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 세계문화사(상)

세계문화사(상)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Ⅰ. 세계역사와 우리의 생활

◑ 역사의 어원

▶ 중국의 경우: 명 말부터 사용된 역사라는 말의 뜻을 살펴보면, 사(史)는 '기록하는 사람' 또는 '사서(史書)' 를 뜻하고, 역(歷)은 '시간의 경과' 를 뜻한다.▶ 서양의 경우: 역사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어의Historia에서 유래한 History(영어)와 Geschichte(독어)가 그것이다. Historia는 이야기, 지식의 탐구, 조사의 뜻을 지니고 있고, Geschichte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geschechen)'라는 말에서 나온 명사로, '일어난 사실'을 뜻한다.

▶ 객관과 주관: 헤겔은 이 두 가지 어의를 역사의 객관적 측면과 주관적 측면이라 하였다. 즉 객관적 의미의 역사는 'Geschichte'나 '歷'과 같이 '과거의 사건'을 뜻하는 것이고, 주관적 의미의 역사는 'Historia'나 '史' 와 같이 '과거 사건의 기술'을 뜻하는 것이다.

◑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

▶감계주의(鑑戒主義): 역사 속에서 규범을 찾아 그것을 거울로 삼아서 인간의 행동을 비추어 보려는 경향이다. 특히, 통치에 참고하려고 역사를 서술하였다.

▶상고주의(尙古主義): 옛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새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보아 고대를 존중하여 후대의 퇴폐해진 것을 고대의 이상 사회로 돌려야 한다는 관점을 보인다. '서경'과 '시경'에 나타나 있다.

 

▶순환 사관(循環史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관점에서 왕조의 흥망 성쇠를 바라보고 있다. 맹자의 일치 일란설(一治一亂說)이나 전통적인 오행설(五行說)에서 그 유형을 찾을 수 있다.

◑ 역사란 무엇인가?

【랑케의입장】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는 과거를 심판하고 동시대인들에게 미래의 행복을 교시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러나현재의 역사 연구는 그같은 고상한 임무를 수행하지 않으며, 단지 실제 본래 있었던 그대로의 것을 보여줄뿐이다.

【카의입장】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상호 작용은 현재와 과거사이에 상호 관계를 아울러 내포한다. 역사가와 역사상의 사실은 서로가 필요하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 작용이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 사실로서의 역사 - 과거에 인류가 살아온 발자취, 즉 과거에 일어났던 객관적 사실 자체를 모두 역사로 해석하는 것으로 과거의 실증적인 복원에 주력하게 된다. 19세기의 근대 역사학을 확립했던 랑케가 이 입장에 있었다. 그는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의 지상 과제로 삼아야 하고 이 때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는 입장에 있었다. 랑케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역사가는 자신의 주관을 버리고 과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 사실 자체가 진실을 밝혀 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 기술(記述)로서의 역사-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역사가가 그 시대의 견해와 지식으로 자료를 해석하여 재구성하여야 한다. 즉 시대가 변하고 시대적 요청이 변하면 역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 크로체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로, 서술되는 것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고 있는 것은 현재의 요구이다"라고 보았다. 카도 역사가는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사실을 만든다고 하여 역사가의 해석을 통한 역사의 '기술'을 강조하였다. 역사가가 주관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과거 사실을 취사 선택하는 것 자체가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어떤 입장을 가지고 사실을 정리하고 해석을 하지만 그 사실 속에서 역사가는 처음 가졌던 견해를 수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사실과 현재를 사는 역사가는 끊임없이 대화한다.

1. 문명의 새벽

(1) 인류의 출현

◑ 인류의 기원: 1959년 리키 박사 팀은 아프리카 탄자니아 공화국의 탕가니카에서 최고 인류의 두개골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Australopithecus boisei)로서 약 175만년 전에 생존한 직립하고 도구 제작 능력이 있는 인간의 선조라고 밝혀졌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의 발견은 인류학의 전통적 관념을 뒤엎는 것이었으나 다시 다른 원시 인간의 유골이 발견됨으로써 결론이 바뀌었다. 리키는 두 번째로 발견한 유골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라 명명하였다. 이것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더 큰 뇌를 갖고 도구를 제작한 인류라고 추정되었다. 하빌리스란 능력이 있다는 뜻이므로 결국 호모 하빌리스는 도구 제작 능력이 있는 인류를 의미한다. 그것은 신장 4피트 가량의 채식만을 하던 오 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에 비해 아무 것이나 먹는 잡식 인류로서 역시 인간의 선조라고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리키의 주장에 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으며 인류학자들은 한때 가장 최초의 원인류 (猿人類 Hominids)라고 생각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를 내세워 그 생존 연대를 170만년 전 으로 소급 단정하여 또다시 최고 인류의 하나로 주장하였다. 1924년 남아공의 해부학 교수인 다트 (R.A.Dart)가 발견한 최초의 인류의 두개골로 다트는 이것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즉 '남 방의 원숭이'라고 명명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키가 1m 내외로, 그 두뇌의 용적도 450-550ml 밖에 안되어, 현대인의 3분의 1정도이었으며, 용모도 유인원과 비슷했으나 직립하여 두발로 걸어 다녔다는 점 에서 사람과(Hommonides)에 속한다. 두발 끝이 볼품없게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어 몸을 아래위 좌우로 흔들면서 걸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들이 사냥한 동물들의 두개골이 대부분 왼쪽이 손상되어 있어 이들은 오른손잡이로 파악된다. 조약돌을 깨뜨려 간단한 연모를 만들어 썼다. 이들이 직립 보행하였으며 도구를 사용한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불과 언어를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호모 하빌리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의 셋이 다같이 가장 오래된 인류의 선조인 셈이며, 공통점은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은 400만년 이전으로 그 생존 연대를 추정하는 아파르원인(猿人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발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디오피아의 아파르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직립 원인이라 추정되고 있다. 아파르 원인이 둘로 크게 갈라져 그 하나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다른 하나가 호모(Homo)로 분지되었다.

 

◑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s) :베이징인, 자바인, 하이델베르크인 등을 가리킨다. '직립한 사람' 이라는 뜻으로, 홍적세 초기에서 중기까지 생존한 사람들이다. 석기를 만들었고, 뇌의 용적은 대체로 1000cc 정도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2배이다. ▶ 북경 원인(Sinanthropus pekinensis) : 1927년 북경 의과대학 교수 캐나다인 해부학자 데이비드슨 블랙은 수 백년 전부터 이곳 동굴에서 화 석을 가루로 내어 약으로 팔아 왔다는 소문을 듣고 베이징 근처 저우커우텐(周口店)의 석회암층 동굴을 발굴 조사한 결과 불에 탄 파편과 40여명 분의 원시 인류의 뼈 등 다수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 자바인(Pithecanthropus erectus) : 1891-92 자바섬의 트리닐에서 네덜란드의 식민지군에 복무하던 유젠느 듀보아가 신장 165-170cm가량의 화석을 발견하고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즉, 직립 원인이라고 명명하였다. ▶ 하이델베르크인(Homo Heidelbergensis) : 1907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가까운 마우어의 지하 24미터 지점에서 발견되었으며 형체가 두드러 지게 크고 앞쪽의 돌출도 현생 인류와 많이 다르나 치아의 모양과 배열은 현생 인류와 매우 가깝다. 시대적으로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와 네안데르탈인과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 호모 에렉투스와 현생 인류의 중간형으로 네안데르탈인으로 대표된다. 홍적세 중기 이후의 인종으로 독일의 네안데르탈 지방에서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불린다. 약 20만년 전에 유 럽에 널리 퍼져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두뇌의 용적은 1200cc정도이며 신장은 160cm정도. 매장의 풍습 과 종교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흔적이 발견된다. ▶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 : 네안데르탈인이 발전시킨 문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종교적 감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를 남긴 점이다. 1908년 남 프랑스의 유적 르 무스티에에서 18세 소년이 옆으로 누워 무릎을 구부린 채 부싯돌을 싼 베개를 베고 잠자는 모습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도구와 뼈가 부장되어 있었다. 시체를 잠자는 자세로 안치한 것을 보면 이들은 죽음 그 자체를 잠으로 여겼으며 종교적 감정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부장품으로 보아 사후 세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 유럽의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중국의 저우커우텐 상동인 등을 가리킨다. 두개골의 용적이 현대인과 같은 정도이고 용모도 거의 같아, 현대인과 직결된다고 간주되어 진다. ▶ 크로마뇽인(Cro-Magnon 人) : 하버드 대학의 할람 L. 모비우스가 1868년 프랑스 도르도뉴 부근 레제이지이 간선도로 유적에서 세밀 한 조사 작업을 하던 중에 길가에 있는 크로마뇽(Cro-Magnon은 칠뜨기라는 의미의 사투리)이라는 동굴 속에 잘 매장된 사람의 뼈와 석기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몸집이 가늘고 길며 두뇌 용적이나 모습이 오늘날의 유럽인과 비슷하였다. 이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으며 동굴 벽화(동물상, 여인상)를 남겨 풍요 다산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만도 크로마뇽인의 동굴 예술 유적은 70군데가 넘는다. 크로마뇽인은 수렵 동물의 정확한 관찰자이며 뛰어난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재능을 자각하고 발전시켜 그것을 몽상적 행위나 의식에까지 높여 주는 복잡한 생활 방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시체의 창백한 얼굴에 빨간 안료를 칠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유럽에서는 죽은 자의 얼굴에 화장을 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두개골을 갈아 컵으로 사용한 흔적도 있다. (중세 시대에는 크리스트교의 성자의 해골이 의식 때 컵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상동인(上洞人) : 1933년 중국 저우커우덴의 윗동굴(上洞)에서 발견된 인류인데 발달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서 황인종 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 그리말디 인(Grimaldi 人) : 1909년 모나코 그리말디의 그로트 데 장팡 동굴 하층에서 발견된 노파와 소년의 유골로서 대표된다. 신장은 다같이 160cm정도이며 신체적 특징으로 보아 오늘날 흑인의 조상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방에 널리 퍼져 살았는데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이동해 가다가 크로마뇽인들에게 격퇴 당했을 거라고 추측되고 있다.

 

◑ 라스코 동굴(Lascaux) : 프랑스의 도르도뉴 현 베제르 계곡에 있는 구석기 시대 후기의 벽화가 있는 동굴 유적. 1940년 한 마리의 개가 갈라진 틈속에 빠져 이를 구하려 한 소년이 구멍을 파고 들어가 수백 미터의 동굴이 처음 발견되었다. 2만5천년전의 그림으로 소, 사슴, 돼지, 맘모스 등을 붉은 색, 검은 색, 노란 색 등을 써서 묘사해 놓았다. 이 곳 동굴의 각 벽면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그것은 알타미라 동굴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흑·갈·황·백색 등의 채색에 의한 동물화가 많다. 소·말·사슴 등을 주로 하여 그 표현력은 사실성에 있어서는 알타미라의 그것에 뒤지지만, 그 거친 필치는 생동감이 넘쳐 있고, 특히 구도에 있어서는 복잡성이 가미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그림으로서는 새 모양의 머리를 한 인물과 막대기 끝에 머문 새의 그림이다. 인물은 일종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주술사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1963년 그림에 녹조류가 번식하여 동굴을 폐쇄시켰다.

 

◑ 선사시대의 미술 : 현재 우리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만년 전이었다. 이 때에는 연모 를 만드는 기술도 크게 발달하여 창이나 활이 사용되고, 화살촉, 창날 등 날카로운 뗀 석기와 함께 작살, 낚시 등 골각기도 만들어져, 큰 짐승과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술이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에 그려진 동물의 그림은 아주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이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동굴 깊숙이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그려졌다던가 중첩해서 그렸다는 점으로 보면 그들이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벽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마술과 같은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마술사들이 자신들이 복수하려는 대상의 머리카락을 태우거나, 인형을 만들어 찌르듯이, 사냥감은 벽에 그려짐으로 인해서 이미 그들에게 잡힌 것이었다. 구석기인들은 이러한 그림 위에 창을 찌르는 의식을 치른 후 다음날 자신감 있고 용감하게 사냥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원시인의 사물에 대한 사고 방식은 어떤 결과는 비슷한 것을 표현함으로 얻어 진다고 믿었는데 예를 들어 사냥이나 식물의 성장 등을 표현하는 춤을 추거나 그림을 그리면 사냥이나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지금도 각 나라의 민속춤에는 사냥하는 춤이나 농사를 짓는 행위의 춤이 많이 남아 있다. 한편 이러한 짐승의 그림과 의식에는 다음 사냥이 좀더 잘되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자기들의 손에 죽은 짐승들의 혼을 기리는 심정, 그리고 어려운 사냥에 성공했다는 자부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 라스코 동굴(Lascaux) : 프랑스의 도르도뉴 현 베제르 계곡에 있는 구석기 시대 후기의 벽화가 있는 동굴 유적. 1940년 한 마리의 개가 갈라진 틈속에 빠져 이를 구하려 한 소년이 구멍을 파고 들어가 수백 미터의 동굴이 처음 발견되었다. 2만5천년전의 그림으로 소, 사슴, 돼지, 맘모스 등을 붉은 색, 검은 색, 노란 색 등을 써서 묘사해 놓았다. 이 곳 동굴의 각 벽면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그것은 알타미라 동굴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흑·갈·황·백색 등의 채색에 의한 동물화가 많다. 소·말·사슴 등을 주로 하여 그 표현력은 사실성에 있어서는 알타미라의 그것에 뒤지지만, 그 거친 필치는 생동감이 넘쳐 있고, 특히 구도에 있어서는 복잡성이 가미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그림으로서는 새 모양의 머리를 한 인물과 막대기 끝에 머문 새의 그림이다. 인물은 일종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주술사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1963년 그림에 녹조류가 번식하여 동굴을 폐쇄시켰다.

(2) 원시인의 생활과 문명의 탄생

◑ 석기·청동기·철기 시대의 구분 : 석기 시대를 구·신석기로 나누는 것은 영국의 고고학자 러벅(Lubbok,Sir John, 1834∼1913)에서 비롯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시대의 과도기로서 중석기 시대를 설정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 시대 는 세석기를 특징으로 하는 채집, 수렵, 어로 생활의 마지막 단계인데, 흔히 구석기 시대의 말기로 취급 된다. 그리고 덴마크의 고고학자 톰센(Thomsen)의 제창으로 인류가 주로 사용한 연장의 재료에 따라 인류사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로 구분하는 3 시대제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 신석기 혁명(Food Producting Revolution) : 기원전 7천년 전, 산업 혁명과 맞먹는 중대한 변화가 인류사에 나타났다. 이를 신석기 혁명(농업 혁명)이라고 한다. 신석기 혁명이라는 표현은 영국의 고고학자 차일드(V.G. Childe)가 처음 사용하였다. 신석기 혁명이 가져다 준 첫 번째 변화는 먹을 것을 찾아 떠돌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인간 사회에 불평등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원시 사회는 평등 사회였다. 그러나 그 평등은 먹을 것이 적기 때문에 이루어진 평등이었다. 누군가 굶어 죽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힘의 약화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업 혁명 이후 개인이나 집단이 잉여 생산물을 사유하게 됨으로써 평등은 깨어졌다. 빈부 격차가 생기고 신분 지위의 고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농경의 시작은 인류의 생활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삽이나 손도끼 같은 생산 도구가 개발되었고, 또한 분업이 이루어졌다. 정착 생활이 확산되면서 비약적인 인구 증가 현상이 나타났고 사냥하던 짐승을 사육하였다. 또한 곡물 빻기, 의복 제작, 굽기 등의 원시적 수공업이 형성되었고 아울러 저장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현재도 채집 수렵으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적도 아프리카의 피그미족, 남아프리카 사막의 부시 맨, 말레이 반도,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인디언, 에스키모 등이다.

◑ 비옥한 초승달 지대(fertile crescent) : 세계에서 최초로 농경이 이루어 졌다고 여겨지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소아시아의 일부, 시리아, 팔레스티나, 아라비아 북부를 돌아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초승달형의 지대를 말한다. 이 지대에서는 일찍이 (B.C.7000년경) 보리와 밀, 염소, 양 등의 야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농경과 목축이 이루어 졌다.

◑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 원시 사회는 남녀 사이도 평등한 사회였다. 당시는 자식의 혈통이 어머니를 통해서만 확인되는 모계 사회였고, 인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으므로 임신, 출산, 육아라는 여성의 역할이 매우 중요 하고 거룩한 일로 여겨졌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공동체 전체의 경사였고 여성의 일은 공동체의 살림을 유지하는 사회적 노동이었다. 또한 남성이 해 오는 사냥보다는 여성이 맡아 하는 채집 활동이 보다 더 안정된 식량 확보 방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농경과 목축이 남성의 일이 되고 거기서 생겨난 잉여 생산물을 주로 남성이 사유하게 되면서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사유 재산의 주인이 된 남성은 그것을 남 아닌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려면 자신의 자식이라는 확인이 필요했으므로 여성에게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를 금지시키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여성은 정조를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새로운 도덕 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여성은 집안에서 한 남성만을 위해 일하고 그의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을 최고의 임무로 여기고 사는 열등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 고대 문명의 성립

▶ 인류는 일만 전쯤 처음으로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정착 생활이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초기의 농업은 천수(天水)에 의존하며 전혀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약탈 농업이어서 자주 경지를 바꿀 필요가 있었고 촌락 또한 가끔 이전해야만 했기 때문에 큰 취락은 형성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큰 강 유역에서부터 관개 농업이 발전하게 되면서 농업 생산이 늘어나고 많은 인구가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게 되어 대규모 촌락(도시)이 형성되었다.

▶ 청동기의 사용은 농업 생산을 한층 증대시킴과 더불어 보다 강력한 무기를 발달시켜, 주민 사이에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고 계층 분화가 일어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농경은 물 과 비, 바람과 태양 빛 등 거대한 자연의 힘에 크게 좌우되었으며, 농경민들은 이러한 자연의 힘을 신 이라 믿었다. 이로 인해 종교(점복) 행위는 사회생활의 중요한 일면이 되었으며 이와 같은 종교 의식 과 관련하여 문자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 여섯 날과 여섯 밤 동안 바람과 홍수가 밀어닥친 뒤 모든 사람은 진흙으로 변해 있었다. --- 비가 그친 뒤에도 산꼭대기에 매달린 배는 6일 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수메르 인의 서사시 [길가메쉬(Gilgamesh)]의 홍수 신화

2. 중국의 고대사회

(1) 중국 문명의 형성

◑ 양샤오 : 중국의 허난 성 뤄양의 서쪽에 있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 1921년 스웨덴의 앤더슨이 이곳에서 채도를 발견하면서 유명해졌다. 유적은 촌락의 남방, 황토 고원 상에 있으며, 길이 600m, 너비 480m의 지역에 걸쳐 유물 포함층이 퍼져 있으며, 그 두께는 평균 3m에 이르고 있다. 앤더슨 박사는 깐쑤 성에서 얻은 채도 자료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그것들을 6기로 편년하였는데, 양샤오 기는 바로 중국 채도 문화의 전형적인 시대로 생각된다. 채도 외에도 석기로는 몸통이 두터운 대형 석부(石斧)나 끌 모양의 석부, 석 촉 등이 나왔으며, 또 농기구의 일종으로 생각되는 돌 식칼, 왕겨의 압혼을 남긴 토기 조각이 나옴으로 써 농업이 행해졌음이 분명해졌다. 또 놀랄 만큼 다량의 돼지 뼈가 나왔는데 가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 방추자, 뼈 바늘이 출토되었다.

◑ 룽산 문화(龍山文化) : 중국 화북에 있어서의 신석기 문화의 하나로 양사오 문화를 이으며, 은·주 문화에 선행한다. 산뚱· 허뻬이·허난·싼시의 황하 하류·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산뚱 성의 룽상진 청쯔야(城子崖)의 유적을 비롯하여 저명한 유적이 많다. 이 문화는 보리·조를 주로 하는 농경 문화로서 돼지·개·염소·소를 사육하고, 사슴·멧돼지를 수렵하고 어로도 행해졌다. 원형의 반 지하식 수혈(竪穴) 주거는 바닥을 백회니 (白灰泥)로 포장하고 있다. 도구로서는 각종의 마제 석기나 골각기를 사용하고 조가비로 만든 톱·낫 등이 있다. 이 문화를 대표하는 흑도는 칠흑 색 윤이 나는 보드라운 토기인데 단지·정(鼎)·잔·접시 등이 있다.

◑ 중국의 창조 신화 : 옛날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는 거대한 달걀 덩어리 같았다. 이윽고 이 알이 변하여 반고 (盤古)라는 신이 탄생하였다. 처음에는 반고도 천지의 덩어리 속에 갇혀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반고가 하루에 1장(丈) 자라면 하늘의 높이도 1장만큼 높아지고 땅은 지금처럼 되었다. 반고는 등의 길이만도 9만리에 이르렀다. 그의 눈물은 장강(長江·양자강)과 황하(黃 河)가 되고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었으며, 목소리는 우뢰가 되고 눈동자는 번개가 되었다. 반고가 즐거 우면 하늘이 맑고 노하면 날씨가 흐렸다. 반고가 죽자 머리와 배와 손과 발은 사악(四岳)이 되고 눈은 해와 달이 되었으며, 지방질은 강과 바다가 되고 모발은 초목이 되었다. 즉, 반고는 혼돈 가운데 태어나 하늘과 땅을 나누고 자연 환경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인간을 만든 것은 여와(女渦)라는 신이었다. 그녀가 인간을 만든 재료는 황토였다. 이것은 물론 중국 북부 일대 를 덮고 있는 흙으로, 이 흙 때문에 강도 황하가 되었다. 천지가 열리고 아직 인간이 탄생하지 않았을 때 여와는 황토를 빚어 인간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씩 만들었으므로 바쁘기만 하고, 인간의 숫자는 얼른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와는 황토의 진흙 가운데로 새끼줄을 끌고 다니면서, 이 새끼줄에 묻은 진흙 덩어리로 인간을 만들었다. 따라서 황토를 빚어 만든 부귀한 사람과 새끼줄에 붙은 진흙 덩어리에서 나온 비천한 사람의 두 종류가 생겼다. 이렇게 여와는 인간을 만들어 천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난폭한 신이 나타났다. 그것은 물의 신 공공(共工)이었다.

◑ 삼황(三皇) : 태고의 제왕으로 수인씨(遂人氏)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 불을 만들어 음식을 굽거나 끓이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한다.「수(遂)」는 불을 만드는 도구이다. 수인씨의 뒤를 계승한 제왕이 복희씨(伏羲氏) 이다. 포희(疱犧)라고도 부른다. 복희씨는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뱀이었다.「역」(易)의 8괘(卦)를 만들어 길흉을 점치고 문자를 발명하였다. 또 물고기를 잡는 법과 동물을 사육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뒤를 계승한 것이 여와(女蝸)였다고 한다. 그러나 제왕으로서의 여와는 별로 이채를 띠지 못한다. 역시 사람 머리에 뱀의 몸으로 처음으로 악기를 만들었다. 깨어진 하늘을 수리한 것은 치세 말기의 일이라고 한다. 또 후세에는 복희와 여와가 부부였다는 설도 생겨나, 이 두 왕에 의해 혼인의 예가 정해졌다고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여와는 중매의 신, 또는 자녀를 주는 신이 되기에 이르렀다. 다음이 염제(炎帝)인 신농씨 (神農氏)이다. 몸은 사람이지만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염제」란 태양의 신이라는 뜻이다.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쳤다고 해서「신농」(神農)이라고도 부른다. 또 여러 가지 풀로 약을 만든 데서 뒤에는 약재의 시조로도 부른다. 삼황(三皇)이라고 할 때 혹은 수인(遂人)·복희(伏羲)·신농(神農)을 가리키기도 하고 혹은 복희, 여와, 신농 등 여러 설이 있어 일정하지가 않다. 그것은 삼황이 천(天)·지(地)·인(人)의 삼재(三才)사상에 의해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태고의 신(제왕)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하여 삼 황이라고 하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삼황으로서 천황·지황·인황 (혹은 泰皇)을 드는 설도 나타났다. 뒤에 사마천이《사기》를 쓸 때에는 삼황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채택하지 않았다. 즉, 사마천은 다음의「오제」부터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은 요와 순 또한 군주의 모범으로 추앙 받으며, 이들이 다스리던 시대를 흔히 이상적 인 태평 시대라고 한다. 요는 제곡의 아들로 마치 태양이 그 따사로운 햇빛을 만물에 고루 비추어 생장 하게 하듯 온후한 덕으로 백성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천하를 통치하는 지존의 신분이면서도 항상 겸손 하여 백성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았다. 요에게서 천자의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은 요의 아들이 아닌 순 이다. 요는 당시 효자로 이름난 순에게 제위를 물려주니 이것이 선양의 시작이다. 제위에 오른 순은 요의 뜻을 받들어 인자한 마음으로백성을 사랑하여 태평성대를 이루며 두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순도 요와 같이 아들 상균(商均)이 백성을 잘 다스릴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후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그가 눈 여겨 본 사람이 바로 황제의 증손 곤(鯤)의 아들로 중국 땅의 대홍수를 잘 다스려 국토를 기름지게 한 우(禹)였다. 우는 아버지 곤이 9년간의 노력에 도 불구하고 다스리지 못한 홍수를 13년에 걸친 연구와 노력으로 중국의 모든 하천을 잘 정리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순은 우가 자신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될 만한 인물이라 여기고, 그에게 제위를 물려 주고는 자신은 두 아내와 함께 남방 제후국을 여행하다 창오(蒼梧)라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하를 물려받은 우도 요, 순의 뜻을 받들어 모범적인 통치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우의 치수 사 업에 얽힌 전설은 무척 많다. 한번은 그가 집을 떠나 곰으로 변신하여 물길을 내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아내에게 보이기 싫어서 자기를 만나려거든 아무 때나 찾아오지 말고 반드시 자기가 북을 울린 다음에 오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다. 어느 날, 큰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그 소리를 북소리인 줄 알고 찾아 온 아내는 곰을 보고 깜짝 놀라 도망치다가 그만 넘어져 돌이 되고 말았다. 그 때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 돌이 점점 자라더니 둘로 갈라지면서 아이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이 아이의 이름이 계 (啓)이다. 우(禹)는 천하를 다스린 지 10년만에 죽었다. 그도 일단은 신하에게 제위를 양도하였지만 우의 아들 계(啓)가 현명하여 천하의 인망을 모았으므로 계가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리하여 우가 세운 나라의 이름을「하(夏)」라고 하였는데 하는 왕위를 세습하여 이때부터 중국의 역사에 세습 왕조가 등장했다.

◑ 오제(五帝) : 중화 민족의 특색은 상고주의(尙古主義)에 있으며, 이런 민족성은 오제(五帝)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제'는 다섯 사람의 천자, 덕망 있는 성인으로 고대 중국을 다스린 황제(黃帝), 전욱(顫頊), 제곡(帝 ), 요(堯), 순(舜)을 말한다.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씨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말을 하는 신동으로, 남달리 지혜가 뛰어났다. 당시 천하는 사회의 풍기가 쇠미하고 강력한 지도자가 없어 각 제후들 간에는 반목과 알력이 심해 제후국간의 전투가 끊이지 않는 난세였다. 이런 때에 등장한 황제는 일찍부터 병법과 군사 통솔력을 익혀 마침내 제후들을 정벌하였다. 이로 인해 천하를 호령하는 통치자인 '황제' 로 불리게 되니, 그가 바로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천자이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음악과 문장을 만들어 이것을 배우도록 하여 사람의 귀하고 천함을 구별하였으며, 역법, 화폐, 배와 수레를 만들었다. 황제의 뒤를 이은 전욱은 황제의 손자로 성품이 온화하고 사물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농작물마다 적합한 채취 방법을 연구하여 백성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귀신을 섬겨 존귀함과 비천함의 질서를 바로잡고, 네 계절과 오행(水·木·金·土)의 이치로 백성을 교화했으며, 성심으로 제사를 거행 하여 모든 초목과 짐승들도 그의 가르침에 복종했다. 전욱 다음으로 나타난 성인은 바로 전욱의 아들이자 황제의 증손자인 제곡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 정이 많아 백성들의 고통을 깊이 인식하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물건이라면 아낌없이 나누어주었다. 또한 그는 자기의 허물을 살피고 고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아 온 천하가 기꺼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전욱과 제곡은 아주 뛰어난 인물이면서 덕망 있는 인물들로 전통적인 중국의 관념으로 볼 때 이상적인 영도자라 할 수 있다.

◑ 하(夏) : 중국 최초의 왕조. 현재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은 왕조보다도 앞서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주와 더불어 하ㆍ은ㆍ주 3대로 병칭된다. 시조인 우(禹)의 성은 사씨( 氏)이며, 전욱( 頊)의 손자이며, 요(堯)를 섬 긴 곤( )의 아들이라고 한다. 우는 대홍수를 다스리고, 중국을 9주로 나눈 후, 각지의 토성(土性)의 상 하(上下)와 전ㆍ부ㆍ공(田賦貢)을 정하는 등 치세에 공이 많았으므로 순으로부터 선양 받아 즉위하여 국 호를 하후(夏后)라고 칭하였다. 우도 또한 그의 재상이던 익(益)에게 선양하고자 하였으나, 천하가 우의 덕을 흠모하여 그의 아들 계(啓)를 임금으로 받들었으므로 이로부터 선양제가 끝나고, 상속제에 의한 최 초의 왕조가 출현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우의 자손이 계속하여 왕이 되어 우(禹) 이하 14세 17왕, 471년 (혹은 432년이라고도 함)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17대에 이르러 이계(履癸)가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걸 왕(桀王)이다. 걸은 덕을 닦지 않고 백관을 살상하였으므로, 마침내 인심은 하나라를 떠났다. 유력한 제 후였던 성탕(成湯)도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다가 방면되었다. 탕은 덕을 닦아 제후의 지지를 얻었고, 마 침내 군사를 일으켜 걸을 정벌하였다. 걸은 망하여 남방으로 추방되었다가 거기서 죽었다. 대신하여 탕 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는 스스로 상(商)이라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은(殷) 이라고 하였다.

◑ 역성 혁명(易姓革命) : 천명이란 하늘에서 부여받은 명령·운명이라는 뜻이며, 방벌이란 폭군을 타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선양이란, 덕이 있는 천자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뜻이다. 은이나, 주는 모두 신의 뜻에 의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신권 정치가 행해졌으나, 은(殷)에서는 모든 현상은 불변하는 신의 의지로서 결정되고, 군주는 주술적 점으로써 그것을 예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주나라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에 서 부여된 운명을 따르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덕행을 쌓고 노력하는 것으로써 천명을 호전시킬 수 있고, 태만하면 그 천명을 다할 수 없다고 했다. 군주가 되는 자는 덕행을 쌓지 않으면 안되고, 만약 폭 군이 나타나 천명을 어기고 통치의 책임을 게을리 하면, 하늘은 가차없이 그 지위를 빼앗아 새로이 타 성(他姓)의 유덕자에게 준다고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성을 갈고 천명을 새로이 다시 하는 것을 역성 혁 명이라 하고, 은나라를 타도하여 주 왕조가 성립한 것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후세의 왕조 교체의 이론으로 되었다.

◑ 선양(禪讓) : 중국에서의 역성 혁명(易姓革命)의 방식. 요(堯)가 천자의 자리를 민간의 효자 순(舜)에게 물려주고, 불초한 친자식 단주(丹朱)에게는 물려주지 않았으며, 순(舜)도 마찬가지로 우(禹)에게 물려주었다. 이는 은의 탕왕, 주의 무왕이 폭군을 방벌(放伐)한 것과는 다른 혁명 방식으로 무력을 쓰지 않고 자발적 형식으로 왕실의 지위가 양도되어 선양(禪讓)이라고 한다. 전국 시대부터 이 이상화된 유가의 설을 이용하는 주권수수가 생각되어, 왕 망(王莽)이 이를 시도하였으나, 완전한 형식의 것으로는 위의 조 비가 후한의 헌제의 선위를 받은 것(220)을 최초로 하여, 송(宋)의 태조가 후주의 공제의 뒤를 계승한 진교(陳橋)의 변(960)에 이르기까지 전후 십여회에 걸쳐 행하여졌다. 중세 중국을 지배했던 귀족이 어떤 왕조의 장래를 단념하고 새 실력자를 지지하면서도, 무력 혁명을 피하고, 앞으로 천자가 될 사람에게 단계적으로 권력과 영예를 주어 가면서 원만하게 정권을 바꾸려 했던 것이 선양 방식이 채택되게 된 이유였다.

◑ 은(殷) : 기원전 1500경부터 기원전 1100년까지 약 400년간30왕조가 지속되었다가 주(周)에 의해 멸망된 고대의 왕조.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 의하여, 실제로 사실(史實)이 확실한 시대는, 11대째인 무정 때부터 17대 신(辛)까지, 즉, 말기에 해당하는 200년간 정도이다. 은은 허난성 안양현 일대에 도읍하고, 조상의 제사를 통해 유대를 갖게 된 직업적 성격이 강한 씨족의 연합체로써 구성된 나라를 만들고, 각지에 왕자들을 봉하고, 또 기타 제국과는 혼인관계를 맺는 등, 씨족 조직으로 된 도시 국가군의 연합 조직에 의해 화북 중부에 강대한 권력을 과시했었다고 생각된다. 은 왕은 제읍(諸邑)연합의 맹주였다. 읍이란 성벽을 쌓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사는 곳을 말하며, 읍은 씨족 집단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속에서 왕은 점을 주재하고 제사를 행하는 특권을 행사하였으며, 여러 씨족과의 혼인 관계에 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읍은 도시 국가라는 설도 있으나, 씨족 집단의 요소가 강하고, 자유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다. 은이라는 칭호는 주 대에 붙인 칭호이며, 은인들은 대읍 상(商)이라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중심으로 삼고, 연합체인 제국으로부터는 공물을 거두어 들였는데, 군사적으로는, 왕조나 제국의 왕자 등을 중심으로 하고, 제국에서 수시로 군사를 징발하고 있었다.

◑ 갑골 문자 : 갑골 문자는 귀갑 수골에 새겨진 점복(占卜)문자를 말한다. 19세기말에 은 왕조의 도읍지인 은허가 발 굴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20세기에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갑골 문자는 그것의 해독을 통해 당시의 사회 모습을 추정할 수 있어 귀중한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갑골 문자는 10만 조각 이상 발굴되었고 알려진 문자 수는 3,500자 정도이며 해독된 것은 1,300자 정도이다. 그 글자 중에는 은 왕조의 왕명, 관직명, 의(衣), 사(絲), 악(樂)등이 보인다. 대부분의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 때 점복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복사 중에는 조상에게 풍년과 득남을 구하거나, 비나 질병의 치료를 구하는 등의 기록이 보인다. 특히, 풍년과 비를 기원하는데 직접 천신인 제(帝)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조상에게 구함으로써 조상 숭배의 종법 관념을 발전시켰다. 특히, 여기에는 날짜를 표시하는 간지(干支)가 있어 달력을 사용하여 농경 생활에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은.주의 교체 : 은·주의 교체를 은·주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볼 때는, 주대가 은대보다 나아진 것도 없다. 농업 생산의 기술면에서도 별 변화가 없었고, 청동기 주조 기술은 은대보다도 오히려 퇴보된 감이 있다. [은대에 있어서는 세계의 모든 현상은 천명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는 군주는 이 불변의 신의, 즉 천명을 귀복(龜卜)이나 무사(巫師) 등의 주술에 의하여 예지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결정론에 대하여, 주대에는 [인간은 덕행을 쌓아 올림으로써 천명을 다할 수 있고, 따라서 운명은 신의에 의한 일정 불변의 것이 아니므로, 후천적인 행동, 즉 수양을 쌓고 도덕을 실천함으로써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술 대상을 절대시한 은나라 인과는 달리, 귀신을 '경이 원지(敬而遠之)'할 것과 예로써 대할 것을 강조하였다. 조상신을 선의로 생각한 주나라 사람들은 자손이 예로써 제사하면, 조상은 자손에게 충언과 축복을 준다고 믿었다. 제사 때에는 조상의 공적을 찬양하는 찬가에 따라 신무를 추고, 향연 때에는 조상이 남긴 교훈들을 젊은이에게 전달했다. 전자가 시경의 기원이 되고, 후자가 서경의 대본이 되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와 향연은 종법에 의한 족적 단결을 유지하고, 그 과정의 예의 작법을 통하여 집단의 전통을 몸에 지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주의 종법 질서 유지를 위한 예문화의 기초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예문화는 주 독자의 것으로서 중국 유가의 기원이 되었다.

◑ 주(周:?∼256 B.C.) : 주는 원래 유목 생활을 하였으며, B.C. 11∼12세기경에는 섬서성의 위수 분지에 정주하고, 은에 조공하였던 것 같다. 문왕에 이르러 강성하여져 은과 직접적으로 대립하였으며, 그 아들 무왕은 은을 멸하고, 호경(鎬京: 지금의 시안 부근)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이 어린 성왕이 즉위하자 숙부인 주공(周公)이 이를 보좌하여 은나라 백성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또한 주의 일족을 각지에 봉하여 이른바「봉건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 후 소왕ㆍ목왕의 시대에는 사방의 이민족을 토벌하여 주의 위세는 절정에 달하였다. B.C. 9세기경부터 주의 국력은 점점 쇠약하여지고, 제후의 반란을 틈타 북방 견융 (犬戎)의 침입이 빈발하게 되었다. 선왕은 견융을 격퇴하여 한 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B.C. 771년 유왕 때에 또 한번 견융의 공격을 받아 서울이 함락되고 왕은 살해되었다. 그 아들 평왕은 동천(東遷)하여 성주(지금의 허난 성 뤄양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주 왕조를 부흥하였다. 주의 동천 이후를 동주 시대라 하고 그 이전을 서주 시대라 한다. 동주 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는데, 춘추 시대에는 주왕의 권위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제후들이 주왕의 권위를 빌어 천하를 호령하려 했기 때문에 그 지위는 그대로 인정되고 있었으나 전국시대에는 제후들이 주 왕실을 무시하고 약육강식의 쟁패를 하여 주 왕실의 권위는 완전히 추락하고 결국B.C. 256년 진(秦)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 경(卿)·대부(大夫)·사(士) : 주대의 제후국은 은대와 마찬가지로 도시 국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제후가 봉건되어 몇 대가 경과하면, 그 영역 내에 살고 있는 국인(國人)이 제후로부터 새로이 주변의 읍(채읍)에 봉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제후에 의한 봉건인데, 이들을 대부라고 하였다. 대부는 일정한 서열에 따라 제후의 정 치를 보좌하며, 일족 중에서 사(士)라고 하는 남자를 거느리고 제후 군에 참가하는 부(賦)라는 의무를 졌다. 또 대부 중에서 국정의 요직에 있으면서 제후군의 지휘를 맡는 명문의 장을 경(卿)이라고 하여, 일반 대부보다 상위에 모셨다. 이들은 모두 지배계급에 속하여 토지와 농민을 지배하고 관직을 세습하였다.

◑ 주의 봉건 제도 : 주 무왕이 은 왕조를 멸망시킨 후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했으나, 나이가 어려 성왕의 숙부인 주공이 섭정을 하였다. 당시 주 왕실에 도전하는 세력을 평정한 후, 주공은 은의 유민들을 그의 동생에게 봉하여 국호를 위(衛)라 하였고, 일부 유민은 은 왕조에게 주어 송(宋)이라 했다. 또 주공의 아들에게는 노 (魯)를, 공신인 여망의 아들에게는 제(齊)를 봉하였는데, 이 곳은 과거 은의 세력권이었다. 그리고 복종하지 아니하는 은의 유민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낙읍을 세워 동도(東都)로 하고 이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주의 본국인 산시 지방을 왕의 직할지로 하고 그 외의 영토는 왕의 혈족이나 공신들에게 분봉하여 봉토로 지급하였다. 제후는 분봉 받은 봉토 내에서 정치적인 독립을 인정받는 대신에 국왕에게 공납과 종군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씨족적 혈연 관계를 토대로 한 본가와 분가의 주종 관계로서 서양 중세 봉건 제도가 쌍무 계약적인 주종 관계였던 것과 구별된다.

◑ 종법(宗法) : 주대의 지배 계급은 씨족 제도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일족은 씨족을 표시하는 성이 있고 성이 분화하여 씨가 되는데, 이러한 분화 작용은 혈연 관계를 약화시키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씨족 제도를 종가와 분가 관계로 재편성하여 조상의 제사와 상복, 상호 부조등 규약을 정하여 일족의 단결을 꾀하고 규율을 잡고자 하였다. 이것을 종법(宗法)이라고 하며, 귀족의 공사의 전생활을 규정한 규약을 예(禮)라고 하였다. 종법은 대가족인 종족(宗族)에다 질서를 부여한 규칙이란 뜻으로, 특히 종가 (宗家)의 제사를 누구에게 계승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정한 법규이다. 이러한 규칙은 대가족이 같이 동거할 때 및 천자의 일족을 질서화할 때 필요하다. 종족은 그들의 총 본가를 대종가(大宗家)라 하여 이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그의 지파(支派)를 소종(小宗)이라 한다. 대종의 상속권은 적장자에게 우선권이 있으며, 상속자 이외는 적출ㆍ서출을 막론하고 모두 별자(別子)라고 하는데, 별자는 각기 소종의 시조가 된다. 대종에 남자가 없을 때는 여자는 상속권이 없고, 여자는 모두 동성불혼(同姓不婚)이 원칙에 의하여 타성의 가정으로 출가한다. 그리하여 종가는 그의 가까운 지파의 소종(小宗)에서 상속자를 맞아들인다. 이 때, 동 세대의 사람은 서로 상속자가 될 수 없고, 반드시 소(昭 종묘ㆍ사당의 신주의 서열. 목(穆)의 위), 목(穆)의 순으로 다음 세대의 사람이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주의 봉건 제도는 종법 제도를 국가 규모로 확대한 정치 제도였다. 중국 역대의 왕조는 이 종법의 적용을 둘러싸고 자주 예법상의 문제를 야기시켰다.

◑ 종족(宗族) : 중국에 있어서 부계(父系)의 친족 집단을 말하는데, 그 최대의 범위를 말할 때는 9족(九族)이란 말이 있다. 9족이란 자기 세대 외에, 위로 4대와 아래로 4대, 즉 고조ㆍ증조ㆍ조ㆍ부ㆍ자기ㆍ자ㆍ손ㆍ증손ㆍ 현손의 9세대를 총칭한다고 하며, 또 부족(父族) 4와 모족(母族) 3, 처족(妻族) 2를 합하여 9족이라고 한다고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 또 3족(三族)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앞의 9족과 같은 것이라는 설과, 부모ㆍ형제ㆍ처자의 총칭이라는 설이 있다. 큰 죄를 범했을 때에 연좌(連坐)의 범위가 3족에 미치는데, 이를 족주(族誅)라고 한다. 고례(古禮)에서는 종족이라 함은 유복친(有腹親)에만 한했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종족결합의 필요성이 강화되자. 무복친(無服親)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종족 결합에는 선조 제사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데, 고례에서는 적장자가 종자(宗子)로서 제사를 주재한 데 대하여, 후세에 와서는 형제가 윤번으로 제주(祭主)가 됨에 따라 일족 공유의 종사가 발달하였다. 일족 공동의 제사 비용을 항구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족산(族産) 특히 제전(祭田)을 설치하고, 다시 일족에 대한 경제적 부조를 목적으로 의장(義裝)을 두기도 했다. 또 한편 종족 결합을 위하여 일족의 계보인 족종보(族宗譜)가 만들어졌다. 종족 결합은 남 중국에서 특히 강했으며, 종족간의 싸움도 심하여 계투(械鬪)라고 하는 폭력 투쟁이 종종 일어났다.

◑ 정전법(井田法) : 맹자가 극찬한 바 있는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 제도로서 토지의 공유와 등분을 원칙으로 한다. 900무의 정사각형 토지를 1정이라 하고, 이를 9등분하여 8호가 개별 경작하고 중앙의 100무는 공동 경작하였다. 주나라의 제도로서 고전에 보이는 정전법이나 봉건제도 등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전국시대의 유가들이 그들의 이상을 기술한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 강태공(姜太公) : 주의 문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사방에서 인재를 모아, 태전(太顚), 산의생(散宜生), 신갑(辛甲), 그리고 태공망 여상을 얻을 수 있었다. 태공망은 주의 동해 사람으로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다. 조상때 왕으로부터 여(呂) 지방을 하사받아 여상이라고도 하며 속칭으로 강태공이라 한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늘 위수(渭水)에서 곧은 바늘을 한 낚시를 드리우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문왕은 사냥을 나가기 전에 태사(太史)에게 점괘를 뽑게 했는데 태사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만약 위수로 가시면 용(龍)이나 교(蛟:교룡) 가 아니고, 호랑이나 곰도 아닌,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좌할 큰 인물을 얻게 될 겁니다. 문왕은 말을 달려 위수로 갔다. 위수에는 한 노인이 큰 돌 위에 앉아 흰 눈썹과 백발을 강바람에 흩날리며 한가로이 낚싯줄을 강물에 넣은 채 앉아 있었다. 문왕은 급히 말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강태공은 그의 모든 질문에 명료하게 대답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점괘에서 말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한 문왕이 공손히 말하였다. "선생님, 일찍이 저희 조부께서 한 성인이 우리 주(周)로 오시면 나라가 흥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저희 가문에서 선생님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강태공은 문왕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 그를 보좌하고, 문왕은 그를 태공이 바라던 사람이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 했다. 그 후 주공, 소공과 함께 무왕을 보좌하여 은을 멸하고 주의 기틀을 튼튼히 한 공로로 제후에 봉해졌으며 국정의 정비, 습속(習俗)의 개혁, 산업의 개발에 노력하여 춘추시대 '제(齊)'의 기초를 만들었다.

◑ 주공(周公) : 주공은 문왕의 넷째 아들로 성왕의 숙부이기에 숙단(叔旦)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의 채읍 주(周)를 따서 주공이라고 한다.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으며 아랫사람에게도 후덕한 인품을 보이고 있는 주공 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무왕이 부친의 유업을 계승한 후 강태공과 함께 주왕을 토벌했으며, 무왕이 맹진(盟津) 대회에 가서 제후들을 토벌할 때에 보좌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자신의 병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무왕은 왕위를 주공에게 계승하도록 했으나 주공은 이를 완강하게 사양했다. 결국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성왕이 즉위하고 주공은 충성으로 보좌했다. 또한 주공은 조카 성왕을 가르치면서, 만약 성왕이 잘못을 저지르면 함께 가르치던 아들 백금(伯禽)의 종아리를 때리며 제왕으로서의 자질을 배양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교육을 했다. 주공은 상나라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으면서, 그 승세를 타고 희성(姬姓)을 가진 종실들과 반란군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제후로 봉하여 주 왕조를 중심으로 한 엄격한 봉건 체제를 형성했다. 당시 모든 제후는 천자에게 정기적으로 직접 봉토의 상황을 보고해야 하고, 조공과 군사상 복종의 의무가 있다. 만일 이것을 어기면 즉시 봉토를 박탈당하게 된다. 또한 각 제후들은 천자에게서 봉토와 백성을 받을 뿐만 아니라 모든 예악과 문물 제도까지 주의 방식에 따랐다. 이 개혁으로 주 왕조는 명실상부한 천자국이 되었고, 주의 통치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순탄한 번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봉건 제도의 수립과 문물 제도의 규정과 아울러 주공은 종법제(宗法制)를 실시하여 정권과 족권(族權) 을 통일했다. 주공은 7년간 섭정한 후 성왕 친정 시대를 여는 한편 형의 제위를 동생이 물려받던 상나라의 제도를 적장자가 계승하는 제도로 바꾸었다. 이것은 모든 제후국은 물론 경(卿), 대부(大夫)들도 마찬가지였다. 제후국은 천자에 대해 소종(小宗)이고, 경과 대부는 제후국의 소종이 되어 각 소종들은 대종에 절대 복종하고, 천자가 모든 소종들의 대종이 되어 제후들을 영도하도록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권과 족권이 한 계통으로 통일되고 자리다툼으로 인한 분쟁을 방지할 수 있게 했다. 주공의 이런 노력들은 모두 정치 제도를 도덕화하여 천자, 제후, 경, 대부, 선비, 백성이 주 왕조 내에서 하나의 통일된 조직을 이루어 주 왕실이 확고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각 대종들은 덕을 밝히고 형벌을 삼가하고, 예악(禮樂)으로 천하를 다스려 소종을 진심으로 복종하도록 했다. 주공의 이런 노력으로 천하가 태평성대를 이루어 역사에서 이 시기를 '성강지치(成康之治)' 라 부른다. 성왕의 친정과 함께 정계에서 물러난 주공은 다시는 성왕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주공은 죽음에 임박하자 자신은 영원한 성왕의 신하로서 곁에서 보필하고 싶다는 뜻으로 시신을 호경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주공의 뜻에 따라 성왕은 그를 호경 부근의 필(畢)에 안장시키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국(魯國)은 자손 대대로 천자의 예악으로 주공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 포사(褒) : 기원전 770년경 중국 주나라 12대 유왕(幽王)에게는 포사라는 아름다운 후궁이 있었다. 포사는 절세의 미인이지만 절대로 웃질 않아서 아무도 포사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포사를 몹시 사랑한 유왕은 그를 웃게 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사방에 제후국을 거느린 주나라는 빈틈없는 군사동원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실수로 그만 봉화가 올라가고 말았다. 봉화는 유사시 제후국에 긴급동원 명령을 내리는 신호다. 봉화가 올라가면 제후들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왕궁으로 달려오게 되어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제후들은 봉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자, 그만 맥이 탁 풀렸 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스웠던지 포사는 그만 저도 모르게 살풋 웃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유왕은 뛸듯이 기뻐했다. 얼마 후, 유왕은 포사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일부러 봉화를 올리게 했다. 숨차게 달려온 제후들은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두 번, 세 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기원전 771년 견융(犬戎)이 쳐들어왔다. 유왕은 긴급히 봉화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제후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왕은 결국 견융에게 잡혀 죽고, 이후 주 왕실은 사실상 통치력을 잃고 중국 대륙은 제후들간의 군웅할거시대로 들어간다.

◑ 견융(犬戎) : 고대 중국에서는 서방의 이민족을 융(戎)이라고 일컬었으며, 견융은 그 한 종족이다. 많은 사냥개를 사육하였거나 아니면 개를 토템으로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周)의 목왕은 견융을 정복 하여 이를 태원(太原)으로 이주하게 하였으나, 이후 융의 화가 격심해 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B.C. 771년에 주(周)의 유왕은 신후에게 편든 견융·서이(西夷)들의 침입을 받아 살해되었고, 이로 인하여 주의 동천(東遷)의 원인이 되었다.

◑ 춘추 시대 : 황하 유역의 한족의 발전은 북방 유목민을 자극하여 그들의 침입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주 왕실은 북방 유목민 견웅의 침입을 받아 낙읍으로 동천하게 되어 주 왕실의 봉건 제후에 대한 권위를 잃었다. 또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따라 인구가 증가하고 이 증가된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토지의 획득이 필요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제후들 사이에 토지를 개척하고 혹은 남의 영토를 빼앗기 위한 경쟁과 침략 전쟁이 잦아지게 되었다. 주 왕실의 권위 실추, 이민족의 침입, 영토의 획득 경쟁 등은 약 550년에 걸쳐 제후들 사이에 맹렬한 대립, 항쟁의 시대를 가져왔다. 주 왕실이 동천한 기원전 770년부터 진(晉)이 3분 되어 한(韓), 위(魏), 조(趙)의 3국이 독립한 기원전 40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하고 다시 이로부터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일컫는다. 춘추전국 시대라는 명칭은 공자의 저술인 노(魯)의 연대기 '춘추'로부터 춘추시대, 한나라 유 향의 저서인 '전국책(戰國策)'으로부터 전국시대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 시대에 대해서 각 그 책에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봉건 제도가 무너지는 한편으로 생산력의 증진, 사회의 눈부신 진보 등 진,한 고대 국가가 태동하는 시기이며, 중국의 민족 문화의 원형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춘추 시대의 강국들은 부국 강병에 힘쓰는 한편,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아직 존경의 중심이 되어 있던 주 왕실을 받들고 제후를 규합하여 중국 공동의 적인 이민족의 침입을 물리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 존왕양이(尊王讓夷)의 이상을 실현한 제후를 패자(覇者)라 한다. 그들은 존왕양이의 구호 아래 제후를 규합하여 회맹(會盟)이라고 일컫는 동맹체를 조직하고 그 맹주가 되어 사실상의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최초의 패자가 된 자는 제(齊)의 환공(桓公)이었다. 이어서 진(晉)의 문공(文公)이 패권을 쥐고 남방 민족의 혈통이 섞여 있는 양자강 유역의 초(楚:호북성)가 세력을 얻어 중원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춘추의 대세는 처음에는 제(齊), 송(宋), 진(晉)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 제후와 초의 싸움이었는데 초는 중원과의 접촉에 의하여 중국화되어 장왕(莊王)때에 드디어 패권을 쥐게 되었다. 중원 문화가 양자강 하류에 미치자 초와 동일 계통인 오, 월이 일어나 오의 부차(夫差)가 패권을 쥐고 이어서 월의 구천(勾踐)이 오를 무너뜨리고 패권을 쥐었다. 제(齊)의 8?? 진(晉)의 문공, 초(楚)의 장왕, 오(吳)의 부 차, 월(越)의 구천을 춘추의 5패(覇)라 한다. 오, 월 대신에 송(宋)의 양공(襄公), 진(秦)의 목공(穆公)을 넣는 경우도 있다. 춘추시대는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도시 국가에서 영토 국가로, 지방 분권에서 중앙 집권으로의 과도 기였다. 또 춘추 중기에는 철제 농구가 출현하여 심경제초가 용이하게 되고 생산력은 증대해 갔다. 철제 농구의 보급은 전국 시대에 내려와야 되지만 씨족적인 질서를 분해하고 계급 분화를 촉진했다. 토지 소유는 공동체적 집단 경작으로부터 개별적 경영으로 이행하고, 세제도 영주 직영지라는 노동 지대의 형태로부터 자작농의 현물 지대 수납으로 변화해 갔다. 이와 같은 변화는 춘추 시대, 전국 시대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 전국 시대 :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가 닥쳐 왔다. 강국이 약소국을 실력에 의하여 합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유력한 가신이 그 주군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빼앗는 하극상의 풍조가 생겼다. 진(晋)의 가신 한(韓)·위(魏)·조(趙)가 진(晋)을 3분하고, 제(齊)의 가신 전씨(田氏)가 나라를 빼앗은 것이 그것이다. 이 두 사건을 신호로 전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춘추 중기에 140여 개나 되던 제후국은 약육강식의 결과 전국 시대에는 불과 10여 개국만이 남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한(韓)·위(魏)·조(趙)·제(齊)의 새로 생긴 4개국과 계속 세력을 유지해온 연(燕)· 진(秦)·초(楚)의 3개국이 가장 유력하여 이를 전국의 7웅이라 하였다. 전국의 7웅은 주의 종주권을 완 전히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라 일컬어 사실상 독립국으로 행세하였다. 먼저 조(趙)가 북방 흉노로부터 기마 전술을 배워 세력을 떨치고, 이어서 진(秦)이 이를 채용하여 세력을 얻었다. 진은 천연의 요새이며 비옥한 평야를 갖고 있는 관중(關中)을 차지하고 있을 뿐더러 문화에 뒤떨어진 나라인 만큼, 전통과 인습에 얽매여 있는 점이 적어 중국의 문명국과 달리 대담한 정치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곧 진의 효공(孝公)은 상앙의 신법을 채용하여 과감한 정치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해져 다른 열국을 위협하였다. 이리하여 춘추시대의 초(楚)나라와 제(齊)·송(宋)·진(晋)의 남북 대립은 진(秦)나라와 6국의 동서 대립의 형세로 전환되었다. 여기에 6국이 동맹하여 진에 대항하자는 합종운동(合縱運動)이 일어나고, 혹은 6국을 진에 종속시키려는 연횡(連橫)운동이 일어났으나, 진은 교묘한 외교 정책을 구사하여 6국을 이간시킨 뒤, 주 왕실 및 6국을 차례 차례로 멸하여 드디어 B.C. 211년에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에 의하여 은·주이래 병립해 오던 도시 국가군이 하나의 세계로 통일되었다. 전국 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 국가가 해제되고 중앙 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 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또 철기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 公에서 王으로 : 주의 동천 후 강국은 근처의 소국을 병합하여 도시국가에서 영토 국가로 발전해 갔다. 서주 말에 800 개 가까이 되던 국가는 춘추시대 중기에는 수십 국으로 감소되었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이나 초는 근처의 도시 국가를 정복하면 부하에게 그 토지를 영지로 주지 않고 현이라 이름 붙여 국왕의 직할지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봉건적 질서가 파탄된 가운데서 희미하게 주의 종주권으로써의 명목만은 지켜진 것은 패자의 힘 때문이었다. 패자는 회맹(會盟)을 주최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고, 주 왕실을 존중하고 숭배하여 소위 존왕양이의 명목으로 중원을 통제했다. 제(齊)의 환공(桓公)의 규구의 회, 진(晋)의 문공의 천토(踐土)의 회(전632)가 그것이다. 그러나 남방의 초는 중원에 진출하여 진(晋)을 격파하고(전597) 패업을 이룩했지만, 패자의 성격도 달라져서 주나라 왕실은 아주 무시되었다. 초의 장왕이 주의 왕위의 상징인「큰솥의 무게를 묻는다」(이는 장왕이 주나라 천자의 자리를 노리려는 의도의 표시였다고 한다)라고 한 말은 그 한 예이다. 기원전 4세기가 되면 진으로부터 조·위·한나라가 독립하고 하극상의 정세 속에서 전국 시대로 옮겨진다.

◑ '와신상담'과 미인 서시 : 춘추말, 월 왕 구천(句踐)과 오 왕 부차(夫 )는 서로 원수처럼 싸우는 사이였다. 부차의 아버지가 구 천에게 싸움에 패해 죽자, 부차는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섶 위에 자면서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했다. 이로부터 '와신(臥薪)'이란 말이 생겨났다. 2년 뒤 다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이번엔 월나라가 패했다. 월 왕 구천은 쓸개를 항상 옆에 두고 틈날 때마다 혀로 핥으면서 복수심을 불태웠다. 이로부터 '상담(嘗膽)' 이란 말이 생겨났다. 그래서 '와신상담'이란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구천에게 오 왕 부차가 새 궁전을 짓는다는 소문이 들렸다. 구천은 좋은 목재와 미녀 50명을 선물로 보냈다. 부차가 사치와 방탕에 빠져 나라를 돌보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구천의 은근한 계략이었다. 그 미녀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서시(西施)다. 서시는 본래 장작을 팔던 미천 한 태생의 여인이다. 구천의 계략대로 부차는 서시에게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다가 마침내 월에게 패해 자결했다. 서시는 나라가 망한 데 분노한 오 나라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고도 하고, 월왕 구천의 부하 범여(范 )와 더불어 일생을 마쳤다고도 하는데 확실치 않다.

 

◑ 춘추 전국 시대의 경제 발전 : 춘추시대 중엽부터 시작된 철제 농기구의 사용은 농업 능률의 증대와 토지의 개량을 용이하게 하였고, 또 대규모의 수리 사업을 가능하게 하여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사회적 분업이 발생하여 제철·제염·방적·견직 등의 수공업이 일어났고, 잉여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전매하는 상업이 일어나 화폐 경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즉 철기의 사용은 광산 개발, 철기 제작 수공업의 발달 과 철기 판매 상인을 출현시켰고, 농업 발달과 아울러 여러 가지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은 춘추시대에 이미 제후와 귀족들에 의하여 소규모로 경영되고 있었던 것이나, 전국시대에는 각국의 정부가 대규모로 경영하게 되었고 민간에서도 이루어졌다. 특히 염, 철(鹽鐵)은 민간의 유력자에 의하여 경영되었고 부를 축적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의 발전과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을 촉진시켜 화폐 경제를 발전시켰다. 서주 시대에는 패(貝: 조개껍질)를 실에 꿴 붕(朋)이 화폐의 역할을 하였으나, 춘추 시대에는 청동제의 금속 화폐가 나타나 남방 초에서는 패화(貝貨) 모양의 의비전(蟻鼻錢)이 유통되고 북방에는 농구 모양의 포전(布錢)과 칼 모양의 도전(刀錢)이 유행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진 나라에 원형의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반량전(半兩錢)이 생겨 이후 중국 화폐의 원형이 되었다. 상공업의 발달과 화폐 경제의 발달은 도시의 번영을 가져왔다. 춘추시대의 도시는 제후, 귀족의 거주지로서 정치, 종교, 군사의 중심지였으나, 전국시대부터는 새로이 상공업의 경제 도시로 변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제후국의 수도였던 제(齊)의 임치, 조(趙)의 한단, 위(魏)의 대량, 초(楚)의 영, 주(周)의 뤄양, 진(秦)의 셴양 등이다. 그런데 전국시대 말기에는 대상인의 활동이 두드러져 이들 중에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정상(政商)도 있었고, 또 토지에 투자하여 대지주가 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각국 간에는 통행세, 입시(入市)세가 있었고, 도량형이 다르고 빈번한 전쟁으로 상로가 막히는 일이 많아 상업 활동이 큰 지장을 받았다. 이에 상인들은 통일 국가의 출현을 바랐다.

◑ 제자 백가(諸子百家) : 중국 고대의 여러 학파 및 그 저서의 총칭. 춘추시대의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쳐, 주의 봉건 제도가 무너지면서 언론·사상의 발표가 자유스럽게 되자, 많은 사상가가 나타나 각자의 학설을 발표하였다. 이들을 제자 백가라 한다. 그 중에도 가장 오랜 것이 유가의 설인데, 공자에서 시작된다. 공자는 인(仁)에 달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우선 가까운 자기 수양에서 비롯하여 집·나라·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의였다. 그 학설은 공자의 사후, 맹자·순자 등에 의하여 계승 ·전개되었는데, 요컨대 시대의 사조에 순응하여 당시의 지배자 계급의 정치 도덕에 맞는 것들이었다. 유가가 강조하는 예악을 배척하고 박애주의인 겸애설을 주장한 것이 묵가로서, 한때 성행하였으나 곧 쇠퇴하였다. 이에 대하여 도가는 무위 자연을 부르짖고, 인간이 만든 도덕을 배척하였다. 도가의 설은 노자·장자에 의해서 출발된 것이며, 유가와 더불어 당시부터 사상계의 2대 조류가 되었다. 법가는 형명 법술(刑名法術)에 의하여 천하를 다스리려 한 것이며, 한 비·이사 등에 의해서 대성되었고, 진·한의 실제 정치에 적용되었다.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음양가의 설인데, 음양 오행설에 의해 우주간의 삼라 만상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로는 과학적 해석이라 생각되었고, 백가들에게 응용되었다. 이 외에 병법을 연구하는 병가, 일종의 논리학파인 명가(名家), 정치적인 책략을 말하는 종횡가(縱橫家), 신 농(神農)의 도(道)를 설명하는 농가(農家)등 다수의 학파가 있었다. 이들 학파는 모두 현세에 바탕을 둔 사상으로 이를 위하여서는 모두가 정치와 도덕의 문제에 귀착하였다. 제자 백가의 학설은 한대의 경학 (經學)과 더불어 중국의 학술의 원천이 되고 있다.

▶ 춘추 전국 시대에 제가 백가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 : 일반적으로 정치 사회가 안정되어야 문화 발전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춘추 전국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분열의 시대였으며, 사회적으로는 거대한 변혁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역사상 문화적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 배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부국 강병을 추구하려는 각 제후들이 유능한 인재를 다투어 등용하려 한 것과 종래 소수 귀족에게 독점되었던 지식과 학문이 일반 서민층에까지 확산되어 새로운 문화 창조의 주역이 대두된 점, 종래의 세습적인 신분 제도가 붕괴되어 개인이 자신의 재능에 따라 활약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실력 주의의 대두로 학식과 능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이 새로운 문화 창조의 의지로 연결되었던 점, 그리고 농업과 상업의 발달은 구질서를 해체시켰으며 새로운 시대 이념이 요구되었다.

◑ 제자 백가의 활동

▶ 유가는 춘추 말기에 생존하였던 공자로부터 시작되어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성립되었다. 그가 제시한 현실 구제의 원리는 붕괴해 가는 서주의 질서의 회복이었으며, 그 방법은 '정명(正名)'이었다. 그는 조상 숭배를 기초로 한 전통적인 친족 윤리인 효제(孝悌)로부터 모든 정치 사회의 규범을 도출하려고 하였으며, 법률과 형벌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고 주 봉건 사회의 약속 규범인 예(禮)의 재확립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도덕적 교육을 강조하였고, 도덕적으로 완성된 '군자(君子)'의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현덕자(賢德者) 존중의 논리도 가졌다. 군자의 덕목 중 특히 강조된 것은 '인(仁)'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도덕 철학의 중심 개념이며, 모든 덕목은 '인(仁)'을 실천하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었다.

▶ 맹자는 공자가 제시하지 못한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의 필연적인 근거를 '성선(性 善)'의 논리로 설명한다. '성선'의 인간은 천부적으로 '측은(惻隱)','수오(羞惡)', '사양(辭讓)','시비(是 非)'의 마음을 지녔고, 따라서 이 '사단(四端)'의 발로인 인, 의, 예, 지의 실천도 본성의 배양과 확충만 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인 '인'이 정치에 실현된 것이 바로 유일한 정당한 지배라는 것이다. 이것은 폭력과 기만을 수단으로 한 패도 정치의 반대 개념이며 왕자의 도덕적 실천에 자발적으로 귀의하는 질서를 의미한다.

▶ 순자는 공자의 '예'를 계승하였다. 그는 악과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으므로[性惡] 선천적인 도덕 능력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후천적인 개조의 가능성을 강조하였으므로 교육을 특히 강조하였다.

▶ 법가의 최종적인 목표는 구 귀족 세력의 일소, 엄격한 관료의 통제, 철저한 제민 지배, 군주권의 절대화를 통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의 확립이었고, 인간성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이 그 이론의 출발점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고, 따라서 도덕적 자기 규율의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권위와 형벌에 의한 복종의 강제가 사회 질서의 기초라고 생각하였다.

▶ 묵가는 전국 초기에 생존한 묵자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그 자신도 기계 제작자로 알려지고 있지만 묵가 집단 역시 수성에 필요한 병기, 공구의 생산자를 포함한 하층 계급 출신으로 구성되었고, 이러한 성격상 그들의 논리는 하층 계급의 입장에 동정적이었으며 지배층의 위선과 허구, 사치와 낭비를 반대 하였고, 백성의 희생 위에 강행되는 공벌 전쟁을 철저히 반대하였다. 그들은 현실의 사회적 모순과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혈연적, 신분적인 폐쇄성에 집착한 '차별애(差別愛)','자리(自利)'로 보았고, 그 해결책으로 '겸애(兼愛)'와 '교상리(交相利)'를 주장하였다.

▶ 도가는 노자와 장자에 의해 발전되었다. 도가 사상은 개인의 '전성보진(全性保眞)'을 목표로 한 양생론, 현실 생활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처세와 인생 철학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사상사적인 공헌은 우주 만물의 생성 근원[道], 그 무궁한 생멸 변화의 운동 법칙에 대한 탐구와 역설의 논리를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만물 생성은 '도(道)'의 무의식적인 자기 운동의 결과이며 이것이 바로 '무위(無 爲)'요, '자연'의 원리이다. 따라서 인간도 일체의 욕망과 사지(私智)를 버리고 '무위'의 원리를 체득하 고 실천함으로써, 본성의 '자연'을 보존하고, 그 존재의 근원인 '도(道)'와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종횡가는 세속적 사상가의 한 파로서‘한서(漢書)’예문지에 의하여 이름지어졌다. 소 진(蘇 秦)과 장 의(張儀)의 합종연횡에서 이름이 나왔는데, 그 밖에도 10명의 종횡가가 알려져 있다. 소 진은 합종을 주장하고, 장 의는 연횡을 주장하였다. 합종의 종(從)은 동서를 뜻하며 동방의 초(楚)·연(燕)· 제(齊)·한(韓)·위(魏)·조(趙)의 6국이 종(縱)으로 동맹하여 진(秦)에 대항하자고 한 것이며 , 연횡의 횡은 남북을 뜻하여 진이 6국의 각국과 단독으로 동맹을 맺자고 한 것으로 이를 합하여 종횡이라 칭한다. 이러한 방책들은 전국 시대의 2대 외교 정책으로 이것을 제후들에게 유세했던 자를 종횡가(縱橫家)라고 부르며 이 두 개의 방책이 서로 얽혀 동방 각국의 방침이 흔들렸기 때문에 진은 이 틈을 타서 6국을 통일하였다. ‘전국책(戰國策)’은 이 파의 행동을 기록한 책이라고도 한다. 단‘전국책’은 사부(史 部)의 서(書)로 분류되므로, 이 파의 책으로서 현존하는 것은‘귀곡자(鬼谷子)’가 있을 뿐이다. 이 책은 귀곡자의 찬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귀곡자는 성명이 없고, 단지 숨어 있던 고장 이름에서 귀곡 선생이라 일컬어 졌던 것이다. 소ㆍ장 두 사람은 모두 귀곡 선생에게 사사하였다고 하므로 흔히 종횡가의 원조라 취급되고 있으나,‘귀곡자’라는 책은 후세의 가탁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 사상은 노장의 허무주의를 권모(權謀)에 응용한 것으로서, 상당히 법가 사상을 연상케 하는 점도 있다.

◑ 제자 백가에 대한 사마천의 평

유가는 관심의 폭은 넓으나 요체를 제시하는 것이 적고, 애는 쓰지만 성과가 적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다 따르기 어렵다. 그러나 그들이 군신과 부자의 예를 설정하고 부부와 자유간의 구별을 적절히 강조한 것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묵가는 따르기 어려울 정도로 지나치게 검약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완전히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생산 활동과 절용(節用)을 강조한 그들의 가르침은 본받을 만하다. 법가는 엄격하나 은혜로운 면이 적다. 그러나 군신 상하간의 분(分)을 바로 설정한 그 가르침은 고칠 수 없다. ……도가는 사람들의 정신을 전일케 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와 조화되는 행동을 가르치며, 만물의 풍요로운 자극을 강조한다. -사마천의 [사기] 태사공 자서(自序)에서

◑ 겸애설(兼愛說) : 제자 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인 묵 적이 논한 설이다. 국가·군신·부자·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은 자신과 제 나라만을 사랑하고, 타인·타국을 고려하지 않으므로 일어나는 것으로 유가에서 말하는 인(仁)만으로는 불충분하며, 누구나 차별 없이 서로 사랑하고 이를 나눈다면, 성왕의 도가 행해지고 민심은 안정된다고 하였다.

▶묵자의 반전 평화론 :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큰 일에서 그토록 큰 불의를 저질러도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기는커녕 도리어 장하다 칭찬하며 이를 정의라 한다. 이 어찌 정의와 불의를 분별할 줄 안다 하겠는가. 만일 여기에 한 사람의 죄없는 사람을 죽였다면 세상에는 모두 이를 불의라 하여 반드시 그 사람의 사형에 처할 것이 다. 이런 논법으로 보면 죄 없는 사람 열 사람을 죽였다면 불의는 열 배가 되니 반드시 열 번 죽을 죄에 처해야 할 것이며, 백 사람을 죽였다면 불의는 백 배가 되니 백 번 죽을 죄에 처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천하의 모든 군자들이 잘 알아서 이것을 비난하여 불의라고들 한다. 만일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차별 없이 서로 사랑하도록 한다면 남의 나라를 서로 공격하는 일도, 남의 집을 서로 어지럽히는 일도, 또한 도적도 없어질 것이요, 임금과 신하, 아비와 아들 사이에는 모두 서로 충성하고 효도하고 자애하는 마음을 다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만 된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성인은 천하를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을 터이니 어찌 미움을 금하고 사랑을 권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면 다스려질 것이며 서로 미워한다면 어지러워질 것이다.

◑ 굴 원(343? - 277? B.C) : 이름은 평, 호는 영균, 자는 원. 초(楚)의 명문 출신으로 초왕과 동족이며 박학강지하고, 특히 문필과 변론의 재주가 뛰어나 정치 관계의 사실에 밝았다. 회왕의 신임을 받아 좌도 (左徒)의 관직에 오르고, 또 삼려대부(三閭大夫)로서 왕족 삼성(三姓)을 다스려서 크게 출세하였으나, 상관 대부(上官大夫)의 참소와 진(秦)의 계략으로 추방되었다. 한때 다시 기용되어 진과의 교섭에 임했으나, 이보다 앞서 굴 원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진에 들어가 잡힌 회왕이 3년 뒤에 그 곳에서 객사 (B.C. 296)하자, 회왕의 뒤를 이은 경양왕이 그를 강남으로 추방하게 되고 그는 기울어져 가는 조국의 전도를 차마 볼 수 없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초나라는 굴원이 죽고 나서 50여 일 만에 진에 멸망되는데, 그가 죽은 날인 오월 단오가 되면, 대나무 잎에 말아서 찐 떡을 먹고 창포물로 목욕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대표작 '이소(離騷)'는 장대한 서정적 서사시로 자신이 참소당한 이후의 번민과 국운에 대한 한탄이 절 절히 배어 있다. 이 밖에도 '구가(九歌)' '천문(天問)' '구장(九章)' '원유(遠遊)' '복거(卜居)' '어부(漁 夫)' '초혼(招魂)' 등이 있으며, 후세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굴 원은 옛날부터 충군 애국의 전형적 인물로 지칭되며, 특히 주자학의 성행으로 더욱 빛을 내어 우리 나라, 일본 등에서도 깊이 추앙되는 인물이다.

◑ 진(秦: ?∼206 B.C.) : 춘추 제후국으로 뒤에 전국 칠웅의 하나가 되어 끝내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시조인 비자(非子)는 주 (周)의 효왕을 섬기다가 진에 봉작되어 부용(附庸:小國)이 되었다고 한다. 주의 유왕이 견웅의 침입으로 죽고 평왕이 동천(기원전 770년)할 때에 진의 양공이 군대를 이끌고 왕실을 도와 그 공으로 섬서이서의 땅을 봉토로 받아 제후의 서열에 올랐다. 주변의 견융을 정벌하여 서융의 패자가 되고, 동방의 진(晋)과 겨루게 되었다. 전국 시대 초기에 효공(孝公: 재위 369∼338 B.C.)이 나와 상 앙을 등용, 부국 강병책을 추진한 이래 더욱 강대해졌으며, 점차 동방으로 영토를 확대하고 혜문왕 때에 함양으로 천도한 이후, 동 방 6국과의 격렬한 쟁패전에서 승세를 확보하고, B.C. 247년 진왕 정이 들어서자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정책으로 한(韓)ㆍ조(趙)ㆍ위(魏)ㆍ초(楚)ㆍ연(燕)ㆍ제(齊)의 6국을 차례로 멸망시켜 B.C. 221년에는 드디어 중국의 전토를 통일하였다.

◑ 상 앙(商 ; ? - 338 B.C.) : 공손 앙 또는 위 앙 이라고도 하는 상앙은 순자의 제자로 스승의 사상을 법치주의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대가족을 분산시키고, 인조제에 의한 연대 책임을 강화하고, 개간을 장려하여 토지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군현제의 실시, 세제의 개혁등 부국 강병책을 추진하여 진의 중국 통일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기원전 4세기 효공의 치세 아래 종래의 관습과 정책에 대한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목적은 농지 개간을 통해 국력을 충실히 하고 군사 질서에 기초한 사회를 확립 하는 데 있었다. 개혁은 거의 강제적이었다. 남자 2명 이상의 동거를 인정하지 않고 대가족을 소가족으로 나눴다. 이렇게 생긴 집을 5호, 10호 단위로 묶어 이를 군대 편제의 기본으로 삼고 연좌제로 상호 감시하게 했다. 곧 평상시에는 농사에 힘쓰고 전시에는 군공을 세울 것을 장려해, 전쟁에서 거둔 공적에 따라 작위를 주었다. 작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소유하는 토지 면적이나 의복 따위에 차이를 두어 신분제를 확립했다. 이것은 왕족과 귀족에게도 적용되어 군공이 없으면 그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였다. 이 개혁은 숱한 반대를 물리치고 실시됐다. 상앙은 기원전 350년에 제2차 개혁에 나섰다. 현(縣)을 중심으로 행정 구획을 재편하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다스리는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했다. 또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도량형을 통일했다. 또한 수도를 옹(雍)에서 동부의 함양(咸陽)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의 강제 적인 개혁은 종실 귀족 사이에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기원전 338년, 상앙의 개혁을 이해해 주던 효공이 죽자 상앙은 모반죄로 몰려 도망 다니게 되었다. 그가 관소(함곡관)에 있는 한 여관에 잠을 청하자 여관 주인은 "상군(상앙을 높이 부르는 말)의 법에는 여행증이 없는 사람을 재우면 주인이 그 손님과 연좌의 벌을 받게 됩니다." 하며 거절하였다. 이에 상앙은 "아! 새 법의 폐단이 마침내 내 몸에까지 미쳤는가."라고 탄식했다 한다. 여관 주인의 밀고로 상앙은 체포되었고 진왕은 상왕을 차열형(차열형, 수레에 사지를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해 시체를 공개 전시했다. 그의 일족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기원전 338년의 일이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향후 진나라의 정책에 계승되어 국력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했다.

