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학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1. 옳음과 그름의 표준을 논하라.
첫 번째는 어떤 행동을 하는 데에 있어 주관적으로 ‘나’ 개인을 표준으로 하여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할 때 자신에게 ‘옳음’은 타이에게 ‘그름’이 될 수 있고, 자신에게 ‘그름’은 타인에게 ‘옳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윤리학에서는 ‘개인적 주관주의(individual subjectivism), '윤리적 자기 본위주의(ethical egoism)’, 혹은 ’개인적 상대주의(individual relativism)'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옳고 그름의 표준이 개인이 아닌 타인, 즉 사회 공동체(Society Community)에 조준되는 경우는 ‘문화적 상대주의(culture relativism)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회 윤리가 지향하는 점이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가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는 옳고 그름의 표준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두는 것이 아니고, 초월자 혹은 신에게 두어 신의 영광을 위해서 인간이 봉사하는 차원이다. 이 이론을 ‘신의 영광을 위한 이론(Divine glory theory)라고 한다.
네 번째로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는 누구를 위한 것이냐, 혹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로 옳고 그름을 가름한 것이다. 그 외에 때로는 행위의 결과를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목적론적 윤리 이론(teleological ethical theories)'과 행위의 본질을 살펴봄으로써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의무론적 윤리이론‘이 있다.
2. 도덕과 윤리를 구별하라.
윤리(ethic)란 이간 사이의 인륜, 또는 이치라는 뜻이고, 도덕(moral or morality)이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덕행의 길이다. 도덕이란 공동체 안의 인간이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을 걷고 그 길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도덕의 출발점은 개인이고, 자아를 중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윤리는 도덕의 내면성과 주관성을 포괄적 그리고 객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다. 도덕은 구체적 행동을 말하는 실천적인 면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윤리는 도덕을 이론적인 면에서 논할 때 사용되고 있다. 도덕이 개인적인 면, 즉 주관적인 면의 양심, 동기, 수단과 방법, 그리고 행위에 관한 것이라면, 윤리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 작용에서도 사용된다. 도덕이 체면과 양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면, 윤리는 공식적이 규범이며 주어진 규범이다. 윤리가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정신을 말하면 윤리는 사회적인 객관화된 정신을 말한다. 도덕은 상대성의 성격이고 윤리는 절대성의 성격이다. 윤리가 하나의 틀 혹은 그릇이라고 말한다면, 도덕은 그 틀 혹은 그릇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라고 볼 수 있다.
3. 윤리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라.
첫 번째 단계는 의도나 동기이다.
‘왜 그러한 행동을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라는 의미가 있다. 동기는 옳거나 옳지 않을 수도 있으며,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좋은 동기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때로는 좋은 동기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반면에 나쁜 동기가 좋은 결과를 가져 올수도 있다. 의도의 개념은 윤리학 뿐만 아니라 심리학과 법학에서도 관심이 많은 분야이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의 결과가 어떤 의도에 의한 것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죄과나 비난의 무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든 간에 의도의 목적이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의도적인 목적”(intentional objects)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단계는 수단 혹은 방법이다.
어떠한 행동을 수행하는 데는 항상 수단과 방법이 개재된다. 상황 윤리에서는 “목적은 항상 수단을 정당화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목적론적 윤리의 성격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그 옳지 않은 수단이 정당화 될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의무론적 윤리’에서의 성격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목적 혹은 결과이다. 대부분 좋은 동기와 의도는 좋은 결과와 목적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좋은 동기와 의도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때로는 좋은 목적이나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동기/목적(concrete situation) → 수단/방법(making decision → acting) → 목적/결과(result, effect)’에 있어 다음과 윤리의 진행이 있다. 여기서 좋은(선한)것을 ‘○’으로 표시하고, 나쁜(악한)것을 ‘×’로 표시하겠다.
첫째는 ‘○→○→○’으로 좋은 동기나 의도가 좋은 수단과 방법을 통하여 좋은 결과나 목적을 가져온다.
두 번째는 ‘○→×→○’으로 좋은 동기/의도는 있으나, 옳지 못한 수단/방법을 통하여 좋은 결과/목적을 가져오는 경우이다. 의도적인 목적이다.
세 번째는 ‘○→×→×’으로 동기/의도는 옳은 것이었으나, 수단/방법과 목적/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이다.
네 번째는 ‘×→×→○’으로 나쁜 동기/목적으로 나쁜 수단/방법을 사용하였어도 좋은 결과가 되어지는 경우다. 이러한 경우는 목적론적 윤리로 결과가 옳기 때문에 앞의 순서를 정당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무론적 윤리에서는 아무리 좋은 목적/결과가 주어지더라도 동기/의도와 방법/수단이 옳지 않으면 정당화 될수 없다.
4. 목적론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를 설명하라.
1. 목적론적 윤리(teleological ethics) : 이 윤리 이론은 행위의 결과에 따라 옳음, 혹은 옳지 않음이 판정되는 것이다. ‘결과론적 윤리 이론’이라고도 한다. 결국 하나의 행동이 옳은 것이니 옳지 않은 것인지는 그 행동의 결과로 판정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공리주의 윤리, 윤리적 자기본위주의 등이 여기에 속한다.
2.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s) : 이 윤리는 결과 보다는 행동의 본질 혹은 행위자나 대상자의 본질에 관심을 두는 윤리 이론이다. ‘비 결과론적 윤리’라고도 부른다. 의무론적 윤리 가는 행동 자체를 잘-잘못으로 인정한다. 여기서는 옳음과 그름의 판단자가 초월자인 하나님에게만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행동의 종류와 방법이다. 만일 도덕 행위자가 행하여야 할 의무를 잘 수행하는 행동을 갖는다면 그 행동은 옳은 것이다. 의무론적 윤리에서의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혹은 누가 최상의 권위를 가졌는가?”이다. 그래서 이 윤리를 ‘복종의 윤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마뉴엘 칸트가 이 윤리에 속한다.
5. 고대 그리스의 윤리를 논하라.
먼저 고대 그릿 윤리 사상을 이해하려면 ‘아가토스’(agathos)라는 단어를 알아야 한다. 아가토스는 ‘good'의 고전어이다. 아가토스는 전쟁 때나 평화 때에 용감하고, 재치가 있으며 성공적일 뿐만 아니라 부를 소유한 사람을 의미한다. 즉 선한 사람에게서는 용기, 슬기, 성공 같은 자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고대 윤리 사상의 일반적 특징을 요약하면 정서적이라기보다는 지적이었고,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었으며, 극단적이라기보다는 온건한 윤리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고대 그리스 윤리 철학자들이 중요시한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좋은 삶-선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느냐?”였다. 고대에 있어서 초월자나 계시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이들의 윤리 사상은 이기주의적 윤리 접근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6. 영국의 윤리 사상을 논하라.
영국의 공리주의 윤리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경험에 호소하는 실천적인 면이 강하면(인본주의),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인간 관계의 상호 작용을 강조하는 윤리 사상에 특징이 있다.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7. 칸트의 윤리를 논하라.
칸트의 윤리는 경험보다는 이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행동 그 자체 혹은 수행보다는 의도를 더 중시하는 칸트의 윤리를 ‘의무 윤리’라고도 부른다. 칸트 윤리의 기초는 ‘절대적 도덕 진리’(absolute moral truth)이다. 칸트의 윤리에서 ‘도덕적’이 되려면 의무에 입각한 동기로 이루어진 행위이어야 한다. 의무가 결여된 동기의 행위는 도덕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이 되려면 의무의 감각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칸트는 ‘지상 명령’ 또는 ‘양심의 절대적인 도덕률’이라고 부른다.
칸트 윤리의 또 다른 주요한 원칙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되거나 혹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유일하고 특수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실천적 명령’(practical imperative)이다. 그리고 칸트의 이론 중에서 ‘황금률’ 혹은 ‘전환의 표준’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입장을 바꾸어 보라’는 것이다. 내가 하기 싫으면 다른 사람도 하기 싫고, 내가 좋으면 다른 사람도 좋다는 것을 적용하라는 것이다.
게몽주의의 중요한 원칙을 중심으로 전개된 칸트의 윤리는 자연법에 근거한 전통적인 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도덕법에 호소한 윤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이성이 도덕의 근원임을 호소하였다.
