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1)

동양철학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

 

1. 맹자와 순자의 인성론(人性論)에 대해서 비교․설명하시오.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국시대 중기로써 각 영역국가(領域國家)가 약소국을 침략․병합하면서 사력을 다해 영역을 다투던 시기였다. 따라서 각 국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士)는 물론 서민계층으로부터 널리 인재를 구하게 됐다. 이러한 시기에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중심으로 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주장하여 천하가 질서를 되찾고 평화로워지기를 원했다. 맹자는 일찍부터 유학을 공부했다. 일반적으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을 스승으로 했다고 하고 있으나, 맹자 자신은 거기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맹자는 유학의 입장에서 당시 사회의 질서에 필요한 성선설이란 사상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묵자의 시대에 이미 그 한계점을 드러낸 공자의 사상이 어떻게 해서 맹자의 시대에 다시 인정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공자의 제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시세(時勢)에 따라 약간씩 수정하면서 타학파(他學派)에 대립하여 유가의 사상을 견지하였는데, 그러던 중 맹자라는 인물이 나타나서 타학파의 사상을 비판하고 유가의 사상만이 옳다고 하면서 유가의 사상을 그 시대에 맞게 이론화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당시 실정에 맞게 합리화시키는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선설인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이론은 유가의 중심이론을 이루면서, 유가 사상을 오늘에까지 살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된다.

전국시대의 정세가 한층 심화되고 통일의 예측도 더욱 곤란할 때 유가도 묵가도 아닌 또 한 무리의 사상가들이 배출됐다.

맹자가 이상주의를 제창함에도 불구하고 그 만년(晩年)에는, 진(秦)나라의 제국(諸國)병합의 형세가 급격하게 되어, 세상은 보다 험악하게 되고 제자(諸子)가 활약할 장소도 좁아졌다. 사상계에서는 현세의 의의나 가치를 부정하는 도가의 설이나, 인간의 자주성을 초월한 자연율의 존재를 강조하는 음양가의 설이나, 인간을 국가의 수단으로 하는 법가의 설 등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때 맹자보다 수십년 늦게 세상에 나와서 유가의 설을 전하고 그것을 보다 완비된 학설로 조직화한 사람이 순자(荀子, 前313~?, 이름은 況)이다.

순자도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을 임무로 삼고 있는데, 당시의 제가(諸家)의 설을 흡수하여 그 주요한 문제에 대해서 유가의 입장으로부터 독자적인 견해를 전개했다. 이것이 순자를 종합적 조직적 학설의 형성자라고 하고 있는 까닭이다. 특히 순자는 당시의 도가적인 허무관(虛無觀)을 배척하고 현실 사회생활의 의의를 분명히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보다 현실에 주목하여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긍정하고 더욱이 인간은 단독으로서가 아니라 ‘群’ 즉 집단체를 이룸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규정했다. 게다가 군(群)은 단순한 인간의 집합이 아니고, 일정의 질서 즉 예(禮)가 존재하고, 예(禮)는 각인(各人)의 개별적인 분한(分限)을 규정함과 동시에, 합목적적인 통일적 인륜(人倫)이고, 이것을 실현하는 한에 있어서 무리의 전체적 조화가 있고, 또한 이것을 이행함에 의해서 인간은 사(士)․군자(君子)․성인(聖人)의 진보가 있다고 했다.

인간이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또한 예에 의해서 분한이 규정된다고 하면, 인간이 개인인 것과 사회인인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게 된다. 그래서 순자는 인간에 대해서 성악설(性惡說)의 입장을 내세우고, 예와 같은 도리의 지식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 마음을 선으로 향하게 하고자 하고 있다.

 

2. 공․맹(孔․孟)유학의 윤리관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공자가 말한 실천덕목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仁)이다. 이러한 인에 대한 중시는 그의 예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여겨진다. 공자는 주의 전통문화에 강한 동경을 품고, 전통문화의 계승․유지를 자기의 사명으로 하고 있었다. 전통문화의 구체적인 현상이 예이다. 그래서 공자는 또한 이 전통적인 예를 지극히 존중했다. 사회의 존재방식이 변화면 사회생활을 규정하는 예도 자연히 변화하게 된다. 옛날의 예는 현실의 생활에 적합하지 않고 존재의의를 잃어버리는 상황이 생겨난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공자는 가능한 한 고래(古來)의 예를 존속시켜 가기를 원하고 있다.

공자에 의하면 이 예는 인(仁)의 자연스런 나타남이며, 동시에 인을 실현하는 질서이다. 물론 예는 천지의 질서이며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당위의 법칙인 까닭에 예는 우주의 질서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 주체적으로 구현해야 할 행위의 질서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 예의 내용이 되는 인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인은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진실한 사랑이다. 이러한 인을 다른 말로 나타내면 충서(忠恕)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증자가 공자의 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인데, 충(忠)이란 자기 마음을 성실히 다하는 것이고, 서(恕)란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인 외에 공자가 역시 중요시 여기는 덕목에 지(知)․용(勇)이 있다. 지(知)․인(仁)․용(勇)의 세 가지를 군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덕목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 지․인․용은 크게 보면 인 한 글자에 모두 포함되는 것이고, 작게 보면 지․인․용 각각 세 가지 덕목으로 된다. 공자는 인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인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먼저 진정으로 인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앎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또한 실천적 용기가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이라고 하는 것은 지와 용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지․인․용은 인 한 글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각의 덕목으로 볼 것 같으면 세 가지 덕목이 된다.

이상에서 공자의 인사상을 중심으로 실천덕목을 살펴봤는데, 이러한 실천덕목에 의해서 도달되는 이상적 인간은 바로 군자이다. 이러한 면에서 공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군자가 되기 위한 군자의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도 인정(人情)의 자연함에 근거하는 측은의 마음을 인(仁)의 근본으로 하여 공자의 학설을 계승하고 있는데, 인심(仁心)이 정치상에 발현되어지는 것을 맹자는 특히 강조한다. 특히 의(義)와 이(利)를 상반되는 가치로 보는 것은 공자에게서도 보이는 것이지만, 의(義)를 인(仁)과 동등의 가치로 인정하여 이것을 병칭하는 것은 맹자에 이르러서 보여지는 것이다. 다만 인과 의를 나란히 하여 열거하고 있는 것은 󰡔묵자󰡕 중에도 보여지기 때문에 인의(仁義)의 어원 그 자체는 맹자의 독창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묵자는 의(義)를 이(利)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즉 최대다수의 최대이익이야 말로 의이다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 맹자와 상반되는 점이다. 또한 의는 예의 형식면과 그 정신인 공경(恭敬)과의 조화의 원리로서도 생각되어졌다. 예는 공자에 있어서도 보여지듯이, 유가가 가장 중시하는 바의 것이었다. 단지 예의 형식이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실정에 합치되지 않게 되었을 때, 공자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전통적 형식을 살려서 그 형식에 새로운 내용을 담아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는 태도가 보여졌다. 그러나 맹자는 예를 존중하면서도 그 형식 자체에도 반성을 더하여 행위가 가장 타당 적절하기 위한 원리로서 의를 강조하여, 의에 적합한 예라고 하는 의미로, 자주 예의(禮義)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공자는 최고의 덕으로서 인을 이야기하는 외에도 많은 덕목을 들어서 인격수양의 목표를 제시했다. 맹자도 효제충신(孝悌忠信) 등 여러가지 덕목을 이야기하면서 특히 인의(仁義) 혹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을 나란히 열거하여 이야기한 것은 덕목론의 체계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사덕(四德)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사덕(四德)의 실천은 방심(放心)을 구하여 본심(本心)을 찾음으로 해서 가능하게 된다. 이 맹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설(四德說)은, 한의 동중서에 이르러서 여기에 신(信)의 덕을 더해서 오상(五常)이라고 칭하여 이 이후 길이 유가의 윤리학설의 기본의 하나가 됐다.

공자나 맹자의 윤리의 원천을 인간의 내면적인 본성에 두고 있다.

3. 한대(漢代)의 천(天), 기(氣)에 의한 인간해석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天이란 형체를 가지고 무위자연적 작용만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린 왕충 나름대로의 근거:

왕충의 그러한 정의는 스스로가 이야기하고 있듯이, 유가의 ‘天地夫婦’(천지는 부부이다.), ‘夫婦法天地’(부부의 도는 천지에 본받는다.)라는 관점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당시의 유가와 똑같은 관점에서 출발하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다른 천론(天論)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에 의문이 가지만, 그것은 각기 자기의 입장에서의 해석차이에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유가의 경우는 인격신으로서의 天을 굳게 믿으면서 ‘天地夫婦’, ‘夫婦法天地’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왕충의 경우는 ‘天地夫婦’, ‘夫婦法天地’만을 굳게 믿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왕충은 당시 유가들에 대해서 “부부의 도가 천지로부터 본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째서 부부의 도를 미루어서 천지를 논할 줄 모르는가”하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왕충은 天이나 天의 작용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인 해석을 피하고, ‘天地夫婦’, ‘夫婦法天地’라는 관점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 해석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天의 본체에 대해서 보면, ‘天地夫婦’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현실세계의 부부를 보면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천지가 부부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구조를 같이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왕충은 ‘地’가 형체가 있으니까 ‘天’도 형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있다. 또 天의 작용의 근본이 되는 天의 성격에 대해서도 地로부터 그 근거를 구하고 있다. 왕충에 의하면 天은 그 당시 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무런 의지도 없다고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天에 ‘口目’(입과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天에 ‘口目’이 없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地에 의해서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地라는 것은 흙덩어리뿐이고 ‘口目’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흙덩어리인 地의 夫로서의 天 역시 ‘口目’이 없다는 것은 확연한 사실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 ‘대저 초목은 의지가 없다’(夫草木無欲)에서 볼 수 있듯이 ‘口目의 類’ 외에는 어떠한 것도 ‘欲’(의지)이 없다고 하는 확신을 그 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왕충은 ‘천지는 부부이다’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地가 형체를 갖고 의지가 없으니까. 天 역시 그와 같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天의 형체가 없고 무의지임을 증명하여 그 이전의 天에 대한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2) 기(氣)

이상과 같이 天에 대해서 자기나름의 해석을 하여 이전의 인격신적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형체가 있고 무위자연적 작용을 하는 것으로서 규정지어 놓았다. 그러면 여기서 天의 작용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위에서 살펴봤듯이 天의 작용의 내용은 氣를 베풀어내어서 地의 氣와 합하여 만물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天의 작용이라고 해도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氣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의 이야기로부터도 알 수 있는 사실이겠지만, 다음의 왕충의 말로부터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다. “天의 운행은 氣를 베푸는 것이다. 천체가 움직이면 氣가 나오게 되고 그래서 만물이 생겨난다. 사람이 활동하여 氣를 베푸는 것과 같은데, 신체가 움직이면 氣가 나오게 되고 그래서 자식도 생겨나게 된다”(「自然篇」)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몸을 움직임에 따라 氣가 나오고 그러한 氣가 합하여 자식이 생겨나는 것과 똑같이, 天이 움직임(운행함)에 따라 氣가 나오고 그 氣로 인해 만물이 생긴다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天은 그 형체안에 氣를 품고 있고, 그러한 氣는 天의 형체가 움직임에 따라 밖으로 베풀어져 나오고, 밖으로 베풀어져 나온 氣는 天의 무위자연한 성격을 그대로 지닌채 무위자연하게 地氣와 합일되어 만물이 생겨나게 되는 근원이 된다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볼 때 이 우주안의 모든 작용(현상)이 天의 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직접 작용하는 작용자에 대해서 본다면 天의 작용은 그 형체가 움직이는 것뿐이다. 그러한 움직임에 따라 氣가 天 밖으로 나오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氣가 작용자가 되어 직접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天이란 것은 무위자연한 법칙을 제공하는 근원자이고, 氣는 그러한 법칙에 따라 작용하는 작용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天과 氣에 대해서 자기나름대로의 이론적 체계를 지움으로써 자기가 의도했던 대로 인간세계를 포함한 자연현상 모두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무위자연적인 성격을 지닌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발판을 놓게 됐다.

