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님 설교방

01-10

11-20

21-30

31-40

41-50

51-60

61-70

71-80

81-90

91-100

101-110

박종순

3 돌아온 사람들

4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5 자아관리에 최선을

6 은혜로 사는 사람들

7 한인교회협 정기총회

8 은혜와 삶

9 우울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

10 향과 기도

11 기도에 최선을

12 주 밖에 없나이다

13 경배하는 사람들

14 깨어 있으라

15 지키시는 하나님

16 < 예화 > 독소와 해독

17 생명의 면류관

18 최선을 다하는 교회 II

19 최선을 다하는 교회(1)

20 새해를 맞는 마음

21 구원의 우물에서

22 하나님은 나의 구원

23 엎드리는 사람들

24 승리하는 교회

25 던지고 다시 찾는 법

26 물동이를 버린 여인

27 졸지 맙시다

28 제자가 됩시다

29 열납되도록 드립시다

30 마음을 정한 사람들

31 바로 드리는 사람들

32 수년안에

33 나의 삶 속에 평화를

34 원망하는 사람들

35 하나님이 주신 양식

36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37 풍요로우신 하나님

38 예정에서 영화까지

39 이 성에 유하라

40 그를 힘입어

41 해방된 사람들

42 선택받은 사람들

43 피조물의 탄식소리

4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45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며

46 건강한 사람들

47 단비를 주소서

48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49 나와 내 집이 사는 길

50 가면서 전파하라

51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52 저주받은 도시들

53 한나의 성공비결

54 어떤 부자의 일생

55 하나님이 주신 기업

56 실패에서 성공으로

57 배가 되기 위하여

58 사는 길로 인도 합시다

59 확실한 증거들

60 나의 객실이 있느냐

61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

62 차고 넘치는 교회

63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64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65 전진합시다

66 빛이 있으라

67 실패한 관리자들

68 하나님의 대사들

69 칭송하며 선포하며

70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71 < 교계지도자 메시지 > 어두운 세상 밝히는 크리스천돼야

72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3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4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5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6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7 기독교란 무엇인가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8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79 기독교란 무엇인가 (왜 교회에 가야하나 )

80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81 상담 ( 하나님세계 이해는 믿음뿐 )

82 상담 (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대해? )

83 상담 ( 주일 성수에 대해 )

84 상담 ( 성서에는 담배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

85 상담 ( 성경이 참 진리라는 증거는 )

86 상담 ( 환경 때문에 기도문쓰고 있는데 )

87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 하나 )

88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89 기독교란 무엇인가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0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1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2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3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4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5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6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 하나 )

97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8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99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2 )

100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1 )

101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102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103 기독교란 무엇인가

제목 : 돌아온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누가복음 24장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

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3장-35절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

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회복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두 제자의 행보 속에서 몇가지 산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두제자의 잘못을 살펴보겠습니다.

두 제자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열두사도 중의

두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고 모셨던 사람들

이었음에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의 행보는 다음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오늘 나의 잘못인 것입니다.

(1) 삶의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일하던 곳,다른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살던 예루살렘을 떠났습니

다. 13절을 보면 "그날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부활하신 그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너무 성급하게 조급하게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방관주의, 회피주의, 도피주의

입니다. 방관은 무관심이고, 회피는 편의주의이며, 도피는 적극적 외면이며

부인입니다. 세가지 다 나쁜 것입니다. 가령 두 제자가 한달 정도 예룻라렘

에서 고통받아가 떠났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만 그러나 그날 더우기 부활의

소식이 퍼져나가고 있는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제아무리 미화하고 호평을

한다해도 이해되지 않는 처사였습니다. 현대 크리스챤의 특징은 방관자, 회

피자, 도피자라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내밀고, 불리하면 움츠리는데 익숙합

니다.

떠나면 안됩니다. 부활의 현장인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떠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떠나면 안됩니다.

(2)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

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면 '저희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

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뇌에 충격을 받거나 손상을 입으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사흘 전까지 곁에 있었던 예수를 알아 보지 못했

습니다. 한마디로 비극입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것은 신령한 것과 신령

한 세계를 보는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안과의사들은 사람 눈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이 수십가지라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질환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지 못하는

질환 가운데 가장 큰 질환은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겐 네 개의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사물을 보는 눈입니다.

산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늘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눈이

대기오염과 텔레비젼 시청 등 물리적인 원인에 의해 점점 어두워지고 있스

빈다.

둘은 이웃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정신의 눈이며, 연민의 눈이며, 사랑의 눈입니다. 그런데 이 눈도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가고 있

습니다. 이웃은 보이지 않고 나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고, 좋은 점

은 보이지 않고 허물만 약점만 보는 눈으로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셋은 세계를 보는 눈입니다.

인간의 눈 자체의 가시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천리안이라는 말이 있

긴 합니다만 천리를 보는 눈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조장치를 이용하면 아

메바도 볼 수 있고 월세계도 볼 수 있고, 사람의 위장도 들여다 볼 수 있습

니다.

사람에겐 세계를 보는 눈이 있습니다. 세계란 넓고, 크고, 깁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통합하고, 이해하는 것이 세게를 보는 눈입니다. 그런데 우

리네 눈은 좁고 침침합니다. 나 밖에 모르고 우리 밖에 모릅니다.

모 TV 토크쇼를 진행하는 사회자이 말이 생각납니다.

"요즘 세계화가 한창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한국사람에 세계화 되는 것이

빠를런지, 세계를 한국화 하는 것이 빠를지 얘기해 봐야 될 것같습니다."라

고 했습니다.

세계화 수용 태세가 덜 됐다는 뜻일 것입니다.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미래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넷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이 눈은 믿음이라는 보조 수단이 없는한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그리고 성

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하소서 성령이여"아멘

그런데 현대인은 그 눈이 점점 어두워가고 있습니다.

중세기는 천주교의 교리와 성물숭배가 믿음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그

때를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21세기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문명이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두 제자의

경우 신령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곁에 계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

니다.

(3)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길 가면서 그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풀

어주는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네 가지

단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듣는 것이고, 둘째는 느끼는 것이고, 셋째는 깨닫는 것이고, 넷째

는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긴 듣는데 느낌이 없다든지 느끼긴 하지만 깨달음

이 없다든지 깨닫긴 했는데 실천이 없다면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제자가 말씀을 깨닫지 못한 원인을 25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미련하

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선지

자들의 예언을 의미합니다. 그 예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

님의 말씀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구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신약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

는 일에 익숙한 사람은 무엇이나 잘 믿습니다. 그러나 안 믿고 의심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은 무엇이나 안믿고 믿지 못하빈다.

안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셔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

다.

(4)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남의 이야기처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 자신의 부활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마치남의 이

야기처럼 했습니다.

어떤 주간지를 보니까 요즈음 대구에는 "카더라"통신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유언비어를 말하는데, "..했다 카더라.. 아니라 카더라...

한다 카더라"식의 유행어가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유행어여도 안되고 유언비어여도 안됩니다.

만일 두 제자가 부활신앙이 확실했더라면 이렇게 말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다시 사신 예수를 만나진 못했지만 그 분은 반드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얘기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나 처자를 그리고 남편을 남처럼 여기거나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

다.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남처럼 여기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내가 다니

고 은혜받는 내 교회를 남의 교회처럼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2. 두 제자의 변화를 살펴봅시다.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정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놀랍고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크게 세가지로 요약됩니다.

(1) 시각이 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아진 눈으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눈이 밝아져 허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눈이 밝아지면 예수가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영원한 세계가

보입니다. 반대로 죄의 눈이 밝아지면 세상 것들이 보입니다. 쾌락이 보이

고, 죄짓는 법이 보이고, 불의한 길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제자의 눈

이 언제 어떻게 밝아졌느냐하는 것입니다.

30절을 보면 "저희와 함께 음식잡수실 때에"라고 했고, 31절을 보면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도니"라고 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에수님과의 격의없는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

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사람은 신령한 눈이 밝아지고 신령한 마음이 열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교제하고 먹고 마시면 금방 악을 본뜨게 됩

니다.

내가 신령한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려면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니다. 즉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심령이 변했습니다.

32절을 보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

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성령체험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날 거기서 성

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난후 그들의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냉소

적인 신앙이 불처럼 뜨거운 신앙으로, 침체되었던 신앙이 되살아나는 신앙

으로 탈진했던 신앙이 활기찬 신앙으로, 의심하던 신앙이 확신하는 신앙으

로 회복되었습니다.

언제 뜨거워졌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라고 32절이 설명합니다. 그들은 길에서 말씀듣고 성경말씀 듣다고 성

령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말씀들은 이

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 요지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

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씀듣는 도중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고넬료를

비롯하여 가족들이 방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깊은 관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

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와 운동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도 발견되게 됩

니다. 말씀을 외면하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성령운동은 잘못 탈선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그날 들었던 그 말씀은 바로 성경이었다는 사

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수님 말씀듣고 성령받았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변했습니

다.

(3) 행동이 변했습니다.

33절을 보면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행

동없는 변화는 참 변화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신줄 알고 그리고 마

음이 뜨거워진 뒤에도 그냥 엠마오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이야말로 부활신

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곧 그 시"는 "바로 그 때"라는 뜻입니다. 29절을 보면 그때는 이미 저물

었을 때입니다.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가려면 12km나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 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이나 아니면 2-3일 흐른 뒤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들은 바로 그 때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결단입니다. 믿음이 떨

어지면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그러나 믿음이 회복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즉시

해야 합니다. 미룰 필요도 없고 늦출 필요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던

그들이 곧 그 시로 돌아온 것은 회개의 신속성을 의미합니다.

떠났던 예루살렘으로!

떠났던 하나님께로!

떠났던 믿음에로 속히 돌아와야 합니다.

가수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을 불러 한국과 일본에서 수십만장의 디

스크 판매고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와야 할 곳은 부산항이

아닙니다.

부활의 신앙의 현장, 선교현장, 사명의 현장입니다.

그들은 돌아와 길에서 만난 예수를 증거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돌아왔습

니다. 36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사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

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사람들, 예수를 전하는 사람들,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멘.

4

제목 :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은 바울의 유명한 부활신앙의 고백이며 증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1-34절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35-49절은 부활한 몸의 성격에 대하여

50-58절은 부활과 승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확실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성경대로 살아나셨다고 증거합니다.

1:3절을 보면 "성경대로 죽으시고" 1:4절을 보면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아이사

야 53장과 다니엘서 9:26과 시편 22편과 스가랴 12:10등에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이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 역시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

라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셋째,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눅24:33-39).

넷째,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셨습니다.

다섯째,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여섯째,모든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일곱째,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14-15을 보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은 헛것이며 훗날 거짓증인으로 발견될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확신 또 확신

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이며 나도 다시 산다는 개인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종교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

입니다. 불교,유교, 도교,회교, 힌두교 등 그 어느 종교도 교주가 다시 살

아났다는 교리나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죽은 종교가 아니라 산 종교라

는 뜻입니다.

본문은 세가지를 교훈합니다.

1.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51절을 보면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더니"라고 했고, 52절을 보면

"우리도 변화하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체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

간의 육체는 변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변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힘도

쇠하고 허리도 굽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얼굴도 주름투성이로 변합니다.

곱고 깨끗하던 피부도 거칠어지고 주근깨며 검버섯이 피어납니다. 꾀꼬리

소리나 은방울 굴리던 소리같던 목소리도 쉬고 굵은 소리로 변합니다.

그러나 부활하니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인간이 상

상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나고야 대학의 연구팀이 사람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돼지를 사육하는

데 성공했다고 4월 12일 교도통신이 보도했스니다.

나고야 대학연구팀은 사람의 피를 생성하는 효소 유전자를 수정된 돼지의

난소에 주입시킨 뒤 수정란을 19마리의 암돼지 자궁에 이식했는데 그 중 3

마리가 낳은 27마리의 돼지 새끼가운데 1마리가 사람과 동일한 특성을 지닌

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와 같은 특성을 지닌 돼

지를 사육하려면 앞으로 10년이 더 걸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 피와 동일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돼지는

돼지 일뿐 그것이 사람피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해

서 사람 몸에 수혈이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저로서는 제 몸속에 돼지피를

넣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사람 생명 속에 돼지 생명을 혼합시킬 수

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사람의 피가 정맥과 동맥을 순환하고 있는데도 돼지만아

도 못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물며 돼지피가 사람의 혈관을 흐른

다면 돼지처럼 꽥꽥거리고 낄낄거리고 온통 세상이 돼지 우리가 될까봐 겁

이 납니다.

사람 몸속에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하거나 연장하는데 도움이 됩

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51절과 52절은 변화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홀연

히 변한다"는 것이고 썩지 않을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신령한 몸이

란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는 몸을 의미합

니다.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서서히 몇 십년 걸려 진화하는 것이 아

닙니다.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합니다.

상처 후 재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에게 요청한 상담의 내용은

훗날 천당가면 부인이 둘이 될텐데 어떻게 처신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

다. 저는 그 사람에게 마태복음 22:30말씀을 소개했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했습

니다. 우리는 모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신 크나큰 축복된 것입니다.

2.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55절을 보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

이 어디 있느냐"라고 했고 57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게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했

습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40일동안 금식하신 후 마귀시험을 이기셨습니

다. 유대 교권자들과 지도자들의 도전을 이기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영적싸움에 이기셨습니다. 그뿐입니까?

죄와 유혹을 이기셨고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승리의 축복을 주십니다.

사람의 몸에는 지구상에 사는 사람 수만큼의 온갖 세균이 기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안 거실에는 60만개의 곰팡이가 기생하고 있다

고 합니다. 무심코 피우는 담배한대 속에서 4천여 가지의 화학성분이 발생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온갖 질병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만 그때 그때 생성되는 강한

저항력 때문에 그것들을 막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항력이란

한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그 능력을 받아야 죄도 이기고 시험도 이기고 유혹도 이

기고 마귀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죄를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세상법의 경

우에서도 드러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든

지 죄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죄인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의를 자랑할 수가 없

는것입니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짐승을 죽여 그대로 그 피를 제물로 드림으로 죄사함

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림

으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를 공로를 믿는 사람은 죄

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죽음을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

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

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죽음을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예수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살

아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이며 핵심진리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신앙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3.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58절은 고린도전서 15장의 결론이며 부활장의 마무리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라

나이가 들면 손박이나 몸이 떨립니다. 그것은 몸의 기능이나 힘이 떨어졌

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활신앙이 허약하기 때문입니다. 죽

을까봐 떨고 망할까봐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만 확실하

면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했고, 8:38-39을

보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

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를 우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그 어떤 내적 갈등이나 외적 억압이나 영향에도 자기 믿

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위대한 고백이 가

능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시 사는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데 죽음이 겁날리 없고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주시는 주

님이 계시는데 걱정될 리 없고, 우겨사임을 받고 핍박을 받아도 힘주시고

지키시고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바울은 본문에서 너희도 그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집이 흔들리면 무너집니다. 나무가 흔들리면 뿌리가

뽑힙니다. 신앙이 흔들리면 그 영혼이 침몰합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맙

시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은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힘을 얻고 주

님과 교회를 위해 힘써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부할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

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따르고 좇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으로 끝

이 났다면 충성을 바쳐 따르고 섬길 대상이 없어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

고 더 이상 예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들의 절망은 순간으로 끝났습니다. 새로운 희망과 감격

과 충성의 대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1914년 당시 정동교회는 미화로 200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빚은 1893년에 시작한 교회 건축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은 빚을 갚기 위해 헌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날 걷힌

헌금은 50달러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교인은 이화학당 학생이 많았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학생들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바치기로 의논하고 주일저녁

교회에 다시 모였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찬송을 부른 후 한사람 씩 나와 가

진 것을 바쳤습니다. 동전 17달러 정도, 반지 35개, 손거울, 자명종 2개,

양먈, 내의,구두,혼수감으로 어머니가 주신 붉은 명주도 있었습니다. 어떤

여학생은 댕기머리를 잘라서 주님께 드린다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날 그 교

회의 빚은 해결되었습니다.

빚바랜 이화여대 학생들의 요즘 세태에 비기면 고전소설 같은 이야기입니

다.

누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습니까?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누

가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라서 드릴 수 있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한평생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교회 섬기고 직분 감당

하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나

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오 주여,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4

제목 : 자아관리에 최선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4월 09일

미국 [노테데임 대학교]의 철학과 교수인 톰 모리스(Tom Morris)는 성공에

는 5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1) 목표를 분명히 하라.

(2) 당신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찾아라.

(3) 집요한 끈기로 자신의 포부를 실천에 옮겨라.

(4) 전심전력을 다하라.

(5) 목표를 다시 점검하고 새롭게 하라고 했습니다.

[놀만 빈센 필] 박사는 "실패자처럼 생각하면 실패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성공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생과 신

앙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톰 모리스 교수나 빈센 필 박사의 얘기들은 결국 자신을 어떻게 다스리느

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잠언 16:32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

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탈무드를 보면 "가장 힘센 자가 누구냐, 자기를 이기는 자다"라고 했습니

다.

미국 캔터키감리교회 담임목사였던 데이빗 씨맨즈(David Seamands)박사는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을 치료받기 위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1)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2) 고침받기를 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3) 어떤 문제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4) 문제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5) 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6)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성령

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씨맨즈 박사 역시 문제 해결의 당사자는 자신이며 기도가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타락사건 이후 인간은 자신이 져야할 책임을 그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버릇에 익숙해졌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떠넘기고, 하와는 뱀에게 떠넘겼던 그 나쁜 습성이 지금

우리들 속에서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찌기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고 요즈음 사람들은 "주제를 파악하라"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알고 자아를 통찰하

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교회 목사였던 조웽(Jowett)은 사람은 두

개의 자로 자신을 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자는 자아의 죽음(Life for Chris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내가 죽는 것,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부정이

며 바른 삶의 등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 자아관리의 방향을 발견하게 됩니다.

1. 감정관리입니다.

32절을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라고 했습니다. 바다

에 파도가 있고, 전파에 주파가 있는 것처럼 감정에도 기복이 있습니다. 마

치 날씨처럼 흐렸다. 갰다를 반복합니다.

클라이드 네레모어(Clyde M Narramore) 박사는 "인간의 신체적조건

(Physical)과 정서적 조건(Emotional),그리고 영적조건(Spiritual) 은 상호

간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했습니다.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고, 기도하기

도 힘들어갑니다. 그 영혼이 탈진상태에 빠지면 정신도, 육체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체, 정서, 영혼은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성을 내는 것 역시 그 원인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성내기를 잘하는 원인으로서는,

(1) 습관성 원인, (2) 정서불안의 원인, (3) 외적 충동에 의한 원인,

(4) 물리적 자극에 의한 원인 등이 있습니다.

화를 자꾸내는 버릇에 익숙해지면 반복해서 화를 내게 됩니다.

심지어 좋은 일도 화를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투나 행동 표현이

화를 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게

됩니다.

성내는 것은 그 원인보다 결과가 더 무섭습니다. 라틴어를 잘 모르는 사람

이 라틴어로 학술토론하는 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친구가 물었습니

다. "자네는 라틴어를 알아 들을 수 있는가?" 그러자 그는 "알아듣지 못하

네. 그렇지만 누가 토론에서 밀리고 있는가 하는 것은 잘 알고 있네"

"어떻게 그것을 안단 말인가?"라고 묻자 그는 "먼저 화를 내는 사람이 밀

리는 사람 아니겠나"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자가 먼저 화를 내는 법은 없습니다. 믿음 좋은사람은 벌컥벌컥 화를 내

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 모든 피가 역류합니다. 그래서 혈압이 상승작용을 하게 됩

니다. 화낼 때 얼굴이 뻘겋게 상기되는 것은 혈압의 상승작용 때문입니다.

화를 내면 모든 신경조직에 비상이 걸립니다. 위벽이 긴장을 하고, 위액분

비가 중단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영적 헛점이 생기게 됩니다. 영적 헛점은

마귀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해지도록 분을 품

지 말라"고 했습니다.

밀턴은 "자신을 통제하며 자기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공포를 다스리는 사

람은 한 나라의 왕보다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상담학자인 로렌스 크랩(Lawrence J.Crab)박사는 나쁜 감정을 유발

하는 네 가지 원인을 밝혔습니다.

첫째, 나쁜 행동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바르게 행동하라.

둘째, 나쁜 목표가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의 방향을 수정하라.

셋째, 나쁜 생각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생각하라.

넷째, 나쁜 신앙이 나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신령한 생활을 힘쓰라고 했습니다.

내가 올바로 나 자신을 관리하려면 나 자신의 감정을 바로 관리해야 합니

다. 로렌스 크랩 박사의 말처럼 나쁜 감정을 올바른 행동과 목표와 생각과

신앙을 가질 때 통제되고 조절되는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백입니다만 이유와 원인이 무엇이건 화를 내고 난 다음 시간

이 지나면 저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워 집니다.

일생동안 저 자신이 자신의 감정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그 순간을 참고 넘깁니다.

둘째, 감정유발의 책임을 나한테서 찾아냅니다.

셋째, 빨리 그 사건을 잊어버립니다.

넷째, 기도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은 천하를 다스리는 용사보다 위대한 사람입

니다.

2. 마음관리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50대 중년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설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검사를 해보자며 위검사를 했습니다. 결과는 위에 암세포가

있는 것 같다면 3일후 종합검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날 그 시간부터 위가

쓰리고, 열이 오르고, 사지의 힘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죽도 소화가 안됩니

다. 몇달 안에 암이 퍼져 죽을 것 같습니다. 지옥같은 3일이 지난 후 초췌

한 모습으로 병원에 찾아가 종합검사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후에 결과가 나

왔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간부터 위도 안쑤시고, 열

도 오르지 않고, 기분이 날아갈 듯 하더랍니다.

그것은 마음 곧 정신작용의 결과였습니다. 마음은 그만큼 그 사람의 정서

와 감정과 행동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규태씨의 한국인의 건강관리이라는 에세이를 보면 옛부터 한국인은 심인

설을 중요시했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원인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

다.

건강을 해치는 다섯가지 요인을 양생오난이라고 하는데

一難은 명성이나 재물을 구하는 마음을 멸할 수 없는 것.

二難은 기쁘고 노여움을 제할 수 없는 것.

三難은 노래와 여색을 거절할 수 없는 것.

四難은 맛있고 살찐 음식을 거절 못하는 것.

五難은 근심걱정을 없앨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양생법(건강법)은 마음을 곱고 편하게 갖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관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3. 신앙관리입니다.

33절을 보면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잠언 29:26을 보면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

니다.

시편 127:1을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

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진리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

앙입니다.

제아무리 높은 빌딩이라도 그리고 제아무리 최고의 실내장식으로 꾸민 건

물이라도 기초가 흔들려 무너지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몸이 건강하고 돈을 많이 벌고 정신적으로 튼튼하다고

해도 영혼이 흔들리면 그 인생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유는

영혼이 인간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매년 과로사로 생명을 잃는 사람이 3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고도반응의 사람들 - 민감한 반응의 사람들이며, 고독한 사람들이

며, 까다로운 성미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를 덜 받느냐인데 그것은 느긋한 마음으로 운

동을 즐기고 생활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느긋한 마음은 신앙으로만 가능합니다.

스탠포드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인 케네스 펠레티어박사는 크게 성공한 남녀

51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는가를 연구했습니다. 그 가

운데 제일 많은 것이 기도를 한다는 것이었고, 다음이 정신이나 신체활동을

제어하는 생체자기제어(Biofeedback)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형상을 마음

에 떠올리는 심상화(Visualization)등이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사는 방

법 역시 기도가 제일이라는 과학적 증명은 신앙의 힘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체와 같기 때문에 관리를 잘 하면 살고 활성화되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시들고 죽게 됩니다.

내 신앙이 죽지 않고 산 믿음이 되려면

첫째,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떨어지거나 떠나면 죽

습니다.

둘째, 때를 따라 말씀으로 영양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영적 건강 상태를 수시로 점검해야 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만이 건강한 교회와 사회와 국가를 만들수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아를 관리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감정과 마음과 신앙을 철저히 관리합시다. 아멘.

5

제목 : 은혜로 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마른 땅을 적시는 여름날의

소낙비와 같다"고 했습니다. 만일 여름철 소낙비가 없다면 대지도, 초목도,

사람도 메말라 시들고 말 것입니다.

어떤 날 페르시아의 고레스(Kyros)황제가 친구 중 한 사람에게는 금메달을

걸어주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금메달을 받은 사

람은 키스를 받은 사가을 몹씨 부러워했습니다. 이유는 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에게 키스를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는 것도 나쁠 것은

없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총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총애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 하나만으로도

일평생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4:32-37은 은혜받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소개해 줍니다. 그 모습

은 이상적 교회상이며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 내용을 구

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1.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4:32를 보면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라며 살고 있

는 부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년 사이 이혼율이 5배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1970년도

말에 3만쌍이었던 것이 1993년에는 8만쌍으로 증가했습니다. 이혼의 사유는

부정행위, 학대, 직계존배속 학대, 악의에 찬 유기 등이 대부분입니다. 그

리고 이혼율은 매년 가속되고, 증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부도 한 마음,

한 뜻이 되기가 어렵다는 실증인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의 함께 은혜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감정, 의지, 사상, 생각이 집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부부가 하나되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은혜

를 받아야 합니다. 오순절사건 이전의 그들은 저마다 각각 놀던 사람들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난 이후부터 마음과 뜻이 하나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세가지 안목이 열립니다.

첫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죄인이었던 나, 허물많은 나, 쓸모없는 나, 연약한 나를 제대로 보게 됩니

다. 그리고 주의 은혜로 거듭난 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웃을 보게 됩니다.

이웃을 보면서 사랑을 나누고 통찰력있는 교제를 시작하게 됩니다.

셋째,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은혜를 못받으면 선악

과가 보이고 벌거벗은 수치가 보이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가다오까(KATAOKA)]를 중의원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는

네 차례나 일본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불신자였습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던 어느날 안

개낀 철길을 건너다 기차에 치어 공중으로 튕겨 올랐습니다. 수십미터를 날

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밭이었습니다. 그날

그는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 나를 모래밭에 떨어져 살게 했을까

를 생각하다가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친데도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모래밭에 꿇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발로 교회를 찾아가 예술르 믿기 시작했고, 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와 정치에 투신 중의원 의장을 네번씩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고 문간에 서서 들어오는 교

인들의 신발(게다)을 정리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리고 매 월말이면

자신이 직접 [아오끼] 목사님께 드리는 생활비를 봉투에 담고 리본을 매어

찾아와 무릎꿇고 드렸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산증거인 것입니다.

산산조각난 부부가 하나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회사가 잘 되려면

사장도, 사원도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교회가 잘 되려면 목사도, 교인도

함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은 은혜받고,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될 때 가능해집니다.

2. 나누는 삶을 살게 됩니다.

32절을 보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서로 통용했다는 것과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누는 삶이 가능합니다. 그리

고 헛된 욕심이 사라집니다. 소유는 전투적 과정과 절차를 거쳐서 이루어집

니다. 그러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

습니다(약1:15).

사람은 나이가 들면 하루에 뇌세포가 10만개씩 소멸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의력도 기억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월남전 당시 미군 포로들은 지옥같은 수용소에서 별로 할 일이 없었습니

다. 그때 그들은 둘러 앉아 성경구절을 암송하고 담뱃재로 만든 잉크로 성

경을 써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한 포로들은 모두가 기억력과 건

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인 물을 썩는 것처럼, 돈벌어서 나만 쓰고 나만 먹었던 부자는 한결같이

당대로 망했습니다. 그러나 나누며 산 부자들은 대를 이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의 경우는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참

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저희 교회는 세례문답할 때 십일조 여부를 반드시 묻습니다. 부부가 함께

세례를 받는 경우에도 부부에게 따로 질문을 합니다. "십일조를 하는가,언

제부터 할 것인가"라고 십일조의 경우도 부부가 함께 은혜를 받아야 가능하

기 때문입니다.

부인은 하자는데 남편이 반대를 한다든지 부인은 교회가자는데, 남편은 놀

라가자면 신앙생활이 고달퍼집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나누는 삶을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고, 구경꾼도 없었고

빠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모두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8을 보면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

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

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의 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넘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은 넘치도록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 만큼 나눠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눌 때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강하게 됩니다.

딤후 2:1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은혜를 받은 사람과 나누는 사람과 은혜안에 사는 사람

은 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는 자가 강하고,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부

자입니다.

둘째, 성장합니다.

베드로후서 3:18을 보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믿음과

지식이 자라갑니다. 은헤를 받아야 교회도 성장하고 회사도 기업도 직장도

자랍니다.

셋째, 더욱 풍성해 집니다.

나누면 작아지고 줄어든다고 믿는 것은 세상 경제원리입니다.그러나 나눌

수록 커지고 많아진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경제원리입니다.

경기침체와 불황으로 전 세계가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미국경제

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위해 이유야 어떻든 나누

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바로 그 나누는 정신과 신앙 때문에 미국이 복을 받

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대로인 것

입니다.

사도행전 5장으로 건너가면 나누기를 주저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아나

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 최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부부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베드로를 속이고 성령을 속여려 하다가 한날 함께 죽었습니

다.

칼빈은 아나니아의 죄를 여섯가지로 지적했습니다.

(1)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 (2) 성물을 거짓으로 바친 죄,(3) 허영심으로

바친 죄,(4) 거룩한 교회에 오점을 남긴 죄,(5) 불신앙의 죄,(6)외식의 죄

등입니다.

아무리 내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물질

도, 시간도 재능도 함께 드리기로 한 것은 반드시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를 부활을 증거합니다.

33절을 보면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여기서 부활을 증거한 사건과 큰 은혜가 동시적이었다는 점을 주목해

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이 증거되는 곳에는 큰 은혜가 넘친다는 뜻도 되고 큰

은혜가 넘치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왜 받아야 합니까?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초대교회 사도들은 큰 은혜를 받고난 후에 큰 소리로 예수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받고 예수의 부활을 전파했습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식도락입니다. 그러나 힘을 얻기 위해

음식을 먹고 일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음미하기 위해 은혜를 받는 것은 영적 사치입니다.

은헤는 예수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연쇄

적으로 일어난 사건들,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도시가스 폭발사

건, 세금 포탈사건 등은 한강의 기적과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경우

는 라인강의 기적은 있었지만 우리나라 같은 패륜적이고 반사회적인 사건은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급걱한 사회변동에 대처할 올바

른 가최관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종교분포를 보면 기독교 25%,불교25%(물론 생전절에 한번도 안

가는 사람을 포함해), 유교, 무종교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매년 무당조

합에 연회비를 내는 무당만도 5만여명이 됩니다. 그리고 소위 유형문화재라

고 해서 나라돈으로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들 가운데 80%가 불교사찰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방향도 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패륜도, 사치도,무법

도, 사고도 세계 제일이라고 합니다.

서울대학의 윤이흠 교수는 절대가치를 이 민족과 사회 앞에 제시할 사회적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정치권도 아니다. 대학도 아니다.무당도 아니

다. 종교 아니다. 바로 개신교다"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기독교만 유일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신앙이나 잡신앙

을 가진 종교는 유일한 가치나 진리를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생명을 믿습니다. 부활이 뭡니까?

다시 산다. 죽어도 다시 산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

다.

희망의 종교라야 희망을 줄 수 있고 생명의 종교라야 생명을 줄 수 있고,

부활의 종교라야 부활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길 막고 이 민족이 사는 길은 없습니다.

비내리는 땅은 푸른 초원, 녹음방초로 우거지고 비내리지 않는 땅은 사막

과 황토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은혜받은 나라, 교회, 가정이라야 푸르르고

기름지고 잘 살게 됩니다. 은혜로 삽시다.

7

제목 : 한인교회협 정기총회

자료원 : 한국컴퓨터선교회

발행일 : 95년 06월 29일

미장로교산하 한인교회협의회는 오는 8월 1일-4일까지 소망수양관에서 통

일기원대회 및 정기대회를 개최한다.

[자유를 공포하라]라는 주제아래 열릴 이번 대회는 한인교회협의회 소속

목회자 수백명이 참가한다.

이 대회에는 곽선희, 박종순목사, 송영대 장로(통일원차관)가 강사로 참

석, 교회 및 정부의 관심사에 대해 강연한다.

8

제목 : 은혜와 삶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3월 26일

은혜와 은혜 아닌 것, 은혜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

이도 없다면 구태여 은혤르 논할 필요도 없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치

가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으며 은혜를 받으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은혜 베풀 때 너를 도

왔다","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라고 말씀하면서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도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은헤를 강조했습니다만 그 가운데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강조했습니다. 이유는 바울 자신이 풍성한 은혜

의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깨달은 사람과 체험한 사람들이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은혜는 올바로 받아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

의 은헤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하여 권면

하는 자신의 위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

는 것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이 권면은 바울의 개인적 충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설교듣는 사람들이 지녀야 될 태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

님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케 합

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순종

해야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편식방법과 태도로는 은헤받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 뜻은 은헤의 가치를 알고 소중하게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금은보석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헤를 잘못 받으면

그 삶에 아무런 변화도 갱신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전통과 문화를 지켜 나왔기 때문에 유교적

윤리와 도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유교윤리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삼강오륜]이 그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모와

자식, 윗사람과 아랫사람, 부부간의 윤리가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높이

고 순종하는 것이 성경의 명령이고 동양윤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94년도에는 유학갔던 아들이 돌아와 돈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한 사

건으로 온 세상에 충격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 강단에서 학생

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버지를 살해함으로 더 큰 사회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일부 언론은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은 더 큰 충격

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정말 기독교인이었다면 은혜를 체험

하고 거듭난 신자였다면 그런 일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1,200만-1,500만이라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은혜를 모르고

교회만 들락거리는 사람들 속에는 도둑놈, 소매치기, 살인자, 불한당, 이중

생활하는 자, 그리고 어쩌면 살의를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들도 은혜를 제대로 받기만 하면 거듭나고 새사람되고 회개하

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니라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소프라노 성악가 김영미씨의 얘기는 감동적인

것입니다.

미국 L.A 에 있는 나성한인교회 김의환 목사님이 김영미씨에게 주일 2시

예배에 와서 성가연주회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교회

는 저녁예배가 없거나 2시에 드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김영미씨의 대답은 주일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L.A에

있는 제퍼슨 감리교회 성가대원인데 성가대원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빠질 수

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받은 사람만 가능한 감동적 이야기입니다.

김영미씨의 성공은 그녀 자신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만 그러나 주님

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그의 신앙과 책임감 때문이었으며 그것을 보신 하

나님께서 그녀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저는 이 말 뜻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에게 자주 물었습니

다. "엄마 어떻게 엉덩이에 뿔이 나?"라고 그때마다 제 어머님은'크면 알게

된다"라고 하셨고 "까불지 말라는 뜻이란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어머님의 대답은 명답이었습니다. 철들고 세상을 알면

서 그 뜻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뜻이 때론 떠오릅니다. 엉덩이에 뿔

나는 법은 없습니다. 뿔은 이마에 납니다.

만일 엉덩이에 뿔이 난다면 그것은 기형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장애물

이 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거나 잘못 받으면 기형아가 됩니다. 그리고 자

신의 삶을 망가뜨립니다.

서울시내 모 큰 교회 정문입구에는 그 교회가 꼭 사서 넣어야 할 건물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도 땅이 비좁거니와 그 땅을 사서 넣어야 교

회 전경도 드러나고 출입도 자유로워지는 건물입니다. 큰 교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돈도 있습니다. 문제는 건물임자가 땅을 내놓지 않는 것입니

다. 그런데 어느 해 그 건물을 팔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긴급히 당회

를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결사반대를 합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유

를 들이대면서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그 교

회는 그 건물을 사지 못했습니다. 그후 그 장로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

렸습니다. 들은 바대로는 그 분은 지금 미국에서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반

대했는지 모르겠다"며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고집은 다릅니다. 내 고집을 강조하는 사람은 은혜받은 사람이 아

닙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주관과 고집과 죄악과 악습을 십자가에

못박고 꺽어 버립니다.

다른 얘기 하나를 더 하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모 큰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바로 뒷편에 붙어 잇는 500평 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성장이

나 미래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매입해야 하는 땅입니다.

15년전 어느 날 평당 100만원에 팔겠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당회를 모였습

니다. 땅이 너무 비싸다며 한 사람이 한사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포기했습

니다. 7년이 지난후 5억에 팔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모였습니다만

반대하던 그 사람 때문에 부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어느날 50억에 팔겠다는 연락을 받고 14년만에 50억에 샀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고집부렸던 그 사람은 교회에 세 가지 큰 손해를 주었

습니다.

첫째, 49억 5천만원의 손해를 주었습니다. 첫번 기회에 반대를 안했다면 5

천만원에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성장을 14년 정지시켰습니다.

셋째, 긍정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일하려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신앙적 상

처를 주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바로 받으면 태도가 달라지고 삶이 달라지

고 신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헛되

이 받으면 다른 삼과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울왕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되

었습니다. 그는 은혜받고 예언을 하는가 하면 나라 정치를 잘했습니다. 그

러나 그 은혜를 제대로 간직하지 못하고 헛되이 여기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외면하고 교만하기 시작하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하나

님이 그를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뻔했습니다. 자신도 그의 왕가도

몰락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그리고 바로 받아야 합니다. 부천의 영생교, 일본의

오음진리교, 그들이 표방한 것은 영생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

을 주저하지 않는 비영생, 비진리 집단이었습니다.

여러분, 부모도, 자식도,남편도, 아내도,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은혜를 받아 합니다.

2. 지금 받아야 합니다.

2절 끝을 보면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보라"는 것은 은혜의 공개성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은혜 자체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란 숨쉬는 그 순간, 살아있는 이 찰라를 의미합니다. 이 순간. 이

찰라, 맥박이 뛰고 심장이 고동치고 손발이 움직이고 두 눈이 껌벅거리고

있는 이 순간이 지금입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에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다

분히 종말적 긴박성이 강조되는 시간인 것입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다음으로 미루면 안됩니다. 은혜를 덱토스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입증된"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입증된 사건입니다. 두 번다시 그 효과를 물

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카이로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유쾌하다,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유쾌하고 행복합니다. 본문은 은혜와

구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은혜의 결과를 구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은혜받아야 행복하고 유

쾌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더 이상 은혜를 미루고 소홀히 취급할 생각입니까>

스코틀랜드에서 목회하던 어스킨(Erskine) 목사의 설교를 들은 스칼렛 부

인이 그 날 큰 은혜를 받고 깊은 감동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일 그녀는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들엇으나 은혜를 받지 못받았습니다. 스칼

렛은 목사님을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어스킨의 댈바은 "지난 주에는

당신이 예수를 만나려고 왔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를 받았지만 오늘은 나를

보려고 왔기 때문에 은헤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출처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은헤를 주는 것입니

다.

지금 은혜받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내일도 내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은혜를 받읍시다.

9

제목 : 우울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3월 19일

시편 61편은 다윗이 B.C 979년 경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

나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을 때 쓴 것으로 보는 비탄시입니다(삼하15:17).

다윗은 자신의 비통한 심정과 정황을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끝

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표현했습니다.

2절에서 말한 "눌리다"라는 말의 뜻은 "상하다. 다치다"라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다윗은 아들의 반역 때문에 마음이 상할대로 상했고 다칠대로 다쳤

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에 쌓여 있어 답답하

고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원인은 각각 다릅니다만 모든 사람은 그 어떤 이유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초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가정주부가 이웃집에 놀러가 그 집 아이들을 아파트에서 떨어 뜨

리고 자신도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원인은 그사람이 우울증을 앓

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윌 스트리트 저널]지의 보도에 의하면 월가에서 가장

가까운 뉴욕병원은 최근 가슴통증과 심장발작환자들의 급증으로 응급실을

추가로 설치해야될 형편이라고 합니다. 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월

가의 금융기관 종사자들로 주가의 등락, 환율변동 등으로 인해 긴장과 스트

레스가 겹치는데다 불규칙한 식사와 흡연등으로 심장발작을 일으킨다는 것

입니다.

뉴욕병원의 심장전문의인 이라 슐먼 박사는 "인구 1천명당 심장발작 비율

이 윌가가 가장 높다"고 했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현대인의 40%는

정신질환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열 명중 네명은 정신질환에 걸

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에 비해 여자가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이 3배나 높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정서적으로 소극적이며 수용적이며

긴장해소의 기회가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여성복싱이 유행하는가 하면 한국에서도 여성검도 인구

가 늘어나고 각종 레저시설마다 여성 이용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것은 한마디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자구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 바이올라 대학의 심리학교수 클라이드 네데모어(Clyde M.Narrnmore)

박사는 우울증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1) 어린시절 부모로부터 거부를 받은 경험(parental rejection)이 있을때

(2) 부모의 지나친 비판이나 간섭(overly-critical parents)을 받은 경험

이 있을 때.

(3) 부모의 잔인한 행동(cruel parent behavior)을 경험했을 때

(4) 무의식적인 적대감정(unconsicous feelings of hostility)이 있을때.

(5) 과거의 외상적 체험(traumatic experience)이 있을 때

(6) 본능적인 충동(instinctual drives)과 사회적인 요구(demends of

society)사이의 갈등이 있을때.

(7) 근심과 무가치감이 있을 때.

(8) 강한 죄의식이 있을 때.

브리시터(C.W.Brister)교수는 우울증의 원인을 "사회가치의 혼란, 정통문

화의 붕괴, 실존적 무법현상 때문에 젊은이들 세게에 급속히 번져가고 있

다"고 했습니다.

욥은 욥기 7:3이하에서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

게 작정되었구나.. 새벽까지 이리뒤척 저리뒤척 하는구나"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본문은 2절에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라고 탄식했습니다. 한 마디

로 욥이나 다윗도 자신들의 우울한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영국의 명재상 처칠경은 세계 2차대전 당시 위기에 빠진 연합군과 영국 젊

은이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명언으로 도전했습니다. 그러

나 그도 일생동안 우울증으로 시달렸고 베토벤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합

닐. 그러니까 우울증은 동서양 모든 사람과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치료방법입니다. 전문가들의 견해와 다윗의 고백 속

에서 그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1. 먼저 잘못 선택한 방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근심이나 걱정,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극성 있는 음료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행위는 우

울증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1992년 11월 들소의 항체를 연구하던 존 폴리 박사는 흡연자와 페암환자의

페조직을 현미경으로 비교조사했습니다.폴리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실 경우 담배필터의 미세한 입자들이 잘게 쪼개지면서 폐속으

로 들어가 최소한 수개월 동안 길게는 평생 동안 잠복한다는 것입니다.

92년도 샌프란시코의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발간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커

피는 불면증, 카페인 중독,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스트레스와 불안

증세를 유발시킨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매년 6천명의 생후 6개월된 신생아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부모가 피우는 담배 때문입니다. 건강하게 태어난 생후 1년만의 아

기가 갑자기 숨지는 것을 유아급사증후군(sids) 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간접

흡연이 주원인이라고 힐러리 클로노프 박사가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읍주, 흡연, 약물복용 등은 우울증 해결에 도움이 안됩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특히 유아들에겐 독약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을 해결하기 위해 불건전한 오락이나 레저에 빠지기

도 합니다. 예를들면 도박이나 불건한 모임에 빠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방법이 건전해야 결과도 건전합니

다.

2. 올바른 치료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 건강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근심걱정에 푹빠진 사람들이나 우울증에 시다릴는 사람들끼리 모이고 만나

면 그곳은 우울증 환자 수용소가 되고 말 것입니다.

환자는 명의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우울증 환자는 건강한 생각과 삶을 사

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건강하고 건전한 삶의 이야기들

을 듣고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상담학에서는 상담요법이라고 부릅니다.

우울증뿐만이 아니고 인생살이도 신앙도 좋은 이웃과 바른 안내자를 만나야

합니다. 인도자나 안내자를 잘못 만나면 둘 다 불행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것을 가리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웅덩이에 빠진다"고

표현했습니다. 늘 한숨짓고 탄식하는 사람, 부정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

걸핏하면 절망하고 죽음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대하면 우울증상

은 더 심각해지고 맙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

들을 만나야 합니다.

2) 건강한 활동을 해야 합니다.

우선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보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도 할

일이 있고 해야될 일이 있다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리 내가 살고 있고

해야될 일이 있다는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돌

려야 합니다.

그들은 병들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걷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

고 볼 수 없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상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한 채 6개월-1년씩 신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베

풀고 나눠주고 베푸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나

간 일을 일삼아 되새기고 불행했거나 힘들었던 과거를 되살릴 필요가 없습

니다. 가치있는 일을 위해 손을 펴고 봉사를 시작하십시오. 남을 섬기고 돕

는 일을 찾아서 시작하십시오.

3) 기도로 치유해야 합니다.

다윗은 본문 61:1에서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라고 했고 2절에서는 내

마음이 눌릴 때 땅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비록 내가 되돌아 올 수 없는 땅끝 벼랑으로 밀려 났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주님을 향해 부르짖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라는 복음성가는 우리에게 용기와 믿음을 줍니다. 우리는 1-2절에서 기억

애햐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과 땅끝에서라도 부

르짖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높은 바위 위에 인도하실 줄로 믿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소리내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

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땅끝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절망과 좌절과 우울의

벼랑에서도 기도한다는 것을 뜻하고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나를 높은

바위 위로 끌어 올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를 근심과 걱정과 우울증의 심면에서 끌어 올려 주신다는 것입

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큰 소리로 소리 높여 기도합시다.

4) 주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라고 했고

4절을 보면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

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피난처,망대,날개'라고 노래합니다.

이 셋은 모두가 보호수단입니다.그리고 4절을 보면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

에 거하며"라고 했습니다. 주의 장막은 성막(Tabernacle)을 말합니다. 성막

은 하나님이 계시는 처소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막에 피하여 머문

다면 무슨 걱정이 있으며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피난처, 망대, 날개, 장막으로 믿고 의뢰했던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기고 압살롬에게 쫓기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거나 자신을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피할 곳이 있고 바라볼 곳이 있고 숨을 곳이 있고 영원히 머물 장막이 있

는 사람이 무엇때문에 우울한 삶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

을 절대로 의지한다면 모든 정신적 고통은 사라지고 말것입니다. 성경은 인

간의 성공,건강, 행복만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고난,역경, 불안,실패, 사건, 위기상황 등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해결하시고 처리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기

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위기상황이나 절망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누구

라도 불안이나 걱정으로 인한 우울증 증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믿으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것들을 극복할 수도 있고 무릎을 꿇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약물치료법이나 상담요법도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정신이 조절하고, 정신

은 영혼이 통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영혼은

신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혼이 바로 서면 정신도 바로 서고 육체도 바로 서게 됩니다. 영혼이 건

강하면 정신도 육체도 바른 리듬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방법보다

믿음의 방법이 가장 위대하고 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 망대,날개, 장막이심을 믿읍시다. 그리고 날마다 고백합시다.

10

제목 : 향과 기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3월 12일

요한계시록에는 3대 재앙이 예고되어 있는데 그것은 일곱인의 재앙. 일곱

나팔의 재앙, 일곱대접의 재앙입니다. 인을 뗄 때마다 사건이 터지고 나팔

을 불때마다 재앙이 임하고 대접을 쏟을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임

하는 모습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8장은 일곱번째 인을 떼었을 때 일어난 사건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천사가 금향로에 많은 향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데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드리며 그 향과 기도가 하나님 앞으로 올라 갔다는 것입니다. 향과 기도가

함께 하나님께 올라 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1. 향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드는가?

1) 구약의 경우

구약의 경우 향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향으로 주

로 화장용이나 선물용으로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향으로 그것은 제조방법이나 사용방법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0:22이하를 보면 향 만드는 법이 나와 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

습니다.

첫째, 최고의 향재료를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여러 가지 향 소합, 나감, 풍자 등 최고급 향을 배합하되 동일한 양

으로 해야 합니다.

셋째, 소금을 넣어야 합니다(다른 것은 첨가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시간도,인생

도, 물질도 다 쓰고 남은 찌꺼기를 드리면 안됩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 해

거둔 첫 수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나랏님께 진상을 했습니다.

어느 농부는 매년 제일 빨리 거둔 쌀을 대통령께 바친다면 청와대로 가져

온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게 드리는 향을 최고의 것이어야 했던 것처럼 기

도의 시간도 제일 좋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건축자재는 최고 최상품이었습니다. 금은 오빌

에서 수입한 정금이었고 나무는 그 향이 은은한 레바논의 백향목이었고 둘

은 석질이 가장좋은 예루살렘 근교의 것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언제나 최상품이어야 합니다. 최고의 향품을 일정량으로 배합하

겠다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가 좋다면서 살립도 안하고 성경도 읽지 않고 교회도 안

나오고 사람도 안만나고 기도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은혜를 받고나면 평소 싫었던 사람이 좋아져야 합

니다. 멀리하던 사람이 가까와집니다. 지옥처럼 느껴졌던 가정이나 세상이

할 일 많은 일터가 됩니다. 귀찮던 일들이 즐거워지고 멀어졌떤 교회가 사

랑스러워지고 힘없던 신앙생활에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세 가지 향을 동일한 중수로 배합했던 것처럼 기도생활은 조화와 균형을

잃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가정주부의 경우 "하나님 아버지!"도 잘 불러

야 하지만 "여보!"고 잘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생활이란 외골수로 빠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소금을 쳤다는 것입니다.소금을 치면 세가지 현상이 벌어

집니다.

하나는, 순이 죽게 됩니다.

배추도 생선도 소금을 치면 순해집니다. 자칫 기도생활이나 영적체험에 깊

이 빠지다 보면 팔딱 거리고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거기다 소금을 쳐야 합

니다.

둘은, 맛이 납니다.

제아무리 설렁탕,곰탕,삼계탕이 진국이라도 소금을 치지 않으면 맛이 없습

니다. 제아무리 열심이고 기도를 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아도 그것 때문에

맛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맛없는 음식은 따돌림을 받습니다. 소금치지 않는 기도생활이나 신앙생활

은 이웃이나 교회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소금치고 맛있는 사

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은,고칩니다.

열왕기하 2:19-22을 보면 여리고의 물근원에 문제가 있어 그 물로 농사를

지으면 곡식이 익기도 전에 떨어졌습니다. 엘리사가 어느날 물 근원(수원

지)소금을 던져 그 물을 치료했습니다. 내가 소금처럼 녹아 희생하면 가정

도, 교회도, 역사도 치료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치 소금이 녹아내리듯 십자가에 자신을 던졌기 때문

에 모든 인간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금은 그대로 있으면 안됩니다. 녹아야 소금입니다. 소금은 맛을 잃으면

안됩니다. 맛 잃은 소금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향은 그 사용방법도 일반향의 용도와 달랐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하나님을 위해 만든 향은 거룩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빈다.

예를 들어 자기몸에 바른다든지 화장실에 뿌리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기도

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신령한 문

제를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이사문제, 집 사는 문

제, 어디가는 문제, 누구만나는 문제,따위가 기도의 전체를 차지한다면 그

것은 육체를 위한 기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드리

는 신령한 기도를 수단이나 방법으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개인의 운명이나

점쳐주고 대소사를 밝혀주는 것으로 기도를 전락시켜선 안됩니다.

둘째, 아침 저역으로 분향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30:7-8을 보면 아침마다 아론이 분향했고 저녁 등불켤 때 다시

분향했습니다. 아침은 하루의 시작이고 저녁은 하루의 마감입니다. 그러니

까 분향으로 시작하고 분향으로 마치라는 것입니다. 분향은 기도입니다. 기

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내야 합니다. 만일 기도소리를 들으

며 태어나고 기도하며 살다가 기도로 숨을 거둘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행

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곧 삶이어야 합니다.

셋째, 제사장 외엔 분향하지 못했습니다.

역대상 23:13을 보면 아론과 그 자손들만 분향하되 그들도 몸을 성결케하

고 분향한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10:1-2을 보면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

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에 타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소멸되어

죽었습니다. 역대하 26:16-19을 보면 웃시야 왕이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영

역을 침범해 분향하려다가 나병에 걸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분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기도는 분향입니다. 헌신짝처럼 취급해도 안되고 그 필요성을 외면해도 안

됩니다.

2) 신약의 경우

크게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입니다. 본문에서 밝힌대로 향과 기도가 함께 금향로에 담겨

하나님께로 올라간다는 것은 곧 향이 기도임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향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받으시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

입니다. 그리고 금향로에 담는다는 것은 기도가 그만큼 귀한 것이기 때문입

니다.

둘은, 삶을 뜻합니다. 고린도후서 3:15을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

고 했고 3:14을 보면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탸내시는 하나님

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예수 향기를 날릴 수도 있고 악취가 날 수도

있습니다. 백합화는 바람이 불면 그 향이 널리 퍼집니다. 그리고 찢기면 더

향이 짙어집니다. 우리가 풍랑을 겪고 상처받고 찢길 때 그 사건이나 아픔

때문에 예수 향기가 널리 전파된다면 정말 좋은 향이 될 것입니다.

2. 향과 기도의 의미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향은 성도들의 기도이며 하나님께 올라가는 향연

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만든 향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고 다른 향은 섞어

만들어도 안됩니다. 그리고 그 향을 드리는 장소 다시 말하면 분향 장소는

성전이라야 합니다. 아무데서나 분향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정한 방법대

로 정한 사람이 정한 장소에서 해야 합니다. 왜 성전에서 분향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이 성전에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라고 했고 7:16을

보면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솔

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 때 주신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무소부내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을 처소로 삼으시고 그곳에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성전으로 나와야 합니다.

둘째, 성전에서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5을 보면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

니"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면 비를 내리고 재앙을 거두시고 죄를

사하시고 그 땅을 고쳐주신다고 했습니다.

얼마전 농수산부 직원들이 산에 올라가 돼지 대가리를 상에 올려놓고 넙죽

히 엎드려 절하며 비를 달라고 기우제를 지냈스빈다. 우선 세계화를 표방하

고 최첨단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국가 관리들이 돼지 대가기를 놓고 절하며

기우제를 지냈다는 그 발상이 기가 막혔습니다.

돼지 대가리 놓고 절하는 것이 세계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

습니다. 만일 그때 바로 혹은 그 다음날 비가 내렸다면 농수산부는 기우제

때문이라고 떠벌렸을 것이빈다. 제때에 비내리고 바람이 순하게 부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고 바람의 방향을 돌리

시는 것입니다. 미국도 일본도 과학의 힘으로 비오게 하고 태풍을 막고 땅

갈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셋째, 성전에 영원히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7:16을 보면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고 했습니

다. 잠깐 머물다보면 떠나는 곳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기 계시겠다는 것입

니다. 그러나 내가 사는 집을 언젠가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할 곳이빈다. 그

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론으로 본문 8:5을 주목해야 합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상달된 성도들의 기도 속에는 순교자의 피의 호소도 있었습니다.

고난받고 핍박받은 성도들의 탄원도 있었습니다. 그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

게서 드디어 응답으로 심판의 불을 쏟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는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됩니다. 문제는 기도해

야 하는데 안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되는데 안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

다. 기도하긴 하는데 의심하는 것 이것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향

을 드리듯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향을 바로 만들어야 하듯 기도를 바르게

합시다. 성전에서 분향해서 하듯 성전에 나와서 기도합시다. 향이 하나님께

올라가듯 내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을 믿고 기도합시다. 향은 향기로

운 것처럼 내 기도와 삶이 향기나는 것이 되게 합시다.

주여 기도를 받으소서.

11

제목 : 기도에 최선을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3월 05일

일반적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

에 이르게 하는 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다른 말로 성경을 부른다면 그

것은 [기도의 책]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요한계시록까지 기도

에 관한 이야기들과 기도의 사람들에 과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

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필요한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증거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시편은 거의가 다 기도시들로 엮어져 있습

니다. 시편 145편의 경우도 다윗이 을었던 찬송시로 되었습니다만 그 내용

을 보면 그의 간절한 고백과 간구가 전편을 흐르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을

보면 그의 간절한 고백과 간구가 전편을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

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어떤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는가를 설명

해 주고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내가 날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라고 했

습니다.

무디는 "기도란 내 사고와 목적으로 하나님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요 나

의 사고와 배려와 갈망을 하나님 편으로 끌어주어 그의 도안과 예정에 맞추

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기도의 자세와 응답받는 비결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간구하는 자에게 가가이 하십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

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18절 속에는 다음과

같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라는 말씀의 뜻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밝혀 줍니다. 기도의 대상설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입

니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은 기도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

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입니다.

둘은, 모든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특정인의 기도만 들으시거나 특정인에게만 응답이나 계시를 주시

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나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고 지시를 받

는다고 생각한다든지 하나님이 내 기도만 들으신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

람이 있다면 그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

한다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마치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 운명을 묻고

점치듯이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더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입으로 간구하는 자들과 자기 소리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

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시편 5:2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시편 5:2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

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고 했고, 시편5:3을 보면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66:17을 보면 "내가 내 입으

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내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내 입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모든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특정

인에게만 그 응답을 국한하여서는 하나님이 아니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은, 진실하게 간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한 간구란 과장이나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기도를 뜻합

니다. 현대인은 포장문화에 익숙해 있습니다. 쓰레기 종량제로 포장기피현

상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합니다만 시원찮은 상품도 고급포장으로 감싸 놓으

면 고가처럼 보이고 사람들도 겉치장만 화려하면 진면목은 어떻든 높이 평

가하는 세상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그런 따

위의 포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를 들면 고졸의 기도보다 대졸의 기도를 더 잘 들으신다든지 석사의 기

도보다 박사의 기도를 더 높이 평가하신다든지 월수입 100만원 보다는 1000

만원짜리의 기도를 더 잘 들으신다든지 하는 인간적 논리가 전혀 통하지 않

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진실과 간구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정직과

진실과 솔직한 모습과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헛기침을 할 필요도 없고 채색

옷으로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 유행어 가운데 [알몸표 수영복]이라는게 있다고 합니다.

적나라한 모습을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설때마다 "나는 알몸표 수용복을 입었습니다."라는

심정으로 서야합니다.

[간구]라는 말을 헬라어로 파라칼레라고 합니다. 그 뜻은 '가까이서 부르

다'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이는 가까운 사이입니다. 서로 허위가 있고 거짓이 있고 꾸밈이

있으면 사이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까이서 부르지 못하

는 것은 나에게 허위가 있고 감추고 싶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을

가리켜 무촌간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라는 뜻이빈다.

부부관계가 왜 가장 가까운 무촌간입니까? 그것은 서로 숨김이 없다는 것

입니다. 부부간에 숨기는 것이 많을수록 사랑은 반비례합니다.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그러나 그보다 더

적나라하게 만날 수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나와의 관

계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까이서 부르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만 가까이서 부르시기 위해 친히 이 땅 우리 곁에 오셨습니

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가까이 나와서 부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여기서 왜 우리가 때를 따라 교회에 나와야 하며 교회에 나와 기도해

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가능하면 교회에 나와 정한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건상 그것이 불그

낭하다면 시간을 정하고 교회가 있는 동부 이촌동을 바라보며 있는 곳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의 기도를 들어주신

다는 것을 믿고 기도합시다.

2.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 줍니다.

19절을 보면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

음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경외]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높이고 받드는 태도를 의미

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면서 창조주이십니다. 사랑이시면서 공의이십

니다. 부드러우시면서 강한 분이십니다. 용서하시면서 때리시는 분이십니

다. 부드러우시면서 강한 분이십니다. 용서하시면서 때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면만을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

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련의 저항작가 솔제니친이 미국에서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조국

소련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유는 조국을 버릴 수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가난하고 낙후된 조국 러시아이지만 자신의 조국을 인정했기 때

문에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고 돌아가야 할 하나님의 품은 러시아의 품이 아닙니

다. 미국의 품도 아닙니다. 영원히 안전하고 풍요로운 하나님의 품입니다.

그곳에 나의 행복이 있고 응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품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은 부르짖으면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풍랑으로 난파당한 선원들이 무인도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개

월째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취할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

니까? 지나가는 배가 스스로 알아서 우리를 구해주겠거니라며 앉아서 잡담

이나 나누고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왕 죽은 목숨 발버둥 칠 필

요가 있겠느냐며 포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길은

나무를 모아다가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고 옷을 벗어 높은대로 올라가 흔듦

도 죽을 히을 다해 소리를 질러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신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특권입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주님을 향해 부르짖고 두 눈을 떴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부르짖고 딸을 괴롭히던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어떤 과부는 부르짖고 자신

의 억울한 원한을 풀었습니다. 누가복음 18:7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지 못하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왜 부르짖어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

다.

둘째, 목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교만이나 자존심으로 목이 붓고 막히면 소

리지르지 못합니다.

셋째는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짖고 응답받고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소리높혀 하나님을 찾고 부르

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부르짖지 못합니다.

넷째,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으면 구원받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잇

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부르짖지 못합니다.

요즈음 연예인이나 가수를 따라 다니던 10대 오빠부대가 체육관으로 그 주

소를 옮겼스빈다. 농구나 배구 경기가 벌어지는 체육관은 온통 고래고래 소

리를 지르는 오빠부대들의 괴성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한때

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극성과 정열은 누구도 흉내낼 수가 없습니

다.

저는 이 괴성과 응원열기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들의 기도제사와 신앙열기

를 따져보곤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갖곤

합니다. 세상일 때문에 악을 쓴다든지 신경질 때문에 소리를 지른다든지 홧

김에 울부짖는 것은 창피스런 일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유익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은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힘써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3.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보호해 주십니다.

2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선한 사

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악인으로 대칭시키고 있음을 주목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보호하신다는 것도 주목해

야 합니다.하나님이 악인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까닭은 없습니다.

20절은 시편 145편의 결론입니다.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누구를 지키

시는가 누구를 보호해 주시는가 누구의 소원을 들어 주시는가에 대한 대답

이 20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도와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물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이 크면 물은 많이 담을 수 있지만 그릇이

작으면 물을 적게 담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많이 크게 하는 사람이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

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증오하고 반역하면서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는 시편145:20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사랑하면 보호해

주시고 악인은 멸하신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

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향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안해도 된다는 교

만이나 착각은 버립시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지속을 위해,고독한 사람은 그 고독의 극복을 위해,

병든 사람은 치유를 위해, 은혜받은 사람은 감사를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뜨거운 사랑의 고백을 위해 기도의 손을 높이 듭시다.

기도에 최선을 다하면서 최상의 응답이 임할 것입니다.

