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사

청교도사

청교도사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도 통신학부 최보연)

 

제 1장 청교도

1. 청교도란 누구인가 약술하라.

청교도란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한 부류이다.

이들은 가톨릭적인 영국 국교회 즉 성공회에 반항하여 칼빈이즘을 모범으로 하여 태동된 하나의 신앙운동의 부류이다. 이들은 모든 오락을 죄악시하였으며 화미(華美), 호사(豪奢)를 물리치고 성직자의 권위를 배격하며, 승속(僧俗)을 구별하지 않고 청정(淸淨)한 생활을 강령으로 하고 있다.

청교도(Puritan)라는 별명은 1564년경에 붙여진 명칭으로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1559년)에 규정된 것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질서를 개혁하기를 원했던 영국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의 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청교도들은 전해진 바에 의하면 미신적인 의식들과 천주교의 관구 조직을 타파하고 성직자들의 동등성을 주장하고 편협적인 징계에 대항하며 보다 더 나은 설교와 목회를 위해 능력을 받는 것을 위해 진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청교도들은 분리주의자(分離主義者)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분리주의자들은 청교도로 불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청교도란 이름은 포괄적으로 확대되어 사용되었는데, 칼빈주의 신조를 고수하고 진지한 경건 생활을 실천하는 감독 교회 교인, 장로교회 교인, 독립 교회 교인들 모두에게 대해 사용되었다. 보다 더 넓은 의미에 있어서 청교도주의는 검소하면서도 부유한 문화와, 고상한 전통적 도덕과, 목회 신학으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영국에서와 뉴잉글랜드에서 18세기의 복음주의를 고취시켰다.

 

2. 청교도의 유래를 약술하라.

(1) 종교개혁

사실 청교도주의 실마리가 된 것은 종교개혁과 일련의 사건들로 시작된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는 여러 해 동안의 교회의 악습, 특히 날로 증대해 가는 세입을 위한 온갖 십일조, 요금, 벌금 등의 부과는 그것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한 편, 독일에서는 농노제도가 아직도 존재하였으며 완전하게 지방분권화 된 정부들은 널리 퍼진 농민의 고통을 완화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예술의 아낌없는 후원자들로 후원금을 대기 위해 계속해서 추가 세입을 거둬들였고, 특히 교회 당국의 노골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로 하여금 개혁의 의지를 일으키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의 태도는 이러했다. 신과 올바른 인간적인 관계만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확신하고 모든 선행 중에서 가장 숭고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라고 정의하였으며, 더 나아가 일상생활의 평범한 직업과 본질적인 선함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선행을 자선금 기부나 단식, 기도 또는 부자연스러운 금욕생활을 통해 추구하려는 점을 거부한 것은 루터 사상의 대단함과 독창성을 더욱 입증해 주고 있다. 또한 스위스에서 활동한 쯔빙글리의 뒤를 이은 캘빈은 인도주의적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종교에 대한 접근 방법은 신비적이거나 경건하기보다는 지성적이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 때부터 이 두 사람의 강력한 추진력을 통해서 개신교는 캘빈이즘 그리고 후에는 청교 주의를 구분해 주는 표시가 된 신학과 내적 조직의 특색을 띄게 되었다.

(2) Calvinism

칼빈의 신학 체계는 신의 완벽한 통치와 신의 진정한 본질을 인간은 결국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과 신에 대한 지식이 인간의 가장 소중한 의무이기 때문에 인간은 성격에 담겨 있는 신의 말씀과 자연의 교훈을 통해 약간의 이해를 성취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루터와 마찬가지로 칼빈도 개인의 삶 속에 적용하는 신의 은총을 개별적으로 통찰할 것을 강조했다.

칼빈은 예정설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예정설이란 "우리가 신의 영원한 뜻이라 부르는 것으로, 그것으로 신은 마음속에서 인류 개개인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짓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모두 유사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였다.

칼빈주의는 개인의 정신적 생활에 카톨릭 교회가 중재하는 것을 거부하며 비교적 단순하고 비 의례적인 예배 의식으로 돌아가고 또 교회의 목사들, 집사들, 그리고 장로들의 지도에 교회 신도들의 동의를 요하는 원칙을 내세운 점에서, 칼빈주의는 결코 이교도에게 관대하거나 민주적이라고는 부를 수 없지만 철저하게 신교 적이었다. 비록 칼빈주의 최초의 교리들이 영국 해협을 건너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고, 또 대서양을 건너 뉴잉글랜드로 가면서 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칼빈주의의 기원과 일반적 특성들은 청교 주의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3. 청교 주의의 기원을 약술하라.

* 청교도 운동 기간의 영국 국왕 계보와 개요 *

핸리8세(HENRY VIII, 헨리7세의 차남, 1509-1547, 중도(middle way), 국교회(Anglican Church) 시작,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통과, 1536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Ten Articles 발표, 1539년에 Six Articles로 개정) →

에드워드6세( EDWARD VI, 헨리8세와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낳은 아들, 1547-1553, 개신교(prostantism), 1549년에 영국교회의 첫 번째 기도서 The First Prayer Book 발간, 1552년에 교리 42조문(Forty-Two Articles)을 포고,) →

매리(MARY, 1553-1558, 헨리8세와 케더린 사이에서 낳은 딸, 캐톨릭(romanism) 많은 개신교인들을 체포하고 죽임.) →

에리자베스(ELIZABETH, 헨리8세와 앤의 사이에서 낳은 딸, 1558-1603, 중도(middle way)영국의 중흥 기 이룸, 청교도 운동 일어남. 에리자베스가 죽음으로서 tudor왕조가 끝남.) →

제임스 1세(JAMES 1, 스코틀란드의 여왕 메리의 아들로서 스코트에서는 제임스VI세로 즉위했었음, 1603-1625, 국교회(Anglican Church) 확립,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로 왕권을 강화함, Version of King James를 완역하여 출간, 영국과 화란의 100여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라는 배를 타고 Plymouth를 떠나 신대륙 동부에 도착.) →

챨스1세(CHARLES I, 제임스1세(6세)의 아들, 1625-1649, 국교회(Anglican Church) 강화 개신교 박해, 1629년 왕은 의회를 해산. 그러나 1640년, 의회는 단독으로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소집하여 왕에게 대항. 1642년에 시민전쟁이 일어남, 장기의회는 Westminster Assembly를 소집(1643.7). Westminster Assembly는 1643-1647에 걸쳐서 소집되었으며 120명의 정회원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 소 요리 문답, 예배모범을 만듬.)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는 교황 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그 후 아들을 얻지 못하는 헨리 8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메리가 직위 한 후 신교도들의 박해는 시작되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정권을 잡은 후 그녀는 정치적 입장에서 양파에 대해서 타협적 입장을 취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난 성공회의 최고 수장 직을 계속 이어가면서 구교와 신교사이의 공통분모를 찾으려하였다. 하지만 정통 로마 카톨릭 측과 정통 개혁파측은 여전히 그들만의 교리와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때 생겨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개혁파를 위그노파라 불린 것과 같이 영국의 개혁파의 주류는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길 바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 노선을 불신하였고 로마 카톨릭 교황 Pius 5세도 여왕을 1570년 파문시켰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의 반 카톨릭 정신 즉, 대륙의 Protestantism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신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개혁자들이 바로 Puritans였던 것이고 그 운동이 청교 주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즉, 영국 국교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의 냄새, 즉 성서에 없는 의례를 일소하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신교의 진리는 발휘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주장이었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Jones)의 표현처럼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이 되어서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을 벗어났다고 하는 영국 국교회는 국왕이나 여왕을 교회의 수장(Super Head)으로 받들었으며, 일반회원으로서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귀족과 그 가신들이 존경을 받았다. 그러한 까닭으로 국교회는 전제군주정치와 원칙이 동일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가 중시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Puritan들도 결국은 영국 교회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주장하였고 그 후 그들도 세속에 찌들고 영국 교회와 잦은 교류를 하면서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라서 국교회를 반대하는 단체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교 주의에 기초를 둔 것으로 비국교도(Dissenters) 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이 장로교회이다. 하지만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장로교도 아직 일반 회원의 권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빈곤하며 사회적 지위가 얕은 사람들의 평등의 권리를 인정하는 조합 교회였다. 이 파는 분리주의자(Separatist) 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되었다가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졌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되게 되었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 개혁운동이다. 청교도 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럽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 “국교도에 반대하는 악명 높은 청교도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 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4. 청교도들은 어떻게 활동 했는가 약술하라.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 관으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로부터 분리를 원했고 그래서 기성교회와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 2세가 이끄는 130척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협으로 출현하였다. 필립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복누이 Mary Tudor의 남편으로써 영국의 개혁주의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으로 해군을 보낸 것이다. 1588년 7월1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네델란드 해안을 경유해 영국으로 나아가려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려 대부분 바다에 침몰되었다. 필립 2세는 다시 2차 공격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Darnley경에 의해 스코틀랜드 Mary여왕이 낳은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어려서 장로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나 왕이 되자 성공회를 선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제임스 1세는 교회를 개혁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604년 런던 Hampton 궁중에서 성공회교도와 청교도들이 함께 모이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 모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의회에서 영국 성경 번역이 제안되어 성경을 영어로 공식적으로 번역하게 되어 나온 것이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성경이다 (1611년). 그 전에는 Mary Tudor 여왕 시대에 Geneva Version이 있었으나 Geneva Version이 군주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KJV를 만든 것이다. Hampton 궁중 의회의 결과에 실망한 많은 청교도들은 그 후 네델란드와 나중에는 북미로 이민가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의 청교도들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17세기 전반부에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캠브리지 대학 도시에서 청교도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에 엠마누엘 대학을 세운 Walter Mildway도 있었다. 또한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1558-1602)는 많은 학자들에게 캘비니즘에 입각한 설교로 그들을 개혁시켰다.

그리고 Richard Sibbes(1577-1635)는 49세에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이 되어 개혁주의 설교로 청중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Thomas Goodwin(1600-1679)은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이 되어 많은 저술활동으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영국 왕이 된 찰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성도인 Henrietta Maria와 결혼하게 되자 청교도 주류의 의회와 마찰하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교회들을 박해하고 나아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까지 구교를 강요하다가 2년 간(1639-1640) 전쟁을 치른 끝에 스코틀랜드를 복종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1642년부터 1648년까지 영국 내에서 구교를 지향하는 왕당파 군과 청교도를 대변하는 의회 군(New Model Army)간의 시민전쟁이 발발해 신교를 대표하는 의회 군이 이기자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7년간의 시민전쟁에 스코틀랜드 군도 의회 군 편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성공회와 같이 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되는 제도를 철폐시키고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Abbe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소요리 문답서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작성에는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장로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1658년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와 독립교회(Independent), 1689년 침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후에 미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보수주의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서를 인정하고 그들의 교리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그 후 의회와 의회군이 분열되고 스코틀랜드도 장로교 방식의 왕정 정치를 주창하다가 최종적으로 의회군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영국 연방은 올리버 크롬웰 호민관(Lord Protector)이 이끄는 청도교파에 의해 올리버의 아들 리차드 크롬웰까지 군사독재로 통치되었다. 구교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청교도를 비롯한 장로교, 침례교, 독립교회 지도자들이 재판관으로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은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다루려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유대인들이 영국에 들어와 유대교를 세우는 것도 400년 만에 허용하였다. 올리버에 의해 청교도인 존 오웬이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존 오웬은 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체계화시켰다.

올리버가 죽고 그의 아들 리차드가 새로운 호민관이 되었으나 얼마 못가 1660년 찰스 2세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제가 부활되자 청교도의 입지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 시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퀘이커 교도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신앙 교리를 가지려하지 않은 이유로 얼마 못 가 비기독교적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중에 북미로 건너 간 퀘이커교도들은 1681년부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본거지를 구축하였다.

찰스 2세로 군주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청교도들은 다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구교 세력은 각종 종교적 제약으로 청교도의 입지를 줄여갔다.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는 데 특히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셀러였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리차드 백스터가 지은 '성도의 영원한 쉼',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 성경 주석이 1687년~1712년 사이에 쓰여졌다.

1684년~1685년 사이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 교회들을 Episcopal(주교주의) 제도화하려는 찰스 2세의 시도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잇달았다. 1685년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영국 연방을 모두 로마 카톨릭화 하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위그노파를 멸종시키려는 루이 14세와 같은 방식으로 청교도파와 성공회파를 모두 멸종시키려 하였으나 결국에 실패로 돌아갔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난 후, 1689년부터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7세기 말부터 성공회는 세계 선교의 눈을 뜨고 북미 매리랜드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는 등 전 세계에 성공회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제 2장 청교도 혁명

1. 청교도 혁명의 배경을 약술하라.

