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강해 2

제 3장 전도장

제목:요나의 전도와 니느웨성의 부흥{욘3:1-9}

 

요나서 1장-2장까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불순종해서 징계를 만나게 되고 고기 뱃속에 들어가 회개의 기도를 하기까지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다가 요나가 회개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거두셨다.

본 장은 요나가 하나님께로부터 두번째 소명을 받아 수행하니 니느웨성이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에 긍휼을 베푸시어 구원하시는 내용이다.

1. 요나가 두번째 사명을 받음{욘3:1-2}

1).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1절}{사명을 받음}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미 요나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 고로 요나는 첫번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실패한 선지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번 주님의 명령을 배반했던 요나에게 두번째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실패하고 또는 범죄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때에 우리를 또 다시 부르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한번 부르신 사람은 한때에 그가 실수하고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버리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며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씀이다.

*.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명령에 불순종한 요나에게 재차 또 말씀을 주셨는가?{이유가 있다고 본다}.

{1}.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요나가 불순종했다고 해서 니느웨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중지된 것은 아니다. 또 요나가 한번 불순종했다고 해서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시려는 계획이 변경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끝내 요나에게 두번째 말씀을 주신 것이다.

{2}. 요나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이었다.

우리도 과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불순종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한번 거역하고 한번 불순종했다고 그 즉시 버리셨다면 우리는 영영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 되어 망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불순종을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참으면서 회개할 기회도 주시며 순종할 기회도 주시는 것이다.

{3}. 니느웨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폭넓은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새삼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벧후3:8-9}.

전도자 요나의 말씀을 통해 회개시켜 멸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요3:14-16}.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2절}{사명의 길}.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넘어진 그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일어나라는 것이다.

다시스에서 니느웨로 향하여 일어나라는 것이다. 니느웨성의 부흥운동을 위하여 한번 죽었다 다시 살아난 요나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다.

일어나라는 것은 신앙의 부흥을 촉진하는 말씀이다.

일어나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고 하셨다.

요나가 하나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데 있어 가장 큰 약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자기 중심적으로 처리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2}고 아주 구체적으로 명령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니느웨의 회개 사명을 목적으로 하여 요나에게 제일 먼저 지시한 말씀이 {네가 명한 바를...선포하라}는 명령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신4:2, 12:32, 계1:3, 22:18-19}.

요나 선지자가 지금까지 말썽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생각대로 다시스로 향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삼키고 내뱉는 자였다. 그는 자기 기분이나 사상에 맞는 말씀들만 환영하고 어떤 말씀은 믿고 다른 말씀은 의심하거나 적당히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넘어가는 인본주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내가 네게 명하는 바를” 전하라고 명령하였다. 요나가 니느웨의 선교 사명을 위해 갖추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뿐이었다{벧전4:11, 왕상22:14}.

베드로도 “설교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벧전4:11, 공동번역} 한다고 권면하였다.

교회의 단상은 하나님의 강대상이지 목회자 개인의 탁상이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교훈이 선포되는 곳이지 개인의 말재간이나 개인의 학문이나 인위적인 교회의 특정 프로그램들이 선전되는 인간의 활동무대가 아니다. 단상은 개인의 권위신장이나 인기획득과는 상관이 없는 곳이다. 단상은 오로지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22:14}고 주 앞에서 결단하고 그 말씀에 온전히 투신한 자들만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에 그 반응이 좋다고 해서 마치 자신의 공로인양, 자찬과 자만에 빠질 이유가 없고 그 반응이 설혹 나쁘다고 해서 크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관심은 말씀 선포의 반응 여부보다는 누구의 말씀을 전파하는가에 더 쏠려 있어야 한다.

2. 요나의 순종과 그의 전도{욘3:3-4}

1).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순종의 자세)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며, 삼일 길이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다는 것은 순종의 동작이다.

{욘1:3}은 요나는 불순종의 동작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때에는 니느웨로 향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요, 다시스로 가려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일어났다.

{욘3:3}은 다시스가 아니요 니느웨를 향하여 일어났으니 순종의 동작임을 알 수가 있다.

요나가 일어나 향했던 니느웨는 {막대한 성읍}이라고 하였다. 어찌나 막대하였는지 사흘 길을 돌아야 니느웨성을 다 돌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성의 주위가 90마일이나 되는 대도시이며, 인구는 400만 이상었다고 한다. 이 막대한 성읍의 전도운동은 하루 이틀에 완성될 일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성으로 가야만 하는가?