8. 상황 윤리를 논하라.
미국의 성공회 윤리학자인 조셉 플레처(Joseph Fletcher)가 명명한 상황 윤리는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도덕주의와 율법주의로부터 탈피하는 입장이다. 상황 윤리는 1960년대에 급진적인 운동으로 일어나서 예수의 새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 전제하에 전개된 윤리 운동이다. 이것은 ‘Contextual Ethics'라고도 부른다. 인간이 결단하고 행동할 때 어떤 주어진 규칙이나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유일한 규범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항상 선한 것이며, 희생적이며,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상황 윤리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째는 실존론적 윤리로 행위자의 자유 선택에 중점을 둔다. 규칙이나 원칙들은 인간 본연의 존재 가치를 억누르며 혹은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키에르케고르, 틸리히, 불트만에게서 찾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서 나타난 유형이다. 이 윤리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뜻인데,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활동보다는 하나님의 확고한 명령에 더욱 초점을 맞춘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Contextual Ethics'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윤리이다. 이 윤리는 리차드 니버와 폴 레만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행하시는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 혹은 응답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활동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즉 코이노니아를 통한 인간화의 작업이 중요한 과제이다. 첫째와 둘째 유형은 유럽 대륙에서 주로 태동 되었고, 세 번째 유형은 미국에서 발전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은 사랑에 강조점을 둔 조셉 플레처의 상황 윤리이다. 오직 옳고 그름은 아가페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적용하라는 것이다. 상황 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느낌이 아니라 행동이다. 어떤 고정된 원리나 규칙에 행동이나 인격을 속박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인격으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상황 윤리에서 근본적인 성격은 행동을 결단하는 데 개인적인 책임과 이러한 개인적인 책임을 바탕으로 한 인간 관계가 강조되는 점이다. 내가 ‘나’되는 것은 ‘너’가 존재하기 때문이며, ‘너’가 되는 것은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9. 사회 윤리와 기독교 윤리를 비교 설명하라.
사회윤리의 출발점이 인간 중심이라면,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중심이다. 사회윤리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인간과 인간관계의 윤리를 지향한다면, 기독교 윤리는 신본주의 바탕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윤리이다. 사회 윤리에서 규범과 가치관의 기준이 사회의 관습과 문화, 그리고 자연법적인 윤리에 입각한다면, 기독교 윤리의 규범과 가치관의 기준은 철저히 성서에 입각한다. 사회윤리는 자연법적인 윤리이고, 기독교 윤리는 신법적인 윤리이다. 사회 윤리가 사회와 시대의 상황에 부응하여 변화되는 윤리라면, 기독교 윤리는 영속적이어서 변화되지 않는 윤리이다. 사회 윤리는 인간 이성의 힘에 긍정적이고, 기독교 윤리는 인간 이성의 힘에 부정적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윤리는 사회 윤리를 통합한다.
10. 구약의 윤리적 성격을 쓰라.
구약성서의 윤리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개념들은 율법과 계약사상이다. 특히 계약사상은 이스라엘의 법과 규례들과 관련이 깊다. 계약사상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과 규례를 하나님의 법으로 받아들이고 지켜야 한다는 신 중심 적인 도덕적 의무를 불러온 근거가 되었다. 구약의 윤리적 성격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계약사상이 지닌 신 중심적이다. 계약사상에는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그리고 인간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한 논의가 필요없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이 명령하는 대로 행해야 함을 말한다. 바로 ‘무엇이 선한가?’라는 질문이 선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원하시는가?’가 바로 선과 옳음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주의 적 복종과 의무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윤리적 의무가 제의적이며 사회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계약사상이 담고 있는 윤리적 의무는 하나님에 대한 제의적 성실을 뜻하고 하나님에 대한 제의적 성실성은 도덕적 성실성을 동반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형식적 제의로 타락한 예배행위는 곧 이스라엘의 윤리적 실패와 직결되었다.
셋째, 계약사상 안에는 깊은 휴머니즘적 관심이 담겨있다. 계약사상에서 신 중심적인 사유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중심적 사유보다 한층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윤리적 결과를 낳았다. 즉 사회적으로 약한 자들의 생존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계약사상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또한 억압받던 족속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는 것도 강조한다.
넷째, 계약사상이 지닌 배타성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족속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자신들의 민족적 생존의 관점에서 해석하였기 때문에 계약사상은 민족적 차원에서 배타적이다. 그래서 이것은 윤리적 유연성을 제거하며 다른 이들과의 교제와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 비 관용주의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을 도덕적, 영적으로 우등한 것으로 말하면서 다른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게 하였다.
11. 예수의 윤리를 논하라.
공관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해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예수를 통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 또한 있다.
첫째, 예수의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이다. 예수는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바리새파나, 에세네파, 제롯당, 혹은 그 당대의 이스라엘 현실을 배경으로 일어났던 민족주의적 입장에 선 예언자적인 갱신운동 파에 속하지 않고, 옛 시대의 종말이 임박했다는 종말론적 설교를 했다.
둘째, 인간에 대한 완전주의 적 요구를 한다. 예수의 윤리적 명령들은 세상을 현실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고 있기보다는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삶을 살아갈 것을 명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은 이들에게 삶의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을 주기도 하였으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차원 높은 요구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완전주의적 윤리는 새로운 시대, 즉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내다보며 이에 응답하는 종말론적인 완전주의적 삶을 지지하는 윤리였다.
셋째, 하나님 나라 사상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는 곧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기이한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여기서 예수는 종말론적 실존의식을 불러일으키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될 것을 요구한다.
넷째, 신 중심적 윤리이다. 예수의 윤리적 관심의 일차적인 요소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어졌다. 이러한 윤리적 요구들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요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인간은 단지 회개와 복종으로 응답할 뿐이다.
다섯째, 사랑과 용서의 윤리이다. 예수의 완전주의적 윤리가 회개와 전적인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의식을 고조시켰다면, 그의 사랑과 용서의 윤리는 이러한 개인주의를 통하여 용서를 필요로 하는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예수의 윤리는 철저히 비타협적인 윤리로서 특정한 대상들을 향하여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제자직의 윤리로 보는 견해를 지지한다. 또한 예수의 윤리를 순수한 종교 윤리가 구체적 현실 속에서 관련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종의 타협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보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지지한다. 즉 사회, 정치, 가정,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독교 윤리가 의미를 지니게 하기 위해 기독교 윤리는 그 속에서만이 아닌 문화 문명과 관계를 지는 윤리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12. 어거스틴의 윤리사상을 논하라.
첫째, 창조의 신 하나님의 사상이다. 어거스틴의 하나님 이해는 선하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모든 전체의 창조주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런 하나님은 악과 관련이 없는 존재로서 지어진 창조물 또한 선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세계관에는 선-악의 이원론적 대립은 없다.
둘째, 인간의 실존 사상이다. 인간은 선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무로부터 창조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에게 의존된 존재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닮게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 과용으로 인해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였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하여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순례자로서 세상을 경명하고 오직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의 윤리이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카리타스라고 부른다. 이 사랑은 이 세상의 것들을 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사랑하는 사랑을 말한다. 즉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만이 인간의 궁극적 의미와 행복을 주는 것이다.
13. 루터의 윤리 사상에 대하여 쓰라.
루터의 윤리사상에는 전제되어져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은총에 의한 죄인의 의인, 기독교 윤리적 행위란 기독교인 됨의 근본조건인 은총에 의하여 의로워진 존재를 전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루터는 말한다.
둘째, 기독교 윤리적, 도덕적 행위는 믿음의 범주를 넘지 않는다. 윤리적 행위가 하나님의 은총의 행위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도덕적 행위가 믿음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중세의 덕론과 반대된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윤리사상,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힘입은 이들이 신을 위한 존재에서 변화를 받아 이웃을 위한 존재로서 살아가게 된다.
넷째, 인간은 의로운 존재인 동시에 죄인이다. 루터는 인간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긍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님의 긍정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머무는 것이 인간이다.
다섯째, 이중적 율법, 법의 신민적 용법 혹은 정치적 용법과 법의 신학적 혹은 복음적 용법이다. 율법은 이성적 범주 안에서 기독교인들과 비 기독교인들의 합의를 불러온다. 그래서 세상질서의 유지를 존속시키기 위한 범주가 된다는 의미에서 법이 정치적 용법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세상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 법을 칼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폭로하는 것뿐이지 인간을 구원시키진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한계 속에서 복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14. 칼빈의 윤리 사상에 대하여 쓰라.
