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문화사
(하)
김 영 선
1.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성숙과 움직임에 대하여 약술하라.
(1) 명·청 제국의 번영
- 명의 건국 : 원말, 홍건의 일파인 주원장이 있었는데, 양자강 하류의 곡창 지대를 손에 넣어
세력을 얻어 1368년 금릉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명이라 일컬었다. 이가 곧 명 태조이다.
- 군주 독재 체제의 확립 : 태조는 천하를 통일하자 내치에 힘써 명 왕조 270년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육 유(六諭): "부모에게 효도하라(孝順父母).
웃 어른을 섬겨라(尊敬長上).
마을 사람끼리 서로 화목하라. (和睦鄕黨).
자손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라(敎訓子孫).
각자 생업에 만족하라(各安生理).
나쁜 짓을 하지 말지어다(毋作非爲)."
- 이갑제 : 중국 명의 촌락 자치적 행정 제도.
- 부역황책 : 천하의 군현에 명하여 부역황책(賦役黃冊)을 편찬케 하다.
- 어린도책 : 토지를 생선 비늘같이 세분하여
- 대명률 (大明律) : 1397년에 반포되어 명·청 시대의 약 500년
간을 통하여 형률의 근본이 된 것으로 전 30권.
- 명·청대의 사회 지배 계층 :향신(신사) 명·청 사회의 지배층에
는 향신(鄕紳)이라는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신사(紳士)
라고도 하였다. '신(紳)' 이란 관리를 가리키고, '사(士)' 란
학위 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부·주·현의 학생,
과거 1차 시험에 합격한 거인(擧人), 그리고 현직·전직
관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 명의 감합 무역 체제 : 무역 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으므
로 누가 장악하느냐 하는 것이 일본 국내 정국의 동향을
좌우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 조공 무역 : 종주국에게 때를 맞추어 예물을 바치는 일을 조공
이라고 하며, 청 국력의 약화로 그 체제는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 정화(鄭和) : 명 초의 대 항해가로 윈난 성 쿤밍 출신의
이슬람교도이며, 본성은 마(馬)이다. 환관으로서 영락제를
보필하였고, 정난의 변때 공을 세워 정 성(姓)을 하사받았으
며, 태감이 되었다.
- 회관(會館--공소公所) : 동향자 또는 동업자가 사교와 상호
부조의 목적으로 세운 건물로서 공소라고도 한다.
- 명·청대의 사회와 경제 : 사회 경제적 특징은 지주·전호제의 확대와 상품 생산의 현저한 발달이다.
- 중국의 곡창 지대 : 당 중기까지 화북 평야 지대는 중국 농업의
중심지
- 이갑 정역과 잡역 : 국가의 조세와 요역을 이갑 조직을 통해
부과되는데, 요역은 이갑 정역과 잡역으로 크게 나뉜다.
- 일조편법 : 명대 후기부터 청대 초기까지 중국에서 시행된 조세 제도.
- 지정은(地丁銀) 제도 : 인두세의 소멸을 뜻하는 획기적 세제의
개혁이었다.
- 민중의 저항 운동
- 명의 쇠망 : 16세기말에 14대 신종 만력제가 즉위하여 명재상 장거정의 보필을 얻어
토지를 측량하고 호구를 조사하고 세법을 개정하여 일조편법을 천하에 통용
시키고 관의 기강을 바로잡아 이른바 '만력의 치' 라는 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신종은 장거정이 죽은 뒤 정치에 실증을 느껴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가 다시 문란해져 관료들은 동림·비동림의 당쟁만을 일삼게 되었
다. 게다가 일본의 토요토미히데 요시의 침입에 고통을 받고 있던 조선을 돕
기 위하여 50만 대군을 보내어, 이 때문에 거액의 군비를 소비하여 왕실의
사치비와 더불어 재정의 궁핍을 가져왔다. 명은 미봉책으로서 광산을 개발하
고 소금·차 등의 상세를 부과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관리의 부패를 조장한 데
불과하였다. 이 결과 민중의 궁핍은 극도에 하여 유민과 도적이 횡행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17세기 중엽 싼시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포
위하였으므로 숭정제가 목을 매어 자살하고 결국 명은 1644년 망하였다.
- 이 자성의 난 : 명말 싼시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
- 청의 중국지배 : 청은 정복왕조로서 약 3세기에 걸쳐 중국을 지배하였던 만큼 시정은
요·금·원의 그것에 비하여 교묘하였다. 명이 망한 후, 중국 본토에 들어간
여진인은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당시 2억 정도로 추정되는
한족에 대해 기미 정책(굴레를 씌워 탄압하는 정책)을 역으로 이용하여
반청 세력을 무마하고, 3세기에 걸친 장기 지배의 틀을 마련하였다. 중앙의
중요한 관직에 한인·만인을 반반씩 채용하여 모든 일을 그 합의에 의하여
결재하게 하고, 한문화를 존중하여 여러 가지 문화사업을 일으켜 한인을
회유하는가 하면, 만주 풍속인 변발을 강요하여 변발하지 않는 자는 머리를
남겨두지 않도록 하고, 때때로 문자의 옥을 일으켜 청조와 만주인을 비방
멸시하는 문자를 농하는 자를 엄벌에 처하고, 금서령을 내려 많은 책을
금지하고 불살라 한인을 억압하였다.
- 청의 군사제도 -8기병제 : 8기병제는 청조 성립의 기초가 된 군사제인
동시에 지배자인 만주인에 대한 행정 제도이기도 하다
- 청의 문화 정책 : 청조는 중국인에 대하여 만주 풍속인 변발을 강제하고, 문자의 옥을
일으켜 만주인을 비방하는 글을 쓴 사람을 엄벌에 처하고, 금령을 내려 반만
사상을 지닌 책을 몰수, 불사르는 등 중국인을 위압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지식인을 존중하여 관리로 등용하고, 중국 문화를 존중하여 사고전서
의 편찬 등 방대한 문화 사업을 일으켜 중국인을 회유하였다.
- 상업의 발달 : 청대에 양쯔강 하류의 델타 지대는 경제력 면에서 전국에서
으뜸갔을 뿐 아니라, 문화.학술의 중심으로도 크게 번영하였다.
- 청초의 학풍고증학의 전개 : 청초의 학풍은 이른바 '경세 치용의 학' 으로 대표된다.
- 고증학과 공양학 :
- 러시아와 청의 국경 조약 : 러시아가 17세기 이후 시베리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청나라 세력과 충돌하게 되자 국경을 확정지어 갔다. 네르친스크 조약
(1689)과 캬흐타 조약(1727)으로 몽고와 만주의 국경을 정하고,
아이훈 조약(1858) 으로 헤이룽강 이북을, 베이징 조약(1860)으로 연해
주를 얻고, 이리 조약(1881)으로 중앙 아시아 방면에서의 국경을 확정.
-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 (1689) : 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조약.
- 크리스트 교세의 확장 : 명 중기 이후에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 사상과 풍습
을 잘 참작해, 크리스트 교리를 그것과 교묘하게 조화시켰다. 또한 그들은 당시
지식인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기한 서양 학술의 소개에 노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명 나라를 위해 대포. 소총 등 무기의 주조에도 협력하였다.
그렇게 하여 크리스트교의 세력은 점차 신장되어 갔는데, 위의 자료는
숭정(崇禎) 연간(1628∼44년)의 포교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2)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세
- 일본 역사 요약(메이지 유신까지) : 일본은 4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처음에는 여왕 卑彌呼가 거느리는 北九州의 耶馬台國이 유력하였으나, 뒤에는 近畿지방의 호족들이 연합하여 천황씨를 우두머리로 한 야마토(大和)정권이 강해졌다. 야마토 국은 3국에서 건너간 귀화인으로부터 학문과 기술을 깨우쳐 6세기 말에는 쇼토쿠(聖德)태자가 17조의 헌법을 제정하여 귀족간의 싸움을 조정하고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정하는 한편, 불교를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삼아 호류사(法隆寺)를 비롯한 많은 사원을 세웠다. 이리하여 일본 최초의 문화인 아스카(飛鳥) 문화가 꽃피었다. 그 뒤 야마토 국에는 천황(天皇)씨와 소가(蘇我)씨가 서로 패권을 다투었는데, 드디어 천황씨가 소가씨를 억누르고 패권을 쥐어 645년에 문화개신(다이카 개신)을 단행하였다. 이에 의하여, 종래 귀족과 호족의 사유이던 토지·인민이 공지(公地)·공민(公民)으로 서 천황의 지배아래 들어가고, 귀족들은 단순한 천황의 관리가 되어, 여기에 천황 지배의 통일 국가가 이룩되었다. 야마토 국은 8세기초에 서울을 나라(奈良)로 옮기고, 견당사를 당에 보내어 당의 제도·문물을 수입하고, 불교를 보호하여 많은 사원과 당탑을 세워 이른바 헤이안(天平) 문화가 꽃피었다. 일본은 8세기말에 서울을 平城京(奈良)에서 平安京(京都)으로 옮겼으나(794), 토지국유제도(班田制度) 에 기초를 둔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차츰 귀족과 사원의 권력이 커져 광대한 토지와 농노 및 노비를 소유하게 되어, 장원이 발달하였다. 이리하여 토지 국유의 원칙은 깨뜨려지고 전제 군주제도는 무너져, 전국에 많은 장원을 가진 후지와라씨(藤原氏)가 권력을 쥐어 독재 정권을 수립하였다. 중국과 공식적인 내왕은 9세기말에 끊어졌으나, 사무역과 한반도를 통하여 중국 문물이 수입되어 일본의 문화 수준을 향상시켰다. 특히, 불교가 일본의 사상과 학예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한편, 외래 문화를 흡수·소화한 사람들 사이에 독자적인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도 일본 문자 가나(假名)의 고안은 후세의 일본 문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은 환락에만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권력이 약해지고 지방의 질서가 문 란해졌다. 그리하여, 장원내의 소지주들이 장원을 방위하기 위하여 무장하게 되고 여기에 무사계급이 일 어나게 된다. 이들 무사4?차츰 지방의 실권자가 되어 11세기말에는 드디어 무사를 전국적으로 지배하 는 미나모토씨(源氏)와 다이라씨(平氏)의 2대 세력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다이라氏의 세력이 강대하여 귀족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쥐었으나, 12세기말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다이라氏를 타도하고 정 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카마쿠라(鎌倉)에 막부를 열어 전 일본을 사실상 지배하였다(1192). 원씨의 장군들은 주종관계를 맺은 무사와 호족에게 영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차츰 정비되 고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어 고대적인 전제 군주는 자취를 감추고 중세적인 봉건 제도가 형성되었다. 이 정권은 약 1세기 반 동안 유지되어 그 동안에 2회에 걸친 몽고의 내습이 있었으나(1274, 1281), 태풍을 이용하여 이를 물리쳤다. 그러나, 은상(銀賞)을 받지 못한 불평무사와 지방의 중소지주들이 들고 일어나 농민과 결탁하여 카마쿠라 막부를 타도하였다(1333) 그 뒤 정권은 천황에게 돌아가 천황의 지배가 부활 되었으나(건무중흥), 그것도 한때에 불과하였다. 카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공이 컸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천황 정권을 타도하고 1338년 장군이 되어 교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막부를 열어, 무사의 일본 지배가 다시 부활되었고 몽고의 침입이래 끊어졌던 중국과의 교통이 다시 열려 명과의 무역이 활발히 행해져 여러 가지 물자와 문화가 수입되었다. 특히 선종은 장군을 중심으로 한 무사 문화에 영향을 주어 東山(히가시야마)文化가 일어났다. 그러나 중기를 넘어서자 장군의 권력이 약해진 반면에 지방의 대영주, 곧 수호대명(守護大名)의 권력이 강해졌다. 지방의 영주들은 영지를 확대하기 위하여 서로 싸웠는데, 15세기 후반에 이르자 중앙의 장군의 상속전과 얽혀 요닌(應仁)의 亂(1467∼1477)이 되어 무사들이 동서 양군으로 갈라져 10년 동안 싸웠으며 이 대란이 있은 뒤, 무로마치 막부는 유명무실의 존재가 되고 대봉건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전국을 지배코자 싸워 약 100년 동안 전국시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이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나타나, 여러 대명을 제압하여 일본을 다시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정권은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는 지금의 동경인 에도(江戶)에 막부를 열어(1603), 조직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하여, 천하의 대명을 지배하였다. 15세기말에 인5되瀏寬?발견된 뒤 동양에 진출하기 시작한 유럽의 상선은 일본에도 내항하였다. 유럽인이 일본에 온 것은 1543년에 포르투갈의 상선이 일본의 종자도에 표착하여 종자를 전한 것이 처음인데, 6년 뒤인 1549년에는 제주이트교의 간부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er)가 건너와 크리스트교를 전하여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도쿠가와 막부는 유럽과의 통상이 막부의 통일정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1638년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금하는 한편 유럽제국과의 통상을 금하여 쇄국 정책을 강행하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 봉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7세기 중엽에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네덜란드 이외의 유럽 제국과 일체 손을 끊었다. 그러나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을 구하여 광분하고 있던 구미 자본주의의 거센 파도는 일본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러시아가 1792년과 1804년에 들어와 수호 조약의 체결을 요구하고 미국이 1805년 페리(Perry)를 보내어 통상 조약의 체결을 희망하였다. 당시 태평양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미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해에 이르는 기항지로서 일본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어떻든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응하여 이듬해에 미·일 화친 조약을 맺어 두 항구를 열어 약 2세기에 걸쳐 지켜오던 일본의 쇄국은 끝이 났다. 이어서 영국·러시아·네덜란드 사이에도 같은 내용의 조약이 맺어지고 다시 1858년에는 조약이 개정되어 수호통상 조약이 되었다. 그 뒤 10년이 지나 중대한 정치 개혁이 단행되었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明治) 유신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타도되고 천황제 정권이 수립되어 유럽을 본보기로 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관제의 정비, 지방제도의 개혁, 학제의 발포, 국군의 건설, 지조의 개혁, 자본주의의 보호·육성 등 정치·경제·군사에 걸친 급속한 근대화에 의하여 일본은 근대 국가로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봉건 유제가 잔존하고 대외적으로는 치외법권·관세 자주권의 상실 등 불평등 조약을 짊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선진 열강들의 대열 속에 끼이려면 조속한 부국강병을 실현할 수 있는 군국적 관료 국가 체제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근대화가 미성숙하였기 때문에 국내 시장이 비좁아 국외에 시장을 구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일찍부터 대륙 진출을 꾀하여 1871년에 청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1874년에 대만을 정벌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를 확보하고, 조선에 4淪臼?재삼 개국을 요구하였다.
- 전국시대(戰國時代) : 무로마치 시대의 후기에 해당하나 오닌(應仁)의 난부터 1568년 오다 노부가나(織田信長)가 입경할 때까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시대는 중앙 정권으로서의 무로마치 막부가 유명 무실화하고 각지에 할거한 신흥 다이묘가 각기 지방 분권적인 영국(領國)을 형성하여 서로 싸우면서 점차 통일의 방향을 드러내는 전란의 1세기였다. 신흥의 지방 무사들은 중앙 제패를 목적으로 부국 강병책을 쓰며 상쟁하는 한편, 장원 체제를 보존하며 구세력을 최종적으로 몰락시켰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가는 구실을 하였다. 그 결과 소농민 경영의 광범위한 전개가 진행되었고, 도시 및 지방 시장의 광범위한 발생 및 발전을 가져왔으며, 부국 강병책에 의한 광산의 개발, 교통로·역체(驛遞) 제도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국 시대는 파괴와 함께 새로운 시대의 태동의 기운이 급격히 높아졌던 시기로, 문화도 종래의 교토 중심에서부터 지방으로 전파·보급되어 국민적 기반을 넓히는 경향을 나타냈다.
- 바쿠한 체제(幕蕃體制) : 전국기에 묘슈(名主)층의 지배에서 자립하고 있던 농민에 대응해서, 무사영주층은 쇼쿠호(織豊)정권 아래서 계급적 결집을 완수하여, 농공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 새로운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그것은 절대 지배자인 쇼군이 지배하는 중앙의 막부 정부와 다이묘(大名:영주)가 지배하는 지방의 반 자치적인 정부인 번(蕃,한)이 연결된 2중 구조로, 이 두 개의 세력이 일본 사회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막부의 장군(쇼군)은 일본 최대의 봉건 영주일 뿐만 아니라, 다이묘, 국왕을 비롯하여 모든 봉건 영주에 대해서도 명실공히 최고의 지배자로서 군림하였다. 다이묘는 쇼군(장군)으로부터 봉해진 봉토에서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면서 규정 범위 안에서 가신을 가질 권리를 인정받아 번을 구성하였다. 번은 경제면에서 연공미의 환금이나 물자의 확보시 막부가 장악하고 있는 오사카, 에도의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영내 유통용의 화폐를 주조하는 것도 인정되지 않았다. 번의 기구는 막부의 기구를 소규모화한 것이고, 번내의 권력은 다이묘에게 집중되었다. 이렇듯 막부와 여러 번이 전체로서 정치 권력을 구성하고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 체제라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그의 유업을 계승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3년 에도 막부(1063∼1867)를 열어 이 바쿠한 체제를 완성시켰다. 봉건 사회의 기본적인 계급관계는 봉건 영주층과 농민층인데, 일본의 근대 사회는 이 농민층에 대립하는 봉건 영주층이 막번 체제로 굳게 결속 조직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장군과 다이묘가 그들과 인민 사이에 있는 소영주나 중간층을 거의 완전히 해체하여 이들을 토지에서 분리시키고, 성 아래에 거 주시키면서 가신단으로 편성하여 직접 자영 소농민과 상공업자를 지배·수탈하였다. 따라서 막번 체제 는 이전의 어떤 체제보다도 주도 면밀한 체제였다. 1867년 바쿠후의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에 이르러 바쿠한 체제는 해제되었다.
-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 에도 막부는 처음에 외국과 통교를 확대하여 무역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묵인하였으나, 크리스트교 신앙이 민중 사이로 확대되자 농민 통제에 불안을 느끼고 신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1612년부터 막부는 전도 금지, 선교사 추방을 명하였으며, 크리스트교도 박해는 도처에서 행해져 신도는 무시무시한 고문으로 개종을 강요당했다. 17세기초에 28만 명의 크리스트 교도가 개종을 거부하여 살해되었다. 인민이 이 정도로 견고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지배자의 공포를 더욱 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와 중국에게만 나가사키 항에 한하여 무역을 허용하는 쇄국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 겐로쿠 문화의 발전 : 겐로쿠 시대는 에도 막부의 5대 쇼군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집권하였던 시기로 문치주의와 조닌 문화가 특색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막번 체제가 완성되고 쇼군의 권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으며 학문이 크게 장려되었다. 막번 체제의 완성은 소농민의 광범한 자립 성장을 기초로 이루어진 새로운 경작지 개간, 농구·비료의 개선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였다. 따라서 겐로쿠 문화에는 민중의 생활과 감정이 긍정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산업과 도시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막번 체제의 성립과 함께 복잡한 토지 소유 관계가 정리되고 막부와 여러 번이 수입의 증가를 위해 치수와 관개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경지가 증가되었고 농업 경영이 안정되었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수공업과 상업 및 도시도 발달하였다. 도시에는 각종의 상인 중간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고 화폐 및 신용 제도도 발달하였다. 학문 분야에서는 막부와 여러 번에 의해 장려된 유학이 현실 정치와 결부되어 한층 융성해졌고 후에 인문·사회·자연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실증적인 여러 학문이 이 시기에 싹텄다. 예술 분야에서는 경제 발전이 눈부셨던 간사이 지방의 신흥 상인 등을 기초로 하여 현실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추구했던 작품이 창조되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런 겐로쿠 풍의 풍속이 무사 사이에도 유행되어 무가와 조닌이 일체가 된 문화가 꽃피었다. 불교는 크리스트교 금지의 수단으로 데라우케 제도가 채용되면서 막부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나, 종교적 긴장을 상실하고 형식화되어 침체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 봉건 사회의 윤리적 지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유학, 특히 주자학이었다. 문예는 주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의 조닌 사이에 개화하였다. 이 시대에 등장한 소설 형태의 '우케요조시'는 상업적 재질의 자각이나 금전욕, 인간의 애욕 등 조닌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었다. 조닌 문화의 일면은 극단적인 화려함을 내포하고 있어, 복장은 남녀를 불문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고 부의 힘으로 무사를 업신여기게 되었다.
- 산업 근대화의 맹아 : 18세기에 들어선 일본은 상업적 농업의 전개와 전국적 상품 유통의 발달에 따라, 농촌 지대에 면포· 견직물 등의 섬유업을 비롯하여, 제지(製紙)·제도(製陶) 등의 지방 수공업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종래 원료 내지 반제품의 생산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차차 가공·완성 공정도 실시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도시 수공업을 압도하는 세력으로서 우수한 상품을 중앙의 시장에 다량 출품하게 되었다. 따라서 농민 중에서도 영속적으로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는 자도 나타났고, 또한 농민층 분해의 진전에 따라서 대량으로 발생한 영세 농민은 생계 유지를 위해서 이에 종사했다. 이와 같이 부업적인 농촌 공업은 차차 연속적인 생산으로 발전해 갔으나, 봉건제의 규제가 강하여, 직접 생산자인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임금 노동자가 되는 일은 적었다. 이러한 민간 산업과는 별도로 일부 지방의 영주 직영의 직물 공장에서는 매뉴팩쳐 경영이 실시되었고, 또한 바쿠우나 사가·사츠마·쵸슈 등의 한(藩)에서는 군사적 요청에 따른 서양식 공장이 설립되어「근대적」생산 양식의 맹아 단계에 도달했다. 거기에다 구미 자본주의의 자유무역 시장의 일환에 끼어 들게 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개국 상황은 일본의 지식인층으로 하여금 중국 중화관에서 서구 문명국관으로의 그 시점을 전환시켜 넓은 세계에 지식을 찾게 했다. 그러나 이 전환은 서양의 과학, 동양의 예(藝)의 의식을 매개시켰기 때문에, 유교적 합리론에 밑받침된 봉건 의식을 온존시켰다. 그러나 구미의 자유 무역은 일본 사업계에 일대 타격을 가하였고, 특히 견직물 공업지대의 조업을 부진하게 했다. 이 결과 바쿠후 말기에는 재래 산업의 근대적 전개는 오히려 저해되었다.
- 일본의 천황제 확립 : 일본에서의 19세기 후반은 300년에 걸친 바쿠한(幕藩) 체제가 붕괴되고, 메이지 유신을 거쳐, 천황제 국가가 확립되어 가는 시기이다. 개국은 일본 국내의 부르조아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한편, 물가 앙등을 비롯한 경제 혼란은 민중의 생활을 동요시켜, 봉건 지배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고조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기본적으로는 농민의 반봉건 투쟁을 동인으로 하면서, 토막파 지도자들의 지도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적 제도들을 철폐함과 동시에,「부국강병」을 슬로건으로 하여 급격한 「근대화」를 도모했다. 이 정책 실현을 위해서, 지조 개정에 의한 새로운 세제가 확립되었는데, 농민들로부터의 수탈은 과중했었다. 농민은 각지에서 지조개정 반대의 반란을 일으켰고, 한편에서는「문명개화 」에 반발하는 보수적 무사층이 무력 반란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처하여, 메이지 정부의 전제적 성격은 한층 강화됐다. 이리하여 전제 정부에 반대하였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의 확충, 국회 개설을 요구하는 자유민권 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전개 되었다. 정부는 이 민권 운동을 억압하면서, 메이지 헌법을 제정했는데, 초기 의회에서는 역시 민당(民黨) 공세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항쟁은 조약 개정의 성공과 청일 전쟁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 칙어를 정점으로하는「충군애국」의 이데올로기가 성립되어, 학교 교육을 통해서 국민에게 침투되어 소위「신민」이 육성되어 나갔다.
2.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중국의 문호 개방과 근대적 성장
- 중화사상(中華思想)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중국을 세계의 중심 문명 지대라고 생각하고, 주변 제 민족을 야만 미개의 비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중화 사상이 있었다. 그들은 외교·정치·문화·경제 등 제 부분에서 우월감을 나타냈으며, 16세기 이후 중국과 접촉을 갖게 된 유럽 제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무역도 중국 황제의 은혜에 의하여 허락을 받아 행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청은 1757년부터 광저우(廣州)에만 공행(公行)을 두고 정부 통제하의 제한된 독점 무역을 해 왔다. 이는 중화 사상에 기초한 불평등적 무역으로 중국의 외교와 무역의 관행이 되어 왔었다. 여기에서 여러 가지 무역상 불편과 마찰이 발생하였는데, 이후 난징 조약으로 영국과 청의 대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수 천년의 전통을 가진 이 사상이 한번의 전쟁이나 조약으로 바뀔 수는 없는 일로서, 그 후에도 조약의 규정은 황제의 은혜요, 의무가 아니라고 주장하여 영·청간의 분쟁이 재연되었다.
- 영국의 아편 무역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 농민에게 아편 종자를 지급하고 재배·제조·포장을 강제함으로써 중국에 수출하였다. 아편 무역을 통해 영국에서 은이 유출되는 것이 정지되고 오히려 중국에서 은이 유출되기 시작하였다. 아편 무역에서 영국이 획득한 은은 인도 농민에게 아편 생산비로 지불되어 토착 면포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아편 무역은 영국의 산업 자본 축적 및 시장 개척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청에서는 아편 중독자가 급증할 뿐만 아니라 많은 아편을 밀수입하기 위해서 은이 날로 유출되어 은값이 폭등한 결과 은본위제의 경제 상태가 마비되어 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도광제에게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는데, 하나는 민간인에 한하여 아편 흡음을 인정하고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여 관세 수입을 확보하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리든 민간인이든 모두 엄금하고 아편 흡음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강경책을 써서 1839년에 임칙서를 광저우로 보내 외극 상인에게서 아편 상자를 몰수하여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 린 쩌쉬(林則徐:1785-1850) : 청의 정치가로 아편 엄금론자.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치수(治水)의 공을 세워 1837년 호광(湖廣) 총독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아편 수입의 성행으로 은이 대량 유출하여 중국 경제에 타격이 심하고 국민 건강을 해치게 되자, 그는 여러 번 아편 엄금론을 주장하고, 또 관내의 엄금책에 실효를 거두었다. 1838년 흠차 대신(欽差大臣특명 파견 대신)으로 임명되어 광동으로 가서 이듬해 3월까지의 기한부로 영국 상인에게 아편 인도를 명하고 이행되지 않자, 무역 단절·외국 상관의 봉쇄 등 강경 수단을 취하여 이를 굴복시키고, 아편 2만 상자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으며, 각국의 상선에 대하여 아편을 중국에 가져올 때는 화물을 몰수하고 법에 의하여 처벌한다고 하였다. 때마침 영국 선원에 의한 중국인 타살 사건이 일어나 범인 인도에 응하지 않는 영국측에 재차 강경 수단을 취했으나, 11월 3일 영국군과 드디어 전투를 벌여 아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힘을 다해 영국과 싸웠으나, 청조의 대영 유화책에 의하여 좌천되고, 그 후 태평 천국의 난이 일어나 1850년 다시 흠차 대신으로서 평정하러 가는 도중 병사하였다.