이 니느웨는 전원과 목장으로 둘러 있으므로 전원의 도시라고 할 수 있으나 이 도시 사람들은 대개 생활이 부유한 편으로 사치와 안락과 음란과 죄악으로 크게 관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죄악의 도시 니느웨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후에는 망하도록 결정하고 계셨다. 그러나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할 경우에는 망하지 않도록 결정하고 계셨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이 숨막히는 계획을 빨리 전하기 위하여 단신으로 니느웨 성읍에 들어간 것이다. 과거에는 불순종하던 걸음이 이제는 순종하는 걸음이 되어 니느웨로 간 것이다.

이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니느웨로 갔다. 고기 뱃속에 있다가 나왔으니 옷은 더러워졌을 것이고 또 몸은 매우 피곤했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니느웨로 가기 전에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 입고 몸도 며칠 쉬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어떤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즉시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때때로 사람의 안목이 두려워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태도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즉시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즉시 실천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사탄은 재빨리 틈타 순종치 못하게 하는 것이다.

2).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하룻길을 행하여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4} {전도의 자세}

요나의 전도 운동은 니느웨성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우리들도 복음을 증거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오직 여호와의 말씀대로 외쳐야 할 것이다.

(1). 요나는 그 어디서나 전도했다.

1장에 보면 요나는 배 가운데서도 이교도들에게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전도한 바 있거니와 니느웨성에서는 길을 행하면서 전도하였다. 그러므로 요나는 바다와 육지에서도 전도하였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노방에서도 전도하셨고, 산에서 도 전도하셨고, 해변에서도 전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감방에서도 전도하였고, 강변이나 법정이나 할 것 없이 전도한 것을 보게 된다.

베드로는 가정에서도 전도하였고, 예루살렘 거리에서도 전도하였다.

빌립은 병거를 함께 타고 가면서 전도하였다. 우리는 전도자들이 어디서나 전도한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蕑

(2). 요나는 누구에게나 전도했다.

다시 말해 상하 귀천를 가리지 아니하고 또는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말씀을 전한 전도자였다.

최권능 목사님은 전도의 권능을 받은 목사님으로서 어디서나 또 어느 누구에게나 담대하게 전도하신 분이다. 최목사님은 말을 타고가는 헌병에게도, 거리에 내왕하는 많은 신사숙녀에게도, 산에서 나무하는 나뭇꾼에게도,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에게도, 부자집 사랑방에 찾아 들어가 갓을 쓴 노인에게도 전도하였으며, 형무소 감방에서는 간수들과 죄수들에게까지 그 누구에게나 때를 놓치지 않고 전도한 목사님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한 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전도한 최권능 목사님의 전도를 본받아야 될 것이다.

{딕 힐리스}는 {주님을 모신 자는 다 선교사이고 주님이 없는 마음은 다 우리 선교지}라고 하였다.

(3). 말씀에 확신을 가진 전도자이다.

그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선언하였으니,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그대로 전하였다.

오늘 한국 교회가 심히 무력한 것은 설교자의 강단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그 원인 중 하나이다.

소위 고등비평이나 신신학에 중독된 전도자의 입으로 천당과 지옥에 대한 증거가 철저하지 못한 것은 자기 스스로가 확신을 가지지 못한 까닭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약하게 하는 것이 곧 사탄의 역사요, 타락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유혹}.

어떤 전도자는 천당에 대하여 전도할 때에 {천당이 있는지 없는지 나로서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우선 있는 줄 알고 신앙생활 하다가 요행히 천당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자 밑져야 본전이 아니냐?}고 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역대에 순교자들이 천당과 지옥이 있는 줄도 분명히 모르고 이러한 요행수로 자신의 생명을 버렸겠는가? {카타콤의 순교자들,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등}

(4). 요나는 솔직한 전도자이다.

요나는 하나님 말씀 그대로 단순하고 솔직하게 전도하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라고 하였다{고후4:2}.

진실로 진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여야 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다른 말을 가지고는 비록 천사의 방언을 한다고 하여도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설교자가 강단에서 진리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상을 발표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요,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쓸데없는 괴변을 토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무한한 흥분이 되게 함은 가소로운 일이라 하겠고, 자기의 책임되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지 않고 근거없는 철학이나 과학적 언론을 시험하는 것은 구역질나는 일이요, 저주받을 일이다.

이제 교역자로서는 신자들을 진리대로만 솔직하게 전하고 인도할 것이요, 신자들은 진리대로 솔직하게 인도하고 전하는 교역자를 바로 받들어 섬기자. 이렇게 되면 교회는 크게 부흥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딤후4:1-6}.