(2) 진·한 제국의 발전

◑ 시황제의 정치 : 천하를 통일한 진은 국가 통치의 모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중앙 집권적 정치제도를 확립하였다. 진왕 정(政)은 왕의 칭호를 전설상의 삼황 오제(三皇五帝)를 뜻하는 '황제'로 바꾸어 그 격을 높였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군에는 수, 위, 감 등의 관료를 임명하였으며, 중앙에는 승상, 태위, 어사, 대부의 3공과 9경의 관료제를 확립하여, 중앙 집권적 관료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는 다음의 한 제국에 계승되어 중국 통일 제국의 출발이 되었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정복 전쟁 과정에서 강력한 왕권이 출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씨족 공동체적 읍제 국가 대신 영토 국가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마련된 것이 군현제이다. 또한 지방관을 통하여 전국을 직접 장악하는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진시황의 정치는 정치적 중앙 집권을 지향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면에서 제국의 동질성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도량형을 통일하고, 화폐와 문자 심지어는 수레의 폭까지도 통일하여 춘추 전국 시대의 분열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이 때 진이 확보한 영토는 역대 중국 영토의 원형으로 남아 역사상 통일과 분열이 엇갈리는 속에서도 대체로 유지되었다. 시황제는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법가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상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법가는 군주가 정하는 법에 따라 통치한다는 사상으로, 신상필벌 원칙에 의해 엄격히 법을 적용, 신분의 고하나 귀천을 구별치 않는다는 상당히 혁신적 면모를 지닌 정치 철학이었다. 법가 사상의 창시자는 상앙이며, 한비자·이사가 대표적 인물이다. 진시황은 이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제자백가의 저술들을 불살라 버리고 많은 유생들을 생매장시킨 이른바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제자백가의 저술을 숨긴 자는 노역형, 그에 대해 논하는 자는 참수형, 옛 일을 돌이켜 지금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했다.「음풍농월하는 쓸모없는 사상은 단호히 배격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오늘날 독재 정권의 사상 및 언론 탄압의 예로 인용되고 있다.

◑ 시황제 : 진시황제는 500여 년 동안 제후들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다. 이름은 정(政), 그의 출생에 얽힌 다음의 비화가 전해진다. 전국 시대에 조(趙)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 (秦)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대상인 여불위(呂不韋)가 도와주었다. 그리고 여불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초가 진(秦)의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후원하였으며 자신이 총애하던 여자를 자초가 좋아하게 되자 그 녀를 자초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녀는 당시 여불위의 아이를 뱃속에 갖고 있었다. 자초는 결국 진의 왕이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자초가 죽은 뒤 진의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시황제라는 것이다. 정(政)은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정치 혁신을 단행하였다. 중앙 정부의 기구를 행정ㆍ감찰ㆍ군사의 3 권으로 나누어, 승상ㆍ어사대부ㆍ태위를 각각 장관으로 하였다. 또한 이 사의 의견을 따라 봉건제를 폐하고 군현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군(뒤에 48군)으로 나누고 중앙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는 등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전국 시 대의 6국의 유습이 남아 있었으므로 시황제가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은 B.C. 206년경 항우ㆍ유방에 의해 멸망되었다.

◑ 축객령에 대한 이사의 상소

시황제 10년, 진나라 관직에 있던 한나라 사람이 시황제에게 개발이란 명목으로 수로를 만들기를 권했는데, 후일 이것은 진나라의 국력을 소비시키려는 책략이라는 것이 발각됐다. 그러자 진의 종실과 대 들 사이에 이것을 기화로 지금 진나라에서 봉록을 받고 있는 타국인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축객령 (逐客令)' 이 대두되었다. 이때 이사가 축객령에 반발하여 상소를 올렸다. 옛날 목공(穆公)은 융(戎)의 유여(由余), 완(宛)의 백리해(百里奚), 송(宋)의 건숙(蹇叔), 그리고 진(晉) 의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맞이하여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효공은 상앙을 중용하여 지금 진나라의 영토가 천리인 강대국으로 번영했으며, 혜왕은 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6국의 합종 (合縱)을 해체시켜 진나라에 복종하게 했습니다. 또 소양왕(昭襄王)은 범휴를 중용해 '원교근공책(遠交近 攻策)' 으로 진나라 제왕의 업을 이룩했습니다.

◑ 이 사(李斯) : 시황제가 왕이 된 B.C. 246년부터 B.C. 208년까지의 38년간, 특히 후반의 25년간을 승상으로서 시황과 그 2세를 보필한 사람으로, 전국 초에 상채에서 태어났다. 순자에게 사사하여 그 법치주의적 학풍의 일면을 정치면에서 발휘하였다. 시황제의 정책은 거의가 이 사가 계획한 것들이다. 선량·호쾌하며 재능· 학식이 아울러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시황제가 죽자 2세 황제 호해를 받들어 온갖 음모를 자행하던 환 자 조고에게 기만당하여 그 방향을 잃게 된다. 시황제 37년(B.C 210), 시황제는 아들 호해(胡亥), 이사, 조고 등과 함께 다섯 번째 순행을 하다 50세의 한창 나이로 사구(沙丘)에서 급사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재상 이사는 나라가 혼란해질 것이 두려워 환관 조고와 결탁하여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함양으로 와서 제위를 계승하라는 황제의 유서를 '부소는 불효하니 자살하라' 는 내용으로 고쳤다. 이것을 진짜로 믿은 부소가 자살하고, 둘째 호해가 제위에 올라 진 2세(秦二歲)가 되었다. 진 2세는 의지가 박약하고 무능해 황제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조고는 진 2세를 마음대로 농락하면서 자기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고의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에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재상 이사였다. 그리하여 조고는 이사와 그의 아들 이유(李由)가 반란을 도모한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진의 최대 공신이었던 이사는 함양의 시장 거리에서 자기가 제정한 법률인 5형(五刑)을 갖춘 요참형(腰斬刑: 코를 베고 귀와 다리를 자르고 채찍질을 한 뒤 허리를 자르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진 2세 2년(B.C 208)의 일이었다.

◑ 진승, 오광의 난 : 진의 2세 황제 원년 7월 이문내의 왼쪽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오른쪽 지역에는 힘있는 부자들이 살았으며 왼쪽 지역에는 힘없는 약자들이 살고 있었다)이 징발되었다. 변경의 어양(漁陽)을 수비하게 된 900명의 사람들이 도중에 대택향에서 야영을 하게 되었다. 진승과 오광은 순번에 따라 이 고달픈 여행길에 오른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마침 큰비가 내려 길이 끊겨 버렸다. 일정을 계산해 보니 도저히 기한까지 어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해진 날짜보다 늦게 도착하게 되면 법에 따라 참수형이 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진승과 오광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지금 도망친다 해도 죽임을 당할 것이요, 모반을 한다 해도 죽을 것이니 이왕 죽을 바에야 나라를 세우고 죽는 것이 어떻겠소,"……오광은 원래 부하를 무척 아꼈으므로 병졸들 중에는 오광을 돕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진승과 오광은 병졸들을 모두 모아 명령하였다. "그대들은 큰비를 만나 기한 내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소. 기한을 어기게 되면 모두 참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오. 설령 목이 잘리는 일은 면하더라도 변경 수비를 하게 되면 열에 여섯이나 일곱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오. 어쨌든 남자로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나 만약 죽는다면 크게 이름을 떨치고 죽는 것이 어떻겠소. 왕후장상에 어찌 종자가 따로 있단 말이요." 그러자 전원이 한결같이 "삼가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항우와 유방 : 항우(項羽 : B.C 233-202)는 초(楚)의 무장으로, 숙부 항량과 함께 강동에서 팔 천의 병력으로 봉기, 진(秦)에 대한 반란군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유방(劉邦 : B.C 256∼195)은 초나라 패현(沛縣)의 일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이 두 사람은 각자 대군을 이끌고 강대한 진나라를 공격 하여 마침내 역사의 장에 그 이름을 남긴 영웅들이다. 진 2세 황제 원년에 정장(亭長)이라는 하급관리로, 현령의 명령에 따라 죄수들을 인솔하여 여산릉의 공사장으로 가던 유방은 죄수 가운데 도망자가 속출하자 문책 당할 것이 두려워 인솔해 간 죄수들을 풀어주고 추종자들과 함께 산으로 숨었다. 그때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방은 이에 호응하여 패현을 근거지로 거병했고, 당시 설(薛)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항량을 찾아가 그의 예하 부대의 하나가 되어 함양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항량이 크게 패하여 죽음을 당했고, 뒤를 이어 항우가 반란군을 통솔했다. 진나라가 망한 후 항우는 스스로 어지러운 천하를 정리하여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자 했다. 우선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추대하고, 공을 세운 19명의 왕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어야 했는데, 그 가운데는 유방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항우는 팽성을 도성으로 하는 아홉 군을 차지하고 국호를 '서초(西楚)' 로 하여 사람들은 그를 '서초패왕' 이라 불렀다. 그러나 유방에게는 궁벽한 남쪽의 한중(漢中)을 떼어주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고 유방은 이곳을 근거지로 남정(南鄭)을 도읍으로 삼아 한나라를 건국했다. 본래 무장이었던 항우는 용감하기는 했지만 지혜가 없었고, 정치가로서의 감각이 결핍되어 천하를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으니 이것으로 4년에 걸친 '초한 전(楚漢戰)' 이 시작되었다. 항우와 유방은 수많은 접전을 벌였는데, 전술상에서는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항우가 위였지만, 전략 상으로는 유방이 한 수 위였다. 유방은 한신, 팽월의 도움 외에도 각 제왕들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초군은 크게 패하고, 항우는 해하(垓下)까지 쫓겨가 포위 당하고 말았다. 포위된 상태에서 오랜 시일이 흐르자 초군의 병사는 갈수록 줄어들고 식량은 차츰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항우는 유방의 계책에 빠져 몹시 절망하여 하늘을 찌를 듯했던 옛날의 용맹은 간 곳이 없었다. 어느덧 한밤중에 이르자 항우는 장막 안에서 연회를 베풀고 지금까지 자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중신, 명장들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때 애첩 우미인(虞美人)과 애마 오추마(烏 馬)가 항우의 곁에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본 항우는 슬프게 탄식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건만 力拔山兮氣蓋世, 때가 이롭지 않으니 오추마가 달리지 않는구나 時不利兮 不逝,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하랴 不達兮 可柰河, 우야 우야 어찌하랴 虞兮虞兮柰若何.] ---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고 천하 영웅의 말로에 눈물을 흘렸다.

◑ 유태공 : 자기의 권력 강화를 위해 오랫동안 보좌해 오던 신하들에게 서슴지 않고 살수를 펴는 냉혹한 유 방이었으나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지극한 효자였다. 유방이 제위에 오른 후 그의 부친은 태상황 유태공(劉太 公)이라 불렸다. 유태공은 평생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면서 시골 사람들 틈에서 함께 어울리며 세월을 보내던 순박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아들이 한나라의 제왕이 되었으나 이를 빙자하여 세도를 부린다거나 재물에 욕심을 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아들을 따라 대궐에 들어온 이후로 늘 즐겁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런 유태공을 본 유방이 시중들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유태공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었다. 넓은 궁궐 안에 오직 예절바르게 순종하는 아름다운 궁녀들만 가득 있는 생활이 그에게는 아무 즐거움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떠나온 고향 패현 풍읍(豊邑)에서 친구들과 가끔 도박도 하고,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시다 서로 욕하고 싸우기도 하며, 닭싸움, 개싸움을 구경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부친이 향수로 인해 입맛을 잃고, 사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본 유방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시골 풍읍을 장안으로 옮겨오기로 결정했다. 유방은 즉각 풍현 정경을 장안에 그대로 재현하도록 명령을 내린 후 공사가 완공되자 풍읍의 선비, 농사꾼, 장사꾼 등의 백성들은 물론 닭, 개, 돼지 등의 동물들까지 모두 장안으로 옮겨와 새로 지은 장안의 풍읍에서 살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 입주하자 유 방은 즉시 부친을 초청했다. 고향 풍읍이 그대로 장안으로 옮겨온 것을 본 유태공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옛 친구를 찾아가 함께 술마시며 회포를 풀었다. 이런 일화로 이 지방이 신풍(新豊)이라 불리웠고, '제왕의 고향' 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유방은 외부인이 이 마을로 이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여태후(呂太后: ?∼B.C 180) : 중국 역사상 유명한 태후 세 사람이 있으니 한의 여태후, 당의 칙천대후, 청의 서태후로, 이 세 사람은 정치적 능력이 남자에 비해 뒤지지 않는 여자 중의 호걸들이었다. 유방이 천하를 제패하고 제위에 오르자 여씨는 황후가 되고 그녀의 아들 영(盈)이 태자로 봉해졌다. 한 고조 유방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실인 여후가 낳은 아들은 태자 영뿐이었다. 한 고조가 죽은 후 제위를 물려받은 혜제는 성품이 후덕하고 어질었다. 이런 아들의 성품을 누구 보다고 잘 아는 여태후는 이복 형제들이 황위를 노릴까 의심하여 자신이 직접 하나씩 숙청하기로 결심했다. 한 고조는 생전에 여러 후궁 가운데 척부인(戚夫人)을 가장 총애하였다. 여태후가 가장 먼저 죽이려는 사람이 바로 척부인과 조왕 여의였다. 여태후는 한시바삐 골치 거리를 처리하기 위해 즉시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누구보다도 자기 모후의 성격을 잘 아는 혜제는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몸소 패상(覇上)까지 마중 나가 함께 입궁하고, 그날부터 형제간의 회포를 푼다는 이유로 조왕 여의를 자기와 함께 기거하게 하여 모후에게 손쓸 틈을 주지 않았다. 당시 혜제는 늘 새벽마다 활쏘기를 연습하곤 했으나 여의는 아직 나이가 어려 게으름을 부리고 늦잠을 자기 때문에 혜제는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혜제가 자기 침소를 떠나자마자 여태후는 즉시 사람을 보내 잠자던 여의를 덮쳐 강제로 독주를 먹였다. 활 쏘기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온 혜제는 여의가 침상에 피를 토한 채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된 것을 발견했다. 이어서 여태후는 척부인의 두 눈을 파내었으며, 귀를 태워 귀머거리를 만들고, 입에는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이고, 두 손과 발을 잘라 칙간에 던져 놓고 그녀의 목에 '인체'(人 : 사람 돼지) 라는 팻말을 걸게 했다. 그리곤 혜제의 소매를 붙들고 가서 그녀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혜제는 너무 큰 충격에 마음의 병을 얻어 거의 1년간을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후 혜제는 즉위한 지 8년째인 24세의 젊은 나이로 미앙궁(未央宮)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혜제의 죽음은 여태후에게 슬픔보다는 하나의 걱정거리를 가져왔다.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혜제가 한 점 혈육도 없이 세상을 떠나니 이제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진 것이다. 혜제의 장례를 대충 마무리짓고, 후궁 미인이 낳은 남자아이를 몰래 데려다가 황후 장씨의 방에 밀어 넣고 장 황후의 소한 후 태자로 삼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소제 홍(少帝弘)이다. 소제가 점차 자라면서 자신의 생모가 죽음을 당하고 자신이 황위에 오른 이유를 알자 자신이 친정하게 되면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말했다. 이 소식이 여태후에게 전해지자 그녀는 황제를 별궁에 가두어 죽이고, 군신들에게 황제가 병이 들어 국정을 처리할 수 없다고 전하며 폐위시켰다. 그 해 5월, 여태후는 상산왕(常山王) 유의(劉義)를 즉위시키고 소제(少 帝)라 부르게 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소제가 통치한 기간은 사실상 여태후가 천하를 다스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은 기원전 187년을 기년(紀年)으로 하여 기원전 180년 9월까지 그녀의 통치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천하를 한 손에 장악하게 된 여태후는 자기 기분에 따라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이니 그것이 변태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녀가 다스리던 8년 동안 고조의 일곱 아들 가운데 5명이 여태후에 의해 타살되거나 자살하였고, 조정의 요직은 유씨 대신 여씨가 장악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80년, 칠십 세 전후의 여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구심점을 잃은 여씨 집단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녀의 죽음은 그 동안 여씨 일족에 눌려 왔던 세력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고, 제 왕비의 자손인 유장(劉章), 공 신 진평, 주발 등이 연합하여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소제를 폐위시킨 후, 대왕(代王) 항(恒)이 제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한 문제이다.

◑ 중국: 중국(中國)이라는 나라 이름은 '가운데에 위치한 나라(Middle Kingdom)' 라는 뜻이다. 이것은 중국인 의 천하관을 반영한 말로서 중국이 세계의 중앙에 위치하여 주변의 여러 민족을 관할한다는 중국인의 민족적 우월 의식을 나타낸 국호이다. 그러나 중국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무의미한 인도와 페르시아에서는 중국을 '지나(支那)' 라고 불렀으며, 그보다 서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영국에서는 '차이나(China)'라고 불렀다. 지나나 차이나는 춘추 전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한 진(秦)에서 유래된 것이나, 정작 중국인은 중국을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말로서 진보다는 진 멸망 후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漢)을 내세워 왔다. 그러하기에 중국인을 한족(漢族), 중국 문자를 한자(漢字), 중국 문화를 한(漢)문화라고 한다. 이처럼 한 왕조가 중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통일이 바로 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은과 그 뒤를 이은 서주는 씨족제를 바탕으로 한 도시 국가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동주 이후의 춘추 전국 시대는 분열과 혼란기였다. 그리고 시황제의 진이 춘추 전국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단명하여 15년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진의 뒤를 이은 한은 400여 년간(기원전202년∼기원후 220년)통일을 지속시켜 나갔다.(외척 왕망이 한때 제위를 빼앗아 신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그 존속 기간은 15년에 불과하였다.) 그 결과 한은 진과 같은 획일적인 통일 정책을 강요하지 않아도 문화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중국의 고전 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특히 한의 무제는 진이 실패한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였다. 게다가 한은 적극적인 대외 원정을 추진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함으로써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그리하여 주변 여러 민족, 여러 나라에 정치, 문화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중국인은 비로소 중화 제국으로서의 민족적, 문화적 자각을 하게 되었고, 이 때의 국호였던 한이 중국 민족과 중국 문화를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되게 된 것이다.

◑ 군국 제도(郡國制度) : 한대의 지방 제도로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것. 한의 고조는 진(秦)이 급진적인 군현 제도를 시행하여 멸망한 것을 거울삼아, 또 통일에 공적이 있었던 사람을 우대하는 뜻에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경제의 중심 지역과 서북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는 직할지로서 군(郡)을 두는 한편, 관중 동쪽 및 남쪽의 구 6국(舊六國)에는 일족과 공신을 분봉하였다. 그러나 고조는, 이들 왕국이 독립된 실력을 갖는 것을 염려하여, 서서히 교묘한 수단으로 왕국의 파괴공작을 행하여, 고조 말년에는 이성(異 姓)의 왕국은 거의 제거되었다. 잔여 유씨(劉氏) 일족의 왕국도 문제·경제 때 압박이 가해져 이에 반항하여 오초 칠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났으나, 불과 3개월만에 평정되고, 이후 왕국의 권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또 무제는 추은(推恩)의 영(令)등 각종의 금령(禁令)으로 왕국의 힘을 쇠퇴시키며, 왕국을 제거하는 적극책을 취하여 그 결과 군국제는 유명무실해지고, 실제는 군현제와 다를 바 없이 되었다.

◑ 오초(吳楚) 7국의 난 : 한 왕조는 군현 제도와 병행하여 봉건 제도를 부활하였고 일족의 자제를 각지의 왕으로 봉하였으나 얼마 후 세력이 강대해 져서 오(吳), 초(楚), 제(齊)등의 여러 왕은 넓은 영지를 갖고 중앙 정부에 대항하였다. 한은 그 세력을 억누르기에 힘써 기원전 156년 제 6대 경제는 조조의 시책을 받아들여 제왕의 영토를 삭감할 방침을 세우고 초(楚), 조(趙), 교서(膠西)에 이어 오(吳)에 이를 착수하려 하자 오왕이 반기를 들었으며 이어서 초, 조, 교서, 교동(膠東), 치천( 川), 제남(濟南)의 6왕도 이에 가담하여 7국의 반란으로 발전하였다. 이 반란은 한의 장군 주아부의 무공으로 진압되었으며 그 결과 여러 왕후의 권력은 약화되고 영지도 많이 세분화되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다.

◑ 한 무제의 군현제 실시 : 봉건제와 군현제는 중국 통치 체제의 2대 원리로서 유가는 봉건제를, 법가는 군현제를 이상으로 내세워 왕도주의와 패도주의로 서로 대립하였다. 주에서 실시된 봉건제는 지방 분권화의 속성으로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을 경험하였고, 진의 군현제는 그 획일주의적 중앙 집권화로 쉽게 붕괴되었다. 항우가 봉건제를 취한 것은 역사의 대세를 거역한 것이고, 유방(고조)의 군국제는 과거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이것이 다시 오.초 7국의 난을 계기로 봉건제를 버리고 군현제로 환원하게 된 것이다. 경제때 지방 분권 세력을 진압한 후, 무제에 의한 군현제적 중앙 집권 체제의 실현은 방대한 통일 제국의 통치를 위해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무제가 법가적 군현제로 황제 지배 체제를 강화하고, 명분상으로는 유교를 관학으로 택해 유가적 덕치주의를 표방한 것은 무제의 뛰어난 통치 능력에서 나온 역사적 위업이었다. 무제는 유가 사상을 배경으로 중화에 군림하는 황제로서 주변의 미개한 이적(夷狄)을 중국 문화(유교)에 동화시킨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방대한 대외 원정을 감행하였다.

◑ 흉노(匈奴) : B.C. 4세기말부터 약 500년 동안 몽고에서 번영한 유목 기마 민족. 전국 시대에 흉노는 오르도스 지방에 거주하면서 중국의 북변을 공격했으나, 진대(秦代)에 몽염에게 격파되어 인산 북쪽으로 퇴거했다. 묵돌 선우 때에 동호(東胡), 월지(月氏) 등의 족속을 병합 전 몽고를 지배하고, 이어 중국(漢)을 공격하였다. 한 고조는 백등산에서 대패하여 화의를 청했다.(B.C.200) 이후 한은 선우에게 공주를 보내어 통혼하고, 또한 재물을 보냄으로써 평화를 유지했다. 이어 무제 때에도 대군을 보내어, 흉노를 토벌하였으나 굴복시킬 수 없었고 양측 모두 피폐할 뿐이었다. 후한의 초기인 48년에 흉노의 내분이 재발하여 일축왕비가 자립하여 호한야 선우라 일컫고 남변의 부족을 이끌고 후한(광무제)에 항복함으로써,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호한야나 그의 자손(남흉노)은 후한의 사급(賜給)을 받고, 남선우정을 미직(美稷:오르도스 좌변)에 설치하였다. 한편 몽고의 북흉노는 선비족ㆍ남흉노의 공격을 받고, 또, 후한의 정벌군에게 패하여 91년 오르콘 강 서쪽의 근거지를 버리고, 일리 지방으로 옮겨, 약 반세기 동안 타림의 지배권을 놓고 후한과 싸웠으나, 2세기 중엽에 키르기즈 초원으로 이주, 이후 중국의 역사로부터 종적을 감추었다. 4세기에 유럽 일대를 휩쓴 훈족이 이 북흉노의 후손이라는 것은, 북흉노의 몽고 퇴거와 유럽 출현시기의 일치, 양자의 습속의 동일성, 유뮬의 유사성, 그 밖의 문헌이나 고고학적 사료로 거의 확실한 것으로 추측되나 다른 의견도 만만치 않다. 국가 형태는 부족 연합체로서 연제ㆍ호연ㆍ수복ㆍ난ㆍ구림 등의 귀성(貴姓)이 있고, 선우는 언제나 연제씨 출신에서 나오며, 연 3회의 부족장 회의는 선우 주재하에 제례를 갖고, 정치를 의논했다.

◑ '사기'에 그려진 흉노의 생활

북방의 미개지에 살면서 목축에 편리한 곳을 찾아 정처없이 거처를 옮겼다. 가축의 대부분은 말, 소, 양이었으며 특수한 것으로는 낙타, 당나귀 등이 있었다. 말이나 풀을 쫒아 유목하며 성곽도 주거지도 경작지도 없는 형편이었으나 각기 영역은 있었다. 문서를 사용하지 않고 말로 약속을 하였으며 아이들도 양을 타고 활을 쏘아 새나 쥐를 잡았으며 조금 나이가 들면 여우나 토끼를 잡아 양식에 보태고 장정들은 활을 잘 쏘아 모두 기병이 되었다. 평상시에는 목축과 함께 수렵으로 생활해 나가고 전시에는 군사를 훈련시켜 침략 공벌하였으니 이것은 거의 천성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유리할 때 전진하고 불리할 때 후퇴하며 도망치고 달아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이익이 있으면 예의를 차리지 않았으며 군주 아래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몸에 두르고 털옷을 입었다.

◑ 장건의 비단길 : 개척 기원전 2세기, 흉노는 감숙성 일대와 중앙 아시아를 손에 넣고 서방과 비단을 교역,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었다. 기원전 159년에 즉위한 한 무제는 역대의 굴욕을 씻기 위해 흉노를 칠 것을 계획했다. 그는 흉노에게 쫓겨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간 월지국과 손을 잡고자 했지만,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이때 나선 인물이 장건(張騫)이다. 기원전 139년 그는 백여 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월지국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중국 국경을 벗어나자마자 흉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간신히 죽음을 면한 그는 흉노인으로 정착, 흉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장건은 탈출하여 드디어 목적지인 월지국에 도착했다. 월지국은 아무르 강 북안, 우즈베크 공화국 부근 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나라와 손을 잡고 흉노를 공격할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돌아오던 장건은 또 흉노의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감시병이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가까스로 도망친 장건은 기원전 126년, 떠난 지 실로 13년만에 돌아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은 실패했지만, 장건이 10여 년간 보고들은 서역 지방에 대한 이야기는 무제를 한껏 들뜨게 했다.「월지 를 찾아 헤매던 중, 대완(大宛)에 들어갔습니다. 피땀을 흘린다는 대완의 말은 하루 천리를 달립니다.」이것이 천마로 유명한 한혈마(汗血馬)이다. 기원전123년 무제는 이 말을 얻을 욕심으로 장건을 다시 파견, 흉노를 쳐서 대완에 이르는 길을 뚫게 했다. 대완(Fergana)은 구 소련 키르기즈탄 공화국의 페르가나 분지에 자리잡고 있던 나라이다.

◑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류 : 장건이 개척한 길은 중요한 동서 교역로가 되었다. 비단·거울·칠기·약재·향신료·북숭아·살구· 닭·제지법 등이 서역으로 전달되고, 거기서 다시 유럽과 지중해 세계로 전해졌다. 한편 석류·오이·호 박·호두·수박·마늘·참깨·모직물 등 서역의 문물이 중국으로 건너 왔으며, 불교·조로아스터 교· 이슬람 교 등의 종교와 역법·점성술도 이 길을 통해 소개되었다. 중국인들은 서역에서 들어온 문물에 「호(胡)」자를 붙여 불렀다. 호떡·호적·호복·호반 볶음밥·호무(胡舞)는 다 이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다.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서역 문물은 그대로 우리 나라에까지 전해졌다. 격구·축구·그네 ·윷놀이가 건너왔고, 줄타기·땅재주·탈춤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봉산 탈춤의 주인공들이 서역 사람을 닮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로마가 비단길의 서쪽 종착역이었다면, 우리나라는 그 동방 종착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역(西域) : 중국 사람들이 서방 지역의 여러 나라를 가리켜 부른 말로 지리적으로 명확하게 구획할 수 없으나, 넓은 뜻으로는 중앙 아시아로부터 이란,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인도, 티벳을 가리키고, 좁은 뜻으로는 타림 분지 즉 동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들을 가리킨다. 요컨대 그 당시의 대 서방 육상 교통로가 미쳤던 곳, 혹은 서방에 관한 지리 지식 여하에 따라서 그 범위도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대에 동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이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 이들 여러 나라들은 서역 36국이라 총칭되었고, 그 후 수 세기동안 실제 국가 수에 관계없이 36국으로 통칭되었다. 한(漢) 왕조는 B.C. 99년에 카라샤르와 쿠차 사이에 둔전병을 진주시키고, B.C. 59년 오루성(烏壘城)을 쌓아 여기에 서역 도호라 하여 둔전의 경영과 교통로의 보전을 임무로 했다. 후한에 이르러 일시 단절되었으나, 74년에 부활하였다가 또 단절, 91년에 세 번째 부활했는데, 이 때의 도호(都護)가 반 초(班超)로서 그 아들 반 용과 함께 중국 서역 경영사상 가장 저명한 자가 되었다. 그 후 당은 북정(北庭)·안서(安西)의 양 도호 부를 두어 서역을 경영했다. 그 목적은 북방 초원의 유목민 세력에 대한 군사 전략상, 또 한편으로는 서방과의 통상 내지는 그 문명에 대한 관심에서였는데, 이것이 중국 왕조에 대하여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 대월지(大月氏) : 진·한 시대에 중앙 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 B.C. 3세기경, 신쟝 동부 일대에 월지라고 부르는 민족이 유목하여 한때 강력해져 깐쑤(甘肅) 방면에 세력을 신장했다. 중국 고전에는 우씨(禹氏)·월지(月氏)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정확한 원음은 밝혀지지 않았다. B.C. 162년, 2회에 걸쳐 흉노에게 패해서, 옥소스 강 북으로 이동하여 소그디아나 지방에 호수 10만, 인구 40만의 대국을 세워, 옥소스 강 남쪽의 박트 리아까지도 지배했다. 한의 사신 장 건이 이 곳에 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대월지국(大月氏 國)이라 부르고, 그 뒤 45년경부터 대하(大夏)의 제후의 하나인 쿠샨(貴霜)이 강력하게 되어 대월지 대신으로 이 지방 전역을 지배했는데, 그 뒤에도 중국에서는 쿠샨 왕조를 대월지국으로 불렀다. 쿠샨과 대월지간의 혈연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 유교 정치 이념의 채택 : 무제 때 유가가 다른 학파를 누르고 중국 사상계의 주류를 이룩하게 된 것은 다른 학파는 편협한 일가의 이론과 주장을 고집하였으나, 유교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있는 경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가의 경전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뿌리 또한 깊고 넓다. 따라서 유교 경전은 단순한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며, 거기에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국인의 사상 철학이 담겨져 있고 인간 윤리를 강조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 유가는 중용(中庸)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다른 학파의 경우는 지나치게 논리에 편중되거나 현실 생활을 부정하기도 하고 인간의 윤리를 도외시하기도 한다. 특히 진에서의 법가주의의 실패는 무제로 하여금 많은 반성을 하게 하였다. 따라서 유교의 온건한 중용주의와 인의예악(仁義禮樂)의 존중은 바로 사회 질서를 정비하고 인간 윤리를 안정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황제의 입장에서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수신(修身), 제가(諸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기본 원리와 중용을 표방한 유가를 채택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한편 한 초에 유행하던 도가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 유가가 관학으로 발전한 면도 없지 않다. 사실 도가는 현실 생활을 부정하고 무위(無爲)를 강조한 나머지 인위적인 정치를 배격하였다. 문제 (文帝)에 의해 실시된 무위 정치는 이와 같은 도가 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안정되 고, 농업 생산력이 회복되어 경제가 발전하게 되면서 예의와 법도 그리고 음악으로 체면을 차리고, 정치에도 다양성과 함께 문화성을 중시하게 되자 여기에 유가가 지배 계층으로부터 환영을 받게 되었다.

◑ 동 중서 (董仲舒, 200?-120? B.C): 무제 때의 유학자로 무제로 하여금 유교에 의하여 사상 통일을 하도록 하는 정책을 건의하였다. 어려서부터‘공양춘추(公羊春秋)’를 수학하고, 경제 때에는 박사가 되었다. 그의 저서‘춘추번로(春秋繁 露)’는 공양사상(公羊思想)에 의한 춘추의 해석으로, 여기에 나타난 것은 전한의 금문학(今文學)의 사상이다. 인간과 자연과의 사이에는 기능의 일치가 성립되는데, 양자는 서로 상관 관계에 있다고 하는 철학 상의 입장에 서서, 행정 조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치 사상을 설명하였다. 그 기초는 전국이래 지배적이었던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하여 주어졌다. 인군(人君)이 만일 천의에 거역하는 행위가 있으면, 하늘은 재앙 또는 이변을 내려 경고한다고 하는 재이설(災異說)은 이렇게 하여 성립되었다. 또한 경제 정책으로서 한전(限田)·노예 해방을 주창한 것은 국가 권력의 집중화를 꾀한 것이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 한대 호족의 모습

▶ 호강, 대가(豪强,大家)가 산해(山海)의 이익을 장악하여… 일가가 무리를 모아 1000여명에 이른 경우도 있는데, 대개 국가의 지배를 이탈한 인민을 모두 모은 것이다. -염철론 복고편

▶ (대상인, 부호들은) 시세의 변동을 살펴서 그 이익을 얻었으며 말업(상업)으로 재산을 이루고, 본 업(농업)을 가지고 이를 지켰다. -사기 화식열전

▶ 호인(豪人)의 집은 수백 채의 건물이 연이었고, 기름진 땅은 들에 가득하며 노비는 수 천, 예속된 농민은 수만에 이른다. -후한 중장통의 말

◑ '염철론'의 양측 입장

▶ <현량, 문학: 향거리선제를 통해 진출한 유가적 관료> - 정치의 근본은 도덕과 인의를 앞세워 말업을 억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본업인 농업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소금. 철. 술의 전매와 균수, 평준 등은 정부 스스 로 인민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인민을 말업(상업)에 달려가도록 만들고 있다. 따라서 이런 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옳다.

▶ <대부(大夫): 국가 권력을 대변하는 상인 출신의 법가적 관료 -상홍양> - 현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는 변경의 방비를 굳게 해야 하며 그를 위한 재정적 조치로서 소금, 철, 술의 전매와 균수, 평준의 제도는 존속시켜야 한다.

◑ 무제 이후 통제 경제 정책의 내용

▶전매제: 소금, 철, 술 등 대중적 수요가 있으면서 이익이 많은 상품을 국가에서 전매

▶균수법: 각지의 특산물을 거두어 부족한 지방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고 차익을 국가가 취함.

▶평준법: 특산물을 거두어 저장했다가 부족한 시기에 팔아 물가를 조절하고 차익을 국가가 취함

▶상인에 대한 중세 : 재산 평가액 2000전 당 120전의 비율로 농민의 경우보다 5배 이상 부과

▶화폐 주조: 오수전

◑ 사마 천 (B.C.145 - B.C.86?)과 사기 : 한대의 역사가로 태사공(太史公)이라 일컬어진다. 부친은 하양(夏陽: 山西)사람. 10세에 고문(古文: 옛 문자로 씌어진 전적(典籍))을 읽고, 20세에 전국을 주유하였다. 태사령(太史令)이던 부친 사마 담(司馬 談)이 무제의 봉선(封禪: 천자가 천(天)과 지(地)에 국가의 영속을 비는 일종의 제사) 의식에 참렬하지 못한 울분으로 죽자, 그 유지를 받아 태사령 직을 계승하여 태초력(太初歷)을 완성하였다.(B.C. 104). 이후 사마 천은 내용과 문장이 모두 뛰어난 역사서『사기』(전 130권)를 저술하여 동양사의 대부라고도 일컬어진다. 그가『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B.C. 99년) 그의 친구 이능이 흉노에게 포위 당하여 부하들과 함께 항복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이능을 변호하였다. 이 때문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 사마천은 굴욕적인 궁형(남성의 성기를 자르는 형벌)의 처벌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심혈을 기울여 『사기』를 저술함으로써 치욕을 씻으려 하였다. 이리하여 신화 시대의 황제에서 무제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몸소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적을 실제로 조사하고 전설을 채집 하며 고전을 배워 사서를 기술하였던 그의 태도는 현대의 역사 연구에서도 유용한 과학적이며 탁월한 학문적 자세였다. 사마 천은 전혀 새로운 구상을 가지고 역사를 서술했다. 먼저 세계의 중심되는 것을 「본기(本紀)」에 기술했다. 그것은 오제로부터 시작하여 하, 은, 주 3대 및 진의 역사를 기술한 뒤, 시 황제로부터 무제까지 역대의 황제들의 역사가 계속된다. 항우는 황제가 아니었다. 여후도 황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 시대를 움직였던 인물이었다. 따라서「본기」에 넣어졌다. 사건의 연차는「표(表)」의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이리하여 역사를 연표의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 사마천에 의해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사회와 제도의 움직임은 긴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일관되게 파악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서(書)」를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고래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평준서(平準書)는 지금의 말로 말하면 경제사이다. 이어지는「세가(世家)」는 제후의 역사이다. 만일 본기를 태양이라고 한다면 세가는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혹성이다. 춘추 전국시대 열국의 움직임도 여기에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열전(列傳)」은 주로 개인의 전기이다. 외국의 사정5?또한 열전에 포함 되었다. 그 나라들은 모두 중화의 황제에게 신(臣)으로서 따라야 했다. 따라서 개인인 신(臣)과 똑같이 열전에 기술되었다. 사마 천이 창안했던 서술의 형식은「기전체」로 불리어져 오랫동안 역사서의 기본 형식이 되었던 것이다. '사기' 는 고전과 사료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취사 선택하는 한편, 그 서술은 간결 하며 풍부한 지식이 살려졌고, 저자의 인간성도 배어 있어 중국의 고전적 역사서 중 으뜸으로 취급되고 있다.《사기》는 전부 130권, 52만 6천 5백 자라고 한다. 그것도 종이가 없는 시대의 일이었다. 대나무와 목편(木片)에 썼던 것이다. 대나무와 나무의 한 조각의 길이는 대개 1척(당시에 있어서는 약 23cm)이었고, 폭은 1cm 가량이었다. 그것은 간(簡)이라고 불려졌다. 책도 편지도 이와 같은 죽간(竹簡)과 목간(木 簡), 혹은 포(布)를 사용했다. 2매 이상의 간에 계속하여 쓸 때는 실로 묶었다. 그 형태에서 책(冊)이라는 글자가 생겼다. 긴 문서 또는 책의 경우 많은 간을 실로 꿰어 묶지 않으면 안되었다. 적당한 분량이 되는 곳에서 합쳐 이것을 말아 두고 있었다. 따라서 책을 셀 때 권(卷)이라고 한다. 옛날에 공자는《역( 易)》을 되풀이하여 읽어서 「위편(韋編)이 세 번 끊어질」정도였다고 한다. 나무나 대나무의 간을 철한 위(韋)가 세 번이나 닳아서 끊어질 정도로 되풀이하여 읽었다는 뜻이다.

◑ 동 아시아의 전통적 역사 서술 체제

▶ 기전체(紀傳體) 본기(황제 중심 연대기)와 열전(개인 전기)을 중심으로 표(연표), 지(또는 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의 각 주제), 세가(제후 중심 연대기)등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체제이다. 사마천의 [사기]를 필두로 반고의 [한서] 이후 대부분의 정사가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사기], [고려사], [해동역사] 등이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 편년체(編年體) 수많은 사건과 사실을 발생한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공자의 [춘추]가 최초의 작품이다. 통 감류나 실록류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사서는 대체로 이 체제를 따르고 있다. 중국의 자치통 감, 자치통감강목, 우리 나라에서는 왕조실록, 고려사 절요 등이 그 예이다.

▶ 기사본말체(記事本末體) 한 사건이나 주제를 중심으로 그 발생, 경과, 결과 등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남송 때 원 추의 [통감기사본말]과 조선 후기 이긍익의 [연려실기술]등이 그 예이다.

▶ 강목체: 큰 줄기(강)와 작은 내용(목)으로 나누어 정통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주희의 [자치통감 강 목]이 그 대표적이며 우리 나라의 [동사 강목]이 이에 속한다.

◑ 참위설(讖緯說) : 중국 고대의 예언설로. 참(讖)과 위(緯)는 원래 별개의 사상이었으나 후세에 와서 이것을 동일시하여 병칭하게 되었다. 참은 거짓으로 은어를 만들어 미리 길흉을 점치는 예언으로 선진(先秦)시대부터 행해졌고 위(緯)는 경(經)에 대립하는 말로 유교의 경서에 부회하여 우주 만물의 신비한 이치를 설명한 것이며 경서를 보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위서(緯書)를 뜻한다. 이는 전한 말부터 성행하여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비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전한 말에 왕망이 제위를 찬탈하려고 참위설을 이용하였고 후한의 광무제 유수도 이를 좋아하여 참위설은 후한의 사상계를 휩쓸었다. 그러나 인심을 현혹하는 것이라 하여 진(晉)이후 누차 금지되었다.

◑ 왕 망(王莽 B.C. 45-A.D. 23) : 중국 전한 원제(元帝)의 황후 왕씨의 일족으로 왕 망은 부친만이 일찍 죽어 가난하게 지냈으나, B.C. 16년 에 후(侯)에 봉함받고, B.C. 8년에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B.C. 1년 9세의 평제(平帝)를 세우고 점차로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오행 참위설을 이용하여 천하의 신망을 얻음과 동시에, 딸을 평제의 황후로 삼았다. A.D. 5년 평제를 독살하고, 부명(符命)을 구실로 하여 천자의 자리를 겸하여 차지하고(가황제(假皇帝)라고 칭하였음), 불과 2세 밖에 안 된 유 영(劉孀)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이어서 9 년에는 진황제(眞皇帝)가 되고, 신도후(新都候)의 이름을 본떠서 국호를 신(新)이라 하였으며,「주례(周 禮)」를 본떠서 중앙·지방의 관제를 고쳤다. 그는 극단적인 유가 사상의 신봉자이며 현실을 무시하고 유가 경전에 있는 그대로의 정치를 행하려 했다. 즉 천하의 모든 토지를「왕전」이라 선포하고 이상적 토지 제도로 생각했던 정전제를 실시하려고 토지 겸병, 노예 소유의 제한을 기도하고, 노비를 사속으로 하여, 매매를 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행 불가능하여 3년 후에는 중지하였다. 또 상인을 억압 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려고 오균(五均)·육관(六管)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같은 정책은 너무나 복고적· 공상적이어서 사회의 실정과도 맞지 않았고 또한 왕 망에게 그와 같은 정책을 강행할만한 실력도 없었 으므로, 호족이나 일반 농민의 광범한 반대를 초래했다. 화폐제도·관제·지방 행정에 대해서도 현실을 무시한 개변이 많아 사회적 대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또한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흉노를 정벌하다 실패하였으며, 동방에서는 고구려의 침입, 서방에서는 서역 제국의 이반, 남방에서는 윈난의 반란이 계속되었고, 말년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23년에 살해되고 신(新)은 멸망하였다.

◑적미의 난: 18년 지금의 산동 성에서 번숭(樊崇)이나 역자도(力子都) 등을 지도자로 하여 일어난 반 왕망의 농민 반란이다(18∼ 27). 그들은 왕망의 실정하에서 몰락유망을 강요당한 농민들로서, 눈썹을 붉게 칠한 것으로서 자기편의 표지를 삼았다.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 25년에는 한 왕실의 혈통을 이은 소년 유분자(劉盆子)를 황제로 내세워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농민 세력은 호족들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유수 등의 세력과 대결하게 되어 27년 마침내 항복하였다.

◑ 반 고(班固 ;32-92) : 후한의 역사가. 그의 조상은 전국 시대의 초(楚)의 명가로서 부친 표(彪), 동생 초(超), 누이동생 소(昭) 등은 높은 학문으로 유명했으나 높은 지위에는 오르지 않았다. 명제 때 사관에 임명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20여 년간의 시간을 보낸 끝에 전한대의 역사서인 [한서]의 거의 대부분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반고가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죽자 여동생 반소가 8표를 보충하고, 또 마속이 [천문지] 등을 보 충함으로써 [한서]의 편찬이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백호통덕론(白虎通德論)'을 저술하였다. 두헌(竇憲) 과 흉노 정벌에 종군하였고,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옥사하였다. 또한 사부(詞賦)에도 능하여, 그의 '양도 부(兩都賦)' 는 유명하다.

◑ 오두미도(五斗米道) : 2세기 후반기 중국에 일어났던 종교 결사로 천사도(天師道)라고도 한다. 교조는 장 능(張陵)이지만, 그의 아들 장 형과 손자 장 노에 의하여 정비되었다. 장 각의 태평도와 더불어 도교의 원류를 이룬다. 노 자(老子) 5천문(五千文)을 암송하며, 기도에 의하여 병을 다스리고 치병의 사례로 쌀 5두(약 5승)을 받았는데, 오두미의 명칭은 이에서 유래된다. 또 사회 사업의 하나로 의사(義舍)를 설치하여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여, 교세가 싼시·쓰찬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그의 자손은 쟝시 룽후산에 자리잡은 뒤, 도교의 정일교(正一敎)가 되었다.

◑ 종이 발명 : 제지법이 발명된 것은 후한 때의 일로, 목종때(105)의 환관 채 윤이 수피(樹皮)ㆍ마 (麻)ㆍ포(布)ㆍ어망(魚網) 등을 재료로 제조하였다. 이 종이는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채윤지(蔡倫紙)라 불려졌는데, 그 후 좌백ㆍ모홍 등에 의해 개량되어 점차 세상에 퍼졌다. 이리하여 중국에서 생긴 제지술 은 당의 고선지의 군대가 탈라스 강변에서 사라센 군과 싸워 대패하였을 때(751), 포로가 된 당의 군인 중의 제지공들에 의해 사마르칸드에 전해졌고, 그 후 전전하여 12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럽에 소개되었다.

◑ 대진국(大秦國) :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한 로마령의 오리엔트를 가리킨다. 대진은 페르시아의 서방(西方)을 의미하는 'Psina'의 음역이다. 중국인은 후한대에 비로소 페르시아의 서쪽에 대진국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 태평도와 황건적의 난 : 중국 하북성 북부 거록에 사는 장각(張角)이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대현양사(大賢良師)라고 불렀다. 대 현양사는 '황천'이라는 신이 이 세상에 보낸 사자(使者)라는 뜻이다. 장각의 평판은 꽤 먼 지방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사람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이다. 장각에 의하면 병은 죄와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 황천이 내리는 벌이었다. 따라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황천의 사자인 장각 앞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며 부적이 가라앉은 부수(符水)라는 특별한 물을 마시면 낳는다는 것이었다. 장각에게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그 숫자가 10여 년 동안에 수십만에 이르렀다. 장 각은 그들을 출신 지방에 따라 나누어 놓고 지도자를 두었다.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종교집단이 완성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태평도'라 불렀다. 태평도의 지도자 가운데에는 의학지식을 가진 사람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한 농민들이 태평도에서 구한 것은 단지 아픈 병을 치료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슴속에 응어리 맺힌 것을 서로 터놓고 이야기해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면서 삶의 희망 을 찾는 것이었다. "창천은 이미 죽었다. 황천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한나라를 대신해 태평도가 지배하는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구호였다. '창천', 즉 푸른 하늘은 한나라의 지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서기 184년 2월 태평도의 농민들은 장각의 지도 아래 떨쳐 일어났다. 그들은 반란의 상징으로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둘러썼다. 이 때문에 이 반란은 '황건의 반란'이라 불렸다.

 

3. 인도 및 서남아시아의 고대문화

(1) 인도의 고대 문화

◑ 인더스 문명: B.C. 2500년경을 중심으로 약 1,000년간 인더스 강 유역에 번창하였던 고대 문명으로 하류에 있는 모헨조다로와 상류의 하라파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1922년 모헨조다로의 고대 유적이 확인된 이후 하라파 등지에 대규모적인 발굴이 있었고, 이에 따라서 이 지역의 문명이 계속 드러나게 되었다. 출토된 많은 인장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인더스 문자로 유명하지만,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못하고 있다. 인더스 강의 충적토에 매몰된 이 문명은, 대체로 7층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그 사이의 시차는 최상층에서 최하층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으로 잡고 있다. 이 문명의 특징의 하나는, 정연 한 도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점이라 하겠다. 이 도시들은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사용한 주택과 우물, 목욕탕,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하수도를 만들어 사용한 흔적이 있다. 1925년 발굴된 대형 목욕탕은 가로 13미터, 폭 8미터로 종교의 의식 전에 사용되었던 것 같다. 가옥 내부에는 배수 시설이 있어, 이는 도로 밑의 배수구로 통하게 되어 있다. 또한 소맥과 대맥의 낟알이 발견된 것은 당시 이 곡류들이 주식 물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채색 토기·석기·청동기·은기 등도 출토되고 있으며, 장신구의 기술도 진보되었던 것 같다. 문자가 새겨진 인장은 활석제로서, 동물 문양이 조각된 것도 있다. 이외에 조각품으로서 여신상 등 뛰어난 것도 있다. 이는 모신 신앙이 유행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며 또 한편으로는 자연 숭배·성기 숭배 사상도 있었으리라 추측케 하는 유물도 나타나 있다. 이 문명의 기원이나 그 전파 경로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수메르 문명 및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많은 유사점도 보이며, 또 애프간 대지 남방의 출토품과도 흡사한 유물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정설이 없다. 농경을 주로 하고, 우상 숭배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므로 그 후의 베다 시대의 인도 문명에도 그대로 계승되지 않았으며, 또한 드라비다족이 세운 문명이라는 설도 확증이 없다. 유적의 최상층에 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인골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이 도시의 최후가 비극적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 모헨조다로(Mohenjodaro) :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 하류 지역에 있으며, 상류 지역에 있는 하랍파와 아울러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 유적. 1921∼1931년에 걸쳐 J.H. 마아샬 경과 1935∼1936년 E.J.H. 매카이(1880∼1943)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1946년에는 M. 휘일러 경이 조사 연구하였다. 도시는 높이 10m 정도의 구릉 위에 있으며, 동서남북으로 뻗은 대로에 의해 정연하게 구획되고 있다. 북쪽 지구는 특히 잘 조사되어 벽돌로 지은 건축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 서쪽의 구릉 위에는 대 욕장·창고 등의 공공 건물이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후 세 쿠샨 왕조 시대에 건조된 사리탑이 남아 있다. 대로의 폭은 약 10m, 소로는 약 1.5∼3m이며, 배수 설비도 잘 되어 있다. 신전·왕궁 등의 건축물은 없다. 출토된 유물에는 채문 토기, 청동 혹은 동으로 된 무기·공구, 귀금속·보석 등의 장신구가 있고, 아직 해독되지 못했지만, 문자가 있는 인장이 출토되고 있어 메소포타미아에 비견하는 고대 도시 문명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 하랍파(Harappa) : 인더스 강 상류 라비 강 남쪽에 있는 인더스 문명의 도시 유적. 지금의 파키스탄 펀잡 지방에 있다. 19세기 중엽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1920∼1934년, 1946년에 인도 정부의 관계 기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가 행해졌다. 유적은 물이 마른 라비 강의 바닥을 따라 주위의 밭으로부터 10∼20m의 높이를 갖고, 강을 내려다보는 몇 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범위는 주위 약 5km 정도에 이른다. 유적의 서부는 성새 (城塞), 동부는 시가지로 되어 있는데, 발굴된 곳은 서쪽의 성새 지구와 그 북쪽의 작업장·창고 및 성새 남쪽의 묘지 지구이다. 성새는 높이 15m, 200m×400m 정도의 평행 4변형의 언덕인데, 성벽은 말린 벽돌로 쌓고 겉면은 구운 벽돌로 쌓았으며, 방비에 역점을 둔 서쪽 벽은 기부(基部) 12m, 높이 9m나 된다. 창고와 작업장도 질서 정연한 규모를 이루고, 주택도 부설되어 있다. 작업장·창고에서는 제분용 맷돌, 탄화된 곡식 등이 나오고, 묘지에서 나온 유물로는 동, 청동제의 평평한 도끼, 끌, 창날, 화살촉, 낚시 바늘, 팔지 등과 흙을 구워 만든 여신상, 동물형의 인형도 많다. 동석(凍石)을 새겨서 만든 스탬프식의 인장도 나오는데, 모양은 정방형 또는 장방형이 많고, 소·코끼리·범·신상(神象) 따위의 형상이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문자의 종류의 총수는 200자 정도인데 아직 해독되어 있지 않다. 이 하랍파 문화의 연대는 이란, 이라크의 여러 문화와의 비교 연구에 의하여 대략 B.C. 2500∼2000년으로 생각되며 청동 유공부(有 斧), 청동제의 핀, 토기 등으로 보아 페르시아, 이란 방면과 문화적인 유대가 많았음을 나타내고 있다.

◑ 드라비다 인(Dravidian) : 아리아인의 인도 이주에 앞서, 인도에 거주했던 인종이라 생각되고 있지만,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고, 또 인류학적으로도 명백하지 않다. 인도ㆍ유럽계와 대립하는 대어족(大語族)인 드라비다 계의 언어를 말하는 제 민족으로서, 남인도와 실론 북부를 중심으로 분포되었지만, 인도의 다른 지방에도 널리 거주하고 있어 오늘날 8,000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체질적으로는 대체로 모발과 눈동자가 흑색이며 코는 넓고 피부도 검은 편이어서 아리아인 계통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 아리아 인(Aryans) : 넓은 의미에서는 인도·유럽인의 동의어로 사용되나, 흔히 그 지파(支派)인 인도, 이란에 정주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인도·유럽인의 집단에서 언제, 어디서 분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도 또는 이란에 이동하기 이전에는 중앙 아시아의 고원 지대에서 공동 생활을 영위하면서 주로 유목 생활에 종사하였다고 생각된다. B.C. 20∼15세기경 그들의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여 인도의 서북 지방에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인도·아리아인으로서 인도 고대 문화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이다. 후에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이란인도 아리아인의 지파로서, 이란 지방으로 이동한 것은 인도·아리아인의 이주보다 수백 년 뒤의 일이라고 한다. 아리아의 종교는 일찍부터 발달하여, 베다 및 아베스타 같은 것은 그들의 종교적 산물이다. 인도·이란어는 인도·유럽 어족에 속한다.

◑ 브라만 교 : 베다(Veda)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인도 아리아족 고대 종교의 총칭이다. 특정한 창조주가 없는 다신교로 태양의 신 미드라, 달의 신 바르나(Verna), 폭우의 신 인드라(Indra), 창조의 신 브라만 (Brahmans)이 있었다. 사제 신분인 브라만(Brahmans)은 창조신의 자손을 칭하여 복잡한 제사 의식을 독점하는 특권을 누렸다.

◑ 베다(Veda) : 힌두교의 성전.「지식」을 의미하는 말인데, 특히 제식(祭式)의 지식을 말한다. 또 어떤 특정한 책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B.C.13세기부터 약 2000여 년의 긴 기간에 작성되고 기록된 문헌에 대한 총칭이라 할 수 있다. 힌두인들은 이 베다 문헌을 '신이 성자들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믿고 신성시한다. 베다는 리그, 사마, 야주르 및 아타르바의 4베다로 나뉘어지는데, 그 내용은, 1) 찬가나 제사(祭詞) 등의 산히타, 2) 신들에게 바쳐지는 희생제의 지침서인 브라흐마나, 3) 특히 삼림(森林) 중에서 불려지며 자연력을 신 격화시킨 신에 대한 찬가와 기도 주문인 만트라를 수집한 본집인 아라냐카(森林書), 4) 명상적 사색서인 우파니샤드 등의 4부(部)로 되어 있다. 베다의 성립 연대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은데, 최고의 리그 베다로부터 고대 우파니샤드의 성립까지를 대체로 B.C. 20∼B.C. 5세기로 잡는다. 이것은 인도·아리아 인 고전 문화, 특히 철학·종교 사상을 규명하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른바 제단타 학파는 우파니샤드를 절대적 권위로 삼는 힌두 철학의 체계로서 B.C. 4세기경부터 나타났고, 후에 인도 철학 사상의 핵심을 형성했다. 베다가 행해진 시대는 아리아인의 펀잡 이주로부터 다시 동방의 갠지즈 강 유역으로 발전하던 시기인데, 이 시기를 인도 역사상 베다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 인도 사회의 카스트 : 16세기 인도 지역에 진출했던 포르투갈 인들은 그들이 인도인 사회에서 처음 본 집단적 신분 구분을 포르투갈 어로 '인종, 종류, 혈통' 등을 의미하는 '카스트' 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인도에는 원래 그러한 집단적 신분 구분을 표현하는 말로 '바르나'와 '쟈디'라는 두 개의 표현이 존재하고 있었다. '바르나'라는 말은 원래 '색(色)'의 의미를 가졌는데, 그것이 계층의 구별을 나타내게 된 것은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 강 하류 지역에 침입해 온 아리아 족이 피부색이 하얀 자신들과 검은 원주민들을 구 별하여 사용한데서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그 후 인더스 강 하류 지역에서 정착 생활에 들어간 아리아 족 사회에서는 사제나 왕족의 중요성이 증대했고, 또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아리아 족이 갠지스 강 유 역에 진출하여 정착, 농경 사회가 성립됨에 따라 사회의 계층화와 고정화가 한층 더 진행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사제로서의 브라만, 왕족으로서의 크샤트리아, 평민으로서의 바이샤라는 구분이 분명해지고, 이 3자가 피정복민이며 노예였던 수드라를 지배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쟈디'라는 말은 원래 '가문'을 의미하는 말로 '바르나'와 같이 이념적으로 커다란 계층적 신분을 나타내는 경우는 없고 대부분의 경우 어떤 특정 지역, 특정 언어, 특정 직업 등과 결합하여 보다 작은 집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그러한 쟈디가 인도 전체에 모두 몇 개 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계산 방법에 따라 3,000이라고도 하고 4,000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쟈디 집단의 특징은 내혼(內婚) 집단으로 그 내부 밖에서는 결혼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신분은 그 속에서 출생함으로써만이 획득된다는 점이다. 현재는 특정의 직인(職人) 카스트를 제외하면 거의 붕괴되었다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말하면 각 쟈디 집단 사이에도 상하 관계가 있어서 거기에 하나의 계서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등이 그 특징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각 쟈디의 상하 관계 결정에는 어떤 종류의 타부(Taboo)에 근거한 정(淨), 부정(不淨) 의 관념이 작용하여 상하로 격리된 카스트 사이에서는 식사를 함께 하지 않는 특징도 발견된다. 힌두교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사회 구조인 카스트 제도는 그 형성 과정에서 불살생(不殺生) 이론이 도움을 주었으며, 인도의 기본적인 종교 관념인 윤회(輪廻)와 업(業: Karma) 사상이 카스트 제도를 이론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전생의 행위에 따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태어날 수 있다는 업 사상은 사실상 카스트 제도에 대한 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 사회를 수많은 별개 단위로 갈라놓아 정치적 혹은 사회적 목적을 위해서 진정으로 협조할 수 있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 계급이 고정되어 있어서 개성이 발휘될 수 없으므로 인도문화는 자연히 정적인 성격을 띠어 정체되는 경향을 가져오고 말았다. 카스트 제도는 이와 같이 인도 사회에 미친 커다란 해독에도 불구하고 복잡 다양한 인도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는 공헌하였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신분에 알맞은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는 카스트 제도는 자기 희생 정신을 조장시키고 개인을 조직 단체에 예속시키는데 도움을 주어왔던 것이다.

◑ 우파니샤드(梵 Upanisad) : 베다의 부속 문헌의 하나. 오늘날 우파니샤드의 이름을 가진 문헌은 약 200종을 넘는데, 이는 불교 발 생 시대(5-4세기 B.C.)부터 수세기 동안에 주요한 우파니샤드의 형태를 갖추다가, 후에 힌두교의 발전에 따라 여러 종파 혹은 사상 체계를 흡수하여 수많은 우파니샤드가 나오게 되었다. 현재 200여종이 전해 지고 있는데, 그중 중요한 것 10여 종은 고 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600 - A.D.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그 후 10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 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 크리트어로 쓰여져 있다. 우파니샤드라는 말의 원래 뜻은 산스크리트의 upa-ni-sad(가까이 앉다)에 기원 하며, 이것이 사제간에 대좌하여 전수하는「비밀의 교의」로 변하고, 다시 비의( 義)를 풀이한 성전(聖 典)의 이름이 되고, 드디어는 이런 종류의 문헌을 총칭하게 되었다. 인도의 정통 브라만 철학의 연원으로서, 그후 철학, 종교 사상의 근간, 전거(典據)가 되었다. 개개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자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집, 정비되었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만의 제식 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불교 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 석 가(B.C 556경∼B.C 485경) :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뜻대로 이루어지다)이며 샤카족의 현자라는 의미로 석가모니라고 한다. 2500 년 전 현재 네팔 지역에 해당하는 카피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린 탄생불은 그 때의 모습을 모델로 하고 있다.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0대 후반에 결혼하였으나 생노병사에 대한 강한 의문을 느끼고 왕궁과 처자를 버리고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6년의 고행 끝에 명상을 통해 삶의 슬픔이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하지 않고 해탈이라 하였다. 부처(깨달은 자)가 성도(成道)한 곳이라는 뜻에서 그곳을 붓다가야(Buddhagaya)라고 하며 깨달음을 얻은 나무를 보리수라고 한다. 사르나트(鹿野苑)에서 처음으로 설교를 하였고 많은 제자를 얻었으며, 그 중에도 샤리푸트라(舍刹佛), 목갈라나(目連) 등이 유명하였다. 석가의 사상은 자각에 의한 해탈 자유와 열반 정적(涅槃靜寂)에 있으며, 종래의 아리아적인 고전 브라만교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나, 비(非)아리아적인 요소를 뚜렷하게 볼 수 있으며, 특히 브라만 지배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서 극히 혁신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사실은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성도한지 45년이 되는 80세에 '모든 생은 멸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힘써 해탈을 구하라' 라는 마지막 설법을 남기고 쿠시나가라 국의 사라나무 숲에서 열반에 들었다. 샤카무니의 사후 얼마 안 되어 제1회 결집이 행해지고, 100년 후에는 제2회 결집이 행해지고, 100년 후에는 제2회 결집이 행해졌는데, 아소카 왕 때에 있었다고 하는 제3회 결집은 실제로 행해졌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율(律)·경(經)은 아소카 왕 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 마가다(Magadha) : 마가다는 현재의 인도비하르 주(州) 남부 지역의 옛 이름으로 B.C. 6세기 중엽에 샤이슈나가 왕가의 빔비사라 때 강대해져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의 치세 때에는 당시 북인도에서 세력이 있었던 소위 16 대국 중에서 가장 강대해졌다. 빔비사라는 불교의 보호자로서 유명한데 아자타샤트루 이후, 이 왕국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으나 우다인의 치세때 도읍을 라자그리하에서 수륙의 요충지인 파탈리푸트라로 옮겼다. B.C. 4세기 전반에는 난다 조가 군림하였으며, B.C. 328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북서 인도에 침입했을 때, 마가다 왕국은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부강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 후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가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어서 그의 손자인 아소카는 남인도에 세력을 신장시키고, 대제국을 출현시켜 그 영역 내에 불교에 기초를 둔 복지 국가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아소카 왕의 사후, 마가다 왕국은 급격히 쇠퇴하고, B.C. 185년경에는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하여 마가다 왕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 마우리아 왕조(Maurya Dynasty ;317?-180 B.C.) : 인도 역사상 최초의 고대 통일 국가를 형성한 왕조. 사료(史料)가 적어 통일 형성의 연대, 국가 체제 등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은 점이 많으나, 대체로 B.C. 317년경부터 B.C. 180년경까지 지속되었다. 찬드라 굽타가 나타나서 마가다 국에 군림하여 왕조를 창건하고, 유능한 인물인 카우틸랴를 재상으로 기용하여 갠지스 강을 중심으로 벵골 지방에서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통일 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그 후 아소카가 제3대의 왕위에 올라 약 36년간 통치하였는데, 그는 동남의 칼링가 지방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이룩하고, 마우리아 왕조의 세력은 절정에 달하였다. 왕은 깊이 불교에 귀의하고, 법칙을 공포하여 그의 제국의 전역에 불교에 의한 행복과 비폭력의 시대를 출현시킴과 동시에, 변경의 민족과 외국에도 불교의 복음을 전도시켰다. 왕의 법칙은 돌에 새겨져서 오늘날에 전해지며, 고대 인도의 언어사·문화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인도 미술사도 이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왕의 사후에 마우리아 왕조는 급속히 쇠퇴, 약 50년 후에 멸망하였다.

◑ 찬드라굽타(Candragupta ;제위-317?∼293? B.C.) :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창건자. 마가다 국의 비천한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B.C. 317년경 서북 인도에서 거병하여 마가다 지방으로 진출, 난다 왕조의 9대 다나난다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마가다 국왕이 되어 마우리아 조를 창시하였다. B.C.305년 시리아 왕 셀레우코스가 인도에 침입하였을 때, 25만 이상의 병력과 9천 마리의 코끼리 부대로써 이를 물리치고, 서북 인도로부터 그리스의 군사 세력을 일소하고, 또 인근의 군소 제국을 병합함으로써 북쪽은 히말라야 산맥, 남쪽은 빈드야 산맥을 넘어서 남방 지역에 이르고, 동북은 뱅골 만, 서쪽은 아라비아 해로부터 힌두쿠시 산맥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파탈리푸 트라(현대의 퍼트나)에 도읍 하였다. 비샤카닷타(9세기)의 희곡‘무드라라크샤사’는 찬드라굽타의 거병 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전제 정치를 행하였으나 불교를 보호하였으며, 또 자이나교의 신봉자로서 퇴위 후 고행 생활로 들어갔다 한다.

◑ 아소카(Asoka: 272?∼232?B.C.) : B.C. 3세기경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최전성기의 왕으로 왕조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이다. 재위 기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B.C. 268∼232년이 라는 설이 있다. 마우리아 왕조는 이 왕의 재위 중에 동남 인도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하여, 데칸 고원의 남부를 제외한 전인도의 통일에 성공하고 인도 역사상 초유의 통일 제국의 실현을 보았다. 그의 시정 방침은 그가 남긴 각종의 조칙 비문에서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는데 대외적으로는 적극적 공세를 삼가고, 오히려 광대한 영토 안의 질서를 공고히 하여 이민족에게 침략의 기회를 주지 않게 하였다. 이 평화 주의적 정책을 실행하기 위하여 종교적·도덕적 정신의 가치를 중시하여「법(法: dharma)」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법」이란 불교에 의하여 올바르게 설법된 것이라는 생각에서, 즉위 7년만에 스스로 불교에 귀의했다. 교법 대관(敎法大官: dharmamahatra)이라는 특수한 대관의 직을 창설하고, 국민의 도덕적·종교적 지도를 맡게 하였다. 불교가 세계 종교로서 융성하였던 것은 그 공적이다. 또 각종의 사회·자선 사업, 예컨대 가로수를 심고, 일정한 거리에 우물을 파서 여행 하는 인축(人畜)에게 그늘과 물을 제공하고, 의료소를 설치하고, 약초를 재배하게 하는 등을 하였는데, 이것은 강력한 중앙 집권적 행정 기구의 소산이다. 그는 현재까지도 인도인들의 이상적 제왕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 불교의 전파 : 마우리아 왕조에 이어 인도와 중앙 아시아의 일부까지 통치한 것은, 1세기에 세워진 대월지의 쿠샨 왕조였다. 이 왕국은 제 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에 이르러 자못 강성하게 되자 로마와의 교통으로 그 문물도 볼만한 것이 있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대승 불교의 전개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하였던 로마 예술에 영향을 받아 발전한 불교 미술의 발달이었다. 대승 불교와 이 불교 미술은 '비단길'로 불리는 중앙 아시아의 사막 길을 거쳐 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일어남으로써 일시 쇠퇴하였던 브라만 교가 불교의 장점을 섭취하여 인도의 민족 종교로서 부흥하게 되어, 불교는 인도에서 특수 종교로서의 의미가 퇴색하고, 대승 불교의 철학적 깊이는 오히려 종교로서의 실제적 감화력을 잃게 되어 8세기부터 인도에서는 거의 쇠퇴하고 말았다. ▶ 불교의 사성지 : 룸비니 동산(석가가 태어난 곳) , 부다가야(부처가 된 곳), 사르타트(녹야원: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곳), 쿠시나가라(석가모니가 입적한 곳)

◑ 날란다(Nalanda) : 인도의 비하르 주에 있는 지역으로 라지기르와 더불어 불교 유적으로 유명하다. 굽타 왕조 후반기인 5세기경부터 12세기에 걸쳐 불교 교학의 중심지로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중국 당대의 고승 현장과 의정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1915년이래 대승원(大僧院)의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남북 500m, 동서 250m이며 수많은 승방·불당의 초석, 미술 조각품이 있으며, 그 출토품은 굽타 기에서 팔라 기에 미치는 것인데, 12세기말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 자이나교(Jainism) : B.C. 5세기경 동인도의 마가다 왕국에 일어난 종교로 시조 바르다마나는 석가처럼 귀족·무사 계급 출신인데, 지나란 존칭으로 불린다. 바이샬리에서 태어나 30세에 출가, 오랜 고행과 명상 끝에 42세에 득도하여, 포교 활동 후 72세에 입적했다. 교의는 일종의 무신론인데, 우주의 구성 요소를 영혼과 비영혼으로 대별하여 후자가 물질과 육체를 구성하여 영혼을 속박하고 고뇌를 낳게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을 정화하기 위하여 철저한 고행과 금욕을 권하고 업에 의한 윤회를 인정하고, 이른바 불살생·불망언(不妄言)·불사음(不邪淫)·불소득(不所得)·불투도(不 盜) 등의 오계(五戒)와 여러 가지 고행에 의한 해탈을 설명한다. 자이나 교도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인 불살생을 관습으로 하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자이나교 사원에는 불교에 있어서의 불상과 꼭같이 지나 상(像)을 비롯한 기타 우상이 많은데, 서부 인도의 아부 산에 대표적인 역사적 건축·조각 등을 남기고 있다.

◑ 바르다마나(Vardham na) : 자이나교의 창시자로 샤카무니와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일설에 의하면 B.C. 549∼ 477년에 걸쳐 살았다고 한다. 귀족·무사 계급의 출신으로 브라만교에 만족하지 못하여, 스스로 신종교를 창시하였다. 그는 인생을 고(苦)로 보고, 정신(正信)·정지(正知)·정업(正業)을 통해서만 영혼이 구제받을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철학적으로는 만유(萬有)를 생명과 비생명으로 분류해서, 다원적 실재론을 전개한 데에 그 특색이 있다. 자이나교는 그 후 인도 사회에 유포되었고, 현재는 120만 여의 신도를 가지고 있다.

◐ 안드라 왕국(Andhra) : B.C. 3세기말부터 A.D.3세기 전반에 이르는 약 500년 동안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왕국. 프라티시타나에 도읍하였으며 왕조 명은 사타바하나라 한다. B.C. 2세기 전반, 시리 샤타카르니의 치세에 는 서인도 일대에까지 진출해서 왕국 번영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가우타미 푸트라 샤타카르니 치세(90∼ 120) 때가 왕국의 최성기로, 이 무렵 인도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중계지로 한 동서 무역은, 막대한 부를 가져왔다. 왕국 안에는 동업 조합이 발달되고 은행업이 번창하였는가 하면 문화도 크게 융성했다. 아마 라바티의 불교 예술은 남인도의 독특한 공예의 미를 자랑하고 있고, 또 인도 서정시 중에서 가장 아름 답다는 '삿타사이' 나 인도 최초의 소설집인 '브리하트카타' 등의 문예 작품도 나왔다. 안드라 왕국은 3세기 전반에 그 자취를 감추었다.

◑ 박트리아 왕국(Bactria) : 헬레니즘 시대의 왕국의 하나.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아리야 강의 중간에 있는 지바의 옛 이름이며, 교통의 요충지로서 유명하다. 현재의 아르가니스탄 북부와 러시아령 투르키스탄 남부에 위치 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에 영유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한 주가 되 었다가, 곧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가에 속하여, 헬레니즘이 풍미하자 이 지방에도 그리스 풍의 도시가 다수 건설되었다. B.C. 255년 태수 디오도투스가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을 세웠고, 그 후 마우리아 왕조 가 쇠퇴한 틈을 타서 인더스 강 유역에 침입하여 큰 세력을 떨쳤으나, 만년에 안티오코스 4세의 종형제 인 에우크라티데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각지에 참주가 배출되어 서로 싸우는 가운데 그리스인의 지배권이 갑자기 쇠퇴, B.C. 139년경 파르티아 왕국과 스키타이 인이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 쿠샨 왕조 : B.C. 20년경부터 5세기 중기까지 계속된 중앙 아시아의 이란 계 왕조로 쿠샨은「쿠샨족(族)」을 의미한다. 이 왕조는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 1왕조는 힌두쿠시 남쪽의 카피사(현재의 배그람)를 수도로 하여, 동북방의 타림 분지에서 후한과 싸우기도 하고, 서북 인도에 침입, 펀잡 지방을 병합하기도 하였다. 이후 국내가 분열되었는데, 이를 재통일한 것이 카니시카 왕으로서, 제 2왕조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카니시카의 치세에는 북인도의 대부분을 그 지배하에 두었고, 수도도 하계를 제하고는 푸푸샤푸라 (현재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에 두었다. 중국 사서에서는 쿠샨 왕조를「귀상(貴霜)」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때로는「대월지」의 명칭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3세기 전방에 사산 왕조가 이란에서 홍기하자 쿠샨 왕조도 그 세력 아래 들어갔다. 이같이 명목적인 주권만을 가지며 4세기 전반까지 존속한 것이 제 3왕조이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과의 싸움으로 사산 왕조의 동방 지배가 약화되자, 이 틈을 타서 쿠샨족은 세력을 회복하여, 이에 제 4왕조가 일어났다. 이 왕조는 한때 세력을 떨쳤으나 5세기 중엽부터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에프탈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쿠샨 왕조 시대는 서방이 동로마 제국이나 아르메니아와의 접촉·교통이 잦았으므로 동서 문화 교류상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인도 및 이란의 영향이 컸다. 조로아스터교, 불교가 똑같이 믿어졌고, 문자나 미술 면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이 강하였다. 정치면에 있어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방식을 이어받은 것이라 생각되며, 화폐는 지금까지 많이 출토되는데 왕명이나 연대의 비교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카니시카(Kaniska) : 인도 쿠샨 왕조의 왕으로 재위연대에 대해서 여러설이 있으나, 2세기에서 3세기초가 타당할 것으로 본다. 푸루샤푸라(지금의 페샤와르)에 도읍하여, 그 판도는 서북 인도의 대부분, 즉 간다라, 수에 비하르에서 아우드, 비나레스에 이르고 캐시미르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한편 타림 분지 지방에도 세력을 뻗쳐 실크 로드를 지배하게까지 되었다. 로마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여러 번 로마로 사자를 보내었다. 왕은 또 로마의 아우레이 금화를 모방하여 금화를 주조하였으며, 그 금화에는 갖가지 신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대부분은 조로아스터교의 신들인데, 그리스나 힌두의 신들도 보인다. 이것은 그가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잡다한 백성들에게 군림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교에 귀의하여 아소카 왕과 아울러 일대 보호자로 알려졌으며, 국내에서는 불교가 성행하였다. 또 불전의 결집, 푸루샤푸라 대 탑의 건조 등을 이룩하였다. 이른바 간다라 미술은 그의 시대부터 쇠미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불교 시인으로 알려진 마명(馬鳴)·용수(龍樹) 등이 활약한 시대이다.

