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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사
분열사
김 영 선
제1편 전래사
제1장 기독교의 동양전래
1.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중국 전래에 대하여 약술하라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때이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파사(波斯)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 칭하기도 했으며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대진(大奏)을 넣어 대진교(大奏敎)라 불렀다. 대진승(大奏僧)은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를 의미하고 대진사(大奏寺)는 그 사원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대진경교(大奏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알로펜이 이끄는 선교단을 환영하고 장안에 정착하도록 배려한 태종은 638년에 경교를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의 하나로 선포하였고 장안 의령방에 사원을 건축하여 대진사라 칭하였으며 승려 21명을 두어 포교하도록 하였다.
태종에 이어 고종(高宗)대에 이르러서도 경교는 계속 보호를 받았다. 고종은 경교를 진종(眞宗)이라 하였으며 전국에 경사(景寺)를 건립하였고 알로펜에게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란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후대하였다.
현종(玄宗) 숙종(蕭宗) 대종(代宗) 덕종(德宗)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경교는 삼이사(三荑寺=회교, 조로아스터교(祅敎), 경교)의 하나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인 고위관리들 가운데 경교를 숭배한 인물들도 여렷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 알로펜을 영접했던 방현령을 비롯하여 현종 때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고력사(高力士), 숙종․대종․덕종 3대를 섬긴 명장 곽자의(郭子儀)와 그의 밑에 있던 이사(伊斯)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781년 덕종 건중(建中)2년에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奏景敎流行中國時)를 장안에 있는 대진사 경내에 건립했다. 이 경교비야말로 중국에서의 경교 역사와 실태를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교는 845년 무종(武宗)의 회창멸법(會昌滅法) 조치에 의하여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 예수회의 일본 선교에 대하여 설명하라
인도 고아에서 8년 동안 선교하면서 예수회의 동양 선교 발판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가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을 다녀 온 바 있는 친구이자 포르투갈 선원 핀토(Memes Pinto)로부터 받은 권유 때문이었다. 또한 사비에르는 다른 친구 알바레스(Jarge Alvares) 선장의 소개로 일본인 안지로(安次郞) 일행을 만났고 그들을 고아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 수업을 받게 하면서 일본 선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 마침내 사비에르는 토레스(COSIne de Torres)신부, 페르난데스(Joao Fernandez)수사. 안지로 등과 함께 1549년 8월 15일에 일본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했다. 이것이 일본 기독교 선교의 시작이다. 사비에르가 2년 3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전도한 결과 1천 5백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는데 이것이 일본 선교의 기초가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불교의 한 유파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교는 일본에서 남만종(南蠻宗), 천축종(天竺宗)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들이 불교인이 아님은 곧 알려지게 되었고 대신 기리시단(切支丹, 혹은 吉利支丹)이란 독창적인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포르투갈 말로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Christao에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관심을 두고 접근했던 영주나 다이묘들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리시단으로 개종하는 예가 속출하게 되었다. 명문 출신의 기리시단들을 특별히 기리시단 다이묘(切支丹 大名)라 부르는데 이들의 개종은 한 개인의 개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그가 지배하고 있는 성(城)주민들의 개종으로 연결되어 기리시단의 수적 증가를 가져 왔다. 그 결과 1570년에 약3만 명의 기리시단이 생겨났고 1579년1O만 명, 1581년 15만, 1587년에는2O만 명에 이르렀다. 특히1570~82년의 10여년 간이 일본 기리시단 역사의 절정기로 큐우슈의 3대 명문 오오토모 ․아리마 ․오오무라에 의해 12, 3세 되는 소년들로 구성된 사절단이 로마 교황청에 파견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상류계층인 영주들이 기리시단으로 개종한 것은 신앙적인 동기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선교사를 통해 포르투갈․스페인 등과 무역하고 서양의 신무기를 얻으려는 세속적인 목적도 크게 작용하였다. 후에 기리시단에 대한 정부의 박해가 가해졌을 때 끝까지 신앙을 수호하며 순교했던 다이묘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배교하고 만 것도 이 같은 입신 동기를 반증해 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처럼 빠른 기간 중에 유행하게 된 기리시단 신앙이 정부측의 탄압을 받기 시작한 것은 1587년 무렵부터였다. 당시 일본 통치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었는데 집권 초기에는 기리시단을 보호하는 정책을 펴다가 얼마 후 기리시단을 사법(邪法)으로 규정하는 금교령을 반포하였다. 그가 기리시단을 금하게 된 동기는 기리시단 세력이 정치적 위협 요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1596년 우라도에 정박 중이던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San Felipe)호 선원이 스페인의 위력을 자랑하면서 일본인들을 위협한 언동을 한 것이 토요토미를 분노케 하여 선교사 6명과 일본인 기리시단 20명을 체포하고 나가사키에서 처형시킴으로 기리시단 박해가 본격화되었다.
그의 후임들도 계속 기리시단을 박해하였으며, 1623년 통치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도 계속 기리시단을 금하였는데 1637년 시마바라에서 일어난 농민주동의 반란에 기리시단 신자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구실로 또다시 기리시단에 박해를 가했다. 결국 1639년에는 네덜란드 선박을 제외한 어떤 외국선박의 입항도 금하는 한편 외국 선교사를 추방하고 기리시단을 박해함으로 기리시단은 표면적으로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1853년 안세이(安政)조약 체결로 문호를 개방하고 기독교 선교가 재개되기까지 거의 200여 년 동안 일본에서는 기독교 역사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회에 의해 추진된 일본 선교는 기리시단 역사를 창출하여 기독교 신앙을 일본에 접목시킨 것 외에도 포르투갈. 스페인의 서구 문화가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 문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 대하여 쓰라
예수회의 일본 선교를 개척한 사비에르는 1551년 말에 고아로 귀환하였다. 그는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극동 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한 듯하며 중국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일을 위해 고아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사비에르는 1552년 4월에 중국을 향해 고아를 출발했고 8월 하순에 중국 광동에 가까운 상천도(上川島)라는 섬에 도착하였으나 이곳에서 중국 선교를 준비하다가 그 해에 사망함으로 중국 선교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로마 교황은 1568년에 이르러 카르네이로(Carneiro)를 중국 주교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교에 착수토록 했다. 카르네이로의 뒤를 이어 1573년에 발리냐니(Alexandro Valignani, 范禮安)가 40명의 선교사들을 이끌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 후 발리냐니의 요청으로 도착한 루지에리(Michael Ruggieri, 羅明堅)는 마테오 릿치(Metteo Ricci)를 중국으로 인도했다. 이 들은 모두 예수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철학, 과학 분야의 고등교육을 받은 예수회 소속의 학자들로서 마카오에 머물면서 우선 중국어 학습에 몰두하였다.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선교하는데는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중국 문화에 긍정적으로 접근한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583년 루지에리와 릿치는 광동성 수도인 조경(肇慶) 지부(知府)를 방문하고 정중한 예절을 갖추어 선교 허락을 요청하였다. 선교 허락 요청을 받은 지부는 서문밖에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경에 3층 짜리 유럽식 성당을 1년만에 건축한 루지에리나 릿치는 중국인들의 문화 전통과 타협하는 태도를 취하며 선교에 착수했다. 루지에리는 광동에 정착한 이듬해(1584년)에 한문으로 〈성교실록〉(聖敎實錄)을 간행하였다.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으론 처음 것이었다.
릿치는 같은 해 〈산해여지전도〉(山海與地全圖)라는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이 지도는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만 알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루지에리나 릿치는 우선 중국인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문화적인 접근 방법을 썼다. 복음이나 교리를 전하는 것은 가급적 삼갔다. 이 같은 방법은 문화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중국인들에게 효과가 있었다. 중국 선교를 개척한 루지에리와 릿치는 구체적인 선교 방법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루지에리는 중국 민중을 주요 선교 대상으로 삼은 반면 릿치는 유식 계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루지에리는 민중 종교였던 불교의 문화 양태를 이용하려 했으나 릿치는 지배 계층 종교인 유교의 문화 양태를 이용하려 하였다.
루지에리는 로마 교황으로 하여금 명 황제에게 직접 사절을 보내어 선교 허락을 얻게 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여겨 1588년 이탈리아로 귀국하였다가 중국에 다시 귀환하지 못한 채 1607년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중국 선교는 릿치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유식자 계층, 지배 계층을 지향하는 선교가 추진되었다.
제2장 천주교의 조선 전래
1. 조선인들의 서학 연구와 실천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1. 서학 연구
천주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최초의 형태는 조선사회의 내부적 모순을 타개하고자 했던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서학(西學)이었다. 어느 민족,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 즉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청과 조선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외교사절단 부연사행(赴燕使行)은 중국의 수도 연경(또는 북경)을 방문했다. 그 중 일부는 그 곳의 천주교회당에 가 선교사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이들을 통해서 우리 나라에 서학 물품들이 유입되게 되었다.
서학연구의 근거가 되었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 기물의 조선 유입은 이미 17세기초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서학 유입 시기를 지나 18세기 중엽부터는 조선 학자들 가운데 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은 이 익(李 瀷)이었다. 이 익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되어 ‘조선 서학’이란 학문 체계가 수립되며 조선 후기 실학 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서학을 연구했던 초기의 양반들은 대부분 실학자(實學者)였다. 이들 실학자들 중에 서학의 기(器)적 측면을 강조했던 북학파는 북경을 다녀온 홍대용을 비롯한 박지원, 이덕형, 박재가 등으로서 이들은 서양 과학과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부국유민(富國裕民)을 위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기여하려는 의도를 가졌지만 종교적인 면에서는 서교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서학의 이(理)적 측면을 강조하는 부류는, 조선 서학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형성한 기호(畿湖)지방 남인계(南人係) 학자들로서 이익의 제자들이 주축 되어 생긴 성호학파(星湖學派)였다, 이들은 서학의 사상적 근거인 서교, 즉 천주학(천주교)까지도 적극 수용하여 실천하려는 모험적인 학자들이었으니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 벽, 이승훈, 이기양 등이었다.
2. 서학 실천 운동
이들 성호 학파들은 학문으로서만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실천 운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1770년에 이르러서는 이 벽(1754-1785)의 제자 홍유한이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신앙실천운동의 최초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보다 확실한 신앙 실천은 1777년(정조 원년) 겨울에 성호 좌파(星湖 左派)의 영수이며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이 정약전 등 수명의 학자들과 함께 교리 연구회로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교리 연구회는 그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779년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라는 서울에서 100여리 떨어진 외딴 절에서 교리 연구회 모임을 갖고 신앙 실천을 여행(勵行)하였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천주교 서적들을 읽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변하기에 충분하여 즉시로 새 종교에 대하여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 강학에 참가한 자들은 성호좌파의 영수인 권철신의 문하생이였고 이들과 교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강학에 참석한 자들은 권철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이벽 등 여섯 명을 들고 있는데, 1779년을 천주교 창립 년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윤하, 이승훈, 정약종, 정약용을 포함시키고 이들을 한국 천주교의 창립성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벽은 천주공경가를, 정약전은 십계명가를, 이가환은 경세가를 지어 불렀고 매월 7. 14. 21. 28일에는 안식을 취하고 육식을 피하며 이 모든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극히 비밀리에 실천하였다.
결국 강학회는 조선 서학파의 실질적 구분을 가능케 했다고 볼 수 있다. 학문적 연구로, 또는 혈연, 지연으로 관계를 맺어왔던 자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생활 습관을 바꾸는 데서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천주교의 창설과 포교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1. 조선 천주교의 창설
1783년(정조 7년)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都)이 동지사俊至使)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도 부친을 따라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보고 그곳에 있는 서양 선비(선교사)를 만나보고 신경(信經)도 얻어오고 아울러 영세도 청하여 받고 오도록부탁하였다.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이 벽의 말대로 북경의 북천주당을 찾았다. 북천주당은 예수회 해산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맡아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얻어 열심히 읽고 또 신부의 가르침도 받았다.
▶ 이 과정 속에서 이승훈은 자신이 입교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부친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그라몽(J.J. de Grammont, 梁棟林) 신부에게베드로란 영세 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784년 정월 말경 귀국 직전이었다.
세례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서 많은 책과 십자고상(苦像)과 성화 등 천주교 성물을 받아 가지고 1784년 서울로 귀환하였다.
이 벽은 이승훈을 통해 전달받은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오랜 동안 은둔처에서 책을 읽으며 천주교교리에 접했던 그는 신앙의 확신을 가진 후 먼저 이승훈․정약전․정약용 등 가까웠던 동지들을 찾아가 이벽은 보다 적극적인 신앙 실천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벽은 계속해서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1784년 9월경 이승훈은 이 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벽에겐 세례자 요한, 권일신에겐 프란체스코 사베리오란 세례명이 주어졌다.
권철신의 외숙이었던 홍교만(洪敎萬)도 이 무렵 입교하였는데 홍교만에 의해 그의 고향인 경기도 포천지방에도 천주교 신앙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권일신은 충청도 내포(內浦, 현 아산지방) 출신인 이존창(李存昌), 전라도 전주 출신인 유항검(柳桓險)을 교인으로 얻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예산 사람 홍낙민(洪樂敏)이 이승훈․정약용 등과 친분을 나누던 중 교인이 되었고, 전라도 진산(珍山)사람 윤지충(尹持忠)이 김범우의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서울과 경기도 마재 ․양근 ․포천 지방, 충청도 내포, 예산 지방, 전라도 전주․진산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조선 천주교회는 창설되어 갔다. 이승훈의 수세(受洗), 그리고 이승훈에 의한 이 벽 ․권일신 세례, 위 3인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에 의해 자생적(自生的)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2. 포교활동
▶ 윤유일, 지 황 등은 북경에 들어가 그 동안의 박해 상황을 주교에게 보고하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 북경 주교로부터 사도직 수행을 위한 일반적인 권한과 비상 권한을 모두 받은 주문모 신부를 안내하여 1794년 12월 23일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1795년 초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이 맡아 관리하던 북촌 사택에 거주하며 우리말을 익히는 한편 은밀하게 세례 등 성사를 베풀기 시작했다. 신부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자 은둔했거나 배교 했던 교인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외국인 신부가 국내에 들어와 종교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관청에까지 들리게 되었고 1795년 6월 국왕의 신부 체포령이 떨어졌다. 마침 주문모 신부는 조선인 교인들의 주선으로 체포를 면하고 멀리 연산의 이보현(李步玄)의 집에 숨을 수 있었으나 신부 영입을 주도했던 윤유일․지 황은 물론, 신부사택을 마련했던 최인길까지 체포되었다. 이들은 1795년 6월 28일에 처형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되어 홍낙민, 김종교, 허 수, 이가환, 이승훈, 황사영 등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는데 대부분이 배교 하거나 신부 입국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이 드러나 풀려났다. 일이 이 정도로 정리된 것은 무엇보다 정조(正祖)가 과격한 천주교 탄압을 싫어했으며 권력을 잡고 있던 채제공이 남인(南人) 시파(時派)에 속했던 인물로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대부분 자신과 같은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을 축소화하려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다.
연산으로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는 1년 후 다시 서울로 잠입하여 여자교인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이후 6년 동안 은밀하게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해 나갔다. 1년 전의 사건을 거울삼아 교인 접촉에도 신중을 기했다. 신부의 행방은 강완숙 만이 알고 있었다. 성사 집행은 엄격한 심사를 거친 교인들에게만 베풀어졌다. 교인들조차도 신부가 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주문모 신부의 활동이 여러 가지 면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으나 그의 활약으로 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특히 그가 들어온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여성 교인들의 증가라는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3. 천주교의 초기 박해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을사 추조(乙巳 秋曹) 적발 사건
1785년(정조 9년, 乙已) 봄에 형조의 금리(禁吏)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성당자리)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 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정약용 3형제, 권일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책유(責諭)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 추조 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 이 사건으로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비록 중인 계층의 김범우 한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사건으로 천주교회의 실체가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보수적 유림들로부터 천주교가 배척 당하기 시작하였다.
2) 정미 반회(丁未 泮會) 사건
1787년(丁未) 겨울에 이승훈․정약용․강이원(姜履元) 등이 반촌(泮村)에 있는 김석태(金石太)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 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성죄치토(聲罪致討)하도록 해야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서학의 사설(耶說)을 금하지 않으면 점차 백성들에게 퍼져 무군멸친(無君滅親)하는 폐단이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우선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는 것이 시급하다고 하였다. 정조(正祖)는 마침내 그 청을 받아들여 집안에 비장 된 서학서들을 모두 불에 태우거나 물에 던져 버리고 북경으로부터의 서학서 수입을 엄중 단속하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3) 진산 사건
1791년(정조 15년, 辛亥)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상연(權尙然)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外從)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 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外從兄)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 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神主)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고 있던 상례(喪禮)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 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은 홍낙안이었다. 그는 진산 사건에 접하자 즉시 당시의 집권자 채제공에게 윤지충을 사형시킬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냈고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에게 윤지충의 체포를 촉구하고 나섰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는데 윤지충은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는다고 분명하게 밝힘으로 당시 유교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던 봉건주의 사회체제에 큰 반향을 이르켰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亂行)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음 11월 13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진산 사건은 양반계층 교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진산 사건 이후 대부분의 양반 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았다. 홍낙안에 의해 진산 사건의 두목이란 모함을 받은 권일신은 1791년 11월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제주도 유배형이 선고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이 흔들려 천주교를 비난하는 글을 쓰고 말았으며 이미〈벽이문〉(闢異文)이란 글을 지어 천주교를 배격하는 입장을 선언하고 평택 현감으로 봉직 중이던 이승훈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홍낙안의 비난을 받게 되자 재차 자신의 무관함을 밝히는 글을 쓰기도 했다. 충청도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도 이 무렵 배교 하였다.
진산 사건으로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금하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박해와 안에서의 배교로 나타났다.
