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중)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V. 유럽 세계의 전개
1. 유럽의 봉건사회
(1) 서유럽 세계의 형성
◑ 훈 족 : 중앙 아시아의 스텝 지방에 거주하였던 투르크 계의 목축 민족. 중국 사상(史上)에 등장하는 흉노와 같은 종족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4세기 초엽에 유럽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다뉴브, 타이스 양강 사이에 약 반세기 동안 머문 후 370년경 동고트 족의 대부분을 굴복시키고 서고트 족을 압박하여 게르만족 대이동의 발단을 만들었다. 4세기 말 루아스 왕 때에는 지금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하고, 다음 아틸라왕 때에는 그 전성기를 이루어 동로마 및 서로마를 압박하고 주변의 게르만 민족을 복속시켜 헝가리를 중심으로 서는 라인 강, 남은 다뉴브강, 북은 스칸디나비아 남부, 동은 이란에 걸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아틸라 왕 사후(453)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여 다뉴브강 하류로 후퇴하고, 얼마 후에 타민족과 혼혈하여 민족으로서는 멸망하였다.
◑ 원시 게르만 사회 : 게르만족은 거칠고 야만스러운 민족이었다. 북유럽, 그들의 땅은 늘 비가오고 춥고 습한 곳이라 사람이 살기가 마땅치 않아 게르만족은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어 알프스 산맥을 경계로 로마 제국에까지 삶의 터전을 넓히게 되었다. 그들은 왕과 장수를 문벌에 의해서 선출한다. 왕은 무제한적인 전제 권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장수들의 지위는 권세보다도 사람의 모범됨에 의해서 정해진다. 그들은 결연히 전열의 앞에서 싸워, 사람들을 감탄시켜 그 지위를 얻는다. 사소한 일은 수장(장로)들이, 중대사는 인민 전체가 협의한다. 그러나 결정권이 인민에게 있는 문제도 미리 수장들에 의해서 논의된다. 예기치 않은 긴급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일정한 시기, 즉 초생달 혹은 보름달에 집회를 갖는다. 그들은 이 때를 그들의 일을 시작하는 데 가장 길한 시기로 생각하는 것이다. 군중들이 모여 충분한 수가 되었을 때, 그들은 무장한 채로 자리에 앉는다. 왕이나 수장들의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함을 지름으로써 거부한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창을 마주친다. 무기로서 칭찬하는 것이 가장 영예로운 찬성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싸움터에서는 종사가 족장과 대등하게 용감하다는게 명예였다. 그러나 족장이 전사했는데도 살아서 돌아온 자는 평생토록 치욕이요, 오명이었다. 족장을 돕고 보호하고 자신의 용감한 행동을 족장의 영 광으로 돌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스러운 종사의 의무였다. 족장은 승리를 위해 싸우고, 종사는 족장을 위해 싸운다.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 게르만의 이동과 건국 : 기원 전 50년경 시저가 알프스를 넘어 게르만의 땅에 발을 디딤으로서 게르만 족은 처음 로마의 문명이란 것과 만나게 되고, 따뜻하고 기름진 땅과 화려한 로마 문화에 동경을 하다가 때마침 로마 제국이 약해지자 그들 중 일부가 로마의 용병으로 또는 소작인으로 로마 영토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때 마침 볼가 강 근처에 살던 아시아계 유목민 훈족이 게르만의 땅에 쳐들어오자 이들을 피해 게르만 인들이 로마 제국 영토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고 이들의 세력이 점차 커져 로마의 군대가 거의 게르만으로 차게 되어 게르만인 장군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되고 게르만이 유럽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Frankische Reich ;481-843) : 게르만 부족의 일파인 프랑크 족이 5세기말에 갈리아에 건설한 국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 프 랑크 족은 몇 개의 작은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왕국 가운데 하나를 지배하던 메로빙거라는 가문에 클로비스 왕이 나타나 통일된 프랑크를 세웠다(486). 로마시대에 갈리아 지방의 중심이었던 루데시아를 수도로 하여 이름을 파리라고 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태반을 포함하는 대제국이 되어, 유럽 문화의 역사적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건국의 시조 클로비스 이후 751년까지 계속된 메로빙 왕조는 지중해 상업에 의존하여, 다른 게르만 부족 국가처럼 로마적 전제 관료 국가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으나, 클로비스 사후의 게르만적 분할 상속 원리에 의한 각 분국왕(分國王) 사 이의 싸움 속에서, 상업의 쇠퇴에 따르는 토지 경제(농업)의 진전과 더불어 왕권은 점차 약체화하고 6,7 세기에는 대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둔 귀족 세력이 대두하여 레우데스를 중심으로 한 봉건 관계도 발전을 보게 되었다. 왕국의 중심은 네우스트리아로부터 아우스트라시아로 옮겨지고, 후자의 궁제인 카롤링가는 이들 새로운 귀족 세력을 배경으로 삼아 피핀(中), 카알 마르텔의 위업을 거쳐, 751년 피핀(小)때에 마침내 왕위를 찬탈하여 카롤링거 왕조를 세웠다. 그의 아들 카알 대제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교황과 제휴하여 800년에는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았다. 대제는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실현을 바라면서도, 한편 기존의 귀족 세력을 법리적으로 봉건 제도 하에 재편성하여 이후의 각국 봉건법의 기초를 만들었다. 대제의 사후 루드비히 경건왕을 거쳐 왕국은 베르덩 조약과 메르센 조약에 의하여 동 프랑크, 서 프랑크, 이탈리아의 3왕국으로 분열된 후, 마쟈르, 아라비아, 노르만인의 침략과 봉건적 분립주의 때문에 각각 911, 987, 877년에 멸망하였다. 이 세나라는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초가 되었다.
◐ 클로비스(Clovis ;465/6-511) : 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481∼511). 메로빙 왕가의 시조로 살리족 프랑크의 수장으로서 각지를 정복했는데 486년경 북부 갈리아의 로마 총독 시아그리우스의 나라를 정복하여, 솜 강에서 르와르 강에 이르는 지역에 진출했다. 게르만 국가의 약점은 지배 민족인 게르만의 수가 구로마계 원주민보다 아주 소수라는 점(전 인구의 3%를 넘지 못함), 그리고 게르만족은 이단(아리우스 파)을 믿어 정통 카톨릭(아타 나시우스 파) 교도였던 로마인과의 융화가 안되었다는 점이다. 클로비스는 496년에는 알라만 족을 정복, 마인 강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영토를 획득하고, 같은 해 전승을 기념하는 뜻에서, 또한 진실한 크리스트교 신자인 왕비 클로틸다 및 갈리아의 이른바 교양 귀족의 청을 받아들여, 랭스의 주교 레미기우스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로마인으로부터 이단시되는 아리우스 파 크리스트교를 믿는 다른 게르만 여러 국가 중 이채를 띠었다. 507년에는 부이예 부근에서 서 고트 왕 알라리크와 싸워 르와르 강에서 가론 강에 이르는 지역을 정복하였다. 전쟁 후 동 로마 황제 아타나시우스로부터 파트리키우스 및 콘술의 칭호를 받아 수도를 파리로 정하였으며, 프랑크 인과 로마인(갈리아) 사이의 사상적 융화를 도모하는 등 프랑크 왕국 발전의 기초를 세웠다. 그가 죽은 후 왕국은 게르만의 관습에 따라 4 왕자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 메로빙거 왕가(Merovingiens) :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가(481∼751). 그 이름은 5세기 중엽(448∼457) 살리 족 프랑크를 지배한 메로비스에서 유래한다. 메로비스의 손자 클로비스(481∼511)에 의하여 기초가 확립되고, 그 아들 클로타트 1세(511∼561) 때에 거의 갈리아 전체에 걸쳐서 번영했다. 시리아인, 유다인 등 오리엔트 상인의 내왕이 많아, 고대적 상업으로부터의 관세 수입에 의존하는 로마 양식의 관료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게르만 고유의 재산 균분 상속의 원칙 때문에 왕국은 항상 분열의 위기에 놓여져, 그 후 지중해 상업이 쇠퇴하는 한편 각 분국 왕들이 서로 싸우자 대 토지 소유에 바탕을 둔 귀족 세력이 대두하여 클로타르 2세(613∼628), 다고베르트 1세(622∼638)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상의 실권은 이들 귀족 중 제일 세력이 강한 분국의 궁재의 손으로 넘어갔다. 분국 오스트라시아에 이어서 프랑크 왕국 전체의 궁재가 된 카롤링거 가의 쿠데타로 751년 실데리크 3세를 끝으로 단절되었다.
◑ 푸아티에 전투 : 732년 프랑크 왕국과 이슬람 제국의 원정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 파리 남쪽 루아르 강변의 투르(Torus)와 푸아티에(Poitiers) 사이에서 벌어졌다. 프랑크군을 이끈 사람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宮宰 : 궁내 대신) 카알 마르텔(Karl Martell)이었다. 궁재는 왕의 직할지를 관리하고 군 통수권을 장악한 최고 장관이었다.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에서 일어나 페르시아·중동·북아프리카로부터 스페인 남부까지 점령했다. 이어서 지중해와 피레네 산맥에 도달해 유럽 대륙을 반원형으로 포위하는 형세를 취해 기독교 제국의 제후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슬람 원정군은 아부드 알 라만의 지휘 아래 713년, 스페인의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730년에 프랑스 남서부의 보르도를 공격했으며 이어서 가론 강 포도밭을 망가뜨리고, 보르도 탈환에 나섰던 아키텐 군을 격파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카 알 마르텔은 이슬람 군의 경무장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보병 중심의 기존 군대를 개혁해 중무장 기병대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루아르 강 남쪽의 평원에서 북진하던 이슬람 군 9만명을 맞아 7일간에 걸친 전투 끝에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이슬람 군 경기병은 마지막에 프랑크의 중무장 보병의 밀집 부대에 돌격했으나 방패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아부드 알 라만은 전사하고 이슬람 군은 스페인으로 물러났다. 궁재 카알 마르텔의 명성은 한층 높아지게 됐다. 카알 마르텔의 세력은 국왕을 능가했으며 그의 아들 피핀 대에 이르러서는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을 손에 넣게 됐다. 이 때부터 프랑크 왕국의 왕위는 메 로빙거 왕조에서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다. 카알 마르텔이 기독교 국가의 위기를 일단 극복하게 된 것은, 이슬람 군이 여전히 원정을 계속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직속 기병대를 증강했기 때문이다. 궁정 친위 대의 기병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분에 상응하는 은대지를 주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 카알 마르텔은 전 국토의 3분의 1에 달하던 교회령의 일부를 몰수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카알 마르텔이 이때 편성했던 중무장 기병대는 나중에 봉건 기사의 지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됐다. 이 때부터 전투력의 중심 이 보병에서 기병으로 옮겨져, 이전에 보병으로 프랑크군의 중심이 됐던 소토지 소유자인 자유농민의 지위는 낮아졌다.
◑ 카롤링거 왕가(Carolingians) : 751년 이래 메로빙거 왕가와 바뀌어 프랑크 왕국을 지배한 왕가. 카알 대제를 낳은 왕가로 카롤링은 카알의 라틴명인 카롤루스에서 유래한다. 계보가 한쪽은 노(老)피핀, 다른 한쪽은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아르눌핑 가라고도 한다. 원래 마아스, 모젤 강 유역의 대토지 소유자로서, 메로빙거 왕조 내란기에 대두한 아우스트라시아 귀족 세력의 지지를 받아, 7세기 대(大)피핀이 메로빙 왕가의 프랑크 왕국에서 궁재직을 발판으로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그 자손은 계속하여 궁재가 되고, 그의 증손 카알 마르텔은 이슬람 교도의 침략을 격퇴하여 더욱 강성해지고, 그의 아들 소(小) 피핀은 751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라 카롤링거 왕가를 창건하였으며 다음의 카알 대제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받아, 반(半)고대적인 집권적 관료국가로서 번영하였는데, 고대적인 상업에 기생하고 있던 메로빙거 왕가와는 달리, 토지 경제 내지는 농업 분야에 권력 기반을 두고 있었다. 대제의 사후, 봉건적 분권주의가 진전됨에 따라 제국은 점차 약체화하였다.
◐ 피핀(Pepin ;714-768) : 프랑크 카롤링 왕가의 초대 왕으로 741년 부친 카알 마르텔의 사후 네우스트리아의 궁재가 되었고, 743년에는 737년이래 비어있던 왕좌에 힐데리히 3세를 앉히고, 747년 형 카를만이 수도사가 되자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를 겸하여 전 프랑크 왕국의 실력자가 되었으며, 교회령 몰수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여 교회의 십일세(十一稅) 징수권을 광범위하게 승인하였다. 751년 로마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얻어 왕을 폐위하고 스와송의 제후 회의를 통해 정식으로 왕에 추대되고 게르만의 옛 풍습인 방패를 타는 의식 외에, 교회측의 기름 붓는 의식도 함께 거행하여 즉위했다. 754년 다음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랑고바르트 국왕에게 압박되어 구원을 청해 오자 754년과 756년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에 원정하였다. 그는 라벤나 지방과 아드리아 해 연안의 펜타폴리스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했는데,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과 교황 사이에 굳건한 유대 관계가 확립되었다.
◑ 카알(카롤루스) 대제([독] Karl der Grosse [프] Charlemagne ;742-814) : '마호메트 없이는 카롤루스 대제도 없다' 라고 피렌이 주장했듯이, 지중해 연안을 주름잡고 있었던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여 카롤루스 대제는 유럽 문명권을 확립하고 일체화시킨 군주였다. 768년 부친인 피핀의 사후, 동생 카알만과 왕국을 공동 통치하다가 771년 카알만이 죽자 전 프랑크 왕국을 통일 지배하였다. 재위 40여 년간 사방을 경략하여 대통일 사업을 성취하여 772∼804년에는 작센을 병합하고, 774년 에는 교황의 청으로 북 이탈리아 랑고바르트 왕국을 멸망시켜 이를 합병하였으며 778년 서쪽의 사라센 족을 토벌하여 에스파냐 변경 영토를 설치하였다. 또한 778년 바이에른, 케른텐을 합병하고 791∼803년 에는 멀리 동방의 아바르, 벤드 등의 제 민족을 정복하여 거의 대부분의 게르만 부족을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종교, 즉 프랑크 왕국과 크리스트교로 통합하였다. 각 부족이 저마다의 법전을 가지고 통치하던 이들 광대한 지역을 중앙 집권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그라프, 순찰사 등의 관료 제도를 정비하면서도, 한편 봉건 제도 발전의 바탕을 만들어 중앙의 각 봉건 국가가 성립될 수 있는 공통적인 출발점을 만들어 놓았다. 이 밖에 이탈리아의 영토의 일부를 교황에 헌납하는 등 교회에 대한 봉사가 컸으므로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 황제로 대관하여 게르만 인들에게 크리스트교를 확대하는 사명을 위탁하였다. 그것은 형식으로는 서 로마 제국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피핀, 클로비스이래의 과 제였던 비잔틴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서 로마 황제권과 크리스트 교 교황, 즉 속권(정치적 권력)과 교권(영적 권력)이라는 두 권력이 대두하여 서유럽 세계가 어우러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되었으나 로마 제국의 부흥의 이념은 10세기에 신성 로마제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수도 아리헨에 궁정 학교를 설립, 알퀴누스 등 학자를 초빙하여 교 육 사업을 장려하였으므로 소위 카롤링거 르네상스 문화가 번영하였다. 이 점에서 유럽을 형성하는 3대 문화 요소(고전 문화, 크리스트교, 게르만 민족 정신)는 카알 대제의 통치하에서 비로소 완전한 융합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 카롤링거 르네상스 : 원래는 카롤루스 대제가 성직자의 교양을 높이고 그들에게 올바른 라틴어를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고전의 부활, 나아가서는 일반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 중심 인물인 알퀸 (Alquin)은 영국 출신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중세 초기의 영국 문화가 프랑크 왕국에 옮겨져 꽃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외에도 여러 곳의 학식 있는 성직자들이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에 모여들어 전 유럽적인 문화 운동의 양상을 띠었다. 전반적으로 고전의 모방을 위주로 한 독창성이 없는 라틴문화였으나, 신학의 부흥과 더불어 중세 전성기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 11세기에 지어진 무훈시의 대표작. 4002행으로 되었으며 각 행은 10 음절로 되어 있다. 카알 대제의 크리스트 교 군대와 에스파니아의 이교도 사라센 군과의 싸움을 테마로 하여 지어졌다. 사라센 왕 마르실에게 보내는 사신으로 지명된 가넬롱은 위험한 사명을 노여워하고, 또 마르실의 뇌물을 받아 대제에게 반역한다. 대제의 군대가 에스파냐로부터 퇴각하여 롱스보의 험로에 이르자 갑자기 사라센 군이 기습하였으나, 대제의 조카 롤랑은 올리비에의 권고를 듣지 않고 구원도 청하지 않아서 롤랑, 올리비에, 대주교 튀르팡 등이 모두 죽움을 맞는다. 대제는 복수로 사라센 군을 토벌하고 돌아오지만, 롤랑의 애인 오드는 롤랑의 죽음을 듣고 따라서 죽는다. 조국애와 신앙을 결합한 최고 걸작이며 또한 카페 왕조의 정치적 통일의 문학적 표현이다.
◑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과의 제휴 : 카롤루스 대제에 이르러 프랑크 왕국은 유럽 최강의 국가로 성장했다. 여기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다. 당시 로마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간섭과 보호하에 있었다. 교황은 새로운 후원자가 필요했다. 이때 가장 적절한 인물로 생각된 것이 프랑크 왕 카롤루스였던 것이 다. 카롤루스 역시 유럽을 지배하기 위해선 교황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800년 크리스마스 날,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 로마 제국 황제의 제관을 씌워 주었다. 동로마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일개 국왕이 아닌 황제와의 제휴라야 했기 때문 이다. 프랑크 왕 카롤루스의 서 로마 제국 황제 즉위는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로써 침입자였던 게르만은 명실상부하게 유럽의 새 주인공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게르만 문화와 로마 문화, 기독교가 융합된 중세 서유럽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프랑크 왕국은 교황의 수호자요, 서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며 유럽 일대를 석권하게 되었다. 서 로마 제국은 부활되었으나, 그 주인은 바로 로마를 무너뜨린 당사자, 게르만 족이었던 것이다.
◑ 프랑크 왕국의 분열 : 카롤루스 대제가 죽자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네 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루트비히 1세가 영토와 함께 서 로마 황제의 제관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달리 정치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가 형제들과 영토 분할 문제를 놓고 골육 상쟁을 하다 죽자, 왕국은 다시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로타르는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 일대, 그리고 서 로마 제국 황 제 칭호를 물려받았으며, 2남 루트비히 2세는 동 프랑크 왕으로서 라인 강 동쪽을, 막내 칼은 서 프랑크 왕으로서, 서 프랑키아, 아키텐, 가스코뉴, 셉티마니아를 각각 물려받았다. 이 같은 영토 분할은 843년 베르됭 조약(843)으로 확정되었다. 이러한 분할은 로타르가 아아헨 시, 로마 시, 롬바르디아 평야, 라인 강을 수중에 넣은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일체감과는 관계없이 순전히 경제적인 견지에서 실행되었다. 그런데 로타르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통치하던 지역은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남은 두 형제에게 다시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북동부는 동프랑크로, 서북부는 서프랑크로, 남부는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이 메르센 조약으로 그어진 경계선이 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 오토 1세(Otto I) 936년 독일 작센 왕조의 2대 왕으로 즉위하여 962년 신성 로마 제국을 창건했다. 아버지 하인리히 1 세는 작센의 제후로 여러 부족의 선거에서 동 프랑크 왕국의 왕위에 올랐고 933년 마자르 족을 격퇴하고 왕권의 기초를 다졌다.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1세는 국가 통일 사업에 전력을 기울여 각지에 할거했던 제후와 호족에게 봉건적인 군신 관계를 강요했다. 그러나 이들이 반항하자 친족을 각지에 봉하는 한편, 변경백을 지방에 파견해 정치의 상급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가부장적 봉건적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은 애써 파견했던 변경백과 친족이 토호화해 각 지방의 제후나 유력자와 결탁하고 왕의 권위에 대립하는 양상을 띠게 됨에 따라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오토 1세는 다음에는 성직자를 요직에 등용하여 교회 세력과 결탁함으로써 왕권을 확립하려 했다. 성직자들은 이미 독신의 의무를 가지고 있으므로, 세습적인 이해 관계로 골치를 썩힐 이유가 조금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토 1세가 정책을 전환한 논거였다. 955년 오토 1세는 마자르 족을 아우크스부르크 근교에서 무찌름으로써 동쪽 국경의 위협을 제거했다. 이보다 몇 년 전에 오토 1세는 부르고뉴 왕의 딸 아델하이트와 약혼을 했는데, 아델하이트와의 결혼을 둘러싸고 북 이탈리아의 베렝가리오와 바이에른 공인 동생과 대립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에 원정해 아델하이트를 왕비로 삼고, 이탈리아 왕도 겸했 다. 961년에는 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했고, 이듬해인 962년 교황 요한네스 12세의 집전으로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했다. 교황이 오토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배자로서, 고대 로마의 유업을 계승해 기독교 왕국의 정통자의 지위를 확인해 주는 결과가 됐다. 이후 독일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1806년 나폴레옹 1세에게 해체될 때까지 약 1천년 가까이 형식적 인 이름을 유지하게 됐다(그러나 끝내 이탈리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의 혼란을 이용해 교황권에 대한 지배도 확립하게 됐다. 이후 분쟁의 씨앗이 됐던 교황권과 황제권의 다툼도, 오토 1세의 시대에는 황제권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어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 신성 로마 제국(Heuluges Ro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962∼1806) : 중세부터 19세기 초엽까지 존속한 독일 국가의 명칭. 독일 왕 오토 1세가 962년 교황 요하네스 12세로부터 제관(帝冠)을 받은 데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독일에서는 왕이 즉위하면 이탈리아에 가서 교황으로부터 대관(戴冠)하여 신성 로마 황제의 제위를 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제권과 교권의 결합은 황제들에게 교회 지배권을 가져다주어, 그들은 그것을 통해 국내의 분립적 제후를 누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들은 관념적이기는 하나 유럽 세계에 있어서 속계의 최고 군주로서 영예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교회 지배권은 하인리히 4세 이후 성직 서임권 투쟁을 통하여 붕괴되었고, 또 당초의 이념을 실천하려던 역대 황제의 이탈리아 정책은 본국의 봉건 제후들에 대한 양보를 불가피하게 하여 중세 말기 이후 독일이 영방 국가로 분열되는 커다란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황제 선거권은 13세기 말 이래 7선제후에 의해 고정되고 황제의 선출은 그들의 이해를 제국 전체의 이해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것은 1437년 이후 황제위를 계속 차지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또한 대공위 시대에서 종교 개혁 시대에 걸쳐서 진행되던 영방 주권의 확립은 제국을 명목상의 존재로 떨어뜨리던 중 30년 전쟁 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영방 국가의 체제가 문서로서 승인되어 제국은 사실상 해체 되었고, 1806년 나폴레옹 세력하의 라인 동맹 16방이 제국을 탈퇴하게 되자 합스부르크 가의 황제가 제위를 사퇴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 카페 왕조(Capetian dynasty: 987-1328) : 카페 왕조는 987년, 위그 카페가 창건한 프랑스의 왕조로 14세기 초의 샤를 4세까지 14대에 걸쳤다. 카페 가문은 본래 일드 프랑스 지방에 영지를 가지고 파리 백이라고 일컬어졌다.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는 틈을 타서 887년 파리 백 외드(Eudes)는 노르만 족 침입군을 센 강 유역에서 격파한 공으로 한 때 왕위를 얻었다. 그러나 외드가 죽은 뒤 왕위는 다시 카롤링거 가문으로 돌아갔다. 그 뒤 외드의 손자 위그 카페의 시대에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위그 카페가 왕위에 올라 카페 왕조를 열었다. 왕이라는 이름을 얻기는 했으나 카페 왕조의 영토는 좁아, 부르고뉴·플랑드르·가스코뉴·아키텐· 프로방스 등에서 할거하고 있던 제후에 비해 왕가의 세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카페 왕조는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선진 농업 지대였던 일드 프랑스 지방을 영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업· 상업·기술·문화의 발전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파리는 프랑크 왕국 초기부터 수륙 교통의 요충지로 대주교가 있었으며,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여 시민 생활은 갈수록 번영했다. 카페 왕조의 5대 왕인 루이 6세(재위 1108∼37년)는 왕권의 기초를 다지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루이 6세의 뒤를 이은 루이 7세(재위 1137∼80년)는 아키텐 공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해 그녀의 지참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토 를 얻음으로써 영지를 확대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사에 몰두한 나머지 왕비를 보살피지 않아서, 제2차 십자군 원정 도중 엘레오노르가 잘생긴 아라비아인 하인과 정숙하지 못한 행실을 보여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러 나라의 왕족과 제후들 앞에서 부인이 불륜을 저지르자, 루이 7세는 어쩔 수 없이 왕비와 이혼함과 동시에 어렵게 손에 넣었던 영토까지 잃었다. 게다가 엘레오노르는 다음에는 영국 왕 헨리 2 세와 결혼함으로써 프랑스 국내에 영국의 영토가 생기게 돼, 양국에 숙명적인 분쟁의 화근이 됐다. 카페 왕조 권력이 안정되기까지 로마 교회가 왕권에 제공했던 정신적·물질적 지원은 유례없는 것이었다. 왕의 영지 외의 사제들까지도 교계의 봉건 영주로서 국왕에게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했으며, 또 궁정에서 교양 있는 측근의 역할을 했다. 국왕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주장도, 주로 국왕이 교회로부터 신성성을 부여받았던 결과이다. 루이 7세에 이은 필리프 2세와 루이 9세 시대에 카6?왕조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2·13세기 유럽에서 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왕권과 도시가 서로 협조하게 됐고, 왕의 영지가 확대되면서 종전의 봉건 가신적 지배가 국가적 지배로 바뀌어 왕의 정치력은 향상됐다. 왕권은 지방 통치를 위해 대관(bailis)·지사(Seneschal)라 일컫는 관료 조직을 갖추고 행정·사법·재정· 군사의 상급권을 장악했다. 또한 루이 9세 시대에는 중앙 관제를 정비해 사법을 담당하는 파를망 고등 법원, 재정을 담당하는 회계 검사원과, 나중에 대고문부라 일컬어지는 행정 관청을 설립했다. 그리하여 13세기 말 필리프 4세 시대에는 삼부회를 설립해 신분에 따라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신분에 따라 대표를 회의에 보내 국왕의 자문과 과세 요구에 답변하는 구조가 갖추어졌다. 카페 왕조의 발전과 함께 왕권의 수도였던 파리는 더욱 번창해 영역도 필리프 2세 때보다 확대됐다. 루브르 왕궁과 왕실 고문서관, 파리 대학이 본격적으로 착공된 것도 이 시기다. 또한 파리 동쪽의 습지대도 상업가로 변해, 시청과 중앙 시장도 건설됐다.
◑ 노르만족의 활동 : 노르만 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지금의 덴마크에 거주하는 게르만 계통의 부족들로서, 모험심이 강하고 항해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노르만이란 북부 사람들(North men)이란 말에서 유래되며, 이들은 또 바이킹(Vikings)이라고도 불리워졌는데, 이는 협만(Vik)의 자손(King)이란 뜻이다. 이밖에 바이킹, 데인인, 바랴그인 등의 별칭이 있다. 게르만의 대이동 때에 원주지에 머물러, 어업, 농경, 목축 또는 해상 약탈에 종사했는데, 8세기경 본국의 통일 왕권의 형성에 따라, 종래의 독립적 지위를 잃은 세력들은 인구 증가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주민을 이끌고 약탈적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 범위는 전 유럽에 미치고, 제2차 민족 이동이라고 부를 만한 양상을 보였다. 스웨덴의 노르만은 동으로 슬라브족의 땅으로 진출하였다. 9세기 중엽에는 노브고르트에 기지를 설치하고, 다시 남쪽으로 진출하여 드네프르 강변의 키예프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일명 바랑고이 족으로도 알려졌으며, 여기 저기에 요새화한 기지를 마련하여 주변의 농촌 주민을 정복하였다. 10세기 바랑고이 족은 현재의 서부 러시아의 지배자가 되고, 이 넓은 땅에 키예프 공이 지배하는 최초의 러시아 국가를 건설하였다. 노르만은 북해와 대서양에도 출현하였다. 9세기에 그들은 수시로 영국과 프랑스의 해안 지대와 하천 유역에 출현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의 침입과 약탈에 시달린 서 프랑크 왕은 10세기 초(911)에 그들에게 세느 강 하구 일대를 주어 봉신으로 삼았다. 이것이 후에 커져서 노르망디 공국이 되고 11세기에는 그들의 일부가 멀리 지중해로 진출하여 시칠리아를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고 남 이탈리아에 나라를 세우는 한편, 영국을 정복하여 노르만 왕조를 세우기도 하였다.(1066) 이보다 앞서 9세기 후반에 영국은 덴마크 계통인 데인족의 침입에 시달린 끝에 북동부 지방을 그들에게 할애하였다. 이들은 후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여 앵글로 색슨족과 융화하게 되었다. 노르만은 아일랜드에도 침입했으나 원주민인 켈트족에게 격퇴되었다. 그들은 다시 멀리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로 진출하고, 일부가 그 곳에서 북아메리카 대륙까지 건너갔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노르만과 이민족의 침입은 가까스로 이루어졌던 질서 회복과 안정을 완전히 파괴하여 사회의 전반적인 봉건화를 촉진하고 부흥하는 듯이 보였던 문예도 완전히 사라지는 형편이 되었다. 서 프랑크에서는 대부분 c層동坪?노르만 약탈과 파괴의 대상이 되었으며, 많은 도시가 약탈되고 불탔다. 인명의 피해도 많았거니와 많은 경작지가 방치되어 삼림이나 황무지로 변하였다. 노르만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 었으나, 정착과 더불어 점차 평화적 상업에 종사하게 되어, 상업의 부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정주 지에서 원주민과 융합, 동화하여 유럽 중세 세계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마자르 족의 침입은 노르만처럼 장기간은 아니었으나, 파괴성에서는 더욱 격심하였다. 이러한 황폐의 늪으로부터의 부흥 과정에서 유럽의 중세 사회와 문화가 발전되었다
◑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 ;1066-1154) : 노르망디 공 윌리엄 정복왕(1066∼1087)의 즉위에서 비롯되는 영국 왕조. 그 뒤 왕위는 윌리엄 2세, 헨리 1세로 계승되었다. 헨리 1세는 그의 딸 마틸다(독일 황제 하인리에 출가시켰으나, 그가 죽은 뒤 앙 주 백 제프리와 재혼)를 후계자로 했으나, 귀족은 이를 승인하지 않고 블르와 백 스티븐(1135∼1154)을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마틸다는 의형 그로스터 백 로버트와 함께 서부 영국을 근거로 스티븐 왕과 대 립, 19년간의 내란을 겪은 뒤, 마틸다의 아들 앙주 백 헨리 2세가 즉위(1154)해서 앙주 왕조를 열게되어 노르만 왕조는 끝나고, 플랜탄지네트 왕조가 들어선다. 정복왕은 노르만적 봉건제를 도입하여 귀족을 지 배, 중앙 집권적 봉건제를 유지했으나, 헨리 1세 시대에 다시 중앙 정부가 전문화되고, 주 법정에 중앙 에서 임명한 사법관을 두어, 왕의 순회 재판이 행해지는 등 왕권이 강화되었다. 그 뒤 스티븐 시대의 내 란에 의해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왔으나, 앙주 백 헨리의 즉위로 다시 봉건 왕정의 질서가 회복되었다.
◑ 롤 로(Rollo, 860∼931) : 노르만 족의 수장으로 890년 노르만 족의 대부대를 이끌고 센 강 하구에 침입하여 그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나아가 파리를 포위했을 뿐 아니라(892), 내륙 깊숙이 침공해 들어갔다. 그래서 911년 프랑스 왕 샤를 3세는 그와 조약을 맺어 센 강 하류의 점령지를 그에게 봉토로 주었다. 롤로는 초대 노르망디 공 로베르 1세로서 프랑스 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고, 영내의 통치에 있어서도 훌륭한 솜씨를 보였다. 노르망디 공국의 잘 정비된 봉건제도는 그 뒤 1066년의 노르만 정복으로 영국에 옮겨졌다.
◑ 마쟈르 인(Magyars) : 우랄 어족의 우고르어 파에 속하는 민족으로 원주지는 우랄 산맥 서남방이었으나, 4세기경 동방으로부터 압박을 받고 서남방으로 이동하여 오늘의 아조프 해 동안의 쿠반 강 하류 지역에 이르렀다. 이어서 9세기 초엽에 페체네그 인의 압박으로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돈, 드네프르 두 강 사이의 흑해 북안에 머물다가 896년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현재의 헝가리 땅으로 들어왔다. 그 후 다시 비잔틴 제국, 독일 등으로 진입하려다 하인리히 1세, 오토 1세의 반격으로 대 타격을 받은 데다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자, 점차 그 자리에 평화로운 정주 생활을 시작하여 10세기경에 국가 통일을 완성하였다.
(2) 봉건 사회와 교회의 발전
◑ 봉건 제도(feudalism) : 봉건 제도란 말의 기원은 동양의 경우 주나라의 '봉국 건후(封國 建候)' 에서 비롯되었으나 흔히 말하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봉건 제도(feudaliem)는 대체로 중세 서유럽에서 발달하였던 제도를 뜻한다. 봉건 제도란 넓은 의미로는 하부 구조로서의 장원제와 상부 구조로서의 군신간의 보호 충성 관계를 포함하나, 일반적으로는 보다 좁은 의미의 봉건사회의 정치 제도인 레엔(Lehn)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봉건 제도란 봉토를 매개로 하여 맺어진 주종 관계인 것이며, 봉주와 봉신 사이의 보호와 군사적인 봉사라는 쌍무적 관계인 바잘리테트(Vasallitat: 가신제)와 봉주가 봉신에 대한 봉토 수여의 관계인 은대지제가 결합된 정치 제도인 것이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로마의 은대지제(Beneficium) 기원설과 게르만의 종사제(Gefolgschaft) 기원설이 있으며 8세기 프랑크 궁재 카알 마르텔이 이슬람의 세력을 막기 위해 기병 전술을 하기 위하여 교회령을 몰수하여 그것을 가신에게 준 데서 제도적으로 성립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그 결정적 의의는 부정되고 있다. 바잘리테트와 은대지제의 결합은 이미 메로빙 시대에 왕 및 지방 호족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레엔 제도가 국가 제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카롤링 초기라고 추측되고 있다. 즉 메로빙 말기에 발전한 호족 체제 및 국가 관료의 중앙 권력으로부터의 독립화를 앞두고, 카롤링 초기의 왕들은 국가적 통일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들과 봉건 관계를 성립시키고, 그들의 영 지와 관직을 봉토로서 용인하고, 이무니테트(Immunitat: 불수불입권)를 부여함과 동시에 국왕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지웠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11세기까지, 독일에서는 12세기 중엽까지, 영국에서는 11세기 후반에 확립되었다. 유럽 봉건 제도의 주요 특징은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봉 (封:fief)의 수수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전사들 사이의 주종 관계이며, 둘째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농노제에 의해서 경영되는 장원 제도이고, 세째는 정치적 측면에서 봉건 영주들의 불입권에 입각한 지방 분권제이다. 유럽 봉건제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쌍무적인 계약 관계이다. 신하는 주군에게 충성을 선언하고(homage), 주군은 신하를 서임(investiture)하며, 봉(토지·관직·돈·과세권·화폐 주조권·시장 개설권·교회 등)을 주어 봉건 관계가 성립되었다. 신하는 군사적·경제적 의무 외에 충언0?부조(Consilium et auxilium)의 의무가 있었으며, 또한 주군은 보호와 양육의 의미를 지게 된다는 점에서 쌍무적이었다. 봉건 제도의 최성기는 11∼13세기의 일로서, 이 때에 국왕을 최고의 봉주로 하는 봉건 관계가 차례로 하급 영주에 미치어 피라미드 형의 정치 질서가 전면적으로 성립되게 된 것이다.
◑ 종사제도(Gefolgschaft) : 귀족들이 자유민인 종사에게 무기를 주고 보호·부양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충성하게 하는 게르만의 제도로, 이는 봉건 제도 하의 주종 관계의 중요한 기원이 되었다. 종사의 자격은 자유민의 미성년 자제여야 하고 주인과의 관계는 성실한 서약에 의한 자유로운 결합이었으며 말, 무기, 의복, 노예 등을 지급받고 주인집에서 기거하였다.
◑ 은대지 제(Benefizialwesen) : 봉토(封土)의 별명이기도 한 베네피키움(은대지:Beneficium)을 부여하는 제도로서, 베네피키움(은대지:Beneficium)은 원래 증여의 형식을 표시하는 말로서, 처음엔 금전·용익권·토지 대여 등을 포함한 불완전 증여의 경우에 쓰였으며 피여자(被與者)도 성직자·여성·부자유민에게 걸쳐 있었으나, 그 후 봉건 가신에게 조건부로 증여되는 토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레엔제(봉건제)의 물적 측면으로서의 은대지 제의 성립 계기를, 카알 마르텔의 교회령 몰수에서 찾아보려는 견해는 오늘날에는 없어졌지만, 메로빙조이래 산발적으로 나타나다가, 카롤링 초기에 가서 특히 빈번해진「교회령의 몰수」그 자체만은 은대지제 발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교회법에 의해 양도할 수 없게 된 교회령을 가신에게 주기 위해서는 교회의 상급 소유권을 인정한 연후, 제한부 증여라는 형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주종관계의 내용과 탁신의 절차
봉신은 주군에 대해 일정 기간(연간 40일 정도)의 군사적 복무, 부조라 불리는 공납의 부담(주군의 장남의 기사 서임, 주군 장녀의 결혼식, 주군이 포로가 되었을 때의 몸값, 주군이 성지로 가는 경우), 중요 사항의 결정을 위한 협의나 재판에의 참여를 위하여 주군의 궁정에 출석하는 것 등의 의무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주군의 봉신에 대한 의무는 봉(封)의 수여, 봉신의 보호 등이 있었다. 주종관계에 의해 나타나는 체제는 피라미드식 계층 조직이지만 불입권에 의해 지방 분권적 정치 제도가 발달하였다. 그들(종사들)은 다음과 같이 탁신(託身)을 행하였다. 즉 백작은 그(탁신자)가 아무런 유보도 없이, 그 백(伯)의 가신이 되기를 원하는 지를 묻고, 그의 답변을 요구하였다. 그는 "소신은 원하옵니다."라고 대답하며, 이어 그는 두 손을 백작의 두 손 사이에 넣고서 접물(接物)을 함으로써 그들의 주종 관계는 맺어졌다. 그리고 탁신을 행한 자는 백작의 통역관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성실을 다짐하였다. "소신은 성심을 다하여 지금으로부터 윌리엄 백의 신하인 것을, 또한 소신은 오직 백작에 대해서만, 그리고 다른 어떤 자에게도 거역하면서, 성의껏 속임없이 성실을 유지할 것을 약속하옵나이다." 마지막으로 이 탁신자는 성자(聖者)의 성유물(聖遺物) 위에 손을 얹어놓고, 이 사실을 선언하였다. 이어 백작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뭇가지로써 이 약속 밑에 성실을 다짐하고, 탁신(託身)을 하며, 다시 서약을 한 모든 사람들에게 봉(封)을 수여하였다.
◑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투탁 계약
나 아무개는 세상이 아는 바와 같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이올시다. 그러므로 나는 영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나이다. 영주님이 자비심을 베푸신다면 나는 영주님의 보호하에 제 몸을 맡기겠나이다. 탁신(托身)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 따라 행해집니다. 영주님은 제게 식량과 의복을 도와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영주님께 봉사하고 잘 모시겠습니다. 또 제가 살아있는 동안, 저의 자유로운 신분을 지키기 위해 영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농 노(serf,villein) : 농노의 기원은 로마 제정 말기의 부자유 소작인(콜로누스)의 자손이거나 몰락한 게르만의 자유민으로, 오랜 혼란기에 유력자에게 토지를 바쳐 그 보호하에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고대 노예와 근대 자유 농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여, 영주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자신의 재산을 가질 수 있고,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경영을 할 수 있었다. 다만 근대 자유 농민이 지주에 대한 지대만을 지불하면 되고 신분적으로 지주와 평등한 자유민인데 대하여, 농노는 우선 토지에 매여 있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약되어 있었고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대가로 지대 이외에 각종 부담(인두세, 사망세, 혼인세)을 지고 있었으며, 또 영주의 방앗간, 빵집, 양조장 등의 사용을 강제당하고, 영주의 재판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노의 부자유와 부담을 과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농노는 경작지에 대한 세습적 용역권과 공유지에 대한 공동 이용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권리는 촌락 공동체의 관습에 의해서 보장되었다.
◑ 중세 농노 보도의 생활
다음의 자료는 아이린 파우어가 한 장원의 토지 대장에 의해서 중세 농노의 생활을 그려낸 것이다. 이 토지대장에 보도라고 하는 한 농노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처와 세 아이들과 함께 조그만 목조집에 살고 있으며, 집터와 경지와 목초지 및 두서너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는 땅을 빌리고 있다. 일주일에 사흘은 수도원의 직영지에서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직영지는 넓은 농원으로 그 한 가운데 석조의 집이 있으며, 성가신 관리인이 살고 있다. 그 바로 곁에는 여자 노예들이 길쌈을 하는 조그만 집이 몇 채 모여 있고, 노예가 사는 오막살이, 작업장, 조리장, 빵 굽는 솥, 헛간, 마구간, 따위가 나란이 서 있다. 직영지의 대부분은 보도와 같은 농노가 일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하루 종일 일하며, 집에 있는 그의 아내도 또한 바쁘다. 그녀는 집 둘레의 채소밭을 가꾸며, 수많은 닭도 돌보며, 길쌈을 하며 게다가 아이들이 귀찮게 군다. 그러나 오늘은 관리인이 있는 장원 사무소로 닭과 달걀을 갖다 내지 않으면 안된다. 보도는 일주일에 사흘 일하는 외에도 소작료와 햇닭 세마리, 달걀 열 다섯 개, 그리고 돼지 한 쌍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집에 돌아오면, 오늘은 길쌈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일은 그 성가신 관리인이 다 짜놓은 천을 가지러 오며, 새로운 일감을 놓고 가기 때문이다. 어둑어둑할 무렵, 보도가 고달픈 몸을 이끌고 돌아온다. 집에서 손수 만든 작은 초를 켜고, 그 불 밑에서 다섯 사람이 함께 모여 저녁밥을 먹으면, 곧 자기 자리에 눕는다. 초가 타는 것이 아까우며 게다가 모두들 지쳐있기 때문이다. <크레인 브린튼 외, 세계 문화사>
◑ 장원 제도(Manor system) : 장원의 구조는 영주 직영지, 농노 보유지, 공동지로 나누어졌다. 민가들을 중심으로 경작지 및 목초지, 황무지, 산림 등이 있다. 영주 소유의 직영지는 농민들이 경작해 주지만 장원청에 부속된 채원은 소작으 로 대여된다. 3포에 각각 섞여 있는 농민 보유지 외에 목초지, 황무지, 산림 등은 공동 사용권이 있는 땅이다. 마을의 신부들을 위한 토지 역시 농민들이 경작하였다. 농경 방식에는 특이한 양상이 있었다. 장원 내의 모든 농경지는 울타리를 두르지 않은 채 광활하게 '개방된' 상태에 있었다. 우리 나라 농촌은 대부분의 경우 농경지에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별로 신기할 것이 없으나, 서양의 경우 근세 이래 개인의 농지는 울타리를 둘러쳤기 때문에 각별히 대비된다. 경작의 목적에서 농경지는 보통 추경지, 춘경지, 휴경지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이는 농작물의 윤작을 하기 위함이었다. 윤작은 1차년에 밀이나 라이 맥, 2차년에 휴경, 3차년에 연맥이나 보리를 파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농민 보유지의 크기는 지역마다 상이하나 평균 30에이커이며, 각각 10에이커씩 3포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이것은 다시 밭갈이하기에 적절한 크기의 지조(strips)로 나뉘어져 있으며 3포지 전체에 걸쳐 경작지는 흩어져 있었다. 장원은 영주의 재산이며 그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농민측에서 보면 장원은 경제적·사회적 생활 터전이었다. 영주는 농민에게 경작할 토지를 주고, 농민은 그 대가를 공납과 노역으로 지불하였다. 양자의 관계는 관습법상 법적 효력을 갖는 관계였다. 영주는 농민들에게 제분소와 교회를 마련해 주고 재판을 실시하였다. 농지가 원래 영주의 땅이라 해도 정당한 사유 없이 농민 보유지를 빼앗지 못하였다. 농민들이 영주에게 이행해야 할 의무는 결코 적지 않았다. 먼저 노역은 매주 2∼3일 간의 정기적인 주역(week-work)이 있었다. 농민은 영주 직영지의 경작에 동원되며, 다리나 도로의 수선 및 그 밖의 운반 작업을 하였다. 다음으로 농민은 지대를 생산물로 납부하였으며, 중세 후기에 이르면서 금납으로 대체되었다. 이 밖에 인두세가 있어 연 1회 이상 모든 농민이 곡물, 가축, 양봉, 닭 등을 공납하였다. 농민의 아들이 교회직에 들어갈 경우 사전 승락을 받아야 했으며 그 대가를 지불하여야 했다. 마찬가지로 농민의 딸이 외지 사람과 결혼할 때도 혼인세를 지불하였다. 또 영주만이 합법적으로 포도 압착기, 제분 시설, 빵 제조 시설 등을 갖고 있었으며 농민들이 포도주, 밀가루, 빵을 만들게 될 경우 이러한 시설의 사용료를 현물로 납부하였다. 중세 농민의 의식주나 기본 생활은 조잡, 소박하고 비위생적이었다. 집은 흙벽과 흙바닥이었고 초가 지붕을 하고 있었다. 짚 뭉치를 깔아 침상으로 하고, 창문은 겨울에 짚으로 막아야 하는 벽에 뚫은 구멍에 불과하였다. 닭은 집 주위에서 키우고 집 앞에 쓰레기나 분뇨가 쌓여 비위생적이었다. 주식은 검은 빵이며 달걀, 양배추, 무, 콩 등이 부식이었다. 가끔은 닭을 잡아 먹었으나 추운 겨울이 다가와 건초가 없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양, 소는 잡지 않았으며, 신선한 육류 대신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먹게 마련이었다. 음료로는 자가 양조한 맥주나 포도주가 흔한 편이었다.
◑ 삼포제(三圃制) : 중세의 개방 경지 제도에 있어서의 농지 경작법의 한 형태. 대개 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에 걸쳐 지배적이었던 경작 제도. 이 제도는 곡초식 농법과 달라 개방 경지에서만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 특징은 동곡과 춘곡과의 윤작과 정기적인 휴경을 결합시켰다는 점과 경작지 전체를 대략 3 등분하여 이 세 방법을 순환시킨 데에 있다. 밭갈고, 씨뿌리고, 수확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0월에 휴경지로 된 땅은 다음 해 봄까지 목초지로서 방치되고, 4∼6월 사이에 방목, 7∼9월 사이에 밭갈고, 이어서 동계 경작지로 바뀌고, 10월에 동곡을 파종, 다음 해 8월에 수확하고 그 후 9∼11월까지 방목, 그 다음 해 3월까지 방치 또는 방목에 이용한 후 밭 갈고 하계 경작지로 전환시켜 4월에 춘곡 파종, 9월에 그 수확을 끝낸 뒤 10월에 재차 휴경지로 전환시킨다. 이와 같이 3년을 주기적으로 순환하였다. 18세기경 클로버·감자·협두등의 휴한 작물이 재배되자, 이 삼포제는 개량 삼포제로 옮겨갔다.
◑ 사교 중심지 : 교회·성채·방앗간·선술집 서양 중세의 회합 장소 중 으뜸가는 것은 성직자들이 활동하는 교회였다. 중세의 교회는 공통적인 정신 생활의 중심지이자 회합의 장소이기도 했다. 여기서 회의가 열리고, 위험시에, 특히 화재 발생시에 종을 울려 사람들이 모이도록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담소를 하고 놀이를 하고 시장을 보았다. 성직자들과 종교 회의가 교회의 역할을 신의 집으로서의 본래적 역할로 환원시키려고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오랫동안 이슬람 교 사원과 비교될 수 있는 여러 기능을 가진 사회적 중심지였다. 교구 생활이 교회가 조직한 소우주였듯이, 성채 생활은 영주들이 성채에서 형성한 사회적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봉신의 젊은 아들들이 모여들어 영주에게 봉사하고 군사 훈련을 받았다(때로는 인질 역할도 했다). 영주의 가족과 하인들도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이들과 더불어 여흥꾼들의 무리들은 영주의 기분 전환과 위신을 위해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 이곳에서 음유 시인들의 지위는 애매했다. 이들은 고용주들의 덕과 공적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인들이 주는 봉급과 총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자신들도 영주가 되는 욕망을 갖고 있었고 또 가끔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기사가 되어 문장을 받은 음유 시인들의 경우가 그랬다. 성채에서 생산된 문학과 예술 작품들은 종종 봉건 사 회에 대한 적대감을 다소 포장된 형태로 증언한다. 민중 사회는 이와는 다른 회합 장소를 가지고 있었다. 시골에서의 만남의 장소는 농민들이 곡식을 가지고 와 줄을 서서 방아 찧을 순서를 기다리던 방앗간이었다. 우리는 농촌 개혁이 때로는 그곳에서 논의되고 전파되었으며, 농민 봉기의 음모가 거기서 꾸며졌다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농민 회합의 장소로서의 방앗간의 중요성을 입증해주는 두가지 사실이 있다. 12세기 종교 교단의 규약들은 수도사들이 그곳으로 시주를 받으러 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창녀들이 방앗간 근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경제적 이익보다도 도덕을 항시 앞세웠던 성 베르나르는 수도사들에게 이 악의 소굴을 파괴하라고 권하였다. 도시에서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시장과 회의실을 갖고 있었다. 한 예로 파리의 거상들이 모였던 수로 상인 조합 회의실이 있었다. 이 곳은 '부르주아의 응접실'이라는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물론 도시에서도 가장 큰 사교의 중심지는 선술집이었다. 선술집에는 마을 주민들과 도시의 구역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선술집 주인은 대부업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곳은 여관을 겸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숙박시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선술집은 사회적 교류망의 중요한 매듭이었다. 먼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며 전설들이며 신화들을 담은 소식들이 그곳에서 전파되었다. 그곳에서의 대화가 중세인들의 망탈리테(심성, 집단 무의식)를 형성했다. 그곳에서의 술 한잔이 흥을 돋구었듯이, 선술집은 내부의 격정을 발효시켜 폭발시킨 취기와 정렬적인 색조를 중세 사회에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삼위 일체(Trinity) ; 크리스트 교에 있어서 아버지인 신과 아들인 예수 크리스트와 사람의 심중에 내재하는 신으로서의 성령은 세 개의 페르소나(Persona; 신격 개성)로서 일체의 것이라는 정통 카톨릭 신학의 근본적 교의. 이에 대해서는 오랫동안의 논쟁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 파는 크리스트란 신을 동일시하여 삼위 일체설을 주장하였고 아리우스 파는 크리스트란 신과 인간과의 중간적 존재라 하여 삼위 일체설을 부정하였으나, 결국 325년의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 파가 정통으로 인정되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서 삼위 일체의 교의가 확립되었다. 이후 정통 카톨릭 신학의 근본적 교의가 되었다.
◑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8?∼373) : 니케아 시대의 크리스트 교 교부로 아리우스의 이단이 발생할 당시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부제로서 니케아 회의에 참석하여 반 아리우스 파의 거두로서 활약했다. 삼위 일체 교의의 확립에 썼으며,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 일파가 기초한 의정서에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이다]라는 중요한 구절을 넣을 것을 요구하여 엄격한 순리주의를 관철시켰다. '반이단론' 을 비롯하여 아리우스 논쟁에 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 아리우스(Arius ;256∼336) : 크리스트 교 이단의 시조로 처음에 수도사였다가 뒤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가 되었다.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의 가르침을 받아 단순한 유일신론의 입장에서,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크리스트의 완전한 동질성을 부정하고 오히려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로서의 크리스트의 인간성을 강조하며 아타나시우스 파의 삼위 일체론에 반대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서 파문이 확정되었으나 그 세력은 끈질기게 남았으며, 특히 이 파의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전도는 사적(史的)으로 중요하다.
◑ 로마 교회 : 로마는 고대 로마 제국의 수도이고, 그 교회가 크리스트의 수제자 베드로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제정 기에 많은 순교자를 낸 도시로서, 크리스트교 세계에서 우위와 권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이외에 콘 스탄티노플·안티오키아·예루살렘·알렉산드리아의 5대 본산이 있었으나, 마지막 3도시는 7세기 이슬람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대립하였다.
◑ 수도원 운동 : 불안과 폭력이 지배하던 중세 초 4세기 무렵, 일부 성직자들에 의해 세속을 떠나 한적한 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엄격한 계율 밑에 공동 생활을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세상의 부귀 영화나 안락한 생활 대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스스로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하고 청빈, 복종, 순결의 계율과 "너희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나를 따르라"는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감옥같은 방에서 기도와 명상으로 생활했다. 서유럽 수도원의 기초를 확립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베네딕트이었는데, 그는 592년 로마 남쪽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워, 73장으로 된 베네딕트 계율을 세워 수도원 생활을 조직하였으므로, 이에 최초의 진정한 수도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 베네딕투스(Benedictus Nursia ;480?-543?) : 서유럽 수도원의 창립자라 할 수 있고,「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선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이탈리아 교부의 생애와 기적, 영혼 불멸에 관한 대화' 에 알려져 있을 뿐이다. 로마의 북방에 있는 누르시아에서 출생하여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세속을 멀리하여 수비아코 산 근처의 동굴에 가서 살았다. 그 후 529년경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몬테카시노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남긴 유일한 계율은 '베네딕투스 계율'인데 이는 서유럽의 거의 모든 수도원이 채용하고 있는 계율이다. 이 계율은 서문과 73장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짧은 글이다. 수도원의 계율은 그 전에도 있었지만, 그의 계율이 널리 보급된 이유는 그 규칙이 과격하지 않아 실행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과 너무 번잡한 규칙을 피함으로써 응용할 여유를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 주된 내용은 수도사를 지망하는 자는 시험 기간을 거친 후 「정주(定住)」「절대 복종」「빈곤과 정절」을 서약해야만 허가할 것, 원장의 지배는 절대적이지만 큰 일에 대해선 연장자들의 의견을 들은 다음에 처리할 것, 기도·명상 이외의 시간에는 노동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다.
◑ 교황과 황제 : 중세 세계는 교권의 정점인 교황과 속권의 정점인 황제라는 두 권위를 양 촛점으로 하는 '타원형의 세계'. 그러나 이 두개의 권위는 평화적으로 공존한 것이 아니라, 특히 성직자 서임권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권력싸움을 전개하였다. 이미 그러한 싸움은 오토 대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 국의 황제가 된 후, 교황을 폐위하고, 교회의 성직자를 국왕의 관료로 만들었으며, 교회령과 수도원령을 왕령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한편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피핀이 바친 교황령을 경제적 기초로 하고, 서유 럽 전체 땅의 거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고위 성직자 제후들을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지니고, 정신 세 계의 지배권 뿐만 아니라 세속적 지배권을 공공연히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성직자 서임권 문제를 둘러 싼 교황과 황제와의 싸움은 교황 그레고리 7세의 교황권 지상의 선언으로 더욱 격렬해졌으며, 십자군 운동을 전후하여 교황권이 점차로 우세해져서 인노켄티우스 3세 때 절정에 이르렀으나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권은 쇠퇴하였다.
◑ 카노사의 굴욕(1077) : 1077년 교황에 즉위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직자의 결혼, 성직 매매를 일절 금지하고, 그때까지 국왕 및 제후가 갖고 있던 성직 임명권을 교황이 갖겠다고 공포했다. 성직자를 세속의 왕이나 제후들이 임명하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독일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이에 격렬히 반발했다. 성직 임명권을 넘겨준다는 것은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1076년 1월 하인리히 4세는 보름스에서 제국 국회를 소집,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이번엔 분노한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였는데 파문이란 카톨릭 세계로부터의 완전 추방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치명적인 조치였다. 카톨릭 교도는 더 이상 황제 를 만나선 안되었으며,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후 역시 황제와 똑같이 불경한 자로 간주되었다. 사태 가 이렇게 되자,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던 독일의 제후와 성직자들은 황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인리히 4세는 당황했다. 더이상 교황에 맞서 싸울 지지 기반을 잃은 그는 무조건 복종을 맹세했다. 교황은 이때 카노사 성에서 휴양중이었다.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하인리히 4세였지만 교황은 만나주질 않았다. 하 는 수 없이 황제는 그 추운 겨울날 얇은 옷에 맨발로 눈 속에 서서 꼬박 3일 밤낮을 눈물을 흘리며 용 서를 빌었다. 그제서야 교황은 접견을 허락하고 교회에 복종할 것을 서약 받은 다음 파문을 취소해 주 었다. 이렇게 해서 성직 임명권을 둘러싼 교황과 황제의 싸움은 일단 교황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하인리히 4세는 왕권을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1082년 하인리히 4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로마를 점령하고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교황청에 승인시켰다. 살레르노 지방으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5년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으로 유배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는다- 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싸움은 하인리히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교황과 황제의 치 열한 대립이 일단락된 것은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가 모두 죽고 난 다음이었다. 성직 임명은 교황의 권리로 하되 성직자에게 내리는 토지는 국왕의 권한하에 둔다는 타협안이 보름스 화의에서 통과 된 것이다.
◑ 교회권과 세속권의 대립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 선고] 사도들의 수좌인 성 베드로여! 우리들의 말을 들으소서.---- 나는 당신의 은총에 의해서----전능하 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의 힘을 빌어, 또한 당신의 권능에 의해서 당신의 교회에 대해서 그지 없 이 교만하게 거역한 하인리히에게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의 모든 권리를 부인 하노라. 여기에 나는 모 든 크리스트 교도들이 여지껏 그에게 해온, 혹은 하고자 하는, 신종(臣從)의 서약의 속박에서 해방하는 바이며, 또한 그 누구도 그에게 황제로서 신종하지 않을 것을 명하는 바이다. 당신의 교회의 명예를 무시하려는 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지녀야 할 명예를 마땅히 그의 몸에서 박탈해야 한다.
◑ 파문(Excommunicatio) : 카톨릭 교회에서 신도를 교회와의 신앙상 접촉으로부터 배제함을 말한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원칙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카논 법에 의하면 파문당한 자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비탄니라고 하여, 교황청에서 그 사람을 지명하여 공개적으로 파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톨레라티라 하여 아직 지명 공개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일단 파문된 자는 성사를 받을 수 없으며, 교회 묘지에매장될 수도 없으며, 사면도 받을 수 없으며, 다른 신도와의 접촉도 일체 금지된다. 또한 파문은 개인만이 아니라 도시나 국가 등의 단체에도 가해지는 수가 있다. 이것을 인테르딕티오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영국 왕 존에게 내린 파문 등이다. 파문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교 투쟁의 시대이다. 이 때의 교황은 독일 황제를 누차 파문하였는데, 파문당한 황제는 그 신하가 봉건적 복종의 의무에서 해제되므로 황제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그러나 파문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폐단도 수반되었다.
◑ 보름스 협약(Wormser Konkordat ;1122) : 신성 로마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리스투스 2세간에 맺어진 협정. 이로써 1076년 이래의 성직 서임권 투쟁은 일단 타결되었다. 그 내용은, 1)성직자는 교회법은 규정에 따라서 선거되며, 황제는 지환 (指環)과 장(杖:영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서임권을 포기하고 홀(笏:세속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교회령 및 이에 부수되는 정치적 권리의 수여만을 행사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2)독일 국내에서는 황제의 홀(笏)에 의한 수봉(授封)은, 성직자 서임때 행해지는 성별(聖別)이 의식에 선행되며, 부르군드와 이탈리아에서는 성별이 선행되어야 할 것. 3)교회 국가에서는 이러한 협정은 적용되지 않음 따위이다. 이러한 일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이상과는 아주 먼 것이어서, 황제는 독일 국내에서는 아직도 성직자의 임명을 좌우할 수 있었으나 독일 이외에서는 서임권은 교황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황제권은 약체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이 내 용은 교황과 황제가 다같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타협적인 것이어서, 서임권 투쟁은 시타우퍼 왕조를 통하여 내내 계속되었다.
◑ 인노켄티우스 3세(제위 1198∼1216) 교황권 전성 시대의 교황으로 교황권의 확대에 힘써 독일 황제의 선거에 간섭하고, 프랑스 왕의 이혼 을 중지케 하고, 영국 존 왕과 켄터베리 대주교의 임명권을 가지고 싸워 존 왕을 파문하였기 때문에 존 왕이 굴복하여 그 봉신이 되었다. 그가 교황권의 황제권에 대한 우월성을 태양과 달의 비유로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 교황권의 전성
우주의 창조주는 천체에 위대한 두 빛을 설치하였으니, 강한 빛은 낮을 지배하고 약한 빛은 밤을 지배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편적 교회의 영역에도 창조주는 위대한 두 권위를 임명하였으니, 더 위대한 것이 영혼을 지배하고 약한 것이 육체를 지배한다. 이 두 권위란 교황권과 왕권이다. 그리고 달은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으며, 그 효과, 크기, 질과 지위에 있어서 태양만 못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왕권은 그 위엄을 교황권으로부터 얻는다. 그러므로 왕권이 교황권을 침범하면 왕권의 빛이 약해질 것이며, 왕권이 교황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빛은 커질것이다. -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편지(1198년)
◑ 아비뇽 유수(1309∼1377) : 중세 말에 교황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거주한 것을 말한다. B.C. 6세기에 바빌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의 고난에 비겨서 이렇게 부른다.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하는 보니파키우스 8세는 프랑스 왕 필리프 4 세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분사하였다.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교황권의 쇠퇴를 상징한다. 보르도의 대주교로 교황에 선출된 클레멘스 5세(1305∼1314)는 프랑스 인으로, 프랑스 국왕에 대하여 보니파키우스 8세가 취한 비난을 모두 취소하고 1309년 남프랑스의 론강 좌안에 있는 아비뇽으로 교황의 거처를 옮겼다. 그 이후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체제하여 프랑스 왕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7년에 아비뇽을 떠나 로마에 돌아갔지만 그 다음 해에 사망하고 이로써 로마와 아비뇽에 사실상 2명의 교황이 등장하게 되어 시스마(교회의 대분열:1378-1417)가 일어났다.
◑ 시스마 ( Schisma,교회 분열:1378∼1417) : 중세에 카톨릭 교회 사이의 통일이 무너지고, 교회의 대립이 생긴 것을 말한다. 이단이 교의에 관한 문제임에 대하여, 시스마는 권위에 관한 문제이다. 교회 대분열 시대는 1378∼1417년에 걸쳐 로마와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교황이 양립했던 상태를 가리킨다. 이전에 아비뇽에 유폐됐던 교황청은 1377년 그레고리우스 11세의 로마 복귀와 함께 폐지됐다. 그런데 이듬해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죽고 이탈리아인 우르바누스 6세가 교황에 선출됐지만 추기경단은 우르바누스 6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하고 새로 클레멘스 7세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우르바누스 6세가 냉혹하고 사려가 깊지 못하며 인격적으로도 열등하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그러나 우르바누스 6세가 완고하게 로마를 떠나지 않자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후 전 유럽의 교회도 양파로 갈라지게 되자 애가 탄 성직자들은 주교로 구성된 공의회가 교황의 권위보다 우월하다는 결의를 했다. 이 동안 양측의 교황청은 재정이 궁핍하여 관직 매매 등이 성행, 중세기말 로마 교회의 쇠미함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으며, 이윽고 밀어닥치는 종교 개혁에 의한 크리스트 교계의 분열의 전조를 나타냈다. 이에 대하여 독일·영국 등은 로마측의 교황을, 프랑스 를 중심으로 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칼 등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했다.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했던 양 교회를 통합하려는 계획은 주교회의 중개로 여러 번 시도됐지만 쉽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1409년 피사 공의회는 두 교황을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선임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결과는 3명의 교황이 서로 대립해 혼란이 더욱 가중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414∼17년에 걸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는 위클리프와 후스 같은 성서주의자를 이단으로 규탄했다. 동시에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는 데도 주력해 3년만에 세 교황을 겨우 퇴위시키고, 선거로 추기경 오도네 콜론나를 마르티누스 5세라는 통일 교회의 교황으로 선출했다. 다행히도 교회의 대분열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후스의 처형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정략에 의한 비극으로 판단한 체코 국민이 전쟁을 일으켜, 교회의 고민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다. 동시에 교회의 내부에서 하급 성직자의 발언권이 더욱 강해지면서 로마 교황청은 차츰 동요하게 됐다.
◑ 크리스트교와 중세 유럽 : 크리스트교가 유럽의 종교로서 확립된 것은 중세의 전성기인 12∼13세기 무렵이었다. 중세 카톨릭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중세 유럽사회의 유일한 통일적 계층 기구가 되었으며 따라서 중세 유럽은 하나의 '크리스트교 공화국' 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세 사회에서 크리스트교는 각 지방의 농촌 공동체 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농촌의 축제, 주일 미사, 혼인, 장례 등이 모두 교회를 통해 치루어지고, 교회는 농민의 친목과 결속의 중심이 되었다. 중세 농민의 방목이나 씨뿌리기, 수확, 세금내는 날도 모두 크리스트교의 제일에 맞추는 등 크리스트교는 민중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또 기사의 윤리에도 깊은 영향을 주어 정의를 사랑하는 성실한 전사의 윤리로서 크리스트교 정신이 그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중세의 문화 또한 크리스트교 문화이며 신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라 할 수 있다.
◑ 아우구스티누스(St. Auhustinus, 354∼430) 초기 크리스트 교회 최대의 교부(敎父)로 중세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대사상가이다. 부친 파트리키우스는 로마 제국의 관리이며 이교도였고, 모치 모니카는 독실한 크리스트 교도였다. 카르타고에 유학, 수사학을 배우면서 발군의 성적을 올렸으나, 젊음의 객기로 방탕한 생활에 빠져 19세에 모친의 승낙 없이 신분이 낮은 여자와 동거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항상 육신의 유혹과 이상과의 괴리에 고민하면서 크리스트 교가 말하는 전지전능의 신이 어째서 악을 만들었는가에 의혹을 갖고, 마니교에 귀의하여 철저한 선악 이원론으로부터 악의 문제에 관한 자기의 번민을 해결하고, 또 그 조직적인 우주론으로써 자기의 탐구욕을 만족시키려 했다. 338년 로마로 건너가 이듬해 밀라노에서 수사학의 교사가 되었다. 386년 모친의 영향과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크리스트 교로 개종, 387년에 세례를 받고 로마로 옮겼다가 모친의 사망으로 388년에 귀향했다. 391년 힙포 레기우스에서 성직자가 되어, 395년에는 주교가 되고, 종교적 지도를 위한 가까운 곳의 여행에 나간 외에는 죽을 때까지 34년간 이 곳에서 활약했다. 철학적ㆍ신학적 저서가 많은데, 그 대표적 작품은 '고백' 과 '신국론'이다.‘고백’의 처음 10권은 자서전이며, 나머지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에 관한 논설이다.‘신국론’은 410년의 고트 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공략한 책임이 고대적 신들을 무시한 크리스트 교에 있다고 한 주장에 자극받아 지은 것으로, 크리스트 교를 공격하는 모든 이교나 고대 사상을 논박하여 크리스트 교의 진리성을 변증하였다. 이 책에서 크리스트적 세계관에 입각한 그의 역사 철학을 엿볼 수 있다.