3. 니느웨성의 부흥의 모습{회개} {욘3:5-9}

니느웨 백성은 40일이 지나면 망하리라 하는 하나님의 사람 요나의 경고를 받고 회개하였다. 진정한 신앙 부흥은 회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1). 하나님을 믿음으로 회개를 하였다{회개의 동기} {5절}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연인에게도 뉘우침은 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게 된다.

범죄했던 두 사람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1). 가룟유다는 뉘우침은 있었으나 회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2).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믿음에서 출발된 용서받을 수 있는 회개를 하였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 회개는 ?

(1). 양심의 자연 충동에서 나오는 뉘우침이 아니다.

(2). 말씀의 감동과 성령의 역사에서 오는 참된 중생에서 시작되는 회개이다.

“이 문화적인 수도 니느웨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40일만에 쉽게 망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심판의 경고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 회개를 할 수 없다.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단 말인가? 하고 말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자로서는 회개할 수 없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이 회개하게 된 것은 그 당할 환란의 두려움을 예감함으로 된 것이다. 물론 회개를 인도하는 공포심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공포심이다.

그런 공포심이 아니고 다만 혼란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사람을 두려워하는 공포심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생각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환란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주님의 손에서 오는 채찍으로 알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수 없다. 믿음에서 회개가 출발되고 믿음으로 회개하여야 바른 회개가 되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2).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다{회개의 자세} {5절}

참신앙에서 나오는 회개는 금식과 베옷으로 그 회개를 항상 인도한다. 무슨 말인가? 애통하며 회개하였다.

굵은 베옷을 입은 자는 농담, 유흥을 하지 않고 그 심정은 엄숙하다. 또 베옷 입은 자들을 누구가 유혹하지도 않는다. 즉 구별된 생활이다.

좋은 옷을 입으면 으레 시내 번화가로 배회하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그러나 베옷을 입으면 사람이 숙연해진다. 자신을 반성하며 겸손해진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죄가 기억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와 거꾸러져서 부르짖게 된다.

“혼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5}. 환난은 하나님께 부르짖도록 하기 위해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며 베옷을 입고 부르짖는 자를 보신 하나님은 용서해 줄 마음이 생기고 그 뜻을 돌이키신다.

지금 위기에 처한 우리는 영육간에 금식을 선포하고 베옷을 입을 때인 것같다.

(1). 굵은 베옷 리본을 가슴에 달고

(2). 하루 한끼씩이라도 금식하고

(3). 첫 시간{새벽기도}을 드리자.

3). 왕으로부터 회개하다{회개의 순서} {5-6절}

왕의 회개가 나온다. 다른 말로 하면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살게 된다.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이 사는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는 누구인가? 민족의 지도자는 교인들이다. 또 , 교회 지도자들은 목사, 장로이다. 가정의 지도자는 부모들이다. 먼저 나 자신이 회개해야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문제를 남에게서 찾지 말고 먼저 나 자신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면 가정, 교회, 민족이 사는 것이다.

4). 구체적으로 회개하다{회개의 방법} {8절하}

각기 이것은 구체적인 회개이다.

(1). 외식하는 죄이다{교만}

상좌에 앉기를 원하는 죄이다. 시장에서 문안받기를 좋아하는 죄이다. 겉으로 거룩한 체하는 죄이다.

(2). 탐심의 죄이다{마23:16-18}{욕심}.

탐심은 우상 숭배이다. 금전 만능주의 욕심 때문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을 받아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다{약1:15, 딤전6:6-12}.

(3). 강도의 죄{전쟁으로 사람을 죽이는 죄}{전쟁}

악하여 지고, 포악하고, 사납게 되어, 원수맺기 잘하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잘 풀지 않고, 사랑을 저버린 무서운 죄이다.

5). 제도화한 회개를 하다{회개의 특징} {7절}

왕으로부터 조서가 내렸다. 이 조서로 말하면 왕의 {특별 담화문}이었다. 이제 그 조서의 내용은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하여 이 나라와 민족에 임한 재앙과 싸우라는 선전포고가 아니라 {각기 악한 길과 손호 행한 강포에서 떠나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크게 각성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땅히 각성할 때가 왔다. 니느웨성에서 일어난 회개 운동은 우리 나라, 교회,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우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하는 강포에서 떠나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는 운동이 기적적으로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가 제도화되어 범국민적 범국가적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개인이 회개하는 것보다 너무도 중요한 일이다.

