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행14:19-28
구약 시대에는 건강, 장수, 부귀, 영화등의 세상의 것을 축복으로 여겼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환난 고통을 면제해 주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께서 심령상 축복인 팔복을 교훈하셨고 또 "너희들이 이 세상에 있을 때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며 각오하고 승리자가 되라고 촉구하였습니다(요16:23).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음의 위기를 겪은 바울은 하룻밤 동안 치료하고 다음날 부터 핍박 당하는 전도 여행을 다니며 심방하고 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주님 위해 바치는 아름다운 전도자였습니다.
1.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교훈임
하나님 께서는 성도들의 극한 상황 속에서 이적의 은혜를 베풀어 위로 하시며 큰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첫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등은
다리오 왕 외에 타인이나 타신에게 경배하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는 영을 내리었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다가 풀무불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구출해 주시었습니다.
둘째,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구출받았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금신상을 두라평지에 세우고 이곳에 절을 하라고 강요했으나 이에 거절 했다는 죄목과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서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므로 구출함을 받은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옥중에서도 석방케 되었습니다.
그는 복음 전하다가 붙잡혀 사형 시간이 몇시간 남지 아니했는데 옥문이 절로 열리어 석방되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만 오늘의 우리들도 이들과 같은 신앙에서 주만 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신앙 생활에서 핍박과 시련이 와도 낙심치 말고 큰 은혜를 주실 것을 믿고 큰 소망을 가지고 잘 견디어 나가야 이들과 같은 이적의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의식이 들었을때 일생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은혜의 자리에 올라가서 그 신비한 광경을 보고서 말하기를 (고후12:1-5)에 "14년 전에 내가 삼충천에 올라가서 낙원을 보고 왔다"고 간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14년 전이 바로 루스도라에서 전도하다가 생명의식을 잃었을 때와 같은 해입니다. 이로써 극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 가장 좋은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극한 상황속에서 이적의 은혜를 베풀어 위로 하시며 큰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3. 인간들의 간사한 면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간사함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호산나"부르던 군중이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 초라하게 서서 재판을 받으시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고 외쳤던 것과도 같이 루스도라에 있던 사람들도 조금전까지만 해도 바울과 바나바에게 "쓰신"이라 불렀는데 이뜻은 "그리스도의 모든 신중에 가장 높은 신이요"라는 뜻이고 후에 바울에게 "헤메"라고 불렀는데 이뜻은 신의 사자 즉 신탁을 전하는 언어의 발명자이며 웅변가로서의 행운의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같은 참 간사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나쁜 것은 복음 전도자를 돌로 쳐 죽이면서 선동하기를
첫째, 이단자들
둘째, 사람을 미혹케 하는 자들
셋째, 사기꾼들
넷째, 거짓된 것을 선전하는 자들
다섯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 등등으로 모략하고 중상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죄를 짓게 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좀더 슬기롭게 판단해 보고 정확히 사리를 이해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선동과 충돌에 넘어가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 사도들의 열심있는 전도를 알 수 있습니다.
박해가 전도를 막지 못했고 죽음이 생명의 도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 까닭은 복음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며 성령이 감화하는 역사와 생명이 있고 각가지 체험케 하시는 일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고 체험해 보니까 영생 천국이 확실하니 어찌 전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들은 돌에 맞어 죽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첫째, 전도의 정의를 말한다면
(1) 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는 것
(2)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리를 전하여 세인들로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
(3)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4) 복음을 설명하는 것
(5)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뜻이 있으니 우리 성도들의 막중한 책임이 있는 동시에 이는 비 기독교인들의 생애를 바꾸어 놓는 일이니 전도의 사명이 무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도의 사명이 무겁다고 생각하며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그러면 전도의 목적은
(1) 전도란 죄인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요(요14:6)
(2) 전도란 주님의 지상 명령이요(마28:19-20)
(3) 전도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요(요15:8)
(4) 전도란 신자의 최대의 책임이요(롬1:14)
(5) 전도란 영적 성장의 비결이요
(6) 전도란 축복과 상급을 받는 일이요(요15:16)
(7) 전도란 사랑의 실천입니다(고후5:14-15)
다만 성도들은 사도들의 전도의 열의를 본받아 이 시대에 사명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환난이 있으나 이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환난을 겪은 경험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계7:13-14)에 "장로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흰옷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환란과 우리의 구원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롬5:3)에 "우리가 환란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를 환란은 인재를 인내는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첫째, 환란은 신앙의 유무를 시험합니다.
환란은 신앙의 유무를 알아보는 기회이며 신앙이 있는 자는 어떠한 환란도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사14:16)에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고 했습니다. 송족의 절개를 북풍한설에서만 나타납니다.
둘째, 환란은 신앙의 인격을 연단합니다.
(약1:2-4)에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진주는 조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가 수년 동안 아픔을 견딘 결과 마침내 진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순금이라는 것도 불속에 여러번 연단을 받은 후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환란은 자신의 무능을 깨닫게 합니다.
(1) 신앙이 부족하니 환란을 통해 견고하며 빛나는 순금 같은 신자가 되게 함이요
(2) 인격이 부족하니 보잘것 없는 모래알이 진주같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넷째, 환란은 죄를 깨달아 회개케 하심입니다.
참새는 죽을 때 구슬픈 소리를 발하고 사람은 죽을때 선한 말을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환란 중에서 회개하게 된다는 예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환란은 천국을 동경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환란을 많이 겪은 자일수록 내세의 소망이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고후4:16-18)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6. 약한 신자에게 확신을 주게 되었습니다.
22절에 "이 믿음에 거하라"고 했는데 바울이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구사 일생 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주동자들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온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 위험 지역에 제차 방문하여 성도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연약하고 의심 많은 초신자들에게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큰 확신을 부여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는 진실한 사도들을 보고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그 믿음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와 같은 확신에 찬 삶을 살때 믿지 않는 이웃이 감화를 받습니다.
7. 새로운 전도지를 선택케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고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아니함을 생각하고 선교지를 앗달리아로 바꾸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편히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신개척지를 선택한 것입니다. 즉 출발지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 가려면 버가 항구에서 여객선을 타야 하는데도 앗달리아(25절)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곳은 지금 이달리야 혹은 사탈리아로 불리는 항구 도시로서 사도들의 발길이 닿지 아니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곳에 복된 소식을 전하려고 그곳으로 갔던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이들에 전도의 열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결 론
돌에 맞아 죽게되 사경을 헤메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스데반이 돌에 맞으면서 하늘을 쳐다볼때 하늘문이 열렸던 광경을 보았듯이 바울은 삼층천에 이끌려 하늘의 영광과 장차 가서 주님과 영원히 사는 나라를 목격했으니 환란속에서 주의 위로가 더욱 컸던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주의 사명에 더욱 충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