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전래사
제1장 기독교의 동양전래
◉ 과 제 ◉
1.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중국 전래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알로펜(Alopen, 阿羅本)을 단장으로 한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에 도착한 것이 635년, 당(唐) 태종(太宗) 때이었다.
태종은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내보내 이들을 환영하였고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머물게 하며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도록 배려하였다.
이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한자 명칭은 여러 가지였다. 그들이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 음역인파사(波斯)를 붙여 파사교(波斯敎)라 칭하기도 했으며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대진(大奏)을 넣어 대진교(大奏敎)라 불렀다. 대진승(大奏僧)은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를 의미하고 대진사(大奏寺)는 그 사원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대진경교(大奏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2. 예수회의 일본 선교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인도 고아에서 8년 동안 선교하면서 예수회의 동양 선교 발판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비에르는 일본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가 일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을 다녀 온 바 있는 친구이자 포르투갈 선원 핀토(Memes Pinto)로부터 받은 권유 때문이었다. 또한 사비에르는 다른 친구 알바레스(Jarge Alvares) 선장의 소개로 일본인 안지로(安次郞) 일행을 만났고 그들을 고아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시켜 신학 수업을 받게 하면서 일본 선교를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일본에 처음 왔을 때 일본인들은 그들을 불교의 한 유파 정도로 생각했다. 그래서 가톨릭교는 일본에서 남만종(南蠻宗), 천축종(天竺宗)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들이 불교인이 아님은 곧 알려지게 되었고 대신 기리시단(切支丹, 혹은 吉利支丹)이란 독창적인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데 이는 포르투갈 말로 그리스도인을 뜻하는 Christao에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처음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관심을 두고 접근했던 영주나 다이묘들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면서 기리시단으로 개종하는 예가 속출하게 되었다. 명문 출신의 기리시단들을 특별히 기리시단 다이묘(切支丹 大名)라 부르는데 이들의 개종은 한 개인의 개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과 그가 지배하고 있는 성(城)주민들의 개종으로 연결되어 기리시단의 수적 증가를 가져 왔다. 그 결과 1570년에 약3만 명의 기리시단이 생겨났고 1579년1O만 명, 1581년 15만, 1587년에는2O만 명에 이르렀다. .
3. 예수회의 중국 선교에 대하여 쓰라.
[답] 예수회의 일본 선교를 개척한 사비에르는 1551년 말에 고아로 귀환하였다. 그는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극동 아시아에서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한 듯하며 중국 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일을 위해 고아로 귀환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 교황은 1568년에 이르러 카르네이로(Carneiro)를 중국 주교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중국 선교에 착수토록 했다. 카르네이로의 뒤를 이어 1573년에 발리냐니(Alexandro Valignani, 范禮安)가 40명의 선교사들을 이끌고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 후 발리냐니의 요청으로 도착한 루지에리(Michael Ruggieri, 羅明堅)는 마테오 릿치(Metteo Ricci)를 중국으로 인도했다. 이 들은 모두 예수회 소속이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철학, 과학 분야의 고등교육을 받은 예수회 소속의 학자들로서 마카오에 머물면서 우선 중국어 학습에 몰두하였다.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중국인들에게 선교하는데는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중국 문화에 긍정적으로 접근한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1583년 루지에리와 릿치는 광동성 수도인 조경(肇慶) 지부(知府)를 방문하고 정중한 예절을 갖추어 선교 허락을 요청하였다. 선교 허락 요청을 받은 지부는 서문밖에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제2장 천주교의 조선 전래
조선인과 천주교의 접촉
◉ 과 제 ◉
1. 조선인들의 서학 연구와 실천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천주교가 이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최초의 형태는 조선사회의 내부적 모순을 타개하고자 했던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서학(西學)이었다. 어느 민족,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 즉 학문으로서 받아들여진 것이다.
청과 조선을 정기적으로 왕래하던 외교사절단 부연사행(赴燕使行)은 중국의 수도 연경(또는 북경)을 방문했다. 그 중 일부는 그 곳의 천주교회당에 가 선교사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이들을 통해서 우리 나라에 서학 물품들이 유입되게 되었다.
2. 서학 실천 운동
이들 성호 학파들은 학문으로서만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실천 운동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1770년에 이르러서는 이 벽(1754-1785)의 제자 홍유한이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금하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함으로써 신앙실천운동의 최초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보다 확실한 신앙 실천은 1777년(정조 원년) 겨울에 성호 좌파(星湖 左派)의 영수이며 유명한 학자인 권철신이 정약전 등 수명의 학자들과 함께 교리 연구회로 모임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교리 연구회는 그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779년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라는 서울에서 100여리 떨어진 외딴 절에서 교리 연구회 모임을 갖고 신앙 실천을 여행(勵行)하였다. 이 연구에서 그들은 천주교 서적들을 읽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변하기에 충분하여 즉시로 새 종교에 대하여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2. 천주교의 창설과 포교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조선 천주교의 창설
1783년(정조 7년) 이승훈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都)이 동지사俊至使) 서장관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도 부친을 따라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 벽은 이승훈을 찾아가 북경에 가거든 천주당을 찾아보고 그곳에 있는 서양 선비(선교사)를 만나보고 신경(信經)도 얻어오고 아울러 영세도 청하여 받고 오도록부탁하였다.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이 벽의 말대로 북경의 북천주당을 찾았다. 북천주당은 예수회 해산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맡아보고 있었다. 그곳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얻어 열심히 읽고 또 신부의 가르침도 받았다.
▶ 이 과정 속에서 이승훈은 자신이 입교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고 부친의 동의를 얻어 마침내 그라몽(J.J. de Grammont, 梁棟林) 신부에게베드로란 영세 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784년 정월 말경 귀국 직전이었다.
세례 받은 이승훈은 북경에서 많은 책과 십자고상(苦像)과 성화 등 천주교 성물을 받아 가지고 1784년 서울로 귀환하였다.
이 벽은 이승훈을 통해 전달받은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오랜 동안 은둔처에서 책을 읽으며 천주교교리에 접했던 그는 신앙의 확신을 가진 후 먼저 이승훈․정약전․정약용 등 가까웠던 동지들을 찾아가 이벽은 보다 적극적인 신앙 실천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 벽은 계속해서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하여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불과 1년도 못되어 서울과 경기도 마재 ․양근 ․포천 지방, 충청도 내포, 예산 지방, 전라도 전주․진산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조선 천주교회는 창설되어 갔다. 이승훈의 수세(受洗), 그리고 이승훈에 의한 이 벽 ․권일신 세례, 위 3인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에 의해 자생적(自生的)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2) 강완숙의 활동
강완숙은 여러모로 선구적인 여성 지도자였다.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자마자 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박해기간 중 신부의 피신과 은둔을 주선했으며 1796년 이후 실질적인 신부 보호인 역할을 감당했다. 여 교인 증가도 강완숙의 열심 있는 전교활동 결과였다. 여성 교인들의 신앙지도도 강완숙이 맡았다.
강완숙의 활약으로 왕족에게까지 신앙이 전파되었으니 양제궁(良娣宮)에 살고 있던 은언군(恩彦君) 부인 송(宋)씨와 그 며느리 신(申)씨가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으며 뿐만 아니라 양반집 부녀자들과 궁 안의 궁녀들도 여렷 입교하였다. 강완숙 외에 정약종 ․황사영 ․흥익만(洪翼萬) ․황 심(黃心) ․신태보(申太甫) 등이 신부를 도왔고, 최창현 ․유항검 ․최인철 ․유관검 ․이존창 등 배교 하거나 냉담했던 교인들도 다시 돌아와 돕고 나섰다.
우리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교리연구회 성격을 지닌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조선인 스스로 신앙 훈련을 쌓도록 유도했다. 초대 명도회 회장으로 정약종을 임명했으며 이 회원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 4천 여명에 불과했던 교인 수가 몇 년 후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주 신부는 서울 이외에 경기도 여주, 충청도의 공주 ․온양 ․내포 ․고산 ․남포, 전라도 전주 등지를 돌면서 지방 교인들의 신앙 생활도 지도하였다.
3. 천주교의 초기 박해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즉위했으나 나이가 11세에 불과해 순조의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活) 김(金)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수렴청정을 계기로 벽파는 정조 때 남인시파에 눌려 정치적으로 배척 당했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용했다. 이 같은 정치적 갈등의 배경에서 야기된 천주교 박해가 바로 신유박해로 표현되는 1801년의 대규모 교난(敎難) 사건이었다.
정순왕후는 1801년 1월 1O일(음)에 각 고을 수령들은 각기 자기 관할지역 전역에 서로 연대 책임을 지는 오가작통법을 만들어, 만일 그 다섯 집중에 사학(邪學)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그 감시를 맡은 통수(統首)는 수령에게 보고하여 개심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국법이 있으니 그들을 싹도 나지 않도록 뿌리 뽑아 버리라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이 교서 반포에 따라 전국에 걸쳐 천주교인 체포가 실시되었다.
교서가 반포 된지 9일 만에 명도회장 정약종이 천주교 관계 서적과 성물(聖物)들을 고리짝에 넣어 숨기려고 옮기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주문모 신부의 활약상은 물론 천주교인들의 실상이 폭로되고 말았다. 양반 계층 교인들의 천주교 관련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벽파의 처벌 요구는 더욱 가열되었고 마침내 2월에 접어들면서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흥낙민 ․권철신 ․홍교만․정약종 둥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홍교만․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이 2월 26일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했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 하였으나 유배당했다. 박해는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내포, 여주, 양근 지역에서 교인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황해도 황주까지 피신했던 주문모 신부는 교인들의 피해를 줄일 목적으로 3월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체포로 그 동안의 행적이 소상히 밝혀졌고 무엇보다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교인이 되었다는 것, 궁 안에도 상당수의 교인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강완숙을 비롯한 여자 교인들의 실태도 발각되고 말았다. 강화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이 사사되었고 그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약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4월 19일 군문효수(軍門梟首) 되었고 그를 숨겨주거나 도와주었던 강완숙 등 여러 교인들과 궁녀출신 강경복 ․문영인 및 강완숙을 도왔던 동정녀 윤점혜도 처형당했다. 이러한 엄청난 박해가 신유년(1801)에 일어 났다하여 신유박해(신유사옥)라 하며 이때 희생된 천주교인의 수는 3백 명이 넘었다.
4. 천주교의 수난에 대하여 약술하라
제3장 개신교의 전래
◉ 과 제 ◉
1. 서해안을 통한 개신교의 접촉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1) 바실 홀의 성경 전달
조선에 성경을 처음 전해 준 사람은 영국인 바실 홀(Basil Hall)이었다. 그는 1816년 중국으로 파견된 사절단을 태우고 온 배의 선장으로서 조선 서해안을 측량할 목적으로 맥스웰(MaxweU)과 함께 배를 타고 1816년 9월 1일에 백령도와 대청도(大靑島)근방에 상륙하여 여러 가지 진귀한 물품을 그곳 주민들에게 주는 동시에 당시 중국 선교사로 와 있던 모리슨(Morison) 목사의 부탁을 받아 가지고 왔던 한문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9월 5일에는 군산만에 들어가 비인에서 조대복(趙大福)을 만나 다른 선물과 함께 성경을 전하였다.