 

4. 한대이후 유․불․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1) 유교에서 노장(老莊)으로

위(魏)나라의 창업주(創業主)인 조조(曹操)의 뒤를 이은 문제(文帝)는 학관(學館)을 일으키고 박사의 인원을 늘려서 유학의 흥륭을 계획한 사람인데, 당시의 학자로 왕숙(王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버지 왕랑(王郞)은 금문학(今文學: 今文이란 한나라 시대에 통용되던 문자라는 의미인데, 이러한 今文으로 쓰여진 경서에 의해서 이야기되는 경학을 바로 今文學이라고 한다. 이 今文學이란 것에 대해서 古文學이란 것이 있는데, 선진시대의 고문자로 쓰여진 경서에 의해서 이야기되는 경학을 말한다)을 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 그 아들 왕숙(王肅)도 금문학에 능통했다. 왕숙은 또 가규(賈逵) 마융(馬融)의 학(고문학)을 좋아하여, 금고문을 절충하여 󰡔서󰡕(書)․󰡔시󰡕(詩)․󰡔삼례󰡕(三禮)․󰡔좌씨전󰡕(左氏傳)․󰡔논어󰡕(論語)의 주(注)를 써서 모두 다 학관에 채용됐다. 그가 금고문을 절충한 태도는 정현(鄭玄)과 같지만, 그는 정현에 반대하여, 정현이 금문에 의거한 것은 그는 고문을 취하고, 정현이 고문을 채용한 것은 금문으로 고쳤다. 그에게 또 󰡔성증론󰡕(聖證論) 12권이 있는데, 이 책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의거해서 정현을 논박한 것인데 그가 근거로 한 가어(家語)는 그의 위증(僞增)한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일마다 정현에게 반대하고 있는데, 그 의견의 차이점은 주로, 예의 제도와 자구(字句)의 해석으로 대의(大義)에 관한 것이 적다. 그렇게 해서 그후 성증론은 정학(鄭學)과 왕학(王學)의 논쟁의 중심이 되고, 정학(鄭學)을 받드는 마소(馬昭)가 이것을 반박하자 왕학(王學)의 무리 공조(孔晁)가 여기에 답하고, 박사 장융(長融)이 이것을 비판했다. 동시에 손염(孫炎)도 또한 정학(鄭學)을 받들어 󰡔성증론박󰡕(聖證論駁)을 저술했는데, 손염(孫炎)은 또한 「이아주」(爾雅注) 6권 및 「이아음」(爾雅音) 1권을 저술하여 문자의 훈고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서 생각하면 고문학이 일어난 이래 문자의 연구가 중시되어져 점점 작은 문제가 논의되게 됐다고 여겨진다. 이 때의 경학은 주로 문자의 훈고 및 필법이 주요한 문제로 되고 대의(大義)에 관한 것은 없었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유학이 그 근본을 놓아두고 말절(末節)에 치중하게 되자, 그 결과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사람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노장(老莊)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렇게 해서 당시에 노장사상이 유학을 압도하고 위로 나오게 됐는데, 그 대표자로는 왕필(王弼)과 하안(何晏)을 들 수 있다. 왕필은 그 저술에 「노자주」(老子注) 2권과 「역주」(易注) 6권이 있다. 그의 「노자주」(老子注)는 장자의 사상으로써 노자를 해석한 것이고, 종래의 해석에서 진일보하고 있다. 그의 「역주」(易注)는 「비씨역」(費氏易)에 근거하여 노장의 철학을 빌어서 역을 설명한 것이고, 이 또한 이전에 없는 것이다. 다음에 하안(何晏)도 노장을 좋아하여 노자의 주(注)를 썼는데 나중에 왕필의 노자주를 봄에 이르러, 그 훌륭함에 감복하여 자신의 주(注)를 폐기했다고 이야기되고 있으므로 그 역시 왕필 정도의 사람일 것이다. 그에게 또 「논어집해」 2권의 저술이 있다. 「집해」는 그 이전의 논어의 주해를 모아서 부족한 점을 보충한 것이고 그 보충한 부분에는 노장사상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유서(儒書)를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후한 말부터 위초(魏初)에 걸친 고문학의 진전이 문자훈고에만 치우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그러한 반동으로 󰡔역󰡕과 󰡔논어󰡕에 의해서 유학의 정신을 천명해 보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마침내 노장사상을 빌어 와서 󰡔역󰡕․󰡔논어󰡕의 뜻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후 노장사상의 연구는 날로 번성하여 위(魏)에서 동진(東晉)에 이르는 사이에 무수한 노장주석서가 나왔다. 이와 같은 노장학의 전성은 속사(俗事)를 멀리 하고 청담(淸談)을 귀하게 여기는 일종의 시대사조를 형성했다.

2) 노장에서 불교로

노장학의 전성은 한편에 있어서 단지 청담아론(淸談雅論)을 취하여 마음의 희열만을 즐길려고 하는 일종의 시대사조를 이루었지만, 다른 한편에 있어서 새로 들어온 인도사상 즉 불교의 이해를 도왔다.

불교는 후한초에 중국에 전해지고, 얼마있지 않아 초왕영(楚王英)에게 신봉되어지고 후한말 환제의 대에 이르러 조정에 모셔졌다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정말로 중국인이 불교를 이해하게 된 것은 위진(魏晉) 때부터 일 것이다. 가령 후한에서 양(梁)에 이르기까지의 승려의 전기를 모은 혜교(慧皎)의 󰡔고승전󰡕을 펼쳐보면 후한에서 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는 단지 불경의 번역에 종사한 역경승(譯經僧)의 전기를 열거할 뿐이고 한사람의 의해승(義解僧)도 나오고 있지 않다. 이것은 아마도 위말(魏末) 이전에 불교는 아직 정말로 중국인에게 이해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고, 중국인이 스스로 나아가서 불교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것은 위말(魏末)의 주사행(朱士行)에서 비롯되고 있다.

주사행은 영천(潁川)의 사람으로 일찍부터 높은 이상을 품고 진속(塵俗)을 벗어나 있었는데, 나중에 출가하여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만 몰두하여 후한의 축불삭(竺佛朔)이 번역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애독하여 그 강설을 시도했는데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겨 마침내 원본을 찾기 위하여 서역에 가게 됐다. 그후 우전(于闐)에 들어가서 경전을 손에 놓어 제자들을 통해 중국으로 보내게 되지만, 그는 우전(于闐)에서 생을 마쳤다. 이 주사행이 보낸 경전이 바로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다. 그후 석도안(釋道安)이 이 반야사상의 선전에 힘을 쏟게 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고 나서 이 때에 이르기까지 대략 3백 수십년을 경과하고 이 사이에 많은 역경가의 노력에 의하여 무수한 경전이 번역되고 있는데 이들 경전만큼 학자의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 없다. 그리고 이들 반야부의 경전이 중요시되어진 까닭은 반야의 교리와 노장의 사상이 근사한 점이 있고, 노장학의 전성이 이러한 종류의 경전의 이해를 도왔기 때문이다.

반야부경전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諸法皆空’의 이치를 이야기한 것인데, 당시의 학자는 이 공(空) 한자를 해석함에 노장의 무(無)자로써 하고, 그것을 격의(格義)라고 불렀다. 격의라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외전(外典) 즉 노장(老莊)․󰡔주역󰡕(周易) 등의 책으로써 한다고 하는 의미이고, 도안(道安)경까지의 학자는 반야의 공을 설명하기 위해서 노장의 설에 의거한 것 같다. 대체적으로 정말로 반야의 교리가 이해된 것은 라습(羅什)이 중국에 와서 대승의 론, 예를 들면 󰡔中論󰡕, 󰡔十二門論󰡕, 󰡔百論󰡕 등이 번역되 나온 뒤의 일이지만, 라습 이전에도 여기에 근사한 설명이 베풀어지고 있다. 승조(僧肇)의 「不眞空論」이나 가상(嘉祥)의 󰡔中論疏󰡕에 의하면 라습이전에 반야의 공을 설명한 학설에 三家의 뜻이 있었다고 한다. 소위 三家의 뜻이란 본무의(本無義)․심무의(心無義)․즉색의(卽色義)의 세 가지이다.

첫째의 本無義는 축법심(竺法深)의 설이다. 本無義란, 가상의 󰡔中論疏󰡕에 의하면, 아마도 노자의 천하만물은 有에서 生하고, 有는 無에서 生한다(󰡔노자󰡕 40장)라는 사상에 의해서 반야의 空을 설명한 것으로, 이것에 의하면 반야경에 ‘諸法皆空’이라고 설명한 것은 제법, 즉 현상의 본체가 無라고 하는 의미가 된다.

둘째의 心無義는 축법온(竺法蘊)의 설이다. 법온(法蘊)의 心無義는, 반야경전에 ‘一切色法空’이라고 설명한 의미는 일체의 현상이 空無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나의 마음을 텅비게 하면 색상이 그친다고 하는 의미라고 해석한 듯하다. 이것도 역시 󰡔노자󰡕의 「왕필주」에 의거한 해석일 것이다.

셋째의 卽色義라는 것은 지둔(支遁)의 설이다. 지둔은 반야경에 ‘卽色是空’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色(만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만물은 실재하고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만물의 상(相)이 바로 그 본성이다라고 하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대개 일체의 제법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그 일시적인 相으로써 바로 제법의 실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이 일시적인 相에 집착하지 않고 현허(玄虛)의 경지에 놀아야만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 그의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이고, 같은 생각에서 󰡔장자󰡕를 해석한 것이 그의 「소요유편주」(消遙遊篇注)이다.

