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지리학(聖經地理學) 과제
(총회신학교 2008학년도 통신학부 최보연)
제 1 장 총론
과제1. 지리학의 정의와 중요성을 쓰라.
·지리학(geography)`은 `땅을 비롯하여 그 땅과 관련된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지리학이 다루는 범위는 땅과 관련된 모든 지리적인 현상들 즉 기후, 인종, 동물 식물들과 이런 것에서 산출되는 모든 생산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 삶의 환경과 직접적인 상관성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지리적 요소들은 여러 면에서 인간 형성의 후천적 요소들이 되었으며, 세계의 역사와 문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느 한 나라의 경제를 비롯한 사회적, 정치적인 발전은 그 지역의 지리적인 여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경제적 교류나 무력 충돌, 국경의 형성 등과 같은 국제적 관계도 지리적 요소와 무관치 않다. 인간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는 그들이 늘 접하고 있는 주변 환경 곧 지리적인 여건과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지리학 연구의 중요성은 바로 이런 점에 있는 것이다.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하려면, 성경의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고 익히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 내용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이라는 특정한 지역에서 있었던 역사와 관련된 기록으로 그러한 지역에서의 일상적인 삶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배경이며 동시에 성경 역사의 현장이었던 이스라엘과 그 주변 지역과 전혀 다른 지리적-문화적 환경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배경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성경을 대하게 되면, 본문이 의도하는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환경이나 문화적 개념에 근거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성에 빠질 수 있다.
과제2. 성경지리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쓰라.
성경의 정확한 이해와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성경지리 연구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첫째로, 성경의 역사가 실제로 일어났었던 이스라엘 땅의 지리적 형태와 특징을 익히는 것은 성경의 정확한 이해에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신학이나 윤리 등과 같이 조직적으로 체계화시킬 필요성을 지닌 내용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일차적 관심은 하나님이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에서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시고 활동하셨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이트(G. Ernest Wright)가 지적한 것처럼, 성경 안에는 지리, 역사, 그리고 신앙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구분할 수 없을만큼 뒤얽혀 있기 때문에, 성경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리적 여건과 역사의 적절한 이해 없이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2. 둘째로, 성경 지리를 익힐 필요성은 성경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지리적 문제를 성경 자체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성경이 지리적 요소에 고나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일차적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리적 요소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의 지리는 별다른 보충적인 설명 없이 모두가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성경시대와 전혀 다른 문화, 역사, 지리적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그러한 침묵은 성경 이해에 장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3. 셋째로, 이스라엘 땅의 지형과 지리적인 복잡성이 성경이해에 성경지리가 필요한 점이다.
이스라엘 전체 면적은 약 2만㎢에 불과하다. 동서간의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80km, 남북의 길이는 다소 길어 약 240km 정도가 되지만, 비교적 작은 면적의 이 땅 안에는 다양한 지형들이 밀집되어 있다. 해발 2814km 높이의 헬몬산이 이스라엘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가 하면, 지중해 해면보다 무려 400m나 낮은 사해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해안지역과 갈릴리 주변에는 기름진 농경지들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유다 광야와 남부 네게브 지역은 주로 목축문화가 옛날부터 형성된 지역이다. 이러한 지형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모두가 성경의 내용과 역사 이해에 중요한 요소들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지리적으로 복잡하다는 사실은,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스라엘 지형지리 연구가 간단한 과제가 아니라 보다 진지한 연구 자세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스라엘의 지리적 요소와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지리적인 이해가 없다면, 지리적인 움직임 뒤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사건의 역동성이나 의미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다. 곧 성경이 전하려는 중심 내용을 감사고 있는 정서적 감동이 모두 빠져 버린 평면적인 성경이해가 되고 말 것이다.
4. 네 째로, 이스라엘 지리는 성경신학 이해에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성경지리의 또 다른 중요성이 있다.
영국의 성경학자 도드(C.H. Dodd)가 지적한 바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점이다. 따라서 성경 역사가 일어난 배경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없는 성경신학 연구는 본문의 의미를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해 버릴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만나신다는 의미는 또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만나주신 그 하나님을 그들의 환경 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들이 경험한 자신들의 삶의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땅 자체는 하나님의 계시를 보다 명확하게 전달하여 주는 계시의 `시청각 자료실`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지리는 단순한 `지형지리(physical geography)`적 차원이 아니라 `역사지리(historical geoeraphy)`적 차원과 성경신학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신학적 지리(theological geography)`라는 차원에서 조명 되어야 한다.
제 2 장 가나안의 자연지리
과제1. 가나안의 지정학적 위치를 논하라.
페르시아 만부터 소아시아, 아라비아, 시나이 반도에 걸치는 소위 근동(Near East) 지방의 땅은 비교적 척박한 땅이다. 반면 그 중에서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그리고 요단 강과 나일 강 등 주요하천 지역은 그 외의 지역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옥토지대를 이루고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나일 강까지의 옥토지대를 주변의 척박한 땅과 구분시켜 서로 연결하여 보면 마치 초승달과 같은 모양이 나온다고 하여 이를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ent district)라 부른다. 근동 지방의 주요한 역사는 다 이들 지역과 관계된 것이다. 한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중에서도 세 대륙을 잇는 그야말로 가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가나안 땅은 평화 시에는 무역로(貿易路)로서, 전쟁 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대 세속 문명의 원형이라 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도 이 같은 초승달 지대에서 발생하여 가나안을 통로로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곤 하였다.
수동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땅에서 유일한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가 발생하여 그 순수성을 보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 하나님의 간섭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능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런 가교의 땅을 선택된 백성의 땅으로 삼아 그 백성의 신앙이 널리 퍼질 기회를 주셨다고 볼 수 있다.
과제2. 가나안의 명칭들을 쓰라.
1) 가나안 (창12:5, 13:12, 출6:4)
유래 :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을 정복하기 전 이곳에 살던 기르가스, 아모리, 가나안, 브리스, 헷, 히위, 여부스 등의 원주민 7족속이 노아의 손자 가나안(창10:15)의 후손들이었던 사실에서 기인한다.
특징 : 가나안이라는 명칭은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이 약속의 땅을 지칭하기 위하여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된 지명이다. 팔레스타인이 비 유대인이 주로 사용한 지명 즉 밖에서 지칭할 때 지명이라면, 가나안은 유대인이 안에서 자신의 땅을 지칭할 때 사용한 대표적 명칭이었다.
2) 팔레스틴 (출15:14, 사14:29)
유래 : 이 지명은 원래 가사에서 욥바까지 동부 해안 지방을 차지한 블레셋 족속의 땅만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출15:14, 사14:29). 이들은 해안 민족으로서 외지와의 접촉이 잦았는데, 특히 헬라인들이 마치 블레셋이 해안지방 뿐 아니라 그 내지인 약속의 땅 전체를 블레셋이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데서 기인한다.
특징 : B.C 5세기 유명한 헬라 역사가 헤로투스가 처음으로 이 팔레스틴을 약속의 땅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한 이래 로마인들도 행정구역 명칭이 아닌 일반 지역 땅으로는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일반 세계사에서는 이 명칭이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가가 정식출범한 1948년 이전까지는 비록 위임 통치 지역에 대한 명칭이기는 하였으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3) 약속의 땅(히11:9)
유래 : 너무도 당연히 이 땅이 아브라함을 위시한 족장들에게 약속되었던 사실에서 유래한다.
특징 : 사실 아브라함이 이 땅을 약속 받았을 당시에는 이미 그 땅은 다른 족속이 살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일개 이주민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하나임이 주권으로 이 땅을 약속하시고 또 실제 이스라엘에 주셨던 사실에서 이 명칭은 훗날 성도들이 얻을 천국을 상징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4) 기타 명칭들
*쁄라 (사62:4)
*거룩한 땅(슥2:12)
*임마누엘의 땅(사8:8)
*젖과 꿀이 흐르는 땅(레20:24, 민13:27, 신11:9)
*그 조상들에 맹세한 땅(민14:23, 신31:4)
*이스라엘에게 준 땅(민20:24, 삼상13:19, 대상21:4)
*기업의 땅(민34:18, 신2:12)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신3:20)
*아름다운 땅(신4:21, 9:6)
*부족함이 없는 땅(신8:9)
*좋은 땅(왕상14:15)
*주의 땅(대하6:27, 호9:3)
과제3. 가나안의 기본 지형을 구분하라.
1) 요단 계곡 지대
팔레스틴의 지형 상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요단 계곡 지대이다. 이는 북부 시리아와 레바논 계곡에서 시작하여 갈릴리, 요단강 그리고 사해 양안지대(兩岸地帶)를 거쳐 남으로는 아라바를 지나 아카바 만까지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지대이다. 대지진으로 인한 지각의 단층 작용으로 형성된 이 계곡 지대는 전 지역이 해면보다도 고도가 낮다. 실례로 북쪽의 갈릴리는 -210m, 남쪽의 사해는 -400m에 달한다. 바로 이 계곡 지대를 기준으로 서쪽의 중앙 고원 지대와 동쪽, 즉 트랜스 요르단 지역의 동부 고원 지대가 구분되는 것이다. 이 요단 계곡 지대는 모두 5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다.
① 갈릴리 호수 이북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1차 수원지를 이루는 홀레 호 분지
② 가버나움, 뱃새다, 디베리야 등을 포함하고 있는 갈릴리 분지
③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강 본류 유역
④ 쿰란, 소돔, 맛사다 등이 포함된 사해 유역
⑤ 그리고 그 아래의 아라바 광야 저지대가 그것이다.
한편, 이 요단 계곡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의 중부 고원 지대와 이 요단 계곡이 연결되는 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반면, 동부 고원 지대 쪽의 연결 부분은 대부분 급경사를 이룬다.
2) 중부 고원 지대
고원지대라고 해서 거칠고 험악한 산악지대를 연상한다면 그것은 오해이다.
비록 요단 계곡과 면하여 급경사를 이루는 부분은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고도가 높다 뿐이지 경사가 완만한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다. 토질 또한 비옥하여 주거와 생업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가장 북쪽의 두로와 시돈 등과 인접한 레바논 고원지대, 나사렛, 다볼 산 등이 위치한 평균 표고 780m의 갈릴리 고원지대 사마리아, 세겜, 에발 산과 그리심 산 등이 있는 사마리아 고원지대, 실로, 벧엘 등이 위치한 에브라임 산악지대, 베들레헴, 헤브론 특히 감람 산, 모리아 산, 시온 산에 둘러싸인 예루살렘 등이 위치한 남쪽의 유다 산악지대가 여기에 포함된다. 특히 유다 고원지대와 네게브, 즉 남쪽의 건조한 사막 지대의 경계를 이루는 소위 유다 분수령은 비옥한 땅과 광활하고 메마른 땅이 뚜렷이 대비를 이루며 만나는 장관을 연출한다.
3) 해안 평야 지대
팔레스틴의 해변은 대체로 바위가 많고, 파도로 인하여 형성된 계단식 침식 지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수심이 깊은 곳이 별로 없어 욥바, 가이사랴, 두로 등을 빼고 나면 대규모 항구 도시는 없다. 한편 이런 해안선과 중부 고원지대 사이에 폭이 좁은 퇴적층 평야가 불연속적으로, 즉 군데군데 형성되어 있다. 그 중 대표적 지역은 가사, 가드, 아스글론, 아스돗 및 에그론의 소위 블레셋 5대 도시를 포함하는 블레셋 평야, 블레셋에서 갈멜 산까지의 샤론 평야, 갈멜 산과 기손 강 이북의 스불론, 아셀, 에스드랄론 평야를 포함하는 악고 평야가이에 해당한다.
4) 동부 고원 지대
요단강 동쪽의 고원지대도 서쪽의 중앙고원지대와 마찬가지로 요단 계곡과 나란히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평균 해발 700m의 고원지대이다.
이러한 동부 고원지대는 북쪽의 헬몬 산에서 아라바 고지대를 지나서 홍해까지 뻗어 있으며. 좌측으로는 요단 계곡과 우측으로는 넓은 사막지대와 연결되어 있다.
요단 계곡 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사막과 연결된 우분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산악과 연결된다. 한편 동부 산악 지대에는 요단강으로 합류하는 4개의 비교적 큰 강이 있는데, 이 4강을 경계선으로 5부분으로 다시 세분된다.
① 헬몬산에서 야르묵강까지의 바산 산지
② 야르묵강에서 얍복강까지의 길르앗 산지
③ 얍복강에서 아르논강까지의 암몬 산지
④ 아르논강에서 제렛강까지의 모압 산지
⑤ 제렛강에서 홍해 에일랏까지의 에돔 산지
과제4. 가나안의 토양과 기후를 약술하라.
1) 토 양
팔레스틴 토양의 기본 구분도 지형 구분과 대략적으로 일치한다. 해안 평야는 대부분으로 퇴적암으로 되어 있다. 팔레스틴 남부의 소위 네게브 지역의 광야들은 암염(岩鹽) 또는 붉고 노란 돌들과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다.
한편 팔레스틴 동부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광야는 모래벌판으로 된 전형적인 사막 지대의 토양은 대부분 석회암(limestone) 또는 백악(白堊, chalk)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팔레스틴 토양의 특징은 결국 석회암 토양의 특징이라 하겠다. 석회암은 비교적 단단하며 흙으로 잘 부서지지 않지만, 일단 흙이 되면 매우 비옥하다. 따라서 비교적 유년기 지형의 특색을 보이는 팔레스틴 지방의 토양은 그 면적이 좁으나 비옥한 편이다. 한편 석회암은 빗물을 잘 흡수하기 때문에 일단 비가와도 대부분 땅 속으로 스며들며 지표에는 물이 곧 마르게 된다. 반면 지하수가 풍부하여 팔레스틴 생활에서는 고대로부터 우물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또한 석회암은 빗물에 잘 녹으므로 팔레스틴 전역에는 이런 천연의 침식 동굴이 많이 있다. 그리하여 창고, 묘지 등으로 생활과 밀접하게 사용되었는데, 이에 관련된 성경 기록도 많다.
2) 기 후
팔레스틴은 북위 30도와 33도 사이에 위치한 아열대 지방이며, 또 지중해와 인접한 연고로 전반적으로 소위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을 갖고 있다. 팔레스틴 기후의 가장 큰 특징은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대신 건기와 우기의 구분이 있는 점이라 하겠다. 건기는 4월에서 9월까지의 6개월간이며, 우기는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이다.
기후의 중요 요소는 기온, 바람, 강우량 등이 되겠으나 본서에서는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 전반적으로 요소를 동시에 고찰하려 한다. 한편 팔레스틴에서는 비가 가장 많이 오는 1-2월 경을 겨울, 반대로 가장 뜨거운 7-9월을 여름이라 한다. 물론 이는 소위 온대 지방의 4계절 구분과는 약간 개념이 다르다.
(1) 건기의 기후
건기는 대략 4월에서 9월까지의 기간이다. 4월 초에는 소위 늦은 비, 9월 중순 이후부터는 이른 비라 하는 약간의 비가 내리기도 하지만 5월에서 9월 초순까지는 거의 전 지역에 전혀 비가 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해변 지역을 제외하면 습기가 전혀 없어서 구름도 거의 없이 맑고 청명하다. 실제로 근동 지방은 전 지구상에서 태양열 반사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본다면 7월-9월 경의 여름 평균 기온은 20°C-28°C사이이다. 이 평균치로 보면 별로 더운 것 같지 않지만 한낮 최고 온도가 35°C-40°C에 육박하는 일도 가끔 있다. 또 워낙 일교차가 심하므로 여름철에도 한밤에는 얇고 긴 털옷이 필수품이 될 정도이다. 물론 기온은 같은 시각에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여리고와 사해 근방 그리고 아라바 광야 등의 요단 협곡 지대가 특히 무더워서 35°C-40°C를 오르내리는 것이 다반사이다.
한편 5-8월까지는 대개 서북풍이, 9-10월 경에는 주로 동남풍이 불면서 더위를 몰고 온다. 반면 우기의 비를 몰고 오는 바람은 서풍 또는 서남풍이다(눅12:54-55, 욥37:9), 또 연중 가끔씩 헬몬 산 이북에서 비교적 찬 북풍이 불 때도 있고, 비교적 따뜻한 남풍이 남방 네게브 쪽에서 불어오기도 하나 뚜렷이 구분지을 만한 계절풍이 팔레스틴에는 없다.
바람 중에서 특히 사막 쪽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모래 먼지와 건조한 더위를 몰고 오기 때문에 몸에 아주 해롭다. 이런 동남풍이 부는 날씨를 아라비아어로 `함신`이라 하는데, 이는 50이라는 말이다. 즉 이런 날씨가 대략 년 50일간 계속되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팔레스틴에서는 이런 `함신`이 건기 후반부에 주로 발생한다. 이런 날씨에는 비록 덥지만 몸을 노출하는 것보다 얇은 천으로 얼굴은 물론 온몸을 가볍게 가리는 것이 오히려 더 좋다.
따라서 이런 기간에는 전형적인 사막인의 복장과 같은 유형의 차림새를 하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팔레스틴인의 기후를 논할 때 중요한 요소의 하나가 이슬(dew)이다. 주로 지중해와 요단강의 습기가 심한 일교차로 인하여 이슬로 되는데, 팔레스틴에서는 연간 260일 내린다. 그 중 농경과 삼림에 도움을 줄 정도의 이슬은 200일 정도 내린다. 이 이슬로 인하여 거의 6개월간이나 계속되는 건기에도 목축과 농경에 도움을 주는 최소한의 수분이 확보된다. 지중해와 고원 지대에는 비교적 많은 이슬이 내리나 요단 계곡에는 그 양이 적다. 만약 이 이슬마저 내리지 않는다면 가뭄의 피해는 더욱 가중된다(왕상17:1).
이상의 사실에서 기상관측 기술이 없었던 B.C.15세기 A.D.1세기경의 소위 성경시대의 생활에 있어서는 긴 건조기 동안의 물 확보가 매우 중요했었음을 알 수 있다.
(2) 우기의 기후
우기는 대략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의 기간이다. 사실 팔레스틴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속하여 연중 강우량이 주변 지역보다는 양호하고 요단강 등의 하천이 있지만, 넓게 보면 팔레스틴 특히 남부 지역은 전 지구에 걸친 건조지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팔레스틴의 연평균 강우량은 대략 600mm이다. 그러나 이는 그야말로 평균치에 불과하다. 어떤 해에는 122mm이상의 비가 오는가 하면 또 어떤 해에는 고작 100mm의 비가 내리는 등 변호가 심하다. 여기에다 팔레스틴의 지형이 대개가 구릉지대이고 수분 흡수가 잘되는 석회암으로 되어 있어 물 보존력이 약하다. 이러한 이유들이 복합 작용을 하여 팔레스틴에는 극심한 가뭄이 수년씩 계속되는 수가 많다. 따라서 이런 가뭄의 기사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창26:11, 렘14:2-6).
또한 우기라고 해서 6개월간 고르게 비가 오는 것은 아니다. 이른 비라 하여 9월 중순에서 10월 경에 비가 조금 내리고, 늦은 비라 하여 3,4월 경에 또 비가 조금 내린다. 이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농경에 매우 유용하다.
반면 대부분의 비는 12-2월 경에 내리는데, 그것도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단시일 내에 집중 호우로 내리고 그쳐 버린다. 사마리아와 유대 지역 등 팔레스틴 주요 주거 지역의 강우 일수는 약 50일이다. 한편 우기의 기온은 가장 추운 1월을 기준으로 볼 때 기온 변동이 별로 없는 지중해 연안이 11°C-20°C이고 유다 산지의 예루살렘이 5°C-12°C사이이다.
따라서 한 겨울이라 해도 온대 지방의 봄 날씨 정도로 포근하다. 그렇지만 비가 올 때면 바람이 심하게 불어 기온이 급강하하며, 또 우박과 천둥 번개가 동반되기도 한다.
제 3 장 가나안의 생활 지리
과제1. 가나안의 중요 도로를 요약하라.
가나안은 지정학적 위치상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연결점이었다. 또한 실제로 고대 문명의 양대 발상지인 북동부의 바벨론 지역과 남으로 이집트를 끼고 있는 가나안에는 일찍부터 대륙을 연결하는 국제 도로가 개설되어 있었다. 이들 도로를 따라 대상(大商)들이 왕래하였으며 자연히 도로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로는 비단 무역상들만 다닌 것이 아니라 군사 원정에 나선 정복자들도 이 길을 용이하게 사용했다. 때문에 이 길을 중심으로 숱한 영욕(榮辱)의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험준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주요 국제 도로는 지중 해변을 따라 개설되었다. 그리고 아라비아와 연결되는 국제 도로는 트랜스 요르단(Transjordan)의 비교적 평탄한 초원과 사막 지대를 따라 나 있었다. 그렇지만 각 지방을 잇는 구내 도로는 지형적 장애를 극복해 가면서 오랜 세월을 통해 점진적으로 개설되었는데 이는 내국인들의 잦은 왕래와 교류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1) 국제 주요 도로
(1) 해안 도로 : 이집트에서 지중해변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올라와 하솔을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대로(大路)이다. 이 길은 산지로 이루어진 팔레스틴 내륙을 통과하지 않고 당시 도시들이 주로 발전했고 물이 흔한 해안으로 통해 있었다. 따라서 상인들은 무역의 대상이 되는 도시를 경유하며 필요한 물건을 조달하고 안전을 확보키 위해 이 길을 이용했다. 이 길은 므깃도에서 갈라져 계속 해안을 따라 올라가 아가릿에 이르는 길과 다메섹을 거쳐 메소포타미아까지 연장되는 길이 있다. 전자의 길은 후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하기 위해 경유한 도로이며, 후자는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들이 귀환할 대 이용한 경로인 듯하다.
(2) 왕의 대로(King`s highway) : 홍해상의 아카바 만에서 헤스본, 라못 길르앗을 거쳐 다메섹에 이르는 제 2의 국제도로이다. 아라비아에 이르는 주요 간선 도로들이 이 길과 연결되어 있어 아라비아 상인들이 주로 교역을 위해 이용하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를 요청하였으나 에돔 왕과 아모리 왕에게 거절 당하였던 길이 바로 이 대로이다(민20:14-21, 21:21-32). 오늘날 이 길은 `술탄의 길(Tariges-Sultani)`로 불리고 있다.
2) 주요 국내 도로
팔레스틴의 국내 도로는 2개의 큰 국제도로를 연결시키는 것으로서 주로 산들을 피해 평지나 계곡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길들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지 않았으므로 잘 정비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강도의 위험마저 있었다(눅10:30). 구약의 인물들이나 신약시대 예수님과 사도들이 다였던 길들이 대부분 이러한 길들이다.
(1) 중앙 산지 길 (Central ridge road)
브엘셀바에서 베들레헴, 예루살렘을 거쳐 가나안 북부의 하솔에 이르는 산악 길이다. 간혹 애굽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다멕섹으로 가는 국제 무역상들도 이용하였으나 주로 내국인들의 여행로였다.
(2) 여리고 길 (Jericho road)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통하는 길이다. 이 길은 아둠빔 비탈(수15:7)을 지나 요단 동편 지경에까지 이어졌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길이 바로 이 길이다(눅10:30-37).
(3) 욥바 - 암만 길 (Joppa - Amman road)
지중해변의 욥바에서 벧엘, 여리고를 거쳐 암만(랍바)에 이르는 길이다. 이 가운데 특히 벧엘과 여리고 간의 도로는 산지를 끼고 있는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일명`기브온 거친 땅의 길(삼하2:24)`이라고도 불리웠다.
(4) 술 길 (Shur road)
브엘세바에서 술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애굽에까지 연결되는데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치던 하갈이 잠시 쉬었던 길목이기도 하다(창16:6,7). 메마른 광야 지대를 통과하는 길로 경험이 없는 자는 길을 잃기 쉬웠다. 한편 이밖에도 가나안을 동서남북으로 연결한 주요 도로들로는 광야 길, 모압 길, 아라바 길, 악고 산지 길 등이 있다.
과제2. 가나안의 농업을 약술하라.
가나안은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cent district)라 불리는 지역의 하단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할 것으로 여길 수 있으나 꼭 그렇지 만은 않다.
왜냐하면 가나안 각 지방과 토질, 기후 등이 꼭 농업에 적당한 것은 아니었고, 또한 실제로 고대에는 이러한 지리적 여건들이 농업을 하는데 있어 심심찮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지리적 요인과 더불어 가나안의 주요 농작물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1) 지리적 요인
팔레스틴 지역은 별로 넓은 지역은 아니나 지형의 변화가 심하고 토질의 차이와 기후 조건의 변화가 많으므로 농업이 발달하기에는 비교적 어려운 곳이었다. 따라서 초기 히브리인들은 농업보다는 목축업에 치중했으며 비로소 가나안 정복 이후에 원주민들이 비교적 비옥한 곳에 발달시킨 농업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지리적 요인 상 농업이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다.
① 지형
가나안은 크게 해안 평야지대, 중부 고원지대. 그리고 요단 계곡지대, 동부 고원지대 나누어 각 지형의 특색을 논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에 따라 경작이 불가능하거나 아니면 경작의 형태가 달라짐을 물론이다.
② 토질
비교적 오래된 충적토(沖積土)로 형성되어 있어 토질이 좋은 샤론평야와 요단 계곡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나안 땅은 지층이 얇고 무수히 많은 돌들이 묻혀 있는 돌짝 밭이다. 따라서 그러한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밭을 일구는 작업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악조건을 지니고 있는 중에도 유다, 에브라임, 암몬, 모압 지방의 구릉지대는 석회질 토양이어서 비교적 농사가 잘된다. 그리고 바산, 길르앗, 갈릴리 지역은 비록 고원지대이긴 하나 현무암 토양이어서 또한 곡식이 잘 자란다.
③ 기후
가나안은 기후 변화가 매우 심하다. 특히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건기(4-9월)와 우기(10-3월)가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나안에서는 우기(雨期)가 시작될 무렵에 파종하고 우기가 끝날 무렵에 추수를 한다. 이밖에도 기온과 바람, 습기 등이 일상생활 및 농사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
(2) 주요 농작물
가나안의 주요 농작물은 밀과 보리, 올리브(olive)와 포도 등이다(대하2:15, 시104:15). 그런데 지리적 여건에 따라 각 지역별로 주요 수확물이 뚜렷이 구분된다
① 포 도
유다 산지(山地)가 주 생산지이긴 하나 지중해 연안 전 지역에 걸쳐 재배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블레셋 평원에는 포도원이 많았다. 보통 포도원들은 넓은 전원에 개간 되었지만 때로는 집에 딸려 있는 것도 있었다(왕상21:1). 봄이 되면 농부들은 포도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돌 벽이나 울타리를 두름으로써 여우나(아2:15) 도적의(렘49:9) 침입을 막았다. 더불어 새로운 묘목을 심으며 버팀목을 만들어 가지가 쳐지는 것을 막았다. 한편 포도의 수확 철(8,9월)이 되면 온 가족이 임시 막사에 기거하면서 포도를 딴다. 이 포도는 이스라엘인의 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가운데는 포도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한편 포도는 과일채로 먹거나 건포도를 만들어 먹기도 하나 대개 포도즙과 포도주로 만들어 상용(常用)한다.
② 올 리 브
추위를 타는 점 외에는 비교적 가뭄에 잘 견디며 척박한 땅에서도 생명력이 강한 올리브 나무는 유대 남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특히 헤브론, 베들레헴, 이푸나, 나불루스 등 팔레스틴의 중앙고지에 밀생(密生)한다.
계단 형태로 만들어 놓은 구릉 지대에서 재배되는 올리브열매로 먹기도 하나 대개 기름을 짜내는 원료로 사용된다. 따라서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는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만드는 압축기 유물들이 많아 발견된다.
이 올리브유는 옛부터 식용, 조명용, 약용, 미용용, 그리고 종교 의식용으로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한편 올리브 나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풍요를 상징하는 묘사에도 등장한다(신6:11, 8:8). 따라서 이 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예언에도 사용되며(렘11:16, 호14:6) 저주에 대한 묘사에도 나타난다(신28:40, 욥15:33).
③ 보 리
밀과 더불어 보리는 팔레스틴의 주요 곡물이다. 즉 보리는 말과 나귀의 여물(왕상4:28) 및 가난한 사람의 식량으로 주로 사용되었다(룻2:17, 요6:9,18). 따라서 보리 경작의 실패는 국가적인 재앙으로 간주되었다(욜1:11). 한편 보리는 가을 이른 비가 내린 후에 파종되었고 그 이듬해 봄에 추수되었다(룻2:23). 그러나 추수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여리고 근처의 낮은 땅에서는 보통 4월부터 추수가 시작되었고(수3:15) 고원 지대에서는 5월 도는 6월 초순이 되어서야 추수가 시작되었다. 밀 추수는 그 후 약 4주 후에 이루어졌다.
④ 밀
곡식 중 밀은 가장 중요한 곡물로 취급되었다. 밀의 재배를 위해서는 보리보다 더 토질이 좋으며 물이 풍부해야 하므로 갈릴리 주변이 가장 잘 자라는 지역이었다. 한편 밀은 보리와는 달리 고급 곡물로 취급되었다. 주로 이는 낱알을 빻아서 만든 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는데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낱알의 겉껍질을 벗겨 빻은 고운 밀가루로 만든 빵은 특별한 손님의 접대나(창18:8) 제상용으로 사용되는 고급품으로 인정받았다(출29:2). 성경 가운데는 이러한 밀의 추수(삼상6:13), 타작(대상21:20), 정돈과 키질(마3:12),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두로와의 무역 상품으로도 묘사된다(왕상5:11). 이처럼 밀은 생활과 밀접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보살핌(시81:16), 저주(욥31:40), 신부의 아름다움(아7:2)을 묘사하며 영적 교훈을 위한 비유로도 자주 등장한다(마3:12, 눅16:7, 고전15:37, 요12:24).
⑤ 대추야자
성경에서 `종려`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대추 야자(datepalm)이다. 대추야자 나무는 사해를 중심한 요단 계곡 일대에서 주로 자란다. 특히 여리고는 `종려나무 성읍(신34:3, 삿1:16)이라 불릴 정도로 이 나무가 흔하다. 그러나 출애굽 여정 가운데 엘립에도 종려나무 70주가 있었고(출15:27, 민33:9), 엘랏(신2:8), 엘롯(왕상9:26) 등도 종려 나무와 관계된 지명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아카바 만에서 유대 남부, 중부 지방까지 이 나무가 자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이 나무는 그 모양이 유려하다는 점에서 신부의 품위 있는 모습(아7:7,8), 이스라엘 통치자의 상징(사9:14)뿐 아니라 종교적 기물에도 자주 등장하여 솔로몬 성전 벽, 문, 문설주 등에 새겨졌다(왕상6:29,32,35). 한편 유대인은 그 열매를 생으로 혹은 술에 담구어 먹기도 하였다.
⑥ 무화과
무화과는 아담과 하와가 그 잎으로 수치를 가리는 사건에서부터 언급되기(창3:7) 시작한 유대인에게는 매우 친근한 과목이다. 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의 풍부한 무화과를 보고 매혹되었다(민13:23, 신8:8). 이는 돌싹 밭에도 잘 자라는 무화과가 팔레스틴 전역에 걸쳐 재배되는 풍부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처럼 팔레스틴의 대표적인 과목인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도 이용되었다. 즉 유대인 추방의 비유(렘24:3)와 민족적 재난의 에언들(렘5:17, 호2:12, 욜1:7,12, 암4:9)과 평화와 번영의 상징으로서(왕상4:25, 왕하18:31) 무화과가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를 저주한 것도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외식에 대한 책망으로 볼 수 있다(마21:18-21).
한편 팔레스틴의 무화과는 어디에나 흔해 무화과의 일종인 일명 애굽 무화과라 불리우는 뽕나무에 삭개오가 올라갈 수 있었으며(눅19:4), 한 해에도 여러번 과실을 맺으므로 가난한 자나 여행자의 식량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열매는 생으로 먹기도 하나 말려서 과자로 만들어 오랫동안 보관하며 먹기도 했다(신8:8). 또한 그 수확은 대개 1년에 두 번 걸쳐 이루어지는데 첫 수확은 6월, 두 번째 수확은 8월경에 이루어졌다.
과제3. 가나안의 목축업을 요약하라.
가나안의 일상적인 산업은 목축업이었다. 이는 팔레스틴이 대규모 농업에는 부적합한 척박한 땅이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본래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창47:3).
또한 저들은 예배 의식상 하나님께 가축을 희생(犧牲) 제물로 드려야 하였으니 가축을 기르는 일은 불가피하였다. 이와 더불어 가나안에는 비교적 초원과 산지가 많았는바 가축을 기르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이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틴에는 유목(遊牧)하는 과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① 양
성경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기사 가운데서 이미 양의 사육 사실이 묘사된다(창4:2). 이처럼 양은 인류 초기에 가축이었을 뿐 아니라 팔레스틴의 가장 일반적인 목축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성경 가운데는 양(히, 촌; 헬, 프로바톤)이 500회 이상이나 언급된다.
성경시대에 양은 인간에게 고기(삼상14:32), 젖(사3:21-22), 옷감 짜는데 필요한 양털(레13:47-48), 거친 옷을 만드는데 쓰이는 양피(히11:37), 장막의 덮개(출26:14)등 일상생활에 필요했을 뿐 아니라 번제(레1:10), 속죄제(레4:32), 속건제(레5:15), 화목제(레22:21) 등의 희생 제물의 중심 요소였다(출20:24).
이처럼 양은 족장 시대 이후로 계속 사육되어 온 인간과 친근한 가축이므로 성경 가운데는 이에 대한 묘사가 많다. 즉 양은 애정이 깊고(삼하12:3), 비 공격적이며(사53:7), 자기 방어 능력이 약하여(미5:8) 끊임없는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민27:17), 인간을 양으로 비유하며 목자 되신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준다(시23:1). 또한 양이 희생 제물을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모든 죄인의 대속자 되신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비유하기도 한다(요1:29).
② 염소
염소도 가나안의 주요 가축 가운데 하나였으나 양이나 소에 비해 그 수효나 가치에 있어 훨씬 못 미쳤다. 그러나 양이 언덕이 적은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던 반면 염소는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잘 자랐으므로 계속 사육되어 왔다.
한편 팔레스틴 주위에 사는 어떤 종류의 염소는 양과 그 모양이 흡사하다. 즉 주의 깊게 살펴보아서 꼬리가 치켜 올라간 여부를 확인하여야만 염소를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염소는 양과 더불어 사육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그 구분의 어려움을 들어 최후의 심판을 양과 염소의 구분으로 비유하고 있다(마25:31-46). 한편 염소는 고기나 젖을 취하며 가죽을 이용하는 목적으로 사육되었다.
③ 소
가나안에서는 대개 초장에 소를 풀어 놓아 길렀으나(민22:4), 풀이 풍부하지 못한 연고로 마굿간에 매어 골고루(눅13:15) 짚을 먹였던 경우도 있었다(사11:7). 이처럼 소는 양이나 염소처럼 대규모로 사육하기가 힘들었으므로 식용(食用)으로 보다는 농업용 혹은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다. 즉 소는 수레와(민7:3), 쟁기와(삼상11:5), 탈곡기를(신25:4) 끌었다. 이처럼 소는 사람들과 가가이 있었으므로 사람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 효용성이 높았기 때문에 절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성경은 소와 관련된 입법이 따로 명시되어 있다(출21:28). 또한 소는 주요 제물이었을(출20:24) 뿐 아니라 힘든 일을 마다 않고 묵묵히 해내는 종교적 미덕(美德)의 상징물로도 이용되었다. 솔로몬 성전에 부어 만든 바다는 12마리의 청동소가 떠받치고 있었으며(왕상7:25), 놋으로 만든 10개의 받침판에도 사자와 소와 천사들이 조각되어 있었다(왕상7:29).
④ 말
말은 B.C 2000년경부터 근동에 도입되었으며 이집트(출14:9), 가나안(삿5:22),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이 사용한 흔적들이 발견되나 히브리인들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동물이었다. 이는 히브리인들이 말을 이방 적이며 사치를 조장하고 물리적 힘을 나타내며 또한 전쟁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와(신17:6) 사무엘은(삼상8:11) 말의 수효를 늘이는 것을 반대했으며, 여호수아는 가나안 전쟁의 전리품인 말의 힘줄을 자름으로써 전쟁에 사용치 못하게 했다(수11:6,9). 그러나 다윗을 거쳐(삼하8:4) 솔로몬에 이르러서는 4만필의 말과 4000채의 마사(馬舍)를 가질만큼 말에 의존도가 높아졌다(왕상4:26, 대하9:25). 따라서 예루살렘 성에는 마문(馬門)까지 생겨나게 되었다(느3:28, 렘31: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민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말고기의 식용도 율법 상 금했으므로(레11:4, 왕하7:13) 더 넓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⑤ 나귀
나귀는 비교적 일찍 사육되기 시작하였으므로(B.C.3000년경) 성경에서도 족장 시대부터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창42:26, 49:14). 즉 성경에서는 나귀는 주로 짐을 나르거나(삼상16:20), 농사짓는 일에(사30:24) 이용되었으나 운송수단으로 언급된 경우도 많다(출4:20, 민22:21). 이는 나귀가 끈기 있고 힘이 세며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누구든지 쉽게 사육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포로기 직후 유대사회에서의 나귀 수효는 다른 가축의 수효를 능가할 수 있었다(스2:66-67, 느7:68-69). 그러나 율법은 굽이 갈라졌으나 새김질을 못하는 나귀를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했다(신14:3-8). 따라서 이는 식용으로 사용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는 말과는 달리 평화를 상징하는 짐승이므로 평화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나귀를 탈 것이 예언되었다(슥9:9).
⑥ 낙타
낙타는 다른 짐승들과 달리 주로 사막을 가로질러 먼 지방으로 여행하는데 필요한 동물이었으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크게 유용한 가축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낙타를 얻었고(창12:16), 그의 종 엘리에셀은 열 마리 낙타를 이끌고 바닷 아람으로 여행을 했다. (창24:10). 또한 라헬이 드라빔을 감춘 곳도 낙타 안장이었다(창31:34). 이처럼 낙타는 족장 시대 뿐 아니라 사사 시대(삿6:5), 다윗 시대(삼상27:8-9), 솔로몬 시대(왕상10:2)에도 계속 등장한다. 신약 시대 세례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었으며(마3:4), 예수님께ㅐ서도 낙타를 들어 부한 자가 구원 얻기 어려움을 말씀하셨다(막10:25). 이처럼 낙타가 성경에 자주 언급됨에도 불구하고 정착 생활을 하던 유대인에게는 큰 효용성이 없었고 그 고기 역시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으므로(레11:4) 실제로 잘 사육되지는 않았다.
⑦ 기타
위에서 언급한 짐승들 외에도 성경은 가축으로서 기타 동물을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 돼지는 팔레스틴 원주민들이 사육하고 잡아 먹었으며 헬라인에게는 가장 흔한 희생 동물이었으나 히브리인들에게는 부정한 금기 동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팔레스틴에는 야생 돼지들이 많았고 농작물을 해쳤다(시80:13). 한편 히브리인들 거주지를 벗어나면 돼지 사육은 흔하였다. 이는 돼지 기르는 자가된 탕자의 비유나(눅15:11-32), 가달 지방에서 귀신 들려 몰살한 돼지 떼의 이야기 속에서도 확인된다(마8:28-34). 또한 다른 문화권에서 개가 중요시되는 것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은 이를 경시했다. 그러나 개가 집안의 식사 장소 가까이 갈 수 있었으며(마15:26-27), 양 떼를 지키는 것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욥30:1) 히브리인과의 접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 묘사한 대부분의 개는 야생 개로서 시체나 썩고 더러운 것을 먹는 성질이 사나운 동물이었다. 따라서 성경 가운데는 개를 비하시켜 불결함을 표현하는 비유로 자주 사용하였다(신23:18).
과제4. 가나안의 식물들을 열거하라.
(1) 곡물
가나안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곡물은 밀과 보리이다. 그 밖에도 콩과 팥, 귀리와 조 등이 조금씩 생산된다. 이 중 밀과 보리는 이스라엘인들의 주식(主食)인 빵의 원료가 되며, 조와 귀리 등은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① 밀 (레23:14, 신8:8, 삼상25:18, 왕하4:42)
특징 : 원산지는 근동 아시아와 중부 아시아이다. 가나안에선 10, 11월에 파종하여 다음해 5,6월에 추수한다. 가장 중요한 곡물 중의 하나로 갈아서 빵을 구워 먹거나 볶은 곡식 채로 먹는다.