성사는 중단되고 교인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천주교회를 지켜나간 인물들은 중인계층의 교인들이었다. 역관 출신인 최창현․윤유일 ․최인길, 악사(樂師) 출신인 지 황 등은 양반계층이 떠나간 초기조선천주교회를 지켜 나갔다. 이들에 의해 신부 영입운동이 추진되었고 흩어진 교인 규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4. 천주교의 수난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신유사옥(邪獄)(박해)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즉위했으나 나이가 11세에 불과해 순조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活) 김(金)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수렴청정을 계기로 벽파는 정조 때 남인시파에 눌려 정치적으로 배척 당했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이 같은 정치적 갈등의 배경에서 야기된 천주교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로 표현되는 1801년의 대규모 교난(敎難) 사건이었다.
황사영 백서사건
신유박해는 9월 25일 충청도 제천 배론〔舟論〕에 숨어 있던 황사영이 체포됨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가 체포될 때 북경에 보내려고 만들었던 장문의 서한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정부를 더욱 흥분시켰다.
황사영은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배론으로 피신하였으나 박해 초기에 이미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다. 이 같은 급박한 상황에 처한 황사영은 배론의 은둔처에서 박해내용을 비단에 적었는데 이를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라 한다.
2. 기해 사옥
1839년(헌종 5년)에 신유박해보다 더 치열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그것이 곧 기해박해(己亥追害)이다. 이 박해는 이지연을 비롯한 풍양조씨 세력이 순원왕후에게 천주교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여 이를 물리치지 못한 순원왕후의 박해령 포고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박해는 4월 18일에 선포된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서 비롯되었다. 오가작통법 실시를 골자로 한 이 교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으로 교인 체포가 실행되었고 기왕에 잡혀 들어온 교인들에 대한 심문과 처형이 실시되었다. 5월 24일, 남명혁 ․권득인 ․이광헌 ․박희순 ․이아가다․김업이 등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한 것을 필두로 서울과 전주 ․홍주 ․공주 ․원주 등 지방에서 교인 체포와 처형이 진행되었다.
김순성이란 배교인(背敎人)이 있어 교인들에 대한 정보를 정부에 알려 주어 많은 지도급 교인들이 체포되었는데, 유진길 ․정하상․조신철 등 교회 재건운동의 주역들이 그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또 김순성의 간계로 8월에는 앵베르 주교까지 체포되었다. 그리고 모방 ․샤스땅 신부도 앵베르 주교의 자수권유 서한을 받고 자수하여 체포당했다. 세 명의 프랑스 신부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심문을 받은 후 9월21일에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그해(1839년) 11월에 정부는 〈척사윤음〉(斥邪輪音)을 반포하여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정부 처사의 정당성을 백성에게 선전하였는데 이 윤음 반포는 박해를 마무리 짓겠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 이상 가는 피해를 교회에 안겨다 주었다. 이 무렵 기록된 〈긔해일긔〉에 따르면 참수된 순교자가 54명, 옥중에서 죽은 자가 60여명에 이르며 배교하고 석방된 자가 4, 50명에 이른다. 이처럼 처참한 박해를 받았으나 교회의 회복능력도 전보다 강하여 신유박해 때처럼 오랜 세월 폐허상태에 머물지는 않았다. 교황은 순교한 앵베르 후임으로 1843년 1월 페레올(J. J. Ferreol-高) 신부를 3대 주교로 임명하였고 메스트르(A. Maistre-李)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여 입국하도록 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1836년 마닐라 유학을 떠났던 김대건은 1845년 8월 조선인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고 입국의 기회를 모색했다. 마침내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새로 임명된 다블뤼(M. A. N. Daveluy 安敦伊) 신부와 함께 18455년 1O월 12일 충청도 강경을 통해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페레올과 다블뤼는 도착 즉시 서울과 충청도 지방에서 선교활동에 착수했다. 김대건 신부는 만주에서 입국의 기회를 찾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을 주선하기 위해 황해도 해안으로 갔다가 등산곶 근처에서 등산첨사 정기호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것이 1846년(헌종 12년) 6월 5일의 일로 이 사건을 계기로 또 한 차례 박해 선풍이 불었다. 페레올이나 다블뤼는 다행히 체포를 면했으나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현석문 남경문 등 기해 박해 때 살아 남은 교인들이 처형당했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박해를 병오 박해라고도 하나 1839년의 기해 박해의 연장으로 취급하고 있다.
3. 병인 박해와 양요(洋擾)
1836년 모방 신부가 한국에 온 이래 30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신부가 20명이나 입국하여 희생적인 선교활동을 폄으로 조선 천주교는 184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하여 1865년에 이르러는 2만 3천 여명으로 증가했다. 이런 천주교회는 결국 1866년(고종 3년 丙寅) 엄청난 박해의 회오리에 말려들게 되었다.
1) 병인 박해
병인 박해의 원인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천주교회의 수적 부흥이다. 강화 도령 철종(哲宗)이 현종 서거 이후에 즉위하였는데, 철종은 신유 박해 때 죽은 은언군(恩彦君)의 직손이므로 천주교 확장의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여건을 배경으로 신부들이 밀입국하여 전도활동에 박차를 가하여 1857년에는 1만 3천여 명의 교세를 확보하였고 1865년(고종 2년)에는 2만 3천여 명이 되었다. 또 국내에 있는 외국인 신부만도 12명이 되었는데, 이것이 박해의 원인이 되었다.
또 다른 원인이라면 박해를 감행한 섭정 흥선대원군의 과격한 내정 개혁으로 인한 내적인 저항과 잇따른 이양선(異樣船)의 내침으로 외적인 침략의 위협을 받게 되므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방법의 하나로 천주교 박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당시 국내는 동학란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동북 국경 지역은 제정 러시아의 침공으로 어려움이 많았었다.
이때에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홍 봉주(洪凰周), 김 기호, 남 종삼(南鍾三) 등이 러시아의 남하를 방지하기 위하여 신부를 조선에 파송하고 순교자까지 낸 프랑스와 대영제국의 협조를 얻어, 조영불(朝英佛) 삼각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저지하고 그 대신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하였다.
천주교 교인들이 여기에 대하여 희망적인 전망을 가진 것은 그 당시의 섭정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그 측근들이 천주교에 대하여 상당한 관계가 있었고, 대원군의 부인과 고종의 유모도 천주교 신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 종삼 등의 계획에 대하여 베르누 주교는 교정 분리〈敎政分離)의 원칙에 따라 개입하기를 꺼려하였다. 대원군은 신부들에 대한 한 가닥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자 탄압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청나라에서도 심한 탄압이 있었고 국내에서도 서학(西學) 배척의 여론이 비등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의 칼을 빼 들은 것이다.
1866년(고종 3년-병인)의 천주교 교도 대학살은 앞에 있었던 어느 박해보다 크고 넓은 실로 비참한 박해였다. 1866년에 시작하여 대원군이 실각하는 1873년까지 8년간이나 조선 전역에 미쳐서 계속되는 박해였던 것이다.
6명의 외국 신부들이 순교 당하고 약 8천-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신도가 순교 당하는 비참한 참극이 일어났다.
2) 병인 양요(洋擾)
병인 박해가 국내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와의 충돌이라는 대 사건으로 확장되고 말았다.
박해에서 몸을 피한 프랑스의 리델(Felix Clair Ridel) 신부가 한국인 교인 11명과 함께 어선을 타고 서해를 건너 천진(天律)에 있는 프랑스 공사관을 찾아가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 상을 보고하였다. 프랑스 인도지나 함대 사령관 로즈(P.G. Roze) 제독은 제1차로 한강변 서강(西江)에, 2차로 병인년 lO월에 7척의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하였는데. 이때에 리델 신부가 통역으로 동승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살상과 만행을 일삼았고 귀중한 사고(史庫)를 불태우고 많은 사료들과 은괴를 찬탈해 가는 죄악을 범하였다.
이들이 강화도에 침공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퇴각함으로서 반대로 천주교의 박해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대원군은 어린아이들까지 모든 교인을 다 죽이기로 하는 순교의 회오리가 다시 불어왔던 것이다.
3) 남연군묘 도굴 사건
1868년 6월에는 독일인 상인 오페르트(E. 0ppert)가 충청도 덕산에 상륙하여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묘소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터졌다. 1866년에 이미 두 차례나 조선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고 돌아간 오페르트는 남연군 묘소를 도굴하여 무덤에서 몇 가지 유물을 담보물로 잡고 대원군의 기세를 꺾어 보려는 계획이었다. 그는 페롱 ․깥래 둥 조선에서 탈출한 신부들과 최선일 등 조선인 교인들의 안내를 받아 덕산에 상륙하여 남연군 묘소를 파다가 서해안의 바닷물이 빠지는 바람에 중단하고 돌아갔다. 이 사건은 대원군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신부와 교인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됨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 한층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4) 신미 양요
l866년(병인년) 7월 평양 대동강에 미국 국적의 상선 제너럴셔만(The General Sherman)호가 나타나 무장한 채 1O여 일 버티다가 조선 군인들의 반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배에는 웨일즈계의 영국인 목사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Robert Jarmain Thomas)가 통역의 자격으로 동승하였는데, 그는 1866년 음력 7월 27일(양력 9월 3일)에 대동강변에서 순교하였다.
이 사건은 국제적 외교 문제로 번졌다. 일본과 중국을 중계로 한 외교적 교섭이 계속되다가 1871년 5월에 미국 극동 함대 사령관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이 군함 4척을 이끌고 영종도를 거쳐 광성진(廣城鎭)까지 진출하였으나 만행만 저지르고 퇴각하였다. 이리한 사건은 천주교의 수난을 더하게 한 것이었다. 리델 신부가 안내역으로 동승한 것이라든지. 한국인 신도 몇 명이 안내역을 하여, 밤마다 천주교 신도들이 미국 함대와 접촉을 꾀한 점등이 더욱 박해를 심하게 하였다. 대원군은 종로 네거리와 각 지방에 척화비를 새우고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제3장 개신교의 전래
1. 서해안을 통한 개신교의 접촉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바실 홀의 성경 전달
조선에 성경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이었다. 그는 1816년 중국으로 파견된 사절단을 태우고 온 배의 선장으로서 조선 서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맥스웰(MaxweU)과 함께 배를 타고 1816년 9월 1일에 백령도와 대청도(大靑島)근방에 상륙하여 여러 가지 진귀한 물품을 그곳 주민들에게 주는 동시에 당시 중국 선교사로 와 있던 모리슨(Morison) 목사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왔던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9월 5일에는 군산만에 들어가 비인에서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다른 선물과 함께 성경을 전하였다. 그는 다시 약 1O일간 다도해 근방을 순항하였고 추자도에도 상륙하였는데, 아마 여기서도 성경을 전한 듯 하다.
2) 귀츨라프의 선교 활동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사람은 귀츨라프(Carl.A.F.G tzlaff)였다. 그는 유태계 독일 태생으로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동남아선교의 뜻을 두고 중국에 머물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배 암허스트호를 타고 1832년 7월 17일 경에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에 나타나 가지고 온 책과 물건을 주면서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암허스트호(Lord Amherst)는 한국의 서해안을 답사하였는데, 백령도와 대청도, 그리고 소청도에서 정박하였을 때 성경을 반포하였다고 한다. 이 섬들을 서양인들은 제임스 홀 군도(James Hall Group of bland)라고 한다.
암허스트호는 항해를 계속하여 7월 23일 경에는 충청도의 홍주만 고대도에 정착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에 머물면서 지방관리를 통해 왕에게 청원서와 선물을 보내었다. 그 선물 속에는 성서 한 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왕에게 보낸 청원에 대한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그곳 사람들에게 한문으로 된 전도문서를 나누어 주기도하고 지방관리들의 식사초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으로부터의 회신은 중국황제의 허락이 없으면 외국과 통상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결국 귀츨라프 일행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약 한 달간 조선에 머문 후 조선해안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선장 린제이의 1832년 7월 27일자 일기에 보면 그들이 ‘양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한글 자모를 써 받았고, 귀츨라프가 한자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베끼게 했다고 한다.
3) 토마스의 전도와 순교
1866년 7월 미국선박 제너랄셔만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근처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관민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제너랄셔만호에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승선한 영국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가 타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머물며 조선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던 윌리암슨(A.Williamson)의 소개로 조선선교를 결심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상선이 조선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동승하였다.
1866년 8월 9일 중국의 지푸를 출발한 제너랄셔만호는 일주일이 지나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였다. 제너랄셔만호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선원들은 조선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토마스 목사를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며 예수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을 밝혔다.
이에 평양 백성들은 처음에 땔감과 양식을 주면서 친절을 보였으나, 그들이 관군을 억류하고 총을 쏘아대자 관군과 평양백성들이 격분하여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맹렬하게 항거하였다. 때마침 제너랄셔만호가 모래톱에 걸려 꼼짝못하게 되자, 평양백성들은 배에 불을 질러 선원 전부를 포로로 생포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처형당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성경을 나누어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순교하였다. 그때 목격자중 12세 소년이었던 최 치량(崔致良)이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목사는 27세의 나이로 이 땅에 순교의 피를 뿌림으로써 조선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된 것이다.
장로교 마펫(S.A.Maffet)목사는 이로부터 27년 후인 1893년 11월 평양에서 학습 세례 반을 조직할 때 토마스 목사에게 한문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순교의 피는 평양 성을 위대한 기독교 성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2. 중국에서 벌린 선교사들의 조선인 선교 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최초의 주재 선교사가 입국하기 이전 국내의 성경반포는 두 갈래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만주를 통해 주로 조선 북부지방에 반포되는 경로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일본을 통해 조선남부지방에 반포한 경로를 말한다. 우선 첫 번째 경로의 성경 반포 과정을 살펴보자. 한글성경이 간행되기 이전에는 로스의 한글성경번역에 참여한 조선인 개종자들이 만주와 조선을 왕래하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성경을 조금씩 국내에 반포하였다.
그러다가 로스는 최초의 한글성경이 간행되자 식자공 김청송을 그의 고향 즙안에 보내어 성경을 반포하게 하였으며, 1882년 10월에는 서상륜을 대영 성서 공회의 최초의 권서인으로 파송하여 한국에 성경을 반포하기 시작하였다. 서상륜은 3개월간 복음을 전하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온 서상륜은 1883년 후반기에 서울에 성경을 반포하며 전도하였다. 그 결과 서울에도 다수의 개종자를 얻어 로스에게 "서울에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글을 보냈다. 그러나 로스는 본인이 가지 못하고 1884년 봄에 다량의 한문, 한글 성경을 상해 제물포간의 정기항로를 이용해 서상륜에게 보냈다.
한편 김청송에 이어 로스의 한글성경인쇄에 참여하였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제2식자공은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인 평양에 오면서 약 1천 권의 성경을 가지고 와서 판매하였고, 맥킨타이어로부터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은 수세자 중 한 사람도 이 무렵 국내에 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 당시에는 천주교를 극심하게 탄압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비가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이므로 이전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았다. 그래도 초기의 권서인들은 아직 가시지 않은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성경을 반포하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하나의 성경 반포과정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경로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만주에서 한글성경이 최초로 간행된 때는 1882년 초이다. 스코트랜드 성서 공회는 이 성경을 곧 만주와 조선 본토에 반포하고 동시에 이중 일부를 톰슨 총무에게 보내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성경을 반포하게 하였다. 톰슨은 기독교 소책자를 포함한 성경을 받아 일본인 권서인을 통하여 부산에 반포하고 이어 1884년에는 직접 내한하여 부산에 성서보급소(Bible depot)를 개설하였다. 이 성서 보급소는 일본인 권서인을 두어 운영하였는데 아주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3. 알렌, 아펜셀러, 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알렌의 입국
1883년 1O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소속 의료선교사인 알렌 의사는 적당한 선교지를 찾지 뭇하고 있던 중 상해에 있던 친구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의 권유로 한국으로 선교지 변경을 꾀하였고, 1884년 6월 22일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았다.
알렌은 l884년 9월 14일에 상해를 떠나 9월 2O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9월 22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는 영국, 청국, 일본 공사관 공의와 세관 의사로 수고하게 되었다. 그는 의료 선교사이니 만큼 의술을 통해 사회봉사를 하며 복음 전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다.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서 당시 수구파의 지도자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 민 영익이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당시 장안의 유명만 한의 14명이 불리워 와서 치료하였으나 아무도 지혈(止血)할 수 없었는데, 뭘렌도르프의 연락으로 알렌 의사가 와서 치료하였고, 3개월간의 정성스러운 치료로 민 영익이 완쾌하계 되었다. 이로 인해 알렌의 의술이 인정받게 되었고, 그는 궁정 의사 즉 어의(御醫)로 임명받았다. 이와 같이 안렌 의사가 의술을 통해 당시 고위층들과 접촉하게 되어 선교 활동의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하게 되었다.
알렌의 의술이 알려지자 많은 환자들이 몰려 왔으나 이를 자기 집에서 치료하는 것이 어려워 병원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알렌은 이 계획을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에게 말하여 찬동을 받고 한국 정부에 병원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여, 1885년 2월에 병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 한국 정부는 병원 이름을 광혜원(廣惠院)이라 하고, 갑신정변 때 죽은 홍 영식의 집을 병원으로 사용토록 허락하였다. 알렌의 광혜원은 한국 최초의 신식 의료기관이었는데, 1885년 6월에 입국한 헤론(Heron)의사와 함께 진료를 통해 전도하였다
아펜셀라의 인천 상륙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 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 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 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 H. 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 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 매클레이 감리사의 의견이 [여러사람이 함께 한국에 들어가면 의심을 받을 염려가 있으니 따로 따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아펜셀라 목사는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와 함께 일본 나가사끼를 떠났으며 4월 2일 아침에는 한국 땅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곳은 부산이었으며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드디어 인천에 도달하였다.
