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마지막 주일 설교 모음

"대림절 3,4주 설교 자료 4편"|주일낮설교
새생명축복 | 조회 32 |추천 0 |2011.12.13. 20:31 http://cafe.daum.net/SermonSchool/HmtY/360

대림절 3째주일을 지나 4째주를 맞이 합니다.

지난 주일은 성서주일이기도 했지요.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 오시는 날을 대망하는 의미에서

대림절 한가운데 성서주일이 있는 것은 의미가 있죠.

이제 성탄을 바로 앞에 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탄을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축복을 기리면서

형통한 나날을 기도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I. 본문의상황과내용

1. 본문의상황과배경

이사야서는 일반적으로 1-39장을 1부(제1 이사야)로, 40-55장을 2

부(제2 이사야)로, 56-66장을 3부(제3 이사야)로 나눈다. 이렇게 나누어

진 3부의 역사적인 배경은 각각 다르다. 1부는 주전 8세기이며 2부는

주전 6세기로 바벨론 유수 기간이고 3부는 바벨론 유수에서 돌아온 후

라고 학자들은 대부분 말한다.

40장 자체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나타나 있지 않다.“너희는 위로하

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 백성이 위로받아야

할 형편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40장 이후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

이 바벨론 유수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40장 이전의 내

용에서 그 암시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다.

36-39장은 역사적인 부록으로 제1부의 신탁 내용과는 차이가 있고

대림절

셋째주일

사 40: 1-11

40장과 연결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내용은 열왕

기하 18장 13-20장 19절에도 있다. 이 내용 중에서도 바벨론 유수에대

한 실마리는 39장 1-8절의 내용이다. 이 39장은 40장의 서론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자신의 사자들을 히스기

야에게 보냈고 히스기야는 그 사자들에게 왕궁과 보물 창고를 모두 보

여 주었다. 그 결과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갈 것을 이사야가 예언하였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모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

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6, 7절).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이 이루어져서 이스라엘은 지금(40장) 바벨론

에서 유수 생활을 하고 있고 이제 그들은 위로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

렀고 하나님께서 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의 말

씀을 전하는 것이다.

2. 본문의 내용

1) 내용의단위 오늘의 본문은 40장 1-11절이다. 그러나 이 전체적

인 내용의 단위는 40장 1-41장 26절이다. 그러한 근거는 유대인들이 3

년 주기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한 단위를 표시하는 세데림이 이 부분

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42장부터 시작하는 종의 노래의 서론으로 읽

는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2) 특별한구조 1-2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하라는

말씀을 하고‘목소리’라고 하는 말이 세 번 반복되어 있다. 새로운 내

용이 시작될 때마다‘목소리’가 나와서 사람을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

달하고 있다.(3, 6, 9절).

3) 사자문체 5절에“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로 메시지

를 끝내고 있다. 사자 문체의 원형은“이렇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다. 이 문구는 예언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을 보증하

는 역할을 하며 권위를 입증하는 것이다.

4) 문학적형식 본문은 시의 형식으로 쓰여졌으며 각 연마다‘목소

리’를 반복함으로써 강조하고 있고 평행법을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예는 동의적인 평행법으로 2절: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와“그 죄악

이 사함을 받았느니라”가 같은 내용이고 3절: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

을 예비하라”와“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가 평

행한다. 같은 평행법이 9절에도 사용되어 있고 반의적인 평행법은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와“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가 서로 대조된 내용이다.

5) 전후맥락 본문 직전은 39장으로 포로로 잡혀가 유수 생활을 하

리라는 암시가 있고 그 동안 시간적으로 공백이 있은 후 바벨론으로

잡혀 온 것을 전제하고 바벨론 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위로하라는 것이며 그 준비를 명령하고 아직 출발은 하지 않고 있다.

직후의 맥락은 52장 11, 12절에서 떠나라는 명령이 있다.“너희는 떠날

지어다. 떠날지어다. …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행하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희 뒤에서 호위하시리니,”이사야서 전체에서 전반부는 주

로 심판을 선포하며 후반부에서는 위로와 용서의 내용이 나온다. 성경

전체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면 심판하시나 회

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용서하시고 구원하심을 보여 준다.

6) 본문의 구조

1-2절:전령의 사명-내 백성을 위로하라.

3-5절:첫째 목소리-하나님이 오실 길을 만들어라.

6-8절:둘째 목소리-유한한 사람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대조

9-11절: 셋째 목소리-시온아! 아름다운 소식 즉, 승리의 하나님이

목자로 오신다.

전령의 사명이 첫 부분에 나오고 각 단위마다 목소리가 한번씩 반복

한 점이 특징이다.

3. 중요한내용설명

1절에서“위로하라”를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한다. 이런 방법은 이사

야의 특징적인 문체이다(예, 51:17과 52:1에“깰지어다”2회, 52:11:

“떠나라”2회 반복) 여기서 주목할 낱말은‘내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

성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암’은 계약 백성이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잡혀 와서 유수 생활을 하여도 하나님의 계약 백성의 지위를 계속 유

지하고 있음을 강하게 나타내는 내용이다.

2절에서‘나의 백성’이 이전에 범죄한 것을 용서받았다. 3절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가 마태복음 3장 3절과 요한복음 1장 23절에 인

용되었으나 내용이 다른다. 즉‘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

는 신약의 번역은‘광야에’가‘한 소리가 외친다’를 직접 꾸미는 것으

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은‘광야에’가‘길을 예비하

라’를 꾸미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강조점은 광야에, 즉, 사막에 하

나님께서 오실 길을 만들라는 점이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은‘광야’와‘사막’에 길을 만들라는 내용을 듣

고 바로 모세의 인도하에 출애굽한 일을 연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

성은 애굽에서 시내 사막을 지나 약속의 땅에 온 것 같이 바벨론에서

도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야 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 귀환

을 두 번째 탈출(출애굽)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오시는 목적은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다.

‘목소리’로 시작되는 두번째 연(6-8절)은 유한하고 무상한 인간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조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내며 그 하나님께서 위로하라고 명령하시고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

심을 연결한다.

‘목소리’의 내용을 가진 세번째 연(9-11절)은 번역 성경들 가운데

첫 문자의 번역에 차이점을 나타낸다. 즉, 개역성경은“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로 번역하고, 표준 새번역과 다른 외국 성경은“좋

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로 번역

하였다. 개역은 소식을 받는 쪽이 시온이며, 표준은 소식을 전하는 사명

을 받은 쪽이 시온이다. 대부분의 성경이 후자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이 9절의 내용은 옛날 왕의 도착을 알리려 높은 망루에 올라가는 것처

럼 예루살렘의 높은 곳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오심을 전하라는 의미이다.

10절의 내용은 고대 근동의 전쟁을 이해하면 쉽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 때는 민족끼리 싸우는 것을 민족의 신끼리 싸우는 것으로 생

각하였다.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싸워서 이스라엘이 잡혀 간 것은 여호

와가 패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다. 이 10절에서 여호와가 패한 쪽

이 아니라 승리하여 개선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입성함을 알리는

것이다.

