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 종교학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1. 종교의 필요성을 쓰라.
․ 제임스(Wm James, 1842-1920, 미국의 심리학자, 절학자) - ‘믿으려는 의지’가 있다.
․ 구약 전도서 - ‘하나님이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3:11 하반)고 갈파.
․ 어거스틴(참회록 1장 1절) - “하나님은 인간을 다만 당신을 위해 만드셨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당신에게서 안식을 얻기 전에는 참 평안을 가지지 못하나이다.”
․ 시편(42:1-2)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고”
이와 같이 인간 심령의 심각한 요구에 응해 주는 것인 만큼 이것은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2. 종교의 기원과 발달을 쓰라.
원시 미개인에게는 고상한 도덕적, 정신적 욕구보다는 물질적 욕구가 지배적이었던 만큼, 그리고 그들이 그 물질적 욕구를 만족 시키려 함에 있어서 자신들의 역량이 부족하므로, 초자연적이며 초인간적인 존재의 힘을 빌고자 하였던 동기에서 발생한 종교는 인류 문화의 다른 사건들과 함께 종교도 저급의 상태에서 높은 데로 발달하여 왔다. 그리고 종교의 발달은 신관의 발달과 병행한다. 따라서 신관의 발달은 동시에 종교의 발달이기도 한다.
․ 종교적 신앙 즉 신관의 발달
(1) 마나설(Manaism) - 자연물, 인간, 사건 등에 접하여 있어서 비상한 행동이나 사건 등에는 ‘마나’라는 신비한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 것.
(2) 정령설(精靈說, Animism) - 자연의 흐름 속에 사람의 혼령 혹 생명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 중 어떤 것들로부터 원조를 받으려 하거나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 하는데서 종교는 생겨 낫다고 보는 설.
(3) 주물 숭배(呪物崇拜, Fetishism) - 나무 조각, 조개 껍질 등의 것에 신이나 신비한 마력이 있어 사람에게 화나 복을 내린다고 믿는 것.
(4) 주술(呪術) 혹 마술(魔術, Magic) - 요술 사가 신비한 영력을 부리어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행동을 가리킴.
(5) 토템(Totem)숭배 - 자기 조상이 식물 혹 동물에게서 나왔다고 믿어 그것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
(6) 자연숭배 - 자연물들은 인간보다 더 지혜와 힘이 있어서 인간에게 화와 복을 줄 수 있다고 믿어 그것을 숭배하는 것. (천, 지, 일, 월, 성신, 비, 바람, 불, 물 등)
(7) 다신교(多神敎) - 이 세상에는 무수한 신들로 차 있다고 믿는 것. (山神, 太陽神, 雨師, 風伯, 月神, 星神 등등)
(8) 조상숭배 - 인간의 조상을 숭배.
(9) 만유신교(萬有神敎) 또는 범신교 - 만물은 다 신이요 신은 만물이라고 보는 신앙.
(10) 유일신교(唯一神敎) - 가장 발달되고 합리적이며 인간의 심령에 최고의 만족을 주는 신관. 단일신교(單一神敎) - 여러 신중에서 한 신만을 택해서 섬기는 신앙.
(11) 인도교 혹 인간교(Humanism) - 초인간적이며 초자연적 신의 실재를 인정치 않고 인간과 또는 그가 품은 이상과 최고의 가치를 신앙과 노력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상.
3. 종교를 분류하라.
- 첫째 분류법 - 부족적 종교, 국가적 종교, 세계적 종교
- 부족적 종교 ; 각 개인의 소관사라 함보다는 부족 전체의 소관사.
- 국가적 종교 ; 부족이라는 작고 좁은 형태에서 국가적인 규모로 발달.
- 세계적 종교 혹 예언자적 종교
* 신관은 세계적이며, 동시에 개인주의적이며, 형식적인 것 보다 적이며, 의식주의적인 것보다 신비주의 혹 정신적이다.(불교, 기독교, 회회교)
- 그 밖의 분류법 - 자력교와 타력교, 현존 종교와 사멸 종교
4. 종교란 무엇인가.
* 통속적 정의 ; 종교는 사람이 자기가 지존자 혹 최상자라고 믿는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숭경(崇敬)의 태도이다.
5. 현존한 종교들을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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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명 |
창시연대 |
창시자 |
신도수 |
|
힌두교(인도교) |
2000~1500 B.C. |
없음 |
230,15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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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
1275 B.C. |
모세 |
15,315,359 |
|
신 도 |
660 B.C. |
없음 |
25,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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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투스트라교 |
660 B.C. |
자라투스트라 |
50,000 |
|
도교(노자교) |
604 B.C. |
노자 |
5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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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 |
599 B.C. |
마하비라 |
1,610,000 |
|
불 교 |
560 B.C. |
석가모니 |
150,18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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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교 |
551 B.C. |
공자 |
300,000,000 |
|
기독교 |
4 B.C. |
예수 |
900,00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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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회교 |
570 A.D. |
마호메트 |
315,000,000 |
|
시크교 |
1469 A.D. |
그루 나낙 |
6,21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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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
1860 A.D. |
최제우 |
3,000,000 |
6. 비교 종교 연구의 태도를 쓰라.