위의 三家의 뜻에 이어서 도안의 本無義가 나오고 있다. 도안의 本無義는 축법온의 本無와 똑같은 명칭으로 불리어지고 있지만, 그 생각은 상당히 다르다. 대개 도안은 대승경전에 일체의 諸法이 空 혹은 無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현상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고, 모든 현상은 인연 화합하여 생긴 것이어서, 이 인연 화합하여 생긴 만물의 相은 시시각각 변화하여 그치는 곳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만물의 본성이 아니고, 만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것이라고 하는 의미를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도안의 本無義는 지둔의 卽色義와 거의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가상의 󰡔中論疏󰡕에서는 도안의 本無와 지둔의 卽色은 이름은 달라도 내용은 같고, 나중에 나오는 라습 문하의 승조의 不眞空의 설과 같은 뜻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위에서 서술한 三家의 뜻과 도안의 本無義를 대조하여 고찰하면 축법온의 本無義로부터 心無義에, 心無義에서 卽色義 및 도안의 本無義로 나아감에 따라서 한층더 사상이 진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최초의 本無義는 노자의 철학에 의해서 반야의 空을 설명한 것으로 無를 諸法의 본체로 보고 있고, 다음의 心無義는 왕필의 󰡔노자주󰡕에 의해서 空을 단지 인간의 心을 텅비게 하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최후의 지둔과 도안은 空의 의미를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여, 인간이 인정하는 諸法의 相이 그 眞性이 아니라고 하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겨우 반야의 본뜻에 접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노장의 철학이 얼마나 반야의 이해에 공헌하고 있는가를 상상할 수 있음과 동시에, 노장의 사상과 반야의 사상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도 살필 수가 있다. 요컨대 노장의 無는 대개 본체론적으로 말한 無인데, 반야의 空 혹은 無는 인식론적으로 말한 것으로, 이것이 불교와 노장의 구분이다. 그런데 최초의 학자는 이 구분을 이해하지 않고 바로 노장으로써 불교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지둔․도안이 나옴에 이르러 겨우 여기에 생각이 미쳐서 불교의 정신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후에 라습이 중국에 와서 용수(龍樹)․제파(提婆)의 대승론이 번역됨에 이르러 점점 명료하게 의식됐다.

그럼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노장학 자체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위진이래 노장학이 전성기를 이루며 노장의 주석서가 무수히 나온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라습이 중국에 들어오고 난 후가 되면 불교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노장의 책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중에는 반야의 사상에 의해서 해석된 것도 있고 三論의 사상에 의해서 해석된 것도 있다. 이러한 것은 그 시대가 불교전성의 시대인 만큼 당연한 결과라고도 하겠다. 반야의 사상은 처음 위진 경에 있어서 노장 철학의 도움으로 겨우 사이비 이해가 부여되어져 있었는데, 동진(東晉) 경이 되면 이해가 진보하여 반야의 사상이 노장과 구별되야 할 점을 의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육조말(六朝末)이 되면 반대로 반야의 철학에 의해서 노장을 설명하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에 의해서 육조 때 노장 전성의 사상계가 점차 불교전성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3) 도교(道敎)

후한말에 천하를 시끄럽게 한 황건(黃巾)의 난이 있었는데, 곧 장각(長角)일파의 반란이다. 그 세략은 상당히 컸다고 한다. 장각(長角)의 난은 얼마있지 않아 조조에 의해서 평정되었는데, 거기에 이어서 장수(張脩)도 파군(巴郡)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후 얼마있지 않아 장로(張魯)라는 사람도 또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중 장각과 장수는 우길(于吉)이라는 사람이 동해의 곡양에서 발견한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라는 神書에 근거하여 일종의 종교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위문제(魏文帝)의 전략(典略)에 설명되어 있는데, 장각은 태평도(太平道)를 만들고, 장수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만들었다. 장로는 패국(沛國)사람으로 그 道는 조부 장릉(張陵)이 촉(蜀)의 학명산(鶴鳴山) 중에서 수업하여 깨달은 바로 그 아들 장형(張衡)이 그것을 전하여 장로에게 가르친 것인데, 「삼국지장로전」(三國志張魯傳)에 의하면 장로의 道도 역시 오두미도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장수와 같은 종교단체였음에 틀림없다.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주」(三國志注)에 의하면 장수는 바로 장로의 아버지 장향의 잘못이다라고 하는데, 혹 그럴런지도 모른다. 요컨대 장각․장수․장로의 道는 老子五千文을 외우고 思過符水에 의해서 병을 치료하는 일종의 종교단체로 이것이 곧 도교의 기원이다.

후한말에 三張의 道 이외에 여기에 유사한 이술(異術)이 여러 곳에서일어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로강(盧江)의 좌자(左慈)에서 갈현(葛玄), 정은(鄭隱), 갈홍(葛洪)으로 이어지는 일파가 있다. 갈홍은 󰡔포박자󰡕(抱朴子)의 작자로서 유명하다. 이 좌자에서 갈홍에 이르는 일파는 三張의 道와는 다른 道術을 주장하는데, 전자가 양생법을 중시하여 단약(丹藥)을 만드는 것을 주안점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해서, 후자는 기도를 중시하고 부주(符呪)를 존중하고 있다. 그런데 󰡔포박자󰡕 「하람편」에 실린 도서(道書)의 목록을 점검하면, 갈홍이 모은 도서(道書)는 대개 291部로 그것을 三類로 나누어, 제1類에는 도교의 교계서(敎誡書) 206部를 열거하고, 제2類에는 符 56部를, 제3類에는 단법(丹法)의 書 29部를 싣고 있고, 그 중에는 우길의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 170권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볼 때, 갈홍의 시기에는 이미 三張의 道와 좌자․갈현의 術이 종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포박자의 뒤 북위(北魏)에 구겸지(寇謙之)가 나와서 三張의 道를 개혁하여 도교를 확립했다.

그뒤 북제(北齊) 때 현도관목록(玄都觀目錄)이라고 칭하는 道書目錄이 나왔는데, 이 현도관목록에 의하면 도서(道書)의 현재 수가 이천사십권에 달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사실로부터 볼 때 진(晉)에서 북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서(道書)가 증가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현도관목록은 道書 이천사십권을 분류하여 三洞으로 나누고 있다고 하고 있는데, 소위 三洞이란, 동현(洞玄)․동진(洞眞)․동신(洞神)의 三部로 현의(玄嶷)의 󰡔견정론󰡕(甄正論)에 의하면 洞玄은 說理契眞의 書, 洞眞은 法體實相을 탐구하는 것, 洞神은 符禁章醮의 類를 실은 것이라고 한다. 또 북주(北周) 도안의 이교론(二敎論)에 의하면 洞玄部의 대표로서 상청경(上淸經)을, 동진부(洞眞部)의 대표로서 영보경(靈寶經)을, 동신부(洞神部)의 대표로서 삼황경(三皇經)을 들고 있는데, 상청경(上淸經)이 갈현에 의탁되고, 삼황경(三皇經)이 符禁章醮를 기록하여 三張의 道를 잇고 있는 점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동신부(洞神部)는 대개 삼장(三張)의 도교를 잇는 것, 洞玄部는 대개 갈현의 術을 조술하는 것이고, 또 洞玄部 中에는 道家관계의 諸子의 書까지도 포괄하고 있다고 하는 점으로부터, 洞玄․洞神의 二部에서 좌자갈현파와 三張의 派가 종합된 위에 노자․장자 등의 諸子, 즉 도가의 철학적 문헌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洞眞部의 저술은 비교적 새로운 문헌으로 이 중에는 불교의 대승경전 특히 법화․유마 등의 경전이 고쳐져서 편입되고 있는 것 같다.

이상의 사실에서 볼 때, 도교는 처음 장릉에서 장로에 이르는 符呪․기도의 俗信에서 일어나서, 다음에 갈현의 신선양생술을 받아들이고, 또 다음에 위진 당시 일세를 풍미했던 노장의 철학을 흡수하고 마지막으로 불교의 교리로 수식하여 완성된 종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발달은 후한말에서 육조말에 이르는 약 300년간에 성취된 것이다.

도교 발달의 역사에서 생각하면, 그 주장하는 바가 과연 노자에 관계있는가 어떤가가 의문이다. 그러나 이미 도교가 완성된 뒤에 있어서의 도교학자는, 그들이 노자를 조술하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노자의 姓이 李이고 당실(唐室)이 또한 李姓이기 때문에 당의 여러 임금은 노자로써 조선(祖先)으로 생각하여 도교를 존중하고 믿었다. 그래서 당태종은 노자로써 석씨(釋氏)보다 위에 위치지우고, 고종은 노자를 존경하여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고 추호(追號)하고, 현종은 스스로 노자의 주(注)를 써서 諸州의 도관(道觀)에 비(碑)를 세워서 이것을 새기게 했다. 또한 도장(道藏)은 불교의 대장(大藏)에 모방하여 편찬된 것으로 이것을 동진(洞眞)․동현(洞玄)․동신(洞神)의 三洞으로 나눈 것은 석장(釋藏)이 경률론(經律論)의 삼장(三藏)을 구별한 것에 모방한 것이다. 또 三洞이 각각 12부로 나누어 무릇 36부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도 불교에 12부경을 이야기하는 것에 본받은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당조(唐朝)에 이르러 이와 같이 도장(道藏)이 편찬되고 있는 것은 도교의 지위가 유불 이교(二敎)에 팽팽하게 대립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도기일원론(道器一元論)과 도기이원론(道器二元論)의 차이점을 설명하시오.

정호(호: 明道)는 이천의 형으로서 ‘도기일원’(道器一元)을 주장하고, 아우인 정이(호: 伊川)는 ‘도기이원’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이후 성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황종희(黃宗羲)는 󰡔송원학안󰡕(宋元學案)의 「명도학안」(明道學案)에서 “명도의 학풍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골몰하여 후학들이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육왕심학 및 선학으로 흘렀으나, 이천의 학문은 주자로 계승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풍우란(馮友蘭)은 이정사상(二程思想)의 특징과 이후의 이정사상의 전개 양상을 “명도의 천리 혹은 리는 구체적인 사물의 자연적인 추세로, 사물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의 심학파(心學派)는 모두 리가 사물을 떠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명도를 심학의 선구로 삼고 이천을 리학의 선구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풍우란의 견해는 황종희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황종희와 마찬가지로 풍우란 역시 ‘정주 성리학’으로 지칭되는 주자학에서 이정(二程)을 함께 지칭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이정의 사상은 구별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이천이 이후의 리학(理學)의 선구가 된다는 사실은 정확한 것이다.

한편 후외로(候外盧)는 “이정의 정치 사상 및 그들의 철학 사상은 서로 유사하며,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당시 그들의 제자가 스승의 말을 기록함에 있어 결코 분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이정 형제의 성격이 형 명도는 온화하고 동생 이천은 근엄하다 하여 서로 다르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나누지 아니하였다. 근래 어떤 사람은 명도는 육왕일파의 연원이 되고 이천은 주희 일파의 연원을 열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의론은 결코 사실과 부합되는 것이 아니다.”라 하여 명도가 육왕일파의 연원이 되고 이천이 주자학파의 연원이 된다는 풍우란 및 황종희의 견해를 기본적으로 부정하고 이정 양인의 사상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후외로의 견해는 명백한 오류이다. 당시 이정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기록할 때는 기본적으로 양인의 학설을 구별하였다. 󰡔이정유서󰡕(二程遺書) 스물 다섯권 가운데서 1권에서 10권까지는 양인의 설을 함께 싣고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누구의 말인가를 밝혀두고 있다. 11권에서 14권까지는 명도는 어록을, 15권에서 25권까지는 이천의 어록을 나누어서 싣고 있다.

