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연구, 목회 윤리
머리말
본인은 대학원에서 4학기를 강의하는 동안 어느 학자가 만든 textbook을 사용하여 강의하지 않고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강의안을 가지고 강의를 해 왔다. 그리므로 학생들에게 소개할 textbook이 없었다.
다만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학생들에게 나의 강의 파일을 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학생들 가운데서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혹 컴퓨터가 있을지라도 자유롭게 가지고 다니면서 볼 수 없는 단점이 있기에 4학기 강의를 한권에 책으로 만들어 나의 과목의 textbook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물론 나의 이 textbook은 논문을 쓰기 위한 양식을 취하지 안 했다. 내가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각주를 달거나 참고도서 목록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특히 성경의 삼대주제 같은 것은 참고도서를 약간 사용하고 거의 성경만을 사용했음을 실토하는 바이다.
글을 쓸 때 참고도서를 많이 사용한다는 것과 각주를 다는 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것들이 주관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객관화된 주장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타인이 쓴 글을 마치 나의 글인 것 같이 도용하는 학자의 양심을 버린 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안다.
그러는 의미에서 본인의 글은 그 주장에서 약간의 객관성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며 어느 부분에서는 나의 주관적인 주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주관적인 주장일지라도 성경 안에서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 뜻을 굽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끝으로 나의 이 글이 나오도록 미련한 자에게 지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족하나마 나의 강의를 들어준 나의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감사하고 늘 그림자같이 나의 곁에 함께 하는 나의 아내에게 감사한다.
늘 아들이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나의 어머니와 나의 여식아이 애리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하는 바이다.
상마교회
한 정 길 목사
성경 해석학
머리말.
우리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을 조사해 보면 목사가 되려고 공부를 하는 자들과 단순히 하나님의 지식을 얻고자 신학을 공부하는 자들이 있다. 대부분 단순히 하나님의 지식을 얻고자 하던 신학생들은 신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더 이상의 진학을 하지 않고 평신도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목사가 되고자 하는 신학생들은 목사는 되는 과정을 하기 위하여 신학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된다.
물론 과거에는 신학교를 졸업하면 강도사 고시를 볼 수 있었고 강도사 고시에 합격한 자들은 목사고시를 거쳐 목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단들에서는 목사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신학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자에 한에서만 강도사 고시와 목사 고시를 통해서 목사가 되게 한다.
본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신학대학원에 들어온 자들 모두는 목사가 되고자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들은 신학대학원의 과정을 이수하고 총회에서 실시하는 강도사 고시를 합격한 후 노회에서 실시하는 목사고시에 합격한 후 목사의 안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고 훌륭한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다. 있다.
첫째: 목사는 하나님의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자로써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기 위하여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목사는 가르치는 대상이 사람임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가르치는 방법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 목사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자로써 오늘날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하나님은 인간에 추상적인 사고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며 실존하시는 하나님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마귀하고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영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넷째: 목사는 성도들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로서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서 훌륭한 인격이란 윤리적(인간으로써 지켜야 할 도리)으로나 도의적으로(선을 지향하려는 마음과 행동) 완벽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 본인과 여러분들은 훌륭한 목사로서 갖추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기 위하여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하는 방법을 연구하려고 한다.
성경을 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며 또한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하나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되었고 중세 시대의 우리 기독교도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함으로 수많은 악행을 범했다.
근세에서도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흑인 노예 제도를 합법화 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성경을 대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단을 만들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며 비록 이단이라는 이름을 갖지 안 했어도 성경의 해석이 잘못됨으로 성도들을 잘못 인도하며 구원에 길을 막으며 하나님의 뜻과 정 반대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 필자는 바른 성경 해석법이 필요함을 느끼고 이에 따른 글을 쓰려고 무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지식에 있어서 부족한 필자로서는 늘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신학교의 강의의 부탁을 받고 글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부족한 글이 탄생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하여 다른 성경 해석학자들의 글을 보았다.
그들의 글 가운데서는 필자가 그대로 인용한 글도 있고 약간 변형을 가지고 인용한 글도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성경 해석방법은 기독론적 해석 방법이다.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에 비추어 연구하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가 모든 성경을 완전히 해석하는 연구방법은 못 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범하는 성경 해석을 막는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 바이다.
필자는 이 밖에도 올바른 성경 해석을 위하여 필요한 해석 방법을 다른 성경 해석학자가 연구한 그대로 또는 약간의 수정을 가해 글을 쓰려고 한다.
부디 성경 해석 방법을 찾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유익이 되었으면 한다.
Ⅰ.서론
1. 성경 해석학의 중요성.
하나님의 일꾼으로 성도들을 인도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교육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일 것이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합당한 사람으로 그 성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인도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합당한 사람의 성품도 갖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바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지식을 완전하게 계시하여 준 성경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적인 소설과 같이 읽는 것으로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이 필요한 책이다. 그리고 성경 해석에 있어서 잘못 해석하는 경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많은 영혼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됨으로 바른 성경해석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 해석을 위한 연구를 위한 학문인 성경해석학은 참으로 중요한 것 중에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2.성경 해석에 대한 용어의 정의
성경 해석과 연관되어 사용되는 학문은 성경해석학, 성경주석학, 성경주해학, 성경강해학등이 있다. 여기서 성경해석학을 빼고는 서로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간략한 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모든 정의가 그렇듯이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느냐에 따라서 종합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성경 해석학의 정의
성경 해석학 (Biblical Hermeneutics) 은 성경의 해석의 원리, 법칙 ,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성경 해석학은 흔히 학문(science) 과 예술(art)을 조화시킨 학문으로도 정의를 하는데 성경 해석학이 학문이라는 뜻은 성경해석학이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법칙 적용에 있어서 융통성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이고 딱딱한 법칙 적용은 오히려 성경본문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훌륭한 성경해석 자는 해석의 법칙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법칙을 적용하는 예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2)성경 주석의 정의
성경 주석이란 영어로 Biblical exegesis, Biblical commentary 사용되는데 여기서 exegesis는 주석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commentary는 주석 책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exegesis는 헬라어 έξήγησις로부터 온 것으로 그 의미는 “설명하다, 이끌어 내다” “인도해 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주석학은 성경의 본문을 연구함으로 저자가 본래의 수신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끌어 내는 작업을 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3)성경 주해학.
성경주해학은 주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될 경우도 있고 강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주해학은 주석처럼 한 단어 한 구절만을 설명하지 않고 문단 전체를 설명하되 본래 저자가 본래 수신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찾는데 강조를 두는 학문이다.
4)성경 강해학.
강해는 영어 표현으로 Exposition이다. 그리고 강해 설교는 Expository Preaching 이라고 한다.
강해는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기를 원하는지 찾아내는 것이다. 강해는 성경 본문에 뜻을 왜곡시키지 않으면서 성경의 본문의 뜻을 현 시대에 적절하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종(δουλος)이란 용어의 강해는 해석자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의 개념, 즉 집안에서 부리는 하인 정도의 개념의 종의 개념이 아니요, 오히려 노예의 개념과 같은 것임을 현대 독자들에게 설명해 주는 작업이다. 즉 강해는 성경의 내용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하는 데 더 강조를 두는 것입니다.
Marshall은 주석과 강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주석은 성경이 무엇을 말했는지(said)를 찾는 작업이고
강해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says)찾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3 성경 해석학의 필요성.
1)일반적인 소설과 같이 읽는 것으로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8:26~35절 말씀을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권세가 있는 내시가 이사야서 53절을 읽고 있었으나 그 뜻이 무엇인지 몰랐다.
2)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다가 잘못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HAN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억지로 해석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우리 인간들이 알 필요가 없는 부분이 있다.
계시록은 10장 4절을 보면 우뢰가 발할 때의 그 일곱 우뢰의 비밀을 사도요한이 기록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기록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했다. 즉 그 부분의 비밀을 우리 인간이 알 필요가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성경을 보면 우리 인간이 알 필요가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HAN 계 10: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그것을 우리가 억지로 해석을 하려한다면 문제가 되며 멸망의 이르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종말에 대한 시간이다.
종말에 대한 시간은 우리 인간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종말의 시간을 몹시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그 날짜는 아들도 모른다고 하시며 가르쳐 주기를 거절했다.
물론 여기 삼위일체 되시는 우리 예수님께서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종말에 대한 모든 비밀이 예수님의 의하여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되고 마지막 심판장으로 종말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날짜를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날을 모른다고 하시면서 그 권한이 아버지에게 속해 있다고 하시며 가르쳐 주시기를 거절했다.
마지막 승천할 때도 그 날을 알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과 그 시를 가르쳐 주시기를 거절했다.
참고:
[HAN 행 1:7]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그러나 그 날과 그 시를 가르쳐 주는 대신 그 날이 갑작스럽게 임할 것이니 늘 깨어서 바른 신앙을 하라고 했고 성령이 임하며 권능을 받고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즉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열심히 하라고 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시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지 않은 것은 우리 인간이 그 날과 그 시를 아는 것이 아무런 유익이 없고 도리어 혼란이 야기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종말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진정 구원에 유익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늘 종말을 대비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종말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진정 구원에 유익 된 것이라는 것이다.
(2)잘못된 해석: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단들이 많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늑대요 신앙의 강도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잘못 해석하며 사람들의 구원에 길을 막는 무리들이다.
이들 특히 여호와 증인 가운데는 성경 말씀을 많이 보는 자들이 있는 것 같다. 그 증거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 빽빽이 줄이 그어진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바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에 앞잡이가 되어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3)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HAN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목회자에게 자장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작은 교회에서 적은 사례비를 받고 목회 하는 것인가?
그런 것은 도리어 자랑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인가?
여기 교회 부흥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부흥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그러나 많은 교인을 인도했다고 큰 교회에서 목회를 했다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만은 아니다.
성경을 보며 노아는 자신의 식구만을 구원했어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보다 하나님께 부끄러운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거짓 진리에 빠져 하나님께서 맡겨준 하나님의 양을 마귀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필자 신학교에 다릴 때 나이 먹은 신학생이 한 분 계셨는데 필자의 친구의 말로는 그분이 전에 목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한번 목사가 되신 분이 어찌 다시 신학을 하느냐고.. 그러자 친구에 말은 그분이 목사로 있을 때 전도관에 빠져 성도들을 데리고 전도관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후 말씀에 분별력을 다시 찾고 자신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성도들과 같이 나오려고 했는데 이미 전도관에 빠진 성도들은 함께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통감하고 다시 신학을 1학년서부터 다시 하게 되었고
목사라는 직분도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 목회자의 가장 부끄러운 것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을 갖지 못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부끄러운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성경 해석학을 배울 필요가 있다.
4.성경 해석의 권세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성경의 바른 해석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성경의 바른 해석만이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에 길을 바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해석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혼동을 줄뿐만 아니라 구원에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은 아무에게나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에 우리는 성경 해석에 대한 권세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1)성경 해석 권세는 교회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 해석 권세는 오직 교회에만 있고 개인에게는 주어지지 안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교에서 주장하는 주장이다.
처음 가톨릭교에서 성경해석 권세는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으로
평신도들이 성경을 소장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기에 성경을 처음 영어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보급하려고 했던 틴젤을 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을 회부하여 사형에 처했던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가톨릭 교인들도 성경을 소장하고 읽을 수 있으나
여전히 그 성경을 해석할 권세는 교회에만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만 있다는 것은 교회 최고회의 추기경 회의 또는 교회의 수장이라고 보는 교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 신부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게 한 것도 그레고리1세(540~)의 성경해석에 따른 것이며, 그토록 우상에 대하여 철저하게 반대하여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반대하여 죽음으로 대신했던 우리나라의 가톨릭교회가 오늘날 제사하는 것이 허용된 것도 교회의 수장이라고 하는 교황의 성경 해석 권세에 따른 것이다.
2)성경 해석 권세는 하나님께 신비한 힘을 받은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만이 성경 해석의 권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성령의 감동을 신비한 힘으로만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을 보면 성령의 신비한 힘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성경을 바로 해석한 아볼로를 보여주고 있다.
[HAN 행 18:24~27]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3)성경 해석의 권세는 아무나 성경 해석자의 자격 요건이 갖추어진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경 해석 권세는 아무나 성경 해석자의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으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개신교에서는 평신도들에게도 성경 읽기를 권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개인의 성경 읽기를 통하여
아무렇게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금하는 것이
좋다.
5.성경 해석자의 자격 요건.
베드로는 성경의 해석자로 무식한 자나 굳세지 못한 사람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며 성경의 해석자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성경을 해석하다가는 도리어 멸망에 이르는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 성경 해석자로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1)무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식하면 학벌이 적은 사람을 말한다. 역시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도 이러한 관점에서 베드로를 무식한 사람으로 보았다.
[HAN 행 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무식은 학벌에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분별력이 없는 사람을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력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2)완고하지 않아야 한다.
완고함이란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잘못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주장 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은 분명 상대의 말이 옳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과 논쟁을 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지 못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그릇된 신념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구약 성경을 많이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을 거절한 것이다.
종교 개혁자 칼빈도 성경을 연구하다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가톨릭 교리의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벗어나기가 어려웠었다고 고백을 했던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완고함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해석자는 언제나 바른 교훈을 받게 되며 자신의 그릇된 주장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3)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고정관념이란 오랫동안 참으로 믿어왔기에 참된 것으로 고정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고정관념에는 그릇된 고정관념이 많다. 과거에 여자들은 요물이며 재수 없는 자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생각할 때 과연 그런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고정관념 속에 놓여진 성경해석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소돔의 멸망의 주요 원인이 동성애에 있다는 해석을 함으로 오늘날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막아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해석자 역시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바른 성경 해석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성경이 하나의 참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분명히 믿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참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때 그 해석 역시 일반적인 서적을 해석하는 것과 차별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의 해석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절대 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른 성경 해석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은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5)진리를 찾기를 갈급 하여야 한다.
[HAN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진리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참 진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자가 얻는 것이다. 성경은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성경에 진리를 열심히 찾고자 하는 자가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해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6)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자 하여야 한다.
[HAN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식을 바로 안다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 인간의 지혜가 많다고 했던 헬라인은 진리를 미련한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해석자는 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퀴나스 역시 성경의 난해한 구절을 만나면 기도하며 때때로 금식을 하였다고 한다.
이토록 성경 해석자는 하나님께로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를 받도록 해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서 바른 해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서 얻었다는 해석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얻는 그릇된 해석일 수 있기 때문에 바른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 바른 분별력은 하나님의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얻어지는 것이다.
5.성경 해석자에게 필요한 도구.
1.성경.
성경해석의 가장 필요한 도구는 성경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이 성경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원어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면 성경 해석에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원어성경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많은 번역 성경을 볼 수 있다면 성경해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길 바란다.
2.훌륭한 성경 해석자들의 가르침.
저는 목회자 자료집 CD를 만들면서 이러한 글을 섰다. 아무리 훌륭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아무 사전에 지식 없이 비행기를 만들라고 하면 장난감 이상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남이 연구하여 놓은 비행기에 대한 사전에 지식 위에 나의 한 가지 지식을 덧붙인다면 훌륭한 로케트 이상의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자료집에 있는 설교든 신학이든 그것을 소화하고 거기에 내가 깨달은 지식을 조금 첨가한다며 훌륭한 설교가든 신학자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성경 해석자들의 가르침을 소화하여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고 추가할 것은 추가할 때 훌륭한 성경 해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길 바란다.
3)성경 해석자들을 위한 토론장.
사람이 완고한 외골수에 빠지지 않으려면 주입식 교육에 장에서 일방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보다는 충분히 여러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토론식 교육의 장에서 교육받고 연구하여야 한다.
성경 해석 역시 다양한 방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의 주장을 주입식으로 교육받고 연구함으로 외골수 적인 성경해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Ⅱ.일반적인 여러 가지 성경 해석 원리
1. code 식 성경 해석 방법
성경은 은밀한 code로 되어 있음으로 code를 해석하는 방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경의 문자를 일정한 간격과 또는 대각선 등으로 보면 인간의 미래에 중대한 비밀들이 code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code를 해독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께서 조금도 언급하거나 암시한 적이 없음으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반응은 이러한 해석방법은 거론할 가치가 없는 해석으로 생각하고 있다.
2.우화적 해석 방법.
1)우화적 해석 방법이란.
성경의 문자나 명백한 사실아래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다고 보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성경 저자는 역사적인 형태 아래서 어떤 메시지를 말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우화를 만들어 삽입했다는 것이다.
2)성경의 어느 부분을 우화적으로 보고 해석해야 하는가?
성경 전체를 우화적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 어느 부분을 우화적으로 보고 해석한다는 말인가?
우화적 해석 방법을 논하는 자들은 우화적으로 보아야 할 부분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1).어떤 진술이 표면적으로 하나님께 하등의 가치도 없는 사실을
언급하는 경우.
(2)어떤 진술이 바른 진술과 모순이 되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문제점을 안겨다 주는 경우.
(3)기록 자체가 본질적으로 우화인 경우
3)우화적 해석의 문제점.
(1)우화적 해석들은 주석상의 순수한 역사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2)실제로 성경에 문자와 역사적인 사실 속에 우화적인 부분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3)우화적 해석과 모형적인 해석을 혼동하는 경우를 만든다.
3.영적 해석 방법.
1)영적 해석이란
이 해석 방법 역시 우화적인 해석 방법과 같이 성경의 문자나 역사 속에 다른 뜻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화적인 해석과 다른 점은 우화적인 해석은 성경의 일부분이 사실이 아닌 우화를 교훈을 주기 위하여 삽입되었다고 보는 방면에 영적 해석은 성경이 우화문학의 형태로 나타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성경의 문자와 사실은 그대로 인정하는 가운데 다른 뜻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해석이다.
2)영적 해석의 힘.
오늘날 많은 분들이 영적 해석에 호감을 갖고 있다. 특히 부흥회를 인도하는 분들 가운데서 많이 사용하는데 영적 해석은 마치 표면적인 성경의 문자와 사실 이상의 비밀을 밝혀낸 것 같은 느낌을 줌으로 호소력이 있다.
물론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반대되지 않을 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삼가야 할 해석방법이다.
예: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의 비유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신앙이 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강도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며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은 도움을 줄 수 없으나 즉 율법으로는 도움을 줄 수 없으나. 도움을 준 것은 사마리안 인으로 이름 없이 무시당하는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관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며 강도 만난 자에 대한 돌봐준 보상은 다시 와서 갚아주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교회에 대한 상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는 해석이다.
이 영적 해석은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과 반대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야기하신 것은 이웃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비유에 불과한 것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참된 이웃이란 혈통이 같고 , 같은 무리가 라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는 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참된 이웃이 되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3)영적 해석의 문제점
영적 해석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음으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성경해석 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럼 영적 해석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1)영적 해석은 객관적인 해석이 아님으로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상이한 여러 해석을 낳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2)이 방법은 해석자의 이익을 위하여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단들이 즐거이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되었다.
예: 이단들이 즐겨 사용한 ‘피 가름 법칙,
4.합리적인 해석 방법.
1)합리적인 해석 방법이란.
모든 학문은 합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인 해석은 성경의 문자나 사실이 오늘날 우리들의 지식의 합리성에 맞지 않으며 부정되어야 하며 모든 성경 해석은 우리의 합리성에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물위에 걸어가셨다는 사실을 말씀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거나 물가를 걸은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창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호감을 줄 수 있어도 참신한 신앙을 가진 신앙인에게는 거부되는 성경 해석 방법이다.
2)합리적인 해석 방법의 문제점.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합리성에 억지로 끄집어 맞추려는 생각은 아주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5.모형적 해석 방법.
1)모형적 해석 방법이란.
많은 사람들이 모형적이 해석 방법을 우화적인 해석 방법과 영적 해석 방법과 혼동하여 생각한다. 그러나 모형적인 해석 방법은 우화적인 해석 방법과 영적 해석 방법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모형적인 해석 방법은 성경의 문자와 사실이 어떠한 실체의 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형적인 해석 방법은 히브리서를 기록한 기자가 즐거이 사용한 방법이다.
[HAN 히 1:1~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또한 예수님께서도 즐거이 사용하신 방법이다.
2)성경에 나타난 모형적 해석 방법의 사용
모형적이란 참된 실체를 보여주기 전에 미리 만들어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사용된 모형적인 해석은 메시야와 그의 사역의 대한 예언의 성취를 증거 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 모형적인 해석은 참된 실체와 비교하지 않고는 바른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참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의 출연으로 가능하게 된 해석 방법이다.
3)모형적 해석의 문제점.
모형적인 해석은 참된 실체와 비교하며 해석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형적 성경해석의 문제점은 성경 어느 부분은 모형적 해석으로 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6.문자적 해석 방법.
1)문자적 해석 방법이란.
일반적으로 보수 학자들과 성경 주석가들이 즐거이 사용하는 해석방법으로 우화적, 영적, 합리적인 해석을 배제하며 성경의 단어와 문장과 문맥에 중점을 주고 해석하는 방법이다.
2)문자적 해석 방법의 원리.
(1)한 단어는 그 단어를 품고 있는 문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문장은 그 문장이 포함하고 있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비슷한 주제를 다르고 있는 성경 구절은 피차 검토되어져야 하며 어떤 경우에는 제 3의 구절이 두 구절 사이의 외견상의 모순을 해소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명백한 구절과 애매한 구절이 같은 주제를 다르고 있을 경우 명백한 구절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4)절차와 문법과 언어와 상징에 세심한 주의를 하여야 한다.
(5)문자주의는 자구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자주의란 문맥을 통하여 그 의도하는 참된 뜻을 찾으려는 노력에 반하여 자구주의는 성경의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네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버려라. 에 대한 해석으로 문자주의에서는 범죄 하는 행위는 내게 귀중한 것이라고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구주의는 문장 그대로 범죄 하는 손을 그대로 자르라는 것이다.
3)문자적 해석의 방법의 문제점.
문자적 해석의 만으로 성경을 완전히 해석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특히 사실과 상징 속에서의 예언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문자적인 해석은 불가능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 우리는 모형적인 해석과 문자적인 해석을 적절히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Ⅲ. 기독론적 해석 원리.
1.기독론적 성경 해석의 방법이란?
기독론적 해석 방법이란 모형적 해석 방법과 문자적 해석 방법을 사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추가적으로 사용된 해석 방법이다. 이 해석 방법은 모든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성경 해석 방법으로 필자가 강하게 주장하는 해석방법이다.
[HAN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기독론적 성경 해석 방법은 모든 성경을 예수님과 관련지어 연구하는 방법으로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
◎.우리 인간에게 왜 예수님의 구원에 역사의 필요한가?
◎.예수님의 구원에 역사는 어떻게 베풀어지는가?
◎.예수님의 구원에 역사는 분명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등, 을 모든 성경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을 비교하여 연구하는 방법이며 참된 진리를 찾아내는 방법이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진리에 대하여 많이 말을 한다. 그러면서도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 진리는 무엇인가?
기독교 진리에 대하여 한번 정의를 내려보자.
성경은 주의 모든 계명이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HAN 시 119:151]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정죄 할 때 사용한 유대인들의 율법도 진리인가? 아니다.
성경은 주의 말씀 즉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한다.
[HAN 시 119:16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 하리이다.
[HAN 요 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런가?
그렇다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용된 성경의 말씀도 진리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율법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도 잘못 해석되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은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했다.
[HAN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경은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했다.
[HAN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성경은 진리가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의 것을 종합하여 볼 때 진리란 하나님의 법과 말씀을 참 진리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에 비추어 해석하여 얻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 해석을 통하여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기독론적인 성경 해석 방법을 택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2)성경해석에 있어서 기독론적인 해석을 배제했을 때 나타나는 문제점
성경을 보면 성경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관련지어 성경을 연구하지 안 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과 관련지어 성경을 연구했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했을 것이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성경을 가지고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하여 왔는데 그것도 역시 기독론적인 성경 해석을 하지 안 했기 때문이다.
또 청교도의 후손이라고 자부하던 저 미국 사람들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며 그들의 인권을 밟아버린 것도 성경을 기독론적인 해석을 하지 안 했기 때문이다.
3)기독론적 해석법의 장점.
(1)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찾아 준다.
성경이 사람들의 손으로 기록되었을지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성령의
완전한 영감으로 기록된 것으로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율법에 따라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만 사랑하고 이방인들은 싫어하는 차별을 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하게 몰랐던 것이다.
여기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기독론적인 성경 연구의 접근이 필요하다. 즉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HAN 요 14:8~9]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곧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한 위의 하나님으로 인간의 모습을 입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오늘날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성경을 기록할 당시와 판이하게 다른 것들이 많이 있다.
시대적인 관습의 변화, 과학의 발달, 등 많은 변화가 있다. 기독론적인 성경 해석을 하지 않으면 중세시대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범하게 된다.
중세시대에 갈릴레오가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을 했을 때 기독교 종교회의는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있는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만들었는데 그것이 무슨 소리냐 하며 그를 정죄하였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주장하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시인함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할 때 이 종교회의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론적 해석을 하지 않으면 급변하는 세상의 이러한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고 심지어 구원에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길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명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앞으로는 가정의 형태도 지금의 형태하고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이 아니라 남자와 남자와의 결혼 여자와 여자의 결혼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 있었던 일인데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는데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점점 아내와 사랑이 식어져 끝내 이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남편 되는 사람이 아내에게 위자료를 적게 주고 싶어서 아내의 과거의 허물을 조사하게 되었고 아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에게 위자료를 주는 것 보다 자신이 속았기 때문에 위자료를 받아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이 세상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날 것이다.
전에 TV에서 한 성전환자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가운데서 호적을 몰래 고치고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성전환 한 남자가 목사의 사모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면 정죄되지 않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육상선수였던 한 여자가 강도의 의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검을 하게 되었는데 그 육상선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는 것이다. 그 육상선수는 외모로 보나 또 그의 외적인 성기를 보나 분명히 여자였으나 그 몸속에는 남자의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 육상선수는 자신이 남자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죽었던 것이다. 이 여자가 남자와 살 때 그는 정상적인 이성애 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과학이라는 것이 발전됨에 따라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하며 세상을 급속히 변화를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신앙의 답을 해야 한다.
◎.동성애자를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미국의 장로교회가 동성애자 안수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일어나 분열의 조짐을 보인다는 것을 기독교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다니는 교회가 있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기독교 동성애자들의 사이트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목사님께서 동성애자들을 위한 교회를 비공개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답을 해야 하는가?
물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과 비추어 해석하는 기독론적 해석을 한다면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전환을 인정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도 한 남자가 여성으로 성전환하고 이름을 하리수라 개명하고 연예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적지 않은 토론이 있었다.
모 목사님께서 토론장에 나가 남자가 여자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 대항하는 것으로 당연히 잘못된 것으로 말했다.
이에 대하여
문화선교 보냄과 세움 대표인 박양식 목사가 기독교계 인터넷신문 뉴스앤조이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제기했다. 박목사는 하리수로 대표되는 트랜스젠더들이 사회 전면에 등장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의 관점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 문제는 역사의 전환기에 하나님의 뜻을 좀더 헤아려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그는 트랜스젠더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의견이 있으나 하나님의 질서는 몇 사람의 파괴적 행위로 무너지지 않으며, 아담과 하와의 타락 때부터 무너진 것이라고 했다. 또 성전환이 죄악이라면 성형수술을 하거나 의학적 처방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어 유대인들은 선천적 소경을 죄인으로 취급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며 성 정체성을 고민하며 사는 자를 일방적으로 죄인 다루듯 하는 것은 유대인의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박 목사는 인간적 고뇌 속에서 선택한 인생이기에 성전환을 문제 삼다가 사람을 놓치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며 혹시 교회에 와서 등록할지 모르는 트랜스젠더를 위해 교적부에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는 난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한윤정기자〉
과연 여러분은 이러한 일에 대한 신앙의 답을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과 비교하는 기독론적 성경 해석을 선택한다면 답이 나올 것이다.
◎.인위적인 산아제안을 인정해야 하는가?
◎.시험관 아이 출생은 인정해야 하는가?
◎.수혈을 인정해야 하는가?
◎.여자 안수 문제를 받아 들이야 하는가?
등등.
이에 대한 신앙의 답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문자적인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도 쉽게 답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론적인 성경 해석으로만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4)기독론적 성경 해석 방법
기독론적인 성경 해석의 방법은 앞에서 언급을 했듯이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에 비추어 해석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론적 성경 해석을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을 연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과 사상을 면밀히 연구하려면 예수님의 전기라고 볼 수 있는 사 복음서를 통하여 가능하리라고 본다.
우리는 이 사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을 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을 연구하여 보자.
(1)예수님의 말씀 이해
예수님의 말씀은 대부분 명확하게 증거 되었으나 어떠한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이제 그 난해한 부분을 연구하여 예수님에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 시간 우리는 자칫 오해하기 쉬운 난해한 부분과, 과장적 표현과, 비유에 대하여 연구해 보자.
A. 예수님의 말씀 중 난해한 부분.
*예*
◎.[HAN 마 5:34~37]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 구절은 교회역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극히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맹세하는 것을 일체 거부하였다. 만일 맹세를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렸을 때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말씀에 대하여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 자신의 생활에서 맹세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즉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지 안 했던 것이다.
[HAN 고후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HAN 갈 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HAN 빌 1: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맹세를 도무지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 보다 맹세의 남용을 막으려고 강조하신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말에 절대로 진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HAN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HAN 마 5:27~28]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전에 신학교에 다닐 때 한 학생의 교수에게 물었다.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 죄입니까? 그러자 그 교수는 죄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음행에 대하여 생각만 해도 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그런 의도에서 하신 것인가?
그렇다면 건강한 남성들은 모두 간음을 범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또 미워하는 것도 살인을 범한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감성은 가진 인간으로 미움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예수님의 율법에 재해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문맥을 통하여 이해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재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HAN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인가? 마5:20절 말씀을 보아서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한 개인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 집단이 말하는 의의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의에 개념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의에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식적인 율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으로 율법을 다 지켰다는 그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을 율법에 비추어 판단하여 볼 때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HAN 요 8:7]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소위 말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입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의는 무엇인가?
그 의는 바울 사도가 외쳤던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주시는 의인 것이다.
[HAN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HAN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HAN 롬 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HAN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은 좀 정직하다고 하시는 기독교인들이 행위가 바르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하는 말로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성경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HAN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주여! 주여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불러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말로만 주여! 주여 했기 때문일까?
여기 변론하는 변론이 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목사) 노릇했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부흥사)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선생들이기에 큰 판결을 받는 것이기 때문일까?
[HAN 약 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뜻 되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은 불법을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법은 무슨 법인가?
율법을 말하는 것인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재해석으로 율법을 범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자가 없다고 말했다.
[HAN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렇다면 무슨 법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새 계명이며 아직도 성도들이 지켜야 할 계명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인 것이다.
[HAN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HAN 막 12:30~31]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뒷받침하여 주는 말씀으로 마25장 백 보좌 심판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
말씀들을 종합하여 볼 때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부흥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랑을 멀리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B.예수님의 말씀 속에 표현된 과장법에 대한 연구
어떤 사람은 성경에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내어 버려라 는 말씀을 보고 도박을 하던 손을 찍어내어 버렸다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런 의도에서 하신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문자 그대로가 아닌 다른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말씀의 문맥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또는 예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행동과 사상에 비추어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길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과장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표현된 과장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4복음서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수많은 과장법들이
발견된다. 과장법은 크게 두 가지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첫 번째 양식은 극단적이 표현 (hyperbole) 양식이고
두 번째 양식은 과도한 표현(overstatement) 양식이다.
①극단적인 표현 양식.(hyperbole)
명령한 말씀이나 묘사된 말이 문자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예
[HAN 마 7:3~5]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兄弟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여기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에서 눈 속에 들보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의 조그만 한 허물을 보는 것 보다 자신의 큰 허물을 먼저보고 상대를 비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자신을 고쳐나가는 사람이 되라는 표현을 극단적인 표현 양식의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HAN 막 10:23~25]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여기서 우리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과연 그런가?
물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부의 위력을 알고 그 부를 얻기 위하여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것은 모든 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위력을 알고 그 부에 안주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표현을 극단적 양식의 과장법을 사용하여 강조하신 말씀이다.
②과도한 표현 양식.(overstatement)
명령하신 말씀이나 묘사된 말씀이 실천 가능한 것이나 그대로 문자적으로 준수되기를 의도하지 않은 것
예:
[HAN 마 5:29~30]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눈을 뺄 수 있다.
그러나 눈을 뺀다고 좋아질 것이 무엇인가?
과연 우리 예수님을 눈을 빼는 것을 원하시는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형제를 실족하게 하는 장애물이 나에게 귀중한 것이라고 해도 버리고 형제를 실족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도한 표현 양식의 과장법을 사용한 것이다.
[HAN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여기서 우리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형제와 화목하려 갈 만큼 모두가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천리나 먼 곳에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곳까지 가서 화해를 하고 예물을 제단에 드리라고 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화목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도한 표현의 과장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극단적인 표현 양식과 과도한 표현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말씀을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C)예수님의 말씀 속에 표현된 비유.
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을 보며 많은 비유가 사용된 것을 보게 된다.
공관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약 1/3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 비유는 쉽게 이해하기 쉬운 비유도 있지만 그 당시 제자들까지도
의문을 품을 정도로 난해한 것들도 있다.
그러므로 비유를 바르게 해석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①.예수님께서 일반적으로 사용한 비유.
예수님께서 사용한 비유에 대한 형태에 대하여 학자 간에 많은 논란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그것을 따지는 데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한다.
a)직유: 직유는 “같이” “처럼”과 같이 비교사에 의하여 연결되어 서로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실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분명한 비교이다.
[HAN 요 15:5~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b)은유: 은유는 직유와 같이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실체를 비교하지만 분명한 비교 점을 갖는 직유와 달리 은유는 아무런 비교사 없이 암시적인 비교만을 한다. 이 은유는 나라와 환경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음으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 이해하여야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HAN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HAN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HAN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c)예화: 예수님께서 천국에 지식을 전할 때 우리의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 설명 해 주셨는데 그것을 예화라고 말할 수 있다.
예화란 현실에서 없는 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하는 우화(알레고리)와는 약간의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예화는 알레고리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나사로의 이야기는 천상의 이야기를 언급함으로 현실의 이야기와 동떨어진 알레고리와 같이 보이나 그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분명한 사실을 들어 이야기 한 것으로 알레고리로 볼 수 없는 것이다.
②.비유의 목적
예수님께서 비유를 왜 사용하셨는지 그 목적은 마13:11~17 막4:10~12 눅8:8~10 등에 잘 나타나 있다.
a)반응을 보이는 제자들을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쉽게 비유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말씀을 사모하여 따르는 사람들이다.
[HAN 눅 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b). 무 반응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어서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③. 비유 해석의 원리
올바른 비유 해석을 위해서는 몇 가지 원리를 알아야 한다.
a)먼저 어떤 상황에서 비유를 하셨는지 연구해야 한다.
b)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주의 깊이 연구해야 한다.
c)그때 당시의 문화와 관습을 연구해야 한다.
d)그 비유가 예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연구해야 한다.
e)천국에 대한 비유가 현재론적인 천국인가? 종말론적인 천국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2).예수님의 행동 이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떠한 행동을 하셨는지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행동은 말씀이상의 메시지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①.예수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매사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의논하시며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이다.
[HAN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②.예수님은 당시에 정죄된 사람들과 멀리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했다.
구원은 그가 사람들에게 정죄된 사람이냐? 아니냐? 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원을 사모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HAN 마 9:11~13]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③.예수님은 성전의 부패를 몹시 싫어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과격한 모습을 보이신 부분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신 행동에서이다. 그것은 성전이 순수한 성전으로서 모습을 상실하고 장사의 소굴로 변하여지는 것에 대하여 분노하신 것이다.
[HAN 눅 19:45~46]
성전에 들어 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④.예수님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싫어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싫어했다. 심지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면서 까지 그들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을 드려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로: 그들은 의로운 체 하며 타인을 정죄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세상의 명예에 치중하기 때문이었다.
[HAN 마 23:6~7]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셋째로: 그들은 아집에 빠져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안 했기 때문이다.
넷째로: 그들은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천국에 가는 길을 막기 때문이다.
[HAN 마 23:1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다섯째로: 그들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리고 덜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HAN 마 23:2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섯째로 :그들은 옳은 것을 알되 행하지 안 했기 때문이다.
[HAN 마 23: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일곱째: 그들은 무엇보다 더 긍휼과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HAN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3)예수님의 사상 이해.
예수님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바로 알아야 한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사상을 오직 사랑이다.
Ⅳ.기독론적 성경 해석 실습.
1)안식일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키는 주일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안식일이 아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에서 토요일 저녁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십계명을 주장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고 말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된다고 말한다. 즉 구약의 안식일은 오늘날 주일의 모형이라 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걸맞게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구절에 그러한 암시를 보여준 것이 없다. 여기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생각하고 오늘날 기독교인이 주일을 지키는 당위성을 논해야 할 것이다.
(1)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병자들이 애원하여 병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와서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막1:21~26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경우 귀신들린 자가 귀신을 쫓아 달라고 구하지 안 했다.
마12:7~15
한 손 마른 자 역시 자신이 치료받을 것을 기대하지 안 했는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료해 주셨던 것이다.
눅13:11~17
십 팔 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한 여자병자 그녀는 예수님께 치료를 위하여 간구 하지 안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이다.
요9:1~14
안식일에 진흙으로 소경을 고쳐주었을 때도 그 소경이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 하지 안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이다.
눅14:1~6
안식일에 고창 병이든 남자가 예수님께 병을 고쳐 달라고 간구 하지 안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료해 주신 것이다.
요5:8~18
베데스다 연못에 있던 38년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도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도리어 변호하기까지 했다.
[HAN 마 12:1~6]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사이로 가실 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의도적으로 스스로 안식일을 범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무시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HAN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했을까?...그것은 안식일에 대한 지금까지 지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안식일에 대한 바른 지식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2)유대인들의 안식일 해석과 예수님의 안식일 해석의 차이
유대인: 안식일에 대한 법규를 문자적으로 해석 하여 안식일에 일을 하는 행위는 당연히 정죄 되어야 한다는 해석이다.
[HAN 출 31: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HAN 민 15:32~35]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예수님: 법철학적으로 안식일을 해석하여 안식일은 인자를 위한 날이다. 라고 말했다.
인자를 협의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나. 광의로서 인자를 볼 때는 우리 인간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3)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유.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케 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려고 정하신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거룩한 날로 정한 날이라는 것이다.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4)안식일을 대신 하여 주일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초대교회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을 함께 지켜온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 안식일은 지키는 것을 버리고 주일만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안식교회를 빼놓고 오늘날 성경 해석학자 가운데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주인은 인자라는 말씀에 무게를 둔 것이며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에 역사가 예수님의 부활로 분명하여진 이상 부활을 상기하는 주일을 지킴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에 기인한 것으로 믿어진다.
Ⅴ.문학 형태에 따른 성경 해석.
성경 66권 모두가 같은 문학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같은 문학의 형태같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시문학을 역사 문학 같이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우리는 나름 되로 성경을 몇 가지 문학의 형태로 나누고 그 문학에 따른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 보려고 한다.
1)역사 이전의 역사문학.
지금까지 창세기는 모세 오경의 하나로 율법서에 포함을 시켜왔다.
그러나 필자는 해석상 창세기를 역사 이전의 역사문학으로 분류를
하려고 한다.
창세기를 역사 문학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정확한 연대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를 역사서로 보는 이유는 인류의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며 허구한 신화를 담은 것이 아니라 사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역사 이전에 역사 문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역사 이전의 역사문학에서 연구해야 할 것들
(1)인류의 기원에 대하여
(2)인간의 구원에 필요성에 대하여
(3)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한 약속에 대하여
(4)죄악 된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
(5)구원을 위하여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2)법학 문학.
법학 문학은 출애굽기 , 민수기 , 레위기, 신명기 등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고 있는 성경의 문학의 형태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 율법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문자적으로 그대로 연구하여 그 법은 오늘에 그대로 적용을 시키는 것은 무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학 문학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1).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졌으며 왜 주셨는가?
(2)하나님의 율법으로 언급된 종류는 무엇인가?
◎.제의적인 율법.
◎.종교상의 율법.
◎.생활상의 율법.
(3)하나님의 율법의 세목이 율법의 확장 해석과 축소해석을 의하여 그때 관습을 수용함에서 온 것인지 연구
(4)오늘날 사라진 율법과 남아있는 율법의 차이는 무엇인가?
(5)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3)역사 문학.
역사문학은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여호수와서,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를 등의 문학 형태이다.
신약에서는 기독교의 역사를 담은 사도행전이 역사서로 볼 수 있다고 본다.
여기 우리가 역사서에서 연구해야 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다음과 같은데 역점을 두고 연구하는 것이 좋다.
(1)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연구
(2)역사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3)역사 속에 인간의 흥망성쇠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
(4)기독교 역사서라고 볼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는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고 발전하여 나가게 되었는지 연구.
4)지혜문학.
지혜 문학은 인간이 살아갈 때 필요한 처세술을 기록한 것으로 인간들에게 삶의 질을 높여주려는 문학이다.
대체로 성경에서의 지혜문학은 잠언, 전도서 등을 말할 수 있다.
여기 지혜문학에서 우리가 연구해야 될 것들은
(1)우리 인간은 무엇인가?
(2)인간의 진정한 지혜는 무엇인가?
(3)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인간이 지혜롭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4)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지혜롭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5)시문학.
시문학은 인간의 감성을 문학으로 표현한 것으로 성경에서는 시편과 아가서 등을 말할 수 있다.
여기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들은 .
(1)기자들의 지성과 감성 속에 표현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
(2)기자들의 다양한 환경 속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
(3)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진솔한 찬양의 모습
(4)시문학 속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6)묵시문학.
묵시문학은 구약에는 다니엘서와 신약에는 계시록을 같은 문학의 형태를 말할 수 있다.
이 문학의 형태는 미래에 대한 예언된 것들은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 해석이 용이하지 않다.
우리는 이 문학에서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1)억지로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성경의 전체적인 흐름과 다르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그 묵시록이 쓰여 진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 정확한 시간을 가르쳐 주기 위한 글이 아니다.
정확한 시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면 상징적인 것들을
매체로 하여 사용되지 안 했을 것이다.
◎핍박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다.
다니엘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희망이 없을 때 주어진 것이다.
요한 계시록: 초대교회의 엄청난 핍박을 받는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7)예언 문학.
성경에서 예언 문학을 담은 성경은 우리가 소위 선지서라고 하는 것들이다.
이들 문학은 선지자들의 생애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 문학의 중요성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이 문학을 통하여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1)메시야에 대하여 예언된 부분이 어느 것이냐 는 것이다.
(2)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느냐 는 것이다.
8)전기 문학.
전기문학이란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다른 문학으로 4복음서가 이 문학에 속한 것이다. 여기서 전기문학 4 복음서에서 우리가 연구해야 할 것은.
(1)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분은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와 같은 분인가?
그분은 우리가 바라던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 인가?
(2)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3)예수님께서 행동에서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4)그의 사상은 무엇인가?
(5)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9)서신 문학
서신문학은 주의 제자들이 편지를 통하여 하나님을 가르친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초대교회 제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서신 서를 통하여 그들을 가르침을 얼마만큼 알 수 있다. 우리가 서신서를 통하여 알아야 할 것은
(1)그들이 가르치고자 하던 중심 사상이 무엇인가?
(2)그들이 가르치던 그때 환경을 이해하는 것
(3)그들이 가르치고자 하던 성도들의 생활관은 무엇이었는가?
(4)예수님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등등.
Ⅵ 결론.
본인은 두서없이 짧은 시간에 성경 해석학에 대한 글을 썼다.
물론 수정하고 보안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을 줄 안다.
이점은 여러분들이 연구하면서 수정 보안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분명하게 하고 싶은 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안전한
해석법은 기독론적인 해석법이라는 것을 새삼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성경을 해석하는 법은 못 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해석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3대 주제
(원시적 관점에서 보는 성경 연구)
상마교회
한 정 길 목사
머리말
필자는 성경을 몇 번 통독 하는 가운데서 성경이 말씀 하려는 중심 내용이 무엇일까? 생각 하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서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지혜 주심으로 몇 자 적어 보게 되었다.
본인은 물론 성경을 연구하는 분들과 현재 신앙을 갖고 계시는 교우들과 신앙을 갖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필자의 글 구성이 학자들의 것과는 비교 할 수 없는 부끄러운 것에 지나지 않을 줄 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 하시고, 증명 하시고, 가르치고, 계시는 가를 연구하려는
계기로 삼는다면 필자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상마교회 한 정길 목사
서론
성경을 고찰해 보면 성경은 크게 3가지 테마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첫 번째는
나사렛 예수야 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학수고대 하던 인류의
구원자 참 메시아 됨을 증명 하려는 것이며,(요20:31)
둘째는
하나님께 불순종 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에 처한 인간이 참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길만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는 것과,(요20:31; 요14:6; 행4:12)
셋째는
예수 안에서 은혜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 를 가르쳐 주고 있다. (딤후3:16-17; 마5:16)
이 시간부터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고찰해야 될 것은 과연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 참 메시아 인가?에 대한 고찰이요
참된 구원에 길이 예수께만 있는가? 에 대한 고찰이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 무엇인가?
고찰 하여 보자.
1부
예수님은 참 메시아 인가?
과연 예수님은 인류에 구원자 참 메시아 인가?
예수님께서는 참 메시야 인가? 아닌가? 에 대한 지식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 가 아니라면 수없이 많은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비참하고 불쌍한 자들이 될 것 이다.
