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老敎會史
김 영 선
제1장 장로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1. 교회의 정치 형태들을 약술하라
1) 교황정치 : 교회를 계층구조로 이해하여 여러 계급으로 조직하고,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권세를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에게 주었으므로 교회는 세속정부의 영역까지 관할해야 한다는 정치체제로서 카톨릭교회가 채택하였다.
2) 감독정치 : 계급구조를 따르고. 교회는 정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교회의 머리는 정부의 수반이 되고, 지 교회는 자율권이 없는 정치체제로서 성공회와 정부를 교회의 머리로 삼지 않는 감독정치를 감리교회가 채택하였다.
3) 회중정치 : 개 교회주의를 주장하고, 계층구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며. 성경적 배경을 추구하였고. 교회와 정부의 분리를 주장하고. 지 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였으며 회중에 의한 목사선택, 교회의 권징을 실시하는 정치체제로 침례교회에서 채택하였다.
4) 장로정치: 자율사상과, 평등사상을 받아들이어 교회원이 장로라는 대표를 선택하여 대의 정치를 추구하고.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믿고 교회 사이의 연합을 강조하며. 교회와 정부영역을 분리하나 두 기관은 동등해야 한다는 정치체제로 장로교회, 개혁교회가 채택한 정치체제이다.
2. 개혁주의자들의 5가지 주장을 쓰라
①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의롭다 함을 받는다.
②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구원을 받는다.
③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tura) 교회의 기준을 삼는다.
④ 오직 그리스도만이(Sola Christo) 중보자시다.
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돌려야 한다.
3. 칼빈의 5대 교리를 해설하라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인간에게 주어진 양심이라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도록 주어진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인간에게 양심마저도 없다면 동물과 마찬가지인 존재가 될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양심대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므로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하고 있다,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라는 말씀에서 오직 예수님은 자신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도 로마서 8:33절에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와 로마서 8: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을 의롭다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송사를 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이를 효과적인 부름이라고도 부르는 데, 디모데후서 1:9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와 디도서 3: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 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를 부르사 구원하심은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 하신 은혜의 섭리만이 요구되어짐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부르셔서 구원하심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필요치 아니하며, 오직 그분의 전능하심만이 선포되어지는 것이다.
⑤ 성도의 견인(堅忍)(Perseverance of the saints):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의 확신의 근거를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에 그 굳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히브리서 6:17-18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너무도 확실한 말씀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 1:21-22절에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 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도의 보증과 인이 되어 주심으로, 이러한 약속들을 굳게 확립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틀림없는 보호를 입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것이다.
4. 장로교회 특유의 교리를 약술하라
A.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장로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로서 이것이 중심적인 교리이며 다른 교리는 이 교리를 기초로 해서 세워진 건물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장로교회는 하나님만이 우주에서 가장 높고 절대적인 지배자이며, 창조와 섭리와 속죄의 사역에서 주권자이심을 믿고 고백한다.
B. 예정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나오는 것이 이 예정론 이라는 장로교회의 교리이다.
엄밀한 신학적인 용어로서는 예정론(Predestination)이라는 것은 인간과 천사, 그리고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고, 하나님의 피조물 전체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장로교회는 하나님이 영원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계획은 포괄적인 것이며 하늘과 땅, 지옥을 그 계획 가운데 포함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 이 계획 가운데는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존재가 포함되어 있음을 믿고 있다.
C. 은혜에 의한 구원
장로교회는 언제나 은혜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강조했다. 이 교리에 의해서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D. 성도의 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장 1절)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다.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5. 장로교회 정치체제의 특징적인 원리를 약술하라
A. 목사와 장로로 구성되는 치리회
장로회 정치체제란 장로들만의 교회의 다스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와 장로의 연합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체제를 말한다.
B.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대의적 유기적 통일체
당회(Session)를 가지고 있다. 당회는 목사 또는 복수의 목사와 치리장로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당회의 임무는 각 교회를 영적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노회(Presbytery)는 일정한 지역 내의 모든 목사와 각 교회로부터 파송 된 총대 장로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노회는 지역내의 교회와 목사들에 대한 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대회(synod)는 인근 지역 최저 3개 노회 이상으로 구성된다. 소속 노회의 모든 목사와 한 교회 한 명의 장로에 의해 구성된다. 그 관할하는 노회에 대해서 감독권을 가지고 있다.
총회(General Assembly)는 교회의 최고 기관이다. 그러므로 총회는 전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 총회는 전 노회로부터 파송 된 대의원에 의해 구성되며 대의원의 수와 선출 방법은 규정을 정하여 시행한다. 총회는 전 교회와 그 활동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2장 장로교회의 기원
1. 회당시대의 장로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 회당과 장로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시부터 신구약 중간 기에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형성 확산시킨 것이 회당(Synagogue)이었는데 여기서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기도 하고 찬양을 하고 모세를 전하기도 하였다.(행15:21 겔8:1 14:1 20:1-4 33:30-)
그들은 이곳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예배하고 교육을 받았다.
이 회당의 모든 권위는 장로들로 구성된 조그마한 조직체에서 좌우하였다.
이 때 바벨론에 흩어진 자들은 직접 선거로 뽑았고, 그 이외 지역에서는 도성 가까이 있는 산헤드린과 예루살렘의 대 산헤드린에 의하여 임명되기도 하였다.
장로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요청되었을 때는 그들은 공적으로 안수를 받았다.
율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졌을 때는 회중에 의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로 또는 서기관(랍비)으로 부름을 받아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수를 받았다.
이 때 집례는 세 장로가 있어야 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숫자가 적은 회중에서는 혼자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였으며 회의를 사회하였다. 그러나 단독으로는 권위있는 결정은 할 수 없었다. 교의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웃에 있는 동료 장로와 함께 협의하였다.(눅13:14)
각 회당에 있는 장로들의 의회는 한 사람의 우두머리나 의장을 임명했다. 이를 회당장 또는 의장이라 불렀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나 밑의 사람들에 의하여 선출이 되었는데 일시 또는 영속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회당장은 항상 의회원과 같이 그러나 그들과 구별된 사람으로서 예전과 직무를 수행하였고 당회의 당회장으로서 사회를 하였다
회당에서 장로들의 의무는 의장 밑에서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이었다.
가르치는 일은 이미 장로가 된 기성인들이 하였고, 다스리는 일은 학식이 있고 전문적인 계층이 하였다. 이들은 모두 율법에 대한 지식과 전통과 해석에 대해 특별히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에스라는 제사장으로서 서기관 일을 한 대표자이었다.(스7:6 느8:1-9) 후기에는 제사장뿐 아니라 일반인 중에서도 서기관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회중의 자연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마23:2-7에서 지적한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개회당은 장로직으로 운영되었고,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그 지역 모든 회당에 있는 모든 장로들을 모아 장로회를 이루어 해결과 해답을 내렸으며, 모든 회중들을 돌보았다.
2) 산헤드린
산헤드린의 역사적 기원은 분명치 않으나 이 산헤드린의 성서적 기원은 신명기 17:8-11, 민수기 11:16에 둔다. 탈무드는 이 기원을 모세에 두며 백성을 재판하는 일을 한 것으로 명시하였다.
이 이름이 옛날에는 게루시아(γερουσια)로 통하여 “장로들” “장로들 모임” “백성들의 장로들”로 통용되었다.
이 말이 의회 또는 “재판 법정”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고등법원 대법원을 지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대 산헤드린이라고 하였다. 지방에 있는 소 산헤드린의 정족수는 23인이었으며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71이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은 제사장, 서기관, 백성들의 장로들로서 이들은 대제사장 하에 있었다. 이를 “노회”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 “백성들 또는 이스라엘의 의회“라고도 하였으며 ”산헤드린“이라고 하였다.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은 전직 대제사장, 현직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학자들, 장로들이었는데 이 장로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회당에서 나온 대표가 포함되기도 하였다.
대 산헤드린 아래 예루살렘에 23인으로 구성된 보조적 법정이 둘이 있었으며, 지방에는 유대인 가구 수 120 이상이면 어느 마을에도 산헤드린을 설립할 수 있었는데 이 지방 정족수는 7인이었다.
산헤드린은 축제, 새 달의 계산을 좌우했고, 순례자들을 통하여 올라오는 산적한 종교적 사회적 법적 문제들에 대한 답을 내리는 일을 하였다. 문화적인 전통과 종교적인 독립과 자치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산헤드린은 국가적 차원의 “백성들의 의회”였으며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통하여 발언을 하였다. 산헤드린으로부터 율법은 온 이스라엘에게 공포되었다.
그러나 산헤드린의 주 업무는 백성들의 소송 건에 대하여 재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종족 문제와 거짓 선지자, 고위 성직자의 유죄 유무와 적대국과의 선전포고와 성전의 성소 부분의 가감과 각 지파의 산헤드린 회원의 임명과 우상숭배의 심판등을 성경에 기인하여 판단하는 기능을 행하였다.
이 시나고그(회당)와 산헤드린은 민주적인 대의 정치의 본이었으며, 사람들의 의사를 가장 정당하게 잘 표현할 수 있으며, 가장 적합하고도 적절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포로시대를 전후하여 군주중심의 나라들 앞에서 장로회 조직체로 보여준 대의 정치는 오늘 날 까지도 본이 되는 것이다.
2. 신약시대의 장로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장로직이 공적으로 교회의 직분으로 도입되었다
사도들의 전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운 교회(에크레시아)에 처음으로 장로직이 언급되기는 행11:30이다. 벌써 이때 유대인 회당의 장로가 아닌 우리 기독교의 장로직이 직분으로 도입된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신약교회는 장로와 집사 두 직분을 두었다
장로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신약교회에 허락한 직분은 장로(또는 감독)와 집사의 2가지 직분만을 인정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의 직분에는 구별이 없다고 본다.
3직분론 자들은(감독주의자, 교황주의자) 목사 또는 감독(teacher elder), 장로(ruling elder), 집사(serving office)의 3가지 직분이라고 주장한다. 신약에서의 장로와 감독은 목사에 관한 언급이지 평신도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치리장로에게는 가르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본다.
3) 장로와 감독
성경에서 장로란 단어는 늘 감독이란 단어와 함께 쓰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어떤 직분을 제정하실 때는 어떤 명칭보다도 그들의 기능과 활동을 위하여 일꾼을 세웠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장로의 명칭은 다양하게 장로, 목자, 교사, 감독 등으로 사용되었다
사도들도 바울은 빌 1:1; 딤전 3:1-2, 5:17; 딛 1:5-7에서, 베드로는 벧전 5:1에서, 야고보는 약 5:1을 통하여 감독과 장로는 동일한 직분임을 말하고 있다.
4) 장로 직의 두 종류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일들을 더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다. 이 구절은 장로에는 가르치는 장로와 치리하는 장로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전서 5장 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 가운데한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5) 치리 하는 장로의 선택
신약교회의 장로들은 일반 회원(교인)에 의해 선출되어 임직 했다. 거기에는 충분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다.
사도행전 1장 23-26절에서 모든 제자가 유다 대신 보충하기 위하여 맛디아의 선거에 참가했다. 6장 3절에는 일곱 사람의 집사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에 모든 제자들이 참가하고 있다. 또한 14장 23절에서는 모든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임명(ordain)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은 문자그대로 번역한다면 손을 올리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장로 임직식 때에 손을 얹는 안수에 관해서라기 보다도. 장로 피택을 할 때 피택 방법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약성경에서 초기 기독교의 문헌에로 눈을 돌려 볼 때 교회 정치 가운데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교회의 일꾼들(church officers: 집사, 장로를 의미함-역주)이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Rome)는 A.D. 100년경 교회의 일꾼은 전 회중의 동의에 의해 그 직무에 임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신약시대의 장로들이 회중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믿는 데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가 정치 형태로서 대의제(代議制)를 취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대의제는 오늘날까지 항상 장로주의에 있어서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의제라고 하는 장로교회의 이 교리에 의해서 시민적, 종교적 자유와 인간의 사회 의식 일반이 증진되고 큰 은혜를 계속 받고 있는 것이다.
3. 사도후 시대와 중세 시대의 교회정치 형태를 약술하라
초대교회 초기에는 장로주의적 정치형태를 유지했으나 교회가 확장 부흥됨에 따라 강력한 교권이 필요하게 됨에 따라 중기 이후로 감독 중심으로 변천하게 됨을 보게 된다
1) 클레멘트 :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the Corinthians)] 에서 사도들이 감독과 집사의 구별을 하지 않았다. 클레멘트 때까지만 해도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정부형태 유지하였다.
2) 폴리갑 : [빌립보인에게 보내는 편지] 에서 클레멘트와 같은 사상을 보여준다, 빌립보 교회에는 두 가지 직분 곧 집사와 감독만이 있으며 어떤 직분의 높고 낮음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적어도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이래 폴리갑 때까지 50-60년 이상 교회의 직분을 집사와 감독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키프리안 : 3세기에 접어들면서 박해, 배교, 교회의 분열 등의 문제에 직면해서 키프리안이 '감독중심'으로 모일 것을 강조하자 '감독우위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감독직의 운영상의 우위성이 주장되기 시작했고 회의 시에 사회를 보는 직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키프리안 자신은 감독을 장로보다 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키프리안 때까지는 로마교회의 군주적 감독직(monarchical episcopasy)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장로회 정치는 종적을 감추고 긴긴 중세교회시대는 교황정치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왈도파에서는 성경 66권만을 유일한 신앙의 기초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재자로 주장하고, 연옥은 적 그리스도의 고안물이며, 교회절기, 성자숭배, 성수, 금욕주간, 미사는 인간적 고안물이라 주장하고,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찬뿐이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인은 세속권에 순종하여야 하며, 세금을 바칠 것을 주장하고.
