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목회 서신
서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족한 자는 바울의 서신을 가지고 강의를 해 왔다.
바울의 서신 로마서를 가지고 바울의 신학을 다루었고
고린도서를 통하여 바울의 목회 신학을 다루었다.
요번 학기에는 바울의 서신 디모데, 디도서를 통하여 바울의 목회학을 다루려고 한다.
이 서신들을 보면 바울 사도가 신앙 안에서 자식과 같이 여기는 젊은 두 목회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 바울의 가르침을 우리에 적용하여
좋은 목회지식을 갖고자 한다.
본인은 1부에서는 “성서 백과사전” 정 인찬 편집, 기독지혜사 출판에 언급된 “목회서신”을 약간 수정(뺄 것 빼고, 수정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언어를 약간 수정)과 함께 그대로 다루었고 2부에서는 주석들을 참고로 해서 목회서신에서 나오는 목회학적 지식을 다루려고 한다.
물론 본인의 지적 부족함이 많기에 모든 강의는 절대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주관하심 속에 이루어지를 바라는 바이다.
1부
목회 서신: PASTORAI EPISTLES
1.배경
18세기 초 이래 디모데 전, 후서와 디도서는 목회 서신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말은 서신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서신들은 목회적 관심에서 쓰여 진 편람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 신들은 목회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 때문에 목회서신이란 명칭은 전혀 부적당한 것만은 아니다
이 서신들은 목회 임무를 수행 하려는 사람에 대한 권면과 지시가 들어 있는 모든 고대문서의 표본으로써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서신들은 특별히 각 개 인들에 게 부쳐진 것 이었다. 그러나 이 들은 사사로운 서신왕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 서신들은 특히 초대 교회의 필요성에 맞추어 고안된 특이한 문학양식을 갖추고 있다.
로마 교회에서 작성된 초기 성경 목록인 무라토리단편( the Muratorian Canon)은 일찍이 이 서신들을 언급한 바 있다. 무라토리단편은 주장하기를, 이 서신들은 "개인적인 감정 과 애정의 발로로' 쓰여 졌으나, "교인 훈련준비를 위해 가톨릭교회에 신성하게 바쳐졌다"고 했다. 이 서신들은 수신자들 만 읽는 것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돌려 읽는데 더 큰 가치를 갖고 있었으므로, 바울 서신들 가운데 끼게 되었다.
목회서신 수신자의 배경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제 1 차 전도여행 중 개종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루스드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루스드라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핍박을 받았다. 디모데는 이 사실을 분명 하게 목격 했었다. (HAN 딤후 3: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제 2차 전도여행 도중,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 지방을 다시 지나갔으며, 이 때 디모데를 동료로서 일행에 끼어 주었다. 이로써, 바울은 디모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 관심은 점점 깊어 갔다 디모데가 바울의 동료로서 선택된 것은 어떤 예언의 말씀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장로들은 디모데에게 안수를 베풀면서 이 예언의 말씀을 디모데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HAN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HAN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디모데가 부름을 받아 활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는 할례를 받았다. 그의 어머니
유대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공연히 할례를 받지 않게 함으로써 유대인(크리스챤의 감정 을 상하게 하여
일어날 수도 있는 곤란을 피 하고 싶어 했다.
제 2, 3차 전도여행 도중, 디모데와 바울은 서로 깊이 결합 되었다. 그리고
디모데와 에라스도가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파견되는 등, 때때로 디모데에게는
보조적인 전도 임무가 부과되기도 했다. (HAN 행 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품었던 따뜻한 배려는 다섯 개 이상의 바울서신 인사에서
디모데를 자신과 나란히 병렬 시키는 데에서 잘 나타나 있다 (고후 골 살전, 후)
더욱이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디모데만큼 서신독자의 사정(私情)에 친절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HAN 빌 2:19~20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
그러나 디모데는 소심 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바울은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능히 처리해 나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의 입장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 바울은 디모데 대신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했는데, 이를 보아도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비교]
[HAN 고전 4:17]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HAN 고전 16: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 임이니라
[HAN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디모데에게 부쳐 진 두 개의 목회서신은 바울이 그의 소심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친밀한 동료였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사도행전이 디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 있어서도 디도가 사도 바울의 전도사업에 참여했다는 것 이외에 알려져 있는 바가 없다
그는 바울과 함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헬라인이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도록 강요되지 않았다 (HAN 갈 2: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디도가 가장 잘 알러지게 된 것은 주로 고린도 교회에서 그가 바울을 대리하여 전도사업을 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가 쓰여 진 시기와 후서가 쓰여 진 시기 사이의 공백기간 동안 그는 고린도 교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울은 디도로부터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보고를 받고 나서야 얼마만큼 안도감을 갖고 '눈물의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썼던 것이다.
디도는 대단히 미묘한 상황들을 잘 대처해 나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은 디도를 자신의 "동무요 동역자'라고 묘사했다 (HAN 고후 8: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디도는 어떤 상황일지라도 이를 잘 이겨 나갔음에 틀림없다.
(HAN 고후 12: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물에게 이'목회 '서신을 보냈다.
ll . 통일성 .
초대교회에 있어서, 이 서신들의 통일성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이르러 이 세 서신들이 통일성을 이루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슬라이에르마허(Schlelermacher)은 디모데 전서 의 진정 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두 서신의 순전성(純全性)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의 비평 원리는 목회서신 전체의 통일성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서신의 진정성은 전체적으로 인정되든지 전체적으로 부인되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서신들의 통일성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견해 들이 제시되었다. 그런데 목회 서신에 대한 반론이 제기 되자 신약 비평학자들은 두 개의 양자택일에 봉착하게 되었다. 각 서신이 모두 진정성을 갖고 있든지, 아니면 각 서신이 모두 거짓이든지 바로 그것 이었다. 몇몇 학자들은 특히 디모데 후서와 디도서의 내적 통일성을 의문시 했었다. 이들은 바울 저작을 인정하지 않으나, 몇 가지 단편적인 구절 속에는 바울 특유의 문체가 들어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글이 아닌 가짜 저 작물에 바울이 각주를 써 붙였거나
(각주가설),
☉자신의 단편적인 글월을 첨가했을 것(단편가설)이라는 이론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구구한 이론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하리슨(p.N. Harrison)의 이론이다. 그는 디모데 후서와 디도서에서 바울 자신의 글월을 추려내었다. 처음에 그는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부분을 낱낱이 열거 했다
(1)디도서 3: 12-15
(2)디모데후서 4:13 절 이 하, 20, 21절 상반 절
(3)4: 16-l8절 상반 절
(4)4:9-12,22절 하반 절
(5)1 : 16절 이하, 3: 10절 이하, 4:1, 2절 상반 절, 5편 하반 절, 6편 이하,
18편 하반 절, 19, 21절 하반 절, 22절 상반 절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단편화는 그 자체의 이론적 타당성을 오히려 결여하게 만들었다. 후에 하리슨 자신은(2)와 (4)를 합치고 (3)과(5)를 합침으로써 단편들의 양식 수효를 세 가지로 줄여 보다 조리 있게 만들고자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이론을 보다 신뢰받게 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어떻게 해서 이러한 단편들이 보존되었을까 하는 문제는 해결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더구나 이 문제에는 어떻게 그 편집자가 자신의 글월에 바울의 단편들을 결합시킬 계획을 세웠을까 하는 문제가 곧 제기되므로 어려움이 가일층 더했다.
어째서 그 편집자는 디모데 전서에 바울의 단편을 하나도 수록하지 않으려 했을까?
어째서 그는 디도서 끝 부분에 한 가지 단편만을 부가했으면서도
디모데후서에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장에 바울의 단편들을 선포했을까?
편집과정에 대한 이 질문을 적당히 설명할 수 없다면 ,하리슨의 이론은
그 타당성을 잃고 마는 것이라고 보겠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이 서신들을
사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 한다면, 이러한 이론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다.
저 자.
A. 각 서신들의 주장,
이 세 개의 서신들은 모두 바울이 그 저자라고 주장한다. 또한 각 서신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반드시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익명의 저자의 간책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울이 목회서신의 저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째서 그러한지 그 증거를 대야하며, 서신 인사에 어째서 바울의 이름이 사용되었는지를 어느 정도 적절히 설명하여야 한다.
B.교대 교회의 견해.
저자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증거가 어떠한 것 이든, 그것은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 같다.
어떤 교회 이 든지 목회서신의 저자가 바울 이외의 다른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신약 정경 항을 참고하라).
C. 바울 저작에 대해 제기된 반론들.
이러한 반론들은 네 개의 주요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각 부분이 독립적으로 고려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반론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 역사적 반론.
학자들은 목회서신에서 언급된 역사적 자료들을 사도행전의 기본 역사 틀에 맞추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되는 어려움은 하나하나의 언급을 사도행전의 개개 상황에 뜯어 맞추는 일이 아니고, 이들 모두를 조리 있게 정돈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 서신들은 밀접히 서로 연관된 사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급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세 가지 제 안이 제기 되었다.
첫 째,
바울의 저작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언급들을 바울이 2년간 로마에서 집에 억류되어 있었던 일(행28:30) 이후에 발생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석방된 후 동쪽 지방에서 나머지 전도사업을 수행했다는 것을 가정한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 후 바울이 다시 체포되어(이 점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역사 자료가 없다) 마침내 로마에서 순교했으리라는 것도 가정된다.
또한, 사도행전에 기록된 여러 가지 시련 중 바울에 대한 고소는 로마 법정에서 판결을 받도록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석방되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유죄를 증거 할 어떤 증인들도 그 고소내용을 지지하기위해 로마에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에 이 소송에서 바울은 고소자의 직무유기에 의해 승소했었을 것이다.
두 번째,
바울의 저작에 대해 반론을 펴는 사람들은 목회서신 이외에 어떤 성경 자료들도 위에서 말한 해방가설(바울이 로마에서의 억류로부터 풀려났다는 설)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단편이 서신 속에 편입되어 있다는 가정을 한 것이다.
이 단편들을 사도행전 역사 설화에 개별적으로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로 봄으로
이러한 주장은 단편가설을 지지하며, 해방가설의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이 편집구성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는 해방가설을 제기
하는 문제보다 더 크다.
세 번째,
목회서신에 나오는 모든 역사적 언급들은 목회서신이 위작임을 감추면서 마치 진실이기나 한 것 처 럼 보이기 위 해 창안된 거짓 고안물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문학적 고안은 고대세계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또한, 위작(駱作) 서신들과 진실을 가장하는 이러한 역사적 자료 사이에는 어떠한 일치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 기독교 세계에 존재 하고 있었던 위작 서신들은 이러한 가설의
개연성에 반대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두 가지 위서는「고린도 3서」( 고린도3서는 바울행전에 편입돼 있음)와「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 4세기의 어떤 문서조작가의 작품으로 목회서신과 일치점을 찾을 수 없고 그러므로 목회서신을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옳지 않은 것이다.
2. 교회의 반론.
목회서신은 감독, 장로, 집사 등 직위를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다른 어떤 바울 서신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바울은 교회조직에 대해서 특수함 관심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바울의 저작을 부인하는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설립이 사도바울의 생애보다 훨씬 후대에 속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목회서신에 반영된 상황들을 검토해 볼 때, 바울사도시대라야 그 타당성을 갖게 된다.
다른 서신에서 바울이 감독 또는 집사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이 이러한 문제에 바울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처럼 앞일을 내다보며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교회 문제에 관하여 직계 제자들에게 몇 가지 안내 사항을 제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전도여행에서 장로들을 택하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행 14:23).