4. 하나님의 자비하신 긍휼의 은총{욘3:10}

회개한 니느웨성은 하나님의 긍횰을 받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회개하는 자는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에 매어 달린다. 또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궁휼과 은혜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1). 회개하는 영혼

(2). 회개하는 가정

(3). 회개하는 교회

(4). 회개하는 민족에게 주는 것이다.

니느웨성은 요나의 외침을 받고 어떻게 했는가?

끝까지 반항한 소돔성은 멸망하였으나 니느웨성은 요나의 말을 사람의 말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도성이 되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린 자는 뒤에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회개를 않는 자는 망하고 나서 또 울어야 한다.

오늘 교역자가 울고 한국의 성도들이 울면 이 나라 이 민족은 망하지 않는다. 이것이 없으면 망하고 나서 또 울어야 한다.

(1). 에서는 저주받고 원통해서 울었다. 이것은 회개의 기회와 축복을 빼앗기고 나서 운 울음이다{히12:17}.

(2). 가버나움과 고라신이 울었다{마11:20-21}.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울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을 보게 된다.

아무리 완고한 부모라도 그 자식이 잘못을 하여 채찍을 들었을 때 간절히 애원을 하면 채찍을 거두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범죄한 인간이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은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며 또한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시는 것이다.

죤 번연은 일평생에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죄인의 괴수에게 은총이 넘친다}는 유명한 저서를 출판하였던 것이다.

결론

하나님의 기대는 인간이 전혀 죄를 범치 않는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나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인가? 아무리 큰 죄를 범하였어도 그 것을 깊이 뉘우치며 회개하여 새롭게 되라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해 주시고{욘3:10}, 은혜와 진리로 채워 주신다{잠1:23}.

 

제4장 사랑장

제목:요나의 인간성과 하나님의 사랑{욘4:1-11}

 

우리는 요나의 본성이 또 다시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다가 하나님의 징계의 폭풍을 당하고, 고기 뱃속에서 암흑의 고통을 맛보고 나서 뼈저리게 회개하였다. 그리고 그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번째 받고 니느웨성에 들어가면서 외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심중에는 니느웨성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는 심정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강압적 사명에 눌려서 간 것이었다.

요나의 편협한 인간성을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에 비교할 때에 그 얼마나 비열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1. 요나의 부패한{편협한} 인간성{욘4:1-3}

요나는 하루의 전도로 니느웨성 사람들을 회개시킨 능력의 사자였다. 그러나 그저 지나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그토록 큰 능력을 행한 요나가 어떻게 부패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나} 하는 문제이다.

1). 불평하는 인간성{1절}:“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였다”{1절}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니느웨 성민의 구원을 불평하는 말이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심히 싫어”하였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 요나의 불평은 잘못이다. 그 이유는

(1). 그는 하나님의 하실 일에 대하여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는 너무도 소견이 좁은 사람이다.

그에게는 이방인일지라도 포용할 수 있는 아량이 없었다. 그는 가서 전도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다. 부모님에게는 열자녀가 다 소중한 것처럼 하나님께는 만인간이 다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니느웨 성민도 귀한 자들이다.

(3). 그는 니느웨 성민들을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이유로 불평했다{마9:1}. 이것은 큰 잘못이다.

(4). 요나는 니느웨가 사십일 이내에 망하지 않으면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같다. 그것은 두려운 일도 아니고 불명예스러운 일도 아니다. 니느웨 성민들은 요나의 전도로 회개했기 때문이다.

(5). 요나는 너무나 개성이 강한 자인 것같다.

개성이 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장점이 된다. 무골호인이라서 반드시 좋다는 말은 아니다. 큰 일을 해낸 사람들은 다 개성이 특별한 사람들이다. 어려운 일을 해낸 자들은 대부분 개성이 강한 자들이다.

또한 개성이 너무나 강한 것은 단점도 된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도 개성이 강한 인간이 된다면 그는 고집 불통의 사람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마저도 고집이 세다는 것은 불신앙의 말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요나가 지금 니느웨 성을 구원한 것이 내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다.

2). 변명하는 인간성{2절}

요나는 지난날 자기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정당화함으로 변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한 적이 있었다{욘1:3}. 요나의 이 행동은 엄연한 죄요, 불순종이다. 그는 이 죄 때문에 징계도 받고 책망도 받았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풍랑과 환란을 만난 것이다.