교회직분을 장로와 집사로 구분하고, 장로회를 인정하고, 목사가 큰 죄를 저질르면 출교 되든지 설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장로는 회중으로 부터 선출하고, 교회 총회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목사는 일년에 한 번 회집해야 한다고 하였다. 초대교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그룹이므로 피터 왈도파를 장로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신앙과 교회정부 형태가 오늘날의 장로교회와 같았음을 볼 수 있다.
4. 칼빈의 생애를 약술하라
1) 성장과 회심
존 칼빈은 프랑스 피칼디 주 노용 시에서 1509년 7월 10일에 출생하였는데 그곳은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60마일 되는 곳이었다. 그의 아버지 제넬코반은 자녀들에 대하여 사소한 일이라도 예사로 생각하지 않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 아버지에게서 지식욕과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받았고, 어미니 쟌느르 푸랑에게서는 경건을 배웠다. 그의 가정은 사회적 부와 지위를 함께 가졌었고, 칼빈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지만 자신의 아들을 처음에는 신부로 만들 생각으로 칼빈이 12세 되었을 때 그의 생활비에 넉넉할 만큼의 수입이 있는 교회사 직분에 붙여 주었다. 칼빈은 교직을 목표로 훈련받았고, 학교에서는 조수의 일도 보았다.
1523년 14살 때에 칼빈은 멀리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귀족 몬모르와 젠리의 자제들과 함께 라 마르슈 (La Marche) 대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라 마르슈 대학은 프랑스 인문주의 신문화의 본산이며, 국왕 프랑소아 1세의 교육제도의 중앙 집권 정책에 따라서 견실하게 발전하던 곳이었다.
칼빈은 이 대학에서 교수 코디어 (Maturin Cordier)에게 라틴어를 배웠고 이것은 다른 개혁자들보다 훨씬 나은 라틴어를 쓸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은 그해 몬테그(Montaigue) 대학으로 옮겼다. 이것도 아마 그의 아버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더 교회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 교직을 목표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함 같다. 칼빈은 이곳에서 우선 철학을 4년 간 전공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527년 그의 아버지의 심경의 변화로 그는 오를레안(Orlean) 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게 되었다. 이것은 아들로 하여금 좀 더 명예로운 생애를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그는 볼슈(Bourges) 대학에서 공부한 결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3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칼빈은 법률에서 다시 방향을 바꾸어 고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법률가보다는 문필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해석을 출판하여 학계에 데뷔하였다.
1534년 그는 갑작스런 회개를 경험하였다. 칼빈 자신의 말에 의하면 “너무나 완고하게 이 로마교의 미신에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러운 회개를 통하여 마음이 완악하기로는 누구보다도 더 강하였던 나의 모든 생애를 정복하여 복음을 가르치는 마음이 불붙게 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John Cclvin :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Grand Rapids, Michigan, 1949. P. XL) 그는 이 체험을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고, 이기적 자기 추구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발전을 추구하는 자가 되었다.
칼빈은 1533년 프랑스 곧 제네바 종교개혁 운동의 선도자로서의 길을 닦기 위해 파기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로 구성된 작은 단체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얼마 안 되는 지도자가 되어 회원들을 가르치고 설교도 하게 되었다.
2) 회심 그 이후
칼빈은 1535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스트라스버그(strassburg)로 가서 다시 스위스의 바젤로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경건한 호구라인 부인 댁에 투숙하게 되었고, 그 집에서 1536년 그의 불후의 걸작인 “기독교 강요” 제 1판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 동기는 당시 프랑스의 신교도 박해가 있었고 그 박해의 잘못을 시정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칼빈의 나이는 26세였고, 이 기독교 강요는 사도신경을 줄거리로 하고 모든 성경에 기초하고 있었다.
1535년 제네바에서는 천주교에 치명적인 두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로마 카톨 릭의 한 여자가 신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을 독살하려다가 발각된 사건과, 신 구교 공개 신학 토론회에서 신교 측의 승리였다. 그래서 사실상 제네바는 신교 도시로 바뀌고 있었다. 이때 지도자는 화렐이었다. 화렐은 밤에 칼빈에게 찾아가서 개혁 운동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칼빈은 자신의 성격과 안 맞을 뿐더러 경험도 없어 거절하려 했으나 화렐이 “그대가 만약 하나님의 일보다 고요한 생활로 독서나 즐기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저주하리라” 는 말을 했고, 칼빈은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느끼고 제네바 개혁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536년 10월 1일 로잔에서 열린 성찬 문제로 신 구교파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는데 칼빈은 교부신학을 자유로이 인용하면서 로마 천주교의 잘못을 밝혔고 결국 토론회는 신교의 승리로 끝났다. 그 후 1538년부터 1542년 3년 간 칼빈은 스트라스불그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그의 사상은 더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결실을 많이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멜랑톤과 일생동안 깊은 우정을 맺었고 루터를 존경하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불그에서 있는 동안 교훈하며 설교하였고, 또한 목회를 했을 뿐 아니라 저술도 많이 하였다. 칼빈은 이때 기독교 강요 제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과 성찬에 관한 통속적인 논문이란 책도 썼다.
1540년 한 과부와 결혼하였는데 9년동안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많은 내조를 받다가 1549년 그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다시 결혼하지 않았다.
5. 칼빈의 신학 사상을 약술하라
1) 칼빈 신학의 출발점
칼빈 신학을 이해하는데는 무엇보다도 그의 기독교 강요를 쓴 내적 필연성과 그것으로 목적한 바를 알면 된다.
칼빈 신학의 문제는 형식 구성이나 사상 연관의 내용적 요소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 사상의 형식이나 내용적 사상 요목은 그 깊은 곳에 있는 연관성을 지시하는데 그친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출발점은 그의 회심이 가져온 하나님의 체험에 있었다. 칼 홀이 말한 것처럼 “회심의 순간이 그의 전 생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는 그때이래 루터가 언제나 되돌아간 내적 투쟁에 봉착함이 없는 것처럼 외길로 그 얻은 것의 전개에 돌진하였다.” 칼빈의 회심은 이점에서 특징적이며 그것이 그의 신학 사고를 결정지어 주었다. 칼빈의 회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에 억압된 것인 동시에 그를 성서에 복종시킴으로 성립되었다. 칼빈 자신은 자신의 회심을 무가치한 자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었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증명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혜나 의와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칼빈의 신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이 저항하는 자까지도 복종시킬 만한 힘으로 나타나는 은총의 사실이며 이 신학을 특징짓는 것은 회심에서의 ‘힘’의 감각이었고 하나님을 능력자로 체험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신학은 쯔빙글리주의와 루터주의의 중재적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개혁신학을 조직적으로 해석하며, 로마 카톨릭뿐만 아니라 루터파, 재세례파, 반-삼위일체 파까지도 반대하고 있다. 개신교 신앙에 대한 해석을 이룬 이 책은 개혁전통의 근본문서로 칼빈 신학의 주된 자료이기도 하다.
6. 칼빈이 제네바에서 실현한 장로회에 대하여 쓰라
칼빈은 제네바에서 장로회 정치를 실현하여 장로회의 표본이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에 시와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정치와 훈련에 관한 “교회 규정”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결국 1542년 시의회의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교회에 관한 모든 것, 교회 정치, 교리, 예배, 훈련, 그리스도인의 생활 등의 모든 것을 성경에 기초해서 만들어 이 교회 규정에 담았던 것이다.
칼빈은 성경의 교회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단순한 대의제이며, 장로 이외의 직원으로서 목사, 교사, 집사를 가지고 이었다고 믿어 교회 규정에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리하여 제네바 교회는 사실상 장로교회가 된 것이다. 제네바 교회는 명칭상으로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일컬어졌으나 정치 형태로는 완전한 장로교회였다.
제네바에서는 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로서 장로회가 조직되었는데 현대 장로교회의 당회와 닮았고 어떤 점으로는 노회와 비슷했다. 장로회의 임무는 교회를 치리하고 교회 규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칼빈은 장로의 피택은 교회 회중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시의회가 장로 선거에 강하게 개입하여 실현할 수 없었다.
제네바 장로회는 교인들의 훈련을 강조했고, 기독교 생활에 관한 상세한 규칙을 정해서 사람들이 이 규칙을 지키는가 감독하는 일을 하였다. 제네바 장로회가 남긴 기록에는 여러 가지 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징벌을 받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매우 엄하게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짓을 했을 때 징벌을 가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앙고백과 교리 문답서를 만들어 교회에서 채용케 했다. 이 두 가지는 오늘 날 까지 장로교회의 교리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제3장 프랑스의 장로교회
1. 프랑스의 종교 개혁을 약술하라
프랑스의 위그노교회를 만든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멀리 15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가 시작될 무렵,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정부 체계는 이미 왕권 절대주의(royal absolutism)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귀족들은 왕의 권한이 점차 강화되어 가는 것에 분개했다.
프랑스 왕실은 루이 12세(1498-1515) 이래 ‘한 하나님, 한 신앙, 한 법, 한 왕’이라는 구호 아래 강력한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왕권의 증대를 추구하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왕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다. 교회를 자기의 지배 하에 넣기 위한 구실로서 프랑스 왕은 프랑스의 카톨릭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루이 12세의 아들 프랑소아 1세(1515-1547 재위)에 이르러 ‘갈리아주의’(Gallicanism)로 나타났다. 갈리아란 프랑스에 대한 로마시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갈리아라는 말을 쓸 때는 프랑스의 고유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할 때이다. 그러므로 갈리아주의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의 교회가 프랑스적 카톨릭교회이기 위해서는 로마 교황보다 프랑스 왕의 지배를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516년 프랑소아 1세는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볼로냐 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맺었다. 이 조약(협약)은 종교 협약이었다. 이 협약에 의해서 국왕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왕과 교황과의 관계를 규정지은 것이었다.
어느 초기 역사가는, 그 협정에 의해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temporal advantage)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spiritual sway)를 찬탈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으며 교회 법에 따른 주교들의 선출은 폐지되고 왕이 주교를 지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소아(프란시스) 1세는 방대한 교회 이권들을 자기 손에서 주무르게 되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승진하기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뜻을 공부하기 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다.
교회를 절대 왕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프랑소아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르네상스의 새로운 학문을 순수하게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인문주의 학자들을 격려했으며 그들의 다른 학문들뿐 아니라 성경 연구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다. 그는 불어 성경 읽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둔감했다. 그러한 왕이 총애하고 승진시킨 성직자들이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자질들을 결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프랑스 고위 성직자들은 사실상 세속적이고 탐욕적이었으며 방탕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부유하게 살면서 자기들의 본래 활동 영역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소아 1세는 국가의 재원을 낭비했고, 매관매직으로 그것을 충당했으며 자기 곁에 있는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러한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점점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다.
1517년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프랑소아 1세는 내심 종교개혁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환영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처럼 프랑스가 종교적인 문제로 인하여 정치적 분열까지 맞게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520년대 초 프랑스에는 모(Meaus) 그룹이라는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적 종교개혁이란 고전 연구와 원어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성직자들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교회 내의 비리를 척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되 독일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로마교회와의 단절은 추구하지 않는 교회개혁운동을 말한다.
이 모 그룹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는 르페브르(Lefevre d'Etaples, 1450-1536)와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이 유명하다.
르페브르는 프랑스의 종교개혁자요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에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후에 구약성경과 외경을 번역하였다(1528년). 이것은 1530년에 함께 출간되었다(Antwerp Bible). 이 번역이 비록 라틴어역(벌게이트)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 후의 번역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521년 르페브르는 소르본느 대학 박사들로부터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르페브르의 작품들을 정죄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주석」에서 르페브르는 루터의 칭의 교리를 기대하면서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르페브르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날개 돋힌듯이 팔렸다.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는 집권 초기에 이 모 그룹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1525년 2월 파비아(Pavia)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 패배하고, 프랑소아 1세가 포로가 되는 굴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 후 프랑소아 1세는 국력 신장을 위해 국민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종교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종교의 통합은 전통적 종교인 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그리하여 개신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개시하게 되고, 모 그룹도 프로테스탄트로 취급하여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혹은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1525년 이후 프랑스 내에서는 상당한 기간 동안 종교개혁운동은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2. 프랑스 종교개혁과 칼빈의 관계를 약술하라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출판하던 해인 1536년부터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갔다. 칼빈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사실상 지도자였다. 그가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작하게 된 것도 프랑스에서의 개신교도 박해 때문이었다. 칼빈은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잔인한 박해를 받는 것을 차마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들을 변호하기 위해 그는 조용한 바젤 시에서 붓을 들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사상 가장 유명한 「기독교강요」가 되었다. 이 책은 기독교 문헌 중 가장 귀중하고 영원히 남아야 할 책으로 지적이며 영적인 깊이와 능력을 소유한 조숙한 천재의 걸작이다.
칼빈은 개혁파 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신교의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불리었다.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강요」의 출현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며, 사도 시대 이후 가장 명석하고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확신에 넘치는 기독교 교리의 변호라고 예찬하였다.
그러면 프랑스 개혁교회에 대해 칼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가?
