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믿는것과 안믿는것

[제목] 믿는다는 것과 생각한다는 것

김태규 교수

Ⅰ. 생각한다는 것

1. 본다는 것

우리의 삶이 문제투성이 인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본다는 것”이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다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것을 대상화하여 거리감을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자기 환경에 맞는 전문적인 육체의 기관기능을 가지고 나오는 뛰어난 존재이지만, 어떤 것을 대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이러한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자기 자신 뿐 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조차도 대상화하여 거리감을 취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사유하기를 포기한다면 바로 인간이기를 그만 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소외다.

“본다는 것”, 그것은 우선 그 “기본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그 “기본 조건”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제 “본다는 것”의 “기본(基本) 조건(條件)”은 무엇인가?

먼저 “본다는 것”, 그것의 “기본 특성”부터 살펴보자.

우선 “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또는 세상 사람들이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스스로 그리고 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다는 것”이 갖는 첫째 기본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다는 것”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 앞에 “주어져 있는 것”, 그것을 문제 삼아야 하고, 그것만을 문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본다는 것”이 갖는 둘째 기본 특성이다.

다음으로 “본다는 것”, 그것의 “기본 조건”을 살펴보자. 본다는 것은 첫째로 “여기서”또는 “저기서” 보게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또는 “저기서”라고 하는 자리 내지 장소는, “본다는 것”에 있어서 그 첫째 “기본 조건”이다. “본다는 것”은, 둘째로 “이전에”또는 “이후에”라는 것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전에”또는 “이후에”라고 하는 시간 내지 때는, “본다는 것”에 있어서 그 둘째 “기본 조건”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본다는 것”은, 셋째로 하나의 “시야”를 가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 자체가 하나의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시야” 속에 있는 것만을 볼 수 있다. “눈의 시야(視野)”, 그것은 “본다는 것”에 있어서 셋째 “기본 조건”이다.

그리고 우리 “시야”를 벗어나 그 밖에 주어져 있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다른 사람이 자기 “시야”에 주어져 있는 것을 그가 스스로 보고 난 후에, 우리에게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만일 다른 사람이 말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시야”를 벗어나 그 밖에 있는 사물이나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여기서 전적으로 무력할 뿐이다. 그리하여 “본다는 것”,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듣는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주어져 있는 것”그 자체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그자체로 제한되어 있고 한정되어 있기 - 여기서 또는 저기서, 이전에 또는 이후에 그리고 시야-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대화”라고 한다.

2. 생각할 만한 대상

우리는 ‘생각한다는 것’ 속에서 두 가지 계기를 얻어 만난다.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어지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가 라고 물어야할 것이다. 도대체 생각해 볼만한 문제란 어떤 것인가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1) 내가 여기 있다(Ich bin da)는 사실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이 현존(Dasein)은 데카르트에서처럼 논리적으로 물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묻지 않아도 그냥 그대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해 볼만한 첫 번째 대상(人間)이다.

2) 두 번째로 주어져 있는 것은 나 자신 외에 ‘다른 것’이다. ‘내’가 주어져 있다면 나이외의 ‘다른 것’ 역시 주어져 있는 사실이다. 이것은 생각해 볼만한 두 번째 대상(世界)이다.

3) 인간과 세계가 무엇인가? 라는 탐구는 우리는 인간과 세계의 원리와 근원에 이르게 한다. 인간과 세계 즉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의미 있게 하는 근거로서의 ‘절대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본원적인 사유의 대상이 된다. 역사는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여 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만한 문제는 위 세 가지 대상 즉 '인간', '세계',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비판적인 의식을 가져가는 것이 바로 철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 결과가 인생관과 세계관이다.

Ⅱ. 믿는다는 것

1. 의미

“나는 믿나이다”라는 말마디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기본적 태도 선택이다. 이 말은 이것 또는 저것에 대한 확인을 뜻하지 않고 존재와 소유와 현실전체를 대하는 태도의 기본 형태를 뜻한다. 이 말은 보이지 않는 것, 시야에 들어올 수 조차 없는 것이 비현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현실이라는 태도선택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을 유지하고 가능케 하는 현실이라고 보는 태도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현실을 가능케 하는 그것이 인간에게도 참으로 인간다운 존재를 베풀어주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고 인간으로서 존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태도선택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뜻하는 태도선택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만으로 살릴 수도 유지할 수도 없는 중심이 인간 실존한 가운데에 있어, 그 중심이 불가시의 현실에 부딪침으로 비로소 불가시의 현실이 감촉되고 바로 존재자체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소위 회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가시적 세계로 기울고 손으로 만지고 자기 것으로 움켜쥘 수 있는 세계로 쏠린다. 그럼으로 실존적인 회심이 없이는 이러한 타고난 본성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 믿음이란 바로 회심 즉 실존의 전회이고 오직 스스로를 돌이키는 사람만이 믿음을 얻는다.