주자 역시 이정(二程)을 구분하였다. 특히 󰡔근사록󰡕(近思錄)을 편집하면서 ‘정자왈’이라고만 하지 않고 이정 가운데 누구의 말인가를 일일이 명시해 놓고 있다. 뿐만아니라 문인과의 대화에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명도와 이천을 구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자의 태도는 이정 사상의 차이점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의 사상을 구별해야만 하는 것은 그들 사상의 논리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명도는 도가 곧 기이고, 기가 곧 도라고 하는 도기 일원관(道器一元觀)에 입각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 하지만, 이천은 기 운동의 내재 원리의 원인, 즉 소이(所以 : 까닭 : 원인)의 소이를 세계의 궁극적 존재근거로 설정하고, 이것을 도 혹은 리라고 하는 도기이원의 입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리와 기 가운데서 더 본질적인 것은 리가 되며, 이는 리의 일차성에 대한 긍정으로서 명도의 일원적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인식론, 심성론, 수양론 뿐만 아니라 철학 체계 전반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전개하게 하였다. 나아가 이후 성리학의 전개 과정에서도 명도의 철학은 명대의 나흠순(羅欽順)이나 조선의 율곡과 같은 내재관적 리기철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반면에 이천은 주자 및 퇴계의 주리론의 선구가 되었다. 따라서 주자학을 연구함에 있어 양인의 구별 없이 자의적으로 이정의 논설을 인용하면 오류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성리학 발전사에도 흔히 보여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그러한 오류가 종종 나타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주자학의 객관적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정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도 철학의 특징은 “형이상을 도(道)라 하고 형이하를 기(器)라 한다. 그러나 표현은 이렇게 하지만 도 역시 기이고 기 역시 도이다.”라고 하는 ‘즉도즉기’(卽道卽氣)의 ‘상즉논리’에 있다. 따라서 명도 철학에는 세계의 바깥에서 세계를 규제하는 어떠한 초월적인 원인이나 힘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즉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 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도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며, 이러한 도를 계승한 것이 선(善)이다. 이처럼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생명 현상 그 자체를 ‘道’라 하여, 도는 언제나 세계의 내오에 세계의 본질로 존재하며, 이것은 또한 인(仁)이며 생생의 원리로서 도덕적으로는 선이 된다고 했다. 이는 생지위성(生之謂性)에 대한 긍정으로서 고자(告子)의 인성관에 근접하는 것이다. 또 세계는 허망한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의 통일체로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이다.

인식의 문제에서도 명도는 “배우는 자는 먼저 인(仁)을 알아야 한다. 인이라는 것은 혼연(渾然)하여 만물과 더불어 한몸이다. 이러한 이치를 깨달아 성(誠)과 경(敬)으로 그것을 보존할 따름이다. 애써 방검(防檢)하거나 궁색(窮索)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명도의 인식 방법은 이천 및 주자의 이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인식 방법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천과 주자는 리와 기를 분리하며,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를 거친 다음에 천리를 활연관통(豁然貫通)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명도는 이러한 분개(分開)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세계는 그대로 하나의 살아있는 세계이며, 주․객(主․客)이니 리․기(理․氣) 등으로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명도의 인식론은 격물궁리의 방법을 통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궁리․진성․지어명(窮理․盡性․至於命)의 세 가지 일은 동시에 이루어짐으로, 원래 단계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명도의 주장은 이천과 주자의 격물궁리를 통한 천리의 체득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이처럼 명도에서는 인식 이론 역시 도기일체관(道器一體觀)에 근거, 이천이나 주자에서처럼 격물과 궁리의 단계를 통하여 진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외양망(內外兩忘)을 통한 직관에 의해서 천리를 체득하고자 하는 특징을 보인다. 따라서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먼저 인을 알아야 한다”(學者須先識仁)고 했지만, 그러나 어떻게 인을 이해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명도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 도기일원에 있다고 한다면 이천은 분명한 도기이원에 입각해서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했다.

이천은 “한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하지만 도가 바로 음양인 것은 아니다. 한 번 음이 되게 하고 한 번 양이 되게 하는 소이(所以)가 도이다. 기의 운동(一闔一闢)은 변(變)일 뿐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이천의 논리 구조는 명도가 일음일양의 변화 발전과정을 도라하여 도를 기 운동의 내재적 자기 법칙으로 파악하고, 음양을 떠나서는 도가 있을 수 없다고 한 논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천은 도가 곧 음양이 아니라 능히 음이 되게 하고 양이 되게 하는 까닭을 도라고 했던 것이다. 즉 기 운동의 내재 법칙이 아니라 기 운동의 내재 법칙의 가능 근거, 다시말해서 기 운동의 소이의 소이가 도인 것이다. 따라서 명도가 도라고 하였던 일음일양의 전개 과정을 이천은 다만 ‘변’(如一闔一闢, 謂之變)이라고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천은 장횡거의 태허(太虛)에 대해서는 ‘리만이 가장 완전한 실재이기 때문에 태허같은 존재는 없다’하고 태허를 리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리는 자신은 움직이지 아니하면서 자신 아래에 종속해 있는 모든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의 원동자라고 했다.(莫之爲而爲, 莫之致而至)

인성의 문제에서도 이천은 명도와 뚜렷이 구별된다. 명도에서의 인성론의 기본 입장은 생지위성(生之謂性)이다. 따라서 즉성즉기(性卽氣 氣卽性)가 된다. 그러므로 선(善) 역시 성(性)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을 성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도의 사상은 성선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맹자뿐만 아니라, 이천 및 주자, 그리고 횡거와도 다르다.

이천은 ‘생지위성’(生之謂性)과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하나로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여 생지위성과 천명지위성은 “다같은 성자(性字)이지만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생지위성의 성은 드러난 현상에서 말하는 성이고 천명지위성은 성의 리를 말하는 것이다.... 성의 리로서의 천명지위성은 선하지 않음이 없다.”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心) 역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라는 대립되는 양항의 구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욕을 제거함으로써 천리가 회복된다고 하여 “인심은 사욕이므로 위태하고 도심은 천리이므로 정미하다. 사욕을 없애면 천리가 밝아진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입장은 ‘리일분수관’에 입각한 것으로, 이는 인식론에서는 격물치지를 통한 천리 회복의 가능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천리가 내재되어 있고, 이러한 필연 법칙으로서의 천리가 인간의 본질이므로 성선의 필연성이 확보된다. 그러므로 이천은 현실적인 인간 존재의 불선을 재(才)에서 찾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체계에 입각해 본다면, ‘생지위성’(生之謂性)의 성은 ‘재’에 불과하다. 또 그의 ‘리일분수관’은 그의 인식 문제에도 관철된다.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하는 정주 성리학의 인식방법의 특징은 인식의 문제가 수양의 문제와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격물’은 곧 대상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卽物窮理)하는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백지’인 인식 주관으로서의 심(心)에 경험적 사실을 써넣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객관 세계의 원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유추(類推)함으로써 세계와 인간의 존재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격물궁리는 객관 세계의 법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아니라, 윤리의 본성을 깨닫고자 하려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주관적 심 혹은 성의 궁격(窮格)이며 윤리적 천리(天理)를 궁격하여 완전한 인간, 즉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격물궁리의 과정은 이미 단순한 인식의 과정이 아니라 수양의 과정이며(‘格物亦須積累涵養’ 󰡔遺書󰡕卷15), 이렇게 격물궁리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천하의 이치에 통달(脫然貫通)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인식 방법은 경험과 직관의 종합으로서 불교의 점수(漸修)를 통한 돈오(頓悟)와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즉 점수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돈오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천의 인식 방법은 명도의 점수의 측면이 배제된 직관적․돈오적인 인식론과는 궁극적으로 다르다.

유학의 목적은 선을 택해서 실천(擇善而固執之)하는 데 있다. 격물궁리는 ‘택선’의 근거를 찾는 것이다. 즉 당위 법칙의 근거로서의 천명(天命)을 이해해야만 도덕적인 인간 행위의 판단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천의 지행론(知行論)은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입장에 서있다. 즉 행위의 기준으로서의 당위와 근거를 알아야만 행위가 가능해 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여, “인식이 깊어지면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르게 된다. 천리를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옳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은 것은 리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이러한 이천의 인식과 실천에 관한 입장은 주자로 계승된다.

앞에서 이미 정주 성리학의 근본 특징은 인식의 방법과 수양의 방법이 통합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인식의 주체는 심(心)이다. 심이 바르지 않으면 천리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이천은 “배우는 자는 마음이 어지러워짐을 근심하면서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지 못하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병폐이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마음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사로운 마음을 제거하여 성(誠)을 보존하는 경(敬)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천은 과욕(寡慾)을 주장(致知在於所養, 養知莫過於寡欲. 󰡔外書󰡕, 卷2 )한다. 이러한 이천의 과욕설은 렴계의 무욕에 대한 비판이다.

렴계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순수하게 해야한다 하고 그 방법을 무욕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과욕만 가지고는 안되고 무욕해야 한다하고, 또 정(靜)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노장 및 불교와의 연관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신유학은 노장과 불학의 안티테제로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천은 유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정(靜)만을 말하게 되면 곧바로 석씨(佛家)의 설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정(靜)자를 써야 한다.”라 하고 렴계의 주정(主靜)과 무욕(無欲)을 경(敬)으로 통합시켰다. 주자 역시 무(無)를 말하였지만(今且得寡, 以至於無, 󰡔語類』卷61․71條), 이것이 노장이나 불교의 설과는 다르다는 점을 주장했다. (周子之說, 只是無欲故靜, 其意大抵以靜爲主) 이러한 정주의 노력은 유학의 순수성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긴 해도 유학이 여타의 사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정의 사상은 그 근본 구조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도기관’에서 찾아진다. 즉 명도의 도기상즉의 일원적 세계관은 인성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인식의 문제에서도 이천의 이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그것과는 명백한 차이를 보여준다. 명도는 기 운동의 과정 자체가 도였고 기를 떠나서 기의 질서 정연한 운동을 가능하게 해 주는 어떠한 존재도 설정하지 아니하였다. 반면에 이천은 일음일양하는 기 운동의 내재적 ‘소이’(所以)의 ‘소이’를 도라고 하였다. 따라서 명도에서의 도는 이천에서는 변(變)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인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명도는 생지위성에 입각해서 ‘기즉성·성즉기’의 논리를 전개함으로, 선뿐만 아니라 악의 근거도 성(性)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천의 이원적 세계관에서는 명도의 즉성즉기의 생지위성은 다만 기질의 성일 따름이고, 성 자체의 본질은 순수한 천리로서 무불선한 것이 될 수밖에다. 따라서 악의 근거는 일종의 가능 개념인 재(才)에서 찾게 되었다. 이러한 이천의 인성론은 횡거의 ‘천지지성’과 ‘기질지성’의 이분법적 인성론에서 영향받은 것으로서 주자의 인성론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울러 이천은 횡거의 󰡔서명󰡕에 나타난 리일분수사상에 입각해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시킨다. 즉 리는 리일의 리와 분수의 리라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긍정하였다. 따라서 개별물이 모두 하나의 리를 갖추고 있으므로 개별물의 존재 원리를 이해함으로써 리일의 리인 천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리는 자연의 필연법칙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서는 마땅히 그러해야할 당위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인성의 선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사상의 차이는 이후 성리학의 전개 양상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한다. 풍우란 및 󰡔송원학안󰡕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천은 이후 정통 주자학의 선구가 된다. 그러나 명도의 사상은 이후 리기혼륜(理氣渾淪) 혹은 리기일물설(理氣一物說)의 선구가 된다. 즉 명대의 나흠순은 주자학의 수정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의 리기일물설(理氣一物)의 근거는 명도의 도기상즉의 일원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도의 학문이 이후 심학의 전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심학은 오히려 불학과 접근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명도의 도기일원관은 리기일물설의 선구가 된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것이다.