칼빈의 마음 속에는 항상 동족 프랑스인들이 떠나지 않고 자리잡고 있었다. 제네바의 칼빈은 복음적 신앙에 동정적이거나 이미 지지를 하거나 참여한 시민과 귀족 그리고 신자들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 칼빈은 조국 프랑스에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프랑스 개신교의 초기에는 루터파 복음주의와 명백한 차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550년대에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 이들이 고국에 돌아와 자기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칼빈주의 서적들이 점차 널리 유포됨에 따라, 프랑스의 개신교는 제네바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신자들은 그룹을 지어 개인 주택이나 헛간, 숲 속이나 들, 동굴이나 그밖의 은신처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자 그들은 칼빈에게 목회자를 파송해 주도록 요청했다. 칼빈은 그의 능력 안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꾼을 파송하였다. 그들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시편 찬송, 칼빈의 논문 그리고 프랑스어 성경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1559년에는 프랑스에 2천 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생겼고 이 교회는 정치덕으로 장로주의를 교리는 칼빈주의를 채용하였던 것이다.
1559년 5월에 프랑스의 전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오늘날의 총회와 같은 “대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칼빈주의적 신조와 장로주의 정치 제도를 채용하였다.
지방교회는 지방단위 회의를 구성하였으며, 많은 상류층 남녀가 가입하했으며 귀족들도 들어 이었다.
프랑스 왕정의 박해와 탄압은 거세고 일관성 있고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1559년부터 전국적 교회를 조직화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3. 위그노의 시련을 약술하라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해 버렸다. 지도자 14명은 고문을 당하고 화형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다양한 처벌을 받았다.
앙리 2세(1547-59)도 역시 박멸 정책을 썼다. 그는 파리 의회에 ’불붙는 방‘(the burning chamber)이라 불리던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감옥은 차고 넘치고 화형이 흔해졌다. 성경에 관한 책들과 제네바에서 온 모든 책이 금서가 되었다. 화형수들은 혀를 잘라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했다.
커다란 위험 가운데 1555년 9월에 파리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프로테스탄트들 중에는 저명한 귀족들도 있었다.
파리의 목사 앙뚜완느 드 샹디외(Antoine de Chandieu)는 뿌와띠에(Poictiers)의 교회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목사들은 전국적 교회의 조직을 위한 ’교회 정치의 조항들‘(Articles of Polity, 1557)을 작성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들은 신앙과 조직의 표준을 채택하기 위한 총회(General meeting)를 계획했다. 1559년 5월 파리에는 약 50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였다. 신속히 완전한 합의를 거쳐 그들은 권징의 형식과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교회 정치에 관해서 그들은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다.
이때쯤 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은 보통 위그노(Huguenots)라고 불리게 되었다. 위그노들의 사상은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국민적 규모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립은 프랑스 카톨릭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군대를 동원해 신교 교회를 탄압하려 했다.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대제독 코린(Admiral Coliny), 나바르공 앙리(Henry of Navarre)왕자, 꽁드(Conde)와 같은 유명한 군인들이 있어서 그들은 신교도들을 지키는 조직을 만들었으나 칼빈 등은 이를 반대 만류했다. 이로 인해 엄청난 피의 강이 흐르게 되었다. 약 1세기에 이르는 신교도와 카톨릭 교회간의 분쟁으로 엄청난 신교도들이 희생되었다.
1572년 8월 24일 기독교 사상 최대라고 할 대학살이 있었다.
다수의 신교도들이 신교도인 나바르 공 앙리와 카톨릭 교도인 마그리트의 결혼식을 구실로 파리에 유인되어졌다. 정부에서는 이 결혼식을 통하여 신구교도가 화해할 것을 바랐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파리의 모든 신교도들을 학살하고자 하는 사상 최고의 음흉한 계획이 굳혀져 있었다. 8월 24일 미명 성 제르만 사원의 큰 종소리와 함께 신교도들이 무참하게 학살 개시가 되었던 것이다. 신교도는 발견되는 데로 용서 없이 학살되었다.
파리와 프랑스 전국에서 학살된 신교도는 한 주간에 7만~10만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끊임없는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개신교회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신교도인 왕자 나바르공 앙리가 국왕이 되어 그를 앙리 4세라 불렀는데 왕위 획득 후 그는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러나 그는 1598년 “난트의 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신교도 신앙에 자유를 부여하였다,
1598년 <낭트 칙령>이 발표되자, 위그노들에게 어느 정도 종교적 자유를 주었다. 위 ‘개혁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자유가 약 200개의 동네들과 약 3,000명의 귀족들의 성에 허용되었다. 개혁교회의 대회들이 간섭없이 허용되었다. 그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①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② 200개의 도시와 300개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공연한 신앙을 인정한다.
③ 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준다.
④ 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허가한다.
⑤ 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준다.
⑥ 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 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한다.
⑦ 8년간 약 200개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
이 칙령으로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 당했다.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에 이 칙령을 폐지하였고, 그 결과 신교도 약 40만 명이 다른 나라로 망명하였다.
제4장 네델란드의 장로교회
1. 네델란드의 종교개혁과 탄압에 대하여 약술하라.
칼빈주의는 네덜란드의 국가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네덜란드 국민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현저한 요소가 되어왔다.
네덜란드 종교에 있어 근대적 시기(the modern era)는 루터나 칼빈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14-15세기의 형제단 운동, 특히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378년 제라드 흐루트(Gerard Groot)와 플로렌트우스 라데빈스(Florentius Radewins)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요람인 데벤터(Deventer)에서부터 여러 동네로 전파되어 북유럽의 많은 대학들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 교사로서의 형제단원들은 학문과 지성(literacy and intelligence)을 고도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신약성경 헬라어와 다른 성경연구에 흥미를 보였으며, 구어체로 된 성경의 보급을 주장하고 그것에 힘써왔다. 「평범한 언어로 된 성경을 읽을 필요성」은 창설자들의 동료인 제라르 제르볼트(Gerard Zerbolt)가 쓴 논문의 제목이였다(1398년). 형제단은 이러한 목적 및 다른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인쇄 출판에 있어서 선구자였다. 그들의 신학은 어거스틴적이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는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의 신앙을 가장 잘 요약한 사람이다. 그는 라덴빈스(F. Radewins)의 영적 지도 아래 있게 된 12세 때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그 운동에 전적으로 몰두하였다. 데보티오 모데르나(혹은 the Modern Devotion) 운동의 지도자들은 종교적 학교들을 세웠다. 여기서 학생들은 도덕과 하나님 경외를 배웠으며, 이와같은 방식으로 수도원과 교회에서 생활할 사람들로서 준비를 갖추었다.
공동생활 형제단의 학교와 수도원은 신비적 명상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신앙의 필요성을 가르쳤다. 그들의 학교는 학문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고 특히 고전 연구를 격려하였다. 에라스무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은 이러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러한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악덕을 보았고, 교회의 부패에 대한 저항을 글로 표현하였다.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그의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에서 교회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의 본문을 편집하여 출판했다(1516년). 이것은 종교개혁을 위한 중요한 공헌이었다.
네덜란드의 카톨릭 교회 안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 많은 요인들은 종교개혁을 향한 길을 마련해 놓았다.
첫째로,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대한 비평이 있었다(criticism of the doctrine and practice of the Catholic hurch).
둘째로, 단순하고 실제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simple, practical, Biblical Christianity)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부흥이 일어났다(revival of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이것은 로마교회가 거의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었던 면이었다.
2. 네델란드의 종교 개혁과 탄압
그러면,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비록 후에 칼빈주의가 그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현이 되었지만, 루터의 글들이 먼저 소개되어 널리 읽혔다. 어거스틴파 수사들은 루터의 가르침을 가르쳤고, 1523년에 이미 그 수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이단 혐의로 브뤼셀(Brussels)에서 화형을 당했다.
로마 교회의 끈질긴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2. 네델란드 장로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559년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조직화되어 결집해서 하나의 교회를 만들었다. 그 해 제네바에서 칼빈의 교육을 받은 한 목사가 오늘날의 벨직 신조르 알려진 칼빈주의에 입각한 신앙고백을 만들었으며, 1563년 안트워프(Antwerp)회의에서 장로주의에 입각한 교회 헌법이 작성되었으며, 이 헌법에 기초해서 대단히 많은 장로교회가 조직되어졌다.
1569년 네델란드 장로교회는 독일의 엠덴(Emden)에서 회의를 열어 대회(Synod)를 조직하고, 각 교회로부터 대회까지 전 교회 조직이 만들어졌다.
네델란드 장로교회의 하나의 특징은 한 마을에 장로교회가 몇 개가 있든 그들은 하나의 당회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새로 세워진 개혁교회는 그들의 신앙 성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와 「벨직 신앙고백서」를 채택하였다.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는 칼빈주의적인 것으로서 프랑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 의거한 것이다. 그것은 1561년에 칼빈의 제자인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가 개정하였고, 1572년에 도르트레히트(Dordrecht)회의에서 승인을 얻었다. 이것은 모든 교회들의 신조(the creed of Netherland Protestantism)가 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는 젊은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techism)을 채택하였다.
1575년 라이덴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어서 프라네커(Franeker), 그로닝겐(Groningen), 우트레히트(Utrecht) 그리고 하더위크(Harderwijk)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학교육(theological training)을 실시하는 학교가 되었고 여러 나라로부터 학생들이 몰려 왔다.
17세기까지 화란의 신학자들은 전(全) 기독교계에서 높은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였다. 그들이 개신교에 준 영향은 지대하였고 칼빈주의를 더 널리 전파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3. 아르미니우스와의 논쟁에 대하여 약술하라
네덜란드 교회는 예정론의 본질에 관하여 격심한 신학 논쟁을 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인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는 선택이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뜻)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적 결론(칼빈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그의 교리는 도르트 회의(1618-1619)에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게속 전파되었으며 18세기 웨슬레에 의해 채택되어 새로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76년부터 1582년까지 라이덴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그 후 제네바로 가 베자(1519-1605)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1588년 부터 자기 고향 암스테르담에서 목사로 봉직하였다. 그는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또 성경과 신학에 관하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다. 그는 또한 목회상담자로서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당시에 화란에는 코오른헤르트(Dieryk Coornhert, 1522-1590)라는 법률가가 있었는데, 그는 칼빈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적인 인문주의 신학으로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르미니우스에게 그의 글을 반박하는 글을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반박하기 위해 그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미니우스는 코오른헤르트의 사상에도 부분적으로는 옳은 점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코오른헤르트는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의 영향을 받아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에 대한 기사야말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라고 보고, 하나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항상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그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자유의지론으로부터 ‘힌트’를 받아 칼빈의 예정론에도 비판할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자기의 이러한 사상 변화를 상당 기간동안 숨겼다. 그러다가 1603년 라이덴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부터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결국 이것이 같은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고마루스(Gomarus, 1536-1641)와의 격렬한 신학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타락전 예정설(supralapsarianism)에 반대하였다. 그는 유기의 작성 혹은 이중예정을 부정하였다. 고마루스는 타락 전 예정설을 고수하고 유기의 작성을 믿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예정된(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1609년 아르미니우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르미니우스가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어 교수가 된 사람은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3)였다. 그는 죽은 아르미니우스를 대신하여 고마루스와 예정론에 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이 때 고마루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교수직에서 축출하려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교수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몰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당시 궁정목사로 있던 요한 위텐보가에르트(John Wtenbogaert, 1557-1644)와 문제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위텐보가에르트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지지하는 목사 46명의 서명을 받아 화란 의회에 소위 「항의문」(Remonstrance)을 제출했다(1610-년). 그들은 그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개 조항으로 요약하였다 :
① 예정 :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될 자를 미리 예정하셨다.
② 구속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만인구원론은 믿지 않았다).
③ 죄 혹은 자유의지 :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선한 자유의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혹은 성령의 역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④ 은혜 :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 영향력을 깨뜨려 버릴 만한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 또 성령과 협력하여 중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은혜로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중생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이 충분하고도 능력있는 은혜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은혜는 ‘불가항력적’(irresistible)이라고 말할 수 없다.
⑤ 성도의 견인 : 성경에는 ‘성도의 견인’에 관한 가르침, 곧 한 번 중생한 신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에 반대되는 가르침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고마루스 일파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1611년 「반(反)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여 국가가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4. 도르트 회의에 대하여 쓰라
아르미니우스 논쟁은 도르트 회의(1618. 11-1619. 5)에서 결말지어졌다. 이 회의는 어떤 의미에서 개혁교회 최초의 세계대회가 되었다. 화란 교회의 대표는 약 70명이었고 그밖의 나라에서는 모두 27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그노 대표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참석을 금지시켰으므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 회의에서는 「항의파」가 대표의 자격이 아니라 피고의 자격으로 출두하여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진술해야 했다.
도르트 회의는 칼빈주의 5대 원칙을 채택하였다 :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③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제5장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1.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 약술하라
스코틀랜드는 문명이 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예술은 놀라울 정도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제국의 중심지와 비교할 때 백성들은 야만적(barbarous) 이었고, 땅은 개척되지 못했다. 여러 세기 동안 민족(nation)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로마 제국은 어떤 시기에도 스코틀랜드를 차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종교는 조잡했고 미신적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의 명백한 우위성 앞에 굴복하였다. 즉 스코틀랜드는 본래 외국의 선교적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 국가였다.
2.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에 대하여 약술하라
(1)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
스코틀랜드에서 종교개혁의 첫번째 순교자는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3-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의 재능있는 젊은이(a talented youth)였다. 그는 파리와 루뱅(Louvain)에서 공부했고, 후에는 독일의 개혁된 대학인 마르부르크(Marburg)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종교개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527년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복음의 선포를 시작했다. 1528년 2월 29일 그는 심문을 받고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며, 성 샐베이터 대학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스코틀란드에서 그는 종교개혁의 루터적 단계(the Lutheran stage of the Reformation)의 대표자였다.