이것은 바울이 선한 교회치리 문제를 깨닫고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고 보겠다. 그리고 제 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부르러 보냈고 그들에게 특수한 가르침과 격려를 베풀었다(행20:17-38). 더욱, 자신이 설립한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바울은 문안인사를 드렸다(빌 1: 1). 어떤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디모데와 디도의 지위는 2세기 교회 상황을 반영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로를 택할 권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바울의 동료들이 사도 바울의 역할을 대리하면서 일시적으로 가졌던 기능과 2세기의 발전한 감독직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3.교리적 반론.
여기서의 주요 문제는 목회서신의 교리가 과연 얼마만큼 바울 특유의 것인가이다.
목회서신에는 의(義)의 사상과, 하나님 의부 성 , 성령의 내재 활동 등 몇 가지 중요한 바울교리들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목회서신에는 "믿음', "진리' , '위임', "신실한 말씀 "등과 같은 낱말이 흔히 언급되는데 이것은 목회서신이 서로 상관있는 용어들을 짝 지워 통일성 있는 형태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몇몇 학자들은 바울의 역동적 성격에 비해 볼 때 이 점은 너무나도 판에 박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 특유의 교리가 목회서신에 빠져 있다는 점을 들어 반론을 펴는 일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개개의 서신 속에서 언제나 상론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울은 이미 그의 교리를 잘 알고 있었던 친밀한 동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이제까지와는 다른 신학적 내용을 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우, 이러한 서신들은 교인 교육의 필요성 때문에 쓰여 진 많은 교회 서신들과 비교 될 만하다.
판에 박힌 교훈 형식들에 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바울은 기독교 교훈의 귀중한 유산이 그가 죽은 후에도 보존되는 일에 관점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도 또한 그 자신의 가르침 중의 일부를 동일 전승형식(서로 상관있는 개념들을 서로 묶어 한 동아리를 만들어 전승시키는 형 태. 예컨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 령 등을 한데 묶어 전승시키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역주)으로 받아 들였었다(비교. 고전 15:3절 이하).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기억하기 용이한 형태를 취하고 이에 신실한 말씀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확실히 목회서신 속에는 비(非)바울적이라고 할 만한 교리내용은 전혀 없다.
4. 언어학적 반론.
학자들은 다른 신약성서들 보다 목회서신의 언어학적 문제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는 어휘와 문체 등 두 가지 초점의 문제가 있다. 어휘상으로 볼 때, 목회서신에는 바울이 다른 서신들에서 사용하지 않은 낱말들의 사용 용도가 높으며 (사용된 전체 낱말 중 3분지 1 이 그러하다),
신약이 다른 책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은 낱말의 수효도 175개나 된다. 하리슨과 같은 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어휘들은 2세기에 흔히 사용되었으므로, 이 낱말들은 2세기의 것임에 틀림없다고 한다. 그러나A.D. 50년부터 이 모든 낱말들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으며, 바울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리슨은 목회서신에 상당수의 대명사, 전치사. 관사 등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반론을 제기했다. 이러한 품사들은 바울서신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그는 주장했었다. 이런 낱말 형태는 무의식적으로 한 사람의 문체를 나타낸다고 보아, 하리슨은 이를 근거로 해서 바울 저작권을 부정했다. 최근 학자들은 정관사와 같은 부수어의 사용 민도, 문장 길이 등을 근거로 통계학적 처리 방법을 사용하려고해 왔다(비교. A.Q. Mortrn과 J.McLeman, paul, the man and the Myth(1966)).
만약, 어떤 작가가 항상 일정한 빈도로 정관사를 사용한다면, 이것은 문체의 객관적 판단기준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조사 연구치고 목회서신이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다른 네 개의 바울 서신을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 할 경우, 5명의 서로 다른 저자가 요구 된다).
바울의 문체는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통계학적 처리방법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에 대한 주요 비판은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간결하기 때문에 적당한 표본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제 기된 네 가지 반론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서신 자체의 저자 주장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 이 훨씬 더 이 치에 맞는다.
Ⅳ.집필시기
바울의 사망 연대를 연대기적으로 결정 하는 일 은 명백하지 가 못하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로마에서 순교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순교 연대는 A.D 64년에 시작한 네로의 박해기간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의 순교가 박해기간 초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혹자는 박해기간 끝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도행전28 장에 기록된 경위에 기준하여 바울의 로마 도착시기를 논의 하는 데 있어 서도 확정된 이론이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울의 로마 도착시기 가 A.D.58년 경 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혹자는 이를 2년 후로 잡기도 한다. 만약, 목회서신이 말하는 바울의 활동을 그 근거로 하여 바울이 제 1차 로마 억류로부터 일단 풀러 났었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사정이 연출될 것이다. 즉 재 억류될 때까지의 시간적 공백이 길면 길수록, 바울은 보다 많은 시간을 나머지 동부지역 방문에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바울이 애초에 의도 했던 바대로(행 15:24,28 )스페인을 방문하였다면, 그의 순교가 네로 박해기간 끝에 일어났다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옥중서신에 보면 바울은 동쪽으로 되돌아갈 결심을 했었던 것 같은데, 역시 바울은 스페인에 가고자 한 본래의 의도를 포기해 버렸음에 틀림없다. 사도 바울이 A.D. 64년경에 순교했다면, 목회 서신의 저작 연대는 A.D. 64년 경 직전 이었을 것이다. 즉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는 바울의 로마 재 억류 직전에 쓰여 졌을 것이며,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옥살이 기간에 쓰여 졌을 것이다.
V . 집필 장소
이미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목회서신은 사도행전의 역사 틀 안에 놓을 수가 없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 서신들을 저술 했다면, 이들은 사도행전 역사 이후에 계속된 바울의 나머지 생애 기간에 쓰여 졌을 것 이다. 그러나 이 서신들의 역사적 자료들과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독립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서신들 내의 자료들을 목록으로 만들고(자료가 허용 하는 한) 이 서신들이 쓰여 졌을 기간에 사도 바울이 어떠한 활동을 하였을 것인가를 재구성해 볼 수 있을 뿐이다.
(1)바울은 에베소와 마게도냐를 방문했었던 것 같다(딤전 1 :3 ).
(2)그는 또한 그레데를 잠깐동안 방문하였다(딛 1:5).
(3)그는 디도에게 편지를 쓴 후 그 다음 겨울을 에비로( Epirus) 서해안에 있는 니고볼리에서 보내고자 했다(딛 3: 12).
(4)디모데 후서를 쓴 다음, 바울은 로마에 ( ? )다시 수감 되었다. 그는 로마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말하기를, 로마에 있을 때 오네시보로가 그를 찾아왔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디모데 후서는 로마에서 부쳐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두 서신의 저작 장소는 더 분명하지 않다.
디모데 전서를 썼을 때 바울은 마게도냐에 있었다. 이것은 이치에 맞는다.
왜냐 하면,서신에서 그는 이 장소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디도는 에비로에 있었거나, 에비로에 가는 도중이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올바르다면, 서신들의 저작 순서는 디모데 전서, 디도서,
디모데 후서 일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쓰여 졌을 것으로 추정 된다.
W · 수신인
서신자체의 주장을 인정한다면,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의 수신인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다. 디모데 전서 1:3절에서 바울은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은·.· " 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 서신이 디모데에게 보내졌으며 그 때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또한 디도서 1 :5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 뜨러 둔 이유는·.· "이 라고 말했다.
디모데 후서는 수신인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이 점에 대한 암시는 존재한다. 디모데의 상황은 디모데 전서를 보냈던 때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Ⅶ 쓰여 진 경위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서신들은 에베소와 그레데에 보내졌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서신들의 저술을 촉진시킨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할 수도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남아 있으라고 강권했을 때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 자신도 에베소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에베소를 지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는 이에 앞서서 바울은 그 곳에서 활동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자들이 이를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디모데 전서가 쓰여 진 경위를 이해하는데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역시 가장 중요한 일은 디모데가 에베소에 남아 거짓 교설을 선전하는 교사들을 다루도록 권면 받았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이것은 디모데에게 쉬운 일(위임)이 아니었었다. 디모데는 소심한 성격을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반대 세력을 처리하는 일을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더욱 그에게는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언급한 바에 따라 판단하여 올바른 사람을 교회 직위에 임명해야 하는 책임이 맡겨져 있었다.
디도서에 있어서는, 이러한 책임이 보다 분명하게 언급되어있다. 디도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장로들을 임명하기위해 그레데에 남았던 것이다(딛 1;5).
디도의 경우, 바울은 그와 함께 그레데 섬으로 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디도나 바울의 활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디도서를 쓰고 있었을 때, 바울은 니고볼리에 있었거나 겨울을 지내기 위해 그곳에 갈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딛3: 12).
더구나, 바울은 디도에게 니고볼리에서 그와 다시 만나자고 권했다. 이것을 볼 때, 디도의 그레데에서의 임무는 단 기간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저술한 까닭은 자신의 임종이 가까이 왔음을 예상하여 그의 후계자들에게 마지막 의사전달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바울은 드로아에 있었고 이 곳에 겉옷과 양피지 문서를 두고 떠났다. 또한 그는 에베소에 드로비모를 남겨 두었다. 왜냐하면, 그가 병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죄수로서 시련을 당하고 있었을 때, 그는 판결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내려질 것이라고는 기대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는 모든 일을 다 끝내고 있었다. 바울은 그의 체포에 대해서나 당시 그의 상황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해서는 바른 성경자료들에 있어서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울은 디모데가 곧 그에게로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딤후4:9,21).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서신이었다.
Ⅷ.목적
바울은 이 서신들을 쓰기 바로 직전까지'디모데와 디도와 개인적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을 생각해 볼 때 이 서신들(특히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 )의 저작 목적은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디모데 전서 3: 14절에서 바울은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 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 이니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 이것은 이상한일 인 것 같다. 왜냐하면, 디모데와 바울의 개인적 교계를 생각해 볼 때, 디모데는 크리스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 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서신을 세밀하게 읽어 보면, 디모데가 개인적으로 바울의 소식을 거의 모두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 전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편지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디모데가 사도 바울의 권위로서 자신의 지도권을 뒷받침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리라. 서신을 자세히 읽어보면, 혹자는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디모데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몇 가지 증거가 나온다. 만약 그러했다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한 지원이 매우 귀중한 것임을 디모데는 깨달았을 것이다. 디모데 전서의 제 1차적 저작목적은 바로 이것이었다. 따라서 이 서신은 도덕적 교훈과 교회 설비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루어졌고, 이 교훈과 가르침은 발전하는 공동체 내에서 실천적 가치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디도서의 저작 목적도 동일하다. 교회 직원에 요구되는 자질을 다루고 교회 내 여러 단체들의 행위에 대해 교훈을 베푼 다음, 바울은 디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2:15).그리고 잠시 후 그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반복하여 표현하면서,'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3:.5)고 말했다. 틀림없이 디도는 이 가르침을 사도 바울로부터 구두로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디도서는 평판이 나쁜(비교 1 :12 )그레데 사람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디도의 권능을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 쓰여 졌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디모데 후서 여러 곳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준엄하게 질책 하고 훈계 했다. 바울 자신이 임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음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서신의 저작 목적은 분명하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에게 올 시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러나 바울의 열망은 그가 죽기 전 디모데가 그의 의사를 전달받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 비교. 딤후4:6) 그런 의미에서 이 서신은 " 바울의 마지막 영가“라고 말할 수 있다.