2) 귀츨라프의 선교 활동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사람은 귀츨라프(Carl.A.F.G tzlaff)였다. 그는 유태계 독일 태생으로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으로 동남아선교의 뜻을 두고 중국에 머물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영국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배 암허스트호를 타고 1832년 7월 17일 경에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에 나타나 가지고 온 책과 물건을 주면서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 토마스의 전도와 순교
1866년 7월 미국선박 제너랄셔만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근처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양관민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제너랄셔만호에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승선한 영국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목사가 타고 있었다.
토마스 목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머물며 조선선교에 깊은 관심이 있던 윌리암슨(A.Williamson)의 소개로 조선선교를 결심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 상선이 조선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복음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동승하였다.
1866년 8월 9일 중국의 지푸를 출발한 제너랄셔만호는 일주일이 지나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도착하였다. 제너랄셔만호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선원들은 조선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토마스 목사를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며 예수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을 밝혔다.
이에 평양 백성들은 처음에 땔감과 양식을 주면서 친절을 보였으나, 그들이 관군을 억류하고 총을 쏘아대자 관군과 평양백성들이 격분하여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맹렬하게 항거하였다. 때마침 제너랄셔만호가 모래톱에 걸려 꼼짝못하게 되자, 평양백성들은 배에 불을 질러 선원 전부를 포로로 생포하였다.
2. 중국에서 벌린 선교사들의 조선인 선교 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알렉산더 윌리암슨목사는 스코틀랜드출신으로서 토마스 목사와 함께 중국 선교사로 왔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 공회 대리인을 겸하여 산동성 지푸에 본부를 두고 중국과 만주 등지에서 전도하고 있었다. 그는 한편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산동성에 온 조선인을 만나 조선 천주교의 형편을 듣게 되었다. 그는 조선에 가서 전도하는 것은 어려우나 조선인들에게 전도할 것을 결심하고 토마스 목사의 순교 1주년이 되는 1867년 9월 9일에 고려문(高麗門)을 포함한 만주 전도여행을 떠났다.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있는 작은 마을로 조선과의 교역 관문인데,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장이 서고, 이 때에는 한국인이 자유로이 와서 중국인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윌리암슨 목사는 고려문으로 와서 많은 조선인율 만나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팔았다. 무료로 주는 것보다 돈을 받고 파니 조선인들이 더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다고 한다.
2) 로스와 맥킨타이어의 전도
귀츨라프와 토마스 목사에 이어 조선선교를 시도한 선교사는 로스(John Ross)와 매킨타이어(John Maclntyre)목사였다. 이들은 스코트랜드장로교회 소속으로 1872년 중국에 파송 되었다.
중국에 온 로스는 조선선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윌리암슨의 충고에 따라 만주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로스는 윌리암슨으로부터 토마스의 순교사실을 듣고 조선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로스는 1874년 10월 9일 첫 번째 고려문 여행에 나섬으로 조선인 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로스는 제1차 고려문 여행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되돌아 왔다. 로스목사의 두 번째 여행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이루어졌다. 이 여행에서 로스는 의주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 그를 봉천으로 데려와 조선어를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1877년에는 조선선교사를 위한 조선어 교재인 <Korean Primer>를 출간하였다. 로스는 이때부터 시작하여 1878년 봄에는 이응찬과 몇 명의 조선인 도움을 받아 요한 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번역은 한문성경을 원본으로 삼아 한문에 능통한 조선인이 번역하였기 때문에 착수한 지 1년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3. 알렌, 아펜셀러, 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알렌의 입국
1883년 1O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 도착한 미국 북장로교 외지 선교부 소속 의료선교사인 알렌 의사는 적당한 선교지를 찾지 뭇하고 있던 중 상해에 있던 친구 헨더슨 박사(Dr. Henderson)의 권유로 한국으로 선교지 변경을 꾀하였고, 1884년 6월 22일 선교본부의 허락을 받았다.
알렌은 l884년 9월 14일에 상해를 떠나 9월 2O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고, 9월 22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미국 공사관 공의(公醫)로서 봉사하게 되었다. 뒤이어 그는 영국, 청국, 일본 공사관 공의와 세관 의사로 수고하게 되었다. 그는 의료 선교사이니 만큼 의술을 통해 사회봉사를 하며 복음 전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었다.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서 당시 수구파의 지도자들이 피해를 입었는데, 그중 민 영익이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당시 장안의 유명만 한의 14명이 불리워 와서 치료하였으나 아무도 지혈(止血)할 수 없었는데, 뭘렌도르프의 연락으로 알렌 의사가 와서 치료하였고, 3개월간의 정성스러운 치료로 민 영익이 완쾌하계 되었다. 이로 인해 알렌의 의술이 인정받게 되었고, 그는 궁정 의사 즉 어의(御醫)로 임명받았다. 이와 같이 안렌 의사가 의술을 통해 당시 고위층들과 접촉하게 되어 선교 활동의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하게 되었다.
알렌의 의술이 알려지자 많은 환자들이 몰려 왔으나 이를 자기 집에서 치료하는 것이 어려워 병원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알렌은 이 계획을 미국 대리공사 폴크(Foulk)에게 말하여 찬동을 받고 한국 정부에 병원 설립 계획서를 제출하여, 1885년 2월에 병원 설립 허가를 받았다.
아펜셀라의 인천 상륙
아펜셀라(Herry G.Appenxeller)는 드루우 신학교 재학시절에, 1883년 미국 하드포드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 집회에서 해외선교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미국 북감리교회지 선교회를 통하여 선교사의 임명을 받은 그는 1885 년 2월 2일 한국을 향해 떠나기에 앞서 샌프란시코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펜셀라 목사와 동행으로 스크랜튼 의사 부부와 모친 스크랜튼 여사가 있었다. 이들 감리교의 개척선교사 일행은 태평양을 횡단하여 2월 27일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다.
1885년 3월 31일에는 일본에서 재한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파울러(C. H. Fowler) 감독은 감리사로 매클레이 목사, 부감리사에는 아펜셀라 목사, 회계로는 스크랜튼 의사를 각각 임명하였다.
언더우드의 입국
[일본에 주재중인 올트맨(Allert Oltmans)이 1883년 겨울에 선교 지원자들을 모아놓고 은자의 나라 한국에 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의 주장은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가 기도하고 있고 또 1882년에는 한미 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가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교회가 무관심하여 1년 동안을 허송세월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으로 갈 사람을 찾고 있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나는 그때 인도에 갈 생각으로 의학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갈 사람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였다. 교회 기관지들은 아직도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기사로 나와있었다. 바로 이때에 나에게 하늘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너는 왜 못가느냐(Why not go yourself?)이었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선교 희망이 한국 행을 막고있었고 또 실제로 한국의 문은 닫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 차례나 선교본부에 가서 한국 행을 간청하였지만 쓸데없는 말이라고 핀잔을 받았다.
언더우드 목사는 일본에 있는 동안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제하면서 한국 풍습을 익혔고 특히 이수정을 통하여 그의 번역서인 마가복음을 손에 들고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선교사가 피선교지에 들어가 그 나라 말을 배우고 또 그 성경을 번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인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미 번역된 성서를 손에 들고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으니 그 감격이야말로 형언할 수 없으니 만큼 컸다.
드디어 아펜셀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에 발을 내딛었고,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4.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의료 선교 활동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알렌의 입국을 통하여 의료 선교는 실시되고 있었다. 의료 선교는 알렌이 고종의 궁정 의사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큰 효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광혜원을 통하여 진료사업은 한국 사회 각층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교육 선교 활동
의료 선교와 아울러 시도된 것이 교육 선교이다. 교육을 통하여 새 문명을 점하게 하였고,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한국에서 처음으로 여자 학교를 세운 것은 1886년 5월 31일에 스크랜튼 의사의 모친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이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 상황으로 보아서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하였고, 여자에게는 이름도, 교육도, 인권도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시대에 여자 학교의 설립은 경이적인 것이다. 스크랜튼 여사가 세운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당시로서는 학생 모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아서 숙식, 책, 의복까지 제공하며 공부를 시켰다. 명성 황후에 의하여 〈이화 학당〉이라고 명명된 이 학교는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교회 설립 활동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하던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여 예배를 인도하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선교사들과 공사판 직원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영어로 예배드리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책문에 한국인을 상대로 하여 예배드리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에 솔내 교회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전도 활동을 암암리에 시작하였고 성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였다. 1887년 6월 24일에는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 받아 공부하던 학생 중 하나가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윌 12일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첫날은 14명이 모였고, 다음 주일에는 15명이 모였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서 상륜, 서 경조 두 사람을 장로로 택하여 안수하였다.
1887년 1O월 9일에는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는 한국 감리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5. 외국 선교부들의 입국에 대하여 열거 약술하라
[답]
성공회의 입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부가 한국에 설치된 후에 영국 교회(성공회)에서 189O년에 존 코폐(John Corfe․고요한)주교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하여 일하였다.
성공회는 선교시작 때부터 한국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로 코르프 신부를 임명하였고, 처음 선교 시작할 때에는 <대영종고성교회>란 조직 하에 선교하다가 후에 <조선성공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4년 성미가엘 신학원을 강화에 개원하고 1916년 5월에는 교구회가 조직되고 조선 성공회의 기본교리와 전례에 관한 선언이 있었고 헌장 법규도 제정하였다. 1941년 외국선교사들의 신사참배문제로 강제 추방당하였으나 해방과 더불어 세시주교의 귀환으로 조선 성공회가 재건되었다.
호주 장로회의 입국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 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지만 선교 열은 매우 왕성하였다.
데이비스 목사는 1857년 빅토리아주의 멜보른(Melbourne)에서 출생하였으며 멜보른 대학을 졸업하여 그곳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그 후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한 바 있어 도중에 그만두고 스코틀랜드의 에딘바라 대학에 가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하여 처음에 인도로 갔으나 18개월이 지나는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부득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미국 남장로회 입국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때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후에 남장로교 총회 외지선교회에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달라고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아직 한국 선교사업은 착수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레이놀드와 젼킨은 한국 선교의 실현을 위하여 매일 3시에 기숙사에서 합심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레이놀드는 세 사람의 선교 동지와 함께 각지를 순회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교회 신문에도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드디어 독지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죤 언더우드(John T. Under
wood)란 사람으로 2만5천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 달라고 기탁하였다. 그렇게 되자 외지 선교회에서도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레이놀드는 떠나기에 앞서 한국 선교 7인 선발대에 동참하기로 뜻을 함께 한 볼링(Patsy Bolling) 양과 결혼하였다.
드디어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 동생 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해 10월 18일에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11월 3일에 서울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 장로회의 한국 선교의 막은 올려진 것이다. 그들은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말을 익힌 다음에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주로 호남지역인 전라도 일원을 선교구역으로 생각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 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그의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이념은 오직 성령 충만한 성신인으로 키우는데 있었다. 오직 한국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선 성령 충만한 교회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교우지인 신학 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보수주의 신학노선의 많은 논문을 게재하여 한국교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주력하였다.
실로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장로교에 있어서 영적 훈련 면에 있어서 우수하였다. 그러나 지적 훈련 면에 있어서 빈약하였다. 아쉬움,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하에서 수난과 박해가 중첩되는 그 시기에 있어서 성령 충만한 교회의 신앙노선은 필요하였다.
신사참배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도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철저하게 반
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여 굴하지 아니하였다.
미국 남 감리교 입국
미국 남 감리교(The N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한국선교는 미국의 북 감리교보다 10년이나 늦게 개시되었다. 1895년 미국 남 감리교가 한국 선교를 착수하게 된데 있어서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다.