12

제목 : 주 밖에 없나이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년 02월 26일

시편 150편은 거의가 다 다윗의 저작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다른 사람

의 작품도 몇 편씩 끼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과 동시대의 인물로 보는

아삽이나 아굴 그리고 다윗와의 아들인 솔로몬 등의 시가 수록되어 있습니

다.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73편의 목적은 하늘과

땅 그 어느 곳에도 주와 같은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을 영원

히 찬양하며 경배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을 중심으로 아삽의 신앙과

고백을 찾아보겠습니다.

1. 오직 주님 한 분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25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

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동남아에서 잡신이 많은 나라가 일본입니다. 약 200만개의 잡신을 섬긴다

고 합니다. 그 다음이 중국이고 그 다음이 한국입니다. 아삽이 이 시를 을

고 노래를 불렸던 그 시대의 중동지방 역시 우상과 잡신이 들끊고 있었습니

다. 예를 들면 바알,아세라, 아스다롯, 몰렉등 사람들이 신격화하고 숭배하

는 우상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러한 주변의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유일

신이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이나 잡신에게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

황에서 아삽은 유일신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주

밖에 없으며 사모할 자가 없다"는 이 고백이야말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

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고백과 상통합니다.

주 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오직 한분이신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링

니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만으론 안됩니다. 그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

모한다는 것은 마음을 준다는 것이며 사랑의 대상으로 결정했다는 것입니

다.

찬송작가 프라이(C.W.FRY)는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

님은 아름다워라"고 노래했습니다.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은 "너는 남편을

사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 이후 서

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깨진 부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주님과의 간격을

떼도록 하기 위해 온갖 유혹과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서 다

오기도 하고 물질을 통해서 오기도 하고 명예를 통해서 오기도 하고 권력을

통해서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유혹과 시험이 갖는 공통점이 있습니

다.그것은 달콤하고 감미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이며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소근거립니다. 그러나 그 시험에 빠진 사람은 모두가 한결

같이 실패했거나 파멸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났

습니다. 가인은 질투와 시기 때무에 시험에 빠져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

다.

삼손은 블레셋 여자 들릴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두눈이 뽑히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의 유혹에 빠져 성령님을 속이려다가 한낱 한시

에 부부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복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다윗은 실수로 하나님을

외면하고 유혹에 빠졌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했을 때 하나님

이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내가 섬기고 사랑하고 사모할 분은 주님뿐임을 믿고 고백

합시다.

2. 인간의 육체는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며 분깃이라고 노래

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육체를 쇠잔하는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점점 약해지고 힘

이 없어지다가 결국 침상에 눕게 된다는 것은 전세계에서 매년 1,500만회

정도의 지진이 발생하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합니다. 그중 간진 (리히터

규모 6-9)이 100회 이상, 중진(4-6)이 1만5천회정도,나머지는 (1-4)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미진나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현대과학으로는 정확한 지진의

예측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물에서 거품이 끓어오르고 쥐가 쥐

구멍에서 기어나와 비틀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면하던 뱀들이 기어나와 길에

서 열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일반 칸사이지방의 대지진이 있기 전 동남해에선 이상하리만큼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고 중국에서는 금년들어 닭,돼지,쥐,고양이 등이 유별난 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유럽에서가는 외양간에 메어둔 황소가 하늘을 바라보고

유별나게 울면 지진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거북이떼가 떼지어 기어나면 지

진이 일어났따고 합니다.그러나 최첨단의 과학을 자랑하는 미국이나 일본

도 지진예측에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며 무

력한가를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인간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시다"고 사람은 잘

못알고 있는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존재이며 무엇이나 해

낼 수 있다는 것도 잘못 알고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암이 걸렸을 경우

퍼지는 속도가 10-20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술은 몸 속의 세포들 뇌신경세

포, 위장세포, 간세포, 백혈구들의 저항력을 약하게 해서 암의 전이가 빨라

진다는 것이다.

샌디에고 의과대학의 암 전문인인 이기천교수는 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는 모습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동양인이나 서양인이 다른 점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공포, 아픔으로 인해 그 죽는 순간이 너무나 처절하더라는 것입니

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죽는 사람

들은 모두가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더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

다. 시인의 고백대로 나의 영원한 반석이며 피난처이신 주님을 믿기 때문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노래합니다.

27절을 보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음녀같이 벌하신다"고 했고 28절을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했고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GNP는 1963년 100달러였습니다. 1989년에 5천달러를 돌파했고

드디어 1995년인 금년에 1만달러를 넘게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1만달러 시대에 접어들었을 경우 발생할 문제들을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이 예견하고 있습니다.

@ 승용차의 대형화

@ 가전제품의 원색디자인과 대형화

@ 독신자 용픔 시장 확대

@ 교외에 세컨드 홈

@ 전력소비의 급증

@ 상품수요의 폭발

@ 취미생활의 변화

@ 투자패턴의 변화

@ 자동화 등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걱정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 태도의 변화입니다. 소

득이 높아지고 문화적 욕구가 충족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대신 세상을 의지하고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을 의지하게 됩니다. 주말이면

산으로 바다로 해외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교회는 빈자리가 많아지게 될 것

이고 찬송과 기도소리는 작아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저를 음녀같이 멸하셨나이

다"라고 했습니다.

잘 산다는 것 그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소득이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될 것

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 때문에 주님을 멀리 하거나 떠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하거나 떠나면 망하고 멸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과학문명을 대치시켰습니다. 그러

나 세계도처에서 전쟁과 지진과 기근과 홍수와 전염병과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과 문명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데 대한 심판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말라리아를 퍼뜨리는 모기를 죽이기 위

해 강력한 살충제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모기만 죽은 것이 아니라 모기들과

함께 초가지붕에 서식하는 곤충들을 잡아 먹는 별들도 함께 죽었습니다. 결

과로 초가지붕 속에는 곤충이 들끓기 시작했고 얼마뒤 지붕이 곤충 때문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인간들의 무지와 교만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지금 지옥으로 만들어가

고 있습니다.국가도 가정도 개인도 하나님을 떠나거나 멀리 하면 안됩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최상의 복인 것입니다.

전 세계 인류가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형상을 회복하고 주님께로 돌아오

는 날 이 세계는 파라다이스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합시다. 하나

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시다.

성공하고 잘 산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거나 떠나지 맙시다. 하

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4. 모든 행사를 전파하겠다고 노래합니다.

28절 끝을 보면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지난 2월 15일

오전 한국통신회의실에서 가진 한국-러시아-일본 3개국 부총리간에는 해저

광케이블을 통한 영상회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홍보와 교류의 새로운 기

대가 열렸음을 시사합니다.

세계 여러나라의 지도자들이 한 곳에 모이지 않아도 국제회의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보시대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입니다.그런데 시인이

주의 행사를 전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입과 몸과 몸과 삶으로 전하겠다는 것

입니다. 제아무리 광케이블을 통한 정보교환시대가 도래했다고 하더라도 인

간은 직접 만나 얼굴을 대하고 손을마주 잡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

리는 최대한 문명의 이기들을 선교도 구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일을 기계에서 맡길 수는 없습니다.

시인은 "주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입으로 전파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주 밖에 없나이다."

그렇습니다. 내가 영원히 찬양하고 섬길 분은 주 밖에 없습니다. 나의 반

석이며 피난처이신 분도 주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까이하고 복받을 수 있는 분도 주님 밖에는 없습니다. 영원히 부를

노래도 주 밖에 없습니다.

"주 외에 누가 있으리요"

"주 밖에 없나이다"

"영원히 가까이 할수록 행복하고 떠나면 죽는 분도 주님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 중심을 지키고 믿을 때 올바른 신앙이 되는 것입니

다.주님만 나의 구원,요새,산성,피난처시라는 다윗의 고백과 아삽의 노래는

그 맥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과 노래가 나의 고백이 되고 나의 노래가 되게 합시다.

그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주 밖에 없나이다" 아멘.

13

제목 : 경배하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년 02월 05일

사람과 짐승의 다른 점은 여러가지입니다. 사람은 문자와 언어를 가지고

있는 점이라든지 도덕이나 윤리 규범을 지키는 능력 등 짐승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과

신앙심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절을 짓고 사워을 짓고 교회를 짓는 것은 인

간세게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제아무리 지능지수가 높은 침팬지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세계엔 하나님 예배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미개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모인 곳엔 예배가 있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

다.

경배의 대상이나 그 방법에는 차이가 있고 문제가 있습나다만 그러나 절대

자를 찾고 경외하고경배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종교행위인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하늘,땅,해,달,별같은 천체나 바람,비,번개,우뢰같은 자연 현

상들을 숭배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숭배(Nature Worship)라고 합니다. 무엇

인가를 그리거나 새겨서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면 믿

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물숭배 (Fetichsm)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숭배행위는 결국 피조물을 절대화해서 숭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숭배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창조주를 십계명의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찌니라"고 했고 제2계명은 "너를 위하

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을 신격화해서

숭배하는 종교와 창조주를 절대자로 예배하고 숭배하는 기독교를 같은 종교

범주에 넣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채필근 목사님의 비교종교론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어른은 유모어가 풍부하시고 한학과 동양학은 물론 해박한 신학과 철하글

겸비하신 학자였습니다. 본래 채목사님은 철저한 유교가정에서 자라며 유교

경전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14살 되던 해 아버지가 (1898년) 복음을 받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때 소년 채필근의 심정은 아버지를 이단에게

빼앗긴 것같은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는 유명한 한

학자로 600여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공부하던 분이었습니다. 채필근은 공자에

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공부자님, 제 아버지는 그리스도교를 좀 알아라지

고 그 종교를 공박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보시더니 그만 불행하게도 이단에 빠졌습니다. 성인님께서

이단을 공부하고 연구하면 해롭다고 하심이 이것을 가리키심인듯 합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성인의 도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라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후 어느날 아버지가 채필근을 부르더니 내일은 주일이니 예배

당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변명도 피할 길도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이단자를따라 난생 처음 예배당엘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으로 돌아와

공부자님께 다시 호소했습니다. "공부자님 참말로 죄송합니다. 성인님의 가

르침 중에 아버지가 잘못하면 간하고 간하여도 듣지 않으면 울면서 좇으라

고 하셨지요. 그리고 세상을 떠나시면 3년까지 고치지 말라 하셨지요. 저도

아버지 세상 떠나시면 3년상 치르고 틀림없이 성인님에게로 돌아오겠습니

다."라고 그러나 그 채필근이 끝내 공자한테 안돌아가고 유명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훗날 채목사님은 [공자님께] 라는 글속에서 "내가 꼭 다시 성인님에게로

돌아오겠다던 맹세를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공부자

님이 계시다면 그리스도교에 귀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부자나 소크라테

스나 석가모니같은 성인들과 철인들도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그리

스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인의 신앙이기 때문입니

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9편1절에서 시인은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고 그를 예배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

니다.

시편 29:1-2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 예배는 계속해서 드려야 합니다.

1절을 보면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했습니다.돌

리고 돌릴찌어다라는 거슨계속해서 드리라는 것이빈다.

신체의 리듬은 일할 때 일하고 쉬어야할 때 쉬고 먹어야 할 때 먹고 잠자

야 할 때 자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시간과 간격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리듬은 반복되어야 합니다.

정월 초하룻날 1년분의 음식을다 먹을 수는 없스빈다. 사흘 휴가 기간동안

1년 밀린 잠을 다 잘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1년에 한번이나 한달에 한번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의 예배로는 부족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의 시간입니다. 친한 사람일수록 가까운

사람일수록 만나는 횟수가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정말 친해지면 한 집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장관이 예배하러 예

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 세례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국사에 바쁘고 교통조건이 열악했던 때였습니다만 그는 아직 예배를 드리

기 위해 남의 나라를 방문했던 것이빈다.그리고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

에디오피아를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데 큰 몫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에디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살기 힘든 나라에 들어가빈

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잘 살던 저들이었습니다만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에디오피아를 떠난 것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주말이면 모든 상가가 철시를 하고 주일이면

가족들이 정장한 모습으로 교회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국력이나 경제적 영향력이나 정치적 힘은 세계에 제일이 었

습니다. 그러나 60가대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리고 세속문화의 거센 도전

에 정신문화가 무릎을 꿇기 시작하면서부터 미국사람들은 주말이면 저마다

문을 닫고 바닷가로 산으로 술집으로 들로 빠져나갔습니다. 교회는 텅텅비

기 시작했고 문을 닫거나 교회건물을 파는 교회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미국은 날개를 달고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위신이

추락했고 경제가 흔들렬싶고 도덕이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미국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포가히자 하나님

은 저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아니고 미국을 염려하는

미국인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본래 영국을 떠났던 청교도들은 미국 신대륙에 상륙하여 첫 해 지은 농사

로 맨 먼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청교도 정신은 하나님

을 예배하는 정신인 것입니다.

시인은 노래합니다. '돌리고 돌릴찌어다'라고.

2.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리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방법은 제사였습니다. 모든 제사는 정해진 법대로 드려야 하빈

다. 제물을 선택하는법 , 제물을 잡아서 드리는 법,제사장이 제사를 집전하

는 법 드이 소상하게 정해져 있었스빈다. 그러나 신약의 경우는 그 기본 정

신과 자세가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하셨고 바울

은 로마서 12:1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것입니다. 구체적

으로 바른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성경 ,찬송, 옷차림, 헌금, 마음가짐 등 미리미리 준비하고 당일에 서둘거

나 조급히 굴면 안됩니다.

둘째, 모든 예배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평양 산정현교회 목사였던 주기철 목사님이 어느 주일날 예배인도를 하고

있는데 그 교회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님이 헐레벌떡 교회에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급한 일로 늦었던 것입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자오

님이 늦으면 교인이 본받을게 뭐가 있겠습니까?"그 한마디에 조만식 장로님

은 그날 선 채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후 목사님을 찾아와 앞으

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늦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조만식 선생님은 주기철 목사님의 오산학교를 다니실 때 교장이셨고 주 목

사님은 학생이셨습니다. 평양 산정현 교회가 주기철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모시기로 하고 조만식 장로님을 청빙대표로 보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목사님 저희교회에 부임해 주실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대인의 겸손이셨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교통사정, 개인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하나님 뵙는 시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 바른 자세로 드려야 합니다.

태도도 바르게 마음고 바르게 찬송도 기도도 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그리

고 예배 이외의 다른 사건이나 소음이 예배장소를 어지럽히면 안됩니다. 예

를들어 예배도중에 핸드폰이 울린다든지 그리고 유유하게 통화를 하고 있는

다든지 무선호출기의 삐삐움이 들린다든지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안됩니다. 그리고 유아가 쿵쾅거리고 활보를 한다든지 울음소리가 남의 예

배를 방해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이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신 예배였는지를 생각해야 합

니다. 헛수구로 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아름답고 거룩하게 드려야 합니다.

2절 하반절을 보면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했스빈

다.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옷이란 거룩함으로 꾸민 아름다운 옷이라는 뜻이

빈다. 구악시대 제사장이 하나가링께제자드리기 위해 입는 옷은 팅여상복이

아니었스빈다. 최그급 천에 수를 넣고 금수술을 달아 만든 거룩하고 아름다

운 옷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단정

해야 합니다.

복장문화의 발달로 현대인들은 다양하고 멋있는 의상을 접하게 되었습니

다. 유니섹스라고 해서 남녀의 성구별이 모호해져가고 있기 때문에 의상도

남녀 구별이 어려워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초로 인간이 옷

을 입기 시작한 것은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입니다. 그

러니까 어떤 옷이든 입어서 추하고 혐오스러우면 안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

나님을 만나기 위해 입는 옷은 더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운 예배,

기쁘고 즐거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84:3을 보면 '참새도 주의 전에서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둘 보금

자리를 얻었나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4;4을 보면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29;11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

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전에 나오기를 힘쓰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에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예배를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교통이 차단

됩니다. 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

셨습니까? 예배에 최선을 다합시다. 예배생활에 최선을 다합시다.

14

제목 : 깨어 있으라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년 01월 29일

주경학자들은 마태복음 24장을 작은 계시록이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계시

록이 담고 잇는내용들을 축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종말에 과한 자세

한 설명이 있기 때무에 요한게시록과 상통점을 갖고 있는것이빈다. 오늘 읽

은 본문은 말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취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 마태복음 24장 4절이하에 기록되어 있

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다.

(2) 난리와 난리소문이 무성할 것이다.

(3)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간의 싸움이 치열해질 것이다.

(4) 처처에 지진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

(5) 사랑이 식고 반목과 갈등이 첨예화 할 것이다.

(6)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노아홍수 당시의 상황을 예로들어 주셨습니다. (37-39).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이 세상이 홍수로 멸망하게 된다

는 외침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

지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39-).

그리고 인자가 다시 올 때도 그런 현상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

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 가장 가까운 나라 일본 칸사이 지방을 휩쓴 대지진 참사

를 지켜보았습니다.

2월 1일자 뉴스워크지의 표지는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고층건물의 처참

한 모습을 싣고 있었고 "무너진 일본의 내진신화"라는 타이틀과 함께 "고베

의 악몽"이라는 화보 특집을 다루었습니다.

지진으로 무너진 고베 고속도로에 깔린 트럭사진 밑에 이런 설명을 써놓고

있었습니다. "일본 칸사이 지방의 산업 중심지였던 고베시 일원이 대지진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모든 사태에 대한 대비가 완벽한 것으로 여

겨졌던 초일류 산업기술국 일본에 어떠헥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일본 당국

은 수년째 지진에 대한 안전보장을 큰소리쳤는데.. 일본인들은 2차대전 이

래처음으로 자신들이 취약국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라고 .

지난 1월 17일 오전 5시 46분에 발생한 지진은 불과 20초간 계속되었습니

다. 그러나 사망자는 5,100명을 넘어섰고 2만 5천명이 부상당했는가 하면

이재민은 3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그리고 5만채의 건물이 무너졌거나 파

손되었다고 합니다.

20초간의 재앙치곤 그 결과가 너무나 엄청나고 큽니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일어난 지진상황을 살펴보면 1970년 페루 북부에서일어

난 지진으로 66,794명이 사망했고 1976년 중국 당산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24망2천명이 사망했고 1985년 멕시코시티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4,200명이,

1988년 아르메니아 북서부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5만5천명이, 19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진으로 62명이, 1990년 이란 북서부의 지진으로 4만명이,

1990년 필리핀 루손 지진으로 1,621 명이, 1993년 인도 마드하라슈트라 지

진으로 3만명이 1994년 캘리포니아 노스리지 지진으로 61명이,1995년 고베

지진으로 5,100명이 죽었습니다. 25년동안 지진으로 죽은 사람의 수르루

합하면 444,833명이 됩니다. 그리고 진도는 6.4에서 8.2였습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지진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것입니

다. 그것은 지진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며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

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구는 12대의 지각판으로 구성되어 있따고 합니다. 암반으로 이루어진 판

들은 계속 이동하면서 판사이의 단층선에서 서로 충돌한다고 하빈다.그때

한쪽판이 다른 한쪽판 아래로 꺼지거나 위로 치솟아 오르게 되는데 그는 충

돌의 충격으로 암반이 갈라지면서 지진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전

세계는 지각판의 이동과 함께 지진대에 걸쳐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

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문가들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여선 안됩니다.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여 합니다. 마태복음 24:7을 보면 "처처에 기근

과 지진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지진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 출애굽기 19:18을 보면 시내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셨다"고

했고, "온 산이 크게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민수기 16:31-32을 보면 고라

와 그 일당이 모세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고 작당하여 반항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땅이 갈라지고 입을 열어 그 모든 소속이 산 채로 매장된 일이 있었습

니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매몰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19:11을 보면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아합왕을 피해 도망쳤을 때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다"고

했스빈다. 아모스 1:1아늘 보면 여로보암왕 시대에 큰 지진이 있었다고 했

습니다.

마태복음 27:50-51을 보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는 지진이 있었고 마태복음 28:2을 보면 주님이 부활하실 때도

큰 지진이 났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지진은 하나님의 능력과 현존, 진노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특히 마지막 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의 도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각판의 이동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겨로가라고 설명합니

다만 그러나 성경은 지진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 심판과 진노의 뜻

이 들어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히브리서 12:26을 보면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기니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고 했습니다. 땅도 하늘도 진동시키는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고베 지진 이후 일본사람들의 걱정은 재해복구나 슬픔의 회복보다는 더 큰

지진이 일본을 강타하리라는 두려움이라도 합니다.

뉴스워크지 베를린 지국장 빌 포웰(Bill Powell)은 [지진 속에 파묻힌 '오

만의 시대']라는 글 속에서 "심각한 경기침체와 만성적 정치혼란이 뒤엉 닥

친 지난 주의 지진은 80년대 후반 최고조에 달했던 일본인들의 경제적 기술

적 우월감의 소산인 오만의 시대가 나긴 잔재들마저 일소해 버렸다"면서 5

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의 경제적 상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서구의 쇠퇴와 퇴폐를 손가락질하면서 설교하는 동안 도

쿄의 졸부들은 그들의 생선 초밥에 반짝거리는 금가루를 뿌려 먹었다. 자만

심 가한 미군도 일본의 기술지원이 없었더라면 걸프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본의 중의원 이시하라 산타로 의원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러나 이제부터 일본 사람들은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고 썼습니

다.

저는 세계적으로 계속된 대지진 사건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지난 주 가장

가까운 일본 칸사이 지방에서 일어난 지진사건을 보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

라"는 주님의 말씀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능력은 유한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자타가 공인하는 최첨단 과학문명국입니다. 그런데 지진이나자 고

베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물도, 전기도, 먹을 것도 없었스빈다..

가장 발달된 도시 고베시 한복판에서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고 잠잘

곳도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고도로 발달된 일본의 정보, 통신, 교통도 손

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주전 2160년경 메소포타미아(Nesopotamia)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로 큰 도시(Great City)를 건설하고 하늘에 닿는 탑을 쌓기 시

작했습니다. 그 탑의 목적은 두 가지 였습니다. 인간의 기술문명을 자랑하

고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하늘 닿는데까지 탑을 쌓

아올려 하나님을 기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탑을 무너뜨리

진 않았습니다. 시날(Shinar)평지에 모여 탑을 쌓고 있던 사람들을 흩어지

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흩어지면 탑은 자연히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명이나 과학의 종말을 역사는 증거해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그것을 알면 하나님 앞에서

떠들고 소리지르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자만이나 교만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상쳐를 건드리는 것 같아 미안합니다만 미국이 지진으로 고속도로가

무너지고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 내렸을 때 일본 언론들은 앞을 다투

어 비아냥댔습니다.

그걸 공사라고 했느냐는등 적어도 지진대비는 했어야 된다는둥 그러면서

일본은 지진대비만은 철저하다는등, 고속도로나 고속전철은 어떤 경우에도

만전을 기했다고 장담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수대교가 무너지자 일

본 언론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실공사였다느니 원리의 붕괴라느니 사회

현상의 붕괴라느니 비아냥대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당사자인 우

리로서는 기분이 좋을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할 말이 없게 되

었습니다. 교만이나 자만은 금물입니다. 일본의 지진은 먼산의 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함경도와 동해 동북부지역 그리고 전국 곳곳이 활성단층이라는 것입니다.

서울대 지질과학과 이기화 교수는'우리나라가 지각판 경게에서 떨어져 있

긴 하지만 지각이 약한 단층구조가 많아서 인접지각판의 충돌로 대규모 지

진이 일어나게 될 경우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

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는 성경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심판의 두려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나 L.A. 노스리지 지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뜻있는 사람들

은 미국을 향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경고라고 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이번 칸사이 지방의 지진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수용

하는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며 경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고 두렵습니다. 예외도

없습니다. 단 회개하면 예외가 성립됩니다. 우상숭배와 교만은 하나님이 가

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

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넷째,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2을 보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

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고 44절을 보면 "이러므로 너희도 예배

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했습니다.

한낮에 당하는 지진피해 보다는 잠자다가 당하는 지진피해가 더 크다고 합

니다. L.A. 노스리지 지진도, 이번 고베 지진도 잠잘 때 일어났습니다.

6.25남침도 주일새벽 잠잘 때 일어났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잠잘 때 사건이 터지고 문제가 일어납

니다. 주님의 재림도 졸며 잠잘 때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잠잔다는 것은 무

엇을 뜻합니까? 하던 일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의식 상태에 빠지

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눈 감고 불 끄고 편히 드러누워 쉽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적당한 휴식이나 긴장해소는 필요합니다만 그러나 영적으로 네

활개 펴고 편히 쉬어를 계속하면 큰일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오늘밤 주님

이 오셔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심판을 향한 초침소리는 점점 긴박해져가

고 있습니다.

전쟁 ,기근,갈등,반목,증오,지진,이단의 출몰등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

다. 우리는 깨어 정신을 차리고 주님 오실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한 손엔 창을 한 손엔 연장을 들고 예루살렘성을 재건했던것처

럼 우리는 깨어 기도하고 믿음을 지켜 그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일하면서

준비하고 준비하며 일해야 합니다.

졸지 맙시다. 깨어 기도합시다. 깨어 준비합시다. 신앙생활 잘 합시다.

아멘 주 예수여 어소 오시옵소서.

15

제목 : 지키시는 하나님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발행일 : 95년 01월 22일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될 법도를 재조명

하고 확인하기 위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굽을 떠나 광야를

횡단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신앙과 생활 지침서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신명기 32-34장은 신명기의 결론부분이 됩니다.

신명기의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고 있으며 모세가 죽기 전에 각 지파를 축복한 것입니다. 본문이 말

하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짖

켜주심을 살펴보겠습니다.

1,열악한 환경과 위기에서 지켜주십니다.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만나시

고"리고 했스빈다.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던 광야는 사람이 거처하거나 통과하기가 힘든 곳

이었습니다. 일교차가 커서 낮에는 일사병으로 쓰러질만큼 폭염이 계속되다

가 밤이 되면 추위가 몰아 닥칩니다.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기 십상이

고 독사와 맹수들이 들끓기 때문에 언제 기습을 받을런지 예측불허입니다.

거기다가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곳을 "황무지,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그토록 열악하고 위험천만한 황야를 횡단했던 이

스라엘 민족이 단 한명도 목말라 죽었거나 일사병으로 죽었거나 배고파 죽

었거나 추위에 얼어 죽었거나 맹수에 물려 죽은 일이 없었스빈다. 애굽에서

나왔던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었지만 그들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

고 불순종한 죄 때문이었지 황무지와 짐승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32:21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라고 했습니다.

환경이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이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 좋은데 타락하거나 잘못되는 경

우가 있는가 하면 환경이 열악한데 바로 되고 잘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 유치원의 경우를 보면 중구 교육청 관내뿐 아니라 서울 시내에

서 모범 유치원으로 공인받고 평가를 얻었습니다. 매년 평가에서 빠지지 않

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장 건실하고 알찬 교육

을 실시하는 모범유치원이라는 것입니다.

충신유치원보다 더 시설규모나 내용이 크고 화려한 유치원이 많습니다. 그

러나 충신유치원은 협소하고 제한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모범적인 유

치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을 탓하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

경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 믿음을 굳세게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 잘 벌고 성공하고 잘 살게 됐기 때문에 주님 외면하고 교회등지는사람

이 있는가 하면 감사하고 감격해서 신앙생활을 더욱 잘 하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중요한 것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일이 되

든지 안되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외

면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황무지와 짐승이 울부

짖는 광야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

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은 그들이 사잘굴과 풀무불 속에 들어 갔을 때 사

자의 입을 봉해 주었고 풀무불이 사르지 못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

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언제, 어디서나"입니다.

저는 가끔식 비극적 생애를 마감한, 고 박대통령 내외분을 새각하곤 합니

다. 인물평가란 적어도 그 세대가 지난 후라야 가능한 법입니다. 100년후에

내리는 평가가 정직한 평가가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의

생각으론 자신들의 정권연장을 위한 무리한 정치 행동을 제외한다면 어느

대통령 못지 않게 일을 많이 했다고 평가하고 싶스빈다. 그런데 불행한 것

은 육영수 여사는 철통같은 경비망을 뚫고 잠입한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세상을 떠났고 박 대통령은 정보부장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육여사의 경우는 그 자리에 우리나라에서 사격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사람

과 완전무장한 경호원들이 보는 앞에서 저격당했습니다. 박대통령의 경우는

가장 신임하는 경호실장, 비서실장, 정보부장이 동석한 자리에서 저격당했

습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의 상처들이긴 합니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대

체 누가 누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잘못은 절대자이신 하나가링을 과소평가하고 상대자인 사람의 능려

이나 그 역할을 절대 평가하는데 있습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사람은 대단

한 것으로 평가하고 하나님은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32:39을 보면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하며 상하게도 한다면

하나님을 향하여 보호와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저희 집 안방에는 고 갈물 이철경 선생께서 써주신 한글족자가 걸려있습니

다. 살아계실 때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라며 부탁드리고 받은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

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는 시편 121:1 -2 말씀입니다.

2. 왜 지킵십니까?

신명기 32:9을 보면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

업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자기 백성이기 때문이라

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을 선택하라고 추천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신이 우리를 선택해 다랄고 부탁한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의도와는 상관도

없는 일방적 선택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버

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자식을낳은 부모는 자식을 기르고 지키

고 가르칠 책임을 전적으로 져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또 다른 이유는 언약 때문입니다. "내가 너

를 지키겠다 사랑하겠다 인도하겠다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

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조건과 제한과 약점과 허물을 넘어서고 덮어줍니다. 이스라엘

과의 약속 때문에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기 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덮어주

시고 용서하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약속은 엄밀하게 보면 냉정한 것입니다.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약속은 깨

어지는 법이고 그 책임은 어긴 사람 쪽에 있는것입니다. 약속을 어긴 사람

은 대접을 받기도 어렵고 용서를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그리고 용서와 관용과 도움을 받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겠다던 약속도 ,하나님만 사

랑하겠다던 약속도, 결코 한눈팔지 않겠다던 철석같은 약속도 제멋대로 깨

트려 버렸습니다. 대접은 커녕 매맞고 내쫓기고 버림받을 일만 골라 했습니

다. 그러나 [사랑]때문에 용서받고 보호받을 수 있었스빈다.

사랑으로 눈이 가리워지면 세상만사가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사랑이 절대 조건이긴 하지만 사랑은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무에

결혼을 결저아는 단계는 이성적 관찰과 판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단 이성

적 판단과 결정이 된 다음에는 불같이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것이 결혼의

절차인 것입니다.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매맞는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고 보호받는 이유는 순전히 사랑 때문인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어떻게 지켜 주십니까?

10-12절이 설명해 줍니다.

1) 구체적으로 지켜주십니다.

10절을 보면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

다"라고 했습니다. [만나시고]는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서 지키신다는 것

이빈다.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는 전폭적으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자

기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는 것은 완벽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눈동자 같이 지키시낟는 말씀을 주목해야 하빈다. 사람의 눈에는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개의 신경세포가 있어서 거리,광도, 색상을 자동으로 조

절한다고 합니다. 모든신체의 기능이 오나전 자동차화 시스템으로 되어 있

지만 특히 눈의 기능은 전자동이라고 합니다. 눈꺼풀만해도 완저 자동 개폐

식이어서 유사시에는 즉흥적으로 눈꺼풀이 덮히게 됩니다. 그리고 눈물샘을

만들어 언제나 안구운동에 지장이 없도록 촉촉하게 습도를 조절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시나는 것은 자기

눈을 보호하듯 철저하게 완벽하게 지켜 주신다는 것이빈다.

사람의 지체 가운데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신경조직, 두뇌판단, 눈동

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눈을 보호하듯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2) 홀로 인도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

도다"라고 했습니다. 힘이 모자라 누구의도움을 받는다든지 연합전선을 펴

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셨습니다.애굽의 바로

왕은 기병대를 동원하고 술객들을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고 괴롭혔

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홍해를 가르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홀로

하셔도 무엇이나 가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방법입니다. 11절을 보면 "독수리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

을 업는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짤막한 한 구절 속에 독수리 훈련방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 중 왕이 되는 것은 가혹한 훈련 때문이빈

다. 알에서 금방 나온 독수리는 병아리나 꿩새끼와 다른 바 없습니다. 그러

나 철저한 훈련을 통해 새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어미 독수리는 등지 안에

있는 새끼들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것은 어미의 보호본능입니다. 그

러나 보호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둥지를 흔들어 새끼를 떨어뜨립니다. 위기

를 느낀 새끼들이 몸부림치며 등지 안에 머물려고 하면 날개를 너풀거려 떨

어뜨립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가 땅을 향해 떨어질 무렵 어미는 다시

받아 둥지로 옮겨 놓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반복합니다. 그 뜻을 모르는

다른새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어미 독수리가 심술이 났다든지 정신이

돌았다고 수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독수리의 강훈련방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고 오늘 우리를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현대인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하루 만보를 걸으라고 합니다. 그래

야 하체가 튼튼해지고 신진대사가 잘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신체를

단련하고 훈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십니다. 영광도 호롤 받으십니다. 축복도 홀로 하십

니다. 지키시고 힘주시는 것도 홀로 하십니다.

인생을 살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 보금자리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둥지에서 떨어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파멸은

아닙니다. 그리고 종점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훈련이며 연단이며 훈

련방법입니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5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합니다."감옥은 이상한 곳이다. 강철같이

굳세게 되어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들풀처럼 약해져 나오는 사람도 있

다."

하나님은 온실의 화초처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독수리

가 새끼를 훈련하듯 지휘관이 병사를 훈련하듯 감독이 선수를 훈련하듯 하

십니다. 거기에 합격하면 강한 독수리가 되고 강한 병사가 되고 강한 선수

가 되는것입니다. 오늘 나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의 인도와 보호를 따릅시다.

주여, 나를 지켜주옵소서.

16

제목 : < 예화 > 독소와 해독

자료원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5년 04월 20일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가 구약의 엘리사가 국을 끓일 때 독을

제거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오는 독을 다음과 같이 말

했다.

"현대전의 무기는 첫째 핵무기, 둘째 중성자탄, 셋째 세균이

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가루, 사랑의 가루, 화해의 가루를 뿌려

서썩는 곳에 소금이 되고 어두운 곳에 빛이 되어야 한다.

17

제목 : 생명의 면류관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1월 15일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경우를 놓

고 볼때 하는 일과 맡은 일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스니다. 그 가우데서

기억하기 쉬운 것들만을 꼽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 아버지, 아들,

할아버지,삼촌,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형부, 매제, 이모부 등이 저에게

따라 다니는 이름입니다.

사회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서울 시민이고 용산 구민에다 이촌동 동

민입니다. 교회적으로는 충신교회 담임 목사, 서울서노회 노회원, 예장총회

목사입니다. 그리고 연합사업이나 사회 단체, 교회단체 등에서 맡은 일이

수십가지 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국민 노릇을 잘 해야 되기 때문에 시민 노

릇을 소홀히 한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 노릇을 잘 하기 위해 남편 노릇을

가볍게 취급한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 노릇으로도 비거운데 할아버지 노릇까지 감당하기는 더 어렵다면서

나는 할아버지가 아니다 못한다라고 거절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맡은 일을 감당해내는 사람의 능력과 역량을 따라 개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맡은 일에 최선을 하느냐 하지 않느

냐인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서머나 교회는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있었던 일곱교회

가우데 가장 모범적이면서 최선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서머나교회의 장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1.열악한 환경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머나교회가 처했던 상황을 9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라고 했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

도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과 훼방에 직면한 교회였습니다. 예수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와 환난과 생활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유대주의자들의방해

와 훼방이 교회를 괴롭혔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로마의 황제 숭배와 유대인의 율법주의가 서머나

교회를 위협했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사람은 재산을

목수당했고 일터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드른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외부기온을 따라 변한다면 시낭지키기가 어렵게 되빈

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물이 얼게 됩니다. 그러나 영상으로 올라가면

얼었던 물이 녹게 됩니다.

외적 조건이 조금 어렵다고 움츠러들고 약간 편해졌다고 활개치는 그런 신

앙이라면 뭘 해낼 수 있겠습니까?

한국 초대 교회 순교자 가운데 한 분인 최태용 목사님이 1926년1월호 [영

과 진리가]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 속에서 "이제는 신앙혁명을 들으라.기독

교가 아니요, 그리스도 자신을 믿으라. 교회 생활이 아니요 영이 더가라.

진리가 되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교인이 아니라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아

니라 예수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등불이 방 가운데 들어가매 어둠이 밖으로

도망가고 물이 그릇 안에 들어가매 공기가 밖으로 나가고 믿음이 마음 가운

데 들어가매 의심이 밖으로 나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燈入房中夜逃外

하고 水入器內氣出外 하며 信入心中疑出外라).

빛이 들어가면 어둠이 쫓겨나고 물이 차면 공기가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

다.

세계교회 신앙 선배들의 신앙면모를 들여다 보면 오히려 열악한 환경과 조

건 속에서 더욱더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서머나교회도 그랬습니다.

2. 영적인 문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생활을 잘 한다든지 예수를 잘 믿는다든지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한다

는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교회에 나와 하루 봉사를 했다고 해서 일당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경력으로 인정되어 회사에서 진급할 때 도움이 되는 것도 아

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사건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당장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축복

을 받는다는 것도 당장 내 손에 수표가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가 당

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쪽 분야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입

니다.

그러나 서머나교회는 영적인 문제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했습니

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이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영이 살고 영이 복을

받아야 육신이 살고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이기선 목사님이 일본 경찰에 체

포되어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일경이 고문을 할때마

다 '주님은 저 위해 피흘러 돌아가셨는데 저도 고문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

니다"라며 고문을 견뎌내었습니다.

어느날 일경이 물었습니다. "영감, 천황 폐하가 기독교를 믿으면 죽이겠다

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이기선 목사님은 "천국법도 지키고 국법도 지키겠소"라고 대답

했습니다. "어떻게 둘 다 지킬 수 있단 말이요?"라는 물음에 이목사님은 "

하나님이 예수믿으라 했으니 예수 믿고, 천황이 죽으라 했으니 죽으면 됩니

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기선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해서 생명이 아깝지 않다는지, 죽음

이 두렵지 않다든지 고문이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십자가

를 면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나 서머나교회 교

인들이 환난과 궁핍과 핍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던 것은 영적

인 문제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아무리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잘 산다고 해도 그 집에서 앞으로 80년

이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80년 안에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그 육체를 에워싼 조건들은 모두가 제한적이고 한시적입니

다. 그러나 영원합니다. 그리고 영적 사건도 영원한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오늘의 쾌락이나 행복 때문에 영원한 나라를 포

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것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는 본문 10절 하반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했

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이미 충성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환난

과 궁핍과 고통을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그 교인들에게 주님은 말

씀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이 한마디 속에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던 충성을 더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이미 충성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것으로 만족

하거나 자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훈련의 의미나 가치는 지속성에 있습니다. 게임 끝나고 훈련을 쉬는 선수

는 다음 경기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게임이 있든 없든 훈련을 계속해야 강

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독창회나 연주회가 끝났다고 해서 연습을 중단

해 버리는 음악가나 전시회 끝났다고 해서 붓을 던져버리는 미술가는 훌륭

한 작품을 남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힘써 그일을 계

속해야 합니다.

둘째,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수지 댐이 터지는 것은 지극히 작은 구멍으로 물이 새기 시작하고 그것

이 점점 커져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성인병의 경우도 커져서 원인이 점던 커져서 큰 병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

적으로 사람의 위 용량은 200CC 의 음식물이 위 속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위가 10배로 불어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루가 매 끼니마다 터질 지경

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위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짠 것, 매

운것, 질긴 것, 뜨거운 것, 오만가지 나쁜 것을 다 집어 넣습니다. 쉴 날도

쉴 시간도 없습니다. 피곤해서 잠깐 쉴까하면 커피 집어넣고, 과일 집어넣

고, 과자 집어넣고, 저녁 잠자는 시간에도 2000cc를 집어넣고 중노동을 시

킵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모든 위병의 원인이 바로 그러한 위장관리에서 비

롯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 소홀히 취급하기 쉬운 일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고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어하

니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셋째, 드러나지 않는 일에 최서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일이란 성과가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드러나지 않는 일

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실적위주에 치우치다 보면 형식과 전시효과를 중요시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일은 오늘 당장 그 실적이 드러나

지 않습니다. 오늘 충성했다고 해서 오늘 상급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은 그일에 상응하는 보수를 받게 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시간제가 있고, 일급이 있고 주급이 있고, 월급이 있고, 연봉이 있습니다.

한시간 일하고 받는 보수는 극히 작습니다. 대개 엄청난 보수일수록 연봉으

로 계산합니다.1년에 얼마를 주고받기로 계약하고 일을 하는 것이 연봉입니

다. 한 시간 일하고 그 자리에서 받아 챙기는 돈과 연봉입니다. 한 시간 일

하고 받아 챙기는 돈과 연봉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연봉이 아니빈다. 최고봉이빈다.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장 오늘 일하고 칭찬이나

보상이 없다고 해서 그 일을 소홀히 하거나 과소평가 하면 안됩니다.

넷째, 내가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일을 나혼자 다 맡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맡은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맡지 않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잘못입니다.A 회사에 입사를 했으면 그 회사일에 최

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A 회사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B회사 일에

군침을 삼킨다면 A 회사가 그를 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겨주셨습니다. 그일에 최선

을 다해야 합니다.

다섯째,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죽음을 각오하고, 죽을 힘을 다해, 순교정신으로 일하라는 것입니

다.

[예수천당]으로 유명한 최봉석목사님은 1939년 6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2차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40일 금시기도에 들어갔습니다. 40일 금

식기도가 끝난후의 최목사님은 산송장이었습니다. 병보석으로 나와 기홀병

원에서 15일간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가지 못하고 1944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시기전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뿌린 피와 흘린 땀 위에 한국교회는 세워졌습

니다. 오늘까지 한국교회가 역사의 격동과 격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피와 땀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도록 충성한 다음에 오는 상급이빈다. 본문을 보면 "그리하면 내가 생명

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면류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경기에서 우승한 사람, 싸움에

서 이긴 개선장군,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퇴임하는 장관에게 면류관을 주었

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썩지않는 면류관, 사

랑의 면류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유는 생명을

바쳐 얻은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최선을 다한 뒤에는 반드시 상급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히믈 다해 최선을 다하면 영원한 생명과 면류관이

약속되어 있음을 받는 것이 됩니다.

금메달리스트는 금메달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상금이 있고 연봉이 있고

명예가 있고 직장이 보장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최선을 다한 그리스도인

에게 주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그 상급이 내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남

의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18

제목 : 최선을 다하는 교회 II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1월 08일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 최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고 최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울사도의 삶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4:7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길을 마치

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한 구절 속에 바울의 삶의 여정이

그려져 있습니다.[싸웠다,마쳤다, 지켰다]는 세마디야 말로 그가 일생을 어

떻게 살았으며 어떤 태도로 일했는가를 설명해 주기에 넉넉합니다.

그는 싸우는 병사처럼,달리는 운동선수처럼, 성을 지키는 파숫군처럼 싸웠

고 달렸고 지키며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

다.

흔한 일은 아닙니다만 마라톤 선수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걸어서 결승점으

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경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달리는 사

람은 걸으면 안됩니다.

축구열전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에서 공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선수는 없

습니다. 있다면 부상당하고 퇴장하거나 반칙으로 퇴장당하는 선수일 것입니

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운동경기로 비유했고 전투로 비유했습니다. 최

선을 다하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1994년 11월 9일 저녁 6시 제주공항을 떠나 광주로 이륙하던 대한항공 326

편의 비행기 왼쪽 엔진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기 시작했습니다. 300명의 승

객과 승무원은 순간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곧바로 기장은 기수를 제

주로 돌려 회항했고 다행히 불은 착륙과정에서 꺼졌습니다.

원인 조사 결과 망가진 엔진사이에 꿩이 깃털과 피가 남아 있었습니다.

활주로에 있던 꿩이 비행기에 부딪쳐 일어난 조류충돌사고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외국에서는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라고 부릅니다.

꿩 한마리 때문에 엔진부품인 팬블레이드(Fan Blade) 46개가 망가져 40억

원의 수리비를 날렸다고 합니다.

1995년부터 23년간 민항기와 군용기 73대가 새와 충동해 추락했고 138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92년 한 해동안 전 세계적으로 5,605건의 조류 충동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꿩 한마리와 비행기, 비교도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만 그 작은 새한마리가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40억원의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이 사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은 큰 것에도 소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

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면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면장이라는 사실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했나. 대학을 안나왔나, 얼굴

이 못생겼나, 헌데 겨우 면장이라니" 하며 면장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는 술타령을 일삼고 걸핏하면 도지사 만나 교제해야 된다며 도청소재지에

나가 살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왜 면장일을 소홀히 하느냐고 물으면 "나한

테 대통령을 시켜보라 내가 누구보다 잘 해낼거다"라며 기염을 토합니다.

이 소문이 도지사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을 댕오령 시켰겠습니까?

그 달 말로 해임되고 자리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핑계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나를 무시해도

분후가 있지. 이걸 일이라고 준단 말야? 다른 걸 맡겨보란 말야, 잘 해낼테

니.."라며 핑계를 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들은 둘을 맡겨도 다섯을 맡겨도 충성을 다합니다. 무

엇을 맡겨도 그 일에 최서을 다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취급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일군]이라는 말의 의미는 배 밑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를 젓는

사람을 뜻합니다. 북소리에 맞춰 줄지어 앉은 채 노를 젓는 사람을 가리켜

일군(훼파레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노를 젓는 일을 맡았습

니다. 어두운 배 밑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를 젓는 동안 한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우며 꾀를 부리는 노예가 발견되면 감시원의 가죽 채찍이 날아옵

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한눈을 팔아도 안되고 딴전을 피워도 안되

고 꾀를 부려도 안되고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뒷줄은 힘드니까 앞줄로

가겠다든지 기분 나쁘니까 쉬다가 하겠다느니 불평도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

다.

북소리의 리듬에 맞춰 노를 젓기만 하면 됩니다. 배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 목적지가 어딘지에 관한 것은 선장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 살면서 모내기를 해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모내기를 합니다만 옛날엔 사람이 줄 지어서서 손에 한웅큼

씩 모를 들고 있다가 줄을 따라 모를 심곤했습니다. "평당 쌀이 몇가마니

나올까, 비료값은 얼마나 들까, 이 논에서 나온 쌀은 누가 가져갈까"등 그

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이 어이 하는 구령에 맞춰 모를 심고

일어서고 다시 모를 심곤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일군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이며 하나님의 배에서

노를 젓는 노예이며 하나님의 논에서 모를 내는 일군인 것입니다. 일군의

할 일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두기자 회견이 끝난 후 TV 토론에 참여한 어느 연사의 말이 생

각납니다. 그는 '대통령의 시정방침이나 세계화 구상이 발표됐습니다만 국

민의 할 일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모든 국민이 그 뜻을 따르고 협력한다면

선진화나 세계화가 이뤄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구상은 한낱

구상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군은 일해야 합니다. 떠들고 일 안하는

사람보다는 조용하게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일군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맡은 자]라는 것은 관리자,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본래 뜻

은 오이코스노모스(Oikosnomos) 라는 것으로 집을 관리하는 자라는 것입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면 얼마나 신임이 두터우

며 그 책임이 중요합니까?

미국 대통령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사람가운데 검은 가방을 든 사

나이가 있습니다. 그 검은 가방은 만일의 돌발사태에 대처할 대통령의 결

정에 관한 장치가 장착되어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 가방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겠습니까.심복도 가장 신임하는 심복에게

맡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사명을 맡겼겠습

니까? 믿고 신임하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을 소홀히 취급하고 과소 평가

하는 것입니다.

관청마다 벽에는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어느날 장관이 자기방에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을 떼낸 후 땅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고 합시다.사

진이란 인화지에 현상한 그림에 불과하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존재와

권위와 인격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 장관의 목이 붙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한테 직분을 주셨습니까? 내가 누구의 종이며 일군이며 청지기입니

까?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신 일

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맡았든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더구나

비밀가방을 소홀히 취급하면 그 화가 더 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 축복받는 비밀, 영원한 생명의 비밀,천국가

는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 비밀을 알리고 전하는 청지기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3.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에 공력을 밝히

리니"라고 했고 4:4 끝을 보면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창조론과 종말론을 가진 종교입니다. 창조론이란 하나님이 천지

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종말론이란 이 세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속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아직도 빛이 무엇인가에 대하 명확한 개념이나 정의를 정립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17세기 후반에 뉴톤(Newton)은 [빛은 발광체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하여 나오는 입자]라는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즉, 광립자

(particulate Theory) 설이 뉴톤의 학설입니다. 그런가하면 물리학자 호이

겐스 (Huygens)는 빛은 하나의 파동이라고 하여 파동설(Wave Theory) 을 주

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빛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라고 하는 광량자설

(Photon Theory)을 주장했습니다. 최근의 학자들은 빛은 파도의 파장처럼

파동성(Wave)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전자파니(electromagnetic wave) 파

장(Wave Length)이니 주파수(cycle) 니 가시광선(visible light)이라고 부

릅니다.

그러나 창세기 1;3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빛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었습니

다. 빛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흑암을 물리치기 위해 말씀으로 만드신 창조물

이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자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규명하고 연구해도 미지한 그 빛을 말

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고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했고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낱낱이 심판이 있을

것이며 잘한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

은 일군과 맡은 자들에게 요구하는 자격조건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은 학벌도, 가문도, 미모도, 경력도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다른 조건들은 충성하는데 필요한 것들이지 충성보다 그것들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사회겨험이

나 가문이나 학벌이 출충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만 베드로를 선택하

신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십자

가를 지는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12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

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가

문때문에,내 학벌때문에,내 경험때문에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충성되이 여

겨"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꾸짖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것은 왜 공부하지 않느냐, 왜 경험이 적으냐가 아닙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입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4:4에서 '자책할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본 것입니

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내가 맡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꾀를 부릴 순 없지 않습니까?

19

제목 : 최선을 다하는 교회(1)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1월 01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는 금년 한해동안 이 구절을 암송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암송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회 모일 때도, 제직회 모일 때도 교역자 모임에서

도 예배시간에도, 남녀선교회 모임에서도 맨 먼저 이구절을 암송하고 시작

해야 합니다.

이유는 금년 우리 교회 표어 성경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최서을 다해야 한

다는 것은 금년 만의 경우는 아닙니다. 인생과 신앙을 포함한 모든 일에 최

선을 다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최선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최선이

란 "산모가 아이를 낳을때 힘쓰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아 본 경험이 없어서 실감나는 얘기를 할 수 없습니다만 여

자들의 말에 의하면 죽을 힘을 다하고 목숨을 걸고 힘을 써낳는다는 것입니

다.

산부인과 병원이 없었던 시절의 임산부들은 민간요법으로 집에서 해산을

하고 했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방에 들어가는 임산부들 마음 속엔 내가

벗어놓은 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으로 해산에 임했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세계에는 대충대충 대강, 적당히,슬슬, 되는대로

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그만 둘수는 없는 대충대충, 슬슬, 적당하, 되는대로,아이

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죽기 위해 남겨둔 힘까지도 써야 고고성을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인생사는 것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적당히,

슬슬 해 치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영국 격언 가운데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신의 축복을 기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받을 생각을 말라는 뜻입니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지미 카터]입니다. 그는 그의 고향 조지아 주에 카터 연구소

를 만들어 국제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국제 해결사로 각광을 받고 있습

니다. 그는 작년 경직화되어 가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만났고, 보스니아의 내전해결을 위해 세르비아계의 본거지 팔레를

방문했는가 하면 아이티를 방문해 아이티의 긴장을 해결하는데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했는데 제

목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Why not the best?)였습니다.

카터가 해군중위시절 해군함정을 타고 항해하던 중 어떤 날 함장 리코버

제독으로부터 "귀관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라는 책망을 받은 일이 있

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크게 깨닫고 자극을 받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

했고 그러한 삶이 원인으로 작용해 대통령이 되었노라며 리코버 제독에게

감사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성공의 조건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재벌들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그들

은 오늘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알게되빈다. 음악도,운동

도, 미술도, 세계 정상에 오르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대충대충 시간이

나 메꾸려는 태도로는 예술가도 되기 힘들고 학자도 되기 힘들고 목회자도

되기 힘듭니다.

성공의 일곱가지 비결이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을 바로 관리해야 합니다.

시간이란 초와 분과 시들이 모여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스러기를

모아 만든 작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초나 분 하나하나를 소홀

히 취급하고 낭비하다 보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로 목적성취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투리 시간을 선용하고 아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100억 환상에 빠져 백원이나 천원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도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은 일생 가난뱅이가 되든가 아니면 어느날 도둑

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려면 잠도 줄여야 합니다. 24시간 중 4분의 1이상을 자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성공의 길은 멀어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잠이 많으면 기도생활도 힘들고 규칙적인 신앙성

장이 어렵게 됩니다. 특히 목회자는 잠이 많으면 고생스럽습니다. 한국교회

의 경우 새벽기도회가 없어지긴 어려울텐데 목히자가 잠이 많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올바른 시간관리는 성공과 직결되어 있음을 기억

해야 합니다.

둘째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성공이 어렵습니다. 구멍가게도 부지런하면 성공하지만 게

으르면 문을 닫게 됩니다.

신선한 야채와 생선을 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게는 아침 11

시나 되어야 문을 엽니다. 가정 주부들은 그날 아침 일찍 문여는 다른 가게

로 가서 물건을 사가곤 했습니다. 넉달만에 그 게으른 가게는 문을 닫았습

니다.

교회도 게으른 교회는 부흥하기 어렵습니다. 불꺼져 있는 시간이 많은교

회, 담임목사도 게으르고, 부목사도 게으르고, 장로도, 권사도, 성가대도,

교사도, 교인도 모두 게으름뱅이들 뿐이라면 그 교회는 부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1에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

기라"고 했습니다.

잠언 6:6을 보면 "게으른 자는 개한테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배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일하는 소의 입에는 망을 씌우지 말라"고 했고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으면서 댓가만 챙기는 것은 안됩니다.

바울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민주

화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일하기를 기피하는 풍조가 돌기 시작했습니

다. 맡은 일을 적당히 땜질이나 하고 댓가만 챙기겠다는 망국적 풍조가 풍

미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일 안하는 사람은 권리도 없습

니다.

우리는 민족적으로 좀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복지부동]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희자되고 있다는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복지부동이 무업니까? 너는 떠들테면 떠들어라 나는 꼼짝도 안한다는 것입

니다. 죽일테면 죽여라.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 복지부동입니다.

게으르고 일 안하고 복지부동하는 것은 나라 망치는 병균입니다.

신앙도 게으르고 일 아니하면 자라지 못합니다. 금년은 무엇이든 누구든

한 가지씩 일을 합시다.

셋째,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힘을 다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명기 6:5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

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성품, 힘을 다하라는 것은 전력

을 다하라는 것이며 전 인격을 다 쏟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전력투

구해야 성공합니다. 한 가지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다른 일도 잘해냅니

다. 그러나 작은 일 한 가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둘도 셋도 제

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맡았든지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의 길도 막히지 않고 그 다음 사람의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공한 사람을 본떠야 합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공한 사

람들은 남이 따르지 못할 비범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우연히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점과 그 면을 예의주시하고 배우고 본뜨

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쁜것, 악한 것, 범죄수단은 본뜰 필요가 없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자취는 따르고 배우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다섯째,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천대받을 수도 있고 호

강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개가 죽으면서 자식들에게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절대로

한국에 이민 가지 말라"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철탕집으로 끌려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 뉴저지 주에 살던 [보미]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주인이 죽으며 100만 달러를 유산으로 몰려주었습니다. 그 유산은 변호사가

관리하며 개전용 캐딜락 승용차에 전속 운전수를 고용했고 주치 수의사가

건강을 체크하는가 하면 전속 개의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을 입혀 주었

습니다. 그 개는 주인 잘 만나 호강한 것입니다.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면 성공길이 열리고 잘못 만나면 열렸던 길도 닫히고 맙니

다. 그러니까 성공하고픈 마음이 있다면 친구나 이웃 선택을 잘 해야 합니

다.

제가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교회를 다니며 늘 어울리느니 7-8명의 친구들

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4명은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

를 들면 장난삼아 남의 수박을 훔친다든지, 호박 잎을 가루처럼 만들어 담

배처럼 피운다든지 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곤 했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그들과의 만남이나 교제를 끊지 않고 계속했더라면 오늘의

저는 목사가 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모두가 예수를

떠났고 세상 사람들이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귀고 있는사람, 자주 만나는 사람, 친구려니 하고 교제하는사람을

둘러 보십시오.

빨리 삶에 오염되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십시오.

여섯째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회란 시간과 사건이 합해서 되는 것이기 때

문에 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마치 물이 흐르듯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므

로 그 기회를 붙잡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성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도, 구원도 지금이라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일곱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성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해도 성공의

결정권은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조건 속에서도 성공을

만들어 내시는가 하면 성공의 결정에서도 끌어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

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성공과 행복과 평안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역대상 29:10이하를 보면 다윗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

니다. 그는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주권과 천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께

속하였으며 주께로부터 왔노라"고 했습니다.

1995년도 충신교회 표어는 [최선을 다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관련성구

는 고린도전서 4:1-2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이 구절을 때마다 암송해

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저는

계속해서 왜 최선을 다해야 하며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하며 최서을 다하면

어떤께 되는가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바람직하고 바르고 좋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결

과로 오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 라스베가스에 도박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금요일 오

후에 몰려들기 시작 토요일과 주일까지 도박에 미쳐 있다가 오후가 되면

시뻘겋게 충혈된 눈과 빈혈병자처럼 비실거리는 걸음거리로 주차장으로 간

다는 것입니다.

도박군들은 이틀밤씩 최선을 다했지만 남는 것은 허탈, 기진, 패배감 뿐

인 것입니다. 나쁜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1995년 한해동안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뜻있고 보람된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각각 맡은 일들에 최서을 다합시다.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상급이 임할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아멘!

20

제목 : 새해를 맞는 마음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1월 01일

우리나라 만큼 사계절의 순환과 구분이 명확한 곳도 많지 않습니다. 노르

웨이 같은 경우는 겨울이면 몇 달씩 밤만 계속되는가 하면 여름이면 낮만

계속됩니다.

노르웨이 최북단 사는 주민들은 1월18일이 되면 여러달 동안 계속된 밤이

끝나고 새롭게 솟아오르는 해를 보기위해 높은 산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해를 본느 순간 "아침이다! 해가 솟는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강원도 경포대의 새해 첫날 일출을 보기 위해 12월 31일

저녁 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간 성전에서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할 감사의 주제나 내용 가운데 새해

니까 특별히 더 감사해야 된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감사는 언제나, 늘 감사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지난 한해는 수를 셀 수 없는 감사로 점철된 한해였습

니다. 주님 떠나지 않고 믿음지킨 것으로 시작해 죽지않고 살게 된 것, 사

지백체가 기능상실하지 않은 것, 주님 섬기게 해 주신 것, 전쟁 일어나지

않은 것, 굶어죽지 않은 것, 오늘 여기 모일 수 있게 된 것.. 등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대망의 새해를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맞이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해를 맞는 우리의 마음가짐이며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카렌다는 바

뀌고 해는 바뀌었지만 그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

다.

어떤 공산주의자가 뉴욕에 있는 콜럼버스 광장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공

산주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염을 토하며 외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새로운 옷

을 입혀 줄 수 있습니다"라고

그의 연설을 듣고 있던 기독교인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새 옷을 입을 새 사람을 만드십니다"라고

새 옷보다는 새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값비싼 새 옷을 입어도

도둑놈은 도둑놈입니다. 새 옷 입는다고 도둑놈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옷만 갈아 입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시편 131편은 시인의 소박한 열망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

은 시인의 삶의 다짐이기도 하고 소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시인의 그 소

박한 다짐을 새해를 맞는나의 소망과 다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1절에서 시인 다윗은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후기 작품입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

을 치며 불렀던 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고 통치자인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을었던 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며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라고 자신의 겸손을 고백한 것입니다.

겸손은 내적인 것이며 인격적 사건입니다. 겸손은 자포자기나 체념이 아닙

니다. 겸손이라는 원문의 뜻은 [누르다][낮추다][괴롭히다]라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신을 누르고 낮추고 괴롭히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누가복음 18:13-14을 보면 어느 죄 많은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

소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죄를 사하셨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이며 무가치한 존재이며 얼마나 잘못한 것

이 많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될수록 겸손의 부피는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풀리처]에게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풀리처는 대답했습니다. "만일 그대가 영국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를 들어 써 주실 것이다"라고

주경가 베이커는 "인생은 계단과 같다. 위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알게되고

밑으로 내려가면 자신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드보르작]은 민족주의 낭만파 음악

인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입니다. 특히 그가 작곡한 첼로 협주곡[신세계 고

향곡]은 음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날 드보르작을 존경하는 프라하의 시민들이 그에게 꽃다발을 증정했습

니다. 그 꽃다발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라는 리본이 매어

있었습니다.

며칠 후 사람들이 드보르작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주었던 꽃다발은

드보르작의 작곡실 한켠에 있는 베토벤의 흉상 밑에 놓여있었습니다. 그리

고 드보르작이 직접 쓴 찬사도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에게..."

드보르작은 시민들의 찬사와 꽃다발을 받고 몸둘 바를 몰라하며 고민하다

가 자신의 음악세계에 결정적 영향력을 주었던 베토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

던 것입니다.

우리가 취해야할 겸손한 삶의 태도는 주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주님께 돌려야 하며 주님의 받으셔야 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최고의 겸손인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금년 한 해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2. 과욕을 버리겠습니다.

1절 끝을 보면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

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지나친 욕심으로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일과 미치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란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허영된 삶이나 욕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정치의 이슈는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경제적 중진국 대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사는 훈련은 전무였습

니다. 허영, 사치,낭비의 물결이 홍수처럼 휩쓸어도 속수무책입니다.

시인은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힘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고

백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쓸 수 있는 힘은 제한되어있습니다.

수명 자체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힘과 생명을 헛된 데 낭비하면 안됩니

다.

돈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만 그 돈을 벌기 위해 과욕을 부리면 결국 그

돈 때문에 인생을 그릇치게 됩니다.

쾌락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쾌락만을 구하다

보면 그 쾌락에 빠져 패가망신하고 마는 것입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올바로 사용합시다. 노력하고 힘을 다해 살되 욕

심은 버립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3. 평안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2절을 보면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실컷 젖을 먹고 난 후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숟가락으로 이유식을 먹였을 대 아기의 표정과 엄마의 젖을 먹을때 아기의

표정을 비교해서 관찰해 보십시오. 이유식을 받아 먹고 있는 표정은 만족한

표정이빈다. 그러나 엄마의 젖을 먹고 있는 표정은 행복하고 평안한 표정입

니다.