Ⅸ 내용과 개요.
디모데 전서
A 바울과 디모데(1: 1-20). 디모데의 과제는 적절치 못한 사변들을 선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논박하는 것이다(1-11절). 그 다음, 바울은 디모데의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하나님 은혜에 대한 자기 자신의 체험을 열거했다(12-17절) · 그 다음 바울은 디모데에게 위탁한 임무를 그에게 일깨워 주며 , 믿음에 굳게 서라고 권고했다( 18-20절 ).
B . 교회 조직에 대한 시사( 2: 1-4: 16). 여기서는 여러 가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다
1) 공중기도는 만인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 2:1-8. 2)
2) 크리스챤 부녀자들은 겸손과 순종으로 알려 져야한다. 바울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 호소하면서 이를 주장했다(2:9-15).
3) 교회 직원들은 일정한 자질을 가져야 한다. 이 부분은 감독과 집사직을 다루었다(3: 1-13).
4) 교회는 진리의'기둥'과 '터'이어야 한다.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수호자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해나가면서 고대 기독교 찬송가를 소개했다 (3:14-16).
5) 교회의 미래는 배교(背敎)에 의하여 위협받을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잘못된 교설과 행위를 언급했다. 악령과 지나친 금욕생활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했다(4:1-5).
6) 디모데는 바울이 권고했던 바를 명하고 가르친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인격적인 모범이 어리석은 논쟁보다 더 중요했다(4:6-10).
C. 교회 훈련( 5: 1-26).
바울은 교회 내 여러 단체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과부와 장로들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진정 재정적 궁핍 속에서 허덕이는 과부를 돌 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며, 이들을 위해 명부 가입 제도를 개발할 것을 가르쳤다. 우리들은 장로들을 알맞게 존경하여야 하며, 쓸데없는 직무들을 맞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D. 여러 가지 일에 대한 조언 (6: 1-18).
여기서 바울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 주의를 돌렸다( 6:1,2). 이 관계에 있어서 지도규준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는 다시 한 번 거짓된 가르침 특히 여기서 귀결되는 도덕적 부패를 언급했다( 6:3-5). 그 다음 부분은 재산과 관련된다. 여기서 지족(鎭足)과 탐욕이 서로 비교되었다(6-10절). 그 다음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며,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11-16절). 그리고 바울은 재산이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 이번에는 부유한 크리스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말했다(17,19)
E. 디모데에 대한 마지막 훈계 (6 :20,21).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피해야하는가를 말해 주었다.
디모데 후서
A. 격려와 훈계 (1: 1-14).
바울은 디모데의 과거 체험을 회상시키며, 그에게 받은 은사를 불이 일들 일으키라고 권고했다(1t-7절). 디모데 에게는 담대함이 필요했다(8-10절). 그 다음 바울은 복음의 설교자로서 그가 직접 체험한 고난을 간절히 말했다( 11, 12절). 그 다음 바울은 디모데 자신의 임무를 가르쳐주었다 (1 3,14절)
B. 바울과 그의 동료들(1: 16-15).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오네시보로와 같이 바울을 도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처럼 그를 떠나버렸다.
C. 디모데에 대한 특별한 조언(2: 1-26).
바울은 디모데의 주요 임무를 분명히 밝히며(1,2)
인내의 필요성울 역설했다(3-7절 ).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고난 체험을 간절히 말했다(8-13절). 또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그 목표다)소극적 으로 (무신적인 말장난 회피가 그 목표다)조언했다( 14-19절)- 바울은 디모데 자신의 개인적인 행실과 태도에 대해 많이 말했다(20-26철 ).
D. 종말( 3:1-8).
디모데 전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앞으로 올 도덕적 타락의 징후를 내다보았다.
E.디모데에 대한 마지막 조언( 9: 10-4: 18).
바울은 다시 한번 자신의 체험을 간절히 말하며(3:10-l3) 디모데에게 그의 일을 계속하라고 훈계했다(3: 14-4:5). 이에 연이어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이 나온다(4:6-8). 나머지 부분은 재인적인 요청과 첫 변명에 대한 바울의 언급으로 끝난다(4: 9-18) .
F.문안인사와 축복( 4: 18-22).
디도서
A. 디도에 대한 인사( 1: 1-4).
바울은 그에게 위임 되었던 진리를 선언했다.
B. 장로들에 대한 조언 ( 1:9-9),
바울은 장로들의 자격과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했다.
C.그레데 사함들의 성격 ( I: 10-10). 여기서는 그레데 사람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을 견책하라고 강력하게 조언했다.
D. 크리스찬의 행위( 2: 1-10).
여기서는 노인(1-3절 ) 젊은이 (4-8절) 노예 (9, 10철) 등 3계 충 사람들이 취급되고 있다. E.교리와 생( 2: 11-3:7).
우선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이 어떤 일을 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2: 11-15).
이것이 바로 디도가 선포할 내용이다. 그 다음 바울은 크리스찬들이 공동체내에서 어떻게 처신해 야 할 것 인가를 말했다(3:1, 2). 곧 이어 그는 이교도의 생활과 기독교적구원을 서로 대조시켰다(3:3-7).
F. 마지막 훈계 ( 3:8-15).
바울은 디도에게 훈계하기를 크리스찬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고( 8절),
변론을 피하도록( 9-11절) 권고하라고 했다. 그는 디도가 자신과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함으로써 펀지를 끝냈다(12-15절).
X신학.
여기에서는 단지 목회서신의 신학적 특징을 지적하는데 그치려고 한다. 목회서신의 신론은 하나님에 대한 명칭 속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의 모든 서신 첫머리 인사에서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나, 목회서신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서신을 보다 깊이 캐어보면, 금방이 하나님의 부성이 드려난다( 비교 (딤전 6:17; 딤후 1:7) . 디모데 전서 1 :17결에는 하나님에 대한 주목할 만한 찬양이 나오는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특유한 영광을 주장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보여주고 있다(딤전 6: 15 , 16). 그는 의로운 심판관으로 묘사되었다(딤후 4:8). 여러 번이나 바울은 하나님을 구주라고 불렀다. 그리고 구주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성격일 것이다(비교. 딤전 4:10; 딛1:13; 2: 10, 13;3:4). 하나님이 구원의 전체 구조와 계획을 시작하셨다. 바울은 이 .목회서신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말을 하였다. 그의 참 인간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딤전 1:15). 디모데 전서 1:16 절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내를 언급한 것이다. 디모데 전서에 들어있는 찬송은 기독교 신앙 한 복판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찬양한다. ' 여러 번 바울은 그리스도를 주로 언급하며, 여기서 이 용어는(하나님에게 적용할 때와 똑 같이 )가장 온전한 중요성을 갖는다(6:15). 구주라는 명칭은 또한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딤후 1.10; 딛2: 13 3:6).그리스도의 중재 직, 즉 그는 자신을 속량 금으로 내어 주셨다는 주장은(딤전 2:5,6) 예수자신이 스스로 표현했었던 것이다(막 10:45).바울의 복음의 본질적연 요소는 죽은 자로부터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이다(딤후 2:8). 그리스도가 이 서신들 안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부분 바울 서신에서 보다도 이 목회서신에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언급이 적다. 그러나 목회서신에 나오는 언급들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디모데 전서 4:1절에 보면 , 성령은 후일에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날 것임을 분명히 알려준다고 했다.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이 디모데에게 진리를 맡겼고 또한 그 안에 머물고 계신다고 했다.(딤후1:14) 성령은 신자의 중생과 갱생의 동인이다.(딛3:5)라고 했다. 이렇게 몇 가지 안 되는 언급이긴 하지만, 이것들은 목회서신이 성령의 역사를 완전히 깨닫고 있었음을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다.
2부
우리는 1부에서는 “성서 백과사전” 정 인찬 편집, 기독지혜사 출판에 언급된 “목회서신”을 개관적으로 다루였다.
이제 2부에서는 목회서신에서 나오는 목회학적 지식을 다루려고 한다.
첫 번째로 목회자에 대하여
두 번째로 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세 번째로 교회 세워질 일꾼의 자질에 대하여.
네 번째로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목회자에 대하여
다섯 번째로 교인들의 윤리교육 대하여
다루어 보려고 한다.
Ⅰ.목회자에 대하여.
우리는 목회 서신인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통하여 바울사도가 젊은 목회자 디모데와 디도에게 권면하는 것을 통하여 목회자의 대하여 생각하려고 한다.
1.목회자의 사명의식.
목회자가 목회에 앞서 사명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 사명의식은 자신이 원해서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니고 또 어떤 사람들의 권면에 의하여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니고, 또 할일 없어서 목회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나에게 일을 맡겨 주셨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소개할 때 그것을 늘 강조했다.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라고 말하며 주어진 사명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HAN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HAN 딤후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목회자가 사명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은
첫째: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명을 주셨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목회자는 사명의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회자는 사명주신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목회자는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늘 자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목회자는 주어진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결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2.목회자 자신을 위하여 해야 할 일
1) 영적인 일.
(1)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HAN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
'믿음과 착한 양심'은 본 서신 안에서 세 번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1:5 ; 3:9) 보아 믿음과 착한 양심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본문의 '믿음'은 딤후 2:17, 18에서 기록된 것처럼 '진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Hendriksen).
사람의 양심이 파괴되면 도덕적 부패와 함께 영적 파멸까지 초래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양심을 버림으로써 오는 믿음의 파멸을 막기 위해 선한 양심, 즉 성령으로 거듭난 양심과 진리인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한다.
'선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약 양심이 파괴되면 믿음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목회자가 선한양심을 버림으로써 파멸이 초래됨을 경고하고 있다.
(2)경건의 훈련을 해야 한다.
[HAN 딤전 4:7~11]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 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경건'(euvse,beian 유세베이안)은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Calvin). 이런 경건(敬虔)의 연습은 8절의 '육체의 연습'과 대조를 이룬다. '연습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귐나제'(gu,mnaze )는 '벌거벗은'을 뜻하는 '귐노스'(gu,mnoj)에서 유래한 말로 '벌거벗고 운동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당시 헬라에는 '달리기'와 '격투' 등의 경기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옷을 벗고 경기에 임하였다(Josephus).
즉 고대의 운동 경기자들이 경기에 나가기 전에 부지런히 훈련하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목회자는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늘 부지런히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건한 삶을 사는 자는 금생(今生)에 하나님과 더불어 삶으로써 은혜가 넘치는 평화스러운 삶을 살며(시34:1, 2), 내생(來生)에 있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막 10:30). 이러한 삶은 잠시 동안만 유익을 주는 육체적 삶과 달리 항상 유익을 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3)자신과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조심하는 것
[RSV 딤전 4:16]
Take heed to yourself and to your teaching; hold to that, for by
so doing you will save both yourself and your hearers.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스스로 조심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살펴
보라고 권면한다. '삼가'( e;pece , 에페케)는 '주의하다'를 뜻하는 동사 '에페
코'(e;pecw)에서 온 말로서 시상이 현재 명령법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네
자신을' 뜻하는 여격 '세아우톤' seautw )과 합성되어 그 의미가 '너 자
신에게 관심을 계속해서 가져라'는 뜻을 나타낸다.
한편 '가르침'은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doctrine, KJV). 따라서 본 절의 '가르침'은 공적(公的)인 가르침으로 보아야 한다(Lenski).
