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제1장 예배의 정의
1. 성경에서의 예배의 의미를 논하라
1) 예배란 ? 웹스터 사전의 일반적인 정의는 초월자에게 경배, 고백, 기도, 감사를 통해 초월자를 향한 존경, 숭배와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 그리스도 인격에 나타난 신성과 완전한 구속의 역사를 인식하여 찬양,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즉, 예배는 영이 거듭난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관계(Relationship)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한 구속의 역사를 인식하는 능력 있는 삶은 예수님께서 표출해 주셨습니다. 그 핵심적인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예배 가운데 우뚝 서야 할 것이 십자가와 보혈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입술의 고백이 아닌 성령께서 감동, 감화하시는 찬양이 되어야합니다.
3) 영어를 보면 "worth" + "ship" = Worship, 즉 가치를 어떠한 대상에게 돌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존경하는 사장님"할 때 "his worship, 사장님"이라 표현합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배란 최상의 가치 "Supereme worth" 인 것입니다.
2. 학자들이 내린 예배의 정의들을 진술하라
1) W.L. Sperry :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숭경이며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며 그의 존재하심 앞에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받으실만한 분이심을 말하며 예배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말입니다. 시편 29편에서 말씀하듯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2) Brightman : '예배란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자의식이 없는 내적 자세'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세란 영혼이 평정된 상태로 빨려들어 가는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도 역시 예배를 사람의 관점에다가 맞추려는 설명입니다.
3) 슐라이에르 마허 : '예배는 경건한 종교적 자기 계시'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것도 예배를 어떤 내면세계에 빠져 들어가는 것으로 의미하고 있어서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4) 퀘이커교도 : '예배는 경건한 침묵이다. 그것은 거룩한 욕구로 채워진 명상과 관조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예배가 자기 수양의 한 방법으로 정의되어진 경우입니다.
5) 레이몬드 압바 : '예배란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고 했는데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시편 29:2절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6) 오스카 하드만 : [기독교 예배사]라는 책에서 '예배는 본래 최고의 가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7) 에블린 언더힐 : 그의 책 서문에서 '예배를 깊은 의미에서 생각할 때 영원 자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의 예배가 그 시작조차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사람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 Gibbs(깁스) : 1)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
2)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영혼의 쉼.
3)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 자체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
9) Paul Hoon(풀 훈) :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람의 응답이다.
10) Brunner(부루너) : 예배는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봉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회중의 봉사이다.
11) Huxtable(헉스터블) : 예배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의사 소통이다.
12) Martin(마틴) : 예배는 하나님과 함께 갖는 영적인 극적 축제이다.
3. 예배의 정의를 진술하라
1) 간단한 정의 : 예배는 최고의 가치, 사랑, 헌신을 하나님 앞에서 드리고 살아가는 것.
2) 총괄적 정의 : 예배는 신자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말씀에 응답함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생각에 관심과 마음의 사랑을 주님께 집중함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는 것입니다.
▣ 예배란
(1)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하고 화해하며 타협하고 협동하는 것입니다. 즉 보이는 존재인 인간과 보이지 않는 존재이신 하나님의 교통할 수 있는 단계가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되 가장 정성 된 것,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나아가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절정이 예배입니다. 예배 중에 인간은 최고의 정상에 오르게 되고, 드리는 물질도 또한 최고의 가치를 드러내게 됩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인간을 이해하고 환영하며 하나님을 향한 높은 행동을 인준하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배 자체가 하나님 앞에 우리를 드리는 것인데, 인간은 예배 중에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과 조화를 이룹니다. 약속 없이 드려지는 인간의 일방적인 노력은 미신에 불과하며, 결과를 기대하는 신념이 만들어낸 헛된 시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 중에는 늘 하나님의 관심이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실재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예배는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가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의 가로막음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큰 불신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죄 중에 하나님의 도움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과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죄 중에 빠진 인간과 화해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은 아들을 십자가에 피흘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 편에서의 화해는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의 죄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예배는 곧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죄를 회개하고 나아오는 인간과의 화해의 현장이며, 구속주와 죄인이 만나는 만남의 광장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신 것이며, 인간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항상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곧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태세의 가다듬음입니다. 인간은 늘 하나님 앞에서 불순하고 더러운 존재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예배 속에서 회개가 성공하지 못하면 그 예배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되므로 예수의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이 화해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피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예배라면, 이방인의 제사와 같다 하겠습니다.