상징적 의미 : 하나님의 말씀 (렘23:28), 영적 축복(시81:16)
② 보리 (출9:31, 민5:15, 욥31:40)
특징 : 가나안에서 가장 오래 전부터 경작되던 곡물이다. 파종 시기는 밀과 같으나 수확 시기는 3,4월 경이다. 가난한 서민들의 주요 식량으로써 밀보다 경작하기가 수월하다.
상징적 의미 : 강인함
③ 나맥 (출9:32, 사28:25, 겔4:9)
특징 : 일명 귀리 또는 쌀보리라고도 한다. 밀의 변종으로 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수확한다.
④ 조 (겔4:9)
특징 : 일년생 초본으로 죽을 수거나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나 대개는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
⑤ 콩 (삼하17:28, 겔14:9)
특징 : 중국이 원산지이다. 가나안과 인접 지역의 들판이나 밭에서 잘 자란다. 이 역시 가축의 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⑥ 팥 (창25:34)
삼하 17:27-29
오랜 옛날부터 밭 작물로 재배되어 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데 주로 죽을 쑤어 먹는다.
(2) 유실수 (有實樹)
가나안에서 널리 재배되는 포도와 무화과는 이스라엘인들이 빵과 함께 즐겨 먹는 상용(常用) 음식물이다. 그리고 그 밖의 유실수 중에서 올리브는 식용외에도 다용도 기름을 추출 해 낼 수 있는 소중한 열매이다.
① 살구나무 (창43:11, 출25:33, 렘1:11)
특징 : 성경에선 일명 파단행(巴旦杏)으로 번역되어 있다. 실제로는 근동 지방에 흔한 감 복숭아 나무를 가리킨다. 열매에 고단위 지방질이 함유되어 있어 미용에 좋다.
상징적 의미 : 부활, 소망, 각성, 보호
② 사과나무 (잠25:11, 아7:8)
특징 : 성경에서 가리키는 사과란 실상 살구이다. 봄철에 연분홍 꽃이 흐드러지게 피며 열매는 서양 오얏과 비슷하다.
상징적 의미 : 아름다움, 향기로움
③ 무화과 나무 (민13:23, 20:5, 마7:16)
특징 : 가장 인기 있는 과실수 중의 하나이다. 고대로부터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 여러나라에서 재배 되었는데 그 열매는 당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상징적 의미 : 자유, 번영
④ 쥐엄나무 (눅15:16)
특징 : 자웅 이주(雌雄 異株)로서 주로 늦여름에 꽃이 피고 그로부터 약 10개월 후에 열매를 맺는다. 달콤한 맛을 지닌 열매는 사람이 먹기도 하나 대개 가축 사료로 쓰인다.
⑤ 뽕나무 (삼하5:23, 대상14:14-15, 눅17:6)
특징 : 열매가 검은 것과 흰 것 두 종류가 있다. 이중 흰색 뽕나무는 누에를 치기 위한 것이며 검은 뽕나무는 식용이다. 원산지는 페르시아로 추정되는데 요단 계곡에 많이 자란다.
⑥ 비자나무 (창43:11, 아6:11)
일명 호도나무라고도 한다. 원산지는 페르시아와 트랜스코아로 추정된다. 그 열매는 흔히 날것으로도 먹으나 간혹 볶아 먹기도 한다.
⑦ 감람나무 (창8:11, 삿9:8, 느8:15, 렘11:16)
장수하는 나무 중 하나로 오래된 것 중에는 1,000년을 넘은 것도 있다. 대개 5월에 꽃이 피며 그때로부터 5,6개월 후에 열매가 맺힌다. 열매는 50%이상이 기름 성분을 지니고 있어 먹기도 하나 주로 기름을 짜 여러 용도에 사용한다.
상징적 의미 : 번식, 화평, 축복, 아름다움
⑨ 종려나무 (레23:40, 삿4:5, 요12:13)
성경에서 말하는 종려나무는 실제로 대추 야자나무이다. 열매는 당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영양가가 높다. 때문에 사막에 사는 배두윈족들은 낙타 젖과 대추 야자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상징적 의미 : 의, 승리, 아름다움
⑩ 석류나무 (출28:33, 민20:5, 신8:8)
원산지는 동인도 제도이다. 열매는 오렌지 크기이며 새콤하고도 감칠 맛을 지니고 있다. 즙으로 술을 빚기도 하며 열매 껍질은 염색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상징적 의미 : 풍요
⑪ 포도나무 (창40:10, 신8:8, 사7:23, 마7:16)
온대에서 아열대 비방에 걸쳐 널리 재배되는 나무이다. 그 종류만 해도 수백 종으로써 형태와 색깔, 맛과 당분 등이 각기 다르다. 가나안에선 8,9월이 포도 수확 철이다.
상징적 의미 : 평화, 비옥, 번영
(3) 채소와 박과(珀果) 식물
근동 인들의 기본 요리 재료에 양념으로 추가하는 파, 마늘, 부추 등은 가나안에서도 자생하거나 재배된다. 그리고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수박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가나안에서 재배되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① 파 - 민11:5
성경에서 말하는 파는 실상 양파이다. 가나안에는 이웃 애굽에서 전래 되었는데 점차 개량종이 개발되었다.
② 마늘 - 민11:5
백홥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소아시아 여러나라에서 일찍부터 재배되었다. 주요 양념의 하나로 특이하고 짙은 냄새가 난다.
③ 부추 - 민11:5
매운 맛을 지닌 초본으로 날 것으로도 먹으며 양념으로도 사용한다. 근동 여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부추와 비슷하다.
④ 수박 - 민11:5
가나안과 그 밖의 지역에서도 즐겨 먹는 과실이다. 살과 즙이 많은 과육은 향기가 좋고 청량제 구실도 한다.
상징적 의미 : 풍성함
⑤ 외 - 민11:5
열대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참외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애굽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재배되었다.
(4) 섬유식물
가나안의 주요 밭 작물 중 하나인 삼, 즉 아마(亞麻)는 근동 지역의 대표적 섬유 식물이다. 한편 목화가 언제부터 가나안에서 재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① 삼 - 출9:31
성경에서 말하는 삼은 대개 아마를 가리킨다. 아마를 손질하여 배를 짜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알려져 왔다. 그 열매는 짜서 기름을 뽑으며 남은 열매 찌꺼기는 사료로 이용된다.
② 목화 - 에1:6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지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재배되었다. 다년생 초본으로서 열매 안에 희고 긴 실로 싸여 있는 씨앗이 들어 있다.
상징적 의미 : 온화함
(5) 향료와 조미료
성경에 언급된 것들 중에는 박하처럼 가나안에 자생하는 것도 있으나 외국에서 수입해 쓰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① 회향 - 사28:25, 마23:23
일년생 초본으로 꽃은 노란 색깔이다. 열매는 납작하고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 있는데 방향성(芳香性)이 있어 약용, 향료로 쓰인다.
상징적 의미 : 지혜
② 갓 - 출16:31, 민11:7
지중해 동부 연안이 원산지이다. 열매는 약용으로 쓰이며 잎은 채소와 향료로 쓰인다
③ 대회향 - 사28:25, 마23:23
일년생 초본이다. 강력한 방향 성분을 지니고 있는 열매로 향료, 음료, 과자, 빵 등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④ 박하 -눅11:42
가나안 도처에서 자생하는 물풀과(Mentha) 식물이다. 잎과 꽃에서 향료를 채취한다.
상징적 의미 : 지혜
⑤ 겨자 -마13:31, 17:20
가나안 도처에선 잡초처럼 취급되는 흔한 풀이다. 씨앗은 아주 작고 검은 색을 띤다.
상징적 의미 : 작음
⑥ 번홍화 - 아4:14
다년생 초본이다. 향수 및 의약품, 염료를 만드는데 사용되는데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⑦ 침향 - 시45:8, 잠7:17, 요19:39
남부 아시아에 자생하는 열매를 맺는 상록 교목이다. 약품과 향료로 사용되며 향기가 좋아 그 나무는 분향용으로도 쓰인다.
상징적 의미 : 이스라엘 교회
⑧ 유향 - 아1:14, 4:13
달콤한 향내가 나는 흰 꽃이 피는데 잎사귀를 짓이겨 빨강, 노랑, 오렌지 색깔의 물감을 얻을 수 있다. 여인들이 화장하는데 이용하기도 한다.
상징적 의미 : 아름다움
⑨ 창포 - 출30:23, 아4:11
인도 및 인근 지역에서 향료로 널리 사용한다. 다년생 초본으로서 방향유를 뽑을 수 있는 식물이다.
상징적 의미 : 아름다움
⑩ 육계 - 출30:23, 잠7:17, 아4:14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반도 등지에서 자생하는 상록 교목이다. 식물의 뿌리에 대단히 향기로운 성분이 들어 있어 행수와 향료로 사용된다.
상징적 의미 : 호의
⑪ 풍자향 - 출30:34
키 큰 다년생 초본으로 노란색 또는 연두색 꽃이 핀다. 줄기와 뿌리에서 점착성(粘着性) 액체가 나오는데 불에 태우면 강한 향기가 난다.
상징적 의미 : 부귀
⑫ 몰약 - 창37:25, 아5:13, 막15:23, 요19:39
서남 아라비아, 아비시니아, 소말릴란드 등지에 자생한다. 가지나 줄기에서 향기가 나는데 나무껍질에 상처를 내면 약간 떫고 매운 진이 나온다. 이 수지는 약재, 향수 원료, 방부제 등오 사용된다.
상징적 의미 : 연인(아1:13), 입술(아5:13)
⑬ 나드 - 막14:3, 요12:3
마타리라의 다년생 초본이다. 히말라야에 자생하는데 여러나라에서 향료로 상용한다.
(6) 임목(林木)과 관목(灌木)
성경에서 흔히 언급되는 나무들로는 백향복, 상수리 나무, 조각목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백향목은 성전과 왕궁을 짓는데, 그리고 조각목은 성막(tabernacle) 및 성막 기구 제작에 사용되기도 했다(출25:10, 23, 26:15,26)
① 백향목 - 레14:4, 왕상4:33, 시80:10, 겔27:5
레바논의 특산물이며 소나무의 일종이다. 재질이 단단한데다 잘 썩지 않으며 윤기와 향기가 좋아 가구나 고급 건축 자재로 사용된다.
상징적 의미 : 영광, 위엄, 아름다움
② 조각목 - 출35:7, 36:20, 37:1, 신10:3
시나이 반도에 자생하는 싯딤 나무이다. 일명 애굽 아카시아로도 불리나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아카시아와는 다르다. 나무에 웅이가 많고 가늘어서 훌륭한 목재는 아니나 내구성이 강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상징적 의미 : 강인함
③ 떨기 나무 - 출3:2-4
장미과에 속하는 떨기류로 가나안과 시리아 전역에 자생한다. 높이는 90cm 가량이며, 흰 꽃 또는 분홍 꽃이 송이를 이루며 핀다.
④ 잣나무 - 사41:19, 60:13, 겔27:5
동부 지중해 연안국에 자생한다. 관상요 또는 방풍림으로 심기도 하는데 높이는 9-15m이다.
상징적 의미 : 하나님, 축복
⑤ 로뎀 나무 - 왕상19:5
가지가 많은 관목으로 싸리나무처럼 생겼다. 사막과 모래 언덕에서 자라는 나무로 배두윈 족들이 뗄감으로 사용한다.
⑥ 월계수 - 사44:14
가나안과 지중해 연안의 여러나라에 자생한다. 봄에 흰 꽃이 피며 열매는 검은 빛으로 장과(奬果)이다. 잎과 열매는 향료로 쓰이며 나무에서 나는 방향액은 약재로 사용된다.
상징적 의미 : 승리
⑦ 우슬초 - 출12:22, 레14:4, 요19:29
하얀 솜털이 나 있는 다년생 관목이다. 높이 30-60cm로 작은 흰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며 박하 향을 풍긴다.
상징적 의미 : 겸허, 비천
⑧ 짠 나물 - 욥30:4
명아주 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염분이 많은 땅에서 흔히 자라며 초록빛 작은 꽃이 핀다.
상징적 의미 : 궁핍
⑨ 화석류 - 느8:15, 사55:13, 슥1:8
60-12cm높이의 상록 관목이다. 식물 전체에서 향기로운 액이 나오므로 향수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상징적 의미 : 평화, 감사
⑩ 상수리 나무 - 창35:4, 수24:26, 사6:13
가나안과 동부 지중해 연안국에 흔한 참나무 과의 낙엽 교목이다. 높이 15m 정도이며 꽃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상징적 의미 : 거룩
⑪ 신풍 나무 - 창30:37, 겔31:8
낙엽 성 교목으로 가나안 북부 지방에서 주로 서식한다. 통칭 플라타너스인데 학계의 정식 명칭은 버즘 나무이다.
⑫ 버드 나무(a) -창30:37, 호4:13
동부 지중해 전역에 흔한데 우리나라의 버드나무와는 다르다. 봄에 꽃이 피는데 오렌지 나무의 꽃과 유사하다. 초록빛 열매는 개암과 비슷하다.
⑬ 버드 나무(b) - 레23:40, 시137:2
참 버드나무 또는 유프라테스 포플라로 추정된다. 강가나 산간 지대에서 볼 수 있으며 열매는 삭과(朔果)이다.
⑭ 에셀 나무 - 창21:33, 삼상22:6
사막, 모래 언덕, 늪지 및 강변 등 어디서나 잘 자란다. 늦여름에 꽃이 피는데 희고 자그마한 꽃이 송이를 이룬다.
⑮ 갈대 - 왕하18:21, 욥40:21
가나안 전역의 강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1.2-3m의 높이에 굵기는 1-2.5cm이다.
상징적 의미 : 심판, 연약함
왕골 - 출2:3, 욥8:11
사초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 3-4.5m 굵기는 3-8cm로 멍석, 파피루스, 작은 배 등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훌레 계곡 및 가나안 해안 평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애기 부들 - 출2:3, 5, 사19:6
다년생 초본이다. 가늘고 긴 줄기 위에 아주 조그마한 꽃과 열매가 달린다.
한글 개역 성경에선 갈대로 번역되어 있다.
상징적 의미 : 연약
가시 나무 - 출22:6, 마27:29, 요19:2
가나안에서만도 이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100여종이 있다. 가나안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가지로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만들기도 했다.
상징적 의미 : 멸시, 조롱, 고난
찔레 - 미7:4
식물 전체에 보드라운 털이 나 있는 다년생 초본이다. 사해 부근과 요단 계곡 남쪽에 자생하며 꽃은 연분홍 또는 푸른색이다.
상징적 의미 : 고통, 해약
엉겅퀴 - 창3:18, 사34:13
일년생 또는 다년생 초본으로 노란색 꽃이 핀다. 겨울에 나는 잎은 요리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상징적 의미 : 무가치, 고난
(7) 기 타
① 쐐기풀 - 욥30:7, 습2:9
일년생 초본으로 가나안에는 4종류가 있다. 꽃과 열매는 초록빛으로 눈에 잘 듸지 않는다. 습지, 쓰레기 더미, 길가에서 잘 자라며 몸에 닿으면 자주색 액체를 분비한다.
상징적 의미 : 불신앙 심판, 파멸
② 가라지 - 마13:24-30
벼와 식물의 독보리를 가리킨다. 낱알 껍질 밑에 자라는 곰팡이 탓으로 이 낱알이 들어간 밀가루는 씁쓸한 맛을 띠며 유독하다.
상징적 의미 : 죄악, 오염
③ 독초 - 신29:18, 렘23:15
가나안 전역의 황무지에 흔한 초본이다. 유독성을 지니고 있으며 당근과 비슷한 잎사귀가 난다.
상징적 의미 : 분노, 심판
④ 쑥 - 신29:18, 렘23:15
국화과 초본으로 우리나라의 쑥과 유사하다.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는 잎은 식용이나 약재로도 쓰인다.
상징적 의미 : 부정, 처벌, 고통
⑤ 쓴나물 - 출12:8, 민9:11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식물은 국화과 식물이다. 베두윈 족들은 쓴 맛이 나는데도 이것을 나물로 먹는다.
상징적 의미 : 슬픔
⑥ 박덩굴 - 욘4:6-7
스미스(Smith)와 같은 학자는 이를 아주까리로 추정하기도 한다.
아주까리는 아프리카가 원산지이다. 한편 박은 일년생 초본으로 열매는 바가지를 만드는데 쓰인다.
상징적 의미 : 시원함
⑦ 합환채 - 창30:14-16, 아7:13
만드라고라(mandragora)라 불리는 식물이다. 희고 붉은 꽃이 핀 후 노란색 열매를 맺는다. 고대 근동 지역에선 최음제(催淫劑)로 사용되었다.
상징적 의미 : 사랑
과제5. 가나안의 동물들을 열거하라.
1) 가 축
① 말 - 창47:17, 왕상4:28, 에8:10, 미1:13
B.C.2000년대 초에 이집트를 침략한 힉소스족이 페르시아에서 중동으로 반입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에는 요셉 당시 이미 말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가서야 이스라엘인들이 본격적으로 사용하였다.
상징적 의미 : 활력, 날쌤
② 나귀 - 민22:21, 수6:21, 삿11:4, 눅19:35
정식명은 당나귀이다. 가나안의 나귀는 누비야 야생 나귀의 종자임이 어깨의 검은 색과 등줄로 쉽게 판명된다. 낙타가 등장하기 전까지 나귀는 사막 횡단에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운송 수단이었다.
상징적 의미 : 어리석음, 음란함
③ 노새 - 삼하13:29, 왕하5:17, 대상12:40
이는 숫당나귀와 암말의 잡종이다. 그런데 율법에는 이종 교배(異種交配)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가나안에선 노새의 증식이 불가능하였으니 자연히 외국에서 수입하여 썼다.
상징적 의미 : 우둔함
④ 돼지 - 레11:7, 사65:4, 막5:11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스라엘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그러나 가나안의 이교도들은 돼지를 길렀다.
상징적 의미 : 부정, 불결
⑤ 낙타 - 창32:15, 삿7:12
단봉 낙타와 쌍봉 낙타 두 종류가 있다. 아라비아인과 그 밖에 유목민은 매우 오랜 옛날부터 낙타를 운송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상징적 의미 : 온순함
⑥ 소 - 창12:16, 신7:13, 삼상11:5
희생(犧牲) 제사 제물로도 사용되는 소는 주로 농사일에 사용하기 위해 사육된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소를 식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상징적 의미 : 성실
⑦ 염소 - 레1:10, 민18:17, 아4:1
젖은 풀을 좋아하지 않는 염소는 관목이 무성한 언덕에서 잘 자란다. 가나안에서 손님이 오면 염소 고기를 요리하여 대접하는 것이 관례였다.
상징적 의미 : 완고함
⑧ 양 - 창4:2, 레3:7
이스라엘인들의 최대 재산인 양은 털과 젖, 고기를 제공해 주는 매우 유용한 가축이다.
성경에는 최초로 아벨이 양치는 자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상징적 의미 : 평화
⑨ 개 -신23:18, 왕상14:11
가나안에선 아주 흔한 짐승이다. 그런데 일부 집에서 사육되는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거리를 서성이며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야생 견으로서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 당하기도 한다.
상징적 의미 : 무가치함, 악함
2) 야생 포유류
① 박쥐 - 레11:19
동굴과 폐허지에서 주로 서식한다. 율법의 정결 규례상 부정한 짐승ㅇ로 취급되고 있디.
상징적 의미 : 부정함
② 고슴도치 - 사14:23, 습2:14
가나안에는 3종류의 고슴도치가 서식하고 있다. 주로 산기슭이나 바위가 많은 곳에 살고 있다.
상징적 의미 : 황폐함
③ 이리 - 창49:27, 마7:15
가나안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대개 한두 마리씩 돌아다니면서 목자와 가축을 습격하곤 한다.
상징적 의미 : 교활함, 포악함
④ 재칼과 여우 - 시63:10, 애5:18, 사34:14, 삿15:4
재칼을 오늘날에도 가나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유동물이다. 여우와는 달리 썩은 고기를 먹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떼를 지어 다니는 재칼과 달리 여우는 암수가 같이 다니거나 단독으로 다닐 뿐이다.
상징적 의미 : 교활함
⑤ 곰 - 삼상17:34, 사11:7, 계13:2
성경 시대에 곰은 가나안의 산악 지대 전역에 서식하고 있었다. 이들 곰은 가축과 과일 나무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전멸되었다.
상징적 의미 : 미련함, 적 그리스도
⑥ 사자 - 욥4:11, 잠30:30
가나안에선 13세기경에 전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방의 사자는 페르시아 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징적 의미 : 용맹, 위엄
⑦ 표범 - 합1:8
오늘날에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레바논과 헤르몬에서 한 마리씩 가나안으로 넘어 오는 경우가 있다. 사자와 마찬가지로 고양이 과에 속하는 맹수로 사슴, 영양 따위를 잡아먹고 산다.
상징적 의미 : 날쌤
⑧ 너구리 - 레11:5, 잠30:26
성경에선 사반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실상은 시리아 바위 너구리이다. 사해 골짜기에서 헤르몬에 이르는 지대의 바위 틈에 주로 산다.
상징적 의미 : 부정함
⑨ 들나귀 - 욥6:5, 사32:14
성경 시대 가나안에선 시리아의 들 나귀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시리아 사막에서 들 나귀가 사라진지는 대략 100년이 된다.
상징적 의미 : 완고함
⑩ 사슴 - 신14:5, 왕상4:23
과거 가나안에는 오늘날 중동 북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3종류가 살았다. 그러나 현재에는 1종류도 남아 있지 않다.
상징적 의미 : 평화
⑪ 가젤 영양 - 신12:15, 왕상4:23
한글 개역 성경에선 노루로 번역되어 있다. 그 우아한 자태로 인해 종종 아름다움의 표상으로 언급된다.
상징적 의미 : 아름다움
⑫ 야생 염소 - 욥39:1, 시104:18
성경에 언급된 것 중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누비아 야생 염소뿐이다.
성경에선 산양, 산 염소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상징적 의미 : 지도자, 파괴자
⑬ 뿔긴 사슴 - 신14:5
영야의 일종인 아라비아 오릭스(Oryx leucoryx)인 것으로 추정된다. 율법의 정결 규례상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된다.
⑭ 영양 - 신14:5, 사51:20
영양 또는 야생 들 양으로 추정되는 반추 동물이 성경 시대 가나안에 살았음은 분명하다.
⑮토끼 - 레11:6, 신14:7
팔레스틴 토끼 외에도 희귀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그 정확한 종류는 알 수 없다.
상징적 의미 : 경망함
두더지 -레11:29, 사2:20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시리아 두더지이다. 작은 곤충과 나무뿌리를 찾아 땅굴을 파는 습성이 있다.
상징적 의미 : 부정함
쥐 - 삼상6:5, 사66:17
설치류(齧齒類)의 모든 짐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떼를 지어 다니면서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등 그 폐단이 심하다.
상징적 의미 : 부정함
3) 새와 물고기
① 매 - 신14:13, 욥28:7
성경에선 매와 독수리 종류를 모두 지칭한다. 가나안에선 몇 가지 종류가 발견되는바 솔개, 수염수리 등이다.
상징적 의미 : 날쌤
② 올빼미 - 레11:16-17
부엉이류를 포함하는 말이다. 야행성으로 주로 동굴이나 폐허지 부근에 서식한다.
상징적 의미 : 황폐, 부정
③ 타조 - 사13:21, 미1:8
아프리카가 본래 서식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키 2-2.5m에 체중 130-140kg 정도 나가는 큰 새이다.
상징적 의미 : 잔인, 부정
④ 황새 - 신14:18, 렘8:7
검은 목 두루미, 학 등과 같은 종류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새들은 대개 봄에 가나안을 찾는 철새들이다.
상징적 의미 : 우아함
⑤ 비둘기 - 창15:9, 레1:14
집비둘기와 산비둘기 두 종류가 있다. 요단 골짜기, 게네사렛 지방의 골짜기 등지에 산비둘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상징적 의미 : 평화, 순결
⑥ 메추라기 - 출16:13, 민11:31-32, 시105:40
아프리카에서 겨울을 난 메추라기는 봄이 되면 떼를 지어 북쪽으로 이동하는데 가나안에서 메추라기를 볼 수 있는 때는 대개 이 시기이다.
상징적 의미 : 탐욕, 일용할 양식
⑦ 오리새(대승) - 레11:19, 신14:18
한글 개역 성경에는 대승으로 번역되어 있다. 가나안에는 초여름에 남쪽 나라에서 날아온다.
⑧ 까마귀 - 욥38:41, 눅12:24
가나안에는 8종의 까마귀가 있다. 가나안 전역에 걸쳐 서식하는데 성질이 사납다.
상징적 의미 : 재앙
⑨ 참새 - 시84:3, 마10:29
요단 골짜기에 특히 많이 서식한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들이다.
상징적 의미 : 고독
⑩ 제비 - 사38:14, 렘8:7
3-11월경에 가나안에 머물다가 겨울이 되면 다시 따뜻한 남방 지역으로 날아간다. 가나안에서는 서너 종류의 제비가 관찰된다.
상징적 의미 : 부르짖음
⑪ 물고기 - 창21, 마13:47
성경에선 물고기 총칭으로만 쓰였을 뿐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된 경우는 전무하다.
4) 파충류와 곤충류
① 이 - 출8:16, 시105:31
이목에 속하는 곤충의 촌칭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데 발진티푸스, 재귀열, 참호열 등을 매개(媒介)한다.
상징적 의미 : 재앙
② 벼룩 - 삼상24:14
벼룩과는 기생 곤총이다. 날개는 퇴화했으나 뒷다리가 발달되어 있어 잘 뛴다.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상징적 의미 : 미약함
③ 파리 - 전10:1, 사7:18
파리목의 곤총이다. 콜레라 등 나쁜 병원 균을 옮기는 유해한 벌레이다.
상징적 의미 : 우매자, 애굽(사7:18)
④ 메뚜기 -출10:4, 레11:22
가나안에는 40여종이 서식한다. 주로 떼를 지어 다니면서 농작물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다. 상징적 의미 : 약함, 무수함
⑤ 개미 - 잠6:6, 30:25
땅속이나 썩은 나무 등지에 집을 짓고 집단 생활을 한다. 가나안에만도 여러 종류가 있다.
상징적 의미 : 부지런함, 지혜
⑥ 꿀벌 - 삿14:8, 신1:44
가나안의 것은 검은 남방 형 꿀벌로 애굽 벌이나 이탈리아 벌과는 다르다.
벌꿀의 원기 회복과 치료 효과는 일찍부터 알려졌다.
상징적 의미 : 하나님의 군대, 아모리 족속
⑦ 거미 - 욥8:14, 사59:5-6
절지동물(節肢動物)로 거미목에 속한 곤충의 총칭이다. 똥구멍 앞에 있는 방적 돌기에서 거미줄을 내어 그물 같은 집을 쳐놓고 벌레가 걸리면 잡아먹고 산다.
상징적 의미 : 연약성, 헛됨
⑧ 전갈 - 신8:15, 겔2:6, 눅10:19
전갈과에 속하는 종류의 총칭이다. 가나안에만도 10여종이나 서식한다. 대개의 길이가 10-20cm이며 배 끝에 강한 독성을 지닌 독침이 있다.
상징적 의미 : 잔혹함
⑨ 거머리 - 잠30:15
거머리 과의 환형동물(環形動物)이다. 주둥이와 배 끝에 흡반이 있어 다른 동물의 살에 붙어 피를 빨아 먹고 산다.
상징적 의미 : 악의 세력
⑩ 개구리 - 출8:2, 시105:30, 계16:13
양서류(兩棲類)이다. 참개구리과, 맹꽁이과, 무당개구리과로 분류된다. 물속은 물론 물밖에서도 생활하는데 산란기에는 매우 시끄럽게 우는 특징이 있다.
상징적 의미 : 악한 영
⑪ 도마뱀(수궁) - 레11:30, 잠30:28
성경에는 수궁(守宮)으로도 번역되어 있다. 도마뱀과에 속하는 파충류로 가나안에 여러 종류가 서식한다.
상징적 의미 : 담대, 지혜
⑫ 뱀 - 창3:1, 출4:3, 마10:16
가나안에는 30여 종류가 있다. 독이 없는 뱀도 있으나 코브라, 살무사, 뿔뱀 등은 치명적인 독성을 지니고 있다.
상징적 의미 : 지혜, 간교함
제 4 장 해 안 평 야
과제1. 해안 평야의 지역적 특성을 약술하라.
1. 해안평야의 지형
1) 이곳은 지형적으로 산지지역에 비하여 낮은 평야지역이다. 해안평야는 여러개의 지역단위로 나누어지는데 이런 지역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평야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북족의 로쉬-하니크라 근처에서는 해안평야의 폭이 4-5km에 불과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그 폭이 넓어져 40km로 넓어지고 있다.
2)해안평야는 비옥한 지역이다. 해안평야의 비옥성은 중앙산지와 가까이 있어 비옥한 충적토와 강우량이 많은 지역이라 좋은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 늪지대가 형성된 곳도 있다.
3)해안평야는 역사적으로 당 시대의 바벨론과 이집트를 연결해 주는 가교적 위치에 있어 많은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에서 제일 개방된 지역이다. 해안선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연적인 항구가 거의 없는 해안으로 고대 때에도 자연적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 좋은 항구가 없었다. 그래서 역대의 통치자들은 빈약한 항구시설을 보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었다. 해안평야는 2개의 산(지중해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갈멜산과 로수ㅟ하니크라)과 3개의 강으로 인해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진다(갈멜산 아래쪽의 악어강, 욥바근처를 흐르는 야르콘강, 그리고 해안평야의 남쪽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애굽강).
*평야의 구분
1) 악고평야 : 로쉬-하니크라에서 갈멜산까지의 지역 - 아셀지파 평야, 스블론 평야라고도 함.
2) 돌평야 : 갈멜산에서 악어강까지의 지역 - 큰 의미는 없다.
3) 샤론평야 : 악어강에서 야르콘강까지의 지역 - 가까이에 욥바(오늘날 텔아비브)가 있다.
4) 블레셋평야 : 야르콘강에서 엘아리쉬강까지의 지역 - 블레셋지역
여기에서 악고와 샤론평야는 늪지대로 해안평야에서는 쓸모가 없다 - 산밑에서 샘이 흘러 하천이 되어 낮은 지역으로 흘러 웅덩이 또는 바위에 걸려 대부분이 늪지라 쓸모가 없다.
2. 해안평야의 지형적 구조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해안지역에서 정착하지도 못했고 또 해상활동을 전개하지도 못했는데 그 이유로는 우선 갈멜산 이남의 해안지역은 바위가 아닌 모래로 되어있기 때문에 좋은 항구를 만들 수 없었으며 또 이집트 나일강에서 쏟아져 나오는 진흙이 팔레스틴의 해안선까지 흘러 내려와 쌓임으로 깊은 항구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항구가 들어서는 조건에는 맞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해안은 두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하나는 모래언덕으로 덮혀있는 원만한 형태의 해안과 10~40m정도 높이의 가파른 절벽형 해안이다.
1) 해안지역
해안에서 발견되는 암석은 사암층인데 이것은 모래가 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칼슘라임 성분과 합쳐져서 마치 세멘트처럼 단단하게 된 암석인데 이 절벽형의 사암층 해안에는 이 절벽들과 거의 수직적인 방향으로 바다 속에 넓고 편편한 바위 층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절벽들과 편편한 바다바닥들은 모두가 바다 파도의 침식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로쉬-하니크라).
2) 모래언덕
강물에 의해서 해안 절벽이 없어진 곳에서는 육지로 통하는 넓은 입구가 강 하구에 생기게 되고 이곳을 통하여 바다바람은 모래를 육지 쪽으로 끌어오게 되어 형성된 모래언덕은 물의 흐름이 약한 지역에서는 그 주변에 습지를 형성시키게 된다 - 모래 언덕과 습지가 생긴다.
3) 평야지역
해안의 모래언덕이 있는 지역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면 사암층 언덕이 해안선과 나란히 형성되어 있다. 이 사암층 언덕은 바다로 부터의 모래의 유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결가 이 지역에서의 습지대 확산은 차단되고 비옥한 농경지가 형성된다. 그러나 해안에 가까운 지역은 바다에서 올라온 붉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모래토양은 샤론평야와 블레셋평야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나 오렌지와 같은 과일재배에 적합한 토양이다. 반면에 산지 가까운 쪽의 농경지는 산지에서 내려온 테라로사가 쌓여 형성된 충적토로서 채소나 곡식재배에 적합한 지역이 되고 있다.
3. 해안평야의 기후
이스라엘의 해안평야는 남쪽 이집트의 건기 아열대 기후와 북쪽 레바논 습기 아열대 기후가 교차하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남쪽은 점점 강우량이 많아지고 있는데 년 평균 강우량은 애굽강 근처는 150mm, 가자지역은 380mm, 샤론평야와 도르평야에서는 500mm, 악고평야는 660mm이고 이 지역은 습기가 많아 이슬이 내리는 날수가 년중 200여일을 넘고 있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에서의 이슬은 여름철 농작물에 특별히 중요한 것이다.
연중 평균온도는 화씨 70°인데 이 해안지역은 항상 바다에 의해 조성되기 때문에 계절에 높은 편이다. 해안지방은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으로 유명하다. 이 미풍은 아침에 불기시작하면 하루종일 계속 불어오면서 여름의 무더위를 잊게 해준다.
4. 해안평야의 특징
1) 바다와 관련된 경제
이스라엘의 해안은 항구의 입지 조건으로는 적합하지 않지만 고대시대의 욥바와 도르같은 항구에서는 무역을 위한 물자수송과 여행객들의 해상교통을 제공하였다. 그런가 하면 아스켈론과 아스돗은 어업이 발달하여 소금에 절인 고기 수출로 유명하였다. 또한 이곳 바닷가에서 발견되는 특수한 조개껍질에서 두로의 자주색 염료라고 불리우는 염료가 채취되는데 이 염료를 사용하여 일찍부터 이 지역에서는 옷감 직조업이 발달하였다. B.C 14c의 우가릿 문서에서는 악고, 아스돗, 아스켈론 도르 등지의 옷감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2) 농업과 관련된 경제
고대 이 지역에서의 농업은 해안의 구조 때문에 일부지역에서만 발달하였다. 해안에서는 해안선을 따라 놓여있는 모래언덕으로 인하여 농업이 불가능 하였지만 모래언덕 넘어로부터 산지 사이에는 비옥한 충적토지역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샤론 평야의 경우 이 지역의 많은 늪지대와 울창한 삼림으로 이곳에서 농업이 발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면 블레셋평야는 지형적으로 곡식생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3) 국제도로와 관련된 경제
당시 국제도로였던 해안길이 지나가는 이 지역은 도로로 인한 혜택도 있었지만 그것과 더불어 위험성도 함께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의 국제도로는 해안의 모래언덕이 육지로 깊이 침투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다 편리한 산지 쪽으로 형성되었다. 그에 따라 중요한 도시들도 모두가 산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국제도로가 이곳을 지나간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무역의 기회를 많이 주었으며 그런 이유 때문에 많은 도시들이 이 도로 주변에 세워졌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이지역은 군사도로로 바뀌면서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황폐화가 자주 잇따랐다.
과제2. 악고평야에 대하여 요약하라.
*악고평야의 지역적 특성*
악고평야는 로쉬-하니크라로부터 갈멜산까지 약 40km이며 해안에서 갈릴리산지까지의 동서간의 폭은 12km 정도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져 레바논과의 경계선인 로쉬-하니크라에서는 바다와 산지가 맞닿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성경시대 이 지역은 바닷가의 모래언덕으로 인하여 늪지대를 이루었다. 특히 오늘날의 하이파(Haifa)가 위치하고 있는 해안은 모래침전이 심하여 바다의 수심이 매우 얕으며 이 모래 퇴적은 멀리 악고지역까지 확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모래 퇴적은 항구 건설에 불리한 여건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다로 유입되는 강물의 흐름을 막아 넓은 늪지대를 형성하였다. 이런 자연조건으로 인하여 이 지역을 지나가는 주요 도로나 이 지역에 형성된 농경지는 바다 쪽이 아닌 내륙 안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악고평야는 아셀지파에게 분배된 땅으로 이스라엘은 이지역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의 중심도시는 악고인데 신약시대에는 돌래마이라고 개명되었다. 갈멜산과 지중해가 만나는 해안에서는 현재 이스라엘의 삼대도시 중의 하나인 하이파 도시가 위치하고 있다.
*악고평야의 중요한 지역들*
1) 로쉬-하니크라(Rosh-haniqrah)
악고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갈릴리산지의 한 지류가 서쪽으로 뻗어져 나와 지중해와 만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는 두로의 사닥다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것은 이곳이 북쪽으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두로와 가까우며, 지중해로 뻗어 나온 절벽 형 산 모양이 마치 게단형태를 하고 있어 붙어진 이름이었다. 사닥다리(ladder)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술람은 사닥다리이기 보다는 오히려 계단을 의미하고 있다(창28:12). 히브리어 명칭인로쉬-하니크라는 깨어진 틈이 있는 산 정상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로쉬-하니크라 절벽 밑에는 바다 파도로 형성된 커다란 석회암 동굴들이 위치하고 있다.
로쉬-하니크라는 레반트지역의 해안평야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자연 경게선이다. 이곳은 또한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해안에서의 북쪽 경계선이었으며 현재 이스라엘의 국경이 되고 있다.
2) 악고(Acco)
악고는 악고평야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옛 악고는 현재의 악고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내륙에 자리잡고 있었다. 악고는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는 가장 입지조건이 좋은 항구로서 악고는 헤롯대왕이 갈멜산 남쪽 해안지역 가이사랴의 인위적인 항구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해변의 유일하고 중요한 자연 항구였다. 악고 항구는 지중해의 강한 서남풍이 맞불어 닥치는 곳이라 페니키아 해변의 두로와 시돈만큼 항구로서 적절하지 못했으나 갈릴리 호수까지 통하는 동서 통로로서 큰 역할을 한 곳이다. 악고는 아셀지파에게 분배가 되었지만 다윗시대 때 까지는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영토가 되지 못했다. 솔로몬의 통치 때에 많은 갈릴리 지방이 두로 왕에게 넘어갈 때 이곳은 두로의 왕에게 편입되어 두로의 영역이 되었고(왕상9:10-13), 알렉산더의 정복이 있기까지는 뵈니게 지방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아셀지파는 이집트에 내려가지 않고 출애굽당시 이 지역에 이미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라시대에 악고는 중요한 항구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프돌레미 2세는 이곳을 돌레마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고 로마는 A.D 64년 이곳을 로마의 직접 식민지로 격상시켰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거의 마치는 A.D 57년경 두로에서 가이샤라로 가는 도중 이곳 돌레마이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적이 있었다(행21:7). 이곳에서 바울은 이 지역의 여로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기도 하였다.
십자군 시대의 악고는 중요한 항구도시였고, 1187년 힛틴의 뿔 언덕 전투에서 십자군이 살라딘 군대에게 패배하자 악고는 그후 약 100여년간 지속되었던 십자군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1291년 마므룩 군대의 43일간에 걸친 포위공격을 받으면서 악고는 마침내 함락되었다. 당시 미쳐 빠져나가지 못하고 배를 기다리고 있던 악고의 약 3만명 주민들은 무참히 살해 되거나 노에로 팔려갔었다. 악고의 함락을 마지막으로 팔레스틴에 있었던 십자군 역사는 끝나게 되었다.
3) 기손강(Nahar Kishon)
현재는 아랍어로 `나할 엘무콰타`라고 불리는 기손강은 무깃도 근처의 북부 사마리아 산지에서 시작되어 이즈르엘과 악고평야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이즈르엘 계곡을 거치면서 기손강은 길보아산과 나사렛 산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지류의 물들과 합류하여 흐르고 있다. 성경에는 기손시내(왕상18:40, 시83:9), 혹은 기손강(삿5:21)이라고 불렀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는 므깃도 물가라고 하여 그 강의 위치가 므깃도 근처임을 보여주고 있다(삿5:19). 그런가하면 스블론지파의 땅에 속한 지역으로서 욕르암 앞 시내라고도 불리웠다(수19:11).