첫째, 하나님의 창조물로서의 인간 - 칼빈은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 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광이 취소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으로도 회복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것은 당시의 알미니안 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의지와는 반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들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된 자들은 영적인 귀족주의적 의식을 지니기도 하였다.
둘째, 기독론적 윤리 - 칼빈의 선택적 구원론인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거절하고 마치 도덕 페기론적 경향을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함을 얻은 기독자의 삶에 대해 자세히 말한다. 그 핵심이 기독자의 자유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값진 대가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이웃을 섬기는 삶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이렇게 칼빈은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도, 은총의 결과도, 중생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도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윤리는 기독론적이다.
셋째, 감사와 복종의 윤리 -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복종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구원함을 얻은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감사와 복종의 삶은 성서적 규준에 따르는 삶으로 가룩한 성화의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고, 거룩한 백성들이 교제를 하는 삶이다.
넷째, 교회와 국가 - 칼빈은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모든 신앙의 사람들이 평생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또 구원받은 사람들은 자로서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을 법의 3의 용법으로 설명한다. 3의 용법이란 신자들의 거룩한 삶이 안내자로서 성화의 삶을 추진하는 추진력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교회의 역할과 더불어 정치제도의 필요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제도의 기능을 종교를 후원하는 일과 공공의 이익을 위한 시민적 정의를 지켜나가는 것으로 소극적으로 제한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향한 복종이 언제나 정치제도에 대한 복종에 우선 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칼빈에 있어 정치 제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신정정치를 더욱 단단하게 이루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15. 웨슬리의 윤리 사상을 쓰라.
첫째, 신앙과 이성 - 웨슬리는 신앙과 이성의 사람이었다. 그는 이전의 종교개혁자들인 신앙과 이성간의 갈등 속에서 이성보다는 신앙에 관심하였던 것과는 달리 삶과 신앙의 다원적 성격을 긍정적으로 이용하며 포용주의 적 논리 속에서 윤리적 실천을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둘째,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 - 웨슬리의 신학은 체험적인 귀납적 성격을 가진다. 웨슬리가 말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 앞서서 전 인류를 향하여 선행적으로 은총을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보편적인 사랑을 주신다. 이에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총 안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의 요구는 기독교 윤리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이것은 교회의 담을 넘어선 사회 윤리적 실천의 지평을 열었다.
셋째, 윤리적 신앙 - 웨슬리는 실천적인 윤리사상을 가졌다. 그는 전통적 신학이 종교적 관념과 제의의 개혁에만 관심함으로 구체적인 삶의 변화를 목적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웨슬리의 입장을 정적주의 적 신앙이나 도덕 폐기론적 경향과는 달리 실천과 참여를 강조하여 강한 세계내적 관심을 촉발하게 되었다.
넷째, 개방적 사유 - 보편적인 하나님의 선행의 은총을 말하는 웨슬리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거룩한 삶을 이루어내는 신앙의 힘’이지 기존 신학적 사유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교조주의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개방적 태도를 가졌다. 그러나 개방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통일성도 중요시 여겼다. 즉 ‘거룩함을 통한 일치’를 신앙인들에게 기대하였다.
다섯째, 사회윤리 - 웨슬리의 사회윤리 적 의식은 ‘휴머니즘적 인간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웨슬리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선행은총을 강조함으로써 상대적인 교회의 권위와 교조적 주장 밖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였다. 그래서 노예 제도 폐지운동, 감옥 선교, 병원선교, 노동조합운동을 했다. 즉 웨슬리는 사회를 위한 교회를 강조하는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과 이웃사랑에서의 완전 - 웨슬리는 성화와 완전을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완전에 이르는 여러 단계를 설명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바라는 마음을 일깨우는 선행은총, 의롭게 하는 은혜, 죄의 용서, 거룩하게 하는 은혜, 변화의 과정, 온전한 성화이다. 이런 모든 단계는 결국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윤리적 성숙을 신앙적 의무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16. 책임의 윤리를 논하라.
초기 공동체와 중세를 거쳐 오면서 기독교는 개인주의적 경건주의로 고착되었고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이해가 윤리적 정적주의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나 19C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즉 종교가 정치 사회적 영역까지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이들을 기독교 자유주의자라고 지칭하는데 인간성에 대한 신뢰와 복음의 이상을 가지고 사회적 현실을 뛰어넘는 이상적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현실 속에서 그렇게 쉽게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지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세계 1,2차 대전으로 구조적인 악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둔함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의 의미는 현실정치, 경제영역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앙이 관여하려는 책임의 윤리가 엿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책임의 윤리적 관점에서 모든 역사 안에서의 운동들의 상대성을 인정하여 기독교 윤리 또한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고 상대적인 요건에서 최선의 역사적인 정황에 대한 도덕적 요구를 기독교 윤리가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하였다.
17. 기독교 윤리학의 필요성을 쓰라.
(1) 상황적 필요성: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기독교윤리의 요청
한국교회적 상황은 기독교신앙 내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앙과 삶의 이원적 분리'의 문제가 심각한 점으로 결론지어진다. 그것은 개인의 내적 경건이 삶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안에서의 신앙과 세상안에서의 삶과의 불일치가 그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상적 측면에서 볼 때, 급속한 교회성장과 그로 인한 기독교인구의 증가, 그리고 한국사회에서의 기독교인의 사회적 영향력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기독교신앙의 동력이 개인적, 사회적 삶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것은 결국 신앙과 윤리의 이원적 분리의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앙없는 윤리'를 강조하려는 자유주의적 신학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적인 신앙구조에서 빈번하게 드러나는 '윤리없는 신앙'이 문제이다. 따라서 신앙과 윤리, 혹은 신앙과 삶의 이원적 분리를 극복하는 것이야 말로 한국교회적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그것은 곧 기독교윤리의 절대적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이원론적 신앙구조: 믿음과 행함, 교회와 세상, 하나님과 이웃으로 양분하여 신앙생활 구조가 분리되어 있으므로 해서 윤리적 불균형을 가져 왔다.
그럼 왜 한국보수교회는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하여 '행위없는 믿음'만을 지닌 크리스챤을 양성하게 되었을까? 왜 오늘의 한국교회는 윤리가 부재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을까?
a.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오해
종교개혁의 기본명제의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이다. 모든 인간은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져주시는 은총을 믿음으로써만(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공적과 인간의 선행을 구원에 대립되는 항목으로 간주하여 성도의 윤리적 삶 자체를 마치 경시하거나 불필요한 것처럼 설교해 왔다.
-한국보수교회목회자들의 설교에서 실천적인 주제(이웃사랑, 구제)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실천적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위한 실천주제이다.
-더구나 윤리적 주제에 해당하는 성경본문도 신앙고백적 맥락에서 해석되고 설교된다는 것이다. 삭개오의 회심을 키가 작은 그가 예수를 만나기를 열망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측면에 강조를 두어 세관원 삭개오의 비윤리적 삶에 대한 '사회적 회개'에 대한 부분을 삭제해 버린다.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구원을 결정한다는, 믿음으로 오는 구원과는 배치되는 본문이다. 그럼에도 구원에 있어서 행위론적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이 곤혹스런(?) 텍스트를 구원받은 자들은 이웃에의 실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정론적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본문의 급진성을 희석시켜버린다.
b. 이웃관계보다는 하나님관계에 편중된 신앙
기독교는 '하나님과 나'사이의 수직적 문제이지 '나와 이웃'과 수평적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중심이냐, 인간중심이냐,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 복음화냐 인간화냐의 이원적 양자택일과 대립적으로 분리하여 양자택일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관계가 하나님관계를 결정짓는 경우가 성경에 빈번히 등장한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미가6:6-8
c. 사적 신앙으로서 기독교
개인주의적 신앙: 나의 영적 구원, 우리들만의 천국, 너희들의 예수를 만드는 신앙문화. 사회변화의 개인중심적 사고: 개인이 변화되면 사회도 바꿔진다.
