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고학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제1장 : 서론
1. 고고학이란?
고고학(Archaeology)이란 말은 두 개의 희랍어에서 온 것인데 "고대"라는 뜻을 가진 "알카이오스"(archaios)라는 말과 말씀, 사건, 기사, 강연 등의 뜻을 가진 "로고스"(log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고고학이란 "고대의 사건들에 대한 연구"이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었으나 발굴 작업을 통해 밝혀진 역사의 자료들을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과거의 인류가 생활 행위에서 남긴 유적이나 유물을 발굴, 수집하여 인류의 역사ㆍ문화ㆍ생활 방법 등을 구명하는 학문이며, 광의의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발굴 조사를 통하여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자료, 즉 유적과 유물의 해석으로 인류의 과거 생활 및 문화의 변천을 밝히는 과학이다.
인류의 과거를 구명하는 실마리로는 유적ㆍ유물과, 문자로 쓴 문헌 사료(文獻 史料)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고고학이고, 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문헌 사학 즉 협의의 역사학이다.
고고학은 문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추어 선사 고고학(先史考古學)과 역사 고고학(歷史考古學)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문헌이 없는 시대는 고고학의 독무대이며, 문헌이 완비된 시대는 문헌 사학의 독무대이다.
2. 성경 고고학이란?
성경고고학은 성경 시대, 즉 성경의 시대적 배경과 성경 지역, 즉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지리적 배경에 해당되는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고고학은 성경학의 여러 분야 중 하나라기 보다는 고고학의 한 분야로 분류된다.
오늘날 성경고고학은 성경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학문 분야로 자리 잡았고, 성경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으며, 나날이 증가하는 현장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의 축적으로 끊임없는 성경의 재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경 고고학(聖經考古學/Biblical Archaeology)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기술(記述)과 사실(史實)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으로서 불교 고고학과 더불어 종교 고고학의 일부를 구성하며, 시간적으로는 성경학이 전승과 역사의 최초의 정합성(整合性)을 인정하는 B.C. 2000년 기부터 신약성경이 성립되어 끝날 때까지, 즉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를 주로 다룬다.
성경 고고학 문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인 [Biblical Archaeology](Philadelphia:Westminster,1962)의 저자인 라이트(G. E. Wright)는 "성경 고고학은 고고학 발굴 결과 얻어진, 성경을 이해하는데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였다.
3. 성경고고학의 연구범위를 쓰라.
시대적 범위에서 성경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경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성경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성경고고학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팔레스타인에서 농경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 (서기전 8500-4300년)부터 신약성경의 배경인 초기 로마시대 (서기전 63-서기 135년)까지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는 주로 이스라엘로 국한되며,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 이란, 키프로스, 그리스, 및 이탈리아 등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 연구 범위에 대해서 올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는 "성경 고고학의 연구는 고대 근동 지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지역과 러시아 남방으로부터 아라비아 남단에 이르는 지역까지 성경과 관련된 모든 지역을 포함 한다"고 말한다. 즉 신약성경 시대에 대해서는 로마제국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지역이 관심의 대상이고 구약성경 시대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메소포타미아 계곡과 페르샤(현대의 이란)까지 포함하는 지역인 것이다.
4. 텔이란?
성경의 배경 지역들은 대략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데,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고대의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 텔(tell)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선택하였다. 첫째, 근처에서 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 둘째, 주위에 경작할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 셋째,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 넷째,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 등이다.
텔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터키, 레바논, 요르단, 이집트 등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텔이 언덕처럼 높아진 이유는 대부분 흙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2-30년 만에 한번씩 허물어지고 다시 외부에서 돌과 흙벽돌을 가져와서 새로 짓기 때문이며 무너진 잔해를 완전히 성벽 밖으로 치우지 않는 한 도시의 지반은 점 점 높아지게 된다. 텔은 한 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제한된 발굴 지역에서 수천 년의 주거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서로 얽힌 건물의 기초 벽들을 일일이 확인해주어야 하는 등, 매우 복잡한 주거 층 론(stratigraphy)을 이해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
역사적으로 서기전 6세기 이후부터는 고대 이스라엘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등의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더 이상 성벽을 갖춘 “언덕의 도시”를 유지할 명목이 없어졌고, 특히 그리스 시대(서기전 330-63)에 들어와서 그리스 폴리스의 영향으로 텔 근처의 평지에 계획된 그리스-로마식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시대에도 텔은 그 위치 상 군사적 요새 겸 관망대나 그리스-로마식 신전 등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5. 성경고고학의 연구방법론을 쓰라.
성경고고학의 독특한 세 가지 연구 방법론은 주거 층 론(stratigraphy), 유형론(typology), 그리고 토기 연대추정(pottery chronology)이다.
주거 층 론은 텔 자체가 여러 개의 주거 층(stratum)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 하에 상대적으로 밑의 주거 층이 위의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연대추정을 가능케 한다.
유형론이란 주로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에 적용되는 방법론으로서 겉모양이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지리적 시대적 기원과 발전 등을 유추하는 분석의 한 방법론이다. 이 유형론은 특별히 토기 분류에 결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토기 연대추정은 토기의 모양 중에서도 특히 아구리 부분(rim)이 시대적으로 자주 변천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50년의 단위까지 세분하여 상대 및 절대 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일종의 토기 유형론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론이다.
19세기 말 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된 이스라엘 여러 지방의 다양한 시대의 토기들의 유형으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토기 달력(pottery calendar)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라도 비교적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성경고고학에서의 가장 믿을만한 시대판단의 기준으로서 ‘비교 토기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토기제작 시기 (서기전 6000년)이래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30-50년 내외의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6. 성경고고학의 시대구분을 쓰라.
(1) 신석기 시대(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4300).
토기이전 신석기 시대 : 서기전 8500-6000.
토기 신석기 시대 : 서기전 6000-4300.
(2)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3) 청동기 시대(Bronze Age: 서기전 3300-1200).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50.
중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2250-1550.
후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1550-1200.
(4)철기 시대(Iron Age: 서기전 1200-586).
서기전 586년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는 철기 시대 이후의고고학적 시대구분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점령 통치했던 주변 강대국들에 따라 각각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바빌로니아 시대(서기전 586-530),
페르시아 시대(서기전 530-330),
그리스 시대(서기전 330-63),
로마시대(서기전 63-서기 330),
비잔틴 시대(서기 330-630)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성경고고학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고고학의 시대구분의 기준에 따라 철기 시대까지만 범위로 넣고 있으며, 그 이후 시대는 역사학과의 밀접한 교류에 따른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포함하는 독립적인 고전 고고학(Classical Archaeology)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전 고고학의 중심지는 역시 현재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성경고고학의 전통적인 시대를 서기전 586년으로 한정시키는 경향도 있다. 좀더 세분된 성경고고학의 각 시대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이 시대의 문명은 나투프 문명(Natufian Culture)이라고도 불리며 소위 팔레스타인에서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여리고)가 건설되었고, 농업혁명으로 인한 정착경제의 발전과 목축업이 시작되었다.
2)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이 시대의 문명은 야르묵 문명(Yarmukian Culture)이라고 불리우며 이때부터 비로소 처음으로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토기가 특정지역의 고유한 민족 집단에 의해 독특하게 제작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구분 및 인종집단 구분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3)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금속인 구리가 도구제작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석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요단 건너편 지역 사해 북부의 텔레일랏 가슐(Teleilat Ghassul)에서 이 시대의 거주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명을 가슐 문명(Ghassulian Culture)이라고도 부른다. 특별히 엔 게디 남쪽의 미슈마르(Mishmar) 동굴에서 발견된 436점의 구리제품은 이 시대에 벌써 고도의 구리 제련 술이 발달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4) 초기 청동기 I 시대(EB I: 서기전 3300-3050)
이 시대는 고대근동 전체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고 이의 여파로 정착경제가 가속화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시대에 이집트와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를 통하여 밝혀졌다.
5) 초기 청동기 II 시대(EB II: 서기전 3050-2700)
이 때부터 본격적인 도시문명이 근동지방 전체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소위 제 1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의 영향으로 가나안 지방에서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6) 초기 청동기 III 시대(EB III: 서기전 2700-2250)
이 시기는 도시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이며, 조직적인 국제무역의 흔적을 토기나 장신구 등의 물질문명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이때 번창했던 도시들로는, 하솔, 벳 예라크, 벳샨, 므깃도, 아이, 여리고, 야르뭇트, 텔 엘헤시, 텔 에라니, 텔 할리프 등을 들 수 있다.
7) 중기 청동기 I 시대(MB I: 서기전 2250-2000)
서기전 2250년을 전후하여 가나안의 초기 청동기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그 이후 250여 년 동안 일종의 쇠퇴기를 맞게 되며 이집트의 제1중간기(제7-11왕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시대는 수직갱 무덤(Shaft Tomb)이라는 독특한 매장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성행했던 유목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8) 중기 청동기 II 시대(MB II: 서기전 2000-1550)
이집트의 중 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 제작 면에서도 고속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바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체의 기술로 대량생산되었다.
9) 후기 청동기 I 시대(LB I: 서기전 1550-1400)
이집트의 제15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파괴되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집트는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0) 후기 청동기 II 시대(LB II: 서기전 1400-1200)
아마르나(Amarna)시대라 불리는 서기전 14세기의 가나안은 이집트를 종주국으로 그 지배 하에 근처의 마을들을 통치하는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발굴을 통하여 이집트 식 신전 및 궁전이 므깃도와 벳샨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이집트가 이 도시들에 총독부를 두고서 가나안을 직접 다스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1) 철기 I 시대(Iron I: 서기전 1200-1000)
서기전 1200년을 전후해서 고대 근동지방에서 암흑기(Dark Age)라고 불리는 문명의 위기가 발생하는데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는 등의 기상 이변이 가장 중요한 문명붕괴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지중해 연안을 휩쓴 해양민족의 이동으로 막강했던 헷 제국이 몰락하고 시리아와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파괴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의 유입이 발생하고, 가나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권력공백을 틈탄 약소민족들이 각각 아람, 페니키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목 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의 추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과 주거분포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철기 II 시대(Iron II: 서기전 1000-586).
다윗왕조의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명이 발전되었으며, 비교적 구약성경의 역사서의 기록과 발굴을 통한 주거분포가 일치하는 등 이 시대는 성경고고학의 중심시대로 간주된다. 북쪽의 단(Dan)에서부터 남쪽의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와 쿤틸랏트 아즈루드(Kuntilat Ajrud)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양식의 요새가 많이 건설되어서,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영역과 고유의 물질문명의 지리적 분포를 쉽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13) 농업 혁명(agricultural revolution): (서기전 10,000-8,000)
서기전 1만 년경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야생 농작물의 재배와 야생 동물들의 가축화가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된다. 대규모의 수확이 가능하고 기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밀과 보리 등의 곡물류의 재배는 연중 강수량이 500밀리미터 이상인 지중해변과 자그로스 산악 지역에서부터 시작됐다. 서기전 1만년경 이 곳의 거주민들은 오랜 기간의 구석기 시대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야생으로 자라던 밀과 보리를 계절에 따른 농사를 통하여 대량으로 수확하면서 농사를 근거로 하는 정착생활이 시작됐다. 이러한 생업의 변화를 농업혁명이라 부르며 이 때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 또한 정착 생활에서도 쉽게 짐승들을 얻기 위해서 사냥에서 생포한 야생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여서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역사상 최초로 길들여진 가축들은 다음과 같다.
개: 서기전 11,000년경, 염소: 서기전 8,500년경, 양: 서기전 8,000년경, 돼지: 서기전 7,500년경, 소: 서기전 7,000년경, 고양이: 서기전 7,000년경, 당나귀: 서기전 4,000년경, 말: 서기전 2,000년경, 낙타: 서기전 1,200년경(아라비아 광야)
14) 도시혁명(urban revolution): (서기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의 발달은 농업혁명의 결과 대규모의 관개사업과, 잉여 농산물의 교환 등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건설한 요새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고학적 관점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서 성안에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했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착지로 규정된다.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근처의 농경지의 실 소유주로서 농사와 목축을 관장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처하며, 농산물의 교환을 주도하는 통치세력을 확립하게 되었다. 따라서 최초의 도시는 왕을 중심으로 일종의 도시국가(city state)를 형성하였다. 신석기시대부터 원시적으로 발전했던 종교는 도시 안에 건설된 신전을 중심으로 제사장이라는 특정 계층을 탄생시켰고, 이제 신들은 해당도시의 수호신 개념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도시혁명의 결과 교환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품의 목록과 수량의 기록 필요성이 생겨났고 이로부터 단순한 기호들이 추상적인 의미를 지닌 본격적인 문자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제2장 창세기와 메소포타미아
1. 길가메슈의 서사시에 대하여 쓰라.
길가메슈의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라는 12판으로 된 것 중 11번째 판에 기록되었다. 고대 우룩(성경의 에렉 - 창 10:10)의 왕이요 영웅인 길가메슈가 고생을 무릅쓰고 조상 우트나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답할 때 우트나피쉬팀이 들려 준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것이다. 우트나피쉬팀은 바로 성경에서 노아가 겪었던 홍수 이야기를 거의 비슷하게 진술하고 있다.
앗시리아와 바벨로니아의 홍수 이야기도 자기들의 스스로 기록이 아니요 아슈르바니팔 왕이 그들보다 먼저 메소포타미야 하부에 들어와 살던 세계 역사의 최고 민족인 수멜 사람들의 기록을 전래한 것이다. 기원전 1967년 또는 기원전 2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홍수 기록(니플의 문서)이 발굴되었다. 결국 고대 메소포타미아 여러 지방 사람들에 의해 와전되기는 했으나 태고로부터 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래되었음이 확증된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키슈(Kish)에서 파낸 점토 기록은 거의 기원전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홍수 전에 살았던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런 후에 홍수가 세상을 휩쓸었다. 홍수가 휩쓴 후에 왕권이 다시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첫째로 키슈에 왕권이 임했다"고 적혀있다.
노아의 대홍수가 참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 여러 곳에서 저들의 다신교적인 정치 색채로 와전되고 왜곡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그대로 조상의 전승을 따라 보전되어 내려와서 오늘날 우리로 성경의 노아 대홍수를 확신하는데 문자적인 뒷받침을 하게 되었다.
이 길가메쉬 서사시는 창세기의 노아와 필적할 만한 신의 선택자인 우트나피슈팀의 이야기 도중에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홍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영국은 빅토리아 왕조시대로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는 보수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구약성경의 신빙성을 증명할 증거로 여겨지면서 영국의 국민적인 관심이 들끓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일간지인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라프(Daily Telegraph)지는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찾는데 1,000기니아(guinea)의 포상금을 내걸었다. 당연히 스밋트는 이 모험을 자처하고 나섰으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한 끝에 티스리스 강변의 모술에 도착하여 고대의 니느웨로 여겨지는 쿠윤직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 작업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스밋트는 384개의 토판 문서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이 중에는 물론 잃어버린 홍수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2.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설화에 대하여 쓰라.
홍수 설화 점토판을 발견한 스미스는 1876년 그가 수집한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의 점토판으로부터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기사와 흡사한 고대 바빌로니아 설화를 찾아내었다.
이 점토판은 기원전 1700여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의 하무라비 대왕(1728-1686 BC)이 자기 나라와 자기들의 신인 말둑(Marduk)을 높이기 위하여 그 이전부터 니플, 앗시리아 등 여러 곳에 있던 기록을 개편하여 쓴 것을 아슈르바니팔 왕이 자기 도서관에 보관하여 둔 것이다. 이 서사시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 뜻은 "태초에"(When above)라는 것으로서 7개의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어 창조의 7일을 나타낸 듯이 보인다. 성경 외에도 고대 여러 나라들이 저들의 조상들이 전해 준 창조의 이야기를 불완전하고 왜곡되게 간직하고 있다.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사실이 객관성이 있는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에 관한 신화는 아카드어로 기록된 에누마 엘리쉬로서 지금까지 니느웨(Nineveh), 앗슈르(Ashur), 키쉬(Kish), 술탄 테페(Sultan Tepe) 등에서 발견됐다. 이들의 기록연대는 서기전 900-200년까지로 다양하며 신화 자체는 7개의 토판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1100줄에 달한다. 이 신화의 제목인 ‘에누마 엘리쉬’는 첫 두 단어로서 ‘높이서 --할 때’ ‘When on high’라는 뜻이며 신들의 태어나는 태초의 시간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저 높은 곳의 하늘이 명명되기 이전에 저 낮은 곳의 땅이 이름 불려지기 이전에’
제1세대 : 압수(Apsu): 민물 <--> 바닷물: 티아맛(Tiamat)
제2세대 : 라크무(Lakhmu): 진흙 <--> 갯벌: 라카무(Lakhamu)
제3세대 : 안샤르(Anshar): 구름 <--> 안개: 키샤르(Kishar):
제4세대 : 아누(Anu)
제5세대: 누디무드(Nudimmud)=에아(Ea) <--> 담키나(Damkinna)
제 6세대 : 마르둑(Marduk)
제 1-3 세대의 신들은 각각 쌍을 이루면서 자연현상을 대표하는데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늪지대를 연상시킨다. 압수(Apsu)는 젊은 신들의 소란함 때문에 편안히 쉴 수가 없어서 그들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알아차린 에아(Ea)가 압수를 결박하여 죽여 버렸다. 이 때부터 압수는 에아의 전통적인 거처가 되었다. 이야기는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려는 티아맛 진영과 이에 대항하는 에아의 아들 마르둑과의 전투로 전개된다. 티아맛은 킹구, 후부르와 함께 그녀가 만든 11 괴물들을 동원하였고 마르둑은 활, 곤봉, 번개, 화염, 그물, 폭풍으로 무장했다. 마르둑은 우선 폭풍으로 티아맛을 제압한 다음 활을 쏘아 죽였고 그녀의 시체와 킹구의 피로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였다. (1) 하늘과 땅, (2) 하늘의 성좌: 매달 3개의 성단(constellation): 36 성좌, (3) 달과 태양, (4)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티아맛의 눈물, (5) 인간: 킹구의 피
에누마 엘리쉬는 전형적인 바빌로니아의 문학 작품이다. 이것의 집필 의도는 마르둑(Marduk) 신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며 자연과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기전 1750 년경 함무라비가 바빌론을 새 왕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수메르 시대부터 미미한 존재였던 마르둑이 출세하기 시작하였고, 서기전 1120년경 느부갓네살 1세가 신년축제를 통하여 마르둑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시켰다. 에누마 엘리쉬는 신년축제(아키투 축제) 제 4일에 마르둑 신상 앞에서 낭독되었다. 앗슈르에서 발견된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마르둑 대신에 앗수르가 들어가 있다. 바벨론의 마르둑교(Mardukism)는 도시, 신전, 신상, 그리고 제의문인 에누마 엘리쉬까지 갖춤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최고로 발전된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셈족의 시대별 발전 상황을 쓰라.