11절은 하나님을‘목자’로 묘사하고 있다 심판하여 징벌하는 하나

님이 아니라 승리하고 오시는 분은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즉,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4. 설교구성

이 본문은 대림절(강림절)에 사용한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

림을 준비하는 절기이다. 우리 교계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하나님

께서 심판하시러 오는 내용을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기쁜 소

식(위로하고, 돌보고)을 전하려 하나님께서 오신다’이다

* 범죄한 백성이라도 하나님은‘나의 백성’으로 늘 여기시며 회개할

때 용서하신다(탕자의 비유에서도).

* 대림절에 오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

시고 목자같이 그 백성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 대림절에 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오신다. 그분이

오시도록 길을 예비하자.

Ⅱ. 오늘의상황과본문적용

1. 서론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있을 때 백성들에

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1절의“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또 5절의“여호와의 입이 말씀 하셨느니라”하여 이 예언의 말씀이 나

라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황폐해져 버리고 성전은 무너지고 포로로 잡

혀 와 있는 절망과 고통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의 약속의 말씀임을 일깨워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하여 바벨론

의 포로가 되었는가 생각하여 보라.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이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죄악을 행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지 아니하므로 벌을 받아 나라가 멸하였다고 성서는 증언한다. 예

레미야 25장 1-1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하였으나 백성이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땅이 황무지가 되고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하셨다. 본문에서도“죄를 인하여 벌을 받았다”고 하셨다. 이같은 절망

의 상황에서“위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어지는 광복의 소식을 전하

여 주고 있으니 이 말씀을 들은 백성들의 환희와 희망을 어찌 말로 표

현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36년간 일제의 수탈 가운데 있었고, 광복의

기쁨을 체험한 백성들이니 이 말씀이 가벼이 들리지 않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체험되어지는 귀한 말씀이다.

2. 본론

1)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죄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고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진다. 그리고 그 말씀의 중심은“여호와의 영

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5절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영광’이라는 것은 중세 그림의 예수님 모습의 머리 뒷부분

에 그려진 후광이 아니다.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곧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말하는 것이다. 출애굽기 40장 34절

에 보면“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도다”는 말씀

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회막에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또 24장 15-16절의 말씀에도“모세가 산에 오르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하였습니다(겔 43:4-5사 6:3)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임재하실 때 사용되어지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두 사람의 선지자에게 나타나심이

아닙니다.“모든 육체 곧 모든 사람이 함께 보리라”고 합니다. 구약성서

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모든 인간은 두려워 떨며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이사야 6장 6절의 이사야 선지자가 그러하였으며, 출애

굽기의 70인 장로들이 그러하였고, 모세가 그러하였습니다(출 33:17-

23).

그러나 본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모든 사람이 함께 본다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더욱이 하나님의 임재가 모든 이의 죄를 심판

하시려고 하심이 아니라-누가 이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리요- 본

문에 보면 1절에“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라 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케 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10-11절에 만군의 하나님이 오시며 그분은 목자 같다

고 말씀하신다.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고 젓 먹이는 암컷

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는 목자와 같이 모든 인간에게 오시어 우리를 다

스리고 돌보신다 하신다. 요한복음 1장 1절에“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고 14절에“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하셨다. 그렇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참 인간의 몸으로 이 땅

에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

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영광이시다. 그 분은 자신을 낮추

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우

리 가운데 오셨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소외 단절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죽음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목자 없

는 양같이 유리 방황하는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

끄시는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바의

것이요. 우리가 신앙하는 것이다.

이사야의“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함께 보리라.”그

리고 그 하나님은 심판의 주가 아니라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에

게 임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목자같이 돌보신다는 말씀이 예수 그

리스도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본다. 그러나 동시에 성서는

그 예수께서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셨다(행1:11).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로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예

수를 기다립니다. 마치 초림의 아기 예수를 기다린 세례 요한, 예루살렘

의 시므온, 안나 선지자 같이(눅 6:25절 이하).

2)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사야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음성이“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하나님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하신다. 길을 만들어라는 명령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길을 만들라고 한다. 또한 9절에는“좋

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라고 하

여 예루살렘의 높은 곳에 올라 가서 하나님이 오심을 전하라고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길을

예비하고, 그의 오심을 만방에 전하라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3장에서 세

례요한을 예수 오심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증거하고 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유대인

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친다. 또한 요한복

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동시에 예

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현대의 기독인 역시 오늘 우리 시대를 향

하여 회개하라고 외쳐야 한다. 먼저 우리가 세상의 그릇된 가치와는 다

른 하나님 나라의 윤리로서 본을 보여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회개하라

고 외치는 사명을 수행하여야 한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리스

도이시며 다시 오실 것을 전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

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며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기독인

의 삶의 자세이다. 성서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라. 그들은 서

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섬기므로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면

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삶을 살아왔음을 성서가 우리

에게 증거하고 있다. 현대의 교회 공동체가 초대교회가 가진 하나님 나

라의 윤리성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다시 오

실 것을 전하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사야 40장의 길을 예비하라,

전하라는 말씀을 현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안나라는 여인을 보라. 그녀는 예수 오심을

기다리며 거의 전 생애를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

도함으로써 섬겼다고 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 오심을 알지 못하

였으나 그녀는 아기 예수를 만났다. 그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

를 기다렸지만 진정 예수 오심을 알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

나 진정 하나님을 섬기던 안나라는 여인은 긴 세월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를 만났다.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바벨론의

포로로 있었으나 하나님의 구원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이 세상은 예수

가 다시 오심을 보게 될 것이다.

3. 결론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오신 성육신의 은혜를 믿음으

로 받아들이고 철저히 각성하는 때이며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

리는 우리의 소망을 돌아보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언약을 따라

오신 것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오심을 기다림은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처럼 길을 예비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며 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는 것

임을 명확히 깨달아야겠습니다.

세상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로마서 1 5 : 7 - 1 3

Ⅰ. 본문의 상황과 내용

1. 로마서의성격

바울 서신의 일반적인 성격은 수신 교회들이 직면한 문제들과 밀접

한 관계가 있다. 바울 자신이 세운 교회 또는 골로새 교회처럼 바울이

직접 세우지 않은 교회든지 간에 교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주고 적대 세력과의 대결에서 복음의 변증을 하는 등 매우 구체적인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가령 고린도전서의 집필 동기는 고린도 교회

에서 보낸 질의서(7:1)에 대하여 사도로서 답을 주고 또한 고린도 교회

내의 성결의 문제, 신자 상호간의 재판 소송의 문제, 당파 등에 관한 소

식을 접하고 구체적인 지도와 권면을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이 논리적인 단절과 일관성의 결여를 갖는다면 이런 상황에 대처

하면서 기록된 문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서는 사정이 다르다. 바울이 로마 교회를 설립하지도 방문하지

도 않은 까닭에 로마 교회 내부의 문제 등과 직접 관련하여 쓰여진 서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표면적인 이유는 로마 교

회 방문 전에 당시 세상의 땅끝이라 여겨진 스페인 선교를 위하여 로

마 교회의 이해와 협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이 스페인 선교 전략이라는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로마