개교회중심의 교회구조, 신앙의 사유화 혹은 사사화(私事化), 교회와 기독교신앙의 사회적 공공성의 의식이 상실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공공성의 결핍은 대개 섹트적 종교집단에게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d.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칼빈주의는 하나님주권신학이다. 신학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구원의 근원과 과정, 그리고 모든 결과가 신적 주권으로 귀결된다. 이 신학은 "만물이 주에게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6)를 고백하는 신학이다. 그런데 하나님주권의 강조는 상대적으로 인간행위의 책임성의 약화를 초래한다. 윤리는 인간의 책임영역이다. 물론 기독교윤리는 신적 은총, 즉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사건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인간편의 윤리적 요청이 중시된다. 따라서 하나님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대칭적 분리의 틀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주권이 인간의 책임적 행위를 추동하는 상호연관적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정통주의 구원론이 펠라기안적 신인협력설을 배격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배격하였다면, 기독교윤리는 신적 주권을 전제로 하는 인간의 책임영역에의 강조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e. 인간의 전적부패
인간의 전적 부패교리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어떤 능력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개혁주의 고백서들이 대체로 인간의 전적부패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진술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중에 죽게 되었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과 부분이 전적으로 더렵혀졌다(wolly defiled)"고 기술하고 있다(VI,2). 또한 "전적으로 모든 선에 대한 의욕을 상실케 하며 무능해지며, 그 모든 것에 반대하게 하며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원래적 부패로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발생한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죄의 상태로 전락한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영적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wolly lost)(IX,3). 도르트신경도 인간은 "타락한 결과로 모든 사람은 죄중에서 잉태되었으며, 진노의 자식이며, 구원받을 만한 선을 행할 수 없고, 악에 빠지기 쉬우며 죄속에서 죽을 죄의 노예로 출생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진술은 이와 관련된 다른 성경적 진술과 일치한다(시124:3; 렘17:9;요8:34; 롬8:7)
그러나 정통개혁신학은 비록 부패하였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훼손되었으며, 그 잔여분이 남아 있음을 강조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천상적 영역과 지상적 영역에서의 인간의 능력을 구별하면서, 전자의 영역에서 자연인이 할 수 있는 어떤 긍정적인 것이나 선도 존재하지 않으나 후자의 영역, 즉 지상적 영역에서 인간은 정부, 가계운영, 공학기술, 인문과학에서의 일반적 능력과 더 나아가 어느 정도의 양심과 상식, 자연적 본능, 이성, 정의감과 평등감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연적 재능들은 죄로 인해 부패되었지만 소멸되지는 않았으며,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인간의 탈선과 타락에도 "모종의 섬광처럼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II.2.17). 그런 점에서 칼빈주의 5대교리중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 교리는 본래 칼빈이나 도르트신경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17.18세기에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전적부패"의 본래 의미는 인간 본성가운데 어느 부분도-인간의 이성, 의지, 육체까지도-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며,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Cornelius Plantinga는 도르트신경이 전적부패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전적 부패라는 표현은 칼빈주의자들로 하여금 과격한 염세주의자 또는 인간 혐오주의자로 여기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도르트신경은 어느 곳에서도 비중생자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만 항상 행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중생자라도 선과 악의 차이를 인식할 알고 있고 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그 자신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악만을 일삼는 천박한 벌레가 아니다. 죄로 타락하였으나 인간은 여전히 선을 행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선행과 선을 행할 능력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는 없다. 물론 전적부패교리는 인간의 근본적인 선행능력을 의문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연인도 탁월한 선행을 베푼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
f. 피안적 종말사상
오도된 종말사상으로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나라 사상이다.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이 부정되면, 이 세상이 갖는 의미가 상실된다. 세상은 불타 없어져 버릴 장망성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거나 세상에서 책임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신속히 이곳을 탈출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나 기독교세계관 혹은 문화관의 입장의 종말관은 세계멸절의 종말론이 아닌, 세계변형(transformatio mundi)의 종말론이다. 그것은 세상이 불타없어질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속이 세계문화 전영역을 새롭게 창조하는 새창조의 종말이자, 점진적이고 계속적인 과정적 구원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타락한 세상문화를 새롭게 함으로 실현되며, 그러한 종말관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할 수 있는 종말관이다.
(2). 원론적 필요성: 신앙과 윤리(Glaube und Ethik)의 상관성
a. 신앙과 윤리의 통전적 일치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Religion) 이상이다. Bonhoeffer는 일찍이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종교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신앙의 근본적인 본질은 종교적 행위, 즉 '신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포괄적 체계이다. 신앙은 삶이다! 기독교는 예배, 기도, 성경읽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됨(Being a Christian)을 종교인, 즉 주일교인(Sunday Churchman)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를 삶이 없는 반쪽 기독교, 반쪽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버리게 한다. 기독교는 삶이다! 흔히 카톨릭은 선행을 강조하여 윤리가 강할 수 밖에 없고, 개신교는 윤리보다는 믿음을 강조하여 삶이 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종교개혁적 신학(Reformational Theology)은 믿음과 더불어 더욱 철저한 삶(윤리)을 강조한다.
루터는 말하기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안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살고, 사랑을 통해 그의 이웃안에서 산다. 그는 신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사랑을 통해 자기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다시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그의 사랑안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삶 전체를 포괄지우는 것이므로, 그것은 신앙과 삶의 통전성과 일체성아래 표현되어져야 한다. 신앙없는 삶은 근거없는 기독교가 된다면, 삶이 없는 신앙은 공허한 기독교가 되고 만다. 신앙은 기독교진리의 근원이자, 토대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삶은 그 신앙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윤리는 신앙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 믿음은 그에 상응하는 행위(삶)를 수반해야 한다.
기독교는 단지 제의(Cult)의 종교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은 단순한 교의적 체계, 교리적 사실에 대한 지적 동의나 수긍(하나님의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과 부활, 재림 등)만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과 헌신의 삶을 원하신다. 기독교진리의 중심체계에 이 두 요소의 균형성이 분명하게 보여진다.
b.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마22:36-40)
하나님사랑은 하나님과 그 백성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수직적 차원이라면,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다른 이웃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수평적 차원의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신본적(神本的) 측면과 이웃을 향한 인본적(人本的) 사항과의 결합으로부터 그 본질의 구현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향한 관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내어 결국 인본주의를 가져온다든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핑계로 이웃을 향한 관심을 멀리 하려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우리를 어떠한 분리주의적 형태의 신앙을 말한 적도 가르친 적도 없다. 성경적 신앙은 믿음과 윤리의 일치와 통일을 강조한다.
c. 믿음과 행함(야2:14-26)
믿음은 우리밖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Gottes Werk)이라면, 행함은 우리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일(Werk des Christen)이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는 하나님의 의, 신적 의라면, 행함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의, 옳음이다.
d. 하나님의 요청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윤리적 책임
성경은 하나님의 요구와 요청으로 가득차 있다.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 여기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에는 믿음에 대한 요구와 윤리에 대한 요구가 동반된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섬김, 경배, 영광돌림)과 함께 하나님앞에서의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앞에서의 삶'(coram deo)이다. 그것은 하나님앞에서의 삶의 책임적 삶을 요청받는 동인이 된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윤리적 삶을 요청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존재에 있어서,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닮은꼴이다. 하나님과의 도덕적 유사성을 갖는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해질 책임이 있다. 거룩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사랑은 우리의 삶안에서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보여준 그 사랑은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에서 보여주어야 할 근거가 된다.
따라서 기독교윤리학은 '상응의 윤리'(Entsprechungsethik)이다. 하나님의 존재적 성품은 그의 백성의 삶안에서 윤리적 일치와 윤리적 닮음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보이신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확인)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의 요구의 근거가 된다.
18. 기독교 윤리학의 요소들을 쓰라.
(1) 인간과 행위
윤리의 문제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이며, 이는 인간의 행동, 즉 인간의 현존재 전체에 관계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행동의 내적 의미와 법을 찾게 되고, 여기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현존재에 대한 언급은 사회학적 이해와 기독교 윤리학적 이해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먼저 사회학적 이해는 인간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전제 아래 출발하지만 실제로는 인간과 사회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P.Berger는 사회적 과정을 外化(exter naliza-tion)와 객관화, 그리고 내화(internalization)의 3단계로 보고, 1단계는 사회가 인간에 의하여 형성되는 단계요, 2단계는 사회가 하나의 독자적인 현실(reality)이 되는 단계이며, 3단계는 인간이 사회에 의하여 형성되는 단계이다.
