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의 내-외적 의미인 `프레로오`와 `프레레스`
국내보다는 국외 세계에서 20세기말의 유일하게 남은 최후의 성자라고 추앙했던 성공회 소속 의 대천덕 신부의 "신학과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이라는 책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그 아주 이른 초기에 지금의 새생활영성훈련원 박철수 원장은 대천덕 신부를 만나 서로의 관심사에 대한 동일 이해에 허심탄회였으며 이에 서로 같은 레벨에 서 있다라고 동감과 기쁨을 표했다고 한다. 이렇게되어 플레로오와 플레레스의 두가지 성령의 내-외적 역사함이란 개념이 학문의 기초적 개념을 갖게 띄게 되었으며 21C에 부응하여 영성이란 용어가 범개신교화함에 기여한 바가 크다.
지금에 와서 나름대로 그 용어에 대해 생각해보면 참으로 유익 적절한 분별이었다라고 여긴다. 이에 성령 충만의 두 요소 중...플레레스는 성령의 외적충만으로 한국교회가 평소 지향해온 범 은사운동을 지칭한다.., 이에 현금 영성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품인 플레로오로 내적 충분(=충만)을 구별해 줌인 것이다.
외적이고 육체에 부어지는 9가지 성령의 은사와 내적 영역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풍만케 되어지는 내적 영성으로의 구분인 외적-내적 충만을 분별함이 핵심인데 필자에게도 일부 경험으로 주신 바로는 역시 은사란 육체아(=육체)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면으로 플레레스이나, 내적충분인 플레로오란 영교아 즉 내적아인 속사람에 역사되는 영적이며 영체적인면이 있었음임을 때론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하기를 성령의 외적역사인 은사성이란 사역적인 면을 지칭함이 적당하며, 내적 성령의 역사란 (생명적인 역사로) 내 안의 그리스도의 생명력의 충만함을 위함이라는 확신을 갖게해 주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타당함은 말씀이, 지식과 지혜나 통변과 예언 믿음등의 은사면으로 만이 아니라 그 말씀이 계시성 자체로 영교적이 되어 주님의 생명을 그 말씀 그대로 느끼게 해 준다는 면으로 매우 중요한 지적인 것이다.
성령충만의 두가지 `πλεροω`(플레로오)와 `πλερηζ`(플레레스) 역사와 코이노니아
내적충분 외적충만
(성령충분과 성령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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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남. 평양의 국인학교,
데이빗슨 대학교, 린스턴 신학대학원, 하버드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사제 서품을 받은 뒤 1057년 한국에와서 성공회 미가엘 신학원을 재건립하고 1965년 강원도에 '예수원'을 설립하였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주 가지 상이한 방법에 대한 저의 연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성품(열매)를 위한 내적인 역사이며 다른 하나는 능력과 은사들을 위한 일시적인 충만으로서 외적인 역사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지속적인 성령 충만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외적인 역사는 얼마든지 재충만의 경험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내적인 역사와 전혀 다른 경험입니다. 이두가지 역사(役事)는 결코 혼동되거나 대치될 수 없는 상이한 두 가지 헬라어 동사에 의해 표현됩니다만 우리 신학자들은 이 둘을 혼동시키는데 훌륭한 기여를 해왔고 성경 번역자들 또한 전혀 상이한 이 두 단어를 동일한 단어로 번역해 버림으로써 교회에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성령 충분과 성령 충만
배는 고기로 항상 다시 비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흠뻑 적시게'(be Saturated: 나무의 진액처럼) 할 수 없고 다만 '가득 채워지게'(be charged)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곧 이어서 대언(대언. 혹은 예언)을 하거나 어떤 능력을 행하게 되는데 이후에 다시금 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밧데리와 같아서 능력으로 충전되지만 지속적인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내적인 역사는 포도나무와 같이 진액으로 가득 차 있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1)밧데리가 되거나 혹은 (2)하나님을 위한 포도나무가 될 수 있으며 (3)하나님께서 실로 원하시는 바와 같이 그 둘을 함께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절실하게 와 닿은 사실은 헬라어 `πλεροω`(플레로오)와 `πλερηζ`(플레레스)등 어간에 'ρ'이 있는 단어들은 '흠뻑 적셔지다' 즉 장기적으로 충분하게 채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을 한국어로 옮길 때 "충분"이간 말로(흑은 다른 적합한 단어)구별해서 번역해야 합니다. 반면에 헬라어 핌플래미(πιμπλεμι)와 플래테오(πληθηω)등 어간에 'θ'가있는 단어들은 일시적인 충만과 관계가 있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능력을 덧입게 되고 즉각 대언(예언)이나 어떤 강력한 역사를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여러 차례에 걸쳐 재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한번의 세례. 많은 충만"(one baptism, many fillings)이란 표현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단어들은"충만"이란 말로 정확하게 번역됩니다. 성령으로 충분하게 된다는 것은 거듭나서(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특히 8장에서 바울이 강조한 바와 같이) 새로운 피조물 즉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며 성장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집사를 세웠던 자격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으며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스데반에 관하여 항상 사용되어진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보수적인 교파에서 매우 강조해온 것이기도 하며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용되어진 단어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과 사가랴, 엘리사벳, 베드로에게 임했던 "충만"은 "능력으로 채워진다" 즉 "충전된다"는 뜻이며 성품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잃어버린 영혼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마7:21-23참고). 동일한 구별이 신약성경에서는 성령이 사람 "안에(in)"과 "위에(upon)" 임한다 즉 내적인 역사와 외적인 역사란 표현으로 시종일관 나타납니다.
