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사
(하)
김 영 선
1.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성숙과 움직임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명·청 제국의 번영
- 명의 건국 : 원말, 홍건의 일파인 주원장이 있었는데, 양자강 하류의 곡창 지대를 손에 넣어
세력을 얻어 1368년 금릉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명이라 일컬었다. 이가 곧 명 태조이다.
- 군주 독재 체제의 확립 : 태조는 천하를 통일하자 내치에 힘써 명 왕조 270년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육 유(六諭): "부모에게 효도하라(孝順父母).
웃 어른을 섬겨라(尊敬長上).
마을 사람끼리 서로 화목하라. (和睦鄕黨).
자손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라(敎訓子孫).
각자 생업에 만족하라(各安生理).
나쁜 짓을 하지 말지어다(毋作非爲)."
- 이갑제 : 중국 명의 촌락 자치적 행정 제도.
- 부역황책 : 천하의 군현에 명하여 부역황책(賦役黃冊)을 편찬케 하다.
- 어린도책 : 토지를 생선 비늘같이 세분하여
- 대명률 (大明律) : 1397년에 반포되어 명·청 시대의 약 500년
간을 통하여 형률의 근본이 된 것으로 전 30권.
- 명·청대의 사회 지배 계층 :향신(신사) 명·청 사회의 지배층에
는 향신(鄕紳)이라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사(紳士)
라고도 하였다. '신(紳)' 이란 관리를 가리키고, '사(士)' 란
학위 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주·현의 학생,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한 거인(擧人), 그리고 현직·전직
관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 명의 감합 무역 체제 : 무역 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으므
로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 일본 국내 정국의 동향을
좌우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 조공 무역 : 종주국에게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는 일을 조공
이라고 하며, 청 국력의 약화로 그 체제는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 정화(鄭和) : 명 초의 대 항해가로 윈난 성 쿤밍 출신의
이슬람교도이며, 본성은 마(馬)이다. 환관으로서 영락제를
보필하였고, 정난의 변때 공을 세워 정 성(姓)을 하사받았으
며, 태감이 되었다.
- 회관(會館--공소公所) : 동향자 또는 동업자가 사교와 상호
부조의 목적으로 세운 건물로서 공소라고도 한다.
- 명·청대의 사회와 경제 : 사회 경제적 특징은 지주·전호제의 확대와 상품 생산의 현저한 발달이다.
- 중국의 곡창 지대 : 당 중기까지 화북 평야 지대는 중국 농업의
중심지
- 이갑 정역과 잡역 : 국가의 조세와 요역을 이갑 조직을 통해
부과되는데, 요역은 이갑 정역과 잡역으로 크게 나뉜다.
- 일조편법 : 명대 후기부터 청대 초기까지 중국에서 시행된 조세 제도.
- 지정은(地丁銀) 제도 : 인두세의 소멸을 뜻하는 획기적 세제의
개혁이었다.
- 민중의 저항 운동
- 명의 쇠망 : 16세기말에 14대 신종 만력제가 즉위하여 명재상 장거정의 보필을 얻어
토지를 측량하고 호구를 조사하고 세법을 개정하여 일조편법을 천하에 통용
시키고 관의 기강을 바로잡아 이른바 '만력의 치' 라는 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신종은 장거정이 죽은 뒤 정치에 실증을 느껴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가 다시 문란해져 관료들은 동림·비동림의 당쟁만을 일삼게 되었
다. 게다가 일본의 토요토미히데 요시의 침입에 고통을 받고 있던 조선을 돕
기 위하여 50만 대군을 보내어, 이 때문에 거액의 군비를 소비하여 왕실의
사치비와 더불어 재정의 궁핍을 가져왔다. 명은 미봉책으로서 광산을 개발하
고 소금·차 등의 상세를 부과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관리의 부패를 조장한 데
불과하였다. 이 결과 민중의 궁핍은 극도에 하여 유민과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17세기 중엽 싼시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포
위하였으므로 숭정제가 목을 매어 자살하고 결국 명은 1644년 망하였다.
- 이 자성의 난 : 명말 싼시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
- 청의 중국지배 : 청은 정복왕조로서 약 3세기에 걸쳐 중국을 지배하였던 만큼 시정은
요·금·원의 그것에 비하여 교묘하였다. 명이 망한 후, 중국 본토에 들어간
여진인은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당시 2억 정도로 추정되는
한족에 대해 기미 정책(굴레를 씌워 탄압하는 정책)을 역으로 이용하여
반청 세력을 무마하고, 3세기에 걸친 장기 지배의 틀을 마련하였다. 중앙의
중요한 관직에 한인·만인을 반반씩 채용하여 모든 일을 그 합의에 의하여
결재하게 하고, 한문화를 존중하여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일으켜 한인을
회유하는가 하면, 만주 풍속인 변발을 강요하여 변발하지 않는 자는 머리를
남겨두지 않도록 하고, 때때로 문자의 옥을 일으켜 청조와 만주인을 비방
멸시하는 문자를 농하는 자를 엄벌에 처하고, 금서령을 내려 많은 책을
금지하고 불살라 한인을 억압하였다.
- 청의 군사제도 -8기병제 : 8기병제는 청조 성립의 기초가 된 군사제인
동시에 지배자인 만주인에 대한 행정 제도이기도 하다
- 청의 문화 정책 : 청조는 중국인에 대하여 만주 풍속인 변발을 강제하고, 문자의 옥을
일으켜 만주인을 비방하는 글을 쓴 사람을 엄벌에 처하고, 금령을 내려 반만
사상을 지닌 책을 몰수, 불사르는 등 중국인을 위압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지식인을 존중하여 관리로 등용하고, 중국 문화를 존중하여 사고전서
의 편찬 등 방대한 문화 사업을 일으켜 중국인을 회유하였다.
- 상업의 발달 : 청대에 양쯔강 하류의 델타 지대는 경제력 면에서 전국에서
으뜸갔을 뿐 아니라, 문화.학술의 중심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 청초의 학풍고증학의 전개 : 청초의 학풍은 이른바 '경세 치용의 학' 으로 대표된다.
- 고증학과 공양학 :
- 러시아와 청의 국경 조약 : 러시아가 17세기 이후 시베리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청나라 세력과 충돌하게 되자 국경을 확정지어 갔다. 네르친스크 조약
(1689)과 캬흐타 조약(1727)으로 몽고와 만주의 국경을 정하고,
아이훈 조약(1858) 으로 헤이룽강 이북을, 베이징 조약(1860)으로 연해
주를 얻고, 이리 조약(1881)으로 중앙 아시아 방면에서의 국경을 확정.
-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 (1689) : 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
- 크리스트 교세의 확장 : 명 중기 이후에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 사상과 풍습
을 잘 참작해, 크리스트 교리를 그것과 교묘하게 조화시켰다. 또한 그들은 당시
지식인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기한 서양 학술의 소개에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명 나라를 위해 대포. 소총 등 무기의 주조에도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여 크리스트교의 세력은 점차 신장되어 갔는데, 위의 자료는
숭정(崇禎) 연간(1628∼44년)의 포교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2)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세
- 일본 역사 요약(메이지 유신까지) : 일본은 4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처음에는 여왕 卑彌呼가 거느리는 北九州의 耶馬台國이 유력하였으나, 뒤에는 近畿지방의 호족들이 연합하여 천황씨를 우두머리로 한 야마토(大和)정권이 강해졌다. 야마토 국은 3국에서 건너간 귀화인으로부터 학문과 기술을 깨우쳐 6세기 말에는 쇼토쿠(聖德)태자가 17조의 헌법을 제정하여 귀족간의 싸움을 조정하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정하는 한편, 불교를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삼아 호류사(法隆寺)를 비롯한 많은 사원을 세웠다. 이리하여 일본 최초의 문화인 아스카(飛鳥) 문화가 꽃피었다. 그 뒤 야마토 국에는 천황(天皇)씨와 소가(蘇我)씨가 서로 패권을 다투었는데, 드디어 천황씨가 소가씨를 억누르고 패권을 쥐어 645년에 문화개신(다이카 개신)을 단행하였다. 이에 의하여, 종래 귀족과 호족의 사유이던 토지·인민이 공지(公地)·공민(公民)으로 서 천황의 지배아래 들어가고, 귀족들은 단순한 천황의 관리가 되어, 여기에 천황 지배의 통일 국가가 이룩되었다. 야마토 국은 8세기초에 서울을 나라(奈良)로 옮기고, 견당사를 당에 보내어 당의 제도·문물을 수입하고, 불교를 보호하여 많은 사원과 당탑을 세워 이른바 헤이안(天平) 문화가 꽃피었다. 일본은 8세기말에 서울을 平城京(奈良)에서 平安京(京都)으로 옮겼으나(794), 토지국유제도(班田制度) 에 기초를 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차츰 귀족과 사원의 권력이 커져 광대한 토지와 농노 및 노비를 소유하게 되어, 장원이 발달하였다. 이리하여 토지 국유의 원칙은 깨뜨려지고 전제 군주제도는 무너져, 전국에 많은 장원을 가진 후지와라씨(藤原氏)가 권력을 쥐어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중국과 공식적인 내왕은 9세기말에 끊어졌으나, 사무역과 한반도를 통하여 중국 문물이 수입되어 일본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켰다. 특히, 불교가 일본의 사상과 학예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한편, 외래 문화를 흡수·소화한 사람들 사이에 독자적인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도 일본 문자 가나(假名)의 고안은 후세의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환락에만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권력이 약해지고 지방의 질서가 문 란해졌다. 그리하여, 장원내의 소지주들이 장원을 방위하기 위하여 무장하게 되고 여기에 무사계급이 일 어나게 된다. 이들 무사4?차츰 지방의 실권자가 되어 11세기말에는 드디어 무사를 전국적으로 지배하 는 미나모토씨(源氏)와 다이라씨(平氏)의 2대 세력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다이라氏의 세력이 강대하여 귀족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쥐었으나, 12세기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다이라氏를 타도하고 정 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카마쿠라(鎌倉)에 막부를 열어 전 일본을 사실상 지배하였다(1192). 원씨의 장군들은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와 호족에게 영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차츰 정비되 고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 고대적인 전제 군주는 자취를 감추고 중세적인 봉건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 정권은 약 1세기 반 동안 유지되어 그 동안에 2회에 걸친 몽고의 내습이 있었으나(1274, 1281), 태풍을 이용하여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은상(銀賞)을 받지 못한 불평무사와 지방의 중소지주들이 들고 일어나 농민과 결탁하여 카마쿠라 막부를 타도하였다(1333) 그 뒤 정권은 천황에게 돌아가 천황의 지배가 부활 되었으나(건무중흥), 그것도 한때에 불과하였다. 카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공이 컸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천황 정권을 타도하고 1338년 장군이 되어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막부를 열어, 무사의 일본 지배가 다시 부활되었고 몽고의 침입이래 끊어졌던 중국과의 교통이 다시 열려 명과의 무역이 활발히 행해져 여러 가지 물자와 문화가 수입되었다. 특히 선종은 장군을 중심으로 한 무사 문화에 영향을 주어 東山(히가시야마)文化가 일어났다. 그러나 중기를 넘어서자 장군의 권력이 약해진 반면에 지방의 대영주, 곧 수호대명(守護大名)의 권력이 강해졌다. 지방의 영주들은 영지를 확대하기 위하여 서로 싸웠는데, 15세기 후반에 이르자 중앙의 장군의 상속전과 얽혀 요닌(應仁)의 亂(1467∼1477)이 되어 무사들이 동서 양군으로 갈라져 10년 동안 싸웠으며 이 대란이 있은 뒤, 무로마치 막부는 유명무실의 존재가 되고 대봉건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전국을 지배코자 싸워 약 100년 동안 전국시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이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나타나, 여러 대명을 제압하여 일본을 다시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권은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는 지금의 동경인 에도(江戶)에 막부를 열어(1603), 조직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하여, 천하의 대명을 지배하였다. 15세기말에 인5되瀏寬?발견된 뒤 동양에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의 상선은 일본에도 내항하였다. 유럽인이 일본에 온 것은 1543년에 포르투갈의 상선이 일본의 종자도에 표착하여 종자를 전한 것이 처음인데, 6년 뒤인 1549년에는 제주이트교의 간부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er)가 건너와 크리스트교를 전하여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도쿠가와 막부는 유럽과의 통상이 막부의 통일정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1638년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금하는 한편 유럽제국과의 통상을 금하여 쇄국 정책을 강행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 봉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7세기 중엽에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네덜란드 이외의 유럽 제국과 일체 손을 끊었다. 그러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을 구하여 광분하고 있던 구미 자본주의의 거센 파도는 일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러시아가 1792년과 1804년에 들어와 수호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고 미국이 1805년 페리(Perry)를 보내어 통상 조약의 체결을 희망하였다. 당시 태평양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미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해에 이르는 기항지로서 일본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어떻든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여 이듬해에 미·일 화친 조약을 맺어 두 항구를 열어 약 2세기에 걸쳐 지켜오던 일본의 쇄국은 끝이 났다. 이어서 영국·러시아·네덜란드 사이에도 같은 내용의 조약이 맺어지고 다시 1858년에는 조약이 개정되어 수호통상 조약이 되었다. 그 뒤 10년이 지나 중대한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明治) 유신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타도되고 천황제 정권이 수립되어 유럽을 본보기로 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관제의 정비, 지방제도의 개혁, 학제의 발포, 국군의 건설, 지조의 개혁, 자본주의의 보호·육성 등 정치·경제·군사에 걸친 급속한 근대화에 의하여 일본은 근대 국가로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봉건 유제가 잔존하고 대외적으로는 치외법권·관세 자주권의 상실 등 불평등 조약을 짊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선진 열강들의 대열 속에 끼이려면 조속한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 있는 군국적 관료 국가 체제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근대화가 미성숙하였기 때문에 국내 시장이 비좁아 국외에 시장을 구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일찍부터 대륙 진출을 꾀하여 1871년에 청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1874년에 대만을 정벌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를 확보하고, 조선에 4淪臼?재삼 개국을 요구하였다.