이에 비해 성서적 이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인간과 사회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 관계되는 개념임과 동시에 사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인 일치성을 받을 때 존재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은 이러한 성서를 제 1자료로 하여, 성서 안에 나타난 관계의 개념으로부터 인간이해를 출발한다.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두 가지 존재 양식, 즉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서의 인간과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사회학적인 과정의 이해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나, 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고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인간의 행위는 전통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목적론적인 주지와 법에 기초한 의무론적 主旨의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으나, 목적론적 주지는 객관적 목적을 제시하기가 어렵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적합한 수단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때때로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을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난점을 안고 있고, 반면 의무론은 행위 의무론이든 규칙 의무론이든 각자 상호간에 결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제 3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책임주의적 주지론이 요구된다. 책임적인 윤리는 매일 당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정확히 해석하려고 노력하며, 구체적인 상황에 적합한 응답을 하려고 노력한다.
(2) 규범, 콘텍스트, 결단
규범은 “사유, 의지, 감정 등이 일정한 목적이나 이상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과 원리”이며, 콘텍스트는 “어떤 사건이나 인격에 적합한 총체적인 상황이나 배경이나 환경”을 말한다. 또한 “결단한다”는 것은 어떤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며, 이는 여러 가지 주지 아래서 가능하다. 저자는 여기서 규범과 콘텍스트의 상관관계가 미치는 결단의 영향을 살피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의 모형
K. Barth와 D. Bonhoeffer에 의해 시도된 접근 방법으로서 하나님의 명령을 규범으로 하는 결단은 상황의 요청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부터” 오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명령의 명령법적 양태를 하나님의 요청(claim), 하나님의 결단, 하나님의 판단으로서의 명령으로 구분하는데, 이 명령의 의미는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요, 다른 하나는 동료인들에게 대한 책임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은 “허락”이며, “자유”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본회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임통치의 콘텍스트 안에서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본회퍼 역시 “한계상황이나 ”무조건적 필연“을 남겨둠으로써 행위 의무론의 주지를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있다.
2) 아가페 모형
R. H. Niebuhr와 J. Fletcher에 의해 시도된 접근 방법으로서 이들에게 나타나는 규범은 사랑(Agape)이다. 니이버는 상호 의존하는 사랑과 아가페의 근사치로서의 정의를 말하면서 이를 통해 구체적인 콘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다. 이에 비해 플레처는 ?상황윤리?적인 측면에서 사랑만이 이성과 함께 파트너십을 가지고 작용하는 가운데 선을 이룬다고 주장하나, 윤리적 결단 수행에 있어 보다 넓고 복합적인 인간 상호작용의 사회적 인과관계를 쉽게 간과함으로써 “사랑 단일론”에 빠지고 말았다.
3) 신국 모형
W. Rauschenbusch를 주축으로 하는 사회복음 주창자들이 시도한 접근 방법으로 신국이라는 목적을 설정하고 인간은 그 신국을 실천해 가는 자로서 그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신국 모형은 책임 사회 건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신국 자체를 지상에 건설하려 함으로써 낙관적인 꿈을 이루려 하고 있다.
4) 코이노니아 모형
P.Lehmann에 의해 도입된 모형으로서, 코이노니아를 윤리적 규범으로 보고 이를 크리스천의 삶의 출발점이요 기독교 윤리학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 모형이다. 레만은 크리스천과 비 크리스천을 비교하면서 이들이 만나는 곳은 자연법의 합리적인 통찰이 아니고, 공통으로 당하는 윤리적 궁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신학적인 논의에 머무를 뿐 실제 사회에서 실효를 거둘 구체성이 없으며, 모든 것을 코이노니아로 귀결시키면서 도덕적 의무를 약화시키고 있다.
5) 소망의 모형
J. Moltmann에 의해 전개된 모형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에 기초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소망을 윤리의 규범으로 제시한다. 이 소망의 윤리는 가능성의 세계(콘텍스트)를 새로운 세계, 즉 화평의 세계로 변형시킴으로써 수직적인 면을 수평적으로 옮겨 놓으려 하였다.
규범과 콘텍스트의 관계에서 규범이 콘텍스트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위에서, 적어도 콘텍스트 밖에서 온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규범은 콘텍스트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19. 정의에 대하여 논하라.
(1) 전통적 이해
정의는 기독교 윤리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윤리학에서 정의론을 다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합법성 안에 있는 정의’를 완전한 덕으로 보면서 그 정의 안에서 모든 다른 덕을 이해하고 있으나, 이러한 덕 전체를 포함하는 정의와 구별되는 정의인 부분적 정의, 즉 공평성안에 있는 정의를 말하고 있다. 부분적 정의의 형태는 분배에 있어서의 공평성과 조정으로서의 공평성의 두가지 개념으로 나누어지며, 이는 경제 생활이나 정치적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칸트는 정의를 한사람의 의지가 자유의 보편적 법칙에 일치하여 다른 사람의 의지와 결합될 수 있는 조건들의 집합으로 보고, 이 정의를 두가지 의미에 비추어 사용하고 있다. 법과권리가 바로 그것인데, 전자는 선험적 원리에만 근거하는 자연법과 입법자의 의지로부터 오는 실정법으로 구분되며, 후자는 다른 사람들을 매는 도덕적 능력(moralische Vermogen)으로서 다시 본유적 권리와 획득된 권리로 구분된다.
롤스(John Rawls)는 그의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정의의 개념을 “공평성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라 부르면서 이 정의의 두가지 원리로서 기본적 자유에 대한 평등의 권리를 가지는 것과 공공에게 공개된 위치와 공직에 부속되도록 정리되는 것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것들은 주고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권리와 의무에 부가된 것을 결정하고 사회적 경제적 이익의 분배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상의 전통적인 들의 공통점은 정의의 첫째 원리로서 평등성을 내세우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례적 정의는 서구사회의 현실적 삶의 원리로 나타나고 있으며, 롤스의 사회적 경제적 분배의 원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들의 강점은 정의의 원리를 합리성 또는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지만, 이 인간의 이성이 자연법 또는 신적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2) 기독교 신학자들의 이해
이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먼저 P. Tillich는 “분배의 정의와”와 “조정의 정의”라는 용어의 구별이 타당한지, 그리고 정의가 가지는 평등성의 요소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틸리히에게 있어 정의는 “존재의 형식”인데, 이를 나타내는 정의의 원리들은 그 기본적인 원리와 정의의 위협이 요구되는 구체적인 상황을 중재한다. 이 중재의 원리는 ‘적합함’의 원리, ‘평등성’의 원리, ‘자유’의 원리, ‘공동체’의 원리의 네가지가 있다. 그의 정의는 세 형식(form)을 갖는데, 존재의 힘에 기초한 요청, 비례적 정의, 변형 또는 창조적 정의가 그것이다. 특별히 틸리히는 창조적 정의를 ‘재연합하는 사랑의 형식’이라고 부르면서 그 사랑은 “분리된 것들을 연합시키려는 추진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의와 사랑이 개인적 관계에서 갖는 기능을 “듣는 것(listening)”과, “주는 것(giving)”, 그리고 “용서하는 것(forgiving)”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개인적 관계는 공동체를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사랑, 즉 사회적 관계로 확대되어진다. 그는 궁극적으로 정의와 사랑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임을 밝히면서 그것들은 인간 실존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둘 사이에는 갈등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일치만 있으며 인간의 정의와 사랑의 궁극적 근거가 된다. 틸리히는 인간의 정의의 근거를 하나님 안에 둠으로써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자연법의 기초를 좀더 확실하게 하였다.