얼마나 한국 행을 갈망하였던지 그들은 상륙하자마자 땅위에 엎드려 먼 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올렸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을 상륙하였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여!! 어서 속히 이 백성들을 얽어매고 있는 흑암의 사슬을 끊으시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 빛과 자유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펜셀라 목사는 선교회에 보내는 보고문 가운데 위의 기도문을 실었다.
아펜셀라 목사는 상륙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아내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았다]라고 아펜셀라 목사 부부와 언더우드 목사는 함께 한국을 찾아왔으나 한국내의 실정은 아직까지 외국인 여자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아펜셀라 목사는 부득이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언더우드 목사만 서울에 들어갈 수 있었다. 미국 대리공사 포오크 (George C. Foulk)가 아무리 애써 보았지만 [서울에 서양인 여자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사정인고로 부인을 잠시 일본으로 가 있다가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펜셀라는 인천에 도착한지 9일 만인 4월 13일에 부인과 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도착 다음날인 4월 18일 청국의 대표 이홍장과 일본 대표 이또오가 중국에서 텐진조약을 체결하여 우리 나라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기는 하였지만, 그때에는 여독으로 건강을 상한 부인의 치료로 아펜셀라 목사의 한국 입국은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6월 20일에 가서야 아펜셀라 목사는 인천에 또 한번 상륙하였고 서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의 입국
언더우드가 한국을 찾게된 동기와 사정을 회상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은자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 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이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 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 문은 닫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 행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이제 나에게는 본국에 머물러 목회를 하거나 인도에 가는 길밖에는 것 같았다. 나는 이렇게 머뭇거리는 상태에서 뉴욕의 어느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나는 이 청빙에 응하기로 하여 수락하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고 하였다. 그 순간에 [한국에 갈 사람은 없는가,(Not one for Korea)한국은 어찌할 터인가 (How about Korea?)라는 소리가 나의 귀에 쟁쟁하게 들어 왔다. 이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손에 쥐었던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단숨에 중앙 통에 있는 선교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수석서기인 엘린 우드(F. F. Ellin wood)를 만났다. 몇일 후 그에게서 받은 기별은 다음 회의에서 내가 선교사로 임명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는 종래의 배외 정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정을 하였고,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 동안 선배 선교사 인 헤본(James C. Hep
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 나라 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 손에 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큼 컸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4.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의료 선교 활동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알렌의 입국을 통하여 의료 선교는 실시되고 있었다. 의료 선교는 알렌이 고종의 궁정 의사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큰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광혜원을 통하여 진료사업은 한국 사회 각층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1886년에 입국한 앨러스 양은 광혜원에 여자부를 신설하고 여자 상대의 전도 활동을 하였다. l887년 알렌 의사가 워싱톤 주재 한국공사와 함께 가기 위하여 병원을 사임하자 헤론 의사가 원장이 되어 병원을 구리개 즉 오늘날의 을지로 2가로 옮겼다. 감리교 소속 스크랜튼 의사는 1887년 6월 15일에 병실 5개가 있는 병원을 완성하였는데. 고종 황제는 그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니 이 병원은 왕립 양호원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1887년에는 여자 병원이 설립되고 메타 하워드(Meta Howord)라는 여의사가 와서 병원을 맡았다.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의료 선교는 장족의 발전을 하였고 각 계층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2. 교육 선교 활동
의료 선교와 아울러 시도된 것이 교육 선교이다. 교육을 통하여 새 문명을 점하게 하였고,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자 학교를 세운 것은 1886년 5월 31일에 스크랜튼 의사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이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 상황으로 보아서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였고, 여자에게는 이름도, 교육도, 인권도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여자 학교의 설립은 경이적인 것이다. 스크랜튼 여사가 세운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당시로서는 학생 모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아서 숙식, 책, 의복까지 제공하며 공부를 시켰다. 명성 황후에 의하여 〈이화 학당〉이라고 명명된 이 학교는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 1886년 6월 8일 아펜젤러 목사는 스크랜튼 의사의 조수 두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모체가 되어 학교를 시작하여, 고종 황제가 이학교의 이름을 배재 학당(培材學堂)이라고 명명하여 이것이 한국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이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년 5월 11일부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 중 고둥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입국하자마자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업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3. 교회 설립 활동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던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공사판 직원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영어로 예배드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책문에 한국인을 상대로 하여 예배드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만주에서 로스 목사와 갈이 성경 번역사업과 전도 사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인 의주에 와서 전도 사업을 하던 서 상륜은 동생 서 경조와 같이 박해를 피하여 황해도 솔내(松川 ․九美浦)에 있는 삼촌 집으로 왔다. 그는 1884넌 로스 목사가 선편으로 부친 6천 권의 성경을 당시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호의로 인수하여 전도 사업을 하였고. 1885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 된 사실은 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솔내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이며, 한국 교회 역사의 발상지라고 하겠다. 자립 전도를 실시하였고 몇 해 안되어 이 교회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에서 50세대의 장년을 포섭할 정도로 교세가 확창 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에 솔내 교회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전도 활동을 암암리에 시작하였고 성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였다. 1887년 6월 24일에는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 받아 공부하던 학생 중 하나가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윌 12일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첫날은 14명이 모였고, 다음 주일에는 15명이 모였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서 상륜, 서 경조 두 사람을 장로로 택하여 안수하였다.
1887년 1O월 9일에는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5. 외국 선교부들의 입국에 대하여 열거 약술하라
1) 성공회의 입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부가 한국에 설치된 후에 영국 교회(성공회)에서 189O년에 존 코폐(John Corfe․고요한)주교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일하였다.
2) 호주 장로회의 입국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J.Henry Davis)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3) 미국 남장로회 입국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4) 미국 남 감리교 입국
미국 남 감리교(The N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한국선교는 미국의 북 감리교보다 10년이나 늦게 개시되었다. 1895년 미국 남 감리교가 한국 선교를 착수하게 된데 있어서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다.
그 첫째는 한국인 윤치호로부터 한국에 선교 사업을 개시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일이고, 둘째는 중국 중앙 지대에 정착하여 선교하고 있는 남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국을 선교의 적지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0월 헨드릭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서 선교하던 리드목사가 한국에 와서 선교 사업의 상황을 시찰하면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또한 기후도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윤치호의 주선으로 고종 국왕은 지극한 호의로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목사를 접견하면서 미국의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교육과 의료 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칭찬하였다.
5) 캐나다 장로회의 입국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6) 침례회의 입국
침례교회의 한국 선교는 펜윅(Malcolm C.Fenwick)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Toronto)출신으로 선교를 위해 내한할 때 선교 기관의 배경이 없이 개인 자격으로 왔다.
7) 성결교회의 선교
오늘날 한국에 성결교회가 존재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선교활동은 한국인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시작되었다. 무디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찰스.E.카우만과 에른스트.A.길보른 그리고 그들을 도운 일본인 목사 나카다 시게하루(중전중치)가 일본에서 동양선교를 위해 설립한 것이다.
8) 구세군의 입국
구세군 (The Salvation Army) 의 한국 개전은 1908년부터이다. 구세군은 영국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우드(William Booth)와 부인 캐더린(Catherine)이 창시한 전도, 자선, 사회 사업을 목표한 종교 단체이다.
6. 선교 구역이 어떻게 조정 되었는가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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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 |
도 |
도 시 및 지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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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장로회 |
경기 |
서울 고양 파주 교하 양근 광주일부 과천 용인 양지 진위 양성 안성 시흥 김포 죽산 통진 양주일부 |
|
충북 |
연풍 청주 문의 영동 회인 청산 보은 청안 옥천 황간 괴산일부 | |
|
경북 |
대구 안동 경주와 전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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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봉산 수안일부 곡산 황주 은율 문화 장연 신천 송화 풍천 안악 재령 평산 서흥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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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
평양 안주 숙천 여유 순안 강동 자산 삼동 중화 상원 영원 덕천 개천 순천 은산 맹산 성천 강서일부 증산일부 용강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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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
의주 용천 철산 선천 곽산 정주 가산 박청 구성 삭주 창성 벽동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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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로회 |
충남 |
대전 부여 목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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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
전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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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
전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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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
전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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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장로회 |
경남 |
부산 등 전 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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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장로회 |
함남 |
원산 성진 문천 등 북부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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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
전 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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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
경기 |
서울 인천 수원 안산 남양 교동 강화 부평 여주 광주일부 이천 음죽 양천 양근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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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
진천 음성 충주 제천 청풍 영춘 단양 괴산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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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
원주 횡성 평창 영월 정선 강릉 삼척 울진 평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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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옹진 강녕 해주 연안 배천 평산 신계 봉산 일부 수안일부 서흥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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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
평양 양덕 함종 삼화 맹산일부 성천일부 개천일부 온산일부 순천일부 강서일부 증산일부 강동일부 용강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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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
태천 운산 회천 영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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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회 |
경기 |
서울 송도(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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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
춘천 철원 양구 이천 지경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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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
원산 회양 안변 용동 |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그를 끝까지 붙들어 그 인물이 스스로 개인 전도하는 일꾼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전도한다.
둘째는,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만한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켜 나아가게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 사업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하여 운영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발생하면 곧 그를 선임하여 교회의 책임 일꾼으로 세우고, 선교사는 가급적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다.
넷째는 교회당 건축은 그 교회의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건축한다.
제2편 성장사
제4장 교세 확장활동
1. 1907년 대 부흥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1903년 원산에서 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화이트(M. C. White) 여 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가졌다.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 및 일부 한국 교인 그리고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인사들까지 참석한 연합기도회 모임으로 발전하여 원산 창전(倉前)교회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로 남감리회에 소속되어 있던 하디(R. A. Hardie, 河鯉泳)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 바로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 3년간 강원도 일대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솔직히 털어놓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신앙적인 허물, 곧 한국인 앞에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과 자만심에 찼던 권위주의에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선교 초기만 하여도 선교사들은 한국인 전도자의 안내를 따라악취가 나는 토속적인 음식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오막살이에서 새우잠을 자가며 겸허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전도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특히 서북지방에서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한 안심입명(安心立命)의 피난처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되자, 선교사들의 자세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즉 1895년 이후 각 지방마다 선교기지(Mission Station)가 설립되고 교회가 자리를 잡자. 선교사들은 개인 사택에 화려한 생활도구를 들여놓고 피서지까지 확보하는 등 초기 선교사들의 겸허한 모습이 점차 사라졌던 것이다. 하디 선교사의 고백 가운데 이와 같은 선교사 자신들의 문제에 대한 자성(自省)의 빛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진심 어린 고백이 터져 나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마침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내한한 선교사와의 기도모임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초기부터 용이하지 않았지만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 이후 외국인에 의한 선교활동은 더욱 위축되었다. 따라서 여간한 인내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고는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터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화이트 선교사로부터 들었을 때 한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선교활동에 대하여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하디 선교사의 이상과 같은 고백은 이날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명과 은혜가 되는 한편 하디 선교사 자신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 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 운동과 회개 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다시 개최된 교파별 연합기도회에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럽(A. F. Robb)이 성령을 체험하는 역사가 있었고, 선교사 중심의 기도회로 원산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1905년 8월 평양에서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러한 부흥회의 열기는 같은 해 삼남지방 목포에까지 전해져 그곳에서도 다투어 통회하고 자복 하는 기도 소리와 부흥의 불길이 솟기도 하였다.
2. 장로교회의 조직에 대하여 진술하라
1) 독노회
▶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넌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 찬성원(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9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하나의 노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한다. 이 독노회에서 결의한 주요 안건은 다음과 같다.
(1) 신학 졸업생 7명 목사 장립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서 경조(徐景昨), 한 석진(韓錫普), 양 전백(梁甸伯), 길 선주(吉善宙), 이 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등이 안수를 받았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사 목사들인 것이다.
(2)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결의하고 7명의 목사 중 한사람인 이 기풍 목사를 파송 하였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설립 당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간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를 받은 지 2O년의 교회가, 그것도 처음으로 장립하는 7명의 목사 중 한 명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l907년 부흥 운동의 결과가 이같이 확장됨을 볼 수 있다.
(3) 의사봉 제정이다. 의사봉을 제정하여 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4) 대리회의 조직이다. 전국을 한 개의 노회로 묶어 놓으니 그 지역이 너무 넓어 노회가 자주 모이기 곤란하므로 종전의 소회(小會) 대신에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경상 및 전라 지방에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5)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를 채택하였다.
이와 같이 독노회는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는데, 1907년의 첫 졸업생 가운데서 이 기풍 목사를,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의 8명의 졸업생 중 최 관흘 목사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 한 것이 좋은 예이다.
2) 장로회 총회의 조직
1911년까지 독노회가 모이다가 1912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지금까지의 7대리회를 7노회로 조직키로 하고 독노회가 발전적으로 총회가 되도록 하였다.
▶ 1912년 9월 1일 평양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회집 되었는데, 회원은 목사 52인, 선교사 44인, 장로 125인 계 221명이 회집 하였다.
이 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 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 필수, 회계 방 위량(W. N. Blair), 부회계 김 석창 등이었다.
총회 설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1957년에 방 지일 목사가 중공치하에서 귀국하기까지 45년 동안 선교사업을 하였다. 역대 산동성 선교사는 김 영훈(金永勳), 박 태로(朴泰魯), 사병순(史秉淳), 박 상순(朴商純), 홍 승한(洪承漢), 방 효원(方孝元), 이 대영(李大榮), 방 지일(方之日), 김 호순(金好淳) 등이다.
이것을 보면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제주도 선교를 실시하고 그후 시베리아 선교, 일본 유학생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는 첫 걸음을 딛는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쾌거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을 밖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3. 남북 감리교의 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미(북) 감리교회
미 북 감리교회에서 초기 선교사로 파송 받은 아펜젤러 일행 5명은 부임 도중 1885년 3월 31일 부로 ‘한국 선교회’를 조직하였는데 감리사에 맥클레이, 부 감리사에 아펜젤러, 회계에 스크랜톤으로 정했다. 이들은 당시, 전도금지로 배재학당의 교육을 통해 학원전도에 힘쓰고 의료 활동으로 선교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1) 구역회, 지방회 조직
1897년 서울 구역회를 조직하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한국 선교 지방 감리사에 시란돈 (스크랜톤) 이었고 제물포, 강화, 연안구역 구역장에 조원시 이었으며 평양, 삼화구역 구역장에 노보을 이었고 서울구역 (정동, 상동, 동대문) 구역장에 시란돈 이었으며 수원, 공주 구역 구역장에 서원보였고 원산 구역 구역장에 맥길 선교사 였다.
1901년부터는 교세가 확장됨으로 3지방회로 분활이 이뤄지게 되었다.
1901. 11. 1. 인천지역을 한국 서 지방회로 1901. 12. 1. 평양지역을 한국 북 지방회로 1902. 5. 1. 서울지역을 한국 남 지방회로 하여 장로사들을 두었다.
최초로 김 창식, 김 기범이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02. 5. 18에 최 병헌 목사 안수, 1903. 5. 3에 이 은승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4년 5월 9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노블감리사 사회로 급변하는 사회개혁 및 정세에 관하여 토의하고 결혼문제, 노예제도, 안식일 준수, 도박과 오락도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절대 금하기로 정했다.
(2) 한국 연회 조직
1908년 3월 11일에 선교연회가 완전히 독립 제1회 한국연회를 일본 주재 해리스 감독이 내한하여 정동 제1예배당에서 조직되게 되었다.
북 감리회의 처음 세워진 교회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정동 교회 : 아펜젤러가 1885. 8. 배재학당 세워 신교육하며 학원선교를 시작하였는데 그 곁에 1886. 10. 11. 한옥에 4명이 모여 첫 예배드리고 벧엘 교회 라고 불렀었다,
② 상동 교회 : 1885. 9. 10. 내한한 스크랜톤이 상동병원에서 기도회를 시작. 교회 명칭을 달성교회(1900)로 하였었다. 1901년 미국 스탠포오드에 있는 ‘미이드’ 양이 자기 어머니를 기념하여 거액을 보내와 벽돌 예배당을 봉헌하고 상동 미이드 기념교회라 불렀다.
③ 동대문 교회 : 1892. 12. 25. 성탄일에 동대문 옆에 "볼드윈 기념예배당"으로 시작되었다. 볼드윈 박사는 뉴욕에 사는 분인데 그는 볼드윈 시약소와 학교를 세워 많은 후원을 하였다. 1900. 까지 "볼드윈 예배당" 1906. 까지 - "볼드윈 동대문 예배당" 으로 부르다가 1908. 이후 - "동대문 교회"라 불렀다.
④ 제물포(인천) 웨슬리 교회 : 아펜젤러 내한 1년 후 1886. 4. 25. 인천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는데 1891. 8. "제물포 웨슬리 기념 예배당"이 신축되었다.
2) 남 감리교회
1895년 10월 8일 명성왕후가 시해 당한 뒤 국내 정세가 어지러울 때 헨드릭스 감독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이덕 박사를 대동하고 10월 13일 래한하였느데 이 때윤 치호의 역활과 공이 컸다. 이미 활동하고 있는 스크랜톤 박사의 도움으로 현재 한국은행 본점이 있는 중심지에 선교기지를 정하고 활동했다.
그후 2주간 후 헨드릭스 감독으로부터 "중국 선교연회 한국지방 장로사"로 임명받았다. 스크랜톤이 상동교회의 진실한 교우 김 주현과 김 흥순을 이덕 박사에게 추천하여 조력하게 하였다. 이들은 서울 근교 "고양읍 교회"를 짖게 되었는데 현재의 광희문 교회인 것이다.
1897년 9월 10일 "제1회 한국 선교 지방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2개 구역으로 정하여 서울구역은 구역장에 이 덕 박사가, 개성 구역은 구역장에 고 영복 목사가 맡기로 하였다.
1900. 4. 15. 부활주일, 배화학교 기도실에서 주일예배 시작한 것이 발전하여 "종교 교회"가 되었다.