- 태평 천국 운동의 의의 : 태평 천국 운동은 아편 전쟁을 전후한 청의 몰락과 열강의 침략, 농민의 궁핍화 등 당시 사회의 제 모순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정치적으로는 태평군의 진압이 한인이 조직한 향용(鄕勇)에 의하였으므로, 청조의 위신이 타락하고 한인의 정치적 진출을 가져와 정권이 이흥장 등으로 넘어갔으며, 태평군의 진압 과정에서 향용이 강화되어 청의 중앙 집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 진압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이 입증되어 서방 문화에 대하여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양무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전화로 유민이 발생하 조세 수입이 격감하고, 군비 팽창에 따른 재정 고갈로 청조가 더욱 재정적 파탄에 직면했다. 또한 서양인은 이 운동을 계기로 해관(海關)을 관리하여, 청은 더욱 열강에 의지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구의 격감, 농촌의 황폐에 따른 곤궁을 초래했다. 태평 천국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중국사 발전을 규정짓는 요인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 태평 천국 운동의 부르주아적 성격 : 조선의 동학농민 운동, 인도의 세포이 반란과 함께 유럽 자본주의에 대항한 아시아 농민의 대표적인 투쟁 중의 하나인 태평 천국 운동은 과거 낙방생 홍수전(洪琇全)의 기이한 꿈에서 비롯됐다. 그 꿈은 자신이 승천하여 금빛 수염의 근엄한 노인에게 진도(眞道)와 검, 권능을 부여받고 중년 남성의 도움을 받아 천상의 요마를 쫓아내고 세계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 광주 거리에서 기독교 안내문을 주워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꿈속의 노인은 여호와, 중년 남성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신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믿고 상제회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청조의 더딘 개방정책에 신물을 내고 있던 열강들은 한때 태평 천국군을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기독교에 대한 상제회의 이단성과 태평 천국군의 공산적 혁명성을 간파하고 청조를 무력 지원했다. 태평 천국 지도부는 토지의 균등 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천조전무 제도(天朝田畝制度)'를 시행하는 등 농민 공산주의적인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부르주아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부르주아적인 개혁의 주창자는 천왕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182 2∼64)이었다. 그의 노선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자본주의적인 개혁 방안이었고 이전의 태평 천국의 평등주의적인 경제 이념과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는 전리(專利 : 사전 이익)를 옹호하여 각 생산 부문의 경쟁적 발전, 노동력의 질적 재고를 촉구했다. 이를 위해 은행, 우편, 새로운 기계 기술의 발명에 대한 전매특허, 철도, 기선, 도로, 광산, 신문 노비 폐지, 고용 노동의 도입 등을 제시했다. 정치 체제에서도 홍인간은 미국식 대통령제 채택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그 밑에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 실무를 맡을 것을 구상했다. 하마터면 장발적(長髮賊)이라 불리던 농민 반란이 아시아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킬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평등 외교를 기반으로 한 무역 경쟁을 통해 부국·강국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같은 개혁 구상은 태평 천국의 진압 후에 청조에 의해 추진되는 양무 운동이나 같은 시대 일본의 유신 세력이 구상했던 근대화 계획과 맞먹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새로운 개혁 노선을 확보한 태평 천국군은 양자강 하류의 경제 중심지와 서양의 근대적인 기선을 획득하기 위해 상해 공격을 감행 했다. 그러나 태평 천국이 그들의 형제라고 여기고 있던 서구 열강은 태평 천국군이 상해로 입성하려 하자 그 동안의 관망 자세를 버리고 상승군(常勝軍)이라는 부대를 조직, 무력 개입에 나섰다. 근대적인 대포 앞에서 태평 천국군은 무력했다. 이홍장의 중국군과 영국 장군 고든의 외인부대의 거센 반격에 태평 천국은 그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천경(지금의 남경)을 내주고 말았다.
- 양무 운동(洋務運動) : 중국의 근대화 운동은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된다. 그 첫 단계가 서양의 기술을 습득하려는 양무 운동이고, 다음이 청조를 그대로 두고 제도 문물을 개혁하려는 변법 운동(變法運動), 그리고 청조를 완전히 타도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혁명 운동을 들 수가 있다. 양무란, 좁은 의미로서는 외교 교섭에 관한 이무(夷務)를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서양의 기술의 배워 근대화한다는 뜻이다. 태평 천국의 난을 평정하는 데 있어서 한인의 활약이 매우 컸으므로 이 때문에 청조는 점차로 한인을 중용하게 되었다. 이들 한인 관료를 중심으로 중국인의 자각이 싹터서 서양 문화를 수입하여 새로운 정치를 확립하고 중국의 부강을 달성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어린 황제인 목종(동치제)이 즉위하여 모친인 서 태후가 섭정을 하고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의 한인 신관료가 정치를 쥐고 혁신 정치를 행하게 되니 이를 동치의 중흥(양무 운동)이라고도 하였다. 양무 운동은 안으로는 태평 천국의 압력과, 밖으로는 서구의 충격에 대한 중국 지배층에 의한 체제의 재정비 작업이라 하겠다. 양무 운동에 있어서 특히 힘을 기울인 것은 군비의 개선과 군사 공장의 설치로 외국 무관을 초청하여 양식의 군사 훈련을 시키고 무기, 탄약, 선박 등의 제조와 석탄의 채굴과 제철업을 일으키면서 중국의 근대 공업이 시작되었다. 또 독일과 미국에 유학생을 보내고, 새로운 기술과 외국어 학습을 위한 학교가 설치되었다. 그 밖에 모직물과 직물 공업을 일으키고 상선 회사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인은 서양 문화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양무 운동은 피상적인 구미의 모방에 만족하였으며, 대부분의 완고한 비양무파 관료들은 보수 적 입장을 내세워 개혁에 반대 의견을 보였고, 결국 청·일 전쟁의 패배로 양무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 톈진 조약(1885. 4. 18)
조선에 있는 중국 군대를 철수하고, 조선에 있는 일본국 영사관을 호위하는 군대를 철수한다. 중국 은 군대를 마산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군대는 인천항에서 철수한다. 2. 장래 조선국의 변란, 중대한 사건이 있으면 양국은 한 나라가 군대를 파견할 경우는 반드시 문서로써 사전 통지한다
☞ 톈진에서 청이 여러 열강과 체결한 조약의 통칭으로 10여 개가 있다. 여기에 제시된 톈진 조약은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와 청 전권 대사 이홍장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군이 조선에 출병하면서 이 조약에 따라 일본에 통보하였고 그로 인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시모노세키 조약(1895. 4. 17)
제1조 청국은 조선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조선의 청국에 대한 공 헌 전례(貢獻典禮) 등은 독립 자유에 손해가 되므로 장래에 이를 모두 폐지해야 한다. 제2조 청국은 다음 토지에 대한 주권 및 해당 지방에 있는 성루, 병기 제조소 및 관이 소유한 물건을 영원히 일본국에 할애한다. 1. 왼쪽의 경계 안에 있는 봉천(선양)성 남부의 땅…… 2. 타이완 및 부속의 여러 섬…… 제4조 청국은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은 2억 냥을 일본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제6조 청국은 본 조약을 비준 교환한 후 속히 전권 위원(全權 委員)을 임명하고, 일본 전권 위원과 통상항해 조약 및 육로 교통 무역에 관한 결정을 체결할 것을 약속한다. 현재 청국과 유럽 각국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조약 장정을 가지고 청·일 양국의 기초로 삼는다.
- 20세기 초 중국 혁명론의 특징
신해 혁명 전후 중국의 혁명가들이 가졌던 혁명에 대한 기본 시각을 알려 주는 자료들이다. 국체와 민생의 변혁, 삼민주의의 실현 등 사회질서의 본질적 혁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들이다. 19세기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겪으면서 진행된 각종 개혁 운동의 실패는 중국인들에게 심각한 좌절을 안겨주었다. 이에 중국인들은 향후 중국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전통적 질서의 전면적 해체를 통한 신질서의 수립이란 혁명론으로 나타났다.
- 군정부 선언(중국 혁명 동맹회 선언)
이제는 국민군이 일어나 군정부를 세워 260년의 양취를 몰아내고 4천 년의 조국을 회복하여 4억인의 복지를 꾀한다.…… 국민 혁명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모두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갖는 것, 즉 모두가 혁명의 책임을 지는 것이고 군정부는 다만 그 중추가 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국민의 책임은 곧 군정부의 책임이요, 군정부의 공적은 곧 국민의 공적이므로 군정부와 국민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책임을 완수할 것이다. 이에 오늘날 혁명의 원칙과 장래 정치의 근본을 천하에 포고한다. (1) 만주족을 몰아낸다. 우리 한인을 지금까지 260년이나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만주 정부를 전복하여 우리 주체를 탈환해야 한다. (2) 중화를 회복한다. 중국은 중국인의 중국이고 중국의 정치는 중국인이 담당한다. 만주족을 몰아낸 뒤 우리 민족의 국가를 회복한다. (3) 민국을 건립한다. 이제는 평민 혁명에 의해 국민 정부를 세운다. 무릇 국민을 평등하고 참정권을 갖는다. (4) 지권을 평준화한다. 문명의 복지는 국민이 평등하게 향유한다. 사회 경제 조직을 개량하고 천하의 땅값을 조사하여 결정해야 한다. ---중국 혁명 동맹회가 1906년에 도쿄에서 강령을 수정하여 1907년 황강 봉기 때 포고한 것
- 삼민주의 : 캉유웨이 등의 개혁과 의화단 운동의 실패, 그리고 광서 변법이라는 청 유지 차원의 소극적인 개혁은 오히려 혁명 사상의 급속한 전파를 초래하였다. 당시 혁명의 주동 세력으로는 쑨 원의 흥중회 이외에 화흥회(華興會) 등이 있었는데 대개는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탄압을 받아 일본에 망명하여 있었다. 그들은 청 타도에는 뜻을 같이 했으나 분산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통일된 이론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 쑨 원은 이들을 합쳐 1905년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하고 강령으로 삼민주의를 채택함으로써 혁명의 기초 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령을 보면, 청 타도는 있으되 외세 배격은 없고, 오히려 외세의 호의 협 조를 희망하고 있다. 그들의 당시 힘으로는 동시에 타도하는 것은 어렵다고 여긴 때문이다. 또한 혁명의 수단으로서 군사력에만 의존했으니 민중을 혁명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청 타도와 공화정 수립은 이루어졌지만 민주주의는 크게 진전될 수 없었다. 신해 혁명으로 청이 멸망하고 중화 민국이 성립되어 민족·민권주의는 성취되었지만, 위안 스카이 등의 군벌이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행하자, 쑨 원을 혁명의 재출발을 생각하여 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공산당과의 합작을 통하여 삼민주의도 발전시켰다.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 한인·몽고인·티베트 인 등 국내 제 민족의 평등과 자 결,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으로 발전하였으며, 민권주의는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한 선 거·파면·창제 등의 권리를 백성이 가지며, 정부의 행정력이 약하지 않도록 치권(治權)의 확립을 지향했고, 민생주의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말하는데,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면으로 기울어진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등으로 발전하였다. 삼민주의는 현재까지도 중국 정치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일본의 개국과 근대적 성장
▶ 중국 중화 사상에 바탕을 둔 중국의 전통적인 조공 무역 체제는 아편 전쟁의 결과 붕괴되고 중국은 안팎으로 시련을 맞게 되었다. 안으로는 태평 천국 운동이 일어나 내란 상태에 빠졌고, 밖으로는 애로 호 사건으로 인해 제2의 아편 전쟁을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전통 체제의 모순은 더욱 노출되었고, 청조는 한인 관료들을 중용하여 양무 운동을 추진함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려 하였다. 중체 서용론(中體西用論)에 입각한 이 운동은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그 한계성이 드러났고, 이에 캉 유웨이 등의 변법 자강 운동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일본의 입헌 정치 제도 도입을 비롯한 전면적인 제도 개혁이라 할 수 있는 이 운동도 보수파의 반격인 무술 정변으로 좌절되었다. 이어서 의화단의 난을 겪은 청조는 헌법 대강을 제정하는 등 국면의 전환을 모색하였으나, 마침내는 쑨 원 등 공화파가 주도하는 신해 혁명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 정치는 미국의 포함 외교로 막을 내리게 되고, 미·일 화친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항과 더불어 외국 상품의 범람으로 큰 타격을 받자 반 막부 운동이 활발해졌다. 이러는 가운데 유력한 번(藩) 세력들에 의해 막부가 타도되고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국왕이 5개조의 어서문을 발표하고 개혁에 착수하였으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이는 전면적인 서구화·근대화 개혁이었으나, 국왕 절대주의를 표방함으로써 국수주의·군국주의로 나타나고 마침내는 제국주의적 침략 국가로 등장하여 주변 국가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안겨주는 불행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 일본의 개항 :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미국·러시아·영국 등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포경선의 급수, 저탄 시설의 필요, 대 중국 무역의 중계 지점으로서 일본의 개항이 절대 필요하였으므로, 1852년 페리(Perry)제독으로 하여금 4척의 군함으로 위협케 하고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에 막부는 다음해에 회답을 주기로 하였다. 1854년 1월 페리는 약속한 회답을 얻고자 7척의 군함을 거느리고 다시 나타났다. 막부는 이에 화친 조약을 맺었고, 이어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조약은 모두 불평등 조약으로서, 항구의 개방, 치외 법권, 최혜국 대우 등이 규정되었다.
◆ 미·일 화친 조약 : 1854년 3월 3일, 일본 가나가와(神奈川)에서 조인된 12개조의 조약. 일본을 개국시킨 조약으로 미국의 강압에 의해 체결되었다. 시모타, 하코다테의 개항과 여행권, 미국 선박에 대한 식량, 연료, 식수 공급, 외교관의 시모타 주재, 최혜국 대우의 승인이 주요 내용이다.
- 삼국 간섭 :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 청·일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종식시키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만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침략 행위에 항의하자(삼국 간섭, 1895) 일본은 삼국의 항의에 굴복하고, 랴오둥 반도를 청국에 반환하였다. 그 때까지 일본은 러시아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3국 간섭으로 중국에 혜택을 준 3국은 중국으로부터 세력권을 확보하는 등 이권을 획득하였다.
-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 : 일본의 자본주의는 방적업 중심의 경공업에서 출발하여 제철업을 기초로 하는 중공업으로 발전하였고, 러·일 전쟁 이후에는 조선·금속·기계 공업 등이 뼈대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산업 혁명은 1887년 전후부터 1907년 전후 사이에 수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산업 혁명의 진행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에 추진된 일련의 개혁이었다. 폐번 치현에 의한 전국의 정치적·행정적 통일은 전국적 시장이 발전할 기반이 되었고, 직업의 자유, 거주의 자유는 인민이 노동자로서 농촌을 떠날 자유를 갖게 했으며, 의무 교육은 근대 산업 노동자를 양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위로부터의 근대화로 풍속조차 정부의 강제, 즉 행정 경찰의 압력에 의하여 변화되었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는 지배자의 요구를 실현시킨 것으로 군사 기술·장비의 근대화가 중심이 되어, 산업·과학·기술 모두 군사적인 것이 우선이었다. 의학도 군사 목적의 외과 의학이 먼저 발달했고, 근대 음악도 군악에서 시작하였으며, 근대 서양 수학의 도입도 육·해군 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의 자본주의를 비약시킨 계기는 청·일 전쟁이었다. 청의 배상금을 기초로 1897년에 화폐법과 금 본위제가 성립하는 등 일본 경제의 기초가 확립되고 1903년에는 회사 숫자나 자본금이 전쟁 전의 3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특히 중 공업은, 전쟁 후 경영의 중심이 군비 확장이 있었기 때문에 군수 공장을 축으로 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 철도는 1892년에 철도 부설법이 공포되자 각지에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조선, 해운업에 대해서도 정부는 많은 지원을 하였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농촌에서는 지조(地租) 개정으로 소작지의 비율이 증가하고 근대 공업의 발전에 따라 도시 인구의 증가와 철도의 보급으로 미곡을 비롯한 농산물의 전 국적 시장이 성립되었다. 지조와 소작료라는 무거운 부담은 소농민을 파탄시켜 농민층을 분해시켰고, 소작 농민층은 자식들을 노동자로 도시에 보냈다.
- 유키치의 '문명 개화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전 세계의 나라들이 서로 나누어져 각각 독립된 형태를 이루면 그에 따라서 인심과 풍속이 달라지고 국체와 정치가 달라진다. 그런데 지금 그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 모조리 유럽을 목표로 하는 것은 적합치 않고, 모름지기 그 쪽의 문명을 채택해서 우리의 인심과 풍속을 살피고, 그 국체에 따라 그 정치를 준수하고,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비로소 적절한 조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이에 답하건대, 외국의 문명을 취해서 미개한 나라에 퍼뜨림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적절하게 취사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만 문명에는 밖으로 드러나는 사물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의 구별이 있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문명은 취하기가 쉽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문명은 찾아내기 어렵다. 나라의 문명화를 꾀함에 있어서는 어려운 쪽을 먼저 하고 쉬운 쪽을 나중에 해야 한다.…… 서양인의 흉내를 내고 귀에 새로운 일, 눈에 새로운 일, 다른 사람과 다른 짓을 하면 모두 문명 개화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문자로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즉 문(文)에 밝다는 뜻으로 널리 배워서 세계의 일들을 바로 알고 그 장점을 취하여,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하는 것이 참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 밖의 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서양 열강의 아시아 진출
- 동인도 회사 : 17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인도, 동남 아시아, 중국, 일본 등과의 원거리 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조직된 유럽 여러 나라의 특허 상인들의 합자 회사 또는 주식 회사이다. 그 중에서도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가장 유명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 때(1600) 유효 기간 15년간의 특허장을 정부로부터 받았으며 1609년 영구적인 유효 특허장을 받아 활약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애초의 목적인 무역 이외에도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군사적인 실권을 정부로부터 위임받아서 식민지 확보와 경영에 주력했다. 여기서 동인도 회사는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했고 화폐가 주조되었으며, 식민지 경영을 위해서 육군과 해군의 군사력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과의 선전 포고와 휴전, 강화의 권한까지를 행사했다. 또 유럽 여러 나라와의 식민지 쟁탈전도 감당했다. 그 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경영, 중국 무역의 독점 등을 수행한 후 1858년 해체되었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이보다 앞서 1800년에 해산했으며,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도 인도에서의 영국과의 쟁탈에 실패한 뒤 해산되었다. 이 밖의 유럽 여러 나라의 것도 19세기에 들어서 모두 해체되었다. 본국 정부의 식민지 직접 경영 또는 본국 정부의 국제적 지위의 변화에 따른 경영 부진 등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 경영은 그야말로 약탈과 살육의 강압적인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유럽에서의 중상주의적 식민지 경영의 상징이기도 했다.
-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침투 : 1600년 동인도 회사는 국왕으로부터 특허장을 획득했는데, 그것은 이 회사 이외의 단체가 동인도 무역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이 회사의 사업은 일종의 중개업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은 등을 수출하고 향료 등을 동인도로부터 수입하며, 수입한 상품을 영국 국내와 유럽 각지에 판매했다. 이 회사의 이외의 상인은 독점 무역에 반대했으나 특권은 왕권을 배경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독점 무역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의회는 일단 신회사를 인가했으나 신회사는 이미 구회사가 동양 각지에서 축적해온 사람들과 접촉하는 경험이나 방식에서 경쟁할 수 없었으므로 양자는 타협하여 1702년 합동 동인도 회사가 되었다.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사망과 함께 무굴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제1차 카나틱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가 인도인 지배층을 끌어들인 전쟁이었으나, 이 전투 중에 유럽인이 지닌 무력의 압도적 힘이 과시된 결과, 동인도 회사는 교역할 때 무력을 사용하면 보다 쉽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757년의 플라시 전투, 1764년의 부크사르 전투에 의해 동인도 회사는 벵골의 징세· 재정 담당 대신의 권한을 획득하여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후 인도 전역에 영토를 확대시켜 나갔다.
- 마라타 동맹(Maratha) : 마라타, 즉 마하라시트라(Maharastra)는 중세기의 인도에서 독립을 보전해 온 빛나는 역사를 가진 종 족이다. 이들은 서고츠 산을 중심으로 서쪽은 봄베이에서 고아에 이르는 길다란 지역을 차지한 종족으로 마라타어를 사용하는 힌두교도 인데, 18세기에 이르러 쇠미해진 무굴 제국에 대신하여 영국 세력에 대항하는 대표적 세력이 되었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뛰어난 지도자 시바지가 군사·행정의 조직을 정비하여 무굴 제국의 남진을 무찌르고 민족적 단결을 강화했다. 또, 이 동맹의 최성기를 가져온 페샤와르의 바지 라오는 마라타의 주권을 장악하여 중부 인도의 대부분, 그리고 탄조르 등 남인도의 각지와 구자라트, 말와 등의 북인도의 각지에 지배권을 확장하여, 유력한 몇 가계가 중심이 되어 푸우나를 근거지로 한 연방 또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에도, 영국의 인도 지배에 있어서의 최대 강적으로서 그들을 괴롭혔는데, 3차에 걸친 마라타 전쟁의 결과로 영국에 병합되었다.
- 마이소르 전쟁(Mysore War) : 18세기 후반에 영국과 마이소르 왕국과의 사이에 4회에 걸쳐서 일어난 전쟁으로 영국의 남인도 장악의 결정적 단계가 되었다. 1761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에서는, 이슬람 교도의 무장 하이다르 알리가 자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이다르 알리는 무교육한 위인이었으나, 정치가로서나 군인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지닌 사람으로 삽시간에 남인도의 서해안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에 남인도 지방에 세력을 부식하고 있던 영국을 자극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1667∼1669), 제2차(1680∼1684) 전쟁은 영국측이 불리하게 끝났는데, 제2차 때에는 프랑스가 마이소르측에 가담함으로써, 유럽에 있어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 다툼이 인도에 파급했다. 영국은 인도에 있어서의 각 번왕국 사이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하이다르 알리의 아들 티푸 술탄(Tipu Sultan)에게 제3차(1789∼1792), 제4 차(1798∼1799)의 전쟁을 도발, 마침내 티푸를 죽이고 남인도에 세력을 확립하였다.
- 시크 전쟁 : 19세기 중엽, 인도 서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시크 교도와 영국군 간에 일어났던 전쟁. 2회에 걸친 이 전쟁의 결과, 영국은 서북 인도의 요지 펀잡 지방을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제1회의 전쟁은 1845∼1846년에 있었고, 발단은 시크 군이 영국군 점령 지구에 공격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항상 펀잡 지방의 병합을 노리던 동인도 회사는, 즉시 선전을 포고하여 응전하였다. 서전은 시크 군의 선전으로 3회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몇몇 시크 영주들의 배반으로 1846년 2월 소브라온의 전투에서 패배, 이 결과 강화 조약이 체결되고 영국은 동부 펀잡 지방을 병합하는 한편 서부 펀잡 지방에서의 군대 주둔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제2회의 전투는 1848∼1849년에 일어났고, 영국의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되자,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반영 무장 봉기로 폭발하게 되어, 진압에 나선 영국군의 고전은 제1회의 그것과 별 차이 없었으나, 또다시 유력한 시크 영주의 배반으로 진압되었다. 이 결과 영국은 1849년 3월 전 펀잡 지방의 병합을 선언하고, 숙원인 인도 정복을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는 서북 국경 지역까지도 장악했고, 인도 최대의 곡창·면작 지대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 세포이의 반란(Sepoy Mutiny ;1857-1859) : 인도의 병사 및 농민에 의해서 일어난 민족적 대 반란. 세포이란 페르시아어로 군대란 뜻이며, 여기에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편성한 이슬람교도, 또는 힌두교도로 구성된 벵골 지방의 동인도 회사 소속의 용병을 가리킨다. 세포이는 이들은 영국인의 인종 차별, 특권의 폐지 등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1848년부터 정복 전쟁과 토후국 병합 정책에 의하여 인도 정복을 거의 완성하였으나, 강경 정책으로 인도 민중의 반영 감정이 고조되자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에게 신식총으로 무장을 시켰다. 신식총의 탄약은 돼지와 소의 기름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교도에게는 돼지가 금기였고, 힌두교도에게는 소가 신성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발을 기화로 항쟁을 전개하여 1857년 5월 수도 델리를 점령하였다. 이는 단순한 군대 반란이 아니라, 인도 각 지방의 토후의 후원, 농민·도시 수공업 자들의 후원을 얻으면서 인도 전역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4개월 뒤에는 전인도의 약 3분의 2가 반란에 휩쓸리었다. 반란은 처음 무굴 제국의 부흥 선언에도 나타난 것처럼 본질적으로 인도 구지배층의 권력 구조와 민중의 소박한 배외 감정에 바탕을 두고 점점 고조되어 갔다. 자민다르(토지 소유권을 갖는 지방 호족) 제도가 행해졌던 북인도의 태반 및 남인도의 일부에서는 농민은 지주나 고리대에 의해 압박되고, 도시 수공업자는 영국 상품과의 경쟁에서 타격이 컸으므로 반항이 끈질겼으나 라이야트바리 제도(농민에게 경작 토지 소유권이 있는 제도)가 행해지고 있던 데칸이나 남인도에서는 농민들이 자작농인데다 지조 경감의 특전을 받았으므로 소극적이었다. 한편 펀잡의 시크교도, 애프간의 이슬람교도, 네팔의 그르카 병들은 적극적으로 영국군을 도왔다. 영국은 본국에서 군대를 증파하여 1859년 4월까지 겨우 주요한 반란을 억압하는 한편 동인도 회사를 폐하고 인도를 본국 정부의 직접 지배하에 두었다. 이 반란에서는 인도의 봉건 세력이 지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통일된 조직을 가지지 못해서 실패하였지만, 인도 역사상 최초의 민족적 단결에 의한 반영 운동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 인도 국민 회의의 조직 : 1857년 5월 10일에 세포이 항쟁은 무굴 제국의 수도인 델리 근교의 군사 기지 미루트에서 시작되어, 다음날 델리로 진격하여 무굴 황제를 옹립하고 그로 하여금 복권을 선언하게 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지탱해 온 용병 군대의 충성심은 봉기를 계기로 한꺼번에 동요하게 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로 각 도시의 민중이 봉기하였고 농촌 지역에서도 영국의 지배는 무너졌다. 그러나 각 정권은 여러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2년여에 걸쳐 전개된 항쟁은 농촌에서 전개된 게릴라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포이 항쟁 이후 전국적인 정치 조직의 필요성이 강하게 인식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885년 12월에 봄베이에서 인도 국민회의의 창립 대회가 열렸다. 이 회의체는 인도의 지도급 인사를 영국측에 끌어들여 협력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주어 반영 운동을 약화시키고 영국의 인도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로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인도측의 중요한 추진자로는 벵골 출신의 스렌드라나트 바네르지아와 봄베이 출신의 다다바이 나오로지 등의 정치가들이 있었고, 영국측에서는 퇴직 관리가 참여하였다. 창립 당시 회의파가 내건 정책은 전체적으로 인도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영국 식민지 당국자와 계속해서 교류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측도 대중의 불만과 지식인의 결합을 저지하기 위해 이 조직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에 들어서자 회의파는 반 영국, 반 제국주의적 방향을 드러내고, 영국으로 가는 국부 유출, 군사 부담의 증대, 거듭되는 기근이 모두 제국주의 지배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영국의 인도 통치가 굳어지고 인도인의 민족 의식이 고조되면서 차츰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1906년에 개최된 캘커다 대회에서는 자치(스와라지), 국산품 애용 (스와데시), 영국 상품 배척, 국민 교육의 4대 강령이 채택되어 추진되었다.
- 인도 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 : 영국의 인도 지배를 통하여 시행된 인도 통치에 관한 법령으로 이 법의 변천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지배와 민족 운동에서 자치 독립에의 과정을 통한 통치 기구의 변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1857년에 세포이 반란이 일어난 직후인 1858년에 새로운 인도 통치법이 시행되었고, 영국 정부 각료에 인도 담당 국무 대신과 인도 참사회·인도성을 두어 총독에 의한 본국 직접 통치 기구를 확립하였으며 통치의 전권은 내각 중의 일원인 인도상(相)에게 위임되었다. 그리하여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는 인도 제국이 성립되었다. 그 뒤 입법부에 소수 인도인의 심의권을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났으나, 1885년 인도 국민회의의 성립을 기하여 인도인 참정운동이 통치법 개정을 위한 추진력이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특히 커어즌 총독 시대에 벵골 분할 법안의 발표를 기하여 최초로 민족 운동의 저항이 있게 되자, 영국은 1909년 모올리·민토우 개혁이라는 참사회 법안을 발표하였고, 다시 1912년의 통치법에 서는 분할이 취소되었다. 그리하여 1915년에도 통치법의 개정이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후인 1919년 에는 몬타규·쳄스퍼드 법에 의하여 직접 선거에 의한 주 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스와라지를 요구하는 인도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통치법 개정 조사를 위하여 1927년 인도에 파견된 사이먼 위원회를 보이 코트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 1935년 8월 버마를 인도로부터 제외한 전문 478조에 달하는 새로운 인도 통치법이 포고되었다. 이 법은, 1)인도상의 권한을 줄여서, 인도 황제에게 직접 이양하되, 인도 총독에 대행하게 하고, 2)왕후국을 포함하는 연방제를 시행하여 왕후국 대표도 포함하는 상하 2원제의 입법부를 만들고, 3)주 자치제를 시행하여 지사의 권한을 크게 인정한다는 등의 근본적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인도인의 반대는 그치지 않았고, 연방제의 실현도 끝내 보지 못하였으며, 1937년의 주 선거에서는 회의파의 대승을 가져왔고,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11주중에 8주의 회의파의 내각이 사직하여 주 자치제도 동요를 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인도 통치법은 1947년 8월 15일 인도 독립법의 시행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2) 인도 및 동남 아시아의 근대화
- 브라모 사마지(Brahma Samaj) : 19세기 이래의 힌두교 개혁파 중의 일파로 1828년 람모한 로이가 캘커타에 설립한 협회를 말한다. 크리스트 교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종래의 힌두교를 일신교적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동시에, 힌두사회의 낡은 체제의 개혁을 꾀하였다. 1833년 로이가 사망한 후 D. 타고르가 뒤를 이어 베다 시대를 이상으로 하는 복고적 성격을 강하게 풍기는 한편, 협회를 조직하였다. 1857년 이래 케샤브 찬드라센이 이 운동에 참가하자 크리스트교적 영향이 짙어지고, 카스트 제도의 폐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중심으로 한 사회 개혁이 제창되었다. 그러나 종래의 타고르 파와는 사상적 대립으로 말미암아 결국 분열되고 말았다. 1878년 이후 새로 조직된 사다란 브라마 사마지 파가 점차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지방 지부의 활발한 운동과 더불어 사회 봉사적인 개혁 사업을 전개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세기 이래 종교·사회면에서의 최초의 개혁 운동으로 힌두 사회 사상 커다란 의의가 있다.