(1) 영국 사회의 변화

영국에서는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으로 이득을 본 세력은 젠트리(gentry)로 불리는 지방 계층들이었다. 그들은 자영농과 귀족사이의 중간 계급으로서, 경제적 이익을 바탕으로 의회의 하원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편, 도시에서는 상공업의 발달로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발달한 두 세력 중에는 농촌의 자영농과 함께 칼뱅의 신앙을 가진 청교도가 많았다. 그들은 국왕의 전제 정치와 국교회 강요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왕권신수설이었다.

(2) 왕권 신수설의 신봉

왕권 신수설에 대해 제임스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신이 하는 일에 왈가왈부 하는 것은 무신론이자 신성모독인 것처럼, 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신하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 역시 주제 넘는 짓이자 엄청난 모독이다." 즉, 왕권신수설은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국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인이며,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적이다. 또한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을 지고 신하는 오직 복종의 의무만 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한편으로는 신이 왕에게 굉장히 커다란 책임감을 준 것으로, 종종 왕이 그의 의무를 매우 신중하게 여기게 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새로운 왕이 의회 적 전통이 강한 영국에 왕권신수설을 강요한데서 출발한다.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이 왕권신수설을 강하게 믿었으며, 이를 신하들에게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의회는 반발하였다. 여기에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가 더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과 의회는 종교적으로 다른 믿음을 지닌 것이었다. 즉 왕은 영국 국교회를, 의회는 청교도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현명한 정치를 하지 못하였다. 그들의 정치는 억압적인 전제정치였다. 이는 의회의 분노를 더욱 자극하였다.

(3) 전제정치의 강화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음으로써 tudor왕조가 끝나고, 왕위는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1세가 이어받았다. 제임스 1세(1603-1625)는 당시 영국의 입헌정치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의회와 국왕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아들 찰스 1세(1625-1649)도 절대왕권을 고집하며 가톨릭을 옹호하여 의회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여 전제정치를 펼쳤던 것이다. 그는 중세부터 확립되어 온 입헌적 전통을 무시하였고,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한편, 일부 귀족과 대상인에게 상업독점권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국왕의 통제 아래 있는 국교를 강제로 믿게 했다. 이에 대해 국민은 강한 불만을 가졌다. 귀족 대상인 등과 달리 도시의 중소상인과 수공업자, 농촌의 젠트리와 요맨 (yeoman)사이에는 국교를 기피하고 칼뱅파의 흐름인 청교주의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국왕과 늘 대립했다. 찰스 1세의 행동에 항의하여 의회는 권리 청원을 가결하였다. 왕은 마지못해 그것을 승인하였으나, 다음 해에 의회를 해산하고 그 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1년간 찰스 1세는 이럭저럭 의회 없이 잘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교회의 교리를 스코틀랜드에게도 강제로 믿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영국 정치는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2. 청교도 혁명의 시작과 전개 과정을 약술하라.

(1) 청교도 혁명의 시작

스코틀랜드는 영국 국교회가 아닌 청교도의 한 분파인 장로교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왕은 영국 국교회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에 스코틀랜드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황한 찰스 1세는 이를 막을 군대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가 없었다. 그리고 돈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왕은 11년 만에 의회를 다시 열 수 밖에 없었다. 왕과 의회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 혁명의 시작이 된 것이다.

(2) 청교도 혁명의 전개과정

스코틀랜드의 무장 봉기에 대처하기 위한 전비 마련을 이유로 찰스 1세는 11년 만에 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11년 동안 의회를 열지 않고, 왕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불만을 품은 의회는 왕의 정치 행동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왕을 지지하던 왕당파와 의회를 중심으로 왕을 비판하던 의회파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분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영국 국교회를 믿은 사람은 국왕을 추종하였다. 반면에 청교도들은 의회를 추종하였다. 이외에도 재정에 대해 왕이 재정권을 지녀야 한다는 사람들은 왕을 중심으로, 의회가 재정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1642년 왕과 의회를 중심으로 갈라진 두 파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였다. 바로 이것이 청교도 혁명이다. 이 내분은 처음에는 왕당파가 유리하였다. 왜냐하면 왕당파에게는 전쟁에서 유리한 기병대가 있었으나, 의회 파에게는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의회파의 군대를 재조직하면서 전세는 차츰 뒤집혀졌다. 크롬웰은 신형군이라 불리는 규율이 잘 잡힌 기병대를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을 승리를 이끌었다. 결국 왕당파오 의회파의 전쟁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왕의 전제정치에 맞선 의회파들 대부분이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 3장 청교도 운동의 전개

1. 영국 청교도 운동의 전개 과정들을 약술하라.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개혁을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 성서에 따라 더욱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려 한 영국 프로테스탄트는 사상적 배경은 칼뱅이즘으로 하여, 개혁운동은 16∼17세기에 활발하게 전개되어 갔다. 국교회 내부로부터의 개혁을 지향하는 무리, 국교회와의 분리를 주장하는 무리,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와 같이 외국으로 탈출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무리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후에 칼뱅주의적 개혁을 지향한 장로파를 중심으로 독립파·침례파·퀘이커파·수평파·디거파· 제5왕국주의자 등 여러 파로 나누어졌다.

개혁의 바퀴가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것은 멈출 수 없는 힘이 되었다. 각기 새로운 지도자들과 그룹들은 개혁을 한층 더 몰고 갔으며, 1600년대는 영국교회에 부흥이 있었던 한 시기를 내다보고 있었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영국교회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로 보기도 한다.

첫째, 성장의 시기가 있었다(1560-1640). 청교도 운동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들 청교도들은 성경적 권위와 근거를 찾을 수 없거나 희박한 종교적 의식들을 폐지하기 원했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성경에 기초된 설교와 실천에 있었다. 이 영역에서의 진전은 특히 개인적 성결과 가정의 성결을 통해서 나타났다. 이러한 성결의 강조는 매일의 ‘Q T(Quiet Time)’와 가족 경건회(family devotions)를 낳았다. 이 성결에 대한 동일한 열망은 또한 19세기 후반의 케스윅 운동(Keswick Movement) 배후에 놓여 있으며, 심지어 1990년대 미국 플로리다 펜사콜라 부흥과 영국 선더랜드의 부흥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Ⅰ, 1558-1603) 재임 초기 동안, 청교도들은 의회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개혁에 대한 높은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후계자 제임스 1세(King James Ⅰ, 1603-25)는 청교도들에게 적대적이었고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들이 국교회에 순응하도록 만들겠다. 아니면 나는 그들을 영토 밖으로 내몰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보다 심한 것을 보여주겠다.” 그 결과, 국교회로부터 나와 그들 자신의 독립된 회중들을 만든 성직자들에 의해 분리주의 운동이 자라났다.

이 시기에 핍박이 심했고, 적지 않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회중들과 함께 보다 관대한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이 망명에 의한 두 가지 사건은 특별히 의미가 있다.

첫째, 1608년, 네델란드의 홀란드에서 일군의 메노나이트(재세례파)들과 교섭한 결과,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1550-1616) 존 스미드(John Smyth, 1570-1612)는 산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재발견했다.

헬위스는 자신을 포함하여 스미드와 52명의 교회 멤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3년 후, 헬위스는 런던으로 돌아와서 영국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다.

둘째, 1620년, 순례자들(Pilgrim Fathers)은 메이플라워(mayflower) 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의 새로운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다.

좀 더 개인적인 경건의 측면에서 보자면, 청교도 운동은 개인과 가족의 경건을 강조한 가정 중심의 운동이었다. 매일의 가족 기도의 강한 실천이 있었다. 성서가 온 가족들에게 읽혀질 때, 가장은 성서 본문을 설명하면서 말씀을 나눴을 것이다. 종종 이것은 거의 칼빈주의적 예배 형태로 발전했다. 이와 맥을 함께하는 개척자들 가운데 한 명은 매튜 핸리(Matthew Henry)였다. 그가 쓴 성서주석은 바로 이런 실천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세째, 청교도적 이념의 전파는 많은 부분을 영국시민전쟁 기간 동안 의회 의원이었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과 그의 신형군대(New Model Army)에 빚을 지고 있다. 이 군대의 많은 병력들은 거듭난 신자들이었으며 청교도적 설교 가들이었다. 이 군대의 발길이 닿았던 어떤 지역들에는 독립교회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 모든 교회들은 그 군대가 주둔해서 설교했던 곳에 세워졌다. 그러나 청교도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종교적 개혁운동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마지막 시간까지 극단적일 만큼 급진적이었던 하나의 정치적 힘이었다.

1625년, 청교도들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윌리암 로드(William Laud, 1573-1645)는 종교개혁과 선택의 교리, 예정설, 그리고 믿음에 의한 칭의 등을 거부했다. 그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기여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하면서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을 선호했다. 이 ‘세상을 긍정하는 신학’(world-affirming theology)은 보다 더 세상을 부정하는(world-denying) 청교도적 이념과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1662년, 모든 성직자는 개정된 국교회 기도서에 따라야 한다는 일련의 의회 법안이 통과되었다.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국교회로부터 축출되었고, 그들의 이전 목회지로부터 5 마일 이내의 지역에서 설교가 금지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약 2000명의 성직자들이 축출되었다. 가정 모임들 또한 금지되었다. 퀘이커 지도자 윌리암 펜(William Penn)은 추산하기를, 이 박해기간 동안, 적어도 5 천명이 그들의 종교적 확신 때문에 죽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은 보다 관용적인 유럽 국가들 혹은 아메리카로 망명하여 거기서 그들의 삶을 마감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은 침례주의자(Baptists)와 퀘이커(Quakers) 등과 같은 다양한 그룹으로 분해 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이 운동의 추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물론 정치적 힘으로서의 역할도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고난의 신학에 길을 열어주었다.

매튜 헨리 이외에, 아마 가장 유명한 영국 청교도는 사상가이며 목회자였던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일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열정을 가졌기에, 설교를 금지하는 박해를 대항해서 12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에 남긴 가장 위대한 공헌은 아마 네 단어로 축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이것은 그가 옥중에서 쓴 것이다. 그는 청교도적 사상들이 어떻게 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습득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예가 될 것이다. 그는 또한 17세기 말, 청교도주의를 계승했던 새롭고 그리고 덜 정치적인 비국교도들(Nonconformists)의 전형이다.

청교도의 개혁운동은 예배개혁에서 교회정치개혁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정치개혁으로 나아갔다. 국교회의 탄압 속에서도 설교운동과 클래시스운동 등으로 동조자를 늘려, 제임스 1세 시대에는 그들 요구대로 《흠정역성서(欽定譯聖書, 1611)》가 나오게 되었고 마침내 찰스 1세 때 혁명이 일어나 청교도는 크롬웰의 지휘 아래 왕정을 쓰러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은 11년으로 끝나고 왕정복고와 국교회의 부활로 청교도는 비국교회파가 되었다. 성서주의, 간소한 영적 예배의 강조, 신에 대한 강렬한 책임의식, 성스러운 공동체 건설 등이 청교도의 중심적 주장이었다. 또한 정치적·경제적으로 근대사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 청교 주의의 문학에 대하여 약술하라.

청교 주의의 문화 풍토에 있어서 문학의 목적은 실리적인 것이었으며, 종교가 우선이고 모든 것은 종교를 위해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이 즐겨 사용한 장르는 설교집이나 신학적 논술, 전기, 토론 그리고 역사로 실리적인 면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작품 주제는 그들 생활의 종교적 절대성에 의해 결정되었다. 모든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주제는 복잡한 과정의 갱생을 통한 원죄로부터 영적 세계로의 여정이었다.

청교도들의 문체 역시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고 믿음으로써 청교도들은 일상적인 일들을 우화적이거나 상징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청교도들의 신천지로의 출국을 명령하셨다고 믿음으로써 그들은 이 위대한 사건을 진지하면서도 극적으로 서술했다. 그 뿐만 아니라 성경이 그들의 모든 일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은 성서적 바탕과 심상 그리고 비유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끝으로 그들은 간소한 의식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문체도 간결함을 지표로 삼았다.

 

3. 미국에 끼친 청교 주의의 영향을 약술하라.

아메리카에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하여 미국의 건설은 청교 주의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정치 참여를 한정된 교회 구성원으로 제한하였고 특히 종교적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일종의 엘리트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오히려 미국의 독자적 민주정치에 역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집회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촌락공동체, 지방분권적인 정치제도의 발달은 미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고 중앙에 파견하는 대표자를 직접 선출하고 세금에 의한 공공사업을 펼쳤다는 것은 미국 정치의 중요한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갖는 독특한 선민의식은 미국인들의 낙천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선민의식은 다른 민족과의 접촉이나 선교 대상의 출현 시 수단이 무력이라 해도 과감히 자행하는 극단적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수단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호전성 역시 미국인의 피 속에 선민의식과 같이 용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대륙 정착 시 인디언 정벌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레이건 대통령의 말 '소련은 악마의 제국(Evil Empire)'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잘 밝혀지고 있다.