그런데 어떤 기독교인 가운데서는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참 메시아이든 단순히 훌륭한 교사이든 무슨 중요한 것인가? 라고 반문 하면서 예수님의 그 가르침은 오늘날과 같이 인심이 심히 각박한 세대에 교훈 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이며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 가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아무리 훌륭한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을 지라도 그는 기만자요 사기꾼이며 그의 죽으심은 한낱 광인의 광기에 불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인 이라면 예수님이야 말로 인류에 구원자 참 메시야임 을 인정하고 신앙을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을 증명 할 수 있어야 한다.
Ⅰ.메시아의 의미.
메시아란 마샤흐( jv'm;)즉 기름을 바르다. 기름을 붓다.에서 나온 말로서 메시야(j'yvim; 마쉬아흐)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신약 성경에는 헬라어로 크리스토스 (κριστοS)번역 되었는데 오로지 예수님의 대명사로 사용될 만큼 예수님께만 사용 되었지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이 명칭이 사용 되지 안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이 명칭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구약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사람에게 불러진 명칭은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만 불러진 명칭과 비교해서 신성의 의미로서는 완전히 다름을 알아야 한다.
1.기름의 사용.
일반적으로는 화장품으로 사용 하였으며(겔16:9; 룻3:3; 아1:3;; 4:10) 또한 의약품으로도 사용 하였다.(사1:6; 대하25:15) 보통 사람들은 기름을 즐거움과 행복감을 더 높여준다고 생각 했던 것 같다. (참고 시45:7; 전9:8; 사61:3) 그러므로 기름을 삼가 하는 것은 슬픔을 상징 하였다. (참고 삼하14:2; 단10:3)
2.기름 부음의 의식.
1).하나님의 제의에 있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모든 기구는 기름을 부음으로 성물로 구별
하였다.
이렇게 기름이 부어진 기물들 가운데는 회막, 증거궤, 상, 등잔대, 제단, 및 이에 부속된 기구들 이었다. 이 모든 기물들이 기름 부음을 통해 독특한 神性을 부여 받았으며 그 때문에 무릇 이것을 만지는 자는 거룩하게 되었다. (출30:26-29)
2).제사장에게 행해졌다.
처음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 부음으로 성별의 의식이 행하여 졌다. 이 기름을 부어 제사장으로 성별하는 이 제의가 매 세대마다 실행되었는지 그리고 이 제의가 모든 제사장들에게 적용 되었는지의 여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랍비 전승에 의하면 오직 대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의 아들만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비교 Maimonides,sefer Abodah Ⅰ)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단지 요시야 왕 시대까지 지속 되었을 뿐이다.
이 시대 이후에는 제사장 전유의 의복을 부여하는 것으로서 제사장들의 대한 기름 부음을 대처 하였다. 즉 대제사장에게는 8점의 의복이 일반 제사장에게는 4점의 의복이 주어졌다 한다. (Yoma7:5)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제사장 성직을 감당 하도록 구별 되었고 성별되었음을 뜻한다.
3).왕에게 행하여 졌다.
구약 시대에는 왕들에게 기름을 붓는 의식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요아스, 등 이 밖에도 다른 왕들도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서 왕으로 성별 되었다. 그 때문에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말은 왕과 동의어였다.(삼상12:3,5) 기름 부음을 통하여 지위를 임명하는 이 의식은 그 지위에 합당한 은사로 상징 할뿐 아니라 이러한 은사를 카리스마적으로 부여 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
3.이스라엘 백성이 소망 하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구약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름 부음을 받은 이상적인 왕이 나타날 것이라고 소망 하였다. 이런 이상적인 왕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은 예언자들의 예언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언자들이 예언 한 이 이상적인 왕 메시야는 인류에 구원자로서 하나님이시며, (사9:6-7) 다윗의 뿌리로서(렘23:5) 인간으로 태어나실 분이시며,(사9:6-7) 철장 권세로 적을 물리치며,(시2:6-8)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시고 의로 통치하실 분이라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에 대해 메시아냐? 그렇지 않느냐? 에 대한 시비는 곧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이신 이상적인 왕이시냐? 아니냐? 에 대한 시비이다.
Ⅱ.예수님께서 참 구원자 메시아임을 부정 하는 자들.
1.기독교인이 아닌 이방 사람들.
1).예수님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한 자.
예수님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대다수는 예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으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설한 하나의 교주로만 알고 있다.
2).예수님에 대하여 약간에 관심을 가진 자.
이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장 훌륭한 선생이며, 지도자이며, 가장 거룩하게 살아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신 위대하신 분임을 인정 한다.
2.현재 유대인들.
오늘날 성지 순례를 다녀오신 목사님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대 다수가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부정 한다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아닌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3.예수님 당시 다수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게인 등.
예수님 당시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게인 등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토록 학수고대 하던 메시야로 믿지 아니 했다. 도리어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은 마귀의 힘을 입어서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을 마귀에게 접신된 자로 모독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 하실 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메시아적인 발언을 하였을 때 어떤 서기관은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으로 참람하도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부정 하였다.
특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신앙 하고 따르는 자들을 율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 이라고 정죄 했다.(요 7:45-49) 그들에 의하면 예수는 율법적으로 볼 때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혔을 때 그것을 믿지 아니 함으로 예수님을 해 하게 된 것이다.
마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님을 죽일꼬 의논 하거늘
요10:3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이라 말하였기 때문, 즉 메시야임을 밝혔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정죄 한 것도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씀 하셨기에 이를 불경죄로 정죄 한 것이다.
Ⅲ.왜? 구약 성경에 능한 제사장,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정 했는가?
1.예수님의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망하는 메시아 관과 다르기 때문.
마11:2-5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이 옥중에 있을 때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여쭈되 당신이 오실이 곧 메시야가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는 내용을 볼 때 우리는 의구심을 갖기 쉽다.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확신 있게 증거 했던 세례요한이 이런 질문을 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예수님 자신에게서 직접 듣게 함으로 더욱 믿게 하려는 치밀한 계획에서 의도한 것이라고 보는 것과 또 하나의 대답은 세례요한이 학수고대 하였던 메시아 관과 현재 예수님의 모습과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일치 하지 않았기에 전에 확신을 가지고 증거 했던 예수님에 대하여 참 메시아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물어 보게 한 것으로 아마 세례요한의 기대는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께서 곧 바로 불의에 왕국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것으로 믿었으나 예수님께서 기대하는 것과 같이 그 일을 하지 안하였기 때문에 잠시 잠깐 이나마 의심 한 것이 아닌가? 라고 보는 것이다.
과연 어느 답이 옳은지 성경에 언급한 것이 아님으로 말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건은 후자의 경우를 지지 한다.
마20:20-21 말씀을 보면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메시야관도 영광 받을 메시야 ,정복자 메시야, 승리의 메시야로 알았지 고난 받을 메시야로 알지 안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요12:12,13말씀과 눅23:35 말씀을 보면 유태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상반적인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유태인들이 바라던 메시아 관 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른 것을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12:12,13 말씀을 보면 명절에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려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 왕이여”하면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 하면서 환영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환영도 며칠이 안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으로 바꾸어 졌다. 그것은 아마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대하던 메시야가 아님에 속았다는데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이 분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 하는 것으로 바꾸어진 것이다.(눅23:35)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메시야 관은 어떤 것일까?
1).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나름 되로 가지게 된 메시야 관에 대한
역사적 배경.
하나님의 종 모세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에 땅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되었다. 가나안 땅에 정착된 이스라엘 백성은 세월에 흐름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멀어지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진노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주변 국가를 왕성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 했고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 보다는 불완전한 부족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하나님께 왕국을 세워 줄 것을 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BC 1043년에 사울을 기름 부음으로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고 처음으로 왕이 다스리는 왕국을 만들어 주신다. 그러나 사울 왕은 스스로 교만하여 망령된 행실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왕위를 폐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움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굳건한 반석위에 세우게 된다. 그 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의 은사로 이스라엘 국가를 번영하게 했다. 그러나 솔로몬 통치 말년에 이방의 신을 섬기는 영적 음란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했고 솔로몬 왕 사후 이스라엘 통일 국가는 BC 931년 내분이 일어나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 후 두 왕국은 하나님 뜻 되로 살려는 몇몇의 왕들의 통치가 있어 잠시 잠깐 태평세월을 누리는 것 같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최악의 상태까지 이르게 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되었다.
그토록 화려했던 손로몬 성전도 초토화 되어 버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그만 한 희망도 살아져 버렸던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소리를 외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며 이스라엘 멸망을 예언 하였으나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의 복된 소식을 전파 하였다. 그 희망의 소식은 지금까지 왕들이 무력함으로 어려워진 나라를 신적 능력을 가진 왕이 나타나 적을 진멸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이상적인 국가, 전쟁이 없는 평화스러운 국가를 세울 것이라는 희망적인 복음 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사의 의해, 헬라에 의해, 로마에 의해 수없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결코 좌절 하지 안 했던 것은 아마도 이런 메시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나름 되로 메시야 관을 갖게 한 예언에 말씀
(1).초월적인 힘으로 나타날 메시야.
사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2).적을 물리치는 승리의 메시야.
시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
시 2:6~8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3).멸망 하지 않는 영원한 왕국을 세울 메시아.
단2:44
이 열 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공평과 의로 통치하실 메시야.
사 32:1~4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 할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 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사 42:1~4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렘 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슥 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5).평화의 왕국을 세울 메시아.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메시야는 베들레헴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예언서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로 오실 분은 미5:2절에 준하여 다윗에 고향 베들레헴에서 나오실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이유는 충분한 의구심을 갖게 했다.
요1: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빌립이 와 보라 하니라
요7:26-27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요7:40-43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에 대한 출생지를 논함.
요7:49-52
“상고 하여 보라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Ⅳ.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부정하는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어리석음.
1.이들은 메시야가 육적 소망을 이루어 주실 분으로만 믿은 어리석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부정하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혀 왔던 왕국들을 무너뜨리고 강대한 왕국 메시아 왕국을 건설 할 것으로 생각 했다. 그러나 그것은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하신 일을 말씀하심으로 메시야는 마귀를 멸하시려 이 세상에 왔음을 은밀히 가르쳐 주시고 병마와 사망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자 에게 해방을 주시려 오신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마 11: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또 요18:36-37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와 대화 가운데 메시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말씀 하셨다.
또 메시아의 왕국이 세계를 지배 할 것에 대한 예언 슥9:9-10은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이 온 세계에 펴져 모든 이방인까지 구원 하시는 메시야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그들은 왕 되신 메시야만 알았지 백성의 죄를 짊어지신 제사장적
메시야를 알지 못했다.
인류에 구원을 주시러 올 메시야는 죄악에 억눌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대속할 필요가 있기에 대속의 고난 또한 짊어져야 되었다. 그러기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왕으로 승리하신 메시아를 예언하기도 하나 인류의 죄를 대속 하시는 고난의 메시아를 예언 하기도 했다.
고난을 짊어지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
1).배반을 받으나 승귀하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
시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수치와 능욕을 받으시는 메시아 예언.
시 69:19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 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3)얼굴이 심히 상한 메시아 예언.
사52:14-15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 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4).세상 죄를 짊어지고 고난 받으시는 메시아 예언.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은 삼십에 팔릴 메시아에 대한 예언.
슥11: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6)찔림을 당하시는 메시아 예언.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7)해침을 당하실 메시아 예언.
슥13: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3.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출생 했다는 것은 오해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빌립으로부터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님이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전하는 소리에 나사렛에서 어찌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하면서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이 길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올 수 없음을 말하며 갈릴리 출신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음을 강조 한다. (요7:41; 49; 5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출생 하였는가? 성경은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마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음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특히 헤롯이 이유 없이 베들레헴에 사는 2살 아래의 유아들을 살해 하게 했던 사건 역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증거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렛 사람이 된 것은 그 육의 아버지 요셉이 예수님과 더불어 애굽에 피난 후 고향으로 돌아올 때 유대인의 왕으로 아켈라오가 잔인한 왕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왕이 된 것을 보고 두려워 나사렛에 가서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 메시아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애굽에 잠시 피신 한 것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한 것 이며(호11:1)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를 갖게 된 것도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마2:23)
물론 여기서 언급되었듯이 메시야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 워 질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어디에 기록 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 주석가 들은 나사렛이라는 말에는 경멸, 과 멸시를 뜻하는 것으로 멸시 받을 메사야가 됨을 말씀 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사53:3; 시22:6)※톰슨 성경의 주석 참고
Ⅴ.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구약 성경
1.구약 성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 졌다.
|
슥9:9 |
승리의 입성 |
요12:12~14 마2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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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
사건 |
예수님에게서 성취 |
※.이상의 도표는 뉴 톰슨 관주 성경 부록 성경 연구P508-509를
그대로 옮김.
2.성막의 비밀로 예언된 메시아 상이 예수님에게서 분명히 보여 졌다.
요5:46-47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 하시되 너희들이 모세를 믿었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증거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말씀 하셨다. 여기 모세의 기록은 무엇인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곧 오경을 가르친다. 그 중에서 성막에 대한 기록은 모세의 기록 중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 성막에 대한 기록은 장차 오실 메시야 상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히9:9-12)
즉 유대인들이 모세의 기록을 알았다면 성막의 비밀도 알았을 것이요 성막의 비밀을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참 구원자 메시아임을 알았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막의 재료가 말해 주는 메시야 상
※.이상의 도표는 이 영규 목사 저 성막의 비밀을 참고 하여 만듦.
2.성막에서의 제사가 말해 주는 메시아 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 되었다.
성막이 메시아의 성품과 사역을 예언 했던 것과 같이 성막에서 행한 제사 의식도 메시아의 사역과 구속함을 예언 하고 있다.
성막에서 행한 제사들
1)인간의 죄를 전가 하여 드려진 희생 제물의 제사였다.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제사장은 제물 위에 손을 얹고 안수 하였는데 이 의식은 인간의 죄를 희생 제물에게 전가 시켜 희생케 함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죄의 보응을 희생 제물로 담당케 함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고자 드리는 제사였다.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증거 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이라!하며 예수님 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실 희생의 제물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야임을 증거 했다.
2).피 흘림의 제사였다.
히9:2 말씀을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 나니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제사는 피로서 정결케 하는 제사였는데 곧 생명을 드림으로 하나님께 용서 받고자 하는 뜻이 있다. 여기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자신의 생명을 드려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을 위한 속죄를 끄집어내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의 죄를 용서 받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에 구원자 참 메시야임을 증명하고 있다.
3). 흠 없이 드려지는 제사였다.
구약 시대에 드려지는 제사의 제물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다. 여기 인간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할 메시아도 흠이 없는 자라야만 했다.
구약시대의 제물의 흠은 외형적인 것 이였으나 신약시대의 제물은 내면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과연 우리 인간 중에 누가 흠이 없는 자인가? 성경은 우리 인간 모두가 허물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롬3:10)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와 허물이 없는 자인가?
히4:15; 고후5:21; 눅23:4; 요8:46; 요일3:5; 벧전2:22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결코 죄와 허물이 없으신 분으로 분명하게 언급함으로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에 구원자 참 메시야임을 증거 하고 있다.
4).속죄 받기위한 제사였다.
구약시대에 드려지는 대부분의 제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한 속죄 제물이었다. 여기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 역시 인간을 하나님께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힘과 행위가 있어야 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를 담당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히9:11-22)
5).화목하기 위한 제사였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이가 파괴 되고 실제로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은 우리 인간에게 무섭게 내려졌다.
여기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는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릴 힘이 있는 자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시대 가졌던 그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가리켜 사랑 하는 나의 아들이라고 말씀 하셨다.(마3:17)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친히 화해 시켰다고 말씀 하고 있다.(롬3:25)
Ⅵ.메시아의 임무와 예수님과의 관계.
칼빈 시대 이후로 중보의 3중직을 말하는 것을 하나의 통례로 여겨 왔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았을 때 그는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가지 직무를 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식과 오성과 의와 거룩함으로 하급 피조물에 대한 주장 권을 부여 받은 것이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이 죄는 완전히 인간을 감염시켜 선지자, 제사장, 왕의 세 가지 직무를 적절하게 행사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오인과 기만과 불의와 도덕적 부패 그리고 비참과 사망의 권세에 종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는 완벽하게 이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함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행사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1.선지자 직 과 예수님
구약 성서는 신18:15에서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임함을 예언 하였다. 이 성구는 행3:22-23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이다. 예수님은 눅13:33에서 자신을 친히 선지자로 말씀 하셨다. 그는 자신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을 전한다고 말씀 하셨으며, (요8:26-28; 12:49-50; 14:10-12; 15:15; 17:8-20)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 하셨다. (마24:3-35; 눅19:41-49) 따라서 독특한 권위로 말씀 하셨다.(마7:29)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예수님은 완벽한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한 분으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임이 분명하다.
2.제사장직과 예수님.
성서는 선지자와 제사장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했다. 선지자는 백성에게 나아가는 하나님의 대표자로 임명된 자 이며 제사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백성의 대표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접근하여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행동을 하는 특권을 부여 받은 중보적인 역할을 하는 자 였다.
이러므로 구약성서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 제사장 직을 수행 할 것을 예언 하였다.
시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슥6:12-13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 이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과연 예수님은 제사장의 자격을 갖춘 메시야인가? 유대인 들은 이 질문에 강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은 공식적으로 모세 시대부터 정해졌으며 레위 족속이 이를 담당하고 다른 족속은 이를 담당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를 볼 때는 예수님은 레위 족속이 될 수 없다. 구태어 예수님의 족보를 정한다면 유다 족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레위 족속이 아닌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될 수 있는가?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제사장 된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된 것이라고 말씀 하고 있다.(히5:5-10) 이외에도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제사장 되심에 부족함이 없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다. (히3:1; 4:14; 6:20; 7:26; 8:1)
그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도 역시 예수님의 제사장적 사역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막10:45; 요1:29; 롬3:24-25; 고전5:7; 엡5:2; 요일2:2; 요일4:10; 벧전2:24; 벧전3:10 )
여기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완전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하신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임을 알아야 한다.
3.왕 직과 예수님
인류의 구원자 메시야는 자연적으로 모든 피조물 위에 가지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참여 하신다. 이 왕권은 그의 신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본래 메시야에게 속하여 있는 권리인 것이다.
구약 성경은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가 왕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시하고 있다. (시2:6; 시45:6-7; 시132:11; 사9:6-7; 미5:2; 슥6:13) 이 예언의 성취로 신약 성서는 예수님께서 이 왕권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셨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신다. (마2장; 요18:37)
그러나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의 왕권은 이 세상적인 왕권이 아님은 알아야 한다.(요18:36)
예수님의 왕권은 교회에 대한 영적 왕권이며, (고전11:3; 엡1:20-22; 엡5:23) 우주에 대한 왕권을 의미 하는 것이다.(마28:18)
그리고 앞으로 다스릴 천년 왕국에 왕권이요, 영원한 천국에 왕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기 우리는 왕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Ⅶ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예수님의 삶.
1.예수님의 공생에
1).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그에 선제함을 통하여 증거.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라면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선제 했었어야 한다.
사9:6 말씀을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영존하신 분으로 ,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과연 예수님은 영존하신 분이신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친히 증거 하시기를 자신은 아브라함 보다 더 먼저 존재 하셨던 분이심을 증거 하시며 이미 영원 전부터 존재 하셨던 분임을 증거 하고 있다.(요8:58) 그뿐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는 연대의 다함이 없는 영원한 분이심을 말씀하시고 (히1:12)또 천지 창조를 하신 창조자이심을 증거하고 있다.(히1:2) 요한복음 기자 역시 예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되시는 하나님이요 하나님과 함께 창조 사역을 담당 하셨던 창조 주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참 메시아임을 분명히 증거 하고 있다.
물론 여기 성경 기자들이 예수님의 선제함을 직접 본 것은 아니다. 또한 어떠한 사람들의 증거로 기록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증거 하는 예수님의 선제 설은 부정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 한 것이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록 한 것이 아니고 순수한 계시에 의하여 기록한 것으로 즉, 순수하게 하나님께로 온 지식으로 인정됨으로 이들이 기록한 예수님의 선제 설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확실한 것으로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메시아임을 우리는 부정 할 수 없다.
2).예수님의 탄생에서 보여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자료.
(1).족보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언급은 마1:1-16과 눅3:23-38에 언급 되었는데 이 족보들은 약간의 상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족보의 서술 방법뿐만 아니라 족보에 나오는 인물까지 서로 다른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아리스티데스는 마태복음은 왕적 족보를 누가복음은 제사장적 족보를 기록 하였다고 보았다.
◎.칼빈과 메이쳔은 마태복음은 요셉의 족보를 다윗을 통한 법적 계통을 누가복음은 요셉의 족보를 실제 조상들을 통하여 실제적 계통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았다.
◎.율리우스와 아프리카누스는 야곱(마1:15-16)과 헬리(눅3:23)가 서로 이복형제라고 주장하여 헬리가 죽은 후에 야곱은 레위기 율법의 결혼을 통하여 요셉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야곱은 요셉의 실제 아버지이며 헬리는 요셉의 법적 아버지라고 보았다.
◎.그밖에 학설. 마태복음은 요셉의 족보를 누가복음은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 하였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 족보가 다른 이유에 대한 학설 또한 각기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여기 복음주의 성경 관은 모든 성경이 완전하게 혹은 무오 하게 이해 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 주장 중에서 어느 한 학설이 옳을 수도 있고 이들 학설 모두가 다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 신학자라면 이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가 하나님의 무오하신 말씀으로 믿는 연고로 이 양 복음서의 족보 그 하나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 할 것이다.
여기 마태복음의 기록 연대는 일반적으로 AD 58-68년으로 보고 있고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를 AD 60년 초기로 보고 있음으로 여기 두 기록은 동시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없다.
만일 두 기록이 동시적으로 나왔다고 할 찌라도 이토록 족보에 상이함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회의가 있어 진리를 사수 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행15:5~20)
그러나 이 두 족보의 기록에 대한 논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두 복음서의 기록을 초대교회가 다 인정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우리는 두 족보의 기록이 예수님의 족보를 논하기 위하여 기록 되었다 기 보다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을 크게 대두시킴으로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소망하는 구약 성경에 예언된 왕 되신 메시야를 증거 하는 것이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족보에 모든 인류에 조상인 아담을 언급함으로 예수님께서 온 인류에 구원자, 인류에 소망을 성취하실 메시야임을 증거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천사의 출현과 증언.
성경을 보면 천사가 나타나 탄생을 예고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 탄생이 예고된 자들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쓰실 일꾼들이었다. 삼손의 경우 하나님의 사자기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본래 잉태하지 못함으로 생산치 못한 그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예고하였고 이 아들은 장차 불레셋 군사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 할 것을 예언 하였으며, 이 아들은 나면서부터 하나님께 받칠 나실인임으로 그에 성결 된 삶을 위하여 음식과 용모에 대한 주의 사항을 가르쳐주고 그녀의 남편 마노아에게도 나타나 역시 가르쳐 주었다.(삿13:2-18)
세례요한의 경우도 분향하기 위하여 선택된 아비야의 반열 제사장 사가랴에게 천사가 나타나 잉태치 못하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아이가 잉태 될 것을 예고하였고 장차 이 아이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케 하는 일을 할 것이고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위해 준비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눅1:5-25)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천사의 예고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일반적으로 많은 부분이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천사가 나타나 탄생을 예고하는 경우는 그 부모에게만 탄생에 대하여 예고하였고 타인에게는 전혀 예고하지 안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주의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였다. (눅2:8-20)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남녀 관계 속에서 낳을 아이가 아니라 순수한 처녀에게서 낳을 아이 라는 천사의 예고라는 점이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여인이 자신과 성적 관계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잉태된 것을 보고 심히 괴로 와 한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잉태는 부정한 행위에서 온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괴로 와 하는 요셉에게 천사는 나타나 마리아에게 나타날 자가 누구인가를 가리켜 준다.
마리아에게 잉태될 자는
◎.남자에 의하여 잉태될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될 자라는 것이다.
여기 성령으로 될 자란 세례요한의 경우와 같이 모태에서부터 성령 충만한 아이(눅1:15)과는 대조적이며 또한 성령에 의하여 만들어진 아이가 아님을 말씀하는 것이다.
여기 성령으로 된 자란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 하셨던 예수님께서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이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라 이름 지어질 자 라는 것이다.
예수(ιησομ)란 이름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임마누엘 하나님 이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예수님이야말로 참 하나님으로 우리 인간과 같이하려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참 메시야임을 말한다.
이상의 천사의 예고를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참 메시아임을 보여주고 있다.
(3).복중에 아이 세례요한의 증거.
우리는 복중에 있는 아이가 예수님께서 메시아 됨을 증거 하였다는 사실을 들을 때 마치 전설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은 의심 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복중에 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방문을 알고 즐거워서 뛰었다고 말씀하고 있다.(눅1:44) 여기 우리는 복중에 있던 세례요한이 단순히 움직인 것을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너무 과장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때 성령 충만 하였고 아이가 복중에서 움직일 때 그것이 그리스도 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아이의 움직임이라고 성령에 의하여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성령 충만한 상태이었기에 복중에 아이의 감정을 파악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 우리는 복중에 있는 아이가 어떻게 예수님의 어머니의 방문을 감지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예수님의 어머니의 잉태를 알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복중에 있던 세례요한은 이미 성령 충만한 아이였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을 입은 자였기 때문에 가능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여기 복중에 아이 세례요한의 증거는 세상의 부패한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아이의 증거요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이 같이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증거로 복중에 세례요한의 증거야말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참 증거로 보아야 한다.
(4).동방으로부터 온 지혜로운 자들의 증언.
마2장 말씀을 보면 동방으로부터 온 지혜로운 사람(magi)가 동방에서 별을 보고 이스라엘 왕으로 나신이에게 경배하려 왔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동방에서 온 지혜로운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이며 어느 나라 사람일까?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던 별은 어떤 별일까?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
여기 어떤 사람들일까에 대해서는 대부분 신학자들에 의하면 별을 관찰하고 미래를 예언 했던 점성술사가 아닌가? 본다. 많은 점성술사들은 하늘에 있는 별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각자의 운명을 이야기 한다고 생각 했다. 만일 하늘에 어떤 별이 빛을 잃으면 누구의 운명에 이상이 생긴 것이며 빛이 빛나면 광영이 있을 것으로 예언 했다. 여기 동방으로부터 온 지혜로운 자(magi)는 별을 보며 미래를 예언한 점성술사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럼 이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 일까? 성경은 이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솰렌박사(Dr.W L Swallen)는 말하기를 유대인 중에 성경을 잘 알며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리던 흩어져 살던 유대인 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이가 어디 있느뇨?라고 묻는 것을 보면 이들은 성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임에 분명 함으로 솰렌 박사의 주장은 옳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여기 동방에서 온 지혜로운 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말이 통할 수
있는 이스라엘 나라 주변의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동방에서 온 지혜로운 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이스라엘 왕으로 나실 이가 어디 계시는가 물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의 언어든, 로마의 언어든, 헬라의 언어를 알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임은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우리는 동방에서 온 지혜로운 자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 이었다는 사실이다. 여기 우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동방으로부터 온 지혜로운 자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나 그것보다 동방에서 온 지혜로운 자들이 본 별이 어떤 별일까? 알아보는 것이 더욱 중요 하리라고 본다.
케풀러의 계산의 의하면 기원전 7년경에 세 개의 유성 즉 목성, 토성, 화성이 일직선에서 한 개와 같이 보인 일이 있었은데 아마도 이 별이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별이 아닌가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또 Bc1592년과 Bc1604년에 샛별이 나타나 심히 광명하게 보이다가 얼마 후에 점점 없어졌다고 하는 실례가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탄생할 때 나타난 별도 이러한 샛별이 아니었던가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가능성이 있으나 결코 그렇다고 필자는 동조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별의 출현이 자연적인지 초자연적인지 알 수 없다.
자연적 이라면 어떻게 별이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 하여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는지 대하여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때 나타난 별은 초자연적으로 나타난 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별이 어떠한 별이든 동방의 지혜로운 자(Magi)가 어떤 자들인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 기자가 말씀하고자 하는 참뜻은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방인이 직접 메시야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안했으나 이스라엘 왕으로 나실 분, 이 세상 모두에게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을 향해 경배하려 왔다는 사실을 통하여 이들이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누구에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식을 통하여 알게 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분명히 밝히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우리는 메시야의 지식이 없는 동방의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의 신비한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다는 증거 역시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5).헤롯의 사악한 행위에서 보여준 메시야 증언.
헤롯의 사악한 행위가 메시야를 증거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말과 같이 보인다.
마2:16 말씀을 보면 헤롯왕은 갑작이 아무 이유 없이 백성들의 원성을 살 행위를 하였다. 곧 베들레헴에 그 모든 지경 안에 사는 두 살로부터 그 아래 나이의 어린 아이들을 모두 살해한 것이다.
왜?
헤롯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하였을까?
왜?
하필이면 두 살부터 그 아래의 아이들을 죽였을까? 또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아이들만 살해 했을까? 성경 기자는 이 헤롯의 이 잔인한 행위는 메시야를 살해할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살로부터 그 아래 아이들을 살해한 것은 동방으로부터 온 지혜 자들이 가르쳐 준 메시아 탄생에 대한 정보에 따른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살해한 것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이 성경을 풀어 메시아 탄생을 가리켜 준 것에 준한 것 이었다.
여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어느 역사를 통하여 보아도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출2장 참고)만일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면 헤롯이 아무리 살해하려고 할지라도 메시야가 그의 일을 다 이루기까지는 결코 살해 될 수 없을 것이다. 메시야가 헤롯에 의해 살해 되지 안했다면 메시야는 헤롯왕이 베들레헴 아이들을 살해한 후 약 20년 이후부터 활동 하였을 것이다. 그 시대 메시아로 여겨지는 자는 누구였는가?
첫 번째로 세례요한을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증거 하기를 자신은 메시야를 위해준비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 라고 증거 했다. (눅3:15~18; 막1:1~8; 마3:11~12)
그 다음은 예수님을 생각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여 자신을 낮추는 자였다.(마3: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분명 메시아임을 밝히고 있다.(요4:25~26; 요18:37; 눅22:70; 막15:2) 헤롯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살해 한 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요 헤롯왕이 베들레헴 아이들을 살해 한 후 약20년 이후부터 예수님과 세례요한 외에는 하나님의 독특한 일꾼이 나오지 안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것이 된다. 이로서 헤롯의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살해한 사악한 행위야말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6).목자들의 증언.
베들레헴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을 지킬 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음을 말씀하시고 그리스도 표적은 강보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하나님의 사자의 가리킴을 따라 목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맞이하려 예수님께서 탄생 하신 곳에 찾아온 것이다. 여기 목자들이 본 하나님의 사자는 환상으로 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동일하게 본 사실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사자가 지시한 되로 따라 행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본 것이다.
여기 목자들의 증언 역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분명히 증거 하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7).처녀가 잉태하는 기적 적인 사건이 말해주는 증언.
구약 성경을 보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는 처녀에게서 잉태 될 것임을 말씀 하고 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남자를 모르고 과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자연적인 법칙을 초월하는 힘이 있음으로 처녀가 아이를 잉태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는 그리 어려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과연 남자와 부부 관계가 없는 순수한 처녀였느냐? 그렇지 않느냐? 에 대한 논쟁의 여지는 있다.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는 처녀가 잉태한 것이 아니고 여자가 잉태 하였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는데 이런 주장은 일반 상식으로 인간 상식을 초월 하는 성경 자체를 무시하는 이단적 주장일 뿐이다.
성경은 마리아가 처녀였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눅1:34 말씀을 보면 천사가 마리아의 잉태를 예고하였을 때 마리아는 분명히 대답하기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 I have no husband)라고 대답함으로 남자와 성적 관계를 하지 안했던 상태를 말해 주고 있다. 마1:18~25를 보면 비록 요셉과 정혼한 사이 일 찌라도 요셉과 성 관계를 하지 않은 순수한 처녀였음을 증거하고 있다.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한 다음에도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까지 성 관계를 하지 안했다고 언급함으로 예수님의 탄생은 순수한 처녀에게서의 탄생이요 이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사7:1에 예언된 참 메시야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예수님의 영아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
(1).시므온의 증거 (눅2:23~3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며 성령이 함께 하던 자였다. 그는 메시야를 소망하고 기다리던 자이었는데 성령께서 지시 하시기를 저가 주 그리스도를 보기 전 까지는 죽지 않으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전례를 행하고자 아기 예수를 데려왔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 하신 데로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이방에 비치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또 시므온은 메시아의 고난도 예언 했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은 자가 되실 것이다.
◎.메시아 예수님은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드려 냄으로 그들에게
핍박을 받을 것이요
그 핍박을 보아야할 마리아는 칼이 마음을 찌르듯 하는 괴로움
을 당할 것을 예언 하였다.
이렇게 시므온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성령에 가리켜 주심에 의한 것으로 여겨짐으로 시므온의 메시야 증거 또한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참고 요1:33~34)
(2).안나의 증거.(눅2:36~38 )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는 출가 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하고 살다가 과부가 된지 팔십 사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던 선지자였다. 그녀는 전례를 행하기 위하여 그 부모와 함께 온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가 메시아임을 알고 증거 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4).예수님의 소년 때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암시하는 예수님의 태도와 말씀(눅2:41~50)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때 예수님은 그 부모님과 더불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 날을 마치고 돌아가는 부모의 일행과 같이 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려 있었는데 그 부모가 예수님께서 같이 동행 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찾으려 예루살렘에 다시 돌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랍비들과 함께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는데 그 지혜와 대답은 기이할 정도였다. 예수님의 모친께서 예수님께서 함께 동행 하지 않음으로 심적 고통을 가졌던 것을 말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 하시기를 어찌 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하시며 곧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암시적으로 말씀 하셨다.
5).그 밖에 예수님의 공생에 전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
눅2:52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라고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지혜가 성장 했다는 것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 것이지 결코 예수님의 지혜는 성장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지혜란 많은 삶의 경험 속에서 축척 되는 것으로 인간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지혜 역시 성장하는 것이 당연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는 인간에 경험 속에서 나온 지혜가 아니라 하늘에서 온 지혜임을 알아야 한다. 곧 예수님의 지혜는 인간의 경험 속에서 나오는 불완전한 지혜가 아니라 하늘에 완전한 지혜인 것이다. 예수님의 성장 과정에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 자료는 성경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 때가 되기까지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철저하게 감추신 것 같다. (참고 요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2.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들.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를 전체로 다루어 기록 하였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증거만을 성경에 기록 하였을 뿐이다. (참고 요20:31)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 역시 메시아로서 일반적인 인류의 탄생과 다른 기적적인 탄생만을 기록 하였을 뿐 메시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유년기 와 소년기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구원 사역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30세쯤 되어서 이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을 철저하게 숨긴 체 30세쯤 될 때까지 기다리셨는가?
우리는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오직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것에 의하면 때가 되지 안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여기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나서서 활동한 시기를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를 연구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고찰하는 것이야말로 풍성한 증거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1).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타자에 의한 메시야 증언.
(1).세례요한의 메시야 증언
성경기자 들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예언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 로서 앞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개자요 길잡이요 증인으로 말하고 있다. (마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메시야에 대하여 바로 알기 위해서는 세례요한의 메시아 증언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세례요한은 장차 나타나실 메시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감히 그분에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할 위대한 분으로 증거 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성령과 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증거 했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심판 주 되시는 분으로 증거 했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 세례요한이 메시야는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 하시나 그분이 어디에 사시며 그가 누구인가 가르쳐 주지 안했다. 그러나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는 예수님께서 곧 메시아임을 알아차리고 예수님께 세례 주기를 거부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주기를 거부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세례는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안 세례요한의 거부는 당연한 것이다.
둘째: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를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임으로 무죄 하신 메시아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세례요한은 알고 있었기에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 이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례를 받는 것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하시며 세례를 받으셨다. 이 예수님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야말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밖에도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직접 증거 하기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증거 하며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그의 제자들에게 증거 하였다.(요1:29)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직관적인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으로 누구든지 성령이 내려와서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메시야임을 깨달아 알라는 것이었다. 세례요한은 이 확실한 증거에 의하여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요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여기 요1:33과 마3:14과 마3:16~17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 위에 성령이 머무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머물었다고(마3:16~17) 증거 함으로 마3:14의 말씀과 요1:33의 말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여기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해석 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요1:33의 말씀은 세례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깨닫게 된 것은 그의 직관적인 사고의 불완전한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세례요한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오셨을 때 이미 예수님 위에 성령이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 오셨을 때 하나님의 음성과 더불어 성령의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마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셋째: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 오셨을 때 세례요한은 그의 직관적인 사고에 의하여 그가 메시야임을 알아 차렸다.(마3:14) 그 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고 그에 증거에 대한 확신을 갖고 증거 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필자의 생각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처음 알게 된 것은 비록 세례요한의 직관적 사고에 의한 것 일지라도 그것에 의존하여 증거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한 확실한 증거로 증거 함으로 세례요한의 증거가 조금도 허위가 없음을 강조 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세례요한의 증거 역시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2).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증거.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인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믿었다. 물론 가룟인 유다 역시 예수님을 따르던 초창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식어지자 끝내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심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대적자의 손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분명한 메시아라고 믿었다.
물론 어느 때에는 그들의 신앙이 약해져서 예수님을 멀리한 적은 있으나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분명히 믿었다.
여기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믿고 증거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거를 일일이 기록하는 것 보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증거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베드로는 3년 이상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가까이에서 모셨음으로 베드로의 증언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 세상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 찌라도 같이 동거동락 하다보면 그의 허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은 것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마16:16)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생명의 주 되심을 깨달았다. 베드로가 이렇게 깨닫게 된 것은.
첫째: 세례요한의 증거를 들었기 때문이요. (요1:35~42)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요(요6:68)
셋째: 예수님의 초능력을 가까이에서 친히 체험하였기 때문이요.
넷째: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요. (마17:1~8)
다섯째: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마16:17)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잠시 부인 한 적이 있으나 (마26:69~75) 결코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부인 하지는 않은 것 같다. 베드로는 곧바로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이 기억나서 회개 하게 되었고 (마26:75)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어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 할 때 사랑의 고백을 하였다.(요 21:15~17)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의 체험을 받은 후 성경을 이해하는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행2:21) 주장 하게 되었고 협박과 생명의 위기 속에서도 예수님의 대적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였다.(행4:5~20)
여기 생명의 위기를 불사하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하고 이 때문에 순교마져 거절하지 안했다는(전해 오는 설) 베드로의 증거야말로 신빙성이 있는 증거로 믿어진다.
(3).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의 증거.
요한복음의 저자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행전을 기록한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분이심을 증거 한다.
◎.태초의 말씀이신 분.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성부)와 함께 계셨던 하나님.
요1:1
◎.만물을 창조 하신 하나님.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 빛 되신 하나님.
요 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하나님이시나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8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 중에 하나이므로 위증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도 요한의 증거 당시 예수님을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명을 빼앗길 위기 속에 자신을 던져 버리는 행위임으로 감히 신앙의 확신 없이 이를 증거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 생명을 내 놓을 의리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예수님을 두고 뿔뿔이 흩어져 버렸던 제자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 구원에 주로, 하나님으로 증거 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아마도 그의 증거는 가까이 생활 하면서 예수님의 생활과 말씀 가운데서 흠과 티를 발견 할 수 없어 메시야로 희미하게나마 믿던 믿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구체화 되고 강한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메시야 증거 역시 신빙성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
(4).의심 많은 제자 도마의 증거.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되시는 분이시라고 믿는 믿음에 의심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라는 자신의 확신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급기야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 했다는 제자들에 보고를 접하였을 때는 그 부활의 사건을 강하게 부정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한 모습을 직접 보여 주셨을 때 도마는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그는 예수님의 완전한 부활은 하나님만이 가능 할 수 있는 부활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심 많은 도마가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증거 한 그 증거 역시 신빙성 있는 것으로 믿어야 할 것이다.
(5).예수님 당시 일반인 가운데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 하던 자들.
ㄱ.우물가의 여인.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으로만 알고 적대시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생명수 되시는 분이심을 말씀 하시고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히 알아 말씀하실 때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계속되는 대화를 통해 그가 참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고 그 확증을 같고 자기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동네 사람들에게 증거 하였다.
ㄴ.우물가에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듣고 예수님께 나아 온 사마리아인들.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들은 사마리아 인들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예수님께 나아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고 그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깨닫게 된다.
(6).예수님의 대적자 백부장의 증언.
막15:39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책임자로 보이는 백부장이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을 가리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여기 백부장의 이 고백은 어떤 사실에서 기인된 것인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기인 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통에서도 원수를 용서 하시는 모습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고통으로 죽이는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 속에서도 저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는 용서 하는 모습에서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단순한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말씀한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하신 말씀은 일반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특히 강도에게 락원을 허락하시는 말씀은 인류에 구원자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말씀이 단순한 인간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곧 인류에 구원자의 말씀으로 믿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은 너무나도 의연하게 맞이하는 죽음이었다.
물론 예수님께서 나에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반론을 제기 하며 오해하는 자들도 있으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을 이루기 위하신 것이지 하나님을 원망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메시아의 고통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보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 하나이다.하시며 운명을 거두시는 모습에서 분별력이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 하나님의 아들임을 직감 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예수님의 운명하실 때 함께 나타난 자연의 괴이한 현상을 보면서.
눅 23: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해가 빛을 잃고 어두움이 임한 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자연현상이 아니었다고 보여 진다.
만일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면 성경에 기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분별력이 있던 백부장은 이런 자연의 괴이한 현상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하여 일어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으니 라고 여겨진다.
(7).마귀의 증거.
마귀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증거 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 이유는 마귀는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럼 마귀의 증거는 무엇인가?
마귀가 예수님을 향하여 증거한 증거는 예수님께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 하였던 것이다.
마귀가 우리인간을 속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을까? 과연 예수님께서는 바리세인들의 말과 같이 마귀들의 왕 바알새불을 힘입어 일하던 자이셨는가? 그리하여 마귀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케 하였는가? 성경은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말씀하기를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의 이런 증거를 원하지 않으셨고 이런 증거를 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막3:11~12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따라서 마귀들의 증거는 예수님을 유익되게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 증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연 발생적 증거 역시 신빙성이 없다고 볼 수 없다.
2).예수님께 불러진 명칭이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거 한다.
(1).예수.(Ιησου )
예수란 이름은 천사의 의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그 뜻은 자기 백성을 구원 할 자 라는 뜻을 갖고 있는(마1:21) 메시아적 이름이다. 이 이름은 우리가 메시아로 믿는 나사렛 예수님께만 이름 지어진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인데 눈의 아들 이스라엘의 민족의 지도자 여호수아(수1:1)와 여호사닥의 아들 제사장 여호수아에게도 불러진 이름이다.(슥3:1) 이것은 우리가 메시아로 믿는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의 고유성을 깨뜨리는 것 보다는 구약의 나타난 두 여호수아는 메시야의 그림자적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2).그리스도.(Κριστος)
그리스도란 명칭은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 있다. 구약시대에는 이 기름 부음을 왕과 제사장에게 행해 졌으며 (출29:7; 레4:3; 사9:8; 삼상9:16; 10:1; 삼하19:10) 선지자의 기름 부음은 왕상19:16에 기록 되어 있다. 특히 왕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불러지기도 했다.
구약시대의 기름부음은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의하여 직임이 임명 되었다는 것과.
◎기름을 받은 자와 하나님 사이에 신성한 관계가 성립되었다는 것과.
◎하나님에 의하여 직임이 임명 된 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는 것이다.
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메시야의 명칭이 신약 시대의 이르려 나사렛 예수님에게만 고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아마 그리스도의 3가지 직임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며 인류를 구원하려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나사렛 예수님께 불러진 그리스도란 명칭은 단순히 구약시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구약시대의 예언된 장차 나타나실 구원자.
마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신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한 명칭.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26: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막 14: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눅 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
요 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구주로 표현된 명칭.
마 22:43~45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다.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유일한 지도자로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요 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구세주.
눅2:11
(3)인자.( uiJo;n tou' ajnqrwvpou )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단순한 사람을 표현하기도 하고(민23:19; 삼상26:19; 사51:12) 하나님 앞에 고 하는 인간 자신이 자신을 표현한 명칭(시8:4)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실 때 사용된 명칭이기도 하다.(겔2:1)
구약시대의 인자라는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사용된 것은 단7:13에 언급된 인자 같은 이이다.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님께서 이 명칭을 자주 사용 하셨는데 그 명칭을 40회 이상이나 사용 하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사실에만 예외가 있을 뿐이다. 여기 예수님의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성을 소유하신 분(요1:14)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예수님께서 이 명칭을 자주 사용 하신 이유는
◎.일시적이나마 복음 전 할 때 장해를 받지 않기 위하여 자신이 메시야임을 잠시나마 은폐하기 위하여.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인간의 삶을 경험 하시고 인간의 곁에 계신 분이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마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와 고난을 받아야 될 대속이 어린양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며.
마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눅 9: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여 인간이 되셨음으로 심판 주 되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막 2: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4).하나님의 아들.(uiJe; tou' Qeou' )
하나님의아들이란 예수님에 신성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하나님에 아들이란 명칭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4:2 호11:1) 다윗의 집에 약속된 왕에게 와 (삼하7:14 시89:27) 천사들에와 (욥1:6 38:7 시29:1) 일반적으로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창6:2 시73:15 잠14:26) 사용된 것은 사실이나 사람에게 사용되거나 천사에게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과 조물주와의 관계를 표현한 명칭이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의 관계를 표현한 명칭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천사와 사람에게 불러진 하나님의 아들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성경은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천사와 사람에게 불렀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복수형으로 표현 했으며, 예수님께 불러진 하나님의 아들이란 단수형으로 표현하여 독생자라 불렀다.
예수님께 불러진 하나님의 아들이란.