- 전국시대(戰國時代) : 무로마치 시대의 후기에 해당하나 오닌(應仁)의 난부터 1568년 오다 노부가나(織田信長)가 입경할 때까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시대는 중앙 정권으로서의 무로마치 막부가 유명 무실화하고 각지에 할거한 신흥 다이묘가 각기 지방 분권적인 영국(領國)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면서 점차 통일의 방향을 드러내는 전란의 1세기였다. 신흥의 지방 무사들은 중앙 제패를 목적으로 부국 강병책을 쓰며 상쟁하는 한편, 장원 체제를 보존하며 구세력을 최종적으로 몰락시켰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가는 구실을 하였다. 그 결과 소농민 경영의 광범위한 전개가 진행되었고, 도시 및 지방 시장의 광범위한 발생 및 발전을 가져왔으며, 부국 강병책에 의한 광산의 개발, 교통로·역체(驛遞) 제도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국 시대는 파괴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태동의 기운이 급격히 높아졌던 시기로, 문화도 종래의 교토 중심에서부터 지방으로 전파·보급되어 국민적 기반을 넓히는 경향을 나타냈다.
- 바쿠한 체제(幕蕃體制) : 전국기에 묘슈(名主)층의 지배에서 자립하고 있던 농민에 대응해서, 무사영주층은 쇼쿠호(織豊)정권 아래서 계급적 결집을 완수하여, 농공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 새로운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그것은 절대 지배자인 쇼군이 지배하는 중앙의 막부 정부와 다이묘(大名:영주)가 지배하는 지방의 반 자치적인 정부인 번(蕃,한)이 연결된 2중 구조로, 이 두 개의 세력이 일본 사회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막부의 장군(쇼군)은 일본 최대의 봉건 영주일 뿐만 아니라, 다이묘, 국왕을 비롯하여 모든 봉건 영주에 대해서도 명실공히 최고의 지배자로서 군림하였다. 다이묘는 쇼군(장군)으로부터 봉해진 봉토에서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면서 규정 범위 안에서 가신을 가질 권리를 인정받아 번을 구성하였다. 번은 경제면에서 연공미의 환금이나 물자의 확보시 막부가 장악하고 있는 오사카, 에도의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영내 유통용의 화폐를 주조하는 것도 인정되지 않았다. 번의 기구는 막부의 기구를 소규모화한 것이고, 번내의 권력은 다이묘에게 집중되었다. 이렇듯 막부와 여러 번이 전체로서 정치 권력을 구성하고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 체제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의 유업을 계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에도 막부(1063∼1867)를 열어 이 바쿠한 체제를 완성시켰다. 봉건 사회의 기본적인 계급관계는 봉건 영주층과 농민층인데, 일본의 근대 사회는 이 농민층에 대립하는 봉건 영주층이 막번 체제로 굳게 결속 조직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장군과 다이묘가 그들과 인민 사이에 있는 소영주나 중간층을 거의 완전히 해체하여 이들을 토지에서 분리시키고, 성 아래에 거 주시키면서 가신단으로 편성하여 직접 자영 소농민과 상공업자를 지배·수탈하였다. 따라서 막번 체제 는 이전의 어떤 체제보다도 주도 면밀한 체제였다. 1867년 바쿠후의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에 이르러 바쿠한 체제는 해제되었다.
-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 에도 막부는 처음에 외국과 통교를 확대하여 무역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묵인하였으나, 크리스트교 신앙이 민중 사이로 확대되자 농민 통제에 불안을 느끼고 신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1612년부터 막부는 전도 금지, 선교사 추방을 명하였으며, 크리스트교도 박해는 도처에서 행해져 신도는 무시무시한 고문으로 개종을 강요당했다. 17세기초에 28만 명의 크리스트 교도가 개종을 거부하여 살해되었다. 인민이 이 정도로 견고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지배자의 공포를 더욱 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와 중국에게만 나가사키 항에 한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쇄국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 겐로쿠 문화의 발전 : 겐로쿠 시대는 에도 막부의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집권하였던 시기로 문치주의와 조닌 문화가 특색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막번 체제가 완성되고 쇼군의 권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으며 학문이 크게 장려되었다. 막번 체제의 완성은 소농민의 광범한 자립 성장을 기초로 이루어진 새로운 경작지 개간, 농구·비료의 개선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였다. 따라서 겐로쿠 문화에는 민중의 생활과 감정이 긍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산업과 도시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막번 체제의 성립과 함께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가 정리되고 막부와 여러 번이 수입의 증가를 위해 치수와 관개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경지가 증가되었고 농업 경영이 안정되었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수공업과 상업 및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시에는 각종의 상인 중간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고 화폐 및 신용 제도도 발달하였다. 학문 분야에서는 막부와 여러 번에 의해 장려된 유학이 현실 정치와 결부되어 한층 융성해졌고 후에 인문·사회·자연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실증적인 여러 학문이 이 시기에 싹텄다. 예술 분야에서는 경제 발전이 눈부셨던 간사이 지방의 신흥 상인 등을 기초로 하여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추구했던 작품이 창조되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런 겐로쿠 풍의 풍속이 무사 사이에도 유행되어 무가와 조닌이 일체가 된 문화가 꽃피었다. 불교는 크리스트교 금지의 수단으로 데라우케 제도가 채용되면서 막부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나, 종교적 긴장을 상실하고 형식화되어 침체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봉건 사회의 윤리적 지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유학, 특히 주자학이었다. 문예는 주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의 조닌 사이에 개화하였다. 이 시대에 등장한 소설 형태의 '우케요조시'는 상업적 재질의 자각이나 금전욕, 인간의 애욕 등 조닌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었다. 조닌 문화의 일면은 극단적인 화려함을 내포하고 있어, 복장은 남녀를 불문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고 부의 힘으로 무사를 업신여기게 되었다.
- 산업 근대화의 맹아 : 18세기에 들어선 일본은 상업적 농업의 전개와 전국적 상품 유통의 발달에 따라, 농촌 지대에 면포· 견직물 등의 섬유업을 비롯하여, 제지(製紙)·제도(製陶) 등의 지방 수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종래 원료 내지 반제품의 생산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차차 가공·완성 공정도 실시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도시 수공업을 압도하는 세력으로서 우수한 상품을 중앙의 시장에 다량 출품하게 되었다. 따라서 농민 중에서도 영속적으로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자도 나타났고, 또한 농민층 분해의 진전에 따라서 대량으로 발생한 영세 농민은 생계 유지를 위해서 이에 종사했다. 이와 같이 부업적인 농촌 공업은 차차 연속적인 생산으로 발전해 갔으나, 봉건제의 규제가 강하여, 직접 생산자인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임금 노동자가 되는 일은 적었다. 이러한 민간 산업과는 별도로 일부 지방의 영주 직영의 직물 공장에서는 매뉴팩쳐 경영이 실시되었고, 또한 바쿠우나 사가·사츠마·쵸슈 등의 한(藩)에서는 군사적 요청에 따른 서양식 공장이 설립되어「근대적」생산 양식의 맹아 단계에 도달했다. 거기에다 구미 자본주의의 자유무역 시장의 일환에 끼어 들게 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개국 상황은 일본의 지식인층으로 하여금 중국 중화관에서 서구 문명국관으로의 그 시점을 전환시켜 넓은 세계에 지식을 찾게 했다. 그러나 이 전환은 서양의 과학, 동양의 예(藝)의 의식을 매개시켰기 때문에, 유교적 합리론에 밑받침된 봉건 의식을 온존시켰다. 그러나 구미의 자유 무역은 일본 사업계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고, 특히 견직물 공업지대의 조업을 부진하게 했다. 이 결과 바쿠후 말기에는 재래 산업의 근대적 전개는 오히려 저해되었다.
- 일본의 천황제 확립 : 일본에서의 19세기 후반은 300년에 걸친 바쿠한(幕藩) 체제가 붕괴되고, 메이지 유신을 거쳐, 천황제 국가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국은 일본 국내의 부르조아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한편, 물가 앙등을 비롯한 경제 혼란은 민중의 생활을 동요시켜, 봉건 지배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고조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기본적으로는 농민의 반봉건 투쟁을 동인으로 하면서, 토막파 지도자들의 지도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적 제도들을 철폐함과 동시에,「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하여 급격한 「근대화」를 도모했다. 이 정책 실현을 위해서, 지조 개정에 의한 새로운 세제가 확립되었는데, 농민들로부터의 수탈은 과중했었다. 농민은 각지에서 지조개정 반대의 반란을 일으켰고, 한편에서는「문명개화 」에 반발하는 보수적 무사층이 무력 반란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처하여,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 성격은 한층 강화됐다. 이리하여 전제 정부에 반대하였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의 확충,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자유민권 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전개 되었다. 정부는 이 민권 운동을 억압하면서,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초기 의회에서는 역시 민당(民黨) 공세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항쟁은 조약 개정의 성공과 청일 전쟁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 칙어를 정점으로하는「충군애국」의 이데올로기가 성립되어, 학교 교육을 통해서 국민에게 침투되어 소위「신민」이 육성되어 나갔다.
2.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중국의 문호 개방과 근대적 성장
-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중국을 세계의 중심 문명 지대라고 생각하고, 주변 제 민족을 야만 미개의 비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중화 사상이 있었다. 그들은 외교·정치·문화·경제 등 제 부분에서 우월감을 나타냈으며, 16세기 이후 중국과 접촉을 갖게 된 유럽 제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무역도 중국 황제의 은혜에 의하여 허락을 받아 행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청은 1757년부터 광저우(廣州)에만 공행(公行)을 두고 정부 통제하의 제한된 독점 무역을 해 왔다. 이는 중화 사상에 기초한 불평등적 무역으로 중국의 외교와 무역의 관행이 되어 왔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무역상 불편과 마찰이 발생하였는데, 이후 난징 조약으로 영국과 청의 대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수 천년의 전통을 가진 이 사상이 한번의 전쟁이나 조약으로 바뀔 수는 없는 일로서, 그 후에도 조약의 규정은 황제의 은혜요, 의무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영·청간의 분쟁이 재연되었다.