(2)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
16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가난한 후진국이었다. 왕권이 약한 반면에 귀족들의 세력이 거세었다. 교회는 국토의 반을 차지하여 비교적 부유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교회 재산은 평신도 귀족들의 소유였다. 여러 대학들이 있었으나, 교육 수준은 대륙에 비하면 뒤떨어져 있었다.
1543년 국회는 성경 읽기와 번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1544년에 이르러 비이튼(David Beaton, c. 1494-1546)과 친불파는 강한 억압책을 적용하였다.
이 때에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가 위샤트(George Wishart, 1513-1546)가 활동하고 있었다. 위샤트는 애버딘 대학에서 문학석사(M.A.) 학위를 취득한 후, 고향에 돌아와서 교장으로 일했다.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단의 혐의가 있는 자로 소환되기도 했다(아마 그 이유는 그가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가르쳤기 때문이었을것이다). 그는 피신했으나 1년 안에 브리스톨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 무렵(1540년 경)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 갔으며, 그 지역에서의 종교개혁의 진전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소코틀랜드로 귀국한 후 던디(Dundee)와 그밖의 지역에서 설교했다. 그는 키가 크고 머리가 검으며 긴 수염을 가졌다. 태도는 정중했으며 생활방식은 단순했다. 그는 매우 진지한 교사였다. 그는 추기경 비이튼의 명령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 비이튼 자신은 그후 3개월 후에 성 앤드류스 성에서 매복 기습을 받아 살해당했다.
(3) 메리 여왕과 죤 낙스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1561년 8월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시 이미 그녀는 낙스(Knox)가 자기 최대의 적이며 또 스코틀랜드가 이 양편을 함께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낙스는 처음엔 이 메리 여왕이 프로테스탄트 손에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랐었고 곧 그와 비슷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낙스가 메리 여왕을 세 번 째까지 알현할 때는 정중한 만남 속에서 작은 논쟁만을 벌였었다. 그러나 네 번째 알현에서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조가 보였다. 메리 여왕이 스페인의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할까 생각중이라는 얘기를 들은 낙스는 자기의 명령을 발하여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강렬한 반대의 경보를 울리게 하였다.
메리 여왕은 국사에 한 이단적인 설교자(낙스)와 일반 평민들이 개입을 한다고 격분하여 낙스를 소환하였다. 그녀는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를 꾸짖고 또 낙스를 반역죄인이라고 고발하였다.
그러나 메리 여왕의 세력은 기울었고, 1567년 메리 여왕은 몰락, 퇴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낙스의 오랜 친구인 모레이(Moray)의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섭정 제임스는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파와 섭정 지지파 사이의 투쟁 속에 빠져들어 갔다.
낙스는 이 소용돌이 속에 걱정과 근심을 하며 개입하였다. 그러나 낙스의 힘은 기진한 상태에 있었다. 낙스는 임종의 자리에서 교회 직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외치는 그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 그 비판받는 인간들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었음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신다. 단지 그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죄악을 참으로 증오하고 혐오한 것인 사실이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기꺼이 은혜를 베푸시사 그의 신비스런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과연 그가 맡기신 사명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너무도 컸기에 전혀 인간들의 눈치를 살핌이 없이 주께서 내게 명하시는 대로 너무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낙스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감히 고백하나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취한 점이 없으며,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노력한 점도 없으며, 나 개인의 정욕 혹은 다른 이들의 정욕을 만족시킨 일도 없으며, 단지 내게 허락하신 은사를 성실하게 사용하여 내가 감독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노력하였을 뿐이다.”
또한 낙스는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그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유언에 기록하였다 :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시거니와, 나는 사람들에게 명백하고 순수하게 그의 진리를 보여주는데 조금도 비겁하지 않았다.”
<대영백과 사전>에서는 죤 낙스에 대해 상세하게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
“낙스가 설교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은 그가 이성과 감정을 잘 혼용하는 능력(his capacity to fuse reason with emotion)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또 그가 강단에서 열정적인 논리를 구사하여 지성과 감정에 똑같이 강력한 호소를 하였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그는 비관용적인(intolerant) 면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 나 비슷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낙스의 칼빈주의는 후대의 칼빈주의보다는 훨씬 온건한 것이었다... 자기가 믿는 바에 대해서 오직 한마음을 가지고 일생 내내 꿋꿋하게 헌신한 것을 보면, 그 시대에는 이러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참으로 드물었는데, 그는 참으로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낙스의 도덕적 생활이 그의 엄격한 시조(rigorous creed)와 어긋남이 없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 낙스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가 있다.”
죤 낙스는 1572년 11월 24일에 죽었다. 제임스 멜빌(James Melville)은 낙스를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선지자이자 사도”(that most notable prophet and apostle of our nation)라고 불렀다. 섭정 모튼(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 그의 일생동안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Here lieth a man who in his life never feared the face of man).
(4)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
낙스가 사망한 후, 곧 앤드류 멜빌이 지도자가 되었다. 멜빌은 스코틀랜드의 몬트로즈(Montrose) 부근의 밸도비에서 1545년 8월 1일 출생하였다. 몬트로즈에서 라틴어, 헬라어, 프랑스어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고, 1559년 성 앤드류 대학교의 성 메리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1564년 가을에 파리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성 앤드류 대학교를 떠날 당시, 그는 “영국의 젊은 학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철학자이며 시인인 동시에 헬라어 학자”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멜빌은 파리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철학 등을 공부했다. 후에 그는 제네바를 여행하였으며 그곳에서 곧 인문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멜빌은 베자의 문하에서 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1574년 7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멜빌은 글래스고우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노력과 열의로 각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게 되어 강의실들이 꽉 들어차게 되었다. 1575년 8월의 총회에서 멜빌은 고위 성직제도가 성경적 근거를 갖고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1578년 4월부터 그는 <제 2 치리서> 작성을 주도하였으며, 이것은 1581년 총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제 2 치리서>는 멜빌의 주요한 노력의 결과였다.
3. 죤 낙스의 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주인공은 죤 낙스(John Knox, 1513-1572)였다.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은 그를 “그의 조국과 세계가 빚을 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인”(the one Scotchman to whom his country and the world owe a debt)이라고 불렀다.
죤 낙스는 제임스 5세의 초기인 1513년(혹은 1515년)경에 해딩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계급 출신으로서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샤트가 설교할 때 검을 들고 그를 호위하기도 했다.
위샤트가 화형을 당한 후, 낙스는 성 앤드류 성으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설교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설교의 효과는 놀랄 정도였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교황제의 가지들을 쳤으나 그는 뿌리를 쳤다”(Others cut the branches of the Papacy, but he strikes at the roots.)라고 했다.
그후 프랑스의 공격으로 성 앤드류 성은 함락 당하고 낙스는 체포되어, 프랑스 노예선(죄수나 노예들이 노를 젓게 한 돛배)에서 19개월 동안 죄수로 지냈다. 그 배에서 복역하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처음으로 설교했던 성 앤드류 성에 있는 성 삼위일체 교회의 뾰족탑을 바라보았으며, 그 때에 그는 자신이 다시 한 번 더 나은 시기에(in better times) 그 곳에서 설교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표명하였다.
석방된 후, 낙스는 잉글랜드의 버위크(Berwich)에서 여러 해 동안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했다. 당시에 영국 왕은 에드워드 6세(1537-1553)였으며,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의 지도아래 종교개혁이 급도속로 진전되고 있엇다.
낙스는 5년 동안(1549-54) 비위크에서는 목회를 통해, 런던에서는 설교를 통해, 그리고 대주교 크랜머와의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버위크에서 목회할 때 그는 성찬 참석자들로 하여금 성탄 식당에 둘러앉게 했는데 그는 그것이 성경적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꿇어앉는 것에 대한 낙스의 반대 때문에 크랜머는 제2차 기도집(the Second Prayer Book)에서 꿇어 앉는 것에 관해 극히 개신교적 설명을 가했다. 즉, 성찬식이 시행될 때 무릎 꿇는 것은 시행되지만, 이것은 경배의 의미는 없으며, 결과적으로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설명을 삽입하였다(이것은 낙스의 공헌으로 인정된다). 비록 낙스가 <제2차 기도집>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일치와 평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행정 장관(magistrate)의 명령때문에 버위크의 옛 회중에게 그 기도집의 사용을 추천하였다.
1559년 5월, 낙스는 고국의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이 시기까지 그는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그는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의 개혁자들과 유익한 접촉을 하였다. 본래 낙스의 입장은 위샤트와 같이 쯔빙글리 적이었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칼빈과의 접촉을 통해 대부분의 면에서 칼빈주의적이 되었다. 낙스에게는 <제네바> 도시야말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학교’로 보였다.
고국에 돌아온 낙스는 성 앤드류스 성당에서 설교함으로써(1559년 6월 11일) 자기가 프랑스 노예선에서 품었던 소망을 성취시켰다. 낙스는 복음적인 기독교신앙의 확립을 위해 개혁세력의 선두에 섰다.
1560년 체결된 버위크 조약(the Treaty of Berwick, 1560년 2월)에서 개혁가들은 스코틀랜드에 진주해 있었던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보호하에 두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섭정 역할을 했던 귀즈의 메리(Mary of Guise)는 관점과 야심에 있어서 철저하게 프랑스적이었다. 섭정은 총명했으나 신중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개신교도들이 거의 그녀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귀족들은 섭정에게 신앙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고 프랑스 군대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병이 들었고 개혁파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부르면서 이제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 양편이 다 퇴각할 것을 요구했다. 1560년 6월 11일 그녀가 죽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은 개신교 목사 죤 윌록(John Willock)이었다.
속수무책의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의 지원도 없고 군대의 증강 가능성도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1560년 7월 6일 에딘버러 조약(the Treaty of Edinburgh)에 따라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모두 퇴각하게 되었다. 7월 15일에 프랑스가 자기 나라로 출항했고 영국군도 도보로 출발했다. 19일에 낙스는 많은 교인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승리한 스코틀랜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자기네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문제해결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다. 왜나하면 스코틀랜드에는 모든 일을 처리할 중앙집권적 권력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8월에 자체적으로 모인 스코틀랜드 의회는 종교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 신앙고백>(Scots Confession)이 스코틀랜드의 정식 신앙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문서는 그 색조가 온건한 칼빈주의였다(a document moderately Calvinistic in tone). 또한 이 문서는 칼빈이 주장한 것보다 훨씬 더 성례전에 대해 강조를 하고 있었다.
개혁교회의 조직과 그 치리체제를 정립하는 문제는 계속 남았다. 낙스는 뛰어난 자질을 갖춘 교회인사들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제 1 치리서>(First Book of Discipline)을 스코틀랜드 의회에 제출하였다(1560년). 거기에는 개혁교회의 조직과 재정문제에 대한 제안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예배는 <낙스의 전례서>(Book of Common Order)에 의해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낙스가 제네바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을 개정한 것이었다. 이 <전례서>에 의하면, 교회 회중은 그들이 매년 선출하는 장로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또 이 장로들은 회중들 가운데에서 확고한 도덕적 규율(firm moral discipline)을 유지하는 데에 목사를 돕게 되어 있었다. 목사는 회중들에 의해 선출되지만 목사들은 다른 동역자들에 의해 그 신앙과 생활을 엄격하게 심사받고 통과된 후에야만(after rigorous examination of life and doctrine by their ministerial brethren) 임명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유능한 목사가 있으면 그는 어떤 한 지역(주로 과거의 카톨릭 교구와 일치함)을 담당하는 <감독자>(superintendents)로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최종적인 권위(final authority)는 장로들과 목사들로 구성된 전체교회의 총회(general assembly)에 속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시편 찬송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개혁교회의 표지였다. 제네바에 있던 낙스의 교회에서는 51개의 시편 모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총회는 1564년에 전 시편의 완성과 출판을 제시했다. 제네바의 곡조가 평이 좋았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주 그 노래에 화음을 붙여 찬송했다. 그리하여 곧 4부로 된 찬송이 편집되었다. 가사들은 시적인 감각(poetic quality)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후의 다양한 번역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제2차 스코틀랜드 시편집(the second Scottish Psalter)이 1650년에 출판되었다.
낙스의 저술과 그가 끼친 영향력은 사람들에 의해 종교적인 면에서 또 정치적인 면에서 여러 갈래로 평가되고 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요, 반드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낙스가 가졌던 것은 확실한 일이다. 이 신념 위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세워졌다.
낙스는 <하나님의 나팔>이었으나, 후대에 남아있는 설교는 단 두 편 밖에 없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첫번째 시험”(마 4:1)이요, 다른 하나는 “왕권의 근원과 한계”(사 26:13-16)이다.
4.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역사를 약술하라.
(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존 낙스와 스포티스우드(Spottiswood), 윌로크(Willock), 로우(Row), 더그라스(Douglas), 위남(Winarm) 이 여섯 사람을 시켜 스콜틀랜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채용하고 장로교회를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2) 제1회 장로교회 총회와 훈련교서.
1560년 12월 20일 스코틀랜드의 제1회 장로교회 총회가 낙스의 지도아래 개최되었는데, 출석자는 목사 6명, 치리장로 36명이었다. 이 총회는 훈련 교서(Book of Discipline, “스코틀랜드 교회정치 체제”“첫번째 훈련교서”)를 만들어 냈다.
이 훈련 교서에는 장로, 집사의 임기는 1년으로 하였고, 당회, 대회, 총회의 조직을 정하였으며, 교회 직분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주일학교 부장, 대독자(Readers) 등을 두게 했으며, 기독교교육에 관한 규정을 많이 할애 했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태도, 도덕적인 문제를 취급하여 신앙을 일상생활에 적용하도록 한 것을 본다.
