제목: 복된 삶의 자세(전9:7-12)
일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답고 하나님 앞에 합당한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1)누구를 위해 사느냐?
(2)누구 무엇 때문에 사느냐?
(3)어떻게 사느냐?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이 시간 본문 마음을 통하여 기독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전도자의 사상을 찾아보며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여기 표현된 전도자의 사상은 기독신자들이 이 복잡한 현실에서 비관적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낙관적인 생활, 부정적인 생활이 아니라 긍정적 생활을 해야 된다 고 하였다.
탄식하며 슬퍼하면서 살 것이 아니라 찬송하면서 기쁨으로 살라는 것이다.
이는 전도자의 사상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이기도 하다(살전5:16,벧전5:7, 빌4:4, 요14:1).
오늘 이 시간 행복한 삶을 이루는 조건들을 찾아보면서 복된 삶, 행복된 삶,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이 되기 바란다.
1. 식물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며 받자(전9: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이것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7절)고 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행락을 권장하고 쾌락을 조장하는 것처검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말씀은 무절제한 향락주의 쾌락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발)은 (다윗)이 곤궁한 때에 도움을 청했으나 손을 펴 적선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위하여는 왕의 잔치만큼이나 벌려 놓고 대취하여 있었다.(삼상25:10-11). 그 결과 그는 죽고 말았다 (36-38)
또 눅16:19에 보면"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했다. 그는 자기집 대문간에 누워 헌데를 앓으며 상에서 떨어지는 찌꺼기로 배를 채운 나사로의 불행은 외면한 채 자기 몸만 위하여 늘 흥청거렸다. 그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
(단5:1)에는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 그 일천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고 하는데, 그날밤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가 나라를 차지했다.
대체로 이런 경우는 음식을 탐하고 술을 탐하는 향락중심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런 무절제한 향락생활을 찬성하지 않는다. 동시에 염세사상을 가지고 고행주의나 금욕주의에 기울어짐도 옳지 않다.
마11:19에 보면 "인자는 와서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이 비난이나 비판에 아랑곳 없이 식물을 잡수셨다. 물론 그에게는 40일 금식기도와 같은 경우도 있었다. 동시에 그는 금욕주의자, 고행주의자도 아니셨다. 고로 바리새인들에게 너무 먹고 마신다고 빈정거림을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는 안정되고 절도있을 향락생활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고 있다(전2:24). 과연 만물은 주님으로 부터 온 것인즉 우리는 그것들을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바로 사용하고 기쁘고 즐겁게 이용함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면 합당 기쁜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마시라고 해서 도둑질이라도 해서 기쁨으로 먹고 마시라는 뜻은 아니다. 또 포도주를 마시라고 해서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하여 근심걱정을 잊어 버리고 기뻐하라는 뜻도 아니다.
여기 음식을 기쁨으로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적당하게 노력하고 노동해서 식물을 얻어 기쁨으로 먹고 마시라는 뜻이다.
다음은 음식맛에나 도취되어 가지고 기뻐하라는 뜻이 아니라 좋은 식물을 주어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를 기억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런 고로 기독교는 극기와 고행을 위해서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고 늘 슬퍼하면서 비애에 잠겨서 살라는 종교가 아니라 잘 먹고 마시면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종교인 것이다.
할 수 만 있으면 우리는 잘 먹고 좋은 것을 마시라는 것이다. "열심히 먹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기 바란다"
2. 의복은 청결하고 몸은 항상 단정히 하며 살라(전9:8)
8절에 보면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다. 여기에 의복을 희게 한다함은 깨끗하고 청결하게 하라 함이요, 술결과 희락을 상징하는 말이다.
종교적 의미로선 희락보다 순결을 더많이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막9:3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하셨을 때의 모습을 그리되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이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고 했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라고 해서 흰 의복만 입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여기 의복을 희게 하라는 뜻은 의복을 깨끗이 하라는 뜻이다.
우리 의복이 좋든지 나쁘든지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 의복이 깨끗하냐,더러우냐가 문제이다. 기독신자들은 의복을 깨끗이 단정하게 입고 다니고 될 수 있으면 깨끗한 의복을 입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우리 의복이 좋든지 나쁘든지 특별히 전도자가 의복을 항상 희게 하라는 말씀은 흰 의복은 성경에서 순결을 상징하고 축복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신자들은 항상 순결하게 살아야 하고 축복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머리에 향기름을 그치지 않게 하라고 하는데 이는 몸단장에 신경을 써서 단정하게 하라는 말이다.