- 영국의 아편 무역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 농민에게 아편 종자를 지급하고 재배·제조·포장을 강제함으로써 중국에 수출하였다. 아편 무역을 통해 영국에서 은이 유출되는 것이 정지되고 오히려 중국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아편 무역에서 영국이 획득한 은은 인도 농민에게 아편 생산비로 지불되어 토착 면포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편 무역은 영국의 산업 자본 축적 및 시장 개척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청에서는 아편 중독자가 급증할 뿐만 아니라 많은 아편을 밀수입하기 위해서 은이 날로 유출되어 은값이 폭등한 결과 은본위제의 경제 상태가 마비되어 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도광제에게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하나는 민간인에 한하여 아편 흡음을 인정하고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여 관세 수입을 확보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리든 민간인이든 모두 엄금하고 아편 흡음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강경책을 써서 1839년에 임칙서를 광저우로 보내 외극 상인에게서 아편 상자를 몰수하여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 린 쩌쉬(林則徐:1785-1850) : 청의 정치가로 아편 엄금론자.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치수(治水)의 공을 세워 1837년 호광(湖廣) 총독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아편 수입의 성행으로 은이 대량 유출하여 중국 경제에 타격이 심하고 국민 건강을 해치게 되자, 그는 여러 번 아편 엄금론을 주장하고, 또 관내의 엄금책에 실효를 거두었다. 1838년 흠차 대신(欽差大臣특명 파견 대신)으로 임명되어 광동으로 가서 이듬해 3월까지의 기한부로 영국 상인에게 아편 인도를 명하고 이행되지 않자, 무역 단절·외국 상관의 봉쇄 등 강경 수단을 취하여 이를 굴복시키고,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으며, 각국의 상선에 대하여 아편을 중국에 가져올 때는 화물을 몰수하고 법에 의하여 처벌한다고 하였다. 때마침 영국 선원에 의한 중국인 타살 사건이 일어나 범인 인도에 응하지 않는 영국측에 재차 강경 수단을 취했으나, 11월 3일 영국군과 드디어 전투를 벌여 아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힘을 다해 영국과 싸웠으나, 청조의 대영 유화책에 의하여 좌천되고, 그 후 태평 천국의 난이 일어나 1850년 다시 흠차 대신으로서 평정하러 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 태평 천국 운동의 의의 : 태평 천국 운동은 아편 전쟁을 전후한 청의 몰락과 열강의 침략, 농민의 궁핍화 등 당시 사회의 제 모순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정치적으로는 태평군의 진압이 한인이 조직한 향용(鄕勇)에 의하였으므로, 청조의 위신이 타락하고 한인의 정치적 진출을 가져와 정권이 이흥장 등으로 넘어갔으며, 태평군의 진압 과정에서 향용이 강화되어 청의 중앙 집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진압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이 입증되어 서방 문화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양무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전화로 유민이 발생하 조세 수입이 격감하고, 군비 팽창에 따른 재정 고갈로 청조가 더욱 재정적 파탄에 직면했다. 또한 서양인은 이 운동을 계기로 해관(海關)을 관리하여, 청은 더욱 열강에 의지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구의 격감, 농촌의 황폐에 따른 곤궁을 초래했다. 태평 천국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중국사 발전을 규정짓는 요인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 태평 천국 운동의 부르주아적 성격 : 조선의 동학농민 운동, 인도의 세포이 반란과 함께 유럽 자본주의에 대항한 아시아 농민의 대표적인 투쟁 중의 하나인 태평 천국 운동은 과거 낙방생 홍수전(洪琇全)의 기이한 꿈에서 비롯됐다. 그 꿈은 자신이 승천하여 금빛 수염의 근엄한 노인에게 진도(眞道)와 검, 권능을 부여받고 중년 남성의 도움을 받아 천상의 요마를 쫓아내고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광주 거리에서 기독교 안내문을 주워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꿈속의 노인은 여호와, 중년 남성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고 상제회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청조의 더딘 개방정책에 신물을 내고 있던 열강들은 한때 태평 천국군을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기독교에 대한 상제회의 이단성과 태평 천국군의 공산적 혁명성을 간파하고 청조를 무력 지원했다. 태평 천국 지도부는 토지의 균등 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천조전무 제도(天朝田畝制度)'를 시행하는 등 농민 공산주의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주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부르주아적인 개혁의 주창자는 천왕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182 2∼64)이었다. 그의 노선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본주의적인 개혁 방안이었고 이전의 태평 천국의 평등주의적인 경제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리(專利 : 사전 이익)를 옹호하여 각 생산 부문의 경쟁적 발전, 노동력의 질적 재고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은행, 우편, 새로운 기계 기술의 발명에 대한 전매특허, 철도, 기선, 도로, 광산, 신문 노비 폐지, 고용 노동의 도입 등을 제시했다. 정치 체제에서도 홍인간은 미국식 대통령제 채택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그 밑에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실무를 맡을 것을 구상했다. 하마터면 장발적(長髮賊)이라 불리던 농민 반란이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킬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등 외교를 기반으로 한 무역 경쟁을 통해 부국·강국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개혁 구상은 태평 천국의 진압 후에 청조에 의해 추진되는 양무 운동이나 같은 시대 일본의 유신 세력이 구상했던 근대화 계획과 맞먹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개혁 노선을 확보한 태평 천국군은 양자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와 서양의 근대적인 기선을 획득하기 위해 상해 공격을 감행 했다. 그러나 태평 천국이 그들의 형제라고 여기고 있던 서구 열강은 태평 천국군이 상해로 입성하려 하자 그 동안의 관망 자세를 버리고 상승군(常勝軍)이라는 부대를 조직, 무력 개입에 나섰다. 근대적인 대포 앞에서 태평 천국군은 무력했다. 이홍장의 중국군과 영국 장군 고든의 외인부대의 거센 반격에 태평 천국은 그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천경(지금의 남경)을 내주고 말았다.
- 양무 운동(洋務運動) : 중국의 근대화 운동은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된다. 그 첫 단계가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려는 양무 운동이고, 다음이 청조를 그대로 두고 제도 문물을 개혁하려는 변법 운동(變法運動), 그리고 청조를 완전히 타도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혁명 운동을 들 수가 있다. 양무란, 좁은 의미로서는 외교 교섭에 관한 이무(夷務)를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서양의 기술의 배워 근대화한다는 뜻이다. 태평 천국의 난을 평정하는 데 있어서 한인의 활약이 매우 컸으므로 이 때문에 청조는 점차로 한인을 중용하게 되었다. 이들 한인 관료를 중심으로 중국인의 자각이 싹터서 서양 문화를 수입하여 새로운 정치를 확립하고 중국의 부강을 달성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어린 황제인 목종(동치제)이 즉위하여 모친인 서 태후가 섭정을 하고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의 한인 신관료가 정치를 쥐고 혁신 정치를 행하게 되니 이를 동치의 중흥(양무 운동)이라고도 하였다. 양무 운동은 안으로는 태평 천국의 압력과, 밖으로는 서구의 충격에 대한 중국 지배층에 의한 체제의 재정비 작업이라 하겠다. 양무 운동에 있어서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군비의 개선과 군사 공장의 설치로 외국 무관을 초청하여 양식의 군사 훈련을 시키고 무기, 탄약, 선박 등의 제조와 석탄의 채굴과 제철업을 일으키면서 중국의 근대 공업이 시작되었다. 또 독일과 미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새로운 기술과 외국어 학습을 위한 학교가 설치되었다. 그 밖에 모직물과 직물 공업을 일으키고 상선 회사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인은 서양 문화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양무 운동은 피상적인 구미의 모방에 만족하였으며, 대부분의 완고한 비양무파 관료들은 보수 적 입장을 내세워 개혁에 반대 의견을 보였고, 결국 청·일 전쟁의 패배로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 톈진 조약(1885. 4. 18)
조선에 있는 중국 군대를 철수하고, 조선에 있는 일본국 영사관을 호위하는 군대를 철수한다. 중국 은 군대를 마산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군대는 인천항에서 철수한다. 2. 장래 조선국의 변란, 중대한 사건이 있으면 양국은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경우는 반드시 문서로써 사전 통지한다
☞ 톈진에서 청이 여러 열강과 체결한 조약의 통칭으로 10여 개가 있다. 여기에 제시된 톈진 조약은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청 전권 대사 이홍장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군이 조선에 출병하면서 이 조약에 따라 일본에 통보하였고 그로 인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시모노세키 조약(1895. 4. 17)
제1조 청국은 조선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조선의 청국에 대한 공 헌 전례(貢獻典禮) 등은 독립 자유에 손해가 되므로 장래에 이를 모두 폐지해야 한다. 제2조 청국은 다음 토지에 대한 주권 및 해당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 제조소 및 관이 소유한 물건을 영원히 일본국에 할애한다. 1. 왼쪽의 경계 안에 있는 봉천(선양)성 남부의 땅…… 2. 타이완 및 부속의 여러 섬…… 제4조 청국은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은 2억 냥을 일본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제6조 청국은 본 조약을 비준 교환한 후 속히 전권 위원(全權 委員)을 임명하고, 일본 전권 위원과 통상항해 조약 및 육로 교통 무역에 관한 결정을 체결할 것을 약속한다. 현재 청국과 유럽 각국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조약 장정을 가지고 청·일 양국의 기초로 삼는다.
- 20세기 초 중국 혁명론의 특징
신해 혁명 전후 중국의 혁명가들이 가졌던 혁명에 대한 기본 시각을 알려 주는 자료들이다. 국체와 민생의 변혁, 삼민주의의 실현 등 사회질서의 본질적 혁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19세기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겪으면서 진행된 각종 개혁 운동의 실패는 중국인들에게 심각한 좌절을 안겨주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향후 중국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전통적 질서의 전면적 해체를 통한 신질서의 수립이란 혁명론으로 나타났다.
- 군정부 선언(중국 혁명 동맹회 선언)
이제는 국민군이 일어나 군정부를 세워 260년의 양취를 몰아내고 4천 년의 조국을 회복하여 4억인의 복지를 꾀한다.…… 국민 혁명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모두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갖는 것, 즉 모두가 혁명의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군정부는 다만 그 중추가 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국민의 책임은 곧 군정부의 책임이요, 군정부의 공적은 곧 국민의 공적이므로 군정부와 국민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책임을 완수할 것이다. 이에 오늘날 혁명의 원칙과 장래 정치의 근본을 천하에 포고한다. (1) 만주족을 몰아낸다. 우리 한인을 지금까지 260년이나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만주 정부를 전복하여 우리 주체를 탈환해야 한다. (2) 중화를 회복한다.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고 중국의 정치는 중국인이 담당한다. 만주족을 몰아낸 뒤 우리 민족의 국가를 회복한다. (3) 민국을 건립한다. 이제는 평민 혁명에 의해 국민 정부를 세운다. 무릇 국민을 평등하고 참정권을 갖는다. (4) 지권을 평준화한다. 문명의 복지는 국민이 평등하게 향유한다. 사회 경제 조직을 개량하고 천하의 땅값을 조사하여 결정해야 한다. ---중국 혁명 동맹회가 1906년에 도쿄에서 강령을 수정하여 1907년 황강 봉기 때 포고한 것
- 삼민주의 : 캉유웨이 등의 개혁과 의화단 운동의 실패, 그리고 광서 변법이라는 청 유지 차원의 소극적인 개혁은 오히려 혁명 사상의 급속한 전파를 초래하였다. 당시 혁명의 주동 세력으로는 쑨 원의 흥중회 이외에 화흥회(華興會) 등이 있었는데 대개는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탄압을 받아 일본에 망명하여 있었다. 그들은 청 타도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분산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통일된 이론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 쑨 원은 이들을 합쳐 1905년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하고 강령으로 삼민주의를 채택함으로써 혁명의 기초 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령을 보면, 청 타도는 있으되 외세 배격은 없고, 오히려 외세의 호의 협 조를 희망하고 있다. 그들의 당시 힘으로는 동시에 타도하는 것은 어렵다고 여긴 때문이다. 또한 혁명의 수단으로서 군사력에만 의존했으니 민중을 혁명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청 타도와 공화정 수립은 이루어졌지만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될 수 없었다. 신해 혁명으로 청이 멸망하고 중화 민국이 성립되어 민족·민권주의는 성취되었지만, 위안 스카이 등의 군벌이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행하자, 쑨 원을 혁명의 재출발을 생각하여 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공산당과의 합작을 통하여 삼민주의도 발전시켰다.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 한인·몽고인·티베트 인 등 국내 제 민족의 평등과 자 결,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발전하였으며, 민권주의는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한 선 거·파면·창제 등의 권리를 백성이 가지며, 정부의 행정력이 약하지 않도록 치권(治權)의 확립을 지향했고, 민생주의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말하는데,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면으로 기울어진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등으로 발전하였다. 삼민주의는 현재까지도 중국 정치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일본의 개국과 근대적 성장
▶ 중국 중화 사상에 바탕을 둔 중국의 전통적인 조공 무역 체제는 아편 전쟁의 결과 붕괴되고 중국은 안팎으로 시련을 맞게 되었다. 안으로는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나 내란 상태에 빠졌고, 밖으로는 애로 호 사건으로 인해 제2의 아편 전쟁을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전통 체제의 모순은 더욱 노출되었고, 청조는 한인 관료들을 중용하여 양무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려 하였다. 중체 서용론(中體西用論)에 입각한 이 운동은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그 한계성이 드러났고, 이에 캉 유웨이 등의 변법 자강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일본의 입헌 정치 제도 도입을 비롯한 전면적인 제도 개혁이라 할 수 있는 이 운동도 보수파의 반격인 무술 정변으로 좌절되었다. 이어서 의화단의 난을 겪은 청조는 헌법 대강을 제정하는 등 국면의 전환을 모색하였으나, 마침내는 쑨 원 등 공화파가 주도하는 신해 혁명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치는 미국의 포함 외교로 막을 내리게 되고, 미·일 화친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외국 상품의 범람으로 큰 타격을 받자 반 막부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는 가운데 유력한 번(藩) 세력들에 의해 막부가 타도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국왕이 5개조의 어서문을 발표하고 개혁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이는 전면적인 서구화·근대화 개혁이었으나, 국왕 절대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국수주의·군국주의로 나타나고 마침내는 제국주의적 침략 국가로 등장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는 불행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 일본의 개항 :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미국·러시아·영국 등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포경선의 급수, 저탄 시설의 필요, 대 중국 무역의 중계 지점으로서 일본의 개항이 절대 필요하였으므로, 1852년 페리(Perry)제독으로 하여금 4척의 군함으로 위협케 하고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에 막부는 다음해에 회답을 주기로 하였다. 1854년 1월 페리는 약속한 회답을 얻고자 7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다. 막부는 이에 화친 조약을 맺었고, 이어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은 모두 불평등 조약으로서, 항구의 개방,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 등이 규정되었다.