2. 비잔틴제국과 그 문화
(1) 비잔틴 제국의 성쇠
◑ 비잔틴 제국 : 정치에 있어 비잔틴 황제는 관리나 군대를 지배하는 한편, 종교에서도 콘스탄티노플의수좌 대주교의 임명권을 비롯하여 종교 회의의 소집과 회의 내용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정교로 불리어지는 비잔틴의 크리스트교 교회는 서방과 달리 황제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 교황주의라고 부 른다. 비잔틴 제국은 활발한 상업 활동에 의해 유지된 경제력, 로마로부터 물려받은 정치 제도, 국교로 된 크리스트 교 그리고 이곳에 전통적으로 남아 있던 헬레니즘 문화를 토대로 하여 크게 발전하였으며, 서로마 제국이 망한 뒤에는 로마 제국의 유일한 계승자로서 비잔틴 제국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보존, 유지하여 후일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 었다. 학자들은 그리스의 고전을 읽고 연구하는 한편, 필사하고 주석을 붙였다. 그들은 고전과 관련된 사전과 문법서를 만들고, 거대한 백과 사전을 편찬하였으며, 법률, 지리, 전술, 행정, 기술 등에 관한 다 양한 논문을 남겼다. 성 소피아 성당과 그 내부의 모자이크 벽화는 새롭고 독창적인 비잔틴 미술의 출발이었다. 또한 서유럽의 입장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동쪽으로부터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을 무찌름으로써 크리스트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 그레고리우스 7세의 연설 > 우리는 이교도들이 크리스트 교 제국을 압박하고 있으며, 거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국토를 잔인하게 황폐하게 하였고, 수 천명의 크리스트 교인들을 양처럼 도살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크리스트 교인임을 자인한다면, 위대한 제국의 비틀린 운명과 많은 크리스트 교인의 살해에 대하여 마땅히 비탄에 빠지게 됩니다. (1074년)
◑ 군관구 제도(System of Themes) : 비잔틴 제국에서 지방 주둔 부대를 군단으로 편성하고, 군단 주둔지역을 군관구로 하던 징병 제도. 이 군관구는 동시에 행정 구획이 되어 군단장이 군사, 행정의 장관을 겸했다. 군관구제(themes)는 4세기 이래의 군·민정의 분리가 7세기부터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폐지되고, 군단의 사령관이 주둔지의 민정도 함께 다스리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군관구는 지방 행정의 단위가 되었으며, 그 장관은 부하 병사들에게 군사적 복무에 대한 대가로 병사 보유지를 지급하여 병사들이 자영 농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들을 둔전병이라고 한다. 그 보유지는 병사의 장남에 의해 병역 의무와 함께 상속 었다. 이 제도는 농민의 일부에게도 적용되어 병사 보유지를 지급받고 병역의 의무를 졌다. 이를 국가 기구의 핵심이 되게 한 것은 헤라클레이오스 황제였다. 페르시아의 압박이 강화되자, 아르메니아 방면에 3개의 군정구를 만들고, 지방 귀족을 그 장관에 임명했다. 680년에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트라키아, 옵시키온, 카라보스에 군정구가 설치되었다.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한때 로마 제 국령의 동부가 사라센 군에 의해 침략을 받고, 변경군의 둔전제가 없어지고부터는 군정구는 군단의 주 둔지 즉, 군관구 테마라고 통칭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7세기말에는 제국은 헬라스의 군관구를 합쳐서 8 개의 군관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군관구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지방적 세력을 얻어서 중앙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향이 생겼으므로, 10세기에는 군관구를 26개로 세분하고 중앙 집권 제도를 강화했다. 그 뒤 이것이 30개(아시아에 18, 유럽에 12)로 세분되어, 전시에는 군단장은 황제가 임명한 원정군 사령관 또는 방면군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곧 지방 호족에 의해 군관구가 강화됨에 따라 황제권으로부터 분리되어, 10세기 후반에는 이 제도는 쇠퇴하고 지방 호족의 대토지 소유가 늘어나 11세기 후반에는 호족들에게 대토지를 지급하고 군사적 봉사를 시키는 프로노이아(pronoia)제도가 등장하여 봉건적 영주가 각지에 독립적인 세력을 갖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영내의 농민은 예속화되어 봉건화가 촉진되었다.
◑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us I : 483∼565년) : 동로마 황제로 유스티누스 1세(재위 518∼527년)의 조카이고 양자다. 유스티누스 1세가 황제가 됐을 때는 이미 노령(68세)이어서 유스티니아누스에게 정치를 돕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황제 자리는 당연히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제국의 동부를 페르시아가 휩쓸고 있었는데,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를 격퇴(530∼531년)했으나 당시 토지를 잃은 다수의 농민들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유입되고 있었으므로 농민에 대한 영주권을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지닐 것이 요구됐다. 여러 가지 소요를 일으킬 사태에 직면한 부랑민들은‘니케(승리) 니케’를 외치며 폭동을 일으켰다. 532년 말부터 533년 초에 걸쳐 일어난 이 폭동을‘니케의 폭동’이라 부른다. 폭도들은 유스티니아누스를 궁전에 포위했다. 그는 망명하려 했지만 황후 테오도라가 그를 격려해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이 때도 그를 구원했다. 황후인 테오도라는 낮은 신분 출신의 여자로 콘스탄티노플 경마장의 여배우였다고 한다. 523년에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했는데 뛰어난 두뇌와 재능을 지녀 그를 잘 보조한 여장부로 알려진다. 벨리사리우스는 이후 아프리카(533∼534년)·시칠리아· 이탈리아(536∼538년)를 정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 제국 부흥이라는 구상을 실현시켜 지중해는 다시 로마의 호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 원정은 재정난을 가져왔다. 재정난은 유스티니아누스의‘성 소피아 성당’건립(537년)과 궁정 건립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정책의 기반은 황제 교황주의의 확립 등 황제권 강화에 있었으며 또한 그는 로마 제국의 쇠퇴의 원인을 법과 질서의 문란으로 보고 534년 트리보니아누스를 비롯한 16인의 법학자에게 명해 로마 법전을 집대성한『로마법 대전(유스티니아누스 법전) 』을 만들었다. 이것은 후에 현대 법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업적 가운데 최대의 것이다.
(2) 비잔틴 문화와 그 영향
◑ 성 소피아 성당(사원) 이스탄불에 있는 비잔틴 예술의 대표작.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궁전 입구에 있었던 같은 이름의 소실된 성당을 제건한 것으로, 10만명의 일꾼을 동원해서 단기간에 완공하였다.(532년 기공, 537년 완성). 지름 31m의 웅장한 돔을 받친 거대한 건물의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고, 내벽의 하부는 대리석을 붙이고 상부는 모자이크화가 그려져 있다. 유스티아누스는 완성된 성당을 보고 신을 찬송하며, "오, 솔로몬이여, 나는 당신을 능가하였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1543년부터 이슬람 교 사원으로 되었으며, 첨탑이 덧붙여지고 내부가 다소 개조되었으나, 기본적 형태는 유지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그와 같이 훌륭한 것은 아담 이래 일찌기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 성 소피아 성당의 돔(Dome)은 놀라운동시에 무서운 작품이어서, 견고한 석조 건물로 밑받침되어 있느니보다 차라리 하늘에서 금사슬로 매단 것같이 느껴진다."
" 그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가면, 당장에 그것이 사람의 노력이나 근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품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정신은 하늘에라도 오른 듯하여 신이 여기 바로 가까이 계시고, 신이 스스로 택하신 이 거처를 기뻐하심을 깨닫는다."
◑ 로마 법(Roman Law) 로마의 법률 전체를 가리키며, 특히 이를 집대성한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大全)'을 말한다. 로마 사회도 처음에는 관습법이 시행되었으나,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B.C. 451년 처음으로 성문법인 12동판법이 나왔다.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확대되면서 로마 법은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시민법에서 전인류에 미치는 만민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법률들은 일정한 시기에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때 그때 점차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었으므로 이를 정리할 필요가 생겼다. 로마 법의 편찬 사업은 일찌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도되었던 것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 제는 트리보니아누스 등 10명의 학자에 위촉하여 이 대사업을 완성하였다. 그들은 우선 역대 황제의 [칙령집]을 편찬하고, 여러 학자의 학설을 수집한 [학설 휘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법학도를 위한 교과서로서 [법학 제요]를 편찬시켜 533년에 완성하였다. 이들 3부작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편찬 사업은 끝났으나. 그 후 황제는 계속하여 중요한 칙명을 많이 냈으므로, 나중에 535∼564년간의 칙법 165를 편찬하였다. 이것을 [추가법] 또는 [신 칙법 휘집]이라고 한다. 이상 4부작을 로마법 대전이라 하였다. 11세기에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에서 로마 법의 주석이 행하여지면서 여기에 모인 유럽 각지의 학생들에 의하여 로마 법이 각국에 전파되어 유럽 각국 근대법의 기초를 이루었다.
◑ 로마 법에 의한 재판
어느날 황제가 나타났을 때, 어떤 가난한 여인이 그의 발 밑에 엎드려 울면서, 경찰의 어떤 고관이 이웃에 짓고 있는 거창하고 호화로운 새 저택 때문에 그녀의 집은 광선과 공기가 온통 막혀버렸다고 하소연 하였다. 게다가 그 고관은 황후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 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당장에 조사하도록 명령했으며, 그 여인의 말이 정말임을 알자 그는 그 범인을 발가벗겨 한길에서 매질하게 하고, 그의 저택을 헐도록 하여 그 집이 섰던 땅은 그 여인에게 주었다. 또 어느 때에는, 황제가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감히 붙잡고 그 말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였다. 테오필루스 황제는 대궐로 들어가서 그녀를 데려오게 하였더니, 그 여인은 자기가 살던 곳의 사령관이 억지로 자기 남편에게서 말을 빼앗고, 황제의 비위를 맞추려고 그 말을 그에게 바친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 사령관은 그 말의 임자를 병대와 더불어 싸우게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사령관이 황제 앞으로 끌려와 그 여인과 마주치자, 그는 마침내 자기 죄를 인정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파면되고, 그의 재산의 일부는 몰수되어 그 고소인에게 주어졌다.
◑ 그리스 정교 : 1054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에 전파된 크리스트교. 동서 양 교회의 분열은 각기 그 지방의 종교적 전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우상 숭배 논쟁과 교황권 문제였다. 우상 숭배 논쟁은 842년에 해결을 보았으나, 교황권 문제는 9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포더오스의 취임에서 발단하였다. 서로마의 교황은 그 우월권을 주장하고 동로마는 총주교의 독립을 주장하여 정면 충돌을 일으켜 결국 1054년에 동·서 로마 교회는 분열되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 정교도는 이슬람 교도의 압박을 받고 중세에 시달렸으나, 1830년 그리스 독립과 동시에 그리스 교 회는 투르크 지배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서 독립, 1878년에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독립과 동시에 교회도 또한 총주교 관구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989년 키예프공(公) 블라디미르가 크리스트 교로 개종한 이래, 크리스트 교는 러시아에 침투, 동로마 제국 멸망후에는 그리스 정교 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교회의 지지로써 러시아를 통일, 1589년에는 러시아의 총주교 관구가 설치되어 교회는 황제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고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여 크리스트교는 번영하였다.
◑ 동·서 교회의 갈등(1054년 분리)
일찌기 8세기에 교황들은 우상 숭배에 관한 문제로 성상 파괴를 내건 비잔틴 황제들과 싸우게 되고, 이탈리아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적들을 지원하였다. 그 앙갚음으로서 최초의 성상 파괴자인 비잔틴 황제 레오 3세는 교황의 관할구에서 남이탈리아와 발칸 지방을 떼어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할구에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의 위신과 재정에 가한 이 타격조차 이 시기에 교황을 비잔티움에서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문제로 되지는 않았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비잔티움이 북 아프리카에서 쳐들어오는 아랍족이나 알프스를 넘어 쳐들어오는 롬바르드족에 대하여 이탈리아와 교황청을 방어할 힘이 없다는 교황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교황이 8세기에 피핀과 카롤루스에 의존하고 800년에 서방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을 만들어 낸 것은 비잔티움인이 못하는 방어를 단단히 하여 롬바르드 족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세계 문화사]브린튼 외 저-
◑ 동로마 제국 멸망 :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황제가 죽은 뒤 둘로 분열했던 로마의 동쪽 제국은 6세기의 유스티아누스 1세(재위 527∼565년)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뒤 사라센 제국,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위협당 하면서 차츰 영토를 잃었다. 1202년에는 제4차 십자군에게 수도를 점령당하고 라틴 제국이 됐다. 1261년 에 다시 동로마 제국(Easterm Roman Empire)을 회복했다가 내란과 교황 자리의 상속 분쟁으로 고통받 았으며 13세기 말부터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을 받고 만신창이 상태가 됐다. 1453년 4월 강력한 수륙 양면에서의 공격을 받고 포위됐으며, 견고한 성도 수비대의 부주의로 안쪽에서부터 무너졌으며 5 월에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투르크 군의 포격을 맞고 영웅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동로마 제국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3. 중세 유럽의 성장과 변화
(1) 십자군의 원정과 봉건 사회의 해체
◑ 십자군 원정
▶ 배경 : 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였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유럽 세력 팽창의 대표적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 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 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 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 원정의 경과 : 제 1회(1096∼1099) 주로 프랑스의 제후와 기사를 중심으로 편성되어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예 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다. 제 2회(1147∼1149) 예루살렘 왕국이 투르크에 의해 위협을 당하자 독일의 콘라드 3세, 프랑스의 루이 7세 등이 원정을 시도했으나 예루살렘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끝났다. 제 3회(1189∼1192) 독일의 프리5躍??1세,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 필리프 2세의 지도로 대원정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제 4회(1202∼1204)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으나, 본래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베네치 상 인이 동지중해 상업권의 탈취를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라틴 제국을 건설하여, 비잔틴 과의 반목을 초래하였다. * 알비조바 십자군(1209∼1229) 남프랑스에 대항하는 십자군 * 소년 십자군(1212) 프랑스, 독일의 소년, 소녀들로 구성 제 5회(1219∼1221)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하여 한 때 예루살렘을 회복하였으나 결국 빼앗겼다. 제 6회(1248∼1254) 성지 도착이라는 최초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이집트 정복을 목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루이 성왕)에 의해 원정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다. 제 7회(1270) 튀니스 점령을 목적으로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이것도 실패하였다.
▶원정의 영향 :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교황의 권위를 떨어뜨린 반면, 왕권을 강화시켰다. 또한 제후와 각급 기사들의 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동방 무역이 활성화 됨으로써 서유럽의 도시와 상공업을 한층 더 발 전시켜 자급 자족적인 자연 경제가 무너지고 유럽 봉건사회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문화와 비잔틴 문화 등 외래 문화와 접촉하면서 유럽인의 시야가 확대되었다.
◑ 우르반 2세의 십자군 호소
근동의 기독교국이 종종 구원을 요청하고 있으니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그 외 도시에서는 기독교도가 학대받고 성당은 모독당하고 훼손당하고 있다. 신을 믿지 않은 더러운 터키 인의 진출은 그칠 줄 모르고 이미 일곱 차례나 기독교도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다가오고 있다. 성지의 형제들을 구하라. 서구의 기독교도들이여, 지위가 높은 자도 낮은 자도, 부자도 가난한 자도 근동의 기독교도의 구원에 매진하라. 신은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 사함을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은 그대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빈궁해졌다. 이 땅은 자원도 풍부하지 않고 경작자들에게도 얼마 되지 않은 곡물만이 주어진다. 그러니 그대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대들의 증오심을 없애고 적의를 누그러뜨려 서로 싸우는 것을 가라앉힐 수 있게 되었다. 성묘(聖廟)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신이 그대들에게 내리신 토지이다. 그리고 그곳을 불신의 무리로부터 해방시켜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불행한 자와 가난한 자는 그 땅에서 번영할 것이다.
◑ 마라의 학살 : 1096년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안티호크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다. 이 무렵〈마라의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성에 도착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그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육을 자행했다. 사라센 인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다. 마라에 머문 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 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 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을 보였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삐까지 피로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 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 3차 십자군 원정 : 독일의 중세 사상 가장 강력한 프리드리히 1세는 3차 십자군 원정에 출정하여 1190년 소아시아 사례프 강에서 익사했는데 이때의 유별난 이야기는 시체 처리법이다. 우선 몸을 잘라 가마솥에 넣고 삶아 뼈와 고기를 분리한 다음 내장과 살은 현지에 묻고 뼈만 고국으로 가져갔다 한다.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멀리 가서 죽게 되면 취하는 장사법이라고 한다. 어쨌든 3차 십자군 원정은 영국의 리처드 왕, 프랑스의 필립 왕 , 독일의 프리드리히 왕이 출전하였는데, 프리드리히 왕은 강을 건너다 익사하고 필립 왕은 리처드 왕이 십자군 사이에 인기가 높은 것을 시샘하여 자기 군대를 이끌고 원정 도중 귀국해 버렸다. 리처드 왕은 전쟁을 마치고 귀국하던 도중에 오스트리아 왕에게 납치되고 오스트리아는 왕의 몸값으로 많은 액수를 영국에 요구 하였다. 리처드 왕을 대신하여 잠시 왕노릇을 하던 동생 존은 스스로 왕이 되려는 욕심에서 몸값의 지불을 거절하고, 결국 리처드를 따르던 충신들이 몸값을 치러서 귀국한 리처드는 의적 로빈훗의 도움으로 존을 몰아내고 다시 왕위에 복귀하게 된다.
◑ 십자군 원정의 본질
<제 4차 십자군의 전환> "여러분, 그리스는 매우 부유하고 모든 것이 풍요한 지역입니다. 만일 우리가 회복되도록 그 곳에 가서 그 지역에 있는 식량과 다른 물건들을 가져오는 데 합리적인 구실을 갖게 된다면, 그것이 나에게 는 좋은 계획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합법적인 후계자를 만났으므로, 여러분들이 찬성만 한다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 갈 수 있는 좋은 구실을 가졌습니다." (베니스 총독의 제안)
◑ 위클리프(Wycliffe, John, 1324∼1384) : 영국의 선구적 종교 개혁자로 옥스퍼드 대학 신학 교수로 1374년 국왕 사절단의 차석으로 브뤼주에서 교황측과 교섭하고, 귀국 후 널리 선교 활동을 벌이고 저작을 발표하여 국왕과 랭카스터공 존 오브 고요트의 비호를 받았다. 당시의 반 교황적 조류를 타고 교황에 대한 납세에 반대, 특히 교회 재산에 강렬한 공격을 가하여 [옥스퍼드의 꽃]으로 칭송되었다. 1378년 교회 분열(시스마)을 계기로 카톨릭 교의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또한 성서의 번역을 시작하여 이른바 [가난한 성직자]를 보내어 민중에게 복음을 전했다. 1379년 이후 [화체설(化體說)]을 부정하는 견해로 나아가고 특히 1381년의 와트 타일러의 난이 그의 설교에 기인하는 것이라 하여 대학과 귀족의 지지를 잃어 실의속에 물러났다. 1382년 그의 저술에서 뽑아낸 24개조가 이단이며 오류로 판정되었으며 그의 교설은 30년 후 후스 및 후스 전쟁으로 재연되었다.
◑ 후스(Hus, Jan 1369?∼1415) :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자로 빈농 출신인 그는 당시 보헤미아에 전파되었던 위클리프의 교설에 공명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비난하였다. 황제와 독일인에 대립하고 있던 보헤미아 왕 벤쩰과 체코인은 그를 지지하였으나 프라하 대주교는 1408년 이단의 설교를 금지하고, 이어 1409년 그가 대학 제도를 개혁하여 신제도의 총장에 추대되자 1411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1415년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위클리프의 설에 따라 신의 계시로서의 성서를 기본으로 하여 예정설을 취하였고, 교회의 토지 소유와 세속화를 비난하였는데, 그의 교설은 독일인과 교회의 압박으로 고통받는 체코인의 민족의식과 결합하여 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그의 처형후에도 후스파는 후스전쟁을 일으켜 반항 운동을 계속하였다.
◑ 혁신의 12세기 : 네덜란드의 역사가 호이징하는 12세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12세기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시대였다. 보통 르네상스라 부르는 몇 세기보다 1100년대의 한 세기 동안이 훨씬 많은 각성과 발전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12세기 들어서서 유럽세계는 이민족의 침입이 뜸해지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야금술이 전파되어 도끼와 칼로 숲을 자르고 개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목제 보습이 철제 보습으로 대치되어 밭을 깊게 갈아 땅을 기름지게 하였다. 또 소와 말을 경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어깨걸이 멍에가 개발되었고 철굽이 이용되었으며 물레방아가 크게 보급되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혁신을 통해 농업의 생산력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는데, 10세기까지 소맥 씨 한 알을 뿌려 세 알 정도를 수확하였던 것이 이때는 여섯 알에서 여덟 알까지로 증산되었다. 또 12세기에는 도시가 성립되고 상업이 다시 활기를 띠게된 때이기도 하였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서임권 투쟁이 일어나 그 결과로 교회법 연구가 왕성해졌고, 중세 대학이 발생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 중세 도시▶ 성립과 발전 : 중세의 도시는 처음 상인들이 모여 임시로 거주하며 장사를 하던 곳이었다. 이런 곳은 대개 로마 시대 이래 내려오는 고대 도시의 외곽지역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장사하기에 알맞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상인들은 임시 거주지 주변에 새로운 성곽을 쌓고 영구히 거주하며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부르주아라고 불리웠다. 처음에 도시는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영주는 시장세, 거래세, 통과세 등 각종 세금을 징수하였고, 또 도시가 생기면 땅값도 올랐기 때문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상인들은 영주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민이었지만, 주변 농촌에서 이주해 온 수공업자나 날품팔이 노동자는 여전히 농노 신분이었다. 이들은 상업 활동에 필요한 온갖 일들, 예를 들면 수레나 상자의 제조, 상품 견적과 수송에 종사했으며, 도시의 인구가 늘어감에 따라 제빵업자, 양조업자, 대장간, 또 푸줏 경영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상인과 함께 이들 수공업자들은 도시 주민의 핵심을 이루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날로 번창하자 도시민들은 영주의 불필요한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요구하였다. 도시인들은 돈으로 혹은 무력으로 자치권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신분의 자유, 영주가 만든 법이 아니라 도시법과 상법에 의해 운용되는 자신들의 재판소, 각종 세금과 봉건적 강제의 면제, 자치권을 따낸 도시인들은 문자 그대로 '자유민'이 되었다. 여기서 도시인이 누린 '자유' 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도 시의 집단적 자유이다. 중세 도시는 경제적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노예제를 기초로 하는 자유 시민들의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조직으로서의 고대 도시와 구별되는 점이다. 한편, 중세 도 시는 도시법을 지니는 특권 단체였으며, 성곽으로 둘러싸인 자유로운 영역이었다는 점에서, 근대 주권 국가의 지방 자치제로서의 도시와는 성격이 다른 봉쇄적인 지연 단체였다.▶ 성격 : 벨기에의 중세사가 피렌(pirenne)은 중세 도시를 정의하여 '둘러싼 성벽의 보호하에 살며' 특별한 법, 행정, 재판을 가지고, 그럼으로써 집단적인 특권적 법인체를 이루었던 상공업을 영위하는 자치 단체라고 하였다. 상인의 정주, 수공업자의 이주가 활발해졌어도 중세 도시는 애당초 행정·재판·군사 등에 걸쳐서 봉건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중심은 상인이며, 그들은 영주의 시장세·관세 등에 손해를 깨닫고 봉건 영주의 지배를 차차 압박적인 것으로 느껴서 여기에서 빠져나가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도시 인구의 증가, 시민 생활구의 성벽에 의한 구획 등으로 일반 시민 가운데서 공동체 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1, 12세기가 되자 경제력을 가진 시민은 상인 길드를 중심으로 도시민 전체를 보호, 규제하는 선서 공동체(〓콤뮨:Commune)를 형성하고 이것이 강력하게 단결하여 영주와 투쟁, 자치권(행정·재판·군사)을 획득했다. 이 결과 도시는 자유도시가 되고 농촌 사회에 우월하는「국가 중의 국가」라고도 불리는 독립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11∼13세기의 서유럽에 왕성하게 콤뮨 운동이다. 이 때 도시는 봉건 영주 위에 있는 지배, 즉 국왕이나 황제의 지배권을 배경으로 삼았고, 국왕이나 황제는 또한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강화하려고 생각하여 이들 제도시에 특허장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자치권을 획득한 도시는 차차 봉건 영주와 견주는 실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발전 형태는 주로 북구 도시에 현저하다. 여기서 발생하는 중세 도시의 자유·자치의 의식은「도시의 공기는 자유롭게 한다.(Stadluft macht frei) 」라는 속담에 단적으로 표현되어 도시 안에서는 점차 자유 로운 새 기풍이 진작되었다(장원에서 도망쳐 나온 농노라도 도시에서 '1년과 1일'을 넘기면 다시 붙들려 가지 않았다). 이것은 그 후의 유럽의 시민 의식과 근대 정신의 원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도시 특허장(Stadtprivilegien) : 중세 유럽에서 국왕 또는 영주에 의하여 도시 공동체에 주어진 특허장. 이것은 중세 도시에 있어서의 시민 자치의 법적 근거를 이루며, 도시법의 유력한 근원이 된다. 일찍이 존재하였던 특허장의 두가지 형태, 즉 독일의 여러 오토 황제들처럼 도시 영주에 대한 이무니테트권 부여의 형식을 취한 것과 직접 비크(상인 정주지)의 상인 단체의 특권을 인정한 것 중 후자가 발전한 것이다. 건설 도시의 이른바 건설 특허장을 제외하면, 그 기재 사항은 흔히 이미 성립되어 있던 정세의 확인이며, 예로부터의 관습법의 성문화라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그 구체적 내용이 국왕 또는 영주와 시민간의 역관계에 좌우되었음을 당연한 일이며, 시민의 투쟁도 궁극적으로는 도시 특허장의 획득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 도시 귀족에 대한 수공업자들의 투쟁 :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여러 도시 내에서는 상층 시민(도시 귀족)이 시정을 독점하고 일반 시민을 압박했기 때문에 13∼15세기에 걸쳐서 수공업 길드가 발달함에 따라 수공업자는 권리 획득을 위해서 시정을 독점하는 도시 귀족(상인 길드)에 대항하여 참정권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수공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종종 승리를 거두어 정권에 참여하였고, 때로는 권력을 모두 장악한 적도 있다. 많은 도시에서는 상인 길드가 중세 말 근세 초까지 특권을 유지하여 수공업자 길드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1301년 5월 필리프 왕은 새로 군림하는 왕으로서 플랑드르 지방을 순회하였다. 왕이 강(겐트)시에 들어서자, 일반 시민들은 재빨리 몰려들어 왕에게 소리치며, 강과 브뤼주에서 상품에 대한(특히 맥주와 봉밀주(蜂密酒)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강의 시민들은 이것을 "사악한 세금"이라 불렀고, 브뤼주 사람들은 '법정 가격' 이라 불렀던 것이다. 왕은 아우성치는 시민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도시 귀족들은 매우 못마땅하였다. 그들은 브뤼주에서 그러했지만, 그 혹독한 세금에서 많은 이익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강을 떠나 브뤼주로 갔다. 브뤼주의 도시 귀족들은 시민들에게 강에서 처럼, 왕에게 몰려들어 세금의 폐지를 요구하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을 말하였다. 이에 시민들이 노하여 이 도시에서는 더 큰 소란과 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를 선동한 자는 한 직포공과 그의 몇몇 지지자였다. 브뤼주 도시 귀족과 시정관의 지시에 따라, 치안관이 그 직포공 외에도 약 25명의 주동자를 구금하였다. 이 소문이 시민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격분하여 모의한 끝에 간수를 위협하여 옥문을 열고, 그들의 동료를 무사히 구출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소란은 잠시 가라 앉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도시 귀족들의 악의에 의혹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1302년 격렬한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의 피를 보게 되었다.
◑ 길드(Guild) : 도시의 시민들은 길드라 불리는 직업별 조직으로 편성되어 장인, 직인, 도제로 나누어지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세워져 있었다. 길드는 중세 도시의 내부에 있어서 도시의 경제적 발달, 자치권의 확대, 시정의 운영 등에 중심적 역할을 한 상공업자의 단체로 그 성격은 자신과 그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할 목적을 갖는 것으로서 조합원의 상호 부조, 가격의 통제, 생산 제한 등의 규정이 있었다. 도시의 자치는 상공업자로 구성된 길드에 의해 추진되었다. 상인 길드는 이탈리아에서 매우 일찍 발생하였지만,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은 12세기 이후이며, 중세 도시의 길드는 먼저 상인 길드에서 시작되어 이것이 시정의 중심이었던 연유로 해서 시민 전체를 규제하고 있었으나, 수공업자의 증가에 따라 그들이 상인 길드의 지 배와 투쟁하여 동일 직종별로 결속되는 수공업 길드(쭌 프트)가 된다. 길드는 본디 조합원 상호간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었는데, 생산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점차 증가하는 일반 수공업자의 생산을 저해하는 것이 되어 사회 발전에 마땅치 않은 것이 되었다. 이 점에서 자유·자치를 표방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봉건 체제에 의존하고 있었던 길드의 한계를 보아야 할 것이다.
◑ 도제 제도(徒弟制度: System of the Apprenticeship) : 서유럽 중세의 동직 조합의 내부에 존재한 도장인(都匠人)-장인(匠人)-도제(徒弟)의 계층 조직에 따라 도장인과 도제의 관계를 규정한 제도. 장인·도장인을 지망하는 자는 도제로서 도장인과 수업 계약을 맺고, 수업료를 지불하고 입문하며, 도장인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작업하며 기술을 습득함과 동시에, 그 가정의 잡무도 돌보게 된다. 도장인은 도제에게 일상의 의식과 약간의 용돈을 주고, 기술 지도뿐만 아니라 도덕상의 감독에도 전책임을 졌다. 한 사람의 도장인이 갖는 도제의 수는 1∼2명으로 제한되어 있었으며, 도제 연한은 보통 10세 전후에 시작하여 7년 정도이며, 이것이 끝나면 장인이 되었지만, 15세기에 장인의 도장인으로의 진출이 저지된 이후는, 후계자 양성이란 이 제도의 본래의 뜻도 없어졌다.
◑ 객주 제도와 매뉴팩처 : 원거리 무역이 활발함에 따라 특권 상인이 발생하였는데, 이들은 해외 무역에서 돈을 모아 상업 자본가가 되었다.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수출할 상품이 요구되었으나, 길드 제도 하에서는 수요를 채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농한기의 농민들에게 도구와 원료를 대어주고 상품을 생산하게 하는 객주제 (putting-out system)가 등장하였다. 그 뒤에는 주장을 비롯한 기술자들을 채용하여 분업과 협업을 통해 상품 생산을 하는 매뉴팩처(manufacture)가 발생하였다.
◑ 레반트 무역 : 10세기의 상업의 부활에서 16세기의 신항로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동방과의 무역을 말한다. 레반트란 이탈리아 어의 태양이 뜨는 지방, 즉 동방을 뜻하는 말이다. 이탈리아는 고대 이래 동방과 유럽의 교통의 요지로서 큰 비중을 가졌으며, 베네치아, 라벤나, 아말피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관계로 중세를 통하여 레반트 무역이 발전하였다. 특히 베네치아는 십자군을 계기로 피사와 제노바를 누르고 동방무역을 독점, 알렉산드리아, 트레비존드에 1년에 2회의 무역선단를 보내어 동 인도산의 향로 및 기타의 사치품과 유럽에서 가져간 모직물·은등과 교환하여 이를 전 유럽에 전매하여 폭리를 취하였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서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과 영국, 피렌체의 레반트 무역에의 가담으로 베네치아의 독점은 무너졌으며, 1498년 바스코다가마의 신항로 발견에 의한 동인도 무역의 등장으로 완전히 그 의의를 상실하였다.
◑ 한자 동맹(Hanza Bund) : 한자란 상인 조합이라는 뜻으로 북해, 발트해 연안의 북유럽의 도시가 상업상의 목적으로 14세기에 결성한 동맹이다. 뤼벡을 맹주로 한 북부 독일의 도시들이 지도적 역할을 한 관계로 독일 한자라고도 한다. 12세기 초엽 이래 독일의 도시 상인들은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영국, 네덜란드 등지로 진출하여, 공동의 이익을 옹호할 목적으로 외지 한자를 결성했는데, 13세기부터는 본국 도시 사이에도 동맹 결성의 기운이 일어나, 14세기 중엽 폴랑드르에 있어서의 독일 상인에 대한 압박을 계기로 하여 외지 한자와 본국 도시를 포함하는 동맹 조직이 확립되게 되었다. 동맹은 가맹 도시 상인의 외국과의 거래를 보호, 촉진하고, 외지에서의 특권의 확보 및 확장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최고 지도 기관인 한자 회의는 3 년마다 뤼벡에서 개최하여 상품 보호의 수단, 전쟁과 조약의 협의, 해륙로의 보호와 확보 문제, 특권 획득의 문제 및 화폐 도량형에 관한 공동 규정을 토의하였다. 이리하여 유럽 북반의 통상을 독점하고, 해군도 보유하여 봉건 제후·국왕 등과 대항할 만큼의 위세를 드러내었고 14∼15세기에는 동맹 도시가 100개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노브고로드, 런던, 브뤼지, 베르겐 기타의 중요 상업 근거지에 재외 상관(在外商館)을 가지고 있었으며, 활동 범위는 우랄 산맥에서 북대서양에 이르는 유럽 대륙의 북반부 전역에 걸치는 독점적 상권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국제적으로는 근세 국민 국가의 중상주의적 발전, 신대륙의 발견,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동맹 내부의 대립 격화, 독일 제 영방에 의한 영방내 도시의 압박 등으로 점차 약체화하여, 30년 전쟁으로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해산되었다.
◑ 코뮌(Commune) : 11세기 말에서 12세기에 걸쳐 중세 도시 운동의 과정 중에 발생한 주민의 서약 단체. 코뮌 운동은 프랑스에서는 먼저 플랑드르의 캉브레에서 시작되었으며(1070), 12세기에 프와투로부터 일드 프랑스를 사이에 끼고 피카르디에 이르는 북프랑스 일대에 집중적으로 코뮌을 성립시켰다(랑, 아미앵, 스와송 등). 이는 당시의 사회적 변모에 합치되지 않는 영주권을 배제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에 바탕을 두고, 철저한 단결과 상호 부조를 서약한 주민의 공동체이며, 왕 또는 영주의 인가에 의하여 독립된 시장과 시 참사회원을 선출하여, 그 밑에 재판 기관을 구성하고, 스스로 영주권과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프랑스 중세 도시 중에서도 코뮌은, 이와 같은 점에서 남부의 집정 도시, 중부 내지 서부의 해방 도시로 구별된다. 카페 제왕 중 특히 필립 2세는 코뮌 운동을 보호하여, 다른 영주권을 견제하려고 하였는데, 1214년 부빈 싸움에서의 코뮌군의 활약을 정점으로 하여 이 운동은 급속히 쇠퇴하고, 루이 9세는 도시에 자유를 부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앙 집권 정책에 의하여 도시에 간섭하였다. 게다가 도시 귀족에 의한 과두 정치가 일반화하면서부터, 중세 코뮌은 100년 전쟁의 참화 속에 매몰되어 갔다. 프랑스 혁명중에 나타나는 코뮌은 중세 코뮌의 폐지 후에 성립한 시민의 혁명적 자치 조직이었다.
◑ 메디치 가(Medici) : 중세 말기, 또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피렌체의 금융업자이다. 14세기부터 무역·금융업으로 큰 이익을 얻었고, 15세기에 들어서자 코시모 데 메디치 때에 최성기를 맞았다. 또한 영국 왕·프랑스 왕· 로마 교황 등에 막대한 대부를 하고 민간에는 자선을 베풀고 문예를 보호하여 르네상스의 개화를 가져 왔다. 또한 교황 레오 10세·크레망스 7세를 그의 가문에서 배출했는데 16세기가 되자 제국의 이탈리아 간섭이 심해지고 메디치 가의 집안 싸움도 있고 해서 쇠퇴했다.
◑ 후거 가(Fugger) : 중세 말기에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의 대상이다.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친 야콥 후거 때에 전성기를 맞아 유럽 각지에 광산을 소유하고 동양과의 사치품 무역으로 거액의 부를 쌓았다. 이 재력을 가지고 신성 로마 황제·로마 교황을 비롯하여 각국에 융자하여 때때로 유럽의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을 보였다. 그러나 그 경영은 투기적 이윤 획득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멕시코 은의 수입으로 비롯되는 유럽 가격 혁명이나 16세기에 거액을 빌려간 에스파니아 국고의 파산 등으로 인해서 몰락했다.
◑ 동양과 서양의 교차점 콘스탄티노플 -세계무역의 중심지
성소피아 사원의 둥근 지붕이 높이 솟은 콘스탄티노플 거리는 골목안에는 대상들의 숙소나 시장 그리고 광장에는 유럽과 아시아 등 곳곳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대며 온갖 언어로 거래를 하였고 상인들의 창고에는 이국의 생산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거리에는 곱슬머리 아프리카 흑인, 황색 피부의 타르타르 인, 거무튀튀한 이집트 인, 백척장신의 영국인 등이 터키인, 유태인, 아르메니아 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었다. 아라비아 상인은 중국의 비단과 보석, 인도의 진주, 향료, 조미료 그리고 페르시아와 러시아의 비단과 융단을 가지고 들어왔고 러시아 상인은 북구와 흑해를 잇는 이른바 바랴기 길을 통해 가죽, 모피제품, 노예를 가지고 들어왔다. 세르비아 인, 불가리아 인은 아마와 절인 생선, 곡물을, 또 이탈리아 상인은 아마포와 스페인 융단을 가져왔다. 그들은 서로 상품을 교환하는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사치품―견직물, 보석세공을 요구하였다. 동양과 서양의 교차점 콘스탄티노플은 그러한 활발한 무역에 의해 세계의 모든 민족과 종족, 상인들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 14세기 전반 피렌체의 번영
매일 소비되는 빵의 양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피렌체 시내에는 부인, 아이를 합쳐 9만 명의 인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 여행자, 군인 등은 1,500명으로 추정된다. …… 읽기가 가능한 아이들도 8,000명에서 만명에 달한다. 또한 6개의 학교에서 산술이 가능한 아동들은 1,000∼1,200명 정도이며 4개의 큰 학교에서 500∼600명의 학생들이 문법과 윤리를 배우고 있다. ……양모조합의 점포는 200개가 넘고 12만금 플로링에 해당하는 7∼8만 반(피륙단위)을 취급한다. 양모공업 노동자의 몫을 별도로 하더라도 이 총액 중 3분의 1은 피렌체 노동자의 수입이 되며 이것은 3만이 넘는 인구의 생계를 유지한다 …… 환전상은 80 군데가 있다 …… 재판소는 80곳이며 …… 내과의와 외과의를 합쳐서 60명의 의사가 있다. 향료점은 100여 개를 헤아리며 상점과 시장의 수는 무수히 많다.
◑ 흑사병 : 흑사병은 페스트의 일종으로 폐에 병균이 침입하는 폐 페스트를 일컫는다. 일단 감염되면 별안간 고열이 치솟고 피를 토하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정신을 잃는다. 대개 발병한 지 24시간 내에 사망하고 마는데, 사망 직전에 환자의 피부가 흑색 또는 자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리었다. 페스트의 발병원인은 물론 치료법도 몰랐던 당시 사람들은 갑자기 쓰러져 헛소리를 하다가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환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흑사병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가리지 않고 생명체는 닥치는 대로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에 싸여 하나 둘 도시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병균이 떠다니는 공기를 직접 대하지 않으려고 흰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흑사병에 대한 공포는 삶들을 광기와 미신에 사로잡히게 했다. 어떤 사람은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약초를 태우거나 나무의 액을 구해서 마셨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고 믿으며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파리 대학 의학부는 토성과 목성이 겹치는 천체 이변의 결과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사람들은 난폭해졌다. 누군가 물에 독을 탔기 때문에 흑사병이 생긴 거라는 소문이 나돌자 사람들은 그 범인으로 유대인을 지목했다. 유대인은 이교도인데다가 상술이 뛰어나 돈을 너무 잘 벌었기 때문에 평소부터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생매장당하거나 산 채로 불 속에 던져졌다. 미신과 사이비 종교 집단이 활개를 쳤다. 신이 노한 탓이라면서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알몸으로 찬송가를 부르며 십자가와 못이 박힌 가죽 채찍을 들고 마을과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살점이 찍히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의 알몸뚱이를 채찍질해댔다. 이 사이비 종교 집단은 흑사병과 함께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등지로 퍼져나갔다. 온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은 1348년을 고비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 인구는 3분의 1로 줄어들어 있었다. 유럽 인구가 흑사병 이전의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때 죽어갔는지 알 수가 있다.
◑ 농민 반란의 배경 : 화폐 경제의 등장은 장원에도 영향을 주어 시장에 판매하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영주들이 농민으로부터 부역대신 현물이나 화폐로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써 농민은 부역의 의무에서 해방되었으며 농산물의 가격이 오르고 화폐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서 그만큼 농민의 부담이 줄어들어 경제적 지위가 향상 되었다. 이들을 독립 자영 농민이라 하는데 토지, 농기구, 가축 등 농업상의 생산 수단을 소유함과 동시에 스스로 농업 생산에 종사하였다. 영국의 요우먼(Yeoman), 프랑스 라부뢰르 (Laboureur). 서남부 독일의 바우어(Bauer)등이 그 보기이다.
◑ 자크리의 난(Jacguerie ;1358) : 백년 전쟁 중 북프랑스에서 일어난 농민 폭동으로 당시의 프랑스 농민에 대한 별명인 자크에서 유래 한다. 폭동의 직접적 동기는, 백년 전쟁으로 인해 농토는 황폐하여졌고, 농민을 보호하지 못한 귀족에 대한 불만도 큰 데다, 귀족의 지휘하에 있는 기사들은 농촌을 약탈하였으며, 또 귀족이 포로가 되면 그 대속금을 농민이 부담해야 하는 실정에서 귀족에 대한 농민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1358년 5월 28일 피카르디의 생뢰 수도원에 주둔한 기사군을 부근의 농민들이 습격함으로써 반란은 시작되어, 영주의 성곽을 공격 목표로 삼아, 삽시에 북프랑스 일대로 확대하였다. 한때는 당시 파리에서 일어났던 마르셀의 반란과 제휴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에 갈라졌고, 그 후 자크리는 보베의 클레르몽을 공격하다 실패하여 그 수령 카이예는 참수당하고, 이후 자크리는 각지에서 격파당하여 2주만에 진압되었다. 이 때 귀족의 보복은 잔학이 극에 달하여 약 300명의 농민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 와트 타일러의 난(1381) : 영국의 고전 장원제에 반항한 농민 폭동. 13세기 이래의 봉건적 착취와 농노제에 반항하는 농민들의 도피 및 흑사병에 의한 일시적인 인구 감소는 농업 노동력 부족을 초래하여, 영주의 국영지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반면에 농민은 생산력의 발전과 노동 조건의 호전으로 농노제 폐기를 위하여 고전 장원제에 대한 계급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영주는 직영지 경영 유지를 위한 이른바 봉건 반동을 강화, 국가 권력을 매개로 하여 노동자 조례를 실시하는 등 더욱 계급적 모순을 드러내니 1380년 부당한 인두세 징수를 계기로 노동에 의존하던 부농층과 하층 영주의 지도하에 농민들의 대 폭동이 일어났다. 또한 1381년 5 월 웨섹스에서의 농민의 징세 거부에서 발단하여 타일러 J. 볼의 지휘하에 런던 시민과 합류한 농민들 은 런던을 점령하여 대법관 서드베리를 처형한 다음, 마일 앤드에서 국왕 리처드 2세와 회견하고 농노 제 폐지, 상거래의 자유, 고정 지대 4펜스를 주장하여 이를 인정하게 하였다. 이로써 대부분의 농민들은 만족하여 귀향하였으나 타일러에 의해 인솔된 켄트, 웨섹스, 런던의 반란군은 농노제의 완전한 폐기를 요구하여 재차 스미필스에서 국왕과 회견하고 탄압적인 법령의 폐지, 교회령의 몰수와 이의 민중에의 분배 및 전 농노의 자유화를 요구하였으나, 교섭중 타일러가 피살되면서 폭동은 진압되었다. 이 폭동은 비조직성으로 인해 실패하기는 했으나 영국 농노제 폐지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 존 볼(John Ball ;?-1381) : 영국의 성직자이며 워트 타일러의 난의 사상적 지도자. 난이 일어나기까지 약 20년간 널리 민중에게 설교하여「켄트의 미치광이 성직자」라고 불렸다. 워트 타일러의 난 당시에도 옥중에 있으면서 무장 봉기를 주장하였고, 반란군에 의하여 옥에서 구출되어 런던 진격을 앞두고는,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길쌈할 때 어느 누구가 귀족이었겠는가?」고 부르짖어, 농민에게 혁명적 평등 사상을 고취시켰다. 반란이 실패한 후 체포되어 국왕 리처드 2세의 면전에서 처형되었다.
(2)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 유럽 세계의 팽창 : 유럽 세계는 여러 차례에 걸쳐 대외적 팽창을 시도하였다. 첫번째는 중세 전성기인 11∼13세기의 대외 팽창의 기운이다. 동유럽에서는 독일 인들이 슬라브 족을 압박하면서 동방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크리스트 교도들이 이슬람 교도에 대항하여 재정복 운동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로마 교회와 봉건 영주들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교황권의 신장과 결합하여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다. 두번째는 15세기 말부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나, 대양을 향해 진출하였다. 신항로의 발견과 세계 일주를 통하여 유럽 인들의 세계관을 크게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번째는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유럽은 후진 지역인 아시아, 아프리카에 무력을 앞세워 식민지 진출을 자행하였다.
◑ 프랑스내 영국령 : 영국은 중부 이남의 잉글랜드, 북쪽의 스코틀랜드, 서남쪽의 웨일즈 그리고 북 에이레등 4개의 서로 다른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다(남 에이레는 1921년 영국으로부터 독립). 인종은 게르만 족 계통으로 노르 만 족(바이킹), 앵글로 족, 색슨 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원전 2400년경 켈트 족이 건너와 정착하였으며 기원전 55년 로마의 케사르가 정복하여 라틴 문명을 접하게 된다. 이후 게르만 족의 일파인 색슨 족과 앵글로 족이 잉글랜드 지역을 점령하고 켈트 족은 북쪽으로 쫒겨가게 된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하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는데(윌리엄 1세) 이때부터 프랑스와 영국은 왕과 신하의 관계가 되었다. 윌리엄 1세에게는 세 아들(로버트,로푸스,헨리)이 있었는데 둘째인 로푸스에 이어 막내인 헨리가 왕이 되었다(헨리1세). 그런데 헨리에게는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딸 마틸다를 프랑스 인 앙쥬 공과 재혼시켜 그 사이에 태어난 왕자 헨리 플란타지네트가 헨리 2세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플란타지네트 왕조:1154-1485). 헨리 2세는 19살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왕비 엘레노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엘레노아는 루이 7세와 이혼하고 헨리와 결혼하게 된다. 엘레노아는 결혼 선물로 자기 앞으로 소유 가 되어 있던 남 프랑스의 엄청난 땅을 영국에 가져오게 되어 헨리 2세는 영국, 노르망디, 앙주, 남프랑 스 등을 합쳐 프랑스 왕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되어 프랑스에 대항하게 된다.
◑ 리처드와 존 : 헨리 2세에게는 리처드와 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는 막내 존을 더 사랑하여 존에게 더 크고 좋은 땅을 물려 주려고 하자 리처드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산속으로 쫒겨난 왕은 존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존은 형인 리처드 편에 서서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왕이 된 사자왕 리처드는 재위 10년중 본국에 있던 기간은 6개월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쟁터에서 보냈다. 리처드는 즉위한 다음해부터 시작된 제3차 십자군 원정에 8천 명의 병사와 100척의 배를 동원하여 참가, 성지 예루살렘 주변에서 이 트 왕 사라딘과 용감하게 싸워 '사자왕(Lion Hearted)'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던 중, 본국에 있던 동생 존의 왕위 찬탈 음모를 알아차리고 사라딘과 화해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도중에 오스트리아 공에게 붙잡혀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존과 패거리 귀족들을 진압한 후 프랑스내의 영국령을 노리는 프랑스 왕과 싸우기 위하여 프랑스로 향했으나 거기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중세 기사도 이야기『아이반호』는 그를 기사도의 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왕으로서의 정치적 수완이 결여된 일개 무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어 동생 존이 1199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그렇다고 형처럼 모험심과 용기도 없던 존 왕을 신하들이나 백성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이 기회에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존 왕에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켜 결국 존 왕은 많은 프랑스내 영국 땅을 잃어 버리고 교황에게 파문까지 당하게 된다. 이러한 존에게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고 그것을 문서화하여 승인하게 했는데 힘없는 왕은 분노에 떨며 서명을 했다. 이것이 대헌장(마그나 카르타:1215)으로 이 문서는 봉건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영국 입헌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존 왕은 다음해인 1216년 세상을 떠나고 9살짜리 헨리 3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1215) : 잉글랜드 국왕 존이 귀족들의 강제에 못 이겨 승인한 특허장. 대헌장이라고 번역한다. 성립의 계기는 왕의 폭정에 의한 봉건적 관습의 무시와, 중과세에 대한 귀족의 반항으로 시작되었는데, 특히 왕이 1214 년 프랑스의 구영토 회복을 위하여 제후에게 군역과 군역 대납금을 부과함으로써 귀족의 불만을 샀다. 귀족은 종군을 거절하고 국왕에 대한 충성을 파기하였으며, 런던 시민과 함께 왕을 공박하여, 이듬해 6 월 15일 러니미드에서「귀족들의 조항」에 조인케 하였다. 전문 63개조로 되어 있으며, 그 주된 조항은 교회의 자유(1조), 봉건적 부담에 있어서의 상속료의 제한(2·3·43조), 후견권 남용의 방지(3∼5조), 어용금의 제한, 군역 대납금 및 어용금은 봉신 회의의 의결 없이 징수할 수 없음(12조), 법적 재판에 있어서 벌금의 제한(20∼22조), 장원 재판소의 권리 침해의 금지(34조), 순회 재판의 제한(18, 19조), 인신의 자유(39조), 런던 기타 도시 특권의 확인(12·13조), 도량형의 통일(35조), 직권 남용의 징발 제한(28·30 ·31조), 엽림 재판관의 권한 규정(44조), 이 특허장의 준수를 감시할 25명의 귀족 위원회의 구성(61조) 등이었다. 그 내용으로 볼 때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농노의 권리는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로써 자의적인 왕권에 대한 법의 지배 원칙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시대가 흐름에 따라 많은 조항에서「인민의 권리와 자유」의 이념이 추출되어「자유의 성전」으로 이상화되었다. 그리하여 이 마그나 카르타는 특히 근대 영국 헌법의 제 원칙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데 깊은 의의가 있다.
귀족 성직자들이 국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을 파기하고 국왕을 압박하여 대헌장을 승인시켰다.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 국왕, 아일랜드 왕, 노르망디공, 아키텐공, 앙주백인 존은 대주교,주교, 수도원장, 백, 그 밖의 귀족, 재판관, 주지사, 모든 대관 및 신하에게 분부하노라]
1. 짐은 영국 교회가 자유로우며, 그 권리를 축소시키거나 침해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신의 이름을 빌 려 또한 짐의 특권에 의하여 영구히 확인한다. 12. 어떠한 면역전이나 보조금도 협의에 의하지 않고는 짐의 왕국에서 부과되지 될 수 없다. 다만, 짐 의 포로 석방금, 장자의 기사 서임이나 장녀의 혼인 축의금은 예외로 한다. 13. 런던시는 육상으로나 수상으로나 그 예로부터의 자유와 자유로운 관세 모두를 유지한다. 34. 자유민은 합법적 재판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 구금될 수 없다.
◑ 신분제 의회 : 고위 성직자와 귀족, 도시 대표로 구성된 의회를 말한다. 성직자와 귀족은 국왕의 전제권을 견제하였으며, 시민은 국왕의 자의적 과세권을 구실로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영국 의회, 프랑스의 삼부회, 에스파냐의 코르테스가 모두 신분제 의회이다.
◑ 시몽 드 몽포르 의회 : 헨리 3세는 프랑스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사사건건 참견하는 영국의 귀족들을 멀리하고 처가인 프랑스 사람들을 대거 등용하여 교황의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대헌장을 무시하고 전횡을 하였다. 이 에 귀족들은 대헌장의 준수를 요구하게 되고 헨리 3세는 30년 동안 7번이나 이를 준수할 것을 약속하였 으나 번번이 약속을 어기자 결국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반란 세력의 대표는 시몽 드 몽포르였는데 그는 헨리 3세의 매부로 프랑스 인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그는 각 주와 자유도시에서 선출된 2명씩의 대표들로 의회를 구성했다(시몽 드 몽포르 의회: 1265). 이것이 영국 국회의 탄생이다.
◑ 모범 회의(1295) : 헨리 3세가 죽고 이어 즉위한 조카 에드워드 1세는 프랑스와의 전쟁과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와의 제휴 에 대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주 이상 귀족과 수도원장을 포함한 고위 성직자, 그리고 각 주에서 2명씩 기사와 자치도시에서 2명씩의 시민 대표를 선거에 의해 소집하였다. 14세기 중엽에는 제후, 성직자, 도시 대표자로 구성된 상원과 기사, 시민으로 구성된 하원의 양원제가 성립되었다.
◑ 백년 전쟁(1339∼1453) : 영국 프랑스간의 싸움. 노르망디공 윌리암이 영국을 정복한 뒤 영국은 200년이 넘는 동안 신하의 나라로 사사건건 참견을 받아야 했다. 영국은 이러한 완전히 관계를 끊고 당당히 1대 1로 맞서고자 하였으며 플랑드르에 대하여 왕권의 신장을 기도하는 카페 왕가(프랑스)와 프랑스의 영토를 확보하여 경제적으로 플랑드르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플란타지네트 왕가(영국)의 대립이 전쟁을 유발하게 되었다. 플랑드르(프란더스)는 프랑스 북부 지방으로 당시 옷감을 짜는 기술이 없던 영국이 양털을 수출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프랑스 왕이 이곳에 많은 세금을 과세하자 플랑드르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려고 영국을 끌어들였다. 때마침 1328년 카페 왕가(987-1328)가 단절되자 영국 왕 에드 워드 3세는 그의 어머니가 카페 왕조 가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발루아 왕가(1328-1589)의 필리프 6세에 대항하여 자기의 카페 왕가 상속권을 주장하고 이를 구실로 하여 전쟁을 개시했다. 전후 3차에 걸친 이 전쟁은 간헐적으로 100여년간 계속되었으므로 백년 전쟁이라 불리어진다. 서전에서 프랑스는 에클뤼즈의 해전에서 완패(1340)하고 크레시의 싸움에서 대패(1346), 또 1356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패하여, 국왕 쟝 2세가 포로가 되었다. 프랑스는 거듭되는 전란과 흑사병의 맹위로 극히 피폐되었으며 태자 샤를은 파리의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자크리의 농민 반란(1358)을 진압한 후 겨우 영국과 브레티니의 화약을 맺었다(1360). 즉위 후 샤를 5세는 군제 개혁과 왕실 재정의 강화에 노력하고 아키텐 귀족의 반항으로 동요하는 영국에 대하여 공세로 나가 그의 치세 동안에 거의 실지 회복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1380년 그가 죽은 후 국정은 재차 문란해지고, 더우기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악화된 데다 왕족 제후의 대립이 아르마냐크 파와 부르고뉴 파의 항쟁으로 발전하여 국내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1415년 노르망디에 상륙, 아쟁쿠르의 싸움에서 아르마냐크 군을 격파하고, 1420년 트르와 조약에 의해 샤를 6세로부터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획득하였다. 그 후 1422년 헨리 5세,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헨리 6세는 소위 영·프 복합 왕국의 왕호를 칭하고 공세를 강화했으나 한편 샤를 7세는 위축되어 전혀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429년 쟌 다르크가 출현하여 포위된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이래, 프랑스 군은 마침내 공세로 나아가 1435년 부르고뉴 공과의 화약이 성립되고, 다음해 파리를 탈환하였으며 이어서 포르미니(1450), 카스티용(1453)의 회전에서 대승하여 칼레를 제외한 전프랑스 영 토에서 영국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에서는 상비군의 창설, 왕실 재정의 확립, 제후 세력의 억압 등으로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영국에서도 이 전쟁 직후에 일어난 장미 전쟁 때 겨우 절대주의 왕권이 성장하여 두 나라는 모두 중앙 집권적 국가로서의 단서가 열리게 되었다.
◐ 쟌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 : 백년 전쟁 말기의 프랑스를 영국으로부터 해방하는 데에 공헌한 애국 소녀. 프랑스 동북부 로렌주 남부의 동레미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카톨릭 신자로서 경건한 생활을 하였다. 13세에 「프 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아, 1428년 뜻을 굳히고 근처의 보쿨뢰르 수비 대장을 설득하여 그의 원조로 시농의 샤를 7세에게로 갔다. 왕과 만나 신의 계시를 전하여 그의 정통성을 확신시킨 후 1429년 5월 군대를 얻어 영국군을 도처에서 격파하여 오를레앙의 위기를 구출하고, 또 파테에서 승리하여 동년 7월 랭스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게 하는 기적적 분투를 하였다. 그러나 국왕 측근의 질투와 배신으로 1430년 5월 콩피에뉴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자, 영국 세력하에 있던 파리 대학 신학부는 그를 '마녀' 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했다. 여자인 잔 다르크가 남장을 하고 전투의 선봉에선 사실이 바로 마녀라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용감한 잔 다르크도 죽음 앞에서 마음이 흔들려 재판정에서 참회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하지만 며칠 후 자신의 연약함을 후회하고 다시 화형대에 섰다. 그의 육신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오르고 뼈는 센 강에 뿌려졌다. 그녀의 활약은 당시 겨우 싹트기 시작한 프랑스의 민족 의식과 카톨릭 신앙을 통일적으로 구현시킨 것으로서, 이후 애국적인 영웅으로서 민중의 존경을 모으게 되어 백년 전쟁 직후, 복권 소송이 제기되어(1455∼1456) 1920년에는 성렬(聖列)에 올랐으며, 그녀의 제사는 매년 5월 국민적인 제전으로서 행해지고 있다.
◑ 마녀 사냥 : 마녀 사냥이 일어난 시기의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마녀 사냥은 구질서의 대표적 지도층인 교황과 성직자, 봉건 영주, 귀족, 왕의 부추김에 의해 전 유럽에 퍼져갔다. 이들은 당면한 사회적 혼란상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했고, 천 년 동안 지켜져 온 사회 질서를 보존해야 했으므로, 기존 질서를 어그러뜨리거나 전통의 가치관과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은 모두 '이단' 이요 '마녀' 라고 선언했다. 1484년 교황 이노센트 8세는 다음 같은 교서를 발표했다. "근래 북부 독일과 라인 지역에 많은 남녀가 신앙으로부터 일탈하여 마녀가 되어 갖가지 요사스런 마술에 의해 논밭의 작물이나 과실을 시들게 하고 태아나 가축을 죽이고 남편을 성적 불능으로 만들고 아내를 불임하게 하는 등 많은 사람들의 재난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우리들은 큰 슬픔과 고통으로 듣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문관이 자유롭게 모든 방법을 다하여 누구라도 교정하고 투옥하고 처벌할 권한을 지녀야 함을 명한다." 이 교서가 발표된 후 유럽은 마녀 콤플렉스에 걸린 것처럼 마녀사냥에 나서게 되는데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약 3백 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 3백여 년 동안 마녀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된 사람의 수는 무려 30여만 명에 달한다. 마녀의 죄목을 보면,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악마 연회에 참석한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맞춤을 한 죄, 악마와 성교를 한 죄, 이웃의 암소를 죽인 죄, 우박을 불러온 죄, 농작물을 망친 죄,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 먹은 죄……마녀는 이웃의 밀고와 떠도는 소문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마녀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웃을 고발했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돈 문제가 얽힌 경우도 흔했다. 일단 마녀로 체포되면 성직자들이 재판을 한다. 피고는 자신이 정말 마녀라고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받는다.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백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마녀라는 증거요, '마녀란 세상에 없다'고 마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 또한 이단으로 간주되어 마녀의 증표가 되었다. 고문에 못이겨 자백을 하면 이번엔 같이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대라고 고문하며, 처음 자백을 번 복하면 다시 고문이 시작된다. 그래서 한번 마녀로 체포된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란 고통을 덜 받고 화형대에 서느3? 아니면 몇 번이고 고문을 당하느냐 둘중의 하나였다. 고문 방법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문과 자백이 끝나면 재판정에 선다. 자백서가 낭독되고 수사관이 묻는다. "XXX는 자유 의지에 따라 고문에 의해 자백한 사실들을 인정하는가?" 그런 다음 최종 판결이 내려지고 그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진다. 마녀 사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귀족과 교회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흉년, 굶주림, 질병, 아이들의 죽음, 서민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은 바로 마녀의 소행이며 못된 마녀를 잡기 위해 애쓰는 교회와 국가는 성스럽고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바로 여기에 마녀 사냥의 감춰진 비밀이 있다. 마녀는 무너지는 중세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봉건 귀족과 성직자들이 찾아낸 대리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마녀는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돌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집중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종교적 작품이다. 지방 관리와 성직자들을 마녀 사냥에 적극 끌어들이기 위해 관리에게는 마녀로 기소된 사람의 전 재산을 몰수할 권리를 주었으며, 마녀로 기소된 사람의 가족은 재판관들의 연회 비용과 화형용 나무 값을 모조리 내게 했다. 한편 마녀 사냥에는 중세의 뿌리 깊은 성차별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1562년부터 1684년까지 독일 남서부에서 일어난 1,258건의 마녀 처형 사건중 82%가 여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마녀로 지목된 여자들은 대개 눈에 잘 띄는 남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못생겼거나 너무 예쁘거나, 성품이 못되었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거나, 병을 잘 고친다든지 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거나, 혹은 남편 없이 혼자 사는 과부거나. 어떤 의미로든 사회적 일탈자였고, 가난한 하층계급의 여성이었다.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든지 훙년이 든다든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누군가 '마녀가 우리 마을을 해치려 한다' 고 소문을 내고, 그러면 마을 전체는 마녀 사 냥 열풍에 휩쓸리는데 그때마다 주로 혼자 사는 과부, 가난한 중년 여인이 희생물이 되었다. 과부의 경 우, 남편이라는 사회적 보호막이 없기에 희생물로 삼기가 쉽고, 과부〓사회적 일탈자라는 의식이 일반적 이었기 때문이었다.
◑ 장미 전쟁(1455∼85) : 백년 전쟁 직후 영국에서 일어난 내란으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랭카스터 가(붉은 장미 문장)의 헨리 6세와 요크 가(흰 장미 문장)의 리차드 간의 분쟁이었다. 튜더(Tudor) 가문은 북웨일스에서 일어난 지방 지주의 가문이다. 헨리 5세의 왕비 캐서린을 섬겼던 오언 튜더가 헨리 5세가 죽은 뒤 캐서린과 결혼함으로써 랭커스터 가문과 연결됐다. 오언은 본래 왕비를 호위하던 기사였다. 헨리 7세(재위 1485∼1509 년)는 이 오언과 캐서린의 손자로 태어났다.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 군을 무찌르고 영국 국왕이 됐으며, 그의 즉위를 도왔던 요크 파의 협력자들과의 약속을 따라 1486년에 에드워드 4세의 큰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이로써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결합이 이루어져 30년 동안 계속됐던 장미 전쟁도 끝났다. 헨리 7세는 평화를 수립하고 쓸데없이 피를 흘리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국내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장미 전쟁은 겉으로는 왕위 계승 전쟁이었지만 실은 봉건 제후의 집안 싸움으로 민중은 거의 내란에 참가하지 않았다. 병력도 별로 많지 않아 양군을 합해 5천 명쯤의 병력이 동원된 전투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만큼 내란으로 인한 피해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또한 내란에 참가했던 사병과 대영지를 가진 봉건제후가 대부분 손해를 입고 몰락한 결과, 자연히 왕권은 강해져서 영국의 산업과 경제도 지장 받지 않고 계속 발전했다. 왕은 산업과 상업을 통해 중산 계급으로 성장한 지방의 지주 및 시민을 치안 판사로 임명했다. 또한 왕은 이들 평민층과 결탁해 귀족 세력을 억눌렀으며, 왕권의 지배는 구석구석까지 미치게 됐다. 웨일스와 영국의 결합도 튜더 왕조의 지배하에서 이루어졌다.
◑ 독일의 분열 : 중세 말 독일에서는 신성 로마제국이 12∼13세기에 이르러 점차로 유명무실해지고 오히려 대제후들이 분열되는 경향이 커졌다. 제국 황제는 독일 국내 정치보다 이탈리아 정책에만 몰두하여 그 세력이 쇠미해져, 1254년부터 1273년까지 대공위 시대가 되었다. 그 후 1356년에는 금인칙서가 발포되어 마인츠 대사교를 비롯한 7인의 선제후가 황제 선거권을 독점하였으며 제후들은 자기 제후령 안에서 주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 대공위 시대(大空位時代: Interregnum, 1256-1273) : 중세 후기 독일 황제의 무력화와 유력한 제후들의 발호로 인하여 시타우퍼 왕가의 단절과 더불어 야기된 무정부 상태. 건국초의 독일은 약간의 제후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국왕은 그 사이에서 선출되었기 때문에 왕권은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로 분열의 징후가 증대하고 국정이 복잡하였으며, 황제권의 동요와 함께 제후의 세력이 증대하여 영방으로 발전하면서 황제에 반항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유를 바라는 데에서부터 가능한 한 황제권의 약체화를 원했는데 시타우퍼 왕조 말기부터 이러한 경향이 심하였다. 13세기 중엽 프리드리히 2세가 교회로부터 파문되자, 이에 대립하여 튀링겐 하인리히 라스페(제위1246∼1247)를, 이어서 빌헬름 폰 홀란트(제위1247∼1256)를 대립 황제로 선출하였다. 그 사이에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콘라트 4세가 사망함으로써 시타우퍼 왕조가 끊어져 빌헬름의 제위가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그도 1256년에 죽자 황제 선거가 행해질 때 제후는 2파로 분열하여 교황당의 전통을 이은 겔프 당의 제후는 영국 왕 헨리 3세의 동생 코온월의 리처드를 선출하고, 시타우퍼 가의 전통을 존중하는 시타우퍼 파는 카스틸랴 왕 아폰소 10세를 세웠다. 이와 같이 2인의 외국인 황제가 선출되었으나 두 사람 모두 관심이 없어 리처드가 일시 독일에 왔을 뿐, 사실상 제위는 공위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공위 시대란 1254년 호엔슈타우펜 가 출신의 황제 콘라드 4세가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가의 루돌프 1세가 1273년 즉위할 때까지 20여년 동안 황제가 없던 시대를 말한다. 이러한 지방 분권의 결과 제국의 영방 국가에로의 분열은 결정적 사실이 되었다.
◑ 제국 의회(Reichstag) : 프랑크 왕국 및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당시부터 독일 국왕은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대제후에게 자문하고 임의로 의회를 열었으나, 12세기부터 상례적으로 소집되어 제국 의회가 되었다. 이것이 성문화된 것은 1356년 금인 칙서(金印勅書)에 의해서이며, 여기서 제국 의회 참가 자격이 확정되어 제후뿐만 아니라, 제국 직속의 그라프, 자유인, 제국 도시 등이 제국의 제 문제에 대해서 토의하고, 다수결에 의하여 의결하는 권리를 얻었다. 1489년부터 선제후(選帝候)(7표), 제후(100표), 제국 도시(2표)의 3부회로 되었는데, 도시의 참가란 전혀 무의미하였다. 16세기의 종교 개혁때에는 카톨릭파 회의와 프로테스탄트파 회의로 분리되어 각기 결의를 행하였다. 의회의 장소는 일정하지 않으며, 1663년부터 레겐스부르크시에 고정되었는데, 그 이후를 사절 회의라고 부르며, 본래의 제국 의회는 1654년 후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의 성립에 따라,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된 제국 의회가 성립되어, 법안의 제출과 청원의 전달 등을 주로 하며 연방 참의원에 대한 하원의 구실을 하였다. 1918년 11월 혁명으로 소멸되었다.
◑ 선제후(選帝侯: Kurfurst) : 13세기 이후 독일 국왕을 선거할 권리를 갖는 제후. 독일 국왕의 지위는 원래 선거제를 원칙으로 하고 혈통권에 의한 유자격자 중에서 유력한 제후가 선출되었으나, 국왕에게 인정된 계승자 지정권에 의하여 오토 1세 이후는 사실상 세습제가 되었다. 그러나 1197년의 2중 선거 후, 특히 시타우퍼 왕가의 몰락(1254) 후에는 다시 선거제가 원칙화되고, 13세기에 있어서의 국왕 선거권은 유력한 성직 귀족과 세속 제후에게 한정되었다. 작센시피이겔에 의하면, 마인쯔, 쾰른, 트리어의 3대 사교(司敎)와 라인 궁중백(宮 中伯),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邊境伯)의 3제후가 그것이며, 1290년 보히미아 왕이 참가하여 7명으로 증가되었는데, 그들 7명은 7선제후로서 금인 칙서에 의하여 그들의 권리가 성문화되었다. 또 선거는 원래는 전원 일치제였으나 금인 칙서에 의해 다수결제가 채택되었다. 17세기 이 후 7선제후 제도는 무너지고 그 수와 구성원은 자주 변경되었다.