◎.형이상학적 탄생의 의미로 사용.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곧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난 존재로 세상적 개념으로 볼 때 예수님은 영존하신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보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은 정통 기독교의 교리로 믿고 있는 삼위일체설에 대하여 부정을 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사야서 9장6~7절 말씀을 보면 인류에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는 영존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탄생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세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탄생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지식적인 차원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탄생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예수님을 가리켜 독생자라고 표현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탄생 하셨으나 그 탄생은 형이상학적인 탄생으로 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히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메시아적 의미로 사용.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 되시는 성자로 사용.
마11:27; 14:28~33; 16:16; 21:33~46; 22:41~46; 26:63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따라서 예수님께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낸 것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명칭이다.
(5).주( kuvrio" )
신약 성서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주 라는 명칭은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존경하는 표현으로.
마 8: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마 20: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소유권과 권유를 표현하고 있으나 예수님의 신격을 내포하지 않는 표현으로.
마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승귀한 인격과 최고 영적 권위를 표현하는 명칭으로 하나님과 동일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막 12:36~37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눅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눅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 영적 권위를 표현 하는 명칭으로 주는 단순히 존경 받고 훌륭한 사람에게 와 영적존재(천사)에게 불러질 수 있는 명칭이 아니고 하나님께만 불러질 수 있는 명칭으로 예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에 구주가 되심을 분명히 증거 하는 명칭이다.
3.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거 하기 위하여 보여준 말씀과 표적.
(1) 하나님께서 직접 증거 하신 말씀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요12: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2) 하나님께서 직접 증거 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
ㄱ.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신 표적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ㄴ.변화산 표적
마17:1~8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의 두 형제를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오르셨다. 거기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그에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으며,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 하시는 모습을 그에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았던 베드로는 거기서 같이 살기를 구한다. 그때 빛난 구름이 덮히며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에 말을 들으라 하셨다. 여기서 보여 진 환상은 한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 동일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 환상은 단순한 환상이라고 보기 보다는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직접 증거 하신 표적을 주신 것으로 여겨진다.
ㄷ.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제 육시로부터 제 구시까지 어두웠던 표적
(마27:45)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태양이 그 빛을 잃고 어두웠다고 증언 하고 있다.
여기 어둡게 된 것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 워 어둡게 된 것이 보다는 태양은 떠있는데 그 빛을 잃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괴이한 현상을 기록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 괴이한 현상으로 태양이 빛을 잃고 어둡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께서 메시아 이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표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ㄹ.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표적
마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승에 의하면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의 두께는 한 손 폭의 두께로 4인치(약 10㎝)였다고 하며 Haldeman에 따르면 휘장은 두 마리의 황소가 양쪽에서 잡아당긴다 해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직조 되어 졌다.라고 한다. (이영규 목사 저 성막의 비밀 참고)
이토록 튼튼하게 직조된 휘장 막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은 대 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그곳을 이제 예수님에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는 모든 자들에게 허락하신다는 하나님의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4).예수께서 자신이 직접 메시아임을 증거 하신 증거
(1) 행동을 통하여
ㄱ.무죄하신 메시야
마귀에 시험을 이기심 마4:1~10
사람은 가장 약할 때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 짖기 쉬우며 가장 강하고, 편할 때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죄 짖기 쉽다.
예수님께서는 금식함으로 육체가 가장 약하여 졌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겼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한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의 논리적인 유혹의 시험을 이기셨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어떠한 마귀의 유혹 속에서도 마귀의 유혹을 따라 하나님 앞에 죄 짖지 않는 메시야 곧 무죄하신 메시야를 증거 하신 것이다.
ㄴ.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
◎.죄인과 가까이 하심.
인류에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죄인들과 가까이 할 찌라도 결코 그들에 죄악에 동화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가까이 하셨으나 결코 그들에 죄악에 동화 되지 않으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신 모습에서 인류에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죄인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들의 죄악에 동화 되지 않는 모습에서 더욱더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의 모습을 확실히 보게 된다. ( 마9:9~13; 눅5:32; 히4:14~15)
◎.간음 중에 잡힌 여인 용서.
예수님을 시험 하는 유대인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은 한 여인 끌려 나와 예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시는지 시험하기를
율법에 의하면 이런 자는 돌로 쳐야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판단 하십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주장하며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하셨다 그리하자 율법으로 여인을 정죄한자들이 여인을 떠나게 된다. 우리는 여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죄인을 위하여 변호 하시는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 요8:3~11)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받으실 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부정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강도의 죄를 지고 예수님의 함께 사형 당하는 자 중 예수님의 우편에 있던 한 강도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예수님께 구원을 부탁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주저 없이 낙원에 들어갈 자격을 주셨다.
과연 누가 자신의 마음 되로 낙원에 들어갈 자격을 줄 수 있는가?
그것은 인류에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만이 가능 할 수 있다.
여기 우리는 한 강도에게 낙원에 들어갈 자격을 거리낌 없이 정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다. (눅23:39~43)
ㄷ.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 일부 사람들 가운데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메시아적 찬양을 돌렸다 메시아적 찬양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거절 하지 않으시고 당연한 것으로 받으셨다.
ㄹ.하나님의 아들 되신 메시야.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 하지 않으시고 그 고백이 옳다고 칭찬하셨다. 여기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성품을 볼 때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베드로의 이런 고백을 분명하게 부인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고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베드로를 칭찬 한 것은 자신이야말로 메시야임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16:16~20
ㅁ.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랑을 실천 할 자는 누구인가? 아마도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만이 가능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 하라고 명하셨고 자신이 또한 실천함으로 사랑의 본체 되신 하나님이심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마5:43~48 사랑의 명령
눅23:34 사랑의 실천
ㅂ.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메시아.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다 특히 인간의 마음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물론 심리학을 연구한 분들이 상대의 행동을 통하여 어느 정도 상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사단의 힘을 입은 자들이 얼마만큼 상대의 마음을 투시 할 수 있어도 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 속담에도 열길 물 속은 알 수 있어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1:47~49 나다나엘을 아심.
마2:24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심.
요4:16~19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아심.
ㅅ.새 계명을 주실 수 있는 메시아.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재정할 수 있는가? 또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새 계명을 우리 인간들에게 줄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며 또한 이렇게 말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월권하는 불경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율법에 입법자는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체이신 인류에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라면 이일을 할 자격이 있다. 우리가 구원주로 믿는 나사렛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 없이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는 메시아임을 알 수 있다.
(요13: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ㅇ.하나님을 바로 섬김의 법을 아시는 메시아.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이 바로 섬기는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서로 논쟁하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고 생각을 했다. 이 논쟁의 모습은 오늘날 각 교회들과 각 신학자들이 자신들 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긴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런 논쟁을 할 때마다 어떠한 결론을 맺는가? 하나님이 오시면 누가 옳은지 확실히 아실 것이라는 것이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법은 메시야가 오시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하나님께 올바fms 예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요4:20~26)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 참 예배하는 법을 아시는 메시아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하 신일은 그가 참 메시야임을 나타내신 사건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성전에서 매매 하던 자들의 매매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돕는 매매였음으로 어쩌면 그들의 매매는 유대인들에게 어쩌면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보였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선교라는 이름으로 또는 교회 운영을 위한 방편으로 행해지는 장사와 기업식의 교회 운영이 용납되어 질 수 있는 것도 정당하게 보여 지는 것과 같다.
우리는 여기 예수님께서 보여준 실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위를 정죄함에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이런 행위는 옳음과 그릇됨이 공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과거에 어떠한 실례를 준하지 않고 과감하게 성전에서 매매 하던 자들을 책망 하 실수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아시는 메시아였기 때문이다.
(막11:15~17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2).이적을 통하여.
ㄱ.마귀를 멸하시는 메시야.
예수님께서 귀신을 몰아내시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오늘날 무속 하는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 사람을 푸닥거리로 온전하게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그때 당시도 귀신에 지배를 받는 무당들이 귀신을 쫓는 것이라고 생각 한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 하시기를 마귀의 나라가 스스로 분쟁 한다면 결코 마귀에 나라는 스스로 설수 없으며 스스로 망하게 된다고 하시며 마귀의 나라는 서로 분쟁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당들이 귀신을 쫓는 것은 귀신을 쫓는 체 하며 사람들을 속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은 사람을 속인 무당들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은 이미 마귀의 나라가 하나님의 아들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에 의하여 부셔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 귀신을 쫓아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예수님의 이적 행하시는 모습에서 우리는 메시야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 마8:28~34 )
ㄴ.인류에 약함과 병을 짊어지신 메시야.
마11:5
세례요한이 옥중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당신이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야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게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말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어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 된다 하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암시 하셨다.
우리는 여기 예수님께서 행하신 병든 자 치료와 약한 자를 일으키시는 이적을 통하여 인류에 약함과 병을 짊어지신 메시아 상(사53:4~6)을 발견할 수 있다.
ㄷ.생명의 떡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며 주리셨을 때 사단은 시험하여 이르기를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 덩이가 되게 하여 먹으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육에 양식 보다 더 귀한 것임을 강조 하시며 사단의 말을 따르지 안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보다 더 귀하지 않는 떡을 친히 만들어 주시는 이적을 보이셨는데(마14:13~21; 마15:32~39)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생명에 양식이 되심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요6:31~58)
곧 사람이 떡으로 육신이 사는 것 같이 영이 살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희생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이적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 예수님께서 떡을 만들어 주신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에서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할 메시야 상을 볼 수 있다.
ㄹ.자연을 지배하시는 메시야.
사람이 물위를 걷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 물론 소금쟁이와 같은 가벼운 곤충은 물에 표면장력을 이용하여 물위를 걸을 수 있으나 力學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 하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다고 말씀 하고 있다. 그 의미는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막6:48~51)
또 어느 누가 자연을 명령 한마디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아마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허구성이 많은 동화 속에서나 신화에서나 가능할 이야기다. 그러나 사실을 그대로 서술해야 하는 역사적인 기록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유는 자연은 의식이 없는 것으로 사람의 명령을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람 보고 명 할 때 바람이 순종하고 바다에게 명령 하였을 때 바다가 순종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이 사건을 기록한 성경을 상세하게 고찰한 사람이라면 성경이 허구성이 있는 그런 책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진실 된 책이라는 생각에 이의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다는 사건과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 하셨다는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속하신 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물위를 걸으신 이적과 바람과 바다를 명령 한마디로 잠잠하게 한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에 모습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 상을 분명히 볼 수 있다.
( 막4:39~41)
ㅁ.생명을 주시는 메시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행 하신 이적 중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우리에게 의미 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의술로도 죽은 자를 완전하게 살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어 나흘이 되어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다. 여기 완전히 죽은 자를 살리실 분은 누구인가? 그것은 인간을 흙으로 창조 하시고 코에 생기를 부어주신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어 부패된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간에게 생명 주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이야 상을 볼 수 있다. ( 요11:39~41)
ㅂ.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전능하신 메시아.
필자는 어렸을 때 아라비아 나이트를 읽고 마법사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바꾸는 이야기를 읽고 나도 마법사들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바꾸는 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 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물체를 변화시키기 위해는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요소를 가미 시켜야 하며 사람들이 원한다 해서 모든 것을 원하는 되로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요한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변화 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무엇이지 변화 시킬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아무런 것을 가미하지 않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을 보이셨다. 우리는 이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에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 상을 볼 수 있다.
(요2:1~11)
ㅅ.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수에서 고기잡이로 전문가가 된 어부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 호수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 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어부에게 고기가 넘치도록 잡히게 했다.
여기 자신의 말씀에 순종 하는 자에게 안 되는 일을 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는 예수님의 이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축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메시아 상을 볼 수 있다. ( 눅5:5~8 )
(3)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 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증거는 참되지 못하다고 했으니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증거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요8:12~13)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려 낼 때 자신을 아름답게 포장하여 드려내려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을 증거 할 때 그 증거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 드리기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 참이니
그 이유는
첫째: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이 함축하는 의미는 곧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지각으로 깨달을 수 없는 천국에서 오셨고 천국으로 가실 하나님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인 메시아 예수께서 자신을 증거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는 분명 메시아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기에 거리낌 없이 자신을 증거 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셨다. (요8:14)
둘째: 예수님의 증거는 자기 자신이 증거 하시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안에서 같이 증거 하는 것임으로 참된 것이라고 말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증거 하는 것에 대한 신빙성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거 하시는 말씀을 고찰 하자.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집적 증거 한 말과 행동.
ㄱ.하나님께서 인 치신 메시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인 맞은 자로 표현하고 있는데(요6:27) 여기 인 맞음이란 σφραγιs로서 안전, 보전을 위해 도장을 찍음에서 온 것으로 보전하다, 증명하다, 인봉하다를 말한다. 성경은 인 맞은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을 말씀 하는데(계7:4) 예수님의 인 맞음과 구별 하여야 한다. 계7:4 말씀의 구원 받은 백성에게 행해진 인 치심은 문맥을 보아 하나님의 구원 받을 백성을 하나님의 것이라 인 치심으로 멸망으로부터 보호 하겠다는 의미로서 인 치심을 말씀하는 것이요 여기 요6:27에 예수님께 행하여진 하나님의 인 치심은 문맥을 보아 하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로 삼으신 메시야에 대한 증명으로 인치를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인 치신자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메시아임을 자신의 입으로 직접 증거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ㄴ.자기 목숨을 사람들의 대속물고 주실 메시아.
( 마 20:28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과연 우리 인간을 위해 온전한 대속물이 될 자격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오직 인류를 구원하려 오실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20:28을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대속할 유일 하신 구원자 메시야 되심을 말씀 하신 것이다.
ㄷ.창세전에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가졌던 메시야.
( 요17:5 요17:24)
예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같이 영화를 누렸던 자로 자신을 표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가 아니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면 그는 분명 미친 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행위에서 또는 말씀 속에서 미친 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고찰 하였다면 예수님에게서 미친 자의 모습을 발견 하기란 아주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발견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창세전에 함께 영화를 누렸다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렸던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야이심을 거짓 없이 솔직하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ㄹ. 하나님과 동등한 메시야.
( 요5:18 요10:30~3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 하면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자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 함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오직 핍박과 죽음에 위협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명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시려 오신 메시아임을 인간들에게 알려 줌으로 믿고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 하시려는 의도에서 직접 말씀해 주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ㅁ.자신의 생사를 마음 되로 결정하시는 메시야.
우리 사람들은 자신의 생사를 자기 마음 되로 할 수 없다. 어떤 자는 죽는 것만은 자살을 통하여 자신 마음 되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것도 결코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 한다.
전에 필자는 삶의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생명을 버리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끝내는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그렇다 성경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의 허락 없으면 결코 죽일 수 없으며 스스로 죽을 수 없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생사를 자신 마음 되로 정 할 수 있는 것으로 말씀 하시고 있다.(요10:17~18)
여기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사를 자기 마음 되로 정할 수 있다고 말씀하심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야임을 직접 증거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ㅂ.세상을 이기신 메시야.
하나님의 대한 신앙이 강한 우리 인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악이 지배하여 온 세상을 스스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 해도, 또는 강한 의지력을 가졌다 해도 악이 지배하여 온 세상을 극복한고 이겨 나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 하신다. (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여기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임을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ㅅ.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아.
인간의 선제설을 믿는 그런 자들의 의하면 우리인간들 중에는 신으로 있다가 신의 계율을 범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인간이 된 자 곧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런 주장에 동조 하지 않는다. 우리인간은 결코 하늘에서 내려올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인간의 영육이 남녀의 성교에 의하여 탄생 될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요3:13) 예수님의 잉태는 성령으로 잉태 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이를 증거 했다.(마1:20)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유일한 분이라고 말씀하심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야임을 직접 말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ㅇ.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메시야.
필자는 가끔 부흥사들 가운데 자신이 성령을 체험시킬 수 있는 자로 표현하는 것을 보는데 그런 부흥사들는 성경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자일뿐이다.
성경은 세례요한의 증언을 통하여 오직 메시아만이 성령세례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음을 말씀하시고 있다. (마3:11)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다고 말씀 하셨다.
여기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신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주실 메시아이심을 직접 증거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14:16~26 요16:17
ㅈ.하늘과 땅에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자신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로 받으신 분으로 말씀하므로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임을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 마28:18)
ㅊ.천국 열쇠를 주실 수 있는 메시야.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신앙 하느냐를 물어 보았다.
그리하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라고 고백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베드로를 칭찬 하셨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다.(마16:16~19)
여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음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메시아임을 직접 증거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ㅋ.마지막 심판 주 되시는 메시야.
세례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인류에 메시아로 오실 분은 농부가 추수 때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던져 넣는 것 같이 인류를 심판 하시어 원하시는 자에게 영원한 천국에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영벌에 넣으실 심판자 되심을 증거 하고 있다. (마3:12; 참고 눅5:22)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인류에 심판관이 되심을 말씀 하시고 있으며(고후5:10)
예수님 또한 자신이 인류에 심판관 메시야임을 증거 하고 있다.
ㄱ).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음
(요5:27)
예수님께서 심판하시는 권세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인자됨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을 입으시기 전에는 심판 하시는 권세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음으로 인류를 구원할 자 메시야가 되어 인간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일을 전담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ㄴ).최후의 심판주로 활동.
예수님의 심판주로서 활동은 물론 예수님의 초림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니
첫째로는 사단에게 내려진 것이요 (요16:11)
둘째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전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저주 받은 자로 선언 되었기 때문이다.(요3:18)라고 말씀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심판주로서의 예수님의 재림은 영광 중에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구름타고 큰 영광으로 오심.
마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아버지에 영광으로 왕권을 가지고 오심.
마 16: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상과 벌을 주심.
마25:31~46
마 19:28~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이 담고 있는 메시야 증거.
다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것이 있으니 이제 이것을 고찰 하려고 한다.
ㄱ.죄를 사할 권세를 가졌다 하시며 구원에 메시야임을 증거.
( 마9:6 눅5:20~24)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려오는 것을 보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셨다. 그때 서기관들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참으로 참람하도다. 하였다 . 그들의 생각을 알고 있는 예수님을 주저 하지 않고 자신은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것을 분명히 말씀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죄를 사할 권세가 있는 분은 오로지 인간의 심판관이 되시는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죄를 사할 권세가 있다고 말씀 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 또한 분명 하나님의 본체 되시는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ㄴ.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하시며 대속의 메시야임을 증거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 육체적이나, 정신적이나, 영적으로 쉼을 찾지 못했다. 특히 영적으로는 율법의 정죄속에 늘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괴로워해야만 했다. 과연 율법으로 정죄된 죄 많은 사람을 이 죄짐으로부터 해방 시켜줄 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오로지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시며 율법으로 정죄된
우리에 죄 짐을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진리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되심을 알 수 있다.
ㄷ.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다 하시며 승리의 메시아임을 증거.
눅 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예수님께서 70인의 제자를 세우고 이들에게 명하기를 병자들을 고치고 천국이 가까워 졌다고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순종하여 제자들이 천국 복음을 전하고 기쁨으로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 하더이다.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뱀을 밞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능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라고 하셨다.
여기 뱀과 원수는 마귀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마귀를 제어할 권세를 주셨음을 말씀 하시는 것이다. 과연 우리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마귀를 제어할 힘이 있는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단코 마귀를 이겨 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마귀를 제어할 권세를 받은 자는 어느 누구도 마귀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귀신 들린 자를 치료한 적이 있는데 귀신이 예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을 보았다. 귀신이 두려워하는 자, 마귀를 제어할 권세를 주시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는 분명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이 틀림이 없다.
ㄹ.성경은 다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 것이라 하시며 성경의 주인공 되시는 메시아임을 증거.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의 해석은 코에다 걸으면 코걸이요 귀에다 걸으면 귀걸이가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해석의 법칙을 아주 가볍게 생각한다. 이토록 성경의 해석을 각자 자신의 생각 되로 인간의 합리성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며 진리를 막으려는 사단의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로 해석 하려면 성경해석의 주요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필자는 성경의 바른 해석을 원리를 가르칠 때마다 요5:39의 말씀을 가르쳐 준다. 곧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므로 예수님 안에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주인공은 예수님 자신이 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분명히 증거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ㅁ.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며
인류에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메시아 증거.
(요14:6)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며 자신을 통해서 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구원을 받을 수 있으심을 말씀 하시고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 하고 있으며 오로지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 하시고 있다.
과연 인간으로서 이런 말씀을 어느 누가 감히 하실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메시아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거리낌 없이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의 모습을 확실히 확인 할 수 있다.
ㅂ.나는 빛이라 하시며 어두운 세력 곧 죄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메시야 증거.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 기독교인의 사명을 말씀 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시며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여기 기독교인에게 불리워진 세상의 빛과 예수님께 불리워진 빛과는 차별이 있다.
성경은 이것을 구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참 빛이라 하셨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참 빛에게서 빛을 받아 반사하는 빛에 불과 하다.
곧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은 한 결코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빛 자체임으로 어떤 힘을 의지 않고도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참 빛이라 하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이 분명하다.
ㅅ.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며 성령을 보내실 메시아 증거.
성령을 보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 특히 자신을 믿는다 하여 성령 충만함을 허락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거한 말씀이라 하겠다.
ㅇ.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요11:25~26) 내게 주신 자를 마지막에 다시 살리리라 하시며 (요6:39~40,44)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메시야 증거
Ⅷ.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한 극적인 증거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한 가장 극적인 증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죽은 뒤 3일 후에 부활하신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인류에 죄를 대속하신 메시아의 구원사역을 보여준 것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후에 다시 사신 것은 사망을 저주를 깨뜨린 것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에 확증을 주신 메시야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바른 지식이야말로 예수그리스도가 인류에 구원자 참 메시아임을 알게 한다.
1.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증거 하는 메시아 증거
(1)예수님에 십자가의 죽음은 타의인가 자의인가?
예수님에 죽음이 타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강제적으로 집행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본인이 모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에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의미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ㄱ.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타인에 의하여 어쩔 수없이 강제로 집행되었다면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 성인으로 불러 질 수 있어도 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실 메시야가 아니다.
ㄴ.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임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광인이든지 메시아이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 하였다는 증거.
ㄱ.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팔자를 미리 알고 있었다.
마 26:23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죽이려 하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써 가르치시니
◎.죽는 날짜를 미리 알고 있었다.
마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사람들에 의하여 죽을 것에 대하여 분명히 알면서도 그 죽음을 피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ㄴ.무력으로 얼마든지 십자가의 죽음을 모면 할 수도 있었다.
◎.따르던 자들을 선동하여 대적자들을 대적 할 수 있었다.
◎천사들을 대동하여 대적자들을 대적 할 수 있었다.
(마26:53)
예수님께서 광인이 아니고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증거.
ㄱ.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것이었다.
(마26:39~45)
ㄴ.십자가의 죽으심은 성경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마26:54; 참고 사53:5)
ㄷ.십자가의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요1:29 참고 사53:4~6)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예수님에 십자가의 죽으심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된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광인의 광기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대속적 죽음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여기 대속적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분명 인류에 구세주가 아닌가?
2).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에서 말씀하신 말씀이 가지는 의미와 메시아 증언.
ㄱ.엘리 엘리 라막 사막다니.
(마27:46)
인류에 죄를 짊어지시고 고통당하시는 메시아 증언.
(시22:1 성경을 응하게 하심)
ㄴ.내가 목마르다.
(요19:28)
인류에 죄를 짊어지시고 고통당하시는 메시아 증언.
(시69:21 성경을 응하게 하심 )
ㄷ.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19:26)
인간의 아들이 될 수 없는 메시아임을 증거 한 증언.
ㄹ.아버지여 저희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23:34)
인류에 중보자 되시는 메시야임을 증거 한 증언.
ㅁ.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심판주 되시는 메시야임을 증거 한 증언.
ㅂ.다 이루었다.
(요19:30)
승리자 메시아임을 증거 한 증언.
ㅅ.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눅23:46)
아버지 하나님께로 온 아들 되시는 메시아임을 증거 한 증거.
이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으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말씀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2.예수님의 부활이 증거 하는 메시아 증거.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것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죽으신 3일 후에 부활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죽은 자가 살아났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부활이 가지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롬1: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 하시어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을 위한 부활이 아니다. 영적으로 소경된 미련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구할 때 패역한 시대 즉 바로와 같이 깨닫기에 완고한 자에게 보여줄 유일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다.
여기 요나의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나가 큰 물고기 속에서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것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무덤 속에 장사 지낸 바 되어 3일 후에 부활 할 것을 말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활의 사건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메시아만이 할 수 있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이 친히 부활 이며 생명이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한 보증이기 때문 요11:25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조상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죄로 모든 인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 사망이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폐하여 졌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사망의 형벌이 더 이상 주관치 못함은 보증해 준 것이기 때문 롬5:12~21 롬6:9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빙성
예수께서 메시아 되신다는 증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토록 예수님에 부활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사건 중에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부활에 사건을 믿으려 하지 않고 부정하려고 한다. 그들에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에 부활에 대한 부정의 허구성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 하다는 근거를 객관적으로 제시 하고자 한다.
1).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장하는 학설들.
(1).고등 비판가들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한다.
그 이유는
ㄱ.육체의 부활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활 하실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의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기 전에는 영으로 존재 하셨다. 그때 그분은 조금도 불편하거나 부족함이 없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으셨다는 사실이 육체의 제약 속에 살아야하는 불편을 겪으셔야만 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감에 있어서 육체의 부활이 꼭 필요한가? 하는 질문 속에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이들의 생각이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이 잘못 된 것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에 의미는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며.
(롬1:4)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의 주님이심을 보여주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에 대한 보증을 주시기 위한 것이며.
(요11:25).
◎.하나님의 형벌인 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졌음을 보여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ㄴ.이들은 기독교는 해독하기 어려운 오해와 모순에 기초하지 아니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 한다.
합리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성경을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 있다.
곧 믿음으로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고 믿음으로도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 주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합리성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부정하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ㄷ.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심령과 교회 내에 생존하심을 의미한다.
그들의 말의 의하면 부활은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나 제자들이 믿는 것뿐이라고 한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객관적이 아니요 믿음 속에 받아들이는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의 관념 속에 있는 하나의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알아야 한다.
(2).예수님의 죽음 자체를 부정하며 부활을 부정하는 자.
스트라우스는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실제로 운명하지 아니하고 기절 하였을 뿐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운명 하실 때까지 두 강도는 살아 있었다.
요19:31~33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 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 있던 시간이 완전히 죽으시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막 15: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그러나 이들의 주장들은 아주 잘못 되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 증거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서 운명 하신 것을 보고 확인하기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찔려 예수님에 몸에서 물과 피가 다 흘러 나왔음을 성경이 증언함으로 완전한 죽음을 확인 시켜 주었다.
요 19:33~34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께서 여기 저기 전신에 상처를 입으시고 3일 후에 제자들 앞에서 부활 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3).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시인하나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 하는 자들의 제설.
ㄱ.도난설
마28:15 말씀을 보면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유태인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을 한 후 거짓으로 부활을 증거 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 소문에 근거는 예수님의 시체를 지켰던 자들에 증언으로 쾌 신빙성이 있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증언에는 신빙성이 결어 된 허위 조작된 증언임을 마태는 고발하고 있다. 마태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시체를 지키던 파수꾼들의 증언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뇌물과 제안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들은 파수꾼들에게 거짓된 말을 하도록 뇌물을 주었다.
마 28:12~14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제사장 들은 파수꾼들에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제안했다.
( 마28:14)
특히 파수꾼들에 증언이 허위라고 확증할 수 있는 증언은 마27:62~66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한 후 부활을 주장할 가능성을 미리 짐작하고 무덤을 파수꾼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니 과연 파수꾼에 직무 유기가 가능 할 수 있겠는가? 또 파수꾼이 직무 유기를 했음에도 벌주지 아니 했음이 이상하지 않은가?
ㄴ.유령설
유령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마리아와 다를 제자들이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는 중에 정신이상이 생겨서 허상 곧 유령을 본 것이라 주장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신 후 나타내 보이심을 유령이 아닌지 의심한 사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손발을 보이시며 만져 보라고 하시며 살과 뼈가 있는 육체적 부활을 확인 시켜 주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ㄷ.환상설
환상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초로 하여 환상설을 주장한다. (고전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들은 바울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을 환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구운 생선을 먹으심으로 (눅24:42~43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의 부활이 환상이 아닌 사실임을 보여 주고 있다.
2.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신빙성 있는 증거.
참고 종합4복음서 연구강 태국 박사 저 p254.
(1).직접 증인 마태, 마가, 요한, 야고보, 11제자, 5백인, 여인들, 막달라 마리아등에게 11회나 부활 후에 나타나셨다. 그 외에 바울에게 나타났으며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게 들어 자세히 분석 하였다.
(2).바울의 서신의 증명.
(롬1:4,6:4 골3:1 살전4:14)진실한 학자들은 바울의 서신은 1세기에 바울이 쓴 것이라고 한다. 사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이라도 바울의 서신은 부정 할 수 없다. 라고 한다.
(3).부활이 없으면 증명 할 수 없는 7개의 조건이 있다.
ㄱ. 제자들이(도마까지)확실한 부활을 믿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이 부활의 사상은 어디서 왔겠는가?
ㄴ.바울의 개심 전과 그 개심 후의 삶을 비교하여 보면 놀라운 변화가 있는데 부활이 없다고 하면 그의 개심후의 삶은 어떻게 성명 할 수 있겠는가?
ㄷ.죽으신 후 3일에 부활, 이 3일의 사상은 부활이 없었다면 어디에서 나왔는가?
ㄹ.빈 무덤 부활이 없었다면 3일후에 시체가 없어진 것은 어떠한 이유인가?
ㅁ.제자들의 비겁한 심리 상태가 변하여 그 몸을 희생 하는 데까지 담대하여진 것은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설명할까?
ㅂ.주일의 출처는 무엇인가?
유태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인데 고대에 유태인 크리스챤들이 안식일을 버리고 일요일 즉 예수님의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기는 심히 곤란 할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이 주일 제도를 어떻게 설명할까?
ㅅ.세계적 기독교는 부활의 결과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께서 만일 그가 율법적으로 범죄자라고 하여 사형을 당하고 부활이 없었으면 어찌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 하겠는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인류의 구주로 세계가 신앙하는 근본적인 사상은 그의 부활에 있다.
예수님에 부활에 대하여 부정하려는 자들에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지금까지 그 증명들이 더욱더 확고하여졌다.
이토록 예수님에 부활의 확실성은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 하나님에 아들 메시야임이 분명히 증거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Ⅸ.결론
고대로부터 많은 선생과 성인과 지도자들이 그들의 훌륭한 교훈과 가르침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키며 인간이 바르게 사는 도리를 가르치고 지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에게 주어진 거대한 죄악에 힘 앞에는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 곧 그들은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할 구원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나사렛이라는 시골 목수의 아들 예수가 인류에 구원자 곧 인류의 소망이 되시는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물론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 요셉의처 마리아의 몸에서 인간을 입으셨는데 남녀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잉태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동정녀에 몸에서 스스로 인간을 입으신 것이다. 그는 외모로는 초라한 시골 나사렛 청년 이었으나 그는 분명히 인류의 구원자 메시아였다.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 했던 그 당시 유태인 종교 지도자들은 그가 메시아임을 극구 부인하려 하였으나 그를 따르고 영적 영안이 열린 자들은 구약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통하여 그가 확실한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님을 전파하며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증거를 하게 되었다.
우리가 역시 여러 가지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고찰한바 예수님이 확실한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열심히 전파함으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2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성경의 고찰을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임을 분명히 인식 했으리라고 믿는다.
이제 우리가 고찰해야 될 부분은 과연 인류에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만이 가능 한가?이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는 종교의 다원론과 구원에 길에 다양성을 주장하며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도 어떠한 종교와 교훈을 통하여 선하고 바르게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첫째:
이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부정하고 단순히 훌륭한 분으로만 인정하려고 한다.
둘째: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순종한 모범적인 의미만 있다고 알고 있다.
셋째:
이들은 아담의 원죄는 부정하고 자범죄 만 강조한다.
넷째: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정한 큰 죄와 사소한 죄를 구별 큰 죄는 정죄하나 사소한 죄라고 여기는 죄는 무시한다.
다섯째:
이들은 사람이 완전히 율법이행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에 주장을 긍정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오직 인류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이 구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체적으로 왜 인간 스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인류에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는가를 고찰 하려고 한다.
Ⅰ.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히브리어로는 야샤 ( [v'y:)이다. 이 야샤란 놓아주다, 구하다, 석방하다, 란 의미와 돕다, 구제하다, 란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구약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사용 되었다.
구약성경에 구원(야샤 [v'y: )는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1.구원이란 언어는 민족적 해방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
(출14: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 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 하시매.
2.구원이라는 언어는 삶의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망의 공포에서
시 6:4~5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 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시 107:13~14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사자의 입.
시 22: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 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전쟁.
신20: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
◎.악한 자.
시 59:2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
◎.질병
사38:20~21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 이사야는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었고
◎.환란
렘30:7
“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 로다 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3.구원이란 언어는 죄에 속박에서 벗어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 51: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 130:8]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
구원이란 헬라어로는 σωτηρια로 신약성경에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 되었다.
신약 성경에 쓰여 진 구원 σωτηρια는 어떠한 의미로 사용 되었는가?
1.구약에서와 같이 육체적인 안전과 건강에도 사용 되었다.
◎.원수의 손에서 구원.
행 7:25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생명의 위기에서 구원
행27: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육체적 병 고침
마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그러나 신약에서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을 더욱더 강조한다.
◎.죄에서 구원
눅 1: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
롬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3.신약에서의 구원은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지금 이 땅 위에서 구원에 기쁨을 누리고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한 구원은 최후에 심판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 날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며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왕으로 좌정 하시는 날이다. (롬3:11; 히9:28; 계20:11~21:4)
이제부터 논하고자 하는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서의 구원을 다루려 한다.
Ⅱ.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이 필요한가?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은 멸망 받을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 하고 있다. 아마 어느 누구든지 인간은 멸망 받을 존재라는 것에 대하여 는 부정할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여기 멸망에 대한 개념은 무신론자의 개념과 유신론자가 가지는 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무신론자가 가지는 멸망의 개념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요
유신론자가 가지는 멸망의 개념은 영혼이 고통 하는 곳에 들어감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이 필요한 이유도 같을 수 없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에게 육신에 죽음이 있기에 그 죽음에서 벗어날 구원이 필요하며 의술에 발전만이 이런 한 일을 얼마 정도 성취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신론자들은 인간은 죽음 후에 고통의 곳과 행복에 곳으로 분리되어 가는데 여기 고통의 곳에 가지 않기 위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 유신론자들 가운데도 왜 우리인간이 고통에 곳으로 가야 하는지는 기독교와 유대교 입장과 이방의 종교들과는 구별된다.
구별되는 것을 비교하여 보자.
이방의 종교 가운데 윤회설을 주장하는 자들
이들의 주장은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인 동물들은 수 없는 선행을 쌓아야 인간으로 승귀 될 수 있으며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그가 살았을 때 선하게 살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고귀한 신분으로 또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고 신적 존재로 살았던 존재는 신에 존재에서 추방당할 때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구원에 필요성은 저급한 존재로 윤회되지 않기 위해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자신이 선하게 사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전통 기독교와 유태교에 속한 자들
우리 인간은 처음에는 멸망 받을 자로 창조되지 않았으나 인간의 조상 즉 인간의 대표자인 아담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불순종하여 따먹음으로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류가 같이 죄인으로 정죄되었음으로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롬5: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뿐만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완전한 타락으로 스스로 죄에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여기 우리 인간은 죄에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멸망을 받지 않은 구원에 참여할 필요성이 있다.
Ⅲ.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상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상태를 고찰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만일 인간에 상태가 죄와 무관하든지 스스로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는 의지가 있다면 인류에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가?
1.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다.
요8:32~36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말이 너희에게 거하면 너희는 나에 제자가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씀 하시자 유태인들이 말하되 우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유자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죄를 범하고 있는 한 자유자가 될 수 없고 죄에 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 하셨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전까지는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2.인간의 내면세계가 악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다.
마15:1~20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실 때 그의 제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범하여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이것을 지적하여 정죄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요 입에서 나오는 것들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우리는 인간의 마음자체가 이미 악에 의해 오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마음은 악한생각, 살인과, 음란, 도적질과, 거짓증거 , 훼방을 일으키게 하는 악으로 오염된 것이다.
3.인간은 양심의 법정 앞에 죄인임을 시인 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요8:2~9 말씀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현장에서 잡은 간음 중에 있던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그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질문하여 말하되 “선생님이여 여인을 간음 현장에서 잡아 왔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 모두가 물러가게 되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자신이 남을 정죄 하는 자리에 설 때는 자신은 죄와 상관이 없는 무죄한자로 생각하나 양심의 법정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임을 시인 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알 수 있다.
4.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자이다.
마26:41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겟세마네라는 곳에 가서 기도 하실 때 제자 베드로와 세베데 의 두 아들 들에게 깨어 있어 기도 하라고 부탁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잠들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음으로는 깨어 기도하려 무진 애를 써도 육신이 약해서 할 수 없음을 지적 하셨다. 바울 사도 역시 롬7:18~25 말씀을 통하여 죄에 있어서 인간에 의지가 무능함을 통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우리는 인간에 의지로 지극히 적은 것 하나마져도 제대로 실천하기가 어려우며 의를 행함에 있어서 인간에 의지는 전적으로 무능한 것을 보게 된다.
Ⅳ.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이행하고 있다는 착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종교를 보던 사람이 완전히 선하게 살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이행 한다면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과연 가능 한가?
사람들은 이것이 가능 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여러 종교를 통하여 무단히 노력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에 상태를 고찰함 속에서 우리인간에 상태는 죄에 종이 되어 의를 행할 자유의지가 박탈되었고 인간에 내면세계 즉 마음이 이미 악에 의해 완전히 오염되었고 자신의 의지로 무엇 하나 바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상실한 무능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양심의 법정에서 죄인임을 시인 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전히 율법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착각이다.
과연 이 착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그 이유는
1.사람들은 형식적인 율법만 생각하기 때문에.
마19:16~21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네가 영생을 얻고자 할진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청년이 묻기를 어느 계명 을 지켜야 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가리켜 주었다.
그리하자 청년은 당당하게 내가 이 계명을 어려서부터 모두 지켰습니다. 아직도 내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 말을 듣고 말씀 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하셨다.
여기서 우리 형식적인 계명을 지키고 만족하는 인간에게 근본적인 계명을 요구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를 볼 수 있다. 과연 우리 인간 누가 하나님의 근본적인 계명(참고 마5:21~48)의 요구를 완전히 지켜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을 수 있는가?
2.인간은 인간 나름 되로 정한 큰 죄는 크게 정죄하나 사소하게 여기는 죄는 무시하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간음 현장에서 잡은 여인을 정죄한 자들은 이 여인이 아주 큰 죄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보다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교만한자,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찬 자들을 더욱 큰 죄로 정죄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우리는 인간이 나름 되로 크게 보는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가 있고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고 무시하기 쉬운 죄가 하나님께서 큰 죄로 여기시어 용서하지 않는 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Ⅴ.형식적인 율법과 근본적인 율법은 무엇이 다른가?
대부분 율법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형식적인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들임을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율법은 형식적인 율법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요구 하신다.
곧 근본적인 율법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여기 우리는 형식적인 율법이 무엇이며 근본적인 율법이 무엇인지 비교하여 고찰하여 보고 근본적인 율법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생각 하여 보자.
1.형식적인 율법과 근본적인 율법과의 비교.
건전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어려서부터 율법에 대하여 배워 왔고 실천하여 왔음으로 그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자부하여 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에 따라 율법을 범하는 자들을 자신 있게 정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대인들을 본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지켰다는 율법으로는 완전한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지킨 율법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 이행은 형식적인 율법 이행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근본적인 것 까지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비교한 두 가지 율법에 대한 비교를 고찰하여 보자.
1)살인죄.
◎.형식적인 율법에서의 살인죄:
고의적으로 상대에게 해를 가하여 상대의 육체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실행적인 살인죄를 말한다.
◎.근본적인 율법에서의 살인죄:
근본적인 율법에서는 실행적인 살인죄는 물론이거니와 상대에게 노하는 원초적인 살인까지 포함한다. 여기 상대에게 노하는 것이 어찌 살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모든 살인죄는 상대에게 분노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분노하는 자가 살인죄를 범하지 못한 것은 살인죄가 싫어서가 아니다. 살인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율법에서는 살인죄의 시작이 되는 상대에게 노하는 것 까지 살인죄로 정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율법에서는 상대에게 라가(경박한 자)라고 하는 것과 미련한 놈이라 하는 것 곧 명예 살인도 육체적 살인과 동일시하였다.
2).간음죄(마5:27~32)
◎.형식적인 율법에서의 간음죄:
배후자 외에 타인과 육체적인 접촉을 통하여 성행위를 실제로 실행하는 것.
◎.근본적인 율법에서의 간음죄:
실제로 실행하는 간음죄는 물론이거니와 음욕을 품고 배후자가 아닌 타인을 보는 것 곧 원초적 간음과 음행 없이 아내를 버리는 사랑 파괴하는 행위와 버린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도 간음으로 정죄한다.
2.근본적인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는.
우리인간이 근본적인 율법 이행이 가능 한가?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는 로마서 주석 서론을 통하여 율법행위 (that doing the works of the law)와 율법 이행(that fulfilling the law)이라는 개념을 달리 해석하여 율법 행위는 인간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온전한 율법을 지킬 수 없으나 율법 이행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온전한 율법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령님에 도움이 있을지라도 온전한 율법에 요구를 이행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같이 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요구하는 율법 이행이 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이 근본적인 율법이행을 하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근본적인 율법의 요구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1).형제와 화목 하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마5:23~24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줄로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에게 사과하라. 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들 관계에서 온전한 율법 이행을 위해서는 먼저 사과하는 것 곧 화평 하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범죄 하게 하는 요소는 과감하게 버리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마5:29~30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고 너희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범죄를 하는 자신의 몸을 자해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내게 범죄케 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나에게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버리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살아야 만이 율법 이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자신의 말에 성실하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마5:33~3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에 성실하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자신에 말에 성실하라는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리인간이 자신의 말에 성실하려는 자세로 살아갈 때 조금이나마 율법 이행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4).넓은 아량으로 살아야 한다.
마5:38~4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가 너에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되며 너를 송사하여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네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 하여주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풍성한 사랑과 넓은 아량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 되로 살아갈 때 율법 이행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5)원수까지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마5:43~48
율법의 완전한 이행은 사랑으로 만이 가능한데 그 사랑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초월하여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때 온전한 율법 이행은 가능 하리라고 본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근본적인 율법을 완전히 이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근본적인 율법의 완전한 이행은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예수님 외에 어느 인간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도달할 수 있는가?
비록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받는 우리 기독교인도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해 아주 미력한 발 거름을 옮길 뿐이다.
Ⅵ.인간이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이 율법을 완전히 지켜 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완전히 율법을 행하면 의로운 자인고로 구원 받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롬10:5) 그러나 과연 인간 누가 율법을 완전히 행하여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인간은 근본적인 율법의 요구 아래 무능한 자임을 실감하게 된다.(롬3:20)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 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롬3:11)
그러므로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을 속이는 사탄의 간교함에서 나온 것이며(갈5:4) 이렇게 전하는 것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잘못된 자들이다.(갈1:6~8)
Ⅶ.율법은 우리에게 아무 필요가 없는가?
하나님의 은혜냐 율법이냐를 논하는 자들 가운데에서는 율법은 우리에게 무익한 것임으로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십계명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엡2:15 말씀에 원수 같은 의문에 속한 계명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로 폐하셨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율법을 구태어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을 바로 이해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께 하려 함이로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여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혼란이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고찰하여 보면 이런 오해는 모두 살아지리라고 믿는다.
여기 율법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아보고 율법은 과연 그리스도에 의하여 폐하여 졌는지 알아보고 오늘날에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되는지를 고찰하여 보자.
1.구원에 있어서 율법은 가치가 있는가?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다 실행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미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우리인간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 중에는 다소 착하게 살았다는 자들이 율법을 지키고 살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율법의 요구는 지극히 적은 율법 하나를 범하여도 모두를 범한 것으로 정죄함으로(약2:10) 율법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구원은 율법을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구원에 있어서 율법에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이 인간을 구원하는데 아무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간접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돕는 일을 했으니 그것은 인간의 죄를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율법이 없을 때에도 아담이후 범죄자였다. 그러나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깨닫지 못하고 이로서 구원에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오면서 인간은 자신들이 철저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이 엄청난 죄악에서부터 구원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갖게 된다.
또 율법은 우리인간이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지키어 구원 받을 수 없음을 가르쳐 줌으로 새로운 구원에 길을 모색하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을 바로 연구한 자라면 반드시 참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에 품을 찾게 되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율법의 가치를 인간들을 예수님에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παιδαγωγοs는 소년 보호자로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가는 직책의 노예 )으로 그 가치를 정하고 있다.
2.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율법에는 크게 3가지 기능이 있다.
첫 번째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다.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도 인간들에게 죄가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했던 가인의 후손 라멕은 자신의 불만으로 사람을 죽이고도 그것을 죄로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당연하게 떳떳하게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도 역시 이방인으로 있을 때 곧 하나님의 법을 알기 전에는 우상숭배를 죄로 여겼던가? 그 때 우리는 우상숭배라는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께 복을 구했으니 그것은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을 알게 됨으로 우상숭배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됨을 깨닫게 되었다. 이토록 율법은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롬3:20
“그러므로 육체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두 번째 기능: 상벌의 기능이 있다.
