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절 둘째주를 기다립니다.
대림절은 그리스도 오심에 대한 다만 순수한 대망의 뜻에서 기쁨으로 지켜왔답니다.
그런데 12세기 경부터 그리스도의 대림이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대림은 과거에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현재에서는 신자들의 마음에 은혜로 교회 역사가 시작된 후 약 천여년 동안은
찾아 오시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마지막 심판날에는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사건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대림절기에 참회를 하고 신앙적인 새결단을 하게하는 풍습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는 대림을 이와같은 3중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문중에서
대림절 두 번째 주일
성서일과 | 눅1:68-79; 말3:1-4; 빌1:3-11; 눅3:1-6
회 중 75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인도자 76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회 중 77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인도자 78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회 중 79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주님, 부끄러운 고백을 드립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기다리며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
이지만, 이 마음 속에 공허한 절망이 감돌고 주님께서 일러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
신의 사람이 바로 저희들입니다. 죄악과 허물로 가득한 심령을 숨길 곳 없어 방황하고 서 있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심판날에 주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
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오늘의 주제 _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하는 법
석의적 접근
말라기 선지자의 예고는‘사자’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에서 오랜 논의를 몰고
왔다. 사자가 천사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여 여기에 예언된 사자는 단순
한 천사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라고 밝힌 사자의 과업으로 보아“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
하라”(사 40:3)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은 궤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여
기서의 사자는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한 세례 요한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세례 요한의 예언과 일련의 동질성을 확인시킨 다음의 예언은 메시야의 임재
가 성전이 될 것임을 알린다. 이는 구약의 전통을 계승하는 예언임과 동시에 예
수 그리스도 탄생 후 성전 방문을 예시하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여호와의 사자
는 연단하는 사명을 띠고 임한다. 곧 불과 같은 용모와 활동성으로 세상을 정결
하게 할 것이며, 특히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시리라 예언하였다(3절).
개인적 사랑과 기쁨을 품고 있는 빌립보서는 다양한 소재를 갖고 있다. 그러
나 본서가 품고 있는 2장의 기독론은 문학적으로 웅혼하며, 신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제공하는 공적 가치가 인정된다. 그 밖에는 개인적 권면이 많아 사사로
운 서신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교회의 정신과 종말에 관한 성도의 태도라는 소
재에 접근할 때는 다감한 교훈이 한층 강화되어 있는 은혜로운 서신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왜 그리 사랑했으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하
여는 사도행전의 관련 기록들이 증명해 줄 것이다(행 16:12-40 참고).
루디아를 비롯한 회심의 무리들은 대단히 헌신적이었다. 루디아가 자신의
집을 교회로 바친 것을 비롯하여 교인들의 헌신은 단연 초대교회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다. 반면에 점을 치는 사람들이나 보수적 관원들은 예수 그리스도
의 복음에 적대적이었다.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것을 시작으로 몹시 때려 감옥
에 가두고 핍박하였다. 하지만 적대 세력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다. 밤에 감
옥 문이 열리자 사도를 감시하던 간수가 즉시 회개하고 온 가족과 함께 그리스
도를 받아들였다.
바울이 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지점은 투옥되어 있는 로마의 감옥이다. 빌립
보 교회의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여정을 돌아보니 선한 일이 재
림의 날까지 이르겠다는 칭찬과 확신을 보내 주고 있다. 그 방법을 기도를 통
해 풀어 준다. 빌립보 교회를 위해 총체적으로 기도한 내용은 사랑과 진실과
의로 귀착된다. 여기서 특히 진실하여 허물없이 재림의 날을 맞이하자고 기도
한다. 이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라기의 본문에서 원용된 이사야 40:3 이하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면
서 세례 요한의 출현이 성취된 대목이다. 요한이 등장하여 구약의 예언을 성취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데 있다. 그러므
로 이 말씀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예비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전제
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 시기를 확연히 보여 주는 역사적 시간대가 기록되어 있다.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의 등장을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
스도의 공생애 시작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
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권력자들의 자리에 임하지 않고 빈 들에 있는 사람 요
한에게 내려왔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회개의 세례가 베풀어졌고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누가는 여기서 회개의 세례를 강조한다. 예비의 방식이 세례라면 그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단순한 회개가 아
니라‘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3절)이다. 요한의 세례는 메시야를 맞
이하기 위한 예비의 태도를 명확하게 밝혀 준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
다.
설교를 위한 조명
서신서의 말씀(빌 1:3-11)으로 설교 작성 | 전개식 설교
Move 1 - 기쁨을 잃어버린 시대
요즈음 사람들 사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로‘기쁨의 상실’을
들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쁨이 쑥 빠져 나가 버리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
다. 새롭게자기일을이루어창업하는사람에게축하인사를건넸다.“ 얼마나
기쁘십니까. 축하합니다.”그랬더니돌아온대답은이랬다.“ 기쁘긴뭘답답해
요. IMF 시대가 다시 오지 말란 법이 있겠습니까?”
새 생명을 얻어도 가르칠 일이 걱정스럽고 갖가지 병고와 취업난, 또 테러와
전쟁 속에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출생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
의 전에 나오면 성결한 기쁨이 충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세속적 분쟁
으로 인해 고통이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생들을 위하여 본문은 기쁨을
아낌없이 선사하고 있다. 무엇이 그리 기쁠 수 있단 말인가.
맨처음의기쁨이시작된다.“ 간구할때마다너희무리를위하여기쁨으로항
상 간구함은”(4절) 간구하는 사람은 바울 사도이며 마음 속에 착한 일을 한 사람
들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기쁨의 시작
이다. 내가 만나는 타인들을 좋게 생각하고, 칭찬하고, 기도하기에 이른다면 기
쁨이 온다. 우리는 남이 해 놓은 일을 볼 때면 일단 어떻게 생각하는 태도를 지
녔는가? 우선 그의 수고를 위로하며 좋게 여기고 칭찬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
렇지 않는다면 결코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없으며, 삶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Move 2 - 로마 감옥에서의 기쁨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면서도 기쁨에 넘쳐 빌립보 교인들
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대들 마음이 참 착하다. 그 착한 일이 예수님 오시는 날에 이루어질 것이
다. 그래서 나는 기쁘다.”
이런 내용이 기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옥에 갇힌 그에게 무슨 기쁨이 있을
까? 더구나 이 곳은 보통 감옥과는 다르다. 로마 군대 중에서도 가장 정예군인
근위대의 감옥인데, 이 부대는 라틴어로 프라이토리움(praetorium)이라는 황제
친위대를 가리킨다. 중죄인을 가두고 군사들이 한 사람씩 교대하며 죄인을 지
켰다.
이 절망의 시간, 바울에게 기쁨이 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에 전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바울 앞에 황제의 근위병들이 자진하여 시간마다 자신의 곁을 찾아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있구나 하며 바울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간
수와 죄수는 처음에 경계심과 적개심을 보이다가 이내 서로 친해진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사람인 바울에 있어서랴.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Move 3 - 빌립보 교회의 기쁨
빌립보 교인들은 믿음을 가진 후 착한 일을 많이 하였다. 교회의 기초를 닦은
신자는 루디아였다. 이 여인은 두아디라 성 출신인데 그 곳은 소아시아에 있으
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이다. 옷감 생산지로 알려진 고향
에서 옷감을 가져다가 빌립보에서 로마인들에게 파는 상인, 자주 장사였다. 그
루디아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자 여인의 집이 바울 일행의 숙소가 되었다. 자
기 집과 재산을 내놓으면서“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
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하였고, 그 집은 유럽 최초의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되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 사도를 매우 사랑했다. 그가 데살로니가로 갔을 때 선
물을 보내 왔고,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도 다시 선물을 보내 문안하고 격려했다.
다른 교회들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바울이 로마 감
옥에 묶여 버리자 빌립보 교회는 위로와 함께 옥바라지를 해 줄 도우미를 보내
주었다. 선물과 위로금을 갖고 머나먼 로마 땅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사형
선고를 받은 노인을 돌보며 옥중 뒷바라지를 하는 그 일을 누가 기쁘게 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빌립보 교인인 에바브로디도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그 곳
에 와서 풍토병으로 거의 죽게 되기까지 봉사를 했다.
Move 4 -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쁨
기도의 기쁨을 경험해 보라. 기도하는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 증인이라는 확
신을 갖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하였
다(8절). 심장은 생명을 공급하고 양심을 반영한다. 나의 사랑을 내 심장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 최고의 사모함과 최고의 진실
함을 표현하는 말씀이다. 참 사랑과 기쁨의 기도는 이렇게 생겨난다.
지금은 대림절 기간, 기쁨으로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자.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쁨을 세세히 표현한 사도의 간구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가
득 넘쳐야 한다. 그 사랑에 지식과 총명을 더하여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말씀의
통찰력을 갖고 진리의 기반 위에서 풍성한 사랑이 넘치기를 기도드리자.