요나는 뻔뻔스럽게도 다시스로 도망친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하고 있다. “주께 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4:2}. 그런즉 니느웨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요나가 가서 전하지 않는다 해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다시스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요나는 자기의 실수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책임을 하나님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친 죄를 하나님 때문이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에 대하여 자기 아내 하와에게 책임을 돌렸다{창3:12}. 하와는 뱀이 꾀므로 먹었다고 했다{창3:13}.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것에 대하여 동생 야곱 때문이라고 변명하며 핑계를 댄다{창27:36, 25:29-3}.

아론은 우상 사건에 대하여 이렇게 변명한다.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고 하기에 만들게 되었다”고 변명한다{출32:22-24}.

빌라도는 주님을 죽인 죄에 대하여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이다”면서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렸다{마27:23-26}.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아무도 자기 책임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격언은 진리이다.

요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우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잘된 것은 모두 {나} 때문이요, 못된 건 모두다 {조상} 탓이다{잠28:13}.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핑계대고 변명하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원망 또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본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요나의 기도이다. 그는 기도하면서 변명하고 핑계를 대면서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항의하다가 불평하는 넋두리가 아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잘못된 기도가 많다.

(1). 자랑하는 기도

(2). 교훈조의 기도

(3). 책망조의 기도

(4). 설득조의 기도

(5). 원망하는 기도

(6). 분풀이하는 기도 등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이런 것은 기도가 아니다.

3). 감정을 억제 못하는 인간성{3절}

요나는 자기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죽기를 소원하고 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한탄한다.

요나가 이렇게 감정이 폭발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정말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선민인 유대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이방인이 구원받아 잘 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먼저 죽고 말겠다는 것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것의 포로가 된다면 너무나 비참해지고 말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감정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성을 빼앗는 것보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용사보다 낫다고 했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남이라고 하였다.

*. 자살을 금하는 성경적 이유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창9:5-6}

(2).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에{고전3:16}

(3).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였기에{출20:13}

(4). 주께서 때가 되면 부르실 것이기에{딤후4:3-5}

*. 왓손은 살인을 다섯 가지로 정죄하고 있다.

(1).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다.

(2). 그것은 호소하는 죄다.

(3). 그것은 악마와 같은 죄다.

(4). 그것은 저주받은 죄다.

(5). 그것은 진노를 사는 죄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성냄이 어찌합당하냐? ”{4:4}

이 말씀은 흥분과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씀이다.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이다.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요나는 한때 회개한 사실이 있다{고기 뱃속에서}. 그러나 저는 지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시험에 빠져 있다. 역시 인간일 뿐이다.

은혜받은 인간도 그 은혜가 소멸하면 옛 성품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

2. 하나님의 관용과 요나의 방관{욘4:4-5}

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4절} {하나님의 관용의 책망}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관용하시는 사랑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자기 마음대로 성질을 부리는 자를 징벌하시지 않고 선히 관용하여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 말씀은 흥분과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냉정히 자기를 반성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책망을 하신 것이다{히12:6-8}.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하시고 책망을 한다고 했고 책망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참아들 사랑받는 자가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 방법

(1). 성경 말씀으로 책망{롬13:13-14}

(2). 징계의 채찍을 통하여 책망{히12:6}

(3).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책망{갈6:1}

(4). 주의 종들을 통하여 책망{다윗, 나단}

(5). 하나님께서 직접 책망하시는 경우{요나}

2).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5절}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노라”{5} {요나의 방관}

유감스럽게도 요나 선지자는 사리적으로 생각을 좀 해보라는 하나님의 온유한 권면을 뿌리치고 성에서 나가 버렸다{5}

요나가 성 밖으로 나간 두 가지 이유

(1). 니느웨 성이 회개한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함

(2). 행여나 어떤 재앙이 임하는지 은근히 기대하는 태도이다.

니느웨 성의 구원받는 것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사명을 내어던져 버리고 산 위에 올라가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는다. 이것은 영적 사업을 버리고 육적 사업으로 타락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도 교회가 하는 일이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사명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세상에 나가는 자 또는 교회 모든 직분을 다 사면하고 뒷전에 앉아서 수수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빨리 회개하시기 바란다.

3. 박 덩굴과 하나님의 사랑{4:6-11}

1). 박 덩굴을 준비하신 하나님{6절}

요나의 이런 방관 태도에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로우셔서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요나에게도 은혜 베푸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책망 대신 그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요나의 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그에게 피난처와 휴식처를 마련하였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덩굴을 준비하사 요나에게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지게 하여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요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이다.