율법의 상벌의 기능의 잘 표현된 성구는 신명기 28장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축복을 받게 되고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 율법의 상벌의 기능에서 인간은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상 보다는 저주 받는 자로 정죄되었다.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에게 원수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엡2:15)
갈3:10: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롬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세 번째 기능: 사랑 실천을 요구 하는 기능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을 정죄하려는 목적에서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고 이 세상을 사랑이 넘치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는 목적에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 모두가 사랑을 실천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마22:37~40)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 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에 완성이니라.
3.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율법은 하나님께로 온 것으로 그 자체가 선하고 거룩한 것이다.(롬7:12)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오신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분명히 원수 같은 계명을 그에 육체로 폐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엡2:15)
여기 왜 하나님의 계명을 원수 같다고 하였는가? 그리고 예수님의 육체로 폐하셨다는 의미는 무슨 의미인가?
계명을 원수 같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기에 그 계명의 정죄적 기능만이 남아 우리를 영원한 멸망을 받을 자로 용서 없이 정죄하기 때문에 정죄 받는 인간의 측면에서는 계명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 그의 육체로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폐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으로 율법의 정죄를 한 몸에 짊어짐으로 율법에 정죄적인 기능이 그에 속한 자들에게 더 이상 필요 없게 했다는 것이다.
4.구원 받은 백성도 계속적으로 계명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났음으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계속적으로 지키도록 요구 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것은 그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랑으로 살도록 요구 하시는 것이다.(롬6:1~11)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인간을 사랑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자녀로서 삶을 위해 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셨다는 것은 율법의 정죄적인 기능을 뺀 사랑의 기능만을 가진 계명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살라는 것이다.(요일2:7~8)
Ⅷ.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 스스로 율법에 요구를 완전히 이행 할 수 없음으로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고찰 하였다. 여기 하나님께서는 희망 없는 우리 인간에게 희망의 빛을 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요1:9~12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무조건적인 은혜이다.
이 무조건적인 은혜의 근거는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 한데서 기인 한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구원 하시려는 마음에 있다.
요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1.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열려진 구원에 문
구원에 문은 예수님에 의하여 열려졌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 아래의 성구는 그것을 증거 하는 성구이다.
1).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신분이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에 길이심을 밝히고 있다.
2).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인간과 함께 하시기를 위하여 인간을 입으신 분이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원에 길 되신 예수님, 인류를 하나님께로 인도 하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으로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인간에 몸을 입으신 분이다.
3).예수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과 화목에 길을 열어 놓으셨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롬 5:8~11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4).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에 부활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에 길임을 확증 하셨다.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2.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구원에 문으로 누가 들어 갈수 있는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려진 구원에 문은 모든 일류가 모두 들어 갈 수 있는가?
성경은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에 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요3:16)
이 말씀은 구원에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격이 구약 시대와 같이 민족적으로 신체적으로 신분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 인류를 모두 구원에 문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 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예수 믿는 자로 한정 하고 있다. 곧 구원에 문에 들어 갈자는 들어갈 자격이 있는 자가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구원에 문에 들어 갈 자가 누구인가?
1)하나님께로 난자.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2)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이끌어 내신 자.
요6:44~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3).하나님께서 알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된 자.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4)예수님 자신이 원하는 자.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5)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 한자.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Ⅸ.구원에 이르게 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1.시인 하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인류에 구원자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마음으로나 행동으로나 말로나 시인하는 믿음이다.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2.신뢰하는 믿음이다.
신뢰는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1)예수님의 신분을 신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에 구원자 그리스도의 신분을 가지신 분임을 의심치 말아야한다.
2).그분이 하신 말씀을 신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조금도 의심치 말고 받아 들이야 한다.
3).그분이 하신 약속을 신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 하셨는가?
그것은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신다고 약속 하셨다. 우리는 이 약속을 조금도 의심 하지 말아야 한다.
4)그에 크신 사랑은 영원히 불면하심을 신뢰.
인간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전에는 다정하였던 친구가 오늘에는 적이 되는 경우도 있고 사랑으로 한 몸이 된 부부도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심치 말아야 한다.
5).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 이시다는 말씀을 신뢰.
예수님만이 우리 인간에게 유일한 구원이심을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한다. 어떤 사람을 이 말씀을 온전히 신뢰 하지 않음으로 다른 것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헛된 수고를 하다가 끝내는 구원에서 멀어 지는 경우가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의를 행할 능력이 무능한 우리는 그 어느 것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인류에 구원자 예수를 통해서 만이 구원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말아야한다.
3.확신하는 믿음이다.
1)하나님께서 나를 사랑 하시고 있다는 확신.
2).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대속에 십자가의 공로와 은총을 나에게 베푸셨다는 확신.
3).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나에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
4).하나님의 구원에 역사는 반듯이 나에게서 이루신다는 확신.
4.맡기는 믿음이다.
1).나에 모든 죄 짐을 벗어 주님께 맡겨야 한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나에 모든 삶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3).나에 영혼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
행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Ⅹ.구원에 대한 최종 결정 자 곧 최후 심판관 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은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 구원에 소극적인 면은 예수님 자신이 화목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케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구원의 적극적인 면은 예수님 자신이 친히 심판관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의 모든 죄를 간과 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선언을 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 하시고 무죄로 선고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1.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인류에 심판관이신가?
1).세례요한의 증거.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를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라고 증거(마3:12) 하면서 예수님께서 인간을 천국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지옥에 들어가게 할 수도 있는 심판관이신 분으로 증거 하고 있다.
2).예수님 자신의 증거.
마7:21~23 말씀을 보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예수님 자신을 묘사하시고
마13:41 말씀에는 마귀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지옥에 멸하시고 의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광을 얻게 하실 영원한 심판장이신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2.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에 심판관으로서 권세를 언제 받았는가?
성경은 예수님께서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으셨다고 말씀 하시는데(요5:27) 앞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심판관 되시는 권세를 그 분이 인간을 입으셨을 때 비로써 받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입으시기 전에도 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심판관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입으실 때 인간의 심판권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이양 하셨다는 것이다.
3.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 심판관으로서 활동.
예수님께서 최후 심판관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이 세상의 종말인 재림 때 이루어 질 것이다.
1).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구름타고 큰 영광으로 오심.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왕권을 가지시고 오심.
마16: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3).예수님께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상과 벌을 주실 것이다.
마19:28~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참고 마25:31~46)
ⅩⅠ.예수님의 최후에 심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시는가?
세상의 모든 재판관은 이미 기록한 성문법에 따라 재판하기도 하고 기록된 법은 아니어도 이미 전에 판결된 판례에 따라서 재판하는 것이지 무조건 자신의 마음 되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최후에 심판 역시 그때 기분에 따라서 심판 하시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최후 심판을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실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
그럼 예수님의 최후에 심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시는지 고찰하여 보자.
1.구원에 이르지 못할 자.
1).자신이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
마9:10~12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기를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느냐고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 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 하듯이 나는 죄인을 부르려 왔노라.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자는 자신이 의롭다고 스스로 자부하여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를 내세우는 자가 아니고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깨닫고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긍휼을 입고자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2).주에 복음을 거절한자.
마10: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마 22:3~7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그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책임이 전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3).성령 훼방 하는 자.
마12:31~32
성경에 보면 모든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성령 훼방 죄는 무엇인가?
성령 훼방 죄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으셨을 때 그를 시기하던 자들이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으신 것은 마귀의 왕 바알새불에 힘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비방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인자를 거역하는 것은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이 말씀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성령 훼방 죄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귀의 능력으로 격하시켜 비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우리가 령에 세계에 대하여 무지해서 성령 훼방 죄를 범해도 정죄 받게 되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영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마귀의 능력을 쉽게 분별하기 어렵다. 영에 지식이 부족해서 성령의 능력을 부정했다 해서 정죄함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분명히 알면서 자신의 시기심과 완악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마귀에 능력으로 격하시켜 부정하며 모독 주려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4).예수를 믿는 소자를 실족 시키는 자.
마18:6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지극히 적은 소자 하나를 실족 시키는 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물 속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말씀 하셨다. 곧 예수를 믿는 지극히 적은 자 하나라도 의도적으로 실족케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 자를 실족 시키는 것으로 직접적인 것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를 자신의 판단으로 정죄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간접적인 것은 잘못된 가르침으로 실족케 하는 것이다.(마23:15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 말과 행동이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를 예수님과 이간시키는 것을 말한다.
5).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하지 않는 자.
마18:35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너희에 엄청난 죄를 용서해 주었으니 너희도 너희에게 죄를 범한 자들을 용서 하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가 너희에게 죄를 범한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긍휼과 관용을 베풀 줄 모르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긍휼과 관용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여기 우리인간은 하나님의 법 되로 심판 받아 구원함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한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의 심판을 받는 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6).세상 부요함에 매달려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거절한자.
마19:16~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요한 청년이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자 그 청년은 자신 있게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너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 그리하면 하늘에 보화가 있으리라.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나 이 부자 청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는 세상의 부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려우니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같이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여기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는 세상에서 조금 착하게 살았다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오직 예수님을 따르는 길만이 구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세상 부요함을 사랑 하는 것이 큰 장해물이 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 부요함이 기독교인에게 저주를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데 장해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저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부요함에 매달려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하는 것은 분명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7).예복으로 단장 하지 않은 자.
마22;11~13 말씀을 보면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 혼인 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초청한다. 그런데 이 초청을 처음 받은 자들이 이 초청을 거절한다. 임금은 초청을 거절한 자들을 향하여 진노하게 되고 그 임금은 그 종들에게 다시 명하기를 사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모아 잔치에 참여 시키라고 명령 하셨다. 종들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사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모아 옴으로 혼인 잔치에 많은 손님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임금님께서 손님을 보려고 들어올 새 거기에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은 그 연유를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아무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이에 임금은 분노하여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지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에 말씀인데 이 비유에 말씀은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자가 어떤 자들인지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그들은 초청을 거절한자와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이다. 여기서 초청을 거절한자들은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요 넓은 의미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 또 여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기독교인에 회중에 들어 왔으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럼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
계7:13~14 말씀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 입지 않은 자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를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한다.
8).불법을 행하는 자.
마7:23
불법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법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 하나님의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우리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과거 유대인의 개념으로 본 형식적인 율법 아래서는 우리인간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보아 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한 후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율법을 다 준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율법을 다 준행 할 수 없는 우리인간은 모두가 불법을 행하는 자가 아닌가?
그렇다 율법 중 그 어느 것 하나를 범하여도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인간 모두는 불법을 행하는 자로 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은혜 안에 사는 자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은혜 안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새 계명을 준행하며 살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요일3:23)을 준행하는 것이다.
은혜 안에 사는 자들의 새 계명 준행은 성령님에 인도하심으로 가능하게 되며 비록 사랑에 법을 준행하는 것이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각자에 노력을 받으시는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불법을 행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난 자며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의 법을 준행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참고 마24: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9)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하면서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착하게 살았다고 해도 구원이 없음을 알아야한다.
2.구원에 참여될 자.
1).하나님의 뜻 되로 사는 자.
마7:21~23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씀하여진 것을 토대로 해서 정의를 내려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의 지극히 적은자 하나도 실족되지 않는 것
마18: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주시려는 것.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불법을 멀리 하는 것.
마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따라서 하나님의 뜻 되로 사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요 하나님의 새 계명 사랑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2)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 고백을 하는 자.
마16:16~1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3).어떠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4).거짓예수와 거짓선지자에게 미혹되어 신앙을 떠나는 자가 되지 않는 자.
마 24: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5).하나님 최고주의로 신앙 하는 자.
마10:37~39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나님 최고주의는 무엇인가?
하나님 최고주의란 내가 사랑하는 이 세상 그 무엇 보다 더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심지어 내 자신 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 하는 것을 말한다.
6).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 할 수 있는 자.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7).예복을 입은 자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앞세우는 자.
마22:11~13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참고 계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8).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자.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9).자신의 신분 또는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우리 예수님을 좋으신 분임을 믿고 온전히 의탁하는 것.
예:세리 삭케오, 구원받은 강도, 죄 많은 여인 등...
3.최후 심판의 상벌에 대한 근거.
1).사명 감당에 따른 상벌.
(1).직무 수행에 따른 상벌.
마24:45~51
ㄱ. 상 받을 자: 맡은 직무를 성실이 수행한자.
이들의 특징.
◎이들은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주인을 기쁘게 한다.
◎.이들은 주인의 집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준다.
ㄴ.벌 받을 자: 맡은 일에 불 성실한자.
이들의 특징.
◎.이들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고.
◎.동무를 때리고(형제에게 악행하고, 권리를 남용하고)
◎.술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신다.(세상 향락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림)
(2).직무 태만과 열심에 따라서 내리는 상벌.
ㄱ.상 받을 자: 직무에 열심인자.
이들의 특징
◎.자신이 재능을 최대한으로 개발해 주인 되시는 하나님 위해 최선을 다해 산다.
이들에게 내려질 상급으로는
◎. 하나님의 신임을 받음(적은 일에 충성하였음으로 많은 것을 맡게 됨)
◎. 주인인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됨.
ㄴ.벌 받을 자: 직무에 태만한자.
이들의 특성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하나님을 유익되게 하지 않는다.
이들이 태만한 이유.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재능)에 열등함에 대한 불만과 이를 주신 하나님의 대한 불만에서 온 것.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이들에게 내려진 벌
◎.있는 것 까지 빼앗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을 받음.
2).재림 준비에 다른 상벌.
마25:1~12
상 받을 자: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신앙의 등불을 꺼지 않고 늘 성령 충만으로 충만한 자.
벌 받을 자: 전에는 신앙이 좋았다 하더라도 마지막 주님 앞에 나아 갈 때는 신앙의 등불이 꺼진 자.
3).사랑의 실천에 따른 상벌.
마25:32~46
상 받을 자: 지극히 부족한 자들을 돌봐 줌으로 사랑을 실천 하는 자.
벌 받을 자: 지극히 부족한 자들을 보고도 그들을 도울 것을 외면한자.
4).믿음에 유무에 따른 상벌.
상 받을 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음.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모든 죄가 간과됨.
롬3:22~26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심판 받지 않음.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영생을 상으로 받음.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벌 받을 자: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를 거절한자. 하나님의 용서 없는 심판을 받음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ⅩⅡ.하나님의 은혜로 믿음 가운데 사는 자는 반듯이 구원을 받는가?
웨슬레 알미니안 주의를 주창하는 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도 자신의 믿음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은총에서 버림 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불완전한 구원을 말한다.
물론 우리들의 주변에서 그와 같은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어떤 능력 있는 목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 같더니 마귀의 사도로 변모되는 모습. 착한 양심으로 사는 것 같이 보이던 신도가 세상에 물들어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경우 인간의 경험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일 수 없다. 처음에는 착한 사람같이 보이고 믿음 있는 자 같이 보이나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택한 자가 아님을 알아야한다. 성경은 가룟사람 유다가 비록 예수님의 제자의 반열에 있었던 것 같이 보이고, 구원 받을 자로 택함을 입은 자 같이 보였으나 그는 처음부터 구원 받을 자로 선택함을 입은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참고마13:25~40)성경은 예수님께서 한번 택한 자는 결코 버리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한번 선택함을 입은 자는 결코 정죄함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자의 구원이 하나님의 완전성 위에 있음을 알고 이 구원에 역사가 하나님의 능동적 역사임을 알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에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여기 우리 인간의 구원에 서정과 하나님의 활동을 고찰하여 보자.
인간의 구원의 서정은 크게 3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나에 동료 목사인 이 영규 목사님은 이것을 시제로 구분하여 과거 구원, 현제 구원, 미래 구원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이것을 법적 행위로 구분하여 선언적인 구원, 진행적인 구원, 완성적인 구원으로 구분 하는데 이 구원에 역사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것이다.
1.선언적인 구원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하나님.
1).선언적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역사.
여기 시간적인 구별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는 구별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역사를 이해하기 쉽다.
(1).소명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룩된 구원에 신앙을 수납하도록 택한 백성을 강권적인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이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중생
물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
요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회심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의식적 변화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사역이다.
요6: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4).신앙
예수님을 나에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이 믿음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2).선언적인 구원
(1)칭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 구원자로 믿는 자에게 예수님의 공로와의를 부어 주심으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초기 재판적인 행위이다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양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2.진행적인 구원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하나님.
진행적인 구원은 성도의 성화와 견인을 말하는데 성도의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로 보아야하며 성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에 응답으로 수동적이라고 볼 수 있다.
(1)성도의 성화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
ㄱ. 징계로 인도 하시고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ㄴ.사랑으로 인도 하시고 보호 하시고
롬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ㄷ.성령으로 늘 함께 하시며 인도 하시고 보호 하신다.
(2).성도의 견인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로 선언 된 자는 성화에 과정에서 결코 버림 당하지 않는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3.완성적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로 선언된 자는 한 사람도 버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관이 되기 때문이요. 마7:21~23; 13:41; 16:27~28; 19:28~29; 24:30; 마25:31~46; 눅21:27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은 긍휼과 관용의 심판이기 때문이다. 마18:21~35; 롬3:19~25
ⅩⅢ.결론.
우리 모든 인간은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한 자임을 알게 되었고 율법의 요구를 스스로 온전히 지켜서 의롭게 되어 구원에 이를 자가 하나도 없음을 알았다. 오직 일류에 구원은 인류에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그의 구속하심에 힘입어 구원을 얻게 될 뿐인 것이다.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내려질 심판은 율법에 따라 법적으로 심판 받는 심판이 아니라 긍휼과 관용의 심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는 세상에서 비록 죄인이라고 정죄 되었을지라도 또 죄인의 신분으로 살아갈지라도 감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예: 예수님 우편에 구원 받은 강도, 예수님을 믿은 세리와 창기) 과연 어느 종교에서 이런 구원에 길을 본적이 있는가? 죄에 오염된 세상 속에 사는 우리인간에게 구원을 가능케 하는 힘이 어느 종교에 있는가? 오직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을 구원 하시려 하늘에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모습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음 안에서 차별 없이 구원을 주시겠다는 이 복된 소식을 들으시라. 이 복된 소식만이 죄에 오염 속에 구원의 희망을 잃은 우리 인간에게 한 가닥 희망에 빛임을 알라.
3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믿음으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날 구원 받았다는 기독교인의 삶을 보다 보면 혐오감이 생기기까지 하도록 잘 못사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과연 저렇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좋아 하실까?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믿음이 좋다고 교회에서 칭찬 듣는 자가 부모님을 구박하기도 하고
형제간에 불목하고 이간하기도 하며 교회에 그토록 열심 있는 분이 이웃교회를 해치기 위하여 중상모략을 서슴치 아니하고, 뇌물을 좋아하며, 온갖 부조리에 참여하며 ,부자에게는 아부하고, 가난한 자는 무시하거나 핍박하고, 나에 이익이 없으면 어느 때든지 배신해 버리는 냉정함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에 구원 받은 자 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물론 예수님을 나에 구주로 믿고 내 자신을 맡겨 버리면 구원은 확실하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인의 삶에서 이토록 예수님께서 싫어하는 악마의 삶이 계속 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사는 삶은 과거의 그릇된 삶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에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사는 삶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다(고후5:17)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로 충만한 삶이요
둘째: 하나님에 은혜에 감사하는 가운데서 충성을 다하는 삶이요.
셋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요
넷째: 하나님을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삶이다.
이제 예수님을 나에 구주로 믿고 하나님에 은혜 가운데서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가르치심과 그에 삶을 연구 하여 예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멀리 하고 예수님께서 좋아 하시는 것을 최선을 다해 행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Ⅰ.구원 받은 기독교의 사명
마5:13~16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크게 두 가지 사명이 있다.
첫째는 영혼 구원 사명이고
둘째는 사회 구원 사명 이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 가운데서는 사회 구원만을 외치며 영혼 구원을 무시 하는 자들이 있고 반대로 영혼 구원을 외치며 사회 구원을 무관심 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 구원만을 외치고 영혼 구원을 무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본주의자들이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다.
또 영혼 구원만을 외치고 사회 구원을 외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식적인 기독교인과 맹신자들이다.
진정 기독교인 이라면 사회구원과 영혼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여기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영혼 구원의 사명과 사회 구원의 사명을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1.기독교인의 영혼 구원의 사명.
하나님에 은혜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확신하는 기독인은 자신이 구원 받은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타인도 그 구원에 참여 될 수 있도록 인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요3:16~17
1)영혼 구원에 필요성 (왜 인간은 영혼 구원이 필요한가?)
성경은 말씀하시길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 놀라운 축복 가운데서 창조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창1:26~28 창2:9~15 창2:18~25) 그러나 하나님에 명령을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에 진노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창3장)여기 인간은 자신들에 노력과 수고로서 하나님에 진노에서 벗어 날수 없게 되었다.(롬3:9~18) 이토록 한조각의 희망마져도 없는 인간에 영혼은 외부로부터 오는 구원에 길이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2)영혼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길
죄를 지어 하나님에 진노 가운데 거한 우리 인간에게 참된 구원에 길이 과연 있는 것인가? 혹자는 지금이라도 죄를 멀리하고 선하고 바를 삶을 살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 이들이 말하는 선하고 바른 삶은 어디에 기준 되어야 하는가?
여기 선하고 바른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 되로, 또는 양심 되로 살았느냐다. 물론 우리 인간은 율법 되로 사는 삶이 형식적으로 가능할 수 있으나 온전히 율법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며, 양심 되로 사는 길도 부패된 양심에 만족하게 사는 것은 가능 할 수 있으나 온전한 양심에 따라 만족하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율법과 양심에 따라 온전하게 살았다 해도 이미 죄인으로 선언된 인간에 죄책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는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고발하고 있다.
여기 우리 인간은 스스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가능한 구원에 길을 인간을 위해 베풀어 주셨으니(마19:26; 요3:16) 이 구원에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진 구원이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에 길로서 확실하고 분명한 구원에 길이다(롬3:22~25)라고 필자는 2부참된 구원에 길은 예수님께만 있는가?에서 언급하였다.
3).기독교인의 영혼 구원에 사명을 수행.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확신을 받은 기독교인은 그 구원에 역사가 자신에게서 확실하게 진행 되도록 하여야 하며 그 구원에 길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구원에 길이 있음을 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자신에게 구원에 역사가 진행되게 하기 위해서는 늘 믿음에 법도에서 떠나지 않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에 성령이 인도 하는 되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하여 말씀 들음과 기도와 찬송과 봉사를 통하여 늘 훈련 되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구원에 길을 알리는 길은 전도를 통하여 가능 할 수 있는데 전도에는 구두전도와 문서전도와 행위전도가 있음을 알고 형편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2.기독교인의 사회구원 사명.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 받은 기독교인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곧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이라는 범죄를 범하기 전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가졌던 것을 회복해야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걸작품인 인간들과의 깨어졌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여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야 할 사명이다.
이 사명은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으로 하나님 앞에 상급에 심판을 받을 때 칭찬 받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이 사명은 몇 가지 중대한 의미가 있다.
첫째: 마귀로부터 온 부패한 세상을 본래의 상태로 돌이키지는 못할지라도 이제부터는 마귀의 부패함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성결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요.
둘째: 우리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을 빛나게 하려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요.
셋째: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에 빛을 비춤으로 그 빛을 보고 세상 사람들 역시 구원에 참여 되도록 이끄는 영혼 구원에 전초적인 사명이다.
1)사회 구원 사명의 두 종류.
(1).소금의 사명.
이 사명은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려는 사회 구원에 적극적인 사명이다. 이 사명은 성질 상 참여의 사명으로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깊숙이 개입하여 기독교의 고유에 맛 사랑과 희생으로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사명이다.
(2).빛에 사명
이 사명은 세상에 잘못됨을 바로 고치는 사명으로 사회구원에 소극적인 사명이다. 이 사명은 성질상 비판의 사명이다. 이 사명은 단순히 어두운 세상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리스도에 빛을 받아 반사함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사명임을 알아야 한다.
2).사회 구원 사명을 가능케 하는 힘.
(1).하나님에 진리에 말씀으로 옳고 그릇됨을 분별하는 힘.
빌1:9~10
내가 기도 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 까지 이르고사회 구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옳고 그릇 된 것을 바로 분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을 가장한 체 악행을 자행한 우리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 더러운 죄악을 몰아내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고 외치면서 행해졌던 잔혹한 종교 재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사형의 현장에서 할렐루야 찬양을 부르던 하나님에 대한 무지한자들을 보라.
나와 같지 않는 인간,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 때문에 핍박하며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이고 사회를 구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자위하던 어리석은 군상들을 보라.
한 손에 채찍을 가지고 같은 인간 흑인을 동물 취급하며, 채찍질 하면서 자신들은 신앙으로 청결하게 사던 청교도의 후손이며 자신들의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창9:25 말씀을 자기들의 방식으로 해석 가나안의 후손은 종으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실천한 것으로 자신들을 합리화 하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무리들을 보라.
여기 우리는 바른 분별력 없이 사회를 바로 세우자는 사회 구원사명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옳고 그릇됨을 바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몇 가지 성구 말씀으로는 부족하다. 이 세상 옳고 그릇됨을 바로 분별할 시금석은 오직 한분 예수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옳고 그릇됨을 바로 분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행동과 말씀과 사상을 기초 삼아 분별해야 한다.
(2).희생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자기 자신 희생, 물질 희생, 시간 희생 등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으로 맛을 내는 자가 되어야 하며 세상의 빛으로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희생이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자기를 녹여 희생 시켜야 하며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태우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믿지 않는 자 들에게서 교인을 비방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에 의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생활에 있어서 손해를 조금도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른 의미로 생각하면 많은 기독교인이 사회생활에서 희생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기독교인이 자신의 희생이 없이 사회 구원사명을 감당 할 수 있겠는가?
(3).기독교의 고유에 맛인 사랑.
요15: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
기독교의 고유의 맛은 사랑이다 .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니고 사단의 모임 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며, 하나님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은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은 또한 사랑의 화신으로 사랑을 외쳤고, 사랑을 실천하셨으며,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시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 없이 사회 구원 사명을 감당 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4)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순수성.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 하도록 하라.
필자는 어느 기독교 사립학교의 부조리에 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 사립학교가 암암리 교사를 채용할 때 교사가 되려고 하는 자에게 얼마의 금품을 요구 한다는 것이다. 과연 될법한 일인가? 이런 정신으로 어떻게 세상 구원을 앞장선다는 것인가? 필자는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기독교 사립학교는 엄청난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지적을 했다.
그리하자 그 교회를 다녔던 모 권사가 변명하기를 이런 것은 모든 사립학교가 가지고 있는 관행이니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으로 어설픈 변명이다.
사회 구원의 사명을 짊어진 기독교인이 세상이 그렇게 하니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세상에 빛이 세상이 온통 어두워서 그만 나도 어두워져 버렸다면 이것이 옳은 이치인가? 아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기독교인의 순수한 신앙은 결코 세상과 타협 할 수 없으며 또한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5).성령 충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로 선언된 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한 마귀의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고 맡겨진 사회 구원 사명을 제대로 수행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 충만으로 가능 할 뿐이다.
여기 성령 충만 이란 성령의 기운으로 호흡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행2장)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려 말씀으로 인도하는 되로 사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 구원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갈 때 가능하리라고 본다.
3)사회 구원 사명의 목적.
(1).사회 구원사명을 통하여 주님의 모습을 닮아 져 가는 것.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여기 사회 구원 사명은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데 이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기독교인이 사회 구원 사명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함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은 어쩌면 단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2).사회 구원사명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마5: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기독교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필자가 외숙부님의 병문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차를 타려고 개표소에서 있을 때 두 명의 늙은 여성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하나님 뵈려 모 기도원에 간다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한 여성이 이들을 비웃으며 예수 믿는 것들이 못된 짓들은 더 하더라 하면서 심히 분노하며 말하는 것을 보았다.
이 여인의 말은 단순히 기독교인을 중상모략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기 동래에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는 여자가 시부모를 괄시하고 동래 사람들 하고도 사이가 나쁘다는 것이다.
필자는 예수님을 뵈려 간다는 여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곳에 함께 하신다고 가르쳐주고 기독교인에 대하여 혐오하는 여인에게는 변명하기를 학생들이 다 학생입니까? 공부하려고 학교에 가는 자들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부모님 무서워서 학교에 가는 자가 있으니 다 같은 자로 취급 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자들도 있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는 자가 있으니 하나님을 바로 믿는 자는 결코 시부모님을 괄시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히 싫어하기 때문 이지요 라고 말했다.
그렇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바르게 살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을 것이요 기독교인들이 잘못 살 때 하나님 거룩한 이름은 욕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사회 구원사명을 통하여 영원 구원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행2:47下
“온 백성에게 칭송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어떤 기독교인이 말하기를 교회의 헌금 중 50%는 구제사업 등 사회 구원 사역을 위하여 쓰여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필자는 이 주장에 얼마는 동감 하면서도 완전히 동의 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사역을 이루시려는 목적으로 교회와 목회자의 삶을 위하여 헌금을 하도록 명한 것이지 구제를 목적으로 헌금을 정하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물론 신약 시대에 헌금 중 일부가 구제사업을 위하여 사용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구제 역시 교회 안에 성도들을 위하여 쓰여 진 것이지 이방인들을 위하여 구제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헌금 중 일부라도 구제 사업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 말은 결코 아니다. 필자의 말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급선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을 사용하는데 제일 먼저 교회운영과목회자 생활을 위하여 쓰여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구제 사업 등 사회 구원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만인에게 알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품으로 돌아오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4).사회 구원 사명에 충실한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1).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줄을 우리가 확신 하노라.
(2).금생에서도 복을 받게 된다.
잠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것이요 남을 윤택케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3).영원한 상급을 받게 된다.
마25:34~40
Ⅱ.성도가 반듯이 소유해야할 3가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성도는 반듯이 소유해야할 세 가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여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서로 분리 될 수 없으며 그 가치 역시 우열을 나눌 수 없다.
바울 사도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며 사랑이 제일 우위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나 이 말씀은 사랑이 부족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식물로 비유한다면 믿음은 뿌리에 속하고 소망은 줄기에 속하며 사랑은 열매에 속한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 없이 소망과 사랑이 존재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 없이도 사랑을 행하여 구제와 관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랑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 단순한 사랑일 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믿음 없이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다. 그러나 믿음 없는 소망은 이 세상에 것을 소망하는 저급한 소망일 뿐이며 저 하늘에 소망, 고차원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
또 하늘의 소망과 사랑을 창출 할 수 없는 믿음은 믿음을 가장한 단순한 이론뿐이며 죽은 믿음에 불과 한 것이다. (마15:8)
그러므로 성도로 부름 받은 기독교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것을 반듯이 소유해야한다.
1.성도가 소유해야 할 믿음.
1).믿음에 정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 질것을 확신 하는 것이며 보지 못했으나 성경 말씀이 증거 하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 나에 확신으로 삼고 증거 하는 것이다.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기독교인의 믿음의 대상.
(1)성경:
기독교인의 경전으로 삼고 있는 구약성경 39권과 신약 성경 27권은 하나님의 절대 영감으로 쓰여 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금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성경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척도며 인간이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계시로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체험하는 어떠한 신비한 경험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고 믿어야 한다.
(2).하나님:
기독교인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실존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3).구원:
하나님에 명령을 불순종한 인류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가운데 인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인류에 구원자이심을 알고 그를 믿음으로서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한다.
3).믿음의 필요성.
(1).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듯이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믿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
기독교인에 성령 충만의 삶은 참으로 필요하다. 기독교인은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고 성령으로 진리를 바로 알기 때문이다. 이 성령 충만의 삶은 믿음에서 가능하게 된다.
갈3: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갈3:14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3).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세상에서 승리 할 수 있기 때문.
약1:13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우리가 앎이라.
벧전1: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히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4).믿음으로 구하는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
막9:23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5).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할 수 있기 때문.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라고 말씀하시며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여 주었다. 우리가 믿음을 가운데 살 때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병 고치는 능력, 갖가지 능력 등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이다.
(6).믿음으로 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눅8:5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ㄱ.믿음은 죄 사함을 얻게 하다.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ㄴ.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게 한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3: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갈2:16上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ㄷ.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게 한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7)믿음으로 만이 진정한 소망과 진정한 사랑을 창출하기 때문.
4).기독교인의 믿음의 뿌리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1)하나님은 현제 실존하고 계시다는 확신.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2).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신뢰.
히11:6
ㄱ.하나님은 약속을 반듯이 실행 하시는 좋으신 분으로 신뢰.
히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ㄴ.죄 많은 죄인일지라도 그분에 품에서 살기를 원하는 자는 언제든지 받아 주시는 분으로 믿어야 한다.
눅23:40~43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ㄷ.우리를 이해해 주시는 분으로 믿어야 한다.
막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ㄹ.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많으신 분으로 믿어야 한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하나님의 능력은 절대전능 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마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5).온전한 믿음에 삶을 사는 자에게 나타나는 삶의 현상.
(1).세상을 따르는 삶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선택한다.
요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2).어떠한 장해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막10:46~52
마15:22~28
(3).말씀을 사모하며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행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4).열심히 기도하는 자가 된다.
눅11:8~13
(5).자신의 삶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눅23:40~43
(6).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로 충만한 삶을 산다.
(7).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도인 사랑을 자발적으로 행하려 한다.
6)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종류.
※정통신학91여름호 설교자를 위한 믿음 강성찬목사 논문을 많이 참고했음.
(1)없는 믿음 .
ㄱ. 예수님이 살아 난 것을 본 자의 말을 믿지 않이 하는 것.
막 16:14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ㄴ.천국 잔치의 가치를 모르는 것.
마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ㄷ.천국 잔치에 초청을 무관심하고 자신의 삶에만 관심 있는 것.
마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ㄹ.천국 잔치에 참석하라고 소식 전하는 자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
마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2)거짓된 믿음.
말로만 믿는 믿음.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3)적은 믿음
ㄱ.하나님에 아들이 함께 동행 하고 있음에도 두려워하는 믿음.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ㄴ.하나님에 능력을 체험하고 있음에도 두려워하는 믿음.
마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ㄷ.하나님께서 먹여 줌에도 불구하고 염려하는 믿음.
마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ㄹ.하나님에 능력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는 믿음.
막9:22~23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4)구원 받는 믿음 큰 믿음, 능력을 이르기는 믿음.
ㄱ.백부장의 믿음(마8:5~13)
◎.예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믿고 겸손함.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ㄴ.혈류 병 여인의 믿음(마9:20~22)
◎.예수님 겉옷만 만져도 병 고침을 받겠다는 믿음.
◎.예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는 것을 믿는 믿음. 혈류 병 환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한자로 여겨 가까이 하지 안했기에 혈류 병 환자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서 예수님에 겉옷을 잡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 이였다. 그러나 혈류 병 환자인 여인은 예수님은 좋으신 분으로 믿었기에 예수님에 겉옷을 만질 수 있었다.
ㄷ.베드로의 믿음.(마16:16~18)
◎. 바른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고 그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히 선지자로 세상을 현명하게 사신 현인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바른 신앙고백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이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다. 만일 이 고백을 할 수 없다면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니는 교인이라 할지라도 신앙인 이라고 볼 수 없다.
ㄹ.소경 거지 바디메오 믿음.(막10:46~52)
◎.사람들에 책망을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 믿음.
필자는 낙심 난 교인들과 대화해 보면 이들 대부분이 누구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없다고 한다. 이들에 말투에는 낙심 나게 된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변명은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바디메오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방해 하여도 개의치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께 도움을 구했다.
이토록 하나님만 바라보며 어떠한 신앙의 방해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 바라는 믿음이 큰 믿음이라고 볼 수 있겠다.
ㅁ.구한 것이 이룰 줄 알고 의심하지 않는 믿음.
(막11:23)
구한 것이 이룰 줄 알고 의심하지 믿음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들의 믿음에는 하나님의 절대전능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에 확신을 나온 것으로 큰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ㅂ.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막2:1~5)
◎.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구원 받겠다는 믿음.
어떤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올 때 그것은 쉽지 안했다. 그러나 이들은 중간에 포기 하지 않음으로 예수님께 올 수 있었고 이들에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포기 하지 않은 믿음에는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 믿음에는 예수님의 전능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에서 나온 큰 믿음으로 볼 수 있다.
ㅅ.우편 강도의 믿음.(눅23:28~31)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이심을 분명히 믿음.
예수님께 구원을 부탁한 우편 강도는 예수님께서 인류에 구원자이심을 알았기에 영혼 구원을 부탁 한 것을 알 수 있다.
◎. 용서 받지 못할 죄인도 간곡히 용서를 구하고, 영혼을 부탁하는 자를 예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믿음을 삶에 반영
믿음을 삶에 많이 반영 할수록 행함 있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 큰 믿음, 능력 있는 믿음, 곧 능력을 일으키는 믿음이다.
자신믿음진단해보시오.
◆.이상의 표 이외에도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어떤 믿음이 부족한지
체크하여 보자.
7).믿음 성장에 장해가 되는 것들.
(1)외적 장해.
ㄱ.그릇된 종교 지도자의 행위.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는 성도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릇된 종교지도자의 그릇된 행위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존마져도 의심하게 만들고 그릇된 지도자의 안일 된 삶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ㄴ.그릇된 지식과 가르침과 사상.
그릇된 지식과 가르침과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면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성경을 보면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된 종교 지도자가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가르칠 때 많은 성도들이 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믿음에서 떠난 것을 보게 된다.
ㄷ.우환과 질병과 핍박.
마귀가 성도를 넘어뜨리는 도구로서 우환과 질병과 핍박은 무서운 무기이다. 신앙이 약한 성도들이 이것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을 말씀과 인내로 극복하는 성도는 더욱더 강한 믿음으로 성장하게 된다.
ㄹ.부요함만을 목적 삼는 것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대부분이 부요하게 되기를 원한다. 기독교인들도 부요함을 원하는 것에 있어서는 예외 일 수 없다. 그리하여 교회마다 신년초가 되면 축복 대 성회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이 부요하게 되기를 바라는 성회를 한다. 부흥사들 가운데는 자신만이 하나님께로 축복권을 받아 자신이 안수만 하면 부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샤마니즘적 기복신앙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아무튼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부요하게 되는 것만을 목적하는 가운데 사단의 무서운 계략이 침투하는 것을 본다. 사단은 부요함을 원하는 자들을 자극하여 부요함을 주며 신앙을 떠나 교만과 자만으로 자신을 따르기를 유혹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면서 까지 부요하기를 원하는 것과 주어진 부요함을 감사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신앙의 장해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내적 장해.
ㄱ.하나님의 사랑을 빼버리고 말로만 믿는 믿음도 참 믿음로 착각 하는 것 .
마7:21~23
ㄴ.인간의 완악함.
◎.성경의 진리를 무조건 거부하려는 고집.
◎.외모로 판단하려는 것.
◎.경험된 지식 안에서만 생각 하려는 고집.
ㄷ.보고 믿고자 하는 믿음.
요 20:27~29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ㄹ.세상 염려와 근심.
마6:25~3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ㅁ.세상 제물을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욕심.
8).믿음을 성장케 하는 것.
(1).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2).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함으로.
(3)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4).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실감하는 삶을 가질 때.
(5).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확신 할 때.
(6).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을 때.
2.소망.
1).소망의 정의
기독교인의 소망은 믿음에서 파생된 것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가운데서 허락하신 천국의 즐거움에 참여된다는 소망으로 기독교인의 삶에서 오는 어떠한 고난도 이기게 하는 힘이 있으며 어떠한 환경에서도 편안을 누릴 수 있게 하는 힘이다.
2).소망의 근거.
(1).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2).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3).성도가 소유해야 될 소망.
(1).하나님 구원에 참여됨을 소망.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 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2).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감을 소망.
마5장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3).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상급을 소망.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4.사랑.
1).사랑의 정의.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아니다.
(고전13:1)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언하고 산을 옮길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아니다.
(고전13:2)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 할지라도 또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아니다.
(고전13:3)
무조건 용서하고 단순히 좋아함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를 진심으로 유익되게 하는 것이다.
2).기독교인의 사랑의 대상.
(1).하나님
마22:37~38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사랑 할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2).인간.
기독교인이 인간을 사랑 할 때는 내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
3).사랑의 형태.
(1).표현적 사랑.
표현적인 사랑은 외적으로 보여 지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2).근원적인 사랑.
온전한 사랑이 되도록 하는 요소.
ㄱ.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
◎.상대의 공격을 대적 하지 않고 화해하려는 노력.
(고전13:14)
오래 참음, 온유함, 투기하지 않음.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려는 노력.
(고전13:4~5)
자랑하지 않음, 교만하지 않음, 무례히 행치 않음.
◎.상대의 유익을 해치지 않으려는 노력.
(고전13:5)
자기 유익을 구치 않음, 성내지 않음.
ㄴ.하나님의 대한 근원적인 사랑.
◎.죄를 싫어하고 진리를 좋아함.
(고전13:5~6)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음,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진리와 함께 기뻐함.
◎.굳건한 신앙위에 서는 것.
(고전13:7)
모든 것을 참음 (στεγω 비밀을 지키다, 덮는다.: 약속에 기다림.)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딤(υπομενω:주어진 고난과 시련을 참음)
4).사랑의 필요성.
(1).하나님께서 사랑을 원하시기 때문.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가 배우라 (사랑을 무시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참고 사 1:10~17)
(2).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
요 13:34,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3).사랑은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4).사랑은 비판을 받지 않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
눅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5).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
마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6).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상을 받게 하기 때문.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이의 아들이 되리니
(7).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게 하기 때문.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누르고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8).사랑은 하나님의 자녀 되는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이의 아들이 되리니
5).사랑하는데 장해가 되는 것.
(1).불법이 성하여 가는 것
마24:12
불법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 지리라
(2).사랑을 빼버리고 거짓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 아버지 뜻도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3).사랑을 빼버린 형식적인 율법만을 강조하는 것.
마12:1~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자를 죄로 정치 아니 하였으리라.
(4).자기 자신만을 생각 하는 이기적인 욕심
마2:16~18
(5).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내 입장으로만 생각 하는 것.
(6).상대의 허물만 보고 내 허물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6).사랑하는 자가 되려면.
사람에게
(1).상대를 이해하는 자가 되라.
상대 측면에서 생각하여 보라.
눅23: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들을 용서하는 것에는 내 측면에서 상대를 생각하시지 안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에게 말씀하시길 너희들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 내가 너희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너희들에 병을 고쳐 주지 안했더냐? 그런데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죽이다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과연 너희들이 이럴 수 있느냐 얼마든지 예수님 입장에서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생각하여 상대를 원망하지 안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자기를 해하는 자들을 위해 변호하며 기도 하기를 하나님 저들이 나를 해하는 죄를 범한 것은 자신이 행하는 죄를 모르고 하는 것이니 용서하여 옵소서 하시며 상대의 무지를 충분히 이해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먼저 화해 하도록 노력하라.
마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려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한 나의 주장과, 이익을 좇다보면 상대와 다투는 경우가 있다. 여기 우리는 다투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보다 화해하지 않는 것이 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화해하지 않는 것은 영원한 원수를 만드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자는 후배들을 권고할 때 이런 말을 들려준다. 천명의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한명의 원수를 만들지 말라. 우리는 천명의 친구가 없어도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명의 원수에 의하여 우리는 철저히 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화해하는 것은 상대에게 패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승리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온전히 화해하는 것은 우리의 진짜원수 마귀에 계교를 무너뜨리는 것이 되며 상대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3)넓은 아량을 가져라.
마5:39~42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되며..
넓은 아량은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더불어 세상을 이긴자 만이 넓은 아량을 가질 수 있음을 알라.
(4).도움을 구하는 자를 외면하지 말라.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눅10:30~36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자.
(5).죄는 미워도 사람을 미워하는지 말라.
마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6).자신도 과실이 많은 자임을 알고 상대의 과실을 용서하라.
마6: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7).받고자 하는 마음보다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께
(1).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겨라.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리켜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위라고 말씀하시고 있다.(출20:4~5)
그러면 우상 숭배는 무엇인가?
인간이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는 것이요 인간이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이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어떤 성도가 공무원으로 월급의 대부분을 하나님께 드려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 주어 잘산다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 하나님의 축복이란 뇌물을 말하는 것인데 과연 여기 성도의 관념 속에 하나님은 어떤 분임을 말하는가? 하나님께 잘 드리는 자는 불의한 재물이라도 허락해 주신다는 것이다. 곧 이런 관념 속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섬기다 보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성경에 계시와 예수님을 통하여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2).하나님 최고 주의로 섬기는 자가 되라.
마10:37~39
하나님 최고주의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들 말로만 하나님 최고주의를 주장한다. 예수님 당시 유태인들은 하나님 최고주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시기를 너희가 말로는 하나님 최고주의를 주장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마15:8)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순위를 인간의 유전에 두기 때문이다.(15:9)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고주의는 말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최고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제일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다.
(3).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노력하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 중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는 기도와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크신 사랑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며, 기독교인으로서 바르게 살아 모든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야 한다.
(4)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 믿음으로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가? 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그 이유로는 하나님의 계명에는 부정적인 기능, 즉 정죄의 기능, 과 인간이 집행할 때 위선의 죄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구원 받은 자로 선언된 하나님의 백성 일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율법에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긍정적인 측면은 율법을 본래 정하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규범의 기능이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과 완전케 하셨다는 말씀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시고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한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참고: 요한일서를 보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
(5).예수님의 양인 성도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일을 하라.
요21:15~17
예수님께서는 부활 하신 후 제자 베드로에게 사랑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고 예수님께는 사랑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 한다면 나에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길,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을 하나님의 양인 성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고 보살피는 것이다.
(6).지극히 적은 자들을 돌봐 주라.