1900년에 윌슨 감독은 서울 구역장에 무야곱, 개성구역장에 고영복, 원산구역장에 하리영을 임명하여 3개 구역으로 분할하였다.
1904년에 ‘한국선교지방회’에서 김 흥순(44세)에게 전도인 허가장을 수여하여 남 감리교회의 최초 성직자가 되었다.
1906. 9. 18. 지방회 때 정 춘수(32세), 주 한명이 전도사 직첩을 받았고, 이때부터 미 감리회와 남 감리회가 모두 교회이름을 감리교회로 통칭하게되었다.
1911. 10. 1. "제 15회 선교회" 개회 중에 서울 종교교회에서 머리감독으로부터 김 흥순, 정 춘수, 주 한명이 목사(집사)안수를 받으므로 남 감리교회에서 베푼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15. 10. 3. 김 홍순, 정 춘수, 양 주삼에게 장로 목사 안수가 있었다.
제5장 교회의 수난과 민족운동
1. 105인 조작 사건에 대하여 약술하라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찌총독 모살 미수 사건’이다.
1909년 이또가 암살 당한 후 데라우찌(寺內)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헌법제도를 실시하고, 언론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았으며 무단 정치를 강행하였다. 그는 강압정책을 통하여 이 나라를 통치하려 하였다.
여러 형태의 항일 독립운동을 사전에 방지하고 제거하는 작업을 위해 러시아의 잔인한 통치술과 고문 기술을 터득한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을 조선주차사령관 겸 경무총감으로 임명함으로서 엄청난 날조 조작과 압박과 고문이 휘몰아치게 된 것이다.
당시 신민회와 교회 세력이 중추를 이루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은 반일(反日) 세력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이것을 부수기 위하여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안악 사건은 안 중근의 동생 안 명근(安明根)이 독립 자금을 국외로 반출하려다가 체포되자 여기에 연루하여 황해도 일대의 지식인과 교계인사 160여 명을 검속하는 사건이었다. 여기에는 김 구(金九), 최 명식(崔切仙), 이 승길(李承吉), 도 인권(都寅權)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중에 감리교 목사 도 인권을 제외하고는 1915년을 전후하여 출옥하였으나, 이것은 일본의 조작에 의한 사건으로 교회가 박해를 당하는 첫 출발에 불과 하였다.
총독부는 이어서 평안도를 중심한 기독교세력을 분쇄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건을 조작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지도자를 투옥하고 선교사를 추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들의 날조 극은 다음과 같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찌(寺內)가 l9lO년 11월 5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을 위하여 선천 역에 잠시 하차하였을 때 선교사 맥큔(G. S. McCune)이 데라우찌와 악수하는 것을 암호로 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유수한 교계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는데 19l1년 가을까지 157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감리교의 전 덕기(全德基) 목사를 비롯하여 김 근영, 정회순 둥이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23명이 석방되었으며, 나머지123명이 l912년 6월 28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신자가 lO5명이었고 일본의 가공할만한 조작적 재판에서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이 주장한 증거는 소위 공술서(供述書)인데, 이것은 일본의 잔학한 고문으로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 일본의 극심한 고문과 억지 재판을 통하여 윤 치호 둥 105인에게 5년 혹은 1O넌 징역을 언도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작극울 통하여 교회를 말살하려 하였으나 복음의 뿌리는 더욱 깊고 더욱 넓게 전파되어져 갔다.
일본의 105인 사건 판결문에 의하면 윤 산은(尹山溫-G. S. McCune). 나부열(羅富悅 S. L. Robert). 그리고 사락수(謝樂秀-A. M. Sharrooks) 선교사들이 이 음모를 격려하여 주고 밀의의 장소를 제공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언더우드, 마펫, 해리스가, 이 사건에 가담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해리스 같은 이는 일본과 가장 친해서 일본의 대리인이라고 하는 선교사까지도 연계시켰던 것이다.
선교사들 중에는 일본총독부와 친밀하게 지내는 자도 많았으며, 교정분리 원칙을 구실로 일본에 대한 항거를 방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YMCA 총무로 있던 길레트(P.L. Gillett)는 이 사건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의 조작극과 한국 교회에 대한 핍박을 서신으로 외국에 알려 폭로했기 예문에 1913년에 국외로 추방되기까지 하였다.
2. 3.1운동과 한국교회의 활동에 대하여 쓰라
3․1운동의 근원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나 고종의 승하를 들 수 있으나 그보다도 근원적인 원인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a. 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열망 b. 엄격한 총독부의 군정과 그 횡포
c. 일제의 민족성 말살 기도 d. 사법 기관이나 행정기관에서의 한국인 배제 및 차별 대우 e. 언론, 신앙, 결사 자유의 박탈 f. 종교에 대한 근절 정책
g. 한국인의 해외 여행과 유학 금지 h. 옥토(沃土)의 약탈
i. 공창 제도 및 마약 방임 등 한국 청년의 퇴폐 조장과 비도덕 화.
j. 만주에의 한국인 강제 이민 k.일본인을 개선과 한국인에 대한 착취.
3.1운동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국내. 외의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들 수 있으며, 3.1운동의 선구로서 2.8독립 선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보다 근 1개월 앞서서 일본 동경 YMCA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2․8독립선언을 YMCA에서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하였고, 이 독립선언문을 국내, 일본 정부, 각국 공관, 언론 기관에 발송하였던 것이다. 이 행사의 처음과 나중에 윤 창석(尹昌錫) 목사의 기도와 지도가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기독교회 내에서는 1919년 1월 말~2월 초에 걸쳐 선우학이 이승훈․양전백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협의한 후 평양․선천․정주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조직화에 착수하였다.
그러던 중 2월 7일 이승훈이 연합전선을 펴자는 천도교 측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천도교와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이때쯤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인 이갑성 등도 강기덕 ․김원벽등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독립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처음에 학생 단은 학생들 단독의 독립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연합전선을 준비하던 종교계에서 합류할 것을 종용하여 이에 합류하였다. 2월 24일에는 한용운․백용성 등 불교계까지 포함한 종교계를 중심으로 민족 대 연합 전선을 이룩하고 구체적인 독립운동 추진방침을 결정하였다.
거사 일은 3월 1일로 정하고, 선언서는 최남선에게 기초하도록 하였으며, 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를 교단별로 선정한 것이 33인이었으며 그 대표 중에 기독교계 인사가 16명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이 승훈, 양 전백, 이 명룡, 유 여대, 김 병조, 길 선주, 신 흥식, 박 희도, 오 화영, 정 춘수, 이 갑성, 최 성모, 김 창준, 이 필주, 박 동완, 신 석구 등이었다.
그 다음 천도교 측의 보성사에서 선언서 21.000여장을 인쇄하여 종교계 ․학생단을 통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독립선언 장소는 파고다공원으로 결정되었으나, 예기치 않은 폭력사태나 일제 군경의 교란을 우려한 박희도의 제의에 따라 하루 전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당일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의 선언식과 시민, 학생들의 선언식 장소가 달라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약간의 혼선이 있게 되었다.
파고다 공원에 약 5천여 명이 모여 33인 대표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보성 전문학생 대표 강 기덕은 태화관에 도착 33인 대표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하였다. 강 기덕은 33인 대표가 파고다공원으로 가지 않으면 권총으로 모조리 죽이겠다고 위협할 정도였다. 이 사실을 보고 있던 평양감리교 이규갑 전도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주 교회 교사 정재용을 데리고 파고다공원에 도착 팔각정에서 정재용으로 하여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학생․시민들은 독립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이렇게 3.1운동은 시작되었다.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29명의 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통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던 것이다.
같은 날 독립 대표들의 선언식과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사전 조직화가 되어 있던 평양․진남포․안주․선천․의주․원산 등지에서도 일어나, 급격히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는 초기에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3월 중순경까지는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시위양태도 초기에는 독립선언서 격문 배포, 집회, 만세시위 행진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으나, 군대를 동원한 일제의 폭력적 유혈 탄압에 맞서, 헌병․경찰․군청․면사무소․우편국 둥 식민통치의 말단 기관들을 습격, 파괴하는 등 폭력적 시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3․1독립선언을 종교인들이 주도하였던 만큼 운동 전개과정에서도 종교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여기서 기독교인이 시위를 주도한 사례를 몇 가지 보면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유 여대 목사의 경우 지방시위를 주도하기 위하여 서울의 선언식에는 불참하였지만, 의주지역의 김창건 목사․김이순 전도사․안석응․김두칠 등 동지를 규합하여 3월 1일 의주 서부교회당 공터에 7, 8백여 명을 모아 자신이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당하였다.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도 이일영 ․김이제 ․강규찬 목사, 정일선 전도사 등과 함께 평양에 있는 6교회가 연합하여 선언식과 시위를 계획하고 3월 1일 종소리가 교회에서 울리자 평양시민과 기독교인은 숭덕학교 운동장에 약 1천 수백 여명 회집되어 김선두 목사 사회로 찬송과 기도를 한 후 도인권이 "왜 우리는 독립을 해야하는가"라는 취지를 설명하고 강규찬이 연설을 하고 정일선 전도사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김선두 목사는 사회자로서 구속되어 천년을 사는 것보다 자유를 찾아 백년을 사는 것이 의의가 있다는 뜻의 연설을 하여 군중들을 열광케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그 해 장로회 총회가 열리는 1O월까지도 복역 중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부회장 마펫이 총회를 주재하였다.
이들이 벌이는 시위에 평양 시내의 10여만 명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참했다.
노회의 임원들이 기독교 학교 학생들과 교인들을 동원하여 3․1운동에 참여한 사례로는 경북 노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즉 당시 노회장이던 정재순 목사와 노회 서기이던 이만집 목사 등은 3월 8일 대구 장날을 기하여 교인들과 계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장의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독립만세라고 쓰인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할 시기인데 각자가 그 독립을 희망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독립을 위해 당연한 일이므로 만세를 고창해야 한다고 하여 이에 호응한 7,8백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공주에서도 공주읍 교회 목사 현석칠이 영명학교 교사 학생들을 포섭하여 4월 1일 공주 장날을 이용한 시위를 계획하여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평신도들에 의해서 조직화되어 만세시위를 벌인 경우는 강화군의 시위이다. 이 시위는 은세공을 하던 유봉진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일으킨 것으로 시위 참여 인원이 1만 명을 상회하였고 물론 평화적인 만세시위이긴 하였으나, 시위 도중 피체자가 생기자 경찰서에 몰려가 피체자를 구하고 다시 군청에 가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하는 대담성을 보였다. 이 시위가 대규모로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교회조직을 통한 치밀한 연락과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에서 기독교는 여타 어느 종교보다도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초기조직화 단계의 거의 모든 흐름에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으로 관여하였으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민중운동화 단계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사실 기독교의 조직이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이 그처럼 신속히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1 운동으로 말미암아 받게된 교회의 피해는 격심하였다.
▶ 수원 제암리 교회는 1919년 4월 15일 낮 14시경 일본군 아리다 중위가 제암리 교회에 도착, 교인들을 교회당에 집합시키고 일본군으로 하여금 교회를 포위케 하고 교회에 불을 질렀다. 여기서 살아서 나오는 교인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교회 안에서 30여 명은 불에 타 죽었다. 이런 식으로 만행을 저지른 곳이 15곳이나 되었다.
l919년 5월에 조선 총독부가 발표한 것을 보면 교회당 전파 17동, 일부 파괴 24동, 그 외 교회당 피해 41동, 교회 재산 피해 약 3만 달러, 오산 중학교의 피해 5천 달러라고 하였다. l919년 6월3O일 현재 투옥된 사람은 기독교인 2,190명으로 유교나 천도교, 그리고 불교 신도 합계 1.556명보다 훨씬 많았고 기독교 교역자도 151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의 통계 자료는 사실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1910년 1O월의 장로교 총회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장로교인 중 체포된 자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 l34명, 기독교 지도자중 수감된 자 202명, 사살된 자 41명, 총회 회집 시 현재 수감중인 자 202명, 교회당이 훼파된 곳 12개소였으며, 함북 노회 관내에서만 26명의 참살자가 있었으니, 총독부외 통계가 사실과 얼마나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19년 1O월에 모인 장로교회에서는 신학생들의 피체와 지방 교회의 손실로 신학교의 속강을 중단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수감으로 말미암아 총회 임원진을 선교사들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 국내에서 기독교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민간의 기맥을 상통하고 복국사업(復國事業)의 완성을 기하여 내외의 활동을 일치시키고자 국내에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하였다. 연통제는 임시정부의 내무부 소관으로 1919년 7월부터 1921년까지 시행되었다. 연통제의 주요 사무는 다음과 같았다.
정부에서 발(發)하는 법령과 공문의 전달, 독립시위운동 진행의 보고, 전쟁을 개시할 때 필요한 군인 군속(軍人軍屬)의 징모(徵募) 및 군수품의 징발․수송, 4 구국금(救國金) 100원 이상을 각출할 구국 재정단원의 모집, 구국금 및 정부에 상납할 금전의 수합과 납부, 정부에서 발행할 공채(公債)의 발매(發賣), 통신, 상부로부터의 임시명령의 전달이었다.
연통제는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지의 서북지방에서는 비교적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그 이유는 이 지역이 기독교 사상에 의하여 민족의식과 시민정신이 다른 지역보다 발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부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歸人會)이다. 본래 1919년 6월 장로교 측의 한영신(韓永信), 김보원(金寶源), 김용복(金用福) 등과 감리교 측의 박승일(朴昇一), 이성실(李誠實), 손진실(孫眞實) 등이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로 합동하여 임원으로는 총재 오신도(吳信道), 회장 안정석(安貞錫), 부회장 한영신 등이 선출되었으며, 평안도 각지에 7개의 지회를 두었다. 이 회의 주요사업은 동지규합, 군자금 모금, 배일사상 고취, 결사대 및 독립운동요원 원조 등이었다.
1920년 1O월 일제에 발각되기까지 이 회는 2,4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조직을 통하여 연통제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 이밖에도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반석 대한애국 여자청년단(聲石大韓愛國女子靑年團), 순천(順川)의 대한민국 부인 향촌회(大韓民國歸人鄕村會), 대동(大同)의 대한독립 부인청년단(大韓獨立歸人靑年團) 등도 연통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자금도 열심히 모금하였다. 이처럼 연통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종종 그 사실이 적발되어 고초를 당하였다. 이들은 나체고문과 같은 혹독한 형벌을 받았고 상당수가 감옥에서 형을 살아야했다.
한편 서북지역과는 달리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는 연통제가 일부지역에서만 시행되었고, 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어 그 기능을 대행하였다. 즉 충청도․전라도 등지의 대한 독립 애국단, 경기도․경상도․충청도․전라도 등지의 대한민국 청년외교단과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그리고 대한 적십자회 등이 그러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이들은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역량을 결집하여 발전시켰으며 국외의 임시정부나 독립운동단체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그들의 항일투쟁을 원조하였다.
▶ 대한 독립 애국단은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支團)을 가지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를 위한 지원단체였다. 단장 신현구(申鉉九)를 비롯하여 박연서, 김상덕, 조종대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김태원이 파견된 이후 이 단체는 임시정부의 연통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 단체는 두 차례에 임시정부축하시위를 벌였으며,조선인 관리퇴직 동맹계획’을 세웠다. 이는 일제의 식민기관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을 모두 퇴직시켜 일제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20년 1월 일제에 적발되어 무산되고 이 단체도 해산당하였다. 이후 단원들은 암살단이나 대한독립군 등의 무장단체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 다음으로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은 상해의 조용주, 연병호 등이 국내에 들어와 안재홍(安在鴻), 이병철(李秉澈) 등과 연합하여 1919년 5월 서울에서 조직하였는데 이들을 비롯한 단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단체는 국외지부의 설치, 조소앙을 위시한 외교원의 파견, 기관지〈외교시보〉의 발간 등 국내 독립운동 단체들 중 가장 활발한 외교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 한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3월 조직된 혈성 부인회(血性婦人會)와 4월에 조직된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가 통합하여 발족한 것으로 회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혈성 부인회는 오현주, 오현관. 이정숙 등이 투옥 인사와 가족들을 도울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며, 주로 정신(貞信)여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이 참여하였다.
▶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는 전국에 걸쳐 지부를 두었고, 회원들로부터 거둔 회비의 3분의 1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회비납부 이외에도 군자금모금에 헌신하였다. 이 회는 특히 3․1운동 때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와 황에스더가 1919년 9월 각각 회장과 총무로 선출된 이후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즉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금은 물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에도 힘썼다. 조직도 급속히 확대되어 전국에 2천여 명의 회원을 두게 되었고, 임시정부는 물론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연통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에 발각될 때까지 이 회는 2,300여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냈으며, 애국지사의 가족들과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 자매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일제에 탐지되면서 이 회도 적발되어 1919년 11월 두 단체의 간부진이 모두 검거되었다. 이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그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일으켰다.
한편 수적으로 많지는 않지만, 일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테러활동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 강우규(姜宇奎), 박치의(朴致毅), 김상옥(金相玉) 등을 들 수 있다.
▶ 강우규는 장로교 전도사까지 지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국권이 기울던 한말에는 함남 홍원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운동에 투신한 바 있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자 국외로 이주, 북만주․시베리아 등지를 전전하면서 국권 회복할 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민족교육과 국권회복운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5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결성된 「대한노인동맹단」(大韓老人同盟團)에 가입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않고 총독만 경질하여 신임총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총독은 첫째 하느님의 계명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 또 남의 것을 탐내지 마라한 것에 위반되고 만국공법을 교란하며 민족자결주의를 멸시하며 세계의 여론을 무시하는극흉 극악한 죄인이므로 죽이려고 결심하고, 러시아인에게서 폭발탄을 구입하여 1919년6월에 미리 국내에 잠입해서 거사를 준비했다, 마침내 그 해 9월 2O일 남대문 역에서 새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의 마차에 폭발탄을 던져, 수행원과 일본 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어 총독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그는 재판정에서도 당당히 일본과 총독의 죄과를 역설하였고 이듬해(1920년) 11월 29일 교수형을 당했다.