목회자는 항상 자기 자신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함으로 그릇된 생활을 멀리하고
자신이 항상 가르치는 공적가르침에 관심을 가지고 주의함으로 그릇 된 가르침을 멀리해야 한다.
(4)자신을 지켜 정결케 해야 한다.
[HAN 딤전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관여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 간섭은 헬라어 '코이노네이'( koinw,nei )는 '함께 나누다', '동반자가 되다'의 뜻을 갖는다.
즉 목회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죄에 동반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을 지켜 죄와 멀리하는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5)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HAN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에서 '싸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고니주'( avgwni,zou )는 올림픽 같은 운동 경기에서 '시합하다', '시합에 이기기 위해 애쓰다'의 뜻을 갖는다.
즉 목회자는 믿음이라는 선한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을 권고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Simpson).
(6)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바른 말을 본받아 지켜야 한다.
딤후1:13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향하여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의 헬라어 '휘포튀포신 에케 휘기아이논톤 로
곤'( u`potu,pwsin e;ce u`giaino,ntwn lo,gwn )은 문자적으로 '바른 말의 본으로 지키라'를 의미한다. '바른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과 삶을 가능케 하는 건전한 복음의 진리를 가리킨다(4:3;딤전 1:10).
목회자는 건전한 복음의 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며 또한 바울과 같이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사는 목회자의 본을 받아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합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7)자신을 깨끗이 하여 귀한 그릇으로 쓰여 지도록 하라
[HAN 딤후 2:20~21]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이 하며
♣귀히 쓰는 그릇이 되며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며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에서 '깨끗하게'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ㄱ. 혹자는 악한 생각이나 행위를 버리고 내면적인 정결을 이루라는의미라고
한다(Scott).
ㄴ. 혹자는 앞서 언급한 후메내오나 빌레도와 같은 거짓 교사들의 행위나
가르침을 피하여 깨끗하게 하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Guthrie, Lock, Bernard).
본인은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받아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즉 목회자가 악한 생각이나 행위를 버리고 내면적인 정결을 이루고 거짓 교사들의
행위나 가르침을 피하여 깨끗하게 살 때 하나의 귀한 일꾼으로 하나님께서 쓰시기 합당한 자로, 선한 일을 행하며 모든 이에게 유익을 끼칠 준비가 되어 있는 주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이다.
(8)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아야 한다.
[HAN 딤후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서 추구해야 할 덕목을 언급한다.
즉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마음의 상태를,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하고 전적인 신뢰를,
'사랑'은 원수까지도 자비의 대상으로 삼는 형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화평'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간의 평화롭고 온전한 상호 이해를 의미한다(마 5:9;요 13:34;롬 12:18).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합되는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는 형제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성도에 대한 평화롭고 온전한 상호 이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9)온유함을 가져야 한다.
딤후2:24~26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대하여 온유하라고 말씀한다.
여기 '온유'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으로(마 11:29), 복음을 가르치며 전하는 교사들이 닮고 배워야 하며 실천해야 하는 덕목이다.
목회자는 거역하는 자라도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
즉 이단자들이나 신앙이 미숙한자를 온유함으로 진리의 길에 들어서도록 권면하고
지도할 때 그들이 그 교훈을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부끄러움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HAN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말씀하며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 목회자에게 가장 부끄러운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 가거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려 가르치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르게 가르치는 자의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다.
디모데는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배웠으며(딤후1:5),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진리는 바울로부터 배웠다(딤후3:10,11).
즉 디모데는 바르게 가르치는 자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HAN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 게서 배운
것을 알며
둘째로:
성경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딤후3:15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연구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성경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성경에 핵심이 무엇인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 등 다양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2)육적인 일
건강관리를 해야 한다.
[HAN 딤전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목회자들의 건강관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물론 바울 사도와 같이 건강치 못한 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고 더욱 겸손해 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목회자가 건강치 못함으로 목회자 개인의 영적, 육적으로 큰 손실을 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주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물론 목회자들은 선천적 또는 후천적 체질에 따라 건강하기도 하고 건강하지 못하기도 한다.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분들은 늙도록 젊음의 기력을 잃지 않았으나
이삭과 같은 분은 늙음으로 눈이 어두워졌던 것을 보게 된다.
여기 목회자의 건강관리에 있어서 선천적인 체질은 어쩔 수 없어도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건강한 체질로 바꾸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가 건강한 체질을 갖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치료의 은사로 건강한 체질을 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알맞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적당한 음식과 약과 의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3.목회자가 경계해야 할 일.
1)성도 징계에 있어서 신중해야 한다.
[HAN 딤전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목회자가 성도를 다스리다가 보면 잘못된 성도들을 징계해야 될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목회자는 신중해야 한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은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엄히 명한다는 것은 헬라어 '디아마르튀로마이'
( diamartu,romai )로 '엄숙히 단언하다', '엄숙히 선언하다'의 뜻을 갖는 강의 복합어로서 교회 징계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신중해야 함을 나타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편견이 없어야 한다.
둘째로:
바른 절차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편벽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 '편벽'(偏僻)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클리신'(. pro,sklisin) )은 '저울을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하다'는 뜻의 동사 '프로스클리노'( pro,sklinw))에서 파생된 말로 '편애'(favoritism, NIV)로 번역될 수 있다.
즉 디모데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개인적인 편견이나 편애를 철저히 배제하고, 사랑과 의에 입각한 공정한 판결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경솔하게 안수하지 말아야 한다.
[HAN 딤전 5: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여기서 '안수'는 헬라어로 (에피티데이,. evpiti,qei()로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 타락한 장로들을 다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으로서의 안수이다(Rocke, White, Robertson).
(2) 장로를 비롯한 다른 성직을 임명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진 것이다.
(Earle, Kelly, Theodoret).
(3) 본 절은 장로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 것으로서 장로를 임명할 때 행한 공개적인 의식 이었다(Lenski).
위 의견들 중에 두 번째 것이 가장 지배적이다.
목회자는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기기 위해 안수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품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중직자들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3)물질의 욕심을 피하라.
[HAN 딤전 6:5~11]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목회자들도 인간이고 보니 물질의 위력을 경험하게 되고
물질과 무관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목회자들이 쉽게 물질에 유혹에 빠져 진리를 버리고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 '이익의 재료'로 번역된 헬라어
'포리스몬'(porismo.n )은'얻다', '획득하다'를 뜻하는 동사 '포리조'( porizo)에서 파생된 말로 '경제적인 이익'을 뜻한다(financial gain, NIV).
그리고 여기서 '경건'은 헬라어로( euvse,beian,유세베이안) 으로
'종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종교라는 이름으로 거짓된 교훈'을 가르쳐주고 그 대가로 물질적인 사례를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는가?
우리 목회자들은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4)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HAN 딤후 2: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바울사도는 디모데를 향하여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한다.
혹자는 여기서 말하는 '청년의 정욕'은 단순히 성적(性的)인 욕망뿐만 아니라
지나친 식욕, 지식욕, 명예욕 등을 가리키는 것(Hendriksen, Guthrie, Scott).이라고 말하나 여기 ‘청년’이라는 말에서 암시하는 것은 성적인 욕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바울사도는 교회의 젊은 여자들을 대할 때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같이 대하라고 가르치며(딤전5:2)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가 젊은 여자 성도와 성적 욕망으로 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계 것을 볼 수 있다.
5)거짓된 지식 망령되고 헛된 변론을 피해야 한다.
[HAN 딤전 6: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는데 여기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은 당시 영지주의자들(Gnostics)의 가르침이나 유대주의 의 가르침을 가리킨다(Earle).
그 가르침은 '망령되고' 공허한 변론이다.
여기서 망령이란 헬라어로 ( 베벨루스, bebh,louj )로 '신성을 더럽히는'의 의미이며(레 10:10 ; 딤후 2:16),
'허한'이란 헬라오로(케노포니아스, kenofwni,aj )로 '공허한'을 뜻한다.
즉 목회자는 거짓된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리고 의미가 없는 변론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6)말세에 있을 그릇된 생활에서 멀리해야 한다.
딤후3:1~5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딤후 3:1~5의 서신을 통하여 말세에 그릇된 생활이 만연할 것을 예언하면서 이 그릇된 생활에서 멀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디모데가 살던 그 당시의 시대보다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 더 피부로 느껴지는 말씀이다.
그렇다 목회자인 우리는 바울이 경계하는 말세에 그릇된 생활에서 멀리해야 할 것이다.
7)항상 배우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
[HAN 딤후 3: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바울사도는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들을 지적하며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라고 말하며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항상 배우나 진리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바울사도는 경험을 했다.
그는 유대인으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대한 지식을 배운다고 배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도리어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로:
잘못된 가르침을 배울 때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둘째로 :
진리의 주체인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배울 때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과거나 현재나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통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배운다.
그러나 그들이 마침내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배우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도 유대교에 심취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배웠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배웠기 때문에 도리어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저 다멕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행9:1~5)
그 후로 예수님을 주체로 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할 때
마침내 진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셋째로: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만 의존하여 배우려 할 때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얼마나 진리에 떠나 있는지 그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 예로 감리교 신학 학장이었던 변 성학 교수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분은 하나님의 대한 많은 지식을 배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한 지식을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만 의존하여 배웠기 때문에
“[HAN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라는 진리에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8)입으로는 주를 시인하나 행위로 주를 부인하는 것
[HAN 딛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체험해서 잘 안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적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그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Scott).
본인은 하나님을 안다고 시인하는 목회자와 성도가 교회 안에서 세상 사람들 같이
다투는 모습을 볼 때 이 행위가 하나님을 시인하는 성도들의 행위인가?
의구심을 갖기도 합니다.
물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럴 수 있다고 할지라도
계속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중상모략하며 해치려고 모습,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고, 거룩하게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은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이야 말로 주를 시인하나 행위로는 주를 부인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시 입으로는 주를 시인하나 행동으로는 주를 부인하는 자인지 늘 자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9)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아야 한다.
[HAN 딛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바울사도는 디도에게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통치 세력이나 이웃들,심지어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조차 '비방과 악담'을 하지 말아야 한다(딤전 6:4 ; 벧전 2:23).
'훼방'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지해야 하며 보다 적극적인 복음에의 순종을 필요로 한다(Guthrie).
또 그리스도인들은 문자 그대로 싸우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싸움이나 선동 등에 현혹(眩惑)당하거나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Hiebert).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인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4.지도자로서 목회자의 모습.
1)권위를 가져야 한다.
[HAN 딛 2: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회자는 성도를 지도하는 지도자로서 항상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잘못된 길로 나간 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책망해야 할 임무가 있다.
이러한 임무는 '하나님의 권위'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바울사도는 디도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를 갖기를 권면하고 있다.
예수님 역시 이 세상에 계실 때 권위를 가지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일을 가르친 것을 보게 된다.
참고:
[HAN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러나 오늘날 목회자들은 어떠한가?
성도들의 눈치만 살피며 권위를 상실하고 있다.
아니 성도들이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목회자에게서 존경 받을만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목회자에게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권위 있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없었던 것은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2)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HAN 딤전 4: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사람들의 심리는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상대가 나 보다 부족하다고 느낄 때 그가 비록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다.
여기 목회자가 성도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은
첫째: 목회자가 나이가 어릴 때 나이 많은 성도의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다.
여기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너의 연소함 때문에 연륜과 경륜 내세우는 장로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목회자가 여자 일 때 남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남자에 의하여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다.
셋째: 목회자가 학력이 부족할 때 학력을 자랑하는 자들에 의하여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다.