◆ 미·일 화친 조약 : 1854년 3월 3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조인된 12개조의 조약. 일본을 개국시킨 조약으로 미국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 시모타, 하코다테의 개항과 여행권, 미국 선박에 대한 식량, 연료, 식수 공급, 외교관의 시모타 주재, 최혜국 대우의 승인이 주요 내용이다.
- 삼국 간섭 :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 청·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종식시키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만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침략 행위에 항의하자(삼국 간섭, 1895) 일본은 삼국의 항의에 굴복하고, 랴오둥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였다. 그 때까지 일본은 러시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3국 간섭으로 중국에 혜택을 준 3국은 중국으로부터 세력권을 확보하는 등 이권을 획득하였다.
-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 : 일본의 자본주의는 방적업 중심의 경공업에서 출발하여 제철업을 기초로 하는 중공업으로 발전하였고, 러·일 전쟁 이후에는 조선·금속·기계 공업 등이 뼈대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산업 혁명은 1887년 전후부터 1907년 전후 사이에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산업 혁명의 진행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에 추진된 일련의 개혁이었다. 폐번 치현에 의한 전국의 정치적·행정적 통일은 전국적 시장이 발전할 기반이 되었고, 직업의 자유, 거주의 자유는 인민이 노동자로서 농촌을 떠날 자유를 갖게 했으며, 의무 교육은 근대 산업 노동자를 양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근대화로 풍속조차 정부의 강제, 즉 행정 경찰의 압력에 의하여 변화되었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는 지배자의 요구를 실현시킨 것으로 군사 기술·장비의 근대화가 중심이 되어, 산업·과학·기술 모두 군사적인 것이 우선이었다. 의학도 군사 목적의 외과 의학이 먼저 발달했고, 근대 음악도 군악에서 시작하였으며, 근대 서양 수학의 도입도 육·해군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를 비약시킨 계기는 청·일 전쟁이었다. 청의 배상금을 기초로 1897년에 화폐법과 금 본위제가 성립하는 등 일본 경제의 기초가 확립되고 1903년에는 회사 숫자나 자본금이 전쟁 전의 3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특히 중 공업은, 전쟁 후 경영의 중심이 군비 확장이 있었기 때문에 군수 공장을 축으로 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 철도는 1892년에 철도 부설법이 공포되자 각지에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조선, 해운업에 대해서도 정부는 많은 지원을 하였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농촌에서는 지조(地租) 개정으로 소작지의 비율이 증가하고 근대 공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 인구의 증가와 철도의 보급으로 미곡을 비롯한 농산물의 전 국적 시장이 성립되었다. 지조와 소작료라는 무거운 부담은 소농민을 파탄시켜 농민층을 분해시켰고, 소작 농민층은 자식들을 노동자로 도시에 보냈다.
- 유키치의 '문명 개화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전 세계의 나라들이 서로 나누어져 각각 독립된 형태를 이루면 그에 따라서 인심과 풍속이 달라지고 국체와 정치가 달라진다. 그런데 지금 그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 모조리 유럽을 목표로 하는 것은 적합치 않고, 모름지기 그 쪽의 문명을 채택해서 우리의 인심과 풍속을 살피고, 그 국체에 따라 그 정치를 준수하고,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비로소 적절한 조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이에 답하건대, 외국의 문명을 취해서 미개한 나라에 퍼뜨림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적절하게 취사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만 문명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물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구별이 있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문명은 취하기가 쉽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문명은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는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서양인의 흉내를 내고 귀에 새로운 일, 눈에 새로운 일, 다른 사람과 다른 짓을 하면 모두 문명 개화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문자로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즉 문(文)에 밝다는 뜻으로 널리 배워서 세계의 일들을 바로 알고 그 장점을 취하여,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하는 것이 참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 밖의 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서양 열강의 아시아 진출
- 동인도 회사 :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인도, 동남 아시아, 중국, 일본 등과의 원거리 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조직된 유럽 여러 나라의 특허 상인들의 합자 회사 또는 주식 회사이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가장 유명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 때(1600) 유효 기간 15년간의 특허장을 정부로부터 받았으며 1609년 영구적인 유효 특허장을 받아 활약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애초의 목적인 무역 이외에도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군사적인 실권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아서 식민지 확보와 경영에 주력했다. 여기서 동인도 회사는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했고 화폐가 주조되었으며,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육군과 해군의 군사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선전 포고와 휴전, 강화의 권한까지를 행사했다. 또 유럽 여러 나라와의 식민지 쟁탈전도 감당했다. 그 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경영, 중국 무역의 독점 등을 수행한 후 1858년 해체되었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이보다 앞서 1800년에 해산했으며,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도 인도에서의 영국과의 쟁탈에 실패한 뒤 해산되었다. 이 밖의 유럽 여러 나라의 것도 19세기에 들어서 모두 해체되었다. 본국 정부의 식민지 직접 경영 또는 본국 정부의 국제적 지위의 변화에 따른 경영 부진 등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 경영은 그야말로 약탈과 살육의 강압적인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의 중상주의적 식민지 경영의 상징이기도 했다.
-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침투 : 1600년 동인도 회사는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을 획득했는데, 그것은 이 회사 이외의 단체가 동인도 무역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이 회사의 사업은 일종의 중개업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은 등을 수출하고 향료 등을 동인도로부터 수입하며, 수입한 상품을 영국 국내와 유럽 각지에 판매했다. 이 회사의 이외의 상인은 독점 무역에 반대했으나 특권은 왕권을 배경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독점 무역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의회는 일단 신회사를 인가했으나 신회사는 이미 구회사가 동양 각지에서 축적해온 사람들과 접촉하는 경험이나 방식에서 경쟁할 수 없었으므로 양자는 타협하여 1702년 합동 동인도 회사가 되었다.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사망과 함께 무굴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제1차 카나틱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인 지배층을 끌어들인 전쟁이었으나, 이 전투 중에 유럽인이 지닌 무력의 압도적 힘이 과시된 결과, 동인도 회사는 교역할 때 무력을 사용하면 보다 쉽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57년의 플라시 전투, 1764년의 부크사르 전투에 의해 동인도 회사는 벵골의 징세· 재정 담당 대신의 권한을 획득하여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 인도 전역에 영토를 확대시켜 나갔다.
- 마라타 동맹(Maratha) : 마라타, 즉 마하라시트라(Maharastra)는 중세기의 인도에서 독립을 보전해 온 빛나는 역사를 가진 종 족이다. 이들은 서고츠 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봄베이에서 고아에 이르는 길다란 지역을 차지한 종족으로 마라타어를 사용하는 힌두교도 인데, 18세기에 이르러 쇠미해진 무굴 제국에 대신하여 영국 세력에 대항하는 대표적 세력이 되었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뛰어난 지도자 시바지가 군사·행정의 조직을 정비하여 무굴 제국의 남진을 무찌르고 민족적 단결을 강화했다. 또, 이 동맹의 최성기를 가져온 페샤와르의 바지 라오는 마라타의 주권을 장악하여 중부 인도의 대부분, 그리고 탄조르 등 남인도의 각지와 구자라트, 말와 등의 북인도의 각지에 지배권을 확장하여, 유력한 몇 가계가 중심이 되어 푸우나를 근거지로 한 연방 또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에도, 영국의 인도 지배에 있어서의 최대 강적으로서 그들을 괴롭혔는데, 3차에 걸친 마라타 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병합되었다.
- 마이소르 전쟁(Mysore War) : 18세기 후반에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과의 사이에 4회에 걸쳐서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의 남인도 장악의 결정적 단계가 되었다. 1761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에서는, 이슬람 교도의 무장 하이다르 알리가 자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이다르 알리는 무교육한 위인이었으나, 정치가로서나 군인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지닌 사람으로 삽시간에 남인도의 서해안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에 남인도 지방에 세력을 부식하고 있던 영국을 자극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1667∼1669), 제2차(1680∼1684) 전쟁은 영국측이 불리하게 끝났는데, 제2차 때에는 프랑스가 마이소르측에 가담함으로써, 유럽에 있어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 다툼이 인도에 파급했다. 영국은 인도에 있어서의 각 번왕국 사이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하이다르 알리의 아들 티푸 술탄(Tipu Sultan)에게 제3차(1789∼1792), 제4 차(1798∼1799)의 전쟁을 도발, 마침내 티푸를 죽이고 남인도에 세력을 확립하였다.