또한 진실하여 허물없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해야 한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쌓인 허물이 많은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 그것을 용서해 주셨다. 이제 주님 안
에서 허물을 걷어내고 진실한 자녀가 되어 재림을 맞이하도록 기도한다. 이어
서 의로움이 나왔다. 올바른 결실이 맺어져야 참된 하나님의 자녀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도록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먹
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일이다. 진정 하나님
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 삶이 주님께 바쳐지는 신성한 제물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
어다(시 33:1-3)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저희의 모든 것을 드려 아버지의 섭리를 찬송합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
일에 이 거룩한 성소에 임재하사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
진 것을 믿고 예비하는 자녀들이 여기 모여 영원한 나라를 소망합니다. 이 예배를 통해 저희에
게 굳건한 믿음을 주시고, 구원의 자녀로 삼으시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대
림의 은총을 베푸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인도자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회 중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인도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회 중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인도자 4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회 중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인도자 5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회 중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대림절의 복음
눅2:21-39
서울교회/배성산목사
대림절은 그리스도 오심에 대한 다만 순수한 대망의 뜻에서 기쁨으로 지켜왔다.
그런데 12세기 경부터 그리스도의 대림이 더 넓은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즉 그리스도의 대림은 과거에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현재에서는 신자들의 마음에 은혜로 교회 역사가 시작된 후 약 천여년 동안은
찾아 오시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마지막 심판날에는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사건으로 해석하게 된다.
대림절기에 참회를 하고 신앙적인 새결단을 하게하는 풍습이 생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는 대림
을 이와같은 3중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신앙의 정서와 삶의 현
장에는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시작되는 대림절 초반부터 모든 것이 상업화되고 사회는 이로
인하여 크게 상혼을 불러 일으켜 장사소득의 방법으로 취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케롤과 장
식품들로 요란해진다. 오늘날은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부터 벌써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유혹
들이 우리의 현실이기에 정작 기쁨의 최고의 구주탄일의 참된 의미는 정령 크리스마스날에
는 무의미하게 되고 허탈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대림절의 의미 찾기는 뜻있는 일이라 생각
한다. 한마디로 대림절의 그 뜻을 헤아려 본다면 "그리스도가 오셨고, 오시고 있고, 오실 것
이다"라는 대림절 메시지에 모두 담겨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대강절을 지키는 의미는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그
리스도의 구주탄일을 회상하면서 또다시 우리들의 마음속에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해 주실 것을 기다리며 또한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
마지막 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계절로 지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의 탄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격과 기쁨이다. 말구
유 같은 우리의 더러운 마음에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구주성탄절은 사망과 어두운
그늘 밑에 앉아있던 우리들에게 빛을 비춰 주시고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하여 벅찬 가슴으로
살 것을 새롭게 다짐하는 계절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뜻을 깨닫고 어려운
이 시대를 용기와 기쁨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메시지를 선포하는 계절이다. 말씀의 선포뿐
만 아니라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눈길을 소외된 자들에게 돌리고 아직도 어
두움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하는 계절
이 되어야 한다.
처음오신 그리스도는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러
나 이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만난 그리스도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초림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나 재림의 그리스도는 심판의 주로 오시게 된다. 초
림의 주님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영광의 보좌에 앉아 심판주의 당당한 모습을 말씀
하고 있다. 재림하실 주님은 심판이 주 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래 인간들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과 불신 그리고 불
확실성이라는 삼불(三不)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사망으로부
터 해탈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소원해 왔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의 복귀, 즉 하나님께
나가기를 희구해 온 것이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희구와 노력이 바로 종교의 형태를 지니고
나타났고 갖가지의 종교가 이 땅에 발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불
안의 시대'라는 것을 핵문제를 세계의 문제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
지 못할 것이다. 폴틸리히(P. Tillich)는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이
며 더욱이 종말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다고 했다. 인구의 폭발, 환경의 오염, 자
원의 고갈, 그리고 핵무기의 공포에 위협을 느낀 과학자들을 비롯해서 현대 지성인들이 '앞
으로 100년을 존속하기 어려우리라'고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갖는다. 그래서 EC당국은
이에 '아이는 둘만 낳고, 기술대신에 예술을 숭상하고, 개발 대신에 자원을 아끼고, 그리고
난 다음 역사의 종말을 잊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만날 기쁨에 즐겁게 찬송 부르면서 기다린 두 노인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시므온이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게 메시야가 올 때까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은 안나이다. 그는 결혼 한지 7년만에 과부
가 되어 84년 동안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는 성전을 떠나지 않
고 기뻐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가 예수를 영
접한 사람들이다. 오늘의 신앙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림으로 일관한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들간의 약속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는 약속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은 시간과 공간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기다리는 신앙인의 자세에 더욱 초
점을 둔 것이다. 등불을 밝히고 기다리는 신앙을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 미가 등의 예언에도 불구하고 2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푸대접
하고 말았다. 정녕 그가 이 땅위에 오셨는데 그를 마구간에 모시게 된 푸대접은 기다림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만민을 구원할 구주로 오신 예수와 죄인을 불러 친구로 삼아 죄
사함 받게 하시고 섬기는 종으로 고요하게 오시는 예수를 그들은 기대밖에 두고 있었기에
구주 오심의 의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구약 역사 전체는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이다. 그 약속이나 예언이 모두 예수의 오
심을 두고 한 말이다. 약속은 기다림이고 구주탄일은 오심이며 예언은 기다림이고 허락은
오심이며 율법은 기다림이고 복음은 오심이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세기 동안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별한 축제로서 알려진 것이 없었
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확장시기에 교회의 강조 점을 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5일이 축제일로 받아들여지고 확정된 것은 4세기경이다. 2천년의 세기말
에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의 의미를 새기며,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말씀과 영으로 새롭게 임재하여 주실 것을 기다리며,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
부하고 있는 불신의 세계와 역사 속에 임재하여 주실 '좋은 소식'의 메시지를 증거 하는 것
은 오늘의 선교의 사명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나심을 '좋은 소식'으로 알고 고백하는 삶의
현장이 되기를 간구 하는 마음으로 대림절을 맞이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그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적인
지위에 대한 압도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한량없는 구원의
축복이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
는 값없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그 분이 그 백성들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비밀
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에 구원을 가져다준다. 즉 그것은 하나님
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불 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은혜스러운 구원의 행위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 준다. 의인 즉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스럽고 거져 주
시는 사면을 강조하는 것이 특히 바울의 복음 메시지에 나타난 특징이다. 복음은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된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화해를 이루셨고 평화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려 오셨기 때문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복음의 시작'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이 평화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를 세상에 보내시어 성령
의 능력을 힘입어 온 세계에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우선
적인 존재 이유는 이 좋은 소식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이제 대강절의 메시지는 예언의 성취와 준비와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고 재림을 대망 하는
자에게 회개와 참회를 강조한다. 이것은 새 천년의 대림절을 지키는 자리에 초대교회가 사
순절과 함께 참회의 절기로 지키면서 복음의 증인 사역 의미를 새 천년의 교회가 다시 구현
해가야 한다.
그를 기다리는 자의 복 (본문 : 사 30:18-22)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H.G. 웰스라고 하는 작가의 '대 주교의 죽음' 이라고 하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설명해주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대 주교는 날마다 습관처럼 대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똑같은 말로 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하소서." 이것이 그의 기도 첫 문장입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오늘 내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한평생 수십 년을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오냐, 무슨 일이냐?" 이 소리를 듣고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이여 말씀하소서" 하면서도,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실까?" 그 많은 시간 기도하면서도, "정말 기도가 응답되는 걸까?" 어쩌면 기도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자기 감정을 순응하는 이 정도에 그치는, 소위 말하면 추상적이고 감상적 신앙이라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하고 기도하고 믿고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얼마나 내 생활 속에 확실하게 응답된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기다린다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깊은 아주 깊은 오묘한 말씀이올시다.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그는 능력이 많고 그는 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기다리는 겁니까? 그는 창조주입니다. 그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왜 기다림이라고 하는 고통을 택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 보세요. 가지고 싶지만은 지금 갖지 못하니까 돈을 벌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내가 무능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 기다려야지요. 우리는 기다려야 됩니다. 부득불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함, 그런 불가피적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능력이 많으세요. 하시고 싶은 일은 해요. 언제나 하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 섭리자 하나님, 도대체 무엇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얼마동안이나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뜻을 자제하시고 그 행사 속에서 왜 그 많은 시간 기다리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그의 편지 베드로후서 3장 8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죽기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 일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기다림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이"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릴 때는 하루가 천년 같아요, 어떤 때는 천년이 하루 같아요. 이런 시간 그 관념을 초월해서 완전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왜 이 기다림의 고통을 선택하셨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주 쓸모 없는 자로, 아주 구제불능한 자로, 아주 끝난 그런 존재로 대하지 않고 아직도 가능성을 두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죠.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있는 존재라고 인정해 주시는 거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 결혼생활하고 뭐 이렇게 시작하고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한 삼십 년을 참았다가 이젠 더 못 참겠다고 그러더라고요. 왜요? 기다릴게 없으니까 이제는. 기다려 봤자 뭐 이제 싹이 노란데 뭐. 그렇게 생각하고, 절망하고, 실망하려고 그러는데, 그건 참으로 인격에 대한 최고의 모독입니다. 저는 늘 얘기합니다. 신랑, 신부들에게 늘 얘기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절망이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건 마지막 말이라고. 아직도 나는 너를 기다린다.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사랑입니까? 얼마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겁니까?