E. Brunner는 “정의와 사회질서“에서 정의론을 논하고 있는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정의 즉 단순한 평등성의 정의와 비례적정의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전자는 사적인 법의 영역에, 후자는 공적인 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을 비판한다. 그는 평등의 근거를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의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하면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전제 아래 그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너(thou)”라고 부르면서 모든 사람을 책임적 존재에로 부르셨다고 주장한다. 불평등의 근거 역시 두가지 견해에서 검토하는데, 하나는 불평등을 처음부터 비 본질적으로 보는 견해로 스토아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를 결정적이라고 보는 견해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론과 인간사이의 우열과 계급을 논하는 사상들을 들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불평등 사상은 이 두가지 모두 배격하고 있으며, 각 개인은 개체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의존하고 완성되는 존재로 본다. 브루너는 정의와 자연법과의 관계를 자연법의 세 전승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기독교 이전에는 객관적인 성격을, 근대에는 주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을 가졌으나 기독교에 있어서 자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창조적 명령이다. 정의와 사랑의 관계에 있어 정의의 본성은 사랑의 본성과 철저하게 다르지만 이 둘 모두 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사랑은 용서하는 하늘의 법인 반면, 정의는 공평한 지상의 법이며, 가장 구체적인 상황에서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정의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3) 책임 윤리적 이해
책임 윤리의 입장에서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가드너(Clinton)는 브루너가 양자의 이원론을 과장되게 강조한다고 지적하고 사랑은 정의의 성취이지 대치물이 아니며, 정의는 사랑의 필연적 도구임과 동시에 사랑은 정의의 궁극적 규범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오만과 이기심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오만은 힘의 오만과 지적인 오만, 도덕적 오만, 영적인 오만으로 나타나며, 이기심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과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그리고 자기 정당화에서 나타난다. 인간 사회는 이러한 오만과 이기심의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따라서 절대적 평등이란 사실 실현 불가능하고 다만 그것에 대한 최대 접근치에 이르도록 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례적 정의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인간 사회에서 오만과 이기심을 최대로 억제하고 공동체의 공익을 위한 최대의 노력을 하게 하는 정의이다.
20. 자유에 대하여 논하라.
(1) 성서에 나타난 자유
구약 성서에 나타나는 자유는 주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 반면, 신약에서는 더 적극적인 “얽매임으로부터의 자유”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법을 변형시킨 분이시다. 그는 법보다는 사람이 더 귀중함을 일깨우고 있으며, 사람의 생명이 문제가 될 경우 그는 법을 변형시킬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며, 우리는 그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의를 행하는 신분이다.
(2) 종교 개혁자들에게 나타난 자유
루터의 자유는 두 가지의 전제, 즉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았다는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두 가지는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크리스천의 자유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뿐이며 이 복음은 믿음으로만 받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칼빈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의 자유는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써 법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며 이는 크리스천의 삶 전체가 경건의 연습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둘째 부분은 양심의 자유가 법의 강제 없이 기꺼이 복종하는 것이며, 셋째 부분은 무관심한 것들(고기, 술, 음식 등)에 대해 우리가 어떤 종교적 의무로 매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에게 있어 크리스천의 자유는 영적인 것이며, 이 자유는 법의 제 3 사용을 분명히 함으로써 법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고 있다.
(3) 라인홀드 니이버에게 나타난 자유
니이버에게 있어서 자유는 인간의 삶에 창조적인 힘을 줌과 동시에 파괴적 가능성이 부여된 고유한 자유이다. 이는 자연법이나 이성의 법을 초월할 수 있고 동시에 인간의 실존의 구조에 도전할 수 있다. 인간은 이성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는 자유를 가지며,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그의 고유한 합리성에 의해 또는 자연적 인과율에 의해 해석하려한다. 르네상스와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 자유의 방향에서 단순히 두 개의 다른 움직임이다. 이 두 움직임은 후자가 기독교의 조건안에서 개체성의 한정된 발전을 나타내고 전자인 르네상스는 기독교 안에 놓여진 한계를 넘어서 개체성의 발전을 나타내지만, 현대인의 사상적 발전은 개체성의 기독교적인 기초를 파괴하였다. 니이버는 칸트의 관념론에 기초한 자유의 개념을 반대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합리적인 과정을 초월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매여진 한계가 있는 선택의 자유를 갖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사회적이며 합리적인 피조물이다. 니이버에 의하면 실재론자들은 인간의 자유가 공동체에 미치는 분열된 결과를 강조하며, 관념론자들은 인간의 합리적인 자유를 주로 인간의 사회적 의미의 한계를 연장시키고 그 충격의 혼란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창조적 능력에 의하여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인간의 유한한 실존의 한계를 잊을 수 없으며, 인간의 자유는 개인과 공동체의 고유하고 변증법적인 관계에 기여한다. 니이버는 이러한 자유를 위한 법으로서 “사랑”에 호소하는데 사랑없이 이러한 자유는 기독교 윤리학에서 될 수 없는 가능성일 따름이다.
21. 원리와 행위에 대하여 논하라.
(1) 책임사회의 구조
H.D.Wendland 교수는 세가지 관점에서 책임사회를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로 책임사회의 요소는 협력이라는 관점과, 책임사회는 사회조직의 목적으로서 크리스천의 사랑은 이러한 책임 사회가 형성되도록 요구한다는 관점, 그리고 세번째는 기독교 윤리의 요청 즉 기독교 윤리는 단순히 크리스천 공동체만을 위하는 윤리가 아니며 세계를 위하는 윤리라는 관점이다. 이는 곧 크리스천이 세상을 위하여 봉사할 책임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협력(partnership)의 사상과 연결된다. 이 협력은 사람들의 공존 상태와 협동 상태, 그리고 공동참여의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2) 책임 사회적 활동
소극적인 면에서 책임사회는 사회에서의 협력을 통하여 공존과 공동참여의 생활양태를 형성함으로써 경건주의와 맹목적 성서숭배를 배격한다고 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개인 그 자체와 사회적 존재를 극단적으로 분리시키려는 것 때문에 책임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으며, 성서의 구절을 법조문화함으로서 그 진의를 상실케하는 맹목적으로 성서를 숭배하는 입장 역시 오늘날 사회속에서 살아 있는 복음이요, 책임사회를 이끌어 나갈 말씀의 역할을 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반면 적극적인 면에서 책임사회를 위해 크리스천은 바른 증언이 필요하며, 인간의 심성 개조를 위해 적극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크리스천은 사회구조의 변혁에도 참여하여야 함과 동시에 책임사회를 위한 정의를 추구하여야 한다. 더불어 책임사회를 위한 사회정책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 사회정책은 소극적인 면에서 죄를 억제하는 정책이 되어야 하며, 적극적인 면에서는 정의의 실천을 위한 사회정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22. 결혼과 가정과 성에 대하여 논하라.
1) 결혼
성서의 결혼제도는 남녀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성적으로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성서에는 일곱 가지의 결혼 형태가 등장하는데, ① 여가장 결혼 ②부가장 결혼 ③ 일부다처제 결혼 ④ 일부일처제 결혼 ⑤ 족외혼 ⑥ 동족 결혼 ⑦ 수혼 등이 있으나, 일부일처제외에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남녀는 하나님 앞에서 지위, 목표, 은총이 같도록 창조되었으며, 성서가 말하는 결혼의 의의는 우주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적인 관점에서 결혼의 의미는 한 남자가 그의 아내와 정신적으로, 성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삶의 영역을 이루며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결혼을 소명(vo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사적인 성격을 가짐과 동시에, 두 가정의 대표자이자 두 가족의 언약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다. 윤리학적인 입장에서 볼 대 결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 형태임과 동시에 남녀가 평생의 반려자로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존재양식이다.
2) 가정
오늘날에는 종래 까지는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형태의 다양한 가정이 등장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랑이다. 물론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문제가 되겠지만, 특별히 그러한 비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은 “사랑”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회현상이란 사회관계의 고형화이며, 가정은 분명히 사회현상이다. 이러한 가정은 몇 가지 특색을 가지는데 첫째, 가정은 모든 사회에서 형식적으로 발전되는 사회제도이며, 둘째로 가정은 더 큰 사회 구조의 도구적 기반이다. 셋째로 가정은 많은 기능이 서로 분리되지만 사실상 분리된 것은 아니다. 사회현상으로서의 가정은 생산과 육체적 지속, 보호와 안정, 교육과 사회화, 레크리에이션, 신분제공, 애정을 주는 것 등의 과업을 가지며, 더 큰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모형으로서 나타난다.