- 시크 전쟁 : 19세기 중엽, 인도 서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시크 교도와 영국군 간에 일어났던 전쟁. 2회에 걸친 이 전쟁의 결과, 영국은 서북 인도의 요지 펀잡 지방을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제1회의 전쟁은 1845∼1846년에 있었고, 발단은 시크 군이 영국군 점령 지구에 공격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항상 펀잡 지방의 병합을 노리던 동인도 회사는, 즉시 선전을 포고하여 응전하였다. 서전은 시크 군의 선전으로 3회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몇몇 시크 영주들의 배반으로 1846년 2월 소브라온의 전투에서 패배, 이 결과 강화 조약이 체결되고 영국은 동부 펀잡 지방을 병합하는 한편 서부 펀잡 지방에서의 군대 주둔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제2회의 전투는 1848∼1849년에 일어났고, 영국의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되자,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반영 무장 봉기로 폭발하게 되어, 진압에 나선 영국군의 고전은 제1회의 그것과 별 차이 없었으나, 또다시 유력한 시크 영주의 배반으로 진압되었다. 이 결과 영국은 1849년 3월 전 펀잡 지방의 병합을 선언하고, 숙원인 인도 정복을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는 서북 국경 지역까지도 장악했고, 인도 최대의 곡창·면작 지대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 세포이의 반란(Sepoy Mutiny ;1857-1859) : 인도의 병사 및 농민에 의해서 일어난 민족적 대 반란. 세포이란 페르시아어로 군대란 뜻이며, 여기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편성한 이슬람교도, 또는 힌두교도로 구성된 벵골 지방의 동인도 회사 소속의 용병을 가리킨다. 세포이는 이들은 영국인의 인종 차별, 특권의 폐지 등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1848년부터 정복 전쟁과 토후국 병합 정책에 의하여 인도 정복을 거의 완성하였으나, 강경 정책으로 인도 민중의 반영 감정이 고조되자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에게 신식총으로 무장을 시켰다. 신식총의 탄약은 돼지와 소의 기름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게는 돼지가 금기였고, 힌두교도에게는 소가 신성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을 기화로 항쟁을 전개하여 1857년 5월 수도 델리를 점령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대 반란이 아니라, 인도 각 지방의 토후의 후원, 농민·도시 수공업 자들의 후원을 얻으면서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4개월 뒤에는 전인도의 약 3분의 2가 반란에 휩쓸리었다. 반란은 처음 무굴 제국의 부흥 선언에도 나타난 것처럼 본질적으로 인도 구지배층의 권력 구조와 민중의 소박한 배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점점 고조되어 갔다. 자민다르(토지 소유권을 갖는 지방 호족) 제도가 행해졌던 북인도의 태반 및 남인도의 일부에서는 농민은 지주나 고리대에 의해 압박되고, 도시 수공업자는 영국 상품과의 경쟁에서 타격이 컸으므로 반항이 끈질겼으나 라이야트바리 제도(농민에게 경작 토지 소유권이 있는 제도)가 행해지고 있던 데칸이나 남인도에서는 농민들이 자작농인데다 지조 경감의 특전을 받았으므로 소극적이었다. 한편 펀잡의 시크교도, 애프간의 이슬람교도, 네팔의 그르카 병들은 적극적으로 영국군을 도왔다. 영국은 본국에서 군대를 증파하여 1859년 4월까지 겨우 주요한 반란을 억압하는 한편 동인도 회사를 폐하고 인도를 본국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 이 반란에서는 인도의 봉건 세력이 지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통일된 조직을 가지지 못해서 실패하였지만, 인도 역사상 최초의 민족적 단결에 의한 반영 운동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 인도 국민 회의의 조직 : 1857년 5월 10일에 세포이 항쟁은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 근교의 군사 기지 미루트에서 시작되어, 다음날 델리로 진격하여 무굴 황제를 옹립하고 그로 하여금 복권을 선언하게 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지탱해 온 용병 군대의 충성심은 봉기를 계기로 한꺼번에 동요하게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로 각 도시의 민중이 봉기하였고 농촌 지역에서도 영국의 지배는 무너졌다. 그러나 각 정권은 여러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2년여에 걸쳐 전개된 항쟁은 농촌에서 전개된 게릴라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전국적인 정치 조직의 필요성이 강하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885년 12월에 봄베이에서 인도 국민회의의 창립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체는 인도의 지도급 인사를 영국측에 끌어들여 협력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주어 반영 운동을 약화시키고 영국의 인도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로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인도측의 중요한 추진자로는 벵골 출신의 스렌드라나트 바네르지아와 봄베이 출신의 다다바이 나오로지 등의 정치가들이 있었고, 영국측에서는 퇴직 관리가 참여하였다. 창립 당시 회의파가 내건 정책은 전체적으로 인도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영국 식민지 당국자와 계속해서 교류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측도 대중의 불만과 지식인의 결합을 저지하기 위해 이 조직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서자 회의파는 반 영국, 반 제국주의적 방향을 드러내고, 영국으로 가는 국부 유출, 군사 부담의 증대, 거듭되는 기근이 모두 제국주의 지배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영국의 인도 통치가 굳어지고 인도인의 민족 의식이 고조되면서 차츰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1906년에 개최된 캘커다 대회에서는 자치(스와라지), 국산품 애용 (스와데시), 영국 상품 배척, 국민 교육의 4대 강령이 채택되어 추진되었다.
- 인도 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 : 영국의 인도 지배를 통하여 시행된 인도 통치에 관한 법령으로 이 법의 변천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와 민족 운동에서 자치 독립에의 과정을 통한 통치 기구의 변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1857년에 세포이 반란이 일어난 직후인 1858년에 새로운 인도 통치법이 시행되었고, 영국 정부 각료에 인도 담당 국무 대신과 인도 참사회·인도성을 두어 총독에 의한 본국 직접 통치 기구를 확립하였으며 통치의 전권은 내각 중의 일원인 인도상(相)에게 위임되었다. 그리하여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는 인도 제국이 성립되었다. 그 뒤 입법부에 소수 인도인의 심의권을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났으나, 1885년 인도 국민회의의 성립을 기하여 인도인 참정운동이 통치법 개정을 위한 추진력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특히 커어즌 총독 시대에 벵골 분할 법안의 발표를 기하여 최초로 민족 운동의 저항이 있게 되자, 영국은 1909년 모올리·민토우 개혁이라는 참사회 법안을 발표하였고, 다시 1912년의 통치법에 서는 분할이 취소되었다. 그리하여 1915년에도 통치법의 개정이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인 1919년 에는 몬타규·쳄스퍼드 법에 의하여 직접 선거에 의한 주 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스와라지를 요구하는 인도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통치법 개정 조사를 위하여 1927년 인도에 파견된 사이먼 위원회를 보이 코트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 1935년 8월 버마를 인도로부터 제외한 전문 478조에 달하는 새로운 인도 통치법이 포고되었다. 이 법은, 1)인도상의 권한을 줄여서, 인도 황제에게 직접 이양하되, 인도 총독에 대행하게 하고, 2)왕후국을 포함하는 연방제를 시행하여 왕후국 대표도 포함하는 상하 2원제의 입법부를 만들고, 3)주 자치제를 시행하여 지사의 권한을 크게 인정한다는 등의 근본적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인도인의 반대는 그치지 않았고, 연방제의 실현도 끝내 보지 못하였으며, 1937년의 주 선거에서는 회의파의 대승을 가져왔고,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11주중에 8주의 회의파의 내각이 사직하여 주 자치제도 동요를 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인도 통치법은 1947년 8월 15일 인도 독립법의 시행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2) 인도 및 동남 아시아의 근대화
- 브라모 사마지(Brahma Samaj) : 19세기 이래의 힌두교 개혁파 중의 일파로 1828년 람모한 로이가 캘커타에 설립한 협회를 말한다. 크리스트 교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종래의 힌두교를 일신교적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동시에, 힌두사회의 낡은 체제의 개혁을 꾀하였다. 1833년 로이가 사망한 후 D. 타고르가 뒤를 이어 베다 시대를 이상으로 하는 복고적 성격을 강하게 풍기는 한편, 협회를 조직하였다. 1857년 이래 케샤브 찬드라센이 이 운동에 참가하자 크리스트교적 영향이 짙어지고, 카스트 제도의 폐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중심으로 한 사회 개혁이 제창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타고르 파와는 사상적 대립으로 말미암아 결국 분열되고 말았다. 1878년 이후 새로 조직된 사다란 브라마 사마지 파가 점차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지방 지부의 활발한 운동과 더불어 사회 봉사적인 개혁 사업을 전개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이래 종교·사회면에서의 최초의 개혁 운동으로 힌두 사회 사상 커다란 의의가 있다.
- 영국의 인도 통치의 속성과 반영 운동 : 영국은 식민지 주민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통치 정책을 구사하였다. 영국의 벵골 분리 정책은 식민지 주민의 종교적 대립을 이용한 민족 이간 정책의 전형적 사례이다. 당시 인도인들은 종교적 차이보다는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여 영국의 이간 정책을 효과적으로 분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인도의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후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를 직할 식민지화 하였다가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지배하는 영령 인도 제국을 만들었다(1877). 영국은 인도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인도 국민회의를 소집하였다.(1885). 초기의 국민회의의 활동은 온건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영국의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을 인도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영국의 인도 총독 커즌은 1903년 행정적 능률의 개선을 꾀한다고 하며 캘커타를 중심으로 하는 서 벵골과 아샘을 포함한 동 벵골의 두 지역으로 벵골주를 양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인도인, 특히 벵골인의 반발이 거세었으며, 그들은 이것이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벵골주의 주민들은, 서 벵골인은 힌두 교도이고 동 벵골인은 이슬람교도이지만 동일한 인종으로 동일한 벵골어를 사용함으로써 항상 벵골인으로서의 일체감을 갖고 있었다. 벵골 분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구체적 표현은 인도 물품 구매 운동(Swadeshi) 및 영국 상품 배척 운동으로 나타났다. 과격파가 주도한 1905년 국민회의의 캘커타 대회에서는 벵골 분리가 철회되지 않는 한 영국 제품을 사지 말 것 등이 결의되었다. 1905년 말경에는 이 스와데시 운동이 전 인도에 확산되었다. 1906년에는 전 인도 이슬람교도 연맹이 결성되어 국민회의 노선에 동참하였다. 결국 영국은 벵골 분리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으며, 국민회의 내에서는 다시 온건파가 득세하게 되었 다.(1907) 제1차 세계대전 중 인도는 전후 자치권 획득을 조건으로 영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스와라지) 요구를 묵살하고, 로울라트 법을 제정하여 오히려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더 강화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회의에서는 다시 과격파가 세력을 얻어 강력한 반영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즉 간디 등이 주도한 인도 국민회의가 1920년에 무저항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 불복종 운동은 대단히 적극적인 반영 운동이었으며, 이슬람교5도俑?간디와 협력하여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 1929년에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과격과 네루는 자치를 넘어선 완전 독립을 반영 운동의 목표로 천명하였다. 인도 국민회의의 성립 배경이나 그 노선 변화를 통해서 인도 민족 운동의 특성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국민회의는 비교적 온건한 투쟁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인들이 자치권 획득을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 단계로 독립 달성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뒤에 간디의 자치 운동 노선과 네루의 독립 운동 노선의 차이를 낳게 되었다.
- 회교도 연맹(Muslim League) : 1906년에 발족한 인도 이슬람교도의 정치 단체로「전(全)인도 무슬림 연맹」이라고 칭하였다. 초대 총재는 아가 한으로 이슬람교도의 지위 보호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극히 친영적이었으나 힌두와는 원래부터 대립적이었으며, 또한 중·상류 계급을 주체로 하였다. 터키 문제가 원인이 되어 1912년 이후 점차 반영적 경향을 띠고, 민족 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국민회의 파에 접근, 제1차 세계 대전후 칼리프가 옹호하는「힐라파트 운동」이 크게 일어나면서부터는 국민회의 파의 민족적 저항운동(1919∼1922)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4년이래「힐라파트 운동」도 터키의 술탄제 폐지에 의해 소멸되고, 진나가 연맹의 재건에 힘쓰자 다시 친영적인 색채를 강화하였다. 그 이후는 항상 회의파와 대립하였으며, 1940년에는 파키스탄 분리 계획을 결의함으로써, 1947년 8월 양 자치령 분리 독립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파키스탄 독립 후에도 제1당으로 활약하였고, 1948년 진나를 잃은 후부터는 복잡한 정세의 변천 과 더불어 차차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동파키스탄에서는 점차 그 지위의 동요를 가져와, 1954년의 주선거에서는 예상 외로 통일 전선 세력에 참패하는 결과가 되었다
- 벵골 분할령 : 1905년 인도 총독 커즌에 의하여 발하여진 벵골 주 분할 정책. 커즌은 제국주의의 추진자로서 벵골 주 내에서 힌두 교도인 벵골 인 지식층에 의한 민족 운동 추진을 억제하기 위하여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아샘 지방과 힌두 교도의 벵골 인이 인구의 1/3을 점하고 있는 벵골 주를 분할 통치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힌두교, 이슬람교 양 교도의 분할 통치인데 그 목적은 단순히 민족 운동의 약화를 도모한 것만이 아니고 힌두, 이슬람 양교도의 대립 경향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 때문에 국민회의 파는 캘커타 대회에서 스와라지, 스와데시, 대영 보이코트, 민족 교육의 4대 강령을 내걸고 강력하게 반대하여 반영 기운을 북돋았다. 이에 영국은 한편으로는 운동을 억압하고 한편으로는 타협적 태도를 취하여 결국 1911년에 분할령은 폐지되었다. ▶ 스와라지, 스와데시 : 스와라지는 자기 지배라는 힌두어인데 캘커타 대회에서는 자치 독립을 뜻하게 되었다. 스와데시는 국산 애용이라는 뜻이다. 또 스와데시는 대영 보이코트와 동의어로 해석하여 영국 상품 배척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스와데시의 구체적 표현은 인도 재래의 수공업 생산의 추진 운동으로 나타났다.