◑ 금인 칙서(金印勅書 황금문서:1356) : 1356년 신성 로마 황제 카알 4세가 뉘른베르크 및 메츠의 제국 의회에서 발포한 31장으로 된 제국법. 라틴어로 썼으며, 황금의 인새(印璽)를 사용하였다하여 이렇게 불리어진다. 대공위 시대 이후의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고, 특히 국왕 선거의 절차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제후는 3명의 성직 제후 (마인쯔,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 4명의 세속 제후(보히미아 왕, 팔쯔 백(伯),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7명으로 한정되며, 선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행한다. 표결은 다수결이고, 신왕의 대관은 고도 아아헨에서 행하며, 교황의 승인은 필요하지 않다. 선제후는 제후 중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최고 재판권 광산 채굴권 제염 화폐 주조 등의 특권을 가지며, 그 영지의 상속은 장자 상속으로 하며 분할할 수 없다. 국왕 선거 외에, 봉토 보유자간의 동맹 체결의 금지, 도시의 확장 금지 등이 규정되었다. 선제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제후의 독립적 지위를 보장하고, 제후들이 영방 단위로 독립되는 경향을 촉진시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 영방국가(領邦國家 Territorial state) : 영방 국가는 이미 프리드리히 2세 때의 제후법에서 싹트고 있었으나 13세기 후반 대공위 시대와 14세기 황금문서 등을 거치면서 유력한 제후들이 영방(Territorium)단위로 집권화를 추진하여 독립적 경향을 강화하였다. 이리하여 마침내는 최종 재판권, 축성권, 화폐 주조권. 관세 징수권 등 소위 연방 주권 (Landeshoheit)을 확립하여 사실상 황제로부터 독립하였으며, 주권 국가나 다름없는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국가 내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을 형성하였다.
(3) 서양 중세의 문화
◑ 스콜라 철학 : 스콜라(scholar)란 원래 교회나 수도원의 부속 학교를 나타내는 말이고 스콜라 학이란 원래 여기에서 일어난 학문을 말했는데, 후세에 가서는 널리 중세의 여러 대학에서 일어났던 학문, 특히 철학 및 신학을 말한다. 이 학문은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의의 학문적 근거를 탐구하였다는 의미에서 중세의 독 자적인 학문 체계라고 할 수 있으나,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인식에 있어서의 이성의 힘을 중시하였다. 한편 플라톤주의적인 스콜라 철학의 계열도 있었는데 이는 신비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 발전 과정은 대체로 3기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신앙이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하였으며 그 대표자는 안셀무스이었다. 13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으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 통일을 꾀하여 '보 편이 존재하는가(실재론), 아니면 개체만이 존재하고 보편이란 단지 명목에 지나지 않는가(명목론)'라는 문제로 이른바 보편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중세 말에 이르러서는 이성과 신앙, 신학과 철학의 분리가 주창되어 경험 과학에의 길이 열렸다.
▶ 신앙 우위(안셀무스) - 지적 노력으로 신앙을 심화시키고 불신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이성보다 신앙이 앞서며 신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결론은 " 나는 신앙을 위하여 지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다." 였다.
▶ 신앙과 이성의 조화(토마스 아퀴나스)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 정신이 감각적인 경험을 통하여 자연의 세계에 관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는 자연 세계의 진리 외에 초자연의 진리가 있으며, 그것은 오직 신의 은총으로서 인간에게 계시됨으로써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보 았다. 아퀴나스는 이 초자연의 진리는 자연계에 관한 지식과 모순되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자연의 진리를 보완하고 이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 신앙과 이성의 분리 ▷스코우터스 - 신의 의지는 지적 노력에 의해 속박되지 않으며, 아무 이유없이 완전히 자유롭게 움 직인다고 보았다. 따라서 신의 의지는 지적 노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에 있다고 하였다. 즉 그는 보편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완전한 실재성은 개체에 있어서만 존재하므로 명목론적 경향에 가깝다. ▷윌리엄 오컴- 보편은 약간의 개체를 대표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실재하는 것0?개별적인 것 뿐이다. 이렇게 보편적인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보편적인 것과 관계 있는 학문인 신학도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신학적으로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아퀴나스(Aquinas Thomas: 1224∼1274) :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 학자로 아퀴노 백(伯)의 아들로 록카섹카에서 출생하여 나폴리 대학에서 수학 한 후 도미니쿠스 교단에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접하였다. 파리 대학과 이탈리아의 로마, 나폴리 등 지에서 교수가 되었으나 리용 교회 회의에 가는 도중 사망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단히 많으나 이를 셋으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해석 비판의 서로서 주해, 명제집 주해와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 관한 것이 이에 속한다. 다음에 그의 철학 자체에 관한 것으로‘신학 대전’‘대이교도 대전’의 두 가지가 있다. [신학 대전]은 그에 의해서 종합되고 체계화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최고 최대 업적이다. 셋째로, 더욱 깊은 문제의 고찰은‘정기 토론집’‘자유 토론집’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크리스트교 사상과 조화시켜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신앙을 훌륭하게 통일시키고 있다. 스콜라 학자 가운데도 이성 혹은 신앙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나, 그는 인간의 현실 생활을 가능한한 시인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신의 나라에 이르는 길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강력한 지상 권력을 지니는 중세 교회가 취해야 할 입장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한 사상가이다. 사회 사상면에 관해서도 역시 그러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 단체의 근본 형식은 가족이며, 그로부터 여러 가지의 단체를 거쳐 국가에 이른다. 그들은 모두 교회의 힘으로 통일되며 그 위에 교황이 군림한다. 교회는 크리스트교 세력의 정신면을, 국가는 물질 면을 관장한다. 따라서 국가의 형식으로서는 귀족 정치 등의 좋은 점을 가미한 왕정이 최선의 형식이라 했다. 노동·이득·사유 재산도 적극적으로 시인하나 신분에 맞게, 혹은 적정 가격을 취할 것 등 전통주의에 흐르고 있다.
◑ 스코우터스(Scotus 1266∼1308)와 오컴(Occam 1290?∼1349?) : 스코우터스는 신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으며 섭리의 개념도 오로지 믿어야 할 따름이며 이성으로는 논증할 수 없다고 하여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려 하였다. 오컴은 우리의 인식의 원천은 개별적인 사물일 뿐이며 신의 속성따위는 신앙의 대상이고 이성으로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신앙과 이성이 준별되는 한편 경험 과학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 신비주의(Mysticism) : 합리적 사변이나 교의, 예배 등의 형식을 버리고 직관을 존중하고 신앙의 내면성을 중시하는 입장으로, 중세를 통하여 끊임없이 이어져서 교회의 형식화에 대하여 신앙에 생명을 부어 넣는 역할을 하였다. 베르나르드(Bernard 1090∼1153)는 인식의 최고 단계는 명상이며 그것을 통해 신과의 신비적 일치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 1182∼1226)는 탁발 수도회를 조직하여 종래의 수도원인 산간 벽지에 물러 앉은 은둔적인 것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을 벗삼는 사랑과 봉사의 생활에 들어갔다. 독일의 엑하르트(Eckhart,1260∼1327)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가난' 상태에서 비로 소신과 일치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 로져 베이컨(Roger Bacon, 1214?∼1294) : 영국의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그는 스콜라 철학의 사변적 학풍에 반대하여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추리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며, 모든 것은 경험에 의존한다."라고 하였다. '실험과 학'이란 말은 그로부터 유래하여 소위 귀납법을 지식 추구의 방법으로 채택되었다.
◑ 바실리카 양식(Basilica) : 고대 건축 양식의 하나로 그리스 어로 왕의 건물을 뜻하였으나, 로마 시대엔 시장에 부속하여 건축된 회당을 말한다. 법정·시민 집회소·상거래소로 쓰였으며 건축은 장방형의 외벽으로 둘러 싸이고 외벽 안쪽엔 열주식 회랑이 있고 중앙은 장방형의 가운데에 뜰이 있다. 개방적이며 규모가 큰 것은 로마의 막센티우스 바실리카(313년 완성)로 길이87m, 나비 62m이나 된다. 크리스트교 공인 후는 민가나 카타 콤베에서 집회하고 있던 크리스트 교가 이 양식을 채용하여 바실리카 교회당을 많이 세웠다. 이들은 종 교적 목적에 합치하도록 건축 구조도 약간 변경시켰지만 라벤나에 있는 성 압폴리나레 성당이 유명하다.
◑ 로마네스크 양식(Romanesque) : 11∼12세기에 서유럽에서 성립했던 건축.미술 양식으로 로마네스크(Romanesk)라는 말은 로마 풍 또는 환상적이라는 의미로서, 19세기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코몽이 이름 붙였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일찍이 비잔틴(동로마) 미술과 동방의 장인들과 접촉했던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이 발상지로, 수도원 운동으로 표상되는 청신한 시대 풍조와 함께 유럽 각지로 전해졌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최고 성과는, 종래 나무 골조 천장으로 크게 갈라져 있던 넓은 공간을 견고한 돌의 돔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무거운 돌 로 된 천장을 지탱하고 넓은 공간을 채우는 데는 물론 기술상 곤란한 문제가 많았다. 이 때문에 건물 몸체를 덮는 돔에는 반원형 아치를 기본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또 기둥 사이마다 독립한 교차 돔을 사용하는 방법이 고안됐다. 서유럽에는 내부 공간을 확대해 앞쪽에 탑을 설치하고, 입구 공간을 만드는 형식도 채택됐다. 많은 나무 골조 천장을 가지고 있었던 바실리카 풍 성당 외에, 벽이 두텁고 야생적인 면을 가진 로마네스크 건축이 나타났다. 이 무렵 로댕은 기하학의 숭고함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원시성을 가진 아름다움에 창조의 기쁨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로댕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감상을 이야기했다."로마네스크 양식은 지하 묘지로부터, 벽이 두텁고 비밀스러운 지하 제사실에서 생활하던 초기 기독교 교도로부터 생겨났다. 그런 만큼 종교의 발생처럼 신중하고 어두운 양식이다."로마네스 크 건축의 발달과 함께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석조 부조로 성당 외벽을 장식하는 것도 고안됐다. 성당 내벽의 회화 장식은 거의 모두가 벽화였다. 조각과 같이 대부분 지극히 도식화한 표현으로 윤곽과 옷 주름은 율동적인 역동성을 나타내면서 독특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밀라노의 산 비첸초인 플라토 사 원, 캉의 라 토리니테 사원, 프랑스 루아르 강변의 아젤 리드 성당, 중부 프랑스 느베르의 생 에티엔 사 원을 비롯해 많은 걸작이 남아 있다.
◑ 고딕 미술(Gothic) : 중세의 미술 양식으로 중세 초의 바실리카 양식, 11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12세기 말부터 북부 프랑스에서 발달한 중세 최고의 문화 유산중 하나. 고딕이란 원래 고트족에서 유래한 말. 르네상스 말기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자, 특히 바자리가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 미술을 모멸하는 의미를 담아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부터는 단순히 12,3세기부터 14세기에 북프랑스에서 일어나 독일, 영국, 북이탈리아 등 전유럽에 전파된 크리스트 교회당 건축과 이에 따르는 회화, 조각, 공예품 등의 양식에 대한 호칭이 되었다. 12,3세기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융성과 도시의 발흥으로, 세속적 정신과 결합한 교회정신과 신흥 시민의 재력, 기술 그리고 독립 정신이 결합하여, 공공 사업으로서 성당을 도시에 건조하게 되었다. 이 성당은 도시의 단결과 권력과 번영의 상징으로서 일반 신자 출신의 건축 조합과 여러 공업 길드와 대상인 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 시민의 봉사와 헌금으로, 수 십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세워졌다. 이 때문에 성당은 현관은 무수한 조각과 회화로 장식되어 있다. 첨단이 교차된 십자형 돔과 버팀벽 등의 사용으로 로마네스크 건축과는 달리 천장을 높이고 창을 크게 넓힐 수 있었다. 고딕 건축은 새로운 토목 기술의 출발을 뜻하며 중세인의 종교적 열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높은 첨탑과 색유리가 끼워져 있는 창문이 있어 밝고 신비롭고 경건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위쪽으로 뻗은 기둥의 율동과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한 초현실적인 광선은 예배자에게 천상으로 향하는 무한한 동경을 일으키게 한다. 이것은 중세 크리스트 교회 최성기의 초현실적 예술 조각의 기조는 자연주의이며 사도나 예언자뿐 아니라 일반 민중의 노동이나 생활도 조각되어, 학문·도덕·노동 등 민중이 필요로 하는 지식의 가시적 표현으로서, [서민의 성서] [돌의 백과 사전] 구실을 했다. 12세기 프랑스의 생드니 수도원 성당이 그 최초의 것이 며, 프랑스에서는 아미앵, 랭스, 샤르트르, 파리의 노트르담, 이탈리아에서는 시에나, 오르비에토, 앗시시, 밀라노, 영국에서는 캔터베리, 웨스트민스터, 독일에서는 쾰른, 시트라스부르크, 울름, 프라이부르크 본성당 등의 대회당이 유명하다.
◑ 중세의 미술 : 중세의 미술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중세 미술가는 한 스승의 도제로 들어가 처음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스승은 그림의 비교적 덜 중요한 부분을 그려준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적으로 예수의 제자를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그리는 방법을 배운다. 그는 고전의 장면을 모사하거나 재구성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고, 그것들의 구조를 바꾸어 보기도 하면서 마지막에는 그가 모르는 유형의 장면을 그려 낼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 생애를 통해 스케치 북을 가질 필요성이나 실물을 그릴 필요성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중세 미술에서는 한 사물이 완전한 비례를 지닐 때만 아름답다고 보았기 때문에 모든 순수하고 절대적이고 완전한 아름다움은 바로 다름아닌 신으로부터 연유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중세 시기의 절제있는 척도와 적절한 비례는 신적인 완전성과 절대성을 위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지상적인 것을 넘어선 진리의 세계를 시각화시키는 순수한 형식이기도 하였다.
◑ 기사 문학 : 중세 봉건사회의 기사의 생활을 취급한 문학으로 그 작자도 일반적으로 기사이나, 또 왕후 교직자나 시민 등도 있다. 프랑스에서 생겨나서 독일 등 전 유럽에 퍼졌다. 프랑스에서는 11∼12세기에 발달되었으며 13세기에는 쇠퇴하였다. 그 쇠퇴의 원인은 도시의 발달과 시민 정신의 대두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기사 문학은 남방에서는 서정시, 북방에서는 서사시로 나타났다. 전자는 11세기부터 나타나 12세기에 성행하게 되었다. 그 작자를 트루바두르라고 부르며 기사의 연애가 중심 테마이다. 후자는 같은 무렵 먼저 무훈시로서 나타났다. 그것은 봉건 사회의 무사의 싸움, 국왕과 신하 사이의 충성 반역 등 살벌한 면을 읊었다. 그런데 12세기부터 같은 북방에서 싸움의 세계보다 사랑의 세계를 취급한 서사시가 나타났다. 이것이 르망 쿠르트와라고 불리는 것으로,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 프랑스 문학을 지배하였다. 무훈시로부터 로망 쿠르트와로 변화된 것은 십자군 이후 유럽 봉건 사회에 일단 평화가 찾아들게 되었으며, 따라서 궁정에 어느 정도의 여가와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망 쿠르트와에서는 사랑이 지배적이며, 여성은 가장 고귀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 대표 작가는 크레티앵 드 트르와이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이 사랑은 크리스트교적이 되고, 사랑을 위한 기사의 모험이 신앙을 위한 모험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다가 시민 정신의 대두로 몰락되었다. 귀족을 멸시하고 여성의 공유를 읊은‘장미 이야기’제 2부는 기사의 쇠퇴를 나타낸 것이다. 한편 12세기에 발전되었다. 그 특색도 같으나, 독일의 기사는 대부분이 부자유 신분(미니스테펠데케, 하르트만 폰 아우에, 볼프람 폰 에셴바하, 고트프리이트 폰 시트라스 부르크 등이다. 다만‘니벨룽겐의 노래’는 독일의 독자적인 서사시이다. 기사의 연애를 읊은 서정시는 미네장이라고 부르며, 그 대표 작가는 발터 폰 데르포겔바이데이다.
◑ 니벨룽겐의 노래(Nibelungenlied) : 독일 중세 기사 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 1204년경 파사우에서 씌어졌으며 모두 39장으로 되어 있다. 니벨룽겐은 네벨(안개)의 뜻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전반은 지이크리이트의 죽음, 후반은 크리임힐트의 복수가 중심을 이룬다. 지이크프리이트는 네덜란드의 왕자이며 니벨룽겐의 보물을 획득한 탁월한 용사이다. 부르군트의 옹녀 크리임힐트와 결혼했으나 지이크프리이트가 살해되자, 그녀는 훈족의 왕 에쩰과 결혼하여 복수한다. 그녀의 오라비 군터이하 모든 사람이 죽는 비참한 결말이다. 주인공은 크리임힐트이며, 미모의 여인이 복수의 마귀가 되어 가는 줄거리가 중심을 이루는데, 웅대한 구상과 성격 묘사로 써 민족 이동기를 무대로 한 여러 민족의 지도자들을 전설화하고 있다. 널리 북유럽 게르만 민족 사이에 전하여졌으며 게르만적이기 때문에 그 후에도 널리 보급되어 애독되었다. 게르만인의 충성, 그 공동체 정신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 위주가 되고, 크리스트교의 영향은 극히 희박하다.
◑ 대학 : 중세 초기의 유일한 지식 계급은 승려, 수도사였고 교회는 신앙의 지도 기관인 동시에 학문을 연구하 고 세속의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이기도 하였다. 대학(University)이라는 말은 길드란 뜻인데 원래 '전체' 라는 의미의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에서 유래하였다. 실제로 교육을 위한 길드라고 볼 수 있다. 중 세 전반기의 학문과 교육의 중심은 수도원이었는데 12세기 이후 수도원의 부속학교(Schola)로서 대학이 발전하였다. 이후 1500년까지 유럽 각지에 77개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중세 대학은 교권, 속권과 함께 학권으로서 중세 세계의 권위 중 하나였다. 초기의 유명한 대학으로는 볼로냐 대학과 파리 대학을 들을 수 있는데 모두 12세기에 창립되었다. 파리 대학은 교수 조합, 볼로냐 대학은 학생 조합에 의해 다스려 져 다른 대학의 모범이 되었다. 볼로냐 대학은 학생조합이 교칙 및 학과목을 정하고 교사를 임면하였고 국적에 따라 여러 동향단을 만들고 그 중에서 학생감과 학장을 선출하여 각자 행정을 맡게 하였다. 이 대학은 그 지방이 로마법의 부활 운동이 일어난 곳이어서 법학이 유명하였다. 한편 파리 대학은 노트르 담 성당 부속 학교에서 시작되어 신학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며 교수 조합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대학이라 할 수 있다. 13세기에 제도가 완성되어 학장 밑에 독자적인 재판소를 갖고 완전한 자치제를 구사하였다. 대학의 교육 과정은 문법, 수사 및 논리의 3교과와 수학, 기하, 천문, 음악의 4교과로 이루어진 7자유 교 과였다. 3교과를 수료한 경우 문학사의 자격을 취득하고 5·6년의 수업 후 문학 석사가 되며 전문 학부인 법률, 의학 및 신학을 수학한 후 박사 학위가 주어졌다.
V.근대 유럽 사회의 발전
1. 근대 의식의 성장
(1) 르네상스
◑ 르네상스의 성격 : 14세기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에서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의 발전은 고전 문화의 부흥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앞장 선 사람들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말에서 유래한 인문주의라는 말은 원래 인간성을 도야하고 세련되게 해주는 글과 예술의 힘을 뜻했으며 시, 수사학, 역사 등 인문 교양 과목이 그러한 힘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여기서 바탕이 되는 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이었다. 중세에도 고전들이 교양의 기초가 되기는 했지만 기독교의 교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였는데 이것이 르네상스 시기에 와서 종교적 속박을 벗고 새로운 인생관을 펼칠 수 있는 것으로 환영받았던 것이다.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페트라르카는 이탈리아 말로 서정시를 썼으며,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는 세속적인 생활을 자유롭게 묘사했다. 또한 이들은 라틴 작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거나 그 리스어를 공부하여 고전 문화를 자신들의 작품 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또한 이탈리아의 미술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분야로서 찬란하게 꽃피웠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으로 대표되는 천재 예술가들은 고전 미술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자연과 인체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새로운 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당시 사람들은 찬란했던 고대 문화가 멸망한 뒤 암흑의 중세가 이어졌으며, 이제 자신들에 의해 멸망 했던 문화가 부흥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16세기 중엽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들의 전기를 썼던 바사리(Vasari)였다. 그는 치마부에(Cimabue), 지오토(Giotto)에서 시작하여 미 켈란젤로에 이르러 완성된 고전 미술의 부활을 리나시타(rinascita : 재생)라고 불렀고 이 말은 이후 프 랑스어인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단지 미술 분야만이 아니라 문화의 전 영역으로 확대하여 근대 문화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점을 확립한 사람은 19세기 문화사가 부르크하르트(Burckhart)였다. 그는 르네상스를 '세계와 인간의 발견' 을 기초로 하여 인간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함과 동시에 개인의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려는 경향으로 파악했으며, 합리적인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근대 문화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르네상스를 시대적으로 중세와는 단절되고 고대와 직결되는 것으로 파악했다. 부르크하르트의 이러한 해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을 볼 때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의 배경은 넓은 의미에서 중세 사회의 붕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탈리아에서는 13세기 이전에 이미 봉건 제도가 쇠퇴했다. 지중해 무역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했고 이 속에서 상인층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이렇게 원격지 무역과 모직물 공업,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 사회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회적 기반 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견해도 많이 제출되었다. 먼저 12∼13세기 유럽의 정신적 각성에서 르네상스의 원류를 찾는 주장이 나왔다. 중세의 연애시나 성자 프란체스코의 자연에 대한 천진난만한 태도, 당시의 종교 운동을 지탱시킨 인간의 신앙적 갱생 등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 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고전 문화의 부흥을 르네상스의 기본적인 계기로 볼 수 없으며, 기독교와 게르만 민족 정신의 융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12세기 프랑스의 라틴어 고전이나 자연학의 부흥과 그에 수반된 새로운 생활 태도에 주목하여 '12세기 르네상스' 를 제시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 지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호이징아는《중세의 가을》이라는 저서에서 르네상스는 근대의 시작이 아니라 중세의 가을, 즉 중세 문화의 결실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론들을 통해 부르크하르트가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던 많은 것들이 중세의 산물이며, 르네상스 시대에도 여전히 중세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르네상스를 단순히 근대의 시작으로는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컨대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는 관점은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하나의 신화일 뿐이다.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는 실제로 중세적인 요소와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신구 문화가 교차하여 혼재했던 하나의 과도기로 볼 수 있다.
◑ 르네상스의 의의
<부르트하르트의 견해> 르네상스는 처음으로 인간의 충만한 전체적 특성을 인식하고 비추어 보도록 함으로써, 외부 세계 발전에 더욱 위대한 업적을 더하여 주었다. 이 시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우선 개성을 최고도로 발전시켰으며, 개인을 모든 형태나 모든 조건 아래서 그 자신을 가장 열심히 또 철저히 탐구하도록 이끌었다. 인격의 발견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인격의 인식을 수반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커다란 과정 사이에서 고대 문예의 영향이 개재하였다는 것인데, 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개인과 인간성을 모두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은 고대 문예의 영향에 의해서 규정되었고 특징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하고 표현하는 힘은 시대와 그 시대 사람들에 달려있는 것이다.
◑ 신곡 : 단테(1265∼1321)의 서사시.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3부로 된 세계 고전 문학의 금자탑인 단테의 대표작으로 이것은 그가 당파 싸움으로 피렌체에서 쫓겨나 방랑 생활을 한 1304년부터 1321년까지 쓴 것으로 광대한 규모와 건축적인 균형 조화의 아름다움을 지닌 일대 시편이다. 내용은 삼위 일체를 상징하고 있어 중세 철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3부전 99장과 서장의 100장으로 되어 있으며, 하루를 숲에서 보낸 단테가 인간 이성의 상징인 베르길리우스와신학의 상징인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삼계(三界)를 순례하고, 인간의 영혼이 죄악의 세계에서 정화되어 영원한 천국으로 향상 정진하는 줄거리를 묘사하여 단테의 인생관·종교관·우주관을 담은 것이다. 1320년 그는 천국 편을 베로나 공 칸 그란데에게 바친 이듬해에 사망하고, 미발표된 최후의 13가(歌)는 그의 사후에 그의 아들 야코포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라틴어의 전통을 깨뜨리고 토스카나 이탈리아어를 사용한 점에서 국민 문학 탄생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 데카메론 : 보카치오의 작품으로 흑사병이 대유행하던 1348년에서 1453년 사이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내용은 흑사병을 피하여 일곱의 부인과 세 남자가 황폐한 피렌체를 버리고 어느 궁전으로 옮기어 그 곳에서 15일 동안 머물면서 금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이야기를 하여 전체 100가지 이야기를 한다는 것으로써, 그 속에 성(性)의 해방의 기쁨과 성직의 모순과 부패에 대한 조소, 구 지배계급에 대한 서민의 평등희구 갈망 등이 묘사되어 있다.
◑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 :1304-1374) : 이탈리아의 시인으로 최초의 인문주의자. 피렌체 출신으로 고전 문학 연구에 열중했으며 볼로냐 대학에서 법률학을 수학한 후 아비뇽에 돌아와 다시 문학 활동을 계속했다. 1327년 미녀 라우라와의 정신적인 연애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330년 롬베츠의 주교가 된 무렵부터 인문주의 운동의 선두에 서서 그리스·로마의 매몰된 문헌 발굴에 노력했다. 1338년에 아비뇽으로 돌아왔으나 얼마 후 발키우사에 은둔하여 라틴시 '아프리카' '위인전'을 집필했고, 1350년 라우라를 노래한 서정시 '칸초니에레'의 집필에 착수하여 여성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감정 그리고 자연을 자유롭게 그대로 표현하였다. 1373년 파도바와 베네치아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의 강화 사절로 활약하던 도중 병사하였다. 처음으로 스포츠로서의 등산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자기 동생과 함께 알프스의 방뚜 산에 오른 것은 세계사적 의의를 가진 사건으로 중시되고 있다. 그가 순전히 호기심에 끌려 1,900m가 넘는 높은 봉우리에 오르려고 한 시도 속에 자연미에 대한 동경이라고 하는 근대적인 태도가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는 또 말년에 자기 자식에게 쓴 편지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고유한 가치를 요약하고 있다.
◑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 :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하는데, 16세기의 미술가인 지오르지오 바사리의「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에서 비롯된다. 바사리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보았으므로 로마제국이후 문학이나 예술 내지 고전이 이때 와서 비로소 재생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옛것이 새로이 살아난다는 관념은 지오토가 살았던 시대 이래로 이탈리아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시인이나 미술가를 칭찬하고자 할 때 그의 작품이 고대의 작품만큼 훌륭하다고 말하곤 했다. 이러한 관 념이 성장한데는 이탈리아인의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로마가 문명세계의 중심이었으나 고트족과 반달족과 같은 게르만 종족이 침입해와 로마의 문명이 몰락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런 역사의식의 바탕에서 이들은 중간시대의 미술을 야만적이라는 뜻으로 고딕(Gothic)미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 중세와는 다른 르네상스기의 뚜렷한 특징은 세 가지이다. 그 하나는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이며, 둘째는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의 지식이며, 세째는 르네상스기에 있어서 가장 기품있고 아름다운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형식에 대한 지식이었다
◑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본명 :Michelagniolo Buonarroti ;1475-1564) :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 화가, 시인으로 피렌체 교외 카프레세에서 출생하였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가 된 후, 로렌초 데 메디치가에 들어가 고대 조각에 접하고, 철학·문예를 배웠다. 1496년부터 1501년 사이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피렌체의 바르젤로 국립 박물관에 있는 박카스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조각하여 일약 조각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1501년 봄 피렌체로 돌아와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다비드상' 을 제작하였다. 1505년 교황 줄리오 2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갔으며, 1508년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에 착수, 1512년에 완성을 보게 되는데 이 그림은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혼자서 그렸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마 그의 특이했고 다사다난한 사생활을 다룬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유래없는 대천장화는 보는 사람에게 입체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의 훌륭한 솜씨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수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것을 완성했을 때 그는 천장에서 떨어진 물감때문에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목도 굽히지 않아 한동안은 위를 향한 채 있어야 했다고 한다. 다음해부터는 메디치 가가 정권을 잡은 피렌체에서 작품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 때쯤부터 씩씩한 인간의 힘의 표현은 없어지고, 작품 중의 조상(彫像)은 모두가 인생의 고뇌와 절망을 나타내고 있다. 1536년 봄,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제대 벽에 장대한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시작해 1541년 11월에 완성하게 된다. 얼마 후에 바오로 3세 교황의 의뢰로 바티칸 내 바올리나 소성당의 프레스크화도 제작하였다. 노인이 된 미켈란젤로는 후작 부인 빅토리아 꼴론나와 좋은 친우 관계를 맺는데 특히 영적인 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죽기 며칠 전까지도 그는 최후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조각하려는 의지가 대단했었다 한다. 침대에는 겨우 이틀밖에 누워 있지 않았고 1564년 2월 18일 몇 명의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독했던 세상을 떠났다. 교황은 그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으려고 했지만 조카 레오나르도 보나로띠가 피렌체로 옮겨 성 십자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1537∼41년)> --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벽화 : 이 작품은 200㎡의 넓이에 391 명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중앙에 있는 예수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인물들이 나체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작품이 다 완성되기도 전에 외설 시비에 휘말렸었다. 특히 교황청의 의전관 체세나는 제작 도중의 이 작품에 대해, 마치 목욕탕이나 술집 같다고 혹평하였는 데, 미켈란젤로는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그림의 오른 쪽 맨 아래에 지옥 심판관 미노스로 그려 놓 았다. 미노스는 뾰족한 짐승 귀에, 뱀에게 온몸이 휘감겨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원래는 성기 부분을 뱀이 물고 있었으나 후세에 거기에 천 조각을 그려 넣어 가려 놓았다가 최근에 다시 원래 모습을 되찾 았다. 또한 그림 중간의 그리스도의 발아래 있는 바르톨로메오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는 설도 있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가-화가, 조각가, 건축가, 과학자, 수학자, 음악가. 이른바 르네상스의 만능 인간으로 불린다. 피렌체 교외의 빈치 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가정적으로는 불우하여 서자(庶子)로서 자라났다. 어려서부터 수학·음악·회화 등에 특이한 재능을 나타내고, 자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470년경부터 피렌체에 거주하면서 조각가 겸 화가로서 유명한 베로키오에 게 원근법·해부학 등을 배우고, 창작활동에 열중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으로서는 '수태고지(受胎告知)' 가 있다. 미완성의 '성(聖) 히에로니무스'는 이 시대의 그의 사실주의의 절정을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된다. 1482년 밀라노에 가서, 밀라노의 전제 군주 스포르차의 군사 기술자로서 봉사, 대포·요새 등의 각종 병기를 설계하였다. 또한 시체를 해부하여 생리학을 연구하고, 조류의 비상을 관찰하여 비행의 원리를 발견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을 하였다. 그의 발명품은 용수철에 축적된 에너지를 이용하여 달리 는 자동차에서부터 소형 기중기, 준설선, 하늘을 날으는 배, 방직기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있다. 예술 활동으로서는 '최후의 만찬' 등의 걸작을 남기고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가마대' 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 밀라노 시대는 그의 고전 예술의 완성기로서, 단순한 사실 이상의 정신적 내 용을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1499년 프랑스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입 후 피렌체에 귀환, '모나리자'를 그렸다. 그 후 다시 밀라노, 로마를 편력하여 예술·과학 분야에 다각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1516년에는 프랑스 왕 프랑스와 1세에게 초빙되어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체재하였다. '지적인 모든 연구에서 신의 신비를 탐구할 수 있다' 는 그의 말에는 인간의 재능에 대한 자신감과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려는 르네상스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최후의 만찬' 과 '모나리자' 등의 작품 역시 인간의 해부학이나 원근법 등 과학적 연구가 뒷받침되어 그려진 것이다.
◑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1493∼97년)>--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수도원의 식당 벽에 그려져 있는 이 작품은 신약 성서에 기록된 한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날 밤,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하 자, 그 말에 놀라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주 탁월하게 표현한 것이다. 중세에도 이 장면을 그린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열 두 제자 중 유다는 예수를 로마 병사에게 팔아 넘긴 죄인이라 하여, 보통 그림에서 빠 져 있거나, 혹은 구석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다빈치의 그 림에서는, 그 유다가 예수의 바로 오른 편에 죄책감에 고개를 살짝 옆으로 누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릴 때, 예수와 유다의 모델이 된 사람이 동일 인물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 라파엘로(Raffaello Santi ;1483-1520)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로 우르비노에서 출생하였다. 페루지노로부터 감미로운 화풍을 배우고, '삼 미신(三美神)' '콘네스타빌레의 성모'를 제작하였다. 1504년 피렌체에 가서 프라 바르톨롬메오, 다빈치, 미켈란젤로에 심취하였으며 '카르디넬로의 성모' '자화상' 등을 제작, 그의 기본 구도인 삼각형 구도를 완성하였다. 1509년 율리우스 2세에 의해 로마로 초빙되어 바티칸 궁전 교황의 거실 장식을 의뢰 받고 '서명의 방' 4면벽과 천장화를 복잡하면서도 뚜렷한 내용을 지닌 화면으로 구성하였다. 대작 '논의' '아 테네의 학원'을 제작, 많은 군상의 구성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 밖에 '폴리뇨의 성모' '소의자 (小倚子)의 성모' '성 시스트의 성모' 등의 소품이나 초상화에 볼 만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미술은 일반적으로 조형력이 부족하고 선인들을 모방한 흠은 있으나, 여러 화가의 장점을 흡수·종합하여 훌륭 한 조화와 원만한 이상미를 표현하였다. 따라서 그를 가리켜 르네상스 회화의 종합자인 동시에 완성자 라고 한다. 온화·유순·단아한 인품은 궁정인들 뿐만 아니라 전 민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호화로 운 여생을 보냈다.
◑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09∼10)>--바티칸 궁 서명의 방. 진리는 인문 과학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중앙에 관념의 세계를 대표하는 플라톤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고 과학과 자연계를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팔을 들어 앞을 가리 키고 있다. 피타고라스, 유클리트 등 많은 철학자, 과학자들이 앉거나 서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고 있 는데 공간의 원근법과 집중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화면의 오른쪽 끝 부분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기도했다.
◑ 브라만테(Bramante, Lazzari) :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가로 프란체스카와 알베르트의 영향을 받았고 화가로서 건축학을 공부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교유하여 그의 건축 아이디어의 영향도 받았다. 이 무렵의 대표적 건축으로는 산타 마리아 델레그라치에 성당의 중앙당 본당의 성체 감실이 있다. 1499년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 연구에 전념하였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뜻에 따라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에 착수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이 성당의 그리스 십자형으로 된 대원개 집중형식의 본당은 전성기의 르네상스의 대표작이다.
◑ 보티첼리(Botticelli) : 이탈리아의 화가로‘봄’‘비너스의 탄생’등이 대표작이다. 피렌체 출신의 방탕한 수도승으로 알려진 필리포 리피에게 그림을 배웠다. 보티첼리는 나중에 붙인 이름이고, 본명은 알렉산드로 디 마리아노 필리페피다. 초기 작품은 후기의 여성적인 아름다움과는 달리 인체의 구석구석을 계산한 듯한 투시도 법을 따르고 있다.‘봄’(1478)은 ‘봄의 비유’라고도 하는데 검푸른 숲을 배경으로 이교적이면서 서정적인 낭만을 자유롭게 표현함으로써 충만한 생의 환희와 합창을 전한다. 가운데에 비너스가 서 있고 양옆에는 꽃의 여신이 오른손으로 풀꽃을 뿌리고, 3명의 여신이 고요한 원무를 추면서 봄이 오는 것을 축복하고 있다.‘비너스의 탄생’(1485)은 최고의 걸작이다. 파도 거품 속에서 바닷가에 닿은 비너스의 촉촉하면서도 신선한 누드 상이 여성의 성스러운 관능미를 간직하면서 금방 태어난 듯한 여인의 생기와 야성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회화의 천재로 일컬어진다.
◑ 피렌체(Firenze) : 저명한 인문주의자와 예술가를 배출한 베네치아·로마 등과 함께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 약 10만명으로 직물 공업과 금융업의 중심지였다. 15세기에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집안은 부유한 은행가로, 문예의 보호자로서 유명하다.
◑ 메디치 가문 :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는 독일의 푸거 가문과 비교되는 대 금융가문이다. 13세기 말쯤부터 동방 무역과 은행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다. 조반니(1360∼1429년)와 그의 장남 코시모(1389∼1464년)시대에는 메디치 은행의 지점이 전 유럽에 퍼졌으며 아시아·아프리카에도 거래처를 설치했다. 1443년 코시모는 피렌체 최고 참사회로부터 과두 상인층으로 이루어진 공화정의 수반에 추대됐다. 코시모는 정권을 장악하자 비용을 아끼지 않고 피렌체의 정비와 미화에 노력했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1449∼92년)의 등장 과 함께 피렌체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됐으며 동시에 시정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독재도 완성됐다. 로렌초는 정적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리는 반면 학문과 예술을 애호해 피렌체를 르네상스 문화의 전당으로 빛을 내게 하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로렌초가 죽은 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원정하는 길에 피렌 체에 입성해 사보나롤라 민주 공화 정부가 수립되는 날까지 이탈리아 미술은 메디치 가문과 함께 번영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문화가 쇠퇴했어도 16∼17세기까지 경제적인 실력을 가지고 코시모 1세가 토스카나 대공의 칭호를 얻어 봉건 군주의 대열에 끼었다. 프랑스 왕비와 로마 교황도 배출했다. 그러나 도저히 로렌초 시대의 영광을 재현할 수는 없었다.
◑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 di Bernardo dei ;1469∼1527)) :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 사상가, 외교가, 역사가로 피렌체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피렌체 공화 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는 피렌체사(史)의 전개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메디치 가의 몰락 후 1498년부터 1512년까지 공화 정부 주석 소데리니 밑에서 외교·군사에 관한 십인청(十人廳)의 사무국장이 되어 외국에도 수차 사절로서 파견되었다. 후에 메디치 가가 복귀하자 실각하여 은거하였다. 그 동안 명저‘군주론’‘로마사론’‘전술론’‘피렌체사’와 희곡‘만드라골라’등을 저술하였다. {피렌체 사}, {로마사론}은 근대적 역사 서술의 선구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적 혼란 속에 이탈리아의 분열을 걱정하며 강력한 왕권에 의한 독재적인 지도자가 나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군주론을 저술하였다. 군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의와 신의를 저버리기도 하고 인간의 도리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사상이다. 여우의 간사함과 사자의 용맹을 예로 들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 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즘은 결국은 중세적 정치 방식이나, 도덕률이 권위를 잃는 과도기적 사상의 꽃이며, 또한 내우 외환으로 혼란의 극에 있었던 당시 이탈리아의 역사적 소산이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를 찬미하였으나, 이탈리아의 구제를 권력 정치가의 전형인 보르지아에게 기대한 것이었는데, 그의 본성은 단순한 정체론이 아니라 조국애였다. 만년에 피렌체 근교의 산 카시아노에서 저작에 전념하다 실의와 빈곤 속에서 죽었다.
◑ 군주론(君主論: I1 Principe ;1532)) : 마키아벨리가 저술한 근대 정치학 수립에 크게 기여한 저서. 내용은 메디치에 드리는 헌사와 본문 26 장으로 되어 있으며, 국가·군주·군사 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다. 중세의 도덕률이나 종교관에서 벗어난 개인만이 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으며, 예리한 시대 감각을 보이고 있다. 분열되어 있는 이탈리아를 구출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가의 출현을 바라는 애국적인 저서이며, 위기의 정치 학설인데, 그의 전제 군주 찬미는 후세에 커다란 비판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 이탈리아와 북유럽 르네상스의 비교
▶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기둥이 된 군주와 교황들은 문학과 예술 및 휴머니스트들의 활동을 적극 원조하 였다. 이 외에도 재산을 모은 대 상인들이 문예를 후원하였는데 거기에는 다분히 중세적 도덕관이 작용 했을 수 있다. 중세의 윤리 도덕이 인색함과 축재의 죄악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부유한 계층은 문예 후 원에 그들의 재산을 소비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 정치적 지배자들이 문예 후원에 적극적 이었던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굳혀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는 전제적 지배자나 소수의 도시 귀족의 교양과 예술애호에 의해 장려·보호되어 대중 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 에라스무스를 위시한 서유럽의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칼뱅 등 종교 개혁자와 같은 시대에 살던 사람들 로서 특히 고전 연구뿐 아니라 성서 연구에 몰두하여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지역에서는 이탈리아보다 봉건적 주종관계와 관습이 더 뿌리 깊이 내렸으며 농촌 사회와 도시와의 확실한 구별이 지어져 있었다. 스콜라 철학의 세력도 오히려 북방에 있어서 더 확고하였다. 그러나 중세 의 봉건 체제가 쇠퇴함에 따라 사람들은 사회와 교육 제도 등에 더 큰 관심을 갖고 특히 종교의 개혁을 지향하게 되었다. 휴머니스트들의 관심은 주로 성서나 그 밖의 크리스트교의 고전을 원어로 연구하며 가능하면 원초적인 크리스트교로 돌아가겠다는 실제적 이상을 내세웠다. 그들에게는 탐미적 개성을 발 휘시키는 데 주력하는 일보다는 윤리적·종교적 덕성을 증진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였다. 서유럽의 인문 주의는 중세이래 유럽의 정치·사회의 지주였던 종교 그 자체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사회 개혁의 의지를 자극하였다.
◑ 에라스무스(Erasmus, Desiderius ;1446?∼1536) :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에서 출생. 일찍 고아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 재능을 인정받 아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리스와 라틴의 고전 문학을 연구한 후 영국이나 이탈리아 여행을 즐 겨하였으며, 영국에 있는 친구 토마스 모어의 집에서 유명한‘우신예찬’(1509)을 써서 교회와 수도원의 위선을 풍자하고 무지와 광신대신 지성과 이성을 강조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 기도 하였으며 1513년 이후는 독일에 정주하였다. 당시 종교 개혁의 물결에 말려들어 처음엔 개혁파에 동정적이었으나, 이지적이며 개인주의자인 그는 행동적이며 열광적인 루터와 맞지 않아 유명한 논쟁을 벌인 후, 신구 양파로부터 공격을 받고, 또, 병으로 고생 끝에 사망하였다.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서의 번역 등은 유명하며 프랑스와 라블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토머스 모어와 유토피아 :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런던의 재판관의 아들로 태어난 정치가, 사회 사상가이면서 인문주의자였다. 헨리 8세의 결혼 정책에 반대하여 처형당하였다. 오늘날 이상향을 지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모어가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속되어 오던 것인데 그 동기는 실제 현실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우회적인 표출인 경우가 많다. 모어 역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1516년에 쓴 책에서 표현했는데 이 책의 제목이 바로《유토피아(Utopia)》이다. 그런데 이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리스어 ou(없다)+topos(곳)+ia(명사어미)에서 나온 말이다. 문자 그대로 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 이란 뜻이다.《유토피아》는 영국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제1부와 이상국 유토피아의 지리, 정치, 종교, 가족 제도, 풍속 등을 다룬 제2부로 나뉘어져 있다. 이 책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대륙 탐험에 따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기로에 표류하다 유토피아 섬에 도착한 선원이 그곳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저자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의 제2부에서 표류했던 선원이 들려주는 이상 사회인 유토피아는 재산 공유제 사회였다. 즉 착취없는 생산과 분배, 쾌적한 노동, 교육의 남녀 평등, 행복한 가정 생활, 평화주의, 종교적 관용 등. 모어가 이렇게 재산 공유제 사회를 이상 사회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그를 근대 공산주의의 선구자로 간주하기도 한다.《유토피아》에서 묘사된 나라는 건물·시가·위생·노동·교육·경제 등에 관해 매우 진보적이다. 예를 들면 유토피아의 수도 아모르우트의 사람들은 6시간 일하고 8시간 자며, 그 외에는 각자의 취미 특히 독서에 시간을 보낸다. 유토피아의 시민들은 자위상의 필요 혹은 폭정하에 신음하는 국민의 해방을 돕는 경우 외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교육은 범죄의 예방으로 실시되며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은 유익한 생계 수단을 위한 교육을 받고 석방된다. 국가의 재산은 모든 시민에게 균등 배부된다. 모어가 살고 있던 영국의 현실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영국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해외 식민지 무역이 발전했고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발전한 것이 모직물 공업이었다. 이전까지는 양모를 수입해 쓰던 모직물 공업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원료인 양모가 부족해지자 토지 소유자들은 좀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이른바 인클로저 운동이다. 그런데 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대대로 살던 토지에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모어는《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라고 까지 말했다. 모어는 또 프랑스 국왕과 대신들을 예로 들어 정치에서의 책략과 야망을 폭로하고, 나아가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 결함의 원인을 사유 재산 제도에서 찾았다. 즉 돈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는 곳에서 국가의 올바른 번영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유토피아》는 여러 국가의 사악함의 원인을 파헤치고 당시의 영국인들, 넓게는 유럽인들에게 도덕적 반성을 촉구한 저서라 할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성적인 교화로 인간을 개조하여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 인문주의자의 이상이 깃들어 있다.
◑ 돈키호테(Don Quijote) : 세르반테스가 지은 유명한 풍자 소설로 원명은‘재지(才智)있는 향사(鄕士) 동키호테 데 라만차’이 다. 에스파냐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자로서, 어려서부터 파란 많은 생활을 겪었는데 {돈키호테} 는 그러한 경험의 소산이었다. 기사 이야기를 탐독하던 동키호테가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편력의 길에 오르는 이야기인데, 정의와 이상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종사 산초 판사의 두 사람이 현실에 부딪히며 일어나는 해학적인 줄거리이다. 르네상스에서 시작되는 근대 소설이 참으로 인간 묘사를 주제로 한 것은 이 돈키호테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과학혁명 :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뉴턴의 업적은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을 탈피하여 인식할 수 있고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판명한 것이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지구의 절대성은 사라지고 우주의 무한함을 깨닫게 되어 중세적 세계관은 커다란 타격을 입게된다.
◑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 1543년〈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란 책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폴란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당시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고 지구는 움직이지 않으며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생각은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천동설〉로 대표되는데, 교회와 카 릭 신앙이 이 천동설을 확고히 떠받치고 있었다. 이와 다른 생각을 품는 자는 성서를 위배한 이단자로 낙인찍혔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태어났다. 그는 수학자로 출발, 천문학에 관심을 갖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깊이 연구한 끝에 그 학설이 엉터리라고 깨달았다. 천동설은 별들의 움직임을 전혀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지동설을 확신했지만 세상에 발설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사실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이 아니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피타고라스는「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중세에 이르러서도 소수의 학자들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을 했다.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일정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했다. 이들은 그럼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학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그 러나 이 주장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명성과 교회의 권위에 가려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안쪽에서부터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이 각각 원을 그리며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가히「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는 건 거룩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체계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란 바로 그 같은 혁명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을 일컫는 말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그때까지의 인간 중심적 우주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인간이 사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입장은, 결국 신 중심의 생각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우주관을 크게 바꾸어 놓은 지동설이 교회의 권위에 미친 영향은 아주 컸다. 원래 수도사였던 코페르니쿠스도 이를 염려하여 자기 학설을 공표하기를 주저하였는데, 마침내 친구의 권유를 받아 죽기 직전인 1543년에 그것을 발표했을 때에도, 그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교황 바울로 3세에게 바치는 글을 실어 놓았던 것이다.
◑ 브루노 조르다노 : 브루노는 154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도미니크 회에 가입, 수도사가 되었으나, 왕성한 지적 욕구로 당대의 온갖 지식과 과학적 성과를 섭렵한 끝에 수도원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 후 제네바·파리·옥스포드·마르부르크·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떠돌며 강의와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단적인 이론은 선뜻 환영받지 못했고, 덕분에 그는 항상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다. 때마침 어떤 베니스 인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를 초청한 사람이 바로 그를 밀고한 장본인이었다. 브루노는 체포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 1600년 2월 17일 로마의 광장에 장작더미가 쌓이고 한 남자가 결박당한 채 세워졌다. 마침내 장작더미에 불이 붙었다. 남자는 한 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 십자가를 건네주자, 그는 말없이 뿌리쳐 버렸다. 이것이 브루노의 최후이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포기하라는 종교 재판소의 요구에 불응하고 7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화형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그의 사상이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한층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우주는 무수히 많은 태양과 별들의 체계로 충만한 무한의 경지이며, 우주는 한계도 중심도 없이 오직 운동을 계속할 뿐이라고 했다. 이는 우주를 유한한 것이라고 본 코페르니쿠스를 한 걸음 앞지르는 내용이었다. 그에게 신은 곧 자연이었다. 교황청은 그의 사상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여겨 그를 화형에 처하고 만 것이다.
◑ 케플러(Kepler, Johannes) : 요하네스 케플러는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철저히 연구한 사람이다. 1600년 그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천문학자인 덴마크의 티코 브라에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티코 브라에가 죽은 뒤 그는 부라에의 계승자가 되었다. 코페르티쿠스를 존경한 그는 연구와 관찰을 거듭한 끝에 천체의 운동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이것이 유명한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이다. 첫째,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타원 궤도를 그리며 돈다. 둘째,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도는 속도는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각각 다르다. 케플러는 이 두 가지 원칙을 1609년에 발표했고 10년 만인 1619년 세번째 법칙을 발표했다. 즉, 임의의 두 행성간의 거리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의 평균 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훨씬 정교하게 만든 인물이다. 지동설이 사람들에게 사실로 받아지는 데는 무척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코페르니쿠스와 조르다노 브루노, 케플러는 근대 과학의 새 지평을 활짝 연 사람들이었다.
◑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 갈릴레이는 1564년 사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11살 되던 해 수도원에 딸린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깊은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몰두하게 된 것도 이 당시의 깊은 회의와 연관이 있다. 아버지는 그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했지만, 그는 자연 과학에 더 흥미를 느꼈다.「진자 등시성」을 발견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목성의 주위를 네 개의 위성이 돌고 있다는 것, 은하수는 무수한 별들의 모임이라는 것, 달에 있는 산맥, 그리고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해냈다. 그의 나이 45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단박에 유명해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천동설을 고수하고 있던 교황청은 그의 주장이 불합리하고 이교도적이라 하여 경고를 했다. 1623년 그의 옛 친구인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새 교황 우르반 8세로 선출되었다. 갈릴레이는 안심 하고 연구를 계속했다. 1632년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담아〈두 개의 주요한 우주체 계의 대화〉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교황 우르반 8세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그럴 듯한 가설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이었 다. 이듬해인 1633년 6월, 갈릴레이는 마침내 종교 재판에 부쳐졌다. 재판관들은 그에게 자신의 이론을 철회하고 죄와 오류를 고백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그는 브루노처럼 담대한 인물은 못되었다. 천동 설이 옳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만 것이다.「그래도 지구는 돈다」갈릴레이가 법정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린 말이다. 그 후 갈릴레이는 얼마간의 감옥 생활을 거쳐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다가 1642년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는 과학적 연구 방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2) 종교 개혁
◑ 위클리프(Wycliff : 1330쯤∼84년) : 영국의 선구적 종교 개혁가인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와 목사가 됐다가 교회의 교리 그 자체에 의혹을 품고, 특히 교회의 세속 지배가 신앙을 차츰 황폐하게 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영국의 교회 영지와 재산은 왕국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교와 수도원장은 정치·사회적으로 우월권을 획득하고 그들이 주민들로부터 수탈한 조세도 로마 교회로 빠져나갈 확률이 컸다. 위클리프는 영국 국민이 낸 세금과 토지에서 생긴 수익은 반드시 국왕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설교했다. 또한 교계와 세속의 사명관을 엄격하게 구분해 영국의 성직자는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하고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위클리프의 개혁 강령은 교회와 정부의 탄압에도 국민들 사이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위클리프 사상을 계승해 종교 운동의 실천에 종사했던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롤라드 파(Lollards)라고 부른다. 위클리프는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은밀한 보호를 받으면서 성서를 보급시키기 위해 성서의 영어 번역 편집에 종사했다. 위클리프는 사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 선언을 받았으며 유해는 파헤쳐져 태워지고 재는 템스 강에 뿌려졌다.
◐ 후스(Hus,Jan :1369?-1415) : 보히미아의 종교 개혁자로 빈농 가에서 출생하고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을 배웠고, 졸업 후 교수로 있다가 1402∼1403년 동 대학 총장이 되었으며, 프라하 시의 베들레햄 교회의 설교사를 겸하였다. 당시 보히미아에 전파되었던 위클리프의 주장에 공감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비난하였다. 황제와 독일인에 대립하고 있던 보히미아 왕 벤쩰과 체코 인들은 그를 지지하였으나, 프라하 대주교는 1408년 이단의 설교를 금지하고, 이어 1409년 그가 대학 제도를 개혁하여 신제도의 총장에 추대되자, 1411년 그를 파문하였다. 1412년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나폴리 왕 토벌을 위하여 속죄부를 판매하자, 후스는 이를 통렬히 비난하였고 민중도 그를 따라서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414년 콘스탄쯔 종교 회의에 소환되어 1415년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는 위클리프의 주장을 따라 신의 계시로서의 성서를 기본으로 하여 예정설을 취하고 교회의 토지 소유와 세속화를 비난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독일과 교회의 압박으로 고통받는 체코인의 민족 의식과 결합하여 개혁 운동을 일으키게 했으며, 그의 처형 후에도 후스 파는 후스 전쟁을 일으켜 반항 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 후스 전쟁(Hussitenkrieg ;1419-1436) : 보히미아의 후스 파가 일으킨 종교 전쟁으로 1415년 후스의 처형이 있은 후 카톨릭 교회에 의한 프라하 시 파문과 프라하 대학 탄압에 대하여 후스의 교설을 신봉하는 프라하 시민들은 교회·수도원을 습격하고, 1419년에는 국왕 지기스문트의 군대와 충돌하여 대대적인 반란으로 발전하였다. 후스 파는 온건한 우트라크비스텐과 과격한 타보르 파로 갈라져 있었으나, 외적에 대해서는 합심하여 싸워, 교황의 명으로 파견된 지기스문트의 5차례에 걸친 십자군(1420∼1431)을 격파하고, 1426년부터는 국외로 진격하여 한때는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에까지 도달하였다. 탄압에 실패한 카톨릭 교회측은 1431년 바젤 종교 회의에서 화평 조건을 토의하고, 1433년 화약 초안을 작성하고자 우트라크비스텐은 이에 동의하고, 끝까지 반대하는 타보르 파를 리벤에서 격파한 후, 1436년 화약을 성립시켰다. 여기서 교회측은 양종 성찬을 인정하고 후스 파는 지기스문트의 보히미아 왕위를 승인하였다. 이 반란은 종교적 저항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민족적 문제도 큰 요인이 되고 있었다.
◑ 면죄부(Indulgene) : 카톨릭 교회의 교리에는 참회를 하면 죄는 사면되나 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한 사람들의 인간적 행위, 이를테면 충실한 의무 이행, 인내, 기도, 또는 선행을 행하여야 된다고 하였다. 특히 좋은 일을 하면 연옥에서 받을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근거는 교회가 지니고 있는 공덕인데, 예수의 한없는 공덕, 성모와 여러 성인들의 순교를 통한 공덕들을 교회가 지니고 있어, 그 일부를 증표로 하여 교회를 위한 사업에 쓴다는 목적으로 기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면죄부라 하였는데, 교황이 교회 수입을 늘리고자 면죄부를 발매하였으며, 특히 중앙 집권적 권력이 없었던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판매하였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는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를 발급하였는데 도미니크파 수도사 테첼의 경우에는 면죄부를 산 사람뿐 아니라 부모 친지의영혼도 면죄부를 산 돈이 금고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으로부터 튀어나온다는 선전을 하였다.
◑ 루터(Luter, Martin ; 1483∼1546) : 작센의 아이슬레벤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1505년 돌연 아우구스티누스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1512년 신학 박사가 되었고,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카톨릭 교의에 대한 의문은 수도원 생활 중에 싹텄으며, '신앙만에 의한' 의인에의 확신에 접근하고 있었다. 의인설(義人說)은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킨 바탕이 된 이론이다. 인간의 구제는 교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성사와 선행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에 대한 신앙과 자비로운 신의 은총으로써 즉 신앙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1517년 테째르에게 인솔된 면죄부 판매 일행이 작센으로 왔을 때에 그는 종교적 확신에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작성, 발표하였는데 독일 민중들에게 곧 커다란 영향을 불러 일으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로마 교황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1519년 교회측 대표인 에크와의 라이프치히 토론에서 교황·종교 이외의 권위를 부정하고, 1520년에는 교황의 파문장을 대중앞에서 소각하여 불퇴전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또 같은 해에 {독일 국민의 크리스트교 귀족에게 드림}, {교회의 바빌론 유수의 서곡}, {크리스트 교도의 자유}를 저술하여 의인론과 성서주의, 만인 사제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개혁 이념을 표명하였다. 1521년 카를 5세에 의해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소신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국법의 보호 밖으로 놓여져, 귀로에 작센 선제 후(選帝候) 프리드리히 공의 보호로 발트부르크 성에 칩거하여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1524년 독일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영주·제후와 농민과의 조정에 노력하였으나 폭력화하자 제후 의 무력적 진압을 지지하여 개혁 운동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잃었다. 이는 그의 정신주의와 프로테스탄 트 교회 확립을 제후들의 세력에 기대한 입장 때문이었으나, 영방 교회제 확립 쪽으로 개혁 운동의 선회를 결정짓는 것이었다.
◑ 루터의 95개조 반박문(1517. 10. 31)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 마르틴 루터의 감독하에 다음의 여러 조문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제1조- 우리들의 주(主)이며 스승인 예수는 "무엇이든 회개하라......(마태복음 4장 67절)"고 말씀하셨 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으로 크리스트교도의 생애가 모두 회개하는 것이기를 바라셨다. 제2조- 회개는 교회의 절차 즉 사제의 지도에 의한 "고행", "단식", "기부", "기도", "순례"와 같은 속 죄 행위의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20조- 교황이 "모든 벌을 면죄한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든 벌이 아니다. 단지 교황 자신이 내린 벌을 면죄한다는 것뿐이다. 제21조-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도 모든 벌이 면죄된다고 하여 면죄부를 판매하는 설교자는 모든 잘 못을 범하고 있다. 제27조- 동전이 모금 상자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혼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 간을 유혹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제39조- 민중으로 하여금 면죄부의 전능한 가치와 진실된 회개를 동시에 알게끔 설교하는 것은 어떠 한 학식있는 신학자로서도 불가능하다. 제45조- 곤경에 처란 사람을 돕지 않고 면죄부를 사려는 생각은 교황으로부터 되를 면죄받는 것이 아니라 신의 노여움을 사는 것임을 크리스트 교도에게 가르쳐야 한다. 제89조- 교황은 면죄부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전에 발행된 면죄부가 어째서 이번의 신면죄부 발행에 따라 무효가 되겠는가? 제95조- 크리스트 교도에게 십자가를 외치는 예언자에게 축복있으라. 거리에는 십자가가 없다.
◑ 루터와 농민 반란 :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교회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농민들에게 루터는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토마스 뮌처가 있다. 루터의 소개로 츠비카우에서 목사가 된 그는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군주·지배자·부자를 비판하는 그의 설교를 듣고 농민과 광부들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1523년 뮌처는 튀빙겐에 정착, 다음해 그곳에서 일어난 농민 전쟁의 선두에 섰다. 1525년 튀빙겐에서 시작된 농민 전쟁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농민군의 요구사항은 총 12개 조항이었다.「제1조 민주적인 교회 운영, 제2조 십일조 거부, 제3조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농노제 폐지, 제4조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 제5조 자유로운 벌목, 제6조 세금 증대 거부, 제7조 부역 증대 거부, 제8조 토지세의 적절한 징수, 제9조 영주 마음대로 하는 처벌 금지, 제10조 촌락 공동체 허가, 제11조 과부와 고아 약탈 금지, 제12조 이러한 조항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 허가」그러나 루터는 농민 전쟁에 매우 냉소적이었다.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농민들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이는 만인을 평등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정신적 왕국을 현세의 왕국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고 나머지는 농노여야 하며, 어떤 사람은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농민 전쟁은 1525년 가을 진압되었다. 루터는 특히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으므로 이에 힘을 얻은 봉건 귀족들은 무자비하게 농민군을 진압했다.「반도들은 유해유독하며 악마의 화신이란 점에서 그들보다 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대들은 농민 반도들을 죽이기를 마치 미친 개를 때려잡듯 해야 한다. 만약 그대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를 공격할 것이며 그대의 토지를 모두 뺏어갈 것이다」루터는 이렇 게 귀족들에게 호소했다. 농민들은 이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뮌처가 지도한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실현해보려던 또 하나의 종교운동은 막을 내렸다. 한편 농민의 지지를 잃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봉건제후와 도시민의 지원하에 계속되어 1555년 아우크 부르크 화의에서 대 타협을 이룸으로써 공인되었다. 이로서 카톨릭이 아닌 루터 교가 성립,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루터 교를 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 부르고 카톨릭은 구교라 부르게 되었다.
◑슈바빙 농민의 12개조
제1조 우리들의 작은 바람은 …… 우리들이 금후 마을 목사를 우리 손으로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목사의 불법적인 행동이 보일 때에는 그를 파면할 권한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다.…… 제3조 우리들을 농노라고 생각하는 것이 종래의 관습이었으나 그리스도가 귀한 피를 흘려 우리들 모두를 양치기이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똑같이 예외없이 해방하고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심한 처사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이며 자유이기를 원하는 것은 성서에도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제4조 가난한 자가 짐승과 새 그리고 강의 물고기를 포획하는 행위가 허가되지 않았던 것이 여태까 지의 관습이었으나 그러한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비동포적이고 이기적이며 신의 말씀에 부합되 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제6조 우리들의 가장 큰 짐은 날마다 커지는 부역이다. 제7조 농민이 고통받지 않고 평온하게 토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영주는 더 이상 농민을 괴롭히거나 압박해서는 안 되며 농민에게 더 이상 부역이나 그 외의 것을 무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 1525년 3월 영주와의 교섭을 위한 초안
◑ 시말칼텐 전쟁(Schmalkaldischer Krueg ;1546-1547) : 1529년 제2회 슈바이엘 국회에서 황제 카알 5세가 루터파의 신앙을 금지한 것에 대해 루터파 제후나 도시는 1530년「시말칼덴 동맹」을 맺고 그에 대항하였으며 황제 카알 5세는 프랑스, 투르크와 대결하는 데에 전념하여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할 겨를이 없었으나, 이후 프랑스와의 화약이 성립되자, 프로테스탄트가 트리엔트 종교회의 참가를 거부한 것을 이유로 1546년 동맹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신교 측은 프랑스의 지원을 의뢰하였으며 로마 교황과 결탁한 황제 측에서는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병사가 참전했다. 프로테스탄트 측은 내부의 알력과 작센 공 모리쯔의 배반으로 붕괴되고, 또 1547년 뮈일베르크 싸움에서 참패했다. 이것을 시말칼덴 전쟁이라 한다. 그러나 황제의 우월한 입장은 1552년 프랑스와 동맹한 모리쯔의 배반으로 뒤집혀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에서 일단 타협이 성립되었다.
◑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Augsburger Religionfriede: 1555) : 카톨릭과 루터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하여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소집된 제국 의회의 결의. 내용은 1) 제후 및 제국 도시는 신구 신앙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주민은 그에 따라야 하며 이를 원하지 않는 자는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 단 루터 파 이외의 신교는 금지된다. 2) 카톨릭 제후가 루터 파로 개종할 때는 그 지위와 영토를 상실하며 카톨릭의 후계자가 임명된다. 3) 루터 파의 영토에는 카톨릭 교회의 사법권은 행사되지 못한다. 1552년(파사우 제국 의회)이전에 몰수된 교회령은 현행대로 인정되나 그 이후의 것은 옛 영지로 복귀한다는 것 등이다. 이것으로 종교 개혁 운동 이래의 양파의 대립은 일단 종식되었으나 그 철저하지 못한 타협적 해결은 후에 30년 전쟁 발발의 원인을 초래하게 하였다. 또한「지배자의 종교가 그 영내의 종교가 된다」는 원칙에 따라 제후들과 자유도시에게 종 교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이로써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이미 실현될 단계에 있던 영방 교회제가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차이점
▶ 루터의 종교관 ▷의인설(義人說) - 신에 대한 신앙과 신의 은총으로써만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 교회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성사(聖事)와 선행(善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써만 의롭게 된다. ▷루터의 사회 국가관 - 농민들이 요구는 만인을 평등하게 만들어 크리스트의 정신적 왕국을 현세의 왕국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지주고 나머지는 농노여야 하며, 어떤 사람은 왕이고 나머지는 신하가 되어야 한다.
▶ 칼뱅의 종교관 ▷ 예정설(豫定說) : 인간의 구원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신자는 자기의 구원을 확신하고 근 면하게 세속적인 직업에 종사하는 것만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칼뱅의 사회 국가관 : 제노바에서 칼뱅은 시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종교와 정치가 하나의 행정 체제 로 융화하는 신정적(神政的)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시민에게 엄격한 윤리적 생활을 강요하였으며 축제·극장 등 오락을 폐쇄하였으므로 엄격한 지배 체제에서 오는 단순, 소박함이 시민 생활을 지배하였다.
◑ 쯔빙글리(Zwingli, Huldreich :1484-1531) :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로 처음에 인문주의적 연구를 하다 1516년 에라스무스와 알게 되어 그 영향을 받아 점차 복음주의로 기울어 쮜리히의 목사가 되었다. 쮜리히 청년들이 용병 옹모나 속죄부 판매에 대한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1522년부터 종교 개혁 운동의 실천에 투신, 성서주의에 투철하여 1523년에는 시 정부로 하여금 로마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게 하고, 교황권을 부인하고 수도원을 폐쇄하고 미사도 폐지하였으며 다시 베른, 남독일 방면까지를 그 영향하에 두었다. 1529년 마르부르크 토론에서 루터와의 견해 조정에 노력하였으나, 성찬식에 관하여 최후까지 일치점을 찾지 못하여 결별했다. 1531년 반개혁파인 산림 5주와의 카펠 싸움에 종군 목사로서 참가하여 전사하였다. 그의 신학 사상은 인문주의의 영향에 의하여 루터에 비해 훨씬 합리주의적이며 또한 정치적 개혁에 대해서도 실천적이어서, 신의 사면적(赦免的) 사랑보다는 예정설을 앞세우는 등 전반적으로 캘빈에 가깝다. 그의 요절로 성공하지 못한 스위스의 개혁 운동은 얼마 후 제네바로 찾아온 캘빈에 의하여 계승·실현되었다.
◑ 칼뱅(Calvin ; 1509∼1564) : 종교 개혁자이자 신학자인 칼뱅은 동북프랑스의 하찮은 통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대학에서 인문주의와 신학을 공부하였다. 스위스 바젤에서 27세의 나이로 예정설로 유명한『기독교 요강』을 집필하여 순식간에 신교진영의 이론적 지도자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으나 그 자신은 여기에 일생을 바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제네바에 하루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열렬한 선교사이며 교회 혁신운동의 기수인 기욤 파렐이 숙소로 찾아와 칼뱅을 설득하고 만 것이다. 이후 제네바 시장이 된 칼뱅은 엄격한 기독교 규칙으로 시민 생활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시민들은 춤을 추거나 예배시간에 웃는 것만으로도 고발당하였으므로 '자유파' 시민들에게는 원성을 얻었다. 교회가 국가에 밀접하게 협력하는 '기독교 공동체' 의 실현을 목표로 한 칼뱅은 그러한 목적에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설은 루터와 같이 엄격한 성서주의의 입장에 서서 카 톨릭적 교계 제도와 그 행위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예정설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는 이성은 신 에 의하여 지배되며 구제는 신의 예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니 신에게 복종함으로서 참다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신이 소명한 직업과 노동에 전념하고 합리적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부도덕 을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사상이 민족적이고 농업적인데 비하여 칼뱅의 사상은 실 천적인 생활 윤리를 규정했으며 시민 사회인에게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주류가 되 었다.
◑ 예정설(豫定說)과 직업 소명설 : 칼뱅의 저서인 '크리스트교 강요'는 신에 의해 예정된 사람만이 구제된다고 하였다. 예정설을 받아들인 칼뱅파 교도들은 구제의 확신과 더불어 신에 의하여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신의 영광을 지상에 나타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크리스트 교도는 그의 사회 활동을 통해서 신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모든 직업의 평등을 주장하고 근로에 의한 영리 추구와 축재를 인정하였다. 세속적 직업은 칼뱅교도들에게 신의 구제를 받았다는 '확신의 표지' 또는 악마와 나날이 싸우면서 신의 영광을 나타낼 '신앙의 싸움터' 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칼뱅교도들은 근면하게 직업 노동에 종사하며, 모든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생활 전체를 합리적으로 조직할 것을 권고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써 초래되는 재화의 축적이 적극적으로 긍정되고 축적된 재화는 절약으로 자본을 형성하고 금욕적인 소비억제로 재생산에 투입되어 생산력의 확대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서유럽 여러 나라로 퍼지고 특히 그의 직업 윤리는 중산 시민계층에게 받아들여져 발흥하고 있었던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칼뱅파의 교도를 영국에서는 청교도(Puritan)라 하였으며, 프 랑스에서는 위그노(Huguenots),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Geusen)이라 하였다.