시스라 군대의 강력한 마병이 패전하게 된 것은 폭우로 인하여 생기는 강주변의 진흙벌 때문이었다(삿5:20 이하).
기손강과 관련된 성경 역사는 삿4:7, 13, 5:21에서 드보라 사사시대 때 이스라엘의 바락이 시스라가 이끄는 가나안 군대와 전쟁을 벌렸던 지역이었으며 왕상18:40에서는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선지자들과 신앙대결을 벌린 후 이곳에서 그들을 처형시킨 장소였다.
4) 갈멜산(KMT. Karkmel)
중앙산지의 이블레안 부근에서 지중해 쪽으로 약 24km 뻗어나온 갈멜산은 현대도시 하이파에서 지중해와 만나고 있다. 갈멜산은 가장 높은 곳이 552m에 불과한 낮은 산지이다. 갈멜산의 이러한 낮은 산세 때문에 이스라엘을 지나가는 중요한 도로들은 대부분이 갈멜산을 지나가고 있다. 이곳을 통과하는 도로로서는 욕네암, 므깃도, 다나악 등을 지나는 통로 등이 유명하였다.
갈멜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의미로서 이 지역이 얼마나 비옥한 곳인가를 표현하는 명칭이라고 하겠다.
성경역사와 관련된 것은 왕상18장의 엘리야가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과 신앙대결을 벌렸던 사건이다. 갈멜산에서는 유사이전의 인류가 살았었던 흔적도 발견되었다. 그런 유적이 발견된 것은 가이사랴와 하이파의 중간쯤 되는 갈멜산 서편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구서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동굴에서였다. 1930년대에 이 동굴에서 벌렸던 발굴 작업 결과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네안델탈인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졌고 이들을 학계에서는 일명 갈멜산 인류라고도 부른다.
과제3. 도르평야에 대하여 약술하라.
*도르(Dor) 평야의 특징*
도르평야는 갈멜산에서 악어 강까지 약30km 길이의 해안지역으로 해안과 산지와의 간격이 3km정도의 좁은 해안이다. 또 갈멜산과 인접한 곳이기 때문에 높은 지역이므로 수11:2에 도르의 높은 지역이라고도 불렀다. 남쪽 경계선은 갈멜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시냇물로 인해 주변이 늪지대로 도로나 농경지에는 쓸모가 없었다. 특히 이 지역의 지리적 특징이기도 한 바닷가의 언덕과 모래들은 갈멜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막아 주변 지역을 늪지대로 만들었다.
도르평야는 역사적으로 삿1:27에 므낫세지파에게 분배가 되었던 지역이었으나 그들은 실제적으로 이 지역을 소유하지 못한채 여러 세대를 지냈다. 성경에 유일하게 언급되어 있는 도시는 도르이다(삿1:27).
*도르평야의 중요한 지역들*
1) 도르
도르는 갈멜산 남쪽의 지중해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도시이다. 오늘날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1200년)부터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도르 주변의 해안에서는 자주색 물감을 만드는 원료가 되는 조개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부터 직조업이 발달하였다. 고대시대에 자주색은 권의의 상징이었으며 종교적인 색깔이었다.
사삿기1:27, 역대상7:28절에서 이 도시는 므낫세지파에게 분배가 도엇지만 다윗-솔ㄹ몬 시대까지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었고 그동안 전체 해안지역을 점령하였던 블레셋이 이곳을 차지하였다. 여호수아12:23에서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 중 도르는 하솔과 야빈이 주도하는 연합군에 참여하여 이스라엘과 싸우기도 하였다. 앗수르 통치 때에는 해안지역의 중심도시가 되었었고 헬라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항구도시였으며 십자군시대에 세워진 십자군 성채가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
2) 악어강(Nahar Tanninikm)
악어강은 갈멜산의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유입되는 강으로서 연중 끊임없이 흐르는 강이다. 악어강이라는 이름은 과거에 많은 악어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고대에는 이 강에 댐을 건설하여 조그만 호수를 만들기도 하였다. 헤롯은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하면서 가이사랴의 급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갈멜산과 악어강으로부터 가이사랴까지 상수도 시설을 만들었다. 도수교 형태의 당시 상수도 시설은 그 일부가 아직까지도 가이사랴 근처에 남아있다.
과제4. 샤론평야에 대하여 요약하라.
*샤론평야의 지역적 특징*
샤론평야는 악어강에서 욥바가 위치하고 있는 야른콘강까지 약 80km 거리의 해안지역이다. 해안에서 서쪽의 산지까지 폭은 비교적 넓어 평균 16km가 된다. 대부분의 지역을 덮고 있는 붉은색의 모래는 물의 배수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지역을 거대한 습지로 만들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샤론의 사막 같다고 한 것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붉은색의 모래 때문이었다(사33:9). 샤론의 어원적 의미는 `숲이 우거진 지역`이지만 그것은 습지대에 형성된 잡목 숲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샤론의 수선화(아2:1)`나 소와 양들을 방목하였던 `샤론의 들(대상5:16, 27, 219, 사65:10)`에 관한 내용은 모두가 이 지역에 형성된 습지대와 관련된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샤론평야의 대부분은 잡목과 수풀로 뒤덮여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농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도로 역시 평야의 중심지역이 아닌 산지 쪽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샤론평야의 숲은 1차 세계대전까지 이 지역을 통치하였던 터키가 기차 연료를 충당하기 위하여 대부분 벌목되었다. 1920년대 시온주의자들이 이 지역을 매입하여 유대인 이민자들을 정착시켰을 때까지만 하여도 샤론평야는 여전히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대로서 농업이나 사람의 거두가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인 정착자들은 늪지대의 물을 말려 나가면서 이 지역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과수재배 단지로 만들었다. 특히 이곳은 유럽으로 수출한고 있는 이스라엘 오렌지의 주 생산단지가 되고 있다.
샤론평야는 므낫세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므낫세지파는 이 지역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였다(수17:12-13, 삿1:27-28). 성경 내용에 따르면 샤론지역에는 레위인에게 속한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수21:8-42, 대상6:54-66). 다윗시대에 이르러 샤론의 일부지역이 이스라엘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솔로몬은 이곳을 `헤벨의 땅(왕상4:10)`.이라고 불렀고 벤헤셋으로 하여금 이 지역을 관장하게 하여 왕궁에서 쓸 한 달간의 물건들을 매년 조달시켰다(왕상4:27). 헤롯시대 이 지역에 가이사랴를 통하여 로마와의 교역이 중대되었고 가이사랴와 다른 지역 사이를 연결하는 여러 도로들이 샤론지역 내에 건설되었다.
*샤론평야의 중요한 지역들*
1) 가이사랴
갈멜산에서 약 37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가이사랴의 역사는 기원전 3세기 중엽 뵈니게 사람들이 이곳에 요새화된 작은 규모의 정박시설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스트라토의 탑`이라고 불렀다. 로마시대 이 도시가 팔레스타인에서 중요한 항구도시가 된 것은 기원전 22년 이곳에 대대적인 항구도시를 건설하였던 헤롯왕에 의해서다. 그는 이곳을 가이샤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라고 개명하엿다. 헤롯의 가이사랴 건설은 고대 세계에서 최초로 시도되었던 인공적인 항구 건성이었다.
2) 욥바
아름답다라는 이름을 가진 욥바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해 주는 국제도로인 해변길이 지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항구도시였다. 또 국내도로도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예루살렘으로 직행할 수 있는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이다.
욥바는 비록 작은 항구였지만 그 역사적 역할이나 영향력은 중요하고 컸었다
*역대하 2:16에서 솔로몬은 성전과 궁전을 짓기 위하여 레바논으로부터 백향목 재목들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 욥바 항구를 이용하였다.
*요나서 1:3절에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기 위한 배를 탓던 곳도 욥바 항구였다.
*행9:36-43에 신약시대에 욥바에서 베드로는 죽은 다비다를 살려냈고
*행10장에 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던 베드로는 이곳에서 이방 선교를 위한 환상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을 따라 가이사랴로 갔었다.
3) 아벡(신약시대에는 안디바드리)
강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벡은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욥바에서는 동북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야르콘강의 수원지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요새도시였다. 이곳은 특히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는데 그것은 이 도시와 동쪽편의 산지 사이의 좁은 지역을 따라 해안길이 지니가고 있으며 욥바에서 예루살렘이나 세겜으로 통하는 국내도로가 이곳에서 해안길과 교차하며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벡을 장악하는 것은 곧 중요한 무역로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4) 아르콘강(Nahar Yarkon)
아르콘강은 아벡 근처에서 발원하여 지중해로 흐르는 강으로서의 전체의 길이가 약 30km 되는 샤론영야에서는 가장 큰 강이다. 이 강은 지형적으로 샤론평야의 남쪽 한게선을 이루고 있다. 이 강과 합류하는 여러지류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실로에서 흘러 내여오는 와디 실로와 아얄론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와디 아얄론이다. 성경에서는 이곳이 단과 에브라임지파 사이의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수19:46). 이 강의 양쪽 언덕에는 고대에 많은 정착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5) 룻다(Lydda)
룻다가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호수아의 정복이 있기 200여년 전인 B.C 15세기 이미 존재하였다. 이집트의 투트모스 3세가 가나안을 점령하고 남긴 기념비에는 룻다가 오노와 욥바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이 언급되어 있다. 룻다는 모세오경이나 에언서 등에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단지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에만 언급되어 있다. 역대기에는 베냐민 지파가오노와 룻다와 그 향리를 세웠고라고 기록되어 있다(대상8:12).
과제5. 블레셋평야에 대하여 약술하라.
*블레셋평야의 지리적 특징*
블레셋평야는 욥바에서 애굽강까지 약 112km이고 폭은 16-40km의 해안지역으로 높은 곳은 300m까지 높은 평야이다. 이 지역은 지형적인 면에서 다른 지역과 대조적인 지역이다. 그런 대조적 변화는 블레셋평야 이남지역과 비교하여 볼 때 더욱 두드러져 처음 절벽형 바위로 구성된 해변이 나타나고 있다. 토양도 바뀌어 비옥한 테라로사와 샤론의 붉은색 모래가 섞여 이루어진 토야이라 농경지로 적합한 좋은 땅이지만 블레셋과 페니키아의 양쪽 압력으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항구시설, 농경지, 국제도로(해안길)에서 볼 때 중요했다.
B.C. 12세기부터 이 지역에는 에게 해 출신의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던 블레셋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그들은 이 지역을 지배하는 민족이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이 지역의 이름을 블레셋평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블레셋 북부지역을 분배 받았던 단지파는 블레셋의 세력에 밀려 이곳을 포기하고 갈릴 북쪽의 단 지역으로 이주하였다(삿18장). 블레셋평야의 다른 지역은 유다지파에게 분배가 되었는데 그들은 평야지역보다 산지를 선호하여 결과적으로는 이 지역을 블레셋에게 내준 셈이 되었다.
*블레셋의 기원과 역사*
블레셋은 에게해 출신의 해양민족으로 이집트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북동쪽 해안으로 축출되어 이스라엘 남부해안지역에 정착하여 남쪽의 가사에서 북쪽의 갈멜산까지 해안지역을 통제하였다. 사삿기 14:16절의 소몰이 박대로 600명의 블레셋인들을 죽인 아낙의 아들 삼갈의 충돌이 이미 사사시대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엘리제사장, 사무엘, 사울, 다잇시대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이었다.
이 때 이스라엘은 큰 고통을 당했는데 왜냐하면 블레셋은 기술과 조직면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가나안인들을 능가하였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청동을 능가하는 철을 최초로 들여와 주로 전쟁에 사용되는 철을 독점하고 있었다. 삼상13:19절에 보면이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사사기 1:19절의 철병거의 강력한 힘으로 쳐들어왔고, 이스라엘 농부들은 철 다루는 기술이 없어 그들이 농기구 수선을 위해 블레셋 지역으로 가야만 하였다.
*블레셋 평야의 중요 지역들*
1) 아스돗(Ashdod)
아스돗은 역사에 관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폐허화된 옛터들은 현재 모래로 뒤덮여 있고 아직 체계적인 고고학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삼상5:1-8절에 보면 구약시대 때 블레셋은 에브라임 산지에까지 침투해 실로에 있는 종교적 중심지도 통제하면서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았고 빼앗은 법궤를 아스돗에 있는 그들의 다곤 신전에 법궤를 옮겨 놓았다. 당시 아스돗은 가나안의 다곤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였다.
2) 아스켈론(Ashkelon)
욥바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하고 있었던 아스켈론은 블레셋 지역에서 유일한 항구였고 국제도로가 지나는 길목에 위치하였으며 주변 땅은 비옥하고 물도 풍부하여 토양은 농작물에 적합하여 농사와 무역의 중심지 그리고 어업과 각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의 요지가 되었다.
3) 가사(Gaza 가자)
블레셋평야는 가장 중심도시로서 삼손이 갇히고 눈을 뽑히고, 블레셋 신전을 무너뜨리고 죽은 곳. 이스라엘 해안길의 마지막 도시이다. 지형적 여건 자체가 전략적으로 중요하므로 항상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지금도 가사지역이 신문에 심상치 않게 나고 있다.
가사는 블레셋이 차지하기 전에는 이집트의 통치를 받았고 블레셋이 정착이후 가사는 사삿기 16장에 삼손의 이야기 속에도 업급이 되고 있으며 다곤신을 섬기는 지역이었다.
4) 에그론(Ekron)
에그론은 단지파에게 분배된 곳이었지만(수19:43)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초기에 점령하지 못한 지역이었다(수13:3). 가드와 함께 유다의 쉐펠라 지역에 인접한 에그론은 블레셋에 옮겨왔던 법궤가 이스라엘 지역으로 되돌아 가기 전에 마지막 머물렀던 곳이다(삼상5:10-6:16). 이것은 에그론이 벧세메스 가까이 있는 지역임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사무엘의 영도 하에 이그론은 당분간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지만(삼상7:14), 곧 블레셋의 영토가 되었다. 그것은 골리앗이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후 블레셋 군대가 가드와 에그론으로 후퇴하였던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5) 가드(Gath)
포도주 짜는 틀이라는 의미는 가드는 블레셋의 다섯 도시중의 하나로서 에그론과 함게 산지에 가까운 해안평야 동편 쪽에 위치하고 있었다(수13:1, 삼상5:7, 6:17). 여호수아가 이곳을 점령하였을 때 가드에는 아낙자손이 살고 있었다(수11:22). 사울 왕을 피하여 숨어 지내던 다윗은 가드와 아기스의 허락으로 이곳에서 얼마동안 망명생활을 하였다(삼상27:2-11).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가드는 사무엘시대와 다윗시대에 각각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하였다(삼상7:14, 대상18:1). 다윗의 군대에는 가드출신 군인들이 600여명이나 있었다(삼상15:18).
6) 애굽강(Nahar Mitzraim : Brook of Egypt)
구약성경에서는 여러번 언급되고 있는 애굽강은 히브리어로나할르 미츠라임인데 이것은 예로르혹은예로르 미츠라임으로 표현되는 나일 강과는 구별되고 있다(사23:3). 애굽강이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용례 속에서 나오고 있다. 하나는 유다의 남쪽 경계와 관련된 지리적 용어로 사용된 것이고(민34:5, 수15:4, 47, 왕상8:65, 겔47:19, 48:28). 다른 하나는 전체 이스라엘의 경계를 가르키는 표현인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이다(왕하24:7, 사27:12)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경계선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제 5 장 중 앙 산 지
과제1. 중앙산지의 지역적 특성을 요약하고 구분하라.
1. 중앙산지의 지형적 특성
중앙산지의 지형적 성격은 해안평야와 대조적이다. 해안평야가낮고, 비옥하고, 개방적인 반면, 중앙산지는높고, 폐쇄적이고, 비생산적인 지역이다.
1) 높은 산지: 해안평야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해발 200m 정도에 불과하지만, 중앙산지는 가장 낮은 곳이 450m이며 가장 높은 곳은 122m나 된다. 실제적으로 여러 산지들이 서로 엇갈려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앙산지는 교통에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 이런 상황이 예외적인 지역은 이스르엘 계곡이다.
2) 폐쇄적 산지 : 중앙산지는 지리적 여건상 폐쇄적이다. 이것은 중앙산지가 고립된 지역이지만, 안보상으로는 외국의 침입에 쉽게 점령 당하지 않는 안전한 지역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중앙산지는 대제국의 통치자들에게 크게 관심을 끄는 지역은 아니었다.
3) 비생산적인 산지 : 중앙산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생산적인 지역이다. 주로 강성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곳 산지는 값비싼 광불이나 자연자원이 거의 없는 곳이다. 중앙산지는 경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중요시 여겨졌던 전략적 지역이다.
2. 중앙산지의 지역적 구분
중앙산지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크게 네 개 의 지역 즉 갈릴리산지, 이스르엘 계곡(평원), 사마리아산지, 유다산지 등으로 구분된다. 이스르엘 계곡은 갈릴리산지와 사마리아산지를 갈라놓는 계곡형태의 평원으로서, 지중해 연안이 해안평야와 요단계곡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중앙산지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갈릴리산지는 상부 갈릴리산지와 하부 갈릴리산지로 나뉘어지며, 중앙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마리아산지는 므낫세 산지, 에브라임산지, 베냐민산지 등으로 나뉘어진다.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유다산지는 산지의 양쪽 편에 유다광야(동)와 세펠라(서)가 위치하고 있다.
과제2. 갈릴리산지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갈릴산지의 일반적 특성
갈릴리산지는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사각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갈릴리산지는 동서간의 거리가 약 40km, 남북 간의 거리는 약 80km가 된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갈릴리산지는 북쪽의 리타니강, 남쪽의 이스르엘 계곡, 서쪽의 악고평야, 동쪽의 훌레 계곡과 갈릴리 바다 등으로 둘러 쌓인 지역이었다. 갈릴리산지의 북쪽 경계를 레바논 안에 있는 리타니 강으로 보고 있지만,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실제로 차지하였던 영토는 훌레계곡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의키리앗 쉬모나(Qriyat Shemona)이남지역이었다. 요세푸스도 갈릴리의 북쪽 한계를 훌레계곡으로 기록하고 있다.
갈릴리산지는 악고에서 갈릴리바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로쉬 피나(Rosh Pinna)로 이어지는벧케렘 계곡(Biq´at Bet Kerem)을 중심으로 상부와 하부로 나뉜다. 요세푸스 역시 갈릴리를 상부와 하부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갈릴리산지를 상부와 하부로 구분하는 것은 행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 지형적 차이에 의한 것이다. 갈릴리산지를 상부와 하부로 나누는 경계선인 벧케렘게곡 북쪽에는 거의 수직으로 500-600m의 절벽을 이루고 잇는 에쉬-사구르(Esh-Shagur) 단층이 위치하고 있어서 두 지역의 구분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다.
하부 갈릴리 대부분 지역은 600m 이하의 낮은 산지인 반면, 상부 갈릴리는 1,000m 이상 되는 높은 산지이다. 상부산지는 또한 기복이 심한 산세이기 때문에 통행에도 매우 불편하다. 상부 갈릴리산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메롬산(제벨 야르묵)은 그 높이가 1,200m나 되어 중앙산지 중에서의 가장 높은 봉이다. 신약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갈릴리는 주로 하부갈릴리를 의미하였다. 지역적으로 이스르엘의 북쪽 변방지역에 속해 있었던 갈릴리 지방은 타 문화에 쉽게 흡수되었으며(사15:1), 군사적으로도 자주 정복당했던 지역이다(왕하15:29).
구약성경에서 상부 갈릴리를 특별히이방의 갈릴리라고 지칭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었다. 즉 기복이 심한 산세와 여러 지역단위로 나누어져 있는 지형적 상황 때문에 이곳은 다른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용이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어느 한 민족에 의하여 전체가 지배되는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통치가 아니라 아무리 약한 민족이라도 스스로 자신을 지키며 존재할 수 있는 지역이 되었다. 옛날부터 여러 민족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이 지역을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렀다.
2. 갈릴리의 역사
갈릴리의 어원적 의미는굴러간다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둥근 모양의원이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치로서의고리등을 나타냈다. 이런 기본적인 의미의갈릴리는 둥근 원 안에 들어잇는잘 구획된 지역(well-drfiend district)이라는 의미로 발전하였다. 구약성경에서갈릴리는 지역의 한계가 분명하게 주어진 지역을 의미하였다. 이사야 9:1의 이방의갈리리를 개역성경의 난외주에는지경이라는 이역을 제시하고 있다. 갈리릴 리가 고유명사화 되어 사용된 것은 비교적 후대에 이르러서이다. 신약시대 갈릴리는 갈릴리산지를 중심으로 한 인근지역을 지칭하는 고유한 지역명칭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시대에 갈릴리지방은 별로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당시 갈릴리지역은 가나안 사람들이 밀집되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곳을 분배 받앗던 아셀, 납달리, 잇사갈, 스블론 지파들은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공존하며 살았었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갈릴리지역은 행정적으로 재편되어 솔로몬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다(왕상4:12, 15-16). 솔로몬은 갈릴리의 일부인 가불 땅을 성전 건축의 협력 대가로 두로왕 히람에게 넘겨주었다(왕상9:11-12).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당시에 갈릴리는 중요하게 인식되지 못한 변방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카비 혁명운동이 일어나면서 갈릴리지역의 유대인들에 대한 이방인들의 압력이 너무 심해졌고,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였던 마카비혁명의 지도자들은 그곳의 유대인 대부분을 남쪽의 안전한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 후 기원전 104-103년 하시모니안 왕조의 히르카누스가 갈릴리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여 자신의 영토로 삼으면서 그는 이전에 유다지방으로 이주시켰던 유대인들을 다시 갈릴리지역에 재정착시켰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정통성을 강조하는 유다지방의 유대인들은 변방의 갈릴리지역 사람들을 멸시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은 폼페이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던 기원전 6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후 로마의 세력을 배경으로 삼았던 헤롯 대왕은 갈릴리지역을 자신의 통치지역으로 삼았다.
3. 상부 갈릴리산지의 지형
레바논산지의 한 지맥인 상부 갈릴리산지는 기복이 심하고 지형구조가 복잡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인 메롬산은 해발 1,208m 높이로서 중앙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상부 갈릴리는 유다산지와 달리 산지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으며, 사마리아산지와 하부 갈릴리산지처럼 산지사이에 넓은 계곡들도 없다. 오히려 게곡은 작고 좁으며 별개의 여러 산지로 지역이 쪼개져 있다.
상부 갈릴리산지의 자연적 저건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유리한 점도 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곳에는 연간 600-800mm의 강우량이 기록되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삼림이 울창하였는데, 특히 상수리 나무 숲과 관목들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무엇보다도 상부 갈릴리산지의 대표적인 작물은 올리브나무이다. 신명기에서 아셀지파에게 주어진 축복의 내용 속에 그러한 사실이 잘 반영되어 있다.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신33:24). 또한 이곳은 많은 샘들이 있어 많은 상시천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런 상시 천을 따라 각종 과일나무들이 많이 자랐다. 겨울에는 강물들이 불어나서 물의 흐름이 급해지며, 지역에 따라서는 계곡에서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한 유리한 자연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에 살지 못했던 이유는 험한 산세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지형 때문이었다.
4. 하부 갈릴리산지의 지형
지질학적으로 상부와 하부 갈릴리는 지형적으로 전혀 다른 모습을 띄는 분리된 지역이지만, 하부 갈릴리의 동편 산지는 기복이 심한 상부 갈릴리의 산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반면에 하부갈릴리의 중앙부와 서편 산지는 전체 중앙산지 중에서 가장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하부 갈릴리산지의 질형적 특성은 동서방향으로 평행을 이루며 형성된 산등성이들이다. 이런 산등성이 사이에는 넓고 앞이 트인 분지형 평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성경에서 그런 계곡평원들이 구체적인 이름으로 거명되고 있지는 않지만, 네 개의 골짜기와 분지가 산등성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최북단에는 상부와 하부 갈릴ㄹ리를 구분해 주는 벧케렘 계곡(Bet Kerem Valley)이 위치하고 그 아래로는 하라준분지(Halazun Basin)와 벧네투파계곡(Bet Netufa Basin)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나사렛산지의 북쪽에는 투란분지(Tur′an Basin)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분지들과 계곡들은 지중해와 갈릴리바다를 쉽게 오갈 수 있는 도로 역할을 하였다. 하부 갈릴리산지를 거쳐 가는 도로들은 모두가 갈릴리바다 북서편에 위치한 게노사렛 평원과 연결되어 있다.
하부 갈릴리의 낮은 산지들 사이에 위치한 분지와 계곡들은 그 바닥이 평평하고 낮아서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지역의 도로들은 계곡 자체가 아닌 산지 쪽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겨울 우기에는 계곡을 지나다니는 것이 더욱 불편하였다. 그러나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곡물 재배에는 이러한 사항이 오히려 유리한 여건이 되었다. 하부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밀 재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여건에 힘입어 특히 바벨론 포록 이후 헬라시대와 로마시대 하부 갈릴리는 많은 마을들이 세워졌고 집약적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하부 갈릴리산지의 두드러진 특징은 토양의 비옥성과 더불어 산지로 인한 전략적 중요성이다.
*갈릴리 산지의 중요지역들*
1) 가데스(Kadesh)
가데스는 갈릴산지에 위치한 가나안 도시로서 여호수아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납달리 지파에게 분배가 되었다. 가데스 왕은 여호수아에 의해 패배 당하였던 31명의 가나안 왕들 중의 하나였다(수12:22). 다른 지역에 있는 같은 이름의 도시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때로는납달리의 산지 갈리리 게데스라고도 불렀다(수20:7). 이 도시는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갈릴리 지방의 도피성이기도 하였다(수21:23). 후에 이곳은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에게 점령되어 이곳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되었다(왕하15:29). 로마시대 가데스는 두로의 통치지역이었는데, 이곳에서 로마시대의 신전과 무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가데스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대체로 사페드(Zefat)에서 북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인텔 카데스(Tel Kadesh)가 옛 가데스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는 고대 유적이 묻혀있는 두 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스라엘 말기까지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2) 치포리(Zippori)
나사렛에서 북서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치포리는 해발 250m 정도 높이의 넓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치포리는 별로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지만 주변이 낮은 지역이기 때문에 돋보이는 곳이며 방어에도 용이한 지역이다. 치포리; 언덕 아래에는 비옥한 들판이 자리하고 있다. 치포리의 샘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히브리어로 치포리는새라는 의미인데, 이런 이름이 붙게 된것은 이 지역이 마치 새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듯이 주변 지역을 조감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성경에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치포리는 성경과 관련하여 특별한 중요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치포리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인 역사책이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기원전 103년 하시모니안 왕가의 알렉산더 야나이가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치포리는 로마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요세푸스의 고대사 8. 338). 헬라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치포리는 기원전 64년 폼페이가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후 그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폼페이는 갈리리지역 행정구역을 새롭게 개편하면서 치포리를 갈릴리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삼았다. 이때부터 치포리에는 유대인들은 물론 이방 관리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치포리 원주민들은 로마의 통치를 환영하지 않았다. 헤롯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은 별문제가 없었지만, 헤롯이 죽게 되자 갈릴리지역에서는 소요가 일어났으며 치포리도 그런 영향을 받아 이곳에 있었던 헤롯의 별궁이 약탈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갈릴리의 통치자가 되었던 헤롯 안티파스는 소요 때 불타버린 도시를 재건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왕국의 행정수도로 삼았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그가 티베리아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유대인 전쟁기간동안(기원 66-70) 치포리는 주로 로마를 지지하는 자들이 거주하였던 도시였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파괴당한 후 많은 유대인들이 갈릴리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치포리는 유대인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 사회의 공식적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 의회가 이곳에서 모이기도 하였다. 베스파시안은 치포리를 로마의 정식 자치시(포리스)로서의 지위를 부여하였으며, 하드리안황제는 이곳을 가이사의 명칭과 관련된 이름인데오카리사레아라고 개명하면서 자치적인 독립도시로 삼았다. 이 명칭은 그후 비쟌티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비쟌티시대 치포리는 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으며 큰 규모의 비쟌티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3) 가나(Kanna)
신약시대 가나가 위치하였던 곳은 어디인가에 관하여 두 장소가 주장되고 있다. 한곳은 교회 전승에 근거를 둔 곳으로서, 나사렛에서 북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크파르 카나(Kefar kanna) 이다. 이 도시에 위치한 희랍 정교회는 돌로 만들어진 두 개의 항아리를 보관하고 있다. 이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이 돌항아리들은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때에 사용하였던 여섯 개 돌 항아리들은 예수께서 돌 항아리 중 남은 것이다. 옛 가나의 또 다른 위치는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키르벳 카나(Kirbet kanna)벧네프타 게곡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현지 주민들은 오늘날까지도 이곳을 갈릴리 가나라고 부르고 있다. 가나의 두 후보지 중에서 후자가 전자가 보다는 더 정확한 장소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후자가 요세푸스가 설명하고 있는 가나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갈릴리지방에서 로마군과 교전할 때 가나를 그의 군대 본부로 삼았다. 아직까지 키르베트 카나에서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 당시로 추정되는 로마시대의 도자기들이 이곳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가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첫 번째 이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던 곳이고(요2:1-11), 후에는 왕의 병든 신하 아들을 고쳐주기도 하였다(요4:46-54). 가나는 또한 나다나엘의 고향이었다(요21:2). 그는 후에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후에는 나다니엘보다 바돌로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4) 나사렛(Nazareth)
예수님의 고향이었던 나사렛은 치포리에서 남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북쪽의 투란분지와 남쪽의 이스르엘계곡 사이의 나사렛 산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나사렛 산지의 길이는 약 12km이고 폭은 약 3km가 되는 북동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지이다. 산지의 평균 높이는 약 400m로 비교적 낮으며 산지 밑의 게곡에는 부드럽고 비옥한 토양들이 있다. 그러나 이스르엘계곡 쪽으로의 경사지는 비교적 가파른 편이다. 이 산지 위에서는 이스르엘 골짜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있다. 이스르엘 계곡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가파른 절벽형의 산봉우리의 하나를케두밈산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이곳으로 끌고 와 산 아래로 떠밀어 죽이려 했던 곳이다(눅4:28-30).
예수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헤롯 대왕이 죽고 난 뒤 이집트에서 돌아와 이곳에 정착하였다(마2:19-23). 이곳에서 예수님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 나사렛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매력적인 동네는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은 나다니엘이 빌립에게 한 말은 곧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다니엘의 그러한 발언은 지역감정을 보여주는 편협된 의견이 아니라 메시야와 관련된 동네가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선한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메시야와 관련된 예언 내용과 나사렛이 무관함을 보여준다. 나사렛은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언급된 바가 없는 동네였다. 그런 면에서 나사렛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세워진 동네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세비우스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나사렛은 4세기까지도 작은 마을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비쟌티시대에 이르러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비쟌티시대 이곳에는 처음으로 거대한 규모의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기원 636년 아랍에 의해 나사렛기념교회는 무너졌고, 십자군시대가 되면서 교회는 다시 재건되었다. 그 후 1730년 옛 교회 터에 새로운 교회를 짓게 되었고, 1877년 이 교회를 다시 증축하였다. 그리고 1955년에 이르러 캐도릭 교회는 중동에서 가장 큰 교회로 알려진 현재의성수태고지 교회(Annunciation Church)를 신축하였다.
나사렛에 남아 있는 유적 중 예수님과 그의 가족에 대한 전승을 입증할만한 곳은 거의 없다. 다만 옛날부터 사용되었던 마을의 공동 샘터가 있을 뿐이다. 이 샘은 최근까지도 나사렛 시민들의 식수원으로 사용하였다. 예수님과 그의 가족도 분명 이 샘에서 식수를 길러 갔을 것이다. 나사렛의 식수원이었던 이 샘터 위에는 현재성가브리엘 교회라는 이름의 희랍정교회 소속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전승에 의하면, 마리아는 이곳 샘터에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과제3. 이스르엘 계곡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이스르엘 계곡은 하부 갈릴리산지와 사마리아산지 사이에 위치하면서 지중해와 요단계곡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지역이다. 신약시대에는 이스르엘계곡을 헬라어 명칭인에스드라엘론 골짜기(Valley of Esdraelon)라고 불렀다(미카비1서 5:52, 12:49, 유딧서1:8, 3:9, 4:6, 7:3 등). 길보아산 밑에 위치하고 있었던이스르엘도시에서 연유된 이 골짜기의 명칭은 하나님의 식물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 지역이 얼마나 비옥한가를 표현해 주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르엘 계곡의 지형적 특징*
1)이스르엘 계곡의 동부지역은 외관상 긴 통 모양을 하고 있는데, 벧산과 이스르엘 도시 사이의 동 서간 길이는 18km이며, 길보아산과 모래산 상의 남북간 폭은 약 5km 정도의 좁은 협곡이다. 이곳의 중심부에는 길보아산 밑에 위치한 하롯샘에서 발원하여 요단계곡 쪽으로 흐르는 하롯강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강 때문에하롯계곡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전쟁들이 벌어졌던 곳이다. 기드온의 군대가 미디안 군대를 이곳에서 물리쳤으며(삿7:1), 사울이 블레셋을 맞아 싸우다 그의 아들들과 함께 마지막 죽음을 맞았던 길보아산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삼상29-31장).
2)이스르엘 계곡의 중심부분이기도 한 서부계곡은 외형상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삼각형의 밑변에 해당되는 지역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사렛산지인데, 욕네암과 다볼산이 양쪽 끝지점을 이루고 있다. 삼각형의 정점은 현재 아랍도시인 제닌 근처의 이블레암이다. 삼각형 모양의 각 변 길이는 각각 32km정도로 상당히 넓은 계곡이다.
때로는 이곳을므깃도 골짜기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서부계곡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므깃도이기 때문이다(수12:11).
이스르엘 계곡은 지형적으로 해안평야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는 중앙산지에 속하고 있는 거대한 계곡형 평원이다. 산지가 교통에 불편한 장애적 요소가 된다면 산지 사이의 거대한 계곡인 도로형성에 많은 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고대부터 대부분의 중요한 도로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갔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스르엘 계곡을 중심으로 적어도 일곱 개의 크고 작은 도로들이 다섯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서쪽으로는 갈멜산 기슭을 따라 악고와 뵈니게로 향하는 도로가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이스르엘계곡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다볼산을 거쳐 갈릴리바다로 나아가는 해안길이 있었다. 이 길은 갈릴리바다를 거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었다. 동쪽으로는 역시 이스르엘계곡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하롯계곡을 거쳐 벧산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는 겨울 철 우기 때 다볼산을 거쳐 지나가는 중심도로가 통행하기에 불편할 경우 대체 도로 역할을 하였다. 남쪽으로는 도단을 거쳐 세겜과 예루살렘으로 연결하는 도로가 있었다. 마지막 남서족으로는 갈멜산으로 넘어 해안평야로 나아가는 세 개의 통로--북족으로부터 역네암 통로, 므깃도 통로, 디나악 통로가 있었다. 이 세 통로 중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통로는 해안길의 간선도로 격인 므깃도 통로였다.
*이스르엘 주변의 산들과 강들*
이스르엘 중요성은 비옥한 지역이라는 경제적 측면과 중요한 도로들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측면이다. 이러한 이스르엘계곡의 중요성은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들과 계곡 내부를 흐르고 있는 강들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이 지역은 사방이 산들로 둘러 쌓인 곳이며 또한 두 개의 중요한 강이 발원하여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르엘 계곡의 북쪽에는 하부 갈릴리산지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사렛산지가 놓여있으며, 서쪽에는 갈멜산이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있다. 남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가 시작되고 있으며, 동쪽에는 다볼산, 모래산, 길보아산 등 세 개의 산이 남북 방향으로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이스르엘계곡에는 길보아산 밑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두 개의 강이 있다. 서쪽 방향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가는 기손강은 강 자체의 규모가 작아서 겨울 우기에는 불어난 강물이 자주 범람하는 경향이 있었다(삿5:21). 주변산지에서 흘러 내려온 빗물들은 비옥한 충적토지역을 진흙벌로 만들어 통행에 많은 불편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가나안의 막강한 시스라군대가 드보라의 군대에게 패배한 원인도 이런 진흙으로 인하여 군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동쪽인 요단계곡 방향으로 흐르는 하롯강은 길보아산 밑의 하롯샘에서 발원하여 해저 115m에 위치하고 있는 벧산 도시를 거쳐 해저 225m의 요단강으로 유입된다.
*이스르엘 계곡의 중요 지역들*
1) 므깃도(Megiddo)
이스르엘 계곡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므깃도는 가나안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여 왔던 고대 도시 중 하나이다. 오늘날의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있는 므깃도는 이스르엘계곡을 거쳐 가는 해안길이 갈멜산을 넘어 해안평야로 나아가는 길목을 지키는 전략적 도시였다. 이곳은 또한 북서쪽에 위치한 악고로 가는 길과 남동쪽에 위치한 벧산으로 가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므깃도는 지형적으로 전략적인 도시로서 많은 전쟁이 이곳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므깃도는 강력한 가나안의 한 도시국가였으며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므깃도를 점령하지 못하였다(삿1:27). 그 후 다윗시대에 이르러 므깃도는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고, 솔로몬은 이곳에 요새화된 자신의 병거 성을 건설하였다(왕상9:15). 후에 아합은 므깃도를 더욱 요새화시켰다. 현재 남아 있는 므깃도의 거대한 지하수로시설은 아합 때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므깃도는 기원전 733년 앗수르에게 점령 당하였고, 그 후 요시아왕은 기원전 609년 이곳에서 이집트의 느고를 맞아 싸우는 중에 전사하였다. 성경시대 이후에도 나폴레옹이 1799년 터키군과 더불어 이곳에서 전쟁을 벌렸고, 세계 1차 대전 중 연합군을 이끌었던 알렌비 장군 역시 이곳에서 터키군을 패배시켰다. 이러한 계속적인 전쟁의 역사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세계 종말에 있을 마마겟돈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계16:16). 아마겟돈은므깃도 언덕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하르 메기도를 헬라어로 음역 표기한 것이다.
므깃도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고학 발굴 작업이 있었다. 1925-1939년 사이에 시카고 대학 고고학 팀이 이곳을 처음으로 발굴하였고, 1960년 이스라엘 고고학자 이갈 야딘(Yigal Yadin)은 이곳을 재차 발굴하였다.
ㅁ,깃도에서 발굴된 고고학 유물들 중에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청동기 초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나안 사람들의 산당.
(2) 하솔과 게셀에서도 같은 형태로 발견되었던 솔로몬 시대의 성문. 이 성문은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여러 겹의 방어벽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3) 지방장관의 거주지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궁전
(4) 솔로몬시대의 마굿간으로 추정되는 건물과 길쭉한 형태의 돌 구유 통들(왕상10:26)
(5) 아합왕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규모의 수로시설. 이것은 외적들의 성을 포위하였을 때 성 밖에 있는 샘으로부터 안전하게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도록 마련한 지하수로시설이다. 이 지하 수로의 길이는 약 66m나 된다.
2) 벧산(BEth Shean)
고대도시 벧산은 하룻 계곡과 요단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단계곡을 지나가는 남북교통로와 이스르엘 요단동편 지역을 지나가는 동서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벧산은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 시대의 역사자료에 이미 언급이 되고 있다. 벧산은 다낙, 므깃도, 이블레암 등과 더불어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에 점령되지 못한 가나안의 도시들이었다(삿1:27). 사울 시대 이 도시는 블레셋의 통치 아래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전사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달아매었다(삼상3110, 12). 다윗은 자신의 왕국을 북쪽으로 확장하면서 이 도시를 점령 한 것 같고, 그 후 솔로몬은 벧산을 자신의 다섯 번째 행정 구역에 포함시켰다(왕상4:12).