셈족(Semitic, Semitisch)’이라는 용어는 1871년 독일의 쉘쪄(Schelzer)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셈족은 시대별로 다음과 같이 발전하였다.
서기전 4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민족,
서기전 30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서부 셈어족,
서기전 1200년 이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의 아람 민족, 이스라엘 민족,
서기전 200년 이후: 나바테야 민족,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서기 600년 이후: 무슬림 아랍 민족, 유대 민족
*오늘날 셈족의 후예인 모슬렘 아랍 민족은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비롯한 북부 아프리카 등 광활한 지역에 살고 있다. 서기전 1 만년 경에 발생했던 농업혁명은 북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지의 야산지대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 주인공들이 셈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농업혁명 이후 그 장본인들이 계속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주인공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셈족은 시리아 광야를 고향으로 하는 아모리 족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시리아 광야, 또는 북부 아라비아 광야를 셈족의 지리적 고향으로 보고 있다.
1) 도시국가(City State) 시대 (서기전 4000-3000)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들은 남쪽의 수메르 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기전 4000 년경부터 이 곳에서는 우룩(Uruk), 라가쉬(Lagash), 우르(Ur), 니푸르(Nippur), 슈루팍(Shuruppak), 키쉬(Kish) 등의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2) 왕국(Kingdom)시대 (서기전 3000-2000)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가장 강력한 도시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어 일종의 왕국을 형성했으며, 대표적으로 남쪽의 수메르 왕국과 북쪽의 아카드 왕국으로 분류된다.
3) 제국(Empire)시대 (서기전 2000-330)
서기전 2000 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은 좀 더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서기전 1800 년경부터는 하무라비왕이 바빌론 도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고, 북쪽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는 샴시-아다드(Shamshi-adad)왕이 앗수르 도시를 중심으로 앗시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두 세력이 함께 경쟁하며 발전하다가 서기전 1100 년경부터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치하기에 이르렀으며, 서기전 612년에는 신 바빌로니아(Neo-Baby
lonia)가 그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서기전 539년부터는 이란지역의 페르시아가 이 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서기전 330년경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함으로써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4. 텔 마르딕에 대하여 쓰라.
현재까지 메소포타미아를 고대 히브리인의 문화적 발상지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잊혀진 시리아 제국의 잿더미에서 발굴된,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셈 어(語) 점토판들이 그보다 천년 전에 있었던 고대 세계를 하나하나 벗겨 주고 있다. 필시 에블라 족이 히브리인의 조상이라면, 당연히 에블라 문화는 히브리인의 모(母) 문화가 된다. 이것은 성경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며,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끼칠 영향도 엄청날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1964년 로마 대학에서 근동 지역 고고학 교수로 있던 파울로 마티에가 일단의 고고학 팀과 함께 시리아에 도착하여 고고학적 전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역, 곧 시리아의 북서 지역의 언덕(텔)을 탐사하고 있었다. 이 텔은 폐허가 된 고대의 마을을 의미한다. 동료들은 그에게 이 북서 지역의 '초승달의 옥토'에 관심을 쏟도록 자극하였다. 반면 당시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지역은 흔히 고대의 궁벽했던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24세였던 마티에는 오늘날의 알레포시 남방 30마일 지점에 위치한 가장 큰 텔을 파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텔 마르딕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시리아의 평지보다 50피트 정도로 위로 돌출되어 있는, 그 넓이가 140에이커나 되는 거대한 텔이었다. 이곳은 일찌기 4000년전 이집트로부터 앗시리아에 이르는, 아니 그 이상의 지역을 지배했던 전설적 대 제국 에블라의 수도였다. 이 젊은 이탈리아 고고학자는 이곳을 파내면서도 이곳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고고학자들은 에블라 시의 한 왕이 세운 비문을 발견하였다. 텔 마르딕은 고대 에블라임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에블라가 고대 역사가들에게 숨김없이 드러났다. 가장 초기의 메소포타미야 제국을 이룬 아카드인들은 쐐기 문자 점토판의 입을 빌어 그들이 에블라라는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의 수많은 타 지역들이 우연한 주목을 받고 있는 동안 에블라는 큰 마을 이상으로 취급되지 못하고 있었다.
텔 마르딕을 10년에 걸쳐 팠을 때, 마티에와 그의 팀은 도자기와 도구, 그리고 보석 장신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발굴하였다. 1974년, 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쓴 42개의 쐐기 문자 점토판을 캐내었다. 같은 해 그들은 두 개의 방을 발굴했는데, 그 속에는 놀랍게도 16,000개의 점토판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왕실 문서 보관소였다.
제3장 출애굽기와 이집트
1. 이집트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이름들을 쓰라.
케멧트, 미쯔라임, 이집트, 콥트의 어원
1) 케멧트(Km.t)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케멧트(Km.t), 즉 “검은 땅”이라고만 불렀다. 검은 땅이란 다름 아닌 나일 강의 범람으로 형성된 비옥한 충적토를 말하며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검은 색은 곧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검은 땅 케멧트는 “붉은 땅”을 의미하는 데쉬렛트(Dšr.t)와는 대조를 이루는데 데쉬렛트는 이집트의 광야가 주로 누런색과 갈색을 띤 풍화된 석회암 지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 미쯔라임(םיצ)
오늘날 아랍어로 이집트를 “미쎄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같은 셈어 계열에 속하는 성경 히브리어의 미쩨르(ר)와 연관이 있다. 히브리어로 미쯔라임은 “두 개의 미쩨르”, 즉 “두개의 이집트”를 의미하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북쪽의 하 이집트와 남쪽의 상 이집트를 한꺼번에 지칭하기 때문이다.
3) 이집트(Egypt)
고왕국 시대(서기전 2575-2134)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수도인 멤피스를 그 곳의 신전 이름을 따라 “훗트-카-프타(Hut-ka-Ptah)”, 즉 “프타의 영혼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신왕국 시대에는 멤피스를 “히-카-프타(Hi-ka-Ptah)”로 불렀고, 서기전 14세기 아멘호텝 3세와 4세의 외교 문서인 아마르나 편지에서는 멤피스가 아카드어(Akkadian)로 “히-쿠-우프-타(Hi-ku-up-ta)”로 기록되고 있다. 서기전 8세기경 이집트가 그리스 세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리스어로 “에-기-프토스(Αι-γυ-πτος)”로 발음되었고, 라틴어로 에깁투스(Aegyptus), 즉, 이집트(Egypt)로 발전되었다.
훗트-카-프타 --> 히-카-프타 -->히-쿠-우프-타-->에-기-프토스-->에깁투스-->이집트
4) 콥트(Copt)
오늘날 콥트(Copt)는 이집트의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기독교인들과 이집트 기독교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 명칭은 이집트의 라틴어식 이름인 에깁투스의 아랍어식 발음에서 비롯되었다.
서기 640년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이슬람 세력의 무슬림들은 이집트를 점령하여 카이로를 건설했고, 그들은 이집트를 “다르-알-깁트(Dar al-Gibt)”, 즉 “이집트인들의 고향”이라고 불렀다. 점령 당시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의 한 식민지로서 국교가 기독교였던 만큼 이집트 기독교인들을 “깁트(Gibt)”로 부르게 되었으며 나아가 “콥트(Copt)”로 발전되었다. 후-카-프타-->에깁투스-->다르-알-깁트-->깁트-->콥트케멧트, 미쯔라임, 이집트, 콥트의 어원
2. 이집트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라.
1)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제 1-3 왕조 (서기전 2920-2575)
2) 고왕국 시대 (Old Kingdom):
제 4-6 왕조 (서기전 2575-2134)
3) 제 1 중간기 (First Intermediate Period):
제 9-11 왕조 (서기전 2134-2040)
4) 중왕국 시대 (Middle Kingdom):
제 11-13 왕조 (서기전 2040-1650)
5) 제 2 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제 14-17 왕조 (서기전 1650-1540)
6) 신왕국 시대 (New Kingdom):
제 18-20 왕조 (서기전 1540-1070)
7) 제 3 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
제 21-24 왕조 (서기전 1070-712)
8) 후시대 (Later Period):
제 25-30 왕조 (서기전 712-332)
9) 그리스-로마 시대 (서기전 332-서기 395)
3. 모세의 양모에 대하여 쓰라.
애굽왕 투트모세 Ⅰ세에게는 무남독녀 핫셉섯이라는 공주가 있었다.
그가 바로 모세의 양모이다.
투트모세 Ⅰ세가 친자식으로는 핫셉섯 밖에 낳지 못하자 세습 제도에 의해 왕위를 잇고자 소첩에게서 낳은 나이 어린 아들을 연상의 딸과 결혼시켜 다음 왕인 투트모세 Ⅱ세가 된다. 그러나 투트모세 Ⅱ세가 4년 만에 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요절하자 과부가 된 핫셉섯은 자신이 남자의 모습을 하고, 이중 관을 쓰고서 왕으로 군림했다. 그는 왕으로서 20년간(1504-1482 BC) "세계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군림하였다. 그는 상하 애굽을 다스리며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이룩했다. 그의 유명한 건축물은 테베 가까이 데일 엘 바리(Deir el Bahri) 절벽에 맞대서 지은 흰 대리석의 시체 안치관인데 신전 형식으로 웅장하게 세워졌다. 또한 그를 위해 카르낙에 세워진 두 개의 오베리스크(방첨비) 가운데 한 개는 그 높이가 97.5 피트에 무게가 70만 파운드나 된다. 이 여왕을 양모로 한 모세는 당대의 최고 교육을 받으며 왕위를 계승할 강력한 후계자로 등장했다.
핫셉섯 여왕은 후계 문제로 애굽의 지배 계급인 아몬신의 제사장들과 반목이 심했다. 왕이 될 사람은 동시에 아몬신의 제사장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선조의 신앙을 고수하고자 이를 거절했다(히 11:24, 25). 궁지에 몰린 핫셉섯은 제사장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죽은 남편의 소첩에서 낳은 아들을 자기의 딸과 결혼시켜 후계자인 투트모세 Ⅲ세(1482-1450 BC)로 삼았다.
뜻 밖에 왕의 후계자가 된 투트모세 Ⅲ세는 카르낙에 있는 신전 비명에 "아몬신의 개인적인 개입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적어 놓았다. 그는 모세와 왕위 다툼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위치가 달라지고 그의 유일한 보호자인 핫셉섯도 기원전 1486년 경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던 어느 날 민족적 자각과 사명감에 충동을 받아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 감독관을 쳐 죽인다. 그러자 진상이 탄로나자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쳐 40년간을 그곳에서 살았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뒤 얼마 후 핫셉섯의 근신(近臣)들이 제거되는데 아마 투트모세 Ⅲ세의 추종자들에게 살해된 것 같다.
4. 열 재앙에 대하여 쓰라.
(출 7:20-12:30)
1) 첫째 재앙 - 나일강이 피로 변함
애굽 인들에게 있어서 나일 강은 예배의 대상이었다. 나일강을 위한 기도, 찬미, 예배가 드려졌다. 고대 나일강의 찬가가 발견되었다. "당신은 가난하고 어려운 자의 주가 되십니다. 만약 당신이 하늘에서 뒤집혀지면 신들은 망할 것입니다." 나일강은 애굽 신들의 총 본산이다. 부활과 영생의 신 오시리스(Osiris), 나일강의 신 하피(Hapi), 홍수의 여신 사테드(Satet), 그의 언니신 안퀘드(Anqut) 등이 첫째 재앙에서 망해버린 것이다.
2) 둘째 재앙 - 개구리
이 재앙은 개구리로 나타나는 크눔(Khnum)신의 부인 헤큐트(Heqt)를 친 것이다. 헤큐트(Heqt)는 개구리 여신으로 부활의 상징이요 비옥의 표상으로 개구리가 거처에 나타나면 그 해의 길조라고 했다.
3) 셋째 재앙 - 이
지신(地紳) 셉(Seb)에게 내린 것이다. 그들은 지신 셉 덕분에 온갖 혜택을 입고 산다고 믿었다.
4) 넷째 재앙 - 파리
파리 중에서 맵시파리(Ichneumon Fly)는 거룩해서 신으로 섬겼다. 너무 극성스럽고 폐해가 심해 신으로 섬긴듯이 보인다.
5) 다섯째 재앙 - 가축
애굽에는 수많은 가축 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암소의 여신 하돌(Hathor)이 으뜸이었다. 하돌은 출애굽 당시인 18왕의 주신이었다. 또한 황소신 아피스(Apis)를 잘 섬기면 내세에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6) 여섯째 재앙 - 독종
이 재앙은 풀무의 재를 바람에 날려 독종을 일으켰다. 이것은 태풍과 전쟁의 신인 레슈퍼(Reshpu)와 퀘테슈(Qutesh) 슈렉(Sulech)에 내린 것이다. 이 재앙으로 사람과 가축이 고통을 당해도 고칠 힘이 없는 의약의 신 임호텝(Imhotep)을 친 것이다.
7) 일곱째, 여덟째 재앙 - 우박과 메뚜기
우박이나 메뚜기 재앙은 애굽인에게 풍요한 수확을 약속하고 경배를 받는 그들의 신들의 무능과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알게 하는 하나님의 실력 행사이다.
8) 아홉째 재앙 - 흑암
아홉째 재앙으로 빛은 사라졌다. 몸을 굽혀 궁창을 만들고 있다던 하늘 여신 누드(Nut), 하늘을 거처로 삼고 해로 얼굴을 나타낸다던 호러스(Horus)신, 일월성신을 주장한다는 도드(Thoth)신, 불의 여신 세크멧(Sekmet), 일출신 프타(Ptah), 일몰신 테무(Temu), 주신인 태양신 라(Ra)가 흑암 재앙 때 완전히 패배 당했다.
9) 열째 재앙 - 장자
애굽의 주신인 라(Ra)는 태양신이다. 그는 때때로 암소의 첫 새끼 황소로 땅 위를 걷기도 한다. 또한 출생의 신 메스케밋(Meschemit)은 바로의 장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리하여 애굽의 모든 신들은 아무것도 아님이 밝혀지고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이 폭로되었다.
열째 재앙에서 맏 아들을 잃은 바로는 아멘호텝 Ⅱ세이다. 그를 뒤이어 바로가 된 투트모세 Ⅳ세는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였다. 애굽의 기자 지방에 있는 스핑크스 가까이에 세워진 커다란 붉은 색 화강암 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스핑크스 모양으로 나타난 신에게서 꿈으로 통고 받았다. 참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자신의 꿈 이야기이다.
10) 열째 재앙에서 황태자인 형이 죽자 뜻밖에 왕이 되었음을 무심결에 시인한 것이다.
제4장: 정복과 정착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
1. 여리고성에 대하여 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넌 후 제일 먼저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다(수 6:1-27). 여리고 성의 폐허를 찾기 위하여 1907년 독일의 셀린 교수(E. Sellin)가 발굴을 시작했다. 뒤이어 1909년 바찡겐(Watzingen) 교수가 합세하여 발굴에 성공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여리고 성의 파괴가 초자연적임을 확인하였다.
1930-1936년 사이에 영국인 갈스탕(John Garstang) 박사에 의하여 정밀 발굴이 계속되었다. 발굴 결과 제4층(D층)의 폐허에는 기원전 1400년 경에 무너진 것으로 그 시대에 해당되는 토기와 갑충석을 발굴해 냈다. 특히 성벽은 이중 벽돌 벽으로서 바깥 벽은 두께가 2미터, 안쪽 벽은 두께가 4미터나 되었고 성벽의 높이는 10미터 가량 되었다. 두 성벽 사이의 간격은 약 5미터였다. 여리고 성의 면적은 약 6에이커 정도로 협소하여 이 두 성벽 위에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집들을 짓고 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기생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수 2:15)의 의미를 밝혀 준다.
그 성은 아주 거칠게 파괴 되었는데 외벽은 그산 비탈의 앞쪽으로 흔들려 무너져 내렸고 내벽은 그 위에 집들이 있는 두 벽 사이로 무너져 앉았다. 불에 타서 붉은 빛을 띤 돌들과 벽돌이 재와 그슬린 목재와 뒤섞여 있었다. 이 흔적들은 성이 무너질 때 큰 불이 있었음을 말해 준다(수 6:24)
2.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가설들을 쓰라.
1) 정복설(the conquest theory)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대로 가나안의 도시들이 서기전 1200년경 파괴되었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파괴된 주거 층을 동시대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미국의 성경고고학자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 위치한 텔 베잇트 미르심(Tell
Beit Mirsim)을 발굴한 후 C2 주거 층이 서기전 1220년경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올브라이트는 이 유적지를 여호수아에 의해 군사
적으로 정복된 도시 중의 하나인 드비르(ריבד)로 보았다. 이 연대는 이집트 제
19왕조의 파라오 메르네프타 시대에 기록된 소위 ‘이스라엘 석비’의 연대에
기초한 것이다.