어떤 의미에서 믿음은 본래 그 자체가 모험적 결단이며 도약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어느 시대에서나 불가시 세계를 참 현실로 여기고 근저로 삼으면서 감연히 삶을 뜻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간존재의 성향을 그대로 따라 취해진 태도는 결코 아니다. 믿음은 본래 실존을 송두리째 걸고 내려야하는 결단이었고 여기에는 결심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회심이 항상 요구되어 왔다.

2. 믿음의 딜레마(dilemma)

가. 어제와 오늘

가시와 불가시사이의 문제에서 어제와 오늘사이의 심연이 다가온다.

믿음은 전통의 옷을 입고 있으나 전통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자리를 진보의 이념이 빼앗아 버렸다. 전통은 벌써 끝난 어제의 일이고 오히려 진보가 인간존재의 참된 기약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오늘의 인간은 전통이나 과거가 아니라, 진보와 미래라는 곳에 사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만 해도 현대인에게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나타나는 신앙이라면 이미 극복되고 파기된 그 무엇으로 보일 수밖에 없고 미래를 본연의 과제로 알고 자기 발전의 길로 보는 현대인에게는 전통이 실존의 터전을 열어주지 못할 수 밖에 없다.

나. 과학적 기본태도

모든 것을 현상으로 드러나고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국한시키고 이런 태도는 우리의 존재감을 좌우하고 현실 안에서 차지할 바 우리의 위치를 정해 준다. 이제 우리는 사물의 숨은 자체를 찾고 존재 그것의 본질을 파고드는 일은 포기했다. 현실을 보는 것으로 국한한다.

ㄱ) 역사주의의 발단

verum est ens : 존재는 진리다. (고대 중세)

verum quia factum : 사실이 진리다.(근대 이후)

우리에게 진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란 우리 스스로가 이루어 놓은 (만들어 놓은)것뿐이라는 뜻이다. : 사실이라는 육지

ㄴ) 기술사고로의 전환

verum quia faciendum : 진리는 이제부터 이룰(만들)수 있고 이루어야 할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진리는 존재의 진리도 아니며 인간이 겪은 사살들의 진리도 결국 아니고 세계혁명의 진리요, 세계형성의 진리, 즉 미래와 행동에 관련된 진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의 바탕이 되어주는 뜻에 의존하고, 이 뜻을 아무 두려움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땅으로 받아들임을 말한다. 좀 더 전통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만물의 수여자이며 유지자 즉 말씀(로고스)에 대한 응답으로 알아듣는 일이다.

Ⅲ. 믿는다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의 관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어야하고, 믿기 위해서는 이해하여야한다."

1. 생각함의 초월

가. 참된 것

우리 인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성으로 “참된 것”을 찾아 나선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밖으로”나가서 감각적인 사물 속에서 “참된 것”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감각적인 사물은 변한다. 지나산다. 그리고 결국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 속에서 “참된 것 자체”를 얻어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는 둘째로, 우리 자신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리 안에는, 즉 우리 의식 속에는 감각적인 사물들의 이상들과 형상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쉽게 변하고 없어지는 감각적 사물보다는 오래 견딘다. 그것들은 지속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식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변한다. 그리고 지나가 버리고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속에서도 “참된 것 자체”를 얻어 만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는 셋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마저도 “뛰어넘게”된다.

이때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참된 것 자체”가 그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 준다. 그 “조명”으로 우리를 밝혀 준다. 그 때문에 그리고 바로 그 덕택으로 우리는 “참된 것 자체”, “진리 자체”를 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다.

나. 선한 것

우리 인간은 또한 “선한 것”을 찾아 나선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첫째로 우리는 우선 우리 “밖으로”나가서 감각적인 사물 속에서 “선한 것”을 찾아내려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쾌락을 향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쾌락과 저러한 쾌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 속에서 결국 우리는 지치고 만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각적인 사물들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쾌락 속에서는, “선한 것 자체”를 얻어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는 둘째로 우리 자신 “안으로”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절대적으로 성실해질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모든 힘을 다 쏟아 붓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는 셋째로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와 “하나님을 사랑하기”사이에서 최종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머지 하나님까지도 미워하게 만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게 만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사이에서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나머지 하나님마저도 그때그때마다 뒤로 미루는 그러한 최종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기”쪽을 선택한 사람은 구원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쪽을 택한 사람은 구원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바로 인간의 행복이 달려 있는 “선한 것 자체”를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다. 인간 스스로 그리고 자기 힘만으로는 결단할 수가 없다. 그것은 “선한 것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 손을 내밀어 줄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선한 것 자체”인 “하나님”이 그의 “은총”으로 도와 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