마25:31~46
필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교회는 가난 타는 곳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는 가난한자가 심히 천대를 받는 곳이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교회도 지어야 하고, 교회를 유지하여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를 먹여 살려야 하기에 물질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감사하는 헌금을 요구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통하여 가난한 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과부가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고 많이 받쳤다 하신 것은 가난한 자가 드리는 지극히 적은 헌금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진정의 헌금은 크게 받으시고 인간이 보기에 심히 큰 헌금이라도 인간에게만 보이기 위하여 드리는 헌금이라면 크게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금 때문에 가난한자들을 차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난한자들을 각별히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분노 하시는 이유 중에 지극히 적은 약자들을 돌보지 않고 괴롭힌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 자신에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지극히 적은 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은 실로 당연한 것이다.
Ⅲ.구원 받은 기독교인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1.겸손한 삶.
마5:3에 언급된 심령이 가난한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마음에 겸손을 의미한다고 본다. 여기 마음의 겸손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 겸손이 있는데
하나님께 겸손은 심령이 가난한자라는 말씀 속에 그 정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여기 가난πτωχοs는 구걸하는 극한 가난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겸손은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앞에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시인하고 창조자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창18:27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둘째로: 인간에게 겸손은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지 않고 상대를 존경하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려면.
1).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엡3:8
모든 성도중 주에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2).하나님만이 부족한 나를 바로 인도 하실 수 있음을 알고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
3).나에 공로는 모두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인간 앞에 겸손한 삶을 살려면.
1).상대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형상 되로 창조된 귀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2).아무리 부족한 자라도 나 보다 유능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3).나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상대 보다 유능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한다.
4).자신을 낮추는 길이 자신을 높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애통 하는 삶.
애통πενθοs는 슬픔, 비애, 비탄이다. 여기애통은 죄에 빠진 자신을 보며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앙에서의 애통은 하나님의 사랑 받을 인간이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 앞에 죄송함으로 몸 둘 바를 모르고 자기 자신의 잘못을 심히 한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됨을 철저하게 고하며 용서 받고자 하는 행위 이다. (눅18:10~11)
애통하는 삶을 살려면
1).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에 의하여....
2).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 죄송함을 철저히 느껴야 한다.
3).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여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3.온유한 삶.
‘온유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하기 쉽다. 그 이유는 온유란 연약함, 우유부단함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온유함은 강함 자에게서 나온 것으로온유함πραυτηs은 친절, 겸손, 동정심, 유순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를 대항하고 나의 이익을 빼앗으며 나를 분노케 하는 대적에게 관용하고 넓은 아량으로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삶이다.
유순한 삶을 살려면.
1).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져라.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 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는데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저들에 입장을 충분히 이해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무지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해 하셨던 것이다.
2).죄를 미워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자가 되라.
3).상대를 불쾌하지 않도록 예의를 지켜라.(고전13:5)
(1).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2).상대를 높여 주라.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지나친 아부는 경계하라.
잠 29:5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시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4). “욱” 하는 마음을 자제 하는 훈련을 하라.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딛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4.의를 사모하는 삶.
의 δικαιοσυνη는 의, 옳음, 올바름, 정의를 의미한다. 여기 우리 인간이 의에 삶이 가능 할 수 있는가? 실제로 불가능하다. 성경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롬3:10)
예수님 역시 눅18:19에 네가 어찌 나를 선하다(의롭다)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다.
물론 여기 말씀은 예수님께서 의롭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의롭다라는 말을 진지하게 사용 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말씀이다. 완전한 의에 삶은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몇몇의 사람들에게 의로운 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의에 도달한 것을 의미 한 것이 아니요 사악한 그 당시의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선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이해 해야 할 것이다. (예: 노아, 마리아의남편 요셉 등)
성경은 바리새인들이 곁으로 의로운 체 하였는데 여기 그들은 형식적인 율법 준수를 통하여 정의를 실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율법 준수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 할 수 없었다. 관연 인간이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는가?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 만이 의롭다는 칭호를 얻고 의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는
1).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죄를 간과하심으로 의롭다 하시는 칭호를 주시기 때문이요.
2).예수님을 믿는 자는 말씀으로 의에 길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요.
3).예수님을 믿는 자는 성령님께서 의에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를 사모하는 삶이란 신앙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5.긍휼을 베푸는 삶.
긍휼히 여기다 ελεεω는 불쌍히 여기다, 측은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라는 의미이다.
여기 긍휼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풀어 주는 값싼 동정이 아니다. 상대의 어려움을 같이 느끼며 진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상대를 측은히 여기고 돕고자 하는 행위이며 연약함으로 죄를 범한 자를 정죄함보다 그 무능함을 이해하고 관용하는 행위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려면
1).우리 하나님께서 긍휼을 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우리는 우리의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3).긍휼 없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긍휼 없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4).자신도 언제든지 연약한 상태에 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6.마음이 청결한 삶.
마음καρδια는 마음, 가운데, 중심, 내부를 의미하며 청결함καθασοs는 깨끗함, 성결함, 정결함, 순결을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청결은 마음 중심으로부터 도의적으로 윤리적으로 순결하고 깨끗함을 의미하며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우리 인간이 마음 중심으로부터 도의적,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청결 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 인간은 자발적으로 청결한 삶에 도달할 수가 없다.(참고 마15:1~20)
마음의 청결한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믿는 자에게 내려지는 은혜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요13:3~11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여기 청결한 삶은 예수님께서 우리에 더러움(죄악)을 씻어 줄때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청결한 삶은?
1).회개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하며.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하나님을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딛1:15~16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3).연약한 자를 돌아보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해야 하며.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4).진리에 순종해야 하며.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5).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늘 범하는 죄를 회개하고 신앙의 의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약4:7~10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 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 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7. 평화를 만드는 삶
화평케 하는 자 ειηνοποιοι는 평화를 만드는 자를 의미 한다
즉 서로 의견이 틀려서 싸우는 사람을 화해케 하거나 서로가 적대감을 갖고 있는 자들에 마음을 돌이켜 친구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평케 하는 자로 대표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친히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인간을 향해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롬5:1; 골1:20; 엡2:17~17
여기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 역시 예수님을 따라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베풀어 놓은 하나님의 화평에 길을 찾지 못한 불신자를 인도해야 하며, 인간과 인간과의 불화도 화해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화해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1). 쌍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2).지혜가 있어야한다.
3).희생이 있어야 한다.
4).인내가 있어야 한다.
5).쌍방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8.의를 위해, 주를 위해 오는 핍박을 감내 하는 삶.
기독교는 핍박을 먹고 성장한 종교 이다.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에 구원사업을 반대하기 위하여 마귀에 적극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귀에 간계를 통하여 구원사업을 더욱 활성화 시켰던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에 구원사업을 방해 하기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는 일을 행하셨으며 다시 부활하심으로 이를 확증 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마귀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에게 오는 핍박을 하나님께서는 바꾸어
1).하나님에 복음을 널리 전파케 하시고
행8:3~4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2).신자들을 더욱 결속하게 하시고
행4:23~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3).하나님만 의탁하게 하시고
행 12: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4).하늘에 상급을 크게 하신다.
마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의를 위해 주님을 위해 오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오는 핍박을 묵묵히 이겨내야 한다.
기독교인이 오는 핍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1).하나님에 뜻 되로 부르심을 입 은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하늘에 상급을 소망하라.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3).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께 하심을 알라.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4).핍박은 잠깐이요 상급은 영원 한 것을 알라.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5).끝까지 참는 자가 복이 있음을 알라.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Ⅳ.기독교인의 신앙의 경계.
1.기독교인이 경계해야 하는 것.
1)마귀의 시험.
(1)마귀의 시험의 특성.
ㄱ.사람이 가장 약할 때 또 가장 강할 때 시험한다.
ㄴ.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시험한다.
ㄷ.인간에 심리를 알고 그 심리를 이용하여 시험한다.
창3:1~5
ㄹ.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시험을 하기도 한다.
마4:6
ㅁ.하나님께 드려지는 경배를 가로 채려고 한다.
마4:8~9
(2)마귀의 시험을 이기려면
ㄱ.말씀으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ㄴ.마귀에 말이 합리적일지라도 따르지 말아야한다.
마4:6~7
ㄷ.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ㄹ.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마26:41
ㅁ.성령 충만으로 무장 해야 한다.
ㅂ.하나님에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
엡6:11
ㅅ.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
벧전5:9
2)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거짓 사상(마7:15~20)
(1)이들에 특성.
ㄱ.외모로 분별하기 어렵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ㄴ.큰 표적과 이적을 보이며 유혹한다.
막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ㄷ.할 수 있으면 택한 자들도 미혹하려 한다.
막 13:22
ㄹ.대중에게 사랑 받고 칭찬을 받기도 한다.
눅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ㅁ.이들에 목적은 성도에 영혼을 해치는데 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2)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
ㄱ.이들은 성령에 진리를 부정하며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ㄴ.다른 복음을 전하며
갈 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ㄷ.다른 영을 전하며
고후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ㄹ.예수님이 하나님에 아들 인류에 구원자 메시야임을 부정하며
벧후 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ㅁ.신앙에 열매, 행위에 열매가 잘못되었다.
마7:16~17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3)죄 짖는 형제
눅17:3~4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라는 말씀은 형제를 정죄 하라는 것이 아니며 상대를 멀리 하라는 말씀도 아니다. 오직 형제와 같은 죄에 동화되지 말라는 것이다.
2. 기독교인이 경계해야 될 삶.
1)위선적인 삶 마6:1
위선적인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그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칭찬 듣기 위하여 의를 행하는 것이다.
(1) 위선자의 특색
ㄱ.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옳게 보여도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ㄴ.약자를 괴롭히며 마치 하나님과 교통 하는 자 같이한다.
막 12:40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ㄷ.상석에 앉아 사람들에게 대우 받기를 원한다.
막12:39~40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ㄹ.구제 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사람들에게 광고 한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ㅁ.자기 자신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다.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2)위선자에 대한 하나님의 대우
ㄱ.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지 못한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ㄴ.하나님께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눅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ㄷ.큰 심판을 받게 된다.
막 12: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3)위선자의 삶을 멀리 하려면
ㄱ.하나님께서는 나에 은밀한 것 까지 보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ㄴ. 세상에서 칭찬 듣는 것을 좋아 하지 말라.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ㄷ.하늘에 소망을 두라.
2)비판 하는 삶
우리들은 그 누구든지 선과 악에 대한 조그만 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그 지식에 대한 인간에 실천의지에 차이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의 선악에 대한 실천에 대한 차이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 할 지라도 종국적으로 선을 지향하고 악과 멀어지려는 인간의 실천의지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 완전히 소멸되었던지 또는 그 의지가 남아있을지라도 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게 되었다는데 많은 성경학자들이 동의 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많은 현인들이 선에 대하여 인간에 실천의지를 높이기 위하여 여러 이론과 학설을 외쳤으나 그들 자신도 결국은 그 실천의지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에 모습을 보고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라고 말씀하셨다. 여기 우리는 선악에 대한 지식 속에서 자신의 악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행위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소위 위선의 탈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소위 위선의 탈을 쓰고 남을 판단하는 속에서 자신을 의롭게 보이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행위는 선에 대한 실천의지를 높이는 것이 되지 않을 뿐 더러 위선의 종이 되기에 삼가 할 것을 명하셨다.
그 밖에도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다.
(1)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ㄱ.인간에 판단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 사람의 판단을 외모적 판단으로 완전할 수 없다.
ㄴ.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기 때문
(믿음으로 의롭게 된 성도라 할지라도 그 의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지 자신의 행위로 얻을 것이 아님으로 자랑 할 것이 못된다.)
ㄷ.판단은 죄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미워하게 까지 하기 때문.
ㄹ.우리가 불의를 미워하나 우리 모두가 불의를 범하고 있기 때문.
ㅁ.사람을 판단할 자는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
(하나님 권리를 월권하는 행위)
ㅂ.남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을 반성할 줄 모르는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
마9:9~12 눅5:30~32
(2)기독교인이 해야 하는 판단
ㄱ.죄 자체는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판단하지 말라.
ㄴ.형제를 세우기 위한 건설적인 비판은 해야 한다.
※.건설적인 비판이란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들어 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범죄:παραπτωμα 걸림, 실책, 범죄로 고의적인 범죄가 아닌 실수, 실책으로 보는 것이 좋다. 온유:πραυτητοs 온유, 겸손, 동정심, 공손 바로잡다:καταρτιζω정돈하다, 고치다, 복구하다)
상기 말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설적인 비판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상대의 드려난 실수를 고쳐주려는 사랑의 노력을 말한다.
ㄷ.하나님에 말씀으로 자신을 늘 판단해야 한다.
3)예수를 믿는 지극히 적은 자를 실족 시키는 삶 마18:6~10
여기 적은 자 μικροs는 어린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처럼 보 잘 것 없는 자를 의미 하며 실족 시킨다 σκανδαλιζω는 걸리게 한다. 넘어지게 한다. 범죄케 하다. 이다.
즉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지휘적으로, 영적으로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자를 신앙생활을 못하도록 넘겨 뜨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들은 부족함이 많기에 세심한 배려가 없으면 쉽게 실족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지극히 적은 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실족 시키는 행위에는 직접적인 행위와 간접적인
행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1)지극히 적은 자를 실족 시키는 것
직접적인 행위.
ㄱ.차별대우로 신앙을 실족 시키는 경우 .
ㄴ.교회법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실족 시키는 경우.
ㄷ.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실족 시키는 경우.
ㄹ.상대와 다툼으로 실족시키는 경우.
ㅁ.상대에게 범죄 하여 실족시키는 경우.
간접적인 행위
ㄱ.상대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경우.
ㄴ.상대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지도 하는 경우.
ㄷ.그릇된 행위를 보여 줌으로 상대에게 실망을 주어 실족하게 하는 경우.
ㄹ.상대에게 잘못 가르쳐 주어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경우.
마23:15
(2)지극히 적은 자를 실족 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
ㄱ.실족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
마18:4
ㄴ.저희 천사가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있기 때문.
마18;10
ㄷ.지극히 부족 한자를 괴롭히는 것은 주님을 괴롭히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
마25:41~46
ㄹ.실족하게 하면 화가 있기 때문.
4)나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관용을 망각하고 타인에 대한 관용이 인색한 삶. 마18:21~35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다. 어떤 임금에게 신하가 있었는데 그는 임금에게 많은 빛을 졌다. 임금은 신하에 가련함을 보고 그 모든 빛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나 탕감을 받은 신하는 자기에게 적게 빛 진 친구를 잡아 빚을 갚도록 강요하고 그 친구가 빛을 갚지 못하자 끝내는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임금님은 진노하여 용서 할 줄 모르는 신하를 가두어 버렸다.
여기 비유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용서를 받고도 용서 할 줄 모르는 기독교인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에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왜? 기독교인들 가운데 용서 할 줄 모르는 자들이 있는가?
(1).자신도 전에 죄인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
(2).자신도 타인을 정죄한 죄를 동일하게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나도 언제든지 범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렸기 때문.
(4).자기 스스로 구원 받을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
(5).하나님의 심판은 심는 되로 거두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
기독교인이 구원 받는 심판은 긍휼과 관용의 심판이어야 한다. 긍휼을 베푸는 자 긍휼의 심판을 받게 되고. 용서를 베푸는 자 용서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긍휼과 용서가 없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없이 법 되로 심판을 받게 된다.
5).예수님 믿을 자의 자격을 스스로 결정하는 삶.
오늘날에도 완고한 기독교인 가운데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용납할 수 없어 하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를 막아 버리는 경우가 있다. 과연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정해 있은가? 또 우리는 그 자격 요건을 스스로 정할 권리가 있는가?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자의 길을 영영히 막아 버리기 때문이다.
(1).대체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자로 정하여진 자들이 누구인가?
구약시대
ㄱ.민족적 조건에 따라 정하였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으로 귀화 되지 않는 한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ㄴ).신체적 조건에 따라 정하였다.
문둥병자, 혈류병자, 불구자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ㄷ).직업적인 조건에 따라 정하였다.
세리, 창기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ㄹ).그밖에 조건에 따라 정하여 진 것
남색 하는 자(동성연애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오늘날 기독교.
오늘날에는 구약 시대와 같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의 자격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제한하지 않고 있다. 즉 민족적인 조건, 신체적인 조건 에 있어서 제한하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을 범하는 자가 회개하지 않을 때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교회에서 출교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윤리적인 범죄를 범하는 자는 출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매춘부가 그 직업을 버리지 않고 기독교인이 되려고 할 경우.
◎.동성연애자가 그 행위를 버리지 않고 기독교인이 되려고 할 경우.
◎.일부일처제를 실행 하지 않는 자가 기독교인이 되려고 할 경우 등.
(2).교회가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나 고려해야 될 자.
ㄱ.매춘 행위를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
기독교는 매춘 행위를 음란한 행위로 정죄하며, 하나님께서 부부의 화합과 사랑을 위해 주신 성적 기능을 매매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를 범한 것이라고 정죄한다.
그러므로 매춘부가 그 행위를 버리지 않고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랄 때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이를 거절하며 매춘의 행위를 버리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끝내 매춘부가 그 매춘의 행위를 버리지 않을 때는 교회에서는 매춘부가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지라도 이를 거절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생각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매춘부의 매춘행위가 자신의 음욕에서 나온 쾌락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나온 것인지 고려해야 할 것이며, 또 선천적으로 생리적으로 성욕을 주체 할 수 없어 가정을 갖기를 포기 하고 선택한 매춘부라면 우리는 이들이 기독교인 되고자 하는 것을 거절해야 되는가? 우리는 여기 매춘의 행위를 하며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매춘부를 거절할 권리가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ㄴ.일부일처제를 위배하고도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자.
구약 시대에는 일부다처제를 정죄하지 안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부일처제를 주장하심으로부터 일부다처제는 부도덕한 행위로 정죄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일부다처제를 좇아 첩을 두는 행위는 정죄하여 출교하기 까지 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본처를 두고 젊은 처녀를 첩으로 맞이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이 사실이 발각되었고 교회에서는 이를 정죄 하였다.
이에 범죄한 기독교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나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젊은 첩에서 낳은 자녀가 이미 두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교회는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경우는 아이들은 남자의 자녀도 됨으로 계속적으로 돌봐야 하며 첩하고 교제는 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매우 현명한 처리 같이 보인다. 그 이유는 자녀들은 이 일에 있어서 무죄함으로 돌봐 주어야 하며 첩은 자신이 범한 일에 보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는 해결책은 아니다.
그 이유는
양 부모 밑에서 양육함을 받을 권리가 있는 자녀가 그 어느 한편만을 선택해야 되기 때문이며, 죄에 대한 보상은 첩만이 당해야 된다는 것은 매우 불공평한 것이다.
또한 경우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첩과의 생활을 그냥 허용하는 것이다.
다만 본처에 대한 의무감 역시 소홀하지 말아야 하며 양쪽에 사랑을 골고루 분배하여 쌍방이 사랑의 질투를 갖지 않도록 힘쓰라고 교육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일부일처제의 목적이 부부 사랑과 가정 평화에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일부일처제를 허용하는 것이 됨으로 타인으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모방하게 하는 단점이 있어 일반적인 교회는 이 해결책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에 있는 기독교인이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교회는 이런 자들을 거부할 권한이 있는가?
ㄷ.동성연애자가 그의 삶을 버리지 못하고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자.
쉐이페 목사의 편지고뇌하는 그리스도인 에게에서 킴과 베키 두 여성은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첫째로 그녀들은 그리스도인이며, 둘째로 레즈비언(동성연애 하는 여성)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 우리는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인 가운데 동성연애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동성연애에 대한 심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갖고 이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교인 가운데 동성연애자가 확인되면 교회는 동성연애의 삶을 버릴 것을 강요하며 만일 동성연애의 삶을 버리지 못한다면 교회는 가차 없이 정죄하여 출교하게 된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동성연애 자체를 말하기조차도 싫어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소돔의 멸망에 원인은 그 도시가 동성연애로 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앞으로 지구의 종말도 동성애적 성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말하기를 앞으로 세상은 개성을 존중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을 예고하면서 동성애적 결혼 역시 인정되는 세상이 올 것을 예고하고 있다.
과연 동성연애의 성행이 인류의 종말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러나 성경에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역시 멸망에 이유가 되는 죄들을 아주 다르게 특징 짖고 있다.
(사1:10; 3:3 겔16:49 미야23:14)
여기 질서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비록 소돔의 멸망이 동성연애 때문이 아닐지라도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으로 또 성경이 금하는 것(구약의 성경과 사도들이 금한 것)이기 때문에 정죄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동성연애자의 삶을 만나보지 못하고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강하게 거부하는 동성연애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첫째: 자신의 성 정체감을 분명히 갖고 있으면서 동성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자이다. 즉 남자가 남자의 모습을 한 남자를, 여자가 여자의 모습을 한 여자를 연인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말한다.
둘째: 자신의 성 정체감을 바로 갖지 않은 자가 동성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이다. 즉 남자가 여장하고, 여자가 남장하고 같은 동성의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의학 명으로 성전환 증)을 말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을 동성연애자의 범주에 포함하는 것을 싫어한다.
과연 동성연애자는 생리적(선천적)으로 동성연애자 일 수밖에 없는 자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천적으로 성의 성장 과정이 잘못되어 동성연애자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동성연애자가 그 동성연애적인 삶을 포기 하고 정상적인 삶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대부분 동성연애자들 자체가 동성연애 행위가 부모와 형제와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것이기에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대부분 동성연애자들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동성연애자들 가운데에서는 자신들은 하나님과 인간들에게 저주 받은 자로 태어난 불운한자라고 비관하여 극단적인 방법으로 삶을 포기 까지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동성애적 기질을 성 호르몬의 이상으로 보며 선천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과연 동성연애자들은 나면서부터 저주 받은 자들인가?
교회는 이런 동성연애자들을 동정 없이 구원에 문을 닫고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인이 되는 기회를 빼앗아 버릴 권리가 있는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테오도르보베트는 그의 저서의미 있는 동성애의 생활에서 그는 동성애를 도덕이나 죄와는 무관한 것으로 말하며 동성연애자도 정상적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비도덕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고 말하며 정확하게 똑같은 정도의 죄를 범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 들어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 부부를 인정 하는 것과 유럽 개신교협의회에서 동성애를 허용하는 흐름으로 가는 것을 주의하여 보면서 동성연애자들 가운데서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자들을 막을 권한이 교회에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3)예수님께서는 기독교인 될 자를 제한하는가?
예수님께서는 기독교인 될 자를 제한하고 있지 않다. 비록 세리와 창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자 곧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을 기꺼이 받아 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
요3:16절에 누구든 지란 민족적 조건, 신체적 조건, 직업적 조건, 등을 따지지 않고 기독교인으로 받아 주시겠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교만하여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자를 빼놓고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는 그가 누구이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예수님을 믿을 자격에 대한 제한에 대한 필자의 견해.
매춘부, 첩을 둔 자,동성연애자 등이 오늘날 기독교인이 혐오하는 그들의 생활을 벗어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자 할 때 우리는 이들을 거부해야 하는가?
여기 대답은 예수님 말씀과 행동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매춘부들을 구원에 길로 부르셨다.
(※매춘부들이 그 생활을 버렸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라고 예수님께서 받아 주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르신 매춘부들은 그 생활을 버린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죄인으로 정죄했기 때문이다. 유태인들은 기생 라합을 죄인으로 정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기생 라합이 그 생활을 버리고 유태인으로 귀화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를 제한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을 우리에게 주셨다. 과연 사랑의 법을 실천해야 되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자를 제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을 제한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경계해야 될 삶이 아닌가 생각된다.
6).타인과 비교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삶.
마20:10~16
신앙생활 중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어떤 성도가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성실하게 자라면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핍박 하고 헐뜯고 세상에서 각가지 악행을 하고 막 기독교인이 된 성도 보다 받은 은사와 축복이 부족할 때가 있다.
이 난해한 하나님의 행위는 어떻게 설명 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과 인간이 보고 평가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이런 설명은 하나님을 위한 인간에 변명이지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변명을 하지 않으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스스로 공정하신 모습을 위배 하신 것 같으나 그분의 깊으신 뜻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 인간에 눈에는 하나님께서 공정하지 않으신 분으로 오해하여 보여 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공의에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여기 기독교인 가운데서는 하나님의 이런 난해한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공의에 하나님이심을 망각해 버리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경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원망과 불평은 당연히 경계해야 될 삶임을 가르쳐 주고 주고 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1).이런 일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에 속하기 때문.
롬9:19~21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좋으신 하나님을 악하게 보는 행위이기 때문.
마20:13~15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3).각자의 외모가 다르듯이 받는 달란트와 축복이 다름을 알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
마25:14~15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4).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주었으니 만족하고 감사해야 됨을 막는 행위이기 때문.
고후8:15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5).하나님에 평가 기준이 은사를 다르게 준만큼 다르게 평가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여기 하나님의 공의가 있다.)
7)법에 매어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을 정죄 하는 삶.
(막3:4 눅6:1~11)
기독교 안에서의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령아래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 할일을 항목으로 정하고 가르치고 지키도록 강요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는 기독교에 법을 지켜야 한다 하면서 하나님의 강령인 사랑을 빼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은 예로는 유대인에게 볼 수 있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법을 지킨다 하면서 하나님의 강령인 사랑을 빼버리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 사건을 놓고 범법한 자라고 정죄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이삭을 잘라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범법한 자라고 정죄한 것을 보게 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들은 행위를 심히 비판 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시 사랑을 빼버린 법만을 강조 하는 삶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자신이 주장하는 법이 하나님 사랑을 범하는 것인지 생각 하라.
ㄱ.하나님에 명예를 더럽히는 것인가?
ㄴ.하나님 최고로 사랑 하는 것을 막는 것인가?
ㄷ.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하게 하는가?
ㄹ.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막고 있는가?
ㅁ.선교하는 일에 장해가 되는 것인가?
ㅂ.교회 부흥을 막는 행위인가?
ㅅ.성령의 역사를 막는 행위인가?
(2).자신이 주장하는 법이 인간 사랑을 위배하는 것인가 생각해야한다.ㄱ.상대의 영혼을 손상 시키는 것인가?
ㄴ.상대의 생명을 해치는 것인가?
ㄷ.상대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막는 것인가?
ㄹ.상대에게 정신적, 신체적, 물질적 손실을 주는 것인가?
8).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는 삶.
막3:29; 눅12:10
성경을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 (요일5:16~17)
과연 사망의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하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살인죄를 범한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죄.
마22:3~5
둘째: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해치고 그 초청을 거절하는 죄.
마22:6
셋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은 죄.
예수님의 대속적 은혜를 받아 드리지 않는 죄.
마22:11~13
넷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 주 이심을 믿고 의탁하지 않는 죄.
요3:18
다섯째: 하나님에 뜻 되로 행하지 않는 죄.
마7:21
여섯째: 가난한자들을 외면한 죄.
마25:41~45
이러한 죄를 계속 범하면서 하나님 심판을 받는다면 그 영혼은 반듯이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러한 죄는 예수님 심판 앞에 서는 날까지 회개할 기회와 용서 받을 기회가 주어져 있음으로 사망의 이르는 죄라고 볼 수 없다.
성경은 이러한 죄 보다 더 무서운 죄가 있으니 용서함을 받을 수 없는 죄이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이다.
히6:4~6
한번 비침을 얻고 하나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자.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완전히 떠난 죄)
둘째는 성령을 훼방한 죄이다.
막3:28~29
※성령을 훼방한 죄란?
a.성령 훼방 죄란 무슨 죄인가?
성령 훼방 죄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분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을 무조건 거부하며 마귀의 능력으로 몰아부처 정죄하는 것
(막3:22~30)
b.성령 훼방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분별력을 갖도록 한다.
요일4:1~3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이라 하여 무조건 정죄하지 말라.
◎.외적으로 보여 지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지 말라.
행2:13~19
◎.마귀의 능력과 비슷하다 하여 정죄하지 말라.
마귀는 성령의 능력을 흉내 내는 경우가 있다.
즉 마귀도 방언, 예언 ,병 고치는 일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기서를 통하여 모세가 행한 하나님의 능력을 애굽의 술사들도 흉내 낸 것을 알 수 있다.
◎.타인이 체험한 성령의 능력을 시셈 하지 말라.
갈5: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9).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삶.
막8:33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나아가실 때 노중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신앙을 물어 보았다. 이에 베드로가 신앙고백 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심히 흡족하시며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는 천국의 열쇠를 주실 것을 약속 하셨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예수님께 간했다. 그리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사단아 물러가라 하시며 너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 하느냐 하셨다.
여기 우리가 베드로 같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분별 할 줄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협조하는 것.
사람의 일: 인간에게 세상적인 유익을 줄 수 있으나 구원사역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2).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지 말라.
(3).하나님의 일을 위하여서는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한다.
(4).우리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5).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먼저 두어야 한다.
10).열매 맺지 않는 삶.
세례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 위에 놓였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졌으니)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는 멸망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시되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열매 맺을 때가 되어 열매를 얻으려 하나 얻지 못했을 때 심히 분노하여 찍어 버리라고 명령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비유에 말씀은 하나님께서 양육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않으면 버리시겠다는 말씀이다.
눅13:26~27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바른 행위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니라.
여기 말씀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 생활을 하고 말씀을 열심히 들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행위에 열매를 맺지 않는 생활을 하면 버리겠다는 말씀이다.
(1).열매 맺는 생활이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 나타나는 삶의 결과로 모든 사람의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여기 사람의 삶의 열매에는 사망의 이르게 하는 열매가 있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있다.
(2).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무엇인가?
ㄱ.찬송의 열매.
히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ㄴ.전도의 열매.
요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ㄷ.행위의 열매.
◎.어두운 일에 참여 하지 않는 삶.
엡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의를 행하는 삶.
약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에 열매를 거두느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맺어지는 삶.
갈5:22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위에 열매는 성령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 하심으로 선하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삶을 말한다.
(3).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면.
ㄱ.예수님과 늘 연결 되어 있어야 한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ㄴ.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ㄷ.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ㄹ.기도해야 한다.
약5:18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ㅁ.길이 참으며 성령에 역사를 기다려야 한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ㅂ.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워야 한다.
딛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ㅅ.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감사해야 한다.
히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ㅇ.자신을 희생 하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1).약자를 핍박 하고도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삶.
눅20:47
오늘날 신앙에서 낙심 난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는 가난 때문에 교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낙심 나게 되었다고 말하며 교회야말로 빈부의 격차가 확실히 드려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물론 물질이 필요한 곳에서는 부요한자가 대우를 받고 가난한자가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과거나 현제나 미래에서 어쩌면 당연시 되어 왔고 당연시 될 것이다.
교회 역시 교회 운영을 위하여 물질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부요한자가 대우 받고 가난한자가 멸시 받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강자가 약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에 하나로 말씀하고 있다. (사1:10~17)
교회는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임을 알아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운영해야 한다는 이름 아래 사랑을 저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짊을 지우고 멸시와 천대로 약자를 고통 주면서도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은 당연히 경계해야 될 삶이다.
Ⅴ.기독교인의 생활.
1.기독교인의 신앙생활.
1).바른 예배를 드리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구원 받은 기독교인의 삶은 계속되는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예배는 교회에서만 드리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는 기독교인의 일상생활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예배의 참된 의미를 알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해야한다.
(1)예배란 무엇인가?
ㄱ.예배 γονυ(knee)는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로 예배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을 말한다.
ㄴ.예배προσκυνειν(worship)는 경배하다라는 의미인데 입 맞추다라는 어원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존경하며 경배하는 것을 말한다.
ㄷ.예배λατρεια(service)는 봉사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육적, 영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배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육적, 영적으로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2).기독교인의 예배의 대상(계22:8,9)
ㄱ.막연한 형식적인 예배의식이 아니다.
ㄴ.하나님의 실존을 무시 한 체 진리 추구가 아님.
히11:6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실존을 반듯이 믿어야 한다.
ㄷ.헛된 우상도 아님.
고전 10:14
ㄹ.인간도, 마귀도, 천사도 아님.
행10:25~26 마4:9,10 계22:9
ㅁ.오직 성경책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마4:10 계22:9
(3).기독교인이 드려야 할 예배는?
ㄱ.교회 안에서
ㄱ).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예배. 롬12:1
ㄴ).하나님 앞에 겸손으로 드려지는 예배.
ㄷ).하나님 앞에 온전히 회개함으로 드려지는 예배. 사1:18
ㄹ).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함 속에서 기도 드리는 예배.
ㅁ).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 드려지는 예배. 시150
ㅂ).하나님의 말씀을 전력을 다해 듣고 받아들이는 예배.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바 곧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알도록 노력하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실천하려는 결심으로 ‘아멘하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려는 결심을 가졌으면 곧바로 실행하라.
※.왜 기독교인이 말씀을 듣지 못하는가?
a.마귀의 침노가 있기 때문 .
마13:19
b.육신의 피로 때문에.
행20:9
c.세상 잡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
d.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완고하기 때문이요, 니고데모와 같이 세상적인 지식에만 의존하기 때문이요, 세상 욕심에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e.목회자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ㄴ.교회 밖에서.
기독교인들은 교회 밖에서도 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삶 속에서 바르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한다.
(4).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ㄱ.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ㄱ).형식적 의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과 뜻과 정성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ㄴ).자신을 온전히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롬12:1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온전히 희생과 봉사로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께 순결을 드리는 예배이며, 하나님과 신령한 만남을 가지는 예배이다.
ㄴ.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ㄱ).거짓 없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거짓 예배는 하나님의 실존을 분명히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오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보다는 사람을 의식 하는 데서 나온다.
(예: 아니니아와 그 아내 삽비라 행5:1~11)
그러므로 거짓 없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우리에게 지금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 하여야 한다.
ㄴ).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눅 24: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예배는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예배가 되어야 한다.
ㄷ).하나님께 순종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삼상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으로 훈련하는 생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은 사람이 늘 음식물을 섭취하여 생명을 유지 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섭취해야 한다.
예수님 역시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라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 하지 않고는 영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것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야 하며 성도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성경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
(1)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가?
ㄱ.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
눅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ㄴ.말씀으로 만이 옳고 그릇됨을 판단 할 수 있기 때문.
마4:4,7,10
마귀는 합리적인 논리로 예수님을 유혹 하였다. 단순한 지식으로는 마귀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에 유혹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ㄷ.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
엡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ㄹ.말씀을 바로 아는 길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기 때문.
마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ㅁ.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 되로 행해야 하기 때문.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ㅂ.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생기기 때문.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ㅅ.말씀을 듣는 것이 물질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 보다 더 예수님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
눅10: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ㅇ.말씀만이 성도를 의로 교육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2).기독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섭취하기 위해서는?
ㄱ.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력을 가져라.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ㄴ.하나님께서 세운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라.
행 10: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ㄹ.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ㅁ.성경의 해석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사상 안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ㅂ.말씀을 받아들일 좋은 마음의 밭을 가져야한다.
마13;3~23
ㅅ.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ㅇ.말씀 되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라.
눅1: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 가니라.
(3).기독교인은 말씀으로 훈련해야 한다.
말씀으로 훈련해야 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하나는 연단하는 의미가 있다.
즉 기독교인은 말씀으로 어떠한 마귀의 유혹에서도 ,시련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기독교인으로 연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의미는
말씀을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실제로 실행 할 수 있도록 훈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ㄱ.연단을 위한 훈련.
ㄱ).광야의 복음이 철저하게 교육되어야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괴로웠던 것은 성도들에게 어려움이 닥쳐올 때이다. 성도들 대부분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 하고 교회를 멀리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당했다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만사형통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만 알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을 잘 믿는 자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 만사형통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 하는 만사형통이란 개념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만사형통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 되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사형통의 축복이 어떤 때에는 자신이 보기에는 저주 같이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오해를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은 광야에 복음을 들어야 한다. 여기서 광야의 복음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해서는 수없이 찾아오는 유혹과 고난을 참아야만 했던 것 같이 천국을 향하여 가는 기독교인의 앞에도 갖가지 유혹과 핍박과 고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육을 말한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ㄴ).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해야한다.
고전3:2 히5:14
성경은 성도들이 먹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젖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는 젖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55:1에 말씀하시는 은혜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신앙이 성장되지 못한 성도들에게 가르쳐지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들에게 결코 바람직한 말씀의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성장 한 후 삶을 위하여 젖이 아닌 단단한 음식이 필요하듯 성도의 바른 교육도 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되어야 하며 성도 역시 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여기 젖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며, 단단한 음식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단지 성경에 언급한 것에 의하면 젖과 같은 말씀은 육체적 욕망을 아직도 버리지 않은 기독교인들 즉 육체적 욕망 때문에 신앙의 실족이 쉽게 되는 자들을 신앙의 실족을 시키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게 교육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단단한 말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이 성장된 기독교인들 즉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들에게 교육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하게 교육 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으로 의무와 책임감이 강조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기독교인은 의무와 책임감이 강조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도가 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ㄴ.실천을 위한 훈련.
실천에 옮길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 교회는 얼마나 사랑을 가르치고 배우고 외쳐왔던가? 그러나 실천이 없었기에 교회는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필자는 오늘날 교회에서 그토록 열의를 갖고 하는 성경 공부의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보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성경 공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요 성경공부가 실천 없이 아는 체 하는 성도를 양육하는 교육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지 못한다고 성경공부를 한 성도들에 의하여 쫓겨나게 되었다 한다.
물론 목사가 이단적 주장을 한다면 단연히 쫓겨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진리를 전한 것에 하자가 없다면 그 설교는 어느 누구에 의하여 판단 받을 수 없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가 진리를 전함에 있어서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을 몰아낸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천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ㄱ).실천이 없는 말씀은 끝내는 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7:27~28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ㄴ).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는 자는 말씀을 당연히 실행해야 한다.
눅 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히 4: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함이라.
ㄷ).알고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눅12:47~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ㄹ).아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영접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마2:5~6
동방박사가 이스라엘 왕으로 나신 분께 경배하려 왔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왕으로 나신분의 출처를 물을 때 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동방박사가 이야기 하는 것이 메시아인 것을 깨달고 성경에 예언한 되로 정확하게 메시야의 탄생지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를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아는 것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다는 알 수 있다.
ㅁ).아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사랑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눅13:26~27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ㅂ).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 할 때 예수님도 우리를 지켜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하나님에 명령을 몰라서 가 아니었다. 하나님에 명령을 순종 하지 안했기 때문이다. 곧 인류에 근본적인 죄악은 불순종에서 발생되었음을 알아야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분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자는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악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야한다.
(1).순종이란 무엇인가?
순종이란 히브리어로는 사마로 듣다, 경건하게 귀를 기울이다. 라는 뜻이며 헬라어로는 πειθω 순종하다, 신뢰하다. υπακοη 순종적으로 귀 기울임 υπακουω 귀를 기울이다, 순종하다, 따르다 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순종은 명령자에 말을 신뢰함 속에서 경건히 귀기우려 듣고 나에 지식과 이해력에 따라 이의를 제기 하지 않고 무조건 명령자의 말을 따라 행하는 것
(2).기독교인은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가?
ㄱ.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렘 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ㄴ.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의 말에 순종해야 한다.
히13: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 할 자 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자에게 순종함으로 유익을 얻은 자.
나아만 장군, 사룻다 과부 등..
ㄷ.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하라.
엡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ㄹ.남편에게 순종하라.
엡5:22,24
남편에게 순종해야 되는 것은 가정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이다.
ㅁ.상전에게 순종하라.
엡6:5
상전에게 순종해야 되는 것은 그 사회조직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것이다.
(3).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ㄱ.하나님 말씀에 대한 분별력.
ㄴ.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ㄷ.하나님 말씀에 대한신뢰
아브라함의 절대적인 순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왔음을 알아야 한다.
히11:17~19
ㄹ.하나님 앞에 겸손.
자신은 하나님 앞에 철저히 부족한자 임을 알아야 한다.
ㅁ.순종을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
(4).하나님 앞에 순종을 저버린 자는 어떻게 되는가?
ㄱ.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게 된다.(삼상15장 참고)
예: 사울왕 등..
ㄴ.풍랑(어려움)을 만나게 되어 주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까지 고통을 준다.(요나서 참고)
예: 요나 등.
ㄷ.자신의 지위와 축복을 빼앗기게 된다.
예: 사울왕 등.
ㄹ.하나님께서 예비한 영원한 축복을 얻지 못한다.
딤전1:9
ㅁ.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된다.
신11:28
(5).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어떠한 축복을 받게 되는가?
ㄱ.구원을 받게 된다.
예: 노아 등.
ㄴ.하나님의 예비한 축복을 받게 된다.
신4:30 신28장
ㄷ.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예: 예수님
4).늘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에 영적 삶에 있어서 말씀은 양식에 비유된다면 기도는 호흡으로 비유된다.
말씀이 없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곧바로 신앙의 성장이 그치고 말라 죽게 되고 기도가 없어도 역시 신앙이 죽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은 현재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며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절대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서 참으로 좋으신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 하고자 하는데서 나온 것으로 기독교인의 삶은 반듯이 기도의 삶이 되어야 한다.
(1).기도의 정의.
ㄱ.성도의 호흡이다.(필수성에 따른 정의)
살전5:7
ㄴ.하나님과의 대화이다.(상대성에 따른 정의)
사1:18
ㄷ.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것이다.(방법성에 따른 정의)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간절히 탄원하는 것이다.
ㄹ.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주체성에 따른 정의)
요16:24
ㅁ.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나님에 뜻에 복종 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눅11:11~13 하나님의 사랑.
마26:39 하나님의 뜻에 복종.
따라서 기도란 하나님의 자녀 된 기독교인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예수님의 공로와 사랑을 앞세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말한다.
(2).기도의 필요성.
ㄱ.복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마7:7
요15:7
ㄴ.죄 사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사1:18
ㄷ.귀신을 쫓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막9:29
ㄹ.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약5:15
ㅁ.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마26:41
(3).기도의 요소.
ㄱ.하나님을 찬양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시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 할지어다.
시148:13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 할지어다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 영광이 천지에 뛰어 나심 이로다.
단4:37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에 왕을 찬양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심으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ㄴ.감사하는 것이 있어야한다.
대상16: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시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에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 하리이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ㄷ.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이 있어야 한다.
렘3:13上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약5: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행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와 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ㄹ.하나님께 간구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16:24
지금까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 하리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구하라 그러하면 이루리라.
ㅁ.타인을 위한 중보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딤전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εντευξιs 중보의 기도)와 감사로 하되
누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해야 하는가?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골4:3
◎.죄지은 백성을 위하여, 주권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신9:18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라.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라.
삼상12:23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라.
욥1:5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23:34 행7:60
ㅂ.예수님에 이름으로 구해야 한다.
요15:16
(4).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
기도에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외형적인 기도이고,
둘째는 내면적인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기도보다는 내면적인 기도를 더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 하는 자는 기도하는 내면에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ㄱ.회개하는 기도이다.
대하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ㄴ.죄악을 멀리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이다.
시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 하시리라.
ㄷ.전심전력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이다.
렘29:13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ㄹ.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으로 기도하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는 기도.
마6:5~6
너희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ㅁ.중언부언 하지 말고 신중에 있는 것을 고하는 기도이다.
마6:7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ㅂ.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이다.
마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ㅅ.합심으로 기도하는 기도이다.
마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ㅇ.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이다.
마21:22
너희가 기도 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약1:5~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
ㅈ.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이다.
눅18:10~14
ㅊ.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이다.
요14:13,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 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네가 구하면 내가 시행 하리라.
ㅋ.쉬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이다.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ㅌ.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는 기도이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ㅍ.하나님에 뜻에 순종하는 기도이다.
마26:42
나에 원 되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에 원 되로 하옵소서.
5)주안에서 모이기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히10:24~25)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을 위하여 꼭 모여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느 장소에 특별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곳에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교회를 나아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찬송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유명하다 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영상을 통하여 생생하게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구태어 교회에 나아갈 필요가 있는가? 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하기 쉽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주안에서 모임을 모이기에 힘쓰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주안에서의 모임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 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령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1).왜 기독교인들이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가?
ㄱ.바쁜 산업 사회 때문에.
ㄴ.애경사가 주로 주일에 하기 때문.
ㄷ.세상 쾌락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
ㄹ.신령과 진정, 희생과 정성을 담은 예배를 무시하고 이론적인 예배와 형식적인에 치중되기 때문.
ㅁ.주일 낮 예배만 중요시하였기 때문.
ㅂ.하나님에 실존과 천국에 대한 소망의 믿음이 살아졌기 때문.
ㅅ.마귀가 하나님의 백성을 망하게 하려는 최후의 유혹에 속고 있기 때문.
(2).왜 우리 기독교인은 모이기에 힘써야 하는가?
ㄱ.하나님의 명령에 모이라 하기 때문.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ㄴ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나누기 위하여
행10:33下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롬10:17
믿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생김”
ㄷ.성도가 사랑으로 교통하기 위하여
행2:43~47
◎.도움이 필요한자를 돕고.
◎.마음을 같이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ㄹ.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ㅁ.때에 따라 내리시는 하나님에 은혜를 얻기 위하여.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3)기독교인이 모이기에 힘쓰는 자가 되기 위해
ㄱ.과감한 절제가 필요하다.
마18:8~9
성도가 거룩한 모임을 가지기 위하여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은 과감한 절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사단은 성도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고 갖가지 유혹을 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물질로 유혹 하기도 하고 다정한 친구들이 의리를 무기 삼아 유혹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신앙에 유해한 것은 내 눈과 손 같이 내게 있어서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절제 하는 삶이 필요하다.
ㄴ.주님에 이름으로 모이는 날은 어느 날이든 중요한 날임을 알아야 한다.