외국 미술단체에서 [평화]를 주제로 미술작품을 공모했습니다. 많은 작품

이 공모됐는데 소재가 다양했습니다.

구름 한점도, 바람도 없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배 한척, 한적한 시골의 전

원풍경, 꽃핀 들녘에서 가족들이 소풍을 즐기는 모습, 노을지는 석양 한쌍

의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 푸른 초장에서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 등, 평화를 상징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공보전의 당선작은 다음 그림이었습니다.

"거친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가의 작은 오두막 엄마의 품에 안겨 밖에서 일

고 있는 풍랑이나 소란에 아랑곳 없이 젖을 빨고 있는 갓난아기의 미소"였

습니다.

아기의 최대 요람은 엄마의 품입니다. 집안에 돈도 있고 TV도 있고,만화책

도 있고, 언니도 있고, 장난감도 있고, 옷도 있고, 신발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보험 증서도 있고, 침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느

니 서럽게 울어댑니다. "엄마- 부르며 웁니다. 아가의 최대 행복과 평화는

엄마의 품입니다. 그곳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품 거기서 젖뗀 아이처럼 행복하고 평안을 찾겠노라"고 다

윗은 시편 17:8에서 하나님의 품을 "주의 날게 그늘"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의 품, 그 날개 그늘에서 쉬고, 평화를 찾고 평안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 날개 및 내가 평안히 쉬네

밤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주님 안에서 그 날개 아래서 평안을 누리며

금년 한해를 살아나갑시다.

4. 영원히 하나님을 바라며 살겠습니다.

3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라고 했

습니다.

3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내 일생 하나님을 높이며 겸손히 살겠다. 헛된 일에 나의 건강이나

정력이나 소유를 낭비하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품 속에 살면서 젖

먹고 난 어린 아이처럼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겠다. 이스라엘아 내가 그렇게

살기로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는 통치자로서의 바램을 피

력한 것입니다.

바란다는 것은 원한다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

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면 세상 것은 얻을 수 있지만 만족과 행복은 얻지 못하빈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볼 땐 나는 만족하였네"라는 노래처럼 하나님을 바라

면 참 만족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스라엘아 영원까지 바

라면 내가 누릴 만족과 행복도 영원까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새해의 태양이 밝았습니다.

겸손하게 삽시다.

욕심을 버립시다.

평안을 누리며 삽시다.

영원히 하나님을 바라며 살아갑시다. 아멘!

21

제목 : 구원의 우물에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년 12월 25일

본문은 하나님을 나의 구원과 힘과 노래로 밍고 사는 사람들에게

임할 은혜와 그 삶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

면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

다.

3절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

나님을 나의 구원, 힘, 노래로 믿고 산다면'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는 사람인가,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은혜를 받은 사람인

가 하는 것은 그의 사는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3

절 [그러므로]이하의 설명을 주목해야 합니다.

1.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네가 생각하는 땅이나 물에 대한 개념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땅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기 때문에 성지로 믿는가하면 물이 귀

한 곳이기 때문에 [구원]의 상징으로 묘사된 곳이 많습니다.

사8:6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죄를 가

리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렸다"고 묘사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살던 어떤 여인은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물

길러 나왔다가 거기서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야말로 기

쁨으로 물을 긷게 된 것입니다.

출17:1-7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물과 얽힌 모든 사건 등은 결국 영원한 생명의 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물 긷

는 사람들 입니다.

지금도 수도 물을 사용합니다만 옛날엔 우물을 파고 그 물을 두

레박으로 퍼내 썼습니다.

우물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그 동네 여론의 집합소입니다.

우물가에 둘러앉은 아낙네들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며 속상한 얘

기며 축하할만한 소식들을 주고 받는 곳이 우물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여론광장인 셈입니다.

둘째, 우물물은 퍼내야 맑고 깨끗합니다.

물을 퍼쓰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해 이끼가 끼고 썩게 됩니다.

물은 흔들고 흘러야 생수가 되는 법입니다.

셋째, 두레박이 터지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물이 다 새어 나가게 됩니다.

넷째, 우물물은 계속 새롭게 솟아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마치 우물물

이 솟아나듯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물 없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쁨보다 더 큰 감격이 신령

한 우물을 만난 사람에게 넘치는 것입니다.

누굴 만날까봐 뜨거운 한 낮에 물길러 나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참 기쁨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

쁨으로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긷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참 기빛븜, 참 행복, 참 만족을 얻으려면 구원의 우물에

서 물을 길어야 합니다. 구원의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우물가에 둘러 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

의 꽃이 피운다면 참 기쁨이나 구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그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최초의 언어는 [감사합니다]라는 것입

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주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그

가 자신을 구원해 준 사람에게 맨 먼저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형씨 몇살이슈?"

"주민등록 번호가 뭐유?"

"어디 사슈?"라야 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안됩니다. 첫마디는 "감사합니다"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감사의 대상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

며"라고 했습니다. 딴이름 부르며 감사하면 안됩니다. 나에게 구원

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편 후반부를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노래들로 채워져 있

습니다.

때로 우리는 정말로 감사해야 될 하나님과 상대적인 감사의 대상

인 사람을 뒤바꿀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입은 은혜는 최선을

다해 감사할 줄 알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선 대충 대충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

다.

3. 그 행하심을 만국중에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것만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내가 감사하고 있는 그 사

실과 내용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느 해 농아인들과 정박아들이 함께 드리는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건강한 제가 볼 때 그들은 감사

할 조건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는 그들의 노래와

손놀림 속에서 감격적 감사를 목격했습니다. 감동적인 예배였습니

다.

우리는 사지백체가 말짱하고 먹고 배설하고 잠자고 깨어날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가 적었습

니다.

감사는 하나였고 원망은 아홉이었습니다.

감사의 노래는 한곡 뿐이었고 원망과 시비의 노래는 수천곡조였

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사를 중얼거렸을뿐 선포하지못했

습니다.

본문은 만국 중에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좋은가, 귀

한가, 위대하신가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김포 공항 직원들의 성탄 축하예배에 설교를 하기위해

갔습니다. 그날 마침 모 백화점이 제2공항청사 지하 넓은 공간에

매장을 열고 자선바자 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장소가 그곳

매장을 지나서 가야하는 곳이어서 매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 코너를 지날 때마다 판매원들이 "어서 오십시요" "할인 판매

합니다" "기회 놓치지 마십시요" "좋은 물건입니다"라며 손님 끌기

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상품 판매에 열을 쏟는 젊은이들의 신념을 볼 수 있

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도 망서림도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감사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해야 합니담. "예

수님은 나를 위해 오셨다"고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예

수님은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고 "예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선포해야 합니다.

5절 끝을 보면 "온 세계에 알게 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만국 중에 선포하라든지 온 세계에 알게

하라는 것은 복음의 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문민정부 출범초기의 이슈는 개혁과 민주화였습니다. 그리고 어

번 개각을 계기로 내건 이슈는 세계화입니다.

이제는 동남 아세아의 한국이 아니라 세계의 한국이 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어차피 세계 정세는 세계화를 지향할 수 밖에 없습니

다.

러시아나 중국이 이미 개방 정책을 표방한데 이어 북한도 영공개

방을 선언했습니다. 이제 더이상 폐쇄나 쇄국정책이 설 자리가 없

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주전 700년경 하나님의 구원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온 세계에 알게 하라는 본문의 교훈이야말로 복음선교의

세계화를 위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벳바게라는 마을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

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길가에 서있던 시민들이 종려가지를 흔들

고 겉옷을 벗어 길에 편 채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러자 종교 지

도자들이 웬 소란이냐며 말렸습니다.

그때 주님은 "만일 이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

셨습니다.

4-6절 사이에 "그 이름을 부르며, 선포하며, 알게하라, 소리높여

부르라"고 반복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4.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 보겠습니다.

왜 감사해야 하며 그 이름을 부르고 선포하고 높이고 찬송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5절 끝을 보면 "가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극히 아름답다는 것은 탁월한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영광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탁월

하고 비교할 수 없고 영광스러운 사건이며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

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중국 상해나 북경에도 성탄나무(Christmas

Tree)를 세우고 성탄 할아버지(Santa- )를 만들어 세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전 세계가 그분의 탄새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

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삶을 산 사람이 누굽니까? 그리고 예수님처

럼 죽은 사람이 누굽니까? 오직 예수 뿐입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위대하신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크리스마스입

니다.

이 복된 날 우리에겐 너무나 감사하고 증거할 사건들이 많습니

다.

윌리엄 거널은 "악한 일을 하고 기뻐하는 모습이나 그리스도인들

이 슬퍼하고 낙심하는 모습은 똑같이 꼴불견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제(토요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늘 주님]이라는 붓글씨

를 써서 표구사에 보냈습니다. 어떤 분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서였

습니다. 저는 그 분을 만나본 일이 없기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

람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이 몇년 전 제가 써준 [늘 주님]이라는

족자를 사무실에 걸어 놓았는데 어느날 그분이 그 방에 들어 왔다

가 그것을 보았답니다. 어렸을 때 교회 생활을 하다가 장년이 된

뒤로부터는 신앙생활을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날 [늘 주님]이라는

족자를 보는 순간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휘호 하나를 더 부탁해서 받아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는 것입니

다.

[늘 주님]을 히브리 말로는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이

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뤄진 날을 크리스마스라고

부릅니다.

크리스마스는 구원의 우물이 되신 주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

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이 사건을 감사합시다. 이 아름다운 사건을 만국에 전파합시다.

오늘도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할렐루야!

22

제목 : 하나님은 나의 구원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년 12월 18일

이사야12장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스라

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찬양이 136편이나 되었다고 합니

다. 본문의 찬양 주제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12:1은 "그날에 너희가 말하기를"이라는 서두로 시작됩니다. (In

that day you will say) 그 뜻은 그날에 있을 사건 때문에 찬양한

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주님이 메시아로 오시는 날

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이사야12장은 주전 700년 전에 불렀

던 성탄송가가 되는 것입니다. 12장은 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1-2)과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 만방에 전하라는 것입니다(3-6). 우리는 2절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워이심

이라"고 했습니다. 2절 속에 하나님 찬양의 내용이 드러나고 있습

니다.

1."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고 찬송합니다.

우린 여기서 [나]라는 1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시라고 노래하지 않고 나의 구원이시라고 노래한 점을 주목해야 합

니다.

1절 끝을 보면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나의 구원"이 바른 고백입니다. 구원은 내 것일 때 감격스

럽고 감사가 넘치는 것입니다. 만성 고질병을 앓던 사람이 명의를

만나 병을 고쳤습니다.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병을 고쳤는

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울먹이멸 어느 병원인지는

잘 모르겠고 의사 이름도 모르는데 하여튼 우리가 고침받았다고 떠

벌렸다고 가정합시다. 그 사람은 가장 중요한것을 잊어버린 사람입

니다. 병원을 대고 고쳐준 의사 이름을 대고 내가 그분 때문에 고

침받았다고 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는 이 고백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만 나의 구원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유일성과 구원의 유일성을 천명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구원의 길도 하나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바울은 갈1:6에서 [다른 복

음]이라고 했고, 1:8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

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도량이 크고 넓은 사도였습니다. 심지어 자기를 배신했거

든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들도 용납하고 포용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사상 가운데 종교 다원주의라는게

있습니다. 미국은 본래 합중국이어서 각 나라 각 민족이 각각 다른

종교를 가진 채 모여 살고 있습니다. 각 나라 사람마다 각각 다른

종교 신앙을 가지고 살면서 구원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유

교나 불교나 회교나 인도교나 그 어떤 종교도 구원이 있기 때문에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

이 종교 다원주의 주장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나 교회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무신론보다 더 무서운 적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말한 [저

주받을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예수 그리스

도의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

다.

둘째 하나님은 나를 용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구원의 과정이며 조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내가

죄용서 받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

다. 용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람이 죄없는 사

람더러 "내가 당신을 용서하겠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 사람에게 지은 죄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

습니다. 그러나 지옥갈 죄를 용서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특사로 수감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교도소에서 나온 사

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사]라는 말은 듣는 순간 하늘이 빙

빙 돌더랍니다. 그리고 설마하는 생각으로 기가 막히더랍니다. 자

기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답니다. 분명 꿈은 아니더랍니다. 전신의

힘이 쑥 빠지면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답니다. 그리고 이젠 살

았구나라는 감동이 전신을 휘감고 소리치며 노래를 부르고 싶더랍

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은 그 감격은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에 그것을 비길 수 있겠습니까? 위가 쓰리고 아파

서 병원을 찾아간 어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설마 했지만 암이라

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현기증이 일어

나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암이야라는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암이란말야, 뭐 이따위 병원이 다있어?"라

며 모든 것이 다 증오스러워 졌습니다.

그 시간 부터 위가 쑤시고 열이 오르고 구역질이 나고 개스가 터

져 나왔습니다. 식욕이 떨어지고 소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

을 들은 친구 의사가 모 종합병원의 내과 과장을 소개해 주면서 다

시 한번 검사해 보도록 주선을 했습니다. 결과는 암이 아니었습니

다. 그 순간 세상이 그렇게 밝고 아름답고 햇빛이 그토록 찬란하더

랍니다. 의사가 그토록 고맙고 팔다리에 힘이 솟고 차 안에서 노래

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특사받은 감격만도 못하고 암이 아니라는 건강 진단을 받은 후의

감격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도 있고 용서하실 수도 있습니다. 벌하실

수도 있고 상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무서운 심판을 받은 사람이나 민족들의 이야기

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경우는 용서받은 사

람들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셋째 그 구원은 영속적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의사나 약은 내 몸둥이를 고쳐 줍니다. 그러나 그 몸둥이는 나이

들면 노쇠하고 병약하게 됩니다. 영원히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

니다.

어떤 잡지를 보니까 외국의 어떤 여자 배우는 얼굴 성형수술만

세번을 했다고 합니다. 20대 초반에는 눈이며 코며 양 볼의 보조개

를 성형했다고 합니다. 30대 초반에는 이마의 주름을 없애고 팽팽

하게 하기 위해 머리 속으로 이마 피부를 끌어 잡아 꿰메는 수술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늘어진 목덜미와

턱을 팽팽하게 만들기 위해 목 뒤로 피부를 비끌어 메는 수술을 했

다는 것입니다. 그 잡지의 평은 만일 50이 지난 그녀의 얼굴을 비

끄러맨 실을 가위로 싹뚝싹뚝 잘라 버린다면 하루 아침에 그녕는

60 노파가 되고 말 석이라고 했습니다.

미인도, 영웅도, 영광도, 재물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구원은 영원히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2.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찬송은 경험적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힘

을 체험한 사람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육체의 힘입니다.

물건을 드는 힘, 만드는 힘, 무력, 폭력, 경제력, 정치력, 지식

의 힘 등 인간 세계에서 생성되고 행사되는 모든 힘을 가리켜 육체

의 힘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데 이 힘이 없으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 힘과

힘이 겨루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영적인 힘입니다.

영적인 힘은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입니다. 마귀도 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이 힘은 누구도 무엇도 겨룰 수 없고 맞설 수 없습니다. 가장 이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마귀의 힘인데 이밈 마귀는 하나님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지 오랩니다.

하나님의 힘은 자기 힘을 믿는 사람에게서는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을 믿고 의지하면 강한 힘이 돼 주십니다. 교만과 불신

과 의심과 염려는 내게서 힘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앙망하면 새 힘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사40:31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한평생 하나님의 힘을 체험하며 살았던 다윗은 시18:1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

고 이어 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나의 산성이시라"고 노래 했습니다.

다윗은 고독할 때마다, 힘들 때마다, 시련이나 환난이 앞을 가로

막을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힘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힘

으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며 구원이십니다.

3. 하나님은 나의 노래라고 찬송 했습니다.

가사있는 노래는 사람만 부릅니다. 새들의 노래는 소리와 곡조는

있습니다만 가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노래는 가사가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노래는 자연, 이념, 사상, 사랑을 예찬하거나 표현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그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영국 시인 에드워드 영은 "기도는 우리의 길을 하늘로 향하게 하

지만 찬양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노래 가운데 가장 귀하고 고상한 노래는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

니다. 그것은 거룩한 노래이기 때문에 [성가]라고 부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등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을 많이 쓴 크로

스 비는 생후 6개월만에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친구가 그녀에게 "하나님은 왜 너 같이 착하고 재주 많은 사람을

맹인이 되게 하셨을까?"라며 한마디 했습니다. 크로스비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는 순간 네 소원이 무

엇이냐고 물으셨다면 나는 맹인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거야 왜

냐하면 천국에 가서 맨처음 눈을 뜨고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

야"라고...

그녀는 일생동안 2000여개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도 24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각각 다릅니다.

두 눈을 뜬 사람도 있고 감은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불행한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도 있고 문제 투성이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로스

비는 두 눈을 감을 채 2천여개의 감사와 감격의 찬송시들을 썼습니

다.

시119:164절을 보면 "주의 의로운 규례로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행16장을 보면 빌립보 옥

중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깊은 밤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 크신 사랑을 찬송하는 계절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합시다.

금성철벽 여리고 성도 나팔불고 찬송하며 돌았기 때문에 무너졌습

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신 주여 내가 주를 찬양 하나이

다.

23

제목 : 엎드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년 12월 11일

민수기에는 두가지 큰 반역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14장에 기록된 바란 광야 가데스의 반역 사건 입니다. 애

굽에서 나온지 2녕 정도 지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렀

을 때 각 지파의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군들은 모세의 파송을 받고

그 딪당에 들어가 40일 동안 비빌리에 샅샅이 정킹마을 마치고 돌

아왔습니다. 그리고 정탐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서 가져

온 실과를 보이며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며 심히 커

우리 실력으론 그 땅을 점령할 수 없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이

보고가 끝나자마자 백성이 소리를 지르며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애굽에서 죽었거나 이곳 광야에서 죽는 것이 좋았겠다.

2)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칼에 죽게

하려는가

3)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 났겠다.

4)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 모세를 향한 반역이었고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반

역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며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

고 능히 들어갈 수 있다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갔습니다.

민14:27절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조치가 기록되오 있습니다.

1) 나를 원망하는 이악한 회중을 어느때까지 참겠느냐

2) 내가 그들의 원망을 다들었다

3) 말한대로 해 주겠다.

4) 너희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다.

5)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너희 자녀들이 40년을

광야에서 유리방황하게 될 것이다.

6) 그리고 하나님과 모세를 악평한 열명은 하나님 앞에서 재앙

으로 죽었습니다.

참으로 끔찍한 진노였습니다. 40년을 방황하게된 결정적 이유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반역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다른 하나의 반역은 가데스의 반역이 있은지 38년, 길고도 험했

던 광야 바황이 끝나갈 무렵 당시 지도층 인사였던 [고라, 다단,

온]세사람이 작당하여 반역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주모자였던 [고라]는 레위 지파인데다 모세의 사촌 형제였

고 성막의 기물을 운반하고 관리하는 고핫 자손이었습니다. 한 마

디로 그래선 안될 사람이 반역 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 세 사람은 250명의 저명 인사들을 포섭하여 구테타를 모의

하고 항명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악은 언제나 악과 뭉치기 마련입

니다.

그들이 내건 원망과 불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 왜 너희가 스스로 여호와의 총회 위

에 스스로 높이느냐

2)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과야에서 죽

이려하느냐

3) 우리 위에 왕이 되려느냐

4) 왜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지 않고 고생을

시키느냐

5) 이젠 가나안은 싫다,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38년전 바란광야 가데스의 반역 때문에 38년 동안 광야를 방황해

야 했던 그들은 38년후 고라의 반역으로 엄청난 징벌을 받게 되었

습니다.

민16:32절을 보면 땅이 갈라져 산채로 고라, 다단, 온 세삼과 그

의 가족과 온 집이 생매장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동조했던 250명

저명 인사들은 하나님의 불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16:35). 그 뿐

만이 아닙니다. 그 사건 이후 하나님의 진노로 동조했거나 동의했

던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두 반역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두렵고 치욕스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두 반역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의 항변이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은 피조물의 도전이

나 항거나 반역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은 유일하게 인간들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말 심지

언 범이나 사자도 창조주를 반역하지는 않습니다. 인간만 반역죄를

짓고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단코 그 죄를 용납하지 않은십니

다.

롬9장20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

느냐 말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말대로 된것입니다(14:28)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 "가나안은 절대로 못들어간다""우

리는 안들어간다"이 말은 저들이 걸핏하면 쓰던 상투어였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말대로 된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될꺼야]를 반복해도 좋은 사람이 되기가 힘든 법인

데 [나는 나쁜 놈이 될꺼야, 나는 죽을꺼야, 나는 망할꺼야]를 노

래 부른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는 원망과 불평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심리는 반드시 남을 끌어 드리고 싶어집니다. 동조자

를 찾고 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라는 250명을 모았습니다.

네째는 모든 원망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란광야 사건도 고라의 사건도 하나님이 친히 들으셨고 보셨습

니다(민14:27). 하나님은 돌이나 나무나 쇠붙이로 만든 신이 아닙

니다. 듣고 보고 느끼고 행동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19:14절에서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는 모세 원망과 하나님 원망이 같은 맥락에서 취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4: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라고

했고, 14:11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

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14:27절을 보면 "나

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라고 했습니

다. 민16:3을 보면 "그들이 모세와 아론을 거스렸다"고 했고,

16:30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과연 여호와를 멸시했다"고 했습니

다.

민16:4을 보면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16:42을 보

면 "모세와 아론을 칠 때에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더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

이요 보내신 자요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개인적인 권력욕이

나 공명심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심부름

하고 있는 종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사역을 방해하고 반항

하고 반역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하나님

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여섯째는 댓가 지불이 너무나 크고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사건의 경우는 주모자가 모두 진노로 죽었고 40년 방화이

시작 되었습니다. 고라의 경우는 당사자와 부화뇌동했던 250명 무

리들, 말로 마음으로 동조했거나 박수를 보냈던 14,700명이 멸망했

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 행동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초점은 처참한 비극을 들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을 대했던 모세의 태도를 살펴 보려는 것입니다.

14:5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자라"고 했고

16:4을 보면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라고 했고 16:45을 보면 "두

사람이 엎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출34:8절을 보면 "모세가 급히 엎드렸다"고 했고 민20:6을 보면

"모세가 회막문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엎드리는 사람입

니다. 힘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고 막막하면 땅에 엎드렸습니다.

신9:18-25을 보면 40일동안 그는 물도 떡도 먹지않고 하나님 앞

에 엎드렸습니다. 수5:14을 보면 여호수아도 엎드렸습니다. 모세한

테 배운것입니다. 도대체 엎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는 자신을 낮춘다는 것입니다.

높은 사람 가진 사람 강한 사람은 대개 뻣뻣하게 서거나 앉기 마

련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은 종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모세

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엎드린 것입니다.

둘째,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린 종은 [머리를 들라]는 임금이나 주인의 하명이

있을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답답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

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엎드린 것입니다.

셋째, 기도를 의미합니다.

모세는 땅바닥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말씀 드리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뜻을 기다리기

위해 엎드렸던 것입니담. 한마디로 모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결과입니다.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1) 절망하고 낙심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태도는 문제를 더 힘들게 만들 뿐 아니라 회복 가능성

차체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2) 원망하는 태도입니다.

사회를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고 여건을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원망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원망하면 결과는 파멸입

니다.

3) 출구를 찾는 태도입니다.

누구를 만날까? 누구에게 호소할까? 누가 도와줄 수 있을까? 지

평선이나 수평선에서 출구를 찾는 것입니다.

4)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과 태도는 하나님께 부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겠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회사

나 가정이나 업체에 찾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토록 애타

게 찾던 누군가를 보내시고 누군가를 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

시는 것입니다.

죠지 뮬러는 한 평생 동안 기도 응답으로 최고 기록을 세운 사람

입니다. 통산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마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톺해서 기도 응답을 주셨습니다.

모세의 경우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이 임재하셨고 사건에 개입하

셨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셨고 주변의 교통 정리를 해 주셨

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였던 멜랑크톤은 "환난과 곤고는 나를 골방으

로 몰아 넣어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는 그 환난과 곤고를 내게서 떠

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죤 번연은 "만일 당신의 입이 벙어리일때 하나님

은 당신에게 귀머거리가 되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벙어리는 말

못하고 디스크 환자는 땅바닥에 허리굽혀 엎드리지 못합니다. 나는

영적으로 버어리가 아닙니까? 허리 못굽히는 허리병 환자는 아닙니

까?

지금 입을 열어 기도합시다. 엎드립시다. 지금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가 기도하나이다 내 기도를 들으소서.

24

제목 : 승리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4년 12월 04일

우리는 본문 20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

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뜻은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교회에 승리

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한구절 속에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을 이기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전투는 칼과 칼, 총과 총의 대결입니다. 맨 주먹과

권총을 든 사람이 싸우는 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싸움과 같은 것

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신데 반해 사단은 난폭하고 간교하기

짝이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평강의 하나님이 사단을 상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참 승리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

다.

창 3:15절을 보면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태초에

사단과의 영적 전쟁이 있었음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덤비는 사람보다는 싱글싱글 웃으며 덤

비는 사람이 이기기 마련입니다. 사단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싸움을 걸지만 하나님은 평강으로 이기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동원하는 무기는 어떤 것들입니까? 17절과 18절이 설명해

줍니다.

첫째, 분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시고 사단을 분쟁하게 합니다. 부부가 갈라

서게 하고 형제가 분쟁하게 만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시기

하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서도 분쟁을 일으킵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엡4장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되고 싶은 마음 하나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되는 것을 방해하

고 찢는 것은 사단의 역사인 것입니다.

둘째, 거치게 합니다.

17년을 보면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리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치게 한다는 것은 방해가 된다는 것입

니다.

영의 세계는 민감한 세계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가 그

시야를 가려도 그 영혼에 큰 그늘이 드리우는 것입니다.

카메라 렌즈에 눈섭 하나가 붙어 있었는데 그대로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현상을 해보니 사진에 큰 기둥 하나가 가로 놓여 있었습

니다. 눈섭이 확대인화된 것입니다.

내 영혼을 방해하는 것은 눈섭처럼 작은 것도 닦아 내야 합니다.

사단은 모든 것을 거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 필요없는 사람

이 되게 만듭니다. 그 공동체에서 필요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필요

한 사람이 됩시다.

셋째, 예수를 섬기지 않습니다.

18절을 보면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

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 배만 섬긴다"고 했습니다.

사단은 자기를 섬기게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 것도

내 이익과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고 가르칩니다.

털끝 만큼만 손해되는 일이 생기면 악을 쓰고 덤비는 것이 사단

의 생활 방법입니다.

미국의 큰 제과회사 사장이었던 존 하일러는 사업을 시작하기전

하나님과 중요한 약속을 했습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하겠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는 통장 하나를 별도로 만들고 통장 주인의 이름을

M.P라고 했습니다. M.P는 My partner의 약자입니다.

그날부터 전체 수입의 10분의 1은 그의 파트너인 하나님 통장에

자동으로 입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파트너에게

10분의 2, 10분의 3으로 이익배당을 늘려갔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사업 역시 2배 3배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

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옛날 얘깁니다만 비만오면 교회 마당에 꽃을 옮겨다 심는 권사님

이 있었습니다. 자기집 마당에 심으면 시들고 교회 마당에 심으면

잘 자란다며 자기집 마당의 꽃을 떠다가 심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꽃이 자라는 모습을 자켜보고 순을 집어 주며 기뻐하는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태

도인 것입니다.

네째, 순진한 사람을 꼬입니다.

18절 끝을 보면 "공교하게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공교하다는 것은 세련되었다는 것이고 아첨한다는 것은 듣기 좋

고 보기 좋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세련된 매너와 듣기 좋은 화술과

보기 좋은 태도로 순진한 사람을 유혹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별명은 유혹자, 꼬이는자 입니다. 그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꼬이고 미혹하는 것이 사단의 전문 기술입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감언이설띵

에 넘어가 멸망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이

기도록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본문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2. 속히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사단의 시험이나 유혹은 영원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

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 시련, 슬픔, 시험이라는 것들은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한 그것들

은 속히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환난이나 시험

이나 실패나 고통이라는 것들은 한평생 내 뒤를 따라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20절 끝 부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바

울은 하나님께서 사단을 속히 이기게 하시는 그 사건을 은혜로 해

석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내게 임할 때 시험도 유혹도 고통도 실

패도 속히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주님의 은혜가 임해

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받는 몇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란 나 자신의 능력이나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라야 된다는 겸손을 가진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

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다든지 내가 해 낸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

진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둘째,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도 구하는 사람이 받습니다. 은혜도 갈망하고 사모하는 사람

이 받는 법입니다. 이유는 갈증난 사람에게라야 냉수 한그릇이 꿀

맛인것처럼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꿀보다 더 단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

다.

지난번 미국의 중간 선거는 민주당의 참패와 공화당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공화당의 승리를 미국 언론들은 보수파의 승리라고 표

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민주당의 정책이나 클린턴의 정치 노선이

진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클린턴은 대통령 선거 공약에 동성연애를 인정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동성연애자들의 표를 긁어 모았습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의 모든 국민하교에서는 매일 한차례

씩 의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매일 아침 수업

을 시작하기전 전국 교실에서는 담임 선생님의 인도로 기도를 드리

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도인 케네디가 대통령

이 되면서 1962년 헌법 2조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국시에 배치된다하여 연방대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리고 기도를 없애버렸습니다. 그것이 케네디가 위임

한 다음해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빼앗겼던 사람들이 이번 대거 공화당의 승리의 주역

들이 되면서 빼앗긴 교실의 기도를 되찾아 미국의 위기를 구하고자

나선 것입니다. 그들을 언론은 보수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공연히 말합니다.

오늘 미국이 이 모양 이 꼴로 전락한 것도, 심지어 국민학교 아

이들과 시골의 중고등학교 아이들까지도 총기를 휴대하고 마약 중

독에 빠져 들어가는 것도, 그리고 케네디가 총에 맞아 죽은 것도

기도시간을 빼앗은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태 경제협력 각료회의 18개국 정상 회담

을 마친 클린턴은 기자회견에서 공립학교 기도시간 부활 문제를 반

대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했습니다.

공화당의 공세는 단순한 정치 공세가 아닙니다. 병든 미국, 썩어

가는 미국을 다시 살리는 처방은 기도 밖에 없다는 신앙적 진단을

내린 것입니다. 저도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클린턴은 타 종교의 반발을 고려해 [자발적 기도] 방안을 제시했

다지만 미국이 다시 사는길은 클린턴과 민주당과 공화당과 전 국민

이 무릎꿇고 두손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썩어 곪아터져 건드리기만 하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고름이 터지

는 이 나라! 그것이 4공 책임이냐, 5공 책임이냐, 7공, 7공 책임

이냐를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살릴 길이 뭡니까? 청와대도 국회도 사법부도 교회도 모두 한 통

속이 되어 기도 운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1863년 4월 30일 목요일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국민금식과

기도의날]로 지킬 것을 선포하면서 "우리는 계속된 성공에 도취되

어 너무 자족하고 교만한 나머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우리 자신을 겸비하여 국가적인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관용과 용

서를 빌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부산에서 만난 모장로님은 약국을 경영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아

파트 단지에 있는 약국이어서 저녁 11시 지나서야 문을 닫는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선친도 장로님이셨는데 평생 새벽 기도를 빠뜨

리지 않으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나기전 모든 죄를 다 낱낱

이 회개하고 숨을 거두셨는데 심지어는 교인들 손이 더럽다고 악수

안한 것까지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분의 아들 장로 역시 아버지가

물려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새벽 기도회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집에 돌아가면 저녁12시 잠자리에 들면 1시가 되지만 반드시

일어나 새벽 제단을 쌓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참으로 좋은 모범과 전통을 물려 받았

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은혜받는 비결도 기도입니다. 국가가 살고 민족이 사는 것도 기

도입니다.

1773년 불란서 의회가 [불란서 국민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다]는 결의를 했습니다.

그 이후로 부터 불란서의 정신과 도덕과 윤리는 곤두박질치기 시

작했습니다. 그후 불란서의 혁명 국회는 다시 "불란서 국민은 초월

적 존재와 영혼불멸은 인정한다"는 결의를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그것마져도 없었더라면 불란서는 망했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가정

도 살고 문제도 해결됩니다. 기도해야 은혜받고 승리 할 수 있습니

다.

25

제 목 : 던지고 다시 찾는 법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전 11:1-4

미국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26세)는 '부인들'이라는 영화에 1천 2백만

달러를 받고 출연해 사상 최고의 여배우 출연료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우

리 돈으로 96억원입니다.

같은 영화에서 [맥 라이언]은 1천만 달러(80억원)을 받았고,"씨스터 액터"

라는 영화에 출연한 {우피 골드버그}는 8백만 달러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영화 한 편에 출연하고 96억원을 받았다는 보도를 읽으면서 몇가지

생각나는게 있었습니다.

첫째는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점입니다. 얼마나 잘 나

고, 잘 생기고, 연기가 좋아서 천문학적인 출연료를 받을 수 있을까.

둘째는 세계의 내노라하는 배우들이 얼마나 부러워 할까.

셋째는 그 돈을 어떻게 쓸가.

넷째는 그토록 엄청난 출연료를 지불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골이 찬

사람일까. 골이 빈 사람일까 하는 것이빈다.

얼마전 미국에서 WBA챔피언을 뽑는 권투시합이 있었습니다.

45살된 [조지 포맨'과 25살난 [마이클 무어러]의 권투경기에서 포먼이 10

회에 무어러를 KO시키고 챔피언이 되었습니다.KO로 상대편 선수를 때려 눕

히고 KO승을 거둔 포먼이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 기도하는 모습이 텔리비젼

으로 증거되었습니다.

현재 [조지 포먼]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시 북부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권투시합이 있기 전 주일 포먼은 강단에서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마저

내밀어 주라"는 요지의 설교를 해 교인들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포먼 목사가 링에서 그것도 20살이나 아래인 무어러 선수를 두

둘겨 패 KO시키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사람들이 도대체

링에서 뭐라고 기도했는지 모르겠다고 비아냥댔습니다.

그러자 포먼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성직지가 사람을 팰수 있느냐는 공세에 그는 "복싱은 하나

님 말씀을 전하는데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한 수단이며, 선교의 일환이다"라

고 응수했다고 합니다.

그는 87년도에 권투로 벌어들인 파이트머니로 불우청소년을 돕는데 전액을

썼다고 합니다.

마이클 무어러와의 경기를 지켜본 권투전문가들은 역시 목사 복서로서 모

범적인 매너를 보여줬다고 칭찬했습니다.

솔직하게 저는 96억원을 받았다는 미녀배우 [줄리어 로버츠]보다는 흑인목

사이자 권투선수인 [조지 포먼]이 더 매력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다움이란 얼마나 버느냐, 얼마를 가졌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쓰느냐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

다.

지난 10월 최명길 자매가 방송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짤막한 그의 수상소감

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오늘 제게 주시는 상금은 제가 다니는 충신교회를 통해 르완다 난민을 돕

는데 쓰겠습니다."

이 짤막한 얘기는 세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연기자로서의 신선한 이미지를 높혔고,

둘째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걸 밝혔고,

셋째는 충신교회를 알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옛말에 짐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기독교인의 청

지기관은 바로 벌고 바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시절 홍길동전이나 임꺽정 소설을 진지한 흥미와 관심을 가지

고 읽었습니다. 그들의 의협심과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그들의 의기가 손뼉

을 칠만큼 통쾌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던 때의 소견이었습니다.

정당한 행위란 동기도 방법도 결과도 좋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목적이 좋다고 하더라도 도둑질을 하거나 사람을 죽이면서 그 목

적을 성취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이스라엘의 3대왕 솔로몬의 인생과 신앙고백록입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하여 인생이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경홈을 반추하며 밝히고 있습니다.

11장 본문에서 그는 "던지라.. 다시 찾으리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1절을 보면 "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식물은 내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

다. 먹는 것으로 시작해 쓰는 것, 소유한 것들을 말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가 여러가지입니다.

동물은 영혼이 없으나 사람은 영혼이 있습니다.

동물은 고도의 윤리성이 없지만 사람은 윤리적 결단과 삶이 있습니다.

동물은 하나님 예배가 없지만 사람에겐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행위가 있

습니다. 동물에겐 언어와 문자가 없습니다만 사람에겐 언어와 문자와 과학

과 문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겐 너무나 많고 다양한 생필품이 있습니다. 동물은 필요한

것들이 간단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겐 집, 자동차, 침대, 이불, 베개, 전기

불, 저금통장, 돈,보석, 숟가락, 젓가락, 의복 등... 그 수를 셀수가 없습

니다.

동물들에겐 없어도 되는 것들이 사람들에겐 너무나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

고 그런 것들은 만족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들이 줄을 이어 개발되고 시판

되고 있기때문입니다.

당시 솔로몬은 최고의 향락과 사치를 만끽하며 살았던 통치자였습니다. 부

와 영화와 향락을 마음껏 즐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여기 몇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고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원히 가지고 있을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본인은 영원히 가지고 있고픈 마음이지만 그것들은 언젠가 내 곁

을 떠나 물흐르듯 흘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하관식을 하는 묘지에서 세상떠난 부인의 관 위에 손으로 흙을 덮

으며 중얼거리던 남편의 독백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바보같은 사람, 이렇게 훌쩍 떠나려면서 집수리는 뭣하러 했소"라

는 것이었습니다. 구름이 흘러가고 물이 흐르듯 우리의 모든 것도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둘째 주라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물에 던진다는 것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 자체만으로 귀한 것입니다.

저는 6.25전쟁 직후 미국사람들이 보내준 구호물자 가운데 양복한 벌과 구

두 한 켤레를 다니던 교회를 통해 선물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제 발과

몸에 맞는 것이어서 제 차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도 그 신발 임자가 누구였는지, 그 양복 주인이 누구였는

지 모릅니다. 그냥 미국교회 어느 교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외에는 아는 이

없습니다.

그 구제품을 보내는 미국교회 교인들도 누가 자기 것을 입고, 신고,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보내준 것입니다.

편애는 시기와 질투와 증오와 싸움을 일으킵니다만, 박애는 그런 불순물을

만들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쌀쌀하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저도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제가 그런 평을 듣게된 데는 저 자신의 개성탓도 있습니다만 특정인만을

위해 목사의 사랑을 편애해선 안된다는 다시 말하면 목사는 만인의 목사여

야하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야 된다는 목회 철학 때문인 것입니다.

저는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를 도와준 나라, 내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구두를 신게해 줬고, 양복을 입게해준 나라라는 고마운 마음을 갖곤 합니

다.

욥기 22:44을 보면 "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긔하면 전능자가 네 보매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라"고 했

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나는 물질을 버렸는데 하나님이 그 자리를 친히 메꿔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아무리 귀한 보배나 값진 보석이라도 뜻있고 값지게 사용한다면 하나님

이 그 빈자리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본문은 밝

힙니다.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반드시 도로 찾

는다는 것이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면서 사는

생활이 복이 있음을 기억하고 많이 던지고 삽시다.

쓸데없이 던지고 쓸데없는 것에 던지지 맙시다. 바로 던져야 도로 찾게 됩

니다.

2.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라

2절을보면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줄찌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 폭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하나나 둘만을 보지 말고 일곱이나 여덟을 보라는 것입니다. 나만 보지 말

고 이웃을 보라는 것이며, 서울만 생각하지 말고, 한국을 생각하라는 것이

며, 한국만 생각하지 말고 북한동포를 생각하라는 것이며, 나아가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골고루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물질도, 정성도 골고루 넓게 나눠야 합니다.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일곱으로 국한하지 말고 일곱이라는

제한수를 넘어 여덟에게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어떤 주경학자는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눠주라는 본 구절을 곱셈으로 해석했습니다. 즉 7*8=56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흔히 사랑은 국경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전 세계 어느 곳이나 들어갑

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높이, 그 깊이, 그 넓이, 그 길이로 이

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남을 돕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

첫째 성경의 명령입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사랑과 봉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둘째 주님이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셋째,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히셨으며, 주리셨으며 헐벗었으며 목마르셨나이까?"

라는 질문에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언제 무슨 재앙을 당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많이 넓게 던지라"고

했습니다.

심은 만큼 거둡니다.

정을 주면 정을 받고,

덕을 베풀면 덕을 입게 됩니다.

사랑과 온정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경기탓으로 돌립니다만 백화점

은 초만원입니다. 그것은 종말현상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랑이 식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합시다.

남을 도웁시다.

손을 폅시다.

지갑을 꺼냅시다.

26

제 목 : 물동이를 버린 여인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요 4:27-30

요한복음 4장은 예수님과 한 이름없는 여인과의 만남에 관한 기사로 채워

져 있습니다. 그녀가 누구의 딸이었는지,나이는 얼마나 됐는지, 교육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들에 대해선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어느날 물길러 나왔다가 우물가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얘기 끝

에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다는 것이 본문의 줄거리인 것

입니다.

여자라고 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리브가,한나,마리아 등 성

경 속엔 여러 명의 여인들의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미라아 여인의 경우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그녀의 과거

는 철저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대화는 여자로선 가장 아픈 상처인 과거를 들춰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그 과거 때문에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다녔고, 사람접촉을 피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외출이 뜸한 한 낮을 골라 물을 길러 나

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과거를 끄집어 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과거

를 부인하지 않고 시인했다는 점입니다.펄쩍 뛰며 웬 사람잡을 소니랴고 잡

아뗐다면 그날 에수님과의 만남은 무위로 끝났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사람, 주님을 마나는 사람에게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과거가 드러나면 어떻습니까?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

겠느냐"라는 극단적인 굴욕을 당하면서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

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주님께서로 더 바짝 다가

섰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내를 누비며 운전하는 영업용 택시 기사들에게 설교할 기회

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지금까지 교통법을 한번도 어긴 일이 없는 사람

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떠니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범법자들이

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

아닌 삶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그날 예수님을 만나 여섯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하

지 않았더라면 일생 어둔 그늘에 묻혀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의 과거를 들추고 상처를 건드리신 것은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

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렸을 때 종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수술부위에

부쳐놓은 거즈를 떼낸 후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아냅니다. 그때 그 아픔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파서 악을 쓰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나 의사가 사정없이 미

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이나 열흘씩 거즈를 떼내지도 않고 닦아내

지도 않고 약도 바르지 않는다면 환부는 썩어 고름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거를 들추고 괴롭히고 그것을 약점삼아 악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과거를 말함은 악용 치유하기

위해서이며, 주께서 상처를 건드리심은 그 상처에 고여있는 피고름을 닦아

내고 고쳐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1. 예수님과 그 여인의 대화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제자들을 마을로 보냈습니다.

그것은 곁에서 이러쿵 저러쿵 거들고 나서는 제자들이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둘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3-15절을 보면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

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

르지도 않고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장소가 우물가였기 때문에 화제는 자연히 물로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는 마

실 물을 달라고 했고, 주님은 생명의 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단계는 신앙의 초보단계인 것입니다.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이 신앙의

주된 관심이라면 그것은 신앙의 초보단계입니다.

먹고 또 먹어도 배고픈 것들,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나는 것들이 세상 것

들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벌고, 얼마나 소유하면 "이제 그만"이라고 손을 저으며 만

족할 수 있을까요?

[프랭클린]은 "만족은 가난한 사람을 부하게 만들고 불만은 부한 사람을

가난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 6:17에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것은 재물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동성 고

기압과 같아서 언제 어디로 옮겨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를 받

고 가지면 된다는 상한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하는 목적도, 사업을 하는

목적도 잘 먹고, 잘 살고, 부자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실현되지 않고 깨어지게 되는 날이면 절망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목숨까지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내가 주는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

라"고 하자 그는 바로 그런 물을 내게 달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강의실에서 물마시는 것, 밥먹는 것, 숫가락질하는 것, 줄

서는 것, 신호등 보고 길 건너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

습니까? 그런 것은 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차원과 신앙의 차원을 한 단계 높입시다.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2)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에 과한 이야기가 20절에서 갑자기 예배에 관한 것으로 돌변합니다. 화

제가 바뀐 것입니다.

화제를 극적으로 바꾼 것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대답 속에는 진짜 남편이라고 믿고

살았던 사람은 없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가 불륜과 부도덕으로 일관된 삶이었다는 실토이기도

한 것입니다.이유는 남편아닌 여섯 남자와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안고 있는 도

덕적 갈등과 고민과 함께 영적 갈망을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자나 바라보고 웃고 우는 그녀의 일차원적 삶을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고 예배하는 삶으로 끌어내 주신 것이빈다.

2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했

습니다.

금년들어 재벌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규정이 변했다고 합니다.

남녀 성차별 없앤 것은 이미 오래고, 전 같으면 병역필,명문대학, 성적 등

이 우선조건으로 꼽혔지만 금년부터는 그 사람의 인성, 적응 능력, 인간관

계, 창의성, 품성 등 주로 인격적 조건이 중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자기에게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

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본래 예배(라트뤼오)라는 낱말의 뜻은 "고용된 하인"이라는 말에서 유래했

는데, 그 뜻은 봉사하다, 섬기다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봉사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써비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쳤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세상섬기고,남자섬기고,그것도 제 남편도 아닌 남자들에

게 시달리며 살던 그녀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

서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녀의 위대한 삶의 전환이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변화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매어달리고, 사람에게 매어 달리며 살던

사람이 그것들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 섬기며 살게 된 것이 참 변화입니다.

삶의 방향과 질이 달라진 것이 참 변화인 것입니다. 드디어 그녀는 사람답

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된 것입니다.

2.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28절을 보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물동이는 식수수단이며, 생활수단입니다. 지금처럼 상수도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물동이가 없으면 물을 길어다 먹을 수가 없스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좋고 귀한

시간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모래퍼서 밥만들고 풀잎 잘라 반찬만들어 노는 소꼽장난이 끝나고 진짜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은 모래밭에 그것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갑니

다. 그 밥상을 가지고 들어가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껏 죄에 파묻혀 살면서 여섯명 씩이나 남자 파트너를

바꿔가며 소꼽장난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은 고독했고 허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거듭났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

렸습니다.

그녀에게 물동이는 그의 지나간 과거였고, 어두운 삶의 상징이었습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것들과 버러선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것,

귀한 것, 필요한 것, 가치있는 것은 버려선 안됩니다. 그러나 해로운 것,

유익하지 않은 것, 나쁜 것들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간 그 여인은 결단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으

로 다가섭니다. 진실로 예수를 만난 사람은 동네도, 사람도 겁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던 그 여인의 모습을 영상처럼 보십

시다. 발걸음 가벼웠을 것입니다. 어깨는 덩실거렸을 것이고, 입에선 노래

가 흘러나왔을 것입니다.그리고 그의 눈에는 감격의 이슬이 맺혔을 것입니

다.

그 이야기는 오늘 나의 이야기라야 합니다. 그 모습은 바로 내 모습이 되

어야 합니다.

2)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했습니다.

29절을 보면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은 와 보라 이는 그리스

도가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그날 그 여인의 간증과 증거 때문에 39절을 보

면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42절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마리아인들이 그 여자에게 "우리가 믿는 것

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 우물가에서 죄많은 여자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게 하셨

습니다. 그리고 사미라아 동네에도 사건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예수 바라보고 믿는 것이 진짜입니다. 예수님이 던지는 폭탄이 진짜 폭탄

입니다.

물동이를 버리게 하신 것도 그토록 저주스럽던 동네로 뛰어들어가게 하신

것도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지게 하신 것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줄을 서 예수를 믿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주여! 나도 그렇게 만들어 주소서, 나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아멘.

발행일 : 941120

분 류 : 설교

27

제 목 : 졸지 맙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20:7-12

정상적인 수면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편 127:2에서 "여

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러나 잠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은 과속운전, 과로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이라고 합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해본 운전자는 누구나 경험했을 것입니다만 주행중 조는

시간은 불과 2-3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2-3초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졸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졸음은 일종의

생리 현상입니다. 졸음의 원인은 수면부족일 때,피곤할 때, 식사 후 식곤증

때문에, 허약할 때 등입니다.

졸릴 때 잠자고, 깨야할 때 깨는 것은 자유로운 행복입니다.

그러나 잠자고 싶을 때 잠자지 못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3일간 밥을 먹지 않는 고통보다는 3일간 잠자지 않는 고통이 더 큰 것입니

다. 그래서 고문 가운데 무서운 것은 잠을 못자게 하는 고문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잠은 은헤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졸고 앉

아 있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정하는 각료회의에서 장관이 끄떡거리고 졸고 앉아

있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 됐다면 그 장관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골자는 영적인 졸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

기서 주목할 것은 영적 상태가 무너지면 정신상태가 무너지고, 정신상태가

흔들리면 육체도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긴장상태가 무너져 내리면 모든 분야의 나사못이 풀리게

된다는 것이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한 젊은이의 사건을 통해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주일에 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면 '안식후 첫 날에'라고 했습니다. 안식후 첫날은 주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고 마침 선교여행중 드로아를

방무한 바울사도가 말씀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스럽고

복된 날, 복된 장소에서 불상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

다락난간에 걸터 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1950년 6월 25일은 주일 새벽이였습니다. 그동안

일어났던 대형 사건이나 사고들은 대부분이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작년 (1993년)10월 10일 위도 앞바다에서 여객선 침몰로 270명이 희생당한

사건도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휴일을 즐기려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

다. 그중에는 교회다디는 교인들도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나 주일에 대한 개념을 올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창세기 2:2을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

시니라"고 했고, 3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렸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의 출발은 엿새동

안 천지창조 사역을 의해 노동하신 하나님이 쉬신날입니다. 아담이나, 하와

가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후에 하나님은 인간에게도 쉬라고 안

식의 법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쉬시도록 해드리고 그대신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안식일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엿새동안 눈코뜰새없이 자기 사업, 자기 직장, 자기 생업에

골몰하다가 안식일이 되면 내가 쉬는 날로 착각하고 놀고 쉬려하고 있습니

다.

그것은 안식일의 기본정신을 망각한 처사인 것입니다.

주일의 경우는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으로 바뀌면서

지키게 된 주의 날입니다.

글자 그대로 주일은 주의 날,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의 주인은 주님이십니

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한테 물어보지 않고 휴일이니, 공일이나, 주일이니

하여 제멋대로 남용하고 죄짓는데 쓰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유두고의 경우는 안식후 첫날 교회에 나와 앉

아 있었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말씀을 듣고 있었는데 떨어져 죽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교훈은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주의 전에 나오지 않는 것은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와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참 예배자의 정신과 자세를 가다듬고 앉아 있어야 되

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나와 바른 에배를 드려야 합니다.

2. 그 사건은 말씀듣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며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때 말을 밤중

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저녁집회가 좀 길어졌는데 3층에서 졸던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잡담하고 노닥거리는 것은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만 진리를 탐구하고 말씀

을 들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지루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내 생각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옛날 얘깁니다만, 영화곤에 영화보러 갔다가 중간에 쉬고 본 영화가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빅터 플레밍'이 감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였고, 하

다른 하나는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였습니다. 지금도 생생한 것

은 그 누구도 '무슨 놈의 영화가 이렇게 길담','쓸데없이 길구먼'이라며 짜

투덜댄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끝을 알리는 The End싸인이 화면에 나오고 극장 안의 불이 켜졌는

데도 사람들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조는 사람도 없었

습니다. 세기의 명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면서 조는 사람은 [바

람과 함께 사라질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유두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졸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졸아선 안될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다"고 했습니다. 조명은

수면과 직접 관계가 있습니다. 불을 끄거나 조명이 어두우면 졸거나 잠을

청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날 밤의 경우는 윗다락까지 등불을 밝혀 두었습니

다.

그리고 그날 밤 졸았던 사람의 수가 수십 명이었다면 그건 바울의 책임입

니다만 다 정신차리고 말씀듣는데 유두교 혼자만 졸았습니다. 한마디로 은

혜의 등불, 마음의 등불, 영혼의 등불이 꺼졌기 때문입니다.

꽃피고 새우는 봄날도 마음이 싸늘하게 식으면 춥게 느껴지는 것처럼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은혜는 떠나고 졸음만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신자가 은혜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이유는 은혜를 받지 못해

야 다루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은혜받는 것을 방해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킵니다.

둘째 말씀에 대해 의심을 일으킵니다.

셋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 불평스러운 마음을 일으킵니다.

넷째 교회를 등지게 만듭니다.

다섯째 졸도록 유도합니다.

시험 중에 가장 심각한 시험은 말씀듣다가 거의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설교듣다가 시험드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소서' 상담시간에 보낸 편지사연 가운데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헌금이야기를 하면 거부감이 일어나고 은혜가 안되는데 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이 있었습니다.제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설교는 합시다와 하지 맙시다로 구분됩니다. 전도해라, 기도해라, 사랑해

라,봉사해라,바로 살아라, 못된 짓 하지말라, 미워하지 마라,죄짓지 말라

등이 계속 반복되고 설파됩니다. 그런데 다른 얘기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도

헌금문제만은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 내 신

앙이 모자라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거부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맨날 설교가 헌금소리로 채워진다면 그건 잘못이지만 한두번 정도라면 '주

님 저도 헌금생활 많이하고 바로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소

원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고 복받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날 그날의 말씀

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도록 노력하십시오."라는 내용의 대답을 한 일이 있

었습니다.

유두고는 말씀듣다가 떨어졌습니다. 만일 충신교회에서 누구누구가 설교

듣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보도가 된다면 그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3. 걸터 앉았기 때문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졸

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왜, 뭣하러 3층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위험은 피하는 것이 최상의 예방책입니다. 화재를 예방하려면 불을 조심해

야 하고, 교통사고를 예방하려면 차를 조심해야 하는 것처럼 추락을 막으려

면 걸터앉아서 안됩니다.

저는 이 상황을 영적 사건으로 조명해 보고 싶습니다.

걸터 앉았다는 것, 그것은 안정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방자스러운 행동입

니다. 의자에 앉는 것도 엉덩이를 디밀고 허리를 등받이에 붙이고 똑바로

앉는 것이 가장 단정한 자세입니다.

영적으로 걸터 앉는다는 것은 뭔가 산만하고 오만하고 그러면서 지쳐있느

니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지난 주간 뉴스위크지 뉴스메이커 안에 두 사람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인기 텔레비젼 토크쇼의 호스트로 최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

는 [오프라 윈프리]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홍보담당 비서였던

콜린랠리를 내쫓고 다른 사람을 채용했는데 전비서가 20만달러의 손해배상

청구를 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것입니다.

거기다가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중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지

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바이얼린 연주가인

금년 23세의 [질 새햄]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 주 필라델피아 교향악단과 함께 카네기 홀에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 연주가 끝나자 기립박수를 받았습니다.

박수가 끝나자 그는 슬금슬금 무대 뒤로 걸어가더니 오케스트라의 바이얼린

파트 제일 마지막 줄에 앉아 다른 단원들과 함께 [드보르작] 의 제8번 교향

곡을 신나게 연주했던 것입니다.

교만방자한 윈프리는 구설수에 오르고 겸솨난 질 새햄은 칭찬을 받고 있다

는 기사였습니다.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힘들든지 쉽든지, 편하든지

괴롭든지, 걸터 앉으면 안됩니다. 정신차리고 말씀듣고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졸고 있는 사단병력보다는 깨어있는 1개 소대가 훨씬 더 강한 법입니다.

졸고 있는 교인 10만 명보다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씀을 경청하는 1천명

교인이 힘이 있습니다.

운전도 졸면 안되고, 공부도 졸면서 하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몽롱한 상태에서는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몽롱한 상태에서

하면 안됩니다.

분재토양에 3대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흡수성이고, 둘째는 통기성이고, 셋째는 배수성이라고 합니다.

분재에 적합한 흙은 공기가 통해야 하고, 물이 흡수가 잘 되어야 하고, 배

수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성장의 조건이 있습니다.

교회출석 잘하고, 말씀 잘 먹고, 졸지 않고 깨어 기도하고, 예수님 바라보

고 전진하노라면 믿음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졸지 맙시다. 정신차립시다.

깹시다. 일합시다. 아멘.

발행일 : 941113

분 류 : 설교

28

제 목 : 제자가 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요 15:7-10

국토면적에 비해 자동차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이라고 합니다. 그

리고 세계에서 교통사고가 제일 많은 나라도 한국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주한 외국인이 한국에서 운전하는 법을 소개해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습니다(미국 자동차 잡지 오토모티브 뉴스특파원).

첫째 파란불은 자동차 경주의 출발신호다. 파란불이 켜지는 순간 반드시

뒷차의 경적이 울릴 것이다. 그 전에 나가라.

둘째 차간거리는 1인치의 틈도 두지 말라. 그 틈을 메우지 않으면 뒷차가

매울 것이다.

셋째 시원하게 달릴려면 레미톤 차를 사서 타라. 모든 차가 길을 비켜줄

것이다.

넷째 모든 차선을 헤집고 다녀라. 주행차선만 골라서 다니면 앞으로 가기

어려울 것이다.

다섯째 차가 막힐 때마다 경적을 길게 울려라. 스트레스도 풀고, 건강에

좋을 것이다.

여섯째 손을 흔들어라. 마구 끼어들고도 손만 흔들면 된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니까>..

한마디로 우리의 자동차 문화를 비아냥댄 글이었습니다.

교육부는 금년 9월부터 유치원에서는 한해 40시간,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20시간 이상 도로교통법과 경범죄 처벌법 등을 가르치도록 의무화했다고 합

니다.

그것은 잘못된 운전습관이나 비뚤어진 운전문화를 어려서부터 바로 가르치

자는 때늦은 발상인 것입니다.

누구에게엇 배우느냐, 어떻게 배우느냐, 무엇을 배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

의 인격과 인생과 신앙이 결정되는 것이빈다.

훌륭한 스승에게서 바른 삶을 배우면 인격인이 됩니다. 위대한 스승에게서

참 도를 배우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잘 만나야 하는 것이빈다.

본문 8절 끝을 보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

리가 예수님의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제자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본문 속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 제자는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부입니다. 그래서 '무촌'이라고도 합

니다. 그리고 부인을 [안사람]이라고 부릅니다.여기서 말하는 [안사람]이란

집 안에 있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언제나 함께

있는 사람,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나와 함께 살자. 내 집에 들어와 살자, 나와 함께 일하자는 것입

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친구들 몇 사람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의 꽃을 피우느라 식사시간이 길어져 저녁 10세가 넘었습니다. 식사 후에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씩 하기로 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집에 전화를 걸더니 부인이 몸살기가 있으니 빨리 약을 사오란다면 먼저 자

리를 떴습니다.그러자 3년 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난 친구가 "우리는 천천히

일어섭시다. 집에 가봐야 기다릴 사람도 없는데.."라며 천정을 바라보았습

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시한부

존재들입니다.

늘 언제나 기다려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씩 지방집회를 마치고 돌아

오면 새벽 2시나 3시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집에 도착해 보면 아이

들은 잠에 골아떨어져 있지만 제 아내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밖에서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

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두번 세번 울려도 대답이 없자 섭섭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혼자 잠을 자다니..."

그러나 만일 입장이 바뀌어 내가 기다렸다면 나는 꿈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 원리가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 거하면 '원하는대로 이루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예수 밖에 거하면 원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부림처도 안되고, 안간힘 써도 안되고, 발을 동동 굴러도

안되는 이유는 내가 예수안에 거하지 않고 예수 밖에 살기 때문인 것이빈

다.

우린 자칫 잘못하면 예수 안에 산다든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부자유자

나, 속박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예수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안되게 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뜻을 이루려면 행복을 잡으려면 진실한 성공을 이루려면 예수 안에 거해야

합니다.

5절을 보면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2.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

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과실

을 맺지 않는 가지는 재해 버린다"고 했고, 4절에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는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했고, 8절에서는 "과실을 많이 맺어야 제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나무는 관상수가 있고, 유실수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관상수에게서 과실

을 찾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유실수라면 당연히 과실이 있어야 합니다. 포도

나무는 과실을 맺는 유실수입니다.

탐스럽게 잘 익은 포도는 포도주의 원료가 되는가 하면 과실로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포도나무가 가지는 우리 그리스도인입니

다.

그리고 과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당연한 본분을 의미합니다. 과실

은 나무의 결과이며 평가기준입니다.

포도가지가 제아무리 무성해도 과실이 없으면 포도나무 가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지가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양공급이 중당됐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6절을 보면 "과실이 없으면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고

했습니다.

나에겐 과실이 있습니까?

일년동안 뭘했습니까?

단 한 알의 과실도 맺지 못한 채 잎떨어진 앙상한 가지만으로 금년을 마무

리할 생각입니까? 제자는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금년 봄 유치부에서 아이듬에게 호박씨를 나눠주면서 집에 가져다가 심으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 머리통보다 더 큰 호박 한 덩이를 가져온 아이가 있었습

니다. 자기집 아파트앞에 심었더니 호박이 열렸다는 것이빈다.

1년 동안 교회를 들락거리면서 신앙생활하면서 호박 한덩어리도 맺지 못했

다면 그는 호박만도 못한 사람입니다.

제자는 열매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 기도의 열매, 봉사의 열매, 성령의 열매들 가운데 다는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몇가지는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매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3.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9절을 보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했고,

10절을 보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라히라"고 했습니

다.

예수님의 제자는 스승인 예수님의 삶을 따르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여러가지 면에서 사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청빈, 검소, 절제, 근면,관용,진실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본받

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희생과 사랑입

니다.

만일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

한다면 그는 제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마

디로 자기를 희생하신 사랑입니다.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문법을 연구해 보면 명사의 종류가 여러가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명사,인칭대명사,추상명사 등 명사의 종류가 여러가지 입니다. 사랑은

추성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건이며, 역사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뭔가를 골똘히 추상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

다. 사랑은 행동하고 사건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추상화하고, 형용사화하고, 소설화화고,드라마화

하고,작품화해버리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은 죽어가는 자식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밤새 뜬눈으로 눈물을 쏟으

며 지켜보고 있는 어머니의 사건입바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로 죽어가는 인간을 멀고 먼 하늘에서 지켜보며 관조하

고, 사색하고, 명상한 하나님의 명상록이 아닙니다.

친히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매맞고, 찢기고,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신 몸으로 고난의 사건인 것입니다.