2) 정착설(the settlement theory)
이스라엘 백성은 한꺼번에 일회적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정착했다기 보다는
좀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이주민들의 축적된 결과이다. 갈릴리 산
악지방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정착 흔적이 비교적 이른 시기인 서기전 1250년경
부터 확인되는 점과 같은 중앙산악 지대라 할지라도 북부지방보다 남부지방이
좀더 늦게 정착이 이루어진 점 등이 점진적인 이주 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알트(A.Alt)는 특정 민족이 새로운 땅에서 정착하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며 기
존의 정착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알트는 힉소스 시대(서기전 1650-1550)부터 후기 청동기 시대(서기전
1550-1200)까지의 이집트 기록을 면밀히 분석한 다음, 가나안의 주거 분포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착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에 그리 큰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
다고 주장하였다.
알트의 이러한 점진적인 정착 가설은 이집트가 가나안을 직접 통치했던 후기 청
동기 시대와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했던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가 매
우 다른 형태의 정치-사회적 모습을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지만,
그가 주장했듯이(Alt 1966: 169), 비록 후기 청동기 시대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의 중심 무대였던 중앙 산악지대는 이집트의 효율적이고도 철저한 식민지 통치
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가설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1967년 이래로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중앙 산악지대에
관한 체계적이고도 철저한 고고학적 발굴 및 지표 조사들의 결과는 1920년대
알트가 감지할 수 없었던 이 지역에서의 새로운 주거분포의 모습들을 하나씩 드
러내주고 있다.
3) 반란 설(the revolt theory)
이스라엘 백성은 정복설이나 이주 설에서 주장하듯이 외부로부터 가나안으로 유
입된 것이 아니라 후기 청동기 시대(서기전 1550-1200) 이미 이곳에 거주하
고 있던 가나안 사회의 하층민 계급에 속하는 농민과 노예들이 사회적 반란을
일으켜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시내 산에서 유래한 유일
신 야훼신앙을 자신들을 결속하는 종교적 이념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반란 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에 관한 사회학적 관점의 분석으로서 특
정한 가설을 제시하여 그에 따라 현상들을 해석하고자 시도한다.
미쉬간 대학 교수였던 멘덴홀(G.E. Mendenhall)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을 사회-정치적 관점에서 분석한 다음 서기전 13세기 경 후기 청동기 시대 말기의 가나안 도시국가들에 대항했던 ‘농민들의 반란’으로 규정짓고 있다.
3.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과정을 쓰라.
(여호 6-11장)
1) 요단 계곡: 여리고 정복(여호 6:22-25)
전리품: 귀금속(금, 은, 구리, 철)은 야훼의 창고에 보관
2) 베델 산지:
(1) 아이 정복(여호 7:2-8:29): 성의 주민 1만2천명을 모두 죽임성을 불질러서 영원한 폐허(םלוע לת)로 만듦
(2) 기브온 정복(여호 9장): 아모리 다섯 왕 동맹과의 전투(기브온 전투): 예루살렘, 헤브론, 야르뭇, 라키쉬, 에글론 등 다섯 왕을 막케다 동굴에서 죽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통치권도 자연히 여호수아에게 넘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3) 쉐펠라
(1) 마케다(הדקמ) 정복(여호수아 10:28)
(2) 리브나(הנבל) 정복(여호수아 10:29-30)
(3) 라키쉬(שׁיכל) 정복(여호수아 10:31-33)
(4) 에글론(ןולגע) 정복(여호수아 10:34-35)
4) 유다 산지: 헤브론(ןורבח) 정복(여호수아 10:36-37),
드비르(ריבד) 정복(여호수아 10:38-39)
5) 이즈르엘 평야: 메롬 물가(םורמ ימ)의 전투
6) 갈릴리: 하쪼르(רוצח) 정복(여호수아11:10-11)
*정복하지 못한 땅(여호수아 13:1-6): 남은 땅(הראשׁנ צראה = ‘땅이 남았다’)
1) 해안 평야: 블레셋과 페니키아: 시돈과 그발(비블로스)
2) 골란 고원: 그슈르 민족의 땅
4. 가나안의 3대 여신을 쓰라.
가나안의 3대 여신들은 아나드, 아세라, 아스다롯이다. 아나드는 바알신의 누이와 부인으로 나타나는데 아세라(Asherah), 아스다롯(Astarte, Ashtaroth)과 함께 음란과 부도덕과 잔인성으로 특징지어진 가나안 종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아나드와 아세라는 서로 바알신의 부인이 되려고 끈질기게 싸운다. 이 여신들은 모두 성(sex)과 전쟁의 여신들로 자식을 많이 낳게 하는 다산의 신이면서 성질은 포악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전쟁의 신도 된다. 아나드와 아세라는 '쿠드슈'(Qudshu)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는 '처녀', '거룩한 자'라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신성한 매춘부'로서 부도덕한 일을 했다. 이들의 상징이 라스샴라에서 발굴된 금걸이 장식에서 나왔다. '신성한 매춘부'인 이 여신들을 섬기는 의식에서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남창(男娼; Gadesh)들이 역할을 했는데, 그들을 '미동'(신 23:17; 왕상 14:24, 15:12, 22:46)이라고 불렀다. 또한 여자 창기(娼妓; Gadeshah)도 역할을 했다(신 23:18; 호 4:14). 그들이 섬기는 종교 의식의 내용이 부도덕한 매춘 행위였다. 믿기 어려운 최악의 타락상이었다. 그들의 예배는 매춘 행위와 뱀을 숭배하며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홍수 전 세상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의 반복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손을 빌려 그들을 심판한 것이다.
제5장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1. 사울 왕이 첫 번째 수도로 정한 곳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기브아(삼상 15:24, 10:26, 22:6, 23:19).
2. 예루살렘에 대하여 쓰라.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될 때까지 약 400년간은 무질서와 배도의 시대였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당시에는 사사들이 통치하였다.
가나안인 하솔이 철병거 900승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20년간 다스렸다(삿 4:3). 당시 불레셋 사람들이 철기와 철 병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위압을 당했다(사 1:19, 4:3; 수 17:16-18; 삼상 13:19-22). 고고학에서 밝혀진 발굴 결과 기원전 1100년경에 속하는 많은 철기를 불레셋에서 발굴하였으나 팔레스틴에서는 기원전 1000년 이전의 것은 출토된 것이 없다.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연합군의 군대를 므깃도에서 대파했다(삿 5:19). 1937년 동양 연구소 발굴단은 므깃도를 발굴하여 기원전 12세기에 속하는 지층에서 대 화제의 흔적과 함께 궁전 마루 아래서 200개 정도의 아름답게 조각된 상아와 금장식품들을 찾아냈다. 그 중 하나는 가나안 왕이 할례 받은 포로를 다루는 조각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이스라엘 관계를 말해 주고 있다.
예루살렘은 해발 2500피트의 고지에 위치하였으며 천연 암석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아 아무도 빼앗을 엄두를 못낸 채 400년간이나 여부스 인들이 살아온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치러 온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을 놀려대었다(삼하 5:6). 그런데 다윗은 이 성을 빼앗을 때 "수구로 올라가서"(삼하 5:8) 점령하라고 하였다. 19세기까지 이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고고학에 의해 이 뜻이 밝혀졌고 당시 예루살렘의 급수 시설을 알게 되었다.
1867년경 영국의 젊은 공병 장교 와렌(Charles Warren)이 고대 가나안 지방의 물 공급 제도를 연구 중 예루살렘의 수로 시설을 찾는데 성공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당시의 이 산지(오벨 언덕)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은 바깥에 연접해 있는 두 골짜기에서 솟는 두 개의 샘을 가지고 있었다. 두 샘은 기혼(왕상 1:40-45; 대하 32:30)과 엔 로겔(수 15:1; 삼하 17:13)이다.
와렌이 발굴한 결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기원전 2000여년전부터 벌써 성 밖의 물을 길러 나가지 않고도 물을 길을 수 있는 특수 수도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성 밖에 있는 기혼샘(성 마리아 샘 또는 처녀 샘이라고도 함)이 있는 동굴에서 성 안쪽으로 수평으로 굴을 뚫어 36피트 서쪽 24피트 북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이 물을 성 안에 있는 옛 동굴에다 연결시켜 놓고 45피트의 굴을 위로 뚫어(수직굴) 그 위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바깥 동굴 샘은 입구를 돌과 흙으로 막아서 아무도 모르게 해 놓았다. 이 수로를 와렌의 수갱(Warren's Shaft)이라고 부른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그의 무사 중의 하나인 요압이 어디서 이 급수로에 대한 정보를 듣고 이리로 기어 올라가 성 안에 침입하는데 성공하므로 400년간이나 정복치 못했던 예루살렘을 빼앗아 수도로 정한 것이다(삼하 5:6-10).
예루살렘은 포위 2년 가까이 계속되다가 시드기야 왕 제11년 기원전 586년 오늘날 8월 15일 또는 18일(왕하 25:8-12; 렘 52:12-15)에 함락되었다.
3. 솔로몬의 성전에 대하여 쓰라.
솔로몬 성전의 모양은 성막의 모형과 같고 부분을 두 배로 확대되었다. 규빗을 50cm로 계산하면 성전의 길이는 30미터, 폭 10미터, 높이 15미터였다(왕상 6:2). 성전 건축에는 약 3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과 15만 명 정도의 가나안 사람들이 가담했다.
4. 아합의 상아궁에 대하여 쓰라.
1908-1910년에 걸쳐 사마리아가 하버드 대학,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 영국 고고학회 등의 주관 하에 발굴되었다. 거기에서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가 처음 쌓은 왕궁의 기초(왕상 22:39)가 발굴되었다. 아합과 여로보암 Ⅱ세가 확장한 궁전과, 아합이 병거를 타고 아람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한 후 그의 피 묻은 병거를 씻었다는 사마리아 연못도 발견했다(왕상 22:38).
아합의 상아궁의 진상이 1931-1933년 그리고 1935년 이후 계속된 사마리아 발굴에서 밝혀졌다(왕상 22:39). 상아 궁은 상아를 조각해서 벽장식의 타일처럼 벽에 붙였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아합의 상아 궁에서 발굴된 깨어진 상아 조각품과 꼭 같은 상아 조각품이 1845년 레이어드가 파내고 최근인 1957년 전후해서 말라완(M.E.L. Malawan) 교수가 팠던 니므롯(성경의 갈라로 앗시리아의 초기 수도)의 앗시리아 궁전에서 나온 것과 흡사한 것이다.
그 이유는 한 때 아합의 상아궁의 벽에 붙어 있던 상아 조각품을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이 망할 때 앗시리아가 떼 내어 부서진 것들을 그냥 버리고 가서 최초의 발굴에서 그 조각들이 나온 것이다. 또한 완전한 것은 니므롯에 있는 앗시리아 왕궁의 벽에 붙인 것이다. 앗시리아가 망할 때 정복한 국가에서 다시 떼어갔다.
아합의 상아 궁 발굴 때에 화장품과 화장품을 배합할 때 썼던 접시와 조그마한 석함이 나왔다(왕하 9:30). 거기에는 검정, 초록, 빨강색을 담을 수 있는 작은 홈이진 곳이 있었고 가운데는 이것들을 배합하는 움푹 파인 곳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불그스름한 색깔이 남아 있었다.
5. 바벨론성에 대하여 쓰라.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벨론 성이 현대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1899년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간 로버트 콜더베이(Robert Koldewey)교수는 독일 동방학회의 사업으로 바벨론 성을 발굴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13:20-21, 14:1; 렘 51:37)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오직 들짐승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며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사 13:21, 22)
발굴 결과 바벨론 성의 규모는 내외 전장(全長)이 15마일 정도이고, 느부갓네살 이후의 전 도성의 둘레는 하궁에서 옛 왕궁까지 유프라테스강 전면을 포함해서 10마일 정도였다. 강 동편의 내성을 두른 2중 성벽은 바깥 것이 22피트, 안의 것은 12피트였다. 바벨론 전 성읍을 바깥으로 두른 성벽 역시 2중 성벽인데 바깥 것은 26피트, 안의 것은 24피트였다. 폐허 중에 제일 높은 부분이 이슈타 게이트로서 48피트 가량이다. 본래 성안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은 300피트 가량의 신전 탑 '에테메난키'(Etemenanki)였다.
그 폐허에서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직위가 찍혀진 평방 12인치 반의 벽돌이 발굴되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주문(主門)인 이슈타 게이트인데 그 성문의 벽돌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용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뒤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이 문각 되어 있어 다니엘 7장의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다니엘의 세 동무가 던져졌던 풀무는 벽돌 굽는 가마였다. 원추형으로 생긴 이 가마 속에 진흙과 벽돌을 쌓고 원유와 짚 또는 겨를 섞어 연료로 사용했다. 다니엘 3장에서 분노한 왕이 7배나 뜨겁게 하라던 것은 원유가 섞인 연료를 7배만 더 넣으면 된다. 또 우상이 세워졌던 '두라 평지'(단 3:1)는 지금의 힐라 언덕 5마일 아래에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들어가는 한 지류의 입구에 있는 '나르 두라'(Nahr Dura)이다.
다니엘 6장의 사자 굴은 고대 제국의 왕들이 스포츠로 사자 사냥을 위하여 사자를 가둬 두었던 곳이다. 이와 같은 사자 굴은 앗시리아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사자 굴을 인봉할 때는 그 입구를 돌로 맞고 그 둘레를 젖은 석회로 바른 뒤 원통 모양으로 문각 된 도장을 굴려서 직사각형의 인상(印象)을 남겨 아무도 뜯지 못하게 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이 마지막 잔치를 했던 큰 홀은 느부갓네살이 지은 남궁에 있다. 그곳 중앙에는 보좌가 있는 넓은 방이 있는데 길이가 173피트, 넓이 57피트, 높이 66피트이다.
6. 석방 령들에 대하여 쓰라.
1) 고레스의 제1차 석방령
바벨론은 유다 백성을 포로에서 석방하지 않자 약속된 70년 기간(렘 29:10)의
예언은 성취될 가망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페르샤
의 고레스를 일으켜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바벨론 성을 함락시켰다(사
44:26-28). 고레스는 기원전 539년 10월 29일에 개선 입성했다.
고레스는 자기의 숙부이며 장인인 메데 왕 다리우스(단 6장)를 이어 페르샤의 왕이 되었다. 그는 다니엘 6장의 사자굴 사건, 고레스에 관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 12, 29:10), 다니엘 5장의 사건 해석 등에 감명을 받고, 그의 통치 원년 즉 기원전 537년 가을에 제1차 포로 석방 령을 내렸다.
고레스의 제1차 포로 석방 조서가 에스라 1장에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 폐허에서 고레스 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길이 9인치의 기념비(圓住 記念碑)가 발굴되었다. 그 내용은 그가 아무 싸움도 하지 않고 바벨론을 함락시킨 사실과 선대왕(先代王)들의 악을 보상하기 위해 외국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돌려보내서 저들 신들의 신전을 재건하도록 도와 준 이야기가 쓰여 있다. 그 내용은 에스라 1장의 것과 방불하여 에스라서의 정확성을 입증한다. 고레스의 무덤은 파살가대(Pasargadae)에서 발굴되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석방 령이 내려졌지만 이 때에 돌아 간 백성들의 수는 종을 제외한 42,360명에 불과하였다(스 2:64, 65).
2) 다리우스 1세의 제2차 석방 령
제1차 석방 령이 내린지 약 17년 만인 다리우스 1세 제2년 기원전 520/519
년에 제2차 석방 령이 내렸다(스 4:24-6:15).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는 이기적
인 백성들을 책망하고 격려하여(학 1:3-10) 성전 건축을 서둘렀다. 하나님께 서는 아하수에로 때의 위기를 미리 보시고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에서
속히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했다(슥 2:6-9). 학개는 '만국의 소망'(학
2:7)이신 그리스도의 초림을 예언하였다(학 2:6-7).
제2차 석방령을 내린 페르샤 왕 다리우스 1세(522-468 BC)의 보석 인장이 테베에서 발견되었다. '위대한 왕'이라고 찍혀 있다. 또한 펄스 포리스(Persepolis)에서 발굴된 높이 8피트의 석회석 부조(浮雕)에는 다리우스 1세가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는 에스더의 남편인 아하스에르 왕이 아버지로 에스더의 시부이다.
다리우스의 제2차 석방령이 내렸지만 1차 석방령에 무감각했던 유대인들은 무관심하게 남아 있었다. 이러는 동안 사태가 악화되어 유대인 전멸령이 내리게 되었다. 사단의 조종을 받은 하만의 모략에 의하여 유대인들은 올무에 걸린 것이다(에 3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때를 위하여 에스더를 왕후가 되게 하셔서 사태가 해결된다(에 4:16).
1884년-1886년에 걸쳐 불란스 사람 듀라포이(Dieulafoy)에 의하여 에스더가 살던 수산궁이 계속 발굴되었는데 거기 에스더 4장 2절의 '대궐 문', 5장 1절의 '알뜰', 6장 4절의 '바깥 뜰', 3장 6절의 '부르'를 발굴 확인했다.
3) 아닥사스다의 제3차 석방령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아하수에로(486-465 BC)왕 때
하만의 모략에 걸려 전멸할 위기를 벗어났으나 국제 정세와 국내 사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혜미야의 수고로 제1차 석방령이 내린 후 80년 이 되어 가던 기원전 457년에 마지막 석방령이 내렸다(스 7:7).
아닥사스다(Artaxerxes I Longimanus; 465-423 BC)는 에스더의 의붓아들로 아하스에로 왕의 셋째 아들이다. 2300주야의 기산점이 되는 기원전 457년의 석방령이 내림에 있어서 에스더의 감화가 컸음이 확실하다.
석방 령이 내린 뒤 에스라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리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실망 적이었다(스 8:1-14). "집들과 땅들을 마련한 많은 사람들은 저들의 소유를 희생할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안일과 평안을 사랑하였고 그저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였다. 저들의 모본은 믿음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기로 선택한 자들에게 걸림이 되었다".
출발을 위하여 아하와 강변에 모였을 때 회중 가운데 레위 자손은 한 사람도 없었다(스 8:25). 결국 출발은 지연되었고 에스라는 개인 설득을 벌이고 긴급 초청을 발하여 약 40명의 제사장과 220명쯤의 행정가, 교사들을 모아서 출발했다.