목회자가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훌륭한 인격과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3)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사람에게 나타내라.
[HAN 딤전 4: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지도자로서 목회자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전심전력해서
진보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일이란 목회자로서 수행해야 할 일들을 말한다.
즉 목회자가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일에 전심전력하여 진보를 보일 때 성도를
따라 오게 되는 것이다.
4)선한 일에 본을 보여라.
[NIV 딛 2:7~8]
In everything set them an example by doing what is good. In
your teaching show integrity, seriousness
and soundness of speech that cannot be condemned, so that
those who oppose you may be ashamed because they have
nothing bad to say about us.
예수님께서 당시에 백성의 지도자라고 볼 수 있는 율법사를 가리켜
너희가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눅11:46)라고 말씀하며 백성들에게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면서
자신들은 친히 율법을 지키며 본을 보이지 않는 율법사들을 지적했다.
이러한 자들은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목회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을 가르치면서 친히 사랑을 실천하며 본을 보이셨다.
오늘날 지도자로서의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으로만
끝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 모든 일에 있어서 친히 선한 일을 함으로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5)가르침에 있어서 성실함과, 진지함으로 하고 그리고 비난 받을 수 없는 건전한 말을 하라.
[NIV 딛 2:7]
In everything set them an example by doing what is good. In
your teaching show integrity, seriousness
([KJV 딛 2:7] In all things shewing thyself a pattern of good works : in doctrine shewing uncorruptness , gravity , sincerity ,)
[NIV 딛 2:8]
and soundness of speech that cannot be condemned, so that
those who oppose you may be ashamed because they have
nothing bad to say about us.
딛2:7절에서 NIV에서는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 성실하고 진지함을 보여라고 하는
반면에 KJV에서는 교훈하는 일에 있어서 타락하지 않음과 진지함과 성실함을 보여라고 말한다.
즉 지도자로서의 목회자는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 가르침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삼는 타락함을 보여서는 안 되며 그 가르침에 있어서 진지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비난받지 않는 건건한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5.목회자의 임무
1)진리를 사수하며 거짓 가르침을 대적해야 한다.
딤전1:3
딤후2:15
하나님이 백성을 진리 가운데 바르게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목회자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에 길에서 벗어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밝혀 그들을 대적하고 ,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인도할 임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바른 교훈에 부합한 것을 가르쳐야 한다.
[HAN 딛 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목회자의 임무는 성도들에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가르칠 임무가 있다.
여기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가르침' 을 의미한다(딛1:9).
또한 '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페이'(pre,pei )는 '알맞은' 혹은 '어울리는'이란 뜻으로 목회자가 가르쳐야 할 것은 '바른 교훈'과 일치해야함을 시사한다(Guthrie, Robertson).
즉 목회자는 거짓교사들이 가르친 오류나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복음과 일치하는 삶의 양태를 가르쳐야 함을 의미한다(Scott).
3)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해야 한다.
[HAN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목회자의 임무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본 절에서 바울은 기도의 대상을 '모든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혹자는 '모든 사람'은 '모든 죄인들과 성도들을 포함하는 범세계적인 사람'(Robertson)으로 규정하지만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본 절의 '모든 사람'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 지
위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Hendriksen).
이것은 기도의 대상을 생각함에 있어 인간의 관습과 제도를 초월(超越)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본 절에 나오는 네 개의 기도에 대한 명사인 '간구', '기도', '도고', '감사'가 각기 뚜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단순한 동의어로서 반복 사용되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Hervey).
혹자는 이 네 단어의 의미를 따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 한다(Guthrie).
그러나 이 네 단어들이 열거된 것은 단순히 무의미한 반복만은 아니다.
그 단어들을 원어 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간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세이스'( deh,seij()는 '긴박한 상황에서의 어떤 특별한 성취를 위한 탄원'을 의미한다(Earle).
둘째,
'기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카스'(proseuca,j()는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아룀'을 뜻한다(Hervey).
셋째 '도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튜크세이스'( evnteu,xeij()는 신약성경에서 딤전 4:5과 본 절에서만 언급되는 단어로 '접근', '인터뷰', '사회적 교제' 등의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나 본 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구하는 '중보기도'를 가리킨다(Hervey).
넷째, '감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카리스티아스'( euvcaristi,aj()는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뜻한다(Lenski).
목회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긴박한 상황에서 특별한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며 , 하나님께 간구하되 경건한 아룀과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할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성도들의 경건의 훈련을 시켜야 한다.
딤전4:7~11
목회자는 성도에게 경건에 훈련을 시켜
현세에서나 오는 세상에 유익을 줄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하나님의 말씀으로 권하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HAN 딤전 4: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HAN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목회자의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하고, 가르치고 ,전파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어느 때든지 항상 힘써야 할 임무임을 알아야 한다.
6)전도인의 일을 하며 주어진 직무의 일을 다 하는 것이다.
[HAN 딤후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목회자는 전도인의 일을 하며 , 주어진 직무를 다할 임무가 있다.
여기 전도인 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스투 euvaggelistou/( )로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의미한다.
즉 목회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구원에 복된 소식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외칠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직무를 다 하는 것이다.
본 절에서 말하는 직무란 헬라어로 '디아코니안'( diakoni,an )으로 목회 사역(ministry, NIV)을 포함한 '여러 가지 봉사'를(Guthrie)의미한다
이 임무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근신해야 한다.
본 절에서 근신이란 헬라어로 '네페'( nh/fe )로 문자적으로는 '술을 삼가 하다'는 뜻이 있으며 '침착하라'(keep your head, NIV)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말이나 행위를 조심하라는 것이다.
둘째로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
본 절에서 '고난을 받으며'는 헬라어로 '카코카데손'( kakopa,qhson()으로 '고난을 견디다'라는 의미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따르고 전파하는 길에 고난이 뒤따름을 시사한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러한 고난을 잘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7)성도들로 하여금 좋은 일에 힘쓰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HAN 딛 3: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NIV 딛 3:14]
Our people must learn to devote themselves to doing what is
good, in order that they may provide for daily necessities and
not live unproductive lives.
우리 사람들로 하여금 매일의 필요를 위한 생산을 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살지 않도록 선한 일에 그들 자신을 헌신하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들은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상업사회의 원리를 답습하여 대우받는
교인이 되려고 하고 목회자들은 그들의 요구를 좇아 행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목회자의 임무는 성도들로 하여금 선한 일에 자신을 헌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8)범죄한자는 담대히 치리하라.
[HAN 딤전 5:20]
범죄한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범죄한자를 담대하게 치리하는 것은 목회자의 임무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목회자가 범죄한자를 치리하는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 범죄자를 치리하는 목적에는
첫째로:
범죄자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고
둘째로:
범죄자를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 하는 것을 예방하는데
있다.
그러나 목회자가 치리하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첫째로:
자신의 감정에 따라서 치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주어진 법을 떠나 치리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치리를 받는 범죄자가 자신이 과연 잘 못되었다는 충분한 인식을 갖게 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권위의 은사로 치리해야 한다.
6.목회자의 각오
본인이 신학교를 다닐 때 고향 교회에 후배 되는 사람도 신학을 하였다.
그 사람과 대화하는 가운데 그가 신학을 하게 된 동기가
부흥사들이 교회에서 좋은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목사가 되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방법이었는지는 모르나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결심을 한 자는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목회자의 길을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경건히 살고자 하는 길이기 때문에
고난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고난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고난을 나의 상급이 되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천국에 나를 위하여 예비 되기 때문이다.
참고
[HAN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HAN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7.목회자의 보수
[HAN 딤후 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사도는 고린도 교회 같은 곳에서는 자비량하면서 목회자의 보수를 받지 않고
일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그렇게 한 것은 목회자가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목회자가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자연의 이치와 또 성경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에게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 본 절도에도 일상의 예를 들어서 목회자가 그 보수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목회에 따른 보수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일만 전념해야 할
목회자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부흥사는 자신은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가 목사 이전에 많은 돈을 모아둔 경우든지, 부모의 유산을 많이 받았든지, 복권 같은 것에 당첨되어 큰 부자가 되어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분명 사기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교회로부터 직접 사례비를 받지 않으나 음성적으로 추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또는 그 밖에 방법으로 사례비 못지않은 돈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목회자가 교회로부터 합법적인 보수를 받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떳떳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Ⅱ.거짓 가르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를 대적 마귀는 적극적으로 방해를 한다.
외적으로는 핍박과 향락의 유혹과 부와 권세의 유혹과 다른 종교의 그릇된 가르침을 무기로 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의 구원을 방해하려고 한다.
또 내적으로는 그릇된 무리들을 교회에 심어 그들로 하여금 성도들의 구원을 방해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인 알곡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가 되는 마귀의 사람 가라지도 함께 존재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교회 안에 마귀의 사람 가라지는 교회의 성도를 가장하여 목회자를 해치거나 교회의 불화를 가져오며, 교회의 부흥의 길을 막아 성도들의 구원을 방해한다.
물론 교회 안에서 일시적으로 마귀의 영향을 받아 목회자를 해하는 자들, 교회의 불화를 가져오는 자들, 교회의 부흥을 막는 자들이 모두 마귀의 사람 가라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예수님께서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고 삯꾼 목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마귀의 하수인이 자가 교회의 지도자로 가장하여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을 방해한다고 말씀한다.
물론 일시적으로 마귀의 영향을 받아, 또는 진리의 무지로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지도했다고 해서 마귀의 하수인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깨우침이 없이 계속적으로 진리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라며 분명 마귀의 하수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진 목회자들은 성도를 마귀의 사람 가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도도 같이 해를 입을 수 있는 방법인 가라지를 뽑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진리로 성도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가라지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 그릇된 가르침으로 성도를 망하게 하는 마귀의 하수인인 양의 탈을 쓴 이리와 삯꾼 목자들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릇된 가르침을 드려내며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일꾼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1.거짓된 교훈을 대적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세우진 일꾼
1)에베소 교회에-----------디모데
바울사도는 로마에서 2년간의 옥에 갇혀다가 석방된 후에 디모데를 데리고 그레데 섬을 지나 에베소까지 왔으나 계속 동행하지 않고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둔 채 마게도냐로 떠났다.
바울이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것은 에베소 교회에 거짓교사들의
미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가 에베소에 더 머물면서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않고 디모데를 남겨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보다 더 급한 문제가 바울사도에게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옳은 생각 같지 않다.
그것 보다는 바울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생각하면서 젊은 일꾼 디모데에게 직접 교회에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심어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사도는 디모데와 함께 주의 일을 하면서 디모데는 신실한 동역자요, 믿음의 아들이며,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있어 능히 이 거짓된 교훈을 대적하고 교회를 바로 세울 자로 믿었던 것이다.
2)그레데교회---------------디도.
바울은 그레데에 체류하였다가 떠날 때 디도를 남겨놓고 떠나게 된다.
여기 바울이 그레데에 디도와 함께 체류를 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혹자는 로마로 끌려가다가 풍랑을 만나 그레데에 체류한 것이라고 주장하나(Hiebert)
그 당시 그레데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인 것 같다.
도리어 로마에 갇혔다가 풀려난 기간에 그레데에 체류했으리라고 가정하는 주장이
옳을 것 같다.
바울사도는 그레데에 잠시 체류하고 있다가 떠나는 마당에서 그레데 교회의 거짓된 가르침을 대적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게 하기 위하여 디도를 남겨놓게 된다.