서를 기록했을지라도, 이 기회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소개하

고 지금까지 이방인에게 전하여 온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서신에

담아낸 것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의 교리가 본서에서 체계화되지는 않

았다 할지라도 로마서는 바울 사도의‘신학적 고백록’이라 일컬어지고

또한‘바울의 성경’이라고 하는데 별다른 이견은 없다. 단순히 신학고

백만이 아니라 로마 교회에 보내는 구체적인 메시지도 담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2. 본문의 문맥

바울 서신은 대체로 제1부에서 복음의 진수 곧 기독교 교리를 취급

하고 제2부에서는 복음의 실천윤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로마

서 제1부(1-11장)에서 복음의 진수, 즉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말하고 제2부(12-15장)에서 실천 윤리, 즉 인간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기술한다. 바울의 신앙 윤

리 실천의 기초는 헬라의 윤리나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

도 자신에게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15:1-6)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수의 윤리 교훈의 독창성이 여러 가지로 말해질 수 있지만

하나만 든다면 예수의 윤리교훈은 바로 예수의 삶 그 자체다. 예수의

삶을 언어화(로고스화)한 것이 그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본문(15:7-13)은 14장 1-15장 6절을 꿰뚫고 있는 주제를 폭넓게

확장하고 있다. 여기 주제란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를 용납하라는

것인데, 우리 본문에서 이 주제가 강한 자를 이방인으로, 약한 자를 유

대인으로 확장하여 논의되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의 구성원을 말한다면 유대인 그리스도인 수가 이방인 그

리스도인의 수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것은 클라우디우스(Claudius) 로

마 황제가 주후 49년에 로마로부터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에 설

령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남아 있다고 할지라도, 또 54년 이후에 추방된

유대인(유대인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이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유대인

그리스도인 수는 소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역사적배경

로마서는 고린도전후서보다는 늦게 기록된 서신이라는 것이 일반적

인 견해인데, 그렇다면 로마서의 내용에서 논의되는 것들이나 로마서가

전제하는 상황들 속에 고린도 교회는 상황이 반영되었다는 가능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1장 18절 이하의 남녀간의 성적 문란(남

색, 여색) 언급은 아마도 성적 문란이 극심한 고린도 시의 사회적 상황

의 반영이라는 주장일 수 있듯이, 로마서 14장 1절 이하에서 말하는 강

한 자와 약한 자의 언급도 고린도전서(8:1-11:1)가 전하는 우상 제물

먹는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로마서의 경우는 우상 제물을 직

접 거론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채소 먹기를 고집하는 채식주의자와 아

무 것이나 자유롭게 먹는 사람이 서로를 심판하지 않기를 요구하고 있

다. 바로 이 점에서 고린도 교회 상황과 직결하는데 어려움이 없지 않

으나 한편 로마서 14장 21절은‘고기를 먹지 않은 자’를 언급하고 있

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상황을 그 배경으로 말하는 것이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고린도 시는 많은 신전들이 있어서 우상 제물로 쓴 음식들이 시판되

었다.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이전에 우상을 섬기던 형제들이 있었다. 따

라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된 이후에 우상 제물을 먹으면 양심이 약

해지고 더러워진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는 반면(8:7), 제물을 먹는데 전

혀 거리낌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전자들이 약한 자들인데

바울은 약한 자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 강한 자들이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약한 형제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강한 자의 배려를 주문한

것이다(8:9-13).

이번 문제는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사회 참여에 대한 가·부 논

쟁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들은 고린도

교회에 내린 바울의 신앙생활 지침을 오늘의 상황에서 재해석하는 지

혜가 필요하다.

4. 본문과 바울사도의 의도

바울은 자신이 강한 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믿음이 강한 우리

는 약한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짐을 져주어야 합니다”(15:1)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강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

면, 그리스도가 자신을 기쁘게 하거나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았듯이,

이웃이 좋아하는 대로 살아야 할 것을 바울이 말하고 있다. 그것이‘사

나 죽으나 주님을 위한다는 것이다’(14:7).

이웃이 좋아하는 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이웃의 마음

에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좋게 여겨지는 것이 그의 이웃

에게도 좋게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K. Barth).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를 용납하면 둘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이 일치는 약한

자에 일치시킨 결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한 자에게 일치시킨 결과 역

시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시킴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서 이 일치 속에서 둘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좋은 대로 사는 것을 거

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본문 15장 7절의‘그러므로’는 앞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요약하는

말이다. 그런데 7절 이하에서 논의 주제가 확대된다. 이제 강한 자로서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약한 자로서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서로를 용납하

게 되면 함께 생각할 것이 있다. 그것은 둘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

스도를 생각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용어를 주목한다. 15장 8절의 [진리]를 위하여와

15장 9절의 [긍휼]하심 때문이라는 용어다. 하나님의 진리(aletheia)를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할례자의

종이 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유대인 조상들에게 약속한 대로 이

루신 것의 확증을 말한다. 구약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이스라엘

이 수없이 배반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심으로 일관하였다.

그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의 약속은 폐기될 수 없었다. 그 약속들은 아

들의 성육신(Incarnation)에서 성취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긍휼 혹은 자비를

힘 입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한편으로

유대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에

게 전달되는 것을 증언한다. 이렇게 이중의 목적을 지향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방인을 용납한 것 같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약한

자)과 이방인 그리스도인(강한 자)은 서로를 용납할 것을 요구한다. 그

근거는 그리스도에게 있다. 본문 15장 7절은 6절의 요약인데 7절의

“… 같이”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말하기보다는 구원을 가져오는 분을

뜻한다. 그러니까 모범보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방인을 용납하신 것이었다. 이방인의 용납이야말로 종

말론적인 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약속된 것이었다. 바울은 9-12

절에서 구약성서를 원용하는데.‘이방인(ethne)’이란 핵심 용어가 인용

문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께

찬양을 드리며 … (시 17:50). 이방 사람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하여라(신 32:43),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시 116:1),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다,

이방인은 그에게 희망을 둘 것이다(사 11:100).”

구약성서 인용을 연결하는 핵심 낱말‘이방인’에 의한 언어 유희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눈에 불경건하게 보인 자들

이 부분적으로 하나님 찬양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근거는 그리스도가

온 세계를 통치하는 데 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는 이방인의 희망이

다. 13절에서 희망의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한 희망이 독자들에게 차고

넘치게 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이 단락을 마감한다.

5. 설교 주제: 세상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인류의 희망이신 그리스

도

12월 18일은 여전히 성탄을 앞둔 대림절이다. 성서주기 읽기에서 이

대림절에 왜 이 본문을 제시하게 하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구절은 15

장 12절일 것이다. 이새의 뿌리의 싹을 언급한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의 강림을 말하는 것이며, 이방인은 그에게 희망을 둘 것을 말

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설교 주제를 대림절과 관련시켜서“인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혹

은 과거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주제였던“세상의 소망이신 그리스

도”로 한다. 후자의 제목은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류의 구세주만이 아니

라 인간을 포함한 온 생태계를 주관하는 주님이라는 의미에서 더 포괄

적이라 할 것이다.