벧산은 주변의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수원지 그리고 온화한 날씨로 인하여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하였던 지역이다. 이슬엘의 랍비 중 한사람은 벧산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만약 에덴 동산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다면 벧산은 그 문이 될 것이다
전략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벧산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방치된 폐허가 되었다. 헬라시대에 이곳은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었다.스키토인들의 도시라는 의미의 이 도시명은 아마도 프톨레미 2세(기원전 285-246년) 통치 때에 용병으로 있었던 스키토인들과 관련된 것 같다. 당시 스키토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용병으로 이곳 벧산에 주둔하였다. 벧산이 최대의 번영기를 누린 것은 기원전 63년 폼페이가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이다. 이 도시는 데가볼리 도시들 중 요단강 서편 지역에 위치한 유일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데가볼리 도시연맹의 중심적 수도가 되었다.
벧산에는 발굴된 대표적 유물로는 보존 상태가 좋은 로마시대의 대규모 원형극장이다. 기원 2세기 후반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형극장은 약 5000여명 정도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갖추어져 있다.
3) 이스르엘(Jezreel)
길보아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이스르엘은 잇사갈지파에게 분배가 된 가나안시대 때부터 있었던 도시였다(수19:18). 사울은 블레셋과 마지막 전쟁을 벌리기 전에 이곳에 그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솔로몬은 이스르엘을 그의 왕국의 다섯 번째 행정구역에 예속시켰다(왕상4:12). 오므리왕가의 아합왕은 이 도시를 크게 증축하여 북왕조 이스르엘의 겨울별궁을 삼았다(왕상18:45), 21:1). 아합왕은 이스르엘의 별궁을 더 크게 확장하기 위하여 근처에 있었던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적으로 차지하려고 그 주인 나봇을 살해한 적이 있다(왕상21장). 아합이 나봇을 살해한 피의 댓가로 아합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보낸 군대에게 파괴당하면서 이스르엘 역사 속에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헬라시대부터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게된 이곳은 중세 때까지 그 명목을 계속 유지하였다.
4) 다볼산(MT. Tavor)
다볼산은 나사렛산지의 북쪽 지맥으로 이스르엘계곡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정상이 580m 높이가 되는 아담한 봉우리의 산이다. 산 자체는 석회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산의 동쪽은 검은 현무암 토양으로 덮여있고, 서쪽은 흰색의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다볼산 주변은 이스르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다볼산은 검고 둥글게 솟아 있는 모습이며 산 주위 계곡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모습은 신비로운 경외심과 위엄을 자아내는 산이다. 5세기의 교부였던 제롬은 이 산을경이롭도록 둥글고 높은 산 이라고 극찬하였다.
산들은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에게 산은 거의 거처이며, 신적인 권능이 존재하는 곳으로 비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 올라 신에게 기도와 경배를 드리며 구원을 간구하였다. 가나안시대의 사람들 역시 다볼산을 신성하게 여겼었던 것 같다. 산 아래 기슭에서 발견된 가나안인들의 성소 관련 뮤물들이 그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으며,다볼의배꼽혹은중심이라는 의미 역시 고대시대 이곳이 예배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 이 산을 신성시하였던 경향은 스블론 잇사갈을 향한 모세의 기도 속에서 잘 나타나 있다.스블론이여, 나가는 것을 기뻐하라, 앗사갈이여, 장막에 있는 것을 기뻐하라. 그들은 열국 백성들을 산으로 부를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의의 재물을 바칠 것이니라(신명기33:18-19). 여기에서 언급된산은 이스르엘계곡에서 중심적인 산인 다볼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산의 자연적 조건 자체가의의 제사를 위한 에배 중심지로 적합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시대에 이 산 위에는다볼이라느 도시가 있었고, 그 도시는 앗사갈과 스블론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수19:22).
다볼산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성산 중 하나로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시편의 기자는 세상에 드러나 있는 여호와의 놀라우심과 위대하심을 언급하면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사으로서는 이 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다볼과 헤르몬이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즐거워 하나이다(시편89:13). 유대인의 미드리쉬적 해석에 의하면 율법이시내산에서 주어졌을 때 다볼산은 마치 시내산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다볼산 정상에서 율법이 자기에게도 역시 신성시되는 장소이다. 예수께서 세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 자신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시킨 장소가 곧 다볼산이었다는 교회의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전승에 근거하여 비쟌티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다볼산 정상에 변화산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다볼산 정상에는 프린체스카 계통의 변화산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드보라시대 이후에도 이곳에서는 많은 전쟁이 있었다. 특히 유대인의 로마를 향한 일차 반란운동 때에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대항하여 싸웠다. 당시 유대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요세푸스는 다볼산을 요새화하였고, 그 위에 마을을 세워 로마와의 싸움에서 버티어 나가도록 독려하였다. 그러나 전술적으로 앞선 로마군은 다볼산을 점령해 버렸다. 중세에는 십자군과 이슬람간의 긴 전쟁이 이 산을 중심으로 벌어지기도 하였다. 십자군들은 필사적으로 이 산을 방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슬람에게 패배하였고, 산 위에 있던 교회건물은 모두 파괴되었다.
5) 모래산(Giv´t Hamore)
다볼산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잇는 모래산은 화산 활동에 의하여 형성된 540m의 높이의 산이다. 현무암과 백악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산은 그 정상이 원형으로 되어있고 산의 전체 둘레는 4.8km 정도이고, 산의 직경 길이는 가장 넓은 곳이 2.4km이다. 이스르엘과 하롯계곡 사이의 도로와 티베리아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모래산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사사 기드온이 활동하던 시대에 미디안 족은 이 산의 북쪽 계곡에 진을 치고 있었다. 기드온이 선발한 300명 정예용사들은 모래산 건너편에 있었던 하롯샘가에서 이곳 모래산 기슭에 진을 치고 있던 미디안을 향하여여호와의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치면서 출전하였다.
모래산의 북쪽과 남쪽 기슭에는 성경과 관련된 중요한 두 도시가 위치하고 있다. 남쪽 기슭에는 구약시대의 도시인 수넴(Shunem)이 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 마지막 결전을 벌리기 위하여 이곳에 진을 쳤던 적이 있다(삼상28:4). 나이가 많아 늙게된 다윗의 몸을 덥게 하기 위하여 채용된 수넴여인 아비삭은 이곳 출신이었다(왕상1:3). 또한 이곳에서 한 수넴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접대하였고 엘리사는 그 수넴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었던 곳이기도 하다(왕하4:8-37). 그런가 하면 모래산의 북쪽 기슭에는 신약시대 도시인 나인(Nain)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려준 장소로 유명하다(눅17:11-17). 현재도나수(=나인)이라는 아랍동네가 위치하고 있으며, 동네 한가운데 희랍정교회 소속의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과제4. 사마리아산지에 대하여 약술하라.
*사마리아산지의 지형적 특징*
고대 이집트 문서에서는 사마리아산지를세겜 산지라고 불렀다. 성경은 이곳을에브라임산지라고도 부르고 있다(수17:15, 19:50, 삿3:27, 4:5, 삼상1:1, 9:4, 왕상4:8, 왕하5:22, 렘31:6 등). 그러나 실제적으로 에브라임지파가 차지하였던 지역은 사마리아산지의 남부 지역에 국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에브라임산지라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에브라임지파의 역할이 컸었기 때문이다.사마리아산지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북왕조 이스라엘 시대부터였다.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은 새로운 수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세겜 북서쪽에 위치한 430m 높이의 산언덕을 세멜에게서 은 두 달란트를 주고 구입하였다. 그리고 이 산 위에 새로운 수도인 사마리아를 건설하였다(왕상1624).
1. 지형적 특성
사마리아산와 유다산지 사이에는 지형적으로 특별히 구별되는 자연경계선은 없지만 이 두 지역 사이의 지형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사마리아산지는 유다산지와 달리 산 높이들이 일정하지 않으며 지형적인 변화도 비교적 심한 편이다. 이곳은 많은 강우량으로 인하여 풍화작용이 유다산지 보다는 심한 편이며 깊은 계곡들도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계곡들은 대체적으로 서쪽, 북쪽, 남쪽 방향으로 열린 형태인데 그런 지형은 외부 세력들이 쉽게 사마리아산지의 중심ㅂ부로 접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사마리아산지가 역사적으로 페쇄적인 유다산지보다 외부로부터 정치- 문화-종교적 영향을 쉽게 수용하였던 것도 이런 지형적인 조건들과 관련이 있었다.
사마리아산지는 남북방향으로 형성된 분수령을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로 양분된다. 이 두 지역은 여러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서쪽은 완충적인 중간지역 없이 완만한 경사를 이룬 채 곧바로 해안평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계곡지역에서는 곡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쪽은 급한 경사지로서 산세가 험하여 외부의 접근이 어려운 지역이다. 서쪽보다는 강우량도 급격히 떨어져 이 지역에서의 농작물 재배는 거의 불가능한 편이고 단지 목축을 위한 초지가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사마리아산지는 지형, 기후, 재배작물 등에서 갈릴리산지와 유다산지의 중간적 성격을 띄고 있다. 비옥한 충적토인 테라로사로 이루어져 있는 이 지역의 산지와 계곡은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중해 지역의 전통적 작물인 밀, 올리브나무 등을 비롯하여 포도 등 다양한 과일나무들이 재배되면서 또한 양과 염소들을 방목하기도 한다.
2. 므낫세 산지
므낫세산지와 에브라임산지의 구분은 사마리아산지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세겜을 중심으로 나뉘어진다. 므낫세산지는 남쪽의 에브라임산지보다 산세가 낮은 편이며 주변이 산지로 둘러 싸여있는 일종의 분지형 산지이다. 이곳의 토양도 다른 지역보다 덜 비옥한 석회암 성분이다. 므낫세산지의 북쪽은 갈멜산지와 길보아산지가 서쪽과 동쪽에 각각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은 에브라임산지와 연결되어 있다. 분지형 산지인 이곳은 완만한 구능형 산들과 산지사이의 넓은 계곡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통행에 편리한 도로들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일찍부터 이 지역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큰 도시들이 많이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도단, 세겜, 사마리아 등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 지역은 외부와의 접촉이 빈번하였던 곳이다. 특히 북쪽의 아람이나 뵈니게 지방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러한 지형적 조건은 외부 문화와의 접촉이라는 점에서 유리한 측면도 있었지만 잦은 외적의 침입이 있었다는 점과 외래 종교의 영향이 많았다는 점에서 불리한 지리적 여건이기도 하였다.
3. 에브라임산지
에브라임산지는 므낫세 산지와 달리 대부분이 600m에서 1,000m까지 높은 산지이다. 에브라임산지의 최고봉은 벧엘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바알하솔로서 그 높이가 1,016m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북족의 므낫세 산지와는 여러 가지 대조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우선 에브라임산지는 동쪽과 서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계곡들도 비교적 좁은 편이다. 그런 점에서 이곳은 지형적 교통로는 험준한 산지로 인하여 불편한 편이었는데 동서간의 도로보다는 분수령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남북간의 도로가 주로 사용되었다. 그에 따라 중요한 도시들은 주로 분수령길 주변에 발달되었다. 실로 벧엘, 미스바 등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4. 베냐민 산지
에브라임산지와 유다산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베냐민산지는 그 모양은 마치 말안장을 닮은 작은 규모의 산간지역이다. 역사적으로 베냐민산지는 에브라임산지에 속하였던 것 같다(삼상1:1). 지파의 규모나 그들이 차지하였던 산지의 넓지 않았던 베냐민지파는 점차적으로 에브라임지파에 의존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에브라임산지와 베냐민산지는 지형적으로나 역사적 측면에서 서로 연속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산지로 이해될 수 있다. 베냐민산지 가운데 한 부분은 기브온 족속들이 차지하였던 지역이다(수9:8). 특히 베냐민산지의 남부지역은 기브온의 네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수18:25-28). 그들이 차지한 지역은 현재의나비 사무엘(Nabi Samwil; 전통적으로 사무엘 무덤이라고 주장되는 장소)이 위치하고 있는 산등성이와 벧호론길이 지나가는 계곡형 평원이 포함되어 있다. 벧호론길은 분수령을 따라 세겜에서 남쪽의 브엘세바로 내려가는큰 길(삿21:19)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마리아산지의 중요지역들*
1. 사마리아(Samaria)
사마리아는 오므리 왕에 의하여 건축된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오늘날은 아랍 동네인 사바스티야(Sabastiya)가 위치하고 있는 언덕을 의미한다. 오므리왕은 세멜의 소유지였던 이 언덕을 은 두 달란트를 구입하여 북왕조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를 이곳에 건설하였다(왕상16:24). 사마리아는 아합왕 때에 아람왕 벤하닷이 중심이 된 연합군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지만(왕상20장), 이스라엘은 그들을 성공적으로 몰아냈다. 아합의 아들 요람시대에 벤하닷은 재차 사마리아성을 공격하였다(왕하6:24-7:20). 그러나 8세기에 이르러 사마리아성은 크게 번영하였다. 특히 여보로암 2세 때 사마리아성의 번영은 최고 수준에 달하였다(왕하14:23-87). 그러나 8세기말 경 이스라엘 내부의 갈등(왕하15장)은 앗수르제국의 공격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었다(왕하15:29-31). 마침내 사마리아는 갈릴리, 요단동편 고원지대 그리고 해안평야에 뒤이어 사르곤 2세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다(왕하18:9-12). 앗수르는 외국인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켜 혈통적으로 혼합되게 하였다.
2. 세겜(Shechem)
세겜은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의 위치하고 있는 세겜계곡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서 산지를 관통하는 남북의 도로와 세겜계곡을 통하여 해안지역과 요단계곡을 잇는 동서간의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하란에서 가나안지역으로 이주하여 올 때 그들이 처음 도착하였던 가나안지역이 세겜이었다. 후에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야곱은 세겜에 정착하여 이곳에서 가나안족들과 얼마간 함께 지냈다(창33:18-20).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세겜에서 정복을 위한 전쟁을 벌렸다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이곳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스라엘 영토로 흡수되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하나님과의 언약을 재확인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다짐하였다(수8:30-35). 요셉의 유언에 따라 출애굽한 이수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요셉의 시체를 가져와 이곳 세겜에 묻었다(수24:32). 세겜에 있는 요셉의 무덤은 오늘까지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장소 중 하나로 보존되고 있다.
3. 도단(Dothan)
도단은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북쪽의 이스르엘계곡과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가는 길목이다. 므낫세 산지 중에서 가장 큰 계곡평원이기도 한 도단 주변지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었다. 고고학발굴에 의하면 석기시대와 초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이곳에는 큰 규모의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매우 번성하는 도시로 발전하였다. 헬라시대까지 이곳에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이 발굴된 유적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다.
성경에서 도단이 언급된 것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는 이야기 속에 나오고 있다(창37:17이하). 후에 이곳은 선지자 엘리사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는데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나기 위하여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왕하5장). 한때 아람왕은 엘리사를 체포하기 위하여 많은 군대를 보내어 도단성을 포위한 적도 있었다(왕하6:13 이하).
4. 디르사(Tirzah)
디르사는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텔 엘파라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파라계곡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요단 계곡과 트랜스요르단으로 연결되는 중요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산지 사이의 계곡에는 수량이 풍부한 강이 흐르고 있는 이 지역은 고대로부터 경관이 좋은 장소로 유명하였다(아6:4).
디르사는 앗수르에 의하여 파괴를 당하였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디르사의 정확한 위치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알브라이트(W.F. Albrght)가 제안한 와디파라 수원지에 위치한텔 엘파라를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디르사의 주변 자연 경관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아가서에서는 여인의 미를 디르사에 비유하고 있다(아6:4).
5. 실로(Shilo)
실로는 세겜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지고 예루살렘에서는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실로는 중앙산지의 분수령을 따라 형성된 남북간 중심도로의 동쪽 편에 자리하고 있다. 성경은 실로의 위치를벧엘 북편, 르보나 남편,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길 동편 실로라고 밝히고 있다(삿21:19).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후 이곳에 성막을 세움으로 각 지파들이 모일 수 있는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일을 이곳에서 실시하였다(수18:1-10). 엘 리가 실로의 성막에서 제사장으로 맡고 있을 때, 사무엘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삼상1-3장). 이스라엘이 에벤에셀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크게 패하면서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실로는 완전히 파괴가 되었다. 그후 실로는 다시 재건이 되기도 하였다(렘4:5, 7:12, 26:6,9). 여로보암에게 북왕조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아히야는 실로 출신의 선지자였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는 실로 출신들이 많이 있었다(느11:5). 실로는 헬라시대와 로마시대, 비쟌티시대르 거치면서 나름대로 번성하는 도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서 실로는 완전히 폐허화된 도시로 남게 되었다.
6. 벧엘(Beth El)
벧엘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도시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분수령길 간선도로변에 위치하면서 에브라임의 남부경계지역에 속하는 도시이다(수16:1-4). 벧엘은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인데, 성경에서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많이 언급되는 도시이다. 이곳은 아브라함 시대에루스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와 벧엘지역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렸다. 야곱은 이곳에서 꿈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다음 이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개명하였다(창28:10-22).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 때 여호수아에게 점령 당하였던 벧엘은 사사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예배장소가 되었다(삿20:26). 드보라 여사사는 벧엘 근처의 종려나무 아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였고(삿4:5), 사무엘은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하여 벧엘지역을 순방하였다(삼상7:16).
솔로몬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 벧엘의 중요성이 다소 축소되었지만, 통일왕국이 남북으로 분열 이후로는 옛 위치를 다시 되찾게 되었다. 즉 여보로암 1세는 북왕국의 중요한 성소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벧엘은 기원전 721년 북왕조가 앗수르에게 점령 당하면서 앗수르의 영토가 되었다. 앗수르는 벧엘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 앗수르에 포로가 되었던 제사장 하나를 세워 하나님의 법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다(왕하17:26-28). 그후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점령 당하게 되면서 벧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포로기 이후 벧엘은 귀환한 유대인들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벧엘과 아이 사람들은 모두 223명이었다(스2:28). 그 이후 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벧엘은 크게 번성하였는데, 특히 비쟌티시대에 와서는 더욱 발전하여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인구과밀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비쟌티시대 이후 아랍 통치시대가 되면서 벧엘은 갑자기 몰락하여 도시로서의 존재 자체도 사라져 버렸다.
7. 미스바(Mizpah)
베냐민산지 북쪽 지역에 위치한 미스바는 예루살렘에서 약 12km 떨어진 분수령길 주변에 자리하고 있다. 베냐민지파에게 분배된 이 도시는 벧엘산지를 향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수18:26). 성경에서 미스바가 처음 언급된 것은 베냐민지역에서 강간을 당하고 기브아에서 살해된 레위 사람의 첩 이야기에서다(삿20:21). 이스라엘 전체 회중은 베냐믽파에게 보복을 취하기에 앞서 이 사건을 놓고 미스바에 모여 대책을 상의하였다. 사무엘시대에도 미스바는 중요한 집회 장소였다. 특히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금식과 회개의 종교적 모임을 개최하였다(삼상7:5-16).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모으고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던 곳도 미스바이다(삼상10:17).
남북 왕조의 분열 이후, 미스바는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국경 요새로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여로보암 왕조를 넘어뜨린 바아사는 왕위에 오른 후 유다와의 국경을 라마까지 확장시켰다. 그러한 조치 속에는 예루살렘에서 해안지방으로 나아가는 벧호론길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이에 유다의 아사왕은 북쪽 지방의 아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바아사를 공격하였다. 이에 바아사는 라마를 포기하고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유다는 라마의 요새를 파괴하고 유다의 국경선을 미스바까지 확장하였다(왕상15:17-22, 대하16:1-6).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후 미스바는 바벨론에 의해 유다총독으로 임명된 그달리야가 거주하였던 도시였다(왕하25장, 렘40-41장). 포로기 이후에도 미스바는 유다에 속한 한 지역의 중심도시가 되었다(느3:15). 신구약의 중간시대에도 회집장소로서 미스바의 중요성은 계속 유지되었다. 유다 마카비는 이곳에서 자신의 군대를 소집하여 헬라와의 전쟁을 준비하였다(마카비1서3:46).
과제5. 유다산지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유다산지의 일반적 역사와 지형 개관
유다산지는 구약을 비롯한 신약시대 전체를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아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유산이 생겨났다. 이스라엘의 정치, 경제, 그리고 신앙의 중심지들이 주로 유다산지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은 성경을 비롯하여 요세푸스의 저작들, 탈므드 경전, 그리고 기독교 교부들의 작품들을 통하여 입증이 되고 있다.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유대삱에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헤브론, 베들레헴과 같은 중요한 도시들이 자리잡고 있다. 주변의 비옥하지 못한 토양과 물의 부족 등 환경적으로는 불리한 여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도시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통의 중심지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유다산지 중에서 대표적인 도시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지중해의 해안지방에서 여리고를 거쳐 요단동편지역으로 연결되는 대로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중요성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유다산지의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유다광야와세펠라(평지)가 자리하고 있어 외부의 침입자들을 적절하게 방어할 수 있는 자연방어선 내지 완충지역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다산지의 서쪽에 형성된 계곡들은 때로 외부의 침입을 용이하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있는 소렉골짜기와 엘라골짜기 등이 이러한 외부 침입을 가능케한 대표적인 계곡들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계곡 통로를 이용하여 블레셋 사람들, 헬라인들, 로마인들, 십자군들 등이 유다산지를 공격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런 계곡들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것은 곧 유다산지 전체를 통제하는 의미였다.
로마와 두 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가 되었고, 그에 따라 유다지방의 인구는 크게 감소하였다. 특히 기원 135년바르크흐바를 중심으로 일어난 두 번째 유대인의 반란운동으로 로마가 진압한 후, 로마는 유대인들이 더 이상 유다산지에 거주할 수 없도록 법적 제재를 가하였다. 그에 따라 유다산지의 유대인 인구는 급격히 줄어 들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해안지방과 갈릴리지방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외국으로 피난을 떠났다, 그래도 일부 유대인들은 유다산지에 계속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갈릴리지방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유다산지는 중세와 금세를 거치면서 크게 발전되지 못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세기말부터 일기 시작한 시온주의자들의 이민과 개척으로 인하여 유대산지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특히 1948년 신생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유대산지는 다시 이스라엘의 중심적 지역으로 부각되었다.
(2)유다산지의 지형과 경제적 특징
1. 지형적 특징
지질학적으로 사마리아산지와 유다산지를 구별하는 분명한 경계선은 없다. 그러나 이 두지역은 지형적인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마리아산지는 유다산지보다 더 많은 강우량 때문에 풍화작용이 더 심하고 깊은 계곡들이 더 많이 형성되었다. 반면에 유다산지는 높은 고원형 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보다 더 건조한 기후의 영향으로 산지 자체가 많이 나뉘어져 있지는 않다. 땅위로 드러나 있는 바위들과 흩어져 있는 돌들은 유다산지 지표면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유다산지에서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토양은 더욱 거칠어지고, 지형은 더 심한 굴곡 모습을 띄고 있다. 유다산지 가운데 비교적 집약적인 농작물 재배가 가능한 곳은 베들레헴과 헤브론 사이의 지역이다.
유다산지들의 지형적 특징은 산지의 높이에 변함이 거의 없으며 외형도 비슷하다는 점이다. 산지의 토양 색깔은 비롯하여 지질학적 구조 역시 차이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다산지의 다양한 지층들이 한때는 통일되어 있었으며, 깊고 좁은 게곡들은 후대에 이르러 형성된 것임을 암시해 준다. 이곳에서의 강우량은 년간 500-600mm에 이르고 있으며, 이 지역에 위치한 여러 개의 샘들은 급수원 조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빗물들은 지표면에 모아지지는 않고 땅속 깊이 들어가거나 아니면 사해나 지중해로 유입된다. 유대산지의 분수령은 넓은 편이어서 이 지역을 지나가는 도로 형성에 도움을 주고 있다. 에브라임산지와 네게브를 잇는 중앙산지의 분수령길 주변에는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등과 같은 중요한 큰 도시들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유다산지의 동쪽과 서쪽의 양편은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있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해안평야를 향하고 있는 서쪽 경사지에는 비가 내리는 겨울철에만 물이 흐르는 매우 빈약한 개천이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흐르는 계곡은 평상시 해안지방에서 산지에 이르는 자연 도로 역할을 한다. 반면에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동쪽은 매우 급한 절벽형 경사를 이루고 있다. 유다산지에서 요르단계곡과 사해까지는 직선거리로 24km 떨어져 있지만, 높이의 차이가 무려 1200m나 되고 있다. 이 짧은 거리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 지역에 몇 개의 독특한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 경사지에서 중요한 계곡은 기드온계곡과 와디켈트이다. 이곳의 독특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유다산지와 요르단 계곡 사이에는 도로들이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사실 유대산지에서 사해와 요단계곡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폭이 좁은 깊은 와디켈트 한 뿐이다.
2. 경제적 측면
유다산지는 사마리아산지와 마찬가지로 지중해성 작물재배에 적합한 지역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각종 곡물, 감람나무, 그리고 포도재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작물들 중에서 특히 포도재배는 유다산지의 대표적 작물이었다. 감람나무는 겨울철 날씨가 추운관계로 사마리아산지보다는 덜 재배되었다. 유다산지에서 이루어진 농법 가운데 특이한 점은 계단식 농업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급한 경사지가 많기 때문에 빗물이 토양이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돌을 쌓아 계단식 농지를 만들었다. 헤브론 이만 지역은 강우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농업은 적합지 않고 다만 목축이 가능한 지역이다.
3. 유다산지의 경계
① 유다산지의 북쪽 경계는 베냐민산지의 남단으로서 아얄론 골짜기와 여리고가 연결되는 지역이다. 비교적 낮은 분지인 베냐민산지에서 완만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되고 있는 이 북쪽 경계지역은 예루살렘 근처에서는 약 800m까지 높아지는 지역이다. 이러한 오르막길은 계속 남쪽으로 이어져 헤브론 근처에서는 약 1000m 정도의 높이까지 달한다.
② 유다산지의 남쪽 경계는 브엘세바 근처로서 헤브론에서부터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의 마지막 부분이다. 따라서 남쪽 지역을 통하여 네게브 지역의 아말렉족과 같은 사막민족들은 빈번하게 유다산지를 공격하였다.
③ 유다산지의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면서 유다광야와 연결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동서간의 교통에 지대한 장애물이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중요한 자연 방어역할을 해주었다.
④ 유다산지의 서쪽은 세펠라구능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지역은 해안지방과의 교류를 가능케 해주었고, 유사시에는 유다산지를 장어하는 전략적 완충 역할을 하였다.
(3)유다산지의 중요 지역들
유다산지에 위치한 도시들은 주로 남북 교통로가 되고 있는 분수령길 주변에서 발전하였다. 그러한 이유는 유다산지의 동쪽과 서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교통로 형성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분수령 주변에 발달한 대부분의 도시들은 유다산지와 유다광야가 접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그것은 유다산지의 분수령이 동쪽 곧 유다광야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다산지의 도시들 중에서 예루살렘은 위치상 남북도로뿐 아니라 동서간의 교통이 가능한 십자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여건 때문에 예루살렘은 다른 도시보다 더 큰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1. 베들레헴 (Beth Lechem)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770m의 석회암 구능지로 이루어진 베들레헴은 기원전 14세기 이집트문서에서 이미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도시가 성경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서였다. 다윗의 조상들은 이곳에 오래 전부터 정착하여 살아왔으며, 다윗은 이곳에 태어나 주변 광야의 초지에서 양들을 돌보는 목동으로 성장하였다.
베들레헴은 크게 요새화시켰던 왕은 다윗의 손자였던 르호보암이다. 그는 유다왕국의 동편을 수호하기 위하여 에담, 드고아와 더불어 베들레헴을 크게 증축하였다(대하11:6). 그 이후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정치와 역사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 도시로 밀려났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메시야의 탄생지가 될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에 힘입어 새로운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미5:1). 6세기경 바벨론에서 귀환한 123명의 베들레헴 출신자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본향에 정착하였을 것이다(스2:21).
미가가 베들레헴을 메시야의 탄생지로 예언한 그대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그리스도의 탄생지에 처음으로 기념교회가 세워진 것은 339년 콘스탄틴대제의 생모인 헬레나황후에 의해서였다. 이 기념교회는 그 후 부분적인 변화가 있긴 했지만, 교회가 세워진 본래의 자리나 기본적인 구조의 변함이 없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베들레헴의 그리스도 탄생기념교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는 제롬이 이곳에서 신구약전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일이다. 그는 384년부터 이 교회에 머물면서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성경이 카토릭교회의 공인성경인벌게이트번역본이다.
2. 벧술(Beth Zur)
벧술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6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 도시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은 중앙산지의 남북교통로가 지나가는 도로변으로서, 유다산지 중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해발 약 1010m가 되는 곳이다. 르호보암은 이곳에 전략적 요새로 세웠고(대하11:7), 유다 마카비는 이곳에서 시리아 군대를 격파하기도 하였다.
3. 헤브론(Hebron)과 미므레(Mamre)
베들레헴 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헤브론은 해발 927m의 고지대로서, 유다산지 중에서는 가장 높은 지역이 되기 때문에 헤브론 주변은 산지 속의 평야지대처럼 분지형태를 띄고 있다. 또한 이곳은 급수원도 풍부하고 거주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성경시대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헤브론은 포도재배의 최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왔던 12명의 각 지파 대표들은 가나안 땅의 비옥성을 알리기 위하여 헤브론 근처의 에스골골짜기에서 포도송이를 막대기에 꿰어 줄이 메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민13:21-23).
헤브론은 유다산지의 여러도시들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헤브론의 원래 이름은네 개의 도시(the Town of four)라는 의미의기럇아르바이었다. 이러한 헤브론의 초기 이름은 마므레를 포함하여 주변의 작은 마을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 것임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헤브론은 이집트의 소안보다 칠 년 앞서 세워졌다고 되어있다(민17:22 이집트의 소안은 B.C 1720년경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자료들이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헤브론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하여왔다. 헤브론에서 이루어진 한 고고학 발굴 결과는 기원전 3300년경 이미 헤브론에 집단 거주의 흔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헤브론 근처에 위치하고 있던 마므레는 헤브론 연합도시를 구성하였던 네 지역 중 하나였다. 정확하게 마므레의 지역이 어디였는지를 확인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는라마트 알 칼릴(Ramat al-Khalil)으로 보고 있다. 헤브론을 성역화 시킨 헤롯대왕은 이곳에 거대한 담장(45m x 60m)을 세웠다. 그러나 로마시대 하드리안황제는 이곳에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을 지었다. 그후 콘스탄틴황제는 하드리안이 세운 이방신의 제단을 헐어버리고 아브라함이 쌓은 제단(창13:18)을 기념하는 교회를 지었다.
4. 드빌(Debir)
드빌은 헤브론에서 남서쪽으로 약 1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가나안시대에 이 도시는 아낙자손들이 살았던 일종의 도시국가였다. 그 당시 이곳은기럇세벨(수15:15, 삿1:11), 혹은기랏사나(수15:49)라고 불렀다. 그나스의 아들 사사 웃니엘의 아내로 내주었다(수15:15-19, 삿1:11-15). 후에 드빌은 아론 제사장 게열의 그핫자손에게 분배되었다(수21:15, 대상6:58). 이러한 사실은 드빌이 왕국시대 매우 중요시 되었던 도시임을 시사하고 있다.
포로기 이후 드빌은 과거의 중요성을 되찾지 못하였다. 당시의 유다지방의 남쪽 경계는 벧술에까지였으며(느3:16), 드빌은 헤브론과 더불어 유다의 행정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외지역으로 취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유대인사회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헤브론만 언급하고 있지 드빌은 빠뜨리고 있다(느11:25-30). 시약시대에 이르러 헤브론 이남지역은 이두메인들이 차지한 지역이 되었다. 그들이 이 지역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것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직후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드빌은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그 역사적 의미를 잃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과제6. 유다광야에 대하여 요약하라.
유다광야는 서쪽에 있는 유다산지의 분수령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모양을 띄고 있다. 서쪽 경계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고, 다만 유다산지의 거주지역이 끝나는 지점이 곧 유다광야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동쪽 경계는 사해로 명백하게 규정된다. 북쪽 경계는 요단 계곡으로 이어지는 베냐민산지의 동쪽 경사지이며, 남쪽 경계는 북부 네게브와 만나는 지역이다.
유다광야는 지리적으로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유다산지의 동쪽 경사지는 사해를 향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즉 유다산지에서 사해까지의 직선거리는 20-25km 박에 되지 않지만, 두 지역의 높이 차이는 무려 122m나 된다. 이곳의 경사는 완만하거나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단층을 거쳐 내려가는 급경사이다. 유다산지에서 사해까지 평균 높이가 300m 이상 되는 단층이 5개나 존재하고 있다. 엔게디 근처 지역에서는 직선거리가 2km도 안되지만 두 지역의 높이 차이가 무려 600m나 되는 곳도 있다. 이러한 절벽형 급경사로 인하여 유다광야에는 캐논형태의 깊은 계곡들이 잘 발달되어 있다.
유다광야를 이루고 있는 사막 환경은 몇 가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루어졌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요인은 극히 적은 강우량이다. 사해 근처에서는 년간 100mm 정도의 극히 적은 비가 내린다. 사해지역은 지중해 수면보다 400m가 낮은 지역인데, 유다산지에서 사해 쪽으로 형성된 급경사는 이곳에 비를 거의 내리지 않게 만들면서 기온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이 지역은 사막에 가까운 광야지역이 되었다. 유다광야의 환경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지리적 여건은 이 지역의 토양이다. 주로 백악의 연성석회암으로 이루어 이곳 토양은 물을 잘 흡수하고 땅을 쉽게 건조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곳은 물과 식량이 늘 부족한 지역이며,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정착하여 거주한 흔적이 거의 없는 지역이다. 그러나 유다광야는 다른 광야나 사막과는 달리 역사적으로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유다광야의 크기는 폭이 실제적으로 50km를 넘지 못하고 있는 제한된 지역이다. 사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직선거리에 불과 22km 정도이다. 그리고 인근의 유다산지와는 불과 몇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유다광야와 예루살렘, 베들레헴, 드고아.헤브론과 같이 인구가 집중적으로 모여 살고 있는 산지의 중심도시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이런 중요한 도시들과의 인접성이 곧 유다광야가 네게브나 시나이 같은 사막지역과 구별되는 점이다. 즉 거주지의 주변지역인 유다광야는 유다산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거주지역의 생활기반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유다광야는 다른 중심 지역과 고립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여러 거주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 더구나 동쪽으로는 사해와 그 건너편의 모압지역으로 접하여 있고 서쪽으로는 유다산지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문명된 두 거주지역 사이에 끼어있는 셈이다. 유다광야는 다른 지역을 가기위한 중간 지점이 아니다. 중요한 거주 지역들을 연결시켜는 도로가 발전되어 있지 않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유목민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길들이 있을 뿐이다. 물론 성경시대나 로마시대에 유다광야를 지나 사해의 리숀반도를 통해 모압지방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그러나 사해 쪽에 위치한 여리고를 거쳐 요단동편지역으로 건너가는 길이 더 안전하였고 사람들의 통행도 많았다. 단지 위급한 시기가 닥쳤을 때에 대체적으로 성격의 도로로 광야를 통과하는 길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유다광야는 이와 같은 독특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문명의 중심권에서 벗어난 불모의 광야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기존사회로부터 도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나 삶의 중심지로부터 축출된 사람들,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로 거주지역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지역이 되었다. 이것은 유다광야가 광야라는 격리된 지역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주변의 도시들과 인접해 있어 주변의 도시들ㄹ로부터 손쉽게 생활용품들을 조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피신하였던엔게디요새(삼상23:29)는 유다광야 가운데 있는 한 지역이었다. 세례요한이 자신의 영적 훈련을 위하여 선택한 곳도 유다광야였으며(눅1:80),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시고 시험을 받은 곳(마4:1-11)도 여리고 근처의 유다광야였다.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위기를 만나게 될 때마다 유다광야는 국가를 위하여 싸우는 항쟁자들의 마지막 저항지가 되었다. 마카비 전쟁이나 마사다의 항쟁, 그리고 바르코흐바의 항쟁 등은 그에 대한 좋은 예들이다. 유다광야에는 목축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유목민들이 살고 있는 것 이외에도 역사적으로 통치자들에게 대항하는 정치적 반란 세력들, 사회를 떠난 은둔자들, 그리고 수도원 형태의 공동체를 이룬 종교적 집단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비쟌티시대를 거쳐 중세에 이르는 동안 유다광야에는 수많은 수도원들이 세워졌던 이유도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독특성 때문이었다.
과제7. 쉐펠라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쉐펠라의 지역적 특징
유다산지와 해안평야 사이에 위치한 세펠라는 유다산지를 방어하는 일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완충지역이다. 이곳은 유다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이다(수15:33-47).세펠라의 어원적 의미는낮은 지역(low land)인데, 이것을 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평지락 ㅗ번역하였다. 세펠라는 블레셋평야와 유다산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얄론골짜기에서 네게브의 경계 부근까지 긴 모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펠라의 동서간 폭은 16-20km가 되며, 남북간의 길이는 72km가 넘는 길고 좁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지형적으로 세펠라는 해안지방과 연결되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는데, 산지의 높이는 지역에 따라 100m에서 450m가 되는 일종의 야산지역이다.
세펠라는 유다산지에만 발견되는 독특한 지형이다. 유다산지에 인접한 에브라임산지에는 해안지역과의 접경 지역에 세펠라와 같은 야산지대가 없다. 세펠라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지들 사이에 백악의 깊고 좁은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계곡들은 서쪽에서 유다산지를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세펠라의 석회암은 유다산지의 석회암과는 달리 비옥하지 못한 토양으로 잘 부식된다. 이것은 세펠라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강우량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 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고대시대 이곳에는 수목이 우거진 지역이었다(왕상10:27).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세펠라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사이의 완충지대로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중요시하였던 유다의 왕들은 세펠라지역을 요새화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르호보암은 이집트왕 사삭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견고한 요새들로 수축하였다.
세펠라의 중요한 지형구조는 해안지방에서 산지의 깊숙한 내지로 이어지는 일련의 계곡들이다. 이 지역의 대부분 계곡들은 해안 가까운 지역에서는 비옥하고 폭이 넓은 계곡이 되지만, 암석층으로 이루어진 산지의 내부쪽으로 들어오면서 계곡은 점차적으로 좁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중요한 계곡등이 자리하고 있다.
① 아얄론계곡(Valley of Aijalon): 아얄론 계곡은 유다산지에서 해안지방에 이르는 중요 교통로였다. 이 계곡은 벧호론길과 연결되어 베냐민산지오하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수10:10-15, 삼상14:31). 이것은 아얄론계곡이 유다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길목을 지켜주는 일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 사삭은 르호보암의 통치기간이었던 기원전 924년 아얄론계곡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아얄론계곡의 남쪽에는 전략적으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게셀성이 위치하고 있다.
② 소렉계곡(Valley of Sorek): 소렉계곡은 아얄론계곡에서 남쪽으로 약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곳은 삼손의 활동으로 유명하였다(삿16:4). 소렉계곡 주변에 있었던 도시들 중 유명한 것은 벧세메스(Beth Shemesh)와 소라(Zorah)이다. 소렉계곡으로 이어지는 유다산지의 두 계곡은 르바임계곡(Valley of REphaim)과 케살론계곡(Valley of Kesalon)이다. 이 두 계곡들은 모두 예루살렘 근처에서 시작되는 게곡들이다. 블레셋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 다윗은 르바임에서 그들을 두 번이나 격퇴시켰다(삼하5:17-25).
③ 엘라계곡(Valley of Elah): 엘라계곡은 소렉계곡에서 남쪽으로 8km 떨어져 있다. 이곳은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군인 골리앗(삼상17:2)을 맞아 싸웠던 곳이다. 이 골짜기 한가운데를 흐르는 물가에서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기 위한 물멧돌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곡은 베들레헴으로 직접 이어지는 길목이었으며 아세카(Azekah)와 소고(Socoh)와 같은 도시들이 엘라계곡의 길목을 방어해 주었다.
④ 구브린게곡(Vallaey of Guvrin): 구브린계곡은 엘라계곡에서 남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성경시대에는스바다골짜기(대하14:10)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해안지방에서 헤브론으로 올라가는 지름길이 있었으며, 마레사(Mareshah)라는 요새가 이 계곡을 방어하였다. 마레사는 미가 선지자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이 계곡에서는 유다산지로 공격하려는 구스사람 세라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린 것으로도 유명하다(대하14:9-15).