◑ 간다라 미술 : 인더스 강 유역의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인도의 쿠샨 왕조에서는 그 지리적 특성 때문에 그리스, 이란, 인도 문화가 쉽게 융합될 수 있었다. 그 결과 간다라 지방(펀자브 지역과 바로 이웃한 지 역)에서는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형태로 신상을 만드는 것에 영향을 받아 인도인들도 인간 형체의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곧 간다라 미술로서, 불상의 얼굴 모습이 그리스 조각을 닮았는데, 이 양식은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는 쿠샨 왕조때 나타난 대승 불교의 전파 경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2) 오리엔트 문명의 성립

◑ 메소포타미아(meso〓중간 지대, Potamia〓강들) : 지금의 이라크가 있는 지방으로 그리스인들이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다(강 사이에 있는 땅). 현재의 명칭인 이라크도 물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펼쳐진 사막도 2만년 전 까지는 푸른 숲으로 덮여져 있었다. 빙하로 쌓여 있던 지구가 따뜻하게 되면서 땅이 메말라지기 시작하 여 1만년 전에는 오늘과 같은 사막으로 변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사막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모래 언덕을 파헤쳐 고대 도시를 발견하고 미술품이나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을 발견,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이 빛을 보게 되었다. 1862년 12월 3일에 영국의 고고학자에 의해 노아의 홍 수를 그대로 닮은 바빌로니아의 설화를 담은 점토판이 발견되어 학계에 발표되었다. 오리엔트는 로마인들이 동쪽을 가리킨 '오리오르'(Orior; '해가 돋다'라는 뜻)란 말에서 유래하였다. 지금의 나일 강 하류, 메소포타미아 및 동부 지중해 지방을 가리킨다.

◑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 : 고대 바빌로니아의 영웅시. 길가메시를 중심으로 한 3천 행에 이르는 대 서사시로서, 우르 제 3왕조 슐기(B.C. 24세기경)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에서 서기 학교가 정비되고 그 교과서(파라 문서)의 신의 이름을 모은 문서에 신격화한 길가메시(Gilgamesh)가 등장한다.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수메르의 우룩시의 왕으로 바빌론에서 씌어진 장편 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실제의 주인공은 키슈 왕국과 싸웠고 사후 그의 영웅적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신격화되었다. 그러나 시에서 길가메쉬는 영원히 죽지 않기 위해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친구인 엥키와 함께 길가메시는 삼나무 숲의 수호자인 후와와를 죽였고 여신 이나나가 황소를 보내 그 둘을 죽이려 할 때 여신 또한 죽였다. 그러는 동안 친구 엥키가 죽었고 이에 흥분한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슈팀이라는 한 노인을 찾아 나섰다. 왜냐하면 수메르의 전설에 따르면 이 노인은 과거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자신의 가족과 동물들을 위해 방주를 만들어 살아남았고 신들로부터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보장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트나피슈팀은 길가메시에게 다시 젊어지게 만드는 마법의 풀을 주었다. 그러나 길가메시의 부하 한사람이 그것을 훔쳐 달아났고 길가메시 는 이에 몹시 흥분하였다. 그는 다시 우트나피슈팀을 찾아가 6일 낮과 7일 밤을 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불사의 비밀을 얻어냈다. 하지만 인간인 길가메시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잠들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죽음을 감수해야만 했다. "오! 길가메시여! 당신은 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이었다. 하지만 영생은 당신의 운명이 아니었도다." --- 길가메시는 예로부터 전해온 이야기인데, 현존한 텍스트로서 완본으로 치고 있는 유명한 것은 앗슈르바니팔의 니네베 대 도서관에서 출토한 악카드어 사본 (B.C. 7세기)으로서 그 속의 대홍수 설화의 기술이 노아의 홍수 전설과 흡사한 것이 G.스미드에 의하여 발견됨으로써 아주 유명해졌다.

◑ 설형문자(楔形文字) :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메르인이 B.C. 4천 년경에 발명하여 그 후 서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3천년간 사 용한 문자의 총칭. 둥그스럼한 그림 글자에서 발달되었으나 점토에 갈대의 줄기나 금속제의 철필로 썼기 때문에 획이 저절로 설형(楔形)이 되었다. 수메르 시대의 금석문에도 역시 둥그스럼한 문자가 병용되었으나 이후에는 설형 서체가 일관되게 사용되었다. 셈 계의 악카드 인, 아무르 인, 앗시리아 인, 인도· 유럽어 계의 힛타이트 인, 페르시아 인 등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이 문자로 쓰여진 언어도 수메르어, 악카드어, 엘람어, 힛타이트어, 고대 페르시아어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오랫동안 서아시아의 공식 외교 문서에 사용되었으며, 이집트 제18 왕조의 아마르나 문서도 설형문자로 쓰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수메르, 바빌로니아 문화가 고대 서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음을 명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수메르 인 :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먼저 수메르 인이 도시 국가를 형성하였고, 지구라트 중심으로 신정 정치를 하였으며, 설형 문자를 사용하고 맥주를 만들어 즐겨 마셨다. 오늘날의 시간과 원을 360도로 나누는 것은 이들의 60진법에서 나온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고대국가 수메르는 나일강 유역처럼 평온하지 않았다. 때때로 홍수가 밭과 그리고 도시까지 휩쓸어 버리는가 하면 또 사방이 막힌 데가 없이 개방되어 있는 이 땅은 기름진 옥토를 둘러싸고 이민족들의 침입이 많아 내세적이고 낙천적이고 소박한 이집트인과는 달리 현세적인 윤리관과 죄의식의 깊은 자각에 도달하고 신들에게 보호받기 위해 의식을 통해 신에게 호소하고 회개도 하며 빌었다. 그들은 신의 힘에 의해 행복과 불행이 초래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지구라트(Ziggurat) : 햇볕에 말려 만든 벽돌이나 구워 만든 벽돌로 만들어진 메소포타미아나 엘람의 도시의 주신에 바쳐진 성탑. 지구라트는 '높은 곳'이라는 뜻이며, 벽돌로 축조된 거대한 피라미드형 탑으로 외부의 계단은 나선형으로 또는 곧게 붙어 있다. 원형은 우바이드기의 기단을 가진 신전으로서, 우르 제 3왕조의 우르의 성탑은 난나르(Nannar)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단은 3단인데 꼭대기에는 신전을 떠받들고 있다. 궁전·신전과 함께 고대 도시 국가의 중심부에 건설되었는데, 성서의「바벨 탑」의 모델이라 하여 유명한 신 바빌로니아 시대의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7층의 기단을 가진 마르투크 신의 성탑이다.

◑ 메소포타미아의 신들 : 수메르인의 도시는, 주신과 그에 부속한 신들을 숭배했다. 폭풍신 엔릴은 닙푸르에, 하늘의 신 아누는 우르크에, 물의 신 엔키는 에리두에, 달의 신 난나르는 우르에서 숭배되었다. 전쟁과 풍요의 여신 이 난나(이쉬타르)도 숭배되었다. 셈 사람들도 이 신들의 신앙을 답습했으나,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 (Marduk)는 엔릴과 합하여, 메소포타미아의 판테온의 주신이 되었다.

◑ 시르곤의 아카드 왕조 : 아카드의 왕 사르곤(Sargon)이 수메르를 통일한 우루크를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기원전 2334 년쯤 수메르와 아카드를 통일한 사르곤은‘모든 땅의 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아카드(Akkad) 왕조를 창시했다. 이로써 수메르의 도시 국가 체제는 끝나고 바빌로니아에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가 만들어졌다. 사르곤은 동쪽은 엘람, 서쪽은 마리까지 세력 범위를 확대했다. 그의 비문에는"5,400명의 병사가 날마다 그의 앞에서 식사를 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전문 전투 집단이 아카드 군대의 핵심이었다. 아카드 왕조에서 사르곤에 뒤지지 않는 왕은 제4대의 나람신(Naram-Sin)이다. 그는‘사방 세계의 왕’을 자칭하며,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신격화했다. 단궁을 사용하는 군대를 지휘해 지중해 연안과 소아시아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정복 활동을 전개했다. 아카드 왕조의 왕 들은 사방으로 원정해 서아시아 최초의 군사 상업 제국을 건설했다. 그 결과 아카드 어는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공용어가 되었다. 한편 수도 아가데의 소재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 바빌로니아(Babylonia) :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제국으로 바빌로니아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남부에 위치한 충 적 평야 지방을 말한다. 맨 처음엔 수메르 인이 도시 국가군을 형성하였으나, B.C. 2800년경 셈 인종인 악카드 인이 침입하여, 차츰 수메르 문화를 흡수 융합하였다. B.C. 2500∼2000년경에 다시 셈 인종 계통 의 아무르 인이 침입하여 바빌론을 중심으로 차츰 통합해서, 바빌론 제 1왕조를 창시하였다. 제 6대 왕 함무라비(1728∼1686 B.C.) 시대에 바빌로니아를 통일하여 그 세력 범위가 멀리 시리아, 팔레스티나까지 미쳤다. 함무라비 왕 때 치수 사업이 완비되었고, 산업도 번영하여 곡물ㆍ야자ㆍ피혁ㆍ양모를 생산하고, 모직물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세계 최고의 법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함무라비 법전이 전하여져 당시의 상당히 발전된 사회 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수메르 인이 창시한 설형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종교는 수호신인 마르두크를 최고신으로 모시고, 왕은 신격화되어 신관ㆍ귀족ㆍ군대들의 보좌로 백성에게 군림하였다. B.C. 17세기 중엽에 캇시트가 침입하여 함무라비 왕조를 넘어뜨렸고, 이어서 미탄니인, 힛타이트의 침입을 받아, 정치적 중요성이 상실된 채 B.C. 9세기에 앗시리아에 병합되었다. B.C. 612년 바빌로니아, 메디아, 이집트, 리디아인들이 앗시리아를 멸망시키었으나, 특히 칼데아인이 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움으로써 바빌로니아의 정치적 의의가 회복, 북시리아로 발전하여 네부카드넷자로 왕(604∼562 B.C.)때엔 공전의 번영을 누렸다. 수도인 바빌론은 다시 세계적 상업 도시가 되어 바벨 탑과 공중 정원이 세워져 세계를 놀라게 했고, 점성술이 발달하여 천문학의 수준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동방에서 갑자기 일어난 페르시아에 B.C. 539년 공략되었다.

◑ 바빌론(Babylon) :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고대 도시. 신의 문이란 뜻. 이 이름은 일찍이 악카드 시대에 나타나 있으나,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바빌로니아 제 1왕조 시대부터이다. 1899년∼1917년에 독일의 동양학자가 발 굴했는데, 이중의 성벽, 50여의 대신전과 탑은 당시의 번영을 짐작케 한다. 시신(市神) 마르두크를 전국 토의 최고신으로 받들었고, 도시는 크게 번영했다. 앗시리아 지배 시대에 파괴되었으나,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다시 번영을 누렸고, 특히 네부카드넷자르 왕(604∼562 B.C.) 때에 호화로운 건축물이 세워졌다. 페르시아 시대에도 번영하였으며, 알렉산더 대왕도 바빌론에 입성하여 세계 제국의 수도로서 역사가 시작되는 듯하였으나, 그가 요절한 후 쇠퇴하였다.

◐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법전으로 1901년 프랑스의 몰간이 지휘하는 페르시아 탐험대에 의해서 수사에서 발견된 탑형 비문이다. 높이 2.5미터, 둘레 1.8미터의 이 탑은 상부에 함무라비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법전 수수 광경이 부조되어 있다. 섬록암 기둥에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49열 3000 행으로 되어 있었으나 앞부분의 5열은 엘람의 왕에 의해 지워졌다. 함무라비왕(1792∼1750 B.C.)은 즉위 38년에 반포하여 법전 비를 주요 도시의 신전 입구에 건립하여 일반인이 널리 알도록 하였던 것 같다. 그 위에 "재판을 얻기 위한 자는 이 비 앞에 와서 그것을 읽고 들어라. 이 비는 그대들에는 법을 명백 히 가르치고 그대들의 권리를 지킬 것이다. 함무라비는 나라의 주인으로 국민의 아버지이니라"고 선포 되어 있다. 법문(法文)은 282 항이나 되고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고, 또 민법·형법·상법·소송법 등에 미쳐 있으며, 표현은 극히 구체적이고 판례적이다. 먼저 종교적인 주술에 대하여 규정하고, 모든 계층에 걸친 사회 생활·일상 생활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으며 최후로 각 계급·직업의 임금을 규정하고 있다. 원시적 율법의 자취도 농후하여 물에 빠뜨려서 뜨는 혐의자는 무죄라는 조항도 있다. 특색으로는 첫째로「눈에는 눈을, 뼈에는 뼈를, 이에는 이를」이라는 개인적 책임 추궁의 명시, 둘째는 신 앞에서의 서약의 중시, 셋째는 모든 재판에 있어서의 증서(證書)의 절대성을 들 수 있다. '리피트 이시타르 법전' 발견으로 이 법전은 세계 최고의 법전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그래도 그 규모에 있는 짜임새와 후세에 대한 영향이 컸다는 점에서 설형문자의 법률 중 가장 중요시되고 있다.

▶·왕궁과 사원의 재산을 훔친 자는 사형에 처한다. ·부모를 때린 자식은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자유민의 눈을 뺀 자는 그 눈을 뺀다. ·자기와 같은 지위에 있는 자의 이를 뺀 자는 그의 이를 뺀다. ·농민이 과수원을 소작하면 수확의 2/3를 주인에게 바친다. 만약 수확고가 줄어들면 그 책임을 농 민에게 돌려 소작지 주변의 수확고 표준에 따라 농민에게 소작료를 바치게 한다. ·목수가 집을 짓다가 무너져 주인의 딸이 죽으면 목수의 딸을 죽인다. ·남의 노예를 때려죽인 자는 그 주인에게 노예 값을 물어주어야 한다. ·만일 노예가 그 주인에게 "너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고 말하면, 주인은 그에게 자기 노예임을 확 증시키고 그 귀를 자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한 자는 자기의 눈을 상하게 한다. 만약 귀족이 평민의 눈을 못쓰게 만 들 경우에는 은 1 마나를, 노예의 눈을 못쓰게 만들 경우에는 그 절반을 지불하면 된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가족을 저당품으로 가두어 두었다가 빚을 갚지 못하면 그의 가족까지 노예로 할 수 있다.

◑ 이집트의 신들 : 고대 이집트인들은 주물 숭배(呪物崇拜)를 행하여 모든 자연물·초자연물을 신이라고 믿는 다신교를 섬겼다. 매의 신 호루스, 개의 자태를 한 아누비스, 따오기 형상을 가진 토트 등, 그 밖에 저승의 신 오 시리스, 그의 처 이시스처럼 사람의 모습을 한 신도 존재했다. 태양신을 최고의 신으로서 우러러보았다. 신들은 애초에는 각 부족이나 노모스·도시의 신이었으나, 국가 통일 당시 통합되고 의인화되어 복잡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 오시리스(Osiris) : 고대 이집트의 신으로 이집트어로는 우시리라 함. 부시리스(오시리스의 집)의 한 지방 신이었으나, 뒤에 각지에서 숭배되었으며, 특히 아비도스는 성지로서 신전이 세워지고 밀의가 행해졌다. 헬리오플리스의 신관에 의 하면, 대지(게브)와 천공(天公:누트) 사이의 아들이며 이시스의 남편인데, 속성으로서는 문화의 아버지, 농업ㆍ법률ㆍ신앙의 수여자로 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에게 살해되어 나일 강에 던져졌는데, 그의 아들 호루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했으며, 그의 처 이시스는 사방에 흩어진 그의 유해를 다시 모아 매장하였다. 또 호루스의 주술에 의하여 오시리스는 죽음과 부활을 거쳐 사자(死者)의 왕으로 서 저승 세계를 통치하였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오시리스의 재판을 거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였 다. 이에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윤리적 관념이 종교와 결합되었다. 또 죽음ㆍ부활의 사상에서, 서산에 졌다가 다음 날 아침 소생하는 태양신 라와 동일시되게 되었으나, 다른 신들과의 동화도 여러 번 행해 졌다. 헬레니즘 시대에서 로마 시대에 걸쳐서는, 이시스, 호루스와 더불어 지중해 연안에 널리 전파되었다.

◑ 이시스(Isis) : 고대 이집트의 여신. 이집트어로 아스트. 농경 신 오시리스의 처이며 호루스의 어머니. 생산의 상징으 로, 머리에 소뿔을 단 여자 모습, 혹은 연꽃을 손에 든 여신상으로 표현되었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데메테르와 동일시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바다의 신으로서 여러 항구에서 신앙되었으며, 술라 때 그 신앙이 로마에 들어왔다.

◑ 라, 레, 아멘, 아톤 : 이집트의 태양신으로 흔히 배를 타고 하늘을 건너는 태양 모양으로 표현된다. 신앙 중심지는 이우느 우(히브리음으로는 온, 그리스음으로는 헬리오폴리스)였다. 이집트에서는 태양은 나일 강과 더불어 모든 생명·광명·풍요의 원천이었다고 생각되었으며, 헬리오폴리스의 신관의 활동으로 국가적인 신앙이 되어 신·인간·세계의 창조자로서 숭앙되었다. 제4 왕조 말기이래 국왕의 이름의 일부에 라(또는 레)가 붙었으며, 또 국왕의 칭호의 하나로「태양의 아들」을 붙이게 되었다. 고 왕국의 초기에 이미 하 이집트의 에드푸의 호루스 신과 동화되어 두 날개를 갖는 태양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후에 일륜(日輪)을 머리에 이고, 독수리의 머리를 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 뒤에도 다른 여러 신과의 동화가 이루어 졌으며, 신 왕국 시대에 신앙된 아몬신도 중 왕국 말기에는 이미 아몬라로 불리어져, 라와 동일신으로 숭배되었다. 아멘은 테베의 태양신으로 중 왕국이후 라와 합쳐져 아멘 라의 신앙을 낳고 테베의 주신이 되었다. 기원전 14세기에 아멘호테프 4세는 전통 있는 아멘의 신앙을 버리고, 태양 원반의 광선에서 손이 뻗쳐져 있는 심볼을 가진 태양신 아톤의 신앙으로 개종했다.

◑ 오벨리스크(Obelisk) : 끝이 가는 석주, 특히 고대 이집트의 것을 말한다. 그 대부분은 4각이며, 담홍색 섬장암으로 된 단석의 석주이다. 아랫부분의 폭은 높이의 10분의 1이고, 첨단부는 피라미드 형에다 구리를 씌웠으며, 각주 면에는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다. 보통 한 쌍을 이루어 태양신을 모시는 신전 입구에 세워졌다. 전승을 기념하거나 왕의 위업을 과시하는 문장이나 모양을 새겼는데, 태양 숭배와도 관계가 있다고 한다. 헬리오폴리스, 카르나크 기타의 고적에 남아 있으나, 나일 강가에는 미완성의 것이 때때로 바위에 붙은 채로 남아 있다. 최고의 것은 하트셉수트 여왕이 카르낙 신전에 세운 것으로 둘중 하나는 현재 로마에 있으며 길이가 31.5m나 된다.

◑ 이집트 문명과 역사 : 이집트는 이른바 사막 속의 오아시스였다. 이집트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았지만, 적도 이북지역 즉 나일강은 7월 중순부터 범람하기 시작하여 11월까지 계속되는데, 그 동안 이집트 분지는 온통 물에 잠기고 높은 지대에 있는 도읍과 마을은 마치 해안의 섬 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강물이 휩쓸고 간 토지는 부패한 수생 식물의 잔재와 광물성 물질을 함유한 옥토로 변했다. 나일 강의 범람은 관개의 역할뿐만 아니라 시비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이 지역에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한편 나일 강의 범람은 가옥을 침수시키는 등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이 때문에 이집트인은 제방을 쌓고 인공 구릉을 만드는 등 수리 공사를 서둘러야 했다. 그 외에도 건조 기에 경지나 과수원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운하가 개통되었고, 운하가 통과하지 않는 고지대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날랐다. 이렇게 많은 노력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은, 주민 중에 노예가 된 자나 전 쟁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된 자가 맡아 했다. 이집트인은 포로를 잡아 이전처럼 죽이지 않고 노예로 삼아 가장 힘든 일을 시켰다. 본래 이집트인은 씨족을 이끌고 살아 왔는데, 각기 다른 씨족이 자기들의 토지 에 물을 대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운하를 판다는 것은 이익도 일의 효율도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씨족 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이것이 더욱 발전하여 보다 큰 공동체, 즉 노모스가 성립하였다. 노모스 내 에서 힘이 센 사람이 가장 좋은 토지를 경작하고 수확을 많이 거두었고, 노예들을 자신들의 일에 종사 시켰다. 이리하여 부강한 귀족이 출현하였다. 노모스 간에는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약한 노모스는 강한 노모스에게 정복되었다. 기원전 3500년경에는 이러한 노모스가 합쳐져서 하이집트(나일강의 델타 지역)와 상 이집트(나일상 중류)라는 두 왕국을 이루었으며, 기원전 3000년경 제 1폭포에서 델타에 이르 는 사이에 통일 국가가 성립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건설자는 메네스라고 하는데, 이는 상 이집트의 티스 출신 제왕에 의한 통일 사업이 그에 의하여 상징된 것이다. 그 최성기는 고 왕국(제3∼6 왕조)·중 왕국 (제11및12 왕조)·신 왕국 혹은 제국(제18∼20 왕조) 등의 시대이다. 제 4왕조 때 수도 멤피스에 가까운 기자에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등 여러 왕의 대 피라미드가 건설되었다. 중 왕국에서는 귀족의 권력이 현저히 중대하여 봉건 제후 시대라고도 일컬어진다. 중 왕국 후에 힉소스가 침입, 약 200년간(1780∼ 1570 B.C.) 전토를 지배하였고, 이 지배를 무너뜨린 18 왕조의 제왕은 다시 팔레스티나, 시리아로 진출 하고, 상류의 누비아도 정복하고 미탄니, 힛타이트와 싸워 아시아에서 최강국을 이룩하여 제국 시대의 기초를 세웠으며 다시 지중해·홍해에서 무역에 종사하여 거대한 치부를 이집트에 안겨 주었다. 아멘호 테프 3세·4세의 시대는 아마르나 시대라고 불리고 이집트와 여러 다른 나라 사이의 우호 관계가 수립 되었다. 그 후 람세스 2세는 힛타이트와 카데시에서 싸웠고, 다시 강화 조약을 체결하지만 나중에 해상 민족의 침입에 의하여 힛타이트는 멸망하고 이집트는 해상 민족을 간신히 격퇴했다. 제 20왕조의 말기 부터 이집트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제 21왕조 이후에는 왕조 말기 시대에 들어간다. 신(神)인 국왕(파라 오)에게 정치상의 일체의 권한이 귀속되나, 그 권한을 부분적으로 대행하는 재상·대신이 있었으며, 그 밑에 방대한 관료 조직이 있었다. 지방 행정의 단위는 노모스인데, 그 수는 42∼50이며 총독이 통치하였 다. 상층 계급에는 왕족·고급 관리·신관, 중산 계급에는 상인·서기·장인이 속하며, 국민의 대부분은 가난한 농민인데, 그 밑에 전쟁 노예가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국토 전체가 국왕에게 귀속되었으나, 실제 에 있어서는 귀족·신관이 대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의 대다수는 국왕 또는 귀족·신관의 토지에서 거 의 농노적인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많은 지대를 납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채광(採鑛)·관개(灌漑)·궁전 이라든가 피라미드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 나르메르 왕 :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5000∼4000년 사이에 나일 강 유역의 상 이집트에 20개, 나일 강 삼각주 지역의 하 이집트에 22개의 도시 국가 노모스(Nomos)가 있었다. 그것들이 차츰 통일되어 상 이집트 왕국과 하 이집트로 양분되어 있다가 결국 상 이집트가 삼각주까지 정복해 상·하 이집트를 통일했다. 아비도스의 왕명표(王名表)에 따르면 최초로 이집트를 통일한 자는 메네스 왕으로, 이는 나르메르(Nar Mer)왕과 동 일인이고 아하(Aha)라고도 일컬어졌다. 그의 재위 연대는 기원전 2850년쯤이라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 그가 이룬 통일로 인해 성립한 것이 제1왕조로서 이 때부터 고 왕조 시대가 시작됐다. 헤로도토스가 전 하는 바에 따르면 제1왕조는 멤피스(Memphis)에 도읍했다. 그리고 적의 공격에 대비해‘흰색 성벽’을 쌓았다. 메네스 왕이라는 이름을 적은 유물은 없지만 나르 메르 왕의 것은 있는데, 나르 메르 왕이 호루스 신의 도움으로 하 이집트를 정복해 6천 명을 포로로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 파라오(Pharao) : 히브리인에 의해 붙여진 고대 이집트 왕의 이름. 성서에서는 특정한 왕을 말하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원래의 이집트 어「페르아」는「큰 집」의 뜻으로, 뒤에는 일반적으로 국왕의 뜻으로 바뀌었다. 이는 신(神)인 국왕을 직접 지칭하지 않고 그가 사는 집을 경칭으로 사용한 까닭이다. 왕은 나일강의 대규모의 치수·관개 사업의 통솔자로서 귀족을 관료 제도 속에 편입, 전제 권력의 집행자가 되었다. 그러나 의식 상에서 왕은 상·하 이집트의 절대적인 왕일 뿐만 아니라 매의 신 호루스에 의하여 신성이 부여된 현세 와 내세의 최고신, 태양신,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되었다. 그의 권력의 원천은 신권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만이 자유인이며 국민 전체가 총체적으로 노예였다.

◑ 미이라(Mirra) : 아스팔트로 처리하여 건조·보존된 시체. 어원은 아마도 아라비아어의 무미아이(mumiai ;송진을 바른 다·아스팔트)에서 기원한 듯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널리 행해졌는데, 종교적·위생적 의미를 갖는 다. 고대 이집트어로,「미이라로 한다」는 말은 원래「천으로 싸다」의 뜻이다. 실지로 시체를 세척하고, 약품으로 처리한 뒤에 포목으로 단단히 싸매었다. 고대 이집트의 제 1왕조(B.C. 4000) 당시로부터 제 22 왕조(B.C. 1000)경까지 행하여졌다. 시체를 미이라로 하여 보존하면 죽음으로써 일단 떠났던 영혼이 다시 돌아와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체를 미이라로 만드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또한 성조 성수(聖鳥聖獸)를 미이라로 하는 일도 널리 행하여졌다. 미이라를 제작하는 방법은 먼저 유해를 작업대 위에 놓고 둥그렇게 굽은 칼로 콧구멍에서부터 뇌까지 찔러 뇌수를 꺼내고 이어서 날카로운 돌칼로 배를 갈라 내장을 전부 꺼낸 다음 향료 등을 바른 후 다시 꿰맨다. 그 다음 유해를 천연 소다수에 70일 동안 담가놓은 뒤 유해를 꺼내 씻고 질 좋은 아마포로 온몸을 칭칭 감고 나서 고무를 발라놓는다. 방부 처리가 끝남과 동시에 저승 세계로 갈 준비를 마친 미라는 곧 죽은 자들의 성역인 아비도스로 향하는 여정의 첫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죽은 자들의 제왕, 오시리스가 모셔져 있는 화려한 공동묘지에 묻히는 장례식은 오직 부유한 자들만이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지만 아비도스는 모든 죽은 자들을 위하여 그 성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어 아비도스로 향하는 저승객을 실은 장례선들이 나일강을 바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원래 죽은 후 오시리스 신의 곁으로 가는 영광스러운 혜택은 왕들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지만 점차 귀족들에게도 허락되면서 결국에는 죽은 이집트인들은 모두 '신' 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 사자의 서(死者의 書) : 이집트에서 미이라와 함께 매장된 파피루스나 묘의 벽면에 그려진 비문 등을 일괄해서 하는 말로써 그 내용은 대개 사자(死者)의 안녕과 행복을 비는 주문 등이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제 18왕조 때 만들어진 파피루스 문서로서, 부활의 신이며 죽은 자의 심판자인 오시리스의 면전에서 죽은 자의 혼 을 저울에 달아 생존시의 행위를 조사하는 장면이 담겨져 있다. 만일 혼의 무게가 모자라면 악어, 하마 등에게 집어 던져 삼키게 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사자의 서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에 대해서 오시리 스 신에게 바치는 산 자들의 일종의 신원 증명서라고 할 수 있다.

◑ 파피루스(Papyrus) : 파피루스 풀의 줄기로 만든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종이. 파피루스 풀은 옛날에는 나일 강변에 무성하였는데, 현재는 남방 수단과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에서 볼 수 있다. 최초에 기록된 것은 히에라 틱으로, '사자(死者)의 서(書)' 와 함께 분묘 속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나중의 것으로는 데모틱과 콥트 어로 된 것이 많다. 이 후자가 헬레니즘 시대 이후에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문서도 많아, 오늘날 파피루스 학(學)이라 하면, 이 그리스어로 쓰여진 파피루스 고문서에 대한 연구를 말한다. 파피루스 종이의 서적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기록된 문자는 어느 것이나 횡서(히에라틱, 데모틱은 우측에서부터, 콥트 어는 좌측에서부터)이기 때문에 적당한 길이를 구획하여 한 페이지로 만들어져 기입되어 있다.

◑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 파라오는 사후에도 장엄하고 화려한 생활을 한다고 여겨져 피라미드가 세워졌는데, 이들 대부분은 고 왕국 시대에 건립되었다. 나일 강의 서쪽, 델타 지역에 있는 70개의 피라미드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기원전 약 2천 8백년 전에 건립된 쿠푸왕의 피라미드이다. 이 피라미드의 높이는 141m, 밑변의 길이는 약 230m이며 그 둘레를 한 바퀴 돌려면 거의 3km나 걸어야 한다. 헤로도투스의 계산법에 의하면,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는 10만 명이 한 부대가 되어 3개월씩 돌아가며 10년 동안을 작업해야 하 며 피라미드 건설 현장으로 깎은 돌을 운반하는 도로를 만드는 데만도 무려 10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돌 하나의 무게는 2톤이나 되었고, 인부들은 채찍으로 맞아 가면서 이 돌을 운반하였다. 피라미드는 모두 나일강 서쪽에 세워졌는 데 이는 태양이 지는 곳이 서쪽이므로 서쪽에 사후의 영원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 왕국, 신 왕국 시대의 무덤군인 룩소르의 왕가의 계곡, 왕비의 계곡 등도 나일강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 스핑크스(Sphinx) : 보통 머리는 사람,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한 신화적인 괴물로 그 기원은 고대 이집트 시대이다. 그리스 어로「묶는 것」이란 뜻이다. 이집트 어로는「후」또는「네브」이고, 이집트에서는 오벨리스크와 같은 태양신 즉, 레의 상징으로서 그 거대한 상이 신전과 궁전 앞에 장식되었다. 기제에 있는 최대의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의 모습을 재생한 것이라 한다. 이 스핑크스는 거대한 암석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써, 사람의 머리를 한 사자가 앉아서 앞으로 팔을 뻗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스핑크스는 왕의 강대한 권력을 인격화한 것으로써 그 높이는 20m 이상이고 길이는 73m이다. 중 왕국 이후에는 수십 기를 늘어놓기도 하고, 독수리· 숫염소의 머리를 지닌 것도 있었다. 이 풍습은 앗시리아, 페니키아에도 퍼졌고, 그리스 신화에서는 테베에 있었다는 스핑크스의 이야기가 있다.

◑ 로제타석과 이집트 문자 : 이집트 왕국이 통일되고 국가 체제가 정비되던 시기(초기 왕조 시대)에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집트 문자는 그림 문자에서 발달한 것으로, 서체로는 상형 문자인 신성 문자(Hierochlyph)와 신관 문자 (Hieratic), 민중 문자(Demotic)로 구분된다. 히에로클리프는 상형 문자이기 때문에 묘지나 신전의 비문 같은 기념물엔 적합하지만 행정 사무에 쓰기에는 실용적이지 못했다. 때문에 곧 히에로클리프를 간략화 한 히에라틱이 채용되었다. 이 두 가지 문자가 필요에 따라 쓰였다. 히에로클리프는 이후 시나이 반도를 통해 시리아에 전해져서 뒷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히에로클리프는 신전 또는 묘지의 벽면이나 비석에 많이 남아 있는데, 1799년 이집트에 원정 왔던 나폴레옹 군대의 기술 장교 쁘사르가 나일강 어귀에 있는 로제타라는 상업 도시에서 길이 1m, 폭 75cm인 검정색의 비석 하나를 발굴하였다. 비석의 위 2 단에는 히에로클리프와 히에라틱이 새겨졌고 하단에는 그리스 문자가 씌어져 있다. 이 비문은,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의 신관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식에 왕의 덕을 기리어 새긴 것으로, 나폴레옹은 이 돌을 프랑스로 가져가게 하였고 결국 20여 년만에 프랑스인 샹폴리옹(Champolion)에 의해서 히에로 클리프가 해독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먼저 그리스 문자를 해독하고 그에 맞춰 이집트 그림 문자를 해독 함으로써 이집트의 고대 역사를 알아 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 이큰 아톤(Ikhn Aton: 1380-1362 B.C.) : 이집트 제18대 왕조의 왕인 아멘호테프 4세의 고친 이름. 이집트 제국의 극성기에 즉위, 종래의 국시와는 반대로 극단적인 평화주의를 주창하였다.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신봉하여, 이집트의 전통적인 다신교인 아몬 교에는 반대하였다. 도읍을 테베로부터 아케트아톤(현재의 텔 엘 아마르나)로 옮겼으며, 아톤의 신전과 궁전을 건설하고 이주하였다. 이 같은 일신교의 확립은「고대 이집트의 종교 개혁」이라고 불리며, 또 이 시대에 현저하였던 미술·문학적인 혁신 기운은「아마르나 혁명」이라 일컬어진다. 그 러나 국방 정책을 소홀히 하고 있는 동안에 힛타이트는 시리아에, 하비루는 팔레스티나에 침입하였다. 내정도 어지러워져서 왕의 사후 급속히 반대 세력이 득세하여, 테베로 다시 천도하고 아몬 교도 부활되었다

◑ 람세스 1세(Ramses I ; ?-1318 B.C.) : 이집트 제 19왕조의 건설자(1319∼1318 B.C). 전 왕조의 하르엠헤브 왕 밑에서, 아들 세티 1세와 함께 상 이집트를 다스리는 대신이었는데, 왕이 죽은 후 신 왕조를 세우고, 세티 1세와 공동 통치를 하였다. 이 왕조에서 라, 세트 등의 북방 신들이 부활하였으나, 수도 테베의 주신을 섬기는 아몬 교는 여전히 성행하였다.

◑ 람세스 2세(Ramses II ; ?-1164 B.C) : 이집트 제19 왕조의 왕(1301∼1234 B.C.)으로 세티 1세의 아들. 북으로는 팔레스티나, 남으로는 이디오 피아를 정복하고,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의 건설을 기도하였다. 힛타이트의 대군과 카데슈에서 싸워 힘겹게 승리하였으나, 신흥의 앗시리아에 대비하여 화약을 맺었다. 델타의 동방 펠루시움, 헬리오폴리스, 타니스를 연결하는 선에 방벽을 쌓고, 또 번영하는 테베(오늘의 룩소르)를 장대한 건축물로 장식하였으며 누비아의 아부심벨에 자신과 왕비 네페르타리의 신전을 건축하는 등 이집트 내에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남겨 놓았다.

◑ 이집트 미술의 특징 : 고대 이집트 예술에 보이는 가장 뚜렷하고 가장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면성의 원리이다. 정면성의 원리란 인체는 그것이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간에 가슴의 평면만은 그 전부가 감상자 쪽으로 향하도록 묘사된다는 것이다. 이집트 미술의 또 다른 특징은 인물의 신분이나 그 역할의 중요성에 따라 그리는 인물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묶어 그리는 일명 정면성의 법칙이라 불리는 그림방식은 이집트인의 그림을 일관되게 지배해 온 방식인데, 그리는 대상의 인물이 절대 에 가까울수록 이러한 법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이집트인의 삶의 방식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자'(왕이나 신)와 일시적으로 '행위하는 자'를 뚜렷이 구별하여 '존재하는 자에겐 절대적인 완전함과 근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앞서와 같은 불변의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였 다. 영원불멸의 관념을 굳게 믿고 기하학적인 모습의 대명사격인 피라밋을 건축했던 이집트인에겐 명암과 원근으로 실물을 닮게 그리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인 속임수에 불과한 이러한 그림의 기술이 천하게 여겨졌던 게 틀림없다.

◐ 힉소스(Hyksws) : 힉소스는 고대 이집트어의「외국인 지배자」란 말에서 유래한다. 이것을「목양자의 왕」이라고 해석함은 잘못이다. B.C. 2천년대 초에 시리아, 팔레스티나에 침입하였고, 여세를 몰아 이집트까지 진출하여 이집트 전토의 통치자가 되었다(1730∼1570 B.C.). 유목민 출신으로 말과 전차를 이용하여 기동성에 뛰어난 용감한 민족으로, 이집트에서는 델타 북동쪽 구석의 아바리스에 구축한 견고한 성채가 정치적 중심지였는데,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도 요소 요소에 이러한 성채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집트 제18 왕조의 제왕에 의해 그들은 델타에서 축출 당하고, 서남 아시아의 각 거점도 공략당했다. 그들이 후르리 인과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군대에는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있었다.

◑ 페니키아인(Phoenicians) : 고대 지중해의 시리아 연안 중부, 레바논 산맥 서쪽의 좁고 긴 지방을 페니키아(Phoenicia)라 부르는 데, 이것은 그리스어의 '포이니케오스(Feunikeos:자주색)' 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이 지방에서는 자주색 염료의 원료가 되는 조개가 산출되었는데 그리스인은 이들이 자주색의 외투를 입었다 해서 Phoinikes라고 불렀던 것이다. B.C. 1000년경에 지중해 무역을 지배하였으나, B.C. 8세기에 앗시리아에 정복당했으며, 해상 무역도 그리스인의 세력에 밀리었다. 시돈(Sidon), 티루스(Tyrus), 베리투스, 비블로스 등 각 도 시는 각기 군주제 하에 자치를 행하였으나, 처음에는 시돈, 뒤에는 티루스가 이들 도시 동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레바논의 목재는 이집트, 바빌론 등지에 수출되었고 교역품은 키프로스의 구리, 에스파냐의 광물, 갈리아의 피혁, 발트 연안의 호박, 영국의 주석 등 광범위했으며, 지중해의 섬들과 아프리카 북쪽에 식민지 내지 무역 중계지를 만들었는데, 특히 카르타고(Carthago)는 유명하다. 그들은 또 알파벳의 발명자로도 알려졌다. 시나이 반도의 광산에서 이집트인의 지배 아래 있던 셈족이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음표화한 것을 22개의 알파벳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인이 받아들인 뒤로 지금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이 됐다.

◑ 힛타이트(Hittite) : B.C. 2천년대초 인도·유럽인의 대이동의 일파로서 그들은 아나톨리아에서 카르카즈 산맥을 넘어 남하해 서진해 왔거나 발칸 반도를 남하해 동진 해온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토착민을 정복하여 귀족 계급을 구성, 또 중부 소아시아를 통일하여 왕국을 형성하고,‘하투사스(Hattusas:지금의 보가즈쾨이 마을)’에 도읍하였다. B.C. 15세기 중엽에 하투사스에 신 왕조가 일어나, B.C. 14세기말부터 13세기에 걸쳐 슈필룰리우마시, 무루실리시 2세, 핫투실리시 3세와 같은 영주가 나타나, 소아시아의 여러 소 왕국을 병합하고, 이집트, 미탄니 두 왕국의 국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시리아를 제패하고 소위 제국 시대를 열었으나, B.C. 12세기에 들어서자 새로운 민족이동이 일어나「해양 국민」(아카이아인, 필라스티아인, 프리지아인 등)의 침입을 받고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집트의 왕이 신의 화신이며, 수메르의 왕이 신관왕 이었음에 대하여, 힛타이트의 왕은 군대 통치자였으며, 부족장 회의의 보좌를 받았고, 부족장들과는 조 약으로써 결합되었다. 신 왕국에서는 아시아적 전제주의를 채택하여 왕권은 현저하게 신장되었다. 히타이트 인은 세계 최고(最古)의 철기 사용자며, 또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교역을 했음이 고대 오리엔트 각지의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히타이트 인은 그 뒤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지배했지만 기원전 717년쯤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다.

◑ 캇시트(Kassites) : 고대 오리엔트 시대의 자그로스 산맥 일대의 호전적 산간 민족. 또 이 민족이 세운 바빌로니아의 왕 조(B.C. 15∼11세기). 함무라비의 사후 바빌론 제1왕조는 급속히 쇠퇴하여, 바빌로니아 땅에는 이 제1왕조와 페르시아 만 연안의 「바다의 왕국」및 동방에서 침입한 캇시트족의 정권 등의 3국이 정립 항쟁했는데, 캇시트가 이들을 병합하여 바빌론을 수도로 왕조를 세워 약 400년간 통치하였다. 이 동안에 36명의 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의 치세에 대해서는 아직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역대의 왕은 끊임없는 주변의 민족과 싸워서 영토의 보전을 도모했는데, 당시 북방에는 힛타이트 왕국, 미탄니 왕국, 후르리 인의 국가가 번영하고 있었다. 캇시트 왕국은 이들의 국가 및 이집트, 앗시리아와 문화적 교류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여호와(Jahweh) : 유대교의 유일 절대 신으로 남부의 부족 연합의 신이었던 여호와는 다비드·솔로몬 왕국 시대에는 전 이스라엘의 주신으로 되어 바빌론 유수 이후의 오랜 정치적 혼란을 거쳐 유대교 교리가 확립됨에 따라 유일신으로서 다른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교리나 계율에 위반되는 의례를 제거시켰다. 유일신의 사상은 크리스트교에 계승되었다.

◑ 솔로몬 왕 : 유일신 야훼(여호와)를 믿는 히브리인은 가나안 지방을‘약속의 땅’으로생각했다.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 남부에 침입하여, 철제 무기로 이스라엘인을 공격한 필리스티네 인(Philistines)에 대항하기 위하여 반영구적인 군사 지도자가 필요해 사울을 초대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필리스티네 인과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이후 남부의 유대족 출신인 다비드(Dawid 전1000∼전971)가 유대의 왕이 되어 여호와 앞에서 서약하고, 북부의 이스라엘 왕이 되어 남북 가나안을 처음으로 통일시켰다. 그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숙적인 필리스티네 인을 격파하고 용병대를 채용하여 왕국을 강화했다. 다비드의 아들 솔로몬(Solomon 전971∼전922)은 왕위 계승의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 솔로몬(Solomon)은 이집트 왕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수도 예루살렘에 대신전과 왕궁을 건설하고 행정 개혁·상업 무역을 확대해 이스라엘 왕국의 전성기를 누렸다. 예수가"솔로몬의 영화가 극성했지만 들판의 백합만 못하다"라고 말한 유명한 번영기를 출현시켰다. 그러나 그의 전제 군주적인 지배와 대 토목 공사, 군비의 확장으로 백성은 압박을 받았다. 그가 죽은 뒤 왕국은 이분되어 북의 10부족은 이스라엘(Israel :B.C. 933∼722년, 아시리아에 멸망)로, 남의 2부족은 유대(Judah :B.C. 933∼586년,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로 분열했다.

◑ 이스라엘 왕국(전922∼전721) : 솔로몬이 죽은 후 북부 이스라엘 여러 부족을 거느리고 있었던 여로보암(Jeroboam)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Rehoboam)에 맞서 독립한 나라이다. 수도는 시켐(Sichem), 옴리(Omri)왕조 시대에 수도를 사마리아(Samara)로 옮겼고, 예후 왕조 시대에 앗시리아 왕 사르곤 2세에 의해 정복되어, 상류 계급은 식민(植民)되었다.

◑ 유대 왕국(전922∼전586) : 이스라엘 왕국이 분리된 후 솔로몬의 후계자는 남부 유대(Judah)를 지배하였다. 수도는 예루살렘, 한 때 앗시리아에 복종, 요시아(Joshua)왕 시대에 신명기법(新命記法)이 발포되었다. 이어서 이집트 왕 네코에게 패배하여 조공하였으며, 이후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레자르 2세에 의하여 멸망당했다.

◑ 유대교 : 유목 시대의 사막의 백성 이스라엘 여러 부족의 부족적 신앙, 모세의 신과의 서약, 다비드·솔로몬 왕국에 있어서의 주신(主神) 여호와의 신앙, 바빌로니아 유수 이후의 유일신으로서의 여호와의 숭배, 이 교도의 여러 신의 배제--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통하여 유대교가 형성되었다. 페르시아를 제외한 다른 오리엔트의 전지역에서 다신교가 행해지고 있는 시대에 이스라엘에서는 일신교가 성립되었다. 유대교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인과의 계약에 따라 천지와 인류의 창조자인 유일신 여호와를 모시는 종교로, 다른 모든 종교를 부정하고 성서에 기록된 율법·의식·계율을 엄중히 준수하는 종교이다. 유대교의 중요한 교의의 내용으로는 유일신, 유일신전주의, 선민 사상, 율법 준수주의, 제사 존중주의를 들 수 있다. 또한 우상 숭배의 금지, 주 1회의 안식일(토요일), 전 이스라엘인의 할례를 규정하고 있다.

◑ 통곡의 벽 : 예루살렘 서쪽 성벽 일부의 명칭으로, 솔로몬 시대에 세운 신전이었는데 파괴되어 예수 그리스도 시대 헤로데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예수가 죽은 후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다. 이와 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린다고 하여, 중세의 유대인은 이 벽 앞에 모여 신전 파괴와 예루살렘 함락을 슬퍼하며 회복을 기원했다고 한다.

◑ 유태인의 역사

전 1500년경: 헤브라이 인이 팔레스티나 지방에 정착.

1230년경: 모세의 지도 아래 탈 이집트

931년경: 이스라엘 왕국 성립-북 이스라엘, 남 유대 왕국으로 분열

722년: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멸망

586년: 유대는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바빌론의 유수)

538년: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에 의해 해방 유대인, 예루살렘 신전 재건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음.

후 32년: 예수 처형, 기독교 성립

66-70년: 유대 전쟁(로마 지배에 저항)

132-135년: 유태인의 예루살렘 출입을 처형으로 금지, 유태인은 망국인이 됨.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기독교 공인으로 유태인 차별 시작

1179-1215년: 십자군의 교회회의에서 유태인 차별 결의

1492년: 레콩키스타 완성 15만명 이상의 유태인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

1881년: 러시아에서 격심한 유태인 박해(포그룸)

1948년: 독립

◑ 앗시리아(Assyria) : 메소포타미아 북방 앗슈르를 수도로 한 셈족의 국가. 처음에는 바빌로니아에 속하여 있었으나 B.C. 2000년경에 독립하여 B.C. 1300년경에는 니네베에 천도하였는데 그 국토는 미탄니, 힛타이트, 바빌로니 아, 엘람 등 강국 사이에 끼인 지방의 소국가에 불과하였다.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Tiglatpileser I 전 1114∼전1076)는 앗시리아의 국내를 통일하고, 북쪽의 나일리, 북시리아, 바빌로니아를 정복했다. 그후 앗시리아는 한동안 쇠퇴했으나 앗슈르나시르팔 2세(Assurnasirpal II 전883∼전859), 샬마네세르 3세 (Shalmaneser III 전858∼전824) 시대에 시리아를 정복, 우라르투에 반격을 가하였다. 앗시리아는 티글라 트필레세르 3세(전746∼전728) 시대로부터 제국 시대로 들어갔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쳐버리고 우라르투 를 정복, 아람 왕국을 멸망시키었고(전732),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공략에 성공했다. 쿠데타에 의해 새로 왕조를 세운 사르곤 2세(Sargon II 전722∼전705)는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전721), 센나케리브 (Sennakherib 전705∼전681)는 마침내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이집트를 점령했다. 이로써 앗시리아는 최 초로 오리엔트 세계를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전668∼전626)은 바빌로니 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부속된 모든 땅을 평정하여 그 판도가 카시트에서 이집트까지 넓혀졌다. 앗시리 아의 군대는 전차 병, 궁병(弓兵), 보병으로 되어 있으며 철제의 무기를 써서 각지를 정복했다. 피정복민 은 사살되거나 강제 이민을 당하거나 했으며 조공에 의해 소 국가의 지배권은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지방 통치를 위하여 주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는 군인으로서도 유능했지만, 학문을 매우 좋아해 전국에 학자를 보내 문서를 모아 도서관을 만들기도 했다. 앗시리아는 후에 신 바빌로니아, 메디아, 스키타이의 연합군에 패망되었고, 드디어 기원전 612년 니네베는 함락되었다. 궁전과 함께 파묻힌 이 시대의 도서관 이 2천 수 백년만인 1853년에 영국의 라삼 형제에 의해 발굴되었다. 2만 매에 이르는 점토판은 쐐기 문 자, 고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역사·문학·종교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그 가운데는 천지 창조 설화·홍수 전설 따위도 들어 있다. 현재 영국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사정을 해명함에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

 

◑ 메디아 왕국(Median Empire ;675경-550경 B.C.) : 고대 오리엔트에 있어서의 카스피 해 남서쪽의 산악 국가. 메디아 인은 민족 언어학상 페르시아 인에 가까우며, B.C. 2000년경에 하(下)우르미아 지방에 살고 있었다. 메디아 인을 최초의 통일한 자는 프라오 프테스 왕(675경∼653경 B.C.)이다. 그 아들 키악사레스는 인근 지역을 멸하고, 바빌로니아의 나보폴랏사 르와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를 멸하였다. 당시의 영토는 이란의 대부분과 우라르투 및 카파도키아의 일 부를 포함하였다. 아스티아게스 왕(585∼550 B.C.) 때에 바빌로니아의 일부를 영유하게 되었지만, 속령의 왕인 키로스에게 패하여, 왕국은 페르시아 인이 지배하게 되었다.

◑ 칼데아(Chaldea) :「칼데아」는 전 바빌로니아 지역을 의미하는 말인데, 보통은 신 바빌로니아 왕국 시대의 바빌로니아를 말한다. 앗시리아의 치하에 있었던 바빌로니아는, 칼데아 인의 장군 나보폴라사르(재위: 625∼605 B.C.)에 의하여 독립이 성취되고, 메디아와 결탁하여 앗시리아를 멸하여 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열었다. 그 후 남보니도스 치세(재위: 555∼539 B.C.)에 페르시아 군의 침입으로 바빌론이 함락되고, 신 바빌로니아 왕국은 페르시아의 사트라피가 되었다(B.C. 538).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는 특히 천문학이 발달했고, 바빌론 유수나 바벨 탑의 건설 등이 있었으며, 신관이 세력을 얻어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부분에 진출하였다. 인종적으로 칼데아 인은 셈인(셈 아라마이크 인)에 속한다.

◑ 네부카드네자르 2세(NebuchadnezzarⅡ) : 나보폴라사르(Nabopolassar) 왕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은 뒤 칼케미쉬에서 이집트 왕 네코(Nechoh) 2세의 군대를 격파해 시리아를 손에 넣고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유대인을 바빌론에 유수(幽囚)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국내에서는 관제를 정비하고, 수도 바빌론의 방비를 굳게 하며, 훌륭한 신전과 궁전을 지어 바빌론을‘세계의 도시’로 일컬어지게 했다. 바빌론 유적은 1899년부터 독일 오리엔트 학회가 발굴했다.‘바벨탑’과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하는‘공중 정원’의 흔적이 발견됐다. 또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운하와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을 장려 했다. 그리고 그의 시대에 신 바빌로니아 왕국은 당시 여러 나라들 중에서 번영을 누렸다.

◑ 바빌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Exile : B.C 597) :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601년 유대왕국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그 상층 계급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빌론에 포로로 데려갔다(기원전 597년). 두 번째는 기원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재차 함락되고 당시의 왕인 시드기야는 여리고에서 붙잡혀 장님이 되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세 번째는 기원전 582년의 일로 유다의 모든 도시가 역시 바빌론 사람들의 손에 파괴되고 주민들이 포로가 되었다. <예레미아> 52장 30절에 의하면 포로의 수는 기원전 597년, 586년, 582년의 전후 3회에 걸쳐 4,60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남 자만의 수일 것이며 부녀자를 포함하면 그 수는 25,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은 주로 왕국 사회의 중핵층인 귀족, 군인, 공인(工人) 등이었다. 이 포로들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기 원전 508년에 포고령을 내려 귀환을 허용할 때까지 억류되어 있었다. 포로들은 바빌론에서 종교적 자유는 허용받았으나 예루살렘 신전에서와 같은 제사 의식은 금지 당했고 그 대신 안식일 예배가 중심이 되어 회당에서의 율법 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예배 의식이 제사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모세 시대에서 그들의 시대까지의 역사인 <신명기>에서 <열왕기>까지의 기록이 씌어졌다. B.C. 5세기 후반에 느헤미야, 에스라 등이 귀국하면서 새로운 법전이 나오고 민족이 재건되었으며 유태교가 성립되었다. 바빌론 포로 사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대 시련이었으나 약 반세기 동안에 포로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바빌로니아의 문화에 접하여 구약성서의 근간이 되는 헤브라이의 여러 문서의 집성을 보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유태인 공동체 회복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Achaemenid Persia ;6세기-330 B.C) : 기원전 6세기 중엽 이란 고원 서남 페르시스(파르스)에 살던 아리아 계의 페르시아인중에서 키로스(재 위 559-529 B.C)가 나타나 같은 계통인 메디아 왕국을 멸하고 이란 고원을 평정하였다.(B.C 550) 이어 서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을 점령하고 바빌로니아에 침입하여 칼데아 왕국을 정복하고 서아시아를 통 일하여 아케메네스 왕조를 건설하였다. 앗시리아와 같은 탄압 정책을 취하지 않고 도리어 관용주의를 택했으므로 백성은 '페르시아의 평화' 를 구가하였다. 전 영토를 22개의 사트라피(속주)로 나누어 각 주 에 사트라프(총독)을 파견하여 일반 행정을 관장케 했으나 왕 직속의 문관을 배치하여 징세권을 관장케 하고 군사권을 장군에게 맡기어 행정을 분담시켰다. 각 주는 국고 납공과 국군 소집의 의무를 졌으나 지방의 전통은 되도록 보존하도록 힘쓰고 언어, 풍속 따위의 간섭은 받지 않았다. 그 반면 '왕의 눈과 귀' 라고 불린 지방 순찰사를 수시로 파견하여 지방 행정의 감독을 맡게 하는 등 지방 세력의 감시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당시 국도였던 수사로부터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소아시아의 사르데스에 이르는 군용 도로인 '왕의 길' 은 2400km의 길에 111개의 숙소가 있고 매일 26km를 가면 3개월 걸렸다고 한다. 이 도로를 간선으로 하여 전국에 시설된 도로망에는 역체(驛遞)제도가 완비되어 있었다. 여행자는 왕이나 고관의 도장이 찍힌 여권을 소지하고 숙소에서 매일 그날 분의 식량을 받았으며 먼 곳에서 온 여행자는 안내인의 안내를 받았다. 다리우스 1세와 그 아들 크세륵세스 1세의 2대에 걸쳐 행한 여러 차례의 그리스 원정(페르시아 전쟁)의 실패도 그다지 제국의 융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이 원정을 계기로 하여 그리스 민족이 대두하여 다리우스 3세(제위 336-330 B.C)때 끝내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는 피정복민의 문화에 대해 관용주의를 채용하였으므로 옛 바빌로니아 종교는 그대로 토착민 사이에서 신앙되었으나 이란에 있어서는 왕가의 보호 밑에 조로아스터교가 성하였다. 미술에서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의 전통위에 독자적인 섬세한 양식을 만들어 수사나 페르세폴리스에 현존해 있는 장대한 열주 건축을 위시하여 많은 조각이 그 예술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 B.C. 600년경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고대 종교. 경전은 아베스타. 이 종교는 원시 아리아인에게 공통되던 옛 이란인의 불의 숭배 및 선신 아후라와 악신 다에바의 신앙을 기초로 한 것인데, 종래의 선신의 다신적인 존재를 물리치고「광명과 지혜」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유일한 최고신으로 하는 일신론적 이념과, 물심(物心) 양 세계를 진실과 허위로 나누어 각기「선신」과「악신」의 소산이라 고 하는 2원론적 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리고 아후라 마다즈가 악신 다에바를 패배시킴으로써「신 의 왕국」이 도래한다고 믿는다. 이 조로아스터의 2원론적 철학 원리는 뒤에 이스라엘의 종교 사상에도 영향을 주어 유다교에 사탄의 사상이 도입되게 되었다. 아케메네스 조 및 사산 조 페르시아에서는 국교로 성행되었으나, 이슬람의 발홍과 더불어 이란에서 추방되었고 중국에서는 5세기경부터 전하여져 현교라 불리어졌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선신(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을 불로 보아 불을 특히 숭상하였으므로, 이 교를 배화교라고도 하는데,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오염을 두려워하는, 청정관(淸淨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원형탑(圓形塔) 안에서, 사체(死體)를 조류에게 먹이는 장례법은 유명하다.

◑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 고대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 아후라는 신을, 마즈다는 지혜를 뜻한다. 아메샤 스펜 타 정신(精神)의 도움으로 광명 세계(동물계·식물계·인간계)를 창조하고, 그 절대적 지배자로 군림하 여 선한 자를 돕고 악한 자를 징벌한다.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 시대에는 유일신으로 숭배되었으나 뒤 에는 아리만(앙그라 마이뉴: 암흑의 요정)과 부단히 대결하는 자, 천지를 움직이는 2원적 원리의 하나로 생각하게 되었다.

(3) 고대 서남 아시아 세계의 변천

◑ 파르티아(Parthia) : 이란 고원 동북부의 파르티아에서 일어나, 이란 및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던 파르니 족의 왕조. B.C. 248∼247년에 파르니 족의 아르사케스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사트라프를 살해하고 파르티아 왕국을 세웠 다. 이 시조인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라 아르사케스 조라고 했는데, 중국의 사기에 처음 나타난 안식은 이 아르사케스의 음역이다. 미트리다테스 1세(재위: 170∼138 B.C.) 시대에 셀레우코스 조와 박트리아 왕 국의 쇠퇴기에 편승하여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으로는 갠지즈 강에 걸치는 지역을 그들 세력 밑에 두었다. 미트리다테스 2세(124∼]88 B.C.)경부터 로마와의 공방전이 치열해져 오로데스 1세 때에 로마의 장군 크랏수스의 군대가 카라에에서 전멸하였다(B.C. 53). B.C. 19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중국 및 인도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재개할 것을 조건으로 파르티아 왕국과 화의를 체결하였다. 그 후 226년 사신 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셰르에게 멸망되었다. 그 지역은 동서 무역로의 요지였으므로 중계 무 역, 특히 비단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고 종교는 조로아스터교였다.

◑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42) : 사산이라는 이름은 왕실의 조상이며 조로아스터 교의 사제였던 '사산(Sasan)'에서 딴 것이다. 이 왕조는 아케메네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그 발상지가 페르시아 지방이며, 사산의 손자인 아루다실은 페르시아 재건이라는 포부를 갖고,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는 신정 국가를 건설하였다. 사산 조의 군주는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황제위를 받은 신권적 존재이며, 귀족·사제·관리·농공상의 4계급의 위에 군림하였다. 사제(司祭)는 토지 소유, 1/10稅, 신도의 증여 등으로 막대한 수입을 갖고 있었고,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인 성화(聖火)는 가정·씨족·촌락·지방마다 제사로 받들어졌고, 사원은 전국에 세워졌다. 사제는 또 일반인의 관혼상제에도 관여하였다.

◑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 : 3세기경 페르시아인 마니에 의하여 창시된 종교. 크리스트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바빌로니아 원시 신앙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선과 악, 광명과 암흑 등 이원론을 제창하였다. 마니 자신은 광명의 세계로부터 현세에 나타난 예언자·구제자이며, 마니교 제사(祭司)는 선·악 혼합의 현세에서 광명을 암흑으로부터 분리하고 인간을 구제한다고 하였다. 그들의 계율은 엄격한 동양적 금욕주의를 취했으며, 포교를 위해 교회주의·성직자 계급제가 채택되었다. 창시할 당시에는 사산 조에 의해서도 인정되어 궁정내에도 신도를 확보하였으나, 후에 조로아스터교에 의해 이단시되고, 박해를 받아 마니도 276년경 십자가형을 받았고, 경전도 소각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니교는 서쪽에서는 시리아부터 이집트, 북아프리카에까지, 그리고 4세기 이후에는 에스파냐, 남 프랑스, 이탈리아에까지 전파되었고, 동방에서는 투르키스탄, 중앙 아시아 방면에 퍼지고, 7세기말에는 당에까지 전파되었다. 당에서는 한때 금압을 받았으나(732), 부활되어 장안 등에 회당이 건립되기도 하였지만, 843년 또 다시 금지되었다. 당을 거쳐 몽고의 유목민인 위구 르족에 전파된 것은 유명하며, 그 후 위구르인이 투르키스탄 방면으로 이주한 후 다시 중앙 아시아의 마니교가 성행하였다고 보여진다.

 

4. 지중해 세계의 전개

(1) 그리스 세계의 전개

◑ 그리스의 신 : 태초에 흙과 물, 그리고 하늘이 혼돈 상태에 있다가 얼마 후에 이 혼돈 가운데 게오 여신(흙의 신)과 우란 신(하늘의 신)이 등장하였다. 게오와 우란 두 신 사이에 거인이 탄생했는데, 우란 신은 거인 아들이 자기 권력을 탈취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깊은 지하 연못에 처박아 버렸다. 그런데 그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인 크로노스가 거인을 구출하였다. 덕분에 크로노스는 거인의 도움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세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크로노스 신도 격렬한 싸움 끝에 결국 막내아들 제우스에게 권력을 물려주었다. 제우스와 그를 보좌하는 많은 신들이 올림피아 산 위(텟살리아)에 산다고 하여 그리스인들은 그 신들을 올림피오스라고 불렀다. 제우스는 크로노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을 자신과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졌다. 제우스 자신은 번개 불의 신으로서 아내 헤라와 함께 하늘을 관장하였다. 동생 포세이돈에게는 바다를 위임하고 또 다른 동생 하데스에게는 사자(死者)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아폴로는 빛의 신, 시의 신이 되어 학문과 예술의 수호신인 9명의 정령을 그 권력하에 두었다. 절름발이 헤페스트는 불과 대장간의 신, 아프로디테는 미의 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아테네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인간의 경제 활동의 각 부문에도 각각의 수호신이 있었는데, 데메트르는 농경을 수호하는 신이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의 신, 아테네는 베틀의 신, 헤르메스는 교통과 상업의 신, 아르데미다는 사냥의 신이었다. 그리스 각 지방에는 삼림, 초원, 강, 산 등에 사는 씨족 신이 따로 있었다. 그리스인은 신들이 불사의 존재로서 전능한 능력을 지녔으나,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운명에 지배 받기 때문에 불운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숙명을 모이라라고 불렀는데 어느 누구도 숙명(모이라)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모이라는 인간과 신의 생활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 올림포스의 신들 : 올림포스라 함은 북방으로부터 침입한 그리스 사람들이 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한 산의 명칭으로 민족 이동의 영향으로 각지에 올림포스라고 하는 산이 생겼는데, 종내는 텟살리아 북부의 올림포스 산이 그 이름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흰 구름에 쌓인 산정에 있는 대 궁전에서 주신인 제우스를 중심으로 신들이 연회를 베풀고 있는 모양을 호메로스는 그의 시에서 묘사하고 있다. 나중에는 올림포스 신들 중에서 주요한 신은 몇몇밖에 안 되게 되었는데, 올림포스 12신은 제우스 (주신 ; 신과 인간의 아버지)-쥬피터 헤라 (제우스의 처 ; 결혼, 생산의 신)-주우노 포세이돈 (제우스의 형 ; 바다의 신)-넵튜운 아레스 (제우스의 아들 ; 군신)-마르스 아폴론 (제우스의 동생 ; 태양, 음악, 예언의 신)-아폴로 헤파이스토스 (제우스의 아들 ; 불과 공예의 신)-불카누스 헤르메스 (신들의 사자 ; 행운과 상업의 신)-머어큐리 아테나 (제우스의 딸 ; 전쟁과 평화, 지혜의 여신)-미네르바 아르테미스 (제우스의 딸 ; 수렵과 달의 여신)-다이아나 아프로디테 (미와 사랑의 여신)-베누스 헤스티아(제우스의 동생 ; 가정의 여신)-베스타 데메테르(제우스의 동생 ; 농업의 신) 이다.

◑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다 주고 불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제우스는 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멀리 카프카즈로 유배를 보내어 그를 절벽의 바위에 쇠고랑으로 채운 다음, 매일 매로 하여금 간을 쪼아먹게 하였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용감하게 모든 고통을 찾아내면서 제우스에 굴복하지 않았다.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되자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뿐만 아니라 인간도 엄벌에 처했다. 제우스는 온갖 고통과 불행을 금제 상자에 담아 이것을 미인 판도라의 손에 넘겨주었다. 판도라는 미인이었을 뿐 아니라 호기심이 매우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금제 상자를 보고 잽싸게 열어 보았다. 판도라가 금제 상자를 열자마자, 상자 가운데 있던 온갖 고통과 불행이 빠져 나와 빠른 속도로 인간 세상을 뒤덮고 말았다.

◑ 헤라클레스 : 그리스인의 화제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영웅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헤라클레스였다. 그리스 신화 가운데 나오는 헤라클레스는 대중의 진정한 영웅이자 남아다운 수난자였다. 헤라클레스는 네메아 시(아르 고리스)의 주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그들의 가축을 먹어치우는 사자를 때려죽이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나 동물을 물리치기도 했다. 또 그는 구리발톱과 부리를 한 괴상한 새도 물리쳤는데, 이 새는 제우스에 의해 바위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던 새로서 헤라클레스는 그 새를 죽임으로써 인간을 위해 수난 당하던 신을 구출해 주었다. 한편 헤라클레스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가로막고 있는 암벽을 깨서, 하나는 스페인 쪽으로 던지고 다른 하나는 아프리카 쪽으로 던졌다. 이로 인해 생긴 두 개 의 커다란 암벽을 그리스인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명명했다. (오늘날의 지브로올터 해협) 안티우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흙의 신 게오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안티우스가 적과 싸워 지게 될 경우 대지에 입맞춤하면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 원기를 회복했다. 그리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오는 어떤 이방인도 물리쳤는데, 안티우스의 약점은 어머니인 대지로부터 떠나 있으면 힘이 약화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이 점을 간파하여 안티우스를 대지에서 떨어지게 유인하여 공중에서 싸웠는데, 마침내 그의 숨통을 조일 수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이처럼 많은 위엄을 달성함으로써 마침내 제우스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 신이 되었다.

◑ 오이디푸스 : 앗키타 지방 보에오티아의 라이아 왕의 아들 오이디푸스는 자기 부모의 곁을 떠나 다른 사람에게 양육 되어 부모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보에오티아의 테베로 가는 도중 한 노인을 만났는데 서로 길을 양 보하지 않아 싸움이 벌어졌는데 오이디푸스는 노인과 그의 종자를 죽였다. 그 중 한 명의 종자가 겨우 살아 도망쳤다. 오이디푸스는 이 노인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베 시 근교의 바 위산에 반신은 사자이고 반신은 여자인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살고 있었다. 스핑크스는 통행인에게 수수 께끼를 내어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을 죽였다. 오이디푸스가 그 곳을 지날 때 스핑크스는 다음과 같 은 수수께끼를 냈다.『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묻자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려서는 기고, 성장하여서는 걷는데, 늙어서는 지팡이를 쓴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스핑크스는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 죽어 버렸다. 이제 편안 하게 살 수 있게 된 시민들은 오이디푸스를 라이아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했다. 라이아 왕은 강도에 게 살해되었다고 시민들은 생각하였으며, 라이아왕의 미망인 유카스트 즉, 오이디푸스의 어머니가 오이 디푸스의 아내로 되었다.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테베 사람들이 무서운 병에 걸려 죽 어 갔다. 신은 테베 시민에게, 라이아 왕의 피로 손을 더럽힌 자를 추방하지 않는 한 이러한 재앙은 그 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때 라이아 왕과 길에서 만난 오이디푸스와의 싸움에서 간신히 도망쳐 온 종자가 오이디푸스에게 라이아 왕을 살해한 사람은 당신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오이디푸스는 너무나 도 큰 충격을 받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다.

◑ 데세이 : 에게이 왕의 아들 데세이는 앗티카 제일의 용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데세이는 앗티카의 흉악한 강도 프로크르스트를 살해했다. 프로크르스트는 길가는 나그네를 불러다가 진수성찬으로 대접한 뒤 침대에서 쉬라고 권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나그네의 발이 침대보다 길거나 짧으면 침대에 맞춰 나그네의 발을 자르거나 잡아당겨 늘렸다. 이 침대를 <프로크르스트의 침대>라 부른다. 데세이는 프로크르스트를 살해하여 그 침대에 가로로 눕혀 놓았는데, 그 침대가 프로크르스트에게는 너무 짧았다. 데세이의 제일의 위업은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가혹한 공물을 바쳐야 했던 자기 나라 사람들을 그 의무로부터 해방시켜 준 일이었다. 9년마다 7명의 소녀와 7명의 소년을 미노스 왕에게 공물로 바쳐야 했는데, 이 소년 소녀들은 사람의 몸에 소의 얼굴을 한 괴물 미노다우르의 먹이로 바쳐졌다. 이 위업의 어려움은 괴물을 퇴치 하는 것보다 오히려 미궁을 빠져 나오는 일이었다. 그런데 미노스의 왕녀 아리아도나가 데세이를 흠모 하여 그에게 실 꾸러미를 주었다. 데세이는 그 실 끝을 미궁 입구에 매어놓고 실을 풀면서 미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미노다우르를 살해한 다음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 나왔다. 이 일을 위해 떠나 던 날, 데세이는 부친 에게이 왕과 이별하면서 만약 무사히 일을 마치면 하얀 돛을 단 배를 타고 돌아 올 것이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검은 돛을 단 배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데세이는 일의 성공으로 정신없이 기뻐하다가 아버지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타고 왔던 검은 돛을 단 배 그대로 고국으로 되돌아갔다. 매일 밤 바닷가에서 배를 기다리던 아버지 에게이 왕은 검은 돛을 보고 데세이가 죽은 걸로 단정을 내렸다. 에게이 왕은 심히 낙심하여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바다를 에게 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에게 문명(Aegean Civilization) : 그리스 문명이 성립되기 이전에 에게 바다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던 청동기 문명으로 크레타 문명, 미케네 문명, 트로이 문명으로 나누어진다. 에게 해의 북쪽을 제외한, 로도스 섬, 키프로스 섬으로부터 레반토 지방에도 미쳐 동부 지중해 해역에 퍼진 사상 최초의 해양 문명이며 유럽 지역에 일어난 최초의 문명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독일의 슐레이만과 영국의 에반스 등의 발굴에 의하여 그 실체가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 문명은 에게 해 지역의 올리브, 포도 재배와 그 제품인 기름과 술의 해상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더불어 오리엔트의 선진 문명과의 접촉의 결과로 이룩되었다. 이리하여 B.C. 3000년경부터 독자적인 청동 문명이 일어났는데, 에게 문명에는 크레타, 미케네, 트로이, 키클라데스, 헬 라딕(그 후기가 미케네 문명), 텟살리아의 여러 문명이 있으며, 점차 상호 밀착, 통합되어 갔다. B.C. 2000년경부터 크레타 문명이 동 지중해 해역의 주도자가 되었고 이어서 미케네 문명이 전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철기를 가지고 남하한 그리스인인 도리아 인에게 멸망하였으며 이후 폴리스 중심의 그리스 문명이 나오게 된다.

◑ 크레타 문명(Creta Culture) : 에게 문명의 전기 문명으로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한다. 크레타 섬은 동부 지중해의 중심에 있으며 면 적은 약 8,620km이다. 섬의 중부가 특히 번성하여 크놋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에 초기의 궁전이 세워 졌고 벽화와 화려한 채색 도기가 출현하였다. 후기가 되자 크놋소스 왕이 섬 전체를 통일하여 전설상의 미노스 왕의 해상 왕국이 성립되고 크레타 문명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크놋소스는 세계 제 1의 도시가 되어 궁전은 그 장려함을 자랑하게 되고 동부의 여러 항구도 번영하게 되었다. 그 교역권은 이집트, 레반트, 그리스에 이르고 이전의 그림 문자로부터 선문자 A가 발전되었다. 국왕은 신성하며 신관 또는 상인 왕으로서 활약하였다. 궁전은 많은 작은 방으로 이루어진 여러 층의 건물로, 안뜰이 있었으며 그 장식은 꽃, 새, 물고기 그림과 궁정 생활을 나타내는 벽화로 크레타 인이 회화에 상당한 수준을 가졌음을 짐작케 한다. 도자기는 형체가 아름다웠고 화초와 바다 동물의 무늬가 있었다. 모든 미술이 자연주의적이고 밝고 경쾌한 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신앙은 자연 숭배, 주물(呪物) 숭배를 바탕으로 하였고 여신이나 독립된 신전은 없었다. 인종은 지중해 인종과 소아시아인과의 혼성이었다. B.C.1400년 2차에 걸친 그리스인의 침략으로 궁전과 문명이 동시에 괴멸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에반스가 크노소스에서 커다란 궁전 터를 발견하였으며. 1952년 영국의 마이클 벤 트리스라는 젊은 학자가 선문자 B라는 독특한 문자를 해독함으로써 이들의 문명이 알려졌다. 선문자는 오래된 순서로 선문자 A, B로 구분하는데, 주로 왕실에 관한 기록, 세금 징수와 전쟁 포로들을 노예로 한 수, 곡물 가축 등의 수를 기록하고 있다.

◑ 미케네 문명(Mycenean Culture) : 에게 문명 후기에 번영했던 문명으로 독일인 슐레이만이 발견했다. B.C. 2000년경 남하해 온 그리스인은 B.C. 1600년경부터 급속히 크레타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활발한 해상 활동을 전개하여 문화가 번영했다. 이 때부터를 미케네 시대라 이른다. 미케네 인은 점점 부강하게 되면서 크레타 인을 압박하여 B.C. 1500년경에는 동부 지중해의 해상권·교역권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는 여러 왕국이 할거하여, 펠로폰네소스의 미케네, 필로스, 중부 그리스의 오르코메노스 등이 유력했다.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을 모방한 것이었으나, 크레타가 밝고 다채로우며 개방적인 데에 반하여, 미케네는 상무적 (尙武的)이며 장중한 그리스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왕의 주거는 장중하고 견고한 성채이며, 메가론 건축이 핵심으로 되어 있다. 크레타 식 화려한 궁전과는 판이하나, 건축내부의 벽화는 크레타 풍을 모방하고 있으며, 전사·수렵도 등이 그려진 벽화는 그 기교 면에서 크레타보다 뒤떨어진다. B.C. 1200년경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남하한 도리아 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역사적으로 미케네 문명은 그리스 문화의 선구인 동시에, 오리엔트 문명을 그리스에 전하는 교량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트로이 문명(Troian Culture) : 트로이는 마르마라 해에 가까운 소아시아의 힛사를리크 언덕으로서, 거기에는 9층의 주거지(시:市)가 있었다. 제1시는 이미 성벽을 만들고 금속 문화를 가졌으며, 제2시(B.C. 3천년기(紀)의 후반경)는 장경(長經) 120m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가졌으며, 성내에는 4개의 메가론이 서 있어 최초의 융성기를 보여 준다. 이 곳은 흑해와 에게 해,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이 접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역과 부근 평야의 농산물, 배후지의 광산 등으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었다. 술레이만이 발견한 「트로이의 보물」은 제2시에 속하며, 황금제의 관과 장신구와 용기·은제품 등으로 국왕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였다. 도기는 조잡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나타낸 안호나 동물호가 특색이다. 이 문화는 에게 해의 유럽 쪽, 레스보스 섬, 소아시아의 내지로 퍼져 갔으나 에게 세계의 동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크레타와의 접촉은 찾아볼 수 없다. 제2시의 붕괴 후, 제3시부터 제5시가 같은 문화를 갖고 부흥되었으며 제6시는 두 번째의 전성기로서 성벽은 최대의 영역을 둘렀는데, 그 유구(遺構)로서 남아 있는 것은 적다. 그러나 그 유구나 유물은 완전히 미케네 문명으로서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이에 이어지는 제7시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트로이 문명은 제2시가 대표하게 되는데, 그 문화와 타문화와의 관계·기원은 분명치 않으며, 그 연대에도 여러 설이 있다. 트로이는 19세기에 독일인 슐레이만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소년 시절 슐레이만은 아버지로부 터 선물 받은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 라는 책에서 붕괴하는 트로이 성을 묘사한 그림 한 장을 보고 전 설 속에 파묻힌 트로이를 자신이 찾아 낼 것을 결심하고 생애의 절반을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데 보냈다. 마침내 그가 49세에 그 꿈은 실현되어 트로이 문명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게 된다.

