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냐 믿음이냐

제목:햄함이냐 믿음이냐?(롬4:1-8)

구원에는 (1)과거 구원(기본 구원), (2)현재 구원(미래 구원), (3)미래 구원(영화 구원)이 있는데, 이 구원을 행함으로 받느냐, 믿음으로 받느냐가 문제이다.

성경을 보게 되면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같다. 그러나 두 사도가 다 아브라함을 예으로 든 것을 보면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보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 바울과 야고보의 관점

1)사도 바울은 창세기 15장을 들고 있고, 야고보는 40년 후인 창세기 22장을 언급하고 있다.

[1]사도 바울-창15장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이 40년간의 의로 칭함을 받은 사람으로 믿음의 생활을 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2]야고보-창22장.

창22장에 와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행위로 증명되었으며 그의 행위로 그의 40년 간의 믿음은 완전하여 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 사이에 주장하는 내용에는 모순이 없다. 그들은 믿음의 두 다른 국면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2)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의 대항해서 믿음을 강조하고 있고, 야고보는 형식주의에 대항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1]바울-율법주의 (믿음)

바울은 창세기 15장을 인용하여 믿음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바울은 행위가 믿음에서 부터 솟아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2]야고보-형식주위(행함)

야고보는 창세기 22장을 인용하여 행위의 필요를 입증하고 있다. 야고보는 믿음이 행위에 의하여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공로에 대항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단순한 형식적 전통주의에 대항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3)서로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조화되고 있다.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싸우고 있는 적군이 아니라 같은 군대의 군인으로서 반대 방향에서 오는 적에 대항해서 성곽을 지키며 적을 각기 자기 쪽에서 격퇴하는 것이다.

서신을 받은 수신자의 성격으로 보아도 바울은 주로 이상세계에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선포하여 복음을 강조하고 -야고보는 예루살렘 감독으로 종교인의 전통과 우월감에서 살면서 사실은 비행과 외식을 일삼는 유대인을 규탄하였다.

4)기독교의 구원은 믿음에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1]기독교의 구원은 오직 믿음이다.

(1)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의 길을 닦을 수 없다(행4:12,창39:9, 마5:48, 롬3:9-20)

(2)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다(마9:13, 행10:43, 벧전2:24, 요3:16)

(3)사람은 믿기만 하면 된다 (롬1:17, 행16:31, 요1:12).

그러므로 성경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선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선을 행하라고 한다.

[2]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함.

요한 칼빈이 말한 것처럼 "홀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그러나 구원하는 그 믿음은 홀로 있지 않는다"

헐벗고 양식 없는 자에게 양식과 의복은 주지 않고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여도, 그 헐벗은 자가 덥지 않고 양식 없는 자가 배부르지도 않는 것이 니 그것은 무익하다(약2:15-16).

사도 요한은 요한1서3:17-18에서 "누가 이 세상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고 하였다.

5)믿음은 영의 세계에 위대한 법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가 된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파괴한다. 우리 주님께서 그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오셨다(사59:1-2, 사53:3-7).

롬4장은 믿음의 사실과 능력을 해석하고 예증한다. 믿음은 하나님과 그 은혜에 이르는 우리의 오직 하나인 응답이다.

믿음은 (1)자기 부정과, (2)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함한다. 이 두 국면이 그 의미를 요약한다.

믿음은 자기 위로를 버리고 상호신뢰를 시작한다. 믿음은 공로가 아니다. 그 가치와 효능은 믿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믿는 대상에 있다.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우리는 그의 속죄 희생의 효능을 받으며 믿음의 능력은 그 모든 원천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믿음이란?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근본 태도요, 구속 받은 자의 구속주에 대한 태도이며, 믿음의 능력은 가지의 생명이 포도나무의 본체 생명에 있듯이 우리가 신뢰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4)신부가 신랑에 대한 근본태도가 바로 서면 자연 열매를 맺는 것이다.

2.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약2:14-26)

1)행함이 없는 믿음(약2:14-20)

[1]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으며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어서 (17-26)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하지 못하는 것으로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고전 13:2)에는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찌라도 사랑(행함)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하였다.

[2]실례(15-16)"무익하다"

헐벗고 양식 없는 자에게 양식과 의복은 주지 않고 평한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하여도 그 헐벗은 자가 덥지 않고 양식 없는 자가 배부르지도 않은 것이니 그것은 무익하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요1서3:17-18에서 "누가 이 세상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 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하였다.

[3]죽은 것(17절, 26절)

믿음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활동(행함)이 없음을 말한다. 갈5:6에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살전1:3에서 "믿음의 역사"라고 한 말은 모두 살아서 활동하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

[4]증거 불가능(18절)

행함이 없이는 믿음이 있음을 남에게 보여 증거할 수 없다. 믿음이 잠재해 있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이러한 믿음은 남에게 증거하기가 불가능하다.

행위로 나타날 때에 비로소 이것이 내 신앙이라고 증거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행자가 다 신앙인이란 뜻은 아니고 불신자도 선을 행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선행이지 믿음은 아니다.

여기서 언급한 것은 믿음은 행함이 없이는 증거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뿐이다.