부활절 날 주님은 제자들 "안으로(into:enefushsen)"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요20:22 ). 그렇지만 다시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위로부터 능력으로 "덧입혀지기까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 후 오순절 이전에 존재했던 그들의 일치와 120문도가 규칙적으로 모여 "사도들의 코이노니아" (komonia of the apostles)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내적 충분함의 표시입니다.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의 '성령의 교통하심'(The koinonia of the Holy spirit)과 사도신경의 '성도의 상통하심'(The communion of the saints)은 요한일서 1장3절에 언급된 바 교회와 성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와 마찬가지로 단순하게 "코이노니아"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매 그들은(성령의 외적 역사인)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고 3천명이 그날 세례를 받았는데 즉각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코이노니아'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동양에서 우리는 음(내적)과 양(외적)이 항상 합력하며 실체의 본성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창1:27참고). 그것은 서양에서 흔히 강조되듯이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or)가 아니고 "양자 모두'(both-and)를 포용하는 사상입니다.
건강한 신학을 습득하려면 구약의 동양적 사고방식과 신약의 서구적 사고방식을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약의 저자중 단 한사람만이 서구인으로서 의사인 누가였고 다른 모든 저자들은 구약에 통달했던 동양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도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됩니다. 한국의 신학자들은 그들의 민족적 유산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코이노니아
우리들 중에 많은 분들이 코이노니아의 개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고 "사귐"(fellowship )과 "상통"(communion)이란 단어가 둘 다 코이노니아란 말을 번역한 것이란 정도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제가 고전 헬라어를 점검해보기로 결정한 것은 불과 두 해 전이었습니다. 코이노니아란 말이 신약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긴 하지만 다른 헬라문학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말이라고 신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발견하게 된 것은 헬라문학의 전시대에 걸쳐 그 단어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70인역 성경과 복음서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코이노니아란 단어는 대단히 강한 의미를 함축한 용어로 항상 사용되었는데 그 말에는 헌신되고 상호책임을 감당하는 가장 긴밀한 관계 즉 남편과 아내, 친형제 자매의 관계와 동업자와 두 나라(가장 우호적인 나라) 사이의 동맹관계 혹은 갱단 사이에 존재하는 명예(의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도적 혹은 악인들과 관련하여 "코이노니아"란 단어가 쓰인 성구는 잠 1:11,14; 28:24; 욥 34:8; 사1:23; 마23:30등이다).
코이노니아란 단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단어가 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긴밀한 가족식사를 의미하는 성채성사를 설명하는 단어로 사용되어지긴 하지만 주일예배 후 한잔의 커피를 함께 나누는 사귐을 설명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일상영어에서 이 말과 가장 유사한 표현은 "상호 책임성(mutual responsibility) 혹은 "상호 헌신"(mutual commitment)이란 표현일 것입니다. "헌신"(위탁:commitment)이란 단어가 보다 원뜻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친형제, 자매의 경우는 종신토록 서로 헌신(위탁)하는 것이 분명하고도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업이나 국제협약 혹은 폭력단의 경우도 역시 영속적인 관계가 되도록 의도되어 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신약성경에 코이노니아와 관련된 성경구절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뿐 아니라 그 성구들이 17가지 다른 번역(킹제임스 번역과 개역성경의 경우는 17가지. 중국어 성경의 경우는 23가지 단어)들로 적당하게 얼버무려져 왔는지 보게되어 점점 더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된 것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기독교를 합법화시킨 콘스탄틴 대제 통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에 모든 지주들과 정치가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자 이들에게 아부하여 "코이노니아"를 실행할 어떠한 어리석은 일에도 휘말리지 않도록 확신시키고자 했는데 왜냐하면 그럴 경우 가족 및 정치그룹들에 대해 자기네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손상시킬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커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사귐" 정도로 변질시켜 버렸으며 그들 및 지금까지 1585년 동안 그들의 계승자들은 어떠한 신학자들이라도 다르게 가르치려고 노력할 경우 반드시 평판을 나쁘게 만들고 해고시키거나 필요하면 화형에 처하도록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 코이노니아란 단어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구약성경에서 '코이노'란 단어로부터 파생된 단어들은 결혼, 국제협약, 갱단, 사업상의 동업자. 죽은 사람들과 대비한 '살아있는 모든 사람'과 관련된 말입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 중 가장 강한 연대를 나타내주는 단어입니다. 이 표현은 헬라문학의 모든 시대에 사용되어진 일반 헬라어법과 조화를 이룹니다. 복음서들은 구약의 선례를 따르고 있으며 아직 성령의 코이노니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오순절 이전에 어떤 코이노니아가 진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지만 언제 그것이 시작되었고 어떤 형태로 실행되었는지 전혀 암시를 주지 않습니다. 신약의 나머지 내용에 근거해서 우리는 그것이 부활절 날 예수께서 제자들 안으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고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2~23)고 말씀하셨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요한일서 1장과 비교해보면 죄의 용서는 코이노니아와 관련되어 있고 고린도후서 13장 14절을 보면 코이노니아는 성령과 관계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3천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자마자 "사도들의 코이노니아"(혹은 단순한 코이노니아라고 해도 무방한데 이것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의미함)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코이노니아와 가르침은 (비록 후속구절들을 볼 때 단지 코이노니아만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코이노니아란 말이 구약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끊을 수 없는 동업자관계나 혹은 갱단이나 친형제, 자매의 강한 연대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 의해 확증되어집니다.