◑ 일리아스(Ilias) : 호메로스의 서사시로「일리온(트로이의 별명)의 노래」라는 뜻. 이 장시는 전 24권에 15,693행인데, 아 킬레우스의 분노ㆍ슬픔ㆍ싸움, 헥토르의 처자와의 결별과 용맹, 그 부친의 비탄의 장면이 특히 유명하 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의 최후 10년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텟살리아의 왕인 페레아의 궁중에서 결혼식을 축하하는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여기에는 불화의 여신 에리다를 제외한 모든 신들이 초청되어 참가하였다. 화가 난 에리다는 향연을 망칠 결심을 하고, 신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쓴 종이와 함께 사과를 던졌다. 이에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 그리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 극심한 말다툼이 일어났다. 여신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제우스에게 구했으나 제우스는 트로이 왕 프리알의 아들 파루스에게 이 곤란한 문제의 해결을 떠넘겼다. 헤라는 자기를 뽑아주면 파루스를 전 세계를 다스리는 왕자가 되게 해 주겠다고 했고, 아테네는 세계에서 제일 가는 용맹과 지식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약속했으며 아프로디테는 세계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젊은 파루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이 때부터 헤라와 아테네는 파루스를 증오하였고, 나중에는 트로이 주민 전체에게 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파루스가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이의 왕비 헬레나를 몰래 훔쳐 데려가는 일을 거들어 주었다. 메네라이는 헬레나를 되찾아 파루스에게 당한 모욕을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스의 모든 왕들도 메네라이를 돕기로 결정하고 트로이 정벌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메네라이의 동생으로 미케네의 아가멤논 왕이 전군을 지휘하였다. 이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양 진영의 영웅들이 모두 참전했다. 그 중 유명한 사람은 그리스의 편에서는 페레아의 아들 아킬레스였고 트로이 편에서는 프리암의 아들 헥토르였다. 아킬레스의 절친한 친구 파도로크르가 트로이 성문 앞에서의 헥토르와의 결전에서 패하여 아킬레스는 친구에게 빌려준 자신의 갑옷과 투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여신 페티다가 불과 대장간의 신 헤페스트를 찾아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입어 보지 못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킬레스는 새로운 갑옷과 투구를 걸치자 곧바로 전쟁터로 3ぜ뭅? 그리스 군과 분연히 맞서 싸우던 많은 트로이 인이 살해되고 간신히 살아 남은 자는 도주해 버렸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헥토르만은 도망치지 않고 아킬레스가 자기에게 가까이 오기를 당당히 기다리고 있었다. 헥토르의 부모는 성벽에 서서 아킬레스와 싸우지 말고 성안으로 들어오라고 외쳐댔지만 헥토르는 말을 듣지 않았다. 헥토르는 아킬레스와 용감히 싸웠으나 아킬레스의 갑옷과 투구를 그의 창으로 뚫을 수 없었다. 장시간의 싸움 끝에 아킬레스는 헥토 르를 살해했다. 숨을 거두기 직전 헥토르는 아킬레스에게 자기 시체를 효수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킬레스는 냉혹했다. 그는 헥토르의 머리를 자르고 시체를 전차에 묶어 자기 진지로 돌아왔다. 아킬레스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헥토르의 친구 파루스는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에 화살을 명중시켜 아킬레스를 쓰러뜨렸다. 아킬레스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아킬레스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사자(死者)나라의 물을 그에게 끼얹었다. 그러나 이때 어머니가 아킬레스의 말 뒤꿈치를 잡고 물을 끼얹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마법의 물이 닿지 않아 쉽게 상처가 날 수 있었다(아킬레스 건). 헥토르가 전사한 후 트로이 군은 벌판에서 그리스 군과 일대 결전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성밖으로 나왔다. 아킬레스가 없는 그리스 군은 직접 맞서 싸우기보다는 책략을 강구하였다. 그들은 오딧세이의 계략에 따라 나무로 된 큰 말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리스에서 제일 용맹한 군인들을 숨겨 놓았다. 나머지 군인들은 트로이 군을 속이기 위해 타고 왔던 배가 있는 근처의 섬으로 퇴각했다. 그리스 군의 후퇴를 목격한 트로이 군은 포위망을 풀고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밤이 되어 트로이 군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목마 안에 타고 있던 병사들은 성문을 열고 그리스 군을 불러 들였다. 이리하여 그리스 군은 시내 곳곳에서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트로이 군을 살육했다. 마침내 전쟁 10년만에 대 트로이는 함락되고 말았다.

◑ 오딧세이 : 오딧세이는 12,110행으로 이루어진 장편 시로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이타카의 왕 오딧세이를 주인 공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 용사들은 귀로에 올랐지만 이타카(이오니아 연안의 섬)의 왕 오딧세이는 바다 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 무려 10년 이상 바다를 떠다녀야 했다. 오딧세이의 모험 가운데 재미있었던 일은 싸이렌과 만난 일이었다. 싸이렌은 인어였는데, 그의 노래는 듣는 이로 하여금 황홀감에 젖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싸이렌이 살고 있는 섬 주변을 통과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한 번 이 섬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 오딧세이는 이 섬 가까이에 이르자 싸이렌의 노래 소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모든 사람의 귀를 납으로 틀어막고 자기의 몸도 돛대에 묶었다. 오딧세이는 싸이렌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자 섬 쪽으로 헤엄쳐 나가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옆에 있던 일행이 그를 더욱 단단하게 묶어 세웠기 때문에 오딧세이는 노래를 들어가면서 그 섬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딧세이의 배는 다시 폭퐁우를 만나 난파되었고 선원들은 바다에 표류하였다. 오랜 고생 끝에 오딧세이는 뗏목을 엮어서 다시 바다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눈이 하나만 있는 거인 포르펨(포르펨은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오딧세이의 뒤를 밟은 포세이돈이 그의 뗏목을 부러뜨렸다. 오딧세이는 겨우 어떤 바다의 여신에 구조되어 알 수 없는 섬에 머무르게 되어 간신히 살아났다. 이 섬을 다스리는 아르키노이 왕은 오딧세이를 기쁘게 맞이해 주고 토산품을 선물로 주기도 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배도 만들어 주었다. 오딧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나라들을 편력하는 동안 고국에 있는 아내 페네로바에게는 권세 많은 구혼자가 수없이 찾아왔다. 오딧세이는 다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아내 페네로바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구혼자들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오딧세이가 거지로 변장을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마침 구혼자들이 술을 마시고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거지로 변장한 오딧세이를 짓궂게 우롱 했다. 페네로바는 오딧세이의 활을 당겨 화살로 12개의 도끼 구멍을 통과하면 자기의 남편으로 맞이하겠다고 구혼자들에게 제의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씩 활을 당기려 했으나 어느 누구도 그 활을 당 길 수 없었다. 그때 오딧세이가 자기 힘을 시험해 보겠다고 제의했다. 구혼자들은 이에 반대했지만 오딧 세이로부터 거지의 신분을 알게 된 데레마히는 그에게 활을 넘겨주었다. 오딧세이는 아주 쉽게 12개의 구멍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나서 그는 구혼자들을 모조리 쏘아 죽였다. 페네로바는 이 누더기를 걸친 늙고 추한 거지가 오딧세이라고 전혀 믿지 않았으나 그가 자기의 남편이 되었음을 인정했다. 오딧세이가 돌아오고 구혼자들이 사살되었다는 소문이 곧 이타카 전역에 퍼졌다. 살해된 구혼자들의 연고자들이 오딧세이와 그의 동료들에게 싸움을 걸어 왔지만 아테네의 도움을 받은 오딧세이가 승리했다. 아테네신은 오딧세이와 이타카 사람들은 화해시켜 이타카 사람들은 다시 오딧세이를 왕으로 추대했다.

◑ 신탁 : 그리스인은 자기 집에 있는 제단이나 신전에서 신에게 예배드렸다. 성전의 대부분은 그것이 있는 지방 내에서만 숭배되었다. 그러나 성전이 있는 곳은 그리스 전역에서 존경받았으며, 때로 그리스 국경 밖에서도 중시되었다. 델피 신전은 유명했다. 델피 영지는 포키스의 팔리나스 산록(중부 그리스의 델피 부근)에 있었는데, 프치아라고 하는 무녀가 신탁을 내렸다. 무녀는 동굴 틈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굴 틈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에 무녀는 정신이 혼몽하여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흥얼거렸다. 그러면 신관이 곁에서 이 말을 듣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는 신의 뜻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신의로 사람의 방향을 자기 이익에 따라 조정하였는데, 심지어 국가의 행동도 좌우하였다. 실제로 신탁은 미래의 일을 예언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탁은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말이었다. 어느 날 델피의 왕 크레스가 페르시아 인과의 결전을 앞두고 하리스 강의 수로를 변경시켜도 좋은지 즉,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해도 좋은지의 여부를 델피 신탁에 의뢰했다. 강의 수로를 변경하면 크레스가 페르시아를 격파 할 수 있다는 신탁이 있었다. 크레스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여 강의 수로를 변경시켰다. 그러나 그는 참패했다. 크레스는 신탁이 틀린 책임을 물었으나, 델피 신관은 신탁 때문이 아니라 크레스 자신의 죄 때문에 참패했다고 대답했다. 신탁이 내린 충고나 예언에 대한 보답으로 신관에게 재물이 바쳐졌다. 이리하여 델피 신관은 커다란 부를 지닌 강자로 등장하였다. 그는 금을 대여해 주기도 하고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기도 했으며, 전쟁 때에는 이런저런 형태로 나라를 원조했다.

◑ 올림피아 : 고대 그리스의 풍습에는 운동 경기가 중시되었다. 그리스에는 커다란 운동경기가 네 개 있었다. 그것은 올림피아, 델피, 코린트, 메네아에서 행해졌고 각기 4년마다 개최되었으므로 결국 매년 개최되는 셈이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 제사 때에 행해진 것이었다. 올림피아 경기는 제우스 신전 근처의 평원에서 여름의 마지막 만월 무렵에 개최되었으며 이 기간을 올림피아드라고 불렀다. 올림픽 경기는 보통 기원전 776년에 제1회가 열렸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로 시작된 것은 훨씬 오래 전부터일 것이다. 올림피아 경기를 보기 위해 그리스 세계의 각지에서 많은 국민이 모여들었다. 모든 그리스 국가는 이 경기에 임원과 선수를 파견하였다. 올림피아 경기가 진행될 때는 각 국가간의 불화도 정지되고 전쟁도 종식되었다. 이를 범하는 국가는 많은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러한 <신성 한 체전>은 그리스인의 문화적 통일을 촉진하였다. 경기 종목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달리기였고 그후 5 종 경기(멀리 뛰기, 달리기, 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레슬링)가 더해졌다. 경마나 전차 경기가 추가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중엽이 되고서였다. 후에는 연설, 시의 낭송, 그림 등의 예술 콩쿠르까지 추가되었다.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남자뿐이었다. 그들은 전라로 경기를 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시작된 풍습으로 원래는 옷을 입고 경기를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원전 720년 오르싯포스라는 이가 경기 중에 허리에 두른 천을 떨어뜨리고 주워 두를 여유가 없어 그냥 계속 달려 우승하였는데 그 뒤 천을 두르지 않고 달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알려져 전라로 출전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경기 관람도 여신관을 제외하고는 여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의 승리자에게는 제우스 신전 가까이에 자라고 있는 야생의 올리브 가지로 만든 관이 주어 졌다. 승리자에게 주어진 상품은 이것뿐이었으므로 명예가 가장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올림픽 경기의 아마추어 정신의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승리자는 자신들의 폴리스로 돌아가면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물질적인 보수도 상당하였 다. 가령 아테네 시에서는 국가에 특히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국비로 식사를 제공하는 [브류타네이온]이 있었는데 승리자는 일생동안 이 식사를 허용 받았다. 더구나 상금도 500드라크마나 받았다. 또한 우승자에게는 극장의 일등석이 배당되었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올림피아에 입상이 세워졌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올림픽 경기는 계속해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이교의 신인 제우스의 제사가 금지되었고 경기 대회도 기원 393년에 금지되었다.

◑ 폴리스(Polis) : 이 말은 원래 외적이 쳐들어 왔을 때 주민들이 의거하여 싸우던 산채를 뜻하였는데 이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고 도시 국가를 형성하게 되어 점차 국가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원래 의미 의 폴리스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즉 '높은 폴리스'라고 불리웠다. 아테네의 명칭은 그리스의 신 아테나(전쟁과 평화의 여신)에서 따온 것이다.

◑ 아크로폴리스(Akropolis) :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중심이 되었던 언덕. 원래 폴리스라고만 불리웠는데 폴리스가 도시 국가를 뜻하는 말이 되자 akros(높은)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도시 성립시나 식민시의 건설에 있어서 방어의 원리가 강하게 작용하였음을 이 지형에서 볼 수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코린토스의 아크로코린투스 등 대부분의 폴리스가 그 아크로폴리스를 지니고 있으나 스파르타와 같이 뚜렷이 언덕진 곳이 없는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서 주위에서 60∼70m의 높이, 동서 약 300미터, 남북이 약 150미터의 흰 5각형의 석회암 언덕으로서 견고한 성벽을 두르고 서쪽 끝의 프로필리이어(樓門)로 들 어가게 되어 있다 언덕 위에는 중앙 남쪽부터의 파르테논을 위시하여 에레크테이온과 니케의 신전이 있다. 언덕의 남쪽 기슭에는 페리클레스의 오데이온, 디오니소스 극장,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에우메네스 주랑(柱廊), 헤로데스 앗티쿠스의 오데이온이 있다. 이 외에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시칠리아의 아크라가스의 것도 유명하다.

◑ 아고라(Agora) : 그리스 도시 국가의 중심 광장. 시장-market(영), Markt(독)으로 번역되나, 이는 아고라의 일면을 표 현할 뿐, 아고라의 적당한 용어는 없고 어원적으로는 사람들의 집회장이다. 아크로폴리스가 종교·정치의 중심임에 대하여 아고라는 시민의 경제 생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의 중심으로서 로마의 포룸에 해 당하며 동양의 도시에는 없었다. 이 광장의 주위에는 관청과 신전 및 주랑이 세워져 있으며, 이 주랑에 는 가게들이 들어 있었다. 시민들이 항상 이 곳에 모여 정치나 학문을 논하였음이 플라톤의‘대화편’ 에서도 나타난다. 많은 도시에서 발굴되고 있는데, 대표적 아고라는 근년에 와서 전체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 아테네의 그것이다. 광장 부분은 대체로 200∼250m정도이나, 동쪽·남쪽·서쪽의 일부에는 중앙 ·동·동북·남·앗탈로스 등의 주랑(스토아)이 있으며, 이스토스 신전이 서있고, 광장 안에도 아레스의 신전 및 오데이온이 있으며, 기타 여러 종류의 건물과 군데군데에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 세습 사유지(Kleros) : 그리스의 자유 시민들이 소유한 사유지를 의미한다. 오리엔트 사회에서는 대규모의 관개 농업을 경영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성립하였으나, 그리스는 천수 농업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족단위 노동의 집약을 통해서만 생산성을 올릴 수 있었다. 농민들, 즉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경제적 자립이 중요하였으며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가능한 한 클레로스를 증가시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자 하였다. 그리스 사회를 시 민 공동체라 하는 바, 그리스 시민들의 비교적 평등한 상호 관계의 기초는 그 구성원들의 비교적 균분된 사유지 때문이라 할 수 있다.

◑ 아테네 민주 정치의 성립 배경 : 아테네 민주 정치 발전의 관건은 평민의 경제력 신장과 중장 보병으로서의 역할 증대에 있었다. B.C. 6세기 초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무구의 가격이 저렴해짐에 따라 중소 농민이나 해외 무역을 통해 성공한 상공업자들이 자비로 중무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중장 보병 부대의 전투력은 귀족 기병 부대 를 훨씬 능가했다. 이에 과거 귀족의 기병 부대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의 부대가 형성되고 이로 인한 전술상의 변화는 일정한 대형 및 규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 중장 보병의 사각형 밀집 대형(Phalanx)이라는 것이다. 이 밀집 대형 속의 병사들에게는 개인적 용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평민들 사이에는 전열(즉 공동체)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 즉 자기 권익을 지키는 것이 곧 애국심이라는 새로운 의식과 더불어 기존 신분 질서에 대한 회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 아르콘(Archon) : 제 1인자, 지배자, 고관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며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에서 볼 수 있는 국가 최고관의 호칭. 원래 귀족제 때의 관직으로서 폴리스의 성립과 더불어 생겨나, 민주제 시대로 계승된 관직인데, 그 성립과 변천은 아테네에서 가장 명료하게 볼 수 있다. 아테네에서는 처음 왕가 출신이 3명이 종신제로 임명되었는데, B.C. 750년에는 임기 10년, 다시B.C. 683년에는 임기 1년으로 되었으며 다른 귀족도 취임하였다. B.C. 4, 5세기경에는 매년 9명의 아르콘이 취임하였는데, 최고관인 아르콘 에포니모스, 제사장으로서의 왕의 뒤를 이은 아르콘 바실레우스, 군인·외인 관리의 플레마르코스 및 이 밖의 6명의 사법 담당자 테스모테타이가 있었다. 솔론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9명의 아르콘은 명문의 출 신에서만 선출되었으며, 자격은 솔론에 의한 계산 등급 규정이 4등급 중, 제 1등급에 들어 있어야 했다. 페르시아 전쟁후에는 전 시민에게 개방되었으나, 민주 정치의 진전으로 세력을 잃어 가고, 487년 추첨에 의해 선출하게 됨으로써 무력화되어 스트라테고스가 사실상의 최고관이 되었다.

◑ 드라콘(Drakon ;B.C. 7세기 후반) : 처음 아테네는 성문법이 없었고 관습에 의해 재판이 행해졌었다. 에우바도리도스(귀족노예주)가 재판권을 장악하여 언제나 부자의 이익이 되도록 판결하였다. 민중의 압력이 거세지자 에우바도리도스는 일 정한 정도 양보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기원전 621년, 에우바도리도스는 아르콘의 한사람인 드라콘에게 성문법의 제정을 일임했다. 드라콘이 만든 법률은 가혹한 것이었다. 드라콘은 B.C. 621년에 소송 절차나 형벌의 규정을 포함한 법전을 제정하였다. 이 법전은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성문화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법 적용에 대한 횡포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형벌은 가혹하여 후세에 이 법률은「피로 쓴 것」이라 불렸으며 살인에 관한 것 이외에는 솔론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살인에 관한 법률은 B.C. 409∼408년에 재공포되었으며, 오늘날 그 비문이 일부가 출토되어 판독되고 있다. 고의에 의한 살인, 과실로 인한 살인, 정당 방위를 위한 살인을 구별하고, 살인 교사자를 살인범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등 주관적인 면이 고려되어 있다. 관습법이 성문법으로 바뀌었어도 평민의 생활에 이로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민중 봉기가 그치지 않았다. 정치 제도를 개혁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 솔론의 개혁 : 기원전 594년에 아테네 제일의 아르콘으로 선출된 솔론이 민중과 귀족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개혁을 실시할 당시, 소 토지 소유자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 채무금을 표시하는 돌의 수가 점점 더 증가하였고, 많은 아테네 시민이 고향을 등지던가 노예가 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솔론은 혁명적인 성격을 띤 두세 개의 시책을 단행했다. 최초로 취해진 시책이 < 부채 면제>였다. 솔론은 토지에 있는 채무금 저당표석(抵當慓石)을 제거하도록 명령하고 부채의 반환을 폐지하였으며 채무 노예를 금지했다. 또 채무금 미 반환으로 대지주의 손으로 넘어간 토지는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으며,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간 시민들은 국고에서 대신 지불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러한 시책은 귀족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이었으나 데모스의 반란이 두려워 그들도 받아 들여야만 했다. 솔론은 소득에 따라 시민을 네 등급으로 나누었다. 제 1등급에 속한 자는 소맥 500메진(1메 진은 52.5리터) 이상 또는 그에 상당하는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를 거둬들이는 시민이었다. 제 2등급에 속한 자는 300메진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었다. 이 등급의 시민은 말을 기를 만한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기마전사>라고 불렀다. 제 3등급에 속한 자는 200메진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인데, 이들은 소 두 마리를 소유할 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제크기데스>(한 조라는 뜻)라는 불렀다. 마지막 제 4 등급에 속한 자는 전혀 토지를 갖지 못한 시민으로서 페다라고 불렀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도 재산 소유의 정도에 따라 정해졌다. 제 1등급의 시민만이 국가 최고의 직책을 맡았으며, 이들 가운데 아르콘이 선출되고 아레오파구스의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제 2등급의 시민은 기병이었으며 제 3등급의 시민은 갑옷과 투구, 그리고 칼과 창을 개인적으로 마련한 중갑보병이었다. 이 세 등급 가운데서 솔론이 제정한 400인 회의와 아레오파구스가 국가를 쿠데타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 4등급의 페다는 국무를 담당하지 않았으며 다만 민회에 출석하여 배심원 재판에 나갈 권리밖에 없었다. 이것이 솔론이 단행한 아테네 국가의 개혁 내용이었다. 솔론의 개혁은 에우바도리도스의 권력을 철저하게 제한하는데 실패했고, 빈민을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서 불만을 샀다. 에우바도리도스는 솔론이상 공업자나 c怒痴寧?중시한 것이 불만이었고, 데모스는 솔론이 토지 소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하지 않은 데 불만이었다. 사실 부채가 폐지되었다 해도 빈민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빈민은 이전처럼 무일푼이었고 새로운 채무금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리하여 솔론의 개혁후에도 민심의 동요가 계속되고 오히려 고조되어 갔다.

◑ 참주(僭主: Tyrannos) : 그리스의 비합법적인 지배자. 티란노스(Tyrannos)는 왕을 뜻하는 외래어로 원래는 폭군이란 뜻은 없었으나, 민주 정치가 확립된 후, 특히 B.C. 4세기의 플라톤 등에 의하여 나쁜 뜻으로 해석되게 되었다. B.C. 7, 6세기의 페이돈(아르고스), 클레이스테네스(시키온), 페이시스트라토스(아테네) 등으로 대표되는 자들을 전기 참주, B.C. 4, 3,세기의 디오니시오스 1세(시라쿠사이), 이아손(페라에), 아가토클레스, 히에론 2세(시라쿠사이) 등으로 대표되는 자들을 후기 참주라고 한다. 전자는 귀족 정치에서 민주 정치에로의 전환기에 나타나, 주로 화폐 경제의 진전에 수반되는 사회의 변동에 처하여 귀족에 대한 평민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또 외적의 침입에 당면하여 국민적 방위의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후자는 주로 군사적 지도자로서 주로 폭력으로 독재권을 장악하였으나, 오랜 법률ㆍ국제(國制)는 파괴하지 않고, 이를 자기의 지배권 확보 책으로 사용한 것이 특색이다. 참주 정치는 세습되었으나, 대부분 2대째에 타도되었다. 참주 중에는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민중에게 선정을 베푼 사람이 많았다. 그는 상공 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농민을 돕는 등 아테네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의 폭 정과 귀족의 반항으로 참주 정권은 무너지고 민주 정치가 나타남으로써 참주 정치는 귀족정과 민주정의 과도기적 정치 형태가 되어 버렸다.

◑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600?-527 B.C.) : 아테네의 참주로 아테네에서는 솔론의 퇴임 후 당쟁이 심하였는데, 과두 정치를 바라는 평민당과 중 용의 정체를 바라는 해안당(海岸黨)에 대해, 민주 정치를 바라는 산지당(産地黨)의 수령이 되었다. B.C. 565년경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B.C. 561/560년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한 후 참주가 되었 다. 다른 두 당파가 결속하여 그를 추방하였으나, 해안당의 수령 메가클레스의 딸과 결혼한다는 조건으 로 귀국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파혼했으므로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트라키아의 팡가이온 금광에서 자금 을 저축하여 용병을 사들였으며, 외국인과 동맹을 맺어 10년 후에는 무력으로 정권을 회복하였다. 또한 그는 민중을 기만하여 무기를 회수함으로써 참주 정치의 기틀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망명 귀족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분배하여 소 농민층을 확립시킴으로써, 솔론 시대 이래의 빈부의 대립 문제를 일단 해결 했다. 농민에게는 생산물에 십일세를 과하여 권농책을 시행했다. 정치 제도는 솔론의 것을 존속시켰으 나, 자기 일족으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게 하였다. 그의 시대에는 도자기 등 수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수공업자의 수가 많았던 것 같은데도, 권농책에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은 그의 세력 기반이 농민에게 있 었음을 보여준다. 그에 의해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폴리스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협피아스가 뒤를 이었다.

◐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 ;B.C.6세기 후반) : 아테네의 정치가. 일찍부터 참주정 타도에 힘썼으나, 여러 번 실패한 후 스파르타의 원조를 얻어 B.C. 510년 이의 타도에 성공하였다. 그 후 과두파의 이사고라스와 정권을 다투어 일시 망명했다가 민중이 이사고라스에 반대하여 일어나게 되자 귀국하여 B.C. 508/7년 이후 민주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종래 씨족제적 4부족 제도를 폐지하고, 10부족으로 편성하였다. 이 새로운 부족의 구성 단위를 이루는 것은 데모스(구(區))이며, 모든 아테네 사람은 당시의 현주소의 구에 소속되고 주소가 바뀔 경우에도 대대로 소속구를 세습한다. 그리고 이 구가 몇개 모여 트릿티스를 구성하는데, 전 앗티카의 해안·내륙지·중심시는 각각 10개의 트릿티스를 포함한다. 이 세 지역에서 트릿티스를 하나씩 뽑아 추첨으로 3개의 트릿티스를 뭉쳐서 신부족을 편성했다. 이러한 편성 방법을 사용한 것은 종래의 귀족의 씨족제적 세력이나 B.C 6세기에 생긴 평지당(平地黨)·해안당(海岸黨)·산지당(山地黨)의 지역적 성격을 띤 당파의 기반 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다. 신부족 편성에 따라 솔론이 설치한 400인 평의회를 폐지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5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는 500인 회를 신설하는 동시에 각 부족 가운데서 1명의 비율로 10명의 장군을 선출하기로 하였다. 참주의 재현을 방지하기 위해 도편 추방의 제도를 만든 것도 그였다고 한다. 그의 개혁은 아테네의 민주정의 기초를 확립하여 놓았는데, 그의 생애나 사상에 관하여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 스파르타의 정치 제도 : 스파르타의 최고 권력자는 두 명의 왕이었다. 왕은 전쟁 때만 전쟁권을 행사했을 뿐이고 평상시에는 게르시아라고 하는 장로회의에서 국사를 논의했다. 게르시아는 3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2명의 왕 외에 선출된 28명의 종신 장로가 회의에 출석했다. 장로는 60세 이상이어야만 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제도는 5명의 에페로스(특별히 선출된 공무원)로 구성된 평의회였다. 에페로스는 1년마다 새로 선출되었다. 후에 에페로스의 권한이 강화되자 왕의 책임을 물을 정도까지 되었다. 이외에 성인이 된 스파르타 시민 모두가 참석할 수 있는 민회가 있었다. 민회는 매달 한 번식 개최되었는데, 왕은 이 민회에 출석하여 게르시아의 결정 사항을 설명하였다. 그때 시민들은 이 결정 사항을 심의하는 대신 단순히 찬성 또는 반대의 소리를 지를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정치를 주도한 것은 민회가 아니라 왕과 에페로스 그리고 게르시아였다.

◑ 스파르타인의 생활과 교육 : 스파르타인 사이에는 오랫동안 공유재산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토지는 평등하게 분배되었으며 토지 매입에 의한 부의 축적은 금지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리쿠르구스는 스파르타 인을 평등하게 하고 호사한 생활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금, 은 화폐 대신 철 화폐를 유통시켰다고 한다. 이 철 화폐는 엄청나게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화폐를 많이 모아 두는 일은 불가능했다. 스파르타 인은 평시에도 공동 식사를 하였으며 전사의 대장은 치시티아라고 불렸다. 스파르타 인은 아들의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스파르타 인은 아들을 낳으면 시의 장로로 하여금 운명을 결정케 했다. 장로는 허약한 아이는 아이겟스 산 계곡에 내던지고 건강한 아이만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허약한 아이는 용맹한 전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건강한 아이만을 교육시켰던 것이다. 소년은 일곱 살부터 열 여덟 살 때까지 국민학교(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김나지움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과목은 체조였으며 창던지기나 원반던지기 등 군사 교육이 주를 이루었다. 학생들의 신체를 단련시키고 고된 전사 생활에 적응케 하기 위해 일부러 거친 옷과 음식을 먹이고 때로는 구타도 하였다. 스파르타 교육은 아주 간단한 질의 응답 식의 교육이었다. 이러한 간결한 질의 응답 식을 <라코니아 식>이라 불렀다. 스타르타의 어머니들은 아들을 전쟁터에 내 보낼 때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기보다는『방패와 함께, 그렇지 않으면 그 위에서』라는, 즉 승리하여 돌아오는가 그렇지 않으면 용사답게 전사하라는 뜻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러한 엄격한 교육의 결과로 스파르타 인은 용맹하고 강인한 전사로 성장하였다.

◑ 리쿠르고스(Lykurgos) : 스파르타의 전설적 입법자. 그의 연대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일정하지 않으나, B.C. 1000년경에서 B.C. 600년경까지의 차이가 있다. 토지의 균등 분배, 원로회의 설치, 민회의 정기적 개최, 귀금속 사용의 금지, 공동 식사 등의 군국적 생활 양식을 정하였다고 전하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傳承)은 B.C. 5세 기 이후의 것이고, 또 그의 연대나 가계에 대한 전승도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실재성은 의문시 되 고 있다. 스파르타의 여러 제도도 오랜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며, 그가 만일 실재했었다고 해도 그 일부 분을 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펠로폰네소스 각지에서 숭배되었던 같은 이름의 신이 입법 자로 생각되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페리오이코스(Perioikos ;Peri-oikoi) : 고대 그리스의 반 자유민. 변두리에 사는 사람이란 뜻. 도리아 계 국가 특히 스파르타에 많았다. 참정 권은 없으나 지방 자치권과 군사ㆍ납세의 의무를 가졌다.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였으며, 토지 보유자도 있었던 것 같다. 스파르타에서는 시민에 가까운 권한을 가졌지만, 텟살리아에서의 그 지위는 낮은 종속민에 불과하였다.

◑ 중장 보병(Hoplitai) : 그리스 폴리스의 시민으로 조직된 군인. 그리스의 폴리스는 원래 전사 공동체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중장병의 의미는 폴리스 사회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아테네의 귀족정 시대에는 귀족으로 이루어진 중갑 기마병이 중심이었으나,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자비로 부담했던 무구(武具)가 가벼워지고 가격이 떨어지면서 중산 평민층이 중장보병으로 참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의 참정권도 확대되었다.

◑ 이오니아(Ionia) : 에게 해에 면한 소아시아의 서안 지방. 그리스인들이 초기부터 식민하여 동방 문명의 영향을 받아, 본 토보다 일찍 B.C. 800년경부터 천문ㆍ철학ㆍ문학ㆍ미술 등이 발달하였다. B.C. 7세기에 리디아인의 세력 밑에 들어갔고, B.C. 6세기 크로이소스 왕 때에 페르시아에게 지배되었는데, B.C. 500년경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이오니아의 반란」은 실패하였으나,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477년 그 지배에서 해방된 다음에는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B.C.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토벌로 자유를 회복, 그 후 마케도니아, 페르가몬, 로마 등에 복속되었고, 중세기에는 비잔틴 제국령, 현재는 터키령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생명선이었으며, 그리스 문화 형성에 공헌하였다.

◑ 페르시아 전쟁 :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 B.C. 6세기말 페르시아는 거의 전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서쪽으로 진출했 다. 이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시는 B.C. 6세기 중엽에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무역 활동이 억제되고 참주제를 강요당하여 불만이 많았으므로,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해 반란 을 일으켰다(499 B.C.). 반란은 진압되었으나(494 B.C.),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이 반란을 원조했다하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노여움을 사, 그리스 원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제 1회: (B.C. 492): 다리우스의 사위 마르도니오스의 지휘하에 트라키아 해안을 제압하였다. 해군은 아토스 곶(串)에서 폭풍으로 큰 손해를 입었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귀국하였다.

▶제 2회: (B.C. 490):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토벌한다는 명목 하에 다리우스는 다티스, 아르타페르네스가 지휘하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낙소스 섬과 델로스 섬을 정복하고, 에우보이아섬에 상륙하여 에레트리아를 파괴했으며, 앗티카 북부의 마라톤 벌에 상륙하였으나,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 군에게 격퇴되었다. 할 수 없이 해상으로부터 다시 아테네를 공격하려 했으나 밀티아데스 등이 이미 회군하여 아테네를 수비하고 있었으므로 단념하고 귀국하였다.

▶제 3회: (B.C. 480): 아테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해군 확장안을 채택하여 페르시아의 재 침공에 대 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페르시아는 크세르크세스 왕이 친히 지휘하여,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텟살리아를 거쳐 그리스 본토로 남하, 테르모필라이의 험준한 길목을 지키고 있던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지휘하는 그리스 군을 격파하고 아테네에 침입하여 시가지를 불태웠다. 아테네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지휘아래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모든 남자를 해군에 편입, 군함에 태우고 페르시아 해군과 살라미스 만에서 교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육상에서 이를 보고 급히 귀국 하였고, 육군은 텟살리아로 후퇴하였다.

▶제 4회: (B.C. 479): 마르도니오스 지휘하에 페르시아 군은 다시 남하, 앗티카를 침범하고 보이오티아에 들어갔으나, 플라타이아이 싸움에서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한편 페르시아 해군은 미칼레 싸움에서 그리스 군에 패하여 이오니아 도시들은 독립을 회복하였다. 페르시아 전쟁과 동시에, 서방 시칠리아에서도 시라쿠사이의 참주 겔론의 지휘하에 카르타고 군을 격퇴함으로써 그리스는 동서에서 이민족의 위협을 물리쳐 자유를 확립하였다. 아테네는 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해상 진출의 기틀을 확고히 했으며, 델로스 동맹을 결성하여 그 맹주가 되었고, 문화상에 있어서는 찬란한 고전 시대를 맞이하였다. 또한 국가 제도상으로는 민주 정치를 철저히 실현시켰다.

◑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 : 마라톤 경기가 페르시아와 아테네 사이에 벌어졌던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소아시아 해안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식민지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에 정복되어 그 압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그리스가 이를 원조하게 되어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곳인 마라 톤(Marathon)에 상륙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아테네의 중무장 보병들은 자기들의 두 배가 넘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 곳에서 격파했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병사가 아테네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는 "기뻐하라, 우리의 승리를" 이라는 한 마디를 외친 후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 마라톤 전투에서의 승리는 중무장하고 전투에 나선 아테네 시민의 승리였으며 민주 정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480년 다리우스를 계승한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하기 위해 몸소 대군을 진두 지휘했다.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여 아테네는 델포이에 있는 태양의 신 아폴론 신전에 사람을 보내 신의 계시를 받아 오게 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의 신정적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신의 계시는 절망적이었다. 다시 한번 계시를 간청하자 약간은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나무로 만든 벽 뒤에 숨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나무로 만든 벽'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의견이 분분했다. 이 때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사람이 '나무로 만든 벽'이란 배를 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래 해군의 증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으로 이미 2년 전에 그가 제안했 던 배 200척이 건조되어 있었다. 아테네의 민회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아테네 시민은 모든 부녀자와 노인을 살라미스 섬으로 피신시키고 싸울 수 있는 남자는 200척의 배에 올라 페르시아 군과 싸울 준비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아테네가 가지고 있던 200척의 배는 3단 노선이었으며 길이는 약 40미터, 폭은 6미터였다. 그리고 노를 젓는 데는 100명 이상의 사람이 필요했다. 뱃 머리에는 충각(衝角)이라고 하는 뾰족한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나무 뿌리를 날카롭게 깎아 청동을 입힌것이었다. 전속력으로 적함에 다가가 이것으로 적함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것이 당d?사용된 전술이었다. 따라서 노를 젓는 사람의 기술과 일치된 단결심이 승리의 열쇠였다. 결전은 기원전 480 년 살라미스 해상에서 벌어졌다. 아테네를 버리고 해상에서 페르시아 군에 맞서 싸운다는 작전은 멋지게 성공했다. 400척이 넘는 페르시아 배의 절반 이상이 침몰했고 크세르크세스는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네테는 승리했고 민주 정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죽음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 민주주의적 시민 생활에 대한 애착이 아테네 시민의 투지와 단결을 가져다 준 결과였다

◑ 아테네의 민주 정치의 특징 : 아테네의 민주정은 페르시아 전쟁 후 완성되었다. 전쟁 중 배에서 노를 저었던 무산 시민들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참정 때문에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수당이 지급되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특징은 모 든 성년 남자 시민(Demos)은 누구나 입법, 사법, 행정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일부 특수 관직을 제외한 모든 관직은 추첨에 의해 선임되었다는 점이다.(직접 민주정) 그러나 정치적 권리는 폐쇄적인 시민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특권이었으며 여자, 거류 외국인,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제한적 민주정) 폴리스 시민들이 누린 자유는 노예의 노동력을 밑받침으로 한 노예 경제에 의한 민주정이었다.

◑ 페리클레스 : 아테네의 정치가인 페리클레스(Perikles)는 아테네의 명문 귀족 출신이었는데 기원전 461년 에피알테스(Ephialtes)가 암살된 뒤 민주파의 지도자가 됐다. 귀족 정치의 잔재인 아레오파고스(Areopagos) 회의의 실권을 빼앗아 대부분의 관리를 추첨으로 뽑고, 관리에게 일당을 지급하는 것을 비롯한 민주적인 개 혁을 단행했다. 페리클레스는‘대관’(아르콘) 같은 중요한 관리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군사 지도자 로서 기원전 443년 이후 연속해‘장군(스트라테고스)’에 선임되어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하여‘이름은 민주정이었지만 페리클레스의 1인 지배’로 일컬어지는 강력한 지배를 했다. 그러나 혼자서 지배하는 참주가 아니었으며, 항상 민회와 민중의 의견에 따라 정치를 하였다. 그는 델로스 동맹 기금에 의해 넉넉해진 재정으로 공무에 종사하는 시민(이때 다수의 무산 시민 계급이 시민권을 차지하게 되었음)들에게 보수를 줌으로써 대중적인 민주주의가 관철되었다. 그의 시대에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같은 화려한 신전들이 건설되는 등, 아테네는 학술·예술·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에게 배우는 등 그 자신도 개명된 지식인이었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작과 함께 유행한 페스트로 두 아들과 함께 죽었다.

◑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 477∼404 B.C.) :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의 아리스티데스(Aristeides)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모아 결성한 대 페르시 아 해상 동맹. 페르시아의 침공은 479년에 격퇴되었으나, 그 뒤의 침공에 대비하여 결성된 것이며, 에게 해의 섬들과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폴리스가 가맹하여 그 수효는 약 200이 되었다. 함선을 낼 수 있는 폴리스(Polis)는 함선을, 함선을 갖지 못한 도시는 선박 건조와 함대 유지에 필요한 돈을 내서 연합 함대 를 조직해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델로스(Delos) 섬의 아폴론 신이 매개였기 때문에‘델로 스 동맹’이라고 일컬어졌다. 동맹의 기금도 처음에는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보관했다. 아테네는 이 금을 관리하는‘그리스 회계관’(헬레노타미아이)을 두고 동맹의 맹주가 됐다. 동맹 도시는 함선을 내어 실전에 참가하기보다는 금전을 내거나 공납금을 내는 쪽이 훨씬 많았다. 따라서 함선의 대부분을 내고 있던 아테네의 힘이 갈수록 강해졌다. 그리하여‘아테네 제국’이라 일컬어진 것처럼 동맹시를 강력하게 지배했다. B.C. 454년 동맹의 금고가 델로스에서 아테네로 옮겨져 페리클레스는 이 기금을 민주주의 정치 기금으로 활용하여 공무에 종사하는 시민들에게 보수를 주면서 민의에 따른 정치를 하여 아테네가 번영하였다. 공동의 자금이 아테네의 재정으로 유용되었기 때문에, 가맹 도시의 자금 제공은 아테네에의 공납금과 같은 성격을 띠었다. 원래 가맹 도시는 독립과 자치를 보전한 것이었는데, 아테네는 각 시에 민주 제도를 강제하고, 공납금의 증액 할당, 아테네 기준으로 화폐와 도량형 통일, 무역 통제, 동맹시로부터 경작지 몰수 따위를 동맹시에 강제했으며 분쟁을 아테네의 법정에서 해결토록 했다. 이 때문에 각 도시는 차례로 이반할 것을 기도했으나, 그 때마다 진압되고 독립을 잃었다. 이로 인해 아테네에 대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불만이 차츰 높아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 :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여러 도시의 공수(攻守) 동맹. 제1, 제2 멧세니아 전쟁에 의해 스파르타는 멧세니아인을 헤일로테스로서 예속시켰으나, B.C. 550년경 테게아와 싸워 이겼을 때는 테게아인을 헤일로테스로 하지 않고, 그들과 항구적인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이윽고 다른 아르카디아의 도시들도 스파르타와 동맹하였다.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기원이다. 뒤에 코린트, 시키온, 트로이젠, 에피다우로스, 메가라, 아이기나 등이 참가하여, B.C. 6세기말까지에는 아카이아의 대부분과 아르골리스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의 모든 도시가 이에 가입하였다. 동맹의 제도도 이 때 정해졌는데, 각 도시는 개별적으로 스파르타와 조약을 맺되, 동맹이 전쟁을 할 때는 모두가 군대를 보내어 스파르타 왕의 지휘 를 받아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스파르타 또는 코린토스에서 회의를 열어, 투표에서 다수 도시가 찬성해야만 스파르타는 각 시의 참전을 요구할 수가 있었으며, 또 스파르타는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회의의 개최를 거부할 수 있었다. 또한 세금을 과세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기부금은 받았다. 이러한 조약에 따라 가맹시 코린토스와 메가라가 아테네에게 압박을 받자, 스파르타에 개전을 독촉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이다. 테베의 융성으로 B.C. 366년에 해체되었다.

◑ 자연 철학 : 철학은 그리스에서 현저하게 발달하였다. 이 과학은 우주란 무엇이고 만물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 세계의 기원을 최초로 설명하고자 시도했던 사람들은 소 아시아 도시의 현자들이었다. 세계 최초의 학자인 그들은 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 말에 만족하지 않고 과학적 설명을 추구했다. 최초의 철학자인 밀레투스 출신의 탈레스(기원전 6세 기)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가운데 특히 유명한 사람은 에페소스 출신의 헤라 클리투스(기원스 6세기)와 아프데라 출신의 데모크리투스 (기원전 5세기)였다. 헤라클리투스는 만물의 근원은 불이라 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고 가르쳤다. 데모크리투스는, 세계의 기초는 신도 정령도 아니고 물질이라고 했는데,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 그 물질은 끊임없이 결합과 분리의 운동을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다양한 원자의 여러 형태의 결합에서 천태 만상의 자연 현상을 설명했다. 데모크리투스는 이러한 학설로 모든 일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종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데모크리투스는 세계 최초의 유물론자라 말할 수 있다.

◑ 탈레스(Thales) : 소아시아의 밀레투스(miletus) 출신으로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생존했으며‘7현인’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철학의 시조’라 불렀고, 그리스 자연 철학을 시작한 사람이다. 일식(기원전 585년 5월 28일이라고 함)을 최초로 예언한 사람이다. 탈레스(Thales)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고 했다. 그는 상인으로 짐작된다. 상업 때문에 이집트에 가서 신관들에게 배우고 피라미드의 높이를 그림자를 이용해 재는 법, 바다의 배까지 거리를 재는 방법, 각 변이 3 : 4 : 5의 비율인 삼각형은 직각 삼각형이라는 것들을 생각해 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당시 선진국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던 지식을 실용화했다.

◑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 그리스의 자연 철학자로 어려서 이집트와 동방 세계를 여행했다고 하며, 박학다식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저서는 철학 이외에 윤리학·수학·천문학·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플라톤은 그의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설을 중시하였다. 그의 철학의 기본은 원자론(原子論)으로서, 레우킵포스의 원자론을 계승, 확립하였다. 즉 불변 불멸의 극미(極微)의 아토몬(atomon ;분할할 수 없는 것)과 허공의 존재를 주장하고, 무한한 허공 속에서 무수한 아토몬이 운동하여 집합함으로써 물질이 형 성되고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했으며, 아토몬은 모두 동질이나 형태나 크기가 다르며, 배열을 달리함으로 써 다양한 물체가 생긴다고 설명하였다.

◑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5?B.C.) : 그리스의 철학자로 밀레토스 출신이며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로서 밀레토스 학파를 완성하였다. 아낙 시만드로스가 만물의 시원을「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보고, 그 성격을 명확하게 규명하지 않은데 대하여 공기(아에르: 실은 안개와 같은 것)가 바로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것을 회석하면 불, 농축하면 물, 또는 흙이 된다고 보았다.

◑ 소피스트 : 27년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의 사회 생활은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전의 철학자 들은 주로 우주 기원의 문제와 만물 근원의 문제를 연구하였으나, 계급 갈등이 심화하고 정권 투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국가와 사회에 대한 또는 시민의 본분과 의무에 대한 사회 문제가 철학의 근본 문제로 등장하였다. B.C.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웅변술을 가르치고 돈을 받던 소피스트들이 이러한 문제를 연구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은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프로디코스, 힙피아스 등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설득하고 토론하는 기술을 가르침으로써 시민을 계몽하는 역할도 했다.

◐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5?-415? B.C.) : 트라키아의 아브데라 출신의 소피스트, 소피스트라 자칭한 최초의 사람으로 아테네 등에서 40년간 소 피스트로서 활약하였다. B.C. 444년에 아테네가 식민시 투리오이를 건설하였을 때 그 시의 법전 기초의 임무를 맡았다.「인간은 만물의 척도」란 유명한 말은 각 개인의 주관적 판단 이외에는 보편적·객관적 인 진리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상반하는 주장은 모두 다 참이며, 어느 것이나 변론의 힘으로 이기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신들의 존재는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는 도덕 면에는 미치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도덕을 신봉하여 각자가 속하는 사회의 도덕률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 :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보편적 진리와 도덕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것은 자기 성찰로써 인 식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과 대립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회의론이 아테네의 청년들에 게 주는 해독을 염려한 나머지 스스로 가두에 나가 『누구든지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만은 스스 로 알고 있다』고 말했으며,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격언인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 소크라테스는 독특한 대화법인 문답과정을 통해 대화자 자신이 올바른 해결을 찾도록 유도하고, 스스로 자신의 견해 가 틀렸음을 깨닫게 하는 방식을 주로 택하였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지식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지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판단법도 이러한 점에 착안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반감과 오해를 초래하여,『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고 아테네의 젊은 이들을 오염시켰다.』는 구실로 소송당하여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의 제자와 친지들이 감옥에 있는 소크라테스에게 감옥에서 도망치던가 자기 학설을 포기하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독배를 기꺼이 마시고 죽음을 택했다.(기원전 399년) 소피스트와 달리 그는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확신하고 따라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권위, 곧 국가, 법률, 도덕 등을 존중하여 몸소 국법을 엄수했던 것이다.

◑ 플라톤(Platon ;429? - 347 B.C.) : 소크라테스의 학설을 계승한 사람은 귀족 출신의 플라톤이었다. 스승이 사망한 후 플라톤은 철학 학교(아카데미아)를 세우고 거기에 모인 청중에게 철학을 강의했다. 플라톤은 데모크리투스와는 달리 세계의 기초는 물질이 아니고 신사상, 즉 이데아라고 주장했다. 그는 진실의 존재는 이데아(관념)이고 물질적 존재는 이 이데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이원론적 관념 철학을 세웠다. 세계 최초의 거물급 관념론자인 그는 데모크리투스의 자연 및 사회의 과학적 설명을 일보 후퇴시켰던 것이다. 또한 그는『국가』에서,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고 군인이 국가를 지키며 근로자가 일하는 국가를 이상 국가로 주장했다. 플라톤은 철학자와 군인도 사유재산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며 일하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국가의 행정에 관여하지 못하며 시민권도 가질 수 없는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생각했다. 플라톤은 사회 구성원을 이성을 지닌 자유인과 주인의 명령에 복종만 하는 노예로 구분하여 노예주 철학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플라톤은 이러한 이상 국가를 시실리 섬에서 실현코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의 국가론은 아테네 민주주의를 부정한 일종의 귀족주의 정치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민주정치가 중우정치로 타락 해 가던 당시의 실정을 고려한다면 그의 주장들 속에서 구국 의식의 일단을 찾아볼 수도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로 칼키디케 반도의 스타기로스에서 출생.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의 아민타스 2세의 주치의였다. 17세 때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이 죽을 때까지 약 20년간 체재하였다. 그 후 아테네를 떠나 41세때 당시 13세의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되었다. B.C.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아테네 교외 리케이온에 학원을 열어 제자들을 길렀으며, 숲을 거닐면서 사색하고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소요학파라고 불려진다.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아테네에 반 마케도니아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마케도니아와 연고가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독신죄로 고소되어, 학원을 테오프라스토스에게 위임하고 칼리스시로 도망하여 거기서 위장병으로 죽었다. 그의 연구는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윤리학설ㆍ정치학을 비판하였으나, 그의 체계적 사유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플라톤 철학의 영향이 있다. 그의 연구는 형이상학ㆍ논리학ㆍ윤리학ㆍ정치학ㆍ심리학 ㆍ예술학ㆍ생물학 등에 미쳤고, 그 각 분야에 독자적인 방법과 내용을 편술하여 이 학문의 기초를 쌓았 는데, 그는 이들 여러 분야의 인식을 형이상학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로 구축하고 전 존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고 노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이전 시대에 발달한 모든 과학을 집대성하였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는 과학의 다양한 문제가 취급되어 있다. 그는 비단 철학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학문을 체계화하는데 힘썼다. 그의 방대한 학문 체계는 뒤에 스콜라 철학에 도입되어 중세의 사상계에 군림하고 사라센의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지식이 다방면에 걸쳐 훌륭한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지만, 다른 많은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 제도를 정당한 현상으로, 즉 노예 제도는 자연의 영원한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고대의 이 위대한 사상가조차도 노예주 계급의 고유한 사고 방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서로는 에우데모스, 철학에 대하여, 시학, 국제지, 정치학, 오르가논, 자연학, 천체론, 형이상학, 영혼론 등이 있다.

◑ 호메로스(Homer) : 그리스의 서사시인으로‘일리아스, 오딧세이아’등의 작가. 생존 연대는 기원전 1200년부터 700년쯤까지 여러 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매우 오래된 인물로 생각했지만, 요즘은 시대를 상당히 내려보는 경향이 있어 기원전 800년 이전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출생지도 명확하지 않아, 스미르나·키오스·유 로폰·이타카·필로스·아르고스·아테네 등이 거론된다. 언어상으로는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과 아이올리스 지방의 경계로 생각되며 장님이라 설도 있다. 그의 2대시는 최초의 그리스 문학이며, 또 최대의 걸작이다. 그리스 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이 강의되었고, 또 그리스인의 의인적 신관과 인간관을 형성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시의 무대는 미케네 시대인데, 여기에다 작자가 속했던 시대의 여러 가지 요소가 가미되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하기 전부터 있었던 원(原)호메로스의 편집자인지, 혹은 원작자인 지, 또‘일리아스’‘오딧세이아’가 한 사람의 작품인지 두 사람의 작품인지 등에 관하여서는 아직 일정한 설이 없다. 이것이「호메로스 문제」라고 불리는 것이다.

◑ 헤시오도스(Hesiodos ;B.C. 700년경) : 그리스의 서사 시인. 고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호메로스보다 좀 뒷시기의 인물로 본다. 작품으로는『노동과 나날(Ergakai Hemerai)』『신통기(神統記 : Theogonia)』2편이 남아 있는데, 후자는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노동과 나날』에 따 르면 그의 아버지는 소아시아 키메의 상인이었는데 나중에 그리스 본토의 보이오티아에 농업을 경영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재산은 헤시오도스와 그 동생 페르세스에게 나누어졌는데, 동생은 재산을 곧 잃어 버리고 형에게 더 많이 요구해 재판이 벌어졌다. 형 헤시오도스가 동생에게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훈계한 것이『노동과 나날』이다. 당시의 농민 생활, 귀족이 부정하게 행한 재판, 그 밖에 민간 풍속을 아는 데 중요한 문헌이다. 『신통기』는 올림포스의 신들의 계보를 찾아 세계의 생성을 체계화한 것이다. 유비아 섬의 칼카스 시에서 백일장에 우승했으며, 로크리스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 사포(Sappho ;612?-? B.C.) : 소아시아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 태생의 여류 서정 시인.‘10번째의 뮤즈’로 일컬어졌다. 정변 때문에 소녀 시절에 잠시 시칠리아로 갔다가 나중에 귀국해 소녀들을 모아 일종의 종교적 단체 생활을 하면 서 음악과 예법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사포(Sappho)를 일종의 동성애자로 보기도 하지만, 결혼해 클레이스라고 하는 딸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간결한 시행에 감미로운 정열을 담아, 다양한 운율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여 자연에의 동경을 표현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7권(혹은 9권)의 시가 있었는데 연애를 노래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 시대에 대부분 파기되어 지금은 단편 외에는 2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미소년 파온과의 불행한 사랑 때문에 레우카스의 낭떠러지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녀가 출현한 시대는 이른바 서정시의 시대로, 알카이오스(Alkaios)·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솔론 (Solon), 그 밖의 서정 시인이 속출했으며, 여류 시인도 배출됐다.

◑ 아나크레온(Anakreon: 570∼?B.C.) : 그리스의 서정시인, 이오니아의 테오스 섬 출신으로 아브데라로 이주하고, 후에 사모스 섬의 참주 폴 리크라테스, 그의 몰락 후는 아테네의 참주 힙파르코스의 궁정에 초빙되었다. 명랑하고 경쾌한 술과 사 랑의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독음(獨吟)·풍자시 등을 많이 지었다. 후세에 그의 시풍을 모방하는 자가 많아「아나크레온풍」이라 불리었다.

◑ 그리스의 미술 : 그리스의 미술하면 파르테논 신전과 그리고 조각들을 생각할 수 있다. 건축과 조각의 수준을 볼 때 회화의 수준도 상당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으나 회화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주로 항아리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과 풍속화를 통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 미술의 작품들에는 크레타 양식의 쾌활한 운동감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딱딱한 점에서는 이집트 미술을 능가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그림들은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이집트 미술과는 상당히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가 아닌 감정을 그린 회화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부터 죽은 자보다 살아있는 자에게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그리스의 연극 : 그리스의 연극은 술과 정열, 그리고 재생의 신인 디오니소스에 대한 제사에서 유래되었다. 디오니소스의 제사에서는 희생물로 산양을 죽이고 그것을 뒤집어 쓴 제사장과 합창대가 서로 대사를 주고받으며 비극(tragodia)을 상연하였다(tragos〓산양, odus〓합창대) 연극의 주제는 인간의 오만(Hyburis)때문에 신의 징벌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는데, 국가적 행사로 상연된 연극에서 그리스 시민들은 시민 의식을 정화할 수 있었다 한다.

◑ 아이스킬로스(Aischylos; 525?∼456 B.C.) : 아테네 3대 비극 시인 중의 한 사람.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마라톤 및 살라미스에서 싸웠다. B.C. 468 년경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에 의해 초빙되어 후에 귀국하였으나, 재차 시칠리아 섬으로 가서 젤라에서 죽었다. 비극의 배우를 종래의 1인에서 2인으로 늘려서 대화를 시킴으로써 그 형식을 바꾸었으며, 내용도 사상적ㆍ예술적으로 높이는 등 참된 의미의 비극을 창조했다. 작품은 종교성에 넘치고 등장 인물은 초인적인 영웅이다. 제우스를 전지전능한 선한 신이라고 믿고, 신화 전설을 다시 해석함으로써 이 신념을 관철하려 애썼다. 90여 편의 작품 중 7편만이 전하는데,‘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리스 비극으로서 는 예외로 당시의 사건을 취급하였으며, 페르시아 전쟁의 목격자 기록으로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다.‘오레스테이아’3부작은‘아가멤논’,‘코에포로이’,‘에우메니데스’로서 씨족제적 사회에서 폴리스 사회 에의 진보를 명확히 의식하고 있으며, 이 외에‘구원을 바라는 여인들’,‘테베로 향하는 7인’,‘사슬에 얽매인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 소포클레스(Sophokles ;496?-406 B.C.) : 아테네의 3대 비극 시인의 한 사람. 부유한 무구 제조자의 아들로 서 아테네 근교 콜로노스에서 태어 났다. 어려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아 음악과 체육에 뛰어났으며, 살라미스 해전 후의 축제에 소년 무창 대의 선두에 섰다. B.C. 468년에 최초의 작품으로 선배 아이스킬로스를 누르고 우승하였고, 이후 24회나 우승하였다고 한다. 정치면에서도 장군이나 델로스 동맹의 재무관과 같은 요직에 있었지만, 품성이 온후 하여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던 사람이었다. 제3의 배우가 출현하는 극을 처음으로 썼고, 합창대를 개혁하기도 하여 비극을 기술면에서도 완성하였다. 작품은 치밀한 구성하에 완전한 언어로 씌어졌으 며, 그 기교는 더없이 완전했다. 아이스킬로스가 신의 정의를 믿은 데 대하여 그는 신의 전능과 인간의 무력을 확신하고, 불합리한 신의 지배도 그대로 승인했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인물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인간미를 띠고 있다. 123편의 작품 중 전하는 것은 7편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이 왕이 영화의 절정에서 부친을 죽이고 모친을 아내로 삼는 중죄인으로서 비참의 극으로 역전하는 것을 그린 것인데, 고래로 가장 비극적인 비극으로 치고 있다. '안티고네'는 이 여주인공의 성격 묘사나, 불문의 법과 국왕 의 법률과의 대립 문제를 제기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445?∼385? B.C.) : 그리스의 희극 작가, 시인. 생애의 상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시류에 반대되는 보수적 입장에서, 소피스트의 신식 교육이나 그 영향을 받은 에우리피데스의 신식 비극 등을 반대했다. 활동한 시기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의 30년간과 일치하며, 시종 평화주의자로서 클레온을 중심으로 한 호전적 정치가를 통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패배(404) 이후의 작품에는 시사적 정치 문제에 대한 강렬 한 관심은 사라지고, 이른바 중기 희극의 경향이 나타난다. 작품은 기지와 해학, 기발한 공상과 달콤한 서정이 넘치는 반면, 당시의 지도적 인물의 희화나 민중의 생활 묘사를 포함하고 있어, 정치사나 사회사의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작품으로‘아카르나이의 사람들’‘기사(騎士)’,‘구름’,‘벌’‘평화’‘ 새’‘여자의 평화’‘테스모포리아를 축하하는 여인들’‘개구리’‘여자 의회’‘복의 신(神)’의 11 편이 현존한다(연대순).

◑ 메난드로스(Menandros :기원전 342쯤∼291년쯤) : 아테네 태생의 희극 작가. 알렉산더의 초빙을 받았지만 조국을 사랑한 메난드로스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100편 이상이나 있었다고 하지만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20세기초부터 사막 속에 매 몰되어 있던, 그의 작품을 기록한 파피루스가 몇 개 발견됐다. 완전한 것이 아니라 모두 조각이었지만 그의 작품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로마의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희극은 모두 그의 작품을 모방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앞 시기의 작가와 달리, 정치 풍자는 하지 않고 일상 생활과 연대 따위가 주 제로 되어 있다. 피레우스에서 수영하던 중 익사했다고 한다.

◑ 헤로도토스(Herodo-tus ;484?∼430? B.C.) : 그리스의 역사가로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낫소스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참주 리그다미스의 타도 운동 에 실패하자, 사모스에 망명하였다. 한때 귀국하였다가 다시 아테네를 찾아 페리클레스, 소포클레스와 사귀고, 아테네 민주 정치의 찬미자가 되었다. B.C. 444년 아테네의 투리오이 식민에 참가하여 그 곳의 시민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북으로는 흑해 북안, 남은 이집트 남단, 동은 바빌론에 이르는 대 여행을 하여 견문을 넓혔다. '역사'(9권)는 동서 양대국이 충돌했던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한 것인데, 그 사이사이에 많은 에피소드들을 삽입하였으며, 대 여행에서 얻은 견문도 기술하였다. 신화나 속설에 대해서는 여러 번 이오니아식의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철저하지는 못하며, 또 신탁이나 조짐을 믿으며,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보복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강한 연구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가 탐구한 바에 의하여 기술하였기에 후세에「역사의 아버지」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각 민족마다 풍속ㆍ습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관습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 투키디데스(Thukydides ;460?∼?398 B.C.) : 아테네 태생의 역사가로 기원전 424년에 장군으로 뽑혀 칼키디키의 암피폴리스를 구원하러 나섰는데, 현지에 도착하자 도시는 이미 함락되어 있었다. 그 뒤 망명해 20년간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기원전 404년에 귀국했지만 그 뒤의 생애는 분명치 않아 죽은 곳이나 연도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되자‘이것은 대 전쟁이 될 것이다’고 생각해 즉시 역사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현존하고 있는 그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8권)는 기원전 411년 전반에서 중단되어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민회 나 전장에서의 지도적 인물의 연설이 많이 삽입되었고, 역사 추진자의 의도나 사상이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헤로도토스의 이야기식 서술과는 달리 엄밀한 사료 선택과 비판이 이루어졌고, 대상을 엄밀히 전쟁사에 한정했으며, 종교나 도덕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정치적 관점에서 인과 관계를 설명하였고 목격자가 한 이야기도 면밀한 검토 끝에 기술했으며, 공문서도 이용하는 등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진실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헬레니즘]

◑ 카이로네아 전투(B.C. 338) :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Philippos Ⅱ)는 아테네를 공격하고 테베에는 사절을 보내어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B.C. 339). 그런데 아테네의 데모스테네스가 민회에 제안해 스스로 사절이 되어 테베로 가서 동맹을 맺었다. 필리포스 2세는 B.C. 338년 보이오타아의 카이로네아(chaeronea)에서 아테네·테베 군과 싸워 이겼다. 이 승리후 필리포스 2세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코린트(Corinth)에 모아 회의를 열고 이전에 맺었던 동맹을 다시 맺었다. 각 폴리스는 세력에 따라 대표를 내어 정례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회의의 의결에는 강제력이 있었으며, 위반자는 벌금을 물었다. 나아가 이 코린트 동맹과 마케도니아가 동맹을 맺는다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사실상 독립성을 잃고 마케도니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 마케도니아 : 그리스의 북쪽에 자리 잡은 왕국이었으며 그리스 사람들과 같은 종족이었으나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 인을 바르바로이(Barbaroi: 야만인)로 간주하였다. 마케도니아는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B.C. 5세기부터는 그리스 문화를 대대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국가 발전에 힘썼다. 필리포스는 소년시절 테베에 볼모로 가 있으면서 뛰어난 전술과 용병을 배워 후일 그리스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 후 페르시아 원정의 장도에 오르던 중 연회에서 독살되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부왕의 유업을 이어 동방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원정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 내부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내란으로 그리스에서는 몰락한 시민들이 속출하였고 부유한 시민은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하였다. 여기 서 그들의 의식을 밖으로 돌려 동방에 대한 식민으로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렉산더의 원정은 곧 그리스 식민 도시의 건설 과정이었고, 무산 시민과 상공업자, 그리고 노예까지도 오리엔트 각지에 건설된 알렉산드리아 도시에 살게 된 것이었다.

◐ 필립포스 2세(philipposⅡ ;382-336 B.C.) : 아민타스 2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친. 어려서 테베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그리스의 문화와 에파메이논다스의 전술을 습득하였다. 귀국 후(B.C. 364) 조카의 후견인이 되었다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군제를 개혁하고, 트라키아 해안의 광산 지구를 공략하여 재력을 얻었으며(B.C. 357 이후), 북방의 야만족을 누르고 텟살리아에 진출(B.C. 353 이후), 올린토스를 점령(B.C. 348)한 후는, 신성전쟁에 개입하여 인보 동맹의 실권을 쥐었다. 데모스테네스가 지휘하는 아테네와 테베의 반(反)마케도 니아 연합군을 카이로네아 싸움에서 격파하여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였고(B.C. 338), 코린토스에 그리스 제 도시의 대표를 소집하여 헬라스 연맹을 조직하고 그 맹주가 되었으며, 페르시아 원정을 결의하여 그 사령관이 되었다. 원정의 선발대를 파견한 후, 고도(古都) 아이가이아에서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암살되었다.

◑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356 - B.C.323) :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으로 아버지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 스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은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로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 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과 행정 등의 실질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chaironeia)의 싸움에 직접 참가하였다. 부왕인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어, 그리스 도시 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아버지와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B.C. 334년에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하여 B.C. 330년에는 메소포타미아로 들어가 페르시아 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그는 여기서 다시 동쪽 으로 원정하여 인도의 인더스 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들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군대를 돌리어 B.C. 324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 왔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 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동방 진출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 고르디우스의 매듭 : 굉장히 어려운 문제나 일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 한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가 동방 원정길에 올랐을 때 소아시아에 있는 고르디우스라는 마을에 들어섰다. 이 마을 신전의 기둥에는 한 대의 짐수레가 단단히 묶여 있었는데 이 수레의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매듭은 너무 절묘하게 묶여 있어 아무도 풀지 못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알렉산더는 신전으로 가서 단칼에 매듭을 베어 버렸다. 결국 그는 그 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 헬레니즘 문화 : 알렉산더의 꿈은 지중해와 오리엔트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2만km에 달하는 원정길 에 여러 학자를 동행시켰다. 그리고 정복지마다 새 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다 음 그리스의 학자, 예술가, 상인들을 이주하게 하였다. 또 그리스인과 페르시아 인 사이의 결혼을 적극 장려, 대규모의 합동 결혼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그 자신 다리우스 3세의 딸을 제 2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리 페르시아 청년들을 그리스 식으로 교육하는 한편 페르시아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 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동서 문화 융합 정책은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를 헬레니즘(Hellenism) 문 화라고 한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색은 세계시민주의와 개인주의이다. 즉 고립된 폴리스를 뛰어 넘어 좀 더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고, 폴리스라는 공동체 중심의 사고로부터 개인 중심의 사고로 바뀌기 시작 하는 것이다. 헬레니즘 문화는 로마를 통해 서유럽으로 전해져 유럽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오늘날 유럽 문화의 기저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Hebraism)의 두 흐름이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헤브라이즘이라는 말과 대 조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헤브라이즘이 헤브라이의 종교 사상과 거기에서 나온 크리스트교 사상을 통 털어 지지하는데 대하여 헬레니즘은 그리스의 정신이나 그리스 문화를 지지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헬레니즘 문화는 인도에도 영향을 미쳐 간다라 양식이라는 독특한 예술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 간다라 양식은 서역 지방을 거쳐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역사적 의미로 헬레니즘 시대는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복으로부터 로마에 의해 이집트가 망한 시기까지를 말한다.

◑ 알렉산드리아 : 알렉산더는 원정 때 각지에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라고이름 붙였다. 그 대부분은 병참 기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 도시들이 그리스 풍의 문화 를 문화를 오리엔트에 전파하는 거점이 됐다. 알렉산드리아로 이름 붙여진 도시는 70개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이집트의 나일 강 지류 카노푸스 하구에 세워진 것이다. 이는 병참 기지가 아니라 그가 멸망시킨 티루스를 대신해 상업 항구로 건설된 것이다. 지중해의 정중앙에 위치를 정해 지금까지도 상업 항구로 번영하고 있다. 이 곳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 번성해 '눈 말고는 무엇이든 있다' 고 일컬어졌다. '고대 7대 불가사의' 로 꼽히는 등대를 비롯해 몇만 권 의 장서를 자랑하던 대 도서관·학사원·신전·왕궁 등이 있어 학예의 중심 ― 특히 자연 과학 연구의 중심지가 됐다.

◑ 디아도코이(Diadokoi : 후계자들) : 알렉산더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으며 더구나 갑자기 죽었기 때문에 후계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 가운데 유력한 장군들은 각기 대왕의‘후계자’로 자 칭했다. 안티고노스·안티파트로스·카산드로스·리시마코스·프톨레마이오스·셀레우코스, 그 밖의 인물들이 디아도코이로 꼽힌다. 그들은 알렉산더와 같은 세계 제국의 지배자가 되려고 서로 싸워 이른바 '후계자 전쟁' 이 일어났다. 입소스 전투를 거쳐 후계자 전쟁은 기원전 281년 리디아의 코로페디움 전투 에서 차츰 결말이 났고, 알렉산더의 영토는 시리아(셀레우코스 왕가)·이집트(프톨레마이우스 왕가)·마케도니아(캇산드로스 왕가)의 이른바 헬레니즘 3왕국으로 나뉘어졌다.

◑ 셀레우코스 왕가(Seleukos) :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의 한 사람인 셀레우코스 1세가 수립한 시리아 왕국의 왕조. 처음 바빌로니아 지방을 지배하였으나, 다른 후계자와 싸워 B.C. 281년경에 대왕의 옛 아시아령을 거의 병합하였다. 그가 암살된 뒤 안티오코스 1세, 안티오코스 2세, 셀레우코스 2세, 셀레우코스 3세, 안티오코스 3세 등이 계승하였고, 그 사이 이집트와 페니키아, 팔레스티나 지대의 영유권을 가지고 싸워, B.C. 200년경 이를 확보 하였다(시리아 전쟁). 안티오코스 3세 때 옛 영토를 회복함에 힘쓰고, 인도에도 진군하였지만, B.C. 2세 기초에는 로마 세력과 충돌하였다. B.C. 192년에는 그리스에 진군하였다가 로마 군에게 격퇴되었고, B.C. 190년에는 로마, 페르가몬의 군대들에게 패하여 타우루스 산 서쪽의 소아시아를 잃었다. 안티오코 스 4세(175∼164 B.C.)는 열렬한 그리스 정신의 애호자로서 지방 자치를 장려하고, 그리스 풍의 왕국을 목표로 했다.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로마의 간섭을 받아 퇴각하기도 했다. 또한 종교 문화의 통일을 꾀하여, 유다교를 압박하여 막카바이오스 전쟁을 일으켰다. 그 후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빼앗기 고, 나머지 땅은 분열되었는데, 안티오코스 7세는 파르티아에 대한 반격 도중, 전사함으로써(B.C.129) 왕 조의 정통은 단절되었다. 나머지 영토인 시리아, 킬리키아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에 병합되었다(65∼63 B.C.). 이 왕가는 각지에 많은 도시를 건설하여 아시아의 헬레니즘화를 촉진시켰다.

◑ 스토아 학파(Stoikoi School) : B.C. 315년경 키프로스섬 출신의 제논에 의해 창립되었는데, 그가 아테네의 스토아 포이킬레라는 건물에서 가르쳤다 하여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학풍은 이후 아테네, 타르수스, 셀레우케이 아, 로도스 등지에 계승되고, B.C. 2세기경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에서 통속적인 도덕 철학으로서 환영을 받아, 세네카, 아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펠리우스와 같은 대표적인 철학자가 배출되었다. 스토아학은 윤 리학·자연학·논리학으로 되어 있는데, 그 근본 사상은 이 우주의 만물은 일정한 이법(理法 : 로고스) 에 의해 생성 유전되는 근본 물질인「불」에 지배되고, 그「블」은 또 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므로 전 자연은「불」의 필연성, 즉 이성적인 신의 섭리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 기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이 자연의 이성과 법칙을 통찰하며, 굳은 의지와 체념을 가지고 감정과 쾌락을 물리치며, 그리하여 자기의 내면적 독립을 지켜나가는 가운데 덕이 생기며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고 하였다. 또 이 학파는 하나의 법(자연법)에 의한 세계 국가를 내세워 이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시 민이 될 수 있다는 평등한 입장에서 특정 국가의 속박을 배격하는 세계시민주의를 취하였다. 이것이 로마의 중심 철학이 되었다.

◑ 에피쿠로스 파(Epicurean School) : 스토아 학파와 아울러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 철학 학파로 에피쿠로스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이 시대의 철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인 인생관이 강하였는데,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여 마음의 평 화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국가와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허전했던 당시의 사람들 사이에 복음처럼 퍼져 갔다. 외적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 했던 점에서는 그 시대에 유행했던 스토아 학파와 같지만, 스토아 학파가 덕을 덕 그 자체를 위하여 추구한 데 비하여, 그는 마음의 평화, 즉 행복을 위하여 추구했던 것이다. 이 철학은 사후(死後)의 존재를 부정하고 현세에 있어서의 최대의 개인적 쾌락이 최고의 덕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B.C.342-270)는 쾌락설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마음의 행복이었다. 로마의 루크레티우스에 의하여 더욱 보급되어 기원 후 4세기까지 존속되었으나, 이 학파가 소멸된 후에도 그 사상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B.C. 275?∼194?) : 헬레니즘 시대의 문헌학자. 아프리카의 키레네 사람으로 칼리마코스 등에게 배우고, 아테네에 유학한 후 프톨레마이오스 3세의 초청을 받아 B.C. 235년 아폴로니오스(로도스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 되었다. 스스로 문헌학자라 칭한 최초의 학자로서 여러 방면에 활약하였으며, 특히 최초의 체계적 지리학자로서 공적을 쌓았고 수학, 천문에서도 역량을 과시했다. 올림피아 승자의 리스트를 만들어 과학적 연대 결정의 선구를 이루고 호메로스의 연구에도 뛰어나고, 시ㆍ수필에도 능했다. 그에게는 명저 ‘지리학’(3권)이 있으며 ‘성좌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287-212 B.C.) : 그리스의 수학자·물리학자·공학자로 시라쿠사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시라쿠사가 로마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로마 군에게 피살되었다. 지레의 법칙의 정식화, 이른바「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했고, 수학에서는 원과 구(球)의 면적, 공학에서는 복활차(複滑車) ·전쟁 기계·나선 양수기의 발명 등이 있으며, 그 때문에 과학과 기술이 밀접하게 결합되게 되어 고대 과학은 최고로 발달하였다.

◑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 B.C.300?) : 그리스의 수학자로 영어로는 유클리드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306∼283B.C.)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기하학 원리’는 선인의 업적에다가 그 자신이 발견한 원리를 추가하여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시킨 것으로서, 최근까지 초등 기하학의 표준적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310?∼230 B.C.) : 그리스의 천문학자, 수학자로 사모스 태생이다. 일·월식의 관측과 달의 크기와 거리를 측정하였고, 유성은 태양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는 태양 중심설을 제창하였다.

◑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Klaudios; 2세기경) : 고대의 대 천문학자이며 지리학자. 알렉산드리아에서 천문 관측에 종사하였다.(121∼151). 저서‘알마 게스트’는 대 천문학자 힙파르코스의 업적을 중심으로 그리스 천문학을 집대성하고 거기에다 자신의 설을 보탠 것이다. 이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해ㆍ달ㆍ5유성의 운행을 설명한 천동설로서, 아라비아 천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타파될 때까지 정설로 되어 있었다. 이 밖에 지 구의 표면을 경도ㆍ위도로 나누어, 약 8,000 군데의 토지의 위치를 측정한 '지리학' (8권)과 '광학(光學)' 의 저서가 남아있다.