그 첫째는 한국인 윤치호로부터 한국에 선교 사업을 개시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일이고, 둘째는 중국 중앙 지대에 정착하여 선교하고 있는 남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국을 선교의 적지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0월 헨드릭스 감독과 함께 중국에서 선교하던 리드목사가 한국에 와서 선교 사업의 상황을 시찰하면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또한 기후도 적합하다고 판단하였다. 윤치호의 주선으로 고종 국왕은 지극한 호의로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목사를 접견하면서 미국의 여러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교육과 의료 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칭찬하였다.
1896년 8월 리드목사는 한국의 선교 관리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상동교회 부근에 선교회 본부를 설치하여 선교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중국 연회와의 관계는 1897년 5월 조선 선교 처로 분리 발족하였으며 9월 10일에 제1회 조선 지방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회장에 리드 목사, 서기에 윤치호가 각각 직임을 맡았다. 지방회의 본부는 개성으로 정하였다.
서울을 내놓고 개성으로 간 이유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부산을 선교 본거지로 한 것처럼 서울에는 여러 교파의 본부가 주재하고 있어 경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중국 연회로부터의 완전한 분립은 1907년에 시행되었다.
리드 목사가 최초의 남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윤치호 장로가 시종여일하게 협력하였음은 두말 할 것 없다. 그리하여 서울 부근에 고양읍에는 제1 남감리 교회가, 파주에는 제2 남감리 교회가 그리고 서울에는 광희문교회가 잇달아 서는 호전된 발전을 보여 주었다.
캐나다 장로회의 입국
캐나다 장로교회 (The Prebyterian Church in Canada)에서 파송된 정식 선교사단이 한국에 도래하기는 1898년이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맥켄지(William John MaKenzie,)목사가 개인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다가 생명을 희생한 사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맥켄지는 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저축한 돈 1백 달러를 내놓으면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아직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그의 유서에는 한국 선교를 위하여 2천 달러의 남은 돈을 전부 바친다는 귀절이 있었다. 솔내교회 교인들은 맥켄지 목사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면서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캐나다 장로회 총회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선교의 개시를 촉구하는 글이 교회 잡지에 많이기고 되었으며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목사 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 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사업에 있어서 큰 공헌이 있다고 한다면 만주간도 지방에서의 선교활동을 간과해선 안 된다. 1912년에는 정식으로 캐나다 선교부가 용정에 설치되었으며 은진 중학교, 명신 여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일대 요람지가 되게 하였다. 특히 간도에 설치된 제창 병원은 의료 선교 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한국망명객들이 출입하며 독립운동을 숙의 하던 장소로 유명하게 등장하였는데 병원장 마틴(Stanly F.
Martin) 선교사는 한국인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깊어 솔선해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며 3.1운동의 추진을 위하여도 상당한 공헌을 남긴 인물이다
침례회의 입국
침례교회의 한국 선교는 펜윅(Malcolm C.Fenwick)에 의하여 개시되었다. 그는 캐나다의 토론토(Toronto)출신으로 선교를 위해 내한할 때 선교 기관의 배경이 없이 개인 자격으로 왔다.
펜윅 선교사는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하여 한국에 가라는 소명감을 느꼈다고 한다. "1889년 7월에 나는 출처를 알지 못하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랑하는 친구 헤론(J.W.Heron) 선교사의 부인이 한국에서 복음을 증거 한 죄로 감옥에 갇혀있으며 교수형으로 처형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1889년 12월 8일에 28세 청춘의 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고 서울에 거주하면서 한국말을 익혔다. 그후에 그는 한국인과 함께 생활하면서 언어를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황해도 솔내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가옥과 토지를 구입하여 채소를 재배하면서 서병조를 교사로 하여 한국말을 배우면서 부근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사업에 종사하였다.
6. 선교 구역이 어떻게 조정되었는가 쓰라
[답]
여러 교파의 선교 단체가 속속 도래하게 되자 자칫 잘못하면 선교사들 사이에 불화와 대립이 발생할 염려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각 교파들 사이에 협동만 이루어진다면 모든 교인을 한데 묶어 하나의 교회를 형성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아니하였다. 1890년 [선교사 연합 공의회] 는 그것을 목적하여 탄생하였다.
창립 회합에서 미국 북장로회의 헤론(John W. Heron,)의사가 의장이 되었고, 호주 장로회의 데이비스(J. Henry Davis)목사가 서기로 선임되었으며, 언더우드 목사와 기포드 (D,L.Gifford)목사, 그리고 알렌(H.Newton Allen) 의사 등이 참석하였다. 마펫(Samuel A. Moffett)목사는 제2차 회합부터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회합은 호주 선교회의 유일의 대표인 데이비스 목사가 별세하게 되자 미국의 북장로회 만으로는 존재할 의의가 없어져 3, 4개월이 지나면서 자연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 회의는 [개혁 신앙과 장로회 정치를 준행 하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조직하는 것] 을 목적으로 설정하였고 한국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기구가 정립되기 전까지 전국 교회에 대한 상회의 역할을 자연히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 회가 결코 공식적 기구는 아니었으며 다만 상호간의 친교와 상담과 조언하는 회합에 불과했고 권리 행사를 여전히 각자의 선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1893년 1월에 열린 첫 회의에서 미국 남장로회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남지방에서 선교하기로 약정되었고 미국 북장로회는 이미 선교를 개시한 모든 지역에서의 선교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부산 지역에서는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가 함께 선교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산에는 두 선교회가 함께 상주하기로 하고 경상도 남부는 호주 장로회가 낙동강의 이북은 북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합의가 성립되었다.
미국 북 장로회와 미국 북감리교의 선교회 사이의 특수 한 합의점은 한국의 전 지역에서 인구 5천명이상의 도시에서는 함께 선교 사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그 인구 미만의 도시에서는 먼저 선교를 개시한 선교회의 담당 구역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안에 대하여는 당시 한국교회를 방문했던 감리교의 포스터(R.S.Foster) 감독이 동의를 하지 않아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 원칙이 선교회 상호간에 그대로 적용된 것은 사실이었다.
1905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양 교회 사이에는 선교 구역을 재조정할 필요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평안북도에서 영변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북감리교에서 맡기로 하고 그 외의 강계와 선천 등 지역은 북 장로회의 선교 구역으로 결정하였다. 선교 도상에 있어 아무래도 각 교파의 선교사들 사이에 부딧치는 난관이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상호간에 협동정신을 잘 발휘하여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하여 선교의 실적을 크게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친선을 도모하면서 예배도 드리고 전도사업도 함께 협력하여 좋은 결과를 나타내었다. 하나가 되어 하는 선교의 성과는 초기 한국교회의 발전을 이룩하게 하는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7. 네비우스 선교 방침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 글을 읽고 한국과 흡사한 풍토를 가진 중국에서 시행된 선교 방법을 연구함으로서 한국에서의 선교가 성공적으로 수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네비우스 목사는 약 2 주간을 서울에 체재하면서 저서인 [선교 사업의 방안](Methods of Mission Work) 을 중심으로 주한 선교사들과 사이의 세미나를 통하여 한국 선교사업을 위한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첫째로,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였으면 그를 끝까지 붙들어 그 인물이 스스로 개인 전도하는 일꾼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활을 통하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전도한다.
둘째는, 교회의 운영과 기구 조직은 그 교회 자체가 능히 감당할만한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하여 발전시켜 나아가게 한다.
셋째로, 교회에서 전도 사업을 지도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하여 운영할 수 있는 유자격자가 발생하면 곧 그를 선임하여 교회의 책임 일꾼으로 세우고, 선교사는 가급적 목회 일선에서 후퇴한다.
넷째는 교회당 건축은 그 교회의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 구조나 모양은 한국 고유의 양식으로 지방의 교회당답게 건축한다.
장로회신학대학에서 다년간 교회를 강의한 마삼락(Samuel H.Moffett)박사는 위의 내용에서 두 가지를 더 첨가하여 설명하였다. 즉 성서 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지식을 신도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시키도록 협의했다는 점과,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개체 교회의 담임을 못하게 강력하게 규제하였다고 뚜렷하게 말하였다. 그의 부친인 S. Austin Moffett박사도 [네비우스 목사의 한국 내방은 나에게 가슴깊이 두 가지의 큰 교훈을 남겨 주었는데 그것은 성서 연구의 강조와 자립 정신의 고취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네비우스 선교 방안이라고 불려지는 내용이며, 이를 대별할 때 자력전도(Self-Propagation), 자치제도 (Self-Government) 자급운영(Self-Support)의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중심 이념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피 선교지로서의 의타심이나 경제적 무능력을 배제케 하여 역량 있고 자립하는 교회 상을 갖게 하여 기독교 토착화에 기초를 조속히 설정하려는데 목표가 있었다. 초기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에 있어서는 이 방안을 채택함으로 그 이후의 선교 정책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또한 이것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 상당한 공헌을 남겼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제2편 성장사
◉ 과 제 ◉
1. 1907년 대 부흥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1903년 원산에서 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화이트(M. C. White) 여 선교사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가졌다.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 및 일부 한국 교인 그리고 동아기독교(침례교)의 인사들까지 참석한 연합기도회 모임으로 발전하여 원산 창전(倉前)교회에서 계속되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로 남감리회에 소속되어 있던 하디(R. A. Hardie, 河鯉泳)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무력함을 고백하는 통회의 기도를 하였다. 바로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 3년간 강원도 일대에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으나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솔직히 털어놓았던 것이다.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초기부터 용이하지 않았지만 1900년 의화단(義和團)사건 이후 외국인에 의한 선교활동은 더욱 위축되었다. 따라서 여간한 인내와 아픔을 감내하지 않고는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터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화이트 선교사로부터 들었을 때 한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선교활동에 대하여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하디 선교사의 이상과 같은 고백은 이날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명과 은혜가 되는 한편 하디 선교사 자신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 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 운동과 회개 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다시 개최된 교파별 연합기도회에서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럽(A. F. Robb)이 성령을 체험하는 역사가 있었고, 선교사 중심의 기도회로 원산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1905년 8월 평양에서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러한 부흥회의 열기는 같은 해 삼남지방 목포에까지 전해져 그곳에서도 다투어 통회하고 자복 하는 기도 소리와 부흥의 불길이 솟기도 하였다.
▶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 부흥 운동의 불이 점화되었던 것이다. 장대현교회의 부홍사경회는 매년 있어 왔던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이 해의 사경회는 시작 전부터 예년과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미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길선주(吉善宙) 장로가 이 집회 준비를 위한 새벽기도회 인도에 나섰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안수를 목전에 두고 있던 길선주의 새벽기도 인도는 이미 성령의 임재를 예시해 주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교하기 전 도가(道家), 선문(仙門)에 심취한 바 있는 인물로서 영적 감응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당대 대표적인 부흥사였다.
이러한 길선주의 남다른 영력으로 인도된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는 집회 첫날부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1.500명이 모인 첫 날의 정경을 그날 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이 가득 찬 얼굴이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은 얼굴이었다. 그는 길목사가 아니었고 바로 예수님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도피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놓은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영을 가지고 예배당으로 되돌아 와서 오 ! 하나님 나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울부짖었다.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분이 술회하였다.
성령강림이라는 신비적인 종교체험으로 현현(顯現)된 이와 같은 부흥운동의 열기는 여성과 학생들에게 전이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당시 평양에는 숭실대학(崇實大學)을 비롯한 숭실(崇實), 숭덕(崇德), 광성(光成) 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가 많았으며 거기에 재학중인 학생들만도 당시 2,500명에 달하였다. 바로 이들이 부홍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이들에 의한 집단적인 전도운동도 전개되었다. 즉 학생들은 수업을 중단하면서까지 사경회와 기도회에 참석하였으며 매주 일요일은 그룹을 지어 평양시내와 인근 촌락을 다니면서 전도운동에 나서는 열심을 보였다.