6. 설교에 담을 내용들

1)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서로를 용납하여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서 우상 제물을 둘러싼 논쟁은 어느 한 쪽의 득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대방에게 자기를 일치시킴으로써 종식

되고 평화를 이룩하게 된다는 바울의 교훈을 낳게 하였다.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메시지 역시 같다. 먹는 음식에 대하여 자유한 자들과 채

식주의자들이 서로를 심판하지 않기를 요청한다.“그리스도는 강한 자

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그 강한 자

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약한 자들에게로 데려가신다”(K. Barth).

그리스도인은 만물 위에 있어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들이지만

만물 아래서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자들이다(M. Luther).

본문에서 강한 자는 율법으로 인하여 의롭다는 길에서 제외되었으

나 은총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의 세계에 들어온 이방인

들이다. 약한 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의 일치의 근거는 강

한 자들 가운데서 약한 자들을 보시고 약한 자들 가운데서 강한 자들

을 보시는 그리스도다.

갈등과 대결의 종식, 빈익빈 부익부의 지양, 인종과 성의 차별 해체,

정의와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등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러한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근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

벽을 몸으로 허무신 그리스도에게 있다.

2) 이웃이 좋은 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이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인종과 성별, 외부적 조건 등

과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곧 이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는 것은 허공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인간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이웃이 좋아하는 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이웃의 마

음에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좋게 여겨지는 것이 그의 이

웃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K. Barth). 그리스

도 당신 좋은 대로 살지 않으신 삶의 모범을 따르는데 평화가 있고 희

망이 있다.

3) 그리스도는 세상의 소망이다

우리의 소망의 근거는 미래의 충격으로 다가 올 온갖

정보 지식 산업의 엄청난 발달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오직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아지고 종이 되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

하셨다가 제3일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세상의 소망이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이스라엘 조상에게 약속한 것을 그리스도의

강림에서 성취하셨다. 동방 박사들이 헤롯 대왕에게“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실 만큼 세상(인류)을 사랑하셨기에 누

구나 저를 믿는 자들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진실로 하나님은

긍휼하셔서 이방인 같은 불경건한 자들이, 마침내 인류가 또 세상이 소

망을 가지도록 하셨다.

Ⅱ. 오늘의 상황과 본문 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이제 대림

절의 의미대로 다시 한 번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며 예수 그리스

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심을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

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우리의 변화를 생각하며 소망을 가져야 할 때이

다. 오늘 나 자신의 모습과 나의 가정과 일터와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어놓아 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들어오셔서 변

한 것이 무엇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는가?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기뻐

하며,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나누어 보자.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미움과 다툼과 분열과 분단의 고통이다. 교회도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개인이 바르게 서 있지 못하니 가정인들 온전할

수 없다. 다툼과 미움과 분쟁 투성이다. 특별히 오늘과 같이 사람들을

강제하는 윤리와 제도가 의미가 없어진 시대에 가정 파탄과 이혼 등으

로 사람들은 깊은 상처받고 사회의 기강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작은 차이로 너무나 오래 사분 오열되었던 교회는 다시

하나가 되어 일치와 연합의 길을 찾는데 고통스러운 산고(産苦)를 겪고

있다. 또한 냉전체제의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분열되었던 남과 북은 이

미 냉전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오늘까지도 서로 통일의 실마리

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미움과 다툼과 분열이 우리 가운데 있는한 어느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세상 한가운데서 오늘 우리는 로마서를 읽고 있다. 로마서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수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 그

래서 종교 개혁가 루터는“이 서신은 신약성경의 진정한 핵심이며 가

장 순수한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내용을 낱말 하나 하나

에 이르기까지 외우도록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영혼의 일용할 양식으

로서 나날이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귀중하며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

고 우리가 그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가르

쳐주는 것이 로마서인 것이다. 이 가운데 오늘 본문 15장 7절에서 13

절까지는 로마 교회 안에 있었던 큰 문제였던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을 풀어 가는 지혜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분

열과 다툼을 풀어갈 수 있는 비밀을 복음 안에서 제시하고 따를 것을

권고하고 계신 것이다.

1. 첫째로, 강한 자와 약한 자는 서로를 용납해야한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이 적은 자든, 많은 자이든 서로서로 받

아들이라 하셨는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하라고 하

신 것이다. 바울은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은 하나로 뭉쳐야 하고,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들이 한 몸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유대인과 이방

인이 교회의 가족으로서 같은 교제를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이란 것이다. 서로 성정이 다

르고, 믿음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연합하고 일치할 수

있는 근거와 원리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소망이

신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우상의 제물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그

분열과 대립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서로가 상대방의 입

장에서 되는 것으로 교회의 평화가 이루어졌다. 고기를 먹는 것은 하나

님 안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그것 때문에 형제가 시험에 든다면

자제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심을 확신하는 이방인들은 고기를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아직도 율법의 습관 속에 있던 유대인들은 채

소밖에 먹지를 못하였다(14:2).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상황 안에서 화

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라고 하면서 15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였다.“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

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그리스도인은 만물 위에 있어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자들이지만 만물 아래서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는 자들

이다.”그렇다. 오늘 우리는 갈등과 대결의 종식, 빈익빈 부익부의 지양,

인종과 성의 차별 해체, 정의와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이 절실하게 요청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은 유대인과 이방인,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장벽을 몸으로 허무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

스도는 자유하신 하나님이셨지만 할례자의 종이 되셨고,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하여 이방인도 받아들이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서로 용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서로를 정죄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용납함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 미움과 다

툼과 분열을 끝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둘째로, 이웃을 생각하며, 이웃이 좋은대로살 아야한다

서로 서로를 용납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이 좋은 대로 살아감으로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살아갈 수 있

는 것이다. 나 좋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10절을 보자(롬

15:10).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열방들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인데, 무엇을 즐거워하라는

것인가? 기쁜 소식, 바로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복음으로 인해 서로 기

뻐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버리셨듯이 우리도 우리

의 몸을 버려서 이웃을 구원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이웃이 좋아하는 대로 사는 것은 이웃의 마

음에 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좋게 여겨지는 것이 그의 이

웃에게도 좋게 여겨지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우리에게 좋은 것

을 이웃에게도 좋도록 나누어주고 함께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전도와 선교와 봉사의 원리이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

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신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로 인해 우리 모두가

화해하고, 일치하고, 통일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이웃

은 누구인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인종과 성, 신분 등 외부

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이웃이다. 그러므로 우리

는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삶의 모범대로 우리도 이웃을 생각하며 이

웃이 좋은 대로 살아 복음을 함께 누리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

리에게 귀한 복음,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영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웃들이 함께 누리도록 하자. 이렇게 우리의 이웃과 함께 즐거움을 나

누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 아래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이웃

이 좋은 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다툼과 분리보다는 화해와 일치의

즐거움이 가득할 것이다.