롬14:5~16
오늘날 교회들의 병패 중 하나는 성도들이 주일 낮 예배는 그래도 모이나 주일 저녁 예배와 수요 예배는 그 참석이 심히 저조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그 원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연구한 것은 없으나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 성도들이 내가 정이 든 교회만이 우리교회라는 협의적인 교회 관을 갖고 먼 교회 까지 찾아가 예배함으로 생긴 현상이며, 또 하나는 주일 낮 예배는 안식일에 대응하는 날로 정하여 그 참석에 율법적 강제성을 부여하나 그 외의 날은 율법적 강제성을 부여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은혜 가운데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옳지 못하다. 기독교인이 주일을 지키는 것과 그 외에 예배일을 지키는 것은 율법적으로 강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백성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예배 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하는 날자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ㄷ.하나님에 은혜와 축복은 은혜로운 자리에 열심히 참여하는 가운데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 3:1~10
성전 미문 앞에 자리 잡은 소경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시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그토록 소원하던 온전한 사람이 되는 축복을 받았다. 여기 치료 받은 소경이 성전 앞에서 구걸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구걸 했다면 아마 기도하려 성전에 올라온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토록 내가 어느 장소에 있느냐는 우리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불신자가 모이는 그 곳에 자리 잡으면 불신자가 되어가고 과격한자들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으면 과격한 사람이 된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는 은혜로운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이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는 자리 곧 교회를 가까이 할 때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서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ㄹ.하나님에 실존을 분명히 믿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한다.
히11:6(하나님의 실존)
계21:1~4(하늘에 소망)
하나님께 모일 때 죽을병을 고치는 약을 주고 (구원) 아름다운 집을 주고 (천국의 집) 그분에 자녀로 살게 해주신 다는 약속이 있다.
ㅁ.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행2:46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것을 싫어하여 각가지 방법으로 방해 한다. 특히 초대교회는 권력자들을 이용하여 박해함으로 하나님의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는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였다.
그것은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마귀는 핍박이 아닌 물질과 쾌락을 미끼로 하나님의 백성을 모이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오늘날 역시 마귀를 멸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성도와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사람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누구와의 교제를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아무리 양순한 사람일 지라도 포악한 사람과 교제 하게 되면 포악한 사람으로 변하게 되고 신앙이 좋은 사람도 무신론자와 교제하게 되면 무신론자가 되어 버리고 우상 숭배자와 교제 하게 되면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린다.
여기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람들과 사귐을 늘 주의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될 수 있는 한 같은 기독교인들과 바른 신앙의 교제를 갖는 것이 신앙에 큰 유익이 됨을 알아야 한다.
(1)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가?
ㄱ.성도의 교제는 서로 사랑케 한다.
요일 3:10~19
ㄴ.성도의 교제는 약한 자를 돕기 때문
행20:25
살전5:14
ㄷ.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을 면하게 하기위해
히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의 중에 누구든지 죄에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ㄹ.서로 짐을 지기 위하여.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ㅁ.서로 위로하기 위하여
살전4: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 하라
ㅂ.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히10:24
서로 돌아보라 사랑과 선행을 격려 하며..
ㅅ.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기 위해
롬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한 것을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권고케 하려 함이니
ㅇ.신앙에 열성을 갖기 위해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라.
2)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ㄱ.예수님의 사람 안에서 해야 된다.
ㄴ.자신의 자랑을 삼가 하고 겸손함으로 교제해야 한다.
ㄷ.상대의 주장을 무시하지 말고 이해하며 다툼을 삼가 해야 한다.
ㄹ.신앙을 위한 대화를 갖도록 노력해야 하며 신앙에 무익 한 것이나, 신앙에 저해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는 대화는 삼가 해야 한다.
7).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 최대의 사랑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 사랑이다.(요3:15)
사람이 사람에게 베풀 최대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가 예수를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도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믿음으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이 타인에게 베푸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럼으로 믿음으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은 전도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1)왜 기독교인은 전도를 해야 하는가?
ㄱ.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
마28:19
막16:15
행1:8
ㄴ.하나님의 선택된 자를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수단이기 때문.
고전1:21
ㄷ.하나님에 진노 속에 거하는 자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
(2).그리스도를 전도하는 방법.
ㄱ.구두 전도.
일반적인 전도의 방법으로서 많은 청중에게 외치는 형식의 구두 전도가 있고 일대일의 상대를 대상으로 대화식으로 전도하는 구두 전도가 있다.
기독교가 처음 전파 될 때는 청중에게 외치는 형식의 전도가 필요하나 오늘날에는 일대일의 대화식 구두 전도가 더욱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더욱더 일대일의 구두전도는 청중에게 외치는 구두전도 같이 대단한 용기가 없어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전도하기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때에는 청중에게 외치는 구두 전도 역시 필요할 때가 있으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본다.
ㄴ.문서 전도.
옛적에 우리나라에는 글을 모른 문맹인 들이 많았음으로 문서 전도는 실제로 활용하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으로 글을 모르는 문맹인은 실제로 없음으로 문서 전도의 활용에 참으로 좋은 때이다.
특히 문서 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 있어 지혜롭게 활용 할 수 있다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ㄷ.행동 전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너희 착한 행실을 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마5:16)
이 말씀은 기독교인이 착한 행실로 살아 갈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착한 생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품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잡아 포로 삼고 성전까지 훼파했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바른 행실과 믿음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되며,( 단4:1~3 )
신약 성경에는 초대 교인들이 바른 행실로 온 백성들에게 칭송을 들으니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다.(행2:47)
이토록 행위 전도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 강한 힘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그 뿐만 아니라 구두전도와 문서전도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는 행위 전도가 밑 바침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행위 전도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그리스도 전하는 자의 자세
ㄱ.빚 진자라는 관념을 가져야 한다.
롬1:14
바울 사도는 자신이 빚 진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셨다. 곧 복음은 전하고 싶으면 전하고 싶지 않으면 전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니라 채무자가 반듯이 빚을 갚아야 되듯이 복음은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ㄴ.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야 된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그 성과가 확실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자치 태만하기 쉽다. 그래 지금은 복음을 전할 때가 아니야 하고 쉽게 그러나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때를 얻든지 못 얻던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을 언제 어떻게 부르실 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ㄷ.복음 전함에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ㄹ.복음에 관하여 묻는 자에게 온유함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한다.
벨전3:15
어떤 전도인이 전도하다 말고 안 믿는 사람과 다투었다. 그것은 안 믿는 사람이 복음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랑으로 전해져야 하며 어떠한 반대자라 할지라고 넓은 아랑과 온유함으로 성실히 상대를 이해 시켜 주어야 한다.
ㅁ.행위로 전도해야 한다.
행위 전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유창한 말을 할지라도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호소력이 약해진다. 어떤 성격이 불량한 전도인이 하늘 나라가 좋다는 것을 그를 아는 사람에게 말하고 그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자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이 묻기를 당신도 예수님을 믿으니 하늘나라에 가겠군요. 이에 전도자는 자신 있게 대답 했다. 그렇소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 분명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소 그러니 당신도 망설이지 말고 예수를 믿으시오. 이 전도자의 자신 있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하늘나라 가는 것을 포기 하겠습니다. 나는 하늘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산다는 것이 두렵거든요.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머 이야기 같으나 전도자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야 될 이야기임을 알기를 바란다.
ㅂ.복음 전파는 성령에 능력에 힘입어서 해야 한다.
행1:8
고전2:4
복음전도를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만 하려고 하는 것은 쉽게 실패하기 쉽다.
그 이유는 사단이 강하게 복음전도를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복음전도를 하여야 성공할 수 있다.
유명한 전도자 최 권능 목사님의 일화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복음 전도가 얼마나 유익한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8)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오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마20:28에 말씀 하셨다. 그뿐 아니라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자신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그렇다.
기독교는 섬김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종교이다. 즉 봉사 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봉사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1).봉사란 무엇인가?
봉사는 헬라어로 διακονεω로 섬기다, 식사 시중을 든다, 부양한다, 봉사한다, 집사 일을 본다. 로 봉사란 자기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섬기며 필요한 것으로 돌봐 주는 것을 말한다.
(2).기독교인은 누구에게 봉사해야 하는가?
ㄱ.하나님께 봉사해야 한다.
ㄱ).예배의식을 통한 봉사.
ㄴ).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통한 봉사.
ㄷ).복음 사역에 직접, 간접적으로 봉사.
ㄴ.목회자가 성도를 위한 봉사.
ㄱ).성도들의 영혼을 살게 하기 위하여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
ㄴ).성도들이 시험에 빠졌을 때 위로해 주는 봉사를 하여야 한다.
ㄷ).성도들이 영육이 병들었을 때 치료하고 간호하는 봉사를 하여야 한다.
ㄷ.성도가 목회자를 위한 봉사.
목회자가 성도의 영혼을 위하여 봉사 한다면 성도는 목회자의 육신의 삶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
ㄹ.성도와 성도끼리의 봉사.
성도끼리의 봉사는 자신의 강한 것을 가지고 성도의 약한 것을 담당 해야 한다.
(3).기독교인이 온전한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ㄱ.겸손함으로 무장해야 한다.
ㄴ.대접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대접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ㄷ.희생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ㄹ.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
ㅁ.사람의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하늘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4).봉사하는 자가 받는 상급.
ㄱ.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ㄴ.모두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게 되고 사랑 받게 된다. 요12:26
ㄷ.이 세상의 축복과 하늘의 축복을 받게 된다.
9).기독교인은 재물을 바로 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사는 동안에 이 세상을 살아 갈수 있도록 필요에 따라 많은 재물을 빌려 주셨으며 이 재물을 바로 사용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 졌으나 하나님에 것인 이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사용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재물에 대한 바른 인식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자신과 타인을 해롭게 하는데, 우리는 물질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르게 사용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1).기독교인의 재물에 대한 바른 인식.
ㄱ.보화는 땅에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6:19~20)
ㄴ.재물을 주인으로 섬길 때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눅18:23~26)
ㄷ.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눅12:15)
ㄹ.부요함이 꼭 축복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눅6:26; 눅12:19~26)
ㅁ.재물은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2)기독교인의 바른 재물 관리.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것을 맡아 사용하며 보호할 사명을 가진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청직이로서 하나님의 것을 바로 관리 할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ㄱ.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욥1:21
주신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화와 이시니 여화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지어다.
ㄴ.나에 소유는 하나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욥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ㄷ.나에게 맡겨준 재물로 만족하라.
잠30:8~9
ㄹ.주님의 허락 없이 헛된 낭비를 금하도록 노력하라.
ㅁ.주님이 원하는 되로 사용하라.
ㄱ).자신과 가족을 돌보는데 사용하라.
ㄴ).가난한 자를 돌보는데 사용하라.
ㄷ).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협조 하는데 사용하라.
(3).재물을 바로 관리 한자에게 내려지는 축복.
ㄱ.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송을 받게 된다.
ㄴ.이 세상에서도 더 많은 재물을 맡게 된다.
ㄷ.하늘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된다.
10).기독교인은 인색함이 없는 헌금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의 헌금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인의 헌금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이게 한 장소인 교회를 운영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의 생활을 담당함으로 복음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게 함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성장을 이루게 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가운데 빈약한 자들을 도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교회가 사회에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기독교인은 당연히 인색함이 없이 헌금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1).기독교인의 헌금이란 무엇인가?
ㄱ.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 되로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이며 하나님에 은혜에 감사하는 감사의 표현이다. (신16:17)
ㄴ.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유여(有餘)한 것으로 저희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 (고후8:13~14)
ㄷ.교회 생활을 생업으로 하는 성도(목회자)를 섬기는 것 (고후8:4)
ㄹ.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며 (마6:19) 물질의 축복을 받게 하는 문이 된다.(말3:10)
ㅁ.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다. (고후 8:3)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의 은사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풍성하게 하는 헌금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실 때 가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환난과 시련과 가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헌금은 왜 필요한가?
ㄱ.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필요하다. 즉 복음 전하는데 필요하다.
ㄴ.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필요하다.
물질이 있는 곳에 너에 마음이 있느니라.
(3).헌금의 종류.
ㄱ.십일조(말3:10~12)
ㄴ.주일 헌금(출23:15)
ㄷ.감사 헌금(출25:2)
ㄹ.절기 헌금(신16:10)
(4).헌금의 사용.
성도들이 교회에 드리는 헌금은 주님 앞에 온전하게 쓰여 져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쓰여 져야 한다. 헌금은 하나님에 구원 사역을 위해 쓰여 져야 한다.
ㄱ.복음증거를 위하여
◎.교회운영비.
◎.교역자 생활비.
ㄴ.전도를 위하여
◎선교비
◎구제비
(5).헌금 하는 자의 자세.
ㄱ.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헌금하라. (눅21:1~4)
어떤 교회서는 헌금을 많이 하는 자가 교회를 마음 되로 하며 목사도 자신이 먹여 살리는 것 같이 하며 교회의 주인 행사를 하는데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께 많이 드렸어도 나에 것을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액의 헌금을 하였을 지라도 결코 교만해서는 안 된다.
ㄴ.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한 헌금을 드려라. 행5:1~11 성경을 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에게 헌금을 드리고도 그 헌금 드림 때문에 저주 받은 자가 있다. 그들은 아나나아와 삽비라라는 부부이다. 그들이 저주를 받게 된 것은 헌금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거짓된 헌금을 드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짓된 헌금을 드리게 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을 의식하며 드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의식하며 드렸기 때문이다. 이토록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들을 의식하며 드리는 헌금은 거짓된 헌금을 드리기 쉽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ㄷ.세금과 뇌물 적이 아니라 감사 예물을 드려라. (행8:18~22)
세금으로 드리는 헌금은 강제로 드려지는 헌금을 말하는 것이요 뇌물적인 헌금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은 나에 다른 목적 곧 나에 이익을 챙기기 위하여 드리는 헌금을 말한다. 필자는 어떤 성도가 헌금을 했는데 목사님께서 축복 기도를 하지 안했다고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필자는 그 성도에게 말하기일 당신은 감사헌금을 드린 것이 아니었습니까? 반문 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감사 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뇌물적 헌금으로 드린다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미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사업에 협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그 무엇을 얻으려는 다른 속셈으로 헌금을 드린다는 것이다. 참으로 유치한 헌금이다.
우리 기도교인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얻을 자격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ㄹ.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라.
출25:2 고후8:3 고후9:7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헌금이 되어야 한다. 여기 하나님께 감사하는 헌금은 강요에 의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억지로 드려지는 헌금이 될 수 없다.
특히 감사함으로 드리는 헌금은 아까운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헌금을 드림으로 즐거움 마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헌금을 기쁨으로 받으신다.
ㅁ.자신의 능력에 맞게 드려라.
신16:17 고후8:12
필자가 강원도에서 목회를 할 때 한 여 집사가 상담하기를 그녀는 교회에 휘장을 하기 위하여 성도에게 빚이 졌는데 그 빚을 갚기 위하여 가정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하여 남에 집살이를 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녀의 가정은 안 믿는 남편과 시부모가 함께 사는 가정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였다. 과연 안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심히 두렵기도 했다.
성도가 빚으로 헌금한 것이라면 목회자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위로하고 당연히 빚으로 하는 헌금을 거절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전임 목회자에게 원망의 마음이 들기 까지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 주시기를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만일 다쳤다면 교회가 치료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빚을 졌으면 교회서 갚아 주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것을 마음 되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혜가 생기고 그 때 어느 성도가 작정 헌금을 드린 것이 있어서 그 헌금으로 빚을 갚아 주었다.
성도들이 부흥회 때 순간적인 감흥에 치우쳐서 남에 빚이라도 얻어 헌금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이러한 헌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ㅂ.준비하는 가운데 드려라.
고후9:5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단순히 물질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정성을 함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하는 자세로 드리는 것이 올바로 드리는 헌금이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라 믿어진다.
ㅅ.불의한 제물을 드리지 마시고(사1:13) 예물 위에 의와 인과 신을 겸해서 드려라.(마23:24)
이사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수하게 드리는 예물이 도리어 하나님을 괴롭힌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성도가 십일조를 철저히 할지라도 의와 인과 신을 버린 것은 하루살이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것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앞에 헌금할 때에도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고 사랑과 믿음이 겸비한 헌금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6)헌금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축복.
ㄱ.하늘 문을 여시고 풍족한 축복을 주신다.
말3:10~12
ㄴ.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
눅6:38
ㄷ.하늘의 창고에 없어지지 아니 할 보화가 쌓이게 하신다.
고후9:6
※ 십 일 조
교회 운명에 있어서 가장 힘 이 되는 헌금은 십일조이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생활을 담당하기 위해서 정한 것으로 교회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된다.
교회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십일조 하는 성도의 가정 열한 가정만 있어도 목회자의 생활은 안정 될 것이며, 교회 운영이 염려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에 일을 전업으로 하는 목회자가 생기면서 십일조는 철저하게 강조 되어 왔던 것이다.
A .십일조의 정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은혜에 감사해서 자신의 소산의 10분의 1을 교회에 드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협조 하며 이미 주어진 하나님에 은혜를 감사 하는 마음으로 드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B.십일조의 발생.
a).은혜 가운데 자연적 발생.
창14:20
창28:22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에 하여 처음 시작되지 안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도 감사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감사를 표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b).율법적 강제적 발생.
레27:30~33
은혜 가운데 자발적으로 받쳐지던 십일조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이후부터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줌으로 바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받쳐져야 하는 것으로 강제성을 갖게 되었다. 십일조가 강제성을 갖게 된 것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문적으로 전업하는 레위 족속이 생기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일에만 치중 하도록 그들의 생활을 담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 이라면 목회자가 하나님의 일에만 열중하도록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산다는 기독교인에 있어서는 받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쳐야 하는 헌금임을 알아야 한다.
C.십일조 사용
a).목회자 에게(민18:21~23)
b).불쌍한 자들에게(신14:28~29)
D.목회자도 십일조를 해야 되는가?
히7:9~10
십일조는 목회자의 생활을 위하여 정해진 것으로 목회자가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이 생긴다.
여기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 같이 그에게서 태어난 레위족속 제사장들도 당연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목사들도 십일조를 예수님께 당연히 해야 하는데 목회자가 드리는 십일조는 목회자가 담임한 교회에 드려지는 것보다 상회비로 또는 선교비로 쓰여 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하나님께서 싫어하는 십일조.
a).악과 겸한 십일조.
사1:11
b).억지로 하는 십일조
고후 9:7
c).하나님을 사랑함 없이 축복만 받으려고 바치는 십일조.
d).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
말3:8
F.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십일조
a)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드리는 십일조
b).의와 인과 신을 겸비해서 드리는 십일조.
마23:23~24
G.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십일조를 드린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축복.
a).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신다.
말3:10
b).소산을 지켜 주시며 우환과 질병에서 지켜 주신다.
c).하늘에 창고에 보화가 쌓이게 하신다.
11)목회자를 존경하고 사랑함이 있어야 하며, 목회자의 바른 인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에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목회자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바른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목회자를 무시하는 것은 그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음은 하나님에 말씀을 들음에서 생긴다고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에 말씀을 듣지 못할 것이요 신앙의 성장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목회자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삶을 살아 갈 때 신앙의 큰 이익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1).목회자는 누구인가?
ㄱ.하나님의 백성의 직분적 구별.
ㄱ).구약시대
목회자의 반열- 족장시대의 족장, 제사장, 선지자, 왕, 등 (인도자)
목회자는 주의 사자라 불러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언하며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양의 반열 - 하나님의 양이라 함은 넓은 의미로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 전부를 가리킨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서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인도함을 받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구약시대는 대체로 하나님의 양의 반열로 제사장과 같은 종교지도가 생긴 후에 족장,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 백성 자녀 등
ㄴ).신약시대.
목회자의 반열-예수님 ,사도, 선지자, 교사, 목사, 장로, 전도자, 집사, 감독 등
여기서 장로와 집사는 오늘날의 집사와 장로와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양의 반열-평신도로서 장로, 평신도로서의 집사, 평신도를 말한다.
ㄷ).오늘날.
가톨릭교회
목회자의 반열-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등
양의 반열- 수녀, 평신도 등.
개신교회
목회자의 반열-목사, 강도사 전도사, 교사(어린이의 목회자.)
양의 반열- 평신도 장로, 권사. 집사, 평신도 등
ㄴ.목회자에 대한 정의
세월에 흐름에 따라 직분의 이름도 달라지고 임무도 달라졌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신 하여 하나님에 백성을 인도할 자를 목회자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그 권위 역시 하나님에 의해 구별하여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목회자는 스스로 의하여 세워지거나 인간의 힘으로 세워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졌음으로 그 대우와 권위 역시 일반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돌봐 주라는 사명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로서 하나님에 권위를 입은 자라고 정의 할 수 있다.
(2) 목회자의 권위
ㄱ.하나님께서 세웠기 때문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롬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며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 이니라
ㄴ.하나님께서 그에 권능에 오를 손으로 붙드시고 있기 때문.
계1:20
네가 본 것을 내 오를 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러므로 목회자에게 도전은 하나님에 권능에 대한 도전이다.
ㄷ.하나님과 일체로 여기기 때문.
눅10:16
요15:18
(3)하나님에 사자 목회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
ㄱ.목회자의 허물을 드려내지 말고 덮어 주어야 한다.
창9:20~27
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드려낸 함은 저주를 받고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음.
삼하6:20~23
하나님의 법궤를 맞이하는 다윗은 심히 기뻐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었다. 이에 그의 아내 미갈이 지적하며 비방 하였을 때 다윗은 미갈을 저주 하여 무자 하게 하였다
민12:1~15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함에 대하여 비방한 모세의 누님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림 너희가 어찌하여 내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 하느냐?
ㄴ.목회자에 대하여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출16:8
우리가 누구냐 너희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라
ㄷ.목회자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출23;20~21
내가 사자로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 하며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 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왕하 2:23~24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엘리사를 향하여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조롱할 때 엘리사가 노하여 저들을 저주함에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 42명을 찢어 죽임.
ㄹ.목회자에 지위나 권위를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민16장
모세와 아론의 지위를 침범하려던 레위 자손 고라와 나단아비람외 이백오십 인이 하나님의 불과 땅에 삼킴을 당해 멸망당함.
대하26:16~21
웃시야왕은 제사장의 지위를 교만함으로 침해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분향 할뿐 아니라 제사장 아사랴에게 노함으로 말하자 하나님께서 웃시야 왕에게 저주 하여 문둥병이 발하게 함
오늘날 장로님들은 분수에 넘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
ㅁ.목회자를 대적하거나 해하지 말아야 한다.
대하24:20~25
제사장 여호와의 아들 스가랴를 해한 요아스 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됨.
삼상26:6~10
그러한 후에 사울에 옷자락을 벰을 인하여 다윗에 마음이 찌려 자기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
삼상1:12~18
영적 눈이 어두워서 오해하는 하나님의 종 엘리를 대적 하지 않은 한나가 복을 받음.
ㅂ.전쟁터 같은 위험한 곳에 내 보내지 말아야한다.
(목회자의 권위가 손상을 입을 가능성이 있는 이방인 전도 등)
삼하21:16~17
장대한 자의 아들 중 삼백 세겔 중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수류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불렛셋 사람을 쳐 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그리하여 이스라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ㅅ.목회자를 귀하게 대접하며 사랑해야 한다.
살전 5:12~1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 수고하고 주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에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 끼리 화목 하라.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 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유
마10:40
목회자를 귀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 곧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
※.실례
갈 4:14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육체의 부족함을 알고도 엽신 여기지도 아니하며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 같이 예수님 같이 대접 할 뿐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눈까지도 빼어 줄 정도로 바울을 귀하게 대접 했다.
롬 16:4
브리스와 아굴나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줄 정도로 바울을 귀하게 대접했다.
※축복
왕상 17:8~16
엘리야 선지자를 어려움 속에서도 귀하게 대접한 사르밧 과부는 흉년에도 양식이 마르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왕하 4:8~37
엘리사를 귀하게 대접하여 휴식처를 제공한 수넴 여인은 가정에 기쁨을 얻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행10:25
베드로를 맞이하여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까지 베드로를 귀하게 대접한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처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되었다.
ㅇ.목회자의 말을 청종해야 한다.
출23:20~21
내가 사자로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며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 이니라.
※.이유
행10:33
주의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도의 자세.
살2:13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목회자의 말을 청종하지 않은 자에게 내려진 저주.
대하16:7~14
선견자 하나니에 책망을 받지 않은 아사왕이 병이 걸림.
대하25:16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 않은 아마샤를 하나님이 멸하시기로 결정하심.
대하36:16~17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한 시드기야 시대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내림.
마10:4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큰 재앙을 받게 된다.
ㅈ.목회자가 말씀으로 인도할 때 복종하고 순종해야 한다.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3.기독교인의 가정생활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축복에 장소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셨고 가정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온 가정이 구원을 받으리라.
곧 이 말씀은 나의 구원과 가정의 구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더불어 노아의 가정을 구원 하셨고, 롯과 더불어
롯의 가정을 구원 하셨으며
고넬료와 더불어 고넬료의 온 가정 식구는 이방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다.
이토록 나와 가정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가정 안에서 위로를 받고 가정 안에서 삶을 영위 한다. 그러기에 가정은 기독교인의 삶에서도 참으로 중요하다. 가정에 불화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온 가정을 파멸에 빠지게 하며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가정에 화목은 자신에 삶뿐만 아니라 온 가정을 윤택하게 만들면, 하나님에 축복을 받게 하며, 신앙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된다.
여기 화목한 가정생활은 부모, 자녀, 형제. 부부의 바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1).화목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는 부모님께 효도함이 있어야 한다.
화목한 가정은 질서가 있어야 한다. 질서가 없는 가정은 좋은 가정이 될 수 없다.
부모님께 효도 하는 것은 가정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부모님께 효도 하는 것은 모든 윤리에 근본이다. 부모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푼 자 이다. 나에게 은혜를 베푼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사랑 한다는 것은 위선자 일뿐이다.
오늘날 우리 주면에 폐륜적 범죄가 늘고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인과 장모를 구타하는가 하며 시 부모를 내 쫓고 심지어는 자신을 낳은 친 부모님도 구타하고 물질 때문에, 사소한 말다툼으로 부모님을 죽이기까지 하는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범죄가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참으로 만물에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럴 수 있을까 하고 반문 하게 된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런 페륜적 범죄를 어떻게 다루실까? 성경은 이런 폐륜적 범죄를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경계하시고 이런 범죄를 범한 자에게 진노 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반대로 효도하는 자는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불효를 버리고 부모님께 진심의 효도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1).부모님께 효도 할 수 있는 범위.
유교: 살아 계신 부모님을 공경 하고 공양함은 물론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께는 제사를 통하여 공경하고 공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교에서는 부모님께 효도 할 수 있는 범위는 돌아가신 부모님까지이다.
기독교: 기독교에서 부모님께 효도 하는 범위는 살아 계신 부모님을 주안에서 공경하고 공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인은 진정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으로 한정 되어 있음으로 불효에 후회를 갖지 않으려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 효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통해서 부모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상은 엄격 하게 금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제사는 부모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부모님을 흉내 내는 마귀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환상을 통하여, 꿈을 통하여 부모님께서 제사를 받으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 그것은 마귀가 부모님을 가장하여 우리를 속였을 뿐이다
마귀는 천사를 흉내 내기도 하고 죽은 자를 흉내 내기도 한다. 사울 왕에게 신접한 여인을 통해 나타난 사무엘에 영혼은 사무엘에 영혼을 흉내 낸 마귀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은 죽음과 함께 하나님에 심판을 받아 선한 자는 천국에 악 한자는 지옥에 정착되고 그 어떠한 타인의 노력으로나 타인의 공덕과 기도로 이미 선언된 하나님에 심판을 바꿀 수 없다. 그뿐 아리라 이미 심판 받은 영혼은 자신 마음 되로 자신의 거처를 옮길 수 없다.(참고 눅16:19-31)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은 부모님이 멸망 받을 불신자 가운데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도하여 멸망을 면케 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공양 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 이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무관심 하라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은 살아 계신 부모님이나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분들이 계신 그 곳에서나마 조금이라도 기쁨을 줄 수 있는 것 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첫째: 조상을 욕되게 하는 삶을 금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사람을 소개 할 때 우리 나라와 같이 아무개 손자 아무개 아들 누구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자손에 행위와 업적에 의해 조상님들을 욕되게 할 수도 영화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이다.
둘째: 부모님 중 이 세상에 남은 분에게 돌아가신 분에게 못 다한 효도를 한다. 이 세상에 남은 분은 누구인가? 그분은 이미 돌아가신 분의 한 몸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이미 돌아가신 분의 한 몸인 살아 계신 분께 잘하는 것이 돌아가신 분께 잘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셋째: 형제가 우애 한다.
형제가 우애 하는 것을 보는 것 같이 부모님에 기쁨은 없다. 나는 나에 어머니에게서 그것을 보아 왔다 아마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이 말에 동의 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섬긴다고 제사상을 차려 놓고 제사 때문에 형제들끼리 서로 옥신각신 싸움하는 불신자들을 볼 때 참으로 한심 하게 느껴진다.
아마 불신자들이 생각 하는 것 같이 죽은 영혼이 제사를 받으려 왔다면 가슴 치면 탄식 했을 것이다.
넷째: 자신이 멸망 받을 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 한다.
부모에 소원은 자신이 어느 곳에 있든지 자기 자녀가 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손이 멸망 받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 하는 것은 산 부모님께 나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 하는 것이 된다.
다섯째: 부모님에 유지를 받든다.
부모님을 공경 한다는 것은 부모님에 말씀에 순종 한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지를 받든다. 것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공경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본 것과 엄격 하게 말해서 우리 기독교인이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범위는 이 세상에서만 이므로 부모님께 효도할 기회를 잊음 으로 평생 후회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된다.
(2).기독교인이 부모로 섬기는 자.
ㄱ.영에 아버지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창조주적 의미로(사64:8)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자녀를 돌보는 참된 부성으로서 의미로(히12:7)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하시고 훈계하시고 그릇된 길을 걸을 때 사랑에 매로 징계 하시며 바른길을 가도록 돌보아 주신다.
셋째: 양육자의 의미로(사1: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때에 따라 영에 양식과 육에 양식으로 먹이시며 특히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넷째: 멸망을 주시지 않으실 분으로서 의미(요1:12)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이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녀 된 기독교인은 절대로 멸망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을 멸하기를 원치 않는 것 과 같다.(요3:16)
다섯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실 분으로서 의미(롬8:16-17)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얻을 권세를 주셨다.
ㄴ.신앙의 아버지
가톨릭교에서는 목회자를 神父(Father)라고 부른다. 곧 목회자는 신앙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목회자를 신앙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유는 목회자가 성도를 말씀으로 양육하기 때문이요 성도들을 바른 신앙인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고 훈계하고 인도하기 때문이다.
ㄷ.육의 부모
나를 낳으시고 기르신 분으로서 기독교인 이라면 반듯이 효도해야 될 분(마15:3-9 )
ㄹ.법적 부모
타인 이었으나 법적으로 부모로 인정된 분 즉 장인, 장모, 시부모, 양부모, 의붓아비, 서모 등
(3).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가?
엡6:2-3
ㄱ.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이 하나님께 충성 한다는 명목아래 부모님께 효도하기를 거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 한다.(마15:4-9)
ㄴ.모든 윤리에 근본이기 때문에
ㄷ.은혜 베푼 분께 은혜 갚는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
부모님은 엄청난 은혜를 베푼 분이 시다. 낳으셨을 뿐 아니라 노심초사 자녀들을 염려하며 기르신 분들이시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녀가 부모님께 효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ㄹ.축복 받는 근거이기 때문
엡6:2-3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 말씀은 부모에게 효도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길이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약속 이다.
(4).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가.
ㄱ.부모님을 유익되게 해야 한다.
부모님을 진정으로 유익되게 하려면 주안에서 부모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부모님께서 불신자라면 구원 받을 성도가 되도록 전력을 다해 전도해야 한다.
ㄴ.존경 하는 마음으로 대 한다.
부모님께서 사회에서 존경 받을 그런 분이 되지 못할 지라도 그 자녀에게는 존경 받을 자격이 있다.
ㄷ.부모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부모님은 자나 깨나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며 자녀가 불행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부모님은 내 가 잘될 때 한없이 기뻐하시고 내가 망할 짓을 할 때 걱정 하신다.
ㄹ.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말며 서운 하게 말라.
그토록 강하시던 부모님도 나이가 들면 약해져서 조그만 일에도 서운해 하신다. 특히 가정 사 문제를 의논 하지 않고 행할 때 서운해 하시며 병고에 있을 때 돌아보지 않을 면 서운해 하신다. 또 형제가 불목 하는 것 은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
ㅁ.부모님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
홍수로 인류가 멸망당한 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살아남은 노아는 포도를 재배 하여 그 열매로 술을 담아 마시고 취해 벌거벗은 모습으로 잠들게 된다. 이 모습을 본 그의 아들 함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고 하게 된다. 함으로부터 소식을 접한 셈과 야벳은 아비의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돌이켜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안했다.
여기서 노아가 하체를 드려낸 모습은 노아가 그의 허물을 드려낸 모습과 같다. 여기 아비의 하체를 보고 그의 형제들에게 발설한 함의 처사는 아비의 허물을 말 한자로 저주 받는 자가 된다. 그러나 아비의 허물을 보지 않고 덮어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게 된다.
우리들 부모 역시 완전 할 수 없어 그들의 허물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셈과 야벳 같이 부모님의 허물을 보지 않고 덮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ㅂ.부모님을 외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룻기서를 보면 룻이 홀로 된 시모를 외롭게 두고 떠나지 않고 모심으로 만인에게 칭찬을 받는 자가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큰 축복을 받아 다윗왕의 선조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을 사는데 정신이 없어 우리들의 부모님이 외롭게 살아가시는 것을 그대로 방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ㅅ.부모님을 공양해야 한다.
성경을 보면 애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요셉은 부모님을 모시고 공양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가?
남부럽지 않게 성공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공양하기를 거절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우리 하나님께서 대단히 분노 하시리라고 믿는다.
(5).부모님께 효도 하는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임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부모님께 불효 하는 자는 반듯이 죽이라고 (출21:15; 신21:18-21)하였을 뿐 아니라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30:17) 무서운 저주를 하셨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부모님께 효도 하는 자는 큰 축복으로 같이 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그럼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는 어떤 축복을 받는가?
ㄱ.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멸 하는 이방 여인 이었으나. 시모에게 효도함으로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
ㄴ.자녀의 축복을 받는다.
룻은 홀로 된 시모께 효도함으로 자자손손 축복을 받게 되는데 룻에게서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태어나게 된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보겠다고 노력 하는데 부모에게 불효 하면서의 수고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 이다.
ㄷ.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축복을 길이 누리게 된다.(엡6:3)
부모님께 효도 하면 네가 잘되는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장수하는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다. 여기서 장수의 축복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오래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오래도록 누리게 해 주신다는 약속이다.
(6).부모님께 효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외적 영향
ㄱ.좋은 부모님을 만나야 한다.
필자가 강원도에서 목회 할 때 일이다.
하루는 성도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망치로 쳐서 경찰서 잡혀 갔다고 소식을 듣고 심히 놀랐다. 아버지를 망치로 때린 그 아들은 불량한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착하 디 착한 청년 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께서 술에 취하기만 하면 그의 어머니를 구타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를 치는 불효를 범하게 된 것이다.
이토록 효도를 할만한 자질이 있는 자식도 부모에 그릇된 행동 때문에 불효자가 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ㄴ.좋은 배필을 만나야 한다.
부모님께 효도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좋을 배필을 만나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아는 상식이다. 성경에 보면 야곱의 큰 아들 에서가 이방인 가운데서 배필을 구했는데 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면 결혼 전에는 효도 했던 자가 결혼 후 불효자가 되는 그런 경우를 보기도 하고 결혼 전에는 불효자였던 자가 결혼 후 효도 하는 자를 보게 되는데 그만큼 효도 하는데 배우자의 역할이 중요함을 말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ㄷ.부모님을 공경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효도를 하는 데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무시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전에는 효도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효도하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산업 사회의 영향아래 핵가족 화된 오늘날의 가정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며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교육이 기능 교육과 입시교육으로 빠지고 윤리교육이 미약한 가운데서의 효도를 기대 한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날 윤리의 마지막 보류인 기독교의 교육이 효도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쇄신 시킬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이 일에 무관심 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적인 영향
ㄱ.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부모님께 효도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를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ㄴ.마음속에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필자는 철이 없을 때 어머님을 싫어했었다.
그 이유는 어머님께서 너무나도 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어머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는데 내가 병으로 고통 받을 때 자신을 아끼지 않고 간호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써 어머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어머님께 부족하나마 효도 하려고 노력 하게 되었다.
그렇다 우리들의 부모님은 알게 모르게 아낌없는 희생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ㄷ.마음속에서부터 오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사회적인 분위기가 효도하는 분위기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효도를 명하였을지라도 내 마음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사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온전한 효도를 할 수 없다.
2)화목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는 자녀를 바로 키워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자녀 키우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고 먹고 사는 것이 과거 보다 풍족하여 자녀 양육 하는데 문제 될 것이 그리 없는 것 같이 보이나 자녀들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바로 양육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해 고통스런 발 거름을 옮길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울면서 따랐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녀들을 돌아보시며 여인들에게 말씀하시길예루살렘의 여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다. 때가 이르면 자녀를 낳지 않은 자가 복되다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말씀이기도 하나 넓은 의미로서의 예언 성취는 마지막 시대에 자녀들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을 예언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과연 오늘날 우리들의 자녀들은 어떠한가?
공부 못한다고, 세상이 자신들이 바라는 되로 되지 않는다고 자살 하는가 하며, 부모님께 대들고 심지어는 부모님을 구타하고 살해하기도 한다.
내 자식만은 착하게 사는 가 했는데 어느새 불량한 자들과 어울려 각종 범죄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옛말에 자녀가 있는 자는 못된 남의 자녀를 보고 욕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나에 자녀도 언제든지 잘못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기독교의 자녀들은 악의 세력에서 안전 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을 보면 제사장 엘리의 자녀, 사무엘의 자녀, 다윗의 아들 압살롬 등이 바른길로 행하지 못함으로 가정을 불행하게 만든 사실이 있다.
여기 엘리는 제사장이요 , 사무엘은 훌륭한 선지자요,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녀를 훌륭하게 바로 키우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여기 기독교인의 가정은 자녀 양육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야 한다. 특히 신앙의 지도자는 자녀를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딤전3:4,12; 딛1:6)
(1).자녀는 무엇인가?
자녀는 키우기가 심히 어려운 그런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려고 자녀를 주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 자녀는 무엇인가?
ㄱ.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창33:5; 48:9; 수24:3 시113:9 사8:18)
자녀는 우리를 기쁘게 해 주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준 자 이라는 것이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돈을 보고는 웃을 수 없어도 자식 보고는 웃는다.
이 말은 돈은 모든 사람이 좋아하나 기쁨을 주는 선물로서 자녀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ㄴ.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다.
(시127:3-5)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아 자녀에게 상속해 주어도 자녀가 그 재산을 지킬 수 없으면 곧바로 가난 하게 된다. 그러나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자녀로 말미암아 말년에 부요케 된 자가 많다.
그러므로 바른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된다.
ㄷ.자녀는 아비의 멸류관이다.
(잠17:6)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왜 유명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다윗이라는 훌륭한 아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훌륭한 자녀는 그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부모의 면류관이 되는 것이다.
(2).성경에 나타난 잘못된 자녀.
ㄱ.엘리의 아들들
이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을 자신들이 원하는 되로 마음 되로 취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함으로 온 가정을 저주 받게 한 자들이다.
ㄴ.사무엘의 자녀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이다. 이런 사무엘의 삶 속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기란 심히 어렵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 들은 사무엘과 같지 않고 뇌물을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무엘의 영광된 사사의 직임은 사무엘의 가정에서 더 이상 잇지 못하게 된다.
ㄷ.노아의 아들 함
노아의 아들 함은 아비의 허물을 발설한 자로 저주 받은 자가된다.
그렇다 부모의 허물을 보는 자는 저주 받는 자가 될 뿐 아니라 아주 잘못된 자녀이다.
ㄹ.다윗의 아들 압살롬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비의 왕에 보좌가 탐이나 아비에 대하여 반기를 들으므로 폐륜의 범죄를 범한 자가 되었다.
이토록 자신의 권력을 위해 폐륜의 범죄도 두려워 않는 압살롬 이야말로 못된 자식이라 볼 수있다.
ㅁ.동생 요셉을 판 야곱의 형제들
야곱의 아들 들은 아우 요셉을 팔고도 아비에게는 아우 요셉이 동물에 의해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함으로 부모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다.
이토록 부모의 마음을 해 아리지 못하고 부모의 마음에 못을 박는 자녀는 올바른 자녀라 볼 수 없다.
ㅂ.살인자 가인
가인은 동생의 신앙을 시 셈 하다가 동생을 죽인 자로서 가정의 평화를 깨뜨린 자로서 아주 못된 자식이다.
그럼 왜 가정에서 이런 못된 자녀가 생기게 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부모가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 하며, 또는 그 부모가 자녀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고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우상을 만들었던 데라에게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오게 된 경우)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는 그 부모의 행위에 의해서 올바른 자녀들이 나오기도 하고 잘못된 자녀가 나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부모의 어떤 행위가 자녀를 그릇되게 만드는가?
첫째: 자녀 우상주의가 자녀를 그릇되게 만든다.
엘리의 자녀들 경우
둘째: 자녀 교육에 태만 할 때 자녀가 그릇되기 쉽다.
오늘날 목회자의 자녀들이 그릇된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문 목회자들이 성도 교육에 온 정열 쏟다 보니 자녀 교육에 등한이 함으로 나타난 결과인 경유가 많다. 아마 사무엘의 자녀들의 경우가 이 경우에 속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그 부모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자녀에게 허물을 보여 줄때 자녀는 그릇되기 쉽다.
술 취한 노아의 경우.
넷째: 부모에게 그릇된 자는 그릇된 자녀를 낳기 쉽다.
야곱은 형님을 위한 축복 기도를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는 죄를 범해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해다. 야곱 역시 자신이 아버지를 속인 것 같이 그 자녀에 의해 속임을 당해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섯째: 하나님과 인간에게 범죄 할 때 자녀가 그릇되기 쉽다.
다윗이 압살롬이란 못된 자식이 생기게 된 경우 아담의 가정에서 가인이란 자식이 생기게 된 경우.
(4).성경에 나타난 바른 자녀.
ㄱ.죽기까지 순종한 아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려고 이삭을 결박할 때 이삭은 아버지에게 대항 하지 않고 순종 하였다.
여기 죽음 앞에서도 순종 하는 이삭 이야말로 참으로 바른 자녀라고 볼 수 있다.
ㄴ.자기를 희생 시키면서 까지 부모님의 고민을 해결해 준 자녀.
사사 입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승리를 주신다면 내가 돌아 올 때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그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 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입다가 승리하여 돌아올 때 그에 딸이 그를 맞게 된다. 이문제로 입다가 고민 할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입다의 딸은 아비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위해 기꺼이 희생을 택하게 된다. 여기 아비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위해 희생을 택한 입다의 딸이야 말로 훌륭한 자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ㄷ.어려움에 처한 부모님을 공양한 자녀.
흉년에 아버지를 공양한 야곱의 아들 요셉
ㄹ.아버지를 신뢰하고 따른 자녀.
홍수를 예언한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 하고 따른 홍수전의 노아의 아들 들
ㅁ.아비의 허물을 덮어준 자녀
노아의 아들 중 셈과 야벳은 아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드려내는 허물을 보였으나 아비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었다.
(5).성경에 나타난 바른 자녀 같이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는.
ㄱ.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해야 한다.
딤전5:10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것과 다르다. 사랑은 상대를 진실로 유익되게 하는 것이다.
ㄴ.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야한다.
신11:19; 31:13; 32:46; 사54:13
ㄷ.자녀가 잘못 되었을 때 바른 훈계가 있어야 한다.
사랑의 매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ㄹ.차별 없는 자녀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야곱의 차별 있는 자녀 사랑 때문에 야곱의 자녀들이 동생 요셉을 괴롭히는 못된 자들이 되었다.
ㅁ.자녀들을 분노케 하지 말라.
엡6:4; 골3:21.
부모의 싸움과 이혼은 자녀들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사랑 없는 처벌은 자녀로 하여금 분노케 한다.
ㅂ.자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
마10:37.
ㅅ.자녀에게 신앙의 좋은 본을 보여주라.
딤후1:5.
신뢰 받는 부모가 되라.
존경 받는 부모가 되라.
ㅇ.자녀의 고민을 들어 주며 이해 해 주며 사랑으로 감싸 주는 자가 되라.
ㅈ.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그 죄 값이 자녀에게 미치지 않게 하라.
성경은 부모가 하나님께 범죄 할 때 그 죄 값이 자손 삼 사 대 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했으며, 반대로 부모가 하나님께 사랑 받으면 그 자손 수 천대에 이르러 축복을 받게 하신다고 말씀 하셨다.
3)화목한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는 친족 사랑과 형제 우애가 있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하여 형제 우애가 필요 하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한 부모님께로부터 난 친 형제가 있고 아내 또는 남편으로 말미암아 된 법적 형제가 있으며 믿음 안에서 형제 된 자가 있다.
어떤 기독교인은 믿음의 형제가 친형제 보다 또 법적 형제 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에 어머니와 형제가 그를 찾아 왔을 때 말씀 하시기를 나의 참 형제자매가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 되로 사는 믿음의 형제가 아닌가? 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바른 기독교인 이라면 친형제 역시 더욱 사랑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골육 형제를 구원 하기위해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롬9:3)
그뿐 아니라 딤전5:8을 보면 기독교인이 친족 곧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의 배반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 라고 말씀 하고 있다.
여기 우리 기독교인은 믿음의 형제는 물론이거니와 내 친형제를 더욱 사랑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1).형제 우애는 왜 필요 한가?