다른 종교를 연구함에 있어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긍정적이며 건설적인 태도로서 다른 종교의 장점을 찾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사도바울 -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 버리라”(살전5:2-22)
․저스틴 - “모든 사람이 올바로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재산이 될 것이다.”
7. 인도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인도교(印度敎)라고도 한다. 힌두교를 범인도교라 함은 힌두(Hind)는 인더스강의 산스크리트 명칭‘신두(Sindhu:大河)’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도와 동일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BC 2500년경의 인더스 문명에까지 소급될 수 있으며, 아리안족의 침입(BC 2000∼BC 1500?) 이후 형성된 바라문교를 포함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아리안 계통의 바라문교가 인도 토착의 민간신앙과 융합하고, 불교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300년경부터 종파의 형태를 정비하여 현대 인도인의 신앙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에 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양한 신화 ·성전(聖典)전설 ·의례 ·제도 ·관습을 포함하고 있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神觀) ·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 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푸라나》 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三神一體)가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마, 유지신(維持神)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속한다. 비슈누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고,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輪廻)와 업(業), 해탈(解脫)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와 업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심어줌으로써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한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달마(법 ·의무)이다. 4성(계급)제도와 4생활기(學生 ·家住 ·林住 ·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 ·성별 ·직업 ·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마 사마즈(1828년 창립), 아리아 사마즈(1875년 창립)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1897년 창립)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歸一)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 신도 - 인도 전 인구 3억 9천만 중 2억 3천만
․ 특색 - 계급 제도(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 인도교의 발달 - 여러 시대를 통해서 여러 사람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하여 발전된 종교.
8. 자이나교와 시크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1】자이나교
자나교라고도 한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비정통(非正統) 브라만교에서 발생한 출가주의(出家主義) 종교이다. 불전(佛典)에서 니간타(Nigantha:尼乾陀)라고 전하는 종교를, 석가와 같은 시대의 마하비라(Mahvra)가 재정비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최고의 완성자를 지나(Jina:勝者)라 부르고, 그 가르침이라 하여 지나교 또는 자이나교라는 호칭이 생겼다. 불타에서 연유하여 '불교'라는 호칭이 생긴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교조(敎祖)의 출신과 인간형성, 지리적·문화사적 배경, 교단 성립의 경위도 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도에서 하나의 종교로 성립된 이후 불교·힌두교와 더불어 커다란 영향을 미쳐왔으므로, 인도의 전통적 문화와 그 유형 무형의 유산에 관해서 자이나교를 무시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불교와 교단간의 밀접한 교섭은 양종교의 원시 경전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支派)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시 경전에서는 비교적 상세한 교의(敎義)가 정립되어 있으나, 그 이후로는 불교만큼 다채로운 발전을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후세에 와서 인식론이나 논리학은 불교의 영향이 현저한데, 오랫동안 산일(散佚)되어 있던 불교의 작품들이 최근 자이나교의 승원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 교도 수는 인도 전역에 걸쳐 180만 정도밖에 되지 않으나 상호부조적(相互扶助的)인 성격이 강하고 상인이나 금융업자가 태반을 차지하고 있어 경제적 영향력 또한 막강하다. 그 실천생활상의 특색으로서 승려를 통하여 불살생(不殺生:ahins)이 엄격하게지켜지고 있다. 교의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二元論)을 주창한다. 즉 생명(jiva)과 비생명(ajiva)으로 이루어져 있고, 비생명은 다시 공(空:운동의 원리)·비공(非空:정지의 원리)·물질재료\·허공·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형이상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다음 7종 또는 9종(선·악을 포함하여)의 실천론적 계열이 모든 가능태(可能態)로 제시된다. 즉 생명·비생명\·선·악\·누(漏)·박(縛)·차(遮)·멸(滅)·해탈(解脫)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이 외적 대상의 영향을 받아, 물질재료가 생명 속에 누입(漏入)하고[漏], 그것이 물질적 업(業)을 형성하여 생명을 속박한다[縛]. 그리고 외적·내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업물질(業物質)의 누입을 정지시키고[遮], 또한 이 업물질을 멸(滅)한다. 이 멸한 상태가 해탈이다. 해탈에 이르게 하는 덕목(德目)으로는 정견(正見)·정지(正知)·정행(正行)으로 요약되거니와, 구체적으로는 불교의 오계(五戒)에 해당하는 오금서(五禁書:브라다),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에 해당하는 삼기율(三紀律:구프티), 오용심(五用心:사미티)이 특히 요구되고 있다.