기다림!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고통을 스스로 감수하시면서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심판을 멈추시고 다음 때를 기다립니다. 다음 시간을 기다립니다. 오래오래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건 곧 은혜입니다. 성숙하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깨닫고 성장해서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큰 회사에서 그 신입사원 모집하는데 아주 지혜를 냈다고 합니다. 요새 회사 직원하나 잘못 쓰면 회사 거덜나거든요. 보통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채용한다는 거. 아 그래서 "사람을 자 써야 되겠는데, 어떻게 좋은 사람을 고를까. 성적표대로 되는 건 아니요, 물론 IQ도 아니요. 사람됨을 어떻게 바로 심사할 수 있을까?" 하던 중에 그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마지막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아주 우수한 사람들을 한 방에 놓고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인터뷰 몇 시부터 합니다." 해 놨거든요, 그리고 한 시간을 두었어요. 그러니까 한시간 동안 처음에는 조용히 있다가 "왜 시간이 늦지?" "왜 말이 없지?" "왜 이거 뭘 하는 거지?" "아 이거이거 왜들 이러는 거야'" 하고 하나씩 둘씩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초조해서 어떤 사람은 몸을 동동 구르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손가락을 만지고. 서로가 이러는 시간에 한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 동안에 그 기다리는 시간을 전부 녹화를 해 뒀습니다. 한 시간 후에 "인터뷰 끝났습니다" 거기서 사람됨을 충분히 고를 수가 있었어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어떤 모습입니까? '그럴 일이 있겠지. 뭐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겠지' 하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그 자세, 대단히 중요한 것이에요. 이게 바로 EQ지수가 높은 거예요. 자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저는 박학전 목사님이라고 하는 저희 목사님, 제가 인천에서 목회 할 때 협동 목사님 이셨어요, 나이 많으신 어른인데 그렇게 목회를 많이 간접적으로 도와주셨는데, 가끔 그 집에 이렇게 초대받아서, 방문했을 때 보면 목사님이 연세가 높으시고 아주 참 귀한 어른인데 너무 외롭고 그래서 손자 하나를 데려다 키웠는데, 아 이놈이 말이죠, 밖에 나가 놀다 들어와선 버릇이 없어요. 자기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면서 "이 새끼, 이놈" 별소릴 다 해요. 그래도 할아버지는 좋다고 끌어 안아줘요. 난 이 장면을 너무너무 아름답게 봤어요. 그래 제가 한마디하죠, "아니 천하의 저렇게 무례한 놈, 할아버지를 발길로 차는 놈을 왜 사랑합니까?" 그랬더니, "그건 몰라서 그러는 건데, 애가 지금 이놈소리가 무슨 소린지, 님 소린지 놈 소린지 그건 알 바 아니요. 자기 딴에는 이거 내가 웃어주니깐 좋아하는 줄 알고 더 좋아한대요." 그러면 자 이제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얘가 그 뜻을 다 알 때까지, 철이 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밖예요. 이걸 즉각적으로 심판을 해야 되겠습니까? 기다려 주는 거죠, 그것이 사랑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예요. 기다려 주는 거. 딜레이(Delay)라고 하는 거, 사실 우리가 지연된다는 건 참 괴로운 것이에요. 약속이 지연되고, 무슨 일이 자꾸 늦어지는 것 참 어렵지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실 때, 그 지연됨, 이 속에는 위대한 사랑이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원망과 불평에 치우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지극히 사랑했던 나사로의 집이 있습니다. 오빠와 누이동생 둘, 이렇게 사는 가정으로서 어쩌면 예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가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저들도 예수님을 제일 많이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오빠 되는 그 집의 기둥입니다. 오빠가 병들었습니다. 누이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서 좀 빨리 와서 저희 오빠를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안 갔습니다. 안 가시고 죽을병이 아니다 그러고 안 갔습니다. 지연됩니다. 나흘이 지연되는 가운데 오빠는 죽었습니다.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저들은 마음에 지금 불만이 많습니다. '왜 오라고 할 때 오시기 않았습니까? 왜 내가 구하는 그 시간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장례가 끝나서 냄새가 나는데 지금 오시면 뭐하러 오셨습니까?' 복잡합니다 생각이.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일찍 이 자리에 오지 아니 한 것을 기뻐하노라" 왜요? 병상에서 일으키질 않았고 무덤에까지 들어간 자를 뒤에 끌어냈습니다. 어느 쪽이 더 큰 은혜입니까? 어느 쪽이 더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런고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지연 작전을 씁니다. 이 기다림, 요 기간을 못 참아서 마르다가 주님 앞에 실수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환란의 떡과 고생을 물을 마시며"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환란의 떡과 고난의 물을 마시게 하면서 기다립니다.
여러분 너무나 잘 아는 탕자의 비유도 보십시다. 저는 탕자의 비유를 볼 때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제일 궁금한 것은 그 아들을, 왜 가출을 아버지가 도와줬나 하는 겁니다. 그 못된 아들. 성경에는 간단하게 '유산을 받아 가지고 갔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은, 그렇게 까지 되기까지에는 오죽이나 못되게 놀았겠어요. 그냥 용돈 있는 대로 써 버리고 써 버리고, 많은 사건이……마지막에 "아버지 죽을 때에 네게 줄 유산 미리 주세요." 이 말까지 아버지는 들어주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네 거니까 가져가라." 그 재산을 떼 주는 삼분의 일을 잘라주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이게 기다림입니다. 시간적으로만이 아니고, 그의 인간 됨을 기다리는 것이에요. 아버진 뭘 생각합니까? "이 재산 다 날려도 좋으니까, 부디 내가 바라는 좋은 착한 아들이 되어다오.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 소리 좀 하고 돌아와 다오." 그거 아닙니까? 그 날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여기에 엄청난 것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계시된 것이에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은 과원지기가 무화과를 심어놓고 열매 열리기를 기다렸다. 삼 년을 기다렸다 하는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길 되기를 특별히 아주 겸손해져서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에요. 여러분, 은혜 입었다고 은혜가 됩니까? 내가 겸손할 때만이 은혜가 은혜 됩니다. 내가 온유한 마음, 참으로 착한 마음이 되기까지는 어떤 은혜도 내게 은혜 될 수 없는 것이에요.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되기를 회개하고 믿음에 서서 모든 정욕을 버리고 아주 빈 마음으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깊은 사랑의 뜻을 깨닫고 감사 감격하게 되기를 하나님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은혜 베푸시기 위함이요. 심판을 위해 기다리는 게 아니요, 두고보자. 잘못되면 다 진멸하리라. 그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은혜 베풀기 위하여 은혜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비라고 하는 건 참 좋은 거 아닙니까? 비가 와야죠.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면 이건 망하는 겁니다. 조용하게 땅이 흡수할 만큼 봄비처럼 이렇게 비가 와야지 그대로 장대비가 막 쏟아지면은 다 무너지고 마는 거예요. 비는 중요합니다 만은 정도에 맞게 와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냇물이란 언제나 아름다운 게 아닙니까? 그러나 물이 범람해서 홍수가 되면 다 쓸어버리고 마는 거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귀한 은혜라고 하지만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절대로 은혜 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감당할 그 날을 주님은 기다린단 말입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기다림을 알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다림을 함께 기다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대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기다리는 것과 나의 기다림의 초점을 맞춰야 되요. 그가 내 인격의 성숙을 기다린다면 나도 그 날을 기다려야죠. 부자 되기를 기다려선 안돼요. 잘 살게 되기를 기다려서는 안돼요. 그는 우리가 진실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교만하기를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성공을 기다린다는 말이 이거는 하나님 앞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기다림, 그 뜻을 똑바로 알고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통해야 됩니다. 소망과 약속! 그 날을 기다리는 겁니다. 은혜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종종 출석하던 워싱턴 D.C. 의 뉴욕 에비뉴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의 조셉 C. G.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가 어떤 기간에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그리고 그 성경을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그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그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끝까지 참아 기다릴 것입니다. 그가 은혜 베푸실 때까지, 또 나는 은혜 베푸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수준에까지 도달하도록 기다리겠다. 하나님의 기다림의 뜻을 알고 충분히 이해하고 나면 나의 기다림은 아주 쉽게 됩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저 앞에 있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의 그 거룩하신 시나리오 속에 오늘 내가 있어요. 오늘의 내 사건이 있어요. 이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요, 그런고로 조용히 그 날을, 그 시간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교육학적인 그런 책을 조금 읽다가 한마디 뜻을 찾고 제가 아이들을 키울 때 그렇게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고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지금은 손자, 손녀들에게 그 방법을 그대로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고 또 어머니들에게 부탁을 해 봅니다. 그게 뭐냐면 기다림의 훈련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가르쳐야 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다리는 자세, 그것을 훈련시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뭘 달라고 하면 말입니다. 대체로 즉시 주는 것도 있지만은 중요한 것들은 절대로 바로 주지 말라는 거지요. 뭘 달라고 하면은 "내일 준다" 그래요.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한 밤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 준다." 이렇게 딱 한마디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무리 울어도 주면 안돼요. 하고 하룻밤 자고 난 다음에 "아이들은 다 잊어버렸지 벌써'" "너 어제 나하고 약속했지?" 하고 이것을 줍니다. 그 다음에 얼마 있다가는 또 두 밤 자면 준다, 그 다음엔 세 밤 자면 준다, 일년 후에 준다 이렇게 약속해서 약속을 기다리고, 그 성취의 날을 맞는 그런 기쁨을 가르쳐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약속 했다가도 지금 안 된다고 했다가도 발버둥치고 울면 "옜다 가져라 모르겠다" 완전히 버리는 거래요. 울면 되더라, 발버둥치면 되더라, 이거는 무서운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과 같은 무서운 세상을 만든 거예요. 폭력이 통하지 않습니까? 폭력은 안 통해야 되요. 잘못된 소원은 절대로 이루어져선 안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가르쳐야 되는데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가르쳐야 되는데 이걸 못 했어요. 그건 약속으로 대체하는 거예요. 이걸 못 가르쳤던 거예요. 이걸 훈련을 받아야 되요. 그래서 이 훈련이 되면 보세요. 외국 가서 보면 무슨 일을 하나 줄서잖아요. 줄 서놓고서 거기서 서둔다고 되는 겁니까? 가만히 기다리잖아요. 마냥 기다려요.