한편 여성들 역시 여자신도만을 위한 특별 여자 사경회를 통해 받은 은사와 기쁨을 가정으로 연결시켜 기독교가정으로 변화시키는 예가 적지 않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경이적인 부흥운동이 전국에 알려지자 각처에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평양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동시에 길선주 장로와 같은 부흥사를 초빙하여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평양 부흥회가 동년 1월 16일로 끝난 지 1개월만에 서울 승동교회(勝洞敎會)에서 길장로의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8월에는 의주에서 또한 성령의 열기에 찬 사경회가 길장로에 의해서 인도되었다.
이 대 부흥 운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음을 발견케 된다
(1) 성경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사경회였다.
(2) 철저한 회개운동이었다.
(3) 간절한 기도운동이었다.
이 결과 한국 교회에 다음과 같은 긍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1) 교회가 강한 영력(靈力)을 얻었다.
한국 교회는 선교 2O년의 어린 교회였고, 국난을 당하여 고통 속에 빠진 형편이었으나 대부흥 운동을 통하여 신앙으로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영력을 얻게 된 것이다.
(2) 교회의 엄청난 확장을 가져온 것이다.
평양을 기점으로 하여 부흥의 불길이 각지에 번졌다. 각 지방에서 연속적인 부흥 집회들이 계속되고 교회가 설립되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3) 기독교 공동체가 강하게 형성된 것이다.
서로 회개하며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일어나자 이를 통하여 선교사나 교인이나 할 것 없이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케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성도의 일체감을 심었고, 국난을 당한 백성으로서 신앙을 통한 일체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국 교회 초창기에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부흥 운동의 결과 교회의 조직. 연합. 그리고 선교사라는 세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2. 장로교회의 조직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독노회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넌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3명, 한국인 장로 36명. 찬성원(캐나다와 호주 선교사) 9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
(1) 신학 졸업생 7명 목사 장립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서 경조(徐景昨), 한 석진(韓錫普), 양 전백(梁甸伯), 길 선주(吉善宙), 이 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등이 안수를 받았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사 목사들인 것이다.
(2)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결의하고 7명의 목사 중 한사람인 이 기풍 목사를 파송 하였다.
(3) 의사봉 제정이다. 의사봉을 제정하여 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4) 대리회의 조직이다. 전국을 한 개의 노회로 묶어 놓으니 그 지역이 너무 넓어 노회가 자주 모이기 곤란하므로 종전의 소회(小會) 대신에 경기, 충청, 평북, 평남, 함경, 경상 및 전라 지방에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5)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를 채택하였다.
이와 같이 독노회는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는데, 1907년의 첫 졸업생 가운데서 이 기풍 목사를,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의 8명의 졸업생 중 최 관흘 목사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 한 것이 좋은 예이다.
3. 남북 감리교의 활동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1884년 6월 25일에 처음으로 맥클레이 박사가 고종 황제로부터 선교사업의 윤허를 받은 것은 교육, 의료사업 뿐 이였지, 전도사업은 허락되지 않았다. 근대식 학교와 병원이 설립된 후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배재학당 옆에 정동 교회를 세웠고, 스크랜톤 선교사는 상동병원 옆에 상동 교회와 동대문 시약소 옆에 동대문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제5장 교회의 수난과 민족운동
◉ 과 제 ◉
1. 105인 조작 사건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105인 사건의 공식 명칭은 ‘데라우찌총독 모살 미수 사건’이다.
1909년 이또가 암살 당한 후 데라우찌(寺內)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고 그는 헌법제도를 실시하고, 언론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았으며 무단 정치를 강행하였다. 그는 강압정책을 통하여 이 나라를 통치하려 하였다.
당시 신민회와 교회 세력이 중추를 이루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은 반일(反日) 세력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이것을 부수기 위하여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총독부는 이어서 평안도를 중심한 기독교세력을 분쇄하기 위하여 새로운 사건을 조작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지도자를 투옥하고 선교사를 추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들의 날조 극은 다음과 같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찌(寺內)가 l9lO년 11월 5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을 위하여 선천 역에 잠시 하차하였을 때 선교사 맥큔(G. S. McCune)이 데라우찌와 악수하는 것을 암호로 하여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유수한 교계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는데 19l1년 가을까지 157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감리교의 전 덕기(全德基) 목사를 비롯하여 김 근영, 정회순 둥이 고문으로 세상을 떠났고, 23명이 석방되었으며, 나머지123명이 l912년 6월 28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신자가 lO5명이었고 일본의 가공할만한 조작적 재판에서 105인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의 105인 사건 판결문에 의하면 윤 산은(尹山溫-G. S. McCune). 나부열(羅富悅 S. L. Robert). 그리고 사락수(謝樂秀-A. M. Sharrooks) 선교사들이 이 음모를 격려하여 주고 밀의의 장소를 제공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언더우드, 마펫, 해리스가, 이 사건에 가담하였다고 지적하였다. 해리스 같은 이는 일본과 가장 친해서 일본의 대리인이라고 하는 선교사까지도 연계시켰던 것이다.
선교사들 중에는 일본총독부와 친밀하게 지내는 자도 많았으며, 교정분리 원칙을 구실로 일본에 대한 항거를 방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YMCA 총무로 있던 길레트(P.L. Gillett)는 이 사건이 진행 중일 때 일본의 조작극과 한국 교회에 대한 핍박을 서신으로 외국에 알려 폭로했기 예문에 1913년에 국외로 추방되기까지 하였다.
2. 3.1 운동과 한국교회의 활동에 대하여 쓰라
[답] 3․1운동은 천도교와 불교 둥의 종교 단체들이 연합하여 거국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교회라는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폭넓게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3․1운동의 근원은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나 고종의 승하를 들 수 있으나 그보다도 근원적인 원인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a. 한국민의 독립에 대한 열망 b. 엄격한 총독부의 군정과 그 횡포
c. 일제의 민족성 말살 기도 d. 사법 기관이나 행정기관에서의 한국인 배제 및 차별 대우 e. 언론, 신앙, 결사 자유의 박탈 f. 종교에 대한 근절 정책
g. 한국인의 해외 여행과 유학 금지 h. 옥토(沃土)의 약탈
i. 공창 제도 및 마약 방임 등 한국 청년의 퇴폐 조장과 비도덕 화.
j. 만주에의 한국인 강제 이민 k.일본인을 개선과 한국인에 대한 착취.
3․1운동보다 근 1개월 앞서서 일본 동경 YMCA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2․8독립선언을 YMCA에서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하였고, 이 독립선언문을 국내, 일본 정부, 각국 공관, 언론 기관에 발송하였던 것이다. 이 행사의 처음과 나중에 윤 창석(尹昌錫) 목사의 기도와 지도가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기독교회 내에서는 1919년 1월 말~2월 초에 걸쳐 선우학이 이승훈․양전백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을 협의한 후 평양․선천․정주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조직화에 착수하였다.
3.1운동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는 국내. 외의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을 들 수 있으며, 3.1운동의 선구로서 2.8독립 선언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국내에서 기독교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1919년 6월 장로교 측의 한영신(韓永信), 김보원(金寶源), 김용복(金用福) 등과 감리교 측의 박승일(朴昇一), 이성실(李誠實), 손진실(孫眞實) 등이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로 합동하여 임원으로는 총재 오신도(吳信道), 회장 안정석(安貞錫), 부회장 한영신 등이 선출되었으며, 평안도 각지에 7개의 지회를 두었다. 이 회의 주요사업은 동지규합, 군자금 모금, 배일사상 고취, 결사대 및 독립운동요원 원조 등이었다.
1920년 1O월 일제에 발각되기까지 이 회는 2,4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조직을 통하여 연통제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의 반석 대한애국 여자청년단(聲石大韓愛國女子靑年團), 순천(順川)의 대한민국 부인 향촌회(大韓民國歸人鄕村會), 대동(大同)의 대한독립 부인청년단(大韓獨立歸人靑年團) 등도 연통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자금도 열심히 모금하였다.
▶ 대한 독립 애국단은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支團)을 가지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를 위한 지원단체였다. 단장 신현구(申鉉九)를 비롯하여 박연서, 김상덕, 조종대 등 핵심 인물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김태원이 파견된 이후 이 단체는 임시정부의 연통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 단체는 두 차례에 임시정부축하시위를 벌였으며,조선인 관리퇴직 동맹계획’을 세웠다. 이는 일제의 식민기관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을 모두 퇴직시켜 일제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920년 1월 일제에 적발되어 무산되고 이 단체도 해산당하였다. 이후 단원들은 암살단이나 대한독립군 등의 무장단체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은 상해의 조용주, 연병호 등이 국내에 들어와 안재홍(安在鴻), 이병철(李秉澈) 등과 연합하여 1919년 5월 서울에서 조직하였는데 이들을 비롯한 단원들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단체는 국외지부의 설치, 조소앙을 위시한 외교원의 파견, 기관지〈외교시보〉의 발간 등 국내 독립운동 단체들 중 가장 활발한 외교 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는 전국에 걸쳐 지부를 두었고, 회원들로부터 거둔 회비의 3분의 1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회비납부 이외에도 군자금모금에 헌신하였다. 이 회는 특히 3․1운동 때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정신여학교 교사 김마리아와 황에스더가 1919년 9월 각각 회장과 총무로 선출된 이후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 즉 대한민국의 국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군자금 모금은 물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에도 힘썼다. 조직도 급속히 확대되어 전국에 2천여 명의 회원을 두게 되었고, 임시정부는 물론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들과도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연통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에 발각될 때까지 이 회는 2,300여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냈으며, 애국지사의 가족들과 국내로 잠입한 독립운동가들을 돕기도 하였다.
강우규는 장로교 전도사까지 지낸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국권이 기울던 한말에는 함남 홍원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운동에 투신한 바 있었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자 국외로 이주, 북만주․시베리아 등지를 전전하면서 국권 회복할 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고 민족교육과 국권회복운동에 힘썼다. 그러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5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결성된 「대한노인동맹단」(大韓老人同盟團)에 가입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상옥(金相玉)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찍이 그는 1919년 12월 총독을 비롯한 일본 관리들과 친일파들을 제거하려고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던 중 이듬해인 1920년 8월 미국의원 4O명이 내한하는 기회에 그 계획을 실행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해 1O월 상해로 탈출하였다. 그곳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그는 1922년 11월 일제의 관청 파괴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폭탄과 권총을 갖고 국내로 잠입하였다. 다음해인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진 사건이 일어나자, 일경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추적하였다.