제자는 그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돼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찰결과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문제

는 누가 신장을 기증하느냐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사정

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기증자의 조건을 이야기한 후 고통받는 주의 종을 위

해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잠시후 여

기저기서 두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명이 거의다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의 것이

면 되기 때문에 손을 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랐습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겠습니다"라며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불었습니다.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은 사람을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뜻을 기다리기 위해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드

디더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

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그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해 신장을 바칠 사람을 결정하는 오리털이 내 머리 위로 날

아오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자는 주님의 사랑을 배우고,따르고,실천해야 합니다. 제자가 지킬 게명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아멘.

발행일 : 941106

분 류 : 설교

29

제 목 : 열납되도록 드립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레 22:17-23

어느날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가지고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고, 선물도 거절했습니다. 그때 거절당한 기

분이 어떠했겠습니까?

거절당한 제사, 거절당한 예물, 거절당한 호의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우

리는 본문과 그 외의 몇군데 성경구절을 통해 어떻게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는가를 발젼하게 됩니다.

본문 18절과 19절을 보면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드릴

찌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드려야 열납하시는지 찾아 보겠습니다.

1.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없는 수컷으로 드리라고 했고, 레위기

3:1을 보면 역시 흠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물이나 예물을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짐

승을 드릴 경우 상처가 있다든지, 신체부위에 이상이 있다든지, 병든 짐승

을 드리면 받지 않으셨스니다.

흠없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불완전한 예물은 받지 않습니다. 그

래서 바울은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

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속된 제물이나 죽은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데 있습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는 산 짐승, 흠없는 짐승을 드렸고,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강조된 흠없는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허물투성이입니다. 흠이 없고, 약점이 많은 존재입니다. 바로

그러한 나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고 산 제

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이 짐승이든, 곡물이든, 사람이든 가장 귀하고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쓰다버린 찌꺼기나 잉여 농산물을 드려선 안됩

니다.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을 가진 교회가 있었습니다. 벽이 떨어지고, 비가 새어도

당회가 교회 건축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젊은 집사 10여명이 헌

금을 작정한 후 가장 돈많은 장로님을 찾아가 호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로님,장로님 생전에 교회를 신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저희들이 심부름은 하겠습니다."

"철없는 사람들이로군, 교회를 아무나 짓는 줄 아는가, 그리고 교회를 지

으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네"

"그런 저희도 압니다. 저희들도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할테니 장로님도 헌금

을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허 사람들하곤,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헌금을 하나"

"장로님 이 집하며, 중심가의 빌딩하며, 여기저기 땅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다 내것이 아닐세"

"장로님 것이 아니라니 누구 것이란 말씀입니까?"

"이 집은 우리 집사람 이름으로 돼있고, 빌딩은 큰 아들 이름으로, 땅은

딸이름으로 농장은 둘째 아들 이름으로 과수원은 손자 이름으로 돼있다

네..."

찾아간 젊은 집사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일어서면서 한 집사가 내뱉은

말은 "하나님 몫만 없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흠없는 것으로 주님께 먼저 드려야 합니다.

2.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7:11을 보면 "화목제를 드릴 때 감사함으로 드려야 된다"라고 했

고, 15절을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대표적인 제사가 다섯가지이었

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번제,소제,화목제,속죄제, 속건제입니다. 그

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넷으로 구분됩니다.

불로 태워 드리는 제사를 [화제]라고 부릅니다. 흔들어 드리는 제사를[요

제]라고 부릅니다. 높이 치켜들어 드리는 제사를 [거제]라고 부릅니다. 부

어서 드리는 제사를 [전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제사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

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학생이 여행중 싸구려 여관에 투숙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

니 누가 신발을 훔쳐 갔습니다. 그는 어제 밤 잠자기전 분명히 하나님께 지

키시고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그는 화가 났습니다. 하필이면 가난한 자기 신발을 훔쳐가게 내버려둔 하

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주인이 미안하다면 창고에서 헌 신발 한 켤레를

꺼내다 주며 오늘은 주일이니까 교회에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못

해 따라가긴 했지만 기도도, 찬송되 되지 않고 신발생각만 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의자에 앉아 예배드리는 어떤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는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르는가 하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태도가 너무나 간절하고 감격스러웠습니다. 자세히 그를 바라보다가 깜

짝 놀랐습니다. 그는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

발 신을 발도 없는 사람이 저토록 감사와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신

발 한 켤레 잃어버렸다고 원망하고 투정을 부렸구나"라며 회개했습니다. 그

가 훗날 독일의 재무장관이 된 [마르틴 바덴]이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

다"라고 했고 "감사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조지 메길은 "감사라는 과목은 졸업이 없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일평생 그리고 천당에 가서도 감사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3.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1을 보면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

을 삼아 드리라"고 했습니다. 고운 가루는 한마디로 가장 귀한 상등품 밀가

루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운 가루란 더 이상 방아를 찧을 수 없을 만큼

세미하게 만든 가루를 의미합니다. 밀이 가루가 되는 것은 자기를 으깨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가장 고운 가루란 가장 오랫동안 많이 희생당한 가루라는 뜻입니

다.

고운 가루일수록 돌이나 먼지가 들어가면 안됩니다. 고운 가루를 만들려면

섬세한 관리와 정성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예물도 정

성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오다가다 생각나서 드리는 예배는 고운 가루 예배

가 아닙니다.

저는 국립중앙극장 입장권과 예술의 전당 입장권과 세종문화회관의 입장권

뒤에 있는 주의사항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공연 개시 10분전에 입장하시기 바랍니다.

@ 6세이하 어린이는 입장할 수 없습니다.

@ 공연 중 사진촬영, 화한수는 할 수 없습니다.

@ 공연 중에 객석을 출입할 수 없습니다.

@ 음식물을 장내에 가지고 들아갈 수 없습니다.

@ 공연 도중 입장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태도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1994년 4월 16일(토) 저녁 7시30분,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정명훈

씨가 지휘하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살로메'가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교

회일로 저는 늦게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문은 모두 잠겼고 문마다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 손엔 표도, 지정좌석도 있었지만 늦었다는게 창피스

러웠습니다. 사정 사정해 도둑 고양이처럼 곁문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곁에

사람들에게 여간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정성으로 준비하고, 정성으로 나오고, 정성으로 드

려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그런 것들보다 천만배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4. 순결한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11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라고 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물 속에는 썩게 하는 누룩을 넣으면 안됩니

다. 그것은 썩은 정성, 썩은 태도, 썩은 정신, 썩은 물질을 드려선 안된다

는 것은 가르쳐 줍니다.

누룩은 나만 썩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썩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제물은 썩은 것을 드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동기도, 방법도, 결과도 선해야 합니다.

예배 역시 그 동기와 방법이 순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

과 그 은혜가 감격스럽고 감사해서 경배와 찬야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헌금을 드리는 것도 순수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2:13을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뻣뻣한 것을 순을 죽여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소금은 맛을 내줍니다. 소금을 치라는 것은 썩지않게 부드럽게 맛있

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즐겁고 맛있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도 나

를 맛있는 사람으로, 멋있고 즐거운 사람으로 열납하시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에게 지나가던 왕이 "네가 구걸한 물건중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라고 했더니 쌀 한 알을 깡통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거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깡통 속에 왕이 준 금으로 된 쌀알

이 딱 한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지는 무릎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깡

통채 다 주는건데....."

순수한 마음 자체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5.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레위기 4:10을 이하를 보면 속죄제를 드릴 때 모든 것을 불살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가장 온전한 제사는 불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불사른다는 히브리어는 [사

라프]입니다. 그 뜻은 완전히 소각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

이 참 제사이며 예배입니다.

나를 드리지 않고 물질만 드린다면 그것은 참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고 참

감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가장 귀한 예물은 나를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친 후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삭도

되돌려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19-20을 보면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엇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내 몸도, 내 영혼도, 내 물질도, 내 시간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고 영광도 드려야 하는 것입니

다.

주여 나를 드리나이다.

발행일 : 941030

분 류 : 설교

30

제 목 : 마음을 정한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시 108:1-4

시편 108편은 다윗이 읊었떤 찬송시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대목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라는 시의 서두입니다.

사람은 마음먹기 따라 태도가 결정됩니다. 제아무리 극한 슬픔이라고 해도

마음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게속 슬픔에 빠질 수도 있고, 그 슬픔을 극

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줄 것인가, 안줄 것인가 등으로 고민하다가 마음을 정하고 나면 행동은 저

절로 뒤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정한 마음이 세 가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찬양하며 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그는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

금아 깰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본래 다윗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정규 음악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이 아

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뛰어는 시창력과 연주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를 창작했고,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으며 자작시에 곡을 붙

여 연주하고 노래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래하는 자신의 삶을 소년시절의 감상으로 국한하지 않고 일

생동안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심령으로 찬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

다. 성악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면 발성법과 호흡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는 공명의 폭이 좁지만 배와 폐부에서 끌어내는 소

리는 세종문화회관이나 광장도 울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도 입술로 부르는 경우가 있고 심령으로 부르는 경우

가 있습니다. 입술로 부르는 찬양은 듣는 사람의 귀를 감미롭게 할 수는 있

습니다. 그러나 심령으로 부르는 노래는 듣는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고 하

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심령으로] 라는 말의 뜻은 영광을 다 바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영광을 얻기 위해 온갖 시련을 다 겪었습니

다. 정적에게 쫓기는 고통을 겪었는가 하면 아들의 반역으로 가슴 찢기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차지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결단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조되는 다른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

다. 그는 별 탈없이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 어느 날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세와 영광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그 영광을 길이

누리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그 영광을 양보할 수 없었고, 틈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마저도 자신이 누리겠다

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원인이 돼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

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왕조는 몰락했고 영원히 영광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심령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정성과 사

랑과 재능과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영혼의 노래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

다.

2. 새벽을 깨우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일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건강법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입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은 생체리듬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건강생활에 유익하지 않

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거의가 야행성 기질로 변하고 있습니다. 늦은 밤

까지 잠 안자고 늦게 일어나기 때문에 아침 시간을 몽롱하게 보내게 됩니

다.

그런 습관은 신앙생활도 힘들게 만듭니다. 새벽기도 생활을 못하는 원인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남자 교인에게 신년도 서리집사를 임명할

테니 순종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체질이 야행성이어서 저녁 늦게까지 잠 안자는 것은 얼마든

지 견뎌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죽어도 못합니다.

집사가 되면 새벽기도회에 나가야 할텐데 저는 죽었다 새벽에 깨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잠자다가 깨긴 어렵습니다. 새벽기도 나오라는 말씀을 안하신

다면 집사를 맡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어도 못 일어나는 새벽기도를 어떻게 억지로 하겠습니까 혹 깰 수 있거

들랑 나오시지요"라고 했더니 "그럼 해보겠습니다"라며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해 3월말 연속 새벽부흥회가 계속되던 토요일 새벽 4시 30분 교회로 나

오다가 길에 서있는 그 집사를 만났습니다. 깜깜하고 추운 새벽이었스비다.

"웬일로 서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친구들하고 낚시하러 가기 위해 차를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라며 헤어졌습니다만 제 속으로 "야행성이라 죽어도 새

벽엔 못 일어난다더니.."라며 실소를 금치 못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새벽을 깨우는 것은 마음 정하기에 달렸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시간관리하는 태도와 습관도 고쳐야 합니다.

둘째, 하루의 일과를 주님과의 교제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가끔씩 측근들과 새벽조깅을 즐깁니다.제아무리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보장된 미국이라고 해도 클린턴을 보좌하는 스탭들이 늦잠을

자야 된다는 이유로 대통령과의 이른 아침 조깅을 거절할 수는 없을 것입니

다. 아마 조깅이 좋아서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싫어도 대통령과 함께 뛰

니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새벽을 깨운다는 것은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은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시간입니까?

셋째 다른 사람을 깨우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종소리가 없어졌습니다만 교회의 은은한 새벽 종소리는 잠든 사람

들을 깨우곤 했습니다. 새벽거리를 청소하는 미화원은 거리를 깨우는 사람

들입니다. 신문을 돌리는 사람들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시내버스,

전동차, 택시기사들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새벽제단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은 잠든 민족의 양심과 혼을 깨우

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시들고 마모되고 죽어가는 이 민족의 양심과 정신을 깨우는 새벽종

이 종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아침 주일학교

아이 하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얘 토미야! 넌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니"라고

어떻게 배웠을까하는 것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갑자기 긴장을 하더니 "목사님 전 절대로 아녜요, 전 여리고성

을 무너뜨린 일이 없어요 전 그 곁에 가본 일도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기가막혔습니다. 도대체 선생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선생을 불로 물었습니다. "수잔나 선생, 내가 조금 전에 토미에게 열리

고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여리고성 곁에 가본일도 없다며

자기는 결코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잡아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이 말을 듣던 수잔나 선생은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을꺼예요, 그애는 절대

로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예요, 그 애는 착하고 얌전하거든요?라고 대답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날 예배후 당회가 모인 자

리에서 그 얘길 꺼냈습니다.

"장로님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니까 토미

는 성 곁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잡아떼고 수잔나 선생은 그 애는 절대로 성

을 무너뜨릴 만큼 힘도 없고, 얌전하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

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재정담당 장로가 "목사님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

게 하겠습니까? 누가 무너뜨렸건 교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재

정으로 수리하도록 하십시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가장이 깨어야 가정이 깨는 법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야 교회가 깨어

납니다. 교회가 깨어야 사회가 깨고 민족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다윗은 노래합니다. "나는 새벽을 깨우기로 마음을 정하였노라"고 그것은

내가 먼저 깨겠노라는 것이며 내 가족을 깨우겠노라는 것이며 내 민족을 죄

의 잠과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우겠노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너무나 깊은 잠에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깨워야 합니다.

3.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3절을 보면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라고 했습니다.

1993년도 미국 스탠포드대학 경영대학원에서는 [에니어그램]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강좌에 넣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

인 면을 가진 인간의 감정형태를 9가지로 분류하고 긍정적인 면은 강조하

고, 부정적인 면은 고쳐 나감으로 그 사회나 공동체를 이끌어갈 지도자가

되게 한다는 프로그램입니다.

[에니어그램]에 드러나는 9가지 성격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완벽주의자 (2) 베푸는 형 (3) 연기자형 (4) 낭만주의자 (5) 방관자

(6) 회의형 (7) 향락주의자 (8) 보수형 (9) 조정자형입니다.

이미 뉴욕에서는 이 분류법을 적용해서 사람을 채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

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채용하거나, 임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아이오와주 어느 농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일하는 일꾼들을 위해

농장주인의 아내가 정성껏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일을 끝내고 식탁에 둘러

앉은 일꾼들은 한마디 감사하다는 인사말도 없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

웠습니다.

며칠후 그녀는 일꾼들이 저녁 식탁에 말이 먹는 건초를 잔뜩 잘라서 그릇

에 담아올려 놓았습니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꾼들은 "아니 이럴 수가 우릴

짐승으로 보는 거야"라며 화를 냈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장난이 아닙니다. 지난 번 당신들은 내가 무더운

날 비지땀을 흘리며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그 누구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를 한 사람이 없었어요, 한마디의 감사도 없이 식탁에 앉고 일어서는 사람

들은 값비싼 선물을 발로 짓밟아 뭉게는 마굿간의 소나 말과 다름없어요"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일꾼들은 얼굴을 붉히며 잘못했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평생 감사하며 사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우리도 주께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작은 일에 감사합시다.

언제나 감사합시다.

심령으로 감사합시다.

주경가 베이커는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감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고 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헬라인으로 태어

난 것, 철학자가 된 것"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스튜어트 목사는 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마주앉아 한주간 동안의 은혜를

계산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합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기로 마음을 정합시다.

주여 내가 마음을 정하였나이다.

아멘.

발행일 : 941023

분 류 : 설교

31

제 목 : 바로 드리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고후 8:1-8

지방 중심도시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있는데 어느날 그 도시의 천주교 신

부가 찾아 왔답니다. 찾아온 목적은 신도드을 모아 놓을테니 몇시간 집회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천주교에서 개신교 목사를 청해다가 집회를 할

려고 하는가,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해달라는 것인가라고 물언더니 이미 로마

바티칸의 허락까지 받았다며 개신교의 십일조하는 법을 얘기해 달라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찾아온 신부의 얘기는 도대체 천주교 교인들이라는게 헌금할 줄도 모르고

바티칸에서 돈오기나 기다리고 있어서 답답하고 속상하다며 몇시간 개신교

인들 헌금하는 얘기를 해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쾌히 승락하고 가서 몇 시간 십올조 얘기를 했더니 반응이 크

게 일더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보다는 개신교가 훨씬 더 헌금생활에 익숙하

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세계교회 가운데 한국 교인들이 가장 올바른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빈다.

그러나 보다 더 헌금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드린다면 받으시는 하나님

께는 더 큰 영광이 될 것이고 드리는 우리에게도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8과 고린도후서 8:1-8과 고린도후서 9:1-7은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주신 헌금에 관한 교훈입니다.

몇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6:3을 보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8:1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고, 8:4을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8:6을 보면 "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말하고 있는 "은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행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드린다는 그 행위자체를 은혜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은혜]로 해석한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감사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988년 10월 5일 아침 계약 회사원이었던 전용기 씨가 아침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차에 치어 두개골 골절 등 14가지 합병증세로 전주예수병원에 입

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쫓아간 부인 성정식 씨의 놀

라움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 당시 네살된 딸과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

을 대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생후 45일밖에 안된 딸을 대

전의 친정집에 맡기고 월 5만원의 사글세 방을 병원 앞에 얻어 남편의 간병

을 시작했습니다.

남편 전용기씨는 식물인간이었습니다. 하루 수십 차례씩 가래를 빼내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키는 등 남편 수발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고통의 날들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5년 11개월이었습니다.

주위에선 포기하라고 했고 시댁식구들도 발길이 뜸해지는가 하면 의사들도

합병증세 때문에 얼마 살지 못할 거라며 살아난다고 해도 식물인간을 벗어

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까운 사람들은 새출발을 하라

고 권위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급성폐렴 등 합병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성정식씨도 4

개월만에 쓰러져 입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씨는 평소 배워둔 미용기술로 환자들의 머리를 깍아주고 한달에 4-5만원

을 받아 남편의 기저귀를 사거나 약값에 보탰습니다.

본래 성정식씨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는 집으로 출가를

해왔지만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사고로 쓰러지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날마다 병원교회에 나가 남편 살려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식물인간이라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4년 11개월간의 길고 긴 식물인간의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

다.

저는 이 사연을 신문에서 읽었고, 예수병원 관계자의 입을 통해 직접 들었

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한편의 인간드라마입니다. 부부가 서로 얼굴을 마

주 바라보며 주고 받는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여보 고맙소","여보 깨어나줘서 고마워요"

"내 일생 당신 은혜 잊지 않을꼐"

"나 당신 사랑한다구"

"저두요"

부부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대화가 오고 갈 것입니다.

은혜는 순수한 것입니다. 은혜는 조건도 없습니다. 다만 은혜는 감동과 감

격과 감사가 넘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감동하고 감격한다면

드린다는 행위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쁜 사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드릴 수 있고, 드릴 것이 있다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억천만금을 가지고 있어도 죽어버리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고 또 드릴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제아

무리 드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다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

릴 것이 있다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무릎꿇고 즉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오늘도 깨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으로 보게 해주셨군요. 귀로 듣게 해주셨군요 입으로

말하게 해주셨군요. 손발이 움직이게 해주셨군요 또 다시 오늘 하루를 주셨

군요 감사합니다."

이 기도를 드리고 일어서곤 합니다.

여러분, 억천만원을 벌지 못했더라도, 성공출세를 내 욕심대로 못했더라면

살아있다는 것과 내 것이라고 몫지은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

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은혜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장병을 치료하는 내과 전문의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평소 식도락을 즐기

던 두 남자환자를 치료하고 있습니다. 위장병 환자는 다른 환자들에 비해

음식을 조심해야하고 특히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빈다. A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의 말에 순응하고 치료되면 마음놓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자기 절제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치료가 급속도로 빠릅니다.그런데 B라는 성을 가진 환자는 의사

말을 듣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먹는 재미로 사는데 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느냐, 먹으면서 치료를 하는 법은 없느냐, 먹고 치료하면 되지 않

느냐며 항의하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습니다. 그 환자는 A 환자에 비해

80% 치료가 지연되고 있다는것입니다.

먹게되면 먹게 되서 감사하고, 먹지 못하면 이 다음에 잘 먹게 될 줄로 믿

고 감사하는 사람이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이고 그가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

니다.

건강한 것, 드릴 수 있게 된 것, 드릴 것이 있다는 것, 오늘 내가 여기 존

재한다는 것 그것을 은혜로 믿고 감사합시다.

2. 자신을 먼저 드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5을 보면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물질로 헌금을 하기 전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들어 설명해 보게습니다. 가령 남편이 딴집 살림을 차리고 딴

살림을 하면서 그것을 미봉하기 위해 자기 부인에게 좋은 차를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용돈을 분에 넘치도록 준다고 가정해 좁시다. 부인은 남편이야

어디를 싸돌든 돈주고, 차사주고,옷사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할 수 있겠습

니까?

돈이 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내게 달라"고 하

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10여년 전 저는 어느 사진전에 갔다가 별난 작품을 구경했습니다. 사진모

델은 주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거의가 얼굴이 없었습니다. 여자의

각선미, 히프 가슴, 팔목, 등 그런 부분만을 클로즈업시켜 찍은 사진들이었

습니다. 얼굴없는 지체들의 전시회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돈만 드린다면 그것은 얼굴없는 가슴처

럼 흉물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재민 구호금을 내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나

를 먼저 드릴 때 하나님은 내가 드리는 물질과 시간과 재주를 받으시는 것

입니다.

3. 심는대로 거둡니다.

고린도후서 9:6을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농사법칙이고 인생

법칙입니다. 바울은 그 법칙을 하나님께 드리는 법칙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쿠바의 산티아고 마을에 [마리아]라는 여선생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말을 타고 학교에 출퇴근을 했습니다. 어떤 날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로 학

교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차림새가 꽤재재한 거라든지

맨발로 뛰는 걸로 보아 가난한 집 아이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았더니 자기학교 학생이었고, 검은 눈이 초

롱초롱 빛나고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마리아 선생

은 구두 한 켤레를 사서 그 학생에게 주었고, 정성껏 도와 주었습니다. 그

리고 그 다음해 그는 그 학교를 떠났습니다. 그후 쿠바의 지도자로 카스트

로가 권좌에 오르게 되었고, 마리아 선생은 한 신문에 공산주의를 비방하는

글을 썼다는 죄목으로 경찰서에 연행되었습니다. 그 선생은 곧 바로 정보과

정에게 넘겨졌습니다.

마리아 선생을 본 정보과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마리아 선

생이 아니오?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옛날 구두 사준 학생이 바로 접니다."

라며 덥썩 손을 잡았습니다. 구두 한 켤레와 작은 정성이 훗날 위기를 모면

케 해주었던 것입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

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럼으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덕이라는 씨앗을 뿌리면 덕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사랑이라는 종자를 뿌

리면 사랑이라는 열매를 거둡니다. 그럼으로 좋은 일은 많이 뿌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을 뿌리고,부덕을 뿌리고,죄를 뿌리면 그것들을 많이 거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쁜 일은 많이 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어떤 날 아브라함 집에 낯선 손님 셋이 찾아왔습니다.

너그럽고 후덕한 아브라함 부부는 정성을 다해 송아지를 잡고 요리를 만들

어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두 천사였습니다. 그날 아브라함

은 그들을 대접하고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리고 그날의 약속대로 일년 후에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공짜가 없습니다. 많이 드리면 많은 것으로 채워주십

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면서 늘 해야 할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 더 많

이 못드려 죄송합니다","주님 정성껏 드리겠습니다","주님 더 많이 드리도

록 복 내려 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알고 드립시다.

은혜를 감사하며 드립시다.

나 자신을 드립시다.

풍성하게, 넉넉하게, 많이 드십시다.

심는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바로 드리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드리는 사람들의

헌신과 헌물과 감사를 받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드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거지

도 거지취급하면 화내고 덤빕니다.

하나님을 누구로 알고 믿고 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드리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발행일 : 941016

분 류 : 설교

32

제 목 : 수년안에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합 3:1-4

하박국 선지자의 활동시기는 BC 612년에서 605년에 이르는 7년 기간이었습

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역의 정황은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킨 바벧론의 급부

상으로 격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벧론은 여세를 몰아 BC 605년 갈그미스

(Carchemish) 전쟁에서 애굽을 이김으로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스빈다.

그러한 국제 패권다툼과 경쟁 속에서 남왕국 유다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내 문제였습니다.

통치자들은 백성을 압제하고 착취했습니다. 강대국에 조공을 바쳐야 된다

는 이유로 백성을 늑탈했고 공의를 외치는 주의 종들을 듣기 싫다는 이유로

잡아 죽였습니다(렘 36:20).

그런가 하면 도덕은 땅에 떨어져 구원의 여망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까지 악인의 활동을 방치하시렵니까"

"어느 때에 의인들을 구원하시겠습니까?라고,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가 깨달

은 몇 가지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의문은 "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의 심판을 지체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불의한 바벧론을 들어 택한 백성을 징계하시는가" 라는 것이었습

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무로 깍거나, 돌로 다듬어 만든 생명없는 신이 아닙니다. 보시

고 들으시는 인격적인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불의를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자동검색기처럼 순간순간 삐삐소리를 내지는 않습니다.

바벧론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하고 괴롭히고 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

님을 원망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는 바벧론의 말발굽이 택

한 땅을 유린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할 수 있는가라고 항변했

습니다.

그러나 하나니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렇다해서 바벧론을 방치하신 것은 아

닙니다. 그들 역시 신흥국가 페르시아에 의해 역사의 지명선에서 점멸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어느날 텔레비젼 드라마(한명회)를 보다가 느낀게 많았습니다. 세조

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이 어린 왕이 그 위를 잇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장면은 어전회의였습니다. 손자뻘에 불과한 어린 왕이 뭐라고 한마디를

하고 있었스빈다.

그러자 일제 대신들은 코가 마루바닥에 닿도록 엎드리며 소리를 합창했습

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물론 이것은 왕권을 절대화하고 신격화 했던 전제

정치 하에서나 있었던 풍속도입니다.

왕은 사람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고 정책결정에 오류를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보좌하는 대신들은 왕명을 절대시 했고 성은

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박국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비록 그것

이 인간의 논리나 경험에 비추어 마땅치 않다고 하더라도 "모두 정당하고

옳다"고 믿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로마서 12장에서

표현했습니다.

성경 전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입

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옳다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과 하나님

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항변하고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으

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항하고 반기를 들고 도전했던 사람들은 복을 받

지 못했거나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를 들겠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금령에 도전하다가 추방당한 실

패자가 되었습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신하다가 홍수로 전멸당했습니

다.

자신들의 지식과 과학문명을 하나님으로 대치하기 위해 시날 평지에 모여

반역의 탑을 쌓던 지식주의자들과 과학주의자들은 탑도 무너졌고 동서남북

으로 흩어지는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퇴폐와 탈선과 범죄에 빠진 채 하나님을 외면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흔적도

없이 사람도 도시도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정면 도전했던 고라와 그의 일당은 지진으로 생매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조건없이 순종하고 대홍수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무모한 것 같은 섭리에 순종했기 때문에 자신과 그

후손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철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따라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다가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실패를 넘어 성공을 한 것입

니다.

이런 이야기를 성경전체를 메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그 모두가 옳으십니다"라고

고백하고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나와 내 후손이 복받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

해야 합니다.

현대이을 위협하는 성인병을 일명 인조병이라고도 합니다. 이유는 현대인

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생활방식 때문에 성인병이 발병한 데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성인병은 크게 다섯가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1) 암, (2) 뇌졸증 (3) 심장

마비 (4) 간장병 (5) 당뇨병 입니다.

암의 경우는 그 원인이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만 전문가들은 정

신적 원인과 물리적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와 공기 오염, 식수 오염, 음식물 오염, 불규칙한 생활 등이 복합

적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뇌졸증의 경우는 동물성 기름의 과다섭취로 뇌혈관이 막혀 혈액순환이 안

되는 것이고, 심장마비의 경우는 과로나 과음이 원인이 작용해 돌연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간장병 역시 과음이나 과로에나 약의 과다복용이 그

원인이 된다는 것이고, 당뇨병은 과식, 운동부족, 주색잡기, 근심 걱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주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모든 성인병은 내가 만드는 인조병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

러나 성인병보다 더 큰 인조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행과 저주입니다. 불

행과 저주는 꽃가루처럼 공중을 떠돌다가 아무에게나 내려 앉는 것이 아닙

니다. 그것은 내가 동기를 부여하고 내가 발전시키고 내가 제조하는 인조병

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전하고 반기를 들면 그 순간부터 나는 영적 인

조병에 걸리게 됩니다.

영적 성인병의 증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이 편치않고 불안합니다. 모든 생각과 일에 안정감이 없습니다.뭔가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증상이 계속됩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힘이 없

습니다. 영적 식욕감퇴로 말씀이 맛이 없도 거부심리가 발동합니다. 그 증

상이 깊어지면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싶

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고 그 존재와 하는 일이 의심스러워

지게 됩니다. 이 영적 성이병을 빨리 고치지 않는다면 내 영혼은 지옥에 떨

어지고 맙니다. "오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서 하신 일과 하고 계시는 일과

그리고 앞으로 하실 모든 일은 모두가 옳고 정당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

님의 주권을 인정합시다. 그래야 영혼의 성인병을 고치고 살 수 있습니다.

2. 불의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속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는 의와 불

의,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으로 점철된 사건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긴 사건이 아닙민다.

하박국의 신앙은 설령 이 지상에서 불의와 악과 불신앙이 흥왕한다 하더

라도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판받게 된다는 것이빈다.

그래서 불의한 사람들이나 악한 사람들의 성공이나 행복 때문에 가슴칠 필

요도 없고 그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북극해를 항해하느라면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빙산들이 365일 남쪽으로 흘

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얼음덩어리들은 북쪽으로 떠내려 간다는 것

입니다.

빙산은 75%가 바다 밑에 잠겨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따라 떠

내려 가지만 해면에 떠있는 작은 얼음덩어리들은 표면의 바람을 따라 북쪽

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바다 속에 잠긴 채 떠내려가는 빙산의 방향이 바

닷물의 진짜 방향인 것입니다.

우리 사회 표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사건들, 부정, 부패,횡령,살인,

퇴폐, 불법 따위들은 북극바다 해면에 떠있는 얼음덩어리들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바람에 밀려 북쪽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저네들끼리

부딛쳐 가루가 될 것이며 햇빛에 녹아 없어질 것이며 지나가는 뱃창에 부딪

쳐 조각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빙산은 말없이 그 웅지를 감춘채 남쪽으로 흐릅니다.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침묵이 계속 된다고 해서 바람따라 살면 안됩니다. 불의는

심판받고 정의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수년내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3:2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년 내에 라는 것은 "금방,짧은 시간 안에, 속히" 라는 뜻

입니다.

그리고 부흥케 하옵소서라는 것은 두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죽었던 것을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건강을 회복시

켜서 치료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행중 하박국서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용기와 소망과

위로를 찾았습니다. 인천북구청 세금 횡령사건과 지존파의 살인 사건으로

온통 충격 속에 빠져있던 지난 주간 저는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미국

에 머무는 동안 부녀자 납치살해 사건과 군부대내의 장교 길들이기 사건,

강원도 탄광사거 사건, 뉴스를 들었습니다.

제가 만난 몇몇 지도자들은 "요즘 한국 어때요?"라고 물었고 저는 "글쎄

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제 개인의 생각은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러다가 벼랑에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고민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수년 안에 살리시고 고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하박국의 믿음이며,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살리시고 치

료하신다는 확신과 고백인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신 주님, 거라사의 광

인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신 주님, 그 주님은 오늘 우리 사회와 우리 시대를

살리시고 치료하실 것입니다.

하늘에서 터지고, 땅위에서 터지고, 바다에서 터지고, 집안에서 터지고,

길거리에서 터지고, 땅 속에서 터지고, 관청에서 터지고, 내무반에서 터지

는 사건, 사건, 사건들을 누가 어떻게 막고 고치고 살릴 수 있겠습니까?

"주여 수년 안에 살리시고 치료하소서."

1858년은 미국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부흥운

동은 평신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2년동안 200만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교회 역사가였던 챨스 콜슨(Charles Colson)은 그 운동을 가리켜 "이 운동

은 허드슨 강에서 시작하여 시카고를 휩쓸었고 마치 산불처럼 미 전역을 휩

쓸었다. 그 당시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직업을 가진 전도자들이었다. 날마다

길과 밭과 지장에서 전도했다"고 했습니다.

누가 우리 사회를 고치고 살립니까?" 수년 안에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누가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장에서, 길

에서, 시장에서, 가정에서 마치 1858년의 미국처럼 전도자가 되고, 등불이

되고, 소금이 되고,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절망은 없습니다. 우리 시대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

오기만 한다면 우리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주여, 수년 안에 고치시고 살려 주옵소서.

우리를 부흥케 하옵소서.

발행일 : 941009

분 류 : 설교

33

제 목 : 나의 삶 속에 평화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주간기독교

구 절 : 시 27:1-6

12월의 표어는 [온누리에 평화를]입니다. 성탄 계절이기 때문에 그런 표어

를 정했습니다. [온 누리에 평화]는 먼저 나의 삶 속에 평화가 임해야 합니

다. 다시 말하면 [온누리]는 곧 온 세상인데 온 세상 평화는 곧 나에게서부

터 평화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

으니]했을 때 바로 그 세상은 이 세상의 자연,예컨대 흙,나무,바람,사과들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곧 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된 삶의 평화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정원속에 있지 않습니다. 예금통장

에 있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에는 더더욱 있지 않지요. 우린 그 사실과

그 고백을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의 시편속에서 발견하게 되빈다.

실로 그는 부족한 것이 없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명성을 떨치던 왕이었

습니다. 사무엘하 21:17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

엘의 등불]이라고가지 불렀던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

게도 다윗은 거기서 행복이나 만족을 찾지 않고 있습니다.

신하들이나 측근들 그리고 백성들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등불이십니다. 희

망이십니다]라고 치켜 올려도 그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아니다,나는 등불

이 못된다. 나의 영원한 등불, 꺼지지 안는 등불은 여호와 하나님뿐이시다]

라고 고백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별 것이 아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파스칼은 세종류의 사

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자, 이런 사람은 자기가 제아무리 유식

하고 고상하고 위대하다고 자처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 산지식 즉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하고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고 대범한 척하고 아

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실상은 살얼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찾기만 하는 자,하도 많이 찾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

러나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것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입니다. 하

나님에 대하여 신앙 생활에 대하여 까다롭게 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적으로

항상 공부하고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바로 다윗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이 빛이시고 구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겸허한 신앙의 소유자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 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위대

한 무기가 주어지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무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사람이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을 하나님의 능

력에 맡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능력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위축되

어가는 내 생명, 꺼져가는 등불같은 내 생명 속에 새로운 생명의 활력을 불

어넣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때 나의 삶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

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박종순 목사 설교집 [누구를 찾느랴]에서)

발행일 : 941225

분 류 : 설교

34

제 목 : 원망하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출 16:6-12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부정적 별명이 있습니다.그것은 [목이 곧은 백성]

이라는 것입니다. 고집과 교만과 불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불

순종하는 저들의 모습을 [목이 곧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

면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원망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

엘 백성의 원망이 구체화되고 집단화 되기 시작한 것은 출애굽한 이후부터

였습니다.

출애굽기 14:12를 보면 홍해 앞에서 뒤쫓아 오는 바로의 병샤들을 바라보

며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며 모세를 원

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잠잠해

졌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

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도 쓴물을 단물로 치료하신 기적 때문

에 잠잠해졌습니다 (15:22-27).

출애굽기 16:1-3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지 한달이 지난 어느날 그들의 원망

이 재연되었습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와 덕을 배부르게 먹고

있을 때 죽었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것이 원망의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

면 배고파 죽겠다는 원망이었던 것입니다. 이 원망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

나와 메추라기 때문에 잠잠해졌습니다.

출애굽기 17:3을 보면 그들이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다며 원

망을 시작했습니다. 이 원망은 반석으로 생수가 터지게해 주심으로 끝났습

니다.

그들의 원망은 계속됐습니다.

민수기 11:1을 보면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밤낮도 없었고 실

내, 실외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27을 보면 "장막 안에서 원망했다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두번도 아니고

수를 셀 수 없는 원망역사를 지켜 보느라면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곤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건은 저들의 모습이 곧 우리네의 자화상이라는 점입니다.

저들은 사건있을 때마다 원망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음 가득히 원망의 폭탄을 안은 채 살고 있습니다. 온몸

가득히, 멱까지 원망이 가득차 있습니다.

1. 원망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1) 불신 때문입니다.

원망은 불신의 산물입니다. 죽게 됐다면 원망하면 살 길을 열어 주셨고,

물이 쓰다고 원망하면 단물이 되게해 주셨고, 배고프다고 원망하면 만나를

주셨고, 고기먹고 싶다고 원망하면 메추라기를 주셨고, 목마르다고 원망하

면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주셨습니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기

적과 응답을 체험한 저들입니다만 계속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한마디로 하

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망이란 수근거리며 불평한다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저들이 최소한의 믿

음만 가지고 있었다면 기적과 능력을 체험하면서 원망을 일삼을 수가 있었

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과 섭리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9:3을 보면 "사랑이 미련함으로 자기 길을 굽게하고 마음으로 여호

와를 원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잘못은 자기가 저질러 놓

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탓으로 빚어진 결과를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

게 그 책임을 떠민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잠언 19:3은 미련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문의의 말을 빌리면 한국인의 경우 성인병의 원인은 크게 세가지라고 합

니다. 그것은 식생활, 성격,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불규칙한 식생활, 자극성이 과다한 음식물의 섭취, 과음, 과식 등 식생활

의 잘못으로 성인병이 발병하는가 하면 그 사람의 성격도 성인병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한 성격, 내성적 성격 불같은 성격 등 조화와 균

형을 깨트리는 성격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습관도 성인병 유발의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좋은

습관, 건전한 습관, 경건한 습관은 건강의 비결이 됩니다만 반대로 무질서

한 습관, 통제가 불가능한 습관, 생체의 리듬을 깨트리는 습관은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들의 원망은 누적되고 계속된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책

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버릇을 가지면 일생동안 책임을 떠넘기기에 바쁩니

다.

원망하는 나쁜 습관에 길들면 일마다 원망을 일삼게 됩니다. 습관은 그사

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습관적으로 투

정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결국 그 영혼이 버림받고 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왜 원망하면 안됩니까?

1)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7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

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망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독백이든 혼자서 고함치

는 것이든 다른 사람 앞에서 터뜨린 것이든 하나님이 그 원망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데 어떻게 원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2) 모세를 향한 원망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6:8을 보면 "너희의 원망을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

를 향하여 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16:9,12에는 하나님이 원망을 들으셨다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 보이는 공격대상은 모세였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자

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냈고 고생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

세의 지도능력이 모자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

다. 그래서 걸핏하면 모세에게 대들고 도전했습니다.

그러한 저들에게 16:8 말씀은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 원망은 하

나님을 향하여 함이로다'라는 말씀은 원망의 대상이 누구였는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64:8을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리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

로 지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흙덩어리가 토기장이를 향해 원망을 퍼붓

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부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애굽에 보내 명령

을 순응하며 평생을 바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를 공

격했고 죽이겠다고 덤볐고, 돌을 던지려 했고 원망과 비난을 서슴치 않았습

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원망은 곧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었으며 하나님

을 향한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3. 원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0:10을 보면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더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9을 보면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

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서 게시니라"고 했습니다.

원망은 하면 할수록 그 폭이 넓어집니다. 가까운 사람에 대해 원망을 하기

시작하면 점차 주변은 물론 사회 국가 세계가 원망의 대상으로 바뀌게 됩니

다. 한 가지를 원망하기 시작하면 열 가지 백 가지 그리고 세상만사가 다

원망스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멸망하고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

다.

소위 지존파라는 범죄조직을 만들고 엽기적 살인을 일삼던 20대 젊은이들

의 행적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가난, 무지, 멸시, 증오가 한데뭉쳐 세상

을 쓸어버리려 했다는 것이 저들의 항변입니다. 그러나 저네들보다 더 불우

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곧고 바르게 일하며 꿈을 키워나가는 젊은이들

이 더 많습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원망심리가 점차 증폭되면서 집단행동으로 발전했고 저토록 몸소

리쳐지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만일 저들의 원망으로 시작된 자신

들의 종말을 단 한번만이라도 되돌아 볼 수 있었다면 준엄한 법의 심판대에

서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신문의 기사가 생각납니다.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며 가해

자라는 기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만들었고 그렇게 당한

것입니다. 허탈, 좌절, 통한, 죄책감으로 가슴이 떨리고 머리가 무겁습니

다.

원망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원망하는 사람들이 모여왔던 진을 하나님의 불이 살랐

습니다. 민수기 14:27을 보면 "나를 원망하는 이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6:31 이하를 보면 원망을 일삼고 집단행동으로 모세를 반역했던

고라와 그 일당이 땅이 갈라져 산채로 생매장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원망하던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고로 원망을 일삼과 잘되거나 성공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스빈

다. 욥기 23:2을 보면 "혹독히 원망하는 사람은 받는 재앙도 크다"고 했습

니다.

4. 원망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원망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야 합니다.

원망을 일삼고 불평불만이 멱까지 차있는 사람들과 늘상 교제하다보면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또레집단

형성을 위해 마치 세뇌를 하듯 다른 사람드을 세뇌시키고 동조자를 만들려

합니다. 더 깊은 함정에 빠지기 전 원망하는 개인이나 집단과는 사귐을 끊

어야 합니다.

2) 자족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과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리고 그런 사람이라야 향상과 발전이 성공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불우한 환경에 처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때 더 낳은 환경에로의 진일보가 가능한 것입니다.

반대로 환경을 탓하고 저주하고 적개심을 품는다면 지존파의 젊은이들처럼

멸망에 이르게 되고마는 것입니다.

존 웨인 게이시(John Wayne Gacey)는 33명을 연쇄살인한 희대의 살인자였

습니다. 1978년부터 16년동안 수감되어 있다가 94년 5월 독약주사를 맞고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죽는 날 소원을 묻자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습링니다. 네 종류의 과일과 함께 치킨을 차려주었더니 배불리 먹

고난 후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살인행위이기 때문에

반드시 없애야 한다. 어떻게 정부가 살인을 한다 말이냐"라며 고함을 질러

댔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뉘우침이 없었고 원망과 불평으로 죽었습니

다. 원망을 피하려면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기 책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망심리의 뿌리를 캐보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누구때문에, 무엇때문

에 이렇게 됐다는 망울이 맺혀있습니다.

그러나 내 책임임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남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

음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기도해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한 것은 제자들의 아우성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노련한 노젓는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바람이 그쳤기 때문

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오셔서 "고요하라 잔잔하라"고 명령하셨

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과 내 삶과 우리 역사 속에 주님이 임재하셔서 원망과 시비. 질투

와 분쟁, 다툼과 증오를 잠잠케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각 언론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사회는 총체적 위기국먼에 접어들

고 있습니다. 도덕도, 윤리도, 양심도 실종되버렸습니다.우리의 기도와 각

성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가해자나 피해자가 생겨나선 안됩니다.

원망없는 사회와 교회의 재건을 위하여 기도를 새로 시작합시다.

주여, 우리와 우리 시대를 구원하소서.

발행일 : 940925

분 류 : 설교

35

제 목 : 하나님이 주신 양식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출 16:13-20

애굽은 430년만에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430

년 동안 먹었던 식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나]였습니다. 색깔은 흰빛이

고, 모양은 갓씨와 비슷했습니다. 일정한 곳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을 형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날 그날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머물고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40년 동안 굶어 죽거나, 목말라 죽지 않았습니다. 심지 않

고 거두지 않았지만 4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

고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6:26에서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

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라

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만나는 하나님이 주신 양식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것입

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만나의 교훈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1.식량대로 거둬야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가족 1인당 한 호멜씩 식량대로 거두라고 했습니다. 한 호멜

은 약 2.3리터가 됩니다. 식량대로 거두라는 것은 먹을 만큼 거두라는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남거나 모자라지 않게 거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한 호멜을 재는 그릇이 없었기 때문에 짐작으로 거둘 수 밖

에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짐작으로 만나를

거둬다가 호멜로 되어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는게 없고, 적게 거둔 사람

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집 밖에 나가면 하얀 빛깔의 만나가 지면에 마치 눈송이처

럼 덮혀있습니다.

그릇을 가지고 식구들의 식량대로 거두어서 요리를 해먹곤 했던 것입니다.

"1인당 한 호멜""식량대로"라는 만나의 법칙 속에서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언젠가 과적차량 진입금지라는 표지가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과적차량은 타이어가 펑크날 위험이 있는가 하면, 도로를 파손하

게 됩니다.

구청 공무원의 세금 횡령사건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습니다.

1인당 한 호멜이면 굶어죽지 않고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량초과가 빚

어내는 비극 때문에 울고 망하고 죽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려서 자라던 동네에 [꾸러기],[짱구]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

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은 별 탈이 없는 집 아이였습니다. 그

런데 그 아이는 욕심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욕심꾸러기의 끝자를 따서

꾸러기라고 불렀습니다. 먹는 욕심도 보통이 아닙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도 제일 큰 것이어야 하고, 떡을 먹어도 다른 사람이 하

나들고 먹는 동안 그 아이는 입에다 하나물고 양손에 하나씩 쥐고 새끼를

한꺼번에 먹곤 했습니다. 배가 부르다 못해 올챙이 배처럼 튀어나와도 계속

먹다가 바닥이 나면 물러서는 아이였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튀어나오고 씩씩거리며 쉼쉬는 사람

을 짜구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별명은 [짜구]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위하수병에 걸려 밥을 먹지 못하게 되자 신경

과민 증세가 합병되더니 고등학교 지학도 포기했습니다. 몸은 젓가락처럼

마르기 시작하고 노이로제 환자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시대는 꾸러기들과 짜구난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흔하다

는 점입니다.

1인당 한 호멜! 그것이 정량입니다. 욕심부리지 맙시다.

2. 비축이 불가능했습니다.

19절을 보면 "다음날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고 했습니다.그런데

20절을 보면 만나를 그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매일 아침 나가서 거두는 것이 귀찮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

나는 그 결과를 시험해 보고픈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고 했

습니다.

한 호멜을 넘게 거둔 것들, 즉 정량초과분의 만나는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겨 먹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그날 거둬다가 그날 먹어

야 하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속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6:34을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

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했습니다.

먹을 것도 그날 것으로, 걱정도 그날로 자족하고 끝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19 이하를 보면 여러해 동안 먹고 살 돈과 양식을 창고에 쌓

아놓고 인생을 즐기려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백합니다. "내 영혼

아 여러해 쓸 문건이 창고에 가득하구나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꾸

나"라고.

그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기 때문에 비축이 불가능합니다. 썩고

냄새나고 도둑이 가져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20을 보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

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 먹지도 못할 것, 다 쓰지도 못할 것들을 챙기고 쌓고 숨기려다가 망하

는 사람들이 추태는 다시 한번 [그날의 만나]가 주는 뜻을 되새기게 해줍니

다.

3. 안식일분은 비축이 가능했습니다.

23-24을 보면 안식일 전날 아침에 나가 만나를 거둘 때 이틀분을 거두라고

했고 안식일에 먹기위해 거둔 만나는 썩거나 냄새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식일은 밖에 나가 먹을 양식을 거둘 필요가 없었고 그날은 만나도 내리

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창조하신 후 쉬던 날입니다. 성경은

그날을 하나님의 날이라고 했고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

라엘 민족은 그날 사사로운 일이나 오락을 금했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도 내리지 않고 거두러 나갈 필요도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

도 그날은 쉬셨고 백성들도 쉬는 날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쉬는 것과 자기를 위해 쉬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 인식은 영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만 산좋고 물맑은 바닷가에 별장을 가지고 있

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피로를 풀거나 여가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 위해 지은 호화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별장주인이 자살시체로 그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부

간의 갈등과 정신적 쇼크로 인한 자살이었습니다. 쉬기 위해 만든 별장에서

왜 자살을 해야 했겠습니까?

참된 쉼은 먹고, 마시고, 여행을 하고, 돈을 쓰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

다. 참된 안식은 영혼이 평안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참 쉼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안식의 비결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만나를 거두지 않아도 되는 날이라고 해서 늦잠을 잔다든지, 놀

라간다든지, 죄를 짓는 날로 여기면 안됩니다.

최소한 일주일 중 하루만이라도 주님을 생각하고, 위해서 심부름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었습니다.

3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광야에서 먹인 양식"이라고 했고 35절을 보면

40년 동안 먹었다고 했습니다.

저절로 땅 위에 내린 양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만

나가 처음 내린 것은 출애굽 한지 한달이 지난 달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2월 15일로 되어있습니다. 연대로 따지면 BC 1446년이 됩

니다. 그리고 만나가 그친 것은 41년째 되던해 유월절 직후였습니다.

40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먹기위해 수고도 땀도 흘린 일이 없습

니다. 자고나서 집 밖에 나가면 지면에 덮여 있습니다. 그것을 거둬다가 요

리를 만들어 먹으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만나사건 속에서 다음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욕심부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욕심부리고 한 호멜 이상을 거둬들이면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겼습니다.

만나는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그날 넉넉한 양식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욕심부리다가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

았습니다. 한번으로 끝났으면 존경받고 행복했을 집권자들이 헌법까지 뜯어

고치면서 두번 세번 하려다가 비명에 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월급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 돈이나 삼키려다가 철창신세를 진사람들과

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늘도 듣고 있습니다.

욕심, 그것은 비극의 씨앗입니다.

만나는 아침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면 스러졌습니다. 24시간 땅에 널려있는

양식이 아닙니다. 그때 그때 필요한 양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

니다. 그리고 부지런해야 만나를 먹을 수 있습니다. 늦게 나가면 만나가 없

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광야의 만나는 영원한 생명양식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에서 거둔 곡식을 먹게 된 날부터 만나는 그쳤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행위는 이 세상 떠나면 모조리 끝나게 됩

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행위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48-49를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

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라고 했고, 6:51를 보면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만나, 생명의 떡입니다. 세상 것들을 영원한 양식

으로 생각하면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미국의 갑부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

자가 됐고, 43세에 미국의 정유산업을 장악했고, 53세에 세계 최고의 부자

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로페시아(Alopecia)라는 병에 걸려 머리털과

눈썹이 빠지고 소화불량으로 우유와 크래커로 연명했습니다. 그리고 공포심

에 사로잡혀 수십명의 보디가드가 지켜야 했고 불면증으로 매일 밤을 뜬눈

으로 지샜습니다. 의사는 1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살지 못한다고 선언했고, 각 신문들은 그의

특집과 죽은 다음에 실을 조사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성경

을 읽다가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 함께 회개하고 거듭나기 시

작했습니다. 그는 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구호단체, 의학연구소,

대학 등을 도왔습니다. 페니실린도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개발된 것입니

다. 그는 건강을 되찾아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영원한 만나를 발견했고 먹

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을 먹어야 건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야

삶에 활력이 넘칩니다.

사람답게 가치있게 뜻있게 보람있게 살려면 영원한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풍요롭게 되시기를 축

원합니다.

발행일 : 940918

분 류 : 설교

36

제 목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고전 2:12-16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고백과 선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구원 받았다'

는 것과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과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구원받았다'는 것과 '나는 그리스도인

이다'라는 고백이나 선언은 자주 쉽게 합니다만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고백은 흔한 고백이 아닐뿐만 아니라 쉬운 선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이란 구원받은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내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

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끝에서 바울의 당당한 고백과 선언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바울 자신

의 개인적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이며 그 삶은 어떤 것인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영이란 마귀의 영을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2:2을 보면 마귀를 가리켜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불순종의 아들

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영을 받으면 마귀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마귀의 속성이 밝혀져 있습니다.

1) 마귀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요한복음 8:44을 보면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오도합니다. 진리를 부정하고 침을 퇴핵시킵니다. 마귀가 사상 속에 들어가

태어난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꾸며댑니다. 거짓

말은 마귀의 영이 사주하는 것입니다.

2) 간교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그 간교성에 아담도 하와도 넘어졌습니다. 간교한 마귀

는 오늘도 많은 사라을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3) 헐뜯습니다.

욥기 1:9을 보면 사탄이 욥을 헐뜯고 중상모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귀

는 남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인색합니다. 비난하고 부정하고 공격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4) 난폭합니다.

쇠사슬을 끊는가하면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자해행위를 일삼습니다.

5) 위장합니다.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까지 자신을 위장합니다. 마귀는 변장술의 명수입니

다. 성자로, 애국자로, 위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위장합니다.

6) 교만합니다.

본래 천사였던 마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으로 타락해 마귀가 되었

습니다. 그리고 아담을 시험할 때도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꼬였습니다. 인간은 인간일 때 행복합니다. 인간은 신이 되어

도 안되고 짐승이 되어도 안됩니다.

7) 범죄를 유발합니다.

마귀의 영이 운행하는 곳엔 온갖 사건과 범죄가 꼬리를 뭅니다. 한숨 쉴

겨를도 없습니다. 살인, 폭력, 마약, 뉴에이즈운동,성폭행, 강도, 절도 등

범죄사건들은 마귀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마귀의 영을 받으면 어떻게 되

겠습니까?

바울은 선언 합니다. "우리는 마귀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영인 성령

을 받았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서영은 마귀의 영을 물리치고 교체하는 유일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

다.

마귀의 영은 수양이나 요가나, 의학적 방법으로 추방할 수 없습니다. 성령

받고 그 능력으로만 이길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귀신이 들렸던 사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일국의 왕이 악신들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윗소년을 데려다가 수금을 타며 찬송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사무엘상 16:23을 보면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

이 상쾌하게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고 했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음악이 환자치료요법으로 응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만 그

러나 단순한 세속음악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더우기 귀신을 자극하는 무당음악이나 록음악은 귀신을 흥붕시키기 때문에

덜 날뛰고 달라붙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13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소년시설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었던 것이빈다.

그가 받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울의 악신을 내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도처에서 악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령의 세력을

이기려면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마귀는

혼절하여 도망칠 것입니다.

2. 은혜를 알게 됩니다.

12절 끝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헤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

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를 셀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

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로

결정됩니다.

은혜를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사람을 배은망덕자라고 부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은 사람취급을 받지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어떻게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왜 은혜를 잊어 버립니까?

첫째 스스로 됐다(섰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둘째 악한 건망증 때문입니다.

셋째 사탄의 방해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겠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사는 동안 온갖

박해와 고통을 겪던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받아 애굽을 떠나게 되

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왕 바로는 그들을 그냥 포기하지 않고 추격대를 동원

해 추격을 감행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여 있고,뒤에서는 추격대가

뒤쫓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

고 육지처럼 건너게 해주셨습니다. 이 홍해도하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서는 잊을 수 없는 기적이었고 감격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뒤 마라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

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그들은 사흘전의 기적과 은혜를 기

억 못하는 배신자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원망을 일삼는

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우리들이야말로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은혜를 그토

록 쉽게 저버리거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

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3.신령한 것을 분별합니다.

13절 끝을 보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거의가 신비롭고 신령한 사건들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 홍해가 갈라져 건

넜다는 사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이 먹었다는 사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사건 등 모두가 신비롭고 신령한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받고 구원받았다는 것도

신령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검들은 신령한 이해력과 판단력이 아니면 이해하거나 수

용하기가 어려운 것들입니다.

메이어(Meyer)는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과 결합된"고 했고, 벵겔(Bengel)

dms " 신령한 일은 신령한 사람들에게 해석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신령한 세계는 신령한 눈으로봐야 볼 수 있고, 신령한 말씀은 신령한 귀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는 것입

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면 신령한 것을 깨닫고 분별하고 실천하

는 힘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4. 판단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령한 사람이라야 판단능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영분별 능력을 갖기 때문에 판단이나 분별이 가능하

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은 판단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묻혀사는 사람이나 믿음을 떠나 사는 사람은 판단받고 정죄

받을 일이 많습니다만 신령한 사람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신령한 사람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

다.

판단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 판단과 부정

적 판단입니다. 운동경기에서 이긴 사람에게 이겼다고 판단해주는 것은 긍

정적 판단입니다. 그러나 진 사람에게 이겼다고 판단해주는 것은 부정적 판

단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3을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

는 매우 작은 일이다"고 했고, 4절을 보면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

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판단은 뒷

전으로 미루어 놓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의 판단만 신경쓰고 무관심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나를 의롭다, 깨끗하다. 정당하다고 판단해도 주님이 아니라면 아

닌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정죄하고 손가락질해도 주님이 나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시고

의롭다고 판단하시면 그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바울의 고백이 자랑스럽고 부럽습니

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로마서 8:9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드리고 그 뜻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와 깊은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고 가진 사람이 됩시다.

그래야 참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행일 : 940911

분 류 : 설교

36

제 목 : 풍요로우신 하나님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27:27-29

창세기 27장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인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별미를 준

비한 일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본문

은 이삭이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구체적 내용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삭 자신이 복을 주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

면 "내가 너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서 너에게 복을 주신다

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밝힙니다. 복의 근원도 주체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삭은 복을 비는 사람일뿐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야 합니다.

본문이 밝히는 하나님의 축복은 한마디로 풍요롭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자

신이 풍요롭고 풍성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빈틈이 있다든지 모자라는 것

은 풍요도 풍성도 아닙니다.

히브리어 가운데 '마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흘러 넘치다, 만족

시키다, 온전히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가운데 '플루토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여분으로 남

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풍성하다든지 풍요롭다는 것은 흘러넘치고 만족하게 가지는 것입

니다. 그리고도 여분이 남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풍요가 없습니다. 소비를 미덕으로 치며 세우던 미국도

지금은 불경기와 재정적자로 허덕이고 있는가 하면, 떵떵거리고 큰소리 치

던 일본도 도산하는 회사가 늘어나는가 하면 불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

다.

세게의 지상낙원이는 샹그릴라를 찾아간 어느 언론인은 깜짝 놀랐다고 합

니다 .들꼿으로 레이스를 만들어 걸어주는가 하면 쓰지도 못하는 전화기와

소리도 안나는 피아노를 국보급 유물이라며 자랑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샹

그릴라도 풍요의 세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5:7을 보면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풍성하다고 했고 에베소서

3:6을 보면 영광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시편 86:15을 보면 '진실이 풍성

하다"고 했고, 로마서 2;4을 보면 참으심이 풍성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7을 보면 "그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세대에 나타내려 하심

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이사야 30:23을 보면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

소산의 곡식으로 살찌고 풍성케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너의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디도서 3:6을 보면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다고 했습니

다.

이상의 구절들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어느 정도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그

리고 하나님은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

시는 분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그토록 풍성하신 분

이라는 사실이 감격스럽습니다. 우리는 이삭이 자기 아들에게 빈 복 속에서

하나님의 복이 어떤 것이며 그 복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1. 향기롭습니다.

27절을 보면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주신 밭의 향취로다"라고 했습

니다. 눈이 어두워진 이삭이 야곱의 몸을 어루만지며 아들의 체취를 맡아보

았습니다. 그리고나서 내 아들의 몸에서 나는 향취는 하나님이 복으로 주신

밭에서 나는 향취라고 한 것이빈다.

일찌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고 이삭이 그 땅

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땅의 상속권은 큰 아들인 에서가 차

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는 장라든지 상속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둘

째 아들인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의 꿈은 장자가 받는 축복과 재산을 상속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내고 아버지를 속인 후 축

복을 받게된 것입니다.

27절이 말하는 여호와의 주신 발의 향취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흙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에서보다는 야곱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

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을 향기롭게 인정하고 갈망하는 태도가 야곱에게 있

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에서는 세상 것들이 향기롭다고 여기는 사람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이 더 소중하고 향기롭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것들을 높이고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면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소홀히 한다

든지 하나님의 시간을 업신여긴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향기롭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들과 사명들은 향취나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소중히 다르고 받들어야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

니다.

2.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

도주로 내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려야 땅이 기름지고 땅이 기름져야 곡식이 풍성하게 됩

니다. 그리고 곡식이 풍성해야 창고가 차고 포두주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

다. 바로 그 축복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생동안 가난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난

리가 났을 때도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하셔서 편히 먹고 살 수 있

었습니다.

야곱이 젊은 날 빈손으로 하란에 들어갔습니다만 나이들어 고향으로 돌아

올 때는 갑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때문이었스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메마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

람이 수분을 안고 불어옵니다. 그 수분이 밤의 냉기와 만나면 많은 이슬이

되어 내리곤 합니다. 그리고 그 이슬은 곡식이 자라고 영글게 해주는 것입

니다.

본래 이스라엘 땅은 지금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땅이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다. 그런데 계속된 범죄와 타락으로 땅에 함께 저주

를 받아 건조한 땅이 된 것이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에도 이슬을 내리시고 풍성한 곡식이 영글게 해 주

셨습니다.

인공으로 주는 물만 먹고 자란 과일과 이슬을 맞고 자란 과일은 맛이 다르

다고 합니다. 이슬맞고 익은 과일이 더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현재 내가 누리는 복이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이슬이 끊어지면

안됩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속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

혜는 이슬처럼 기름지고 풍성합니다.

3. 영적입니다.

29절을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내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내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삭이 애곱을 위해 빈 축복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

은 야곱 개인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받을 복을 예

언난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영광과 존귀를 받게될 것을 암

시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돈을 물려주는 것은 3대 넘기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적 유산이

나 신앙적 유산은 천년만년 지속되는 것입니다.

저는 영국 런던을 들를 때마다 일부러 틈을 내 대영박물관을 찾곤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찾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그곳은 미이라 전시관입니다. 관

리자의 말에 의하면 관람객 수가 제일 많은 곳이 미이라 전시관이라고 합니

다.

미이라 전시관은 BC 2천년경 사람들이 시체를 썩지 않도록 처리하여 그대

로 보존하고 있는 사체전시관입니다.

그러니까 전시관에 누워있는 시체들은 적어도 4000여년 전에 살던 사람들

입니다. 딱딱한 석고처럼 누워있는 그들, 어쩌면 4000여년 전 최고권력과

최고의 부를 누리며 살던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고 당대 최고의 미를 뽑내

던 미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시관에 누워있는 사체들은 흉물스럽고 소름끼치는 썩지

못하는 시체일 뿐입니다.