- 로울라트 법(Rowlatt Act ;1919.3.) :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정부는 전후에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약속으로, 인도인의 협력을 구했으나, 전후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영국이 1차 대전 후, 인도와의 원래 약속을 무시하고 그들의 식민 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9년 의회를 통과시킨 반선동법이 로울라트 법이다. 이 법에 의하면 독립 운동 선동자를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으며, 배심원 없이 재판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등 민족 운동 탄압을 내용으로 하였다. 인도인의 민족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이 법을 시행했으나, 저항은 오히려 점점 가열화 되었다. 간디의 유명한 불복종 운동은 이 탄압에 대항하여 개시된 것이다.
- 베트남의 역사
▶ 베트남 문화의 복합성 : 베트남의 국명은 월남(越南)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월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완조(阮朝 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나라의 승인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한다. 한 때 월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월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유래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 나라, 일본과 더불어 중국 문화권 내지는 한자 문화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 침략을 받았듯이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두 나라 모두 남북이 나뉘어져 수십년간 대치 상태에 있다가 1975년 베트남은 통일된다.
- 중국 지배기 : 동남 아시아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000년 이상이나 중국 문화의 유입을 받아들여 왔다. 월남의 신화 중에는 월남인의 조상이 중국의 염제 신농씨의 3세손에 연원한다는 것이 있다. 비록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을 입고 있지만 그와 동격이라는 자긍의 표현인 것이다.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대략 기원전 219년의 진시황제의 남정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남해(지금의 광둥), 계림(지금의 광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 상군(象郡) 등을 두었다. 진이 망한 후 지금의 광둥을 도읍지로 하여 남월이라는 나라가 생겨 세력을 떨쳤으나 한 무제가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9군(郡)을 두어 교주 자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한은 많은 중국인 죄수들을 이 지방에 보냈으므로 그 언어나 습관이 날로 그들 사이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런데다 관리를 보내어 적극적으로 교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화전 농업에 중국식의 농경법이 혼합되고 혼인의 습관 등도 중국식으로 바꾸어졌다. 하지만 외국의 지배가 베트남인의 뜻에 맞지 않아 압정이 계속될 때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베트남 국민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있는 춘착, 춘니 자매의 반란이다. 춘 자매는 교지군 출신이데, 춘착의 남편이 불법으로 중국 관헌에 잡힌 것에 분개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40) 그들의 군세는 급증하여 춘착은 한때 왕을 지칭하기까지 했는데, 한은 마원 장군으로 하여금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 난을 진압하게 했다. 그후에도 베트남에는 평화와 반란이 계속 반복되었다. 한편 저항 운동과는 다른 일면에서 중국 관리들과 접촉하는 소수의 베트남인 사이에 중국 문화가 서서히 전파되었다. 당대에는 한국의 신라, 일본의 헤이안기처럼 적지 않은 당 과거 출신을 배출하였다.
- 독립 왕조기 : 오랜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또 고도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 월남 인의 생명력은 마침내 서기 939년에 吳權(고구엔)에 의한 월남 최초의 독립 왕조(吳朝:938∼968)를 건립 하기에 이른다. 이는 중국에서 당이 망하고 5대의 혼란이 계속되던 시기에 해당한바 그 뒤 정조(丁朝 968∼980), (전)여조(黎朝 980∼1010)를 거쳐 이조(李朝 1010∼1225)에 이르러 비로소 장기적인 안정 왕조가 세워졌는데, 과거제, 구품 관인제 등 중국적 통치체제를 받아들인 이조는 그때까지의 월남인의 활동 범위인 북부 월남을 처음으로 넘어서서 남쪽의 참족의 국가 참파(占城의 후신)을 공략하여 지금의 廣平(강빙), 廣治(강찌)성 지방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참파는 인종면이나 문화면에서 인도화된 나라로서 중국적 문화에 바탕을 둔 북방의 국가와 달랐다. 한편 참파의 서남방에 위치한 오늘날의 캄보디아, 진랍(眞臘)과의 투쟁도 이 왕조때 전개되었는데 이는 통킹(東京)평야에 근거를 둔 월남인의 남진 정책의 표현이었다. 이 당시의 캄보디아는 그 화려한 앙코르와트의 창건자로 이름난 수우랴바르만 2세 치하였는데 월남은 이조의 신종 때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캄보디아를 침입하였다. 캄보디아는 때로 월남을 공격할 뿐 아니라 남방 참파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조 다음의 찬 왕조가 1225년 성립하면서 북방 몽고의 압력을 받아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을 뿐 아니라, 서쪽의 라오스, 남쪽의 참파를 쳐서 이들에게 조공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패배를 모르던 원의 침입을 맞아 세 차례나 승리를 거둔 것(1257, 1284, 1287)은 지금도 크게 자부하는 통쾌한 승리였다. 월남과 참파를 나누는 해운관(海雲關)은 이 무렵에 월남령으로 귀속되어 앞으로의 월남 세력의 남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월남의 남진이 항상 용이했던 것은 아니고, 진조(陳 朝) 후기에 가면 참파의 북진으로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진조에 이어 단명의 호조(胡朝), 그리고 연이은 명대 중국의 직접 통치를 겪은 뒤, 1427년 후여조(後黎朝)가 성립하거니와, 참파가 다시는 월남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후여조의 성종(탕통) 때였다. 월남에 반기를 든 참파의 제 15왕조 2대째 왕인 반 라자드안의 10여만 군이 성종에 의해 격파되고, 수도 비자야(오늘날의 平定) 는 함락되고 f蘭?포로가 되었다. 이어 월남은 참파라는 장애를 넘어서 그 남쪽의 캄보디아 서남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부 월남에 이웃한 라오스에 대해서도 정복의 손을 뻗어 미얀마 국경 지대까지 진출 하게 되었다. 이렇듯 참파의 사실상 영유와 라오스에의 지배권 확립이 이루어진 여조의 성종대는 우리 나라의 조선 세조·성종대에 해당된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월남 남부는 이 무렵에도 완전히 월남화되어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초엽에 권신 莫氏의 찬탈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나 남북 항쟁의 대립형세가 전개되어, 완씨(阮氏)가 순화(順化)를 배경으로 남방 정권을 이룩하여 남쪽으로 진출함으로써 북방 정권(鄭氏)에 대항할 힘을 기르려 하면서부터 남진의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오늘날의 사이공이 위치하게 된 메콩 델타 유역에 월남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캄보디아는 월남을 종주국으로 삼아 조공을 바치게 된다. 1739년과 1755년에 차례로 완씨는 캄보디아와 교전하여 캄보디아의 해변 영토를 완씨령으로 편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월남이 불과 200여년 전에야 형성단계에 들어간 것과, 남부 월남이 마지막을 월남에 귀속된 지역이라는 사실은 월남의 남북 문제를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전통과 관련하여서 살필 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산(西山)의 완씨 삼 형제의 반란이 남방의 완씨 영내에서 일어나 이른바 신완(서산당)과 구완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구완은 조상 전래의 근거지인 순화에서 밀려나와 가정(嘉定, 오늘날의 사이공 근처)으로 쫓겨나면서 서남 해안지대는 결정적으로 월남화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쟁란 때문에 문화적 중심이 변경지로 이동함으로써 그 곳의 문화 수준을 높여 전국적인 문화 수준으로 향상시킨 예는 중국사의 경우 동진이나 남송의 남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현재의 대만도 그 현저한 예라 할 것이다. 그 뒤 가정은 구완 세력을 축출한 서산 삼 형제 중 동종왕 阮文呂(구엔 반 류)의 통치 중심지가 됨으로써 남부 월남의 월남화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비록 서산 당의 지배는 짧았지만, 월남의 북부, 중부, 남부를 포함한 오늘날의 월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 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서산당을 격파하여 새 왕조를 세운 구완 일족 출신의 완조는 서산당에 의한 통일을 바탕으로 월남 전역을 단일 체제로 통치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1802년)
- 프랑스의 침략과 베트남인의 독립운동 : 인도 지배를 둘러싼 패권 투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한 이후, 프랑스는 극동으로 진출을 꾀하였는데, 19 세기 중엽의 동남 아시아에서는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국가에 비해 프랑스의 정치적 진출이 가장 늦은 상태에 있었다. 애로 호 사건에서 영국과 협조하여 무력 개입에 나섰던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적 의도를 드러내고 마침내 직접적인 무력 침공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월남의 남부는 월남사의 남진 방향의 종점으로, 월남 전통에 가장 늦게 젖음으로써 남부는 북부나 중부에 비해 월남적 전통이 약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남부가 월남 전토중 가장 일찍이 식민지화 되었다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월남 남부를 침략의 첫 희생물로 삼았던 프랑스인의 대월남 진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전국적 통일의 바탕 위에 선 최초의 왕조인 완조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였다. 완조를 창건한 阮福映(구엔 푹 앙), 즉 후일의 嘉隆(갸롱)제가 서산당에 쫓기어 사이암만의 섬들을 전전하였을 때 프랑스 신부 피뇨가 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피뇨가 얻어온 의용병과 무기, 탄약은 완복영의 대서산당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프랑스는 구완에 대한 군사 원조의 대가로 베트남 남부 지방에 대한 할양을 요구하여 1859년 가정성(뒤의 사이공, 현재 호치민)을 점령하여 베트남 지배의 근거지로 삼고 1862년에 구엔 왕조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여 코친차이나 동부 3성과 프로콘돌 섬의 영유권을 획득하고 '코친차이나' 라 하여 직할 식민지화하였다.(1862) 그리고 뒤이어 1873∼1885년 사이에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를 점령하여 이를 각각 '안남'(1884) 과 '통킹'(1884)으로 명명하고 남부와는 달리 명목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가 명실공히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에 대해 중국이 가진 전통적 종주권을 파기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청·프 전쟁(1884)을 거쳐 1885년에 톈진에서 체결된 수호 통상 화평 조약에 의거, 청국은 통킹에서 철수하고 프랑스의 통킹·안남에 대한 보호권은 승인되었다. 이로써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적 지배권이 확립되어, 18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이 성립되었으며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게 되었다. 프랑스 지배하에서도 완조의 군주는 폐위되지 않고 형식상이나마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1897년 총독이 된 폴 도우메르는 통킹의 부왕을 폐지하고, 베트남에서는 추밀원의 권한을 빼앗고 장관이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 총독부는 통화의 통일, 소금·술·아편의 전매 제도 실시를 통하여 재정을 확보하고, 그 수익을 철도·운하·항만 등 공공 사업과 문화 사업에 투자하여 통치의 실적을 올렸다. 프랑스 지배하에서 구지배층은 존속하였지만 공유지는 피탈되어 전 경지의 6분의 1 이상이 프랑스인 농원으로 화하였다. 현물세는 현금납이 되고, 알콜이나 아편은 프랑스 상인에 독점되어 폭리의 원천이 되었다. 이리하여 인도차이나는 쌀·고무 등의 식료·원료 산지로 전락하였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독립운동은 전통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전통주의란 1900년 이전까지의 전통적 문신 계층을 중심으로 완조에 대한 충성심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이 저항 운동은 이른바 근왕운동(勤王運動)으로 대표된다. 1900년경부터는 중국어 번역서들을 통해 들어오는 서구의 근대적 사상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운동이 판 보이 쩌우와 판 쭈 진 등을 중심으 로 전개되었다. 유학자 출신 판 보이 쩌우는 중국의 변법 운동이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은 자강 조국을 만들고자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월남 유신회를 조직하여 초기의 손문과 비슷한 방법으로 독 립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우선 일본에 접근하여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원조받아 봉기하려 하였다. 그가 단신 일본으로 가서 의지한 사람은 중국의 변법파 망명객 양계초였다. 그의 도움으로 일본의 조야 와 접촉하고 이후 일본을 월남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하였다. 그가 아무 소개도 없이 양계초를 찾 아가 독립 운동의 뜻을 밝히고자 필사하여 양에게 준 것이 뒤에 양의 알선으로 1905년에 출판된 <월남 망국사>이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가 해외에 정세를 살피거나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꺼려 월남인의 해외 유학을 금지하였는데, 이에 대항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권장하는 동유운동(東遊運動)을 전개하였다. 한편 판 쭈 진은 근대적 사설 학교인 東京(통킹)의숙에 적극적이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일 어난 뒤에는 그에 자극받아 군주제 아닌 공화제 독립을 꾀하여 1912년 월남 광복회를 조직하여 중국 국 민당과 손잡고 광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에 종사한다. 월남 광복회보다 더 근대적인 독립 운동 조직으로서는 阮大學(구엔 다이 혹)의 월남 국민당과 월남 공산당이 있다. 중국 국민당을 본따 河內(하노이)에서 결성된 월남 국민당이 1930년초 조급하게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다음, 항불 운동의 주도권은 베트남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 캄보디아의 역사.