(3) 멜빌과 제2훈련교서
존 낙스가 죽은 후 앤드류 멜빌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사실상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모든 정체(政體)를 정립한 사람이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발전시킨 사람이다. 오래된 훈련 교서를 멜빌은 1578년 제2훈련교서로 개정하는 작업을 했으며, 1581년 총회에서 채택되고, 칙령으로 선포되었다. 이 교서가 바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철저한 장로교회로 만든 것이다. 이 교서는 시정과 교회정치를 분리했으며, 교회 정치는 교리, 훈련, 성찬 등 3부분으로 구분했고, 교회 공직을 목사(감독), 장로, 집사로 구분하였고, 네 번째는 박사와 교사를 덧붙혀 놓았다.
(4) 국민 서약(National Covenant)
제임스 6세는 1603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어 제임스 1세라 불리어 졌는데 이때 양국은 동일한 군주 아래로 통일되었다.
이 제임스 1세가 162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구교의 정치 형태와 예배방식으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챨스는 스코틀랜드의 모든 교회는 1637년 7월 23일을 기해서 영국 구교회의 예배 형식을 채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 날 에딘버러의 존 낙스의 옛 교회인 성 길스 교회에서 대사제 로드의 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하자마자 부인 노동자 제니 게디스(Jenney Geddes)가 의자를 수석 사제의 머리에 던졌기에 한 순간에 민중은 대 소동이 일어났고 여러 물건을 퇴장하는 사제에게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하여 1638년 3월 1일에 귀족, 신사, 목사, 농민 등의 수많은 장로주의자 회중이 그리프리알(Greyfriar)교회 뜰에 모여 “국민 서약”에 서명을 하고, 생명을 걸고 서로 도와 주며 장로주의 신앙에 충성할 것을 서약했다. 이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널리 퍼져 전 스코틀랜드의 사람들이 서명하였다.
그리하여 1638년 11월 21일 글레스고우에서 총회가 모여 알렉산더 헨더슨이 의장으로 뽑혔다, 그는 왕의 특사와 외교를 벌여 감독제도는 추방하고, 순수 장로회 주의를 안드레 멜빌레가 고안한 대로 회복시켰다.
(5) 계약자들(The Covenanters)
1660년 11년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공화 정치를 했던 크롬웰이 죽자 스코틀랜드인들은 네델란드에 망명해 있던 챨스 왕자를 맞아 들여 국민 서약에 서명시킨 다음 찰스2세 왕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얼마 안 있어 국민 서약을 파기하고 장로회주의를 조소하고, 엄격한 법률을 재정하여 영국 국교회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단속하였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인들은 다시 국민서약 아래 단결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계약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챨스 2세 때 이들이 받은 고난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수한 남녀, 어린이들까지 신앙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하고 학살당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인 시대(Killing time)"라 일컫고 있다.
(6) 혁명과 종교 관용령
1685년, 찰스 2세가 죽은 후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으나 1688년에 추방되어 프랑스로 망명했는데, 이때 이른바 명예혁명(Glorius Revolution)이 일어나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네델란드 사람으로서 “침묵의 윌리엄”의 자손이고, 장로회 주의자였다.
1689년에는 관용령(Toleration Act) 이 의회를 통과해서 역사상 없었던 종교의 자유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주어졌다. 1690년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의 국가교회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1712년에 “성직 추천령”이 의회를 통과하였는데, 이 법은 소수의 재산 소유자에게 목사를 임명하는 권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장로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130년에 걸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원인이 되었다.
(7)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분열
최초의 분열은 1733년 에벤저 어스킨(Ebenezer Erskine)의 지도에 의해 일어났다. 성직 추천령에 항의하여 동료 목사들과 스코틀랜드 교회를 나와 협동노회(Associate Presbytery)를 만들었고, 이 새 교회는 100년 간에 걸쳐 몇 교회로 분열을 해 나갔다.
1752년에는 토마스 기레스피(thomass Gillespie)가 성직 추천령에 의해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구원 대회”(Relief Synod)를 만들었다.
1843년에는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성직 추천령에 반대해서 472명의 목사와 하께 이탈해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대분열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교회원이 선거에 의해 제직(목사, 장로, 집사)을 선출해야 한다는 교회 자립 원칙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자유 교회는 큰 교회로 성장하였으며 유력하고 유능한 영적인 목사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1874년 의회는 성직 추천령을 폐기하였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자치의 힘을 회복하였다.
(8) 합동과 재 합동
1847년 토마스 기레스피의 지도로 만들어진 구원대회와 협동노회로부터 이탈했던 사람들이 합동해서 “합동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를 만들었다. 이 교회는 훌륭한 교회로 성장했고, 뛰어난 목사들을 배출시켰다.
1900년에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합동 장로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합동자유교회”를 만들었는데 회원은 50만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합동에 반대한 자유교회의 25명의 목사들이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라는 이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1929년에 스코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 합동자유 교회가 합병하여 “스코틀랜드 교회”(The Church of Scotland)를 만들어 대 교회를 만들었다.
제6장 : 잉글랜드의 장로교회
1.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요인들을 약술하라
(1) 전반적인 요인들
첫째는 종교개혁의 morning star 라고 불리우는 죤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의 추종자들인 롤라드파(Lollards)의 반교회적(反敎會的) 성경 중심 사상이 영국 전역에 확산된 데에서 기인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둘째는 인문주의(Humanism)의 보급에서 찾을 수 있으니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딘 콜렡(Dean Colet), 에라스무스(Erasmus)등의 인문주의자들이 헨리 8세(Henry VIII)와 교제를 함으로서 개혁의 바람을 이르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반(反) 성직제도 사상이 확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직자들은 정부와 행정을 독점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들의 금력(金力)과 부도덕성을 혐오하게 되었다.
넷째는 Luther사상의 침투와 확산에서 찾을 수 있으니 1517. 10. 31에 95개 조항이 게시 된지 4개월 후에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영국에 입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스포드(Oxford), 켐부리지(Cambridge) 대학에서 연구되어 영국전역에 확산되었던 것이다.
다섯째는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독일에서 번역한 영어 성경(신약,1525)이 영국에 입수되어 널리 읽혀 진데 있다고 할 것이다.
여섯째는 국가주의(Nationalism)의 확산이다, 유럽 전역에 교황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국가 주의, 국민 감정이 각 나라마다 확산 된 것이다.
(2) 직접적인 요인 :
영국의 종교개혁은 영국왕 헨리 8세의 이혼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1525년 Henry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이혼을 고려한다.
(1)후계자 문제.
(2)형의 아내를 취한 점에 대한 양심의 가책. Henry는 자녀들의 죽음을 이 탓으로 돌림. (3)시녀 Ann Boleyn과의 열애
Henry는 첫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주도록 교황 Clement VII에게 요청하고 교황도 이 요구한다. 그러나 Catherine의 완강한 거부로 이문제는 다시 로마로 회부된다. 이때 Spain의 Chales V(Catherine의 조카)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은 포로가 되고 결과적으로 Henry는 뜻을 이루지 못한다.
헨리 8세는 왕위를 계승할 태자를 낳기 위해서 궁녀 앤 볼린(Anne Boleyn)과 결혼하였고, 교황 클레멘트 7세는 헨리 8세의 이혼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헨리 8세는 캐더린과 결혼하여 여섯 아이를 낳았으나 유일한 생존자는 메리 공주뿐이었다. 후에 이 메리 공주는 개신교도를 박해하는 ‘피의 메리’가 된다.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Act of Supermacy)을 발표하여 영국 성공회의 유일한 수장이 됨으로써 교회 독립을 꾀하였다. 그 후 헨리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막대한 수도원의 재산을 소유하므로써 로마교회의 세력의 발판을 제어하였다. 3년 동안 헨리는 376개의 수도원들을 철폐하고 그곳의 유물들을 경매로 팔아치웠다.
2. 잉글랜드 개혁의 진행을 약술하라
(1) 헨리 8세(Henry VIII)의 종교 개혁 :
Henry는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The 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킨 뒤 1536년에는 영국교회의 첫 번째 교리 진술인 Ten Articles이 발표된다.
(2) 에드워드 6세(Edward VI) 의 종교개혁(1547-1553):
헨리 8세가 죽은 후, 아들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1547년 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549년 에드워드는 통일령을 발표하였다.
(3) 메리(Bloody Mary. 1553-1558)여왕의 박해:
1553년에 왕위에 오른 메리는 로마교회를 부활시키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였다.(Back to Romanism). 이때 개혁파 성직자가 2,000명이나 사형을 당하였다.
(4) 에리자베스(Elizabeth, 1558-1603)여왕:
앤(Ann)의 딸로서 여왕에 올랐다. 그의 정책은 매우 온건 하였다. Romanist, Lutheran, Calvinist를 섞어 놓은 듯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것이 개신교(prostant)의 출현 배경이 된다.
(5) 제임스 1세(James I, 1603-1625):
그의 어머니는 메리(Mary, Queen of Scots)였다. Scotland에서 어머니 Mary의 퇴위 후 James VI로 즉위 하였다.
(6) 챨스 1세(Charles I, 1625-1649):
제임스 1세(James I)의 아들로서. 비 국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3. 청교도 운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청교도 운동의 역사
일반적으로 청교도 운동은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이 선포된 1559년경에 시작되어, 7세기 후엽 1662년의 통일령과 뒤이어 일어난 대 추방령(Great Ejection)과 함께 막을 내린 것으로 간주한다.
1) 16세기 청교도 첫 세대들은 정치적인 수단을 통하여 교회 정치나 예배 의식에 있어서 필요한 개혁을 단행하려고 시도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주의와 제네바의 칼빈주의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가는 정책을 취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원형이 되었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후반기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 같은 목적과 이상과 마음으로 헌신한 수많은 사람이 출현함에 따라 확산되었다. 윌리암 퍼킨즈(William Perkins)의 책들과,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dgers)의 ‘일곱 개의 小論文’(Seven Treatise)은 청교도적 경건의 전형적인 표준과 함께 수천의 광채를 일으키며 불꽃을 피우게 하였다.
2) 제임스 1세(1603~1625)는 그의 장로교 요람을 버리고 감독주의를 짊어졌고, 또 청교도 지도자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을 이 땅에서부터 몰아내겠다고 하였다.
3) 찰스 1세에 의한 영국민의 자유에 대한 박탈과 그의 완고한 추종자이었던 대주교 윌리암 라우드의 행동은 개신교 사상을 핍박하였고, 경건하고 신실한 개인의 존엄성과 책임감에 대하여 바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분노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호전적인 ‘청치적 청교도주의’가 탄생되었고 이것은 의회주의를 통하여 공화주의를 활짝 피게 하였다. 그것은 종교적인 청교도주의를 야기 시킨 혁명이었다.
4) 마침내 참된 자유의 평온한 시대와 시민전쟁(1642~1648)이 군주주의와 교권주의의 맹위를 감추게 하였을 때 올리버 크롬웰(1654~1658)의 우호적인 통치하에서 청교도주의는 최고의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들의 사상을 가장 왕성하게 표현하였다.
5) 크롬웰의 죽음과 그의 공화정치 몰락 후에 스튜어트 왕가인 찰스 2세에 의한 잉글랜드 왕좌의 재빠른 복구는 청교도 혁명의 종말로 보였다. 청교도주의가 시민전쟁의 단순한 정치적 혁명이었다면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싹튼 많은 것들이 청교도주의가 보다 크고 순수한 영적인 청교도 혁명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1660년 후에 왕정주의자들의 의회가 대주교들과 다시 공모하여 정치적 청교도주의와 종교적 청교도주의를 구별하며, 청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재개하였다. 곧장 기도 에식서가 재차 강조되었고 1662년 통일령에 의해 이를 통과시켰다. 새로 제정된 기도 예식서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무조건 동의하며 순응해야 함은 물론, 이 법령은 장로교 목사안수식을 포기할 것과 감독주의식 안수를 재차 받도록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찰스 1세를 저항할 수 있게 한 의회의 권한을 합법화시킨 1643년의 ‘거룩한 협약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대한 철회를 포함하여 찰스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도록 요구하였다.
1688년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을 성사시키면서 옛날의 주권 자유를 회복하였다. 그들이 이룩한 무대는 1790년대에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로부터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이르기까지 펼쳐진 非국교도 선교운동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4. 청교도 운동의 특성을 약술하라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 윌리암 아메스(William Ames)는 신학(divinity)을 ‘하나님께 대한 살아있는 교리’(the doctrine of living of God)라고 정의하였다.
5. 웨스트민스터회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웨스터민스터 회의가 열린 곳은 영국 의회정치(議會政治)의 본거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1643년 7월 1일-1649년 2월 22일까지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총회에서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칼빈 사상의 대표적 신조(信條)요 장로교회(長老敎會)의 표준 신조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을 비롯한 대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공중예배 지침서, 장로회 교회 정치 체제는 영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 장로회의 헌장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 한국 장로 교회의 신앙고백서는 거의 원안을 따르고 있으나 장로교 정치체제(政治體制)만큼은 영국 것을 도입치 않았다.