(2) 로마의 성립과 발전

◑ 로마의 건국 신화 : 에네아스는 여신 비너스(베누스)를 어머니로 가진 트로이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트로이의 성은 10년 간이나 그리스군의 격렬한 공격을 잘 견뎌내었지만 최후에 오딧세우스가 고안한 목마의 계책에 걸려 함락당했다. 에네아스는 꿈에 나타난 헥토르에게서 트로이의 제사를 지켜서 다른 곳에 새로운 트로이를 건설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에네아스는 트로이에서 배를 타고 나와 트라키아, 크레타섬, 에피루스(에페이로스), 시칠리아 섬을 떠도는 바다 여행을 계속했다. 시칠리아에서는 부친 안키세스가 죽는 비운을 만났지만, 그는 대망의 땅 이탈리아에 건너가려고 하였다. 에네아스는 결국 많은 우여곡절 끝에 부하들과 함 배를 타고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에 도착했다. 그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동쪽 연안인 라틴인 왕 라티누스의 영토에 상륙했다. 에네아스는 왕에게 그 나라에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했는데 왕은 이를 허락했을 뿐 아니라 예언에 따라 딸인 라비니아를 에네아스의 아내로 주겠다고 하였다. 트로이인과 라틴인은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으며, 이윽고 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결합한다. 에네아스는 라비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그녀의 이름을 따서 라비니움이라 이름지었다. 에네아스와 라비니아의 아들 실비우스는 라비니움을 떠나 알바누스 호숫가에 새로운 도시 알바론가를 세웠고, 그 자손들이 여기에 정주하여 전체 라틴인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로부터 13대 후의 알바왕 프로카스는 누미토르와 아무리우스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는데, 맏아들인 누미토르가 뒤를 잇는 왕이 되었다. 그런데 동생 아무리우스는 형에게서 왕위를 빼앗으려고 그 아들을 죽이고 딸인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 신전의 여승이 되게 하여 평생 독신으로 살도록 만들어버렸다. 여승이 된 실비아가 베스타의 신앞에 바치기 위해 마르스의 숲으로 물을 길러 갔었는데 마르스의 신이 그녀를 보고는 반해서 그녀와 정사를 나누었다. 실비아는 그로 인해 쌍둥이를 낳았다. 아무리우스는 그녀의 파계에 노하여 그녀와 쌍둥이를 티베르 강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티베르 강의 신은 죄 없는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구니에 던져진 쌍둥이도 티베르 강의 범람으로 흘러 내려가다가 팔라티누스 언덕 아래의 무화과 나무 가지에 걸려 멈추었다. 거기에 한 마리의 암늑대가 와서 쌍둥이에게 젖을 먹여 길렀다. 그후 아무리우스의 목동 파우스투루스가 쌍둥이를 발견7臼?데리고 돌아와 두 아이에게 로물루스(Romulus), 레무스(Remu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쌍둥이는 성장하여 출생의 비밀을 알자 무리를 이끌고 알바를 공략하여 아무리우스를 죽이고 외조부인 누미토르를 복위시켰다. 그러나 쌍둥이는 그 뒤 알바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성장한 티베르 강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로물루스가 그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로물루스는 도시구역(포메리움)의 주위에 성벽을 쌓았지만, 레무스는 경쟁에 진 것에 화가 나서 조롱하면서 성벽을 뛰어넘었다. 그러자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성벽을 넘는 자는 모두 이렇게 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이리하여 새로운 도시는 로물루스를 기념하여 로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 초기 로마 사회 : 이탈리아 반도에 가장 먼저 나라를 세운 민족은 소아시아 지방에서 옮겨온 에투루리아 인으로 약 3000년전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잡았다. 이보다 좀 늦게 라틴 족이 이탈리아 중부 로마 지방에 조그만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으며 그 남쪽에는 그리스 지방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도시 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탈리아 역사는 이렇게 세 민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들은 에투루리아의 왕을 섬기다 점점 힘을 길러 에투루리아 인을 물리치고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기보다는 귀족들이 1년씩 돌아가며 로마를 다스리자는 데 합의하게 되어 왕이 없는 나라, 즉 공화국으로 출발하였는데 이를 귀족 공화정이라 한다. 로마 시민은 왕정 시대부터 3개의 부족(Tribus)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부족은 다시 10개의 형제족(Curia)으로 나뉘이고, 형제족은 다시 10개의 씨족(Gens)으로 나뉘어 있었다. 왕(Rex)은 군사·제사·사법의 최고권을 쥐고 있었으나 왕위는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그 밑에 각 씨족의 우두머리로써 구성된 원로원(Senatus)이 있어 국왕을 보좌하고, 씨족의 성년 남자로서 구성된 쿠리아회(Comitia Curiata)가 있어 중대한 국사를 의결하였다. 당시의 로마에는 신분의 차별이 엄격한 3계급이 있었다. 제 1계급인 귀족(Patrici)들은 스스로「고유의 로마인」이라 일컫고,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정치·법률상의 완전한 권리, 곧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제 2계급인 평민(Plebs)은 피지배 계급 인데, 그들에게는 참정권이 없고 귀족과의 결혼이 금지되어 권리는 없었으나 병역과 납세의 의무는 있었다. 제 3계급인 피보호민(Clients)은 귀족을 보호자로 하고, 그 토지를 경작하여 지대를 바치고 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들은 예농에 가까워서 재산의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이밖에 노예(Servus)가 있어 주로 전쟁 때의 포로, 부채를 갚지 못한 자들이 되었으나, 아직 중요한 계급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 원로원(元老院 ;Senatus) :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실질적인 지배 기관으로 귀족들의 장로 회의였다. 왕정 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씨족의 장들로 구성되었고 왕정 시대에는 왕의 보좌 기구였다. 정원은 최초에는 100명, 다음에는 300명이 되고, 술라 때는 600명, 케사르 때에는 900명, 아우구스투스 때는 다시 600명이 되었다. 원로원 의원은 처음에는 왕이, 공화정 시대 초기에는 콘술(consul :통령), B.C. 4세기말에 가서는 켄소르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또 아우구스투스는 켄소르의 직권으로써 원로원 의원을 임명하였다. 원로원 의원 사이에도 권한의 차가 있는데, 상급 의원에 비하여 Senatores pedarii(걷는 의원)라 불리는 하급 의원은 발언권이 없고, 투표권만 있을 뿐이었다. 원로원의 직무는 그 권위로써 민회의 의결을 비준하였는데, 이 비준 없이는 민회의 결의는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었다. 또 국가 행정·재정·종교·입법 등에 관해 정무관의 자문에 응했는데, 이것은 원로원 의결과 같은 효력을 내어 실질적으로 정무관을 구속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포에니 전쟁 때쯤부터 로마 및 이탈리아의 중산 농민계급이 쇠퇴하고, 노예 노동이 증가한 결과, 로마의 기초가 약체화하고, 한편 귀족들은 권력을 독점하여, 속주에서 부정을 저질렀는데, 귀족 계급에도 내부 권력 투쟁이 일어났으며, 부패한 귀족들은 이미 속주의 반란이나 외적의 침입을 진압할 수 없게 되어, 아우구스투스의 원수 정치의 성립과 더불어 원로원의 권한도 제한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과 협조적 태도를 취하여, 그의 모든 권력을 원로원 및 민회에서 위임받는 형식을 취하였으며, 속주를 원로원령과 황제령으로 2분하였다. 황제권의 확립과 더불어, 3세기 군인 황제 시대에는 내내 원로원은 무력화하여 거의 유명무실의 존재가 되었으나, 그 명칭은 580년경까지 존속하였다.

◑ 평민의 투쟁 : 처음 로마에 생긴 공화 정치는 실제적으로는 귀족 정치와 다름이 없었다. 종래의 국왕 대신에 귀족 중에서 2명의 통령(consul)이 선출되어 행정·군사의 최고권을 쥐었는데 독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임기는 1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국가 비상시에는 그 중의 한 사람을 총통(dictator)에 임명하여 국가의 전권을 맡겼다. 입법 기관으로는 귀족의 유력자 300명으로써 구성된 원로원(senatus)과 왕정 시대부터 내려온 쿠리아 회가 있었는데, 원로원이 사실상 통령과 쿠리아 회를 지배하여 절대의 권위를 지닌 공화정의 최고기관으로서 행세하였다.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은 전쟁에서 취득한 국유지를 분할·독점할 뿐아니라, 평민의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는 등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평민은 정치·사회 경제상의 평등권을 요구하여 궐기하여 여기에 로마의 계급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B.C. 5세기에 이르자 로마의 발전에 따라 평민의 인구가 급증하고, 또 평민 가운데는 상공업 방면에 진출하여 귀족과 어깨를 겨눌 만한 경제력을 가진 자가 나타나고, 이와 동시에 소농민에 의하여 편성된 중장 보병 밀집대 전술이 전쟁에서 큰 구실을 하게 되었다. 연달아 일어나고 있던 확대 전쟁에 평민의 협력을 희망하고 있던 귀족들이 평민의 요구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점차 평민권이 신장되게 된다. 종래의 쿠리아 회(民會) 대신에 병원회(兵員會: Comitia Centuria)가 창설되었다. 이는 전 로마 시민을 재산의 다과에 따라 7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일정 수의 백인조(百人組: Centuria)를 조직하게 하여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는 동시에 백인조마다 한 표의 의결권을 준 것인데, 이 결과 종래 정권에서 배제되어 있던 평민, 특히 부유층의 평민이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어, 귀족의 아성에 육박하는 제 1보가 되었다.

◑ 성산 사건(B.C 493)과 호민관 제도(Tribuni Plebis) : 기원전 493년, 평민들의 참정권 요구가 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시 부근의 구릉인 성산(Mons Sacer)에 이주하여 평민들만의 신도시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로원이 양보하여 협정을 맺어 평민 가운데서 2명의 호민관을 선출하여 그에게 불법 압박을 당하는 평민의 보호 및 정무관의 행정ㆍ선거ㆍ입법 및 원로원 의결에 대하여 거부 혹은 간섭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 신체를 국법에 의하여 불가침으로 하였다. 또한 호민관은 평민회를 소집하여 의결을 하였으며, B.C. 287년에는 그 의결이 법으로서의 구속력도 갖게 되었다. 호민관은 2명으로 한 사람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동료의 행위를 간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호민관 중의 한 사람을 매수하여 다 호민관의 제안에 반대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우스 그락쿠스가 호민관으로서 평민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귀족들이 적대시하여 술라 때에는 그 권한이 제한되었다. B.C. 70년에 그 기능이 완전히 부활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종신 호민관 직권이 부여되었다. 제정 시대에도 이 관직은 존속되었으나, 본래의 호민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호민관이 가지고 있던 거부권(veto)은 소극적인 권한 행사였을 뿐 적극적으로 그 어떤 행정권이나 군사 통수권은 없었으므로 그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 12표법(Leges Duodecim Tabularum(B.C. 450) : 로마 최초의 성문법. 당시까지 행해지고 있던 관습법은 귀족에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다. 성산 사건 이후에도 사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관습법을 악용하여 평민들을 억압하였으므로 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글로 분명히 적어 놓자고 궐기하여 기원전 451년 이를 구리판에 새겨 로마 시내에 세우게 되니 이것이 로마의 첫 성문법이다. 일명 12동판법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민관 테렌 틸리우스의 제안에 의해 법을 성문화하게 되고, B.C. 451년 압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이하 10명의 입법관이 선출되어 10표(表)로 이루어진 법을 제정했으며 이듬해에 2표가 추가되어 '12표법(Law of 12 Tables)' 이 됐다. 그 내용의 개략은 1표〓민사 소송 수속, 2표〓경쟁금 소송 금액, 4표〓가장권(家長權), 5표〓유산 및 후견, 6표〓소유권 취득의 법, 8표〓불법 행위, 9표〓시민권 박탈, 11표〓귀족과 평민의 결혼 금지 등으로 되어 있다. 귀족과 평민의 통혼을 금지한 규정(제11표)을 비롯해 아직 평민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귀족의 권리 남용에 한계를 그었고, 귀족의 사법권 독점을 제한했다. 따라서 이 12표법의 제정은 평민의 권리가 신장되는 한 계기가 됐다.

◑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ex Licinia-Sextia :B.C. 367) : 호민관 리키니우스 칼부스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제안하여 긴 논쟁 끝에 B.C. 367년에 가결했다. 정치ㆍ경제 양면에 걸쳐 중요한 몇 개의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평민에서 선출할 것과 신관 단체 중에 평민을 넣을 것. 그리고 어느 누구도 공유지 500 유게라(1유게라 는 약 2∼3에이커) 이상을 소유할 수 없고 또 공유지에 100마리 이상의 소와 500마리 이상의 양을 방목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지불한 이자는 원금 상각에 충당하고, 이후 이자의 원금 산입은 1년에 3회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법은 그 후 확장되어 토지 소유자는 노예 이외에 일정한 비율의 자유 농민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이로써 정치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일시적인 호도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빈부의 차이는 더욱 심하여져 B.C. 2세기경에 그라 쿠스 형제가 이의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 호르텐시우스 법(B.C. 287) : 로마의 평민은 귀족과 오래 다투었는데, 기원전 287년쯤 채무법 문제가 생기면서 평민들은 티베르 강 맞은편 야니쿨룸 언덕에 새 도시를 세우고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호르텐시우스(Hortensius)가 독재관으로 뽑혀 양자의 조정을 꾀했다. 그리하여 평민회의 의결은 그대로 국법이 되어 귀족을 포함해 모든 로마 시민에게 구속력을 갖는다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이 호르텐시우스 법으로, 귀족과 평민의 법률상 평등이 실현되었다. 이로써 귀족에 대한 평민의 오랜 신분 투쟁은 대체로 끝이 났다.

◑ 카르타고(Carthago) : 고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한 페니키아의 식민 도시. 전설에 의하면 B.C. 814년에 티레 왕가 출신 페니키아인 일파가 북아프리카에 식민 도시 카르타고(Carthago)를 건설했다. 티레 왕 피그말리온의 누이 엘리사는 신관인 숙부 아케르바스와 결혼했는데, 아케르바스가 막대한 재산을 숨겨 두었다는 말을 들은 피그말리온은 그를 암살해 버렸다. 왕에 반감을 느낀 귀족 일부를 포섭한 엘리사는 남편이 숨긴 재산을 갖고 도망해 키프로스를 거쳐 카르타고에 도달했다. 엘리사는‘쇠가죽으로 덮을 만큼’이라는 원주민의 조건에, 가늘게 자른 소가죽을 이어서 둘러쳐 그만큼 땅을 얻어 냈다. 카르타고의 발상지인 비르사 언덕이 그리스어로‘가죽’이라는 뜻을 갖는 것은 이러한 전승에 유래한다. 시칠리아와 마주보며, 서지중해 동 지중해와의 교통이 요충에 있는데, 바그라닷 평원의 곡물을 이용하여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에스파니아 등의 페니키아 식민지의 패자가 되었다. 귀족 과두 정치의 지배를 받았는데, 귀족 중에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농업 발전에 노력하는 자와 해상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있었는데 후자가 실권을 잡았던 것 같다. 서지중해의 해상 지배권을 둘러싸고 그리스인과 대립하더니, 에트루리아인과 동맹하여 B.C. 550년 경 전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코르시카, 사르데냐, 에스파니아에 세력을 확대하여 그리스인과 항쟁, 결국 서시칠리아를 차지하였다. 또 처음에는 로마와는 우호적이어서 B.C. 508년 및 348년에 동맹 을 맺었으며, 280년 피로스 전쟁 때도 로마를 원조하였다. 그런데 로마의 세력이 확대되자, 카르타고와 의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 B.C. 146년에 카르타고는 한때 괴멸하였다. 처음에 로마는 카르타고의 회복을 불허하였으나, 잔존한 카르타고 인은 융단·염료·보석·도기·램프·철직·재목·모피 등을 수 출하여 농업 기술을 발전시켰다. 카르타고의 비옥한 땅은 로마의 매력을 끌게 되어,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그 곳에 식민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케사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식민하여 속주 아프리카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총독은 아프리카의 곡물 교역을 지배하였으므로 황제에게는 위협이 되었으며, 종종 반란도 일어났다. 반달 왕국의 수도로서 1세기 이상 계속 되었으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을 받아 콜로니아 유스티니아나 카르타고가 되었다가, 698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아 도시는 파괴되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포에니 전쟁(264∼146B.C) : 이탈리아의 정복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로마의 상품이 동맹시 및 식민시에 판로를 얻어, 로마는 상업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일어난 남이탈리아의 정복은 로마의 역사에 중대한 의의를 가져 왔다. 그 하나는 헬레니즘 문화가 급속히 흘러 들어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가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서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점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건너편 아프리카 북안에는 페 니키아 인(로마인은 이를 Poeni인이라 불렀다)의 식민지 카르타고가 있어 그리스 식민지의 몰락 후, 에스파니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실리의 일부를 지배하여 이탈리아를 봉쇄하는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어 드디어 포에니 전쟁(Poeni war)이 시작되었다. 포에니 전쟁은 근 120년간 세 차례에 걸쳐 발발했다. 최초의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무렵 로마는 아직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경제력이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강하게 결속된 시민군 덕택에 용병과 피정복민으로 편성된 카르타고 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로마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시칠리아 섬을 수중에 넣었다. 제2차 전쟁은 기원전 218년에 일어났다. 복수의 칼을 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보병 7만,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 군선 3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에스파냐를 거쳐 피레네 산맥과 험준하기로 이름난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이었다. 피레네 산맥 기슭에 도달하는 데만도 4개월이 걸렸다. 험준한 산을 보고 기가 질린 병사들 중 상당수가 도망쳐 버리고 남은 것은 보병 5 만, 기병 9천뿐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산맥을 넘은 한니발 군은 론 강을 단숨에 넘어 알프스로 향했다. 하얗게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니발은 과감하고 용의주도하게 알프스를 넘었으며 로마와의 첫 싸움에서 특유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듬해 벌어진 칸네 전투에서 8만의 로마 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위기에 처한 로마는 장군 스키피오로 하여금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본국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들은 한니발은 군사를 되돌려 급히 귀국, 자마에서 스키피오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니발의 작전이 먹혀들지 않았고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전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에스파냐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를 떼어주고 군함도 20척만 남기고 다 빼앗겼으며, 50년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한니발은 로마 군에 쫓기다가 기원전 183 년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어 결국 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전 시가를 불태워 버렸다. 전쟁에서 자금을 대주었던 로마의 귀족들은 엄청나게 넓은 땅의 주인이 되었고 몰락하는 농민의 토지와 속주의 토지를 사들여 라티푼디움을 경영하고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경작시켰다. 몰락한 소규모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로마로 몰려들고 이로써 공화정의 기반은 근본적으로 무너져 갔다.

◑ 칸나에 싸움(Battle Cannae ;B.C. 216) : 포에니 전쟁 중의 결전. 칸나에는 남 이탈리아의 고대 도시. 루키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바로가 지휘하는 로마 군 8만 7천 명이, 한니발이 지휘하는 기병 1만을 중핵으로 한 4만의 카르타고 군과 교전을 벌였다. 바로가 작전을 그르쳐 강을 앞에 낀 견고한 진지를 버리고 전군이 강을 건너, 넓은 벌판으로 진출한 틈을 타서, 한니발은 기병을 우회하여 도하시켜 측면으로부터 기습 포위하여 섬멸적 대타격을 가했다. 후세 전사상 포위 섬멸 작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 한니발(Hannibal ;247-183 B.C.) : 하밀카르 바르카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에스파냐로 건너가서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고취받고, 26 세에 에스파냐 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B.C. 221). 그는 먼저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을 공격하여 제2 포에니 전쟁을 일으킨 다음, B.C. 218년 에스파냐를 출발하여 알프스를 넘어 티키누스,트레비아 강변 싸움에서 로마 군을 격파하였다.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승리 (B.C. 217) 후 파비우스의 소극적인 전쟁으로 결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칸나에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카푸아 등의 제 도시는 로마에서 이반하였는데, 로마는 굴하지 않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한니발 측의 보급 곤란을 이용하여 서서히 세력을 만회하였다. 또한 로마 해군에 의한 마케도니아로부터의 원군 저지, 로마에의 진군의 실패, 아우하스드루발의 메타우르스 강변에서의 전멸 등의 이유로 한니발은 궁지에 몰리었다. 그 사이에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아프리카 본거지를 공격, 자마 싸움에서 본국으로 소환된 한니발을 격파했다.(B.C. 202). 강화 후 시리아, 비티니아에 망명하였는데, 로마가 비티니아에게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자살하였다.

◑ 라티푼디움과 공화정의 변질 :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지중해 진출을 위해 포에니 전쟁을 시작한 이래 해외 원정을 거듭하여, 2세기경에는 지중해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들 정복지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로마에서 파견되어온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후 속주의 총독이 된 원로원 의원이나 징세 청부인, 그리고 해상 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은 가혹한 수탈로 거액의 부를 획득하였으며, 이러한 부의 축적은 수도 로마를 '벽돌의 도시'에서 '대리석의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한편, 계속된 전쟁과 속주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로 인하여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중장 보병인 로마의 자영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도시의 빈민으로 몰락하여 갔다. 대신 신흥 부유층들이 대부분의 미분배지(공유지)를 손에 넣고, 이웃의 토지나, 그 밖의 가난한 사람들의 얼마 안되는 땅을, 혹은 설득해서 사들이고, 혹은 불법으로 수탈하여, 토지라기보다는 대평원(라티푼디움)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대 토지의 경작을 위해 정복지에서 수입된 노예를 사 역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유인으로서는 군인으로 징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사정 으로 유력자는 엄청난 치부를 하여 번영하였으며, 노예가 국토에 넘쳐흐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빈곤과 과세와 종군에 시달려 그 수효가 감소되었다. 이로써 평민인 중장 보병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공화정은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라티푼디움은 라틴어의 'Latus(넓은)'와 'Fundus(토지)'의 합성어로, 대토지 소유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경영이 상품으로서의 곡물 생산을 주로 하였는가, 아니면 자급자족을 위한 것인가는 학계의 논쟁이 되고 있다.

◑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 로마는 대외 정복 전쟁으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막대한 공납으로 부유해졌다. 그러나 중소 농민들은 오랜 군복무로 영농을 계속할 수 없어 토지를 팔고 무산자가 되어 로마시로 흘러 들어왔다. 유력자들은 이들의 토지를 매점하고 공유지를 사유화하였으며, 여기에 전쟁에서 얻은 노예를 투입하여 노예제에 입각한 대 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빈부의 차이라는 사회적 문제만이 아니라 군대의 주력을 토지 소유 농민층에 의존하고 있던 로마로서는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134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전163∼전132)는 토지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공유지의 점유를 1000유게라로 제한하고, 규정 이상의 점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토지 없는 시민에 분배한다는 것이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중소 지주를 육성할 필요는 지배층도 인정하고 있었으나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민회에 제안한, 그의 전통을 무시한 행위는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Octavius)의 거부권 발동을 초래했다.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의 면직과 토지법을 민회에 걸어서 성립시켰으나 대농장의 소유자인 벌족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10년 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락쿠스 (Caius Sempronius Gracchus 전153∼전121)가 형의 뜻을 이어받았다. 그는 값싼 곡물의 공급으로 무산 시민을, 그리고 속주 아시아의 징세권으로 기사급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기원전 122년 식민시 건설에 착수했다. 로마 인·이탈리아인을 옛 카르타고에 입식시키는 안이 인정되어 가이우스는 그 준비를 위해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반대파인 호민관 드루수스가 유리한 대안을 제출하여 민회를 선동했다. 귀국한 가이우스는 B.C. 121년 벌족파에 쫓겨 티베르 강가에서 자살하였다. 그락쿠스 형제의 토지 분배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으나 기원전 111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대토지 소유는 계속되고 정세는 불안정했다.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B.C.73 - B.C.71) : 로마 공화정 말기에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 주도하에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 검투사는 글라디오토르(Gladiotor)였으므로 이 반란을 글라디오토르의 반란이라고도 부른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카푸아 검노 양성소에 소속된 검투사였고, 용감하고 총명한 인격자였으므로 동료 검투사들의 신임이 두터워 B.C. 73년 70여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검노 양성소를 탈출, 노예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 2개 군단을 격파하여 남 이탈리아를 석권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예제의 최성기였으므로 노예제 대농업 경영의 보급으로 몰락한 농민들도 많았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트라키아 인. 갈리아 인. 켈트 인. 게르만 인 노예들과 다수의 무산자가 이에 합세하여 반란자의 수는 12만명으로 급증하였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은 로마 정부군을 또다시 격파한 후, 북 이탈리아 포 강(江)지역으로 진군하여 여기에서 갈리아 출신 노예들을 귀향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으므로 방침을 고쳐 남진하여 세 번째로 로마 정부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로 건너가려 하였다. 그러나 해적 들과의 협상에 실패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B.C. 71년 남 이탈리아의 루카니아에서 크라수스가 이끈 로마 정부군에 패하여 스파르타쿠스는 죽고 말았다. 북쪽으로 도망간 잔당도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당하여 포로가 된 노예 6,000여명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처형당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후 전설화해 훌륭한 신체와 용맹, 인간적인 따뜻함을 가진 전형적인 남성상이 됐다.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

▶ "이탈리아를 배회하는 야수조차도 은거할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거늘,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고, 이탈리아를 위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은 공기와 햇빛을 누릴 뿐, 집도 안식처도 없이, 처자를 이끌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장군이 병사들을 싸움터에 내몰고, 그들이 싸우는 것은 적으로부터 묘소와 사당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집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제단을 가진 자 없으며,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조상이 고이 잠자는 묘소를 가진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부귀와 사치를 위해서 싸우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계의 정복자라 불리워진다 해도 그들은 한 줌의 흙덩이조차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연설〉

▶ "평민파임을 자처하면서 토지 점유자들을 내쫓기 위해 농지법들을 통과시키고자 하는 자들은 공화국의 주춧돌을 깎아 없애고 있다. 귀족은 기사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국을 수호해야 한다." 〈키케로의 연설〉

▶ 마리우스의 병제 개혁(B.C. 107)이후 로마의 군 지휘관은 징집된 병사들에게 무장을 지급하고, 전리품과 퇴역 상여금을 약속함으로써 군대를 사병화시켰다.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평민회의 결의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한때 호민관인 그라쿠스 형제는 평민회를 배경으로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나, 벌족파와 충돌하였다. 그러나 평민회도 오늘날의 민주 세력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마리우스와 술라 :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로마의 속주로 되었을 때 그에 인접한 누미디아는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 로마의 기사(상인) 계급은 누미디아의 풍부한 재물에 욕심을 내어, 기원전 111년에 누미디아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는 로마의 장군을 매수하여 로마 군에게 오랫동안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민회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용감한 장군이었던 마리우스는 유구르타의 교섭에 응하지 않고 누미디아를 격파했다. 마리우스의 부관 술라가 유구르타를 생포함으로써 누미디아 토벌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리우스는 민중들 가운데 매우 인기 높은 인물로 부상했다. 기원전 104년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마리우스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재산을 가진 자만을 군대에 입대시켰던 제도를 고쳐, 무산자도 군인이 되길 희망하면 군대에 입대시켰다. 이로 인해 군 복무 기간의 연장이 가능해졌고 군사 훈련도 보다 치밀하게 이루어져 전쟁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 마리 우스의 군사 개혁으로 로마 군은 용병으로 충원되었으며, 또한 개인의 목적에 따라 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가 대병력을 모아 로마에 종속된 민족을 부추기며 반란을 일으 켰다. 이제 노예주에게는 작금의 상황이 강력한 군사 독재자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노예제 공화국의 구제도를 군인의 권력 체제로 바꾸고자 했다. 대 노예주와 귀 족들은 술라를 독재관과 총사령관의 후보자로 내세웠으나 중류 계급과 하층민은 마리우스를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귀족당과 민주당 사이에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양파는 각기 자기들이 내세운 후보자를 당선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귀족당은 술라를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의 토벌에 나서자마자 마리우스의 지지자들이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술라는 로마를 출발하며 마리우스를 쫓아내기 위해 마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마쳤다. 미트리다테스와의 강화를 체결한 후 술라는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마리우스는 로마의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한 싸움 끝에 다음 해인 기원전 82년 술라가 로마를 점령하여 군b?독재를 시작하였다. 술라는 자기에게 반대하였던 마리우스 파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 명단에 기재된 자는 보는 대로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더욱이 살해된 자의 재산 일부를 살해한 자가 가질 수 있게 함으로써 이탈리아 전역에서 암살과 밀고 그리고 재산 몰수가 횡행하였다. 술라는 6개월의 임기에 한정된 독재관을 종신 독재관으로 바꾸고 자기가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주 제도는 폐지되고 군사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호민관의 지위는 땅에 떨어지고 민회의 권리도 축소되었다. 원로원을 600명으로 늘려 술라의 지지자들로 충당했고 재판권도 원로원으로 되돌려졌다. 술라는 로마 공화국의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노예주에게 힘을 합해 하층민의 혁명 운동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종전의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의 반항 때문에 술라의 정책은 철저하게 수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기원전 79년에 스스로 독재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 해 (기원전 78년)에 술라가 죽자 군사 독재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 제 1차 삼두 정치(Triumviri) : B.C. 60년 케사르, 폼페이우스, 크랏수스의 사이에 맺어진 사적 맹약으로 이 3인은 국정을 독점할 목적으로, 크랏수스 및 폼페이우스는 B.C. 60년의 집정관이 되고, 퇴직 후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 크랏수스는 시리아를 5년 동안 지배할 것, 케사르는 B.C. 59년의 집정관이 되고, 퇴직 후 갈리아 키살피나 및 일리리쿰을 지배할 것을 약정하였다. B.C. 54년 케사르의 딸로서 폼페이우스의 처가 된 율리아가 죽고, B.C. 53년 크랏수스가 동방에서 전사하자, 맹약은 해소되고 폼페이우스와 케사르가 대립하였는데, 폼페 이우스가 패하고 케사르에게 전권이 주어지게 된다.

◑ 크랏수스(Crassus, Marcus Licinius ;112-53 B.C.) :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 정치가로 제1차 3두 정치 때의 한 사람이다. B.C. 82년의 내란 당시 술라의 편을 들어 마리우스 파의 몰수 재산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로마 실업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B.C. 70년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여 무공을 떨쳤고, B.C. 71년 콘술이 된 후는 술라의 정치 체제에 대한 기사 신분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폼페이우스와 제휴, 원로원에 대항하여 술라 체제를 타파하였다. 폼페이우수의 동방 원정중 평민파의 지도자 케사르와 결탁하고, B.C. 60년 제 1차 삼두 정치를 하였다. 파르티아 원정군의 지휘권을 장악, B.C. 54년 메소포타미아에 침입하고, 다음 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순조로운 원정을 하다가, 카라에에서 패전하고 사망하였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케사르가 태어난 율리우스 가문은 오랜 귀족이었으나 그의 백모가 마리우스의 아내였기 때문에 민중파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선거나 인기 영합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뿌려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종신적인 대신관 외에 법무관, 에스파냐 총독을 거쳐 집정관이 되었고, 폼페이우스, 크랏수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시행했다. 1년간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기원전 58년부터 5년간「알프스 이남의 갈리 아」와 이리리쿰의 지사가 되는 것을 민회에서 승인받았다. 그는 또한 삼두 정치의 성립후 첫 아내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낳은 딸 율리아를 30살이나 연상인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뒤를 걱정할 염려없이 갈리아에 부임하였다. 3인의 실력자가 로마 정치의 대강을 정해버리자 벌족파가 지배하는 원로원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기원전 55년 케사르는 라인 강을 건너 침입해 온 게르만 인을 격멸하고 나아가 다음해 브리튼 섬(영국)까지 건너가 로마의 장군 중에서 라인 강을 건너고 브리튼 섬을 건너간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9년에 걸친 케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완전히 목적을 달성했다. 갈리아인의 ⅓은 싸움터에서 쓰러졌고 ⅓은 포로나 노예가 되었다. 케사르는 전리품과 과세에 의하여 막대한 자신의 빚을 죄다 청산했을 뿐 아니라 이후의 정치 활동과 자신의 사병(私兵·클리엔테라)을 기르기 위한 풍부한 자금을 축적했다. 케사르가 갈리아에서 정복 전쟁에 종군하고 있는 사이에 삼두 정치의 균형이 무너졌다. 기원전 54 년 케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 다음해 53년에는 크랏수스의 죽음이 알려졌다. 기원전 51년 이후 로마의 정계는 케사르의 처우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케사르는 로마에 귀환하여 성대 한 개선식을 행하고 다시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개선식을 행하려면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고,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면 관직에서 사퇴하고 한 사람의 사인(私人)이 되어야만 했으므로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케사르는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군대를 통솔한 채 다음 해의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마침내 기원전 49년 1월 원로원 회의에서「케사르는 정해진 날까지 군의 지휘권을 내놓지 않으면 국가의 공적으로 간주한다」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스키피오의 제안이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케사르는 이제 행동할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Rubicon) 강가에 도착했다. 이 강은 케사르가 군 지휘권을 가진 갈리아와 이탈리아 본국 사이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면 국법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잠시동안 케사르는 맞은 편을 쏘아보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진군 나팔을 불게 했다.「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그리스의 희극 작가 메난드로스의 대사를 읊으면서 그가 루비콘 강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자 전군도 그를 따라서 일제히 강을 건넜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그의 나이 51세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를 평정한 케사르는 그해 연말에 독재관에, 다음 48년에는 집정관에 선발되어 합법성을 취득했다. 패주한 폼페이우스는 예전에 그가 은혜를 베풀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이집트쪽 에서는 로마의 내전에 말려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폼페이우스가 상륙하자마자 살해해 버렸다. 케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폼페이우스가 이미 암살당한 뒤였다. 그 무렵 이집트에서는 13살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 나라의 관례대로 누나인 클레오파트라(Kleopatra)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불화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고 있었다. 재식을 겸비하여 남자가 좋아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케사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케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사로 잡혀 알렉산드리아 시민을 상대로 싸우는 처지가 되었다. 케사르는 그 후 2개월 이상이나 이집트에 머물며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디오피아 국경까지 갔다. 그것은 곧 신혼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집트를 평정한 케사르는 동방에 진출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향해 나아가 폰토스 서부의 제라에서 단 네 시간의 전투로 이들을 격멸시켰다. 이 소식을 케사르가 로마에 있는 자신의 벗 한 사람에게 써서 보낸 것이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단 세 마디로 무장다운 간결 명료한 표현이었다. 그가 장군이고 정치가인 동시에 일류의 문장가였다는 것은 그가 쓴 <갈리아 전기>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이 책은 자신의 업적을 서술함에 있어「나는」이라는 1인칭을 쓰지 않고「케사르는」이란 3인칭을 써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서술하고 억지로 내세우는 방법을 쓰지 않아 자신의 공적을 정확하게 명기하고 있다. 케사르는 아프리카에서 개선한 후 여러 가지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로마의 역법을 이집트에서 불러온 천문학자의 의견에 따라서 개정했다. 즉, 기원 전 45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태양력을 채용하고 1년을 365일과 ¼로 하여 4년마다 2월에 하루의 윤날을 두었다. 다음으로 이제까지 팽창했던 곡물의 무료 수급자를 정리하여 32만 명에서 15만 명으로 대폭 줄였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이나 라틴 시민권을 속주민에게 확대하여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도시 국가 로마를 넓은 영토 국가 로마로 재편시켰던 것이다.

▶ 운명의 날 - 3월 15일 기원전 44년이 되자 케사르에게는 더욱 새로운 영예가 덧붙여졌다. 그의 조상(彫像)을 로마를 비롯한 전 제국의 신전에 배치하는 것, 케사르가 태어난 달인 퀸크티리스를 그의 씨족명 율리우스로 개칭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는 줄라이(July)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공화정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독재자 케사르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케사르는 크랏수스를 패배시킨 파르티아 토벌을 위한 출정 준비를 갖추고, 로마 출발 3일 전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원로원을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3월 14일 밤, 그의 부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케사르를 껴안고 있던 꿈 이야기를 하며 원로원의 회의를 연기하도록 간청하고, 점장이 신관도 점괘가 불길하다며 회의를 연기하도록 권고했으나, 케사르는 이를 무시했다. 원로원으로 가는 도중 암살 음모를 알리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받았으나 그가 그것을 읽으려 할 때 누군가 말을 시키는 바람에 종이를 든 채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전날 '3월 15일을 조심하시오' 라고 외치던 신관을 만나 케사르는 그에게 '3월 15일인데 나는 무사하지 않소' 하자 점장이는 '아직 3월 15일이 지난 것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케사르가 원로원에 들어서자 원로원의 의사당에는 음모파 중의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죄를 범해 해외로 추방된 형의 사면을 청원했다. 케사르가 이를 거절하자 그 남자는 케사르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각기 단검을 치 켜든 40여 명의 도당이 일제히 케사르를 덮쳤다. 케사르는 몸을 돌려 칼날을 피하면서 단 한 자루의 홀 (笏)을 무기로 삼아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기울여 돌보아온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브루투스여, 그대마저도!」라고 한탄하면서 머리에서부터 옷을 뒤집어쓰고 저항을 포기했다. 쏟아지는 칼날에 찔려 전신에 스물 세 군데의 상처를 입고 그는 폼페이우스의 입상 앞 바닥을 피로 물들이면서 쓰러졌다. 케사르는 쓰러졌으나 음모파 사람들이 의도한 원로원의 권위와 공화정의 부활은 실현되지 않았다. 암살 다음날 브루투스 일파는 중앙 광장에서 전날의 행동에 대한 변명 연설을 했는데, 민중은 분노도 칭찬도 보이지 않고 침묵을 지켜 케사르에게 애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브루투스를 외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음모파와 케사르파 사이에 즉석의 타협이 성립했다. 키케로의 제안으7?원로원은 암살자들에 대 대 사면령을 내렸다. 동시에 케사르를 신으로서 존중하고 그가 통치 중에 정한 일은 변경하지 않기로 했으며 공식 장례의 거행과 유언의 발표도 인정되었다. 3월 20일의 장례 때 안토니우스는 추도 연설을 했다. 그리고 로마 시민에게 한사람당 3백세스테르케스(약 2개월 반의 임금에 해당)를 증여한 케사르의 유언을 공포했다. 뒤이어 케사르의 피투성이 겉옷이 보여지자 민중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민중은 암살자들에 대해 분격하여 케사르의 유체를 화장한 장작불을 횃불 삼아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케사르의 누이의 손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가 케사르의 유언에 따라 양자에 지명되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 옥타비아누스라고 개명했다.

▶ 부르투스의 웅변(세익스피어작 줄리우스 시저) --- 나는 케사르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나 케사르보다도 로마를 더 사랑하였노라. 나는 찢어지는 가슴 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슴을 찔렀도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로마를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 안토니우스의 웅변(세익스피어작 줄리우스 시저) --- 그때 안토니우스의 외침이 나왔다.

◑ 율리우스 력 : 로마에서는 예로부터 태음력이 사용되어 1년은 10개월이고 겨울은 없었다. 나중에 12개월이 되어 큰 달(31)이 네 번, 작은 달(29일)이 일곱 번, 28일인 달이 한 번 있었고, 1년은 355일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22일, 23일로 된 달이 삽입됐다. 1년의 시작은 대체로 지금의 3월에 해당하는 마르티우스 달이었다. 이러한 역법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무렵에는 태양력과 약 3개월이나 차이가 났다. 그리하여 그는 기원전 46년에 태양력을 채택해 로마 역법을 바꾸고 1년을 365일로 햇다. 카이사르의 이름 율 리우스(Julius)를 취해 이 역법은‘율리우스 력’이라일컬어진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이를 다시 고쳐서 지금 통용되는‘그레고리 력’이 됐다.

◑ 제 2차 삼두정치 : 기원전 43년 11월말 북이탈리아의 보노이아(지금의 포로니아)에서 호민관 티티우스의 제안에 의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회담하여 제2차 삼두 정치가 성립됐다. 3인은 권력 지배를 합법화 하여 5개년간의 독재적 권력을 얻어 일체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3백 명의 원로원 의원과 2천 명의 기사 계급에 있는 자들을 살해했다. 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립피 싸움에서 브루투스와 캇시우스의 공화파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 뒤 3인의 세력 쟁탈이 일어나 브룬디시움(B.C. 40), 타렌툼 (B.C. 37)에서 3자가 회담하여 협약을 갱신하였으나 레피두스가 탈락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대립하여 B.C. 31년 악티움 해전 결과 옥타비아누스가 단독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 레피두스(Lepidus, Marcus Aemilius ;B.C. 90?-A.D. 13) : 로마의 정치가로 시민 담당 법무관(B.C. 49),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의 총독(B.C. 48), 집정관(B.C. 46), 케사르의 기병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케사르가 암살되자(B.C. 44) 안토니우스를 지지하고, B.C. 43년 옥 타비아누스와 더불어 제2차 삼두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B.C 42년 집정관으로서 이탈리아를 관리하였다. 필립피 싸움 이후 아프리카의 지배권을 얻고, B.C. 36년 폼페이우스와의 싸움에서 시칠리아를 얻으려다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였다. 그 후 삼두 정치에서 제외되어 군대·속주의 지배권을 빼앗겼으나, 죽을 때 까지 대신관의 직위를 보유하였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속주에 세력 기반을 굳히고 있었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생겼다. 클레오파트라는 전에 케사르의 사랑을 받아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들 케사리온과 명목상의 이집트 왕이 되어 있던 막내 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4세를 데리고 로마에 왔는데 케사르가 암살당하자 급히 이집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막내 동생을 죽이고 케사리온을 왕으로 삼아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기원전 34년에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로마 동방 속주의 중요한 부분을 주었는데 이것으로 로마인에 대한 그의 배반행위가 명백해졌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선전을 포고했으나 그것은 형식상 클레오파 트라에게만 향한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 대(對)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는 9월 2일 그리스 서북안의 악티움의 해전에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는데 승패는 어이없이 쉽게 결판이 났다. 다음해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 가까이 왔을 때 안토니우스는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한 번 옥타비아누스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냉정한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녀를 포로로 잡아 로마의 개선 행렬에 끌고 가겠다는 결심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긍지 높은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포박 당하는 치욕을 받을 수 없다하여 무화과 바구니속에 숨겨져 있던 독사에게 손을 물게하여 자결했다. 이리하여 헬레니즘 동방국가 중 마지막 남은 이집트도 멸망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통일을 완성했다.

◐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B.C.31) : 로마에서 제2회 3두 정치가 붕괴된 후 B.C. 31년에동방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안토니우스와 서방 로마의 전통을 대표하는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벌어진 해전. 안토니우스는 200척이 넘는 대형선을, 클레오파트라는 60척의 요조선(橈漕船)을 거느린 데 대하여 옥타비아누스는 기동력이 있는 소형선을 이끌고 싸웠다. 옥타비아누스측의 선대가 클레오파트라의 선대의 측면에 기습 공격을 가하여 패퇴시키니 안토 니우스의 본대는 혼란에 빠져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이집트로 패주하였다. 그들의 남은 병선 300척은 불태워지고, 5천의 해병이 손실되었으며, 또 잇따른 육전에서도 이집트 군은 모조리 패배, 항복하였다. B.C. 31년 9월,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후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이 땅에 아폴론 신전을 건립하고 니코폴리스(승리의 여신의 도시)를 창건하여 전승을 기념하였다.

◑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 용의주도한 아우구스투스는 공공연히 절대 군주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케사르의 죽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애써 공화제의 형식을 지키고자 했다. 공화제의 권력 기관 (원로원, 민회, 민선 관리)은 그대로 존속되고 옛 풍속과 관습도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케사르와 마찬가지로 공화제의 중요한 직책은 혼자 다 거머쥐었다. 그는 최고사령관(임페라토르)으로서 모든 군직의 임명, 군대 모집, 선전포고, 강화 체결 등의 권리를 가졌으며 북부 에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 중요한 속주의 통치권도 장악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호민관, 집정관, 최고 신관, 감찰관 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 스투스의 통치 체제는 원수 정치 즉, 국가의 제 1 인자 프린켑스의 통치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공화제의 허울을 쓴 군주제이며 공화제의 형식을 빈 독재 권력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민중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생활 보조금의 지급과 민중 오락의 보급을 중시 하였다. 로마의 빈민 20만 내지 30만명이 곡물이나 돈을 생활 보조금으로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또 때 때로 검투사의 시합을 개최하여 민중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1만여 명의 사람과 3 천 5백 마리의 맹수들이 함께 겨루는 시합도 개최되었다. 심지어 다이바 강변에서는 3만여 명의 사람이 30척의 대형 함대와 수많은 소형 선박에 각기 분승하여 일대 해전을 벌이는 구경거리도 있었다.

◑ 로마의 중장보병과 도로 건설 : 로마 군의 주축은 평민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터지면 병사가 되어 전선에 나갔다. 이들은 무장을 모두 자비로 충당했는데, 긴 창과 양날 단검, 갑옷에 방패를 들고 무기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루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 중에는 공병도 있었다. 공병의 임무는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만든 도로는 실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로마인들은「도로는 일직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높은 산에 굴을 뚫고, 골짜기에 다리를 놓는 난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건설된 도로의 총 길이는 8만 5천km, 그 숫자는 372개에 달했다.「팍스 로마나」는 점령지와 로마를 연결하는 도로의 발달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 네로 황제(54 - 68) : 네로 황제는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권력욕이 강한 어머니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네로는 명배우를 자처하며 여러 번 직접 무대에서 연기를 하였다. 황 제 배우에게서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박수치는 일도 곤욕스러운 것이었다. 네로의 치세 동안 사회 불안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불만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6일 간이나 계속된 로마의 대화재였다. 이로 인해 로마 시의 14개 구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것은 4개 구에 불과했고 3개 구는 완전 소실, 7개 구는 그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네로가 옛 로마를 불태우고 그 잿더미 위에 다시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로마 시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로마 전역에 퍼졌다. 네로는 동생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살해했고, 권세욕이 강한 어머니도 귀찮다는 이유로 죽였다. 그는 또한 젊은 날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도 반역을 음모했다는 협의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한편 그는 급료를 인상하고 구경거리를 자주 제공하여 친위대와 도시 빈민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로마의 속주에서 제일 먼저 네로의 폭정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최초로 갈리아가 반기를 들고 그 뒤를 이어 에스파냐가 그에 합류했다. 이 때 로마에서는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원로원은 네로를 <조국의 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긍지에 몰린 네로는 로마로부터 도망치다가 도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68년)

◑ 로마의 평화(5현제시대) : 아우구스투스이래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평온한 죽음을 맞지 못했다. 음욕으로 이름 높았던 칼리굴라,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는 모두 암살 당했고, 네로는 자기 어머니를 죽였으며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다.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 당한 후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 출신인 네르바를 즉위케 했는데, 그는 지금까지의 세습제를 바꾸어 게르마니아 총독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가장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맞아 제위를 계승케 하는 관례가 이어져 연달아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등장, 로마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한다. 트라야누스는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로마 제국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치세의 절반을 속주 시찰 여행으로 보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이룬 판도를 유지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근검절약하고 공정한 재판을 행해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 즉「경건한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두 명의 양자를 지명하여 로마 제정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의 황제가 공동 통치하는 전례를 만들었다. 그 중 하나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재위 8년만에 죽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단독 집권했는데, 그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로마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는 한편〈명상록〉을 집필한 스토아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마 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관례를 깨고 친자식인 코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 능하고 타락한 정치를 펴다가 근위 사령관과 애첩의 공모로 욕실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5현제 시대에 로마 제국의 판도는 최대를 이루었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팍스 로마나」,곧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포장 도로가 사방 팔방으로 만들어져 식민지의 물자들이 활발히 이동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군사 제도는 용병제로 바뀌었으며, 이때는 100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수도관으로 늘 깨끗한 물을 썼고, 대형 목욕탕을 운영했고, 분수도 만들었다. 로마는 놀고 먹기를 즐겨 1년에 150일 정도가 공휴일, 거기에 100일은 늘 행사나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의 축제일에는 각종 경기와 흥행이 벌어졌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콜로세움)에서는 5만 명 이상의 관객이 환호하는 가운데 노예 검투사와 굶주린 맹수, 혹은 검투사와 검투사 간의 혈투가 펼쳐졌다. 이보다 더 큰 대경기장에서는 26만 명의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좁은 트랙을 달리는 요란한 전차 경주가 열리곤 하였는데, 엄청난 인파로 인하여 깔려 죽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한 흥행은 모두 정부가 주최하였다. 그 목적은 대부분 몰락한 농민 출신인 로마의 빈민들을 이러한 흥행에 몰두하게 하여, 그들의 관심이 현실의 정치, 경제적 문제에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불평 불만은 곧장 정부를 향해서 날아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로마의 빈민들은 오직 두 가지 일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으니 그 하나가 바로 투기 시합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무료로 배급해 주는 빵이었다. '빵과 흥행' 그것은 로마의 골치 아픈 빈민들을 통치하기에 더 없이 좋은 정책이었다. 찬란한「로마의 평화」의 그늘에는 수많은 노예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숨어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빵과 서커스, 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검투 경기가 무료로 베풀어지는 동안 밀가루 생산지였던 이집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 콜롯세움(Colosseum) :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 저택을 파괴한 자리에 만든 원형 경기장. 옆에 네로의 거상이 있었으므로, 중세 말기에 콜롯세움이라 일컫게 되었다. 지름이 188∼156m, 높이48.56m 이며 좌석 수는 약 5만으로, 완성된 것은 A.D. 80년이었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줄겨 행해졌으나, 전자는 400년경에 금지되고, 후자는 6세기 테오도리크 대왕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 공공 욕장(Thermae) : 로마 시대의 오락 시설의 하나로 그리스어 therme(따뜻함, 온천) 또는 thermos(따뜻함)에서 나온 말. 어원이 나타내듯이 로마 사람들은 공공 욕장의 풍습을 그리스 사람에게서 배웠다. 카라칼라 욕장이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거대한 규모는 지금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들 욕장은 수 천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고, 목욕 값은 저렴하여 서민들도 매일 목욕할 수 있었다. 목욕물을 데우는 방법은, B.C. 80년 세르기우스 오라타가 발명한 증기 난방 설비를 응용하였으며, 중앙에 있는 솥에서 물을 데워 이를 욕조로 끌어들였다. 또한 남녀 혼욕장 뿐 아니라, 욕장 내에서 산책할 수 있는 정원과 무도·강연 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목욕 풍속은 민족 이동 후에까지 남았으며, 중세에는 혼욕도 행해졌다. 교회는 이를 반대하고, 1500년 시아그리우스의 운동이 주효하여 공공욕장은 폐쇄되었다.

◑ 아우렐리우스(Aurelius Marcus: Marcus Aurelius Aantoninus ;121∼180) : 로마5현제의 한 사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랑을 받고 수사학ㆍ문법ㆍ철학ㆍ법학 등을 교육받았다. 138년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고, 그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146/7년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로부터 스토아 철학을 배웠다. 스토아적인 윤리적 엄격성에다가 로마적 순박성을 지녔으며, 또한 교양과 학문을 사랑했다. 바쁜 정치 생활과 전쟁 속에서도 틈을 내어‘명상록’ 을 기술하였다. 162∼165년 메소포타미아의 파르티아 인을 토벌하고, 166∼175년 및 177∼180년에 보히 미아, 오스트리아에 살던 마르코만니 족, 쿠아디 족, 야치게스 족 등과 싸웠는데, 그 전황은 오늘날 남아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념 조각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저서‘명상록’은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며, 독창적은 아니나 스토아 철인으로서의 그의 고결한 사상이 담겨 있다.

◑ 군인 황제 시대(Soldier Emperors, Barrack Emperors: 235∼285) : 로마 제정 말기 군대가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하고 폐위시킨 내란의 시대. 3세기 전반, 문약한 황제 세베루스가 235년 라인 강 유역의 게르만인 토벌 중 그의 병사의 손에 암살된 후,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강력한 전제 군주정이 수립될 때까지, 각지의 군대는 각자의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여 상호 항쟁하였다. 이미 2세기말 콤모두스 황제 시절, 문약에 흐르고 향락에 빠졌기 때문에 병사의 규율이 문란해져서 무력으로 원로원을 누르고 황제를 좌우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난맥상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시리아, 다뉴브 강 지방, 브리타니아의 주둔병은 각각 자기네의 지휘자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셉티 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질서가 회복된 후 카라칼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를 무사히 보냈으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 후엔 재차 질서가 문란해져 황제는 각지의 군대에 의해 자의로 옹립되었다. 이 반세기 동안에 18명의 황제(공동 통치를 합하면 26명)가 통치하였으며, 그 중 자기 수명을 다한 자는 불과 2명뿐이다.

◑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30쯤∼316년쯤) : 달마티아(일리리아 지방)의 디오클레아 태생으로 해방 노예의 아들로서 일개 사병에서 결국 누메리아 누스 황제의 친위 대장이 됐다. 누메리아누스가 암살되자 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됐다(284년). 동료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를 부황제(Caesar)로 삼고 갈리아의 바가우다이인의 반란을 진정시켰다(285년). 그 공으로 막시미아누스를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되게 해 제국의 서부를 통치케 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동부의 황제가 됐다(293년). 황제 밑에는 각각 부황제를 두어 제국의 사분 통치가 시작됐다. 각각의 부황제가 결국 제위를 잇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계자를 정해 군인 황제 시대와 같은 혼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고안된 제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원수정'(프린켑스)을 '전제 군 정'(도미나투스)으로 바꾸어 로마는 명실 공히 제정이 됐다. 그는 동양의 전제 군주적인 의례를 채택하고 황제에 대한 예배를 성대하게 해 황제의 위엄을 높이려고 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257년) 이래 탄압이 일시 중지되고 있는 사이에 기독교 교도의 반국가적인 태도가 빠르게 증가했다. 이들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 303년에서 305년 사이에 걸쳐 교회 폐쇄, 성서 파기, 이교도의 희생의례 강행 등을 명령하는 칙령이 가끔 나오는 등 기독교 교도에 대한 박해를 했다. 이는 마지막 대 박해였다. 305년 디오 클레티아누스는 병에 걸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달마티아의 살론나이로 돌아갔다. 막시미아누스도 함께 퇴위해 부황제들이 황제가 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4경-337) : 로마 황제(재위 324∼337년)로‘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이며 여관집 주부였던 헬레나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 황제를 칭하며 다투는 자가 6명이나 있었다. 그 한 사람인 막센티우스와 312년 로마의 북방 밀비우스 다리 부근에서 싸울 때 공중 에서 빛과 십자가와‘여기서 이기리라’는 문자가 나타났는데 그때 그는 '그렇다. 저건 분명 기독교의 신이 나를 도우려고 한다' 고 생각하고 곧 군사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만들게 한 후 싸움터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308년 리키니우스가 동부 제국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누이 콘스탄티아를 아내로 삼고 콘스탄티누스와 손잡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313년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는 협정을 맺고 연명으로‘종교 관용령’을 발표했다. 이것이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다.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신앙과 교단 결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교도의 복권, 몰수 재산의 반환 을 규정하는 등 다른 종교와 평등한 대우를 보장하여 교회 발전의 길을 터놓은 획기적인 문서로 콘스탄 티누스는 이를 실행하였으나 리키니우스는 무시해, 이후 두 사람은 대립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323∼ 324년 리키니우스를 해전과 육전 모두에서 격파한 뒤 처형해 버린다. 이리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갈라졌던 로마는 다시 통일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전제 군주제를 확립해 화폐 제도의 개혁, 관료 제도 정비 따위를 단행하였으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콜로누스 제도를 확립하여 소작인을 토지에 속박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으로써 로마 사회에서는 신분과 직업이 고정되기 시작하게 되어 차츰 중세적인 사회로 이행해 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는 교통과 군사의 요지이며 오래 전부터 그리스의 식민지로 번영하였던 비잔티움을 두 대륙을 통치하는 최선의 장소로 선택하여 도읍을 옮기고(330),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하였다. 그 뒤, 제국의 정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지고, 그리스(동), 라틴(서)의 양 세계가 분리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크리스트교 정책으로서,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했고, 325년 니케아에 종교 대 회의를 열어 교회 질서에 간 섭했고, 또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에 대해서는 전자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어느 누구보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베들레헴에 큰 교회당을 세웠고, 황제도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리에 교회당을 세웠다.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여 하루를 쉬게 한 것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이다. 그러나 정작 황제 자신은 죽기 직전 침대 위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교도가 되었다고 한다.

◑ 크리스트 교의 성립(33년경) : 기원전 4년경, 로마 제국의 식민지 유대 땅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예수,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었다. 예수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살았고, 아버지처럼 목수 일을 했다는 것밖에는.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30세가 되어서였다. 유대인에게는 언젠가 여호와가 보낸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종류의 당파로 갈라져 있었다. 왕 헤 롯과 사두개 인은 친 로마파였다. 사두개 인이란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상류층을 차지하는 종교 귀족을 말한다. 이들은 로마에 빌붙어 자기 한 몸의 영화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바리새 인은 중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로마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있었으나 무력을 사용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한편, 무장 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심당(젤롯당)이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로마에 대항했다. 반면, 에세네 파는 속세를 떠나 황야로 가서 금욕 생활을 했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은 에세네 파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그 어느 파와도 달랐다. 그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멸시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회개하면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제사장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신분이 낮은 비천한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려 먹고 마셨다. 그런가 하면 부와 권력을 믿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예수는 사두개 인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위험 인물이었다. 알기 쉽고 힘찬 예수의 말이 사람들을 매혹시킴에 따라 반대의 소리도 높아갔으며, 이윽고 배반자도 나왔다. 예수가 예루살렘 신전에서「채찍을 들고」상인을 내몰았을 때, 사두개 파는 특권의 침해, 수입의 감소를 두려워했다. 계율 엄수를 위선이라고 비판받은 바리새파는 격노했다. 그리고 열심당 (젤롯당)은 예수가 가르치는「하나님의 나라」가 현세의 국가가 아니고, 또한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 (Messiah)가 아닌 것에 실망했다. 사람들이 예수로부터 멀어진 기회를 틈타서 사두개 파·바리새 파는 예수의 12명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롯 유다를 매수하여 고발시켰다. 유대의 최고 평의회는 예수를 체포한 다음, 사람들을 선동하여 왕이 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위임했다(유대인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다). 빌라도는 로마 지배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는 예수를 조사하여 본 결과 실은 종교 문제의 분쟁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했지만, 사두개 파에게 선동된 민중데모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 교외의 골고다 언덕에서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으로서 '유대 인의 왕' 이란 팻말을 달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가 생각했던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온갖 고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었다. 그의 사상은 열심당의 무장 봉기나 에세네 파의 금욕 생활을 뛰어넘어 인간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죽은 후,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결속하여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형제, 자매라 부르고 기도와 식사를 함께 하고 서로 도왔다. 지도자는 예수의 사도 12인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밖에 또 교단의 사무를 담당하는 7인 위원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고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7인 위원인 스데반이 율법의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쫓겨남으로써, 비로소 유대교와 다른 크리스트교로써 자각되기 시작했다.

◑ 바울(Paulus) : 크리스트교인들은 처음에는 각지의 유대인에게 유대 교회에서 크리스트교를 가르쳤는데, 반대가 심하기 때문에 타국인에게 전도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최대의 공헌자가 바울이었다. 그는 예수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사실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크리스트교라는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 로마에 이르는 각 지역에 전후 3회의 전도 여행을 10년간 하였고, 하나님의 아들 크리스트의 죽음은「인류」의 죄를 스스로 대속한 것으로서, 크리스트를 믿는 자는 민족·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가 동포라고 가르쳤다. 신에게 선택된 민족(유대인)의 우월을 부정하는 크리스트교는, 세계적 종교로서 로마 제국 내에 뻗어갔다. 한편 유대 본토에는, 예수를 모세의 재림이라고 생각하는 민족 종교적 크리스트교(야고보·시몬 등)가 있었지만 점차 쇠퇴해 갔다.

◑ 박해 : 로마 제국의 식민지 유대에서 탄생한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 전파됨에 따라 지배자의 박해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제국의 통치에 전념하고 전통적인 다신교로 정신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입장에서 박해를 했다. 최초의 박해자로서 악명높은 네로는 이 때에 베드로(Petrus), 바울(Paulus)이 순교했다는 전설 때문에 유명해진 것 같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크리스트교를 믿는 것이 범죄라고 박해한 것은 도미티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며 조직적인 대 박해를 실행한 것은 데키우스(3세기 중반경), 아우렐리아누스(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 로마에서의 기독교 : 네로가 권좌에 앉아 있던 서기 64년 로마의 중심 가에서 원인 모를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때마침 교외 별장에 있던 황제 네로는 급히 로마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했으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에 네로는 시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투기장 등에서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던 베드로는 도중에 크리스트를 만났다. 그는 크리스트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크리스트가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 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참회하고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영화로 더욱 유명한 소설《퀴 바디스(Quo Vadis)》이다. 그런데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네로 시대에 그치지 않았다.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가던 2세기 이후 박해는 점점 심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최대의 박해가 있었는데, 칙령을 발하여(303) 교인의 집회를 금지하고,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했으며 신자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자유민인 경우 법의 보호마저 박탈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쇠퇴하기는 커녕 더욱 교세가 확장되어 갔고 마침내 국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의 사후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의 노력으로 로마 내에서 포교의 발판을 갖춘 기독교는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초기에 빈민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감에 따라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제국 말기가 되면서 정치, 사회가 혼란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신적인 공허감과 현실 도피적인 사고 방식들이 퍼져 나갔는데 이러한 상태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교세가 미약했던 초기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나 교인들이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고 병역을 거부함에 따라 기독교를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종교로 규 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도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보충하려는 의도도 작용 했다. 이런 대 박해가 행해진 것이 3세기 데키우스 황제(Decius, 249∼51) 때와 앞서 말한 디오클레티아 누스 때였다. 하지만 가장 박해가 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가 박해의 마지막이었다. 313년 콘스탄 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밀라노 칙령).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떠한 박해도 기독교를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해가 가해져도 기독교는 계속 늘어갔고 심지어 군인이나 고위 관리, 황실 인사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의 성격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발생할 당시 기독교는 압박 받는 자의 운동 형태를 띠고 있었다. 현실의 비참함을 메시아의 도래로 보상받고자 하는 민중의 심정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이 기독교였고 따라서 예수가 죽은 후의 초기 교회는 빈민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세기 말, 3세기에 이르러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까지도 현실의 정신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자 교회의 성격은 어느덧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교회는 억압하는 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신에 대한 순종만을 설교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기독교를 승인하여 그것을 다른 저항 운동에 대립시키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 삼위 일체설 : 크리스트교 기본 교리의 하나이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는데, 크리스트의 신과 인 간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동일 본체설]에 기초를 두고 이것에 성령을 부가해서 성부. 성자(예수). 성신 (성령)의 위치를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설이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서 정통파의 교의로 확인되었다.

◑ 아리우스 파 :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리우스(256-336)는 정통파의 삼위 일체설에 반대하여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예수의 동질성을 부정하고,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크 스트 교계를 뒤흔드는 논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터키의 이스닉에서의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318명의 각국 대표가 참가하여 예수의 신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아리우스는 파문되고 삼위 일체설이 정통적 교의로써 채택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 파의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전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Flavius ;346경∼395) : 에스파니아 태생으로 군인으로 무공을 세워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동부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379). 훈족의 압력에 밀려 다뉴브 강을 건너서 침입한 게르만 인의 침입을 무력과 화해로써 극복하였으며, 그 일부를 다뉴브 남쪽 연안에 동맹자로서 정주시켰다. 383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후, 서부 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394년 전 제국을 통일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회 종교 회의를 개최하여, 앞서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바 있는, 아리우스 파 교의의 금지와 아타나시우스 파 교의의 승리를 확정시켰고, 391년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교를 엄금했으며, 393년에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시켰다. 죽기 직전, 제국을 한 사람의 황제가 통치하는 것이 곤란함을 느껴,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동로마 제국)와 호노리우스(서로마 제국)에게 분할하였다.

◑ 콜로누스 : 콜로누스는 제정 말기 지주에게 예속된 농민을 의미한다. 콜로누스는 노예보다는 상위에 있지만 이전 의 자유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였으며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농장주에 대한 예속성이 매우 강했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로웠으나, 332년 칙령에 의해 이동의 자유가 없이 거의 토지에 매어 달린 노예가 되었는데, 이는 중세 농노의 선구가 되었다. 노예와 자유 농민의 중간적 지위를 가진 부자유 농민이었다.

◑ 서 로마 멸망(476) :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를 4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그 자신은 제국 동쪽의 황제가 되고 수도를 니코메디아에 두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둔 것처럼, 로마 제국의 경제적 중요성은 동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두 아들에게 제국을 이분해 주었을 때도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동 로마를 주고 차남 호노리우스에게는 서 로마를 주었다. 제국이 이분된 뒤에 서로마는 약 80년간 계속되어 약 10인의 황제가 뒤를 이었으나 그 권력은 허약했다. 서 로마가 알라릭이 지휘하는 서고트족(410), 가이세르크 왕 휘하의 반달족(495)에 점령되고, 이때 서 로마 제국을 지킨 것은 게르만 출신의 사람(반달인 스틸리코, 서고트인 리키메르 등)이었다. 서 로마 제국의 실권을 장악한 리키메르가 세 사람의 전제 군주(마요리아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를 차례로 죽인 후, 네포스가 일어났으나 오레스테스에게 폐위 당하고 서 로마 마지막 황제 로몰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475년 아버지 오레스테스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는 게르만 족 출신으로 안테미우스 황제 때(470년) 라벤나에서 서 로마 황제의 친위병이 됐다. 게르만인 용병들은 이탈리아에 확고히 정주할 것을 요구하며 오도아케르를 왕으로 추대했으며 로물루스는 폐위되어 캄파니아로 유배됐다(476년). 소멸해 가고 있던 서 로마 제국의 불꽃은 완전히 꺼졌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로마가 같은 이름의 황제 때에 멸망한 것은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오도아케르는 황제위를 나타내는 표장을 동 로마 황제에게 반환하고, 동 로마 황제는 그를 제국 서쪽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는 로마 제국이 다시 통일되었다는 형식이지만, 사실은 서 로마 제국의 멸망이었다. 동 로마 황제 제노(재위 474∼491)는 그 무렵 동 로마를 괴롭히고 있던 동고트 족을 쫓아내기 위해 서 로마를 지배 아래 둘 것을 노리고 동고트의 테오도리크를 시켜 이탈리아를 공격하게 했다.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리크 군에게 잘 저항했지만 493년에 암살당했으며, 테오도리크가 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 만민법(萬民法 - Jus Gentium) : 시민법(ius civile)은 시민 공동체에 소속한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다. 한편, 만민법(iusgentiu- m)은 도시 국가 로마 이외의 이탈리아 인, 속주인 등 로마 제국 영내에 사는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법으로서, 서로 다른 고유한 전통을 포섭하여 형평과 신의를 모든 민족에게 공통되는 원리로 하여 제정 되었다. 이는 시민법이라는 특별법에 대응하는 보통법이며, 일반적 보충적 관계에 서서 로마인의 생활을 규제하였다. 로마의 정복 사업이 진전됨에 따라 이 법은 더욱 발달하여 제정 시대에 들어와서 전 자유 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자 시민법보다도 만민법이 로마법의 실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 때부터 만민법의 명칭이 없어지고 자연법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만민법의 근원은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여러 민족들 사이에 행하여졌던 씨족 사회의 관습에 기원했는데, 뒤에 가서는 세계 각국의 관습 중 특히 그리스의 관습이 중시되었다.

◑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 ;106∼43 B.C.) : 로마의 웅변가, 정치가, 철학자로 아르피눔의 기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수사학ㆍ철학ㆍ법률을 배웠는데 당시의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날로 격화되어 가는 상태여서 출세의 길은 웅변술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 길을 택했다. B.C. 81년 최초의 변론「퀸투스를 위하여」로써 로마 일류의 변호사 호르텐시우스와 싸웠고, 이듬해 로스키우스를 변호하여 반 술라적인 태도를 밝혔다. 그후 건강과 수사학 연구를 위하여 아테네, 소아시아, 로도스 섬을 여행한 후 B.C. 76년 로마에 돌아와 로마에서 손꼽히는 웅변가가 되었다. B.C. 51년 집정관으로서 킬리키아로 갔다가, 로마에 돌아왔을 무렵은 케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무력 충돌이 발발한 때였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으나, 파르살로스 싸움에서 패배하였고, B.C. 47년 케사르의 사면을 받았다.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고, 철학ㆍ윤리학ㆍ법학 등을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B.C. 46년 카토(소)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케사르와의 불화를 가져왔다. 케사르가 암살된 뒤에 다시 정계에 복귀, 공화 정치의 부활을 위해서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그런데 제 2차 삼두 정치의 출현으로 그의 발판이 없어졌고, 결국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정치적 지조는 비난받을 만한 데도 있으나, 위대한 웅변가로서, 또 그리스 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고전 문 화에 대하여 이룩한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주요한 저작으로‘국가론’‘법률론’‘의무론’등이 있으며, 또한 그의 연설로서 현존한 것이 58편이 있다.

◑ 베르길리우스(Vergilius Maro Publius ;70-19 B.C.) : 로마 최대의 시인으로 그의 일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통일과 번영의 시대에 해당한다. 이탈리아의 만토바 근처에 있는 안데스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크레모나, 밀라노에서 교육을 받고 로마에서 철학과 수사학을 수학하였다. '농경가' 에서 농사·과수 재배·목축·벌치기 등의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에피소드에 가득 찬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또 그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아에네이스' 는, 아에네이스의 표류와 라티움을 점령하려고 하는 트로이 인의 용감한 싸움을 노래하였는데 호메로스 를 모방한 데가 있으나, 로마인의 국민시임에는 틀림없다. 『아에네이스(Aeneid)』는 전 12권으로, 로마 건국 신화를 노래한 장편 서사시로 종교적·국민적 경향, 극적인 행위, 현상에 대한 심리적·정신적인 내면화, 성숙된 언어 구사 및 세련된 시의 형식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낌을 받아 궁정 시인의 자격이 주어졌다. 만년에 그리스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메가라에서 죽어 한때 은거했 던 나폴리에 묻혔다.

◑ 에픽테토스(Epiktetos ;60?∼140?) : 제정 시대의 철학자로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의 노예 출신으로, 해방되어 로마 및 니코폴리스에서 가난한 철학 교사가 되었다. 저작은 없고,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가 그의 연설을 속기로 기록한 것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그의 목표는 윤리적 인격의 육성에 있으며, 이를 위하여 금욕적인 육체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이 담겨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영향을 주었다.

◑ 리비우스(Livius, Titus ;B.C.59∼A.D.17) : 로마의 역사가로 파타비움에서 출생.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친교를 맺었으며, 로마 건국에서 B.C. 9년 드루수스의 사망까지를 서술한 '로마서’를 저술하였다. 총 142권 중 현재 처음의 10권(B.C. 293년∼제3 삼니움 전쟁)과 21∼45권의 25권(제2 포에니 전쟁∼마케도니아 정복)의 35권만이 남아 있다. 그는 서술 형식을 중시하는 시대의 풍조를 좇아 전승적 소재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기에 힘썼으며, 사료 비판에 의 한 객관적 사실을 연구하는 과학적 역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로마적 감각과 도덕을 찬미하고, 낭만적 입장에서 과거를 이상화하였다.

◑ 플루타르코스(Plu-tarchus ;46?∼120?) : 로마 제정 시대 그리스의 역사가로 아테네에서 배우고, 케로네아의 사자로서 로마에 가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가장 저명한 작품은‘영웅전’으로 그 중 46편이 남아 있다. 그리스, 로마의 영웅, 저명 인사 중 비슷한 사람을 골라 그 도덕성ㆍ심리ㆍ업적 등을 비교하면서 평가하였다. 또 통속적인 철학 논문을 썼으나 오늘날 그것은‘윤리’로서 총괄되어 있는데, 어린이의 교육, 스토아 철학의 모순, 건강론 등 일반적인 문제를 논하고 있다.

◑ 로마의 미술 :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의 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가장 로마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건축 분야이다.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 건축은 외관의 미를 추구한 그리스 건축과는 달리 거성에 기초를 두고 내부 공간의 충실화를 기하였다. 로마의 건축은 기둥과 들보로 이루어진 그리스 건축과 에트루리아의 분묘나 성문에 사용한 아치형식 또는 궁륭식을 채용함으로써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분말로 된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을 도입함으로써 거대한 건물의 건조를 가능하게 했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건축은 먼저 두 가지 기능적인 면에서의 구획이 가능하다. 하나는 실용에 입각한 건축이며, 또 하나는 실용성보다는 기념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컨대 주거 공간이라든가 공공 건축물은 실용 건축인 반면, 기념주나 기념물은 어느 특정한 사건이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1. 동아시아 문화권의 성립

(1) 북방 민족의 중국 진출

◑ 중국적 천하 질서

◆ 천하관(天下觀) : 황제는 하늘의 뜻을 받은 하늘의 아들(天子)이므로 하늘 아래의 모든 땅은 천자가 다스려야 하며 천자의 통치는 덕(德)을 가지고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그 덕이 구체화 된 것인 위세(威勢)도 아울러 사용한다. (덕은 중국의 문화를, 위세는 이에 수반되는 군사적인 힘을 의미한다.)

◆ 화이사상(華夷思想) : 문화를 기준으로 하여 중국과 그 이외의 나라를 구분(차별)하여 지역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 戎) 남만(南蠻), 북적(北賊)으로 일컬었다.

◆ 조공(朝貢) : 화이 사상이 정치적으로 제도화된 것으로 조공 질서란 원래 중국 고대의 주(周) 왕조의 봉건 체제 의 일부를 일컫는 말로 봉건 영주들은 자기 지역 내의 통치권을 갖고 있으면서 주왕에게 토산물을 바치고, 병력을 보내고, 중요한 의식에 참여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 왕실에 대신 지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었다. 본래 주 왕실의 정치 질서였던 조공 제도는 중국의 문화가 발전되고 중국의 힘이 확대되면서 주변 지역과의 정치적인 관계로 바뀌어 갔다.

◆ 천하 질서의 네 층

▷ 황제의 나라-중국 자체

▷ 내번(內藩)-자치는 하되 주권을 갖지 못한 채 중국 법률 제도의 직접적인 작용을 받음. (청대의 몽고, 티벳)

▷ 외번(外藩)-독립 국가로서 독자적인 법률 제도는 갖고 있으나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조공을 바치고 중국이 정한 역법과 연호를 사용한다.(조선, 베트남)

▷ 외이(外夷)-실질적으로 중국적 천하 질서에 속하지 않는 나라들이지만 중국인들이 관념적으로 조공으로 간주하였다.

◑ 중국의 과거제도

▼ 향거리선제 : 후한의 선거 제도는 향촌 공동체의 질서 원리를 기초로 한 것이고, 유가적 이념에 의해 한제국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효렴(涍廉)을 비롯한 현량(賢良), 방정(方正) 등 과목에 적합한 인재를 향론에 의해 추천하고, 이들 유덕자들이 관료로서 국정을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한 외척·환관은 그들의 파당과 빈객을 지방관으로 임명하고, 선거는 뇌물 거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만연되어 갔다. 이러한 선거의 문란이 격화되어 가는 속에 선거가 공평하게 운영되지 않는 것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으며 중대한 정치 문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지식인 사이에서 현자(賢者)의 등용 문인 향거리선을 준수하라는 소리가 높아지고, 동시에 이는 향촌 사회의 세론인 향론과 결부되어 외척, 환관 정권에 대해 준열한 비판과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지식 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러한 여론이 청의(淸議)이다.

▼ 9품 중정제(九品中正制一九品官人法) : 9품 중정제는 위가 건국한 220년에 상서인 진군의 건의로 실시된 추천에 의한 관리 선발 제도이다. 이 해는 조비가 후한을 선양(禪讓)에 의하여 찬탈한 해로서, 이 법을 실시한 동기는 후한 시대의 관직 등용이 외척이나 환관 등에 의해 극도로 문란하였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으려는 데 있었다. 각 주와 군에 중정관을 두고 그들로 하여금 지방의 청년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중정관은 현지 사정에 밝은 그 지역 출신 고관이 임명된다. 각 지역의 중정관은 관할 지역의 향론을 살펴 덕망이 있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을 9품으로 분류하였다. 지방에서 추천된 향품에 따라 중앙에서는 관리로 임명하는 관품을 주었는데, 향품에서 4품을 내려 관품을 제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제도의 정신은 향론에 따라 덕망과 재주를 겸비한 인물을 추천으로 선발하려고 한 것이므로 그 취지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이미 호족 세력이 지방의 여론을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호족의 자제가 상품(上 品)에 추천되어 고위 관직을 독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9품 가운데 제1품에 추천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호족은 보통 제2품에 추천되었으므로 문지 2품(門之二品)이란 말이 유행하게 되었고 여기에 호족과 관품이 밀착되면서 가문을 중요시하는 문벌 귀족이 탄생되었다. 9품 관인제는 진(晋)을 거쳐 남조와 북조에서도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그대로 존속되어,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벌 귀족의 형성에 큰 작용을 하였다. 한대의 추천과 시험을 병행하던 향거리선제에서 9품 관인제으로의 전환은 가(家)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한대의 향촌 사회가 붕괴되고, 위·진·남북조 시대의 가문과 문벌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가족 사회로 전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대의 백성은 가(家)에서 곧바로 국가의 관인(官人)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종족의 추천을 얻어야만 국가의 관리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는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하던 한대의 향촌 사회 구조에서 능력보다는 가문이나 문 등 종족의 배경을 중요시하던 호족 사회 체제로의 역사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9품 관인제는 국가가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고 국가는 다만 호족이 정한 향품에 따라 관품을 승인한 것에 불과하다.