이천의 이원론적 경향은 횡거의 태허에 관한 견해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이천은 태허의 허를 리로 파악하여 횡거의 ‘허가 곧 기’라는 설을 재해석하였다. 따라서 이천에서의 태허는 음과 양이 나뉘어 지기 이전의 순수한 기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리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천의 입장은 조선의 퇴계로 계승된다. 퇴계는 장횡거와 소강절의 사상을 절충, 자신의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확립한 서화담의 기철학에 대해서 리를 기로 삼은 잘못을 범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천이나 퇴계의 입장은 횡거류의 기철학이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긍정한 바탕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말해서 태허가 규정을 받아들일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미 자신은 무규정적 규정자로서의 리에 다름없다는 말이다.

율곡에서도 횡거나 화담의 기철학의 이중 구조에 대한 이해는 퇴계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는 리의 일차성을 부정하고 주기설(主氣說)을 주장한다. 따라서 개별의 기를 초월해 있는 태허를 설정하는 초월관적 입장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태허에서 음과 양이 나온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퇴계의 주리설 뿐만 아니라 화담의 초월관적 기철학 역시 부정했다.

 

6. 주자(朱子)의 주리론(主理論)의 특징을 설명하시오.

주자 리기설의 특징은 렴계의 󰡔태극도󰡕의 ‘무극이태극’권을 이천의 입장을 가지고 해석하는 데서 찾아진다. 그러므로 주자에서의 리는 무극이태극으로서의 리와 음양양의권에 내재한 중태극으로서의 분수의 리라는 이중의 구조를 가질 것이라는 점을 예상 할 수 있다.

현상 세계는 리와 기의 결합으로 이루어 진다. 따라서 둘 가운데서 어느 한 쪽을 결한다면 리와 기는 모두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주자는 렴계의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합(妙合)하여 응한다.”라는 말에서 진을 리, 정을 기로 이해한다. 그리고 “리와 기가 결합한 까닭으로 형체를 가진 존재자들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현상 세계에서는 리 없는 기 없고 기 없는 리도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기는 작용하는 자이지만 리는 기처럼 스스로 운동하지 않는다. 즉 “기는 운동한다. 그러나 리는 정의(情意)․계탁(計度)․조작(操作)이 없다. 다만 기가 모이는 곳, 바로 그 가운데 리는 존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리는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둘은 그 존재 방식을 달리한다. 이점에 대해서 주자는 “천지간에는 리가 없으면 기가 없다. 리는 형이상의 원리로서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본이 된다. 기는 형이하의 그릇으로서 만물이 생겨나게 되는 도구가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남에 반드시 이 리를 품부 받은 연후에 자신의 본성이 있게 된다. 성(性)과 형(形)이 비록 연장을 가진 몸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도(道)와 기(器)의 사이는 그 차이가 분명하여 어지럽지 않다”라 하였다. 즉 현상 세계에서는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다. 그러나 리는 형이상의 법칙으로서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원리이며, 또 개별자 속에서는 개별자의 각각의 특수성을 유지시켜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형이상의 원리로서의 리는 형이하의 존재인 연장을 가진 기에 내재하게 되는데, 이 경우 리는 개별적 사물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가 리에 의해서 규정되어질 경우에만 다양한 사물의 세계가 전개될 수 있고, 또 개별물은 자신의 본성으로서의 리를 내재하고 있음으로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와 기는 현실적으로는 항상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리기의 구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도기의 분(分)은 분명하다. 주자는 “이른바 리와 기는 분명히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이다. 다만 사물에서는 둘이 서로 섞여 있어서 나눌 수 없이 각각 한 곳에 있다. 그러나 둘이 각각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리의 측면에서 보면 비록 사물이 있지 아니하였으나 사물의 이치는 이미 있었을 것이니 역시 그 이치가 있었을 따름이고 사물은 있지 아니하였다. 무릇 이와 같은 곳을 반드시 분명하게 알고, 또 처음과 끝을 겸해야 비로소 잘못이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처럼 리와 기는 결단코 두 가지 존재(決是二物)로서 현상의 세계에서는 동시에 함께 있어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존재 방식은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사물이 있기 이전에 이미 사물이 있게 한 리가 먼저 있다는, 즉 리선재(理先在)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주자는 리와 기의 관계가 ‘재물상간’(在物上看)의 경우와 ‘재리상간’(在理上看)의 경우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리와 기의 관계에 대한 주자 자신의 견해를 명확히 표명한 것으로서, 주자철학 전 체계를 통해서 이러한 자신의 관점은 철저하게 관철된다.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 리가 먼저인지 기가 먼저인지 선후로 나룰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자답: 좋은 질문이다. 리가 먼저라 해서 오늘 리가 있고 내일 기가 있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선후는 있으니, 예를 든다면 만약 세상이 모두 소멸되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리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에서 ‘리선’(理先)의 ‘선’(先)이 시간적인 선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진다. 리선의 선은 개별적 사물 세계의 존재 근거로서 리가 기보다 존재론적으로 선재한다고 하는, 즉 존재론적인 의미에서의 선이다. 이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주자의 주리론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즉 주자에서의 리-이 경우 ‘통체태극’으로서의 리-는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의 궁극적 존재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물 속에서는 리와 기가 항상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가 흩어지면 개별적 사물도 사라진다. 개물(個物)이 사라진다는 것은 개물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시켜 주던 분수리로서의 내재리도 역시 개물과 함께 소멸됨을 의미한다. 즉 “기는 역시 흩어지며, 흩어지면 곧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주자의 주리론에서 보이는 기에 대한 관점의 근본적 특징의 일단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주기론자들은 기는 무궁(無窮)하다고 본다. 즉 일기장존(一氣長存)이다. 이는 명대의 나정암, 그리고 조선의 이율곡과 기고봉의 리기관에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리와 기는 원래 서로 나뉘어 진 때가 없었다 하고, 기가 무궁하기 때문에 리도 무궁하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리는 기의 자기 질서, 즉 조리(條理)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그러나 주리론에서는 일기장존을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일기장존을 인정한다면, 이는 리와 기가 시원에서부터 항상 함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리가 일차적․근원적인 존재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주기론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주자에서는 이미 흩어진 기는 ‘무’(無)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기는 리에 의해서 그 존재 근거가 설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기는 리의 생멸 원리에 따라서 생멸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생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주자의 주리적 입장에서의 리와 기의 관계는 “이 리가 있고 나서야 기가 생겨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비질료적인 기에서 질료적인 리가 인과 생출(因果生出)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 인과 생출된다면 리는 이미 질료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는 흩어져 버리면 없어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주자에서 리와 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리는 기를 화생(化生)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기는 이 리라고 하는 기의 화생의 원리에 따라서 생멸을 거듭한다. 따라서 주자적 주리론의 입장에서는 기에 대한 리의 일차성이 인정되지 않을 수 없고, 기는 리에 의존하는 이차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즉 리는 기보다 ‘선’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가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을 지라도 무한한 존재로서의 리가 있는 한 세계의 계속성은 확보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궁극적 존재 근거로서의 리의 독립적 실재성이 인정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논리이다. 따라서 주자에서의 리기 관계는 ‘리선’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때의 ‘선’은 시간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는 리에 의존하는 존재이므로 리의 일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의 선이다. 주자의 용어를 빌려서 본다면 “그 근원에까지 미루어 올라가면”(推其向上根源), 혹은 “위로 미루어 올라가면”(推上去) 리는 기보다 일차적인 존재, 혹은 ‘리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7. 양명학(陽明學)을 양지학(良知學)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주자의 ‘격물궁리’라는 주지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대는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상산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그리고 명대에 오게 되면 진백사(白沙 陳獻章)와 누일재(一齋 婁諒) 같은 이가 반 주자학적인 노선에 서서 육상산의 학문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이들이 양명학의 선구자이다.

왕양명(陽明 王守仁, 1472~1528)은 누일재를 스승으로 주자학을 배우기도 하고, 또 도교나 불교 및 문장에도 마음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인종 때 환관 유근이 전횡을 일삼자 이를 탄핵함으로써 유근의 미움을 받아 중국 서남의 불모지인 귀주성 용장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생활의 고통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심즉리’를 깨달았다. 이 때가 양명 38세 되던 해로서 이를 ‘용장의 일오’라 하며, 이는 양명철학의 아르키메디안 포인트가 된다.

주자는 심을 리와 기가 결합된 존재로 파악한다. 또 성(性)이나 정(情)도 심에 의존해 있으므로, 심을 인심과 도심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성이나 정도 본연성과 기질성, 사단과 칠정으로 나눌 수 있다하고 기질을 극복하고 본연을 회복하는 것이 학문의 목적이라 했다. 이를 위해서 주관적으로는 경(敬)공부가 필요하고 객관적으로는 격물치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양명은 이러한 이원론을 부정한다.

첫째, 양명은 理는 기의 조리(條理)로 본다. 따라서 리와 기는 일체이고, 즉 리즉기(理卽氣)가 된다. 이런 점에서 심학의 리기관은 명도에 의해서 확립된 도기상즉관 및 이를 계승한 나흠순의 리기일물설과 그 논리구조가 일치한다.

둘째, 리과 기가 동일한 것이라면 주자처럼 심과 성 및 정을 리적인 측면과 기적인 측면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하나일 뿐이다.

셋째, 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주자처럼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필요없게 된다. 따라서 양명에서는 󰡔대학󰡕의 격물치지가 주자가 말하는 것처럼 객관 대상의 리를 궁구함으로써 치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써 마음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즉 ‘격’(格)은 ‘즉물’(卽物: 대상에 나아감)이 아니라 마음을 ‘정지’(正之: 바로잡음)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명의 관점은 상산의 ‘육경은 모두 내 마음의 주석’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상산과 양명을 합해서 육왕심학이라 하는 소이는 여기에 있다.

넷째, 주자학에서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고 나서야 행위가 가능하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한다. 그러나 양명은 지행의 분리에 반대한다. 객관 대상을 통해 얻어진 단순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참된 지식은 이미 행위와 무매개적으로 매개되어짐으로써 지와 행은 일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즉 ‘지행합일’을 주장한다.