이 회의는 영국의 가장 훌륭한 목사 121명과 하원의원 2O명, 상원의원 1O명, 계 151명으로 구성되었다. 두 명의 목사를 제외하고 목사 모두는 영국 국교의 목사로 안수를 받은 사람들이며, 대부분 모두가 청교도였고 칼빈주의자들이며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교회 정치 형태에 대해서는 의원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고. 다수의 사람들은 장로정치를 회망했지만, 한편 꽤나 많은 사람들이 회중정치 형태(Congregational form)를 바랐으며, 소수이기는 했지만 감독정치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 정치의 형태야말로 이 회의에서 가장 열렬하게, 또한 가장 길게 토론하였던 의제였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처음 1643년 7월 1일에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에서 열려서 5년 6개월 22일 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1,163회의 전체회의가 열렸고, 대단히 많은 위원회와 소위원회도 개최되었다.
회의는 의회군에게 전황이 불리하게 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에 거의 진전되지 않고. 의회는 급히 스코틀랜드에 대표단을 파견해서 군사적 원조를 구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국회의 전 의원이 엄숙한 동맹(Solemn Leagueand Covenant)에 서명할 것을 조건으로 원군을 보낼 것을 동의했다. 이 동맹의 초안은 스코틀랜드 측이 만들었고 잉글랜드는 이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에도 합의가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국회의 모든 의원이 엄숙한 동맹에 서명했을 때 그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속과 방위, 그리고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교회를 하나님 말씀에 따른 교리, 교회정치. 예배와 권징의 면에서 개혁하여 가장 잘 개혁된 교회, 즉 모범적인 교회를 만들 것을 굳게 서약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6명의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그 가운데 4명은 목사, 2명은 장로로서, 목사는 알렉산더 헨더슨, 베일리, 죠지 길레스피, 사무엘 러터포드였다. 그들은 회의에는 참가했지만 투표는 하지 않았고, 적은 수였지만 회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643년 9월에 스코틀랜드 대표단이 도착해서 엄숙한 동맹에 서명한 때로부터 회의 활동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때까지는 영국 국교의 39개조 신조를 토대로 해서 이것을 개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고,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들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39개조 신조를 버리고 영국 국교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훌륭한 신학자들의 모임임과 동시에 기독교사상 보기 힘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이었으며, 많은 시간을 기도하는 데 사용하고, 모든 것이 경건한 마음으로 충만해서 진행되었다.
6.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결정한 장로회의 표준들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49년)
교리 1-38
십계명 39-81
구원의 방편, 82-97
주기도 98-107
2)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649년)
교리 1 1-45
교리 2 46-90
십계명 1 91-121
십계명 2 122-148
구원의 방편 149-177
주기도 178-196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제1장 성경에 관하여
제2장 하나님과 성삼위일체에 관하여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관하여
제4장 창조에 관하여
제5장 섭리에 관하여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에 관하여
제7장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에 관하여
제8장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9장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10장 실제적 부르심에 관하여
제11장 의인에 관하여
제12장 양자에 관하여
제13장 성화에 관하여
제14장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에 관하여
제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
제16장 선행에 관하여
제17장 성도들의 궁극적 구원에 관하여
제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하여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제20장 신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제22장 합당한 맹세와 서원에 관하여
제23장 관공직에 관하여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제25장 교회에 관하여
제26장 성도의 교제에 관하여
제27장 성례전에 관하여
제28장 세례에 관하여
제29장 주의 만찬에 관하여
제30장 교회의 권징에 관하여
제31장 대회와 회의에 관하여
제32장 사람의 사후 상태와 부활에 관하여
제33장 최후의 심판에 관하여
제34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
선 언 문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 소요리 문답 구조 비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의 상호 구조를 잘 정리하게 되면 어떤 신학적 구조에 기초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각 신조의 부족한 부분을 그 자체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조직신학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 소요리문답
서론 1장 성경론(1-10항) 성경 1-6문 1-3문
신론 2장 삼위일체(1-3항) 삼위일체 7-11문 4-6문
3장 작정(예정)(1-8항) 작정 12-13문 7-8문
4장 창조(1-2항) 창조 14-17문 8-10문
5장 섭리(1-7항) 섭리 18-20문 11-12문
인간론 6장 타락, 죄와 형벌(1-6항) 타락,죄 21-29문 13-19문
7장 은혜언약(1-6항) 언약 30-35문 20문
기독론 8장 중보 그리스도(1-8항) 그리스도 36-57문 21-28문
구원론 9장 자유의지(1-5항) 자유의지 149-152문 82-84문
10장 소명(1-4항) 소명 58-61, 67-68 29-32문
11장 칭의(1-6항) 칭의 70-73문 33문
12장 양자(1항) 양자 74문 34문
13장 성화(1-3항) 성화 75, 77-78문 35-36문
14장 신앙(1-3항) 신앙 153, 72-73문 85-86문
15장 회개(1-6항) 회개 76문 87문
16장 선행(1-7항) 선행 78문 x
17장 견인(1-3항) 견인 79-81문 x
18장 구원의 확신(1-4항) 확신 80-81문 신자의 삶 39-107문
교회론 19장 율법(1-7항) 일반적 율법 91-98문 39-41문
십계명 98-152문 41-84문
20장 자유(1-4항) 자유 x x
21장 예배와 안식일(1-8항) 구원유익 153-196문 86-107문
서론 153-154문 86-88문
말씀 155-160문 89-90문
기도 178-186문 98-90문
주기도문 187-196문 91-107문
22장 맹세와 서원(1-7항) 맹세, 서원 x x
23장 국가의 위정자(1-4항) 국가 위정자 x x
24장 결혼과 이혼(1-6항) 결혼과 이혼 x x
25장 교회(1-6항) 교회 61-66, 69문 x
26장 성도의 교통(1-3항) 성도의 교통 65-66,69,82-83,86,90
36-38문
27장 성례(1-5항) 성례 161-164문 91-93문
말씀 153-160문 88-90문
28장 세례(1-7항) 세례 165-167문 94-95문
29장 주의 만찬(1-8항) 성찬 168-177문 96-97문
30장 교회의 권징(1-4항) 권징 x x
31장 대회와 총회(1-4항) 대회,총회 x x
종말론 32장 죽음과 부활(1-3항) 영화 82-86문 37-38문
부활 84-85, 87-88문
33장 최후 심판(1-3항) 심판 88-90문 38문
7. 잉글랜드의 장로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잉글랜드의 의회가 전술한 장로주의 표준을 채택한 결과 잉글랜드의 교회는 감독정치를 폐기하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장로교회가 되었다.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군사 원조를 받고. 올리버 크롬웰(OliverCromwell)의 지휘를 받은 의회군은 찰스와 그 군대에 대해 완승했다. 1649년 1월에 찰스는 런던 탑에서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호민관(護民官)으로 하는 공화정치가 수립되었다. 그는 1658년에 죽고, 1660년에 찰스 2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찰스 2세가 국왕이 되자마자 영국의 교회는 감독정치로 복귀됐다.
윌리엄과 메리(Willam and Mary)가 공동 통치자가 된 1688년의 명예혁명과 그것에 이어진 관용령(Toleration Act)이 발동된 후조차도 장로주의를 믿는 자유만이 허락되었고, 노회(Prsby Lenes)와 대회(synods)를 조직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목사는 고립되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유니테리안(Unitarianism)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이단이 교회 내부에 침입해 잉글랜드의 장로주의는 쇠퇴했다.
그러나 19세기가 시작됨과 더불어 잉글랜드의 장로주의자들 사이에 복음적인 신앙 부홍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존 웨슬레(John Wsley)의 지도 하에 영국에 퍼져나간 메도티스트의 신앙 부홍 운동의 영향에 의한 것이지만, 더욱이 잉글랜드에 이주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의 감화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1876년에 여러 장로교회의 그룹이 합동해서 영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England)를 결성했다.
이 신학교는 케임브리지 대학(Cambrigde University)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충실한 교수진을 가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Westminster Theological Collage)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제7장 아일랜드의 장로교회
1. 아일랜드의 기독교사를 약술하라
(1) 아일랜드의 고대 기독교
언제 어떻게 기독교가 아일랜드에 전하여졌는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단히 일찍이 전하여졌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 섬의 최초의 기독교 지도자는 패트릭(Patrick)
(2) 로마 카톨릭 화 된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1170년경 로마 카톨릭의 나라가 되었다. 그 해 로마 교황은 잉글랜드의 국왕으로서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헨리2세(Henry 1)에게 아일랜드의 통합을 명하였다. 그 명령은 실행되었고 그 때부터 350년 간 아일랜드는 로마 카톨릭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3) 아일랜드와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년 헨리 8세 (Henry 四)가 수장령을 의회에 제출하고 가결시켰을 때, 그는 잉글랜드와 동시에 아일랜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4) 얼스터의 지배
엘리자베스 여왕의 후계자 제임스 1세(James 1)에게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인계되었으나. 그는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에게 상담했는데, 베이컨은 영국 본토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아일랜드에 이주시키도록 진언했다. 이 진언은 실행되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얼스터 식민(Ulster Plantation)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이 이주는 아일랜드의 얼스터 현(Province of Ulter) 전체에 미쳤다.
2. 아일랜드의 장로교사를 약술하라
(1) 장로교회의 얼스틴 이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북아일랜드의 이민 때에 전도를 시작했다. 주님은 이러한 장로교회의 목사들 가운데 가장 유망하게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목사를 들어서 가장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사는 제임스 글렌딩잉(James Glendining)이다. 사람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어 우리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라고 외쳤다.죄를 자각했기에 남자나 여자나 모두가 부들부들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소식을 듣고, 다른 목사들이 응원했고, 더욱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깊게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신앙의 부홍운동의 바람이 북아일랜드에 불게 되었던 것이다.
(2) 암흑의 계약과 대학살
찰스 1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국교회의 정치와 교리에 복종시키고자 탄압했지만. 이와 같은 탄압의 손길을 아일랜드에도 뻗쳤던 것이다. 악명높은 토마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가 아일랜드의 총독(Lord Deputy)에 임명되었고, 그의 사명 가운데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를 영국 국교회에 복종시켜야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의 사람들에게 4복음서의 기자(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대해 맹세하는 서약(Oath upon the Holy Evangelists)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웬트워스는 바다를 피로 물들게 한 해전에서 아일랜드를 지키고, 아일랜드의 산업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했으나 그의 처참한 행위가 너무나 잔인했기에 그가 장기의회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1640년에 처형되었을 때 아일랜드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웬트워스가 실각한 후에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북아일랜드의 장로교회 사람들을 공격하고, 특히 고립된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습격을 받아 옷이 벗겨진 채 추위에 방치되어 죽었다. 그 후 아일랜드 사람은 1572년 프랑스의 성바돌로메의 날(St. Bartholomews Day)에 있었던 위그노의 대학살(the Massacre of the Huguenots)을 계기로 교회의 역사에서 그와 같이 유례 없이 무서운 방법으로 장로교회 사람들에 대한 대학살을 시작했던 것이다. 1641년에 시작해 수년간 계속된 이대학살에서 수만 명의 장로교회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3) 아일랜드 최초의 노회
영국의 의회는 폭동을 진압하고 대학살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아일랜드에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스코틀랜드인인 먼로(Munro) 장군이 지휘한 이 군대의 대부분의 병사는 장로교회 사람들이었다. 각
1642년 6월 1O일 이러한 교회(당회)의 대표가 벨페스트(Belfast) 바로 북쪽에 있는 캐릭퍼거스(Carrickfergus)에 모여 아일랜드 최초의 노회를 조직했다.
그들은 북아일랜드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각지에 장로교회를 건설해서 1660년경에는 북아일랜드에 8O개의 장로교회와 7O명의 목사, 그리고 5개의 노회와 1O만 명의 교인이 있게 되었다.
(4) 장로교회의 빛과 그림자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민한 장로교인들)은 천신만고 끝에 북아일랜드의 농업과 공업을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켜, 해가 더해감과 함께 번영한 마을과 도시가 되었으며, 장로교회도 번영과 성장을 계속했다.
찰스 2세가 1660년에 즉위하자마자 매우 엄청난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모든 국민에게 영국 국교회의 정치, 즉 감독 대주교 제도와 로마 카톨릭에 가까운 고교회(Hight Church)의 예배 방식에 따르는 것을 요구했다.
1695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심취해 있던 제임스 2세가 즉위했지만 그들에 대한 도움이 되지 못했다.
1688년 영국에서는 명예혁명(great revolution)이 일어나 제임스 2세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윌리엄과 메리(Willam and Mary)가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은 즉시 영국으로부터 군대를 파견해 아일랜드는 전쟁터가 되었다. 런던데리(Londonderry)의 포위와 보인(Boyne)의 격전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장로교회 역사에서 피도 얼어붙는 듯한 생각이 나는 곳이 되었다. 보인 전투에서 제임스 2세는 패배했고, 윌리엄과 메리의 왕위는 부동의 것이 되었으며, 그 후 얼마 동안 북아일랜드 장로교회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찾아 왔다.
제8장 미국의 장로교회
1. 미국에 건너온 장로교인들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잉글란드에서 온 청교도(背敎徒)
1620년에 순례자들은 매사츄세츠의 플리머츠에 도착했다. 그들은 영국교회와 갈라져서 흘란드로 갔다가 미국으로 이주해 온 청교도들이었다.
1620년과 1640년 사이에 21,0OO명으로 추상되는 청교도들이 뉴 잉글란드에 왔는데 이들 중에 400명 이상의 뛰어난 청교도들이 장로교회의 체제를 지지했다.
(2) 프랑스로부터 탈출한 위그노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박해로부터 도망하여 일찍 미국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3) 네덜란드인
네덜란드인은 네덜란드로부터 직접 와서 비교적 일찍이 1623년 뉴욕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기들의 말로 예배를 드렸고 롱아일랜드와 뉴욕에서 평온하게 지냈다. 이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또한 장로회체제를 신봉했다.