◐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 종교 개혁에 의해서 성립된 근대 크리스트교로 그 명칭은 1529년 슈바이엘에 국회를 소집한 신성 로마 황제 카알 5세가 루터파의 신앙을 금지한 것에 대해, 헤센 방백 필립에 의해 지도된 루터파의 제후나 도시가 항의서(protestatio)를 제출한 데에서 유래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의는 루터 및 캘빈에 의하여 확립되었으며, 그 후에 형성된 여러 교파는 모두 이 양자의 교의에 기원한다. 이러한 여러 교파는 각각이 상이점이 있기는 하나, 그 근저에 있어서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것은 루터에 의하여 제시된「성서주의」「의인론」및「만인 사제주의」의 정신이며, 도덕적 선행이나 성사 등의 외적 계기를 중시하는 카톨릭 교회에 대립하여,「신의 말씀」인 성서 및 신앙의 내면성을 중시한다. 캘빈 파는 예정설을 취하며, 또한 사회적·정치적으로는 루터에 비하여 훨씬 실천적이지만, 그 정신의 근저에 있어서는 루터와 공통되어 있다. 17,8세기에 많은 교파가 형성되었는데, 회중파(會衆派웨스민스터 신앙고백에 교의상의 기초를 둔다. 청교도도 이에 속함), 뱁티스트 파(유아 세례를 부인), 퀘이커 파(일체의 형식적 요소를 배 제), 모라비아 파(후스 파의 지류), 메더디스트 파(경건주의의 유파에 속하며 웨슬리가 창립) 등이 그 주요 계통을 이루고 있다.
◑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년) : 영국 왕을 영국 국교회의 지상에 있어서 유일한 최고의 수장으로 하는 법령. 헨리 8세가 궁녀 앤 볼린과 결혼하고자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혼을 강행하는 한편 수장령을 의결케 하여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하였다. 영국 왕이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수장령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국왕 폐하는 마땅히 법에 따라 실제로도 영국 교회의 수장(首長)이시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성직자들이 여러 차례에 걸친 성직자 회의에서 승인한 바이다. 그러나 이를 더 확실히 해 두기 위해서, 그리고 영국에서 크리스트교의 공덕을 증대시키고 지금까지 국내에서 행해진 죄악과 이단 및 그 밖의 범법 행위와 폐단을 모두 다 없애기 위해서, 본 회의의 권한으로 다음의 법령을 정한다. 즉 우리의 국왕 폐하와 앞으로 폐하를 계승하실 여러 왕들은 앵그리카나 이클리저(Anglican Ecclesia)라고 불리는 영국 교회의 유일한 수장으로 해석되고, 승인되고, 또 그렇게 여겨져야 한다. 국왕은 당연히 영국 교회의 수장이며 수장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 : 헨리 7세의 차남으로 형 아아더가 요절하였으므로 부친의 사후 18세에 영국의 왕위(1509∼1547)에 올랐다. 아라곤 왕의 딸이며 과부가 된 형수 캐더린과 결혼하였다. 청년 시대에는 에라스무스, 토머스 모어와 교제하여 학식을 넓혔다. 추기경 울지를 기용하고부터 국제 관계에 휘말려, 1513년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 5세를 도와 프랑스와 싸웠으며, 그 동맹국 스코틀랜드와도 싸웠다. 그 후 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황제의 항쟁을 중재하여 이득을 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딸 메리를 낳았으나 남자 후계자를 갈망하 여 캐더린과 이혼하고, 왕비의 시녀인 앤 블레인(엘리자베드 여왕의 어머니)과 결혼을 하려고 하였으나, 교황의 반대에 부딪히자 캔터베리 대주교의 힘을 빌어 앤과의 결혼을 강행함으로써 파문을 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처음엔 「신앙의 보호자」로 불리던 헨리와 교황과의 결렬은 결정적인 것이 되어, 1534년 수장령을 발하여 국왕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영국에 있어서의 로마 교회의 권리와 수입을 단절하고, 1536년 및 1539년에는 수도원 해산을 단행하였다. 1536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앤을 간통했다는 죄로 처형한 뒤에도 결혼은 순탄치 못하여, 제인 시이모어와 세 번째 결혼했으나 아들 에드워드를 낳고 죽어서 또 홀몸이 되었으며 이번에는 독일의 루터 파들이 영국에 자기의 교세를 확장하려고 루터 파인 클리브 공의 딸 앤을 왕비로 추천하여 네 번째의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뚝뚝한 이 독일 여자에게 곧 실증을 느껴 이혼하고 다섯 번째 결혼을 캐터린 하워즈와 하게 되었다. 한때 열렬히 그녀 를 사랑하였으나 시종과 간통을 한 혐의로 사형시키고 보모 출신인 캐터린 피아와 여섯번째의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왕비는 헨리 8세보다 10년이나 더 살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6명의 아내와 결혼하고 그중 2명의 아내를 사형시킨 역사상 가장 많은 화제 거리를 풍운아이며 만능 스포츠맨으로 특히 그레꼬로망형 레슬링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왕권 강화에 노력하여, 1537년 북부 재판소를 설립함으로써 북부 제후의 세력을 꺾었으며, 1541년 아일랜드 왕을 주창하여 아일랜드 지배를 강화하였다. 의회의 권위를 높이는 등 입헌적인 군주로 자처하였으나, 전형적인 절대주의 군주였으며, 영국의 절대주의는 그에 의하여 강화되어 엘리자베드 여왕의 치세로 이어졌다.
◑ 통일령 : 영국의 종교 개혁 때 영국 국교회의 의식 및 기도를 통일시킨 법령. 헨리 8세는 초수입세 금지령과 수장령을 발포하여 여태까지 로마 교황청에 바쳐오던 상납금을 금지시키면서부터 영국 국교회는 카톨릭 교회에서 분리되었는데 그 교의에는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에드워드 6세는 1549년에 루터파의 교의를 가미시킨 공도문을 제정하더니 이어 통일령, 곧 [예배의 통일 및 새크러먼트(成事) 집행을 위한 법령]을 발포하여 공도문을 사용할 것을 명령하였다. 1552년 공도문의 일부가 개정되면서 제 2의 통일령이 발포되었다. 메리가 카톨릭을 부흥시킨 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국교회의 기틀을 확고히 하기 위해 1559년 다시 수장령의 통일령을 발포했다. 왕정 복고 때도 의회는 장로파와 독립파를 억압하는 한편 아직 잔존하고 있던 카톨릭 파에 대처하기 위해 통일령을 부활시켰다.
◑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 1534년 헨리 8세가 이혼 문제를 계기로 수장령을 발하여 스스로 영국 국교회의 유일한 수장이 됨으로 써 로마 교회로부터 분리 독립하였다. 그 후 헨리는 수도원 해산을 단행하여 카톨릭 세력을 꺾었으나, 국교회의 성립은 표면적인 독립에 그치고 교의·의식면에서는 거의 카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1594년 에드워드 6세는 통일령을 발하고, 캘빈 파의 교의를 도입한 공도문의 일반적 사용을 요구하였다. 이어 메리 여왕은 카톨릭을 부활시켜 교황권의 재확인, 지금까지의 교회 입법의 전면 철회 등으로 반동 정책을 강행했다. 그러나 엘리자베드 여왕은 국교회의 재흥을 도모하여 수장령·통일령을 다시 발하고 「39 개조」를 제정하여 국교회의 교의적 기초를 굳혔다. 국교회는 캔터베리 대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감독 기구를 근간으로 하며, 이 감독직이 진정한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는 한편 교회의 수장은 국왕이며, 교회는 국가 기구의 하나로서 국가의 감독 지배를 받으면서 그 테두리 안에서 자치권을 누렸다. 그러나 신앙 면에서 철저하지 못하여 청교도들에게는 불만이 많았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주로 정치적인 동기에서 행해졌으므로, 교의·의식면에서 신구 양교의 불철저한 결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교회내에서 친로마 파도 복음주의 파도 함께 불만이어서 전자는 앵글로 카톨릭 파로서 교회내의 일파를 이루고, 후자의 일부는 청교도로서 이탈하고 기타는 메더디스트 파가 되었다. 이른바 성공회는 국교회의 전통을 잇는 주류파이다.
◑ 공도문(Book of Common Prayer) :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 중세 이래 영국에 있어서는 로마식 기도서가 널리 행해졌는데, 이는 성속의 구 별이 있으며 번잡하게 나뉘어져 있었으므로, 종교 개혁시에 새로이 국교용 기도서가 작성되었다. 1549년 에드워드 6세 치세하에 크랜머 등에 의하여 영어의 사용, 비성서적인 이야기의 삭제, 예배식의 간소화, 일정한 예배식의 실시 등을 목적으로 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으나, 이는 단순히 중세적인 부가물의 생 략에 불과하였으므로, 혁신과 성직자들이 좋아하지 않아 1552년 캘빈주의를 많이 채용한 제2기도서가 통일령과 함께 공포되었다. 뒤에 메리 여왕 시대에 폐지되었다가, 엘리자베드 여왕 치하에 1559년 통일 령과 함께 제2기도서 개정의 형태로 부활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개정을 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초서(Chaucer) : 영국의 시인으로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난 초서는 에드워드 3세가 그의 재능을 아껴 궁정에 출입하게 되었다. 초서의 제1기는‘프랑스 기’로 궁정에 번창했던 프랑스 기사도 이야기에 감동해 『장미 이 야기』를 영역했다. 제2기는‘이탈리아 기’로 이 시기에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와 만나 그들의 영향을 받아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Trolius and Criseyde)』를 창작했다. 제3기는‘영국기’로 의원과 임야국 장관 등 관리로 활동했으며, 최대의 걸작 『켄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를 저술했다. 이 장시는 만년의 15년 동안에 저술했으나 결국 미완으로 끝났다. 초서는 시를 정확한 런던 영어로 기록했기 때문에 영어 표준어의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이 때문에‘영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며, 영국 르네상스의 선구자가 됐다.
◑ 제수이트 교단(예수회: Society of Jesus) : 로마 카톨릭 교회에 속한 교단으로 종교 개혁을 계기로 일어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항하기 위하여 에스파니아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해서 1534년 파리에서 창설되었으며 1540년, 교황 파울루스 3세에 의해 윤허되어 정식적으로 발족하였다. 회원은 군사 훈련을 받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교황을 수장으로 받들어 교황 지상권을 재확인하고, 엄격한 군대식 규율로 조직되어 프로테스탄트 공세에 의한 실지(失地)의 회복과 이방 전도에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신교도들에게 빼앗겼던 서남 독일 지방을 탈환한 외 에도, 이베리아 국가들의 식민 사업에도 뛰어들어 유럽에서 잃은 교세를 아시아에서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 교단의 동양 포교 활동은 1542년 인도의 고아에 사비에르가 온 것에서 시작되며 1547년에는 일본, 1752년에는 중국에 이르렀다. 이어서 발리냐노·룻지에리·맛테오 릿치·아담 샬 등의 선교사가 포교에 힘써 명의 황족으로부터도 신자가 나오는 등의 성과를 거두는 한편, 유럽의 학문·기술을 널리 소개하였다. 청대에서는 선교사를 서양 학술의 교사로서만 인정하고 종교가로서의 활동을 제한하였다. 게다가 다른 크리스트 교단과의 종교상의 대립도 있어 통일을 이루지 못하다가 1773년에는 교단 자체도 일단 해산하였으므로 종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로욜라(Loyola, Ignatius de ;1491-1556) : 제주이트 교단의 수도사로 에스파냐의 북부 로욜라 성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팜펠루나의 프랑스 방위전에 종군,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치료를 받는 동안에 성서를 읽고 감격하여 종교에 투신하게 되었다. 1528년 파리 대학으로 옮기면서 신학·철학의 연구를 하였으며, 1534년 파베르, 사비에르와 함께 제 이트 교단을 조직하고 카톨릭 교회를 부흥시켰으며, 인류의 교화를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건강이 나빠져 1535년에는 에스파냐에 돌아갔으며, 1537년에는 동료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였으나 투르크와의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북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교화와 병 간호에 힘썼다. 1540년 예수회가 교황에 의하여 공인되자, 로욜라는 1541년에 그 총장이 되었으며 군대적 복종과 규율로써 단 원을 훈련시켜, 회원을 아시아, 아프리카에 파견하여 포교에 종사시켜 유럽에서 실추된 카톨릭 세력을 해외에서 회복하였다. 그 자신은 로마에 머물러 사무를 총감하고, 회규를 제정하였으며, 학교를 세우는 등 제주이트 교단의 발전에 진력하였다. 그 후 죽을 때까지 교단의 총장직을 맡았다.
◑ 스위스 독립 : 알자스 지방에서 일어난 합스부르크 가문은 11세기에 스위스의 여러 지역을 영유해 유력한 가문이 됐으며 머지않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도 차지하게 됐다. 스위스(Switzerland)는 13세기 말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복종하다가 1291년에 압정에 대항해 우리·슈비츠·니트발덴 3주가 연합해 독립 운동을 일으켰다. 사냥꾼으로 명성이 높았던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1315년 3주의 농민은 장창대를 조직해 모르가르텐 전투에서 황제군을 격파했다. 그리하여 황제로부터 3주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이 승리는 마찬가지로 독립을 바라고 있던 다른 주의 주민들도 움직여, 여러 도시가 차례로 동맹에 가입해 스위스 연방은 1353년에 8주가 됐다. 8주는 협력해 1386년 이후 다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하고, 1499년 2월에는 슈바벤 전투에서 7개월에 걸친 전투 끝에 다시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했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도 마침내 스위스 13주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스위스 농민의 용기는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져, 이 무렵부터 스위스 인을 용병으로 맞아들이는 풍조가 생기기도 했다.
(3) 유럽 세력의 해외 진출
◑ 신항로의 개척 : 유럽에서 육류를 저장하고 보존하는데 있어 동양의 열대 산 향료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후추로 주로 인도와 동인도 제도에서 산출되며, 계피는 실론, 육두그는 셀레베스와 기타 동인도 제도에서, 생강은 양질의 것이 중국에서, 저장에 가장 귀한 향료로서 정향(丁香)은 몰루카 제도에서 산출되었다. ……이 일대의 무역은 아랍인과 이슬람 교도에게 장악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인도의 서해안으로부터 귀중한 동방 물산을 홍해나 페르시아만으로 다시 육지를 통하여 카이로나 바그다드에서 무거운 관세를 지불하고 알렉산드리아나 시리아의 항구로 운반하였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네치아 상인을 비롯한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를 사들여 전 유럽에 공급하였다. 신항로의 개척은 그 영향을 충분히 나타나기 위해서 수세기에 걸친 혁명을 야기시켰다. 상업은 이제 단순히 보다 더 큰 선박과 보다 더 많은 자본을 이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대중적인 상품을 운반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상업은 이렇게 귀족이나 대주교, 부유한 상인이나 법률가들 뿐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들의 수요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원료, 새로운 제품, 새로운 물자, 새로운 습성, 부의 팽창과 금융의 발전으로 상업은 양에 있어서나 규모에 있어서 급속도로 증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유층을 위하여 자바로부터 후추를 날라 오느니 보다 빈곤한 사람들을 위하여 인도로부터 차를 운반하는 것이 더욱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된 바로 그날은 세계가 근대적인 체제로 발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날이었다.
◑ 포르투갈의 동양 진출 : 8세기이래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크리스트 교회에 의해 국토 회복 운동이 추진 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라곤, 카스틸랴, 포르투갈의 여러 나라들이 형성되어 갔다. 포르투갈은 주앙 1세 (재위1385∼1433)하에 중앙 집권적인 통일국가로 성장했으며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이 진행되었다. 국토의 회복에서 더욱 아프리카 오지에 있다고 믿어졌던「성 요한의 나라」와의 제휴를 도모하려고 했던 이 계획은 그 속에 더 깊은 물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향료를 중심으로 하는 동방 무역의 이익인 것이다. 헨리 항해 왕에 의해 이미 14세기 전반부터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은 착착 추진되었으며「성 요 한의 나라」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부는 리스본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이와 함께 동양의 부를 구하는 신 항로 개발이 현실화되어 왔다. 1488년 디아스는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 이윽고 1498년 5월 20일 아라비아인의 뱃길 안내인에게 인도된 바스코 다 가마의 선단이 인도의 항구 켈리컷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당시 남해 무역에 활약하고 있던 것은 이슬람 계 상인이며 인도 서해안의 그들 거류지에는 4000가족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독점적 이윤을 위협하는 것의 도래를 민감하게 느끼고 그 진출을 방해하려 하였다.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알메이다는 1509년 마믈루크 왕조의 이집트 해군을 인도 서해안 디우 항 밖에서 격파하였다. 알 메이다를 계승한 인도 총독 알부케르크는 이듬해 1510년 고아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그 곳을 동방 무역 지배의 근거지로 했으며 그 이듬해에는 말라카를 점령하여 말라카 해협을 제압하고 향료 군도에 진출했다. 1517년에는 중국에 진출하여 마카오를 점령하였고, 1543년에는 일본과도 통상을 열었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은 16세기 전반에는 동방 무역을 독점해서 거대한 부를 얻었으며 수도 리스본은 한때 세계 상업의 중심이 되었다.
◑ 헨리 항해왕(엔리케: E Henrique o Navegador 1394∼1460) :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의 넷째 아들로 몸이 약하고 배 멀미를 하는 탓으로 자신은 배를 타지 않았으나 이탈리아를 비롯한 각지에서 항해사, 조선 기술자를 모집하여 선박을 개량하고 시험 항해를 시키는 동시에 고대로부터의 지리서, 지도, 항해 관계 서적을 수집하였다. 유럽의 서남단 산 비산데 곶의 사그레스에 천문·항해에 관한 시설을 창설하고 항해자를 육성하여 대서양 및 아프리카 서해안에 많은 탐험대를 보내어「항해왕」의 이름을 남겼다. 1415년에세우타 공격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진하여 보하도루 곶을 지나서 베르데 곶 남방 북위 8도선까지 도달하였고 대서양에서는 마디라·아조레스의 여러 섬을 탐험하고 개발했다.
◑ 바르돌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s :1450?∼1500) : 포르투갈의 항해가이자 탐험가로 선조 때부터 항해가 가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디아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디아스는 1487년 8월, 포르투갈 국왕 주왕 2세(재위 1481∼95년)의 명을 받고 아프리카를 일주하는 항해 탐험대를 지휘했다. 50톤의 배 두 척으로 남쪽을 향해 항해했는데 아프리카 남단에서 풍랑을 만나 계획한 항로를 지나쳐 그레이트 피시 강에 도달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프리카 서남단의 희망봉을 발견했는데 여기서 폭풍우를 만났기 때문에‘폭풍의 곶(Cabo Tormentoso)’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나중에 주앙 2세가 폭풍의 곶은 이름이 불길하다는 이유로‘희망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듬해 12월 리스본으로 귀항해 16개월에 걸친 항해를 마쳤다. 희망봉을 발견한 것은 뒷날 인도 항로 발견 의 중요한 선구가 됐다. 디아스는 그 뒤 아프리카 무역에 종사해, 1497년에는 바스코 다 가마와 함께 인도 항로 발견에 착수했다. 1500년 카브랄이 인도를 향해 항해하는데 따라갔다가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실종되었다.
◑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 : 포르투갈의 항해가로「인도 항로」의 발견자. 국왕의 명을 받아 1497년 7월 8일 세 척의 배에 168명을 태우고 리스본을 출범하여 11월말에 희망봉을 돌아 이듬해 초에 아프리카 동해안 메린디에 도착했다. 당시 아라비아해는 남해 무역의 루트에 해당하였으며 이슬람 계 상인의 활약 무대였다. 여기에서 아라비아인의 뱃길 안내인 아프맛드 비 마지드를 고용하여 아라비아 해를 횡단하고 1498년 5월 20일에 목적지 켈리컷에 도달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선단은 계속 이 지방에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는데 포르투갈 인과 이슬람 계 상인과의 상권을 둘러싼 전쟁과 인도 여러 항구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그 자신도 그 후 1503, 1524년의 두 번 이 곳을 방문하고 1524년 코칭에서 사망하였다.
◑ 켈리컷(Calicut ;Calico) : 인도 반도의 서남 맬라배르 해안의 항구. 1498년의 바스코 다 가마의 상륙 지점으로 서유럽 세력이 최초로 도달한 지점이다. 13세기경부터 자모린의 세력하에 다수의 이슬람 상인들이 모여 중국·몰루카 즈 제도·인도 물산의 대 페르시아 만·이집트 방면 무역의 집산지로 번영했다.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기행문에 칼리쿠트로 나오며, 그는 여기서 중국 배에 타려고 했다. 원·명 대의 중국인도 많이 내왕하여, 치나코타라고 불리는 상관도 건설했다. 정 화 등도 원정 때마다 이 곳에 들렀으며, 중국에는 고리(古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다. 16세기초 포르투갈 인은 북쪽의 거점을 옮겼는데, 17세기초에 영국과의 관계가 시작되고, 17세기∼18세기 사이에는 프랑스 인이나 덴마크 인 등이 와서 거류지를 개설하고 상관을 두었다. 마이소르 전쟁 중인 1792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에 영유되었으며, 지금은 인도 영방의 케랄라 주에 속해 있다.
◑ 국토 회복 운동(Reconquista) : 에스파니아의 크리스트 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일으킨 실지 회복운동. 이베리아 반도는 8세기에 북 아프리카의 원주민인 무어 인을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하였다. 그 뒤 북쪽에서 정복 을 면했던 고트족을 중심으로 한 반격이 개시되어, 1492년 그라나다의 함락을 끝으로 이베리아 반도는 완전히 카톨릭 교도에 의해 회복되었다. 이 운동은 에스파냐 중세사의 대동맥을 이루며, 771년의 이슬람 침입에서 1479년의 아라곤, 카스틸랴 양국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를 3기로 구분한다. ▶제 1기(771∼1031)는 타리크의 침입에서 옴미아드 왕조의 10대 칼리프 히샴 3세의 폐위에 이르는 기간으로, 서칼리프국의 최성기에 해당한다. 먼저 아스투리아스에 크리스트교 왕국이 형성되어, 종교적 국민주의 밑에 레온, 카스틸랴 방면으로 진출하고, 한편 나바라, 아라곤 방면으로부터의 운동과 더불어 나바라 왕 산초 대왕(970∼1035) 밑에 통일되어 북부 에스파냐가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제 2기(1031∼1212)는 칼리프 권력의 붕괴에서 라스 나바스데 톨로사의 전장에 이르는 기간으로, 칼리프 권력이 여러 소국(타와이프)으로 나뉘어 카스틸랴, 아라곤을 2대 주측으로 하는 크리스트 교국의 우위가 확립된 시대이다. 포르투갈이 독립하였고(1143), 코르도바, 세빌리아 등의 유력한 소국들이 함락되었다. ▶제 3기(1212∼1479)는 국민적 통일에 이르는 기간으로, 귀족의 억압과 봉건적 아나키의 극복을 통해 중앙 집권화를 달성한 시기이다. 이 동안 도시의 발달, 중산적 생산자층의 전개, 코르테스(의회)의 정비 를 보았으며, 그라나다의 함락(1492)으로 국토 회복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카톨릭적 정열이 이 지역에 있어서 '지리상 발견' 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 이사벨 여왕(Isabel :1451∼1504, 재위 1474∼1504) : 스페인 남부를 지배했던 이슬람교도는 11세기쯤부터 쇠퇴하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 교도의 반격과 실지 회복이 놀라울 정도로 진전됐다. 이베리아 반도 서부에서부터 중앙에 걸쳐서 카스틸랴 왕국이, 동부에는 아라곤 왕국이, 남서부에는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했다. 이 국가들은 모두 봉건 국가들이었는데 제후의 반란, 왕위 계승 분쟁, 농민 반란 등이 자주 일어나 어려움을 겪다가 1469년 카스틸랴 왕국의 여왕 이사벨(Isabel : 1451∼1504년)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가 결혼해, 3년 뒤에 페르난도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양국이 합해 스페인 왕국을 형성했다. 이사벨은 여왕의 신분으로 남편과 공동 통치를 했는데 페르난도가 오로지 해외 정복에 종사했기 때문에 자연히 국내 정치를 좌우했다. 1480년 이후 스페인 군은 그라나다에 있었던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공격했고 1492년에는 모든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는 외에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 견도 후원했다. 또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에도 힘을 기울여 유력한 제후와 성직자·기사들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코르테스)에 왕정 관료를 끼워 넣었으며, 더욱이 코르테스의 상급 기관으로 고문 회의를 설치해 왕권에 의한 지배를 강화했다.
◑ 아라곤 왕국(Aragon) : 카스틸랴와 병립한 중세 에스파냐의 왕국으로 원래 로마령(領)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의 일부였으나, 이슬람교의 지배에 굴복하고, 국토 회복 운동의 과정에서 카스틸랴와 함께 그 일익을 담당하였다. 1035년 라미로 1세에 의해 완전 독립을 이룩하였고, 12세기 초에는 최대 판도를 형성하고 1137년에는 카스탈루냐를 병합하여 지중해 제도에 진출하였다. 수도 사라고사 및 바르셀로나는 상업 도시가 되었다. 1469년 아라곤 왕 페르난도 와 카스틸랴 여왕 이사벨과의 결혼으로 에스파냐 통일 국가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생산은 약간의 광물 자원을 제외하고는 조방 농업을 주로 하였고, 농민은 가혹한 수탈을 당했다.
◑ 에스파냐의 해외 진출 : 아라곤, 카스틸랴 양국이 합동하여 성립된 에스파냐 왕국이 이슬람교도 최후의 거점 그라나다를 함락 시키고 국내 통일을 완성했을 때(1492), 포르투갈은 벌써 희망봉에 도달하였으며 인도 항로의 완성은 단순히 시간 문제였었다. 해외 진출에 늦었던 에스파냐로서는 콜룸부스의 서방 항해에 모든 것을 거는 수 밖에 없었다. 60일이 넘는 괴로운 항해 끝에 콜룸부스는「신대륙」에 도달했다. 콜룸부스는 인도에 도달했다고 믿었으나 아메리고 베스풋치나 발보아의 활약에 의하여 그것이 인도와 다른 신대륙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향료는 없었지만 대신 풍부한 은이 있었다. 에스파냐는 즉시 식민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인도 제도를 근거지로 하여 콘케스타도르(정복자)라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의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 원주민 인디언을 정복해 갔다. 코르테스는 멕시코를 공략하여 아즈테크 제국을 멸망시키고 (1521),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1532). 중남미의 연안 지역은 브라질을 제외하고 모두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에스파냐는 가혹한 식민지 경영을 하고 원주민으로부터 공납이나 부역을 징수하여 광산 개발 등의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몰아 부쳤으므로 그 인구는 급속히 감소했다. (원주민이 전멸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수입했다). 은광 개발에 노력한 결과, 대량의 금·은이 에스파냐로 유입됐다. 또 아시아 방면에서는 필리핀 군도를 점령하였으며 마닐라시를 건설해서 동방 무역의 근거지 로 했다. 이리하여 에스파냐는 유럽에 있는 에스파냐 본토, 네덜란드, 밀라노, 나폴리 등의 영토에 더하여 1580년에는 포르투갈을 병합해서「태양이 지는 일없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16세기 후반 필리페 2세 하에서 최대의 번영을 이루었다.
◑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 :1446?∼1506) :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출생하였으며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뱃사람이 되었다. 부친은 직물업과 선술집을 경영하였다. 1478년에 포르투갈로 가서 해도 제작에 종사하면서부터 15세기의 신학설인 지구 구체설에 감명을 받고, 피렌체의 지리학자 토스카넬리의 서방 향해에 관한 설을 듣고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484년 그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에게, 신사(기사)의 칭호 및 탐험으로 새로 발견한 토지에 대한 여러 특권(부 왕위 및 총 제독의 지위, 경제적 이익품의 1/10 배당)을 조건으로 하는 원정 계획을 상신했으나 거부당했다. 영국, 프랑스 왕에게도 거절당한 끝에 1492년에 이르러서야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얻을 수가 있었다. 1492년 8월 3일, 산타 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등 3척의 배에 120명의 인원을 인솔하고 팔로스 항을 출발, 온갖 고난을 극복, 61일간의 항해 끝에 10월 12일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이 '과니하니' 라고 부르는 섬이었는데, 콜룸부스는 이를 '산 살바도르'(San Salvador,성스러운 구세주)라 이름을 붙였다. 그 섬은 끝없는 항해로 절망에 빠진 선원들에게는 구세주 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산토 도밍고와 쿠바를 차례로 발견하고, 산토 도밍고에 '나비다드'(navidad, 성탄절)라는 성채를 구축했다. 이는 아메리카에 세워진 최초의 유럽 거점인 셈이다. 1493년 4월, 그는 아 메리카에서 수집한 소량의 금과 원주민을 데리고 바르셀로나 항에 개선 장군처럼 귀환했다. 두번째 항 해(1493∼1495/96)는 인디아에 포교 및 무역 전진기지 건설, 금광 발굴과 식민의 임무를 띤 1천 5백명에 이르는 17척의 대 선단이었다. 이어서 3차 항해(1498∼1500), 4차 항해(1502∼1504)가 이어졌다. 1504년에 그의 강력한 후원자 이사벨라 여왕이 사망하자 콜룸부스도 점차 그 영향력을 잃어 갔으며 1506년 5월 20일, 56세를 일기로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콜룸부스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그가 처음에 도착해 세웠던 도시인 산토 도밍고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899년 스페인 남부의 세빌리아로 이장되었다. 그가 사망함으로써 신대륙에는 '발견자의 시대'가 끝나고 '정복자의 시대'가 열렸다. 아메리카 인디오에게는 콜룸부스의 도착이 유럽인들의 무지한 만행에 의해 그들의 땅과 종족이 산산조각 나고 유린되는 수탈의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토스카넬리(Toscanelli, Palol dal Pozzo ;1397-1482) : 피렌체의 르네상스기의 천문학자, 지리학자, 의사. 1464년 피렌체 대 회당에 해시계를 설치하여 태양 의 자오선을 계측했다. 그가 작성한 해도를 기준으로 하여, 베하임이 지구의를 만들었는데, 이는 아메리 카 대륙 발견의 길잡이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콜룸부스와 서신 교환이 있었으며, 1474년의 서간에서, 서 쪽으로 항해함으로써 인도 항로를 단축할 수 있다는 서방 항로의 유망성을 논하고 있다.
◑ 마젤란(Ferdinand Magellan ; 1480∼1521) : 최초의 세계 일주자. 남양 제도 탐험에 종사한 후 1517년 에스파냐로 가서 1519년 카를 5세의 인가를 얻고 안티워프 상인의 지원을 얻어 서쪽으로 돌아가는 항로에 의해 향료 제도를 찾고자 출항하였다. 1519년 8월 10일 기함 트리니다드 외 5척의 선박을 이끌고 출발하여 대서양을 횡단하고 남아메리카 연안을 남하하여 1520년 10월 태평양으로 빠져 나가는 길을 발견하였으며(마젤란 해협), 그 자신이 명명한 「파도가 잔잔한 평화로운 바다」인 태평양을 서쪽으로 항진하여 98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괌섬에 기항하고, 1521년 3월 16일 필리핀 남단에 도달했으나 원주민에게 피살되었다. 그 해 11월 트리니다드 호와 빅토리아 호가 몰루카즈에 도착했으나 빅토리아 호와 선원 18명만이 에스파냐에 귀환했다. 이로써 지구가 구체라는 것과 아메리카가 아시아와 접속되지 않은 별개의 대륙이라는 점이 명백해 졌다.
◑ 코르테스(Hernando Cortes :1485∼1548) :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자로 19세로 신대륙에 건너가 산토 도밍고, 쿠바에서 근무한 다음 1518년 에 스파냐 탐험대에 의해 멕시코의 아즈테크 제국 정복에 기용되었다. 1519년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였으며 원주민과 싸우면서 진군하여 같은 해 11월에 수도 테노치티틀란(멕시코 시)에 입성했다. 주민의 반항을 받았으나 1521년 4∼8월 900명의 병력을 가지고 도시를 공격, 대규모적인 파괴 전투 끝에 이 곳을 점령하였으며 폐허 위에 노바에스파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는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강압적인 통치를 했으므로 원주민의 반란을 초래했지만 피투성이의 탄압으로 이를 억압했다. 봉건적 식민지 경영의 선봉으로 학정과 착취로 원주민을 대하였다. 1528년 본국으로 소환되어 만년에는 실의 속에 죽었다.
◐ 피사로(Pizarro, Francisco ;1470?-1541) : 에스파냐의 콩키스타도레스의 한 사람으로 잉카 제국의 정복자. 1509년 미국에 건너가 파나마에 근거지를 두고 알마그로와 함께 남아메리카 서안을 탐험하여 잉카 제국을 발견하였고, 1529년 귀국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의 명을 받아. 페루 총독이 되어 그의 벗 알마그로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정복의 길에 올랐다. 잉카 제국의 내분을 틈타 군대를 침입시켜., 흉계로써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를 포로로 하여 그의 생명의 대가로 거금을 약탈한 뒤 수도 쿠스코를 점령(1533년)하고 약탈과 대량의 학살을 자행했다. 청동·신석기 문명 단계의 잉카 제국은 180명의 그의 군대에 의하여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다시 그는 현재의 리마를 중심으로 식민을 기도하였으나 부장(部將) 알마그로의 보복을 받아 암살되었다.
◑ 마야 문명 : 4∼15세기까지 중미의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에 이르는 고원 지대에서 유카탄 반도 북부 일대에 마야 (Maya)족이 형성한 문명이다. 10세기경을 경계로 코판, 팔렝케, 티칼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고국 (古國) 시대와 유카탄 반도 북부의 치첸 잇차, 마야판, 우즈말의 도시국가가 지배하는 신국(新國) 시대로 구분된다. 옥수수 농경을 기초로 하는 도시 국가 문명으로, 석조 건축물을 특색으로 하며 천문·역법이 발달하였고 상형 문자도 사용하였다. 멕시코의 아즈테크 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는데 그 문화는 아즈 테크 제국에 계승되었다.
◑ 아즈테크 제국 : 14∼16세기초에 멕시코의 아즈테크 인(Aztecs)이 만든 국가로 마야 문명을 계승하여 발달했으며, 14세기 중엽 테노치티틀란(멕시코시)에 장려한 도읍을 축조하고 멕시코 일대를 지배하여 일종의 신정 정치를 하였다. 석조의 계단·피라미드·문자·역법 등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지만 금속기의 발달은 늦었다. 후에 에스파냐 사람 코르테스의 침략을 받아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파괴되어 멸망했다(1521).
◑ 잉카 문명(Inca Civilization) : 페루를 중심으로 한 안데스 산맥의 고원 지대에 일어났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고대 문명으로 마야, 아즈텍 문명과 아울러 일컬어진다. 아시아 대륙의 신석기 시대의 농경 문화가 베링 해협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듯하다. 티아후아나코, 트루히요, 나스카의 세 지방을 중심으로 한 거석 문화 시대를 거쳐, 1400년경에는 북쪽은 에콰도르로부터 남쪽은 칠레에 이르는 대제국이 출현하였다. 신의 화신이며 태양의 아들 잉카(국왕의 뜻) 밑에 오리엔트나 고대 아시아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전제 정치가 시행되었다. 왕은 태양의 아들이라 일컬어 지배했으며 사제의 으뜸이기도 하고 정치·군사· 재판의 최고 권력자이기도 했었다. 거석을 사용하는 대 토목 공사도 이 권력 밑에서 조직된 것이다. 민족·국가적인 농업 공산제와 집단 노동제의 경제 조직이 보이며 토지는 태양신의 것, 국왕의 것, 국민의 것으로 구분되었다. 고원 지대에 속하기 때문에 계단식 경작지가 많고, 운하 공사를 일으켜 아메리카 원산인 옥수수·담배·감자 등을 재배하였으며, 철기와 문자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청동기·금,은기가 사용되었고, 실의 색과 묶는 방법에 의한 기호(퀴푸라고 하는 결승(結繩)문자) 를 사용하였다. 수레의 사용을 몰랐으며, 인력에 의한 신전·궁전·운하 등의 대 토목 공사가 성행하였다. 수도는 쿠스코(페루). 1531년부터 2년간에 걸쳐 프란시스코 피사로 등 에스파냐 인의 정복으로 왕국은 멸망하고 그 사회 제도도 붕괴되었다.
◑ 포르투갈-스페인의 신대륙 쟁탈전 :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인도 항해, 1519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로 상징되는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 경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유럽인들이 새로 발견한 지역은 그들의 약탈로 인해 기존의 문명이 파괴되고 혹심한 약탈과 살상이 자행되었다. 이런 지리상의 발견의 주동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새로운 인도 항로의 발견자인 바스코 다 가마의 말처럼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는 '기독교인과 향료' 였다.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지중해를 통한 동방 무역의 주요 상품이었고 당시 이것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아랍 상인이나 이탈리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동방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볼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지리상의 발견의 동기가 되는 것은 두 나라의 역사에서 유추할 수 있다. 끊임없이 이슬람의 침입에 시달린 두 나라는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과 기독교 전파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이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국가가 아시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은 그들의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만약 이 국가를 발견하고 동맹을 맺는다면 이슬람 세력을 협공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새로운 땅의 발견에 나서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앞선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초반부터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남하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탐험했지만 적도 근방까지만 탐험하고 중단되었다. 이후 1480년대에 국왕 주앙 2세의 후원으로 탐험이 재개되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7에 드디어 '희망봉'에 도달했다. 한편 게다가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회항하는 항로 발견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희망봉의 발견 이후 포르투갈은 내정의 불안으로 인해 당분간 새로운 항로 개척에 힘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으로 1492년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했고 거기서 서쪽으로 기수를 돌려 41일 만에 지금의 바하마 제도 중의 한 섬에 도착했다. 1493년 3월 15일 콜럼버스 일행은 자신들이 출발했던 스페인의 팔로스항으로 귀환했다. 떠날 때는 90여 명이었던 일행이 약 40명으로 줄었고 그들이 가져온 것도 항료와 금이 아니라 약간의 노예와 금속 제품, 거기에 앵무새와 담배 등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각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귀국한 즉시 로마 교황에게 새로 발견한 지역이 모두 스페인의 영토임을 인정받고자 했다. 교황은 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약 6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남북으로 선을 그어 그 서쪽의 발견지는 스페인이, 동쪽의 발견지는 포르투갈이 차지한다고 선언했다(1493). 포르투갈 왕은 이에 즉시 항의했고 양국은 약 1년쯤 협의한 후 경계선을 조금 더 서쪽인 서경 43도 37분으로 옮겨 브라질이 포르투갈 령이 되게 했다. 이것이 토르데실라스(Tordesillas)조약이다. 오늘날 보면 어처구니없는 결정이 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성립했지만 당시로서는 교황의 권한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포르투갈이 브라질로부터 대서양, 아프리카, 인도양, 인도네시아를, 스페인이 아메리카, 태평양, 필리핀을 자기네 영토로 설정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 개혁 이후 다른 유럽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이 이 조약을 무시하고 영토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 동방 견문록 :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여행기로 성서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이다. 당시는 십자군의 원정,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활발한 무역 활동, 몽고 제국 성립 등으로 격동의 시대였는데 이러한 가운데서 마르코 폴로는 북 이탈리아의 탐험 상인의 아들로 베네치아에서 출생하였다. 몽고가 대제국을 건설하자 서유럽의 국왕들은 몽고 제국에 사신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베네치아의 상인 폴로 일가는 1260년 러시아를 거쳐 마침내 북경 근처까지 여행을 계속하여, 몽고에서 교황에게 보낸 사신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리고 다시 아시아 쪽으로 여행을 계획하였는데, 1271년에 드디어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고 당시 17살의 마르코 폴로가 이 여행에 끼어, 페르시아로부터 텐산 남로를 경유하여 원에 입국하여, 이후 17년간 원조의 관직에 머무르면서 중국 각지에 발자취를 남겼다. 때마침 일 한국 국왕에게 시집가는 원의 왕녀 코카친을 수행하라는 명을 받고 취안저우를 출발 인도양을 항해하여 1295년 베네치아에 귀국했다. 그 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에 참가하여 포로가 되었는데 그 옥중담이 동방견문록으로 출간되어 유럽인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고, 특히 아시아 동쪽 끝에 있는 황금의 나라로 소개한 찌팡그(Zipang)는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 몽고의 수도에 들어와, 그 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무르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였는데, 아래의 글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팡그(일본?)에 관해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이다.
◑ 가격 혁명 :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산물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직접적으로 유럽 경제에 영향을 끼친 것은 금, 은 같은 귀금속이었다. 처음에는 아스텍 문명이나 잉카 문명을 정복한 에스파냐 인이 전리품으로 금, 은을 반입해 왔으나, 1545년에 페루의 포토시(Potosi) 광산이 발견되고, 곧 이어서 멕시코에서도 광산이 발견되어 금, 은의 반입량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해밀턴(Hamiton, Earl J.)의 연구에 의하면 1521∼1660년 사이에 은은18,000톤, 금은 200톤이 유럽에 반입되었다고 한다. 오늘의 표준으로서는 많은 양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많은 양으로서 유럽 전체의 물가를 앙등시켰다. 에스파냐의 경우 1세기 동안에 약 3.4배, 기타 지역은 불분명하지만 프랑스가 약 2.2배, 영국이 2.6 배 가량으로 추산된다. 이 역시 오늘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하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변화로서 이를 가격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가격 혁명은 임금 노동자나 지대 등 고정된 수입을 가진 지주들에게 불리하였고, 생산업자나 상인 또는 자영농 등에게 유리하여 유럽이 새로운 경제 체제로 발전함에 도움이 되었다.
◑ 상업 혁명 시대 : 서양에서의 상업 혁명은 15세기이래 전개된 신 항로의 개척으로 유럽인들의 무역 활동이 지중해에서 대서양 중심으로 옮겨지면서 나타났다. 광대한 해외 시장이 새로 생겨나게 되자 종래의 폐쇄적 조합이었던 길드는 해체되고 동인도 회사와 같은 근대적인 기업 형태가 출현하였다. 또한 이전에는 귀중품이던 동양의 산물(향료, 견직물, 설탕 등)이 대량으로 수입되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보급되었으며, 아메리카로부터는 막대한 금, 은이 흘러 들어와 물가가 폭등하는 가격 혁명도 일어났다.
2. 절대 왕정
(1) 각국의 절대 왕정
◑ 절대주의 (Absolutism) : 봉건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영국.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시행된 군주 전제 정치 형태로 학설상으로는 이 절대주의 국가를 봉건 국가의 최종 단계로 보는 설, 근대 국가로 보는 설 등이 있으나, 균형설이 유력하다. 영국은 헨리 7세 때부터 비롯되어 엘리자베드 여왕 시대에이르러 그 극성기를 이루었으며, 가장 늦은 것은 러시아와 일본으로 19, 20세기에 들어와 시행되었다. 절대주의 시대는 한편으로는 봉건 귀족의 세력이 잔존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 시민의 세력이 증대하였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특색은 관료와 상비군 제도이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군주는 귀족과 시민의 양 세력의 균형 상태에 서서 전제 정치를 강행하였다. 이 시대의 경제 정책은 일반적으로 중상주의를 취하였으며, 군주는 관료와 상비군의 유지를 위하여 화폐 획득에 전념하게 되어, 각국은 식민지 획득을 위하여 광분하였다. 대표적인 군주로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영국의 제임스 1세, 차알스 1세 등이 있고, 계몽 전제 군주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2세 등 이 있다. 절대주의 시대의 문화는 일반적으로 궁정의 보호를 받아 호화롭고 화려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 절대주의 시대의 경제 정책 : 절대주의 국가의 정치 지배 기반인 관료제와 상비군을 유지 강화를 위해서는 확고한 재정적, 경제적 기초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무엇보다도 화폐의 획득이 추구되었다. 화폐야말로 '국가의 신경' 으로서, 화폐는 '부(富)'라고 하는 사고 방식에 의해 취해진 일련의 경제적 정책을 널리 중상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중상주의 정책을 모범적으로 시도한 사람은 프랑스 콜베르였다. 중상주의의 제 1단계는 중금주의 (Bullionism)였다. 당시의 화폐는 금과 은이 주가 되었기 때문에 화폐인 금을 보유하려는 것이었다. 또한 '중금주의'는 화폐의 해외 유출을 금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그 대표적인 국가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 중상주의의 제 2단계는 무역 차액 제도로서 영국의 토마스 먼이 그 대표자이다. 여기에서는 외국 무역에 중점이 놓여지고 화폐의 국외 유출 저지보다 수출 초과를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국가가 무역을 통제하여, 수출 보조금 따위의 수출 장려 정책과 수입 관세 인상 따위의 수입 억제책을 취하였다. 그리고 특허 회사를 설립하여 여기에 식민지와 기타 지방과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하여 국고 수입의 중 를 도모하였다. 이와 같이 무역 촉진을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공업 생산을 활발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중상주의의 제 3단계인 산업 보호주의 정책인 것이다. 고율의 보호 관세의 설정, 새로운 생산 기 술의 소개나 장려, 제조업자에의 보조금, 대여금, 면세의 특권 부여, 여러 특권 매뉴팩처의 설립 따위가 절대 왕정의 주요한 시책이었다. 그리고 식민지는 중상주의 정책 수행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는 귀금속의 산출지로서 또한 국내 산업의 원료 생산지 혹은 유리한 무역품의 생산지로서, 후에는 본국 상품을 위한 시장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식민지를 획득하면 본국의 공업이나 상인에게 유리하게 식민지에 여러 제약을 가하고 통제하였다.
◑ 네덜란드의 독립 : 현재의 베네룩스 3국과 북부 프랑스의 일부를 포함하는 네덜란드 지방은 16세기에는 에스파냐 함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상공업이 번영하여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이라 알려져 있었다. 북부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는 동양 물산의 중계 무역으로 붐볐고, 남부는 플랑드르 지방을 포함하여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여 아울러 시민 계급이 성장하고 캘빈파의 신앙을 받아들여서 고이센(거지의 뜻)이라 불리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중상주의 정책을 강화하여 중세를 부과하고 거기다가 카톨릭주의의 입장에서 신교도를 압박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에스파냐 지배를 좋아하지 않는 귀족과 손을 잡고 오 린지 공 윌리암을 지도자로 하여 1568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민족·언어를 달리하는 남북 17개 주는 결속해서 싸웠으나 에스파냐가 남북의 분단을 기도했기 때문에 구교 세력이 강한 남부 10개 주는 에스파냐와 강화했다. 이에 대해서 북부 7개 주는 1579년에 유트레히트에서 동맹을 맺고 독립 전쟁을 강화하여 1581년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선언했다. 이 나라를 홀란드라 부르는 것은 독립전쟁의 중심이 되어 활약한 홀란드주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그 후도 싸움은 계속되었는데 독립군은 영국, 프랑스, 독일 신교 제후의 원조를 얻고 에스파냐는 아르마다(무적함대)의 패배와 펠리페 2세의 죽음으로 약체화된 결과 1609년 휴전이 성립되어 네덜란드의 독립이 사실상 인정되고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정식으로 열국의 승인을 얻었다. 이후 네덜란드는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하여 17세기 전반에는 세계 상업의 패권을 잡았다.
◑ 엘리자베드 1세(Elizabeth I :1533-1603) : 헨리 8세와 제2의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모후(母后)가 처형당한 후 한때 왕위 계승권 을 잃었으며, 이복 언니 메리의 재위 중에는 고생스러운 소녀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신교도이며 총명한 엘리자베드(1558-1603)는 메리의 반동정책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국민의 환호 속에 즉위하였다. 그녀는 수장령을 부활하고 통일령을 발포하여 영국국교의 기틀을 확립하고 특별고등법원을 만들어 국교도 이외에는 신교나 카톨릭교을 막론하고 억압하였다. 영국은 종교개혁에 의하여 필리페 2세의 카톨릭주의 와 대립하였을 뿐 아니라 에스파냐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원조하였다. 이 무렵 영국의 모직물 공업이 에스파냐의 그것을 압박하여 치명적 타격을 주고, 호오킨스ㆍ드레이크(Drake) 등이 거느린 사략선이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는 에스파냐의 상선을 습격하여서는 은, 기타의 화물을 빼앗고 혹은 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에 모직물과 흑인 노예를 밀수출하였다. 여왕은 표면으로는 약탈을 금 하였으나, 내면으로는 이를 장려하고 이에 특허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투자하여 그 이익의 분배에 참여하였다. 사략선은 아메리카의 은을 무상으로 영국의 부로 만들어 왕실의 재정을 튼튼히 하였지만 에스파냐에게는 그 왕실 및 군대의 재정적 기초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에 분격한 에스파냐의 필리페 2세는 영국의 구교도의 음모를 도와 엘리자베드를 폐하고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아트(Mary Stuart)를 옹립코자 하였으나, 엘리자베드는 메리를 처형하여 화근을 끊었다(1587). 이를 계기로 양국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588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Invincible Armada)라 일컫는 유사 이래의 대 함대를 편성하여 단번에 영국의 해군을 격멸코자 하였으나, 영국 해군은 제독 호워드(Howard) 의 지휘 아래 잘 싸워 이를 쳐부셨다. 에스파냐는 3분의 2 이상의 함대를 잃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에스파냐의 해상권은 영원히 사라졌다. 에스파냐에 대한 승리는 영국인의 국민적 통합과 해외진출 의욕을 부채질하였다. 1600년에는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고, 또 북아메리카의 동해안에 는 여왕의 특허 아래 버지니아 식민지가 성립하여 대규모의 무역ㆍ식민활동의 실마리를 열었다. 엘리자 베드의 치세는 영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의 하나라 손꼽는다. 역대의 중상주의 정책이 결실을 맺어 모직물 생산을 중심으로 한 국민산업이 발달하여 번영하고, 국민문예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셰익스피어 ㆍ스펜서ㆍ베이컨 등이 나와 근대 영국문화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Good Queen Beth의 애칭을 받은 여왕의 치세에도 만년에는 언론의 자유와 자율적 행동을 원하는 의회와 관용을 요 구하는 청교도와 여왕의 독점정책에 반대하는 산업자본가의 반항이 나타나, 골머리를 앓았다. ▶ 무적 함대(Invincible Aramada) : 펠리페 2세 때 무적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함대이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소속 130척이 영국군을 습격하였는데, 영국 해적들로 편성된 호킨스와 드레이크의 해군은 이를 영국 해협에서 무찔러 격멸하였다. 이 무적 함대가 격파됨으로서 에스파냐는 급속도로 쇠퇴하게 되고 그 뒤를 영국이 잇게 되었다.
◑ 동인도 회사 :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서 인도나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지와의 원거리 무역을 위해,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세운 식민 기업이며, 합자 회사 또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세워졌다. 때로 국가 권력을 대행하기도 하였으며, 상업 자본의 집중 형태로, 산업 자본 확립 이후 소멸되었다. 포르투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에서 설립되었는데 그 중 네덜란드·영국의 것이 유명하다.
◑ 프랑스의 종교 분쟁 : 왕권을 중심으로 국내 통일이 진행된 프랑스에서는 벌써 15세기 전반에 샤를 7세(찰스 7세)가 국내의 카톨릭 교회를 지배하에 넣고, 또한 프랑소아 1세(재위 1515∼1547)시대에 교황권을 배제하여 왕권에 의한 교회 지배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프랑스 르네상스가 전개됨에 따라 종교개혁의 영향이 미치고 수공업자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 교회가 형성되어 갔다. 특히 국내의 탄압으로 스위스에 망명한 캘빈의 영향을 받은 위그노 파가 세력을 획득했다. 이것이 여러 귀족의 정치적 싸움과 결부되어 프랑스는 격심한 종교적 분쟁 속으로 휩싸여 들어가는데 성 바르돌로뮤의 학살로 상징되는 위그노 전쟁(1562∼1598)이 그것이다. 이 싸움은 부르봉가의 앙리 4세(헨리 4세)의 낭트 칙령(1598)으로 종결되지만 30년에 걸친 전쟁 중에 국내의 봉건 귀족의 세력은 약화되었으며 앙리 4세 하에서 절대주의적인 국가 통일이 완성되었다.
◑ 위그노 전쟁(1562∼1597) : 앙리 2세의 사후 즉위한 샤를 9세(재위 1560∼1574)의 모후 카트린 드 메데시스가 섭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여 궁정내의 신구 양파의 대립을 이용하면서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자 기즈 가는 카톨릭 교도의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에 위협을 가하였다. 카트린이 프로테스탄트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함으로써 기즈 가의 세력을 억압하려 하자(1562), 도리어 양파의 싸움은 격화되어 30년간에 걸친 종교 내란이 발발하였다. 카톨릭 파의 지도자는 기즈가의 제후(앙리, 프랑스와)였고, 위그노의 지도자는 부르봉 가와 콩데 가의 제후(앙트완 드 부르봉, 앙리 드 나바르, 콩데 공(公) 루이)였다. 전쟁은 크게 8회 가량 일어났고, 1572년의 성 바르돌로뮤의 학살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을 거쳐 캘빈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국내의 민중(위그노: Huguenots)을 끌어들여 일어난 격렬한 종교 분쟁이었는데 이를 위그노 전쟁이라 한다. 또한 에스파냐는 카톨릭을, 영국은 위그노를 각각 원조하여 국제전으로 변모하고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다가 1589년 발로아 왕조 단절의 뒤를 이어 신교파인 나바르 왕 앙리가 앙리 4세로 즉위(부르봉 왕조)하여 스스로 구교로 개종하여 1598년 낭트 칙령을 반포하고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와 시민권을 인정하여 내란을 진정시켰다. 이 과정에서 귀족의 세력은 약화되고 왕권에 의한 절대주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 위그노(Huguenot) :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를 부르는 호칭으로 그 어원은, 독일어 Eidgenossen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프랑스에서의 캘빈파 신봉자는 대체로「불쌍한 빈곤 노동자」, 장인, 변호사, 의사, 교수 등의 자유 직업인과 근로 농민이 많았다.
그들은 카톨릭 교도와 격렬하게 싸웠는데(위그노 전쟁), 1598년의 낭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도 리셜리외, 루이 14세의 억압을 받았고, 1685년에는 낭트 칙령도 폐지되어 국외로 망명하는 자가 많았다.
◑ 성 바르돌로뮤의 학살(Massacre of St Bartholomew :1572. 8. 24.) : 1572년 8월 24일 프랑스의 성 바르돌로뮤(St. Bartholomew) 사원에서 위그노 지도자가 대량으로 학살된 사건. 당시 신교도의 수령인 콜리니는 국왕 샤를 9세의 신임을 받아, 카톨릭 교도를 원조하는 에스파냐를 토벌함으로써 내란을 종결지으려고 하였다. 한편,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양 교도를 조화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확대를 두려워하여 카톨릭 수령 기즈 공 앙리와 결탁하고, 성 바르돌로뮤 사원에서 제례의 종소리를 신호로, 콜리니 이하 위그노 교도들을 학살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파리를 비롯하여 전국에 위그노 학살이 번져가 전국에서 수만 명이나 되는 희생자를 냈다고 한다. 많은 지도자를 잃고 귀족층에서는 개종하는 자들도 속출했으나 신교도 민중은 격렬한 저항을 전개하여 위그노 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 낭트 칙령(Edit de Nantes : 1598) :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국내의 프로테스탄트(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국내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본래 프로테스탄트였던 앙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함과 동시에(1593), 이 칙령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 주요한 내용은, 1)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2) 200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하며, 3)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주며, 4)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하고, 5)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하고, 7)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신구 양파에게 평등한 지위를 준 것은 아니며 구교의 우위아래 신교까지도 보호한다는 원리에 입각하고 있지만 신교도는 개인으로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으며 이 칙령으로 일단 종교 전쟁인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당했다. 루이 14세는 절대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적 통일 을 목적으로, 1685년 10월에 이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신교도 약 40만이 프로이센, 영국, 홀란드 등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칙령의 폐지로 경제계의 타격은 매우 컸다.
◐ 앙리 4세(헨리 4세: henri Ⅵ ;1553-1610) : 부르봉 왕조를 창시한 프랑스 국왕으로 앙트완 드 부르봉과 쟌 달브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로테스 탄트로서 위그노 전쟁에 활약, 신구 양 교도의 화의를 굳건히 하고자 1572년 샤를 9세의 누이동생 마르 그리트 드 나바르와 결혼하였다. 이 당시에 성 바르돌로뮤의 학살이 있어, 그는 학살은 면했지만 감시를 받다가 겨우 도망하고(1576), 후에 앙리 3세, 기즈 공 앙리 등과 3앙리의 싸움을 벌이더니, 1589년 앙리 3세의 죽음으로 즉위하여 부르봉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 에스파냐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1593년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카톨릭 세력과 화해하였으며,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포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신앙도 보증하고 내란을 종결시켰다. 또한 동년에 베르뱅 조약을 맺어 에스파냐와도 화의했다. 그는 쉴리를 등용하여 재정을 재건하며 농업 진흥에 힘쓰고 양잠을 장려하여 견직물 공업을 시작하는 외에 운하도 개척하는 등 황폐한 프랑스의 재건에 힘을 썼으며, 캐나다에 최초의 식민지 퀘벡을 개척하였고 부르봉 왕조 번영의 기초를 세웠다.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 소위「대계 획」에 의하여 오스트리아를 누르려 하였으나 1610년 열광적인 구교도에게 암살되었다.
◑ 루이 14세(Louis XIV:1638-1715)의 절대 왕정 : 루이 13세의 아들로 5세에 즉위하였는데, 모후가 섭정이 되고 마자랭이 정무의 실권을 잡았다. 프롱드의 난(1648∼1653) 때에 몇 차례나 파리를 도망하여 모후와 유랑 생활을 하였는데, 이 추억이 그에게 오랫동안 파리를 혐오하는 감정을 갖게 하였다. 1661년 마자랑이 죽자 루이 14세는 친정을 선언하였다. 그는 태양왕의 이름에 걸맞게 안으로 리슈류 마자랑의 유업을 기초로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연 국경설을 주장하여 자주 침략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대하고 국위를 떨쳐 루이 14세 시대라 일컫는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프랑스의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는 루이 14세 때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까지 리슈류ㆍ마자랑 등에게 맡겨졌던 전권을 도로 찾고, 재정ㆍ육군ㆍ해군 등으로 나뉜 내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왕이 스스로 대소의 정책을 결정하고 고관을 임면하여 총감과 대신은 왕의 의사를 수행하는 데 불과하였다. 지사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지방의 고등법원ㆍ지방의회의 권리와 도시의 자치권에 제한을 가하였다. 루이 14세는 특히 재정의 강화에 힘을 기울여 콜베르(Colbert)를 재무총감에 등용하여 콜베르 주의라 불리는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외국 공업 생산품의 수입을 금지하고 혹 관세를 인상하고 국내 제품의 수출세를 경감하는 등 수입의 억제와 수출의 증대를 꾀하고, 자본가에 보조금을 대여하고 외국의 기사ㆍ노동자를 초치하고, 공업 제품의 품질ㆍ양ㆍ판매를 통제하는 등 매뉴 팩튜어를 보호 육성하였으므로 산업과 무역이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한편 중상주의의 일환으로서 식민지의 개척과 해외 무역의 발전에 힘써 서인도 회사ㆍ동인도 회사를 재조직하고, 북아메리카ㆍ캐나다ㆍ미시시피 유역(루이지니아)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영국과 세계적 패권을 다투는 기초를 세웠다. 루이 14세는 군대의 충실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장비와 편성을 개량하는 동시에 보병 20만, 포병을 보태어 40만에 달하는 대 육군을 건설하였다. 왕은 군주의 권력은 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절대무한이며 인민이 이를 제한할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을 이념으로 하여 인민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고 낭트의 칙령을 폐하여 신교도를 압박하였다. 신흥자본가 계급을 많이 포함한 신교도들이 외국으로 도망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 프롱드의 난(1648∼1635) : 프랑스의 부르봉 왕권에 대한 귀족 세력의 최후의 반항기에 일어났던 내란으로 프롱드라 함은 투석기 (投石耭)의 뜻인데, 제1회는 고등 법원의 프롱드(1648∼49), 제2회는 귀족의 프롱드(1649∼53)였다. 루이 14세의 즉위 당시(1643) 모후와 재상 마자랭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들의 절대제 강화에 불만을 품고있던 대 귀족이 일부의 시민 계급과 결탁하여 일으킨 반란이다. 마자랭의 고등법원 간섭에 반대하여 파리의 고등 법원(법복 귀족)이 칙령의 등록을 거부함으로써 왕권에 대항하여 왕실도 한때는 피난하여 파리로 퇴각하였으나, 왕당파의 콩데공에 의하여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콩데공은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었고, 지방에서 반왕당파 귀족이 동맹하여 반항하였으므로 왕실과 마자랭은 다시금 파리를 퇴각하였다. 파리는 콩데 군(軍)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에스파냐의 원조를 받고 있었으므로 파리시민의 반감을 사서 드디어는 왕당파에 의해 탄압되고 왕실은 파리로 귀환하였다. 이 프롱드의 반란은 프랑스에 있어서 귀족 세력(봉건 귀족·법복 귀족)의 왕에 대한 최후의 반란이었으며, 이의 진압에 의하여 대 귀족의 권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이후 고둥법원의 정치 참여는 금지되고 파리시의 관리 선거권은 박탈되었으며 부르봉 절대 왕권을 확립해 놓은 것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 베르사유 궁전 : 18세기의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태양 왕' 이라고 불렸던 루이 14세는 그 이름에 걸맞는 대 궁전을 만들려고 마음먹었다. 프롱드의 난으로 파리를 혐오하여 루이가 관심을 가진 곳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베르사유였으며 공사는 1668년부터 시작되었다. 4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들과 말 6천 마리, 지금의 화폐로 환산하면 수 조원에 해당하는 공사비를 쏟아 부었지만 공사는 예정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시급한 물사정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펌프로 끌어올린 세느 강물을 운하로 옮기는 대토목 공사가 필요했다. 재무장관 콜베르는 국가 재정이 파산될 것을 우려해서 공사를 중단시키려 했지만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공사현장에 가서 몸소 지휘할 말큼 이 대 궁전 건축에 거의 광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려 베르사유 궁전은 겨우 완성 되었다. 그 궁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럽 최고의 궁전이다. 가로 400미터, 세로 900미터가 넘는 웅장한 건물이 늘어섰고 그 가운데에는 길이가 80미터나 되는 대 연회장이 있는데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 하는 강화 조약(베르사유 조약)이 조인된 곳이기도 하다. 방은 각종 보석이 박힌 장식품, 그림과 조각 품으로 꾸며져 있고 태양을 상징하는 루이 14세의 초상화가 곳곳에 걸려 있다. 또한 베르사유 궁전은 1백 헥타르의 정원과 폭 60미터 길이 1600미터의 운하를 파 곤도라를 띄우고 분수와 폭포가 1천 400개, 동굴과 동물원 등 궁전은 초호화판으로 만들어 졌다. '짐은 곧 국가'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 바로 루이 14세이다. 바로크식의 이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의 권력의 상징이었다. 당시 루이 14세를 따라서 이 궁전으로 옮겨온 귀족과 궁전 하인의 수는 약 5천 명에 달했으며 그 귀족의 주변에는 많은 학자와 예술가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군주, 귀족과 귀부인의 호사스러운 사교 문화였다. 프 랑스의 농민에게는, 아니 파리 시민들에게조차 베르사유 궁전과 파리시내 귀족들의 대저택은 정말로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과 같은 것이었다.
◑ 루이 14세의 침략전쟁 : 루이 14세는 풍부한 재력과 강대한 육군을 이용하여 수차의 침략 전쟁을 강행하였다. 그 목표는 전통 적인 대외정책인 양 합스부르크의 타도에 있었으며「프랑스의 자연적 국경」이라는 것이 팽창 정책의 구실거리로 되었다. 이는 국가는 산맥ㆍ호수ㆍ하천 등의 자연적 국경을 가져야 된다는 것인데, 따라서 프랑스는 고대의 갈리아의 경계, 곧 피레네ㆍ알프스ㆍ라인강ㆍ바다를 국경으로 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유럽에는 이미 세력균형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어서, 루이 14세의 침략이 진행됨에 따 이에 위협을 받는 국가들이 연합하여 대항하였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하였다. 루이 14세의 대외 침략전은 전후 4회에 걸쳐 행해졌다.
①그는 먼저 에스파냐의 왕실의 사위로써 에스파냐 령 네덜란드의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이를 침략하였다. 이를 네덜란드 전쟁(1667∼1668)이라 일컫는데, 홀란드가 스웨덴ㆍ영국의 원조를 얻어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므로 1668년의 아아헨(Aachen)에서 네덜란드의 일부를 얻는 데 그쳤다.
②루이 14세에게 방해를 한 홀란드에 보복하기 위하여 홀란드 침략전쟁(167 2∼1678)을 일으켰으나, 독일과 에스파냐가 세력 균형상 홀란드와 동맹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므로 나이메헨(Nimegn)의 평화 조약에서 에스파냐ㆍ독일로부터 약간의 토지를 얻는 데 그쳤다. 그러나, 알사스, 로렌스는 점령한 채 돌려주지 않아 그 뒤 오랫동안 독·불간의 분쟁거리가 되었다.
③이어서 왕제에게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독일 국경 팔스(Pfalz)백령을 침략하였으나(1689∼1697), 독일이 영국ㆍ네덜란드ㆍ에스파냐와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기 때문에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루이 14세의 최대의 침략전은 에스파냐 계승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이었다. 에스파냐의 차알 2세는 병약하여 아들이 없어 후계자의 결정이 열국 외교의 중대문제로 되어 있었다. 루이 14세는 에스파냐를 합병하여 한쪽의 합스부르크 가의 위협을 제거하고 서 지중해에 진출코자 자기의 손자인 필립 5세를 그 후계자로 지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그 광대한 식민지가 프랑스에 합병된다는 것은 유럽의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 되었으므로 영국의 윌리엄 3세와 독일(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드 1세 (Leopold Ⅰ,1658∼1705)는 포르투갈ㆍ사보이ㆍ브란덴브르크 등과 대불동맹을 결성하고 레오폴드의 둘째 카알0?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여 1701년 프랑스ㆍ에스파냐에 개전하였는데 이것이 에스파냐 계승전쟁(1701∼14)이다. 전황은 프랑스에 불리하였으나 동맹국측에서도 보조가 일치하지 못하여 1713년 유트레히트(Utrecht)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상의 침략전을 통하여 주목되는 것은 영국의 국제적 진출이 활발해 진 것이다. 영국은 침략전쟁의 후기에 쇠약해진 합스부르크가에 대신하여 반프랑스 동맹의 중심세력이 되어 루이 14세의 대륙 제패를 방해하고, 식민지 해상전에서 프랑스를 압박하여 식민지 제국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궁정의 사치와 다년간의 외정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와 국고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책이 취해졌는데 이는 모두 국민대중을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어 절대왕정에 대한 저주를 자아냈다. 태양 왕 시대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민중들도 루이 15세 때에는 동요하기 시작하고 루이 16세 때에는 드디어 일어나 반항하였다.
◑ 30년 전쟁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 대서양 연안에 중앙 집권적 절대제 국가가 형성되고 있을 때, 독일은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황제의 권력이 약해진 반면에 대 제후들의 권력이 커져 그들은 각자 그 영내에 영국ㆍ프랑스와 같은 절대군주제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생긴 것이 영방이다. 독일은 종교개혁 때에는 열국의 선두에서 있었으나, 영방의 할거가 계속되어 17세기 전반에는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대란이 일어났다. 이는 신교를 억압하여 제권을 강화하려는 황제와 제권을 억누르고 권력을 얻으려는 신교 제후 및 도시 사이의 싸움이었는데, 덴마크ㆍ스웨덴ㆍ프랑스 등이 독일의 분열을 이용하여 자기네의 세력을 확대코자 신교측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전란은 먼저 신교도가 많은 보히미아 지방에서 일어났다. 보히미아 지방은 독일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Ferdinand Ⅱ, 1619∼1637)의 치하에 있었는데, 페르디난트가 신교를 억압하자 1618년 반란이 일어나 페르디난트를 국외로 몰아내고 신교도인 팔쓰 백 프리드리히가 왕이 되었다. 이듬해 독일 황제가 된 페 르디난트 2세는 카톨릭 동맹의 원조를 얻어 보히미아를 쳐 프리드리히를 몰아내고 신교도에 맹렬한 박 해를 가하였다. 보히미아는 이 때 왕국의 지위를 잃고 오스트리아의 한 주가 되어 20세기에 이르렀다. 페르디난트 2세는 다시 팔쓰를 정복하여 내란은 일시 진정되었다(1623). 그런데 종교적 입장을 달리할 뿐 아니라 합스부르크가의 강대화를 두려워한 덴마크의 크리스찬 4세(Christian Ⅳ, 1588∼1648)가 1625 년 영국ㆍ네덜란드의 후원을 얻어 북부 독일에 침입하여 신교도를 원조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명장 발 렌쉬타인(Wallenstein, 1583∼1634)에게 패하여 퇴각하고 다시 본국이 공격당하여 1629년 뤼벡(Rubeck) 화약을 맺어 독일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황제군은 그 뒤 전 독일에 세력을 뻗쳐 독일의 신 교도는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때에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Gustaf Adolf, 1611∼1632)가 합스부 르크가의 세력이 발틱해 연안에 진출하는 것을 막고 루터파를 원조할 목적으로, 1630년 프랑스와 동맹 하여 신교도 보호의 명목 아래 북 독일에 침입하였다. 스웨덴 군은 연전연승하여 오스트리아의 국경에 육박하였으나, 류쓰엔의 회전에 구스타프가 전사한 뒤에는 그 세력이 줄어들고, 게다가 독일 황제가 독 일 신교 제후와 화약을 맺었기 때문에(1635) 고립상태에 빠졌다. 이에 프랑스가 공공연하게 전쟁에 참가 하여 스웨덴 군과 호응하여 양 합스부르크가의 영토인 네덜란드ㆍ서남독일ㆍ북 이탈리아ㆍ에스파니아 등의 각지를 공략하였다. 전쟁은 그 뒤 10년 동안 계속되다가, 1643년경부터 평화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진척이 없다가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성립함으로 전쟁은 끝났다.