▶ 1920년 9월 1일 ‘박치의’의 선천(宣川)경찰서 폭파는 한국인들의 항일정신을 국내외에 보여주었다. 이후 박치의 이하 1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언도 받았고, 박치의는 사형을 구형 받았다. 그 순간 일어서서 두 손을 들고 하날에 높히 부르지저 하나님 은혜 감사하외다’ 라고 외쳤다고 한다.
▶ 아울러 김상옥(金相玉)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찍이 그는 1919년 12월 총독을 비롯한 일본 관리들과 친일파들을 제거하려고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20년 8월 미국의원 4O명이 내한하는 기회에 그 계획을 실행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해 1O월 상해로 탈출하였다. 그곳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그는 1922년 11월 일제의 관청 파괴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폭탄과 권총을 갖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다음해인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진 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추적하였다. 매제 고봉근(高奉根)의 집에 숨어 있던 그는 출동한 일경들을 사살하고 남산을 거쳐 친구 이혜수(李惠秀)의 집으로 피신했다. 얼마 후 일경 400여명은 그 일대를 포위하고 그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그들과 맞서 싸우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이들은 신앙과 민족을 위하여 몸바친 당시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4. 국외에서 기독교인들이 펼칠 독립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 국외에서는 1919년 4월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수립에 있어 기독교인들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그 모체가 된 독립 임시 사무소를 설치, 운영한 것이 신한 청년단(新韓靑年團)이었다. 이 단체는 1918년 여름에 결성되었는데, 단원들 중 종교가 밝혀진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니, 장덕수(張德秀) ․김구(金九) ․서병호(徐丙浩) ․송병조(宋秉祚) ․여운형(呂運亨) .김규식(金奎植) 등이다. 이 단체의 목적은 국제회의에 독립을 호소할 대표를 파견하려면 정부가 필요한데, 당장 정부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우선 정당이라도 만들어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둥 외교활동에 힘썼다. 아울러 3․1운동 이전, 단원들은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과 자금조달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결과상해는 3․1운동의 진윈지요 그 주체는 신한 청년당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3․1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상해 한인교회 교인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신한 청년단원들의 상당수가 이 교회에 출석하였기 때문에 임시정부와도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신한 청년단 소속은 아니었지만, 이 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승만(李承院 국무총리), 안창호(安昌浩, 내무총장), 이동휘(李東輝), 조소앙(趙素昻, 秘書長) , 신익희(申翼熙, 내무차장) 등 기독교인들도 임시정부 요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일제는 이 교회를 예수교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선전하는데 그 주의가 있다고 경계할 정도였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수립에 기독교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에도 마찬가지였다. 임시정부의 경비는 주로 동포들의 성금으로 충당되었는데, 이것도 특히 기독교인들의 모금이 많았다.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항일무장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된 것도 여럿이었다.
▶ 우선 북간도(北間島) 지역을 살펴보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한신민단이 주목된다.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龍井)에서는 1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모여서 만세운동 축하식을 가진 후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중국군의 발포로 1O여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한국인들의 저항과 소요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4월초까지 북간도 전역에서는 만세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간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 국민회가 성립되었다. 이 회의 전신(前身)은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인데,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것을 지지하면서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徐相庸)을 비롯한 대부분의 회원들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회는 1920년 8월 당시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江淸縣) ․화룡현(和龍縣) 등 3개 현에 1O개의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둔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이 회는 무력투쟁을 위하여 북간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노령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였다. 또한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1920년 7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도 설립하였다. 이 회는 다른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합도 꾸준히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洪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등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1920년 7월 7일 봉오동(鳳梧洞) 전투에서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여명이라는 개가를 올렸다. 그리고 동년 1O월 13일 연길현에서 대한 신민단(大韓新民團), 대한 의민단(大韓義民團), 훈춘 한민회 등의 기독교단체들과 연합하여 동년 1O월 21일 완루구(完樓構)전투, 1O월 25일 고동곡(古洞省)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1919년 3월 12일 북간도 왕청현에서 조직된 대한 신민단은 단장 김규면(金圭冕)을 비롯한 단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회는 독립전쟁을 위한 교전단체(交戰團體)임을 표방하였으며, 민주제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중국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으로 본부를 옮기고, 북간도에는 지회(支會)와 의사부(議事部)를 두었다. 단원들은 무기구입과 훈련강화에 힘쓰면서 국내에도 의연대(義捐隊)를 파견하여 단원을 확보하고 군자금도 모금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특기할만한 것은 삼둔자(三屯子)전투에서의 승리이다. 이 회는 1919년 겨울과 1920년 봄에 걸쳐 수시로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특히 1920년 6월 4일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那)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하고 귀환하였는데, 뒤쫓아온 일본군 1개 중대를 박승길(朴承吉) 휘하 3O여명의 단원들이 섬멸하였던 것이다.
▶ 다음으로 서간도(西間島) 지역에서도 국내에서의 3․1운동 이후 통화현(通化縣) ․유하현(柳河縣) ․즙안현(輯安縣) 등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력투쟁을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1919년 4월 2일 대황구(大荒構)교회에서는 약 3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삼원보(三源堡) 부민단(扶民團)의 총기 구입 문제를 협의하고 성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예배를 마친 후 교회에서 청년 7O여명이 곤봉으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투쟁에 대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도 조직하였다. 통화현의 최봉석(崔奉錫) 목사와 홍경현(興京縣)의 오대규(吳大奎) 목사 등은 급진파(急進派)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일제를 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또한 즙안현의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의용단(義勇團), 청년회 등의 단체를 설립하고 허선노(許善老) 장로를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이들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간도에서의 항일투쟁은 1920년 1O월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에 의하여 자행된 이른바 훈춘 사건을 계기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이 지역 독립운동기지를 초토화하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으며, 교회와 가옥을 불살랐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희생되었다.
제6장 복음 확산 활동
1. 교회의 연합 활동을 약술하라
1. 조선 예수교 장감 연합 협의회
1905년에 만들어진 순수 선교사들만의 모임인 재한(조선)복음주의 연합 공의회(Federal Council of Protestant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1916년에 한국인 교회가 참여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와 준비하여, 1918년 3월 26일에는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 예수교 장감 연합 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가 만들어졌다.
조선 예수교 장감 연합협의회는 처음엔 교파를 초월한하나된 교회를 설립하려는 취지도 없지 않았으나 현실을 감안하여 친목과 협력을 목적으로 한 협의체로 성격이 정착되었다. 이 단체는 장․감 두 교회 대표들로 조직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 미감리회, 조선 남감리회 등 3개 교단대표들이 참여하였다. 재한 복음주의 연합 공의회가 장․감 6개선교부 대표들로 구성된 것과 차이가 있었다.
1918년 2월 26~27일 서울 YMCA회관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장로교의 김필수(金弼秀) 목사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전문 17조로 된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 협의회는 양 교파의 교리와 정치제도의 문제는 건드리지 못하도록 성격을 분명히 했다. 한국인이 참여하여 임원을 맡았고 장․감 두 교회 사이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교파 교회로서 갖고 있던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올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2.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
1919년에 한차례 교회합동운동의 열기를 겪은 후 이원화된 협의체를 하나로 묶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 움직임은 1922년부터 본격화되어 마침내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朝鮮耶蘇敎聯合公議會, Korean National ChristianCouncil)가 창설되었다.
초대 회장에 차재명(車載明) 목사가 당선되었으며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규칙은 이 단체의 목적을,1) 협동하야 복음을 선전함 2) 협동하야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3) 협동하야 기독교 문화를 보급케 함으로 규정하였다. 역시 설립 목적과 취지는 교회 합동이 아닌 교회간의 협동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권한에 대하여는 이 회는 각 교파 신경, 정치, 의식 등에 간여치 못함l이라고 규정하여 그 한계를 분명히 했다. 실질적으로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모체라할 수 있는 이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는 처음에 다음의 11개 단체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이후에 1931년부터 명칭을 조선 기독교 연합 공의회로 바꾸었고, 기독교 기관 중에 회원으로 가입한 수가 늘어나 1937년 이 단체가 해산될 당시엔 위의 11개 회원단체 외에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YWCA), 조선 예수교 서회, 조선 주일학교 연합회, 재일본 캐나다 장로선교회, 조선 기독교 여자 절제회 등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한국인이 주도하게 된 조선 예수교 연합공의회가 교회사에 남긴 업적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비록 제한된 권한을 소유했지만 선교지역 분할 문제를 비롯한 각 교파․선교부 간의 선교정책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종래 선교연합 공의회에서 관장해 왔던 재일본 한국인 선교도 예수교 연합 공의회가 관장하게 되었다. 〈기독신보>, 〈주일학교잡지〉등 한글 정기간행물 발행도 맡아하였고 세브란스병원, 평양기독교연합병원, 연희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등 장․감 연합기관의 운영에도 보다 많은 권리를 갖고 참여할 수 있었다.
2. 교회의 교육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과 탄압은 1911년에 반포되고 1915년에 개정된 〈사립학교규칙〉을 근거로 하여 자행되고 있었다. 관․공립 학교 이외의 모든 사립학교의 교과 과정과 내용을 규정한 이 규칙은 강제적 일본어 사용과 종교 교육을 금하는 것으로 특징을 삼고 있었다. 이 규칙에 의해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었고 선교학교(missionschool)라는 본래의 설립 취지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9월 2O일 서울에서 개최된 복음주의 선교 연합 공의회(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Missions)에서 선교사들이 총독부에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교과목으로 삼는 것과 한국어 사용을 허락해 줄 것을 건의한 것도 이 같은 위기상황을 극복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3․1운동 후에 총독부는 시혜를 베풀듯 사립학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심은 고도로 계산된 통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무력으로 한국을 지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일제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한국인의 정신적 통합을 기도하였다.
1922년 2월 4일에 공포된 개정 조선 교육령이 그같은 음모의 결정체였다. 이 교육령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학교와 일본어를 사용하는 학교로 구분하여 교과목을 규정한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학교에서는 그 교과서를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것을 사용토록 규정하였다. 한국어 사용을 허락하면서 역사를 왜곡한 교과 내용을 주입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정책이었다. 이 신 교육령의 근본 취지는 소위내선일체’의 기초 단계로 일본식 교육제도를 한국에 도입한 것이다. 궁극적인 내선일체를 위해 우선은 한국어사용을 잠정적으로 허용하며 교육 내용을 통해 민족 정신을 개조하려 하였다.
이 교육령이 갖고 있는 또 다른 함정은 사립학교들 사이의 분열 책에 있었다.
이미 1911년에 발표된 사립학교 규칙에서 나타난 조항인데 사립 중학교 중에서 총독부 시책에 순응한 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지정하는 것이다. 이 조항 때문에 기독교계 사립 중학교들 사이에는 혼란이 일어났다. 이 혼란은 종교적 신앙과 민족 문제와도 연결되는 듯했다. 비교적 현실 감각이 예민했던 감리교계 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 인가 절차를 받은 반면에 종교적 교육이 침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장로교계 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가 되기를 거부한 채 사립 중학교로 존속했다. 총독부에서는 끝까지 버틴 장로교 학교들에겐 이른바 각종(各種) 혹은 잡종(雜鍾) 학교로 지정해 학교 명맥은 살려 주면서도 상급학교(전문학교나 대학교) 진학 자격은 부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들 학교 졸업생들은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검정고시를 거친 후에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빈번했던 기독교계 학교들의 선교사 배척운동이나 동맹 휴학의 원인 중에는 여기예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총독부의 교활한 교육 정책으로 종교학교는 일반 학생들이 기피하는 현상이 연출되었고 종교학교 내에서도 종교교육을 폐지하라는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1910년대 이후 종교학교의 수도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 교육령이 반포된 1923년에 약간 증가한 것 외에는 1910년 이후 계속 감소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합병되던 1910~11년 사이에 무려 3백여 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종교학교도 1910~13년 사이에 매년 100~130여 학교가 폐쇄되는 현상을 보였다. 1910년에 778개였던 종교학교가 1920년에는 279개로 줄어 10년 사이에 5백여 학교가 폐쇄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말 황민화(皇民化) 정책으로 민족혼이 말살될 위기에서 그래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한글을 사용하며 민족의식과 신앙을 지키려 애썼던 기독교 학교들의 투쟁의식도 1915년 이후 불리한 조건 속에서 선교학교라는 본래의 설립 취지를 고수하면서 그것을 민족문제로까지 연결시키려는 교육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해외 선교와 해외 한인 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미주 지역 선교
1) 하와이
1902년 하와이 농업이민으로 시작된 한국인의 미국 이주는 처음부터 교회가 배경이 되어 추진되었다.
2) 멕시코
멕시코 이민도 1904년에 시작되었는데 영국인 마이어즈와 일본인 다이쇼가 꾸민 사기에 가까운 이민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3) 쿠바
반면에 쿠바에서는 이민이 시작된 직후에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쿠바 마탄사스에 이주한 이민들 사이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들이 많았다.
2. 일본선교
일본 전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포를 상대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본 전도의 역사는 재일 한인교회와 한인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살펴 볼 수밖에 없다. 재일 한국인 교포와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은 다시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으니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추진했던 사업과 그 외의 교파 교회 및 개인적 전도 사업이 그것이다.
3.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
1) 장로교의 남만주․시베리아전도
남만주 최초의 장로교회는 1898년 즙안현에 설립된 이양자(裡楊子)교회이다.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이 교회가 파괴되고 교인들이 고통을 겪게 되자 이듬해 선천에 있던 선교사 휘트모어(N. C. Whitternore)와 안승원(安承源)을 보내 교인을 위로하고 교회를 재건하게 한 것이 남만주 지역에 대한 한국교회전도의 효시가 되었다.
2) 장로교회의 동만 선교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서 안순영을 보내 전도함으로서 1906년에 양무정자교회와 광제암교회가 설립되었다. 간도지역 선교는 1908년 남감리교회에서 이화춘(李和春)․이응현(李應賢)을 전도인으로 파견하였고 그리어슨도 김문삼을 파송했다. 그 결과 1907년에 이화춘은 민족주의자 박무림(朴茂林)의 지원을 받으며 와룡동교회를 세웠고 1908년에는 이응현의 주도하에 모아산(帽兒山)교회가 세워졌다.
3) 미감리회의 북만주 선교
감리교의 만주선교는 1930년 이전에는 미감리회와 남감리회가 별도로 선교를 추진했다. 먼저 미감리회의 경우를 보면, 미감리회 조선연회는 1910년 목사 안수를 받은 손정도(孫貞道)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4) 남감리회의 시베리아 동만 선교.
1924년부터는 1908년에 간도선교를 개척한 바 있는 이화춘 목사가 다시 간도지방 관리자로 부임하였으며 1925년에는 도인권(都寅權) ․신광현(愼光顯) ․이호빈(李浩彬) ․한국보(韓國輔) 등이 합류하였다. 이들 중에 니콜스크 해림에서 목회하던 장죽섭은 105인사건 때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며, 연추구역을 관할했던 서영복은 김약연 ․구춘선 등과 함께 간도지역 교회와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로 국민회 창설과 간도 3․1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4. 산동 선교
산동 선교는 1912년에 한국 장로교회가 총회를 조직하면서 총회 중에 서해를 사이에 두고 우리 민족과의 해상 교역지였던 산동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총회는 김찬성 목사를 산동에 파송하여 선교 후보지를 답사하게 했고 1913년 총회는 박태로(朴泰者) ․사병순(史秉淳) ․김영훈(金英勳) 3인을 정식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리고 총회는지나에 파송하는 선교사는 자유교회를 설립하지 말고 그 땅 장로회와 연합할 것으로 결정했다. 즉 산동지방에 선교하여 교회가 설립되더라도 그 교회의 소속을 중국교회에 둘 것이지 한국교회에 두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그 소속이 중국교회로 옮겨지며 한국교회에는언권위원의 자격밖에 주어지지 않게 하였다.
4. 1920-30년대 3인의 신앙 부흥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1. 길선주 목사의 내세 지향적 부흥운동
이미 1907년 평양 부홍운동 때 그 주역으로 활약한 바 있던 길선주 목사는 3․1운동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새로운 신앙․사상적 정리 과정을 거쳤다. 그는 옥중에서계시록만 7백독을 하면서 말세 신앙을 정립하였다. 그의 말세신앙은 현실 속의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다. 1922년경부터 전국적인 부홍사로 활약하게 되는 길선주 목사의 설교 주제는말세’ 와재림이었다.
특히 1931년만보산 사건이 일어나 한․중간의 민중 마찰이 생기고, 평양에서 한국인의 중국인 습격과 살해가 자행되었을 때 그의말세외침은 더욱 커졌다. 그는예루살렘(평양을 지칭) 멸망을 외치며 임박한 재림을 강조했다.
1926년부터 교회 내의 청년․진보적 계층과 사회주의 계열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1933년 그가 세우고 지켜온 장대현교회에서 배척을 받고 따로 이향리교회를 세우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35년 강서에서 부홍회를 인도하다가 절명함으로써 그의 부홍운동은 일단락 되었지만 그의말세 신앙은 한국교회 신앙 양태의 한 지류로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2. 김익두목사의 신유와 기적을 통한 부흥운동
1920년 6월 평양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광경을〈동아일보〉는 수천 군중은 미친 듯 취한 듯 홍분한 신경을 것잡지 못하여 어느 무명씨는 즉석에 숭덕학교를 위하여 1만원을 기부하니 뒤를 이어 일어나는 기부의 소리는 미처 수습할 길이 없이 답지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부홍운동의 특징은 기적과 신유를 동반한 것이었다. 1919년 말 현풍 집회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적현상은 1920년 4월의 영남지방 집회 때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이적이 사실이냐 하는 문제로 교회 안팎에서 논란이 되었으며, 이에 황해노회 안에서는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중심이 된 김익두 목사 이적 명증회가 조직되어 김익두목사 부흥회를 통해 치유 받은 자들의 신상과 사건 기록을 정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21년)이란 책을 내기까지 했다. 이를 근거로 황해노회는 1923년 장로회총회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 1조를 수정하자고 헌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헌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다. 총회의 이적 불인(不認)은 그의 부홍회의 의미를 감소시켰고 그 즈음에 교회내의 지식계층이나 일반 사회주의 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26년 간도 용정과 이리에서 반종교가들에 의해 집회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그 무렵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익두 목사의 부홍 운동은 급격한 냉각상태로 빠져들었다.