▶전근대의 역사 :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에 걸쳐 인도 문명의 영향 아래 부남(扶南) 왕국이 번영하였다. 부남은 해상 무역을 통하여 6세기 후반까지 발전하였으며, 이어서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이 부남을 병합,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그후 8세기초에는 수진랍과 육진랍으로 분열되었다가 9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다시 통일, 앙코르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앙코르 왕국을 건설하였다. 앙코르 왕국은 진랍의 전성기로 12세기말까지 번영하였으며, 그 사이 인도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앙코르톰, 앙코르 와트 등 장대한 건축물이 조영되었다. 이 당시 앙코르의 건축과 부조는 크메르 미술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3세기에는 태국인의 압박이 시작되었으며, 14세기에 아유티아 왕조의 세력이 커지자 1434년에는 앙코르를 포기하고 남쪽의 프놈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편 베트남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참파 왕국을 붕괴시키고 크메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크메르는 태국, 베트남 양 민족의 압박을 받아 쇠퇴해갔다.
- 프랑스의 침략과 캄보디아 :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로 침입한 것은 1840년, 몇 사람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베트남에서 현지인에게 살해된 이후로 1858년의 사이공 점령을 시발로 하여 조금씩 박차를 더해갔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862년이 되자, 코친차이나의 절반을 획득한 프랑스가 다시 북방으로 손을 뻗게 된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영유하고 구엔 조를 대신하여 캄푸치아의 종주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사이암을 무시하고 캄푸치아와 경제적인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유리한 지위를 차지해갔다. 이어 1863년에는 노르돔 왕(재위 1859∼1904)과 프랑스·캄푸치아 협정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를 보호령(1864∼1949)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 사이 주민들의 저항으로 반란이 일어난 적도 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프랑스 판무관이 실권을 잡고, 왕은 국가와 종교의 단순한 상징으로만 머물렀다. 1887년, 캄푸치아 는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 라오스 및 중국 국경의 조차지 광저우 만을 포함한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 에 소속되어 식민지 정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한편 노르돔 왕이 죽은 다음에 그의 동생 시오와트 왕(재위 1904∼1927) 때에는 앙코르의 유적이 타이에서 캄푸치아로 되돌려졌다.
- 독립과 내전 : 1940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 한때 그 지배 밑에 있었으나 45년 3월 노르돔 시아누 국왕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립 운동은 계속되었다. 47년 5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왕국 헌법을 공포, 프랑스도 49년 11월 프랑스 연합내의 한 왕국으로 이를 인정함으로써 한정된 범위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은 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 차이나 휴전 협정이 성립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독립 후 캄보디아에서는 사실상 시아누크의 지배 체제가 이루어졌다. 시아누크는 55년 4월 왕정 지지자 정당을 소집하여 <사회주의 인민 공동체(상쿰)> 를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 같은 해 9월 국민회의 총선거에서 상쿰이 전 의석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시아누크는 61년 태국, 63년 베트남, 65년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70년 4월 시아누크의 외유 중에 우익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 론 놀의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72년 국명을 크메르 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론놀 정권은 처음부터 불안정하여 반 론놀 기운이 높아지면서 70년 4월경부터 좌파, 중도파에 의한 게릴라 활동이 강화되어 캄보디아는 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망명 중의 시아누크는 70년 5월 캄푸치아 민족통일 전선, 캄푸치아 왕국 민족연합 정부의 성립과 해방군의 창설을 발표하였다. 75년 4월 크메르 루즈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프놈펜을 함락하여 76년 4월 키 우 삼판을 수반으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정부>가 수립되었다. 중국의 지원 아래 민주 캄푸치아를 장악한 폴 포트 정권은 잔혹한 독재 정치를 자행하여 수많은 국민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 기아로 죽어가게 했고 구정권의 군인과 공무원들을 대량 학살하였으며 70년대 후반의 수년 동안 200만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에 폴포트 정권은 국제적 지탄과 국민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한편 베 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은 78년 12월 <캄푸치아 구국 민족통일 전선>을 수립하여 베트남의 준위성국 상태에 있으며, 시아누크공, 손산, 손센 등 3개 파로 이루어진 <민주 캄보디아 연합정부>가 창설된 이래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 태국의 역사
▶ 태국의 역사의 시작 : 타이족은 중국 남부로부터 라오스, 태국, 미얀마, 말레이 반도에 걸쳐 광범하게 분포하고 있다. 타이족의 기원은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한족의 남진에 밀려 중국의 양쯔강 남부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동하여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윈난(雲南)의 남조국(南詔國)은 타이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라는 설이 있으나 반론도 많다. 13세기에 선주민인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창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태국의 랑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과 라오스와 동부 태국에 걸친 란산(라오족) 등 태국 민족의 소 왕국이 각지에 생겼다. 그 중 랑타이 왕국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나 태국 역사상 정통왕조는 수코타이 왕조(1257∼1350)이다.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라마 캄헹 왕(재위 1277∼1317)은 영토를 넓히고 타이 문자 표기법을 만들었다. ▶ 수코타이 조의 라마 캄헹 대왕 : 수코타이 왕조의 역사는 제3대 라마 캄헹 대왕의 치세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40년 동안 치세하면서 왕국을 강대하게 하여, 몬족의 영토인 미얀마의 마르타반, 또 말레이 반도에까지 지배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여러 외국과 교섭을 활발히 해 그 문물을 수입하고 왕국의 문화 향상에 힘써 타이국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크메르 왕국으로부터 정치, 사법 제도를 도입하여 관제를 정비하고 힌두교,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를 흡수했다. 그 중에서 특히 왕의 이름을 타이국 사상 불후의 것으로 만든 것은 1283년에 이루어진 타이 문자이다. 그때까지 사용되었던 크메르 문자를 개조 창안하여,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타이 문자를 제정하였다. 실론에서 미얀마를 거쳐 소승불교가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다. 아삼을 거쳐 북방 인도와의 교섭도 이루어지고, 그 예술. 문학이나 대승 불교도 수코타이 문화에 흡수되었다. 대왕의 사후에는 왕국의 위세도 쇠퇴하고 얼마 안 가서 각지의 토후가 난립하는 가운데 남방의 아유티아 왕국이 대두하자 패자의 자리를 내놓았다. 8대 180년의 왕조였다. 수코타이 왕조에 이어 아유티아 왕조(1350∼1767)는 위계전 제도를 비롯한 각종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17세기에 아유티아는 무역항으로 번창하여 왕실의 독점 무역 체제를 갖추고 서양 여러 나라 및 중국. 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16세기 후반 미얀마 군에게 점령당했으나 아유티아 왕조의 9ダ?프라야 탁신(鄭昭)이 미얀마를 격파하고 톤 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톤 부리 왕조는 1대로 끝나고, 그 부하인 차크리 장군이 1782년에 방콕에서 차크리 왕조를 세웠다. 이것이 지금의 차크리(방콕) 왕조이다. ▶ 타이 근대화와 출라롱콘 대왕(재위 1868∼1910) : 타이 근대화의 첫걸음은 출라롱콘 대왕의 치세에서 비롯된다. 출라롱콘 왕 때부터 라마 7세 프라차티폭 왕(재위 1925∼1935)의 1932년의 입헌 혁명의 발발까지가 방콕조의 2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계몽적 전제 왕정으로 모든 타이 근대화의 첫걸음이 시작된다. 라마 5세의 근대적인 모든 개혁은 즉위식에서부터 드러난다. 왕에 대한 포복의 예를 없애는 민주화의 일보를 내딛은 것이다. 더욱이 서구 행정제도를 도입하여 우편, 전신, 철도를 부설하는가 하면 사법, 행정의 모든 조직을 서구식으로 개혁하였다. 한편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국내의 대 쇄신을 단행하려고 하는 왕의 치세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의 유럽 세력 때문에 그 독립이 매우 위태로웠다. 이미 미얀마와 인도차이나의 식민지화에 각각 성공한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은 날로 현저해졌다. 외국에 대한 사이암의 치외 법권의 용인 이후(1885) 타이에 대한 침략 압력은 더욱 무르익었다. 왕은 이런 상황에서 치외법권, 불평등 조약의 철폐에 뜻을 두고 부득이한 경우에 는 영토를 나눠주는 한이 있더라도 국권의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다. 어쨌든 타이는 주변의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독립을 유지했는데, 그것은 미얀마로 진출한 영국과, 인도차이나 공략을 추진하던 프랑스 세력간의 완충국이었다는 사실과 타이의 외교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영국에는 조약을 통해 치외법권을 부여하였고(1855), 말레이 반도 북부를 할양하는 한편, 메남 강 이동의 지역을 프랑스의 세력 범위로 인정하는 등, 종속국으로서의 독립이었다. 그 뒤 왕족 전제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에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 군주국으로 발족하였다.