바울사도가 그레데 교회의 잘못을 직접해결하지 않고 디도를 세워놓고 떠나게 된 이유 역시 디모데의 경우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2.대적해야 할 거짓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1)에베소교회
(1)다른 교훈으로 가르치는 것. (딤전1:3)
“다른 교훈”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테로디다스칼레인(. e`terodidaskalei/n)은 '거짓 교훈', 즉 정통 교훈과 배치되는 이단적 사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 이미 공인된 기독교 교리가 있었음을 암시한다(Guthrie).
물론 정통 교훈에 배치되는 것은 이단적 사상으로 보는 것은 옳다고 볼 수 없다.
우리 기독교 개신교는 카톨릭 교회의 정통 교훈을 배치되는 주장을 했던 것을 우리가 아는 바이다. 그러나 개신교를 이단으로 정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 보다는 정통교리란 성경에서 인출 된 교훈으로 이성적, 경험적, 신앙적인 사고에 의하여 확립된 교훈으로 교회 회의가 공인하는 개관적으로 인정하는 교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정통교리에 배치되는 이단적인 사상을 가르치는 것을 금해야 한다.
(2)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것.
'신화와 족보'는 하나의 표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Hendriksen).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만물에 영(靈)이 있다는 영지주의 사상이 있었다(Earle).
이 영지주의자들과 유대교의 학자들은 가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대의
문화권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끝없는 족보가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리하여 구약 인물들에 대한 가상적 족보를 만들었다. 특히 아브라함과 모세,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족보와 전기를 만들어 개개의 자신들을 그들의 후예로 만들었다(Hervey, Hort).
이러한 특색은 당시 유대교의 묵시 문학에서 발견되었다(Earle).
이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경륜'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도미안' ('oivkodomi,an )은 '청지기' 즉 복음 사역을 위한 '직분'을 의미하지만(stewardship, RSV) '계획'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plan, LB). 그러므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에 계획인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전달되고 사람들이 믿음으로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Hervey).
이에 반해 신화와 족보는 첫째,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킴은 물론 영지주의자들 스스로 유식 계급이라고 자처하게 하며, 둘째, 일반 성도들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화와 족보는 마침내 하나님의 교회에 계급주의와 분파 운동을 불러 일으켜 변론만 일삼게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3)율법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는 것.
바울사도는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나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율법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는 자들을 지적한다.
여기 이들이 어떻게 율법을 가르쳤기에 그런 지적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 만연하고 있었던 그릇된 율법관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자가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러한 율법의 가르침은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여러 곳에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말하였다(롬 7:12 ; 갈 3:24 ; 4:4, 5). 또한 딤1:7~10 절에서 바울은 죄를 범하는 자들이 죄를 멀리하도록 정죄하고 이웃을 위한 사랑을 하도록 하려는 율법의 원 목적에 맞게 사용할 때 그 효용성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율법이 선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상 율법은 인간의 구원을 완성시킬 수 없으나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선한 기능이 있다(롬 7:7).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 묘사되었다(갈 3:24).
(4)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 가르치는 것.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의 거짓 예배가 하나님의 참된 예배를 더럽히고 있는 것을 경계시키고, 이것이 성령에 의한 예언임을 밝히고 있다(Guthrie).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여기서 '후일' u`ste,roij kairoi/j ,휘스테로이스 카이로이스)은 묵시 문학적으로 '말세'(막 13:5-37 ; 딤후 3:1)를 뜻하지만, 여기서는 '가까운 장래'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에 실현되는 임박성을 가리킨다(Earle).
에베소 교회에 어떤 특정한 시기에 믿음을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무리가 생겨 성도를 유혹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양심의 화인 맞은 상태에서 일하게 되는데 여기서 '화인 맞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카우스테리아스메논'( kekauthriasme,nwn )은 문자적으로 '인두로 도장을 찍은'이란 뜻이다. 이 말은 노예 매매 시 주인이 노예에게 신체 부위에 불로 지져서 자기 소유를 표시했던 사실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이 부위는 점차 딱딱해져서 감각(感覺)이 없어지게 된다. 즉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서 감각이 무디어진 자들이다(엡 4:19).
즉 그들은 자신들이 외식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패하라고 가르칠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한 것이며, 육적인 것은 악에 물들게 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혼인을 불쾌하게 여겼고 몇몇 음식을 먹지 않았던 엄격한
채식 주의자였다(롬 14:1, 2, Scott). '혼인을 금하는' 풍습은 엣세네파(Essenes)에서 시작하여 테라퓨테파(Therapeutae)에서 유행하였는데(Josephus, Philo), 이것이 발전하여 영지주의자(Gnostics)들의 교리가 되었다. 이러한 교리는 1세기에 교회에 들어와서 2세기 경까지 교회에 두루 퍼졌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 쾌락을
죄로 규정하였고, 성결(聖潔)하게 되는 것은 금욕을 통해서만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특별히 만드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창 1:10, 12, 18, 21, 25, 31). 따라서 억지로 행하는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배치(背馳)된다.
특정한 음식을 금지하는 것은 모세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레 11장).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불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갈 5:1-6). 따라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채식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막7:5 ; 롬 13:14 ; 딛 1:15).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지 않는다(롬 1:21).
(5)망령되고 헛된 말을 가르치는 것.(딤후2:16~18)
망령되고 헛된 말은 가르치는 것은 교회에 독한 창질이 생긴 것을 말한다.
'독한 창질'은 살을 썩게 하는 악성 종기이다. 또한 '썩어져 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헬라어 '노멘 헥세이'( nomh.n e[xei)는 문자적으로 '풀을 먹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독한 창질'은 양들이 풀을 먹어 가듯이 악성종기가 피부에 번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단들의 가르침이나 말들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퍼져나가 잠식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 망령되고 헛된 말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었는데
빌레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며 후메내오는 딤전 1:20에 언급된, 진리에서 떠나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된 자를 가리킨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등 에베소 교회 내에 있었던 이단들은 영의 부활은 인정하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부활을 부정하고 영적인 부활을 주장하였으며 죽은 성도들의 부활 역시 이미 영적으로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특히 플라톤의 이원론(二元論), 즉 영적인 것은 선하며 물질적인 육체는 악한 것이라는 그릇된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선한 영은 부활하며 물질적인 몸은 악하므로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영지주의의 거짓 사상은 기독교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5:12-20, Lenski, Guthrie).
이런 이단 사상은 당시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을 무너뜨려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단사상에 대적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일꾼이 되라고 권면한다.
2)그레데 교회
(1)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것.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 가운데는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로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던 자들이다(행 15:1;롬 2:25-29).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논박하면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하였다(롬 10:9;갈 5:6).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간에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빌 3:3).
바울사도는 이들 그릇된 할례당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복종치 않는다.
이는 앞 절에서 언급한 '거슬리다'와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둘째 헛된 말을 한다.
헛된 말에 해당되는 헬라어 '마타이올로고이'( mataiolo,goi)는 아무 유익도 없고 행
위도 따르지 않는 말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것을 뜻한다.
셋째 속인다.
이는 헛된 말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잘못된 길로 가게 하는 것을 뜻한다.
(2)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정하는 것.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였다.
하나님을 시인하였다는 것은 헬라어로 Qeo.n o`mologou/sin eivde,nai로
'하나님을 안다고 시인하나'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 eivde,nai)는 직관적 지식이나 '체험한 지식'을 의미 하는 것으로
(Hendriksen)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체험해서 잘 안다고 떠들어 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 자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면 거기에 따른 행동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며 하나님이 뜻과 정 반대의 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들은
첫째로 가증한 자였다.
가증한 자란 헬라어 '브델뤼크토이'(bdeluktoi.)는 '혐오스럽고 위선이 가득 찬 자'를 의미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말과 행위가 다름을 암시한다.
둘째로 복종치 아니하는 자였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으로인해서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귀를 기울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셋째로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였다.
여기서 '버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이'( avdo,kimoi)는 문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롬 1:28;고전 9:27).
즉 거짓 교사들은 선한 일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로 선한 일에 옳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하는 것.
그레데 교회도 에베소 교회와 같이 변론과 족보 이야기 율법에 다툼이 있었다.
이러한 다툼은 초대 교회에서 흔히 있었던 것으로 유대교 개종자들 가운데
그릇된 자들이 아직도 유대교의 그릇된 가르침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그릇된 변론과 논쟁은 경계해야 할 것들인 것이다.
(4)이단과 교제하는 것.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 멀리하라고 한다.
한두 번 훈계하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책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계를 받아들인 자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한다.
그러나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교회에서 내보내 멀리해야 한다.(벧후
2장).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에 존속(存續)하면서 교인들과 가까이 한다면 교인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가게 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3.거짓된 교훈을 대적하기 위한 목회자의 자세.
1)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라.
[HAN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거짓된 교훈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거짓된 교훈이 어떻게 위배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나의 논리와 맞지 않는다고 거짓된 교훈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을 대적하던 유대인들의 논리와 달랐고 개신교의 성경을 가르침이 구교의 논리와 달랐던 것을 우리는 안다.
또 나의 경험에 맞지 않는다고 진리에 위배되는 거짓된 것으로 분별을 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이단 종파의 목록이 있는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는데 http://shoppingm.tv/File/happy/AdminPds/Total.htm
세계 신유 선교회의 밀가루반죽으로 환처에 바르고 치료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정죄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경험을 갖지 않은 자들은 그러한 정죄를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진흙을 이겨 환처에 바른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
그것을 가지고 쉽게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신학적인 지식의 바탕이 없는 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무식하게 설명했다고 해서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거짓된 교훈을 대적하기 위한 목회자는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철저하게 거짓된 교훈을 분별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성령이 주신 직관적인 영 분별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의 직관적인 영 분별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 가미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에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이 가미 되었다면 그 영 분별의 능력의 신빙성을
잃어버린 것이 되는 것으로 경계해야 할 분별력이 되는 것이다.
(2)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의 능력이 필요하다.
성경에 대한 많은 구절을 암기하고 있어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진리를 바로 아는데 이를 수 없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다.
그러나 바르게 해석하지 못함으로 도리어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거부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근본적이 목적이 무엇이며 어떠한 키포인트를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본인은 처음 이 신학교에 초청 강사로 와서 성경의 3대 주제를 언급하면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가르쳤으며
첫 번째 수업을 맡았을 때 성경 해석학을 통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키포인트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참고
[HAN 딤후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2)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가르쳐라.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 가운데서는 처음부터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있고
마귀에 올무에 매어 진리를 거역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안목으로는 그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철저하게 마귀에 속한 사람같이 행동을 하면서 진리를 거역하는 자리의 지도자가 되어 멸망을 가처하는 길을 가는 자가 어느 시점에 진리를 깨닫고 완전히 회심하여 하나님의 참된 일꾼으로 바꿔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일단 진리를 거슬리는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온유함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HAN 딤후 2:24~26]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3)잘못된 자를 엄히 꾸짖으라.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하라고 가르치면서
디도에게는 그와 반대로 잘 못된 자를 엄히 꾸짖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잘못된 자를 가르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선택을 함에 있어서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혜는 기도 가운데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지혜여야 할 것입니다.
[HAN 딛 1:13]
이 증거가 참 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4)저들에게 변론하거나 논쟁하지 마라.
진리를 거역하거나 잘못 가르치는 자들 가운데는 온유한 가르침으로 또는 엄히 꾸짖음으로 돌아올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진리를 거역하고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잘 못 알아왔기 때문에
진리를 거역하고 잘못 가르쳐왔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곧 바로 자신을 고치고 돌아오는 자들이다.