⑤ 라기스계곡(Valley of Lachish): 라기스계곡은 구브린계곡에서 남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세펠라지역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계곡인데, 라기스(Lachish)라는 국경도시가 이 지역을 방어해 주었다. 삼손이 가사의 성 문짝을 헤브론까지 가져온 것은 이 계곡을 통해서일 것으로 추측된다(삿16:3). 기원전 791년 산헤립과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은 각각 이 라기스계곡을 통하여 유다산지를 공격했다(렘34:7, 왕하18:4).
(2) 쉐펠라의 중요한 지역들
① 게셀(Gezer)
구약시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였던 도시 중의 하나였던 게셀은 아얄론계곡의 남쪽이면서 세펠라지역의 서쪽 가장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게셀은 해안길이 아얄론계곡과 만나는 지역을 방어하는 전략적인 요새였다. 전략적으로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게셀은 주변의 여러 샘들과 우물들로부터 좋은 급수원을 제공받았다.
게셀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약 1500년전부터 존재하였다. 게셀이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이었다. 넓이가 3m 정도나 되는 거대한 돌들로 만들어진 성벽은 이 도시를 견고하게 지켜 주었다. 그러나 게셀왕 호람은 여호수아에 의하여 패배를 당하였다(수10:33). 비록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나안 사람들을 게셀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하였지만(삿1:29), 이 도시는 레위인들에게 분배기 되었다(수21:21).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게셀은 정식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로 영입이 되었다. 그것은 이집트의 바로가 자신의 딸을 솔로몬의 왕비가 되게 하면서 게셀을 솔로몬에게 선사하였기 때문이다(왕상9:15-17). 솔로몬은 게셀을 벧호론과 더불어 요새화하였는데, 그것은 베냐민산지로 올라오는 중심도로를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시삭이 유다를 침략하였을 때 그는 유다산지를 침공하기에 앞서 먼저 게셀을 공격하였다. 이곳에서의 그의 승리는 곧 유다산지로의 침투를 가능하였으며, 결국 예루살렘의 항복을 얻어내어 유다에게서 조공을 받게 되었다(대하12:1-12). 현재 게셀이 남아있는 것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솔로몬 시대의 성문이다. 이 성문은 하솔과 므깃도의 성문과 일치하고 있는데, 이 세 도시의 성은 모두가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도 있다. 이곳에서는 일년동안의 농사활동을 기술하고 있는 히브리어로 씌여진 일명게셀월력이 발견되엇다.
게셀은 십자군시대까지 한 도시로서의 존재가 유지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1873년 이곳은 재발견되었고, 금세기 초 본격적인 고고학 발굴작업이 이곳에서 진행되었다.
(2) 벧세메스(Beth Shemesh)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벧세메스는 소렉골계곡을 관장할 수 있는 전략적 도시였다. 이곳은 유다의 북족 경게선으로서(수15:10), 레위인에게 분배된 도시였다(수21:16). 벧세메스는태양의 집이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이곳에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곳은 블레셋의 접경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블레셋의 영향을 많이 받게되었다. 삼손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소라에서 태어났고, 삼손의 자기의 아내를 얻었던 블레셋의 도시 팀나(Timnah)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소렉계곡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법궤가 이스라엘로 되돌아 올 때, 법궤는 소렉계곡을 통하여 벧세메스로 돌아왔다(삼상6:12).
이스라엘의 왕정이 세워지기 전, 이곳은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도시였다. 기원전 1050년 경 이 도시는 파괴가 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사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윗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다시 이스라엘의 도시로 재건되었으며, 르호보암은 시삭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요새화를 추진하였다(대하11:5-12). 한때 이곳에서는 유다왕 아마시아와 이스라엘왕 여호아스 사이에 전쟁이 있기도 하였다(왕하14:11-13). 아하스시대에 벧세메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대하28:18). 기원전 586년 유다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 벧세메스는 그 중요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3) 소라(Zorah)
소라는 벧세메스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소렉계곡 내에 위치한 도시이다. 아마르나서신에서는 소라가 게셀왕국에 속한 도시로 되어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후에 소라는 단지파에게 분배 되었는데, 소라는 아스다올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 단지파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삼손 아버지 마노아의 고향인 이곳에서 삼손이 태어났고, 삼손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이곳에 파묻혔다(삿13:2, 16:31).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삼손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한 것은 소라와 아스다올 사이에서였다(삿13:25).
단지파가 북쪽지역으로 이주한 후에 이곳은 유다지파의 땅에 합병되었고(수15:33), 유다지파 중 기럇여아림 자손이 이곳에 거주하며 살았다(대상2:54-55). 소라는 르호보암에 의해 요새화된 쉐펠라지역의 도시들 중 하나였다(대하11:10).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 중에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느11:29).
(4) 아제카(Azekah)
베들레헴에서 서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아제카는 엘라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100m 정도 높이의 언덕이다. 여호수아는 벧호론길에서 하나님에 의한 우박의 도움으로 아모리족속을 이차 패배시킨 후에 아제카까지 그들을 추격하였다(수10:10-11). 블레셋은 사울의 군대와 싸우기 위하여 아제카와 소고 사이에 집결하였으며(삼상17:1), 이 때에 다윗은 골리앗을 아제카 근처의 계곡에서 죽였다. 아제카는 르호보암이 요새화하였던 도시 중 하나였다(대하11:5-9). 이곳은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전에 바벨론 군대에 함락 당한 유다의 마지막 두 도시 중 하나였다(렘34:7). 라기스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아제카가 언급되고 있는 것은 유다왕국 말기에 이 도시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보여준다. 아제카 역시 바벨론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정착하였던 유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느11:30).
(5) 라기스(Lachish)
라기스는 헤브론에서 서쪽으로 약 24km 떨어진 라기스계곡의 남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라기스왕은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방어하기 위하여 싸웠던 아모리 다섯 왕 중의 하나이다(수10:3). 라기스왕은 여호수아군대에 의하여 막게다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라기스성은 정복되었다(수10:22-32). 이 도시는 왕정 초기 다윗이나 솔로몬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후에 르호보암은 예상되는 시삭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하여 라기스를 요새화아였다(대하11:19).
기원전 701년 산헤립은 유다의 항복을 얻어내려는 압력으로 라기스를 포위 공격하였다(왕하18:13-17). 니느웨에 있는 산헤립의 궁궐 벽에는 라기스를 공격하는 앗수르군대의 모습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후 앗수르의 국력이 약화되면서 라기스는 다시 한번 유대의 중요한 요새가 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에게 다시 포위되어 접령 당하였다. 라기스는 아제카와 더불어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점령하였던 도시이다.
라기스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서라기스 서신이 유명하다. 이 서신은 고전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으로서, 기원전 6세기의 히브리 문자와 어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서신에 나오는 내용은 바벨론이 쉐펠라 지역의 대부분 도시를 점령하였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과제8. 예루살렘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예루살렘의 명칭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빈번하게 타민족에게 정복을 당했다. 그런 점에서 이 도시의 명칭이 다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원전 1900년경의 이집트 제12왕조시대 문서에서 예루살렘은아우샤멤(Aushamem)이란 이름으로 지칭되었다. 그 이후 시대인 아카드와 앗수르 문서에는 그 이름이우르살렘(Urusalem)이란 형태로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창세기의 아브라함 시대에 이곳은샬렘이라는 축약형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이러한 축약형 명칭은 그 이후 성경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창14:18, 시76:2, 히7:2).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고대 가나안지역의 신이었던살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예루살렘의 어원적 의미는살렘이라는 신명칭과기초라는 의미의예루살렘을 히브리어 단어샬롬(평화)과 연관시켜 예루살렘을평화의 도시로 이해한 미드라쉬적 유대인 해석은 훨씬 후대에 와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 도시는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각각 다른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에를 들면,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에는여부스의 도시로 알려졌지만,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후에는다윗성혹은시온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을공의의 도성거룩한 도성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표현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과 찬양과 경외심을 보여주는 명칭들이었다. 그러나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은 다른 어느 이름들보다 더 지속적이고 널리 사용되었다. 제2차 유대인전쟁 기간 동안 파괴된 예루살렘을 재건한 로마의 하드리안황제는 예루살렘을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어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고 하였지만, 국내외의 유대인은 어느 누구도 이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랍인들은 여러 세대 동안 이 도시를 예루살렘이라 불러 왔지만,엘 쿠스(EI Kuds)즉거룩한 도시라는 별명을 더 친근하게 사용하였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유대인과 기독교인 뿐 아니라 모슬렘 모두에게 성스러운 신앙 전통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2) 예루살렘의 지리적 위치
예루살렘은 지중해로부터 동쪽으로 약 5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사해 북단에서 서쪽으로 약 24km 떨어진 해발 750m의 유다산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예루살렘이 위치하고 있는 산지는 원래 베냐민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이었다(수18:11-20). 중앙산지를 남북으로 가로 지나가는 분수령 길의 동쪽편에 위치한 예루살렘에서 가장 결여된 요소는 비옥한 농경이다. 그러나 그러한 불리한 경제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한 역사적 중요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선택한 것에서 비롯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선택한 이유는 다음의 네 가지 요소로 지적될 수 있다.
(1)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은 예루살렘의 급수원이다. 예루살렘은 기드론 골짜기 안에 있는 기혼샘과 엔로겔이라는 두 수원에서 식수를 공급받았다. 여름철 기혼샘은 매일 227 입방미터의 물을 공급할 수가 있었고, 엔로겔은 이보다는 적은 양의 물을 공급하였다. 예루살렘이 확장되고 인구도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빗물을 모아 저장할 수 있는 저수조 시설이 사용되면서였다.
(2) 두 번째 요인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쉬운 전략적 측면이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여러 개의 산과 계곡이 자리하고 있어서 전쟁이 발생하였을 때 방어에 용이한 지역이다. 북쪽을 제외한 세 방면은 모두 자연 방어선 역할을 하는 계곡들로 둘러 싸여있다. 예루살렘에서 제일 취약한 방면은전망산(Mt. Scopus)-히브리어로(하르 하쵸침)과 연결되어 있는 북쪽 지역이다. 이곳은 계곡과 같은 자연 방어선이 없이 직접 산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대한 접근과 공격은 완만한 경사지를 이루고 있는 북쪽 지역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3) 세 번째 요소는 편리한 교통로이다. 예루살렘이 지니고 있는 지리적 이점은 이스라엘 내의 중요한 남북간 간선도로와 동서간 간선도로가 이곳에서 교차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을 잇는 간선도로는 산지의 분수령을 따라 세겜 예루살렘, 헤브론과 같은 중요 도시들을 거쳐 브엘세바까지 이르는 분수령길이다. 그리고 동서를 잇는 간선도로는 여리고에서 지중해 해안지방으로 나가는 벧호론 길로서 예루살렘의 북쪽 지역을 지난다. 이런 간선도로의 교차점이라는 이점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모든 불리한 지리적 여건을 극복하고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적 도시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4) 네 번째 요소는 이스라엘 지파간의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 도시라는 점이다. 다윗이 이 도시를 점령할 당시 예루살렘은 가나아의 여부스가 차지하고 있었던 도시였다. 곧 이곳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게 분배되지 않은 중립적 성격의 도시였다. 따라서 다윗이 이곳을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한 것은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간에 생길 수 있는 갈등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이 도시를 점령하고 난 후 도시의 이름을다윗성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 도시가 다윗 개인 소유임을 강조한 명칭이었다.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은 지파 간의 갈등이 없는 중립적인 지역과 다윗 자신의 개인 소우지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 명칭은 다윗의 정치적 입지가 공고해진 이후 곧예루살렘이라는 공식적 이름으로 바뀌었다.
3) 예루살렘 주변의 산들
예루살렘은 사면이 산으로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예루살렘 주변에 위치한 산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원래의 예루살렘이 위치하고 있었던 곳은 약 660m 정도 높이의시온산성이다. 이곳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제공하였던 살렘왕 멜기세덱의 거처이기도 하였으며(창14:18, 히7:1), 다윗이 점령하여다윗성이라고 개명한 여부스의 요새이기도 하였다(삼하5:7).
(2) 시온산성 북쪽에는 해발 730m 높이의모리아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여호와께 번제로 바치려 하였던모리아 땅에 있는 산과 동일시 되고 있다(대하3:1).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이곳은 여브스 사람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있었다. 다윗은 그 타작마당을 구입하여 번제를 드리기 위한 제단으로 삼았다(삼상24:18-25). 그 후 솔로몬은 이곳에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였다. 모리아산은 시온산보다 더 높았지만 현재는 이 두 산 높이 차이가 거의 없다. 그것은 헤롯이 성전을 개축하면서 산 정상을 인력으로 밀어내어 이 두 산 아이에 약 23 에이커 정도의 넓고 평평한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3) 시온산의 서쪽에는 성경시대에서산이라고도 하였던 765m 높이의 언덕이 위치하고 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 산을시온산이라고 잘못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한 전승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시온이라는 예루살렘 명칭은 북쪽의 성산전을 의미하기도 하였고, 서쪽에 새롭게 확장된 시가지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예레미야 31:39에서 언급된가렙산은 아마도 예루살렘 서편에 있던 이 산을 의미하였을 것이라 본다. 마카비시대에는 성전 지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아크라라는 요새가 이곳에 위치하였다. 십자군들은 다윗의 무덤, 마가의 다락방, 그리고 마리아의 운명장소 등을 기념하는 교회들을 모두 이 산 위에 세웠다.
(4) 예루살렘 동편의 기드온골짜기 건너편에는 810m 높이의감람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 산은 기드론골짜기와 나란히 남북방향으로 형성된 산지이다. 감람산이 성경에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날 때이다(삼하15:3). 그 때 다윗은 감람산을 넘어 요단 동편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동편의 이 산 위에 외국에서 데려온 왕비들의 신인 그모스와 몰렉을 위한 산당을 지었다(왕상11:1-7). 이런 이유 때문에 감람산의 남쪽 부분을멸망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cf. 왕하23:13).
예수께서 생애의 마지막 주간을 예루살렘에 계신 동안 감람산을 자주 찾았으며(요8:1, 막11:1, 26:30), 특히 감람산 밑에 위치한 겟세마네 동산은 십자가를 지기 전 마지막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마26:30). 예수님께서는 이곳을 제자들과 함께 찾아오는 것을 일종의 습관으로 삼았던 것 같다(눅22:39).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감람산 정상에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행1:8-12). 오늘날 감람산과 그 주변에는 예수의 마지막 생애와 관련된 여러 개의 기념 교회들이 위치하고 있다.
4) 예루살렘 주변의 계곡들
예루살렘 주변에는 크고 작은 산들과 더불어 깊은 계곡들이 삼면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다. 예루살렘 주변의 산들은 마치 삼지창 모양을 하고 있는 세 개의 골짜기에 의하여 나뉘어져 있다. 예루살렘 주변의 세 골짜기들은 모두 다윗성 남쪽 부분에서 만나 유다광야 쪽으로 흘러 내려가 사해로 유입된다. 예루살렘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세 개의 골짜기는 다음과 같다.
(1)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한 계곡은 L자 모양으로 휘어져 있는흰놈의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쪽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내려온다. 성경시대에 이곳은 좋지 않게 알려진 곳이었다. 아하스와 므낫세 같은 왕들이 바알과 몰록에게 어린아이들을 바치는 의식을 이곳에서 거행하였다(대하28:3, 33:6). 또한 이곳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버려진 쓰레기를 태우는 곳이었다. 그래서 항상 쓰레기 태우는 불과 연기로 이곳에 가득찼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흰놈의 골짜기는 사람들에게 지옥의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의미하는 헬라어게헨나는 흰놈의 골짜기에 대한 헬라어 음역이다.
(2) 삼지창 모양에서 가운데 것에 해당되는 골짜기는티르포에온골짜기이다. 요세푸스는 이곳을치즈 만드는 자의 골짜기라고 불렀다. 이 골짜기는 서편산과 시온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남동쪽 방향의 골짜기이다. 다윗성의 남쪽 부분에서 시작되는 이 골짜기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흰놈의 골짜기와 만난다.
(3) 삼지창 모양에서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골짜기는기드론골짜기이다. 예루살렘과 감람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골짜기는 처음 시작 부분에서는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의 동편을 지난다. 그리고 이 골짜기는 다윗성 남쪽에서 다른 두 골짜기와 만나게 된다. 압살롬의 반란을 피했던 다윗은 이 골자기를 건너 예루살렘을 빠져나갔다(삼하15:23). 요시아왕은 이곳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들을 불태우기도 하였다(왕하23:4-6). 예수는 마가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 골짜기를 건너 겟세마네로 가셔서 기도하였다(요18:1).
5) 예루살렘의 수원지
고대 예루살렘의 급수 문제는 샘과 물저장 시설과 인공 연봇 등으로 해결하였다. 다윗성 아래의 기드론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기혼샘은 예루살렘의 급수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여기에서 솔로몬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에 의하여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왕상1:33-34).
그드론골짜기와 흰놈의 골짜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에엔로겔이라는 샘이 있다(수15:7, 삼하1717). 이곳은 다윗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위에 오르려 하였던 아도니야가 대관식을 거행하였던 장소이다(왕상1:9).
앗수르의 공격을 방비하기 위한 준비로 히스기아왕은 기드론골짜기의 기혼샘이 입구를 막고, 다윗성 밑을 통과하여 예루살렘 성내에 이르는 약 480m 길이의 지하수로를 건설하였다. 이 수로의 마지막 부분에 마련된 인공 연못은실로암(왕하20:20, 대하32:30)혹은실로아(느3:5)라고 명명되었다. 오늘날에는 이 지하수로를히스기야의 수로라고 부른다. 이 수로의 완성으로 유다는 앗수르 군대의 침입과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식수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대하32:34). 이곳은 또한 예수님께서 눈먼 자를 보내어 이 물에 눈을 씻게 함으로써 그의 눈을 고쳐준 곳이기도 하였다(요9:1).
성경시대 예루살렘에는 각 가정마다 개별 저수조가 마련되어 있는 반면, 공동으로 마련한 많은 인공 연못들도 있었다. 구약에 언급된 연못으로서는 윗 못(왕하18:17), 아랫 못(사22:9), 왕의 못(느2:14), 셀라 못(느3:15)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는 성전 북편에 위칳였던 양문(느3:32, 12:39) 곁의 베데스다 연못(요5:2)이 언급되어 있다. 다섯 개의 행각을 갖고 있는 이중 연못으로 유명하였던 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께서는 3년간 병들어 있던 병자를 고쳐 주셨다.
예루살렘 남쪽 12km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 근처에는솔로몬의 연못(전2:6)이라는 인공 연못이 있다. 이곳은 제2성전 시대 예루살렘의 급수를 위하여 근처에 있는 샘물을 모아둔 공동 저수지이다. 이곳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돌 수도관을 연결하여 식수공급원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당시 예루살렘의 물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였는가를 엿보게 한다.
6) 예루살렘의 역사
1. 초기의 역사
예루살렘은 이미 기언전 3000년경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지역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다. 1세기 유대인 역사를 저술하였던 요세푸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 도시는 기원전 2055년에 세워졌다. 고대에 예루살렘은 잊ㅂ트와 긴밀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였고,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가나안 다른 도시들과 더불어 이집트에 예속되는 한 도시국가 되었다. 기원전 14세기경 예루살렘 인근 지역은 히브리인들의 기원과 긴밀한 관계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하피루의 지배 지역이 되었다. 이들하피루는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종주국인 이집트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예루살렘왕은 이집트 편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하피루의 동맹국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예루살렘은 하피루에 의해 정복되지 않고, 가나안족속의 예루살렘 통치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동안, 여호수아는 예루살렘왕 아도니세덱과 전쟁을 벌렸다. 그러나 그 역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지는 못하였다.
사사기에 의하면, 유다자손이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삿1:8)라고 했지만, 여부스족이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았던 것 같다. 같은 장의 사사기에는베냐민자손이 예루살렘에 여부스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삿1:21)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이후 약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 이전에는 가나안족에 속하는 여부스가 이 도시를 소유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지역에서 실시되었던 고고학 발굴 작업 결과로 다윗 이전의 예루살렘 시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할 때, 그의 군대는 도시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놓았던 비밀 수로를 이용하였던 것 같다. 수원지인 시혼샘으로 통하는 이 비밀 수로는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인공 지하 수로이다. 사무엘하 5장 8절에 언급된치노르(=수로)는 다윗이 이 도시의 수원지 기혼샘을 장악한 후에 성내로 진입하였던 그 지하 수로로 간주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이곳의 인구는 이스라엘사람과 더불어 아모리인, 가나안인, 그리고 여부스족 등의 여러 민족들로 구성되었다.
2. 제1 성전 시대
다윗이 예루살렘을 신생 통일 왕국의 수도로 삼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베냐민지파와 유다지파의 경게선이 지나가는 지역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출신 지파인 유다지파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중립적 도시인 예루살렘을 새 왕국의 수도로 선택하였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을 북쪽으로 더욱 확장시켰으며, 예루살렘 안에 성전을 비롯한 왕궁과 성벽을 건축하였다. 그 이후 유다의 왕들은 게속하여 이 도시를 미화시켜 나갔으며, 북쪽과 서쪽의 방어 문제도 크게 개선시켰다. 19세기 말에 발견된 실로암 비문에는 히스기아왕의 명령으로 건축된 지하 수로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지하수로는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공격을 받게 될 때, 도시 안으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비밀 수로 시설이다. 앗수르의 뒤를 이어 등장한 신흥 바벨론이 이집트와 전쟁을 벌리는 동안 예루살렘은 크게 고통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의 국력은 극도로 쇠퇴하게 되었다. 마침내 유다왕국과 예루살렘은 기원전 587년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정복당하고 말았다.
3. 제2 성전 시대
제2 성전 시대 동안 예루살렘은 오늘날의 시온산인 서쪽 지역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궁전 건물들과 요새들, 그리고 아름다운 공공건물들이 세워졌다. 위대한 건축자인 헤롯대왕에 의해 건축된 욥바 문 근처의 성채 하단부 석조들은 오늘날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통곡의 벽으로 더 잘 알려진서쪽벽(Western Wall)의 하단부 돌들도 헤롯에 의하여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헤롯대왕의 건축 사업은 자신의 명성을 후대에 남기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가 세운 건축물에는 언제나 길이가 1m 이상 되는 거대한 돌들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돌의 주변에는 5cm 내지 10cm 넓이의 다듬은 장식 부분을 만들었다. 헤롯시대의 건축에 사용된 돌들은 현재도 남아있는 성전 서쪽벽 일부분과 헤롯궁의 피사엘 망대 일부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헤롯의 통치 이후 로마는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로마의 직접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로마의 통치자들은 그들의 수도로서 예루살렘이 적합하지 않음을 판단하고 정치적 중심지를 가이사랴로 이전시켰다. 로마가 가이사랴로 수도를 이전하였던 이유는 예루살렘이 모든 면에서 로마에 적대적인 유대인의 중심지였다는 점도 있었겠지만 그와 더불어 가이사랴가 로마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가이사랴는 소아시아와 이집트를 연결 시켜 주는 해상 교통로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제2 성전 시대 말기의 예루살렘이 갖고 있었던 특징은 예루살렘이 로마 세계 속에서 상업화 내지 현대화된 도시로 발전하였다는 점과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로마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유대인들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인구가 불과 몇 천 명밖에 되지 않았던 제1 성전 시대에 비하여 제2 성전 시대의 예루살렘은 명실공히 거대한 대도시로 크게 발전하였다.
4. 로마와의 전쟁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 당하기 전 마지막 10년 동안 로마는 유다지방에서 증폭되는 유대인 소요에 직면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이방인 통치를 완강하에 거부하였다.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이 로마 당국자들과 충돌하면서 그곳의 유대인들이 가이사랴에서 강제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면서 66년 유대인들은 로마를 향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이에 네로 황제는 베스파시안 장군을 군사 사령관으로 삼아 로마의 세 군단을 유다 지방으로 파병하였다. 갈릴리 지방을 점령한 베스파시안은 계속하여 유다지방으로 진군하였다.
기원 69년 봄 베스파시안은 전쟁터에서 로마의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고, 대신에 자신의 장남인 티토가 유다 정복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은 70년 8월 28일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도시와 함께 성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상부 도시를 점령하여 유대인 저항을 진압하는 데에는 한 달이 더 걸렸다. 티토 장군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대부분 건물들은 파괴되었다. 이렇게 폐허화시킨 도시에는 로마의 제 10군단이 주둔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견고히 하였다. 유대인들의 로마를 향한 제1 차 유대인 전쟁은 제2 성전의 파괴와 유대의 독립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2000여년 동안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로서의 위치를 잃어 버렸다.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은 다시금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하드리안황제가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유대인들은 또다시 로마를 향한 두 번째 항쟁을 시도하였다. 바르 코흐바와 아키바의 주도하에 일어났던 제2 유대인 전쟁(132-135년)이 진압된 후, 하드리안 황제는 파괴된 예루살렘을 로마식 돗로 재건하였다. 그리고 이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실며이었던아렐리우스를 사용하여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고 지었다. 그는 로마의 신이었던 쥬피터, 유노, 마네르바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예루살렘을신의 카피톨리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제 6 장 중 앙 계 곡
과제1. 중앙계곡의 지리적 특성을 약술하라.
이스라엘 지형 중에서 가장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중앙계곡은 이스라엘의 전체 지형을 현재와 같은 모양으로 형성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중앙계곡은 지구상에서 가장 길고 깊고 넓은 단층 지구대로 알려진시리아-아프리카 지구대의 한부분이다. 이 지구대는 터키의 남동부에 위치한 아마누스산지에서 시작하여 남쪽 지역인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홍해를 거쳐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모잠빅까지 연결되는 거대한 지구대 계곡이다. 이 지구대의 전체 길이는 무려 6500km나 된다. 이것은 위도상 60도 이상을 거쳐 지나가며 계속 이어지는 계곡으로서, 그 거리는 무려 지구 전체 둘레의 1/6에 해당된다. 홍해의 남단인 오늘날의 에티오피 근처에서 이 지구대는 동서로 갈라진다. 동쪽으로 갈라진 지구대는 아라비아 반도와아프리카의 뿔을 갈라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라진 지구대는 동부 아프리카의 내륙으로 들어가 모잠빅까지 이어진다.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대표적인 호수로서는 탕가니카, 루돌프, 알베르트, 니앗사 호수 등이다. 중앙계곡의 바닥은 일정한 깊이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많다. 그러므로 어떤 지역에서는 호수나 바다, 혹은 늪지대와 같은 저지대가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또한 계곡의 지리적 형태나 기후를 비롯한 거주 조건들 역시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많다.
중앙계곡은 단층운동에 의하여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단층운동의 결과로 계곡 양편에는 높은 산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반면에 계곡 자체에는 해저 400m까지 낮아지는 저지대가 형성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의 단층운동은 계곡 양쪽 지역에서 지진과 화산활동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로 갈릴리 바다와 사해 주변에는 여러 광천 온천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서 활발한 화산활동은 일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지진 활동은 자주 발생하는 편이다. 중세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지진 활동만도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기록되었다. 지진 활동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계곡의 양쪽 산지가 갑자기 무너져 내려 중앙계곡을 따라 흐르는 요단강을 십 여 시간 동안 막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과제2. 훌레계곡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훌레계곡의 지형적 특징
훌레계곡은 주변의 산들과 언덕을 인하여 사면이 완전히 둘러싸인 좁은 계곡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상부 갈릴리산지는 훌레계곡의 바닥에서 약 800m 높이로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1000m 이상의 높이를 이루고 있는 상부 골란고원이 위치하고 있다. 북쪽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814m의 헬몬산이 500m 높이의 메툴라산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100-200m 높이의 로쉬피나 지역이 위치하고 있다. 이 로쉬피나 지역으로 인하여 훌레계곡은 남쪽으로 계속되고 있는 중앙계곡과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형태가 되기도 한다.
훌레계곡의 크기는 남북 길이가 25km이고, 동서의 폭은 6-8km가 되며, 계곡 전체의 넓이는 177㎢가 된다. 훌레계곡의 지면 높이는 해발 70m 정도인데, 산지에 가까운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거의 일정한 높이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훌레계곡의 중심부에는 작은 담수호인훌레호수가 위치하고 있었다. 지질학적으로 훌레호수의 형성은 훌레계곡에서 갈릴리바다로 연결되는 좁은 협곡과 관련이 있다.
훌레호수의 주변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강우량이 많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의 상부 갈릴리산지는 년간 강우량이 900mm 정도이며, 동쪽의 골란고원은 년간 1000mm, 그리고 헬몬산의 경우는 년간 1500mm의 강우량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풍부한 강우량으로 인하여 많은 양의 물들이 훌레호수로 유입되었다. 호수로의 물 유입은 두 가지 형태로 이루어진다. 즉 지면 위로 흐르는 물줄기들을 통한 유입과 호수 주변에 있는 샘들을 통한 지하수의 유입이다. 대략적으로 일년간 훌레호수 유입되는 물의 량은 7억 4천만㎡의 물이 유입되는 셈이다. 훌레호수의 넘쳐 흐르는 물들로 형성된 남쪽의 좁은 협곡은 지형적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훌레호수의 남단에서 갈릴리바다까지 거리는 14km에 불과하지만, 높이의 차이는 무려 270m나 된다. 이 지역을 이루고 있는 암석이 비교적 강한 현무암층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좁은 협곡이 형성된 것은 이런 격차가 심한 지형 때문이이었다.
훌레계곡을 지나는 중심도로는 갈릴리바다의 서쪽 해안에서 시작되어 상부 갈릴리산지 기슭을 따라 북상하는 형태로 형성되었다. 이 중심도로는 하솔에서 북쪽 방향으로 나가는 도로와 동쪽 방향으로 나가는 도로로 나뉘어진다. 북쪽 방향으로 나아가는 도로는 뵈니게 지방과 레바논으로 연결되고, 동쪽 방향으로 나아가는 도로는 훌레호수의 남단에서 요단강과 골란고원을 거쳐 다멕섹으로 연결되는해안길의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2) 요단강의 세 근원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크고 긴 강인 요단강은 헬몬산 기슭에서 발원하는 세 개의 강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요단강은 갈릴리바다를 중심으로 상부의 요단강과 하부의 요단강으로 나눌 수 있다. 강물이 발원하는 헬몬산 기슭에서 훌레호수를 거쳐 갈릴리바다까지 이르는 상부 요단강은 그 길이가 약 90km가 된다. 그리고 갈릴리바다에서 사해까지 이르는 하부 요단강의 길이는 약 320km가 된다. 그러므로 상부와 하부 요단강을 합친 요단강 전체의 길이는 무려 400km가 넘는다. 훌레계곡에서 서로 만나는 요단강의 중요한 세 근원은 다음과 같다.
(1) 나할 헬몬 (나할 바니아스)
훌레계곡의 북동쪽에 위치한 헬몬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흐르는나할헬몬은 헬몬산 기슭의 바위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 거대한 샘에서 시작된다. 나할 헬몬의 주변에는 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들로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데, 헬라시대 이곳에는판이라는 자연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졌었다. 그런 것과 관련하여 현재 이곳을바니아스라고 부른다. 신약시대 이곳은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가 있었다. 좁은 협곡을 따라 흐르는 나할 헬몬은 경사가 급한 지역에서는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 이 강은 남서 방향으로 흐르면서나할단을 만나게 되고, 다시나할 스닐을 만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할 헬몬을 요단강의 가장 중요한 본류로 간주하기도 한다.
(2) 나할 단
나할 단은 훌레계곡의 북쪽 지역인 헬몬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이다. 이 강의 근원이 되고 있는 샘물은 수정 같이 맑은 물로 유명하다. 이 샘물은 헬몬산의 눈이 녹아 흘러 내려온 것이어서 한 여름철에도 차가움을 유지하고 있다. 나할 단은 남쪽으로 흘러내려 가면서 여러 개의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으며, 옆으로 흘러 나간 물줄기들이 곳곳에서 조그만 물웅덩이를 이루기도 한다.
(3) 나할 스닐(나할 하츠바니)
요단강의 근원을 이루는 세 강 중에서 가장 길이가 긴 강인니할 스닐은 현재 레바논 국경 내에 있는 헬몬산의 북서쪽 기슭에서 발원한다. 나할 스닐은 이스라엘 최북단 도시인 메툴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52km 떨어진 지역에서 시작되며, 현재 이스라엘과 레바논과 시리아가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에서 훌레계곡으로 유입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온 나할 스닐은 남쪽으로 약 6.5km 더 내려와 나할 헬몬과 나할 단과 합류하여 상부 요단강을 형성한다. 나할 스닐은 샘물과 관계없이 흐르는 지표면 물줄기하는 점에서 큰 규모의 샘물에서 시작되는 다른 두 강과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나할 스닐은 여름철에 물량이 급격히 줄어들며 겨울철 우기에는 갑작스러운 빗물의 유입으로 홍수를 이루며 흐르기도 한다.
3) 훌레계곡의 중요한 지역들
(1) 단(Dan)
본래 이름이라이스(삿8:29)혹은레센(수19:42)이었던 이곳은 단지파가 정착하면서 이 지파의 이름을 따라단으로 개명되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후, 단 지파는 욥바 근처의 해안지역을 분배받았다(수19:4-6). 그러나 단 지파는 철제 무기로 무장되었던 블레셋의 위협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포기한 채 북쪽지역으로 이주하여 이곳 단에 정착하였다. 단은 성경에서 소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고대 도시이다. 단은 기원전 19세기 이집트 저주문서나 기원전 15세기 중엽 투트모세 3세가 정복한 도시 명단에 들어있다.
(2)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가이사랴 빌립보는 헬몬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나할 헬몬의 물근원 주변에 세워진 도시이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나할 헬몬은 훌레호수를 거쳐 갈릴리바다로 유입된다. 베드로는 이 근처에서 위대한 신앙고백 곧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를 고백하였다(마16:13, 막8:27). 이곳은 헬몬산으로 인하여 기후가 쾌적할 뿐 아니라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훌레계곡의 비옥한 지역이 잘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운 도시이다. 헬라시대에 이 도시는판(자연의 신)의 도시라는 뜻에서파네아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명칭은 오늘날 아랍식 발음을 따라바니아스라고 부른다. 구약에서는 이곳을바알갓(수11:17, 12:7, 13:5)혹은바알 헤르몬(삿3:3, 대상5:23)으로 언급하였고, 신약에서는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였다.
기원전 198년 이곳에서 안티오커스 Ⅲ세는 이집트의 프톨레미 군대를 패배 시킴으로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자신의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기원전 20년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 지역을 헤롯대왕에게 넘겨 주었다. 그 대가로 헤롯대왕은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는 거대한 신전을 지었다. 헤롯왕이 죽고 난 뒤 그의 영토는 그의 세 아들에게 분배가 되었는데, 바니아스를 포함하여 갈릴리바다 북부지역은 헤롯 빌립의 몫이 되었다. 헤롯 빌립은 이곳을 자신이 통치하는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거대한 건축 공사를 벌렸다. 그리고 로마황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 이름을가이사랴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인 헤롯왕이 건설한 지중해 해안의 항구도시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가이사랴 빌립보라고 하였다.
신약시대 이곳은 주로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는 이 지역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와서 자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물으셨을까? 그러한 예수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이 지역의 지리적 환경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가장 진실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고 있었다.
첫째로, 이곳은 요단강의 본류로 간주되는 나할 헬몬이 시작되는 근원지로서 이스라엘의 어느 곳보다 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이곳은 가까이에 위치한 비옥한 훌레계곡과 더불어 이스라엘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의 환경 자체가 물질적인 풍요를 가능케 하였던 지역이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이곳에 자연을 주관하는 신인판을 위하여 신전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한 풍요로운 지리적 환경 속에서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 초라한 모습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가를 질문하신 것이다.
둘째로, 이 곳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오래 전부터 판 신전이 세워졌을 뿐 아니라 로마황제를 숭배하기 위하여 헤롯이 건축한 거대한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다. 흰색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황제숭배의 신전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황제의 위용답게 거대한 신전이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위압 당하는 자연의 신전 혹은 로마황제의 신전 앞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이다.
(3) 하솔(Hazor)
하솔은 갈릴리바다에서 북쪽으로 약 16km, 그리고 상부 요단강에서는 서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하솔은 북부 갈릴리지역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도시이다. 고고학 발굴 결과에 의하면, 에이커 정도에 불과하지만, 하부 도시는 거의 200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도시였다. 하솔은 성경시대 초기에 팔레스타인에 건설되었던 도시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였다. 하솔의 전략적인 중요성은 이지역을 지나가는 도로와 관련이 있다. 갈릴리바다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해안길은 하솔에서 북상하는 도로와 동쪽의 요단강을 건너는 도로로 갈라지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기원전 2000년대 이미 팔레스타인에서 정치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하솔이지만, 성경 역사에 처음 등장한것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였다. 당시 여호수아는 하솔왕 야빈을 중심으로 결성된 가나안의 연합군들과 메롬 물가에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수11:1-11). 후에 하솔은 솔로몬에 의하여 요새화가 되었는데, 이는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는 북쪽입구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왕상98:15). 당시 하수로와 여러 겹으로 건축된 성문이 발견되었다. 성경에서 하솔과 관련된 마지막 역사적 사건은 다글랏빌레셀이 이곳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다(왕하15:29).
과제3. 갈릴리바다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갈릴리바다
갈릴리바다가 위치하고 있는 중앙계곡은 지형적으로 갈릴리바다 자체와 갈릴리바다 주변의 비옥한 계곡형 평원으로 나눌 수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의 계곡형 평원들은 갈릴리바다 북동쪽에 위하고 있는 벳세다평원, 그리고 갈릴리 바다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야르묵-요르단 평원이다.
1. 갈릴리바다
동쪽으로는 바산고원, 서쪽으로는 하부 갈릴리산지로 둘러 싸여있는 갈릴리바다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자연 담수호이다. 이곳은 일반 바다가 아닌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라는 명칭이 붙게된 것은 이스라엘에서의 바다 개념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 바다와 다르기 때문이다. 즉 바다로 번역된 히브리어얌은 바다와 호수의 구분 없이 많은 양의 물이 모여있는 곳을 의미한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 뜰에 있었던 물두멍을바다라고 이름 하였던 것도 이런얌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왕상7:23). 갈릴리바다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주변의 비옥한 해변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지역이다.
(1) 갈릴리바다의 명칭
역사적으로 갈릴리바다는 여러 가지 다른 명칭으로 지칭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갈릴리바다를 가리키는 데에 네 가지의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ㄱ) 갈릴리바다(Sea of Galilee): 신약성경에서는 이 바다는 주로갈릴리바다라는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이 명칭은 오늘날에도 기독교인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다.
ㄴ) 긴레렛바다(Sea of Kinnert): 구약성경에서는 갈리리바다를긴레넷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 바다에 대한 공식 명칭이다. 긴네렛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일부에서는 하프 모양을 띄고 있는 갈릴리바다와 연관시키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가키노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갈릴리바다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하였던키나로트라는 도시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이곳에는 뵈니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키나르라는 신을 섬겼다.
ㄷ) 디베랴바다(Sea of Tiberias): 갈릴리바다의 또 다른 명칭은디베랴바다이다. 이것은 갈릴리바다의 서쪽 해안에 안티파스에 의하여 건설된티베리아스에서 기원된 명칭이다. 안티파스는 당시 로마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빌어 이곳 이름을 붙였다. 신약성경 뿐 아니라 유대인 경전에서도 이곳을티베랴라고 불렀으며, 오늘날 아랍 사람들도 이곳을바하르 타바리아라고 부르고 있다.
ㄹ) 게노사렛바다(Sea of Gennosaret):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갈릴리바다의 네 번째 명칭은게노사렛이다.게노사렛은지방장관의 정원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명칭은 갈릴리바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사노르평원에서 연유된 명칭이다. 신약시대와 동시대인이었던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 역시 갈릴리바다를게노사렛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갈릴리바다에 대한 여러 가지 명칭들은 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나 그 지역에 있었던 중요한 도시 이름들과 연관 되어있다. 헬라의 지리학자였던 스트라보(Strabo)는 갈릴리바다 남동쪽 야르묵강 근처에 위치하고 있었던 도시의 이름과 관련하여 이 바다를가다라(Gadara)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2) 갈릴리바다의 지형
갈릴리바다의 남북간 최장 길이는 21km이며, 티베리아와 막달라 근처에서의 동서간 폭은 각각 8km와 12km가 된다. 갈릴리바다 전체 면적은 약 165㎢ 이다. 갈릴리의 해수면은 지중해보다 210m나 낮다. 그러나 갈릴리바다의 해수면 높이는 계절과 년간 강우량에 따라 기복이 있다. 갈릴리바다의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49m인데, 서쪽보다 동쪽이 더 깊이며 남쪽보다 북쪽이 더 깊다. 이것은 동쪽에 있는 골란고원의 경사면이 서쪽에 있는 갈릴리산지 경사면보다 더 가파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갈릴리바다의 전체 수량은 약 45억6천2백만㎡에 달하고 있다.