19세기 말엽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대한 고등 비평의 공격이 집중되었다. 이 때 독일의 저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메이어(Edward Mayer) 교수는 에스라서의 역사성을 적극 옹호하면서 만약 당대의 페르샤 문서가 어디서인가 발굴되기만 한다면 그 문서의 기록과 에스라서의 기록은 틀림없이 일치할 것이라고 1896년에 선언했다.
1904년-1908년에 걸쳐 나일강의 한 작은 섬인 엘레판틴에서 수많은 페르샤 공문서와 개인 편지 등이 발견되었다. 그 기록은 기원전 5세기 경 아닥사스다 1세와 다리우스 2세 때에 아람어로 쓰여진 것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기록과 너무나도 어울리고 있어 성서 신앙의 일대 개가를 올렸다.
제6장 예루살렘 고고학
1. 예루살렘 지명에 대하여 쓰라.
고대근동의 역사기록에서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시기는 서기전 1900년경 이집트 문서에서였다. 대부분의 이집트 학자들은 서기전 1900년경 기록된 저주문서에 나타난 상형문자 표기인 ‘아우샤멤’을 예루살렘으로 보고 있다. 당시 이 단어에는 도시를 나타내는 한정사 대신 지역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어서 이집트인들이 예루살렘을 한 지역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기전 14세기에 기록된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아카드어로 ‘우루샬림(Urušalim)’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서기전 701년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의 침공 기록에는 ‘우르살리무(Ursalimmu)’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지명 ‘예루샬라임(םילשׁורי)’은 우가릿 신화에 등장하는 새벽과 여명의 신, 샬렘과 관계가 있으며 ‘샬렘 신의 기초’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다윗 이전 시대 예루살렘이 ‘여부스’로 불렸다는 사실은 이집트 및 고대근동의 자료에 그 지명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예루살렘이라고 알려졌으며 아마도 이 도시에 여부스라 일컫는 민족이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칠십인 역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어 표기인 ‘히에로솔뤼마(‘Ιεροσολυμα)’는 히브리어 지명의 음역을 반영하는 동시에 이 도시의 ‘거룩성(히에로스)’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2. 예루살렘의 지리적 배경을 쓰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앙산악지대의 분수령에 위치해 있는 전형적인 산악 요새로 개발되었다. 예루살렘은 연중 강수량이 500밀리미터 정도로 겨울곡식인 밀이나 보리를 충분히 경작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비록 동쪽으로는 유대광야가 이어지지만 북쪽의 베냐민 산지, 남쪽의 베들레헴, 그리고 서쪽의 쉐펠라 등 예루살렘은 농사와 목축이 가능한 살기 좋은 지역에 속해 있다. 다윗 성이라 불리는 최초의 예루살렘은 기드론 골짜기 위쪽의 해발 700미터 높이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솔로몬이 건설한 성전은 해발 743미터의 완만한 봉우리에 위치해 있으며 히스기야 시대부터 확장된 서쪽 언덕은 해발 773미터에 달한다.
예루살렘의 지리적 위치의 결정요인은 기드론 골짜기에 위치한 기혼 샘이다. 해발 645미터 지점에 위치한 기혼 샘은 석회암 지역의 바위굴 속에서부터 품어 나오는 전형적인 카르스트(karst) 샘으로서 계절에 따라 하루에 최소 200에서 최대 1000입방미터의 물이 솟아 나온다.
다윗 성은 북쪽의 성전 산 부분을 제외하고는 동쪽의 기드론(Kidron) 골짜기와 서쪽의 티로포에온(Tyropoeon: 치즈 제조자) 골짜기, 그리고 남쪽의 힌놈(Hinnom) 골짜기 등 삼면이 골짜기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비록 면적은 작지만 힌놈 골짜기를 중심으로 소규모의 야채농사가 가능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지에서는 과수원이 발달했었다. 하지만 밀, 보리를 재배할만한 골짜기 평야는 북쪽과 서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항상 이 지역을 통치해야만 식량자급이 가능한 상태였다.
3. 예루살렘의 지하급수 시설들에 대하여 쓰라.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은 유일한 수원지인 기드론 골짜기의 기혼 샘의 물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워렌 수직통로(Warren's Shaft), 실로암 수로(Siloam Channel), 그리고 히스기야 터널(Hezekiah Tunnel) 등 모두 3종류에 달한다.
1) 워렌 수직통로
워렌의 수직통로는 1867년 예루살렘 탐사 임무를 수행하던 영국 공병대의 찰스
워렌이 처음 발견하였다. 전체 구조는 지상에서 54미터 길이의 경사진 터널을
통해서 밑으로 내려간 다음 마치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12.3미터 높이의
수직통로가 기혼 샘의 물길과 연결되어 있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워렌 수직
통로는 원래 파여진 자연 동굴과 바위틈을 이용해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성
경학자들은 워렌 수직통로는 바로 요압이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 타고 올라갔던
‘물을 길어 올리는 바위벽(찌노르)’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삼하 5:8; 대상
11:6). 하지만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므깃도, 하솔, 게셀, 기브온, 이블르암)의
경우에서와 같이 워렌 수직통로는 서기전 10세기 왕정시대에 건설된 것으로 보
인다.
2) 실로암 수로
실로암 수로는 기혼 샘의 물을 저지대의 힌놈 골짜기에 저장하기 위해서 건설된
400미터 길이의 수로이다. 실로암은 원래 히브리어 ‘실로악흐(חולישׁ)’의 그리
스어 음역이며 물을 ‘흘려보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실로암 수로 중 일부는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로 연결되어 있으며 수로의 중간
부분에는 여러 군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근처의 밭으로 물이 공급되도록 하였
다. 실로암 수로의 단점은 바로 이 수로가 성 밖에 위치해 있어서 전시에 예루살
렘이 적군에 의해 포위당할 경우 물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히스
기야는 기혼 샘의 물을 성안의 실로암 저수 장까지 흐르도록 바위를 파서 터널을
만들었다.
3) 히스기야 터널
히스기야 터널의 전체 길이는 525미터인데 비해서 터널 양쪽 끝의 고저 차이는
겨우 32센티미터로서 기울기가 0.06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시공
되었다. 히스기야 터널은 특히 실로암 저수장 부분에서 발견된 실로암 비문을
통해서 오늘날의 터널 공사와 마찬가지로 양쪽에서 파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
으며 중간에서 만났을 당시의 광경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혼 샘과 실로암 저수 장 사이의 직선거리가 315미터에 불과
한데 적들이 쳐들어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525미터나 되는 구불거리는 터널을
건설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질학적인 조사 결과 히스기야 터널은 기존에 물이
흐르는 바위 틈새를 따라 건설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불
거리는 터널임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파 들어간 인부들이 정확하게 중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4) 실로암 비문
실로암 비문은 서기전 701년 앗시리아 산헤립의 예루살렘 침공에 대비하여 히
스기야가 행한 일련의 방어전략 공사 중의 하나인 지하수로 터널 벽에 기록된
것이었다.
서기전 701년 산헤립이 앗시리아 군대를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을 때(왕하
18:13-16; 대하 32:1-8), 비록 성경에는 히스기야가 지하터널을 팠다는 기록
은 없지만 “성밖의 샘들을 막고 흐르는 물줄기를 차단했다”는 구절(대하
32:3-4)을 통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당시 예루살렘의 지하급수시설을 대대적으
로 정비했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수원지인 기혼 샘으로부터 실로암 못까지 전체 길이가 525미터에
달하는 히스기야 터널은 고대 이스라엘의 수준 높은 토목공사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터널의 출발지인 기혼 샘은 도착지인 실로암 못 보다는 오직 32센티미터
밖에 높지 않아서 전체 터널의 평균 기울기는 0.06퍼센트에 불과하다. 이 밖에 도 터널과 관계된 가장 신비로운 두 가지 의문점은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
까지는 직선거리로 315미터인데도 불구하고 구불구불하게 파여져 525미터나
되며, 어떻게 양쪽에서 파들어 간 인부들이 한 가운데서 만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한 구약학자들의 답은 터널의 지상 부분에 있었던 유
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하지만 1978년부터 다윗성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될 때 지질학자인 단 길(Dan Gill)의 정밀 조사 결과 이 터
널지역이 원래 4만 년 전부터 형성된 바위 틈새로 이어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즉
히스기야의 공병대원들은 단순히 물이 흐르는 기존의 바위 틈새를 따라 파다보니
까 구불거리는 수로를 따라간 것이고 당연히 도중에서 양쪽이 만날 수밖에 없었
다는 것이다.
실로암 비문은 1880년 실로암 못에서 물놀이하던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히스기야 터널의 실로암 쪽 출구에서 안쪽으로 10미터 들어간 지점의 왼쪽 벽, 즉 동쪽 면에 바닥에서 1.5미터 지점에 기록된 이 비문은 모두 6줄에 200자의 고대 히브리어가 기록돼 있었다. 비문이 발견된 지 10년만인 1890년 한 도굴꾼이 이 비문을 터널 벽에서부터 떼어 내는 과정에서 비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현재는 23개의 글자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예루살렘의 한 골동품 상인에게 팔렸던 이 비문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 당국에 의해 압수되어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관됐고 오늘날까지 그곳에 소장되어 있다. 비문의 히브리어 전문과 우리말 번역은 다음과 같다.
[תא םבצחה םפנמ] דועב .הבקנה .רבד .היה .הזו .הבקנה [רבד] (1)
ק .שׁא .לק .ע[משׁנ בק]נהל .תמא .שׁלשׁ .דועבו .וער .לא .שׁא .ןזרגה (2)
ה .םיבו .לא[משׁ]מו ןמימ .רצב .הדז .תיה .יכ .וער .לא .אר (3)
וכליו .ןזר[ג] .לע .ןזרג .וער .תרקל .שׁא .םבצחה .וכה .הבקנ (4)
[א]מו .המא .ףלאו .םיתאמב .הכרבה .לא .אצומה .ןמ .םימה (5)
ם]בצחה .שׁאר .לע .רצה .הבג .היה .המא .ת (6)
(1) 굴착 [공사], 굴착 공사는 다음과 같다. [인부들은] 도끼를
(2) 서로 [마주쳤다]. 아직 3아마(큐빗)를 더 파야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3) 왜냐면 암벽의 오른쪽과 왼[쪽에] 틈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4) 굴착 당일에 인부들은 맞은편 동료 쪽으로 파 들어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 로 겹쳤다.
(5) 물이 수원지로부터 연못까지 1200아마(큐빗)를 흘러갔다.
(6) 바위의 높이는 인부들의 머리 위로 100아마(큐빗)였다.
4. 시온산에 대하여 쓰라.
시온은 히브리어로 ‘찌욘(ןוי)’으로 발음되며 ‘건조한 땅’을 뜻하는 ‘짜욘(ןוי)’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시온은 대부분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지칭하는 포괄적이고도 추상적인 명칭으로 등장하며 ‘시온의 딸’, ‘시온의 아들’ 등의 상징적 표현으로 자주 쓰였다. 하지만 시온은 원래 다윗이 점령하기 전 여부스 민족이 살고 있었던 예루살렘 요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따라서 다윗이 점령한 여부스 도시가 ‘메쭈닷트 찌온’, 즉 ‘시온의 요새’로 나타나며, 다윗의 시온은 ‘이르 다비드’, 즉 ‘다윗성’으로 불려졌다(삼하 5:7).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역대기에서도 예루살렘, 여부스, 시온 요새, 다윗 성 등이 모두 한 장소를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됐다(대상 11:4-5). 성전공사를 마친 솔로몬은 다윗 성, 즉 시온의 한 장소에 안치됐던 야훼의 계약 궤를 성전으로 “올려놓았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 시대에도 여전히 시온은 다윗성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잘 알 수 있다(왕상 8:1).
5. 실로암에 대하여 쓰라.
성경시대의 실로암은 실로암 수로와 실로암 못 등 두가지를 모두 의미하고 있다. 실로암은 히브리어로 “보낸다”는 뜻의 동사 “חלשׁ(샬락흐)”의 명사형 “ח(쉴로악흐)”의 그리스어 음역에서 비롯됐다. 실로암은 못으로 불려지기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수로의 명칭이었다. 따라서 이사야서(8:6)에서는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냇물”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혼 샘에서부터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마주치는 곳으로 흐르는 예루살렘 최초의 인공수로였다. 실로암 수로는 덮개가 있는 수로부분과 군데군데 바위를 파서 만든 터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500미터에 달한다. 실로암 수로는 오늘날 기드론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가 마주치는 곳에 위치한 “하므라 저수장(Birkat el-Hamra)”까지 기혼 샘의 물을 운반했으며 아마도 이 곳이 최초의 실로암 못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또한 실로암 수로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어서 자동적으로 근처 골짜기에 위치한 “왕의 정원”에 물을 효율적으로 공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초기의 실로암 못과는 별도로 서기전 701년 히스기야가 거대한 토목공사를 통해 수로터널을 뚫고 기혼 샘의 물을 한군데 모으면서 새로운 실로암 못이 생겨났다. 초기의 실로암 못(아랫 연못)과 구별되게 “윗 연못”이라 불렸던 이 저수장은 벤 시라서(48:19)에서 히스기야가 건설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약시대에 예수가 한 시각 장애인을 고쳐주었을 때 눈 세척 장소로 실로암 연못을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잘 알려진 저수장으로 볼 수 있다(요 9:1-12). 요세푸스는 실로암을 “분수대”로 표현했으며 티에로포에온 골짜기의 남쪽 끝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했다(유대전쟁 5.4.2).
탈무드에 의하면(수카 4.9) 초막절에 실로암 연못의 물을 황금 잔에 담아서 수문을 통해 성전의 제단으로 가져가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예수가 초막절에 예루살렘에서 언급한 흐르는 물에 관한 비유(요한 7:37-38)는 이러한 실로암의 물 긷는 전통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서기 333년경에 기록된 보르도 출신의 한 순례자의 기록에 의하면 실로암 연못에는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건축물(quadriporticus)”이 있었다고 한다. 이 회랑은 아마도 서기 135년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로마 식 도시로 개조할 때 대표적인 노천 목욕탕으로서 만들었으며 근처의 바실리카 건물과 함께 남녀가 별도로 목욕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기 6세기의 순교자 안토니우스는 실로암에는 사방으로 건설된 회랑과 함께 기념교회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에도 이 교회가 나타난다. 따라서 비잔틴 시대의 실로암 교회는 서기 5세기 유도키야 황후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실로암의 북쪽 회랑에 건설된 이 교회는 19세기 블리스(F.J. Bliss)와 딕키(A.C. Dickie)에 의해 부분적으로 조사되었으며 길이가 35미터, 폭 30미터 규모로 알려졌다.
오늘날 실로암 저수 장은 길이 15미터 폭 4.5미터 규모이며 기혼 샘에서부터 525미터 길이의 히스기야 터널을 통과한 물이 이곳을 지나 기드론 골짜기로 빠져나가며 바닥에는 여러 개의 기둥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또한 오늘날의 실로암은 “실로암 마을(크파르 실르완)”로서 20세기 초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의 가파른 언덕 지역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주거지를 일컫는 지명이기도 하다.
제7장 신약시대 고고학
1. 찌포리에 대하여 쓰라.
1931년 여름 미국 미쉬간 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찌포리라 불리는 나사렛 근처의 한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시도했다. 당시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이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사마리아, 벳샨, 므깃도 등 유명한 대도시들을 발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초라한 폐허를 택한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신약시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찌포리가 갈릴리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정성스런 두 달 동안의 발굴 결과 서기 1세기에 건설된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식 극장과 별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비록 지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신약시대에 나사렛은 문명과는 고립된 촌락이 아닌 대도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가설과 함께 어린 시절 예수의 교육적, 문화적 배경을 이 도시로부터 찾으려는 새로운 이해가 시도됐다. 그 결과 청중을 사로잡는 비유, 현실적인 율법의 해설, 그리고 심오한 사랑의 윤리 등은 보잘것없는 나사렛 같은 시골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걷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위 ‘찌포리 문화설’로 불렸던 이 가설은 중단된 발굴과 함께 얼마 못 가서 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1976년에 시행된 이스라엘 전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유적조사에서 찌포리의 중요성이 다시금 부각됐고, 1985년부터 이스라엘의 히브리 대학과 미국의 듀크 대학 공동으로 본격적인 대규모의 발굴이 시작됐다. 비록 1930년대에는 신약시대의 유적을 중심으로 복음서의 해설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과 저택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이제 찌포리는 서기 3세기 동안 발전했던 유대교 중심지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찌포리의 유적들은 대부분 신약시대 직후인 서기 2-5세기의 회당과 귀족들의 저택 등인데 특히 60여 군데서 발견된 모자이크는 갈릴리 지역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변을 감시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한 우뚝 솟은 언덕, 수량이 풍부한 샘과 근처를 흐르는 하천, 비옥한 농경지, 그리고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였다.
찌포리에는 서기전 7-5세기 경부터 사람들이 주거했던 흔적이 있지만 서기전 1세기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이 지방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서기전 40년 헤롯은 로마군의 도움으로 찌포리를 선점한 후 온 갈릴리를 점령했으며, 서기전 4년 그가 죽고 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왕국의 분봉 왕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찌포리를 새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 군에 의해 파괴된 후 유대민족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은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서기 200년경 찌포리에 설립되면서 이곳이 유대교의 중심지가 됐다.
‘기록된 토라’인 구약성경과 견줄만한 ‘구전 토라’인 탈무드의 기본이 되는 미쉬나가 최고랍비 유다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곳도 바로 찌포리였다. 서기 3세기의 100년 동안 번창했던 찌포리는 유대교의 중심지가 티베리아스로 이동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됐다.