미이라를 들여다 볼 때마다 느끼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썩어야 된

다는 것, 죽으면 똑같다는 것, 나도 죽으면 저 꼴이 되겠구나라는 것, 그래

서 사는 동안 뜻있고 가치있게 살아야겠다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온갖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

다.

물론 개인적으로 생활이 어렵고 사업이 힘들고 직장이 고달픈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하루 3천명씩 굶어죽고 콜레라로 죽어가는 르완다에 비

기면 우리는 영육간에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무리입니다.

에서는 좋은 조건 속에서 태어나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

는 그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회를 붙잎바고 하나님의 풍요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누리고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연 조건을 고루 갖춘 에덴동산을 제대로 갈무리못한 아담과 하와는 거기

서 쫓겨났습니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물려받은 우리도 금수가산 갈무리에 실패하고 금수강

산을 쓰게리 강산, 썩은 강산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것이 자연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그리고 신앙이건간에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풍요와 풍성을 제대로 갈무리하 못하

면 그것은 순식간에 남의 것이 되고마는 것이빈다.

독일 함부르크 대학의 바이얼린 교수였던 골드슈타인(Goldstein)은 소련으

로부터 망명온 음악인이었습니다. 그의 동생도 피아노 교수였습니다.

그는 위암으로 두번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를 거절한 채 수술을 받았습니

다. 이유는 마취를 하게되면 암기해둔 악보가 망각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

다. 장기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 그는 자기 손으로 부고를

만들어 화제를 남겼습니다.

부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조화를 가져오지 마시오.

둘째 조화대신 부의금으로 해주시오.

셋째 부의금은 현금으로 해주시오.

넷째 모아진 부의금은 전액 장애자 시설을 위해 써주시오.

다섯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은행구좌로 부의금을 송금해주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드슈타인은 생전에 그가 연주했던 음악보다 더 멋지게 아름답게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했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누리며 소유하고 있는 복은 개인차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

이 작은 사람도 있고 , 보다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빈다.

문제는 마무리입니다.

내가 누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빈다.

내가 내 손이 쥐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돈이든 직분이든 직장이든 정성껏 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이

라는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풍요가 나의 풍요임을 감사합니다.

발행일 : 940904

분 류 : 설교

38

제 목 : 예정에서 영화까지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롬 8:26-30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들이 미리 정하셨다는 교리를 [예정론] 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8:26-30과 에베소 1:3-14은 예정교리를 성경적으로 증언하

고 있습니다.

흔히 예정교리를 신학적으로 어렵게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나

예정교리란 하나님의 인격적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할 일과 앞으로의 계획을

미리 정합니다.

10년, 5년, 1년 그리고 하루동안 할 일을 계획하고 준비합니다.

예를들어 갑자기 자고난 다음날 러시아를 가겠다든지, 사무실에서 일하다

가 갑자기 일어나 미국을 갈 수는 없습니다. 미리 여행계획을 세우고 비행

기편을 예약해야 합니다.

결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길가다가 처음 만난 사람끼리 즉석에서 결혼

을 할 수는 없습니다. 만남과 교제, 확인과 점검을 거쳐서 사랑과 조건이

성립됐을 때 결혼하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르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그 위대한 계획과 섭리를 미리 예정하시고 진행하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

한 사건인 것입니다.

왜 예정하시는가?

첫째 인간구원이 너무나 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전 교인이 수양회를 가

졌습니다. 수양회가 계속되던 어느날 오후 더위를 식히기 위해 아이들과 젊

은이들이 강에서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곳과 급류가 흐르는 곳은 들

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사이 두 아이가 깊은 곳에 들어갔다

가 급류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언덕에서 지켜보고

있던 목사님이 옷을 입은 채로 뛰어들어 두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헤엄쳐 두 아이를 구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헤엄쳐 나오려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한 분이셨

기 때문에 금년 2월 장로회 신학대학교 동문회에서 그분을 장한 동문으로

표창하고 그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분의 희생을 칭찬하고 평가하고 있습

니다.

두 아이를 구한 목사님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작은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 세계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

스도의 희생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됩니다.

(1)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이 밝히는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수 있는 분, 하나님이

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고 낮춰 종이 되셨습니다.

(2)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종이 되시고 낮아지신 그 분은 한평생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자신의 소

유, 행복은 전혀 외면한 채 남을 위해 사셨습니다.

(3) 죽으셨습니다.

사람은 다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 삶을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남을 위

해 살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살다가 죽으셨습니

다.

(4)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희생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은 예수님의 경우만

가능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상하고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고 고침을 받고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 우리네의 죽음과 다른 점입니다. 성경을 보면 [죄 값은 사

망] 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은 심판받고 지옥갑니다. 그러나 죄사함 받으면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

니다. 이토록 귀하고 큰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작정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귀한가?

(1) 생긴 모습이 짐승보다 귀하게 생겼습니다.

동물 가운데 가장 사람과 유사한 것이 원숭이입니다. 그러나 원숭이 노는

꼴을 보면 진화론이 정떨어집니다. 사람은 의젓하고 잘 생겼습니다.

(2) 하는 일이 귀합니다.

희생, 가치창조, 문화창조, 교육, 역사발전 등 짐승은 흉내도 못냅니다.

(3) 창조가 귀합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천지만물과 짐승은 말씀으로,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

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 넣으시매 성령에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까.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는 뜻이며.

다. 영적 존재라는 뜻이며.

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습니다. 인간만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

간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깁니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것을 숭배하거나 섬긴다면 그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귀하게 창조한 인간이 죄짓고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은 그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정의 발전과정은 어떤 것인가, 로마서 8장과 에베소서 1장을 보면 그 단

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미리 정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귀한 일일수록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르십니다.

하나 하나, 한사람 한사람 부르십니다. 성경을 보면 부르신 이야기가 수없

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노아를 부르셨고, 모세를 부

르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를 부르셨습니다. 부르실 대 사용하신 호칭이 있습니다.그것은 "내 아들,

내 종, 내 사랑하는 벗, 내 백성" 이라는 것 등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에서 부모잃은 소년이 울고 있었습니다. 미

군이 그를 차에 싣고 부대로 들어가 돌보아 주었고 그 소년은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후 그 미군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그 소년을 데리고 갔고

자기 호적에 정식으로 올리면서 자기 이름인 Donald Smith를 따서 Donald

Lee Smith라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미국에서 국민학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Chicago 에 있는 Illinois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 지금은 큰

Computer 회사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들로 인정해 주는 것, 죄사함 받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 죄없다고 인정

해 주는 것을 칭의(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라고 합니다.

넷째, 영화롭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옥도 아닙니다. 이유는 천국은 일

본이나 미국보다 훨썬 더 좋기 때문이고, 지옥은 일본이나 미국이나 한국보

다 훨씬 더 뜨겁고 나쁜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특성은

(1)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

(2) 영원한 나라.

(3) 세상의 나쁜 것들이 없는 나라.

(4)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다.그 영광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한문 속담에 [권력은 10년 못가고 꽃은 1일 동안 계속 피지 못한다]는 말

이 있습니다. 그 뜻은 권력, 영광,아름다움이라는 것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리고 세상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고 결정됩니다. 제아무리 집이 좋고 돈이 많

아도 원수와 함께 산다면 하루하루가 힘들고 지겨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건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그야말로 그곳이 낙원처럼 될 것

입니다.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화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결론은 누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를 누리며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8:28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르리 영접하는 자 곧 그 이유를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가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발행일 : 940831

분 류 : 설교

39

제 목 : 이 성에 유하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눅 24:44-49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

건과 거기서 주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세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45절을 보면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

다. 구약성경 도처에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특히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기사도 여러군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반신반의 하는가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깨닫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45절을 보면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려면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천사의 소리를

들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도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튼튼하고 견고한 열쇠는 이스라엘,독일,미국 것들이라고 합니다. 아무나

함부로 열지 못하는 것이 견고한 열쇠입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간단한 쇠

꼬챙이 하나로 모든 열쇠를 다 열수 있다고 합니다. 자동차, 아파트, 사무

실, 심지어 금고까지도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그 누구도 열지 못하는 자물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

간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쇠꼬챙이로도 열지 못하고 이스라엘 열쇠로도 열

리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3:20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내 마음이 문을 열고 들어올 만한 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

나 내가 나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를 들락거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예수를 안믿고 지옥

가기로 작정하고 악을 행한다면 그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말합니다.

남녀관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만나는 것도 가능하고 대

화도 가능하고 결혼도 가능한 것입니다. 제아무리 외적 조건이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맞질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경직되고 굳게 닫힌 제자들의 마음을 먼저 열고 그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성경도, 설교도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며 졸고 있는 사람 성경을 읽으며 하품만 연속하는 사람, 천날

만날 듣고 읽어도 감동이 없는 사람은 마음이 그 무엇인가로 막혀있는 사람

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나 설교를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마음을

모조리 차단해 버립니다. 마음 속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도 않고 깨달음이 없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죽지않고 영생을 얻으려면 빨리

숨겨놓은 죄,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둘째, 교만입니다.

교만은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유치원 아이들 보다는 중학생이 더

아는 척합니다. 경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중학생 보다는 대학생이 더 아는

척 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지식의 축적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성향도 비슷하빈다. 초신자 보다는 오래된 사람이 교

만합니다. 직분 안가진 사람 보다는 직분을 가진 사람이 더 교만합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 보다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성경을 배웠거나,

귀담아 들은 사람들이 훨씬 더 교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들었다는 잘못된 경험 때문

에 마음의 문을 닫고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큰 병입니다.

이 중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가 "우리는 넉넉하다, 부족한 것이 없

다. 부유하다"면서 실상은 거지였던 것처럼 영적 가난뱅이가 될 것이기 때

문에 그 고질병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셋째, 잡념 때문입니다.

잡념이란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에 생각

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빈다. 몸은 교회에 앉아 있지만 그 마음은 동네방

네 동서남북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있는 사람, 찬송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

교를 들어도 예수는 떠오르지 않고 다른 것들만 오락가락 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잡념에 빠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앞에 두고, 공부하는 학생이 잡념에 사로잡히면 공부가 되질

않습니다. 공부가 안되면 그 사람은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잡념이 많으면 말씀은 제대로 듣질 않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강단을 바라보는 눈동자의 촛점이 흐려있기 마련입니다. 말

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 영혼이 고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을 모셔드립시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 드립시다.

본문을 보면 성경은 무엇이 죄이며 누가 죄인인 것을 가그쳐 줍니다. 마음

을 열고 성경을 깨닫고 회개하면 영원한 생명이 내 것이 되는 것이빈다. 지

금 마음의 문을 엽시다.

2.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49절을 보면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

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능력은 위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힘은 땅에서 생겨납니다. 음식을 잘 먹고 영양식을 한다든지,보약

을 먹고 강장제를 먹는다면 육체의 힘은 생겨납니다. 그리고 운동으로 체력

을 단련하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영혼의 힘은 그런 것들로 생기는게 아닙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영혼의 힘이 솟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힘은 위에서

임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받

으면 힘이 솟구칩니다. 삶의 새로운 활력이 솟아납니다. 세상사는 재미가있

고 일하는 맛이 달라집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찬송소리가 달라지고 기

도시간이 달라지고, 교회나오는 발걸음이 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위로부

터 임하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그 능력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옷도 입지 않으면 내것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

도 먹지않으면 내것이 안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뜨겁고 강한 성령의 능력이 위로부터 임할 때 그 능력을

내가 입어야 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입는다]는 말

과 [입힌다]는 말은 다릅니다. 입는 것은 내가 입히는 것을 말하고 [입힌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입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본문은 "위로부터 능력

을 입히울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가 입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사함 받는 것도,능력 입는 것도 내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능력을 입기위해 해야할 일이 있습니

다. 그것은,

3. 이 성에 유하라는 것입니다.

49절 끝을 보면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서 말하는 [이 성]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후 대부분의 제자들은 거칠고 삭막한 수도 예

루살렘을 떠나 그들의 고향이었던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다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예루

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120명만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사람만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익숙하지 않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 갈릴리지방 사람인 제자들로서는 예루살렘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바다를 벗하며 배의 노를 젓던 그들에게 딱딱한 돌집이며, 거리는 전혀 생

소한 곳입니다. 분위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도, 법, 관행을 따지는 예

루살렘 보다는 바닷바람이 속시원하게 부는 갈릴리 바다가 훨씬 더 친근하

고 익숙합니다.

더구나 예수없는 예루살렘에는 한시간도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이 그들의 마

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준미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4을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벗하며 살다가 교회를 처음 나왓다든지, 교회를 옮긴 사람들은 모

든게 익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것들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교회를 떠나거나,예수를 떠나면 안됩니다. 낯이 설고 익숙하지 않더라

도 이 성에 유해야 합니다.

둘째, 싫더라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등학생 1천명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공부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가? 1

천명중 128명만 재미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제일 많은 대답은 거쳐야할 과정이니까, 대

학에 들어가야 하니까, 안하면 사람구실 못하니까 등 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경우도 그 진가를 알기전 까지는 멋도 맛도 모르기 마련입니

다. 그러나 "이 성에 유하라"는 말씀은 주목해야 합니다.

싫더라도 안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부하는 것, 일하는

것 등입니다.

예수믿고 능력받아 힘있게 사는 것은 귀찮고, 힘겹고, 싫더라도 해야합니

다. 싫더라도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싫더라도 이 성을 떠나면 안됩니다. 밥을 먹기 싫다고 해서 한달동안 밥을

먹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양실조로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싫더라도 교회 나오고, 저녁예배 나오고, 새벽에 나오고, 수요일에 나와야

그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에 유하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의 의미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넓게는 예수의 품이

며,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떠나지 말라 이 성에 유하라. 주님과 교회를 떠나지 맙시다.

그래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발행일 : 940828

분 류 : 설교

40

제 목 : 그를 힘입어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골 3:15-17

바울 서신을 보면 벗으라는 말과 입으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벗고 입

는 행위는 인간세계에서만 가능합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입고 벗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털갈이나, 허물갈이는 있습니다만 사람처럼 옷을 벗거

나 입는 일은 없습니다.

창세기 3:21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가죽 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은 인간이 벗고 입

는 일에 관여하셨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벗어버리라"고 했고, "하

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에베소서 4:22-23에서 말씀했습니다.

성경이 지시하는 벗으라,입으라는 행위는 단순한 의상착용에 관한 교훈은

아닙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옷을 벗고 입는 패션의 발달은 인간만이 누려온 문화

특권이기 하지만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벗고 입는 문제는 영적 사건인 것입

니다.

다시 말하면 죄에 물든 영혼의 옷은 벗어 버리고 예수를 옷입듯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그리스도를 힘입으라]고 한

것입니다.

1. 우리가 벗을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에베소서 4:22을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

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해산용어 가운데 [유산][난산][사산][순산] 이라는 있

습니다.

유산이란 임신도중 임산부가 받은 물리적, 외적 충격이나 정신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난산이란 해산과정이 순조롭지 못해 임산부가 태어나는 아기가 고통받는

것을 말합니다.

사산이란 문자 그대로 태어나는 아기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순산은 고

통과 긴장의 과정을 거쳐 새로운 생명이 순조롭게 태어나 고고성을 터트리

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흡사합니다.

믿는 척하다가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산과 같습니다.

믿긴 믿는데 남을 괴롭히고,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자신도 고통스럽게

살면서 가까스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난산과 같

습니다.

가롯 유다 처럼 예수 따라다니고 직분도 받고 집회참석도 하는 사람이 있

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에 예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영혼이

멸망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은 사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시험과 연단을 잘 견디고 그리스도와 교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을

잘 참으면서 마침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순산]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회다니고 교인행세 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유산,난산,사산 신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벗어 버리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벗으라]가 아닙니다.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벗는 것만으론 안된다는 것입니다. 벗

은 것을 멀리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재생가치가 없기 때문에 폐

기처분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을 보면 그것은 썩어져가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썩어져 가

는 것은 도려내고 수술을 해야 새살이 돋아납니다. 썩어져 가는 것을 아깝

다든지 아쉽다고 해서 그대로 놔두면 생명이 위험하게 됩니다.

나의 옛사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욕심,방탕,시기, 질투,음란,도

적질하는 것,훼방, 분쟁, 고집 등 이루 헤아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빨리 벗어버려야 합니다.

가롯유다도 옷벗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벗질 않고 고집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감했습니다.

골로새서 3:5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이라"고 했고 3:6을 보면 "이런 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누더기를 빨리 벗어 버립시다. 누더기에 묻어있는

세균이 내 몸을 온통 썬게 만들기 전에 지금 벗어 던집시다.

2.무엇을 입어야 합니까?

에베소서 4:24에서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고, 골로새서3:17에서는 "그

를 힘으라"고 했습니다.

낡고 더러운 옷을 훌훌 벗고나면 알몸이 됩니다.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

는 것은 나체주의자나 정신착란증 환자일 것입니다.

벗었으면 다른 것을 입어야 합니다. 벗어 놓은 것을 다시 입으면 안됩니

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를 힘읍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고약한 마음을 고쳐보기 위해 어느날 속옷,와이셔츠,

넥타이, 벧트, 양복, 양말까지 새 것으로 갈아입고 출근을 했습니다. 기분

도 상쾌했고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그 기분이라면 화를 내거나 신

경질을 부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가

100만원을 빌려간 뒤 석달째 종적을 감추었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아침에

갈아입고 , 나온 새 옷 때문에 그 사람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을까요?

옷말 갈아입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한 새 사람이란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예수의 소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형의학의 발달로 신체의 모든 부분의 성형이 가능해졌습니다. 쌓꺼풀수

술도 가능하고, 코도 높였다 낮추었다 하는 것이 가능해 졌고, 가슴 크기도

마음대로 조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형으로 안되는 것도 많습니다. 작은 키를 10CM정도 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인격은 성형의학으로 교정하지 못하빈다.

인간의 영혼을 교정하고 바로 잡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는 것으로만

가능합니다.

국가가 예수를 힘입으면 선진국가가 됩니다.

교회가 예수를 힘입으면 은혜로운 교회가 됩니다.

가정이 예수를 힘입으면 평안한 가정이 됩니다.

중국에는 기공술이라는 치료법이 있습니다. 220보트의 전기를 자기몸에 흐

르게 한 뒤 그 전류가 흐르고 있는 손으로 다른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입니

다. 전류가 흐르고 있는 손으로 전구를 잡으면 그 전구에 불이 들어옵니다.

전류가 흐르는 손으로 제 손과 목덜미를 만질 때마다 강한 전기가 감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힙입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힘을 내가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전류가 내 몸에 흐르는 것처럼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예수님의 힘을

내가 받고 예수의 힘을 옷갈아입듯 입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힘이 없지만 예수를 힙입으면 나도 힘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빈

다. 나는 쓸모가 없지만 예수를 옷입으면 쓸모있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망서리고 미룰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누더기는 벗어 버리고 예수를

힘입어야 합니다.

3. 그를 힘입고 난 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됩니다(15).

예수를 힘입고 새 사람이 되면 평강이 우리 삶 속에 임합니다. 그리고 그

평강은 세상에서 얻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세상 평강은 기분이나 조건에

좌우됩니다. 그 길이도 짤막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빼앗아 갈 수도 있습니

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기분이나 조건이 좌위되지 못합니다. 그

길이 또한 영원하빈다. 그리고 사람도 마귀도 빼앗아 가지 못하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할 동안 보람도

있었고 일도 많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들도 많았다.그러나 고향으로 돌

아와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진정한 평안과 위

로였다"고 평강은 예수 믿는 사람이 받는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선물입니다.

2) 감사하게 됩니다(15).

일반 회사와 교회의 다른 점이 여러가지 입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가 용어

입니다. 교회는 은혜, 감사, 사랑, 믿음 등 세상에서 흔치 않은 용어를 많

이 사용하곤 합니다. 특히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용어입니다.

정말로 거듭나고 예수를 힘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감사가 차고 넘쳐야 합

니다.

감사하는 방법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는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

셋째는 물질로 표시해야 합니다.

3) 신령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삶은 16-17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씀이 풍성합니다.다시 말하면 말씀이 넉넉하기 때문에 그 영혼

이 배고프지 않다는 것입니다.배고프면 시끄럽고 불평이 많지만 배가 부르

면 온갖 불평이 잠잠해지고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새

활이 짜증스럽고 교회생활이 불평스런 사람은 [내가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프구나]라고 진단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둘째는 신령한 노래를 부릅니다. 찬송은 감사, 고백, 경배를 한데 묶어 드

리는 곡조붙은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중병을 앓고 있거나 탈진상태에 빠진

사람은 소리가 작습니다.

찬송소리가 작은 사람, 찬송부르며 딴 잡념에 사로잡히는 사람은 영적 건

강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를 힘입으면 찬송의 크기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

라지게 됩니다.

셋째는 모든 일에 예수의 이르으로 합니다. 기도도 예수 이름으로 찬송도

예수님께, 봉사도 예수이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옷입으면 나는 감

춰지고 예수가 드러납니다. 더럽고 추한 내 모습은 예수로 감싸지고 예수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예수 이름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입은 바 된 에수의 그옷과 힘을 다시 벗어던져선 안된다

는 것입니다.

시편 31:10에서 시인은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약하며 나의 뼈

가 쇠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주신 힘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 여

자 들릴라의 유혹에 빠져 주색에 몸과 영혼을 망쳤습니다. 그의 힘은 온데

간데 없어져 버리고 개처럼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40:31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힘있는 자는 살아남고, 힘없는 자는 마귀 밥

이 될 것입니다.

예수를 힘입고 새 사람이 되면 영적인 세계에서 당당한 승자가 될 것입니

다. 예수를 힘입고 승리합시다.

발행일 : 940821

분 류 : 설교

41

제 목 : 해방된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롬 8:1-2

로마서 8:1-2은 바울의 해방선언문입니다. 특히 2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

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나를 해방하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해방은 한마디로 자유로워 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고, 정신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경제적 속박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해방입니다.

다시 말하면 억압과 속박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사는 것을 해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이념투쟁을 걸핏하면 해방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킨다며 6.25 전쟁을 일으켰고, 월남을 해방시킨다면

오랜 세월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해방은 피를 부르고 가난을 자초한 해방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된 날입니다. 그러

니까 해방된지 어언 반시기가 지난 셈입니다. 김일성 사망이후 중단된 남.

북대화,제네바에서 열린 미국과 북한의 핵대화,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외교

정상화를 개시하게 될 것이라는 것 등이 맞물린 정세 속에서 8월 15일 해방

기념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저는 해방기념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감사의 조건이 생각났습니다.

첫째, 해방된 주권국가가 되게 하신 것.

둘째, 잘 사는 나라가 되게 하신 것.

셋째, 자유롭게 살게 해 주신 것.

넷째, 천만 넘는 기독교인을 주신 것.

다섯째, 전쟁을 막아 주신 것.

여섯째, 가뭄과 태풍을 막아 주신 것 등 감사의 조건이 너무나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면서 참된 해방이란

어떤 것이며 우리는 어떤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8:2 끝을 보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니라"고 했습니다. 위

에서 말씀드린대로 어떤 다른 사본에는 "나를 해방하였다"로 되어 있습니

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너"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에서 자유

롭게 해주셨습니다. 죄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 죄값으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답답한 것은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죄를 없애거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짐승을 사람 대신 잡아 제사드림으로 죄를 사함받았습니

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죄를 사해 주

셨고 누구든지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

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죄와 죽음에서 나를 해방하였다"고 했습니

다.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6년 동안 주인을 섬기던 종이 7년 되는 해에는 아무

조건없이 주인을 떠나 자유롭게 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시년 제도

라고 합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안식년을 일곱번 지나서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이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면 땅도 쉬고 종도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을

희년제도라고 하빈다.

종이 제멋대로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그 법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와 죽음의 종으로부터 해방받는 것도 내멋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밝힌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 자

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법으

로 내가 자유를 얻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내멋대로 사는 것은 육신의 생각이지 성령의 생각은 아닙

니다. 8:5를 보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

을 생각한다"고 했고 8:6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

명과 평안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고, 13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

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육신에 속한 일을 하고 살면서 생명을 얻는 것은 불

가능합니다. 그러나 11절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따라 제멋대로 죄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를 믿고 성령의 생각을 따라 생각하고 살면 죄와 죽음에서 해방받고 15절에

서 밝힌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

다.

결단은 내가 해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 하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노릇 하다가 영생을 얻을 것인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맺고 살면

서 행복하고 잘 살수가 있겠습니까? 죄와 죽음에서 해방받으려면 예수깨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감동을 거역하면 안됩니다. 죄

에서 자유함을 받은 감격을 안고 살아 갑시다.

2.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법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표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법

을 시행령과 금령으로 구분됩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 무엇을 어떻게 하라가

시행령입니다. 금령이란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하면 어떤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행령은 적극적인 법이고, 금령은 소극적인 법입니다.율법 속에

는 이상의 두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없을수록 좋습니다. 이유는 다 지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율법조항이 너무 많고 세분화 되면서 법을 다 지키기

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법은 있는데 지키지 못하면 사람들은 거짓말을 시작

하게 되고 위선으로 자기를 감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일주일에 반드시 한번씩 금식을 해야 하고, 구제를 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어떤 종

교지도자가 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공개되면 그

의 지도력이나 출세에 지장이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법을 지키는

양 하게 되고, 자기를 위선의 천으로 포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

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로마서 7:7을

보면 "율법이 없이는 죄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이 죄를 사하

지는 못하빈다.

율법은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해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겪은 일입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이 저를 데려가기 위해 호

텔 앞에 잠깐 차를 세워놓고 제 방에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 교통순경이 기

다리고 있었습니다. 불법주차를 했다는 것입니다. 차주인이 교통순경에게

나는 교회 목사인데 오늘 아침 설교할 목사님을 모시러 왔다가 잠깐 차를세

운 것이라며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교통순경은 "목사

님이 법을 어기면 되느냐"면서 티켓을 끊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

도 저도 할말이 없었습니다. 얼마짜리나겨 했더니 20불 짜리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하와이에서 주일 아침에 불법주차를 했습니다. 시간은 제가 불법주

차를 했습니다. 시간은 제가 내려오는 시간을 합해 5분 정도였습니다.교통

순경에게 한국에서 온 목사님을 모시러 왔다가 잠깐 주차를 했노라고 했더

니 자기도 기독교인이라며 좋은 하루 되라고 인사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벌금 티켓도 떼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두 사건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불법주차는 벌금을 내야 한다는

것은 도로교통법입니다. 그러나 그 법을 집행하는 교통순경의 재량에 따라

법집행의 방법이나 결과는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방법이나 결과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은 좋고 나쁜 것과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만, 그 법

은 내 죄를 도말하거나 속죄해 주진 못합니다.

그러나 에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은 내가 비록 죄를 범했더라도 그 죄르

리 용서하시고 새사람이 되게 해주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 해

방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해방되고,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3. 마귀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죄를 만들어 냅니다. 악을 만들고 이 세상이 온통 죄로

썩어 냄새가 나게 합니다.

마귀의 별명 가운데 바알세불이라는게 있습니다. 그 뜻은 [똥무더기의 주

인]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신선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싫어합니다.

마귀는 자신의 세력확장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전쟁,

분열, 술수,사상, 음란,퇴폐,불신앙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합

니다.

그리고 한번 마귀에게 사로 잡히면 내 힘으로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합

니다. 속박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20:2를 보면 마귀를 옛뱀이라고 했습니다.

뱀의 여러가지 특성 가운데 공격목표를 한번 감으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그만큼 휘감는 힘이 강합니다.

마귀에게 잡히면 해방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가능합니다. 예수는 마귀의 머리를 깨뜨렸기 때문

입니다. 뱀은 머리에 치명타를 입으면 전신의 힘이 풀린다고 합니다.

창세기 3:15을 보면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머리에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는 예언입

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리

고 그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부터 마귀는 우리 곁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포기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죽음으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 자유,마귀로부터 자유,이

사람들을 바울은 해방된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바울의 경고를 주목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기 서

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가 내 것이 되었다는

것은 감격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잘못쓰면 무질서, 혼란, 방종, 타락, 자멸의 무기가 됩

니다. 비록 자유를 얻고 해방받는 사람이라도 날마다 그 자유가 방종이 되

지 않도록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유인이었습니다. 단 예수를 위해 그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위하여 나의 자유와 해방을 써야 합니다.나는 하나님의 자

녀로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맬 수가 없습니다.

발행일 : 940814

분 류 : 설교

42

제 목 : 선택받은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합동

구 절 : 골 3:12-14

본문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사상은 구약과 신약 전편에 흐르고 있는 하나의 일관

된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

시고자 하는 일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중심으로 다음의

사실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1. 왜 선택하셨는가

1) 수가 작기 때문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그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작기 때

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효가 적다는 것은 숫자가 적다는 뜻도 있고 약소민족이라

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기가 작기 때문에 모든 것이 약한 것은 아닙니다. 재래식 폭탄은

큽니다만 핵폭탄은 작습니다. 그러나 그 위력은 작은 것이 더 큽니다. 반도

체의 경우도 작을수록 그 가치와 효용성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들을 선택하십니다. 큰 사람은 오만합니다. 큰 나라도 오

만합니다. 그러나 작은 자들은 자기 실체를 알기 때문에 오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주변에 흩어져 있는 폐품들을 모아 짜맞추는 예술행위가 있습

니다. 일명 전위예술이라고도 합니다만 쓸모없이 버려진 것들을 모아 하나

의 조각작품을 만드는 것을 어셈블리지(aSSEMBLAGE)라고 부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기저기 쓸모없이 버려진 폐품조각과 같은 존재들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주워모아 쓸모있는 작품을 만드시고 거기다가

존재의 의미까지 부여해 주신 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가르쳐 주

고 있습니다.

피카소의 작품 가운데 [황소의 머리]라는 조각작품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

전거의 손잡이와 자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만일 무명의 작가가 자전거 손잡

이와 좌석을 모아놓고 [황소머리]라는 작품명을 부쳤다면 놀림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

라고 했습니다. 작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선택하셨다는 것은 선택받은

우리에겐 감격적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찬송케 하기위해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들 가운데 의미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

늘의 해와 달과 별들, 땅과 바다와 거기있는 모든 생명체들, 풀 한포기에서

하루살이까지 필요없는 것은 없습니다. 인체에 돋아난 솜털까지도 필요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호주 어느 목장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독수리가 양떼를 채가는 바

람에 목장주가 화가나서 산탄총을 쏘아 독소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랬더

니 그 후로는 양떼들이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원인을 알아

봤더니 독수리가 채간 양은 거의가 다 병든 양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이야기기 속에서 두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병든 양을 독수리가 채간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양도 독소리도 존

재와 필요가치가 다로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폐품같은 나를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

는 것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악기는 다 제 소리가 있습니다. 관악기는 관을 통해 소리를 내고, 현

악기는 현을 통해 소리를 냅니다. 그리고 타악기는 두드려서 소리를 냅니

다. 모든 악기는 크기와 생김을 따라 소리가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다른

소리가 한데 어우려져 화음을 이룰 때 음악예술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것입

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악기입니다. 각각 제소리를 내면 됩니다.

큰 소리도 있고 작은 소리도 있습니다. 높은 소리도 있고 낮은 소리도 있습

니다. 강한 소리가 있고 약한 소리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필요한 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북한은 하루 아침에 김일성 찬가를 김정일 찬가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찬송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찬송을 위해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3)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살고 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

습니다.

일시적인 만남은 사랑이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의 시간이 길수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이 차 한잔을 나누는데는 사라

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되려한다든지 부부가 되어 일생을 함께 살기로 한다면 반드

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선택하셨습

니다.

사랑은 늘 함께 가까이 하고 싶은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늘 까이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하나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기도도 찬송도, 감사도

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4)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적 이유는 구원입니다. 죄에서 건져내시고 영생을 선

물로 주시기 위해 버려진 폐품같은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모 일간지 실렸던 기사가 생각납니다. 로스앤젤스에 [리언 그레이브스]라

는 흑인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1981년 어느날 그 노인이 살고 있는 아파

트 옆방에서 사흘간이나 아기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들어가 보았더니 출

생증명서 한장과 포대기에 쌓인 아기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보낼

생을 했으나 그 아기가 천사철머 보여 기르기로 작정하고 지금까지 키웠는

데 그 아이가 금년 13살난 [정로이]이군 이라는 기사였습니다. 흑인 노인

[그레이브스]씨가 아니었더라면 그 아이는 울다가 질식해서 죽었을지 모릅

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죄

에서 건져내지 않으셨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미 내 영혼은

죄에 눌려 죽었을 것이고 천하의 개망나니로 살다가 제명에 살지도 못한채

지옥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웬 일입니까? 웬 사랑입니까?웬 축복입니까? 왜 이토록 날 사랑하

셨습니까? 복음성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갈보리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예수님 갈보리 가야했네, 왜 날 사랑하나. " 아멘.

2. 선택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선택받은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선택하신 후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곳에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 가나안은 지금의 성지 이스라엘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갔

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그 아들 이삭도 살기 편한 그랄로 이민갔다

가 가나안으로 돌아왔습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살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의 대장정 끝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고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

역시 모압 땅으로 이민 갔다가 가나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지금도 유대인은 그 전통 그대로 성지를 지키며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주 넓은 땅을 다 빼앗긴 것처럼 저들도 넓은 땅 다 빼앗기고 지금

은 비록 강원도 크기의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 민족 가운데 자기네 땅

을 성지(HOLY LAND)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유대인 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는 어느 곳이 택한 곳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품입니다.

그곳을 떠나면 안됩니다. 시인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하리이다"라

고 노래했습니다. 주님이 품은 나의 영원한 처소이며 성지입니다.주님의 품

밖으로 벗어나면 죽게 됩니다.

둘째 교회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교회를 버리고 등지고 외면하면 안됩니다. 구약의 성전은

오늘의 교회입니다. 유대민족이 성전중심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간혹 교회가 병들었다느니 썩었다느니 라며 공격하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교회자체가 병든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모인 사람이 병든 것입

니다. 그리고 설사 교회가 병들었다 손치더라도 버리면 안됩니다.

병원만큼 병자가 많고 병균이 많은 곳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병원을 외

면한다면 병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충신교회 교인은 충신교회가 하나님이 택해주신 성소인 것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충신교회 교인들은 다음 몇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첫째 충신교회가 주님이 계신다.

둘째 충신교회가 제일이다.

셋째 충신교사가 내 교회다.

넷째 충신교회를 끝까지 섬긴다.

2) 택하신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법을 지키고 살아야

했습니다만 오늘 우리에게는 사랑의 법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택한 백성은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법을 민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잘못을 가리고 결정하는 법을 형법이라고 합니다. 입법부인 국회

는 법을 만들고 사법부는 그 법을 진행합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정하신 법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택하신 자들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을 옷입고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 같이 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 하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구절 속에서 택함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의 본질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겠습니다. 부부는 일종의 계약관계입니다. 계약조건을

따지면 살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법

아래 있으면 문제될게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참으로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

다. 율법은 정죄가 있습니다만 사랑은 정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

랑을 강조한 것입니다.

3) 택하신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 경계선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이나 북군을 다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이 가열되자 그는

고민끝에 바지는 남군이 입는 것을 입고, 저고리는 북군의 것을 입기로 했

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군이나 북군이 자기를 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

다.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날 그는 밖에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북군은 그의

남군바지를 향해 초을 쏘아대고 남군은 그의 북군 저고리를 향해 총을 쏘아

대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택함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세가지라로 생각합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서로 사랑

합시다. 화목하고 위해주고 도우며 삽시다.

둘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 앞에 서는 시간까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해야 합니다. 때

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해야 합니다.

셋째는 교회를 받드는 일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몸을 반드는 것은 주님을 받드는 것입니다. 교회

를 섬기고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들이 할 일인

것입니다.

택함받은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택한 곳에서 살고 택한 법을 지키

고 택한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가장 멋지고 복된 사람들입니다.

택함받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807

분 류 : 설교

43

제 목 : 피조물의 탄식소리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합동

구 절 : 롬 8:22-25

KBS 방송의 모 기상캐스터는 계속된 가뭄을 가리켜 "과거의 기상기록을 휴

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기상이변이라는 것입니다.

전같으면 일본 규슈지방에서 이동 중인 태풍이 동해안으로 이동 중 앞으로

3일이면 제주도와 동해안을 강타할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있게 되면 제발 태

풍이 멀리 달아나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그런에 이번의 경우는 태풍을 학수고대 했습니다. 6천여개의 저수지가 바

닥을 드러냈고, 선풍기 에어컨은 3년전 재고가지 다 팔렸다고 합니다.

대청호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빙어떼가 때죽음을 당했고, 농작물은 선 채로

메말라 죽어 버렸습니다. 닭장에선 닭들이 늘어진 채 죽었고, 길바닥엔 더

위를 견디지 못한 자들이 수십대씩 시동이 꺼진 채 서있었습니다.

금년 여름 더위는 한국만의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뉴욕은 50년만에 찾아온 더위로 찜통을 이뤘고 네바다 주는 섭씨 52도를

기록하는가 하면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에서는 얼음공장에 얼음이 떨어질 정

도였습니다.

중국의 북경, 상해, 연변, 도문 역시 불볕 더위로 찜통을 이뤘고, 홍콩이

나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서 피조물의 탄식이라는 본문이 생각났습니

다. 사람도 신음하고, 짐승도 신음하고 초목도 신음하고 있는 것 바로 이것

이 피조물의 탄식소리인 것입니다.

1. 왜 피조물이 탄식하게 되었을까요.

22절을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

리가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다 탄식하며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피조물인 인간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

다.주목할 것은 하루하루 창조사역이 끝날 때마다 "여호와 보시기에 좋았더

라"는 말씀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을 보면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의 주거지로

주신 기사가 나옵니다.

2:9를 보면 '보시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고 했고

2:10을 보면 강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 발원한 비손강, 하윌라강, 기혼강,

핫데겔강이 굽이쳐 흘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지하자원이 풍성하게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3:18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

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아름다운 자연이 3장으로 넘어오면서 박토로 변해

버립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창세기 3:19입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

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긴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자연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인간 자신도 죽음을 겪는 비극적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탄식소리는 인간의 탄식소리이며, 인간의 탄식소리는

그가 저지른 죄값이라는 것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이 썩어 악취가 나고, 깊은 산 개울가 할 것

없이 쓰레기로 가득차 돗자리 펴고 앉을 자리가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이 저절로 썩고 개울이 저혼자 더러워집니까? 아닙니다. 사람이 먼저

썩고 그들이 버린 썩은 것들이 산과 강과 개천과 땅을 썩게 만들고 있는 것

입니다.

저는 7월 21일 중국 도문시를 방문했습니다.도문시는 두만강을 경계로 함

경도와 인접한 국경도시입니다. 도문시 직원들의 안내로 국경 초소에 올라

가 북녁땅과 두만강을 바라보았습니다. 걸어서 10분정도면 건너 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습니다만 아무나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다리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두만강물 역시 탁류였습니다. 그리고 김정구씨가 노래한 노젓

는 뱃사공도 거기엔 없었습니다.

두만강물이 오염되는 것은 아오지 탄광에서 쏟아져 내리는 폐기물과 폐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 그리고 그 심성이 타락한 사람들이 사는 곳일수록 자연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버리는 라면 비닐봉지는 땅속에서 50년 동안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무 젓가락은 2560년이 되어도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버리는 건전지들은 이땅을 수은중독증에 걸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상이변도 따져보면 자업자득입니다.

겨울이면 시베리아에서 형성된 차고 건조한 공기가 찾아오고 가을이면 동

북쪽의 오호츠크해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 때문에 청명한 가을이 이뤄집

니다.

봄이면 중국 양자강에서 훈풍이 불어오고,

여름이면 북태평양으로부터 무더운 바람이 불어옴으로 4계절의 순환이 이

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계절의 순환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습

니다.

그 원인 역시 사람입니다.

열대림 남벌로 인한 사막화 현상, 오존층의 파괴, 대기오염, 바닷물 온도

의 상승 등이 주원인인데 그 원인 제공자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린 흔히 선진국으리 GNP로 측정합니다. GNP가 높은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선진국은 대부분 자연보존이 잘된 나라들입니다. 그 나라

들은 강이나 개천에서 비누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습니

다. 물고기도 싹쓸이 해서 잡지 않습니다. 살인적 매연을 내뿜는 차를 몰고

다니지 않습니다.

본문 22절 말씀대로 피조물이 함께 고통하고 탄식하는 것은 피조물 가운데

으뜸으로 창조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오존병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오존병이라 자동차 매연에서 다량

배출되는 질소화합물이 강한 햇볕이 내리쬐면 자외선과 반응해 새로운 오염

물질을 생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오존병은 식물을 말라 죽게하고 눈병, 피부병,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며 플

라크톤도 소멸시킨다고 합니다.

미국의 [샌드라 포스텔 월드위치 연구소]의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70년대

세계가 오일쇼크로 흔들렸던 것처럼 90년대에는 물부족 현상이 일어날 것이

라고 했습니다.

물부족 현상은 중동평화를 깨드릴 것이며, 세계식량 안보를 위협할 것이

며, 산업시설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물부족 현상은 자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활

동에 의해서 초래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원인은 사람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 죄와 타락

입니다. 그 문제가 해결될 때 탄식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2. 해결방법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어 몸이 구속받은 것이라"고 했

고, 24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했습니다. 해결의

방법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을 받

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선진국은 자연환경 보존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자

연을 그대로 보존하는 나라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국가들입니다. 미국,영국,

스코틀랜드,스웨덴,스위스, 독일,덴마크,노르웨이,호주,뉴질랜드 등.

사람이 살면서도 자연보존이 가능한 나라들은 대부분 보존합니까? 그것은

가진 나라들입니다.

왜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보존합니까? 그것은 하

나님의 맡겨주신 선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

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피조물들을 제대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

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피조물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함부로 관리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자연이 바뀌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합니다.

담배 꽁초나, 씹던 껌, 코를 훔친 휴지를 길바닥에 함부로 버리지 않는 시

민정신이 확립됐을 때 민주주의나 민주화는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저 개인

의 소신입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는 바이킹들이 지배하던 나라들입니다. 바이킹

은 해적들입니다. 바다를 주름잡고 약탈을 일삼으며 폭력과 야만적 행동을

일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주후 1080년 기독교의 복음을 받

아 들였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저들의 마음을 순화시켰고 문화민족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행동과 가치와 삶이 변했습니다. 그리

고 일등국가가 되었고 일등국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유교나 불교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민족계몽이나 선진도약에 끼친

영향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전래된 역사는 짧습니다만 이 민족 역사와 국가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앞으로 더욱 기독교의 할 일은 많고 무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는 모든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합니

다. 그리고 찬송 소리로 바꾸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탄식소

리를 그치게 해주십니다.

첫째 개인의 탄식소리를 그치개 해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신음하던 사람들과 슬피울던 사람들과 가슴에 맺힌 응어리 때

문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고침받고 문제를 해결한 이야

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죄로 죽어가던 영혼들이 죄사함받고 새사람된 이야기가 수도

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둘째, 가정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해주십니다.

부부관계 때문에 자녀문제 때문에, 동기간의 갈등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탄식하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 탄식소리가 그치려면 예수 그리스

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모신 가정은 탄식소리가 노랫소리로 바뀝니다.

셋째, 자연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해주십니다.

제아무리 최첨단 과학의 힘이 위대하다고 해도 그 힘만으로 자연을 정복

하거나 통치하진 못합니다. 인간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새롭

게 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연의 청지기들이 된다면 병들고 죽

어가는 자연을 다시 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넷째 역사의 탄식소리를 그치게 해줍니다.

찬송가 79장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

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만유 주 여호와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에 난

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 없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역사는 탄식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러시아는 70년 동안 하나님 몰아내고 공산주의만으로 잘 살아 본다며 버티

다가 망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도 하나님 없애고 자기가 신노릇하며 지상낙원 만든다고 떵

떵거리다가 북한을 저모양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죽었습니다.

역사의 신음소리는 하나님없는 신음소리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 그 역사가

하나님을 영접하면 탄식소리가 그치게 됩니다.

지금도 탄식하는 사람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크신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탄식소리가 기도와 찬송과 감사소리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발행일 : 940731

분 류 : 설교

43

제 목 :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합동

구 절 : 고전 2:12-16

마음은 생각을 만들어 내고 생각은 행동을 결정하고 동기를 부여합니다.

사람은 마음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게 되기 때문에 그가 어떤 마음을 품느냐

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

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신령한 마음 즉 성령

께서 주시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 마음을 가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본문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으

리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는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평생을 살아가느라면 실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은혜를 입고 살

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모든 사람이 다 기억하거나 갚으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혜나 도움을 잊고 사는 사람도 있고 기억은 하지만 갚지 못하는 사람

도 있습니다. 그리고 갚기는 커녕 삶은 산수화처럼 곱고 아름답습니다. 하

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은 그 어느 아름다움에서

도 비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로서 온 영인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낱낱이 기억

하고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시대는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부모, 형제, 이웃들

에게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사는 불감증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용어가 점차 퇴화해 가고 있습니다.

정신분석 학자들은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표출되는 집단심리 현상 가운데

[집단 히스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 전체

가 히스테리 환자처럼 발작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경기침체, 계속되는 무더위,부정적인 사회현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다

보면 우리들 역시 집단 히스테리에 걸릴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원아들에게 역할극을 시키고 그 아이들의 교육환경이나

가정환경을 연구확인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한쌍

으로 묶어 부부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사이좋고 오손 도손 얘기를 나누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는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싸움을 벌리는 부부도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역할은 가정에서 본 그대로를 연출한 것입니다. 오손도손 사

이좋게 사는 것을 지켜보는 아이들은 그 모습을 흉내냈습니다.

부모가 입원해 있거나 병을 앓고 있는 집의 아이들은 그 흉내를 낸 것입니

다. 그런가 하면 이틀이 멀다하고 싸우고 소리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가

하면 히스테리 발작을 일삼는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은 역할극도 그런 것

을 해낼 수 밖에 없고, 그림을 그려도 그런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 것입

니다.

우리가 영적 불감증을 고치고 집단적 히스테리를 치료하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

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

느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진행된 월드컴 축구경기를 보려면 미국엘 가야 합니다. 그러나

텔레비젼 중계를 통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을 눈으로 관찰하고 세는 것은 어렵습다만 천체를 보는 망원경이

나 첨단 장비로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 내장이나 위장을 들여다 볼 수는 없습다만 내시경으로는 샅샅이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신령한 세계 역시 육신의 눈이나, 경험이나, 지식으로는 볼 수도 없고, 이

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라고 했고, "신령한 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작은 먼지만 들어가도 쑤시고 아픈 눈으로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변덕스런 인간의 경험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

습니다. 돋보기 안경을 껴도 글씨를 보지 못하는 눈으로 영원하시고 영존하

시고 신령하신 하나님의 보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눈으로 봅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령한 지식으로

분별합니다. 그래서 본문 14절을 보면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한다"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세상 지식과 신령한 지식이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곡과 가라지처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 밀밭에 나가보면 밀과 가라지가 동시에 섞여 자라고 있습

니다 .그런데 색깔이나,크기나,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가라지를 골라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수때가 되면 가라지는 분별이 쉬워집니다.

이유는 가라지는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엘러지의 원인

이 되기 때문에 사람에 손해를 줍니다.

세상 지식과 신령한 지식의 경우 비슷합니다.처음엔 오히려 세상 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세월이 지날수록 신령한 지식이

사람을 만들어, 역사를 만들고, 가치를 만드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동남아에서 가장 좋은 비싼 차가 많은 나라 그리고 돈이 흔하고 흥청거리

기 좋은 나라를 홍콩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홍콩은 10대들의 자살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급속한 경제성장과 정신적 공백, 이혼율의 급증으로

오는 가정 붕괴와 갈등, 1997년 중국으로 통치권이 이양되는 국가사회 심리

의 불안, 상급학교 진학문제가 주는 정신적 압박감, 메마른 고층아파트 문

화의 단조로움, 부부 맞벌이로 인한 대화의 단절 등으로 분석하고 있습니

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 조건이나 문제가 충족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좋은 환경이나 조건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

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으로 신령한 것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러나 신령한 것으로는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

다.

만일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문제를 세상

지식과 경험만으로 풀어가려고 한다든지 해결하려고 한다면 엄청난 장벽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

조했다는 것이나 에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신령한 사건입니

다. 그 신령한 사건을 세상 지식으로 믿으려고 한다면 죽을 때까지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신령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면 그

어느 것 하나도 고개를 갸우뚱 거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들락거리고 감동도 감격도 없이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의 존재를 시

인도 부인도 못하는 어중간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지금 이시간 신령한 믿

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마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믿고 풀어야 합니다.

3. 판단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 판단력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령한 판단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 가운데 영분별의 은사가 나옵니다. 본문도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공이 신학이기 때문에 다른 분야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제 서가에

는 주로 신학분야의 책이 많이 꽂혀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했

고, 일반대학원에서는 사회학 분야를 공부했습니다만, 가장 오랫동안 그리

고 지금도 계속 접하고 공부하는 분야는 신학분야입니다. 그래서 세상 돌아

가는 것이나 정세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느라면 세상일의 옳고 그릇됨이 선하

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나 행동의 옳고 그릇됨이

훤하게 드러납니다. 저는 그것을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판단력, 혹은 분별

능력이라고 봅니다.

성령충만하고 말씀이 충만하면 영분별과 판단력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

다.

2) 다른 사람으로부터 판단을 받지 않게 됩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신령한 자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령충만하고 신령한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의 눈에

거슬리거나 지탄받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남에

게 유익을 줄지언정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덕을 세울지언정 깨뜨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싸고 덮어주고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에 어

느 곳에서나 누구든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쉿 쉿' 바람 소리를 내지 않더라도, 성령충만하다고 떠들지 않더라도 그

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나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사단이 그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사단은 계속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도전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소망이 없다. 너는 죽는다. 너는 패배자다. 너는 교회

를 다녀도 구원받기 힘들다"라면서 괴롭히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

한 사람은 그런 것들이 겁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내가 예수님의 은혜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을 확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을 보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사함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소망이 있다. 너는 영생을

얻었다."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귀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4) 주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16절을 보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면 그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주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

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 있고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면 내가

신령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눈짓만 해도 알아 차리는 것을 마음

이 통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순종하려면 주님의 마

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 마음은 성령충만할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즐기는 각 나라 사람들의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블란서 사람들은

향을 즐깁니다. 그들의 음식은 향기가 나야 합니다. 불란서는 세계에서 가

장 향수문화가 발달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태리 사람들은 맛을 즐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종 소스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색깔을 중요

시 합니다. 음식담는 그릇도 각양각색이고 음식도 색깔의 변화를 중요시하

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양을 중요시합니다. 세계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곱배기] 를 주문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그리고 밥주걱으

로 밥을 풀때도 꾹꾹 눌러푸고 산더미처럼 쌓아올려 푸는 것는 우리네 뿐입

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마음을 즐기고 중요시합니다. 예수

가 멋있고 맛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이 살 맛이

고, 살멋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까?

오 주님, 나는 지금 주님의 마음 갖기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발행일 : 940724

분 류 : 설교

45

제 목 :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며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사 55:8-9

만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인간과 비슷한 조건을 가진 분이라면 친구는

될 수 있어도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처럼 늙고, 병들고, 죽는다든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 유치하

다면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라고 했습니다. 이 한구절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같은 존재가 아님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가운

데 가장 하나님과 비슷한 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

간은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 행세를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격화했던 세계 유일의 독재자 김일성의 죽음은 여러가지 면에서

충격적 사건이었고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김일성이 일생동안

저지른 몇 가지 잘못을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그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입니다.

김일성의 남침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고 있는 요즈음도 북침아라고 우기

는 정신병 환자들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김일성이 일으킨 6.25

동란의 상처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이산가족, 전쟁 미망

인, 상이군인의 한과 슬픔을 만든 장본인이며, 주전범인 것입니다.

둘째 반세기 동안 자신의 권력과 체제유지를 위해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보

기 힘든 독재정치와 폐쇄정치로 북한을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그는 북한 주민을 눈뜬 장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상과 체제의 노예로 세

뇌시켰고 속박시켰습니다.

셋째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힘든 가난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나 소말리아, 모잠비크와 같은 나라처럼 천연자연이

나 기후가 악조건이어서 굶어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치더라도

북한 주민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가 하면 망명을 쵸

청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모두가 다 김일성 정치의 실패 때문인 것입

니다.

러시아 모처에서 비밀리에 만난 북한 사람에게 밥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밥을 보자 그는 숨도 쉬지않고 밥을 움켜 먹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

람이 그렇게 빨리 밥을 먹으면 체하게 된다며 천천히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굶어죽으나 먹다가 죽으나 죽는건 마찬가지라며 게속 밥을 정

신없이 먹더라는 것입니다.

경제는 정치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백성을 굶어죽게 만드는 정치라면

무슨 소리를 해도 잘못한 정치인 것입니다.

넷째, 자신의 우상화입니다.

김일성 뺏지와 동상을 비롯해 그는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데 전심

전력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진노하시고 용서치 않으시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이

스라엘은 일찌기 바알, 아스다롯, 몰렉 등 이방우상을 끌어 들여 숭배했습

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았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이방여인

이세벧과 결혼하면서 그녀가 섬기던 바알우상을 함께 끌어 들였습니다. 그

리고 그 죄값으로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스빈

다. 그뿐입니까? 아합왕조 자체가 무너져 버렸고 아합과 이세벧은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습니다.

그 누구라도 우상을 숭배하거나 자신을 우상화하면 지옥갑니다.

요한계시혹 22:15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

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라고"했습니

다.

여기서 말하는 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술객들은 무당 점쟁이

를 말합니다. 행음자란 우상숭배를 했거나 우상종교를 지지하거나, 방조하

는 자들을 말합니다. 살인자들은 체제, 정권, 사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자들을 말하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

신을 위하고 남을 해롭게 하기 위해 거짓말을 만들고 퍼뜨리는 사람들을 의

미합니다.

세상 떠난 김일성은 요한계시록 22:15절 전체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그

가 간 곳은 뻔한 것입니다.

다섯째 무신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는 종교를 아편이라고 속단했고,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지도자들은 숙청했으며, 교회를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봉수 교회나 그의 고향에 지었다는 교회는 그이 선전용에 불과했습니다.

만일 그 교회가 선전용이 아니고 진정한 교회였다면 교인이 수천 수만명으

로 매주일 불어나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신이었고, 하나님을 부인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은 협상 테이블이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절충

이나 접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유신론과 무신론을 둘 중에 하나가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들거나 죽어야 합니다.

남한에 가면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하고 북한에 가면 하나님이 없는 것으

로 하자는 식의 절충이 불가능합니다.

무신론자가 유신론자가 되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만 그러나 유신론

자가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멸망과 지옥으로 굴러 떨어지는 첩경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유신론자라면서 무신론의 괴수를 위대한 수령 어쩌고.. 하는 것

은 도무지 무신론자라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상종교와 손잡

거나, 방조하거나, 야합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노하실 것입니다.

김일성, 그는 이제 영원히 악명만을 남긴 채 역사의 지평에서 사라졌습니

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의 악역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회담 거기에 거는 기대, 세계의 관심과 함께 그는 숨수

지 못하는 미이라가 되어 관속에 누워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지켜 보면서 본문이 생각났습니다.

독재자 김일성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김일성을 협상 파트너로 생각했던 정부나 미국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세습적 절차로 정권을 승계한 김정일의 생각과 하나님

이 생각도 전혀 다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다른 점 두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생각이 다릅니다.

8절을 보면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라고 했습니다.

몇가지 다른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생각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속되고 추합니다.

마가복음 7:21-23을 보면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목록이 열

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음란,도덕질,살인,간음,탐욕,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온다"고 했습

니다.

온갖 추잡한 것들로 가득찬 사람의 생각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비교

할 수가 있겠습니까?

둘째 하나님의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의 생각도 변하지 않습니다.

조건이나, 환경을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변합니다.

40년대 50년대 사람의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70년대 80년대 사람의 생각은 오전 오후로 변했다고 합니다. 90년대 사람들

의 생각은 시간마다 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즘 소위 신세대, X세대의

생각은 종잡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마음이 변했니"라고 물으면

"내 마음 나도 몰라"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변덕스럽고, 경망스럽고, 방정맞은 태도나 생각이 정상처럼 보이는 세상입

니다만 하나님이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생각은 늘 따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은 범죄지향적이며 냉소적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구원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

러나 인간의 생각 속에는 시기,분노,질투, 미움, 등이 가득차 있습니다. 하

나님의 생각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 존 홉킨즈 대학교의 사회학과 교수가 자기반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주

었습니다. 그것은 볼티모어의 시내 빈민가에 사는 200명의 청소년을 만나서

그들의 희망이 무엇이며 장래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90%가 훗날 교도소에 갇혀 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는 점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교수가 자기 연구실

의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그때 그 설문조사 자료를 발견했습니다.그는 그때

그 청소년 200명이 궁금했습니다. 그는 자기 과의 제자들을 동원해 그때 그

청소년 200명을 찾아 확인하는 작업을 지시했습니다. 그 결과 180명을 확인

했고 그 중 놀랍게도 4명만 교도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고 변화받아 당당한 사회인이 되었는가를

알기 위해 그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결과 100여명

이 고등학교 시절 교사였던 [오로크]라는 여자 선생님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오로크] 선생님은 은퇴한 후 양로원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아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가르쳤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할머니

교사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저는 그들을 모두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저는 그들을 사랑했

습니다"라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생각 때문에 죄사함 받고, 영

생얻고, 오늘도 따뜻한 은총 속에서 살고 잇는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길이 다릅니다.

8절을 보면 "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라고 했습니다.

길은 계획, 목적, 가고자 하는 길, 하고자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 내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은 다릅니다. 내가 하

고 싶고, 내가 가고 깊은 길도 하나님과의 길과는 다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길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따르면 삶이 편하고 길이 형통하

지만, 하나님이 뜻이나 계획을 외면하고 내 길을 고집하고 주장하면 그 길

이 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안내하시고 인도하십니

다. 그리고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1791년 11월 4일 조지 위싱턴이 이끄는 군대가 세인트 클레어에서 대패했

습니다. 부하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각하 이 패배가 장군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라고 그러자

워싱턴은 '이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져도 하나님의 품안에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아멘.

46

제 목 : 건강한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잠 4:20-23

건강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적인 건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

의 건강을 위한 일이라면 안하는 것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육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영혼이라는 사실과 영혼의 건강이 육

체의 건강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며 본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

니다. 본문의 교훈 역시 영혼의 건강 관리에 관한 것입니다. 몇 가지 교훈

을 살펴 보겠습니다.

1.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20절을 보면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

이라"고 했고, 21절을 보면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환자가 병원에 가면 의사의 처방과 지시가 있기 마련입니다. 병을 고치러

면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짜고 맵고, 자극성 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환자

가 소금이나 고춧가루를 퍼 마신다든지 줄담배에 말술을 마신다면 병을 고

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바드 의과대학의 [윌리엄 크리슨]과 [수전 행킨슨] 두 사람이 미국 의학

협회 저널에 발표한 연구보고에 의하면 하루 2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백내장과 폐암에 걸릴 위

험성이 두배 이상 높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사람은 병치료를 외면하고, 거역하고 살

면서 그 영혼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본문을 주목해 보면 " 내 말에 주의하라, 귀를 기울이라, 눈에서 떠나게

말라, 마음속에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생명과 건강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눈으

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건강유지의 비결인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 집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그들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입다만

그러나 병든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병들면 산해진미도 높은 지

위도, 그리고 고급문화 주택도 아무런 의미가없습니다.

영혼이 병들면 제아무리 화려한 조건을 골고루 갖췄다고 해도 결국은 멸망

하고 지옥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의 중심 교훈은 그 영혼이 건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의사이며 근대 임상의학의 창시자였던 [부르하페]교수가 세상

을 떠난 뒤에 그의 유물이 경매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물 가운데 [의학상 다시 없는 비밀]이라고 쓴 두툼한 노트 한

권이 있었습니다. 그 노트는 노끈으로 단단히 묶어 놓았기 때문에 아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부르하페]가 유명한 의사였기 때문에 그 노

트 속에는 건강과 장수에 관한 엄청난 비결이 적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

니다. 그 노트가 경매에 붙여지자 값은 치솟기 시작하여 엄청난 값에 낙찰

이 되었습니다. 그 노트를 산 사람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채 집으로 돌

아가 노트를 개봉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지 노트 맨 마지막

장에 한줄로 큰 글귀가 써있었습니다.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몸

은 거북스럽지 않게 하라,그리하면 당신은 모든 의사들을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는 차갑게, 발은 따뜻하게, 몸은 거북스럽지 않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

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월여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체내에 골고르 퍼져있는 열이 머리로 치밀어 오르면 쓰러지거나 터집니다.

발의 체운이 식어져서 싸늘해지면 사체가 됩니다. 전체 몸의 기능이 거북

스럽지 않고 편안하도록 유지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는 것이 [부르하페]

의 지론이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건강유지 비결도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을 위한담녀서 이곳 저곳을 찾아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이 성장해야 한다면서 이곳 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다운 믿음을 갖고 싶다면서 이사람 저사람을 다라 다닙

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영혼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대로 살아야 영혼이 거듭나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약학박사 1호인 홍문화박사는 현대인의 병을 세가지로 풀이했습

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한 성격병, 나쁜 생활 습과 때문에 생기는 습관병, 식사패턴

의 잘못으로 오는 식원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병을 고치려면

자기 성격 고치고, 생활습관 고치고, 식사패턴을 바꾸면 된다는 것입니다.

놀만 빈센 필 박사의 건강비결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육신과 영혼의 완치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을 것.

둘째, 육체는 영혼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고 소중하게 취급할 것.

셋째 모든 복수심을 버릴 것.

넷째 담당의사를 위해 기도할 것.

다섯째, 매일 성경을 읽고 운동을 할 것.

여섯째 자신이나 남에게 대해 악한 마음을 품지 말것.

일곱째 의사는 치료하고 하나님은 완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것...

육신이 병든 사람은 불쌍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병든 사람은 불쌍한 단계

를 넘어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 병을 빨리 고치지 않으면 소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2. 나쁜 것을 버려야 합니다.

24절을 보면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피라

"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영혼의 건강을 해치는 통로가 두 가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입과 눈입니다.