【2】시 크 교
힌두교의 신애(信愛:바크티) 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을 융합한 것으로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에 퍼졌다. 교조(敎祖) 나나크는 펀자브의 라호르 주변에서 태어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성자(聖者)들을 만났는데, 특히 바크티의 성자 카비르(1440?~1518)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가 죽은 후에 대대로 구루(guru:法主) 밑에서 교단조직이 정비되어 오다가 제5대 구루인 아르준(1563~1606) 시대에 교전(敎典)이 성립되고 암리차르에 본산(本山)이 건설되는 등 일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단으로서 그 세력이 확대해 감에 따라 무굴제국(帝國)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아르준은 1606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무굴제국과의 항쟁을 통하여 교단은 전투집단화하였는데, 무굴제국 쇠퇴 후에는 영국과 끝까지 싸웠다. 이 전쟁을 시크전쟁이라고 한다.
9. 유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공교(孔敎) ·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 ·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 ·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10. 도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중국에서 발생하였으며 창시자는 노자(老子 604-517 B.C. ?)라 한다. 노자는 그의 독특한 철학적인 도설을 주장하여 사람들이 모든 인위적인 것과 사욕을 버리고 자연에 돌아가 도와 합일함으로 지복의 경지에 이를 것을 주장하였다.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종교로, 노자와 장자(莊子)를 중심으로 한 도가(道家)사상과 구별된다. 도교는 후한(後漢)시대에 패국(沛國)의 풍읍(豊邑)에서 태어난 장도릉(張道陵)이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도 타이완[臺灣] ·홍콩[香港] 등지에서 중국인 사회의 신앙이 되어 있다. 장도릉은 초기에 오경(五經)을 공부하다가 만년에 장생도(長生道)를 배우고 금단법(金丹法)을 터득한 뒤 곡명산(鵠鳴山)에 들어가 도서(道書) 24편을 짓고 신자를 모았다. 이때 그의 문하(門下)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모두 5두(斗)의 쌀을 바쳤기 때문에 오두미도(五斗米道) 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이 죽자 아들 형(衡)과 손자 노(魯)가 그의 도술을 이어 닦았다.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도교에서 받드는 신들은 매우 잡다(雜多)할 뿐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그것은 새로이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제사 지내는 신에는 원시천존(元始天尊)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있고 이는 다시 무형천존(無形天尊) ·무시천존(無始天尊) ·범형천존(梵形天尊)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조인 노자, 곧 노군(老君)도 원시천존의 화신(化身)이라고 믿는다. 그 밖에도 현천상제(玄天上帝:北極星) ·문창제군(文昌帝君) ·후토(后土) ·서낭신[城隍神] ·조군(竈君:五祠 중의 한 神) ·화합신(和合神) ·삼관(三官) ·재신(財神) ·개격신(開格神) ·동악대제(東嶽大帝:泰山神) 등 수많은 신들을 제사지낸다. 한편 도교의 경전을 통틀어서 도장(道藏)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분류하면 신부(神符:부적) ·옥결(玉訣:秘試) ·영도(靈圖:鬼神像) ·보록(譜錄:敎法의 연혁) ·계율(戒律:修道의 율법) ·위의(威儀:齋戒 등의 의식) ·방법(方法:귀신을 쫓는 術策) ·중술(衆術 ·鍊丹類) ·기전(紀傳:老子 등의 전기) ·찬송(讚頌:神典의 偈) ·표주(表奏:귀신에게 奏上하는 祈願文) 등으로 이루어졌다 금주(禁呪)나 부록(符籙) 등 방술을 행하는 것도 이 종교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즉특정한 날과 시간에 목욕재계하면 치아가 튼튼해진다든지, 명경(明鏡)이나 호부(護符)를 차고 다니면 요괴(妖怪)를 피할 수 있다는 따위가 방술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염원하면서 이를 이룰 수 있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실천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① 태식법(胎息法)으로 충화기(沖和氣)를 받아들여 장생하는 수련인 내단(內丹), ② 황금 ·수은과 약물들을 복용하거나 몸에 주입하는 외단(外丹), ③ 음기(陰氣)를 취해서 양기(養氣)를 충만하게 하는 방중술(房中術) 등이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수련 결과, 상자(上者)는 허공에 올라가 우주에 소요하는 천선(天仙)이 되고, 중자(中者)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에서 사는 지선(地仙)이 되며, 하자(下者)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尸仙:人仙)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와 같은 연단술(鍊丹術)만을 닦는 것이 아니라 적덕행선(積德行善)하고 계율을 지켜야 진선(眞仙)이 된다고 하여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도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624:고구려 영류왕 7년)이다. 신라와 백제에도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하였다. 그것은 천제(天祭) ·무속(巫俗) ·산악(山岳) 신앙 등 지리적 여건으로 종교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 수용 권장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종교적 신앙보다는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서적을 통한 무위자연(無爲自然)사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자체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도(仙道) ·선풍(仙風)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가 통일한 이후에는 당(唐)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 중에 양생(養生) 보진(葆眞)을 도모하는 사람이있어 단학(丹學)의 성격을 가지는 수련(修鍊)도교의 양상을 드러내는 현상도 없지 않았다.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는 신앙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神) 중심의 나라였다. 불교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 ·영성(靈星) ·산신(山神),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도참(圖讖)사상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도교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楺)되면서 불교 도참사상과 함께 하여 현세이익(現世利益)을 희구하는 양재기복(禳災祈福)의 기축(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국가적으로는 호국연기(護國延基)를 바라는 재초(齋醮:도교 제사)행사가 크게 행하여졌으며, 특히 예종(睿宗:1105~1130)은 복원궁(福源宮)이라는 도관(道觀:도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크게 진작시켜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하였다. 