"그리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혼인으로 맺어진 자들이며 형제와 자매요 한 몸의 지체이며 초자연적인 왕국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사업에 동역자이며 재물, 결정권, (가르침, 성령, 영광. 구원, 거룩한 성품)영적인 것, (악마나 세속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고난 등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관계입니다"(행 4:32~35참고).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속한 작은 울타리 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인종과 민족 및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란 표현과 성체성사 안에 함축되어 있는데 신자들은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예배에 함께 참여하고 그리스도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속된 것이 거룩하지 않다고 배웠습니다만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 베드로에게 속된 것을 친히 거룩한 것으로 변화시키신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것을 영접하도록 초대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가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우리가 실제로 그 안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성령의 코이노니아 안에서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요약해 놓은 것이 요한일서 1장인데 기록되기를 "복음의 내용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외적으로 알 수 있도록 나타난 바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목적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코이노니아(사귐)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곧장 "천당으로 가는 것"이 하니라 그들의 한발은 이미 하늘에 두고 이 땅에 작은 천국의 모형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 (다른 사람에게 보낸바된: being sent out-에클레시아-코이노니아)를 창조할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동일한 코이노니아 안에서 죄 사함이 뒤따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을 코이노니아 안으로 데려오게 할 능력을 받게 되지만 만일 성령으로 충분하지(플레레스)못할 경우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고 형제들과의 사귐에 참여하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상뿐만 아니라 많은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분하게 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적인 본성(바울은 그것을 "육에 속한 것"이라고 표현함) 안에 머물러 다만 대가를 지불할 요구만 보고 보상들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분케 되고 또한 성령의 세례를 덧입게 되면 즉 성령의 역사를 안과 밖으로 경험하게 될 때 사랑과 열정으로 충만케 된 나머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코이노니아 안으로 데려오기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사랑과 보살핌을 경험하며 또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의 인격적인 친구가 되며, 그분의 새로운 대사(代使 : ambassadors)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을 통하여 길을 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성령을 보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단순하게 들립니까? 사귐(코이노니아)이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엄청난 일입니다.
이것은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들의 전생애를 바쳐 실행하기에도 벅찰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지체들이 다 필요합니다. 이것은 그냥 앉아만 있는 몸이 아닙니다. 승리하기 위한 전투에 참여하며 해야할 과업에 참여하는 몸인 것입니다.
서로와 의논만 하면 될까요? 아니오, 우리 각자 안에 계시며 또한 우리의 코이노니아 가운데 계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기록하신 성경을 우리는 유업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어디에서 어떤 코이노니아가 존재하든지 성령께서 그 상황에 맞도록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명령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미 6:8 참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의(의)를 행하는 것은 코이노니아이지만 그에 덧붙여 어떤 지체라도 세상에서 투표권이나 정치적 지위 혹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의 원칙에 따라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활발하게 참여해야 됩니다. 동시에 코이노니아에 들어오지 못한 불의와 불행의 희생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사귐 가운데로 데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사귐은 또한 성령에서 인도하시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많은 다른 방식의 예배 및 기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연합예배, 기도모임, 기도짝, 개인기도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