양명은 만년에 이르러 ‘양지’(良知)를 강조하고 ‘치양지’(致良知)를 주장한다. 양지는 󰡔맹자󰡕에 보이는 용어로, 인간이 생득적으로 갖추고 있는 선한 도덕심을 말한다. 양명은 양지에 대한 깨달음 이후 스스로 ‘자신이 올바르다는 것을 마음대로 행하여 조금도 숨김이 없었다. 소위 미친자의 심경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하고 있다. 이는 양지가 이미 인간에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고, 다른 가공의 공정을 거치지 않아도 완성되어 있는 것, 즉 현성(現成)한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사욕에 은폐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치양지’하는 공부가 필요했다.

이러한 양명의 입장은 현실적인 인간의 마음이 그대로 절대적인 선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욕의 근거에 대해서 양명은 침묵한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면 사욕의 극복을 통한 본연의 회복이라는 주자적 입장의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욕을 인정한 이상 이것을 제거하는 수양의 방법이 필요한 것이고, 이를 위해서 양명은 문인들에게 ‘정좌’(靜坐)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문인 가운데는 정(靜)만을 중시하여 현실적인 실천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양명은 사상마련(事上磨鍊)을 역설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양지설은 명도의 ‘만물일체의 인’과 결합된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 평등성을 주장한 말이다. 또 횡거에게도 역시 ‘민오동포’(民吾同胞)라는 인간적 평등성에 대한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송유들에게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인간적 평등성은 그들의 ‘분’(分)의 논리에 의해서 차단되었다.

양명의 양지는 성인이나 천민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지는 만인의 보편적 평등성을 매개해줄 주 있다. 이러한 양명학의 체계는 계급적 대립의 해소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보편적 평등성에 대한 긍정은 공맹이래의 유가사상 속에서도 찾아볼 수는 있다. 다만 그것이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과정에서 본래적인 모습이 현실적 상황 속에서 기능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쨌건 양명에서는 모든 사람이 양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배자이든 피지배자이든, 사대부이든 천민이든 인간적인 차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어느날 제자인 왕심재가 외출하고 돌아오자 양명이 무엇을 보고 왔느냐고 물었다. 심재는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성인인 것을 보고 왔습니다(滿街聖人)”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서 양명은 “상대방도 그대가 성인인 것을 보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만가성인설’은 양명 좌파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대로 실천되었고, 이러한 만인의 평등성에 대한 긍정으로 말미암아 양명의 제자 가운데는 위의 왕심재가 염전 노동자였던 것을 위시하여 상인이나 농민 천민들이 많았다.

양명 이후 양명학은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를 우파라고 부른다면 급진파는 좌파가 될 것이다. 우파는 이후 주자적 경향으로 경도되므로 양명학의 극단화를 추구한 좌파에 대해서만 살펴본다.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왕용계(王龍溪, 1498~1583)가 있다. 그는 스승의 설에 따라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양지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이 양지는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현성양지(現成良知)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 속의 양지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되지 이밖에 어떠한 공부도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용계의 양지는 후에 유종주(劉宗周)가 지적하였던 것처럼 선종의 ‘불성’(佛性) 그대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계를 통해서 양명의 선종적인 경향이 극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용계의 사상은 태주학파에게 영향을 준다.

태주학파의 시조이자 ‘만가성인’을 주장한 왕심재(1483~1540)는 “도는 노유귀천에 관계없이 배우고자 하면 전한다”하였다. 이는 현실적 계급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파괴행위이다. 따라서 심재의 강론에는 수천의 농공상인들이 몰려 들었고, 특히 농한기에는 장소를 이동하면서 강론하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이는 유학의 강론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 그의 강론이 이미 종교 집회로서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재의 학문은 서파석에서 안산농, 그리고 하심은과 나근계로 이어진다. 하심은(何心隱, 1517~1579)은 북송 횡거의 민포물여(民胞物與)에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면 살신해서 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간의 평등성을 주장했다. 또 북송 주렴계의 무욕에 대해서도 무욕 역시 욕이라 하여 어떠한 경우에서도 인간의 욕망은 부정되어질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그 욕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어야 함은 만민평등의 사상에 비춰 볼 때 당연한 것이다.

나근계(羅近溪, 1515~1588)는 양지를 ‘갓난 아기의 마음’에 결부시킨다. 이러한 근계의 입장은 이탁오의 동심(童心)설을 준비한 것이다.

이탁오(李卓吾, 1527~1602)는 양명좌파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더욱 철저화했다. 양명은 양지설을 주장하면서 ‘치양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양명 좌파의 학문적 경향은 ‘현성양지’를 극단화하여 양지에 수양이나 공부의 가공을 가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좌파의 입장을 철저화한 것이 이탁오의 ‘동심’설이다.

탁오는 동심은 진심(眞心)이라 하고, 이 동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 했다. 인간의 본래 마음은 모두 동심이지만 눈과 귀를 통해서 견문의 지식이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이 동심이 없어져버린다. 육경의 말도 동심의 말인 것만은 아니라 했다. 그리고 문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동심의 발로라면 경전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떤 종류의 글도 지고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우열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 󰡔서상기󰡕나 󰡔수호전󰡕 같은 명대의 소설을 󰡔시경󰡕에 견주기까지도 하였다.

이러한 탁오의 사상은 이미 유가적인 범주에서 멀리 벗어나서 노장의 자연주의적 입장에 접근해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8.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의 이기관(理氣觀)의 차이를 설명하시오.

염계의 ‘무극이태극’을 어떠한 관점에서 해석 하는냐에 따라 이기관 및 인간관에 대한 입장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권역은 초월의 이로 보면 주리설이 된다. 따라서 주리설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은 기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부정되어야 할 존재이고, 이런 점에서 엄숙한 금욕주의의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천이나 주자 및 퇴계가 이들이다.

한편 이 권역을 명목상의 존재로 보고 음양양의의 기권만이 실재한다고 보면 이는 기의 자기 질서라는 관점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현실적 욕구에 대해서도 부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욕구가 정당성을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명도에서 시작해서 나정암이나 율곡에게로 연결된다.

또 횡거나 화담은 이 권역을 태허라 하고, 개별기의 존재 근거가 되는 존재로 이해했다. 이들의 입장은 횡거는 주자에 의해서, 화담은 퇴계에 의해서 태허의 허를 이라고 보았으면 잘못이 없을 것이라 한 데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전개한 것이 분명하다. 현대 학자들은 이들을 초월관적 기철학자들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들은 인간의 욕망을 주리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정한다.

왕정상이나 왕부지 같은 사람들은 태허의 권역을 명목상의 존재에 불과하다 하고 기를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이며 기의 질서의 근거를기의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한 유물론적 경향을 나타낸다.

이제 청대에 오게 되면 중국은 다시 만주족에게 지배된다. 청대의 학문은 이전의 이천여 년의 중국철학을 역으로 소급하여 전개한 것이라한 양계초의 지적처럼, 청초의 양명학에 대한 수정과 비판은 명나라 심학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지고 왔고, 중국민족의 국가 멸망이라는 엄청난 현실에서 양명학적 심학의 과오를 자각한 학자들은 경세치용(經世致用) 혹은 실용학을 제창하고, 나아가 송학으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되었으며, 다시 후한고문경학의 연구로 소급하여 고증학(漢學)으로 발전했으나, 후한학 즉 고증학의 한계가 자가됨으로써 다시 전한금문경학으로 소급하여 공양학이 발생했고, 다시 전한이후 유학의 독존에 대한 반성은 周奏諸子學의 연구로 소급했으나 만주왕조의 쇠퇴와 함께 제자학에 대한 한계를 자각하자 공자학연구로 소급되어 강유위의 이학이 되살아나는 현상을 빚기도 하면서 서양의 충격과 이에 바탕한 갈등 속에서 다양한 새로운 사사의 가능성들이 시도된다.

 

9. 송명학(宋明學)과 청학(淸學)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명(明)대 사회는 만력(萬曆, 1573~1620) 연간부터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토지의 집중, 중소지주층의 몰락, 농민의 빈곤화는 구조적인 문제가 되었고, 대외군사비의 증대를 주된 원인으로 해서 증세가 계속되자 납세능력이 없는 농민들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한편 조정에서는 환관들까지도 가세한 관료들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혼란스런 중앙정부는 더욱 사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급기야 숭정(崇禎, 1628~1644) 연간에는 농민폭동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고, ‘유적’(流賊)이라는 대규모적인 폭동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이것이 곧 명나라의 운명을 마감하게 했다.

이러한 국가의 위난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학문은 세상에 실제적으로 역할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동림학파(東林學派)이다. 이러한 ‘경세(經世)의 학’을 주창한 일단의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주자학을 신봉했고, 정치적으로는 환관세력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군주에게 충성하고, 환관과 권문세족의 횡포를 꺾어 조정과 민생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은 ‘관료=사대부’라는 가장 정통적인 입장에 선 집단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경세의 학문을 주장하고 절의(節義)를 숭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주장한 경세의 학문도 역시 정치나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은 아니었으며, 또한 이후 크게 발전․성장하지도 못했다. 다만 이들 학문의 의의는, 다음 세대의 새로운 학문의 주역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 고염무(顧炎武, 1613~1682),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에게로 계승되어 그들 학문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는 비록 유적들의 손에 멸망되었지만, 그 때까지 명나라와 대립․전투를 계속하고 있던 만주족이 즉시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은 결국 청조(淸朝)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한족(漢族)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수모였고, 따라서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군사활동이 일어났다. 또한 청조가 만주풍속(특히 변발)을 강요한 것은 한족 지식인들로 하여금 맹렬한 반감을 고조시켰고, 이러한 저항에 대한 잔학한 탄압은 다시금 반감을 고조시켰다. 그러나 결국 청조의 강력한 무력 앞에 전 중국은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동안 광범위하고 강렬한 민족사상이 폭발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명말청초’부터 형성된 이러한 ‘경세치용의 의식’과 ‘민족사상’은 바로 청대학문의 특징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다.

송명시대의 학문과 청대학문의 특징을 한마디로 개괄하면 이학(理學)과 기학(氣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최대공헌은 도덕적 이성의 자각과 그 확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수립하고자 한 학문의 중심이 대체로 순수사유․순수이론, 즉 추상적인 본체론쪽으로 심하게 치우쳤기 때문에 이로 인한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이(理)에 너무 치중하여 사(事)를 경시한다”거나 “심(心)을 강조하고 물(物)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송명시대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바로 다른 민족(만주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문화(서구과학문명)의 도전 앞에 무기력한 존재가 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중요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송명유학자들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한 이분법적 시각, 즉 ‘이는 기에 선행한다’거나 ‘이가 기를 낳는다’고 보는 주종(主從)관계, 그리고 ‘천명의 성’(天命之性)은 순수하여 선하고 ‘기질의 성’(氣質之性)은 잡박(雜駁)하여 악하다고 하는 ‘성정이원’(性情二元)의 문제는 당시 학자들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서 ‘욕망을 제어하고 천리를 회복해야 한다’(存天理, 去人慾)는 수양방법을 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하분절(上下分截), 중도경기(重道輕器: 정신본체를 중시하고 물질현상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의 학문태도는 송명유학자들의 가치관에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즉 송명이학은 점점 관념적인 ‘하늘의 이치’(天理)만을 중시하고 실제적인 ‘인간의 일들’(人事)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실천행위 홀대의 사조로 굳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경향성은 급기야 독선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뼈아픈 비판을 받게 된다.