한편 16C에서 17C동안 전 유럽과 미대륙 뉴 잉글랜드 지방을 휩쓸던 마녀 선풍이 있었는데 특히 뉴잉글랜드의 세일럼의 마녀 선풍은 청교도 사회가 낳은 폐단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것이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점차적으로 상업 자본주의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게 되고, 청교도 사회 역시 상업에 의한 부를 축적한 세력과 주로 농업 위주의 기존 세력이 갈등을 겪게 되었다. 전자가 뉴잉글랜드 동부의 John Poster 세력이고 후자는 항구 서쪽의 John Putnam 세력이었다. 이 분파 싸움의 치열함 속에 부임할 페리스 목사가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를 배격하고 성지를 더럽히는 악마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사탄의 허수아비로 취급되어 죽어 갔다. 상업주의의 거센 바람이 청교도들의 독특한 정신과 생활 그리고 마을의 특수성과 합쳐져 일으킨 큰 비극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미국인들은 17C청교도사회를 이상적인 세계로 간주하고 있으며 물질주의와 세속주의가 극도로 치달을 때마다 17C청교도 사회로의 복고를 주장한다.

 

 

제 4장 청교도의 이주

1.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에 대하여 약술하라.

1607년 영국의 국교회를 개혁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청교도의 한 급진적인 무리인 분리주의자들의 한 소수 집단이 네덜란드의 레이덴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은 것이다. 그러나 칼빈 파에 속하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들을 주로 저임금의 노동직에만 종사할 수 있게 했다.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11년 동안 머물렀었다. 본래 고국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들 있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노동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풍습을 배워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 보다 훨씬 덜 보수적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일이나 교회 생활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인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영국인으로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대륙 행을 결심했다.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다.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결은 그들을 북쪽 해안으로 밀어 갔고,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을 플리머트(Plymouth)라 불렀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후에 스스로 플리머트 식민지의 총독이 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였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한 사람으로 신학적인 지식도 깊었다. 그가 쓴 일기는 당시 플리머트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 메이플라워 호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호로 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배였다. 장장 9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마침내 배는 북 아메리카 동해안에 다다랐다. 새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떠서 플리머스라 부르기로 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퓨리턴(Puritan), 즉 청교도로 제임스 1세의 청교도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그 해 겨울, 이주자들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2) 필그림 파더스의 맹약

이들은 이미 항해 도중 정부형태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메리플라워 맹약〉이라 한다.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인 남자가 참여하는「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메이플라워 맹약〉은 훗날 미국 헌법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 사람들―이들을 후세 사람들은〈필그림 파더스(Philgrim Fathers〉라고 부른다. 이〈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다.

“신의 이름으로, 아멘. 아래에 서명한 우리들, 즉 신의 은총에 의해 영국, 프랑스 및 아일랜드의 왕으로 즉위해 우리의 최고 통치자가 되시고, 또 신앙의 옹호자이신 제임스 폐하의 충성스런 백성인 우리들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기독교를 보급하고, 우리 국왕과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하여, 버지니아 북부 지방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항해를 계획하였던 바, 이제 이 서약서에 따라 각자 신과 상대방 앞에서 엄숙하게 서로 계약을 맺어 정치 단체를 만들어, 그것으로 우리의 공동 질서와 안전을 지켜 나가고, 또 위에 적은 목적을 수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식민지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바에 따라, 언제든 공평하고 정의로운 법률, 명령 등을 만들고, 헌법을 제정하며, 또 공공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에 대한 맹세로 우리들은 제임스 폐하의 재위 18년째 되는 기원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 코드 (Cape Cod)에서 여기에 서명하였다.”

(3) 뉴잉글랜드에 정착

뉴잉글랜드(New England) 는 지금의 미국 북동부지역에 위치한 6주(매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뉴햄프셔, 메인)를 뜻한다.

이때에 청교도 지도자 William Bradford는 청교도로서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우리를 오게 하시고 아름다운 항구와 평화로운 땅에 정착하도록 인도하신 하늘의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무릎을 끓고 기도했다." 바로 그 해 겨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추위와 배고픔과 질병으로 그들의 절반이 땅에 묻히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덤을 감추어야 했다. 그 고생스러웠던 첫 해 겨울 초대 총독 John Carver도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William Bradford가 총독을 계승했다.(30년 이상을 재임) 그의 지도 아래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가져왔던 씨앗들을 심게 되었고 콩, 옥수수의 씨앗은 인디언들로부터 받았다. 첫 수확을 거두게 된 해 가을 추수감사절을 하나님께 드렸다.

(4) 메사츄세츠

그 후 청교도들은 1621년 Fortune호를 타고 32명이 이주했고 1623년 Anne and little James호를 타고 100여명의 이주민이 새로 정착하게 되었다. 1630년에는 1000여명의 청교도 이민자들이 마사츄세츠 베이회사의 지원으로 미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오늘의 보스턴을 건설했고 후에 하버드 대학을 세웠다. 그 후에는 영국에서 10년 동안 1만 8천명의 대 이민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1630년 찰스 1세로부터 식민지 건설의 허가장을 받은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매사추세츠만 연안에 도착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 종교적 관행이 영국에서 점차로 금지되던 청교도들이었다. 그들의 지도자가 존 윈드롭은 신세계에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하며, 이 일에 착수했다. 이것은 청교도들이 엄격하게 자기들의 신앙에 따라 생활할 장소를 뜻했다.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는 뉴잉글랜드 지방 전체의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느 정도는 윈드롭이 이끈 이들 청교도들이 특허장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식민지를 다스릴 권한은 영국 아닌 매사추세츠에 있게 되었다.

특허장의 규정에 따라 청교도 교회의 소속이어야 하는 "자유인"으로 구성된 '제 지방 집회'(General Court)에게 통치 권한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해서 뉴잉글랜드 식민지에서는 청교도들이 종교는 물론 지배적인 정치 세력이 되는 것이 보장되었다. 지사를 선출하는 것도 '제지방집회'였다. 다음 한 세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존 윈드롭이 지사직을 맡았다.

청교도의 엄격한 통치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지방집회'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은 로저 윌리엄스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식민지가 인디언의 땅을 빼앗는 것과 그리고 그 '집회'와 영국교회와의 관계를 반대했다.

그는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부터 추방당하여, 1636년에 지금의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덴스에 사는 나라가나세트 인디언들로부터 땅을 매입했다. 그는 그곳에 정치와 종교가 완전히 분리된 아메리카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매사추세츠를 떠난 사람은 윌리엄스와 같은 세칭 '이단자'들 만은 아니었다. 다른 청교도들도 더 좋은 땅과 기회를 찾아 이윽고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코네티커트강 유역의 땅이 비옥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토질이 박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농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630연대 초에 이르러서는 많은 사람들이 평평하고 기름진 땅을 얻기 위해 인디언들의 습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새로운 공동체들은 흔히 교회의 신도가 아니더라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으며, 그리하여 선거권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여되게 되었다.

이 무렵 차츰 많은 이민들이 신세계가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땅과 자유를 찾아 이주해옴에 따라 뉴햄프샤와 메인의 연안에는 다른 정착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일은 청교도 지도자들은 경건한 새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시민권 부여와 이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 신자에게만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헌장에서 청교도 이주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약속의 땅에서 오직 성경에 약속된 자유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미지의 세계를 정복하고 대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신대륙을 많이 찾았다. 오늘날 미국 역사의 정신적 지주는 바로 청교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청교도(Puritan) 분야의 권위자인 페리 밀러(Perry Miller)도 “청교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미국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2. 분리주의자들과 비분리주의자들에 대하여 약술하라.

* 분리주의자(Plymouth separatist)

1620년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항해하여 미국 매사추세츠 남동부인 플리머스에 정착한 102명의 분리주의자들 이들을 ‘분리주의자’라 칭한 이유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영국 성공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그러한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경제적 번성과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며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데 있었다. 그들은 인디언의 침입과 내부 혼란을 막기 위해 정치 조직이 필요하게 되자 ‘메이플라워 계약’을 맺고 자유가 최대한도로 보장되는 사회를 신대륙에 건설하고자 했다. 분리주의자들이 미국에 남긴 영향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 사상은 무질서와 방탕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양심을 가치 판단 기준으로 두면서 절대적 의미의 진리가 사라지고 상대적인 게 진리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우린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게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는 데서 온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있다.

* 비분리주의자(Boston non-separatist)

1630년 3월 아르벨라(Arbella)등 10여척의 배를 타고 미국 보스턴에 도착한 존 윈스롭(John Winthrop, 1588-1649)등의 비분리주의자들은 개인주의를 경계하면서 공동체의 의를 실현하는 경건한 사회 즉, ‘언덕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 공동체의 특징은 기독교 사랑에 기초한 신앙적 이상향의 사회인 성경에 기초한 법을 만들고 성도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비분리적인 청교도들은 변혁적인 문화관에 기초하여 영국을 개혁하고 신대륙에 이민하여 전 세계가 모델로 삼을 수 있는 경건한 사회를 건설함으로 미국의 기초를 놓았다. 이들은 플리머스의 분리주의자나 현대 미국 헌법과는 달리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은 금지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노동을 신성시하게 되었고, 법이 다스리고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되어 현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하게 되었다.

 

3. 뉴네델란드와 메릴랜드에 대하여 약술하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고용된 헨리 허드슨은 1609년에 지금의 뉴욕 시와 그의 이름을 딴 허드슨 강 일대의 땅을 아마 지금의 올바니 북쪽까지 탐험하였다. 그 후에 있은 네덜란드인의 항해로 이 지역에 대한 소유권 주장과 초기 정착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북쪽을 차지한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인의 최초의 관심은 모피무역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네덜란드인들은 모피가 나오는 오지에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로키 인디언 5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617년 네덜란드의 정착민들은 허드슨강과 모호크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요새를 건설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올바니이다.

맨하탄도 정착은 1602년 초에 시작되었다. 이 섬은 1624년에 그곳을 차지하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24달러를 주고 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섬은 즉시 '뉴 암스테르담'으로 명명되었다.

허드슨 강 지역으로 정착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농원 지주" 제도로 알려진 일종의 봉건적 귀족제도를 장려했다. 1630에 허드슨강 유역에 그 최초의 거대한 농원이 설치되었다. '농원 지주'제도 하에, 4년 동안에 자기의 농원에 50명의 성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25킬로미터 길이의 강변 땅과 독점적인 어로 권과 사냥 권 그리고 자기의 땅에서의 민사상 및 형사상의 관할권이 부여되었다. 그 대신 그는 소작인들에게 가축과 농구와 건물을 제공해야 했다.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바치고, 지주에게 잉여 농작물에 대한 '우선적 선택권'을 부여했다.

이들 네덜란드인과 유대를 가지고 있는 스웨덴의 한 무역회사가 그로부터 3년 후에 그보다 남쪽의 델라웨어 강 연안에 최초의 정착지를 설치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지를 공고히 할 방편이 없었던 스웨덴인村은 네덜란드인의 정착지에 흡수되고 말았고, 이 땅은 후에 펜실베이니아와 델라웨어로 발전했다.

1632년 캘버트 일가는 찰스 1世로부터 포토먹 강 이북의 땅을 개발할 수 있는 특허를 얻었다. 지금의 메릴랜드이다. 이 특허장은 비개신교 교회의 설치를 명백히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캘버트 일가는 같은 신앙의 카톨릭교도들이 그곳에 정착하도록 권장했다. 메릴랜드 최초의 邑인 세인트 메리邑은 1634년 포토먹 강이 체사피크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어귀에 건설되었다.

캘버트 일가는 영국에서 차츰 종교적 박해에 직면하게 된 카톨릭교도를 위한 피난처를 마련하는 한편, 이문이 있는 자산을 일구는 데에도 관심이 있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영국 정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개신교도들의 이민도 권장했다

이들은 신대륙의 특수한 환경에 의해 미국적인 특성을 가진 청교도 정신을 발전시켰다. 이 청교도 정신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기본 정신이 되었다. 이들은 종교와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에 종교개혁 정신에 투철하였다.

 

4. 청교도 정신과 푸론티어와의 관계에 대하여 약술하라.