▶ 베스트팔렌 조약(Westfalen :1648. 10. 24.) : 30년 전쟁을 종결시킨 조약으로 1643년이래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으나, 결국 1648년에 오스나브뤼크에서 최종적으로 조절되었다. 그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독일의 제후ㆍ도시는 카톨릭ㆍ루터ㆍ캘빈 중 어느 파의 신앙을 골라도 좋게 되고, 제후와 도시는 독립권을 얻어 외국과 조약을 맺을 권리를 획득하였다.
②스웨덴은 서 포메라니아와 엘베 웨젤 사이의 2 사교구를 얻고 프랑스는 알사스의 대부분과 라인 강안의 땅을 얻었다. 스웨덴도 프랑스 국왕도 독일의 제국 의회에 참석할 권리를 얻었다. ③제국의 일부였던 스위스ㆍ네덜란드의 독립이 정식으로 승인되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동 포메라니아를 얻었다. 이리하여 독일은 4대하의 하구를 모두 외국에게 빼앗겨 내륙국이 되었으며 30 년 전쟁의 피해는 너무나 커서 국토는 황폐화되고 인구는 크게 줄었으며 도시와 산업은 쇠퇴하였다. 르 네상스와 종교개혁 때의 그 풍부하였던 문화도 간 곳이 없고, 도덕이 퇴폐하였다. 30년 전쟁이후 신성 로마제국은 완전히 유명무실의 존재가 되어 3백 수십 개의 독립국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영방 군주들은 제각기 상비군과 관료기구를 갖추어 절대 군주가 되었는데 영방 군주 가운데서 특히 강대 했던 것은 동부 독일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와 오스트리아였다. 서부 독일이 30년 전쟁의 참화를 입어 쇠하고, 독일의 중심이 동부로 옮아갔던 것이다. 서부 독일에는 장원 경제가 해체되고 있었는데 반하여 동부 독일에는 귀족이 직영지를 확대하고 자유농에 대한 부역을 강화하여 그들을 농노화하였으며 토지 귀족 융커(Junker)가 세력을 차지하였다.
◑ 융 커(Junker) : 근대 독일, 특히 동프로이센의 보수적인 토지 귀족층을 일컫는 말. 동 엘베 여러 주에는 역사적으로 대토지 소유제가 발달하여 여기에 예속적인 농업 노동자를 사용하여 직영지의 경영을 행하던 구츠헤르 샤프트(Gutsherrschaft)가 나타났는데 19세기에 이르러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것이 변질하여 융커층이 성립되었다. 그들은 구츠헤르의 전통을 지니며 토지 소유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의 전제적 특권(노비조례, 단결 금지령에 의한 권리, 귀족 세습 재산제 및 영지 구역에 대한 각종의 권리)을 유지하면서 반봉건적 영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융커 이외의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폐쇄적 사회를 형성했기 때문에 시민적 성격이 결여되었고, 호엔촐레론 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였던 반면, 문학·예술에는 이해가 적고 소박하고 사교성이 적었다. 그들은 의회에서 우세하여 프로이센 행정구의 중추를 이루는 중요한 직을 독점하였다. 또한 상급 장교의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행정과 군사를 농단했다. 그 세력은 제 3제국 시대에도 군부를 중심으로 존속하여 당과 군부의 불화를 초래케 했으나 제 2차 세계대전에 패하여 소멸되었다.
◐ 합스부르크가(Habsburger) : 신성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 왕가로 그 이름은 스위스에 있는 거성(居城) 하비히츠부르크에서 유래한다. 10세기 중엽에 창건되어 알사스, 상(上)라인에 광대한 영지를 차지하여 13세기경 남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가 되었다. 1273년 루돌프 1세가 처음으로 황제가 되어 오스트리아, 시타이에르마르크 공국을 획득하였는데 1438년 알브레히트 2세 이후 제위를 세습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 때 네덜란드, 헝가리, 보히미아를 영지로 추가하였고, 카알 5세 때는 에스파냐 왕위도 겸하여 전성기를 맞이했다. 1556년에 에스파니아 계와 오스트리아 계로 분리되어 전자는 펠리페 2세가 상속하였으나 1700년에 단절되었고, 오스트리아 계는 마리아 테레지아 때 로트링겐 가로부터 프란쯔 1세를 맞아, 이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1806년 나폴레옹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박탈당하여 단순히 오스트리아 황제라고만 불리면서 20세기에 이르렀으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카알 1세가 퇴위함으로 써 유럽의 명문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메리안의 편지(1652년)
고귀하고 위대하신 제후님과 영주님께. 지난 4∼5년, 아니 36년간을 살아 온 사람들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절대적 진리라고 하면서 자랑삼아 이야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독일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서, 특히 전쟁 과 평화의 문제에 관해서 이제까지 그 누구가 2, 3백 년 동안에도 겪지 못한 아주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겪었던 것입니다. …… 우리가 1616년에 살았을 당시에는, 선제후(選帝侯)의 여러 영지를 비롯하여 도시 및 시골 마을 등은 잘 꾸며져 있었으며 상당한 양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모든 도시 와 시골 마을은 사람들 무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상인, 시민과 농민들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걱정, 위험없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 요컨대, 독일은 그 당시 이 세상의 천 국으로 여겨질 만한 곳이었습니다. ……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는, 그러나] 정의와 공정함은 힘과 부정 에 완전히 짓밟혀 버렸습니다. 시민이나 농민은 모두 자기 것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것을 군대에 바쳐야 했습니다. …… 상인의 화물을 실은 말이나 마차가 새로 만든 길 위에서 예사로 악탈되고, 상 인과 마부는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 많은 도시와 성, 마을, 집들이 재로 변해, 사람들은 집을 잃 고, 부모는 자식과 떨어져 아주 어려운 처지로 내몰렸습니다. 수천 명이 창칼에 쓰러지고, 학살당하고, 찔려 죽고, 물에 빠져 죽고, 불에 태워져 죽고, 그 밖의 잔인한 방법으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수백 개 나 되는 도시, 수천 개의 마을이, 사람은 물론 개 한 마리도 살아 남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습니 다. 밭은 전혀 경작되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는 잡초와 관목이 자라 버렸습니다. 정원 안에서는 때때로 죽은 말의 뼈가 발견되고, 밭에서는 불길한 식물 위에서 솔개와 까마귀가 날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시 대는 가고, 그 대신에 무서운 전염병과 열병, 그 밖의 죽음의 병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 해 값이 쌌던 시대는 가고, 쓰라린 굶주림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가축처럼 들풀을 주 워 모으고, 나뭇잎을 뜯어 삶아 먹었습니다. 아니, 그 줄어들어 버린 위를 달래기 위해 변질된(반은 썩 은) 식물의 한 조각을 얻을 수가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맛좋은 것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 메리안(Merian, 1621∼87)은 스위스의 화가로서, 그의 편지는 30년 전쟁이 끝난 후의 독일의 황폐함을 그 무엇보다 잘 그려내고 있다.
◑ 계몽적 전제 정치 : 18세기의 절대주의, 특히 동유럽의 절대주의는 계몽적 전제정치로서 특징지어 진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2세의 통치는 그 전형이라 하며, 그들은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개명적인 사회 개혁을 실시하고 정치·경제의 근대화를 수행하여 강력한 근대 국가의 건설을 기도했다. 그와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봉건적 여러 관계가 강하게 남아서 자본주의의 발달이 미숙한 동유럽 여러 나라가 서유럽의 선진국에 대항할 필요에서 실시된 것이었다. 따라서 봉건 귀족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의 증대를 꾀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으며, 개혁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어 본질적으로는 절대주의임에 변함이 없었다.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의 황폐 속에서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세력 확대를 개 시하였고, 18세기에는 계몽적 전제정치 아래 강화된 양국이 독일의 지도권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융커의 나라인 프로이센은 그 성격을 최대한으로 살려서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서 발전하며, 프리드리히 2세 통치시대에 두 번이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독일 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어서 강국의 지위를 확립했다. 다시 18세기 후반 3회에 걸쳐서 폴란드를 분할하여 더욱 더 강대하게 되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국내에 많은 이민족이 있어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에 의한 개혁도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하여, 차차 독일 통일을 지도하는 입장을 잃기 시작했다.
◑ 프리드리히 빌헬룸 1세(Friedrich Wilhelm I :재위 1713∼1740) :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의 기초를 확립시킨 왕으로 프로이센은 에스파냐 계승 전쟁에서 황제군의 편을 들어 1701년에 정식으로 왕국으로서 인정받았는데, 프리드리히는 그 2대째 왕이다. 그는 국내의 절대주의적 체제를 편성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함과 동시에 소국으로서는 과분하다고 할만큼 군비 확장에 노력하였고 따라서 재정을 긴축시켜 국고의 충실을 도모했다.
◐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Ⅱ, 1712-1786) : 즉위하던 해, 카알 6세 사후의 오스트리아의 상속 분쟁을 틈타서 실레지엔을 점령하고, 1748년 아아헨 화약으로 그 영유를 확인시켰다. 그 후 보복을 기도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국력 충실에 힘쓰는 한편,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하여 프로이센의 고립을 꾀하자, 영국과 동맹을 맺고 1756년 7년 전쟁을 개시하였다. 전쟁의 참패로 한때는 자살 직전의 절망적 곤경에 빠졌었으나 1762년 러시아의 여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죽고 그를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하여 동맹을 이탈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에 의하여 실레지엔의 영유를 재확인시키는 동시에, 프로이센의 유럽에 있어서의 강국으로서의 지위와, 독일에 있어서의 지도적 세력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나아가서는 1772년 제1회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였고, 또 오스트리아의 바이에른 합병책에는 바이에른 계승 전쟁(1778∼ 1779), 군주 동맹의 결성(1782)으로 대항하여 그 저지에 성공하였다. 한편으로 국왕의 절대권을 확립하기 위한 중앙집권 정책은 각 방면에 걸쳐 행해졌다. 곧 절대제의 중앙기관으로서 내각을 확립하고, 문무의 관직에 귀족(Junker)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군비를 확장하여 엄격한 규율과 우수한 무기를 가진 유럽 최강의 육군을 건설하고, 사법제도를 개혁하여 계몽주의에 의하여 고문을 폐지하고 법률의 통일을 꾀하여 대왕이 죽은 뒤 발포된「프로이센 일반국법전」을 편찬하고 절대제의 세제에 익숙한 프랑스의 세리들을 대량으로 채용하여 세수입의 증가를 꾀하고, 황무지의 개간, 내지 식민의 장려 등으로 농업을 일으키고,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상공업을 일으켰다. 종교정책으로는 실제상의 필요와 계몽주의에 의하여 관용주의를 꾀하여 신교국이면서도 카톨릭 교도를 국토개발을 위하여 받아들였다. 절대군주제의 기초로서 융커(토지귀족)의 문무관직에 있어서의 우월권과 영주 경영(Gutsherschaft)에 있어서의 농민의 예속성은 유지되었지만 건전한 농민층의 존재는 병사의 공급원으로서 농업 생산력의 향상을 위하여 필요하였으므로 대왕은 영을 내려 융커의 농민보존지 몰수를 금하고 농민의 부역을 경감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릴 때부터 문학ㆍ예술을 좋아하고, 만년에는 베를린의 교외의 포츠담(potsdam)에 로코코식의 상 수시 (Sans Souici)궁전을 지어 문인ㆍ철학자ㆍ예술가를 모아 교류하고 영국의 로크, 프랑스의 볼테르 등과도 교우를 맺어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국정을 독재하는 절대 군주였지만 스스로 「국가의 제일의 공복」이라 하여 국가와 국민의 복리 증진을 이념으로 삼아, 이른바 계몽 절대 군주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계몽 절대 군주제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절대제에 있었던 것이니, 계몽주의는 절대제와 조화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채용되었다. 대왕은 프랑스적 교양에는 풍부하였으나, 당시 일어나 기 시작한 독일의 민족문화에 대하여는 이해가 없었으며 도리어 이를 멸시하였다. 괴테의 청년시대의 작품을 비난한 것이 그것이다. 이 무렵 프로이센에는 프로이센의 국가 의식은 형성되고 있었으나, 독일 민족의 의식은 희박하였다.
◑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 : 오스트리아의 여제(1740∼1745)로 헝가리 및 보히미아의 여왕이기도 하며, 퇴위하여서는 오스트리아 대공(1740∼1780)이 되었다. 카알 6세의 딸로서 1736년 로트링겐 공 프란쯔 시테판(후의 황제 프란쯔1 세)과 결혼하였다. 카알이 죽자 장녀인 그녀가 카알 6세의 칙령에 의해서 즉위하였다. 바이에른, 작센, 사르데냐 및 프랑스, 에스파냐 등은 여자의 제위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고, 오스트리아의 분할을 기도하여 1741∼1748년에 걸쳐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을 일으켰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실레지엔에 침입하였다(실레지엔 전쟁). 이에 대해서 테레지아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응전하였고, 1748년 아아헨 조약에 의하여 그의 지위를 확보하였지만 실레지엔, 팔마, 롬바르디아의 일부를 상실하였다. 그 후 재정 개혁, 상공업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으며, 또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실레지엔의 회복을 기도하여 프로이센과 7년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1756∼1763년). 그러나 1772년 제1회 폴란드 분할, 177 8∼1779년 바이에른 계승에 참가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남편인 프란쯔 1세, 아들 프란쯔 요제프 2세의 재위 기간에도 사실상의 여제로서 법전의 개정, 교육 제도의 정비 등에 의해서 국력 회복에 노력하여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 요제프 2세(Joseph Ⅱ :1741-1790) : 오스트리아 및 신성 로마 황제(1765-1790)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자. 1765년 부제(父帝) 프란쯔 1세의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공동 정치를 하다가,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자 적극적인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계몽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카톨릭을 누르고, 행정 조직을 중앙 집권적으로 개편하였고 귀족에 대항하기 위해 1771년 농노 해방을 시도했으며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등 사회 정책에 주력하였으며 1781년에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승려와 귀족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고, 영토 내의 제 민족도 집권화에 반대하여 반항하였으며, 더욱이 개혁 정책의 실시가 급격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1785년에는 네덜란드,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교회 정책은 성직자들로부터 반항을 받았으며, 또한 외교면에서도 1785년 러시아와 결탁하여 바이에 른 침입을 획책했다가 제후 동맹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1788년 투르크 전쟁에서도 패하는 등 실패가 많 았으나 그의 개혁을 일관하는 내정에서의 진보성은,「요제프주의」로서 19세기로 계승되었다.
◑ 러시아 사회 : 동슬라브 민족의 여러 공국 가운데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모스크바 공국은 15세기 말 이반 3세 때 러시아는 몽고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후 이반 4세에 이르러 근대적인 국가와 사회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노제를 바탕으로 하는 황제(차르)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였다. 이반 4세는 비밀 경찰을 만들고 황제에 반항하는 귀족들을 억압하는 한편, 자신에게 충실한 신흥 귀족층을 키우는 방식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갔다. 또한 농민의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농노제를 강화했다. 이반 4세 이후에는 황제권 계승의 혼란에다 귀족간의 갈등, 스테카라친의 반란 등 농민들의 반항으로 국가가 한때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되어 러시아는 안정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17세기의 러시아는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 성격이 강한 후진 국가였다.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와는 달라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와 비슷한 점 이 많았다. 농노제의 발달이 그 하나이다. 곧 국민은 소수의 토지귀족과 이에 예속하는 대다수의 농노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었는데, 농노는 토지에 속박되어 부역 및 공납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농노는 지주 에 의하여 자유로이 매매되고 도망농민의 처벌은 엄중하여 지주는 그들에 대하여 사형이외의 어떤 형벌 이라도 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농노제는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그 절정에 달하였다. 지주계급에는 왕년의 공의 자손으로서 중앙집권화에 의하여 세력이 저하된 대 귀족과 문무의 관직을 차지하여 세력을 뻗치고 있던 신 귀족과 광대한 영지를 지니고 있던 교회가 있었다. 대 귀족은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신 귀족에게 토지획득의 기회를 주는 대외전쟁을 탐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교회는 중앙집권을 배경으로 하여 교권을 확대시킬 수 있는 한 러시아 제국을 지지하였으나, 제국의 과도한 강대화를 원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의 중앙집권화는 지주와 그들이 농노로부터 착취한 잉여농산물을 시장에 소화해 주는 상인의 지지 아래 이루어졌다. 농노제가 발달한 곳에 토지를 소유하고 화폐를 축적한 자영농민이 있을리 없어, 영국과 같은 농촌 매뉴팩튜어의 발달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후일 피오트르 대제에 의하여 서유럽의 매뉴팩튜어적 생산양식이 이식되었을 때, 공장에도 농노제가 실시되어 농노를 노5옆쩜막關?매매하는 일이 성행하여 이른바 농노 매뉴팩튜어의 성립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광대한 영역에는 슬라브인(대 러시아인ㆍ백 러시아인ㆍ소 러시아인)을 중심으로 대소 백여 종에 달하는 이민족이 잡거하고 그들의 대다수는 무지한 농노가 아니면 유목민족이었다. 이러한 국가를 강력히 통제해 나가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수밖에 없어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전제정치가 유지되었다. 러시아는 그 위치가 북쪽에 치우쳐 있고 바다로 나가는 출구가 없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이 출구를 구하여 발틱해 진출을 꾀하고 발틱 해를 얻은 뒤에는 부동항을 구하여 남하하였다. 지중해의 진출을 목표로 하는 발칸ㆍ근동방면의 남하정책은 19세기 러시아의 기본 외교 정책이 되었고, 19세기 전반에는 태평양ㆍ인도양의 진출을 목표로 극동ㆍ중앙 아시아 방면의 남하정책이 병행되어 세계의 정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 피오트르 황제(Pyotr ⅠAlekseevich Romanov :1682-1725) : 러시아에 절대주의를 확립하여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던 이가 17세기의 피오트르 대제이다. 피오트르의 이전 황제 피오도르(Fyodor) 3세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전 황제 알렉세이(Alexei)의 두 번째 왕비 나탈리아의 소생인 열 살의 피오트르가 황제로 옹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이복 누이인 소피아가 친위대의 도움으로 섭정을 폈다. 그러다가 1689년 피오트르는 소피아를 수녀원에 가두고 실권을 장악했다. 키가 크고 총명했으며 호기심이 강한 청년이었던 피오트르는 전쟁 놀이를 즐겼고 형식적인 것을 싫어해서 궁정이나 교회의 의식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 손재주도 뛰 어나서 자신의 의자나 식기를 손수 만들었고 외과와 치과의 진료 기술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그가 수술 도구를 가지고 나타나는 일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피오트르는 뒤떨어진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했고 자신도 하사관으로 신분을 감추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여행 도중 그는 네덜란드와 영국의 조선소에서 직공으로 일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러시아로 돌아온 피오트르는 서구 화를 통한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생활과 풍습을 서구화했다.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긴 수염도 깎고 동양식의 거추장스런 옷을 서구식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런 조치를 강제로 시행해 수염을 자르지 않는 자에게는 '수염세' 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귀족 부인들은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또한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피오트르는 러시아의 근대화와 더불어 '서방으로의 창구' 를 확보하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발트 해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을 꺾어야만 했다. 표트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과 전쟁을 시작했다. 이른바 '북방 전쟁'(1700∼21)이 시작된 것이다. 1700년 11월 나바르 강 전투에서 패하는 등 초기의 전세는 불리했지만 후퇴해서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정비한 러시아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전세를 뒤집었다. 이 북방 전쟁의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에스토니아 등 '서방으로의 창구' 를 얻었다. 피오트르는 북방 전쟁중에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 기구도 재편하여 원로원을 창설하고 지방에는 지사를 파견했다. 또한 징병 제도를 마련하고 각군 사관학교도 세웠다. 그렇지만 지속되는 전쟁과 개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피오트르는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했고 새로운 세원의 마련을 위해 종래의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설했다. 그는 또한 중상주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여 보호 관세로 수입을 억제하고 면세 등 각종 특권을 제조업자에게 부여했다. 이러한 피오트르의 서구화, 근대화 정책과 팽창 정책 으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후진성을 벗어나 비로소 유럽의 일원으로 발돋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제 (the Great)' 라고 불리게 된 피오트르 1세는 북방 전쟁중 새로 건설해 수도로 삼은 페테르스부르크('피오트르의 도시' 라는 뜻)와 함께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 에카테리나 2세(Edaterina Ⅱ :1729-1796) : 러시아의 계몽 전제 군주(1762∼1796). 독일 귀족의 딸로 1745년 피오트르 3세와 결혼하였으나 남편 피오트르 3세가 무능하고 사치한 데다 여럿의 애인을 두자 친위대 장교들의 힘을 빌려 쿠테타를 일으켜 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게 되었다. 왕인 남편은 쫒겨 나면서 4가지 소원을 청했는데 첫째는 자기 목숨, 둘째는 아끼던 바이올린과 사랑하던 강아지, 셋째는 흑인 노예 한 명, 넷째는 새로 사귄 엘리자베타였다. 여제는 3가지 소원만을 허락하여 남편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치세 기간 중 농노제를 강화하여 농노제 귀족 국가의 최성기를 이룩하였다.「지주에 대한 농노의 강제 징역권 부여령」「농노의 지주 고소권 금지령」등 정책을 취하였으며, 1767년 법전 편찬 위원회를 소집하여 약간의 행정상의 개혁을 통하여 절대 왕정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농노에 대한 압박은 푸카쵸프 지도하의 농민 전쟁(177 3∼1775)을 야기시켰다. 그녀는 또한「상공업의 독점 금지」「귀족에 대한 특허장」등으로 상인 계급과의 대립을 조절하면서 귀족 계급의 이권 확대에 노력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폴란드를 분할하였으며(1772, 1793, 1795), 러·터 전쟁 (1768∼1774, 1789∼1792)으로 흑해로 통하는 출구를 열었으며 시베리아 정복 을 추진하여 극동의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다. 볼테르 등의 계몽 사상가와 교류하고 그 영향을 받아 신 법전의 편집, 행정조직의 개혁, 교육의 쇄신, 학예의 보호 등을 실시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반동적 경향을 더욱 강화해 신사상의 보급을 적대시하고, 라디시체프, 노비코프 등의 진보주의자를 박해하였다.
▶ 국민이 군주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군주가 국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죄가 없는 한 사람을 벌하기보다도, 열 사람의 죄인을 용서하는 편이 더 좋다. 군주 정치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백성들로부터 그들이 타고난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선함에 도달하도록 그들의 행동을 올바로 이끄는 것이다. -- 예카테리나 2세의 훈시에서
▶ 친애하는 공작이여, 러시아인은 교육에 대한 열의가 없다고 한탄해서는 안 된다. 짐이 학교를 세운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고, 유럽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다. 우리는 유럽의 여론 속에서 우리의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농민들 스스로가 개화되기를 바라는 날이 오면, 그대도 짐도 모두 우리의 지위를 잃을 것이다. -- 예카테리나가 모스크바 지사에게 한 말에서
◑ 푸가초프의 난(1773∼1775) : 에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에서 일어난 대 농민 반란. 이 시대에 지주 귀족의 농민지배가 강화되었는데, 돈 카자흐 출신의 푸가초프는 스스로 피오트르 3세라 칭하고, 농노해방·인두세 폐지 등을 주창 하며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볼가·우랄 유역에 확대, 스테판 라진의 반란 이상의 규모가 되었으나, 농민군은 전반적으로 장비가 나쁘고, 조직과 계획성의 결함으로 정부군에 패했다. 푸가초프는 체포되어 1775년에 처형되었다
◑ 폴란드의 분할 : 폴란드 왕국은 14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야젤로(Jagello)왕조의 통치아래 번영하고, 15∼ 16세기에는 극성기를 맞이하여 발틱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1572년 야겔로 왕조의 왕통이 끊어지고 선거왕제가 실시된 뒤에는 차츰 쇠하였다. 이 나라에도 16세기 이후 소수의 귀족이 자유농의 토지를 빼앗고 자유농에 대한 부역을 강화시켜 그들을 농노화하여 농노제 가 발달하였다. 귀족들은 선거왕제가 실시되자 자기네의 이익을 위하여 국정에 어두운 외국인을 선출하고, 왕권에 극도의 제한을 하였다. 귀족의 대표자로써 구성되어 있던 의회에는 자유 거부제가 실시되어 한 사람의 반대가 있어도 의안은 부결되었는데 이것이 귀족들에게 악용되어 의안은 성립되는 일이 없고, 의회는 완전히 귀족의 특권을 유지, 강화하고 조세의 부담을 평민과 농민에 전가시키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자유거부권을 다수결로 고치고 상비군을 설치하려는 국왕이 있기는 하였으나, 열강과 대 귀족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주위에 있는 러시아ㆍ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가 중앙 집권국가로서 발전하여 영토 팽창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에, 이러한 구심력이 없는 폴란드가 주위의 압력에 의하여 분할되는 것은 필연의 운명이었다. 러시아의 캐더린 2세는 폴란드의 귀족을 매수하여 러시아인을 왕위에 앉힌 뒤 무력에 의하여 폴란드를 합병코자 하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의 폴란드 합병에 의하여 동유럽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사와 동맹하여 폴란드 문제 에 간섭하였다. 이 결과 러시아와 타협이 성립되어, 1772년 3국이 각각 인접의 폴란드 령을 분할하였다. 이것이 곧 폴란드의 제1차 분할이다. 마리아 테레사는 폴란드의 비운에 눈물을 흘렸으나, 그래도 자기 몫을 사양하지는 않았다. 폴란드에는 코시우스코(Kosciusko,1746∼1817) 등의 애국자들이 궐기하여 국정의 쇄신을 부르짖었으나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러시아의 캐더린이 프랑스 혁명 때문에 서유럽이 동유럽의 사태에 간섭한 여유가 없는 틈을 타 1763년 프로이센과 더불어 폴란드의 제2회 분할을 감행하였다. 이에 코시우스코 등의 애국자들은 해방군을 조직하여 맹렬한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한때는 구 영토의 4분의 3을 차지하였으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침략군에게 패하여, 1795년 나머지의 땅8뗌?오스트리아를 보탠 3국에게 분할 당하고 말았다. 이 제3회 분할에 의하여 폴란드의 이름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으며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회생하지 못하였다.
◑ 유럽의 국제 전쟁 (18세기) : 18세기 유럽 외교정책의 기본은 여전히 제국간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는 동시에 제국의 세력범위가 재조직된 세기이기도 했다. 먼저 에스파냐 계승 전쟁을 경계로 하여 종래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보였던 프랑스가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것. 에스파냐의 국위가 벌써 옛날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여기에 대해 독일 제국 내의 하나의 영방 국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에스파냐 계승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대두되었다는 것, 러시아의 세력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서 한결 곤란해졌다. 많은 동맹이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서 체결되기도 하고 해소되기도 하여 복잡한 관계를 나타냈다. 오랜 동안에 걸쳐서 격렬하게 반목하고 있던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부르봉 가의 프랑스가 동맹하는 등 외교 혁명이라 불리는 사태도 생겼다.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두 나라간의 전쟁이 아니라 전 유럽 여러 나라를 강제적으로 전란 속에 휘말리게 하는 성격으로 발생했다. 더욱이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점은 유럽 본국간의 전쟁은 동시에 식민지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8세기의 전쟁이 왕가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차차 불식, 각국의 중상주의적 식민 정책의 충돌이 때때로 전쟁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17세기 말 이래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정력적으로 해외 진출을 기도해 온 영국은 항상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최대의 강국이 되었다. 미국 식민지가 독립하여 영국의 지배 아래서 이탈하는 타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8세기말에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유럽을 선도하는 입장을 구축하고 있었다.
◐ 에스파냐 계승 전쟁(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 : 에스파냐 왕 카롤로스 2세(1665∼1700)에게 자식이 없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혈연 관계로 루이 14 세, 독일 황제 레오폴트 1세, 바이에른 선제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서로 상속권을 주장하였다. 유럽내의 세력 균형을 위하여 에스파냐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중 그 어느 나라와도 병합되는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네덜란드, 특히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비밀리에 두 번이나(1698, 1700) 에스파냐령의 분할을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획책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던 중 1700년에 카롤로스 2세가 죽었다. 이에 루이 14 세는 에스파니아의 궁정을 조종하여 손자인 앙주 공(公)을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니아 왕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가 동맹(1701년 9월 ;뒤에 다시 프로이센, 포르투갈이 참가)하였으며, 프랑스측에는 사보이 공(1703년 이탈), 바이에른 선제후 등이 동맹하였다. 그리하여 1701년부터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의 각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주요 전투로는 회히시테트, 블렌하임 싸움(1704.8.13; 프랑스군 패배), 라미이 싸움(1706.5.23; 프랑스군 패배), 토리노 싸움(1706.9.7; 프랑스군 패배), 오드나르드 싸움(1708.7.11; 프랑스군 패배), 말플라케 싸움(1709.9.11; 프랑스군 패배) 등이 있으며, 이 동안 영국군은 지브로올터를 점령하였다.(1704). 전쟁 중에도 화평 교섭은 수 차 있었지만, 결국은 1710년 영국에서 휘그 내각이 무너지고 1711년 독일 황제 요제프 1세가 죽자, 1712년부터 유트 레히트 화평 회의가 열리고 유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는데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이 인정된 반면,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행하여졌는데, 이것은 앤 여왕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 유트레히트 조약(Treaty of Utrecht :1713. 4. 11.) : 에스파냐 계승 전쟁은 1713∼1715년에 여러 나라간에 체결된 유트레히트(Utrecht) 조약에 의해서 종결 되었다. 주요 내용은 ①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합병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펠리페 5세가 에스파냐 국왕으로 승인되었다.(에스파냐의 부르봉왕가는 1931년의 혁명까지 계속되었다). ②영국은 프랑스로부터 캐나다 식민지의 일부를 얻고 에스파냐로부터 지브로올터(Gibraltar) 및 미노르카(Minorca)섬을 얻어 지중해의 해상권을 견고하게 하였다. ③사보이 공국은 시실리 섬을 얻어 왕국이 되었다(뒤에 이를 사르디니아 섬과 교환하여 사르데니아 왕국이라 개칭하였다.) ④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프로이센의 왕호를 인정하였다. 이듬해 1714년에 오스트리아는 별도로 프랑스와 라스탓트 조약(Rastatt :1714.3.9)을 맺어 에스파니아령 네덜란드ㆍ밀라노 공국ㆍ나폴리 공국ㆍ토스카나의 일부와 사르데니아를 얻었다. 이 유트레히트 조약은 18세기의 국제 관계를 규정한 것으로서 중요한 조약이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이에 불만을 품고, 1717년이래 몇 번이나 옛 영토의 수복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여 그 때마다 이 탈리아에 전화를 입혔다.
◑ 북방 전쟁(1700∼21) : 에스파냐 계승전쟁과 거의 병행하여 동방에서는 발트 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스웨덴 왕 칼 12세와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칼 12세는 이들 동맹군과 대항하여 싸워 각지에서 승전하였으나, 1714년에는 러시아 함대가 스웨덴 함대를 격파하여 발트 해의 제해권을 쥐게 되었다. 1721년 니스타트 조약의 체결로 스웨덴의 발트 제국은 붕괴하게 되었다.
◑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1740∼48) : 신성 로마 황제 카알 6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기가 죽은 뒤 합스부르크가의 영토가 분할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1713년 칙령을 내려,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를 분할하지 말 것, 남자가 없을 때에는 여자에 상속시킬 것을 규정하고 다시 이 규정에 안전성을 주기 위하여 열국의 승인을 얻는 것을 치세중의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카알이 죽고 장녀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가 즉위하자, 바바리아 선제후가 프랑스의 원조 아래 오스트리아령의 계승권을 주장하고, 삭소니아 선제후 겸 폴란드왕과 에스파니아 왕도 이의를 제출하였다. 이런 나라들은 모두 각각 합스부르크 가의 영토의 분할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국제관계의 긴장을 이용하여 일찍부터 침을 흘리고 있던 실레지아(Silesia)를 얻고자 실레지아에 침입하였다. 마리아 테레사는 하는 수 없어 실레지 아를 프로이센에 떼어주고, 영국의 후원을 얻어 바바리아 공과 프랑스와 싸웠다. 1748년 아아헨의 화약이 맺어져, 마리아 테레사의 상속권은 인정되고 실레지아 이외의 영토는 확보되었다. 결국 덕을 본 것은 프로이센뿐이었다. 실레지아는 프로이센 구영토의 인구의 반에 가까운 주민을 가지고 있었고, 공업ㆍ광 산업이 번영하고 있었으므로, 이 땅의 합병은 프로이센의 발전에 중대한 구실을 하였다.
▶ 아아헨 화약(1748) :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8년의 아아헨(Aachen) 화약에 의해서 종결되었다. 이 결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권(프라그마티셰 장크지온)이 승인되었으나 프로이센의 실레지엔 영유가 인정되었으며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립이 격화되어 7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점령한 지역을 각각 반환했다.
◑ 7년 전쟁(Siebenjahriger Krieg :1756-1763) : 아아헨 조약이 맺어진 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치를 개혁하고 군비를 확장하여 국력의 회복을 꾀하였다. 다음에는 열강을 규합하여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대 동맹을 맺고자, 외교 공작에 착수하였다. 삭소니아를 꾀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앞서 프로이센과 동맹하였던 프랑스마저 동맹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7년 전쟁(1765∼1763) 때에는 프랑스는 오스트리아를 원조하고, 영국은 프로이센을 원조하여 여기에 16세기이래 영ㆍ불이 동맹하여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던 서유럽의 국제대립 관계는 크게 변했다. 이를 보통 외교 혁명이라 일컫는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도를 눈치채고 앞질러 출병하여 삭소니아 및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에, 오 스트리아군이 실레지아에, 프랑스군이 서쪽 라인 방면에서 진격해 왔기 때문에 사면을 적에게 포위당하고, 게다가 믿었던 영국이 프랑스와의 식민지전에 주력을 기울여 군자금 공급을 중지하였으므로 프로이 센은 일시 절망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1762년 일찍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을 찬미하고 있던 피오트르 3세가 러시아 황제에 즉위하자 갑자기 오스트리아와 손을 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군을 내어 프로이센을 원조하고 이듬해에는 영 불간의 식민지전 끝에 맺어진 파리 조약에 의하여 프랑스군이 독일에서 철병하였기 때문에 형세가 역전하여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Huvertusburg)의 화약이 성립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실레지아 영유를 재확인하고 프로이센은 황제 선거 때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대공에게 투표할 것을 약속하였다. 프로이센은 두 차례의 전쟁에 의하여 유럽의 강국이 된 동시에, 독일 통일 운동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 파리 조약(1763) : 한편 식민지에 있어서는 본국의 대립과 때를 맞추어 영국 . 프랑스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에서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영국군이 퀴벡을 함락시켰고, 대서양·서인도 제도에서도 프랑스 해군을 제압하였다. 인도에 있어서도 양국은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 정책 때문에 경쟁, 대립이 일어나 플랏시 싸움에서 영국은 프랑스를 격파하고 인도를 제압하였다. 이에 영국은 파리(Paris)화약에 의해 프랑스로부터는 캐나다 및 미시시피 이동과 아프리카의 세네갈 땅을, 에스파냐로부터는 플로리다를 할양받았고, 폰 디셰리 샨데르나고르는 프랑스에 반환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을 통해서 영국은 해외 진출의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였다.
(2) 17, 18세기의 문화
◑ 바로크 양식(Baroque) : 16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미술 양식으로 르네상스 자연주의, 고전주의 양식에 대하여 감각적 효과를 노린 동적이고 격정적인 경향을 띠었다. 17세기 들어서면서 왕권이 강화되면서 엄숙하고 화려한 왕궁을 지어 왕의 위엄과 권위를 살리고 웅장한 교회, 엄숙한 교회의 벽화들을 그리고 교회의 음악도 장엄한 음악들을 작곡하여 왕과 교회 중심의 문화가 발달하게 되는데 이것을 바로크 양식이라 한다. 바로크란 부조리하고 부정형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18세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크 양식은 회화, 조각, 건축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났는데,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보히미아·오스트리아·독일·스페인으로 번져나갔고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양식은 반 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 수단이 되어 종교 미술에 신선하고 장대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바로크는 군주 귀족주의의 표현 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하였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정·완결성 등에 대하여 경탄과 현혹을 지향하여 양감·광 채·동감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건축에 있어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 부분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성 있는 의복의 표현 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서는 장엄함과 화려함을 주조로 하여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한편 그것은 군주의 생활이며 군주의 지배의 신격화라고 할 수 있다. 쥬 피터나 마르스는 군주의 얼굴 모습을 했고 비너스나 쥬노는 왕비를 쏙 빼놓았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 로코코 양식(Rococo) : 대체로 1723년∼1760년경에 유행한 장식 양식으로 루이 16세 양식이라고도 한다.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귀족들의 수도 늘고 세력이 커지자 왕을 중심으로 하던 문화가 차츰 귀족들 중심으로 꽃피기 시작하는데 귀족들은 왕만큼 장엄, 웅장하지 못하고 대신 섬세하고 우아하고 기교적인 18∼19세기의 귀족 중심의 문화를 로코코라고 한다. 인공 동굴을 형성하는 바위의 단편이나, 조개 껍데기 장식을 뜻하는 로카이유로부터 나온 명칭이라고 한다. 사실 이 양식에는 조개 껍데기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는 곡선이 많고, C나 S자를 기교적으로 확대한 곡선의 공상적 조합은 비서구적·비대조의 리듬을 갖는다. 전체적으로 경아하고 여성적이며, 말기적 귀족 취미를 풍기고 있다. 궁중의 장중함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의 유락의 추구·관능적 황홀·사랑의 공감을 표현하고, 부셰의 그림이나 로코코 인형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건축에서는 포츠담의「상수시 궁」이 대표적이다.
◑ 왕권 신수설 : 절대주의 시대에 왕권의 절대성을 주장한 이론. 그 이론에 의하면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 이며 지상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여 국왕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직접 신에게서 구하였다. 이에 따라 대외적으로는 로마 교황 및 신성 로마 황제의 국왕 권력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고 대내적으로는 봉건 제후의 국왕 권력에 대한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왕권 신수설을 주장한 유명한 사람으로는 보댕, 루이 14세, 제임스 1세 등이 있다. 보댕의 설은 프랑스 절대 왕정 확립에 큰 역할을 했고 기타 유럽 여러 나라 특히 튜더 절대 왕정의 옹호론으로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 절대왕정을 뒷받침해 준 사상〈보쉬에의 성경으로부터 인용된 정치론>
하나님은 왕들을 당신의 사절로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 백성을 다스리신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성 바울은 말하기를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벌을 주는 대신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왕자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하나님의 대행자 역할을 한다. 그러한 왕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다스리신다. "너희는 지금 감히 다윗 후손의 수중에 든 야훼의 왕권에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역대기 下 13:8). 그것으로 우리는 왕권이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왕관임을 알았다. "아훼께서는 나에게 주신 많은 아들 가운데 야훼의 옥좌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솔로몬을 뽑으셨다."(역대기 上 28:5). 또 "솔로몬이 야훼의 옥좌에 올랐다." (역대기 上 29:23)
◑ 절대주의 시대의 정치사상
▶ 왕권 신수설 : 절대왕정이 귀족 및 시민층의 균형 위에 강대한 중앙 집권을 유지하게 위한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보쉬에가 왕권은 신으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에 신성 불가침이라는 입장에서 루이 14세의 절대 왕정을 옹호하였다. 영국의 제임스 1세도 [자유로운 군주국의 진정한 법]이라는 논문을 쓸 정도로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였다. 《…… 국왕의 권위는 신성하다. 신은 국왕을 사자로 하여 국왕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한다. 모든 권력은 신으로부터 유래하며 군주는 지상에 있어서 신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다. 국왕의 인격은 신성한 것으로 그에게 반역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 보쉬에의 왕권신수설》▶ 자연권 사상 : 인간은 자연권을 보다 더 확실하게 누리기 위해 계약을 맺고 사회, 즉 국가를 형성하였는데 지배자가 계약에 의해 위탁받는 권한과 한계를 넘어서고 자연권을 유린할 때 이에 반항하는 것은 시민의 자연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원래 명예 혁명을 정당화하는 것이었으나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18세기의 계몽 사상과 미국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어떠한 인간이나 세계의 수많은 인간들과 평등하게 완전한 자연법 상의 일체의 권리와 특권을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은 자기의 소유물인 생명, 자유, 재산을 타인의 침해와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권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다. ---- 로크의 정부론》▶ 사회 계약설 : 로크가 계약을 피치자와 통치자 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본 것과 달리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개별적인 의지의 집약인 동시에, 일반 의지에 따를 것을 약속함으로서 국가가 성립하며, 이 약속이 바로 사회 계 약이라고 하였다.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인간의 자격을, 인류의 권리를 심지어는 인류의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다. 이러한 포기는 인간의 본성과 양 립할 수 없다. ……한 쪽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고, 다른 쪽에 무제한 복종을 강요한 약속은 헛되고 모순된 약속이다. ----루소의 사회 계약설》
◑ 자연법 사상 (Law of Nature) : 현실의 법률 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계에도 통용된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상으로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그리스의 플라톤 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의 사상 속에 약간 그 싹이 보이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러「이성이 우주(자연)의 본질이다」라고 주장한 스토아 철학에 의해 비로소 확립되었다. 로마에 있어서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였던 B.C. 1세기경부터 스토아 파의 영향을 받아 키케로, 가이우스, 울피아누스 등이 이성의 보편성을 주장했는데, 특히 실용면에서는 만민법을 형성함에 있어서, 법학 사상에 자연 사상이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 중세에서 자연법은, 신의 의지에 포괄되는 모든 피조물에 관한 법(신의 섭리)이라 해석되었고, 이성법은 이 자연법에서 파생한, 인간에게만 관계되는 보편법이라 생각되었는데, 스토아 파 이래의 자연법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신학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르네상스의 자아 각성과 16,7세기의 종교전쟁을 통하여, 전제적 권력에 반항하는 군주 방벌론이 일어났으나, 그 후 그 신학적·초월적 성격을 벗어나, 근대 자연법 사상의 중핵을 이루는 계약 이론이 성립하였다. 계약 이론은 인간 본성의 규정(자연 상태·자연권)에서 출발하여 이성의 합리성을 주장하였고, 사회 계약설로 발전하여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 사상이 되었다. 그 이론은 그로티우스, 홉즈, 스피노자, 존 로크, 루소 등으로 대표된다. 또한 근대 자연 과학 사상도, 자연 현상 속에서 객관적이고도 보편 타당한 법칙을 추구하려 했다는 점에서 자연법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는 역사법학 파나 실증주의의 발전에 따라 쇠 퇴하였으나, 20세기에 국제적 위기가 고양되어 세계적 협조가 절실하게 요청되게 되자,「세계 인권 선언」등 기본적 인권이 강조되어 자연법 사상이 부활하게 되었다.
◑ 홉 스 (Thomas Hobbes, 1588∼1679) : 영국의 철학가, 물리학자로 옥스퍼드에서 철학을 배우고 대륙에서 수학, 자연과학을 연구했으며 베이컨의 영향도 받아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는 운동을 유일한 실재로 보았는데 인간계도 자연계와 같은 원칙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하였다. 이탈리아에서 알게 된 갈릴레이의 물리학상의 업적을 정치학에 적용시켜 이른바 사회 물리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에 가까워 청교도 혁명전에 파리로 피난했는데 한때는 찰스 2세의 사부가 되었으며 뒤에 그 비호를 받았다. '리바이어던' 에서는 사회 계약설의 입장에서 절대주의를 이론화했다. 즉 자기 보존을 위해서는 자연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이기적인 개인의 집단인 사회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는 마당이기 때문에 오히려 개인의 안전을 상실할 수도 있는 결과가 되므로 이성은 보편적인 자연법의 실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연권을 주권자에게 위임하고, 주권자는 이 계약을 실행하기 위해서 계약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주권력은 절대적인 것이라 했으며 국가를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고 하는 바다의 괴물 '리바이어던' 으로 비유했다. 저서에는 '철학강요', '시민론' 등이 있다.
◑ 로 크(John Locke, 1632∼1704) : 영국의 철학자, 정치학자로 영국 계몽주의의 제 1인자, 옥스포드에서 배웠으며 애술리 경의 애호를 받아 한때 관직에도 나갔으나 찰스 2세 시대에 정치적 음모 사건과 관련해 의심을 받아 네덜란드로 망명 였다가 명예 혁명의 성공으로 1689년 귀국하여 명예혁명을 옹호하는 '정부론' 을 저술하여 인간의 자연권과 사회 계약설에 의한 주권과 그 제한을 설명하고 지배자의 전제에 대한 인민의 자연권 확보를 주장하였다. 경험론의 대표자로 '인간 오성론'(1690)에서 데카르트의 본유관념(生得觀念)을 배격하고 인식의 기원을 경험(감각과 반성)에서 찾았다. 정치상으로는 '정부이론(政府二論)'(1690)으로써 홉스에 대립하여 인민 주권을 주장했다. 사회는 국가에 선행하고 그 자연상태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아니라 평화와 협조의 상태이며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의 침범에 대한 방위로서 국가가 계약(피치자의 동의)으로써 성립되는데 혁명권을 포함한 최고 권력은 위양되지 않고, 공동체가 유보한다고 하여 명예 혁명의 정당성을 이론화 시켰다. 그 통치의 3부문(입법, 행정, 연합)은 콩테스키외의 삼권 분립론으로 발전하고 계약 이론은 루소에 의하여 철저화되어 프랑스에 계몽 사상으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메리카의 독립 선언에 구현되었다.
◑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한 나라의 국민이 매년 생활하는 데 쓰이는 모든 물건들을 공급해 주는 것은 원래 그 나라의 모든 국민이 매년 하는 노동으로서, 그런 물건들은 항상 이런 노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생산된 것이거나, 또는 그렇게 생산된 물건을 주고 다른 나라에서 사들인 것이다. ……물론 그(개인)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자신이 공공의 이익을 얼마만큼 증진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외국 산업보다도 국내 산업을 유지하기로 선택한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그는 자기가 생산한 물건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산업을 운영함으로써 자신의 이득만 높일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경우에도,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하나의 목적을 촉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목적에 대해 그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에 대해 꼭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혜 또는 제한을 주장하는 모든 제도가 완전히 철폐된다면 명백하고도 간단한 자연적 자유의 체제가 저절로 확립된다. 사람들이 정의의 법을 침해하지 않는 한, 제각기 자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의 노동 및 자본 두 가지를 가지고 다른 어떤 사람 또는 어떤 계급의 노동 및 자본과 경쟁할 수 있도록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 주어야 한다. -- <국부론, 1776년)>에서
◑ 자유 방임주의 (Laissez-faire) : 프랑스의 중농주의가 중상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원칙적인 경제 정책으로 이 원칙은 경제상, 개인의 기업, 그 형식, 노동조건 등, 모든 경제적 활동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을 주장했는데, 경제적 자유주의의 원칙과 상통한다. 본래 이 말은 프랑스의 미라보가 말한 「하게 하라, 그리고 가게 하라. 세계는 저절로 진행한다」라는 어구에서 생겨났는데, 튀르고에 의해서 중농주의 정책의 원칙이 되었다. 그 후 널리 경제 활동 일반에 적용되었으며, 학설적으로도 애덤 스미드, 리카아도의 영국 정통파에게 계승되어, 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지로는 노동자의 이익을 희생시킨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에, 뒤에 가서 사회주의자의 준혹한 비판을 받았다.
◑ 중농주의(Physiokratie) : 18세기경 중상주의에 이어서 일어난 경제 사상. 중농주의의 시조이며 최대의 대표자는 케네이다. 그는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아 베르사이유 궁전에 살면서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케네의 주장은 농업의 근대적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었다. 즉, 한편으로는 국민의 과격한 요구도 억제하여 자본주의에로의 길을 개척하려 했다. 이 케네의 착상은 경제학을 자립적인 과학으로서 육성시키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 이유는 중상주의가 고찰의 대상을 경제의 유통 면에 둔 데에 대하여, 케네는 생산 면의 분석이야말로 경제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명백히 했기 때문이다. 그는 농업만이 유일한 생산적 직업임을 설명하고, 농민의 자본과 부를 보호하는 것이 경제 발전의 원천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다만 그가 생산 일반에 대해서가 아니라, 농업 생산만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이른바 고전 경제 학파로부터 비판을 면할 수가 없었다. 케네의 주장은 지주나 관료 가운데서도 많은 지지자를 얻어, 그를 중심으로 한 중농학파가 결성되었다. 중농학파가 행한 계몽 활동은 정치상으로도 약간의 효과를 거두었으나, 절대주의 말기의 지배층 상호간의 대립 때문에 미완성으로 그쳤다. 그들의 학설은 후에 이론적· 정책적 두 가지 면에서 튀르고에 계승되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 케네(Fran ois Quesnay, 1694∼1774) : 프랑스의 경제학자로 중농주의 학설의 수립자. 파리 근교의 소지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외과 의사로서 명성을 얻어 1749년 국왕 주치의를 지내었다. 59세에 경제학의 연구에 종사하고, 1752년 귀족이 되었으며, 그 영지에 새 농법을 시도하였다. '경제표' '차지농론 '곡물론' 등 저서를 써서 중농주의의 기초를 세웠다. 케네는 <경제표>에서, 사회가 지주 계급, 생산 계급(농업 경영자), 비생산 계급(상공업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그 중 생산 계급이 자본을 투자하여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간단한 도표로 보여 주고 있다. 미라보, 뒤퐁 드 느무르 등의 협력으로 자기의 이론을 실현시켜 보려다 실패하였고, 곡물 거래의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자유주의 경제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 계몽 사상 :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과 새로운 기계적인 자연관, 그리고 로크의 민주적인 정치 사상의 영향으로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믿고 이성에 의한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확신하며 이성의 힘에 의해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이성에 어긋나는 구습과 낡고 모순된 제도를 과감하게 시정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절대 왕정과 구 제도를 타파하고 자연법, 자연권 사상과 사회 계약 설에 의지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이같은 계몽 사상은 당대의 질서의 타파와 개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현실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어 크게는 근대사회 발전의 사상적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에서의 대표적 인물은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가 있다. 볼테르는 신앙과 언론, 출판의 자유를 주장하여 프리드리히 2세와 예카테리나 2세 등 계몽 전제 군주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이라는 저서에서 삼권 분립을 주장했으며 루소는 사회 계약론에서 인민 주권설을 강력히 제기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하여 주권은 인민에 귀속한다는 이른바 인민 주권설을 내세웠다. 그의 사상은 영국의 군주정을 찬미한 몽테스키외나, 교회를 공격한 무신론자이며, 파리 살롱의 총아였던 볼테르와 비교할 때 가장 급진적이었으며 프랑스 혁명후 쟈코뱅 당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디드로, 달랑베르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 루 소(Rousseau, Jean Jacques ; 1712∼1778) :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철학자, 작가로 스위스의 시계공의 아들로 제네바에서 출생, 출생 며칠 후 모친을 잃었다. 10세 경부터 여러 나라를 방랑하고 16세 때에 사브와에서 바랑 부인을 만나 그녀의 주선으 로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부인에게 돌아와서 얼마동안 그녀와의 관계가 계속되나, 1741년 그녀와 헤어져, 파리로 나가 문필 생활을 시작하였다. 디드로 등의 철학자들과 친분을 갖고, '백과 전서'에 투고를 시작, 1750년 디죵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응모한 '학문 및 예술론'이 당선이 되어 문명을 날렸다. 정치 경제론(1775) 등을 쓰고 독자적인 사회관, 자연관을 수립해 왔다. 1756년에 몽모랑시에 있는 에피네 부인의 별장으로 이주하고, 다시 뤽상부르 원수의 영지로 옮겼는데, 이 무렵부터 디드로 등의 그룹과 헤어졌다. 그 후 '신 에로이즈'(1761), '사회계약론'(1762), '에밀'(1762) 등의 중요한 저작을 연달아 출판, 최후의 저서에게 전개한 자연 신교가 고등법원에서 금지되자 이후 각국을 편력 1770년 파리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신조로 하여 자연은 인간을 자유롭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만들었으나 문명과 사회가 인간을 부자유와 사악과 불행에 빠뜨렸다고 단정하고 교육의 근본 정신은 자연인을 길러내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를 자연 상태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부르짖는데서 사회 계약설을 주창하여 로크보다도 일보 전진한 주권재민론를 견지하였다. 그 사상은 백과전서 파처럼 부르주아지의 이념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나, 그의 경우는 그 하층 농민, 소 시민의 의식을 대표하고 있었다. 또 감정적 해방의 주장이 낭만주의의 원천으로 인정된다.
◑ 백과 전서파(Encyclopedistes) : 18세기 프랑스에서 출판된 디드로, 달랑베르가 감수한 '백과 전서' (1751∼1772)를 집필한 사람들을 말한다. 1745년 르 브르통 서점은 영국 체임버즈의 '사이클로페디아'를 프랑스어로 간행하려 했는데, 이 작업을 맡은 디드로는 과학자 달랑베르와 손잡고 전연 새롭고도 방대한 백과 전서(과학·예술·기술에 관한 합리적 사건)의 발간을 계획하였다. 130여명이리는 많은 집필진(유명인으로서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케네 등이 있다.)의 협력을 얻어 1751년 제1권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이성을 주장하고, 신학과 교 에 대한 비판이 강하였기 때문에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협력자 중에서도 탈락하는 자가 나오기도 하다가 마침내 1759년에는 발행 금지를 당하였다. 그러나 디드로는 이를 잘 이겨내어 1772년까지 본문(本文) 19권, 도표 11권의 대사전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백과 전서는 여러 사상가들이 집필하였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사상적 통일은 결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정치 사상만 해도 볼테르, 몽테스키외, 케네 등은 계몽군주적인 데 비하여 루소, 디드로 등은 국민주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나 이성의 힘을 믿고 과학적 진리, 인류의 진보를 굳게 믿으며, 특히 교회와 절대왕정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비판적이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 백과 전서가 얼마만큼 읽히고(초판 3,000질)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는 잘라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성의 힘을 믿고 과학적 진리, 인류의 진보를 믿으며 이른바 계몽 사상의 발전, 특히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준비라는 점에서 큰 역할을 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 경험론 : 인식의 기원이 경험에 있다는 철학으로 그리스의 소피스트도 이 입장을 취하였으며 근대 과학의 진보에 따라 지식은 경험의 결합에 의해 귀납적으로 얻어진다는 과학적 경험론이 발달하였다. 중세 말기 기존의 권위를 부정한 베이컨을 그 선구로 하여 근대 영국에서의 시민의 대두, 과학의 진보 등이 경험론에 지도적 영향을 주었다. 베이컨은 순수 경험에 의해서만이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이에는 선입관을 떠나 권위에 맹종하지 않도록 이른바 4우상 즉 종족, 동굴, 시장, 극장의 배제가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로크는 경험이란 [감각]과 [반성]으로 이루어지며 이 양자의 결합이 관념을 만들고 관념의 결합이 지식으로 된다고 주장하였다.
◑ 베이컨(Bacon, Francis :1561-1626) : 영국의 철학자, 문학자, 법률학자, 정치가로 런던에서 나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1579년 변호사, 1584년 의회 의원, 1607년 재판관 등으로서 활약하였다. 엘리자베드 여왕 치세 중에는 불우했으나, 1613년이래 검찰총장·대법관을 역임하였고, 1621년엔 자작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의회의 독직 사건으로 실각한 이후로는 저술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 동안 발표한 '수필집' '학문의 진보' '뉴우 어틀랜티스' 등은 문학 형식과 예리한 지성 및 진리의 탐구로 영국 수필의 아버지라 일컫게 했다. 만년에 발표한 철학 논문 '신기관(新機關)'은 그로 하여금 명성을 얻게 하였고, 특히 학문을 하는 방법에 새로운 귀납법을 사용함으로써 근대 과학의 방법론을 확립하였다. 실험과 관찰을 중요시하는 그의 학풍은 영국 경험론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 또한 문학상의 업적으로 해서 영국 르네상스에 있어서의 근대의 선구자가 되었다.▶ 베이컨의 우상론 : 베이컨이 참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 극복하고자 했던 우상으로는 다음의 4가지를 들 수 있다. 1)종족의 우상 :인간이라는 종족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오류 (예: 감각 기관의 불확실성, 의인화: 꽃이 웃고 있다.) 2)동굴의 우상 :어느 정도 각 개인의 특수성에서 오는 오류 (예: 우물안 개구리) 3)시장의 우상 :언어의 잘못된 사용에서 오는 오류 (예: 도깨비라고 하는 말이 있다고 해서 실재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 4)극장의 우상 :잘못된 원칙, 학설에서 오는 오류 (예: 권위 있는 학자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어 버리는 것)
▶ 진리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데에는 단지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 하나는 감각이나 개체(個體)로부터 가장 보편적인 공리로 비약한다. 그리고 이 원리들과 틀림없는 진리로부터 직결되는 공리를 결정한다. 그것이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감각이나 개체로부터 순서에 따라 서서히 공리를 쌓아 가는 것에 의해 결국 가장 보편적인 명제에 도달하도록 짜 맞추어 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방법이다. 하지만 아직 시도하고 있지 않다. …… 두 방법 모두 감각이나 개체로부터 시작해 가장 보편적인 명제에 도달하는 것이지만, 둘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앞의 방법은 단지 어쩌다가 문득 경험이나 개체를 다룰 뿐이지만, 뒤의 방법은 그것을 방법적인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의 <지식 획득의 새 방법(1620년)>에서 ▶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예컨대 아무 글자나 관념이 적히지 않은 백지라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어 떻게 채워지게 되는가? 인간의 복잡하고 무한한 꿈이 언제 그 넓은 곳을 끝없이 다양하게 색칠해 놓 게 되는가? 이성과 지식의 모든 재료는 언제 만들어지는가? 이에 대해 나는 한마디로 말해서 '바로 경 험에서' 라고 대답하겠다. 경험 안에 우리의 모든 지식의 기초가 세워지며, 경험으로부터 지식이 생겨 난다. 외부의 감각적 대상에 대해서건, 혹은 우리 자신에 의해 구상되고 되새겨진 우리 마음의 내부 작동에 대해서건 바로 우리의 관찰이 우리의 오성에 생각할 자료를 제공해 준다. 경험과 관찰 이 두 가지가 지식의 기초이며, 바로 그것들로부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생겨나는 것이다. -- 로크의 <인간 오성에 대하여(1690년)>에서
◑ 데카르트(Ren Descartes, 1596∼1650) :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자연 과학자로 제주이트 교단의 학원에서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과학 스콜라학을, 프와티에 대학에서 법률학 의학을 배운 뒤 네덜란드 바이에른 군의 지원 장교가 되었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방법의 계시를 받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1628년 음악의 수학적 연구를 완성하여‘음악 제요’를 출판하고, 이어서 중 남유럽을 여행하고 [세상이라고 하는 위대한 책 ]을 배우는 한편, 브레다와 파리의 자연 과학자와 깊이 교제하고, 물리 수학 연구에 뜻을 두어 3차 및 4차 방정식의 근을 포물선과 원에 의하여 작도하는 것을 고안하였다. 1627년‘정신 지도의 법칙’을 쓴 뒤, 네덜란드의 각지를 전전하고, 만년의 20년간에‘방법 서설’‘제일 철학 성찰’‘정념론’을 완성하였으며, 정신과 물질의 2원론을 설파하였다. 그는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 라 불리는데 중세 스콜라 철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방법과 체계를 수립하여, 그 뒤 서양 철학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데카르트는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설계를 추진하였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기계적이고 수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신 혹은 인간 정신이라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제쳐놓고 수학적 분석을 통하여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그는 연역적인 논리 즉 수학적인 증명에 의한 방법으로 합리론의 효시가 되었고 근대 철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는 기하학의 한 시대를 초래하였고 기하학자가 법칙을 증명하듯 밝혀야 할 진리를 정리와 가정을 통해서 찾았다. '기하학 정신' 이라고 시대의 상징을 부여하여 새로운 과학이 인간의 사상의 모든 면에 침투하였고, 세계와 인간과 신에 대한 앞으로의 해석에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의 관념론은 말브랑시와 스피노자에게 계승되었다. 양식과 방법적인 회의에 인도되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는 그의 합리주의는, 18세기 계몽사상을 육성하는 풍부한 지반이 되었다. 그는 단지 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모럴리스트로서도 중요하며, 그의 인생 철학은 근대와 자아 탐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3.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
(1) 영국 혁명
◑ 신분제 의회 :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하에서는 봉신이나 고급 성직자들이 국왕의 회의에 참석하여 자문에 응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를 주종 제도에서의 충언의 의무라 하였다. 따라서 봉건 제후들도 그들의 신하를 의무적으로 봉건회의에 참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이니, 이 회의에서는 친목적 문제 외에 전쟁과 평화의 문제, 새로운 신하의 서임, 또는 신하의 결혼 등 중요한 정책과 문제들이 제기, 토의되었다. 이러한 봉건적 관습이 중앙집권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신분제 의회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중세 말에 관료제 정비, 군대 확충, 궁정의 사치 등으로 왕실의 재정이 궁핍해지자 국왕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과세액을 증진시킬 필요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소집된 것이 성직자, 귀족,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였던 것 이다. 이 회의에 모인 대표들은 국왕의 과세에 협조하는 대신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되었으며 그 결과 왕권을 견제하게 되었다. 중세 말 이후의 여러 변화로 국내외적 정치가 복잡해짐에 따라 국왕은 조세 이외에 내정 및 외교상의 문제에도 신분제 의회의 자문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영국의 의회, 프랑 삼부회, 독일의 제국 의회, 에스파냐 코르테스 등이 바로 이 신분제 의회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 시민 혁명의 발생
나는 법률과 체제가 인간 정신의 진보와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간 정신이 점차 발전되고 더욱 계몽되며,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진리가 드러나며 풍습과 의견이 환경의 변화와 함께 변화함에 따라서 제도도 또한 진보하고 시대와 병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문명된 사회를 야만인적인 선조들의 지배 밑에 두도록 하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에게 어렸을 때 입던 외투를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최근 유럽을 피로 물들게 하였던 것은 이러한 생각이었다. 그들의 군주들은 점차적인 상황의 변화에 현명하게 양보하고 진보적인 개선에 대해 진보적으로 대처하는 대신에 낡은 악습에 얽매어 그 뒤에 자신들을 숨기고 밑에 사람들로 하여금 유혈과 폭력을 통해, 무효하고 파괴적인 혁신을 일으키도록 하였는데, 그러나 혁신은 그것이 만약에 평화적으로 신중하게 고려되고 국민의 중지를 모았더라면 승인될 수 있고 건전한 형태로 제기되었을 것이다. 제퍼슨---<혁명의 필요성에 대하여>
◑ 영국 혁명의 경과 : ▷ 제임스 1세(1603∼25) 1625 대항의 ▷ 찰스 1세(1652∼42) 1628 권리 청원, 1642 청교도 혁명 ▷ 크롬웰(1649∼58) 1649 찰스 처형, 1649 공화정 선포 ▷ 찰스 2세(1660∼85) 1660 왕정 복고, 1673 심사령, 1679 인신 보호령 ▷ 제임스 2세(1685∼88) 전제 정치 계승 ▷ 윌리엄 3세(1689∼1702) 1688 명예 혁명, 1689 권리 장전
◑ 요우먼(Yeoman) : 영국 봉건사회 해체 과정(15세기)에 등장하여 19세기 전반 제 2차 인클로저 운동의 와중에 소멸된 독립 자영농민 및 그 계층. 어의는 본래 명예적 봉사, 특히 군사적 봉사를 완전히 끝마친 봉건적 가신을 의미하였으나 15세기경부터는 도시 및 농촌에 있어서 일정한 사회적인 또는 재산상의 지위, 신분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이를테면 당시의 법률가 스미드에 의하면「연 수입 40실링의 토지 재산을 갖는 자유 보유농」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요우먼이라 생각되어, 이들에게 국회 의원 선거 자격과 배심원 자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는 자유 보유농, 관습 보유농을 불문하고 젠트리와 영세농과의 중간에 있는 광범위한 중산적 생산자 계층을 말하며, 일반적으로는 중세 말부터 근대 초에 걸쳐 형성된 중산적인 자영 농민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경제적 발전에 따라 계층 분화를 일으켜 한편으로는 부유한 지주로 상승하였고 한편은 빈농으로 몰락하기도 하였다.
◑ 젠트리(Gentry) : 영국에 있어서 귀족으로서의 위계는 없었으나 가문휘장(家門徽章)의 사용을 허용받는 자유민을 이른 다. 그러나 역사적인 개념으로는 요우먼 이상 귀족 이하의 토지 소유자 즉, 부유한 차지농(借地農)과 법률가, 성직자, 개업 의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자 및 부유한 상인 등을 핵심으로 한 중산 계급의 상부층을 말한다. 이러한 젠트리는 16세기 이후 중산 농민인 요우먼의 희생 및 귀족 계급의 몰락의 결과로서 발생,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했으며 그 패권은 20세기초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 계층은 영국의 자본주의와 사회 발전에 있어 근간을 이루고 청교도 혁명을 주도한 사회 계층으로 항신(鄕紳)이라고도 하는 데 근대적 지주층으로서 종교적으로는 대개 청교도로 당시의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전제정 치에 반대하고 입헌적 전통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 : 종래 개방되어 있고 또한 분산되어 있던 경작지를 집합하여 울타리를 치거나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는 것을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근세 초부터 19세기 전반가지 진행되었는데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제 1차 인클로져 운동은 모직물 공업의 육성에 따른 양모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18세기로부터의 2차 인클로져 운동은 농업 개량과 농업 경영의 능률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어느 경우에나 지주층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중세 농촌의 공동체적 성격이 사라지고 빈농이 토지를 빼앗겨 농촌을 떠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제 1차의 경우 이러한 빈농의 대량 이동 현상(rural exodus)은 큰 사회 문제를 야기시켜 인클로저 금지 조치가 여러 번 취해졌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제 2차의 경우는 산업혁명으로 새로이 일어난 공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함과 아울러 기계의 발명으로 농업 자체가 기계화하여 인클로저 운동이 촉진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업 자본가가 농업 노동자를 고용하여 농업 생산을 하는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고 중농층인 자영농 (yeoman)이 거의 몰락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농업혁명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에서도 지방에 따라 인클로져 운동이 행해지기는 하였으나 영국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따라서 프랑스는 소 토지 소유자 농민의 나라로 머물렀다.