3.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의 소망이 되신다

왜 그리스도가 세상의 소망이신가? 우리 안에 서로 용납하며, 이웃이

좋은 대로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를 연합과 일치의 길에 이끄

시고, 또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 선교와 나눔의 길에 이르게 하신 그리

스도이시기에 세상의 소망이 되신 것이다. 12절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소망의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믿음이 적은 자이든 많

은 자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신자이든 아니든, 사용자든 노동자

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

이든 서로 그 모든‘다름’을 뛰어넘어서 참된‘화해’와‘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가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비하하지 않고

존중하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새

천년을 맞는 세상이 바라보는 소망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새

롭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세상을 참다운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은 다가올 정보 지식 산업의 발달과 새로운 그 어떤 경제체제가 아

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는 세계는 기껏해야 역사 안에 존재하는 희로애

락과 애증시비 안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세계는 서로 용납함으로 얻는 화해와 평화의 세계, 일치와 연합의

세계,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이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 일을 위해 전진

해야 한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고 종이 되사 십자가에 죽기까

지 복종하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소망이시다. 하나님께

서 독생자를 보내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어느 누구든지 예수 그

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셨

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이웃과 화해하게 하시고,

모든 피조세계와 화해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가 우리 안에 이루신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좇아 한국 교회의 분열에 대해 뉘우치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

려 하고 있으며, 세계 교회는 에큐메니즘의 꿈으로 일치와 연대의 길을

찾고 있다. 이제 두 주 후면 열릴 21세기는 과거 19세기와 20세기와는

현격히 다른 세기, 화해와 일치, 연대의 세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

혜를 입고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한

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충만케

하시리라 믿는다. 주신 말씀과 같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용납하

며, 이웃이 좋은 대로 살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이 소망이 넘치

는 것이다.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는 가운

데 분열과 다툼의 언저리에 있는 우리 사회와 교회가 하나님의 격려와

도전과 은혜를 입어서 새롭게 되는 비밀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예화

하나, 울타리를 없앤 홍수 큰 호수가 있는 마을에 사는 농부들은

집오리를 많이 길렀다. 그러나 그들은 집오리 떼를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둬 두고 그 가운데 작은 연못을 만들어 거기서 놀도록 하였다. 그들

은 오리들이 밖에 돌아다나거나 들오리들과 서로 섞여 버리는 것을 원

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는 큰 비가 퍼부어 물어 넘쳐 이 작은

집오리 울타리와 연못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모든 울타리가 잠겨 버리

자 오리들은 널찍한 물 위에 떠올라 날개를 치며 마음껏 자유를 만끽

하였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며 저절로 한무리가 되었다. 큰 소낙비가 그

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었다. 우리는 성령의 강림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연합이 천박한 외면적 통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으로 된 깊은 심정의 연합으로 될 것이다.

둘, 어두워져야 볼 수 있는 별 경제 문제로 병원 문을 닫아야 했던

의사가 있었다.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두 어린

아들이 어두운 거리에 있다가 달려 들어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 거리가 어두워질 때까지 우리는 별을 볼 수 없지요?”하늘에

는 소망과 진리, 사랑, 친절, 온화함의 별들이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하

늘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어두워져서야 그것들을 더 잘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그러한 별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이 밝

아오기까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

나는 누구인가?

I. 본문의상황과내용

1. 본문의상황

1) 요한복음의신학적입장

복음서들에서 동일 인물이나 동일 사건에 대한 기록상의 차이점들

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가진 독특한 신학적인

입장과 강조점이 다른 때문이라는 가설은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가령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상(像)에서도 그런 입장의 차이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세례 요한을

‘회개의 선포자’내지는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세례자’로 규정하고

있다(막 1:4-5와 평행귀).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 요한은‘세례자’가

아니다.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요한

에게서 세례를 받는 기사조차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요한복음의 요

대림절

넷째주일

요1 : 19-23

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증거자’이며, 그의 길을 예비하러 온‘선구

자’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1:7-8, 15, 29-34).

이와 같은 분명한 신학적 입장 차이는, 요한복음서 기자가 의도하는

강조점이,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공관복

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천국 도래의 예언자나, 율법 문제를 다루는 랍

비, 병자들을 고쳐 주는 기적 행사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요

한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계시자요 구원자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로써의 모습을 보여 주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진술을

하고 있는 점에서 독특하게 드러난다. 이른바“나는 … 이다”라는 문구

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히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세례

요한을 세례자나 회개의 선포자로 그 역할을 소개하는 것보다는, 그리

스도를 증거하는 증거자 그의 앞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 소개하는 것

이, 요한복음서 기자가 수행할 사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2) 본문의 시대적 배경

바벨론 포로 이후 느헤미야와 에스라 등에 의해 진행된 재건 운동은

잠시 독립된 유대 나라를 세우는가 했는데, 알렉산더 대왕과 그 후계자

들에 의해 추진된 헬라적 제국주의는 인본주의(Humanism)를 표방하

고 있었기 때문에, 신본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유대교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극심한 박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반발하여 일

어난 마카비 운동이 성공하는가 싶었는데, 로마에 의해서 다시 좌절되

고 말았다. 시저(가이사)를 황제로 하는 로마 제국은 도시 국가 형태의

나라들을 거대한 제국으로 통합하고, 각 나라들마다 허수아비 격인 분

봉 왕들을 세우게 하고 실제로는 총독 정치를 시행하게 되었다.

헬라의 정복자들과는 달리 로마 정부 당국은, 각 나라 각 민족마다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제한적으로 보

장하고 있었지만,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토라의 백성인 자신들이

가진 독특한 야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런 그들의 소망은 이사야를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이 예언한 다윗의 나

라를 재건하는 일이라는 분명한 목표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사 7:10-

17, 9:6 렘 23:5-6 겔 34:23-24, 37:22 단 7:13 사 53:1-9). 이와

같은 메시야 대망 사상은 자연히 영웅의 출현에 주목하게 하였고, 본문

에 나오는 요한의 행적은 이런 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충

분하였다고 보여진다.

2. 본문의 내용.

본문은 요한과 예루살렘 공의회(산헤드린)가 파송한 사람들(제사장

들과 레위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상당히 비중이 있는 대담이다. 공식

적인 질문이었고, 책임적인 대답이 요구되는 대담인 때문이다. 그 주제

는 분명하였는데, 요한의 신분에 대해서 요한 스스로 자기 정체를 밝혀

달라는 것이었다.

1) 1:19(개역성경사용)

“너는 누구냐?”이 질문은, 적어도 산헤드린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요구한 질문이다. 유대인의 전통과 신앙에 관한 한 최고의 의결 기구였

던 산헤드린 공의회는 심상치 않은 요한의 행각에 대해서 신경이 날카

로워졌던 모양이다. 그것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

들이 요단 강변에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기 때문이며(마 11:7-9 눅

7:24-26), 또한 요한의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

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눅 1:17, 참고/ 왕상 21:19-21 렘 2:29).

산헤드린 공의회는 요한을 재판하기 전에 그에게 소명(昭明) 기회를 주

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유대인의 관례대로 증인이 될 만한 사람으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그들이 준비한 질문은“너는

누구냐?”라는 가장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결코 단순하

지 않은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한 인간의 신분이나 능력이나

학력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근원 곧, 존재 자체를 묻는 질문이

었기 때문이다. 너는 어떤 존재냐?