송명이학의 극단에 이르러, 중국철학이 줄기차게 지켜오던 현실 중심의 전통이 무너지고 또한 형이상과 형이하의 연결이 끊어지는, 즉 형이하의 세계를 단절시킨 관념철학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대진(戴震, 1723~1777) 같은 학자는 “송나라 유학자들은 인(仁)․의(義)․예(禮)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 이(理)라고 보며, 그리고 이는 하늘이 갖고 있는 덕을 사람이 태어나면서 품부해 온 ‘아무런 조짐없는’(無朕) 형이상적 존재라고 생각하였다”고 하며, 그리고 심지어는 “송나라 유학자들이 이러한 이(理)로써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송명이학과 청학은 우주론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입장과 형식을 취한다. 송명이학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이’를 ‘기’의 위, 그리고 앞에 위치시킨다. 특히 ‘소종래’(所從來: 근원, 이유)를 탐구할 때에는 ‘이’를 더욱 추상화시켜서 결국에는 ‘이’를 근원적인 무형의 세계에 별도로 소속시켜 놓고 이것으로부터 천지만유가 생겨나오는 생성론적 근원과 원리 그리고 그 과정을 설명한다.

10. 양계초가 말한 청대학술사상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근대 변혁기의 대표적 학자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는 청대 학자들의 공부방법(治學方法)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다음 열 가지 사항은 양계초가 정리하고 있는 청대 학술사상의 공통 특징이다.

 

∙한 가지 뜻을 정립하게 되면 반드시 그 증거를 확보한다. 증거없이 억측을 부리는 것은 단호히 배척한다.

∙증거를 선택하되 ‘옛 것을 우선한다’[尙古主義]. 한당시대의 증거로써 송명시대의 오류를 비판할 수는 있으나, 송명시대의 증거로써 한당시대의 오류를 지적할 수는 없다.

∙불충분한 증거는 정설(定說)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반증하는 사람이 없으면 임시로 두되, 계속 증거를 제시하여 점차 믿게 해야 하며, 그러한 때라도 유력한 반증이 나타나면 폐기한다.

∙증거를 숨기거나 증거를 곡해하면 부덕(不德)으로 인정된다.

∙같은 종류의 사항(事項)을 나열하기를 좋아하며, 비교연구를 거쳐 ‘공정한 법칙’[公則]을 얻는다.

∙이전 사람의 학설을 채용할 때는 반드시 그 출처를 밝히며, 다른 사람의 학설을 도용(盜用)하는 것을 큰 부덕으로 여긴다.

∙합당치 못한 것을 보게 되면 서로 꾸짖어 비록 제자라도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여 반박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스승도 역시 피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러한 경우를 당해도 원망하지 않는다.

∙변론과 힐책은 문제를 근본으로 하여 그 범위로 삼고, 글의 뜻은 독실함과 온후함에 힘써서 비록 자기 의견을 주장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동시에 존중한다. 이를 어기고, 기개만 부리거나 지루하게 간섭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웃는 듯 하는 행동을 보이면 부덕으로 인정받는다.

∙전공을 중시하여 좁고 깊이 연구하기를 좋아한다.

∙문체는 박실(樸實), 간결해야 하며, 말에 가지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11. 중국 근대 기론(氣論)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과학성이 강화된 반면 철학성은 묽어졌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론(氣論)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있어서, 청(淸) 말에서 민국(民國)초에 이르러 일련의 기간은 중국 전통 기론속에서 서양문화, 특히 서양 근대과학이 접목되는 시기이다.

청대에는 비록 실증적 경향의 기론이 우세하였지만,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실패는 이학(理學)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문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막강한 군사력과 근대 공업문명의 충격은 당시 지식인들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당시의 기론 또한 시대 고유의 색채를 띠게 된다. 즉 서양 근대과학의 유입에 따라 종래의 생성론적인 기론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대신 서양 근대과학을 수용할 때의 아날로지(Analogy)로서 주목받게 된다. 즉 기(氣)를 빛, 전기, 질점(質點)과 결합시켜 그 운동, 변화하는 기능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1916년 이후 ‘민주’와 ‘과학’을 슬로건으로 하여 추진된 신문화 운동은 전제(專制)와 미신의 근원으로서 전통적인 것 일체에 대하여 격렬한 비판을 퍼부었는데, 기론 또한 미신적 관념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된다. 진독수(陳獨秀, 1879~1942)는 󰡔신청년󰡕(新靑年) 창간 선언문인 ‘삼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글 속에서,

 

“중국의 지식인들(士人)은 과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음양가(陰陽家)의 부서설(符瑞說), 오행설(五行說)을 배워 마치 자기 학설인양 되팔아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지기(地氣)와 풍수설(風水說)에 의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의 위력을 빌리려 한다.……의사는 과학을 모르기 때문에……오로지 오행(五行)의 상생상극설(相生相克說), 한열음양설(寒熱陰陽說)에다 억지로 끼워 맞춘다.……이러한 공상(空想) 중에서 가장 진기한 것은 기론으로서, 이것은 점성술이나 신선사상과 같다. 시험삼아 우주를 두루 살펴보아도 기가 과연 무엇인지 전연 알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몰두한 지식인들이 중국 전통기론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대표적 견해이다. 5․4운동시의 신문화운동의 주장은 중국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았다. 그후 비록 동서문화(東西文化)논쟁, 인생관(人生觀)논쟁 등에서 전통적 형이상학의 부활을 부르짖는 움직임도 나타났지만 역시 대륙의 전반적인 조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이후 대륙의 공산화는 ‘기’ 개념을 ‘물질’ 개념으로 고착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중국 근대의 기론은 아편전쟁, 무술변법, 신해(辛亥)혁명을 거치면서 각 시기마다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낸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지식인들은 어떻게해서든 열강(列强)의 군사적, 경제적 침입으로부터 빠져나오고자 애쓴다. 그들은 종래 전통사상의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론을 극력 비판하며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도 쏟았다. 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로는 위원(魏源, 1794~1857)과 공자진(■自珍, 1792~1841) 등이 있으며 태평천국운동 때 봉기의 리더였던 홍수전 또한 빠뜨릴 수 없다. 이들은 중국 전통사상 중에서 기론이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가졌다하여 기론의 고취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기론의 뼈대는 역시 장재(張載, 1020~1077)를 비롯한 종래 중국 전통 기론에 근거하고 있다. 위원은 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삼는 장재의 기본체론적 관점을 이어받아 “태허(太虛)의 정기는 유동(流動)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며, ……태허는 만물의 참된 거처가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홍수전은 서양의 기독교 이론을 지도 사상으로 삼았지만 여전히 전통 기론을 이용하여 여러 교의(敎義)를 해석하였다. 그는 영혼불사(靈魂不死)를 논하면서, 사람의 영혼은 모두 “황상제(皇上帝)로부터 받은 일원(一元)의 기로서 생기기도 하고 자라기도 한다. 근본은 같으면서도 만가지로 다르게 흩어지며, 만가지로 다르나 모두 하나의 근본에 귀결한다”고 하였다. 홍수전의 기론 또한 장재 기철학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우리는 장재 기철학이 이 당시 중국의 가장 인기있는 전통사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편전쟁시기의 중서(中西)문화의 충돌이 표피적인 것이었다면, 무술변법시기의 문화충돌은 중국 전통사상과 문화의 심층을 개척하도록 하는 적극적 계기가 되었다. 수십년의 검토와 분석을 통해서 중국인들은 서양의 강성한 힘의 근원이 물질적 조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제도와 사상문화의 선진성에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이 시기에 중국 지식인들의 고민은 바로 대량의 서양 근대과학의 지식을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 문제해결 방안의 하나로서 바로 중국 전통문화 속에서 서양문화와의 동질성을 인식하는 방법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은 우선 기론에 적용되어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이 시기의 주요 학자로는 강유위, 엄복, 담사동 등을 들 수 가 있다. 강유위는 기본적으로 기론에 입각하여 그의 기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서양의 과학지식을 받아들여 전통 기론을 새롭게 해석하려 했다. 그는 우주의 기원 문제에서 기가 변화하여 만물을 낳는 과정을 성운설(星雲說)로 해석하였고, 근대물리학과 화학의 업적을 이용하여 종래의 기론에다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전기를 철학 개념으로 끌어들여 기 개념과 대체하려고도 하였다. 엄복은 전통철학의 개념, 범주에 대한 정의(定義)의 모호성에 불만을 품고, 중국 근대철학에서 가히 모범적 답안이라고 할 만한 정의를 기에다 내렸다. “기라는 것은 질점(質點)과 인력(引力), 척력(斥力)이 있는 사물이다. 그 무게를 저울질 할 수 있고 그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완전하게 근대 과학지식이 획득한 인식으로서 기의 내용이 소박하고 직관적인 사변적 산물에서 과학의 물질적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것은 기론을 새로운 면모로 근대철학 속에 끌어들이고, 과학에 힘입어 기의 물질성을 확정하였으나, 대신 그 철학적인 기능이 점차 엷어짐으로써 장차 철학적 의미를 상실할 운명을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담사동의 기론 또한 엄복과 비슷하다. 그는 기를 과학적 개념으로 확정하여, 지구를 감싸고 있는 200리 대기층의 공기, 몽기(朦氣)라고 생각하였으며, 아울러 그것의 물리적인 특성을 분석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를 하늘과 땅 사이를 운행하는 추상적인 존재로 생각하여, 천지만물의 상호작용하고 상호관계하는 원인, 근거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의 세계는 이것(에테르)에서 생겼고, 허공은 이것 때문에 세워졌으며, 중생은 이것으로부터 나왔다”고 하며, 에테르를 우주만물의 본질로 삼아 전통의 기본체론을 대신하였다.

신해혁명시기에 기론은 또다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장병린(章炳麟, 1868~1936)의 사상에도 전통 기론의 의미가 어설프게나마 남아있다. 그는 자연과학 지식을 이용하여 전통 기론을 강화, 확충하였는데, 담사동의 경우처럼 기를 우주에 가득찬 공기, 몽기라 하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의 원자(原子) 개념을 기 개념으로 대체시켜 우주만물의 근원과 구성요소로 삼았다. 손문의 사상에서, 철학개념으로서의 기는 이미 기본적으로 소멸되어 버렸다. 손문은 전통문화와 서양 근대과학문화의 융합 속에서 만물의 본체와 시원(始原)의 이론에 대해 고도의 추상적 개괄을 하고 종래의 기론 대신 과학적 물질 개념을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전통 기론은 더이상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곧 근대 중국의 기론이 과학적 물질 개념으로 바뀌면서 아울러 자신의 본래 기능인 철학적 본체론의 기능을 점차 잃어감을 보여준다.

서양문화의 전래는 기론의 오랜 역사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고 동시에 그것이 철학적 본체론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이 때문에 대륙의 학자들은 기론의 근대적 발전을 “과학성이 끊임없이 강화된 반면 철학성은 끊임없이 묽어지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유위의 전기, 엄복의 질점, 인력, 척력, 장병린의 원자, 손문의 물질개념은 곧 기론에 있어서 그 철학적 기능이 끊이지 않고 묽어져 최종적으로는 소실되어간 과정을 반영해 주었다”고 한다.

