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눅 7:11-18 ▧
문명과 밀접한 사회에는 언제나 두 행렬이 있습니다. 가는 자와 오는 자, 타는 자와 내리는 자, 죽는자와 사는자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말씀증에도 두 행렬이 있으니 하나는 관을 앞세우고 슬피 울며 나오는 죽음의 행렬이 있고 하나는 예수님을 앞세우고 소망에 차서 성으로 들어가는 삶의 행렬이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 인생의 행렬에도 죽음으로 가는 행렬과(불신자들) 삶으로 가는 행렬(신자)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독자의 시체를 상여 뒤로 따라가는 나인성 과부의 비애는 우리가 말로써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정의 눈물을 머금고 따라 갔으나 그 과부는 이것으로써도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정체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만 진정한 위로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과부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는 자를 향하여 울지 말라고 위로 할 사람이 어찌 주님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과부의 울음을 멈추게 하실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주님은 이 상여를 멈추시고 그 청년을 다시 부활시키사 그 과부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주님은 과부의 눈물을 멈추게 하시고 기쁨을 주시었습니다.
1. 죽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꼭 죽어야 할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이 청년은 젊고 과부의 유일한 아들 이어서 더욱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도록 운명이 지어진 존재입니다.
죽음은 죄값이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히9:27) 하셨습니다. 그러면 죽음이 무엇입니까?
불교에서는 죽음을 도피 혹은 자기의 멸절이라고 합니다. 무신론자는 죽음이란 만사 종결이라고 하고, 성경은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육체적 죽음은 혼과 몸의 분리요 정신적 죽음은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된 인간의 상황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세가지의 기본적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음이 무섭다는 감정이요
둘째는 죽음이 슬프다는 감정이요
셋째는 죽음이 허무하다는 감정입니다. 공포감과 비애감과 허무감 중에서 어느 것을 더 느끼고 덜 느끼냐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동서 고금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어던 의미에서 죽음과의 대결이요 죽음의 공포와 허무와 슬픔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경 죽음은 나를 찾아옵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이제는 네 차례니 가자고 독촉합니다. 불가항력의 방문이요 필연의 손짓입니다. 그러므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죽어서는 아니 될 뜻은
첫째, 이는 부모를 공양해야 할 자인고로 죽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 과부에게는 유일한 소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 보다 먼저 죽는 것은 또한 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사회가 젊은이를 요구하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됩니다.
청소년 시절은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연마의 과정이요 늙으면 사회에서 내어 쫓기는 시기이지만 이 젊은 시절은 어느 단체나 요구하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청년을 살리신 것입니다.
2. 인생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바쁘다고 합니다. 정말 바삐 뛰거나 차를 잡아 타고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죽음이 아니면 삶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인성의 이름은 "아름답다, 사랑스럽다"는 뜻인데 이런 성에서도 비극은 온것으로 과부의 아들 독자 청년이 죽어서 묘지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기차나 기선이나 비행기를 타면 나의 노력없이도 가는 것같이 인생은 앉으나 눕거나 섰거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가?
첫째,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사는 문제가 가장 긴급을 요하는 문제라 하겠으나 그보다 더 급속하게 해결치 않으면 안될 것은 죽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망은 인생의 최대의 강적입니다. 사망앞에는 금력, 권력, 지력등 인간의 어떤 힘이라도 쓸데없고 이 사망에게는 경우도 예의도 체면도 없고 사정도 항의도 못하고 그저 따라 갈 뿐입니다.
사망은 뉘게나 어디서든지 언제나 옵니다. 그러나 고인도 금인도 미래의 사람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순 같은 성군도 갔고, 걸주같은 악군도 갔고, 6개국을 병탄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종고 금인을 만들어 궁중에 세우고 아방궁을 짓고 불노초와 불사약을 구하여 먹으며 말하기를 "이제는 나를 대적할 자 없으리니 일세 이세 만세무궁하리라" 하던 절세영웅 진시왕도 갔고, 역발산 기세하던 천하용장 초패왕 항우도 갔고, 3대륙을 휩쓸던 알렉산더 대왕도 갔고, 불가능이 어디 있느냐 하던 나폴레옹도 "파리 성중에 6대주에 부는 바람은 인간의 한숨이 아니며 5대양의 넘치는 물결은 인간의 눈물이 아니냐"는 애화를 남겨 놓고 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무상한 사망은 광풍같이 사자 같이 달려 오건마는 인생들은 깨닫지 못하고 천년 만년 살것같이 물질과 권력과 색욕을 탐하고 심지어 남의 귀중한 생명을 빼앗아 자기 생명을 연장하려고 하나 사망이 한번 오게 되면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찾아 오시고 위로와 소망을 주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소망이 없는 인생들에게 찾아 오시어 위로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님 공생애 중에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이 세번 있었는데 모두다 찾아가시었습니다. 본문도 이들이 주님을 찾아와 살려 달라고 한것이 아니고 주님이 가셔서 살렸습니다.