- 영국의 인도 통치의 속성과 반영 운동 : 영국은 식민지 주민의 민족적 종교적 갈등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통치 정책을 구사하였다. 영국의 벵골 분리 정책은 식민지 주민의 종교적 대립을 이용한 민족 이간 정책의 전형적 사례이다. 당시 인도인들은 종교적 차이보다는 민족적 동질성을 강조하여 영국의 이간 정책을 효과적으로 분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인도의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후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를 직할 식민지화 하였다가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지배하는 영령 인도 제국을 만들었다(1877). 영국은 인도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인도 국민회의를 소집하였다.(1885). 초기의 국민회의의 활동은 온건파에 의하여 주도되었으며, 점진적이고 합법적인 영국의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을 인도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영국의 인도 총독 커즌은 1903년 행정적 능률의 개선을 꾀한다고 하며 캘커타를 중심으로 하는 서 벵골과 아샘을 포함한 동 벵골의 두 지역으로 벵골주를 양분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인도인, 특히 벵골인의 반발이 거세었으며, 그들은 이것이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벵골주의 주민들은, 서 벵골인은 힌두 교도이고 동 벵골인은 이슬람교도이지만 동일한 인종으로 동일한 벵골어를 사용함으로써 항상 벵골인으로서의 일체감을 갖고 있었다. 벵골 분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구체적 표현은 인도 물품 구매 운동(Swadeshi) 및 영국 상품 배척 운동으로 나타났다. 과격파가 주도한 1905년 국민회의의 캘커타 대회에서는 벵골 분리가 철회되지 않는 한 영국 제품을 사지 말 것 등이 결의되었다. 1905년 말경에는 이 스와데시 운동이 전 인도에 확산되었다. 1906년에는 전 인도 이슬람교도 연맹이 결성되어 국민회의 노선에 동참하였다. 결국 영국은 벵골 분리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으며, 국민회의 내에서는 다시 온건파가 득세하게 되었 다.(1907) 제1차 세계대전 중 인도는 전후 자치권 획득을 조건으로 영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의 자치(스와라지) 요구를 묵살하고, 로울라트 법을 제정하여 오히려 인도에 대한 지배권을 더 강화하였다. 이에 인도 국민회의에서는 다시 과격파가 세력을 얻어 강력한 반영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즉 간디 등이 주도한 인도 국민회의가 1920년에 무저항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 불복종 운동은 대단히 적극적인 반영 운동이었으며, 이슬람교5도俑?간디와 협력하여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 1929년에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과격과 네루는 자치를 넘어선 완전 독립을 반영 운동의 목표로 천명하였다. 인도 국민회의의 성립 배경이나 그 노선 변화를 통해서 인도 민족 운동의 특성을 파악해 볼 수 있다. 국민회의는 비교적 온건한 투쟁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인들이 자치권 획득을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 단계로 독립 달성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은 뒤에 간디의 자치 운동 노선과 네루의 독립 운동 노선의 차이를 낳게 되었다.
- 회교도 연맹(Muslim League) : 1906년에 발족한 인도 이슬람교도의 정치 단체로「전(全)인도 무슬림 연맹」이라고 칭하였다. 초대 총재는 아가 한으로 이슬람교도의 지위 보호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극히 친영적이었으나 힌두와는 원래부터 대립적이었으며, 또한 중·상류 계급을 주체로 하였다. 터키 문제가 원인이 되어 1912년 이후 점차 반영적 경향을 띠고, 민족 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국민회의 파에 접근, 제1차 세계 대전후 칼리프가 옹호하는「힐라파트 운동」이 크게 일어나면서부터는 국민회의 파의 민족적 저항운동(1919∼1922)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4년이래「힐라파트 운동」도 터키의 술탄제 폐지에 의해 소멸되고, 진나가 연맹의 재건에 힘쓰자 다시 친영적인 색채를 강화하였다. 그 이후는 항상 회의파와 대립하였으며, 1940년에는 파키스탄 분리 계획을 결의함으로써, 1947년 8월 양 자치령 분리 독립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파키스탄 독립 후에도 제1당으로 활약하였고, 1948년 진나를 잃은 후부터는 복잡한 정세의 변천 과 더불어 차차 그 세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동파키스탄에서는 점차 그 지위의 동요를 가져와, 1954년의 주선거에서는 예상 외로 통일 전선 세력에 참패하는 결과가 되었다
- 벵골 분할령 : 1905년 인도 총독 커즌에 의하여 발하여진 벵골 주 분할 정책. 커즌은 제국주의의 추진자로서 벵골 주 내에서 힌두 교도인 벵골 인 지식층에 의한 민족 운동 추진을 억제하기 위하여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인 아샘 지방과 힌두 교도의 벵골 인이 인구의 1/3을 점하고 있는 벵골 주를 분할 통치하고자 하였다. 말하자면 힌두교, 이슬람교 양 교도의 분할 통치인데 그 목적은 단순히 민족 운동의 약화를 도모한 것만이 아니고 힌두, 이슬람 양교도의 대립 경향을 더욱 촉진시키기 위한 책략이었다. 이 때문에 국민회의 파는 캘커타 대회에서 스와라지, 스와데시, 대영 보이코트, 민족 교육의 4대 강령을 내걸고 강력하게 반대하여 반영 기운을 북돋았다. 이에 영국은 한편으로는 운동을 억압하고 한편으로는 타협적 태도를 취하여 결국 1911년에 분할령은 폐지되었다. ▶ 스와라지, 스와데시 : 스와라지는 자기 지배라는 힌두어인데 캘커타 대회에서는 자치 독립을 뜻하게 되었다. 스와데시는 국산 애용이라는 뜻이다. 또 스와데시는 대영 보이코트와 동의어로 해석하여 영국 상품 배척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스와데시의 구체적 표현은 인도 재래의 수공업 생산의 추진 운동으로 나타났다.
- 로울라트 법(Rowlatt Act ;1919.3.) : 제1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정부는 전후에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약속으로, 인도인의 협력을 구했으나, 전후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영국이 1차 대전 후, 인도와의 원래 약속을 무시하고 그들의 식민 정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9년 의회를 통과시킨 반선동법이 로울라트 법이다. 이 법에 의하면 독립 운동 선동자를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으며, 배심원 없이 재판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등 민족 운동 탄압을 내용으로 하였다. 인도인의 민족 운동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이 법을 시행했으나, 저항은 오히려 점점 가열화 되었다. 간디의 유명한 불복종 운동은 이 탄압에 대항하여 개시된 것이다.
- 베트남의 역사
▶ 베트남 문화의 복합성 : 베트남의 국명은 월남(越南)이란 한자어의 베트남어 발음으로, 월남이란 1802년 베트남 최후의 전통왕조인 완조(阮朝 1802∼1945)가 세워지면서 당시 청나라의 승인하에 제정된 국호로부터 유래한다. 한 때 월남의 별칭이었던 안남이란 말은 당이 월남에 설치한 안남도호부에서 유래한다.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 나라, 일본과 더불어 중국 문화권 내지는 한자 문화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 침략을 받았듯이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는 두 나라 모두 남북이 나뉘어져 수십년간 대치 상태에 있다가 1975년 베트남은 통일된다.
- 중국 지배기 : 동남 아시아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1000년 이상이나 중국 문화의 유입을 받아들여 왔다. 월남의 신화 중에는 월남인의 조상이 중국의 염제 신농씨의 3세손에 연원한다는 것이 있다. 비록 중국 문화의 강한 영향을 입고 있지만 그와 동격이라는 자긍의 표현인 것이다.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대략 기원전 219년의 진시황제의 남정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남해(지금의 광둥), 계림(지금의 광시), 그리고 베트남 북부에 상군(象郡) 등을 두었다. 진이 망한 후 지금의 광둥을 도읍지로 하여 남월이라는 나라가 생겨 세력을 떨쳤으나 한 무제가 기원전 111년에 남월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9군(郡)을 두어 교주 자사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한은 많은 중국인 죄수들을 이 지방에 보냈으므로 그 언어나 습관이 날로 그들 사이에 스며들게 되었다. 그런데다 관리를 보내어 적극적으로 교화 정책을 폈기 때문에 화전 농업에 중국식의 농경법이 혼합되고 혼인의 습관 등도 중국식으로 바꾸어졌다. 하지만 외국의 지배가 베트남인의 뜻에 맞지 않아 압정이 계속될 때는 자주 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베트남 국민으로부터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추앙되고 있는 춘착, 춘니 자매의 반란이다. 춘 자매는 교지군 출신이데, 춘착의 남편이 불법으로 중국 관헌에 잡힌 것에 분개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40) 그들의 군세는 급증하여 춘착은 한때 왕을 지칭하기까지 했는데, 한은 마원 장군으로 하여금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 난을 진압하게 했다. 그후에도 베트남에는 평화와 반란이 계속 반복되었다. 한편 저항 운동과는 다른 일면에서 중국 관리들과 접촉하는 소수의 베트남인 사이에 중국 문화가 서서히 전파되었다. 당대에는 한국의 신라, 일본의 헤이안기처럼 적지 않은 당 과거 출신을 배출하였다.
- 독립 왕조기 : 오랜 중국의 직접 통치를 받았고, 또 고도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는 월남 인의 생명력은 마침내 서기 939년에 吳權(고구엔)에 의한 월남 최초의 독립 왕조(吳朝:938∼968)를 건립 하기에 이른다. 이는 중국에서 당이 망하고 5대의 혼란이 계속되던 시기에 해당한바 그 뒤 정조(丁朝 968∼980), (전)여조(黎朝 980∼1010)를 거쳐 이조(李朝 1010∼1225)에 이르러 비로소 장기적인 안정 왕조가 세워졌는데, 과거제, 구품 관인제 등 중국적 통치체제를 받아들인 이조는 그때까지의 월남인의 활동 범위인 북부 월남을 처음으로 넘어서서 남쪽의 참족의 국가 참파(占城의 후신)을 공략하여 지금의 廣平(강빙), 廣治(강찌)성 지방을 영유하기에 이르렀다. 참파는 인종면이나 문화면에서 인도화된 나라로서 중국적 문화에 바탕을 둔 북방의 국가와 달랐다. 한편 참파의 서남방에 위치한 오늘날의 캄보디아, 진랍(眞臘)과의 투쟁도 이 왕조때 전개되었는데 이는 통킹(東京)평야에 근거를 둔 월남인의 남진 정책의 표현이었다. 이 당시의 캄보디아는 그 화려한 앙코르와트의 창건자로 이름난 수우랴바르만 2세 치하였는데 월남은 이조의 신종 때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캄보디아를 침입하였다. 캄보디아는 때로 월남을 공격할 뿐 아니라 남방 참파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사이이기도 하였다. 이조 다음의 찬 왕조가 1225년 성립하면서 북방 몽고의 압력을 받아 여러 번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과감하게 물리쳤을 뿐 아니라, 서쪽의 라오스, 남쪽의 참파를 쳐서 이들에게 조공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패배를 모르던 원의 침입을 맞아 세 차례나 승리를 거둔 것(1257, 1284, 1287)은 지금도 크게 자부하는 통쾌한 승리였다. 월남과 참파를 나누는 해운관(海雲關)은 이 무렵에 월남령으로 귀속되어 앞으로의 월남 세력의 남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월남의 남진이 항상 용이했던 것은 아니고, 진조(陳 朝) 후기에 가면 참파의 북진으로 적지 않은 곤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진조에 이어 단명의 호조(胡朝), 그리고 연이은 명대 중국의 직접 통치를 겪은 뒤, 1427년 후여조(後黎朝)가 성립하거니와, 참파가 다시는 월남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은 후여조의 성종(탕통) 때였다. 월남에 반기를 든 참파의 제 15왕조 2대째 왕인 반 라자드안의 10여만 군이 성종에 의해 격파되고, 수도 비자야(오늘날의 平定) 는 함락되고 f蘭?포로가 되었다. 이어 월남은 참파라는 장애를 넘어서 그 남쪽의 캄보디아 서남령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부 월남에 이웃한 라오스에 대해서도 정복의 손을 뻗어 미얀마 국경 지대까지 진출 하게 되었다. 이렇듯 참파의 사실상 영유와 라오스에의 지배권 확립이 이루어진 여조의 성종대는 우리 나라의 조선 세조·성종대에 해당된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의 월남 남부는 이 무렵에도 완전히 월남화되어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16세기 초엽에 권신 莫氏의 찬탈을 계기로 혼란이 일어나 남북 항쟁의 대립형세가 전개되어, 완씨(阮氏)가 순화(順化)를 배경으로 남방 정권을 이룩하여 남쪽으로 진출함으로써 북방 정권(鄭氏)에 대항할 힘을 기르려 하면서부터 남진의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오늘날의 사이공이 위치하게 된 메콩 델타 유역에 월남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캄보디아는 월남을 종주국으로 삼아 조공을 바치게 된다. 1739년과 1755년에 차례로 완씨는 캄보디아와 교전하여 캄보디아의 해변 영토를 완씨령으로 편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월남이 불과 200여년 전에야 형성단계에 들어간 것과, 남부 월남이 마지막을 월남에 귀속된 지역이라는 사실은 월남의 남북 문제를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전통과 관련하여서 살필 때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산(西山)의 완씨 삼 형제의 반란이 남방의 완씨 영내에서 일어나 이른바 신완(서산당)과 구완간의 싸움이 벌어지자 구완은 조상 전래의 근거지인 순화에서 밀려나와 가정(嘉定, 오늘날의 사이공 근처)으로 쫓겨나면서 서남 해안지대는 결정적으로 월남화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적 쟁란 때문에 문화적 중심이 변경지로 이동함으로써 그 곳의 문화 수준을 높여 전국적인 문화 수준으로 향상시킨 예는 중국사의 경우 동진이나 남송의 남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으며, 현재의 대만도 그 현저한 예라 할 것이다. 그 뒤 가정은 구완 세력을 축출한 서산 삼 형제 중 동종왕 阮文呂(구엔 반 류)의 통치 중심지가 됨으로써 남부 월남의 월남화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다. 비록 서산 당의 지배는 짧았지만, 월남의 북부, 중부, 남부를 포함한 오늘날의 월남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한 것 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서산당을 격파하여 새 왕조를 세운 구완 일족 출신의 완조는 서산당에 의한 통일을 바탕으로 월남 전역을 단일 체제로 통치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1802년)
- 프랑스의 침략과 베트남인의 독립운동 : 인도 지배를 둘러싼 패권 투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한 이후, 프랑스는 극동으로 진출을 꾀하였는데, 19 세기 중엽의 동남 아시아에서는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국가에 비해 프랑스의 정치적 진출이 가장 늦은 상태에 있었다. 애로 호 사건에서 영국과 협조하여 무력 개입에 나섰던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베트남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적 의도를 드러내고 마침내 직접적인 무력 침공 정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월남의 남부는 월남사의 남진 방향의 종점으로, 월남 전통에 가장 늦게 젖음으로써 남부는 북부나 중부에 비해 월남적 전통이 약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남부가 월남 전토중 가장 일찍이 식민지화 되었다는 사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월남 남부를 침략의 첫 희생물로 삼았던 프랑스인의 대월남 진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전국적 통일의 바탕 위에 선 최초의 왕조인 완조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였다. 완조를 창건한 阮福映(구엔 푹 앙), 즉 후일의 嘉隆(갸롱)제가 서산당에 쫓기어 사이암만의 섬들을 전전하였을 때 프랑스 신부 피뇨가 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피뇨가 얻어온 의용병과 무기, 탄약은 완복영의 대서산당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프랑스는 구완에 대한 군사 원조의 대가로 베트남 남부 지방에 대한 할양을 요구하여 1859년 가정성(뒤의 사이공, 현재 호치민)을 점령하여 베트남 지배의 근거지로 삼고 1862년에 구엔 왕조와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여 코친차이나 동부 3성과 프로콘돌 섬의 영유권을 획득하고 '코친차이나' 라 하여 직할 식민지화하였다.(1862) 그리고 뒤이어 1873∼1885년 사이에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를 점령하여 이를 각각 '안남'(1884) 과 '통킹'(1884)으로 명명하고 남부와는 달리 명목상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프랑스가 명실공히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 나라에 대해 중국이 가진 전통적 종주권을 파기시켜야 했다. 그리하여 청·프 전쟁(1884)을 거쳐 1885년에 톈진에서 체결된 수호 통상 화평 조약에 의거, 청국은 통킹에서 철수하고 프랑스의 통킹·안남에 대한 보호권은 승인되었다. 이로써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독점적 지배권이 확립되어, 1887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이 성립되었으며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게 되었다. 프랑스 지배하에서도 완조의 군주는 폐위되지 않고 형식상이나마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1897년 총독이 된 폴 도우메르는 통킹의 부왕을 폐지하고, 베트남에서는 추밀원의 권한을 빼앗고 장관이 통치하게 하였다. 이 때 총독부는 통화의 통일, 소금·술·아편의 전매 제도 실시를 통하여 재정을 확보하고, 그 수익을 철도·운하·항만 등 공공 사업과 문화 사업에 투자하여 통치의 실적을 올렸다. 프랑스 지배하에서 구지배층은 존속하였지만 공유지는 피탈되어 전 경지의 6분의 1 이상이 프랑스인 농원으로 화하였다. 현물세는 현금납이 되고, 알콜이나 아편은 프랑스 상인에 독점되어 폭리의 원천이 되었다. 이리하여 인도차이나는 쌀·고무 등의 식료·원료 산지로 전락하였다. 프랑스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독립운동은 전통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의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전통주의란 1900년 이전까지의 전통적 문신 계층을 중심으로 완조에 대한 충성심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이 저항 운동은 이른바 근왕운동(勤王運動)으로 대표된다. 1900년경부터는 중국어 번역서들을 통해 들어오는 서구의 근대적 사상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 운동이 판 보이 쩌우와 판 쭈 진 등을 중심으 로 전개되었다. 유학자 출신 판 보이 쩌우는 중국의 변법 운동이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은 자강 조국을 만들고자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월남 유신회를 조직하여 초기의 손문과 비슷한 방법으로 독 립 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우선 일본에 접근하여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원조받아 봉기하려 하였다. 그가 단신 일본으로 가서 의지한 사람은 중국의 변법파 망명객 양계초였다. 그의 도움으로 일본의 조야 와 접촉하고 이후 일본을 월남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자하였다. 그가 아무 소개도 없이 양계초를 찾 아가 독립 운동의 뜻을 밝히고자 필사하여 양에게 준 것이 뒤에 양의 알선으로 1905년에 출판된 <월남 망국사>이다. 또한 그는 당시 프랑스가 해외에 정세를 살피거나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꺼려 월남인의 해외 유학을 금지하였는데, 이에 대항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권장하는 동유운동(東遊運動)을 전개하였다. 한편 판 쭈 진은 근대적 사설 학교인 東京(통킹)의숙에 적극적이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일 어난 뒤에는 그에 자극받아 군주제 아닌 공화제 독립을 꾀하여 1912년 월남 광복회를 조직하여 중국 국 민당과 손잡고 광동성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에 종사한다. 월남 광복회보다 더 근대적인 독립 운동 조직으로서는 阮大學(구엔 다이 혹)의 월남 국민당과 월남 공산당이 있다. 중국 국민당을 본따 河內(하노이)에서 결성된 월남 국민당이 1930년초 조급하게 봉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다음, 항불 운동의 주도권은 베트남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 캄보디아의 역사.
▶전근대의 역사 :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에 걸쳐 인도 문명의 영향 아래 부남(扶南) 왕국이 번영하였다. 부남은 해상 무역을 통하여 6세기 후반까지 발전하였으며, 이어서 북방에서 일어난 진랍(眞臘)이 부남을 병합, 인도차이나 반도의 대국으로 등장하였다. 그후 8세기초에는 수진랍과 육진랍으로 분열되었다가 9세기 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다시 통일, 앙코르 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앙코르 왕국을 건설하였다. 앙코르 왕국은 진랍의 전성기로 12세기말까지 번영하였으며, 그 사이 인도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앙코르톰, 앙코르 와트 등 장대한 건축물이 조영되었다. 이 당시 앙코르의 건축과 부조는 크메르 미술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13세기에는 태국인의 압박이 시작되었으며, 14세기에 아유티아 왕조의 세력이 커지자 1434년에는 앙코르를 포기하고 남쪽의 프놈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편 베트남의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참파 왕국을 붕괴시키고 크메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크메르는 태국, 베트남 양 민족의 압박을 받아 쇠퇴해갔다.
- 프랑스의 침략과 캄보디아 :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로 침입한 것은 1840년, 몇 사람의 프랑스인 선교사가 베트남에서 현지인에게 살해된 이후로 1858년의 사이공 점령을 시발로 하여 조금씩 박차를 더해갔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862년이 되자, 코친차이나의 절반을 획득한 프랑스가 다시 북방으로 손을 뻗게 된다.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영유하고 구엔 조를 대신하여 캄푸치아의 종주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사이암을 무시하고 캄푸치아와 경제적인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유리한 지위를 차지해갔다. 이어 1863년에는 노르돔 왕(재위 1859∼1904)과 프랑스·캄푸치아 협정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를 보호령(1864∼1949)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 사이 주민들의 저항으로 반란이 일어난 적도 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프랑스 판무관이 실권을 잡고, 왕은 국가와 종교의 단순한 상징으로만 머물렀다. 1887년, 캄푸치아 는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 라오스 및 중국 국경의 조차지 광저우 만을 포함한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 에 소속되어 식민지 정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받게 된다. 한편 노르돔 왕이 죽은 다음에 그의 동생 시오와트 왕(재위 1904∼1927) 때에는 앙코르의 유적이 타이에서 캄푸치아로 되돌려졌다.
- 독립과 내전 : 1940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 한때 그 지배 밑에 있었으나 45년 3월 노르돔 시아누 국왕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립 운동은 계속되었다. 47년 5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왕국 헌법을 공포, 프랑스도 49년 11월 프랑스 연합내의 한 왕국으로 이를 인정함으로써 한정된 범위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은 54년 7월 제네바에서 인도 차이나 휴전 협정이 성립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독립 후 캄보디아에서는 사실상 시아누크의 지배 체제가 이루어졌다. 시아누크는 55년 4월 왕정 지지자 정당을 소집하여 <사회주의 인민 공동체(상쿰)> 를 결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 같은 해 9월 국민회의 총선거에서 상쿰이 전 의석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시아누크는 61년 태국, 63년 베트남, 65년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 정책으로 기울어졌다. 70년 4월 시아누크의 외유 중에 우익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 론 놀의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으며, 72년 국명을 크메르 공화국으로 개칭하였다. 론놀 정권은 처음부터 불안정하여 반 론놀 기운이 높아지면서 70년 4월경부터 좌파, 중도파에 의한 게릴라 활동이 강화되어 캄보디아는 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망명 중의 시아누크는 70년 5월 캄푸치아 민족통일 전선, 캄푸치아 왕국 민족연합 정부의 성립과 해방군의 창설을 발표하였다. 75년 4월 크메르 루즈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프놈펜을 함락하여 76년 4월 키 우 삼판을 수반으로 하는 <민주 캄푸치아 정부>가 수립되었다. 중국의 지원 아래 민주 캄푸치아를 장악한 폴 포트 정권은 잔혹한 독재 정치를 자행하여 수많은 국민을 강제 수용소에 수용, 기아로 죽어가게 했고 구정권의 군인과 공무원들을 대량 학살하였으며 70년대 후반의 수년 동안 200만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때문에 폴포트 정권은 국제적 지탄과 국민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한편 베 트남의 지원을 받은 헹 삼린은 78년 12월 <캄푸치아 구국 민족통일 전선>을 수립하여 베트남의 준위성국 상태에 있으며, 시아누크공, 손산, 손센 등 3개 파로 이루어진 <민주 캄보디아 연합정부>가 창설된 이래 항전을 계속하고 있다.
- 태국의 역사
▶ 태국의 역사의 시작 : 타이족은 중국 남부로부터 라오스, 태국, 미얀마, 말레이 반도에 걸쳐 광범하게 분포하고 있다. 타이족의 기원은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한족의 남진에 밀려 중국의 양쯔강 남부에서 인도차이나 반도로 이동하여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중국 윈난(雲南)의 남조국(南詔國)은 타이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라는 설이 있으나 반론도 많다. 13세기에 선주민인 몬족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창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태국의 랑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태국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과 라오스와 동부 태국에 걸친 란산(라오족) 등 태국 민족의 소 왕국이 각지에 생겼다. 그 중 랑타이 왕국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으나 태국 역사상 정통왕조는 수코타이 왕조(1257∼1350)이다.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라마 캄헹 왕(재위 1277∼1317)은 영토를 넓히고 타이 문자 표기법을 만들었다. ▶ 수코타이 조의 라마 캄헹 대왕 : 수코타이 왕조의 역사는 제3대 라마 캄헹 대왕의 치세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은 40년 동안 치세하면서 왕국을 강대하게 하여, 몬족의 영토인 미얀마의 마르타반, 또 말레이 반도에까지 지배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여러 외국과 교섭을 활발히 해 그 문물을 수입하고 왕국의 문화 향상에 힘써 타이국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크메르 왕국으로부터 정치, 사법 제도를 도입하여 관제를 정비하고 힌두교, 불교를 비롯하여 많은 문화를 흡수했다. 그 중에서 특히 왕의 이름을 타이국 사상 불후의 것으로 만든 것은 1283년에 이루어진 타이 문자이다. 그때까지 사용되었던 크메르 문자를 개조 창안하여,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타이 문자를 제정하였다. 실론에서 미얀마를 거쳐 소승불교가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다. 아삼을 거쳐 북방 인도와의 교섭도 이루어지고, 그 예술. 문학이나 대승 불교도 수코타이 문화에 흡수되었다. 대왕의 사후에는 왕국의 위세도 쇠퇴하고 얼마 안 가서 각지의 토후가 난립하는 가운데 남방의 아유티아 왕국이 대두하자 패자의 자리를 내놓았다. 8대 180년의 왕조였다. 수코타이 왕조에 이어 아유티아 왕조(1350∼1767)는 위계전 제도를 비롯한 각종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17세기에 아유티아는 무역항으로 번창하여 왕실의 독점 무역 체제를 갖추고 서양 여러 나라 및 중국. 일본 등과 교역하였다. 16세기 후반 미얀마 군에게 점령당했으나 아유티아 왕조의 9ダ?프라야 탁신(鄭昭)이 미얀마를 격파하고 톤 부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톤 부리 왕조는 1대로 끝나고, 그 부하인 차크리 장군이 1782년에 방콕에서 차크리 왕조를 세웠다. 이것이 지금의 차크리(방콕) 왕조이다. ▶ 타이 근대화와 출라롱콘 대왕(재위 1868∼1910) : 타이 근대화의 첫걸음은 출라롱콘 대왕의 치세에서 비롯된다. 출라롱콘 왕 때부터 라마 7세 프라차티폭 왕(재위 1925∼1935)의 1932년의 입헌 혁명의 발발까지가 방콕조의 2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계몽적 전제 왕정으로 모든 타이 근대화의 첫걸음이 시작된다. 라마 5세의 근대적인 모든 개혁은 즉위식에서부터 드러난다. 왕에 대한 포복의 예를 없애는 민주화의 일보를 내딛은 것이다. 더욱이 서구 행정제도를 도입하여 우편, 전신, 철도를 부설하는가 하면 사법, 행정의 모든 조직을 서구식으로 개혁하였다. 한편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국내의 대 쇄신을 단행하려고 하는 왕의 치세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의 유럽 세력 때문에 그 독립이 매우 위태로웠다. 이미 미얀마와 인도차이나의 식민지화에 각각 성공한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은 날로 현저해졌다. 외국에 대한 사이암의 치외 법권의 용인 이후(1885) 타이에 대한 침략 압력은 더욱 무르익었다. 왕은 이런 상황에서 치외법권, 불평등 조약의 철폐에 뜻을 두고 부득이한 경우에 는 영토를 나눠주는 한이 있더라도 국권의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다. 어쨌든 타이는 주변의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독립을 유지했는데, 그것은 미얀마로 진출한 영국과, 인도차이나 공략을 추진하던 프랑스 세력간의 완충국이었다는 사실과 타이의 외교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영국에는 조약을 통해 치외법권을 부여하였고(1855), 말레이 반도 북부를 할양하는 한편, 메남 강 이동의 지역을 프랑스의 세력 범위로 인정하는 등, 종속국으로서의 독립이었다. 그 뒤 왕족 전제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에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 군주국으로 발족하였다.