4. 국외에서 기독교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 신한 청년단(新韓靑年團) - 이 단체는 1918년 여름에 결성되었는데, 단원들 중 종교가 밝혀진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니, 장덕수(張德秀) ․김구(金九) ․서병호(徐丙浩) ․송병조(宋秉祚) ․여운형(呂運亨) .김규식(金奎植) 등이다. 이 단체의 목적은 국제회의에 독립을 호소할 대표를 파견하려면 정부가 필요한데, 당장 정부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우선 정당이라도 만들어 대신하려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둥 외교활동에 힘썼다. 아울러 3․1운동 이전, 단원들은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과 자금조달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 결과상해는 3․1운동의 진윈지요 그 주체는 신한 청년당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3․1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대한신민단 - 1919년 3월 13일 북간도 용정(龍井)에서는 1만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모여서 만세운동 축하식을 가진 후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런데 중국군의 발포로 1O여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에 한국인들의 저항과 소요는 급속히 확대되었고, 4월초까지 북간도 전역에서는 만세시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간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 국민회가 성립되었다. 이 회의 전신(前身)은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인데,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것을 지지하면서 대한국민회로 개칭하였다. 회장 구춘선, 부회장 서상용(徐相庸)을 비롯한 대부분의 회원들이 기독교인이었다. 이 회는 1920년 8월 당시 연길현(延吉縣) ․왕청현(江淸縣) ․화룡현(和龍縣) 등 3개 현에 1O개의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둔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이 회는 무력투쟁을 위하여 북간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노령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였다. 또한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징병제를 실시하였으며, 1920년 7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도 설립하였다.
서간도(西間島) 지역에서도 국내에서의 3․1운동 이후 통화현(通化縣) ․유하현(柳河縣) ․즙안현(輯安縣) 등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무력투쟁을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1919년 4월 2일 대황구(大荒構)교회에서는 약 30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모여 삼원보(三源堡) 부민단(扶民團)의 총기 구입 문제를 협의하고 성금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예배를 마친 후 교회에서 청년 7O여명이 곤봉으로 군사훈련을 받으며 항일투쟁에 대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도 조직하였다. 통화현의 최봉석(崔奉錫) 목사와 홍경현(興京縣)의 오대규(吳大奎) 목사 등은 급진파(急進派)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일제를 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또한 즙안현의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연합하여 의용단(義勇團), 청년회 등의 단체를 설립하고 허선노(許善老) 장로를 총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이들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고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제6장 복음 확산 활동
◉ 과 제 ◉
1. 교회의 연합 활동을 약술하라.
[답]
조선 예수교 장감 연합 협의회 - 1905년에 만들어진 순수 선교사들만의 모임인 재한(조선)복음주의 연합 공의회(Federal Council of Protestant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1916년에 한국인 교회가 참여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와 준비하여, 1918년 3월 26일에는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조선 예수교 장감 연합 협의회(Korean Church Federal Council)가 만들어졌다.
1918년 2월 26~27일 서울 YMCA회관에서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장로교의 김필수(金弼秀) 목사가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전문 17조로 된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 협의회는 양 교파의 교리와 정치제도의 문제는 건드리지 못하도록 성격을 분명히 했다. 한국인이 참여하여 임원을 맡았고 장․감 두 교회 사이의 교류가 보다 원활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교파 교회로서 갖고 있던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올 극복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 1919년에 한차례 교회합동운동의 열기를 겪은 후 이원화된 협의체를 하나로 묶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 움직임은 1922년부터 본격화되어 마침내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朝鮮耶蘇敎聯合公議會, Korean National ChristianCouncil)가 창설되었다.
초
대 회장에 차재명(車載明) 목사가 당선되었으며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규칙은 이 단체의 목적을,1) 협동하야 복음을 선전함 2) 협동하야 사회도덕의 향상을 도모함 3) 협동하야 기독교 문화를 보급케 함으로 규정하였다. 역시 설립 목적과 취지는 교회 합동이 아닌 교회간의 협동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권한에 대하여는 이 회는 각 교파 신경, 정치, 의식 등에 간여치 못함l이라고 규정하여 그 한계를 분명히 했다. 실질적으로 오늘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모체라할 수 있는 이 조선 예수교 연합 공의회는 처음에 다음의 11개 단체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이후에 1931년부터 명칭을 조선 기독교 연합 공의회로 바꾸었고, 기독교 기관 중에 회원으로 가입한 수가 늘어나 1937년 이 단체가 해산될 당시엔 위의 11개 회원단체 외에 조선 여자 기독교 청년회(YWCA), 조선 예수교 서회, 조선 주일학교 연합회, 재일본 캐나다 장로선교회, 조선 기독교 여자 절제회 등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2, 교회의 교육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비교적 현실 감각이 예민했던 감리교계 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 인가 절차를 받은 반면에 종교적 교육이 침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장로교계 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가 되기를 거부한 채 사립 중학교로 존속했다. 총독부에서는 끝까지 버틴 장로교 학교들에겐 이른바 각종(各種) 혹은 잡종(雜鍾) 학교로 지정해 학교 명맥은 살려 주면서도 상급학교(전문학교나 대학교) 진학 자격은 부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들 학교 졸업생들은 총독부에서 실시하는 검정고시를 거친 후에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빈번했던 기독교계 학교들의 선교사 배척운동이나 동맹 휴학의 원인 중에는 여기예서 비롯된 것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총독부의 교활한 교육 정책으로 종교학교는 일반 학생들이 기피하는 현상이 연출되었고 종교학교 내에서도 종교교육을 폐지하라는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1910년대 이후 종교학교의 수도 현저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신 교육령이 반포된 1923년에 약간 증가한 것 외에는 1910년 이후 계속 감소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합병되던 1910~11년 사이에 무려 3백여 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종교학교도 1910~13년 사이에 매년 100~130여 학교가 폐쇄되는 현상을 보였다. 1910년에 778개였던 종교학교가 1920년에는 279개로 줄어 10년 사이에 5백여 학교가 폐쇄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말 황민화(皇民化) 정책으로 민족혼이 말살될 위기에서 그래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한글을 사용하며 민족의식과 신앙을 지키려 애썼던 기독교 학교들의 투쟁의식도 1915년 이후 불리한 조건 속에서 선교학교라는 본래의 설립 취지를 고수하면서 그것을 민족문제로까지 연결시키려는 교육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해외 선교와 해외 한인 교회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하와이 - 1902년 하와이 농업이민으로 시작된 한국인의 미국 이주는 처음부터 교회가 배경이 되어 추진되었다. 1902년 12월 22일에 인천을 출발한 1차 이민단 121명은 교인들이 중심이었으며 인솔 책임자 장경화, 통역 안정수는 모두 내리교회 직원들이었고 이들의 신앙지도를 위해 홍승하 전도사가 함께 동행하였다. 이처럼 하와이 초기 이민은 감리교 선교 확장의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와이에 도착한 이민들은 농장에 정착함과 동시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결과 1903년에 오아후섬 가후쿠와 와이알루아 농장에서 평양 남산현교회 출신의 홍치범 권사와 안정수․현 순 등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설립했고, 호놀룰루에서도 안정수․우병길이 주동이 되어 현지 감리교회 감리사 피어슨(G. L.Pearson)과 교섭하여 1903년 11월 3일 교회를 설립했으며 초대 담임자로 흥승하 전도사가 부임했다. 그후 각 섬의 농장마다 교회가 계속 설립되어 1910년 당시엔 한인교회수가 35처에 달했고 한국인 권사가 27명에 이르렀다. 각 지방의 교회 교인 수를 합하면 많을 때는 1천명이 넘었으며, 적을 때는 250명으로 줄었는데 이는 1905년 이후 하와이 이민이 중단된 데다 하와이에 왔던 이민이 미국 본토로 이주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와이의 한인교회들은 하와이 선교와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멕시코 - 멕시코 이민도 1904년에 시작되었는데 영국인 마이어즈와 일본인 다이쇼가 꾸민 사기에 가까운 이민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1905년에 멕시코로 이민간 사람들은 1909년 노동계약 기간이 만료됨으로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었던 국민회에서는 황사용․방화중 목사 등을 파견해 멕시코 이민구제사업을 펴는 한편 교포들의 하와이 이주를 추진하였다.
멕시코 이민의 대부분이 비기독교인들 이었던 관계로 하와이 이민사회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런 상황에서도 노동계약기간이 끝나고 어느 정도 자유를 얻게된 교포들이 독자적으로 신앙집회를 갖기 시작하였는데 1908년 1O월 5일 김세원 ․황명수․이근영 ․방경일 ․신광희 ․조병하․정춘식 등이 메리다에서 전도회를 조직하고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들은 190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방화중 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그해 5월 12일 정식으로 멕시코 한인선교회를 조직했다. 방화중 이후 김제선 전도사가 맡아 본 이 교회는 교포들의 잦은 이동으로 크게 발전하지는 못했다.
쿠바 - 쿠바에서는 이민이 시작된 직후에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쿠바 마탄사스에 이주한 이민들 사이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1921년 1O월 5일 한인선교회를 조직했다. 이것이 1926년에 이르러 감리교 선교부 지원을 받으면서 쿠바한인감리교회로 정식 설립되었다. 초기엔 방경일․양춘명 ․호건덕 등이 교회를 이끌었으며 1959년 쿠바가 공산화되기까지 꾸준하게 유지되었다
일본선교 - 일본 전도는 엄밀하게 말해서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포를 상대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을 의미한다. 재일 한국인 교포와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은 다시 두 범주로 나눌 수 있으니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추진했던 사업과 그 외의 교파 교회 및 개인적 전도 사업이 그것이다. 먼저 장․감 연합으로 추진된 전도 사업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 기원은 1906년 8월에 창설된 토오쿄오 한인YMCA에서부터 언급 할 수 있다. 구한말 경무관 출신의 김정식(金貞植)에 의해 창설된 토오쿄오 한인YMCA는 단순한 유학생 친교 단체가 아닌 민족운동 요람지로 발전했고 1919년 2․8독립선언의 진원지가 되었던 것이다.
4. 1920-30년대 3인의 신앙 부흥운동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길선주 목사의 내세 지향적 부흥운동 - 1907년 평양 부홍운동 때 그 주역으로 활약한 바 있던 길선주 목사는 3․1운동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새로운 신앙․사상적 정리 과정을 거쳤다. 그는 옥중에서계시록만 7백독을 하면서 말세 신앙을 정립하였다. 그의 말세신앙은 현실 속의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형성되었다. 1922년경부터 전국적인 부홍사로 활약하게 되는 길선주 목사의 설교 주제는말세’ 와재림이었다.
1926년부터 교회 내의 청년․진보적 계층과 사회주의 계열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았다. 1933년 그가 세우고 지켜온 장대현교회에서 배척을 받고 따로 이향리교회를 세우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35년 강서에서 부홍회를 인도하다가 절명함으로써 그의 부홍운동은 일단락 되었지만 그의말세 신앙은 한국교회 신앙 양태의 한 지류로 분명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익두목사의 신유와 기적을 통한 부흥운동- 1920년 6월 평양에서 열렸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광경을〈동아일보〉는 수천 군중은 미친 듯 취한 듯 홍분한 신경을 것잡지 못하여 어느 무명씨는 즉석에 숭덕학교를 위하여 1만원을 기부하니 뒤를 이어 일어나는 기부의 소리는 미처 수습할 길이 없이 답지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김익두 목사의 부홍운동의 특징은 기적과 신유를 동반한 것이었다. 1919년 말 현풍 집회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적현상은 1920년 4월의 영남지방 집회 때 많은 병자들이 치유 받는 집단적 기적현상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이적이 사실이냐 하는 문제로 교회 안팎에서 논란이 되었으며, 이에 황해노회 안에서는 임택권(林澤權) 목사가 중심이 된 김익두 목사 이적 명증회가 조직되어 김익두목사 부흥회를 통해 치유 받은 자들의 신상과 사건 기록을 정리하여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1921년)이란 책을 내기까지 했다. 이를 근거로 황해노회는 1923년 장로회총회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된 장로교 헌법 3장 1조를 수정하자고 헌의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헌의는 1924년 총회에서 부결되고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는 고비를 맞았다. 총회의 이적 불인(不認)은 그의 부홍회의 의미를 감소시켰고 그 즈음에 교회내의 지식계층이나 일반 사회주의 계층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26년 간도 용정과 이리에서 반종교가들에 의해 집회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그 무렵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하는 반기독교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김익두 목사의 부홍 운동은 급격한 냉각상태로 빠져들었다.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적 부흥운동 - 1930년대 한국교회의 신비주의 신앙을 형성한 주도적 인물인 이용도 목사도 3․1운동 때 송도 고보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되었고, 1920년기원절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는 등 1924년 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4차에 걸쳐 3년 이상 감옥에 살았던 민족주의자였다. 이 같은 그가 부홍운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강원도 통천교회로 부임한 지 1년 후인 1928년 12월말로부터 1929년 1월초에 이르는중생(重生)의 체험에 있었다.