◑ 청교도 혁명 : 튜더 왕조의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그녀의 유언대로 스코틀랜드 왕인 사촌 제임스가 영국 왕위에 올라 제임스 1세가 되어 스튜어트 왕조가 성립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한 나라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대헌장(1215 Magna Charter)이래의 영국 의회의 전통을 무시하여 의회와의 마찰을 초래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함께「왕권 신수설」의 신봉자로 유명하다. 의회는 제임스 1세의 왕권 신수설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의회의 자유와 권한은 이론의 여지없이 영국 신민이 옛날부터 상속받은 재산이다. 국왕·국가·국토방위·교회에 관한 곤란하고 긴급한 사항들은 마땅히 의회가 토론해야 할 의제들이다.」 이와 같은 의회의 주장에 격분한 제임스 1세는 그 내용을 실은 의사록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의원 7명을 체포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왕이 되자 에스파냐와의 일전을 계획, 전쟁에 필요한 비용문제 때문에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가 열리자, 법률가 출신의 하원의원 에드워드 코크는 의회의 권리를 명시한 청원서를 제출했고, 의회는 이를 기꺼이 승인했다. 이것이 유명한〈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이다. 찰스 1세는 6월 청원서를 재가하고 그 대신 필요한 돈을 받아냈다. 그러고는 이듬해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런데 1639년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교회를 영국의 국교회식으로 고치려다 스코틀랜드에서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찰스 1세는 할 수 없이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의회는 경비조달을 승인하기는커녕 왕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분노한 찰스 1세는 무력으로 의회를 누르려고 했다. 그러자 의회측도 군대를 모아 대항했다. 이리하여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8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싸움은 처음엔 왕당파가 우세했다. 왕당파는 구 귀족·성직자·독점 상인들의 지지 를 받았으며, 의회파는 자영농·신흥 상공업자·신흥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이다. 중류 지주 출신인 그는 매우 독실한 청교도였으며 논리정연한 인물이었다. 그는 철기군 (Ironside)을 이끌고 1645년 6월 네이즈 전투에서 왕당파를 격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도를 올 리고 찬송가를 부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철기군의 활약은 눈부셨다. 1646년 6월 왕당파의 근거지인 옥스6宕弱?점령되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40만 파운드를 받고 찰 스 1세를 영국 의회에 넘겨주었고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마침내 처형되고 말았다. 영국은 군주제 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왕 대신 의회가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을 청교도 혁명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새로 권력을 장악한 의회의 구성원들이 바로 신흥 상공업자들, 즉 청교도였기 때문이다.
◑ 권리 청원 : 제임스 1세 시대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국왕과 의회 사이에 긴장은, 결국 그의 아들 찰스 1세(재위 기간: 1625∼49) 때에 폭발하고 말았다.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부과하고 기부금을 내지 않는 귀족은 감옥에 넣고 세금을 못내는 가난한 사람들은 군대로 끌고 가고, 경비를 절약한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을 민가에 분산시켜 먹고 자게 하였다. 찰스 1세는 전쟁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회를 개최하였다. 의회에서는 찰스 1세의 전제 정치에 반발하여 왕에게 <권리 청원>을 제출했는데 중요한 내용은 ①의회의 승인 없이 과세할 수 없다. ②개인 집에 병사를 숙박시킬 수 없다. ③국민은 정당한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④평화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없다 등이며 마그나 카르타,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헌정 발달상의 3 대 문서중 하나이다.
◑ 신모범군(New Model Army) : 군대 전체가 열성적인 청교도들로 단단히 구성되어 있어, 전투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며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1645년 크롬웰은 새로운 형태의 상비군 '신모범군' 을 만들 것을 의회에서 결의하도록 하였다. 신모범군은 지원병을 중심으로 한 군대였으므로 다수의 농민, 직인이 입대하여 지휘관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브라이드 대령은 원래 마부였고, 휴슨 대령은 수선공이었으며, 폭스 대령은 냄비 만드는 사람이었다. 1645년 여름, 네이즈비에서 '민둥머리' 군은 국왕군과 전투를 벌였다. 의회군은 모두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고 있었기 때문에 '민둥머리(Roundheads)' 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크롬웰의 철기병은 국왕군의 측면과 배후를 덮쳐 주력을 쳐부수고, 5,000명의 포로와 대포를 모두 빼앗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국왕은 고국인 스코틀랜드로 피신하였으나, 스코틀랜드는 국왕을 40만 파운드에 의회에 팔아 버렸다. 1647년 국왕이 몰래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크롬웰은 또 한번 국왕군에 승리하여 국왕을 체포하였다.
◑ 찰스 1세(Charles Ⅰ: 1600∼1649) : 영국 국왕(1625∼1649)으로 제임스 1세의 둘째 아들. 부왕과 한 가지로 왕권 신수설의 신봉자였다. 영국 국교주위를 강화하여 청교도를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대외 전쟁 때문에 재정이 곤란하게 되어 중세를 부과하려고 하였는데, 1628년 의회는 오히려 국왕의 대권을 규제하는 권리 청원을 제출함으로써 이에 웅수하여, 그는 이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톤세·파운드 세의 문제로 의회를 해산하고, 이후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로오드, 스트래퍼드를 기용하여 반동 정치를 강화하였다.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요하고, 이에 대한 반항을 진압하기 위하여 자금이 필요한 데서 소집한 단기 의회를 즉시 해산하고, 뒤이어 소집한 장기 의회와도 충돌하여, 1642년 마침내 청교도 혁명이 발발하였다. 크롬웰에 패배하여 스코틀랜드로 도망하였다가, 의회파의 분열에 편승하여 1648년 재차 의회측과 개전하였으나, 여기서도 실패하고 체포되어 의회가 임명한 135명(의원, 법률가, 군인 등)으로 구성된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아 '전제군주', '반역자' 의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649년 1월 30일, 찰스 1세는 화이트 홀 궁전 앞에 마련된 처형대로 끌려 나와 형 집행인의 도끼에 목이 잘렸다. 형 집행인이 왕의 머리를 높이 들어올리자, 처형대를 에워싸고 있던 군중들 사이에서 괴이한 신음 소리가 났다고 한다.
◑ 크롬웰(Cromwell ; 1599∼1658) : 영국 동부의 젠트리(부농층) 출신으로 경건한 청교도였다. 의원으로 의회 내의 독립파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New Model Army)를 이끌고 국왕군을 무찔러 혁명의 주도권을 잡았다. 신흥 자본국가와 자영 농민을 중핵세력으로 하는 독립파는 48년 의회를 독점하고 49년 국왕을 처형하여 '자유 공화국'을 선언 하였다. 53년 통치 장전을 제정하여 크롬웰은 종신 호국경이 되어 독재 정치를 하였다. 58년 그가 사망하자 엄격한 청교도적 정치에 실증을 느낀 국민의 환호 속에 60년에는 왕정 복고가 이루어 졌다.
◑ 항해 조례 : <항해 조례>는 크롬웰이 지배하던 시기에 발표되었지만, 그는 이 조례의 제정에 반대하였고 이러한 발상을 한 것은 해외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다.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에 타격을 가함과 동시에 영국상공업과 해운업을 육성하려는 것으로 주된 내용은 (1) 유럽 이외의 지역으로부터 영국이나 영국 식민지에 상품을 운반하는 선박은 영국이나 식민지 소속 선박이어야 하며
(2) 유럽 내의 상품을 영국에 수출하는 경우 영국 또는 상품 원산지 소속 선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전쟁이 일어났으나 영국이 승리하였다.
◑ 통치 헌장
제1조.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이루어진 공화국 및 그에 속한 영토의 입법상의 최고 권한은 단지 한 사람 및 의회에 소집된 인민에게 있다. 이 단 한 사람의 칭호는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 한다. 제2조. 인민에 대한 최고 통치권의 행사 및 정부의 행정권은 호국경에 있으며, 호국경은 자문 위원 회의 도움을 받는데, 그 구성원의 수는 21명을 넘지 않고 또 13명 이하가 되지 않는 것으로 한다. 제4조. 호국경은 의회가 개최되어 있는 동안은 의회의 동의에 따라, 국가의 평화 및 행복을 위해 육 ·해군을 두고 지휘하는 것으로 한다. 또 의회가 개최되어 있지 않은 동안에는 자문 위원 다수의 조언 과 동의를 얻어 그렇게 한다. 제5조. 호국경은 앞에서 언급한 조언에 따라, 다른 여러 나라의 국왕 및 국가와 우호 관계를 지속시 키고 또 그것을 지켜 가는 데 관계되는 모든 사항에 대해 명령을 내리며, 또 자문 위원 다수의 동의를 얻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하거나 혹은 평화 조약을 맺는 기능을 갖는 것으로 한다. -- <통치 헌장(1653년)>에서
◑ 파트니 회의 : 런던 근교에 파트니라는 곳이 있다. 템즈 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파트니 교는 지금까지도 옥스퍼드 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이 해마다 개최하는 요트 경기의 코스로서 유명한 곳이다. 이 다리 옆에 있는 사원에서 1647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크롬웰 군대의 간부와 병사·시민대표가 토론회를 열었다. 병사·시민 대표는 '평등파' 라고 불렸다. 그들의 요구는 그 이름에서 보여주듯이 정치적인 평등을 실현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22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줄 것, 신앙의 자유와 징병 거부의 자유 등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평등파는 자신들의 요구를 정리한『인민 협정』이라는 일종의 헌법과 같은 것을 만들어 이것에 따라 영국 정치를 개혁하라고 크롬웰에게 요구하 였다. 크롬웰은 물론 이 요구를 거절했다. 크롬웰은 "모든 남자들이 선거권을 갖다니, 그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그렇게 되면 도대체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국왕과 귀족은 타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는 지주나 대 상인처럼 그것에 걸맞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농민과 직인처럼 재산도 없는 패거리에겐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물론 크롬웰 한 사람의 생각은 아니었다. 크롬웰이 대변한 것은 영주를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계급, 즉 부르조아 계급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때 의 혁명은 국왕을 대신하여 이 계급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기 위한 혁명이었다. 평등파는 패배였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그 요구는 조금씩 실현되었다.
◑ 명예 혁명 :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했다. 안으로는 의회파가 장로파· 독립파·수평파로 갈려 그 골이 깊어만 갔고,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항해 조례를 발표,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두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654년 크롬웰은 호국경자리에 올랐다. 그의 지지 기반은 군대였다. 그러나 크롬웰은 1658년 사망하고 그로부터 꼭 2년만 인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시민은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사람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 군주제였다. 그러나 그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를 한껏 동경하며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꿈은 루이 14세 같은 절대 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불안을 느낀 의회는 심사율·인신보호율을 제정했다. 심사율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이고, 인신보호율은 아무 이유 없이 인민을 체포, 구금하지 못하며, 구금된 자는 20일 이내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이다. 찰스 2세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제임스는 형보다 더한 전제 주의자인데다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찰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귀족·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당이라 불렸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이 바로 명예 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와 앤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 당과 토리 당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 장전: Declaration of Rights>을 승인케 했다. <권리장전>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0택컁?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입헌 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 혁명이라 불렀다.
◑ 찰스 2세(Charles Ⅱ:1630∼1685) : 영국 국왕(1660∼1685)으로 차알스 1세의 아들. 청교도 혁명 당시 왕당파의 패배로 프랑스로 도망하여, 행동을 같이 한 클래렌던의 손으로 양육되었다. 부왕이 처형된 뒤에는 찰스 2세라 칭하고, 1651년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국왕으로 영접되었으나, 크롬웰과 싸워서 패배하고 재차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프러텍터리트 붕괴가 있은 후 멍크의 실력에 의지하여, 1680년 브레다 선언 직후 귀국하여 왕정 복고를 실현시켰다. 클래렌던을 중용하고, 국교 재건, 기타 브레다 선언을 파기하는 정치를 강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외 정책에 있어서는 특히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수행하고, 경제 정책에서는, 크롬웰의 정책을 답습하였으며, 생활을 위하여서는 왕령까지도 매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래렌던 실각 후에는 커밸에게 정무를 담당시켰으나, 중요 문제는 직접 다루었다(이를테면 도버 밀약). 이러한 보수적·전제적인 태도가 의회를 자극하여, 심사율과 인신 보호율의 성립을 보게 되고 카톨릭 교도 배척법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과학 진흥에 뜻을 두어 왕립 협회의 창립에 협력하였다.
◑ 심사령(Test Act, 1672) : 찰스 2세 때 영국 의회가 제정한 종교 관계의 법령. 1661년 기사 의회를 통과한 클래랜던 법전은 카톨릭 교도 및 비국교도의 억압을 기도한 점에서 국왕의 카톨릭시즘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그런데 찰스 2세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의 도버 밀약에 따라 1672년 특별 사면권을 행사하고 비국교도에 대한 형벌을 정지하는가 하면 또한 카톨릭 교도의 해방을 획책하였다. 의회는 이에 강경하게 반항하여 이를 철회하도록 강요하고 심사령을 성립시켰다.(왕권에 대한 의회의 우위). 이로써 모든 문무관은 영국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 화체설(化體說) 반대 선언에 서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고 사실상 카톨릭 교도 및 그 밖의 비국교도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후 이것은 자주 정치상 의 분쟁을 일으켰으나 1828년에 폐지, 다음 해에 카톨릭 해방령이 발포되기에 이르렀다.
◑ 인신 보호령(1679) : 영국에서 찰스 2세 때 발포된 법률로 왕정 복고에 의해 옹립된 찰스 2세가 반동적이고도 의회를 무시하는 처사가 많았으므로 이에 대항한 의회측에 의하여 발포되었다. 그 내용은 함부로 체포, 투옥하는 것을 금하며 반역 또는 중대 범죄의 용의자 이외에는 24시간 이상 구류할 수 없다는 기본적 인권을 규정하고 있다.
◐ 토리 당과 휘그 당 : '토리' 는 아일랜드 말의 '도적' 또는 '범법자' 에서 유래하였으며 '휘그' 라는 말은 본래 스코틀랜드의 폭도라는 뜻으로서, 찰스 2세의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기사파와 민권파가 대립하였을 때, 기사파가 민권 파를 조소하여 부른 명칭이다. 청교도 혁명 때의 왕당파와 의회파의 대립은, 기사파와 민권파의 대립으로 꼬리를 이어, 찰스 2세가 죽고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후계 문제로 보수세력(토리 당), 진보세력(휘그 당)으로 나누어 졌는데 후임 요오크 공이 카톨릭 교도인데다가 독재를 할 인물이라 그를 꺼려 서자(庶子) 몬머드 공을 세우려는 진보파와 법에 따라 왕의 동생인 요오크 공(제임스 2세)으로 왕위를 승계해야 한다는 보수파로 대립하였으나 결국 제임스 2세가 즉위하게 되었고, 이 두 세력의 대립은 이후 영국의 회의 양당 정치의 효시가 되었다. 그 후 명예 혁명은 휘그 당 노선의 승리를 의미하며 윌리엄 3세 시대에 휘그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앤 여왕 치세 말년에는 한때 토리 당이 우세해졌으나 하노버 가의 조오지 1세의 즉위와 더불어 휘그 당의 세력은 다시 회복되었다. 이 동안에 월포올의 노력으로 내각책임 제도도 확립되었다.
◑ 대영 제국 성립 :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와 무역거래를 하기 위해 영국 국회와 합치기를 원해 대영제국 국기는 잉 글랜드의 성 조지기(바른 십자가)와 스코틀랜드의 성 안드래기(빗 십자가)를 합쳐 유니언 잭이 탄생하였다.
(2) 미국의 독립 혁명
◑ 청교도의 신대륙 이주 : 영국 안에는 성공회, 카톨릭 양쪽에 불만을 품고 좀더 엄격한 칼빈파 즉, 청교(퓨리탄)쪽으로 특히 지식층의 사람들이 늘어가고 의회의 세력도 강했다. 제임스 1세의 청교도 탄압에 일부 청교도들은 1620 년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처음 도착한 곳을 버지니아라고 하였다.
◑ 메이 플라워 호 : 1620년 9월 6일 영국의 플리머스 항에서 한 척의 배가 닻을 올렸다. 배의 이름은 메이플라워 호로 10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는 배였다. 장장 9주일에 걸친 항해 끝에 마침내 배는 북 아메리카 동해안에 다다랐다. 새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그곳을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의 이름을 떠서 플리머스라 부르기로 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고국을 생각하면서 붙인 이름이었다. 이들은 대부분이 퓨리턴(Puritan), 즉 청교도로 제임스 1세의 청교도 탄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청교도란 신교 중에서도 칼뱅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서, 엄격한 교리와 금욕·절제를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해 겨울, 이주자들의 절반 정도가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봄이 되자 길을 닦고 집을 짓는 등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함께 예배를 드릴 장소도 만들었다. 이들은 이미 항해 도중 정부형태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을〈메리플라워 맹약〉이라 한다. 맹약에 따라, 개척지는 성 인 남자가 참여하는「민회」에 의해 통치되었다.〈메이플라워 맹약〉은 훗날 미국 헌법제도의 맹아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미지의 세계로 온 102명의 메이플라워 호 사람들―이들을 후세 사람들은〈필그림 파더스(Philgrim Fathers〉라고 부른다. 이〈필그림 파더스〉가 바로 오늘의 미국을 있게 한 선조들이 다.
◑ 미국 혁명의 경과 ▷ 영국의 중상주의 체제 1765 인지법(印紙法), 1767 타운젠트 세법 ▷ 독립 전 쟁 1773 보스턴 차 사건, 1774 대륙 회의, 1775 미·영군의 접전, 1776 독립 선언서 발포 1778 프랑스·에스파냐 참전, 1781 요크타운 승전 ▷ 독립의 달성1783 파리조약, 1787 합중국 헌법 제정
▶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 제임스 1세의 국교 강요로 이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들이 17세기 초부터 버지니아 주 등으로 이민을 시작하였으며 1620년에는 '순례시조' 라 불리우는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플리머드에 상륙하였다. 그 후 18세기 초반까지 북아메리카 동쪽에 영국령 13주가 성립되었다.
▶ 설탕 조례(Sugar Act, 1764) : 영국 의회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하여 7년 전쟁에 대한 비용을 충당하려고 아메리카 식민지 밀무역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제정한 조례로 세율 자체는 1733년 당밀 조례의 2분의 1에 지나지 않았지만, 법적 강제 조치가 수반되었으므로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중상주의 규제는 강화되었다. 보스턴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상업 식민지가 이에 반발하여 이듬해 발포된 인지 조례에 대한 전 식민지의 반항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766년 영국 상인들이 영국 의회에 압력을 가해 수정되었다.
▶ 인지조례 : 7년 전쟁 후의 영국의 대 식민지 입법으로 인디언의 반란 및 프랑스의 보복에 대비하여 북아메리카의 1만의 군대를 주둔시킬 비용의 일부를 식민지로부터 충당하려고 입법했다. 이는 법률상, 상업상의 증서 나 증권류, 주류 판매 허가증, 책자, 신문, 광고, 달력, 트럼프 등에 반 페니-10파운드의 인지를 붙이려는 규정이었다. 이는 관세 통제와는 달리 내국 과세이며, 또 국고 세입을 위한 대책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는 식민지 전체의 영국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중요한 입법이었다.
▶ 타운젠트 조례(Townshend Acts, 1767) : 영국의 식민지 규제 입법으로 재무상인 타운센드의 제안에 의해 성립되었다. 1)뉴욕 식민지 의회의 권 능을 정지하는 법률 2) 유리, 납, 도료, 종이, 차에 과세하는 수입법 3) 아메리카 관세 위원국을 설치하 고 세관리에게 일반 수색영장을 부여하는 관세 징수법 4) 영국에서 아메리카로 수출되는 동인도 회사의 차를 영국에서는 수입세를 면제하는 법률 등의 네가지 법률로 되어있다. 식민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 혀 1770년 차세 이외는 철폐되었다. 이것은 아메리카 독립 혁명의 한 원인이 되었다. ▶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1773. 12. 16) : 아메리카 독립혁명 직전의 사건. 영국 동인도 회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동 회사에 주어진 차의 전매권에 반대하여 상인 및 도시의 장인과 소농민은 각지에서 저항운동을 조직화하였다. 보스턴에서는 동 인도 회사의 선박에 적재된 차의 하역작업을 거부하는 민중 집회의 결의를 무시하고 허치슨 총독이 차의 하역을 강행하려 하자, S 애덤스의 연설로 흥분된 급진파인 [자유의 아들]일부는 인디언으로 가장하 여 3척의 배를 습격하고 1만 5천 파운드의 차를 바다 속에 던졌다. 이에 영국의 본국 정부는 1774년 6 월 1일자의 보스턴 항만 조례를 비롯한 일련의 탄압 입법을 제정하니 이는 곧 독립 혁명의 결정적 분화구가 되었다.▶ 대륙회의(Comtinental Congress) : 대륙회의는 아메리카 독립 혁명기에 본국과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식민지간에 적극적인 협력의 필 요성이 절실해졌으므로 각 식민지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륙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1774년 9월 필라델피 아에서 제 1차 대륙 회의가 열린 이래 1781년 3월에 해산될 때까지 식민지간의 연합 정부 역할을 수행 하였으며 미국 혁명 수행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아메리카 13식민지 및 독립 후의 각 주의 통일적 행동을 군사, 외교, 내정에 걸쳐서 지도한 기관으로 정부라고 하기보다는 13식민지의 대표로 구성되는 외교 회의의 성격을 지녔고 각 대표는 자기의 식민지 정부로부터 훈령을 가지고 출석하였다. 제1회 는 1774년 9월∼10월에 열리어 아직 독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고, 식민지의 자유와 자치의 회복을 목적으로, 권리의 선언 반포 및 대륙 연합의 결성이 주요한 사업이었다. 제2회는 1775년 5월에 열렸는데, 당초에는 식민지의 자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우선 무력 행동 선언을 발표, 6월에 워싱턴을 식민지군 총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며, 7월에 [평화의 청원]을 국왕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본국의 태도가 경직되자, 1775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독립의 주장이 급진파 사이에 강력하게 일어났고, 이어서 급진파의 지도에 의해서 7월 2일 독립 선언을 가결, 이후 독립 달성에의 통일 지도체로서 각 식민지를 지도하였다. 제2회 대륙 회의는 1781년까지 존속하였고, 연합 규약 발표 후에는 연합 의회로 되었다.
◑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 : 아메리카 독립 혁명 운동 초기의 급진적인 저항 단체로 원래는 비밀 결사로서 발족하여 조지아를 제 외한 각 식민지의 도시에서 결성되었다. 처음엔 부유한 상인들도 참가하였으나, 뒤에 탈락하고 주로 노 동자·장인(匠人)의 단체가 되었다. 그 성립 시기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1765년에는 비밀성을 포기하였으며, 기본 원칙을 공언하여 인지 조례 폭동을 추진하였고, 타운젠트 조례 반대 운동 때도 제1선에 나섰다. 뒤에 장인 조합으로 발전적 해산을 하였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식민지간의 유대를 유지하였으며, 중요한 혁명 기관인 통신 위원회 및 대륙 회의의 선구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혁명에 있어서 그 모델이 되었다. 여성들의 이와 비슷한 조직으로는「자유의 딸들」이 있다.
◑ 홍차에서 커피로
영국은 동인도 회사가 중국에서 가져오는 홍차를 애호하게 된 이래, 현재까지도 홍차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홍차를 즐기고 있다. 그에 비하여 현재 미국인들 중에는 커피 애호가들이 많다. 독립 이전 미국 동부 식민지에는 영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이 많아 홍차 애호가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동인도 회사는 여기에서도 중국 홍차 수입으로 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따라서 영국의 차 조례에 대한 반대 운동이 확산되어 차를 거부하고 대신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서, 이런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 제 1차 대륙 회의의 선언과 결의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의 주민은 자연의 불변 법칙, 영국 헌법의 원리, 특허장 및 서약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권리를 갖는다. 1. 식민지의 주민은 생명, 자유, 재산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들은 어떠한 주권적 권력에게도 그들의 동의 없이 위의 권리의 어느 하나라도 권리를 양도한 일이 전혀 없다. 2. 식민지에 처음으로 이주한 우리들의 조상은 모국으로부터 이주할 때 영국 영역내에서 태어난 자유로운 신민이 갖는 모든 권리, 자유, 특권을 누릴 자격을 갖고 있었다. 3. 이와 같이 이주했다고 하여 이들은 결코 위의 권리 중 어느 하나라도 빼앗기거나 양도하거나 상실 한 일이 없으며....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고 누렸으며 그들의 후손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 5. 식민지는 각자 영국의 관습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특히 이 법률의 절차에 따라 이웃의 동등한 주민 으로부터 재판을 받는 고귀한 특권도 갖고 있는 것이다. 8. 식민지는 평화적으로 모여 불평 불만을 토의하고 국왕에게 청원할 권리를 갖는다. 이와 같은 행동 에 대한 소송제기, 금지적 선언 및 조치는 모두 법률에 위배된다. 10. 식민지의 참의원이 몇몇 식민지에 입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입법 기관의 자유에 대하여 비합헌적이며 위험하며 파괴적인 것이다.(1774. 10. 14)
◑ 미국 독립 혁명의 성격과 이념 : 미국 혁명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본국 정부의 압제에 대한 자유 수호와 이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의 새로운 입헌적 연방 공화국이라는 것이었다. 20세기에 경제적 해석이 가해져 사회적, 경제적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 지적되고 민주주의 혁명으로 보려는 견해가 대두하였다. 미국 혁명은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공화 체제의 정부를 수립하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발달사상 큰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주동 세력인 부유층이 정치를 독점한다는 전통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미국 독립선언에 나타난 지도 이념은 존 로크를 비롯한 계몽 사상가의 영향이 컸다. 독립 선언서에서는 인간의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와, 이를 보장하는 정부의 수립, 그리고 인간의 자연권을 주장하였다. 한편,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패트릭 헨리의 '자유 아니면 죽음' 이라는 의회 연설에 의해 크게 선동되었으며 토마스 페인은 '상식' 이라는 책을 통해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함으로써 독립의 기운이 팽배하게 되었다.
◑ 독립 선언서 :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이 기초하고 프랭클린 등의 교정을 거쳐 대륙 회의에서 가결된 후 13주 식민지가 만장 일치로 공포한 선언이다. 로크의 자연법 사상에 입각하여 13주 식민지가 자유 독립국가임을 공언하고 장래에 어떤 국가 형태를 취할 것인지를 시사했다.
◑ 미국 헌법의 제정(1787) :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인 55명의 대표로 구성된 제헌 회의에서 채택된 것으로, 그 원문은 오늘날까지도 수정없이 원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맞추어 현재까지 26개의 새로운 조항이 추가되었는데, 이 추가 조항을 수정 헌법 또는 수정 조항이라 한다.
(3)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 프랑스 혁명의 경과 ▷ 국민의회(Assemblee Constituante ; 1789-91) 1789. 5. 5 삼부회 소집 1789. 6. 20 테니스코트의 선언 1789. 7. 4 바스티유 감옥 습격 1789. 8. 4 봉건 제도 폐지 1789. 8. 26 인권 선언 1790. 여름 자코벵 클럽의 세력 성장 1791. 6. 25. 왕의 도주 실패] ▷ 입법 의회 (Legislative ; 1791. 10 -92. 9) 1791. 8. 27 대불 동맹, 필니츠 선언 1792. 4. 20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 1792. 8. 왕권 저지 1792. 9. 대 학살 ▷ 국민 공회(Convention ; 1792. 9 - 95. 10) 1792. 9. 21 로베스피에르의 공화국 선포 1793-94 공포 정치, 처형 1793. 8. 23 국민 개병제 실시 1794. 7. 27 로베스피에르 처형 ▷ 집정관 정부(Directoire ; 1795. 10 - 99. 11) 1795. 10. 26 국민 공회의 해산, 집정관 정부의 수립 1796 - 97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1797 급진적 평등주의자 비뵈프 사건 1799. 11. 9 나폴레옹의 구테타 ▷ 통령 정부(Consulat ; 1799. 12 - 1804. 5) 1800 - 02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1802. 8 나폴레옹, 종신 통령이 됨 1804 나폴레옹 법전 편찬 ▷ 나폴레옹 제국1804 나폴레옹 황제로 즉위 1805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에 참패 1807 프로이센 정복(틸지트 조약) 1812 러시아 원정 1813 라이프치히 해방 전쟁 1814 나폴레옹, 엘바 섬으로 유배 1815. 3-6 백일 천하 1815. 6 워터루 패배, 나폴레옹의 몰락 1814 - 15 빈 회의
◑ 구제도의 모순
백작 나리, 나리는 사람들이 나리를 받들어 준다고 해서 정말 자기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귀족, 재산, 훈장, 지위, 이러한 것들로 의기양양해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그만한 보배를 얻기 위해 나리는 대체 무슨 일을 했습니까? 단지 태어날 때 들인 수고뿐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인간으로서도 지극히 평범하고요. --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1781년)> 중 제5막 3장에서
◑ 부르주아지 : 귀족 계급과 농민 계급 사이의 제 3계급층으로 법률가, 의사, 돈 많은 상인 은행가들을 부르주아 계급이라고 한다. 농민은 성밖에서 생활하고 귀족은 성안에서 생활하였다. 이 제 3계급은 영주나 귀족의 저택 근처에 모여 살았다. 부루(BUOURG)는 프랑스어로 성(城)으로 결국 성안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 아서 영(Authur Young)의 <프랑스 여행기(1792년) : 아서 영(1741∼1820)은 영국의 농업 경제학자로서, 그는 선진국 사람의 입장에서 앙시앵 레짐 말기에서 대혁명 초기까지의 프랑스 상황을 골고루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베아른의 인상] (1787년) 8월 11일 루르드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이곳으로 보내진 죄수들을 가두어 둔다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방어되고 있는 성이 바위 위에 있다. 지금은 일곱인가 여덟 명이 있다고 하는데, 한 때는 여기에 30 명이 있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기 징역수이다. 그들은 냉혹한 학정(虐政)의 무자비한 손에 의해 안락한 가정의 품에서 끌려 나와 처자식과 친구들로부터 떨어져, 자기가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아니 죄가 아니라 오히려 공덕 때문에 이 꺼림칙하고 비참한 집안에 웅크리고, 너무나 큰 절망으로 몸을 망치게 된 사람들이다. 오오, 자유여! 자유여! 더욱이 이것이 우리 영국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주요 국가 중에서 가장 온화한 정치인 것이다. 마치 비둘기를 매의 먹이로 만들어 놓은 듯, 신의 섭리는 인류에게 단지 폭군의 먹이로서만 생존할 것을 허락한 것처럼 보인다. [가난한 농촌 여자와 나눈 대화] (1789년) 7월 12일, 당나귀를 쉬게 하기 위해 긴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가다가, 나는 마침 한 불쌍한 여자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국을 한탄하면서 나라 꼴이 비참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우리 서방님은 겨우 한 뼘밖에 안 되는 토지에다 소 한 마리와 비쩍 마른 망아지 한 마리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데, 우리는 영주 한 사람에게 밀 1 프랑샤르(약 19kg)와 암탉 세 마리를 지대로 바쳐야 하고, 또 한 사람의 영주에게는 밀 4 프랑샤르(약 76kg)와 암탉 한 마리와 1 수의 돈을 바쳐야 합니다. 이 밖에도 무거운 인두세와 공납이 있지요. 우리에게는 자식이 일곱 명이나 있어서 암소의 젖은 수프를 만드는 데에도 부족하답니다." "그러면 왜 말 대신 암소를 한 마리 더 기르지 않나요?" "당치도 않습니다. 말이 없으면 우리 서방님은 지금과 같이 농작물을 잘 나를 수가 없어요. 지금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위대하신 분들이 뭔가 하시려고 한다는데, 우리에겐 누가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좀더 잘 해 주시겠지요. 어쨌든 인두세니, [봉건적]권리니 하는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답니다." 이 여자는 가까이서 보아도 60세나 70세로 보일 것이다. 힘든 일을 했기 때문 이라고는 해도, 그 정도로 그녀의 허리는 굽어 있고, 얼굴은 주름 투성이였다. 그런데 그녀의 말로는 자기가 겨우 28세라는 것이다. 이 곳에 와 본 적이 없는 영국인으로서는 프랑스의 농촌 여자들의 대부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 하층 계급의 생활 상태가 두 나라 사이에 이렇게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 때문이다. -- 아서 영(Authur Young)의<프랑스 여행기(1792년)>에서
◐ 프랑스 혁명(1789-1799)
▶ 혁명의 발발 : 파리 시민의 봉기는『앙시앵 레짐』이라고 불리는 낡은 제도에 대한 프랑스 민중의 저항이었다. 1789 년 5월 베르사이유 궁전에 소집된 삼부회의 의원의 수는 승려 308명, 귀족 285명, 제 3신분 621명이었다. 그런데 개회와 동시에 의결 방법에 관하여 대립이 일어나 승려ㆍ귀족의 대부분은 과거의 예에 따라 신분별로 개별의 회의를 만들어 부별로 의결할 것을 주장하고 제 3신분 및 다른 약간의 의원은 3부공통의 다수결을 주장하였다. 드디어 제 3신분과 일부의 승려ㆍ귀족은 3부회에서 분리하여 스스로 국민의 대표라 하여 국민의회를 만들어 6월 20일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 않기로 맹세 하였다(테니스코트의 맹서). 해산의 왕명을 전한 사람들에게 미라보(Mirabeau, 1749∼1791)는「우리들은 총검의 힘이 아니면 이 장소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외쳤다. 이에 루이 16세도 양보하여 국민의회 를 인정하고, 남은 승려ㆍ귀족에게 국민의회와 합류할 것을 권하였다. 국민의회는 헌법제정의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무렵 혁명을 요구하는 소리가 신문ㆍ팜플렛ㆍ연설 등에 의하여 파리를 비롯한 국내의 각처에 퍼져, 카페ㆍ바 등에는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도시와 농촌의 여기저기에 소동이 일어나 관헌은 무력화하고 근위병은 반란을 일으켜 해산하였다. 이에 국왕은 군대를 베르사이유에 모아 호위하게 하는 동시에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던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국왕이 군대의 힘으로써 국민의회를 해산시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하였다. 이에 파리의 민중들이 들고일어나 시청을 점령하여 자치행정 조직을 만들고 각 지구에 국민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민중의 동요는 날로 심해져, 11월 14일에는 무기고를 습격하여 3만 2천의 소총을 빼앗고 정치범을 가두고 있던 바스티유(Bastille)감옥을 파괴하였다. 바스티유가 점령당하는 순간, 루이 16세는 화려한 베르사유 궁에서 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능하고 매사에 무관심한 그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7월 14일: 없음』이 날은 지금 프랑스의 국경일로 되어 있다. 무기력한 국왕은 네케르을 복직시키고 개혁파의 라파예트 백(La fayette, 1757∼1834)을 국민의용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국민의 환심을 사는 데 급급하였다. 이 때 국민 의용대가 그 모자에 파리를 나타내는 적색ㆍ청색 사이에 왕실을 나타내는 백색을 넣은 띠를 둘러 뒤의 삼색기의 기원이 되었다. 농민의 폭동0?전국에 퍼져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고 교회와 귀족에게 바치는 공조와 부역을 거부하고 매점인ㆍ독점상인의 집을 불살랐다. 공포에 사로잡힌 의회는 8월 3일과 4일의 이틀에 걸쳐 회의를 열고 조세상의 특권, 부역, 인격적 예속관계, 10분의 1세, 영주재판권, 매관제, 길드 등 봉건적 특권의 폐지를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를 성문화할 때에 여러 가지 제한이 가해져, 인격적 예속 관계, 10분의 1세, 영주 재판권 등은 무상으로 폐지되었으나, 화폐지대와 생산물 지대의 폐지는 유상이 되어 농민이 이를 살 때까지 지대의 징수가 계속되게 되었다. 의회는 다시 8월 26일 인권선언을 발표하였다. 미국 독립선언의 영향을 받은 이 문서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천명한 것으로서 전문 17조로 되어 있으며, 진보적 군인 라파예트가 기초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인권선언은 자연법 사상에 입각하여 주권재민, 언론, 출판의 자유, 법률상의 평등, 과세의 평등, 삼권분립 등 새로운 시민사회의 원리를 세운 점에 있어서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선언 등과 더불어 인류사상 중요한 역사적 문서의 하나로 되어있다. 그러나 생산자를 위한 경제적 자유는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언급되지 않았고, 교육의 자유는 승려의 반대로 제외되었다. 노동자의 단결의 자유는 처음부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국왕은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의 선언을 승인하지 않았을 뿐더러 근위병을 증가시키고 무력에 의하여 의회를 탄압하려 하였다. 10월, 파리는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 해는 지독한 흉년이었다. 그때 베르사유 궁에서 대 연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게다가『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민중은 분노로 들끓었다. 10월 5일 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약 2만 명의 파리의 군중이『빵을 달라! 빵을 달라!』외침과 함께 행진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베르사유 궁이었다. 성난 민중들은 왕에게 파리로 갈 것을 요구했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왕비와 아들을 데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쥔 여성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파리로 와야 했다. 국민의회도 이어서 파리로 옮아왔다. 파리가 명실상부한 프랑스 수도가 되었을 뿐 아니라, 왕과 의회가 파리의 혁명적 민중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어 반동파의 책동이 곤란하게 되었다. 국왕은 드디어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을 승인하였4? 헌법제정의회는 이어서 교회의 토지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승려세속법을 제정하여 사제ㆍ사교를 선거제로 하는 동시에, 국가의 봉급에 의하여 생활하도록 하였다. 이 바람에 혁명 초기에 혁명에 가담하였던 다수의 승려들이 반혁명으로 달려, 이후 카톨릭교회는 혁명 정부에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다. 정부는 몰수한 교회의 토지를 저당으로 불환지폐를 발행하여 재정의 안정을 꾀하였다. 국내관세ㆍ길드의 폐지ㆍ화폐ㆍ도량형의 통일 등에 의하여 상품의 유통과 생산이 자유롭게 되어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791년 9월에 입헌군주제에 기초를 둔 신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 91년 헌법은 군주제를 인정하고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인민주권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왕권은 극도로 제한되고 특권신분은 폐지되어 모든 인민이 다같이 시민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인권선언에 주장된 평등주의는 그냥 그대로는 실현되지 않아 선거권은 일정한 재산을 가진 유권자에게만 부여되었다. 이 무렵 왕실은 1790년 7월에 네케르가 사직하고, 또 1791년 4월에는 왕실과 결탁하 여 왕실측근의 반동적 귀족을 억누르는 한편 민중의 급진화를 방지하는 데 노력하고 있던 미라보 (Mirabeau, 1749∼1791)가 죽어 유력한 동조자를 잃었다. 반왕실적 공기가 높아감에 위험을 느낀 루이 16세는 1791년 6월 왕비와 함께 왕비의 친정 오스트리아로 몰래 도망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바렌에서 붙잡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 입법의회 시대 : 헌법제정의회는 1791년 9월에 해산되고 신헌법에 의하여 일원제의 입법의회가 소집되었다. 입법의회에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라파예트의 푸이양 당(Feuillants)이 제 1당을 차지하였으나, 그들의 세력은 날로 쇠하고 그 대신에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지롱드 당(Girondins)과 자코뱅 당(Jacobins)이 차츰 중립 파의 세력을 흡수하여 의회의 대세를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지롱드 당은 상공시민계급의 이익을 대표하여 지방분권적인 연방공화정을 주장하고, 자코뱅 당은 회의장의 좌측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산악당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급진적 소시민과 노동자 사이에 그 정치적 기반을 갖고 중앙집권적 공화정을 주장하였다. 영국은 처음에는 프랑스 혁명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혁명이 차츰 급진적이 되어 사회혁명과 하층민의 대중운동으로 화하자 혁명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부르봉 왕가가 통치하고 있던 에스파냐 및 시실리 왕국은 본가인 프랑스 왕조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곧 양국의 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결과가 된다 하여 이를 두려워하였다.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오빠이며 오스트리아 공겸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2세는 루이 16세로부터 구원의 청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혁명이 자국에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ㆍ빌헬름 2세와1791년 8월 필니츠 (Pillnitz)에서 회견하여 프랑스 혁명을 비난하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아직 무력간섭의 실시를 선언한 것은 아니었으나, 프랑스 혁명파들에게는 노골적인 내정간섭으로 해석되었다. 입법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지롱드당 내각은 1792년 4월 국왕에 압력을 가하여 오스트리아에 선전하였다. 이리 하여 23년에 걸친 유럽의 대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양국 군대는 즉시 연합하여 프랑스에 침입하여 국왕을 비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프랑스 국민을 위협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회는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정부의 애국심과 혁명적 의식에 불타는 지방의 의용군이 계속 파리에 모여들었다. 그 중 마르세유에서 온 의용군이 불렀던 진군가 <라 마르세예즈> 는 혁명의 노래로 민중들에게 널리 불리어졌는데 지금의 프랑스 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나가자! 조국의 아들 딸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독재에 항거하는 우리의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피묻은 깃발은 날린다. 보라! 저기 압제자 야비한 9ジ?湧?칼 우리의 형제자매와 우리의 처자를 죽인다. 무기를 들어라! 대오를 지어라! 나가자! 나가자! 우리 함께 압제자의 피로 옷소매를 적시자!--- 연합군의 침입에 격분한 파리의 소시민과 노동자들은 1792년 8월 9일의 밤과 10일 아침에 급진파의 자코뱅 당의 지도 아래 봉기하여 혁명적 콤뮨의 설립을 선언하는 동시에 튜이루리 왕궁에 침입하여 왕과 그 가족을 의회에 호송하고 의회에 요구하여 탕폴(Temple)의 캄캄한 감옥에 가두게 하였다. 대중운동의 압력에 눌려 의회는 왕권을 정지하고 신 헌 법을 제정하기 위하여 신 의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무렵 국경의 최후의 요새인 베르당이 프로이센 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으므로, 파리의 민중이 흥분하여 반혁명 분자 1000여명을 잡아 가두고 혹은 즉석의 인민재판에 의하여 처형해 버렸다. 이 9월의 학살에 대하여 의회도 행정당국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국방위도 철저히 진행되어 많은 의용병이 모여들어 국경으로 향하였다. 이리하여 프랑스군은 9월 20일 발미(Valmy)의 포격전에서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이 전쟁은 구식의 직업적 군대에 대한 인민군의 우위성을 증명하여 혁명전쟁의 전기가 되었다. 괴테는 그의 저서 「1792년의 발미의 포격전」가운데에「여기에서 그리고 이 날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 다」고 적어 놓고 있다.
▶ 국민 공회 시대 : 1792년 9월 21일에 보통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새로운 의회 국민 공회가 발족하였다. 프랑스군의 승리를 전해들은 국민 공회는 만장일치로 왕정폐지를 결정하고 9월 22일로써 공화정 제1년의 제1일로 정하였다. 국민 공회는 브리소ㆍ베르뇨ㆍ공도르세 등 약 200명의 지롱드 당이 우익을 점령하고, 당통ㆍ로베스피에르 등 약 100명의 자코뱅 당이 좌익을 차지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지롱드 당이 가장 혁명적인 파리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방분권적인 연방공화제를 주장한 데 대하여 자코뱅 당은 급진적 혁명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통일 공화국을 주장하였다. 반혁명의 억압수단으로서 테러를 하자는 자코뱅의 주장에 지롱드 당이 반대하였다. 지롱드 당은 민중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또 프랑스 상품의 시장을 넓히기 위하여 대외전쟁에 정치의 중점을 두었다. 양당의 중간에는 의원의 과반을 차지하는 중간 분자 가 있어서 정세에 따라 이리 쏠리기도 하고 저리 쏠리기도 하였다. 국민 공회는 지롱드 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을 재판하여 1793년 1월 21일 민중의 적으로서 혁명 광장의 단두대에 올려 처형하였다. 왕비 마리 앙투앙네트 역시 그해 10월 16일, 38살의 나이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국왕의 처형은 열국을 놀라게 하였다. 영국 수상 소피트(William Pitt, the Younger, 1759∼1806)의 제창에 의하여 영국 ㆍ폴란드ㆍ오스트리아ㆍ에스파냐아가 대불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침입하였다. 이에 호응 하여 국내의 각지에 강력한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 혁명은 내외의 위기에 부딪쳤다. 국민 공회에서는 지롱드 당과 자코뱅 당이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자코뱅 당이 토지개혁을 철저히 하기 위하여 봉건적 의 무를 무상으로 폐지할 것과 인플레에 허덕이고 있던 민중을 구하기 위하여 경제통제ㆍ가격공정ㆍ식량징 발 등을 주장한 데 대하여, 상층의 상공업자의 이익을 대표한 지롱드 당은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여 이 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지롱드 당과 자코뱅 당의 결전의 날이 다가 왔다. 자코뱅 당은 지롱드 당 에 대한 민중의 증오심을 부채질하였다. 1793년 6월 자코뱅 당의 지휘 아래 파리의 하층민이 봉기하여 의회를 포위하고 지롱드 당 간부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체포된 지롱드파 의원은 32명에 달하여 이 당의 세력은 몰락하였다.
▶ 자코뱅 당의 독재정치 : 탈주한 지롱드 당 의원의 선동에 의하여 왕당의 귀족과 지롱드 당원을 중심으로 하는 반혁명의 반란이 일어나 자코뱅 당의 가장 우수한 지도자이었던 마라(Marat, 1743∼1793)가 지롱드 파의 사주를 받은 한 소녀에게 자택의 목욕탕에서 암살당하였다. 국민 공회는 자코뱅 당에게 조종당하고 공화국의 최고행 정권은 신설된 공안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는 당통(Danton, 1759∼1794)ㆍ로베스피에르(Robespiere, 1758∼1794)ㆍ카르노(Carnot) 등 9인의 위원에 의하여 구성되어 대신ㆍ장군ㆍ군대를 감시 아래 두었다. 내정의 긴박한 정세 아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독재정치가 실시되었다. 공안위원회의 지배아래 있던 혁명재판소는 반혁명의 혐의가 있는 자를 모조리 기요틴에 보냈다. 1793년 6월에서 1794년 7월에 이르기까지의 이른바 공포정치시대에 파리에서 처형된 자만 하더라도 2500명의 다수에 달하였다.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오르레앙공 로댕부인, 화학자 라보아제, 바이이 등이 기요틴의 이슬이 되었다. 자코뱅 당의 독재 아래 여러 가지 급진적인 개혁이 행해졌다. 망명귀족의 토지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빈농들에게 분할해 주고, 봉건적 제 권리를 무상으로 폐지시켜 영주제의 절멸을 완성하였다. 이리하여 소토지를 가진 농민이 대량으로 생겨 오늘날의 프랑스 소농민 계급의 기원이 되었다. 곡물과 생필품의 독점적 매점이 금지되고 최고가격법이 정해졌다. 장자상속제가 폐지되고 자식들이 평등의 재산상속권을 갖게 되었다. 여자들에게도 남자와 같은 재산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구력을 제정하고(이 공화력은 1806년 1월 1일까지 사용되었다), 도량형을 개정하여 미터법을 채용하고, 크리스트교를 배척하고, 이성의 숭배를 하였다. 이런 것들은 너무나 합리주의에 치우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으나, 미터법의 제정만은 후세에 큰 공헌을 하였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징병제도가 실시되어 프랑스의 육군은 20만 명에서 77만 명으로 늘었다(당시의 프랑스 인구는 약 2000만 명이었다). 군대내에는 종래의 군대와 같이 출신의 차이에 의한 차별대우가 없어지고 실력만 있으면 사병에서 군사령관도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의원이 군대에 파견되어 지휘관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혁명군의 병사들은 혁명정신에 불타 사기가 왕성하고 행동이 민첩하였다. 카르노의 총지휘아래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는 동시에 1794년에는 국경 밖으로 진격하여 벨기에ㆍ폴란드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은 점령지의 도처에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인민을 해방하여 그들의 환영을 받았다.
▶ 총재정부의 성립 : 자코뱅 당의 독재는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인플레를 억압하기 위하여 최고가격제를 실시하였으나, 빵 이외의 일용품에 대하여는 유명무실이 되었다. 노동자는 일용품의 물가고에 응하기 위하여 노임의 최고가격제의 폐지를 요구하였다가 정부에게 거절당하여 불평을 품었다.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에 의하여 소토지 소유자가 된 농민은 식량징발에 불만을 품고 혁명적 동요를 싫어하는 등 보수화 하였다. 혁명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상공시민도 생산과 통상의 자유를 원하여 더이상의 혁명의 진행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자코뱅 당은 소시민과 일부 노동자의 지지를 받는 데 불과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정세 아래 자코뱅 당의 내부에 대립이 일어났다. 공포정치의 강화를 주장하는 좌파 에베르(Hebert), 공포 정치를 반대하는 우파 당통이 날카롭게 대립하였는데, 1794년 3월 중간파의 로베스피에르가 양자와 그 당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청렴하고 성실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었으나, 그 사상은 너무나 이상주의에 치우쳐 있었다. 그가 지도하는 혁명정부의 극단적인 통제경제 정책은 국민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속박하고 암거래에 의한 물가고를 가져와 국민 생활을 위협하였다. 이와 동시에 재 은 극도로 궁핍하고 정부발행의 지폐의 가치는 폭락하여 수습할 수 없는 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재판소의 권한을 강화하여 많은 사람을 조국의 적이라는 이름 아래 단두대로 보냈다. 1794년 6월 10일에서 7월 2일 사이에 파리에서만 1376명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에서 반로베스피에르의 공기가 짙어갔다. 드디어 1794년 7월 27일에 온건파의 반 혁명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는 사형을 당하고 자코뱅 당은 몰락하였다. 공화력의 열의 달(Termidor) 9 일에 해당하므로 이 사건을 테르미도르 반동이라 일컫는다. 이 결과, 유산시민을 주체로 하는 온건공화당이 국민 공회에서 다시 지도권을 회복하여 무산시민을 배경으로 하는 자코뱅 당과 구특권 계급이 지도하는 왕당의 반항을 억누르고 정권을 쥐었다. 1795년 8월 국민 공회는 소득액에 의하여 선거권을 제한하는 신 헌법(제 3헌법)을 제정하고 해산하였다. 이에 의하여 양원제의 입법부와 5명의 총재를 행정장관으로 하는 총재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결국 유산시민의 승리로서 끝났으며 절대 왕정은 무너지고 봉건적 찌꺼기는 일소되고 인민의 법률 상의 자유ㆍ평등이 확립되어, 자본주의의 발전에 탄탄대로를 마련해 주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한나라의 혁명에 그치지 않고 그 영향은 널리 전 유럽에 퍼져, 봉건제도를 일소하고 자유주의ㆍ민주주의의 승리의 기초를 세워 근대사회의 성립에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 루이 16세(Louis XVI :1754-1793) : 루이 15세의 손자로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앙트와네트와 결혼하였다.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수렵과 자물쇠를 만드는데 몰두하는 등,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튀르고, 말제르브 등을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 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르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 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개혁은 특권 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 1789년 6월 삼부회가 국민 의회로 성장하여,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이 같은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1789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 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이어 바르 나브 등의 푸이양 파와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여, 1791년 6월 20일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조룰 기조로 한 1791년의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 후에도 초지를 버리지 못하고, 특히 지롱드 당의 전쟁 정책에 동조하였으나 패전으로 인한 외국군의 간섭을 받았다. 또 1792년 4월 선전후 절대 왕정의 회복을 목표로 전쟁 추진을 계속 사보타지하다가 결국 국민의 분노를 사게 되어 8월 10일 사건으로 왕정은 전복되고(9.21.), 그는 탕플 감옥에 유폐되었으며, 국민 공회의 투표 결과 반역자로서 1793년 1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 Josephe Jeanne:1755-1793) :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쯔 1세와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의 정략 결혼으로 1774년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당시 절대 왕정의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의 궁핍을 고려함이 없이 베르사이유 궁에서 호사한 생활을 하며, 미모와 허영과 무분별한 사려 등으로 좋지 못한 평판을 남겨 왕위를 실추시켰다. 황태자의 출산이 늦어 지위가 불안정하였으나, 1785년 황태자의 탄생과 함 께 해결되었다. 주견없이 남편의 정치에 간섭하고, 튀르고를 추방하는 등 절대 왕정을 구하려는 개혁에 도 방해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발발 후는 1789년 10월 파리 시민들의 강요로 남편 및 아들과 함께 파 리의 튈르리 궁에 이사하였으며 철저한 반혁명적 태도를 견지하고 미라보 등을 수족으로 하여 음모의 중심이 되었다. 애인인 스웨덴의 귀족 페르센과 짜고 왕 일가의 도망을 기도했다가 실패하고, 이후 오빠 인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를 부추기어 그의 무력 간섭에 의해 혁명을 타도하려고 전쟁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1792년 8월 10일의 봉기 이후 탕폴의 감옥에 투옥되어, 남편 루이 16세가 사형당한 뒤를 이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 바스티유(Bastille) : 바스티유라는 말은 원래 성채를 의미하는 보통 명사인데, 예부터 파리에 있는 성채 중에서 주된 것을 가리키는 습관이 있고, 또 생탕트완 교외에 있는 것에만 한정하게 되었다. 한때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나, 원래는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 영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성채를 감옥으로 사용한 것은 17세기 루이 13세때 리셜리외에 의해서였다. 이 곳에 투옥된 사람은 귀족이나 부르조아지들이었으며, 중대한 범죄자 외에는 비교적 자유스럽고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는데, 반권력적인 문필가가 투옥됨에 따라 음산한 인상이 생겨, 절대 왕정의 상징으로서 널리 인식되었다. 그래서 1789년 7월 14일에 발생한 바스티유 감옥의 파괴는 곧 프랑스 혁명의 본격적인 개시를 알리는 대 사건이 되었다.
◑ 라파예트(La Fayette :1757-1834) :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로 16세에 장교가 되어 아메리카 독립 혁명에 의용군으로 종군하여 미국, 프랑스 양국의 협력에 힘쓴 결과 승리를 획득하여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귀국 후 1787년의 명사회 때부터 1789년의 삼부회 소집 때까지 자유주의 귀족 및 상층 부르조아지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국민의회에서는 영국식의 입헌 왕정을 추진하였다. 7월 14일의 바스티유 함락 후 파리시의 민병 사령관으로 선출되자, 이를 국민 위병으로 육성하고, 그 무력을 기초로 입헌 왕정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791년 국왕의 바렌 도피 사건, 샹드마르스의 학살로 인기를 잃었으며, 개전시에도 중앙 사령관으로서의 무력을 대외전보다도 국내의 탄압에 이용하려다 실패하고, 8월 10일 사건에 의한 왕정 전복 후 망명하였다. 망명, 감옥 생활, 나폴레옹 체제하에서의 은퇴 등을 겪었으나 왕정이 복고되자 정계에 돌아와 자유주의 정당의 지도자가 되어 7월 혁명에서도 활약, 루이 필립의 즉위에도 협력하였다.
◑ 롤랑 부인 (Madame Roland, Jeanne Manon :1754-1793) : 프랑스 혁명 시대의 여류 정치가. 조각가의 딸로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미모와 재주가 뛰어나 다방 면의 교양을 쌓고, 특히 문학과 고전에 정통했다. 1780년 롤랑 드라 플라티에르와 결혼, 혁명이 시작되자 남편을 흔들며 정치에서 활약했다. 일찍이 공화적 경향을 띠고, 특히 브리소나 뒤무리에와 손잡았는데, 1791년 입법 의회 성립 후, 그녀의 살롱에는 부르조아를 대표하는 의원들이 모여 지롱드 당의 중핵을 형성하였다. 전쟁 정책을 추진, 그녀의 지원으로 그의 남편은 두 차례나 내무상 직을 맡았는데, 1792년 9월 이후 국민 공회의 시기에 접어들자, 로베스피에르 등 몽타냐르와의 투쟁을 계속, 1793년 3월 남편의 도망 후는 애인인 뷔조를 대변인으로 삼아 활동을 계속하다가, 6월 2일의 시민 봉기에 의한 지롱드 당의 몰락으로 체포되어 10월에 처형당하면서 「오 자유여! 네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가 범하여졌 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저서로는 옥중에서 딸을 위하여 쓴 '나의 최고의 사상'(1793)이 있으 며, 그 밖에 '회상록'이 있다.
◐ 혁명 재판소(Tribunal Revolutionnaire) : 1793년 3월 10일 국민 공회가 파리에 창설한 반혁명 범죄 심리를 위한 특별 재판소로 판결은 재심을 인정하지 않으며 24시간 내에 집행되었다. 9월 파리의 급진적 지구의 압력에 의해 공포 정치가 조직됨 과 동시에 개혁되었는데, 그 때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개혁된 후는 4부로 나누어져 휴일없이 개정되었으며 왕당파와 반혁명 분자뿐만 아니라 경제 교란자와 비협력 분자도 혁명의 적이라 하여 이를 단죄, 기요틴에 보냈으며, 혁명 정부를 뒷받침하는 기관의 하나가 되었다. 1794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공포 정치의 중앙 집권화가 추진되어, 지방의 혁명 재판은 금지되고 반혁명 용의자는 전부 파리로 보내 기로 했기 때문에, 파리의 혁명 재판소의 권한은 공화국 전체에까지 확대되었다. 파리 혁명 재판소가 내 린 2,639건의 사형 판결 중 1,376건이 6월 10일부터 7월 27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처리되었는데, 이러한 기요틴 정치에 대한 공포와 혐오는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가 되었다. 테르미도르 반동 후에 재판소 직원은 숙정되어 그 기능이 정지되었으나, 그 후 재조직되어 자코뱅 잔당의 처벌에 이용되 다가, 1795년 5월 31일 폐지되었다.
◑ 기요틴(Guillotine) : 프랑스 혁명중 사형 집행에 사용된 단두대. 그 전부터 남 프랑스 및 이탈리아 등지에서 사용되던 것 을 의사이며 입헌 의회 의원이던 기요탱이 죄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의 채용을 제안한데서 명 명되었다. 고통이 적으며 처형에 필요한 시간도 짧아 많은 사람을 처형하는데 사용되어 공포 정치의 상 징적 존재가 되었다.
◑ 자코뱅 클럽(Club des Jacobins) : 프랑스 혁명기 최대의 정치 클럽, 원래는 3부회 소집 전후에 결성되었던 브르통 클럽을 모체로 하여 국왕과 의회가 베르사이유에서 파리로 옮긴 후 재조직되었는데, 생토노레 가의 자코뱅 수도원에 본부를 두고, 정식 명칭을「헌우회(憲友會)」라 하고, 1792년 9월에는「자유와 평등의 벗인 자코뱅 클럽」으로 개칭되었다. 지방의 정치 클럽을 통신 등을 통해 지도하여 그 영향력은 전국적이었다. 흔히 소수 정예 분자에 의한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급진적 혁명주의자를 가리키며 몽타냐르라 불리는 프랑스 혁명의 당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으나, 이는 점점 살벌해져 갔던 혁명의 과정을 통하여 생긴 말이지 초기에는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소위 자코뱅 클럽에 속한 회원은 모두 자코뱅파라 불리었고, 그 성격은 클럽의 지도권을 잡은 당파 여하에 따라 삼두파, 지롱드당, 몽타냐르로 변했다. 이를 지도하는 당파는 초기엔 삼두파였으나, 국왕의 바렌 도피사건 후의 위기 때 탈퇴하고, 이어 전쟁 문제를 둘러싸고 지롱드 당과 몽타냐르가 대립하다가, 1792년 8월 10일의 인민 봉기 전후부터 후자가 지도권을 잡고, 그해 가을 이후 지롱드 당을 제명하자, 클럽은 몽타냐르의 원외 조직이 되었다. 원래 입회금은 12 프랑, 회비 연 24프랑이라는 고액의 부르조아적인 조직이었으나, 방청하는 상퀼로트의 힘도 컸기에, 상퀼로트와 제휴한 부르조아지의 클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몽냐타르(Montagnards) : 프랑스 혁명기의 주로 국민 공회에 있어서의 혁명적 부르조아지의 당파. 상퀼로트(소부르조아지ㆍ소상 점주ㆍ소공장주ㆍ소농민ㆍ장인)와 결합하여 입법 의회에선 최좌익에 위치하였다. 1792년 8월 10일의 민중 봉기를 지도하여 왕정을 전복, 1793년 5월 31일∼6월 2일의 민중 봉기를 조직하여 정적 지롱드 당을 추방, 정권을 잡았다. 주류파는 로베스피에르 파였으며, 공안위원회에 의한 독재를 통하여 전쟁의 승리, 봉건제의 폐지, 최고 가격제를 강행하였으며, 또한, 반혁명 파에 대해서는 공포 정치로 임했다. 그러나 자파내의 극좌파인 에베르 파와 우파인 당통 파의 2파를 제거한 후 상퀼로드의 협력 약화에 따라 부르조아지의 반격이 일어났을 때, 이를 처리하지 못하여 몰락하였다. 이 테르미도르의 반동 후에도 국민공회의 말기, 그리고 총재 정부 때도 여러 번 민중 봉기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 지롱드 당(Girondins) : 프랑스 혁명기의 입법 의회 및 국민 공회에 있어서의 당파로 주로 상공업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며, 브리소, 콩도르세, 베르니오, 귀아데, 장소네 등에 의해서 지도되었다. 이 중 후자의 3인이 지롱드현 출신 의원이었으므로 지롱드 당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 입법 의회에서는 좌익적 입장을 취하여, 국왕 루이 16세의 반혁명적 실태를 폭로하였고, 무역상의 이해 관계를 문제로 삼아 대외 전쟁을 추진하였다. 1792년 각료를 자파에서 선정할 것을 국왕에게 강요하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을 성취시켰다. 그러나 전쟁 지도에 실패한데다가 전쟁 수행에 대해 태만하였던 국왕 기타 반혁명파와는 결정적으로 대결하지 못했으며, 8월 10일의 민중 봉기에도 반대하였다. 이후 봉기한 코뮌과 이와 결합한 몽타냐르와 싸워, 초기의 국민 공회에서는 우세하였으나, 1792년 루이 16세의 처형 문제로 자코뱅 당과 대립하게 되고 1793년 5월 31일∼6월 2일의 민중 봉기로 정권에서 추방되고, 간부는 체포되어 사형을 받거나 탈주중에 자살하였다. 잔당은 뒤에 로베스피에르 몰락 때 일역을 담당했고, 테르미도르 파에 합류하였다. ◑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 :1758 ∼ 1794) : 프랑스의 혁명적 정치가로 1789년 삼부회 소집이 선포되자 아라스에서 삼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국민 의회를 통하여 소수 민주그룹에 속하였다. 처음에는 국민 의회에서 미라보를 지지하는 무명의 의원이었으나 점차 발언권이 증대하여 미라보가「프로방스의 거대한 불」이라고 불린 데 대하여 '아라스의 촛대' 라 불리었다. 1791년 위기에 빠진 자코뱅 당을 재건하고 점차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강화하였으며 자코뱅 당의 지도자로서 혁명의 추진에 노력하였다. 1792년 8월 10일 국민 봉기에 의한 왕정의 전복을 지도하였으며 파리 코뮨을 장악하였다. 동년 9월에 국민 공회의 파리 선출 의원이 되었으며 이듬해 6월 2일의 봉기를 지도하여 지롱드 당을 추방하였다. 1793년 혁명 정부의 수립과 최고 가격 결정, 망명자 재산 매각 등의 혁명 입법을 혁명 재판소와 공안 위원회를 통해 추진하였다. 그의 사회적 이상은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줄이고 소 생산자의 수를 늘리며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산하고 교환할 수 있 는 소생산자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는 유혈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외의 비상 사태 속에서 완고하 게 자신의 이상을 관철시키려 하여 결과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연이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였다. 국민 공회 의원들은 내일은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으며 더 이상 혁명의 진행을 원하지 않는 농민, 도시의 민중들은 로베스 피에르를 '청념의 신사'로 존경하면서도 공포 정치에 두려움을 품고 테르미도르 9일에 그를 배반하였다.(1794년 7월 27일) 다음날 로베스 피에르와 그의 지지자 22명은 환호 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 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
◑ 마라(Marat, Jean Paul:1743-1793) :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혁명가로 스위스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며 어머니는 스위스 인이다. 처음 보르도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런던과 파리에서 개업하였으며, 1775년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 파리에서 혁명적인 분위기에 감화되어 과격한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789년 2월 3부회 소집을 앞두고 인권 선언 초안 등을 발표하여 프랑스 혁명의 본무대에 등장했다. 혁명 추진을 위한 선전의 중요성에 주목, 9월「인민의 벗」을 발간하여 미라보, 라파예트 등과 함께 입법 의회를 지배, 푀이양 파, 지롱드 당 등 부르조아지를 대표하는 당파를 공격하여 뒤에 상퀄로트라고 불린 소부르 조아지 세력의 계몽에 기여하였다. 이 때문에 자주 탄압을 받아 런던에 두 차례나 망명했다. 1792년 8월 10일 이후 파리 코뮌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권력 확립에 노력하였으며, 9월 학살에도 간접적 책임을 지었다. 파리 선출의 국민 공회 의원이 되어 공화정 성립과 동시에「인민의 벗」을「프랑스 공화국 신문」으로 개명, 몽타냐르의 수령의 한 사람으로 지롱드 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 1793년 봄에는 지롱드로부터 고발되었으나, 파리 시민의 지지를 얻어 무죄 방면되었다. 5월 31일∼6월 2일의 시민 봉기에도 지도적 역할을 하여 정권을 획득한 후, 병으로 자택에서 요양 중 지롱드 파를 동정하는 소녀 Ch. 코르데에 의해 욕실에서 암살되었으나, 그 후 혁명의 순교자로서 존경을 받았다.
◑ 당통(Danton, Georges Jacques: 1759-1794) : 샹파뉴 주(州)의 아르시스쉬르오브에서 출생하여 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1785년 파리에 가서 왕실 고문 회의의 변호사가 되었다. 1789년의 혁명의 발발에 열광하여 1790년 코르들리에 클럽을 결성하고, 또 자코뱅 클럽에도 입회, 민주 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1791년 국왕의 바렌 도피 사건 후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였는데, 샹드마르스의 학살 이후 책임 추궁을 받아 수주간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귀국 후 파리 코뮌의 검사 시보가 되어 세력을 얻고, 1792년 8월 10일의 민중 봉기 후에는 지롱드 내각의 법무상이 되었으며, 9월 학살에 대해 그 책임을 추궁 당하였다. 그 무렵 외국군 침입의 위기를 당하여 자연 국경의 원칙에 입각해서 국가 방위의 중요성을 주창하였다. 발미 싸움의 승리는 그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였으며, 국민 공회 의원으로 선임된 후부터는 몽타냐르에 속하였으나, 부르조아지를 대표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우파에 해당되어, 이 때문에 지롱드 당파의 타협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미라보나 필립 공과 의 관계 때문에 몽타냐르의 공격의 좋은 재료가 되었으며, 그의 기도는 실패로 끝났다. 1793년 6월 몽타냐르의 정권 획득 후, 좌파 에베르 파와 대립, "관용"을 주장하여 부르조아지에 대한 대책을 완화할 것을 역설하였다. 공포 정치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 파에 의해서 1794년 3월 고발되어 처형당하였다.
◐ 혁명력(Calendrier Repubvlicain) : 프랑스 혁명 당시, 롬의 주장에 따라 국민 공회가 1793년 11월 24일 시행한 역법으로 크리스트 기원을 폐지하고, 1792년의 추분에서 시작하는 해를 제 1년으로 했는데, 1년은 12개월, 1개월은 30일, 나머지의 5∼6일은 「나머지 날」로 했으며, 그「나머지 날」은 공화 축제일로 배당하였다. 또한 12개월은 가을의 3개월이 방데미에르「포도의 달)」, 브뤼메르「안개의 달」, 프리메르「서리의 달」, 겨울의 3개월은 니보즈「눈의 달」,플뤼비오즈「비의 달」,방토즈「바람의 달」, 봄의 3개월은 제르미날「새싹의 달 」,플로레알「화월(꽃의 달)」, 프레리알「풀의 달」, 여름의 3개월은 메시도르「수확의 달」,테르미도르 「열의 달」,프뤽티도르「결실의 달」로 구분되었다. 이것들은 공회 의원 파브르 데글랑틴이 명명한 것이다. 또 1개월을 3순(旬)으로 나누고, 데카디(열흘째 날)는 휴일로서 순일절(旬日節 공화축제)이 행하여 졌다. 이 혁명력은 전통을 폐지하고 합리성을 추구하려는 혁명 정신에 기초를 둔 것이며, 이성의 숭배와 더불어 사회를 비기독교화 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13년간 사용된 후 공식적으로는 1806년 1월 1일부터 다시 그레고리우스 력이 사용되었다.