입은 모든 음식물을 통과시키는 문과 같습니다. 너무 뜨거운 것을 통과시

켜도 안되고 너무 찬 것을 통과시켜도 안됩니다. 너무 맵고,짜고, 독한 것

들을 통과시켜도 안됩니다. 극약이나 독약을 통과시켜도 안됩니다. 입은 몸

속에서 생성되는 분비물을 내보내는 관문입니다. 그러나 계속 침을 흘린다

든지 가래를 내뱉는다면, 먹은 음식물을 입으로 내보내면 안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계속 침을 뱉거나 가랠르 내뱉지 않습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그 입으로 궤휼이나 사악하고 굽고 독한 말을 내밸

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못된 것, 나쁜 것을 보기위해 방황하지 않는 것이빈다.

그러나 영혼이 병들면 그 입으로 계속 더러운 말과 남을 괴롭히는 말이 쉴

새없이 마치 가리챔을 뱉는 것처럼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눈 역시 좋은

것을 보지 않고 나쁜 점만 보게됩니다.

미국에 이민가서 살고있는 사람가운데 22년 동안 108번이 교회를 옮긴 장

로가 있었습니다. 이민교회의 특성은 이합집단이 심하기 때문에 한 교회를

오래동안 다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 사람은 특별한 경우였습

니다. 1년에 약 5번 정도 교회를 옮긴 셈이고 평균 두달에 한번 정도의 교

호를 바꾼 셈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108번 교회를 대하는 그의 태도였

습니다. 단 한번도 그 어느 교회에 대해 만족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교호

를 옮기는 날로부터 그 교회의 단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목사의 허물을 맨

먼저 찾아냅니다. 그리고 마치 예언자나 된 것처럼 자기 눈에 드러난 허물

을 떠벌리고 얘기합니다. 교회주보, 성가대, 주방 교인들의 태도등 씹지 않

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108 교회의 단점을 낱낱이 노트에 적어서 마치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가 병으로 죽게되자 어느 교회도, 어느 목사도, 그의 장례식을 해줄 수

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108

번째 옮겨왔던 교회 목사님이 불쌍히 여겨 그의 장례식을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08번째 옮겼던 그 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들려준 이야기였으니까

진실한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은 장례식날 관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하빈

다. "이 분의 유랑과 번뇌가 108번째로 끝나서 천만다행이다"라고.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천당에 올라가 주님 앞에 108번 교회를 거치면서 잡아낸

허물을 기록한 두툼한 노트를 펴놓는다면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과연 그런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신앙생활은 했을까요?

과연 주님 앞에 설 수는 있었을까? 만일 섰다면 주님은 그 사람의 허물이

적힌 수십권의 노트를 던져주며 읽어보라고 하시지는 않았을까?

제가 보기에 그는 정의의 사람도 아니었고 신앙인도 아니었고 더구나 장로

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후손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못지않게 불행하게 되었

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만 그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내 영혼이 건강하려면 좋은 것을 보고, 좋은 점을 따르고, 좋은 점을 입으

로 말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남의 흉만을 찾고 입을 놀려대거나 나쁜 것만을 찾아 탐닉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병든 사람입니다.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3. 바로서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27절을 보면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

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건거를 타려면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줄을 타는 사람도 중심만 잡으면

줄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잡지 못하면 넘어지고 떨어집니

다.

그것은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높은 줄에서 떨어

지지 않는 비결은 두가지입니다. 중심잡고 앞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중심잡고 앞을 바라보아야 타락하지 않고 건강하게 됩니다.

예수 중심잡고, 예수 바라보는 사람은 미국을 가든 소련을 가든,중국을 가

든 휴가를 가든, 여행을 가든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중심에서 떠나고 다른 것들을 바라보면 그 순간부터 악을 향

해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내 영혼이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십자가 높

이 달리신 에수님 바라보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면 영혼의 전염병이 만연된

세상에 살아도 전염되거나 쓰러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중심으로 살고, 예수 바라보면서 건강하게 살아갑시다.

발행일 : 940710

분 류 : 설교

47

제 목 : 단비를 주소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슥 10:1

필요할때 필요한 만큼 오는 비를 단비라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계속 내

리면 장마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비교적 비가 흔하고 강우량도 넉넉한

편입니다. 그리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농사를 짓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려야 할 때 내리지 않으면 강도 바닥이 드러나고

저수지도 바닥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비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그나

라는 두 차례 비가 내립니다. 파종할 때 내리는 비를 이른비라고 하고, 결

실할 때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만일 이른 비가 내리지 않으면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게 되고 늦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결실을 못하게

됩니다.

알맞은 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그해 농사를 결정하는 원인이 됩니다.

제 아무리 수리시설이 잘된 나라의 경우라도 비가오지 않으면 농사는 물론

식수도 문제가 됩니다.

최첨단의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미국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난리가 납니다.

잔디에 물을 주지 말것, 물을 아껴서 쓸 것 등 주정부나 시에서 비상이 걸

립니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흡족하게 내리는 비가 단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비를 구하라는 본문의 말씀은 지금까지 설명한 식수나 농

사에 필요한 비를 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72편 6절을 보면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

이 임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사는사람에게 임

하는 은혜를 비로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10:12를 보면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단비처럼 우리네 삶을 구석구석 큰데서 작은 데까지

골고루 돌보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비는 바람과,초목과, 동물들에게도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역시 모

든 피조물에게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돈이나 과학의 힘으로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비는 땅에서 분수처

럼 솟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대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가 내리지 않은 원인입니다.

그것은 아합왕이 바알 우상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바알신이나 그 당시

이교도들이 섬기는 신이었습니다.

바알 신도들은 남신과 여신이 있는데 남신과 여신이 만나 접촉할 때 비가

내린다고 믿는 해괴하고 부도덕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비와 이슬을 주

장하신다고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저버리고 소위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왕이라는 사람이

바울 신에게 절을 하는가 하면 도처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도록 국고 지원을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 선지자를 죽여 없애겠다고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이교도들도 하늘의 뜻을 거역하면 재앙이 임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

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우상의 전을 건축하고 우상앞

에 합장배례하고 추파를 던진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외면하거나 떠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물고기가 아스팔트 위에서 사는 기적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떠나서 사

는 기적은 없습니다.

2. 성령을 의미합니다.

단비가 사람과, 짐승과 초목 등 모든 피조물에게 생기와 활력을 준다는 면

에서 성령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성령충만한 삶은 활기와 생기가 넘칩니다.

석회와 물이 합하면 뜨거운 열이 생깁니다.

녹슨 쇳가루와 알루미늄에 열을 가하면 2,000도 이상의 열을 냅니다.

[나]라는 존재는 약하고 무력합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받으면 내게서

폭발적 힘이 발산됩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

다. 부흥회 도중 어떤 사람이 과부의 유산을 처리해 주면서 100원을 착복한

것을 회개하고 그것을 변상하겠다고 나선 것을 필두로 3만명이 회개하고 예

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4천명이 세례를 받았습니

다.

이 불길은 선천, 재령,개성, 서울, 대구로 퍼져나갔습니다. 성령의 역사였

던 것입니다.

길선주의 그 당시 설교 속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남의 물

건을 도둑질한 사람은 잡을 수 있으나 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는 누

구도 포박해낼 수가 없다. 죄가 엎드려 있는 마음은 지옥이요 회개한 마음

은 천당이니...."

교회에 죄인들이 모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다는 소문일 들은 경찰관 방은

덕이 죄인 몇놈 잡아다가 실적을 올리겠다며 장댓재 교회를 찾아와 구경하

다가 그날 성령받고 회개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방은덕은 체면도 불구하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선생님 나를 살려 주세요"

라며 소리지르며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행하신 능력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인간이 구원 받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 속

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희미한 숯불을 산소 속에 집어 넣으면 강한 빛을 발하면서 불꽃을 튀기며

타게됩니다.

유황 역시 공기속에서는 힘없이 타지만 일단 그것을 산소 속에 집어 넣으

면 강렬한 푸른 불꽃을 튀기며 타게 됩니다.

내가 성령을 받고 나를 성령의 도구로 맡길 때 나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이 되는 것입니다.

무디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교만과 이기심과 욕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들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질 것이

다. 만일 우리들의 마음이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을 때 성령이 계실 자

리가 전혀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

령이 단비로 충만하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면 단비를 구하는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첫째,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

니다. 구하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뭄으로 나무가 말라죽고 수도물이 중단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지자 그 지

역 교회협의회가 모여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기도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각 교회별로 기도의 날 교회에 모여 기도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기도모임

에 참석한 연인원이 2,800명이나 되어는데 그 중에 비 올줄로 믿고 우산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통틀어 13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것이 우리네 믿음의 현주소입니다. 비오게 해달라면서

우산을 준비하지 못하는 우리의 믿음 쪽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고 단

비를 구합시다.

둘째 너넉하게 구해야 합니다.

가뭄으로 갈라진 땅에 내리는 비는 넉넉하고 흡족해야 합니다. 먼 가뭄으

로 가라앉을 정도라면 해갈도 되지 않습니다.

은혜도, 축복도, 성령도 차고 넘쳐야 합니다.

사람들이 작은 규모의 구멍가게 보다는 대형 슈퍼마겟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양한 물건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라한 인생살이를 마감하고 풍요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성령을 충만히 받

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넉넉하게 구해야 합니다.

셋째, 나눌줄 알아야 합니다.

소양댐이나 팔당댐에 일정량의 담수량이 초과되면 수문을 열어 물을 내 보

냅니다. 그것이 위험을 막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나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신앙생활을 하

려면 내가 받은 은혜나 능력을 다른사람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말

하면 "주시옵소서"만으로 끝나는 신앙이 돼선 안되는 것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있는 콜드워터스 어느 은행에 6월 6일 새벽 폭발물이

터져 금고가 박살이 났습니다. 은행털이범들이 금고 안에 있는 돈을 털어가

기 위해 폭발물을 설치했고, 금고가 폭발하면서 돈을 길거리로 흩날라지 주

민들이 달려들어 너도나도 돈을 주워 담는 바람에 정작 범인들은 몇푼 밖에

챙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믿고, 벌고, 살고, 쓰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리

고 성령충만과 은헤를 구하는 태도 역시 정당해야 합니다.

명예나, 출세나, 치부의 수단으로 은혜와 성령을 구해선 안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3년 가뭄처럼 모든 것이 메마르고 갈증나 있습니다. 남

북한의 첨예한 갈등, 핵전쟁의 위협, 도덕성의 몰락, 윤리기강의 붕괴, 청

소년의 탈선, 우상종교의 창궐 등 먼지 풀석거리는 메마른 황야와 같습니

다.

시원한 단비가 한바탕 쏟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일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내 영혼의 갈증 역시 심각하빈다. 뭔가 텅빈 것 같은 공허감,

소유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허무감, 무엇인가 막혀있는 것같은 답답함, 기

쁨보다는 짜증스럽고 원망스런 속마음,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

니까? "봄비 때,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

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는 본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게 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심령, 내 가정, 이 나라에 단비를 주소서, 은혜의 단비를 주

소서, 성령의 단비를 주소서. 아멘,

발행일 : 940626

분 류 : 설교

48

제 목 :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딛 2:11-15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뿐입니다. 분단

국가였던 독일도 서독이 동독을 흡수함으로 통일국가가 되었고 예멘 역시

남과 북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서독은 당초 동독을 흡수통일 하는데 소용되는 비용을 1조 마르크 정도로

잡았지만,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고, 약 2조마르크(약 9백50조원)가 넘어서

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을 흡수통일 하는데 얼마의 비용이 들 것인가에 대하

여 [일본 장기신용은행 종합연구소]는 2천억달러(약 160조원)로 추산했고

국내 경제학자들은 40조원에서 많기는 6백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통일을 위한 비용이 천문학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도 엄청난 생명 유지비가 들아갑니다. 마

시는 물,산소, 심장이 뛰고, 위가 수축작용을 하고, 세포가 생성되고, 먹은

음식물이 소화되고,그것이 열량으로 변해 각 기관에 보급되고, 자동으로

손, 발가락이 움직이고, 듣고, 보고 걷는 것 등,

돈으로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면 하루에 1000만원 정도의 시설비와 유지비

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달이면 30억이 되고, 1년이면 360억원이 됩니

다.

그런데 우리는 병들면 돈내고 병을 고치면서도 매일 1천만원 정도의 생명

유지비를 공짜로 쓰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전혀 관심도 없고 감사도 없습

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남북한 통일의 경우 1인당 비용을 산출하면 890만원 꼴이 된다고 합니다.

죽을 내 생명이 죄사함 받고 다시 살기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필요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본문은 그것을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돈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은

혜란 조건부가 아닙니다. 조건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몇가지 교훈을 찾겠습니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은혜라든지 거저 주신다든지 하면서 싸구려인

양 치부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받는 나는 은혜였고, 거저 받은 선물이었습니다만 그 은혜와 선물을 주시

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면 죽게 하

시고 그 공로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결코 값싼 은혜도 아니고 싸구려 상

품이 아닌 것입니다.

고층 빌딩마다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가지 돈을 내고 엘리베이

터를 타본 일이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 무역센타빌딩이나, 엠파이어스테이

트빌딩은 관광객들에게서 돈을 받습니다만 그러나 대부분의 빌딩은 공짜로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베이터 자체가 공짜인 것은 아닙

니다.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당 5천만원 1억 혹은 2억 하는 것들도 있

습니다. 내가 그 엘리베이터를 공짜로 탄다고 해서 엘리베이터가 공짜인 것

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기까지에는 예수님의 희생과 십

자가에서의 피흘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셨고, 죽게하신

슬픔을 겪으셨습니다.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고"고 여기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인종과,

지역과, 계급과, 성분과,출신을 포괄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주십니다. 단, 예수를 믿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어느날 밤 관장이 야순을 돌다가 도둑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관가로 데려

다가 엎드려 놓고 볼기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도둑이 갑자기 "아이

구 태조대왕 등뼈 부러진다"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볼

기를 치자 도둑 역시 계속하여 "태조대왕 등뼈 부러진다"며 자기가 태조대

왕의 후손임을 암시하는 바람에 풀어 주었습니다.

그 기발한 소문을 듣게 된 어떤 도둑이 밤에 도둑질을 하다가 야순관리에

게 붙잡혀 관가로 끌려가 볼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볼기를 내려치기 시작하

자 그 도둑은 "아이구 염라대왕 등뼈 부러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제딴에

는 아무려면 태조보다야 염라대왕이 더 높겠거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

니다. 그런데 그를 때리던 관리는 염라대왕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날 그 도둑은 염라대왕 덕택에 반쯤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로마서 10:13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

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고, 사랑받

고, 복을 받게 됩니다.

2.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

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영적으로 출생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태

어난 생명은 양육과 보호가 필요합니다.

부산 일신병원에 갔다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신생아실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생명이 인큐베이터안에서 보호받으

며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일정기간 동안으로 끝나야 합니

다. 제일 바람직한 것은 태어난 새 생명은 엄마의 품 속에서 고동소리를 들

으며 사랑받고, 보호받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자라고 신앙이 자라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양육되는 것이 제일 행복한 것입니다. 그

런데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

입니까?

내가 누구의 보호를 받고 양육받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

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경호원들의 철통같은 경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의 경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지키는 사람

은 마귀의 소유인 것입니다.

1800년대 미국의 시인이었던 롱펠러(Henry Wadsworth Longfellow) 는 보통

종이 위에 그의 시를 써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그의 시는 6천 달

러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10불 미만의 종이 위에 그렸던 모나리자나 만종은 지금 수십만 달러의 명

화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것이 되느냐, 누구의 보호를 받느냐, 누가 나를 키워주느냐가 중요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키워주시고 이끌오 주신다는 것이 본문의 강조입니

다.

3.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르게 살라는 것입

니다.

12절을 보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

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경건하게 살고 세상 정욕을 버리고

근신하고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호화여객선 [아틀랜틱호]가 핼리팍스 해안에서 조난당해 수백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남은 생존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우체국을 찾아가

가족들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

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길이 간직

하기 위해 전보용지를 액자에 넣어 사무실 벽에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리

고 그는 날마다 "구원 받았다"는 전보내용을 읽으면서 신앙생활의 채찍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느 청년들의 모임에서 바로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묵

은적이 있었습니다.

참석했던 젊은이 90%가 잘 사는 것보다는 바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습니

다. 그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잘 사는 것과 바로 사는 것의 차이점이 무

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잘사는 것.

1) 잘 먹고, 잘 쓰고, 잘 노는 것이다.

2) 하고픈 짓을 하고 사는 것이다.

3) 제 멋대로 사는 것이다.

4) 남의 간섭을 배제하고 사는 것이다.

바로 사는 것.

1) 자기를 통제하며 사는 것이다.

2)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며 사는 것이다.

3) 가치있게 사는 것이다.

4) 더불어 사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관점과 해석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자녀된 사람들이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

다. 바르게 삽시다.

4. 선한 일에 열심이기를 원하십니다.

14절 끝을 보면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했

습니다.

구라파를 휩쓸던 나폴레옹이 1백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러시아를 쳐들어갔

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러시아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워터루

전선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외쳤습니다. "모든 것이 끝장이다. 각자 살

아 남을 방도를 찾아라"고.

그러나 내가 믿는 예수는 너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믿으면 산다,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산다.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이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최종 목적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헤야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을 선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영국 웨스터민스터 교회 목사인 [모건] 박사에게 한 소년이 편지를 보냈습

니다. "저는 지난밤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한 후 예수님을 구주

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 이후로 나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차 있

습니다. " 여기까지 편지를 읽은 모건박사는 깊은 생각이 잠겼습니다. 설교

를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지다니.. 그러나 그 다음을 읽는 순간 기쁨이 되살

아났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토록 슬퍼하는 이유는 제 아버님이 아직 예수

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사는 날 동안 해야할 가장 귀하고 크고, 위대하고, 절실한 선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 내는 것입니다.그것이 나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

입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발행일 : 940619

분 류 : 설교

49

제 목 : 나와 내 집이 사는 길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16:29-34

역사 연구의 대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연구에서 그동안 역사의 지

평에 떠올랐던 21개의 문명이 있었는데, 그중 19개가 자멸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과 물질주의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도 없고 옷도 입지 않는 야

만인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신도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지능지수가 높고 고급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개나 침팬지에게는 신이 없습니

다.

그 차이는 간단합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고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학에서의 논의되고 있는 사람에게는 뇌의 의식활동이 정지되는 것을 말

합니다. 다시 말해 뇌의 의식활동이 멈추게 되면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

다. 마찬가지로 그 영혼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영적 활동을 하지 않

는다면 죽은 영혼이 되고마는 것이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람을 구성하

는 가장 중요한 중심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본질이라고 본다면, 육체는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껍데기란 본질을

감싸고 있는 옷에 불구한 것입니다.

양장점 쇼윈도우에 서있는 마네킹은 철따라 달마다 새 옷으로 갈아 입곤합

니다. 그것도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최고급 의상입니다. 그러나 그 누

구도 마네킹을 바라보면 행복한 여인이라고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네킹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의식활동이 정지된 사람들이 제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잘 입는

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참 행복이나 보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르웨이는 세계에서 살기좋고 잘 사는 나라로 유명합니

다. 인구는 400만 정도에 불구하고 수도인 오슬로는 47만명정도가 살고 있

습니다. 쿠웨이트 다음으로 석유가 많이 나오는 나라이며 GNP는 25,000불이

넘습니다. 병나면 국가가 고쳐주고 늙으면 국가가 책임지고 먹여 살려 줍니

다.

부자들은 섬이나 산속에 별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말이나 휴가철이 되면

별장생활을 즐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별장들은 텔레비젼을 놓지 않고 수

도시설은 집 안에는 없습니다. 나무때서 밥해먹고, 물도 밖에서 길어다 먹

고, 맨발로 걸어다닙니다. 다시 말하면 원시적 삶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

다.

여러분, 잘 산다는 것은 편한 것입니다. 편하다는 것은 정신적인 것이며,

영적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편안해야 몸도 삶도 편안해지는 것

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

습니다. 다시 말하면 온전하고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를 하신

것이빈다.

토인비가 지적한대로 문명이든, 국가든, 개인이든 무신론과 물질주의에 빠

지게 되면 침몰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러시아의 붕괴입니다. 70년동안 러시아를 지배해 나온 것은

무신론과 유물론 사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무너졌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나님은 없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는대로 살고 행동하기 마련입니다. 나쁜 것을 믿으면 나

쁜 짓을 합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믿으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한 종교와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최근 세계 의학계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AIDS) 못지 않게 전세계에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준 [살을 먹는 괴박테리아]의 정체 규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의학계는 성형수술을 잘못받은 후 괴사성 근막염 증세를 보이

고 있는 환자 두명을 놓고 연구한 결과 정확치는 않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

루어 성형수술 부작용이라는 개연성이 높다는 소견을 발표했습니다.

물론 개연성이 높다는 소견이기 때문에 성급한 결론을 삼가하는 것이 좋습

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것, 그것이 제일 좋다는

것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본래의 것이 무너지면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

다.

인간의 본래 모습은 내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순천자(順天者)

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문명, 문화, 과학, 경제, 학문이

라는 조건들 때문에 계속 성형수술을 받아 나오는 동안 전혀 다른 이질적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 이즈러진 나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자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오늘 읽으니 성경 사도행전 16:31은 말씀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

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이와 비슷한 말씀이 요한복음 3:1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기독교가 강조하는 복음의 골자는 쉽고 간단합니다.

고대 빌립보 교도소에 바울이라는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죄명은 귀

신들린 소녀를 고쳐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교도소 소장이

죄수 바울을 향하여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종교적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 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정상적인 가정과 가족이 있었습니다. 정신건강도 정상적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영혼의 문제에 대해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는 어떻게 해야 내 영혼이 구원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겠는가를 물은 것입

니다. 그 물음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

리하면 당신과 당신의 집(가족)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요...."

B.C 2세기 [안티파토루스]라는 사람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를,

1) 이집트의 피라미드.

2) 바빌로니아의 허공에 매달려 있는 정원.

3)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4)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5) 할리카르나수스의 마우솔로스 능묘

6) 로즈섬의 콜로수스 거상(巨象).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영국의 시사잡지(이코노미스트)는 세계의 7대 불가사의 목록

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1971년 미국 인텔사의 테드호프가 발명한 마이크로 프로세서.

2) 전세계 9천만명의 여성이 사용하고 있는 피임약(1951년 멕시코시티에

있는 신텍사스의 젊은 연구원인 칼제라시가 발명).

3) 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벧이 발명한 전화로 이것은 거대한 세계를

지구촌으로 좁힌 일동공신이라는 것.

4) 한번에 570명을 태울 수 있는 점보 제트기.

5) 해상 석유채굴 시설.

6) 1950년대 미국이 처음으로 실험한 바 있는 수소폭탄, 이것은 지구의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공포의 에너지라는 것.

7) 1969년 7월 20일 오후 10시 18분 미국 우주선인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아폴로 11호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고, 그곳에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는 명판을 남긴 이후 달기지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것 등을 7대 불가

스의로 꼽았습니다.

7대 불가사의는 인간이 만든 지식과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러나 더욱 불가

사의한 것은 그토록 위대한 업적과 유산을 남긴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풀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주선을 쏘아 올렸지만 여객기 추락을 막지 못하고 있는가하면 생명공학

을 발전시킨 인간들이지만 죽음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두 종류의 인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것은 마치 빛을 향한 모습과 빛을 등진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빛을 등진

얼굴은 침울합니다. 그러나 빛을 바라보면 찬란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삶은 정신적으로 한대 지방과 같습니다.그래서 성경

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도소 소장의 "내

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은 빛을 등지고 살았던

한 사람의 고뇌에 찬 절규였습니다.

그에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짤막한 대답 속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구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직업이 무엇이며, 신분이 무

엇이며, 나이가 몇이며, 재산이 얼마이며, 학벌이 어느 정도인가 등 그런

것들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정신이나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그리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

니다.

둘째는, 구원의 연쇄성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그 영향과 변화 때문에 가족과, 친척과, 이

웃과, 친구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는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무엇인가를 묻는 잡지사의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함께 사는 사람.

2) 함께 가는 사람.

3) 함께 나누는 사람.

4) 사랑하는 사람.

5) 서로를 보완하는 사람이라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렇스빈다. 가족이나 부부란 함께 살고, 가고,나누고, 보완하는 관계입니

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과 믿음을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그 비

결이 무엇입니까?

어느 교도소 소장의 경우처럼 가족이 함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1956년도 미국의 100대 재벌 랭킹에 들었던 기업가운데 1992년까지 살아남

은 기업은 불과 21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2천년이 되면 현재 10대 재벌 가운데 3개 정도가 탈락

하게 될 것이라고 대통령 직속 21세기 위원회가 예견했다고 합니다.

영원한 재벌도 영원한 건강도,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일본 주식회사의 얼굴이라는 평판을 듣던 [모리타 아키오]소니사회장이 뇌

출혈로 쓰러지자 일본은 물론 전세계의 경제인들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키오 회장이 돈이 없어 쓰러졌겠습니까? 지정병원과

주치의가 없어 쓰러졌겠습니까?

그것은 모리타 아키오 회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직하게 우리는 나 자신의 제한성과 한계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미국이 중요한가를 판단해 우선 순위를 따라 일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겐 무엇이 우선 순위일까요?

다시말하면 지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의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하다가 쓰러진 52세의 사장은 "제가 바보였습

니다. 쓰러지면 끝나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라며 나와 내 집이

사는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좋은 일, 급한 일은 뒤로 미루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발행일 : 940612

분 류 : 설교

50

제 목 : 가면서 전파하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0:5-15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신 이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은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과 병자들을 고치신 일과 복음을 전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궁극적 목적을 살펴 보면 복

음을 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수를 셀 수 없는 성공경부 운동과 제자훈련 운동이 일

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전도하지 않는 성경공부나 제자

훈련은 의미가 없습니다.

도시마다 기독교 이름을 내건 병원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본래 선교사들이

그 병원을 세울 때의 정신은 가난하고 불쌍한 병자들을 고쳐주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병원들이 복음전도는 없애

버리고 의료 행위만 계속한다면 병원문을 닫든지, 이름을 바꾸어야 할 것입

니다.

주님은 부단히 열 두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전도현장으

로 파송하셨습니다.

본문은 열 두제자를 전도현장으로 파송하면서 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 당부는 오늘 우리에게는 전도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피를 물려받은 동족입니다.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핍

박했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동족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분부하신 선교명령도 맨 먼저 예루살렘

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

니라"고 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데서부터, 관계적으로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전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서 늘 느끼는 것입다만 내 가족이 제일 어렵고 가장 가가

운 사람이 제일 힘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

다.

가령 남편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듣는 순간부터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두번,세번, 진단

을 다시 해 보고 치료방법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

은 영혼이 죽어가는 문제에 대해선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박테리아 때문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

습니다. 24시간 만에 사람의 살점을 다 파먹고 죽게 만든다는 괴박테리아의

공포가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보다 더 무서운 박테리아가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송두리채 파멸시키는 박테리아, 그 이름 [죄의 박테리아]입니다.

이 박테리아는 영혼도, 정신도, 육체도 모조리 썩게 만들고 맙니다. 이 죄

의 박테리아를 퇴치하고 고치는 백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

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로 죄를 사함받고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것입

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가족, 네 친척에게로 가라"고, "가서 그들을 건져내라"고. 어떤 주부

는 주걱으로 밥을 퍼서 담을 때마다 십자가를 그으며 예수 믿게 해달라고기

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느니 남편 구두를 새벽마다 싸가지고 나와 신발임자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6개월 아침 금식을 하면서 남편 구원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건성피부증 때문에 가려워 하는 남편의 등을 긁어 주면서 십

자가를 긋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구원

해야 합니다.

2. 가면서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점이 여러가지 입니다만 그중에 하나는 기독교는 가

면서 전파하라는 종교인데 반해 불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전파하는 종교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거리로 불교는 산 속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

즈음 웬일인지 불교가 기독교보다 더 설치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면서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호흡하고 세상을

걸어가면서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16을 보면 "내

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내십니다. 입산수도하는 도사처럼 찾아오는 사람

들에게만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찾아가서, 기회를 만들어서 복

음을 전해야 합니다.

찾아 갑시다. 만납시다. 기회를 만듭시다.

그리고 가면서 전파하라는 말씀의 뜻은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두번으로 끝내지 말고 계속 가면서 하라는 것입니다.

3. 능력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 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전도자에게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의사도 아닌데 무슨 재주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

이르리 깨끗케 하며 귀신을 내쫓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전도하면서 당하게 될 사태들을 미리 말씀하시면서 고치

고 내쫓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둘째, 전도는 전투라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셨는데 귀신은 순순히 쫓겨가는 법이 없습니다.

귀신은 더럽고, 악하고, 나쁜 존재입니다. 귀신은 방해꾼이고, 훼방꾼입니

다.귀신은 이간질에 능하고 평화를 깨뜨립니다. 그 귀신을 내쫓는 방법은

귀신보다 더 강한 능력을 받으면 되는데 그 능력은 예수 능력인 것입니다.

전도는 귀신이 점령하고 있는 영역을 빼앗는 전투이기 때문에 능력을 받아

야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지막 때 사단이 인류를 위협하는 도구로 핵무기, 에이즈

박테리아 등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고칠 것을 고치고 막을 것을 막아내고, 내 쫓을 것

은 내 쫓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주여 능력을 주옵소서.

4.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10절을 보면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전도 이외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전도가 과연 될까? 그 사람이 내 말을 들어 줄까? 그 날 나와 줄까? 그 사

람이 예수를 믿으면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처신을 해

야 하는가? 등등 전도 자체보다 걱정거리가 더 많게 됩니다. 그런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마치 무전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처럼 알몸으로 떠났습니

다. 이유는 관광 떠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예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 전도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시작했고 하고 있고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 주시고 동행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8:20에서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 평안을 빌라고 했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아니

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여행 도중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 평안을 먼저 빌라는것입

니다.

그리고 평안을 비는 행위는 오늘 우리에게도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도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면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평안이 성립됩

니다. 영혼의 참 평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둘째, 평안한 마음과 태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대장자와 말다툼을 한다든지, 입씨름을 한다든지,

마음을 상하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는 것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양보

하고 후퇴해야 합니다.

정신질환자를 상담요법으로 치료하는 사람은 고성을 지르거나 책상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환자의 심리상태를 편하고 안정되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말씨와 태도가 부드럽고 안정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의 태도 역시 평안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자면서 한숨을 내

리쉰다든지 팔자 타령을 한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예수의 복음을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6:15에서 "평

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습니다.

6.지혜롭고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16절을 보면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순결은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두가지 큰 덕목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손해만 보게 되고 순결이 없으면 손가락질을 당하게 됩니다.

전도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문서 전도라고 합니다. 입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

전도라고 합니다. 발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방문 전도라고 합니

다. 온 몸으로 하는 전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격 전도, 삶의 전도라고 합

니다.

우리가해야 할 전도는 온 몸 전도입니다. 그리고 가면서, 가서 하는 전도

라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은 매우 중요한 주간입니다.

다음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1)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2) 자신의 건강과 감정관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3) 다툼이나 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4) 다음 주일은 전도 대상자의 시간과 여건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5) 단 한 사람만을 대상자로 작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는 실패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6) 대상자를 계속 양육해야 합니다.

(1) 좋은 본을 보입시다.

(2) 덕을 끼칩시다.

(3) 그를 위해 계속 기도합시다.

(4) 계속 양육합시다.

가면서 전파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너도 가면서 전파하라"고.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605

분 류 : 설교

51

제 목 :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욘 2:1-10

요나는 주전 790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무대로 활동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활동상황은 요나서 이외에는 별로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요나서의 특징은 하나님의 보편성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지마는 다른 민족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본

서의 특징입니다.

어느날 요나는 그당시 최대 강국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

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곳으로 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길이 멀기 대문입니다.

육로로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둘째 감정문제입니다.

앗수르는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가였습니다.

셋째, 선민사상과 우월감 때문입니다.

요나를 포함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네만을 선택했다고 믿었습

니다. 그런에 앗수르 서울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요나의 신앙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다른 곳으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원인이 요나

에게 있음을 발견한 선원들이 그를 바다에 던졌으며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본서의 줄거리입니다.

1.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이유를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1:3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하

여"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요나의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는 그 발상과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은 요나의

신관에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편 139편에 나타난 시인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

며"라고 했고,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가서

거할찌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피하면 피해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1:4을 보면 "여호와께서 태풍을 바다위에 내리셨다"고 했고 1:17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

습니다.

왜 하나님이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 던져 삼키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요나가 가는 길과 하려는 일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선지자로 부르신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

다.그런데 요나는 그것을 기피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기피자의 불안한 삶과 사명자의 떳떳한 삶을 비교해 볼 필요

가 있습니다.

요나의 기피행각은 그 목적지로 정했던 다시스에 가기도 전에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명사히고 요구하시는 일을 회피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본 사건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 물고기 뱃속을 [스올]이라고 했습니다. 스올은 음부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음명령을 거역한 사람이 들어갈 곳은 스올이라는 것입

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현한 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음부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은 스올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음부의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나의 경우 앗수르의 국법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돈을 내지 않고 몰래 배

를 탄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정법을 어기고 도피한 것도 아니었습니

다. 그러한 그가 스올의 고통 속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

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뭣니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라는 것이었

습니다.

요나는 그 명령을 거역한 것이빈다.요나로서는 그 명령을 거역할 만한 충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상숭배하는 나라, 이스라엘을 호시탐탐 노리며 침략하려는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복했던 요나는 스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

속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요나서 2장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2. 요나의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절을 보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

고 했습니다.

기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했습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지만 신령한 눈을 들어 성

전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를 뜻합니다. 세상을 보고, 물질을 보고,

사람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회개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스올의 뱃속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딸만 넷을 낳은 어떤 사람이 42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너무 귀한 아들이

라며 아들을 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날마다 귀인이 바라보는 재미로 산다

면 즐거워했습니다. 그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갔습니다. 어느날, 귀인이가

잘못한 일이 있어야 야단을 쳤습니다. 그날 밤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이런 저

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귀인이한테 물었습니다. "얘 구인이라 넌 엄마가 좋

으니 아빠가 더 좋으니"라고. 귀인이 대답은 당당하고 또렷했습니다. "난

엄마가 더 좋아. 아빤 싫어 보기도 싫단 말이야. 난 아빠하고 안 놀거야"낮

에 야단 맞은 후유증이 남은 셈입니다.

그러나 귀인이 아빠가 그 순간 많은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야단한번 맞

고 싫어졌다는 그 감정표현을 긍정적으로 보면 진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러나 자식만을 바라보는 재미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를 가장 놀라게 했던 슬픈 사건은 유산 때문에 부모를 살해

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부모가 그 아들을 낳아서 키우는 동안 기대와 꿈의 컸을 것입니다. 어쩌면

유명한 교수나 의사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나갈 한약사가 되어 준느

것이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휘두른 흉기에 부모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학축제에 참석한 대학생이 마음이 허전해 어느 집에 들어가

이유가 없이 흉기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의 파생성, 고질병을 어떻게 고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수입 오렌지족들은 한달에 600만원에서 800만원을 용돈으로 쓴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중병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만이 우리 시대와 병든 역사와 정치와 살마

들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2)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6절 끝을 보면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지셨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 영혼이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였다"고 했습니다.

요나는 해결의 방법을 올바로 찾았습니다. 내 영혼이 피곤할 때 내 생명을

구덩에서 건져 내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피곤할 때, 고통스러울 때, 괴롭고 답답할 때 무엇을, 누구를 생

각하십니까? 파도가 철석거리는 동해안의 백사장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안개꽃 펼쳐진 들녘을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를 도와 주리라고 기대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십니까?

요나의 고백은 다릅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그

이유를 9절 끝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

나이다"라는 요나의 고백인 것입니다.

친구란 가장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며, 그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

고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친구들은 내가 꼭 필요할 때 내곁에 있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부도, 자식도 타인인 셈입니다. 어린 자식과 아내를

남겨둔채 어느 날 남편 혼자 훌쩍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런가하면 자식이 노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립니다.

그래서 요나는 고백합니다. "나는 피곤할 때 여호와를 생각하노라"고, "나

의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이 고백은 오늘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인생 삶이 피곤할 때

주님을 생각한다","나는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 이 고백이

곧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은 요나가 니느웨로 들어가 하나님의 구원을 외치는 것으로

끝납니다. 요나의 오침을 듣고 니느웨에 살고 있던 왕과 대신들과 신하들과

백성들이 옷을 찢고 무릎쓰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최근 잇달아 터지는 대형 사건들과 패륜을 지켜 보면서 니느웨의 회

갱누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6월 12일은 요나운동과 그리고 니느웨 운동이 일어나는 날입니다.

예수가 진실로 그 역사 속에 들어가고 가정 속에 들어가고 부모 속에 자식

속에 들어가면 패륜이나 죄악이 자리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교회 마당을 가득 매운체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는 것

을 볼 때면 행복하고 가슴이 벅찹니다.

예수를 전합시다.

예수를 말합시다.

예수를 이야기 합시다.

병든 역사,무너진 도덕, 망가진 정신이 다시 살려면 예수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도 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발행일 : 940529

분 류 : 설교

52

제 목 : 저주받은 도시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1:20-24

현대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구 집중문제, 교

통문제, 주택문제, 대기오염, 환경파괴,범죄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 봐도 도시가 크면 클수록 그 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도 큰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대도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규모가 크면 클수록 문제도 크

고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도시가 오늘까지 남아 있는 것도 없

어져 버린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돔과 고모라 라든지, 폼페이 같은 도시는 없어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 도시도 없어졌습니다. 그 세도시는 고라신, 벱세다, 가

버나움입니다. 그 세도시는 서울이나 뉴욕처럼 큰 도시느니 아닙다만 그러

나 그 당시 그 지역에서는 큰 도시 구실을 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왜 없어졌는가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현대 도시의 성격 규명

과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불신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

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신의 결과입니다. 믿으면 회개운동이 일어납니

다만 안 믿으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도시를 사람으로 의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인간의 도리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과정입

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가 없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에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는 시인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와 가지고 있는 잘못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하거

나 핑계를 대면 안됩니다.

셋째 단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죄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하고 믿음도 자기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다

시 말하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낱낱이 마치 자술서를 쓰는 것처럼 내가 지은 죄를 숨김없이 고백해

야 합니다.

넷째 단계는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고백만으로 끝나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내가 고백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다섯째 단계는 사죄를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죄를 고백하면 그리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약속하고 있

습니다. 눈보다 더 희개 양털보다 더 희게 사하신다고 약속하셨고(사

1:18),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고 했습니다 (사 44:22). 그리고 동이 서에

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가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했습니다 (시 103:12).

여섯째 단계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참회개는 거기서 돌아서야 합니다. 거기서 발을 빼고 손을 씻고 그 현장을

떠나야 합니다. 죄에 대해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참된 회개는 방향을 바꾸

는 것입니다.

일곱째 단계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돌이켰으며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딴데로 가면 안됩니다.

여덟번째 단게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되돌이 근성이 있습니다. 회개했노라고 하지만 옛날 그때 거기

로 되돌아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고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른다면 죄길로 되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 하

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성령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따라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라신 도시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

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현대 도시들은 어떻습니까? 서울 장안에 사는 사람치고 교회를 모르는 사

람과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

니 서울 시민 1200만을 생각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들 가운데 고라신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없으면 그 다음은 멸망 밖에 없는 것입니다.

2.교만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

지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올라 가겠다고 설쳤던 루시퍼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시날 평원에 모여 성을 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벽

돌을 만들고 역청을 만들어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의 높이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었고 그 목적은 하나님을 낮추고 자

기네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탑은 무너졌습니다. 인간이

최초로 쌓으려 했던 교만의 탑은 지금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역시 교만과 패륜과 부도덕과 불신

때문에 유황불에 녹아 없어졌습니다.

개인도, 도시도, 역사도, 왕조도 교만하면 안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의

교만은 금물입니다.

바벧론 왕조의 느브갓네살 왕은 교만 때문에 쫓겨났고, 이스라엘의 사울

왕도 왕위에서 쫓겨갔고, 페르시아의 국무총리 하만도 교만 때문에 죽었습

니다.

영국의 신학자였던 테일러(Jeremy Taylor)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무엇

이었는가를 생각해보라. 그때 당신은 無였다. 그후 여러해 동안 당신은 무

엇이었는가를 생각해봐.그것은 연약함이었다.

그 다음 당신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큰 죄인이다. 당신은 이웃

과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에게 빚진 자이

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한다면 날마다 우리는 겸손해야 된다"라고 했습니

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 교회의 청빙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대표로

조만식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의 청빙결정을 전하고 모시기

로 했습니다. 주기촐 목사님을 찾아온 조만식 장로님은 젊은 주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희 교회에 부임하실 것을 허락해 주

십시오"라고 청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기철 목사님이 오산학교

를 다닐 때 조만식 장로님은 교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주일 낮 조만식 장로님이 바쁜 일로 예배에

늦었습니다. 황급히 들어서는 조만식 장로님을 본 주기철 목사님이 소리쳤

습니다. '조장로님 거기 서 계십시오. 장로님이 예배에 늦으면 어떻게 본이

되겠습니까?" 그날 조장로님은 문간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 다시

는 예배에 늦지 않겠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초대 한국교회를 빛냈던 두 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다던 가버나움 도시는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버나움만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 가운데 가온(gaon)이라는 말이 있스빈다. 그 뜻

은 "베풀다"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체나 가진 것은 손톱만한 것인데 그것을

부풀려서 마치 세상 것을 다 알고, 다 가졌고, 다 통달한 것처럼 자기도취

에 빠져 있는 것이 교만 즉 [가온]인 것입니다. 주드(zud)라는 단어도 있습

니다. 그 뜻은 우쭐대다. 거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을 가장 적절하

게 묘사한 헬라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투포(tupho)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

은 "천천히 타 버리다","꺼져가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

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일어섭니다. 그렇지만 교만한 사람은 천천히 마

치 촛불이 꺼져가는 것처럼 천천히 타버리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교만은 언젠가는 명성도,성공도, 소유도,인기도 꺼져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편 119:21을 보면 '교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6을 보면 "주께서는 굡나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만을 멀리 해야 합니다.

3.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라신,벱세다,가버나움,이 도시들이 왜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까?

20절을 보면 "책망을 받았고",21절을 보면 "화가 있을찐저"라고 저주를 받

았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음부에가지 낮아지리라"는 책망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땅도, 사람도 국가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노아의 둘째 아들 함이 저주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

니다.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 벗은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

러나 셈과 야벱은 얼굴을 돌리고 뒷걸음질로 들어가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잠이 깬 뒤 노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됐고 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바로 그 함의 자손들이 훗날 시돈, 그랄, 소돔,고모라에 흩어져 살았고 흑

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저주의 반대는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

가 바라는 것은 축복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친척과 내 이웃과, 내 친구

와 그리고 우리나라가 축복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복도 여러가지입니다. 재물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명예의 복, 부부

이 복 등 그 종류가 가지가지 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음 다 받거나 소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복을 선택해야 된다면 여러분은

어떤 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복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복의 비결이기 때문입니

다.

저는 가난한 농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제대로 먹고,입고,

쓰는 것이 한스러울 만큼 부러웠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제가 제일 가

난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님은 저에게 예수 믿는 것과 공부하는 것은 그

만두어선 안된다면 논을 팔고 밭을 팔아 공부를 시켜 주셨습니다.

만일 제가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공부를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무엇이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눈앞이 아찔합니다. 박도둑놈

이 됐을까?깡패가 됐을가?아니면 벌써 죽었을까? 생각할 수록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몸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찬송이

감격으로 다가섭니다.

여러분, 불신은 저주의 원인입니다. 교만은 저주와 패망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버립시다. 믿음을 고백합시다.

그리고 저주받아 죽어가는 내 가족, 내 친척,내 이웃, 내 친구들을 건져냅

시다.

저들에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사랑하는 예수

내가 받은 구원을 증거합시다.

저들을 저주의 무더기 속에 방치해 둘 수가 없습니다.

건져내야 합니다.

살려내야 합니다.

함께 축복받고 영생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발행일 : 940522

분 류 : 설교

53

제 목 : 한나의 성공비결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삼상 1:21-28

한나는 엘가나의 아내였고 불임증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사무엘을

낳아 유명한 선지자로 키웠을 뿐만 아니라 3남 2녀를 더 낳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성공을 한 것입니다.

1.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1:10을 보면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했고,

1:12을 보면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라고 했고, 1:17을 보면

기도하여 구한 것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20을 보면 아들 이름을 사

무엘이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라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한나의 기도로 문제를 푼 사람입니다.

자신의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불가능을 기도로 해결한 것입니다.

돼지는 병들어 드러누웠을 때 외에는 하늘을 보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병

아리도, 참새도, 소도, 말도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지만 유일하게 돼지

는 땅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

람은 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위를 바라보

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돼지처럼 병들어 드러누워야만 하늘 바라보고 소리친다면 그것은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나는 기도로 문제를 해결했고 불임증을 고쳤고 자녀교육도 성공했습니

다.

2. 은혜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1:18을 보면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한나가 당시 제사장인 엘리에게 한 말입니다만 그러나 그것

은 그녀가 평소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고 갈망했는가를 설명해 주

고 있습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든지 갈망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없인 못한

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 기간은 잠깐입니

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그 길이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사는 사람은 그가 누리는 건강과 행복과 성공이

길고 영원하게 됩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했던 한나는 그의 원대로 은혜를 받았고 그 결과 자

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3. 믿었기 때문입니다.

1:18을 보면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17절을 보면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 제사장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후 한나는 집으로 돌아가 먹고 마시며 평안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에게 직접 응답하신 것도 아니고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응답

을 주셨습니다만 한나는 그 응답을 확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환상을 본 일도 없고 음성을 들은 일도 없고, 계시를

받은 일도 없지만 엘리의 말을 그대로 믿고 그곳을 떠나 집으로 갔고 평안

을 찾게 되었습니다.

믿으면 믿는대로 됩니다.그러나 안 믿으면 안 믿는대로 안 됩니다.

한나의 성공비결은 믿음입니다.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믿음이 그녀에게

응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캐나다의 핼리팩스의 어느 호텔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긴급 출동한 소방

차들이 물을 뿌리고 투숙객들이 뛰어내릴 수 있도록 땅 위에 그물을 쳤습니

다. 한 아버지가 자기 어린 아들을 창문을 열고 던졌습니다. 그 아이는 그

물 위에 떨어져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화재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구조된 사람은 매우 적었습니다.

신문기자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너를 창 밖으로 던질 때

무섭지 않더냐"고 그러자 그 아이는 "무섭긴요, 아버지가 저를 위험한 데로

던졌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겨 버리는 믿음 일단 맡겼으면

믿고 평안한 마음을 지니는 것,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 밖으로 집어 던졌다고 합시다. 위험한 곳으로 던졌겠으

며 죽어 없어지라고 던졌겠습니까?

로마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신하들에게 로마의 신에게 절하고 숭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신하가 명령대로 로마 신에게 절을 하고 숭배

를 했지만 그중 독실한 기독교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드은 곧바로 투옥되

거나, 관직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기상천외의 인사를 단했습니다. 자기

명령에 복종한 신하는 다 내쫓아 버리고 자기 명령에 불복하다가 쫓겨난 신

하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요직에 앉혔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자기 왕에게도 충성을 다할 것이며 자기 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자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킵시다. 불구덩이에 집어 넣어도 믿고, 창 밖으로 던져도 믿고,

내쫓겨도 믿음만은 버리지 맙시다.

4.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1:28을 보면 이적으로 낳은 아들 사무엘을 젖을 뗄 때까지 데리고 있다가

곧바로 성전으로 데리고가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녀 자신이 믿음으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이들도 하나님께 드리고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젖을 뗄 때까지만 양육을 책임졌고, 젖뗀 후엔 성전

에 맡겨 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자녀교육에 과단성이 있었음을 보여 줍

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과잉보호 속에서 자랐기때문에 커서도 마마보이 틀을 벗

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주일 어른 예배와 같은 시간대에 맞춰 영아부

예배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처럼 어려

서부터 신앙과 예배를 가르치자는 것이고, 다른 하는 부모의 과잉보호부터

해방시키자는 것입니다.

영아부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처음 엄마를 떨어질 때 몹시 울고 보채기만

한달만 훈련하면 적응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학원에 맡기고, 과외 선생한테는 맡기면서 그것도 막대한 돈다발과 함께

사정사정해서 맡기면서 거저 맡아주고 가르쳐주고 그 영혼을 살리는 교회에

맡기는 것은 주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런 면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교회 나와 예배드리는 가정은 복받은

가정입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두변째 왕으로 40년 동안 나라를 통치한 성군이었으

며 메시아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저이나 자녀 교육엔 실패자였습니다. 두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딸인 미갈과 정략적으로 결혼했습니다. 미갈은 냉소적인

여자였고 부정적인 여자였습니다. 본래 사랑없는 정략 결혼이었던 탓으로

부부사이가 편치 못했습니다.

밧세바는 충신 우리아의 아내였는데 우리아를 암살하고 힘으로 빼앗아 아

내를 삼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5:13을 보면 그는 수많은 처첩들을 권력을 빙자해

거느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첩간의 갈등, 적자 서자간의 갈등이 겹쳐 가

족관계와 가정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만 것입니다.

둘째 신앙교육의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가운데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왕 다윗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반

란군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만 생각해 보면 기

가 막힐 일입니다.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뒤쫓아 다니는 아들, 아들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하는 아버지, 그 집안 꼴이 뭣니까?

다윗은 정치,성공,출세, 전쟁 때문에 자녀 교육을 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30여년 전에 미국에 건너가 공부하고 부부가 목회를 하는 목사님 가정이

있습니다. 3남매를 미국에서 낳아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3남매는 한국어도

잘 합니다만 부모말에 절대 순종입니다. 미국 아이들이 냉수처럼 마시는 코

카콜라도 건강에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고 했다면 코카콜라도 마시지 않을

정도입니다. 두 아이는 대학 다니고 한 아이는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순종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그렇게 된 비결은 간단합니다. 매일 그 가정은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

침에 못 드리면 저녁에라도 반드시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예배시간이 복받는 시간이었고 가정교육의 시간이었고 가족 만남

과 교제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내일부터 가정예배를 시작합시다.

사도 행전 10정을 보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지는 한 가정이야기

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 가정입니다. 로마 장교인 그의 가정이

그토록 모범적인 가정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가족 신앙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행전 10:2을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했습니

다. 그리고 사도행전 10:24를 보면 "일가,친척,친구들을 모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온 가족, 친구, 일가,이웃들의 영혼 구원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는 "만일 종교가 가정에 머무를

수 없다면 성전에 제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청소년 범죄로 법정에 서는 청소년의 80

는 신앙 훈련이 없은 가정 출신의 아이들이며, 이혼부부의 90%는 가정 예배

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나 고넬료의 성공비결은 기도와 가족 신앙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

다.

둘째, 성령을 충만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했

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윤활유와 같기 때문에 불편한 부부관계, 삐걱거리는 가족관

계를 부드럽게 해줍니다. 그리고 성령은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성령은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족이 성령을 받으면 태도가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생활이 변합니다.

내 가족, 내 친척, 내 이웃, 내 친구를 예수의 사람으로 만듭시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니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행복이 오고 내 가정에 평화가 오는 첩경인 것입니다.

19세기 영국에는 네 쌍의 행복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곧 빅토리아

여왕부부,시인 브라우닝 부부, 캐논 버틀러와 조세핀 버틀러,윌리엄 우드부

부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가장 행복한 부부는 신앙생활을 잘 했던 부부였

습니다.

6월 12일은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해 오는

날입니다.

1) 대상을 정합시다.

2) 그를 위해 1,3,5 기도를 드립시다.하루 세번 5분이상.

3) 그에게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립시다.

4) 그리고 6월 12일을 미리 알립시다.

5)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우와 친절을 다합시다.

6) 계속 기도로 공격합시다.

7) 결과를 믿고 전진합시다.

오 주님, 나도 한나처럼, 고넬료처럼 가족구원과 신앙에 성공하게 하소서.

발행일 : 940515

분 류 : 설교

54

제 목 : 어떤 부자의 일생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눅 16:19-31

초년 고생은 돈주고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초년에는 고

생을 하고 살더라도 그 고생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진다면 고생을 참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초년은 행복했지만 중년기와 노년기를 불행하게

보내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초년은 행복했지만 그후의 삶은 처절한 불행으로 이

어졌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한 부자의 일생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편의상 부자의 일생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1. 죽기 전의 삶

19절 첫머리를 보면 "한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

었는가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의 이름이나 가족관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짐작컨대 유산을 물려 받았는지 자수성가를 했든지 아니면 때를 잘 만나

벼락부자가 됐든지 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생전에 호의호식했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자색옷

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자색옷과 고운 베옷은 그 당시 부자들과 상류층 사람들이나 입을 수 잇는

의상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사치와 연락으로 꾸며졌고 안일과 방종으로 채

워졌습니다.

미국 문화를 파티문화라고도 합니다. 그들은 파티를 즐깁니다. 그러나 매

일같이 파티를 즐길 수는 없습니다.

여가도 즐겨야 합니다만 나마다 놀고 먹는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여가를 영어로 리크레이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재창조(Recreation)라는

것입니다.

호의호식하고 날마다 파티열고 사치와 방종을 일삼았던 어떤 부자의 이야

기는 그의 삶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무절제한 삶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심

심찮게 재벌 2세들의 파행적 삶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신

문 가쉽은 타락한 재벌2세들을 가리켜 "먹고 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

고 꼬집었스비다. 먹고 입고 여가를 즐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닙

니다. 먹고 입고 여가를 즐기는 행위가 재생산을 위한 준비나 재충전을 위

한 것이라면 탓할 것도 없고 지탄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부자처럼 날마다 새옷 갈아입고 식도락을 즐기고 호화파티

를 열어 주지육림에 빠진다면 그것은 제아무리 제돈 쓰고 하는 짓이라고 하

더라도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의 결정적인 큰 잘못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는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외면한채 살았습니다.

빌립보 3:19을 보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

이 지적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두차례나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

다.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

해낸 신이라며 숭배했습니다. 그때 주모자는 아론이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사마리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이라고 숭배했습

니다. 그때 주모자는 여로보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부자는 황금 우상숭배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배

가 신입니다. 그러다가 멸망으로 그 삶을 끝내고 마는 것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이나 재산이 많다는 것은 결코 죄나 악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

다.

본문의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 가진 것 때문에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2. 죽은 후의 삶

22제을 보면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했습니다. 죽음에 예외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죽은 후부터입니다.

고통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23절을 보면 "저가 음부에서 고통중에"라고 했고 24절 끝을 보면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사치스럽고 화려했던 삶은 끝났습니다. 드디어 음부의 고통과 고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이은 음부를 [스올]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올은 악인

이 들어가는 곳인데 신약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가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잘 믿고 잘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들어간 것이아니라 그

의 교만과 불신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안믿으면 지옥갑니다. 어제까지 떵떵거리고 세도부리고 잘 살던

사람의 신세가 변해서 불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됐다면 변해도너무 많

이 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잠깐 잘 살다가 영원한 고통의 세계에서 들어가게 된 것입

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마 10:28을 보면 "몸과 영혼이 함께 형벌받는 곳"

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불못,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 불과 유황이

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거기 들어갑니까?

마귀와 그 사자(마25:41),믿지 않는자 (계 21:8),우상숭배자(계21:8),범죄

한 천사(벧후 2:4),거짓선지자 (계 19:20)등이 들어갑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첫째, 모든 욕구가 거절당하는 곳입니다.

본문을 보면 나사로를 보내 손끝에 물을 적셔 혀끝을 서늘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했습니다. 나사로를 고향에 보내 다섯형제에게

전도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도 거절당했습니다. 내 맘대로 안되

는 곳,인간적 욕망과 욕구가 거절당하는 곳입니다.

둘째, 단절의 세계입니다.

26절을 보면 건너갈 수도 올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번가면 그것으로 끝

입니다. 되돌아올 수도 없고 기어서 나오는 방법도 없습니다. 편지를 주고

받을 수도 없고 친선방문을 할 수도 없습니다. 천주교 사람들처럼 돈많이

바치면 빠져나올 수 있다든지 기도를 많이하면 천당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

도 아닙니다.

죽는 순간 다시말하면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 순간 지옥과 천당으로 갈라집

니다. 그리고 그 시간부터 그 누구도 어떤 노력으로 내왕이 불가능한 것입

니다.

지옥설교는 부담스러운 설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지옥가는 것

을 방치하지 않으려는 목사라면 지옥얘기를 안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 고통의 세계입니다.

23절을 보면 "고통 중에"라고 했고24절을 보면 "고민하나이다"라고 했고

25절을 보면 "고민을 받느니라"고 했고 28절을 보면 "이 고통받는 곳에"라

고 했습니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이란 편한 것, 고통

없는 것입니다. 행복찾기에 전력을 쏟는 사람들이 왜 지옥의 고통을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까?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그때마다 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그것은 부자의 다

섯형제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이 고

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견디다 못한 부자는 한방울의 물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

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다섯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에 나사로를 보내 이 사

실을 알려주고 그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물론 그것

도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의 영원한 고통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이라도 지

옥에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여기서 우리와 그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겐 형제가 없습니까? 오늘 죽으면 지옥갈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이 없습니까>

내 형제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옥간 부자만도 못하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32:32에서 모세는 범죄한 동족의 죄를 용서해 주시든지 아니면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주시든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자신

의 생명을 내걸고 동족구원을 기도한 것입니다.

로마서 9:3을 보면 바울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노라"고 했습니다. 내가족,내

친척,내 친구, 내 이웃을 향한 영적 관심이 지옥같 부자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스겔서 33:6을 보면 파수군이 자기 책임을 다 못해 성이 점령당하고 그

성 사람들이 적의 칼에 죽게된다면 "그 죄를 파수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내가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는 걸 알면서도

전도하지 않은 탓으로 내 부모, 내 형제, 내 친척, 내 이웃이 지옥을 가게

된다면 그들은 불신과 교만 때문에 지옥을 가게 되겠지만 그들이 지옥가게

된 그 책임은 전도하지않은 네게 물으리라는 것이빈다. 다시 말하면 그 피

값을 네게서 찾으리라는 것입니다.

8년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시내 모교회를 다니는 50대 후반의 여인이 저희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등록교인이 아니기 땜분에 깊은 관심이나

돌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구역장을 통해 심방 요청이 있

어서 벼르다가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있는 듯했고 가

족관계도 복잡한 것같았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정신건강도 정상이 아니었습

니다. 그에게 가정의 안정과 본인의 건강을 위해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권

면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날

지방을 내려가는데 차중에서 갑자기 그 분 생각이 떠오르면서 궁금하고 급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건강은 어떤지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는지, 가정은

안정이 됐는지 전화라도 당장 걸어보고픈 마음은 들었지만 고속도로였기 때

문에 지방에 그대로 내려가 저녁모임을 마친 후 교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여자가 고층아파트에

서 투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때 그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그리고 구원의 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지옥으로 굴러떨어져가고 있는 내 가족이 있습니다. 내

형제가 있습니다. 내 친척이 있습니다. 내 이웃이 있습니다. 참효도가 무엇

입니까? 그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그들을 내버려둘 생각입니까?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내 친족, 내 친구, 내 이웃이 지옥불

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방관만해야 합니까?

대상자를 찾아 정합시다.

기도를 시작합시다. 1,3,5, 기도를 시작합시다. 금식,철야,새벽연속,모든

기도를 총동원합시다. 모세처럼, 바울처럼, 내 생명과 맞바꾸는 기도를 합

시다.

대상은 가장 가까운데서 찾읍시다. 내 가족, 내 친족, 내 이웃,내 친구 중

에서 찾읍시다.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저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힘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맙시다. 주님께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심하지 맙시다. 성령께서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6월 12일, 그날은 마귀가 통곡하고 귀신이 벌벌떠는 날이 될 것입니다.

주여 승리하게 하소서. 지옥 권세가 무너지게 하소서. 전도합시다. 하면

됩니다. 내가 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508

분 류 : 설교

55

제 목 : 하나님이 주신 기업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시 127:3-5

시편 127편은 이스라엘의 3대왕이었던 솔로몬이 읊었던 시 가운데 하나입

니다. 시의 길이는 짧지만 담고 있는 뜻이 아름답기 때문에 널리 애송되고

있습니다.

본편은 둘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1-2절은 하나님을 외면했을 때 오는 불행

한 결과에 대하여 3-5절은 하나님게서 주시는 축복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

다.

1-2절의 요지는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켜주실 때

그 존재와 위상과 행복이 지켜진다는 것입니다.그리고 3-5절에서는 하나님

이 주시는 자녀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녀란 내가 낳은 자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낳은 것만으로 자식이 되는 것

인 아닙니다. 올바른 양육이 자식을 자식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식을 세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7:6을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

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라고 했습니

다.

그리고 창세기 17:8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

셨습니다. 여호수아 11:23을 보면 훗날 가나안 땅을 점령한 아브라함의 후

손들이나 가나안 땅을 기업을 차지하게 됩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하셨고 그

들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을 주셨습니다.

신약의 경우를 보면 기업의 의미가 다분히 영적인 것으로 발전합니다.

마태복음 25:34을 보면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했고 계시

록 21:7을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두

구절의 뜻은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은 자식을 가리켜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나 영원한 천국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것처럼 자식은 하나

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기업은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자손만대 물려나가야 하는 유산이며 축복입

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이 받은 기업인 가나안 땅을 오늘

가지 지키고 유지하고 물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의 경우도 가정과 가문을 이어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

니다.

말씀드린대로 기업은 지키고 전승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화민족일수록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전승해 나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재를 대하는 국민정서에도 문제가 있고 문

화재를 관리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문화지 밀반출사건이라든지 도굴이 그 한 예입니다.

그리고 불교사찰이나 불상등을 문화재라는 이유로 막대한 국고지원은 물론

신개축에도 국고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하더라도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없습니다.

영원한 기업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키고 아끼고 가꾸어야

할 기업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녀입니다.

제아무리 잘 지은 집도 관리가 소홀하면 금방 낡고 냄새가 납니다. 얼마전

모 교회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하룻밤 집회인도를 맡았기 때문에

거기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원은 규모도 그려니와 시설도 최

신시설이었습니다. 건축한지 7년 정도된 건물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

룻밤을 지내며 악취와 싸워야 했습니다. 화장실 냄새가 방 안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골 여인숙 화장실 냄새와 같은 악취가 배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관리

소홀의 결과였습니다. 건축물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자식이라는 기업도 관리를 잘못하면 쓰러지고 벽에 무너지고 망가지고 냄

새나게 됩니다.