2) 1:20-22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이 말은 요한이 한 첫 대답이었다. 그리

스도! 히브리말로 메시야(구세주)란 뜻을 가진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대답했다는 말이다. 요한의 대

답은 산헤드린이 보낸 사람들의 마음 속을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는

듯이 질문의 핵심을 관통한다. 본문에서“숨기지 아니하니”라는 말은,

‘머뭇거리거나, 꺼리지 않는다’는 동사 를 사용하고 있다. 그

러므로 이 말은, 요한이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유언비어에 대해서 귀먹

지 않았다는 것을 밝힐 요량으로,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모든 생

각까지도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말이다. 유대

백성들에게 요한은 분명 특별한 존재로 비쳐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경건한 생활과 깊은 신앙심과 열정은 그의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통해

서 영웅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벌써 요한=

그리스도라는 등식을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보여진

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의회는 요한의 존재를 명확하게 파악해 둘 책임

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송된 사람들의 기대와 긴장과는

너무 다르게 엉뚱한 대답을 듣게 된 셈이었다.

파송된 사람들은 요한의 대답으로 충분했지만, 분명히 다짐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줄기차게 질문을 퍼붓는다.“네가 엘리야

냐?”아니면“네가 그 선지자냐?”그러나 요한의 대답은 시종여일하였

다.“나는 아니라.”당시 유대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말세의 때가 오기 전에는 엘

리야가 먼저 오도록 되어 있다는 말라기서의 예언이었다(말 4:5-6). 요

한의 대답은“나는 아니라”였다. 그들은 재차 묻는다.“네가 그 선지자

냐?”여기에서 말하는‘그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

에 버금 가는 사람으로 신명기에서 언급한 선지자를(신 18:15)을 말하

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요한의 대답은 역시“나는 아니라”였다. 파송된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으면 물을수록 그의 정체가 더욱 베일에 싸여 있

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최후의 질문을 던진다.“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는 말이 그것이다. 개역번역과는 달리 공동번역에서는“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소?”라고 말한다. 원문에서“자신에 대해

서 누구라 말하느냐?”고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동번역이 보다

질문의 의도를 구체화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질문은 요한이 받았던

가장 중요한 질문의 하나였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해

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의 운명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1:23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바로 이것이 요한의 자기

정체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사 40:3)에서 자신

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나는 …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한은 자신

을‘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은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라

고 볼 수 없다. 그는 유대교가 인정하는 유일한 권위, 성경의 권위를 가

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은 이름도 없이 외치는 광야의

소리이지만, 성경에서 확증되는 소리이다. 요한을 위탁된 소리(말)라고

할 때, 예수님은 화육하신 소리(말씀)이시다. 요한은 자신을 화육하신

소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불리워진 위탁된 소리였다고 믿었다. 요한이야

말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바로 파악하고 살았던 흔치 않은 사

람이었다고 말해야 하겠다.

3. 설교의 구성

우리 시대처럼 정체성의 문제가 심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자의식이 없기 때문에 엄청난 비극들이 양산되고

있다.“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들에 이르

기까지 던져야 하겠다.

1) 내가 아닌 것을 분명히 해야한다.

세례 요한이 자신에 대해서 진실했듯이, 우리 자신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단호하게“아니 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

2) 내가 무엇을위해 부름받았는지를 확인해야하겠다.

모든 사람은 생의 사명을 짊어지고 태어났다.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

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스스로도 힘써야 하겠고, 가까

운 관찰자들의 조력을 받을 수 있겠다.

3) 나는 나만이해야할 일에 충성해야하겠다.

아무리 작고 천해 보인다고 하더라도(세례 요한처럼 : 그는 소리였

다), 자기 역할에 충성할 때 가장 값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라는 진

리를 몸으로 실천해 보자.

Ⅱ. 오늘의상황과본문적용

1. 서론

현대인은 자기 정체성과 사명감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쉽다. 그 이

유는 기계 문명 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TV, VTR, 컴퓨터, 전화,

자동차 등 현대 문명이 이룩한 이기(利器)들은 인류에게 편리함과 즐거

움을 주었지만, 그 반면에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빼앗아 감으

로써 자연과 시간 속에서 영혼이 가진 깊은 아름다움을 맛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철학자 데카르트는“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

다”라고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였다. 과연 현대인 중에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깊이 성찰하면서 삶의 목적과 의미

를 제대로 파악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

다. 이러한 때 세례 요한은“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갖게

한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체성과 사명감을 깨우쳐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찾아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질문에 대한 세례 요한의 대답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가진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감을 되새

겨야 할 것이다.

2. 본론

“네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한 내용 속에는 자신과 자신

의 사명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분명하게 드

러나 있다.

1) 세례요한은 예비하는 자이다

세례 요한은“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이사야가 말씀하신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첩경을 평탄케 하는

자라고 명확하게 자기 정체를 밝혔다.

새벽 어두움이 깊어지면 밝은 아침의 태양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과 예수

님이 오실 무렵의 로마 식민지 생활을 통해 자유를 빼앗긴 채 고통당

하면서 다윗과 같은 통치자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사야

가 예언한 대로“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

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

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고“”, 모든슬픈 자를위로”하실 자(사 61:1-2)

가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메시야의 사

역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다.

예비하는 자로서의 세례 요한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요 1:20), 메시야 활동을 준비하는

사명을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함으로써(마 11:3) 자신이 메

시야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으며,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였고(마 3:

11),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오는 예수님을 가리켜“세상 죄를 지

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함으로써(요 1:29) 예수님의 구속 사

역을 분명하게 증거하였다.

또한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오셨을 때에는 혼란과 고통에 지친 백성

들에게“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면서 소망의 기쁜 소식을

전파함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였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기다

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부르심을 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이

아니니 생각을 바꾸어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여 죄 씻음을 받으면 메시

야의 통치를 받게 될 것임을 깨우쳐 주었을 뿐 아니라, 그 때야말로 가

난에서도 벗어나고, 마음이 상한 자는 치유를 받으며 자유와 놓임을 누

리게 되고 슬픔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임을 전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례 요한처럼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될 때까

지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

는 일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2) 세례요한은 외치는 자이다

세례 요한의 외침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그의 외침은 사

람들이 인정하든 하지 않든 진실이며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그

가 외친 곳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이 찾는 회당이 아니라 요단강 부근

광야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이 외친 내용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었다. 그 내용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사실을 사실대로 외치지 않고 왜곡시켜 말함으로써 혼

란을 자초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그러나 사명자들은 세례 요한처

럼 사실에 근거해야 하며, 진실을 외치고 알리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베드로는,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 앞에서“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

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

지 않을 수 없다”(행 4:19-20)고 말하였으며, 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에게 쓴 편지에서“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

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갈 1:10)라고 반문함으로써 하나님 앞

에 진실된 종으로서의 확고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보여 준 진실된 외침과 같은 맥락의 자세이다. 사실을 외치는 것은 혼

란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평온으로 가장한 혼란을 바로잡는 가장

바른 길이며 지름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

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여 아무리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사실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세례 요한이 외친 장소가 광야였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

리는 항상 중심에 서기를 원한다. 그래서 활동도 가능한 한 중심에 가

까운 곳에서 하려고 한다. 그 당시 종교의 중심은 예루살렘, 그 중에서

도 성전이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서는 회당이 종교 활동

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종교 활동과 관계 없는 광야에서

외쳤다. 누구도 전혀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곳이 중심이건 주변이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가 바로 자신이 사역해야 할 곳임을 기억하고

기쁨으로 일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그 곳이 천국을 준비하는 회개의

현장, 하나님이 보시기에 중심이 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율법을 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였다. 그가 회개

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국을 맞기

위한 준비이며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응답이지 그것이 천국을 얻는

길은 아니다. 세례 요한의 선포의 중심인“천국이 가까웠다”는 메시지

는 메시야 예수님을 염두에 둔 것이다.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요한의 외침은 그 자체가 복음이었다.