5. 기독교인들의 문화 활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미술 활동 - 한국 개신교 미술의 효시는 《천로역정》(1895년)삽화를 그린 김준건을 언급할 수 있다. 김준건은 게일(J. S. Gale)에게 영향을 받아 개종한 원산지방의 초기 교인이었다.
김준건은 전통 풍속화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동양화 기법으로 《천로역정》 삽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한국 기독교의 토착미술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 동양화기법으로 성경 메시지를 그린 성화(聖畵)의 효시는 김은호(金殷鎬)의 「부활 후」라 할 수 있다.
음악 활동 - 기독교 찬송가를 통해 서양음악의 성악, 기악 양식이 소개되었고, 향상되었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서양음악 교육은 찬송가 공부를 통해 시작되었다. 이화 출신의 김헬렌(최활란)이 정동교회 최초의 오르간 연주자로 1907년부터 봉사하였으니 한국인 최초의 서양음악 연주자가 된 셈이다.
1910년 이화학당에 대학부가 설치되면서 본격적인 서양음악 고등교육이 이루어졌다. 1911년 음악과 주임교수로 하몬(G. Hamon)이 부임하면서 체계적인 성악 및 기악교육을 실시했고 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1925년 이화전문학교가 되면서 음악과가 설치되어 많은 음악인과 교사를 배출했는데 이곳 출신으로 1920~30년대에 해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활동한 대표적 인물로는 피아노를 전공한 김앨리스(정애식)․조그레이스․고봉경 ․김메리․송경신․박현숙․김영의, 성악을 전공한 윤성덕․임배세․박루사․유부형․정훈모․이채리․채선엽 ․한복덕, 종교음악 및 이론을 전공한 이로라 등이 있다.
문학 활동 - 기독교는 개화 혹은 계몽주의적 작가들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끼쳐 그들의 문학작품 속에 기독교적 색채를 가미시켰다. 특히 신문학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육당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작품 속에서 그같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920년대 이후 순수 신문학이 발달되면서 활동한 한국의 대표적 문인들의 작품에서도 그같은 기독교적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남궁벽의 《말》, 변영로의 《오, 나의 영혼의 기여》, 김소월의 《묵념》, 《밭고랑 위에서》, 《신앙》, 이 상의 《날개》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제3편 수난사
◉ 과 제 ◉
1. 김춘배 목사의 성경해석 과 아빙돈주석 번역 문제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남대문 교회 김 영주(金英珠) 목사의 창세기의 모세 저작 부인과 김 춘배(金春培) 목사의 여권(女權)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박 형룡 박사는 <모세의 창세기 저작을 부인하는 사람은 장로교의 목사 됨을 거절하는 것이 가하다>고 공박하고, 여권 문제의 자유주의적 해석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김춘배 목사와 김영주 목사는 출신과 목회 배경이 경기도․함경도였고 1933년어간에 두 사람이 모두 일본의 칸사이(關西)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온 신진 학자들이었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및 사회 복음주의 신학 분위기가 강했던 칸사이 학원에서 수학한 이들은 국내에 들어오자마자 정통 보수주의 교회의 분위기에 맞지 않는 발언을 하였고, 그것이 정치문제화 된 것이다.
아빙돈 성경 주석 문제 -n 이 주석은 감리교 선교 5O주년을 기념하여 1934년에 출판된 《단권 성경주석》(單卷聖經註釋)인데 내용과 번역자로 인해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 책은 미국 아빙돈 출판사(Abingdon Press)에서 발행한 성경주해서(He Abingdon. Bible Commentary, 1930년)를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오자성서무오설을 신조 제1조로 삼고 있던 장로교회 안에서 부정적 반응이 나오게 된 것은 당연했다. 장로교회에서는 보수주의 전통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져 총회에까지 파급된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1935년 장로회 24차 총회에서는 우리 장로회의 도리에 불합한 고로 우리 장로회에서는 구독치 안코 그 주석에 집필한 장로회 사역자에게는 소관 된 각 교회에서 살핀 후에 그들로서 집필한 정신태도를 기관지를 통하야 표명케 함이 가한 줄로 보고하여, 단죄하면서도 관련자에 대한 정치적 처리는 지방 노회에 맡겼다. 송창근․한경직․채필근․김재준이 소속되어있던 평양노회는 각서 제출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송창근․한경직․김재준 등 3인은 성명서를 〈신학지남〉에 발표함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2.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정인과 목사의 찬송가 문제 - 《신편찬송가》란 당시 장로회 총회 교육부 총무로 있으면서서북계 실세의 주도권자로 부각되던 정인과(鄭仁果) 목사의 주도로 편집․출판된 찬송가이다. 이를 《정찬송가》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을정찬송가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건의 내용은 1931년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한 《신정찬송가》를 장로교에서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별도로 장로교용《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여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신정 찬송가》는 1908년 이후 장․감 두 교회에서 사용해 오던 《찬송가》를 개편한 것인데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희와 조선예수교서회가 편집 ․발행 및 판매 권한을 갖고 있었다.
1934년 총회에서 찬송가 편찬 문제는 감리교회에 교섭하야 연합 편찬하게 하되 만일 감리회에서 불응하면 장로회가 따로 편찬함이 가하다는 종교교육부의 헌의를 받아들여 찬송가 편찬에 대하야는 종교교육부에 맛겨서 더욱 잘 편찬하도록 가결함으로 장로교 단독 찬송가 발행으로 방향이 잡혀갔다. 그 해(1934년) 종교교육부 총무로 취임한 정인과 목사의 결단이 크게 작용하여 이듬해 구 찬송가 중 늘 부르지 안는 것 4O장을 삭제하고 신정 찬송가 중 조흔 것 7O장을 선택하여서 너헛고 새로히 100장 가량을 너허서 400장 짜리 《신편 찬송가》를 발행하였고. 장로교 전체 분위기는 《신편 찬송가》발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전필순 목사의 기독신보 문제 - 1933년 7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필순(全弼淳) 목사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기독신보〉 발행권을 둘러싸고 계파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필순 목사는 장로교 소속이었으나 일본의 코오베(神戶)신학교에서 수학하며 그곳 출신 가가와도요히코(賀川豊彦)의 기독교 사회주의에 사상적 영향을 받은 진보적 인물이었으며, 출신 및 목회 배경도 비서북계(非西北系)인 경기도․서울이었다. 그는 〈기독신보〉 사장이 되자마자 기독신보 찬조회를 조직, 한국교회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얻어 경영 자립을 꾀했고, 한국인 직원을 대거 채용하여 편집 진을 보강했다. 이 같은 혁신적조처는 선교사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예수교서회로부터독립’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1935년에 〈기독신보〉가 전필순 개인 발행지로 변하기 전에 이미 그 교회 연합지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있었다. 전필순이 사장으로 취임하던 해인 1933년에 감리교는 양주삼을 발행인으로 한 〈감리회보〉(監理會報)를, 장로교는 정인과를 발행인으로 하는 〈종교시보〉(宗敎時報)를 각각 창간하여 교회 기관지로 출범시켰던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된 교회’를 추구하던 초기 한국교회 정신을 크게 훼손시키는 것이었다.
3. 감리교의 합일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감리교회는 남북 감리교 선교부의 지원 아래 각각 다른 기관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들의 연합 운동이 여러 갈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양주삼 목사는 "감리교의 합동운동"을 위해 추진했으나 미국선교본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한국에서 먼저 합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한국에서 단독으로라도 통합하겠다는 결의와 각오로 6월에 "미 감리교회 한국연회"가 모이고, 9월에 "남 감리교회 한국 매 연회" 모임에서 통합방침을 연구할 위원 5명씩 택하게 된 것이 남북 감리교회의 적극적인 통합운동이 되었다. 위임받은 위원이 1927년 6차례 모여 협의한 결과를 미양 연회에서 수정하여 통과를 보고, 1928년에 미 감리교회 본부의 승인과1930년에 남 감리교회 본부의 승인이 남으로서 합일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1930 12월 2일 서울 협성 신학교에서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 감리교회>로 출범하게 되었다. 양 주삼 목사가 제 1 대 총리사로 피택 되어 감리교 정신의 앙양을 강조하였으며. 거기에 따른 어려움도 있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선교부에서 독립하는 자치 교회의 형태를 이루었다.
4. 오순절 운동에 대하여 쓰라
[답] 한국에서 오순절교회 계통의 선교사로 처음 내한한 이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교인으로 1928년 내한한 간호원 럼제이(M.C.Rumsey)를 들 수 있다. 그녀는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허 홍을 만나게 되었다. 허 홍은 방언을 하는 것과 기도로 병을 고치는 신유를 오순절신앙의 요체로 인식하고 럼제이를 도와 전도 활동을 벌였다. 그후 일본 성서신학원에서 수학한 박성산이 합류하여 1933년 봄 서빙고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오순절교회가 설립되었다.
1932년에는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파슨스(T.M.Parsons)가 역시 개인자격으로 내한했고, 이듬해에도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메르디스(E.H.Meredith)와 베씨(L.Vessey)가 역시 개인자격으로 내한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파슨스는 배부근과 함께 수창동에 제2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했다. 이로써 서빙고에서는 럼제이, 허홍, 박성산이, 수창동에서는 파슨스와 배부근이, 죽첨정에서는 메르디스와 베씨가 오순절교회운동을 전개했다.
1938년 10월 5일에는 한국 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베풀어졌는데, 허홍, 박성산, 배부근 3인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때의 교세가 6교회, 11목회자, 192성도로 일제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오순절 교회는 1950년 4월 9일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 대회를 순천 오순절교회에서 개최하였는데 약 200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그후 2,3차 대회를 모이면서 1953년 4월 8일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결성된다. 이는 1952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채스넛 선교사가 파송 된 다음해이다. 이 때부터 비로소 조직화된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오순절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이 시점에 조용기 목사가 나타난 것이다. 1959년에 순복음신학교를 제4회로 졸업한 그는 1961년 샘 토드 목사의 서대문 로타리 부흥집회 시 통역을 맡았는데 부흥회 기간동안 많은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오늘날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발전하게 되는데, 오순절신앙의 국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용기 목사가 이렇게 시작한 그 교회는 1년만에 성도가 1천명으로 늘어났고, 1970년에 여의도로 교회를 옮기기 직전 만 여명의 성도가 모였다.
제8장 교회의 훼절(毁節)과 수진(守眞)
◉ 과 제 ◉
1.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대하여 쓰라
[답] 황민화 정책의 특징은 천황 신앙의 강제를 축으로 하여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을 빼앗아 민족성의 말살을 단기적으로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의 강요,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常用) 등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한국인의 민족 말살적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소위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이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 속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적(興亞的) 민족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이며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니 구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해방이니 홍아적 민족 해방전쟁이니 성전(聖戰) 등으로 미화하여 아시아 지역의 민족 해방문제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 사이의 모순성을 은폐 시켰다.