▼ 선거 제도 : 수 문제는 관리 후보자의 추천제인 9품 중정제를 폐지하고 직접 임용시험을 쳐 관리를 선발함으로써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의 기초를 갖추었다. 이는 호족에 대한 황제의 지배권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며 과목 시험이었으므로 신분·가문과 관계없이 개인의 능력을 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 당(唐)대의 과거 제도 : 당대의 과거 제도는 그 목적이 황제권의 강화였지만 실제로는 귀족들의 강한 견제가 있었다. 당대 초기에는 시험·임관 모두, 이후에는 시험이 예부로 이관되어 임관을 맡은 이부(吏部)는 당대 귀족들의 소굴이 되었다. 특히 이부의 전시(銓試), 즉 과거에 합격한 진사가 실제 관직에 들어가기 위한 채용 시험이 매우 어려워서 빈한한 진사에게는 쉽게 합격할 수 없는 身(외모), 言(언어), 書(필적), 判(소송 판정의 물음)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 송(宋)대의 과거 제도 : 송대가 되자 형세는 일변하였다. 그 발단은 전시(殿詩)의 등장이며 전시 합격 즉 임관의 새로운 통로가 열린 것이다. 태조 때 낙제자의 항의가 발단이 되어 부정을 바로 잡기 위해 태조 자신이 강무전에서 재시험을 치른 것에서 비롯되어 비로소 과거의 3층제가 완성되었다. 즉, 제 1단계를 해시(解詩:州試), 제 2 단계를 성시(省詩:예부시)라 하고, 해시 합격자를 거인(擧人)이라 불렀다. 성시 합격자가 다시 제 3단계인 궁중에서 시행하는 전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었다. 이 제도는 유력자가 관계에서 세력을 부식하는 것을 방지하고 관료란 황제가 직접 뽑은 문생(門生), 이른바 부하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로써 황제의 지위는 절대적인 것이 되어서 이른바 황제 독재 체제가 확립되고 과거 출신의 문관 우위사회가 성립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이 수대에 시작되어 송대에 완성을 본 과거 제도는 청말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간 시행되어 중국의 정치·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 과거 제도는 청말 입헌 군주 의 채택을 결정한 광서 신정(광서 변법) 때 폐지되었다.

◑ 삼국(三國) : 후한 말에 황 건의 난을 제기로 군웅들이 각지에 할거하였는데, 이 중에서 천하를 3분하는 형세를 이 룬 위(魏)·오(吳)·촉(蜀)을 삼국이라 한다. 삼국 시대란 위의 건국(220)으로부터 진(晉)의 사마 염이 통 일(280)할 때까지를 말한다. 삼국 시대 약 60년간에 걸친 무력 항쟁은 중국 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어 산업의 발달이 억제당하였고, 또 인구의 감소를 가져왔다. 그 반면 각국이 다투어 부국 강병책을 썼으므로 변방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위는 만주 지방에, 오는 인도차이나 지방에, 촉은 윈난 지방에 영토를 확대하여 중국의 판도가 넓어지게 되었다. ▶ 위(220-265) : 조 비(曺丕)가 건국하였으나 그 아버지 조 조 때에 이미 기반이 닦여 있었다. 조 조는 후한 때에 정치적 실권을 독차지하였고, 위 왕에 봉하여져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뒤를 이은 조 비가 후한의 헌제를 강박하여 왕위를 빼앗고, 위를 세워 뤄양에 도읍을 하였다. 위는 3국 중에 서 가장 강력하였으며, 랴오뚱을 병합하고 촉의 침입을 막았으나, 신하였던 사마씨(司馬氏)에게 실권이 넘어가 265년 사마 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위의 정책으로서는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 특히 둔전 제·구품 중정법이 그것들이다. ▶ 오(229-280) : 건국자는 손 권(孫權). 그는 창사 태수의 아들로서 강남에 자리잡고, 촉의 유 비와 손 을 잡아 적벽 싸움(208)에서 조 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3국의 정립을 확립시켰다. 220년 위나라가 흥하자 처음에는 이에 따랐으나, 229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오(吳)라 하고 건업(建業)에 도읍하였 다. 손 권이 제위 23년으로 죽은 이후 진(晉)의 무제에게 멸망되었다. ▶ 촉(221-263) : 촉한(蜀漢)이라고도 한다. 유 비가 제갈 양 등 명신의 도움을 받아 쓰촨(四川)지방에 세운 나라인데, 도읍을 청뚜에 두었다. 촉은 3국 중 가장 약하였으나, 위·오와 더불어 천하 3분에 성공 하였다. 유 비가 죽은 후에도 제갈 양은 어린 왕, 유 선을 도와 내정을 돌보고 정복 사업으로 국력을 키웠으나, 그가 병으로 죽은 뒤,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위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 유 비(劉備 161-223) : 삼국 촉한의 건국자. 소열제(昭烈帝). 전한의 경제의 후손이며, 자는 현덕(玄德)이다. 황건의 난 평정에 종군하였다. 온후한 성격과, 두터운 정의, 치밀한 책략 등으로 군인·사대부들의 신망을 얻어, 후한 말의 군웅 할거의 국면을 이용, 조조 타도의 모의에 가담, 조조를 한실의 조적(朝賊)이라 불러 한실의 부흥을 필생의 임무로 삼았다. 제갈 양을 삼고(三顧)의 예로써 맞아들여, 천하 3분의 계책을 세워, 조 조의 대군을 손 권과 동맹하여 양쯔 강의 적벽에서 대파하고(219), 청뚜의 유 장을 공략하여 익주를 빼앗았으며, 장 노를 쫓아 한중에서 위군을 격파하여 한중왕(漢中王)이 되었다(219). 조 비가 한 왕실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오르자, 이듬해 청뚜에서 제위에 오르고 제갈 양을 승상으로 삼았다. 형주의 영유 문제로 손 권과의 동맹이 깨어져 오와 싸우다, 용장 관 우를 죽인 오를 친정하러 나가서 육 손에게 패배하여 백제성으로 패퇴, 제갈 량에게 아들 유 선을 부탁하고 죽었다.

◑ 조 조(155-220) : 위(魏)의 실제적인 창립자. 후한의 환관 조등의 양자 숭의 아들. 자는 맹덕. 20세에 효렴에 천거되어 낭이 되고, 황건적 토벌에 공이 있었다. 군벌인 동 탁이 뤄양에 들어와 소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워 전횡을 했으므로, 원 소를 비롯한 여러 군웅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동 탁과 싸웠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연합 이 해체되자 동군(東郡)을 근거로 삼아 독립하여 연주를 평정, 황건적의 잔당을 토벌하고, 그 병력을 수중에 넣어 세력을 떨쳤다. 그 무렵 헌제가 장안으로부터 옮겨오자, 이를 맞아 천자를 업고 천하를 호령하고 둔전(屯田)을 일으켜 부국 강병책을 썼다. 또한 기주의 원 소(袁紹)와 관도에서 싸워(200) 이를 격파하고 중원 통일의 기초를 굳혔는데, 적벽 싸움(208)에서 손 권과 유 비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천하 3분의 형세가 되었으나 중원의 주도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한(漢)의 승상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위왕으로 봉작되어 업( )을 서울로 정하여 위왕국의 정부를 세웠다. 그의 아들 조 비가 헌제를 폐하고 위 왕조를 창건한 뒤에,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로 시호되었다.

◑ 5호 16국(5胡16國) : 5호란 진(晉)말에 일어난 8왕의 난(300-306)에 의하여 혼란에 빠진 중국에 차례로 침입하여 온 북방 민족들, 즉 흉노(匈奴)·선비(鮮卑)·갈(?)·저( )·강(羌)의 다섯 민족을 가리킨다. 그들은 약 130년간에 걸쳐 중국 북부에서 16개의 왕조를 세웠으므로 5호 16국이라 한다. 이들 이민족은 일찍이 후한 말 삼국 시대에 이미 중국 내지에 이주하여 한민족과 섞여 살았으며, 그 일부는 농업을 영위하기도 하였다. 진(晉)왕조의 통제력이 약화됨을 기화로, 304년 흉노의 추장 유 연(劉淵)이 산시에서 독립, 316년 그 아들 유 총이 진 왕조를 멸한 이후 중국 북쪽은 분열 상태에 빠지게 되고, 5호가 각지에 할거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전진이 한때 중국 북부를 통일하였으나, 동진에게 패하여(383), 통일이 와해되었다. 다음으로 선비의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북위가 점차 강력하게 되어 주위의 여러 나라를 병합, 439년 다시 북부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5호 16국의 혼란은 끝나게 되었다. 이 동안 북부 중국은 전화로 황폐해지고, 유민이 증대되어 강남에 이주하는 사람이 많았고, 농지도 황폐해져서 사회·경제는 극심한 혼란 상태를 가져오게 되었다.

◑ 8왕의 난 : 291년부터 306년까지 16년에 걸쳐 벌어진 서진(西晉)의 내란. 서진은 무제의 사후 혜제가 제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무제의 황후였던 양(楊)씨의 일족과 혜제의 황후 가(賈)씨의 일족이 정치의 실권을 다투고, 여기에 사마(司馬)씨가 말려들어 8왕의 난이 일어났다. 8왕이란 여남왕(汝南王) 양(亮), 초왕(楚王) 위 (瑋), 조왕(趙王) 윤(倫), 제왕(齊王) 경, 장사왕(長沙王) 예(乂), 성도왕(成都王) 영(潁), 하간왕(河間王) 옹 ( ), 동해왕(東海王) 월(越)을 말한다. 양·가의 양씨와 8왕은 차례차례 흥망을 되풀이하여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으나, 306년 회제의 즉위로써 끝이 났다. 이 난 동안에 8왕은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기 흉노·선비 등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의 중국 침입을 초래하여, 마침내 5호 16국의 난을 일으키는 결과가 되었다.

◑ 선비(鮮卑) : 남만주에서 몽고 지방에 걸쳐 살았던 유목 민족. 몽고, 퉁구스계에 속한다는 것이 통설이나, 최근에 와서 그들의 언어를 터키 어로 해석하려는 설도 대두되고 있다. 흉노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들의 세력이 쇠약하여지자 후한과 결탁하여 동남으로부터 이들을 공격한 일도 있다. 흉노가 멸망한 후는 그 잔존 세력과 몽고 제 민족을 정복하고, 2세기 중엽에는 단석괴(檀石槐)를 수장으로 국가를 건립하였고, 내몽고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쳐, 북으로는 정령족과 대립했고, 남으로는 후한을 침공했다. 그러나 단석괴의 사후, 우문·모용·단·걸복·탁발·독발등의 여러 부족으로 분열하여 각각 중국 문명을 받아들였다. 5호 16국 가운데의 전연·후연·서연은 모용부, 서진은 걸복부, 남량은 독발부가 세웠던 나라이다. 그 뒤 탁발부가 북중국에 들어와 장성 지대와 북중국 전토를 영유하고, 북위(北魏 : 386∼534)를 세워 북조의 기틀을 닦았다.

◑ 저(氏) : B.C. 2세기경부터 위수 상류지방에서 쟐링 강 상류 지방에 산재했던 민족. 처음 소집단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3세기초 무도(武都)ㆍ약양(略陽)을 중심으로 양씨ㆍ부씨ㆍ여씨 등의 호족이 대두하여 5호 16국 시대에 활약하였으며, 전진(前秦)ㆍ성한(成漢)ㆍ후량(後凉) 등이 나왔다. 그러나 수대부터 민족으로서의 독립성을 잃고, 한족에게 가리어 그 이름은 단편적으로 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 갈(?) : 2∼3세기경 산시성 유사현 지방에 들어와 4세기의 5호 16국 시대에 중국을 휩쓴 흉노족의 일파. 당시 이 지방을 갈실(室) 혹은 갈이라고 하였으므로 갈종(種)의 이름이 나왔다고 한다. 5호 16국의 하나인 후조(後趙)는 이 갈종이다.

◑ 유연(柔然) : 북흉노가 한의 압박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한 뒤, 그 땅을 차지한 것은 선비족이었다. 그러나 이 선비도 4세기 이래 중국으로 남침하여 본거지 몽고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이 틈을 타서 일어난 것이 몽고계의 기마 민족 유연(Avars)이다. 유연은 4세기말에는 전성기를 맞이하여서는 천산, 동은 한국, 북은 바이칼 호, 남은 고비 사막에 이르는 큰 나라를 세웠다. 그들은 남조와 손을 잡고 북위를 배후에서 위협하였으므로, 북위가 수차에 걸쳐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유연도 6세기초에는 쇠하였다.

◑ 토곡혼(Tuyuhuen; 吐谷渾) : 유연과 거의 같은 시대에 청해지방에 일어난 것이 티벳계의 토곡혼이다. 그들은 강족이 중국에 침입한 뒤 그 땅을 차지하였는데, 유연과 함께 남조와 손을 잡고 북조를 압박하였다. 서역과 남조 사이에 중계 무역에 의하여 번영하다가 수 양제·당 태종의 토벌을 받아 망하였다.

◑ 에프탈 : 6세기초 유연이 쇠할 무렵 중앙아시아 방면에 에프탈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란계 민족으로서 처음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부에 있었으나, 그 뒤 북상하여 5세기 중엽에는 간다라, 5세기말에는 동투르키스탄으로 진출하였다. 그 세력은 대단히 강하여, 북은 돌궐, 동은 코오탄, 서는 페르시아에 압력을 가하여 40여 국의 조공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돌궐에게 망하였다.

◑ 돌궐 : 유연의 쇠퇴는 에프탈의 북진에 좋은 조건을 부여하였고, 그 지배 아래 있던 돌궐(Turkit)의 발흥을 촉진하였다. 돌궐은 남북조 시대 중엽에서 당 초에 이르는 동안 몽고 고원과 알타이 산맥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투르크 계의 유목 기마 민족 또는 그들이 지배한 국가명을 일컫는다. 투르크 종족은 B.C. 3 세기 말엽부터 정령(丁零)·고차(高車)·철륵(鐵勒) 등의 명칭으로 중국 사료에 나타나 있다. 처음에는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6세기의 중엽 서위의 후원아래 유연을 멸하고 오르콘 강 근방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 돌궐은 그 뒤 더욱 강대해져 사산 조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어 동투르키스탄의 에프탈을 멸하고, 이어서 멀리 로마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어 페르시아를 협공코자 하였다. 이리하여 돌궐은 북은 시베리아, 남은 중국, 동은 만주, 서는 페르시아에 접하는 유목민족 미증유의 큰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돌궐도 581년 이후 내분이 일어나 동서로 갈라져 동돌궐은 내, 외몽고, 서돌궐은 일리 강을 중심으로 한 서투르키스탄을 차지하였다. 수는 동돌궐과 화친을 맺어 서돌궐에 대항하였다. ▶ 동돌궐 : 당은 동돌궐의 힘을 빌려 나라를 세웠던만큼 항상 그들의 멸시를 받았다. 동돌궐의 오만한 태도에 이 를 갈고 있던 당 태종은 동돌궐에 내분이 일어나 철륵 제부족의 이반함을 보자, 철륵 제부족 가운데서 도 가장 강한 시르타르더스(Syrtardus, 설정타)와 손을 잡아 동돌궐을 쳐부수고, 시르타르더스가 강성해지자 이번에는 시르타르더스에서 이반한 위구르(Uyghur)와 손을 잡고 이를 쳐부셨다. 이리하여 당 태종은 연연도호부를 두고 내외몽고를 지배하였다. 고종때에는 다시 위구르를 쳐 위구르 영내의 오르콘 강 근방에 안북도호부를 두어 외몽고를 지배하고, 내몽고의 운중에 단우도호부를 두어 내몽고를 지배하였다. 이리하여 동돌궐의 전지역은 당의 손아귀에 들어 갔다. 그러나 7세기 이후 당의 국내에 동요가 일어나자 다시 동돌궐이 일어나 716년에 즉위한 빌게(Bilge)와 그의 동생 퀼테긴(KulTagin) 시대에 강대 해졌다. 1889년에 발견된 오르콘 비문은 이 두 사람의 공적비로서, 이에 의하여 동돌궐이 북방민족 최초의 문자 사용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동돌궐도 퀼테긴이 죽은 뒤 쇠하여 망하였다. ▶ 서돌궐 : 서돌궐도 그 뒤 내분이 일어나 동부·서부로 나뉘어 서로 싸웠다. 당태종때 서부의 중신 하노(賀魯)란 자가 망명해 f?태종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태종이 죽으매, 그 부하를 이끌고 탈라스(Talas)방면으로 달아나 당에 배반하고 자립하여 샤프라가한(可汗)이라 일컬었다. 그는 그 뒤, 서돌궐 제부족을 통일하여 서역 제국을 지배하는 큰 세력이 되었다. 이에 당의 고종은 그와 사이가 좋지 못한 진주엽호가한과 손을 잡고 샤프라가한을 멸하였다(657). 이리하여 당의 세력은 드디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투르키스탄까지 미쳐 661년 토하라(Tokhara)에 기념비를 세웠다. 당은 중앙아시아에 8 도독부를 두어 통치하고, 이를 다시 동투르키스탄의 쿠차(Kucha)에 설치한 안서도호부로 하여금 통할하게 하였다.

◑ 위구르(Uighur, 回紇) : 서역으로 뻗쳤던 한인의 세력은 8세기의 중엽이후 차츰 후퇴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는데, 이 후퇴를 더욱 결정지은 것은 9세기 중엽의 위구르의 동투르키스탄 점령이었다. 위구르는 외몽고 셀렝가(Selenga)강 유역에서 일어난 터어키계의 유목 기마족으로서, 744년 동돌궐을 물리치고 서방의 카르루크부족에 대항하면서 내외 몽고를 통일하여 갔다. 당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위구르에 구원을 청하여 겨우 이를 진압하였다. 그 이후 위구르는 당을 업신여겨 공물과 공주를 바치게 하였다. 그 뒤 약 100년 동안 위구르와 당의 내왕은 빈번하여 위구르는 말을 보태고 당은 비단·옷감, 기타의 생필품을 보냈다. 호시(互市)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위구르에게 유리하였던 모양인데, 이렇게 위구르를 교사한 자는 지금의 사마르칸드 방면에 있던 교활한 소그드인(Sogdians)이었다 한다. 어떻든 위구르인이 소그드인과 교섭을 갖고 있 는 동안에, 소그드인 사이에 유행되고 있던 마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위구르도 내분이 일어나 쇠하더니, 840년경에 투르크계의 키르기스(Kirgis)의 공격을 받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 위구 르의 일부가 천산 산맥의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투르판을 빼앗고, 이어서 쿠차를 함락시켜 별안간에 서 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위구르의 서역 점령은 동양 역사상 두 개의 의의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이란계 민족의 거주지였던 서역이 투르크 계 민족의 거주지로 되어, 이 지방을 오늘날 터어키라 일컫는 원인을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유목 생활을 하던 투르크인이 농경 생활을 하게 된 일이다. 유목에서 정착 생활 로 옮아간 위구르는 닥치는 대로 주위의 고도의 문명을 흡수하였다. 중국식의 달력을 만들고 중국식의 돈을 만들어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마니교 이외에 불교를 숭상하고, 페르시아·티벳의 불전을 위구르 문자로 번역하여 인도·티벳·페르시아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10세기경에는 이슬람교가 위구르인 사이에 널리 퍼져 오늘날 중국인이 이슬람교를 회교라 일컫는 원인을 만들었다.

◑ 토번(吐蕃) : 아라비아의 동진을 저지한 것은 토번의 서역 진출과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잔여 세력이었다. 토번은 중국에는 저족, 강족으로 알려진 티벳계의 민족이 지금의 티벳 지방에 세운 나라로, 스롱 쓰안 감 포 (Sronbtsam sgam po, 617∼650)왕 때에 라싸에 도읍하고, 당의 공주를 맞아들여 왕후로 삼고, 중국·인 도의 문명을 받아들여 독특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 돌궐은 당 태종의 일격을 받았으나, 즉시 회복하여 고종 때에는 청해 지방을 점령하고 안서 4진을 함락시키고, 중국의 사천·감숙에도 진출하였다. 토번의 전성기는 티스론 떼스안(걸립찬, 755∼797) 때인데, 그는 당의 안사의 난때에 당으로 쳐들어가 장안을 함락시켰다. 즉시 당의 반격을 받아 물러갔지만, 토번의 하서·용우의 점령은 당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 었었다. 또 그는 불교를 일으켜, 이 결과 인도승으로서 티벳에 오는 이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파드마산 바바는 티벳 고유의 토속 종교(본보교)에 인도의 밀교를 보태어 라마교(lamaism)를 일으켰다.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강성을 자랑하던 이 토번도 9세기 이후 차츰 쇠하였다.

◑ 위·진·남북조 시대의 문화 : 서방 문화의 유입으로 한대의 유학이 퇴색하고 서역 문화의 전파로 이국적인 요소가 문화 전반에 넘치고 있었다. 불교를 비롯한 서방의 종교, 예술, 사상, 과학 등이 전래되었고, 중국의 문화도 서방으로 전파되면서 문화의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져 문화 내용이 다채로워졌다. 특히 북방 민족에 의한 호한 체 제(胡漢 體制)의 구축은 처음 있는 일로 중국은 정치 분열상에 빠졌으나, 문화적으로 이들 북방 민족을 동화시키고 북방 민족의 소박한 요소가 가미되어 서방 문화와 함께 중국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의 지배 계층인 귀족이 가문을 자랑하고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유교, 불교, 도교를 비롯하여 경(經), 사(史), 문(文), 화(畵) 등 다양한 학문과 교양을 익혀야 했다. 귀족 사회의 발전에 따라 유교에서 강조되던 충성과 효도의 윤리가 퇴색하였고 통일의 이상을 잃고 불안한 시대가 계속되면서 염 세주의가 유행하였으며, 그 대신 인생의 근본을 사색하면서 자연히 노장 사상이 번창하여 개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불교의 발전과 귀족 사회의 사치스런 취미 생활은 자연히 그림과 글씨, 그리고 공예의 발전을 가져왔다.

◑ 도교의 성행 : 도교의 민중적이고 반체제적인 요소를 잘라내고 귀족의 취향에 맞도록 다시 만드는 개혁이 일어났다. 그 때문에 노자·장자의 사상을 지주로 하고, 혹은 불교의 사상까지 차용하여 도교의 교리와 의식이 정 비되어 갔다. 자세를 새로 갖춘 도교는 귀족 신자들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에서는 구겸지(寇謙之)의 개혁에 의해 천자의 폭넓은 보호를 받았다. 강남에서도 양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은 국정에 대해서도 천 자로부터 상담을 받아「산중재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도교는 인간을 영원한 생(불로불사)으로 인도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 최종적인 목적은 신선이 되는 데 있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복약, 식이요법, 호흡술, 연금술 등의 실천에 의하여 신이 깃들 수 있는 육체를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체내에 깃든 신들과 만나기 위해서 명상에 의한 정신 집중을 행 다. 더 나아간 단계가 되면 도(만물의 근원)와의 신비적인 일치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같은 과정의 전부를 실천하는 것은 직업적인 도사라도 손쉬운 일이 아니라. 일반 신자에게는 더욱 더 그러했다. 다만 도교의 수업 가운데 복약의 습관은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그들은 약을 구하기 위해 산과 들을 돌아다녔다. 그것은 약초임에 틀림없지만 위(魏)의 하안(何晏)이 행한 이후엔 광물질의 약도 열심히 복용하였다. 서예의 대가인 왕희지도 다섯 가지의 미네랄을 혼합한 오석산을 복용하였다. 오석산은 자극성이 강한 약물로서, 이것을 마시면 아편을 흡입할 때와 같은 환각 상태가 된다. 그 처방전에는 계속해서 복용하면 새처럼 몸이 가벼워져서 불로 장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더할 나위없이 위험한 약이었다. 이 시대에는 인물을 비평함에 있어「신선같은 사람」이라는 형용은 최상의 찬사였다. 신선은 만인의 동경 대상이었던 것이다.

◑ 북위와 효문제 : 선비족 탁발규(托鉢珪)에 의하여 건국된 북위는 439년 화북을 통일하고 제7대 효문제 때 균전제, 삼장제 등 획기적인 제도를 마련하여 이후 수, 당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부터 한화 정책을 폈지만, 가장 강력하게 이를 추진한 것은 효문제였다. 그는 우선 도성을 평성에서 낙읍으로 옮겼으며 국성을 중국식의 원(元)씨로 고쳤고, 선비족의 호성(胡姓), 변발, 호복, 호어를 금지하여 이를 모두 중국화하고, 유교를 존 중하여 조정의 제도 의식을 중국풍으로 고쳤다. 이외에 균전제, 삼장제를 시행해서 한족의 전통적 이념에 따른 토지 정책, 향촌 조직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 점전법(占田法) : 일명 점전과전법(占田課田法). 서진 때의 토지 제도로 점전이란 한전(限田)의 뜻으로 토지 소유의 최대 한도를 뜻하며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 겸병을 제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과전(課田)은 할당시킨다는 뜻으로 백성에게 일정 토지의 경작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농민의 정착과 개간을 목적으로 한 제도로 생각되는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 삼장제(三長制) : 486∼589년까지 북조에서 행하여지던 촌락 통제 기구인 인보제도(隣保制度). 이 제도는 촌락의 조직을 3계층으로 구분하여, 그 각 계층마다 장(長)을 두었던 데서 삼장제라 한다. 북위에서는 초기에 5가(家)를 인, 5인(隣)을 이, 5리(里)를 당(黨)이라 하였다가 후에 5가를 비린(比隣), 20가를 여(閭), 100가를 당족 (黨族)으로 개칭하였다. 수(隋)에서는 5가를 보(保), 5보를 여리(閭里), 4여리를 족당(族黨)이라 불렀다. 이와같이 3단계로 조직된 기구는 서로가 연대 책임하에 놓여져 있었고, 통치자는 이 제도를 통하여 호 적 조사, 백성의 음부(蔭付)의 단속, 조세 징수 등을 손쉽게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보 제도는 송대 왕안석의 보갑법 또는 명대의 이갑제 등으로 계승되었다.

◑ 균전제(均田制) : 북위의 효문제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수나라 때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가 당에 의해 완성되었다. 후 한 말 호족의 토지 겸병으로 농민은 땅을 잃거나 호족의 노예가 되었다. 이에 국가는 국가가 직접 지배 할 수 있는 토지와 백성이 적어져 군사와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는 둔전제, 서진은 점전법, 북위는 균전제를 실시하여 귀족의 토지 점유를 제한하고자 하였다. 북위의 균전 제는 노예와 소의 소유 정도에 따라서도 토지를 주어 오히려 이를 많이 소유한 귀족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다. 농민에게 나눠진 토지는 일부는 상속케 하고(상전, 桑田), 그 나머지는 노전(露田)이라 하여 받은 자가 죽으면 다시 반납하도록 하였다. ·노전 - 곡물을 재배하는 토지로 국가에 조(租)를 내며 환수 대상이기 때문에 구분전(口分田)이라 불렸다. ·상전 -뽕을 심고 누에를 쳐서 명주(絹)를 내는 토지로 국가에 조(調)를 내며, 세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업전(營業田)이라 불렸다.

◑ 법현(法顯 ;337?-422?) : 동진 시대의 승려. 계율이 중국의 불교계에서 완비되어 있지 않음을 개탄하고, 339년 구도의 길에 올라 6년간의 여행 끝에 중부 인도에 도착, 불교 유적을 순방하고 '마가승기율(摩訶僧祇律)' '잡아비담심론 (雜阿毘曇心論)' 등을 얻은 후, 다시 실론(스리랑카)으로 건너가 '오분율(五分律)' '장아함(長阿含)' 등을 공부하였다. 413년 해로로 귀국하여 건강(健康)에서 불경의 번역 사업에 종사했다. 그의 여행기인 '불국기' 는 당시의 서방 소식을 전하는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법현이 가지고 온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에 의해 번역, 출판되어 열반종 성립의 기초가 되었다.

◑ 도 잠(陶潛: 365∼427) : 동진 때의 시인으로 자(字)는 연명(淵明). 405년에 팽택 현령이 되었는데, 겨우 80일 만에‘귀거래사 (歸去來辭)’를 읊고 귀향했다. 그는 전원 시인·자연 시인으로 불리며, 또 은둔 시인의 으뜸으로 일컬 어진다. 그의 시는 고요하고 담담한 가운데 진정을 토로하고, 유가적이고 노장적이며, 운치가 높기로는 고금에 그 유례가 없다. 도화원기(桃花源記), 오류 선생전(五柳先生傳), 자제문(自祭文) 등의 글이 있다.

◑ 왕 희지(王羲之 322 ?-379 ?) : 동진 시대의 서예가. 자(字)는 일소(逸少). 비서랑(秘書浪)으로부터 출발하여 우군 장군·회계내사(會 稽內史)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일찍이 은둔 세상의 뜻을 품어, 명승지 회계(會稽)에 와서 사 안·손 작 등과 청담하며 산수를 즐겼다. 353년 깊숙한 산중에 명사들을 초빙하여 시회를 열고, 그가 서문을 쓴 것은, 산수 문학의 기원을 이루었다. 예서를 잘 썼고, 해(楷)·행(行)·초(草)의 전반에 걸쳐 새로운 서체를 완성하여 서도의 원천이 되게 하였다. 왕 술이 중앙에서 회계를 순찰하게 되자, 그 밑에 있기를 부끄러이 여겨 관직을 떠나(355), 오직 산수를 벗삼고,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였다. 필적의 현존하는 것 중에 '난정서(蘭亭序)','상란첩(喪亂帖)','공시중첩(孔侍中帖)','유목첩(遊目帖)','이모첩(姨母 帖)','17첩' 등이 있다. 그 아들 왕 헌지도 서(書)에 능하여 보통 이 부자를「2왕」이라 칭하였다.

◑ 청담의 유행 : 후한 시대에 발전한 유교는 지나치게 예의를 존중하고, 또 유교의 근본정신을 떠나 경전의 자구의 해석만을 일삼는 훈고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권 쟁탈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유유자적의 생활을 원하는 호족들에게는 너무나 형식적이고, 번거럽고, 무미건조한 것이어서 흥미를 잃게 하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계속된 동란과 사회적 불안은 염세증과 현실에 대한 허무감을 자아내어 여기에 유교적 세계에 있으면서도 이를 벗어나려는 의욕이 높아져 노장사상이 유행하였고 유교를 노장사상에 입각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청담은 흔히 위(魏)의 정시연간(正始年間)에 하안·왕필을 중심으로 담객이 모여 담론한 이른바「정시의 음(音)」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담의 풍은 이 때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실은 후한시대에 지방유력자들이 모여 효렴지사를 뽑기 위하여 인물을 평한 청의(淸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청의가 정시연간에 이르러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속담 아닌 청담으로 바뀌어 널리 유행하였던 것이다. 서진시대에 들어가자, 한걸음 더 나아가 일체의 정치적, 사회적 제약에서 초월 한 고답적인 세계관이 존중되어, 유교의 예절을 무시하고 노장의 허무를 좋아하고, 동무들과 모여 술과 음악을 즐기고, 청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무리가 나타났다. 완적·혜강 등의 이른바 죽림의 7현이 그 대표자들이다. 죽림 7현이란 노자와 장자의 허무사상을 숭상하여 속세를 떠나 죽림 속에 은거하여 함께 청담을 나누고, 술을 마시며 유교 질서를 무시하던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 康), 산도(山濤), 향수 (向秀), 유영(劉伶), 왕융(王戎) 등의 일곱 사람을 말한다. 이들이 출현한 것은 위와 진이 교체되던 시대이다. 한이 멸망하여 유가적인 원리가 쇠하고 호족 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신구세력의 대립이 엇갈린 시 대에 그들은 종래의 노자 사상에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적인 장자의 사상을 가미시켰으며 유교의 도리를 방패삼아 자신들의 권세를 펴려고 하는 일파에 맹렬히 저항하여 그들의 허위를 폭로하기 위하여 도리어 자신들은 엉뚱한 태도를 취하였다. 유가의 도덕이나 인위를 부정하고, 자연, 천진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들 7인이 서로 만난 것은 한때뿐이며 뒤에는 각기 흩어지게 된다. 청담은 담론으로서 세월을 보내어 청담망국의 비난도 받았으나, 이에 의하여 중국의 고유사상이 깊어지고, 심원한 불교사상을 받아들일 c?있는 기틀이 열린 것만은 사실이다.

◑ 죽림 7현과 완적 : 죽림 7현의 대표적인 인물로 완적을 꼽을 수 있다. 완적(210∼263)의 집안은 당시 상당히 명망있는 문장 가의 가문으로 죽림 7현의 한 사람인 완함은 완적의 친족이다. 완적은 산도, 향수, 왕융 등과 함께 산양 (山陽)에 있는 혜강의 집 죽림에 모여 술을 마시고 도를 논하며 자유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한번은 사마 소가 아들 사마 염을 완적의 딸과 혼인시키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완적은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은 채 물러나더니 그때부터 60여 일을 매일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셔 구혼자가 말을 꺼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 또 촉 지방을 차지한 종회(鍾會)가 내심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자 생각하고 완적에게 세상의 일에 대해 질문을 하여, 만약 완적의 대답이 자기의 뜻과 어긋나면 그를 문책하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종회의 속셈을 눈치챈 완적은 술에 취한 척하고는 잠만 잤다. 결국 종회는 아무런 꼬투리도 잡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완적은 이와 같이 현실에 대해 비평하는 풍조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묻지도 않았다. 이것은 당시와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소극적인 저항이기도 했다. 완적은 형식과 예법에 반대하여, 예법에 얽매인 지식인이 찾아오면 흰 자위를 드러낸 눈으로 대하고(白眼視), 거문고나 술을 들고 오는 손님에게는 호의어린 눈길(靑眼視)로 대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백안시 하다' 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완적은 유가의 관점으로 볼 때 방약무뢰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성실하고 순박한 성품의 사람으로, 이런 그의 참 모습과 탁월한 사상과 심오한 내면 세계는 그의 문학 작품 속에서 엿볼 수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행동과 이론, 인간 세계에 대한 허무, 행복 후의 추락과 공허, 자기 내부의 고독감과 적막감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저작 영회시(詠懷詩)는 중국 역사상 위대한 시인 이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 수·당 제국의 재통일

◑ 수 문제(541∼604) : 수의 초대 황제인 양견(楊堅)으로 북주의 공신 수국공 양충의 아들. 북주의 무제는 양견의 장녀 여화를 황태자 비로 삼았는데, 587년 선제(宣帝)가 즉위하자 외척으로서 조정에서 부동의 위치를 확립했다. 580년 여화의 아들 정제(靜帝)가 즉위하고부터, 양 견은 더욱 권력을 집중하여 위 지회 등의 반대파를 배제하고, 581년 정제의 선양을 받아 수의 황제가 되었다. 북변의 돌궐을 압박하는 한편, 587년에 남조의 양(梁)을, 589년에는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의 통일을 실현, 3세기에 걸친 중국의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내정으로는 5성(省) 2대(臺) 11시(市)의 중앙 관제의 정비, 구품 관인법의 폐지, 부병제·균전제의 확충, 화폐 제도의 통일, 대운하 광통거의 건설, 주군제(州郡制)의 개혁과 향관의 폐지 등, 귀족 세력을 통제하고 집권 체제의 확립을 기하여, 다음에 나타나는 당조를 위하여 세계 제국 건설의 기초를 다져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재위 24 년만에 사망했는데, 그의 아들 양제(煬帝)에 의한 모살이라고 전해진다.

◑ 양제(楊帝: 569∼618) : 수의 제2대 황제(604∼618)로 문제(文帝)의 둘째 아들. 582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진왕(晉王)이 되어 북변의 방비를 맡았으며, 586년 진(陳)을 토벌하여 이듬해 이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통일을 달성했다. 600년 형인 용(勇)이 폐적당한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는데, 이 사건의 배후에는 중신 양 소(楊素)와 결탁한 양제의 음모가 있으며, 또 604년 문제의 죽음도 그들의 모살이라고 한다. 양제는 즉위하자 뤄양에 동도(東都)를 건설, 지방의 거상을 모으고 605년에 남녀 1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를,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또 610년에는 강남하(江南 河)를 개통했다. 이 운하들은 춘추 시대로부터 한대를 거쳐 반 자연, 반 인공적으로 된 수로를 양제가 보수 확장한 것이다. 현재의 대운하는 원,명 시대에 수리하여 회수로부터 북으로 산동, 텐진을 거쳐 베이징에 이르는 것이며, 전장 1,800km의 세계 최장의 운하이다. 강남의 경제 지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수도 대흥(大興)에 연결시켜, 남북을 일관하는 대동맥을 완성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리하여 609년에는 토욕혼을 토벌하여 칭하이를 병합하고 고창(高昌)을 입공(入貢)시켜 서역에의 길을 열었다. 남방에는 임읍(林邑)을 정벌하고, 적토국(赤土國)의 입공을 재촉하며, 유구(琉球: 오키나와)까지도 정벌하였다 게다가 612년 이후, 매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는데 모두 강력한 반격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이러한 외 정의 실패와 가혹한 수탈은 국내의 모순을 격화시켜 마침내 613년 양소의 아들 양현감(楊玄感)의 반란 을 계기로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양제는 동란의 확대와 더불어 더욱 향락에 빠지다가 618년 우문화급 (宇文化及)을 수령으로 하는 금위군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 이 연(李淵 ;566-635) : 당의 창시자(618∼626). 고조(高祖). 조상은 오호(5胡) 시대의 서량 왕 이호(李蒿)라고도 하고 또 귀화 한 선비족이라고도 한다. 장안에서 태어난 이연은 도량이 넓고 솔직한 인물로서 수 문제의 인척이어서 그의 총애를 받았다. 여러 주의 자사(刺史)를 역임하고 수말에 내란이 일어나자 관중의 치안을 맡았는 데, 호걸들과 친분을 맺어 양제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617년 태원 유수가 되었고, 내란이 격화하여 양 제가 있는 강도(江都)가 고립하자, 그 고장의 호족을 모아 거병, 돌궐의 도움으로 장안을 점거하여 양제의 손자 유를 옹립하였다(공제:恭帝). 이듬해 양제가 살해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덕(武德)으로 개원하고 장안을 도읍으로 정했다. 다음해인 619년 조,용,조 제를 개정하고 624년엔 대체로 군웅을 평정하여 당 왕실의 기초가 확고해졌다. 626년 둘째 세민에게 양위하였다.

◑ 이 세민(李世民 598-649) : 당의 제2대 황제 태종으로 고조 이 연의 둘째 아들. 휘(諱)는 세민인데「20세가 되어 제세 안민(濟世 安民)의 사업을 성취할 사람이다」라는 예언에 의하여 명명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으며 결단력이 풍부하였다. 수의 멸망을 예지하고, 협객·군도(群盜)를 기르다가 부친에게 권하여 거병, 내내 전군을 지휘하면서 관중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 군사적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부친으로부터「천하는 모두 네가 이룩하여 놓은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인망이 높아, 형인 황태자 건성(建成), 아우 원길(元吉) 등의 질시를 받았으나, 기선을 제압하여 626년 현무문에서 형제를 사살하고 그 해에 즉위하였다. 국내 통일의 일단락을 짓자, 이민족의 제압에 착수하여, 630년 강적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사로 잡은 것을 위시하여, 토욕혼·토번·고창·서돌궐·설연타를 정복하였으므로 북변·서변·서역이 모두 당의 영토가 되었고, 남방 제국을 조공시켜 미증유의 판도를 이루었다. 정복지에는 이른바 기미 정책을 실행하여, 황제는 여러 수장으로부터 천가한의 칭호를 받아 번한 공통의 군주가 되었다. 국내 통치에도 주력하여 부역·형벌의 경감, 사치의 금지, 관제의 정비, 인재의 등용에 용심하였다. 수 멸망의 전철을 피하기 위해, 항상 신료와 치도를 논하고 황태자를 위하여 '제범(帝範)' 4권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또 '진서(晋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등 전대의 역사를 편찬케 하고 '진서(晋書)'는 친히 붓을 들었다. 한편 수말의 내란 때 성장한 군웅들을 어떻게 당조에 심복시키는가는 태 종조의 중요 문제였다. 태종은 그들을 관료제에 의하여 흡수하려고 하여, 문학·유학을 장려하였으며 홍 문관을 두고 국자감을 확장하였다. 또 '오경정의'를 편찬케 하여 전대 이래의 해석을 통일하였다. 이러 한 외정·내치에 기여한 공신 20여 명의 초상화를 능연각(凌煙閣)에 걸게 했다. 그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하여 후대 황제의 모범이 되었다. 다만 만년에 손을 댄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인의 불굴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 전쟁의 피해는 멀리 쓰촨에까지 미치어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 : 아시아 세계에서 문명의 발생과 그 발전 지역을 문화의 유형에 따라 살펴보면, 황하 문명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문화권과 인더스 문명을 중심으로 하는 인도 문화권,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된 서아시아 문화권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동아시아 문화권은 위·진·남북조의 혼란과 분열 시대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4대 기본 요소가 되는 유교와 불교, 그리고 율령 체제와 한자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내려오다가 당대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6세기말의 수의 중국 통일과 이를 이은 당 제국의 출현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한 당의 침략에 의해 멸망하여, 한반도에 통일 국가가 출현했으며, 만주에는 발해가 건국하여 당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당 제국의 영토적 확대와 6도호부의 설치로 아시아 각국 이 직접 당과 정치·군사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기미(羈靡) 정책이나 책봉 체제(冊封 體制) 에 의한 조공 관계로 긴밀한 문화적 교류관계를 갖게 되었다. 특히 당의 개방주의 정책으로 당과 주변 국간의 정치·문화면에서의 교류가 촉진되어, 8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문화적 교류가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통일 신라의 찬란한 문화나 나라·헤이안 시대의 일본 고대 문화, 그리고 발해의 문화는 다같이 자국 문화의 기반 위에 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러나 당 왕조가 멸망하는 10세기 초를 시작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붕괴되고 동아시아 문화권도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 나갔다.

◑ 기미 정책(羈靡政策) : 중국 왕조가 이민족을 지배하는 한 방법. 중국은 주위의 약소 민족에 대하여 무력을 쓰지 않고, 그 곳의 추장이나 유력자를 회유하여 중국의 관작이나 은전을 주어 각기 그 풍습을 좇아 자치케 하였다. 기미란 마소를 잡아맨다는 뜻으로, 이반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통치 방침이다. 이러한 지배책은‘ 한서(漢書)’의‘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에 보이는데, 이를 교묘히 이용한 때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속지(屬地)를 가진 당대로서 서역이나 그 밖의 복속지엔 도호부를 두고, 도독부(都督府) 이하 주·현의 장관에는 그 고장의 유력자를 배치하여 압박감을 주지 않고 지배하였다. 이 주를 기미주(羈靡州)라고 하며, 많을 때는 800개 가까이 되었다. 다만 이 때문에 속지를 완벽하고 확실하게 지배할 수 없어, 점차 그 정책이 파탄을 가져오게 되었다. 현종 때에는 이민족으로부터 본토를 지키기 위해 국방선을 후퇴하고, 국방 군단으로 하여금 변경에 군진을 설치케 되었는데, 이는 곧 절도사의 강화를 초래하고, 당말부터 5대에 걸친 군벌(번진)의 시대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 도호부 : 속지(屬地)의 중요성에 따라 정복지에 설치, 장관은 도호이며 중앙에서 파견하였고 군정, 민정의 권한 을 장악하여 도독부와 기미의 여러 주를 통할하고, 속지 민족의 위무와 경제·토벌을 담당하였다. 당은 국초 이래 60년간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그 지역에 6 도호부를 설치하였다. 북정 도호부를 제 외한 다른 도호부는 태종·고종 때 설치하였다. 6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이 때가 당의 영토가 가장 넓었 던 시기였다.

◑ 운강 석굴과 용문 석굴 : 돈황(敦惶)석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 중국에서 맨 먼저 만들어진 석굴은 366년 간쑤성의 둔황 석 굴로 3∼4세기쯤부터 13∼14세기까지의 오랜 기간에 걸쳐 조영됐다. 그 후 5세기에 조영된 윈강 석굴과 룽먼 석굴이 있는데, 전통적 중국 조각, 간다라 양식, 굽타 양식으로 된 이 석굴들은 탁발족의 생명력을 반영한 중국 불교 미술의 보고이다. 운강 석굴(雲崗石窟)은 산서성 대동의 서쪽 16km 정도 되는 곳에 있다. 무주천과 접한 사암 절벽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담요(曇曜)가 북위의 문성제에게 건의해 굴착한 다섯 동(제16∼제20동)에서 비롯된 다. 이들 다섯동을‘담요 5동’이라 부르며, 북위의 시조이래 5대 제왕에 견준 대불상(15미터 정도)이 각각 만들어져 있다. 그 뒤 효문제가 494년에 낙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30년 동안에 동쪽에서 서쪽으 로 약 1km에 걸쳐 크고 작은 약 42동(큰것만도 20동)의 대부분이 굴착됐다. 그 뒤로는 큰 것은 만들어 지지 않고 차츰 쇠퇴하게 된다. 이들 석굴은 인도 석굴 사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중앙에 높은 탑이 새겨져 있다. 또 불상의 양식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았고, 굽타 양식도 가미되어 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중국색이 짙어지고 있다. 불상의 의복이 중국풍으로 되고 얼굴도 차츰 둥근 형에서 참외 모양으로 변한다. 용문 석굴(龍門石窟)은 하남성 낙양현 용문진에 있다. 효문제의 낙양 천도 때부터 당 현종말(756년)까지 만들어졌다. 강의 양쪽 산에 크고 작은 많은 석굴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것은 북위 때 만든 14동, 당나라 때 만든 18동이다. 운강의 것과 비교해 야윈 형태이고 중국풍이 강하다. 당나라 때의 것은 당시의 전형적인 사실적 기법을 사용했다.

◑ 부병제(附兵制) : 6세기 중엽부터 8세기초까지 행해졌던 중국의 병제. 경사(京師)에 좌우위(左右衛) 이하의 12위부(衛府)를 두고, 지방에 630개의 절충부를 두어 관내의 100무의 땅을 받는 장정 가운데서 3년에 1회 신체 건강하고 집안내에 노동력이 많은 장정을 선발하며, 복무 기간은 30년으로 노남(老男)이 되면 면제하였다. 피선발자는 해당지역의 절충부(折衝府)에 소속된다. 부의 병력은 상부 1,000, 중부 800, 하부 600이 표준이다. 상부에서는 화(火) 10명, 대(隊) 50명, 국(國) 200명, 부(府) 1,000명의 부대 구성을 이룬다. 병사는 평시엔 가정에 있으며 농한기에는 부(府)에 소집되어 훈련을 받지만, 3년에 한번씩 1,2개월 동안 교대로 수도의 경비에 임하는데 이를 번상(番上)이라 한다. 병역 기간 중 한번, 변경의 진(鎭)·수(戍)에 나가 경비를 맡는데, 기간은 3년이었다. 부병은 조,용,조 전부를 면제받으나, 일정한 식량과 무기는 자기 부담이었다. 이러한 체제를 보증하는 것은 균전제였는데, 균전제가 와해됨에 따라 부병제도 무력화하였고, 한편 중앙 및 변경의 군사력 강화의 필요에 따라 병력의 공급원을 무산민에게서 구하는 용병제인 모병 제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병사의 질이 저하되고, 또 안사의 난 이후에는 지방 군벌의 사병으로 화하여 번진 세력 출현의 한 요인이 되었다.

◑ 율, 령, 격, 식(律令格式) : 중국·조선·일본 등에서 시행되었던 법전 체계. 율과 영은 원래 개별적인 것이었으나 수·당 시대에 와서 상호 연관적인 법전 체계로 발전하였다. 이 때 율(律)은 형벌 법규를, 영(令)은 행정 법규를 뜻한다. 격(格)은 율령의 규정을 변경했을 때 이 개정된 법규를 집성한 법전이며, 율령에 대해서는 보조적 의미를 가진다. 식(式)은 율령 시행 세칙을 규정한 법전으로 역시 율령에 대해서는 종속적 관계에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래 율과 영의 사이에는 확연한 구별이 없었던 것이, 진(晋)대에 와서 그 성격이 분명해졌다. 명대에 와서는, 이 때까지 당의 율령을 답습해 온 중국의 법전 체계가 변혁되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한 '명률령(明律令)'이 제정되었다. 그 내용은 명례(名例)·이(吏)·호(戶)·예(禮)·병(兵)·형 (刑)·공(工) 등 7률로 되어 있으며, 이 명율령은 거의 그대로 청에 계승되었다.

◑ 3성 6부 제도 : 당대의 중앙 관제. 천자(天子)의 비서역인 중서성(中書省)이 조칙을 기초하고, 문하성(門下省)이 이를 심의하고, 그 결과를 상서성(尙書省)이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6部로 하여금 분담 집행케 한 제도이다. 한대 이후 발달하여 당대에 완비되고, 송대 이후 붕괴되어 한때 없어졌으 나 6부 제도만은 다시 부활되어 청대까지 존속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제도는 당대 초기에 종래의 문벌 귀족의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이를 절충, 천자를 대표하는 중서성과, 귀족을 대표하는 문하성의 합의 제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3성의 장관은 각각 중서령(中書令)·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령(尙書令)이라 하였는데, 그들은 재상이 되어 최고 정무를 결재하였다. 그러나 점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군주 독재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현종때부터는 문하성의 세력이 약화되어 중서성과 문하성이 통합되어 중서문하 (中書門下)가 되었다. 오대를 거쳐 송에 이르러 군주 독재제가 확립됨에 따라 3성 제도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남송 시대에 소멸되었다. 원대에는 중서와 상서의 이름이 교대로 사용되었으나 단순히 중 앙 정부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이 3성 6부는 그 후 동아시아 문화권 여러 나라 정치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 조·용·조(租·庸·調) : 수·당 시대에 완성된 부세(賦稅)의 체계. 당에서의 과세 대상은 정남(丁男,21∼59세의 남자)으로, 연조로 곡식 2섬, 용으로 20일의 노동, 조로 삼베, 비단 등을 징수하였다. ---모든 남녀중 갓 태어난 자는 황(黃)이라 한다. 4세에 소(小)가 되고 16세에 중남이 되고 21세를 정남(丁男)으로 하며 60세를 노(老)라 한다. 1년마다 계장(計帳)을 만들고, 3년에 한번 호적을 만든다. 부역에는 4가지가 있다. 조(租), 조(調), 역(役), 그리고 잡요(雜搖)가 있다. 과세 해당 호는 정(丁)마다 조(棗) 2석을 조(租)로 하고, 조(調)로 토 산물인 비단 등을 내며, 모든 정(丁)은 해마다 20일씩 역(役)이 있고 일이 없으면 바로 용(庸)을 거둔다. 매일 3자(尺)으로 한다. 일이 많으면 역을 더하되 15일 초과시 조(調), 30일 초과시는 조(租)·조(調) 모두를 면제한다.

◑ 측천무후--武韋(무위)의 화 중국사상 단 한 사람의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성은 무(武), 산서성 문수현에서 목재상의 딸로 태어났다. 빼어난 미모를 지닌 그녀는 태종의 부름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 媚)라는 이름을 내리고 궁녀로 삼았다. 그녀의 나이 14살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랑(媚郞)이라고 부르곤 했다. 정관 말년(649), 태자는 병석에 누운 태종을 병문안 갔다가 곁에서 시중들고 있는 아리따운 미랑의 자태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태종이 병사하자 태자 치가 제3대 고종황제가 되었다. 미랑도 고종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소의(昭義) 자리에 올랐다. 이어서 고종은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였다. 이후 그녀는 측천무후로 불리게 되었으며, 꿈을 이룬 그녀는 직접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지병인 간질병 때문에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어 그녀가 대신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훌륭하게 일처리를 했기 때문에 고종은 660년 정무를 아예 그녀에게 위임해버렸다. 측천무후는 660년 소정방을 파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무너뜨려 양제나 태종도 이루지 못한 숙원 사업인 한반도 정복을 달성했다. 이로써 당의 영토는 건국 이후 최대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측천무후의 야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황태자 홍(弘)은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었으나 독살하였고 뒤를 이어 둘째 아들 현(賢)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모반 혐의를 쓰고 자리에서 쫓겨나 자결하고 말았다. 683년 고종이 죽자 셋째 아들 현(顯)이 황제가 되니 이가 제4대 중종이다. 한데 중종은 즉위한 지 1년만에 쫓겨나고 말았다. 황후 위씨의 전횡에 분노한 측천무후가 중종을 황제자리에서 내쫓은 것이다. 그리하여 690년 측천무후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녀의 나이 67살, 중국에 최초의 여황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나라 이름을 주(周)라 고치고, 낙양을 신도(神都)라 하여 사실상의 수도로 삼았다. 스스로를 신성황제라 칭하고 넷째 아들 단(旦)을 황태자로 정하여 성을 무씨로 고쳤다. 또 측천 문자라는 새 문자 20자를 제정했다. 정통성이 취약한 무후는 추사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스파이 정치를 자행했다. 주로 반대 세력의 관리들이 희생물이었는데 추사원의 정문인 여사문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자가 드9갼?이곳의 부름을 받은 관리들은 아예 가족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이미 환갑을 넘기 측천무후는 미소년인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가까이 하고 남첩 제도를 만들었다. 이의 부당함을 진언한 태자의 장남, 즉 그녀의 맏손주도 역시 살해되고 말았다. 그녀는 또 당의 법률에서 금지하고 있는 미신적인 종교 생활에 평생을 의지하기도 했다. 잔학무도했던 사생활과는 달리 무후 시대의 정치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까지 폐쇄적인 기득권 층을 형성하며 오랫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개국공신 집단을 제거하기 위해 무후는 유명무실하던 과거 제를 공정하게 실시, 실력 있는 신인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들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던 장안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여, 이들은 '북문지사(北門之士)' 라고 불리게 된다. 이 북문지사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곧 이어지는 현종때 당문화의 절정을 꽃피우게 된다. 후세 사가들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에서만은 무후를 '일급의 감식가' 로 평가하고 있다. 무후는 역대 어느 황제보다도 민중 생활의 안정 에 신경을 썼고 이에 따라 그녀의 치세 50년간에는 그 흔하던 농민 봉기가 단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된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들어 눕자, 재상 장간지가 쿠데타를 일으켜 쫓겨난 중종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당 왕조를 재건하게 된다. 그해 겨울 측천무후는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무후가 죽은 뒤 이번엔 중종 비 위씨(韋氏)가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며 고기 만두에 독을 넣어 남편 중종을 살해한 것이다. 그러나 위씨의 야심은 불과 며칠 가지 못하고 단의 셋째 아들 이융기(李隆基)에 의해 무산되었다. 23세의 이융기는 중종이 죽은 지 18일 만에 쿠데타를 일으켜 위씨 일족을 주살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예종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었다. 그뒤 712년 예종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가 바로 현종이다. 현종은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력을 키워「개원(開元)의 치(治)」란 칭송을 들었으나, 양귀비를 총애한 나머지 정사를 게을리 하다가 안녹산의 반란으로 황제 자리를 양위하고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 양 귀비와 당 현종 : 당 황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등장한 현종의 치세는 중국 4000년 역사상 다시없는 전성기여서 그의 연호를 딴 '개원의 치' 는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였다. 현종은 웅대한 지략가이기도 했지만 음 악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기도 했다. 737년 황후였던 무혜비가 돌연 사망하자 그는 크게 상심 하여 수천의 후궁도 돌아보지 않고 고적한 생활을 했다. 눈치 빠른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재색으로 소 문이 파다했던 한 여인을 천거했다. 청화궁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현종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했다. 그러자 이 여인은 즉석에서 음률에 맞춰 선녀처럼 춤을 추었다. 현종은 그 여인에게 그만 한눈에 반하 게 되었다. 이 여인이 양귀비(楊貴妃)이고 당시 황태자의 비 가운데 하나였다. 현종의 며느리인 셈이다. 양귀비는 피부가 하얗고 풍만한 여인이었다. 본명은 옥환(玉環)이라고 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17세 때 황태자인 수왕의 비가 되었다. 현종은 그녀를 여자 도사로 만든 후 곧 후궁으로 불러들여 자신 의 비로 삼았다. 이 때 양귀비의 나이 22세, 현종은 57세였다. 그녀는 얼굴만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도 뛰어났고 특히 비파의 명수였다. 게다가 머리 회전이 빨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현종 은 양귀비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녀의 친척인 양국충(揚國忠)을 중용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일개 무뢰배에 불과했던 양국충은 권력을 전횡하며 양귀비의 양자이자 변방 3개 지역을 관할하던 절도사 안 녹산(安祿山)과 앙숙지간이 되었다. 안녹산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돌궐 계 또는 이란 계로 추정 되고 있다. 궁궐에 들어올 때면 항상 양모 양귀비를 먼저 배알해 현종이 그 이유를 묻자 "호인(胡人 : 오랑캐)은 어머니를 앞세웁니다" 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에 찬 인물이었다. 양국충이 이미 죽은 재상 이임보를 돌궐과 내통했다고 모함하여 그의 일족을 주살하자 안녹산은 '황제 옆의 간신을 제거한다'며 거병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조정은 장안에 있던 안녹산의 아들을 죽였다. 이에 격노한 안녹산은 낙양 을 짓밟고 국호를 대연(大燕)이라 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당은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에게 방어를 맡기나 고선지는 환관의 모함에 걸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병사들 앞에서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 수도 장안이 위태해지자 현종은 사천성 방면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배고픔과 피로에 지친 병사5湧?양국충을 살해하고 현종의 막사를 포위, 양귀비의 처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하고 17년 동안 애지중지했던 양귀비를 현종은 차마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천거했던 환관 고력 사는 현종을 설득해서 양귀비를 근처 절로 데리고 갔다. 양귀비는 그곳 배나무에서 목을 매달았다. 그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현종은 고력사로 하여금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오게 해서 비단 옷을 입히고 가슴에는 향수 주머니를 단 후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 절도사(節度使) : 당, 5대 때의 군직으로 번진이라고도 한다. 8세기 초 부병제가 이완되자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의 요지에 배치한 모병 군단의 사령관을 말한다. 절도사는 민정, 군정, 재정의 3권을 장악하여 강대한 권력을 발휘하였는데 안녹산도 평도, 범양, 하동 등 동북 지방 세 곳의 절도사를 겸하고 있었다. 이러한 절도사의 발호, 절도사 간의 대립 항쟁은 당 멸망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 양세법(兩稅法) : 8세기 말 덕종 때 양염의 건의에 따라 시행한 세법으로 조·용·조 대신에 토지 면적에 따라 지세를, 재산의 다과에 따라 호세를 징수하였다. 여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징수하였으므로 양세법이라 하였다. 주,현의 경상비와 중앙으로의 공출비를 계산하여 이를 조세로 거두었다. 즉, 양출 계입(量出計入)이었다. 주호, 객호 모두 현 거주지에서 호적을 올리고 조세는 정남, 중남의 차 없이 빈부를 기준으로 했다. 행상인도 주현에서 1/30 세를 받고 정착인과 같게 하여 요행으로 얻는 이익을 없앴다. 세(稅)는 가을 과 여름의 2회로 나누어 징수하였고, 조·용·조, 잡요는 모두 없앴다. 이로써 여러 종목의 세제가 통합되었으며, 조세의 금납화가 시작되었고, 과세율이 재산에 따라 정해지게 되었다. 양세법은 명대에 일조 편법이 제정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 황소(黃巢)의 난(875∼884) : 당말 황소에 의하여 지도된 농민 반란(875∼884)이다. 당 왕조 멸망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황소는 산동의 암거래상으로 소금의 밀매에 의하여 부를 축적하고 다수의 무뢰한을 양성하여 도당을 만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당의 사회가 문란해지고 농촌은 피폐하여 유민과 빈궁한 농민이 속출했으며 도둑의 무리가 사방에 날뛰고 있었다. 875년 왕선지(王仙芝)가 하북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황소는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왕선지의 사후 그 잔당까지 모아 유민이나 빈궁 농민을 흡수하면서 사천을 제외한 중국 전토를 전전했다. 880년 수도 장안에 들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칭했다. 황소의 반란군이 이처럼 기세를 올렸던 것은 그 휘하에 생활이 궁한 농민이 모이고 허난과 북의 돌궐, 위구르 등의 병사들이 참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이극용 등 당군의 반격으로 장안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도망했는데 884년 산동의 태산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음으로 인해 전후 10년에 걸친 대란이 끝났지만 이 난을 계기로 당왕조는 완전히 지배력을 잃고 약 10년 후에 멸망했다.

◑ 주전충 : 황소의 휘하에 있었으나 황소를 배반하고 당 왕조에 귀순하여 그 공으로 절도사가 되고, 후에는 국위 를 찬탈하여 국호를 후량이라고 하였다. 이에 당 왕조는 20대 290년만에 멸망하게 된다. 912년 양아들을 후계자로 하려다 아들 주우규에 살해당했다.

◑ 5대 10국 : 오대(5代)란 주 전충이 907년 당을 멸망시킨 후부터 905년 송이 일어나기까지의 54년간 중국 북부에서 흥망한 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 (보통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라 함)의 다섯 왕조를 말한다. 10국은 그 동안 각지에 할거한 전촉(前蜀)·후촉(後蜀)·오(吳)·남당(南唐)·민( )·초 (楚)·형남(刑南)·남한(南漢)·오월(吳越)·북한(北漢)의 10국을 말한다. 이 시대에는 한대 이래의 지배층이던 호족과 귀족의 세력이 몰락하고, 무인 계급과 신흥 지주 계급이 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동은 춘추 전국 시대의 그것과 버금할 만한 큰 것이었다. 후량은 태조 주 전충이 당을 멸하고 907년에 세운 것인데, 다음의 말제때에 후당의 장종인 존욱에게 멸망(923)하고, 후당은 장종 뒤에 명종·민제의 2대를 거쳐 제 4대 폐제 때에 후진의 석 경당에게 멸망당하였다.(936). 후진의 건국은 거 란, 즉 요의 원조에 힘입은 바 컸으므로, 석 경당은 북변의 유·계 등 16주를 요에게 주고 신사(臣事)하였는데, 2대인 출제는 신사하기를 꺼려하여, 946년 노한 요에게 멸망당하였다. 이듬해 947년에는 후한의 고조 유 지원이 요의 수비병을 쫓고 후한을 세웠다. 그러나 이듬해 그가 죽고 은제가 섰으나 국내는 안정되지 않고, 950년 후주의 태조 곽 위에게 멸망당하였다. 이 후주도 다음의 세종을 거쳐 3대 공제 때인 960년, 송의 태조 조 광윤에게 멸망당하여 5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5대의 시조 가운데 주 전충은 원래 황 소의 부하로 있다가 당의 절도사가 되었고, 이 존욱·석 경당·유 지원은 모두 사타돌궐(沙陀突闕)의 출신이며 무인이었다. 10국의 시조들도 남당의 이 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장으로 절도사 출신들이었다. 이와 같이 이 시대는 무인의 세력이 강하여 정치는 그들에 의해서 농단되어 모든 구제도는 송두리째 파괴되고, 예의도 절조도 질서도 존재하지 않았다. 전란의 연속으로 인민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위에 가혹한 수탈이 행해져서 농민은 토지를 버리고 유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고, 농토는 황폐화되어 호구는 감소되었다. 그런데 북부보다 비교적 평온하였던 남쪽과 쓰촨 지방은 정권이 안정되었고, 중앙으로부터의 피난자를 맞이하여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으며 상업도시도 발전하였다. 후주의 세종(954∼959)이 즉 위하면서부터 중국 통일의 기운이 일게 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통일의 대업은 그 부장 조 광윤에 의해 c?이루어졌다.

◑ 이 백 : 중국은 물론 한자 문화권의 동양에서 누구든 한번쯤 그의 시를 대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시인 이백(李百:701-762). 낭만적이면서 의협심이 강하고 호방한 성격이 천여 수가 넘는 시를 통 해 거침없이 넘쳐 흐르던 그는 중앙아시아 쇄엽성(碎葉城)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백의 자는 태백(太 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또는 적선인(謫仙人)이라고 한다. 상인이었던 부친 이객이 재산이 많아 이 백은 평생을 유랑하면서 돈을 물쓰듯이 하며 지냈다. 그의 나이 42세 때 겨울, 현종의 부름을 받고 장안 으로 간 이백은 한림대조(翰林待詔)로 기용되었다. 이에 이백은 의기양양하여 "나를 미천하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뵙기를 청하며 사귀고자 하네" 라고 읊었으며, 현종은 "몸소 금마까지 가서 이백을 마중하고 ----먹을 것을 하사하고, 임금께서 손수 국맛을 본 후 먹였다" 고 할 정도로 극진히 대했다. 그 후 이 백은 날마다 현종을 대신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왕을 모시고 연회에 참석해 시를 읊으며 인생을 만끽하 고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때론 오만하기까지 한 이백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인물이 있으니, 바로 현종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고력사이다. 고력사는 왕자나 공주들도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조정 대신들 도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천하의 대환관 고력사에게 만 취한 이백이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한 것이다. 이 일을 괘씸하게 생각하던 고력사는 이백을 제거할 궁 리를 하고 있었다. 시험삼아 묻노니 한궁의 누구와 비슷한가 가련한 비연이 새로 단장한 모습과 같구나. (借問漢宮誰得似 可燐飛嚥埼新粧) 이것은 이백이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한나라의 조비연에 비유하여 읊은 시이다. 그런데 고력사가 이 시를 듣고 양귀비를 부정한 조비연과 비교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고 참언했다. 여기에 양귀비가 가세 하자 현종은 이백을 장안에서 내쫓고 말았다. 결국 '천하를 크게 안정시켜 하나 같이 맑게 하려는' 이 백의 포부는 물거품이 되고, 좌절한 이백은 양, 송, 제, 노 지방을 두루 유람했다. 이때 두보, 고적을 만나 함께 시를 지으면서 때를 잘못 만난 울분을 삭였다. 그리고 남북으로 유람해 산수를 즐기며, 신선과 도사를 찾고 술과 시를 짓는 일에만 소일했다. 상원 2년(761), 이광필을 따라 안녹산의 난 정벌에 참가 했으나 금릉에 이르러 병이 심해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 해인 762년 11월 향년 61세로 병사했다. 후일 끊이지 않고 샘솟는 시정과 풍류로 시선(詩仙)이라 불리웠던 이백의 죽음을 애석해 한 사람들은 그가 호수 속의 달을 건지려 뛰어들었다고 각색하여 비참한 죽음에 낭만적인 베일 한 자락을 드리웠다.

◑ 두 보(杜甫 712-770) : 당대의 시인. 자(字)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조부인 심언(審言)은 측천 무후가 세운 주나라의 시인이었다. 20세경 쟝쑤, 저쟝을 여행하였으며, 23세경 진사 시험에 실패하고, 재차 방랑의 여행길을 떠나 이백(李白), 고적(高適) 등과 만났다. 751년 40세 때, 헌상한 부시(賦時)에 의해 집현원 대제(集賢院待 制), 755년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胄曺參軍)으로 임명되었다. 동년말 안 녹산의 난을 만나 일시 반란군의 손에 붙잡혔으나, 도망하여 숙종때 좌습유(左拾遺)에 취임하였다. 그 후 불우하여 생활이 곤궁하였다. 48세 때 처자와 함께 쓰촨의 청뚜로 가서 친구인 절도사 엄무의 보호하에 수년간 평화스런 생활을 보냈다. 이윽고 양쯔 강을 따라 삼협(三峽)을 경유, 후난에 이르러 불우한 생애를 마쳤다. 이 백과 함께 중국 시인의 최고봉이며, 5언 율시, 7언 율시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그의 시는 개인적 또는 사회 전체의 우수를 표현하는 등 종래의 외형미를 혁신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성실, 웅혼한 기백을 적나라하게 표현 하였으며, 이를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다. 당시 거듭되는 토번의 침입으로 많은 사람들이 단련병 (團練兵) 또는 방추병(防秋兵)으로서 징발되었는데, 출정하는 농민들의 무한한 비애를 읊은‘병거행(兵車 行)’은 이 백의‘자야오가(子夜吳歌)’와 함께 특히 유명하다.

◑ 백 거이(白居易 ;772-846) : 당의 시인으로 자(字)는 낙천(樂天). 싼시 사람으로 798년 진사가 되었다. 한림 학사·형부 시랑 등을 역임하고 840년 형부 상서로써 봉사하였다. 관직에 있는 동안 강주 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자, 초당(草 堂)을 향로봉 밑에 짓고, 유유자적 운명에 순응하였다. 처음에는 국가에 봉사하려고 자주 조정에 간언하 기도 하였으나, 요로에 있는 자로부터 배척당하자 정치에 정열을 잃고, 시작(詩作)을 일삼아 주흥을 즐 겼다. 그의 시는 특히 평이한 시구로써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의 생존 시대부터 내외에 유행 되고 애송되었다. 저서에는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백씨경사사류(白氏經史事類)'가 있는데, 이들은 시 로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장시(長詩)로서 '장한 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일찍부터 여러 사람에게 애송되었다.

◐ 현장(602-664) : 당대의 승려로 서역 인도를 순례,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수행한 고승 삼장 법사의 실제 인물이 현장 이다. 역경 삼장(譯經三藏) 유가유식교학(瑜伽唯識敎學)의 전달자이며, 법상종(法相宗) 구사종(俱舍宗)의 조사(祖師)이다. 진류 사람으로서 형인 장첩 법사를 따라 뤄양의 정토사에 들어가 경론(經論)을 배웠다. 수,당 교체기인 난세 때는 장안, 청뚜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스승을 구했으며, 섭대승론(攝大乘論)이나 소승불교의 각종 논의에도 통달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아직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많았기에 직접 그 원 전을 보기 위해 인도 유학을 결심했다. 627년(또는 629) 톈산을 넘어 북로로 나가, 중앙 아시아, 북인도 를 거쳐 중인도의 나란다사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계현(戒賢)에게 유가유식(瑜伽唯識)의 교학을 배웠으 며, 또한 인도의 여러 고승에게도 불도를 배우고, 불교 유적도 순례한 후, 많은 경전과 불상을 얻어 가 지고 귀로에 올라,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톈산 남로를 지나 645년 장안에 돌아왔다. 태종은 크게 기뻐하여 칙령으로 역경 사업을 맡겼다. 홍복사, 자은사, 왕화궁에서 번역한 경전은 '대반야바라 밀다경' 600권을 비롯하여,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섭대승론(攝大乘論)'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 75부 1,335 권에 달한다. 이 번역은 충실한 축자역(逐字譯)을 했다는 것이 그 특징으로, 그 당시 신역(新譯)이라고 불렸는데, 그의 문하인 규기, 원측, 보광 등에 의하여 새로 번역된 경론(經論)에 의거한 법상종, 구사종 같은 새로운 교종(敎宗)도 일어났다. 그의 여행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은 그 전기인 '대자은사 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과 함께 7세기의 서역 인도를 연구하는 데에 더 없는 귀중한 문헌이다.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 당 현장의 인도 여행기. 12권. 줄여서‘서역기(西域記)’라고도 한다. 현장이 629년 8월, 장안을 출발하 여 서역 인도의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645년 3월 당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보고 들은 138국의 불교 유적 풍속 생활 등을 태종의 명을 받아 편찬 기술한 것이다. 그 중 110국은 스스로 순례한 곳이며, 현장의 기행을 따라 변기(辯機)가 찬록(撰錄)한 것으로서 그 기사는 서역의 불교 사정을 잘 전하고 있는데, 불당이나 당탑의 위치도 분명히 나타내고, 지리 언어 전설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씌어진 풍부한 사료이다.

◑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 당의 승려 의정(義淀)의 여행기. 의정이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남해의 시리비자야에 머 무르는 동안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따위와 함께 찬술하여, 691년 대진 선사에게 의 탁하여 장안으로 보낸 것이다. 자신이 견문한 인도 및 남해 여러 지방에서의 불교도의 계율·계행(戒行) ·사원 생활의 규범 따위를 서술하고 있다. 전문을 40장으로 나누어 당의 계율이 극히 복잡 난해함을 비판하였으며 당시의 남해 지역의 불교를 잘 전한 극히 중요한 사료이다.

◑ 당대의 외래 종교 : 당 문화가 국제성을 띠고 있다는 것은 외래 종교의 유행에서 알 수 있다. 당대에는 그 사원을 총칭하여 삼이사(三夷寺)라고 한 조로아스터 교(현교)·마니 교·네스토리우스 파 크리스트교(경교)가 일찍부터 널리 신앙되었고, 당 중기 이후에는 이슬람 인의 통상 활동과 더불어 이슬람 교(회교)가 전래되었다.

◐ 현교 :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중국의 호칭. 배화교(拜火敎)라고도 한다. 사산 조 페르시아에서는 국교로 신앙되었으며, 중국에는 남북조 무렵에 화북으로 전래해 왔다. 그 후 수대에는 신자를 단속하기 위한 살보(薩甫 薩保)라는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당에서는 이를 살보(薩寶)라고 했다. 당에 이르러 621년에 장안 포교방에 현사가 세워졌고, 631년에는 장안 숭화방(長安崇化坊)에 현사가 세워졌다. 이리하여 장안을 비롯하여 각지에 현사가 생겨, 이른바 삼이사(三夷寺)의 하나로서 중국에 유통되었다. 당조에는 살보 이하 여러 관리를 두어 이를 관리하게 했는데, 그 관직에는 호인(胡人)을 임명했다. 현종 때 일시 금지하였으나 이를 없애지는 못했으며, 무종때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송·원 시대에도 일부에서 신앙되었다.

◑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 교(Nestorianism) :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 네스토리우스(?∼451?)를 시조로 하는 크리스트 교의 일파. 크리스트의 신격 과 인격의 구별, 마리아의 성모설에 대한 비판으로, 431년 에페소스리우스의 종교 회의에서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는 면직되어 리비아로 추방되었다. 이 파는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 및 인도에까지도 전도되어 토마스 파로 불리었다. 또 7세기에는 중국(당 태종때)에서 경교(景敎)라 불리었고, 그 교회를 파사사(波斯寺)라 불렀다. 당 현종때에는 대진사(大秦寺)라 개칭하고, 각지에 이를 건립하여 교세를 제법 떨쳤다. 그 후 200년간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무종때 박해받아 쇠퇴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그 신앙이 다시 허락되어 신자와 교회가 증가하였다.

◑ 당삼채(唐三彩) : 당대에 만들어진 다채로운 도기를 말하며 유약을 바르지 않은 생바탕이나 살짝 구운 바탕에 갈색·녹 색·백색·황색·감색·푸른색 등의 유약을 칠하여 낮은 화력으로 구워 낸 것이다. 모양은 접시·잔· 물병 등 이외도 말·사자·개·단지·향로·베개 그리고 문무관, 서역 풍속의 인물 및 귀신·낙타·날 짐승 등이며, 대부분이 뤄양과 시안 지방의 분묘에서 나온 부장품으로서 실용적인 것은 적다. 호병(胡 甁)을 비롯하여 보상화(寶相華 :불교에서 쓰이는 이상화한 꽃, 원명은 만다라화이고 백련화를 가리킴)· 당초(唐草) 등의 무늬는 서역적인 향기가 짙으며, 형태는 세련되고 색조가 명쾌하여 대체로 호화로운 느 낌을 줌으로써 국제적인 당대 귀족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송·원·명대에도 계속 만들어졌으며 일본· 발해·요에도 영향을 주었다.