갈릴리바다 주변 지역은 언제나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제2 성전시대 갈릴리 주변에는 어림잡아 50만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갈릴리바다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 평원은 특별히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유대전쟁사3:7-8), 이곳은 비옥하고 좋은 토양 덕분으로 잘 맺지 못하는 과실이 없을 정도였으며, 주민들은 모든 종류의 작물을 재배하며 살았다. 이곳은 기후도 알맞아 많은 종류의 생물이 서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의 놀라운 혜택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쟁적으로 이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노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갈릴리바다 근방에는 많은 도시들이 세워졌다. 바다 주변에서는 그리스와 로마식으로 지어진 궁전, 원형 경기장, 극장, 그리고 목욕탕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가버나움, 타브가, 고라신, 아르벨, 벳세다, 수시타, 엘하마, 가다라 같은 도시들의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이 얼마나 번창하였던 유대인 지역이었는를 보여주는 역사적 유산들이다. 높은 문명 수준을 지녔던 헬라와 로마시대의 번영과 갈릴리바다 주변에서 꽃피웠던 신약성경 및 초기 기독교의 역사, 그리고 탈므드와 같은 경전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는 유대인의 영적 유산은 갈릴리바다 주변의 좋은 자연의 조건 속에서 크게 발전했음이 분명하다.
갈릴리바다 주변은 300m 이상 되는 가파른 산지로 둘러 싸여 있어 마치 깊은 분지 속의 바다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산지의 급경사는 주변 산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급작스러운 돌풍으로 바뀌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아였다. 이러한 갑작스런 기상의 변화는 특히 헬몬산의 차가운 공기가 나무가 별로 없는 완만한 골란고원의 경사지를 거쳐 갈릴리바다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자주 일어난다. 이러한 돌풍현상은 오늘날도 자주 만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물을 크게 요동시키는 갑작스러운 폭풍은 어부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돌풍으로 일어난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적을 보여주셨다(마8:26).
갈릴리바다에는 많은 종류의 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울리는 소리를 내는 메기 종류인바르부트도 이곳에서 서식한다. 호수에서 서식하는 여러 종류의 고기를 잡아들이는 어업은 주변의 비옥한 평원에서 이루어지는 농업과 함께 이 지역의 중요한 경제적 수단이었다. 이러한 좋은 여건 때문에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바다 가까운 주변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바다 물이 흘러나가는 출구 근처에서 발견된 인간의 두개골은 10만년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의 인간 거주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신약성경과 유대인의 탈므드가 보여주는 것에 의하면, 헬라와 로마 통치시대에 갈릴리 해변가에는 많은 유대인 어부들이 정착하여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갈릴리 주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았던 어부들이다. 바다에서 잡은 고기는 이곳에서 개발된 저장하는 방법에 따라 상품화되었고 이런 사업은 이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는 로마에까지 수출할 정도로 잘 알려졌었다.
2) 갈리리바다 주변의 비옥한 계곡 평원들
갈릴리바다 북쪽 해안의 양단에 위치하고 있는 게노사렛평원(Gennesaret)과 뱃세다(Bethsaida)은 바다 주변의 산지에서 씻겨 내려온 충적토로 이루어진 비옥한 평원지역이다. 이곳의 충적토는 석회석, 백악, 현무암 등이 풍화되어 생긴 토양으로서, 농작물 재배에 필요 한 여러 가지 비옥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두 평원에는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수원들이 흐르고 있다. 게노사렛평원을 통과하여 유입되는 수원으로서는나할 아무드나할 잘몬은 상시천이지만,나할 아르벨은 우기에만 흐르는 마른 개울 오하디이다. 벳세다평원을 통과하여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강은 유입 물량이 가장 많은 요단강이며 그 외에도 몇 개의 작은 강들이 있다.
두 개의 평원이 위치하고 있는 북부 해안지역을 제외한 갈릴리바다의 다른 지역은 대부분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산지와 인접하여 있다. 이런 지형적 이유 때문에 갈릴리바다 주변의 도로들은 대부분이 북쪽 해변을 따라 형성되었다. 게노사렛평원의 남쪽 지역은 하부 갈릴리산지에 속하는 아르벨산이 갈릴리바다와 직접 연결되어 있고, 이 산과 해안 사이는 불과 수 미터 밖에 되지 않는 좁은 지역이다. 그러므로 다멕섹에서 내려오는 해안길은 아르벨산 밑을 지나 하부 갈릴리산지 내부로 연결된다. 벳세다평원의 남쪽 지역 역시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는 골란고원이 갈릴리바다와 직접 연결되어 좁은 해안을 이루고 있다. 특히쿠르시(Kursi)근처는 높은 절벽형 해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뱃세다 평원에서 갈릴리바다의 남단에 이르는 동편 해안은 지역에 따라 100m 내지 1.6km 넓이의 해안지역을 이루고 있다.
3)갈릴리바다 주변과 이스라엘 현대 역사
19세기 말경인 1887년 갈릴리바다 주변에는 여섯 개 정도의 정착 마을이 있었다. 이런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모두 합하여 250여명을 넘지 못했다. 당시 갈릴리바다 주변의 평원에는 습지대가 형성되어 말라리아가 창궐했으며, 요단계곡은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황폐된 모습은 신약성경 시대와 탈므드시대 이 지역에서 번창하였던 도시문명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갈릴리바다 주변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엽 유대인 이민이 몰려들면서 그들의 정착촌을 이 지역에 건설하면서부터였다. 갈릴리바다 남서쪽에는긴네렛과야브니엘과 같은 정착촌이 세워졌으며, 이스라엘 기브츠 운동의 효시가드가니아도 이시기에 세워졌다. 독립전쟁 이후로는 남동쪽 해안에도 정착촌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독립전쟁 기간동안드가니아 알렙프드가니아 베트체마흐엔게브와 같은 정착촌에서 맹렬한 전투가 있었으며, 휴전협정이 끝난 이후에도 이 지역 주변에서는 주변 아랍국들과의 적대적 긴장감이 늘 계속되었다.
독립전쟁 이후 북동쪽 해안지역은 시리아에 속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엔게브에서 남쪽으로 골란고원 기슭으로 약 1.6km 가량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경선이 해안을 따라 뻗어있었다. 국경선은수시타에서엘하마까지 이어졌는데, 이곳은 이스라엘과 시리아와 요르단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이렇게 시리아와 요르단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남동쪽 해안은 이스라엘에게 속한 영토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갈릴리바다 전체의 관할권은 이스라엘이 갖을 수가 있었다.
4) 갈릴리바다 주변의 중요 지역들
(1) 가버나움(Capernaum)
나훔의 동네라는 의미의 가버나움은 갈릴리바다로 유입되는 요단강 하구에서 남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갈릴리바다 북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수님께서 갈릴리바다를 중심으로 벌렸던 복음사역의 중심지였다(마4:12-14).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기적을 행하셨다(막2:1-12, 눅4:23, 요4:46-54). 그리고 이곳은 회당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은 가르치신 중요한 장소였다(막1:21-22).
회당과 바닷가 사이에서는 비잔티시대의 팔각형 교회건물이 발굴되었다. 이 교회는 가버남움에 있었던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세워진 기념교회로 알려져 있다(마8:14). 381-384년에 이스라엘을 순례한 수녀 에게리아(Egera)의 성지순례기에 의하면, 당시 이곳에 교회로 바뀐 베드로의 집이 보존되어 있었다.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집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 벽은 옛 모습 그대로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주님은 중풍병자에 걸린 자를 고쳐주셨다.
(2) 벳세다(Bethsaaida)
갈릴리바다의 북동쪽 해안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었던 벳세다는 빌립과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이었다(요1:44, 12:21). 신약시대 벳세다는줄리아라는 도시와 인접하여 있었다.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줄리아는 원래 작은 규모의 마을이었지만, 분봉왕 빌립은 이 도시를폴리스(헬라의 도시)로 격상시키면서 당시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줄리아를 도시 이름으로 삼았다. 로마식 도로가 벳세다와 줄리아를 연결시켜 주었기 때문에, 이 두 마을은 마치 한 마을처럼 여겨졌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 근처에서 눈먼 사람을 고쳐준 적이 있었다(막8:22).
후에는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사람들의 불신앙을 크게 책망하기도 하였다(마11:21).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푼 곳은 벳세다와 줄리아의 남동쪽에 있는 빈들로 전해오고 있다.
(3) 고라신(Korazim)
고라신은 갈릴리바다 해변의 가버나움에서 산 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크게 번성하였던 유대인 도시였다. 이곳은 갈릴리바다 북상하는 해안길이 지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중요시되었다. 고고학 발굴작업에 의하면, 고라신의 면적은 약 17에이커 정도의 작은 규모이었다.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불신앙을 예수님께서는 크게 책망하셨다(마11:20-21).
고라신의 건물들과 거리들은 근처에서 쉽게 발견되는 현무암으로 건설되었다. 고라신에서 발굴된 유적 중에서 유적 중에서 유명한 것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옛 회당 건물이다. 이 회당은 서기 2, 3세기의 갈릴리지역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회당건물 모양과 유사하다. 가버나움의 회당 건물이 유다지방에서 생산되는 밝은 석회석으로 건축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라신의 호당은 근처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색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회당 안에서 발견된 것 중에 현무암으로 만들어진모세의 자리(마23:2)가 유명하다. 이 좌석은 회당예배에서 토라를 읽는 자를 위하여 마련된 것이다.
(4) 티베리아(Tiberias)
갈릴리바다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티베리아는 서기 18-22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 도시를 건설하였던 헤롯 안티파스는 당시의 로마황제 티베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도시 이름을티베리아라고 하였다. 안티파스는 티베리아를 건설하면서 자신이 통치하는 갈릴리지방과 베뢰아지방의 행정적 수도를 세포리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안티파스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곳에 당시 유명한 온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는 이 도시가 유대인의 공동묘지 위에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에 따라 이곳을 부정한 도시라고 여겼다. 헤롯 안티파스는 이곳에 거주하는 것을 꺼리는 유대인들 대신 가난한 소작인들, 풀려난 노예들, 퇴임한 군인들을 강제로 이곳에 살게 하였다. 그러나 서기 2세기 초에 있었던 유대인의 로마를 향한 두 번째 항쟁인 바르코흐바전쟁 이후에는 티베리아가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3세기 초 미쉬나를 집필한 랍비 유다가 이곳에서 살았고, 4세기 말경 팔레스타인 탈므드가 이곳에서 완성되기도 하였다. 6-7세기에는 구약성경의 히브리어 자음본문에 붙이는 모음체계가 이곳에서 만들어졌으며, 히브리어 본문이 필사되었고, 성경 본문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들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한마소라체계가 발전하기도 하였다.
과제4. 요단계곡에 대하여 약술하라.
1)중앙계곡의 세 번째 지역은 요단강계곡이다. 갈릴리바다와 사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요단강계곡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을 흐르는 요단강으로 유명하다. 요단강의 직선 길이는 105km 정도이지만, 요단강의 실제 길이는 무려 320km나 된다. 이것은 요단강이 굴곡이 심한 지역을 흐르는 사행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요단강계곡의 지형적 구조
요단강계곡은 여러 지질시대의 융기현상 있을 때마다 심한 침식작용이 있었고, 그러한 침식작용으로 인하여 계곡 자체 내에 게단 형태의 독특한 지형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지질 현상은 요단강 바닥을 중심으로 양편 지역에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지형적 구조를 만들었다.
(1) 고르(Ghor)
고르는 요단강계곡 주변의 양쪽 산지에서 강 쪽으로 형성된 넓고 평평한 지역이다. 산지로부터 물 공급이 가능한 고르지역에서는 농작물 재배가 가능하며 목축을 위한 초지도 형성되어 있다. 요단강계곡에 위치한 대부분의 중요 거주지들은 이러한 고르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특히 벧산 근처와 여리고 근처의 고르지역은 이 지역을 흐르고 있는 물줄기로 인하여 비옥한 농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물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다른 고르지역들은 건조하고 황량한 모습을 띄고 있다. 넓이가 큰 벧산과 여리고 근처를 제외한 다른 고르지역의 폭은 일반적으로 3km 내지 7km정도이다.
(2) 갓다라(Quattara)
고르지역보다 한단계 낮은 지역인 갓다라는계단이라는 의미의 아랍어에서 파생된 명칭이다. 고르지역과 요단강 강안지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갓다라는 사막과 유사한 건조한 지역으로서 대부분이 울퉁불퉁한 산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지역은 농작물 재배가 전혀 불가능하며, 요단강 주변의 울창한 숲과는 극히 대조적인 모습을 띄고 있다.
(3) 조르(Zor)
조르는 요단강계곡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며 요단강 자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곳이다. 실제적으로는 요단강은 조르지역을 흐르는 강이라고 볼 수 있다. 요단강의 충분한 수분과 요단강게곡의 아열대성 기후로 인하여 조르지역에는 울창한 삼림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삼림 속에서는 각종 야생동물들이 서식하였다. 조르의 이러한 삼림지역을 성경에서는 요단의 자랑(히브리어로는게온 하야르덴)이라고 하였다(렘12:5, 49:19, 50:44, 슥11:3). 조르지역에 여러 들짐승들이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삼상17:34-35, 왕하2:24, 17:25, 욥40:15-18, 렘5:6, 암3:4, 막1:13). 메다바에 발견된 모자이크 지도에서도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사자의 모습이 요단강계곡 안에 그려져 있다.
고르지역보다 약 450m 정도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조르는 지역에 따라 넓이가 각각 다르다. 좁은 지역은 400m에 불과하지만 넓은 지역은 3200m나 되는 곳도 있다. 조르지역은 겨울철과 봄철의 우기에는 자주 범람하는 지역이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 언덕으로 물이 넘쳐흐르는 모맥 거두는 봄철이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조르지역으로 넘쳐흐르는 요단강의 범람을 지적한 것이다(수3:15).
요단강계곡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이 비록 서로 가까운 지역 안에 살면서도 요단강을 중심으로 양쪽 나뉘어져 있었던 것은 요단강 주변에 형성된 갓다라와 조르지역 때문이었다. 요단강은 전체 길이가 긴 강이지만, 폭은 그리 넓지 않다. 따라서 강을 건너는 일은 우기가 아닌 경우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한 사실은 아람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의 이야기 속에서도 나온다. 그는 다멕섹 주변의 강을 언급하면서 요단강을 혹평하였다(왕하5:12). 그러나 요단강 지역을 통과하기가 어려웠었던 것은 전적으로 요단강 주변의 삼림지대인 조르와 지형이 험하고 건조한 갓다라 때문이었다.
2) 요단강계곡의 지형적구분
요단강계곡은 지형적인 특징에 따라 두 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이러한 지역 구분은 갈릴리바다와 사해 사이의 거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도시인 아담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아담이
위치한 지역은 양쪽편의 산지 곧 서쪽의 사마리아산지와 동쪽의 길르앗산지가 계곡 쪽으로 발달하여 약 5km 정도로 폭이 좁아진 협곡이다. 이 협곡의 양쪽 편에는 파라강 계곡과 얍복강 계곡이 위치하고 있다. 이 협곡 지역을 중심으로 양분되는 북쪽과 남쪽은 기후나 지리적 환경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1. 북쪽 벧산 계곡
벧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요단강 계곡은 중앙계곡 중에서 가장 폭이 넓은 지역이다. 이 지역은 또한 강우량과 수원이 비교적 풍부하며, 고르지역에는 농작물 재배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곳에서의 년간 강우량은 약 200-250mm 정도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벧산게곡 양편에는 물량이 풍부한 여러 개의 지류들이 요단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강은 서쪽의 하롯강과 동쪽의 야르묵 강이다.
2. 하부 요단강계곡
아담에서 여리고까지 이어지고 있는 남쪽지역은 북쪽지역과 달리 기후가 건조하며, 강우량도 많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곳의 고르지역은 대부분 거칠고 건조한 사막 모습을 띄고 있다. 이곳에서의 년간 강우량은 100mm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지역의 계곡 폭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넓어지는데, 여리고 근처에서는 그 넓이가 무려 32km나 된다. 아담 근처에서의 높이는 많이 낮아져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 되고 있다. 아담 근처에서의 높이는 해저 270m이었지만, 여리고와 사해 근처에서의 그 높이가 해저 390m로 낮아진다. 이것은 두 지역의 높이 차이가 무려 120m나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매 km 마다 약 1m 정도씩 낮아지는 지형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요단강은 급류를 이루게 되며 강의 깊이도 더욱 깊어진다. 반면 계곡의 양편 산지는 더욱 높아져 서쪽의 유대산지와는 1220m난 높이 차이가 있으며, 동쪽의 모압산지와는 이보다 더 차이가 높다.
3) 요단강계곡으로 유입되는 물줄기
요단강계곡에는 양편 산지에서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여러 개의 강들이 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강들은 다음 다섯 개다: 서쪽의 하롯강, 파라강, 그리고 와디 켈트; 동쪽의 야르묵강과 얍복강
1. 하롯강(Nahal Harod)
하롯강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맞아 싸우기 위하여 진을 쳤던 하롯샘(삿7:1)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이 강은 길보아산 밑의 긴 통로인 동부 이스르엘골짜기를 거쳐 요단강으로 유입되는데, 그 길이 약 15km 정도이다. 이 강은 요단강으로 유입되기 전에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벧산을 거친다.
2. 파라강(Nahal Fara)
파라강은 동부 사마리아산지에서 발원하여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상시천이다. 파라강의 수원지는 세겜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디르사 근처의 두 샘이다. 파라강이 흐르고 있는 계곡에는 요단강계곡에서 사마리아산지의 중심부로 들어오는 중요도로가 위치하고 있다. 파라강은 요단강변의 도시인 아담에서 남쪽으로 7km 덜어진 지점에서 요단강으로 유입된다. 한전승에 따르면 파라강은 엘리야가 아합왕을 피하여 숨어 지냈던 그릿시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3. 와디켈트(Wadi Qilt)
와디켈트는 유대광야를 흘러 지나가는 물줄기로서,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벧하니나에서 발원하여 요단강 쪽으로 흐른다. 이 강은 요단강으로 흘러 내려가면서 몇 개의 다른 샘물들과 합류하여 흐르고 여리고 남동쪽 10km 지점에서 요단강으로 유입된다. 헤롯강 시대에 여리고의 물 공급을 위하여 켈트계곡을 따라 인공수로가 만들어졌으며, 여리고 지역의 농작물 재배에 이 물이 이요외기도 하였다. 계곡의 바닥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으며, 이 동굴들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은둔자들의 거주지가 도기도 하였다. 현재 켈트게곡에는 세 개의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수도원은성 죠지 수도원이다.
4. 야르묵강(Nahal Yarmuk)
야르묵강은 요단 동편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강이다. 바산지역과 하우란 지역의 여러 샘들에서 발원하여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이 강은 골란고원과 길르앗산지 사이를 갈라놓는 좁은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다. 야르묵강은 갈릴리바다 남쪽 약 6km 지점에서 요단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성경에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야르묵강이지만, 유대인의 경전인 탈므드에는 이스아엘의 중요한 강 중의 하나로 여러번 언급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서기 636년 아랍의 군대는 야르묵강 언덕에서 비쟌티군대를 격파함으로서 이스라엘 점령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강은 영국과 불란서 위임통치 영역의 경계선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독립전잰 이후에는 시리아와 요르단과 이스라엘 세 나라의 국경이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5. 얍복강(Nahal Yabbok)
얍복강은 요단 동편지역인 길르앗산지를 가로질러 아담 근처에서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강이다. 이곳은 아모리왕 시혼이 통치하던 왕국의 북쪽 경계선이었다(민21:23-24, 수12:2).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 얍복강은 갓지파에게 분배되었다.
얍복강은 라밧암몬 근처에서 발원하여 길르앗산지의 복잡한 지형에 따라 물길의 방향을 여러번 바꾸면서 흐르고 있다. 이 강은 800m 높이의 산지에서 해저 300m의 요단강계곡으로 흐르기 때문에 발원지와 유입지점 사이에는 상당한 높이의 차이가 있다. 이 강이 흐르고 있는 계곡은 고대로부터 요단 동편지역에서 서쪽의 사마리아로 올라가는 중요한 도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야곱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오면서 이 강이 흐르고 있었던 계곡을 따라 여행을 하였다. 야곱은 자기의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이곳 얍복강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고, 그 밤에 천사와 씨름하는 기도를 통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창32:22-23).
4) 요르단강계곡 주변의 중요 지역들
1. 여리고(Jericho)
사해 북단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요단강 서편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는 기원전 8000년경에 이미 정착사회를 이룬 인류 최초의 정착지였다. 해저 258m의 요단강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여리고와 그 인근 지역의 연간 강우량은 100mm 내외의 매우 건조한 사막에 가까운 지역이다. 그러나 여리고 자체 내에는 적어도 세군데의 물근원인 오아시스를 가지고 있어서 도시 자체가 아름다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여리고가 묻혀있는 언덕인델 에스 술탄아래에는엘리사의 샘으로 알려진 물근원이 있다. 엘리사는 이곳에서 나오는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켜 주었다(왕하2:19-25). 여리고의 오아시스는 식수와 더불어 농업용수 사용이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오래 전부터 물을 관리하는 관계시설들이 조직적으로 개발되었다. 특히 여리고에는 아열대성 식물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과일나무는 종려나무이다. 성경에서 여리고를종려나무의 성읍이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신34:3, 삿3:13).
여리고 앞쪽에는 사해로 유입되는 요단강 하구가 자리하고 있다. 이 강을 중심으로 양쪽 편에는 여리고평지와 모압평지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여리고평지와 모압평지 사이의 요단강은 성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있었던 장소이다. 모압평지에서 진을 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곳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으로 입국하였다. 그후 엘리야가 자신의 제자 엘리사 앞에서 하늘로 승천한 곳도 여리고 근처의 요단강가이다. 신약시대 세례요한은 이근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께서도 이곳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현재 여리고 앞쪽의 요단강에는알렌비다리가 놓여져 여리고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을 이어주고 있다.
신약시대의 여리고는 구약시대의 여리고가 묻혀있는 언덕에서 남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의 여리고에는 헤롯의 겨울별장이 있었다. 헤롯은 추운 겨울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의 별궁에서 온화한 여리고의 날씨를 즐겼다. 신약시대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오는 여행자들이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엿다. 예수님께서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는 언제나 여리고를 지나가셨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만났고, 소경 거지 바디메오의 눈을 고쳐 주셨다. 여리고 뒤쪽의 산 중턱에는 희랍정교회 소속의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여리고가 한 눈에 잘 내려다 보이는 이 산을 일명시험산이러고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후 40일 금식기도를 마치시고 사탄으로부터의 시험을 이 산에서 받으셨다는 전승 때문이다. 산의 중턱에는 여러개의 동굴들이 있는데, 그 중 한 동굴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 받으셨다고 전해온다. 현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전해오는 동굴을 중심으로 희랍정교회의 수도원이 세워져 역사적인 장소를 보존해 오고 있다.
2. 아담(Adam)
요단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아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수3:16). 아담은 숙곳과 사르단 사이의 지역으로서, 솔로몬이 성전에서 사용할 놋쇠 그릇들을 이곳에서 만들었다(왕상7:46, 대하4:17). 이집트의 시삭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후 카르낙 신전에 전승의 기념으로 새겨둔 점령지 도시 명단에도 아담이라는 도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의텔 다미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작업 결과로 이곳에서는 고대시대의 유물뿐만 아니라 로마와 비쟌티시대의 유물도 함께 발굴이 되었다. 이것은 아담이 성경 이후의 중요한 도시로서 계속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길갈(Gilgal)
길갈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여리고 북쪽에 위치한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리고 평원에 속하여 있었던 길갈은 성경에서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로 언급이 되어있다. 요단강을 건넌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요단강에서 가져온 12개의 돌을 세움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였다(수4:19-20).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광야생활 중에 하지 못하였던 할례를 거행하였다(수5:3).
과제5. 사해지역의 특성과 주변의 중요 지역들을 약술하라.
1) 사해지역의 지형적 특징들
중앙계곡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새해는 남북 길이가 약 80km이며, 동서간의 폭은 가장 넓은 곳이 약 16km 정도이다. 사해의 해수면은 지중해 해면보다 395m가 낮으며, 가장 깊은 중앙부의 수심은 약 400m가 된다. 성경에서 이곳은 주로염해라고 알려져 있으며(창14:3, 민34:3, 신3:17, 수15:2, 18:19),아라바다다(신3:17, 수3:16, 12:3, 왕하14:25)혹은동해(겔47:18, 욜2:20, 슥14:8)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해는 이스라엘 최북단 지역인 단과 최남단 지역인 에일랏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사해는 리샨반도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두 바다로 나누어진다. 리샨반도는 사해의 동남부에 붙어있는 약 15km 길이의 반도형 지역이다. 리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반도 모양이 마치 혀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혀를리샨이라고 한다. 북쪽의 사해는 남쪽의 사해보다는 훨씬 크고 수심도 깊다. 그에 비하여 남쪽의 사해는 수심이 얕으며 크기도 북쪽보다 훨씬 작다. 북쪽 바다의 넓이는 761㎢인 반면 남쪽 바다의 면적은 254㎢에 불과하다. 그리고 바다의 깊이는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남쪽 사해 수심은 5m 내지 10m에 불과하다. 리샨반도에서 사해의 동쪽과 서쪽 해안 사이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부터 사해를 건너는 나룻터가 이곳에 위치하였다. 현재는 사해의 수면이 계속 낮아져서 리샨반도와 서쪽 해안 사이가 완전히 뭍으로 드러나 있는 형편이다.
사해는 요단강을 비롯하여 주변의 산지로부터 많은 양의 강물과 빗물이 유입되고 있다. 주변에 위치한 여러 와디들과 상시천을 통하여 사해로 유입이 되는 물의 양은 일일 평균 7백톤이나 된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므로 고여든 물이 그대로 고여있고,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출구가 전혀 없다. 그리고 사해 주변은 고온 건조한 사막형 기후를 띄고 있기 때문에 사해로 유입된 많은 양의 물들 중 상당한 분량은 자연 증발된다. 이런 증발 현상이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면서 사해 물 속에는 막대한 량의 광물질들이 남게 되었다. 현재 사해의 광물질 함유량은 28-33%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염분의 함유량도 일반 바다보다 6배 이상 높아 30%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광물질의 함유량 때문에 사해에는 어떤 종류의 생물도 살지 못하는 문자 그대로 사해(死海)가 되고 있다.
사해 주변은 이스라엘에서 강우량이 가장 적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이곳의 강우량은 년 평균 50mm 이하이다. 그러나 겨울철 우기에는 주변의 산지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급류가 사해로 유입되고 있다. 사해의 서쪽 해안에는 두 개의 중요한 오아시스가 위치하고 있다. 하나는 사해 북쪽의 쿰란 근처에 있는아인 페시카이며, 다른 하나는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엔게디이다. 서쪽 해안의 최남단에는 거대한 소금 바위들로 이루어진소금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 소금 바위산 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소금 기둥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때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처 이야기를 연상시켜준다(창19:26).
사해의 북단과 남단 해안은 낮은 평지를 이루고 있지만, 동족과 서쪽의 해안은 수직형의 바위 절벽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급경사는 동쪽 해안이 더욱 심한 편이다. 이러한 경사지에는 고대에 형성된 암석들이 드러나 있다. 서쪽 해안에는 세노니안 백악암층 아래에 형성된 세노마니안 백운석이 드러나 있으며 동쪽에는 검붉은 누비안 사암층들이 드러나 있다. 사해의 서쪽은 비록 좁은 해안이긴 하지만 동쪽 해안과는 달리 도로 형성이 가능한 지역이다. 반면에 사해의 동쪽 해안은 바다와 연결된 급경사의 절벽형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아르논강 계곡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도로 형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해의 동편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사해주변에는 여러 개의 물줄기들이 양쪽 방향에서 사해로 유입되고 있다. 사해 서쪽에서 유입되는 물량은 비교적 적으며, 그것도 겨울철 우기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형성된 깊은 계곡과 장엄한 바위벽들은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산지의 비옥한 토양들이 해변으로 몰고 내려와 일종의 삼각주 지대를 이루기도 한다. 사해 동쪽 해안으로 유입되는 물줄기들은 비교적 물량이 풍부한 편이다. 특히 모압산지에서 사해로 유입되는 네 개의 강은 연중 흐르는 상시천이다. 그 중에서 아르논 강과 제렛강은 가장 중요한 수원이다. 강폭이 30m 정도인 아르논강 양쪽으로는 높이가 500m 이상 되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좁으면서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아르논강 주변과 산지에는 종려나무와 관목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사해의 가장 크고 중요한 수원은 북쪽에서 유입되는 요단강이다. 사해 남쪽에는 남부 게네브지방과 에돔산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몇 개의 강들은 사해 남쪽 해안으로 유입되고 있다.
2) 사해 주변의 중요한 지역들
1. 쿰란(Qumran)
쿰란은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사해 북서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쿰란 주변에는 예루살렘 쪽에서 빗물이 흘러 내려오는 와디쿰란이 자리하고 있고, 사해 쪽으로는아인 페시카오아시스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유다지파 소속의염성(수15:62)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1947년 이 지역에서는 금세기 성경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본 중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구약성경 사본보다 무려 천년이상 앞선 고대성경사본이 있다. 주로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전 100년 사이에 쓰여진 이 성겨 사본들은 마소라 성경사본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가를 입증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쿰란 근처는 황량한 사막지역이다. 그러나 쿰란의 남쪽에는 큰 규모의 오아시스아인 페시카가 위치하고 있다. 1958년 이곳을 발굴하였던 드보(R. de Vaux)는 근처의 쿰란과 거의 같은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러한 발견은 쿰란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의 생활과 이곳 오아시스 지역이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식수를 이곳에서 얻었을 뿐 아니라 오아시스를 이용하여 농작물 재배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엔게디(En Gedi)
사해 서쪽 해안에 위치한 엔게디는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루고트강(Nahal Arugot)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엔게디는새끼 염소의 샘이란 뜻으로 이 지역의 풍부한 수원을 갖고 있는 오아시스 샘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엔게디는 유다지파에 분배된 지역이다(수15:62).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 다닐 때, 그는엔게디 요새에서 숨어 지낸 적이 있다(삼상23:29). 이곳은 또한엔게디 황무지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삼상24:1), 그것은 엔게디 근처 지역이 유다광야에 속하는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면서 다윗이 숨어 있던 동굴로 들어왔던 일도 이곳 엔게디에서 일어났었다. 이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았다(삼상24:3-7). 다윗의 엔게디 동굴에서의 그러한 경험은 시편 142편의 배경이 되고 있다.
엔게디는 고대로부터 아름다운 땅, 향기가 좋은 몰약, 그리고 비옥한 포도원 등으로 유명하였다(아1:14). 요세푸스는 가장 좋은 종려나무와 발삼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엔게디는 또한 광야를 통하여 산지로 올라가는 광야길 입구가 된다. 여호사밧 통치 시대에 암몬과 모압 유다왕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광야길 곧 엔게디를 거쳐 산지로 올라왔다(대하20:1 이하).
3. 마사다(Masada)
마사다는 사해 서쪽 해변에 위치하고 있는 천연요새로서 전체가 자연바위로 이루어졌다. 이 천연요새는 융기현상으로 생겨났으며, 사면이 모두 깊은 계곡으로 둘러 쌓여 있다. 마사다는 이런 독특한 지형 때문에 주변의 산들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마사다는 사방으로 거의 직각에 가까운 400m 높이의 절벽이 둘러있으며, 정상은 20에이커 정도 크기의 평평한 돌 바닥으로 되어있다. 마사다는요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 지냈던황무지의 요새는 곧 마사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삼상22:4, 24:22).
마사다가 처음으로 요새화 된 것은 하시모니안왕조의 요나단 시대(기원전 103-76년)이다. 그 이후 헤롯은 권력투쟁의 와중에 잠시동안 마사다를 가족들의 피난지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기원전 37년 헤롯이 로마의 후원으로 유다의 통치자가 된 후, 그는 마사다를 완벽한 요새로 재건하였다. 그가 이곳을 요새화 시킨 것은 외적의 침입이나 유대인의 반란과 같은 비상사태가 일어날 때 도피처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헤롯은 마사다 정상에 두 겹의 성벽을 쌓고 그 안에 훌륭한 궁전을 비롯하여 저수조와 창고들과 같은 부대시설을 건축하였다. 헤롯이 죽고 난 후 로마는 작은 규모의 군대를 이곳에 상주시키면서 마사다 요새를 지켰다. 유대인 역사와 관련하여 마사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로마와의 제1차 유대인 전쟁을 주도하였던 열심당원들에 의해서다. 전쟁 초기 열심당원들은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인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게 되자 1000여명의 열심당원들과 그의 가족들은 이곳 마사다로 옮겨와 로마와의 대결을 계속 이어나갔다. 이때부터 마사다느 유대인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티토는 실바장군을 시켜 마사다에 항쟁을 계소하고 있던 열심당원들을 섬멸하도록 명령하였다. 로마군대는 3년 동안 마사다를 포위하고 정상공격을 시도하였지만 워낙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이기 때문에 쉽게 점령할 수가 없었다. 로마군대는 마침내 마사다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거대한 인공 축대를 마사다 서쪽편에 쌓았다. 그리고 73년 5월 2일 드디어 로마군은 인공축대를 사용하여 마사다 정상을 정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이 마사다의 정상을 점령하기 직전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열성당원들은 집단 자결을 결행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였던엘리아셀 벤야일의 제안대로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로운 몸으로 자결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다. 정상을 정복한 로마군인들은 승전의 축배를 마시기 전에 마사다 정상에서 장엄하게 죽음을 맞이한 960여명의 열심당원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사다에서 일어났었던 마지막 일들은 요세푸스의 유대인 역사책에서 잘 전해주고 있다.
4. 소돔산(Har Sedom)
사해 남서단에 위치하고 있는 소돔산은 소금 덩어리로 이루어진 산으로 그 길이는 11km이며, 폭은 1.5km 내지 3km가 된다. 산의 제일 높은 곳은 사해의 해수면에서 245km까지 솟아 있다. 복잡한 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돔산은 원래 사해에 속하여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시대 하나의 거대한 호수이었던 사해는 점차적으로 염도가 높아지면서 소금들이 바다 바닥에 침전되었다. 후에 단단한 바위층이 이 염분층 위를 덮으면서 강한 압력을 가해졌고 그런 과정에서 거대한 소금 바위들로 이루어진 산 곧 소돔산이 형성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빗물에 의하여 바위의 소금성분과 다른 연한 성분들이 씻겨 내려가면서 진귀한 모양의 바위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과제6. 아라바계곡에 대하여 약술하라.
1) 아라바 계곡의 특징
아라바계곡은 사해와 홍해의 에일랏만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길고도 좁은 계곡이다. 이 계곡은 실제적으로 동쪽의 에돔산지와 서쪽의 네게브산지를 나누어 놓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해에서 홍해까지의 아라바계곡 전체 길이는 176km이며, 폭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7km 내지 18km가 된다. 오늘날의 아라바계곡은 사해에서 홍해에 이르는 제한된 지역을 지칭하지만, 성경에서는 중앙계곡 전체를아라바라고 불렀다. 따라서 중앙계곡 내에 위치한 사해를아라바 바다혹은아라바에 있는 바다라고 하였다(신3:17, 겔47:8).
아라바는 히브리어로건조하고 황량하다라는 의미이다. 아라바계곡은 실제로 사막과 유사한 자연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이곳의 대부분 지역은 물이 부족하며 오아시스가 있는 몇 곳을 제외하면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한 곳이다. 아라바계곡의 년간 평균 강우량은 약 25mm정도이다. 겨울철 우기 때에 내리는 빗물이 지나가는 와디 주변에는 사막 환경에 잘 적응하는 싯딤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이 나무들은 강한 사막바람의 영향으로 나무의 꼭대기가 마치 우산 형태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극히 적은 양이긴 하지만, 비가 내리는 겨울철동안 이 지역에는 풀들이 자라고 꽃들이 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식물들은 강한 일사량으로 인하여 오래 견디지는 못한다.
이스라엘이 아라바지역을 관할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스라엘 왕국이 막강한 힘을 발휘할 때이었다. 그러나 왕국의 힘이 쇠약해졌을 때에는 에돔이나 나바티안과 같은 주변 민족들에게 이 지역의 관할권을 빼앗겼다. 철기시대 이후로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는 홍해로 내려가는 길목을 지켜주는 요새들이 중요한 지역마다 세워졌었다.
아라바계곡은 주변의 산지에서 흘러 내려온 충적토 모래와 자갈들이 두텁게 덮여있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양편에 위치하고 있는 산지에는 거대한 바위산들이 높은 벽을 이루며 둘러서 있다. 아라바계곡을 중심으로 양쪽편에 위치한 산지는 지형적으로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라바계곡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네게브산지는 동쪽의 에돔산지와는 달리 계속 이어지는 잔지가 아니며, 바위산들도 높은 벽을 이루고 있지 않는다. 서쪽의 경사지는 지역에 따라 높이가 다른데, 계곡의 바닥에서 약 300m가지 높아지는 곳도 있다. 에일랏에서 북족으로 약 32km 지점까지는 주로 수정암과 누비안 사암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다의 침전물로 형성된 바위들이 그 사이에 섞여 있다. 그러나 위쪽의 북쪽 지역에는세노마니안 석회석과 백운암, 그리고 세노니안백악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아라바계곡의 동쪽 지역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계곡의 바닥에서 약 1000m이상 높이 솟은 바위벽들이 아라바게곡을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산지의 지펴면 위로는 붉은 색을 띈 누비안 사암층과 수정암층이 드러나 있다. 겨울철 우기에는 계곡의 양편에 있는 산지로부터 빗물들이 일시적인 홍수를 이루며 계곡 안으로 유입된다. 비록 유입되는 물량이 많지는 않지만, 많은 양의 바위 부식토들을 계속적으로 실어 내려와 산기슭에는 부채꼴 모양의 크고 작은 삼각주들이 형성되어 있다. 동쪽의 에돔산지에서는 서쪽의 산지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린다. 그러므로 서쪽보다 더 많은 빗물을 내려 보내고 있으며, 자연히 침식의 영향력도 서쪽보다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동족편의 삼각주지대는 서쪽의 것보다 규모가 크며 충적토의 두께도 더 두텁다. 사해의 남단에서 시작되는 아라바계곡은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차적으로 지대가 높아져 사해에서 48km 떨어진 지역에서는 지중해의 해면과 같은 위치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28km를 더 내려가게 되면 아라바게곡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해발 230m 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 이후로는 다시 지역이 낮아져 에일랏 항구가 위치하고 있는 홍해에 이르게 된다.
2) 아라바계곡의 중요한 지역들
1. 소돔(Sedom)
성경에서 소돔은 주변의 다른 도시들과 더불어 가나안 지역의 남쪽 경계로 취급되었다(창10:19). 그러나 소돔의 정확한 위치에 관하여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대체적으로 사해의 남단에 위치하였다는 견해와 북단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현재 사해 바다 밑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보는 세 가지 견해가 그동안 주장되어 왔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주장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옛 소돔지역으로 여겨지고 있는 사해 남단에는 사해 바닷물 속에 함유되어 있는 광물질을 축출하는 사해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사해공업단지는 원래 1930년 사해 북단에 위치한칼리아(Qalya)지역에 포타슘을 생산하는 공장이 세워짐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1934년 사해 남단인 옛 소돔지역에 두 번째 포타슘 공장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1948년 독립전재의 결과로 사해 북단지역이 요르단 영토에 편입됨에 따라 사해 북단의 공장은 폐쇄되고, 그 대신 사해 남단의 공업단지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2. 욧바다(Yotvata)
욧바다는 에일랏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아라바계곡 내에서 규모가 큰 오아시스 중의 하나이다. 이 샘의 근처에는 고대에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특히 에일랏으로 내려가는 중간 기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의 여정 중 이곳을 지나갔으며,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신명기는 욧바다가 물아 풍부한 지역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신10:7).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요새 유적이 남아 있으며, 로마시대에는 다이아나여신을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957년 이곳에는요트바타라는 기브츠가 세워졌으며, 1960년대에는바이 하르라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만들어져 성경시대 이 지역에서 서식하던 동물들을 자연상태에서 보호하며 기르고 있다.