ㄱ.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ㄴ.형제 우애는 부모님께 효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ㄷ.형제 우애는 강한 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대적을 이길 힘을 갖게 한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을 갖게 한다.
ㄹ.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시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형제를 믿음의 지도자로 삼을 때 기독교인의 자세.
ㄱ.긍정적으로 받아 드려라.
신17:14-15
ㄴ.가까이에서 협력 하라.
모세를 협력한 형 아론 과 누님 미리암
모세가 자신의 말이 어눌한 것을 하나님께 고하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협력자로 그의 형 아론을 지목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과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아론 보다 더 말이 능한 자가 없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협력자로 모세의 형 아론을 세우신 것은 모세를 진심으로 협력해줄 자는 모세의 친형 아론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ㄷ.형제로만 생각하여 권위를 무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대리자임을 알고 존중하라.
인간의 판단으로 판단하지 말라.
말씀으로 책망 받을 때 대항 하지 말라.
말씀으로 명령 할 때 순종하라.
(3).형제 위에 신앙의 지도자가 된 자의 자세.
ㄱ.자신의 욕심으로 형제의 신앙을 실족 시켜서는 안 된다.
신17:16
ㄴ.형제 위에 교만을 행하지 말라.
신17:20
ㄷ.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존경 받는 자가 되라.
신17:19
ㄹ.형제에게 넓은 아량과 관용으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 요셉
(4).형제에게 그릇 행 한자가 받는 벌.
ㄱ.형제를 시기하여 죽인 가인.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아우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에게 쫓겨나 유리 하는 자가된다. 여기서 유리하는 자란 정신적 불안으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방황하는 상태를 말한다.
ㄴ.미움으로 형제를 팔아버린 요셉의 형제.
요셉을 미워하여 요셉을 애굽 상인에게 팔아버린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늘 하나님의 재앙이 내리지 않을까 불안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요셉이 시험하기 위하여 그들을 도적으로 몰 때 늘 마음속으로 늘 두려워했던 것이 임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형제에게 악을 행한 자는 이토록 마음이 편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ㄷ.자신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형제들을 죽인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
삿9:1-5
아비멜렉은 권력을 쟁취 하기위하여 외가 친척과 더불어 이복형제들을 해한다. 그리하여 그는 권력을 쟁취하나 그는 그 권력을 오래 누리지 못하고 내분이 일어나 끝내는 여인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 여기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의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싸움하는 장수로서는 수치스러운 죽임이 아닐 수 없다.
이토록 형제를 해하는 자는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5).기독교인은 형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ㄱ.믿지 않는 형제의 구원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롬9:3
신앙인 이라면 구원 받지 못하는 영혼은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 믿음의 눈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 이라면 형제가 믿지 않는 멸망의 길에 있다면 최선을 다해 형제를 구원하려 할 것이다.
ㄴ.형제가 연합하여 협력해야 한다.
시133:1-3
시편 기자는 아론과 그 자손이 제사장의 명예로운 지위를 하나님께 얻을 수 있었던 것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 형제 되는 모세와 연합하여 협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누구든지 그 형제와 연합하여 협력하면 이와 같은 축복을 받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ㄷ.형제를 아끼고 돌봐 주어야 한다.
*.가난한 형제라도 미워하지 말고(잠19:7) 돌봐 주어야 한다.
레25:25,36; 신15:7-11
*.형제에게 꾸어 줄때 이식을 취하지 말라. 신23:20
*.형제가 위급할 때 외면하지 말라.
*.형제의 손실을 막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신22:1-4
ㄹ.형제 사이에 들어 이간하지 말라.
잠6:19
우리 하나님께서 중심으로 미워하는 것이 육칠 가지니 교만, 거짓, 죄 없는 자 살인, 악한 계교 ,악을 추구하는 것, 거짓증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형제를 이간하는 자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자.
형제를 이간케 하는 자는 대부분 남이 아니라 바로 형제의 배우자인 경우가 많다. 우리 기독교인 가정에서도 형제가 우애 하지 못하는 가정을 보면 그 형제의 배우자가 문제가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여러분 가운데서는 남편 또는 아내를 부추겨서 형제의 사이를 이간질 한 적이 없습니까? 만일 그런 적이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했기에 하나님께로 오는 축복이 멀어지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는 짓이기 때문 이다.
둘째: 배우자의 사랑이 나를 향해 식어 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혈족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타인보다 우월 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아내가 내 형제들에게 잘해 주는 모습을 보면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어 졌다 하여도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내가 형제에 대한 불평을 할 때 아내가 같이 거들면 나중에는 아내까지 미워지는 것을 느낀다.
기독교인의 아내여 남편의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노력을 하면 아마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남편에게 사랑 받는 자가 될 것이다.
셋째: 여러분의 배우자를 약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라.
형제의 우애는 하나님의 진노도 그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알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다윗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 하지 않는 행위로 스스로 나라를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인구조사 한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어 이스라엘 온 민족에게 온역이 임했는데(삼하24장)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부스 사람 아리우나 타작마당에서 그 진노를 그쳤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타작마당에서 형제가 서로 자기 몫을 상대 형제에게 주는 아름다운 형제 우애를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님으로 신빙성은 없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관념 속에는 형제 우애의 힘이 심히 크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ㅁ.형제의 잘됨을 시기 하지 말라.
형제의 잘됨을 시기 하는 것은 형제도 망하고 자신도 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제의 잘됨을 바라는 것은 나에 잘됨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잘된 형제가 직접 돕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형제가 잘됨은 나에게 사기를 높여주는 것이 되고 타인이 나를 함부로 대항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라.
3).화목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부부관계가 온전해야 한다.
가정 구성에 가장 중추적인 존재는 부부이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들었을 때 가장 처음 부부를 만드셨다. 이 부부 관계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만들어 졌고 형제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화목을 위해 부부의 역할이 참으로 크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올바른 부부관계를 갖지 못하고 이혼이라는 것을 통해 가정의 화목을 산산이 부셔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이혼의 사유로는 배우자의 외도, 남편의 구타, 배우자의 무능, 서로의 성격이 맞지 않기에, 배우자의 주벽이 심하기에, 배우자의 가족간의 문제 등이다.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는가 하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혼도 흔한 것을 보게 된다.
이혼이란 당사자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온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고 고통 주는 것으로 기독교인은 당연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기혼 기독교인은 온전한 부부 관계를 지속할 의무가 있다.
(1).결혼의 목적.
사람들은 이성을 알면서 결혼을 해야 된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진작 결혼 하려는 당사자에게 왜 결혼을 해야 하는가? 물어 보면 확실한 설명을 하기 어려워한다.
여기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물론 성경은 시대에 따라 결혼을 왜 하여야 하는가? 그 목적을 다르게 설명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우리는 먼저 성경에서 보는 결혼에 목적을 고찰하고 바람직한 결혼의 목적을 찾아보자.
ㄱ.구약 시대의 결혼의 목적.
구약 시대의 결혼의 목적은 동족 보존에 중요한 가치를 주고 있다.
동족 보존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sex가 필연적으로 선택 되는데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동족보존을 위한 sex는 그 자체가 성스럽게 여기고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정죄되지 안했다.
예:
*.동족 보존을 위한 근친상간의 대한 관용.
창38:12-26
유다와 그 자부 다말과의 성 관계.
창19:31-38
롯과 그의 두 여식과의 성 관계
*.동족 보존을 위하여 허용된 관습.
창30:3-9
일부다처제
*.동족보존을 위한 강제된 관습.
창38:9-10; 신25:5-10
형에 후사를 잇기 위하여 형수와의 성 관계가 강요됨.
그러나 쾌락 추구적인 sex는 그 자체를 천박하게 여기며 형태에 따라서 무섭게 정죄 한 것을 보게 된다.
예:
*.야곱의 아들 루흐벤이 근친상간의 죄로 저주를 받게 된다.
창49:3-4
*.남색 하는 자의 대한 정죄.
왕상15:12
남색 하는 짓은 이방 종교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 이방 종교 가운데는 신의 형상이 양성을 소유한 분으로 믿는 종족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는 수염을 기른 양성의 신으로 표현.
이집트: 이집트인의 경외의 대상의 신 하피드도 양성의 신으로 표현.
그리스: 헤르마 프로디트스 또한 남성의 성기를 달고 있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여성의 몸매와 유방으로 애정을 유혹하는 여성이기도 한 양성으로 표현.
그리하여 사람 가운데 반음반양의 사람을 신탁을 받은 자로 여겨 그들 신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그들과 성교함으로 신과 가까이 할 수 있다고 생각 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북미 인디언의 Berdache와 인도의 Hijras는 대표적인 예 이다.
즉 남색은 이방종교의 음탕한 종교 행위임으로 금하게 한 것이 분명 하나 이 밖에도 남색은 동족보존하고 먼 sex행위임으로 금하게 한 것도 한 이유라고 본다.
*.계간(항문 성교)에 대한 정죄.
*.호색과 음란을 정죄.
ㄴ.인간 창조 시 결혼의 목적.
ㄱ).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줄 목적.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울 자로 동물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의 도움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동물들은 인간의 외로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의 한 지체인 여자를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사람은 진실로 사랑 할 자가 있을 때 가장 마음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창2:18,20; 창2:23,24
ㄴ).상호 의존케 할 목적.
사람은 남녀가 서로 의존적으로 창조 되었다. 만일 남자의 장점과 여자의 장점을 합성한 자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완전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케 하기 위하여 서로에게 약점과
장점을 주셔서 서로 의존케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남여가 심리적, 생물학적, 신체영역까지 서로 의존케 하셨다.
ㄷ.예수님께서 말씀 하시는 결혼의 목적.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는 결혼의 목적은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배필과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고(마19:4-6) 그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만드는데 있다.
ㄹ.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결혼의 목적.
사도 바울은 사람이 생리적으로 일어나는 음욕으로 인한 사회악을 막기 위하여 결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고전7:1,5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성년이 되면 정상적으로 음욕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만일 사람이 이 음욕을 바르게 소모하지 못할 때 음욕은 사회악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오늘날 미혼모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인신매매가 가능케 되는 것도 AIDS의 공포 속에 놓이게 되는 것도 음욕을 바르게 소모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음욕을 소모시킬 가장 건전한 것은 결혼을 통한 Sex라고 말한다.(고전7:1)
그렇다면 결혼하지 못한 성년의 음욕 소모를 위한 건전한 방법은 무엇인가?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지금까지 정죄하여 왔던 자위행위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다시 정립 되어야 하겠다.
☆.자위행위란.
자위행위란 유다의 아들 오난이 그의 형수하고에 성 교제에서 낳을 자녀가 자기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을 알고 그의 설정을 땅에 했다는 데서 온 말로서 오난의 이름을 따서 오랄리즘이라고 한다. 이 오랄리즘은 단순히 땅에 설정 한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 상대자 없이 스스로 기구 또는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여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설정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독교회는 이런 자위행위를 지금까지 금기 시 해왔다.
그 이유는
첫째: 자녀를 생산하기 위한 성 교제가 아니면 그 자체가 옳지 않다고 보는 구약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둘째: 또 하나의 이유는 자위행위가 상상적인 음행과 더불어 행해지므로 기독교인으로 자위행위는 마땅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마5:27-28
그러나 마5:27-28절은 상상적인 음행을 금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 아래서 모두가 죄인임을 가르치는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결혼의 목적에 대한 성경이 말씀 하시는 바를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성경의 해답을 예수님에 말씀과 행동과 사상에서 얻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에 목적을 무엇이라고 말씀 하시는가?
예수님께서의 결혼의 목적은 자녀를 낳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안했다. 그것보다는 남녀가 서로 사랑 하기위하여 결혼의 목적이 있음을
말씀을 통해 암시 하시고 있다.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 지니라마19:5
또 결혼은 타오르는 정욕을 사랑하는 배우자하고만 함께 나누게 강요됨으로 사랑은 더욱 가정 안에서 뜨겁고 아름답게 꽃피울 것이며 마귀가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의 목적은 남녀가 서로 사랑함으로 한 몸이 되어 가정을 이루어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고 마귀의 공격을 막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사랑할 자격이 없거나 서로가 사랑이 없이 결혼할 생각을 갖는 것은 서로에게 불행한 것이 될 것이다.
(2).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서로 사랑하는 부부 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ㄱ.부모님을 떠나는 것이다.
마19:5
이 말씀은 부모님을 모시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부부 생활의 주체를 사랑하는 부부에게 두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마마보이 남편들이 있어 자신들의 생활의 결정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맡기는 것을 보는데 이런 행위는 언뜻 보기에는 효자같이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바른 효행이 될 수 없으며 끝에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없음으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 한다.
물론 부모님께 조언을 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부 생활의 결정권자는 부부 당사자임을 명심 하자.
ㄴ.두 부부가 하나 되어야 한다.
마19:6
오늘날 이혼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배우자와 성격이 맞지 안 해서 이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한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일치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서로가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은 서로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성격 때문이다. 상대의 그 성격은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 오래 동안 만들어진 성격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성격이 곧 바로 변화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생각이다. 그러나 성격은 환경에 따라 또는 각자의 교육과 의지에 따라 변화 될 수 있는 것임으로 서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분이 말하기일 부부가 싸움을 적당히 하는 것은 싸우지 않고 은근히 상대를 불신 하는 것 보다 더 낳다 고 말하는 것을 보았는데 이 말은 싸움 자체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서 서로의 성격이 드러나고 화해를 통하여 서로의 잘못된 성격을 반성하고 고쳐 나갈 때 화가 변해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반성 없는 부부 싸움은 사랑하는 사이가 원수가 되는 계기를 만드는 것임으로 기독교인은 삼가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성격을 말하고 서로가 이해하고 두 부부가 공유 할 수 없는 성격이며 또 상대에게 해를 주는 성격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부부가 되어야 한다.
곧 우리 기독인의 부부는 하나 되기 위하여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데 내 중심으로 상대의 성격을 개조하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나 되려고 노력하라.
두 부부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첫째: 서로를 위해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라.
둘째: 상대의 장점은 인정하고 함께 누린다.
셋째: 새로운 취미와 생활과 관습과 사상을 서로를 위해 만들고 같이 공유 하도록 한다.
ㄷ.올바른 성 관계를 하라.
고전7:3-4
ㄱ).두 가지 성 기능
부부의 성 관계는 결혼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결혼에 목적인 사랑을 하게하는 좋은 수단임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성에 기능은 두 가지 기능이 있다. 그 하나는 자녀 생산을 위한 기능이고 또 하나의 기능은 쾌락적 기능이다.
지금까지 많은 도덕적 삶을 주장 한 분들 가운데는 자녀 생산을 위한 성 기능은 바람직한 것이나 쾌락적인 기능의 성 관계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 언급하기도 꺼려 왔다.
그러나 쾌락적인 기능 역시 부부의 성 관계에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직 부부의 쾌락적 성 기능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부의 쾌락적 성 기능에서
부정적인 면: 잠5:1-14
부부를 떠나서 성적 쾌감을 추구 하는 것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사며.
가정을 파괴 하며.
사회악에 근원이 된다.
긍정적인 면:
부부 관계에서만 성적 쾌감을 추구 하는 것.
그 결과: 잠5:15-19; 고전7:5
가정이 화목하게 되고.
서로가 더욱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게 한다.
ㄴ).성의 쾌락적인 기능 연구와 기독교적 해석.
이상에서 알아 본 것과 같이 우리 기독교인에 부부 성 관계에서도 쾌락적인 기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며 쾌락적 기능 추구를 위한 올바른 연구와 기독교적 해석이 있어야 한다.
모든 생물 가운데 성 교제에서 쾌락적인 기능에 활력을 찾고자 노력 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른 생물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변태적 SEX 을 고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변태적인 SEX는 올바른 쾌락 추구라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상대에게나 본인에게 해가 되는 것이 되는 것이 많음으로 사람들에 의하여 혐오 되어 왔다.
그러나 변태적인 SEX 가운데에는 사랑 하는 상대에게나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음 알아야 하며 변태SEX를 무조건정죄 하는 것은 삼가 해야 한다.
(ㄱ).본인에게나 상대에게 해를 주는 변태적인 sex.
희생 변태(사디즘; 마조히즘), 약탈 변태, 등
(ㄴ).상황에 따라서 상대에게 해를 줄 수도 있는 변태적인 sex.
상대 변태, 수집 변태(페티쉬), 교역 변태, 등
(ㄷ).상대에게 해를 주지 않는 변태.
상상 변태, 매료 변태(상대의 섹시한 외모와 율동을 감상하는 것)
의복 도착, 등
ㄷ).인간에게 나타난 성욕에 다양성.
사람의 성욕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남녀에 성 관계에 아주 무딘 자가 있어 결혼해서도 배우자와 성 관계를 등한이 하여 배우자로 하여금 불만케 하고 끝내는 상대 배우자로 하여금 가정을 떠나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기회를 만들어 가정을 파괴하는데 원인제공을 하는 경유가 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은 성욕에 대한 어떠한 모습이 있고 배우자는 성욕에 대한 어떠한 모습이 있는지 알고 현명한 대처가 있어야 된다.
※. 인간에게 나타나는 성욕에 대한 다양성.
◎.타고날 때부터 성욕이 없는 자.(타고난 고자).
◎.살다가 성에 기능이 상실된 자.(후천적 고자).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적 삶을 위하여 성에 욕구를 스스로 자제한자.
◎.정상적인 자.
성에 욕구가 강 한자.(이야기 속에 변강쇠와 옥녀)
성에 욕구가 보통인 자.
성에 욕구가 약한 자.
◎.특이한자.(동성애자)
ㄹ).기독교인의 부부 성 관계에서 바람직한 자세.
(ㄱ).부부간에 성 관계를 천하게 보지 말라.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ㄴ).하기 싫은 성 관계라도 배우자가 원하면 해야 한다.
고전7: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ㄷ).함께 즐기는 성 관계 기술을 연구 하라.
서로에게 해를 주지 않는 변태적 성 행위를 금할 이유가 있는가?
(ㄹ).신앙생활을 핑계하여 지나치게 성 관계를 멀리 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
고전7:5
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두 집사가 있었는데 하루는 남자 집사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하기를 자신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내와 이혼을 해야 되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너무나도 황당한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그 집사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되었다.
그 집사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자기는 공사판에 미장일을 하는 자인데 저녁을 먹고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고 하면 아내는 그때마다 저녁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기도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 자기는 그 기도가 끝나기 전에 잠이 든다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를 안아 보려고 하면 아내는 이미 새벽기도를 하려고 교회로 가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아내 있는 홀아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 여 집사의 행위가 옳은 것인가?
이 남 집사의 호소를 들은 목사님께서는 여 집사를 불러 책망하고 바로 지도해 주었다고 한다.
(ㅁ).성 관계 기능이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저하 되었을 때 현명한 대처가 있어야 한다.
자위행위를 돕는 음란 기구를 사용 하는 것도 고려 할만 하다.
(ㅂ).부부를 외에는 그 누구 하고도 성 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
ㄹ).상대 배우자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이해하라 (역할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
◎.상대에 대하여 긍휼을 가져라.
◎.상대에 대하여 따뜻한 배려를 가져라.(양보와 인내에서 가능) 여러분은 부부 싸움에서 승리자인가? 승리자라고 자처 하는 자야말로 가장 어리 섞은 패배자임을 알라.
◎.상대에 대한 관용.
기독교인의 부부의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에로스 사랑에서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 시켜야 한다. (성 춘향과 이 도령의 사랑 같이)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 한 것 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므로 부부의 사랑도 에로스 사랑에서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3).결혼을 앞둔 기독교인이 알아야 할 것.
ㄱ.기도하는 가운데 배우자를 정하라.
ㄴ.믿지 않는 자를 배우자로 선택하지 말라.
ㄷ.믿는 자가 배후자일지라도 사상이 같지 않으면 결혼 하지 말라.
ㄹ.부부의 성 관계가 싫은 자는 결혼 하지 말라.
ㅁ.한 배우자로 만족 하지 못하는 자는 결혼 하지 말라.
ㅂ.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배우자에게 의무를 다 하지 않으려면 결혼 하지 말라.
ㅅ.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면 또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결혼 하라.
(4).온전한 부부 관계를 위한 아내의 의무.
ㄱ.사랑으로 남편을 죄 짖지 않도록 하라.
남편의 외도의 간접적인 책임은 아내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부인은 부부 성 생활을 거부하므로 남편과 사이가 멀어지고 가정만을 알던 남편이 외도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외도한 남편은 자신을 변명하면서 말하기를 자신이 집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아내는 간 곳 없고 못생긴 여자가 잔소리를 하며 대드니 내가 무슨 재미로 가정에 들어가겠느냐고 말한다.
그에 말을 들어보면 자기 아내가 결혼 전에는 몸매도 예쁘게 단장하고 화장도 늘 하므로 늘 예쁘게만 보여 왔던 아내였는데 결혼 후 그녀는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장은 외출 때만 하니 과연 아내는 나를 위한 여자인지 타인을 위한 여자 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을 사로잡는 성 관계도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어 남편에게 사랑 받게 하는 것도 남편으로 하여금 죄 짖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 이라고 볼 수 있다.
ㄴ.남편으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케 해주라.
ㄱ).남편을 무시하지 말라.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남편들은 마음이 심히 상한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자 만일 그대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비교해서 여러분을 무시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이 세상 사람들은 같을 수 없다. 보다 나은 자가 있고 부족한자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의 손에 맛있는 떡을 부러워하는 것 보다 내손에 있는 보리떡이라도 맛있게 먹고 만족 하는 것이 도리어 현명하지 않은가?
이 세상 사람들은 각자가 하나의 장점을 갖고 있다. 여러분은 그대의 남편의 장점만을 생각함으로 남편을 무시하지 않는 자가 되어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자가 되라.
ㄴ).애정으로 자녀를 잘 양육 하는 자가 되라.
자녀의 양육은 아내의 몫인가? 결코 그렇지는 않다. 자녀 양육은 두 부모에게 동일하게 있다. 그러나 대부분 남편들은 가정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밖에서 생활하므로 자녀 교육에 등한시 하는 경우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자녀들이 잘못될 때 심히 자책하게 된다. 자녀가 잘못되었을 때 아내를 다 구치는 것도 자신의 가책을 감추기 위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내가 늘 기도하여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다면 그 남편의 마음은 얼마나 편하고 즐겁겠는가.. 상상해 보라.
ㄷ).남편의 가족과 화목 하라.
대부분 우리나라의 아내들은 시집에 대하여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옛적에는 남존여비의 관습 속에 남편의 집 사람들은 그 위세가 당 당 했으며 반대로 아내의 집 사람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시집온 아내는 시집식구들의 눈치를 보아 왔고 시집식구의 구박도 감수 해야만 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아내들이 시집에 대한 거부감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여성의 지위가 항상 되자 시집에 대한 아내의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으로 아내 된 자는 사랑의 실천자로서 시집에 대한 거부감은 옳지 않다.
더욱이 시집에 대한 거부감은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ㄷ.남편에게 사랑 받는 자가 되라.
에2:17
아내들 가운데 남편에게 사랑 받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누구겠는가? 아마도 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다. 모든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많은 아내들이 사랑 받고자 노력하지 않고 있다. 남편에게 사랑 받는 것은 자기 노력에 달려 있다.
에스더는 남편 아하수에로 왕에게 사랑 받기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노력한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인으로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사랑 받는 아내가 되도록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이 좋아 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 놓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된다.
ㄹ.남편의 위로 자가 되라.
창24:67
이삭은 어머니 사라를 잃고 마음이 어두웠다. 그러나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함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게 된다. 남자들은 투쟁적인 기질이 있기 때문에 마음 또한 강한 것 같이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남자를 잘못 아는 것이다. 진정으로 남자는 여자의 위로 없이 살아가기 힘든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ㅁ.남편에게 순복하라.
엡5:22
벧전3:1
남편에게 순복 하라는 것은 남편의 힘을 두려워 남편에게 강제로 순복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순복하는 것 같이 남편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순복 하여야 한다.
(5).온전한 부부 관계를 위한 남편의 의무.
ㄱ.아내를 괴롭게 말라.
ㄱ).아내를 무시하지 말라.
아내를 무시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라.
ㄴ).아내의 자존심을 상하게 말라.
자존심은 약자가 자기를 지키기 위한 최후에 보루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에 비교하여 약자의 위치에 있는 아내는 자존심이 강하다.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의 자존심을 지켜줄 책임이 있다.
ㄷ).아내를 구타하지 말라.
매 맞는 아내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육체적 힘이 강하다고 약한 자를 구타하는 것은 이성(理性)을 가진 이간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특히 사랑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한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합법화 될 수 없다.
ㄴ.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라.
전9:9
전도서 기자는 아내와 즐겁게 사는 것이 헛된 이 세상, 고통 많은 이세상의 조금이나마 행복할 수 있는 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남편들이여 아내와 즐겁게 살도록 노력하자.
ㄷ.조강지처를 버리지 말라.
말2:15
ㄹ.아내를 귀하게 여겨라.
벧전3:7
기독교인인 아내는 내 아내 이 기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남편 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인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
ㅁ.아내를 내 몸 같이 사랑 하라.
엡5:25,28,33,
(6).사랑으로 하나 된 부부에게 주어지는 축복.
ㄱ.끌 수 없는 사랑의 복된 불이 되게 하신다.
ㄴ.가정이 화평케 된다.
ㄷ.서로가 삶에 활력을 갖게 된다.
ㄹ.훌륭한 자녀를 키우는 힘이 된다.
ㅁ.어떠한 제산을 얻는 것 보다 더욱 행복할 수 있다.
ㅂ.마귀에 시험에 넘어 지지 않게 된다.
고전7:5
3.기독교인의 사회생활.
기독교인의 사회생활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 못지않게 아주 중요하다. 여기 기독교인에 바른 사회 활동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케 하고, 교회를 반대하던 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기독교인화(化) 하는데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르지 못한 사회 활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보이며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까지도 그 길을 막아버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의 사회 활동은 참으로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1)국가에 대한 기독교인의 참여 활동.
(1).기독교인의 국민의무 수행.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그들이 속해 있는 나라의 국민에 한 사람으로 국가가 제정한 의무를 수행할 의무가 있다.
(마22:21)
그러나 국가 보다는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함으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국가의 의무는 당연히 거절해야 한다.
(예: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
오늘날 여호와 증인이라는 이단 종파가 국방 의무를 거절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국방은 공격적인 국방이 아니다. 곧 방어적인 국방으로서 전쟁을 억제 하려는 국방이요 침략 전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으로 당연히 기독교인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외에도 기독교인은 신앙을 위배하지 않는 한 국가가 정한 모든 의무를 수행 하여야 한다.
(2).기독교인의 정치 참여.
기독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가 정치에 직접 참여 하였을 때 국가 발전에 큰 저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 역시 권력에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의 참 모습을 잃어 버렸다. 그러므로 교회가 직접 정치 참여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바른 정치인이 되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는 것이 좋으며, 선거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간접으로 정치 참여할 때 부정된 선거를 하지 않도록 교육 하는 것이 필요하며, 어떤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교회가 해서는 안 된다.
(3).잘못된 정치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 .
우리나라는 기나 긴 세월 동안 군사 독제가 지배 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이 여러 부분에서 박탈당해졌었다. 이에 일부 기독교인 가운데서는 군사 정권에 대하여 항거하며 시위에 가담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을 했다. 그리하여 많은 기독교들이 옥중에 들어가 고난을 당하였다.
여기 군사 정권에 대한 기독교인의 입장은 두 가지 주장으로 나누게 되는데 그 하나는 군사 독제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주장과 또 하나는 기독교인은 군사 독제정권 일지라도 신앙생활에 저해 하지 않는 한 국가에 대항하지 말고 영혼구원에만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정권을 바로 잡아 국민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적극적인 기독교인에 시위 활동을 잘못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잘못된 체계를 하루아침에 바꾸려는 혁명은 더 나쁜 상황으로 바꾸게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증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 예: 전에 러시아 국민들이 군주 독재에 대항하여 싸웠는데 그들의 형명적인 투쟁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었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국민들이 더욱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잘못된 정치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는 바른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 할 뿐 이다.(딤전2:2)
그리고 기독교인을 바르게 교육시켜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되도록 교육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긴박한 정치 위기에서는 기독교인들도 합력하여 나라를 사수 하는데 선의 적 비폭력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2).기독교인이 직업인으로 사회활동
기독교인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직업을 갖고 일을 해야 한다. 일하는 자만이 자신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윤택하게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살후3:10)
(1).기독교인의 직업에 대한 선별.
기독교인에 직업에 대한 선별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고 유익을 줄 수 있는 직업은 비록 사람들이 천하다 무시하는 직업일지라도 조금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으며 직업에 대한 당당한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직업이 사람들 보기에는 좋은 직업이나 신앙에 유해하며, 남을 해치는 직업이라면 기독교인은 단호히 그 직업을 그만 둘 수 있어야 한다.
(2).일하는 기독교인의 자세.
ㄱ.신용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물건 거래에 있어서 철저한 신용이 있어야 하며,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번 약속 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필자가 어떤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모 집사는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데 한번 빚을 가져가면 갚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는 열심히 헌금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집사를 보면 교회 다닐 생각이 없어진다고 말한다고 한다.
기독교인은 금전 거래에 있어 뿐 아니라 직업에 있어서도 신용이 있어야 한다.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사람들에 눈속임을 위하여 만들지 말고 믿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어야 하며 기독교인이 어떠한 직업을 갖고 일하든 그 직장에서 신용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철저하게 신용을 지키면 하는 사업이 축복을 받게 되고 다니는 직장에서는 인정을 받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 무언의 전도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ㄴ.성실성이 있어야 한다.
엡6:5~6
성실성이란 윗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꾀를 부리며 간계하게 속이는 수작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처럼 하는 그런 불성실의 반대어로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려는 것을 말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직장에서, 어떠한 일을 하든지 성실성을 가지고 일을 하여야 하는데 거기에는 사람을 의식하며 속일 수 있다면 속이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속 일수 없는 하나님께서 나의 일을 지켜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필자가 방위로 군 복무를 할 때 부대장 되시는 분이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기독교인을 대단히 존경하는 분이였다. 그분에 의하면 자신이 부관으로 있을 때 부대장 이었던 분이 기독교인 이었는데 그분은 부대 관리를 상부로부터 검열한다고 정보를 입수 할 때나 평상시 때나 늘 동일하게 성실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검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노력한 다른 부대 보다 부족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부대장은 상관들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일하지 않고 늘 동일하게 일해 왔다 한다. 그런데 그 어느 날 군에서 암행 검열을 하게 되었는데 모든 부대는 지적을 받게 되었으나 늘 성실히 하던 그 부대는 인정함을 받고 상관들에 의하여 그 성실함을 인정받은 부대장은 좋은 보직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실한 부대장의 부관으로 있었던 필자의 부대장 이었던 그분은 이런 연유로 기독교인을 존경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성실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으리라고 본다.
ㄷ. 친절성이 있어야 한다.
(약3:13)
불친절은 사람을 심히 불쾌하게 한다. 그래서 싸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사소한 서류 때문에 읍사무소에 가기도 하는데 어떤 직원은 아주 친절하게 대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며 아주 불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친절한 직원을 볼 때는 공무원으로 자신의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저런 사람이 기독교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기독교인은 어떠한 직장에서든 또 어떠한 사업을 하던 만나는 상대에게 친절히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며, (마5: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ㄹ.그 직업이 갖고 있는 윤리성을 지켜라.
필자는 소 장사하는 어떤 사람과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장사를 하다 보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에 말에 의하면 소를 사려온 자에게 각가지 거짓말을 하며 소가 좋다고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해서 곧이 곧 되로 받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못된 사람이라고 비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에게 모든 거짓말이 인정된다는 것이 아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기본 윤리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그 기본 윤리를 범하면서 까지 장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경계하고 금해야 한다.
ㅁ.상대를 사랑으로 대하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고 강변 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 삭막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살아가는 한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방편일 수 없다.기독교인의 삶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잘사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라)
상대를 이해하고, 관용하고, 상대의 유익되게 하는 사랑의 삶이 일순간에는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후에는 창대 하여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기독교인의 직업 안에서 처세술.
ㄱ.직장에서 위 자리 앉아 아래 사람을 관리하는 지도급의 기독교인이라면 아래 사람의 근무에 대한 상벌을 줄지라도 아래 사람의 인격을 무시 하지 말라. 엡6:9
ㄴ.기독교인이 직장에서 아래 사람으로 근무 한다면 위 사람을 존경하며 섬기고, 상대에 대하여 눈속임으로 하지 말고 성실함으로 일하라. 엡6:6
ㄷ.기독교인이 직장에서 같은 동료에게 대한 태도는 손해 보지 않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희생할 줄 아는 자가 되라. 마5:13
ㄹ. 기독교인이 사회인으로 살아갈 때 그를 대한 사람들이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늘 사귀고 싶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3).기독교인의 친구 사귐.
사람이 바른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하다. 사람들은 친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친구끼리는 서로 닮아 진다고 말한다. 깡패 친구를 사귀면 깡패가 되고 선하고 착한 친구를 사귀면 착한 사람이 된다.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친구를 사귀게 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을 사귀면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불신자 친구를 사귀다 보면 신앙이 약하게 되며 신앙이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면 좋은 신앙인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친구 사귐에 주의를 기울이야 한다.
(1).기독교인이 경계해야 할 친구.
ㄱ.다정한 친구이나 죄악으로 유혹하는 친구.
신13:6~8
ㄴ.나에 신앙을 비웃고 신앙을 저해 하려는 친구.
고후6:14 고전5:10,11
ㄷ.나에 인격을 무시하는 친구.
ㄹ.나에 잘됨을 즐거워하지 않는 친구.
ㅁ.내가 잘못되어도 아부하고 칭찬하는 친구.
(2)기독교인이 사귈만한 친구.
ㄱ.나에 잘못을 바로 잡아 주려는 친구.
잠27:6
ㄴ.나에 신앙에 유익을 주려는 친구.
ㄷ.서로의 인격적 대화가 가능한 친구.
ㄹ.나에 잘됨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친구.
(삼상18:1 다윗과 요나단 )
ㅁ.나에 어려움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
ㅂ.친구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친구.
요15:13~14
(3).사귄 친구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
ㄱ.불신자 친구에 대하여.
ㄱ).상대의 잘못됨을 고쳐 주려는 사랑으로 대하라.
요일 5:16
ㄴ).우정을 핑계하여 신앙을 파괴 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
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 나니
ㄷ).상대가 다른 종교인 일 때
논쟁으로 그를 구원 하지 말고 기도와 사랑으로 구원하라.
딛3:9,10
ㄹ).상대가 기독교 비판자 일 때.
그 비판을 분노로 받아들이지 말고 상대가 오해가 풀릴 수 있도록 사랑에 대화를 나누라.
ㅁ).상대에게 진심한 사랑을 보여 주어라.
ㄴ.같은 기독교인 친구에 대하여.
ㄱ).신학적인 논쟁을 금하라.
(딤전6:4 ; 딛3:9 )
ㄴ).좋은 신앙에 체험을 같이 나누어라.
ㄷ).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같이 나누어라
(4).기독교인에 사회봉사 활동
ㄱ.종류.
ㄱ).구제 활동. 마25:31~46
◎.빈곤한자 돕기.
비곤한 자란 부족하여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로 물질적인 ,정신적, 영적으로 빈곤한 자를 말한다. 빈곤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으로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일이다. 그러나 빈곤한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까지 하면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는 빈곤한자를 돕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구제를 지적하여 책망함으로 알 수 있다.
◎.소년, 소녀 가장 돕기.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변에 불의에 사고로, 또는 병마로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가정을 짊어지고 고단하게 삶을 살아가는 소년, 소녀 가장들은 보게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고아를 돌아보지 않는 것을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사1:10~17)
◎.신체장애자 돕기.
신체장애자란 신체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하거나 살다가 신체의 손상을 입은 자를 말한다.
이들 대부분이 정상적인 사람들과 외형적으로 다른 것이 많음으로 사람들에 의하여 거부감을 갖게 하는 경우도 많은데 장애자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연약한 신체장애자를 도와야 하는데 그들을 단순히 값싼 동정심으로 그들을 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서 한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 받고 살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필자는 같은 노회에 목사님 가운데 신체장애자와 함께 사시며 그들을 돕는 목사님을 알고 있는데 그 목사님의 취지가 신체장애자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시며 그들을 형제로 따뜻하게 대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기도 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신체장애자들이 사회에서 적응하며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모든 시설과 우리의 시선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고아원 협력.
고아원 협력과 소년, 소녀 가장 돕기는 같은 맥락에서생각 할 수 있다.
여기 고아원에 입소한 고아와 소년, 소녀 가장과 다른 점은 고아원에 입소한 고아들은 가정을 이끌고 나가는 책임감에서 사는 자들이 아니고 고아원 시설에서 맡겨져 보호를 받는 자들이다. 이들은 고아원에 맡겨져 있음으로 우리가 도와주지 안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으나 사랑의 굶주림 속에 있는 고아원의 원생들을 위로해 주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몫임을 알아야 한다.
◎.양로원 협력.
우리 주변에 약한 자 중에 한 무리는 늙으신 분들이다.
그들은 젊었을 때에 가졌던 용기와 힘과 외모를 잃고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젊었을 때 모은 돈으로, 또는 자녀를 훌륭하게 키웠기 때문에 나름 되로 자신의 주장을 펴가며 가정에서도 대우를 받는 자들이 있기도 하나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녀들에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자녀들이 없는 노인들은 말년에는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어 양로원에 의탁하는 자들이 많으며, 자녀가 있어도 늙은 부모님을 모시기를 싫어 하는 자녀들 때문에 늙은 말년을 양로원에 의탁하는 경우가 많다. 양로원 방문은 이렇게 늙음으로 소외된 연약한자를 위로하는 것으로 기독교인 당연히 담당해야 한다. 특히 양로원 방문에 앞서 내 가정의 늙으신 부모님께 먼저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ㄴ).선도 활동
◎.청소년 선도.
청소년은 그 사회의 뿌리다. 청소년의 그릇되게 행할 때 그 사회는 희망이 없게 된다.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이 방황을 하고 있다. 특히 십대 강력범들이 증가 하고,십대 윤락녀들이 증가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바르게 선도할 책임이 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바로 인도 하기 위하여 사랑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또한 바른 선도를 위하여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환경 정화 활동.
자연은 하나님께서 우리인간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이다. 자연을 보살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감사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연은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기적인 인간의 행위와, 기계 문명으로 말미암아 자연 환경은 오염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에 축복은 이제는 누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여기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연환경 정화에 앞장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을 다시 살리며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도록 힘써야 하겠다.
◎.교도소 복역 자 교화 등.
기독교인들은 죄를 미워해도 그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죄를 지어 교도소 생활을 하시는 복역 자들은 사탄에게 철저하게 속은 피해자들이다. 사탄에게 속아 영원한 멸망을 자처하는 이들을 사탄에게서 벗어나도록 신앙으로 교화 시키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이다.
ㄷ).지역 발전을 위한 활동.
대부분의 교회들의 이름을 보면 그 지역 이름을 수식어로 해서 교회의 명칭을 부른다. 아마 교회는 그 지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 우리 기독교인은 지역 발전을 위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활동을 해야 한다. 특히 조 만식 같은 장로님은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2)기독교인이 사회봉사를 바르게 수행 하려면
ㄱ.희생정신으로 봉사해야 한다.
너희는 소금이니
너희는 빛이니-소금과 빛은 자신이 희생될 때 그 기능이 가능하다.
ㄴ.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말고 주님을 나타내려고 해야 된다.
곧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입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ㄷ.상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자존심은 약자에 자신을 지탱케 하는 마지막 보류이다.
고전13:4~5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ㄹ.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 하라.
마6:2~4
ㅁ.모든 사회봉사는 예수님의 사랑에 정신으로 해야 한다.
요일4:7:8 요일:18 요일3:23~24
ⅵ.결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님을 알았다. 예수님을 바로 믿는 믿음은 반듯이 그 믿음에 행위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신앙생활 있어서나 사회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에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 하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금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행위이다.
자!
예수님 안에서 구원 받은 기독교인이여 우리를 값없이 은혜 가운데 구원하신 우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데 최선을 다 하자.
귀납적 성경 연구
머리말
우리는 한 학기에서 성경해석의 원리에 대하여 고찰했고 또 한 학기에서는 성경을 전체의 내용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원시적 성경해석 방법을 통하여 성경의 3가지 주제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요번 학기에서는 근시적 성경 해석 방법의 하나로 귀납적 성경 해석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고 한다.
여기 필자는 귀납적 성경 연구 방법으로 제시된 관찰, 해석, 적용에 있어서는 인터넷에 올라온 김 의종 목사들의 글을 거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인용했음으로 나의 글이 아님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늘 지식에 있어서 부족한 본인은 이 귀납적 성경 연구 방법을 가르치는 학기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바랄 뿐이다.
상마교회
한 정길 목사
Ⅰ.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
성경을 연구하기 위한 방법으로 연역적 연구와 귀납적 연구가 있다. 여기 연역적 성경 연구와 귀납적 성경 연구는 논리학에서 가져온 연구의 방법으로 성경 연구에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연역적 성경 연구와 귀납적 성경 연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에서 말하는 연역적 논리와 귀납적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1.연역적 논리와 귀납적 논리.
[연역적 논리]
연역적 논리라 함은 광의적으로 보면 연역적 논리 방법을 연구하는 것과 연역적 추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협의적으로 연역적 논리라 함은 연역적 추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연역적 추리는 보통 두 개의 전제로부터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는 방식의 추리로, 일반적으로 삼단논법을 가리킨다.
대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원리나 전제로부터 특수한 사실을 이끌어내는 추리이다.
[대전제] 사람은 모두 죽을 존재이다.
[소전제]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을 존재이다.
※ [예]
A 여름 날씨는 비가 많고 덥다.
지금이 바로 여름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날씨는 비가 많고 더울 수밖에 없다.
B 개는 주인에게 충직한 동물이다.
미니어처 핀셔는 개다.
그러므로 미니어쳐 핀셔는 주인에게 충직할 것이다.
C 물이 없는 곳에서는 생물이 살지 못한다.
달에는 물이 없다.
그러므로 달에서는 생물이 살지 못한다.
★ 이처럼 이미 타당성이 확립된 전제를 통해 특수한 결론을 얻는 방식으로 탐구를 한다면 이것이 바로 연역적 탐구이다.
[귀납적 논리]
귀납적 논리라 함은 광의적으로 보면 귀납적 논리 방법을 연구하는 것과 귀납적 추리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협의적으로 귀납적 논리라 함은 귀납적 추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귀납적 추리라는 것은 여러 가지 동종의 개별(또는 특수)사물에서 공통적인 요소를 귀납하여 이를 일반적인 법칙으로 귀결시키는 것입니다.
ⓐ 갑이라는 사람도 죽었다.
ⓑ 을이라는 사람도 죽었다.
ⓒ 병이라는 사람도 죽었다.......
이로보아 모든 사람은 종국에는 죽는다는 귀결에 도달한다.
※ [예]
A 염소는 허파로 숨을 쉰다.
토끼도 허파로 숨을 쉰다.
사람도 허파로 숨을 쉰다......
그런데 염소, 토끼, 사람 모두 포유동물이다.
이로보아 모든 포유동물은 허파로 숨을 쉴 것이라고 추리할 수 있다.
B 소나무,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의 꽃은 아름답지 않다.
소나무, 버드나무, 느티나무는 모두 풍매화(風媒花)이다.
이로 보아 모든 풍매화는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다.
C 갑은 00나라 사람인데 교활하다.
을도 00나라 사람인데 교활하다.
병도 00나라 사람인데 교활하다.
00나라 사람들은 모두 교활하다.
★ 역시 이처럼 타당성이 확립된 특수한 사실들을 열거한 뒤에 그에 공통되는 사실로 결론을 맺는 것이 귀납적 추리라고 할 수 있다.
2.성경 연구를 위한 두 방법의 단, 장점.
1)연역적 성경 연구
연역적 성경 연구는 어떤 사실을 전제해 놓고 그것을 증명해나가는 방법이므로 다음과 같은 장, 단점이 있다.
In contrast, a deductive study begins with conclusions, with propositions, and then seeks passages in the Bible to substantiate them.
This is a good method for pastors or seminary professors whose greater knowledge and authority have gained them the respect and confidence of their Christian listeners.
번역:
대조적으로 연역적 연구는 결론과 함께 그리고 계획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그것들을 입증하려고 성경 안에서 구절을 찾는다.
이러한 방법은 기독교인 청취자의 존경과 확신을 얻는, 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그리고 권위를 가진 목회자나 신학교수를 위한 좋은 방법이다.
장점:
(1)설교나 강의 시에 좋다.
(2)듣는 자가 특별히 준비할 필요가 없다.
(3)부담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단점
(1)그 전제된 사실이 잘못될 수도 있다.
(2)또한 설교나 강의를 듣는 사람이 그 전제된 사실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이해가 되나 돌아서고 나면 금방 잊게 되어지기 쉽다.
(3)개인훈련이 되지 않는다. 해석자나 설교자에게 의존하게 되어진다.
2)귀납적 성경 연구
귀납법적 성경연구는 어떤 사실을 전제해 놓거나, 말씀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고, 그 말씀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관찰하고 해석한 후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장, 단점이 있다.
Inductive study uses questions to discover facts, then to interpret and correlate them, and then to conclude how they apply to our lives today.
The facts you discover lead you to conclusions about what the writer meant and the first readers understood, and what it should mean to us today.
번역:
귀납적 연구는 사실들을 정확하고 바르게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 발견된 사실들은 통해서 의문을 제기하며 해석을 구하고 , 그리고 그때 우리의 오늘날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결론을 맺는 것이다.