예종은 복원궁을 건립하기 이전에도 그의 즉위 2년에 연경궁(延慶宮) 후원에 있는 옥청정(玉淸亭)에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상(元始天尊像)을 모시고 달마다 초제(醮祭)를 지냈고 청연각(淸燕閣)에서 노자 도덕경을 강론토록 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도교의 성행은 민간에 수경신(守庚申)이라는 도교습속(道敎習俗)까지 낳게 하여 그 풍습이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재초 중심의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으나 중종(中宗:1506~1544) 때에 이르러서는 조광조(趙光祖:1482~1519) 등의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소격서(昭格署:재초 등 도교행사를 관장하던 관청)가 혁파(革罷)되는 등 점차 위축되어 갔으며, 임진왜란(1592) 이후에 초제를 행하는 의식도교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궁중이나 민간에 뿌리내려진 수경신 등의 도교풍습은 그대로 존속하여 왔고 식자층에서는 노자 ·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더불어 양생 보진의 수련도교에 종사하는가 하면 참동계(參同契) 용호비결(龍虎秘訣) 등의 도서(道書)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이 있어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크게 의식도교와 수련도교의 두 맥을 이루면서 종교사상은 물론 문학 ·예술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11. 조로아스터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창시자 : 자라투스트라
․발생지 : 페르샤국
․현황 : 전세계 12만명정도(인도내는 10만이며, 이들은 교육수준과 생활 수준이 유여함)
조로아스터교란 불을 신성시하고 유일신을 예배하던 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이다.
교도 자신들은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다 하여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Mazdayasna)라고 부르며, 한자로는 배화교(拜火敎), 중국에서는 현교(敎)라고 하여 삼이교(三夷敎)의 하나로 꼽혔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인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의 종교적 공유재산에 근원을 둔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경전 《아베스타》에 의하면, 태초에 앙그라 마이뉴(훗날의 아리만)는 악을 택하고, 스펜타 마이뉴(아후라 마즈다의 성령)는 선을 각각 택하였다. 신자도 생각 ·말 ·행동에서 어느 것을 택하는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한쪽은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상호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의 천사들이 원래의 자연종교적 ·물신숭배적(物神崇拜的) 특성이 약화되고 아후라 마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비주체적 천사가 되어, 저마다의 추상적 직능이 이원론과 함께 강조됨으로써, 악의 천사들은 주체성을 회복하고 아후라 마즈다와 직접 대결하게 된다.
종말론은 2단계로 되어 있다. 사자(死者)의 육체는 그들의 독특한 장사(葬事)법인 풍장(風葬) ·조장(鳥葬)에 의해 독수리와 들개들의 밥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의 입구까지 와서 올바로 믿은 자는 그곳에 있는 다리(칼이라고도 한다) 위를 안내받으면서 무사히 건너 천국에 들어가나, 거짓으로 믿은 자는 발을 헛디뎌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한편 조로아스터가 가고 3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천국 ·연옥 ·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용해된 금속으로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악은 멸한다고 한다. 이 사상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의 일부 등 그 후 종교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파키스탄이나 인도에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많은 편이다. 특히 뭄바이에는 그 숫자가 더욱 많다.
12. 회회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창시자 : 마호메트(Mahomet, 570-632)
․특 색 : 절대적 유일신을 신앙
선전 방법에 있어서 무력을 사용함.
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마호메트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⑴ 알라와 《코란(쿠란)》: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는데, 마호메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 주고, 잘 보아 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코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호메트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코란》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敎義) ·제도, 마호메트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코란》은 마호메트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주석서(注釋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法學) ·신학(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다.
⑵ 이슬람의 근본신조: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 절대의 신,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로서 즉 ‘귀의(歸依)’를 뜻한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고 마호메트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조이며, 후에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경전(經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 ·희사(喜捨) ·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인데, 이것을 ‘이슬람’이라고 칭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므로,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다.
⑶ 이슬람 신앙의 요소: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언(言)’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즉 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 오주(五柱):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오주(아르칸 알이슬람:Pillars of Islam)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트(奉化 또는 勤行)’라고 한다.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증언 또는 고백(샤하다):“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마호메트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② 예배(살라트):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 ·정오 ·하오 ·일몰 ·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메카가 있는 쪽을 향하고 행한다.