(3)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신앙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이 정한 규율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진행됩니다. 예배는 인간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시작된 모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의 원형은 하늘에 있습니다. 또한 구약의 희생 제사는 예배의 모형이며 신약 교회의 예배는 그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예배의 주관자는 하나님입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에 의해서 되어진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모여서 만든 모임에 하나님을 참여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배의 주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초대한다는 생각은 강신술과 같은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정성을 들여 신을 불러들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결코 기독교의 예배는 강신술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곳에 초대받은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예배는
첫째,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믿음 안에서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제공되고 믿음을 통해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께 응답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요 참다운 만남입니다.
둘째,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나 사물이 아니라 참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더불어 교제할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예배에 솔선하셨으며 존재의 근거로서 생명의 원천이며 보존자가 되십니다. 그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사람과 만나고 또한 사람을 심판하시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사람이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심과 사랑을 새롭게 들어내셔서 사람으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째, 예배는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근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계시해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단번에 희생적으로 바침으로써 예배의 완전한 행위를 이룩하셨습니다. 기독교 예배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 오시어 만민을 위해 제사장적 희생을 단번에 행하심으로써 속죄의 대 사업과 화해 및 구원의 대 사업을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주님은 영광 중에 오시어 하늘의 예배를 이루시리라는 데 있습니다.
네째, 예배는 성령론에 근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서 성령의 내적 증거를 통하여 예배자의 마음에 파고듭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는 모두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섯째, 기독교 예배는 교회론과 깊이 연결되어 표현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백성"으로서 언약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설교) 주께서 명령하신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을 바르게 시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2장 예배의 역사 ( 창 4:2-3 느 8:13-16)
1. 예배의 근원에 대하여 논하라
예배는 그 출발점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는 예배 받으실 자와 예배드리는 자의 인격적 관계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특히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시고(히1:6), 그의 이성적 피조물인 인간들에게서도 역시 예배 받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본성적으로 예배의 기능과 경향성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경배의 대상을 찾아 섬기고자 하며 자신의 영혼의 기능을 발휘하여 예배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어서 그 본성의 빛에 의하여(롬 2:14) 예배의 대상을 스스로 찾아 나름대로 예배행위를 하게 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행 17:22-23)라는 구절은 인간의 예배정신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적으로 예배하는 경향성을 부여받은 인간은 참된 대상을 섬기지 못하면 어떤 다른 존재를 경배하거나 그 대상을 찾아서 방황하게 됩니다. 사람의 이러한 성향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기의 대상으로 깨닫기에는 어려움이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기 전까지는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롬 1:25).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재창조되어 그의 영혼이 새로운 기능을 발휘하면 그는 참되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에 진력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경배하려면 본래적 성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새로 지으셔서 새로운 생명을 넣어 주시고 그 사람 마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거룩한 소원과 열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누구나 보통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예배의 역사를 개관하라
가. 족장 시대의 예배
1) 이스라엘의 족장들은 그 가족과 함께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고 제사 드리는 일을 하였다 ( 창 12:7-8, 13:18, 35:1-8, 수 24: ).
2) 예배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이었다( 창 15:9-10, 22:5-8 ).
나. 율법 시대의 예배
1) 성전에서의 예배
2) 규정된 예배 - 세부 사항까지 규정(성전을 시설하는 방법, 내용, 제사장의 예복, 회생제물의 종류와 방법.
3) 위탁적 예배 - 매년 3회의 에배는 위탁하지 아니하고 12세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림.
* 3회( 무교절, 맥추절, 장막절 - 출 2:14-17 )
4) 의식적 예배
5) 상징적 예배
다. 포로 이후 시대의 예배
1) 회당 에배의 실시(겔 8:1).