18세기 말에 이르러 New England 사람들이 서부로 진출하여 Frontier(미국 역사상 서부의 개척지) 의 자연 환경과 사회적 조건에 접하였을 때 청교도 정신은 변화되었다. 프런티어의 존재(또는 소멸)가 미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광대한 프런티어는 땅의 입수를 용이하게 하여 농업발달에 기여함과 동시에, 공업제품에도 충분한 국내시장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립의 기회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동부의 과잉노동인구를 흡수하는 안전판의 기능을 다함과 동시에, 미국사회의 유동성(流動性)을 높여 그 중산계급화를 촉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정치면에서도 기존(旣存)의 사회적 제약이 적은 프런티어는 자유 ·평화라고 하는 이념(理念)에 제대로 들어맞아 보통선거운동 등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고, 자치의식도 높였다.

그리고 대자연에 맞서 살아 나가야 하는 냉혹한 상황 속에서 ‘프런티어 스피릿’이라 부르는 개척정신의 기풍이 배양되어 그것은 미국 국민의 국민성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으며, 그들의 개인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 혹은 개개의 독창성을 존중하는 성향을 강화해 주었다.

이런 Frontier의 강력한 평등주의 앞에 청교도들의 귀족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은 사라지고 개척민의 거대한 포부와 낙관주의가 청교도 정신의 비관적인 색채를 퇴색시켰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하게 남아있는 특징은 모든 일을 선악으로 판단하는 도덕적 습성이다. 오늘날 종교적 신앙으로서의 청교도는 New England에서도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그 도덕적 관념은 남아 있어 어려운 사회 문제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제 5장 청교도의 사상과 신앙과 삶

1. 청교도들의 언약사상에 대하여 약술하라.

청교도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뜻대로 개인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와 사회를 세우자는 것이다. 하나님 뜻대로 개인의 삶을 살고 교회와 사회 공동체를 세우자는 것은 목표이고 대 전제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청교도 성직자들은 먼저 스스로 설득되고 그리고 사람들을 설득시키며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바로 그 구체적인 사상적 틀과 정신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청교도 언약사상이었고 그것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참여의식이었다. 언약사상은 이미 유럽대륙에서 소개되었지만 이것이 영국으로 넘어오면서 발전되었고, 청교도들은 이것을 개인 언약, 교회언약, 사회언약의 크게 세 가지로 발전시키면서 삶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정리했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바로 이 언약사상의 뒷받침으로 전개되었다.

청교도 언약사상은 사람들에게 자발적 참여의식을 낳게 했고, 이 자발적 참여의식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청교도 개혁운동 역사 가운데 언약사상이 어떻게 형성, 전개되었으며 자발적 참여의식이 어떻게 발생되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2. 청교도들의 7대 기준을 쓰라.

첫째가 성경중심의 신앙이다. 청교도 운동의 시작이 성경을 바로 읽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바르게 살자는 운동이다.

둘째가 성수주일(聖守主日)이다. 십계명의 네 번째에 지시한 바를 따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며 살자는 운동이다.

셋째가 직업에 대한 소명 정신이다. 신부와 목사만이 사명자요 사역자가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로서의 사명이라 여겼다.

넷째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이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치는 것을 자신들의 책임으로 여겼다.

다섯째는 바른 교회를 세우는 운동이었다. 교황이나 사람의 권위가 지배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를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여섯째는 예언서의 기준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이 영국에서는 제한적인 역할만 하고 실패하였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하여 미국이란 국가가 세워지게 되었다.

일곱째는 재물에 대한 청지기 정신과 십일조 생활에 대한 강조이다. 재물에 대한 이런 사고와 습성이 후에 자본주의를 일으키는 모체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청교도들의 삶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다.

(2) 청교도들은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설교한 사람들이다.

(4) 청교도들은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경건한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5) 청교도들은 개신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4. 청교도들은 무엇을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는가 쓰라.

1) 성수주일 - 철저한 주일 성수의 의무이다.

2) 예배 - 예배의 의무이다.

3) 기도 - 기도의 의무이다.

4) 경건한 가정 - 경건한 가정의 의무이다.

5) 거룩한 삶 -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이다.

 

5. 청교도들의 신학사상을 약술하라.

①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오직 성경’을 강조한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주장은 성경이외의 변질된 교회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임을 강조한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신앙과 삶에 절대적으로 권위가 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신자들이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고 실제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입증하였던 것이다.

②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또 다른 모토는 오직 믿음이다. 여기서 오직 믿음은 이신 칭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이것은 루터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그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수납하는 믿음을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이 포문이 열린 것이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그 성곽교회 문에다 면죄부(행위 구원)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계시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행위로 구원을 강조하는 모든 비성경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행위로 구원을 지양하고 오직 믿음( Sola Fide)을 모토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신학과 사상이 되었다.

사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진리는 초대교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 340~397)와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강조한 칭의론에 근거를 둔 것이었으며, 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중심 진리였다.

루터가 재발견한 이신칭의 진리를 칼빈에게 와서 동일하게 주장된다. 그는 이 진리가 "종교의 유지를 위한 결정적 구심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칭의의 근거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의뢰함이 없이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안식함이, 믿음의 본질인데, 믿음이 그만한 견고성을 가져야 지옥의 모든 공세 앞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나간다”고 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청교도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제정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에서도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청교도들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행10:44; 갈2:16; 빌3:9; 행13:38,39; 엡2:7,8).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요1:12; 빌3:28; 5:1).”라고 한다.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며 (롬3:24; 엡1:7)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골1:21,22; 갈2:16; 딛3:4-7).는 것이었다.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가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결과이다.” 존 오웬은 구원 얻는 믿음이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방식만을 의지하며 그 구원 방식을 선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79)의 표현처럼 “믿음은 은혜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바라고 의지하는 믿음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③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은 공로사상에 근거한 행위구원에 있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 근거한 것이기에 수많은 성자를 숭배하고, 금식기도와 고행이 수반되었다. 그래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놓을 무렵에는 면죄부를 판매함으로 그것으로 지옥 간 영혼일지라도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을 고민하면서 “어떻게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성경(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구원론의 재발견은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만을 의존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이 살길임을 외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오직 은혜란 “모든 인간의 공덕과 행위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는 구원의 원인적 근원에 대한 슬로건이다.” 오직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사도바울이 말한 진리와 일치한 것이다.

칼빈도 동일하게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는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불가항력적 은혜와 관련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신. 인 협력설 주의와 공로주의를 비평한다. 그는 소명과 중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통한 선택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의 의지를 통한 자력적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선택과 그 은혜의 결과로 구원의 부르심과 중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제시한다.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 (더 나아가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이 칼빈도 구원이 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구원이후의 삶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전 과정이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에 대한 사상은 청교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오직 은혜에 대한 진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먼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효적 부르심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딤후1:9; 딛3:4,5; 엡2:4,5,8,9; 롬9:11).”

더 나아가서 칭의에 대해서도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롬3:24; 엡1:7).” 라고 분명히 언급하며, 또한 양자됨에 대해서도 “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엡1:5; 갈4:4,5).”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성화에서도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골1:11; 엡3:16-19),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에게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가 더욱 명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구원의 전 과정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④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자들이다. 즉 그들의 신학과 삶의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도 강조하였다. 그는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는 것을 강조한 것인데 이것을 강조한 이면에는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주체 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찬양을 드리며, 그 은덕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루터는 죄로 인하여 어두워진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광을 그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기위하여 교육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진리를 루터가 주창하였다면 이것을 발전시켜서 자신의 신학의 중심주제로 삼은 사람은 칼빈이었다. 종교 개혁자들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칼빈의 중심사상은 Soli Deo Gloria 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도 더 중요한 일임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을 자기 실존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에게만 생각을 한정하는 것은 건강한 신학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를 강조하면서도 기도 시에 중심 생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생각하거나 신뢰하지 말고 전적으로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만 생각하며, 자기의 욕심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권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함을 말한다.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자녀들과 새신자의 성경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던 교리문답서의 내용에서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 여기서 그의 신학과 사상과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은 청교도들에게 그대로 전하여져서 더욱 체계화 된다. 청교도들이 제정한 웨스트 민스트 대. 소요리 문답에서 칼빈의 정신은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에서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교리 교육에서 최우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볼 때에, 청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학과 사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들은 이 진리에 입각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의 실제의 말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토마스 왓슨은 “모든 사람들의 삶과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대강령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실제의 청교도들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혹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자신과 성품들)을 설교하기에 힘쓴 자들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지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도와주었다. 청교도들은 교회사속에서 가장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며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간 사람들이다.

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이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맴도는 신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진리도 동일하게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과 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과 사상의 중심이 그리스도였다. “마리아와 성자들의 중보는 사족에 불과하며, 사제들의 중보적 역할도 그 필요성이 전무하다. 인간의 공덕체제로써의 성례전을 부정하며, 미사의 피 없는 희생제사 제도를 배격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단번에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인류구원을 위한 족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만이 인간구원의 소망이다.” 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중심 사상과 신학을 전개하였다.

특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신학의 중심테마였다. 구원의 전 과정의 중심이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더욱 분명하다. 그는 “세계사의 중심적 전환점은 그리스도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대 섭리사역인 구속활동을 행하신다. 칼빈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속사관을 언급하는데, 즉 메시야 사상이 역사 속의 종교의 기초, 기본이며,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승귀의 신분이 강조되어 있다. 즉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의 권능적 위엄을 강조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없으면 휴지조작에 불과한 것처럼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에서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6. 미국 청교도들의 성격을 약술하라.

(1) 청교 주의의 특징과 실천주의

1570년에서 1680년 사이에 일어난 청교 주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영국 국교의 종교개혁에 대한 견해와 로마 카톨릭의 신앙 해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이 개인의 깊고 격렬한 신앙적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이와 같은 개인적 체험으로부터 예배 및 생활 전반의 개혁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의 미신과 의식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카톨릭 전승과 관례를 성경보다 중요시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기독교다운 생활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청교도들은 영국을 신의 뜻에 따라 개혁하기 위하여 정당을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중생이나 회심은 단순히 예배 의식이나 설교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모두 청교도들에 의해 체험된 실재들이다. 청교도들은 새로운 삶의 고통과 집요 불굴의 신앙 순례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삶의 형태로의 개종을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청교도 신앙의 개인적이며 경험적인 면은 그 운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특성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신의 진노와 사랑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은 회심에 있어서 필수적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전파된 신의 말씀은 인간이 따라야만 하는 중요한 길이었다.

회심이라는 것은 신의 말씀과의 부딪침을 통하여 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대해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심지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신의 뜻이라 생각했으며 홍수나 가뭄 등의 재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감추어진 죄에 대해 더욱더 깊은 자기반성을 하곤 하였다.

모든 인간의 수명은 그들의 창조주의 손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사실을 우리에게는 거의 냉담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체념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2) 청교 주의 사회적 윤리

청교도들은 구교도의 의복과 예식들이 영국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국 교회의 청결을 주장하면서 Puritans라는 이름이 생성되었던 것이다. 상업 발달의 가속과 방랑 거지들 그리고 계속적인 물가 상승은 청교도 운동에 많은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많은 영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3) 계약신앙

미국의 청교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교리는 '계약 신학'(Covenant Theology)이란 형태로 나타났다. 청교도들은 자기들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가 맺어졌다고 믿었다. 이 관계는 마치 벗어날 수 없도록 연결된 사슬과 같았다 이 사슬의 한 쪽은 그들 개인에게 다른 쪽은 하나님에게 끊을 수 없도록 매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계약'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행위의 계약을 맺었었다. 그리하여 그가 타락하기 전 인류의 대표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살게 하셨던 것이다. 그 대가는 축복을 받아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새로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곧 은혜의 계약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지켜져 나가는 특별한 형태의 계약이었다.

계약을 맺은 당사자는 계약의 내용대로 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청교도들은 이처럼 하나님과 사슬로 연결되었다고 믿었다. 세상에서도 더 좋은 조건이 있어도 계약 맺은 상대와 관계를 하게 되었듯이 하나님도 계약의 내용대로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이 모두는 성경의 법대로 해야 하며 성령에 의지해서 신자의 완전한 목표로 조금씩 자신을 훈련시켜야 했다. 신자들은 순결한 삶과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금 사슬에 매인 이들이었다.

리처드 로저스는 진실한 신자들을 위해서 '매일 할 일'의 목록을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매일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살펴보고 죄를 회개할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약속하신 사죄의 소망을 확신할 것,

매일 우리의 마음이 주 만을 찾을 것,

매일 자신을 악에 대해 무장하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반항할 것을 두려워할 것,

매일 주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다른 무엇보다도 주를 즐거워하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며 그의 재림을 대망할 것,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할 것,

이 모든 것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 경건히 하고 기도할 것,

매일 하나님과 화목하는 속에 일어나고 누울 것 등,

이 계약 신앙은 청교도들에게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 신앙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이 생활을 기뻐했다.