머리에 향을 항상 바르고 살아도 무방하지만 꼭 향기름을 바르고 살라는 말씀보다도 우리의 몸을 깨끗이 하여 남에게 추한 냄새를 풍기지 말고 향기를 풍기면서 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가장 중요한 단장은 마음의 단장, 인격의 단장이다 벧전3:3-4에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다. 만일 이렇지 아니하면 아무리 장식을 잘해도 돼지코에 금고리격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의복이나 몸단장은 전혀 개의치 않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히피들의 세계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보다는 불쾌감을 준다.
신앙자는 남에게 혐오감을 주기보다는 상쾌감을 주고 추한 인상을 주기보다는 아름다운 인상을 주고 방종한 인상을 주기보다는 단정한 인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밝고 건전한 생활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신자들은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의복도 몸도 깨끗이 하고 단정하게 살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라는 것이다.
3. 가정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충실하라(전9:9)
9절에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고 했다.
여기 전도자는 증거하기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라는 말씀은 가정생활 즉 결혼 생활을 건전하게 가지라는 뜻이다.
여기 결혼생활이나 가정생활은 이 세상에서만 가지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허락하신 생활이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결혼생활이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축복하신 규범이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축복하셨고, 예수님께서도 가나 혼인식에 축복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법과 뜻을 따라 정당한 가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복한 삶, 복된 삶을 이루려면 즐거운 가정생활을 이끌어가야 한다. 늘 싸우고 불화하고 슬퍼하는 가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즐겁고 평화로운 가정은 벧전3:1에서 여자는 순복하고 남자는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각자 자기들의 본분과 의무를 바로 수행해야 한다.
기독 신자들의 가정은 더구나 정당해야 된다. 일남 일녀의 합법적인 가정,신앙으로 결합된 가정, 언제나 화평하고 즐거운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17:1에 "마른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다.
가정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벧전3:7, 창24:67). 그러나 그 가정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단란하고 화목하고 사랑이 충만한 가정일때 더할 수 없이 좋은 법이다. 그야말로 지상의 천국과 같은 법이다.
시128:3-4에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그게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하지 않았는가?
4. 삶의 일터에선 근면과 성실로써 일하자 (전9:10).
10절에 보면 "무릇 네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야 할지어다"
창2:8-1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관리하며 지키게 하셨다.
창3:17-19에는 범죄한 아담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노동을 신성한 의무로 주셨다. 고로 잠6:6이하에 나오는 개미를 배워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하면 부를 축적하고 게으르고 나태하면 가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인생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노동을 통하여 부를 허락하신다.
믿는 자에게 축복으로 주시는 부는 창26:25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부르며 제단 쌓는 신앙과 열심히 수고하여 우물파는 노동을 통하여 허락하시는 것이다 신앙만 믿고 노동을 모르는 자는 맹신이요, 노동만 알고 신앙을 모르는 자는 불신인 것이다.
참 인생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노동자의 것이다. (카알힐티)는 행복이란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앙과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것"이라고 규정했다. 노동이 없는 곳에는 행복도 없다.
(밀레)의 유명한 그림"만종"을 보라. 거기엔 하루종일 밭에서 땀흘려 일한 두 부부가 저녁종소리를 들으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지않는가?
시128:1-2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노동의 신성은 백번 천번을 강조해도 좋은 말이다. 노동이 없는 곳에 죄악이 활개를 친다. 일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사람은 일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예수님께서는 요15:17에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 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열심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5.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의지하라(전9:11-12).
본문에서 전도자는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자신의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기회마저도 인생은 알 수 없고 하나님께서 그 기회를 포착하도록 하여야 된다 는 암시를 하고 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여기 전도자가 증거한 바와 같이,
(1)빠른 경주라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2)유력자라고 해서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3)지혜자라고 해서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며,
(4)명철자라고해서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5)기능자라고 해서 은총을 입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전도자는 인간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자신의 힘이나 지혜나 기능에 있는 것만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빠른 자가 선착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힘이 센 사람이 꼭 이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혜자가 돈을 벌어 잘 먹고 잘 살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는 이야기 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운명은 조물주 하나님이 좌우하신다는 뜻이다. 인생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삶도 인간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누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운명을 좌우해 가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자세를 바로 가지고 나의 빠른 것도 의지하지 말고, 나의 힘센 것도 의지하지 말고, 나의 지혜와 명철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그 시기에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만 복종하고 내 자신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신앙으로 하나님의 성호와 영광을 위해 힘쓰는 이 길이 바로 성공하고 행복하여 지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결론
우리는 이 삶의 현장에서 근심하여 한숨짓고 싸움하며 찡그리고 사는 자가 되기 보다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하자.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음미하면서 인생을 복되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자.
(1)식물을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마시며 받자(7).
(2)의복은 청결하고 몸은 항상 단정히 가꾸자(8)
(3)가정에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살자.(9)
(4)삶의 일터에서 근면과 성실로 일하자 (10)
(5)하나님의 주권 앞에 복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