서기전 4년 헤롯 안티파스가 찌포리를 자율적인 도시라는 의미로 ‘오토크라토리스(Autocratoris)’로 명명하고 자기나라의 수도로서 건축공사를 시행했을 때 나사렛을 비롯한 근처의 마을 주민들이 이 공사에 대거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셉과 예수의 직업으로 알려진 복음서의 ‘텍토노스(τεκτωνος)’의 좀 더 포괄적인 의미는 단순한 ‘목수’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건축 노동자’라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찌포리 건설현장을 오갔을 것이고 어쩌면 이곳의 왕궁 부설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예수는 찌포리에 있는 극장에서 서커스와 연극 등을 구경했을 것이다. 그리스 고전에서 ‘휘포크리테스(υποκριτης)’는 ‘연극 배우’라는 뜻인데 오직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는 배우보다는 ‘위선자’의 의미로 자주 쓰였다. 아마도 원래 예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이 배우 같은 자들아’라고 빗대어 꾸짖었을 것이다. 실제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연기하는 찌포리 극장의 배우들을 염두에 둔 예수의 언어적 기법은 로마식 극장이 없었던 나사렛 같은 시골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나사렛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성벽에 둘러싸여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왕궁의 일상생활도 예수의 비유에서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다. 왕궁에 거하는 고급 의상을 차려입은 자들(마태 11:8), 빚진 종을 용서하는 왕(마태 18:23-35), 혼인잔치를 베푸는 왕(마태 22:1-14), 왕과 왕이 전투를 벌이는 비유(누가 14:31),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 중의 하나인 헤롯왕의 재무장관 아내인 요안나(누가 8:3) 등은 모두가 찌포리나 티베리아스같은 왕도와 동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서기 20년경 갈릴리 왕국의 수도는 갈릴리 호수 변에 새로 건설된 로마식 도시인 티베리아스로 옮겨갔다. 청년이 된 예수 자신도 이 건설현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당시 대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아스가 복음서에 언급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후대의 랍비적인 해석은 ‘하맛트’라 불리는 유대인 마을의 묘지를 헐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어서 유대인들이 정결 율법에 따라 일부러 이 도시를 피했다고 전해 준다. 찌포리의 영화가 사라지고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티베리아스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직감한 예수가 자신의 선교 중심지로 가버나움을 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2. 갈릴리 호수에 대하여 쓰라.
1) 16군데의 어항을 지닌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 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 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 온 그는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에 몰두했다. 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1971년부터는 그는 둘레가 66km나 되는 호수 변을 샅샅이 뒤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했다. 20년간의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19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들은 갈릴리 호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도 정확했다’는 그의 고백이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경 연구방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어부의 발견은 이들의 의구심을 부끄럽게 했다.
2) 생선은 매우 비싼 식품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 변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의 비유에서도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다.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를 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을 담갔다. 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 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다. 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다. 서기 1세기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서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룻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 길을 마다 않고 판로를 개척했으며, 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다. 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발달되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3) 어족의 보고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 정어리, 잉어 등이다. 정어리는 젖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히며 한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톤을 차지한다. 잉어는 정어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는다.
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슛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센티미터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 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이라 불린다.
3. 맛사다에 대하여 쓰라.
1) 지리적 배경
맛사다는 원래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해안 가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맛사다는 동쪽의 사해 변으로는 400미터 높이의 절벽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는 주위의 계곡보다는 100미터 이상으로 솟아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맛사다 요새의 정상은 길이 600미터, 가장 넓은 곳의 폭이 300미터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과 1960년대의 발굴을 통하여 맛사다 요새의 역사적, 고고학적 모습들이 상세하게 밝혀졌다. 맛사다는 1838년 엔 게디를 탐사했던 미국의 로빈슨(E. Robinson)과 스미스(E. Smith)에 의해 처음으로 역사적 유적지로 확인됐다. 1842년에는 미국인 선교사 월콧트(S.W. Walcott)와 영국인 티핑(Tipping)이 맛사다에 직접 올라가서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작성하였고, 1848년에는 미국인 해군 장교 린치(J.W. Lynch), 1851년에는 프랑스의 드 소시(F. de Saulcy), 1858년에는 레이(E.G. Rey) 등이 차례로 맛사다를 탐사하였다. 나아가 1867년 영국의 워렌(C. Warren)과 1875년의 콘더(C.R. Conder)에 의해 맛사다의 구체적인 구조물들이 차례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2) 고고학적 배경
맛사다의 본격적인 발굴은 1963-1965년 동안 히브리 대학의 야딘(Y.Yadin)의 주도하에 전 세계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맛사다의 최초의 주거 역사는 동석기 시대(서기전 4300-3300)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들의 흔적은 남쪽 절벽에 위치한 동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곳에서 당시의 모직 천 조각, 거적, 토기 류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들의 주거는 유대 광야의 골짜기 동굴에서 자주 발견되는 동석기 문명의 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왕정시대인 서기전 10세기 이후에도 북쪽 절벽 근처에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주거했던 흔적을 이 곳에서 발견된 당시의 토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맛사다는 서기전 150년경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에 의해 처음으로 요새로 이용되었다. 이 후 헤롯 대왕(서기전 37-4)은 백성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여 항상 대피할 수 있는 광야의 요새로서 맛사다를 계획적으로 축성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비축해 놓았다. 서기전 40년 자신의 적대 세력인 안티고누스와 파르티아 군대에 쫓기던 헤롯 가족들을 맛사다에 숨겨놓고 동생인 요셉으로 하여금 800 여명의 군사로 이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당시 안티고누스에 의해 포위된 헤롯의 가족 일행은 갑자기 쏟아진 폭우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를 통해 로마로 망명한 헤롯이 로마의 세력을 등에 업고 유다의 왕으로 임명받아서 로마 군을 이끌고 유다 지방을 정복한 후 맛사다를 다시 찾은 헤롯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유대 민족의 반란과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공격 위협에 피할 수 있는 피난처로서 서기전 37-31년 사이에 맛사다를 본격적으로 요새화 했다. 헤롯이 죽은 후 이 곳에는 소규모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요새를 유지하고 있었다.
3) 고고학적 발견 물
(1) 물 저장 시설:
서기전 150년경 헤스몬 왕조의 왕들이 맛사다를 본격적으로 요새화 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바로 물 공급 및 저장에 관한 것이었다. 서기전 40년경 헤롯은 왕이 되기 전 반대파에게 몰려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과 부하들을 맛사다 요새에 숨겨두고 로마로 떠난 다음 무사히 돌아와서 맛사다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빗물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전해 듣고 헤롯은 요새의 첫 번째 조건으로서 종합적이고도 완벽한 물 공급 및 저장 체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맛사다의 급수시설은 계곡의 댐과 수로 등의 물 공급 체계와 지하 저수탱크들로 구성된 물 저장 체계로 크게 양분된다.
헤롯은 먼저 맛사다 서쪽의 유대 광야에 위치한 북쪽의 벤-야이르 골짜기와 남쪽의 맛사다 골짜기 등 두 곳에 댐을 건설하였고 이 곳으로부터 맛사다의 북쪽 절벽의 중턱에 두 줄로 파 놓은 저수탱크까지 수로로 연결하였다. 따라서 겨울철 우기에 유다 산악지대에 비가 내리게 되면 자연히 댐으로 막은 골짜기는 거대한 호수로 변하게 되고 이 물은 폭이 1.4미터나 되는 수로를 통하여 맛사다의 저수탱크로 운반되었다. 댐의 높이에 따라 맛사다 계곡에서부터 이어지는 수로는 상부 저장 탱크들로 연결되었고, 벤-야이르 계곡의 물은 하부 저장 탱크들로 운반되었다. 물 저장 탱크는 정방형으로 파여졌으며 상부에는 8개 그리고 하부에는 4개가 배치되었고 탱크 하나 당 용량은 약 4천 입방미터이고 전체는 약 4만 입방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400명의 군대가 10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양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뱀길(snake path) 근처와 정상의 여러 군데에도 7개의 저장 탱크가 있어서 겨울철의 빗물을 저장하거나 북쪽 절벽의 12군데의 저장 탱크에서 끌어올린 물을 임시로 저장하기도 하였다.
(2) 성벽과 요새:
맛사다는 북쪽의 궁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1400미터 길이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성벽은 4미터 두께의 칸막이 성벽(casemate wall)으로서, 1.4미터 두께의 외벽과 1미터 두께의 내벽 사이에는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거나 수비대의 방으로 건설됐다. 맛사다의 성벽은 70개의 수비대 방과 30개의 망대, 그리고 4개의 성문으로 구성돼 있다. 네 개의 성문은 모두가 동일한 설계로서 벤치로 둘러싸인 네모난 방에 바깥쪽으로 통하는 외문과 안쪽으로 통하는 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성문은 위치에 따라 각각 뱀 길 문, 서문, 남문, 수문 등으로 구분된다.
(3) 창고:
맛사다의 창고는 공공건물로서 별도로 건설된 것과 특정한 건물에 딸린 것 등으로 구분되는데 대표적인 공공 창고는 바로 북쪽의 로마식 목욕탕 옆에 위치한 것이다. 창고는 중앙의 복도를 중심으로 양편에 폭 4미터, 길이 27미터의 방들이 건설되었으며 각방의 입구는 복도를 향하도록 설계되었다. 당시 보관되었던 중요 식량들은 밀, 보리 등의 곡식류, 올리브유, 무화과, 대추야자, 건포도 등의 건과 류, 그리고 포도주 등이었으며 각각 적합한 항아리에 담겨졌음이 발굴을 통해서 밝혀졌다. 창고의 벽면과 천장은 석고로 덧칠해져서 방수의 효과를 가져왔고, 특별히 들어가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방바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석고로 칠해진 웅덩이가 패여 있어서 이 곳이 포도주나 기름 등의 액체 류를 부어 놓고 항아리에 담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삼층 궁전:
맛사다의 북쪽 절벽에는 삼층의 테라스에 각각 건설된 세 개의 궁전이 있다. 이 테라스는 바위를 계단식으로 깎은 다음 돌로써 축대를 쌓아 완성하였다. 상궁전(upper palace)은 왕족이 주로 기거하던 곳으로서 절벽 가장자리에는 반원형의 회랑이 딸린 전망대가 있으며, 이 곳에서 유대 광야와 푸른 사해, 그리고 건너편의 모압 산지를 잘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전망대의 뒤 쪽에는 온갖 진귀한 화초로 꾸며진 정원이 있었다.
삼층 계단 중 한 가운데 위치한 중궁전(middle palace)은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정자를 건설하였고, 발굴에서 발견된 지붕 장식을 통하여 화려한 로마식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맨 밑의 하궁전(lower palace) 직사각형의 회랑과 한 가운데의 뜰과 부속 목욕탕이 딸린 연회장이 있었으며, 특별히 남쪽 벽에 그려진 채색 벽화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 하궁전은 가파른 절벽에 돌로써 축대를 쌓고 건설되어서 당시 건축술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상궁전에서부터 중궁전을 통해 하궁전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직사각형의 기둥을 중심으로 계단이 사방으로 감아 내려가는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모든 계단은 지붕을 만들어 실내로 통하도록 설계됐다.
(5) 서 궁전:
서 궁전은 이 요새의 행정과 의전을 진행했던 중심적인 공공건물로서 3900평방미터 넓이로 맛사다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이 궁전은 숙소와 집무실, 작업실, 창고, 사무실 등의 네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숙소는 한 가운데의 실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둘러싸인 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개에 달하는 집무실의 바닥은 검은색과 붉은 색의 돌들로 만들어진 매우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무늬와 포도, 무화과 잎, 석류 등의 식물 모티브가 조화를 이루는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모자이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집무실 옆에는 욕조가 딸린 목욕탕이 있으며 건물 외벽에 설치된 계단으로 미루어 서궁전은 이층으로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6) 목욕탕:
헤롯은 북쪽의 궁전 입구에 화려하고도 웅장한 로마식 목욕탕을 건설했다. 이 목욕탕은 마당과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당에는 모자이크로 바닥이 장식되어있고 나바테아식 기둥들로 받쳐진 지붕으로 덮인 회랑이 있었다. 목욕탕 건물은 원래 로마식의 전통적인 여섯 종류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방으로 소화하였다.
① 탈의실(apodyterium): 벽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검은 색과 흰색의 삼각형 타일로 포장됐다. 이 방은 탈의실 및 기름 맛사지(untorium)의 기능도 담당했다.
② 온탕(tepidarium): 이 방은 탈의실과 마찬가지로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바닥은 타일로 마무리되었다.
③ 냉탕(frigidarium): 냉탕은 온탕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위치하며 계단식으로 된 욕조에는 방수 석고가 칠해져 있었고 항상 찬물을 채워 놓았다.
④ 열탕(caldarium): 열탕은 전체 목욕탕 건물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장 큰 방이다. 이 방에는 북쪽 벽의 아치형 홈에는 석영으로 만들어진 얕은 욕조(labrum)가 있었고 남쪽의 사각형 홈에는 욕조(balneum)가 설치되어서 납으로 된 파이프를 통하여 목욕탕 외부에서 항상 찬물이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열탕은 항상 바닥이 뜨거운 관계로 물을 부어서 수증기가 일도록 하여 일종의 증기탕(subartorium)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⑤ 난방 구조: 열탕을 항상 뜨겁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닥은 온돌(hypocaust)의 구조로 되어 있었고 구들 밑의 바닥에는 높이가 65센티미터가 되는 200여 개의 특수한 내연벽돌로 쌓은 기둥들이 구들장을 받치게끔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열탕의 벽과 천장에도 네모진 토관으로 덮여 있어서 아궁이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가 이 토관들을 통해 순환됨으로써 열탕은 일종의 사우나 역할을 하였다. 이 열탕의 독특한 온돌식 난방 장치와 벽의 네모진 토관들은 발굴 결과 일부가 현장에 잘 보존되어서 20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신약시대 당시의 로마식 목욕탕의 자세한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7) 유대 전쟁(서기 66-73) 당시 열심당원들의 건축물
서기 66년부터 맛사다를 차지했던 열심당원들은 대부분의 건물들을 자신들의 숙소로 개조하기 위해 바닥의 타일과 기둥, 그리고 나무판들을 뜯어내어 건축자재로 활용하였다. 북쪽의 삼층 궁전에서 화살촉과 갑옷의 비늘 등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맛사다에서 가장 화려했던 이 건물들이 열심당원들의 수비대가 주둔했던 막사로 활용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서쪽 궁전은 헤롯 시대와 마찬가지로 행정적 중심지로 이용되었고 그 외의 건물들은 숙소로 사용되었다. 이 곳에서는 요세푸스의 증언대로 열심당원들이 자결하기 직전 가구와 무기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불로 태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열심당원들이 새로 건설했던 건물들은 임시로 지은 숙소들 외에 주로 종교적 목적의 회당과 정결 예식용 목욕탕인 미크베(mikveh) 등이다.
맛사다 요새의 북동쪽 성벽에 건설된 회당은 130평방미터 넓이의 규모로 당시 유대 회당의 건축적인 전통에 따라 제단 방향이 예루살렘이 있는 북서쪽을 향하도록 만들어졌다. 즉 회당에 들어오는 예배자들은 자연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북서쪽 모퉁이의 20평방미터 크기의 방에는 유리와 청동제의 그릇들이 발견되었고, 회당의 바닥에서는 “마아쎄르 코헨(제사장의 십일조)”이라고 적힌 오스트라콘(토기조각 기록), 신명기와 에스겔서 두루마리 사본 조각이 발견되어서 이 건물의 용도를 분명하게 하였다. 다른 회당과 마찬가지로 맛사다의 회당 내부에는 네 단으로 된 벤치가 둘러 싸여 있었으며 한 가운데는 두 줄로 이어진 기둥이 있어서 이층의 난간을 받치게끔 하였다. 맛사다에서 발견된 두개의 미크베 중에서 남쪽의 성벽에 건설된 것은 유대교 할라카에 의거한 완벽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미크베는 빗물이 모여서 고일 수 있게 한 저수장, 정결 예식용 욕조, 그리고 실제로 몸을 씻는 장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8) 중요 유물들
(1) 동전류: 맛사다에서 발견된 650여 개의 동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조 연대가 새겨진 유대 전쟁 동전들이다. 이 동전들은 서기 66년을 기점으로 제 1년부터 제 5년까지 주조되었으며, 특히 제 4년과 제 5년의 동전들이 다섯 개나 발견되어서 서기 70년 예루살렘 이후에도 유대인들이 스스로 동전을 주조할 만큼 여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오스트라카(토기조각 기록): 맛사다에서는 모두 700여개의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으며 각각 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 그리고 라틴어로 된 기록들이었다. 특별히 이 중에서도 아람어와 히브리어 오스트라카는 이들의 기록 시기가 정확하게 서기 66-73년 사이이기 때문에 고문자학 비교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맛사다의 오스트라카는 창고에서 발견된 물품 표와 식량 배급표, 주거 지역에서 발견된 소유주 명패, 회당에서 발견된 제의 관계 기록, 그리고 수문 근처에서 발견된 열심당원들의 지도자 벤 야이르 등의 이름이 새겨진 12개의 추첨용 명패 등으로 분류된다.
(3) 두루마리 사본: 맛사다에서는 창세기(46:7-11), 레위기(4:3-9), 신명기(33), 에스겔서(35-38장), 시편(81-85편, 150편) 등의 구약성경의 사본들과, 벤-시라의 지혜서(39-44장), 요벨서 등의 외경, 그리고 안식일 시편 등 모두 14 점의 두루마리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9) 로마군의 유적들
서기 70년 여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서 4 년에 걸친 유대 민족의 대 로마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던 로마 군은 당시 맛사다를 점령하여 끝까지 항거하던 열심당원들을 일종의 광야 전투 훈련을 목적으로 3년에 걸쳐 포위 및 정상 공격을 통해 완전히 섬멸시켜 버렸다. 로마 군들은 그들이 주둔했던 진지와 포위 돌담, 그리고 결정적으로 요새 함락을 가능케 했던 경사로 등의 유적이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1) 로마군 진지:
모두 8개의 진지가 건설되었으며 이 중에서도 맛사다 건너편 북서쪽 언덕에 위치한 요새 F는 로마 십군단의 실바 장군이 직접 지휘했던 본부가 있었던 곳이었다. 이들 진지에서는 나바테야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요르단의 페트라를 수도로 한 광야의 전문가들인 나바테야인들도 맛사다 점령에 용병으로 참가했음을 알 수 있으며, 동전 류가 서기 120년경에 주조된 것까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서기 73년에 맛사다가 점령된 이후에도 로마 군이 계속해서 주둔한 것으로 추정된다. 8개의 진지는 약 9000여명의 로마군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2) 포위 돌담(circumvallation):
맛사다 주변의 진지들을 연결하는 폭 1.8미터, 길이 3.5킬로미터의 포위 돌담은 몰래 도주하려는 열심당원들을 감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로마 군들의 철저한 전투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경사로:
맛사다의 서쪽에 축조된 경사로는 지금까지 고대 로마 세계에서 건설된 공격용 경사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보존된 것이다. 실바 장군은 길이 200미터 높이 100미터의 경사로를 건설하고 30미터 높이의 공성퇴 탑을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시켰다.