(4) 계약의 실천

뉴잉글랜드는 청교도들의 땅이었다. 이들은 성경 그대로의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뜨거운 의욕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종교개혁의 시대까지 감추어 두셨다가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도록 사명을 주셔서 보내셨던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로서 '구세주의 나라'(The Redeemer Nation)를 건설하게 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몇 가지의 신앙적인 확신들이 계약 신학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명시된 운명'(manifest destiny)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은 신대륙에 '산 위의 마을'을 건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의로운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아이들'로 보내어졌다. 이러한 주제들이 계약의 핵심이었다. 이일을 위해서 총독은 진실한 신자로서 성직자 못지않은 신앙과 학문 그리고 인격을 가졌다. 또한 목사들도 총독 못지않은 권력을 가졌다. 목사들은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지도자였다.

만약 주일 성수 하지 않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로에서 벌을 세우기 위해서 묶어놓을 수도 있었고 채찍을 가하도록 시킬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신정 정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청교도들은 신앙고백의 내용을 믿을 뿐 아니라 깨닫기도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그 내용들을 행동에 옮겨 눈에 보이도록 선행이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인간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 전가된 것이라 믿어야 가능했다. 이렇게 의롭게 된 다음에야 하나님은 힘을 공급해 선행을 하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성화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선행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가장 선한 행동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요. 그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청교도들은 진실로 중생 하지 못한 사람을 밝혀내는 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중생한 사람만이 택하여진 백성이요 하나님의 계약 속에 들어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은 교회에 온 사람들을 정식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데 분명히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고 싶으면 다른 교인들이 받아 주어야만 가능했다. 예배에 참석한다고 다 정식 교인으로 치는 것은 아니다. 청교도들은 절대로 아무나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교회를 세울 때에도 최소한 일곱 명의 발기인들이 서로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만족하고 있어야 했다. 교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중생의 체험과 기초적 교리에 관한 지식이었다. 일곱 이상의 발기인들은 이웃 교회의 목사와 지역 행정관들을 모셔 와서 자신들의 자격을 심사받아야 했다. 안 그러면 교인이 될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고자 할 때는 장로들 앞에 나와서 자신의 신앙적 지식과 체험을 시험받아야 했다. 신앙 지식이 빈약한 자, 중생하지 못한 자, 또는 문제아는 여기에서 일단 걸러졌다. 만약 시험에 통과되었다면 전체 교인들 앞에 소개된다. 그때 그 사람에 관한 문제점들을 교인들이 말하였고 지적당한 명백한 잘못은 공중 앞에서 회개하는 과정이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통과하면 몇 사람이 교회 앞에 이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 줄 것을 요청하는데 약15분간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간증한다. 그러면 여러 질문들이 따라 나온다. 그런 연후에 교인들이 좋게 생각하면 자신의 신앙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교인들은 투표로써 그의 영입 여부를 결정한다. 통과되면 교회로부터 교인 됨을 공식적으로 통고 받았다.

어렵게 교인이 된 만큼 이들은 택해진 백성으로서의 분명한 긍지가 있었다. 이들은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장은 가족 전체를 마차에 태우고 수 십리 길을 달려갔다. 설교는 보통 서너 시간씩 계속되는 성경을 강연하였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설교를 들었다. 예배 후에는 돌아가는 길에 가장은 가족에게 목사의 설교를 정리해 주었다.

(5) 청교도들의 생활과 의식

Puritans는 교육자 양성을 위해 1636년 하버드 대학을 설립하였다. 근본적인 그들의 교육 목적은 일반 신도들의 교리 이해와 종교적 원리, 그리고 사회적인 규율간의 적절한 조화였으며 이는 미국 교육의 기초가 되었고, 1642년에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교육을 최초로 실시하였다. 청교도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에 방해되는 일들은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각 가정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아버지로서, 부권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청교도들의 공공 생활 중심부는 읍민회(Town meeting)였으며 이 읍민회는 교육과 정치적인 활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어린아이들의 교육은 물론,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임명까지도 읍민회가 담당하였던 것이다.

청교도 사회에서의 목사의 위치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청교도 사회는 성서가 지배했고 성경의 설교 다음으로 설득력 있는 권위는 바로 목사의 설교였던 것이다. 정치적인 대표자 역시 종교적으로 거듭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었으며 교회와의 계약에 충실해야 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였으며 전체 공동체의 이익과 이상을 우선으로 삼았고 개인의 야망과 성취에 앞서 이웃의 불행을 걱정하였다. 이는 미국의 다른 식민지의 지배적 성향인 개인주의적 미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7. 청교도들의 사회활동에 대한 사상과 활동을 약술하라.

(1)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청교도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사회를 이 땅에서 일구어야 할 삶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의 한 부분이라고 여겼다. 소명 사상은 청교도들에게 너무도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사상이므로 정치 또한 소명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기독교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모든 문화 영역에 참여했다. 이런 목적에 동원되는 수단은 청교도들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었으나 목적 그 자체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2) 공동선을 추구함

청교도들은 사회의 결집력이 정부 구조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정부의 행정력이야 어떻든지 공동체의 기풍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들은 공동체 기풍을 형성하는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이기심과 공동 관심사를 꼽았다.

청교도들은 순전히 개인적인 이익보다 공공 또는 공동선을 더 의식하는 자세를 손꼽았다.

(3) 청교도들이 벌인 사회 활동

당시 모든 시민 활동, 정치적인 실력 행사, 또는 어떤 소명을 이루려는 집합적인 노력 등은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데 큰 목적을 두고 있다.

(4) 사회 활동의 도덕적, 신학적 기초

청교도들의 사회 활동은 기독교 도덕의식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사회 참여를 주장한 배경에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다. 구원을 확고하게 보장받는 수단으로서 선행을 생각한 카톨릭과는 달리 청교도들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인 관심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진정한 경건은 선행을 낳는데, 이는 감사의 표현이지 결코 공적이 아니었다.

(5) 제도화한 사회 활동보다는 개인적인 사회 활동을 선호함

청교도를 현대 집체적 체제와 비교하면 단연 개인주의가 돋보인다. 16세기 사상가들은 국가에 그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올바른 체제만 가지고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물론 올바른 체제가 있어야 하지만, 개인의 협조와 개인의 책임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청교도들은 무차별적인 자선을 반대하고, 정말 도와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청교도들이 대안으로 택한 구제 방법은 사람들에게 일을 독려하고 그들이 사회의 생산적인 성원이 되도록 고무하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몸담고 사는 사회의 질을 진심으로 염려했다. 인크리스매더는 성경의 목적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우리가 사는 세대를 섬겨야 할지를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는 말로 청교도들의 관점을 요약했다. ‘자기가 사는 세대를 섬긴다.’는 이 구호는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붙드는 구호이다.

(6) 사람 위에 사람 없다 : 평등주의적 경향

청교도의 개인주의의 신학 근거는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라는 교리이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대접하고 모든 개인의 중요함을 보호하려는 청교도들의 균형을 이루는 노력에서도 이러한 개인주의가 발견된다.

청교도들은 외형적인 문제보다 영적인 데 우선권을 둠으로써 단지 혈통 또는 지위에 근거를 둔 특권을 경시하는 풍조를 열었다. 이런 태도에는 만인 제사장설이 뒷받침되었다.

 

8. 청교도들의 가정에 대한 사상을 약술하라.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창조질서로 보았다. 가정제도는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있었고, 국가제도가 생기기전에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가정의 개혁은 그 어떤 창조의 질서의 개혁보다 우선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의 시초가 되는 부부관계의 정립이 우선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에덴동산에서의 첫 번째 가정은 모든 인간의 모범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에덴에서의 가정은 아가페적인 사랑에 기초하였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2:23).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최상급의 사랑고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최초의 가정은 지고한 사랑고백 위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경 교리에 근거하여 청교도들은 가정의 기초는 바로 사랑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랑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하나님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가정생활의 원리를 주셨다(창2:24). 이 말씀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요, 둘째는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요, 세째는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남자가 부모로부터 공간적으로 떠나 분가하여 살라는 말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연합하라]는 말은 의견의 일치를 보라는 말이다. 20년 또는 30년 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나? 그것은 반 푼이 됨으로 가능하다. 자신의 의견을 50%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라]는 말은 육체적으로 하나가 될 것을 시사한다.

* 결혼의 목적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가정의 기원, 가정생활의 원리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행복한 가정은 바로 가정을 세우신 목적을 아는데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신 1차 적인 목적은 종족의 보존에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1:28). 결혼의 원칙적인 목적은 거룩한 자녀를 두기 위함에 있다(말 2:15). 그러면 자녀를 두지 못하는 결혼은 잘못된 결혼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결혼으로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시 127:3). 그러므로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을 단지 자녀의 생산에 두는 로마 천주교도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결혼의 다른 목적은 음란을 방지하는데 있다.

성경은 인간들에게 음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였다(고전 7:1-2).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은 서로 [돕는 배필]이 되는데 있다(창 2:18). 하와를 지으신 목적은 [돕는 배필]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퍼킨즈는 남편과 아내는 서로 도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이루어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 곧 말씀과 성령이 다스리는 가정이 이루어지며 가정의 개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9. 청교도들의 교육에 대하여 약술하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은 부부의 관계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녀를 말씀에 근거하여 양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의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양육에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야말로 부모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1) 교육의 궁극적 목표

청교도들은 인간을 죄악 덩어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죄악 가운데 태어나며, 죄악 가운데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사 또는 장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천국의 보화를 상속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떤 아이가 목사의 자녀 또는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은혜 계약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는 지옥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자녀들을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청교도들은 현세적인 교육보다는 영적인 교육을 우선 시 하였다.

청교도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하나님과 성경을 아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교육의 과제를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보다는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이 이와 같이 영적인 교육을 강조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성경과 구원에 대해 무지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성경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성령께서는 무엇을 행하시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무지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으며 천국과 지옥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짐승과 같이 본능을 따라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영적인 교육 없이는 비록 목사의 자녀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 성을 따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변화를 받아야한다. 곧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함으로 가능하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에게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는 것은 부모의 가장 큰 의무였다. 만일 자녀를 영적으로 교육하지 않을 때 언제인가 그들의 자녀는 그들을 저주할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청교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3) 정기적인 교육과 수시 교육

자녀들을 영적으로 교육하기 위하여 청교도들은 자녀들을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교육하였다. 청교도들은 앉았을 때나 서 있을 때, 길을 걸을 때, 옷을 입을 때나 벗을 때, 아침이나 저녁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의 자녀들을 수시로 교육하였다. 또한 그들은 정기적으로 자녀들에게 말씀을 교육하였는데, 주로 가장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가장은 가정예배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에게 정기적인 신앙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매주일에 한 번씩 모든 식구를 불러 모아 요리문답서를 교육하는 것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요리문답 교육은 루터와 칼빈 이후 기독교교육으로 크게 활용되었는데, 대부분의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목사들은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여 자신의 교회에서 사용하곤 하였다.

또한 피터 벌클리(Peter Bulkely)가 {어린아이는 입이 좁은 병과 같아서 조금씩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으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랄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청교도들은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자녀에게 조금씩 말씀을 주입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실한 백성으로 양육코자 하였다.

4) 자녀 교육과 매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 매를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대교육에서 다루어지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인문주의적 교육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들은 자녀에게 매를 대는 것은 비교육적이며 비인간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론에 근거하여 요즈음 미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대는 것을 가혹 행위로 정죄하며, 매를 댈 경우에 자녀 양육권을 몰수당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러면 성경은 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자녀에게 매를 댈 것을 주장한다. 잠언 22:15절에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하느니라}고 하였고, 잠언 23:13-14절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청교도들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매를 사용하였다. 청교도들에 의하면 매는 말씀의 교육효과를 높여준다고 하였다.

물론 청교도들이 매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은 인격적인 설득과 사랑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매를 사용하는 데는 교양과 훈계(엡 6:4)와 사랑(히 12:8-10)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랑의 동기가 아닌 징계, 곧 과격한 체벌은 엄격히 규제되었다.

왜냐하면 매는 아이의 감정이나 육체를 상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죄에서 구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제 6장 청교도의 설교

1. 청교도들의 목사관을 쓰라.

청교도 운동이 낳은 수많은 선언서 중 하나는 목사가 담당해야 할 큰 의무 세 가지를 ‘설교하고, 성례를 집전하며, 기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윌리엄 퍼킨즈는 “진실한 목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해석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해석자이고, 사람들의 소원을 펼쳐놓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 사죄와 용서를 간구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해석자이다”고 하였다.

아더 힐더쉠(Arthur Hildersham)은 "목사가 해야 할 최우선이고 가장 중요한 책임은 말씀을 부지런히 전파함으로 양떼를 먹이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윌리엄 브래드쇼(William Bradshaw)는 청교도 운동을 당 시대에서 관찰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그들은 목사가 지닌 가장 고상하고 지엄한 직임과 권위는 복음을 엄숙하고 공개적으로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생각한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권면과 견책으로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일이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도들이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이었다고 보았다.”