충청북도 어느 시골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벽에 걸린 족자에 눈이 쏠렸습니

다. 서툰 붓글씨로 쓴 족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었습

니다.

"꾸지람 속에 자란 아이 비난하는 것 배우며

미움받으며 자란 아이 싸움질만 하게 되고

놀림당하며 자란 아이 수줍음만 타게 된다.

관용속에 자란 아이 참을성을 알게 되며.

격려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감을 갖게 되며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 감사할 줄 알게 된다.

공정한 대접 속에 자란 아이를 올바름을 배우게 되며,

안정 속에 자란 아이 믿음을 갖게 되며

두둔받으며 자란 아이 자신의 긍지를 느끼며

인정과 우정 속에 자란 아이 온 세상에 사랑이 충만함을 알게된다."

어떤 어머니가 교육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녀 교육은 언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지금 댁의 자녀는 몇살이나 됐습니까?]

[다섯살입니다.]

[서두르십시오. 5년이나 늦었습니다.]

자식은 내가 낳긴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믿고, 키우고,지키고, 관리해야 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회원은 1천명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만든 좋은 아버지 20계명을 소개합니다.

(1) 공부하라는 말을 줄이고 먼저 독서하는 모습을 보여주라.

(2) 식사시간에는 가족과 대화를 많이 하라.

(3) 자녀가 스스로 판단한 일은 존중하라.

(4)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라.

(5) 아무리 화가나도 자녀를 직접 손으로 때리지 말라. 꼭 필요할때는 벌

을 서게 하거나 회초리를 쓰라.

(6) 똑같은 일로 두번 야단치지 말라.

(7) 함께 여행하는 등 자녀와 공동의 경험을 쌓아라.

(8) 자녀가 좋아하는 책이나 어린이 프로를 같이보라.

(8) 힘든 일이라고 자녀를 참여시켜 협동심을 길러라.

(9) 자녀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말라.

(10) 똑같은 일을 두번 야단치지 말라

(11) 자녀 앞에서 신호를 어기거나,새치기,거짓말을 하지말라.

(12) 자녀와 함께 문구점과 서점에 자주가라.

(13) 가훈을 정하거나 가족놀이를 만드는 우리집만의 분위기를 만들라.

(14) 휴일은 박물관 견학,가재도구 손질,독서등으로 다양하게 보내라.

(15)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가정의 역사가 얽힌 것을 소중히 다루라.

(16) 자녀 앞에서는 다른 사람에 대해 좋은 점만 이야기하라.

(17) 다 쓴 물건은 바꿔쓰고 안쓰는 물건은 재활용하는 본을 보이라.

(18) 자녀가 자신의 의견을 스스럼없이 조리있게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

등 입니다.

요약되는 기둥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

다.

어떤 사업가가 대학 총장을 찾아가 그 대학애 입학한 자기 아들에 관해 부

탁을 했습니다.

[총장님 저는 19년동안 제 아들을 키웠습니다만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

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잘못됐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부디 총장님께

서 잘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장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19년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한 아들을 제가

4년 동안에 이해하고 바로 잡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기도로 키웁시다. 말

씀으로 키웁시다. 믿음으로 키웁시다. 진학보다,성공보다,성적보다 더 중요

한 것은 건강입니다. 그리고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지금 자

녀의 믿음이 어느 지점에 이르렀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7:16을 보면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하

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

이라는 것입니다.

런던에 있는 국립미술관에 들어가면 "코르넬리아와 보석"이라는 제목이 붙

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그림은 두 여인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

입니다. 한 여인이 코르넬리아에게 자신의 진주목걸이를 보여 주면서 당신

의 보석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코르넬리아는 자신의 품에 안고 있

는 두 아들을 바라보며 이 아이들이 나의 보석이라고 대답했다는 내용의 그

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상급으로 자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

급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갈무리 하지 못한다면 그 상은 때로 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벤자민 스포크박사의 [육아법]이라고

말합니다. 전세계의 어머니들과 정신과 의사들과 소아과 의사,교사,심리학

자들이 그 책을 읽었습니다.

스포크는 말했습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를 다루고 가르치는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정신과의사,심리학자,교사,사회운동가,

소아과 의사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잘못이다. 부모들이 물

려받은 유산은 오늘날에도 타당하며 놀라운 결과를 낳을만한 생산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

금메달리니스트는 그 메달을 다른 사람의 목에 걸어주지 않습니다.

자기 목에 걸고 자기가 보관합니다.

흔히 자녀교육을 부모는 포기해 버린 채 특정한 기관에 맡기면 되는 것으

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교육의 경우도 부모가 올바로 신앙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최대한 교육시걸과 재원을 투자해야 합니다.

만일 자녀가 잘못되고 그 삶이 망가졌다면 그것은 일차적인 원인과 책임이

부모와 가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더 빛나게

해야 합니다.

3. 젊은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다고 했습니다.

젊은시절에 낳은 자녀는 그 부모가 노쇠했을 때 그 부모를 보호하고 그 영

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전쟁은 창이나 활이 주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장군의 전통에 화살이

떨어졌다면 그 장군은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자식을 전통에 가

득 꽂혀있는 화살로 비유했습니다. 그만큼 든든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자식

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는 언제나 두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는 지식 때문에 영광받게 될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때문에 얼굴

을 들지 못하지도 모르는 불행한 가능성입니다.

열왕기상 15:26을 보면 나답이라는 왕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아비의 길로 행하며"라고 했습니

다.

나답 왕은 아버지처럼 못된 왕, 나쁜 왕이된 것입니다.

영국의 설교가였던 스펄젼(Spurgeon)목사는 "우리 교회에는 2700명의 교인

이 있다. 그들 중에는 때때로 제명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어려서부

터 믿음생활을 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페르시아 격언중에 "만일 당신이 거룩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자

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라 이유는 그들이 행한 모든 선행의 공로는 결국 당

신에게 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영광이 되고 자랑이 되려면 부모가 그 자녀에게 신앙의 영

향과 유산을 물려 주어야 합니다. 주의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키워야 합니

다. 내가 물려준 신앙의 유산만큼 자식은 나에게 영광이 되고 보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며 화살같은 자녀들을 정성과 기

도와 말씀과 믿음으로 키웁시다.

발행일 : 940501

분 류 : 설교

56

제 목 : 실패에서 성공으로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요 21:1-6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 가운데 하나입

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몇몇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있었고 그곳에 다시 사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과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다

시 성공할 수 있다는 두가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가지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실패원인

조건없는 실패는 없는 이유없는 고난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원인없는 실

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지 못한 이유

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1) 과거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리잡던 어부

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주님은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부르셨고 3년동안 훈

련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다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가 처형당하자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주셨

습니다. 돌아간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다른 제자

들도 따라 나섰다고 했습니다. 이미 3년전 떠났던 곳으로 그들은 되돌아간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경륜이나 연배에 있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

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점에 있어서 수장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그가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러 간다"고 나섰더라면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면서 나서는 바람

에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서게 된 것입니다.

주경학자들 가운데는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다고한 것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기 때문에 갈릴리로 다른 제자들은

데리고 가기위한 방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

락은 허탈감과 실망감 때문에 십자가의 도시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마을 갈

릴리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과거로 돌아간 것입니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던 젊은이가 은혜를 받고 주의 종이 되

기로 결심한 후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3년동안 신학을 공부한 후 경

기도 시골마을의 전도사로 부임을 했습니다. 6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전도사

대우라는게 형편없었던 때였습니다.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7분의 1도 되지

않는데다가 전도사를 괴롭히는 몇 사람이 사사건건 문제를 삼고 나섰습니

다. 마침 그 무렵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하다며 승진발령을 내

줄테니 다시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주저치 않고 짐을 경기도 시

골교회를 떠나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친구들이 도와줘야

먹고 사는 신사게 되고 말았습니다.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죄짓고 살던 과거로 돌아가는 사람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허영에 들더 살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결국 허영에 들뜨고 말 것입

니다. 불행했던 과거만을 곱씹는 사람은 행복해질 겨를이 없게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미래적이며 영원적이며 전진적입니다.

[앞으로 앞으로]의 종교이지 [뒤로 돌아가]의 종교가 아닙니다. 성찬식에

서 참석하고난 어떤 남자교인의 농담이 생각납니다. 예수 믿고난 후에도 상

당기간 동안 끊지 못했던 술 담배를 세례받고난 후 끊었다는 것입니다. 그

리고 처음 성찬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포도주 한모금을 마시는 순간 옛

날 생각이 불쑥 나더라는 것입니다.크리스탈잔에 부어마시던 포도주 생각이

나서 그 생각을 지우느라 혼이 났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초신자의 농담이긴 합니다만 성찬식 포도주를 마시면서 옛날

에 놀던 술집이나 그 술맛이 생각난다면 안될 일입니다.주님의 십자가를 생

각하고 그 피의 공로로 죄사함 받아 들어가게 될 영원한 천국을 생각해야합

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옛동네, 지난 과거로 회귀했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두려

워할 필요도 없고 그리워할 필요도없습니다. 오늘이 중요하고 내일이 더 중

요하기 때문입니다.

2) 작당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해도 저희가 우리

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날 배타고 함

께 나선 사람들의 명단이 2절에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도마,나다나엘,야고

보,요한,그리고 다른 제자 둘입니다. 그러니까 11제자 중에 일곱 명이 작당

하여 고기잡으러 떠난 것입니다.

사회학자들은 군중심리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군

종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여야 할 것 없이 선동정치에 능숙합니

다. 그리고 저마다 국민을 내세우고 애국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당리당략을 위한 선동과 흑색선전과 모략중상으로 얼룩져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의 말 한마디에 6명이 줄에 묶인 것처럼 따라 나섰다면 그 당시 그

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느냐, 누구와 작당하느냐,누구와 친하느냐,누구와 자주만나

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신앙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대학의 근대사 교수였던 킹슬리(kINGSLEY

1819-1875)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토록 아름

다운 인생을 살 수가 있었으며 명문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었느냐"고 그의

애답은 "나에게는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말

한 그 친구는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 신앙과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과 작당하기를 즐기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과 작당하기를 즐기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색잡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면 석달을 못넘기고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짝을 잘 만나야 합니다.

3) 불신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

지라"라고 했습니다. 고기잡는데 정신팔린 사람 눈에 예수가 보였을리 없습

니다. 사람도 물고기로 보였을 것입니다.

돈에 미치면 자나깨나 돈만 생각합니다. 여자에 미치고 남자에 미치면 자

나깨나 사람만 생각할 것입니다. 도박에 미치면 도박만 생각하고 권력에 미

치면 사람을 죽이고서라도 권력찬탈에 혼신을 기울입니다.

불신으로 눈이 가리워진 그들에게 예수가 보일리 없습니다. 믿음이 떨어지

면 실패,슬픔 야속한 것, 억울한 것, 원망스러운 것, 죽은 것들만 보입니

다.

그러나 믿음을 회복하면 갈릴리 바닷가에 웃음띤 채 서 계시는 예수가 보

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회복이 필요하고 부활신앙의 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성공원인

6절 끝을 보면 아무것도 잡지 못했던 그들이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실패가 성공으로,빈손이 차고 넘치는 축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찾아보십시다.

1)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갈릴리 바다에 찾아오신 주님께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

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한 장면이 나옵니다.

우린 여기서 실패자와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예수님 사이의 진솔한 대

화를 보게 됩니다. "있느냐""없나이다"

제자란 부르심에 응답하고 물으심에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대답의 사람,응답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석을 부를 때 대답을 안하면 결석이 됩니다. 그리고 법정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지금도 졸업도 못합니다.

대답이 시원찮거나 회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임받기가 어렵습니다. 왜

부르시든지 빨리 대답하고 그 앞에 대령해야합니다.

상전이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라고 부르면 대기하고 있던 집사나 하인

은 재빨리 "예, 밖에 대령중이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때 자리를

비우면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주일낮 주일밤 수요

일밤 금요일밤 그때 거기 있어야 합니다.

2)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하셨고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고 했습니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 배 오른편과 왼편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던집니다. 그리고 배 앞부

분이나 뒷부분에도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잡지 못했습니다.

'배 오른편에 던져라' 이 명령은 이미 수십번 되풀이해서 던졌던 실패의

경험을 다시 해보라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순종했을 때 성공

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이 비슷한 장면이 누가복음 5장에도 나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헛수고의 연속뿐이었습니다. 그

때 그곳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르리 잡으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며 순종

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르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3

년전 부름받을 때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결정한 오른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결정한 오른편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분명해졌습니다.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에로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

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지 못했다면,

사업가가 사업에 실패한다면,

장사꾼이 돈을 못번다면,

교육자가 교육에 실패한다면,그것은 큰 문제이며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우리는 실패의 연속으로 절망하고 좌절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허탈감에 빠졌던 갈릴리 어부들이 성공한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살아서 찾아오신 예수,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실패로부터 해방되고 성공의 깃발을 꼿는 비결입니다.

나를 믿고 경험을 믿고 배경을 믿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철석같이 믿었던 조건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깨어지는 바람에 주저앉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길이 있고 방법이 있습니다. 실패와 허탈과 절망의 바닷가에 찾아

오신 예수를 만나면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내 경험과 내 생각과 내 상식에 안맞더라도 즉시 지금 순종하십시

오. 즉 예수 방법대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반드시 고기를 잡는 성공이 올

것입니다. 그날 아침 디베랴 바닷가가 예수님을 모신 축제의 자리가 됐던

것처럼 우리네 실패와 고통의 자리도 축제와 성공의 잔치자리가 될 것입니

다. 예수님이 계시면 말입니다.

발행일 : 940424

분 류 : 설교

57

제 목 : 배가 되기 위하여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35:9-15

성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

니다. 누구나 잘 살고 싶고 돈벌고 싶고 출세하고 있고 행복하고 싶은 욕망

을 가지고 있지만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손자였던

야곱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었고 원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한마디로 성공을

한 것입니다.

장자가 받는 축복을 원하더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원하는 처녀와 결혼하기 위해 노력하더니 그것도 이루었습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더니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소원대로 다 얻었습니다. 그 성공비결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것은 오

늘 우리의 성공비결이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1. 그는 성공과 복을 갈망했습니다.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형인 에서와 시간적인 차이는 얼마되지 않은채

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제도상 장자와 차자의 차이는 엄청

났습니다.

모든 권한과 재산권은 장자의 몫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이 싫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챘습니

다. 물론 그의 거짓말과 행동은 그 어떤 경에도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습

니다.

그러나 복을 원하고 바라는 그 태도와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는 형을 피해 하란으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아내감을 만

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기 위해 그는 14년 동안을 참고 기다리

며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라면 참고 바라고 힘쓰는 사람이었

습니다.

대부분 성공한 위인들이 지니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목적지향적이라는

것과 부지런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정한 목적을 향해 부단히 도전하고 전진하는가 하면 모두가 부지런합

니다.

성경은 게으른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개미에게 배우라고 했고 일하기 싫으

면 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

라고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면 부지런하고 열심을 기울여야 합니

다. 하물며 영적 성공을 위해서라면 열심과 노력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제단신앙 때문입니다.

창세기 28장 18절을 보면 형을 피해 하란으로 가던 도중 벧엘에서 하룻밤

을 노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거기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했습

니다.

31:54을 보면 야곱이 산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고 35:14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을 부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28장이나 31장 그리고 35장의 경우는 야곱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떠돌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이나 환경이 안정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때를

따라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

다.

영국의 한 신문이 독자들을 대상으로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인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거기에 뽑힌 것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있는 어린이

둘째는 아기를 목욕시키는 엄마

셋째는 대수술에 성공한 외과의사 순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답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은혜받고 성전계단을 내

려가는 그리스도인의 그 표정,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없는 행복한 표정이며 마음이며 순간인 것입니다.

은혜받고 감격하는 여인의 모습은 모나리자에 비할 수 없고 그 얼굴은 미

스코리아에 비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눈이 부셔서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우리가 성

공하고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늘 만나야 합니다. 그 분과 늘 교제해야 합

니다. 하나님과 늘 교제하는 방법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홀히 취급하면 안됩니다.

바른 예배를 위해 몇가지 안내를 드립니다.

첫째, 정한 예배시간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새벽,낮,밤,정한 날, 정한

시간에 열심으로 나와야 합니다.

둘째, 정한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거리관계나 교통수단의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시간으리 지켜야 합니다.

셋째, 준비하고 드려야 합니다. 마음 태도 복장 헌금 등 미리 미리 준비해

야 합니다.

넷째, 모든 모임보다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가령 따로 둘러앉아서 회의를 하는 것 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가 우

선입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며 예배가 교회의 최우선기능이며 과업인 것

입니다.

다섯째 예배는 생활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편의상 그리고 형편상 예배의 시작과 마침을 정하고 예배를 드립니

다. 그러나 예배는 끝이 있으면 안됩니다. 주일 낮예배가 끝나면 바로이어

삶의 현장으로 나가 생활예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 그리고 목

숨이 다하는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3. 기도생활 때문입니다.

창세기 32:25을 보면 얍복강변에서 벌어졌던 야곱의 영적 전투장면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가솔들은 데리고 20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에게 청천벽력같은 급보

가 전해졌습니다.

장자권을 빼앗겼던 형 에서가 400명 장정을 이끌고 야곱을 처치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습니다.

그는 이런 저럭 궁리끝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의 기도를 천사와의 씨름이라고 표현했

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천하장사 이만기와 국민학교 4학년 김복동이가 모래판에

서 씨름을 한다면 그 씨름판이 어울릴 것 같습니까? 하물며 천사와 야곱의

씨름, 이것은 하나마나한 씨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천사를 이겨야 자기

앞에 가로놓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절박한 믿음 때문에 밤이 새도록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씨름을 계속했습

니다. 그리고 그는 그날 밤 판정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천하장사가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기도로 이겼고 기도로 자신의 문

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그날 밤 얍복강 나루터

의 기도가 없었더라면 야곱의 생애는 형님이 휘두른 몽둥이로 막을 내렸을

것이빈다.

우린 여기서 참으로 성공하고 문제를 푸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됩

니다.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즉 위기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놀라고 당황합니다.

둘째, 걱정하고 절망합니다.

셋째, 방법을 찾습니다.

넷째, 방법을 동원해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다합니다.

다섯째, 해결이 안되면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신앙적 접근입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방법이 있

습니다. 야곱이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우리에겐 기도라는 위대한 방법이 있습니다. 야곱이 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야곱은 뛰어난 기지와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임기웅변력도 뛰어났

습니다.

그러나 생사 흥망의 기로에 섰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만이 해결의 길이며 하나님과의 대면만이 사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

니다. 진실로 해결을 원한다면 축복을 원한다면 지금 기도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입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은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아야될 축복을 받았습니

다. 그런가하면 아버지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축복

했습니다. (28:3).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축복 때문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창세기 31장42를 보면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

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다면 외삼촌께서 나를 공수

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

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자신이 복을 받고 부자가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창세기 35장9절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

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야곱의 성공과 복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

게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미국 뉴욕 맨하탄 75번가에 [해피 유치원]이라는 심판을 내건 유치원이 성

업중에 있습니다. 이 유치원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개를 맡아 돌보아 주

는 개 유치원입니다. 그런데 사람 유치원보다 개 유치원이 훨씬 더 사치스

럽고 시절이 좋습니다.

뉴욕의 언론은 이곳 [탁견소]를 개 사교클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개

운동기구를 설치해 개 헬스클럽도 만들어 놓고 개들에게 입힐 옷을 맞추주

는 고급 부티크 [파큐 애비뉴]도 성업중입니다. 그리고 전속 훈련사가 훈련

을 시키고 수의사가 건강을 체크해 줍니다. 돈만 더 내면 개인교수제도를

적용해 일대일로 교습을 시키기도 합니다. 교습비는 단체받은 주 6회 250달

러이고 개인교습비는 시간당 150달러입니다.

문제는 개들은 그러한 특별배려에 대해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 사는 집에서 딩굴고 뛰노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가관인것은 개들이 노는 꼴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위하고 만족감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입니다.한쪽에서는 개 유치원, 개 사교클럽이 성업중인

가하면 한쪽에서는 사철탕집이 성업중입니다.

지금 우리는 개 사교클럽같은 세상 것들 묻힌 채 그것들이 행복이고 가치

있는 것들인 양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내 영혼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

입니다.

1925년도에 노벧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영국의 극작가이며 비평가였던 버

나드 쇼(Grorge Bermard Shaw) 는 '비참해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지금 행복한가 아닌가를 놓고 빈둥거리며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한가해지면 불행이나 행복을 따지게 됩니다. 그러

나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이 기도하고 주님 섬기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생

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라며 노래부르는 마이클 잭슨은 코

를 포함해 두번이나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80년대부터 피부에 흰반

점이 생기는 백반증으로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그가 무대에 설 때나 외출

할 때 얼굴에 회떡칠에 가까운 짙은 화장을 하는 것으니 얼굴에 번지고 있

는 백반증세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돈,명예,인기를 다 얻은 그 사람이지

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시사주간지 뉴스워크지는 최근호에서 '미국 10대들 꿈을 잃고 산다"라는

특집기사를 썼습니다. 총,마약,이혼,범죄등으로 뒤범벅된 미국사회 속에서

10대들은 꿈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면 그곳이 미국이든 구라파든 동부이촌동이든 압구정이든 불행

해집니다. 내가 행복하고 복을 받고 배가되려면 하나님의 은총의 우산아래

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품속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 손안에 잡혀야 합니

다.

발행일 : 940417

분 류 : 설교

58

제 목 : 사는 길로 인도 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겔 33:10-11

먹으면 사는 약이 있는가 하면 죽는 약이 있습니다. 극약이나 독약은

먹으면 죽습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이 있는가 하면 섭취량이 많을수록

병의 원인이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걷는 길도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살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문]이라고 했고 [길]이라고 했습니다.

1980년 가을 요한복음을 읽던 중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는 주님의 말씀을 명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길]이라는 말씀

이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그해 성탄절 저는 교인들에게 [길]이라는

붓글씨를 써서 카드 대신 보냈습니다.

얼마후 모 일간지가 교계 지도자들의 칼럼을 연재하면서 칼럼 제목을

[길]이라고 정하고 제가 쓴 [길]을 題字로 삼은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걸어야할 길은 두 가지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사는 길과

죽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길과 영멸의 길,천국길과 지옥길

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먹으면 죽는 음식인줄 알면서 일부러 먹는 것은 자살행

위입니다.

얼마전 텔레비젼 교양프로에서 실험관 속에 실험용 새끼 쥐를 넣고

그 속에 담배 연기를 불어 넣었더니 그 자리에서 쥐가 죽는 것을 보았

습니다.

이 세상에는 의외로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는 길은 제

쳐두고 죽는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담배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가 있는 방에 문

을 닫은 채 한 개비의 담배를 피우고 그 연기로 방안을 채웠을 때 신

생아에게는 치명적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산모와

신생아가 있는 방안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살의가 있는 사림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죽는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눈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33장 1-9절은 파숫군이 자기 할 일을 다하지 않았을 때 오는

불행과 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은 높은 망대 위에 올라가 사방을 살펴야 합니다. 만일 적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만일 파숫군이 졸

거나 딴짓을 하느라 나팔을 미쳐 불지 못해 적군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면 그는 그 책임 때문에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몇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파숫군은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 땅 백성이 자기 중에 하나를 택하여 파숫군을 삼았

다"고 했고 7절을 보면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높은 성루에 올라가 파수를 서는 사람은 특별히 뽑혔거나 지정된 사

람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뽑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만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은 영광입니다만 영광보다 더 무거

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수만명의 축구선수 가운데서 국가대표팀으

로 뽑히는 것은 축구인의 최고 영광입니다. 그런가하면 대표선수는 한

국의 영예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습

니다. 그러기에 운동장에 나서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선택된 사람이라고 말씀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 주셨고 그 가운데서 다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해 주

셨습니다. 그만큼 선택된 사람들은 책임이 큰 것입니다.

2. 파숫군은 경고의 책임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칼이 그 땅에 임함을 보고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

되"라고 했고 7절을 보면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

들에게 경고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고의 책임에 대한 원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제대로 경고해야 합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경고하라"고 했습니다. 개 발자국 소리를듣

고 너는 나팔을 불어댄다면 큰 일입니다. 바람에 나무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적군의 기습으로 알고 나팔을 불어도 큰일납니다. 제대로 들어

야 합니다.

92년 10월 28일 휴거 소동은 귀신이 속삭거리는 소리를 하나님의 소

리로 잘못 듣고 나팔 불어댔던 사건이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파숫군에게 시시때때로 이상한 환청,환음,환상을 들려

주거나 보여 주면서 교란작전을 펴고 있습니다.

계시인양 위장하기도 하고, 진리인양 포장을 해서 파숫군의 정신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파숫군은 "내 입의 말을 듣고"라야 합니

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경 외에 다

른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파숫군이 되려면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정신차리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미하게 들릴 때가 있기 때문에 귀 기울이고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들립니다. 시끄럽고 복잡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

지 않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7절 셋째 줄을 보면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라고 했

습니다. 하나님은 파숫군을 통하여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파숫군

에게 미리 알려서 경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마이크로폰은 성능이 아주 좋은 것입니

다.

제 육성만으로는 이 넓은 방안을 울리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확성장치

를통해 저 먼 구석까지 제 설교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줄이

끊어지거나 전기가 나가면 고성능 마이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아무리 인격이 고매하고 공부를 많이 하고 인물이 출중해도 소리를

전달하지 못하는 파숫군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

신하여 경고의 소리를 발해야 합니다. 파숫군은 들은대로 받은대로 본

대로 전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클린턴을 만나러 간다면 그 친서

를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대통령을 대신해 옐친을 만나러 간다면 그 책임을 소홀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가을 대신하여 파숫군의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어떻게

소홀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1892년에 내한한 스왈른 여선교사가 황해도 안악 장날 장터를 돌며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안악골에는 김익두라는 유명한

깡패가 있었습니다.

장보러 나오는 장사꾼들은 성황당에 들러 제발 오늘 김익두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고 돌맹이 한 개 집어서 던진후 장터에 나오곤 했습

니다.

그런데 스왈른 부인이 장터에서그 김익두를 만났습니다. 전도지를내

맬며 예수를 믿으라고 하자 김 익두는 전도지를 받더니 콜르 풀어 버

리는 것입니다. 화가 난 스왈른 부인은 김익두에게 "당신 오늘밤에 썩

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날밤 김익두는 내내 코가 썩을까봐 걱정하다

가 다음날 스왈른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내 코가 썩지 않겠느냐고 물

었습니다. 그러자 스왈른은 "예수 믿으면 코 안 썩습니다."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김 익두가 예수를 믿고 한국 초대교회 거장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코가만 썩는 것은 아닙니다. 심장도, 신장도, 혼도,

영도 다 썩어 죽고 맙니다.

파숫군은 그 사실을 전해야 합니다.

어떤 날 스펄젼(Spurgeon)목사가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가 반

색을 하며 인사를 청했습니다.

"조님 오랫만입니다. 전에 한번 뫼신적이 있습니다."

"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그러실 것입니다. 14년 전이니까요 그때 손님께서 이 성경책을 주시

면서 전도를 하셨는데 그때 저는 이 책을 읽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

니다."그의 손에는 낡고 빛바랜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파숫군은 입을

다물면 안됩니다.

3. 파숫군의 책임은 무겁고 큽니다.

8절을 보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파숫군의 책임을 다 못하면 둘다 죽게 됩니다. 성 안에사는

백성도 죽고 파숫군도 죽게 됩니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아도 그 책임을 물어 처형하고 맙니다. 본문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 책임을 철저하게 묻겠

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며 워털루전쟁 영웅이었던 웰링턴(Arthrur

Sellington)장군에게 "총사령관이 행군 명령을내리면 어떻게 해야 합

니까"라고 묻자 그는 '진군하여 싸우는 것이다. 성공의 책임은 사령관

에게 있다. 만일 출발하지 않는다면 총살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옳

습니다.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음으로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고 자식

이 죽고 부모가 죽는다면 그 파숫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생 천국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와 부모와 자식이 지

옥을 가게 된다면 그 파숫군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4. 사는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떠나서사는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

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라고 했습

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앙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입니다. 그런

데 그 길을 떠나 죽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사는 길로 인도하

는 것이 교회가 할일 입니다.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신부가 결혼을 앞두고 혼수감 준비하며 장농,반지,시계,옷,드리

세,아파트,자동차,전자렌지,냉장고,숟가락,젓가락 사러 다니다가 지쳐

쓰러져 결혼식날 병원에 입원해 있다면 그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이 중요하지 혼수감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구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회의하고,세미나하고,결의하

고,조직하느라 정력과 시간낭비하고 정작 전도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

면 죽은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87세 되던 해 알렉산더 메더(Alesander Mather)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죄가 아니고는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그런 전도

자를 100명만 보내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이야 지옥문을 부술 수 있

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본문 20절을 주목합시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대로 심판하리라."

내 가족, 내 이웃, 내 친척, 내 친구, 내 동포를 사는 길로 인도합시

다.

죽도록 내버려두지 맙시다.

발행일 : 940410

분 류 : 설교

59

제 목 : 확실한 증거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1:1-5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온갖 이단들이 기독교의 진리와 유일성을

음해하고 파괴공작을 계속했습니다만 그러나 기독교만이 지니는 유일

성 때문에 전세계 인구이 3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기독론 중심의 이단들입니다. 예

를들면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한다든지, 아니면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도 있고,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가 하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에수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어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불교나 유교를 통해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십

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

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도 존재할 수가 없고, 신앙도 성

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

는 증거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19:15을 보면 어떤 사건의 사실 여부와 진실 여부를 증언하려

면 2-3명의 증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실 증명은 2-3명의

증인이면 성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와 증인이 부지기수입니다. 그

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증거가 너무나 많고 확실합니다. 몇가지 증

거를 살펴보겠습니다.

1. 사도행전이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1:1을 보면 사도행전을 받은 사람이 [데오빌로]라고 했습니

다. 데오빌로는 그 당시 로마 정부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누가는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데오빌로에게 보냈습니다.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생애를 사실대로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

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데오빌로는 로마의 고관으로 예수님

을 영접했고 그 나애 도미틸라(Domitilla)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AD 96년 도미시안 황제 때 순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당시 로마의 고관이었던 [데오빌로]에게 보낸 공식 문서

이며 기독교 변증문입니다. 공식문서와 변증문에 어떻게 거짓증거를

써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그때 누가가 보낸 사도행전이 거짓말 투성이었다면 데오빌로가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끔씩 역사 기술의 오류나 왜곡시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잘못된 역사기록이나 왜곡된 부분들이 만천하에 드러나

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사도행전의 경우 만일 위증이나 오류가 있었다면 그 당시는 물론 훗

날 수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과 평가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기독교 2천년 동안 사도행전의 정경성과 정당성을 흔들리지

않은 채 초대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친히 나타나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5:4-8을 보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

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9베드로)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그

500여 형제에게 보이셨고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후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은 내게도 보이셨니라"고 했습니다.

주경기 카알(Carr)에 의하면 다시 사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

나 자신을 보여 주신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에게 (마 28:9)

(2) 베드로에게 (눅 24:34,고전15:5).

(3) 글로바와 다른 제자에게 (눅 24:13-35).

(4) 도마가 없을때 제자들에게 (막 16:14,눅24:36,요20:19).

(5) 도마가 함께 열한 제자에게 (자됴20:26).

(6)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에게 (요21:1-24).

(7) 갈릴리 산위에서 열한 제자에게 (마 28:16).

(8) 500여 형제들에게 (고전 15:6).

(9)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 (고전 15:7).

(10) 예루살렘 부근에서 열한 제자에게..(막 16:19,눅24:50,행

1:3-12,고전 15:7).

횟수로는 열번 이상,사람 수로는 600여명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대로 구약이 경우 사실 증거는 증인 2-3명이면 됩니

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시기 위해 계속해서 많은 제

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

요하겠습니까?

본문 3절을 보면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동

안 저희에게 보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40일 간을 세상에서 계시면서 부활하신 자신을 보여 주

셨습니다. 너무나 명확한 증거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3.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순교자들의 피가 증거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예수의 역사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콩트(Auguste Comte)와 영국 시인 칼라일 (Thomas

Carlyle)이 어느날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철학자 콩트가 의

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기독교를 대신할 수 있는 완전한

종교를 창설하기 위해 구상 중에 있습니다. 그 새로운 종교는 기독교

가 내세우는 유치한 신비적인 이야기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에 완벽

하고 분명한 것이 될 것입니다"라고.

듣고 있던 칼라일이 대답했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니 좋은 일

입니다.그러나 그 전에 당신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수처럼 당

신도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만

들고자 하는 종교가 생명있는 종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독교는 부활과 생명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 힘 때문에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영국의 로지경 (Oliver J.Lodge)은 영국의 물리학자였고, 버밍엄대학

의 창설자입니다. 그의 아들이 1차대전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했

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전사하기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속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버님 제가 죽더라도 제 무덤엔 오지 마세요. 전 거기에 없을테니

까요."

어거스틴(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도 어느날 아들에게 '내가 죽거

든 장지 문제로 고민하지 말고 아무데나 묻어주기 바란다.나는 바로

하나님께로 가게 될테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떳떳하고 편안합니다. 이유는 죽음

을 넘어선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고대 로마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300년동안 기독교를 박해했습니

다. 그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습니

다.

나병이 만연된 골짜기에 몰아넣기도 했고 사자굴에 던지기도 했습니

다. 그런가하면 불속에 던졌고, 칼로 쳤습니다. 그러나 결국 게임은

기독교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예수가 로마를 이긴 것입니다.

생명은 강합니다. 예수의 부활생명은 오늘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증거이며 웅변입니다.

예수는 다시 사셨습니다. 빈 무덤과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성경과 수

많은 증인들이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증인은 증

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

부활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이유 역시 예수가 누구시며 어떻게 죽으셨으며 다

시 사셨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부활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가지 감사할 조건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다시 사신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죽은 신, 대답 못하는 잡신,우상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

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 무덤이 없는 예수를 믿고 있

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둘째, 건전한 교단,건전한 교회에 소속돼 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사이비 교단이나 이단 교히에 소속된 목사나 교인은 불행합니다. 그

집단이 잘못되면 교인도 낯을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 사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습니다.다시

말하면 죽은 예수를 다시 살아났다고 위증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

럽겠습니까?그러나 다시 사신 예수를 전하며 사는 것은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다시 사신 주님의 보호를 받으며 산다는 것이 감사했습니다.

지난 3월 18일 새벽 6시 천호동 제일교회 김인식 목사님이 새벽 기도

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가 쓰레기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압축작업 직전의 청소차 곁으로 다가 갔습니다. 분명

신음소리, 울음소리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쓰레기 봉지 안에서 들

리는 소리였습니다.

미화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비닐 쓰레기 봉지를 개봉하자 그

안에 새파랗게 질린 피투성이 신생아가 들어 있었습니다. 한시간 정도

지난 신상아였습니다.

추위와 세균 감염 때문에 생명이 위급했습니다. 교회로 안고 와서 난

로를 피우고 물을 끓여 사모님과 함께 씻기고 응급조치를 취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 누구가가 무책임하게 버린 생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금봉지)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쓰레기 봉지에서 죽었어야 할 핏덩이가 금봉지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핏덩이를 내다

버린 비정이나 타락한 윤리 이야기는 제쳐 두기로 합시다.

만일 그때 그 핏덩이가 본능적인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신음소리를

내내지 않았더라면 그 생명은 죽음의 봉지 안에서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소리, 그 울음, 그 신음 소리가 살게 해 준 것입니다. 성경은 소리

내어 부르짖고, 찬양하고,하나님을 찾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목사님에게 발견되었다는 것, 그것은 보통 일이 아

닙니다. 그 생명은 자기를 버린 생모에게 양육받고 자라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쓰레기 봉지가 금봉지가 된 것입

니다.

저는 곰곰히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야

말로 나에게는 금봉지를 주신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 쓰레기에 묻힌 채 죽어야 할 조인, 죄의 비닐

봉지에 싸여 숨막힌채 질식해 죽어가던 나를 주님은 거기서 건져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 이름까지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금종지는 김 목사님의 호적에 입양이 됐지만 나는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양자가 되었습니다.

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뉴스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시렵니까?

어떤 날 인도의 스테판 닐 주교가 성공회의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서

류를 내밀고 도움으로 요청했습니다. 대주교는 한참 동안 서류를 들여

다 보다가 옆으로 밀어 넣으며 이렇게 물었싸브니다."당신은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습니까"라고 .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고, 부탁을 드리는 우리네

열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시면서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최근에 마지막으로 누구에게 나를 전했느냐"라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교회의 절대 과제입니다. 입

을 엽시다. "다시 사셨습니다."

"믿어야 다시 삽니다"라고.

아멘.

발행일 : 940403

분 류 : 설교

60

제 목 : 나의 객실이 있느냐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막 14:12-16

유대인이 지키는 가장 큰 절기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으로부터 해

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첫째, 집안에 있는 누룩을 샅샅이 찾아 없앴습니다.

본래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월절이 되면 누룩 넣지 않은 떡을 만들게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가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펴 누룩을 찾아 없앴습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은 맛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

이고 그 정도가 지나치면 부패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누룩을 찾아 제거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순결하고 성결한 삶

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이 맛도 있고, 모양도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부패된 것은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마치 누룩없는 빵처

럼 맛이 없고 재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부패하면 안됩니다.

썩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음식도 썩으면 먹을 수가 없고, 물도 썩으면 마

실 수가 없습니다. 정치도 썩으면 끝나고 왕조도 썩으면 그막을 내립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누룩을 제거합시다. 말씀의 불을 켜고 샅샅이 누룩을 찾

아 없애 버립시다.

둘째, 쓴 나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쓴 나물을 먹은 것은 애굽의 학정 밑에 살면서 겪었던 고난을 생

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쓴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쓴 약일수록

당의정을 입히거나 캡술 속에 집어넣어 만듭니다.

그러나 쓰다고 무조건 멀리하고 외면한다면 쓴 약이 주는 효과는 기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저스는 "향료는 으깨질수록 짙은 향기를 발한다"고 했습니다. 제아무리

고급스런 향료라고 했도 10년이나 20년 계속해서 향기를 발할 수는 없습니

다. 시간이 지나면 향이 날아가기 때문에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향기는 2천년이 지나도 여전히 향기롭고 신선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에서 으깨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장미 한그루 사다가 앞뜰에 심고 가꾸었습니다. 거름을 주고

물을 주며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장미가 피지 않자 꽃집을 찾아가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꽃집 주인은 "잘못 아셨군요 그 품종은 척박한

땅에 심어야 꽃이 피는 것입니다. 기름진 땅보다는 모래밭이 좋고 비료를

주면 꽃이 피지 않습니다. 모래 자갈 밭에 옮겨 심으시고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 주세요 그러면 반드시 향기나는 꽃이 필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

다.

우린 지난날 쓴 나물 먹고 살던 때를 잊어선 안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쓴

나물 먹으며 살고있는 이웃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난의 삶을 쓴 나물로 기념했던 것처럼 우리

도 지난 날 죄에 묻혀 살았던 삶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슨나물을 씹으면서 자신들을 낮추었고 교만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쓴 나물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어린 양 재물을 준비했습니다.

역사연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매년 유월절이 되면 예룻라렘

에는 100만 명으 인파가 몰려 들었고 25만 마리의 어린양이 유월절 제

물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학대받고 살던 유대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열가

지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렸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장자가 주는 재

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천사가 넘어가 재

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

을 잡아 그 피로 제사를드렸습니다. 어랜양의 피 때문에 재앙을 면했

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중요한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예

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유대인은 짐승의 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만 우리는 어린

양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문설주에 피를 바

르고 재앙을 면했습니다만 우리는 십자가에 흘린 피로 사망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까?짐승 땜누에 재앙을 피한 사람의 감격

이 커야 합니까? 아니면 에수님때문에 재앙을 면한 사람들의 감격이

커야 하겠습니까?

수난주일 아침 어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목사님

의 설교는 에수님의 고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에 목사님은 에수님이 수난 기사를 봉독했습니다. 유다

의 배신, 예수님의 체포,헤롯과 대제사장에게 끌려 다니며 조롱당하시

고 채찍에 맞으신 일 그리고 마침내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를 따로운 프로렌스라는 일곱살난 소녀가 훌쩍거리며 울

기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자 어머니는 죄송하는 표정으

로 눈인사를 보낸후 낮은 목소리로 프로렌스를 꾸짖었습니다.

"너 왜 이러니, 조용히 하려므로 " 그러나 프로렌스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더 크게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데리

고 나가라는듯 어머니와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엄마가 다그치

며 울음을 그치라고 하자 프로렌스는 울먹이며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이 한마디에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그 소녀는 그날 위대한 설교를

한 것입니다. 훗날 그 소녀는 여류문학가 프로렌스 바클레이

(Florence Barclay)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감증 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감격과 감사가

우리에게서 떠나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도 감동이 없습니

다. 성만찬에 참여하면서도 감격이 없습니다. 누룩없는 떡과 쓴 나물

과 어린양의 피를 잊지 맙시다.

본문은 에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함께할 집을 준비하라

고 당부신 기사입니다. 제자들을 동네로 보내시면서 물 한동이를 가지

고 가는 사람을 만날텐데 그에게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그가 너희를 인도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전에 제자들

과 함께 할 유월절 만찬 장소를 정해 놓으신 후 그들을 보내신 것입

다. 바로 그곳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이었습니다.

"나의 객실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씀은 나귀새끼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말씀과 이맥 상통합니다. 나귀새끼 주인에게 제자

들이 말했싸브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다"라고.

그러자 주인은 아무말 없이 나귀새끼를 내주었고 주님은 그 나귀 새

끼를 타시고 벱바게 마을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로마의 개선 장군은 갑옷에 긴 칼을 뽑아 든 채 백마를 타고 성내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예수의 입성은 십자가를 지시려는 죽음의 입성입

니다.

그러기에 백마 대신 비틀거리는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고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강림하

실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새끼 나귀를 생각해 보곤합니다. 청년 예수를 채운채

휘청거리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나귀, 그날 그 사건 때문에 나귀는

주님 오실 때까지 교훈과 설교의 테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때 두말없이 내놓았떤 나귀 주이;다의 헌신과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다락방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웅장한 왕궁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의대 저택도 군데군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락방은 호화주택도 아니었고, 공공건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만찬은 호화판 파티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조촐한 다락방, 별로 꾸밈도 없는 다락방입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있습니다만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셨을 때 주인은 두말없이

그 다락방에 내놓았습니다.

우리 여기서 [나의 객실]이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주

인의 다락방이지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사건이후 그 다락방은 세계 기독교인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치고 만찬상을 베풀었던 다락방을

방문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힘없는 나귀도 주님 태우고 유명해졌고, 값싼 다락방도 예수님께 빌

려 드리고 세계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를 사용하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 혼자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나만 기쁘고 유익하고 만족합니다.

둘째는 남과 함께 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함께 쓰는 사람과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셋째는 도둑맞거나 빼앗기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속상하고 기분 나쁘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넷째는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나도 다른 사람도 그리고 주님도 기분이 좋고 기쁨이 넘칩

니다. 그것은 나귀 주인이나 다락방 주인의 기쁨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결론을 내립시다.

내 소유들 가운데 주님을 위해 내놓을 어린 나귀는 있습니까?

우리집 공간에 주님께 드릴 객실은 있습니까?

"나의 객실이 이느냐""내가 탈 나귀는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리

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내가 나귀입니다.

제 몸뚱이가 주의 어린 나귀입니다.

제 심령이 주의 객실입니다.

오셔서 좌정하옵소서

내 마음이 구유이며 객실입니다.

아멘.

발행일 : 940327

분 류 : 설교

61

제 목 :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단 10:18-21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다니엘은 여러가지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

습니다. 그의 신앙은 물론 남다른 성공과 출세에 있어서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벧론에 끌려간 유다 포로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바

니다만 바벧론왕국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41장을 보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국무총리가 된 이야기

가 나옵니다.그럭 저력 누구나 국무총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이나 다

니엘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창세기 39:23을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했고 창세기 41:38을 보면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니엘서 10:11을 보면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했고, 19절에서도 "은총을 크게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

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복을 받고 성공한 것입니다.

본문의 교훈은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과 명예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제시하여 줍니다.

1.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포로생활에서 지친 청년 다니엘에게 어느날 기회가 다가섰습니다. 그것은

유다 포로 청년 가운데 몇 사람을 선발해 특별교육을 실시한 후 바벧론왕

비서실에서 일하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바벧론은 세계를 제패한 최대 강국이긴 했습니다만 사회기강은 어

지럽고 도덕은 퇴폐일로를 치닫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휩쓸린 젊은이들은

가치관을 상실하고 정신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쓸마한 사

람이 없었습니다.그래서 바벧론 왕은 비록 포로들이긴 하지만 쓸만한 젊은

이들을 골라서 쓰겠다는 용인술을 발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1:8

을 보면 왕이 허락한 진미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유

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먹으면 식도와 위장을 거쳐 배설돼버리는 음식을 놓고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면 거절한 다니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때 그는 자기와 싸우고

있었습닐. 타협하느냐, 거절하느냐, 개방하느냐, 절제하느냐, 바로 사느냐,

멋대로 사느냐....

절제란 자기 욕망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을 조절하고 삶의 균형

을 지키는 것이 절제입니다. 하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이라도 옳지 않은 것

은 금하는 것이 절제이며 극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 그런 상

황에서 왕이 뜻을 거역하고 자기 뜻을 관찰한다는 것은 모험이었고 위험스

런 일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다니엘이 타협하고 수용했더라면 하나님의 은

총은 그를 떠났을 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고집과 습관을 제어하고 내가 나

를 이겼을 때 하나님의 은총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2) 중단없는 기도생활입니다.

6:10을 보면 그는 하루 세번씩 기도했고 9:3을 보면 금식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릎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행위입

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사 연구에서 세계를 지배했던 21개의 문명 가운데

19개 문명이 자멸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과 물질주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문명과 물질숭배 문명은 자멸한다는 것입니

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대화 통로를 개설하고 기

도했습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능력받아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영국 회중교회 목사였던 조세프 파커(jOSEPH PAKER)박사는 "그 사람의 얼

굴을 보면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늘 기

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정원에 핀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다"고 했습니다.

라디어 전파는 1초에 18만 6천마일을 간다고 합니다. 이전파의 속도는 음

속보다 1백배나 빠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소도는 기

도의 전파입니다. 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이 됩니다. 그보다 더 빠른 전파

도 음속도 없습니다.

다니엘은 그 기도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

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명이

길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받은 은총이나 복은 그 수명이 길고 큽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두 사람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내용은 [워싱

톤이 이긴다, 아니다 진다]였습니다.

위싱턴이 진다는 사람의 주장은 "워싱턴군이 열세이기 때문에 진다"는 것

이고 이긴다는 사라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난 겨울 찬바

람이 불던 어느날 숲속을 지나는데 숲 속에서 사람소리가들려 그 근처로 가

보았소 그랬더니 위싱턴 장군이 얼굴을 눈덮힌 땅에 댄 채 기도를 하고 있

었소. 나는 그때 위싱턴이 이긴다는 확신을 갖게 된거요"라고.

승리와 영광과 성공을 원한다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총을

기도로 구합시다.

2. 큰 은총을 받은 후에 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1) 강건하게 됩니다.

18절을 보면 '나로 강건케 하여"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강건하라 강건하

라"고 했고 19절을 보면 "내가 곧 힘이 나서"라고 했습니다.

노벧 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개렐 박사(ALEXIS GARREL)는 "기도할때 심신

을 위한 가장 강력한 지적, 도덕적 스테미나를 생산하는 홀몬이 분비된다"

고 했습니다.

저는 어려서 연날리기를 해 보았습니다. 실타래에 연을 달아 하늘 높이 뛰

웁니다. 바람을 탄 연은 높이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실이 끊어지면 연은 제

멋대로 둥실둥실 하늘로 날아갑니다. 얼마나 자유롭고 멋져 보입니까? 그러

나 그 연은 버림받은 연입니다. 강물에 빠지든지 어느 마을 나무가지에 걸

려 갈기갈기 찢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의 건강이나 강건한 신앙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5을 보면 "나를 떠

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소화제, 피로회복제,신경안정제, 비타민, 알로에, 로얄제리 등 몸에 좋다

는 약은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복용하는 중년 신사가 있었습니다. 어

느날 더이상 지탱할 수 없는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진달겨

과는 약 과잉복용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때문에 병이 생겼다]는 것은 역설이며 아이러니 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약은 안 먹을수록 약이되고 먹을수록 약이 안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크게 받을수록 내 영혼과 정신과 몸이 건강하게 됩

니다.

요한1서 3절을 보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내 영혼과 몸을 강건케 하십니다. 그 은

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은총받고 힘이 난 것처럼 우리도 은총을 받아야 힘이 납니다. 힘

이 나야 일하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주여 은총을 주옵

소서.

2)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19절을 보면 "두려워 하지 말라 평안하라"고 했습니다.

평안하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만나 "은혜를 받은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

께 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30을 보면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

니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평안이 임

합니다. 이유는 은혜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구체적인 증거이기 때문

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왜 두렵습

니까?

본문 19절을 보면 "내 주께서 나로 힘이 나게 하셨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걱정이나 두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을 향한 관심이 다른곳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바라보고 물 위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물결을 바라

보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셋째, 야단맞을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잘못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 잘못이 있으면 두렵게 됩니다.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 죄있는 사람은 무서워 떱니다. 고속도로를 달

리느라면 요소마다 교통경찰이 서 있습니다. 교통순찰 차나 경찰만 보면 가

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만 그러나 교통법을 바로 지키고

지정 속도만 지키면 심장떨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경찰 차가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따

라 붙었습니다. 빨리가면 빨리 따라가고 천천히 가면 천천히 따라 갔습니

다. 40분 정도 뒤따라 갔더니 창밖으로 손을 내민 경찰이 수신호로 앞서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그때 저도 손을 흔들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습니

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일이 없다면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가 가지고 있는 교향악단 가운데 싼타 세칠리아 오케스트라가 있습

니다. 훌륭한 악기들과 연주가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데도 빛을 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휘자 때문입니다. 그동안 세칠리아 오케스트라

는 줄곧 객원 지휘자들이 지휘를 했습니다. 객원 지휘자는 잠깐 있다가 떠

날 사람이기 때문에 구태여 야단치고 잘못을 잡아내서 귀찮게 할 필요가 없

습니다. 적당히 구슬리고 칭찬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나 상임지휘자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미세한 소리나 터치 하나하나를 꼬집고 야단쳐야 합니다.

그래야 격조높은 정상의 작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객원 지휘자는 손

님입니다. 손님은 야단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를 야단치고 고쳐

주고 바로잡아 줍니다. 그렇다고 부모 버리고 손님따라 나선다면 그 자식은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야단맞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야단을 맞더라도

낙심하거나 빗나가면 안됩니다.

히브리서 12:5을 보면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고 했고, 12:8을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받고 두려움을 버립시다. 그리고 평안하게 살아갑시다.

3)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본문 20-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벧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그 페르시아가 다시 헬

라에게 망하고 그리고 다시 그 헬라가 망하게 될 역사의 파노라마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함부로 계시를 주시거나 뜻을 밝히지 않습니다. 은총

을 크게 받은 사람에게만 당신의 뜻을 밝혀 주십니다.

은혜를 크게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주를 기쁘히게 해 드릴 수 있습

니다.

은혜를 받아야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평안한 삶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서로 사랑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은총을 크게 받고 살아 나갑시다.

발행일 : 940320

분 류 : 설교

62

제 목 : 차고 넘치는 교회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슥 1:16-17

바벧론 포로에서 70년만에 귀환한 이스라엘 민족의 최대 과업은 무너진 성

과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앞장서서 추진하거나 이끈 선지자와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에스라,느헤미야,학개,스가랴 등이었습니다.

스가랴는 학개 선지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예언활동을 폈습니다.

스가랴서의 내용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1-8장은 스가갸가 본 환상에 대하여,9장-14장은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 16-17절은 70년만에 이스라엘 민족이 바벧론에서 예룻라렘으로 돌아

오게 된 이유와 예루살렘 성읍들이 받게 될 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

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은즉"이라고 했습

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바벧론의 침략으로 함락되면서 유다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70년동안 바벧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겠습니다. 유

다 포로들의 소망은 하루라도 빨리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

다.그러나 자기들의 힘으로 해방되거나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바벧론은 세계 최대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흥국가로

부상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주전 538년 바벧론을 멸망시키면서 유대

인들에게 해방을 주었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

했습니다.

이 사건을 스가랴 1:16은 "내가 긍휼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남이 해 주었을 때와 내가 해낼 수 없는 일을 도와

주었을 때의 고마움이나 감동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해방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이 그들을 긍휼히 보셨던 것입니다.

유다 민족이 바벧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째는 싸워서 이기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둘째는 바벧론 왕이 특혜를 베풀어 주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불가능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일으켜 바벧론을 멸망시키시고 유다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는 비단 유다민족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도 받았고, 여러분

도 받았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던 일들, 내 노력으로는 불가능했

던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셨습니다.

죄에서 건져 주셨고, 위기에서 보호해 주셨고, 시험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성취했을 때 그것을 성공이나 축복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주택복권 10장을 매번 샀습니다. 그리고 당첨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10의 5조는 하나님께 드리고 5조는 자기가

쓰겠다며 기도를 했지만 500장의 복권을 샀어도 당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도 소용없고 쓸데없다"며 기도 무용론을 펴기 시작했습니다.이

기도가 옳은 기도입니까?

이태리의 경우 정초에 파는 복권을 30억 리라 짜리도 있습니다. 우리 돈으

로는 15억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30억 리라의 복권에 당첨된 40명을 추적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단 한명도 잘 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명에 죽었거나 감옥

에 들어 갔거나 파산을 했습니다.

많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40명의 이태리 복권 당첨자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들은 오히려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불행해 졌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2. 그들이 돌아온 것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긍휼이 여김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

운데 건축 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는

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먹줄을 치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목적이 보다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집짓고 돈벌고 자

식낳고 70년 동안 억눌려 살았던 욕망을 터트리며 향락을 일삼기 위해 돌아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복한 망각입니다.

지난 날의 불행했던 기억과 불쾌했던 감정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행복한 망각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망각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것은 잊어선 안될 것들

을 잊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 날 받았던 은혜라든지, 하나님

과의 약속이라든지, 가난하고 불행했을 때의 겸손한 자세라든지... 이런 것

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불행한 망각입니다.

그런 것들은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내가 오늘 왜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다시 말하면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살아 있으며 존재하는가를 생각해 보

아야 합니다.

돈벌고 잘 살고 일하고 놀고 먹고 마시는 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면 예

수를 모르는 사람과 다를게 뭐가 있겠습니까?

70년 동안 유다 민족이 그토록 애타게 열망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전 건축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이유나 생존

이유도 보다 더 높고 신령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빈다.

그게 무엇입니까? 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을 위해 나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과 능력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한국 여행객이 로마 시내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덩치 큰 사내

들이 앞뒤로 막더니 마치 수사관인양 패스포트를 보자고 했습니다. 순간 깡

패라는 직감이 들었지만 상황이 험했기 때문에 지갑을 꺼내주었습니다. 지

갑 속엔 5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500불을 꺼내더니 마치 위조지폐

라고 가려내려는 듯 이리저리 살펴보면 요즘 위조화폐가 많다는등 너스레를

떠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행객 왼손목의 금빛 나는 로렉스 시계를 보더니 슬며시 500불

을 지갑에 넣어주며 위조지폐는 아닌것 같다면 손목의 시계를 보자고 하더

라는 것입니다.

순순히 풀어주었더니 이리저리 뜯어 보고 흔들어 보고 만져 본 후 이런 고

급 시계를 손목에 차고 다니면 위험하니 주머니에 넣어주겠다며 여행객 주

머니에 시계를 넣어 준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시계를 꺼내보니 로렉스 시계는 가져가고 그 사람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넣고 갔더라는 것입니다.

총총히 사라져가는 그들 뒤에 대고 한국 여행객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중

얼거린 말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구". 그 로렉스 시계는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

한 3만원 짜리 가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듣고 처음엔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참동

안 생각했습니다.

남의 것을 뻔뻔하게 탐닉하는 로마 사람, 위기를 모면하고 익살을 떠는 한

국 남자, 3만원 짜리 로렉스시계를 만들어 진짜처럼 국제 무대에 내놓는 한

국의 장인기술, 속고 속는 우리시대... 실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왜 삽니까? 왜 여행을 합니까? 왜 일합니까? 왜 공부를 합니까? 왜 자식을

낳습니까? 왜 사업을 합니까?

그것들이 하나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상관있는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뜻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

다. 그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

니다.

3. 넘치도록 다시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고 다시 차고 넘치는 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억하고 분명히 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차고 넘치는

회복과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인 가운데 정 명훈씨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현재 빠리 바스띠유 오페라의 상임 지휘자로 구라파 음악계의 거장으

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음악인이 순

수하게 음악을 사랑하면 언젠가는 그가 사랑하는 음악이 돈과 명예와 인기

와 행복 등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인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고 그 음악이 가져다 줄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 인기, 따위 등을 사랑

하게 되면 음악은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음악인은 음악 자체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성공과 명예와

인기와 돈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이 주시는 것들 예를 들면 돈, 명예,인기,행복 따위등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나를 떠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성공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산다면 하나님도 그 부산물도 나를 언젠가는 떠날 것입

니다.

본문을 주목합시다.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여기서 말하는 성읍은 예루

살렘과 유다 나라를 뜻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의미합니

다.

어떻게 해야 푸부하게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맨 끝 순서에 놓고 틈나면 생각하고 여력생기면 감당

한다면 하나님도 나의 문제를 맨 끝 순서에 두실 것입니다.

이번 주간부터 새벽부흥회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부흥사경회가 시작됩니

다. 이번 사경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시간시간 참석합시다.

은혜를 갈망합시다.

가족이 함께 참석합시다.

시간을 지키고 늦지 맙시다.

기도로 준비합시다.

은혜는 준비한 만큼 받는 법입니다.

축복은 자기 그릇대로 받는 법입니다.

주님께 나오는 일과 은혜받는 일을 우선순위 1번에 둡시다. 은혜 못받고

은혜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사업도, 장사도, 회사도 가정도 은혜 받아야 신장하고 평안하고 융성합니

다. 은혜 받기 위해 마련한 잔치에 빠지게 맙시다.

그리고 차고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읍시다.

발행일 : 940313

분 류 : 설교

63

제 목 : 나중까지 견디는 사람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마 10:16-23

예나 지금이나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

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다시 그들을 파송하신 기사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나가 전도해야 될 세상

과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

야를 쏘다니며 먹이를 사냥하고 상대를 만나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

맹수인 이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광야의 대표적인 맹수는 뱀,독수리,전갈,이리 등입니다.

그 가운데 이리는 사납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맹수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맹수라도 사람보다 사납고 공격적인 것은 없습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개는 훈련시키는대로 한다고 합

니다. 훈련받은 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단 미친

개는 예외라는 것입니다.

외국 서커스단에서 쇼를 하는 호랑이나 코끼리 그리고 사자 같은 맹

수들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누구에게나 대들고 배신을 일삼

고 있습니다. 사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마음 아픈 일이지만

20년을 교육받고 훈련받은 사람이 고작 하는 일이 사기,횡령,협잡,부

정, 폭력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신 것

입니다.

본문을 보면 세가지를 당부하고 있습니다.

1. 지혜롭게 순결하라.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당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거칠고 간교하고 공격적인 사람을 이리로 비기는가하면 뱀과

비둘기를 들어 교훈하셨습니다.

뱀은 하등동물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고등동물인 인간을 넘어 뜨렸습

니다. 뱀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다니던 길로만 다닙니다.

둘째 한번 공격하기로 작정한 대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셋째, 서두르지 않습니다. 신중합니다.

넷째, 통채로 삼켜 버립니다.

다섯째, 냉혈동물입니다.

여섯째,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뱀은 마귀의 사자로 이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하등동물이지만 그 지혜는 고등동물이 따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비둘기는 뱀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동물입니다.

비둘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목적지향적입니다.

한꺼번에 여러가지 사물을 복합시켜 보지 않고 한 가지만을 주시합니

다.

둘째, 평화적입니다.

다른 상대를 공격하거나 패거리를 지어 쪼아대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비둘기를 순결과 평화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령의 상징으로 묫

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순결의 조화를 생각해야 합니

다. 뱀같은 지혜만 강조하다 도면 순수성이 결여되기 쉽고, 비둘기같

은 순결만 강조되다 보면 지혜가 모자라게 됩니다.

지혜와 순결을 마치 자동차와 두 바퀴처럼 한 축을 중심으로 함께 움

직이고 굴러가야 합니다. 지혜만 있으면 매끄럽고 순결만 있으면 속아

넘아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고 순결한 양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이리

때 같은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을 삼가라.

17절을 보면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

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교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필요한 존재이면서 고통스

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독수리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떤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

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누이였던 미리암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이 그를 괴

롭히고 반역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모세를 괴롭혔습니다.바울

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디모데후서 4:9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

습니다. 그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였습니다. 금속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

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 "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의 목회 일

생동안 크나큰 가시였습니다.

40여년을 목회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

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밝힌 조심해야 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잡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

이상에서 열거한 열가지 항목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런지 의문입

니다.

사람 때문에 성공하고 행복해 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람 때문에

고통당하고 실패하고 손해보고 길이 막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목사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

니다.

첫째는 노노 하는 사람입니다. (NO NO PEOPLE)

항상 안된다. 못한다고 머리 흔들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입니

다.

둘째는 요요하는 사람 (YO YO PEOPLE) 입니다.

줏대도 없고 소신도 없이 흔들리고 변덕스러운 사람입니다.

셋째는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입니다 (BLOW BLOW PEOPLE):바람이

날리는 사람들.

생각도 크고 소리도 커서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일을 해야할 때는 움

추려들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고고 하는 사람입니다 (GO GO PLOPLE)

생각도 말도 크고 동시에 소신껏 밀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노노하는 사람, 블로우 블로우 하는 사람, 요요하는 사람들은 삼가해

야 할 사람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가 좋다고 아무나 사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귀하다고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노처녀가 결혼이 급하다고 아무나 배우자로 정할 수는 업지 않습니까?