3.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적 부흥운동
1930년대 한국교회의 신비주의 신앙을 형성한 주도적 인물인 이용도 목사도 3․1운동 때 송도 고보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되었고, 1920년기원절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는 등 1924년 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4차에 걸쳐 3년 이상 감옥에 살았던 민족주의자였다. 이 같은 그가 부홍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강원도 통천교회로 부임한 지 1년 후인 1928년 12월말로부터 1929년 1월초에 이르는중생(重生)의 체험에 있었다. 그는 또 새벽기도 중에교회 안에 가득 찬 악마들과의 치열한 싸움을 체험하였으며 양양에서는 환상 중에 빨간 군대의 습격에 대항해 싸우는 체험을 했다. 이러한 체험이 있은 후 그의 설교는 능력 있는 설교가 되었고 참석자들의 통회 자복이 터져 나왔다. 초기엔 통천․양양․개성 등지의 감리교회에서 부홍회를 인도하였는데, 1930년 목사 안수를 받고, 1931년 연회에서 순회 부흥사로 파송을 받으면서 전국적인 부홍운동가가 되었다. 이때부터 장로교회에서도 그를 초청하여 부홍회를 가졌는데 당시 그의 설교 주제는회개와신생이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당시 교권적 교회가 안고 있던 부정적인 현상들이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도 그에게는 마른 나무깨비 같은 꼴로 비판받고 있었다. 1931년 재령 서부교회의 2천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 벽돌로 담을 쌓고 울깃 불깃 장식을 해놓은 것이 이것이 교회가 아니예요. 이 예배당을 다 불질러 버리고 잿덤이 위에서라도 몸과 마음을 아주 바쳐 참된 예배를 드려야 그것이 교회올시다” 라고 설교한 것으로 그는 한때 무교회 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다. 그의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제도권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역 비판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다 한준명(韓俊明) ․박승걸(朴承傑) ․박계주(朴啓柱) ․백남주(白南柱) ․유명화(柳明花) 등 스웨덴보리 및 선다싱 등의 극단적 신비주의신앙에 심취해 있던 신앙 인들과 교류하고, 특히 한준명 ․유명화 등이 관련된 소위 강신극(降神劇)소동이 일어나면서 이용도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용도가 그들이 이단 시비에 몰렸을 때에도 그 자신 신앙태도에 다소간 다른 점이 있다는 H(한준명을 지칭)는 고사하고 도적이나 음부나 살인강도라고 하더라도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죽기를 원하고 힘쓰는 자로 자처하며 무조건적인 무제약적인 사랑을 실천한 것도 기성 교회가 그를 이단시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결국 1931년 황해노회가 그에게 금족령을 내린 것을 필두로 1932년에는 평양노회가 그의 집회를 규제하고 그에게 신앙적 감화를 받아 형성된 평양기도단의 해체를 명했다. 〈기독신보〉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이세벨의 무리로 규정한 것도 치명적인 상처였다. 이처럼 제도권 교회로부터 비판과 제재조치를 받으면서 이단 시비에 휘말렸던 그는 지병인 폐병이 도져 1933년 3월 소속했던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휴직하였으며, 원산에서 요양하던 중 그 해 1O월에 3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아무튼 이용도는 비록 제도권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았지만 그 자기 희생적 사랑, 그리스도의 겸비를 조건 없이 실천하려 했던 순수한 신앙으로 신비주의 신앙인 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김익두․길선주․이용도 외에도 1920~30년대 부흥운동을 인도한 인물들은 더 있다. 성결교의 이명직과 정남수, 감리교의 김종우․유석홍․신홍식, 장로교의 김인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지방을 순회하며 사경회를 인도하면서 1920~30년대 암울한 민족 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민중의 희망을 선포하였다.
5. 기독교인들의 문화 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1. 미술 활동
한국 개신교 미술의 효시는 《천로역정》(1895년)삽화를 그린 김준건을 언급할 수 있다. 김준건은 게일(J. S. Gale)에게 영향을 받아 개종한 원산지방의 초기 교인이었다. 김준건은 전통 풍속화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동양화 기법으로 《천로역정》 삽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한국 기독교의 토착미술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 동양화기법으로 성경 메시지를 그린 성화(聖畵)의 효시는 김은호(金殷鎬)의 「부활 후」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3등 상을 받은 작품인데 일종의 인물화로 세 편으로 된 연작(連作) 형태였다. 서울 안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김은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어용화사(御容畵師)로 근대 한국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가 「부활 후」 외에 다른 기독교적 작품을 남기지 않아 아쉽지만후소회(後素會)를 통한 그의 제자인 김기창(金基昶)․김학수(金學洙) 등이 그의 화풍을 계승해서 해방 후 성경주제와 기독교 역사화를 그렸다.
서양화가로 기독교 성화를 그린 최초의 인물은 길선주 목사의 아들인 길진선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2. 음악 활동
기독교가 한국음악사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한국 서양음악사는 곧 한국 기독교 유입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 찬송가를 통해 서양음악의 성악, 기악 양식이 소개되었고, 향상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서양음악 교육은 찬송가 공부를 통해 시작되었다. 기록상으로는 스크랜톤(M. F. Scranton) 부인이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로 찬송가를 가르친 것이 서양음악 교육의 효시가 되고 있다. 당시 주일 오후에 정동교회에서 여성집회가 열렸는데, 그때 6명으로 조직된 합창단이 찬송을 불렀다 하니 한국 최초의 성가대로 기록 될 만하다. 이화 출신의 김헬렌(최활란)이 정동교회 최초의 오르간 연주자로 1907년부터 봉사하였으니 한국인 최초의 서양음악 연주자가 된 셈이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서양음악 고등교육이 이루어졌다. 1911년 음악과 주임교수로 하몬(G. Hamon)이 부임하면서 체계적인 성악 및 기악교육을 실시했고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1925년 이화전문학교가 되면서 음악과가 설치되어 많은 음악인과 교사를 배출했는데 이곳 출신으로 1920~30년대에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는 피아노를 전공한 김앨리스(정애식)․조그레이스․고봉경 ․김메리․송경신․박현숙․김영의, 성악을 전공한 윤성덕․임배세․박루사․유부형․정훈모․이채리․채선엽 ․한복덕, 종교음악 및 이론을 전공한 이로라 등이 있다.
초기의 한국인 남성 음악인들도 선교사를 통해 서양음악을 교육받았다. 한국 양악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김인식(金仁湜)이 대표적인 예이다. 평양 출신으로 숭실 중학교에서 여선교사 헌트 부인과 스눅(V.L.snook)에게서 성악․오르간․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숭실대학교를 3년 마치고 1907년 상경하여 상동청년학원을 비롯해서 배재․경신․기호․진명학교 등지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한국 근대 음악 전문 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에서 1911년부터 후진을 양성했다. 1905년에 한국 근대 가곡의 효시로 알려진 「학도가」를 작곡했으며 헨델의 「메시야」를 우리말로 번역했고 국악에도 관심이 깊어「영산회상」,「여민락」등을 채집하여 악보 화하기도 하였다. 이 조선정악전습소를 통해 김인식이 길러낸 음악가로는 홍난파(洪蘭波)와 이상준(李尙俊)을 꼽을 수 있다.
김인식을 배출한 숭실대학에는 1913년 무렵 모우리(E. M. Mowry) 부부가 주동하여 합창단을 조직하고 음악교육을 본격적으로 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박윤근이 모우리에게서 음악을 배우고 1914년에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하고 1921년에 돌아와 모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총체적 음악교육을 실시하며 많은 음악인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김세형․박태준․현제명․김형준․박경호․차재일․위혜진 둥을 꼽을 수 있다.
또한 말스베리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많았는데 서원숙, 이용준, 김동진 등이 이다.
연회전문학교의 음악교육은 1915년 예배시간에 합창과 찬송가를 지도한 베커(L. S. Baker) 부인에게서 시작된다. 그후 1918년에 피아노 연주자 김영환(金永煥)이 음악 담당 교수로 부임하였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숭실대를 졸업한 후 미국에 유학했던 현제명(玄濟明)이 1929년에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하면서 연희전문학생들의 음악활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연희전문학교 관현악단과 4중창단, 합창단을 조직했으며 박경호와 함께 중앙향우회 오케스트라를 조직, 활발한 연주 활동을 보였다. 또한 그에게 배운 윤기성 ․이인선 ․이광준 ․곽정순 ․이유선 ․김성태 ․문학준․김생려 ․이인범 ․이유성 ․곽정선 ․정희석․유한철 등이 한국 음악계의 중진들로 활약했다.
교회와 주일학교를 중심 한 민요와 동요창작을 통한 음악활동도 활발했다. 1924년 윤극영(尹克榮)이 「반달」이란 동요를 작곡했는데, 3․1운동 직후의 민족적 현실을 절실하게 그린 이 노래는 일제 말기에 금지 곡이 되었다. 이외에 홍난파의 《조선동요 100곡집》(1930년), 강신명(姜信明)의《아동가요곡 3백곡》(1936년), 박태준의 《동요집》 등이 있다.
3. 문학 활동
문학 측면에서도 기독교가 한국 신문학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기독교는 개화 혹은 계몽주의적 작가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쳐 그들의 문학작품 속에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시켰다. 특히 신문학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육당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작품 속에서 그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 이후 순수 신문학이 발달되면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의 작품에서도 그같은 기독교적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남궁벽의 《말》, 변영로의 《오, 나의 영혼의 기여》, 김소월의 《묵념》, 《밭고랑 위에서》, 《신앙》, 이 상의 《날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기독교 문학은 기독교인들의 문학 활동을 통해 형성되었다. 한국 신문학의 최초 순수문예지로 일컬어지는 《창조》(1919년 창간)의 주요 동인인 김동인(金東仁)․전영택(田榮澤)․주요한(朱耀翰) 등이 모두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적 작품을 썼다는 데서 이들을 한국 기독교 신문학의 개척자라 부를 수 있다. 평양 숭덕학교 출신인 김동인은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1919년), 《마음이 얕은 자여》(1920년), 《유서》(1923년), 《이 잔을》(1923년), 《명문》(1925년),《신앙으로》(1930년) 등 기독교적 인간이해와 윤리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작품을 썼으며, 감리교 목사이기도 한 전영택도 《생명의 봄》(1920년) 이후 《천치? 천재》(1920년), 《화수분》(1925년), 《흰 닭》(1925년) 등 기독교적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소설을 썼다.
주요한은 한국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1919년)를 쓴 작가로도 유명한데 《벽모의 묘》, 《말》 등의 작품에서 히브리인들의 메시야 사상과 견줄 수 있는 미래지향적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1920년대의 브나로드운동 및 농촌계몽운동 등 사회참여운동 분위기 속에서 계몽적 작품이 나오게 되었는데 심 훈의 《상록수》는 YWCA가 샘골에 파송 해 실제로 활약했던 최용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으로 유명하며, 김말봉(金末峰)의 《밀림》, 《찔레꽃》, 《푸른 날개》 등도 기독교적 희생과 인내를 그린 작품이고, 이용도의 예수교회와 연결되는 박계주(朴哲周)의 《순애보》, 《진리의 밤》, 《구원의 정화》 등에서도 강한 기독교적 인본주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함홍 영생중학교 출신으로 1925년 일본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온 김동명(金東嗚)도 시집 《나의 거문고》(1930년), 《파초》(1938년) 등을 내면서 일제시대의 민족 현실을 서정적 감성으로 표현하였다.
이외에 1930년대 문단에 등단한 기독교인 작가들로는 노천명(盧天命) ․김동리(金東里) ․황순원(黃順元) ․박영준(朴榮濬) ․임옥인(林玉仁) ․김현승(金顯承) ․박두진(朴斗鎭) ․윤동주(尹東柱) ․모윤숙(毛允淑) ․정지용(鄭芝容) 등이 있으나 이들 중 일제말기 옥중에서 순절한 윤동주를 제외한 대부분은 해방 이후에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기독교 문학뿐 아니라 일반 문학사에서도 그 위치가 분명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기독교가 한국 문화운동사에 끼친 영향과 공헌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제3편 수난사
제7장 교회의 갈등발생
1. 김춘배 목사의 성경해석과 아빙돈주석 번역 문제에 대하여 진술하라.
1) 김춘배 목사의 여권문제
우선 여권문제의 경우를 살펴보면, 장로교회 안에서 직제상 여성의 지위문제가 거론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였지만 1930년대에서 들어서면서 장로교회의 보수적 남녀차별을 비난하는 글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감리교회에서는 1930년 남․북 감리회가 합동하면서 1회 총회에서 비록 선교사들이었지만 14명의 여성 목사를 배출할 정도로 여성문제에 대해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장로교회는 여성안수를 금한 헌법 「정치 제5장 3조」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에 1934년 함남노회 22개 교회 여성들이 여성 장로직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한 바 있었다. 이 같은 여성들의 청원을 지원할 목적으로 함남노회 산하 성진중앙교회에서 시무 하던 김춘배 목사는 1934년 8월, 23차 총회가 열리기 직전 〈기독신보〉에장로회 총회에 올리는 말씀이란 글을 기고하였는데 그는 이 글에서 정치 제5장 3조를 차별적 헌법으로 규정하였고, 특히 다음과 같은 부분은 보수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여자는 조용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2천년 전의 일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닐 터인데요.라는 내용이었다.성경무오설을 신봉하던 그들로서는 여자는 조용하여라는 성경 말씀을 2천년 전의 일개․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습정도로 해석하며 그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인식하고 있는 자신들의 태도를 비꼬는 듯한 김춘배 목사의 언사가 불경스럽기만 했다.
2) 아빙돈 성경 주석 문제
이 주석은 감리교 선교 5O주년을 기념하여 1934년에 출판된 《단권 성경주석》(單卷聖經註釋)인데 내용과 번역자로 인해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책은 미국 아빙돈 출판사(Abingdon Press)에서 발행한 성경주해서(He Abingdon. Bible Commentary, 1930년)를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은 감리교의 유형기(柳瀅基)가 번역․편집 책임을 지고 신생사(新生社)에서 출판한 것인데, 번역자로 감리교의 양주삼․정경옥․김창준(金昌俊)․전영택(田榮澤)․변홍규(下鴻圭), 장로교의 송창근(宋昌根)․채필근(蔡弼近)․한경직․김관식․김재준․조희렴․윤인구 등을 비롯한 53명이 참여했다. 이 아빙돈 성경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 비평학을 즉 문서비평학, 고등비평학, 역사비평학 등 당시로는 현대적 학문 방법론을 총동원한 새로운 주석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오자성서무오설을 신조 제1조로 삼고 있던 장로교회 안에서 부정적 반응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했다. 장로교회에서는 보수주의 전통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총회에까지 파급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1935년 장로회 24차 총회에서는 우리 장로회의 도리에 불합한 고로 우리 장로회에서는 구독치 안코 그 주석에 집필한 장로회 사역자에게는 소관 된 각 교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야 표명케 함이 가한 줄로 보고하여, 단죄하면서도 관련자에 대한 정치적 처리는 지방 노회에 맡겼다. 송창근․한경직․채필근․김재준이 소속되어있던 평양노회는 각서 제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송창근․한경직․김재준 등 3인은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2.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라
1.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장․감 두 교파 교회의 갈등과 장로교회 내의 서북․비서북계 갈등을 표출시킨 사건이 1935년의신편 찬송가사건이다.《신편찬송가》란 당시 장로회 총회 교육부 총무로 있으면서서북계 실세의 주도권자로 부각되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주도로 편집․출판된 찬송가이다. 이를 《정찬송가》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을정찬송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건의 내용은 1931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한 《신정찬송가》를 장로교에서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별도로 장로교용《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신정 찬송가》는 1908년 이후 장․감 두 교회에서 사용해 오던 《찬송가》를 개편한 것인데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희와 조선예수교서회가 편집 ․발행 및 판매 권한을 갖고 있었다.
1934년 총회에서 찬송가 편찬 문제는 감리교회에 교섭하야 연합 편찬하게 하되 만일 감리회에서 불응하면 장로회가 따로 편찬함이 가하다는 종교교육부의 헌의를 받아들여 찬송가 편찬에 대하야는 종교교육부에 맛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함으로 장로교 단독 찬송가 발행으로 방향이 잡혀갔다. 그 해(1934년) 종교교육부 총무로 취임한 정인과 목사의 결단이 크게 작용하여 이듬해 구 찬송가 중 늘 부르지 안는 것 4O장을 삭제하고 신정 찬송가 중 조흔 것 7O장을 선택하여서 너헛고 새로히 100장 가량을 너허서 400장 짜리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였고. 장로교 전체 분위기는 《신편 찬송가》발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로써 장로교는 《신편 찬송가》, 감리교는 《신정 찬송가》를 사용케 되어 두 교회 연합운동 분위기에 큰 손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2.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문제
이러한 교회 연합운동 손상은 기독신보사건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기독신보〉는 1915년부터 간행되던 장․감 연합 초교파 신문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 신문의 주필이던 박동완(朴東完)이 민족 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고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1920-21 사이에 독립운동에 관련된 기사들을 수록하여 교계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각광을 받았던 신문으로 1921년도에 총 25만 2천 여부를 발행한 영향력있는 언론지였다.