 

2. 청교도 설교자들의 설교 특징을 약술하라.

(1) 대중을 사로잡는 설교, 진한 감동

당시 영국 성공회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설교를 따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평신도들이었다. 훌륭한 설교가 있는 곳에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달려갔다. 훌륭한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그 곳에는 언제나 청교도 설교자가 있었다. 청교도의 설교가 인기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설교에 대해 보였던 투철함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설교는 듣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우리를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 근처로 데려간다.”고 한 존 프레스톤에게서 단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존 코튼의 설교를 들은 어떤 사람은 이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코튼 목사는 권위 있고, 능력 있게, 또 생명력 있게 설교하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선지자나 사도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때면 그 분의 목소리가 아니라, 선지자 자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제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는 성경을 강대상에서 집어 들고, 그것을 가져가려는 것 같이 한다. 그러나 즉시 되돌아서서 교인들의 역을 맡아 하나님께 말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부르짖으며 애원한다. '주여, 저희에게 무슨 일을 하셔도 좋습니다만 당신의 생명만은 가져가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녀들을 죽이고, 우리의 집을 불태우고, 우리의 재물을 진멸해 버리소서. 그러나 당신의 성경만은 우리에게 남겨 주십시오. 당신의 성경을 빼앗아가지 마소서.'

그런 다음 그는 다시 하나님의 역할을 한다. '음, 조금 더 너희들을 시험해 보겠다. 성경을 너희들에게 두노라. 너희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 내가 지켜볼 것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지, 더 귀하게 여기는지, 더 잘 지키는지, 더 잘 행하는지, 성경 말씀대로 더 잘 사는지를 지켜볼 터이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면 사람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굳윈은 그 예배를 마치고 나와서 15분간 그의 말의 목을 붙잡고 울고 난 다음에야 말에 오를 기력을 회복하였다.

(2) 청교도의 지적 설교 충실

영국 국교회 성직자들의 무지는 자연스럽게 평신도들의 무지를 낳았다. 조시아스 니콜라스(Josias Nicholsas)는 400명의 교구민 가운데 40명 미만이 ‘그리스도에 관해, 그 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에 관해, 죄에 따르는 형벌이 무엇이고 무덤에서 썩은 우리 육체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초보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조사를 통해 알았다.

설교에서 지적 깊이를 갈망하는 청교도들의 바람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 중 하나는 대학 교육을 받은 목사를 원하는 것이었다. 메사추세츠에 상륙한 지 불과 6년 만에 하버드 대학을 설립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경해석 강연(prophesying)과 특별강연(lectureship)이라는 두 가지 독특한 제도 역시 지적인 설교 여부를 결정한다.

전자(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이르러 폐지됨)는 설교 세미나 또는 설교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연구 집회였다. 거기에는 한 지역 목사들이 참석했다. 목사들은 그 지역의 교회에 모여 사전에 합의한 본문에 관해 참가자 중 다섯 명이 설교를 하고 이어 강평회를 갖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이 실시한 특별 강연은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더 잘 파악하도록 돕는 방편이었다. 강사로 참가하는 사람들은 설교자 또는 평신도들에게 추앙받는 개인 연사였기 때문에 제도 교회의 직접적인 통제가 미치지 못하였다.

청교도 설교 가들은 주도면밀하게 설교를 준비했다. ‘고민에 찬 설교’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상이었다. 그것은 자기 고민이 있고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을 쓰며, 면밀히 준비한 설교를 말한다. 미국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존 엘리어트는 철저하게 연구한 설교가 아니면 가치 있게 보지 않았고, 깊은 연구를 하여 설교에서 어정쩡하게 넘어가는 대목을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3) 강해설교

청교도들은 교리와 신학을 떠받들었지만 특정 성경본문의 의미를 활짝 여는 강해설교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공 예배 모범을 채택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렇다. “성경에서 가르침을 추출할 때 신중을 거듭해야 한다. 먼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인가를 살펴야 하고, 두 번째로 그 안에 진실이 배어 있는가, 그리고 회중이 그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하는 것이다.

(4) 설교의 짜임새(조직적)

그들은 일반적으로 3부로 구성된 설교를 모델로 삼았다. 윌리엄 퍼킨즈의 “성경 해석의 실제”(The Art of Prophesying)에 청교도 설교 구성의 전형을 대할 수 있다.

① 정경의 한 부분을 선택해서 읽는다.

② 그렇게 읽음으로써 본문의 의미가 그것 자체만으로도 확연히 드러나게 한다.

③ 무리 없이 본문에서 추출할 수 있는 몇 가지 유익한 교리를 구성한다.

④ 설교자에게 그런 은사가 있다면 정확하게 구성한 교리들을 아주 쉽고 평이한 말로 생활과 인간사에 적용한다.

 

본문 봉독을 합당한 설교를 위한 예비 과정으로 여긴다면 설교의 3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1) 본문의 표면적 의미를 포착한다.

(2) 그 본문에서 교리적 또는 도덕적 원리를 끄집어낸다.

(3) 이런 원리들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제시한다.

본문에서 교리를 추출해 내는 작업은 본문 분해이다. 청교도들은 본문에서 교리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각 교리들이 ‘모범과 성경의 증거, 그리고… 성경에 뿌리를 박은 건강한 추론의 힘에 의하여’ 보강되어야한다고 느꼈다. 이같이 증거와 추론을 중시하는 목적은 특정 본문에서 추출한 교리가 배경을 이루는 성경 전체의 지지를 받음을 확증하기 위함이었다.

(5) 교리(신학적) 적용

청교도 설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교리를 생활에 적용해야 한다고 역설한 점이다. 청교도들은 매우 실천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성경 진리에서 하루하루의 삶으로 이르는 다리를 놓지 않는 한 교리란 생명력이 없는 문구에 지나지 않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적용은 설교자 뿐 아니라 회중에게 떠맡긴 책임이기도 했다.

퍼킨즈는 그의 책 ‘성경 해석의 실제’에서 회중의 상태에 따라 적용방법을 일곱 가지 범주로 나누었다.

① 무지하고 가르치기 힘 든 불신자

② 배우려고는 하지만 무지한 자

③ 지식은 조금 있으나 오만 불손한 자

④ 겸손한 자

⑤ 믿는 자

⑥ 타락한 자

⑦ 이런 저런 요소를 고루 가지고 있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실천을 이끌어 내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회중의 삶이 설교자에게는 상급이다.”

(6) 살아 꿈틀거리는 설교

청교도들은 설교에서 지적인 요소를 무척 강조했지만 이런 이지적 이해가 마음과 의지에 뜨겁게 호소하는 힘과 잘 조화를 이루었다. 그들의 설교는 살아 꿈틀거렸다.

청교도 관습을 보면 회중들이 대단히 적극적이었음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청교도들의 관습은 설교를 듣고 난 후 차근히 묵상하는 것이었다.

묵상을 돕는 방편으로는 암송이 좋았다.

(7) 긴 시간의 설교

청교도 설교자들은 일반적으로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 목적으로 그들은 모래시계를 사용하였다. 한 설교자는 다 끝마칠 때까지 무려 4번이나 모래시계를 돌려서 명성을 얻었다.

(8) 쉽고 편안한 설교

평이한 산문체를 고집한 이유는 명쾌한 전달이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윌리엄 퍼킨즈는 이렇게 말했다. “설교는 쉽고 명료하며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본보기가 될 만한 설교는 바로 쉬운 설교이다. 다시 말하지만 쉬우면 쉬울수록 더 좋다”

리처드 시브즈도 이렇게 주장했다. “진리는 꼭꼭 감추어 있기를 제일 두려워하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드러나기를 가장 원한다. 진리는 벌거벗을수록 사랑받고 강해 진다”

평이한 설교란 없어야 할 요소는 빼고, 갖추어야 할 요소는 갖춘 설교를 말한다.

설교 내용이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전제 위에 설교 유형에 관한 그들의 소신이 뿌리내리고 있음은 움직이지 않는 사실이다.

청교도들에게 말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지 목적 그 자체는 아니었다.

(9) 설교에 수반하는 거룩한 생활

청교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심령에 설교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경계해야 할 영역으로 네 가지를 언급한다.

1.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하면서 자신은 그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

2.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범 죄를 짓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자신은 더 나쁜 자범 죄를 행하며 살지 않도록 조심하라.

3. 자기가 맡은 고귀한 직분에 부적합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4. 자신의 모본이 적어도 자신의 가르침과 모순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청교도 설교 가들의 설교 교훈

(1) 나는 내가 느낀 것, 특히 내가 아픔을 겪으며 느낀 것을 설교한다.…사실 나는 죽음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은 자와 같은 신분이다. 나는 착고가 채워진 채 역시 착고에 묶인 그들에게 설교하러 간다. 그들을 깨워 일으키기 위해서 내 마음에 불을 담아간다. (Troplogia)

(2) 다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설교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은 죽어가는 사람이다. (Richard Baxter)

(3) 설교에 동원된 언어는 치유의 수단이요, 구원 마차이다.…말씀 전파는 그리스도께서 내다보시며 또 그 분 자신을 성도들에게 내보이시는 창문이라고나 할까 (Thomas Watson)

(4) 신실한 설교자가 없다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에게서 그 위용을 드러내지 못한다.…그렇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은 설교하는 베드로와 바울을 가진 조그마한 마을의 영광에 지나지 않는다.(Richard Heyricke)

(5) 설교가 죽어있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살아 있어야 하고 또 효과적이어야 한다. 불신자가 교회에 왔다가 감화를 받고,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으로 변화될 정도가 되어야 한다. (William Ames)

(6) 진실로 설교는 하나님께서 창안하신 제도이다. 믿음을 얻고 거룩한 지식을 쌓으며, 의지와 정열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기 위한 신성한 제도이다. (Richard Sibbes)

 

 

제 7장 청교도 인물사

1. 존 낙스에 대하여 약술하라.

존 낙스(John Knox, 1514-72) : 청교도의 창시자

(1) 존 낙스의 등장과 활동

존 낙스는 1513년경 에딘버러(Edinburgh)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하딩톤(Haddington)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 앤드류(St. Andrews) 대학에서 교육받고, 이어 신부로 서품되었다. 30세쯤에 그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설복당했고,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위샤트는 복음 전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은 자였고, 1546년 성 앤드류의 화형장에서 순교했던 인물이다.

향후 13년 동안 낙스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는 실패로 끝나 버린 앤드류 성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노예가 되어 프랑스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에 19개월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에드워드(Edward) 6세 치하 말기에 영국으로 오게 되었고, 크랜머의 1552년판 '공중기도서'(Book of Commom prayer)를 준비하는 최종 단계에 참여하여 일익을 담당했다.

1553년 메리 여왕이 즉위하자 그는 독일로 건너갔다. 한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 있는 영국의 망명자 교회의 목사로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낙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보다 철저한 개혁파 예배 의식을 소개함으로써 '공중 기도서'를 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다른 도시에서 망명온 보다 보수적인 자들은 이를 좋게 여기지 않았고, 낙스를 즉시 몰아내려고 리차드 콕스(Richard Cox)와 그 이외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은 낙스에게 항의하며 "그대들은 영국 교회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낙스는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습을 지니라고 말씀하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런 충돌은 엘리자베드 1세 치세시 '공중 기도서'를 견지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대륙의 개혁파 교회들이 지니는 노선에 서서 보다 충실한 종교개혁을 요구한 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청교도(Puritan) 논쟁의 전조가 되었다. 콕스는 사람들에게 (낙스의 급진적인 교회 정치관을 환기시킴으로써) 프랑크푸르트로부터 낙스를 추방시켜야 한다고 조종하자, 그는 제네바로 건너갔다.

그는 칼빈의 제네바를 열렬히 찬미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곳에 머물면서 그의 유명한 '괴물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1차 나팔소리'(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 1558)를 저술했다. 이러한 여성 통치자에 대한 비난은 영국의 여왕 메리 튜더(Mary Tudor)에게 향해진 것이었다. 1558년에 엘리자베드가 즉위했고 그녀는 낙스의 그런 저서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1559년, 낙스는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왔고 그 곳에서 교회 개혁을 도왔다.

(2) 낙스와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때까지 국사는 잠시 12명으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이루어지다가 1560년 8월 3일 의회가 소집됨으로 정치 주도권은 의회로 넘어갔다.