- 미얀마의 역사 : 미얀마는 중국의 문헌에 옛날부터 표(驃 당), 포감(蒲甘 송), 면(緬 원). 면전(緬甸 명, 청)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이 나라의 역사는 현재 전국의 산야에 정주해 있는 여러 종족의 이동의 역사다. 서력 기원의 시초에는 몬족이 시탕 강 하류 지방에 정착하고, 인도로부터 농업 기술과 힌두교, 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미얀마 최초의 강력한 왕조는 8세기에 이라와디 강 하류의 프롬을 수도로 정했던 표족(驃族)의 왕조인데, 이 왕조는 9세기에 망하고, 표족도 사라졌다. 11세기가 되면서 이라와디 강 중류 유역에 미얀마족 최초의 왕조인 파간 조가 등장한다.(1044∼1287) 이 왕조는 12대 250년간 지속되었는데, 아노라타 왕이 세웠다. 왕은 그때까지 탈라잉에 살고 있던 몬족의 세력을 이라와디 강 유역에서 쫓아낸 뒤 페구를 수도로 하여 버마 중앙평원을 제압하였다. 왕은 동남아시아에서 최초로 코끼리를 이용한 전술을 개발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이 때에 국교를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로 바꾸었는데, 이는 힌두의 몬족에 대항하기 위해 애니미즘이나 힌두교와도 융화되었던 대승불교를 버리고 순수무잡(純粹無雜)을 고집하는 소승불교를 채용한 것이다. 이 파간 조도 1287년 몽고군의 침입에 의해 망하고 그후 200 여년간 혼란기가 계속된다. 제2의 미얀마 왕조를 퉁구 조(1486∼1752)라고 한다. 이 왕조는 2대왕 타빈 시웨티(재위 1531∼1551) 이후 전성기를 이루어 1560년경에는 현재의 미얀마 령을 넘어 태국 북부와 라오스까지도 판도에 넣고 69년에는 태국의 아유티야 왕조까지도 공략하였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외정과 내전으로 피폐했으며, 17세기에는 델타지대의 반란으로 타웅구를 버리고 이라와디 강 중류지역의 아바로 천도하였다가 이곳까지 천도하여온 몬족에게 멸망하였다. 1752년, 아바 왕국의 후계 자를 자칭하고 있던, '장래의 불타' 를 의미하는 이름의 알라웅파야(재위 1752∼1760)가 몬족에 반기를 들고 시웨보에 도읍을 정했다. 이어 몬인, 즉 하머마의 탈라잉인을 공격하여 프로움을 점령하고 1755년에는 다곤을 탈취하여 랑군(싸움의 끝)이라고 이름하였다. 1757년에는 페구를 함락시켜 몬인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알라웅파야 왕조는 1767년에 태국의 아유티야 왕조를 재차 정복하는 등 강대화되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 아시아로 진출한 영국과 충돌하게 되어 결국 1885년의 마지막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붕괴5품?미얀마 전토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1866년에 전토를 인도의 일부로 편입, 끝내 왕조는 멸망하였다. 1897년 인도의 한 주로 승격하였지만, 자유는 없고 도리어 인도 자본자가 지주들에게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인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는 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미얀마 통치와 특히 인도인에 의한 경제 지배는 미얀마 인의 반감을 고조시켜 소위 미얀마 민족주의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이 운동 중 아웅산과 우누들이 이끄는 그룹들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제2차 대전중 버마는 일본에 점령되었으나, 여러 정치세력은 대동단결하여 반파시스트 인민 자유연맹(AFPFL)을 결성하고, 영국군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전쟁 후 아웅산과 우누들은 영국과 교섭 끝에 마침내 1948년 1월 4일 미얀마 연방을 탄생시키고 신 정권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러나 신 정권하에서도 미얀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즉 미얀마 족 중심의 새 정부에 카렌족, 샨 족 등 소수민족이 반발하여 제각기 독립, 자결을 요구하였고, 또 신 정권을 탄생시킨 미얀마인 독립 운동가 중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신 정권 주류파의 친서방적 노선에 반대하여 내전으로 발전하였다. 내전은 미국, 영국 등의 원조로 미얀마 정부가 정상을 되찾자 한때 소강 상태에 있었으나, 1956년부터 소수 민족과 공산당의 반란이 다시 시작되어 미얀마의 정정은 다시 불안해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62년 3월 2일 네윈 장군이 이끄는 미얀마 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 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들을 체포함으로써 군정상태에 들어간다. 네윈 군정은 그 기본 원칙으로<버마식 사회주의>를 도입, 비 미얀마족 자본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국영 경제기구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계획당을 창설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 인도네시아의 역사 : 인도네시아 최초의 왕조는 인도계 이주인들이 중심이 되어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스리비자야(7∼14세기)이다. 이 나라는 특히 강력한 해상 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 자바서부, 말레이 반도의 대부분을 손에 넣었으며 남중국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룰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는 자바의 중앙에 사이렌드라라고 불리었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 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이 두 왕통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 제국이 성립하였다. 그 뒤 중심은 수마트라로 옮겨지고, 자바에는 대승 불교가 쇠퇴, 다시 시바 신앙의 힌두 문화가 성행하고 마타람 왕국이 세력을 회복하였다. 사이렌드라조의 변혁은 중부 자바에서 브라만교와 시바 숭배를 부활시켜 마타람 왕국의 발흥을 보았다. 이 왕국은 8세기 중엽부터 11세기초까지 존속하였는데, 처음의 약 1세기는 중부 자바의 북부지역을 지배하면서 남부지역의 사이렌드라 왕조와 대립하고 있었다.
-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강제 재배 : 바타비아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인도네시아 해역을 지배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처음에는 향료 무역을 위하여 연안 제 도시를 확보할 뿐, 대륙으로의 영토 확장은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말엽 이래 상품 작물의 재배와 공출은 토착민에게 강제할 필요에서 자바 섬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바섬 내에 있어서 직할령을 순차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18세기 중엽에는 반탐·마타람 양 왕국을 보호하에 두어 자바 정복을 완성하였다. 1799년에는 회사가 해산되고 정부의 직할하에 들어갔다. 자바 섬을 식민지로 함에 있어서 네덜란드는 토호의 세력을 이용하였다. 그들은 총독으로부터 토착민 관리로서의 세습적 지위를 받아, 지방 행정을 담당하고 부하 관리를 시켜 재배 공출의 감독과 도망 농민의 감시를 맡도록 하였다. 1830년 총독 팡 뎅 보스는 본국과 동인도의 재정난을 구하기 위하여 강제 재배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커피·감자·남(藍)·담배 등 수출용 작물을 자바 섬의 농민에게 강제 재배토록 하는 제도로서, 이로 인하여 벼농사를 망쳐 농민은 큰 곤궁에 빠지게 되었고, 본국으로부터도 강한 반발을 받아, 1860년대로부터 19세기 말엽에 걸쳐 폐지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인도네시아는 강제 재배 제도로 집약되는 네덜란드의 식민지 체제의 완성기이며 동시에 무단 정치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자바 전쟁(1825∼1830), 파트니 전쟁(1830∼1839), 바리 전쟁(1846∼1849), 아치에 전쟁(1873∼1914) 등에 의하여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전역을 평정하였다. 나폴레옹 전쟁기에는 한때, 영국에 점령되었으나 전후에 뉴기니(1826), 바리(1848), 보르네오(1849), 수마트라(1872)의 차례로 영토를 확장하여, 마침내 본국 의 60배나 되는 대식민지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자바 전쟁, 아치에 전쟁을 정점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각지 민중의 대 네덜란드 저항을 통하여 20세기 이후의 네덜란드에 대한 항쟁의 기반이 이루어졌다. 인도네시아의 민족 운동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엽에 걸쳐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자치를 목표로 하는 적극적인 활동은 역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였다. 수카르노, 하타 등에 의하여 영도된 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제2차 대전 때부터는 다시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 15일의 이틀 뒤인 8월 17일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 하타를 지도자로 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곧이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전후 진주한 영국은 이것을 인정하였으나, 네덜란드 측은 인정하지 않아 4년간에 걸치는 싸움 끝에 1949년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의 연방 공화국이 되고 다음해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확립하여 유엔에도 가맹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6년에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을 파기하고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후의 국내는 동요가 끊이지 않고 1958년에는 내전이 전개되면서 군정이 등장하고 소위 교도 민주주의를 내세운 수카르노가 집권하게 되었다.
-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필리핀 연방 : 미국·에스파냐 전쟁 후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필리핀은 이에 대해 게릴라 전을 통한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필리핀 경제의 대미 의존도가 높아가는 속에서 미국은 부분적으로 필리핀의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1907년에는 국민당이 우세한 가운데 하원이 성립되어 미국 총독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남고, 입법부는 필리핀 인이 차지하였다. 이후 국민당을 대표하는 오스메냐 쿠에존은 일당 지배의 과두 지배 체제를 확립, 완전 독립을 지향하던 중 1935년에, 10년 후에 완전 독립 을 전제로 한 필리핀 점령으로 중단되었지만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 중 비교적 식민국의 통제가 가벼운 속에서 독립을 향한 민족 운동을 계속하였다. ▶ 호세 리살(1861∼96) : 필리핀의 민족 운동가로 에스파냐 압제하의 필리핀 노예 상태를 통분하여, 저술에 의하여 민족적 자 각을 고취하게 하고 독립과 해방의 기운을 촉진시켰다. 그는 1892년 독립 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연맹을 결성하여 대 에스파냐 독립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였으나, 1896년 에스파냐 당국에 의하여 처형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필리핀의 민족 운동은 더욱 격화되었고 당황한 에스파냐는 아기날도와 비아크 나바트 조약을 맺어 타협을 모색하였다.
- 현대 동남 아시아의 서구 침략사 인식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1941년에 "페그디난드 마젤란의 죽음"이라고 새겨진 역사적 기념비가 근처에 세워졌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맥탄(Mactan)의 추장 라풀라푸(Kapulapu)의 군대와 싸움에서 부상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1521년 4월 27일 바로 이 지점에서 사망하였다. 쥬안 세바스찬 엘카노(Juan Sebasian Elcano)의 지휘하에 마젤란 선단의 빅토리아 호는 1521년 5월 1일 세부(Cebu)를 출항하여 1522년 9월 6일 산 루카 드 바라메다(San Lucar de Barrameda)에 닻을 내렸다. 그리하여 최초의 지구 일주 항해를 완료하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그때에는 이미 독립된 필리핀 공화국이 "라풀라푸"(Lapulapu)라고 명명된 두번째의 기념비를 세웠다. 그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장소에서 1521년 4월 27일에 라풀라푸와 그의 병사들은 스페인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그들의 지휘자인 페르디난드 마젤란을 전사케 하였다. 그리하여 라풀라푸는 유럽의 침략자를 격퇴한 최초의 필리핀 사람이 되었다."
3) 서아시아 각국의 근대적 성장
-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근대적 개혁 : 18세기말의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남하, 오스트리아의 발칸 진출, 영국·프랑스의 동지중해 해역에 대한 경제적 침략 등의 외적 압박과 국내 지주층의 호족화, 발칸 여러 민족의 독립 요구 및 아랍의 민족적 자립 요구 등에 의해 안팎으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18세기말에 셀림 3세는 개혁 정치를 폈으나 지주층과 수구파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고, 19세기초에 마무트 2세도 개혁에 앞장서서 일부의 지주층 세력을 없애고 예니첼리 군단을 해체하였다. 1839년부터 술탄 압둘 메지트는 탄지마트라고 하는 일련의 근대화 정책을 전개하였는데 탄지마트는 투르크어로 '개혁', '재구성'이란 뜻이며 1839∼78에 추진된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말한다. 그 주요 내용은 행정 제도와 징세 제도의 개혁, 징병제 실시,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인한 법적 차별의 철폐, 신식 교육제의 도입, 오스만 은행설립 등으로, 행정·사법·군사면에 걸친 광범한 개혁을 통해 서구화를 지향하였으나 보수 세력의 반대와 열강의 간섭이 계속되어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근대화 정책의 성과는 1876년 미드하트 파샤와 나미크 케말의 초안에 의해 헌법이 선포되고 의회가 소집되는 것으로 결실되었지만, 압둘 하미트 2세의 전제화로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의회도 해산되었다. 그는 측근과 비밀 경찰을 이용하여 30년간의 전제 정치를 폈다. 압둘 하미트 2세의 전제 정치에 반대하는 여러 자유주의 세력 가운데 학생·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과 진보 위원회'는 1908년 살로니카에서 궐기하여 압둘 하미트 2세에게 헌법과 의회의 부활을 승인시켰다. 이 것이 이른바 '청년 투르크 혁명'으로, 이 운동은 탄지마트 말기의 나미크 케말 등에 의한 자유주의 운동의 계보를 잇는 것이었다.
- 사파비 조(Safav ;1502-1763) : 시아 파 제7대 이 맘의 자손인 이스마엘은 서부 이란의 투르코만차이와 호라산의 우즈베크족을 쳐서 전 이란을 통일하고 타브리즈에서 도읍하여 사파비 조를 개창하였다. 그는 아라비아어 풍의 술탄 칭호를 배척하고 페르시아어의 존칭「샤」를 사용하였으며, 또 12 이맘 파(派)를 국교로 정하는 등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난 이란 민족주의를 강조하였다. 시아파를 지도 정신으로 하는 이 왕조는 무굴 왕조나 우즈베크 여러 한국(汗國) 또는 순니 파의 오스만 투르크와 대항하게 되어 투르크의 침입을 받아 카즈윈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압바스 대제(1587∼1629)가 나오자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영국인의 지도로 군제 개혁을 단행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광대한 실지를 탈환하였다. 또 내정에도 빛나는 치적을 올려 수도 이스파한의 장려함은 유럽 세계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압바스 대제의 사후 다시 오스만 제국의 침입을 받고, 또 1722년에는 애프간 족에게 수도를 점령당함으로써 사실상 멸망하였다. 사파비 조 시대에는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여러 나라가 페르시아의 비단을 얻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오스만 제국에 대하여 공동 전선을 펴기 위하여, 나아가서는 인도 이동의 식민지와의 연락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투어 우호 관계를 맺었다.
- 카자르 왕조(Kajar ;1779-1925) : 젠드 왕조를 넘어뜨린 아가 무함마드에 의하여 창시된, 이란에 있어서의 이슬람 왕조로 왕조 초기시대에는 러시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국위를 해외에 떨쳤으나 러시아와의 두번째 싸움에 패하여 치외 법권을 인정하고 나서는(투르크만차이 조약 : 1828), 이것이 열강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란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하여 바브 교나 아프가니에 의한 민족 해방 운동이 일어나, 1906년에는 입헌 군주제가 채택되었다. 그 동안에도 영국·러시아의 제국주의 침략은 계속되어 1912년에는 정식으로 영국·러시아의 이란 분할 협정을 승인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반(半)식민지화되어 버렸다.
- 수에즈 운하 : 일찍이 1799년 이집트를 원정한 나폴레옹은 장차 나폴레옹은 장차 인도를 정복할 것을 꿈꾸고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의 개설을 계획하였으나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55년이 경과한 1854년 프랑스의 외교관 레셉스는 이집트 태수 사이드 파샤로부터 허가를 받아, 자본금 4천만 달러의 운하 회사를 만들고, 1869년 운하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수에즈 운하이다. 레셉스는 프랑스 정부에 이집트 태수 소유의 주식을 매입하도록 건의했으나 묵살되었고, 오히려 영국이 1875년 이를 매수하였다. 그 후 영국은 운하 경비를 구실로 군대를 주둔시켜, 이곳을 식민지 거점으로 삼았다. 이 운하는 10여 년의 세월에 걸쳐, 12만 명이라는 이집트인의 희생을 내며(당시 이집트 인구 500만) 건설된 것이므로, 이집트 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도 항로를 1만km정도 단축하고 연간 2만 척 이상의 선박을 통과시키는 이 운하는 당초 수에즈 운하 회사의 소유 기간이 1968년이었으나 1959년 국유화됨으로써 이집트인의 것이 되었다.
4. 제국주의와 제 1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약술하라.
(1)제국주의와 국제 대립
- 제국주의의 형성 : 근대 산업자본은 자유경쟁을 원칙으로 하였다. 자유경쟁은 대기업으로 하여금 소기업을 압도 병합하게 하여, 19세기 후반 특히 1870년대부터 생산의 집중이 행해졌다. 대기업은 상호의 손실을 피하기 위하여 카르텔(Kartell)·트러스트(Trust)·콘쩨른(Konzern) 등의 협정을 맺어 이윤의 확보를 꾀하였다. 카르텔은 기업연합으로서 각 기업이 독립성을 지닌 채 상호 경쟁을 배제하고 시장의 독점을 꾀한 것이며, 트러스트는 기업합동으로서 각 기업이 독립성을 잃고 대기업으로 결합하여 보다 더 강고한 시장의 독점을 꾀한 것이며, 콘쩨른은 자본의 동일관계에 의하여 기업의 결합을 꾀한 것이었다. 이러한 독점체의 형성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공황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생산의 집중은 대규모의 자금의 융통을 필요로 하여 기업가가 은행 융자에 의존하는 정도가 커지게 되어, 이 때까지 산업의 중개자에 불과했던 은행이 중역 등을 보내어 산업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은행은 융자한 여러 기업사이의 경쟁을 조정하는 동시에 기업의 집중을 더욱 더 추진하였으며 은행 자신도 집중이 행해져 한나라의 경제계는 거대한 은행에 의하여 지배되게 되었다. 대 은행과 대 산업의 결합체는 금융자본이라 불리는데, 20세기에 들어가 자본주의 국가들에 연달아 형성되었다. 이리하여 본래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산업 자본을 중핵으로 하던 자본주의는 거대한 독점 자본가의 금융 과두 지배로 변모하여 독점 자본주의(Monopolistic Capitalism)가 성립되었다. 독점 자본은 세계 시장을 분할하고, 또 과잉 축적에서 발생한 자본의 해외 투자가 상품 수출과는 별도로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자 국내의 과잉자본을 수출하여 국외에 투자하게 되 는데 이 경우 토지·원료·노동력이 값싼 아프리카·아시아·태평양 제도 등의 후진지역이 투자 대상이 되었다. 특히 철도에 대한 투자가 성행했는데 철도를 통해 그 지역의 자원과 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투자의 안정성을 얻기 위하여 그 지역을 식민지적으로 영유하는 것이 필요하였으므로 열강 사이에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결과 20세기초에는 후진지역, 특히 아프리카·태평양 제도는 선진 열강들에게 거의 대부분이 분할되어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독립국들도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나라는 선진국의 금융자본의 주입에 의하여 경제적으로 지배되고, 이어서 정치적 지배를 받아 반식민1致?되었는데 이집트·중국 등이 좋은 예이다. 제국주의의 개시는 유럽의 국제 관계에 전환기를 가져왔다. 베를린 회의(1878) 이후의 외교 관계는 유럽 자체의 문제보다도 식민지 시장에 있어서의 대립에 의하여 좌우되는 일이 많아, 열강의 이해의 충돌은 날로 심해졌다. 특히 20세기에 들어가 이미 대부분의 지역이 선진 열강들에게 분할되었기 때문에, 독일·이탈리아·일본 등의 후진 자본주의 국가는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력을 배경으로 선진제국의 세력 범위 내에 파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리하여 열강은 각각 그 지배를 세계적으로 확립코자 획책하여 이른바 세계 정책의 대립을 낳았다. 이는 영·독의 대립을 주축으로 더욱 복잡해져 드디어 발칸 문제를 도화선으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발전하였으며 1차 대전 후에는 국가 기관을 지배하여 파시즘 발생의 모체가 되었다.
- 제 2인터내셔널 : 제 2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은 1889년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적 근거로, 광범위하게 발전해 온 사회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성립하였다. 핵심은 독일 사회 민주당으로 시종 전쟁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반전 투쟁에 대해서, 베벨 안에 레닌과 로자의 수정을 가하여 「전쟁을 혁명으로 전화한다」라는 실천적 지침을 결의했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인식상의 결함을 드러내고, 내부 의견이 통일되지 못했다. 모로코 문제·발칸 전쟁 등 긴장에 대처하기 위하여 열린 바젤 대회는, 슈투트가르트 결의를 재확인했으나 결의 실행의 보증이 없고 혁명적 대회 선언도 성과가 없어,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자, 독일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조국 방위론」에 기울어진 사회주의 각국 세력은 정부를 지지하고, 전시 공채에 찬성하고 말았다. 제 2인터내셔널은 베른시타인 (1850∼1932)을 중심으로 수정주의의 경향이 강해져서, 집중적 통제 기관을 갖추지 못하고, 붕괴된 것이다.
- 바젤 선언 : 1912년, 전쟁이 세계 전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하여, 스위스 바젤(Besel)에서 열린 제 2인터내셔널 임시 대회에서 채택된 선언으로,「프롤레타리아는 자본가의 이윤이나 왕조의 야망을 위하여 서로 싸우는 것을 범죄라고 느끼고 있다」고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를 선언했으나,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프롤레타이아트의 대부분이 연대하기보다는 자기 조국의 방위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 삼국 동맹 :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의 국제적 대립은 1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는데, 3국 동맹과 3국 협상은 그러한 대립 관계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3국 동맹은, 우선 비스마르크가 베를린 조약으로 독일에 대한 러시아의 감정이 악화된 것에 대한 경계로 1879년 오스트리아와 조약을 체결하고, 그 뒤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자 이에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동맹을 제기함으로써 완성되었다.
- 삼국 협상 :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뒤, 빌헬름 2세는 러시아와 맺었던 조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러시아는 독일로부터 떨어져 나와 서로 같은 처지에 있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한편 영국은 빌헬름 2세의 세계 정책으로 독일과 대립하게 되자 프랑스에 접근하여 협상을 맺었으며, 러·일 전쟁으로 극동에서 러시아와의 대립이 해소되자 중동 지역에서의 세력 범위를 설정하는 협약을 맺음으로써, 삼국 동맹에 대항하는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 협상이 결성되었다. 이 협상은 1893년의 러·프 동맹, 1904년의 영·프 협 상, 1907년의 영·러 협상에 의해 자연히 형성된 것이고 처음부터 동맹 조약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 다. 이 협상으로 독일의 우세는 종말을 고하고, 오히려 독일이 이 3국에 의하여 포위되는 체제가 나타났다.
(2) 제 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 발칸 전쟁(Balkan Wars)
▶ 제1차 (1912-1913) : 트리폴리 전쟁(이·터 전쟁)에서 투르크가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기회를 틈타 1912년 3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 사이에 차례로 군사 동맹이 체결됐다. 이것이 발칸 동맹(Balkan League)으로 그 목표는 투르크령 마케도니아에 있었다. 이를 배후에서 조정했던 러시아는 이 동맹을 통해 범 게르만주의를 저지하고 남하 정책을 유리하게 전개하려 했다. 발칸 동맹 4국은 이·터 전쟁중인 1912년 10월 8일 투르크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자 투르크는 이탈리아와 서둘러 강화하고 동맹측과 싸웠으나 패배하여 전투 3개월만에 휴전을 요청하였다. 1913년 1월부터 런던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열강의 중개로 5월에야 비로소 런던 조약을 체결,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투르크는 마케도니아 및 트라키아의 두 지방을 발칸 동맹 제국에 양도하였다.
▶ 제2차 (1913) : 제1차 전쟁의 전리품인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분배를 둘러싸고 전승국간에 분쟁이 일어나, 7월 8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불가리아를 공격, 다시 루마니아와 투르크가 불가리아 공격에 가담했기 때문에 불가리아는 같은 해 8월에 항복하여 부쿠레시티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를 할양하였다. 1913년 9월 부쿠레슈티 강화 조약으로 마케도니아는 여러 나라로 분할됐으며, 알바니아는 독립을 승인 받았다. 세르비아는 아드리아 해의 출구를 획득했으나,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발칸 전쟁은 유럽 열강의 발칸 정책과 근동 정책이 얽혀,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열강의 국제적 긴장을 더욱 조장시켜, 얼마 후 제1차 세계 대전의 계기가 되었다.
- 제1차 세계 대전(First World War ;1914-1918) : 독일과 영국의 제국주의적 대립, 알사스·로렌 문제 등을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적 대립, 발칸에 있어서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와의 민족주의적 항쟁, 발칸민족 문제 등이 1914년 6월의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폭발, 마침내 협상 제국 대 동맹 제국의 대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육전은 서부 전선을 주무대로 하여 여기에 동부 전선, 이탈리아 전선, 발칸 전선이 덧붙고 해상에서는 헬골란트 앞 바다 싸움, 포클랜드 해전, 유틀란트 앞 바다 해전을 통하여 협상측이 우세를 확보했다. 전쟁은 장기 지구전으로 들어갔으나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하자 곧 서부 전선의 균형이 깨어져, 1918년 가을, 동맹 제국은 휴전을 제의하였다. 협상 제국은 독일과 베르사이유 조약, 오스트리아와 생제르맹 조약, 투르크와 세브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은 900만 이상의 인명 피해와 3,300억 달러의 전비를 소비하였으며, 전후 열국은 민족적 주권 국가에 의한 세력 균형에 불안감을 갖게 되어 집단 안전 보장 체제로서의 국제 연맹 설립에 노력했다. 또 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국제 정국에 있어서의 유럽의 우위가 상실됨과 동시에 미국의 발언권과 비중이 증대하였다.
- 1차 세계 대전의 종식 : 1918년 11월, 독일이 휴전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4년간에 걸친 세계 대전은 막을 내렸다. 미국의 참전과 러시아 혁명은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중립을 천명하고 유럽으로부터의 주문으로 자국의 산업을 번영시키는 데 골몰하고 있던 미국은 1915년 영국 상선 루시타니아 호가 독일 잠수함에게 격침 당해 타고 있던 미국인 백여 명이 사망하자,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17년 독일이 무 제한 잠수함 작전을 선언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마침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200만 명의 육군을 서부 전선에 보내는 한편, 막대한 규모의 군수 물자와 재정 원조를 투여,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당내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 종식을 추진했다.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으며, 유럽 노동자 계급의 지원 없이도 러시아에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1918년 3월 3일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독일과 강화하고 연합군을 탈퇴했다. 이에 여유가 생긴 독일은 동부 전선의 병력을 서부로 돌려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오히려 대패하여 후퇴하고 말았다. 동맹국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투르크는 영국에게 메소포타미아를 점령당한 뒤 10월 30일 항복하고, 불가리아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패하여 휴전하고 말았다. 오스트리아는 부다페스트에서혁명 운동이 일어나 황제가 스위스로 망명, 합스부르크 가가 무너지고 11월 3일 항복했다. 독일에서도 혁명 운동이 일어났다. 11월 3일 킬 항의 해군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 베를린의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독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사회 민주당이 이끈 새 정부는 11월 11일 프랑스의 우아즈 강 연변에 있는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 조약에 서명, 마침내 전쟁은 끝이 났다.