10) 비잔틴 시대의 유적
서기 5-6세기에 기독교 수도사들은 맛사다 정상에 교회당과 부속 건물을 건설하여 일종의 수도원을 운영하였다. 이 교회 건물의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오늘날까지 잘 보전되어 있고, 요새의 이곳 저곳에도 당시의 수도사들의 주거 흔적이 남아 있다.
11) 맛사다의 최후
서기 1 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였던 요세푸스(Josephus)가 기록한 유대 전쟁를 통하여 맛사다가 헤롯의 요새 궁전인 동시에 유대전쟁(서기 66-73) 당시 유대인들이 끝까지 로마 군에 항거했던 최후의 비극의 격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서기 66년 유대 전쟁이 시작될 때 갈릴리 지방 출신인 유다의 아들 메나헴은 960명의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인 “열심당원”들을 이끌고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던 맛사다 요새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이 곳에 저장된 물, 식량, 의복, 무기류 등의 보급품을 체계적으로 준비하여 로마 군에 대항하는 새로운 거점을 확립하였다. 유대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여름에 예루살렘의 함락과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맛사다는 팔레스타인의 마지막 유대인들의 보루가 되었다. 당시 맛사다의 지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당한 메나헴의 뒤를 이은 그의 조카 엘리에제르였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대인 반란의 진압 목적을 이미 달성한 로마군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 장군은 장차 아라비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서기 73년 당시 유다의 총독이었던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로마 제 10군단을 이끌고 맛사다를 점령하기 위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했다. 로마 군은 2년에 걸친 무수한 정상 공격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요새 꼭대기의 견고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해 공성퇴(battering ram)를 끌고 올라갈 수 있는 돌 판으로 포장된 경사로를 6개월에 걸쳐서 건설하였다. 맛사다 요새의 유대인들의 격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경사로가 완성되어 공성퇴가 성벽을 무너뜨렸고 다음날 아침이면 성벽이 파괴된 곳으로 로마 군이 진격해 올라올 운명에 처해졌다. 바로 이날 밤에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야이르는 모든 유대인 전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이 모든 일은 동족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이러한 처벌이 적군인 로마 군에 의해 자행되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심판하도록 합시다. 따라서 내일 아침에 로마 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밤에 우리가 아직 자유의 몸일 때 스스로 영광의 죽음을 택합시다.”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은 아내와 아이들을 죽인 다음 남자들이 한 곳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여 그 열 명이 나머지 사람들을 죽였고 남은 열 명이 한 명을 추첨하여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했다.
4. 고린도와 바울에 대하여 쓰라.
바울은 그의 선교여행 중 모두 60여 군데의 도시들을 거쳐 가는 동안 들리는 곳마다 길게는 한달 짧게는 3-4일 정도 머물렀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이방인들의 반발, 그리고 이러한 소요사태를 방지하려는 지방 총독들의 제지로 한 곳에서 오랜 기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무려 1년6개월을 머물렀다.
1) 국제적인 대도시 고린도
비록 아테네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하지만 서기 1세기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해발 575m 높이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바닷가의 레카이온 항구를 동시에 지닌 고린도는 도시라기보다는 막강한 왕국이었다. 일찍부터 고린도에는 유대인들이 정착했으며 바울은 자연스럽게 이곳의 유대인 구역에 머물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전할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여러 외국인들과 교류하며 이를 통해 그의 선교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케아 지방에서 그를 시기하는 유대인들과 해당 로마 관리들의 저지로 구금되고 몰래 탈출하는 등 계획했던 만큼 선교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안디옥에 필적할 만한 선교의 본부를 고린도에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고린도는 근처의 성소 이스트미아에서 대규모 축제와 운동경기를 2년에 한번씩 개최했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었을 것이다.
2) 바울은 천막업자였다.
바울이 이스트미아 경기에 참여하고자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기술을 활용해서 선교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선박의 돛을 비롯해서 극장의 차일, 포룸의 천막, 노천상점 등 천막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천막업자는 중요한 직업 중 하나였다. 이중에서도 천막의 수요가 가장 많은 경우는 그리스 지역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축제와 운동경기였다.
보통 축제는 일주일 정도면 끝나지만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스트미아 축제나 4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올림피아 축제는 2-3개월씩 지속됐다. 축제에 몰려든 수만 명의 참가자들을 위해서 수백 개의 천막이 필요했고 수백 명의 천막업자들이 동원되어 몇 달씩 일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요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많은 천막업자들이 활동했고 로마에는 천막업자의 조합도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통해서 네로 황제의 원형경기장에는 푸른색 바탕에 별들이 그려진 천막이 지붕의 역할을 했으며, 가정집의 안마당에는 붉은 색의 천막을 쳐서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바닥에 이끼가 잘 자라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막업자의 경우 수입은 괜찮았지만 일은 매우 고된 것이었다. 대부분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이나 겨울철의 차가운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서 작업을 해야했고 천과 가죽을 자르고 굵은 바늘을 이용해 바느질을 했기 때문이 손이 부르텄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바느질 작업으로 바울의 손이 매우 무뎠기 때문에 그는 글씨를 크게 쓸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갈 6:11).
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하여 쓰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전문적인 천막업자들로서 로마 제국 내에서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일했다. 로마에 많은 일감이 있었음에도 불굴하고 이 부부가 고린도에 온 이유는 서기 41년 클라디우스 황제가 내린 로마로부터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었다(행 18:2).
바울은 이미 자리를 잡은 고린도의 아굴라 가족을 알게 됐고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했다(행 18:3).’ 이 부부는 바울과 1년 6개월을 같이 동고동락하며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스트미아 경기 특수 때문에 사업도 번창할 수 있었기에 목숨을 내걸 정도로 바울의 선교 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롬 16:4). 바울의 선교로 이 부부는 에베소(고전 16:19)와 로마(롬 16:3-5)에 가정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서기 50-51년 고린도에서 일년 반이나 지내며 관전했던 이스트미아 경기는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경기의 전 과정이 끝난 후 우승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폐막식은 그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운동경기로 비유한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운동경기에 참여하여 정당하게 경쟁을 했고 이제 막 달리기를 끝냈습니다. 나는 경기의 서약을 준수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며 공정한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내게 수여하실 것입니다(딤후 4:7-8).’
제8장 사본
1. 시내 사본에 대하여 쓰라.
1844년 5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한 성경학자는 시내산 중턱의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 도서관에서 큰 바구니에 담긴 가죽종이 뭉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곳의 한 수도사는 이 뭉치 중 일부가 이미 불쏘시개로 아궁이에 던져졌노라고 말하기도 했다. 얼핏 보기에도 또렷한 그리스어 대문자로 구약의 예언서들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대부분 구약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는 모두 129쪽이나 되는 이 가죽종이들을 하나씩 골라서 수도원 측에 건네주었고 그들은 답례로 그에게 43쪽을 선물로 주었다. 1500년 동안 잊혀졌던 세계 최고의 그리스어 성경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 역사적인 위업의 주인공은 복음서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대항할만한 물적 증거로서 가장 오래된 신약성경을 찾아서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약관 29세의 티셴도르프(C. Tischendo
rf)였다. 1815년 독일의 렝겐펠트에서 태어난 그는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신약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1840년에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할 만큼 일찍부터 이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했다.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기독교 국가답게 정통성 있는 최고의 성경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 프랑스의 에프라임 사본, 그리고 이탈리아의 바티칸 사본들이다. 하지만 프러시아 제국은 이렇다할만한 고대 성경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티셰도르프의 시내 사본은 커다란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라이프찌히로 돌아 온 그는 2년 후인 1846년 삭소니 지방의 왕을 기념하여 ‘프레드릭 아우구스투스 사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입수한 43쪽의 그리스어 구약을 출판했다. 하지만 당시 티센도르프는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고 단지 이집트 근처라고만 얼버무렸다. 많은 독일인들이 만일 영국인이 이것을 처음 발견했더라면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즉각 구입하여 벌써 대영박물관에 갖다 놓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곧 이집트 총독의 주치의로 일하는 자신의 친구 프루너-베이(Pruner-Bey)를 통해 나머지 86쪽을 구입하려 했으나 이미 이 사본의 가치를 알게 된 수도사들은 더 이상 팔려고 하지 않았다.
1852년 말 티셴도르프는 두 번째로 성 카타린 수도원을 방문하여 나머지 86장을 찾아 구입하려 했으나 수도사들의 반대에 부딪혀 빈손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는 길에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 그리스 등지의 수도원들을 방문하여 여러 점의 고대 성경의 사본들을 입수하는데 성공했다.
1859년 1월 그리스 정교회의 대부 격인 러시아 황제의 후원으로 티셴도르프는 세 번째로 시내 산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성 카타린 수도원에 도착한 그는 일부러 수도사들을 자극시키지 않으려고 애써서 관심을 돌렸다. 그가 사귄 한 수도사가 그가 떠나기 사흘 전 그의 방에서 붉은 천으로 싸 보관했던 346쪽에 달하는 성경을 보여주었다. 필체로 보아 이미 소유한 43장과 같은 저자의 것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사본은 신약전체와 구약의 일부를 담고 있었다. 바티칸 사본이나 알렉산드리아 사본과는 달리 온전한 신약은 처음이었다. 그는 카이로의 부속 수도원으로 이를 가져가서 베끼고 돌려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는 칠 일만에 카이로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던 수도원장에게 필사허락을 부탁했고 그는 한번에 8쪽씩 건네받아서 베끼기로 허락을 받았다. 두 달 동안 그는 346쪽 모두를 베끼는데 성공했다. 모두 11만 줄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마침 성 카타린 수도원의 새로운 원장 선출이 늦어지는 것을 이용하여 그들이 스스로 러시아 황제에게 이 사본을 선물하도록 계획을 꾸몄다. 2월 24일 한 달 반 후에는 사본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3월 30일 그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몰래 갖고 러시아 황제에게 선사하고자하는 뜻을 비쳤다. 아무리 그가 외교력을 동원했지만 수도원 측은 기증이 아닌 복사 본을 위한 임대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 해 9월 24일 그는 돌려주겠다는 편지를 수도원에 보낸 후 드디어 시내 사본을 임대해서 뻬쩨르부르크에 도착했다. 1859년 11월 짜르코에-셀로(Tsarkoe-Selo)에 있는 겨울궁전에서 그는 러시아 황제에게 시내 사본을 증정했다. 1862년 10월 러시아 왕정수립 1000주년을 기념하여 모두 223부에 달하는 복사 본을 출판해서 러시아 황제로 하여금 전 세계의 도서관에 기증토록 했다. 이중에 하나가 오늘날까지 성 카타린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다. 나중에 러시아는 수도원 측에 9000루블(1350파운드)을 지불했다.
시내 사본은 언제 어디서 기록되었는가? 기록 연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는 복음서 부분의 여백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일련의 숫자 표시인데 이것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므로 그의 사망 연도인 서기 340년 이후로 추정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31년 가이사랴의 감독이자 저명한 성경학자인 유세비우스로 하여금 그리스어 성경을 50권 제작하여 제국내의 중요한 교회에 배포하도록 명령했다. 이 중의 하나인 시내 사본은 원래 가이사랴에 있던 것이 서기 638년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때 그들의 박해를 피해 빠져나온 어느 피난민에 의해 성 카타린 수도원까지 오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의 바티칸 사본도 필체로 보아 유세비우스가 제작한 50권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시내 사본의 내용상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쟁은 바로 마가복음서의 끝 부분이 현재의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예수의 부활 기사(마가 16:9-20)가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모든 신약학자들이 마태복음서를 가장 초기의 기록으로 여겼기 때문에 티셴도르프는 자연스럽게 필사자의 실수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마가복음서가 최초의 기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20세기 초부터 복음서 논쟁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또한 티셴도르프는 글씨체와 잉크 색깔의 차이로 요한복음 21장 25절이 후대의 첨가임을 밝혔다. 당대의 많은 학자들이 이를 부인했지만 자외선 분석 결과 원래 24절로 끝을 맺고 ‘요한에 의한 복음’이라는 끝맺음 제목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25절을 기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누가복음서 24장 51절 이하에도 예수의 승천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 러시아가 성립되면서 돈이 궁한 러시아 정부는 1933년 12월 27일 347쪽에 달하는 시내 사본을 영국에 10만 파운드를 받고 팔아 넘겼다. 시내 사본은 전체가 약 730쪽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55퍼센트인 403쪽 정도만 발견되었고 이들은 현재 네 군데에 흩어져 소장되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인 347장은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있고 43장은 독일 라이프찌히의 도서관에, 3장은 뻬쩨르부르크에, 그리고 아직 완전히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10여장이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보관중이다.
1975년 5월 성 카타린 수도원 구내의 오래된 창고가 불이 난 후 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고대 문헌들이 1,000여점 발견되었고 이 들 중에는 10여장이 넘는 시내 사본의 일부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현존하는 모든 사본들이 사도행전 8:5에서 빌립이 사마리아로 간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시내 사본은 그가 가이사랴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기록 장소는 가이사랴로 여겨진다. 또한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명령으로 50권의 성경을 만들었다면 그의 필사실이 있는 이스탄불이 기록 장소일 가능성도 있다. 가죽종이에 기록하여 신구약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장정했다는 사실은 당시 낱권으로 파피루스에 두루마리 형태의 성경에 비해 괄목할 만한 로마 제국의 업적이었다.
비로소 실용적으로도 유대교의 구약과 기독교의 신약을 하나로 묶은 계기가 되어서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건을 구약의 예언과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다. 모두 14,800군데서 후대의 수도사들이 좀더 원본에 가까운 구절을 분석하기 위해 여백에 수정의 기록한 것은 바로 교회사를 통하여 여러 번에 걸친 성경의 본문 연구가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티셴도르프가 처음 입수한 43장중에서 에스더서의 끝부분에는 꽤 긴 분량의 참고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시내 사본의 수정 작업은 오리게네스(Origenes)의 헥사플라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다. 헥사플라는 오리게네스와 그의 제자들이 20년에 걸쳐서 서기 245년에 완성한 것으로 모두 여섯 단으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음역, 오리게네스 자신의 그리스어 성경, 그리고 당시의 대표적인 세 가지 그리스어 사본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 후 차례대로 안토니우스, 팜필루스 등이 수정을 가했으며 이 편집 본을 직접 참고로 하여 익명의 수도사가 시내 사본에 수정 기록을 남겼다. 이는 시내 사본이 성 카타린 수도원으로 옮겨지기 전의 일이었다.
시내 사본은 신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헤르마스의 목자서와 바르나바스의 편지 등의 외경도 포함하고 있다. 구약은 전체의 약 40퍼센트 정도만 보전되었고 신약은 전체가 남아있었다.
따라서 시내 사본은 바티칸 사본과 함께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진수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시내 사본은 대문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장, 절이나 심지어 단어 사이의 공백도 없이 죽 이어진 문장이었다. 그가 평생을 걸쳐 수집한 고대 성경 사본들은 오늘날 영국 글라스고우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희귀본인 1516년 출판한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1520년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의 초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서기 330년 헬레나 황후는 시내산 중턱 샘이 흐르는 골짜기에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와 모세의 불붙는 가시덤불을 보호하는 망대를 건설했다. 성 카타린 수도원은 서기 548-565년 사이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건설됐다. 서기 726년부터 시작된 성상파괴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원 구내에는 희귀한 고대의 성화들이 수백 점 남아 있다. 서기 9세기 700여 년 전 순교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타린의 유해가 산에서 발견되었고 수도원의 명칭도 성 카타린으로 바뀌었다.
2. 에프라임 사본에 대하여 쓰라.
서기 5세기경 그리스어로 기록된 구약과 신약 성경으로 나중에 훼손된 후 낱장의 가죽종이들은 원래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른 문서가 기록된 팔림프세스트 사본이다.
서기 12세기 에프라임 시루스(Ephraim Syrus)는 자신의 설교를 그리스어로 이 위에 기록하였다. 모두 208쪽의 사본 중에서 구약은 잠언, 전도서, 아가서, 욥기, 지혜서, 벤 시락서 등을 포함하는 63쪽이며 신약은 145쪽으로 대부분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죽종이의 크기는 가로 25.6-26.4 센티미터, 세로 31.4-32.5센티미터이며 한 쪽은 한 단으로 채워져 있고 한 단은 40-46줄로 이루어져 있다. 신약은 원래 232-238쪽인 것으로 추정된다.
에프라임 사본은 맨 처음 이집트에서 기록된 후 서기 6세기 가이사랴에서 첨가된 흔적인 있고 서기 9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또 한 차례 첨가되었다. 이 사본은 서기 16세기 경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카타린(Catherine de Midici)이 소유하고 있다가 프랑스로 함께 이동되었고 오늘날 파리 국립 도서관(Bibliothéque Nationale)에 소장되어 있다.
3. 시리아 사본에 대하여 쓰라.