그러나 193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필순(全弼淳) 목사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기독신보〉 발행권을 둘러싸고 계파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필순 목사는 장로교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코오베(神戶)신학교에서 수학하며 그곳 출신 가가와도요히코(賀川豊彦)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사상적 영향을 받은 진보적 인물이었으며, 출신 및 목회 배경도 비서북계(非西北系)인 경기도․서울이었다. 그는 〈기독신보〉 사장이 되자마자 기독신보 찬조회를 조직, 한국교회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얻어 경영 자립을 꾀했고, 한국인 직원을 대거 채용하여 편집 진을 보강했다. 이 같은 혁신적조처는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예수교서회로부터독립’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발행권을 갖고 있던 조선예수교서회와 관계가 나빠지게 될 것은 자명했다.
여기에다 전필순의 사장 부임 이후로 〈기독신보〉에는 경기․중부의 진보적 인사들의 글이 자주 실렸으며 특히 장로교총회에서 이단으로 인증한 신홍우(申興雨) 중심의 적극신앙단에 대해 호의적 기사를 씀으로 서북계의 견제도 받게 되었다.
이 같은 복잡한 상황에서 1935년 9월 조선예수교서회 이사회에서는 유억겸(兪憶兼)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전필순에게〈기독신보〉사장직을 인계하도록 했으나 전필순은 이를 거절하고 사무실을 종로 2가 서회 건물에서 수송동으로 옮기고재 혁신을 선언하며 독자적인 발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장․감 연합 교계 신문이던 〈기독신보〉는 전필순의 개인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5년에 〈기독신보〉가 전필순 개인 발행지로 변하기 전에 이미 그 교회 연합지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있었다. 전필순이 사장으로 취임하던 해인 1933년에 감리교는 양주삼을 발행인으로 한 〈감리회보〉(監理會報)를, 장로교는 정인과를 발행인으로 하는 〈종교시보〉(宗敎時報)를 각각 창간하여 교회 기관지로 출범시켰던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된 교회’를 추구하던 초기 한국교회 정신을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3. 감리교의 합일에 대하여 약술하라
장로교는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였으나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매우 컸고 미국 교회의 신학과 정치가 여기에 직결되는 경향을 보였다.
감리교회는 남북 감리교 선교부의 지원 아래 각각 다른 기관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연합 운동이 여러 갈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양주삼 목사는 "감리교의 합동운동"을 위해 추진했으나 미국선교본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한국에서 먼저 합동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에 감리교회가 들어 올 때에는 각기 때와 배경은 달리했으나 선교 초기부터 서로 우호적이었고, 사업에도 협동적이었다. 1915. 2. 15.에는 합동으로 "그리스도 회보"를 창간했으며, 1905. 4. 에는 합동으로 신학교 세웠고, (협성 신학교) 이화 여자 전문학교도 합동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1924년 "남북 감리교회 통합방침"을 합의하였으나 1925년에 미국 본부에서 부결하였다.
1926년 한국에서 단독으로라도 통합하겠다는 결의와 각오로 6월에 "미 감리교회 한국연회"가 모이고, 9월에 "남 감리교회 한국 매 연회" 모임에서 통합방침을 연구할 위원 5명씩 택하게 된 것이 남북 감리교회의 적극적인 통합운동이 되었다. 위임받은 위원이 1927년 6차례 모여 협의한 결과를 미양 연회에서 수정하여 통과를 보고, 1928년에 미 감리교회 본부의 승인과1930년에 남 감리교회 본부의 승인이 남으로서 합일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1930 12월 2일 서울 협성 신학교에서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 감리교회>로 출범하게 되었다. 양 주삼 목사가 제 1 대 총리사로 피택 되어 감리교 정신의 앙양을 강조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어려움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선교부에서 독립하는 자치 교회의 형태를 이루었다.
4.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쓰라
한국에서 오순절교회 계통의 선교사로 처음 내한한 이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인으로 1928년 내한한 간호원 럼제이(M.C.Rumsey)를 들 수 있다. 당시 럼제이는 교단이나 교회 지원 없이 단독으로 내한했다. 그녀는 기도하던 중 한국에 가서 선교하라는 지시를 받고서 사재를 털어 그냥 혼자서 한국을 찾아서 왔던 것이다. 그녀는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허 홍을 만나게 되었다. 허 홍은 방언을 하는 것과 기도로 병을 고치는 신유를 오순절신앙의 요체로 인식하고 럼제이를 도와 전도 활동을 벌였다. 그후 일본 성서신학원에서 수학한 박성산이 합류하여 1933년 봄 서빙고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오순절교회가 설립되었다.
1932년에는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파슨스(T.M.Parsons)가 역시 개인자격으로 내한했고, 이듬해에도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메르디스(E.H.Meredith)와 베씨(L.Vessey)가 역시 개인자격으로 내한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파슨스는 배부근과 함께 수창동에 제2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했다. 이로써 서빙고에서는 럼제이, 허홍, 박성산이, 수창동에서는 파슨스와 배부근이, 죽첨정에서는 메르디스와 베씨가 오순절교회운동을 전개했다.
1938년 10월 5일에는 한국 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베풀어졌는데, 허홍, 박성산, 배부근 3인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때의 교세가 6교회, 11목회자, 192성도로 일제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오순절 교회는 1950년 4월 9일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 대회를 순천 오순절교회에서 개최하였는데 약 2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그후 2,3차 대회를 모이면서 1953년 4월 8일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결성된다. 이는 1952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채스넛 선교사가 파송 된 다음해이다. 이 때부터 비로소 조직화된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순절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시점에 조용기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1959년에 순복음신학교를 제4회로 졸업한 그는 1961년 샘 토드 목사의 서대문 로타리 부흥집회 시 통역을 맡았는데 부흥회 기간동안 많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오늘날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발전하게 되는데, 오순절신앙의 국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가 이렇게 시작한 그 교회는 1년만에 성도가 1천명으로 늘어났고, 1970년에 여의도로 교회를 옮기기 직전 만 여명의 성도가 모였다.
제8장 교회의 훼절과 수진
1.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하여 쓰라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1932년 상해침공,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하였다. 또한 이러한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식민지 한국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동원체제를 구축하는 한편,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였다. 일제는 식민통치 초기부터 우리 민족의 특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경찰과 군사력에 의한 폭력적 억압만으로는 식민지 지배의 안정을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식민지 민족의 정신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민족의 독자성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킴으로써 식민통치의 영구적 안정을 도모하며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말살의 동화정책(同化政策)은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방침이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 그들이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이를 한층 강화시킨 것이 소위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이었다.
2. 일본의 신도에 대하여 설명하라
신도의 기원은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가미라는 말은 신격(神格)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본의 고유어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자연현상, 경이적인 자연물, 신화적 인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을 일본인은가미로 숭배하였고 이것들을 총칭하여 8십만 신, 혹은 8백만 신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가미라는 말은 고대인들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가미에 대한 신앙이 고대 일본의 천황 권의 강화와 함께 천황의 조상신으로 여겨졌던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중심으로 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神社)에 봉제하여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도는 고래(古來)로 일본의 정치권력 내지는 황실(皇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그러나 신도는 교리나 경전보다는 고대로부터의 관습적 의례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고등 종교인 불교에 눌려 그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사상적 열세와 천황 권의 약화로 막부체제하에서 민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던 신도가 17, 18세기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유한 것을 찾기 위하여 고전을 연구하는 가운데 신도에 주목하고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문하에서 막부말기에 신도사상에 입각한 배외적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 신으로 여기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되었고, 지배 통치의 원리로 채택되었다. 그 후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 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수적 토착 종교로서 국교적 지위를 확립하여 갔다. 1871년에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사를 국가의 종사(宗祀)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에 공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3.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
장로교의 경우는 그 양상이 달랐다. 1931년 9월, 경남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 실행 위원회를 1936년 초에 소집하고 미션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정하며, 그해 1O월의 실행 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 내외의 학교 폐쇄를 단행하였고, 본국의 승인도 얻었다.
이런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의 고통을 겪다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강압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참배 결의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 1938년 전국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자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 공작을 하기 시작하고, 반대자들에 대한 검속이 일어났다. 이런 험악한 가운데 1938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회집 되었던 것이다.
일본 경찰 97명이 193명의 총대들 사이에 끼어 앉아 회의를 감시하는 가운데 다음날, 오전 1O시 일제의 각본대로 박 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하였다. 이에 회장 홍 택기 목사는 가(可)만 묻고 부를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방 위량 선교사와 한 부신 선교사가 결의의 불법을 외치자 일본 경찰들은 폭력으로 밖으로 끌어냈다. 총회 폐회 후 부회장 김 길창 목사가 각 노회장들을 인솔하고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지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4. 교회의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1) 수양동우회
수양동우희는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국내조직으로, 겉으로는 총독부로부터 양해를 얻은 인격수양․민족개조를 표방한 친목 수양단체였으나, 이면적으로는 민족의식고취와 민족 실력 배양을 통한 주권회복이 그 궁극의 목표였다.
한편,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의 국내 조직으로 겉으로는 산업의 진흥을 표방하였지만, 이면적으로는 해외 독립운동 자금의 지원과 국내 동지 확보, 계몽활동 전개를 통한 조국 독립운동 지원이 그 목적이었다.
이 두 단체는 다수의 사회 지도급 기독교인들이 가입, 활약하였고 해외 독립운동과 연계를 가친 국내 조직이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수양동우회는 1922년 이광수 등에 의해 조직된 수양동맹회와 1923년 김동원 등에 의해 조직된 평양지역의 동우구락부가 1926년에 합동하여 만들어진 단체이다. 여기에는 주로 서북계 장로교인들이 많이 참여하여 활약하였는데, 서울의 주요한․이용설․김윤경․이대위․이윤재 등과 평안도의 김동원․백영엽․정인과․김성업․김선량․김항복․김하현․한승곤․한승인 및 함북의 송창근 등이 그들이었다. 1937년 이들의 활동이 발각되어 6월부터 서울․평양․선천 ․안악 지회의 관계자 181명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하여 이들 중 42명을 기소하였다.
이들은 결국 1941년 1O월 제3심 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이는 이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제의 술책에 불과하였다. 이들은 주로 변호사, 의사, 목사, 저술가, 상공인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특히 평양 선천지역 회원들은 거의 기독교 신자들이어서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2) 흥업 구락부
흥업 구락부는 1925년 신흥우․이상재 ․구자욱 등 기독교 유력 간부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표면으로는 국민의 복리향상과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사실은민족 관념을 보급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여 해외 독립운동가들에게 운동 자금을 대어주고자 하는 일종의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의 주요 회원들은 모두 상류 유식 계충에 속하는 기독교 장로와 목사 및 교사 등 사회 유력자들로서 조직 당시부터 사회 각층의 우수한 지도자들 중에서 엄선하였기 때문에 기독교계 문화단체 및 사회단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한 보고서는 이를기독교를 통하여 조선독립운동의 실천에 착수한 현저한 사안(事案)이라고 보았다.
비밀리에 활동을 전개하던 흥업구락부가 일제 당국에 탄로난 것은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의 일이었다. 신흥우․이건춘․구자옥․이관구․최두선 ․홍병 덕․정춘수 등 54명이 체포되어 견디기 힘든 가혹한 신문을 받았다. 일제는 이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으므로, 이를 계기로 이들을 이른바 전향(轉向)시켜 그들을 전쟁 협력자로 역이용하고자 온갖 위협과 회유를 하였다. 결국 이들은 이러한 일제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사상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6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비록 강요에 의한 것이긴 하였지만 일단 절개를 굽힌 이들은 일제의 각종 부일 협력 활동에 동원되어 철저히 이용당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행각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과 교회의 변질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5. 교회의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대하여 쓰라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의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하는신사참배 강요 금지청원운동이요, 둘째는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었다. 물론 저항자들 가운데는 청원이나 거부 권유 등 대외적인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은둔하여 자신의 신앙만이라도 지키려는 소극적인 항쟁 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의 경찰에게 끌려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러한 것이 증거가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신앙과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수차에 걸쳐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경고하다가 여러 차례 경찰서에 끌려가 구류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청원, 경고가 효력이 없자 1939년 2월 일본 정계 요로 및 제국의회에 청원하기 위하여 마침 신사참배 거부로 선천 보성여학교 음악교사직을 사퇴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일본에 건너갔다. 이들은 일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박장로의 아들 영창(永昌)과 함께 구세군 사령관 야마무로(山室軍平) 중장, 일본 기독교회 장로 히비끼 중장, 정우회(政宇會) 대의사 마쪼야마(松山常次郞), 전 조선총독 우가끼 등을 방문하여 진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순교할 각오를 하고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74회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첫째, 종교법안 제정 반대, 둘째, 국교를 신도(神道)에서 기독교로 할 것, 셋째, 신사참배강요 등 악법 실시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투옥을 철폐할 것 둥을 내용으로 한 경고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으로 회송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박장로는 6년간의 옥고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적 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하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 간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 중심 인물은 평안남도의 주기철, 평안북도의 이기선, 경상남도의 한상동․이주원 ․주남선, 전라남도의 손양원 등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지역에서도 박의홈․헌트(B. F. Hunt, 韓富善)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교회와 개인의 인적 지역적 연대를 가지고 활동하였으나 점차 지역간의 연대가 이루어져 경남지역, 서북지역, 만주 봉천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의주의 북하단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던 이기선은 1938년 7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교회를 사면하고 각지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다가 경찰에 여러 차례 검속을 당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순회활동을 통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다가 1940년 3월경에는 만주의 안동을 방문하여 이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자들인 최용삼․김형락․박의홈․계성수․김성심 등과 회합을 갖고 첫째, 신사참배를 죽어도 반대할 것, 둘째,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제들을 입학시키지 말 것, 셋째, 세속화되어 신사참배 하는 현 교회에 절대 출입하지 말 것, 넷째, 신사 불참배 동지들끼리 가정예배를 드릴 것, 다섯째, 신앙동지들을 확보하여 신령한 교회출현의 소지를 육성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그리고 계성수와 함께 지방전도를 하면서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거부를 역설한 뒤 평양의 채정민 목사에게 자신의 활동을 보고하고 향후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황해도 지역 순회운동 계획을 세워 김의창과 함께 황해도 각지를 돌며 활동하다가 1940년 6월경 일경에게 체포당하였다.
1938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시무 하다가 신사참배 반대로 목사직을 사면한 한상동은 이주원과 함께 경상도 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39년 12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단지 종교운동으로만 그치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우므로 조속히 정치운동으로 전회시킬 필요가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첫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老會)를 파괴하도록 할 것, 둘째,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로 신노회를 조직할 것, 셋째,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넷째,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 원조를 도모할 것, 다섯째, 가정 예배 및 가정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며 한편 개인전도 둥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그리고 부산․마산․진주․거창․통영 등 활동구역을 나누어 맡아 맹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주기철 목사가 3차 구속에서 석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평양을 방문하여 최봉석 ․박관준․주기철․채정민․오윤선․김의창․김지성․김인후․김형락․박의흠 등과 회합을 갖고 그 확대방안을 논의하고 돌아왔다. 한상동 목사는 이 운동의 전국 확산의 실행을 위해 노력하다가 그해 7월 부산 경찰서에 검속 되었다.
3․1운동 직후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룬 바 있는 주남선(朱南善) 목사도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38년 말경에는 그가 시무 하던 거창읍교회를 사임하고 한상동․이인재 등과 함께 조직적인 거부운동을 펴기 위하여 거창․합천․함양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면서 설교를 통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수차 거창경찰서에 끌려가 수난을 당하였다. 1940년 7월 16일 다시 검속되어 부산을 거쳐, 이듬해 7월 평양으로 이송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거기서 옥고를 치렀다.
▶ 평양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본거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였다. 주기철 목사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아 1938년 1차 검속 이래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검속 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산정현교회도 주기철 목사를 쫓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폐교되었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 저항은 전국 어디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남지역의 손양원 ․백영홈 ․박영대 등과 전북의 배은희․김가전. 충북의 허성도․송희용, 경남의 조용학, 황해도의 이종근․박경구 등이 있으며, 교파적으로도 감리교의 이영한․강종근․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김 연, 동아기독교의 전치규․김영관, 안식교의 최태현 등이 있고, 천주교 신자들도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한국 기독교가 두 가지 상반된 행동 양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저지른 친일 ․부일 행각과 민족정신과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행적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적 교회, 기독교 기관들이 친일․부일적 행위를 보여준 반면에 소수무명의신앙인들은 주로 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을 폈던 것이다.
제9장 해방과 교회의 재건
1. 북한 교회의 재건과 수난에 대하여 쓰라
1945년 9월 2O일, 다음과 같은 재건 원칙을 발표하였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와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을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은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기간에는 집사와 평신도들이 에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재건 복구할 것.
그러나 출옥 성도들의 이러한 재건 방안은 일제하에서 교권을 가지고 일본과 타협하며 지냈던 일부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5년 11월 평북 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모인 교역자 퇴수회에서 박 형룡 박사의 공박을 받은 신사참배 결의 당시의 총회장인 흥 택기 목사가 반발하였다. 홍택기 목사는 해외로 도피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나섰던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고 주장하고, 신사참배 회개 문제는 각 사람이 하나님과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제와 타협하고 배도(背道)한 자들의 자기 정당화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은 한국 교회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보여 주고 있었으며, 일제 치하에서 타협하며 지냈던 자들의 기회주의적인 교권에의 집착이 신앙의 경건성을 주장하는 출옥 성도들의 의견을 압도하고 만 것이다.
1945년 11월 14일, 평양에서는 38이북 지방의 노회 대표들이 회집하여 잠정적으로나마 총회를 대행할 기관으로서 <이북오도 연합노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갈이 결의하였다.