③ 희사(자카트) 또는 천과(天課):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④ 단식(샤움):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月間: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 ·흡연 ·향료 ·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이 끝난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 순례(하주):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마호메트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廟)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⑸ 교도의 일상생활: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코란》과 《하디스 Hadith》(마호메트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관한 서적에 사용되는 명칭)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①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허용된 행위로, 이것은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은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Haram:이슬람법 용어).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성립 :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홍해(紅海)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巡禮者)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코레이시족(族)이었으며 마호메트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마호메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얼마 후에 죽었으므로 어린 마호메트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후 숙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多神敎) 신당에 빠져, 돌 ·천체 ·샘 ·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하니프들은 이에 반대하여 세계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마호메트가 자신은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호메트가 메카 근교의 힐라산(山) 동굴에서 최초로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맨 처음 그의 아내 하디자가 입신(入信)하였는데, 그 후 그녀는 메카의 박해시대에는 자주 남편의 힘이 되어 주었다.
마호메트는 메카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40명, 10년 만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고 게다가 메카의 집권자인 코레이시족의 박해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이를 피하여 622년 9월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행(行)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명문 인사가 다른 유럽 부족의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헤지라라고 하는데,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풍습이다. 마호메트의 운명과 이슬람의 장래는 이 헤지라를 통하여 일변하였다. 메카에서 이주한 교도(무하지룬)와 메디나의 협력자들은 힘을 합쳐 교단(敎團:움마)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인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마호메트는 교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메카군과 싸워 630년 1월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 신전(神殿)을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어놓았다. 얼마 후 아라비아인의 태반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 광대한 아라비아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은 실로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의 이상은 종래의 부족단위의 사회를 하나의 이슬람 교단으로 바꾸어,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전체 교도를 한 형제로 삼는 평화스런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632년 6월 메디나의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이슬람교의 이단파와 수피즘 :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란》이지만 마호메트가 죽은 뒤에는 그것만으로는 교의상 판단이 곤란한 경우가 많아, 그러한 때에는 ‘수나(마호메트의 언행)’로써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 수나를 중요시하여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수니파(派)라고 하여 이것이 이슬람교의 정통파로 지목되는데,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아라비아의 원시 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함에 따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딪쳐,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파(流派)가 생겨났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뱃사람이나 장사꾼을 그 주축으로 하는 하리지파(派)가 그 최초의 것인데,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만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등지에 약간 잔존할 뿐이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혈통은 딸 파티마와 제4대 칼리프인 그의 조카 알리와의 사이에 태어난 하산과 후세인의 두 아들 계통으로 전해졌는데, 이 중에서 특히 후세인의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시아파(派)는 후에 이란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 최초의 이단적 종파가 되었다. 마호메트는 “이슬람 교리는 70개로 분열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시아파는 많은 지파(支派)로 분열되어 극단파를 낳았는데, 개중에는 이미 이슬람교로 간주할 수 없게 된 것까지도 있다. 이같이 이단 종파는 상당수가 있으나, 신도수는 전체의 10 %에도 못 미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수피즘(또는 수피파)은 원래 원시 이슬람 사회 안에서 금욕 ·고행을 주의로 삼는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등의 신비주의까지 받아들여 사상계의 일대조류로 발전하였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사람을 심판하는 이슬람법에 대한 반동에서 발전한 것으로, 이슬람교가 세계적 대종교로 발전한 것은 실은 이 수피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반면 이슬람 사상 속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격하려는 자도 있다.
이슬람교의 발전 :
⑴ 이슬람권의 확대:
마호메트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에스파냐)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江)의 싸움에서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天山南北路]의 투르크족(族)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人)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니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西)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역정복(逆征服)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人)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왕조는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공략, 비잔틴 제국(帝國)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⑵ 분포 현황:
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에게 생소한 이슬람교가 그 두꺼운 벽을 뚫고 한국에 전래된 것은 1955년이다. 이슬람교의 전파는 1955년 9월, 6 ·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터키 부대의 압둘 라흐만 종군 이맘(성직자를 가리킴)과 주베르코취 종군 이맘의 지도와 협조 아래 김진규(金振圭)와 윤두영(尹斗榮)이 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 이슬람교 협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 김진규, 부회장 겸 사무국장 윤두영과 신도 70여 명으로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시작되었다. 초창기 10여 년 간에 선교 ·운영의 난관을 극복하고 65년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로 재발족, 67년 3월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로 인가되어 신도 7,500명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76년 5월 현재의 용산구 한남동에 중앙성원(中央聖院)을 건립하고(사우디아라비아 기타 6개국의 원조로), 80년 항도 부산에 제2성원, 81년 경기 광주에 제3성원, 86년에는 안양시에 제4성원과 전주시에 제5성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해외교포를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인도네시아에 지회가 설립되고 국내의 신도수 약 3만 4000명의 교세를 가지게 되었다. 80년 5월 대통령 최규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당시 칼리드 국왕과의 공동성명을 통하여 한국 이슬람대학 설립 공사비 일체의 제공을 확약받았으며, 경기 용인에 13만 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한국의 이슬람교는 70년대의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두드러지게 교세 확장을 보였는데, 매년 중동 각지에서 무슬림이 되어 귀국한 1,700여 명의 기능근로자 신도들을 핵으로 삼아 신도 배가운동을 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슬람교는 한국인의 유교적 전통이나, 현대의 남녀동등 사상까지의 차이점 일부일처주의의 헌법조항에 배치되는 일부다처주의 등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의 용어 및 교리의 토착화 등 여러 가지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13. 천도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천도교는 조선 후기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를 교조로 하는 동학(東學)을 1905년 제3대 교조 손병희(孫秉熙)가 천도교로 개칭한 종교이다.