2)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 존속( 느 8:1-6 )
3) 어느 곳에서나 설립( 행 6:9, 13:5, 14;1, 17:1)
라. 예수 시대의 예배 : 회당과 성전에서 동시에 거행됨.
마. 신약 시대의 예배 : 성전의 희생제물 중심의 예배와 회당에서의 말씀 중심의 예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합쳐짐 그것이 성찬이다.
바. 초대교회의 예배 : 말씀 예배와 만찬 예배로 나누어져 있었다.
사. 속 사도 시대의 예배
1) 주의만찬과 말씀(강론)이 나누어짐.
2) 주일날로 예배를 옮김.
3) 찬송가를 사용.
4) 수요일, 금요일은 오후 3시까지 금식을 경건으로 생각.
자. 중세 시대의 예배 : 말씀예배가 없어지고 성례전만 남게 됨.
차. 종교 개혁 시대의 예배 : 말씀 예배가 회복되고, 자국어로 예배함.
카. 오늘날의 예배
1) 예배 형태면에서 고정적이다.
2) 예배를 난발하고 있다.
3) 음악의 사용관심이 높아짐.
4) 설교중심의 예배가 이루어짐.
제3장 예배의 대상(중심) (사도행전 17:24-25)
1.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진술하라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경외와 봉사와 생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먼저 나의 예배와 섬김을 받으실 분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자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의라는 것이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지으신 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라는 사실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목적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대 아테네 지역을 돌아다닐 때 수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집)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조성자시요, 주인 이시요,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것이고 우상을 섬기듯이 그런 방식으로 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예배는 오직 천지의 주재자만 받으셔야 할 것이며 그는 분명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면 거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자신들의 종교성에 의하여 종교예식을 행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불경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사의 저자 오스카 하드만(Oscar Hardman)의 말대로 예배란 지극히 높은 가치에 대한 피조물적인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가치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알고 자신이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예배는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2: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계속하여 25절에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마땅히 경배할 자로 알아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상을 섬기고 따라서 많은 윤리적 부패와 불경건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 하는 피조물인 것을 깊이 자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각성이 있다면 어찌 감히 하나님 예배를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경거망동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돌보심)하시나이까? 많은 피조물들 속에서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본다면 이러한 진정한 자기 성찰과 아울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칭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품성)이나 존재하심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이라는 명칭은 주를 의미하며 대체로 위엄과 권위를 표현하고 하나님은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 이심을 뜻하고 이에 따르는 {엘로힘}은 강하고 유력한 경외의 대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하나님은 창조주와 통치주 이심을 가리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도나이}(주)라고 불렀던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다스리신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굴복을 받으시며 사람을 종으로 가지시는 자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며 그의 나라를 이 땅에 두시고 그의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존귀하신 어른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하나님 앞에 인간들은 다만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듯이 그들의 예배는 바알 숭배와 같은 위복 사상의 제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출발되는 예배하고 일반종교의 기복주의적인 의식행위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자도 될 수 있는 반면에 피조물을 섬기는 우매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고 다만 그를 경배하지 않는 것은 피조물의 주권이 창조주의 주권보다 큰 곳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창조는 신적 계시의 시작과 기초이며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느헤미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송영하기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 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 경배하나이다'(느 9:6)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재자이시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또 보존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로서도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존재들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여기에 거룩하신 나라를 건설하시고 경영하여 나가시는 일을 보고 경배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예배도 이교도들의 다신론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인위적이며, 순간적 표현방식의 예식과는 달리 유일신론적이며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엄격한 구분에서 오는 윤리적, 인격적 복종과 모든 일을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순응과 원칙적으로 통일된 표현방식에 의한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창조적 신앙이 없는 곳에는 다신론과 범신론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 창조주 신앙이 확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배자의 영역, 태도, 대상, 그리고 예배자와의 관계를 훌륭하게 묘사하여주고 있음을 봅니다. 