사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은 미국서 공부 할 때, 뭐 '조스' 라고 하는 영화 있지요. 그 영화를 보러 간다고 미국 학생들이 야단을 하더라고요. 그래 저녁에 공부 마치고 11시에 가자고. 아 그래! 도서관에서 공부마치고 나오는데 하도 가자고들 그래 나도 따라나서 봤지요. 이 사람들 금요일 날 저녁에 영화구경 가는걸 알기 때문에 따라가 봤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줄을 길게 섰는지 표를 사지도 못하고 서있는 거예요. 보세요. 다 보고 나온 다음에 또 기다리고 기다렸어요. 제가 3시에 봤어요 영화를. 그런데 돌아가는 사람도 없어요. 밤중에 그 영화간 앞에서 3시간 4시간이죠 11시부터. 그리고 아침에 돌아왔습니다. 나는 어디 어떡하나 보자 하고 끝까지 기다려보고 아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라고요. 아 별것도 아닌 영화 하나 보겠다고요.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기다려서 보고 나오면서 나는 영화는 생각이 안나요. 기다리던 생각만 나요. 그겁니다. 바로 우리가 이것이 없어요. 조급해서 그저 욕을 하고 저주하고 폭동을 하고 미치고 왜 이 모양이 된 겁니까 이게? 기다리는 훈련이 없어요, 기다리는 성품이 없어요, 또 기다림에 대한 믿음이 없어요. 미래 지향적인 약속을 놓고 그리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여러분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 응답은 세 가지로 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그래라" 하는 응답이 있고요,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게 있고. 또 하나는 "버려라! 네 소원 잘못됐으니 생각을 고쳐" 이게 응답이에요. 세번째 응답은 "기다려, 때가 될 때까지. 그 어느 때까지 기다려라" 그러면 그것도 응답이에요. 기다림 그 자체가 응답이라는 걸 알아야 되요. 그것이 행복이어야 되요. 그것이 즐거움이어야 되요. 기다린다는 것이 그 자체가 내게는 큰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니까요. 사랑이니까요. 사랑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니까요. 여호수아 7장 13절에 "스스로 성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려라." 말씀하십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가? (본문 : 행 1:1-11)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성은 더 질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풍요한 생활을 누리면 누릴수록 더 정욕의 노예가 되어 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에 과연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똑같은 질문이지만 말을 바꾸어서 또 한 번 질문을 드립니다. 5백 만원이 적은 돈은 아닙니다만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대학을 나온 양가집 딸이, 그것도 임신 8개월이 된 가정 주부이자 작가 지망생인 20대 여자가 천사 같은 여덟 살 박이 어린 소녀를 목 졸라 죽이게 하는 이런 비정하고 잔인한 세상이 우리의 마음을 쏟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목사님이 차를 타고 가는데 앞에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바짝 다가가서 보니까 그 오토바이에 스티커 하나가 붙었는데 거기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고 합니다. "죄의식 따위는 뭉개버려라." 무엇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고 사느냐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을 가만히 보면 죄의식은 점점 실종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죄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을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취급하는 그런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죄의식이 생길텐데 하나님이 두렵게 느껴지지 않으니까 죄의식도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벨트앙스트(Weltangst)라는 사람이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죽어버렸다. 그러나 새로운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다." 연세 드신 분들을 위해서 한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 공포를 던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두렵다' 하는 생각도 죽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편안하고 자유스럽고 모든 것이 자신만만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 다른 것이 하나 자기 마음에 와 앉아 있습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공포가 자기 마음에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몸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빨리 죽으면 어떻게 하나?' '애에게 이런 일이 생기기 어떻게 하나?' '우리 가정이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별의별 걱정 때문에 오는 공포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을 다 둘러보아도 이 세상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연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을 계속하면 여러분은 아마 마음속으로 '아니야,
나는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세상은 소망이 없어.'하고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또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러분은 이 세상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사십니까?' 왜 일주일 내내 세상일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사느냐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 열 명중의 여덟 명은 일주일 내내 마음이 완전히 세상에 가 있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 사랑하라."고 말씀하지만 그렇게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세상에다 온통 마음과 뜻을 쏟고 목숨까지 바쳐가며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고 기대할 만한 가치도 없다고 하면서 왜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라토렛(Latorette) 박사는 참 유명한 교회사 학자였습니다. 그가 기독교 1900년사를 연구하면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아십니까?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이 건강해서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그런 시대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교회가 형편없이 힘을 잃어버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버리고 부패하고 어떤 면에는 교회가 있으나마나 했던 그런 무력한 시대를 연구해 보고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환경에 너무 순응시키려다가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는 교회의 본래의 정체성을 희생시켜버린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스스로 적응을 시켜보려고 하던 시대와 사회와 그 분위기가 사라져버리자 교회도 함께 없어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살아남아야 됩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 교회만의 독특한 본질이 있습니다. 이것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교회가 아니지요. '옥한흠'이라고 하는 한 사람, 옥 목사만이 갖고 있는 어떤 본질이나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옥한흠은 더 이상 옥한흠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힘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으로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요즈음 세상과 잘 조화를 맞추어서 신앙 생활을 할까?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교회도 좀 이렇게 변해야 되지 않겠는가?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 옷을 갈아입어야 되지 않겠는가?'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면 결국에는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의 유행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세상의 가치관 치고 50년이나 100년 이상 이어지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자꾸 변하고 자꾸 없어지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들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세상에 자기의 모습을 맞추려는 한 세상의 가치관들이 사라짐과 동시에 교회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잘못된 때를 가만히 되짚어 보면 전부 그런 식으로 살았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에도 교회가 많이 변질되어 가지 않나 하는 우려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세상에 온통 빼앗기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를 대망 하는가!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장 말씀은 우리가 진정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다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승천하시기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만나며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때 나누었던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1장 3절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해를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시고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의 주된 관심은 세상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만이 주님의 관심사였고 주님의 대화의 주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토록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지,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1장 1절부터 11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그 과정과 결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는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기록하였노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고 외치며 가르치기를 시작할 때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전개되어 갑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지상에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이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그 전도 활동을 통해서 땅 끝까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 교회를 왜 세우셨느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그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지상 교회를 세웠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언제 완성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제자들을 보고 천사 두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 날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관심, 예수님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 밖에 없습니다. 성경 전체를 여러분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보십시오. 그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 안에 세상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세상 나라에 대한 청사진이 없습니다. 세상 나라에 대한 어떤 목표가 없습니다. 성경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뿐입니다. 세상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으면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왜 대한민국이 존재합니까? 왜 오늘날 우리가 사는 20세기, 21세기가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백성들이 전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올 때까지는 세상 나라가 존재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터전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없다면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타락한 죄악의 소굴,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룩한 백성들을 보면 똑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처음에 한 120명의 그런 사람이 나왔지 않습니까? 120명을 통해서 나중에 3,000명 5,000명 10,000명 이상이 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백성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는 자꾸 늘어났습니다. 나중에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 합세해서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위해 생명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인생 목표도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가 많아지니까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뛰어 넘어 사마리아와 유대와 저 수리아 지역으로 퍼져 나갔지 않습니까? 그들이 퍼져 나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그 수가 더 많아지니라." 나중에는 국경을 넘어서 안디옥에까지, 그 다음에 터키가 있는 이고니온까지, 그리고 나중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바울이 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보세요. 바울이 감옥에 앉아 있지만 그를 면회 오는 사람들, 군인이든 귀족이든 천인이든 노예든 헬라 사람이든 로마 사람이든 유대인이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마음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에 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처럼 눈만 뜨면 건강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벌벌 떠는 그런 사람이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돈을 좀더 많이 벌어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십시오. '아이고 내 자식, 아이고 내 딸, 내 아들 저 놈들 어떻게 잘 되야 될텐데'라며 밤낮으로 아들, 딸 생각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보십시오. 베드로는 자기 아내를 데리고 다녔고 자식도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베드로가 자기 아내를 걱정했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을 걱정하느라 시간을 보냈다는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정을 알뜰히 돌봤습니다. 남편으로서 자기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업에 충실했습니다. 비록 그렇게 살았지만 그들에게 다른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데 온통 마음이 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들은 종종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실제로 생명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끌려가서 돌멩이에 맞아 죽었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니까 집도 빼앗기고, 생업도 잃어버리고 온 가족이 온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 않습니까?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을 살았던 사람이지, 세상 나라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이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하고 그들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똑같습니까? 할렐루야! "주님. 나도 밤낮 하나님나라를 대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비록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정신없이 몰입하지만, 나는 왜 내가 그 일을 하며 사는지 압니다. 하나님 나라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야 정상입니다. 만일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과 너무나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이단이든지 아니면 사이비 기독교인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를 한다고 해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 그래서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 나라가 완성될 때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자가 되자.'라는 의미에서 복음 전하려고 하는 것이 대각성 전도 집회 아닙니까? 혼자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교회가 이렇게 하자고 할 때 거기에 묻혀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해야 되고 마음을 쓰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년이 다 가도록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있다고요?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산다고요? 어떤 멍청한 사람이 그 말을 곧이 듣겠습니까? 사람도 곧이 듣기 어려운 말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겠습니까?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수십 만 명되는 제자들하고 우리 사랑의 교회 교인들하고 비교할 때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단이지요. 똑같아야 됩니다. 똑같아야 돼요. 대각성 전도 집회를 한다고 할 때 "이렇게 좋은 기회 하나님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주여 누구를 전도할까요? 이번 기회에 누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까요?" 라는 자세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전도할 사람도 주시고 만나게 하시고 접촉하게 하시고 또 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는 기쁨도 맛보게 하실 텐데 마음이 온통 세상에 가 있으니까 대각성을 하는지 소각성을 하는지 중각성을 하는지 알 수가 없지요.