(먀5:41)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거기서 죽은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니 곧 일어나 걸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회당장 집에 찾아 가시어서 살리시었습니다.
(요11:43)에도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어서 장사지낸 무덤속에서 냄새가 나는 그 곳에 가시어 "나사로야 나오라고"외치시어 그를 살리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이 안 계신 곳에 죽음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 우리들의 가정에 주님이 늘 계시도록 노력해야 하나니 이는 거룩한 생활과 그에게 경애의 생활을 하는 것이 가정에 축복이요 기쁨이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4. 그 여인의 애처러운 고통을 보시고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나인이라는 조그만한 마을을 지나가시다가 장래 행렬을 보시었습니다. 으례 그렇듯이 그 행렬도 구슬프기 짝이 없는 행렬이었습니다. 특히 이 장례 행렬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체 옷은 풀어져 내리고 맨발로 애곡하며 뒤따르는 한 여인 때문에 더욱 더 예수님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기만 합니다. 예리하신 통찰력으로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임을 확인한 예수께서 그의 고통을 없으시기로 하시고 청년을 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시고 계실까? 우리 인생은 주님이 보심에 따라 우리의 삶의 생애가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모든 대소사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주님께로 인정받은 행동을 하여 은혜를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애가 축복이 넘치는 것입니다.
5. 어떤 형태에 있든지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동양 불교 사원의 벽화나 조각들에게서 우리는 흔히 가만히 앉아 있는 부처의 상을 보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는 항상 서있는 모습, 움직이는 모습, 일하는 모습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처가 좌상이라면 기독교는 분명히 입상의 종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동양 문화는 부처처럼 앉아 있는 앉은뱅이 문화이고 서양 문화는 예수처럼 서있는 문화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이 문화가 빨리 발전 한면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서에는 "일어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입상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사51:17)에는 "이사야는 깰찌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고 외쳤습니다. (사60:1)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였습니다. (행3:1-10) 38년된 앉은 뱅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즉 죽은 사람과 같은 신앙에 생활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는 예수님처럼 늘 깨어 있는 자세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6. 인간 생활에는 희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어두움이 한 인간의 처소를 가리웠고 사망이 청년에게 임하니 너무나 큰 비극이었습니다. 이 청년은 외아들이므로 그 어머니의 사랑은 오직 그에게만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과부였기 때문에 그에게 자기 생의 전부를 의지했고 자기에게 남겨진 유일한 외아들이 없이는 살아 갈수 없는 형편이었으며 다른 후원자 없이 자기의 외아들을 애정적 위안으로 삼고 살아가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슬픔은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한순간의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청년을 장사 지내려고 옮기는 도중에 주님께서는 여인의 슬픔을 씻어 주셨던 것입니다. 영혼이 떠났던 시체가 새 생명으로 되살아났고 그 얼굴에는 빛이 나있고 새로운 생명을 얻으니 그녀의 집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같이 인간사에는 희, 비가 교차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을 전도서에서는 잘 설명해 주고 있으니 (전3:2-8)에 "날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시험과 어려움을 당한다고 좌절하지 말고 하는 일이 계획대로 잘 된다고 그것에만 만족하여 도취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또한 희, 비가 교차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교훈대로 한날의 생활에 족하게 여기며 살것입니다.
7. 죄가 많은 이세상은 절망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써 죄가 이세상에 들어왔고 또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오게 된 것입니다. 젊은 청년의 죽음, 아들을 잃은 과부, 이는 절망과 깊은 좌절로만 빠져드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그 과부만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죄로 인해 영원한 삶을 상실한 인생 모두 이러한 절망과 좌절의 심연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과 좌절을 해결해 주실 분이 있다면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절망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테일러는 이 본문의 기적에 대해 "이것은 놀라운 섭리이며 위대한 기적입니다.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기적들 전혀 필요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죽은자가 다시 살았다는 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험할 일이며 기쁨에 찬 재결합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