그러나 악의 완전한 지배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면서도 또는 완전히 깨달음이 없이 무조건 진리를 거슬리고 대적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진리에 대한 변론을 한다는 것은 진주와 보석을 개에게 던져주고 돼지 에게 던져주는 무익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HAN 딤전 6: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HAN 딤후 2: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HAN 딤후 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HAN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5)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HAN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단에 속한 자가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출교해야 한다.(벧후
2장).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에 존속(存續)하면서 교인들 유혹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고 성도의 영혼을 해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마음은 심하게 왜곡되고 비틀어져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리라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Ⅲ.교회 일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목회란 목회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일꾼들과 더불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라고 해도 좋은 일꾼이 협력하지 않으면 목회에
성공을 할 수 없고 비록 목회자가 부족한 것이 좀 있을지라도 좋은 일군들이 있어
목회에 협력을 한다면 반듯이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회에 좋은 일꾼들을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좋은 일꾼이란 그 일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바울사도는 그 일꾼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세상의 방법을 좇아 그 일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능력이 있는지 따져보는 것 보다 그 일꾼의 인격적인 면을 더 중요시하여 세워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다.
여기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또 디도에게 그 일꾼들의 자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물론 바울이 언급한 교회의 일꾼의 직무는 오늘날 동일한 명칭의 교회 일꾼의 직무와 동일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 교회의 일꾼들에게도 그 자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장로에 대하여
1)감독과 장로와의 관계
디도서를 보면 먼저 장로에 대한 자질을 약간 언급한 후 감독의 자질을 언급하고 있으며 디모데 전서에서는 장로의 자질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감독의 자질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감독'은 신약 성경에서 이방인 교회에만 관련되어 나타난다.(행 20:28;빌 1:1;딤전 3:1). 이 직분은 딛1:5절에 언급된 '장로'와 동일한 직분이다(Lightfoot, Michael, Calvin).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서 설교를 할 때 에베소 장로들을 '감독'이라고 불렀다(행 20:28). 다만 이 두 명칭의 차이점은 '장로'가
'나이나 위엄' 즉 '지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감독'은 그 직분의 '기능'에 강조
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Hendriksen, Michael).
2)장로의 자질
|
|
디모데전서3장 |
디도서 1장 |
|
비슷하게 언급한 것 | ||
|
1 |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함1 |
선을 좋아하며8절 |
|
2 |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함2 |
책망할 것이 없고 6절 |
|
3 |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함2 |
한 아내의 남편이며6절 |
|
4 |
절제하며 , 근신하며, 아담하며2 |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8 |
|
5 |
나그네를 대접하며2 |
나그네를 대접하며8 |
|
6 |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3 |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7 |
|
7 |
구타하지 아니하며,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3 |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7 구타하지 아니하며7 |
|
8 |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며4 |
방탕하다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자. |
|
9 |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7 |
|
반대로 언급한 것 | ||
|
|
가르치기를 잘하며2 |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
|
한쪽 서신에는 있으나 다른 서신에는 없는 내용 | ||
|
|
새로 입교한 자로 말며6 |
|
|
|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야 한다.7 |
|
|
|
|
하나님의 청지기로 책망할 것이 없는7 |
|
|
|
제 고집으로 아니 하는 자7 |
3)장로에 대한 대우.
(1)존경해야 한다.
[HAN 딤전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2)말씀을 전하는 장로에게는 보수를 주어야 한다. 딤전5:18
[HAN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4)장로에 대한 송사.
[HAN 딤전 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평신도들의 교회 안에서의 송사도 신중해야 되지만 장로들의 교회 안에서의
송사는 더욱 신중해야 된다.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장로는 예수님을 대리하고 치리를 하는 장로는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로의 송사에 있어서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송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2.집사에 대하여
디도서에는 집사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디모데 전서에는
집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디모데 전서 3:11절은 여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여자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귀나이카스'( gunai/kaj)는 '여자' 또는 '아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여자들'이 어느 집단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집사들의 아내라는 주장(NIV, KJV, Earle, Moffatt, Jeremias, Easton, Weiss). 즉 전후 문맥상 8-10절, 12, 13절이 집사의 자격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집사의 아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여자라는 주장. 이 주장은 8-12절의 문맥상 합당하지 않다.
♧여 집사라는 주장(Bernard, Lock, Robertson, White, Alford, Ellicott,
Chrysostom).
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본 절의 '여자들'을 감독이나 집사처럼 교회에서 특별한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자들로 이해한다. 다만 여기서 여 집사의 자격 요건에 대해 분리된 문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여 집사가 제2의 직분이라는 차별 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본인은 이 주장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1)자질에 대하여
(1)단정하고 8
(2)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8
(3)술에 인 박이지 아니하고8
(4)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8
(5)깨끗한 양심의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9
여자 집사는 여기에 추가로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11
남자 집사는 여기에 추가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12
2)집사를 세울 때 먼저 해야 할 일
시험하여 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며 세워라10
집사를 세울 때 추천된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집사로 임명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기간을 설정해 놓고 합격여부를 결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실성과 구원에 관한 확고한 믿음의 도리를 가졌는지를 시험하라는 것이다. 8,9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집사가 될 사람을 판단할 때는 떠돌아다니는 풍문(風聞)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교회 전체를 통한 조화나 관찰을 거쳐야한다.
3)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13절
(1)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된다.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여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교회에서의 직위 승진을 시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교회에서 성실히 직분을 감당했을 때 사람들에게 높은 평판을 얻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의미이다.
(2)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된다.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자들에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데 있어서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담대한 것을 말한다(Hervey).
이 담력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연결되는 것은 담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데서 비롯됨을 보여준다(Lenski).
3.참 과부에 대하여 딤전5장
초대교회 당시에는 교회에 참 과부의 직분이 있어 활동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직분은 사라졌으나 자질의 요건에 있어서는 옛적의 권사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
1)자질
(1)육십이 넘은 자.9절
(2)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9절
(3)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고 선한 일을 좇는 자.10절
(4)자녀를 양육하며,10절
(5)나그네를 대접하며10절
(6)성도들의 발을 씻기며10절
(7)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10절
2)주요 직무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해야 한다.5
3)대우
(1)경대하라.3
(2)교회에서 도움을 주라.16
Ⅳ.성도와의 관계에서 목회자의 자세
1.늙은 성도에게
[HAN 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늙은 성도는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이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 '늙은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스뷔테로'( Presbute,rw|)는 다른 곳에서는 교회의 직책을 나타내는 '장로'(elder, presbyter)로 사용되었으나 (17, 19절 ; 딛 1:5) 여기서는 문자적인 의미가 그대로 적용되어 '노인'(older man, NIV)을 뜻한다. 또한 '꾸짖지'의 헬라어 '에피플렉세스'( evpiplh,xh|j()는 본래 '주먹으로 치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말로써 때리다'는 뜻으로 공격적인 심한 질책을 나타낸다.
디모데는 비록 연소하였으나(4:12), 한교회의 목회자로서 때에 따라서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연장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주어야 했다.
그럴 경우 바울은 디모데에게 공격적인 심한 질책을 피하고 온유한 태도로 권할 것을 충고하였다.
여기서 '권하되'의 헬라어는 '파라칼레이'( paraka,lei )는 '올 것을 요구
하다', '충고하다', '위로하다'의 뜻으로 자신에게 오게 하여 충고하며 위로하는
따뜻한 권면을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면은 나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디모데가 교인들을 향해 지녀야 할 태도였고 오늘날 목회자들이 지녀야 할 태도인 것이다.
연장자를 권면할 때에는 아비에게 하듯이 모든 예의와 겸손함을 갖추고 신중
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예의범절은 종교나 시대, 공간을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영속적인 규범이며 특별히 노인을 존대하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기본적인 윤리이다(레 19:32).
2.젊은 남자 성도에게
[HAN 딤전 5: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 하고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젊은 남자 성도들을 대할 때는 형제에게 하듯이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 '형제'(avdelfou,j , 아델푸스)라는 말속에는 기독교의 '평등사상'이 포함되어 있다(Hendriksen).
또한 교회 내에서 누구를 불문하고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교회의 구성 상태를 가장 적합하게 나타내는 말이다(고전 12:26, 27).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한 형제이며 따라서 서로 간에 분열과 반목(反目)을 피하고 선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3.늙은 여자 성도에게
[HAN 딤전 5: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늙은 여자 성도를 대할 때 어미에게 하듯 하라고 권면한다.
물론 여기 늙은 여자 성도가 잘못을 범했을 때 꾸짖는 것을 삼가고 온유함을 가지고
권면하며 예의와 애정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4.젊은 여자 성도에게
[HAN 딤전 5: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젊은 여자 성도를 대할 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권면한다.
여기 '깨끗함'은 헬라어로 ( a`gnei,a|) 하그네이아)은 '성적 순결'을 뜻하는 말로 바울이 디모데가 젊은 여자를 대할 때 느낄 수 있는 성적 욕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Lenski).
그러나 이는 단순히 성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체를 통틀어 아무 흠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포괄적 인 의미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Guthrie)
즉 목회자는 여자 성도를 대할 때 성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체를 통틀어
아무 흠이 없는 상태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Ⅴ목회자가 관심 가져야 할 성도들의 윤리 교육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복음과 천국에 대한 가르침은 반듯이 가르쳐야 할
중요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성도들의 윤리 교육 역시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윤리 되로 살아야 구원을 받기 때문이 아니다.
참된 윤리 되로 사는 길이 하나님의 기뻐하는 길이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으며 성도를 구원하는 전도의 문이 막혀지는 것은 성도들이 바른 윤리 되로 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즉 목회자들의 바른 윤리교육이 부족했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 우리는 목회 서신에 나오는 목회자가 가르쳐야 할 성도들의 윤리 교육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1.남자 성도들의 윤리 교육
1)분노와 다툼을 갖지 않은 상태로 기도할 것을 교육하라.
[HAN 딤전 2: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먼저 남자들이 교회 내에서 서로 화목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엄격히 명하고 있다.
여기 우리가 목회서신을 볼 때 남녀노소의 구별이 나오고 그에 따른 교훈이 나오는데 오늘날에도 꼭 구별하여 교훈해야 된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즉 본 절에 나오는 각처의 남자들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에는 남성들과 같이 공격성이 있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교훈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경배하는 일에 앞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마 5:23, 24).
여기 바울 사도가 '분노와 다툼이 없이'란 말을 사용한 것은 문맥을 살펴볼 때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전히 선민 의식(選民意識)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배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분쟁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교인들 가운데서 종식되어져야 했다(Calvin).
한편본 절에는 기도의 자세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성경에 기록된 일반적인 기도의 자세는 서서 손을 들고 손바닥은 위로 향하여 펴는 것이었다(출 9:29 ; 왕상 8:22 ; 시 63:4 ; 눅 18:11).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기도의 자세가 꼭 손을 들고 기도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는 손'이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을 행하거나, 기타 범죄를 짓고 나서 더럽혀진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Lenski).
만일 우리가 그런 손을 들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돌아서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는 몸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태도가 더 중요한 것이다.
즉 목회자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성도들이 분노와 다툼으로 화평을 깬 상태에서 예배하지 않도록 교육하며, 기도할 때 죄악 된 삶을 버리고 거룩한 모습으로 기도할 것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2)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심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을 온전하게
갖도록 교육하라.