◑ 구양 순(歐陽詢 557-641) : 당의 서예가로 자는 신본(信本). 수 양제를 섬기어 태상 박사가 되었고, 당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었다. 624년 칙령을 받들어‘예문유취(藝文類聚)’100권을 수찬하였다. 태종때에 태자 솔경령이 되었고, 홍문관 학사를 겸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서(書)에 능하여 그 이름은 고구려에까지 알려졌다. 비백(飛白) 전(篆) 해(楷) 장초(章草) 초(草)의 서체를 자유로이 썼으나, 그 중에도 해서가 가장 뛰어났다. 그 서풍은 왕희지 이래의 정통파의 흐름을 받은데다 새 시대의 정신을 담아서 그 유례가 없는 전형미를 창작하여 후세에 길이 해법(楷法)의 모범이 되었다. 우 세남 저 수량과 함께 당초의 3대가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필적중에서‘구성궁 예천명(九城宮 醴泉銘)’이 가장 유명하다. 이는 구성 궁의 감천(甘泉)을 기리어 위 징이 찬미한 글을 비에 새긴 것으로서, 지금의 싼시성 린유현(麟遊縣)에 있다.

◑ 손 사막(孫思邈: ?∼682) : 당대의 신선가이며 의학자.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노장 백가의 사상을 담론하기를 즐겼다. 수 의 문제, 당의 태종, 고종으로부터 수차 벼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산 속에 은거하여 저 술에 몰두하였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의서‘천금방(千金方)’30권을 저술했다. 이 책에 수록된 의가의 윤리에 관한 논설은 특히 뛰어났다. 의서 외에도 많은 책을 지었으며, 100여 세를 살았다고 한다.

◑ 일행(683-727) : 당대의 천문학자이며 수학자. 717년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입경하여 황제와 안국무민(安國撫民)의 도를 담론하였다. 역상 음양 오행학(曆象陰陽五行學)에 밝으며, 대연력(大衍曆)의 기초 초고를 썼다. 밀교의 번역 사업에 참여하고, '대일경소(大日經疏)' 20권, '대일경의석(大日經義釋)' 등을 저술하였고, 「황도 유의(黃道遊儀)」를 제작하였다. 당시의 밀교는 주술이나 마법과 혼동·오해되었으므로 '비로자나경소 (毗盧 那經疏)'나 '비로자나경 의석(義釋)'을 찬술하여 밀교에 있어서의 주술과 과학을 구별하고, 비합리적인 주술은 외도(外道)의 환술(幻術)로 규정하고, 이를 의술·약리(藥理)·야금(冶金)과 같은 과학 기술과 혼동하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파리의 생트 지네비에브 과학관의 바깥 벽에는 위대한 과학자의 성명이 새겨져 있는데, 그 속에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보인다.

◑ 비전(飛錢) : 당·송 시대 돈을 먼 곳에 보내기 위한 일종의 송금 어음 제도. 비전 제도의 발달 원인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당시의 주요 화폐인 동전의 중량이 커서, 많은 액수의 화폐를 소지하고 상거래에 나가는 데 불편하고, 도적 등의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전의 경영은 당대에서는 번진(藩鎭)이 경사(京師)에 둔 진주원(進奏院), 정부의 재정 기관(삼사:三司), 금군(禁軍)을 장악하는 환관·대상이 하였다. 현금을 비전으로 바꾸려면 각전(刻錢)이라고 불리는 수수료를 납입하고, 첩(帖)·거(據) 등의 어음을 교부받았다. 지불인은 수취인이 지참하는 첩과 어음 발행인이 송부한 첩을 대조한 후 현금을 지불하였다. 송대에서는, 편전무(便錢務)라고 불리는 관사(官司)가 발행 사무를 취급하고, 지방 관사는 상인이 환어음을 제시하고 지불을 요구할 때는 당일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민간인이 취급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비전의 발달은 장차 지폐의 발생과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다.

◑ 시박사(市舶司) : 해상 무역 사무를 총괄하는 관청으로 당의 현종때에 처음으로 꽝조우에 설치. 송·원·명대에 존속하여 청의 해관(海關)에 계승되었다. 당대의 장관을 시박사·감박사(監舶司)라고 부르며, 중앙에서 자주 환관이 파견되고, 때로는 지방의 자사·절도사(송의 초기에는 지주:知州)가 겸임했다. 해외 무역에서의 세 수입이나 향약(香藥) 등 일부 수입품의 국가 전매의 이익을 중시한 송대에는 시박사 제도도 개혁 정비되어, 꽝조우·취안조우·밍조우 그 밖의 지방에 제거(堤擧) 시박사와 그 출장소인 시박무(市舫務)가 설치되어 항구에 따라 취급하는 상대국이 정해졌다. 장관인 제거시박(堤擧市舶)은 전운사(轉運使)가 겸했으나, 전임관을 둔 경우도 많았으며, 모두 중앙에 소속된다. 내외 상인의 출입 수속·보호·단속·화물 검사·징세, 판매물의 매상, 관리의 불법 단속 등을 직무로 하였다. 조공 제도하의 명대에는 소극적인 부신(符信) 무역 사무를 행하였으나, 1506∼1570년 이래 약간 왕년의 활기를 띠고, 황족·환관 등은 다투어 시박사 취임 운동을 벌였다. 시박태감(市舶太監)은 환관이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의 칭호이며, 탐욕스런 행위가 많았다.

◑ 나침반 : 중국의 대외 무역은 당대가 되자 왕성해져 아라비아 상선이 내항했으며 송대에 들어서도 계속 활발했다. 광동과 항주에는 외국인이 거주하게 됐으며, 항구로서 송대에는 광동이 가장 번성했으나, 항주·천주·온주·명주 등도 무역항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중국과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항로는 나중의 원양 항해처럼 오랜 시일에 걸쳐 대양을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육지에 가까운 항해를 했다. 그렇지만 상당한 거리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배의 진로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자침이 남쪽을 가리킨다는 점을 알고 11세기쯤부터 이를 항해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자침을 물에 띄워 놓은 나무 판자에 고정시킨 형태로 사용했기 때문에 수침반(水鍼盤)이라고 불렀다. 자침은 지남어(指南魚)라고도 일컬어졌는데 정말로 그 이름에 어울렸다. 이러한 방법은 불안정했기 때문에 자침을 고정해 자유롭게 회전시킬 수 있는 현재의 나침반(羅針盤)을 발명했다. 나침반에는 처음에는 8괘에 근거를 둔 8 방위가 새겨져 있었으나, 나중에는 24방위가 됐다. 나침반은 중국으로부터 아라비아에 전해졌다가, 15∼ 16세기에 유럽에 전해져서 신 항로의 개척 시대를 맞게 됐다.

 

2. 동아시아 사회의 변혁과 동서 문화의 교류

(1) 송의 사회와 문화

◑ 절도사의 득세 : 당에서 5대 10국 시대(907∼960)까지의 군직을 번진이라고도 한다. 8세기 초 부병제가 해체되면서 새 외(塞外)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국경 지대의 요새에 배치된 군단의 사령관을 말한다. 710년 하서 절도 사가 설치된 것이 시초이며, 현종 때까지 10개가 설치되었다. 절도사는 민정·군사·재정의 3권을 장악 하고, 강력한 권력을 배경으로 당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안·사의 난(755∼763)을 계기로 국내 요지에 도 절도사를 두게 되자 수적인 증가와 함께 서로 항쟁하여 당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며, 5대에 들어와 더욱 심해진 항쟁은 무인 정치 시대를 출현시켰다.

◑ 송의 건국과 태조의 문치주의 : 송의 건국자인 태조 조 광윤(趙匡胤)은 탁군(琢郡) 출신으로 후주(後周)의 금군(禁軍, 황제 친위대) 총 지휘관이었다. 그는 상하의 신임이 두터워 세종의 사후, 공제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추천에 의해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즉위 초에는 남당·오월·북한·후촉·초·민·형남 등의 여러 나라가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우선 초·형남을 토벌하여 후촉·남당의 연계를 끊고, 이어서 후촉·남한·남당을 멸망시켜 오 월·북한을 제외하고 거의 천하를 통일하였다. 5대 시대에 혁명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금군의 책동에 기인하였으므로 태조는 금군을 세 부대로 편성하여 각 부대에 지휘관을 두어, 권력의 분산을 꾀하였다. 조광윤(태조)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당대의 3성 6부 제도를 크게 수정하여 귀족 세력을 대변하던 문하성을 중서성에 흡수시키고, 중서성의 장관, 즉 재상은 동중서문하평장사로 격하하였으며, 거부권도 없애 버렸다. 따라서 당대에 천자의 권한을 제한하던 문하 ·상서성이 천자 측근의 중서성에 통합됨으로써 천자의 조칙(詔勅)은 전혀 반대에 부딪치지 않고 그대로 집행되었다. 권력이 재상에게 집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수명의 재상을 두고 참가 정사(參加政事)를 두어 재상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이 밖에 추밀원(樞密院)은 군사권을 장악하여 행정을 맡은 중서성과 함께 국가 최고 의결 기관으로 천자에게 귀속되었다. 따라서 정치(中書省)·군사(樞密院)·재정(三司)의 3기관이 각각 독립되어 천자에게 예속되어 권력 집중과 관료 상호 간의 횡적 연결을 차단한 것이 특징이다. 또 태조는 절도사의 병마·재정의 권한을 빼앗고, 주와 현의 장관 자리에는 중앙 정부의 문관을 파 견하여 지방의 권력을 약화시켜 중앙 집권제를 추진하였으며, 지방 제도도 이와 마찬가지로 주의 지사 (知事)·지주(知州)외에 통판(通判)을 둔 것도 지주의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근세 적 독재 정치 기구가 확립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문무관의 생활을 보장하는 일이 천자의 책임이 되고, 태조는 차(茶)·소금·반(磐)및 기타의 전매 제도를 확립하여 그 수입으로 그것을 충당하였다. 태조는 수도의 문무관의 생활 보장에는 식량 문제가 중요함을 감안하여, 즉위 후 곧 운하를 준설하여 조운을 정비하고 겸해서 재정의 중앙 집권화를 꾀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내정에 힘쓰는 한편, 거란이나 서하 등에 대해서도 방비를 엄중히 하고, 자기의 심복 무장을 국경에 파견하여 전 책임을 지게 하였으므로 이민족의 침입을 허용치 않았다.

◑ 송대의 과거 제도와 황제권의 강화 : 태조는 관료 선발에 있어서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하여 과거 출신이 아니면 고급 관료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또 인연 청탁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호명법(이름을 가리는 법)과 등록법(필체가 나타나지 않게 답안을 베껴서 옮기는 법)을 채택하여 외부의 간섭을 없앴으며, 최종 시험으로 당대에 시행되던 이부 시험을 없애고 황제가 직접 시험관이 되는 전시를 실시하여, 과거 합격자들은 황제에 대한 은덕을 느끼고 충성심을 더하게 만들었다. 전시에서 뽑힌 관료는 황제가 직접 뽑은 문생(門生)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어 황제의 권한 강화와 연결되는 것이다.

◑ 사대부(士大夫) : 송 이전의 귀족 사회에 있어서는 출세의 조건으로 문벌이 중요시 되었으나 송대 이후의 사대부 사회 에서는 신분보다 관료로서의 능력이 중요시되었다. 송대의 사대부는 지주(대상인), 관료, 독서인이라는 3 위일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사대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시문이나 유교의 경전에 대한 풍부한 소양을 지닌 문인들 즉 학자적 관료였다.

◑ 형세호(形勢戶) : 형세란 말은 남북조 시대부터 나오는데 벼락 부자나 벼락 감투를 쓴 자를 의미한 듯하다. 송대의 형세호는 신흥 지주이며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송의 지배 계층이다. 형세호의 일족 중에서 과거 합격자를 낸 것을 관호(官戶)라고 한다. 관호는 호적에 명기되어 요역의 감면과 같은 특권을 얻었다.

◑ 왕안석의 신법 : 왕안석(王安石)은 북송의 정치가로 신종 때 이민족의 침입과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목적으로 변법이라 일컫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식산 흥업(殖産興業)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 청묘법(靑苗法) : 소농민의 구제를 위한 변법의 하나로 봄에 상평창의 양곡을 판매하여 빈민들에게 저리로 자금을 대출하였다가 수확기에 현물이나 돈으로 회수하였다. ▶ 균수법(均輸法) : 일종의 국영 상업에 해당하는 변법의 하나로, 발운사가 정부 자금을 이용하여 강 남의 특산품을 사서 보관하거나 또는 물자가 부족한 곳에 운반하여 판매함으로써 물가를 억제하도 록 하였는데 이는 중간 상인의 이윤을 배제하고 물가 안정을 기하기 위한 것이다. ▶ 모역법(募役法) : 국가의 요역을 면제하여 주는 데 있어 인민에게 빈부의 차에 따라 5단계의 면역전 을 걷는 것이다. 정부가 이 돈으로 사람을 모집하여 요역에 충당하였다. 종래에 역을 면제받았던 관 호(官戶)에게도 면역전을 물게 하였다. ▶ 시역법(市易法) : 소상인의 보호를 위한 변법의 하나로 정부가 공급 초과 물품을 구입하였고, 백성 은 토지 등을 저당하고 지방관에게 돈을 빌릴 수 있게 하였다. 즉 정부가 체화(滯貨)된 물자를 사서 이를 담보로 하여 저리(2할, 당시 일반은 6∼10할)로 상인에게 대부하여 주는 정책이다. ▶ 보갑법(保甲法) : 강병을 위한 변법의 하나로 민호(民戶) 10호를 보(保), 5보를 대보, 10대보를 도보 (都保)라 하여, 각 그 장(長)을 두고 농한기에는 군사 훈련을 과하고 유사시에 동원하는 병농일치의 민병 제도를 말하였다. 한 집에 2정(丁)이 있으면 한 명은 보정(保丁)이라 하여 매일 무예를 배우게 하였다.

▶ 보마법(保馬法) : 보갑의 조직에 말을 사육하도록 하여, 평시에는 농경에 사용하고 전시에는 병마로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매년 말의 건강 상태를 검사하였고, 말이 병사하면 변상하도록 하였다.

◑ 왕안석의 변법에 대한 소식의 상소문

 

…나라의 백성이 풍족할 때, 군주가 개인 재산을 걱정한 적이 있었습니까? 폐하께서 부국(富國)시킨다고 말씀하신 것이 백성을 부유케 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폐하의 사유 재산을 풍족케 하신다는 것인지 신(臣)은 모르겠습니다. ……크든 작든 모든 일을 권력의 힘에 의존해 억지로 처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사리에 따라 처리한다며,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사리에 어긋나게 일을 처리한다면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농민에게 강제로 높은 이자를 물게 하고, 이윤을 놓고 상인들과 경쟁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하니 청묘법(靑苗法)이 실패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진정으로 백성들의 복지를 염려하신다면, 백성들은 어떤 소문이 떠돌아도, 폐하를 신뢰할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세입에만 급급하신다면, 백성들은 떠도는 소문만 믿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농부들에게 대부하여 2월 이자를 받고 계시니, 폐하께서 이자받으려고 대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도 백성들이 어찌 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겠다고 공언하는 것 때문에 비난받기보다는, 그의 실제 행동 때문에 비난받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오로지 백성들에게 이롭게 하기 위해서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주장을 견지하시지만, 백성들은 폐하께서 국고를 늘리려고 이런 정책을 쓰신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소동이 야기된 것입니다. ……젊어서 말에서 떨어져 본 사람은 그 일생토록 다시는 말을 타려 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과격한 개혁안에만 골몰하셔서, 폐하께서는 청묘법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역법(助役法)을 설립하시고, 또 균수법(均輸法)을 실시하기 시작했으며, 군대 조직을 변경시키셨습니다. ……지금 조정은 분쟁으로 불화한 상태입니다. 폐하께서는 그 이유를 캐보시지도 않고, 반대세력을 권력으로 억누르려고 하십니다. ……조정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저항하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1071년)

◑ 사마 광(司馬光)과 자치통감 : 왕안석의 변법에 반대하는 구법당(舊法黨)의 중심 인물로서, 왕안석의 탄핵을 받아 일시 하야하였으나 1086년 정계에 복귀하였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유명하다. 자치통감은 편년에 따라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요지를 매우 간략. 명쾌하게 기술하였다. 위로는 전국 시대로부터 아래로는 오대에 이르기까지의 1360여 년의 복잡한 역사를 294권으로 압축, 편찬하였다. 광범한 자료를 취하여 우선 장편을 만들고 다음으로 가필과 삭감을 하여 완성된 저작을 이루었으며, 그 편찬 방법도 후세의 모범이 되는 특이한 방법을 제공하였다. 재료는 여기 저기서 모아 각 부분별로 집필한 다음 사마 광이 총괄하여 저작을 완성하는 책임 주편 체제의 선구를 이루었다. 사마 광의 저작 태도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고증이 치밀하여 문장이 간결하였다.

 

◑ 송대의 정통론 : 북송의 사학에서 새롭게 전개된 문제로 정통론이 있는데, 이는 구양수가 역사 편찬 기술상의 곤란을 계기로 제시한 것이다. 구양수는 정(正)과 통(統)이라는 두 가지 이념을 가지고 현실의 각 왕조가 이에 해당하는지의 여부를 판정하였다. 정이란 역성 혁명을 하여 교체되는 왕조가 도의적으로 정당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통이란 그 왕조가 천하의 통일을 달성했는가 하는 것으로, 이 두 기준은 때로는 한 가지가 결여되는 경우도 있다.

◑ 양쯔강 유역의 개발

▶ 황건적의 난으로부터 5호의 남침까지의 130여 년 간에 걸쳐 전란을 피해 화북에서 강남으로 이주한 인구는 화북 인구의 1/8이상으로 보고 있다. 삼국 시대의 오나라 때 개발이 시작되었고, 동진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경제 발전이 추진되어 남조 각 왕조에서 이를 이어 갔다. 남북조 시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 하였지만 화북의 발달한 중국 문화가 강남으로 옮겨지고 강남이 개발되어 중국의 문화와 경제가 강남 중심으로 변화하는 중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였다.

▶ 수의 양제는 황하와 화이허를 연결하는 통제거, 화이허와 양쯔 강을 잇는 한구를 완성하였다. 또 황 하에서 북으로 탁군(현재의 베이징)에 이르는 영제거를 뚫었으며, 다시 양쯔 강에서 남으로 항주에 이르 는 강남하를 열어 남북을 잇는 대운하의 개통을 완성하였다.(610년). 또한 통제거와 황하의 교차점에서 다시 수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뤄양, 장안으로의 교통로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대운하 건설은 정치·군사 의 중심지인 화북과 경제력이 풍부한 강남을 연결시키고, 분열되었던 중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중요 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앙 집권화에도 도움이 되었다.

▶ 송대에는 토지의 개간과 관개 시설의 정비·확장 등에 의하여 농업 생산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양쯔 강 델타 지역에 벼농사가 크게 발달하여 "강절(江浙) 지방의 소호(蘇湖)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족 (足)하다."는 말이 생겼다. 한편 진종(眞宗) 때에는 한발에 잘 견디는 참파벼(占城稻)가 수입되어 늦벼 (晩稻)와 결합한 1년 2기작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쌀 생산량이 크게 증가되었다. 그리고 특히 남송 에서는 쌀농사 후에 재배한 보리는 전호(佃戶)의 수입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상품 작물로 보급되었다. 남송이 북송보다 약 3/4으로 영토가 축소되었으면서도 이민족(금, 몽고)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강남 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대운하를 통해 화북으로 운송되던 물자가 그대로 남아 강남을 윤택하게 한 것이 었다. 그리고 당 중엽 이후 중국인 사이에 차 마시는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송대에 이르러 더욱 더 보급 되어 쓰촨, 푸젠, 장시 지방에 차가 널리 재배되었다. 송은 차를 전매품으로 하여 차의 밀매매를 금하였으며, 화북은 물론 서하·거란·여진 등에도 수출되었다.

◑ 송대의 서민 생활 : 송대의 서민 생활은 대체로 향상되었다. 주위 환경도 개선되었거니와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문벌 귀족이 몰락한 후에 국가와 귀족에 의한 이중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송대에는 형세호(形勢戶)의 세력이 막강했으니 이들의 세력 행사는 주로 자기들의 전호(佃戶)를 상대로 한 것이었고, 자영 농민이나 특히 도시의 상공민들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물론 이들 세력에 기반을 둔 관리들에 의해서 억압을 당한 바 적지 않으나 엄격한 계급적 탄압은 크게 감소하였다. 특히 도시의 상공민들은 경제적으로 크게 호전되어 비단옷을 입고 차와 술을 마시며, 와자(瓦子)의 오락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의 사치스런 생활은 서민 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서민들은 이와 같은 호사스런 생활을 하기에는 경제력이 미치지 못했다. 산업의 발달로 그들의 수익은 보다 많아질 수 있었으나, 국가의 무모한 수탈에 의해서 대개는 빈곤을 면치 못했다고 본다. 그 뿐만 아니라 상공인들은 그들 자체의 조직 속에 묶여 있기도 하였다. 즉 직인(職人)들은 '작(作)', 상인들은 '행(行)'의 조직 속에서 그들의 활동을 제한받고 있었다. 행과 작은 원래 상공인들 자체의 이익을 보호하고 불리한 경쟁 때문에 상호 피해 입는 것을 제거해 보자는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물론 이러한 조합이 행원, 작원들에게 도움을 준 점도 적지 않으나 불리한 점도 많았다. 국가는 이러한 조합을 도시 치안을 유지하고 세역을 징수하며 잡부(雜賦)를 강요하는 조직으로 삼았다. 특히 조합의 지도자는 대개 호상(豪商)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악덕 관리와 야합하는 경우 그 피해가 지대하였다.

◐ 행(行) : 당·송 시대의 상인 동업 조합으로 진, 한 시대에도 사(肆)·차(次)·열(列)·행렬(行列) 등의 이름으 로 존재해 왔다. 이러한 명칭은 같은 업종의 상점들이 집단적으로 처마를 잇대어 모여 있어, 그 즐비한 집들을 형용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수·당 시대에는 장안 등 주요 도시에서는 그 상업 지역을 구획하여 시(市)라고 불렀다. 장안에는 동시(東市)·서시(西市)의 두 시가 있었고 이 시는 그 직종에 따라서 몇 개의 행(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육행(肉行)·철행(鐵行)·의행(依行)·약행(藥行) 등으로 장안에 220행, 뤄양에 120행이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행에는 행두(行頭)·행로(行老) 등으로 불리는 장(長)이 있었다. 송대가 되면 당대의 시(市) 제도가 무너지고 동업 상점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으로서의 행에 제약되는 일이 없이 도시 전체에 산재하여 영업하는 일이 많게 되었다. 따라서 행에는 지역적인 뜻이 흐려지고 동업 조합 즉 상인 길드로서의 뜻이 강해졌다. 장인 길드도 행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으나 보통 작(作)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길드는 서구의 길드와는 달리 국가의 엄격한 통제하에 놓여있었고 관 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 조달을 떠맡기도 하였으며 도시의 치안 유지와 세 금 징수, 잡부금 강요 등에 이용되기도 하였고, 조합의 우두머리인 대 상인들이 악덕 관리와 야합하여 오히려 조합원을 억압, 착취하기도 하였다. 행이라고 한 것은 원대까지의 일이며 명대부터는 방(幇)이라 불리게 되었다. 행에는 또한 상인 길드의 뜻과는 별도로 아행(牙行)이란 뜻도 있다. 아행은 거간 또는 도매상을 말하는 것으로 송대부터 생긴 말이다. 상인을 객상(客商)과 좌고(坐賈)로 나눈다면 아행은 후 자에 속하며, 명·청 시대에는 대규모적인 아행이 상업 센터에 점포를 차리고 상품 거래를 객상과 말단 업자 사이에 서서 중개할 뿐만 아니라 객상의 여관이나 상품 보존의 창고업도 겸업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역시 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아행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관의 허가를 필요로 했으므로 특허료를 관에 바쳐 영업 허가증인 아첩(牙帖)을 받고 비로소 가게를 열 수가 있었다.

◑ 송대의 상업 혁명 : 중국에서의 상업 혁명은 송대(960∼1279)에 일어났다. 그 배경은 여러 가지 점에서 찾을 수 있으나 도시의 발달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대에는 종래의 대도시 외에도 많은 중소 도시가 지방에 새로이 성립, 발전하였다. 또한 도시의 구조가 이전의 폐쇄적인 데서 벗어나 개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의 활동도 한결 자유로와져서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도시 분위기 속에서 도시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행(行), 작(作)과 같은 동업 조합을 결성하였다. 다음으로 송대 상업 발달의 배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수공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상품의 종류가 이전보다 다양해지고 풍부해졌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소비 성향도 크게 증대되어 송대 도시의 상공업자들은 비단옷 입기를 좋아하고 술과 차를 마시고 놀았으며 잡극, 꼭두각시 놀음, 만담, 마술 등 예술과 오락, 유흥을 즐겼다. 그러나 인구의 7∼8할이 넘은 농민들은 국가와 지주, 대상인들의 수탈에 시달려 도시인들과는 달리 생활이 곤궁하였다. 세째로는 대외 무역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송대에는 해상 무역이 대외 무역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것은 해양 기술의 발달 때문인데, 동남 아시아 뿐만 아니라, 인도·서아시아·동 아프리카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남해안과 양쯔 강 하류의 대 항구에서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무역을 감독하며 관세를 징수하였는데, 이는 정부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네째로는 화폐 경제가 두드러지게 발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송대에는 금, 은, 철, 동전 등 금속 화폐도 널리 사용되었으나, 교자(交子), 회자(會子)라고 하는 지폐가 발명, 유통되어 상업 발달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송대의 상업 활동은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객상(客 商), 좌고(坐賈), 아회(牙檜)가 그것이다. 객상은 상품의 운송과 도매를 맡고 좌고가 점포를 두어 직접 판매하였으며 아회는 이 양자 간에 상업거래를 연결시켜 주는 중개인이었다.

◑ 송대의 도시 : 당말로부터 송대에 걸쳐서 사회적으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는 도시의 발달이다. 중국에서 도시는 본 래 정치의 중심이었는데, 송대에는 상업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송의 관료 제도의 확립에 따르는 생산력, 생산 기술의 향상으로 인한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 그리고 이전에 행하여 졌던 도시에서의 야간 통행 금지 해제와 정시간내 상업 활동 규제의 해제로 상업이 자유로와진 것, 그 밖에 도시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자유와 환락, 그리고 문화적 생활을 위한 도시 인구의 집중 때문이었다. 송의 수도 카이펑이나 항저우는 당시 인구 100만을 넘어, 유럽의 중세 도시보다 번영하고 규모도 더 컸다.

(2) 북방 민족의 활동

◑ 정복 왕조와 정복 사회 : 정복 왕조 이론은 독일의 동양학자 비트포겔이 1949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북아시아의 이민족이 중국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정복하고 세운 왕조를 말한다. 그는 역대 중국의 왕조를 전형적인 한족 왕조 와 정복 왕조로 나누고, 이민족이 중국을 정복하였을 경우 문화적으로는 곧 중국화되고 만다는 종래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정복 왕조의 경우, 그들 자신이 유목 민족적인 부족적 사회 체제를 유지하면서 농경 문화와 상호 적응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전형적인 정복 왕조로는 요, 금, 원, 청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중국을 점령한 다음, 원래 자신들의 부족 근거지에 자기들 나름의 지배 체제를 만들어 자신들의 정체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요는 북면관 제도와 남면관 제도, 금은 맹안 모극제와 주현 제도, 그리고 몽고는 민족 차별 정책을 취하였다. 이와는 달리 중국인과 2중 체제를 형성하기보다는 한화에 적극 적이었던 '침투 왕조'가 있다. 대표적인 침투 왕조는 위·진·남북조를 통하여 5호가 세운 나라들이다. 내륙 아시아의 부족들은 주대(周代) 그리고 그 이전부터 '중원'을 침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협이 심각한 것이 된 것은 그 '이적(荑狄)'유목민들이 기마술을 도입하며 기동력을 증가시킨 이후였다. 그들은 말의 등자( 子)가 화력과 공격력을 증가시키자 정말 무서운 위협이 되었다. 과도기에 점차 강력해진 이민족들은 중국의 영역 안으로 침투해 왔고, 뒤에는 중국인들을 압도하였다. 북위(386-534)는 그러한 '침투 왕조'의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수는 남북조를 다시 통일하였다. 재조직되고 재생된 관료 제도를 통해 중국은 통합되었지만 이후 계속된 내부 위기로 당 왕조는 다시 붕괴되었다. 그 폐허 위에서 거란 족은 동북 변방에서 첫번째 주요 정복 왕조인 요(遼)를 세웠다. 송은 요에 대항하여 중국 영토의 대부분 을 방어하였으나 후속 부족인 여진을 방어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여진족은 북중국에서 두번째 정복 왕조인 금을 세웠다. 흥미롭게도 그들 역시 5호 16국이래 북방 민족이 넘어 보지 못했던 벼농사 지대의 경계인 미작선을 넘어 중국 전체를 장악할 수는 없었다. 쿠빌라이 칸이 남송을 넘어뜨리고 나서야 정복자들은 처음으로 전 중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명 왕조의 붕괴 후 이민족 침입자 중 가 장 중국화된 만주족에 의해 미작선은 다시 한번 무너지게 되는데 이들은 본질적으로 유목민인 거란, 8?고족과는 달리, 건국 이전에 목축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종사하였다. 요·금·원·청과 같은 4개의 주요 정복 사회들의 경우 한결같이 정복자들은 주로 신뢰할 수 있는 보족인으로 구성된 특수한 군사 기구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는데, 요 왕조 하의 오르두(Ordu ;유목민군), 금 왕조하의 맹안(猛安)·모극(謀克), 원 왕조에서의 몽고인 군단, 청조에서의 '기인(旗人)'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정복 부족은 자신들이 정치적 요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자신들과 중국인 사이의 결혼 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적 구분은 사회적 구분이 되었다. 중국 문화와 풍습을 다양하게 채택한 정복자들은 결코 그들의 우월한 사회 정치적 지위를 포기하거나, 그것 때문에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 지는 않았다. 중국의 국가적 종교의 신성한 의식을 충실히 수행했던 만주의 지배자들조차도 자신들의 주거지 내에서는 계속해서 자신들의 부족신을 숭배하였다.

◑ 거란의 2중 체제 : 거란이 중국을 점령하고 거란인, 돌궐인 등은 거란 부족의 관습인 유목민 부족제로, 중국인이나 그 밖의 농경민에 대하여는 중국적 군현제로 통치하였다. 즉 북면관(北面官)은 부족법에 의한 유목민의 군민 양정(軍民兩政)을 맡도록 하고, 남면관(南面官)은 중국식 율령체제에 의하여 군정을 통할하였다. 또한 위구르 문자를 본떠 문자를 발명하였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농경 사회의 경제적 비중이 증대하여감에 따라 유목민의 유제인 부족제는 무력화되고 농경민 중심의 사회로 변질하는 과정을 밟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금, 원, 청 등 모든 왕조는 이러한 2중적 정책을 폈다.

◑ 맹안 모극제(猛安謀克制) : 금도 요의 2중체제를 본받아 중국인에 대하여는 중국식의 군현 제도로써 통치하고, 여진인, 기타의 북 방민족에 대하여는 종래의 군사적 사회 조직인 맹안·모극제로써 통치하였다. 맹안·모극제는 금의 창설자 아구타가 여진인 고유의 부족제를 재편성한 것인데, 300호를 1모극부, 10모극부를 1맹안부로 하여 각각 그 장인 맹안과 모극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다시 1모극부에서 100명의 장정을 징집하여 1모극군을 만들고 10모극군을 1맹안부로 하여 각각 모극·맹안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행정조직인 동시에 군사 조직이었던 것이다. 금은 화북을 점령하자 각지에 이 맹안·모극부를 배치하고, 송·요의 관유지를 몰수하여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둔전케 하여 평시에는 농사에 종사하게 하고 전시에는 군사로서 활약하게 하였다.

◑ 거란(Kitai) : 4세기 이래, 요하의 상류 시라무렌 강 유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었던 반목 반농의 동호족(東胡族)으로 서 처음에는 위구르에 속하였으나 위구르가 쇠약해진 틈을 타고 일어나, 당말에 질라부(迭喇部)로부터 옐뤼아 바오지가 등장하여 907년에 거란족을 통일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는 내, 외몽고를 합치고 발해를 멸하였으며(926), 한인을 초치하여 중국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의 아들 태종은 국호를 요(遼)로 고치고 (937) 남변 농업 지대의 침략을 개시하여 5대의 하나인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 그 보상으로 지금의 북경, 대동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 16주를 얻어 중국 영토의 일부를 지배하였다. 전성기인 성종때 대군을 이끌고 남침하여 전연의 맹을 맺어 송으로 하여금 해마다 막대한 양의 은과 비단을 바치게 하였다. 이 결과 송의 상품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요의 귀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였으나 그 반면에 사치에 물들어 북방 민족 고유의 강건하고 검소한 기풍을 잃었다. 성종은 그 뒤 송과 통한 여진과 고려를 쳐서 그 영 가 만주에서 신쟝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거란(kitai), 곧 cathay는 멀리 서방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때를 고비로 그 이후 차츰 쇠퇴하여 송, 금 양국의 협공을 받아 망했다(1125). 그 뒤 일족인 옐뤼 따시가 중앙 아시아에 들어가 위구르 계의 카라한 조를 멸하고 Karakitai, 곧 서요(1132∼1211)를 세워 약 80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였다. 거란은 민족 의식이 강하여 중국의 문화에 대항할 만한 새로운 문화의 창조에 노력하였다. 그 현저한 예가 문자의 발명이다. 요의 거란 문자는 태조때 만들어진 것으로, 돌궐 문자를 한자 모양으로 조합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대자·소자의 두 종류가 있어서 공문서 등에 쓰였으며 후에 서하 문자나 여진 문자의 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이 요는 중국의 문화에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였지만 그 우수한 문화에는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유교문화는 중국인 통치의 편법으로서 국가통치의 고등기술로서 받아들인 데 불과하였으나, 불교는 샤아머니즘의 원시적 종교밖에 모르던 거란인에게 큰 흥미를 돋구어 주었던 모양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성종·흥종·도종은 불교를 애호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법회를 열고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때문에 재정에 큰 영향을 끼쳐 요 쇠망의 유력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요의 대장경은 송의 대장경과 더불어 고려에 전해져 고려 대장경의 기초가 되었다

◑ 연운 16주(燕雲 十六州) : 936년 석 경당이 거란의 원조를 얻어서,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晋)을 세운 대가로 거란에게 할양 하여, 이후 분쟁의 불씨가 된 땅. 지금의 베이징(北京, 燕), 다퉁(大同, 雲)을 중심으로 해서 장성의 남쪽 에 해당하는 탁·계·단·순·영·막·울·삭·웅·신·규·유·무·환의 16주를 말한다. 후에 후주의 세종이 영·막의 2주를 회복하였으나, 송대에 역주를 잃었기 때문에 15주가 되었다. 한편 장성 이남이기는 하지만, 일찍부터 거란 령에 속했던 평·난·영의 3주는 이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 전연의 맹약(1004) : 중국의 송에 침입한 요의 성종과 이를 막기 위해 출전하였던 송의 진종이 전주에서 체결한 강화 조 약. 그 조건은, 1) 송은 군비로서 요(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보낸다. 2) 진종은 성종의 모친을 숙모로 삼고 양국은 형제의 교분을 갖는다. 3) 양국의 국경은 현 상태로 한다.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越境者)는 서로 송환한다. 이상의 3개조이다. 이 조약 체결 후 요와 송 사이에는 오래 평화가 유 지되었으며, 그 결과 요는 문화가 발달하고 경제상으로도 발전을 이루어 동아시아 제1의 강국이 되었다. 전연이란 전주의 아명(雅名)이다.

◑ 서요(西遼) : 요가 망한 뒤 그 유족인 야율대석(耶律大石)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 아시아의 카라한 조를 멸하고 세운 국가이다. 카라키타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이 서요는 중앙 아시아의 교통 요지를 차지하고 무역에 종사하다가 몽고에서 망명한 투르크 계의 나이만부에 의하여 망하였다.

◑ 금(女眞) : 10세기 전반에 발해국이 망한 뒤, 그 땅에 퉁구스 계의 여진족이 나타났다. 요는 처음 송화강의 서남방에 살고 있던 여진족을 숙여진(肅女眞)이라 하여 요의 적에 넣어 직접 통치하고, 송화강 동쪽에 살고 있던 여진을 생여진(生女眞)이라 하여 송화강 근처에 관청을 두어 지배하였다. 이들 생여진은 동북 만주의 각지에 할거하여 아무런 통일도 없이 반농, 반수렵의 생활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1세기 말에 하르빈 부근에 있던 완옌부의 추장 아구타가 생여진 제 부족을 통일하고 요에서 독립하여 나라를 세워 금(111 5∼1234)이라 하였다. 이가 곧 금의 태조이다. 태조는 송과 연합하여 요를 공격, 이어 태종때 요는 멸망하였다. 금과 송이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연운 16주룰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금군이 대거 남하하여 1127년 수도 변경( 京:지금의 開封)을 함락시키고 송의 휘종, 흠종의 부자 2제를 비롯한 황족과 신하 3천여 명을 포로로 하고 화북의 여러 지방을 손에 넣었다. 여진인이 중국의 내지에 깊숙이 들어가 한인과 동거함에 따라 차츰 중국 문화에 동화되기 시작하였다. 금은 국초이래 여진인의 한화를 경계하여, 한자와 거란 문자를 참고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었으나 복잡하여 도리어 한자가 많이 사용되고, 한문학이 유행하여 유학·시문에 능한 자가 많이 나타나고, 공식의 의례는 물론 일상의 생활까지도 중국식을 따랐다. 게다가 화북에 배치된 맹안·모극부의 여진인들은 농사일은 오로지 고용된 중국 농민에게 맡기고 자기네는 유락에만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차츰 중국인의 경제적 압박을 받아 토지를 잃게 되고 그 결과 군의 규율이 허물어지고 무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므로, 세종(1161∼1189)은 토지를 정리하여 맹안·모극의 우대법을 강구하는 동시에, 여진인의 관리 지망자에게 여진어와 여진 문자를 배우게 하고, 학교를 세워 자제를 양성하는 등 중국 문화의 침투를 방지하는 데 힘썼으나, 여진인 한화의 대세는 막을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한문학이 더욱 유행하였으며 송의 교자를 모방한 교초(지폐)가 발행되고 불교가 유행하여 각처에 절이 생기고 대장경이 간행되었다. 도교의 전진교가 유행하여 천사도의 계통을 받은 강남의 정일교와 더불어 도교의 2대 종교를 형성하였다. 금은 남송과 대립 항쟁하다가 북방에서 일어난 몽고에게 망하였다.(1234) 이후 여진인은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14세기 후반에 명이 흥하 여 만주를 경략하자, 명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명말에 이르러 건주 여직에서 누르하치가 나와 여진인을 통합하여 후금(後金)을 세우고 후금국한(後金國汗:황제)이 되어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1616). 그 후 태종은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여진인이라 하지 않고 만주인이라 일컬었다.

◑ 정강의 변(靖康의 變: 1126∼1127) : 북송이 금에 의해 멸망된 사건. 정강은 흠종의 연호. 요를 멸망시킨 금이 1123년 연경 부근의 6주를 송에게 할양해 줄 때 송과 맺은 약속을 송이 이행하지 않자, 송의 서울 카이펑(開封)을 공격하였다. 이에 송은 세폐(歲弊)의 지불, 영토 일부의 할양 등을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그러나 송이 약속을 위반하였으므로 금군이 재침하여 카이펑을 함락시키고(1126), 이듬해 휘종(徽宗 上皇)·흠종(欽宗)을 비롯하여 황후·태자·비빈·대신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하고, 많은 재물을 약탈하여 만주로 가지고 가니, 송 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북송). 그 때가 정강 원년(1127)이었으므로, 이 사건을 정강의 변, 혹은 정강의 난이라 한다. 휘종 등은 결국 북만주에서 서거하였고 흠종의 아우 고종이 남경 응천부(南京應天府 河 南)에서 즉위하여 송 왕실을 재건하였다(남송).

◑ 서하(黨項, 西夏: 1038-1227) : 송의 서북방 감숙·섬서방면에 있던 티벳 계의 탕구트(Tangut, 黨項)는 당말 황소의 난 때 공을 세워 당으로부터 절도사로 임명되고 이어서 송에 복속하였으나 요가 일어나자 요에 복속하여 하왕의 책봉을 받았다. 송·요가 대립 항쟁하는 틈을 타 차츰 세력을 뻗쳐 11세기 중엽 이원호(1032∼1048)가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고 대하(大夏)라는 나라를 세워 요령성 흥경에 도읍하였는데 송은 이를 서하라고 불렀다. 서하의 주요 산업은 목축이었으나, 하서 오르도스 지역에서는 관개 농경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단길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중개 무역의 이익이 많았다. 이 원호는 그는 숙적 위구르와 토번을 친 뒤 송의 변경을 침공하여 1044년에 화약을 맺어, 서하는 송에게 신하의 예를 행하며, 송은 매년 서하에게 비단 153,000필, 은 72,000량, 차 30,000근을 제공하며, 국경에 각장( 場 관영 무역장) 2개소를 설치하고 호시 (互市)를 행할 것 등을 정하였다. 원호의 말년이래 서하·요 관계는 악화, 다음의 이 양조 때에 요에 굴 복했고, 요와 금이 항쟁할 때 서하는 처음에 요와 동맹을 맺었으나, 1124년부터는 금의 번신이 되어 송 을 공격하여 오로도스 동부의 땅을 얻고, 1137년에는 적석주(積石州)등 3주를 합쳐서 서하 최대의 판도 를 이루었다. 송의 남천으로 송·서하의 항쟁은 끝나고 이 인효의 시대에는 내정에 힘을 쓸 수가 있어 경제·문화상의 발전이 눈부시어, 유교·불교 등을 기조로 한 서하 문화가 번성하여 명승 석학도 적지 않게 출현하였다. 이 순우의 말년부터 몽고의 침입을 받았으나, 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고 이에 대항하였으나 서하 최후의 왕 현(睍)이 살해됨으로써 서하는 이원호 이래 10왕 190여년으로 멸망하였다. 서하의 문화는 그 지리적 위치에 따라 중국 문화와 티벳·위구르를 경유하여 들어온 서방 문화의 혼합이었는데, 특히 중국 문화의 수입에 힘써 관직·제도를 중국식으로 하고 한자를 기초로 서하 문자를 만들어 썼다. 이 나라에는 유교·불교·도교 등이 성행하였다.

◑ 성리학의 성립 : 성리학(性理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 등으로 불린다. 당·송 시대의 중국 사회의 변동은 지배 사상으로서의 유학에도 반영되었다. 북송의 주돈이가 시작하고 남송의 주희에 이르러 확립된 성리학은 당대 이전의 유학의 면모를 일신했다. 당대까지의 유학은 5경(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자구(字句)에 대한 주석을 중심으로 한 훈고학이었다. 이 훈고학은 사상으로서의 내용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당대에는 오히려 불교가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성리학은 불교를 비판하면서 유학의 사상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지만, 황제를 정점으로 한 국가 지배와 사회의 신분 관계를 우주 자연에 일관하는 불변의 천리(天理)에 기초를 둠으로써 절대화시키고 현존의 지배 질서에 대한 긍정을 이론화하여 명대부터 관학으로 존중되고 채용되었다. 성리학은 이(理)와 기(氣)를 바탕으로 하는 이원론적 철학으로, 이와 기의 관계로부터 우주론을 전개하고 인간의 윤리 도덕을 논하였으며, 학문·수양으로 바른 도(道)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신분 관계의 기초를 만물의 원리 위에 확정한 이 학설은 황제 지배를 용이하게 하였으며, 5경과 함께 4서(대학·중용·논어·맹자)가 중시되었다. 4서 속에 내포된 도덕 윤리가 객관적 규범으로서 고정화되고, 각 개인은 사회 속에 처해 있는 각자의 지위에 따라 그 분수에 맞는 규범을 준수할 것이 요구되었다. 성리학이 당시 사회의 지배 계층이자, 전제적 황제 지배의 지주인 형세호층의 정치 윤리 사상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형세호층이 지배 질서의 유지자로서 갖는 의식은 유학을 단순히 과거 시험을 위한 방편만이 아니라, 향당(鄕黨)을 지도하는 지배자의 교양으로 서 수학한다는 기풍도 만들어 냈다. 향약·가훈 등이 많이 생겼고 동시에 독서인이라 불리는 재야의 유사(儒士)도 생겨났다. --향당(鄕黨) : 자기가 태어났거나 사는 시골의 마을 또는 사람들로 12,500집이 향이 되고, 500집이 당이 되었다.

◑ 당·송 8대가 : 당 중기에 나온 한 유(韓愈)·유종원(柳宗元)은 일세의 문장가인데, 이들을 수직적인 변려체에 반발하 여 씩씩하고 명쾌한 고문체를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이 고문 운동은 한동안 부진하다가, 송 초기에 들어 서 구양수(歐陽修) 등이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노력하여 고문은 비로소 확고한 기반을 굳혔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문장가인 당·송 8대가는 위의 세 사람과 소순·소순·소식·소철·왕안석·주공이 포함되며, 이들은 모두 고문의 대가들이었다.

(3) 몽고 제국의 흥망

◑ 칭기즈 칸(Chingiz Khan :成吉思汗 ;1162-1227) : 몽고 제국의 창건자, 원의 태조. 아명은 테무진(?木眞), 전통적으로 몽고 수령들이 모두 귀족층에서 세습적으로 자리를 차지했던데 비해 칭기즈칸은 집안도 몰락한 상황에서 맨주먹 하나로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집안도 원래 귀족이었다. 부친은 예수게이 바가투르, 모친은 허얼룬이다. 그러나 그가 9세 되던 해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게 독살되었고, 가족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테무친(칭기즈 칸)은 귀족들에게 고통당하는 몽고의 하층민과 약소부락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 이 때의 경험은 후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오랜 포로 생활에서 탈출한 테무친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쓰러진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출세하고 싶었다. 그러나 초원에서는 기득권층인 귀족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권력 기반이 전무했던 그는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기득권층에 맞서기 위해 부족에서 이탈한 노비, 대장장이 등 초원의 민중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다른 부족 사람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초원의 기존 질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부족과 씨족의 장인 귀족들은 즉각 연합군을 조직하여 테무친을 공격했다. 그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은 그와 어린 시절의형제를 맺었던 자무카였다. 그러나 테무친의 평민 군대는 자무카의 귀족 군대를 격파했을 뿐 아니라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족 등을 깨고 몽고 평원을 통일했다. 그는 1206년에 열린 쿠릴타이(몽고족의 의사결정 회의체)에서 칭기즈 칸의 칭호를 받고 초원의 패자가 된다. 그는 먼저 통일 국가의 기구를 정비하였다. 즉 씨족적 결합 관계를 해체 하고, 자기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부장을 천호 집단(千戶潗團)의 장으로 임명, 새 전제적 권력자로서 가 한(可汗)에 예속하는 유목 영주제를 확립하였다. 이후 칭기즈칸은 여진족의 금, 거란족의 요, 한족의 남 송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서방 원정에서는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도 계획되었으나 칭기즈 칸의 돌연한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때 로마 원정이 예정대로 행해졌다면 세계사는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정복된 지역은 자식들에게 분봉 통치하게 하니, 뒤의 4한국의 기초가 되었다. 그의 개국 군주로서의 비범한 재능은 내정·외정 양면에 있어서 잘 엿볼 수 있으며, 그의 동서 문화의 존중, 종교의 보호, 각종 제도의 정비 등은 유목 사회를 국가로까지 끌어 올릴 수 있게 하였다. 칭기즈 칸은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행동은 매우 신중해서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하는 나약한 면도 있었고 큰 싸움을 앞에 두고는 산 위에 올라가 적의 잘못을 늘어놓으며 하늘의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칭기즈 칸은 생애 마지막 원정이 된 탕구트 정복을 끝낸 후 숨을 거두었다. 1227년 8월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 사냥도중 밑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 때문이었다, 전투중 무릎에 맞은 화살 때문이라는 등 설이 분분하며, 이밖에도 벼락에 맞았다, 탕구트 국왕의 아름다운 부인 퀴르벨진이 그와 동침할 때 국부에 상처를 입혀 그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가 죽자 몽고군 지도부는 남은 원정 계획을 취소하고 즉각 귀국을 결정 했다. 죽음을 비밀로 하라는 그의 유언 때문에 몽고로 돌아가는 길에 장례 행렬을 목격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 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 주치(Juchi ;1172-1224/25) : 칭기즈 칸의 맏아들로 킵차크 한국의 시조. 주치는 몽고어로 빈객(賓客)이라는 뜻. 1211년 이래 부친을 따라 금 정벌에 공이 있었으며, 1217년에는 키르기즈 부(部)를 정복하였다. 또, 1219년에는 서부 원정대 제2군의 장으로서 실(Sil)강 방면을 공략하였다. 칭기즈 칸이 여러 아들을 분봉함에 있어서, 그는 장자이기 때문에 가장 먼 킵차크 지방을 영유하게 되었고, 그 땅에서 죽었다.

◑ 차가타이(Chaghatai ;?-1242) : 칭키즈 칸의 둘째 아들로 차카타이 한국의 시조. 칭기즈 칸이 아들들에게 분봉을 할 때에 8,000아일 (유목 가족)의 백성을 얻은 그는 알말티크를 근거로 하여 서요(西遼 카라 키타이)의 고지 일대에 차카 타이 한국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오고타이 한의 치세 중에는 일족 중의 최장로(最長老)로서 권세를 쥐었다.

◑ 오고타이(Ogotai: 1186∼1241) : 몽고 제국 제2대 가한(可汗: 1229∼1241. 태종). 태조 칭기즈 칸의 세째 아들. 치세중 부친에 의해 개척된 제국의 통치를 강화함과 동시에 부친의 계획과 이상을 실현하기에 힘썼다. 그는 즉위함에 있어 가한으로서의 권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형 차가타이를 위시하여 아우 틀루이 등에게 신하의 예를 지키게 하고 태조가 제정한 대법령을 헌법으로 발포하여 통치 방침을 명시하였다. 또 금의 제도를 참고하여 중앙 정부의 기구를 정비하고, 몽고인에 대해서도 납세 의무를 과하고 세의 비율을 소유한 가축의 1%로 정하였다. 그는 또 1235년 오르콘 강(상원)의 카라코름에 수도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여기를 중심으로 하여 역전 제도를 세움으로써 국내 전체에 걸친 교통 기관을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부친의 유업을 이어 받아 금국의 토멸과 호라즘 왕국의 완전 정벌을 추진하여, 아우 트루이와 협력해서 1134년 금국을 멸하였다. 그의 외정 중 가장 큰 것은 남러시아 및 유럽 원정일 것이다. 즉 1135년 출발한 형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를 총 지휘관으로 하는 원정군은 1140년까지 러시아 전토를 경략하고, 그 후 폴란드, 헝가리, 달마티아까지 침입하였다. 이 원정의 결과 러시아 전토는 바투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1143년 킵차크 한국이 건설되었다. 이 원정은 유럽을 뒤흔들고, 유럽인을 몽고의 위력 앞에 부복케 함으로써 이때부터 동북 아시아인이 유럽 인으로부터 타타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트루이(Tului ;1193-1232) : 칭기즈 칸의 네째아들. 부친을 따라 서역을 정벌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1227년 부친의 사후 섭정으로서 형 오고타이를 한위에 앉히고, 이를 도와 내정에 힘씀과 동시에 정복사업에도 종사하다가 작고하였다. 예종이라고 불린다. 그는 부친의 사후 몽고의 본토와 병력의 태반을 이어받았으므로 그의 계통은 가장 실력을 갖추어, 후에 그의 아들 헌종(몽케칸)이나 세조(쿠빌라이킨)가 잇달아 제위에 오름으로써, 원 왕조의 종가가 되었다.

◑ 바투의 서정(西征) : 바투는 칭기즈 칸의 장자 주치의 차남으로 서역 정벌에 나서, 1237년에는 볼가 강 하구에 도달하고 40년에는 키에프를 점령하고, 41년에는 독일 제후 연합군을 바르주다트에서 격멸하였다. 그의 부대는 헝가리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침공하였으나 몽케 칸(헌종)의 사망으로 회군하였다.

◑ 구유크(Guyuk ;1204-1248) : 몽고 제국 제3대 황제, 정종(1246∼1248)으로 오고타이 칸의 장자. 1233년 여러 왕과 함께 랴오뚱의 포선 만노를 정벌하고, 1235년 바투의 원정에 참가, 몽케와 함께 남러시아의 알란인의 수도를 공격하였다. 1241년 태종이 죽자, 곧 귀국하였으며 여러 왕과 중신 사이에 후계를 놓고 분쟁이 있었으나, 섭정인 모후의 책모에 의하여 1246년 한위(汗位)에 올랐다. 명찰한 군주로 기강을 바로잡고, 재정을 농단하던 암두르라하만을 처형하며 모후 섭정 중의 폐해를 제거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3년으로 사망하였다.

◑ 훌라구(Hulagu) : 칭기즈 칸의 네째아들 트루이의 아들로, 형인 몽케 칸(현종)의 명을 받아 서아시아를 원정하여 아바스 조를 멸하고(1258), 다음 해에 일 한국을 세웠다.

◑ 쿠빌라이(Khubilai ;1215-1294) : 몽고 제국의 5대 칸으로, 원의 초대 황제인 세조(世祖)가 되었다. 형 몽케 칸을 도와 대리(大理), 토번 (土蕃)을 정복하고, 몽케 칸이 죽은 다음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1260년 제위에 올랐다. 그는 수도를 카 라코람에서 대도(大都: 베이징)로 옮기고, 중국을 몽고 제국의 중심으로 하여 1271년 국호를「원(元)」이라 일컬었다. 1279년 남송을 멸망하고, 고려, 안남, 버어마, 자바를 굴복시키고, 일본을 정벌하는 등 북아시아 민족에 의한 최초의 동아시아 통일을 완성했다. 중국적 관료제의 채용, 통일 통화의 발행, 세법의 제정 등 중국화를 도모하는 반면, 몽고인 우대, 몽고어의 공식 사용, 몽고 병제의 시행 등 몽고 지상주의 정책을 견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80세에 사망하여 케롤렌 강의 기련곡(起輦谷)에 매장되었다. 칭기즈 칸과 견주는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 쿠릴타이(Khuriltai) : 몽고어로 「집회」롤 뜻한다. 원래 유목민의 장로 회의로, 오환·선비 등에도 이와 유사한 풍습이 있었다. 몽고 제국에서는 가한(可汗)의 선거·추대·약탈·원정 등의 중요 국사를 의논하는 국가적 회의를 가리킨다. 초기에는 특히 가한을 선출하는 최고 회의이던 것이, 한번 유력한 가한이 출현하게 되면 쿠릴 타이는 가한·왕족·공신들의 뜻대로 좌우되고, 가한의 한위(汗位)도 세습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킵차크 한국, 일 한국 등에서도 시행되었으며, 한때 원 왕조에서도 형식적이나마 행하여졌다.

◐ 호라즘(Khorazm) : 중앙 아시아 아무다리야 강 하류 지역, 또 그 곳에 있었던 나라의 이름. 사막으로 둘러 싸인 녹지대로서 일찍이 서아시아 문명이 보급되어 널리 알려졌다. 헤로도토스도 KHorasmi로 기록하였고, 중국에서는 당대에 화리습미가(貨利習彌 )로, 원대에는 화라자모로 기록하고 있다. 이슬람 사료에는 Khwarizm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B.C. 8∼6세기에 국가가 건설되었으며, 이후 페르시아, 박트리아 등의 제국령에 병합되었거나 독립 국가를 이루기도 했다. 관개 농업이 발달했으며 고대 문명이 발달하여 그 매몰된 문 화는 최근 소련의 톨스토프 등에 의하여 밝혀졌다. 8세기에 아랍인이 정복하여 황폐했으나 996년 마문 빈무하마드가 독립하여 호라즘 샤 왕조를 창립,. 이슬람 문화를 모태로 하여 다시 번영했다. 11세기에 들어 가즈니, 셀주크의 두 투르크 왕조에게 정복되었는데, 후에 다시 독립하여 강대해지고 중앙 아시아 북서부 전역을 지배했다. 1220년 칭기즈 칸에게 멸망되어 그 후에는 티무르 조에 편입되고, 다음에는 우즈베크 족의 히바 한국이 세워졌다.

◑ 몽고 군대의 특성 : 첫째, 몽고 군대는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군대 조직과는 전혀 다른 조직 원리를 갖고 있었다. 병사들은 부족을 단위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칸(유목민의 군주 칭호)의 명령에 따라 만 호(戶), 천 호, 백 호로 편제되었다. 이에 따라 각 부족장들의 권한은 약화되고 칸으로의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다. 지휘관은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했고 무능하면 그 자리는 즉시 부하에게 넘겨졌다. 실제 유명한 장군 중에는 목수, 양치기, 대장장이, 노비가 많았고 이들은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쟁터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둘째, 칭기즈 칸은 적 내부의 반목을 이용하는 데 뛰어났다. 특히 개방적인 종교 정책을 취함으로써 각 종교가 엉켜 있는 중앙 아시아에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배층이 불교도인 퀴췰릭을 정벌할 때였다. 그는 지배층과는 달리 민중들은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점을 이용해 이슬람 옹호를 선전했다. 민중들은 몽고군을 해방군으로 여길 정도였다. 셋째, 칭기즈 칸은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초원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국제 상인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안전을 약속함으로써 이 들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몽고군의 승리만이 상업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 민족의 국내 정세에 관련된 정보를 칭기즈 칸에게 넘겨주었다. 칭기즈 칸은 또 이들의 입을 통해 몽고군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유포시킴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적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다. 결국 몽고 사회의 근간을 뒤흔든 평민 군대의 탄생이 테무친을 몽고 초원의 패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칭기즈 칸의 개인적인 능력과 당시 국제 상인 조직의 뒷받침이 결합되어 전무후무한 정복 드라마가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원(元) : 칭기즈 칸이 세운 몽고 제국은, 그가 죽은 후, 몽고 지방을 중심으로 한 대 한국과 다른 서방의 여러 한국이 연합 정권을 이루었으나, 쿠빌라이가 대 한위에 오르자, 여러 한국은 그 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쿠빌라이는 서울을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 옮기고, 대도와 내몽고의 상도(上都)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중앙 정부의 직할지로 하여 여기에 원 왕조를 열었다(1271). 원(元)이라 함은 역경(易經) 중에 있는 한 문구를 따온 것으로, 중국 역대 왕조명 중에 최초의 추상적 국호인데, 이는 이 왕조가 유교 정신에 토대를 둔 정통적인 중국 왕조임을 표방한 것이라 하겠다. 뒤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멸하여(1279)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복속시켰으며, 버마를 토벌하고, 베트남, 참파, 자바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쿠빌라이의 치세 35년간은 원의 황금 시대로서, 그 여세는 그의 뒤를 이은 성종에서 태정제(泰定帝)에 이르는 30여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몽고인·색목인·한인·남인이라는 민족별 신분제를 써서, 몽고인은 중 앙·지방의 각 행정 기관의 중추를 독점하였다. 몽고인은 중계 무역의 이익을 중시하여,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참치, 즉 역전제를 정비하였기 때문에 동서 교통이 발달하여 문물의 교류가 번성하였다. 토지에 있어 종래의 토지 사유를 계속 인정함으로써 대토지 소유와 지주 전호제가 계속되었다. 조세 제도로는 강남은 양세법을, 화북 지방에는 몽고 고유의 세량을 실시하였다. 공용어는 몽골 어, 공식 문서에는 위구르 문자와 파스파 문자를 사용하였다. 민호(民戶)는 요역을 부담, 제색호는 요역을 면제받는 대신 고정된 직분의 봉사가 요구되었다. 뒤에 한위 상속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점차 쇠약해졌으며 거기에다 몽고인·색목인으로 구성된 궁정 귀족의 사치, 라마교 신앙에 의한 많은 낭비 및 이에 따르는 교초의 남발 등으로 물가는 극도로 등귀하였고, 또한 재정권을 가진 색목인이 한인을 압박하였으므로 사회 불안이 증대되어, 드디어 원은 주 원장(朱元璋명의 태조)에게 멸망당하게 되었다.

◑ 원의 국호 : 몽고 제국을 '원'이라는 국호로 개정한 것은 제 5대 쿠빌라이(세조)였다. '원(元)'이라는 것은 역경(易 經)의 '大哉乾元 萬物資治'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처음' '으뜸' 이라는 뜻이었다. 국호를 이런 식 으로 정하는 것을 원 이후 왕조들이 따랐으며, 그 이전의 漢·隋·唐·宋 등은 그 발상지와 관계 있는 지명을 왕조 명으로 하는 것이었다.

◑ 원의 관제 : 무력에만 능하고 문화가 낮은 몽고인이 문화가 우수한 중국을 지배하는 데는 중국의 관료주의적 통치 조직에 의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여기에 원은 송의 제도를 본받아 행정·군정 등을 정비하여 군주 독 재권을 확립하였다. 원 왕조는 중앙에 일반 행정을 맡아보는 중서성, 군정을 맡아보는 추밀원, 감찰을 맡아보는 어사대의 3대 관청을 두었다. 지방에는 11개 처에 행중서성(행성)을 두어 군정·민정을 맡아보게 하고 수 개처에 행어사대(행대)를 두어 감찰을 맡아보게 하였는데, 이 행성과 행대는 중앙의 3대 관 청과 대등한 것으로 황제에 직속하였다. 원의 통치 기구는 분권적 연합제 국가라 할 수 있다. 행성은 지금의 최고 지방 행정 구역인 성의 기원이 되었다. 행성은 다시 로(路)·부(府)·주(州)·현(縣)으로 나누어 각각 장관을 두어 통치하였다. 그 장관에는 몽고인 또는 이에 준하는 서역인을 임명하여 몽고인 지상주의를 관철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행정 감독기관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다루가치(Darg hachi, 達魯 花赤)제가 있어 중앙 정부의 지령의 철저화와 감시를 맡아보았다.

◑ 원의 군사 제도 : 원은 화북 일대를 정치적 기지로서 가장 중요시하고 생산력이 높은 강남을 경제적 기지로서 다음으로 중요시하고, 기타의 지역은 양자를 둘러싼 주변지역으로 취급하여 이에 따라 군사력을 중점적으로 배치 하였다. 곧 경사(京師)에는 국군의 정예들을 선발하여 편성한 시위친군(侍衛親軍)을 배치하고, 화북의 산동, 화남, 섬서, 사천 등에는 다음으로 강한 몽고인 군단을 배치하고, 장성의 주변과 절강의 중요기지에는 한인 군단을 배치하여 경사를 중심으로 한 이중, 삼중의 방위 태세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군단은 만 호부·천호부·백호부 등으로 구분되어 각각 세습의 군관이 있어 통솔하고, 소속의 군호로부터 장정을 징집하여 훈련하였다. 하나의 군호는 정군호(正軍戶)와 첩군호(貼軍戶)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정군호는 군역에 복무하는 장정을 내는 호이고, 첩군호는 전자를 위하여 군호 소유의 전토를 경작하는 호이었다. 군호는 호적상 일반 민호와 구별되어 있었고, 그 수도 72만 호로 정해져 있었다.

◑ 제색호(諸色戶) : 군호(軍戶), 참호(站戶), 장호(匠戶), 타포호(打浦戶), 응방호(鷹坊戶), 유호(儒戶), 의호(醫戶), 음양호(陰 陽戶) 등

◑ 민족적 신분 제도 : 원은 중국을 정복한 후 이민족으로서 고도의 문화 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하여 독특한 신분 제도를 확립하였다. 몽고인은 국인(國人), 서역의 각 부족을 색목인(色目人), 황하 유역 화북의 한인(거란, 여진, 고려인 포함), 그리고 남송의 유민인 남인의 네 계급으로 된 신분 제도가 그것이다. 이 제도에 의하여 정치, 경제 등 제 부문에서 특권과 제약이 다른, 극히 불평등한 대우를 함으로써, 중국을 통치하였던 것이다. 가장 심한 차별을 받았던 것은 한인과 남인인데, 원대에 한인 재상이 단 2명 뿐이었다, 한인들은 이갑제에 의해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그들에게는 비교적 좋은 직업이 장인이었다.

◑ 색목인(色目人) : 원대에 서역인을 가리키던 말로 이에는 위구르, 탕구트 등 20여 부족이 포함되어 있다. 원 왕조의 민족 신분제에 의하여 준지배자였던 색목인은, 한인·남인의 피지배민에 비하여 모든 면에서 특권과 우대를 받아 정치적·경제적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우수한 중국 문화를 색목인의 문화로 대항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 정책은 원의 중국 통치를 성공시킨 근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몽고 4한국(四汗國) : 유라시아를 정복한 몽고 제국은 그 광대한 영토를 왕손들에게 나누어 통치하도록 하였다. 한(汗)은 '군주'의 뜻이다. 태조는 장남 주치(Juchi)에게 카스키 해와 아랄 해 북방의 영토를, 차남 차가타이 (Chaghtai)에게는 아무 하 평지를, 외 몽골 서부에서 텐산 산맥에 걸친 지방을, 3남 오고타이(Ogotai) 에게는 서북 몽고지방을, 4남 트루이에게는 몽골 본토를 나누어 주어 이를 4한국으로 하였다. 4한국은 쿠빌리아 이후 독립적 성격이 강해졌다. 킵차크(Kipchack) 한국은 바투가 남 러시아에 세워 동서 무역으로 번영하다가 13세기 이슬람화하였다. 차가타이(Chagatai) 한국은 중앙 아시아의 농경민, 상업민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로 동서 교통로를 장악하고 번영하여 14세기 초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일 한국은 훌라구가 서아시아를 정복하고 이란 지방에 세운 나라였다. 처음에는 이집트의 마물루크 조와 대립 관계에 있었고 네스토리우스 교를 보호하다가 이슬람화하였다. 원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며 이슬람 문화의 보호자적 역할을 하였다. 오고타이(Ogotai) 한국은 서북 몽고 지방에 건국한 강대한 유목 국가였으나 경제, 문화면에서는 매우 약했다. 원의 쿠빌라이에 대항하다가 망하였다.

◑ 오고타이 한국(Ogotai ulus) : 원의 태종 오고타이가 봉토를 받아 세운 나라(1224). 일리 강의 서북 이밀을 수도로 하고, 서북 몽고를 지배하였다. 오고타이 칸과 그의 아들 구유크는 몽고 본토의 대한위(大汗位)에 올랐으나, 구유크의 사후에 트루이 가의 장자 몽케에게 돌아가 그가 헌종이 되자, 오고타이 한국은 이에 불만을 품고 트루이 가와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특히 오고타이의 손자로 제 4대인 하이두는 쿠빌라이 칸(세조)과 대한위를 둘러싸고 싸웠던 아리크부 가를 원조, 실패하자 곧 쿠빌라이 칸이 세운 차가타이 한국의 바라크 칸을 자기의 진영에 끌어들여, 킵차크 한국, 차이타이 한국을 합한 서방 한국의 대한(大汗)에 추대되어, 원 왕조와 대치하였다. 그러나 하이두가 죽자(1301), 그 아들 차바르는 차가타이 한국의 두와와 함께 원에 항복, 30년에 걸친 대반란이 진압되었다(1303).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차가타이 칸에 토벌당하여 영토를 잃게 되었다. 두와의 사후, 차바르는 다시 거병하였으나 패하여 원에 도망하고, 1310년 오고타이 한국은 차가타이 한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 킵차크 한국(Kipchak Khanstvo ;1243-1502) :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에 건국된 몽고인의 왕조. 칭기즈 칸의 장자 주치의 차남 바투는 남러시아· 유럽을 원정하여 .볼가 강변의 사라이에 도읍하여, 킵차크 한국을 세우고, 형 오르다는 백장한(白帳汗), 아우 셰이반은 청장한(靑帳汗)을 칭하고, 각기 아랄 해 북방, 우랄 방면에 영토를 갖고 킵차크 한국을 종가로 받들었다. 킵차크 한국은 원 왕조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서 무역을 활발하게 하고 흑해 무역의 이윤을 독점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 이슬람교를 채용하여 그 문화를 흡수하여 학예,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언어·문화가 투르크화하고, 사라이는 상당한 번영을 누려 그 영토도 이르티시 강에서 크림 지방에 미쳤다. 그러나 국내에 내란이 일어나고, 게다가 3차에 걸친 티무르 제국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더니 16세기초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망하였다(1502).

◑ 일 한국(I1 Khanate) : 이란 지방에 건설된 몽고 왕조로 창설자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세조 쿠빌라이의 아우인 훌라구이다. 1258년 바그다드의 아바스 조의 칼리프 정권을 멸한 뒤에 타브리즈(아제르바이잔)를 서울로 정하여 건국하여 페르시아, 소아시아를 중추 지역으로 하여 그 세력을 떨쳤다. 먼저 로마 교황, 크리스트교 국가와 동맹을 맺고, 이슬람교를 받드는 이집트의 맘루크조 및 킵차크 한국, 차카타이 한국과 싸워 이기고 내정을 정비했으나, 한위(汗位) 계승 문제로 정치적·경제적 동요를 가져왔다. 그러나 가잔 한(1295∼ 1304)이 왕위에 오르자, 피지배 민족인 이란인과의 융합을 꾀하며,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서원·학교·천문대를 세웠으며, 이슬람 문화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군제·세제를 대폭적으로 개혁하여 일 한국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으며, 라시드 웃딘 등의 뛰어난 문인·학자가 배출되었다. 이 후 한위 쟁탈과 재정의 문란 때문에 세력이 기울어지고, 동방에 티무르국이 일어나자 혼란 가운데 멸망하였다(1411).

◑ 다루가치(Darughachi) : 원의 행정·군사면에 있어서의 중요한 관직명. 그 어원은「진압하다」라는 뜻의 몽고어dau에 gha와 chi를 붙여 그것에 종사하는 사람을 표시한 것이다. 처음 칭기즈 칸이 이를 설치했을 때는 관인(官印)을 갖는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그 지방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뒤에 중서성·추밀원·어사대 등을 제 외한 모든 관서에 설치되어, 각 아문의 최상위를 점하고 관할 행정 전반의 최종적 결정권을 가졌다. 원 칙적으로 몽고인만이 임명되었다.

◑ 서민 문화의 발달 : 원대는 당대와 같이 여러 가지 외국 문화가 수입되어 국제색이 풍부하였지마는 몽고인이 중국의 전통 문화에 대하여, 이해가 없을 뿐 아니라 중국의 지식인을 학대하였기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는 미미하였다. 당시의 속언에 1관(官)·2리(吏)·3승(僧)·4도(道)·5의(醫)·6공(工)·7장(匠)·8창(娼)·9유(儒)· 10개( )이라 하여 유학자를 거지 다음으로 경멸하였으므로, 유학은 송대 유학의 찌꺼기를 핥는 데 그쳤고 시문도 볼 나위 없었다. 다만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속 문학, 곧 구어로써 쓴 소설과 희곡 등이 유 행하였다. 이는 도시의 번영에 따라 서민들의 오락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매양 행동적인 것을 좋아하고, 가무·음곡을 좋아하던 몽고인들의 비위에 맞았고, 또한 이민족 치하에서 뜻을 얻지 못한 문인·학 자들이 이 방면에 손을 댄 데서 발달하였던 것이다. 원곡이란 원대에 유행하던 잡극(雜劇)을 말한다. 잡극은 가곡을 중심으로 하고 사이 사이에 대사를 넣었으며, 노래는 주역에 의하여 독창되었다. 송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해 몽고 제국에서 주로 대도(大都, 베이징)를 중심으로 북방에서 행하여 북곡이라고도 하며, 남방의 남곡과 혼합되어 자유스럽고 복잡하게 발달하였다. 한편 원 중기 이후에는 불우한 처지에 놓였던 남인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항저우를 중심으로 남곡(南曲)이 유행하였다. 형식은 4막으로 나누어지고, 모험과 전설, 노래와 춤과 묘기, 해학적인 대사, 화려한 의상 등이 결합되어 도시 예술을 창조하였다. 이 희곡은 모두 구어로 쓰여진 것인데, 중국 문학사상에 큰 의의가 있다. 그 대표적 작품은 '서상기(西廂記)' '한궁추(漢宮秋)' 등이 있으며, 대표적 작가로는 관한경·정 광조·백 박·마 치원이 유명하다. 한문(漢文)·당시(唐詩)·송사(宋詞)와 더불어 중국 문학의 대표적인 것이다. 소설도 이 때 구어체 스타일로 쓰여져 평민들 사이에 유행하였는데 '삼국지 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등이 유명하며 이같은 문학 작품은 중국 문화의 생명력과 아울러 몽고족 치하 지식층의 욕구 불만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였다. 회화는 송대의 원체화풍이 쇠하고 문인화가 성하여 황공망, 왕몽 등의 대가가 나왔다. 그들의 그림은 자연이 가진 시정과 자기의 시정의 일치점을 찾아내려는 문인화의 극치를 이룬 것으로 중국 산수화의 클라이맥스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서상기(西廂記) : 북곡의 대표적 작품으로 왕실보(王實甫)가 지었다. 당대부터 있었던 [서상기제궁조(西廂記諸宮調)]를 극화한 것으로 재상의 부인과 서생 장군서(張君瑞) 간의 사랑을 묘사한 작품이다.

◑ 비파기(琵琶記) : 원말 고즉성(高卽誠)이 지은 남곡의 대표적 작품이다. 후한의 학자 채옹(菜邕)이 과거에 급제하여 승상의 사위가 되어 영달을 누리는 동안 남편과 헤어져 사는 그의 처가 비파를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 그의 남편과 재회한다는 줄거리로서 그 체제는 후세 작품의 모범이 되었다.

◑ 수호지(水滸志) : 나관중(羅貫中)의 작품으로 북송의 휘종시대에 산둥성 양산박(粱山泊)에 있었던 송강(宋江)을 비롯한 36인의 의적에 관한 사실을 윤색한 작품으로 당시 사회를 고발하는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4대 기서중의 하나이다.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 역시 나관중의 작품이다. 정사(正史)인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을 소설화한 것이다. 인물 묘사에 특색을 가지고 있는데 촉의 유비를 위군자(僞君子), 이를 보좌한 제갈 공명을 교활한 책략가로 묘사하였다.

◑ 파스파(Phags-pa ;1235/1239-1280) : 원 왕조의 제1대 제사(帝師)가 된 티벳의 시캬파 불교의 법왕. 파스파(1239∼1280)는 쿠빌라이가 대리국을 정벌하고(1253) 데리고 온 라마 교주의 조카였다. 원 세조는 그를 제사(帝師)로 모시고, 종교와 정치에 관여하게 하였다. 1260년 쿠빌라이의 요청에 의하여 티벳 문자를 원형으로 한 몽고 문자 즉, 파스 파 문자를 만들어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하였다.(1269), 그 공에 의하여 국사(國師)의 자리에 앉아 티벳 및 구 서하의 일반 행정권과 몽고 제국 전체의 불교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사캬파의 법왕이 원조의 국사의 자리를 세습하였다. 우리 나라에도 개성 남대문에 있던 범종에 파스파 문자가 새겨져 있다.

(4) 동서 문화의 교류

◑ 근대 이전 동·서 문화의 교류

▶ 초원길 : 외몽고의 카라코룸(和林)에서 서로 향하여 오고타이 한국의 서울 에밀을 거쳐 바르하시 호, 카스피 해의 북방을 돌아 킵차크 한국의 사라이에 이르는 이른바 초원의 교통로이다. 기원전 8세기경에 스키타이의 청동기 문화가 전파되고, 그 이후에는 흉노족의 활동이 두드러졌었다. 3·4세기 초에는 5호의 중국 침입과 훈족의 서진 등이 이 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5·6세기경에는 투르크 계의 기마 민족이 장악하였다. 바투가 유럽을 원정했던 길도 이곳이다. ▶ 비단길 : 전한 무제 때 장건의 서역 파견으로 처음 개척되었으며, 그 후 바닷길이 개척될 때까지 중요한 교역로로 이용되었다. 한편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으로 이란 방면에 새로운 문화권이 발달하면서 인도와의 교통도 열려 1세기 중엽부터 두 문화권 간의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중국의 비단과 나침반, 제지술 등이 서방에 전파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와 이란 문명, 불교와 이슬람 교 등이 모두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 유입되었으며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동진 법현의 인도 왕래는 이 길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이다. 이 길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이 가장 컸던 때는 당 현종때이며, 남북조 시대부터 수·당대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이 비단길의 경영권은 이슬람과의 싸움(탈라스 싸움, 751)에서 패한 후 상실되었다. ▶ 바닷길 : 항해술과 조선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별로 이용되지 못하였으나 로마 제국의 홍해 지배와 로마 귀족들의 동양산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크게 번창하였다. 한편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바닷길은 8세기 이후 이슬람 제국의 발전으로 이란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중국과 직접 무역 거래를 전개하게 되고 특히 현종 말기 비단길의 경영에 실패한 이후 이 항로는 동·서 교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세기 후반 아바스 왕조가 바그다드를 수도로 정하면서부터 이슬람 인들의 해상 활동은 크게 활기를 띠게 되어 남부 중국의 항구까지 출입하였다. 송대 이후 중국 선박의 대형화, 나침반의 항해 이용 등 항해술의 발달로 중국 상인들이 비단, 도자기를 가지고 자바, 수마트라에서 인도에 걸쳐 폭넓게 문물 교류를 하였으며 그 뒤 이 항로는 동서 교류의 혈맥이 되었다.