여러분, 양심적으로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세상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시기 때문에 사랑의 교회를 비롯한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고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 이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이름인지 아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누구의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까? '내'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할렐루야! '내'가 누구입니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할렐루야! '내'가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손에 쥐고 계시는 만왕의 왕,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에베소서 1장 21절을 보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 이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온 만물을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오직 그 이름만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권세가 있었는지 베드로가 이 이름을 가지고 한 30분 설교를 하자 예수를 십자가 앞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폭도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리니 기록되었으되 너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하신 말씀처럼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자 그 말씀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많은 사람들이 "형제여, 우리가 어떻게 할꼬, 어떻게 할꼬."하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해 보지만 한사람을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쏘아보면서 '어디 한번 지껄여봐라' 하고 쳐다보는 사람, 그 런 사람을 우리 힘으로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 말 하면 이렇게 꼬리를 물고늘어지고 저 말 하면 저렇게 꼬리를 물고늘어지고 하면서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은이 없는 것처럼 거만을 피우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떻게 우리 힘으로 예수 믿게 합니까? 더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던 그런 폭도들을 무슨 재주로 예수 믿게 만듭니까? 그러나 예수의 이름의 권세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 지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증거를 하자 전부 다 거꾸러지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명령하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이 걷고 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신기해 가지고 베드로 주변에 몰려들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예수의 이름은 그만큼 권세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인도 선교사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스탠리 존스라고 하는 선교사인데요, 평생을 인도에 가서 복음 전하느라고 생을 바친 분입니다. 그분이 89세에 뇌일혈을 일으켜 가지고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보스턴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89세 나이에 그런 병이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분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의사마다 "닥터,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세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스탠리 걸으라. 나에게 그렇게 좀 이야기 해 주세요."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도 부탁을 하니까 의사가 그분에게 왕진을 올 때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으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탠리 선교사는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간호원이 들어오면 간호원보고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간호원이 치료를 하다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 걸으라" 하고 말하면 또 다시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약간 노망이 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은 6개월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90살의 나이에 또 다시 인도에 선교하러 갔다고 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능과 권세와 영광을 믿으니까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능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딸아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하고 명령하고, "아멘"으로 화답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나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의 권세를 안 믿으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믿어보십시오. 왜 못합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만큼 권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보고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라고 할 때 "네 이름을 가지고 가라"거나 "사랑의교회 담임목사 옥 목사 이름을 가지고 가라"거나 "사랑의교회 이름을 가지고 가서 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내' 이름, 곧 예수의이름을 가지고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이름을 수건에 싸서 땅속에 묻어 놓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국 교회의 어떤 통계를 보니까 일년 내내 가도 전도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98퍼센트라고 합니다.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이름으로 도무지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 예수의 이름은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너무 존귀하여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은 너무나 능력이 커서 숨겨 놓고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대각성 전도집회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이름을 가지고 이 더럽고 냄새나는 서초동을 위시해서 여러분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을 복음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각성 전도집회를 아직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혹 계십니까? 그러고도 무슨 낯으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놓고 어떻게 감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십니까? 그래 놓고 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까?
성령의 권능
둘째로, 성령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여러분, 우리 분명히 합시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까? 안 오셨습니까? 오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성령은 분명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권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 못해요. 나는 은사가 없어 전도 못해요. 다른 사람 앞에 가면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도무지 말을 못해요."라는 따위의 변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도 능력이 안 나타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안 믿는 이웃 아주머니하고 같이 서서 내려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성령의 음성을 못 듣습니까? '예수 믿자고 한마디만 해. 한 마디만 해봐.'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니야, 괜히 말을 꺼냈다가 무안만 당할 거야.' 그렇게 갈등하는 사이 1층 문이 열립니다. 그러면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아이고, 잘 가세요. 시원하다.' 성령께서 안 믿는 사람을 만나거나 필요한 사람을 볼 때마다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 마음속에 속삭여 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거부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능력이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백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만들어내는 원자력발전소에서 우리 집에까지 전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발전소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스위치를 올리지 않으면 밥도 못하고 전등도 못 켭니다. 아무리 발전소에서 엄청난 전기를 보낸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그것을 작동하는 스위치를 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교회에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종의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성령은 결코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면 성령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베드로만 잘났습니까?
우리도 잘 났습니다. 베드로만 3천명을 전도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도 3천명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만 만 명 전도하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의교회도 만 명 이상, 십만 명, 백만 명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가대가 찬송을 얼마나 은혜롭게 잘 불러주셨습니까? "전능 왕 오셔서..." 전능 왕 오시라고 소리만 지르지 말고 전도하십시오. 백성이 있어야 왕이 있지 백성이 없는데 혼자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왕이 영광을 받도록 하려면 우리가 성령의 권능을 가지고 나가서 전도해야 됩니다. 순종하면 능력이 흘러 나갑니다. 믿습니까? 능력이 나로부터 흘러 나갑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환상
셋째로, 하나님 나라의 꿈, 곧 환상을 주셨습니다. 2장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 여기서 꿈이나 환상, 예언은 하나님 나라의 꿈이요 환상이요 예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 그려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꾸 늘어나고 그 다음에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오면 흥분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환상과 꿈을 가지고 세상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매일마다 반복해서 외우고 기도하도록 주기도문을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라가 임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의 뜻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과 권세, 이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영원히 다스려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 사상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면서 그 꿈을 먹고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여러분의 꿈과 환상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까?
밤낮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환상은 무엇입니까? 수지 지역의 60평 짜리 아파트입니까? 그래도 마음에 조금 가책이 되면 이렇게 묘하게 둘러대지 않습니까? "주여, 60평 짜리 주시면 거기에서 우리 다락방 할거예요. 주여 60평 주시옵소서." 참으로 웃기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꿈이 무엇입니까? 환상이 무엇입니까? 밤낮 없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 양심적으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성령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영의 일이란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에게 이 환상이 있습니까? 있으면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 환상은 없고 세상 환상만 가득합니까?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수준에만 머물면 안됩니다. 관심이라는 것은 분위기가 바뀌면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뿐 아니라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분위기가 바뀐다고 중단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변명하지 않습니다. 결과를 볼 때까지 그는 쉬지 않습니다. 이게 헌신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은 주님이 시간을 내 놓으라고 하면 시간을 내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하면 돈도 내놓고, 몸바쳐 헌신하라고 하면 몸바쳐 헌신하고, 주께서 원하시면 무엇이든 주저 없이 내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느 목사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부럽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미국의 어느 신학교를 방문했는데 그 신학교가 요즘 재정적으로 조금 어려운가 봅니다. 좋은 교수를 영입하고 싶어도 재정 확보가 어려워 못하고 있던 터에 한국에서 온 이 목사님을 붙들고 사정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신학교에 한국 학생만 해도 천명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도와줄 만 하지 않습니까? 석좌 교수를 모실 수 있는 재정을 지원해 주세요." 석좌 교수란 어떤 자금을 준비해 놓고 그 자금에서 나오는 돈을 가지고 교수를 쓰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석좌 교수 하나를 쓰려고 하면 적어도 백만 불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백만 불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사정을 들으니까 하도 딱해서 그만 "어디 한번 해봅시다."하고 말을 하고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으로서는 그 일이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교회도 지금 수백 억 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터라 교회에다 그 돈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가 약속한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난처한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고민하며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이상하게 중소기업 하는 사장 집사님이 자꾸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점심을 같이 하자고 그 집사님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눈치를 봐가면서 "집사님, 요즘 사업이 어떠세요?"하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집사님이 "요즘 참 형편이 안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회사도 규모를 많이 줄였습니다. 그래도 규모를 줄인 뒤로는 지난 한해 동안 하나님이 어렵지 않을 정도의 은혜를 주셔서 조금 벌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액수를 이야기하더랍니다. 참 재미있지요. 아무리 집사라고 해도 자기 사업에서 번 순수익 액수까지 목사에게 다 고해 바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듣고 보니까 그 액수가 중소기업이 1년 동안 번 돈으로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불경기에 그 정도 벌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나에게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도자가 될 사람을 키우는데 참 필요한 돈이니 날 좀 도와주십시오." 그 집사님은 사정을 듣고 나서는 "주님이 쓰시겠다면 드려야지요."하면서 대뜸 9억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그랬습니다. '나한테는 1억도 안 가져오는데 이 사람은 복도 많네.' 돈 번다고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씁니까? 9억이 적은 돈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는구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써야겠다."하는 확신이 서니까 조금도 아낌없이 내 놓지 않습니까? 이게 헌신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헌신자요,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날마다 벌어 가지고 결국은 가져가지도 못할 것, 자식들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기 십상인 그 돈을 날마다 쌓아놓고 있으려고만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중세기의 유명한 철학자 루소는 예수 믿는 사람을 향해서 빈정거리면서 이런 소리를 했습니다. "도대체 교회라는 것을 보면 이상해. 교회 가서 보면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충성 딜레마에 빠져 있어. 모두가 충성 딜레마에 빠져 있어. 하나님 나라만 찾고 있어. 하나님 나라만 저렇게 찾고 충성하다가 어떻게 그들이 세상 나라의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겠는가? 세상 국가에 훌륭한 시민이 되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만 날마다 찾아서 되겠는가?'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럴 때 캠브리지 대학의 C.S. 루이스 교수가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늘을 겨냥하라. 그러면 땅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땅을 겨냥하라. 그러면 어느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 사람은 세상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잃는 사람은 세상도 다 잃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우선 순위를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먼저 구하면 땅의 것은 덤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세상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18:2). 바벨론은 세상 나라입니다. 이 세상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세상은 반드시 없어집니다.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운명입니다. 이런 세상 나라에 우리가 마음을 빼앗겨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계22:3-5).