최제우는 전통적 유교 가문에서 태어나 지방의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후기는 국내적으로는 외척(外戚)의 세도정치와 양반·토호들이 일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자행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민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무력침략의 위기를 맞던 시대였다.
최제우는 21세에 구세제민(救世濟民)의 큰 뜻을 품고 도(道)를 얻고자 주류팔로(周流八路)의 길에 나서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 양산 천성산 암굴에서 수도하고 도를 갈구하여 1860년 4월 5일 '한울님(하느님)'으로부터 인류 구제의 도인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도의 이름을 '무극대도'라고만 하였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하여 많은 교도들이 모이자, 관(官)과 유생들이 혹세무민한다는 구실로 탄압하여 부득이 전북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으로 피신하였다. 이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특히, 1862년 1월경에 지은 《논학문(論學文:東學論)》에서 처음으로 무극대도는 천도(天道)이며 그 학은 서학이 아닌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동학이라 지칭하게 되었다. 이 해에 다시 경주의 박대여(朴大汝) 집에 머물면서 포교하자, 충청·전라 지방에서까지 수천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자 교도들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862년 12월 동학의 신앙공동체인 접(接)제도를 설치하고 접주(接主) 16명을 임명하였다.
최제우는 1863년 3월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와 대대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접주들로 하여금 교도들을 수십 명씩 동원하여 용담정에 와서 강도(講道)를 받게 하는가 하면, 동학 교단 책임을 맡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時亨)을 선임하였다.
한편, 관의 탄압을 예견하고 그해 8월 14일에는 도통(道統)을 최경상에게 완전히 물려주었다. 날이 갈수록 동학 교세가 커지자, 놀란 조정은 그해 12월 10일에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를 파견,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10일 대구에서 정형을 집행하여 최제우는 41세를 일기로 순도하였다.
동학, 즉 천도교는 신, 즉 한울님을 모시는 유신적(有神的) 종교인데, 신관을 비롯하여 인간관·윤리관·역사관·수행체제가 모두 독특하다.
① 신앙대상인 한울님(天主)은 유일신으로 인격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모시고 있는 초월적이면서 내재하는 신이며, 아직도 참뜻을 펴려고 애쓰는 신이다. 그러나 창조주나 심판의 신은 아니다. 그리고 신은 영적인 것과 기적(氣的)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② 인내천(人乃天)으로 대표되는 천도교의 인간관은 사람을 한울님처럼 존엄한 존재로 본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람의 존엄성이 곧 한울님의 존엄성과 같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간평등과 존엄성을 신앙의 실천적인 핵심으로 삼는다.
③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대표되는 윤리관은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처럼 섬겨야 한다. 1920년대의 천도교가 어린이운동의 목표로 어린이의 윤리적 해방을 내세웠던 것도 역시 어린이도 한울님을 모셨다고 보는 천도교의 신앙에서 연유된 것이다.
④ 천도교는 개체 영(靈)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으나 영생론을 주장한다. 영생은 종교적인 높은 체험의 경지에 이르면 가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시간 속에서도 영원을 살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⑤ 천도교의 역사관은 발전론과 순환론을 겸한 파동형(波動形:起伏盛衰論) 사관으로 보며, 문명의 단위를 동·서로 양분하여 지금은 대전환의 시기인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점으로 본다. 즉 지금까지의 문명은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문명이 전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⑥ 천도교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정치·경제·문화 체제가 이루어지도록 힘써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는 종교이다. 그 과정에서 평등한 인간구제, 부유한 사회구제를 위한 정신개벽·민족개벽·사회개벽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사회변동을 위한 현실참여에 적극적이 된다.
개인적으로 천도교 수행은 청원(請願)과 기복(祈福)이 수반되지만 신앙체제를 확립하여 도성입덕(道成立德)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다. 반면에 집단적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면서 희생·봉사로써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에 이바지하는 데 두고 있다.