성서에서 가정은 부수적 개념을 가지며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이 함께 속해있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바압(Otto Baab)교수는 가족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기타로 생각하면서 가정의결속에 대해 세가지 측면에서 말한다. 첫째, 아버지는 권위의 상징이며 둘째,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으나 온 가족은 서로를 위하여 보호할 책임을 가지므로 결속하였다. 셋째로 가족의 결속은 종교가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기독교 윤리적인 관점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한 도덕행위는 ‘복종’에서 출발한다. 반면 부모가 자녀에 대한 도덕행위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교양과 훈계는 인간성회복이며, 부모는 그 자녀들에게 인간성 회복을 도와야 한다. 이러한 인간성의 회복은 오만과 이기심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부모는 자녀가 사회에서 행동원리를 갖고 사회를 결속시키는 도덕행위를 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3) 성
가정에 있어서 성의 역할은 남편과 아내의 일치성의 확인이라는 측면과 종족보존이라는 측면을 갖는다. 이는 오직 두 사람만의 배타적 관계이며,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정복자가 아니다. 이는 성적인 상호의존이며, 따라서 부부는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였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결혼에서 성의 다른 역할은 종족보존인데, 부모는 이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그들을 바로 인도해야할 책임을 가진다.
혼전 성관계에 있어서 제기되는 중요한 점은 성숙성과 사회적 관심과 자체의 통전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 플레처는 두 가지 통용되는 태도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전통적 입장으로서 혼전 성관계를 금지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전통의 입장으로서 성관계가 사악하거나 악의에 차지 않는 한 비도덕적이 아니라고 보는 태도이다. 여기에 대해 그는 자신의 윤리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데, 먼저 종교적 입장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면서 성서에 혼전 성행위를 분명하게 표시한 곳이 없다고 주장한다. 플레처는 인본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긍정도 할 수 있고 부정도 할 수 있으나 상황에 따라 어느 하나의 입장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크리스천들로서 혼전 성행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휴(Joseph Hough, Jr)교수는 이를 세가지 측면으로 비평하는데 첫째로, 플레처가 반대한 규칙 “ 결혼하지 않고는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정상적 성생활을 하기 위한 하나의 지침이며, 둘째로 결혼이 상호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며 그것이 성사될 때 하나의 역사를 가진다는 점에서 성관계 역시 상호간의 이해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줄 수 없는 것이다. 셋째로 상호간에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참된 내어줌과 참된 마음이 서로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인간적인 행위인 성관계는 타자의 현재뿐만 아니고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성행위를 결혼의 범위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행위를 안내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공동생활의 공익과 질서를 육성시킴으로써 참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발휘케 한다고 할 수 있다.
23. 일과 직업에 대하여 논하라.
세속적 일과 직업에 대해 크리스천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성서에서 말하는 일의 개념은 직접적이며 포괄적이다. 히브리인들은 손으로 하는 노동을 존중하였고 무척 가치 있게 여겼다. 다른 한편으로 일은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된다. 특별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행위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富의 청지기가 되었고 동시에 그 이웃의 종인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직업은 하나의 소명(καλ?ω)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소명은 부름을 받은 자가 부르는 자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소명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위한 일꾼임과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자이다. 또한 일은 다르다 할 지라도 같은 분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모두 다 평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착취하거나 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또한 부름을 받은 자는 공동체를 위하는 일을 해야 하며,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일함으로써 부르신 자를 기쁘게 해야 할 것이다.
개혁자들의 직업관을 살펴보면, 먼저 루터는 보수를 받고 일하는 것과 하나님의 부름을 병합시켜 직업이라는 말보다는 소명(召命) 또는 천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지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소명은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생계 유지의 방편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폭넓게 도움을 주는 범위로 확대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성직, 결혼, 지상의 정부 등 셋으로 보고, 소명은 이 세 질서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세 질서 위에는 사랑이 있으며, 사랑은 소명으로 요구되는 모든 것을 행하고 참과 감당하게 하는 내적 자발상이다. 칼빈의 소명 개념은 루터와 본질적으로 같지만, 우리가 삶의 행위 가운데 하나님의 제한을 생각없이 범하지 않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자기의 특정한 삶 가운데 의무를 갖게 했으며, 그것의 다양한 양태가 소명이라고 하였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생활의 동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하나님의 역사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 부르심의 열매가 행위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일은 인간이 하나의 피조물로서 자기의 실존을 능동적으로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봉사자인데 그 봉사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사람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다른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봉사이다. 바르트는 소명과 일의 관계를 봄에 있어, 소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루터와 일치하지만, 일 자체를 하나님의 가면임과 동시에 소명이라고 보는 루터와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부르심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에밀 브루너에게 있어서 일은 창조의 질서에 속한다. 브루너는 일해야 하는 이유를 첫째로 “정신과 육체의 연합으로 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둘째 공동사회 안에 잇는 한 인격으로 창조된 자이므로 사회를 위하여 일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브루너는 루터와 같이 일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보고 맡은 일을 하나님의 “가면”으로 보면서 정신 우위나 물질 우위의 극단성을 극복하는 면서 인간의 공동체성과 봉사 정신에서 나오는 윤리체계의 확립에 큰공을 세웠다.
일과 소명에 대한 책임윤리의 입장은 성서의 전통과 해석을 크게 달리하지 않으며, 일이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할 때 자유 가운데서 응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응답으로서의 일은 수평적 차원으로도 표현되며,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 크리스천에게는 일이나 직업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며, 그것은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직업에 대한 보람을 느끼는 것, 직업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남에게 해가 되는 직업을 시정하는 것이다.
24. 국가에 대하여 논하라.
1) 국가의 성격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국가의 성격은 그것을 창조의 질서로 보느냐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Helmut Thielicke는 국가를 창조의 질서로 보는 입장으로서 국가가 타락된 세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 국가의 실천이 ‘재판과 사면’에서 나타난다면 무정부가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다 긍정적으로 정부의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하의 국가를 말함으로써 국가의 절대화를 반대하게 되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개인의 독재나 전체주의 구조의 국가는 용납되지 않는다. 이 국가의 성격을 신학적 윤리적으로 규정하면 첫째로 국가의 권위는 창조 때부터 주어져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으며, 위로부터 온힘을 사용하는 권위를 가지고 실제로 악을 억제하지만 그 재판으로서의 억제는 사랑으로 제한을 받는다. 또한 국가는 악의 억제를 위해 힘을 사용할 수 있으나 사랑으로 제한 받지 않을 때, 힘의 무질서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국가의 힘은 두 가지 면(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위 / 타락된 세계질서를 창조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양면속에서 힘의 두 가지 제한성이 요청된다. 그것은 제도 존중주의를 배격하는 것과 그 힘이 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지 목적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창조의 질서는 없고 다만 보존의 질서만 있을 뿐이다. 본회퍼의 국가는 “하나님께로부터”와 관계되는 점에서 틸리케의 창조질서로 본 국가와 비슷하나, “그리스도를 위하여서만”으로 한정함으로서 차이가 있으며, 사악한 자들을 벌한다는 점에서 틸리케의 재판사상과 비슷하나, 국가가 예수그리스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그의 목적을 위하여 봉사하는 선행을 포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본회퍼는 국가의 기반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둠으로써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죄에서 유래되었다는 국가 개념의 약점을 극복하려 하였다. 그는 이런 논리에서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에 입각한 독재정권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윤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창조의 질서와 보존의 질서가 서로 완전히 독립되는 것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서로 보완되어야 하고 창조의 질서에 근거한 국가 이론은 보존의 질서에서 국가의 기반인 예수 그리스도로 항상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2) 국가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
크리스천의 국가에 대한 태도를 기독교 윤리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철저한 평화론과 혁명 신학적 입장, 책임 윤리적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경우의 표본이 될 수 있는 요더(J. Yoder)의 저서 ?예수의 사회윤리?에 의하면 교회는 정부에 반기를 들어야 할 것인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없으며, 다만 정부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자기 직무를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다. 요더는 결국 어린양의 전쟁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다를 것을 호소하는데 이것이 어린양의 승리의 고난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의 태도이다. 둘째 경우는 퇴트(Todt)는 새로운 대책의 통칭인 쇼올 교수의 “혁명의 신학”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그 개념을 분석 검토하고 있는데, 쇼올의 혁명이념은 “사회제도와 구조속에 내포된 부당한 억압요인들을 영원히 말살시키고 기존 체제의 잔재들을 극복하자”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세번째로, 저자는 책임 윤리적 입장에서 창조의 질서와 보존의 질서를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는 혁명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책임 윤리는 크리스천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그의 사랑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그의 최대 가능성으로 가장 가깝게 접근해 가는 것이다.