할렐루야! 예수님과 더불어 세세토록 왕노릇 할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쓰고 헌신하고 충성해야 되겠습니까? 성령께서 이 자리에 임하셔서 다시 한번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세상의 바벨론 신상을 다 깨트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환상이 있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나가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불쌍한 영혼들이 두손들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예루살렘이 어디입니까? 우리 가정에 있는 믿지 않는 식구일 것입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마리아가 어디입니까? 아마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라든지 동네가 될 것입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유대 나라가 어디입니까? 아마 대한민국일 것입니다. 우리의 땅 끝이 어디입니까? 아마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열방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의교회를 향해, 한국 교회를 향해, 세계 교회를 향해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하늘의 환상을 가지고 이 나라를 완성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늘을 겨냥하십시오. 그러면 이 땅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 날마다 땅을 생각하고 땅을 겨냥하고 계십니까? 결국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어리석은 짓 하지말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우리의 생을 아름답게 헌신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여러분의 직장도, 여러분의 재물도, 여러분의 젊음도, 여러분의 건강도 하나님의 영광, 그 나라를 위해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바치는 아름다운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기에 합당한 생활 (본문 : 롬 13:8-14)
광성교회 김창인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말씀을 보면 11절에 "또한 너희가 이시기를 알거니와"에서 알거니와 라는 말은 그 시기가 어느 때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보다도 이 시기에 너희들이 생활을 하고 있거니와 그렇게 해도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합당한 생활. 여러분 이 시기라고 하는 것은 막연히 이 시기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특정한 때를 가르켜 이 시기라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본문이 말하면 그 특정한 때는 언제냐 하면 말세.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바로 그 말세입니다.
이 말세라고 하는 특별한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라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일년을 네 철로 나누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우리가 나누기보다는 나누어져 있는 거죠. 그러다 보게 되면 그 철철이 그 철에 따라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봄에는 씨를 뿌립니다. 여름에는 김을 맵니다. 그 동안에 열매가 무르익으면 가을철에 거둬들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김을 매고 가을에 거둬들인다. 이것이 철에 합당한 생활인데 이걸 바꿔 보십시오. 어떻게 되겠는가? 여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김을 매고 겨울에 거둬들인다. 이쯤 된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활은 엉망이 되고 말지 않아요? 그러므로 그 철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시기. 이 종말이 되어진 이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되겠다. 또 성경이 그렇게 명하고 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가르침 따라 상고해 보면...
첫째로 사랑의 생활입니다(8~10). 말씀을 보면 "피차 ~ 완성이니라" 할렐루야! 여기에 보면 무엇을 하라 명하셨습니까? 사랑! 사랑이라는 빚 외에는 다른 빚을 지지 마라. 우리는 예수님께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빚이라고 하는 것은 갚아도 좋고 안 갚아도 좋은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을 하나님께 갚아 드리려고도 해야 되지만 하나님은 이웃에게 갚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웃 사랑을 네 몸과 같이. 그래서 사랑의 빚을 갚으라. 오늘 본문의 얘기는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로마인들이 이웃을 사랑을 잘 하고 있다면 왜 이런 권면과 명령을 하겠어요? 이웃 사랑을 안하니까 문제죠.
예를 들어 봅시다. 성경을 쭉 펴놓으면 66권 아니예요? 이거 한 번 읽어보면 머리가 복잡해 집니다. 촌수를 못 찾아요. 이 소리가 그 소리 같고 그 소리가 이 소리 같고. 그러나 줄거리를 잡아보면 간단합니다. 율법사 하나가 와서 주님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그 말은 하나님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니라. 그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무엇입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것이 둘째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이웃 사랑, 첫째는 하나님 사랑. 하나님 사랑이 첫째고 이웃 사랑이 둘째입니다. 이걸 뒤 바꿔서 첫째 둘째를 바꿔 놓으면 안되요. 첫째는 반드시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하고 마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한 말씀 더 붙여서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강령은 큰 줄거리라는 뜻이예요.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율법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기까지 다섯 책이 율법이고 그 나머지는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이건 신약이 없을 때 구약에 큰 줄거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성경을 쫙 펴놓으면 66권 아닙니까? 너무 복잡해요. 그러나 이것을 둘로 딱 나누어 놓으면 한쪽 또 다른 한 쪽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 놓을 수가 있는데, 이 두 가지를 나누어 놓아도 상당히 부피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어떻게 나누느냐? 성경에 보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록해 놓은 게 있습니다. 한쪽으로는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기록해 놓은 것이 있어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교리편. 믿음편입니다. 그건 하나님과 나와의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나와 너와의 관계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입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면이 한 쪽 있고 한쪽에는 윤리 도덕적인 면이 있어요. 쫙 펴놓으면 66권됩니다. 그런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말이 너무 많아요. 한 마디로 쭉 줄이면 방금 말씀들은 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성경 한 절이 됩니다. 여기에 쫙 접혀지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쪽은 사람. 나와 너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 상당히 많을지라도 한 절로 딱 접혀 놓으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한 절로 접혀집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그 말씀에서 기독교 윤리가 다 나옵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네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 말씀 가운데서 기독교 교리편 그 다음에는 신앙편이 다 나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한 절로 좁히면 하나님 사랑. 또 한 절로 접히면 이웃 사랑.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큰 줄거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구약 성경 쭉 꿰뚫고 나가는 줄거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것이 나중에는 신약 성경까지 쫙 꿰뚫고 나가요. 신구약 성경의 줄거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이걸 함께 모아 놓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랑이라는 두 글자에서 만나 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이라는 두 글자에서 하나님 사랑이 나오고 이웃 사랑이 나오고, 하나님 사랑에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이 다 나오고 이웃 사랑 이라는 데서 기독교 윤리가 다 나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가장 정확하게 이루어 놓은 사건이 즉 이루어진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중심 아닙니까?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계명 중에 최고의 계명이 사랑입니다. 교리 중에 최고의 교리가 사랑입니다. 그런 까닭에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도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는 빼 놓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웃 사랑에 대한 얘기만 합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로마 교인들이 하나님 사랑은 그렇게 잘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꼭 해요. 십일조는 하나님이 주인 된다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 잘 하죠, 기도 생활 잘 하죠, 그 다음에는 하나님 봉사하라는 거 그렇게 잘 하죠. 하나님께 대해 하라는 그 계명은 그렇게 열심이고 잘 지키는데 이웃 사랑, 너에 대한 사랑은 손톱만큼도 안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 교인들이 하나님 사랑은 잘하는데 이웃 사랑은 그렇게 못할까? 그래서 읽어 드린 말씀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뭐 그 외에 다른 말이 많을지라도 이 계명 속에 다 들어 가 있는 겁니다. 이웃 사랑을 하는 자는 율법을 완성했고 계명을 다 이루었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로마 교회에 흠이 무어냐 하면 이웃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말세가 되면 사랑이 다 식어집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말세에 대한 여러 가지로 해주는 중에 그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불법이 심하므로 사랑이 식어진다. 이건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 죽는데 내버려둬요. 또 그 다음에 아버지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재산 문제를 놓고 칼부림하고 죽여요. 말세가 되게 되면 이렇게 불법이 심해서 사랑이 식어버려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이웃 사랑 않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말세를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재촉해 주시는 말씀인 줄을 믿습니다. 이웃 사랑은 어디서부터 출발 하냐면 바로 자기 옆에 있는 마누라 사랑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마누라 사랑 못하면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웃 사랑은 내 마누라를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가장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다음에는 형제를 사랑하고. 자꾸 확대시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를 사랑하게 되고 세계를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닙니까?