[HAN 딛 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HAN 딛 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절제하며 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팔리우스'( nhfali,ouj )를
혹자는 '술 취하지 않는'으로 해석하여 노년기에 있는 남자들이 범하기 쉬운 '술 취함'에 대한 권고로 본다(Calvin).
그러나 혹자는 '네팔리우스'가 단순히 '술 취하지 말라'는 권고가 아니라 생각이나 언행의 절제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Lenski).
여기서 '네팔리우스'는 두 견해 중 어느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절제'를 의미한다.
경건하며 에 해당되는 '셈누스'( semnou,j()는 '위엄이나 품위를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곳에서는 '단정하고'로 번역되어 있다(딤전 3:8,11).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감찰하고 계심을 알며(롬 8:27)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게 된다(히 11:13-16).
근신하며 에 해당하는 '소프로나스'( sw,fronaj( )는 '신중한' 혹은 '분별력이 있는'것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일에 사려 깊고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또 본 절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Scott). 여기서 '소망'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 절에 열거된 덕목은 본질적으로 고전 13:13에 기록된 덕목과 일맥상통한다(Guthrie).
즉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모든 삶에 있어서 절제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며 올바른 생활을 하며 모든 일에 있어 사려 깊고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신중하게 판다하도록 가르치며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인 믿음과 사랑과 인내로서 살아갈 것을
교육해야 한다.
3)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도록 교육하라.
[HAN 딛 2: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는 바울사도의 교훈에서 '책망할 것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타그노스톤'( avkata,gnwston()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서 법적인 용어이다. 이는 재판관이 고소할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을 나타낸다.(Lenski, Hiebert).
여기 바울 사도는 적대자들이 책잡히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바른 말을 사용할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그렇다 목회자는 성도들이 말을 함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책잡히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올바른 말, 건전한 말을 사용하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이 악하다고 말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전도에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2.여자 성도들에 윤리 교육
1)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않는 , 그리고 술에 종이 되지 않는 성도로
교육하라.
[HAN 딛 2: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본 절은 바울사도는 노년기 여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방향을 교훈한다.
즉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거룩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에로프레페이스'( i`eroprepei/j( )는 '히에로스'(i`eroj,'거룩한')와 '프레페이'(* prepei ,'알맞다')의 합성어로서 '거룩한 생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바울 사도는 부정적인 두 가지 측면을 하나로 묶어 여자를 교육할 것을 디도에게 권면하는데 즉 '참소하는 것'과 '술에 취하는 것'은 하나의 짝을 이룬다. 고대에는 포도주가 유일한 음료수였기에(Scott) 술에 취하기 쉬웠다. 술에 취한 그들은 쉽사리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거나 험담하기 일쑤였다.
목회자는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에 합당한 삶도록 교육하며
술에 취하거나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거나 험담하는 것을 삼가도록 교육해야 한다.
2)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성도로 교육하라.
[HAN 딛 2: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바울사도는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젊은 여자들은 남편을 사랑하여 남편과 함께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자녀를 사랑하며'라는 말은 당시 그레데에 퍼져 있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서 자녀를 보호하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해야 함을 시사 한다.(Guthrie).
즉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부부가 서로 사랑함으로 가정을 사랑의 공동체로 이끌어 나가고, 자녀를 거짓된 가르침과 그릇된 삶에 빠지지 않도록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3)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교육하라.
[HAN 딛 2: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은 신앙인에게 가정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신앙의 이름 아래 가사
(家事)가 방치되어서는 안 되며 가족도 역시 적극적인 사랑의 대상임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특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사도는 여기 젊은 여자들에게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말씀하고 있다.
여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도록 말씀한 것은 복음이 전파된 후 그 속에 내포된 여자의 자유에 대한 사상으로 인해 초대 교회에서는 점차 여자의 해방에 대한 주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러한 풍조는 여자의 단정함과 정절을 대단히 중시하던 당시의 상황 속에서 심한 마찰을 빚게 되었고 어느 정도 교회 사역에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Scott).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여자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양육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이러한 권고는 본 절 이외에 바울 서신의 여러 구절에서 여러 차례 강조되고 있다(롬7:2;고전7:4;14:34,35;엡 5:22-24,33;골 3:18;딤전 2:11-15).
그러나 바울이 여자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성들의 인권과 권리를 무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그 시대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하는 것에 있어서 신중하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3)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2: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바울사도는 여성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화려한 치장을 하는 것을 지적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여성들은 하나님께 보이기 위하여 내적인 아름다움으로 단장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내적인 아름다움에 속하는 '염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두스'( aivdou/j)는 본래 '예절', '고상함'을 의미한다(decency, NIV).
즉 염치 있는 행동은 '예절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삼가며'(Hendriksen),
여자다운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숙함'(Bernard)을 의미한다.
또한 '정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프로쉬네스'(swfrosu,nhj()는 '마음의 확고함', '빠른 이해력'을 의미하는 말로 여기서는 마음의 확고함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성 싶다.
즉 목회자는 성도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외적으로 단장하는 것을 중요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하여 내적인 아름다움이 예절과 고상함을 가지고 또 신앙의 흔들림이 없는 정절로 단장하라고 교육해야 한다.
4)순종함으로 교육받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2: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HAN 딤전 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여자들이 집회에서 마땅히 보여야할 정숙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종용'이란 '침묵'을 의미한다. 곧 공적인 장소에서 말하려고 나서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고전 14:34, 35).
또 '순종함으로'는 개인의 권리의 포기나 무조건적인 굴복을 의미하기보다는 조직된 권위, 예를 들어 교회의 법규와 질서 및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Ramsay).
바울 사도는 교회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도 여자는 남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당부하였다(고전 11:2-6). 이것은 남존 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갈 3:28).
다만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의 교회의 질서와 가정의 질서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르쳐야 될 것은 오늘날에도 여자들이 남자를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를 주관 하는 것을 삼가라고 가르칠 것이 아니라.
교회에 질서와 가정의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그 권위아래 있는 자들은 순종함으로
질서를 지켜나가야 한다고 교육해야 할 것이다.
5)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며 '하와'라는 개인으로부터 이제는 일반적인 여자에게로 주제를 바꾼다.
본 절은 그리스도인 여성에게 있어서 네 가지 미덕을 소개한다. 즉 '정절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이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인 여성에게 정절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살아갈 것을
교육해야 한다.
여성들이 이렇게 살아갈 때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본 구절은 목회 서신 중 가장 난해한 구절로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여자는 여자의 삶의 모든 조건들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것이다(Calvin).
(2) 여인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해산함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Elicott, Lock).
(3) 여자가 해산을 안전하게치름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Moffatt).
(4) 자녀를 양육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Chrysostom).
(5) 여자는 해산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Scott).
이상의 견해 중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 이유는 여자는 형벌로 주어진 해산의 고통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있어서는 남자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3.상전을 모시는 성도들에 윤리 교육
1)상전들을 공경할 자로 알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6: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HAN 딤전 6: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바울 사도가 노예 신자들에게 상전을 공경(恭敬)하라고 권면한 주된 이유는 노예 제도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문화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의 가르침에 손상을 입히거나 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에는 노예 제도가 없어졌다. 그러나 일터에서 상급자와 하급자로 구별이 되어 있다.
여기 목회자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급자로 상급자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있다면 상급자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공경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해야 하며, 또 믿는 상급자를 둔 성도라며 믿음에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더 공경함으로 믿음의 상급자에게 유익을 주도록 교육해야 한다.
2)상전들에게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 거슬려 말하지 말도록 교육하라.
[HAN 딛 2:9]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바울사도는 신앙을 가진 종들에게 그 상전에 대하여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려 말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스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안틸레곤타스'(avntile,gontaj()로 '말대답하다'는 의미로(Hervey, Robertson) 상전에 대한 의도적인 반대나 저항을 의미한다.
오늘에 목회자들은 일터에서 하급자로서 상급자를 모시는 기독교인들에게 상급자에게 의도적으로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말을 함으로 상급자에게 미움을 받는 자가 되는 것 보다 상급자에게 범사에 순종함으로 상급자를 기쁘게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도리도록 교육해야 한다.
3)상전을 속여 이를 취하지 않도록 교육하라.
[HAN 딛 2: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사도는 기독교인으로 종에 상태에 있는 자들에게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도록 말씀하고 있다.
여기 '떼어 먹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스피조메누스'(nosfizome,nouj( )는 '노스피조'( nosfizo,'떼어 먹다')의 현재 중간태로서 '자기를 위하여 떼어먹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종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몰래 훔치는 것으로, 당시 종들의 경우 대다수가 주인이 운영하는 상업을 맡아하였기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Hiebert).
바울은 이것에 대해 금지명령을 하면서 금전에 있어서도 주인을 잘 섬기라고 권면한다.
이렇게 주인 것을 훔치지 않고 선하게 충성을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일터에서 하급자로 업무를 맡는 성도들에게 금전에 있어서 성실함으로 상급자에게 충성함으로 하나님의 교훈에 빛나게 하는 자가 되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다.
4.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을 대하는 성도 교육
우리 기독교인 가운데서는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에 대해서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물론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히틀러 정권 같은 정사와 권세에 대해서는
부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정사와 권세에는 복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 나라가 좋아지며 그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좋은 해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HAN 딛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5.부자들에 윤리 교육
1)마음을 높이지 못하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바울 사도는 딤전6:8-10절을 통하여 '부 하려는 자들에게' 교훈을 준 반면, 딤전6:17~19절을 통하여 는 당시 '이미 부자인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그 당시 에베소는 부유한 도시로서 부자 교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말하는데 '마음을 높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휩셀로프로네인'(u`yhlofronei/n()은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자랑하다',
'교만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부자들을 향해 재물로 인해 교만하게 행하지 말 것을 제일의 교훈으로 권면하고 있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부요한 성도들에게 부요함으로 교만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범죄 하지 못하도록 교육해야 할 것이다.
2)정함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바울사도는 부요한 자들에게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 '정함이 없는'의 헬라어 '아델로테티'(avdhlo,thti()는 '불확실성'의 뜻을 갖는 말로 신약성경에서 본 절에만 나온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으므로 믿을 것이못 된다
(눅 12:13-21). 잠 23:5에도 "정녕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기록 되어 있다.
목회자는 부요한 성도로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늘 영육 간에 풍족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두도록 가르쳐야 한다.
3)선한 일에 열심 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도록 교육하라.
[HAN 딤전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HAN 딤전 2: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HAN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 사도는 선한 일에 열심 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부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자신은 하나님에 것을 맡은 청지기임을 깨닫고 자신의 재물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부요한 성도들로 하여금 그 재물을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만의 쾌락을 위하여 사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맡은 청지기의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선한 일을 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6.종말에 있을 그릇된 삶에 대하여 경계하도록 교육
1)종말에 있을 그릇된 삶
(1)자기를 사랑하며
여기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해하면서 자신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2)돈을 사랑하며
(3)자긍하며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4)교만하며
(5)훼방하며
(6)부모를 거역하며
(7)감사치 아니하며
(8)거룩하지 아니하며
(9)무정하며
(10)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참소하며
(12)절제하지 못하며
(13)사나우며
(14)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15)배반하여 팔며
(16)조급하며,
(17)자고하며
(18))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19)경건의 모양을 있으나 경건에 능력을 부정한다.
[HAN 딤후 3:2~5]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2)종말에 있을 그릇된 삶을 대할 성도에게 가르칠 것은
그릇된 삶에서 돌이키도록 교육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