◑ 총재 정부(1795-1799) : 프랑스 혁명 시대에 공화국 제3년의 헌법에 의해서 성립된 신정부로 공화국 제4년 가을(1795.10.27.)에 성립하여 제8년 가을(1799.11.9.)까지 존속하였다. 입법부로서 원로원, 5백인회의 상하 양원과 행정부로서 의 5인의 총재로 이루어졌다. 부르조아지와 토지 취득 농민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여, 프랑스 혁명의 성 과를 부르조아지의 선에서 안정시키는 것을 지상 명령으로 하고, 제한 선거제와 자유주의 경제의 확립 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이 때 혁명과 전쟁으로 재정은 파탄되었고, 아시냐 지폐의 하락은 극심하게 되어 경제 파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독재 정부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서 권력을 극단적으로 분산한 총재 정부는 긴급 사태에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재정 문제 해결에 있어서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좌 우의 쿠데타가 빈발하여 겨우 경찰과 군의 힘으로 정부를 유지한 데다, 정부의 재정은 대자본가로부터 의 대여와 군대로부터의 송금으로 미봉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군대의 정치적 발언권이 증대하여, 결국엔 나폴레옹의 마지막 쿠테타(브뤼메르 18일)로 타도되고 통령 정부로 교체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69년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에서 이탈리아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혁명을 맞아, 한 때 코르시카에 돌아가 독립 운동에 참가했다. 1791년 22살이 된 그는 자코뱅 당에 가입, 정권을 잡고 있던 자코뱅 정부의 포병 연대장이 되었으며, 2년 후인 1793년 툴롱 전투에서 영국군을 섬멸, 일약 국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795년 세칭 테르미도르 반동, 즉 자코뱅 당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실각, 처형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폴레옹도 체포되어 2주일간 감옥생활을 했다. 풀려난 그는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제3군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육박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굴복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 벨기에와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이제 프랑스의 적은 영국만 남은 셈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번엔 이집트 원정을 단행했다. 이는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는 3만 5천의 군대와 3백 명의 과학자들을 데리고 알렉산드리아에 상륙, 카이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대동한 학자들은 이집트의 동식물·풍속 등을 조사하는 한편, 귀중한 문화재와 고대 유물들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유명한 로제타 돌Rosetta Stone도 이때 발견된 것이다. 그 무렵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했으며, 온건 공화파인 지롱드 당이 이끄는 총재정부는 지도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중이 었다. 마침내 나폴레옹은 몰래 이집트에서 돌아와 동생 루시앙의 도움을 얻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1799 년 11월, 혁명력으로 브뤼메르 18일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라고 한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붙였다. 새 헌법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통과되었고, 나폴레옹은 수석 통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프랑스 민중은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의 자존심을 드높여준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졌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을 종신 통령에 임명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804년 나폴레옹은 국민투표에 의해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프랑스가 불과 10년만에 다d?황제를 허락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이 낳은 개혁을 일정 정도 받아들여 <나폴레옹 법전>을 만드는 한편, 정복지에 혁명의 대의를 전파시켜『정복자』아닌『해방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는 데 힘을 썼다. 1809년에 조제핀과 이혼하고,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 이 기간이 그의 전성기로서 사실상 전 유럽을 지배하고, 형제나 근신(近臣)을 각국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유럽 전체가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으나, 유독 영국만이 우수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버티고 있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대륙 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들과 영국과의 교역을 일절 금지시켰다. 그러나 농산물을 영국에 수출하고 대신 생활 필수품을 수입하는 러시아는 이 대륙 봉쇄령 을 어기고 통상을 재개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1812년 50만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쉽 사리 모스크바를 점령하긴 했으나 그곳은 유령의 도시처럼 텅 비어 있었다. 게다가 화재로 식량은커녕 잠잘 곳도 제대로 얻지 못한 나폴레옹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영국의 군대들이었다. 이들은 1814년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을 체포, 지 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시켰다. 새 황제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1815년 2월 나폴레옹은 엘바 섬을 탈출, 민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허둥 지둥 도망을 쳤고, 전 유럽은 다시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그해 6월,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영국의 웰링턴에게 패하고 말았다. 재집권한지 꼭 백 일 만의 일이었다. 백일 천하는 끝나고 나폴레옹은 이번엔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다. 영국군의 감시 하에서 5년 반에 걸친 울분의 나날을 보낸 그는 1820년 5월 5일 마침내 그곳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 나폴레옹의 황제 취임과 베토벤
"너 역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가! 너 역시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을 테지. 그리고 너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하며 폭군이 되겠지." 나폴레옹이 황제 자리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 그 소식을 접한 베토벤은 격노하여 이렇게 외쳐댔던 것이다. 그는 테이블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악보의 표지 윗 부분을 찢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표지는 다시 씌어졌다. 그때까지는 "sinfonia eroica"(영웅 교향곡)라는 말은 적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탈리아가 당당하게 여러 나라의 대열에 동참할 때가 왔다. 만약 제군들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다면, 유럽을 깜짝 놀랄 만큼 뒤집어 놓고 이탈리아의 위대함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무기를 들고 일어나라. 이미 해방된 이탈리아 지역은 인구도 증가하고 생활도 윤택해졌다. 제군들의 자유를 가로막 고 인권을 탄압하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자. 나는 제군의 군대를 지휘할 것이다. 제군은 이로써 명예와 영광과 부(富)를 얻게 될 것이다.' -- 나폴레옹의 연설(1796년)에서
◑ 베를린 칙령 : 나폴레옹이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가 영국과 통상하는 것을 금지하고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시키려던 칙령으로 '대륙 봉쇄령'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봉쇄령과 프랑스 상품 제일주의는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여러 나라에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이반을 효시로 여러 나라가 봉쇄령을 어기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대륙 봉쇄령 : 나폴레옹은 1806년 11월 21일 '베를린 칙령'을 공포하였다. 이것은 같은 해 10월에 전쟁에서 승리하 고 대륙을 제패한 나폴레옹이 프랑스 부르주아의 궁극의 적인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대륙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영국과 통상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기대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륙 내 반 프랑스 감정만 자극하였다. 1. 영국의 여러 섬을 대륙으로부터 봉쇄할 것을 선언한다. 2. 영국의 여러 섬과 행하는 일체의 무역, 통신을 금지한다. 따라서 영어로 쓴 책 또는 영어로 쓰여진 편지, 우편은 우송되지 않고 차압된다. 3. 영국인은 발견되는 대로 포로로 체포된다. 4. 체포된 영국인의 재산은 압수한다. 5. 영국이나 영국의 식민지에서 생산된 상품은 몰수한다. 7. 영국 혹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직접 왔거나 본 칙령의 발표 이후 그곳에 있던 모든 선박은 어떠한 항구에도 입항할 수 없다. 8. 앞에서 말한 사항에 거역하는 모든 선박은 나포되고 선박 및 적하물은 프랑스 재산으로 몰수된다.
◑ 나폴레옹 전쟁 *성격 : 나폴레옹 전쟁은 이중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나폴레옹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세력과 봉건적 절대주의적 구세력과의 대항이라는 성격이다. 이것은 프랑스 국내의 귀족이나 성직자 등의 반혁명 세력에 대한 봉기이며 대외적으로는 유럽의 절대주의 국가와의 전쟁이어서 양자는 둘인 듯하면서 하나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프랑스군의 원정은 삼색기, 혁명의 원리, 나폴레옹 법전의 진군이라는 전향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둘째는 영국과 프랑스 두 자본주의 국가간의 경제적 주도권 다툼이었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사회적으로는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러시아 원정 : 대륙 붕쇄 체제로 영국에 곡물 수출이 중지되어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던 러시아는 이윽고 나폴레옹 의 경고를 무시하고 활발히 밀수를 했다. 한편 러시아는,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령 서 갈리치아를 바르 샤바 대공국에 합병시킨 것을 프랑스가 폴란드 부활을 의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양국 관 계는 악화되어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Russia) 원정이 시작됐다. 나폴레옹은 여러 종속국의 군대를 포함해 50만 이상의 대군을 거느리고 러시아에 침입했으며, 초토와 작전을 펴면서 퇴각하는 러시아 군 을 보로디노 전투에서 격파하고 같은 해 9월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모스크바에 대화 재가 발생해 시가의 3/4이 불에 탔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항복을 기대했으나 닥쳐오는 추위와 물자 보 급의 곤란으로 결국 퇴각해야만 했다. 퇴각하는 프랑스군에게 러시아 군은 농민 유격대와 함께 일제히 반격을 가해 프랑스군은 궤멸 상태에 빠졌다. 그 사이 본국에서 반란 계획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나폴레옹은 서둘러 파리로 돌아가고, 러시아 원정은 완전히 실패했다. * 라이프치히 전투 : 나폴레옹이 패했다는 소식은 여러 나라 국민을 떨쳐 일어나게 했다. 1813년 각국은 다시 대(對)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같은 해 10월 라이프치히 전투(Battle of Leipzig)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프랑스군을 라인 강 건너로 퇴각시켰다. 한편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있던 영국의 웰링턴이 이끄는 군대도 프랑스에 침입해 프랑스는 패색이 짙어졌다. 이 때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연합국과 프랑스를 중재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이를 거부하여 결국 1814년 파리는 연합군에게 점령당했다. 이 결과 나폴레옹5?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받아들이고, 황제 호칭의 유지와 연금 200만 프랑을 약속 받고 지정된 엘바 섬으로 쫓겨났다. 나폴레옹 퇴위 후 프랑스에서는 탈레랑의 획책으로 부르봉 가문이 복위해 루이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 대프랑스 동맹 : 제 1차 (1793-97) 캄포폴미오 조약 제 2차 (1799∼02) 아미앵 화약 제 3차 (1805∼07) 틸지트 조약 제 4차 (1813∼14) 나폴레옹을 격파 제 5차 (1815) 워털루 싸움 *아미앵 화약(Treaty of Amiens: 1802.3.27) : 나폴레옹 전쟁 중 프랑스, 에스파냐, 바타비아 공화국과 영국 사이에 맺어진 평화 조약. 뤼네빌 화약 후, 영국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군이 잔존 부대를 항복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프랑스 국민은 평화를 원했고, 영국에서도 호전적이 피트에 대신하여 애딩턴이 수상이 되자, 화의를 제의하 여 성립된 것으로서 영국은 각국에 점령지를 반환하였는데, 바타비아 공화국으로부터는 스리랑카를, 에스파니아로 부터는 트리니다드를 얻었다. 이 평화의 수립으로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으로 뽑혔다.
◑ 나폴레옹 법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에 이루어진 법전. 고대 로마법을 연구하고 다시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체득하여 편찬했기 때문에 근대 법전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법에서 평등], [개인의 자유],[소유권의 불가침성],[신앙의 자유]등 근대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나타나 있다. 함무라비 법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과 함께 세계 3대 법전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좋은 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좋은 법률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통령이 된 다음 날부터 학자를 모아놓고 법률을 연구하게 한 후 누가 보아도 옳다고 믿겠는가? 국민 생활에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두 가지 질문으로 하나하나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위의 법전은 그 동안 많은 손질이 가해져 내용은 많이 달라졌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프랑스의 민법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 스페인의 게릴라 : 1804년 5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프랑스 황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 유럽을 정치적으로 통일해 지배하는 것을 꿈꾼 그는 정복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고 그 영토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과 공화국 제도를 실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나폴레옹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국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영국이었다. 하지만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이 지휘하는 영국해군에 크게 패한 바 있는 나폴레옹은 직접 침공을 피하고 대신 1806년 대륙 봉쇄령(베를린 칙령)을 내렸다. 이는 유럽 대륙과 영국의 통상을 금지하는 것으로 영국의 경제에 타격을 줌과 동시에 프랑스의 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생각했던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력은 나폴레옹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고 게다가 영국 상품이 대륙으로 밀수입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이 약한 나폴레옹으로서는 바다에서 이 밀수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 밀수 통로는 영국의 동맹국인 포르투갈의 리스본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점령하려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스페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 점령 계획을 세우고 스페인에 포르투갈을 분할하자고 제안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이 점령되기는 했지만 스페인도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인 꼴이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은 마드리드를 점령했는데 이에 저항하는 마드리드 민중이 5월 2일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상당수의 프랑스군이 살해되자 프랑스군은 보복을 감행했다. 무기를 소지한 채 체포된 스페인 인은 군사 재판 후 처형되었다. 8명 이상의 집회는 모두 금지되었다. 프랑스 인이 살해된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마을은 완전히 불타 버렸다. 5월 3일 마드리드 곳곳에서 많은 스페인인이 처형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고발과 분노를 화폭에 담은 것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다. 이 사건 직후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을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에 앉혔다. 이 사실이 전국에 전해지자 민중 봉기가 확산되었다. 저항이 거세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해 말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입한 나폴레옹은 거의 스페인 전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정복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프랑스군은 게릴라전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게릴라(guerrilla)하는 말은 소규모 전쟁을 의미하는5?당시 민중의 전투를 표현하기 위해 쓰였다. 프랑스군은 처음 경험하는 전투에 당황했다. 정규전과 다르게 언제 어디서 스페인 게릴라 부대가 출몰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군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스페인 게릴라 부대들은 영국군과 함께 1811년에서 13년 사이에 프랑스군을 내몰았다. 나폴레옹은 이 스페인에서의 전쟁을 두고 "스페인의 궤양이 나를 괴롭힌다"하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 말처럼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나폴레옹 몰락의 제1보였다.
(4) 산업 혁명
◑ 산업 혁명기의 변화 : 산업 혁명이후 여러 사정을 접해볼 때 가장 놀라운 것은 인구 증가가 큰 속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농업 혁명은 18 세기말의 산업상의 대변혁에 있어서 제조 공업의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경작에서 공유지 제도의 파괴, 공유지와 황폐지의 대규모 인클로저 및 소농장과 대농장의 통합 이었다. 농장의 통합으로 농민의 수가 감소되었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노동자가 토지로부터 추방되었다... 제조 공업의 경우를 보면 가장 확실해진 사실은 그 시대 기계상의 여러 발명의 결과로서 가내 공업 제 도를 대신해서 공장 제도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공장 제도가 한층 더 빠르게 발달한 것은 기계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그 근본 원인은 상업의 확장에 따른 것인데 상업의 확장은 당시의 교통 수단의 두드러진 발달에 의한 것이다. ……부의 생산에 있어서 이와 같은 변화의 여러 사정은 필연적으로 그 분배에 있어서도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농업의 경우 명확한 사실은 지대의 현저한 등귀이다... 일 부 농민은 지주와 함께 번영했는데, 이는 그들이 지주의 농장을 유리한 임대 계약으로 보유하고 그에 따라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의 성격은 일변하고 그들은 노동자들과 함께 생 활하는 것을 그만두고 특별한 계급이 되었다.
◑ 멜서스의 [인구의 원리]
커다란 문제가 지금 놓여져 있다는 말들은 많이 존재해 왔다. 즉, 인간이 지금부터 출발하여 가속된 속도로 무한으로 전진하여 지금까지 생각 못했던 개선을 가져오느냐 아니면 행복과 불운간의 영속적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모든 노력이 바른 목표로부터 측량할 수 없는 머나 먼 거리에서 정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하는 숙명 속에 빠져야 하는 문제이다... 나는 두 가지의 필요 조건을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먹이는 인간 존재에 필요하다. 둘째 이성간의 정열은 필요하며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거의 남아 있다..... 나의 명제가 인정된다고 가정하면 나는 인구의 힘은 지구상에 인간을 부양할 생산의 힘보다 무한정으로 크다고 말하겠다. 견제되지 않을 때 인구는 기하학적 비율로 증가하고 생존을 위한 생산은(즉 식량의 생산) 단지 산술적인 비율로 증가할 뿐이다.
◑ 제 2차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 : '인클로저' 라 함은 종래 개방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던 미개간지, 공유지, 개방 경작지 등에 울타리나 기타의 표지로 둘러싸서 사유지임을 표시하는 울타리를 치는 것을 말한다. 16세기의 제 1차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공업의 발달에 따른 양모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양의 목장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고 18 세기의 진행된 제 2차 인클로저 운동은 농업 개량과 농업 경영의 합리화를 위한 것이다. 이로써 빈농과 소농이 토지를 상실하게 되고 그들은 새로이 일어나는 공업에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게 되었으며 19세기에는 농업 자체가 기계화되면서 인클로저를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농업 생산이나 경영의 변혁을 '농업혁명(Agricultural Revolution)' 이라고도 부른다.
◑ 공장 제도 : 산업 혁명 이전의 공업은 도구를 사용하는 수공업이었으며, 중세에는 주로 도시의 길드를 통한 생산이었다. 근세에 들어오면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일부 도시나 농촌에서 가내 공업이 일어났다. 가내 공업은 상인이 농가에 원료와 생산 도구들을 공급하여 생산케 하고, 노동 임금과 다름없는 대가를 지불하고 제품을 거두어 가서 판매하거나 수출하였다. 이러한 생산 형태를 선대제라고 한다. 이러한 선대제와 나란히 산업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여 한 작업장에서 분업으로 생산을 수행하는 형태가 발전하고 있었는데 이를 매뉴팩쳐라고 한다. 기계의 발명으로 공업 생산은 종래의 수공업 내지 가내 공업을 벗어나서 기계를 설비한 공장에서 분업과 협업을 통하여 생산을 수행하게 되고 그 규모는 날로 커져가게 되었다. 이를 공장제도라고 하며,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는 그 초기 단계인 선대제 또는 매뉴팩처의 단계를 벗어나 완성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공장제도의 특색은 첫째 기계를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의 경영이 행하여졌고 둘째는 산업 자본가가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 조직에 의하여 협업으로 생산을 하게 하여 그 생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한 것이다. 이 공장 제도의 결과로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두 계층이 나타나게 되었다.
◐ 하아그리이브스(Gargreaves, James: ?-1778) : 영국 산업 혁명기의 발명가로 랭카셔 출생.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1760년 소섬기(梳纖機)의 개량에 성공하고, 1762∼1767년에 방적기를 발명하여 1770년에 특허를 받아, 아내의 이름을 따서 제니 방적기라고 불렀다. 그의 방적기는 8개의 방추를 가진 것이었으나 뒤에 16개로 개량하고, 그의 생존 중에 다른 사람의 손으로 80개까지 늘어났다. 실이 귀할 때의 이 발명은 방적기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오는 원리의 발명으로서, 1775∼1785년은 제니 개량기의 전성 시대였다. 다만 이 기계는 가내 공업용이지 공장용이 아니어서, 이런 의미에서는 아아크라이트의 출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기계의 발명으로 직장을 잃은 동료들의 박해와 자본가와의 소송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끝내 특허권마저 잃고, 한평생을 직공으로 마쳤다.
◑ 워트(Watt, James) : 영국 산업 혁명기의 발명가로 스코틀랜드에서 출생하여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정밀 기계를 제조하였다. 1764년 뉴코멘 기관의 모형을 수리하다 착상하여, 1765년 실린더로부터 냉각기를 분리한 증기 기관을 발명하고, 1781년에 이를 개량하였다. 워트 이전에도 파팽, 세이버리, 뉴코멘 등에 의해서 증기 기관이 만들어졌으나, 그것은 열역학이 미발달되었던 시대의 것으로서, 단순한 기압기관이지 양수펌프 이상의 구실은 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열기관으로 개량하여 기압적 요소를 제거하고, 열 효과를 높여 복동 기관으로 완성하였다. 이 발명은 방적기의 발명과 아울러 동력 혁명을 일으켜, 이를 이용한 기차·기선의 출현을 촉진하는 등 수송 면에서의 획기적 혁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력·수력에만 의존하고 있었던 기계에 강력한 동력을 부여함으로써, 공장 제도를 출현시켜 철과 석탄의 시대를 초래하게 하였다. 그는 물리학·수학·화학을 잘 했을 뿐만 아니라, 법률·음악·어학 등에도 능하였다.
◑ 스티븐슨(Stephenson, George:1781∼1848) : 영국의 발명가로 탄갱 화부의 아들로 출생하여 14세부터 아버지를 도와서 광산 일을 하며, 탄광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1812년 기관공이 되었으며, 1814년 탄갱과 부두사이를 달리는 기관차를 발명하였다. 1815년 데이비와 같은 시기에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1822년 스톡턴ㆍ다알링턴 철도의 기사에 취임한 후, 1825년 그의「로우커모우션」제 1호의 시험에 성공하였다. 그 후 리버푸울ㆍ맨체스터철도에 관계하고, 1829년의 공개 경주에서 그의 「로케트 호」가 우승하자, 이를 계기로 중기력 수송의 잠재력이 완전히 이해되어 다음 해 동 철도에서 그가 만든 8대의 기관차가 운행되었다. 이후, 영국 각지와 벨기에, 에스 파냐 등의 철도 부설에 고문 기사로서 활약하였다. 기관차의 발명은 기술 혁명의 최고조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국 및 세계 경제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 :1811-1817?) : 영국의 중부·북부의 직물·편물업 지대에서 발생한 기계 파괴 운동. 처음 노팅검셔에서 양말·레이스 편물공들이 새로 등장한 광폭 편직기를 집단적으로 파괴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듬해에는 북부의 직물업계에 파급되어 직물 기계에 대한 집단 파괴 행위가 일어났다. 네드 러드(Ned Ludd)라고 불리는 신비스런 지도자의 지휘로 감행되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으나, 그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신식 기계 발명자가 대부분이었고, 케이, 하아그리이브스, 아아크라이트 등은 모두 그들의 공장·주택을 파괴당하였다. 이것은 기계제 대공업의 발생으로 실직의 위험에 직면한 수공업자, 매뉴팩튜어 노동자들의 반 자본주의적 운동이며, 기계를 그들의 압박자로 생각하였으므로 그 목표는 바로 기계 자체가 되었다. 이 운동은 산업가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어 1812년 리버풀 내각의 주도하에 의회에 제출된 탄압 법안이 상원에서 바이런 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립되어 다음해 요크셔에서 일어난 집단 재판을 거쳐 다수의 파괴자들이 교수형, 유형을 포함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뒤 1816년에도 노팅검을 중심으로 같은 운동이 재발하였으나 탄압과 경제 사정의 호전으로 종식되었다.
◑ 노동 문제 발생 :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일요일도 없이 하루 16시간을 일했고 품삯이 싸다해서 5∼6살의 어린아이까지 마구 부림을 당했다. 작업 중 사고에 대한 보상도 없고 쫒겨 나기 일쑤이고 그에 반해 자본가들은 더욱 부자가 되었다. 산업 혁명의 진행과 더불어, 특히 섬유 공장에서의 아동 노동 문제는 차츰 영국의 중대 한 사회적 관심거리가 되어, 취업 연령과 근무 조건을 규정한 공장법이 만들어졌다. 아래의 자료는 1830 년 영국 하원에 설치된 아동 노동의 실태 조사를 위한 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로, 1833년의 공 장법 제정을 위한 귀중한 입법 자료가 되었다.( 공장법 - 9세 이하의 아동 고용 금지, 13세 이하의 아동 은 1일 8시간 이상. 18세 이하의 아동들은 1일 12시간 이상의 야간 업무 금지 등을 입법화하였다.)
4. 19세기의 사회와 문화
(1)자유주의의 발전
◑ 빈 회의 :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의 사후대책을 협의하기 위하여 1814년 가을에서 그 이듬해에 걸쳐 비인에서 열국 회의가 열려, 투르크를 제외한 전 유럽의 군주 혹은 유력한 정치가들이 모여,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사회아래 회의가 진행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벌리는 각종 연회에 각국의 대표가 흥청거리고 있는 동안에 오스트리아·러시아·영국·프로이센·프랑스의 5개국 대표가 중요한 것을 결정하였다. 프랑스는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출석이 허락되어 대표 탈레랑은 열국의 이해대립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회의에서 큰 구실을 하였다. 비인 회의 지배한 정신은 정통주의와 복고주의이었다. 곧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정복 이전의 군주와 영토를 정통으로 삼아 이를 복구하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산물인 자유주의·국민주의를 되도록 없애자는 것이었다. 각국 대표는 이 원칙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영토문제에 대하여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나폴레옹의 재기가 전해졌으므로 열국이 서로 양보하여 드디어 1815년 6월 비인 회의 의정서가 성립되었다. 비인회의에서는 소국이 무시된 채 영토 분할이 행해지고, 국민의 여망이 무시된 채 열강들의 의사대로만 결정되어, 이후 30년 동안 혁신·반동의 충돌을 빚어내는 중대 원인이 되었다. 회의의 결정사항 중 중요한 것을 들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러시아는 와르소 공국의 대부분을 얻고, 폴란드 왕국을 세워 러시아 황제가 그 왕을 겸하고, 스웨덴 령 핀란드, 투르크령 벳사라비아를 얻었다.
② 홀란드 공화국은 오스트리아령의 네덜란드(벨기에)를 합쳐 네덜란드왕국을 건설하였다. ③ 오스트리아는 네덜란드를 포기하고, 그 대신에 북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베니스를 얻었다.
④ 프로이센은 와르소 공국의 일부와 삭소니아의 북반부를 얻고, 회복되지 않는 영토대신으로 라인중류 지역을 얻었다.
⑤ 영국은 지중해의 말타 섬, 이오니아 열도, 실론 섬, 케이프식민지를 얻었다.
⑥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얻고 핀란드를 러시아에 떼어 주었다.
⑦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⑧ 프랑스·에스파냐·포르투갈·사르디니아·모데나 등에는 왕조가 부활되었다.
⑨ 독일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을 비롯한 35 영방·4 자유시로써 독일 연방을 조직하여 프랑크푸르트 에 연방회의를 두고 오스트리아가 의장국이 되었다.
⑩ 이탈리아는 혁명전의 소국으로 분열되고 북부는 오스트리아의 세력 아래 들어가,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리상의 명칭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메테르니히(Metternich, Klemens.Winzel Lothar, F rst von :1773-1859) : 오스트리아의 정치가로 코블렌쯔에서 출생하였으며 1795년 카우니쯔 재상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이지적이며 뛰어난 용모, 변술을 무기로 약진적인 출세를 하였다. 나폴레옹 지배(1801∼1806) 때 드레스덴, 베를린, 파리에 사신으로 갔으며, 그의 보고는 오스트리아를 반나폴레옹적 입장을 취하게 했다. 1809년에는 수상이 되었으며, 황녀 마리 루이즈를 나폴레옹의 황후로 들여보내고, 1813년 대 프랑스 동맹을 체 결하여 나폴레옹을 굴복시켰다. 비인 회의에 출석하여 사실상 회의를 주도, 유럽 외교계의 제1인자로 군 림했다. 그는 혁명 이전의 지배자와 지배 영역을 다시 회복하려는 정통주의를 내세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려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다민족 국가였으므로, 민족주의나 자유주의의 승리는 곧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빈 회의는 패전국 프랑스의 대표인 탈레랑에게 교묘하게 유도되었다. 탈레랑이 제창한 정통주의 원칙은 프랑스의 이익을 대변한 것이었으나, 러시아와 프로이센과 대항하여 오스트리아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혁명 전 상태를 유지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메테르니히는 이를 환영하여 회의의 지도원리로 삼았다. 화려한 외교 파티로 일관된 '춤추는 빈 회의' 에 모인 외교관들은 혁명과 전쟁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 대신, 또한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메테르니히는 또한 절대 군주간의 국제적 단결을 강조하고 4국 동맹을 결성하여 이를 주도하였으며, 신성 동맹에도 가입하였다. 비인 회의 후의 소위「메테르니히 체제」를 전개, 이탈리아, 독일 등의 자유주의· 국민 통일 운동을 억압했다. 국내에 있어서도 경찰을 정비, 카톨릭과 군대의 보호·증강에 주력하는 반면 생활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7월 혁명에 대한 탄압은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어 1848년 3월 혁명에 의해 망명, 1851년 귀국하여 장로적 존재가 되었다.
◑ 정통주의(Legitimism) : 프랑스 혁명 이전의 왕조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이를 복고하려는 주의로 세력 균형 정책과 아울러 빈 회의 이후의 유럽 제 국가의 행동의 기조를 이룬 이념이다. 프랑스의 탈레랑의 활약으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와해되기 이전의 각국간의 세력 관계 및 국가 체제를 정통으로 인정하려 한 이 주장 은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절대주의 제국의 지지를 받아 구 왕조가 복고되고 영토 문제도 균형 정책과 교 묘히 연결 지어 처리되었다.
◑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의 자극과 충격으로 발생하였다. 자유주의는 기존 체제의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개인의 권리를 지키려는 진취적 입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에서 고취되었다. 한편, 민족주의는 종족, 언어, 풍속 등 민족의 객관적 요소들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입장을 의미하는데 이는 혁명의 방위와 전파를 구실로 나폴레옹이 유럽 여러 나라를 침략하였을 때 각국의 민족 의식이 하나의 역사적인 동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자유주의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통하여 순조롭게 발전하였다. 17세기에 혁명을 겪은 영국은 자유 방임주의의 모범이라 불리울 정도로 개혁과 개선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입헌주의 전통을 발전시켰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이래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자유주의의 성립사를 지니고 있다. 그 원인은 두 나라의 정치, 문화의 차이 때문이겠으나, 무엇보다 두 나라의 자본주의 발달의 형태와 정도의 차이가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나폴레옹의 대륙 침략에 의해 각성된 독일, 이탈리아 등의 민족주의는 민족 통일이라는 과업을 우선한 나머지 자유주의를 희생시킨 파행 적 정치 문화를 낳게 하였다. 그것이 20세기에 들어서 양국에 전체주의 체제를 출현시킨 배경이라 할 수 있다.
◑ 먼로 주의(Monroe Doctrine) : 1823년 12월 2일 태통령 먼로가 의회에 보낸 연두 교서 속에서 최초로 발표한 것으로 오랫동안 미 국 외교의기본 정책이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라틴 아메리카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식민지는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당시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 하고자 하던 제정 러시아는 신성 동맹에 참가한 유럽의 군주국과 손잡고 중, 남아메리카의 독립 국가에 대한 간섭을 꾀했다. 그리고 빈 체제의 중심 인물인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도 식민지의 독립이 구체 제의 변경이라 하여 이를 원상으로 복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메테르니히와의 협력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영국은 중남 아메리카의 독립한 여러 나라와 통상 관계를 맺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 었기 때문에 동조하지 않았고 미국도 이러한 움직임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먼로는 교서 중에서 여태까지 미국이 유럽제국에 대하여 불간섭 정책을 위하고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유럽 제국이 그 조직을 서반구에 확대시키려 함은 미국의 평화와 안전에 위험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일반적으로 먼로 선언은 유럽 제국의 대 아메리카 불간섭 원칙, 대 아메리카의 비식민 원칙 및 미국의 대 유럽 불간섭 원칙의 3원칙을 말하고 있다. 이 선언의 근본 정신은 워싱턴 이래의 고립주의인데, 이후 오랫동안 먼로주의는 미국 외교의 전통정책이 되었으나 미국의 국제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확대 해석되어 본래의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 먼로 독트린(먼로주의)-- 발췌 먼로 선언이란 미국의 제 5대 대통령 먼로(Monroe, 재임 기간: 1817∼25)가 1823년 12월 2일 연방 의 회에 제출한 연두 교서 중 미국의 외교 방침을 서술한 부분을 말한다.
…… 이제야말로 미국의 권리와 이해에 관한 원칙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기에 알맞은 기회라고 판단한다. 즉, 아메리카 대륙은 자유롭고 독립된 지위를 그전부터 누려 왔으며 또 현재도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유럽의 강대국 중 어느 나라이건 이를 식민지의 대상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 미국의 시민은 대서양 저편의 사람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가장 우호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문제로 유럽 여러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경우, 우리는 아직 거기에 관여한 적이 없으며, 또 관여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책에 위반되는 것이다. 미국의 권리가 침해되거나 혹은 중대한 위협에 처하게 되는 경우, 비로서 우리는 부정에 분노하여 우리 나라를 지키기 위해 준비할 것이다. …… 현재 동맹[신성 동맹을 말함]을 맺고 있는 각국의 정치 체제는 미국의 체제와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그것은 이들 나라의 정치 형태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 국민 모두가 우리 정치 형태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많은 생명과 재산의 희생으로 성취되고 우수한 시민의 지혜에 의해 길러져 왔으며, 우리가 그 아래서 비할 데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과 그 나라들 사이의 친선 관계를 바탕으로, 솔직하게 선언하는 바이다. 만약 이들 나라가 자기들의 정치 체제를 이 대륙의 어떤 부분으로든 확장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유럽 여러 나라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식민지나 속령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간섭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미 독립을 선언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그럴 만하다고 판단하여 그 독립을 승인한 정부에 대해서는, 유럽의 어느 열강이 이를 억압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그 운명을 지배하려고 간섭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미국에 대한 비우호적인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이들 새 정부와 에스파냐와의 전쟁에 대해 미국은 새 정부를 승인함과 동시에 중립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태도를 지켜 왔으며, 앞으로도 우리 정부의 판단에 비추어 미국의 안전을 위해 그런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을 만큼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태도를 굳게 지킬 것이다.
◑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27) :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그리스는 장기간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민족적·종교적·문화적으로 다른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데 대한 반감이 있는데다가 투르크의 여러 가지 압력도 가하여져 독립에의 의지를 강하게 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 민족주의적 풍조가 높아지자, 1814년 오데사에서 그리스 상인을 중심으로 한 비밀 결사 헤타이리아가 조직되었다. 당시 유럽에는 그리스 애호주의가 활기를 띠게 되는데, 그리스 애호주의(Phihellinism)는 고대 그리스를 문화의 이상으로 여겨 찬미함과 동시에 낭만주의적 정열과 자유주의적 정신이 어울린 19세기 유럽의 정신적 풍조로 그리스 독립운동 때 유럽의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하여 비인 체제하의 각국의 냉담한 태도를 제쳐놓고, 의용 군, 군자금의 모집 등을 실시하였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그 대표적 인물로 스스로 의용병으 로서 독립군에 참가하였다. 1821년 투르크 내의 반란에 편승하여 독립군이 봉기하자, 신성 동맹은 독립 반대를 결의하였고, 투르크 군은 이집트로부터의 원조를 얻어, 아테네를 함락시켜 독립 운동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여 남하 정책상 그리스 원조에 주력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아 인도 확보에 노력하던 영국, 그리고 프랑스가 협동하여 원조를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3국의 제안을 거절한 투르크·이집트의 연합 함대를 나바리노 해전에서 격파하고 1827년에 독립을 달성시켜, 1829년의 런던 회의에서 정식으로 승인되었으며 이에 의해 신성 동맹과 투르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 7월 칙령(1830년) : 7월 칙령은 프랑스 7월 혁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으로, 국왕 샤를 10세에 의해 1830년 7월 25일에 공표되었다. 원래는 모두 4개의 칙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제 1 칙령 신의 은혜로 프랑스.나바르 왕인 샤를이 아래의 여러 조항을 너희 백성들에게 명하노니 공손하게 받 아들일지어다. 이 칙령은 내각 회의의 보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짐은 다음과 같은 조항을 명한다. ①정기 간행물 발행의 자유는 정지된다. ②1814년 10월 21일 공포된 법령 제 1호의 제1, 제2, 제 9조의 규정은 부활된다. 따라서 어떠한 신문, 정기 간행물, 준 정기 간행물도, 계속 발행 중이건 창 간 준비중이건, 그것이 다루는 내용이 무엇이건, 또 파리에서건 지방 여러 현에서건 저작자와 인쇄자 가 각각 별도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발행될 수 없다. 그 허가는 3개월마다 다시 받아야 한다. 허가는 취소될 수 있다. ④제 2조를 위반하고 발행된 신문이나 인쇄물은 즉시 압수 당한다. 그것을 인 쇄하는 데 사용된인쇄 기계 및 활자는 봉인한 후 일정한 공공 기관에 보관하거나 파괴시킨다. ⑥소송 서류, 학술 또는 문학 단체의 논문은, 그 내용 전체 혹은 일부가 정치에 관계되는 한 발행 전에 검열 을 받아야 한다. ⑦이 칙령과 모순되는 모든 규정은 무효이다. 신의 은혜가 가득한 1830년, 즉 짐이 다 스리기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 7월 25일 상 크루 성에서 공포. 왕 샤를. [수상 폴리냑과 그 아래 각 장관의 부서(副署)]
▶ 제 2 칙령 … 짐은 이번 총선거를 하는 동안 우리 왕국의 각지에서 선거인을 속이고 타락시키기 위해 벌어진 갖가지 책동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각료 회의도 이를 인정하고 찬성하였기 때문에 짐은 아래의 조항 을 명한다. ①하원은 해산된다. ②왕의 서명, 내각장관의 부서(副署)]
◑ 7월 혁명 (1830.7.27.―29.) : 프랑스에는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1814∼1824)가 즉위하였다. 왕은 영국의 입헌 왕정을 본보기로 한 흠정헌법을 발포하였다. 상원 의원은 왕명에 의하여 임명되고 하원 의원은 그 자격에 재산상의 제한이 있기는 하였으나 선거에 의하여 결정되고 책임 내각제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구귀족과 고급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극단왕당이 차츰 의회에서 세력을 얻어 반동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반동정책은 극단왕당의 영수인 왕제 찰스 10세(1824∼1830)가 즉위함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 되었다. 그는 빌레루(Villele) 내각을 통하여 언론을 억압하고 구 망명 귀족을 우대하고 보호 관세를 강화하는 등 반동정치를 강화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이미 산업 혁명기에 들어가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달하여 유산시민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세력이 의회에서 우세하였으므로 의회는 1830년 3월 내각 불신임안을 결의하여 드디어 국왕과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왕은 즉시 의회의 해산을 명하고 극단의 선거 간섭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도리어 자유주의분자는 늘기만 하였다. 이에 국왕은 1830년 7월 25일 칙령을 내려 미소집 의회를 해산시키고 국왕의 명령 없이 신문 팜플렛 등을 내는 것을 금하고 선거자격을 지조의 납부자에게만 주어 반대파를 의회에서 제외코자 하였다. 반정부파는 일제히 정부의 비입헌행위를 공격하여 궐기하였다. 파리의 가두에 만든 바리케이드는 3색기가 나부끼고 마르세이유의 우렁찬 노래소리가 들리고, 라파이예트가 민중을 지휘하였다. 포병의 사격도 기병의 충돌도 민중의 완강한 저항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왕은 당황하여 내각을 파면하고 칙령을 철회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영광 의 3일」의 싸움 끝에 파리는 혁명파의 손에 들어가고 왕은 퇴위하여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시가전에 싸워서 이긴 민중은 공화정치를 요구하였으나, 조직력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라파이에트의 지도에 따랐다. 혁명의 급진화를 두려워한 유산시민들은 민중을 꾀어 자유주의자로서 이름이 높은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립(Louis Philip)을「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비인 회의에서 보장되었던 정통왕조는 몰락하고 7월 왕정이 성립되었다.
◑ 2월 혁명 (Revolution de Fevrier 1848.2.) : 유산시민 계층의 지지에 의하여 즉위한 루이 필립의 정부에 대하여 루이 브랑 일파의 사회당이 대립하여 자본가를 옹호하는 왕의 정책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한편 우익에는 부르봉 왕조의 부활을 꿈꾸는 일파가 있고 또 프랑스 국민들이 해외 진출에 평화적 외교정책을 취하여 매양 영국·러시아에 패배만 하고 있는 무능한 정부에 대하여 전 유럽을 지배한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회상하고 있는 틈을 타 나타난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의 일파가 다같이 정부의 타도를 노리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국왕의 지위가 심히 불안정하였으므로 왕은 반대당에 대항하기 위하여 차츰 강경한 보수주의로 전향하였다. 그는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회의 의사를 무시하고 함부로 내각을 임면하였다. 1840년 자유주의자 티에르( Thiers)가 파면되고 그 뒤를 받아 수상이 된 보수파의 기조(Guizot)는 산업·교육방면에는 상당한 업적을 올렸으나 왕의 의사를 받들어 반동정책을 추진하였다. 7월 왕정에는 의원에게 관리 취임을 허락하는 제도가 있었으므로, 기조는 의원에게 관직과 정부관련 회사의 주주의 자리를 주고 혹은 정부기관 사업의 계약을 주어 이를 매수하였다. 정부의 부패가 심하고 정치가와 대자본가가 결탁하여 사리를 꾀하여 오직·사기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846년에 흉작과 공황이 일어나 파산과 실업이 속출하여 사회 불안이 증대하였다. 공화파·사회주의자가 일치하여 파리시내의 각지에 혁신연회(Reform Banquet)를 열어 맹렬히 정부를 공격하고 1848년 2월 22일에는 파리의 샹제리제에서 전국적인 혁신 대연회를 개최하여 기세를 올리기로 하였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연회 참가자와 일반민중이 들고일어나 기조의 관저를 습격하여 이를 진압하려는 헌병 및 군대와 충돌하였다. 흥분한 민중은 24일에는 파리의 거리마다 바리케이트를 쌓아 시가전을 전개하여 시청을 점령하고 왕궁을 습격하였다. 왕은 하는 수 없이 퇴위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라마르틴(Lamartine)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와 루이 브랑 등의 사회주의자의 협력으로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공화정을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2월 혁명은 성공하여 프랑스에 두 번째의 공화정이 성립되었다.
◑ 1848년의 유럽 혁명 : 비인 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와 전 유럽적인 반항 운동의 총결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해가 1848년의 유럽 혁명이다. 이 해는 기본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달성된 자유·평등의 근대 시민 사상의 정착이고 둘째로, 영국 산업 혁명의 진전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의 급속한 발전이며 셋째로 노동자 계급의 성립에 의한 사회주의의 광범한 전개 등이 원인이 되어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해였다.「광란의 해」1848년은 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 넣었고, 비인 보수 체제를 붕괴시켰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은 프랑스의 2월 혁명이었다. 더구나 19세기의 프랑스는 모든 의미에서 프랑스 혁명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발전이었다. 즉 사회적·정치적 평등 이념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으로 구체화되려 하고 있었던 것이 영국과 프랑스였고 내셔널리즘을 지주로 하는 자유 통일의 방향을 명확히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 독일 이탈리아 및 기타 후진국들이었다. 전자는 선거권의 확대와 노동자 계급의 권리 요구가 되고, 후자에 있어서는 봉건적 체제의 타파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 저류를 이루는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 의의 조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프랑스에서는 7월 왕정하에서 정부를 좌우한 것은 대 은행가나 대 상인을 중심으로 한 대부르조아이며 신흥 중소 부르조아·노동자·농민의 입장은 부당하게 억압당하고 있었다. 산업혁명의 진전은 이와 같은 불합리한 대부르조아 지배에 대한 신흥 부르조아의 정치적 불만과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적 요구가 반정부 운동이라는 귀결점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해서 부르조아 공화파와 사회주의의 혼합정권이 실현되었다. 영국에서는 산업 혁명의 성과가 이미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 산업 자본가층의 정치적 입장의 확립에서 나타났고, 경제적으로도 자유주의 경제에서 제반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838년부터 1848년에 걸쳐 차티스트 운동이 전개되고 노동자의 강력한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1848년에도 실현을 보지 못했다. 이 실패가 영국 의회 정치의 침체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내용면에 있어서 그것은 현저한 진보를 하여 왔다. 독일에서는 3월 혁명이 일어나 시민 혁명과 병행해서 국민적 통일 운동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서남 독일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3월 혁명에서 는 봉건적 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민주정치의 기초를 구축하는 면에서는 충분한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결국 연약한 산업 시민 계급이 노동자 등 혁명 세력에 대한 공포에서 봉건 세력과 타협하는 결 과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에서 볼 수 있듯이 통일적 독일 국가를 건설하는 구상도 보수화 한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의 구 세력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유주의가 통일 운동으로서 활발해졌고 맛치니 등의 청년 이탈리아 당이 1848년 11월 로마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북 이탈리아에서 는 사르디니아의 통일운동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폴란드·헝가리·뵈멘·덴마크에서도 독 립 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 3월 혁명 : 1848년부터 1849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 파리의 2월 혁명은 독일에 중대한 영향을 주어 1848년 3월 5일에는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전 독일통일회의 준비를 결정 했다. 3월 13일에는 비인에 혁명이 일어나 메테르니히가 실각했다. 18일에 일어난 베를린 시가전으로 국왕이 양보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내각이 성립되었다. 내각은 제헌 의회의 준비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했다. 〈비인혁명〉 184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 혁명이 발생, 군중은 란트하우스의 의회로 쇄도하여 궁전까지 도 포위했다. 황제는 시민적 요구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궁정 반대파의 사직 요구에 굴복, 런던으로 망명했다. 시민의 무력 봉기에 직면하여 시민적 자유의 원칙이 승인되었다. 또한 헝가리 와 뵈멘에서도 마쟈르인이나 슬라브인의 자치정부가 결성되었다. 〈베를린 혁명〉 베를린에서는 1848년 3월 5일 시민의 폭동이 발생했고, 7일에는 국회 소집, 헌법 발포의 청원이 결의 되었다. 14일, 시내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어 긴장은 극도에 달했고, 18일에는 검열 폐지, 통일 헌법에 관한 칙령이 나왔다. 그러나 왕궁 앞으로 모인 군중에 대한 군대의 발포는 전시가에 걸친 시가전을 유발, 왕은 군대를 철퇴시키고 왕 자신이 통일의 선두에 설 것을 약속했다.
◑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 1848년 5월 18일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성바울 교회당에서 열린 최초의 국민 의회이다. 의원은 약 600명으로 자유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다. 국민 의회는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을 제정, 전 독일인에게 자유·평등한 시민권과 민주주의적 제반 권리를 승인했다. 국가 형태는 세습 황제제에 바탕을 둔 독일 제국으로 하고 의회는 2원제를 규정했다. 오랜 의논이 거듭된 결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 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1849년 3월 국민 의회는 프로이센 왕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했으나 거부당하였다.
◑ 6월 사건(1848.6.23.-26.) : 프랑스의 2월 혁명 후 파리에서 일어난 사회주의자·노동자에 의한 반란으로 2월 혁명 이후에 치뤄진 의회 선거에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정부에 의한 국립 공장의 해산 강행, 철도의 국유화 정책에 반대하는 등의 의회측의 도발을 계기로 하여 사회주의자·노동자가 봉기하여, 파리의 동부 및 남부 지구에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봉기하였다. 입헌 의회는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육군 대신 카베냐크 장군에게 반란 진압을 위한 집행권을 위탁하였다. 그는 4일간의 처참한 전투 끝에 6월 26일 생 탕트완의 전투를 최후로 이를 진압하였는데, 쌍방의 사상자수는 1만을 넘었다 한다. 이후 순수 공화파는 몰락하고 보수 세력이 부활하게 되었다.
◑ 프랑스의 제2 제정
프랑스 국민 여러분! 지금의 정세 아래서는 결코 지체할 수 없다. 날이 감에 따라 국가의 위기는 커져가고 있다. 가장 단 단한 질서의 토대이어야 할 의회가 음모의 소굴이 되었다. 그 의원 300명의 애국심도 결정적 추세를 어찌할 수 없다. 의회는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법을 만드는 대신에, 내란을 위한 무기를 만들고 있 다. 내가 직접 국민으로부터 얻은 권한에 대해서도 의회는 해를 끼치려 하고 있다. 의회는 모든 악독 한 정열을 북돋워 프랑스의 안녕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나는 이를 해산하고, 국민을 나와 의회간의 심판자로 삼으려는 것이다. …… 만일 여러분이 내 이름이 상징하고 있는 의미, 즉 1789년의 혁명으로 다시 일어나고 황제(나폴레옹 1세)에 의해 조직된 프랑스가 언제나 여러분의 것이라고 믿는다면, 내가 요구하는 권한을 인정한다는 뜻을 표명해 주기 바란다. 그 때 프랑스와 유럽은 무질서에서 벗어날 것 이며, 혼란과 적대감은 사라질 것이다. 누구나 국민의 판결을 하늘의 뜻으로 존중하리라. -- 루이 나폴레옹의 <국민과 군대에 대한 포고(1851)>에서
◑ 곡물법(Corn Law, 1815년 성립) : 14세기이래 곡물 특히 소맥의 수출입에 규제를 가한 영국의 의회 입법의 총칭. 여기서는 특히 1815년 성립된 법률을 가리킨다.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사회 변동이 전개됨에 따라 인구 증대로 곡물 공급이 어려워지고 또 프랑스 혁명, 기타의 해외 사정의 변화에 따라 곡물 가격이 크게 변동하였다. 더욱이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후 영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게 되자 지주·농업 자본가로부터 보호 요청의 소리가 높아졌다. 곡가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하여 지주·농업 자본가를 보호하기 위해 우선 1814년 종래 일정 가격 이상의 경우만 허용되어 왔던 수출을 자유화시킨 후 1815년 종래 수입 곡물에 부과된 세금은 폐지하나, 곡물이 일정 가격을 초과할 경우에만 수입을 허가하는 규정이 제출되었다. 이에 대해 소비자나 상공업자의 맹렬한 반대운동이 벌어졌으나 이를 배제하고 의회를 통과하였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정치적 정세의 변화는 당연히 반대운동을 강화시키게 되어 1839 년에는 반(反) 곡물법 동맹까지 결성되었다. 1842년에 이르러 보수당의 피일 내각 때 마침내 술라이딩 스케일 방식이 채용되기에 이르렀고 자유당의 레셀은 곡물세 전폐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결국1846 년 곡물법 폐지 법안은 가결되었으며, 이로써 영국의 자유 무역의 길은 전면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 영국의 선거법 개정(1832)과 차티스트 운동(Chartst movement) : 영국의 선거법은 17세기이래 변함이 없어, 그 동안의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른 인구변동과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다. 그 대표적 예로 부패선거구(rotten borough)가 있었는데 전국에 선거인 200인 이하 의 선거구가 100개를 넘었으며 한 명도 없는 곳이 30여 개나 되었다. 한편 신흥 공업 도시인 맨체스터 나 리버풀 같은 인구 10만을 넘는 곳에서는 한 명의 의원도 선출할 수 없는 모순이 일어났다. 산업 자 본가와 노동자들은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여, 드디어 1832년에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서 선거구가 새로 이 조정되고 유권자의 수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832년의 개혁은 자본가 계급에게 선거권을 주었 으나 그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었던 노동자들은 재산권 제약으로 혜택을 못 입었기 때문에 1839년 노동 자들은 보통 선거, 비밀 투표, 의원의 재산 자격 폐지 및 세비 지급 등 6개항의 '인민 헌장'(People s Charter)을 내걸고 청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운동가를 차티즘(Chartism)· 차티스트Chartist)라 일컬었다. 1842년과 1848년에도 행해졌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노동자의 생활 수준 이 향상되고 선거권의 확대도 이루어져 이 운동은 해체되었다. (1867년 제 2차, 1884년 제 3차 선거법 개정에서 노동자의 참정권 부여)
◑ 인민 헌장(People's Charter 1838) :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의 정치 강령. 이는 1837년 당시, 정계의 흑막적 존재였던 F.플레이스의 지도하에「런던 노동자 협회」의 지도자였던 W. 러베트 등이 의회에 대한 청원서의 형식으로 기초하여, 다음 해 8월 버어밍검에서 개최된 런던 노동자 협회, 버어밍검 정치동맹 및 기타 단체의 대표자와 급진파 정치가들이 모인 집회에서 가결되어, 공동 투쟁의 목표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앞서 J. 카아트라이트가 런던 통신협회의 정치 강령으로 쓴 것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것으로, 1)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현재 실형을 받고 있지 않는 21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대해 투표권 부여할 것 2) 무기명 투표 -선거권을 행 사하는 선거민을 보호할 것. 3) 의원에 대한 재산 자격 제한의 폐지 - 선거민에게 그들이 선택한 자가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뽑을 수 있도록 할 것. 4) 의원 세비의 지급 - 성실한 상공업자나 노동자,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서 스스로 직업에서 벗어나 의회에 출석하더라도 선거민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할 것. 5) 평등한 선거구 - 같은 수의 선거인에 대하여 같은 수의 대표를 확보할 것. 6) 매년 선거 - 수뢰와 협박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지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것. 무기명 투표해도 7년에 한 번이면 선거민이 매수될 수 있으나 어떠한 자금도 보통 선거제 아래에서는 차례로 12개월마다 모든 선거민을 매수할 수 없을 것 등 6가지 정치적 개혁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2) 민족주의의 전개
◑ 융커 (Junker) : 근대 독일, 특히 동프로이센의 보수적인 토지 귀족층을 일컫는 말. 중세의 고지 독일어 Juncherre에서 유래하는데, 구츠헤로(Gutsherr)의 젊은 아들, 특히 차남 이하를 의미했으나, 후에 토지 귀족의 총칭이 되었다. 동 엘베에는 역사적으로 대토지 소유제가 발달하여, 여기에 예속적인 농업 노동자를 사용하여 직영지의 경영을 행하던 구츠헤르샤프트가 성립했는데, 19세기에 이르러 농업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됨에 따라, 구츠헤르샤프트가 변질하여 그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융커층이 성립되었다. 그들은 구츠헤르의 전통을 지니며, 토지 소유에 부수되는 여러 가지의 전제적 특권(노비 조례, 단결 금지령에 의한 권리, 귀족 세습 재산제 및 영지 구역에 대한 각종의 권리)을 유지하면서, 반봉건 영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융커 이외의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않으며, 폐쇄적 사회를 형성했기 때문에, 시민적 성격이 결여 되었고, 호엔쫄레른 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였으며, 문학 예술에는 이해가 적고, 소박하고 사교성이 적 었다. 대부분은 농업 경영가·사관·관료가 되었다. 그들은 의회에서 우세하여 프로이센 행정 기구의 중 추를 이루는 중요한 직을 독점하였다. 또한 상급 장교의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행정과 군사를 농단했다. 그 세력은 제3제국 시대에도 군부를 중심으로 존속하여 당과 군부의 불화를 초래케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 패하여 소멸되었다.
◐ 피히테(Fichte :1762-1814) : 독일의 철학자. 빈곤 속에서 대학을 나와, 가정 교사를 하면서 '계시 비판 시론'(1792)을 칸트에게 바쳐 인정을 받아, 1794년 예나 대학 교수가 되었다. 지식학을 완성하고, 칸트의 실천 비판을 주관적 형이상학으로 높여 낭만파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807년 침입한 프랑스군의 감시하에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강연하여 국민의 도덕적 궐기를 촉구하였으며, 또한 베를린 대학의 창립에 진력하여 총장이 되었다. 해방 전쟁에 참가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처를 간호하던 중 감염된 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예나 대학 사건에 계몽적 무신론을 내걸어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8)
여러분이 선택해야 하는 여러 조건들을 마음속에 떠올려 봐라. 여러분이 계속 침체되고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다면, 노예 상태에서 생겨나는 모든 불행, 즉 결핍과 굴욕, 그리고 정복자의 우롱과 오만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어디에서나 잘못 되었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고 약탈당할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그 국민성과 국어를 희생시켰을 뿐, 얻은 것이라고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자리에 불과하고,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의 민족으로서 차츰 사라져 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여러분이 분발해서 씩씩하게 행동한다면, 꽤 괜찮고 명예로운 상태에 살게 될 것이며, 여러분 중에서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서 여러분과 독일인들의 이름을 아주 빛나게 해 줄 것을 약속하는 한 세대가 자라나는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대에 의해 독일의 이름이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부상하는 것을 머리 속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러분은 우리 민족이 세계를 부흥시키고 재창조하는 것을 볼 것이다. 여러분이 맨 꼴찌가 되어, 존경받을 가치도 없고 또 분명 후손들로부터 부당하게 멸시당할 세대의 마지막 주자가 될지 어떨지는 여러분에게 달렸다. …… 여러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영광스러운 새 시대의 첫 주자가 되어, 그 후손들이 여러분의 세대부터 구원의 연대를 헤아리게 될 수도 있다. 여러분은 이 중대한 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최후의 세대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라.
◑ 관세동맹 : 이 무렵 독일에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영방의 할거제를 불편하게 여기는 공기가 돌아 유명한 역사학자이며 경제학자인 프리드리히 리스트(List, 1785∼1846)는 독일의 국내관세의 철폐와 세제의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1816년 이후 영내의 세제를 정리하고 관세의 철폐를 추진시키고 있었는데, 1819년 이후 인근의 영방중에서도 프로이센과 동일의 세제를 채용하는 나라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프로이센은 1828년 20여 영방의 참가를 얻어 관세동맹을 조직하였다. 여러 영방 가운데는 프로이센과 대항하기 위하여 꼭 같은 관세동맹을 만드는 자가 있었다. 이를테면 바바리아와 베르텐베르크가 남독일 관세동맹을 만들고, 하노바·삭소니아·헷센 등이 중부독일 통상동맹을 만든 것이 그것이다. 프로이센은 다른 관세동맹과 경쟁하여 이겨 차츰 이를 흡수하여 1834년에는 독일 관세동맹을 결성하였다. 프로이센은 이 동맹에서 항상 지도적 역할을 하였는데, 오스트리아가 이를 질시하여 방해를 놓았으나 실패하였다. 관세동맹의 가입국은 상호의 관세를 폐지하고 동맹국 이외의 나라에서 들어오는 물자에 대하여 받는 관세수입을 가입국이 인구비례에 의하여 분배하였다. 이 동맹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통일시켜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835년에 처음으로 부설된 철도가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것도 이 동맹의 덕택이며 도량형·통화의 통일에 도움이 되었다. 프로이센은 경제상의 필요에서 이 관세동맹을 시작한 것이지 만 경제적 통일에 의하여 정치적 통일의 기운을 가져오고 동맹의 지도권을 쥠으로써 정치적으로 오스트 리아를 압도하는 세력이 되었다.
◑ 대(大) 독일주의(Grossdeutsch) : 19세기의 독일 통일에 관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포함시켜 그 지도하에 통일을 달성하려고 하는 입장. 프로이센 왕국 중심의 소 독일주의와 대립한다. 3월 혁명 때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대표를 비롯하여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헤센, 나사우, 하노버, 메클렌부르크 등의 반(反)프로이센적 분리주의자, 카톨릭주의자, 남독일의 민주주의자 등이 결속하여 소독일파에 대립하였으나 패하였다. 1860년대 초에는 독일 연방의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1866년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하여 북 독일 연방이 형성됨으로써 좌절되었다. 1871년의 독일 제국 성립 후, 이 사상은 중앙당과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속에 계승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 제국의 붕괴와 함께 소 독일주의와의 대립은 해소되고, 전 독일인의 통합 문제로 대체되었다.
◑ 소(小)독일주의 : 19세기 독일 통일에 있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고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려는 입장으로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독일주의에 대립되는 것이다. 북 독일에서 우세하였으며 처음에는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 프로이센 학파의 역사가들이 이론화하였는데 드로이젠, 트라이치케 등이 대표자들이다. 그들은 중세 이래의 신성 로마 황제의 정책이 독일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하여 오스트리아 배제 이론을 세워 그 목적을 실현하었다.
◐ 프랑크푸르트 국민 회의(Deutsche Nationalversammlung:1848-1850) : 3월 혁명 중에 개최된 독일의회. 이른바 3월 전기에 통일과 자유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지더니, 3월 에 들어서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의원 선출을 위한 협의가 열렸다. 혁명이 일어나자, 3월 30일 프랑크푸르 트 암 마인에서 준비의회를 가진 뒤에, 5월 18일부터 이 시의 바울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국민 의회는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을 제정, 전 독일인에게 자유·평등한 시 민권과 민주주의적 제반 권리를 승인했다. 국가 형태는 세습 황제제에 바탕을 둔 독일제국으로 하고 의회는 2원제를 규정했다. 통일 독일의 헌법을 제정하는 것을 최대의 임무로 하였으나, 그 때문에 통일의 형태, 즉 대 독일주의와, 소 독일주의가 격렬하게 논란되었다. 의원은 관리학자 등의 부르조아지가 많았는데 그들은 보통 우파, 중앙 우파, 중앙 좌파, 좌파, 극좌파로 나뉘어 진다. 의회적 백치병이란 말이 나올 정도의 많은 논란 끝에 12월 「독일 인민 기본법」을 작성하였고, 1849년 3월에는 이를 기본으로 한 「독일국 헌법」을 공포하였다. 오랜 의논이 거듭된 결과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 독일주의에 의한 독 일 통일의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이것은 프로이센 왕을 황제로 하는 입헌 군주제란 그릇에 부르조아 혁명의 성과를 담은 것이었으나, 프로이센 왕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프로이센을 비롯한 각방이 자방(自邦)의원을 소환해 갔는데, 좌파는 5월에 시투트가르트에서 잔해 의회를 가졌으나, 1850년에 해산되었다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Preuβisch-Osterreichischer Krieg:1866) :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전자에는 북 독일의 각 군소국이, 후자에는 기타의 독일 여러 나라가 가담하였다. 7주 전쟁이라고 불리는 단기전이었으나,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결정하였다는 점에서 중대한 뜻을 갖는다. 양국의 대립은 1833년 독일 관세 동맹의 성립과 1848∼1849년의 프랑크푸르트 국 민 의회에서 프로이센 왕을 독일 황제로 추대하는 결의 등으로 형세가 프로이센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빌헬름 1세는 문제의 해결을 무력에 호소할 작정으로 군비를 확장하였고, 또한 비스마르크가 수상이 되자, 철혈 정책을 선언하였으며, 열강과는 국교 조정으로 위험에 대비하려 하였다. 특히 이탈리아와는 공수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는 비아리츠 밀약을 맺어 오스트리아 문제에 관하여 중립을 지키도록 하였다. 때마침 전에 있었던 덴마크와의 전쟁으로 병합한 실레스비히·홀시타인의 처분 문제는 가시타인 조약으로 협정되었는데도불구하고, 오스트리아가 그 변경을 책동하였으므로, 프로이센은 조약 위반을 구실로 하여 오스트리아령 홀시타인에 침입하였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 3국이 조정에 나섰으나 허사가 되고, 1866년 6월 15일 개전하였다. 전국은 쾨니히극레츠 교외의 자도바 싸움을 고비로 하여 프로이센의 승리가 확실시되었고 이에 따라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의하여 독일 연방은 해산되었으며,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재편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867년 프로이센을 맹주로 하는 북 독일 연방이 조직되어 독일 통일의 기초가 되었다.
◑ 오스트리아의 이중 제국 : 다수의 이민족이 국내에 산재해 있던 오스트리아는 19세기 중반까지는 독일·이탈리아의 분열 상태와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의 대립을 이용하여 강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국내 여러 민족의 동요가 격화된 가운데 독일·이탈리아의 통일이 진전을 보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던지 개혁이 필요하게 되었다. 1866년의 프·오 전쟁에 패배한 후로는 헝가리인에게 왕국 건설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 황제가 그 왕을 겸하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이중 제국이 성립하였다.
◑ 독일 통일과 비스마르크 :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은 봉건 반동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빈 체제로 불리는 이 시대를 주도한 인물 은 오스트리아의 외상 메테르니히였다. 각국의 국경선이 혁명 이전으로 되돌려지고 나라마다 일제히 봉건왕조가 부활되었다. 독일은 빈 회의의 결정에 의해 35개 국가와 4개 자유시로 분립되었다. 프로이센은 그 중의 한 소국이었다. 1861년 즉위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융커 출신의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등용, 독일 통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수상 자리에 오른 그는 독일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누르는 방법밖에 없다고 주장,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군 비확장에 반대하는 의회를 눌러 4년 동안 그 권리 행사를 정지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 군비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우선 프랑스와 비밀리에 협약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고립시켰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라인 강 유역의 합병을 인정받는다는 조건하에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했다.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오스트리아는 7주만에 무너졌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프랑크푸르 트 등을 합병하고 라인 강 이북을 손에 넣어 북 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다음 목표는 프랑스였다. 비스마르크는 미리 오스트리아·러시아·이탈리아에 비밀 외교를 벌여 프랑스를 원조하지 못하게 하고 교묘하게 프랑스를 유도, 선전포고를 하게 했다. 1870년 7월 마침내 전쟁(보·불 전쟁)이 시작되었다. 8월 프랑스군의 본거지 메스 요새가 점령당하고 이를 구원하러 나선 나폴레옹 3세가 세당에서 포로로 잡혔다. 프랑스는 즉시 휴전을 제의했으나 비스마르크는 이를 거절하고 파리로 진격, 1871년 1월 파리를 함락시켰다. 프랑스는 철과 석탄의 보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떼어주고 배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해야 했다. 파리 함락을 눈앞에 둔 1871년 1월 18일,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왕가의 상징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의 황제 취임식을 가졌다. 이로써 수십 개로 분립해 있던 독일 연방은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되었으며, 프로이센의 호헨촐레른 왕가는 독일 황실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의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그는 탁월한 외교수완을 발휘했다. 당시 유럽 정치는 기실 비스마르크에 의해 움직여졌4? 때문에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라고 한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진국이던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에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국가 주도의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1890년 비스마르크는 새 황제 빌헬름 2세와의 불화 끝에 재상 자리에서 물러 났다. 그리고 불만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898년 83살로 세상을 떠났다.
◑ 엠스 전보 사건(Depesche von Ems 1870)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건. 1868년 에스파냐에서 혁명이 일어나 혁명 정부는 프로이센 왕가인 호엔쫄레른 가의 먼 친척에 해당되는 레오폴드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1세는 애초에 그것에 반대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이를 반대하자, 레오폴드는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 외교에 성공한 프랑스는 독일 주재 대사 베네데티로 하여금 엠스(Ems: 독일 북서부에 있는 온천장)에서 휴양중이던 왕을 만나 다시금 다짐을 받게 하였다. 이를 불쾌히 여긴 빌헬름 1세는 대사의 요구를 거절하고, 1870년 7월 13일 전보를 쳐서 비스마르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비스마르크는 마치 프로이센의 국왕이 프랑스 대사에게 모욕을 받은 것처럼 보이게 그 전보문을 고쳐서 신문에 공표하여, 전(全)독일의 여론이 비등했으며, 프랑스도 이 처사에 분격함으로써 비스마르크의 계획대로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이 전보문을 공표하기 전에 미리 군부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속전 속결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1870-1871) : 프로이센과 프랑스와의 전쟁이며,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전쟁.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후, 프로이센과 프랑스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비아리츠 밀약을 근거로 라인, 팔츠의 일부와, 룩셈부르크의 할양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고, 또한 1867년 네덜란드 왕과의 사이에 있었던 룩 셈부르크의 매수 교섭도 비스마르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870년 7월 호엔쫄레른 가의 왕자 레오폴트 가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게 되자,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강경히 반대하였다. 이에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의 간섭을 배제해야겠다고 통감하고 있던 비스마르크는, 이 기회를 포착하여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를 교묘하게 외교적으로 조작하여(엠스 전보 사건), 프랑스로 하여금 선전 포고를 하도록 유도하였다(7월 19일). 프로이센 군은 몰트케의 신속한 작전으로 메츠·스당 싸움에서 연승하였고,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포로가 되어 9월 2일 항복했다. 독일은 프랑스로부터 알사스와 로렌을 빼앗았는데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지역은 농산물과 광산물이 풍부하여 오랫동안 양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였던 곳이다. 30년 전쟁 이후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던 이 지역에 대해, 프로이센은 강경한 교육 정책을 펼쳤다. 파리에서는 임시 국방 정부가 성립되어 독일군에게 항전했으나, 1871년 1월 28일 독일군은 파리에 진주, 베르사이유 가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보다 앞선 1월 18일에는 빌헬름 1세의 독일 황제 대관식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거행되어 독일의 통일이 완성되었다.
◑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1871.3.18.-5.28) : 파리의 혁명적 노동자 정권.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군의 포로가 되자, 4일 파리에서는 민중의 요구로 공화정이 선포되어, 노동자 및 소시민은 자진 국민군에 지원하여 프랑스 방위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런데 부르조아지를 대표한 티에르 정부는 이러한 노동자의 무장을 극도로 경계하여, 국민군의 항전 주장에도 불구하고, 1871년 1월말 프로이센과 강화조약을 맺고 프랑스군은 무장해제 당했으며 정부는 비스마르크의 명령대로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파리 방위를 위해 조직된 시민들의 자위적인 국민군은 해산되지 않았다. 독일군은 파리 시외에 진지를 만들었지만 국민군을 직접 공격하려 들지 않았고 새로 출범한 임시정부에게 국민군을 해산시키도록 명령했다. 1871년 3월 18일, 임시정부는 국민 군의 해산을 명령하고 파리 시내의 몽마르트에 있는 국민군의 대포를 빼앗으려 했다. 임시 정부의 군대 가 대포를 끌고 몽마르트 언덕을 내려오고 있을 때 거리는 이 소식을 듣고 몰려든 시민들로 가득찼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겨눈 병사들은 지휘관의 계속되는 사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부리 앞을 가로막은 부녀자와 아이들에게 도저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시민들은 거꾸로 지휘관을 붙잡아 총살해 버렸다. 병사들도 시민들 편이 되었다. 몽마르트 이외의 지역에서도 임시정부의 군대는 계속 패배해 마침내 임시 정부는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도피해 버렸다. 파리의 실권은 민중이 장악하게 되고, 3월 26일, 시민들은 파리 전 시민의 보통선거에 의해 새로운 코뮌 의원 선거를 치르고 28일에는 20만 시민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 축포가 울리는 가운데 "파리는 코뮌임을 인민 앞에 선언한다"는 코뮌 선언을 발표하여 파리 코뮌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코뮌은 종래의 부르조아적 국가 기관을 파괴하고, 새로운 정치 형태를 창립하였다. 즉 코뮌 자체는 시민이 선거한 의원으로 성립되며, 입법권과 집행권을 아울러 장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되고, 상비군 대신 시민군을 설치하고, 경찰을 폐지하고, 관리를 시민의 선거에 위임하고, 또 근로 민중의 생활을 수호하는 약간의 법령을 시행하였다. 코뮌은 '자치구'라는 의미이며 이들은 파리뿐만 아니라 리용, 마르세유 등지에서도 시작된 움직임과 연결하여 프랑스 전국을 코뮌 연합체로 만들려 했다. 파리 코뮌 의원은 82명인데 그중 3분의 1 가량은 노동자 출신이었0?나머지는 학자나 변호사, 예술가, 저널리스트 등 지식인이 대부분이었다. 이 의회는 동시에 행정부도 겸하였고 계속해서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상비군의 폐지, 공무원 소환제, 교육의 자유와 무상교육, 빈민에 대한 생활 보장, 노동자에 의한 공장 관리 등이 그것이었으며 점점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혁명 정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보불 전쟁의 와중에서 탄생한 파리 코뮌은 프랑스 국내의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급 투쟁이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베르사유로 도망친 임시 정부는 파리를 탈취할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코뮌이 수립되고 나서 일주 일도 채 되지 않아서 반격이 시작되었다. 5월 2일, 드디어 서쪽 쌍끄루 문으로부터 베르사유 군이 파리 시내로 돌입했다.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파리 시민들은 노인이고 여자고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도로의 포장석을 벗겨 바리케이드를 치고 필사적인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튈르리 궁전을 비롯하여 파리 의 중심부는 일제히 불길에 휩싸였다. 5월 28일, 드디어 저항은 끝났다. 코뮌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피에 굶주린 베르사유 군은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모두 3만의 시민이 죽어 세느 강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레 미제라블』를 쓴 프랑스의 문화 빅톨 위고는 1848년 혁명에 참가했기 때문에 고국을 떠나 벨기에로 망명해 있었는데 파리의 모습을 전해듣고 분노와 비애에 치를 떨면서 『공포의 해』라는 시집을 냈다. 그 중에는 12세의 소년에 대한 시가 있다. 죄있는 피와 죄없는 피로 붉게 물든 디딤돌 사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12세의 소년이 친구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 자식, 너희도 놈들과 한패지?" 소년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친구입니다." "좋아." 장교는 말했다. "너희는 총살감이다. 너희 차례를 기다려라." 한 소년이 집에 있는 어머니에게 시계를 전해주고 오겠다고 말했다. 장교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건 핑계지? 사실은 도망치려고 그러지?" "아닙니다. 틀림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좋아, 도중에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하면서 장교는 소년을 풀어주었다. 잠시 후 소년은 정말로 돌아왔다. 소년은 벽에 등을 기대로 떳떳하게 외쳤다. "나는 이곳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 이 소년을 이렇게 행동하도록 했을까? 이 소년만이 아니라 '코뮌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 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독일에 굴복해 버린 정부에 대한 분3肉?자유를 지키려는 정열이 그들을 떠받쳤을 것임에 틀림없다.