[5]마귀도 있음(19절)

행함이 없이 그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믿음은 마귀도 가지고 있다.

행19:15절을 보면"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며, 마귀가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마술로써 악귀들린 자를 고치려고 할 때에 달려 들었던 것인데, 마귀도 예수를 안다고 하였던 것이다.

막1:24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려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하였다(막3:11, 눅4:34, 41, 8:28).

마귀도 예수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 대권으로 마귀 자신들까지 도 주관하고 계심을 알아 그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고 나가고 들어가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고 마귀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니 스스로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표명하였던 것이다(막1:24, 눅4:34, 8:28).

[6]구원 불능"자기도 구원할 수 없다"(14절)

이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니 구원하지 못한다. 물론 행실이 구원의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얻은 믿음, 곧 중생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그 신앙의 증거품이 바로 행함인 것이다.

공연히 입술만 가지고 신앙을 운운하지 말고 행함으로 신앙의 살아 있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7]헛 것(20절)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같이 보이지만 믿음이 아니니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이다.

행함이 없는 것은 믿음이 지니는 모든 효력을 하나도 동반하지 못하니 헛 것일 수밖에 없다.

2)행함이 있는 믿음(약2:21-26).

여기서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라야 참 믿음인 것을 구약 성경에서의 실례를 들어 예증하고 있다.

믿음의 증거인을 두 사람을 드는데,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방인 라합이다. 아브라함은 신앙의 위인이고, 라합은 미천한 기생이니 양극단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이다."

[1]아브라함의 믿음(롬4:18-22)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므로 믿음의 교리를 그에게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그의 위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육적으로는 유대인의 조상이요, 영적으로는 모든 믿음을 가진 자의 조상이다 (롬4:11).

(2)그의 신앙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림, 아들을 제단에 바친 것은 신앙의 극치를 표시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속죄 제물로 바치는 것의 모형이기도 하다. (창22장)

(3)그의 칭의

행함으로 칭의된 신앙이었음을 증거하였음(20-21절). 이삭을 바치기 전에 이미 칭의되었는데 (창15:6),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 칭의된 칭의가 구체적으로 인정될 수 있게 알려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롬1:4).

(4)행함과 믿음의 관계(22절)

믿음은 행함을 돕고 행함은 믿음을 완성시켰다는 뜻이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함은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창11 31).

(5)성서적 예증(23절, 창15:6, 창22:1-12).

전자는 약속 수표를 받은 것과 같고 후자는 헌금을 찾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행함으로 그 믿음이 의롭다 함을 확증하는 것이다.

(6)하나님의 벗(23절하, 대하20:7, 사41:8, 요15:15)

벗이란? 사랑하는 자란 뜻이다. 예수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그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을 가졌던 아브라함인고로 하나님의 벗이라고까지 칭하였던 것이다.

(7)칭의 되는 믿음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다(24절).

곧 진정한 신앙은 행위가 따르는 신앙으로서 이 믿음이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이 신앙은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엡2:8).

그러므로 칭의의 공로는 결국 선행이 아니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뿐이지만 그러나 행실이 믿음의 생명이 되는 고로 결국 행함으로 칭의가 완전히 증거되는 것이다.

[2]라합의 믿음(약2:25-26).

라합은 이스라엘의 필승을 믿었으므로 그 믿음이 사자들을 보호하는 선행으로 나타났다.

라합은 이 선행을 통하여 자신과 그의 가족을 여리고 성의 전멸 가운데서 구출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후 그리스도의 조상 반렬에 참여하는 영광도 얻었다. (마1:5).

그러므로 사람의 산 증거가 영혼에 있는 것 같이 믿음의 산 증거는 실행에 있는 것이다.

(1)그의 신분:기생이었다(수2장).

믿음의 사람중에 아브라함을 예증으로 들고 여기서는 여자요, 가나안인이며 기생이었던 미천한 사람을 들어 말하고 있다.

(2)그의 행동:사자를 접대

"나가게 할 때에"란 밖으로 내어 던진다는 뜻으로 라합이 정탐군을 숨기고 내어 보낸 것이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이었던 것을 표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난 행동이었다.

(3)그의 신앙(붉은 줄을 달아내렸다).

이것은 애굽에서의 선민들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과 같은 어린양 예수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의미한다.

(4)그의 칭의 (행함으로 칭의되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선민의 필승을 믿었으니 그 신앙은 필경 선민 사자를 보호하고 붉은 줄을 달아내리는 선한 행실로 나타났다.

(5)그의 보상(예수의 조상이 되었다).

마1장의 주님의 성스러운 족보에 올라 있고 신약 외경에도 높여져 있다.

(6)그의 결과(구원).

행함으로 그는 구원을 받고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으며 다윗과 예수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의 믿음의 확신이 용감하게 목숨을 걸고 행동으로 나타나 전 가족이 살아 나는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결론

약 2:26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것이라고 하였다.

{1}영혼없는 몸-그것은 죽은 것이다.

{2}행함이 없는 믿음-행함은 영혼에 비하고 믿음은 몸에 비유해서 말하고 있다.

{3}죽은 것-믿음과 행함은 대립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며 뿌리와 열매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