3. 팀나계곡(Valley Timna)
팀나계곡은 에일랏에서 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에 의하여 형성된 계곡이다. 이곳에는 고대 이집트시대의 구리광산 유적이 남아있다. 일반적으로 이곳은 솔로몬이 개발한 구리광산일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이집트에 의하여 개발되었던 구리광산임이 고고학 발굴 결과에 의하여 밝혀졌다. 이곳의 구리광산들은 주로 후기 청동기시대에 개발되어 사용하였던 광산들이다. 팀나계곡은 자연의 풍화작용에 의하여 형성된 아름다운 바위 모양들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4. 엘랏(Elat)과 에시온게벨(Ezion-geber)
이스라엘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홍해 해변가의 항구도시인 에시온게벨과 엘랏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다. 성경은 아카바만에 위치하고 있는 이 두 항구도시를 서로 가깝게 이웃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왕상9:26). 에시온게벨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요르단의 아카바항과 이스라엘의 에일랏항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잘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고대 엘랏의 위치는 현재 요르단의 아카바항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곳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동편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들의 광야 여정지로 언급된 마지막 장소이다(신2:8, 민33:35). 솔로몬시대에 이르러 에시온게벨은 아라비아(오빌), 아프리카, 인도와의 무역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솔로몬은 이곳에 대외무역을 위한 무역선단들을 가지고 있었다(왕상9:26-28). 그리고 여호사밧 시대에도 대외무역의 증진을 위하여 새로운 배들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배들은 사용하기도 전에 파선됨으로 무역에 대한 그의 기대가 무산되기도 하였다(왕상22:48, 대하20:36, 37). 여호사밧의 아들이었던 요람시대에 이곳은 에돔에게 빼앗겼지만 아마시아 시대에는 다시 되찾았다(왕하8:20-22). 아마시아의 아들인 웃시야는 부왕이 되찾은 에시온게벨과 엘랏을 재건하였다(왕하14:22). 아하스왕 때에 이르러 이곳은 아람왕 르신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그 이후 이곳은 이스라엘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난 지역이 되었다(왕하16:6).
헬라시대 초기 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는 이곳에베레니케라는 이름의 항구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나바티안족들이 침략하면서 이곳은 네게브 모든 지역과 더불어 이곳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았다. 로마시대 이후 이곳은아일라라는 이름의 항구도시로 발전하였다. 특히 아라바계곡을 통하여 북쪽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대로가 건설됨으로 이곳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엘랏의 중요성은 로마가 이곳에 로마군단을 주둔시켰던 것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초기에는 로마 제3군단 소속의 예하부대가 이곳에 주둔하였지만, 후에는 로마의 제10군단 본부가 주둔하기도 하였다.
에일랏만은 기후나 조류 흐름의 조건이 산호 서식에 적합하기 때문에 각종 진기한 모양의 산호가 많이 자라는 아름다운 바다이하다. 오늘날에는 일년 내내 높은 기온이 유지되기 때문에 겨울 수영을 즐기는 유럽 사람들로 관광사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곳에는 1975년부터 해저 4.5m에 수중관망대를 설치하여 아름다운 산호바다 홍해의 모습을 직접 관람할 수가 있다. 에일랏 항구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는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국경이 만나는타바가 있다. 6일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시내반도 전체를 점령하였지만, 켐프 데이비드협정에 의하여 대부분의 점령지를 이집트에게 반환하였다. 이때에 타바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경지역이 되었다. 에일랏만(아카바만)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네 개의 나라가 서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제 7 장 트랜스요르단
과제1. 트랜스요르단 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약술하라.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거대한 지구대인 중앙계곡과 시리아-아라비아사막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의 헬몬산에서 남쪽의 홍해에 이르는 트랜스요르단 지역은 지형적으로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산지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지역에 따라 지형이나 기후가 현저하게 다르다. 트랜스요르단의 서쪽 경계는 계곡형 단층으로 인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반면, 동쪽 지역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점진적으로 사막에 연결된다.
트랜스요르단은 크게 다음의 네 지역으로 나뉘어지고 있다.
1) 바산: 트랜스요르단의 가장 북쪽지역인 바산은 헬몬산에서 야르묵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바산의 남북간 길이는 서쪽과 동쪽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즉 중앙계곡과 가까운 서쪽지역에서의 남북간 길이는 55km인데 비하여, 동쪽지역에서의 남북간의 길이는 약 80km나 되고 있다.
2) 길르앗: 길르앗은 야르묵강에서 약복강가지 약 55km 거리의 지역이다.
3) 모압과 암몬: 모압과 암몬지역은 제렛강과 약복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 지역의 남북간 길이는 약 130km이다. 이 지역의 중간지점에는 사해로 유입되는 아르논강이 위치하고 있다.
4) 에돔: 트랜스요르단에서 가장 남쪽지역인 에돔은 사해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제렛강에서 홍해의 에일랏만까지 약 170km 거리의 지역이다.
트랜스요르단의 대부분 지역은 지질변동에 의하여 지형이 솟아오른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융기현상은 서부 에돔 지역과 북쪽의 헬몬산 지역에서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융기활동은 중앙계곡의 지질활동과 연관되어 트랜스요르단의 서쪽 경계지역을 급경사로 만들었다. 반면에 트랜스요르단의 동쪽지역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트랜스요르단의 가장 밑바닥에는 가장 오래 전에 형성된 단단한 누비안 사암층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한 고대의 암석층은 중앙계곡과 인접한 서쪽의 급경사에서 지표면 밖으로 드러나 있다. 이러한 암석의 노출현상은 지속적인 풍화작용이 일어나는 협곡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반면에 동쪽지역의 지층을 이루는 암석은 누비안 사암과 같이 후대에 형성된 것들이다. 누비안사암층은 빗물이 스며들기 어려운 단단한 암석이다. 트랜스요르단 지역에서 상시천이 많이 흐르는 이유는 이러한 단단한 암석층이 지표면 가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요르단의 서쪽지역은 비교적 강우량이 많은 곳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인접한 사막의 영향으로 강우량이 급격히 줄어든다. 여름철 건조기동안 트랜스요르단에 인접한 사막에서는 고온 건조한 열풍이 불어오며, 겨울철 우기에는 건조한 찬바람이 불어온다. 이러한 사막형 기후 때문에 트랜스요르단에서는 중앙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도와 올리브와 같은 과실수 재배가 매우 어렵다. 이 지역에서의 일반적 경제 수단은 목축이었다. 그러나 강우량이 충분한 지역에서는 밀 재배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트랜스요르단의 북부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바산은 지형과 기후조건 등에서 다른 지역과 많은 차이가 있다. 이곳은 동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더욱 높아지며, 그러한 지형상승은 하우란 산지에서 최고점을 이룬다. 이런 지형적 조건 때문에 동쪽으로 갈수록 강우량이 많아지고 있다.
남북간의 거리가 400km가 되며, 다양한 지세를 지니고 있는 트랜스요르단은 북쪽과 남쪽 지역 사이에 지형, 기후, 경제적 근거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북쪽의 바산 지역은 해발 600m 정도 높이의 산지이지만, 길르앗은 900m까지 높아지고 있으며, 최남단의 에돔은 무려 해발 1500m 이상 되는 산지이다. 바산, 길르앗, 암몬, 모압 등지는 비교적 강우량이 많아 삼림지역이 형성되어 있고, 밀 재배와 같은 농업도 가능하다. 그러나 에돔지역은 사막의 영향으로 강우량이 급격히 떨어지며, 관목 형태의 숲과 목축을 위한 초지 정도가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에돔의 남부지역은 초지 형성도 마땅치 않아 목축마저 어려운 형편이다.
과제2. 바산에 대한 내용들을 요약하라.
1) 바산의 지형적 특징
바산의 경계는 북쪽의 헬몬산에서 남쪽의 야르묵강까지이다.평평한 땅이라는 의미의바산은 그 명칭 자체가 암시하고 있듯이 산지의 정상이 평평하게 이루어진 고원지대이다. 산지의 평균 높이는 약 600m 정도이며, 북쪽과 동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지고, 남쪽과 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바산은 두 가지 면에서 트랜스요르단의 다른 지역과 다르다. 첫째는, 바산의 서쪽 경사지가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적으로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런 지형적 조건 때문에 바산은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비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강우량이 높은 지역이다. 그 결과로 바산지역과 연결된 사막은 다른 지역과 달리 동쪽으로 훨씬 들어간 곳에서 시작된다. 즉 요단계곡에서 122km 떨어진 곳에, 그리고 지중해에서는 약 200km 떨어진 지역에서 사막이 시작된다. 또한 바산의 동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하우란산지는 최고봉이 해발 1820m나 되는 높은 산지인데, 이 산지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막아주어 농작물 재배에 피해를 극소화시켜 준다. 바산이 다른 지역과 다른 두 번째 요소는 이 지역의 비옥한 토양이다. 이곳의 땅은 현무암층이 두텁게 덮여있고, 현무암에서 풍화된 비옥한 흙들이 주된 토양을 이루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요소로 인하여 바산은 고대로 레반트지역에서 유명한 곡창지대였다. 특히 바산의 밀농사는 널리 알려져 있었고, 로마제국이 중요하게 여겼던 곡창지대였다.바산의 살진 암소들이라는 성경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바산에서는 밀농사 뿐 아니라 가축을 위한 목축지로서도 유명하였다(암4:1, 시22:12). 잘 부식되지 않은 현무암들 때문에 집약적인 농업이 어려운 곳에서는 소나 양들을 방목하였다. 오늘날에도 바산에서는 비육우들을 대량으로 방목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다.
바산은 세 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가 있다.
(1) 골란고원: 가장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골란서원은 중앙계곡과 야르묵강의 한 지류인 루콰드강 사이에 위치한 고원지대이다.
중앙계곡과 인접하여 있는 골란고원은 지형상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진다. 하부 골란고원의 정상은 대부분 평평한 탁자형의 고원지대로 되어 있지만, 야르묵강과 갈릴리바다와 접경이 되고 있는 남쪽과 서쪽 지역은 급경사를 이룬다. 해발 185m에서 580m 높이가 되는 이 지역은 부식된 현무암 토양으로 두텁게 덮여있다. 하부 골란고원에는 여러 개의 하천들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하천의 물길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단단한 현무암층을 침식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야르묵강과 루콰드강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두 강에서는 보다 강한 물길이 현무암층을 뚫고 지나가고 있으며, 또한 연한 백악층이 이 현무암층 밑에 있어서 강바닥은 더욱 낮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강의 강바닥 높이와 두 강으로 유입되는 지류 하천들의 강바닥 높이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런 결과로 지류들이 본류로 유입되는 입구에서는 자그마한 폭포가 생기기도 한다. 하부 골란고원은 고대부터 잘 알려진 농경지역이었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를 거쳐 크게 번성하였던 이 지역 안에는 행정적으로 데가볼리에 속한수시타(Susita)와감라(Gamla)와 같은 도시들이 있었다.
상부 골란고원은 하부와는 달리 고원 자체가 경사지를 이루고 있다. 상부 골란고원의 시작점인 헬몬산 기슭은 해발 1300m 높이의 지역이며, 이곳에서 남쪽의 갈릴리바다까지는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경사지이다. 상부 골란고원은 지질학적으로 후대에까지 화산 활동이 있었던 지역이다. 그러므로 상부 골란고원에는 화산에 의하여 형성된 많은 원추형 산들과 분화구들이 있다. 헬몬산 근처에 있는 가장 높은 원추형 산은 그 높이가 1280m나 되는 것도 있다. 그리고 헬몬산 밑에 위치한비르카트 람(Birkat Ram)이라는 분화구 호수는 물이 맑고 깨끗한 것으로 유명하다. 헬라사람들은 이곳을피아레(Phiale-접시)라고 불렀다.
이 지역에는 연중 비교적 많은 량의 비가 내린다. 내린 빗물들은 여러 개의 하천들을 통하여 중앙계곡 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물살이 빠른 하천들은 지표면의 비옥한 토양들을 씻어 냄으로 인하여 하천 바닥에는 많은 돌들을 드러나게 만든다. 상부 골란고원의 지표면에 드러나 있는 많은 돌들은 농작물 재배에 큰 방해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대에 이곳은 숲과 삼림이 우거진 곳으로 방목을 위한초지로 유명하였다. 성경에서바산의 암소들이나바산의 상수리나무가 언급되는 것은 모두가 상부 골란고원의 그러한 지형과 관련된 것이다.
(2) 바산고원: 바산의 중앙부를 차지하고 있는 바산고원은 루콰드강과 하우란산지 사이의 지역이다.
바산고원은 골란고원과 하우란산지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바산의 서쪽 시적부분은 해발 215m 정도에 불과하지만, 동쪽 끝은 해발 920m까지 높아진다. 바산고원에서 가장 높은 해발 1100m가 된다. 이 지역은 하부 골란고원처럼 비옥한 토양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바위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작은 언덕들이 많다. 이 지역의 년간 강우량은 300mm 내지 600mm로서 곡물재배에 충분한 양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강우량은 대체적으로 불규칙적인 편이어서 가뭄이 찾아드는 해가 자주 발생한다. 이 지여긔 작은 하천들은 모두가 남서쪽에 위치한 야르묵강으로 유입되고 있다.
성경시대에 있어서 바산고원의 중심지는 당시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던에드레이(Edrei)이다. 현재 이곳이는다라라는 이름의 도시가 위치하고 있는데, 시리아와 이락에 거주하는 모슬렘들이 메카로 순례의 길을 떠나기 위하여 매년 이곳에 집결하고 있다.
(3) 하우란산지: 하우란산지는 바산산지 중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하우란 산지를 현재는제밸 두르즈라고 부르고 있으며, 북쪽에는 응고된 용암층 지역인레자(Leja)와사파(Safa)지역이 위치하고 있다.
하우란산지는 화산활동에 의하여 솟아오른 산지이다. 이 산지는 가파른 경사지로 인하여 주변의 다른 지역과는 나뉘어져 있다. 특히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다멕섹분지와는 대조적인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하우란산지의 최고봉은 해발 1820m의텔 엘 제나이다. 용암분층에 의한 화산암층으로 이루어진 하우란산지는 거칠고 불규칙적인 지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많은 강우량은 현무암층을 부식시켜 비교적 비옥한 토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높은 하우란산지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사막바람을 막아줌으로 바산지역의 농작물 피해를 덜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산지의 서편 기슭에는 비교적 많은 양의 비가 내리며 때로는 눈도 많이 내린다. 이 지역은 고대로 곡물생산과 과일나무 재배가 유명하다.
성경에 나오는바산의 산(시68:15)은 다름 아닌 하우란산지를 의미하는 것인데, 레바논의 산들을 비롯하여 갈멜산과 비교되고 있다(사33:9, 렘22:20). 이 지역에서의 상수리나무도 유명하였던 것 같다(사2:13, 겔27:6).
17세기 이후에는 레바논에서 이주한 두르즈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살아오고 있다. 특히 1860년 레바논에서 있었던 두르즈족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인하여 이 지역으로의 두르즈족들 이주는 크게 증가 하였다. 이런 이유 대문에 하우란산지를 현재두르즈의 산이라는 의미의제벨 두르즈라고 부르고 있다.
하우란산지의 북서쪽과 북동쪽은 별로 높은 지역이 아니지만 가파른 경사를 가진 현무암 산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지역에 따라 경작이 가능한 토양도 있지만, 대부분의 땅이 거친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농경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이 지역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거주지역이 아니다. 오히려 도둑들이나 불법자들의 피신처로 이용되었다. 이곳을 아랍어로레자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피난처라는 뜻이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는 이 지역은드라고닛(Trachonitis)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찢겨진 땅혹은거친 황무지라는 뜻이다. 신약시대 드라고닛은 헤롯대왕의 아들인 헤롯 빌립이 통치하였던 지역에 속한다.
2) 바산의 중요한 지역들
(1) 헬몬산(Mt. Hermon)
이스라엘의 최고봉인 헬몬산은 그 정상 높이가 2814m이다. 헬몬산이 높이 융기되면서 동반적으로 주변에는 계곡이나 분지 등과 같은 낮은 지역이 생겼다. 즉 북서쪽의 리타니계곡, 남서쪽의 이온계곡, 남쪽의 훌레계곡, 그리고 북동쪽의 다멕섹분지 등은 모두가 헬몬산 주변에 위치한 낮은 지역들이다. 헬몬산과 지형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곳은 북쪽의 안티레바논산지에 속하는 산지의 한 지류이다. 헬몬산의 폭은 약 30km이며, 연중 약 1500mm 이상의 강우량이 기록되는 지역이다. 헬몬산의 강우량은 대부분이 눈으로 내리는데, 겨울동안 내린눈은 이른 여름철까지도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여름이 되면서 서서히 녹은 헬몬산의 눈들은 지표면 아래로 스며들어 헬몬산 주변의 샘들을 통하여 다시 분출된다. 이러한 샘들은 남쪽의 요단강, 북쪽의 리타니강, 그리고 동쪽의 다멕섹으로 흐르는 강의 수원지가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헬몬산은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헬몬산은 눈 앞에 두고 있는 가나안 정복의 최북단 지역이었다(신3:8, 4:48, 수11:17, 삿3:3).
아모리 사람들은 헬몬산을스닐(Senir)이라고 불렀으며, 시돈사람들은 이 산을시룐(Sirion)이라고 불렀다(신3:9). 이러한 지명들은 이집트의 저주문서나 우가릿 문서에서도 자주 언급이 되고 있다. 기원전 1330년경 히타이트왕과 수리아왕 사이에 체결된 어느 계약 문서에는 계약 체결 증인으로서 레바논의 신들과 시리온의 신들과 더불어 헬몬산이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헬몬산 주변의 우거진 숲들, 산기슭에 위치한 여러 수원들. 그리고 눈으로 덮여 있는 정상의 모습 등은 고대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경외심을 일으켜 주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헬몬산과 관련하여 유명한 성소들이 자주 언급된다. 사람들이 신탁을 얻으려고 찾아 왔던벧마아가 아벨(삼하20:15, 18)도 헬몬산 근처의 지역이였다. 여로보암 시대에 거대한 신전이 세워진 단(왕상12:29, 왕하10:29, 암8:14)과 헤롯이 아우구스터스를 위하여 세운 로마 황제 숭배 신전이 있었던 가이사랴 빌립보 등도 모두가 헬몬산과 관련된 지역들이다.
(2) 골란(Golan)
골란은 바산지역에 위치한 레위인 도시인 도피성이었다. 이 도시는 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된 지역이다(신4:43, 수20:8, 21:27). 초기 기독교 시대의 역사하가인 유세비우스는 이곳에 거주하였는데, 그는 당시 자신이 살던 골란을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로 증언하고 있다.
3) 아스다롯(Ashtaroth)
아스다롯은 바산왕 옥이 통치하였던 나라의 수도였다(수9:10). 이 도시는 바산의 높은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었던 아스다롯과 관련성이 있는 도시였었다. 이스라엘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에 아스다롯은 므낫세의 아들인 마길 자손에게 주어졌다(수13:31). 때로는아스다롯 가르나임이라는 명칭으로도 사용이 되었는데(창14:5), 그것은 아스다롯과 가르나임이 서로 가까이 위차고 있었던 두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아스다롯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이집트의 저주문서들과 투트모세스 3세의 점령지 명단에도 들어있으며, 엘아마르나서신에도 등 하고 있다. 이곳은 헬라시대를 거쳐 로마시대에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마카비1서에서는가르나임을 언급되며(5:26), 마카비2서에서는가르니온으로 언급되고 있다(12:26). 학자들이 주장하는 옛 아스다롯의 정확한 위치는 아르묵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오늘날의텔 아스타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가르나임(Karnaim)
가르나임은 이웃하고 있는 도시 아스다롯이 쇠퇴한 이후 바산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특히 아람과 앗수르가 바산을 통치하면서 가르나임은 이 주역의 중심 도시로 등장하게 되었다. 가르나임은 아스다롯과 가까이 이웃하고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때로는아스다롯 가르나임이라고도 불렀다. 가르나임의 정확한 위치는 대체적으로 아스다롯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세이크 사아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아드레이(Adrei)
에드레이는 바산지역의 한 도시로서, 옥이 통치하였던 바산왕국에 속한 견고한 요새였다. 현재는 이곳에는테라라는 도시가 위치하고 있는데, 다멕섹과 암만 사이의 중간지점이다. 바산왕 옥과 그의 왕국을 멸망시킨 후 모세는 이곳을 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하였다(민21:33-35). 로마시대에도 이곳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를 이루었으며, 3세기경 이 도시는 발전하여 독립적 위치를 갖게 되었다. 유세비우스의 역사 기록과 로마의 다른 문헌들도 이 도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언급하였다.
과제3. 길르앗산지에 대하여 약술하라.
1) 길르앗의 지형적 특징
길르앗산지는 북쪽의 야르묵강에서 남쪽에서 약복강가지 약 55km 거리의 지역이다. 동서간의 폭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45km 내지 70km가 된다. 길르앗산지는 지리적으로 트랜스요르단에 속하고 있지만, 기후, 지형, 재배 작물, 거주 조건 등에서는 오히려 요단강 서안에 위치한 중앙산지와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바산이 화산에 의한 현무암 지역인 반면, 길르앗산지는 대부분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지이다. 바산산지의 높이가 평균적으로 600m인데 비하여, 길르앗은 900m 이상 높은 산지이다. 년 평균 강우량이 700-800mm인 이 지역에는 요단강으로 유입되는 여러 상시천들이 존재하고 있다.
2) 이스라엘 역사와 길르앗산지
길르앗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야곱과 그의 외삼촌 라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한 사건에서이다(창31:21-23). 그후 모세는 길르앗지역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길르앗과 바산은 아모리왕 시혼과 옥이 지배하고 있었다(신4:47-49). 모세는 길르앗지역을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분배하였다.
기르앗산지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왕국시대이다.
사울은 암몬족에게 공격 당하고 있었던 야베스길르앗 주민들을 구해줌으로서 요단강 동편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었다(삼상11). 사울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이스보셋은 마하나임을 중심으로 그의 세력을 구축하여 요단강 서편지역까지 재점령 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삼하2장).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블레셋 세력을 제압한 다윗은 요단강 동편의 길르앗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암살롬의 반란이 있었을 때, 다윗은 길르앗지방으로 잠시 피하기도 하였다(삼하15-18).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솔로몬의 행정구역으로 편성되었다. 비록 그의 의욕적인 건축 계획에 길르앗지방이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위한 놋 생산지로 이 지역이 활용되기도 하였다(왕상7:46, 9:15-22).
왕국 분열 이후 길르앗의 역사는 전적으로 북왕조 이스라엘과 관련된다.
북왕조를 건설한 여로보암은 요단강 서편의 세겜(Shechem)과 디르사(Tirzah)와 더불어 길르앗의 브니엘(Penuel)을 요새화하였다. 여로보암이 브니엘을 부각시킨 것은 아마도 벧엘과 단에 중앙성소를 세웠던 그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일련의 정치적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창32:24-32). 북왕조 이스라엘이이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아람, 남쪽의 암몬을 비롯한 모압과의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그런 점에서 길르앗지방의 안정은 곧 북왕조 이스라엘의 흥망에 따라 좌우되었다. 길르앗과 관련하여 한가지 인정해야할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가 대체적으로 요단강 서편지역을 중심으로 삼고있기 때문에 길르앗지방과 같은 요단강 동편지역은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분배된 고유의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권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3) 길르앗산지의 중요한 지역들
1. 야베스 길르앗(Jabesh-gilead) '
길르앗산지에 속하는 야베스 길르앗은 므낫세지파에게 분배된 도시였다. 벧산에서 남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지고 갈릴리바다에서는 남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강으로 유입되고 있는와디 야비스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야베스 길르앗은 베냐민지파 문제를 다루었던 미스바회의에 참여하기를 거절함으로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에게 멸망을 당하였다(삿21:8). 이 때에 이곳의 젊은 처녀들은 살아남아 베냐민지파의 멸종을 막을 수 있었다. 그후 암몬사람 나하스가 야베스를 침공하였을 때, 사울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삼상11:1-11). 그러한 사울의 도움을 잊지 않고 있던 야베스 거민들은 사울이 길보아 산에서 전사하여 그의 시체가 그의 세 아들들 사체와 더불어 벧산성에 못 박히게 되자, 그들은 밤을 이용하여 그의 시체를 가져다가 불사르고 그 뼈를 야베스의 에셀나무 아래에 장사하였다(삼상31:12-13). 야베스 거민들의 그러한 용맹스러운 행동을 알게된 다윗은 야베스 거민에게 보상할 것을 약속하였다(삼하2:5-7). 후에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뼈들을 베냐민 땅으로 가져와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 묘에 장사하였다(삼하21:14, 대상10:11 이하).
2. 라못 길르앗(Ramoth-gilead)
라못 길르앗은높은 지역이라는 의미의라못이 암시하고 있듯이, 길르앗지역에서 잘 알려진 높은 지역이다. 때로는 성경에서 길르앗이라는 수식어가 없이라마(라못은 라마의 복수형임)라는 이름으로(왕하8:29, 대하22:6), 혹은길르앗의 라못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신4:43, 수20:8, 21:28, 대상6:80).
라못 길르앗의 위치에 관하여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야르묵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텔 라미트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다멕섹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왕의 대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인 지역이다. 특히 라못 길르앗에서는 요단강 서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스르엘평원으로 나가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다(왕하8:28, 이하9:1, 이하14-165장). 이곳은 전차와 같은 무기들이 동원되어 전쟁을 벌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이었다(왕상22:29-36, 대하18:28-34).
성경에서 라못 길르앗이 처음 언급된 것은 모세에 의하여 세워진 도피성 목록이다. 라못 길르앗은 베셀과 바산과 더불어 트랜스요르단 지역의 도피성이었다(신4:43, 민35:6,14, 수20:7). 또한 라못 길르앗은 레위인들을 위하여 따로 구별하여 놓은 48개 성 중의 하나로서 므라리 자손 레위인들에게 분배되었다(수21:38, 대상6:80). 이곳은 사사 입다의 고향이었으며(삿11:34), 솔로몬이 임명한 지방장관 중 하난였던 벤게벨은 라못 길르앗에 거주하며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왕상4:13).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라못 길르앗의 지배권은 이스라엘과 수리아 사이에서 여러 차례 바뀌었다. 아합왕은 이 도시를 되찾기 위하여 유다의 여호사밧왕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였다(왕상22:3-4). 아합은 라못 길르앗을 점령하기 위하여 일으킨 전쟁에서 전사를 하게 되었고(왕상22:1-40, 대하18장), 예후는 이곳ㅇ서 엘리사에게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왕하9:1, 이하, 대하22:7).
3. 거라사(Gerasa)
왕의 대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거라사는 오늘날의 암만에서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곳에 우치하고 있다. 지금은제라쉬(Jerash)라는 이름의 도시로 존재하고 있는데, 고고학적으로 신석기시대와 초기 청동기시대에 이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도시였다. 그러나 이 도시가 중요한 도시로 부각되며 번성하게 된 것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였다. 로마시대에 거라사는 데가볼리 도시연맹에 가담하는 도시가 되었다. 거라사는 상업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제우스 숭배의 중심지로서도 유명하였다. 제우스신을 위한 여러 신전들이 거라사의 남쪽 언덕 위에 세워졌다. 후에는 도시 중심부에 아테미를 위한 신전도 세워졌다.
비록 거라사는 갈릴리바다에서 남쪽으로 약 50km ㅇ상 떨어진 곳이었지만, 거라사의 영향력은 갈릴리바다 주변지역까지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특히 헬라인들 사이에서 영향력 있었던 거라사의 명성은 누가로 하여금 예수께서 귀신들린 청년을 고쳐준 갈릴리바다 주변지역을거라사지방이라고 언급하게 하였다(눅8:26-39).
4. 마하나님(Mahanaim)
마하나임은 길르앗지역에 속한 갓지파의 도시로서, 갓지파와 므낫세지파 사이의 경계지역에 위치하였다(수21:38, 대상6:80).
마하나임의 정확한 위치에 관하여는 학자들간에 견해가 각기 다르지만, 창세기 32장에 근거하여 마하나임의 위치는 압복가에서 북쪽으로 얼마 덜어진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창32:22).
마하나임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하였던 사건과 관련되어 성경에 처음으로 업급되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 하룻밤을 이곳 마하나임에서 보냈다(창32:2). 그날 밤 야곱은 야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밤이 새도록 씨름하는 결사적인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울이 죽은 후에 아브넬은 사울의 므비보셋을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삼았다(삼하2:8, 12). 얼마후 므비보셋은 암살을 당하게 되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던 장소 역시 마하나임인 것 같다(삼하4:1-8).
다윗이 암살롬의 난을 당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피난처로서 마하나임을 선택하였다(삼하17:24, 27, 19:32). 이곳에서 다윗은 암살롬의 반란군을 대항하여 싸웠고, 암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성통곡하였던 곳도 이곳 마하나임이다(삼하18:33).
솔로몬시대 마하나임은 일년 중 한달 동안 왕궁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충당하는 솔로몬왕국의 일곱번째 지방행정구역 중심지가 되었다(왕상4:14).
5. 숙곳(Succoth)
숙곳은 얍복강이 요단강과 만나는 하구에서 얍복강을 따라 북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야곱이 밧단아림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이곳에 잠시 머물면서 자신과 가축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한 것과 관련하여 숙곳(=헛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창33:17). 이곳은 갓지파에게 분배가 되기 전까지는 시혼왕에게 속한 지역이었다.
기드온은 자신의 군대에 음식 제공하기를 가절하는 이곳 주민을 징벌한 사건이 있었다(삿8:5-16). 후에 솔로몬은 엘살렘 성전을 건축하면서 숙곳과 사르단 사이에 놋을 만드는 주물소를 세우기도 하였다(왕상7:46).
6. 브니엘(Penuel)
브니엘은 숙곳에서 동쪽으로 좀더 들어간 얍복강변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곳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던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창32:22-33). 기드온과 그의 군대가 미디안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할 때, 이곳 브니엘에서 얍복강을 건넜다(삿8:5-9). 이곳은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로 잘 알려졌었다. 이곳에는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대가 있었고(삿8:9), 왕국분열 이후 여로보암은 이곳에 견고한 요새를 건설하였다(왕상12:25).
과제4. 암몬산지의 내용을 요약하라.
1) 암몬산지의 지리적 특징
암몬산지의 경계를 정확하게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초기에 암몬 자손은 아르논강과 얍복강 사이의 지역을 차지하였다(신2:20-21, 37, 3:11). 그러나 후에 이들은 많은 영토를 아모리 사람들에게 빼앗긴 채 얍복강의 동부지역만을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다(민21:24, 신2:37, 수12:2, 13:10, 25, 삿11:12, 22). 그런 점에서 암몬산지의 경계는 이 지역의 중심도시인랍바를 중심으로 모압 북부지역과 얍복강 동부지역이 되고 있다.
성경에서는 랍바는암몬자손의 압바라고 지칭되었다(신3:11 삼하12:26). 성경시대의 랍바는 오늘날 요르단왕국의 수도인 암만이다. 헬라시대에 이곳은 데가볼리에 속했던필라델피아이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곳을물들의 성이라고도 하였다(삼하12:27). 그런 이름이 있게 된 것은 랍바 부근에 얍복강의 근원이 되는 샘물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얍복강은 처음에 동쪽 방향으로 흐르지만, 암만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제르카 지역에서는 강물의 방향이 북쪽으로 바뀌게 되고, 얼마 후 다시 서쪽으로 물길을 바꿔 요단강으로 유입된다.
얍복강은 암만을 마치 활 모양으로 감싸 흐르고 있는데, 이러한 얍복강의 영향으로 암만의 주변지역은 넓고 비옥한 계곡평원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는 얍복강을 이용하는 관개 농업이 가능하다.
다윗은 요압을 시켜서 수원이 풍부한 랍바성을 점령하였다(삼하12:27). 랍바성을 점령하는 전쟁을 치르는 중에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게 되고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범하였다.
암몬산지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강우량이 적은 곳이다. 이곳에서의 년 평균 강우량은 약 300mm 정도이다. 비가 많이 내릴 때에는 년간 500mm까지도 강우량을 기록하지만, 때로는 100mm 이하로 강우량이 떨어지기도 한다.
얍복강이 흐르는 계곡 주변은 비옥한 지역이 되고 있지만, 암만에서 동쪽으로 10km 정도만 나아가면 강우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사막지역이 된다.
역사적으로 암몬사람들은 가까운 사막으로부터 유목민들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그리고 보다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북쪽의 길르앗산지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가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모스 선지자는 무자비하게 길르앗을 침범하였던 암몬사람들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암1:13).
바벨론 포로기 이후 암몬사람 도비야는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는 일을 방해하였다(느2:10, 19, 4:3, 7).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유대인들이 암몬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시켰다(스9:1-2, 느13:1, 23-31).
불리한 자연적 조건과 작은 규모의 영토로 인하여 암몬은 트랜스요르단에 위치하였던 여러 왕국들 중에 가장 힘이 약했다.
얍복강이 흐르는 비옥한 지역과 더불어 사막에 인접한 지역을 지니고 있던 암몬은 농업과 목축이 혼합된 경제체제를 유지하였다.
암몬산지의 역사적 중요성은 트랜스요르단을 남북으로 지나가는 당시의 국제도로왕의 대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왕의 대로는 여러 계곡들로 인하여 통행에 불편하였던 서쪽지역을 피하고 사막에 인접한 지역이긴 하지만 지형적으로 통행에 편리한 동편지역을 따라 발달하였다.
2) 암몬산지의 중요 지역들
1. 랍바(Rabbah: 라밧 암몬)
랍바는 고대 암몬왕국의 수도로서 오늘날 요르단왕국의 수도인 암만에 해당한다. 이곳을암몬 족속의 랍바혹은암몬 자손의 왕성 랍바라는 긴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지만(신3:11, 삼하12:26, 17:27, 렘49:2, 겔21:20), 축약형 이름인랍바가 사용되기도 하였다(삼하11:11, 12:27, 렘49:3). 여기에서의랍바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크거나 인구수가 많다는 뜻에서 주요 도시를 뜻한다. 이곳 주변은 얍복강 상류가 흐르는 비옥한 계곡평원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얍복강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풍부한 샘물들이 많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런 이유 때문에물의 성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갓 자손에게 분배하였다(수13:24-28).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자주 전쟁이 있었다. 이러한 전쟁 중 하나를 이용하여 다윗은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죽도록 방치하였다.
랍바는 당시의 남북간을 잇는 국제도로였던 왕의 대로가 지나가는 길목의 도시로서. 북쪽의 다멕섹에서 남쪽의 아라비아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뿐만이 아니라 동서의 교통로가 연결되는 요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의 상업적, 군사적 중요성을 잘 인식하였던 프토레미 왕조의 프톨레미 2세 필라델피아는 기원 전 3세기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재건하였다. 그리고 새 도시 이름을 ´필라델피아´로 바꾸었다. 그 후 필라델피아는 데가볼리 도시연맹에 가담하게 되었다. 로마시대였던 서기 2세기 이곳은 거대한 도시로 발전하였고, 비쟌티시대에는 주교가 상주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암만은 해발 850m 높이의 7개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인구가 158만인 암만은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의 수도로 행정부와 왕궁이 자리하는 곳이다. 도시의 여러 곳에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의 성채를 비롯한 원형극장 등과 같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과제5. 모압산지에 대한 내용을 약술하라.
1) 모압의 지리적 특징
모압산지는 초기에 아르논강과 제렛강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고원형 산지였다. 그러나 후에 모압은 아르논강을 넘어 그 위의 북쪽지역가지 확대가 되었다(신2:10-11, 19-21).
구약성경에서는 이곳을 ´미쇼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산지의 정상이 ´평평하다´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미쇼르´를 ´평원(신3:10, 4:43)´ 혹은 ´평지(수13:9, 16, 17, 21)´라고 번역하였다.
모압산지에는 사해로 유입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두 강 곧 아르논강과 제렛강이 있다.
깊은 계곡 안에 위치하고 있는 이 하천들은 양편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지를 두고 있어서 사람들의 통행에 많은 불편을 초래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이런 계곡들은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인 자연 방어선이 되었다.
로마시대와 십자군시대에는 이곳에 여러 개의 요새들이 세우지기도 하였다.
모압산지 남쪽에서 사해로 유입되고 있는 제렛강은 모압과 에돔을 갈라 놓는 자연 경계선 역할을 한다. 모압산지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아르논강은 사해를 유입되는 하천 중에 규모가 가장 크다.
길르앗산지가 얍복강에 의하여 두 지역으로 나뉘어진 것처럼, 모압산지 역시 아르논강을 중심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러나 이 두 지역은 산지의 높이를 제외하면 지형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즉 아르논강을 중심으로 북쪽지역은 600-800m 높이의 산지이며, 남쪽지역은 1200m 이상까지 높아지는 지역이다. 이 두 지역 모두는 높은 고원지대로서 누비안사암층을 최하층 암반으로 삼고 그 윗층에 세노마니안 석회암이 형성되어 있는 산지이다. 사해와 인접하여 있는 서쪽 경사지와 강들이 흐르는 깊은 계곡의 양편 가파른 언덕에서 누비안사암층은 지표면으로 드러나 있다.
모압의 남쪽지역은 화산과 관련된 현무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온천들은 이곳이 과거 화산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지역임을 잘 보여준다.
모압산지의 최고봉인 ´제벨 킨지라´는 그 높이가 해발 1230m나 된다.
모압산지는 모압산지는 요단계곡 서편의 중앙산지보다 더 높고 겨울철에 비도 더 많이 내린다. 롯기서에 소개되어 있는 나오미의 가족들이 유다산지의 가뭄을 피하기 위하여 모압지방으로 이주한 것을 이런 자연적 환경과 관련이 깊다.
모압산지는 산지이면서도 정상이 탁자형의 평평한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방으로 연결되는 편리한 도로가 발달하였다. 이런 도로망의 중심적 도시 중 하나가 ′메데바′이다. 메데바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795m의 느보산은 모압산지의 중앙부에서 서쪽방향으로 돌출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하부 요단강계곡을 비롯하여 사해와 유다산지가 한 눈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모세는 이곳에서 약속의 가나안땅을 바라만 본 채 그의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신34:1).
느보산 근처에는 모세와 관련하여 ′에인무사′라는 이름의 샘이 있는데, 그 의미는 ′모세의 샘′이란 뜻이다.
모압과 길르앗 사이에는 정확하고 두 지역을 구분시켜주는 자연 경계선이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모압은 길르앗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과 자주 분쟁을 벌려왔다. 특히 사사시대 모압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계속되는 국경전쟁이 있었다(삿3:120. 이러한 상태는 사울왕 때까지 계속되었고(삼상14:47), 다윗이 이곳을 점령함으로 그 동안 계속되었던 국경분쟁은 계속되었다(삼하8:2).
솔로몬의 통치 기간동안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왕상11:1, 7). 그러나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분열되면서 모압을 점령하여 자신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므리의 아들이었던 아합왕이 죽게 되면서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에 반기를 들었는데(왕하3:4-5), 이 지역에서 발견된 ′모압비문(Moabite Stone)′은 성경의 그러한 사건이 당시의 실제하였던 역사임을 입증해 주었다.
2) 모압의 중요 지역들
1. 메드바(Medaba)
메드바는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중요성을 띈 도시는 아니었지만, 성경에 여러번 언급이 되었다(민21:30, 대상19:7). 유명한 메사왕의 모압비문에서도 이 도시가 언급되고 있다.
사해의 북동쪽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메드바는 왕의 대로가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이다. 이곳의 주변지역은 비옥한 토양의 고원지대가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모압이 각각 소유권을 주장하였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그런 이유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엔 정치적 갈등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왕 시혼에게서 빼앗은 이 도시는 르우벤지파에게 분배되었다.