◑ 카르보나리 당 : 19세기 이탈리아 각지에 조직된 비밀 결사. 19세기 이탈리아 각지에 조직된 비밀 결사. 프리이 메이슨의 지파라고 생각된다. 교황의 주도권에 의한 이탈리아 독립 및 통합을 목표로 하여, 크리스트를 최초의 수난자라는 반(反)신비적 경향과, 루소의 영향, 로마의 제국주의적 확대 등을 혼합한 단체였다. 남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당시의 낭만주의를 배경으로 하여 전 이탈리아에 파급되었으며, 나폴리에서는 25명 중에 한 사람은 당원이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지배에 불만을 품은 중산자층·군인·학생 등에 침투하여 1820∼1821년에는 나폴리 피에몬테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비밀 결사의 성격에서 오는 비 (非)대중적인 약점 때문에 맛치니가 주장하는 청년 이탈리아 당의 시대로 바뀌어졌다.
◑ 청년 이탈리아 당(Giovane Italia) : 맛치니가 지도한 이탈리아의 독립과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결사체. 맛치니는 마르세이유 망명 중, 카르 보나리 당에 의한 1831년 혁명의 실패를 반성하여, 이탈리아의 혁명은 소수의 혁명가나 그룹의 단순한 정치 운동이 아니라, 일반 민중에 뿌리 박은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에 대한 신앙과 인간성에 대 한 확신에 의해 청년 이탈리아 당을 창설하였다(1831). 공화주의와 통일주의를 내걸고 게릴라 전법으로 써 외국의 지배에 항거하며, 기관지를 발간하여 이탈리아 민중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카르보나리 당원은 거의 흡수되었고, 군대에도 파급되고, 1833년에는 지식층이 많이 참가하였다. 맛치니는 1834년 베른에서 청년 유럽 당을 결성하여 국제적 입장에 서고, 다시 1840년을 전후하여 런던에서 청년 이탈리 아 당의 활약에 진력하였으며, 또한 조직과 선전의 중심을 파리에 두고 이탈리아 민중에 호소하여, 184 8∼1849년 혁명의 기초를 닦았다. 카부르의 현실주의 정책이 주류를 이루게 됨으로써 공화파인 청년 이탈리아 당은 쇠하였으나, 리소르지멘토에 차지하는 최대의 기반은 특필할 점이다.
◑ 이탈리아의 통일 과정 : 사보이 왕가를 받드는 사르디니아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외국군이 주둔하지 않는 유일의 나라이었으며, 그 대륙부를 이루고있는 피에몬트(Piedmont)는 토지가 비옥하여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일찍 산업혁명이 일어나 시민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북부의 베네치아·롬바르디아가 오스트리아 령에 속해 있는 데다가 중부에는 교황령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 운동에 외국이 개입할 위험이 있었다. 1848년의 혁명에 있어서 청년 이탈리아 당은 자유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활약하였으며, 사르디니아 왕인 카를로 알베르토가 통일 전쟁을 일으켰으나 오스트리아 군에게 제압되어 실패하였다. 1849년 알베르토의 뒤를 받아 즉위한 빅토르 에마뉴엘 2세(Victor EmanuelⅡ, 1849∼1861)는 오스트리아의 압력을 물리치고 부왕시대의 자유주의 헌법을 견지하여 이탈리아 애국자들의 희망을 모우는 동시에 카보우르(Cvour, 1810∼1861)를 등용하여 각종 개혁을 실시하여 국력의 부흥에 힘썼다. 카보우르는 1850년에 입각하여 2년 뒤에 수상이 되었다. 수상이 된 카보우르는 영국의 자유주의 경제를 본보기로 하고, 구교도의 세력을 억누르고, 군대의 개편과 그 규율의 쇄신에 힘쓰고,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는 비밀 결사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인구 500만에 불과한 사르디니아는 폭력으로써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달성하 기 곤란하였다. 따라서 사르디니아의 이탈리아 통일은 외국의 원조를 필요로 하였는데, 이 방면에도 카 보우르는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곧 크리미아 전쟁에 참가하여 영·불의 호의를 얻고 파리의 강화 회의에 출석하여 오스트리아의 횡포를 호소하여 열국의 동정을 모았다. 1858년에는 나폴레옹 3세와 밀 약을 맺어 사보이,니스를 프랑스에 내어 주는 대신에 프랑스부터 이탈리아 원조의 약속을 얻어, 이듬해 4월에 오스트리아에 선전하였다. 사르디니아·프랑스의 연합군은 도처에서 오스트리아 군을 쳐부셔 마젠타·솔페리노에서 대승하였다. 이 결과 교황령과 나폴리왕국을 제외한 북·중부의 이탈리아가 거의 사르디니아에 합류하여 여기에 통일의 대업이 성공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통일에 성공하여 그 세력이 과대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폴레옹 3세는 돌연 사르디니아를 배반하고 오스트리아와 빌라프랑카(Villa Franca)에서 단독휴전 조약을 맺어 사르디니아에게 겨우 롬바르디아의 병합만을 인정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배신행위는 이탈리아인을 분기시켰다. 파르마·모데나·터스카나 등 중부이탈리아의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군주를 몰아내고 사르디니아와의 합병을 청해 왔으므로 카보우르는 이 땅에 사절을 보내어 통치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카보우르는 1860년 나폴레옹 3세와 새로운 협정을 맺어, 사보이·니스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대신에 북·중부이탈리아의 여러 공국과 로마의 사르디니아 합병을 승인하였다. 북부와 중부의 통일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칠리아의 인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맛치니의 유력한 제자였던 청년 이탈리아당의 애국지사 가리발디(Garibaldi)는 제노바에서「붉은 사쓰대」라 하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시칠리아에 상륙하였다. 그는 불과 3개월에 이곳을 제압하고 다시 반도에 건너가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여 공화정을 선언하였다. 이탈리아의 통일이 왕정의 북부와 공화정의 남부로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한 카보우르가 가리발디와 교섭을 하였는데, 가리발디는 서슴지 않고 시리아와 나폴리를 사르디니아 왕에게 바쳤으며 이 명리를 초월한 그의 행동은 후세 이탈리아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이리하여 사르데냐는 로마와 오스트리아령 베네치아를 제외한 전 이탈리아의 통일을 완료하였다. 그 뒤 이탈리아는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프로이센과 동맹해 베네치아를 얻었으며 이어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프로이센 편에 가담하여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틈타 로마를 점령하고 이듬해 로마를 수도로 삼았다.
◑ 카보우르(Camillo Benso Cavour :1810∼1861) : 이탈리아의 정치가이며 외교관. 피에몬테의 명문 출신으로 토리노에서 출생하여 토리노 사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832년까지 군대 생활을 하였다. 그 후 영국에 유학 중 입헌 정치에 감화되어 토리노에서「일리소르지멘토」지(誌)를 발간. 온건한 입헌주의를 내걸고 농지 개혁과 영국식 산업 개혁의 도입에도 정력을 쏟아, 1848년 신 헌법 제정하의 왕국 의회에 진출하였고, 또 아젤리오 내각에서 자기의 이상을 교육 제도의 개선·우정사업·철도의 개설 등에 반영시켰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이탈리아의 국제적 위신을 회복하는 것으로서 카롤로 알베르토의 혈기에만 날뛰는 대 오스트리아 선전(1848)에는 비판적이었다. 1852년 아젤리오의 퇴진 후 사르디니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등용됨으로써 1852년에 수상이 된 카우보르는, 외교 문제에 몰두, 우선 크림 전쟁에 개입하여 1856년의 파리 조약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1859년 오스트리아와의 관계가 긴박해지자 나폴레옹 3세와 밀약을 맺고, 이듬해 프 랑스·이탈리아 연합군을 조직하여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롬바르디아, 토스카나, 파르마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의 배신으로 인한 빌라프랑카의 화약으로 베네치아 획득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1859년 7월 사퇴하였다가, 그 이듬해 수상으로 재임되었다. 니스와 사보이를 할양하고 프랑스를 회유하여, 북·중부이탈리아의 여러 공국과 로마의 사르디니아 합병을 승인받았으며 시칠리아, 나폴리를 정복한 가리발디와 협상을 성공시켜, 베네치아, 로마를 제외한 중·남부를 통일하였으나, 완전한 국가 통일을 보기 직전에 독신으로 세상을 떠났다.
◑ 1860년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카보우르의 견해
이탈리아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가리발디는 자신의 방법에 따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외교적인 노선을 취한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일입니다. 아직까지도 내 생각은 희망적입니다. 우리는 이 위기에서 벗어나, 반동적인 사람들의 완고함과 공화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생각에도 불구하고 질서와 자유의 굳건한 기반 위에서 우리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것입니다. …… 나는 어떠한 시민 독재 정권도 신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권력에 의해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의회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13년 동안의 경험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선동가들의 폭로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당파 싸움으로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정직하고 강한 정부는 의회의 논의를 통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스스로 약한 생각을 가졌던 것은 단지 의회가 폐쇄되었을 때였습니다. 현재 나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부터 힘을 얻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자유의 상(像)에 베일을 덮어야 한다 해도, 나는 결코 그렇게는 못합니다. 만일 이탈리아인들이 자기들에게는 독재자가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내가 아니고 가리발디를 선택할 것이고 그들에게 그것은 옳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의회로 가는 길은 비록 멀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더 안전할 것입니다. -- 카보우르의 의회 연설(1860)
◑ 가리발디(Garibaldi : 1807 ∼ 1882) : 청년 이탈리아 당에 참가하였다가 남아메리카로 가서 브라질의 독립 전쟁과 혁명에 참가하고 1848년에는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조국 궐기의 소식을 듣고 귀국, 의용군을 조직하여 활약하다 실패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1854년 다시 귀국한 후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참가하여 '천인대(적색 셔츠단)' 를 만들어 시실리아와 나폴리를 정복하였다. 청년 이탈리아 당 출신으로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포기하고 통일의 대업을 위하여 점령한 곳을 샤르데냐 왕에게 헌상했다. 그는 의회에 의석을 가졌으나 정치 생활보다 혁명 운동 및 군사 활동에 분주하였다. 그의 애국적 생애는 이탈리아인의 신화로 되어 있다.
◑ 베네치아 공화국(Republica di Venezia: 667-1866) : 이탈리아의 지방 국가로 중세 초에는 법적으로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그 후인 697년에 처음으로 대통령(도제:Doge)을 시민 중에서 선출하는 과두 정체의 공화국으로서 출발, 강력한 함대와 상 선대에 의해서 11세기에는 아드리아 해를 제압하고, 발칸 지방에서는 노예, 영국에서는 양모를, 흑해에서는 수피를 수송하여 동방과 유럽의 국제 통상의 중개를 독점하였다. 특히 제4차 십자군 때는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특권을 독점하고, 크레타, 키프로스, 모레아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는데, 이 때 제노바와의 상권 쟁탈전에서 승리하였다. 15세기에는 이탈리아 내륙 지방에 판도를 넓혀 크레모나, 베로나 등 도시를 지배하였고, 16세기초에는 전 유럽 세력(캉브레 동맹)과 싸웠다. 이 싸움으로 국가의 재정은 파탄되 고, 신 항로의 발견은 베네치아의 지위를 쇠퇴하게 했으며, 투르크에 동방 식민지를 차례차례 침식당하여, 1718년 모레아가 함락되기까지 고난의 역사를 가졌다. 이리하여 경제적·정치적으로 무력해진 공화국은 1797년 나폴레옹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비인 회의이래 오스트리아령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2월 혁명 이후 1848년에 혁명을 일으켰고, 오랜 동안의 해방 운동 결과 1866년 오스트리아로부터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
◑ 링컨과 남북전쟁 : 1860년 미국 제16대 대통령으로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당선되었다. 그러자 공화당을 반대하는 남부 11개 주는 합중국 탈퇴를 선언, 새로 아메리카 연방을 결성하고 민주당의 데이비드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메리카 연방의 수도로는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가 정해졌다. 남부에서는 일찍부터 대규모 농장이 발달했다. 남부인들은 흑인 노예를 고용, 대 농장에서 면화·담배를 재배하여 영국에 수출하고 생활 필수품을 수입했다. 따라서 남부의 경제는 노예 노동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며, 영국과의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이와 달리 북부는 철·석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공업이 발달, 영국의 값싼 공산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보호 무역을 주장했으며 임금 노동자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부는 보다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남부는 지방 분권 및 자치를 원했다. 남북 대립의 주요 쟁점 중에 하나는 흑인 노예 문제였다. 남부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북부는 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였지만 이미 있는 것까지 없앨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 생긴 주에 노예제를 인정치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남부는 이에 반발, 합중국 탈퇴와 남부 자치를 선언한 것이다. 사실 노예제는 표면상의 이유이고, 남북전쟁의 근본 원인은 신흥 상공업에 기반을 둔 북부의 산업자본과 노예제에 기반을 둔 남부의 농업 자본간의 대립이었다. 1861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남부가 우세했다. 영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남부를 지원했다. 1863년 1월 링컨은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남부의 세력을 약화 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써 남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4백만 명에 달하는 흑인노예가 해방되 었으며 전세는 북부에 유리하게 변화했다. 1865년 4월 남부 연방의 수도 리치먼드가 그랜트 장군이 거 느린 북군에게 함락되었다. 4년에 걸친 내전이 끝난 것이다. 쌍방의 사상자는 무려 60만, 소모된 전비는 100억 달러였다. 승리를 거둔 링컨은 남부를 관대하게 대했다. 그의 목적은 합중국의 단결과 통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워싱턴의 한 극장에서 남부 출신의 청년에게 저격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 았다. 노예 해방과 함께 노예에 기반을 둔 남부『면화 왕국』이 무너지자, 그에 기초를 둔 정치 세력도 쇠퇴했다. 그리하여 전쟁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산업 혁명을 전개, 자본주의를 꽃피우게 되었다. 북부0?승리는 곧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였다.
◑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1863년) : 남북 전쟁이 2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남북 어느 쪽의 승리도 확실시되지 않은 1862년 9월, 링컨은 다음 해 1월 1일을 기해 남부 여러 주의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예고하였는데, 드디어 1963년 1월 위의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은 연방에 충성을 지켜 나가는 주의 노예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또 반란 중에 있는 주에서 남군의 세력아래 있었던 노예는 여전히 노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날부터 남북 전쟁은 이름 그대로 '노예 해방 전쟁' 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게티스버그 연설(1863년) : 남북 전쟁은 처음에 남군이 우세한 가운데 전개되어, 리(Lee) 장군이 이끄는 남군은 1863년 펜실베니아 주에 쳐들어오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에는 게티스버그에서 대 격전이 벌어졌는데, 남북 전쟁의 전환점이 된 이 전투는 남북 전쟁 중 최대의 격전으로 남군과 북군 전체 병사의 4분의 1이 전사하였다. 그래서 같은 해 11월 그 전쟁터의 일부를 국립 묘지로 만들어 전몰 용사에게 바치는 헌납식이 치뤄졌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링컨이 바로 그 식전에 참석해서 한 것으로, 겨우 2분밖에 안되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그 마지막 구절로 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 자영농 창설법(Homestead Act) : 1862년 링컨 대통령이 제정 공포한 법으로, 누구든지 국유지에 5년간 정주하여 개척에 종사하면 160 에이커의 토지를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받게 하였다. 이 법은 안정된 토지 소유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던 서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 스테판 라진의 난 : 17세기 러시아에 일어난 농민반란.「알렉세이 미카엘로비치 황제의 칙령」이라 불리는 농노법(1649)에 의하여 도망 농민의 단속이 강화되고 농민의 이동은 일절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식량 부족으로 봉기한 돈 카자흐의 총수 라진(Setpan Timofeevich Razin)의 지휘 아래 도망농민이 1667년 돈에서 볼가로 이동 해 가면서 대상인의 곡물이나 상품 운반선을 습격했다. 1688년에는 농민군들이 카스피 해에 나타나 무 역선을 습격하였으며 이 농민군은 차차 커져서 정부·지주·대 상인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으므 로, 러시아 정부는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어렵사리 이를 진압했다. 1671년 라진은 붙잡혀서 사지를 찢기는 처형을 당했으나 그의 이름은 농민 구제의 영웅으로서 러시아 민요에서 불리어지고 있다.
◑ 가혹한 체제 짜리즘 : 러시아는 서유럽과 비교해서 황제의 힘이 막강했다. 황제는 짜르라고 일컬어졌는데 이 이름은 고대로마의 케사르에서 유래한다. 러시아에는 17세기말부터 독특한 전제적인 지배 체제가 완성되었다. 이것을 짜리즘이라고 한다. 짜리즘은 낡은 농노제에 토대를 두고 있다. 농노는 영주의 소유물로 간주되어 가축과 같은 대접을 받았으며, 가족 단위로 혹은 한 사람씩 매매되었다. 또한 짜르는 기독교의 한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권위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와 모든 성직자가 짜르 권력의 통제하에 놓였다. 총 인구의 1-2퍼센트 정도의 특권 계층인 봉건 영주와 성직자가 이러한 절대권력을 가진 짜르를 떠받치고 있었다. 이 전제정치에 대한 저항은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표면화된다.
◑ 무라비예프의 <어떤 진기한 대화(1821년)>
▶ 신은 무엇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 인간이 신을 믿어 자유롭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
▶ 어찌하여 러시아의 백성과 군대는 불행한가?
▷ 그들의 자유를 짜르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짜르의 행위는 신의 뜻과 반대되는 것인가?
▷ 물론이다. 주님 말씀이, 너희 중에 우두머리가 몇 사람이 되더라도 그를 너희의 하인으로 만들지어 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짜르는 자기 백성들에게 폭정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 짜르라고 해서 신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 짜르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는가? ▷ 아니다! 그리스도 말씀이, 너희는 하나님과 이교도의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이 바 로 러시아 백성과 러시아 군대가 고뇌하는 이유인 즉, 생각컨대 그들은 짜르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 문일 것이다.
▶ 그렇다면 크리스트교적인 러시아 군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고뇌하는 그 가족과 그 국가의 해방을 위해, 그리고 성스러운 크리스트교적 법률의 준수를 위해, 진 실됨과 희망에 찬 마음으로 주께 기도한 후에 굳게 주를 믿음과 동시에 폭정에 대하여 무기를 들어 러시아의 신앙과 자유를 되찾아와야 한다.
▶ 자유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 모든 축복은 신으로부터 나온다.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하고, 또 영원한 선물로 선함 과, 또 영원한 고통으로 악함을 만들어 놓고 나서,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
▶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가?
▷ 아니다,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필요한가?
▷ 필요하다.
▶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옛 러시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규칙이나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야말로 필요한 일이다.
▶ 옛 러시아에서는 어땠는가?
▷ 전제 군주란 자가 있지 않았다.
▶ 전제 군주란 무엇인가?
▷ 전제 군주 혹은 독재 군주란 토지를 모두 독차지하고, 이성의 힘이나 신과 인간의 법을 인정하지 않는 자이다. 오직 전제 군주만은 한 마디 해명의 말도 없이 자기 기분대로 통치한다.
▶ 신이 전제 정치를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 신은 결코 어떤 악도 창조하지 않으셨다.
▶ 전제 정치가 없는 러시아에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있겠는가?
▷ 언제나 국민의 의회가 있다.
▶ 왜 몽고의 지배를 받고도 이 악덕이 끝나지 않는가?
▷ 아마 백성들이 몽고의 폭군을 닮은 모스크바 공국의 제후 권력을 관대히 봐주기 때문일 것이다.
◑ 데카브리스트(Dekabrist)의 봉기 : 1825년 12월 러시아에서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봉기한 일파로 러시아력 12월(데카브리(Dekabry))에 봉기했기 때문에 12월 당원이라고도 불린다.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서유럽의 자유 사상에 접하게 된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들이 주류가 되었다. 1816년 농노제 폐지 입헌 정치 실시를 목표로 구제 동맹을 조직, 1818년 복지 동맹이라 이름을 고쳤다. 회원 약 200명을 포섭하고, 아락체에프에 의한 반동을 계기로 급진화하게 되었다. 1821년 정부의 탄압으로 남부 동맹, 북부 동맹, 통일 슬라브 동맹으로 분산되었다. 남부 동맹은 1815년 페스텔리에 의해서 조직되어 복지 동맹에 가입해 있었으나, 해산 이후 독립하여 1823년 통일 슬라브 동맹을 병합하여 무력 봉기에 의한 공화제를 세우려고 하였다. 북부 동맹은 1822년 옛 복지 동맹원들에 의해서 조직, 1823년에 입헌 군주제의 확립을 목표로 했으며, 1825년 12월 14일 페테르스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서 한 무리의 귀족 장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가 발생한 당일 원로원 광장에서는 근위 부대가 새로 즉위한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선서식을 방해하고 무력으로 원로원을 장악한 뒤 '제정 정부 타도, 농노제 폐지, 정치적 자유 쟁취, 헌법 제정의회 개최, 임시정부 선출' 을 요구하는 『러시아 인민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데카브리스트 지휘하에 약 3천 명의 병사들도 집결하고 있었다. 정각 12시가 되기 직전 병사들 가운데 '헌법 만세' 를 외치는 목소리가 터졌다. 봉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봉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날의 봉기도 비참하게 끝났다. 니콜라이 1세의 명령에 따라 데카브리스트의 네 배나 되는 황제 직속군이 대포를 일제히 발포하며 달려들자 봉기는 참혹한 실패로 끝나 버렸다. 주모자 5명이 교수형, 121 명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하급병사까지 포함하면 약 3천 명이 엄벌에 처해졌으며 니콜라이 1세는 전제 정치를 강화하였다. 러시아 최초의 혁명 운동으로서의 영향이 크다.
◑ 브 나로드(인민 속으로 ; V' Narod ) : 알렉산드로 2세의 개혁에 대한 러시아 지식인(인텔리겐챠)들의 불만은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 등과 격사상의 등장을 수반하였다. 1873년 가을부터 이듬해 여름에 걸쳐서 '브 나로드' 를 구호로 내세운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학생과 인텔리 청년으로, 그들은 인민주의자라는 의미의 나로드니키(Narodniki) 라고 불렸다. "우리는 혜택받고 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로드(Narod ;실제로 이것은 농민을 가리킨다.)는 가난하고 학대당하고 있다. 우리만 편안하게 지내도 좋단 말인가? 우리는 나로드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느끼고 있었으며 원래의 농노에 의해서건, 아니면 현행 산업 조직의 노예에 의해서건, 노예 노동에 의해 그들의 아버지 집에 쌓여진 재산을 누리기를 거부하였다. 전 러시아 인은 카라코조프와 그 친구들에 대해 법정에서 만든 고발장에서, 상당한 재산 소유자인 이들 청년들이 그들의 모든 필수품에 한 달에 4000원 이상은 쓰지 않고, 또 동시에 협동 조합과 협동 공장(거기에서 그들 자신도 일을 하는) 등을 시작하기 위해 자기의 재산을 투 자하고, 한 방에 서너 명씩 생활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써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의 표어는 '브 나 로드'(민중 속으로)였다. 1860∼1865년의 몇 년간 부유한 집안은 거의 모두 옛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아버지와 자기 자신의 이상에 따라 자기 삶을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아들이나 딸 사이에 참혹한 싸움이 벌어졌다. 청년들은 군무(軍務)나 계산대, 상점을 떠나 대학촌에 모여들었다. 가장 귀족적인 가정에서 자란 소녀들은 한 푼도 갖지 않고 성 페테르스부르크, 모스코바, 키예프로 달려가, 가정의 속박에서, 또 그 밖에도 혹시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남편의 속박으로부터도 해방시켜 줄 직업을 열심히 배웠다. 괴롭고도 참혹한 싸움 속에서 그들 대부분은 개인적 자유를 얻어냈다. 이제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해방 시켜 준 지식을 민중에게 주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러시아의 모든 마을에, 성 페테르스부르크의 모든 지구에, 작은 그룹이 자기 개선, 자기 교육을 위해 만들어졌다. 이 서클에서는 철학자의 책, 경제학자의 논문, 젊은 러시아 역사학파의 연구물을 읽고, 이어서 끝없는 토론을 벌였다. 모든 독서 및 토론의 목적은 그들 앞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그들이 민중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차츰 그들은 민중 속에서 살며 민중의 삶을 사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청년들은 의사, 의사의 조수, 교사, 마을의 서기로서, 심지어 농업 노동자, 대장장이, 나무꾼이 되어 마을 안에 들어가 농민과 긴밀한 관계 속에 생활하려고 하였다. 여자들은 교사가 되는 시험에 통과하고, 산파술이나 간호술을 배워 여러 마을에 들어가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몸을 다 바쳤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뭔가 사회를 개조하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간 것이 아니며, 혁명 사상 같은 것을 지니고 간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농민 대 에게 읽는 법과 그 밖의 것을 가르치고, 의료적 원조를 해 주며, 또 조금이나마 그 암울하고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와주려고 하고, 동시에 보다 좋은 사회 생활에 관한 그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이상이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한 것이다. 나로드니키 운동은 러시아 혁명 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의 미했다. 그것은 농민 공동체에 기초를 둔다는 것, 농촌과 지방도시에 운동을 확산시킨다는 것, 학생과 인텔리 청년을 운동의 중심으로 한다는 것 등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1873년과 1874년의 운동은 완전 히 실패했다. 농민은 나로드니키가 생각하고 있던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농민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학생들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의식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차츰 학생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때로는 적대시하기까지 했다. 한편 도시에서 자란 청년들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자신들의 무력함에 나로드니키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정부의 탄압 또한 가혹했다. 러시아 혁명 운동은 다시 단련되어야 했고 혁명가들은 새로운 혁명이론을 준비해야 했다.
◑ 러시아의 반동 정치 : 농노제와 황제의 전제 정치가 계속되고, 근대공업도 발달되지 못하였던 러시아는 크림 전쟁의 패배로 사회의 후진성을 노출하였다. 그래서 알렉산드로 2세는 1861년에 농노해방령을 공포하고, 또한 위로부터 의 자유주의적인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농노해방은 지주 위주의 것으로 농민의 부담은 줄지 않았으므로 각지에서 농민의 봉기가 일어났다. 더욱이 폴란드에 반란(1863)이 일어나자 황제는 그 진압 에 고심한 나머지 재차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대외 진출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사회개혁을 희망하는 지식인은 농촌에 들어가 농민을 계몽(나로드니키) 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절망에 빠진 사람 가운데는 무정부주의나 니힐리즘에 기울어, 황제 암살 등의 테러 행위 등도 일어났다.
◑ 무정부주의자(Anarchist) : 국가·사회·종교 등 모든 권력·권위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사람 들이다. 그 사상의 기원은 헬레니즘 시대에까지 소급되는데, 19세기 후반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좌경적 성격을 띠고 노동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에서는 바쿠닌, 크로포토킨 등이 등장하여 공산주의가 무산독재를 주장한데 대하여, 국가나 정부의 직접적 소멸을 주장하였다.
◑ 사회주의(Socialism) : 흔히 사회주의라고 말할 때는 자본주의에 수정을 가하려 하거나 또는 이에 대항하려는 일체의 사상이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회주의란 말에 대해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생각은 사회주의의 원리나 사상이지 반드시 그 제도는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공산주의·무정부주의뿐만 아니라 길드 사회주의나 생디칼리슴도 다 사회주의에 포함되어 불리어진다. 사회주의가 공산주의와 구별되어 말해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어 이 개념이 쓰이는 방법은 갖가지이다. 그리하여 사회주의란 말은 개개의 사상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이외의 것을 총칭하는 경우가 있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이로부터 결별하려는 데 대해, 길드 사회주의나 사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어떤 수정을 가하려는 것이지 결코 결별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뜻에서 말해지는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이며 그 운동이다. 사회 제도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역사적으로는 봉건 제도와 자본주의에 병칭되어 쓰인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전 단계라고는 말해지고 있으나, 이는 역사상으로 보아 현실적이라기보다 이론적인 정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같이 개인에 대한 소비 수단의 소유와 처분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생산 수단의 사유 문제에 있어서는 자본주의가 무제한 이것을 승인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데 대해, 사회주의는 개인의 생산 수단 소유권을 부정하고 공공단체에 한하여 이것을 인정한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사회주의는 계급제도가 없는 것으로 자본주의와 구별되기도 한다. 사회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보면, 먼저 아나키즘 즉 무정부주의가 가장 공상적인 사회주의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회주의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여러 가지의 주장이 있다. 다음으로 생디칼리즘은 19 세기말 프랑스의 노동 운동에서 생긴 이론으로 그 일부는 마르크스주의, 일부는 아나키즘 사상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혁명적인 것과 개혁적인 것이 있다. 길드 사회주의는 20세기 초엽 영국에서 발달 한 주장으로서, 노동 조합 속에 중세 길드의 요소를 가하자는 것으로, 생디칼리슴과 달라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의 역할을 한정하여 국가에 특정의 역할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20 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사회주의 사상은 현저하게 현실적인 요구가 되어, 경제상의 제도와 정치상의 조직을 주장하여,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을 주창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초기 사회 주의는 모어의 '유토피아'(1516)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상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근대 사회주의의 시조로 보여지는 것은 1642∼1652년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 최좌익(最左翼)의 입장을 취한 디거즈의 클 럽이다. 이 영국 혁명 후에 사회주의의 한 시기를 그은 것은 프랑스 혁명이다. 당시의 대표적인 사회주 의자로는 바뵈프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단지 평등과 공동 소유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의 획득을 주장한 점에서 영국의 사회주의를 보다 실천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초 엽의 사회주의자로 들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생시몽, 푸리에, 영국의, 엥겔스는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이름지었다. 이 시대의 사회주의에 비하면 그 후의 사회주의는 보다 구체적인 경제상의 플랜이나 정치 운동의 방법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훨씬 과학적이 되었으나, 과학적이라 자칭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비 하면 이상주의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겠다.
◑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근동문제
▶ 러시아의 남하정책 : 발칸까지 정복하여 한 때 그 강성을 자랑하던 오스만투르크도 18세기의 중엽에 이르자, 도나우 강 중류(헝가리)를 오스트리아에 빼앗기고 흑해 북안을 러시아에 빼앗겨 차츰 쇠하였다. 게다가 투르크의 지배아래 있던 발칸 제 민족이 서유럽의 국민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을 일으켜, 이 운동은 1829년그리스의 독립 이후 더욱 치열해졌다. 이러한 때, 18세기초이래 지중해 진출을 목표로 남하정책 을 써 오던 러시아가 발칸에 주목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리하여 니콜라이 1세, 알렉산더 2세 시대에 근동, 발칸에 대한 러시아의 본격적인 남하정책이 추진되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당연히 이 지역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서유럽 제국과 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이 다시 발칸의 민족운동과 얽혀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의 정국에 위기를 낳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19세기에 러시아의 최대의 적이 된것은 영국이었다. 이는 러시아가 투르크를 지배하게 되면 영국과 인도의 연결로가 큰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다음에 말하는 동방문제(이집트사건), 크리미아 전쟁, 러·터 전쟁, 베를린 회의에서 줄곧 투르크를 원조하고 열국을 꾀어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하여 그 진출을 저지하였다.
▶ 동방문제(1833∼1840) : 이집트는 16세기이래 투르크령이 되었는데, 19세기초에 이집트 태수로 임명된 메헤멧 알리(Mehement Ali)는 프랑스의 후원아래 정치, 경제, 문화의 서구화를 꾀하여 그 실력은 투르크를 능가하였다. 그리스 독립 전쟁 때에는 투르크에 협력하여 그 대가로 크레타, 키프로스의 두 섬을 얻었는데 다시 시리아를 요구하여 투르크 본국에 침입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일찍부터 남하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투르크를 구원한다는 명목 아래 남하하여 흑해의 다아다넬즈(Dardanelles)에 출병하였다. 이에 놀란 영국은 프랑스를 꾀어 투르크에 간섭하여, 시리아의 할양을 조건으로 이집트와 화목하게 하여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의 야망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이러한 간섭에 투르크와 러시아가 격분하여 양국은 1833년 운키아르 스켈레지(Unkiar Skelessi)조약에서 공수동맹을 맺고, 투르크는 다시 비밀리 러시아 함대의 해협의 자유통행을 승인한 뒤 이집트와의 전쟁을 재발하였다. 프랑스는 재빨리 출병하여 이집트를 원조하고 투르크군을 쳐부셔 수에즈 및 실리아 남부를 점령하였다. 프랑스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영국의 파아먼스튼(Palmerston, 1784∼1865) 외상은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투르크를 원조하고,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3국과 동맹하여 이집트를 압박하였다. 이 바람에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하고, 이집트는 동맹군에게 항복하여 점령하였던 땅을 모조리 투르크에 돌려주어 투르크와 화해하였다. 1841년 열국 대표가 런던에 모여 국제회의를 열고 스켈레지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여 여기에 동방문제 곧 이집트 사건은 끝을 맺었다.
▶ 크리미아 전쟁(1853∼56) : 남진 정책을 취하는 러시아와 터키·영국·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간의 전쟁. 니콜라이 1세는 투 르크령 팔레스티나에 있는 성지의 관리권을 얻고자 계획하다가 로마교회와 충돌하여(성지문제), 뜻을 이 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국내의 카톨릭 교도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투르크에 교섭하여 1852년 성지 관리권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노한 니콜라이 1세는 1853년 7월 투르크 정 부에 선전을 포고하고 터키를 공격을 개시하였다. 터키의 배후에는 영국·프랑스가 있어 양국이 1854년 3월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으며, 이후 4월 영국과 프랑스군의 불가리아 상륙, 9월 크림 반도 상륙, 10월의 세바스토폴리 포위로 장기전이 되었고, 러시아의 명장 토틀레벤(Totleben, 1818∼1884)은 6 만을 거느리고 세바스토폴리(Sebastopol)에서 영국, 프랑스, 사르디니아의 연합군의 공격에 약 1년 동안 이나 저항하였으나, 마침내는 힘이 다하여 1855년 11월 항복하였다. 이듬해인 1856년 파리 조약에 의해 터키의 영토 보전이 규정되고, 터키는 내정의 개혁과 신교의 자유를 약속하게 되고, 러시아는 베사라비 아의 일부와 흑해에 함대를 두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다뉴브 강의 자유 항해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터키는 영국, 프랑스에 대한 종속관계가 한층 굳어지고 러시아는 남진정책이 저지된 동시에, 패전으로 국가체제의 약점이 노정되어, 알렉산드르2세에 의해 제반 개혁이 단행되었다. 또한 사르데냐는 이탈리아 통일에 있어서 영국·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참전하였었다. 이 전쟁에 나이팅게일이 참가하여 적군과 아군의 구별없이 부상자를 간호하여, 적십자 운동의 기초를 닦았음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 러 터 전쟁(1877-78) : 크리미아 전쟁 뒤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는 범슬라브주의(Pan-Slavism)에 의한 남하정책의 재흥을 꾀하였다. 1870년에 보불전쟁이 일어나 혼란한 틈을 타 파리 조약의 폐기를 통고하고 흑해의 군사기지를 재건하였다. 한편 그리스의 독립 이후 동요하고 있던 발칸 제 민족이 러시아의 후원아래 독립운동을 일으켜, 1861년에 루마니아가 독립한 것을 비롯하여 1875년 이후에는 보스니아(Bosnia), 헤르체고비나 (Herzegoibna), 세르비아(Serbia), 몬테니그로(Montenegro), 불가리아(Bulgaria) 등의 슬라브 제 민족이 연달아 투르크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투르크는 즉시 토벌군을 보내어 철저히 크리스트 교도를 박해하였다. 남하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알렉산더 2세는 이를 구실로 삼아 1877년 투르크에 선전하였다. 러시아군의 일부는 도나우 방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고 다른 부대는 코카사스 방면에서 소아시아로 침입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투르크의 구원에 의하여 지중해 함대를 출동시켜 러시아를 견제하였기 때문 에 러시아는 드디어 1878년 투르크와 산 스테파노(San stefano)조약을 맺었다. 투르크는 발칸 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러시아에 토지를 내어주고 다아다넬즈 해협의 개방을 약속하였다. 이 결과 발칸의 과반이 러시아의 세력 아래 들어가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산 스테파노 조약(Treaty of San Stefano: 1878.3.3.) : 1876∼1877년의 러·터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강화 조약. 산 스테파노는 콘스탄티노플 서쪽 교외의 한 작은 마을이다. 이 조약의 결과, 투르크는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루마니아 3국의 독립과 대(大)불가리아 자치 공국의 건설을 승인하고, 러시아는 영토를 확대하였다. 이 결정이 실현되면 러시아는 실질적으로 발칸을 지배하고, 그 세력을 지중해로 신장해 나갈 것이 명백하므로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이에 반대하고 조약의 전면적 개정을 요구하였다. 특히 영국은 강경하여 개전도 불사한다는 태도를 표시하였으므로 러시아도 이에 굴복,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따라 이 조약을 개정하여 국제 회의에 붙일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의 제청에 의해 1878년 6월 베를린 회의가 열려, 이 조약은 러시아의 양보로 상당 한 수정이 가해졌다. 그 때문에 이 조약은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전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이른바 발칸 문제의 화근이 되었다.
▷ 베를린 조약 : 1877∼78년의 러시아·투르크 전쟁과 그 결과 맺어진 산 스테파노 조약을 계기로 발칸(Balkan)방면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대해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서자, 1878년 6월 산 스테 파노 조약을 개정하기 위하여 비스마르크의 주최 아래 베를린에서 열국 회의가 열렸다. 러시아의 재상 고르챠코프(Gortchakov), 영국재상 디즈레일리(Disraeli), 오스트리아 외상 앙드라시(Andrassy) 등 당대 일류의 정치가가 참석하였다. 비스마르크는「충실한 중개자」인양하면서도 교묘하게 러시아의 주장을 억누르고 영국,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지지하여, 산 스테파노 조약을 폐기하고 베를린 조약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베를린 조약은 19세기말의 유럽정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첫째로 투르크 제국의 해체가 더욱 촉진되고, 둘째로 러시아의 남하가 세 번째 좌절되었다. 게다가 슬라브인의 거주지인 보스니아, 헬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가 범 슬라브 운동이 큰 타격을 받았다. 러시아는 종래 우호적이었던 비스마르크가 영국을 지지한 데에 원한을 품고 그 뒤 독일을 멀리하고 차츰 프랑스에 접근하였다. 셋째로, 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오스트리아의 발칸 진출이 큰 성과를 거두어 남진책의 유력한 기반을 만들었다. 넷째로, 영국은 가장 화려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어 수에즈 운하 가까이에 키프로스섬의 기지 를 얻어 영, 인도의 연결을 튼튼하게 하였다. 이후 발칸에서는 일단 안정이 확보되나, 열국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하고, 독립한 여러 나라들도 대국의 움직임에 좌우되어,「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화지가 되었다.
◑ 드레퓌스 사건(1897-1899) : 유태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의 재판 문제에서 발단하여, 프랑스 제3 공화정에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던 사건. 1894년 10월 참모 본부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대독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 회의에 의해 유죄의 확증을 파악하였으나,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 요구 운동을 벌이고 있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1897년 11월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 사건은 표면화되었다. 1894년의재판의 정당성을 완강하게 주장한 군부는 반 유대주의의 풍조와 군국주의의 기운에 편승하여,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에스테라지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나 1898년 1월 졸라가 이 부정과 허위에 대하여, 대통령과 군부를 탄핵하는 공개장을 [오로르]지에 발표하게 되자, 여론이 비등하여 전 프랑스는 드레퓌스의 재심파와 반 드레퓌스 파로 분열되었다. 전자에는 자유주의적 지식인, 사회당, 급진당이 참가하여 인권 옹호 군국주의 반대 공화정 옹호의 슬로건 하에 인권 동맹을 결성하였고, 후자에는 국수주의자 우익 정치가 군 교회가 집결하여 반 유대주의, 국가주의, 군대의 영광을 절규하며, 프랑스 조국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대립하였다. 이리하여 사태는 한 장교의 석방 문제를 넘어 정치 투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대립은 격화하여, 반 드레퓌스 파는 쿠데타까지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1899년 6월 재심파의 승리로 끝나서 9월에는 대통령의 특사로 드레퓌스는 석방되었다. 그 뒤 진범이 발견되고 군부가 내세운 증거도 조작임이 명확히 드러나게 되어 드레퓌스의 결백은 완전히 증명됐으며 1906년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 결과, 좌파의 대동 단결이 촉진되어 군부는 숙정되고, 반대파와 교회의 세력은 크게 후퇴하여 제 3공화정의 기초가 굳어졌다
◑ 졸라 (Zola, Emile ;1840-1902) : 프랑스의 작가. 젊었을 때는 파리의 언론계에서 활약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과학, 특히 의학·생리학의 방법에 감명 받고, 텐의 영향을 받아 실험적인 수법으로써「과학적」인 소설을 쓰려고 하여 '루공 마카르 총서' (20권 ;1871∼1893)를 지었다. 이는 제2 제정하의 프랑스 사회의 실상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으 로, 주인공의 운명을 유전(알코올 중독)과 환경이라는 두 가지 과학적인 요소로써 처리해 나가려 하였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적인 소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하층 인간군의 모습을 그린 일대 풍속소설로서, 또한 대중 소설로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밖에 '나나'(1880), '제르미날'(1885), '목로 주점'(1877), '수인(獸人)'(1890) 등이 유명하다. 만년에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기울었고, 또한 드레퓌스 사건 때는 피고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한때 영국에 망명하기도 하였다
(3) 19세기의 문화
◑ 랑케의 '역사와 진보' : 첫째로, 역사가는 역사에 접근할 때 주요 착안점을 '어느 시대에서나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생활했는가?' 라는 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도전적인 이념과 같은 어떤 종류의 영구 불변한 기본 이념을 떠나 각 시대가 각기 특수한 의의와 경향을 갖고 있고, 또 각기 고유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둘째로, 역사가는 개개의 시대 사이에 가로놓인 차이점을 인식하여 그 전후 관계의 내적 필연성을 고찰하여야 한다. 물론 그 경우에 어떤 종류의 진보가 인정된다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진보라는 것이 일직선으로 곧게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울물이 온갖 굴곡을 헤치고 흘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내 생각에 따르면 신 앞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은 역사상의 전 인류를 그 전체로서 바라보고 있어 언제 어디에서나 평등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 앞에서는 인류의 어느 시대도 모두 평등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 앞에서는 인류의 어느 시대도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역사가도 사물을 그러한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다 보면 물질적 영 역에서는 조건 없는 진보나 결정적인 향상을 인정할 수 있다. 물질 면에서 이룩한 진보는 세상이 뒤집 어지지 않는 한 퇴보하지 않을 것이다. 물질 면에서 이룩한 진보의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예컨데 미술이나 문학과 같은 아름답고 도덕적인 작품을 오늘날 과거보다 많은 대중들이 감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호메로스보다 위대한 서사시인이기를 바란다거나 혹은 소포클레스보다 위대한 비극 작가는 현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 랑 케(Ranke : 1795∼1886) : 랑케는 근대 역사학을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독일의 역사가이다. 1842년 '라틴 및 게르만 여러 민족의 역사' 를 저술하여 학계의 인정을 받아 베를린 대학에서 반세기 동안 강의와 저작 생활에 주력하였다. 랑케는 역사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서술해야 하며 따라서 사료로 엄밀히 점검하여 그 신뢰성과 원전성을 확인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역사 연구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란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 를 밝히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아야 하며, 역사가는 그의 주관이나 편견을 배제하여야 하고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객관적 사실 중심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랑케 사학은 그 후의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역사학 연구의 기초로서 오늘까지 존중되고 있다.
◑ 역사주의 : 19세기말부터 학문의 각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새로운 개념. 일체의 사물은 역사적 생성 과정속 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가치나 진리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입장. 주로 19세기의 독일을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사조에 입각한 역사 이해의 태도이다. 트뢸치는 역사주의와 자연주의 두 가지를 근대 학문의 2대 소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역사성 밑에서 해석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대주의로 빠지게 된다고 비판받았는데 역사주의라는 말은 그러한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 바그너와 국가주의 : 국민 국가의 탄생은 19세기 중반의 서구를 떠들썩하게 한 강렬한 애국적 감정의 결과이지, 비스마르크나 카보우르 같은 노련한 정치가의 수완만으로 달성된 것은 아니다. 정치의 세계에 민중이 참가하는 것이 겨우 구체화되기 시작한 시대에 국가를 향한 충성심이 민중의 혼을 약동시키고 정치에 관한 열광적 흥분을 초래했다. 현대음악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과거의 시대에는 크리스트교가 공통의 토양이었다. 이것이 없어져 버린 뒤에 남은 것은 국가뿐이다." 국가주의의 극단적인 경우는 바그너이다. 그의 음악 자체는 코스모폴리탄적이었지만 표현은 대단히 애국적이었다. …… 바그너의 애국주의는 방만하고 공격적인 국가주의를 수행했다. 그는 독일인은 '고매한 혼으로 꿈을 꾸고 심원한 두뇌로 생각하는 국민' 이라고 단언했다. 나아가 그는 독일인은 '신의 백성' 이라는 놀랄 만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 국가주의에서 인종주의로 가는 마지막 발자국을 바그너는 밟기 시작했다.…… 1849년 그는 가명으로 '음악에 있어서 유대인' 을 출판했으며 그의 반 유대적 격정은 그의 국가주의와 함께 급속도로 중대하기 시작하였다.
◑ 자유주의(Liberalism) : 광의로는 해방·자유 운동 및 그 사상을 말하나, 역사적 개념으로서는 근대 유럽에서의 자유주의를 가리킨다. 다만 그 형성에 있어서는 신 앞에서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중세 신학의 논리가 작용했 고 한다. 르네상스·종교 개혁 이래 신분적 속박으로부터 해방하려고 일어난 자유주의는, 절대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신흥 부르조아지의 무기로서 시민 혁명을 주도하였다. 그 선두에 선 것이 영국인데, 그들은 개인주의를 기초로 하여 인격·생명·재산의 보증 및 집회·언론·신앙·학문 연구의 자유를 주장했으며, 경제적으로는 A. 스미드류의 자유주의 경제를, 정치적로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의회 제도를 확립하고 책임 내각제를 수립하였다. 자유주의의 이론화의 배경에 벤담, 밀 부자를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도 계몽 사상을 통하여 이성주의에 입각한 자유·평등 사상이 보급되었으며, 프랑스 혁명에 의하여 신분제 사회를 타파하고 이를 유럽의 보편적 원리로까지 확장시켰다. 이상과 같이 서유럽에서는 개인주의 입장에서 종교적·정치적·신분적인 속박과 압박을 배제하는 제도로서 발달한 데 대해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는 정신의 자유로부터 출발하여 19세기 후반 경에는 국민 통일 운동과 결합하여 민족 자유주 의가 되어 국가 통일 성취의 원리가 되었다.
◑ 민족주의 : 국가·민족의 통일 발전을 강조하는 이념으로 유럽의 경우 19세기에 들어와 발달하였고 20세기 초 이후에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발달하였다. 유럽의 경우 신분 사회의 붕괴와 크리스트교적 질서의 해이에 따라 민족주의는 공통의 언어, 문화, 역사 등 쉽게 파악되는 가치 때문에 민족의 전 생활 영역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획득했다. 이것은 빈 체제에 반항하여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이탈하는 경우와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는 같은 민족이 국민적 통일을 수행하려는 운동으로 전개되었 다.
◑ 린네(Linne, Carl von :1707-1778) : 스웨덴의 박물학자. 의학 및 식물학을 공부하여 한때 개업의로 있었으나, 후에 웁살라 대학 식물학 교수가 되었다. 식물의 분류 방법에 대하여, 과학적인 새로운 견해를 발표, 근대 식물학의 명명법을 창시 했다. 그는 또 식물원을 개혁하고, 자연 과학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 진화론(Theory of Evolution) : 생물이 생물 자체로서 점차 고등 생물로 변화한다는 학설로 일찍이 라마르크가 이미 18세기 후반에 생물 진화의 사상을 발표하였고, 1830년에 라이엘이 지질학적 견지에서 유물적 세계관을 세웠다. 그 후 다아윈은 생물학적 견지에서 발생학적으로 연구를 진행시켰다. 그는 일찍부터 종래의 불변설에 의문을 갖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구를 계속하여 1859년에 '종의 기원'을 저술하였다. 그 속에는「적자 생 존」과「생존 경쟁」의 사상이 담겨 있으며, 인간과 원숭이는 동일 조상이라고 논단하였다. 이 학설은 그 후의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끼쳐 프랑스의 르낭은 비교 종교학에 이 학설을 응용하였고, 자연 과학 상에서는 동래의 분석적 방법에 대체하여 발생적 연구 방법이 채용되어 오스트리아의「멘델의 유전 법칙의 발견」등이 행해졌다. 다시 이 학설은 드 프리이스의「돌연 변이설」(1901) 따위로 발전하였다.
◑ 다윈(Darwin: 1809 ∼ 1882) : 1831년부터 5년간 비극호를 타고 과학 탐험에서 수집한 자료와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시사를 받아 1859년 "종의 기원"을 출판하였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자연 도태설로서 생존 경쟁에서 보다 적합하고 유리한 자질을 가진 것은 살아 남으며 그러한 자질은 여러 대를 거듭하는 동안 결국 새로운 종을 탄 생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인간도 이 진화론에 따라 원숭이 종으로부터 진화하였다는 견해(인간의 유 래 Descent of Man, 1871)는 종교계는 물론 사회와 과학과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총괄하여 사회적 다위니즘(Social Darwinism)이라고 한다.
◑ 종의 기원 :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은 생물학상의 진화론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사상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 책이다. 진화론은 이미 19세기 초 프랑스의 라마르크가 주창했으나 당시는 단순한 가설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의 다윈은 라마르크의 학설과 라이엘의 지질학에 자극받아 연구를 진전시켰다. 특히 군함 비글 호를 타고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지역을 조사하는 동안 멜서스의『인구론』을 읽고 이론상의 암시를 얻고, 생물의 종이 생존 경쟁에 따른 자연 도태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했을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다윈의 학설은 당시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교회에서 격렬한 비난을 가했다. 그러나 생존 경쟁에 따른 자연 도태 및 적자 생존의 사상은 그 무렵 세계 각지에 진출해 가던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받고 곧 일반적으로 승인받았다. 더욱이 스펜서로 대표되는 사회 진화론은 다윈의 설을 인류의 발전에 적용했다.
◑ 파우스트(Faust) : 괴테의 필생의 대작인 희곡으로 제1부는 1808년, 제2부는 1831년에 완성되었다. 독일의 중세 맑 이래 민간에 전해 내려온 파우스트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다. 파우스트는 16세기경에 실재하였다고 전해지는 인물로서, 의학과 연금술을 연구하였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을 모독하는 사기꾼이었다고 전해진다. 괴테의 '파우스트' 는 온갖 학문에 통달하고서도 끊임없이 세계의 심오한 비밀을 추구한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신과 내기를 하고 그를 유혹하여 마침내 그를 만족시키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신과의 약속에 따라 그를「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중, 신은 파우스트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상한 자라고 칭찬하여, 신의 구원을 받게 된다. 파우스트 전설은 18세기 중기 이후 독일에 있어, 낡은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하여 노력하는 시민적 정신의 표현이라 하여, 레싱과 몇몇 문인들에 의하여 문학소재로 다루어졌으나, 괴테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원하며, 또한 사회적 실천에 의하여 인생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구제를 받게 된다는 시민적 세계관에 긍정적으로 재생되었다. 여기에 괴테의 '파우스트' 의 불멸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 헤겔(Hegel, Georg Wilhelm Jriedrich :1770-1831) : 독일의 철학자로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의 가정에서 자라나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신학을 배웠으며, 셸링 등과 사귀었다. 처음에는 가정 교사 등으로 연구 생활을 하다가, 1801년 예나 대학의 강사, 1805년 원외 교수가 되어 셸링과 공동으로「철학 비판 잡지」를 출판하였다. 1806년 예나가 나폴레옹의 군대에 점령되어 대학은 폐쇄되었으나, 1808∼1816년 뉘른베르크의 김나지움의 교장,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1818년 피히테의 뒤를 이어 베를린 대학 교수에 취임하였고, 그의 학풍은 전 철학계를 휩쓸었으며 1829∼1830년 동 대학 총장을 역임하였으나, 콜레라에 걸려 병사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정신 현상학' '대 논리학' 등이 있는데, 이를 일관하는 특징은 변증법과 이성주의이다. 세계를 현실과 이성의 일치라고 본 그는,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방법인 변증법에 의하여, 절대 정신으로 향하여 전개되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는 역사를 세계 이성의 논리적인 자기 전개로 보고 그 발전 과정을 변증법으로 설명하였다. 이 변증법적 발전은 일종의 대립보다 고차적인 것으로의 발전을 뜻하며 정(Thesis)과 반(Antithesis) 의 대립을 통하여 양자가 종합(Synthesis)되고 그것은 단지 정, 반의 대립을 낳고 종합의 과정을 밟게 된다. 독일 관념론 테두리 안에서 변증법을 완결시킨 그의 영향은 세계로 번져, 헤겔 학파를 이룩하였으며, 포이에르 바하로부터 시작되는 헤겔 좌파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선구가 되었다. '법철학' 에서 프로이센의 절대주의를 긍정한 그는, 그런 의미에서 반동성이 있다고 하지만, '역사 철학'은 게르만 인만이 세계사의 영위자라고 하는 독단에 빠지면서, 변증법으로써 동적 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학·종교 철학·철학사 등의 저술도 많다.
◑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 :1788-1860) : 독일의 철학자로 단찌히에서 출생하였고, 아버지는 은행가, 어머니는 규수 작가였다. 처음 실업가를 지망했으나, 아버지의 사후 철학으로 전향하여 1809년 괴팅겐, 1811년 베를린 등의 각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동안 피히테, 실라이에르마허에게 배우면서 칸트, 플라톤을 연구하였다.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영향을 받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1819)를 저술하고, 베를린 대학의 사강사가 되었으나, 헤겔의 세력에 밀려 사직한 후 세계를 염세적으로 또는 미망과 고통으로 보았고, 범(梵)과 아(我)가 일체가 됨으로써 이를 초월할 수 있다고 하였다. 헤겔의 사후, 독일 사상계의 지도자가 되어 칸트의 정당한 후계 자로 군림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는 '충족 이유의 네 근원에 대해서'(1813), '자연상의 의지에 대하여'(1836), '윤리학의 두 개의 근본 문제'(1841) 등이 있다.
◑ 신 고전주의 : 귀족들의 사치와 호강이 심해지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해져 갔다. 드디어 1789년 프랑스 시민 혁명이 일어나고 귀족들은 거의 단두대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또다시 자유 분방했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그리워 한다. 그리하여 다시 일어난 문화를 신 고전주의라고 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나 영웅들의 이야기와 나폴레옹 같은 영웅들의 전기를 즐겨 그렸고 건축도 다시 그리스, 로마 풍을 되살렸다. 이 그리스 로마의 옛 문화를 고전 또는 클라식(classic)이라 한다.
◑ 낭만 주의(Romanticism) : 19세기 전반기의 지배적인 문예사조로서 고전주의와 이성의 시대에 대한 반동이었다. 자제, 중용, 균형이란 형식과 법칙을 존중하고 합리성을 강조하는 고전주의의 관점에 대해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찬미하였다. 거기에는 또한 자연에 대한 깊은 존경, 형식주의에 대한 경멸, 일반 민중에 대한 감상적인 사랑. 민족의 과거와 전설에 대한 향수 및 극적 감정과 격렬한 운동감의 표현 등이 포함되었다. 낭만주의는 문학의 영역을 넘어 당시 민족주의의 감정과 결부되어 민족주의 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으며, 또한 역사 연구를 자극하였다.
◑ 바이런(Byron. George Gordon 6th Baron :1788-1824) : 영국의 시인. 런던의 명문에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업하였고, 1809년 상원 의원이 되었다. 남 유럽과 그리스를 여행하여, 1812년 여행시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을 출판하여 문단에 명성을 떨쳤다. 1815년 귀족 사회의 위선을 증오한 나머지 영국을 떠나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귀국하지 않았다. '이단자' '맨프레드' '돈 주언' '하늘과 땅' 등 대표적인 시를 남겼다. 이러한 시들은 서정이 넘치는 풍자와 극적 구성을 이룬 서사시로서, 사회의 위선을 공격한 웅장 유려한 그의 시문이야말로 낭만주의 문 학의 정수로 일컬어진다. 1823년 그리스 독립군에 참가하기 위하여 미솔롱기에 상륙하였으나, 그 곳에서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 리얼리즘(Realism) : 19세기 후반기의 지배적인 문예 사조로 사실주의·현실주의라고도 하며, 그 의미는 다양하다. 최근에는 대개 어떤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의 참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문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컨데, 프랑스에서는 18세기에 이르러 봉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자유스런 환경 속에서 자유로이 행동하는 개인의 모습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이 나타났다. 궁정이나 상류 사회의 고정된 생활이 아니라, 서민 계층(부르조아지)의 일상 생활을 묘사하는 소설인데, 이것이 리얼리즘 소설의 전신이다. 19세기가 되면, 대혁명 이후의 새로운 부르조아 사회와 그 인간을 종합적으로 묘사하는 소설이 나타났다(발자크의 작품). 단순히 사회 환경의 세부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인간 내부와의 생생한 상호 관계를 통해서 그 사회와 인간 생활의 본질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사실주의는 한편으로는 자연 과학의 발전과 합리주의 경향에 호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상주의로 타락한 낭만주의에 반발하였다. 리얼리즘 작가들은 실제로 본 것을 충실하게 묘사하여 사실을 미화함이 없이 인간의 경험을 완전히 정직하게 표현하려 노력하였으며 또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발생된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비참한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려 노력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크게 드러나게 된다.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생산력 발전과 과학상 의 발명·발견은 반드시 인류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각종 사회 문제와 도시 문제가 점점 흉칙하게 노출되고 생산력의 발전이 빈곤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도 아니었다. 19세 기초까지 믿었던 발전에 대한 장미 빛 환상이 깨져나가는 것이었다. 현실을 도피하여 과거 속에서 이국 적 배경 속에서 스스로의 상상 속에서 아름다움과 위안을 찾았던 낭만주의를 비판하고 사실에 대한 충실한 묘사를 중시하는 것이 사실주의였다. 표현의 방법으로서는 낭만주의가 보다 정서적이며, 공상적· 주관적인 데에 비하여 리얼리즘은 이지적이며 현실적이며 객관적인 면이 강조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발자크와 스탕달 자신들은 어떤「유파」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리얼리즘 문학의 규범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유파로서의 리얼리즘은 19세기 중엽에 주창되었으나, 그 운동 자체 속에서는 위대한 작가를 내놓1測?못했다. 이 경우 리얼리즘이란 말에는 상기한 바와 같은 가치적 의미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층 계급의 환경을 자세히 묘사하려는 경향은 그 후의 자연주의 문학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
◑ 인상주의(Imperssionism) : 예술상의 주장으로서 음악·문학 분야에도 적용되나, 주로 19세기 후반의 회화상의 운동을 말한다. 쿠 르베 등의 사실주의적 입장을 이어, 전통적 주제화에 시종하는 아카데미즘에 반항, 자연의 직접적 인상 (印象)을 표현하려하여 마네를 중심으로 젊은 화가들이「카페 게르브와의 모임」이라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는 모네, C. 피사로, 르느와르, 세잔 등 외에 졸라도 참가하였다. 그들은 1874년「화가·조각가 ·판화가의 익명 조합 전람회」를 열어 주위의 통박을 받았다. 그때, 풍자 잡지 기자 루이 르 르와가 모 네의 '인상(해돋이)'이라는 그림의 제목을 따서「인상파 전람회」라고 소개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 겼다. 이 전람회는 8회 계속되었는데,「밝게, 더욱 밝게」를 주제로 했다. 후에 이 화풍도 점차 인정받게 되자, 화가들은 각자 독특한 자연 묘사 방법을 찾아 헤맸다. 배경은 적당히 그려 치우고 어두운 배경에 눈부시게 강한 빛을 받도록 그린 것이 특징이었는데 그들은 물체가 존재한다는 것, 즉 물체가 보인다는 것은 햇빛이 비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햇빛을 그리면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색채가 흐리 터분해지는 것을 싫어하여 원색 그대로의 그림 물감을 사용했다. 또 아틀리에를 떠나 자연 속에서 대상 을 구했으므로 호외파(戶外派)·외광파(外光派) 화가라고도 일컬어졌다.
◑ 자연주의(Naturalism) : 19세기 후반의 실험 과학의 진보에 따라서 일어난 문학상의 주장. 프랑스에서는 1870년 이후 텐의 실 증주의 철학의 영향 밑에 공쿠르 형제, 모파상, 졸라 등이 이 경향의 소설을 썼다. 졸라의‘실험 소설론 ’(1880)은 자연주의의 극단적인 선언서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창작할 때에 작가의 개성, 상상력을 배제 하고, 오로지 일상적인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그 소설들은 뛰어난 것도 있 으나, 발자크나 스탕달 등의 리얼리즘과 비교하면 지나치게「세부를 위한 세부」에 중점을 두어, 사회와 인간과의 사이의 생생한 상호 관계를 묘사함으로써, 전형적인 인간상을 만들어 내는 데에 실패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주의를 부정해 버릴 수는 없으며, 졸라나 모파상처럼 19세기말의 타락한 사 회와 인간을 그려낸 소설은 그 의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 밀레의 <이삭 줍기(1857년)> : 노르망디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밀레(millet, 1814∼75)는 빈곤한 생활과 싸우면서 농민 화가로서의 길을 추구한 자연주의 화가이다. '이삭 줍기' 란 농민 중에서도 최하층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여기서 밀레 는 먼 곳에서 부지런히 가을걷이를 하고 있는 보통 농민들과,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는 비참한 여인들과의 대비를 구상했던 것 같다.
◑ 공리주의(Utiliarianism) : 산업혁명 이후 시민 계급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공리의 원리' 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을 갖는 것을 전제로 하여 행위의 주체가 개인인가 집단인가에 구애되지 않는다. 국가의 정치도 이 인간성 에 입각해야 하며 그 임무를 자유와 안전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유 방임주의이기도 했다. J.S.밀은 쾌락에는 양만이 아니라 질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공리주의, 자유방임주의에서 사회개량주의에의 길을 열었다.
◑ 경제적 자유주의의 확립
사유 재산은 개인들의 노동과 금욕의 결실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금욕의 결실을 그들 스스로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적도 없이 넘겨받는다면 이는 사유 재산이라는 제도의 본질이 아니고 단지 우연한 결과의 것인데 이러한 결과는 어떤 수준까지는 발전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진전은 없고 오히려 사유재산을 합법화시키는 궁극적인 점에서는 충돌을 하게 된다.... 보편적 교육, 사회구성원의 정당한 제한이라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현재의 사회 제도하에서 빈곤이 없을 수 있을 것이다..... 재산 제도는 근본적인 요소로서 제한될 때 개인이 각자의 수고에 의해 생산한 것을 배타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존재하거나 혹은 생산한 사람들로부터 폭력이나 기만이 없이 선물의 형태로 혹은 정당한 동의로서 받은 것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할 때 존재할 수 있다. 전체의 기반은 생산자 스스로가 생산한 것에 대한 생산자의 권리이다. < 존 스튜어트 밀의 [경제학 원리]>
◑ 실증주의(Positivism) : 19세기에 일어난, 실험과 관찰을 학문의 기반으로 삼는 입장.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가 주장하였다. 여러가지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신이나 그 밖의 형이상학적인 것을 피하고 관찰과 실험에 의해 물질 중 에서 원인과 결과를 구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입장이 명확하게 표시된 것은 콩트의 '실증 철학 강의'에 의해서였다. 실증주의적인 사고 방식이 생겨나, 하나의 시대를 풍미하게 된 배경 중에는 19세기에 있어 서의 자연 과학의 발달, 그리고 정신보다는 물질의 우위를 인정하는 자본 사회의 두 가지 측면을 무시 할 수 없다. 즉 실증주의란 19세기의 물질주의를 철학적으로 이론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문학 면에서도 나타나, 생트뵈브, 텐 등의 문학 비평과 졸라를 대표로 하는 자연주의 문학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이 사고 방식이 계승되어, 신비적·비과학적인 학문 경향에 대하여 과학적인 사고법을 길러 주는 힘이 되었다.
◑ 콩 트(Comte: 1789 ∼ 1807) : 그는 관념론 철학의 추상성을 배격하고 인간 사회도 자연계를 연구하는 것과 꼭 같은 과학적 방법에 의해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사상의 발전 단계를 신학의 시대, 형이상학의 시대, 실증적 시대로 구분하고 사회학(Sociolgy)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실존주의(Existentialisme) : 실존만을 확신하는 사상 및 이에 바탕을 둔 행동. 현재 이 명칭의 기원은 흔히 니이체, 키에르케고르 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어원적으로는 그리스 시대 이래로 생각되어 왔음이 분명하다. 이 사상은 본직 을 파악함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주체적으로 실현화된다.「실존은 본질에 선행된다」하며, 존재하면서 자기를 형성함은 존재 이전에 속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념론적 보편주의와 대립되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적 개관 실증주의와도 대립된다. 주체적 인간을 문제로 삼으며 사상사적으로는 니힐리즘에 대한 극복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창조에 수반되는 불안·고독·절망·고뇌는 피할 수 없으나, 그것을 초월하는 자유와 책임과 결단을 소유한다. 기본적 사상의 완성자는 하이데거인데, 그는 기초적 존재학으 로써 「생의 철학」을 설명하고, 동시에 「실존주(實存疇)」와 「실존적(實存的)」과를 구별하였다. 현재 의 대표자로는 사르트르, 야스퍼스, 마르셀 등을 꼽을 수 있다. 창조에의 방법론에 있어서 궁극을 신에 게로 돌리는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의 종교적 실존주의와 니이체, 사르트르, 마르셀의 무신론적 실존주 의로 대별된다. 또한 이 사상은 고도로 발달된 근대 문명 속에서의 인간성이 상실과 두 차례의 대전에 따르는 사회 불안을 배경으로 하여,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를 중심 무대로 융성하였다. 마르크스주 의에 대결하는 유럽의 최후적이고도 유일한 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실존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뒷받침하는 사상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 맬더스(Malthus, Thomas Robert :1766-1834) : 영국의 경제학자 인구론자,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1805년 이후 죽을 때까지 동인도 대학의 역 사 및 경제학 교수로 있었는데 그는 세계 최초의 경제학 교수로 있었는데 그는 세계 최초의 경제학 교 수였다. 1798년 '인구론' 제1판을 '미래의 사회 발전으로서의 인구론'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하고, 1803년 에 증정판을 출판하였다. 이 저서를 통하여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급진주의적인 자본주의 비판에 대항하여, 빈곤은 사회 제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의 증산율과 인구의 증가율 사이에 존 재하는 자연적인 차이에 의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인구 법칙은 마르크스에 의해 심한 비판을 받았으나, 그 후 현재까지 자본주의 경제학 내지는 자본주의 사회 과학으로부터 암묵 또는 명시적인 전제로서 계 승되고 있다. 그의 경제학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고전파 경제학에 속하지 않고 속류(俗流) 경제학으로 구 별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과소소비설은 케인즈에 의해 재인식되어 케인즈 파로부터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인구론' 외에 중요한 저서로 '경제학 원리'(1820) 등이 있다.
세계문화사(중)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