2. 일본의 신도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신도의 기원은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가미라는 말은 신격(神格) 혹은 영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일본의 고유어로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 자연현상, 경이적인 자연물, 신화적 인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을 일본인은가미로 숭배하였고 이것들을 총칭하여 8십만 신, 혹은 8백만 신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가미라는 말은 고대인들의 공통 신앙 형태였던 자연숭배와 조상숭배에서 나온 다신교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신도는 고래(古來)로 일본의 정치권력 내지는 황실(皇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그러나 신도는 교리나 경전보다는 고대로부터의 관습적 의례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근대 이전에는 고등 종교인 불교에 눌려 그 종속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사상적 열세와 천황 권의 약화로 막부체제하에서 민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던 신도가 17, 18세기 일본의 유학자들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유한 것을 찾기 위하여 고전을 연구하는 가운데 신도에 주목하고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문하에서 막부말기에 신도사상에 입각한 배외적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나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메이지유신을 전후하여 신도는 천황을 절대 신으로 여기는 천황제 국가의 지도정신으로 이데올로기화되었고, 지배 통치의 원리로 채택되었다. 그 후 신도는 일본 정부의 보호와 육성 하에 급속히 발달하여 국수적 토착 종교로서 국교적 지위를 확립하여 갔다. 1871년에 일본 정부는 일본의 모든 신사를 국가의 종사(宗祀)로 하고 사격제도(社格制度)를 마련하여 신사에 공적 지위를 부여하였다.
3.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대하여 약술하라
[답]
각 교단들의 신사참배 참여 - 1936년 감리교회에서는 양주삼 총리사가 총독부 초청좌담회에 참여 후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설명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감리교 교회들이 신사참배들을 하고 감리교 계통의 학교들이 해방될 될 때까지 그대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교회의 수난도 가벼웠다. 감리교의 제3차 연회(1938.10. 5-13)가 모였을 때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참석하여 축사까지 할 정도였고, 총리사 양주삼 박사는 내선일체를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장로교의 신사참배 결의 - 1931년 9월, 경남 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 실행 위원회를 1936년 초에 소집하고 미션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정하며, 그해 1O월의 실행 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 내외의 학교 폐쇄를 단행하였고, 본국의 승인도 얻었다.
이런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의 고통을 겪다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강압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참배 결의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4. 교회의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도 일부 친일분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반일적 성향은 매우 강하였다. 황해도 해주의 감리교 전도사 김만식과 전남 나주의 기독교 개량서당 교사 김영환은전쟁은 죄악이라고 비난하여, 중일전쟁을성전(聖戰)이라고 선전하는 일제에 맞섰다.
강원도 이천의 감리교 유치원 보모인 전영신은 일본군 위문을 위한 천인침(千人針 : 출정 병사의 무사를 빌기 위해 천 명의 여자가 한 땀씩 붉은 실로 천에 매듭을 놓은 것)을 미신적 행위라 하고 금지시켰다.
평남 중화군 도제직회 때는 관할서에서 제직회 인도자 노영선 목사를 사전에 경찰서로 불러들여 시국좌담회 개최, 일장기 게양, 동방요배 실시 둥을 명령하여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교회 제직들이 반대하여 실행치 못하였다. 평북 강계의 기독교계 사립 영실학교에서 시국 강연회를 개최할 때도 기독교를 믿는 학생 2O여 명이 고의로 결석하였다.
조직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로는 수양동우회와 흥업 구락부를 들 수 있다. 수양동우회와 흥업 구락부는 개량주의적인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중의 목적을 가진 일종의 민족주의 비밀결사였다.
5. 교회의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대하여 쓰라
[답]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첫째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의 영향력 있는 기관 또는 인사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하는신사참배 강요 금지청원운동이요, 둘째는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었다. 물론 저항자들 가운데는 청원이나 거부 권유 등 대외적인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은둔하여 자신의 신앙만이라도 지키려는 소극적인 항쟁 자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의 경찰에게 끌려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러한 것이 증거가 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신앙과 용기를 주고 적극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 평양지역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본거지는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는 산정현교회였다. 주기철 목사는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주목을 받아 1938년 1차 검속 이래 1944년 4월 21일 평양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전후 4차에 걸쳐 검속 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산정현교회도 주기철 목사를 쫓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40년 폐교되었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 저항은 전국 어디서나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전남지역의 손양원 ․백영홈 ․박영대 등과 전북의 배은희․김가전. 충북의 허성도․송희용, 경남의 조용학, 황해도의 이종근․박경구 등이 있으며, 교파적으로도 감리교의 이영한․강종근․권원호, 성결교의 박봉진․김 연, 동아기독교의 전치규․김영관, 안식교의 최태현 등이 있고, 천주교 신자들도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여 명에 달하고 2백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5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으며, 당시 교회의 변질을 경고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 민족사적 의미가 큰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한국 기독교가 두 가지 상반된 행동 양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에 굴복하거나 편승해서 저지른 친일 ․부일 행각과 민족정신과 순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한 행적이 그것이다. 대다수의 교회 지도급 인사들과 제도적 교회, 기독교 기관들이 친일․부일적 행위를 보여준 반면에 소수무명의신앙인들은 주로 지방에서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같은 저항운동을 폈던 것이다.
제9장 해방과 교회의 재건
◉ 과 제 ◉
1. 북한 교회의 재건과 수난에 대하여 쓰라
[답] 8․15해방과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던 〈수진성도(守眞聖徒)>들은 감격적인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주 기철 목사를 비롯한 5O여 명의 성도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출옥 성도들은 평양 장대현 교희에 모여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하여 기도하고 의논하다가, 1945년 9월 2O일, 다음과 같은 재건 원칙을 발표하였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와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을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은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기간에는 집사와 평신도들이 에배를 인도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재건 복구할 것.
이것은 일제와 타협하고 배도(背道)한 자들의 자기 정당화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은 한국 교회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보여 주고 있었으며, 일제 치하에서 타협하며 지냈던 자들의 기회주의적인 교권에의 집착이 신앙의 경건성을 주장하는 출옥 성도들의 의견을 압도하고 만 것이다.
1945년 11월 14일, 평양에서는 38이북 지방의 노회 대표들이 회집하여 잠정적으로나마 총회를 대행할 기관으로서 <이북오도 연합노회>를 조직하고 다음과 갈이 결의하였다.
(1) 이 연합 노회는 잠정적인 총회의 대행이며
(2) 교단의 규칙은 총회가 재건될 때까지 존속하게 하며
(3) 전국 교회는 과거의 죄를 자복하고 교역자는 두 달 동안 근신에 임하며
(4) 신학교를 연합 노회 관할 하에서 경영하교
(5) 전국적으로 독립 기념 전도를 실시할 것.
한편 이북 각 지역마다 해방의 기쁨을 가지고, 자치단체 또는 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조직되었는데, 대개 기독교인들이 주동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그만큼 교회와 교인들의 위치가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눈치챈 북한의 소련 주둔군들은 기독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제이교회 한경직 목사가 주동이 되어, 1945년 9월에 기독교 사회민주당이란 정당을 조직하였다.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세워, 한국사회를 이끌어나가게 하자는 취지였다. 같은 해 11월 16일 용암포(龍岩浦)에서 열린 사회민주당 지부조직 때 공산주의자들과의 첫 충돌이 생겼다. 공산당이 거기 있는 공장의 직공들을 충동하여, 대회장을 습격하고 간부들을 폭행하여 수라장을 만들었다. 이런 야만적 행동에 격분한 그곳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어나 그들의 폭행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평양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 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를 탐지한 내무서가 결성식 전날 김화식 목사 이하 40여명을 검속하여 결성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검거된 분들은 대개 옥사 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6년 11월 28일에는 김일성의 외숙 강양욱(康良煜 - 일제 때 목사)을 내세워 기독교도 연맹을 조직케 하고 이 기관을 통하여 측면 공격으로 교회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교회를 어용종교단체로 변질케 할 것을 획책하였던 것이다.
부흥사 김 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였던 박 상순 목사를 강제로 가입시켜 선전물로 사용하였으며, 처음에는 교직자들만 연맹에 가입시키다가 1948년에는 일반 평신도들의 가입을 강요하고, 면 ․군 ․도의 연맹을 조직한 후 1949년에는 소위 기독교도 연맹 총회를 결성하였다. 이에 끝까지 가입을 반대하는 오도연합노회의 주요간부를 일제히 검거투옥하고 감리교와 장로교의 신학교를 폐지하였으며, 기독교 신학교라는 명칭으로 통합하여 연맹 총회에서 직영하였다. 1950년에 와서는, 이 연맹 총회에 들지 않은 교역자들은 거의 다 투옥되고 예배당은 그들의 정치 계몽소로 변하게 되었다. 과거 일제시대의 교회 탄압보다 더 혹심한 지경이 되었으므로, 많은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남한으로 내려오거나 지하에 숨어버렸다. 그해 6월 25일에는 드디어 북한은 남침의 전쟁을 감행했었다.
2. 장로교 신학교 재건의 진통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경남노회와의 문제가 어려움 속에서 지탱되어 오다가 1949년4월 제35회 총회는 고려 신학교가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하므로 고려파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울에 소재하고 있던 조선 신학교의 재건 문제는 더욱 복잡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 되어져 갔다. 조선 신학교는 남부 총회(南部總會)에 총회 직영 청원을 내어 허락을 받았고, 김 재준 교수는 자유주의적인 자기의 신학을 대담하게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김 교수의 신학은 한국 교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는데, 1947년 봄에 조선 신학교 학생 5l명이 제33회 총회에 진정서를 내고 김 재준 교수의 자유주의적 교수 내용을 항의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총회가 심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에 착수하려 했을 때, 김교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진정서> 형식의 글을 발표하여 문제가 어느 정도 정리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박 형룡 박사가 고려 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가 한국장로교의 진로 문제에 대하여 고려 신학교 설립자들과 견해 차이가 생겨 교장직을 사임하고 나서 상경하자, 김 재준 교수의 문제 처리는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박 형룡 박사는 1948년 총회의 요청으로 김 재준 교수의 <진정서>를 세밀하게 검토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를 김 재준 교수가 한국 교회를 <능욕>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래서 총회는 조선 신학교 개혁안을 제안하고 김 교수의 l년간 해외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다.
l950년 1윌, 대구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 이 문제에 단안을 내려야만 했다. 그려나 개회 벽두부터 소란이 일어나 비상 정회를 하고 말았다. 그후 2개월 만에 6․25사변이 일어나 1년 후에야 피난 수도 부산에서 총회를 속회할 수 있었다. 이는 교회의 비극이요, 민족의 비극이었다. 교회가 임무를 다하지 못할 때 여기에 따른 박해는 너무나 심각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3. 6.25 전쟁의 교회 피해를 쓰라
[답] 귀한 저명 목사들의 순교와 피납으로 많은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 신석구 목사, 정일선 목사 등이 순교하였고 송창근, 남궁혁, 양주삼 목사 등이 납치 당하였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완전 소실이 152교회, 파괴가 467동이었으며 감리교는 완전 소실이 84교회, 파괴가 155동이었고 성결교가 완전 소실이 27교회, 파괴가 79동이었으며 구세군은 완전 소실이 4교회 파괴가 4동 외에 많은 교파들에 피해가 있었다. 인적 손실을 보면 순교 혹은 피납된 교직자는 장로교 150명, 감리교 48명, 성결교 11명, 구세군 7명이었다.