그냥 공중에 띄어 놓고 말만 하는 게 아니예요. 구체적으로 사랑하려면 손해가 되고 힘이 드는 겁니다. 로마 교인들에 네 몸과 같이 사랑하자고 이렇게 강조하는 말. 본문을 통해서 우리 광성교회 교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두번째로는 각성의 생활입니다(11~)
각성이라고 하는 거는 깨어 일어나 정신차린다. 그런 뜻이예요. 깨어 일어나 정신차린다. 자 그러면 본문으로 돌아가서 11절 한 절 "또 너희가~가까왔음이니라" 할렐루야!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가까워 왔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놨는데 뭐가 가깝고 멀고 해요? 구원이 처음일 때 보다 가깝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건 다른 게 아니라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의 육신은 짐승의 육신과 똑같이 흙으로 된 겁니다. 썩어지면 흙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육신은 짐승과 똑같은 흙으로 된 것이기 까닭에 짐승들을 먹여 주고 재워주고 쓰다듬어 주면 그렇게 좋다고 울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영리한 개도 하나님 안 찾고도 살아요. 찾을 엄두도 못 내고요. 우리 육신도 그렇습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예쁘다고 쓰다듬어주면 이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나 영이라고 하는 거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 놓은 겁니다. 즉, 천사와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천사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입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없으면 죽어요. 하나님만 찾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은 하나님 찾자는 거고, 우리의 육신은 자꾸 세상을 찾아가는 겁니다. 이거 둘이 합해져 이루어 진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나누어지면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혼만 가지고도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고 육신만 가지고도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여기 합해져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데 이 영과 육이 합해진 사람이 죄를 짖고 타락하면 영과 육이 함께 타락하는 거예요. 구원을 얻으면 함께 구원을 얻을 때 구원이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성경은 뭐라 그래요? 믿음은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할렐루야! 여기 보면 믿음은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과 육이 있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내 영혼만 구원받았다 그 말입니다. 육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어요. 그런 까닭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우리 육신은 똑같습니다. 조금 추우면 감기 들어서 야단이고요. 세월이 흘러가면 늙어버리고요. 그 다음에는 죽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 육신인데, 좋은 거 보면 다 가지겠다는 거예요. 조금 손해 끼치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거예요. 그게 믿지 않는 사람보다 낳은 게 뭐가 있습니까? 그건 왜 그러냐 이 말입니다. 육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육신에게서 온갖 정력이 샘솟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고 너 죽이고도 내가 가지겠다는 거 아닙니까? 감기 들고, 나이 먹고. 그런 육신 가지고 천당 가라면 큰 변 아니겠어요? 이건 구원받지 못하고 천당 가라면 큰 변입니다. 육신은 죽어져야 되요. 죽어져야 되요. 썩어져야 되요. 그러다가 이 육신이 다시 부활하고 다시 살아나는데 예수님 부활하고 재림하실 때 종말의 시기입니다. 말세입니다. 예수님 재림하면 우리 죽었던 몸들이 전부 다시 부활해서 우리 육신을 입게됩니다.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 그 말이예요. 그럴 때에는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을 합니다. 먹지 않아도 됩니다. 자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 입을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한 것과 똑같은 영화로운 몸입니다. 이럴 때 이미 구원 얻은 우리 영혼. 이 때 여러분 구원 얻는 우리의 육신. 완전히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서 구원의 완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때문에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 보다 자꾸 자꾸 가까워 졌다. 가까워지는 거죠. 그러다 주님 재림하면 우린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때 완전히 구원의 완성이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육신으로 영과 함께 살아가는 이 마당에 영혼 구원 얻었지만 육신은 아직 구원 얻지 못했으니까 조금 손해를 끼치면 열 배로 갚아 버릴려는게 우리 아닙니까? 여러분 안 그래요? 그러니까 지금 로마 교인들이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 못하고 너를 사랑 못하는 거예요. 쪼금도 너를 위해서 손해볼려고 안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해라.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으면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않느냐? 마땅히 자다가 깰 때가 되었느니라. 정신 차릴 때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걸 각성이라고 그럽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살 때가 아니고 정신을 차리어서 하나님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생활이 있는 동시에 정신차려 깨어 각성하는 두 번째 생활이 있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세번째로 단정한 생활입니다(12~14)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다 그러면 언제 예요? 새벽. 새벽 되면 옷을 갈아입어요? 안 갈아입어요? 무슨 옷을 벗고 무슨 옷을 입어요? 잠옷을 벗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활동복. 정장을 하는 거죠? 오늘 세 번째 얘기가 그거입니다. 잠옷을 입고 나가 활동을 할 수 없지 않아요? 어디를 잠옷을 입고 나가요? 벗어버려야지. 그렇게 하고는 정장을 갖춰야 된다. 그 정장을 갖추는 걸 단정한 생활이라고 합니다. 잠옷 가지고 부시시 하고 정신 못 차리고 그렇게 하지말고 다 벗어버리고 정장을 딱 갖추는 것. 이걸 단정히 행하고. 그래서 단정히라는 말은 모양이 좋다 그런 얘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밤이 깊고 ~ 도모하지 마라"
할렐루야! 그러면 믿는 사람의 정장이 무엇이냐? 정장을 해야 되지 않아요? 단순히 본문에는 정장을 하라고 말했는데, 그 내용이 뭐냐. 에베소서 6장 14절~18절까지 보면 전신갑주를 입고 군대에 나갈 적에 갑주를 입지 않아요? 갑주를 입고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가슴에는 갑주에다가 의에 흉배를 붙이고 허리에는 진리로 띠를 띄고 발에는 복음의 신을 신고 왼쪽에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오른쪽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라.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이 해야 될 정장입니다. 이것이 단정한 옷차림 몸 가짐입니다. 영적인 무장. 말세가 되게 되면 악마가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의 믿음을 눌러치려고 하는지. 이런 정장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의롭다 함을 입은 의의 흉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믿음이라는 방패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검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 말세에 우리가 살아남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이것을 단정한 생활이라고 그럽니다.
첫째 사랑의 생활.
둘째 각성의 생활.
셋째 단정의 생활.
제 목 : 문 두드리시는 주님
절 기 : 대강절 성탄절
구 절 : 말 3:1-6, 계 3:14-20
대강절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는 계절입니다. 이 대강절은 세 가
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크리스마스 때 육으로 오시
는 것이고, 둘째로 주님께서 말씀과 영으로 오시는 것이며, 세째로 주님게
서 마지막 때에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사
옛날에는 이 기간이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마련되었고, 사순
절과 같이 참회하며 금식하는 기간으로 지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년에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팔기 위하여 11월부터 성탄 장식을 하고 크리
스마스 캐롤과 음악을 계속 불러대므로 대강절의 참뜻은 사라지고 말았습
니다. 원래 역사적으로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그 이브에 시작하여 1월 6일
현현절까지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가 교회력에 따른 바른
절기 지키도록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대강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주신 말씀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
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20절)라는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은 한가지도 칭찬을 듣지 못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
니다. 그들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신앙, 그래서 뜨든미지근하여 토해
낼 수 밖에 없는 신앙을 가져,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안믿는 것인지 분간하
기 어려운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물질
적으로는 여유가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가난한 상태에 있었습니
다. 주님은 이와같은 교회를 향하여 회개하라는 말씀과 함께 "내가 문 밖
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말씀을 들려 주신 것입니다.
첫째로, "주님이 문 밖에 서 계시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홀만 헌트가 그린 "세상의 빛"이란 그림을
보고 러스킨이란 분이 해설한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림의 왼쪽에는 인간 영혼의 문이 보인다. 그것은 굳게 빗장질 해 있
고 그 빗장과 못들은 녹이 쓸었다. 문설주는 담쟁이 넝쿨이 기어 올라가
뜨개질이나 한듯 똘똘 감아 얽어 놓았는데, 그 문은 한번도 열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 주위에는 박취 한 마리가 날아다
니고 문지방은 기시덤불과 쐐기풀, 이삭하나 없는 옥숙수등이 무성히 덮여
있는데, 풀깎는 자가 그 야생초에 손하나 대지 않았고 단으로 묶어 놓지도
않았다."