 

12. 이대조의 사회주의사상이 중국적 사회주의사상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제정(帝政)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은 1917년이다. 그리고 약 2년 뒤인 1919년 경부터 중국에도 진독수나 이대조(李大釗, 1889~1927) 등에 의해 맑스주의가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맑스주의는 그 이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약 30년 동안 중국사회에 있어서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1949년 이래로 지금까지는 유일한 체제이데올로기로서 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중국 근대정치사상에 있어서나 철학사상에서도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이라는 구체적 실천문제를 전후하여 당시 중국의 사상계와 지식인들은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세차례의 사상투쟁, 즉 1919년 이대조와 호적 사이에서 벌어졌던 ‘문제와 주의(主義) 논쟁’, 1920년 진독수와 장동손(章東蓀)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회주의 논쟁’ 그리고 1920년~1921년 창당 바로 직전 진독수와 구성백(區聲白) 사이에 전개되었던 ‘무정부주의 논쟁’으로 나타났다. 맑스주의에 대한 집중적인 소개와 열띤 사상투쟁은 주로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젊고 진보적인 학생․지식인들은 맑스주의를 이전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보다 새롭게 접할 수 있었다. 맑스주의의 새로운 혁명사상에 대한 젊은 학생․지식인들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1920년 주로 진독수와 이대조 등이 맑스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921년에는 진독수, 이달(李達), 시존통(施存統) 등에 의해 맑스주의에 관한 논문이 다량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시기적으로 1921년 당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비판적 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맑스주의에 대한 계몽운동은 당시 중국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맑스주의의 영향이 중국 사상계 내에 급속도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맑스주의 자체가 갖는 사상적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당시 중국에서 맑스주의를 수용할 만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점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후퇴하게 되면서 중국의 민족적 경공업발달이 촉진되어 공장 노동자들이 비약적으로 급증하게 되였고, 또한 이에 힘입어 계급분화가 촉진됨으로써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운동의 흐름을 타고 진보적 학생․지식인 계층인 계몽운동에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의 수립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국가 세력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맑스의 예언이 러시아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구 근대문화의 유입이 한창 진행되어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국인들은, 독일인이 가지고 있던 산동반도에 대한 권리가 연합국의 승리의 결과로서 당연히 중국에 되돌아 오리라고 기대하였다. 왜냐하면 제1차 세계대전은 바로 전제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1919년에 개최된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무참히 깨어졌다. 이를 계기로 중국의 지식인들은 서구사회와 자본주의문화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제 다시 중국의 봉건주의와 서구의 자본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찾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맑스주의를 사상적 무기로 한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구원의 횃불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신문화운동의 아성인 북경대학 내에 ‘맑스주의 연구회’가 성립되는 등 맑스주의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단체들이 연이어 만들어졌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여건의 형성으로 인하여 당시 지식인계층에게는 맑스주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도록 하였으며, 노동자․농민들에게는 맑스주의의 기치 아래 사회․정치적으로 결집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들 정치․사회적 배경 및 사상적 배경이 드디어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성립과 더불어 1924년에는 국공합작을 이루어내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1925년부터는 국공합작 세력이 군벌 및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북벌을 감행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은 북벌과정을 통해 노동자․농민세력에게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되며, 또한 정치․사회적 세력을 확고히 굳히게 된다.

초창기 중국 공산당의 최대 이론가는 이대조와 진독수를 들 수가 있다. 이들은 ‘북이남진’(北李南陳)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만큼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대조는 중국 공산당 창립자 가운데 중요한 한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맑스주의의 최초 전파자이기도 하다. 그가 중국사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맑스주의를 인간의 도덕과 의지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받아들이는 등 이른바 중국적 재구성을 최초로 시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 이론의 기원을 이루는 것으로서 평가받는다. 이대조의 사상중 농민들의 해방이 중국 전체의 해방이라는 진단 아래 중국의 청년들에게 농촌에 가서 직접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인민주의적 측면은 바로 모택동의 혁명관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이대조의 사상중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전의 선배사상들의 객체적․수동적 인민관을 완전히 바꾸어, 중국인 한사람 한사람이 주체적 사상을 갖는 인민총체로서 바로 이들에 의해 역사가 창조된다고 파악했다는 점이다.

진독수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서구문화를 인식했던 근대 변혁기 중국지식인의 태도에서 급격하게 공산주의자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공산당이 성립되고 난 후에는 초대서기장이 되어 자신의 혁명이론을 펼쳐나갔다. 진독수의 이론은 그의 지도적 위치로 보아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진독수의 혁명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혁명이론의 본질은 반식민지국가에서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외국 제국주의 및 군벌에 대한 투쟁에서 부르조아와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의 정치활동은 국공합작․노동운동의 조직화․농민운동의 조직화․농민협회의 조직․반제국주의 운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진독수의 이러한 혁명이론과 국공합작정책은 북벌의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사회적․정치적 세력을 확대하는 데 좋은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국민당과의 분열을 초래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의 사회․정치적 세력이 너무도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국민당이 두려워할 정도의 막강한 정적(政敵)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독수의 혁명이론 그 자체에도 오류가 있었던 것같다. 즉, 진독수는 당시 중국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로 인식함에 따라, 혁명의 과정에서 또한 중국의 프로레타리아는 부르조아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후에 확립된 모택동주의와도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북벌과정을 거치면서 중국 공산당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다. 한편 사상계에서도 맑스주의 및 사회주의사상이 점차 보편적으로 되어갔다. 1923~1924년 이후 노동자․농민운동의 격화와 함께 학계에서는 혁명의 현실적 문제를 둘러싸고 혁명이론 및 그 혁명이론을 뒷받침해주는 중국사회사논전 및 유물변증법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7년 4․12반공쿠데타로 국공합작이 결렬되자 중국 공산당의 정책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중국 공산당이 성립된 이후 줄기차게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진독수의 이론과 정책이 구추백(瞿秋白), 이입삼(李立三) 등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입삼은 스탈린(Stalin, 1879~1953)이나 부하린(Bukharin, 1888~1938)의 ‘중국사회이론’에 영향을 받아 진독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순수한 봉건제도는 생산력의 진보와 상업자본의 발달에 따라 파괴되었지만 통일적 중앙집권 국가조직은 봉건지주와 상업자산계급의 연합이었고, 또한 제국주의 침략이 농민계급의 계급분화를 촉진시켰지만 주요한 착취형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입삼은 이 이론에 근거하여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성에서의 우선적인 승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이른바 ‘이입삼노선’을 수립하고 그것을 시도했지만 몇 년 못 가서 실패로 끝났다. 그 이유는 이입삼에 의해 통솔된 중국 공산당의 혁명적 행동이 그의 이론과 정책을 과신한 결과 맹동주의(盲動主義)에 빠졌기 때문이다. 진독수와 이입삼의 이론적․정책적 실패의 경험을 교훈삼아 그리고 대장정 중 왕명(王明)을 중심으로 한 노선투쟁을 거쳐 중국 공산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람이 바로 모택동이다.

모택동은 1920년 중국 공산당의 창립 당원으로서 당 활동과 중국 혁명운동에 참가했지만 진독수에서 이입삼의 시대까지 그의 입장은 당 지도층의 행동노선에 수용되지 못했고 그리하여 그는 독립적으로 농민운동을 지도하며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이 당시부터 그는 일관해서 “조사가 없는 한 발언권은 없다”고 하는 입장에 서서 공산주의의 공식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며, 또한 코민테른의 지도에도 맹종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사와 경험을 토대로 삼아 그 속에서 현실을 지도해가는 이론을 창조하는 방법을 취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은 초기에는 당 지도부로부터 이해받지 못했고 당의 정책에도 반영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지도한 농민운동은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차근차근 성과를 쌓아갔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실천과정에서 산출한 이론과 정책은부동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고 이입삼의 노선이 실패한 이래 드디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모택동이 확립한 혁명이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중국혁명은 단순한 부르조아 혁명이 아니고 그 주된 본질은 노동자․농민을 핵심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반제국주의․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모택동의 혁명이론은 철저하게 토지혁명을 사회적 내용으로 삼고, 확실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전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의 이러한 이론과 그의 혁명적 경험 속에서 생겨난 정책은 점차 확고해져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에 대한 확고부동한 지도이론과 정책으로 존숭받게 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중국 공산당의 혁명이론과 정책을 개관하였다. 이제 이 시기 동안 사상사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점들을 요약해 보도록 하겠다.

중국대륙에서 1920년대는 맑스철학의 전파기로서 사적(史的) 유물론에 대한 소개가 주로 이루어졌고, 1930년대는 주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인식론 등이 좀더 계통적이고 대중적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1930년대는 맑스주의 철학이론과 혁명실천이 결합된 시기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대 후반에는 구추백(󰡔현대사회학󰡕)과 이달 (󰡔현대사회학󰡕)에 의해 이전의 사적유물론 사조가 총괄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는 구추백(󰡔사회철학개론󰡕)에 의해 중국현대철학사상 최초로 변증법적 유물론이 소개되었다. 이달도 또한 󰡔사회학대강󰡕을 지어 이에 가세했다. 그리고 특기할 것은 애사기(艾思奇)의 󰡔철학강화󰡕이다. 이 책은 통속적인 필체와 일상적인 회화체를 이용하여 전문적인 이론을 소화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어렵지 않게 맑스철학 원리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중국현대철학사에 있어서, 철학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3. 현대 신유가의 일반적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첫째, 현대 신유가는 철학을 객관 사실에 관계하는 학문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인생)가치에 관계하는 학문으로 파악한다.

둘째, 그러므로 현대 신유가는 철학이 형이상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셋째, 현대 신유가는 그 철학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직관적 사유를 존숭한다.

현대 신유가는 오늘날 중국 학술계를 점점 더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대륙 내의 현대 신유가 학맥의 단절은 이들 사상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망설이게 한다. 이것은 현대 신유가의 후기 발전이 주로 대만․홍콩․미국 등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대중국의 역사적 경험․현실적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국 내에서의 현대 신유가는 아직 창조적 작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호기심어린 조심스러운 탐구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사실은, 앞으로 현대 신유가에 대한 가장 창조적․주체적 작업은 중국 대륙 내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14. 현대 신유가에서 말하는 ‘직각(直覺)적 사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웅십력이다. 웅십력은 ‘이지(理智)적인 앎’(量智)과 ‘직관적인 앎’(性智)을 구분한다. 현대 신유학자들은 이것이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인식능력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자는 과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보며, 그리고 후자는 자아의 완성과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내재적 근거이고 동력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웅십력이 이 둘을 완전 대립하는 것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지(量智)는 성지(性智)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웅십력이 강조하는 인식은 성지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직각(直覺)을 강조한다. 웅십력은 체용론의 구조 속에서 나름대로 양지와 성지의 통일을 시도하지만 결국 이 양자는 구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양철학 과제 마침

(총회신학교 2008학년 통신학부 최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