시인은 먼저 '온땅이여'라고 함으로서 예배의 영역을 확장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 모든 우주 만물, 삼라만상을 통하여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특별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께서는 목자처럼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데 그 통치하시는 통치의 성격은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5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근거는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뒤따라오는 통치자와 백성,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응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맥스웰(W.D. Maxwell)도 이 점을 동감하여 '우의 예배는 창조주시요 모든 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충성하는 데 그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령님으로 시작해서 성령님으로 마쳐야 합니다. 레이몬드 압바(Abba)의 말대로 참된 예배는 다만 성령님의 활동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고, 봉사할 때에도 성령님 안에서 봉사하라(빌 3:3)고 했고, 찬송할 때에도 성령님 안에서 부르라(엡 5:18)고 하였으며, 연보할 때에도 성령님의 자유 안에서 할 때 항상 유쾌하고 풍부한 연보가 된다(고후 9:7)고 가르칩니다. 물론 성령님의 협력으로 말씀도 전하고 들을 때(고전 2:1-16) 효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철저히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령님과 함께, 성령님을 의지하여 드려져야 합니다. 생명 없는 의식과 제도주의로 드려서도 안되고 아무런 생각 없이 참여해서도 안됩니다. 성령님의 영적 자유를 구해야 합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성령님으로 예배를 드린다하여 준비 없는 즉흥적인 기도가 미리 짜여지고 준비된 기도보다 더욱 영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또한 예배가 순서적이며 의례적일 때는 형식적인 예배가 되고 계획없이, 순서없이 드릴 때 그 예배는 엉적인 예배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배를 위하여 많은 준비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여야 합니다. 물론 성령님의 감동을 우리가 제한하지 말아야 하지만 무계획과 무질서가 항상 성령님의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 14:32, 40 참고). 우리의 예배는 회중들의 마음과 전체 속에 감도는 경외감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헌신의 눈빛과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이 가득하며 즐거움과 평강이 지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성령님의 다스림이 각자 가운데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 예배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
(1)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예배의 유일하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배 중에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시고 응답하실 때에 자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새롭게 늘 드러내셔서 우리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관념이나 생활철학이나 형이상학 가운데 등장하는 만날수 없는 초월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인격이시며 영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할 때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 예배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는 예배의 전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고 계심을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중에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유일한 길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항상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 되시며,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밖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직 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3)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
성령은 예배의 원동력이십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깊이 아시는 분은 성령뿐이십니다.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통달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에는 반드시 성령을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은 예배 중에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성도는 성령의 끈임 없는 역사와 인도하심을 따라서 변화 받게 되며,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인 예배를 진행시키며, 주관하는 원동력은 성령인 것입니다.
제4장 예배의 목적
1. 예배의 바른 목적을 쓰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마틴 루터는 예배는 '죄인의 개종' 또는 '회중의 교육'이 그 목적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의견은 건전한 이야기이지만 예배의 목적을 바르게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예배의 결과로서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목적 자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는 이러한 예배순서(찬송, 기도, 헌상, 죄인 회개, 교육 등) 하나 하나와는 구별되는 예배 자체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예배의 목적이 되거나 예배 전체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경건주의 자들은 '성도의 교제'가 예배의 목적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예배의 기능 혹은 그 결과일 수는 있지만 목적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한 교통이 없는 예배는 사실상 올바른 공동예배가 될 수는 없지만 예배가 교통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룩한 연합이 뚜렷하여 공적예배를 드릴 때 예배는 예배로서의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 계통의 사람들은 예배를 자신의 종교적 감정의 표현으로 생각하는데 이러한 사상은 현대 기독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배란 예배의 대상이신 나님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그 