- 미얀마의 역사 : 미얀마는 중국의 문헌에 옛날부터 표(驃 당), 포감(蒲甘 송), 면(緬 원). 면전(緬甸 명, 청)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현재 전국의 산야에 정주해 있는 여러 종족의 이동의 역사다. 서력 기원의 시초에는 몬족이 시탕 강 하류 지방에 정착하고, 인도로부터 농업 기술과 힌두교, 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미얀마 최초의 강력한 왕조는 8세기에 이라와디 강 하류의 프롬을 수도로 정했던 표족(驃族)의 왕조인데, 이 왕조는 9세기에 망하고, 표족도 사라졌다. 11세기가 되면서 이라와디 강 중류 유역에 미얀마족 최초의 왕조인 파간 조가 등장한다.(1044∼1287) 이 왕조는 12대 250년간 지속되었는데, 아노라타 왕이 세웠다. 왕은 그때까지 탈라잉에 살고 있던 몬족의 세력을 이라와디 강 유역에서 쫓아낸 뒤 페구를 수도로 하여 버마 중앙평원을 제압하였다. 왕은 동남아시아에서 최초로 코끼리를 이용한 전술을 개발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 때에 국교를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로 바꾸었는데, 이는 힌두의 몬족에 대항하기 위해 애니미즘이나 힌두교와도 융화되었던 대승불교를 버리고 순수무잡(純粹無雜)을 고집하는 소승불교를 채용한 것이다. 이 파간 조도 1287년 몽고군의 침입에 의해 망하고 그후 200 여년간 혼란기가 계속된다. 제2의 미얀마 왕조를 퉁구 조(1486∼1752)라고 한다. 이 왕조는 2대왕 타빈 시웨티(재위 1531∼1551) 이후 전성기를 이루어 1560년경에는 현재의 미얀마 령을 넘어 태국 북부와 라오스까지도 판도에 넣고 69년에는 태국의 아유티야 왕조까지도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정과 내전으로 피폐했으며, 17세기에는 델타지대의 반란으로 타웅구를 버리고 이라와디 강 중류지역의 아바로 천도하였다가 이곳까지 천도하여온 몬족에게 멸망하였다. 1752년, 아바 왕국의 후계 자를 자칭하고 있던, '장래의 불타' 를 의미하는 이름의 알라웅파야(재위 1752∼1760)가 몬족에 반기를 들고 시웨보에 도읍을 정했다. 이어 몬인, 즉 하머마의 탈라잉인을 공격하여 프로움을 점령하고 1755년에는 다곤을 탈취하여 랑군(싸움의 끝)이라고 이름하였다. 1757년에는 페구를 함락시켜 몬인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알라웅파야 왕조는 1767년에 태국의 아유티야 왕조를 재차 정복하는 등 강대화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아시아로 진출한 영국과 충돌하게 되어 결국 1885년의 마지막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붕괴5품?미얀마 전토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1866년에 전토를 인도의 일부로 편입, 끝내 왕조는 멸망하였다. 1897년 인도의 한 주로 승격하였지만, 자유는 없고 도리어 인도 자본자가 지주들에게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인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미얀마 통치와 특히 인도인에 의한 경제 지배는 미얀마 인의 반감을 고조시켜 소위 미얀마 민족주의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이 운동 중 아웅산과 우누들이 이끄는 그룹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제2차 대전중 버마는 일본에 점령되었으나, 여러 정치세력은 대동단결하여 반파시스트 인민 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고, 영국군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전쟁 후 아웅산과 우누들은 영국과 교섭 끝에 마침내 1948년 1월 4일 미얀마 연방을 탄생시키고 신 정권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러나 신 정권하에서도 미얀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즉 미얀마 족 중심의 새 정부에 카렌족, 샨 족 등 소수민족이 반발하여 제각기 독립, 자결을 요구하였고, 또 신 정권을 탄생시킨 미얀마인 독립 운동가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신 정권 주류파의 친서방적 노선에 반대하여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내전은 미국, 영국 등의 원조로 미얀마 정부가 정상을 되찾자 한때 소강 상태에 있었으나, 1956년부터 소수 민족과 공산당의 반란이 다시 시작되어 미얀마의 정정은 다시 불안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이끄는 미얀마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 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들을 체포함으로써 군정상태에 들어간다. 네윈 군정은 그 기본 원칙으로<버마식 사회주의>를 도입, 비 미얀마족 자본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국영 경제기구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계획당을 창설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 인도네시아의 역사 : 인도네시아 최초의 왕조는 인도계 이주인들이 중심이 되어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스리비자야(7∼14세기)이다. 이 나라는 특히 강력한 해상 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 자바서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남중국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룰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는 자바의 중앙에 사이렌드라라고 불리었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 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 두 왕통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 제국이 성립하였다. 그 뒤 중심은 수마트라로 옮겨지고, 자바에는 대승 불교가 쇠퇴, 다시 시바 신앙의 힌두 문화가 성행하고 마타람 왕국이 세력을 회복하였다. 사이렌드라조의 변혁은 중부 자바에서 브라만교와 시바 숭배를 부활시켜 마타람 왕국의 발흥을 보았다. 이 왕국은 8세기 중엽부터 11세기초까지 존속하였는데, 처음의 약 1세기는 중부 자바의 북부지역을 지배하면서 남부지역의 사이렌드라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강제 재배 : 바타비아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인도네시아 해역을 지배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처음에는 향료 무역을 위하여 연안 제 도시를 확보할 뿐, 대륙으로의 영토 확장은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말엽 이래 상품 작물의 재배와 공출은 토착민에게 강제할 필요에서 자바 섬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바섬 내에 있어서 직할령을 순차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18세기 중엽에는 반탐·마타람 양 왕국을 보호하에 두어 자바 정복을 완성하였다. 1799년에는 회사가 해산되고 정부의 직할하에 들어갔다. 자바 섬을 식민지로 함에 있어서 네덜란드는 토호의 세력을 이용하였다. 그들은 총독으로부터 토착민 관리로서의 세습적 지위를 받아, 지방 행정을 담당하고 부하 관리를 시켜 재배 공출의 감독과 도망 농민의 감시를 맡도록 하였다. 1830년 총독 팡 뎅 보스는 본국과 동인도의 재정난을 구하기 위하여 강제 재배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커피·감자·남(藍)·담배 등 수출용 작물을 자바 섬의 농민에게 강제 재배토록 하는 제도로서, 이로 인하여 벼농사를 망쳐 농민은 큰 곤궁에 빠지게 되었고, 본국으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받아, 1860년대로부터 19세기 말엽에 걸쳐 폐지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인도네시아는 강제 재배 제도로 집약되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체제의 완성기이며 동시에 무단 정치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자바 전쟁(1825∼1830), 파트니 전쟁(1830∼1839), 바리 전쟁(1846∼1849), 아치에 전쟁(1873∼1914) 등에 의하여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전역을 평정하였다.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한때, 영국에 점령되었으나 전후에 뉴기니(1826), 바리(1848), 보르네오(1849), 수마트라(1872)의 차례로 영토를 확장하여, 마침내 본국 의 60배나 되는 대식민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자바 전쟁, 아치에 전쟁을 정점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각지 민중의 대 네덜란드 저항을 통하여 20세기 이후의 네덜란드에 대한 항쟁의 기반이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의 민족 운동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엽에 걸쳐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자치를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활동은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였다. 수카르노, 하타 등에 의하여 영도된 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제2차 대전 때부터는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의 이틀 뒤인 8월 17일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 하타를 지도자로 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곧이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전후 진주한 영국은 이것을 인정하였으나, 네덜란드 측은 인정하지 않아 4년간에 걸치는 싸움 끝에 1949년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의 연방 공화국이 되고 다음해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확립하여 유엔에도 가맹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을 파기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의 국내는 동요가 끊이지 않고 1958년에는 내전이 전개되면서 군정이 등장하고 소위 교도 민주주의를 내세운 수카르노가 집권하게 되었다.
-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필리핀 연방 : 미국·에스파냐 전쟁 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필리핀은 이에 대해 게릴라 전을 통한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필리핀 경제의 대미 의존도가 높아가는 속에서 미국은 부분적으로 필리핀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1907년에는 국민당이 우세한 가운데 하원이 성립되어 미국 총독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남고, 입법부는 필리핀 인이 차지하였다. 이후 국민당을 대표하는 오스메냐 쿠에존은 일당 지배의 과두 지배 체제를 확립, 완전 독립을 지향하던 중 1935년에, 10년 후에 완전 독립 을 전제로 한 필리핀 점령으로 중단되었지만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 중 비교적 식민국의 통제가 가벼운 속에서 독립을 향한 민족 운동을 계속하였다. ▶ 호세 리살(1861∼96) : 필리핀의 민족 운동가로 에스파냐 압제하의 필리핀 노예 상태를 통분하여, 저술에 의하여 민족적 자 각을 고취하게 하고 독립과 해방의 기운을 촉진시켰다. 그는 1892년 독립 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연맹을 결성하여 대 에스파냐 독립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였으나, 1896년 에스파냐 당국에 의하여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필리핀의 민족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고 당황한 에스파냐는 아기날도와 비아크 나바트 조약을 맺어 타협을 모색하였다.
- 현대 동남 아시아의 서구 침략사 인식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1941년에 "페그디난드 마젤란의 죽음"이라고 새겨진 역사적 기념비가 근처에 세워졌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맥탄(Mactan)의 추장 라풀라푸(Kapulapu)의 군대와 싸움에서 부상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521년 4월 27일 바로 이 지점에서 사망하였다. 쥬안 세바스찬 엘카노(Juan Sebasian Elcano)의 지휘하에 마젤란 선단의 빅토리아 호는 1521년 5월 1일 세부(Cebu)를 출항하여 1522년 9월 6일 산 루카 드 바라메다(San Lucar de Barrameda)에 닻을 내렸다. 그리하여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를 완료하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그때에는 이미 독립된 필리핀 공화국이 "라풀라푸"(Lapulapu)라고 명명된 두번째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장소에서 1521년 4월 27일에 라풀라푸와 그의 병사들은 스페인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그들의 지휘자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을 전사케 하였다. 그리하여 라풀라푸는 유럽의 침략자를 격퇴한 최초의 필리핀 사람이 되었다."
3) 서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
-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적 개혁 : 18세기말의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남하, 오스트리아의 발칸 진출, 영국·프랑스의 동지중해 해역에 대한 경제적 침략 등의 외적 압박과 국내 지주층의 호족화, 발칸 여러 민족의 독립 요구 및 아랍의 민족적 자립 요구 등에 의해 안팎으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18세기말에 셀림 3세는 개혁 정치를 폈으나 지주층과 수구파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19세기초에 마무트 2세도 개혁에 앞장서서 일부의 지주층 세력을 없애고 예니첼리 군단을 해체하였다. 1839년부터 술탄 압둘 메지트는 탄지마트라고 하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전개하였는데 탄지마트는 투르크어로 '개혁', '재구성'이란 뜻이며 1839∼78에 추진된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말한다. 그 주요 내용은 행정 제도와 징세 제도의 개혁, 징병제 실시,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인한 법적 차별의 철폐, 신식 교육제의 도입, 오스만 은행설립 등으로, 행정·사법·군사면에 걸친 광범한 개혁을 통해 서구화를 지향하였으나 보수 세력의 반대와 열강의 간섭이 계속되어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근대화 정책의 성과는 1876년 미드하트 파샤와 나미크 케말의 초안에 의해 헌법이 선포되고 의회가 소집되는 것으로 결실되었지만, 압둘 하미트 2세의 전제화로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의회도 해산되었다. 그는 측근과 비밀 경찰을 이용하여 30년간의 전제 정치를 폈다. 압둘 하미트 2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여러 자유주의 세력 가운데 학생·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과 진보 위원회'는 1908년 살로니카에서 궐기하여 압둘 하미트 2세에게 헌법과 의회의 부활을 승인시켰다. 이 것이 이른바 '청년 투르크 혁명'으로, 이 운동은 탄지마트 말기의 나미크 케말 등에 의한 자유주의 운동의 계보를 잇는 것이었다.
- 사파비 조(Safav ;1502-1763) : 시아 파 제7대 이 맘의 자손인 이스마엘은 서부 이란의 투르코만차이와 호라산의 우즈베크족을 쳐서 전 이란을 통일하고 타브리즈에서 도읍하여 사파비 조를 개창하였다. 그는 아라비아어 풍의 술탄 칭호를 배척하고 페르시아어의 존칭「샤」를 사용하였으며, 또 12 이맘 파(派)를 국교로 정하는 등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난 이란 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시아파를 지도 정신으로 하는 이 왕조는 무굴 왕조나 우즈베크 여러 한국(汗國) 또는 순니 파의 오스만 투르크와 대항하게 되어 투르크의 침입을 받아 카즈윈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압바스 대제(1587∼1629)가 나오자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영국인의 지도로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광대한 실지를 탈환하였다. 또 내정에도 빛나는 치적을 올려 수도 이스파한의 장려함은 유럽 세계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압바스 대제의 사후 다시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고, 또 1722년에는 애프간 족에게 수도를 점령당함으로써 사실상 멸망하였다. 사파비 조 시대에는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가 페르시아의 비단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오스만 제국에 대하여 공동 전선을 펴기 위하여, 나아가서는 인도 이동의 식민지와의 연락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투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 카자르 왕조(Kajar ;1779-1925) : 젠드 왕조를 넘어뜨린 아가 무함마드에 의하여 창시된, 이란에 있어서의 이슬람 왕조로 왕조 초기시대에는 러시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국위를 해외에 떨쳤으나 러시아와의 두번째 싸움에 패하여 치외 법권을 인정하고 나서는(투르크만차이 조약 : 1828), 이것이 열강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란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바브 교나 아프가니에 의한 민족 해방 운동이 일어나, 1906년에는 입헌 군주제가 채택되었다. 그 동안에도 영국·러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은 계속되어 1912년에는 정식으로 영국·러시아의 이란 분할 협정을 승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반(半)식민지화되어 버렸다.
- 수에즈 운하 : 일찍이 1799년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장차 나폴레옹은 장차 인도를 정복할 것을 꿈꾸고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의 개설을 계획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55년이 경과한 1854년 프랑스의 외교관 레셉스는 이집트 태수 사이드 파샤로부터 허가를 받아, 자본금 4천만 달러의 운하 회사를 만들고, 1869년 운하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수에즈 운하이다. 레셉스는 프랑스 정부에 이집트 태수 소유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오히려 영국이 1875년 이를 매수하였다. 그 후 영국은 운하 경비를 구실로 군대를 주둔시켜, 이곳을 식민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운하는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12만 명이라는 이집트인의 희생을 내며(당시 이집트 인구 500만) 건설된 것이므로, 이집트 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 항로를 1만km정도 단축하고 연간 2만 척 이상의 선박을 통과시키는 이 운하는 당초 수에즈 운하 회사의 소유 기간이 1968년이었으나 1959년 국유화됨으로써 이집트인의 것이 되었다.
4. 제국주의와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