◑ 스키타이(Scythians) : 기원전 8∼7세기경, 아랄 해 부근 및 서시베리아에서 남하하여 남 러시아의 선주민인 킴메리아 족을 몰아내고 점거한 이란 계의 유목 기마 민족을 말한다. 기마 민족 특유의 문화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하여 스키타이 문화라고 총칭되는 초원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문화는 시베리아 몽골 및 만리 장성 부근의 유목민과 중국 민족,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 크리스트교의 전파 : 당대에 들어온 네스토리우스교, 곧 경교(景敎)는 「회창의 법난」이후 불교와 더불어 쇠하여 중국 내부에서는 거의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11∼12세기에 남러시아에서 몽고에 걸쳐 교세를 떨쳐 몽고의 나이만·케레이트·옹구트 등이 그 영향을 받았다. 몽고 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경교는 재흥의 시기를 맞이하여 활발해져 몽고 왕족 내에도 많은 신자를 가지게 되었다. 쿠빌라이의 어머니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한다. 원 왕조에 들어가서는 옹구트 족의 거주지가 동아시아 경교의 중심지로 되어 이 땅에서 난 부주교 마르코는 드디어 네스토리우스교 총관장이 되어 마르 야브라하 3세라 하였다. 한편, 로마정교도 중국에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 몽고족의 유럽 침입 이래 동방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로마 교황은, 몽고인 및 중국인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이미 몽고 시대에 카르피니·뤼브뤼키를 보내더니, 세조 때에는 다시 코르비노를 보내왔다. 그는 대도에서 약 30년 동안 포교에 종사하고 신약성서를 몽고어로 번역하였다. 또 오도리크 드 포르데노네(Odoric de Pordenone)가 들어와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포교하고, 코르비노가 죽은 뒤에는 죠반니 마리올리(Jovanni da Malignolli)가 교황의 명령을 받고 포교에 종사하였다. 이리하여 카톨릭교가 차츰 퍼져, 그 교를 십자교라 하고 그 회당을 십자사라 하였다.

◑ 이슬람교의 전파 : 아라비아·페르시아의 상인이 많이 왕래함에 따라, 이슬람교가 해·륙로에 의하여 중국의 서북변과 강남의 도시들에 전파되었다. 이슬람교는 당대에 이미 전해진 것인데, 당시는 아라비아인이 왕래한 일부 지역에만 행해졌으나 원대에는 청진교라 불리워 널리 퍼졌다. 이슬람교도는 색목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하고 문화에도 우수하였기 때문에 특히 천문·역학·전술에 큰 공적을 남겨 놓고 있다. 곧 이란인 자말 웃딘(Jamal ad-Din)은 세조때 원의 회회천문대를 주재하여 이슬람 천문학을 전하였고, 유대인이라 하는 애설(愛薛)은 천문·의학으로써 벼슬을 지냈고, 지도 제작에 바다를 푸르게 칠하는 방법도 그 영향이라 한다. 이슬람 문화는 원대의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여 이를 흡수한 한인 사이에 훌륭한 과학자가 탄생했다. 곽수경(1231∼1316)은 대도에 천문대를 만들고, 아라비아력을 참고로 수시력을 편찬하였고, 주 은본은 아라비아의 지도 제작법을 배워 새로운 지도를 작성하였고, 수학에는 이치가 나타나 측원해경(測 圓海鏡)을 저술하였다.

◑ 라마교(喇摩敎, Lamanism) : 라마교는 대승 불교와 티베트의 다신교적 토속 종교(본보교)가 혼합하여, 독특한 의식과 행사를 가지는 불교로 본디 6,7세기경부터 발전한 것이었는데 원대에 들어와 크게 유행하였다. 대승 불교의 일파인 것에는 틀림이 없으나 이 종파에서는 극락 세계로 인도하는 데 있어서 승려, 즉 라마의 역할을 중시하기에 붙이게 된 이름이며, 정확히 말하면 티베트의 불교라고 할 것이다. 몽고인들은 원래 사상적인 것에는 흥미가 없었으나 교리보다는 주문, 기도를 존중하는 라마교에 마음이 쏠려 왕실에서 이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세조 쿠빌라이는 이에 깊은 관심을 가져 티벳승 파스파(八思巴)를 궁정에 초빙하여 제사(帝師)로서 존경하고 천하의 불교 및 티벳의 정치를 맡아 보게 하였으므로, 라마교는 몽고 귀족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몽고의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재래의 샤마니즘을 많이 믿었기 때문에 라마교는 원의 몰락과 함께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카르피니(Carpini, Giovanni de Piano ;1200?-1252) :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교단의 성직자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의 명으로 몽고인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는 한편, 그 정세를 시찰하기 위하여 몽고에 사절로 나섰다. 1245년에 리용을 출발하여 키에프, 드네프르, 돈, 볼가를 거쳐 바투 한의 왕성(王城) 오르도에 도착했다가, 다시 카라코룸에 이르러 구유크에게 교황의 친서를 바치고, 그 답서를 받아 아비뇽으로 돌아갔다(1247). 그의 견문록은 당시의 몽고 사정을 아는 데에 뤼브뤼크의 여행기와 함께 중요한 기록의 하나이다.

◑ 곽 수경(郭守敬 1231-1316) : 원대의 과학자로 5경, 산술, 수리법에 정통하고, 세조(쿠빌라이)를 섬기어 여러 지방의 관개 수로의 개척에 노력하였다. 1276년 허형 왕 순 등과 함께 역법의 수정을 명 받아 정밀한 관측을 행하여 1280년 말 중국에서 제일 좋다는 수시력(授時歷)을 제정하고, 뒤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수시력은 1281년 공포되었으며 이슬람 역법의 영향으로 정밀한 천문 관측을 기초로 하여 작성, 1년을 365.2425일로 산정하였다. 고려 말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천문학 발달에 공헌하였다.

◑ 동방 견문록 :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친 세계 국가인 몽고 제국의 성립은 동서 교류상의 획기적인 시대를 열었다. 흑해의 동쪽에서 중국까지의 안전한 교통망이 열리게 된 것이다. 역전 제도가 정비되어 40킬로마다 설치된 각 역참에는 여행객을 위한 쾌적한 숙소와 바꿔 탈 수 있는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러한 교통로를 이용하여 카라코람 또는 대도(베이징)를 방문한 몇 사람의 유럽인이 기록에 남아 있다. 이슬람 이교도의 동쪽에는 크리스트교의 나라가 있다고 하는 당시의 유언비어를 믿어, 그 곳과 동맹을 맺기 위해 로마 교황으로부터 파견되어 카라코람에 온 플라노 카르피니, 배로 광저우에 도착한 후 대운하를 경유하여 대도에 온 선교사 오도리크, 그리고 원 말에 대도를 방문한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다 등이 있다. 그러나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일 것이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상인 마르코 폴로는 1270년 말에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예루살렘을 거쳐 소아시아에서 일단 페르시아만에 이른 뒤 이란을 횡단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서 동 투르키스탄의 사막을 건너 마침내 1274년 여름에 상도에서 원의 세조 쿠빌라이를 만났다. 여기서 쿠빌 라이의 신임을 얻은 마르코 폴로는 1290년 말 취안저우를 출발하여 해로로 귀국 길에 오르기까지 실로 17년의 오랜 세월을 중국에서 지냈다. 귀국한 뒤 때마침 일어난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마르코 폴로가 옥중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같은 감방의 수인에게 받아 적도록 하여 쓰여진 이야기가 바로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원대 중국의 풍물을 전해 주는 귀중한 자료로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하였으나, 중국어에 결코 능숙하지 못하였으며, 중국의 지명이나 고유 명사를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지 않고 일부러 외국어로 적고 있다. 한 예를 들면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노구교-를 이란어로 돌다리란 뜻의 프리시긴이라 불렀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보면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생활하였다고는 하나 중국인의 세계에 들어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제대로 관찰하고 이해하였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 몽고인이 중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그에 협조하여 또 하나의 지배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색목인으로서 중국에서 생활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동방견문록은 동양에 대한 서양인의 호기심을 고조시켜 이후 신항로 개척을 낳게한 중요한 9瘟堧?되었다.

◑ 홍건적(紅巾賊, 白連敎道)의 난(1351∼1356) : 원 말기 이민족 왕조인 원의 중국 지배를 타도하고, 한족 왕조인 명나라 성립의 계기를 마련한 종교 적 색채를 띤 농민 반란으로 백련·미륵 교도로 구성되어 백련교도의 난, 홍색 두건으로 머리를 싸서 동지의 표지로 삼았으므로 홍건적의 난이라 한다. 백련교란 미륵불 강생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적 민간 신앙으로 이미 당 이전부터 있었다. 하북성에 본거지를 둔 백련교의 한산동(韓山童)은 일찍부터 미륵불 하생(彌勒佛下生)의 설을 포교하여 하북·하남·안휘의 각지에서 널리 신자를 얻고 있었는데, 1351년 황하 수리를 위한 역부 징발이 야기시킨 민심의 동요에 편승하여 송나라 휘종의 8대손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군은 최초의 탄압에서 교주 한산동을 잃었으나 교도인 유복통 등은 그의 아들 한림아 (韓林兒)를 받들고 안휘성으로 피신하여 송나라를 세우고 사방에 격문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호북의 서 수휘, 안휘의 곽자흥·주원장이나 하남의 농민들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군의 세력은 일시 화북 ·화중 일대에 미쳤는데 내부 분열에 의해서 원군에게 각개 격파되어 본거지도 궤멸당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주원장만이 착실하게 세력을 뻗쳐서 천하를 평정했다.

 

3. 인도및 동남아시아 사회의 변화

(1) 인도 문화의 성숙과 발전

◑ 산스크리트(Sanskrit) : 인도·유럽 어족의 일파인 인도·이란 어파에 속하는 인도의 고어. 넓은 뜻으로는 베다에 쓰인 베다 어와 B.C.4세기경의 문법가 파니니 등에 의하여 정리된 고전 산스크리트를 포함하나, 일반적으로는 후자 를 지칭한다. 이 말은 힌두교의 문헌에 널리 사용되어 왔으나, 불교, 자이나교의 경전에도 쓰였고, 특히 문학 작품으로는 귀중한 것이 많으며, 그 후 근대 인도·아리아어, 남인도의 드라비다계어의 문학에도 쓰였다. 그리고 인도 문화가 파급된 동남 아시아 여러 지역의 언어 문예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이른바 사어(死語)는 아니며, 현대 인도의 브라만 학자 중에는 회화·문장에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으며, 그 국어화를 주창하는 일파도 있다. 한국·중국·일본에서 이를 범어(梵語)라고 부르는 것은 범천 소조 (梵天所造)의 말이란 전설에 의한 것이다.

◑ 칼리다사(Kalidasa) : 5세기의 인도의 시인, 극작가. 그의 생몰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찬드라굽타 2세의 궁정에서 활약한 듯하다. 2세기경부터 발전한 인도 고전 문학을 완성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어,「인도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린다. 작품은 서정시·서사시·희곡에 걸쳐 광범위하며, 신화·전설·연애·모험· 자연 등에서 취재하여 아름다운 필치와 고상한 운율을 구사하고 있다. 희곡에 '천녀(天女)의 사랑', 서사 시 '구름의 사자' '계절의 순례' 등이 있다.

◑ 라마야나(Ramayana) : 인도 고대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와 더불어 고전 산스크리트 문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그 내용은 모두 7편(篇) 24,000여송(頌)으로 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12세기 이후 여러 인도 말로 번역되어 통속적 설화로 농민을 비롯한 힌두 사회 전반에 널리 전승되고, 인도인의 생활 규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중국, 티벳, 동남아시아 등지에도 전래되어 문예·미술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바트에는 라마야나 설화를 담은 아름다운 부조가 있다. '라마야나'는 기원전 2세기경 현재의 형태를 이루었다. 내용은 코살라 왕국의 라마 왕자의 극적인 일생을 서사시의 형태로 엮은 것으로, 그리스의 '일라이드', '오딧세이아' 에 비견되는 산스크리트 문학의 대작이다. 갠지스 강 북쪽에서 세워진 코살라 국의 왕자 라마는 국왕인 부친의 총애를 받던 비(妃)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그를 14년간 숲속으로 추방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숲속에 머무는 사이 그가 숲속의 악마를 퇴치했다는 이유로 악마의 왕(라바나)은 격노하여 라마의 비 시타를 강탈해 자신의 성이 있는 랭카 섬(실론 섬을 말 함. 1972년 이 이름을 따서 스리랑카로 개칭하였다)에 감금하였다. 라마는 시타를 찾아 숲속을 헤매던 중 곤경에 빠진 원숭이 왕을 구해주게 되었고 그 후 원숭이 군대의 도움으로 라마는 시타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라마는 시타를 데리고 코살라 국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고 훌륭한 정치를 해서 크게 번영 했다고 한다.『라마야나』의 저자는 인도 최초의 시인이라고도 불리는 파르미키(기원전 3세기경)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당시 백성들 사이에 구전되던 영웅 라마를 중심 으로 한 갖가지 고대 설화시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문자로 기 록되어 읽혀졌던 것은 아니다.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던 음유시인들이 퍼뜨린 것으로 그들은 이 이야기에다 점차 비파 반주를 곁들여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라마야나』는 인도의 비파법사들에 의해 오랜 세월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여러 가지 민간 설화 등이 덧붙여져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마하바라타(Mahabharata) : 라마야나와 아울러 고대 인도의 2대 서사시의 하나. 18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수(詩數)는 10만을 넘는다고 하는 세계 제일의 서사시이다. 기원전 10세기경 북인도에서 일어났다고 상상되는 2대 부족의 항쟁에 대한 설화를 서사시로 읊은 것이다. 4세기 경에 현재의 형태를 이루었다고 생각되며, 산스크리트 운문으로 쓰여졌다. 바라타족의 대전쟁을 주제로 하여 그 사이에 수많은 설화, 특히 신화와 전설을 가미하여 구성되었는데, 작자는 비야사선(仙)이라고 하나, 동일인의 손으로 한 시대에 이룩된 것이 아니며 민족적 서사시로서 구전되어 대략 4세기에 현재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 힌두교도의 성전인 바그다드기타도 이 속에 포함되는데 마하바라타의 줄거리와 그 속에 포함된 삽화는 후세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바가바드 기타 : 고대 인도 2대 서사시의 하나인 마하바라타의 일절이다. 그 성립 연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다른 문헌과의 관계, 문체, 어법 등으로 보아 기원 후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서북 인도의 한 부족이었던 브르쉬니(Vrsni)족의 족장 크르쉬나(Krsna)를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바가바타(Bhagavata)파의 성전으로 되었던 것이 교주와 베다에서 볼 수 있는 비시누신 파의 동일시에 의하여 정통 브라만 권내에 흡수되어 널리 인도 사상 일반에 영향을 미쳤다. 내용은 성지 쿠르 크세트라(Kuru Ksetra)에 있어서의 친족 결전을 무대로 하여 전쟁에 의혹을 품은 아르주나(Arjuna)를 크르쉬나가 격려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절충적 태도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지만, 그 가장 현저한 특징은 유일신에의 헌신적 사랑에 있으며 기존의 사회 제도 위에 서서 각자의 본분을 다하라고 되어 있다.

◑ 마누 법전(Manusmrti) : 고대 인도의 법전의 선구이며,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된 법전. 전편 12장 2,684조로 되어 있다. 고대 인도의 소위「법」은, 오늘날의 법률의 개념보다 넓으며, 종교·도덕·습관도 뜻하고 있다. 마누 법전은 통상적인 의미의 법전이 아니라, 카스트에 관한 규정이 전체의 3/4을 차지하는 힌두 법전으로 인도의 일상 생활을 지배해 왔다. 따라서 마누 법전에서 현재의 의미로서의 법률 규정은 전체의 4분의 1 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오히려 종교 성전으로서 존중되었다. 원전은 B.C. 2세기부터 A.D. 2세기경까지 사이에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나, 그 성립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이는 오랜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고대 인도의 전승과 사회 관습을 정리한 후 편찬된 것이며, 제명(題名)에 인도 사람이 생각하는 인간의 시조 마누의 이름을 붙인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인도 문화의 전파와 함께 마누 법전의 영향은 동남 아시아의 각지에 미쳤는데, 예를 들면 버어마의 불교 법전은‘마누담마삿탐’라고 불리는 고대 자바의 법전이 있었다.

◑ 힌두교(Hinduism) : 인도의 민족 종교로 [베다]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한 고대 브라만 교가 8-9세기경 종래의 비 (非) 아리안적 민간 종교를 흡수하고, 나아가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등의 여러 성전을 전거로 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부흥된 것이며 현재의 인도 연방 결성의 정치적, 종교적 유대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특정한 창시자나 통일적 교의가 없는 전형적인 다신교로 일관된 체계를 갖춘 종교가 아니라, 태고 때부터 인도인 사이에 육성되어온 잡다한 종교관, 사회관의 종합체이며, 애니미즘에서부터 다신교, 일신교, 범신론, 무신론적 여러 관념에 이르기까지 각기 독자적이며 상이한 종교 의례를 가지면서도, 상호 간에 조금도 모순을 느끼는 일없이 병존하여 혼연한 일대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전체를 통하여 공통된 사상적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곧 영혼 불멸과 윤회 전생의 사상이다. 세계는 주기적으로 생멸의 법칙에 지배되어 영구히 윤회가 계속되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이것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이 윤희로부터의 해탈이 인생 궁극의 이상으로서 강하게 요청된다. 그 수단으로 서 1) 제사, 고행 그 밖의 선행에 의한 방법. 2)올바른 철학적 지견(知見)을 얻음으로써 미몽(迷夢)을 소멸시키는 법. 3)자기를 버리고, 신에게 절대 귀의하는 방법이 가르쳐진다. 주신으로는 창조의 신 브라만, 질서의 신 비시누, 파괴의 신 시바가 있다.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인간의 4대 목표는 믿음으로 덕을 실현 하는 다르마(Dharma), 경제적 행복을 누리는 아르타(Artha), 안락을 누리는 카마(Kama),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모크샤(Moksha) 등이다. 여기에서 앞의 세가지 목표는 결국 마지막의 모크샤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 하겠다. 굽타 시대에 완성된 이 힌두교는 영혼 불멸 사상, 윤회와 업(業)사상, 해탈의 관념 등을 교리상의 기초로 하고 있으며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있다. 인도에서는 불교나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와 같이 만민 평등의 교리를 설파하는 보편적 세계 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고유한 종교 관념인 윤희와 업 사상이 불평등이 전제된 힌두교 및 카스트 제도가 인도를 지배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 했다. 현재 인도 인구 85%가 힌두교도, 불교도는 1%.--- 힌두교의 신 : 힌두교에 공통적이고 유일한 신앙의 조목은 윤회 전생으로, 만물은 이승의 존재 지위를 결정짓 는 인과율, 업(카르마)에 의해 결정되e?무한히 생사를 거듭하는 것이며, 그 지위에 수반되는 법(달마)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다. 힌두교는 다신교로 주요 신으로는 브라만교에서 이어받은 윤회 전생을 관장하는 창조의 신 브라마, 유지의 신 비시누, 파괴의 신 시바 등이 있다. 인도인은 이 세 신을 비롯한 많은 신들을 마음으로 숭배하고 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세상 만물은 모두 신의 모 습"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인도인의 생활 가운데 신들을 향한 예배(푸쟈)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 으로 물, 꽃, 향, 음식 등을 신에게 바치며 공경하는 생활이 가정에서나 마을 또는 도시 전체의 축제로 항상 이루어지고 있다.

◑ 업(業) 사상 : 현세의 처지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과분한 욕심을 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내세에서는 더 좋은 상태로 태어날 수 있다는 인도의 전통적 종교 관념으로, 윤회 사상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런 업 사상이 불교나 자이나교에서 주장하는 평등 논리를 압도하여 카스트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인도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 굽타 양식 :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사회 문화적 특징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는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이다. 이런 맥락에서 힌두교가 성립되어 전 인도에 퍼져 나가게 된 굽타 시대를 인도 고전 민족 문화의 완성기로 파악할 수 있다. 굽타 양식이란 간다라 미술에서 보이는 그리스적 기법을 극복하고, 조각에서는 인도 특유의 곡선미를 나타내고, 그림에서는 독특한 음영법을 사용하는 미술 양식을 말한다. 불상과 여러 힌두 신상에 조화, 균제, 우미의 특색을 보여주는 굽타 양식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은 굽타 왕조 시대의 대표술이다. 모두 봄베이의 근교에 있는데 뛰어난 벽화와 조각이 남아 있다. 이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의 벽화 조각은 간다라 양식과 인도 고유의 양식을 융합한 것이며 굽타 미술이라고도 한다.

◑ 아잔타 석굴(石窟: Ajaina) : 인도 봄베이의 잘가운에서 서남으로 약 63km에 있는 대소 29개의 석굴 사원으로 개굴 연대에 의하여 3기로 나뉜다. 중앙에 가까운 제 8∼13굴을 제1기, 그 양쪽의 제 6,7 및 제 14∼20굴을 제2기, 다시 그 양쪽에 이어지는 나머지 부분의 여러 굴을 제3기로 한다. 제1기는 B.C. 2세기에서 A.D. 2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연대를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제2기는 5∼6세기의 개굴, 제3기는 6∼8세기(굽타 왕조 말기 의 제 왕조)의 개굴로 되어 있다. 이들 석굴은 예배처와 승방으로 대별되어, 각기 그 어느 쪽에 속하느 냐에 따라 그 구조를 달리한다. 그 유명한 벽화는 유파·시대를 달리하는 6개의 그룹으로 구별되며, 약 1천년에 걸쳐서 각지에 발전한 인도 회화의 유파가 여기에 집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흰 회 바탕에 빨 강으로 거칠게 윤곽을 칠하고 그 위에 엷은 녹토(綠土)의 층을 밑의 빨간 바탕이 투시될 정도로 바르고 흑색 또는 갈색으로 윤곽을 명백히 그린 것이다. 주제는 주로 불전과 본생담에 관한 것으로 당시의 인도인의 생활이나 문화의 충실한 모습을 알 수 있다. 인물의 얼굴 모습은 현저한 인도형을 나타내며, 아소카 왕 시대 이래의 중인도 예술의 계통에 속한다. 조각도 간다라 조각의 그리스형을 벗어나 순인도풍의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굴은 인도 건축 미술 사상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아→중국→한국→일본에 이르는 불교 미술 전파사에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석굴은 1817년 영국인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고, 현재는 그 보존에 노력하고 있다.

◑ 엘로라 석굴(Ellora) : 인도 봄베이 아우랑가바드에서 서북방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있는 석굴. 엘로라 마을 동쪽에 남북 으로 연한 바위 산에 약 2km 너비로 굴착되었다. 아잔타와 더불어 유명한 유적으로서 34개의 주요 석굴 외에 약간의 작은 굴이 있다. 남단에 있는 12개의 석굴은 7세기 후반으로부터 9세기 후반에 이르는 힌 두교의 석굴이고, 북단에 있는 5개의 석굴은 9∼12세기에 걸친 자이나교의 석굴이다. 불교 굴에는 차이 트야 굴, 비하라 굴에 유사한 것을 비롯하여 각종 형식이 있으며, 카일라스(16굴)와 같이 암석 사원의 체제를 취한 것도 있다. 그 모두가 안팎의 벽이나 기둥에 풍부한 부조(浮彫)나 신상이 있으며, 힌두 조 각사상 뛰어난 작품들이다. 자이나 굴에도 사원 양식의 것이 있는데 천정에는 비천(飛天) 따위를 그린 벽화가 다수 그려져 있다.

◑ 굽타 시대의 천문학, 수학과 화학의 발달 : 천문학에 있어서 일월식, 하지, 동지, 춘분, 추분을 예측할 수 있었으며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과 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달의 직경을 계산하고 중력의 이론을 전개했다. 수학에서는 10진법을 사용하고 0의 개념과, 제곱근, 사인, 파이(원주율)등을 계산하였으며, 화학에서는 합금의 원리, 비누, 유리, 시멘트 제조법 등을 개발했다.

◑ 라지푸트(Rajput) : 인도 역사상 현재의 라자스탄 주를 중심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힌두 민족을 지칭한다. 그들 자신은 고대의 크샤트리아 카스트의 후예라 자처하지만, 5세기경 인도에 침입한 중앙 아시아 계 종족(에프 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인도화한 이들은 힌두교로서의 대표적 세력을 형성하여 이슬람 세력의 인도 침입이 있기 전까지 강력한 세력을 폈다. 이들은 봉건 제도와 비슷한 신분제 왕후국과 기사도적인 의식이 강한 영주 국가를 각지에 세워, 하르샤바르다나 왕의 통치 이후의 인도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 후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자, 이들은 끊임없는 저항을 전개했으나, 전체 라지푸트의 통일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으며 18세기에 한때 강세를 떨쳤던 마라타에 멸망당하였다. 이들이 인도 사회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며 사회·종교·미술·문학 등의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웅대한 성채와 궁전을 건조하였고, 공예·회화에 특이한 전통을 남겼다. 자이푸르, 우다이푸르, 조드푸르, 비카네르 등은 그 중심지로 알려지고 있다.

◑ 라지푸트 회화 : 인도의 세밀화. 16세기경에 라지푸타나에서 붉은 바탕에 빈틈없는 부조 모양의 구도를 가진 초기의 라지푸트 회화가 나타나, 라지푸트 제 왕조의 비호를 받았으며, 18세기에는 광채와 장식에 특색을 갖는 라지푸트 파의 회화가 자이푸르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무굴 회화와는 대조적으로 인도의 토착 종교나 민중 예술에 기반을 둔 종교적·신비적인 관념 세계를 그렸다. 라마 신이나 크리시나 신 등의 신들 및 신화적인 인물이 기본적인 제재로 되어 있다. 라지푸트 회화는 라자스타니 회화와 파하리 회화로 대별 되며, 전자는 라지푸타나(라자스탄) 지방, 후자는 캐시미르의 일부 지방에서 유행되었다. 라지푸트 회화는 당시 인도인의 풍속, 습관, 일상 생활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 이슬람 왕조의 인도 지배 : 인도에 최초로 이슬람교도가 들어온 것은 8세기초인데, 조직적인 인도 정복이 시작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가즈니, 고르 왕조가 등장하고부터였다. 10세기말에는 가즈니 왕조가, 12세기 후반에는 고르 왕조가 인도 침입을 되풀이 하여 분립, 할거하는 힌두 제 왕국을 격파하고 점점 인도 지배의 발판을 굳혔다. 고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에 있던 터키 계의 이슬람 왕조로 가즈니 왕조의 예속에서 벗어나 서북 인도 영토의 지배자가 되었다. 13세기초에는 고르 왕조가 분열됨에 그 왕조의 부장이었던 아이바 크(Aibark)가 독립하여 델리를 수도로 새로운 이슬람 왕조를 건국하였는데 아이바크가 투르크 인으로 노예 출신이기 때문에 노예 왕조라고 한다. 그 후 약 300년간 델리에 힐지 왕조, 투그루크 왕조, 사이드 왕조, 로디 왕조 등 5개의 이슬람 왕조가 흥망하였으며, 14세기초에는 최남단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 가즈니 왕조(Ghazni ;962∼1186) :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니에서 일어난 투르크 계통의 이슬람 왕조. 이란 계통의 사만 왕조의 노예 출신으로 호라산 태수가 된 알프티긴이 배반의 혐의를 받자 부하를 이끌고 도주하여 카불 남쪽의 가즈니에 창건하였다. 10세기 후반 제 5대인 수북티긴은 왕조의 기초를 확립하고 호라산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아들 마하무드는 이 왕조 최대의 영주로서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전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제패하고, 이후 1024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회에 걸쳐 인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또한 마흐무드는 서쪽으로도 영토를 확장하여 동은 펀잡의 라호르, 북은 사마르칸드, 서는 이스파한에 이르는 이 왕조 최대의 영토를 이룩하였다. 한편, 마흐무드는 군사적 제패와 동시에 페르시아 문예를 보호 장려하여 이슬람 세력의 인도 진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궁정에는 문인ㆍ학자가 운집하여 시인 피르다우시는 ‘샤나메’를 저술하고, 비루니는 '인도사'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마흐무드의 사후, 그 전제 정치의 모순이 드러나 셀주크 족에게 서쪽 영토를 침탈당하고, 다시 1186년에는 애프간 계의 구르 왕조에 의해 수도를 공략 받아 그 후 멸망하였다.

◑ 무굴 제국(Mughul Empire) : 16세기 전반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인도에 군림했던 인도 사상 최대의 이슬람 왕조로 수도는 델리였 다. 바베르는 무굴 제국의 창시자로 티무르의 제 5대 직계 후손으로 칭기스 칸의 혈통이라고 한다. 1526 년 델리를 침공하여 무굴 제국을 세웠는데 무굴이란 몽고를 말한다. 무굴 제국은 17대의 왕통을 이어오 면서 힌두교의 영향을 여러 면에서 받아왔으나 이슬람 제국으로서 인도를 통치하였다. 제 3대 악바르의 시대에는 전대까지의 이슬람 지배를 종합하여 정치·경제 제도를 확립하였고, 제 5대 샤자한의 시대까 지 화려한 궁정을 중심으로 번영을 계속했으며, 6대 아우랑제브 시대에 와서 그 판도는 인도의 남단까 지 달했다. 특히, 악바르의 시대는 힌두교도에 관용을 취해 제도, 사회, 문화의 전반에 걸쳐 이슬람, 힌두 등의 여러 문화의 융합을 볼 수 있는데 건축, 미술, 언어, 풍속 등의 변용은 주목할 만하다. 아우랑제브 시대에 제국의 판도는 확대되었으나 이슬람의 정통파적 통치 정책은 힌두 세력의 반항을 격화시켜 그 결과 마라타, 시크의 세력이 강대하여졌고 게다가 페르시아의 침입까지 받게 되어 무굴의 세력은 급속 히 쇠퇴해졌다. 또한,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세력이 서해안에 진출했고 뒤이어 영국의 세력도 침투하여 무굴 제국은 내외의 압력으로 사실상 붕괴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18세기 후반기에 접어들어 뱅골 등 동부 지방은 영국에 할양되었고 1857년에는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나자 지방 세력의 일부가 무굴 왕조의 재흥을 기도했으나 실패했으며 도리어 무굴 왕조의 최후 황제인 바하두르샤 2세가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양곤으로 압송되고 그 곳에서 옥사, 이로써 무굴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 악바르(Akbar: 1542∼1605) 근세 인도의 무굴 제국 제3대 왕이며, 이 왕조의 사실상의 창설자. 부왕 후마윤이 세르 샤에 의해 인 도를 쫓겨나 도피하던 도중 탄생하였다. 부왕의 급사로 13세 9개월의 어린 나이에 즉위, 부왕의 옛친구이며 역전의 명장 바이람의 도움을 받아, 인근 사방의 유력한 군주를 점차로 정복하여 북인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힌두인을 회유하기 위해 라지푸트의 자이푸르가(家)로부터 왕비를 맞이하고, 인두세·순례세의 폐지 등 힌두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개선하였으며 또 복종하기를 거부한 라지푸트의 부족을 무력으로 정복한 다음 이들을 우호적인 동맹자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위대한 정복자로서 힌두스탄의 대 평원의 통일에 성공한 후, 신드와 캐시미르를 병합하고 발루치스탄을 정복하여 북인도 전토를 지배하였다. 그는 영토를 아그라 이하의 12주로 분할하여 통치하고 만년에는 베라르 등 데칸의 3주를 추가시켰다. 각지에 광대한 영지와 병력을 가진 힌두인과 애프간인의 영주를 억압하고 중앙 집권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힌두인의 재정가 토다르 말을 기용하고 전국의 토지 측량을 실시하여 면적 외에 작물의 종류와 토질을 고려하여 경작지를 4등급으로 나누어 각기 생산물의 3분의 1을 지조(地租)로서 징수토록 하였다. 징세 조직도 촌락의 실정에 맞게 정비하고 지조의 세입은 1억 9천만 루피에 달하였으며, 관세나 각종의 수수료도 거의 같은 액수가 되었다. 중앙 집권화를 지향하여 행해진 관제 개혁은 군정(軍政)과 같은 것 이어서 주(州)는 구(區)로 나뉘고 구는 다시 징세구로 나뉘었으며, 주의 장관인 지사는 대귀족·왕족 중에서 임명되었다. 관리에게는 채읍(采邑)이 하사되고 30등급으로 나뉘어, 등급에 상웅하여 국가에 공출할 승마병의 수가 정해졌다. 신비주의자였던 악바르는, 각 종파의 대표자를 소집하여 서로 토론하게 하였으며 그 공통의 요소를 취하여 독자적인 절충 종교를 만들어「신성 종교(딘 이라히)」라 호칭하고, 악 바르를 지상에서의 신의 대행자라고 하였으나 약간의 신자들을 얻었을 뿐 소멸하였다. 또 악바르는 아라비아 어, 산스크리트 어, 포르투칼 어 등의 서적을 페르시아 어로 번역시켰다. 바다우니와 아불파즐은 뛰어난 역사가로서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이 밖에 악바르는 많은 위대한 건축을 남겼으며 이슬람 양식에 힌두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궁정화는 무굴 왕조의 특색 있는 아름다운 화법을 만들어 냈다.

◑ 타지마할 묘 : 무굴 제국 5대 황제 샤 자한은 페르시아 계 절세 미녀로 명성이 자자한 '왕궁 제일의 꽃'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무무타즈 마할을 왕비로 맞았다. 그녀는 기품 있고 부드러우며 황제를 잘 섬겨 황제도 그녀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녀는 19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아 사람들 사이에서 왕비는 결혼 생활 내내 거의 누워 지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마할은 14번째 출산에서 치명적으로 건강을 해쳐 39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황제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죽음 직전의 왕비가 "내가 죽은 뒤에도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말고 아름다운 묘지를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던 말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즉시 묘지공사를 시작하였다. 타지마할 묘는 국고에서 500만 루피라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인도는 물론이고 아시아 각지와 유럽에서까지 직인을 모집하여 2만 명의 직인과 일꾼들에 의해 22년이나 걸려 완성되었다. 타지마할 묘는 전형적인 이슬람 사원이지만 아름다운 백색 대리석의 돔은 완만하며 풍만한 여성 즉 왕비를, 네 귀퉁이의 뾰족한 첨탑(미나레트)은 남성 즉 황제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는데 마치 황제가 항상 사방에서 사랑하는 왕비를 지켜 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묘지 앞의 연못은 아름다운 왕비의 모습을 꿈처럼 투영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또한 곳곳에 장식된 투각(透刻)과 격자세공 등에서는 인도, 페르시아 미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 호화로울 뿐만 아니라 격조 높은 품격이 넘치고 있어 세계 제일의 아름다운 건축물임에 틀림없다. 이 건축물이 완성된 때는 1653년으로 그 무렵 무굴 궁정에서는 이미 다음 제위를 둘러싼 싸움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샤자한이 골육상쟁의 항쟁 끝에 제위에 올랐던 비극이 이번에는 그를 노리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아들 아우랑제브는 황제를 아그라 성에 감금시키고 다른 형제들을 살해하여 제위에 올랐다. 성내에 유폐된 샤 자한은 죽을 때까지 6년간을 매일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타지마할 묘를 바라보면서 보냈다. 그의 사후에 겨우 염원이 이루어져 유골은 묘지 속 왕비의 관과 나란히 안치되었다.

◑ 아우랑제브(Aurangzeb, Mohi al-Din Alam-gir ;1618∼1707) : 무굴 제국 제 6대 왕(1658∼1707). 1636년 데칸 태수가 되어 농업의 장려에 힘쓰고 유능한 페르시아 인의 징세관을 등용하여 데칸사상 획기적인 새로운 조세 제도를 확립시켰다. 1657년 부왕인 샤자한의 와병중에 형제와 왕위 싸움을 벌여 1658년 부왕을 유폐시키고, 다른 왕자를 살해하고서 왕위에 올랐다. 50년의 치세 중 최초의 20년간은 주로 북인도 통치에 진력하고 국경 일부에서 전쟁이 있었던 것 외에는 비교적 평화로왔다. 무굴 제왕 중에서 최초의 엄격한 정통파 이슬람 교도였던 이 왕은 이교도를 이슬람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하늘에서 부여받은 의무로 믿고 열심히 이를 실천에 옮겼다. 악바르에 의하여 일시 폐지되었던 비이슬람 교도에게 과하던 인두세를 부활시킴으로써, 쟈트족 농민의 반란이나 시크 교도의 반란이 일어나고 또 무굴 왕조의 동맹자로서의 공로가 있었던 라지푸트 족의 이반을 초래하였다. 1681년 이후는 데칸에 발흥한 마라타 족을 복종시키려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원정하였으나 게릴라전에 애를 먹고 아마드너거에 퇴각하여 그 땅에서 89세로 사망하였다. 악바르에 다음가는 위대한 군주로서 최대 판도를 실현하였으나 동시에 이즈음 벌써 몰락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 이슬람 문화권의 형성과 확대

(1) 이슬람 제국의 성립과 발전

◑ 7세기전의 아라비아 반도 : 대부분 사막과 초원으로서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으며 군데군데 오아시스에서는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가난에 시달리고 메카에 있는 카바라는 신전의 검은 운석을 숭배하고 있었다. 7세기 초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지대에는 베두윈 족이 유목 생활이나 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보다 높은 문명 생활하는 아랍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페르시아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교역로가 막히자 새로운 대상로를 통한 동서 교역이 활발해져 대상(隊商) 도시들이 번영하고 이에 따라 도시에는 빈부의 차가 심화되었다.

◑ 마호메트(Mahomet, 본명: Muhammad ;570?∼632)) : 이슬람교의 창시자이며, 이슬람 제국의 창립자. 아라비아 반도의 한 상업 도시 메카를 지배하고 있었던 쿠라이시 족에 속하는 하심 가의 한 사람으로 570년경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6살 때 어머니마저 잃은 후 작은 아버지 아부 탈리브의 집에서 자랐다. 아랍인들은 유목생활을 하며 일찌기 대상무역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마호메트도 12살 때부터 대상에 합류, 시리아 국경 지방을 비롯, 지중해 연안 일대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여행하는 동안에 크리스트 교도나 유다 교도와 접촉하고 그 교리를 터득하여 그것이 그의 사상의 근저를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당시의 세계 정세의 여파를 받아, 아라비아인의 원시적인 우상 숭배 사상에 동요를 일으켜, 보다 순수한 종교, 특히 일신교 신앙을 구하는 하니프 파의 사상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25살이었을 때 메카에는 하디자라는 부유한 미망인이 살고 있었는데 마호메트는 하디자의 재산 관리인이 되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생활의 안정과 막대한 부를 갖게 되었지만 마호메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메카 교외의 헤라 산 속에 들어가 동굴생활을 하며 단식과 명상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자 했다. 나이 40살이었던 610년에 알라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예언자로서 포교를 시작했다. 그는 단순한 종교 개혁자가 아니라, 사회 개혁자이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에 환호를 보낸 것은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계급 타파와 우상 숭배 반대, 만민 평등을 외쳤기 때문이다. 메카의 하층 계급의 지지를 받은 그는 특권 계급인 쿠라이시 족과 카바의 우상 숭배를 먼저 철저히 공격하였다. 이것이 쿠라이시 족의 박해를 초래하여,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어, 622년 마호메트는 자신을 잡으러 오는 귀족들을 피해 야스리브로 도망을 쳤다. 이슬람교에서는 이 도피를「헤지라(聖遷)」라고 부르며, 이 해를 이슬람 력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한편 야스리브는 후에 마디나트운나비, 즉 예언자의 도시, 줄여서 메디나라 불리게 되었다. 이 곳에서 마호메트는 한 포교자로서가 아니라, 입법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메디나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마호메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은 신의 예언자일 뿐이라고 했다. 메디나를 중심으로 교세를 키운 마호메트는 8년 후인 630년에 쿠라이시 족의 강화 교섭을 받아들여 승리자로서 메카에 무혈 입성하였다. 그리고 카바의 검은 돌 이외 의 모든 우상을 파괴한 후 그 신묘를 알라의 신전으로 삼았다. 이어서 전 아라비아를 통일했으며 632년 시리아 원정길에 사망하게 된다. 현재 전세계에 5억 5천만 정도의 신자가 서남 아시아, 동남 아시아, 북 아프리카 일대에 널리 퍼져 있다. 마호메트의 후계자로 선출된 칼리프(Caliph)들이 모슬렘의 지도자가 되어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정복했으며 이어 사산조 페르시아를 멸하고 중앙 아시아로 진출하고, 또 이집트를 정복하여 북 아프리카로 나아갔다. 그 뒤 서쪽으로는 북 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 하여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후 프랑크 왕국에 침입하였다가 격퇴당하였다(732; 투르-프와티에 전투). 흔히 이슬람교도들이 한 손에 코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코란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며 칼을 받아라." 하면서 정복 전쟁을 벌였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의 크리스트 교도들의 주장에 불과한 것 으로 이슬람교도들은 정복한 이교도들에 대해서 오히려 관용적이었다. 그들이 정복전을 지하드(성전)라 믿고 열심히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복민에 대해서는 개종하던가 납세 의무를 지던가 양자 택일케 하였으며 억지로 개종을 강요하거나 잔인한 살육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마호메트의 정통을 이은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는 그의 장인이었으며 제4대 칼리프인 시아 알리는 그의 사위이다.

◑ 코란(Koran) : 이슬람 교의 경전으로 아라비아 어 al-Quran(읽어야 할 것, 읽혀야 할 것의 뜻)에서 온 말이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내린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예언자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그대로 전한 것을 모은 것이다. 처음에는 마호메트가 복송하는 바를 그의 측근의 신자들이 암기하고 혹은 야자잎, 가죽, 뼈 조각 따위에 기록하였던 것을 서기 자이드 등이 기록하여 제 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632-634)가 결집한 후 제3대 칼리프 오스만(644-656)이 제 2회의 결집을 이룩하여 메카 방언으로 고쳐 써서 현재의 코란 원형이 되었다. 총 114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운문 형식에 의한 종교적 내용 외에 신자의 모든 생활을 규정하는 율법적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코란은 신의 말을 집록한 것이므로 그것을 쓴 아라비아 어가 극도로 신성시되어 다른 언어로 번역함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16세기경부터 각국어로도 번역되게 됨), 이 슬람 세계는 코란과 아라비아어를 근간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모세의 5경, 시편, 그리고 신약 성경의 복음서가 신의 계시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완전한 것들이며 오직 코란만이 완전한 기록이라고 여긴다. 또한 크리스트를 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마호메트만을 마지막 최고의 예언자로 섬긴다.

◑ 칼리프(Caliph) : 예언자의 후계자란 뜻으로 마호메트의 후계자를 말하며 정교 양권을 장악하였다. 선거에 의하여 아부 바크르(632-634)가 취임한 것을 시초로 하여 제 4대 알리의 치세까지를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라 부른다. 옴미아드 조 이후 칼리프는 세습하여 동방적인 전제 군주화 하였다. 11세기 아라비아인이 정치 권력을 잃었을 때에는 교주의 의미밖에 없었으나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정복으로 아바스 조의 대가 끊긴 후 투르크의 군주가 술탄 칼리프(Sultan Caliph)로 불리우게 되었다.

◑ 아부 바크르(Abu Bakr: 573∼634) : 이슬람 제1대 정통 칼리프(재위 632∼634). 마호메트의 애처 아이시아의 부친. 메카의 쿠라이시족 통령의 한 사람이다. 메카의 상인으로 일찍 이슬람교에 입문하여 교의 제 1인자가 된 후, 이슬람교의 포교에 힘쓰던 중 교조가 죽자, 신도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칼리프에 선출되었다. 재위 중에는 아라비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사산 조 페르시아와 동 로마를 압박하였다. 재위는 겨우 2년 반에 불과하였지만, 초기 이슬람 국가의 분쟁을 방지하여 그 발전의 길을 개척하였다.

◑ 옴미아드 조(Ommiad 661-1031) : 사라센 제국의 왕조명. 마호메트의 사후, 제4대 칼리프 알리 시대에 옴미아드 가 출신의 시리아 태수 무아위야 1세(?∼680)가 661년 칼리프 권을 빼앗아, 시리아 인의 협력을 얻어 수도를 다마스커스에 두고 전(前)옴미아드 조(661∼750)를 개국하였다. 이후 칼리프의 지위는 세습화되고, 전제 군주로서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이 왕조는 서 투르키스탄을 정복하고(713), 북 인도에 침입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또 에스파냐의 서고트 왕국을 멸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중앙부에 침입하여 프랑크 왕국과 싸웠으나 패하였다(732). 그 황금 시대는 제5대 압둘 말리크의 치세(685∼705)로, 동으로는 인더스 강으로부터 서로는 대서양, 북으로는 카스피 해로부터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달하는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피정복민의 저항이 강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압바스의 후예 사파흐에 의하여 타도되었다. 이 때 옴미아드 가의 일족 압두르 라하만 1세(756∼788)는 에스파냐로 망명하여 756년 코르도바를 수도로 옴미아드조를 제흥하여 독립하였다. 이것이 후 옴미아드 조(756∼1031) 로, 이후 토착 제후를 정복, 노르만 인의 침입과 프랑크 왕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국세를 확대하였다. 이리하여 제8대 압두르 라하만 3세의 치세(912∼961) 때 칼리프의 칭호를 채용하고, 크리스트 교 제국을 압박하여 이베리아 반도에 있어서 이슬람의 패권을 확립하였다. 그 전후가 전성기로서, 정치의 안정, 상공업의 발전, 학예의 진보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수도 코르도바에는 유럽 상인·학생들이 밀려와 바그다드와 더불어 이슬람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이 곳을 통하여 유럽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왕조도 11세기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였다. 제24대 히샵 3세의 치세(1027∼1031)에 각지에서 독립 정권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와해되었다.

◑ 수니 파 시아 파: 코란과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신앙의 기초로 하는 정통파로 전세계에 신자가 4억이다. 마호메트 혈통 아닌 칼리프를 인정한다. 수니란 마호메트의 언행에 의한 관습이라는 뜻이다. 시아파는 수니 파에 대립하는 이슬람교의 일파로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은 자만이 칼리프를 승계할 수 있다고 본다. 시아트 알리 및 그 자손에 의해 예언적 활동이 계속된다고 하며 그 자손만을 정통 칼리프로 인정 하고 있다. 이란에 많고 신자 수는 약 8천만 명이라고 한다.

◑ 이슬람교에 끼친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영향 : 아라비아 반도에는 일찍이 유대교가 침투하였는데 마호메트의 종교 활동 개시와 그 종말관이 유대교 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전설에 의하면 청년 마호메트는 시리아에서 크리스트교 선교사로부터 예언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들을 통하여 교리에 대한 지식을 얻어 이슬람교의 교리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헤지라 이후 메디나에서 유대 교도와의 접촉이 많아지자 유대교로부 터 제도적인 것을 배우기도 하였다. 단식일, 메카를 향한 예배 등을 마련한 것은 이것을 말하여 준다.

(2) 이슬람 제국의 사회와 문화

◑ 이슬람 문화 : 이슬람의 안질, 마마, 그리고 홍역에 관한 의학서는 18세기까지 최고의 권위서였으며, 물리에서는 광학이, 화학에 있어서는 불로 장생의 영약 제조를 목적으로 하는 중국 연금술과 비금속으로부터 귀금속을 얻으려고 하는 이집트의 연금술을 융합시켜 이슬람 연금술사들은 여러 가지 화학 실험과 화학 물질 제조에 성공하였다. 수학에서는 아라비아 숫자의 사용, 영(Zero)의 개념 도입, 분석 기하의 시작, 삼각 측량법 등에서 발전이 있었다. 또한 이슬람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및 신 플라톤 철학을 열심히 연구하여 코란의 해석과 이슬람교의 교리 문제에 이를 적용하였다. 이븐 루시드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주석은 후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스콜라 철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신학은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킴으로써 신학의 근본 문제인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데 설득력 있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문학에 있어서 에스파냐에서 발달한 사랑의 시는 프랑스와 독일의 편력 시인에 영향을 미쳤다. 유명한「아라비안 나이트」는 10세기로부터 15세기에 걸쳐 수집된 이야기들을 엮은 것이다. 이슬람 미술은 건축과 장식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큰 원형 지붕과 종루를 가진 이슬람의 사원 건축인 모스크와 식물의 잎이나 꽃을 아름답게 엮어 놓은 아라베스크 무늬가 그 대표적이다. 궁정의 연가와 류트와 같은 악기들도 에스파냐로부터 프랑스를 거쳐 전 유럽에 전해졌다. 이슬람 문화는 아라비아의 전통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 그리스-로마 문화, 페르시아 문화, 인도 문화 등 여러 외래 문화가 융합되어 창출된 종합적 문화이다. 또한 이것은 동서양 각 지역, 특히 유럽에 전파되어 근대 문화의 창출을 자극함으로써 세계사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 이슬람 력 : 이슬람교도들이 사용하는 역법으로 순수한 태음력인데,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성천(聖遷)한 서력 622년 7월 16일을 기원으로 살고 있다. 1년을 354일, 한 달을 30일과 29일의 두 가지로 정하되, 크고 작은 달을 서로 조합시키고 있으며, 30년 안에 11회의 윤년을 두어 약 11일을 가하고 있다. 태양력보다 1년이 11일쯤 짧기 때문에 계절과 달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

◑ 이슬람 사회의 특징 : 이슬람교는 교리 면에서 기독교와 매우 유사하지만, 교조 마호메트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기독교와 다르다. 이슬람 사회의 종교와 정치 및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이슬람교의 교의 및 이슬람 법(샤리아)이다. 이슬람교의 교리는 단순한 신앙 체계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생활 전반이 합일된 생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슬람 사회는 종교를 바탕으로 하여 코란과 샤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정교 일치의 사회이다. 또한 이슬람교의 종교적 포용성과 만민 평등의 인간관은 이슬람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자 발전의 최대 원천이 되었다.

◑ 이슬람의 5행(신앙의 다섯 기둥: 5주) ①신앙 고백-'알라 이외의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마호메트는 알라의 예언자이다.'라는 구문을 외운다. ②예배- 이슬람교도의 가장 중요한 의무로 하루 다섯 차례(동트기 전, 정오 조금 지난 후, 일몰 전, 일 몰 직후, 밤)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③단식- 이슬람 력 9월(라마단) 한 달간 행해진다. 하루 종일 완전히 금식을 하며 차와 물은 물론이거니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엄금한다. ④희사-이슬람교도는 수입의 40분의 1을 희사하여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 서로 도움을 준다. ⑤순례- 일생에 한번 성지 메카를 순례한다. 부득이 갈 수 없는 사람은 대리인을 세워 갔다 오게 한다.

◑ 카바(al-Ka'ba) : 메카에 있는 이슬람교의 성전으로 네모꼴 건물로서 검은 융단으로 덮였으며, 벽면에 성스러운 검은색 돌이 박혀 있다. 마호메트의 출현 이전부터 아라비아에서 행해지던 원시 종교의 중심으로서, 많은 성석 (聖石)이 신들의 상징으로서 모셔지고 각지로부터 순례 자가 모였었으나, 마호메트가 우상을 파괴하여 흑석만을 남기고 이슬람교도의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매년 각지로부터 순례자가 참배하며, 매일의 예배의 방향은 카바 쪽을 향하도록 정해져 있다. 중국에서는 천당(天堂)·천방(天房)이라 한다.

◑ 지즈야(Jisyah) : 이슬람 세계에 있어서, 이교도인 피정복민에 과하였던 인두세. 원래 아라비아인은 유다교, 크리스트교에 대해서는 개종을 강제하지 않고 인두세를 내게 했던 것인데, 정복이 진행되자 다른 이교도들에게도 똑같은 조치를 취하고 그들을 보호민으로 하였다. 옴미아드 왕조 시대에는 1∼2디나르였다. 법적으로는 이것은 이슬람 공동체와의 계약에 의하여 행해지며, 여자·어린이·노인·걸인·노예 따위는 면제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복 당초엔 지즈야와 하라지와의 사이에는 명확한 구별이 없었으나, 하라지가 이슬람 교도에도 과해지게 됨으로써 인두세적인 성격을 잃었다. 이 제도는 오스만 투르크 시대에도 시행되었던 것인데, 1855년 크림 전쟁 당시에 징병 면역세로 변하였다. 이것을 폐지한 것은 터키 공화국이 되면서부터이다.

◑ 지하드(Jihad) : 이슬람교의 교세 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을 의미하며, 보통은「성전(聖戰)」으로 번역된다. 이슬람법에 의하면 지하드는 이슬람교도에게 과해진 종교적 의무이며, 자유 신분으로 성년에 이른 심신이 건전한 모든 이슬람 남자는 이맘의 명령이 있으면 여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하드를 위하여 목숨을 잃은 자는 순교자로서 천국에서 특별한 우대를 약속받는다.

(3) 이슬람 여러 나라의 발전

◑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s) :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 투르크 민족의 일파인 셀주크 족이 세운 왕조이다. 10세기말에 족장 셀주크가 중앙 아시아로부터 아랄 해의 북동쪽 해안에 이주하여 순니 파 이슬람교에 귀의하고 그의 손자 투그릴 베그(1037∼1063)는 가즈니 왕조를 격퇴하여 전 이란을 병합하고(1040), 이어서 이라크를 영유하고, 바그다드에 들어가 압바스 조 칼리프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1055). 다음의 2대 30년간에 시리아, 팔레스티나, 소아시아, 중앙 아시아를 정복하고, 이집트의 파티마 조를 눌러 서아시아의 광대한 판도에 지배권을 확립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비잔틴 제국을 위협,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을 유발하였다. 그러나 11세기말부터 왕조는 정권 분쟁으로 분열이 일어나 국운이 쇠약해지더니, 종가는 1157년에 망하여 이란의 종주권을 잃었고, 게르만, 시리아, 이라크 및 소아시아 지방에서 독립적 권력을 행사하던 분파 정권은 12세기 사이에 멸망하였다. 또 몽고인의 서진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버티던 소아시아의 분파 정권도 1307년 오스만 투르크에 항복하였다. 셀주크 투르크는 이란, 아라비아의 선진 문화를 존중하고 장려하였으므로 이 시기는 서아시아 문화사에 있어 중요한 시기로 주목되어 있다.

◑ 이크타(Iqta) : 이슬람 사회의 토지 제도로서 아라비아어로「자르다, 나누다」에서 나온 말. 정교 일치의 이슬람 사회는 동시대에 병존했던 유럽 봉건 사회와 달리 고도로 중앙 집권화 된 전제 정치가 행해진 사회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로 이슬람 사회도 상당한 정도로 분권화된 사회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크타 제도이다. 이슬람 사회는 종교가 정치 및 일상 생활을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정치 권력의 측면에서는 분열의 양상이 강했고, 한 국가 내에서도 분권적 경향이 발달했다. 이크타 제도는 이슬람 교도인 아랍 전사를 정복지의 군사 도시에 부족 단위로 거주케 하고, 그 군사령관인 아미르(Amir)에게 정복지의 군사 도시를 행정 및 징세 단위로 하여 정복민을 지배하도록 한 제도로 그 후 군사령관이 주둔지에 머물게 됨에 따라 유럽 봉건 체제와 유사한 형태로 변환되었다. 따라서 이 제도는 효율적 정복을 위한 분권적 군사 지배 체제라고 할 수 있다. 7세기에 아라비아인이 대 정복을 행했을 때, 국유지와 공적(公敵)의 소유지만을 몰수하고 귀순한 백성의 소유지는 납세를 조건으로 보호하였다. 몰수한 토지는 국가가 관리하였으나 이슬람교도인 아랍족에게는 임대 형식으로 분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이 이크 타이며, 이것을 받은 자는 10분의 1에 해당하는 조세를 바치기로 되어 있었다. 이크타 이외에 아랍 족이 아닌 지주로부터 토지 매입이 허용되었으므로, 옴미아드 조 때에는 아랍 족의 대지주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또한 이 이크타를 수령한 자를 무크타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토지의 자유 처분이 허용되어 있었다. 단 사후에 상속자가 없으면 국가 소유로 환원되었다. 압바스 조에서는 이크타가 오로지 무인(武人)에게 주는 영지로 되어 있었다.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에, 그 점령지를 황제령과 분봉지로 나누었다. 이보다 먼저 오스만 제국에서는 각지의 조세를 총독들에게 종신 지급하는 제도를 채용하였으므로, 사실상 봉건제가 되어 독립 국가의 형태가 되었다. 이같은 지방 분권은 국가를 약체화시켰으므로, 메흐메트 2세 때부터 독립 제후를 폐하기 시작하여 1856년에 마침내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 술탄(Sultan) : 아라비아어로 왕 또는 지배자를 말하며 이슬람 세계에서 제정 양권을 장악한 칼리프의 위임을 받아, 제국의 일부를 통치하는 세속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의 칭호. 때로는 신권적 전제 군주 또는 세속 군주를, 때로는 군사적 권위를 의미하였다. 10세기 이후 압바스 조의 칼리프는 모든 실권을 잃자, 마침내는 술탄의 지위를 이민족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셀주크 투르크의 투그릴 베그는 술탄이 되어 모든 이슬람 지역을 한 손에 쥐고 흔들게 되었으며, 칼리프의 존재는 무력화되고 말았다. 압바스 조의 멸망 후 칼리프는 군인 술탄의 뜻에 좌우되어 순전히 종교적 지위를 가지는 데 지나지 않았고, 전제 군주적 권위는 모두 술탄에게 돌아갔다. 1517년 이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이 칼리프로 지명되게 되자 술탄·칼리프 제도가 성립되었는데, 1922년 12월 오스만 제국이 망하자 이 제도도 소멸되었다.

◑ 대식국(大食國) : 중국의 당나라 이후 아랍인을 대식이라 하였는데, 이는 '다지르(大商)'의 중국식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슬람의 대상에는 육로를 이용한 대상(카라반)과 해로를 이용한 대상(다지르)이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종교적 열정 못지 않게 상업 활동에도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동서세계를 연결하는 중계 무역 활동으로 많은 이익을 남겼으며 무역지의 이슬람화를 촉진하여 이슬람교의 발전에도 큰 공을 세웠다. 당시의 우리 나라는 고려 시대였는데 개성에까지 이슬람 상인들이 출입하여 우리 나라 (KOREA)가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 티무르 왕조(Timurids ;1369-1500) : 티무르는 중앙 아시아의 사마르칸트 남쪽 케시에서 출생하여 1369년 차가타이 한국이 쇠퇴하자 발흐에서 거병, 이듬해에 사마르칸트에 도읍하여 티무르 왕조를 세웠다. 스스로 칭기스 칸의 후손이라 일컫고, 몽골 제국 재건의 기치를 들고, 일-킵차크의 여러 한국을 정복 병합하여 인도로 침입하고 1402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황제 바야지트 1세를 앙카라 싸움에서 포로로 하여, 중앙 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사마르칸트는 동서 무역의 최대 중계 시장이 되었으며 또한 이란적인 이슬람 문화도 개화하였다. 그는 마지막에 중국의 신흥 명조를 타도하려고 정복의 길에 올랐으나, 원정 도중 오르라트의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티무르에 이어 1405년 제2대의 제위에 오른 사람은 칼릴 샤(哈里沙 티무르의 제3자 미란 샤의 아들)였다. 그는 명(明)과 화의를 맺었으나, 재위 4년만에 귀족들에게 폐위되고, 헤라트에 있던 티무르의 제4자 샤 루흐가 사마르칸드에 진군하여 제위에 올랐다 (1409). 샤 루흐의 38년에 걸친 치세는 티무르 조의 전성기로서, 이란적 이슬람 문화가 눈부신 발달을 이룩하여 티무르 제국의 황금 시대를 이루었다. 그의 뒤를 계승한 울루그 베그는 학자이며 일류의 문화인이기는 하였으나, 일족간의 정권 쟁탈전과 외적, 특히 우즈베크 족의 침입에 대처하는 수완이 없었고, 재위 2년 8개월에 그의 아들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10수년간 왕족의 싸움이 계속되어, 1465년 아부 사이 드(재위:1452∼1467)가 겨우 난을 진정시키고, 그 아들 아하마드(재위:1467∼1493)가 사마르칸드에 즉위 하였을 때에는 그 세력은 트란스옥시아나에 불과하게 되었다. 당시 페르가나에는 아우 우마르 샤이흐, 바부르 부자가, 동 이란에는 일족인 후사인 바이카라가 각기 독립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이 술탄 아하마드의 치세 동안이 티무르 조 문화의 성숙기에 해당되어, 사마르칸드나 헤라트에 장려한 건축물이 건조되고, 학술면에서도 법학·수학·의학 등 많은 학자·문인·예술가가 배출되었다. 미니어처 예술로 알려진 이란적 예술의 발달과 투르크 문학의 번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샤 루흐제 사후 왕실 일족간의 정권 쟁탈에 덧붙여, 외적 특히 북방의 우즈베크 족의 칩입이 격화됨으로써 결정적인 파국으로 몰렸다. 술탄 아하마드가 1494년에 사망한 뒤, 내홍은 다시 격화되고, 트란스옥시아3ご?우즈베크에 점거되고(1500), 헤라트의 정권도 우즈베크에 의하여 와해되어, 그 영역은 사파비 조 페르시아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티무르 조의 유산은 사파비 조 페르시아 및 트란스옥시아나로부터 인도로 망명한 바부르가 세운 무굴조에 의하여 계승된다.--- 티무르 제국의 문화 : 국도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전개된 이 문화는 동서 문화 융합의 한 전형이었다. 이는 티무르가 아라비아의 천문 학자를 초청한다던가 중국의 도공을 이주시킨 적극책의 결과인데, 이슬람 계의 미술 중에는 중국의 영향이 큰 것이 많다. 티무르의 사후 정치적으로는 제국이 분열을 초래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이슬람의 바그다드에 필적할 빛나는 시대를 이룩하였다. 티무르 제국의 문화 발달은 역대 황제의 보호에 힘입은 바가 컸다

◑ 투르키스탄(Turkistan) : 협의로는 중앙 아시아라고 불리는 지역, 중국사상 서역이라고 하는 곳도 주로 이 지역을 말한다. 북부 파미르를 경계로 동서로 나뉘는데, 동투르키스탄은 타림 분지, 서투르키스탄은 투란 저지에 해당된다. 북방의 준가리아, 카자흐스탄의 초원에 대하여 오아시스 도시가 발달하고, 고래로 동서 교통의 요로가 되는 동시에, 북방 유목민의 위협과 중국 및 이란 왕조의 경영을 받은 적이 많았다. 먼 옛날에는 아리안 계 주민(이란 인)이 거주하였으나 7-8세기경부터 북방 투르크계 민족이 이주하여, 페르시아 어로 투르크 인의 땅(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게 되고, 지금은 서투르키스탄에는 독립 국가 연합 구성국의 투르크멘, 우즈베크, 타지크 등의 공화국이 성립되고, 동투르키스탄에는 중국의 영토로서 신쟝 위구르 자치구가 성립되었다.

◑ 사파비 왕조(1502-1736): 티무르 제국 붕괴 후 이란 지방에 이스마일 1세에 의해 건국되어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고 아랍적인 술탄의 칭호 대신, 이란 고유의 '샤' 라고 하는 존칭을 채용하는 등 이란의 민족적 통일을 강조하였다. 5대 아바스 1세때 가장 전성기를 맞아 당시의 수도인 이스파한은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릴만큼 번영하였으나 그의 사후 급속히 쇠퇴하여 오스만 투르크에게 붕괴되었다.

◑ 파티마 조(Fatimids) : 아프리카의 이슬람의 왕조로 북아프리카, 이집트, 나중에 시리아도 정복했다. 시조인 우바이둘라 알 마하디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증손이라 칭했다. 대대로 시아 파에 속하여 10세기 중엽 바그다드의 아바스 조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는데, 군주는 칼리프라 칭하고, 카이로 시는 수도로서 번영했다. 11세기 이래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또 십자군과 팔레스티나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분 쟁이 계속되는 틈에, 이란 계 쿠르드인 출신이며 뒤에 아유브 조의 창시자가 된 살라딘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 마물루크 왕조(1250-1517) 시리아, 이집트를 지배한 투르크 계의 이슬람 왕조. '마물루크'는 백인 노예를 뜻하는 아라비아 말이 며, 주로 투르크 계 남자로서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노역에 주로 사용되던 '잔쥬' 라는 흑인 노예와는 다른 목적의 노예로서 이슬람 세계 곳곳에서 군벌 정치를 만들어 냈다. 이 점은 노예에 대한 상식적 이해로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다. 마물루크 왕조의 살라딘도 마물루크들을 다수 매입하여 친위대로 조직하였으며, 이들이 뒤에 술탄을 폐립하는 치열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마물루크 출신의 군 사령관 아이 바크가 아이유브 왕조를 타도하고 마물루크 왕조를 창건하여 이집트에 군림했다. 제4대 술탄 바이바르 스(1260∼1277)가 이 왕조 제일의 영주인데, 그는 1258년 바그다드를 공략하여 진격을 계속한 몽고군을 격퇴하고, 십자군에 대해서는 철저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여러 도시를 보유하고 있었던 크리스트교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라센 제국의 칼리프가 카이로로 망명한 것도 이 때이다. 마물루크 왕조 때 카이로는 바그다드 대신에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동서 교역의 접촉지가 되었으며, 역사 학자 이븐 할둔이 활약하고,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방문할 만큼 번영을 나타냈으며 '아라비안 나이트'도 이 왕조 때 완성되었다. 그러나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함대가 인도 항로를 개척한 후 관세 수입의 격감으로 경제적으로 쇠퇴하였고, 1509년에는 포르투칼과의 싸움에 패하였으며, 마침내 오스만 투르크에게 점령당하였다.

◑ 오스만 투르크 제국(Osman Turk :1299∼1922) : 13세기말 셀주크 투르크에 대신하여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투르크계의 순니 파 이슬람 국가로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은 이것이 발전한 것이다. 오스만 1세가 건국하였으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반(半) 유목 생활을 하던 오스만 투르크는, 칭기즈 칸의 압력에 의하여 서진(西進)하게 되었고, 소아시아에 진군하여 셀주크 술탄의 종주권으로부터 벗어나 건국하였다(1296). 부르사를 빼앗고(1326), 아드리아노플을 점령(1362), 다시 유럽 제국의 십자군을 격파하고(1396), 발칸의 대부분을 영토로 하였으나, 서진하여 온 티무르의 군대에게 앙카라에서 패하여(1402) 그 진격은 일시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마호메트 2세 때에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공략에 성공(1453),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어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에 원정하여, 마지막 마물루크 조의 칼리프로부터 칼리프 칭호를 얻어 이슬람 교의 종 주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술탄·칼리프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 후 술레이만 1세(1520-1566)의 치하에 오스만 제국은 극성기에 달하고, 그 영토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치게 되었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비인(오스트리아)까지 육박할 정도였다(1529). 국내에 있어서도 행정·법제·학예 기타 여러 부문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기에 전제주의적 개혁에 의하여 질서를 회복, 강경한 외교 정책을 써서 한때 부흥하였으나, 제2차 비인 포위 공격에 실패 한 뒤부터는(1683) 오스트리아, 러시아, 폴란드의 열강 진출이 활발하여 17세기말에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 18세기 후반에는 흑해 북안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그 후 마흐무트 2세(1808-1909) 이후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이른바「탄지마트(혁신 시대)」에는 근대화 촉진기로서 군사적 봉건제의 폐지, 군대의 근대화가 실시되었으나, 그 운동도 전제 군주 압둘 하미드 2세(1876-1909)의 즉위와 더불어 탄압되었다. 게다가 밖으로는 러·터 전쟁(1877)에 의하여 많은 유럽의 영토를 상실하는 등 내우외한이 빈번한 가운데 20세기로 접어들었다. 이에 청년 터어키 당은 국가의 구제를 부르짖고 일어섰으며, 이 정권하에 투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독일측에 가담하였으나, 그 패전으로 가혹한 세브르 조약에 조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1920). 이 조약으로 오스만 5矗E㈃?괴멸 상태에 빠졌다. 분기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국민 의회를 이끌고 술탄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1922.11.1.). ----오스만 투르크의 국가 조직 : 부족 사회로부터 훙기한 오스만 투르크는 군사 제도가 제국의 기초가 되었으며 복잡한 체제를 수립하 였다. 즉 영내에는 직할지와 번부가 구분되었으며 술탄의 채읍(采邑)이외는 군사적 봉토로서 제공하는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중앙 집권적인 술탄 전제하에 분권적인 행정 조직을 갖는 특이한 체제였 다. 사회 계층은 무관, 문관, 농민, 상공업자의 4계층으로 대별되었고 군사에 중점을 둔 특성을 나타냈다.

◑ 술탄-칼리프 제도(Sultan-Caliph) :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순니 파의 칼리프의 지위도 겸한 제도이다. 1517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가 이집트로 원정하여 아바스 최후의 칼리프로부터 그 지위를 이양 받고, 이어서 술레이만 1세가 정식으로 칼리프로 지명되어(1538) 정·교 양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투르크 혁명으로 1922년 술탄제는 폐지되고, 1924년 최후의 칼리프가 추방됨으로써 칼리프 제도도 결국 소멸되었다.

◑ 술레이만 1세(Suleiman I ;1496?-1566) : 오스만 제국 제10대 술탄(1520∼1566). 자주 원정군을 일으켜 1529년 빈을 포위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헝가리를 합병하였고 프랑스 국왕과 베오그라드 조약으로 동맹을 맺고 독일 황제와 싸웠다. 또 로도스 섬을 점령한 다음 아프리카의 알제리까지 정복하여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와 싸워서 바그다드를 점령하였으며, 아라비아 반도를 제압하여 동서 교섭상의 간선(幹線)을 장악하였다. 오스만 왕조의 국가 조직이 정비되기 시작한 것은 그의 치세로 부터였다. 이 때에 영내는 직할지와 번부(藩部)로 나뉘고, 토지는 재상 이하의 관리에게 봉지로 지급하고, 영주는 봉지의 대소에 따라 군역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또 1550년으로부터 1560년에 걸쳐 술레이만 모스크 같은 장려한 투르크 식 건축물도 축조하였고, 학예도 장려하여 궁정 문학이 발달하였다. 그의 치세는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로써 유럽에서는 그를 장려왕(壯麗王)이라고 불렀다. 만년에는 재정위기를 맞아 두 명의 왕자에게 배척 당했다. 내정면에서도 제국의 각종 제도를 완성하였으며, 터키 문화를 번영시켜 오스만 제국의 극성기를 이룩하 였다.

◑ 레판토 해전 : 술탄 셀림 2세의 치세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베네치아로부터 키프로스 섬을 빼앗자, 베네치아는 교황 피우스 5세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게 구원을 청하고, 오스트리아의 지지하에 오스만 투르크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양군은 그리스 반도의 코린트 만 안에 있는 나프팍토스, 즉 레판토에서 충돌하였는데, 격전 3시간 만에 투르크가 패배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는 곧 해군을 재건하여, 전의를 상실한 베네치아를 굴복시키고 키프로스섬을 정식으로 할양받았다.

◑ 이븐 바투타(Ibn Battutha:1304∼78) : 이슬람 세계 최대의 여행가로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태어나 1325년 22세때 순례를 떠나 나일, 홍해를 거쳐 메카에 도착하였다. 그 후 페르시아 각지,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본 뒤 소아시아에서 흑해를 거쳐 킵차크 한국 으로 갔다. 거기서 왕비를 수행하여 콘스탄티노플에 갔다가 그 후 중앙 아시아를 거쳐 인도의 델리에 8년간 머물며 법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향하여 수마트라, 자바를 거쳐 천주(泉州)를 거쳐 북경까지 갔다. 귀로에 역시 해로를 택하여 페르시아 만에서 이집트를 경유하여 모로코의 훼즈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스페인과 사하라 사막의 오지를 여행하는 등 그의 전 여정은 약 30년 동안에 12만km가 넘는다고 한다. 모로코 왕은 그에게 여행중의 견문을 물어 비서에게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삼대륙 주유기'이다. 이것은 1355년에 완성되었는데 특히 당시의 이슬람 세계와 중국의 대도(大都)의 정세를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 : 사라센 제국이 낳은 최대의 역사 철학자. 튀니지 태생이지만 조상은 남 아라비아 출신이다. 1400년 티무르에 대한 이집트 원정군에 종군하여 포로가 된 후 송환되어 여생을 카이로에서 보내면서, 대 저작의 완성에 진력하였다. '실례(實例)의 서'라 불리는 이 대저는 이슬람 제국의 세계사로서, 그「서설」에서 인간 사회를 유목민과 도시 정주민으로 분류하고, 사막이라는 자연 환경에서 강한 단결 정신을 부여받 은 유목민들의 우수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사치 생활로 나약화 된 도시에 침입하여 왕조를 건설한 소박한 정복 유목민들의 우수성을 역설했으며 정복 유목민들이 도시 생활로 문명화되어 다시금 새로운 유목 민에 의하여 정복 교체된다는 특이한 역사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밖에 이슬람 국가의 정치 조직· 기술·학문 등을 논하고 있다. 이 책의 판본은 1876년 카이로에서 간행되었다.

◑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 ‘천일 야화(千一夜話)’라고도 하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슬람 민중문화. 10세기경의 인도, 아라비아, 이란 등에 기원을 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아라비아어의 설화집인데, 이슬람 문화권을 배경으로 전개된 갖가지의 설화를 집성한 것이다. 그 원형은 이란 고래의「천가지 이야기」이며 이를 수집 정리한 쟈호시야리는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 작자·설화사(說話師)들이 이슬람 교 신앙을 중심으로 아라비아의 역사상의 일화., 자유 분방한 공상에 의한 가공의 이야기 등을 자유로이 가미하여, 변형 각색했는데 16세기경에는 거의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되었다.

◑ 아라베스크(Arabesque) : 아라비아 인이 창안한 장식 무늬로 식물의 줄기와 잎을 도안화하여, 당초(唐草) 무늬나 기하학 무늬를 배합시킨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벽의 장식과 서책(書冊)의 장정, 그리고 공 예품 등에 아라비아 문자가 도안화되고, 거기에 식물 무늬를 배치하여 이슬람 독특한 장식 미술을 만들었다. 후에는 조수(鳥獸) 등의 무늬도 배합하게 되었고, 르네상스 이후에 유럽에서도 유행되었다.

◑ 이슬람 암살단 : 이슬람 교 시아파의 한 분파로 이스마이리 파가 있다. 그들의 본거지는 테헤란 서북쪽에 있는 라므트 산이며 수령은 '산의 우두머리' 라 불리웠다. 그들은 마약의 일종인 하시슈를 이용하여 마을 젊은이들을 궁전 안의 '비밀의 화원' 으로 데리고 들어가 미녀들의 환대를 받게 한 후 한패로 끌어들여 강력한 암살단을 조직, 침입자에게 저항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십자군에 저항하는 한편 동방에서 온 침입자 몽고 군을 상대로도 용감하게 싸웠다. 영어의 암살이라는 말의 어원은 그들이 사용했던 하시슈에서 유래 한다. <이슬람 암살단(아사신)〓Assassins→assassination(암살)>

◑ 알함브라(Alhambra)궁전 : 에스파냐의 그라나다 교외에 있는 이슬람 건조물. [빨간 성(城)]의 뜻. 13-14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주위가 약 3.5km이다. 장려한 홀, 열주, 정원, 분수, 온천, 거실, 모스크 등이 있으며 내부는 아라베스크로 장식되고, 원개는 종유석상으로 덮여 있다. 칼리프의 거성(居城)이었으나 1492년 에스파냐에 점령되어 19 세기 중엽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세계문화사(상)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