세례 요한은 외치는 자였다. 이러한 선포 행위는 단순하고 쉬운 것

이 아니라 변화와 개혁과 모험의 외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을 누

리던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위험한 외침이었으며 그 결과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였고 결국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세례 요한처럼 인정받지 못하고 고

난이 예상되는 속에서도,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고 손해 보고 손가락질

당할 분위기 속에서도, 현대 세계를 향해 외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3) 세례요한은 겸손한 자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서“나는 그의 신들메 풀

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 1:27)라고 하였고,“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이같이 겸손

한 자를 통해서 섭리를 이루어 가신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자기 P.R.

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자기를 높이지 않으면 생존 자체를 위협당하

는 사회이다. 그러나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 메시야를 준비하는자, 메시

야를 증거하는 자로서의 세례 요한은 겸손했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

을 바르게 깨닫고 자신의 사명을 정확하게 이룰 수 있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입으시

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그러한 낮아짐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사명

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어

야 한다. 그리고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일꾼으로서 참

여해야 한다. 겸손한 자란 자기를 정확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다. 겸손

과 자기 비하, 겸손과 위선은 다르다. 겸손은 비굴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도 않고, 속으로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짐짓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꾸미

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겸손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하나님이 맡

기신 대로 자기를 보고 자기 사명을 깨닫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너는 누구냐?”라는 질문

에 대해서 자신이 메시야가 아님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었고, 더 나아

가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은 왕성해져야 하며, 자기는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잘 이룸으로써 더 이상 그분의 앞길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

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3.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

게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인간이 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질문과 관련해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세례 요한처럼 정확하

게 답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

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그

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손길이 너무도 많다. 마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풍요의 제의인 바알 종교가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고 유혹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다. 이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나

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응답해야 한다. 하나

님이 물으시든, 세상이 묻든, 우리는 세례 요한처럼 자신의 삶과 목적과

의미를 정확하게 대답하고 실천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

게 묻고 있다. “그러면 너는 누구인가?”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

이사야 9 : 1 - 6

Ⅰ. 본문의 상황과 내용

1. 본문의 배경

본문은 이상적인 왕의 탄생을 언급하기 때문에 소위“메시야 예언”

이라 불리어진다. 이 예언이 언제 선포되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

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주전 8세기 남유다의 예언자 이사야가 아하스

왕(주전 735-715년) 때에 선포했다고 여겨진다.

아하스 왕 때, 앗수르 제국의 티글랏 필레셀 3세(주전 744-727년)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서부 아시아 지역으로 원정을 하였다. 북이스

라엘과 아람(= 시리아)은 반앗수르 동맹을 맺고,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

러나 남유다는 이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반역이었다. 왜냐하면 유다는 오므리 왕조 이래

로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북이스라엘의 위세에 눌려 지내왔으며 독자

적인 외교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의 베가는 유다 왕 아하스를 암살하고 대신에 타벨의 아

들을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사 7:6). 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본문해설

시리아 왕 르신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였다. 위

기에 직면한 아하스는 앗수르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앗수르의 위협 앞

에서, 북이스라엘-시리아 연합군은 더 이상 예루살렘을 공격할 수 없어

곧 철수했다. 그리고 이 두 나라는 앗수르에 의해 짓밟히고, 결국 멸망

했다. 남유다는 위기를 일단 넘겼지만, 앗수르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러한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활동했다. 그는 다윗

왕조 신학에 근거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예루살렘은 어떠한 공

격에도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아하스 왕이 외

세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국가의 독립을 추구할 것

을 촉구했다. 국가의 독립이 있을 때, 야웨 종교의 순수성과 독립성이

유지되는 것은 당연했다.

2. 본문의 내용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짓밟혀지고, 남유다도 앗수르의 영향

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에서 본문은 선포되었다. 역사적으로 희

망이 보이 않던 때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해방과 다윗왕조의 희망찬 미

래를 예언하는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1) 북이스라엘에 비춰질 구원의 빛(9:1) 이 부분은 앗수르에 의해

서 짓밟혀진 북이스라엘 지역의 회복을 선포한다. 주전 733년, 북이스

라엘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앗수르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부는 포로로 잡혀가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본문은 이

고통이 하나님께서 멸시를 당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앗수르

에 의한 짓밟힘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이다.

심판의 하나님은 이제 구원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은 어두움에

있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다는 것이다. 그 때에는 고통과

절망 속에 살고 있는 이 모든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

화가 있다.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터널 끝에 보이는 빛처럼, 하나

님으로 인한 희망의 빛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개역)

는“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

이다”(표준새번역)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예언의 내용은 아직 완성되

지 않은 미래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구원받은 자들의 기쁨(9:2-5) 이 부분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

원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내용이다. 외세에 의해

짓밟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해방이 다가오는 것

을 보았다. 그 징표는 아마도 6절에 나와 있는 한 아기의 탄생이다.

미래에 다가 올 구원을 바라보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은 마치 곡식을 거둘 때와 같고,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와 같

다.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외세의 침략과 내적인 국론 분열로 인하여 보잘

것 없이 된 나라를 창성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외세의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앗수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데, 사사시대에 기드

온의 인도로 미디안을 쳐 이기고 승리를 거둔 사건, 즉, 미디안으로부터

해방되던 때와 비교된다(삿 7장). 이것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앗수르로부터 해방이라는 불가

능한 현실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세

의 압제로 인한 현재의 희망 없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인하여

기쁨의 상황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침략자의 군대를 없애실 것이기 때문이다. 침략

자의 군화와 군복이 불에 타 없어진다는 것은 군대의 멸망 혹은 해체

를 의미한다. 이것은 압제와 전쟁의 끝, 즉 평화를 뜻한다.

3) 구원의 징표(9:6-7) 이 부분은 한 아기의 탄생이 갖는 의미를

묘사한다. 문맥상 이 아기는 이미 태어났다. 그가 누구인가는 논란의 여

지가 있지만, 아하스 시대의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아마도 히스기야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아기가 장성하여 통치자로 나라를 다스릴 때, 그는“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칭함을 받는다.

여기에서“기묘자, 모사”는“놀라운 경륜가(Wonderful Counselor)”를

의미하며 왕의 지혜와 신중함, 놀라운 계획과 판단력을 묘사한다.“전능

하신 하나님(Mighty God)”은“하나님의 용사(God’s Hero)”“, 힘센 용

사(Mighty Hero)”“, 전쟁에서 하나님 같고(in battle God-like)”등을 의

미하는데, 왕의 군사적인 용맹성을 말한다. 다윗 왕조에서 왕은 하나님

의 아들로 간주되었다(시 2편; 삼하 7:14). “영존하시는 아버지

(Everlasting Father)”는 왕이 장수하며 오래도록 다스린다는 뜻이다(시

21:4). 고대시대에 지혜로운 왕의 장기 집권은 왕권의 안정과 나라의

평강을 의미했다.“평강의 왕(Prince of Peace) ”은 왕이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고 외세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며, 백성들의 삶이 풍요롭게 잘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이 아기가 왕이 될 때, 다윗왕조의 왕권은 점점 강력해지고 남유다

도 평화롭게 된다. 그리고 그의 통치 덕목은 지혜로운 왕들이 가지고

있는 공평과 정의이다. 본문은 이러한 예언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말미

암아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끝난다.