성 카타린 수도원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성경의 사본은 1891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벤슬리(R.L. Bensly)와 버킷(F.C. Burkitt)교수에 의한 사진의 판독으로 발견되었다. 문제의 사진들은 그해 이른 봄에 류이스(Agnes Lewis)와 깁슨(Margaret Gibson)여사에 의해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촬영된 것들이었다. 두 교수는 이듬해인 1892년 시내산으로 향했다. 그들은 약 300쪽에 달하는 시리아 사본을 복사했다. 시리아 사본은 전문용어로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 불리는 가죽종이 기록인데 원래 서기 5세기 중엽 시리아어로 신약성경을 최초로 기록했고 나중에 누군가가 이를 지워버리고 그 위에 다른 문서를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팔림프세스트인 경우 한 면에서 두 종류의 문헌을 확인할 수 있다. 켐브리지 대학팀은 1894년 ‘시내 팔림프세스트로부터 필사한 시리아어 사복음서(The Four Gospels in Syriac transcribed from the Sinaitic Palimpsest)’를 출판했다. 이 시리아 사본은 시내 사본과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서 끝부분의 부활 기사가 빠져있었다.
4. 나그 하마디 문서에 대하여 쓰라.
1945년 12월 어느 토인에 의해 발견된 고대 사본 집으로 나그 하마디라는 현대 도시 부근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도시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사본들은 그 지역 농부에 의해서 '하모라 돔'이란 마을 근처의 나그 하마디라는 도시로부터 북동으로 약 10㎞ 지점에 있는 게벨 엣 타리프(Gebel et-Tarif)라는 절벽 아랫면에 있는 수많은 동굴이나 무덤들 중의 하나에서 발견되었다. 그 표지들의 파피루스 판지에 있는 많은 언급들로 보아 그 당시 수도원 생활의 초기 중심지였던 케노보스키온(Chenoboskion) 주위 지역에서 발생된 것임을 암시해 주는데 아마 그 사본들은 중간 상인들에게 팔렸을 것이고 결국은 골동품상에 넘어갔을 것이다.
5. 에블라 원문에 대하여 쓰라.
1) 텔 마르딕과 에블라의 관계
1955년 한 농부가 시리아의 어느 모래바닥에서 현무암에 조각된 으르렁거리는 사자 형상 발굴과 동시에 제의(祭儀)에 쓰인 잔을 발견했다. 이 잔은 행진하는 군병과 연회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고학자 마티애는 이 제의 잔을 B.C 2000년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이 발견된 위치를 텔 마르딕(Tell Mardikh)이라는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1968년에 "에블라"가 곧 텔 마르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텔 마르딕 발굴이 시작(1964)된지 4년 만에 주전 2000년대에 속한 현무암을 발견하였다. 이 현무암의 형태는 설형 문자를 기록한 옷을 입은 인간상인데 이 사람은 '이빗림'왕의 상으로써 에블라잇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마르딕'과 '에블라'가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2) '이블라' 이름이 '에블라'로 변형과정
처음에는 학자들이 설형문자 표IB를 "이브(ib)"라고 발음하였기에 "이블라"라고 불리어졌는데 1936년에 '웅낫'(Artbur Vngnad)이 '보가즈코이'에서 발견한 후리안 원문에 "에블라"가 "에-엡-라-아-파(e-eb-la-a-pa)" 로 기록되어 "에블라"로 칭해졌다.
3) 에블라의 시작과 끝
이태리 고고학 팀이 마티에 교수 지도 하에 큰 기대를 걸고 연구를 계속한 결과 에블라의 연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청동기 시대, 즉 주전 약 3000년대의 이곳 에블라에 농촌이 일어나고 도시가 구성되었다가 주전 1600년경 문화가 쇠망해진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 쇠망은 헷족의 침략 때문이었다.
4) 에블라 토판 연구에 대한 두 가지 견해
① 첫 번째 견해는 에블라 토판을 연구하며 연대 측정을 했던 시카고 대학교수이고 설형문자 언어학자중 가장 우수한 학자인 '겔브'는 에블라어는 메소포타미아어(오늘날 중동어)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특히 악키드어와 아모리어처럼 비슷한 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어에서 매우 떨어진 언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이 견해는 에블라문서 발견이 성서학 연구에 직접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②두 번째 견해에서'페티나토'교수는 에블라어가 초기 가나안어이고 북방 셈어에 매우 가까운 말이며 히브리어에 매우 가깝다고 주장한다. 미국 예수회 학자인 다훗은 로마 성경연구소 교수인데 그는 페티나토와 같은 견해에서 좀더 나아가 에블라어는 직접적으로 히브리어에 연결된 언어이고, 우가릿(Ugarit)어보다 히브리어에 더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5) 토판에서 볼 수 있는 에블라 시대 배경
에블라 토판 발굴은 투툰카뭄의 무덤 발견(1922), 우가릿 발견(1929), 마리 문서 발견(1930), 쿰란 발견(1947)들 보다 더욱 중요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다. 에블라 토판이 이미 문서상 알려진 도시 문명 중심지를 실제로 증거 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상인들만 해도 삼만 여명이 모여서 장사했으며,농민,공무원,기술자들,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고급문화 생활을 하며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에블라 전체 인구는 삼십만 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며 이것은 고대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였다. 에블라가 가진 큰 창고는 548,500석이나 되는 보리 곡식을 보관했고, 이 곡식은 천 팔백 명에게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큰 양이다. 에블라는 매매 행위에 농작물 대신 금전을 사용한 첫 도시이다. 즉, 인류 역사상 에블라가 처음으로 금전을 작물대신 사용한 것이다.
6) 에블라 토판과 구약성경과의 관련성
에블라 토판과 구약 성경과의 관계에 대한 학자들의 논쟁을 간단히 소개하면 그 이유는 성경 가운데 아담, 하와, 요나, 다윗등의 인명들이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중에 특히 두 이름 아브라함과 에벨로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마티애 교수는 지금 에블라와 성경과의 관계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취하지만 에블라가 발견된 초기에는 "에브라임", 즉 에블라의 황금시대 왕이 창세기 10장에 말한 아브라함의 조상(7대조)인 "에벨"과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페티나토 교수는 매우 명백하게 아브라함이 북방 시리아의 본토인이라고 했다. 한 에블라 토판이 우르(Ur)는 하란(Haran) 근처에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다섯 도시가 에블라 토판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그후 이 견해를 조금 시정하여 세 도시인 소돔, 고모라, 소알(Zoar)을 확정할 수 있다고 했다. 예수회 신부인 다훗 교수는 페티나토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뿐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에블라 토판과 구약성경 관계가 밀접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세기 14장에 기록된 도시들이 에블라와 주전 2500년경 매우 밀접한 경제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훗 교수는 지금 에블라를 발견하여 우리는 구약성경을 더욱 확실히 역사적 문서라고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7) 에블라 토판과 성경 언어와의 유사점(아담, 하와, 야발, 노아)
① 아담 : 에블라 토판에 에블라의 14명의 지방 통치자중 하나의 이름이 아-다-무(a-da-mu)로 나타났다.
② 이브 : 에블라 토판이 "아-와(a-wa)"란 말을 표현한다. "아-와"는 성경의 "하와(hawah, Eve)"와 같은 것이다.
③ 야발 : 창세기 4장 20절에 말한 야발은 에블라 토판에 처음으로 고유명사인 "와-바-룸(a-ba-lum)"이 나타났다. 에블라어는 첫 발음인 와우(waw)를 지니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야(ya)"로 변한다.
④ 노아 : 에블라 토판에 이-나-후키(i-na-huki,안식의 섬)란 말이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나-후(i-na-hu)가 "노아(noah, "repose")"로 되고 히브리어는 "노아"가 된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보는바와 같이 에블라 토판이 구약성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거 할 수 있다고 본다.
6. 사해 두루마리에 대하여 쓰라.
1947년 사해근방에서 발견된 '에세네파' 공동체의 문헌들로 이 두루마리 사본들과 또한 그것들과 함께 발견된 단편들은 성서와 유대교, 기독교의 초기 사건들을 담고 있는 사본들중 가장 중요한 발견 물이다.
1) 사본들의 발견
1947년 2월 혹은 3월에 타아미레(Ta-amireh)족의 베두인 젊은이 마호멧 엣딥(Muhammad ed-Dib)이 사해의 서안 절벽에 뚫려 있는 동굴들 가운데 하나에 들어갔다.(여리고 남방 14㎞ 정도의 지점) 거기에서 그는 높이 약 75㎝, 너비 25㎝ 가량의 항아리들을 발견했다. 그 항아리 속에는 아마포로 쌓인 가격 두루마리들이 담겨 있었다.
현재는 그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소유로 되어 있다.(8개) 이 두루마리들이 아주 오래된 것이고 가치가 많은 것들임을 인정받게 된 시기인 1948년 초에 아랍제국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그 동굴의 과학적 조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1949년 2월 15일부터 3월 5일까지 다시 동굴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요르단 고적 탐사국 랑케스터 하딩과 성서학교(Ecole Biblique)의 드 보(R. de Vaux)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때에 수백 개의 성서문헌들과 외경 그리고 그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문헌 등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항아리 파편들의 양으로 보아 판단하건데 이 동굴은 약 200개 두루마리들로 이루어진 장서의 은닉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되어졌다.
이 장서들은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되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는 오리게네스(A.D 185-254)가 여리고 근방에 있는 한 항아리에서 발견된 희랍어역 시편을 사용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전쟁 때문에 대주교 아타나시우스는 자기 소유의 5개 두루마리를 미국으로 옮겼다.(1948) 그것들은 트레버와 브라운리의 도움을 받아 버로우즈에 의해 출판되었다.
제1권(1950)은 여러 플레이트들과 두 개의 두루마리의 필사본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필사본 가운데 하나는 이사야서 전권을 담고 있으며 또 하나는 하박국 처음 장에 대한 주석(1QpHab)을 담고 있다.
제2권(1951)은 「훈련교본」을 형성하고 있는 보다 작은 두루마리 두개(1QS)를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라멕의 한 묵시록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으로서, 5개 두루마리들 가운데 마지막 것은 그 당시로는 손상시키지 않고 펼 수가 없었다. 1948년 9월 수케닉은 이 사본들을 수록한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출판하였으며 이 책에 뒤이어 1950년에 제 2권이 출판되었다. 하지만 두 권은 모두 수케닉이 소유하고 있는 두루마리 속에 잘 보존된 부분들 가운데 일부만 포함하고 있다.
수케닉의 사후 그의 아들 야딘은 1954년에 《Osar Hamegilloth Hagenusoth》(감추어져 온 두루마리 보물)라는 제목으로 그 두루마리들을 모두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종말론적 전쟁을 묘사한 한 두루마리(1QM)와 또 다른 이사야서 두루마리와 감사 시편들의 편집 본 가운데 네 부분이 담겨 있다. 아비가드(N. Avigad)와 함께 야딘은 소위 「라멕의 묵시록」이라는 문헌을 출판하였다. 이것은 그 동안 히브리 대학교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창세기 몇 개장들에 관한 미드라쉬임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제 1 동굴의 단편들은 1955년 바르텔레미와 밀리크에 의해 《Qumran Cave》라는 제명의 한 책에 게재 출판되었다.
195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타아미레 부족들 가운데 몇 사람들이 이 유명한 동굴 남방 18㎞, 그리고 사해 서방 3.2㎞ 지점에 있는 와디 무랍바아트의 두 동굴 속에서 발견한 새로운 단편들을 제공하였다. 1952년 초 이들 동굴들의 탐사작업이 있었으며 이 동굴들 역시 시대는 다르지만 문헌 은닉처로 사용되었던 곳들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때에 거기에는 엄격한 마소라 양식의 성서사본들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B.C 8세기의 소예언서들과 파피루스 팰림프세스트 하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명한 수도원 마르 사바의 북동쪽 4㎞ 지점에 있는 키르벳 미르드에서 발견된 다른 단편들은 후대에 속한 것들이다. 희랍어와 팔레스타인 아랍어로 쓰여진 성서문헌들은 A.D 4∼8세기의 것들이다.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장소에서 나바테야인 파피루스와 유대교 파피루스, 그리고 소예언서들에 대한 희랍어 본문 단편들이 1952년 7월에 발견되었다. 와디 무랍바아트와 키르벳 미르드의 문서들은 쿰란 근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직접 관계가 없지만 쿰란지역에 있는 다른 동굴들에서 베두인족은 새로운 사본들을 발견했다.
1952년 3월에 있었던 발굴 작업을 통하여 37개 동굴에서 항아리 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에도 역시 사본들이 담겨 있었다. 제 1 동굴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 2 동굴(2Q)에는 성서 단편들과 외경 단편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는 요벨서 일부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아람어 문서 하나가 있다.
그리고 제 1 동굴 북방 약 1.6㎞ 지점에 위치한 제 3 동굴(3Q)은 274개의 아람 어와 히브리어로 쓰여 진 단편들 말고도 두개의 동판 두루마리를 담고 있었다. 키르벳 쿰란 서편 정반대 편에 위치해 있는 제 4 동굴(4Q)은 1952년 9월에 베두인족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동굴에서는 가장 많은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즉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성서문서들, 당시에 알려져 있는 것들과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을 포함한 많은 외경문서들, 이 종파의 주석, 전례본문, 그리고 그 외의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둘 다 쿰란부근에 있는 제 5 동굴(5Q)과 제 6 동굴(6Q)에서도 제 7∼10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보다 적은 양의 것들이 발견되었다. 후자의 동굴들은 키르벳 쿰란의 이회토로 된 양편 단구에서 1955년에 발견되었다. 이 모든 단편들은 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박물관에 수집되어 있다. 이곳에서 그것들은 국제적인 학자 단에 의해 말끔히 손질되고 정리되어 편찬되었다.
후일 제 3 동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제 11 동굴이 발견되었는데 이 안에는 상당히 완벽한 수 개의 두루마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발견 물들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것들로는 두 개의 동판 두루마리 이다. 원래 이것들은 3개 동판조각 리벳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로 그 길이는 총 234㎝이다. 이 구리판은 굉장히 산회되어 풀어지지 않아 작은 조각으로 잘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업은 알레그로의 지도 하에 맨체스터 공과대학에서 이루어졌다(1956-57). 두개 두루마리는 모두 12개 난들로 이루어져 있다. 쿤(K.G.Kuhn)이 뒷면 양각에 두드러져 있는 글자들을 검사한 후 제시했던 견해와 마찬가지로 이 두루마리들은 보물들의 목록과 그 보물들이 감추어져 있는 장소들을 기록하고 있다.
2) 사본들의 외형에서 밝혀진 기록연대
이 문서들 대부분의 언어는 고 히브리어이다. 단지 몇 개의 미쉬나식 히브리어 용어가 사용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제 4 동굴에서 발견된 네 개의 단편들은 흔한 분사들이나 상관적인 불변화사 sh.와 같은 미쉬나 히브리어 문법의 요소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사본들은 학식 있는 서기관들에 의해 정교하게 필사되었으며 동물 가죽의 겉 표면을 사용하여 필기를 위해 가로 선을 그었으며 난외 공백을 일정하게 하기 위해 세로줄을 그었다.
필체는 나쉬 파피루스(B.C 2세기) 필체와 아주 흡사하거나 예루살렘 근방 납골당의 비문들의 필체와 아주 흡사하다.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를 확정하기 위하여 올브라이트, 트레버, 비른바움, 수케닉 등은 고문서학적 증거들을 사용하였다.
이 증거들에 따르면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는 B.C 1∼2세기이다. 항아리 조각들은 헬레니즘기 말엽에 속한다. 그 시기는 대강 위의 시대와 동일한 시대이다. 이 두루마리들의 아마포 외피에 대한 탄소 측정법에 의한 측정 결과로 볼 때 그 연대는 A.D 33년으로 수렴되는데 200년쯤의 오차를 인정할 때 B.C168년에서 A.D233년으로 추정된다.
3) 키르벳 쿰란의 발굴 작업
그러나 이 모든 관찰들이 이 두루마리의 정확한 연대규명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연대를 보다 정확히 결정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키르벳 쿰란의 발굴 작업들이었다. 이런 발굴 작업들을 통하여 이 종파의 중심지로 사용된 대규모의 요새화된 수도원의 폐허들이 파헤쳐졌다.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했던 시기들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그 시기를 구분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성경 적으로) - 이 지역은 BC 8∼7세기에는 대단히 큰 도성이었다. 노트는 이곳이 요시야왕 시대에 쓰여 진 한 목록(BC 639-609)에서 언급된, 즉 여호수아 15:62에 기록된 「이르 하멜라」(염성)와 같은 곳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구약성서 사본들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필사본은 제 1 동굴에서 발굴된 2개의 아사야 두루마리이다. 17개 장에 54개 난들을 지닌 것으로서, 이 두루마리들 중 첫 번째 것은 길이가 7.2m, 폭이 25.9㎝이다. 이것은 모든 두루마리들 가운데 가장 길고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BC 2∼1세기에 필사되었다.
이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은 레위기 단편들로서 그것들은 다른 사해 두루마리들에서 때때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표현하는데 사용된 고 히브리어 필체와 동일한 필체로 쓰여져 있다. 그것들 다음으로 오래된 것은 사무엘서 단편들이다.(BC 3세기) 이 단편들의 분포도로 보아 이 종파가 가장 사랑했던 성서들은 신명기, 시편, 이사야, 창세기 등이었다. 이 단편들도 본문전승에 관한 아주 복잡한 윤곽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형태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사본들 가운데 몇 개는 1QIsb와 마찬가지로 마소라 사본에 근접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반면 사무엘서의 단편들은 70인 역의 히브리어 원본문과 훨씬 근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사마리아어역과 혼합된 양식의 본문과 보다 일치된 사본들도 쿰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본문의 표준형태로 접근하려는 경향이 눈데 띄며 AD 2세기 전반에 속하는 와디 무랍바아트 사본들은 모두가 마소라 본문을 대표하며 이 시기에 이르러 마소라 형식의 발달이 종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동굴들에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는 외경 및 위경 단편들도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지금까지는 역본들 -라틴어역, 희랍어역, 시리아역, 이디오피아역 등-로 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6Q의 단편들은 옛 카이로 회당에서 60년 전에 발견된 히브리어 전도서 본문과 부합된다. 그리고 이 동굴은 또한 히브리어 토비트서와 아람어 토비트서의 단편들도 제공하고 있다. 요벨서는 이 종파에 의해 수개의 필사본, 즉 에녹 Ⅰ,Ⅲ-Ⅴ의 부분들, 레위의 유언, 다마스커스의 계약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외경문서들의 다른 단편들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다음과 같은 암시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 현재까지 그 어떤 특정 종교단체와 결부시킬 수 없는 외경 가운데 일부는 쿰란의 에세네파 문서로 돌려야 한다.