이 문은 영원으로 통할 수 있는 문을 뜻합니다. 예전에 타락하기 이전
에는 이 영혼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언제라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는
데,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는 이 문이 굳게 닫히어 영원 즉 하나님의 세계
와는 차단되어 버린 것입니다. '문밖'은 인간이 잃어버린 세계가 있는 곳
입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는 곳입니다. 이 세계를 향하여 문이 열려 있을
때에는 생명의 바람을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답답하지 않았습니다. 기쁨
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었습니다. 찬란한 영광의 빛을 받을 수 있었습니
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 이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숨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문을 굳게 닫아
빗장질해 버렸습니다. 다시는 이 문을 열어볼 엄두를 못냈고, 마침내는 문
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문빗장은 녹쓸고, 잡풀이 우
거져 문은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너는 내가 부자다 나는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사실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못하
고 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이 원래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
리고 거기에서 만족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잃어
버린 인간의 몰골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지 스스로 알지 못한채 이 세
상에서 얻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물질에 만족하면서 희희낙낙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낙원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었지만, 오히려
더 많은 비극을 가져왔고 현재 살고 있는 그나마의 세계마저 깨져버릴 위
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문명 속에
서 무엇인가 얻어보려고 안깐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비참하고 불쌍하게" 보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비참하고 불쌍하며 가난하게 된 처지에서 헤어나는 길은
잊어버렸던 영원의 세계를 기억해내는 일일 것입니다. 영원을 향한 문을
찾아내어 빗장을 때려 부수고 문을 여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비참해
지고 가난해지고 눈멀고 벌거벗은 까닭으로 해서 스스로 영혼의 문을 찾아
내지도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다고 하였습니
다. 인간의 비참함과 불쌍하고 가난함을, 그리고 눈멀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아 오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셔서는 친
히 우리 영혼의 문을 두드려 주시는 것입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거기 문이
있음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요, 또한 누군가가 밖에 와 있다는 신호입니다.
주님은 인간으로 범죄케 하였던 사탄의 세력을 꺾으시고 승리하심으로 모
든 사람에게 사죄를 선포하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이 지은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루셨으므로 죄짓고 숨은 모든 인간에게
이제는 문을 열고 나와도 좋다는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못 들었거나 들었어도 믿지 못하여 혹은 주저하여 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몰트만의 <소망의 신학>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끌어 올려서 광대한 전망을 주는데도 인간은 물러 않
아서 절망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약속의 상대로 삼는데도 인간은 그 기대
를 믿으려고 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신자들을 위협하는 죄다."하나님은 우
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 약속
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결코 문책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우리의 영혼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
리신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주님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 영
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른 아침의 찬란한 햇살, 아름다
움과 향기를 내뿜는 꽃송이, 사랑의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선물
"(불트만)들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의 문을 부드럽게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시인과 같이 예민한 사람들은 곧 그 소리를 알아듣고 마음문을 여는 것입니
다. 다음은 타고르의 시입니다.
"저는 알만 하옵니다- 당신의 별들의 소리를, 그리고 당신의 수목들의
그 침묵을.
저는 느끼옵니다. 제 마음이 꽃같이 피어나려 하옴을, 그리고 저의 삶
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의 샘물을 마시고 충만해 있사옴을.
당신의 노래는, 눈에 싸여 적막한 나라로부터 날아온 세처럼 저의 마음
에 둥지를 틀고, 그 속에서 제 마음의 '4월'의 따스한 보살핌을 받고 있사
옵니다. 그래 제 마음은 흡족하여, 행복된 계절을 기다리게 되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행복된 순간들과 복된 시간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놓쳐버림으로 거기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
고 맙니다.
그러면 주님은 다른 방법으로 우리 영혼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번에
는 좀더 강열한 두드림입니다. 치료받기 어려운 암 같은 병이나 혹은 자동
차 사고 또는 사업의 실패, 사랑하는 이의 죽음, 옥중 고통 등을 통하여
문을 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 두드림을 다 듣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
나님은 사람들에게 죽음을 통하여 영혼의 문을 열도록 재촉하시는 것입니
다. 사람들이 이 죽음 앞에서는 이 땅 위에서의 모든 것의 허무함을 깨닫
게 되고, 영원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을 찾게 되는 것입
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
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최후의 두드림인데 불행하게도 이 죽음 앞에서도 영혼의 문을 열
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이 문 두드리실 때 얼른 열어서 영접할 수 있도록 우
리의 영적인 감각을 예민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자가 되려거든 불로 제련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워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문을 두드
리심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혀 하심이며 우리와 더불어 사귀고
자 하심이지 결코 심판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
고 그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마치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도록
해주겠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없습니
다. 왜냐하면 주님은 놀라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께
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을 것이요,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잃었던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기쁨
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늘의 은총
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께 문 열기를 거절하는 자는 쏟
아져 들어오는 복을 막는 것"(트렌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분명 우리의 생애는 바뀌어지고
영광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라,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다." 이 세상의
요란함과 광란하는 물질문명의 유혹 속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할 수 있어야 할 것
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막혔던 영혼의 숨통이 터지고 멀었던 눈이 떠져,
하늘의 빛난 영광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새 생명의 기쁨이 우리 속에 가
득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981129(강림절)
사랑의 계절을 만들자
요한1서 4:10-11
벌써 11월이 끝나가고 12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카렌더가 덩그렇게 벽에 걸려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 해도 며칠 남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월의 빠름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되는 한편 지나간 한 해 동안에 허락되었던 귀중한 순간을 무의미하게 허송하여 버리지나 않았는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과 자책감이 앞서기도 합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지금은 대강절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이 대강절을 다른 말로는 대림절, 또는 강림절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대강절을 한마디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를 말합니다. 우리는 기다림의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주께서 이 세상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성스러운 성탄을 맞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 성탄은 지금부터 약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예수라는 한 인간이 탄생하였다는 단순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데 만 의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한 역사적인 사실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왔으며 또 현대적으로 무엇을 가져오고 있는가 하는 데에 더 심오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는 그 예수가 지금도 우리 속에 거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그의 뜻을 따르는데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저 선물이나 받고 흥에 겨워 즐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죠.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성탄절은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다리는 날입니다. 그래서인지 약삭빠른 사람들은 이것을 이용해서 크리스마스를 중심으로 큰돈을 벌기 위해 용품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언제나 크리스마스를 미리 준비합니다. 그러나 정작 믿는 사람들은 캐롤이 들려야, 문방구에서 카드를 팔아야,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야 ‘와! 이제 크리스마스가 오고 있구나’하며 그제서야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먼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이 아니라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가, 그리고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다시 한번 기다리며 그 날을 준비하는 마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유의 주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맞는 우리는 이 날의 의의를 살려서 이 날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의 마음 자리 가장 귀중한 곳에 모시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크리스마스는 무의미할 뿐더러 성탄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사람들끼리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크리스마스는 진정한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참된 크리스마스 행사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성탄절날 들리는 새벽송의 찬양소리와 술취해서 비틀거리며 떠드는 소리의 차이점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성탄절은 경건해야 어울리는 절기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구체화되고 현실화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사랑의 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참 크리스마스를 지키려는 신자들의 자세일 것입니다. 아이들의 도덕 교과서에 보면 불교의 근본이념은 자비이고 기독교의 근본이념은 사랑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의 의미는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하튼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보는 눈이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대부분이 사랑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남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축복된 계절에 우리도 주는 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는 아까워서 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아까워하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경우에는 주는 것이 기쁨이요, 보람이요 축복이요, 만족입니다. 주고 나서 아깝지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경제학적 원리에서 보면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고 나면 나는 그만큼 적어지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주고 난 다음에 내가 더 풍부해졌다고 느끼게 되고 더 충만해졌다고 느껴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면 줄수록 나는 기쁨과 풍족감을 느낍니다. 받으려고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극치에 도달하면 자기의 목숨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이것이 참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지극히 작은사랑의 행위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결코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조그만 성의를 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로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작은사랑이 모아져서 큰사랑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여러분과 저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거룩하신 몸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셨습니다. 성탄은 이러한 예수님의 강림의 목적과 정신을 되살려서 모든 크리스천들이 사랑의 사도로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탄은 사랑의 계절이요, 그러기에 사랑을 주는 계절이 되어야 합니다.
시내 어느 교회에서 개최된 성탄절 준비 강습회에서 성탄절 장식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강사가 산타클로스를 교회의 성탄절 장식에서 제거해야 된다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성탄절하면 어린 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무엇을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산타클로스를 더 기다리기까지 되어 주객이 전도된 현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고 카드를 받음으로 신이 나고 즐거워하는 계절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합니다.
이제는 받기만 하는 성탄이 아니라 주는 성탄이 되어야 하겠고 그래야 비로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성탄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탄의 정신입니다.
끝으로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루는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산에 오르시게 되었습니다. 오르실 때 제자들에게 돌을 한 개씩 들고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돌 한 개씩을 들고 갔습니다. 가롯 유다는 계란 만한 것을 들고 올라가는데 그 뒤를 따르는 베드로는 큰돌을 들고 오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그것을 보고 비웃으면서 "무엇 하려고 그처럼 힘들여 바보같이 무거운 돌을 가지고 가느냐?"고 하면서 자기의 계란 만한 작은 돌을 보여주며 현명한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산에 올라와서 얼마 있다가 점심때가 되어 주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원을 지어 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가지고 올라온 돌을 각각 자기 앞에 내어놓으라고 하셨고, 제자들 앞에는 작고 큰돌들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본즉 제자들 앞에 놓인 돌들이 모두 떡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 앞에는 한 입 밖에 안될 계란 만한 떡덩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앉은 베드로 앞에는 큰 물동이 만한 떡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 떡을 떼어서 가롯 유다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오늘과 같은 강림절처럼 힘들고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기다림과 준비함이지만 준비해야 한다는 것과 있는 것을 나누는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제는 이곳에서 김장을 하면서 겨울을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따뜻한 날씨 속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렇게 비록 힘들고 지루한 준비이지만 이제 우리는 성탄절을 준비하며,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강절 절기를 사랑의 계절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