인식에서 오는 지적 감정과 의지적 발휘 전체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지 예배의 대상과 관계없이 자신의 경건한 감정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표현하면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사상에는 계시 대한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계시란 자신들의 주관적 느낌 혹은 직관 및 종교적 내적 경험이기 때문에 성경계시를 소홀히 하여 버립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 역시 자신들의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이 사람들이 교리주의의 메마름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에 따른 정당한 경외심과 경건한 심정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을 드리는 자세로 드리되 그 목적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에 와서는 하나님 예배는 자기만족이나 성취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 지고 있는 것이 현저합니다. 예를 든다면 종교 감정주의자들의 경우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결핍되어 있거나 성경의 한 부분을 취하고 나아가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들은 감정주의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합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감정운동은 올바른 인식의 터전이 빈약한 신앙의 무질서를 초래합니다. 대부분의 감정운동의 사람들은 그것의 촉진제가 되는 신비운동을 끌어들입니다. 실질 상으로는 성경적 수준의 신비도 아니지만 그와 유사하게 하기 위하여 아이디어를 동원하고 그 일을 위하여 수단을 동원합니다. 요즈음 그래서 아이디어 그룹과 그것을 모방하는 이미테이션 그룹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비적 사역과 사람의 모방으로 만들어내는 흉내들 하고 구별해 내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 예배는 이러한 사람들에 의하여 침해를 당하며 위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하나님 찬송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목적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부추기고 들뜨게 하는 노래를 즐겨 선택하여 반복하여 부르게 하고 종교적 감흥에 휩싸이게는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서의 성격은 상실시켜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향이 하나님보다는 나의 느낌을 향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명료한 각성과 책임 있는 그리고 기도하는 영역이 갈수록 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로 확대되어 나아가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할텐데 무조건 많이만 하면,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으시느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열심히 하면 공적이 되고 성황당에 돌무덤이 늘어나듯 많이만 하면, 오래하고, 힘써서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결국 기도에 대한 성경적 지식의 결핍은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중언부언의 기도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종교적 자기 수양과 포만감과 기쁨은 줄지 몰라도 열매맺는 일에, 능력이 공급되는 기도로서는 의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무모한 열심이 하나님 예배를 해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일도 바른 깨달음을 통하여 은혜가 임하고 그 은혜는 깊은 감동을 주고 삶을 태동시키는 것인데 감정 운동가들은 감정을 돋구거나 위무하여 청중들의 정당한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제는 감정을 유도하는 웅변적 기술이나 테크닉, 제스춰, 심리적 응용을 초월할 줄 아는 성숙한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수단들은 성숙한 예배로 나아가는데 많은 저해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2. 예배의 잘 못된 목적을 진술하라
정치예배라는 것입니다. 1967년 베를린의 한 교회에서 진행된 성탄 자정예배에서 젊은이들이 궐기 운동을 한데서 구체화 되었습니다. 월남전 반대에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번져 폭력 교란운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사실상 이런 것은 하나님 예배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예배를 변조한 여로보암의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정치적 예배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정보와 명상과 토론과 행동입니다. 정보를 통하여 정치적 의지와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에 맞는 성경의 명상, 기도, 노래, 경험의 대화를 나눈 후에 사회적 여건의 개혁을 위한 행동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적 예배운동은 카톨릭의 스테펜스키(F. Steffensky)에 의하여 인도되었으며 그것은 독일, 폴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지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신학을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만들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다른 목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심각하게 반성하여야 할 문제가 있는데 예배가 사람의 목적을 위하여 오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타락은 항상 이러한 조그마한 문제에서부터 예를 들면 찬송 한 장 부르는 일, 일상적으로 기도드리는 일 등에서 시작되는데 이러한 일은 한 번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가 마음을 기울여서 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제쳐놓고라도 사람의 목적 혹은 종교적 목적을 위하여 쓰여 지고 있다는 데에 문제는 심각합니다.
5장 예배의 의무(이유) 요4:19-24
1. 예배해야 할 이유를 논하라
1)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엘, 엘로힘, 야훼, 여호와 등등) -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분이다.
2)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 영광을 받기 위해 창조하심
(사 43:7,고전 10:31,롬 1:18-23, 3:23, 엡 1:3-6).
3) 이스라엘의 교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 이스라엘이 예배에 성공하면 흥하였고 예배에 성공하
지 못하면 폐하였다.
4)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이 예배의 중요성을 이야기함.
5)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배 행습을 통하여 알 수 있다.
6) 천국에서 할 일이다(계 7:9-15, 14:6-7).
예배학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