낙스는 즉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의회는 낙스와 그의 동료 목사들에게 신앙 고백서의 작성을 요구했다. 낙스는 4일 만에 5명의 동료 존들(John Spottiswood, John Row, John Douglas, John Winram, John Willock)과 같이 신앙 고백서를 작성, 의회의 상임위원회에 제출했다. 상임위원회는 이 고백서를 인준하여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그리고 본회의는 동년 8월 17일에 이를 승인하였다.

(4) 낙스와 장로교회

낙스가 주축이 되어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 안에는 칼빈주의 색채가 짙게 깔려 있지만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로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더욱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낙스의 생존시 감독(Superintendent)이라는 직책이 엄연히 존재한 점이다. 그렇다면 낙스는 영국 성공회와 같은 감독교회(Episcopal Church)를 스코틀랜드에 창설했는가 하는 것이 규명되어야 한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였던 도널드슨(G. Donaldson)은 낙스가 개혁한 스코틀랜드 교회는 처음부터 감독제였으나,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이 제네바에서 돌아와 제2의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장로회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도널드슨이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첫째, 낙스는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영국의 궁정 목사로 시무할 때 이미 감독교회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둘째, 스코틀랜드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개혁파 교회보다는 루터파 교회의 영향 하에 있었다.

셋째, 1560년 낙스가 작성한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에 의하면 목사의 임명이 회중에 의한 선거와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해 시행된 시험과 공적 임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 학식이 풍부한 사람들이란 상당한 권한이 부여된 감독을 의미한다.

넷째, 감독은 1년에 2회 이상 담당 관할 구역을 시찰하고, 목사의 불경건한 삶이 발견될 경우 대회를 소집하여 해당 목사를 해임시킬 뿐 아니라, 감독구에 있는 주요 도시에 감독 재판소를 설치하여, 감독의 임명 또는 교인들의 이혼 문제를 다루는 사법 재판관 기능을 했다.

다섯째, 연금 수령에 있어서 감독은 500내지 700파운드를 받았는데 반해 일반 목사들은 100파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차등 지불은 감독의 우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널드슨의 학설은 내픈과 리드에 의해 반박되었다. 특히 리드는 낙스의 저술을 세세히 분석하여 낙스가 성직자의 주 임무를 말씀의 선포로 보았던 점 그리고 성직자는 성공회와 같이 교회 기구나 세속 권력의 관여가 아닌 오직 회중의 동의에 의해서 임명된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제1치리서 제5항 제1조에서 제3조에 기록된 “감독”이라는 용어는 낙스의 진의가 아니었다. 낙스가 처음 작성한 원본에는 감독이란 용어가 빠졌으나 후에 그의 동료 윌록과 스포티스우드가 수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감독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이 감독이라는 명칭은 개혁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마련된 행정 조치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영구 직이 아닌 한정 직이었고(처음에는 3년, 1570년도부터는 1년으로 단축되었음), 자기 관할 구역으로부터 비판과 치리를 받는 입장이며,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장로 제도를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인정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감독직은 도널드슨이 생각한 것처럼, 영국 교회의 치리자의 입장이 아닌 지 교회를 돌보는 방문자 또는 순회 전도자로 해석되어야 한다.

1566년 스코틀랜드 총회는 제2헬베틱 신앙 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을 채택하여 목사 직위상의 우월성을 부정하였다.

여기에서 낙스는 영국 망명 생활에서 로체스터 감독직을 제안 받았으나 감독 정치는 성경이 금한다고 믿었기에 정중히 사양한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따라서 낙스는 처음부터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장로교회의 씨앗만 뿌린 것이다.

1560년 당시 비록 개신교 세력이 절대 우위를 차지했지만, 카톨릭교회의 직분 자들(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등)이 계속 교회에 출석했고, 그들은 직분에 따른 재산도 그대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야 한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가톨릭 성직자 및 그들의 재산 관리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그들과 타협해야 했던 것이다.

1572년 추밀원과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합동하여 리스 협약(Concordat of Leith)을 작성했다. 이 협약에서 가톨릭 측 인사들도 개혁교회에서 임직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개혁교회의 일원이 되면 개혁교회의 총회에 복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낙스가 뿌린 장로교회의 씨앗은 그의 후계자 앤드루 멜빌 시대에 와서 꽃을 피웠다.

괴물 같은 여인들의 통치에 대한 제2차 낙스의 항거는 1568년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가 영국으로 쫓겨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그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그의 주저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 (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로서, 1644년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이었다. 낙스는 15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위하여 헌신했던 최초의 청교도 죤 낙스(John Knox)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이 갖는 영적 권세에 대한 생생한 일화를 남겼다.

당시 이런 사람들이 설교한 내용은 대부분의 헌신적인 필사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잘 보존되었는데, 그는 망명과 추격 속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기에 설교문도 단 두 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서 설교할 때의 일이었다. 종교개혁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며 카톨릭과 개혁 신앙 사이를 오고 가던 메리 여왕 앞에서 그는 설교하였다. 여왕은 자주 얼굴이 하얗게 될 정도로 깊은 두려움에 질려서 부축을 받으며 예배가 끝난 교회당을 걸어 나오곤 했다고 한다. 여왕은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막상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며 자신도 설교자인 존 낙스에게 얼마나 잘 보이고 싶어 했는지를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2. 존 밀턴에 대하여 약술하라.

존 밀턴(John Milton, 1608-74) : 합리적 청교도

밀턴은 1608년 12월 9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공증인과 사채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밀턴은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국교도였고 상당한 수준의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 성 바울 학교에서 밀턴은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했고, 근대어 같은 부분은 가정 교사로부터 보충 수업을 받았다.

그는 학문에 심취했고, 12세부터는 자정 전까지 책을 놓는 일이 없었다. 과도한 독서는 후일 실명의 원인이 되었다. 1626년 담임 교수와 충돌하여 1년 정학을 받은 일 외에는 큰 탈 없이 학문에 매진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크라이스 칼리지 문학사(1629), 문학 석사(1632) 학위를 취득하였다.

밀턴은 학창 생활 7년 동안(1625-32) 라틴어로 운문을 쓰는 법과, 작품 속에서 자아를 표출하는 기술을 배웠다. 그의 첫 영시, “어떤 아기의 죽음에 대해”(On the Death of a fair Infant)는 엘리자베스 시대 풍으로 1628년 쓰여졌다.

그가 21세의 생일 직후에 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는 혈기 왕성한 젊은 밀턴을 가둬 두고 신앙적 시를 통해 영성의 승화를 시도한 것같이 보인다(1629). 이 작품과 1628년에 쓴 “방학에”(At a Vacation Exercise)에서 고전 문학과 르네상스 인문주의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두루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밀턴은 부모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택할까 생각해 보았으나 1630년경 마음을 바꾸었다. 영국 국교회의 제도에 들어가는 것을 노예 생활로 생각했으며, 한편으로는 시에 대한 헌신 때문에 성직을 포기한 성 싶다.

6년(1632-38) 동안 밀턴은 호튼(Horton)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철학, 고전 문학, 역사, 수학 및 음악 등 폭 넓은 교양 과목을 공부하였다. 자유사상을 통해 점잖고 관대한 예술 세계를 접하려는 젊은 밀턴의 야심이 엿보인다.

1632년경 밀턴은 궁정 취향 가면극 아케이드(Arcades)와 1634년 또 다른 가면극 코머스(Comus)를 썼다. 코머스는 밀턴의 선악 사상을 최초로 극화시킨 작품이다. 1637년 모친 사망 후 밀턴은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지식층 인사들로부터 정중한 환대를 받았다(1638-39).

나폴리에서 밀턴을 환영한 후작 만소(Giambattista Manso, Marquis of Villa)와 천문학자 갈릴레오와의 교분은 밀턴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밀턴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영국 정세는 불안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는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1625-49)가 국왕이었는데, 그는 왕권신수설 이론으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찰스 1세는, 반 칼빈주의 자로 열열한 국교도인 윌리엄 로드(William Laud, 1573-1645)를 켄터베리 대감독으로 임명하여 비국교도들을 탄압하였다.

당시 의회는 비국교도인 청교도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과 의회는 자주 충돌했고, 왕은 청교도들의 간섭을 싫어하여 11년 동안(1629-40)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도 국교회 의식을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존 낙스 이래 장로교회 정치가 뿌리내려진 이곳 사람들은 찰스 1세의 강제 명령에 대항하여 영국을 공격하였다. 국왕은 군비 조달을 위해 할 수 없이 의회를 소집했고, 이 의회는 1640년에 시작하여 1660년에 막을 내렸다.

밀턴은 국교회의 사치스러운 의식, 대감독 로드의 전횡 그리고 국교회와 영국 왕실과의 정치적 타협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이제 청교도 세력의 사회 참여로 그의 불만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1639년 7월) 후 밀턴은 뜨거운 정열을 쏟으며 정치 세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1643년 5월 밀턴은 연하인 메리 포웰(Mary Powell)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왕당파 지주의 딸이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무사 태평한 여자라고 밀턴은 후에 토로하였다. 33세의 대학자와 무학의 소녀와의 결혼이 평탄할 리 없었다. 결혼 직후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밀턴은 3년(1643-45)에 걸쳐 그의 “이혼론”(Doctrine and Discipline of Divorce)을 발표하였다. 부부간에 애정이 없는 경우에는 이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결혼은 애정과 우정으로 맺어진 능동적 관계이기 때문에 당시 유일한 이혼 사유인 간통보다 애정 없는 것이 더 큰 이혼 사유라고 정의했다.

불행한 결혼은 1652년 포웰이 죽음으로 끝났다. 밀턴은 1656년에 캐더린 우드코크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으나 그녀도 1658년에 출산 직후 사망하였다. 1663년 밀턴은 젊고 상냥한 민셜(Elizabeth Minshull)과 결혼하였다.

밀턴은 크롬웰의 공화정에 참여하여 정부 활동에 개입했으나 1660년 왕정이 복고되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렇다고 그가 정치적 사상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대 작품들인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은 모두 정치적 메시지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밀턴은 1652년 완전히 실명하여 육체적 고통을 받았고, 왕정 복고 후에는 정신적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난과 역경은 그를 대 서사 시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3. 존 번연에 대하여 약술하라.

존 번연(John Bunuan, 1628-88) : 청교도 순례자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책 중의 하나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88)의 천로 역정이다. 번연은 이 책에서 가장 평범하고 소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우리 인간의 영성 체험을 제시한다.

그가 사용한 언어는 엄청난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 용어나 과학 용어가 아니다. 번연은 주위에서 흔히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상생활 언어를 꾸밈없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이 언어 속에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역동적 힘이 있다.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부각되는 상승된 영적 희열이 있고, 왜곡된 믿음을 가진 위선자들에 대한 풍자적 책망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진리를 위해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격려가 있다.

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존 번연은 기독교 문학의 고전이 된 기독교인의 일생을 그린 우화집 세계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으로「천로역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이 강조하는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와 성경의 만인 이용을 설명한 기독교인의 생활에 관한 우화집이었다.

 

베드퍼드의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1628년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받었다. 겨우 읽기·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갔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활을 새롭게 하고 나쁜 습관을 버렸지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강조하는 내용을 읽고서 회심하였다. 그리고 베드포드에서 평신도 설교자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낮에는 냄비와 팬을 수선하고, 밤과 주말에는 영혼을 구령했다. 그의 능력 있는 설교로 인해 수많은 회심 자들이 생겼고, 또 강한 대적 자들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찰스 2세가 복위하여 크롬웰이 통치하던 시기에 인정했던 종교의 자유를 취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1660년 존 번연은 허가(license) 없이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설교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1672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가 투옥되었던 기간에는 그의 아내가 만든 구두끈을 팔아 번 돈과 그의 책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만 가족들이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665년 잠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다시 투옥되었다.

존 번연은 폐렴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1688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설교를 그치지 않았다.

번연이 지은 60여권의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책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인데, 감옥에 면회 오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 쓰기 시작한 책으로 크리스쳔 소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오래 동안 사랑 받아 왔다.

번연이 옥중에 수감되었던 일은 아마도 <천로역정>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였는지도 모른다.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천로역정>은 고뇌와 회심, 전도와 박해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로 이어지는 번연 자신의 고달픈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1678년 출판된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영어권의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신앙서적이 되었다. 천로역정은 1678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출판 첫 해만 1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오늘날까지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4. 존 오웬에 대하여 약술하라.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죤 오웬은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린다. 맞는 말이다. 그의 전집(Works)은 건전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제일 먼저 택해야 할 책들이다. 현재 그의 글들은25권으로 나와 있다.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청교도들의 다윗 왕'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전반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당시의 도전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그의 모든 글에는 힘과 일관된 사상이 있고 항상 성경의 권위에 충실하다. 오웬의 가르침의 균형과 예리한 통찰에 있어 맞설 자가 없다는 것은 여러 실례로 증명될 수 있다.