전북 옥구군 원당(元堂) 교회에서는 75명의 교인 중 73명이 학살당하였다.
북한군들이 서울을 점령하였을 때, 자칭 교인인 김 욱(金旭)과 전직 목사 최 문식(崔文植) 등이 나타나 교회를 박해하고 목사들을 구금하는 데 앞장을 서는 비비극이 연출되었다. 이와 같은 배신자들의 행동을 통하여 교회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고 1.4후퇴 때에는 대부분 부산으로 피난을 하였던 것이다.
제4편 분열사
◉ 과 제 ◉
1. 고신파 분열에 대하여 쓰라
[답] 해방 전 신사참배 문제로 옥고를 치른 성도들은 기왕에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를 향하여 통회 자복 근신을 요청하였고, 그 참회의 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각 곳에서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 정죄가 잇달았다. 이렇게 해서 이북에 재건파, 복구파의 교회가 세워졌고, 남한에서는 박윤선 목사의 고려신학교가 세워지면서 세칭 고신파 장로교의 분열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피차의 공방과정에서 상대방을 공산당으로 중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51년 장로교회는, 사변으로 단속된 총회의 속회에서 고신파를 정식 단죄하였고, 고신파는 그 나름대로 총회를 향해 용공을 비수처럼 덮어 씌웠고 신사참배문제로 끝내 저항했던 이들 고신파는 자신들을 한국교회 정통으로 자처하게 된다.
2. 기장 분열에 대하여 쓰라
[답] 1930년대 이후 한국의 새로운 신학사조 도입의 주체가 되는 김재준 박사를 비롯한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그 신학적 갈등을 엿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1935년의 단권 성경 주석 문제로 신학적 갈등은 표면화된다. 이 사건은 감리교 류형기 목사의 편집발행 아빙돈 단권주석이 새로운 신학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이유로 그 집필자로 참여한 장로교 인사인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 채필근에 대한 문제이었다. 채필근은 즉시 사과하였으나 나머지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잘못 없음을 별도로 설명하였고, 장로교총회는 동 주석의 열람, 참고를 금지한 사건이다.
자유로운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였던 일군은, 평양신학교가 무기휴학하자 1940년 4월 19일 숭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를 개교했다. 해방 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자 조선신학교는 49년 남부총회의 직영의 허락을 받았다. 그후 새로운 신학사상을 나타냈다. 김재준 교수는 마음놓고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비판적 성경연구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남북장로교의 신학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1947년 김재준 목사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학생 51명이 그를 자유주의라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장로교는 흥분했고, 박형룡 박사는 진정서를 검토한 후 그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판단했다.
이때 김재준은 문제가 신학적 문제만은 아님을 직감하고 보수주의에서 이탈을 결심하였다. 한편 총회가 제출한 조선신학교에 대한 개혁안이 수포로 돌아가자 신학대책위원회에서 박형룡 목사를 중심으로 장로교 신학교를 세웠다. 한 교단에 2개 신학교의 모순이 있자 합동 7원칙 안을 내놓았으나 조선신학교 측의 수락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후 1952년 37차 총회 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 조선신학교의 직영취소를 재인식시켰다. 조선신학교는 불복하고 한국 신학대학교로 출발했고, 1953년 총회를 개최하여 교단을 대한 기독교장로회라 하였다.
3. 에큐메니칼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쓰라
[답] 6. 25후 일치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을 때 장로교의 3번째 분열이 1959년에 일어났다. 복음주의 연합회(N A E)라는 단체는 개인구원의 완성을 강조한 단체이다. N A E는 보수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하면서 WCC를 용공이라 하여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44차 총회서 정회서 거듭하는 혼란 속에 대전에서 서울에 올라온 총대들은 승동교회에서 1959년 합동총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세계교회협의회 (W C C) 에서 영구탈퇴를 선언했고, WCC 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1960년 서울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일치를 위해 WCC서 잠정 탈퇴를 했으나 거절당했다.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기금 유용을 두고 양측간의 대립도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동교회 총회를 오늘의 '장로회 신학대학'(통합측)과 승동교회 총회측을 오늘의 '총회신학대학' (합동측)으로 분열케 한 것이다. 이 분열은 자기 신앙노선을 내세우려는 주도권의 싸움이요, 신학보다는 그 방법론 때문에 다수의 분열을 보여주는 오점을 낳았다.
4. 합동측의 정치적 분쟁과 분열에 대하여 쓰라
[답]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논란 끝에 비상정회 한 후, 둘로 갈려 양측이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속회함으로써 완전히 두 교단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때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장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해서 '통합측'이라고 불리게 됐다. 또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이전에 갈라진 고려파와 다시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이라고 일컬었다.
제11장 교회의 확장과 복음화 운동
◉ 과 제 ◉
1. WCC, ICCC, NAE, RES 와 한국교회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라
[답]
WCC와 한국 교회 - WCC의 성격에 대하여 한국 교회지도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후에는 찬반이 심화되어 급기야 1959년에는 제3차 분열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WCC는 신학적 배경이 각기 다른 교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종교적 혼합주의 색채를 띠고 있으며, 교리보다도 생활에 중점을 두는 특색과 WCC 안에 공산주의 국가 대표들이 참석하고 있으므로 한국 교회에서 용공 논쟁(容共論爭)을 일으켰었다.
WCC의 국가 단위 조직격인 KNCC(Nationa1 Council of Churches in Korea-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에는 예장 통합, 기장, 기감, 구세군, 성공회, 복음교회 등 6개 교파가 정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으며, 한국에서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주도하고, 연합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ICCC와 한국 교회 - 이들은 1948년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후 계솟 국제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강력한 반공사상과 배교 운동 배격으로 극단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1CCC가 한국 교회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예장 고신 측과의 관계로부터 발원하여 장로교 제3차 분일 이후 합동 측과도 관계를 맺었었다. 그러나 ICCC는 한국 교회에서 극단적인 분파주의로 말미암아 여러 교파들을 분열시켜 새로운 교파를 형성케 하였고, 한국의 많은 교회의 고립주의적인 자세는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다. 1CCC의 국내 기구로서는 KCCC (Kore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한국 예수교 협의회)가 있으며 산하 교단들을 가지고 있다.
ICCC는 보수적이며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있는 것은 매우 좋으나, 분열주의적 자세가 호응을 받지 뭇하고 있으며, 오늘의 시대에 바른 신앙을 파수하는 단체로서 그 의의를 가지고 있다.
1CCC는 한국 교회에서 많은 작은 교파들을 발생시켰고 나아가서 이들을 모체로 하여 한국에서의 독립된 기구 형성에 노력하고있는 것이 이들의 약점이다
NAE와 한국 교회 - 1923년 미국의 근대주의적 목사 1,292명이 어번 선언(Aubern Affirmation)을 선언하였는데, 이 선언은 성경의 정확 무오성,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믿지 아니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분격한 근본주의자들이 일어나 이들과 논쟁을 벌일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아니하고 단지 복음을 수호하며 전도하는 화평론 자들이 모인 것을 NAE라고 한다.
이 운동이 국제적으로 확창되어 1951년에는 화란 우드쇼튼에서 24개국 대표들이 모여 국제적 조직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 NAE는 1948년 6O여 명의 신학생들로 출발하였고, 1952년 7월에 정식으로 한국 NAE를 조직하여 복음주의 연합운동을 펴게 되었다. NAE는 신앙에서의 이탈에 대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알리기에 주저하지 않으나 WCC에 대하여 공격적인 투쟁을 하지 않고 온건한 정책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 교회에서의 NAE 운동은 초창기부터 합동측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되어 왔기에 합동측을 NAE측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간혹 있다. 장로교 총회가 한국 교회의 화평을 위하여 소속 목사들은 NAE에서 탈퇴하라고 결의한 후 이 단체의 영향력은 미미하여졌다.
RES와 한국 교회 - RES (Reformed Ecumenical Synod-개혁주의 에큐메니칼 대회)는 1946년 미국 그랜드래피드에서 발기하여 구성된 단체로서 범세계적인 칼빈주의 자들의 모임이며, 개혁주의 신앙 노선에 찬동하는 교파들이 참가토록 되어 있다.
RES는 예장 합동측과 고신측과 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교단 내의 정치적 문제와 신학 사상에 대한 이해 문제 등 많은 논란을 빚었다. 1968년 9월 부산에서 모인 제53회 총회(예장 합동측)에서는 RES 보고를 받고, 1970년에 한국에서 RES 태평양 지역회의를 개최키로 결의하며 연구위원 5인을 선정하였다. 이때에 신복음주의 논쟁이 일어났고, 1CCC계 선교사였던 라보도(Robert S. Rapp)가 RES를 비평하는 책자를 제작하여 전국교회에 뿌리는 등 맹렬한 반대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69년 서울에서 모인 제54회 총회에서는 1970년에 모일 RES 태평양 지역 대회를 중지하기로 결의하고, 그후 RES 탈퇴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RES는 한국 교회에 그 뿌리를 내려보지 못하고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으로 말미암아 중단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의 개혁주의 교단들의 세계적 유대가 단절되게 되었다.
2. 교회의 성장 운동에 대하여 진술하라
[답] 선교 l00주년을 앞두고 각 교단에서는 교회 성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7O년대 후반기에 일어난 이와 같은 경향은 한국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서 의의를 가지며, 나아가서 교회 성장을 통한 자기 정화의 길을 걷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1985년 선교 백주년 기념으로 각 교회가 전개한 진홍운동을 살펴보면
(1) 예장(합동)- 만 교회 운동
(2) 통합측- 매년 3백 교회 증가운동을 전개하여 1985년까지 3천 교회 목표.
(3〉 기독교 감리교회- 5천 교회 운동.
(4) 기독교 장로회- 2천 교회 증가 운동.
(5) 기독교 성결교회- 2천 교회 지향.
(6) 침례교 연맹- 1천 교회 운동.
(7) 나사렛교회- 5백 교회를 목표하여 성장 운동을 펼쳤다.
이렇게 교단마다 교회 성장 운동이 불일 듯 일어났다.
3. 한국교회의 세계선교에 대하여 쓰라
[답] 한국 교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 임무를 다하였다. 1907년 장로교 독노회 조직 시에 7명의 첫 목사중 이 기풍 목사를 제주도에 파송 하였고. 1912년 총회 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 하였다. 감리교 역시 만주지방 선교에 노력하였다.
1970년대에는 각 교단과 교회들이 선교 열의에 가득하여 일본, 인도네시아, 대만, 필리핀, 홍콩, 태국, 파키스탄, 중동, 사라와크, 구암도, 멕시코, 남미 각국, 서독, 이집트 등 세계 각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역수출하는 입장이 되었다. 한국 교회의 조직이 선교하는 교회로서 출발하였고, 지금도 그러한 모습으로 전진하고 있다. 현재(2001년 2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는 9.13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예장 합동측 총회가 1.027명, 통합측 총회가 629명. 개혁측 총회가 453명, 기성 총회가 338명, 기감이 321명, 기침이 296명, UBF가 1.517명을 파송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군소 교단 및 각 개 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 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지역별로 분류해 보면 중남미에 584명, 북미에 1.130명, 아시아에 3.049명, 아프리카에 597명, 유럽에 1.125명, 중동에 125명, 태평양 연안에 271명, 비공개 1.042명, 중국에 315명, 현지인 240명으로 되어 있다.(한국세계선교협의회 집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