㉡ 에녹서는 따로따로 사용되었던 문서들의 수집 본이다. 이 종파는 아마도 인자의 환상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의 유명한 제 2부를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 레위의 유언을 제외하고 열두 족장의 유언은 그 어느곳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후일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
㉣ 그곳에는 노아, 족장들, 모세 등과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한 많은 다른 외경문헌들이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종파는 성서의 책들과 구절들에 관한 주석들도 만들어내었다. 그것들 가운데는 본문을 의역한 요벨서와 같은 미드라쉼이 있으며 그것들 말고도 이 종파에 독특한 주석의 유형인 페샤림이 있다.
이드라쉼 속에는 이사야,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등과 같은 예언서들의 본문이 구절구절 기록되어 있고 그에 따라 각 구절에는 「그 의미」(페사로)라는 설명문이 따라온다. 미드라쉼의 특출한 사례는 창세기 외경이며 페샤림의 것은 하박국 주석이다. 새로운 문학양식의「프로릴레기아」(florilegia)- 성서 본문 수집 본-와 독특한 사상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본문들인 테스티모니아(testmonia) 속에 나타난다.
4Q는 출애굽기, 사무엘 하, 이사야, 아모스, 시편, 다니엘 등을 수집한 프로릴레기움 하나와 메시야 관련 본문들 (신5:28-29;18:18-19;민:24:15-17;신33:8-11)의 테스티모니움 하나를 제공하고 있다. 4Q에서 발견된 경구함에는 랍비들이 지시한 것보다 더 많은 성서 구절들이 들어있다.
3) 고고학적 증거
쿰란의 위치와 아인 페쉬카에 있는 농업용 부속건물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가 드 보에 의해 그의 1959년 쉬바이흐 강의에서 충분히 논의되었으며, 1961년에 불어로 출판되었고, 1973년 개정 영역으로 재 출판되었다. 쿰란 정착의 연대기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많은 발견 물들 가운데 상세한 연대가 적혀 있는 주화들은 이 건물들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기가 언제인가를 밝혀주는 가치 있는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지역에 최초로 사람이 거주했던 상황은 11개의 셀류코스 왕조의 주화들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이것들 가운데 3개는 안티오쿠스 7세의 통치기간 중의 연 3년 동안에 주조된 것임이 정확하게 밝혀질 수 있다. 요안네스 히르카누스 1세의 통치와 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통치에 관한 사실들은 각각 한 개의 주화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143개의 주화들은 알렉산더 얀나이우스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며, 하나는 알렉산드라 살로메와 히르카누스 2세에 의해, 5개가 히르카누스 2세에 의해, 4개가 안티고누스 마따디아에 의해, 그리고 10개가 헤롯대왕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다. 아켈라오의 분봉 통치기는 6개 주화에 의해 입증되고 있으며 로마의 프라이펙투스들의 통치와 프로쿠라토르들의 통치는 91개의 주화에 의해 그리고 아그립바 1세의 통치는 78개 주화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94개 주화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들 대다수는 이 폭동의 제2차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소수가 제3차년에 주조된 것들이며, 제4차년에 주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몇 개의 주화들은 쿰란 건물들이 로마 군사기지로 전용되었던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또 다른 것들은 시몬벤 코크바의 지휘 하에 일어난 제2차 유대전쟁에 참여한 유대 혁명가들에 의해 이 건물들의 유적들이 재 점유되었던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고전학적 증거는 분명히 쿰란지역이 BC 2세기 후반에 정착지로 사용되어 그후 계속 점유되어 AD 66-70년의 전쟁시까지-혹은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시기로는 AD 68년까지-전혀 외부의 침입 없이 존재하여 왔을 것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고고학을 통하여 이처럼 확고하게 입증된 상황에 따른다면 이 쿰란지역의 옛 주민들이 남긴 이 두루마리들의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연대기 틀이 확정될 수 있다.
11개 쿰란 동굴들은 에스더를 제외한 히브리어 성서전권에 해당하는 두루마리들과 단편들을 제공하여 왔다. 그것들은 최고(最古)의 마소라 사본들보다 10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유대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를 기록한 사해문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들이 하나의 전승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수개의 개정된 전승들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개의 사본은 후대의 마소라 학파들이 「전수받은 본문」으로 입증되고 있으며 다른 것들은 성서의 희랍어 역들의 기초가 되는 히브리어 성서를 반영해 주는 최초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쿰란문서들은 성서본문의 전승을 담당한 분야에서도 복수 성이 통일성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점을 밝혀 주고 있다.
(4) 사해사본 내용
1세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무렵 이스라엘 사회는 여러 분파로 갈리어져 있었다. 크고 작은 20여 개의 분파들이 있었지만 당시 역사가인 조세프스와 필리니의 기록에 따르면 바리세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커다란 세력을 지니고 있었고 에쎄네파 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분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세프스에 따르면 에쎄네파는 약 4000명 정도로 도시와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며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과 독특한 복장과 행동, 그리고 특별한 행동 수칙을 지키고 있어 당시 역사가나 학자들에게 아주 많은 관심을 끌고 있었다고 한다. 에쎄네파에 대한 학술적인 기록은 사해문서가 발견되기 50년 전 1896년 기록에 나타난다. 캠브리지대 교수가 이집트 방문중 카이로에서 구입한 문서 가운데 벤 에즈라 유대교 회당에서 발견된 문서들 중에 중세시대 씌어 진 “다마스커스 문서”라고 불리 우는 기록을 보면 이 에쎄네파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다가 후에 사해 동굴 4번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비교 분석함으로써 1986년 처음 언급된 이 분파의 존재에 대한 가설이 옳았던 것으로 증명되었다.
사해문서들은 에쎄네파의 공동체 생활이 조세프스, 필로, 그리고 필리니가 기록한 내용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사해 서쪽 해안지대에 엔게디 지역까지 바로 사해문서들이 발견된 동일한 지역이 이들의 활동지역으로 확인된다. 학자들 간에 다소 이견이 있는 부분도 있는데 사두가이파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든가 로마에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 있다든가 로마가 대항하던 독립군들의 문서들이나 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문서들이 섞여있다는 주장들도 있다. 심지어는 쿰란에서 생활한 에쎄네 공동체와 이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문서 간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조차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학계의 시각은 에쎄네파가 쿰란의 주인이었고 주위에서 발견된 사해문서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서기 68년 베스파시안 장군이 로마군을 파견하여 유대인 반란을 진압할 때 함께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쿰란에서 발견된 2번째 두루마리 문서는 115줄의 문서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달력을 보여주며 날짜 계산 방식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기원전 2C 중엽 하시모니아 왕국시대를 그 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크로스(Frank Cross)는 에쎄네파의 족보를 마카베오 시대의 유다 마카베오의 동생인 요나탄 마카베오 때의 제사장에서 시작된다고 처음 주장한 학자이다.
수세기동안의 페르시아와 그리이스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은 유대사회의 최고 권력으로 활동했으며 거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독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그 후손이 세습적으로 대제사장을 승계했는데 기원전 175년 오니야스 3세와 제이손 두 형제가 자리를 이어받으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당시 그리이스 셀류시드 제국 황제였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많은 뇌물을 제공하고 제이손이 승리하였다.
이에 따라서 제사장은 외국인인 황제가 임명하는 새로운 전통이 생겼으며 제이손이 대제사장이 된지 4년 후에 유대의 부유한 가문이 안티오쿠스를 설득하여 대제사장 직을 사독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 임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메네라우스가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 사회는 소요와 반란으로 뒤덮이게 되었고 제이손의 세력과 메네라우스 세력과의 내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내분은 외부 세력인 안티오쿠스의 개입을 유발시켰으며 이에 대항한 독립전쟁이 바로 마카베오 운동이었다.
마카베오가 정치적인 승리를 쟁취하자 왕과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바로 에쎄네파의 출현의 무대였으며 새로 확립된 예루살렘 성전 주도 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세력들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로운 선생님(Righteous Teacher)”의 지도아래 모여 종파를 이루고 쿰란에 그들만을 위한 장소를 건설한 것으로 여겨진다.
에쎄네파의 공동체 회원들은 엄한 규율과 공동식사, 그리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실천했으며 메시아의 임박을 믿는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이들은 두 종류의 메시지를 기다렸는데 이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라고 불리는 정치적인 메시아(다윗의 후손)와 종교적인 메시아(아론의 후손)로 인식했다. 또한 메시아의 도래는 빛의 아들들(에쎄네파)이 어둠의 자식들에 대해 벌이는 40년의 성전을 치른 후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수도원 공동체의 생활은 율법의 엄정한 준수와 정결례의 강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해 동쪽에서 아침 해를 맞는 아침기도를 시작으로 대추야자 재배 등 여러 가지 작업으로 이어졌고 오정에는 종교적인 정결침례예절과 공동 식사를 한 후 다시 오후 작업을 하는 생활을 하였다. 밤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율법과 지혜문학을 연구하였다.
에쎄네 공동체는 자원자(volunteer)만 받아들었다. 자원자들은 감독(overseer)들의 심사에 따라 악의 그림자보다 빛의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이 확인되도록 했으며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라 판단되었다. 선한자로 받아들여지는 즉시 모든 재산을 공동체에 의탁하였다. 공동체 생활은 그리 가난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매일매일 식사는 육류와 와인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동체는 독특한 태양력을 사용했는데 성전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일년을 364일로 나누었고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고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달을 30일씩 12달로 나누었으며 매 4분기마다 하루씩을 더했다. 일년은 정확하게 52주로 나뉘게 된다. 새해는 언제나 수요일날 시작했으며 태양과 달, 별들이 창조된 날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 절기들은 명확히 표기하고 있는데 유월절은 첫 달에 14번째 날, 칠칠절은 3번째 달에 14번째 날과 같은 방식이다. 이에 따라서 유대인 절기는 언제나 같은 요일에 시작된다. 유월절은 수요일, 칠칠절은 일요일, 속죄일은 금요일, 장막절은 수요일......
쿰란의 한 해는 29시간 48분 40초만큼 태양 공전주기보다 짧기 때문에 에쎄네파는 매 5-6년 마다 달력에 일주일을 더 삽입해서 태양주기를 맞추었다. 이런 달력 시스템 때문에 유대교 절기를 지키는 것이 성전과 달랐다. 이로써 사해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악한 사제가 의로운 선생을 가장 신성한 날인 속죄일에 공격했다는 것을 설명할 수가 있게 된다.
에쎄네파 사람들은 비교적 젊었으며 예루살렘 사제 집안의 후예들로써 예루살렘 권위를 부정하고 유대인 전반의 지지를 얻기위해 고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요세프스 플라비우스가 기록한 전형적인 에쎄네파 회원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외가쪽으로 하시모니아 왕과 대제사장들의 친척인 16세 소년이 집을 떠나 유대사막에서 떠돌다가 바누스라는 사람을 만나 에쎄네 공동체에 얼마간 머문다. 3년 후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바리세이파에 합류했다. 조세프스가 기록한 이 일화는 아마 많은 쿰란 공동체 회원들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매일 아침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오랜 시간 일하며 공동 식사를 하고 엄격한 규칙을 따르며 밤 시간의 1/3은 도서관에서 보내는 생활은 결코 쉬운 생활이 아닐 것이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만이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아마 좀 덜 엄격한 에쎄네 공동체로 옮겨가기도 했을 것이다. 쿰란 주위에는 공동묘지 세 개와 1200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똑같은 형태와 비석도 없이 줄줄이 똑같은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50개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남자였다. 한 무덤만 65세로 판명되었고 다른 모든 무덤들은 30세 이하에서 매장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서기 66년 대반란이 일어났을 때 말세가 온 것으로 여기고 전쟁에 참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반란은 패배로 끝났다. 성전은 파괴됐으며 쿰란의 공동체 본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파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의 종말이라고 믿었고 “유대인 고대사”의 저자인 조세프스 플라비우스는 스스로 유대인의 탄생과 멸망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지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조세프스는 잘못 알았던 것이다. 얌니아(현재 야브네)는 이스라엘 남부 해안의 자그마한 마을인데 로마의 파괴로부터 생존한 몇몇의 랍비들이 성전이 없는 유대교의 기초를 이곳에서 새로 마련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의 시작인 것이다. 랍비들은 분파주의와 갈등이 유대인 역사에 가장 큰 아픔인 성전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보고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유대인의 일체성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로 믿게 되었다. 분파적 요소를 지닌 종파들은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비록 사상의 차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 되었지만 비교적 미미한 것이었다. 성전이 사라지자 에쎄네파의 영향력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에쎄네파의 랍비 유대이즘 영향력을 보여주는 예들이 있다. 이는 규칙적인 기도인데 에쎄네파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대신 하루에 다섯 번 규칙적인 기도를 했고 이는 랍비 유대교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그리스도교에 끼친 영향은 신약성서에 의로운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또는 산상수훈의 선교 내용과 쿰란의 사상을 비교할 때 이해하게 된다.
사해사본은 구약성경 외에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단어들이 신약성경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이스어로 기록된 신약성서의 “의로운 신(sidqat el)”, “율법의 일들(ma’aseh torah)”, “하나님의 교회(gehal el)”, “빛의 아들들(bene’or)”이라는 표현 등이다. 또 다른 에쎄네파가 초기 그리스도교에 미친 영향은 초대교회 조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공동체 생활이나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하는 새벽기도 등이다.
초대교회의 지도자를 뜻하는 그리이스어 Episcopus는 감독을 의미하는 overseer라는 에쎄네파 직책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에쎄네파에서 중요한 절기가 일요일이라는 것도 어쩌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에서 더 비약하는 학자들도 있다. 의로운 선생님을 예수님을 뜻한다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야고보(James)를 칭한다고 보기도 한다. 또는 세례 요한을 칭한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러한 가설들은 아직 대부분의 학자들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에쎄네파의 초기 그리스도교 영향력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본다. 세례 요한은 쿰란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으며 아마 적어도 한 때는 쿰란에 몸담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적어도 에쎄네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죽자 그의 제자 중 일부는 갈릴리로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비교 내용이 나타난다. 유사한 토론들을 통해서 에쎄네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유입되었을 것이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상당한 지식인 계층이었고 지적능력은 입회의 조건이었다. 도서관에서 오랜 동안 공부하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연구했다. 그러나 쿰란 사람들은 당시 대부분 유대인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개방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 반대로 엄격한 이분법에 따라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사람들로써 2차 성전시대 유대교에서 주 세력이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로부터 심한 공격과 체포, 구금 등을 당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쿰란 공동체에 관한 저서들은 그들의 인물들에 대해서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지원자였던 Honio, 감독관이었던 엘리에저르, 그리고 감독관이 규칙 위반자 리스트를 만들면서 적어놓았던 이름들인 요하나, 하나니아, 시게온 등의 이름들만이 파편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이들이 바로 사해 북서쪽 해안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던 수도자 들이었다.
7. 맛소라 사본에 대하여 쓰라.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 A.D. 500-1200)은 구약성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복사하여 또한 보존해 왔던 유대인 학자들, 즉 맛소라 학파에 의해 편집되고 사용되었는데 그들이 사용한 본문의 기원은 A.D. 1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에 본문은 자음으로 기록되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전에 존재하던 자료들을 참조하여 기록되었지만 그것들보다 더욱 가치 있게 간주되었고 더욱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고대 유대인들은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글을 썼으며, 구약성경의 내용을 거의 암기하여 그것을 구전으로 후대에 전해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히브리어는 점차 잊혀지게 되었고 대신 아람어가 통용어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했는데, 히브리어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가자, 히브리어로 된 율법서와 예언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원전 7세기부터 자음만 있던 히브리어에 모음을 달기 시작했는데, 그 작업을 주도한 유대인 학자들을 '맛소라'라 불렀고 그들에 의해서 모음이 붙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맛소라 사본'이라 부른다.
그 때까지 띄어쓰기도 없고 모음이나 억양 기호나 구두점도 없어 생겼던 혼란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으로 고정된 띄어쓰기, 모음, 억양, 구두점 등을 붙여서 소위 맛소라 원문을 이루어놓았다.
맛소라 사본은 후에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제일 완벽한 구약 사본으로 인정되었다. 그 증거로 는 구약 맛소라 사본 그 자체의 이중 구절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시편 14편은 시편 53편에서 재현되며, 이사야 36-39장의 대부분은 열왕기하 18-20장에서 볼 수 있고, 이사야 2 장2-4절은 미가 4장1-3절과 동일하다. 또한 역대기의 대부분은 사무엘서와 열왕기 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구절과 다른 구절을 비교하여 관찰해 보면 실제적인 내용의 일치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거의 단어와 단어의 일치까지 보여주고 있다.
맛소라 사본의 정확성에 대한 또 한 가지 이유로는 고고학에서 얻을 수 있다. 에를 들면 로버 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과 윌리암 얼브라이트는 성경 기록의 역사적인 정확성을 확인하는 자료들을 수없이 발견해냈다.
맛소라 사본의 완전성을 지지하는 가장 좋은 증거로는 70인역(LXX)으로 알려진 구약의 희랍어 번역본을 들 수 있다. 70인 역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사용했던 성경이었으며 신약에 나온 인용구는 대부분 그 책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맛소라 사본과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으며 A.D.10세기의 히브리 본문에 대한 신뢰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1947년 3월 한 아랍 소년에 의해 이스라엘 사해 서북 연안 쿰란(Qumran) 지역의 동굴들 속에 서 고대의 두루마리 책들을 발견하였다. 여기에서는 구약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책의 사본들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진 알려진 9세기 사본보다 천 년이나 더 낡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학계와 기독교에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특히 낡은 사본들과 맛소라 원문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경 고고학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