오웬은 친구들과 함께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유명한 에드먼드 캘러미(Edmund Calamy)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 그런데 캘러미 목사가 오지 않고 한 시골 목사가 대신하여 실망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 방문 목사를 사용하여 오웬이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오웬의 첫 목회 지는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이라는 마을이었다. 그때 그는 메리 루크(Mary Rooke)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의 가정생활의 슬픔은 현대 의학의 혜택을 입고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들은 11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딸아이 하나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딸의 결혼도 깨어져서 친정에 돌아와서 산 지 얼마 안 되어 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웬은 1646년 주일에 출석 교인이 2천 명인 런던의 한 교회에 초빙되었다. 1648년 6월에 페어팩스(Fairfax) 장군은 콜체스터(Colchester)를 포위하였다. 그때 오웬은 군인들을 위한 설교 초청을 받았다. 그는 많은 장교들과 친분을 맺었는데 그중에는 올리버 크롬웰의 사위인 헨리 아이어턴(Henry Ireton)도 있었다. 오웬의 은사는 곧 소문이 퍼져 의회에 초청을 받았고 의회에서 가장 선호하는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올리버 크롬웰의 군종으로도 임명되었다.

1652년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부총장이 되었다. 이 직책은 각종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그는 6년간의 재직 기간에 신학, 설교, 교리문답, 기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옥스퍼드의 질서는 약한 편이었다. 오웬은 관대하면서도 확고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행정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토론 때 한 학생이 상스런 말을 하였다. 그는 경고를 받았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오웬 자신이 그 학생을 힘으로 강의실에서 밖으로 내쫓았다고 한다!

1658년 오웬은 회중교회의 목회자 모임에 나갔다. 이 모임은 런던의 사보이 팰리스(Savoy Palace)에서 열렸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백서를 준비하기 위해서 토마스 굿윈,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리지, 윌리엄 그린힐, 조셉 카릴과 함께 대표로 임명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보이 선언(The Savoy Declaration)이다.

오웬은 1676년 훌륭한 그의 아내를 잃었다. 18개월 뒤에 그는 부유한 여자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이때쯤 해서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마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편의를 돈 많은 아내 덕분에 제공 받았다.

오웬의 글은 그가 분석적이고 조형적이며 통이 큰 두뇌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의 글은 모두 그가 심오하게 이해한 은혜의 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웬의 문장 스타일은 현대인들에게는 쉽지 않다. 다행히도 로(R.K.K. Law)의 수고에 의해서 오웬의 대표작들에 속하는 『성령론』(The Holy Spirit), 『하나님과의 교제』(Commuinon with God), 『복음으로부터의 배도와 그리스도의 영광』(Apostasy from the Gospel and the Glory of Christ)이 요약되거나 현대어로 고쳐져서 나왔다.

 

5. 요한 웨슬레에 대하여 약술하라.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 - 1791)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 6월 17일 사무엘 웨슬리 목사 부부의 열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요한 웨슬리는 신앙심이 많았던 어머니 수잔나 부인에게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735년 10월 14일 요한 웨슬리는 동생인 찰스 웨슬리와 함께 식민지 주민들과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2년 동안 조지아에서 사역했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1738년 2월 1일 그는 잉글랜드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웨슬리는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이 갖고 있던 구원에 대한 확신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에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모라비아교도 친구인 피터 뵐러(Peeter Bohler)의 간증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구원은 즉각적인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완전히 믿게 된다. 그 후 그의 삶은 놀랍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1739∼1791에 있었던 '대 각성 부흥 운동'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웨슬리는 놀랍게도 자기가 설교할 때면 성령께서 강력히 역사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또한 '나의 교구는 전 세계요, 세계는 나의 일터다.' 외치며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하였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 남아 있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위하여 땅 끝까지 달려갈 것이다' 라며, 1753년 직접 발 벗고 세계선교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는 왜소하였지만 그처럼 작은 몸 안에 세계를 흔드는 힘이 들어있었다. 요한 웨슬리는 전도하기 위하여 50년 동안 말을 타고서 지구10바퀴 이상 되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틈에 2백 권이 훨씬 넘는 책을 펴냈으며, 50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 평균 32km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60년 동안 한번도 걸러본 적이 없이 새벽 4시면 일어나 기도하고 설교하였고 동생과 만든 수많은 찬송가 중에 1778년에는 좋은 것만 뽑아 525곡의 커다란 찬송가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가 89세의 나이로 죽을 때 두 개의 숟가락과 하나의 차 주전자, 그리고 다 낡아빠진 코트 한 벌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다. 그의 장례식이 있기 전날 그의 시신은 시티 로드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왔고, 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위대한 빛은(하나님의 보기 드문 섭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들을 비추기 위해 떠올랐다. 이 묘비를 읽는 이들이여, 하나님의 도구인 웨슬리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6. 조지 휘트필드에 대하여 약술하라.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70)

휘트필드는 1714년 영국 남서부의 도시인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청소년 시절은 결코 신앙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1733년 옥스퍼드의 펨브로크(Pembroke) 칼리지에 입학한 후부터 그의 삶은 급변하고 있었다.

1735년 회심한 그는 홀리 클럽의 회원이 되었고 훗일 함께 복음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요한 웨슬리(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 그리고 테론과 아스파시오(Theron and Aspasio)를 쓴 제임스 허비(James Hervey, 1714-1758), 윌리엄 모건(William Morgan)등을 포함한 친구들과 교제하였는데 이들은 1729년 봄에 시작된 홀리 클럽(Holy Club)을 시작한 창립회원들이었다. 이 모임은 후일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과 영적 각성운동을 이끌어간 동력원(Power station)이 되었다. 이들의 엄격하고도 철저한 시간관리, 규모 있는 생활방식(method) 때문에 메소디스트(Methodists)라고 불린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휘트필드에게 큰 변화를 준 책 중의 하나는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중생의 필요성과 이에 대한 복음적 견해를 확립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36년 6월 20일 성직(副祭)임명을 받으므로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된 그는 자기의 고향인 글로스터의 성 메리 드 크립트교회에서 첫 설교를 했는데 이것은 설교자로서 그의 삶을 이끌어간 중요한 힘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때의 설교에 대한 그 자신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그는 이 첫 설교에서 외적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며 목마른 영혼들에게 끊임없는 영적 해갈을 주었고 이 땅에서의 지친 삶에 새로운 힘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설교에는 수많은 청중이 모여 들었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특별한 일은 그가 1739년부터 옥외설교 혹은 야외설교를 시작한 일이었다. 곧 그해 2월 그는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Kingswood)지방 광부들에게 첫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는데 약 2만 명이 운집할 정도로 상당한 효과를 주었다. 이곳은 광산 도시로서, 산업혁명 초기 당시 이들은 영국 국교회의 관심밖에 있었다. 휫필드는 영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 전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런던에서도 야외설교를 시작하였다. 그는 공터나 들판에서 설교하였는데 때로는 수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다. 1739년 4월 29일자 일기에는 "약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옥외설교는 당시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반대하는 영국 교교회의 벽을 넘는 방안이기도 했다. "길과 산, 물가"로 나가서 전도하며 옥외에서 설교하였던 예수님의 설교는 그의 모범이 되었다. 휫필드의 옥외집회, 야외 설교 그리고 극장 전도, 가정 선교, 도시 선교 등은 당시 교회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래서 토마스 찰머(Thomas Chalmers, 1780-1847)는 휫필드의 방법을 '공격적 방법'(aggressive system)이라고 불렀다.

휘트필드는 1736년 6월 26일 주일 그의 고향인 글로스터에서 첫 설교를 한 후부터 1770년 9월 29일 미국 뉴베리 포트(Newbury Port)에서 5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4년간 그는 오직 한가지 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몰두하였다.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즈에는 복음전도자로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가 인도했던 공중집회는 1만 8천회에 달했고 스코틀란드를 14회나 방문하였다.

지금부터 250년이 넘는 그 당시의 도로, 교통, 통신 시설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당시 3-4개월이 소요되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한 일 또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그처럼 많은 대중에게 그만큼 많은 설교를 한 일이 없었다. 저명한 전기 작가인 루크 타이어만(Luke Tyerman)은 휫필드의 마지막 설교는 익세티 마을에서 죽기 불과 수 시간 전에 행한 고린도전서 13장 5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로이드존스의 평가는 거짓됨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 내에서의 그의 헤라클레스적인 엄청난 노고는 성령의 능력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7. 챨스 스펄젼에 대하여 약술하라.

찰스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 1834-92)

찰스 해돈 스펄젼(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온하고 독실한 목회자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스펄젼은 사춘기를 구원을 향한 회의의 시기로 보내게 되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일상이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날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던 목사님이 눈보라 때문에 나타나지 않아서, 회중에 있던 한 성도가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 성도의 설교는 간단했다. 구원을 위해서는 다만 그리스도만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죄의식으로 지치고 낙담한 스펄젼을 가리키며 "단지 주만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했다. 그 순간 스펄젼은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됐다. 구원이 오로지 주님만 주실 수 있는 은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스펄젼의 삶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얻었다. 그후 일생 동안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의 힘차고, 신학적이며, 감미로운 설교는 그로 하여금 "설교의 황제"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861년 3월 31일 스펄전의 메트로폴리탄 태버나클에서 최초의 주일 예배가 드려졌다. 스펄젼의 설교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이 교회 건물은 6천석을 가지고 있었지만 몰려오는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의 설교는 매번 서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까지 1만 명을 넘었다. 그러고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항상 되돌아가야만 했다.

그는 매 번의 설교를 위해 수 시간을 기도했다. 그는 결코 제목 설교를 한 적이 없었으며 항상 성경 본문으로 강해 설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용이 다른 설교 3,500여 편을 중복해서 설교한 적이 없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은 그가 그토록 많은 설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간을 개인 전도하는데 보낸 것을 보고 알 수가 있다. 그는 바쁜 일정 중에도 매주 화요일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개별적인 면담을 위해, 토요일은 복음을 위한 개별 방문을 정기적으로 행하기 의해 남겨 두었다.

1891년 1월 그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그는 불타는 진실성과 굽힐줄 모르는 신학적 신념과 열정을 가진'목음의 전파자'였다.

 

8.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하여 약술하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1703-1758)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 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했다. 그는 11자녀 중 외아들이었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즈는 이스트 윈저의 회중교회 목사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 시절에 회심했다. 많은 지적재능을 가진 그는 12세에 예일대학 입학하였다. 그는 1720년 예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비록 자신의 구원에 확신이 없었지만 에드워즈는 복음 사역이 그의 소명임을 확신하여 1720년 10월에 신학수업을 위하여 예일로 돌아갔다. 6년 후 에드워즈는 그의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가 시무하던 교회의 강도사 직을 수락하였으며 그 교회는 메사추세츠주 노드햄턴에 있었다. 그는 1727년 2월15일에 회중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부친은 목사로서 예일 대학의 설립자중 한 분이었다.

1729년 에드워드는 노드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734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 에 대한 그의 설교는 코네티것 리버 벨리 지역에 영적 부흥을 가져왔고, 1740년 일어난 영적 대각성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750년, 에드워드는 성찬식 참여자의 자격에 대한 교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노드햄프톤교회에서 해임되었고, 1751년부터 스톡브릿지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철저한 칼빈주의 자인 에드워드는 원죄, 예정론,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놓인 죄인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맞이하게 될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노드햄턴 교회에서는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 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1734-1735년과 1740-1742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부흥운동 이후 본 교회에서는 그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 마침내 투표에 의해 축출되고 말았다.

그 후 에드워드는 인디안 선교사로서 여러 해를 일했다. 1758년 에드워드는 뉴저지 대학(지금의 프린스톤 대학교)의 총장직에 취임하였으나 취임 5주 만에 천연두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재로, 최고의 설교자로, 많은 저술을 통해서 미국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가장 유능한 개혁 신학자로 알려졌다.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존 웨슬리처럼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1703년 목사 가정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근면한 삶의 터전은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와 어머니 에스더의 영향이었다. 그는 13세 때 예일대학에 입학, 1720년에 졸업하고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25년 동안 노댐프턴에서 목회를 했는데 이 시기에 대각성 운동이라는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대각성 운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대각성 운동의 결과,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각성 운동은 미국 해안 지방에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심었다. 초기의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은 계속되었고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증가하였다. 대각성 운동은 교육 부문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브라운 대학 등은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의의 깊은 학교들 중 일부이다.

또한 대각성 운동은 교파의 벽을 허물고 관용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교회사가 윌리스턴 워커도 말하기를 “문화적 혼란의 와중에서 발생한 이 운동은 미국의 교회 생활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라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진리의 횃불을 밝히며 의의 길을 열어준 지도자였다.

 

 

청교도사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