5. 양차 대전간의 세계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양차 대전 간의 세계
(1) 베르사유 체제
- 파리 강화 회의와 베르사유 체제 : 1919년 1월 전승국 27개국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 모여 강화 회의를 열었다. 회의의 중심 인물은 미국의 윌슨, 영국의 로이드 조지, 프랑스의 클레망소였으며, 그 중에서도 윌슨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민족자결주의』로 널리 알려진 윌슨의 14개조 원칙은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의 식민지 약소국들에게도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다.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소수 민족들은 독립 국가를 세웠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가 독립하고 세르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등 남슬라브 인의 거주지와 합쳐 세르보 크로아트 슬로벤 왕국이 되었다. 이는 나중에 유고슬라비아로 개칭되었다.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 통치를,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의 헤자즈는 독립을 했다.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우도록 약속받았다. 한편 윌슨은 패전국 독일에게 너무 가혹한 강화 조건을 제시하면 오히려 평화가 깨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독일에 대한 보복을 가볍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입장은 강경했다. 사실 서부 전선의 전투는 거의 대부분 프랑스 영토내에서 이루어져 프랑스의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독일은 자기 나라 땅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것이다. 난항을 거듭한 끝에 파리 강화 회의는 6월 28일 베르사유 궁에서 조인식을 갖게 되었다. 독일의 영토와 해외 식민지는 갈갈이 찢겨 승전국에게 넘어갔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한편 윌슨이 14개조 원칙에서 주장한 『대소 국가의 구별 없이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의 상호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 연맹의 설립』은 이의없이 가결되어 조약의 주요 내용으로 포함되었다. 1920년 11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제1회 국제 연맹 총회가 열렸다. 국제 연맹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 평화 기구였지만, 출발부터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주창자인 미국이 상원의 조약 비준 거부로 참가하지 못했으며, 러시아와 패전국이 제외되었다. 그 뒤 패전국의 가입이 허락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불가리아·독일 등이 차례로 가입했다. 1933년 일본과 독일이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1937년에는 이탈리아가 탈퇴, 이들 파시즘 세력은 또 한 차례의 세계 전쟁을 일으켰다.
- 윌슨 대통령의 14개 조 평화안(Fourteen Points, 1918.1.8) :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의회에 전쟁 목적에 관한 교서를 보내, 이 전쟁이 세계 평화를 수립하기 위해 치뤄지고 있다는 취지를 밝혔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상으로서 위의 14개조 원칙을 제시하였다. 곧 이어 독일은 이 원칙에 따라 휴전하였으며, 이 원칙은 파리 평화 회의에서도 채택되었다. 민족 자결(民族自決), 무병합(無倂合), 무배상(蕪賠償), 승리 없는 평화 등을 근본으로 한다.
- 국제 연맹 :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베르사유 체제하에서 국제 연맹이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국제 평화 유지 기구로서 현실화되었다. 이것은 1918년 초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조 선언 속에서 언급한 제안이 결실이 맺은 것이었다. 1919년 개최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 연맹 조약이 작성되고, 1920년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되면서 국제 연맹도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국제 연맹은 평화의 유지와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전쟁 원인의 제거, 인간 활동의 전반적인 면에서 국제 협조의 조직화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국제 연맹의 본부는 제네바에 두었고 중요 기관은 전 참가국의 대표로 구성된 총회, 상임 이사국 및 비상임 이사국으로 이루어진 이사회, 사무국 등이었다. 그 밖에 자매 기관으로 국제 노동 기구와 상설 국제 사법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연맹 규약에 의하면 가맹국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은 이사회 등의 심사에 의해 처리하며, 규약을 무시하고 무력에 호소한 나라에 대해서는 다른 전 가맹국이 제재 조치를 취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맹국에게 부과된 제재 조치는 경제 제재로 한정되었다. 국제 연맹은 1920년대에, 그리스·이탈리아 사이의 코르프 섬을 에워싼 분쟁이나 터키·이라크 사이, 그리스·불가리아 사이, 폴 드·리투아니아 사이의 국경 분쟁 처리에서 그런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국제 연맹의 활약이 컸던 분야는 국제 협조의 조직화 부분으로 세계 각국은 사회·인도·노동 등의 문제 해결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발족 초기에 독일과 소련의 가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의도 감소되었다. 국제 연맹의 운 영은 영국·프랑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베르사유 체제하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국제 연맹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 군비 축소 회담
▶ 워싱턴 회의(1921∼22) - 미국 대통령 하딩(Harding)이 제창한 군비 축소 회담으로 워싱턴 회의는 1921년에 시작되었으며, 다음 해 2월 6일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당시 군비 축소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1935년까지 유효하였다. 강대국인 영국·미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의 주력함 건조 비율을 조정하고, 영·미·일·프 4개국이 태평양 지역 현상 유지를 약속하였으며,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 주권 존중, 기회 균등의 원칙을 확인하였다. 영·일 동맹을 폐기하는 대신, 이에 대신할 4개국 조약, 9개 국 조약 등이 성립되었으며, 중국에 대해서는 산둥 반도 반환에 관한 중·일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21개조 요구는 폐기되었다. 이 회의 결과 일본의 시베리아 파견군도 철수하게 되었다. ▶ 제네바 회의(1927) - 군축을 위해 제네바에서 회담이 열렸으나, 프·이의 불참가와 미·영·일의 대 립으로 실패하였다. ▶ 런던 회의(1930) - 미국·영국·일본의 대표가 워싱턴 회의에서 다루지 못한 보조함의 비율을 조정 하였다(프랑스·이탈리아는 협정 거부). ▶ 켈로그·브리앙 조약(1928) - 이 조약은 미국 국무 장관 켈로그와 프랑스 외상 브리앙의 제창으로 1928년 8월 파리에서 두 나라를 포함하여 모두 15개국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일명 파리 부전 조약이며, 정식 명칭은「전쟁 포기에 관한 조약」이다. 그 뒤 소련을 비롯해 49개국이 가입했다는 점에서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여 전쟁에 호소하지 않을 것과, 전쟁 포기를 선언한 조약으로 부전 조약으로서는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조약 위반국에 대한 구체적 제재 방법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무력하게 되었다.
(2) 미국과 유럽의 발전
- 스파르타쿠스단의 1월 투쟁 :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사회 민주당 간부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한다는 명분 아래 전쟁을 지지한 평화 정책에 반대했던 리프크네히트·룩셈부르크 들은 군부의 격렬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반전 운동·계급 투쟁·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면서 비합법 운동을 전개했다. 고대 로마 최대의 노예 반란 지도자의 이름을 딴‘스파르타쿠스’라는 비합법 잡지를 발행해, 이들 그룹은‘스파르타쿠스 단’이라고 일컬어 졌다. 1917년에는 비합법 조직인 스파르타쿠스 단(Spartakusbund)을 유지하면서 합법 조직인 독립 사회 민주당에 참가해 1918년 11월의 독립 혁명 때에도 활약했다. 이듬해 1월 5일 베를린 경시 총감이었던 아이히호른(독립 사회 민주당 소속)의 파면을 계기로 20만여 명이 참가해 이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베를린 전역에서 벌였다. 그러나 혁명파가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던 가운데 노스케가 지휘하는 반공 의용군이 철저한 학살을 감행해,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도 학살됐다. 시위는 이른바 참담한‘스파르타쿠스 주간’을 거쳐 진압되고 독일 자본주의 재건의 길이 열렸다. 이 직전의 대회에서‘스파르타쿠스 단’은 이름을 ‘독일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ik) : 1918년 11월 혁명 후 성립되어 1933년 나찌스의 정권 획득까지의 독일 공화국으로 나찌스는 이를 중간 국가라고 불렀다. 11월 혁명으로 독일의 제정은 무너지고 사회 민주당의 에베르트를 중심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사회주의 세력에 의하여 지도된 혁명 정권은 곧 연합국과 휴전하고 1차 대전을 종결시켰다.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하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군부의 힘으로 진압하고 1919년 바이마르에 국민 의회를 소집하여 사회민주당과 중앙당·민주당이 연계하여 바이마르 연합 정부를 수립하여 베르사이유 조약을 승인하였다.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고,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18연방으로 구성되는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집권당인 사회 민주당은 좌익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자본가 계급 및 군부와 타협하였는데 한편 카프 반란 등 우익 세력이 대두하게 되고, 배상 문제로 인한 루우르 점령, 대전 후의 불경기 등으로 공화제는 동요되었다. 그러나 1923년 이후 시트레제만의 지도로 대외적으로는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여 루우르 점령을 해결하고, 영 안과 도오즈 안에 의해 배상금의 경감을 실현하고, 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연합군의 라인란트 철수도 실현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의 극복으로 공화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정권은 바이마르 연합으로부터 우경화하였으며, 국방군이 재편성되고, 1925년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에 취입하였다. 1929년말 세계 공황의 영향으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 실업자가 증대하였다. 이에 대통령 비상 권한으로 긴급 명령을 자주 발포하여 사태 수습을 기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민주주의 체제는 무너지고 나찌스와 공산당이 급격하게 진출, 나찌스는 베르사이유 체제와 의회 정치를 배격하여 강력한 정권을 요망하는 중산 계급의 지지와 공산당의 진출을 두려워하는 자본가 계급의 지지를 받아 1932년의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세력·노동 조합을 탄압, 수권법을 성립시켜 독재제를 수립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은 소멸되었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으로 나찌스는 총통제를 수립하고, 연방 제도도 폐지하여 바이마르 공화 체제는 완전히 없어졌다.
- 바이마르 헌법 : 1918년 11월의 혁명으로 독일의 제정은 무너지고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듬해 선거에 의해 바이마르에서 국민 의회(헌법 제정 의회)가 열리었다. 이 국민 의회는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하고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였다(1919년 8월). 이 바이마르 헌법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 보면, ㉠ 주권 재민 ㉡ 20세 이상 남녀의 보통 선거, ㉢ 국민의 직접 투표에 의한 대통령제(임기 7년), ㉣ 국회의 권한 강화, ㉤ 사회 정책적 조항에 의한 노동자 이익의 옹호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알려졌지만, 비례 대표제에 의한 소수당 분립의 우려와 특히 제 48조의 조항은 1930년 이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독재 정치를 하게 되는 근거를 제공하였으며, 이윽고 나치 독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게 되었다.
- 스탈린(Stalin, Iosif Vissarionovich ;1879-1953) : 소련의 정치가인 동시에 공산주의의 이론적 지도자로 본명은 요셉 비살리오노비치 쥬가시비리. 스탈린은 '강철인간' 이라는 의미로 자신이 직접 붙인 이름이다. 그는 그루지야 인으로, 티플리스의 고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구두 직공이었고 어머니는 농노의 딸이었다. 스탈린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조직하고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 입당하여 활약하다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898년 사회 민주 노동당에 들어가, 티플리스와 바쿠의 노동 운동을 지도하였다. 1905년부터 레닌과 교제하게 되었고, 1910년 당 중앙 위원이 된 후 1912년「프라우다」의 발간을 지도하였다. 2월 혁명(1917)후 정치국원으로서 군사 혁명 위원회를 지도하여 10월 혁명을 수행했고, 혁명 후는 민족 인민 위원으로서 사회주의에 있어서의 민족 문제에 대한 정책에 공헌함과 아울러 차리친 방위에 성공하였으며 1922년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레닌은 당 중앙 위원회의 유서에 "스탈린은 무한의 권력을 수중에 모은 데다가 너무나 조야하고 난폭하다" 고 하며 해임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스탈린에 의해 묵살당하고 말았다. 1924년 레닌의 사후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켜, 5개년 계획으로써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추진시켰으며, 스탈린 헌법을 제정했다. 그 동안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를 숙청하여 독재자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1934년에 시작된 '대숙청' 에서는 100만 명이 처형되고 200만 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독재와 피의 숙청은 그 후의 사회주의 이념과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41년 수상이 되었으며 독·소 전쟁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국가 방위 위원회 의장과 최고 사령관을 겸하고, 영국·미국과 절충하여 소련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전후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 문제'(1950) '소련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 문제'(1952)를 발표하였다. 그가 죽은 후 제20차 당 대회(1956)에서 스탈린 개인 숭배가 비판되어 그의 과격한 숙청, 대전 직전에 있어서의 독일에 대한 정책의 실패, 전후의 농업 정책의 실패, 국제 공산주의 운동, 특히 대 유고슬라비아 정책의 실패 및 전후 세계 경제 분석의 과오 등이 지적되어 비판을 받았다.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
소련의 최고 권력 기관은 소비에트 대회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대회의 회기가 끝나고 나서 그 다음 번 회기까지의 최고 권력 기관은 연방 의회와 민족 의회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동맹 중앙 집행 위원회이다. 9. 소련 소비에트 대회는 선거인 25,000 명에 대의원 1 명의 비율로 선출되는 도시 소비에트 대표와 인구 125,000 명에 대의원 1 명의 비율로 선출되는 농촌 소비에트 대표로 구성된다.
- 제 1차 5개년 계획(1928년 10월∼1933년 9월) : 1928년 국가 계획 위원회에서는 제 1차 5개년 계획(1928년 10월∼1933년 9월)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다음의 결의안은 1929년 4월에 열린 제 16회 당 대회에서 채택된 것이다. 제 1차 5개년 계획은 노동자, 농민에 의한 광범한 사회주의 경쟁으로 1932년 12월 4년 3개월만에 완수되었다.
(3)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 운동
- 21개조 요구 : 중국은 자주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잃고 외세의 간섭과 침략으로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었다. 1차 대전을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유럽의 세력의 개입이 일시 후퇴하자 민족 산업이 성장하고 신해 혁명이래 근대적 교육 기관이 증가하였다. 그 결과 학생과 노동자가 새로운 사회 계층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전승국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여 1915년 1월 21개조 요구를 해왔고 당시에 대총통이었던 위안 스카이도 이것을 한 때 거부했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그 해 5월 9일에는 마침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요구가 부정되자 베이징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21개조 요구의 철폐, 군벌 타도, 반일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5·4 운동은 한국의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를 계기로 각계 각층이 참가하는 반제국주의·반군벌·반봉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5·4 운동은 종래의 혁명 운동이 주로 무장 봉기에 의거했던 것과는 달리 학생·지식층에 의한 계몽 선전 활동을 기반으로 하면서 시위와 파업이라는 대중 행동으로 싸웠다는 점에 특징이 있고, 노동자·상인·학생의 공동 투쟁이 진행되었으며 나아가 전국 조직으로써 전국 각계 연합회가 결성됨으로써 광범위한 민중 운동으로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 신문화 운동(新文化運動) : 신해 혁명의 성과를 앗아가 버린 위안 스카이 등의 정책은 극히 반동적으로 나타나 유교로 상징되는 구도덕·구문화의 부활까지도 꿈꾸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혁신적 지식인은 1915년경부터 활발한 문화 운동을 전개, 유교적 구도덕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과학주의에 입각한 인도적·진보적 문화를 창조하려고 했다. 문학에서 후 스·천 뚜슈·루신·리 따자오 등이 중심이 되어 문학 혁명을 추진하여 유교 ·예교(禮敎)의 비판, 인도주의·문자 개혁·백화 문학 운동 등을 제창하여 학생 청년층의 공감을 얻었 다. 그러나 당시 중국 사정으로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요구, 특히 반제·반봉건적 운동으로 연결 되었다. 베이징에서는「신청년」「신조(新造)」, 상하이에서는「성기 평론」, 후난에서는「저쟝 평론」등의 정기 간행물이 나오는 등 많은 출판물이 나왔다. 또한 루 신의 문학 연구회, 꿔모뤄의 창조사(創造 社) 등의 문화 단체도 활약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뒤에 5·4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 뒤 실용주의의 입장을 위한 후 스 등과 그 외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립하여, 이들 문화 통일 전선은 차츰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 중국 공산당 : 1919년 3월에 설립된 공산주의자의 새로운 국제 조직 코민테른은 1920년의 제2회 대회에서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채택하고 각국에 공산주의적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조직하기 위한 적극적 활동을 개시했다. 1920년 봄 코민테른의 대표 보이턴스키가 중국에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베이징에 파견되어 베이징 대학의 리다자오(李大釣)와 접촉하고 이어 상하이 천두슈(陳獨秀)와 회담했다. 보이턴 스키와 천두슈의 회담 결과 상하이에서는 5월에 천두슈를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공산주의 집단(상하이 공산주의 소조)이 결성되었고,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을 결성하고 공산당 설립을 위한 준비 모임을 개최 하였다. 1921년 7월 공산주의자를 대표하는 13명이 상하이 박문 여학교에 모여 제1회 전국 대표 대회(1전 대회)를 개최했다. 대회 첫날 장국도를 대회 주석에 마오 쩌둥과 주불해를 서기로 선출하고 중국 공산당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 대회에서 임시 중앙국을 설치하여 각 소조와 연락할 것을 결정했고, 당명을 중국 공산당으로 확정지었으며 장국도·천두슈 등을 중앙 위원으로 선출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현을 당의 기본 임무로 하지만, 과도적 단계의 전술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에 참가하여 그것을 지도하고 적극적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원칙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당 강령으로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길을 택한다는 것, 자본의 사유를 폐지하고 전 생산 수단을 몰수하여 사회적 소유로 돌린다는 것 등을 채택하였다. 공산당은 노동자 계급에 대해 계몽 선전 활동을 개시하고 노동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다. 1922년 2전 대회는 처음으로 공산당의 존재를 내외에 밝 혔으며 정식으로 코민테른에 가맹했다. 1923년에는 국민당과의 합작을 결정하였고, 국민당에서도 '연소 (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이 채택되어 1924년에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 졌다.
- 제1차 국공합작 : 1924∼1927년에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간에 맺어진 협력 관계로서 국민 혁명(북벌)의 결정적 기초가 되었다. 국민당도 공산당도 단독으로는 제국주의와 군벌을 타도해 나갈 수 없는 미약한 힘이었기 때문에 반제·반군벌의 목표를 공유하는 양당은 합작할 수 있었다. 공산당은 1922년 전국 대표자 대회에서의 통일 전선 결성의 정책에 따라, 중국 국민당은 1924년의 제1회 전국 대표자 대회의 신강령에 기초하여 1924년 합작이 성립되었다. 공산 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당내 합작 형식이었다. 1924년 국민당의 1회 전국 대표자 대회에서 공산당원은 리 다자오(李大釣) 등 3인이 중앙 집행 위원(정원 23명), 마오 쩌둥 등 7인이 후보 집행 위원(정원 17명)에 선출되었다. 국공합작은 쑨 원의 신 삼민주의를 지도 이론으로 혁명 진영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켜 북벌의 성공을 가져왔지만, 노동 운동·농민 운동은 격화되고 열강(특히 영국과 일본)의 압박도 강하여 민족 자본가 계층을 크게 동요시켰다. 국민당 내부에서도 좌우의 대립이 심해져 가는 속에서 1927년 4월 영국·미국의 협조와 저장 재벌과 연결된 장 제스의 상하이 쿠데타를 계기로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다.
- 상해 쿠데타와 남경 정부 수립 : 중국 국민당이 1924년 제1차 국공합작을 결의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나 손문이 죽은 뒤 1926년 3월 장개석은 중산함장(中山艦長) 등 중앙당원 다수를 광동에서 체포하고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인 1927년 3월에는 북방 군벌군이 국민 혁명군에게 밀려 남경으로 퇴각했을 때 거류민과 영사관을 약탈한 것을 구실로 미국과 영국의 군함이 남경을 폭격했다. 이를 기회로 영·미· 프·일의 5개국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장 제스에게 양자 택일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혁명적이기는 했으나 외국 자본 및 절강 재벌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장개석을 비롯한 반혁명 세력은 이 기회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완전히 분열할 것을 결의했다. 1927년 4월 12일 북벌 도중 상해에서 백숭희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4 . 12사건) 수많은 노동자를 기관총으로 학살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남동부 각지에서 행해졌다. 이 쿠데타로 상해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일소되고 혁명 세력은 탄압을 받았다. 무한으로 근거지를 옮겼던 국민 정부는 이러한 사태에 놀라 장개석을 혁명군 총 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장개석을 비롯한 우파는 왕조명(汪兆銘)을 수반으로 한 무한 정부를 부인하고 4월 18일 남경에 새로운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반공 노선을 분명히 했다.
- 대장정 :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함께 싸워 온 공산당에게 갑자기 총부리를 들이댔다. 지주, 대자본가, 상인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북벌이 성공을 거두자 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파기한 것이다. 이 4·12쿠데타로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살해당하여 1만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그 후 중국 공산당은 정강산(井岡山)을 근거지로 하여 강서 소비에트를 세우고 세력을 키웠다. 장개석은 총 5차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했다. 특히 1933년 10월에 시작된 제5차 토벌전은 막대한 물자를 동원한 봉쇄 작전이었다. 소비에트는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소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국민당 기관지는 강서 소비에트 탈환 과정에서 100만여 명이 살해당하거나 굶어죽었을 거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1934년 1월 서금(瑞金)에서 소집된 제2차 전 중국 소비에트 대회는 혁명의 본거지를 서북 내륙지방으로 퇴각시키는 문제를 검토했고, 드디어 10월 16일 장정을 개시하였다. 장정은 1년 만인 1935년 10월에 끝이 났다. 그 동안 홍군은 중국 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2만 5천 리, 즉 1만 킬로미터를 걸었다. 이는 미국 대륙을 두 번 횡단하는 거리다. 홍군은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그 중 5개 산맥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12개성을 지나면서 62개 도시와 마음을 점령했으며 6개의 이민족 지역을 통과했다. 정강산에서 섬서성 연안까지 장정을 완수한 사람은 열 명중 하나 꼴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35명뿐이었다. 모택동의 두번째 아내 하자정(賀子貞)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완수했다. 그러면서도 홍군은 가는 곳마 다 농민의 지지를 얻어 소비에트를 건설했다. 농민들은 더 이상 홍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는 훗날 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 공산당의 8·1선언(국공합작 제의)
우리 나라 안팎의 노동자·농민·군인·정치가·실업가·학자 및 각 분야의 남녀 동포여!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에 대한 진격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난징의 매국 정부는 한발 한발 투항하여, 우리 북방 각 성도 동북의 4개 성에 이어 사실상 함락되어 버렸다! ……이 몇 년 동안 우리의 국가와 민족은 위기 일발의 갈림길에 처해 있다. 항일하면 살고, 항일하지 않으면 죽는다. 항일 구국은 이미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성한 천직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나라와 민족을 멸망시킬 커다란 재앙이 눈앞에 닥쳐온 이 때,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는 다시 모든 동포들에게 호소하노니, 각 당과 분파 간에 과거와 현재를 통해 정치적 견해나 이해 관계상에 어떠한 차이가 있건 간에, 또 각 분야의 동포 사이에 의견이나 이해 관계상에 어떠한 차이가 있건 간에, 또 각 군대 사이에 과거와 현재을 통해 어떠한 적대 행위가 보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형제는 집안 싸움을 해도, 밖의 멸시는 함께 막는다' 고 하는 진지한 각오를 해야 한다. 우선 모두가 내전을 끝내고, 그럼으로써 모든 국력(인력.물력.재력 등)을 집중하여 신성한 구국 사업을 위해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비에트 정부와 공산당은 특히 반복해서 정중하게 선언한다. 국민당의 군대가 소비에트 지구에 대한 공격을 그치기만 한다면, 또 어떠한 군대라도 대일 항전을 실행하기만 한다면,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그들과 홍군 사이에 아무리 오랜 적대 감정과 원한이 있고 대내 문제에서 서로 아무리 어긋난다고 해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홍군은 즉시 적대 행동을 그치고 그들과 친밀하게 손을 잡고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데 나설 것이다.
- 시안 사건과(1936) 2차 국공 합작 : 국민당 정부의 총통 장개석은 공산당 토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2만 5천리 장정 끝에 섬서성으로 들어간 홍군의 뒤를 쫓아 토벌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1936년 12월 7일, 장개석은 전용기를 타고 섬서성 서안으로 날아갔다. 홍군과의 싸움에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다그치기 위해서였다. 장학량은 만주군벌 장작림의 아들로, 장작림이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뒤부터 국민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해 왔다. 그의 부대는 홍군 토벌을 위해 서안에 주둔중이었으나 양군은 사실상 정전 상태에 있었다. 왜냐하면「중국인끼리 싸워서 안된다」「빼앗긴 국토를 우리 힘으로 되찾자」는 홍군의 항일 통일 전설 전술에 장학량군이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2일 새벽, 장학량의 부대가 장개석이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 바람으로 달아났다. 뒷산 바위 틈에서 그를 찾아낸 수색대 지휘관은 정중하게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저희는 각하를 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에 대항하길 바랄 뿐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8개항으로 된 구국의 요구를 제출,「내전 정지」「거국일치의 항일」을 요구했다. 이것이 유명한 서안 사건이다. 사건이 터지자 즉시 홍군의 군사위 원회 부주석 주은래가 서안으로 날아 왔다. 주은래는 장개석이 황포 군관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정치 주임을 지냈었다. 주은래 또한 국공 합작에 의한 거국적 항일 운동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할 수 없이 이 를 수락하고 남경으로 돌아 왔다. 이로써 10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고 제2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홍군은 적기를 내리고 붉은 별을 떼었으며 장개석 휘하의「제8로군」이 되었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구실로 대대적인 중국 침략을 감행했다.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무려 30만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륙한「남경 대학살」을 자행했다. 그리고 무한·광동·산서에 이르는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점령했다.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은 실로 잔혹했다. 중국인들은 이를 「삼광(三光)작전」이라 불렀다. 즉 죽이고(殺光), 태워버리고(燒光), 약탈(槍光)한다는 뜻이다. 삼광 작전으로 학살당한 중국인 수는 무려 1천 2백만 명을 헤아렸다. 한편 일본은 점령한 남경에 왕조명(汪兆銘)을 중심으로 하는 괴뢰 정부를 세웠다.
- 루꼬우챠오 사건(蘆溝槁事件) : 루꼬우챠오는 베이징 남서 교외에 있는 다리와 같은 이름의 소도시인데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풍대)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연습 중 사병 1명이 실종되자 이를 양국이 공동 조사할 것을 일본이 중국 측에 요구했으나 중국 측은 이에 불응했다. 이에 일본군은 중국 군대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중국군을 불법적으로 공격하여 펑타이에 있는 보병 연대 주력을 즉시 출동시켜 다음날인 8일에는 루꼬우차오를 점령하였다. 중국측의 양보로 사건은 일단 해결될 것 같았으나 일본 군대의 증파와 일본 정부의 강경한 태도로 중·일간의 전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 국민당 전인 대회 - 根絶赤禍案(1937)
중국 국민당은 총리가 남긴 가르침을 받들어 국민 혁명에 힘을 다해 국력을 집중하여 통일의 기초를 다지고,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꾀하는 까닭에 삼민주의를 마음속에 간직해 혁명 방략을 좇아 국민 혁명에 공동 노력을 기울이기를 원하는 자는 우리 쪽으로 끌어들여 동지로 삼아 정성을 다해 받아들였다. 이것은 총리가 흥중회(興中會)·동맹회·중화 혁명당을 창립하고 나서 중국 국민당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정신이다. 그러므로 흥중회·동맹회 시대에는 민족 의식을 갖추고 있는 지사를 입회시켰고, 민국 13년(1924년) 본 당을 재조할 때에는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 케말 파샤와 터키 공화국 : 제1차 대전에서 패배한 터키의 영토를 연합국이 분할하려는 계획이 알려지자 터키인들은 게릴라적 수단을 사용하여 저항 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4월 앙카라에서 '터키 대국민 의회' 가 소집되어 무스타파 케말(케말 파샤)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22년 그리스 군을 격퇴시킨 조국 해방군은 연합국과 무다니아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앙카라 정부를 승인받았다. 이어 앙카라 정부는 1923년 7월에 연합국과 로잔 조약을 체결하여 터키의 독립, 치외 법권의 폐지 등을 승인받았다. 10월에는 공화제를 선언하여 케말 파샤가 초대 대통령에 임명되었다. 케말 파샤는 그리스의 살로니카의 세리의 아들로 태어나 사관 학교를 거쳐 이스탄불의 육군 대학을 졸업하였고, 전제 정치에 반항하여 청년 투르크당의 영수로서 입헌 혁명의 실현에 노력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투르크 국민당을 이끌고 소아시아의 그리스 군을 사카리아 전투에서 격퇴하고 세브르 조약의 개정에 성공하였다. 1923년 공화정의 실시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근대화에 노력하고 터키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이슬람 성법을 폐기하고, 여성들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겨 주었으며 일부 다처제를 금하였고, 부인에게 참정권을 준 것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남성의 투르크 모자 착용 금지, 신비주의 교단의 폐쇄,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헌법조문 삭제, 신라틴문자(투르크어를 로마자로 표기)의 채용 등의 개혁 단행을 단행하였다. 의회에서는 그에게 '아타투르크(투르크의 아버지)' 라는 존칭을 부여하였다. ▶ 로잔 조약 : 1920년 연합국이 오스만 제국과 체결한 세브르 조약은 가혹한 조건을 터키에 부과했으므로 앙카라에 성립된 터키 정부가 세브르 조약의 파기를 선언, 그리스 및 연합국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1923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강화 회의를 열어 체결한 조약
- 아랍 연맹 : 제2차 세계 대전 후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격렬한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거니와 일찌기 대전중 인 1945년 3월 이집트·시리아·레바논·이라크·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예멘의 7국은 아랍주의에 입각하여 유럽 세력을 배제하며 아랍 제국민의 주권 옹호를 목적으로 하는 국제 기구를 결성하였다. 이것이 아랍 연맹이다. 1950년 4월의 아랍 연맹 본회의에서는 공산주의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 집단 방위 조약안을 채택, 그 해 6월 이집트·시리아·레바논·사우디아라비아·에멘이 이 조약에 정식으로 조인하였으며, 후일 이라크·요르단·모로코가 가맹하였다.