그의 실행을 위해서 성(誠)·경(敬)·신(信)을 실천 윤리의 준칙(準則)으로 삼고 있으며, 종교행위로는 ① 주문(呪文), ② 청수(淸水), ③ 심고(心告), ④ 경전봉독(經典奉讀), ⑤ 기도, ⑥ 성미(誠米), ⑦ 시일식(侍日式), ⑧ 기념식 등이 있다. 주문은 본 주문이 13자로서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며, 강령주문(降靈呪文)은 8자로서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이 글을 수없이 반복하여 외우는데, 그 목적은 마음을 닦고(修心), 기운을 바르게(正氣) 하는 데 있다. 심고는 “한울님 감응하시기를 축원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다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청수는 모든 제례의식 때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바치는 것이며, 경전봉독은 《천도교 경전》(《東經大典》과 《龍潭遺詞》)을 경건하게 읽는 것이다. 기도는 심고 ·청수봉전(奉奠) ·주문 읽는 것을 시간과 날짜를 정해놓고 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미는 우리들이 끼니마다 먹는 음식을 한울님의 녹(祿)이라고 생각하여 끼니마다 쌀 등을 한 숟가락씩 뜨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모아서 교단에 바친다.
시일식은 1주일에 한 번(일요일에 교당에서 행함) 집회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며, 기념식은 창도일(創道日) 등 기념할 만한 날에 의식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를 특히 오관(五款)이라 하여 교인의 의무로 정하고 있다.
제사의식은 향아설위(向我設位)라 하여 제수를 모시는 사람을 향해 차려놓는데, 이것은 조상이나 스승님의 영(靈)도 내 안에 모셔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으로 천도교의 수행기본(修行基本)은 기원만도, 깨달음만도 아닌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의 은총과 자력을 겸하는 데 있다.
천도교는 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순도한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제2세 교조 해월 최경상의 노력으로 다시 복구, 1870년경에는 신도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해지방에서 이필제(李弼濟)가 주축이 되어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일으켜 1871년 3월 10일 군아(郡衙) 습격과 8월 2일의 문경 초곡 군기고 습격사건으로 300여 교도가 희생되어 또다시 타격을 받았다. 1875년 최경상은 이름을 시형(時亨)으로 고치고 강원도 지방과 충청도 지방의 포교를 시작, 많은 교도를 얻었다. 이때 최시형은 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실천적 수도요령과, 위생 등 생활의 합리화를 내세워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하여 1880년에는 강원도 인제와 단양 천동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과 《용담유사(龍潭遺事)》를 최초로 목판 간행하여 경전종교로서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충청도 지방으로, 1889년경에는 교세가 전라도 지방까지 뻗치기에 이르렀다. 1892년경에 이르자 신앙자유를 내세워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대대적인 민중시위를 벌였는데 이후부터 교세는 급격히 늘어났다.
이듬해인 1893년에는 서울 광화문 앞에서 정부를 상대로 한 종교 자유화와 교조신원을 소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3월에는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에서 수만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척왜양이(斥倭洋夷)를 내세운 반봉건·반제국주의적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894년 3월에 이르러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全琫準) 고부 접주에 의해 고부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봉준·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華中)·김덕명(金德明) 등 지방의 동학 대접주가 공동으로 동학군을 동원,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5월에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53곳에 집강소(執綱所:군사위원회 같은 것)가 설치되어 폐정(廢政)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어나 결국 청국이 패퇴하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강점하려 들었는데, 이때 최시형은 전 동학군에 기포령(起包令)을 내려 반제국주의 무력항쟁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퇴, 수만의 희생을 내고 막을 내렸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98년에는 최시형마저 체포되어 6월에 순도함으로써 동학(천도교)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00년에는 지도급 인물 중 손천민(孫天民)과 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제3세 교조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1901∼1902년에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上海]까지 갔다가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으로 일본에서 1906년 1월까지 머물렀으며,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국내 동학군을 동원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10월 8일 360곳에서 30만 명이 색옷입기와 단발을 단행하는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한국 근대화의 민중운동이었으나 동학군이 주동이 되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곧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국내 지도자인 이용구(李容九)가 단독으로 일진회(一進會)와 합동,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하였다.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근대적 종교체제를 갖추는 데 힘썼다. 1906년 1월 말경에 귀국하여 2월부터 천도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하는 한편 보국안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국민교육을 위해 800여 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를 경영 또는 보조하는가 하면, 16개 학교에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는 그리스도교계·불교계 인사 및 학생들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하였다. 1922년 5월 19일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가 생애를 마치자 한때 교세는 주춤하였다.
그러나 청년들은 1919년 9월에 발족한 천도교 청년교리 강연부를 토대로 1920년 3월에 천도교청년회를 조직했다. 또한 종합잡지 《개벽(開闢)》을 간행함으로써 문화운동이 시작되었고, 1921년에는 어린이운동의 선구자인 천도교소년회를 발족시켰다. 1922년 9월에는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黨)으로 발전시켜 여성운동·농민운동을 전개했고, 이후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으로 갈라졌다가 1931년 2월 천도교청우당으로 통합했다.
이때 천도교가 간행한 잡지만도 《개벽》을 비롯하여 《신여성》 《어린이》 《학생》 《농민》 《천도교 월보》 《신인간》 《별건곤(別乾坤)》 《자수대학강의》 등이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서 1935년 이후부터는 거의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22년 조직)을 조직, 1935∼19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꾀하다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고, 1938년에는 제4세 대도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멸왜기도사건(滅委祈禱事件)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하였다.