요나는 그 박 덩굴을 인하여 심히 기뻐했다{6}

여러분 우리가 본문에서 유의할 것은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고 “박덩굴을 인하여 심히 기뻐했다”는 점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하였다{합3:18}.

다윗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 구원을 기뻐하였다”고 하였다{시35:9}.

마리아는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하였다{눅1:47}.

요나는 자비의 사랑이 아니라 박덩굴을 기뻐했다. 그의 눈에는 박덩굴만 보였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 살면서도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이 점에 있어서 요나는 배은망덕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린다. 우리는 건강을 뽐내면서 건강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척한다. 우리는 좋은 집에 살면서도 그 좋은 집에 살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녀들 때문에 기뻐 자랑하면서도 그 자녀들을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산다.

이것은 마치 요나가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박덩굴 환경 때문에 기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잘못이요, 배은망덕한 죄이다. 돌아서야 한다.

2). 이튿날 벌레가 박덩굴을 씹었다{7절}

요나가 그렇게도 기뻐하는 박덩굴을 벌레가 씹었다.

세상의 기쁨, 육적 기쁨, 환경적인 물질적 기쁨은 오래 못가는 법이다.

세상 기쁨은 일시적이며{벧전1:24-25}, 세상 기쁨은 불완전하며, 세상 기쁨은 고통의 씨라고 할 수 있다.

세상 기쁨도 벌레가 씹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벌레를 준비하여 그 박덩굴을 시들게 해 버렸다.

요나의 기쁨을 앗아간 것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작은 벌레였다. 이 작은 벌레가 요나의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작은 독사 한마리였다. 교회를 박해하던 헤롯 아그립바는 충이 먹어 죽었다{행12:23}.

작은 벌레{작은 죄악}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요나의 기쁨을 앗아간 것은 작은 벌레였다.

3). 박덩굴로 시들게 하여 교훈함{8절}

저 이란의 사막 지방이니 얼마나 뜨겁겠는가? 하나님이 해가 뜰 때 머리에 쬐여 혼곤에 빠지게 했다.

하나님은 요나가 남이 안되는 것을 좋아하는 악성을 깨닫고 고치게 하기 위하여 박덩굴을 주었다가 빼앗아 보았다.

요나는 깨닫지를 못하였으니 인생들의 어리석음이다. 너무 급하니까 또 무엇이라고 하는가?

4). 죽여 달라는 것이다{8-9}

박덩굴이 시들어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쬐이니까 요나는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한다. 4장에 와서 벌써 두번째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였다. 지금 박덩굴이 죽어서 자기가 좀 괴롭게 되었다고 자기도 죽여 달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감이 죽고 자식이 죽고 사업이 실패했다고 하여 {아이구 난 끝났다} 하지 말고, 박덩굴이 시들어졌든지 무엇이 어떻게 됐든지 욥처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는 믿음을 가지라는 교훈이다. 세상에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이 믿음이다.

5). 하나님의 사랑의 권면에 끝까지 불평하는 요나{9절}

{박덩굴로 인하여 성을 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 말씀은 요나로 하여금 좀 반성해 보라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기를 위하여 초막집이나 짓고 육적 사업에 치중하더니 물질이 조금 손해났다고 죽여 달라는 네가 아니냐? 그러니이제 흥분과 감정에 사로 잡히지 말고 냉정히 자기를 반성해 보라는 것이다.

요나는 반성의 기미가 없이 도리어 자기는 죽기까지 성을 내고 불평을 하여도 합당하다고 하나님께 대들었다{8절하}. 요나는 여기서도 깨닫지를 못하였으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랴!

6). 생명{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11절}

하나님은 요나에게 네가 박덩굴을 아끼는 것이 합당하거든 내가 큰 성 니느웨를 박덩굴보다 더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아니하냐? 좀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

너는 박덩굴 하나를 가지고도 아까와 하는데 이놈아 이 니느웨 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12만명이야{400만명}. 박덩굴보다 더 귀한 생명들이 이렇게 많으니 내가 이 성을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어린 영혼의 수까지 지시하시면서 요나를 타이르고 계신다. 거기에 육축{니느웨성 사람들과 동일한 운명에 있음}까지 말씀하신 것에서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인 것을 보게 된다.

백번 구제하고 내 영혼을 불살라 너의 것을 주더라도 영혼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이것은 참 기독교 운동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될 것이다.

결론

요나서 11절 다음에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자리가 있지만 11절 다음에는 아무 말도 없다.

요나가 이렇게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요나도 때가 되니 입을 다물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는 것처럼 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순종하는 성도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복종하는 자들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