6. 전체주의 대두와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세계 경제 공황과 전체 주의의 대두
- 세계 공황(World Depression) : 1929년 가을 미국 월가의 이변(금융 공황)으로 시작되어 전 산업 부문에 파급, 자본주의 제국을 석권한 만성적인 대공황으로 이제까지의 주기적 공황과는 규모와 깊이에 있어서 현저히 상이했다. 1929∼1933년에 유럽과 아메리카 제국의 공업 생산은 50%, 무역은 60%, 국민 소득도 50% 감퇴하여 실업자는 3천만을 돌파했다. 그 원인은 생산과 소비와의 모순, 즉 범람하는 미국 제품을 소화할 만한 구매력의 결핍에 있었다. ㉠ 유럽은 대전의 황폐에서 충분히 부흥하지 못하여, 달러의 도입으로 대략 재건을 달성할 수 있었으나, 그 반면 미국의 경기 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 미국 내부에서는 독점 자본에 의해 고도로 통제된 공업 제품 가격 때문에 농민 및 일반 노동자의 구매력이 저하되면서 이 모순이 신용의 팽창으로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신용이 원활성을 잃게 되자, 내부적 모순이 곧바로 노정되어 월가의 금융 공황은 필연적으로 전면 공황이 되었으며, 나아가 세계 공황으로 발전했다. 공황의 결과, 세계 경제는 몰락하고 블럭 경제가 지배적이 되었으며, 이것이 또 국내의 불황을 배가시킴과 아울러 이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내셔널리즘의 절대 우세 아래 관세전과 식민지 경쟁이 전개되어,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유발하게 되었다. ---세계 경제 공황의 원인 : 공황의 원인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불균형으로 범람하는 미국 제품을 소화할 만한 구매력이 부족하였 기 때문이다. 유럽은 대전의 황폐에서 미국의 원조로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미국의 경기 변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미국 내부에서는 독점 자본에 의해 고도로 통제된 공업 제품 가격 때문에 농 민과 일반 노동자의 구매력이 저하되면서도, 이것이 신용의 팽창으로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신용이 원활성을 잃자 주가의 폭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뉴딜 정책 : 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실시한 경제 정책으로서 구제, 부흥,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주요 골자는 연방정부가 농업 생산을 조절하고, 과잉 농산물을 매입하여 농산물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농업 조정법(AAA), 산업 생산의 조절과 실업자 구제를 위한 산업 부흥법, 실업자 구제와 공공 사업을 위한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TVA),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 교섭권 등을 인정한 노동자 보호법(Wagner Act), 노인연금, 실업자 수당, 주 정부의 구제 활동에 대한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 등을 규정한 사회 보장법(Social Security Act) 등이었다. 뉴딜 정책은 단순한 임기 응변의 공황 타개책이 아니라 획기적인 경제 정책의 전환으로, 그 목표는 구제(Relief) 부흥(Recovery) 개혁 (Reform)에 두어져 3R 정책이라고도 한다. 19세기의 자유 방임주의를 탈피하여 부의 분배에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복지 국가를 지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NIRA(전국 산업 부흥법) : 농업 조정법(The Agricultural Adjustment Act; A.A.A.)과 더불어 뉴딜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전국 산업 부흥법이다. 이것은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여 산업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그것으로써 모든 산업 구조를 연방 정부가 통제하려고 한 것으로, 기업간 자유 경쟁을 금지하고 업종별로 생산과 가격을 규제하고 기업의 회복과 산업 합리화를 추진하려는 것으로 자본가의 규제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규제까지도 꾀하여 각 산업 부문마다 최저 임금과 노동 시간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이전에 미국에서 주장되어 오던 기업의 이념과는 조화될 수 없었으며, 1935년 5월 최고 재판소로부터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 블럭 경제 정책(Block Economy) : 1929년의 '세계 공황' 후 자본주의 제국은 타국의 덤핑에 대해 상품 판매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또 원료 공급지나 자본의 수출 대상국을 장악하기 위해 특혜 관세 제도 또는 쌍무적 통상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자국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제 지역과의 결합을 강화했다. 영국은 1936년 오타와 협정으로 특혜 관세 제도를 중심으로 그 자치령 및 식민지로 구성되는 영 제국 블럭을, 미국은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아메리카 블럭을 프랑스는 본국과 그 식민지를 결합하는 프랑스 블럭을 형성하였다.
- 영국 연방(British Commonwealth of Nations) : 영국 본국과 제국내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41개 국으로 구성되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가나, 우간다, 도미니카, 서사모아 등 세계 여러 곳에 있는 국가로 영국과 대등한 주권 국가이나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연방이란 뜻보다는 다민족의 국가 그룹으로 우호 협력과 실리를 위한 클럽적 존재이다. 비정치적인 국제 협력이 코먼웰스이며, 가입과 탈퇴는 자유스럽다. 각국이 모두 영어를 쓰고, 의회 제도, 영국식 사회 제도와 사회 관습을 가진 점이 공통점이다.
-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 :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협동체를, 개인이나 집단보다도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하여, 그 우월성을 주장하는 사상.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의 경제적 위기는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의 대두를 초래,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배가되었다. 이 불안과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초조감은, 민주주의 운영의 조건 정비와 방법 개선에 대한 노력을 잃고, 나아가 민주주의 그 자체의 부정, 따라서 민주주의 정립 원리인 개인주의·자유주의·합리주의·공리주의적 세계관 등의 부정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때에 파시즘과 나찌즘이 보여 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유물주의에 대한 반격」으로 나타나, 이 부정과 반격이 곧 이탈리아나 독일이 내세운 신체제, 곧 전체주의의 제1보였다. 이들은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1국 1당 체제를 취하고, 당과 국가 권력하에 통제하며, 전 권력을 장악하는 절대적인 전체 의지를 설정, 그것에 조직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다. 전체를 개별보다 우위로 삼는 사상은 플라톤이나 독일 관념론 철학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념적인 것으로, 전체주의 이론의 중요한 요소로서 이용되기는 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 나찌스(Nazis) : 국가 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NSDAP:1920-1945)으로 1차 세계 대전 후 패전의 피폐와 베르사이유 조 약에 대한 불만에 편승하여, 결성된 독일의 전체주의적 극우 정당이다. 1919년 뮌헨에서 몇 사람이 모여 독일 노동당이라는 소정당으로 발족하였는데, 히틀러가 주도하여 군부에서 자금을 얻고, 1920년 2월 24일 뮌헨 대회에서 25조의 당 강령을 발표하여 일련의 사회주의적인 정책들을 내걸었다. 그 해 4월에 당명을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라고 개칭하고, 군사적인 독재 조직을 만들었으며, 뢰엠이 지휘하는 돌격대(SA)를 편성하였다. 그 동안 시트라서, 헤스, 괴링 등이 입당하였고, 1923년에는 뮌헨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바이에른 정부로부터 당의 해산을 명령받았다. 히틀러도 일시 투옥되었고, 군부의 지지도 상실하였으며, 공화국이 안정기에 들어갔으므로 당세는 침체하였다. 그러나 1925년 다시 재건, 전 독일에 지부를 설치하고, 친위대(SS)를 조직하였으며, 1927년 이후에는 괴벨스의 활동으로 당세가 확장 되었다. 1929년말 이후 공황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이 동요하자, 강력한 정권을 요망하는 농민·중산 계급·실업자 및 일부 자본가의 지지를 얻어 급속히 당세를 확장하여 갔다. 그리고 비합법적 수단과 폭력을 구사하면서 국수주의적·배외적 선전 활동을 추진하여 공산당과 격렬하게 대립함과 동시에, 바이마르 연합의 민주주의파를 눌러, 1932년 우익의 독일 국가 인민당, 철모단과 하르쯔부르크 전선을 결성했다. 그간 당내의 사회주의자를 숙청하고, 사회주의적 강령을 버렸으며, 독점 자본과 타협, 1930년 이후 의회에서 급속히 당세를 확대하여 마침내 1933년에는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다. 정권을 잡은 후에는 곧 수권법을 성립시켜 바이마르 공화국을 사실상 소멸시키고, 다른 일체의 정당을 해산시켜 의회 정치를 부정하였으며, 노동 조합의 해산, 사회주의 탄압, 유태인의 추방 등을 단행하였다. 다음 1934년에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 후 대통령 겸 총통이 되었고, 당과 국가와의 결합을 완성하였으며, 연방제를 폐지, 강력한 경제적 통제를 시행하여 전체주의적 독재를 수립하였다. [혈통과 토지]라는 표어로써 게르만인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베르사이유 체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였으며, 4개년 계획으로 군비를 급속히 확대하여 침략을 개시, 마침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대전 중 군부의 일부를 중심으로 하는 히틀러 1┛?운동이 기도(1938년 2월의 정변과 1944년 7월 20일의 암살 미수 사건)되기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45년 5월 패전과 더불어 당은 소멸되었으며, 최고 지도자들은 국제 군사 재판(뉘른베르크 국제 재판)에 의해 처형되었다.
- 대정(大正) 민주주의 : 1918년에 시작하여 26년 무산 정당이 결성될 때까지 지식인, 학생, 정치인이 주도하는 정치, 사회 계몽 운동으로 당시 하리게이(原敬) 내각은 언론 통제를 완화하였고, 1차 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호황에 힘입어 요시노사쿠조(吉野作造) 같은 지식인들이 일본의 정치, 사회를 민주주의적으로 개조하자는 운동에 앞장섰다. 그 결과 정당 정치가 행해졌고, 보통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사회주의 운동도 본격화하였다. 교육과 학문면에서도 큰 변화가 있어, 의무 교육과 대학 교육이 확대되었고 자유 분방한 예술 활동이 보장되었다.
-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만주 사변 :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측에 가담, 승전국이 된 일본은 전후 빠른 성장을 했다. 그렇지만 방직 공업과 군수 산업에만 치우쳐 산업 구조는 매우 불안정했다.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경제도 심한 타격을 받았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노동자·농민의 생활이 몹시 빈궁해졌으며,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 운동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파시스트 세력이 고개를 들어 국가 개조를 통해 위기를 타개하자는 운동을 폈다. 1932년 5월 15일, 파시스트 청년 장교 일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정당 정치를 부정하고 군부·관료의 주도하에 천황제 파시즘이란 일본 특유의 전체주의를 만들었다. 즉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담당했던 절대자의 위치에 천황을 앉힌 것이다. 이들은 천황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충성심으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 감정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그리 고 일본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란 슬로건을 내걸 었다. 이들의 목표는 만주였다.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 및 군수 물자 공급처로 삼기 위해서였다.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의 관동군은 봉천근교의 유조구(柳條溝)에서 자기네가 경영하는 만주 철도를 몰래 파괴했다. 그리고는 이를 중국측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즉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순식간에 봉천을 점령하고 만주 일대를 손에 넣었다. 이것이 만주 사변이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이 지역에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나라를 세웠다.
- 일본 군국주의의 시조 기타 이키 : 1936년 2월 26일 새벽 5시. 전날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도쿄 시내 곳곳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 렸다. 이로부터 24시간 동안에 일본 제국의 내대신(內大臣), 재무대신, 교육총감 등이 살해되고 수상, 천황의 측근들이 피습되었으며 경시청, 육군성, 참모본부 등이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500여 명의 병사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른바 '2·26사건' 의 발발이다. 이 쿠데타는 육군의 위관급 장교가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정부가 중국 문제 등에서 미국·영국 등 서구 열강의 눈치를 보며 무력 진출을 망설이고 있고 농민 경제의 파탄 등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면서 정부 각료, 정당, 재벌 등 국내 지배 계층의 제거와 천황 친정을 거사의 목적으로 삼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명치 유신에 빗대어 '소화유신' 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26일 아침, 사건 보고를 받은 천황 히로히토는 즉각 진압을 명령했다. 결국 주모자 17명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 사형수들의 명단 중에는 검찰당국이 '수뇌' 로 지목한 민간인 한 명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일본 파시즘의 교조', '순정 파시스트', '혁명의 실천가'등으로 불리며 청년 장교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기타 이키였다. 당시 55세. 19세 때 오른 쪽 눈을 실명한 외눈박이 청년 기타는 1906년 23세의 나이로《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자비로 출판, 당시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자본론에 버금가는 저작', '기성 학자 계급에 대한 정복' 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후일 세계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은 일본 군국주의 시조치고는 역설적인 데뷔가 아닐 수 없다. 손문이 만든 중국 동맹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그는 이어 중국에서 신해 혁명이 터지자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 정부가 손문의 중국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것을 비난했다. 일본은 영일 동맹을 파기하고 영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영국을 동아시아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중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동양은 서 양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성취할 수 있고 이 과정은 동양의 맹주인 일본의 사상적 지도로 이뤄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같은 생각은 동양과 서양의 대결이라는 허울 아래 실제로는 조선에 이어 만주, 중국도 일본이 장악해야 한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드러낸 것이다. 젊은 장교들은 중국에 대한 무력 침략을 지상 과제로 여기게 되었고 1930년의 만주 사변, 1937년의 중일 전쟁으로 몰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타는 원세계의 집권과 북경 군벌의 발호 등으로 퇴색한 중국 혁명에 실망하고 1919년 상해의 한 여관에서 그의 혁명 사상을 정리한 《국가개조안원리대강(國家改造案原理大綱)》을 집필했다. 이 책은 곧이은 그의 귀국과 함께 일본의 우익 인사, 청년 장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아 우익의 바 이블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기타는 소화 유신을 이룩하기 위해서 당시 당, 재계, 군, 관료의 제 거를 주장했다. 그는 천황을 등에 업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3년간 헌법을 정지시키고 귀족원(전후 참의 원), 중의원을 해산시켜 버리려고 했다. 또한 25세 이상의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당시는 납 세액이 10엔을 넘는 남자만이 선거권을 갖고 있었다) 선거에 의해 국가 개조 의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개인의 사유 재산과 기업 자본금의 한도를 정해 그것을 초과한 액수는 국유화하여 국가가 통일적으로 관리하게 했다. 국영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경영과 수지 결산에 관여할 수는 없으나 그 대신 중의원을 통하여 국가의 모든 생산에 발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대외적으로 기타는 일본을 아시아의 우두머리로 인식했다. 그에게 한국은 언어와 풍습의 차이만 있을 뿐 나라의 기본인 사상면에서는 일본과 완전히 같아 다른 나라라기보다 훗카이도와 같은 지방일 뿐이었다. 또 대 영토를 이뤄 일본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는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에 맞서 호주와 극동 시베리아의 점령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군비의 확장을 주장했다.
- 스페인 내전 : 스페인에서는 1931년 4월 아폰소 13세의 망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공화당과 사회당의 연립으로 구성된 공화국 정부는 교회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실시하고 보통 선거의 도입, 군대 개혁, 토지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에 대해 지주, 자본가, 성직자, 장교 등 전통적인 지배 계층은 위기감을 느꼈으며 그 결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극우 정당인 팔랑게 당이 결성되었다. 1933년 총선거에서는 독일에서의 나치의 정권 획득에 고무된 듯 우익의 진출이 두드러졌고 내각에도 참여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대해 마드리드와 북부 공업 지역의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저항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공화국을 지키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하여 1936년 1월 공화당 좌파, 사회당, 공산당 등으로 인민 전선이 결성되었고 이어 실시된 2월의 총선거 에서 총득표의 과반수를 겨우 넘기어 인민 전선이 승리하였다(420만 대 378만). 인민 전선 정부는 공동 강령에 기초해 즉시 토지 개혁을 실시하고 우익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대하여 프랑코 장군 (Francis Franco, 1892∼1975) 등 군부 수뇌는 암암리에 정부 타도 계획을 준비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되고, 여러 파시스트 단체도 비합법화되었으나 반란 계획은 진행되었다. 1936년 7월 18일 에스파니아 령 모로코에서 파시스트 장교의 궐기가 있자, 이를 계기로 에스파니아 본 토 각지에 군대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프랑코는 카나리아 제도로부터 모로코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독일 과 이탈리아로부터 대량의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은 프랑코는 8월 6일 모르코로부터 본토에 상륙하여 공 세로 나가 9월말에는 본토의 3분의 2를 점령하고, 수도 마드리드를 거의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국 제적으로 8월 1일 프랑스의 블룸 인민 전선 정부는 영국의 압력하에 에스파니아 양파 어느 쪽에서 원조 하지 않고, 무기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불간섭을 제의하여 9월에 독일, 이탈리아 및 소련을 포함하는 유 럽 27개국이 런던에 불간섭 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은 6만이 넘는 병력과 대량의 무기, 자금을 반란군에게 지원했고 공군과 해군을 동원한 직접 군사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은 불간섭 정책으로 파시스트 세력의 도발을 묵인했고 오직 소련만이 병력과 무기를 보내 공화국을 지원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지원보다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전 세계 지식인, 노동자의 참전 이었다. 반 파쇼 정열에 불타는 전 세계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스페인의 갓 피어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스페인으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수천의 지식인·노동자들이 국제 의용병으로서 인민 전선측을 도와 전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약 3, 4만이었으며 훨씬 더 많 은 사람들이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에 참가했다.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등은 이 반 파시즘 전쟁에 참가한 체험을 문학 작품 으로 승화시킨 것들이다. 프랑코 군은 1936년 10월 부르고스에 프랑코를 수반으로 하는 국민 정부를 수립하고, 1937년 4월에는 팔랑헤 당의 일당 독재를 정하여 파시스트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한편 인민 전선 정부는 점차 군사적 열세를 당하여 1937년 10월에는 수도를 바르셀로나로 옮기고 장기 항전으로 들어갔으나, 1939년 1월 26일 바르셀로나는 함락 당하였다. 인민 전선 내부에서도 수상 네그린 등의 항쟁파와 대통령 아사냐 등의 항복파가 분열하고, 3월에는 마드리드에서도 반공(反共) 쿠데타가 일어나 프 랑코 군에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3월 28일에 드디어 마드리아가 함락되고, 다음날 프랑코는 내란의 종결 을 선언했다. 독일은 이 스페인 내란(Spanish Civil War) 시기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내란 종료 직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시킴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은 사실상 스페인 내란 시기라고도 한다. 마드리드가 함락된 해 9월 독일군의 전격적인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새로운 전쟁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 게르니카의 비극 :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스페인 내전의 와중에서 벌어졌다. 바스크는 스페인에 속하기는 했지만 스페인 사람들과는 언어도 문화도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이전부터 스페인에 자치를 요구했다. 1936년 10월 인민 전선 정부는 바스크의 자치를 지지하고 자치 정부를 승인하는 방침을 밝혔다. 그리하여 그 후 바스크에서는 프랑코의 반란군에 반대하고 인민 전선 정부를 지지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프랑코는 바스크를 공격하여 북부 지방을 먼저 장악하려 했다. 여기에 신무기를 실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던 독일 공군 총사령관 괴링(Hermann Goring)의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 그리하여 1937년 4월 26일 독일의 최신형 폭격기, 전투기들이 이 마을을 폭격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폭탄,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투하되었다. 그런데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마을은 쑥밭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 사격 연습하듯 기관총 세례와 폭탄을 퍼부었고 여기에는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약 3시간의 폭격으로 1,654명이죽고 889명이 다쳤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독일군의 폭격에 대한 분노이자 고발이었다.
- 베를린·로마 추축(1936.10) : 나찌스 독일과 파시즘 이탈리아가 체결한 정치적 제휴로 양국은 국제 연맹 및 영국, 프랑스에 대항하 는 공동 행동을 취하여 전체주의 진영의 강화를 기도했다. 이 제휴가 제2차 세계 대전의 길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승인하고 이탈리아와 함께 에스파냐의 프랑코 장군 을 원조했다. 또한1936년 12월에 양국은 통상 협정을 체결하여 경제상의 제휴까지도 촉진시켰다.
(2) 제 2차 세계 대전
- 오스트리아 병합 (1938) :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Austria)는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로 해체되어 분립함으로써 중요한 산업 기지를 잃어 약소국이 됐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차츰 나찌가 세력을 확대했다. 강령에 영토 확보를 내세웠던 나찌스의 제1 목표는, 600만 이상의 독일인이 살고 있는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는 나찌화를 두려워하는 자가 있었고, 프랑스도 독일의 강대화를 베르사이유 체제의 붕괴라 하여 반대하고, 이탈리아는 합병으로 직접 독일과 국경을 접하게 되므로 이를 반대하고, 헝가리, 영국도 각기 그들의 입장에서 이를 반대하였다. 오스트리아 나찌스는 돌푸스를 암살하고 일거에 합병을 실행하려 했으나, 이 사건은 정부에 의해 진압되고 오히려 국제적 반대론을 경화시키자,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병합을 일시 단념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스트레자 전선은 영국의 영·독 해군 협정 이후 깨어졌으며, 이디오피아 침략은 이탈리아를 독일에 접근시켜 1937년 9월 히틀러와 뭇솔리니의 브렌네르 회담에서 제휴가 이루어졌고, 1938년에는 독일의 압력과 오스트리아 나찌스의 활동이 더욱 격화되자, 돌푸스의 뒤를 이은 슈시니크 수상은 독일의 압력으로 오스트리아 나찌스의 지도자 자이스잉크바르트를 내무상의 자리에 앉히면서도 이 문제를 국민 투표에 붙여 해결하려 했다. 이것은 나찌스에게 불리한 것이므로 독일은 3월 11일 최후 통첩으로 오스트리아를 위협하여 슈시니 크를 사직시키고, 잉크바르트 내각을 조직하게 하여 그 내각의 요청으로 12일 독일군이 대거 진입하여, 그 이튿날 독일, 오스트리아 양 정부는 정식으로 합병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나찌스 독일의 한 주로 전락되고 잉크바르트는 그 총독이 되었다. 이 사건에 이탈리아는 불만을 나타내고, 영국, 프랑스는 전쟁까지 치를 의사는 없어 동조하는 결과가 되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곧 뒤이어 있는 나찌스의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와 폴란드 침략을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잉크바르트는 전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 뮌헨 회담 : 수데텐 지방은 원래 독일 영토였으나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만들었다. 나치는 1938년 봄부터 수데텐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고 있던 독일계 주민을 꼬드겨 자치 운동을 벌이게 하였고, 히틀러가 이 운동을 이용하여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자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뮌헨 회담을 개최하여 독일이 더 이상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데텐 지방 병합을 승인하였다. 그런데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중요한 회담에 정작 체코의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으며, 당시 체코와 상호 원조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도 제외되었다.
- 독.소 불가침 조약(1939년) : 절대로 서로 화합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던 독일과 소련은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갑자기 불 침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 소련의 의도는 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일과의 전쟁을 일시적이나마 연기해 국력을 강화시키는 데 있었으며, 또한 뮌헨 협정을 무시하고 영토적 야욕을 드러낸 히틀러는 전쟁이 급박한 상황에서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 불가침 조약의 체결이 필요하였다. 독일은 이 조약으로 동.서 양면 작전의 불리함을 피해 1주일 뒤 폴란드에 침입하여 제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가져 왔다. 독일이 폴란드로 진격하자 소련도 폴란드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였으나, 독일군의 발칸 진출로 불가침 조약은 파기되고 독일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제 2차 세계 대전(1939.9.-1945.8.) :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추축국의 침략에 의해, 민주주의 국가군인 연합국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 그 도화선이 된 것은 독일의 단찌히 및 폴란드 회랑에 대한 요구였다.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 폴란드의 단치히 항에 정박해 있던 독일 순양함이 별안간 항구의 요새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독일군 정예 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었고 독일군은 삽시간에 폴란드를 제압했다. 그러자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곧 폴란드를 압도하여 소련과 이를 분할하고는, 다음 해 1940년 5월에는 돌연 서부로 진출, 네덜란드를 5일 만에, 벨기에를 2주일 만에 항복 시켰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마지노 선을 돌파,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6월 10일 이탈리아가 영국과 프랑스에게 선전 포고를 하여 독일측에 가담했다. 14일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독일은 페탱을 내세워 괴뢰 정부인 비시 정권을 수립했으며 영국 런던을 공습했다. 이에 대해 드골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저항 세력은 런던에 임시 정부를 세우고 항전 결의를 표명했다. 독일은 이어 발칸 작전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한 다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를 독일측에 가담시켰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일제히 소련으로 진격했다. 동유럽에 있어서의 이해의 충돌과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카프카즈의 유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 소련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국토의 서반부가 독일군 손안에 들어갔고 자그만치 2천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학살로 죽어간 유태인의 3.5배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1940년 9월 독일·일본·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을 맺었다. 일본은 대동아 건설을 외치며 남방 진출에 나섰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전쟁은 문자 그대로 세계 대전으로 전화는 전지구 표면으로 확대되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하고 이탈리아가 이를 보조한 유럽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고 소련이 동부 전선에서 격전을 벌이면서 점차 연합국측의 승리로 기울었다. 태평양에서의 양상도 비슷했다. 일본은 초기에 기습 공격으로 주도권을 장악, 1942년 전반1沮?필리핀, 말레이지아, 버마, 네덜란드 령 동인도, 서남 태평양 제도를 차례로 점령하여 동남 아시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대동아 공영권의 꿈은 현실로 이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의외로 시간을 끌었고, 태평양 일대의 남방 전선은 너무 넓어서 보급로 유지가 곤란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둬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8월에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잃은 일본은 각 지역에서 고립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전멸당하고 10월에는 레이테 만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1945년에는 필리핀을 빼앗겼다. 한편 1944년 6월 아이젠하워가 이끄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하는 데 성공,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파리를 수복하고 라인 강으로 진격, 1945년 4월 소련군과 엘베 강에서 만나 독일 진격을 눈앞에 두었다. 4 월말,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유격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5월 1일 소련군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히틀러는 전날 자결하였고, 독일은 5월 7일 항복, 이로써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편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8월 8일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여 만주로 진격하자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 연합군측 49개국, 동맹국측 8개국, 동원병력 1억 1천만, 인류의 5분의 4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전사자 2천 7백만, 민간인 희생자 2천 5백만, 총 5천만이 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숫자였다.