8·15광복 이후, 천도교청우당은 다시 조직되었으나, 남북이 분단되면서 이 단체도 남북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측이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반대, 이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국토 분단을 영구화하려 하자, 1948년 2월에 3·1재현운동, 즉 남북통일 총선거운동을 전개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1만 7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많은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14. 원불교에 대하여 약술하라.
19세기 후반의 한국사는 변혁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략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수호해야 했고 국내적으로는 한계에 이른 조선왕조의 봉건적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라의 주권수호와 근대개혁을 위한 다양한 변혁운동이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주권수호와 근대변혁운동은 실패하고 1910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시기 조선왕조 5백년의 지도이념이었던 성리학은 그 사상적 한계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성리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18세기 실학 사상과 북학사상으로 제기되었지만 19세기 체제의 보수 반동적 성격때문에 서학을 빌미로 하는 진보세력에 대한 정치탄압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척사위정사상, 개화사상, 동학사상이 대두되어 이 시기 변혁운동을 이끌어 가는 지도이념으로 자리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사상은 변혁운동의 지도이념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교육·의료사업을 통하여 왕실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데 치중하였다.
한편, 19세기 봉건체제의 모순 심화는 지배세력의 수탈의 강화로 농민들은 담세능력의 한계에 이르러 민중생활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조선후기 이래로 민중의 현세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이상세계는 주로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신앙으로 나타났다.
또한 <홍길동전>의 율도국이나 <허생전>의 변산 무인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생활의 고난과 민중적 이상향에 대한 희원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세의 침략과 체제모순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동학사상(=地上仙境)이 그 해답을 제시한 것이었다.
동학은 최수운의 처형 이후 농민층에 확산되어 1894년 반봉건 반외세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의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농민전쟁의 진압으로 동학은 국가로부터 반역자의 무리로 낙인되고 말았다. 농민전쟁의 좌절 이후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는 많은 신종교들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민족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식민지화 이후에는 종교의 보편적인 목적을 강조함으로써 민족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게되는데, 이는 불교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政敎分離의 원칙이 바로 총독부 권력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는 1910년대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중빈(소태산, 1891~1943)이라는 청년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15. 증산교와 대순진리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 증산교
1902년 강일순(姜一淳:1871~ 1909)이 개창한 종교.
이 종교는 교조의 사후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는데, 일반적으로는 이 분파된 종단들을 통칭하여 창시자의 호를 따서 증산교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흠치교( 敎)라고도 했다.
증산교는 한말 개항기에 나타난 동학·대종교와 함께 이 땅에 새로운 이상세계를 건설한다는 후천개벽을 주장한 대표적인 자생적 종교의 하나이다. 또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문화, 특히 무속(巫俗)과 선도(仙道)를 계승·발전시켜 한국 민중의 개인적인 신앙의식을 민간 중심의 공동체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 대순진리회
증산교는 창시자인 강일순이 사망한 뒤 분열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의 조철제(趙哲濟:일명 鼎山)가 세운 태극도는 도주(道主)인 조철제가 사망한 뒤 그의 유명에 따라 박한경(朴漢慶:일명 牛堂)이 뒤를 이었다. 박한경은 조철제의 아들 영래(永來)와 갈등이 심해지자 추종자들과 상경하여 광진구 중곡동에서 대순진리회를 세우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중심교리는 천지공사(天地公事)이다. 종지(宗旨)로는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造化), 해원상생(解寃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 등의 실천목표와 윤리요강을 내세운다. 또 성(誠)·경(敬)·신(信)을 수도의 3대 요체로, 안심(安心)·안신(安身)·경천(敬天)·수도(修道)를 4대 강령으로 삼고 있다. 주요 경전은 강일순의 언행과 행적들을 적어 놓은《대순전경》으로서 이것이 곧 신자들의 신앙지침이자 생활의 표준이 된다. 강일순을 구천상제(九天上帝), 조철제를 도주, 박한경을 도전(都典)으로 모신다.
교단의 운영은 '도헌(道憲)'에 따라 운영되며 의결기관인 중앙종의회(中央宗議會)와 주요 집행기관인 종무원(宗務院)이 있다. 종의회는 전국에 산재하는 교당·회관·회실·포덕소 등을 관리하는 자들 중 선감(宣監)·교감(敎監)·포정(布正)으로 구성된다. 조직은 종무원 외에 포정원·정원·감사원·수강원·육영사업부·의료사업부로 나뉘어 운영된다.
증산교의 분파들 가운데 가장 조직성을 갖춘 종교단체로서 능동적으로 현대화를 지향하며 활발하게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1969년 5월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에 중곡도장을 기공한 이래 사회봉사 활동을 병행하며 교세가 급성장하자 1987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에 여주본부도장을 세웠다. 이밖에 제주수련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이 있다.
비교 종교학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