(4) 스코틀랜드인
많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이민 초기에 스코틀랜드로부터 직접 미국으로 왔다. 이들은 뉴져지와 남북 캐롤라이나. 그리고 다른 식민지들에 정착했으며 미국의 장로교회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5) 북 아일란드인(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1567년 경 아일란드의 최북단 지방인 울스터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몇 해 안되어 영국 왕은 울스터의 신교도들에게 경제적인 면에서 핍박을 했으며 그 결과 이들 스코틀란드계 아일란드인들의 미국으로 향한 대 이주가 행해졌다,
(6) 독일인
1700년부터 1770년 사이에 수많은 독일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들 중에서 상당수가 칼빈주의자들이었으며 장로교인들이었다.
2. 미국 장로회주의 설립의 시초에 대하여 약술하라
(1) 프랜시스 매케미(Francis Makermie),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
미국 장로교회의 진정한 창립자인 그는 런던 연합회가 열리기까지 약 8년 동안 이 숭고한 선교 사업에 종사했다. 1683년 그는 르호봇과 스노우힐과 메릴랜드에 장로교회를 세웠으며 후에 그 부조에 여러 다른 교회들을 세웠다.
(2) 최초의 미국 장로회
1706년에 필라델피아 근교에서 최초의 미국 장로회(Presbyte교)가 프란시스 매케미에 의해 창립되었다. 앤드류스(Jediah Andrews)는 필라델피아의 목사였는데 매사츄세츠에서 태어나 하바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68년에 필라델피아로 가서 1701년에 임명되었고 끈기 있는 노력으로 인하여 매우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미약한 회중을 한 군데로 모았다. 1705년에 새로운 집회소가 건축되었고 이 새로운 집에서 대(大) 장로회의 기원인 최초의 장로회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창립한 지 몇 해가 지난 후에 장로회는 런던, 더블린, 그라스고우의 장로교인들에게 재정적인 보조를 요청하여 지원을 받게 되었다.
(3) 대회(Synod)의 창립
필라델피아는 펜실바니아의 교회들로 이룩되었고 뉴 캐슬은 델라웨어의 교회들로 이룩되었으며 스노우 힐은 메릴랜드의 교회들로, 롱아일랜드는 뉴욕과 뉴져지의 교회들로 이룩되었다, 1717년 9월17일 4개의 노회 중 3개의 노회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최초의 대회(Synod)를 조직했다
(4) 1729년 결의 채택
1729년 필라델피아대회는 결의를 채택키로 했는데 그 결의에 의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필라델피아 대회의 교리적 표준으로 채택하였다.
3. 미국 장로교회의 처음 분열과 성장과 재결합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대회의 분열
1741년 필라델피아의 대회는 구파(Old-side)와 신파(Ncw-side)로 갈라졌다.
신파는 1745년 뉴욕의 대회로써 분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1741년부터 1758년의 재 연합까지 미국에는 2개의 분리된 장로교회가 있게 되었다. 하나는 필라델피아의 구파대회이고 다른 하나는 뉴욕의 신파 대회였다.
이 무렵에 뉴욕의 대회는 5개의 노회, 즉 써포크, 뉴욕. 뉴 브른스위크. 말링톤. 뉴 캐슬을 갖고 있었으며 필라델피아 대회는 3개의 노회. 즉 필라델피아, 도네갈, 그리고 뉴욕 대회의 뉴 캐슬과는 다른 또 하나의 뉴 캐슬을 갖고 있었다. 구파 그룹은 믿기를, 아메리카 교회의 목사는 뉴 잉글란드나 구 대륙의 대학에서 철저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신파 그룹은 그것을 너무 느린 과정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구 대륙의 대학들은 신 대륙의 아메리카 목사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파(Ncw-side) 그룹은 목사의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대회가 분열되자마자 양쪽 모두 학교를 설립했다.
뉴욕 대회는 죠나단 디킨슨(Johnadan Dickinson : 1688~1741) 목사를 필두로 하여 뉴져지 주의 엘리자베스 타운에 한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를 위한 설립 허가는 1746년 1O월에 받았다. 다음 해 1O월 뛰어난 학장이었던 디킨슨이 죽자 학교는 뉴져지 주의 뉴 라크로 옮겨져, 아론 버르(Aaron Burr) 목사가 책임을 맡았다. 1755년 또다시 뉴져지 주의 프린스톤으로 옮겨져서 1896년에 프린스톤 대학교로 번성하였다.
(2) 1758넌의 재결합
뉴욕 대회는 필라델피아 대회와 다시 1746년 이들의 연합대회가 트렌톤에서 열려 재결합의 가능성을 상의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① 필라델피아 대회가 1741년에 받아들였던 테넌트파에 대한 항의였고, ② 신앙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이라는 문구에 대한 일치하지 않는 해석이었다.
중복되어 소속되어 있는 노회들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도 두 대회가 재결합해야만 했는데 이러한 난점들은 1758년의 결합 계획에 의해 모두 조정되었으나 첫 번째 문제는 매우 가슴 아픈 것이었다. 이 문제는 논의된 항의를 대회 전체의 공적 행위라기보다는 테넌트파를 받아들일 것에 서명한 개개 회원의 사적 행위로서 간주하도록 하는 필라델피아 대회의 동의에 의해 해결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필라델피아 대회에 양보되었는데 이후로는 교회에 들어올 목사는 논의의 여지가 많은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이라는 문구를 뺀 신앙고백서에 서명해야만 한다고 했다. 또한 뉴욕 대회는 테넌트파는 양보하기를 목사들이 다른 회중에 초대받지 않을 것을 강요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인정했고 또한 교회 임원들의 권위에 대해 더 큰 존경을 인정했다. 동료 목사들의 무책임하고 냉정한 탄핵은 금지되었다. 테넌트파는 목사 후보생이 그들의 종교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으로서 심사되어야만 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이러한 규정들에 의해서 결합의 계획은 드디어 1758년 웨스트민스터표준에 기초하여 뉴욕-필라델피아 대회(Synod of Ncw York and Philadelphia)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성취되었다.
확인된 바로는 이 재결합 된 대회는 98인의 목사와 200개 교회와 1만 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었다.
(3) 변경 지역 선교
재결합된 교회는 점점 더해 가는 선교적 열심을 갖고 급속히 증가하는 인구에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서부로 향해 갔다. 기독교 학교들이 세워졌고 미래의 대학을 위한 기초가 놓여졌다.
인디안 가운데서 선교적 일을 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기독교 문헌을 창작하고 전파하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존 엘리오트는 지금까지 감춰졌었지만 이미 이전부터 인디안 가운데서 일했었다. 그는 홍색인종을 기도하는 마을로 모아들였으며 그들의 언어로 복음(福音)을 번역했다. 이러한 미국 선교사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니엘 브레이널드였다. 그는 뉴져지 주의 프리흘드에서부터 서스퀴호나 강에 이르기까지의 인디안들 가운데서 일하였다. 그는 1747년 낙심한가운데 불과 4년이라는 세월을 일하고 죽었으나, 그의 생애가 죠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기록되어 무수한 독자들로 하여금 선교적인 노력을 자극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서부 변경의 백인 정착민들도 역시 전도 사업의 대상이었다. 1755년 뉴욕대회는 서부 펜실바니아로부터 죠지아에 이르는 하노바(Hmover) 대회를 조직했다. 후에 뉴져지 대학의 학장이 된 능변의 사무엘 데이비스(Samuel Davics)가 노회 설립 이전에 이곳에서 일했다. 이 변경 지역 노회는(Frontier Presbytery)다른 노회들의 모체가 되었다. 1781년 뉴욕-필라델피아 대회는 서부 펜실바니아 레드스톤에 노회를 설립했다. 이 노회는 당시 제일 서쪽의 노회였다.
4. 영적 타락과 영적 대 각성 부흥운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영적 타락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미국 독립전쟁 후에도 전 미국에 걸쳐 도덕적이며 영적인 타락이 따랐다. 수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군 복무를 위해 신도의 의무를 버렸으며, 애국적 운동에 눈에 뜨이도록 헌신했던 장로교회는 교회의 건물이 때때로 적에 의해서 병사(兵舍)로 또는 마구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기도 하였다.
미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은 볼테르와 루소의 영향력과 다른 형태의 프랑스의 불신의 영향과 급진적인 사회관의 영향을 받게 만들었다.
톰 페인(Tom Pain)의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는 비종교적인 “자유 사상(Free thinking)을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시켰다. 이때 뉴 져지 대학에는 크리스찬 교수가 2명밖에 없었고, 반면 예일(Yale)에는 많은 사람들이 루소와 볼테르 같은 이름을 따라 자기들의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2) 영적 각성 부흥 운동(The Revival)
미국의 1차 영적 각성 부흥 운동은 1740~1750년대에 일어났었다. 그 때 영적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들은 장로교에서는 윌리암 테넨트(William Tannent), 길버트 테넨트(Gilbert Tennent), 사무엘 블레어(Samuel Blair), 사무엘 데이비즈(Samuel Davies) 등 이었으며. 화란 개혁파의 데오도를 프롤링하이젠, 회중교회의 죠나단 에드워즈, 엘리에젤 휠로크와 침례교회의 슈빌 스티언스, 다니엘 마샬 과 루터교회에선 헨리 멜콰이어 뮬렌베르크,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죠지 휫필드 등을 들 수있다.
1798년부터 1801년 사이에 다른 부홍 운동이 일어나서 곧 전국에 퍼졌는데 이는 제2차 영적 각성 부흥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 운동은 켄터키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공상과 위험과 고된 노동과 저질의 육체적 만족과 싸움과 다툼이 가득 차 있었다.
1799년 제임스 맥그레디(James McGready) 목사는 켄터키의 호간 마을의(Hogan Country) 그의 교회의 교인들을 설득하여서 불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일주일에 한 시간, 한 달에 하루를 기도하도록 하였다. 몇 달 안 지나서 한 여인이 회개하였는데 이 여인이 열심으로 전도하여 곧 1O명 가량을 회개케 했다. 그 다음 2년 동안에는 이 부흥운동이 다른 교구에 퍼졌는데 이번에는 죄를 깨닫는 자들이 애통하고 울부짖으며 바닥에 버둥거리는 등의 이상한 가시적 결과를 수반했다.
1800년까지 이 운동은 켄터키 전역에 퍼졌고 이 운동과 관련하여야외 집회(Camp meetings.)가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했다. 사람들은 종교 집회가 열리는 거룩한 장소 주위에 마련된 텐트나 마차에서 잠을 잤다. 이 영적 각성 부흥운동은 켄터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전국에 걸친 것이 되어 독립 전쟁 후에 있었던 자유 사상과 불신을 타파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가정 전도, 해외 선교, 목사의 교육이 이후 1O년 간 매우 발전했다.
이 활약한 지도자들은 장로교회에서는 제임스 멕그레이디,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 바턴 스톤(Barton Stone), 라이만 비쳐(Liman Beecher), 알렉산더 켐벨(Alexander Campbell),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 등이었다.
이 시기에 컴벌랜드 장로교희(Cumberland Prcsbyterian church)가 세워졌다. 트란실바니아 노회와 이것에서 성장한 컴벌랜드노회는 교육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일부를 숙명론(宿命論)으로 가르치는 것이라 하여 공공연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목사로 임명했다. 켄터키 대회와 총회의 결의로 인하여 1810년 컴벌랜드 노회의 대다수가 후에는 컴벌랜드 장로교회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분리된 교파를 만들었다.
5. 분열된 장로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837년의 장로교회는 아직 미국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파였다.
1800년부터 1830년까지 3O년 간 장로교회는 20,000명의 회원으로부터 173,000여 명의 회원으로 증가되었는데 이 성장은 국가의 성장과 비교하더라도 더 빠른 것이었다. 그러나 1837년 전의 몇 해 동안에 교회 내에서 교회 헌법과 교리의 문제로 올드 스쿨(Old schoo1) 뉴 스쿨(New school) 간에 싸움이 일어날 불길한 움직임이 있었다. 올드 스쿨은 회중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 1801년의 유니온 계획(Union plan)에 만족하지 못하여 이 계획에 의해 설립된 교회는 결코 진정한 장로교회가 아니라고 비난하였으며 더군다나 그들을 교회 법정(Church Courts)에 의해 교회가 다스리거나 교회 교인을 훈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올드 스쿨은 또한 장로교회가 자체 교파의 교회 위원회를 가져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위원회는 미국 위원회(American Board)나 미국 가정 선교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같은 타교파의 기관을 통한 일을 하기보다는 총회가 직접 일을 관장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뉴 스쿨(New school)은 회중교회적 배경과 훈련을 많이 갖고있는 학교로서 유니온 계획과 타교파의 기관에 대해 만족했다. 그들은 긍지를 갖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즉 뉴욕 주의 제네씨 대회(Synod of Genesse)와 여기에 이웃해 있는 두 개의 대회가 성장하게 된 것은 유니온 계획의 덕을 크게 본 것이라는 것과 이 계획은 1800년에 전 교회가 가졌던 수보다 더 많은 위탁 회원들을 1830년에 수용하고 있었다.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은 오늘날의 대다수 평신도들이 보기에는 실제로 모호한 것과 아니면 아주 하찮은 그런 문제에 관해서도 일치를 보지 못했다.