- 레지스탕스 운동(Mouvement de Resistance) : 프랑스어로 저항 운동의 뜻으로 제 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국민의 독일 점령군 및 그 괴뢰인 자국의 비시 정부에 대해 전개한 저항 운동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 제1기: 1940년 6월 22일의 프랑스군의 항복으로부터 이듬해 6월 22일의 독·소 개전까지. 제 3공화정의 해체에 의해 독일 점령군과 비시 정부의 파시즘적 지배가 시작되고, 폐탱과 히틀러의 회견에서 대독 협력이 서약되었으며, 프랑스 경제는 무거운 부담을 져, 11월 11일 파리 학생들의 에트왈 개선문 광장에서의 데모가 일어나 국민의 대독 비협력 태도가 적극화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 제2기: 독·소 개전으로부터 1942년 11월 소련군의 스탈린그라드 반격, 미·영군의 북아프리카 상륙, 독일군의 프랑스 전토 점령에 대응하는 툴롱 항의 프랑스 함대 자결까지이다. 점령군은 노동자 40만의 징발 요구, 인질의 대량 처형(샤토브리앙, 몽 발레리앙 사건 등)으로 억압을 강화하자, 레지스탕스 운동은 활발하게 되고, 군용 열차·시설의 파괴 등이 조직화되었다.▶ 제3기: 1942년 11월부터 해방까지이다. 연합군 공격에 힘을 얻어 공세로 전환, 조직은 전국적 통일을 이루어 1943년 3월, 전국 저항 평의회가 성립되었다. 그 후 1943년 6월에는 알제리에서 드골, 지로의 프랑스 국민 해방 위원회가 성립되어, 연합국의 승인을 얻었다. 이어 독일에의 징용을 거부한 사람은 마키(Maquis: 2차 대전중 중동부의 산중에 들어가 독일 점령군에 대항한 프랑스인 게릴라)가 되고 무장 저항 단체는 국내 프랑스군으로 조직되었다.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이후, 전국적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으며, 연합군 도착 이전에 파리를 해방시켰다. 레지스탕스 운동은 다양한 단체와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나,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굳게 결속되어 끝까지 통일을 유지하였다.
- 히틀러의 유럽 새 질서 계획
러시아 지역으로 독일인을 이주시킬 때 '독일국 농민'은 아주 잘 꾸며진 집단 거주지에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인의 농장과 관청은 훌륭한 건축물로 구성되고, 총독 관저는 궁정의 장엄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독일 이민이 사는 도시를 둘러싼 30km∼40km 내의 지역에 환상지대(環狀地帶)를 만들어, 그곳에 아름다운 농촌을 건설하고 최상급 도로로 농촌들을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러시아 인들은 독일 이민들과는 완전히 판이한 별세계에서 살게 하여 어떤 문명 시설도 누리지 못하도록 하고 방치해 두는 걸로 족하다. 그저 그들은 독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면 그들 마을에 각각 2,3발의 폭탄을 퍼부어 마을 전체를 전멸시켜 버려야 한다.
- 이탈리아의 항복 : 1943년 7월 시칠리아 섬이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 본토에 진입했다. 이와 동시에 무솔리니의 반대파인 바돌리오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솔리니는 권력을 잃고 체포됐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바돌리오 정부는 곧 파시스트 당을 해산하고, 9월에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함께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어 10월에는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이렇게 프랑스의 패배를 지켜보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던 이탈리아는 가장 일찍 추축국 진영으로부터 탈퇴했다. 한편 체포됐던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아부루치 산맥의 한 호텔에 유폐되었으나 같은 해 9월 12월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독일 친위대 부대장 스코르체니 대위를 비롯한 9명의 병사가 낙하산 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특수 글라이더를 사용해 몇백 명의 이탈리아 헌병의 감시 속에서 극적으로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 뒤 무솔리니는 북 이탈리아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한동안 연합국에 대항했으나 1945년 4 월 28일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총살됐다.
- 태평양 전쟁 :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과의 전쟁, 즉 태평양 전쟁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 주미 일본 대사는 기습 공격이 시작되고 나서 1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본국으로부터의 통첩을 미국에 전달하였다. 그 통첩의 내용은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일본과 미국과의 교섭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을 뿐 거기에는 어떤 군사적 행동이나 전쟁에 관한 암시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헐(Cordell Hull, 1871∼1955)의 회고록 중의 일부로, 국제 상식을 무시한 일본의 행동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그 동안 중립을 지켜 오던 미국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테헤란 회담(1943.11)
1.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유격대(the Partisan)에 가능한 한 군수품과 장비를 지원하고, 나아가 군단 작전으로 원조하는 데 동의하였다. 2. 군사적 관점에서, 터키가 올해 안에 연합국 편에서 전쟁에 참가할 것을 바란다는 데 동의하였다. 3. 만약 터키가 독일을 상대로 싸우고, 그 결과 불가리아가 터키에 싸움을 걸거나 공격하는 경우, 소비 에트는 즉시 불가리아를 상대로 싸운다고 하는 스탈린 원수의 성명을 확인하였다. 나아가 본 회의에서는 터키를 참전시키기 위한 앞으로의 교섭에서 이 사실을 명백히 표명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4. OVERLORD(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남프랑스에 대한 작전과 연관시켜 1944년 5월 중에 개시할 것을 확인하였다. 본 회의에서는 또한 소비에트 군대가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하 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개시한다고 하는 스탈린 원수의 성명을 확인하였다. 5. 3국[미.영.소]의 참모가 앞으로도 유럽에 긴급한 여러 작전에 관해 서로 밀접한 접촉을 갖는다는 데에 동의하였다. 특히 이런 여러 작전에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위장 계획을 이에 관련된 참모 가 서로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 얄타 회담(1945.2)
소련, 미국, 영국의 3대국 지도자는, 독일이 항복하고 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 2∼3개월 뒤에, 소련이 다음의 조건으로 연합국 편에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하기로 협정하였다. 1. 외몽고[몽고 인민 공화국]의 현재 상태는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2. 1904년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다음과 같이 회복되어야 한다. ⒜ 사할린 남부 및 그 주변의 모든 섬은 소련에 반환된다. ⒝ 다롄항은 국제화되고, 이 항구에서 소련의 우선적 이익은 옹호된다. 소련의 해군 기지로서 뤼순 의 조차권은 회복된다. ⒞ 동청(東淸) 철도 및 다롄에서 출발하는 남만주 철도는 중·소 합병 회사의 설립에 따라 공동으 로 운영된다. 단 이것은 소련의 우선적 이익이 보장되고, 중국은 만주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갖 는다고 하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3. 쿠릴 열도를 소련에 넘겨 준다. …… 3대국 수반은 소련의 이러한 요구를 일본의 패배 후에 확실히 들어 주기로 협정하였다.
- 포츠담 선언(1945.7.26.)
1. 우리들 합중국 대통령, 중화 민국 정부 수석 및 영국 수상은 우리 수억의 국민을 대표하여 협의한 결과, 일본에게 이번 전쟁을 종결할 기회를 주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3. 힘차게 일어선 세계 자유 국가 백성의 힘에 대한 독일의 쓸데없는 저항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 가 하는 것은 일본 국민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현재 일본을 향해 집결되고 있는 전력(戰力)은, 저항 중의 나치에 투하되어 독일 국민의 모든 토지·산업·생활 양식을 황폐화시킨 힘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하다. 우리의 결의를 바탕으로 우리 군사력을 최대한 사용하였을 때 일본 군대는 완전히 파멸하고 또 일본 국토는 완전히 파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분별없는 판단으로 일본을 멸망으로 이끌어 간 거만한 군국주의적 조언자들이 일본을 계속 통치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이 합리적인 길을 밟을 것인가를 일본 스스로 결정할 시기가 왔다. 5. 우리의 조건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아래의 조건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대신하는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 리는 더 이상의 지연을 인정할 수 없다. 6. 우리는 무책임한 군국주의가 세계로부터 축출될 때까지는 평화와 안전 및 정의의 새 질서가 생겨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일본 국민을 속여 이로 하여금 세계 정복이라는 큰 일에 나서는 잘못 을 저지르게 한 권력과 세력은 영원히 제거되지 않으면 안된다. 7. 위와 같은 새 질서가 수립되고,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이 깨져 버렸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될 때까 지는, 연합국이 지정하는 일본 영토 안의 여러 지점은 우리들이 여기에서 지시하는 기본적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기 위해 점령될 것이다. 8.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홋카이도·규슈·시코쿠 및 우리가 결 정하는 작은 섬들에 한정될 것이다. 13. 우리는 일본 정부가 곧 모든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그런 행동에서 일본 정부가 성의(誠意)를 보이겠다는 충분한 보장을 하기를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 위와 같은 길 이외의 다른 선택은 신속하고도 완전한 파멸을 가져올 뿐이다.
-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 : 독일의 주요 전쟁 범죄인에 대한 처분은 1945년 8월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 사이에서 체 결됐던『유럽 추축국 주요 전쟁 범죄인의 소추 및 처벌에 관한 협정』과『동(同) 부속 국제 군사 재판소 조례』로 구체화했다. 11월 20일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뉘른베르크(Numberg)에서 주요 전범 24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해 이듬해인 1946년 10월 1일에 판결을 내렸다. 처벌 대상은 이전까지의 단순한 ① 교전 법규 위반 죄(고유한 의미의 전쟁 범죄)에 머무르지 않고, ② 평화에 대한 죄(침략 전쟁을 시작한 책임), ③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죄를 새롭게 포함했다. ②가 가장 중요한 법규였던 도쿄 재판에 비해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소에서는 ①과 ③이 중요한 내용이 됐다. 법정에 선 나치당의 수뇌부 들이었던 피고들은 오랜 심리에 굴복했다. 그런데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고 응답해‘굴복한 야수들’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교수형 : 보어만을 포함한 12명, 종신형 : 헤스를 포함한 3명, 금고 20년 : 2명, 금고 15년 : 1명, 금고 10년 : 1명, 무죄 : 3명, 그 밖에 2명은 수감 중 자살).
- 극동 군사 재판(도쿄 재판) : 연합국은, 서방에서는 1945년 11월 뉘른베르크에서, 동쪽에서는 1946년 5월 도쿄에서 군사 재판을 시작했다. 이 재판은 전승국이 패전국을 재판하는 것으로, 이후 비인도적 전쟁의 방지에도 목적이 있었다. 도쿄에서 열린 극동 군사 재판은 연합국 최고 사령관으로서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원수의 명령으로 진행되어 일본의 A급 전쟁 범죄인으로 도조(東條) 전 총리 이하 28명이 재판을 받고 유죄가 선고됐다. 그 밖에 B급 C급 전범으로 전쟁중 비인도적 잔학 행위를 한 약 5천명이 재판을 받았다.
7. 전후의 세계질서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전후의 세계질서
(1) 국제 연합의 성립과 냉전 체제
- 국제 연합 헌장(1945년) : 국제 연합 헌장의 초안은 1944년 덤버튼.오크스에서 미.영.중.소의 4개국 대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1945년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제 연합 창립 회의에 참가한 51개국의 조인을 받아, 그 해 10월 24일에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 냉전(Cold War) : 2차 대전으로 부상한 나라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경계하며 전후 국제질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한반도를 북위 38도선으로 갈라 미국과 소련이 각각 진주한 것도 소련에게 한반도를 송두리째 내줄 수 없다는 미국의 경계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장 개석이 패배하고, 거대한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자 미국은 반공 히스테리에 걸렸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주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57)는『국무성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교수들에게 충성 서약을 하게 하고, 조금이라고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책은 불살라졌다.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봉쇄 당하고 대학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빼앗겼다. 트루먼 전대통령이 러시아 간첩을 은닉했다는 협의로 고발되었고, 심지어 루스벨트·아이젠하워·케네디까지도 공산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극단적인 흑백논리에 의한『빨갱이 사냥』이 도처에서 일어났다.『이웃이 적이 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이미 와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라는 양식 있는 사람들의 경고는 무시되었다. 50년대를 휘어잡은 이 반공주의 선풍을 상원 의원 매카시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즘이라고 부른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 자부하면서 공산주의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면『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서』어디든지 개입했다. 자연 미국과 소련은 세계 곳곳에서 부딪히게 되었고,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권으로 양분되어 날카로운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리프맨은 <뉴욕 트리뷴>지에 이 같은 상황을 해설한 기사를 기고했다. 그는 기사 제목을 냉전(cold war)이라 붙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열전(hot war)이라면 거기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 않은 전쟁이란 의미이다. 이후 냉전이란 말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채플린과 매카시즘 : 1950년 2월 조셉 매카시에 의해 야기된 이른바 매카시 선풍은 1954년경까지 상원의 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진보적인 지식인과 뉴딜 파의 정부 인사들을 차례로 '빨갱이'라고 몰아 그 직위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 각 분야로 퍼져 교육 기관, 노동 조합 나아가 헐리우드까지 확대되었다. 채플린이 공산주의 활동가라는 혐의로 감시의 대상이 된 것은 1921년부터였다. FBI의 채플린에 관한 파일은 1,900페이지가 넘으며 거기에는 독일의 유명한 망명 시인 브레히트 등 좌파 인사들과의 친교가 기록되어 있다. 채플린은 어느 정치 조직에도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진보적 운동에 적지 않은 자금을 주었으며 이따금 정치적인 발언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감시의 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영화 속에 담겨 있다. '빨갱이' 라는 비난은 〈모던 타임즈〉를 만들 때쯤부터 일기 시작했다. 그 후〈위대한 독재자〉,〈무슈 베르두〉같은 작품과 함께 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서도 매스컴 특히 우익계 잡지는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비난의 초점은 주로 사생활에 관한 흥미거리이거나 또는 탈세 혐의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채플린은 당시 '빨갱이 사냥' 의 도구로 활용된 반미행위 조사위원회의 출두 요구를 거부하고 다음과 같은 회답을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정당이나 정치 단체에 가입한 일도 없다. 나는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평화주의자이다." 1952년 영화를 완성한 후 시사회를 위해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떠날 때 미국 법무성은 채플린의 재입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는 미국에 오래 살기는 했지만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스위스에서 평온하게 살았다. 채플린은 1972년 그러니까 그가 죽기 5년 전에야 '빨갱이' 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72년 4월 2일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영화 산업을 예술로 바꾸어 놓았다는 찬사와 박수 갈채 속에서 오스카 상을 받은 채플린은 감격의 인사를 했고 사람들은〈모던 타임즈〉마지막에서 나오는 '스마일'을 합창했다. 쫓기듯 미국을 떠났던 채플린으로서는 감격에 겨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 베를린 봉쇄 : 1947년 코민포름 결성을 계기로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민주화 촉진을 구실로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47년 독일 통일을 논의하는 4개국 외상 회의가 결렬되자, 미·영·프 3국은 독일 통일을 단념 하고 그 점령 지역에 독자적인 독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소련은 이에 반대하여 1948년 4월부터 서베를린의 출입로인 철도와 도로의 통행을 제한하였다. 6월부터는 서독으로부터 서베를린 사이의 육상 교통을 전면적으로 차단하였다. 서방측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서베를린 시민의 식량 등 생활 필수품을 공수하기 시작, 11개월간 234만 톤의 물자를 공수하였다. 그리하여 소련의 의도는 실패하게 되었고, 49 년 5월부터 베를린 봉쇄는 해제되었다. 이러한 미·소간의 대립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더욱 격화, 전 후 미국의 지도하에 반공 진영의 결속이 강화되었다.
- 마셜 계획(1947.6.5) : 미국에 의한 유럽의 경제 부흥책으로 이에 대해 소련은 동유럽 5개국과 경제 상호 원조 회의 (Comecon)을 만들어 대항하였다.
-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 동·서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은 동유럽의 소련 블록에 대항하여, 1948년 7월부터 캐나다 및 서유럽 연합 조약 가맹국(영국, 프랑스, 베네룩스 3국)과 위 조약의 체결을 위한 교섭을 진행시켜, 1949년 4월 워싱턴에서 12개국의 참가 속에 이에 대한 조인식을 가졌다. 이것을 바탕으로 결성된 것이 바로 북 대서양 조약 기구이다.
- 바르샤바 조약 기구 : 소련은 서독의 나토(NATO) 가입과 재군비에 대항하여, 1955년 5월 바르샤바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알바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와 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통일 군사령부가 모스크바에 설치되어, NATO와 대립하는 군사 기구가 성립하였다.
- 공산권 내부의 이념 분쟁 : 중국은 대다수 피압박 민족의 열망을 버리고 미국과 화해하려는 소련에 대해서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수정주의라고 비난하자 이에 대해 소련은 중국이 현실적인 인간의 기본 욕구를 외면하고 공산주의 원칙만을 고집하는 교조주의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실은 60년대의 국제 정치 질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조성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공산권 내부의 이념 분쟁은 국가 이기주의적인 측면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2) 전후의 미국과 유럽
- 유럽 경제 공동체(EEC) : 전후 서유럽은 마셜 계획을 받아 들여 경제 부흥에 나섰으나 미·소 양대 체제에 종속되어 국제적 지위가 현저히 저하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유럽 통합의 새로운 기운이 태동하였다. 프랑스 외상 쉬망의 제안에 따라 석탄과 철강의 공동 관리가 이루어 지고(1952) 쉬망안에 참가한 6개국(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1958년 로마 조약으로 유럽 경제 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일반적으로 Common Market, 즉 공동 시장으로 알려져 있음)를 형성하였다. 이는 중앙에 각 국 대표들로 구성된 관리 기구를 둔 유럽의 진정한 경제적 결합의 시작이었다. 물론 각국은 독자적인 권리를 보유하고는 있으나, 무역만이 아니라 생산과 이민 등에 관해서도 공동 시장의 권리는 강해지고 있으며, 보다 더 많은 참가국을 맞이하여 유럽을 명실 공히 하나의 결속된 경제권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8.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족운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민족 운동
- 중국혁명과 모택동 : 모택동은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 마을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1녀의 장남인 그는 6살 때부터 농사일을 시작했고, 글을 익히자 곡물 장사에 나선 아버지를 도와 장부 정리를 맡아 했다. 16살 되던 해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향의 신식 학교에 들어갔다. 1911년 신해 혁명이 일어나자 호남 혁명군에 가담했다가 손문이 남경 정부를 세운 이후, 면학에 힘써 호남 제 1사범 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그는 스승 양창제의 딸인 양개혜(楊開慧)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1930년 장사에서 모택동의 여동 생과 함께 국민당 군에게 처형당했다. 모택동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북경대학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창시자이며 중국 공산당 창설자인 진독수(陳獨秀)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이다. 마르 크스의 〈공산당 선언〉, 카를 카우츠키의 〈계급투쟁〉등 공산주의 이론서를 섭렵한 모택동은 1921년 상해에서 열린 공산당 제1차 전국 대표 대회에 참석하고 당원이 되었다. 1927년 장개석이 4·12 쿠데타 를 일으켜 국공 합작을 파기하자, 모택동은 호남성으로 돌아와 노동자·농민 부대를 조직, 9월에 추수 봉기를 일으켰으나 봉기는 실패하고 모택동은 천여 명을 이끌고 정강산(井岡山)으로 들어가 최초의 소 비에트를 수립했다. 모택동은 이 강서 소비에트에서 사회주의적 개혁을 시행하고 홍군을 길렀다. 한편 장개석은 '악랄한 홍비(紅匪)'의 보금자리인 강서 소비에트를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홍군은 장개석군 의 공격을 피해 소비에트를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이른바 대장정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 모택동은 장개석에게 연립 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고, 1946년부터 제2차 국공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사실 중·일 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 합작은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1940년 상해 남쪽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 위해 이동중인 홍군을 국민당 군이 공격, 4 천 명의 홍군이 전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국공 합작은 사실상 깨어지고 양군은 항일 전선의 주도 권을 놓고 공공연히 투쟁을 벌여왔던 것이다. 장개석은 1946년 11월 국민 대회를 열고 신헌법을 제정한 다음 48년 5월 총통이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장개석의 국민당 군에게 무기와 물자를 대 규모로 지원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은 10분의 1밖에 안되는 홍군에게 변변히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 졌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 민중들이 국민당 아닌 홍군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948년 홍군은 서주 회전에서 국민당 주력군을 무너뜨리고, 이듬해 대만과 티벳을 제외한 중국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1949년 미국은〈중국 백서〉를 발표, 국민당 군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버렸다. 더 이상 장개석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원조를 잃은 국민당은 일시에 무너져 대만으로 도피했다. 1949년 3 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북경에 입성했다. 모택동은 노동자·농민·지식인·민족주의적 부르주아 대표로 구성된 인민 정치 협상 회의를 소집, 중국 인민 정부를 수립하고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 인도, 파키스탄의 분리 : 제2차 세계 대전이 계속되는 동안 영국의 분리 통치 정책은 계속되었고, 종전을 맞아 힌두, 이슬람 교의 종교적 대립으로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분리 후 양국의 국경 분쟁이 표면화되었는데 특히 카슈미르에서의 대립은 아직도 심각하고 인도는 친소, 파키스탄은 친미 정책을 펴, 이 지역에서의 대립은 국제적 양상까지 띠었었다.
- 카슈미르 분쟁 : 카슈미르는 인도 서북부에 위치한 고원지대로 면적은 약 21만Km2이다. 주민은 이슬람 교도가 많지만 (70%이상) 힌두교도인 토후국 왕이 1947년 인도에 귀속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파키스탄의 원조를 받은 자유 카슈미르파의 무력 항쟁으로 혼란이 일어났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1949년에 휴전이 성립하였지만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카슈미르는 양국의 분할 점령하에 있으면서 무력 충돌이 되풀이되고 있다.
- 방글라데시의 독립 : 파키스탄은 인도를 끼고 동서로 나뉘어 민족, 언어, 풍토가 상이하였으며, 동 파키스탄은 경제 발전이 지연되어 동 파키스탄의 벵골 인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가 이것을 지지하여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결과 파키스탄이 패배하여 1972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였다.
- 아옌데 정권 붕괴 : 남 아메리마 칠레에서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 육군 사령관이 주동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 데 정권을 무너뜨렸다. 육·해·공 3군 사령관으로 구성된 군사 평의회는 실권을 장악하고 피노체트는 평의회 의장이 됐다. 군사 평의회는 라디오를 통해"우리 나라는 경제·사회·도덕적 위기에 처해 있다. 나아가 여당인 인민 통일 전선에 의한 무장 세력의 증가는 내란의 위기를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미리 방지하지 위해 일어섰다"고 최초의 성명을 발표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반란군에게 5분 동안 휴전을 요청했지만 반란군은 이를 거부했다. 반란군은 대통령 관저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했고, 오후 3시 가 지나 반란군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옌데는 집무실 소파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아옌데(Salvador Allende)는 1970년 10월, 사회당·공산당·급진당과 기독교 민주당의 일부로 구성된 인민 연합의 지지로 쿠바에 이어 중남미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초기에는 칠레 국민의 생활이 개선됐지만 아옌데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파업과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의 파업이 잇따랐다. 또한 미국이 주도한 외국 자본이 투자 거부로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중산층의 여론은 더욱 나빠졌다. 이 군사 쿠데타로 사회 민주주의 모습을 띤 마르크스주의 정권의 실험장이라 일컬어지던 칠레에 군사 정권이 수립됐지만 남미 각지에서는 아옌데 정권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9. 제 3세계의 결속에 대하여 약술하라.
- 제 3세계 세력 등장의 배경 : 알제리의 독립 운동가이며 아프리카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프란츠 파농은 이렇게 말했다.「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아랍인·인도인·황색 인종의 땀과 시체 위에 세워진 것이다.」이 말은 제3세계의 등장 배경을 단적으로 설명해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세계 역사는 사실 유럽인에 의해 유럽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들에게 아메리카는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이며, 인도양 항로의 개척자는 바스코 다 가마이고,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마젤란이다. 사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 아메리카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고, 인도양 항로는 아랍인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며, 태평양의 무수한 섬들에는 각각 저마다의 문화가 꽃피어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새로「발견」한 땅이 당연히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기 를 앞세워 깃발을 꽂았다. 원주민의 존재란 이들에겐 거추장스런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용감무쌍한 서부 개척사는 바꿔 말하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멸망사이고, 미국의 번영은 흑인 노예의 비인간적인 희생 위에 피어난 꽃이며,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의 부유함은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 에 대한 가혹한 착취의 대가였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전쟁은 그 본질이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식민지 쟁탈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에서 약 80여 개의 식민지들이 독립을 이루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유색 인종 국가이며 강대국의 지배 아래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을 해야 했던 나라들이다. 이 신생국들은 새로운 국제 질서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 백년동안 굳어진 서양 중심의 질서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자본과 기술의 도움 없이는 자립은 커녕 제대로 국내 경제를 운용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과거 종주국이었던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론 독립했지만 경제적·내용적으로는 여전히 예속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른바 냉전 시대를 맞았다. 세계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대표로 하는 사회주의권으로 양분되었다. 그러자 또다시 강대국의 세력다툼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신생국들은 동맹과 단결을 부르짖게 되었다. 거의 전면전으로까지 비화하고 있던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1953년 3월 스탈린의 갑작스런 사망과 그 후임 수상 말렌코프의 평화 공세로 휴전에 들어간 가운데, 중화 인민 공화국 수상 저우 언라이와 인도 수상 네루는 1954년 6월 인도의 델리에서 회담을 갖고 「평화 5원칙」을 발표하였다.「평화 5원칙」이란 영토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 불가침, 내정 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을 말한다. 이것은 그 뒤 인도차이나 휴전 협정의 체결과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의 연대감을 강화시켰다. 이렇게 하여 제3세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 비동맹 운동 : 인도의 수상 네루는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을 보고, 냉전은 결국 세계 평화를 위협하리라고 생각하여「비동맹 중립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네루의 주장은 1954년「평화 5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제1차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가 열렸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신생국 29개국이 참가한「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색 인종 대륙간 회의」였다. 식민지 체제의 붕괴를 상징하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이 회의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서방 세계(제1 세계)와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세계(제 2세계)의 군사 행동에 휘말리지 않고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속해 있으면서도 서방 세계에 종속되지 않고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제3 세계 국가의 평화 공존 노선이 선언되었다. 여기서는 평화 5원칙을 토대로 한「반둥 10원칙」인 채택되었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국제 연합에 의한 분쟁 해결 등을 중심으로 하는「반둥 10원칙」은 이후 신생국들이 국제 정치에 임하는 기본 철학이 되었다. 이 회의를 기반으로 1961년 티토 대통령의 제창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제1회 비동맹 수뇌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비동맹 회원국의 가입 조건을 결정했다. 즉 비동맹과 평화 공존에 입각한 독자적 정책, 민족 해방 운동 무조건 지지, 냉전에 휘말릴 수 있는 어떤 조약이나 동맹, 외국군 주둔, 군사기지 설치의 거부 등의 조건을 갖춘 나라만이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비동맹 운동은 신생국들의 공감을 얻어 그 세력이 급속히 증대했고, 1980년에는 회원국수가 120여 개국에 이르렀다.
10.20세기의 사회와 문화에 대하여 약술하라.
(1) 20세기의 사회
- 대중 사회의 등장 : 에스파냐의 현대 철학자 오르테가이 가세(Ortegay Gasset, 1883∼1955)는 유명한『대중(大衆)의 반역』이란 저서에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대중의 대두' 라 갈파하였다. 그는 또 대중이 현대 사회 에서 사회 세력을 갖게 된 사실을 가지고 대중의 반역이라 규정하였다. 19세기말의 2차 산업 혁명과 새로운 공업 조직의 도입으로 수많은 밀집 도시가 발생하여 거대한 비인격적 대중 사회가 형성되었다. 대 중 사회의 대두는 19세기적인 부르주아 사회 정치 체제와 그 지도 이념인 자유주의 철학의 변질을 가져 왔다. 첫째는, 현대 대중 사회가 제기하는 여러 가지 공중 위생 문제 때문에 정부의 적극적인 행동·통 제 계획 등이 요청되어 개인의 이해를 위하여 정부의 활동이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야경 국가적 개념이 무너졌다. 둘째로, 현대 대중 사회의 성립으로 보통 선거 제도가 확립되어 일정한 재산을 가진 자만이 참정권을 갖는 19세기의 자유 민주주의 즉 소수 평등주의 또는 평등주의적 과두 정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정당 국가가 성립하였다. 현대 대중 사회에서는 참정권자가 소수의 집단이 아니고 거대 한 무정형 사회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 계층, 즉 재벌에서 거지에 이르기까지 정치 행동으로 동원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이라고 하는 고도로 정비된 정치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2) 20세기의 문화
- 아인슈타인(Einstein ;1879∼1955) : 독일 출신의 이론 물리학자. 취리히 공대를 졸업한 후 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1933년 유대인이라 하여 나치에 의해 추방당하여 미국에 이주하였다. 프린스턴 대학 고등 연구소에 재직하면서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였고,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2차 대전 중 원자탄 제조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전후에는 세계 정부론을 주창하는 등 평화 운동에 관여하였다.