25. 교회에 대하여 논하라.
1) 교회의 사회적 목적
R. Niebuhr는 교회의 목적을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이버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공통된 질(common quality)을 갖지 않는 두 개의 다른 덕이며, 그것은 다만 하나의 공통된 원천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은총이며, 여기서부터 교회의 사회적 목적, 즉 사회를 위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2) 사회 안에서 교회의 존재양태
니이버에게 있어 교회는 세상과 접하는 행동가운데서 살고 자체를 정의하지만 세상의 대상이 아니라 동료이다. 니이버에게 있어서 공동체는 그것에게 형태와 훈련과 표현과 공동행동의 가능성들을 마련해 주는 어떤 제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내적 삶은 외적인 구체화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제도의 교회가 실패하는 것은 내적인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제도적인 교회와 크리스천 공동체는 세상에서 공존해야 한다.
3) 교회의 세상을 위한 책임
니이버는 사회를 위한 교회의 책임을 그 기능에 따라 사도이며, 목자이며, 개척자로서의 책임으로 이해한다. 사도적 책임은 모든 국가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삼는 것이며, 목회적 책임은 양의 목자로서 가난한 자들과 마음의 상처를 받은 자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그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사회의 개척자로서의 교회는 온 사회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먼저 응답하는 인간 공동체의 부분이다.
4) 교회의 세속성으로부터의 독립
현대 세계는 우상숭배와 탐욕으로 깊이 병들어 있으며, 교회는 그러한 우상숭배와 탐욕이 팽배한 세속적 문화와 연합되었다. 교회는 물질의 소유나 분배를 넘어선 자본주의에 예속되어 있고, 민족주의에 예속되어 있으며, 인본주의에 매여 있다. 니이버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독립은 그것이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진리로만 시작할 수 있다. 교회의 주 과업은 인간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혁명을 이해하고 선언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5) 공동목적을 향하여
교회는 비뚤어진 세상을 위하여 평화와 형제우애의 약속을 가지고 시작하였으나 사회발전의 과정에 뒤떨어지고 말았으며, 교파주의로 말미암아 그 빛을 상실하고 말았다. 기독교는 현재 교회의 형태로서는 이 새로운 종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으며, 문화의 현 질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이의 극복을 위해서 먼저 교회는 교회의 일치를 이룸으로써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자체를 조성해야 한다. 니이버가 책임 윤리적 입장에서 교회를 이해한 것은 보이지 않는 종교로 전락하는 경향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26. 폭력에 대하여 논하라.
1) 폭력의 개념 규정
폭력에 대한 개념규정은 그리 쉽지 않다. 폭력에는 개인의 드러난 폭력과 개인의 숨겨진 폭력, 제도적이면서 드러난 폭력, 제도적이면서 숨겨진 폭력의 여러 유형이 있다. 그러나 폭력은 동물이나 사람에 대한 물리적 심리적 공격과 재산 피해를 포함하고 있으며, 고난과 상처까지도 관련되어 생각하는 점이다. 저자는 상처를 물리적인 또는 눈에 보이는 상처와 심적인 상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2) 폭력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태도
폭력에 대한 태도를 분석하면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폭력에 대한 찬성 및 지지하는 입장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입장, 그리고 원칙적으로 폭력을 찬성하지 않지만 사회 변화를 위한 최후적인 수단으로서 하는 수 없이 인정하는 태도가 있다. 폭력을 최후적인 수단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정당한 전쟁의 이론에 서서, 즉 최후적인 수단으로 고려하는 태도이다. 폭력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폭력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책임윤리의 입장에서 볼 때,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적 방법을 빠짐없이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은 결코 합법적인 것이 아니며, 폭력과 범법행위나 당장의 문제와 궁극적 문제, 폭력의 경향성, 이성의 필요성등을 항상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27. 환경에 대하여 논하라.
1) 상황과 문제의 근원
현재 우리는 자연적 환경의 착취와 오염의 문제에 심각하게 직면해 있으며, 그것은 결국 사람의 생존까지라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상황이라 함은 오염된 환경의 현 상태를 말하며, 이 오염된 환경은 대기오염, 수질 오염, 공간 오염, 음향 오염 등 여러 가지로 세분하여 볼 수 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근원은 무엇보다도 먼저 환경을 착취하는데서 온다고 할 수 있으며, 기술공학의 발전과 함께 환경오염의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는데 문제의 발단이 있다.
2) 크리스천의 이해
환경에 대한 성서의 이해는 비록 사람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자연과 화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성서가 지시한 대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사회의 복지, 육체적 건강 등에 공헌하는 자들이 되어야만 한다. 인류의 미래를 계획하고 환경을 정복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크리스천의 창조론과 섭리론의 관점에 비추어 “착취”의 생각을 떠나 “사랑과 존중”의 생각을 가지도록 말할 수 있어야 한다.
3) 기독교 륜리학적 이해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로서 처음부터 환경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말씀하신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역할은 화해의 직책과 교육의 시행, 정책 수립, 인구조절 등으로 요약된다.
28. 인구에 대하여 논하라.
인구 증가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대체로 다섯 가지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자원의 한계, 식량 위기, 환경 오염, 생존 경쟁, 경제 문제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윤리학적 응답*
인구증가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구증가를 막는 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그 일반적인 방법은 가족계획이겠지만, 여기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인구증가의 극심한 상황에 처한 우리가 해결책으로서 가족계획을 실시함에 있어 기독교 윤리학은 그것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적어도 세가지 이론적 근거를 갖는데, 첫째로 “새로운 금욕주의”의 입장에서, 둘째로 가치와의 관계에서, 셋째로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로서의 입장에서 우리는 가족계획을 지지할 수 있다.
29. 의료행위에 대하여 논하라.
최근 새로운 윤리적인 관심사는 의료행위의 윤리문제이다.
인공유산, 인공수정, 기관이식, 인간 실험 등의 의료행위에 있어서 윤리문제가 수없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1) 의료 륜리의 전통들
의료 윤리의 전통들은 히포크라테스 전통과 종교적 전통, 노이렘베르크 전통 등에서 비롯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 전통은 쉽게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책임을 통한 성실한 실천이 그 강점이다. 그러나 기술 발달 이전의 휴머니스트적인 생각에 치우쳐 있음이 약점이다. 종교적 전통들 중에서 성서의 전통은 현대 의료 풍토 조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프로테스탄트 전통은 대체로 성서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사람을 받아 주심과, 그에 따른 사람의 책임을 강하게 긍정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2) 연구 과제
여기서는 안락사의 문제와 인공유산의 문제를 다룬다. 안락사는 환자가 고통을 당할 때에 또는 식물인간이 되어 있을 때 의사나 그 밖에 사람이 환자의 생물적 기능을 뒤집을 수 없도록 중지시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회는 사람을 강제로 죽게 할 권리가 없다고 보지만 사람이 한계상황에 접할 때, 즉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고 분명한 명령을 가질 때만“은 안락사의 길을 완전히 닫아놓지 않고 있다.
3) 인공 유산
인공유산은 오늘날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는 윤리적 논란의 대상이다. 인공유산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가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변화되고 완화된 감이 있으나, 원칙적으로 인공유산을 허용하지 않는 편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인공유산을 반대한 입장인데 이는 인간의 생이 신성하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이유는 임신된 태아는 어떠한 발전단계에 있든지 완전한 인간의 생이기 때문이며, 모든 인간의 권리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공유산을 요구하는 입장은 반대하는 입장만큼 충분히 발전되지 못하였으나, 최근에 대중이 인공유산을 요구하는 입장을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중심과제는 출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다.
책임 윤리적 입장에서는 책임의 의미를 이해하고 어머니와 태아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능한 한, 모든 관계와 여건을 충분히 검토 분석하여 결단을 하고 또 결단을 하게 된다. 책임윤리는 인공유산을 반대하는 이론과 공개적으로 허용하자는 입장과 맞서서 대결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신 행위에 대한 응답으로서 상황에 대한 보다 적합한 조정을 하려는 윤리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학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