올드 스쿨은 1837년의 총회에 자기들이 대다수임을 발견하고는 격한 행동을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그들은 1801년의 유니온 계획에 의해 조직된 4개의 대회는 더 이상 장로교회에 소속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조처는 명백히 뉴 스쿨을 교회로부터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그 다음 해. 제거된 장로회 회원들은 그들의 신임장을 제출하였으나 좌석을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끼리 총회와 같은 조직을 해서 다른 건물로 이전해 갔다. 이렇게 하여 장로교회는 똑같은 공식 명칭을 갖고, 똑같은 교리적 표준을 갖고. 똑같은 교구를 가졌으나 완전히 별개로 분리되어 때로는 적대시하게 되어 두 교파로 갈라지는 이상한 모습을 들어냈다.
분열의 시기였던 1837년부터 1869년까지 두 교회는 올드 스쿨과 뉴 스쿨로 널리 알려졌다. 올드 사이드는 본래 회원의 5/9를 포함하였고 민사 법원에 의해서 분열전의 교회의 법적 계승자라고 선포되었다. 이 비극적 분열은 국가의 지역적인 광대한 팽창이 막강한 힘으로 교회에 막 도전하는 그때에 일어났다.
6. 근대 미국 장로교회의 흐름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미합중국 장로교회(P.C. in the U.S.A.)
1870년 북부의 올드 스쿨과 뉴 스쿨은 대단한 기쁨 가운데 재결합하였다. 이와 동시에 남부의 장로교회들도 이러한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재결합 이후 미국 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맹렬히 전진했다. 그리하여 서부의 주민과 영역은 급속히 증가됐다.
(2) 미국 장로교회(P.C. in the U.S.)
남 장로교회의 1865년까지의 공식 명칭은 아메리카 주 동맹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라 한 적도 있다.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이 명칭은 미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United States)로 바뀌었다. 이 교회를 우리는 미국 남 장로교회(the Southern Presbyterian Church)라고 부르나 이것은 공식명칭이 아니다. 1865년 총회 때도 남부의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South)라고 고쳐 부르자는 데 대해 단호히 거부가 되었다.
3) 미 합중국 연합 장로교회(U.P. Church in the U.S.A.)
신앙고백을 수정한 후 미 합중국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는 미국외 모든 장로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할 것을 제의했는데 그것은 모든 장로교회를 연합하여 하나의 대 미국 장로교회(The Great American Presbyterian Church)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1810년에 갈라져 나간 컴버랜드 장로교회는 이러한 초청을 수락하여 1906년에 수정된 신앙고백을 기초로 해서 미 합중국장로교회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약 1/3의 컴벌랜드 장로교회 회원들이 연합하기를 거부했기에 이 연합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컴벌랜드교회는 근본적으로 신앙 고백에 반대하여 왔으나 이러한 반대는 1903년에 신앙고백서 수정에 의해 제거하였다고 주장했다.
1920년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회(Welsh Calvinistc Mathodist Church)가 총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 합중국 연합 장로교회(Thc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는 1958년 5월 북부 아메리카 연합 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와 미 합중국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U.S.A.)가 병합하여 이루어졌다.
(4) 성장과 조직
미 합중국 장로교회는 근래에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00년 이 교회는 1,0O8,000명이었고 1956년에는 2,800,000명이었다. 연합 장로교회와 병합으로 250,00O명 이상의 교인이 증가되었다. 1960년 미 합중국연합 장로교회는 나머지 교회들의 병합에 의해서 약 3,500,000명의 교인을 가진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가 되었다.
미국 장로교회는 1970년 현재 38개국에 1,045명의 선교사를 지원하고 97개의 종합 대학교와 단과 대학과 양성소, 221개의 중등학교, 272개의 저학년 학교와 56개의 병원과 196개의 진료소를 유지해 나가거나 후원하고 있다. 1975년 현재에는 장로교회와 관련된 52개의 단과 대학과 종합 대학이 있고 7개의 신학교가 국내에, 21개의 신학교가 국외에 있어 총 1,131명의 목사들이 700개의 대학 캠퍼스에서 일하고 있다.
제9장 기타 국가의 장로교회
1. 캐나다 장로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캐나다 장로교회는 노바스코티아 지역에서 미국 혁명이 있기 전 미국에서 그리고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온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1825년에 비로소 그라스고우(Glasgow) 식민 협회가 창립되어 캐나다에 오는 목사들의 후원이 되었다. 이때 온 로버트 번스(Rebert Buns)가 낙스교회 낙스 대학을 토론토에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1843년 스코틀랜드 교회가 분열하여 자유교회(Free Church)가 형성되면서부터 캐나다는 장로교회로 열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러나1861년 연합 장로교와 연합하였고 1875년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연합, 캐나다 장로교회의 면모를 갖췄는데 그때 장로교인들은 8만 8천 여에 달했다.
1925년에는 감리교, 조합교회와 합동해서 “캐나다 연합교회”를 만들었다.
2. 호주 장로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뉴 사우스 웰스(New South Wales)의 교회
오스트렐리아서 제일 일찍 장로교회가 들어선 곳이다. 존 던모어(John Dunmore) 목사가 스코틀란드에서 태어나(1799년) 1878년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이곳 교회를 위하여 대단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곳 총독 토마스 브리샨(Tomas Brishane) 장로의 초청을 받아 목사로서 보다 의회와 신문에 관여함으로 당시 이민 중에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이곳에 필요한 교육자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교육에 임하는 동시에 목사들을 5명을 데리고 와서 뉴 사우스 웰스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때가1826년이었다.
십 년 후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로 가서 19명의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감독교회에서 성직자들을 대하듯 모든 보장 문제를 정부로부터 받아내었는데 그는 스코틀란드의 장로회와 잉글란드의 감독교회의 공동 보장을 얻어냈다. 그러나 새 대륙에서 구습을 너무 강조하여 두 대회로 분리되었다. 그가 속한 뉴 사우스 웰스 대회와 오스트렐리아 대회였다. 그는 후에 정부의 보조를 떠나 독자적인 노선의 장로교회를 시작하였다.
2) 갈등과 성장
오스트렐리아 교회는 스코틀란드 교회를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었는데 1843년 스코틀란드 내에서 있었던 논쟁에 의거하여 22명의 목사와 16개의 교회가 스코틀란드 국립교회에 남았고 6개 교회가 스코틀란드 자유교회로 남았다. 이런 상태가 1865년까지 계속되다가 뉴 사우스 웰스 교회로 통합을 보았다.
이 나라는 점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인구도 성장하였고 교회도 따라서 성장하였다. 이런 일은 전적으로 스코틀란드 교회의 영향이었다. 스코틀란드의 성 안드레(St. Andrew) 대학이 1881년 시드니 대학과 유대관계를 맺으며 설립을 뒷받침하였다. 이는 장로교대학이나 다름없이 호주의 교역자를 배출해 내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스코틀란드의 선교활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3) 빅토리아(Victoria) 교회
1851년 뉴 사우스 웰스에서 빅토리아 주가 분립되었다. 바로 이 해에 금(金)이 발라라트(Ballarat)에서 발견되었다. 황금 열풍이 몰아쳤다. 빅토리아 주의 인구가 7만 7천에 이르렀다. 3년 안에 3배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설교자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교회보다 황금에 더 눈이 밝았고 마구잡이 생활로 들어가 거칠기가 짝이 없었다. 그러므로 1834년 빅토리아가 남 웰스 주에 속해 있을 때 멜보른(Melbourne) 근교 필립 항구에 정착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처음 설교자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은퇴한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1842년 4명의 다른 목사가 가담하여 멜보른 노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남 웰스 주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영향을 받았는데 금광 때문에 장로교회의 분파를 이루었다.
그러나 1870년에 빅토리아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 이 영향은 여러 주로 번져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호주 장로교회는 하나로서 모범을 보이고 있다. 오스트렐리아의 6개의 교회는 하나의 총회로 묶여졌다. 그들은 또한 선교사업에 열중하였다.
패톤(John G.Paton) 목사는 당대에 알려진 선교사였다. 그는 또한 멜보른 대학교의 올몬드 대학(Ormond College)을 신학교의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많은 기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빅토리아 주는 오스트렐리아의 절반 이상의 장로교인들을 확보한 주로서 모든 면에 앞서 가고 있다
제10장 한국 장로교회
1. 한국에 선교한 4대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 선교 활동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서는 1884년 7월 28일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최초의 선교 목사로 임명하는데 합의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2월 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여 일본에 들렸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서 약 2개월 동안 선배 선교사 인 헤본(James C. Hepburns)목사의 따뜻한 영접을 받으면서 그의 집에 기거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6년 5월 11일부터 정동에 있는 자기 집에 붙어 있는 건물에서 고아원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신 중 고둥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입국하자마자 이와 같이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는 한국 선교사업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다.
1887넌 가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개성, 솔내, 펑양, 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 여행은 솔내에 있는 교인들의 초청에 의한 것으로서 솔내 교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2) 호주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J. Henry Davis)가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데이비스 목사는 1857년 빅토리아주의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으며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여 그곳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도중에 그만두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가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처음에 인도로 갔으나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기운이 조성되었으며,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 (Too-rack)교회와 협력하여 선교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고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되었다.
1907년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가 설립되자, 엥겔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회를 대표한 파송 교수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그리고 교회사를 주로 강의하였다. 그는 30여 년을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원어를 하는 신학교들을 특별히 취급한다든지 잘못을 저지르는 학생에게는 철저한 징벌을 가하는 등으로 강직한 일면의 성품을 보여주어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엥겔 목사는 191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고 1917년에는 경남 노회를 창설하면서 제1,2,3대의 노회장을 연임하면서 호주 장로교 파송 선교사로서의 위상을 격상하였고 또한 지방교회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고 꾸준히 수행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3)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 동생 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 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 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할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4)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 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맥켄지 목사는 신학교 재학 시에 한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한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2천 달러의 남은 돈을 전부 바친다는 귀절이 있었다.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목사 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 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2. 한국 장로교회의 최초 독노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넌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 찬성원(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9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하나의 노회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한다. 이 독노회에서 결의한 주요 안건은 다음과 같다.
(1) 신학 졸업생 7명 목사 장립
(2)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결의하고 7명의 목사 중 한사람인 이 기풍 목사를 파송 하였다.
(3) 의사봉 제정이다. 의사봉을 제정하여 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4) 대리회의 조직이다.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5)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를 채택하였다.
이와 같이 독노회는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는데, 1907년의 첫 졸업생 가운데서 이 기풍 목사를,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의 8명의 졸업생 중 최 관흘 목사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 한 것이 좋은 예이다.
3. 한국 장로회 최초 총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1911년까지 독노회가 모이다가 1912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지금까지의 7대리회를 7노회로 조직키로 하고 독노회가 발전적으로 총회가 되도록 하였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회집 되었는데, 회원은 목사 52인, 선교사 44인, 장로 125인 계 221명이 회집 하였다.
이 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 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 필수, 회계 방 위량(W. N. Blair), 부회계 김 석창 등이었다.
총회 설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1957년에 방 지일 목사가 중공치하에서 귀국하기까지 45년 동안 선교사업을 하였다. 역대 산동성 선교사는 김 영훈(金永勳), 박 태로(朴泰魯), 사병순(史秉淳), 박 상순(朴商純), 홍 승한(洪承漢), 방 효원(方孝元), 이 대영(李大榮), 방 지일(方之日), 김 호순(金好淳) 등이다.
이것을 보면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제주도 선교를 실시하고 그후 시베리아 선교, 일본 유학생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는 첫 걸음을 딛는 한국 장로교회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쾌거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을 밖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4. 한국 장로회의 분열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신사참배로 인한 고신파의 분열
해방이 되면서 신사참배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1945년 9월 18일 재건노회가 열리고 2개항의 자숙 안을 정했다. 그러나 곧 기성교회 인사들과 주남선 목사 등의 출옥성도와의 마찰이 야기되었는데, 10여명의 기성교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한 것이며, 지금에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 라고 주장했고,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빚어내어 말썽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어 로마의 탄압에 의한 배교자 문제 처리로 인한 교회의 분열과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 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피차의 공방과정에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2) 신학사상 차이로 인한 기장과 예장의 분열
선교 개시이래 한국 개신교는 그 신학사상과 신앙적 태도에서 보수적 입장을 지켜왔다. 이는 한국에 개신 교회를 전래시킨 선교사들의 신학적 입장에 기인하고 있었으며, 또한 한국교회 지도자들(특히 장로교) 이 세계적인 여러 신학적 조류에 접할 기회가 적었다는 데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더구나 1920년대로부터 한국신학을 대표해온 박형룡 박사는 미국유학시절에도 근대 보수 신학의 대표 메이천에게서 사사한 신학자로서, 귀국이후 한국 신학의 객척자의 구실 등, 모두가 한국 신학을 더욱 한 방향에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몇몇 개신 교파 (이중캐나다 장로회도 포함된)의 신학적 입장은 자못 자유로 왔고, 그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된 한국인 지도자들도 그러한 경향을 가졌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신학교 측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선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한국 기독교 장로회라 하였다.
(3)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 (W C C) 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 신학대학'(통합측)과 승동교회 총회측을 오늘의 '총회신학대학' (합동측)으로 분열케 한 것이다. 이 분열은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3) 에큐메니칼운동으로 인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 (W C C) 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 신학대학'(통합측)과 승동교회 총회측을 오늘의 '총회신학대학' (합동측)으로 분열케 한 것이다. 이 분열은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4) 고신측과, 합동측의 정치적 분쟁으로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
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 측은 이후 교권과 지방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부산 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 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 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는데 이때 탈퇴한 그룹의 대표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 고려측'이라고 부른다.
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 측을 지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 영남 출신들은 절치 부심 끝에 이영수 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측 주류 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
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측(황해 평안 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 보수'는 호남 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 보수측'으로 양분된다.
그 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분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