메드바가 중요한 도시로 부각된 것은 비잔틴시대이다.
서기 6세기경 이곳에 새워진 비잔틴교회 바닥에서 발견된 모자이크로 만든 이스라엘 지도는 유명하다. 이 교회의 현재 건물은 1896년에 새로 지은 것이지만, 모자이크 지도가 있는 교회 바닥은 6세기 때의 것이다. 메드바의 모자이크지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여러지역들과 지형들을 이해하는데에 더 없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헤스본(Heshbon)
헤스본은 성경에서 무려 38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트랜스요르단의 중요한 도시로서 아모리왕 시혼 왕국의 수도였다(민21:21-25).
헤스본의 위치는 오늘날의 ′텔 헤스반′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와디 헤스반의 남쪽 지류가 시작되고 있으며, 와디 헤스반은 서쪽으로 약 24km 흘러 내려가 요단강으로 유입된다. 이곳은 해발 895m의 높은 고지대로서 왕의 대로가 지나가는 중요한 길목이며 모압의 고원평지를 지켜주는 전략적 도시이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56km 덜어져 있고 암만에서는 남서족으로 19km 떨어져 있다. 그리고 느보산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머리왕 시혼이 통치하였던 왕국의 경계는 북쪽의 얍복강에서 남쪽의 아르논강, 그리고 서쪽의 요르단계곡에서 동쪽의 암몬지역까지이다(수12:2, 13:10, 삿11:22). 이스라엘이 시혼에게서 헤스본을 점령한 후 이곳은 르우벤지파에게 분배되었다(민21:21-24, 32:37). 그러나 후에 이곳은 르우벤과 인접한 지역을 차지하였던 갓지파의 소유가 되었다. 갓지파는 후에 이곳을 레위인들에게 넘겨주었다(수21:39).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암몬사람들은 얍복강에서 아르논강까지의 지역이 모두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지만, 사사 입다는 이들의 주장과 요구를 거부하였다(삿11:12-28).
모압의 세력이 최고로 번영하였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활동시기에 헤스본은 다시 모압의 소유로 넘어갔다(사15:4, 렘48:2).
3. 디본(Dibon)
모압의 중심적 도시였던 디본은 사해에서 동쪽으로 약 18km 떨어지고, 아르논강에서 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디본은 헤스본과 더불어 원래 모압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아모리왕 시혼이 모압에게서 이들 지역을 빼앗았다(민21:26).
시혼의 승전에 고나한 내용은 민수기에 수록되어 있다(민21:27-30). 그러나 그 후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이곳을 시혼에게서 다시 빼앗았다(민21:30). 그리고 이 지역을 분배받은 갓지파는 디본을 재건하였다(민32:24), 그것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곳을 ′디본 갓′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민33:45이하).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초기 청동기 시대의 디본은 북쪽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의 아랍 도시인 ′디반′은 남쪽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중기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곳에는 사람들이 별로 거주하지 않는 지역이 되었고, 다시 철기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많은 인구가 상주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후 나바티안시대를 비롯하여 로마시대와 비쟌틴시대를 거쳐 초기 아랍시대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게속 번영하는 도시가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유명한 메사의 ′모압비문′이 발견된 곳은 디본이다. 디본 출신의 모압왕 메사는 기원전 840년경 독립을 이루었고, 그의 통치 중심지를 디본으로 삼았다.
메사의 비문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4. 느보산(Mt. Nebo)
느보산은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본 곳이다. 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나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경에서 느보산이 언급된 것은 두 군데이다. 신명기 34:49에서 느보산은 ′아바림산′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명기 34:1에서는 느보산을 ′비스가봉′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느보산으로 확인되고 있는 지역은 메데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지고 사해에서 북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제벨 엔 네바(Jebel en-Neba)이다.
5. 길하레셋(Kir-hareseth: 오늘날의 케락)
길하레셋은 왕의 대로변에 위치한 삼면이 깊은 게곡으로 둘러 싸여있는 천연요새지역이다. 한때 이곳은 모압왕국의 수도가 되기도 하였다.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이 도시는 크게 번성하였다. 1132년 십자군들은 모슬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이곳에 거대한 성채를 건설하였다. 오늘날 이곳에 남아있는 성채 요새는 십자군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성경에서는 길하세렛(왕3:25, 사16:7, 11)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길헤레스(렘48:31, 36), 모압 길(사15:1)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길하레셋은 ′도시′ 혹은 ′성벽′을 의미하는 ′길(Kir)′과 ′토기′를 의미하는 ′하레세트(hareseth)′의 합성어이다.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도 ′길′이라는 도시가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이 도시를 ′케락′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케락이라는 지명은 이 도시의 본래 이름이었던 ′길(Kir)′에서 파생된 것이다.
길하레셋과 관련된 성경 내용은 모압왕 메사와 이스라엘의 여호람왕 사이에 있었던 전쟁 기록이다. 모압왕 메사는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죽은 이후 매년 바치던 조공을 바티지 않았다. 이에 아합의 아들이었던 여호람은 에돔 왕국과 연합하여 모압을 정벌하게 된다. 당시 메상왕은 디본에 그의 소도를 두고 있었으나 여호람의 군대가 승전을 거듭하자, 이곳 길하레셋으로 후퇴하여 이스라엘-에돔 연합군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장남을 산 채로 불태워 그모스신에게 바쳤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군대가 퇴각하였다는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왕하3:9-27).
사해의 리산반도에서 동쪽으로 약 42km 떨어져 있고 사해 수면보다 1220msk 높이 솟아 있는 원추형 산위에 건설된 길하레셋은 주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특히 동쪽에 더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은 열왕기하 3:25-27에 소개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과제6. 에돔산지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에돔산지의 지형적 특징
에돔산지는 트랜스요르단의 최남단 지역으로서, 모압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제렛강에서 홍해의 에이랏만에 이르는 약 170km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트랜스요르단지역 중에서 가장 높은 산지이다. 제렛강 근처의 에돔산지는 높이가 해발 1300m 정도이지만,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더욱 높아져 중앙부에 이르면 1600m 내지 1700m까지 이른다. 트랜스요르단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에돔산지의 서편기슭은 중앙계곡 곧 아라바계곡을 향하여 절벽형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에돔의 동쪽지역 역시 급경사를 이루어 아라비아사막으로 연결된다.
에돔산지는 겨울철동안 비교적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지역이다. 그러나 그런 많은 강우량은 주로 에돔산지의 서쪽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따라서 에돔산지이 서쪽지역에는 제한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울창한 관목의 숲도 형성되어 있다. 반면에 동편지역은 사막의 영향으로 인하여 매우 건조한 지역이다. 성경에서 에돔산지를 ′세일산(창14:6)′이라고도 불렀다. 히브리어로 ′세일′은 ′머리털′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세일산′이라는 명칭은 에돔의 서쪽지역에 형성된 관목 숲과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의 관목 숲을 마치 털이 덮여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지역의 정식 명칭인 ′에돔′ 역시 ′붉은 색′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자연 경관과 관련이 있다. 에돔산지는 화강암의 암반 위에 누비안사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색깔의 화강암과 적갈색을 띄고 있는 누비안사암층은 이 지역의 외형 모습을 붉은 색을 띈 산지로 만들었다. 이런 산지 색깔과 관련하여 이 지역은 ′에돔산지′ 즉 붉은 색을 띄고 있는 산지라고 부른 것이다.
높으면서 험준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는 에돔산지는 동쪽으로는 사막과 인접하여 있고, 서쪽으로는 깊은 계곡과 연하여 있어서 외부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이런 자연적 조건 때문에 에돔은 천연의 요새를 많이 갖고 있는 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주변 지역에서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은 에돔을 당분간 피신할 수 있는 이상적인 도피처로 삼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이 다른 지역보다 오랜 기간동안 나름대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자연 조건들과 연관성이 있다. 후대에 이르러 에돔지역은 이스라엘에 예속되었다.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장악한 목적은 아라비아와의 교역로인 왕의 대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에돔지역의 주된 경제적 근거는 왕의 대로를 이용한 통상무역에 있었다. 에돔은 바산지역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건이나 모압지방처럼 목축을 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못하였다.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거주민들은 자연히 자신들의 생업을 국제도로를 통한 다른 지역으로 수출하는 일을 비롯하여 아라비아의 토산품들을 수리아와 소아시아지방까지 전달하는 국제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러한 중계 무역업을 최고로 발전시킨 사람들은 나바티안족들이다.
2) 에돔과 이스라엘의 관계
창세기에 의하면, 에돔의 시조는 이삭과 리브가의 장자요 야곱의 형이였던 에서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관계는 우선 혈연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에돔과 이스라엘은 숙명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첫 번째 접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트랜스요르단을 통하여 가나안지역으로 북상을 시도할 때이다. 당시에 에돔은 견고한 성읍들로 요새화 되어 있었으며, 왕의 대로를 튼튼히 지키고 있었다. 에돔 사람들은 왕의 대로를 통과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길은 택하여 에돔백성들의 충동을 피했다(민21:14-21). 그러나 이스라엘의 에돔과의 역사적 갈등은 이러한 사건을 통하여 더욱 깊어졌다.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왕정을 도입한 사울왕은 에돔과 전쟁을 벌렸으며(삼상14:47), 다윗은 에돔지역을 처음으로 점령한 이스라엘 왕이었다. 다윗은 이곳에 국경 수비대를 주둔시키면서 에돔지역을 통치하였다(삼하8:14, 왕상11:15-16).
그러나 에돔은 요람왕 시절 반란을 일으켜 자신들의 왕을 세웠다(왕하8:20-22). 약 100여년뒤 유다의 아마샤왕은 에돔의 북부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는 에돔에 속한 도시인 셀라를 점령하여 그곳 이름을 ′욕드엘′로 개명하였다(왕하14:7). 유다왕으로서 에돔의 전체 지역을 재점령한 왕은 웃시야이다(왕상14:22, 대하26:1-2). 그러나 유다왕 아하스 때에 이스라엘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유다를 공격하는 혼란기를 틈타 에돔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또한 유다를 측면에서 공격하여 많은 유다사람을 사로잡아갔다(왕하16:6, 대하28:17).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에돔은 크게 기뻐하였으며(시137:7), 이일로 인하여 에돔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건들과 연관하여 구약의 오바댜서 전체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에돔은 바벨론에게 점령을 당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에돔의 약화와 더불어 새로운 유목민 정착자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에돔의 원주민들은 서쪽의 네게브지역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헤브론 이남지역에 정착하였는데, 헬라인들은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이두메′라고 불렀다. 에돔지역에 새로 정착한 유목민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난 민족은 나바티안족들이다. 이들이 에돔지역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경인데 그 이후 서기 1세기에 이르러 이들은 에돔지역의 실제적인 주인이 되었다.
3) 에돔지역의 중요 지역들
1. 보스라(Bozrah)
사해 남단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스라는 에일랏에서 북상하는 왕의 대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에돔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한때 이곳에는 에돔왕 오밥이 거주하였던 도시이기도 하였다(창36:33, 대상1:44). 보스라는 가파른 바위산 위에 세워진 요새로서 그 크기는 대략 19에이커 정도이다. 성경은 부스라이 멸망은 곧 이스라엘의 강력한 적대 세력인 에돔의 멸망을 상징하기도 하였다(사34:6, 63:1).
아모스 역시 그런 점에서 보스라의 멸망을 예언했다(암1:12). 현재 이곳에는 ′부세이라(Buseirah)′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다.
고대 보스라는 직물, 염색 등 의복 생산과 관련된 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이 지역을 지나가는 왕의 대로를 이용하여 외국과의 무역ㄷ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후대에 보스라는 나바티안족들에게 점령당하여 그들의 통치 영역이 되었다. 이곳은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였던 ′페트라′와 더불어 나바티안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서기 105년 로마의 트라얀황제는 나바티안 왕국을 로마제국에 병합시키면서 보스라를 재건하여 이 지방의 행정 수도로 삼았다 .632년 아랍이 에돔지역을 점령한 이후로 보스라는 메카로 가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 그 이후로 보스라는 성지순례 길을 나선 이슬람교도들에게 더 없이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2. 부논(Punon)
부논은 사해 남단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이곳을 ′파이난(Faynan)′이라고 부른다. 출애굽 여정 중 이스라엘이 지나갔던 지역중 하나인 부논은 살모나와 오봇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민33:42-43). 이곳의 이름은 에서의 후손 중 한 족장이었던 ′비논′이라는 이름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고 있다(창36:41, 대상1:52).
고대에 부논 근처 지역에서는 많은 양의 구리가 생산되었으며, 여기에서 생산된 구리를 제련하는 시설들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여 주었던 사건은 부논 혹은 그 근처에서 일어났던 일로 여겨진다(민21:4-9).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부논에 구리광산과 구리제련소가 있었다는 점과 이 사건이 있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옮겨간 곳이 부논 근처인 ′오봇′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3. 페트라(Petra)/ 셀라(Sela)
페트라는 나바티안 왕국의 수도로서 잘 알려진 곳이다. 나바티안족들이 아라비아에서 에돔지역으로 이주하여 온 것은 기원전 6세기경이었다. 그러나 나바티안족들에 관한 실제 역사는 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하나였던 안티고너스가 기원전 312년 나바티안들과 전쟁을 벌렸다는 기록에 나오고 있다.
페트라는 성경에 나오는 ′셀라′와 같은 지역일 것으로 추하고 있다. 그것은 페트라와 셀라라는 지명 모두가 ′바위′를 의미하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이기 때문이다.
유다왕 아마샤는 에돔의 셀라를 점려하고 그곳을 ′욕드엘′이라고 개명하였다(왕하14:7, 대하25:12). 선지자 오바댜는 에돔에 심판을 선언하면서 그들을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것은 셀라 지역에 사는 자들에 관한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옵3). 이사야 역시 셀라 거민들을 ′산꼭대기에 사는 자들′이라고 하였다(사42:11).
기원전 300년경 셀라 지역을 점령한 나바티안족들은 셀라북쪽지역에 거대한 바위계곡을 깍아서 놀라운 바위도시 페트라를 건설하였다. 페트라가 위치한 곳은 거대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계곡인데, 바위산의 길이는 1370m이며 폭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어 225m 내지 450m가 된다. 또한 이곳은 대부분 지역이 해발 1000m 이상 되는 높은 산지이다.
페트라는 서기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 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여 이곳 이름을 ′하드안의 페트라′라고 하였다. 로마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발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다. 역사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지만, 6세기경 이곳에 큰 지진으로 발생하면서 페트라는 무너져 폐허화된 것 같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이져진 도시가 되엇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하난 루이스 부르크하르트(Johann Louis Burckhardt)가 시리아의 다멕섹에서 카이로로 가는 도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에게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가 알려졌다.
ㅍ트라가 본격적으로 발굴된 것은 예루살렘 성경고고학 연구소에 의해서이다. 이 연구소는 1896년에 최초의 발굴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페트라 주변의 무덤과 건물들이 발견되었으며, 로마시대의 나바티안도시가 발굴되었다. 페트라의 본격적이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시대의 원형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하늘을 가릴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와 미로와 같은 좁은 통로를 이곳에서는 ′시크(Siq)′라고 부른다 . ′시크′는 ′협곡′이라는 의미의 아랍어이다.
제 8 장 네게브와 시나이 반도
과제1. 네게브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네게브의 지형적 특징
이스라엘 전체를 놓고 볼 때, 네게브는 이스라엘의 최남단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히브리어로 ′네게브′는 ′메마른 땅′이라는 뜻이지만, 지역적 위치가 남쪽이기 때문에 ′남방′이라는 부차적 의미가 생겼다. 한글 개역성경에서 네게브를 모두 ′남방′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네게브의 한계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자연 경계선이나 지형적 차이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네게브지방에 자연 경계선이나 지형적 차이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네게브지방에 자연경계를 설정할 만큼 두드러진 지형이 없기 때문이다. 네게브지역의 경계는 지형적 차이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 내리는 연중 강우량이 얼마인가에 달려 있다. 네게브 중심부가 되는 브엘셀바 주변의 년간 평균 강우량은 대략 200mm이다. 네게브의 이남지역은 본격적인 사막이 시작되는 곳으로 지역 구분은 시나이사막에 속하고 있다. 여기에서 년간 강우량이 200mm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인공적 도움이나 노력 없이 자연에 의한 농작물 재배가 가능한 최소한의 지역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브엘셀바는 인간의 거주의 마지막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한계를 ′단에서 브엘셀바′라고 규정하는 것은 곧 인간의 거주 한계를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네게브지역에서 인간의 거주와 농작물 재배는 역사적으로 특별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였다. 네게브의 중심지역의 토양은 사막에서 불어온 로에스 황토이다. 이 토양은 물만 적절하게 공급되면 비옥한 옥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년간 강우량의 편차가 심하며 또한 해마다 차이가 심하여 자주 가뭄이 찾아오곤 하였다. 더구나 사막 민족들의 잦은 침입은 더 큰 어려움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네게브 지역에서의 안정된 정착은 사막민족들의 침입을 적절히 막아 줄 수 있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도움과 잦은 가뭄을 해결할 수 있는 수리관리제도의 보완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였다.
사람들은 북부 네게브지역의 큰 하천들을 따라 정착하였다. 이런 하천들 주변에는 샘이나 우물들이 있어서 물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네게브 지방에 내리는 빗물들은 오래 동안 말랐던 와디를 통하여 하천으로 흘러 들어오게 되는데, 주변의 사막들과 산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과 합류하여 때로는 급작스러운 홍수를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급류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갑자기 생기는 홍수이기 때문에 큰 피해를 가져 올 수 있다. 시편 126:4의 ′남방의 시내들′은 이런 급류의 홍수를 의미하였다.
′아랏′이나 ′호르마′와 같은 중요한 도시들이 위치하고 있었던 네게브의 북동쪽 지역은 비교적 지대가 높으면서 로에스 황토가 넓게 덮여있는 평야지역이다. 비록 강우량은 많지 않아 건조한 지역이지만, 제한된 범위 안에서 농경과 목축이 가능하였다.
브엘세바 이남 24m 지점부터는 황량한 사막이 시작된다.
성경에서는 이런 네게브에 인접한 사막지역으로 신광야, 바란광야, 시내광야 등을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서 언급된 가나안 땅의 남쪽 경계는 신광야이다. 네게브의 남부 광야지역은 주로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해발 1000m 이상 되는 곳도 있다.
신강을 경계로하여 네게브산지는 비교적 높은 남부산지와 낮은 북부산지로 나뉘어진다. 바란강은 에일랏의 남서쪽 시내광야에서 발원하여 아라바계곡으로 흐르는 강이다.
바란강의 전체의 길이는 무려 240km나 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긴 강이기도 하다. 강이 흐르는 계곡의 넓이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아주 넓은 곳은 무려 3km 이상 되는 곳도 있다. 네게브의 강들은 일년 중 대부분 마른 상태의 강이지만, 갑자기 내리는 겨울철의 폭우로 인하여 강 전체가 범람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규정하고 있는 네게브는 홍해변의 에일랏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지역이다. 그 모양은 대략적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밑변이 되고 있는 북쪽지역은 유다산지의 외곽으로 가사에서 브엘세바의 북쪽지역을 지나 사해의 남단에 이르는 지역이다.
동쪽 경계는 아라바계곡이며, 남서쪽의 경계는 가사지역에서 에일랏에 이르는 이집트와 국경선이다. 삼각형 모양의 네게브지방에서 꼭지지점은 홍해의 에일랏이 되고 있다. 이러한 광역적 개념이 네게브지방 전체 면적은 약 12000km로서, 현대 이스라엘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거대한 면적을 가지고 있는 네게브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개발을 향한 도전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지하자원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에게 네게브는 막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며 또한 홍해를 통하여 인도양 지역 국가들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이기 때문이다.
2) 네게브의 역사
성경은 우리들에게 브엘세바와 그랄 근처를 떠돌아 다니며 생활하였던 이스라엘의 선조들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상당수의 가족들을 거느렸으며 또한 많은 가축떼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떠돌아 다녔던 생황영역은 세겜에서 브엘세바에 이르는 산지들에 집중되었지만, 기근이 닥쳐올 때에는 수르광야를 통하여 남쪽의 이집트가지 내려가기도 하였다. 이삭의 경우에는 네게브에서 보리를 심어 백 배의 수확을 거두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보리는 오늘날에도 네게브지방에서 재배되는 대표적인 작물이다.
네게브의 중심지역인 브엘세바에는 여러 곳에 샘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급수원인 샘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모여 살았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그와 같은 정착지역과 광야와 같은 비정착지역 사이에 있는 땅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선조들 때문에 거룩하게 여겨지는 지역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창21:33).
고고학 발굴 결과에 의하면, 중기 청동기 시대라고 아려진 기원전 2000년 초반 네게브는 가장 크게 번영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많은 영구적인 정착지들이 있었으며, 그중 몇몇 정착지들은 수백 명의 주민들로 구성되기도 하였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간선도로 가까운 곳에 살면서 주로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집들은 돌로 지어졌지만, 대부분이 담이나 요새가 없는 개방된 상태였다. 그러한 발굴 결과는 그 당시가 더없이 평화를 누렸던 시대였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이후 네게브지역은 시몬지파에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네게브를 완전히 장악한 것은 다윗시대에 이르러서다.
솔로몬왕 때에 이 지역은 에일랏의 개발과 더불어 중요한 지역으로 등장하였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의 분열로 인하여 네게브 지역의 통치는 유다왕국의 손에서 떠나고 말았다. 기원전 7세기경 에돔인들은 아라바계곡을 건너 네게브지역으로 진출하여 유다산지와 네게브 산지 사이에 정착하였다. 이곳에 정착한 에돔인들을 특별히 ′이두메인′이라고 하였다.
후에 나바티안인들은 에돔과 네게브지역에 살고 있었던 에돔인들을 축출하고, 페트라를 수도로 삼은 나바티안 왕국을 건설하였다. 중계무역에 종사 하였던 나바티안들은 페트라에서 가사로 통하는 무역로를 조직적으로 개발하면서 네게브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들은 건조한 네게브지역을 지나가는 대상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박시설을 갖춘 도시들을 건설하였으며, 우기철에 내리는 빗물을 저장하는 저수조와 댐 등을 만들어 부분적인 농작물 재배도 시도하였다. 서기 2세기 초 나바티안왕국은 로마제국에 병합이 되었고, 4세기경 로마는 네게브를 로마의 지방행정구역으로 편성하였다.
비잔틴시대 네게브는 일시적인 쇠퇴기를 맞이하였으나 에일랏으로 이어지는 통상로의 중요성과 시내반도의 순례길이 개발되면서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네게브는 다시 황폐되어 수세기동안 방치되었다. 19세기 말 유대인들의 이민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네게브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948년 신생 이스라엘의 독립과 더불어 네게브는 브엘세바를 중심으로 새롭게 개발되는 지역이 되었다.
3) 네게브의 역사적 의미
네게브지역에 처음으로 사람이 정착하였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네게브의 역사는 문명과 사막 사이의 투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투쟁은 고대 근동의 비옥한 반달형지역에서 일어나는 역사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였다.
사막은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역사의 진퇴 시기가 있었다. 만조의 시기에 사막은 자신의 경계를 벗어난 정착된 지역들을 파괴하며 사막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폐허로 바꾸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안정된 세력을 확보하여 자신들의 정착지역을 확장시키면서 사막을 문명의 중심지로 바꾸기도 하였다. 인간과 사막과의 이러한 긴 투쟁 속에서 사막은 때때로 문명보다 우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트랜스요르단, 시리아, 이라크지역의 사막을 둘러보게 되면, 사막이 문명지역을 지배하였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있다. 그러나 네게브의 역사는 고대 중동의 다른 사막지역의 역사와는 다른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문명이 오히려 사막을 공격하면서 정복하는 입장이 되어 왔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사막의 황폐함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 사막을 번영하는 문명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네게브 북쪽 지역을 떠돌아 다녔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이야기, 매몰된 우물들, 양우리들과 소때들의 외양간, 시를 뿌리며 거두는 이야기들, 땅의 경작자들에게 주어진 축복들, 그리고 도시를 세운 자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이런 기간을 보여주는 남은 잔재들은 브엘셀바 근방과 해안지역, 그리고 네게브의 깊숙한 심장부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이 지역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기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네게브에 관한 지식은 지나간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그 중에 명백하게 밝혀진 사실은 선사시대 네게브지역에 살고 있었던 초기의 정착자들은 목축에 종사하였을 뿐 아니라 농업과 수공업에도 종사하였다는 점이다.
근년에 브엘셀바 근처의 한 지역인 ′아브 마타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농기구들, 도끼, 큰 낫, 괭이, 맷돌 등과 같은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도 구리연장들, 구리광석과 금속을 제련하고 주조하는 시설물들이 발굴되었다. 또한 도자기를 만드는 기구들 뿐 아니라 벼와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연장들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발굴된 작은 신상들은 당시 종교적인 예배의식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발견된 유물들에 관한 평가는 기원전 4000년경 이미 이곳에서는 농업과 더불어 목축, 수공업, 심지어는 제련업 등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네게브는 이스라엘 전체에서 가장 먼저 금속이 제조되었던 장소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지역에서 구리광석이 전혀 나오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구리제련과 관련된 시설들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러한 구리 원석들은 아라바지역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아부 마타르′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고대에 인간이 정착하여 살았음을 보여주는 여러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당시의 이 지역 인구밀도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시대보다 더 높았다. 당시의 이 지역 기후는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의 정착은 아직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어떤 지정학적인 요인과 경제적인 요인 대문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4) 네게브의 중요 지역들
(1) 브엘세바(Beersheba)
′7세기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브엘세바는 네게브지방의 중심도시이다. 성경적으로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거주하였던 중심지역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남쪽 경계선 역할을 하였던 브엘세바는 역사적으로는 블레셋과 아말렉의 침공을 자주 당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는 동서 교통로와 남북 교통로가 만나는 경제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년평균 강우량은 200-300mm인 지역은 우기에 제한적인 농업도 가능하였지만, 주된 생활경제를 목축에 의존하는 지역이다. 고대로부터 브엘세바 근처에는 농사와 목축을 겸하는 반유목민들이 주로 정착하여 살았다.
현대의 브엘세바는 15만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이다. 현대 브엘세바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는 옛 브엘세바인 ′텔 세바′가 위치하고 있다. 텔아비브대학의 고고학 교수인 아하로니(Y. Aharoni)에 의하여 이곳이 발굴되면서 ′텔 세바′는 성경시대의 브엘세바였음이 확인되었다. 1969-1976년 사이에 있었던 발굴 작업의 결과로 ′텔 세바′ 언덕에서 사사시대부터 유다왕국의 멸망 때까지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지역을 찾아내었다. 당시의 브엘세바는 강한 성벽을 갖춘 제대로 계획된 도시였다. 왕국시대 브엘세바는 단, 벧엘, 길갈 등과 함께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였으며(암5:5, 8:14), 요시아의 종교개혁은 이곳 브엘세바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왕하23:8). 브엘세바는 앗수르의 산헤렙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것 같고, 그 후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 중 일부는 이곳에 정착하였다(느11:27). 그러나 이스라엘의 변방지역에 위치하였던 브엘세바는 구약시대가 끝나면서 이두메인들의 지역으로 흡수되었다.
(2) 아랏(Arad)
아랏은 성경에 단지 네 번 밖에 언급되지 않았다(민21:1, 33:40, 수12:14, 삿1:16). 그러나 아랏은 성경시대 변방을 방어하는 요새이자 행정의 중심지로서 중요하게 여겼던 도시였다. 동부 네게브에 위치하고 있던 아랏은 에돔으로 내려가는 간선도로상의 전략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한 아랏의 역사적 중요성은 왕국시대 동안 무려 여섯 번이나 파괴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곧 바로 재건되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아앗을 통치하였던 가나안왕은 가데스바네앙서 아다라임길을 따라 북상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은 아랏왕을 호르마에서 크게 격파하였다(민21:1-3).
1962년-1967년 사이 히브리대학교의 주도하에 진행된 아랏에서의 고고학 발굴 결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시대의 신전을 발견한 것이다. 구조나 방향 면에서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형태의 아랏 신전은 내부에 중앙 거실을 비롯한 지성소가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는 산당과 세운 돌(마체바)이 안치되어 있었다. 신전의 외곽 뜰에는 진흙과 다듬지 않은 돌로 만들어진 번제단이 있었다. 아랏에 예루살렘 성전과 유사한 형태의 신전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요시아의 종교개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위치가 확고해지기 이전까지는 예루살렘 성전의 정통성과 합법성에 경쟁적이었던 지방 신전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3) 그랄(Gerar)
그랄은 이스라엘 족장들 시대에 네게브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도시이다. 한때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환대를 받기도 하였다(창20:1-18, 26:1-11). 옛 그랄의 정확한 위치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이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브엘세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텔 아부 후레이라(Tel Abu Hureira)일 것으로 확인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발굴 결과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이후 철기시대까지 게속적으로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가장 특이할만한 발견은 여러개의 용광로가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그랄을 중심으로 블레셋의 철기산업이 발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삼상13:19-21 참조).
(4) 가데스바네아(Kadeshbarnea)
가데스바네아는 시나이 반도의 북부지역에 해당되는 신광야의 한 오아시스지역이다. 이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모세는 바위를 두 번 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특권을 상실하였다(민20:2-13).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는 두 장소가 옛 가데스바네아라고 주장되고 있다. 이 두 장소는 모두가 지역적 위치나 푸부한 물 공급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가데스바네아의 후보지로서 손색이 없다. 약 8km 정도 떨어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 후보지는 ′아인 쿠데이스′와 ′아인 쿠데이랏′이다. 이 두곳은 연중 계속 물이 솟아나는 좋은 샘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곳 주변에 천막을 치고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하게 물을 공급할 수 있었으며, 오아시스 근처에 형성된 목초지는 가축들을 기르기에 좋은 여건이 되었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이곳 가데스바네아에서 죽었다(민20:1).
′아인 쿠데이랏′ 오아시스 근처의 작은 언덕(Tel)에서 고고학 발굴작업이 있었다. 발굴 결과로서 이곳에서는 유다왕국시대의 이스라엘 요새가 발견되었다. 이 요새는 여호사밧이나 웃시아시대에 유다의 남부 경계지역을 지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제2. 시나이 반도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라.
1) 시나이 반도(시내사막)의 개관
성경에서 ′시나이(Sinai)′라는 지명은 다양하게 사용이 되었다. 하나의 특정한 산(시68:8)이나 산맥(신33:2, 삿5:5)을 의미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사막이나 광야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육상 가교적 역할의 시나이 반도를 가리킨다.
시나이반도는 네게브지역의 남부와 홍해의 두 해협을 잇는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사막지역이다. 시나이반도 동쪽으로는 아카바만이 위치하고 있는데(민14:25, 신1:40), 이 지역에 위치한 항구의 이름을 따라 ′에일랏만′이라고도 부른다. 서쪽에는 스웨즈만이 자리하고 있는데, 오늘날 이곳은 스웨즈운하를 통하여 지중해와 연결된다. 시나이반도의 양편에 있는 두 바다를 성경에서는 모두 ′홍해′라고 불렀다. 시나이반도의 남쪽 끝에서 지중해까지의 길이는 380km이며, 스웨즈운하에서 사해까지의 길이는 260km이다. 시나이반도 전체의 면적은 약 3만㎢에 달하고 있다.
2) 시나이반도의 지역적 구분과 도로들
시나이반도는 북부 시나이와 남부 시나이로 양분된다. 이 두 지역은 지향과 지질적 측면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띄고 있다. 북부 시나이는 석회석과 백악질의 낮은 언덕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황무지 땅이며, 대부분의 땅은 자갈과 모래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지중해 해안인 북쪽 해안에는 지중해 바람에 의하여 수많은 모래언덕들이 형성되어 있다. 북부 시나이의 해발은 600m 내지 750m이다. 남쪽과 동쪽,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이곳의 지형은 북부 시나이의 중앙부를 거대한 분지형태로 만들었다. 북부 시나이에서 겨울철동안 내리는 빗물은 여러 와디들을 통하여 엘아리쉬강(애굽강)으로 모아져 지중해로 유입된다.
북부 시나이와는 달리 남부 시나이는 주로 높은 산지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화강암은 고대로부터 구리와 청록색의 터키옥을 생산해 내는 자원이었다. 남부 시나이로서 가장 높은 지역은 시나이산지로서, 2600m의 ′제밸 카타리나′를 최고봉으로 하여 근처에는 2200m의 ′시내산′이 위치하고 있다.
고대에 시나이반도에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지역을 연결하는 세 개의 중요한 도로가 있었다. 다음은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도로들이다.
(1) 해안길: 지중해 해변을 따라 이집트와 다멕섹을 연결하였다. 이 길은 블레셋 지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라고도 불렀다(출13:17).
(2) 수르광야길: 고센땅에서 해안길과 나란히 시작되는 이 길은 방향을 동편으로 바꾸어 시나이 반도의 중심부를 지나 에시온게벨(오늘날의 에일랏과 아카바)과 아라비아로 연결되었다(창16:7).
(3) 세일산길: 시나이반도의 중심부를 지나 에시온게벨(오늘날의 에일랏과 아카바)과 아라비아로 연결되어 있다.
출애굽의 여정을 보여주는 성경의 내용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시나이반도 내의 도로들 이외에도 네 개의 중요한 광야들을 소개되고 있다. 다음은 시나이반도 내에 위치하고 있는 광야들이다.
(1) 수르광야: 히브리어로 ′수르′는 ′성벽′이라는 뜻이다. 수르광야는 중앙 시나이반도에 위치한 산들이 마치 성벽처럼 둘러 서있는 것에서 그런 지명이 기인되었다.
(2) 에담광야: 성경에 의하면, 에담광야는 ′광야 끝′에 위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출13:20), 이것은 에담광야가 수르광야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신광야: 신광야는 남부 시나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4) 바란광야: 바란광야는 동부 시나이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아라바계곡과 에일랏만에 인접하여 있다.
3) 시나이반도의 경제적 상황
시나이반도의 서북부지역을 이루고 있는 지중해 연안에는 년간 100-200mm 정도의 비가 내린다. 그러나 북부지역에서는 년간 강우량이 60mm 정도에 그치고,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그 양은 더욱 줄어든다. 그러나 이 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여러 개의 오아시스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막 유목민들에게 중요한 급수원이 되고 있다.
시나이에서 농업은 지중해 연안의 일부지역과 오아시스 주변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하다. 시나이반도 내의 유일한 거주자들인 베두윈 유목민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낙타, 양, 염소와 같은 가축들을 방목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들은 또한 사막성 기후에 잘 적응하는 종려나무들을 오아시스 주변에 많이 재배하기도 한다. 모세가 이드로의 양떼들을 돌보며 지냈던 지역도 남부 시나이반도 내의 어느 한 지역이었다.
고대에 시나이는 다양한 광물질이 생산되는 지역으로 유명하였다. 이집트인들은 시나이에서 청록색의 터키석을 채취하여 장식품들을 만들었고, 또한 도구나 무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구리를 이곳에서 얻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하였던 구리광산과 제련소들이 ′세라비트 엘 카딤(민33:12에 언급된 ′돕가′)′, 에시온게벨(에일랏), 팀나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4) 시나이반도의 중요한 지역들
(1) 돕가(Dophkah)
엘림과 르비딤 사이에 위치하였던 돕가는 ′제련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민33:12). 그런 점에서 돕가는 고대 이집트의 광산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세라비트 엘카딤′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 지역을 처음 발굴한 패트리(W.F.M. Petrie)의 뒤를 이어 여러명의 고고학자들이 이곳에서 발굴작업을 벌렸다. 이런 발굴작업의 결과로 이곳에서는 땅과 광산의 여신인 하토르를 숭배하는 신전이 발견되었다. 이 성전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이 지역에서 있었던 광산개발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발견은 조그만 신상에 새겨진 초기 셈어 알파벳이다. 이 문자의 연대는 기원전 1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 시내산(Mt. Sinai)
성경에서 호렙산이라고 하는 시내산은 시나이반도 남쪽의 황량한 사막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황강암의 바위산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밑에서 일년이상 진을 치고 지내면서(출19:1, 신4:10) 하나님과의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 시내산은 여러개의 주봉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주봉 가운데 하나인 ′게벨무사′ 곧 ′모세의 산′은 그 높이가 2244m 이다. 스에즈운하에서 약 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시내산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50영일 동안 여행한 후에 도착한 곳이다.
서기 4세기경부터 게벨무사는 전통적으로 성경에서 언급한 시내산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전승이 형성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1)초기 전승들 (2)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출발지점과 이 산 사이의 적절한 거리 관계
(3)이 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의 열 하룻길이라는 거리(신1:2)
(4)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시간 거주하기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는 시내산 북쪽에 위치한 400에이커 규모의 거대한 평지 등이다.
그러나 시내산이 게벨무사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주장들이 그 동안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었다. 유세비유스를 비롯한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시내산이 게벨무사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게벨 세르발′이라고 주장하였고, 다른 학자들은 가데스바네바에서 서쪽으로 약 48kn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벨 할랄′이 시내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혹은 시내산이 시나이반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홍해 건너편의 사우디아라비아반도 내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시내산 정상에는 4세기경에 처음으로 기념교회가 지어졌다. 현재 시내산 정상에 남아있는 교회건물은 1934년에 재건한 것으로서 일명 ′삼위일체 기념교회′라고 부른다. 시내산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 중간쯤에는 아론과 장로들이 모세를 기다렸던 곳으로 아려진 장소가 있는데(출24:1-2), 이곳에서 아합과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으로 피신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났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왕상19:8-9).
3) 성캐더린 수도원(Monastery of St. Katherine)
2세기 중엽 로마의 박해가 극심하게 되자 많은 기독교인들은 은둔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시내산 일대도 이런 은둔자들이 많이 몰려온 지역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모여든 은둔자들은 3세기경부터 시내산 주변에서 집단을 이루어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수용조치가 있은 후 이곳의 수도자들은 콘스탄틴의 모후인 헬레나에게 이 지역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다. 이런 요청에 따라 330년 현재의 수도원 자리에 조그만 기념교회와 교회를 보호하는 성채가 지어졌다. 그후 527년 유스티니안황제는 8년간에 걸쳐 현재 모양의 성채를 쌓게 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15m이며 모양은 정방형이다.
7세기경 이 지역을 점령한 아랍 당국자들은 이 수도원의 보호령이 내렸고, 그 이후 십자군, 오토만제국, 그리고 나폴레옹 등 많은 점령군들 역시 수도원을 보호해 주었다. 그에 따라서 이곳에 보관된 1500년 이상 된 고대 성경사본들이 별 파손 없이 현재까지 소장될 수가 있었다. 이곳에는 희랍어, 콥틱어, 히브리어, 아랍어, 아르메니아어, 슬라빅어, 시리아어 등의 여러 언어로 되어 있는 필사본 성경 사본이 3000여 점 이상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바티칸도서관에 보존된 소장품 다음으로 많은 양의 사본이다. 성경과 관련된 3000여점의 사본 이외에도 5000질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1844년에서 1859년 사이에 독일학자인 콘스타틴 티센돌프에 의하여 4세기경에 쓰여진 시내산사본이 발견된 것이다. 티센돌프는 자신이 입수한 시내산 사본을 희랍정교회의 수호자였던 재정 러시아황제에게 기증하였다. 그후 러시아가 공산화 되면서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되자 1933년 시내산 사본을 10만 파운드에 영국에게 팔아 넘겼다. 이로 인하여 시내산 사본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캐더린수도원 내부에는 떨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히브리어로 ′스네′라고 하는 이 떨기나무는 모세가 소명을 받았던 불붙은 떨기나무로 전해오고 있다. 수도원 내에는 떨기나무 외에도 ′이드로의 샘′ 혹은 ′모세의 샘′이라는 이름의 샘이 있다.
과제3. 중동 아시아 전도를 그리라.
바레인/ 카타르/ 이란/ 오만/ 이라크/ 시리아/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터키/ 요르단/ 예멘/ 레바논/ 아랍 에미레이트/ 싸이프레스/ 이집트
과제4. 이스라엘 전도를 그리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3학기과제 성경지리학 총회신학교 2008학년도 통신학부 최 보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