당신이 발견한 사실들은 그 저자가 의미하는 것과 최초의 독자들이 이해했던 것과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사용해야 활 것인지에 관하여 결론을 맺도록 당신을 인도한다.
단점
(1) 개인이 스스로 과제를 해오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2)결론을 얻게 위한 인내가 필요하다.
(3)서신서나 짧은 본문에서는 하기 쉬우나, 구약이나 복음서, 역사서, 또는 긴 본문에서 관찰하기 어렵다.(특히 구약성경은 성경신학적, 해석학적 전제가 필요하다)
예: TV방송의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따온 것
대하 35:20-27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온 고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대하 35: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대하 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대하 35: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대하 35: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 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대하 35: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 되었더라
대하 35:26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행한 모든 선한 일과
대하 35:27
그 시종 행적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 되니라.
*요시야
8세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림........왕하21:1
성전을 수리함.....................왕하22:3-9
율법서를 읽고 크게 깨달음.......왕하22:10-17
백성들에게 율법 언약을 좇도록 함. 왕하23:1; 2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세움...........왕하23:3
유월절을 지킴...................왕하23:21-23
우상을 제거함....................왕하23:4-24
율법을 전심으로 준수함.............왕하23:25
본문의 말씀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적 해석:
남의 일을 간섭하다가는 고난을 당할 수 있다.
이방인의 입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니 의미 있는 말은 가볍게 여기지 말라.
성경적 해석: (본문에 말씀으로 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다음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얻을 수 있다.
왕하 22:10-20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서기관 사반이 낭독)
왕하 22: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왕하 22: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왕하 22: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왕하 22: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왕하 22:15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왕하 22: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왕하 22: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왕하 22:18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왕하 22:19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왕하 22: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 하니라.
****사 57:1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4)우리의 사고와 교육방식이 대부분 연역적 사고방식이기에 이 방법이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 가 있다
장점
1)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말씀을 보는 훈련을 하기 위해서이다.
프리셉트의 창시자 케이 아더는 귀납적 성경연구의 과정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교사도 사람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오직 살아있는 진리, 사람들이 그 분에게서만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진리를 직접 봄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사람들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 자신께로 인도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즉 우리가 이 방식으로 공부하는 이유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진리나 강요된 진리가 아니라, 성경에 있는 진리 그 자체를 우리가 스스로 확인하고 알아가기 위해서이다
(베뢰아 사람들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어떻게 해서 데살로나가 사람들 보다 더 신사적인 사람이라고 불리 워 지고 있는가? 행17:11 )
(2)말씀연구에 동참함으로서 그 말씀을 지속적인 나의 말씀으로 삼기 위해서 이다,
설교자는 6일 동안 설교 할 본문에 대한 개인 성경공부를 한다. 그리고나서 그것을 자신과 청중의 상황에 맞추어 적절한 부분만을 선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청중들은 설교자가 준비한 모든 말씀을 듣지 못한다. 그리고 설교자가 이해한 만큼 그 말씀을 모두 이해하지 못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을 듣는 청중이 그 말씀이 선포되어지기 전까지의 준비과정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귀납법적인 방법을 통한 개인성경공부에 대한 훈련을 받으면 말씀의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내가 직접 들어가 봄으로서, 얻어진 결론의 말씀들이 지속적으로 간직하고 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 성경공부-그룹성경공부-설교화)
*그런데 이렇게 하는 데는 많은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성경은 현시대와 2000년 이상의 시간적인 간격과 언어와 문화적인 간격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개인이 직접 공부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말씀을 알아 가는데 드는 훈련과 그에 따른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말씀은 우리의 삶과 멀어지고, 또한 그 만큼 우리의 신앙은 얕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특별한 특권층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확신하기로는 한글을 정상적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90프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우리의 수고와 땀과 기도만 있으면 누구든지 충분히 스스로 귀납법적인 방법으로 개인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
"성경연구의 힘든 훈련을 함에 있어서, 그저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이루는 마술 같은 방법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어빙 젠센)
(3)성경을 오래 기억하게 하게하고 영향력을 준다.
You learn and remember much better what you personally discover in the text.
Your group participants, Christians or outsiders, will remember better what you lead them to discover, than what you tell them.
Their own discoveries make more impact upon them.
Research shows that passive listeners forget about 90% of what they only hear from others, but they remember as much as 90% of what they hear, see, talk about and act upon.
당신은 당신이 개별적으로 본문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보다 잘 배우고 기억하게 된다.
당신의 그룹에 참여자들 , 즉 기독교인이나 또는 이방인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말하는 것 보다 그들에게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보다 잘 기억할 것이다
그들 자신의 발견들은 그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준다.
연구자는 수동적인 청취자는 그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을 90% 잊는다. 그러나 무엇에 관해서 듣고 보고 말하고 그리고 행하는 것은 90%만큼 기억한다.
(4) 귀납적 성경 연구는 그들의 동료들을 종교적인 권위자로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인이나 이방인들에게 가르치는 평신도를 위한 최상의 방법이다.
It is the best way for lay people to teach Christians or outsiders who do not consider their peers religious authorities.
Many nonbelievers would not come to hear a religious authority, but are excited about Bible study with peers in a non-threatening environment.
Nonbelievers prefer examining the Bible and coming to their own conclusions about what to believe.
그것은 그들의 동료들을 종교적인 권위자로 생각하지 않는 기독교인 또는 이방인을 가르치는 평신도를 위하여 최상의 방법이다.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의 종교적인 권위자에게 들으려고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협박적이지 않는 환경 안에 동료들과 함께 성경 공부하는 것에 자극을 받는다.
믿지 않는 자들은 성경은 시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들 자신에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Don Posterski tells about a man who told him, "The big problem with religion ... is that it is a deductive system ... you have to accept what is already decided for you." Inductive study helps skeptical people.
So how do you do inductive study?
돈 포스터스키는 그에게 말했던 한 사람에 관하여 말했다.
“종교에 있어서 큰 문제는 그것이 연역적인 체계에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이미 결정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귀납적 성경 연구는 회의적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면 어떻게 당신이 귀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가?
3. 연역적 성경 해석에서 경계해야 예
예: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물론 여기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과장법으로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과도한 표현 양식(overstatement)이라가 보다는 극단적인 표현양식 (hyperbole)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양식의 비유를 사용하기까지 한 것은 그토록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 연역적 성경 연구에서
대전제로: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가 심히 어렵다 본문에 가지고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소전제로 다음과 같은 성구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눅 16:20-25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여기서 왜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는지 본문 말씀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언급함으로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 전제의 소전제로 적당한 것 같다.
소전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 속에서 부자는 살았을 때 부요함을 누렸음으로 음부에 고통을 받게 되었다.
결론: 그러므로 부요함을 누린 부자는 낙원(천국) 이르지 못한다. 라는 연역적 논리를 만들 수 있다.
반: 이러한 연역적 성경 해석을 옳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다. l
그것은 성경에 믿음에 조상으로 여겨진 아브라함이 부자였고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도움을 준 이삭도 기근 속에서도 100배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었으며 다윗과 솔로몬 역시 부자였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이었고 그들의 구원을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나타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속에 부자가 음부의 고통을 당하게 된 이유는 무조건 부자라서 라기 보다는 나사로를 부스러기로 도왔다는 것에 이유가 아닐지 모른다. 곧 나사로를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그의 자존심을 짓밟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아님으로 단순한 추론일 뿐이다.
*.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사랑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소전제: 돈을 사랑하는 부자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라는 소전제를 끄집어내어
결론: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라는 연역적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반: 이 세상 물질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재물을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좋아하는 부자들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으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소전제: 부자는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결 론:그러므로 돈을 사랑함으로 일만 악을 범하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연역적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반: 돈을 사랑한다고 무조건 일만 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 역시 돈을 바르게 사용하며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돈은 악의 뿌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돈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의 대전제로 삼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몇 구절의 성경 말씀을 소전제로 사용하여 결론을 얻고자 하는 연역적 성경 해석 방법이 전체성경 말씀과 일치할 수 없는 위험한 해석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부자들의 삶의 특수적인 상황을 귀납적 성경 해석을 통하여 연구함으로 이러한 결론을 얻어 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의하여 축복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마귀에게 굴복함으로 마귀에 의하여 저주의 부자가 된 자(참고 마4:9)와 부요함에 매어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부자(마19:21-22), 부요함을 자신의 쾌락만을 위하여 사용하며 지극히 적은 소자에게는 부스러기를 주며 그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짓밟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Ⅱ. 귀납적 성경 연구 3단계
김의종목사
총신대신대원, 탈봇과 웨스터민스터에서 강해설교 공부
현재 한국강해설교학교와 세풍성경연구소 강사
저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1. 관 찰 (observation)
(1) 관찰의 정의와 요건
1) 정 의 :
* kuist 박사 "실재적으로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기술"
그는 또한 관찰은 공정하게, 의식적으로, 대담하게 보는 것을 요구.
* 보거나 주목하는 행동, 습관, 능력. 철저히 조심스럽게 주목하는 것. 가까이 보는 것. 보는 것에 완전히 주의를 집중하는 것. 보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깨닫는 것. --
관찰이란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묻고 찾는 작업이다.
**이글의 저자가 아닌 필자는 관찰이란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귀납적 성경 연구에서 관찰이란 본문에 말씀을 정확하게 보고 저자가 또는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바르게 알아내는 작업이다.
2) 요 건 :
<1> 관찰하려는 의지력
성경말씀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성경말씀 속에 들어있는 것을 깨달아 알고자 하는 의지와 의욕을 가져야 한다. 즉, 배우고 알아야겠다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
-- 눈 속에 의지를 가져라! 그러면 그 눈은 탐조등이 되고 그 친숙함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보화를 찾게 될 것이다.
<2> 관찰에 있어서 정확성
관찰은 사실 그 자체를 보는 것이기에 정확성이 요구된다.
정확한 해석과 올바른 적용의 토대는 관찰의 정확성에 있다.
<3> 관찰에서의 인내
주어진 본문을 수 시간 반복 관찰한다는 것은 훈련되지 않은 자에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다. 광부가 광맥을 찾을 때까지 인내하듯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2) 관찰 작업의 순서
1) 관찰 본문의 문체
강화체, 설화체, 시, 역사서, 예언서인지 알아야한다. 문체에 따라 관찰,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2) 관찰 작업 표 작성
<1> 중심단어들이나 중심어구를 찾아 관찰 작업 표에 표시하라.
중심단어란 저자가 반복해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며, 본문에서 그 단어를 뺄 때 그 구절의 내용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런 낱말이다. 중심단어를 찾으면 그것을 관찰 작업 표에 특별한 방법으로 표시해두라.
예) 색연필 이용법과 그림 이용법
본문 속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관한 언급은 모두 표시하라.
<2> 중심단어(삼위일체 하나님 포함) 별도로 주제별 목록을 작성하라.
예) 살전-복음 혹은 말씀 (도) 주제별 목록
살전 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살전 1:2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살전 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살전 1: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 말로이름(5절), 능력으로 이름(5절), 성령으로 이름(5절),
큰 확신으로 이름(5절), 본으로 이름(5절)
많은 환란 가운데 받음(6절), 성령의 기쁨으로 받음(6절)
들리고 퍼짐(8절)- 마게도냐에, 아가야에, 각처에
하나님 주제별 목록(성부, 성자, 성령)
<3> 분석적 목록을 작성하라.
주제별 목록은 본문에 있는 말을 사용하지만 분석적 목록은 자신의 말을 사용하여 그 본문의 진리를 간단히 분석해 놓은 것이다.
-- 분석적 목록은 성경의 한 구획 내에서 보이는 소주제들을 찾아 모은다.
-- 분석적 목록은 아래사항에 대한 요약, 비교, 진행, 혹은 대조가 될 것이다.
* 본문 내에 있는 여러 가지 교리 혹은 가르침.
* 특정한 생각이나 주제의 진행.
* 개인이나 단체의 여러 가지 태도 혹은 행위.
* 사람들의 경험이나 특징들.
** 예1) 복음의 진보되어간 과정
+----------------------------+
| 살전1:5 전파된 복음 |
| 살전1:6 받아들여진 복음 |
| 살전1:8 퍼진 복음 |
| 살전1:9 변화시키는 복음 |
+----------------------------+
**예2) 교리의 분석적 목록
+----------------------------+
| 살전1:4 선 택 |
| 살전1:9 회 개 |
| 살전1:10 재 림 |
+----------------------------+
<참고> 목록들을 관찰 작업표의 오른쪽 여백에 위와 같이 표시하면 본문의 진리를 나중에라도 즉시 알아본 수 있다.
3) 본문의 전, 후 문맥을 살펴보라.
본문의 전, 후 부분의 내용적 연결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살펴본다. 특히 본문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의 주제가 어떤 맥락에서 흘러나왔으며,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어떤 것 인가를 알 수 있다.
예) 행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3장 앉은뱅이 기적, 4장 베드로 요한 설교)
4:32-37 바나바 재산 헌납,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그 영광 그 칭송 탐욕)
4) 본분의 분위기를 서술하라
감정표현이나 강조표현에 유의해야한다.-- 기쁨, 감사, 관심, 애정, 겸손, 심판, 열정, 경고, 저주, 등
5) 강조점을 살펴보라.
-- 두 번 이상 사용한말
-- 비슷한말 : 예)율법=공의, 겁탈=강포, 패역, 간악(하박국)
-- 서로 대조가 되는 말 : 예)악인-의인, 공의-불의, 굽게 행함(하박국)
-- 문법관계
* 특히 영어성경에 나타나는 접속사 (그러나, 그러므로....등)
* 비교를 나타내는 단어들: ~처럼,~하듯이, 혹은 말하자면, 등과 같은 말.
예) 요3:14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두 사건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깨우쳐준다.
* 시간에 관한 표현들: 그 후, 이후로, ~까지, ~때, 이와 같은 말들은 사건이 일어난 시기나 사건의 연속적인 순서를 나타낸다.
* 본문에 나오는 주요 동사를 연결하라.
6) 6W1H 원칙을 이용하라.
설화체(모세 5경, 역사서, 4복음서, 사도행정 등) 관찰시 반드시 사용해야한다.
+-----------------------+
who -------->| What |<--------- where
how -------->| |<--------- when
why -------->| 중 심 사 건 +---------> wherefore
+-----------------------+
*** 막2:1-12 을 예로 든다. ***
-- Who : 누가 등장인물인가? 인물의 직함, 직업, 역할, 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예)
예수님 ; 설교자(V2), 치료자(V2), 매우 유명함(V1,2), 죄를 사해주심(V15), 인자(V10), 마음에 응답하시는 분(V5), 사람의 속마음을 아시는 분(V8)
네 사람과 한 병자 ; 결단력 있고 꾀가 있으면 믿음이 있음 (V4,5)
서기관 : 재빨리 신학적인 문제를 찾아내어 의논함 (V6,7)
-- Where : 어디에서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그 장소가 의미하는 바는?
예) 많은 사람이 모인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V1)
-- When : 언제 사건이 발생하였는가? 그 시간이 의미하는 바는?
예) 바쁘게 설교를 하며 병 고침을 행한지 며칠 지난 후 (V1)
-- What : 본문에 중심된 행동(사상)이나 사건(논지)은 무엇인가?
대화인가? 논쟁인가? 기적인가? 설교인가? 병 고침인가?
예)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심.
-- How :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것은 절정으로 이어지는가?
예)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사해주심. 후에 서기관의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병자에게 일어나 그의 상을 가지고 걸으라고 명하심(V5-11)
-- Why : 왜 사건이 일어났는가? 명백한 이유가 무엇인가? 더 깊은 이유는?
예) 예수께서 사람들의 믿음에 응답하심 (V4-5)
예수께서 육적, 영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병자를 고치심 (V3-5)
예수께서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심 메시야 (V5)
-- Wherefore : 등장인물들이 행한 사건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 결과 따라 오는 것은?
예) 중풍병자가 즉시, 그리고 완전하게 고침을 받음.
무리가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V12)
7) 본문의 단락나누기를 하라.
-- 본문을 장별로 나눈 경우에는 장제목이 본문의 제목이 된다.
-- 단락별 제목은 중심주제와 중심요절을 고려해야하며 네 단어 이하로 한다.
* 제목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출 것.
+ 네 단어 이하여야 한다.
+ 본문에 있는 중심단어 중 적어도 하나를 포함해야 한다.
+ 다른 장의 제목이나 다른 단락의 제목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 그 장의 주제를 묘사해야 한다.
+----------------------------------------+
예) 복음의 전파 (장 제목) | 1:1-1:5 ; 데살로니가인들에게 |
-------------------- 1:6-1:10 ; 데살로니가인들에 의해서 |
+-----------------------------------------+
8) 관찰요약을 자기말로 서술하라.
예) 막2:1-12 ; 중풍병자를 고침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을 가버나움에 있는 집에서 모든 이에게 메시야임을 증명해 보여 주셨다.
-- 그는 죄 사함의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 자신과 똑같이 신뢰와 존경과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
2. 해 석 (Interpretation)
(1) 해석의 정의와 요건
1) 정 의 : 사전에 보면 해석이란 "의미를 명확하게 밝히기 위하여 풀이하는 행위나 혹은 과정"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IBS에서는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찾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본 글의 저자가 아닌 필자의 귀납적 성경 연구 방법에서의 해석에 대한 정의는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가를 관찰한 후 그것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요 건 :
<1> 충분한 관찰
관찰을 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면 할수록 해석에 드는 시간이 절약된다.
충분한 관찰 없이 해석단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그들이 느끼는 것..., 그들이 보는 방식..., 다른 사람이 말한 것..." 등으로 채색되어버린다.
<2> 저자의 뜻하는바에 대한 분명한 인식
해석이란 저자가 뜻하는 바를 발견하는 것이다. 간혹 오해하는 것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연구하기 보다는 저자가 말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밝힌다.
<3> 오랫동안 주석을 멀리하라.
해석 과정에서 문맥의 이해를 통한 해석을 위해 가능한 오랫동안 주석을 멀리하라. 주석은 목발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되어야하며, 오직 말씀을 직접 관찰한 후에 사용되어야 한다.
<4> 선입관을 인식하라.
각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제는 신학적인 의견이나 신앙의 색깔에 따라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입관은 그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결정해 준다.
(2) 해석의 방법
1) 어려운 단어, 분명한 뜻을 알고자 하는 단어를 정의(해석)하라.
+----+--------+---------------+----------------------예) 빌2:1-11 절 | 단어 | 다른 번역판 | 해석 |
----+--------+---------------+----------------------------+
V1 | 권 면 | Encouragement | 용기를 돋우다, 자극, 조장 |
원어 : paravklhsi"
발음 : 파라클레시스
해설 : 3870에서 유래;'애원','충고','위로', 위안, 간청 <고후 1:5; 히 12:5>여명. comfort, encouragement; 애원, 충고, 위로, 위안, 간청
+--------+---------------+----------------------------+
| 위 로 | Consolation | 위안 |
원어 : paramuvqion
발음 : 파라뮈디온
해설 : 3889의 중성형;'위로'(본래적 의미로 구상명사), 위안 <빌 2:1>중명. encouragement, comfort; 위로(본래적 의미로 구상명사), 위안
+--------+---------------+----------------------------+
| 긍 휼 | Affection | 애정, 호의, 감정, 영향 |
원어 : splavgcnon
발음 : 스플랑크논
해설 : 아마도 splen <스플렌>('지라')에서 유래된 상세형; (복수로)'내장', 상징적으로'동정', 애정 <눅 1:78; 몬 1:7>중명. a sponge (지라)에서 유래된 강세형;(복수로)내장, 상징적으로 동정, 애정
+--------+---------------+----------------------------+
| 자 비 | Compassion | 불쌍히 여김, 동정 |
원어 : oijktirmov"
발음 : 오이크티르모스
해설 : 3627에서 유래;'동정', 자비 <롬 12:1>남명. pity, compassion; 동정, 자비
+----+--------+---------------+----------------------------+
| V3 | 허 영 | Empty conceit | 자만, 자기 과대평가, 독단, 변덕|
| 원어 : kenodoxiva
발음 : 케노독시아
해설 : 2755에서 유래;'헛된 영광', 즉 '자기 자만', 허황된 영광 <빌 2:3>여명. vainglory; 헛된 영광, 즉 자기 자만, 허황된 영광
+--------+---------------+----------------------------+
| V4 | 돌아봄 | Look out | 감시, 망보기, 관심사 |
원어 : skopevw
발음 : 스코페오
해설 : 4649에서 유래;'주시하다', 즉(상징적으로)'주목하다', 간주하다, 주의하다, 표시하다, 3700과비교 <롬 16:17>동. to observe; 주시하다, 즉(상징적으로) 주목하다, 간주하다, 주의하다, 표시하다, 심사숙고하다
+----+--------+---------------+----------------------------+
** 방법 : -- 국어사전을 이용하여 단어를 정의한다.
-- 단어해석 사전으로 다음의 것들을 정리한다.
* 어원의 뜻
* 단어에서 나온 변형
* 동사인 경우 시제, 화법, 태
2) 문맥에 따라 해석하라.
--앞뒤의 문맥과 함께 읽을 것
--한절을 자세히 공부할 것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에 유의할 것
--질문에 답해볼 것 : "이 절은 문맥상으로 어떤 뜻일까?"
3) 문맥의 문법적 특징을 살피라.
--문맥이 비유, 모형, 직유, 은유, 상징에 따라 관점을 가지고 해석을 시도하라.
4) 어려운 구절에 대한 질문을 던질 것
예) 살전4장 V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를 취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HRV]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CRV]
各各 거룩함과 尊貴함으로 自己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HS2]
각 사람은 2)자기 아내를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는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는 '자기 몸을 거룩함과 존중함으로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KJV]
That every one of you should know how to possess his vessel in sanctification and honour;
[KJS]
That every one <1538> of you <5216> should know <1492> (5760) how to possess <2932> (5738) his <1438> vessel <4632> in <1722> sanctification <38> and <2532> honour <5092>;
[NIV]
that each of you should learn to control his own body in a way that is holy and honorable,
[NAS]
that each of you know how to possess his own vessel in sanctification and honor,
[NRS]
that each one of you know how to control your own body in holiness and honor,
[NLT]
Then each of you will control your body* and live in holiness and honor-
[UBS]
eijdevnai e{kaston uJmw'n to; eJautou' skeu'o"
동부완능 형대-목남-단 대명,소,2복 관목중단 대명,소남3단 명-목중-단
알고 각각 자기의 아내
should know That every one his vessel
kta'sqai ejn aJgiasmw' / kai ; timh'/,
동부현중/수디 전여 명-여남-단 접등 명-여여-단
취할 줄을 으로 거룩함 존귀함
how to possess in sanctification and honour
5) 문화적, 문법적,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연구하라.
이 구절이 그 당시 문화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예) 출23:19, 34:24-"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당시 가나안인은 염소새끼를 그 어미젖에 삶아 밭이나 나무 등 원하는 지역에 뿌려 그해의 풍년을 기원함.
6) 관주를 검토하라.
-- 관주를 연구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뒷받침 해주고 조명해 주고 확대해 주는 다른 성구를 말한다.
-- 용어이해 :
* 비 / 비교하라는 뜻
* 아무것도 없는 것 / 참고하라는 뜻
* 인 / 인용하여 증명하라는 뜻 ~ 인용: 강조를 말함
* 보 / 보라는 뜻 ~ 비슷한 점 발견
* / 20
* / 30
* 0 / 장
7) 다른 건전한 성경을 비교하라(각 번역판 비교)
-- KJV, RSV, NIV, Today English Version, Living Bible, 개역성경, 공동번역, 새 번역, 표준 신약성서.
-- 여러 번역판 비교시 유익한점
* 내용을 더 보충, 심화해준다.
* 원문의 의미를 다양하게, 가깝게 볼 수 있다.
8) 건전한 주석을 참고하라.
-- 주석은 해석을 하고 묵상한 후 사용한다.
-- 다른 위대한 사람에 의해 인정된 그런 훌륭하고 건전한 사람들의 주석을 사용하라.
-- 어떤 사람도 모든 진리에 대해 다 옳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 객관적인 입장에서 원문에 충실한 주석이 좋다.
3. 적 용 (Application)
(1) 적용의 정의
"적용이란 본문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찾는 하나의 과정이다."
적용은 관찰을 통하여 발견하고, 해석을 통하여 이해된 진리들을 취하여 우리의 삶에 정확하게 투영하는데 있다.
(2) 적용의 원리
<1> 적용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2> 적용은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3> 적용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다 범위를 넓혀가는 점층적 이여야 한다.
예) 나 -->가족-->내교회-->다른교회-->우리사회-->우리나라- ->아시아-->세계
(3) 적용의 실제
<1> 삼위(Trinity) 하나님의 각 성품과 그의 사역에 대해 새롭게 깨달아 믿게 된바. (Something to believe)
<2> 마음에 기쁨이 오며 감사할 수 있어 하나님을 찬양한바.
(Something to praise God for)
<3>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도록 구하고 싶은바.
(Something to ask God for)
<4> 하나님 혹은 사람에서 바꿔야 할 태도나 고백해야할 일.
(Something to be sorry for)
<5> 지금 즉시 취해야 할 행동 및 기도해야 할 바.
(Something to plan and pray for)
(4) 적용시 주의사항
<1> 성경말씀의 전체적인가르침을 충분히 얻지 못한 채 성구를 적용하는 것.
<2> 어떤 구절을 오용하는 것
<3> 성경적 기준보다 문화적 기준을 적용하는 것.
*** 적용에 구체적인 면이 결여될 때, 그리고 적용에 개인적인 결단이 결여될 때, 적용의 부분은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으로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목회 윤리학
머리말.
필자는 윤리학에 대하여 전문적인 연구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연구한 적이 없다고 거부할 만큼 여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윤리 생활은 비방 받을 수밖에 없는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정의를 좇는다면서 총회와 노회를 나누며 서로가 비방을 일삼으며, 조그만 한 개인의 감정 때문에 같은 목회자들 끼리 다투며 헐뜯으며, 이제 막 목회자가 된 자들은 선배 목회자들을 무시할 뿐 아니라 총회와 노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무질서한 모습을 보이며, 교회 부흥이라는 미명아래 이웃교회를 비방하며 성도를 훔쳐가며, 성도들의 영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목회 최면술을 두려움 없이 사용하며,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자신의 부요함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사생활 역시 거짓말을 일삼으며, 음행으로 말미암아 가정을 파괴하는 일들이 목회자의 생활에서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자의 윤리의 부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전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은 목회자의 윤리를 회복하기 위한 조그만 한 몸부림으로 목회 윤리학을 연구하려고 한다.
이 연구를 위하여 참고도서를 찾으려고 익산 시에 있는 기독교 서적을 취급하는 책방을 찾았으나 “목회 윤리”라는 제목으로 쓴 게이로드 노이스 지음, 김종일 옮김의 책밖에 없음에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렇게 목회 윤리를 다룬 책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익산시가 조그만 한 도시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목회자인 우리가 목회 윤리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씁쓸한 생각이 든다.
여기 본인은 게이로드 노이스가 쓴 “목회 윤리학”책을 참고하면서 본인이 느껴온 목회 윤리를 다루려고 한다.
오늘날 학교에서 윤리학을 다룰 때 윤리의 실천 보다 윤리학을 위한 방법론이라든지 윤리학에 공헌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그들의 명언을 암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데 본인은 이러한 공부에 회의를 느낀다.
본인이 생각하는 윤리학은 실천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구하고자하는 것 역시 학적인 것 보다는 우리가 직면하는 상황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윤리를 다루려고 한다.
지금까지 부족한 자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도움을 있으니 라고 분명히 믿으며 목회 윤리학의 연구와 강의를 하려고 한다.
상마교회
한 정길 목사
1.목회 윤리학 란 무엇인가?
목회 윤리학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윤리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여기 동양윤리학의 대표적인 것으로 삼강오륜을 말할 수 있는데 삼강이란 세 가지 강령으로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는 것이고
오륜은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친애가 있어야 하며, 임금과 신하는 의가 있어야 하며,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과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동양 윤리학은 인간의 관계 속에서 가져야 할 규범과 법도를 언급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학은 그리스어로 ethike로 동물이 사는 곳, 축사, 집을 뜻하는 ethos에서 나온 말로 사회의 풍습, 개인의 관습 품성의 뜻을 강하게 풍기고, 윤리적 의식, 신념, 도덕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양 윤리학은 인격에 과한 학문을 의미하며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인 최고선을 밝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양윤리학은 선험적인 도덕률을 근거로 둔 법칙윤리학과 가치의 다양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목적 윤리학의 두 입장으로 나누어져 발전하였다.
여기 동양 윤리학의 개념과 서양 윤리학의 개념이 약간에 차이는 있으나 인간 사회 속에서 자신의 인격을 향상 시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올바름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켜야할 도리와 법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목회 윤리학을 정의 내린다면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목회 윤리학이란 목회자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인격을 향상시켜 목회자가 관계하는 사회 속에서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와 법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목회자란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의 부요함을 늘리기 위하여 성도들을 모으고 그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마치 장사하는 자들이 하나의 고객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장사가 고객 하나를 확보하기 위하여 고객은 왕이다 하며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가진 방법을 쓰는 것과 같이 성도는 왕이다 하며 하나의 성도라도 얻으려고 가진 비위를 맞추며 노력한다.
물론 어떤 의미로서는 이러한 노력을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어겨가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 목회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갈 1:10 말씀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말하며 자신은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목회자는 장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장사하는 자들의 윤리를 따라서는 안 된다 장사하는 자들의 윤리는 고객으로 하여금 만족을 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나 목회자의 윤리는 성도들의 기쁨을 주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는 어떤 자인가?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윤리체계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어떤 자들인가?
1.주님을 대신한 자이다.
고후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
목회자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자로서 자신의 사상과 주장과 감정으로 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상과 주장과 감정으로 일해야 하는 자이다. 특히 목회자의 말과 행위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고 늘 주님을 대신한 자로서 올바른 처신을 해야 하는 자이다.
2.복음을 전하라고 주님께로부터 부탁을 받은 자이다.
살전2: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여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 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 속에 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의 기쁜 소식이다. 목회자는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에 길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목회자는 자신의 세상지식의 유식함을 드려내기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지 않고 철학자 같은 설교로 혹은 윤리학자 같은 설교로 윤리만을 강조 하는 설교로 목회하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목회자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빼버리고, 또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에 소식을 가르치지 않는 자는 엄격한 의미로 기독교인의 목회자라고 볼 수 없다.
3.하나님의 양을 치고 보살피라고 부탁을 받은 자이다.
요21:15~17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목회자는 자신의 양을 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양을 맡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되로 하나님의 양을 돌보는 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양인 성도를 함부로 해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목회자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목회자란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양인 성도들을 먹이고 보살피는 사명을 받은 자이다.
3.목회자에게 주어진 두 가지 사명.
목회자에게 주어진 사명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을 성장시켜 구원에 길을 가게하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가르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두 번째 사명은 바른 행위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명이다. 여기 두 번째 사명은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온전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바로서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고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소명의 도구인 전도까지 막아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은 이 두 가지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목회자의 윤리를 약화시키는 것
목회자의 윤리를 약화시키는 것은 크게 2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심이다.
(1).물욕.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재산이 많은 것은 여러 가지 유익하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장만하기 쉽고 어려울 때 그 어려움을 얼마 정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명예와 권세를 얻게 하는 힘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 구원에 사역을 돕는데도 재물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불신자나 신자나 다 같이 많은 물질을 갖기를 원하다. 여기 목회자도 예외는 아니다. 목사도 많은 재물이 있어야 좋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보다 크게 할 수 있으며 목사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목사가 될 수 있고 가정을 돌보며 자녀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 그러기에 어느 목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물질을 싫어하는 목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자들 가운데는 물질을 모으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거짓된 주장으로 물질을 모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자신의 재물을 모으는 자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은 재물을 바로 사용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까지 하면서 얻은 많은 재물은 죽음 앞에서는 무가치한 것이 되고 영원한 저주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과시욕과 명예욕.
마 4:5~6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행 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푼 심리가 있다. 그리고 모두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존경 받는 명예를 얻기를 바란다. 이러한 심리가 목회자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이 있다고 해서 나뿐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사탄이 이러한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에 뜻에 따르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을 좇아 자신의 과시를 위하여 쓰고 스스로 교만해 하여 하나님 앞에 교만의 죄를 범하니 문제인 것이다. 또한 명예욕을 좇아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다 보면 위선자가 되기 쉽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목회자에게 있어서 명예욕은 해로운 독초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는 명예욕을 경계해야 한다.
(3).권세욕.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삼하 15장~18:15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기를 네가 나에게 경배 하면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우리 목회자에게도 동일하게 권세를 줄 터이니 자신에게 경배 하라고 유혹한다. 여기 우리 목회자는 마귀에 이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있는데 과거 역사를 보면 많은 목회자들이 권세를 얻기 위하여 사탄에게 순복하여 많은 행악을 범한 사건을 보게 되며 오늘날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사탄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교계에서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것을 얻어 권세를 누리려고 각가지 행악을 서슴치 않고 행하며 권세 얻기에 급급하고 그 권세를 얻게 되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방향으로 권세를 남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 목회자들은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잘 사용하는 권세욕을 경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4).정욕.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 하나가 정욕이라고 한다.
어떤 불치의 병을 앓는 환자가 비료기과에 왔단다. 그 비료기과 의사가 그 환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병원을 잘못 찾아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환자가 말하기를선생님 제가 병원을 잘못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저에 병을 알고 있습니다. 그 병이 무엇이며 내가 그 병으로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께 저에 한 가지 소원을 풀어 주십사 하고 온 것 입니다.이 환자의 말을 들은 의사는 어안이 벙벙해서 환자의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자 환자는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저는 몇 달 동안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에 아내와 황홀한 잠자리 한번 가졌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절박한 바램인가?
이외에도 우리인간은 전쟁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정욕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다 정욕은 정상적인 육체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일어나는 것으로 목회자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다윗 왕이 일순간의 정욕을 자제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큰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
필자도 주변의 목사님 가운데 정욕을 자제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내가 아닌 자와 놀아나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자신도 파멸하는 그런 목회자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우리 인간에게는 정욕이 남달리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다.
우리 목회자도 정욕이 강한 자가 있으며 또한 약한 자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는 내가 정욕이 강하던지 약하든지 자신의 정욕을 자제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며, 강한 정욕은 하나님께서 배필로 주신 아내와 더불어 그 정욕 잠재우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여기 우리 목회자는 정욕으로 자신을 망하는데 던져 넣지 않으려면
*.목회자는 정욕의 죄를 범하기 쉬운 환경에 있음을 알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여신도와 업무상 자주 접하게 된다.
목회자는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여신도와 자주 접하게 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일 때는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한적한 곳에 단둘이 있게 되었으면 목회자는 빨리 그곳을 떠나야 한다. 비록 자신이 떳떳할지라도 사람들의 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신학교 다닐 때 목회학 교수가 이야기하기를 옛날에 어느 목사님이 혼자 과부댁에 신방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과부가 목사님께 흑심을 품고 유혹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사는 환급이 이 유혹을 뿌리치고 나왔는데 이 과부는 자신의 유혹을 받아주지 않는 목사가 미워서 소리치며 목사가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다고 하여 그 동래 사람들로 하여금 목사에게 몰매를 하게 하여 목사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목회자는 여성도와 자주 접하는 생활 속에 늘 현명하고 지혜롭게 행동함으로 의심 받지 않도록 해야 하며 순간에 넘어지게 하는 정욕의 욕구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여신도 가운데는 목회자에 대한 존경이 이성의 사랑으로 변하여 가는 경우가 있다.
여자 청년가운데는 목사님과 같은 사람과 결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는 청년들이 많다. 그것은 목회자의 존경이 이성의 사랑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처녀는 꿈을 꾸었는데 자신의 목사님과 결혼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꿈을 깨고 나니 자신에 행위가 어처구니가 없더라는 것이다. 목사님에게는 분명히 사모님이 살아계시고 목사님의 나이 또한 아버지벌이 되기 때문 이러한 꿈은 황당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처녀의 내심에는 목사님에 대한 존경이 이성에 사랑으로 까지 변하여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도의적인 양심이 현실에서는 그것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욕이 인간의 도의적인 양심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늘 자신을 정욕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자부하지 말고 경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의도적으로 목회자를 탐하는 음녀의 접근도 있다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신 이야기인데 필자로는 꾸며낸 이야기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로는 어느 교회에 한 부요한 여성도가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교회에 봉사를 잘 하는지 목사님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목사님의 양복을 해주기도 하고 가끔 목사님 용돈도 드리고 아무튼 목사님은 그 여성의 열심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는 중 하루는 밤 10시경에 그 여신도에게 전화가 오기를 자신이 지금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와서 목사님께서 안수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실 때에는 번거롭게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말고 목사님 한 분만 오셨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전화를 받은 목사님은 그토록 교회에 충성하는 성도의 부탁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홀로 신방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도가 있는 방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그 여신도는 많이 아픈 채 하면서 목사님 제가 몸이 심히 불편해서 목사님을 일어나 맞이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목사님 여기 가까이 오셔서 저에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 좀 해주세요.하더라는 것이다. 목사님은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안수기도를 하려고 그 여성도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려고 하자 그 여성은 목사님하면서 목사님을 안아 버리더라는 것이다. 그 여 성도는 실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몸으로 목사님을 유혹하였다는 것이다.
여기 목사가 성적병신이 아닌 이상 아름다운 여성의 전라의 유혹을 어찌 뿌리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목사는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었고 그 후 그 목사는 그 여신도의 성적노예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를 유혹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목사를 접근하는 음녀가 있다는 것을 우리 목회자는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 음녀의 의도는 일반적으로 목사는 자신을 망하게 하는 자신의 음행을 들추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정한 음행이 탈로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또한 큰 교회의 목사에게 접근하는 음녀는 그런 계기를 이용하여 목사에게 돈을 갈취하려는 음녀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는 처음부터 음녀의 접근을 막도록 현명하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일부 목회자의 아내 가운데는 성에 대한 경시풍조와 무관심을 가진 자가 있어 건강한 목회자로 하여금 외도를 생각나게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기독교인 가운데는 무조건 성 생활이 부정한 것으로 회피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목회자의 아내 가운데에서도 성 생활을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육체적인 사랑은 저급하고 더러운 것이며 정신적인 사랑만이 고급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정신적인 사랑을 빼버리고 육체적인 사랑만 갈구한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그렇다고 육체적인 사랑을 무시하고 정신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것도 정상적인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회자의 육체도 평범한 사람이기에 어느 목회자는 육체적인 강건함으로 남달리 정욕이 강한 사람도 있고 남달리 정욕이 약한 사람도 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윗과 같은 분은 정욕이 강한 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정욕이 강한 분들에 아내가 육체적인 사랑을 거절한다면 그가 어느 신분을 가졌던 순간적으로 자신의 아내가 아닌 자에게 범죄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아내들은 육체적인 사랑이 저급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육체적인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으로 끄집어가는 하나의 도구가 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아내가 성 생활을 회피하는 자라면 눈을 돌려 다른 여자에게서 사랑을 갈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못된 아내의 생각을 바꾸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불타오르는 정욕을 대한 대처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부부를 떠난 성 생활은 부정한 것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으며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밀히 행하는 부정한 성 생활이 사람들에게 감추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어리석은 것은 부정한 성 생활은 끝내는 밝혀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세상 모든 것을 아시고 인간의 마음까지 아시는 하나님 보시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부정한 성 생활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삶을 살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분노하시는 부정한 성 생활은 생각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인 자신도 어제든지 정욕으로 망 할 수 있음을 알고 위태한 장소를 삼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교통사고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들은 운전을 한 뒤 2~3년 이라고 한다. 이유는 그때가 되면 운전에 자신이 생기기 때문에 운전에 조심성이 떨어지고 안전운행에 방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삶 속에 방심은 참으로 경계해야 될 무서운 적이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어떠한 여성의 유혹도 자신 있게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청년 때 한 여성의 유혹에 허무하게 무너져 사랑의 상처를 앓은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그 상처의 아픔은 과거의 추억에 영상을 통하여 필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렇다 그대가 아무리 정욕을 자제할 자신이 있는 목회자라고 자부 할지라도 환경에 따라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허락한 아내만으로 만족하고 성 생활에 있어서도 서로 이해하고 협력함으로 사탄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고전 7: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사도는 사람이 부부로 맺어질 때 서로는 서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의 의사 되로 하지 말고 상대를 의사를 존중해 주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생활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 생활에 있어서도 상대가 원하면 자신이 비록 원하지 않아도 상대를 생각하여 주는 마음으로 상대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신령한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기 위하여 합의 상 잠시 떨어져 살아도 곧 바로 합쳐서 정욕으로 망하게 하려는 사단에 유혹에 넘어지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렇다 부부는 늘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하며 성 생활 역시 즐기며 사랑의 도구로 사용되어 정욕으로부터 오는 부정한 성 생활을 잠재워야 한다. 여기 성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는 변태적인 성 행위를 자신이 또는 상대가 원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 기독교인의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변태적인 성 행위는 성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이성적인 존재, 인간만이 만들어 내는 것임으로 그리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를 경멸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그러나 변태적인 행위가 상대에게나 자신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유해한 것이라면 당연히 금해야 한다. 예를 들면 상대에게 가해하는 사디즘과 자기를 자학하는 마조히즘 같은 변태 등과 같은 것이다. 그 이유는 성 행위는 사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성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에게나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변태적인 성 행위를 갈구한다면 그것이 결코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와의 성 행위는 비록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할지라도 상대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를 주지 않고 사랑을 일으키게 하는 성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라고 필자는 분명히 믿고 있다. 여기 우리 목회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아내와의 사랑으로 만족하고 사탄에게 기회를 주는 어리석음을 갖지 않도록 명심하자.
2)삶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잘못된 습관, 버릇, 성격 등.
5. 목회상의 윤리.
1)설교와 가르침에 윤리.
(1)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연구한 것을 참고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하다.
어떤 목회자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말씀을 가르치니 다른 사람의 글을 참고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전하는 말을 분석해 보면 전체 성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괴상한 성경해석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의 성경 연구한 것을 참고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성경해석에서의 일치와 불일치를 분석함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려는 사탄의 흉계에 막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혹자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세상의 윤리를 내세우며 목회자들이 다른 사람의 성경 연구한 것을 도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성경해석이라면 그 판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누구든지 사용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성경연구가 단순히 그 개인의 지성과 능력으로 왔다면 그 판권은 그 글을 쓴 자에게 주어야 할 것이고 진정한 목회자라면 그러한 글을 참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설교에 있어서 신실성이 있어야 한다.
설교하는 자가 거짓된 설교를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그 첫 번째 것은 자신의 이익을 맞추기 위한 것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거짓된 설교를 듣고 그것을 분석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서 전하기 때문이다.
(3)설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설교는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이나 또한 잘못하면 영혼을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알아야 한다.
만일 영혼을 죽이는 설교를 했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4)사회문제에 대한 설교를 과감하게 해야 한다.
사회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설교를 해야 되는가?
물론 이러한 설교는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잘못하다가는 비난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설교들 했던 마틴루터 킹 목사는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목회자는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설교를 과감하게 외쳐야 할 것이다.
2)성도와의 관계에서의 목회 윤리.
(1)상담자로서의 윤리.
a.진지하게 상대의 말을 들어준다.
b.정죄하는 입장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는 자세를 취한다.
c.상대의 비밀은 반드시 지켜주어야 한다.
(2)성도들과 물질 관계에서의 윤리
성도들과 물질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다.
즉 성도에게 돈을 차용하거나 또는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
3)교회 재정과의 관계에서 목회 윤리.
(1)교회 재정을 목회자 마음 되로 사용하는 것을 삼가고 교회서 정한 되로 사용 하라.
(2)사례비에 있어서 자신이 정하지 말고 교회 재정부에서 정하도록 하라. 그리고 목회자는 교회 재정부에서 과다하게 정한 사례비는 자신이 손수 삭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3)목회자는 사치하는 삶을 자랑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검소한 삶을 살아 교회에 부담을 주지는 않는 것이 좋다.
4)말에 대한 목회자의 윤리.
(1)함부로 약속하지 마라.
(2)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도록 하라.
(3)사실일지라도 남을 허물하는 말을 삼가라.
6.다른 목회자와 관계에서의 윤리.
1)전임 목회자에 대한 윤리.
전임자의 가르침이나 그의 인격에 대한 허물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2)후임 목회자에 대한 윤리.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간섭하거나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3)동료목회자에 대한 윤리.
시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4)후배 목회자에 대한 윤리.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도와주고 이끌어주어야 한다.
5)선배 목회자에 대한 윤리.
무시하지 말고 존경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6)노회 총회와 같은 회의석상에서의 윤리.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다툼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완전하고 옳은 주장보다 미비한 주장일지라도 단합된 주장이 도리어 더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7)동력자로서의 윤리.
자신의 장점으로 동력자의 약점을 보안하여 함께 잘되는 길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7.가정에서의 목회자의 윤리
1)배우자의 관계에서는 사랑으로 존경받는 자가 되도록 하라.
2)자녀에게는 신앙의 바른 본을 보임으로 존경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3)부모에게는 효도와 형제들에 우애로 본이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8.이방 사회와의 관계에서의 목회자의 윤리.
1)타종교와 관계에서 윤리.
(1)그들을 미움에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2)그들의 교리를 반박할지라도 그들의 인신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
2)국가에 대한 목회 윤리.
(1)국가에 직접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참여해야 될 때도 있다.
(2)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는 목회자 역시 지켜야 한다.
9.결론
이상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목회자로서 지켜야 될 많은 윤리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그것들을 연구하여 지킴으로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목회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문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