요약 본문은 한 아기(아마도 히스기야)의 탄생과 연관된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 아기가 장성하여 통치할 때, 성취할 일들

은 북이스라엘 지역의 회복, 외세의 억압으로부터의 독립, 다윗 왕조를

왕성하게 함, 지혜로운 왕으로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림 등이다.

3. 신학적의미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주전 8세기 아하스 시대이지만, 신약성서는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서 성취되

었다고 선포한다(마 4:12-16). 즉,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든 간에 신약

성서와 기독교는 본문을 미래에 올 메시야에 관한 예언으로 이해했으

며, 그 약속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과 통치권에서 찾았다는 것

이다. 이것은 다윗 왕조가 멸망한 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다윗 왕조에 관한 과거 예언자들의 선포를 이해하는 방식이

었다. 즉, 그들은 다윗 왕조에 관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메시야 대망의

시각에서 이해했고, 그러한 전통은 기독교 전승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에 묘사된 이상적인 왕의 모습은 히스기야 왕이

나 유다의 어떤 왕에게서 진정으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만왕의 왕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리고 한 아기의 탄생 역시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미래형으로 이해될 수 있다.

Ⅱ. 오늘의 상황과 본문적용

이 예언은 물론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이었다. 그러나 그 예언이 있

은 지 7백년이 지난 후에 한 아기가 탄생하였고, 이 아기의 탄생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의 개입을 뜻하는 것

이 되었다. 마태와 누가는 아기 예수의 탄생이 바로 이사야 예언의 성

취라고 보았고, 그 이후 모든 크리스찬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이사야의

예언은 아기 예수의 탄생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나 평화설교구성

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뜻하는 것임을 증언하기 시작하

였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에 빛이 비치었다고 하였다. 재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율법의 시대는 끝나고 은혜와 진리의 시대가 시

작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새 역사의 시작을

의미한다. 불안과 공포와 절망만이 지배하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아들

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사랑과 희망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캄캄하던 역사 속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절

망만이 지배하던 세계 속에 희망이 자라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

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각박한 사회 속에 자기 희생을 바탕

으로 한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

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눈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이 세계 역사 속에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렸다는 것을 뜻

하는 것이다.

어둠의 역사에서 빛의역사로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흑암의 역사가 끝나

고 광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것은 처음 창

조에 일어났던 일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이 흑암만이 덮여 있던

세계 위에 빛을 창조하심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의

탄생으로서 그것은 이 세계 역사의 재창조를 의미한다. 빛이 생명을 뜻

하는 것이라면 어두움은 죽음을 뜻한다. 빛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

이라면 어두움은 불안과 공포를 안겨다 주는 것이다. 빛이 긍정적인 역

사를 의미한다면 어둠은 부정적인 역사를 말한다. 예수님 오시기 이전

의 역사는 죽음과 공포와 절망이 지배하는 역사였다. 인간의 죄 때문에

어두워진 역사는 어디에도 희망의 빛이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빛의 역사가 시작됨으로 이사야 예언은 성

취된 것이다. 어둠만이 지배하던 땅에 빛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어둠은

점령되기 시작하였고, 완전하게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빛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 속에서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

성탄은 어둠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빛의 희망을 주는 절기이다.

전쟁의 역사에서 평화의 역사로

둘째로,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쟁의 역사에서 평화의 역사로의 전환

을 뜻한다.“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이사야는 특별히 메시야 예언을 통하여 평화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

성들이 평화를 갈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사야서 2장에 보

면“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

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 하리라”고 하였다. 근본적으로 전쟁의 뿌리를 뽑아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평화의 시대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에서도 적대적인 관계가 없어지는 완전한 평화를 노래하고

있다. 사자와 같이 사나운 짐승들과 어린양과 같이 순한 짐승들이 함께

풀을 뜯을 것이며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서 장난을 하는 평화의 시대

를 꿈꾸었던 것이다. 한 아기의 탄생으로 이런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

라고 바라보면서 그 아기는 평강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였다. 예

수 그리스도는 이 평강의 왕으로 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능한 정치

가처럼 이 나라 저 나라로 뛰어 다니며 평화를 이룩하도록 협상하는

그런 평화의 왕이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먼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게 하셨고, 에베소서에 기록된 대로 원수된 사

람과 사람 사이의 담을 허시고 화해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그는 오셔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므로 평화의 길을 여셨

다. 아직도 이 지구 상에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평화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사야 말씀에 있는 대로“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

실 것”이다. 억압의 역사에서 해방의 역사로 끝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

은 억압의 역사가 바뀌어 해방의 역사가 되었음을 뜻한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

다.”인간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는 언제나 멍에와 채찍과 압

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출애굽의 역사가 상징하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모든 압제와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시기 위하여 역사하고 계

신 분이다. 2차 대전 종전과 더불어 식민주의 시대가 끝났지만, 이어서

독재자들의 등장으로 세계 도처에서 억압과 착취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의 와해와 더불어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많은 독재자들이 사라

졌지만, 경제 세계화에 따른 무거운 멍에가 세계 80%의 가난한 사람들

에게 메워졌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바로 이런 모든 억압과 착취에 대한 도전이며,

여기로부터 모든 사람과 자연을 해방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다. 어둠이 빛으로, 전쟁이 평화로, 억압이 해방으

로 바뀌는 역사의 전환이다. 지금 비록 이 세계가 전쟁의 불안, 인구의

증가, 자원의 고갈, 생태계의 파괴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 때문에 절망의

어두운 구름에 덮여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럼에도 빛

과 평화와 사랑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또 마침내 그것이 완성된다

는 사실이다. 성탄은 우리에게 이런 확신을 가져다준다. 그러므로 성탄

은 오늘 절망하려는 우리 모두에게 새 희망을 주는 계절이다. 피곤하여

넘어지려는 우리에게 새 힘을 솟아나게 한다. 우리가 성탄의 역사적 의

미를 바로 깨달아 알 때 우리는 이 세계를 낙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

다. 우리의 쪼들린 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

로 우리의 삶을 개척해 갈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도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어둠의

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이다. 아무리 악의 세력이 발악을 한다 하더라

도 이미 그들은 패배 당하였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빛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여야 하겠다. 소극적이던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꾸고 적극적으로 평화의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여야 하

겠다. 비록 이 땅에 미움과 시기와 분쟁이 끊일 사이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의 역사를 펼쳐

이 사회를 사랑의 사회로 바꾸어 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탄을

뜻있게 맞이하는 길이다. 우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은 바

로 이런 사랑의 역사를, 희망의 역사를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 때문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