(1) 이 연합 노회는 잠정적인 총회의 대행이며
(2) 교단의 규칙은 총회가 재건될 때까지 존속하게 하며
(3) 전국 교회는 과거의 죄를 자복하고 교역자는 두 달 동안 근신에 임하며
(4) 신학교를 연합 노회 관할 하에서 경영하교
(5) 전국적으로 독립 기념 전도를 실시할 것.
한편 이북 각 지역마다 해방의 기쁨을 가지고, 자치단체 또는 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조직되었는데, 대개 기독교인들이 주동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그만큼 교회와 교인들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북한의 소련 주둔군들은 기독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제이교회 한경직 목사가 주동이 되어, 1945년 9월에 기독교 사회민주당이란 정당을 조직하였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워,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가게 하자는 취지였다. 같은 해 11월 16일 용암포(龍岩浦)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지부조직 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첫 충돌이 생겼다. 공산당이 거기 있는 공장의 직공들을 충동하여, 대회장을 습격하고 간부들을 폭행하여 수라장을 만들었다. 이런 야만적 행동에 격분한 그곳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어나 그들의 폭행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 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를 탐지한 내무서가 결성식 전날 김화식 목사 이하 40여명을 검속하여 결성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검거된 분들은 대개 옥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3 ․1 만세운동 기념일에 각 지방별로 연합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을 폭행으로 방해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했던 것은 의주 동교회 사건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가 주최한 3 ․1절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수천 군중을 몰고 와서 동 교회를 습격하고 사회자 김석구 목사를 모욕하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후견을 받아 공산 정권을 수립하고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정권인 인민위원회는 그 이후 교회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여 그들의 주요한 행사를 꼭 주일에 거행히여 교인들의 출석을 강요함으로 예배 출석을 방해하는 한편, 예배당에서 정치강연을 강행하였다.
박해의 구실로는 1946넌 11월에 북괴 정권 수립을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였는데 이 날이 주일이기에 연합 노회는 강경한 반대 의사 표시를 하였다. 연합 노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에도 볼참하며,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구분, 교회당은 예배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현직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할 때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5개조 교회 행정의 원칙과 신앙 생활 규범을 당국에 통보하였다. 공산당은 자신들의 각본대로 일이 되어가자 반대자들을 투옥하고 강제 노동에 동원하는 등 강압적인 탄압책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1월 28일에는 김일성의 외숙 강양욱(康良煜 - 일제 때 목사)을 내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케 하고 이 기관을 통하여 측면 공격으로 교회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어용종교단체로 변질케 할 것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부흥사 김 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였던 박 상순 목사를 강제로 가입시켜 선전물로 사용하였으며, 처음에는 교직자들만 연맹에 가입시키다가 1948년에는 일반 평신도들의 가입을 강요하고, 면 ․군 ․도의 연맹을 조직한 후 1949년에는 소위 기독교도 연맹 총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끝까지 가입을 반대하는 오도연합노회의 주요간부를 일제히 검거투옥하고 감리교와 장로교의 신학교를 폐지하였으며, 기독교 신학교라는 명칭으로 통합하여 연맹 총회에서 직영하였다. 1950년에 와서는, 이 연맹 총회에 들지 않은 교역자들은 거의 다 투옥되고 예배당은 그들의 정치 계몽소로 변하게 되었다. 과거 일제시대의 교회 탄압보다 더 혹심한 지경이 되었으므로, 많은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남한으로 내려오거나 지하에 숨어버렸다. 그해 6월 25일에는 드디어 북한은 남침의 전쟁을 감행했었다.
2. 장로교 신학교 재건의 진통에 대하여 진술하라
장로교회는 해방과 함께 신학교 문제로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 신학교, 조선신학교, 장로회 신학교 사이의 알력과 여기에 연결된 교권 문제 등으로 매우 복잡하였다. 고려 신학교는 1946년 9월 20일에 한 상동 목사가 조 남선 목사와 함께 설립한 학교로서 박 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만주에서 모시고 오기로 하였으나 박 형룡 박사의 귀국이 지연되자 박 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경남노회와의 문제가 어려움 속에서 지탱되어 오다가 1949년4월 제35회 총회는 고려 신학교가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하므로 고려파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울에 소재하고 있던 조선 신학교의 재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 되어져 갔다. 조선 신학교는 남부 총회(南部總會)에 총회 직영 청원을 내어 허락을 받았고, 김 재준 교수는 자유주의적인 자기의 신학을 대담하게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김 교수의 신학은 한국 교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는데, 1947년 봄에 조선 신학교 학생 5l명이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내고 김 재준 교수의 자유주의적 교수 내용을 항의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총회가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에 착수하려 했을 때, 김교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진정서> 형식의 글을 발표하여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박 형룡 박사가 고려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한국장로교의 진로 문제에 대하여 고려 신학교 설립자들과 견해 차이가 생겨 교장직을 사임하고 나서 상경하자, 김 재준 교수의 문제 처리는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박 형룡 박사는 1948년 총회의 요청으로 김 재준 교수의 <진정서>를 세밀하게 검토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를 김 재준 교수가 한국 교회를 <능욕>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래서 총회는 조선 신학교 개혁안을 제안하고 김 교수의 l년간 해외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김 재준 교수는 <편지에 대신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하고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총회의 신학 대책위원회는 1948년 5월, 장로회 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하고 임시 교장에 박 형룡 박사를 임명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총회 직영 신학교는 조선 신학교가 이미 인준을 받고 있었으니 두 신학교가 총회 안에 있는 격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신학교를 합하는 방안 외에는 별도리가 없게 되었다.
l950년 1윌, 대구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 이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만 했다. 그려나 개회 벽두부터 소란이 일어나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그후 2개월 만에 6․25사변이 일어나 1년 후에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총회를 속회할 수 있었다. 이는 교회의 비극이요, 민족의 비극이었다. 교회가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여기에 따른 박해는 너무나 심각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3. 6.25전쟁의 교회 피해를 쓰라
1950년 민족 분열의 상징인 6․25 전쟁을 통하여 교회는 큰 고통을 겪게 되었다. 6․25전에는 공산주의자들의 폭동과 준동으로 여러 가지 비극들이 있었다. 여수와 순천 반란사건을 통하여 순교의 피를 흘린 젊은이들이 많았으며. 여기에 이은 6․25전쟁의 피해는 참혹하였다.
귀한 저명 목사들의 순교와 피납으로 많은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 신석구 목사, 정일선 목사 등이 순교하였고 송창근, 남궁혁, 양주삼 목사 등이 납치 당하였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완전 소실이 152교회, 파괴가 467동이었으며 감리교는 완전 소실이 84교회, 파괴가 155동이었고 성결교가 완전 소실이 27교회, 파괴가 79동이었으며 구세군은 완전 소실이 4교회 파괴가 4동 외에 많은 교파들에 피해가 있었다. 인적 손실을 보면 순교 혹은 피납된 교직자는 장로교 150명, 감리교 48명, 성결교 11명, 구세군 7명이었다.
전북 옥구군 원당(元堂) 교회에서는 75명의 교인 중 73명이 학살당하였다.
북한군들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자칭 교인인 김 욱(金旭)과 전직 목사 최 문식(崔文植) 등이 나타나 교회를 박해하고 목사들을 구금하는 데 앞장을 서는 비비극이 연출되었다. 이와 같은 배신자들의 행동을 통하여 교회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고 1.4후퇴 때에는 대부분 부산으로 피난을 하였던 것이다.
제4편 분열사
제10장 교회의 분열
1. 고신파 분열에 대하여 쓰라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 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사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 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 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피차의 공방과정에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2. 기장 분열에 대하여 쓰라
선교 개시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 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교) 이 세계적인 여러 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대로부터 한국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의 객척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 교파 (이중캐나다 장로회도 포함된)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 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등은 표면화된다. 이 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잘못 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 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월 19일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부총회의 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신학교 측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선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대한 기독교장로회라 하였다.
3. 에큐메니칼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쓰라
1.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 (W C C) 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 신학대학'(통합측)과 승동교회 총회측을 오늘의 '총회신학대학' (합동측)으로 분열케 한 것이다. 이 분열은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2. 기성과 예성의 분열
한국성결교회는 해방이후 한국교회협의회(N C C)에 가입하였으며, 1955년 10회 총회 때 N A E 에도 가입을 결의하여, 양 기관에 가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양측주장의 이념논쟁과 상대방의 공격의 양상으로 심각성이 드러나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양 기관의 탈퇴문제를 가지고 15회 총회에서 격론을 벌이다가 1년 유보 안이 43대 40으로 통과된 후 16회 총회에서 재론하다가 부결되자, 탈퇴를 주장하던 인사들이 회의에서 퇴장하였으며 1961년 서울 무교동에 있는 여관에서 한보순 목사를 중심으로 '복음진리 수호 동지회' 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자 총회에서는 분열되면서까지 연합기관에 가입하고 있을 필요성이 없음을 인식하고 임시총회를 열어 두 기관의 탈퇴를 가결하였으나, 보수측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1961년 부산에서 국제교회연합회(I C C C)에 가입 결의를 하였으며, 1962년 4월에 자체적으로 총회를 열고 교단명칭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하였다.(예성) 이 분열은 외부단체와의 연계성에서 비롯되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보수파의 편협하고 과격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로써 성결교회가 이 땅에서 시작 된지 55년만에 두개의 성결교회가 나타나는 현상이 벌어졌다.
성결교회가 분열된 후, 기성 측의 노력과 온건파 인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965년에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5년 7월에 이명직 목사가 전국성결교회 신도들에게 합동을 권유하는 메세지를 보냄으로서 합동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각기 총회를 열고 합동하기로 가결한 후, 바로 그날(1965년 7월 23일) 합동총회를 열어 역사적인 합동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예성 측의 일부 강경 인사들은 끝까지 고집을 부려 잔류케 되었다. 그후 73년 6월에 또다시 많은 교회가 예성을 탈퇴하고(190교회 중 112교회) 기성과 합동하였다.
4. 합동측의 정치적 분쟁과 분열에 대하여 쓰라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논란 끝에 비상정회 한 후, 둘로 갈려 양측이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속회함으로써 완전히 두 교단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때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장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해서 '통합측'이라고 불리게 됐다. 또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이전에 갈라진 고려파와 다시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이라고 일컬었다.
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 측은 이후 교권과 지방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 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 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 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는데 이때 탈퇴한 그룹의 대표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 고려측'이라고 부른다.
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 측을 지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 영남 출신들은 절치 부심 끝에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측 주류 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
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측(황해 평안 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 보수'는 호남 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 보수측(현재 홍은동 소재 총회)'으로 양분된다.
그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분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11장 교회의 확장과 복음화운동
1. WCC.ICCC,NAE,RES와 한국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라.
1. WCC와 한국 교회
한국 교회와 가장 깊은 관계들 맺고 있는 국제 기구는 W.C.C.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세계 교회 협의희)이다. 1948년 화란 암스텔담에서 44개국, l47교회 대표 35l명이 모여서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고, 지금은 세계적 기구로서 형성되어 있다. 창립 총회에 김 관식 목사가 참석하였고,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모인 제2회 대회에 한국 장로교회에서 정식 대표를 파송 하였다.
WCC의 성격에 대하여 한국 교회지도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후에는 찬반이 심화되어 급기야 1959년에는 제3차 분열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WCC는 신학적 배경이 각기 다른 교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종교적 혼합주의 색채를 띠고 있으며, 교리보다도 생활에 중점을 두는 특색과 WCC 안에 공산주의 국가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에서 용공 논쟁(容共論爭)을 일으켰었다.
WCC의 국가 단위 조직격인 KNCC(Nationa1 Council of Churches in Korea-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는 예장 통합, 기장, 기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등 6개 교파가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으며,한국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을주도하고, 연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2. ICCC와 한국 교회
ICCC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국제 기독교 연합회)는 WCC 의 에큐메니칼 노선에 반대하기 위하여 apr킨타이어에 의하여 창설된 단체로서 근본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이들은 1948년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후 계솟 국제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강력한 반공사상과 배교 운동 배격으로 극단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1CCC가 한국 교회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예장 고신 측과의 관계로부터 발원하여 장로교 제3차 분일 이후 합동 측과도 관계를 맺었었다. 그러나 ICCC는 한국 교회에서 극단적인 분파주의로 말미암아 여러 교파들을 분열시켜 새로운 교파를 형성케 하였고, 한국의 많은 교회의 고립주의적인 자세는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 1CCC의 국내 기구로서는 KCCC (Kore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한국 예수교 협의회)가 있으며 산하 교단들을 가지고 있다. ICCC는 보수적이며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있는 것은 매우 좋으나, 분열주의적 자세가 호응을 받지 뭇하고 있으며, 오늘의 시대에 바른 신앙을 파수하는 단체로서 그 의의를 가지고 있다.
1CCC는 한국 교회에서 많은 작은 교파들을 발생시켰고 나아가서 이들을 모체로 하여 한국에서의 독립된 기구 형성에 노력하고있는 것이 이들의 약점이다.
3, NAE와 한국 교회
1923년 미국의 근대주의적 목사 1,292명이 어번 선언(Aubern Affirmation)을 선언하였는데, 이 선언은 성경의 정확 무오성,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믿지 아니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분격한 근본주의자들이 일어나 이들과 논쟁을 벌일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단지 복음을 수호하며 전도하는 화평론 자들이 모인 것을 NAE라고 한다. 격동하는 현대의 혼란한 사조와 세속주의에 대하여 교회와 신도를 보호하고 건전한 발전을 목적하여 1942년에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복음 동지 협회(N.A.E.)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어느 종족이나 국가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참예 하도록 하였다. 이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창되어 1951년에는 화란 우드쇼튼에서 24개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적 조직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 NAE는 1948년 6O여 명의 신학생들로 출발하였고, 1952년 7월에 정식으로 한국 NAE를 조직하여 복음주의 연합운동을 펴게 되었다. NAE는 신앙에서의 이탈에 대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알리기에 주저하지 않으나 WCC에 대하여 공격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온건한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의 NAE 운동은 초창기부터 합동측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어 왔기에 합동측을 NAE측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간혹 있다. 장로교 총회가 한국 교회의 화평을 위하여 소속 목사들은 NAE에서 탈퇴하라고 결의한 후 이 단체의 영향력은 미미하여졌다.
4. RES와 한국 교회
RES (Reformed Ecumenical Synod-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는 1946년 미국 그랜드래피드에서 발기하여 구성된 단체로서 범세계적인 칼빈주의 자들의 모임이며, 개혁주의 신앙 노선에 찬동하는 교파들이 참가토록 되어 있다.
RES는 예장 합동측과 고신측과 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교단 내의 정치적 문제와 신학 사상에 대한 이해 문제 등 많은 논란을 빚었다. 1968년 9월 부산에서 모인 제53회 총회(예장 합동측)에서는 RES 보고를 받고, 1970년에 한국에서 RES 태평양 지역회의를 개최키로 결의하며 연구위원 5인을 선정하였다. 이때에 신복음주의 논쟁이 일어났고, 1CCC계 선교사였던 라보도(Robert S. Rapp)가 RES를 비평하는 책자를 제작하여 전국교회에 뿌리는 등 맹렬한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69년 서울에서 모인 제54회 총회에서는 1970년에 모일 RES 태평양 지역 대회를 중지하기로 결의하고, 그후 RES 탈퇴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RES는 한국 교회에 그 뿌리를 내려보지 못하고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들의 세계적 유대가 단절되게 되었다.
2. 교회의 성장 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선교 l00주년을 앞두고 각 교단에서는 교회 성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7O년대 후반기에 일어난 이와 같은 경향은 한국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서 의의를 가지며, 나아가서 교회 성장을 통한 자기 정화의 길을 걷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985년 선교 백주년 기념으로 각 교회가 전개한 진홍운동을 살펴보면
(1) 예장(합동)- 만 교회 운동
(2) 통합측- 매년 3백 교회 증가운동을 전개하여 1985년까지 3천 교회 목표.
(3〉 기독교 감리교회- 5천 교회 운동.
(4) 기독교 장로회- 2천 교회 증가 운동.
(5) 기독교 성결교회- 2천 교회 지향.
(6) 침례교 연맹- 1천 교회 운동.
(7) 나사렛교회- 5백 교회를 목표하여 성장 운동을 펼쳤다.
이렇게 교단마다 교회 성장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났다.
3.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대하여 쓰라
한국 교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 임무를 다하였다. 1907년 장로교 독노회 조직 시에 7명의 첫 목사중 이 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 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 하였다. 감리교 역시 만주지방 선교에 노력하였다.
선교하는 교회의 사명을 다한 한국 교회는 해방 후 교회 재건 뒤에도 계속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특히 1970년대에 와서 선교 열의는 더욱 확장되었다. 해방 후의 경우를 보면 장로교 총회는 1955년 제4O회 총회 결의로 태국에 김 순일, 최 찬영 목사와 그 가족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6.25 폐허를 딛고 일어선 한국 교회의 해외선교 열의를 보여 주었다.
예장 고신 측에서도 대만에 김 영진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 하여 고산족(高山族) 전도에 열의를 가하게 하였다.
1970년대에는 각 교단과 교회들이 선교 열의에 가득하여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필리핀, 홍콩, 태국, 파키스탄, 중동, 사라와크, 구암도, 멕시코, 남미 각국, 서독, 이집트 등 세계 각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역수출하는 입장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조직이 선교하는 교회로서 출발하였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현재(2001년 2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는 9.13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예장 합동측 총회가 1.027명, 통합측 총회가 629명. 개혁측 총회가 453명, 기성 총회가 338명, 기감이 321명, 기침이 296명, UBF가 1.517명을 파송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군소 교단 및 각 개 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 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중남미에 584명, 북미에 1.130명, 아시아에 3.049명, 아프리카에 597명, 유럽에 1.125명, 중동에 125명, 태평양 연안에 271명, 비공개 1.042명, 중국에 315명, 현지인 240명으로 되어 있다.(한국세계선교협의회 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