- 우주 시대의 개막 : 우주에 인간이 만든 인공위성을 맨 처음 쏘아 올린 나라는 소련이다. 1957년 10월 4일 무게 83.6킬로 그램의 스푸트니크 1호는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궤도를 도는 데 성공했다. 한 달 후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타고 있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생물이 견딜 수 있는가를 연구 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58년 1월 31일 미국도 최초의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렸다. 인류 최 초로 우주 공간을 여행한 인간이 탄생했다. 그는 소련의 우주비행사 가가린이다. 가가린은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를 한 바퀴 돈 다음 무사히 귀환했다. 미국은 곧바로 유인 우주 선을 보내는 아폴로 계획에 착수했다. 1968년 12월에 세 사람의 비행사를 태운 아폴로 8호가 달을 향해 떠났다. 그리고 1년 뒤 아폴로 11호가 인간을 달에 내려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달에 갔다 온 인간은 이 번엔 인간이 과연 우주에서 살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소련은 세 사람의 승무원을 실은 살류트 1호를 발사했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세 사람 모두 숨진 채로 돌아왔 다. 1973년 5월, 이번엔 미국이 최초의 우주 정거장 스카이랩을 발사했다. 스카이랩은 작업실, 공기저장 실, 도킹실, 태양 망원경대, 사령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침실, 식탁, 샤워실, 화장실을 갖추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변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빨아내는 장치를 사용했다. 스카이랩 계획이 성공리에 끝나자, 미국은 스페이스 셔틀, 즉 우주 왕복선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4월 최초의 우주 왕복선 콜럼비아 호에 이어 챌린저 호, 디스커버리 호, 어틀랜티스 호 등이 차례로 발사되었다. 1986년 1월 28일, 유인 우주 왕 복선 챌린저 호가 발사 후 73초만에 16킬로미터 상공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러나 미 국의 스페이스 셔틀 계획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
- 생의 철학 : 19세기 후반, 자연 과학의 눈부신 발달과 유물론적 사고가 풍미하고 있을 때, 베르그송은 물질 세계에 대한 정신 세계의 특이성을 밝히는 일에 몰두, 생의 철학을 열었다. 그는 '창조적 전화' 라는 저서 속에서 생명이 물질을 꿰뚫고 실현하는 창조적 진화의 모습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 프로이트(Freud;1856∼1939) :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그는 정신병이 어린 시절의 본능적인 여러 충동이 잘못 억제되어 다시 무의식 내지 잠재 의식 속에 잠겨버리고 적절한 배출구를 찾지 못하게 된 데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정상인의 경우 본능적인 여러 충동이 순조롭게 충족되거나 적절히 억제되면서 사회 현실에 적절하게 적응한다. 말하자면 금기된 성적 충동이 시작이나 음악, 운동 등 정상적인 사회 활동이나 지적 활동으로 '승화' 되어 충족된다는 것이다. 그의 정신 분석은 정신병 치료만이 아니라 심리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철 학과 문학을 비롯한 현대 예술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간 정신의 무의식 내지 잠재 의식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드러나고, 그것이 인간의 이성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 니힐리즘(Nihilism) : 일반적으로는 일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의이지만, 특히 1860년대의 러시아에서 자유 사상가들이 취한 현실주의적·합리주의적 경향을 말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재래의 종 교나 철학을 부정하고, 그리스 정교·전제 정치·러시아 국민성의 삼위 일체를 신봉하는 전통적인 관념을 타파하였고, 다른 면에서는 실제의 생활 문제에 그 고찰을 집중시켜서 사회의 암흑면의 관찰을 철저 하게 하는, 일종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의 입장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인민 자체를 사회의 실체로 서 생각하지 않고, 각 개인의 발달, 자연 과학에 의거한 신생활의 형성을 기하였다. 투르게네프의‘아버지와 아들’의 바자로프는 니힐리즘의 전형이다. 이는 일종의 정신 운동으로서, 정치상·사회상의 실제 운동은 아니었으나, 순수하게 형이상학적 이론의 추구에 그치지 않고, 언제나 현실 사회의 반성과 분석에 착안하는 점에서 단순한 문학상, 철학상의 한 경향도 아니다. 그 권위에 대한 투쟁, 개성의 존중 따 위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길을 터 주었다. 체르니셰프스키, 도브롤류보프 등이 그 대표자이다. 19세기말 에서 20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새롭게 문제화하였으며, 특히 니체의 [대카당스의 논리]가 제시된 이래, 활동적·창조적 의의가 주어져 신가치 창조의 사상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1884-1900) : 독일의 철학자, 사상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문헌학을 연구하고, 약관에 바젤 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음악가 바그너, 역사가 부르크하르트와 친교가 있었지만 뒤에 절교하였다. 그 동안 프로이센 프랑 스 전쟁에도 종군하였으며, 이후 편두통과 발작적인 구토, 안질 등으로 1879년에는 바젤 대학을 사직하였다. '음악 정신에서의 비극의 탄생'(1872)에서 그리스를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별하였고,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에서 독자적인 초인 사상을 창출하였다. 크리스트교 를 약자의 종교로 보고, 자유스러운 절대 인간을 추구하였으며, 생은 고통이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긍정하는 것이 초인이라고 하는 강자의 철학을 주장하였다. 이 사상은 ‘선악의 피안’(1886). '이 사람을 보 라' (1908)에서 한층 더 명확하게 나타나 있으며, 권력 의지, 영겁 회귀의 개념도 확립된다. 역사주의를 배격하고, 일체의 가치의 전화를 주장한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시도 잘 썼다. 1889년초 돌발적인 정신 착란으로 10년간 병상에서 치료중 사망하였다. 실존 철학의 선구자이며, 그의 초인·권력 의지설은 뒤에 나찌스 사상을 낳게 했다고 한다. 이밖에‘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권력에의 의지’ 등을 남겼다.
- 실존주의(Existentialism) : 20세기 철학의 대표적 흐름의 하나인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등에서 유래하고 야스퍼와 사르트르 등을 그 대표자로 들 수 있다. 창조의 방법에 있어서 궁극을 신에게 돌리는 키에르케고르, 야 스퍼스의 종교적 실존주의와 니체, 사르트르, 마르셀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대별된다. 개인의 실존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러한 개인의 실존은 어떤 철학 체계나 이성적인 개념으로도 파악할 수 없으며 오 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개인의 실존은 이성이나 논리를 초월하여 어리석음과 부조리에 가득 차 있다. 그리하여 개인의 생활은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죽음의 사념 속에서 허덕인다. 이를 극복하는 길 은 개인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길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선택의 자유는 일면 불안과 두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하나, 본질적인 상황에서의 인간 각자의 결단에 의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동을 실존 주의는 강조한다. 실존주의는 관념론적 보편주의와 대립되며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적 객관 실증주의와도 대립된다. 주체적 인간을 문제로 삼으며 사상사적으로는 니힐리즘에 대한 극복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창조에 수반되는 불안·고통·절망·고뇌는 피할 수 없으나 그것을 초월하는 자유와 책임과 결단을 소유한다. 이 사상은 고도로 발달된 근대 문명 속에서의 인간성의 상실과 두 차례의 대전에 따르는 사화 불안을 배경으로 하여 2차 대전후의 프랑스를 중심 무대로 융성하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대결하는 유럽 의 최후적이고도 유일한 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실존주의는 2차 대전 때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뒷받 침하는 사상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 실용주의(Pragmatism) : 1877년 미국의 철학자 퍼어스가 행동을 중시하여 '개념의 전체의 의미와 진리성은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결과의 유효성 여하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정의하고, 후에 제임스가 행위는 관념의 지도에 의해 실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한다는 것 속에는 관념과 사유가 작용하고 있어 이들의 참위 여부는 행위 에 이익을 주는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하면서 절대주의·이성론·일원론에 반대하여 상대주의· 경험론·다원론을 주창한 데서부터 유명해졌다. 즉 인식 활동을 통한 생활·행위·실천에 연관시키는 입장에서, 행위는 관념이나 사유의 지도에 의하여 실행되며, 관념과 사유의 진리성은 행위의 유용성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설이다. 발전적 계보로서 듀이의 기구주의, 실러의 인본주의 등이 있다.
- 케인스(Keynes ;1883∼1946) : 영국의 경제학자로 제1차 세계 대전 후 금 본위제에의 복귀와 자유 방임주의에 반대하여 통화 관리 제도를 제창하는 동시에,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을 발표하여 이른바 '케인스 혁명' 을 일으켰 다. 그는 실업의 원인을 유효 수요의 부족에서 구하여, 정부에 의한 유효 수요의 창조로 불황을 극복하 고, 완전 고용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주장함으로써 수정 자본주의적 경제 정 책을 지지하였다.
- 베버(Weber ;1864∼1920) : 독일의 사회 과학자로 그의 학술 활동은 법학·경제학·역사학 등 다방면에 미치고 있다. 그는 '사회 과학 방법론' 을 통해 객관성과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과학적 연구를 주장하였다. 베를린 대학의 사강사 (私講師)로서 출발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등을 거치고, 한때 신경병으로 퇴임하였으나 그 뒤에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매우 독창적인 연구 업적을 내놓았다.
-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 : 독일의 사상가. 그의 저서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iamdes)' 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나타난 유럽주의에 대한 반성의 대표적 저서로서 문화를 유기체적으로 파악하여 생성, 발전, 몰락한다고 주장하며 유럽 문화의 몰락을 단정하였다. 이 저작이 갖는 갖가지 독단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문화의 불가피한 붕괴가 문명으로의 이행에 있다고 한 것이며, 그것이 서양에서는 19세기에 수행된다고 하여 서양의 몰락을 예언함으로써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혼미하던 당시의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관을 단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슈펭글러는 단일한 직선적인 역사 발전을 거부하고 여러 문화권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의 진화와 같이 성장과 소멸의 길을 걸어가며 그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문화를 춘하추동의 사계에 비유하여 서양 문명의 경우, 봄-중세 전성기, 여름-르네상스, 가을-18세기 상공업의 전성, 겨울-제국주의 시대로 특징지었다.
- 토인비(Toynbee ;1889∼1975) :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문명 비평가, 그의 주저 '역사의 연구' 는 1934년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1961년에 완결된 12권의 방대한 것이었다. 그는 인류 문화를 20여 개의 문명 사회로 나누고, 이러한 문명 사회가 탄생·성장·붕괴·해체의 4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토인비는 방대한 자료를 이용하여 문명의 생성과 해체에 관한 역사 법칙을 일반화하였는데 문명의 흥망에 관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도전과 응전' 이다. 내외의 각종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할 때 그 사회는 성장하고 흥하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쇠퇴하고 망한다는 것이다.
- 역사주의(Historismus) : 19세기말부터 학문의 각 분야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새로운 개념. 일체의 사물은 역사의 생성 과정 속에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가치나 진리도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하는 입장. 주로 19세기의 독일을 중심으로 한 낭만주의 사조에 입각한 역사 이해의 태도로서 트뢸치는 역사주의와 자연주의의 두 가지를 근대 학문의 2대 소산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역사성 밑에서] 해석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받았는데, 19세기말이래 이 말이 쓰이기 시 작하게 된 것도 그러한 비판적인 뜻에서였다. 1870년대에 니체는 [역사병]을 시대에 공통되는 폐단이라 하였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반역사주의 주장이 유력해지자 트뢸치는 역사주의를 역사 철학의 과제로 취급하여 역사주의의 입장에 서면서도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을 수가 있는가의 여부를 검토하였다. 그 후 마이네케는 역사주의를 그 성립의 시점에서 고찰하여 반역사주의의 시류에 대항하였다.
- 헤세(Hesse, Hermann ;1877-1962) : 독일의 소설가. 남독일의 시바벤 지방의 칼브 태생. 목사의 아들로서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내면적인 갈등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한때 우울증에 걸려 자살을 기도했으나, 그 정신적인 위기 속에서 기계공 수습생, 서점의 점원 등을 거쳐 시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장편 소설 '페터 카멘 찐트'는 아름다운 청춘의 감정을 묘사한 이야기이다. 1911년에는 인도를 여 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평화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관철하려고 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배반자 취급 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심경에 심대한 상처를 주었다. 후기의 소설 '데미안'(1911), '황야의 이리'(1927), '유리 구슬의 유희'(1943)에서는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악마적인 세력, 자기의 무의식 속에 잠 재하는 반사회적인 세력과의 투쟁이 묘사되어, 자유를 근저로 하는 사회 조직에의 탐구가 엿보인다. 그는 일찍이 유럽적인 합리주의에 회를 갖고 동양의 지혜를 배우려 했는데, 그의 최고의 예술적인 결정은 「인도의 시」라고 불리는 장편 '싯다르타'이다. 1923년 이후 스위스에 귀화했으며, 194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1. 미국과 유럽의 동향에 대하여 약술하라.
- 베트남 전쟁 : 베트남의 근대사는 매우 험난하다. 1883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병합, 인도차이나 반도의 절반 이상을 손에 넣고 냉혹한 지배 정책을 실시했다. 베트남인들 은 의병 운동, 게릴라전 등을 펼치며 프랑스 식민 통치자들에 대항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주 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호치민(湖志明)이다. 그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19살에 선원 이 되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1918년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 모스크 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했으며, 1924년 중국 광동으로 가 국공 합작을 지도하던 러시아인 보 로딘의 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30년 2월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 하면서 베트남에는 새로운 지배자 일본이 나타났다. 공산당은 각계각층의 혁명 세력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모으기 위해『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조직했다. 베트민은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8월 13일 일제히 봉기하여,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를 8 월 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일본이 물러간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을 프랑스였다. 연합군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할하여 북엔 장개석군이, 남엔 영국군이 진주하도록 결정했다. 프랑스는 영국을 따라 들어와 행정 기관을 장악하고, 저항하는 베트민을 진압했다. 북의 장개석군은 일찌감치 손을 뗐다. 베트민은 다시 항전을 개시했다. 베트민은 1954년 봄, 디엔 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궤멸시켰다. 프랑스는 휴전 협정을 맺고 17도선 이남에서의 총선거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나 전국적 총선거는 유산 되고, 17도선 이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섰다. 원수가 된 고 딘 디엠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었다. 잠정적인 군사 분계선이었던 17도선은 국경선이 되었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양단되었다. 디엠 정권 의 전횡과 탄압·무능·부패는 남베트남 인들을 다시 저항의 길로 내몰았다. 이들은 디엠과 미국은『베 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불렀지만, 처음부터 이들이 공산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1960년 남베트남의 혁명 세력은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을 결성하고 전면적인 무장 투쟁에 나섰다. 미국은 베트남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주둔 병력을 계속 증강시키고 나아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 전면전을 시0徘杉? 초강대국 미국과 베트남의 싸움은 당연히 미국의 승리가 예견되었다. 막대한 군수물자가 투입되고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베트남 정글에서 목숨을 바쳤지만 그 곳에서 미국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고립되었다. 식수는 필리핀에서 공수해 오고 음식은 통조림만 먹어야 했다. 베트남인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은 상처만 입고 물러났으며 참전했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었던 전쟁의 의미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번민에 빠졌다. 미국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정당하며 또 승리한다는 미국의 우월감은 여지없이 실추되었다. 전년도까지 일진 일퇴의 공방을 계속했던 베트남 전쟁은 1975년이 되자 종결로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해방군은 남베트남의 경계선을 넘어 1월 7일에 푸오클롱 성을 함락시켰다. 3월 9일에는 중부 고원 지대에서 공세를 시작했고 패주하는 정부군을 추격했다. 한편 사이공에서는 사태 타개의 전망을 갖지 못한 대통령 티우에게 군· 시민·종교계·언론계로부터 비판이 잇따랐다. 4월 17일에는 인접국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이 해방 세력의 손에 함락됐다. 사이공 시민과 미국에게 버림받은 티우는 21일 마침내 사임했다. 28일 사이공 시민 의 기대를 받으며 등장한 두옹 반민 새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즉시 정전과 평화 교섭 재개를 제창했지만 이에 대해 해방군은 탄소니에트 공항과 사이공에 대한 포격으로 응답했다. 29일 미국 대사관이 폐쇄되고 직원은 헬리콥터로 탈출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30일 아침, 해방군이 사이공에 진격했다. 오전 10시 30분, 대통령 두옹 반 민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고 텔레비전을 통해서 정부군 병사에게 전투 정지를 명령했다. 12시 30분, 해방 전선기가 대통령 관저에 휘날리고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은 끝났다. 100여 년에 걸쳐 프랑스, 일본, 미국과 차례로 싸워 통일된 독립 국가를 세운 베트남, 세계 역사상 이들처럼 강대국과 맞서 끈질긴 싸움을 벌인 예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 자유 노조 : 폴란드의 자주 관리 노동 조합인 <연대(連帶)>를 가리키는 통칭으로 <연대(Soildarlity)>란, 1980년 여름의 '폴란드 위기' 로 일약 각광을 받았던 L.바웬사가 이끄는 폴란드 자주 관리 노조의 정식 명칭이다. 이것은 노동 조합 활동으로서 제1회 전국 대회(1981년 10월)에서는 기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에 이르는 <자주 관리 공화국>이라는 이상상을 내세웠다. <연대>는 동유럽 사회주의권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체제 내에서의 노동 조합의 자치와 지방 자치를 주장하고 있으나 그것이 자유화 운동의 성질을 띠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걸프 전쟁 : 걸프 전쟁의 발단이 된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새벽 3시, 이라크 군의 탱크가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섰다. 쿠웨이트 왕과 그 가족은 재빨리 사우디 아라비아로 도망쳤고, 이라크 군은 별반 저항도 받지 않고 7시간만에 쿠웨이트를 손에 넣었다. 한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11월 29일, 오는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라크에 대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한국 전쟁 이후 40년만에 유엔 역사상 두 번째로 유엔군 이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이미 20만의 병력을 페르시아만에 배치해 놓고 있었다. 안전 보장 이사회가 정한 시한을 넘긴지 24시간 후인 1991년 1월 16일 자정을 기해 미국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전면 공습,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뗀 지 25년만에 다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서방측에는 잔인한 독재자요, 아랍 제국의 건설이라는 야망에 들뜬 전쟁광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그를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생각했다. 걸프 전쟁은 서방측의 최신예 무기가 첫선을 보인‘화려한 무기 전시장’이었다. 30센터 밖에 오차가 나지 않는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 레이다에도 포착되지 않는 F117A 스텔스기, 스커드 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아파치 헬기, 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 위성의 활약도 눈부셨다. 미사일 공격을 미리 알고 경보를 발하는 조기경보 위성, 구름 층은 물론 사막의 모래층까지 3미터 가량 투시할 수 있는 레이더 위성 라크로스, 적진 관측 사진을 찍어 보내주는 사진 정찰 위성 등등 첨단 과학 기술과 전자 장비가 총동원 된 ‘전자오락 게임’같은 전쟁이었다. 다국적군은 이 같은 최신무기로 하루 평균 2천 회, 30초에 한 번 꼴로 이라크와 쿠웨이트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2월 24일에 미국, 영국, 프랑스, 사우디아라비아 등 11개 국으로 구성된 다국적군이 지상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앞서,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중재로 이라크가 제 시한 8개안의 종전 평화 협의안을 다국적군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26일 새벽 1시 35분, 이라크는 쿠웨이트 주둔군을 철수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미국은‘아무런 통보를 받지 못했다’면서 공격 을 멈추지 않았다. 27일, 미국 대통령 부시는 밤 12시를 기해 종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휴전 회담은 3월 3일 이라크 남부 사프완 공군기지에서 열렸다. 미국의 슈와르츠코프 다국적군 사령관, 사우디의 할 리드 빈 술탄 아랍군 사령관, 이라크의 아마드 국방부 작전국장, 마흐무드 3군 사령관이 참석한 가운데 이라크는 미국측이 제시한 평화안을 전면 수용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40일에 걸친 걸프 전쟁은 이라크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 독일 통일 :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제국 의회 의사당 앞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있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동독의 바이츠제커 대통령, 데베지에르 총리, 인민의회 의장 자비네 베르그만 폴 여사 등 동서독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면 계단 앞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에 삼색기가 천천히 올라갔다. 군중들은 일제히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 펴졌다. 뒤이어 환성이 터지고 폭음 소리와 함께 찬란한 불꽂이 치솟아 밤하늘을 수놓았다. 동서로 갈려 있던 독일이 45년만에 하나로 통일되는 순간이었다. 동독, 정식 명칭 독일 민주 공화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서독, 정식 명칭 독일 연방 공화국이 면적 37만 5 천km, 인구 7천7백6십만 명을 가진 유럽의 거인으로 재탄생했다. 면적으로는 프랑스·에스파냐 다음의 3위이지만 인구는 서유럽 제 1위이며, 유럽 전체로 보아도 소련 다음 가는 대국이 된 것이다. 통일 이전 의 서독은 국민 총생산 세계 3위, 세계 제일의 수출국, 유럽 공동체 공업 생산량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 었으며, 동독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가장 선진이었다. 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자유· 민주』를 외치는 10만 군중의 시위로 시작된 동독의 개혁은 꼭 일년 만에 서독으로의 흡수 통합에 의한 독일 통일로 종결되었다. 동독은 노동자들에게 버림받았다. 90년 3월 18일의 총선에서 동독 노동자들의 63%가 서독과의 급속한 통합을 지지하는 기독교 민주 연합(CDU)등 우익 정당에 몰표를 던졌다. 그간 살아온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낳은 결과였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들의 불만을 자유 와 민주, 시장경제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게 했다. 독일인이 통일 직후 가장 많이 쓴 말은『당케, 고르 비』였다. 동독 정권이 위기에 몰렸을 때, 소련이 무력 개입을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통일에 결정적인 일조를 했다는 뜻에서이다. 탈출하는 동독인에게 국경을 개방하여 통독의 기폭제 역할을 한 헝가리도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 소 연방 해체, 독립 국가 공동체 출범(1991) : 1991년 12월 8일,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하여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공화국 대통 령, 슈시케비치벨로루스 (구백러시아) 최고회의의장 3인은 <독립 국가 공동체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창설을 선언했다. 벨로루스의 부크 강변에 있는 브레스트에서 비공개 회담을 가 진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대신 『외교·국방·핵통제권』을 공동 관장하는 독립 공화국들의 공동체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연방 대통령 고르바초프는 『3개국만의 합의로 소련의 운명을 결정지 을 수는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나머지 8개 공화국들이 속속 <공동체>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 히고 대세가 기울자 고르바초프도 하는 수 없이 이에 승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발트 3국이 독립해 떨어 져나간 후, 나머지 공화국들을 묶어 새로운 연방을 결성하려던 고르바초프의 신 연방 조약 계획은 물거 품이 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1917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 공시키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로 당당히 출범한 지 꼭 74년만의 일이다. 독립 국가 공동체는 구 소련 같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갖지 않는다. 구 연방하에서는 중앙 정부 밑에 있는 행정 단위 정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는데 비해, 이제는 각 공화국이 저마다 하나의 독립국이 되어 독자의 법률·정책·외교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본부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벨로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 게 되자 11개 공화국 가운데 가장 큰 러시아 공화국이 공동체의 주도권을 쥐고, 그 대통령인 보리스 옐 친이 고르바초프를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 공화국이 구 소련의 모 든 채무를 승계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후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지니고 있던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모 든 권한을 차례차례 빼앗기 시작했다. 그의 구상은 각 공화국들의 독립 주권을 인정하되, 러시아 공화국 의 세력권 안에 묶어둔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12월 26일 연방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 독립 국가 연합 구성 협약
제 1조 합의 당사국들은 독립 국가 연합을 창설한다. 제 2조 당사국들은 민족과 기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 공화국 시민들의 평등권 및 자유를 보장한 다. 합의 당사국들은 다른 당사국들의 시민은 물론 자체 영토에 거주하는 비시민권자에게도 인권에 대 한 국제 기준에 따라 민족·정치·사회·경제 문제 등에 대한 권리와 자유를 보장한다. 제 5조 당사국들은 독립 국가 연합 내의 상대방 영토와 국경선의 보전을 인정하며 존중한다. 이와 함 께 국경의 개방을 보장하며 연합내 해당국 시민들의 여행 및 정보 교환의 자유를 보장한다. 제 6조 당사국들은 국제 평화와 안전 보장, 무기 방위비의 지출을 제한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들을 시행한다. 당사국들은 또 엄격한 국제적 통제하에 전체적이고 완전한 무장해제를 위해, 모든 핵무기의 해체를 위해 노력한다. 제 7조 합의 당사국들은 독립 국가 연합의 공동 조정 기구들을 통해 상호 협력의 토대 위에 이루어지 는 외교 정책, 운송과 통신, 이민, 환경 보호 및 조직 범죄에 대한 대처 방안 등 각각의 협력 분야에 대 한 활동 영역을 인정한다. 제 9조 이 협정의 기준에 대한 해석과 시행을 둘러싼 이견은 해당 기구간의 협상과 아울러 필요한 경 우 국가 또는 정부간의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 제 11조 이 협정에 서명한 순간부터 소 연방을 포함한 제3국의 법은 서명 당사국의 영토에서는 효력 을 갖지 못한다. 제 12조 당사국들은 국제적 의무, 조약, 구 소련의 협정 등의 이행을 보장한다. 제 13조 이번 협정 당사국들이 제3국과의 관계에서 갖는 의무 사항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협정은 소 련의 다른 공산국들은 물론 이번 협정의 목적과 원칙을 공유하는 기타 국가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한 다. 제 14조 독립 국가 연합의 여러 조정 협력 기구를 두는 위치는 민스크로 하며 이번 협정에 서명한 합 의 당사국들의 영토내에서는 앞서 소련 산하에 있던 모든 조직들의 활동이 중단된다.
12. 변모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대하여 약술하라.
- 문화 대혁명(1965-69) : 중국에서 일어난 권력자 상호간의 이념 투쟁. 1956년 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맹렬히 비판하고 평화 공존 노선을 제창한 이래, 중국은 소련의 노선을「타락한 수정주의」로 낙인찍고, 중국에서 그와 같은 수정주의가 대두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이 문화 혁명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1957년부터 시작한 중국의 대약진 정책이 실패한 후, 1960년부터는 조정정책이 실시 되었는데, 이때에 마오쩌둥 비판이 일어나자, 제일선에서 물러났던 마오 쩌둥은 조정기의 제 정책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고 하여, 수정주의가 중국에 확대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계속 혁명론을 내세워 사상, 정치면에서 마오쩌둥 이념을 재강조하였다. 1965년 과학원장, 꿔모뤄(郭沫若)가 마오 쩌둥 사상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다는 자기 비판을 하기에 이르러서는 문화 혁명은 수정주의의 원흉으로 국가 주석 류 샤오지(劉少奇), 중앙당 총서기 떵 샤오핑(鄧小平) 등의 실권파를 지목하고 1966년 봄부터 전국적으로 혁명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군사, 기술을 강조하는 "전(專)"보다는 사상 교육을 강조하는 "홍(紅)"을 중 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마오쩌둥과 그의 반대자들 간의 정치 투쟁으로 진전되어 마오쩌둥은 1966년부터 청소년으로 조직한 홍위병 등을 동원하여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군부의 뒷받침을 받은 홍위병은 탈권 투쟁이라 하여,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당과 국가의 많은 간부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 로 몰아 타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문화 대혁명' 으로 중국 내의 권력 투쟁의 한 표본이었다. 그간 중·소 관계도 악화 일로를 걸어, 중국은 소련을 사회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그 결과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통치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었고, 농·공 분야의 산업 위축은 물론 지식인 탄압에 따른 문화면의 파괴, 정체는 매우 심했다.
-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이스라엘에게 생활권을 빼앗긴 아랍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그들의 생활권 수복을 위한 기구로 PLO 를 조직하고(1964) 레바논에 거점을 두고 주변 아랍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대 이스라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민족 평의회(PNC)가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고(1988.11), PLO의 의장 아 라파트가 이스라엘을 인정함으로써 2차 대전 후 계속해서 중동 평화를 위협해 오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