[만남]은 그 사람의 평생을 결정합니다. 그러기에 선택과 결정은 신

중하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재치 (TACT)와 만남(CONTACT)이라는 두 친구가 똑같이 사랑(LOVE)이

라는 처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접근 방법은 달랐습니다.

재치(MR.TACT)군은 현관에서 소녀의 부모를 만나 열심히 자기를 소개

하고 집안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만남(MR CONTACT)은 뒷문에서

소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구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 결혼에 성공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성공비결은 세상 사람들이 사람 만나고 조건 만나고 타

협하고 로비하고 있을 때 은밀한 곳에서 먼저 주님을 만나는 것이빈

다. 천번 만번 만나도 유익될 것이 없는 사람, 예수 믿고 경건생활하

는데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그 만남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사람은 삼가라]고 했습니다.

3.염려하지 말라.

19절을 보면 "너희를 넘겨줄 때에 또는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31을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9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요

한복음 14:1이하를 보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전서 5:7을 보면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말하는 것, 영원한 세계의 문제등 염

려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단어는 오케이(OK)라

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

까?

미국 하버드대학 안에 있는 비지니스 스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

국 사람이 콕(COKE)이라고 부르는 코카콜라는 것입니다. 전세계 195개

국에 코카콜라가 진출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UN회원국 184개국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코카콜라를 가리켜 [미국 문화의 첨병] [자본주의의

우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1초에 4만병,1시간이면 1억4천4백만병, 하루면 30억병

가량이 소비됩니다.

코카콜라가 세계를 점령하게된 비결은 제조비법,독특한 광고전략,기

업경영 철학, 그리고 전쟁과 권력을 철저히 이용하는 네가지라고 합니

다.

그러나 물만큼 그 소비량이 많은 것은 아니빈다. 코카콜라는 떨어져

도 살지만 물 떨어지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세계도처

에 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산 속에도, 바다 속에도 땅 속에서도 물

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당부는 헛소리

가 아닌 것입니다.

염려는 의심과 불신이 만들어 냅니다. 의심과 불신을 내쫓으면 염려

걱정도 함께 쫓겨난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을 찾겠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람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다가 신앙을 포기한다든지

주님을 떠나버린다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합

니다.

물론 참고 견디는 그 고통은 클 것입니다. 아픔도 크고 외로움도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까지 견디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인내가 요청됩니다.

주님이 고통과 십자가의 아픔을 참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아멘.

발행일 : 940227

분 류 : 설교

64

제 목 :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창 13:10-18

창세기 13장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해 줍니다. 아브라함

과 조카인 롯은 점점 소유가 많아지면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종들과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이 잦아지게 되자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주거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13:9을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

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

게 되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처신이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합

니다.

1. 롯의 선택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선뜩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 되었는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산적입니다. 전

체를 다 보진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

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은 색깔, 생김, 크기는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은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6: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

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눈으로 보아서 이쁜 여자들

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

인이 되었고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6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여

기서도 [눈]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

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클라라 스카(MRS.CLARA SCOTT)여사가 1985년에 만든 찬송의 1절 가사

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게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영원한 세계를

봅시다. 그리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2)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으로 보고 선택한 곳의 조건이 열거되어 있습니

다. 그 조건이란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동

산처럼 아름답고 애굽땅 처럼 비옥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

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곳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재벌의 총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생수를 공수해다가 마셨고,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재배로 먹었고, 생선은 남태평양에서 잡은 것을 먹고, 그리고

보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100년도 못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 건강, 행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

다. 물론 썩은 물보다는 생수를 마시고, 중금속 오염된 쌀을 먹는 것

보다는 무공해 쌀을 먹는 것이 건강과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나 건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기로 친다면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스

웨덴, 덴마크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한가, 만족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그리고 후진국보다 자살자 수가 몇 십배 더

많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

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

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사람들과, 환경문제만 해

결되면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사람들이게 크나큰 경종을 울

려줍니다.

가난한 시골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했습

니다.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

고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3년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한 자기네 집안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만은 명문집안으로 가

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떵떵거리고 세도부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돈많은 회장의 손녀 딸이며, 그 재벌 계열회

사의 사장의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류대학은 아니지만 대학을 나왔고, 나이는 남자보다 다섯살

위인 노처녀였습니다. 얼굴은 살짝 곰보였고 고등학교 때 입은 교통사

고로 턱 밑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왼쪽 팔이 약간 굽어

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은 내개의 열쇠와 은행 통장을 준다는 것이었습

니다.

50평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별장 열쇠, 금고열쇠 그리고 예금통

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젊은이에게 더없는 조건과 환경이었습니다. 신부감은 맘에 들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건을 선택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습니

다.

그가 그녀와 지금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인가 불행해졌을 것인

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

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이었지만 거기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내도

죽었고 재산도 불타버렸습니다.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2.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

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

면 바쳤습니다.

창세기 12:1-4을 보면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14:20을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

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

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순종했습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3천여 명이 모

이는 교회였습니다. 부임 첫 주일예배가 끝나고 나자 할머니 한분이

찾아와 인사를 하더니 "목사님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수천명 교인들

의 마음을 다 맞추시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

니다.

다음 주일 그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수천명이 넘는

여러분의 비위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이 아닙니

다.

만일 저더러 3천여 명의 비위를 낱낱이 맞추라한다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 말을 순종하고 따른다면

저는 생명 다해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나를 맞춰가며 삽시다.

롯은 세상조건에 자신을 맞추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

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조건들을 선택한 것이 아

니라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

고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

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젊은이의 결혼 뒷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애정

없는 결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처가집 가운이

기울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6개월만에 아

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선택과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왜 많고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선택했습니까?

왜 수만개의 교회 가운데 충신교회를 선택했습니까?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니면 직업을 주고 직장

을 주고 회사를 일으켜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것

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선택한 것입니다.

최고 최상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그 신앙이라야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볼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

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혈육인 롯과 환경과 조건이 아브람을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조건

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

게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복을 주셨습니다.

15절-17절을 보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네 자손을 땅

의 티끌같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에게는 땅을 주신다

는 약속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롯의 후손에게는 그 번영을 보장

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췄던 아브라함은 땅도 받았고,

건강도 받았고, 아들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도 받아서 예

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조건 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

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조건만 따르다가 예수 버리지 맙시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봅시다.

발행일 : 940220

분 류 : 설교

65

제 목 : 전진합시다

자료원 : 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히 10:35-39

불교는 산속의 종교, 기독교는 거리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

의 경우 입산,수도,득도,성불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며, 기독교의 경우

에는 현실,역사,삶 구원에 중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명상과 사색을 중요시하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

독교는 변화와 중생과 전진을 중요시하는 동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습

니다.

본문은 당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지녀야 할 신앙생

활의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한 말씀입니다. 특히 뒤로

물러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이나 실패나 박해

같은 여건들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위협하더라도 그런 것들 때문

에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본문의 교

훈이 어떤 것인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담대해야 상을 받습니다.

35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

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용기를 잃어버리거나

믿음을 포기해 버리면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

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35절과 11:6을 연결시키면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

님께 나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나 실패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담대한 믿음으로 이

기면 상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두가지 특징을 갖

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예와 상은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상은 하나님

이 주시는 상입니다. 최고의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지성인들이 받기를 소마하는 상이 있습니다. 그 상이 바로

노벧상입니다.

노벧(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화학자이며 발명가였습니

다.

1863년 폭약을 발명하고 공장을 설립하여 폭약을 제조하기 시작했습

니다.그런데 그 과정에서 공장이 폭파되어 동생과 종업원 4명이 희생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폭약 때문에 갑부가 되었

고, 그의 유언을 따라 1901년 노벧상 제도를 만들어 시상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1895년 11월 27일 유언장을 통해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며 자신의 유산 3100만 크

로나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 기부했습니다.

상은 물리,화학,생리,과학,문학 ,의학 및 경제, 평화 부분에 걸쳐 시

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한 사람도 수상자가 없습

니다. 시상식은 매년 12월 10일 스웨덴 국왕이 임석한 가운데 진행되

며 수상자에게는 금메달과 22만 달러 정도의 상금을 줍니다.

그러나 용기와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상은 하나

님이 주십니다. 노벧상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천군천사가 부

르는 승리의 노래 속에서 하나님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저는 몇년 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노벧상 시상식장에 들어가 보

았습니다. 텅빈 방에서 상을 받는 흉내를 내면서 장차 받을 상을 생각

해 보았습니다.

둘째 영원한 상입니다.

노벧상이나 올림픽상은 지상에서만 그 가치와 영예가 인정되는 상입

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영원한 상입니다. 그영광과 가치

가 영원히 인정되고 평가받는 상입니다.

영원한 상이란 없어지지 않는 상, 녹슬지 않는 상, 그 가치가 영원히

존속되는 상인 것입니다.

2. 인내해야 약속을 이룹니다.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가장 소중한 품성입니다. 나아가 인간

이 지녀야 할 품성이기도 합니다.

짐승도 단번에 성을 내거나 단번에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인내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바이얼리니스터 니꼴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가 어느 날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도중 바이

얼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청중들은 깜짝 놀랐

습니다.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

다. 그러다가 한 줄이 또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때 세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끊어졌습니다. 그는 잠시 연

주를 멈추더니 한 손으로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들며 "줄 하나와 파가

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련한 솜씨로 연주를 했습니

다.

그의 연주가 끝나자 관중들은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인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세줄이 끊어지고 단 한

줄만 남았더라도 그 한줄 믿음으로 성공을 연주해 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암놈 펭귄이 알을 낳으면 숫놈 펭귄이 날개로 덮고 따뜻하게 하여 새

끼가 나오게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 두달동안 먹지도 않고 영하 40도의 한냉과 싸우며 시속 40km

의 강풍을 견뎌 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인내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합니다.

신앙인의 인내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 줄도 모릅

니다. 조그만 괴로워도 짜증내고, 약간만 고통스러워도 신경질을 내는

가 하면 쉽게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크리미어 전쟁 당시 부상으로 다리를 잘라야 하는 병사가 있었습니

다. 나이팅게일이 그 병사에게 "최대한 용기를 갖고 아픔을 참아야 된

다"고 말하자 그 병사는 막대리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그 병사는 막대기의 끝부분을 입으로 깨물면서 수술이 끝날때까지 단

한마디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막대기를 보니

끝 부분이 거의 짓뭉개져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의미깊은 교훈을 줍니다.

고통이나 좌절로 아픔을 겪을 때 실패나 절망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우리가 붙잡을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

다.

이유는 십자가보다 더 억울한 사건도, 십자가보다 더 쓰라린 아픔도,

십자가보다 더 골깊은 상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붙들때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와 소망과 승리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면 약속을 이루지 못합니다.

인내해야 소망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영원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3. 전진해야 기뻐하십니다.

38절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뒤로 물러간다는 말의 뜻은 "철회하다","뒤로 끌다"라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

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도 주저않고 남도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굼벴이도, 지렁이도, 개미도 앞으로 갑니다. 하루살이도 앞으로 날아

갑니다. 자동차도, 비행기도, 사람도 앞으로 갑니다. 부산 목포는 20

시간, 대전은 10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20시간이 걸려도 목적지인

고향을 향해 앞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을 만나고 명절을 지킬 수 있었

습니다.뒤로 가는 것은 30분도 지겹고 힘이 듭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를 보면 애굽을 떠나 40년만에 가나안 땅에 도

착했습니다. 참으로 지루하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났던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고 대들었고 소리쳤습니다.

출애굽기 14:12을 보면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소리치며 저항했던 사건이 기록

되어있고, 출애굽기 16:3을 보면 신광야에 이른 그들이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는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먹다가 하나님의 손에

편히 죽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원망하는 장명이 기록되어 있스빈다.

그들은 전진에는 관심이 없고 되돌아가는 궁리에 바빴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입니다.

늘 옛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 지난 날의 향수와 미련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엔 "과거에","소시적에","나 어렸을 때"라는

말이 일상어로 사용됩니다.

둘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오늘 여기가 제일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과거가 필요없듯이 미래

도 필요없습니다. 이들은 수단과 한탕주의와 단발적인 삶에 만족하고

현싫을 엔조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는 언론사에서 압구정동을 서성대는 젊은이들을 붙잡고 [꿈이 뭣니

까]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꿈이요?"

"왜 꿈을 꿔요?"

"오늘 저녁 디스코텍에 가는 것예요"

"그런거 몰라요"

"여기 있잖아요 (엄지손가락을 보이며)"라는 것들이었다고 합

니다. 의외로 현실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당장 오늘

나한테 무슨 복이 떨어지느냐, 나한테 득되는게 뭐냐,유익한게 뭐냐를

따집니다. 그들은 바로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셋은 미래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시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이스라

엘을 애굽에서 나아오게 하신 것은 그들로 가나안이라는 미래지향적

복지를 향해 전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걸핏하

면 뒤로 되돌아갈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고,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8은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않는다

"고 했습니다.

부산을 가기로 했으면 24시간이 걸려도 한발짝씩, 그리고 시속 10킬

로의 속도라도 부산을 향해 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면 힘들고 느리고 괴롭더라도 뒤돌아

서거나 중단하면 안됩니다.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죄자에겐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

기가 죄지은 현장을 남몰래 둘러보고픈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

나 신앙인은 전진해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 불미했던 지난날 상처

였던 그 사건, 죄짓고 살았던 과거로 되돌아가면 안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가나안입니다.

되돌아가면 목적지에 못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지 않습

니다.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노래불렀던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못갔고 가나안

땅에도 못들어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됩니다.

주님 바라보고 전진합시다. 곁을 보고 사람보다 사건보고 경치보면 전

진못합니다.

주님이 최종 목표이며 영원한 세계가 최종 목적지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맙시다.

계속 전진합시다.

발행일 : 940213

분 류 : 설교

66

제 목 : 빛이 있으라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 1:1-5

*** 빛이 있으라! ***

충신교회:박종순목사

성경본문:창1:1-5.

인간이 제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든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게서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사역에 대한 기록

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특히 3-5절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

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는 말슴 속에서 찾아야 할 몇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1.첫째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시기 전의 형편을 2졸이 다음가 같이 설명합

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슴의 의미는 이미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셨으나, 아직 그 땅에

는 생물이 살 수 있다든지, 조직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

라고 주경가 스콜필드는 말했습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이빛

이었습니다. 빛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혼돈고, 공허도 흑암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고 해도 볼 수 없습니다. 마음

의 빛이 꺼진 사람들이 겪는 불행은 더욱 심각합니다. 마음의 빛, 마음

의 등불이 꺼지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의미있

고, 가치있으려면 빛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진리의 빛과 양심의 빛과 생명의 빛이 꺼지면 온 세상이 어두워질 것

입니다. 온통 세상이 어두워지면 세상은 무질서가 판을 치고, 혼돈과죄

악이 날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빛 없이는 못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주고,

드러나게 하고 볼 수 있는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2.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슴으로 빛을 창조하셧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빛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창세기 1장에만 9번이나 반복되고 있으

며, 성경전체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것은 한마디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1:1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고 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빛이 있으라"는 한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그 한마디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나 권력은 부패하기도 하고, 무엇을 명령해도 그

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

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였습니다. 거기에는 지체됨도 없었고, 고려됨도

없이 말씀과 동시에 실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잔잔하라, 고요하라." 는 말씀 한마디로 성난 파도를 잔

잔케 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주

님께서 무덤 속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말씀 한마디에 나사로가 수족을 동이고, 천으로 얼굴을 감싼채 무

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

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슴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연을 다스리며,

인간의 모든 행사를 지배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위로와용

기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인격이시며,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

는 것입니다.

3.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빛 때문에 밝음과 어두움, 낮고 밤이 나누어졌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것은 주야가 시작되었다는 것입

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 밤은 사단이 지배하게 되었

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시편 24:16을 보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낮이건 밤이건 하나님이 지으셨

으므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날과 시간과 물질을 인

간들이 제멋대로 죄짓고 악을 행하는 데 쓰고 있는 점입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낮이 오는 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밤만 계속되는 것도, 낮만 계속되는 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인생도 비슷한 이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낮을 기쁘고 성공으로 채워

진 시간이라 하고, 밤을 어둡고 ,힘들고,괴로운 일들로 채워진 시간이라

고 해보십시다. 어떻게 인생이 밝고 기븐 낮시간만 계속 될 수 있겠습니

까? 어둡고, 괴롭고, 침울한 고통과 절망의 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은 한정된 시간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법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을 주목하십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는 말씀의 뜻은 밤이 지나

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는 뜻입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고,12

월이 가면 새해가 오는 것은 자연 법칙입니다.

우리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살기만 한

다면 어떤 고난과 고통의 밤중에 처해 있을지라도 새아침의 광명을 맞게

될 것입니다.

어둡고, 침울하고,고민으로 굳게 닫혀 있는 내 마음 속에 빛을 받아 들

입시다. 답답하고 복잡한 내 집 창문을 열고, 주님의 빛을 받아 들입시

다.

뭔가 뜻대로 되지 않고, 속상하고 그래서 산다는게 재미가 없는 내 인

생 속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합시다.

그리고 91년 한해를 빛을 따라서 살아나갑시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67

제 목 : 실패한 관리자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세기 1:26-31

인구문제를 연구한다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고 했기 때문에 인구폭바가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원의 고갈이나 인구의 폭발 책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망상일뿐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장을 보면 "여호

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여섯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가 유익합니다.

하루살이 곤충도 유익하고 심지어는 사람 몸에 잔털까지도 유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번성하고 충만해도 쓰기에 넉넉한 자원을 만드셨고

살아가기에 아무 불편없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 이후부터 입니다.

3:17하반절을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고 18절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은 인간이 살기위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으리 관리하라고 맡겨 주셨습바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땅을 관리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잘못 만난 농장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자란 곳은 농촌이었습니다.

저는 늘 가까이서 두 사람이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농사를 마치 예술품을 만들듯이 짓곤했습니다. 논에 짓느

니 농사나 밭에 짓는 농사 모두가 얼마나 정성을 다 하는지 잡초가 자

랄 겨를이 없습니다.

못자리를 만들어도 미장할 때 쓰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다듬고 매끈

하게 만든 후에 거기에 종자를 뿌립니다. 그는 매년 모범농군으로 표

창을 받곤했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한사람으니 잡초로 우거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날이면 날마다 술이 취해 얼굴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농사가 될

턱이 없습니다.

그는 농사가 귀찮다면서 몽땅 팔아 도시로 나가 술장사를 시작한다고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

니다.

지구의 점하나만도 못한 작고작은 논이나 밭도 주인을 잘 만나야 기

름지고 소출이 많은 법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지구관리에 실패

했습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파괴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양심을 파고했고 하나

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양심을 파괴했고 하나님의

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에덴동산을 파괴했고 환경마

저 파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네 가정을 파괴하고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행복한 삶도 사단이

파괴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입니다.

1972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국연합 인간환경회의가 열렸었습

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환경 선언문을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6월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

가 열리기까지 사람들은 계속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계

속 지구를 파괴해 나왔습니다.

지구환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일 인류가 10년내에 지

구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끝장이 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바니다.

지금 지구 도처에서는 매1분마다 6개의 축구장 크기만한 열대림이 파

괴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30년 안에 지구상

에 있는 열대림 3분의 2가 소실될 것이라고 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우리가 지구를 살려내는데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10년정도 뿐이며 이것은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

다.

오존층의 파괴로 이상 기온 현상이 일어나면서 지구는 사막화되어 가

고 있는가 하면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 수면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땅넓이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열대림이 소실됨에 따라 1년에 5만종, 하루에 140여종의 무척추동물

이 멸종해 가고 있으며 결국 다른 생물이 그런 식으로 죽는다면 인간

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잦은 한발과 홍수의 교차현상을 일으키고 태

풍까지 잦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지구가 죽어갑니까?

마구 버린 중금속, 마구 뿌려대는 D.D.T , 살충제,농약, 공장폐수,

쓰레기, 프레온가스, 자동차 매연, 합성세제 등 결국 우리가 버리는

몹쓸 것들 때문에 지구가 병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0:19을 보면 어느 성을 점령하더라도 그 성에 있는 나무는

도끼로 작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

에 그것들을 공격하거나 작벌해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땅과 나무가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

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인간들이 지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성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

문입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 당시 애굽은 중동지역의 곡창이었습

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나라가 비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집트는 한발고 흉년이 반복되는 사막입니다. 식량

도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백향목으로 울창했던 레바논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풀 한포기도 나무 한그루도 물주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 황무지

기 되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썩으면 자연도 썩고

그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그곳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

다.

환경학자들은 [환경난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환경난민

이란 그곳에 살 수 없는 환경위기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그가 쓴 [지구를 구하자]란 책 속에서 우리는 지구

를 단기간 빌려쓰는데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지구는 저저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

리고 인간을 만드신 후 거기 살면서 지구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얼마동

안 맡겨주신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몇억만년이라고 추측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이 지

구 위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공부하고 장가들고 자식 낳고 그리고 일하

면서 살다가 얼마 후엔 땅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잠시 빌려쓰는 인간이라면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내 잘못 때문에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땅이 중금속으로 죽

어가면 안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몇가지 실천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새사람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편 104:30을 보면 "주의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면 땅도 새로와 진다는 것입니

다.

지구회의 환경회의 구호나 표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해서 새사람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가치관이 되살아나면 더불어 환경도 땅

도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이 제디로 살아있다면 어떻게 공장폐수를 강으로 내보낼 수가

있으며 쓰레기를 몰래 버릴 수가 있으며 공해물질을 버릴 수가 있겠습

니까?

양심이 되살고 윤리가 되살고 도덕성이 되살려면 성령님의 능력이 역

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환경보존에 앞장서야 합니다.

찬송소리만 크고 기도소리만 크다고 훌륭한 믿음은 아닙니다. 훌륭한

믿음은 생활 솟에서 드러납니다.

철야기도 다녀와서 남몰래 연탄재나 오물을 길거리에 버린다면 그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령받고 은혜 받았다면서 산업폐수를 강으로 흘려보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조금 불펴하고 귀찮더라도 환경을 보존하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면

따르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 물자를 절약해야 합니다.

* 버리는 것은 함부로 아무렇게나 버려선 안됩니다.

* 태울 수 있는 것과 태울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은 써야 합니다.

* 화장실의 정화조같은 경우 자주 청소를 해서 그것들이 생활용수로

스며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 제아무리 펑펑 쏟아지는 수도물이라고 하더라도 아껴 써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부터 기독교인은 실천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3이하를 보면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을 먹을 수 있도록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모세가 물에 던

졌을 때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땅을 고치고 물을 치료하고 인간성을 고치는 방법은 매튜헨리가 말한

대로 십자가를 통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19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 지방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

해 밭에 씨를 뿌리지만 토질이 나빠서 곡식이 자라지도 못하고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새그릇

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그 때문

에 물이 치료되었고 그후로 농사가 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소금을 물에 뿌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13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였습니

다. 기독교인이 곧 소금입니다.

우리는 맛이 잃은 소금입니까, 맛있는 소금입니까? 우리는 쓴물을 단

물로, 죽어가는 땅을 생명이 기식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 책임이 있습

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천만 기독교인들이 마음만 하나로 묶

고 생각만 합친다면 우리가 사는 환경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잠시동안 빌려 쓴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쓰거나 포

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

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참 아름다운 세계로 만듭시다.

발행일 : 921007

분 류 : 설교

68

제 목 : 하나님의 대사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에스겔 33:7-11

본문의 요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3:1-6을 보면 파숫군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이란 높은 성루에 올라가 적군의 침략이나 기습여부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만일 적의 기습을 발견하게 되면 급히 나팔을 부어 긴급

사태를 전체 성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때,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된다면 파숫

군의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적의 기습을 알아차리고도 나

팔을 불지 않음으로 그 성이 점령당한다면 그 파숫군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을 보면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파숫군이며 하나님이 주신 말

씀과 경고를 마치 파숫군이 나팔을 불 듯 외치라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 주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를 대표하는 외교관을 대사

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보내신 대사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은 나의 대사가 되라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과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복음의 대사가 되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시다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나는 그 복음 때문에 구원받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존재

하는 것입니다. 세계도처에 선교사들이 흩어져 전하는 복음도 바로 예

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미국의 원주민이 인디언인 것처럼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마우이 족입

니다. 그들은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합니다. 그리고 얼굴이 검고 투박

합니다.

그들의 반가운 인사법은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교하는 한국선교사가 어느날 선교하러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반갑다

고 저마다 코를 부벼대는데 어느 한사람의 코가 몹시 헐어 있더랍니

다.

보나마나 그 사람의 코를 맞대로 부벼 댔다가는 틀림없이 세균이 옮

아 코가 헐게될 것 같더랍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코만 외면해 버린다

면 얼마나 상처가 클까 싶어 "에라 모르겠다", "믿습니다" 두 마음으

로 코를 부벼 댔다는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자기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마우이

족들이 저마다 선교사 부인한테 다가와 코를 맞대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몸도 다 내주셨는데 선교를 위해서라면 별로 잘 나지도 못

한 코, 못 부벼 댈 것도 없다면서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대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하면

안되는 것이 복음의 대사입니다. 만일 위가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는

다면 이민족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피값을 책임져야 합

니다.

본문 33:6을 보면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

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함으로 그 중 한사람이라도 제함을 당하면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나팔을 불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으

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지방 국도를 차를 타고 달리는데 마주오던 승용차가 대낮인

데도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탔던 사람

에게 저 차가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신호

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운전자끼리는 서로 그런 신호를 해 준다는 것

입니다.

그런 신호는 바람직한 신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고 외쳐야 할 신호는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정도의 소식이 아닙니다.

그 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전방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며, 지옥이 입벌리고 있다는

뉴우스입니다. 믿으면 살고 안믿으면 죽는다는, 그래서 지금 당장 믿

으라는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대사가 됩시다.

2. 기도의 대사입니다.

바울사도들은 바알신에게, 몰렉신도들은 몰렉신에게, 불교도들은 부

처에게, 회교도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

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틀이 지켜져야

합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응답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꾸밈없이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용도,고백도, 음성까지도 꾸미면 안됩니다.

넷째,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개인기도는 길어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대표기도는 그것이 새

벽이건 주일 낮이건 주일 밤이건 수요일이건 부흥회때건, 사람이 많든

적든 짧게 해야 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 주일 낮 예배후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

다. 땀을 흘리며 열심으로 연습하는 성가대원을 격려하기 위해 성가대

대장 장로님이 아스케익을 사들고 와서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지휘자가 장로님에게 잠깐 축복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

데 그 기도가 창세기로 시작하더니 그칠 줄 모르고 길어졌습니다. 문

제는 아이스케익이 녹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에서 쭉죽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아이스케익은 온데간데없고 꼬챙이만 남았더라

는 조크가 있습니다. 대표로 하는 기도는 길면 안됩니다.

여섯째, 쉽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장이나 문법의 구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쉽

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 할 사명을 받은 파숫군들입니다.

기도는 쉬면 안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숨소리이기 때문에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줄어든다는 것

은 영혼의 숨이 가물거린다는 것이 됩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영혼의 기관이 정지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영이 병

들게 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기도를 멀리하거나,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 영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네 가정과 자녀

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나팔소리가 시들해지면 안됩니다.

지난 6월 7일-11일까지 인천제일교회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1990년도에 사경회를 인도했던 교회인데 두번째 초청이 있어서 인도

를 하게 됐습니다.

집회가 끝나는 목요일 저녁설교 후에 헌금순서가 있었습니다. 목요일

저녁설교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환경과 건겅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

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능력이 오늘밤 역사하신다는 내용이었

습니다.

헌금이 끝난 후 저더러 축복기도를 해달라면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쪽지 하나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피 토하는 병으로 위기를 겪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쪽지내용은 간단하지만 환자자신은 집회참석을 못하고 그 부인만 참

석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헌금 감사 기도시간에 기도를 했습바니다.

피가 멎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라고.....

그 다음 주간 인천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 내

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기적이 일

어났다는 것입니다.

계속 피를 토해 혈소판이 5만 이하로 내려가면 죽게되는데 5만까지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그 기도시간 이후부터 혈소

판이 계속 올라가 27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담당의사들이 이것은 기적이라면서 퇴원해서 잘 먹고 요양하면 된다

는 결론을 내려 퇴원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날 밤 기도의 대사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

다.

기도하면 될 것을 기도 안해서 안된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도무지 안될 일이 기도해서 됐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굴러 떨어져가는 신앙의 혈소판이 올라가게

합시다.

3. 신앙의 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려고 하신

목적을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하라는 것입니

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대사들입니다. 나의 믿음은 나만의 믿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은 다음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첫째, 부부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단정하고

정결한 행위를 보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런가 하면 남편의 신앙과 인격때문에 아내가 예수를 믿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남편의 불신과 부덕때문에 아내까지 지옥가는 사람이 있

는가하면, 여자 잘못 만나서 신앙과 인생도 망가진 사람이 있는 것입

니다.

둘째,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언행과 신앙을 보고 배웁니다. 돌연변이가 있

기 합니다만.대부분 부모의 신앙과 삶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

다. 훌륭한 신앙의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양육됩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벱의 영향을 받고 자라 훗날 민족 지도자가 되었

고 사무엘 역시 어머니 한나의 영향을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된 것입

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끼리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웃이란 나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

다. 친구, 이웃집, 동창, 동네사람 등이 거기 포함됩니다.

내가 어떤 믿음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손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

고 유익과 덕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믿음의 대사입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선거 열기로 정치가 뜨거워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억만장자라고 소문난 무소속 페로의 화제가 전 매스컴에 오

르내리고 있습니다.

1991년 4월 대통령 후보로서가 아니라 기업인으로 페로가 일본을 방

문했습니다.

일본과의 합작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축하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관례대로 술을 따라 건배를 하는 순서가 됐습니다. 그때 페로씨가 물

었습니다.

"잔 속에 들어있는것이 술인가?"라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물잔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형식으로 건배만 하자고

하자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 마시는 척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

이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부터 페로씨가 좋아졌습니다. 그야말

로 신선한 바람을 쏘인 기분입니다.

교회가면 예수님 은혜를 들먹거리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천주교에 가서는 주님을 찾고 천주교인 행세를 하고, 절에 가선 부처

님 은공을 찾고, 회교사원에 가선 알라신을 숭배한다는 정치가나 지도

자를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페로씨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믿음의 대사들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

니다.

신앙이란 역사나 정황을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올바로 지키고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곳마다 예수님이 드러나고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가 됩시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69

제 목 : 칭송하며 선포하며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시편 145:1-10

시편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입니다. 다

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고백을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께 대한 자신의 고백과 결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다윗의 신관을 살펴봅시다.

본문에 드러난 다윗이 하나님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145편의 서두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명왕이었고 현군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몇가지 실책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비밀과

흑막에 쌓인 근대정치의 암울한 정황에 비긴다면 다윗의 실수나 잘못

은 문제시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역대 왕들 가운데 다윗만큼 선정을 베풀고 백성

의 신임과 존경을 받은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을 마치 국부처럼 높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1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존경

받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이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대 정치구조 안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대통령과 백성이라는 관계

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왕의 손에 달려 있었고,

소유의 여탈도 왕의 재량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능과 재량권을 송두리채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지혜와 신앙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이 모처럼 획득한 왕권과 통치능력을 포기해 버리

고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른다면, 손익득실 면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결

단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고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왕

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받고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습니까. 그것은 내가 책임진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공적인 책임을 맡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보호아래

살지 않으시렵니까?

2)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하

나님을 광대하시다라고 노래한 것은 다음의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스스로 광대하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나 어떤 힘에 의해서 광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광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존개 자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

의 능력이나 크심도 스스로 있는 것이지 타력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영원히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정권이 길다든지 나라가 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했던 초대강국이었던 로마도 지금은 별 볼일 없

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지는 날이 없다던 영국도 지금은 껍질만 남았습니다. 즉 이 지상에

영원히 광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말씀의 은사라는 것도 이 세상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서 누구를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병고

치는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당에는 병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땅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면 모두가 다 신령한 언

어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크신 팔에 나를 맡기지 않으

시렵니까?

셋째, 끝없이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소련이 제아무리 넓고 커도 끝이 있습니다. 바다가 제아무

리 깊고 넓어도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끝이 없

습니다. 광대하심 뿐만 아니라 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3:19에서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했습니다.

넓고 길고 크고 높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한마디로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광대하시고 사랑도 자비도 용서도 광대

하십니다. 그 광대하심 때문에 오늘 내가 사랑받고 용서받고 축복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

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내 마음은 왜 그리 협소합니

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왜 내 사랑은 국한적이고 편협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인데 나의 용서는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 때 일부만 용서하신다

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하나님이 산소를 주실 때 충분한 양을 주시지

않고 일부분만 주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배웁시다.

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다윗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은

혜를 받는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으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비하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다윗은 제일 큰 자입니다. 제일 높고, 제일 강하고 제일

큰 왕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자신

을 낮춘 것입니다. 그는 은혜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야고보 4:6 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

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자들

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내용들을 8절이하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며 선대하시며 긍휼

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 을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했습

니다. 나를 높이지 말고 은혜를 구합시다.

나의 능력이나 소유를 과대포장하지 말고 은혜를 받읍시다. 그것이 평

안하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결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은 왕으로 광대하신 분으로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분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이 어데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나의 주로 높이겠다고 합니다.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높인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높이라고 권하지 않고 내가 높이

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면 주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내가 주를 낮추면 주

는 나를 지옥에 멸하십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조이스] 는 자신이 최근에 저술한 [정

신과 의사처럼 생각하라 (Think Like a Shrink)]라는 책에서 정신역학

요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자기 방어를 포기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방어를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세가기 유형

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력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가 수동적이며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은 감정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이용합니다. 상

사한테 야단 맞고난 후 분노의 감정을 피하기 위해 운다는 것입니다.

셋은 지성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핑계를 만들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해 지능적인 합리화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조이스에 의하면 환자가 일체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그 치료가 단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을 영적 삶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일체의 자기 과시

나 방어를 유보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영혼의 고통

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약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꺼번에 심장약,위장약, 간약, 췌장약, 변비

약, 설사약, 신경통약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내가 한꺼번에 많

은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높이고 그를 경배하

기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2)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1절 -10절 사이에서 시인은 주님을 송축, 칭송, 찬양, 노래

한다는 말을 무려 일곱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영원히 계속 하겠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사람보다 한국사람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노

래방, 노래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노래방이 뭔가 궁금해서 어느 분에게 물었더니 30분이나 한시간 동안

악보를 받아서 칸막이 된 방에 들어가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돈도 안내고 오르간과

피아노 그리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영원히 송축합시다.

성가대에게 권합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영원히 송축하는 신앙으로 찬

양하기 바랍니다. 찬양과 송축은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해야할 당연할

의무입니다.

시편 150:6을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라

고 했습니다.

3) 주의 능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신관도 중요하고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찬송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선포의 신약적 의미는 선교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는 주

의 복음을 만방에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직장이, 그리고 다양한 일터와 만남이 선포의 현장

이 되어야 합니다.

에디슨은 "주님을 아낌없이 찬양하기에는 영원도 너무다 짧으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70-80년 세월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

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입을 열어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

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칭송합시다.

그리고 선포합시다.

복음선포는 우리에게 해야할 종말적 사명입니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70

제 목 :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고린도후서 12:1-9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을 셋으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날

짐승이 날아다니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달과 별 그리고 해가 떠 있

는 하늘이고 세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한 하늘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첫째, 하늘보다는 둘째 하늘이 높고 둘째 하늘보다는 세째 하늘이 높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에녹이나 엘리야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 세째 하늘에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본

분은 그가 세째 하늘에 올라간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의 바울의 세째 하늘 경험이 주는 간증과 교훈을 발

견하게 됩니다.

1.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영적체험은 환상과 계시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신령

한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직접 날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뵉고 그 음성을 듣는다면 얼

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무익한 자랑이라고 못박고 있

습니다.

바울이 가장 자랑했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즉,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랑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계시자랑, 환상자랑, 병고치는 자랑은 결국 자기를 과사히게 되기 때

문에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능력받았다는 사람들과 병고치는 사람들과 기

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병자를 고치고 능력을 행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예수의 복음자랑은 퇴색하고 자기 자랑쪽으로 세월이 지날수

록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병자를 수없이 고쳤다는 어느 권사

님은 천당 갔더니 자기 집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는 세상에서 예수 이름으로 병고치고 능력행하면

서 영광은 다 받고 잘 살았기 때문에 받을 상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경고를 주는 이야기임엔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본인이 간직하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해야지 그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어떤 능력을 받았든지 우리는 다음의

기본틀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나 가진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그 영광을 받거나 그 영광을 가로채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주셨지만 영광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활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능력을 받고 은사가 충만하다고 해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셋째, 교회에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은사받은 사람들일

수록 성령 충만한 사람들일수록 교회 덕을 세우고 교회의 지도자에 순

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그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경우 성

령을 충만히 주신 것은 복음 전하라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다양한 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그 은사도 역시 복음

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고 함부로 은사를 남용하거나 남발하면 하나

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는 본문의 말씀은 어쩔수 없어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2절 중간을 보면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두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가]라는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신비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세째 하늘에 올라갔다면 그것은 최고의 하늘인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2절 끝을 보면 그가 몸안에 있었는

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입신상태

를 의미합니다.

4절을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고 했습니다.

이쯤되면 자기 이름과 그 사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랑하고도 남은

이있습니다.

요즘 은혜받았다는 사람들은 바늘만한 신비를 체험하고도 황소만큼

부풀려 떠벌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천당 갔다왔다는 사람도 있고 죽었

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화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실만 있

으면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고도 자기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자꾸

드러나면 안됩니다.

둘은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2절 셋째 줄에서도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고 4절에서

도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자기가 세째

하늘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삶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시며 그 인도를 절대 순종하고

살아나온 바울의 삶을 한마디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이끌림을 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

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결과를 따라 주시는 선물이며 은혜

입니다.

귀신의 영이나 사단의 능력은 내가 노력하고 힘씀으로 접신이나 강신

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내가 노력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낙원을 구경했고 그곳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계시를 받았습

니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바울

의 위대한 점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3.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런 것들은 자랑할 수는 있으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

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들 속에서 위대한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가 쓴 서신들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

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 13권에 달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이 행한 기적이나 능력을 언급하거

나 쓴일이 없습니다. 바울도 기적을 많이 행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17 을 보면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성령충만을 체험했습

니다.

사도행전 14:8 이하를 보면 루스드라지방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한마디로 그를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16:25이하를 보면 빌립보옥 중에 갇혀있을 때 기도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8:1이하를 보면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않고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과 능력들은 바울 자신은 그가 쓴 편지들 속에서

단 하가지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을 수행했던 의사인 누

가가 쓴 사도행전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입이 없어 말을 안한 것도 아니고 문자를 몰라서 그것을 남기

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자랑하면 자기 인기나 위신이 급상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약한 것들만을 자랑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어나 걸으라는 한

마디로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을 꿰뚫고 그들

이 돈 감춘 사건을 들춰내는 능력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9:32 이하를 보면 룻다지방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 고

생하던 애니라는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그의 설교만 들어도 방언을 하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어 그 시

체를 다락에 뉘어 놓았는데 기도하고 살려낸 기적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5:15-16을 보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만 환자위에

덮이면 병자들이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

역시 베드로가 쓴 베드로 전후서에서는 없습니다. 누가가 쓴 사도행전

에만 언급이 되어 있을뿐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의 능력과 기적을 대하는 자세 속에서 실로 많

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주님만 자랑하는 것은 성령충만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사단의 유홀입니다. 주님만 자랑합시다.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한번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는 자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 덕을 세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환청, 환상, 계시, 병고치는 능력, 영서,속삭임 등 이런 것들을 이미

주신 성경말씀보다 더 높이고 남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다섯째, 함부로 기도해 준다로 머리에 손을 얹거나 아무나 찾아 다

니면서 안수받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기도 전문가처럼 기도해 준다든지 전문가를 골라

기도를 받으러 돌아 다니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안수기도는 그 사람이 받은 은사나 능력을 전수한다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귀신의 영을 전수한다는 부정적

요소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안수를 하거나 받으면 안됩니다.

여섯째,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병고치는 은사 받았다고 왕진의사처럼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예언은

은사를 받았다고 점쟁이로처럼 안됩니다.

능력의 은사 받았다고 전능자처럼 굴면 안됩니다.

신령한 섹례를 듣고 보았다고 해서 함부로 입을 열고 말을 옮겨선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 신비한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마귀의 역사가 나를 강

하게 공격하고 틈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깨어라 근신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신 그 말씀의 대상은 불신자나 초

신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조심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면 냉냉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신비한 세계를 사모하고 신령한 생활을 힘쓰다 보면 고무풍선처럼 붕

붕 뜨는 단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충신교회의 신앙생활)은 지적이면서 영적이고 영적

이면서 지적인 조화와 균형에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로 충만한가하면

그 은사를 조절할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말씀을 실천하는가 하면 깊이 있는 기도와 영

적은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받았다고 고무풍선처럼 들뜨는

것보다는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대로 살고 열심으로 전도하고 교

회에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세째하늘에 올라갔던 바울이 그 사실을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

은 이유는 장차 우리가 다 들어가서 직접 보고 경험할 세계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고 능력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신령한 힘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리고 그 체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합시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그 능력을 쏟읍시다. 할렐루야

발행일 : 9201006

분 류 : 설교

71

제 목 : < 교계지도자 메시지 > 어두운 세상 밝히는 크리스천돼야

물질문명의 황금기를 구가하게될 21세기는 정신문명의 암흑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교회는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21세기운동의 중요성 은 바로 여

기에 있습니다.한국교회는 모든 역량을 결집시켜 총체적 선교를 해야 합니

다.

교회가 물질문명의 탁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성결운동을 전

개해야 합니다.크리스천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합니다.부패를 막고

어두운 세상을 향해 찬란한 빛을 발해야 합니다.

<기독교21세기운동실행위원 충신교회>

자료원 : 국민일보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111

분 류 : 기타

72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어부지리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명언이다. 즉 둘 서로 욕심

을 내고 다투다가 아무도 갖지 못하고 오히려 어부에게 둘이 다 잡힌

경우를 말하는 데 요즘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

고 있다.

어떤 대통령선거에서 두 후보가 서로 지나치게 경쟁을 하고 서로 다

투다가 결국은 제 삼자가 이익을 보고 당선이 된 것이 그런 예가 될

것이며, 형과 아우가 과자 한갤르 놓고 서로 자기가 통째로 먹으려고

싸우다가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 아예 둘 다 전혀 먹지 목하게 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못먹는 밥에 재 뿌린다]는 아주

고약한 행동도 있다. 함께 마음을 합하였으면 조금씩이나마 나눠 먹을

수 있을텐데 너무 욕심을 내고 자기 혼자서만 독차지하려고 하다가 그

나며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여러가지의 평가 가운데 자주 들으면서도 기분

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은 [한국사람은 혼자서는 잘하는데 다른 사람들

과 함께 하는 것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운동 경기에서도 혼자서 하는 종목에서는 상당히 좋은 성적을

내기도 하지만, 집단으로 하는 종목에서는 성적이 부진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에 대해서 전적으로 찬성할 수는 없으며, 경우에 따라

서 달리 이해할 수도 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라고 강하게 권

고하고 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때에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다 (요17장)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면 무

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잘 할 수 있다.

1더하기 1은 산수에서는 2밖에 될 수 없지만 신앙의 경우에는 다르

다. 그 한 사람은 하나의 작은 일밖에 할 수 없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연합하게 되면 뜻밖에도 연합하게 되면 뜻밖에도 큰 일을 할 수 있다

는 사실이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1+1=2나 3또는 그 이상의 힘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연합하게 되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가.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만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하나가 되기 힘들 것이다. 자기

만 좋은 것과 편한 것이 그리고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면 아무도 그와

더불어 있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 고 말한다. 또한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연합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밥상에는

대개 네개의 나라가 밥상에는 대개 네개의 다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길이가 짧거나 부러져 있다면 그것은 그상을 전혀 쓸수 없게

하는 것이다.

자기 몫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때 그가 속한 공동체는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무관심한 사람이 있어도 연합하기 어렵

다. 교만하기조 않고 부족하지도 않지만, 전혀 관심을 쓰지 않고 항상

뒷짐을 지고 구경꾼의 역할만 한다면 그 사람 때문에 연합이 깨지기도

한다.

위정자들은 어떤 정책을 정한 후에는 비록 자기 마음에 만족하지 않

을지라도 한 마음으로 협력해야 나라일이 제대로 되며 기업체에서는

기업의 목표를 달성이 가능하고, 교회에서도 특별한 허물이나 큰 문제

점이 없다면 담임목사와 당회가 세운 교회의 목표를 향하여 온 성도가

하나가 되어야 하고, 또한 한국 교회도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구하

시는 일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 많은 교파와 분파는 이 불신의 세상에 대하여 별고 좋은 모습이

못된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

히 여기며 겸손히](벧전3:8)라고 말한다.

72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실 때 세가지 조건을 완비해 주셨다. 첫째 좋게

만드셨고, 둘째 유익하게 만드셨으며, 셋째 넉넉하게 만드셨다. 하나

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모든것이 좋았고 모든 것이 유익했으며 모든 것

이 넉넉했다.

창세기1장에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여섯번이

나 반복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의미있고 가치있게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유익했다. 하루살이 곤

충도 유익하고 심지어 사람 몸에 있는 잔털까지 유익하도록 만드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창조하셨다. 사람이 아무

리 번성해도 쓰기에 넉넉한 자원과 살아가기에 아무 불편이 없는 환경

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세상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생육하고 번성하

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

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고 위탁하였다. 하나님은 인간

이 자연을 잘 돌보고 관리하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땅을 관리하는데 실패했다. 그 이유는 첫째 인간이 죄

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17절에 하반절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고 18절엔 [당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다. 그 까닭은 인간이 범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범죄는 양심을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다.

그뿐 아니라 에덴동산과 환경까지 파괴했다. 둘째, 말씀의 의미를 잘

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자연 지배와 세계

정복으로 해석하여 환경파괴를 자초했고 인간은 파괴자로 전락한 것

이다.

그 결과 모든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롬8:21)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

녀들이 소유한 영광의 자유를 고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들이 나타나 파괴된 자연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형상을

되찾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파괴된 자연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새 사람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시편 104편 30절에 [주의 영을보

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의 새롭게 되면 땅도 새로워진다는 의미이

다.

호나경회의의 구호나 표어, 쓰리게 분리수거 자연 재활용도 중요하

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

이다. 사람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가치관이 되살아 나면 환경도 땅도

되살아 날 것이다. 땅을 고치고 물을 치료하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

은 거듭남에 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인간은 달라

지고 인간이 달라질 때 역사와 환경도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환경보전에 앞장서야 한다.

자연은 인간으 위해 존재한다.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발붙이고 살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환경을 보전하고

회복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훌륭한 믿음은 생활을 통하여 입증된다. 가령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

았다면서 산업폐수를 강으로 흘려 보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물자절약,쓰레기 분리수거,수자원보호 대기오

염방지 토질보호등 당연한 일들을 실천함으로써 환경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지구는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지구를 잘 관리

하라고 당부하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땅을 잠시 빌려 쓰는 인간이라면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참 아름다운 세

계로 만든 것은 기독교인이 져야 할 책임이며 사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부단히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을 세우고 그 가치에 따라 사

는 가파른 훈련과 연마를 거듭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을 주도

해야 한다. 환경이 오염되고 자연이 파괴되는 현실을 방관하지 말고

보전에 앞장서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밤바다의 등

대이기 때문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26

분 류 : 조직신학

73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학교교육에서는 문화유산을 전달하는 기능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

재를 선발하는 기능이 있다.학교는 사회구성원의 행동양식,가치관및

사회가 축적해온 지식을 전달하는데 이러한 교육기능을 사회화라고 말

한다. 사회화는 사회의 규범을 습득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정체의식

을 발전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화를 통해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학

교는 인간이 사회의 일원으로 자라도록 교육한다.

학교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선발하는 기능도 있다. 누가 어느

부문에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한다. 이를위

해 교육행정을 전문화하고 교육평가를 표준화 단순화한다. 관료화된

제도를 통해 학생들을 등급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선발의 기능이 교육의 획일화와 비인간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인형성을 이상으로 하는 학교육은 말쁜인 전인교육으로 전

락하고 말았다. 입시위주의 교육,대학중심의 교육은 학생들을 왜소화

시키고 그들의 가능성을 계발해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야기시

켰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거나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은 좌절감을

경험하고 자기정체를 확인받지 못한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행복은 성

적순이 아니라고 절규한다.

청소년기란 아동기의 종말과 성인기의 시작 중간에 있는 기간을 말한

다. 청소년들은 신체적으로 성인이 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아직 아동기

를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새악꽈 실천의 괴리를 경험하고 있다. 문화

의 발달과 더불어 청소년기가 길어지고 있으나 현실은 바람직한 교육

풍토가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기는 정체감을 형성하는 시기이다. 자신은 누구이며 어떤 재능

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뜻을 세우는 시기이다. 지금까지 학습해온

역할들,즉 딸로서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친구로서 동료로서 분할된 역

할을 통합시키고 자아상을 형성한다.

문제는 정체감형성에 좌절하거나 실패할때 발생한다. 자신은 누구이

며 어떤 재능이 있는지 혼동한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 자신은 가치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자기증오,가족간의 갈등으

로 느끼는 심리적 고아의식,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

노는 역할혼동의 결과다.

청소년기는 수많은 욕구가 분출하는 시기이다. 그들에게도 성인과 똑

같은 욕구가 있다. 식욕 수면욕 성욕등 신체적 욕구외에도 정신적인

욕구외에도 정신적인 욕구아 있다.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가치있

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고 싶어한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정체감 형성에 실패하거나 욕구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은 일탈행동을

한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인다. 흡연 마

약등 젊은이들을 탈선시키기 쉬운 유혹물들은 얼마든지 있다. 청소년

들은 쉽게 무너진다. 이유는 그들은 부모보다 또래집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신앙으로 교육해야 한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청소

년들은 신앙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주님을 친구로 삼을때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전인교육이어야 한다.

입시중심의 교육은 변화되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인격교육이 균형이

잡아야할 것이다. 사회는 기능인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격을 갖춘

기능인이 필요하다. 모든 학생들이 공부를 잘할 수는 없다. 학생들에

게 그들의 재능에 맞는 길을 선택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청소년

들이 건전한 가치관들을 가진 인격자로 자라기를 기대하신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12

분 류 : 조직신학

74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종착점에 다다른 느낌이 든

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가 입체적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각병원

대기실은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세상은 불신과 부정부패로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병들로 역사가 병들로 환경이 죽어가고 있다.

마음놓고 물 한그릇 마실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식수가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물은 저혼자 썩는 법이 없다. 역사도 그

렇고 문화도 그렇다. 그것을 오염시키고 썩게 하는 장본인이 있는법이

지 역사가 저 혼자 썩고 문명과 문화가 스스로 썩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를 병들게 하는 주범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겪고 있

는 모든 정황적 고통과 비극은 자업자득이다. 총체적인 질병의 근원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

고 있다]고 말한 바있다.

인간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자연환경을 오염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질병이다. 그병은 죄다.

병든 인간이 원하는 것은 치유다. 병든 육신, 병든 사회, 병든 역사

가 치료받기 원한다. 심지어 자연환경도 건강하기를 소원한다. [피조

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유한 영

광의 자유] (롬8:21) 를 얻고자 한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출구가 없다]고 절망했다. 우리의

정황은 출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출구도 있고 길도 없고 우리를 고

칠 수 있는 의사도 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만이 병들어

가는 인간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의사다.

예수는 세 가지 면에서 좋은 의사다.

첫째, 그분은 병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신다. 주님은 어디가 병들었

는지, 왜 병들었는지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는지 알고 계신다.

둘째, 주님은 모든 병을 치료하신다. 인간의 치료는 한계가 있다. 의

사마다 전문분야가 있다. 전문분야가 아니면 손도 대지 못한다. 그러

나 주님께 고치지 못할 질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님은 모든 질병

을 치료하신다.

치료과정에서도 주님의 도움은 필요하다. 인간은 찢고 꿰매지만 낫게

할 수는 없다. 아물게하고 낫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도

움 없는 인감의 힘만으로의 치료란 불가능하다.그래서 의술은 신술이

라고 한다.

셋째, 훌륭한 인격을 소유하셨다. 의술은 인술이다. 단지 기술만으로

좋은 의사가 될 수는 없다. 좋은 기술에 인간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

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따뜻한 마음을 소유하신 의사다.

중요한 것은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주님을 만나 우리의 총체적인 질

병을 치료받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육체와 영혼, 병든사회와 오염된

호나경이 치료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치료자이신 주님을 만나 우리의 병든 육체와 정신, 그리고 죽

어가는 모든 것을 소생시키는 곳이다.

주님은 우리 병든 육체도 고치시고 병든 사회와 병든 역사 병든 문화

도 치료하신다. [죽은 자여 일어나라] 하시면 죽은 자가 일어났다. 성

난 파도에게 [잠잠하라] 하시면 풍랑이 잠잠해졌다. 어두운 세상에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창조되었다.

바로 이 능력이 우리 시대와 우리 역사와 우리 인간을 치유하신다.

우리에겐 고민이 있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할 고민은 아니다. 우리에

겐 문제도 있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병들었

다. 그러나 못 고칠 질병은 아니다.

우리는 능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결하고 고치고 치료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믿음이다. 이유는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5

분 류 : 조직신학

75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하나님의 창조는 풍요로운 것이었다.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동산의 정

경은 풍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는 경관의 아름다움만은 아니었다.

악이 없는 심미였다. 감사와 기쁨 넉넉한 마음과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악행이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담

과 하와의 불순종과 책임전가, 가인의 원망과 살인 등은 에덴동산을

적막의 동산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죄는 죄를 낳고 악은 더 큰 악을 조장했다. 그러나 보니 사람들은 마

음의 여유를 얻지 못했고 삶의 여유도 잃어 버렸다.

현대인 역시 결핍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감사와 고마움은 잃어버리

고 상대적인 빈곤감에 허덕이고 있다. 불만족스럽고 각박한 마음이 삶

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현디인의 고민은 물질적인데 있다기보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데 있다.

사람에게는 세가지 만족이 필요하다 첫째는 물질적인 만족이고 둘째는

정신적인 만족이며 셋째는 영적인 만족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만족 위에 정신적인 안

정이 있어야 한다. 정신적인 안정을 얻었다 해도 신앙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신앙만이 여유있고 넉넉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준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면 바울처럼 빈곤이나 풍요를 초월하여 만족을 누릴 수 있

다.

신앙에는 3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받는 단계다.

구원을 받고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때가 있다. 이때는 [주시옵소

서]라는 기도가 주종을 이룬다.

둘째 단계는 감사하는 단계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하고 받은바

은혜와 축복이 감사해서 [주님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와 찬송을 드리

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드리는 단계이다. 감사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단계다.

감시해서 시간과 정성과 생명을 드리는 단계이다.

제일 많이 감사하는 사람이 제일가는 신앙의 소유자다. 감사가 있는

곳에 찬송이 넘치고 축복이 임할 것이다.

감사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첫째 하나님이다.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107:1) 고 말한다. 감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려고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이

요.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부모님이다.

섹일스피어는 리어왕의 입을 통해 [배은망덕한 자녀를 갖기보다는 독

사에게 물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부모가 하루만 돌보지 않았더라면 살 수 없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자녀들은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기가 쉽다. 부모의 은혜에 감사

해야 한다.

셋째 벗들이다.

우리 모두 친구와 이웃의 도움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호의

와 사랑을 왜곡하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교회는 감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시편기자는 [감사로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

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며 동

시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없

는 삶은 불만스럽고 불평스럽다. 그리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

이다.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감사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다.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현하며 살아야 한다.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

다.

첫째 항상 마음속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둘째 항상 입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다.

셋째 뭄질로 감사의 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온전한 감사는 이 세가

지가 동시에 이루어질 때 성립된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226

분 류 : 조직신학

76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왜 교회에 가야하나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청지기란 말은 [집]이라는 말과

[관리하다]라는 말이 합해서 된 단어로 [관리자]라는 뜻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재능, 시간, 재물을 관리하여야 하는 존

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재능을 따라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맡기셨기 때

문이다 (마25:15).

그것은 절대적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고 인간에게는 상대적인 관리

권만 있음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직분을 맡았을

뿐이다](고전 9:17) 모든 소유의 주님은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정직과 성실함으로 관리해야 하다.

교회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단지 눈가림

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일한다.

자본주의란 이러한 정신에서 발원된 것이다. 정직한 자세로 일해서

신용을 쌓고 신용을 통해 재산을 증식한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서 시간을 지킨다. 절약과 검소한 생활을 통해 잉여자금을 저축한다.

그리고 얻은 소독을 개인적인 향락에 사용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정신은 이익추구의 노동을 윤리적이고 가치있는 일이라고

평가한다. 일한다는 것을 인간의 고귀한 덕목으로 믿는다. 그러기에

사사로운 욕심과 충동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합리적이고 정직

한 정신에 입각하여 일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일한

다. 그러므로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는다. 게으르거나 사치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이다. 잉여이익금은 재투자하고 쾌락과 탐

욕은 거부한다.

축적된 부는 사회에 환원하여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

돈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돈은 노동의 대가를 측정해 주는

기준이요, 거래의 매개체인 동시에 물건의 가치를 정해 주는 수단이

다. 돈은 때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와 감정을 표현케 하는 도구가 되

기도 한다. 돈자체는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용하는

방법에 있다.

[돈을 주어 보라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는 격언이 있다. 돈은

인격의 시험품이다. 돈에 대한 정당한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첫째, 정당하게 벌어야 한다.

버는 방법이 중요하다. 같은 돈이라도 어떻게 버느냐에 따라 추할 수

도 있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투기를 통해 돈을 번다든지 땀흘리지 않

고 벌어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의 경제구조를 절망적으로 만든 몇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가는 돈 가진 사람들의 부동산 투기였다. 기독교인들

은 돈을 벌어도 정당한 방법으로 버는 사람들이다.

둘째 정당하게 관리해야 한다.

고리대금업을 한다든지 남을 괴롭히는 방법으로 관리해서는 안된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은 비성서적이다. 생산적인 일에 재투자해야 한

다.

셋째, 정당하게 써야 한다.

아무리 땀흘러 벌었더고 깨끗하게 써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절악

하되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서는 절약하되 이웠과 하나님을 위해 써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세가지 회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라고 했다.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관리하면 그 사람은 정욕의 함정에

빠진다.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딤전 6:10)

고 말했다.

부패 부정 타락 뇌물 상납사치 방조 이 모든 것이 돈에 대한 그릇된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것은 배금주의

다.

배금주의는 이 시대의 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맘몬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하나님을 섬기든지 선택하라고 촉구하신

다. 영원하신 분 모든 것의 주인되신 분,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겨야 한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219

분 류 : 조직신학

77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인간은 사회 안으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은 태어나

서 교육받음으로써 완성되어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은 교육을 통

해 한 사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습득한다. 교육을 통해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교회는 고유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다. 모든 인간은 영원한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의 장

성한 분량까지 성숙해 가야 한다.

교회는 교육공동체다. 교회가 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없이 교회는 존재하기 어렵다. 교회에서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가

르친다. 성경의 가르침으로 지성 감성 그리고 의지가 새로워질 뿐 아

니라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배운다.

다양한 계층과 직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의 정황 속에서 실천하기 위

해 행동한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로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 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의 수범자요 교사다.

주님이 행하신 대로 본을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 예수를 닮아가는 그

리스도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교회교육의 지향점이다.

인간이 배우는 지식의 종류는 다양하다. 순간적인 통찰로 얻는 직관

적 지식, 이성의 활동에서 얻는 이성적 지식, 감각의 증거에 의해 확

정된 지식,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의해 확정된 권위적 지식,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준 계시적 지식을 일차적인 교육내용으

로 삼고 있다.

계시적 지식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 성경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어

떤 분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은 왜 죄로 가득하게 되었으며

근본적으로 악한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

는 것인지 소개되어 있다.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근본적인 출발점은 사

랑에 있다. 순수과학이 호기심에서 시작하고 응용과학이 도구적 목적

에서 시작하는데 비해 서경을 배우는 목적은 사랑에 있다.

성경을배우는 동기는 근보적으로 다르다. 성경을 많이 배운 사람은

성경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

다.

그러므로 성경을 십년씩 공부하면서도 삶의 변화나 신앙성장의 진보

가 없다면 중단하는것이 오히려 좋다. 왜냐하면 한 말씀 한 말씀을 그

날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결단이 있을 때 성경공부의 진가나 의미

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전인교육의 장이다. 단지는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아

는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지 평가하신다. 관계와 사건

을 통해 얼마나 잘배우고 있는지 확인하신다.

우리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얻는다. 낙제

점수를 얻을 경우 다시 시험을 본다. 그리고 그 시험에 통과하면 보다

높은 수준의 시험이 준비되어 있다. 과거 하나님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훈련을 경험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교육장이다.

하나님의 교육장에는 입시 부정이 없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는 학

생들은 대리시험을 치르지 못한다. 대신 들어갈 수 없다. 돈 주고도

못간다, 귄세로도 안된다. 믿음이라는 조건을 구비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믿음을 갖지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이를 갈며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

러므로 모든 인간은 인간 신앙으로 교육받아야 한다. 이 세상은 신앙

을 습득하는 도장이다.

최종적인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원하는 사람은 신앙교육을 받

아야 한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가장 잘 웃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바른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212

분 류 : 조직신학

78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선교 자체의 정당성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유는 선교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며 교회존재의 절대적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선교의 방법론의 여하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이다.

선교의 뿌리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

도의 명령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당부에서 찾을 수

있다.

한마디로 교회는 선교 공동체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교에

동참해야 하며 행동대원이 되어야 한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한국교회만큼 선교에 주력하는 교회는 일찍이 없

었다. 더욱이 선교받은지 1백년 정도의 짧은 연륜동안 교회성장은 물

론 선교역량의 발휘는 세계 어느 교회도 따를 수 없게 되었다. 그 점

은 세계 교회들의 주목을 받기에 넉넉하다.

기독교인임을 자칭하면서 선교의 필여성을 외면한다든지 도외시한다

면 그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 무엇인가를 망각한 사람이다.

한국교회의 염려스런 현상 가운데 하나가 선교단체의 범람이다. 자고

새면 선교단체가 생겨나고 공고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한국교회의

역량이 증대되고 선교신앙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란다

면 그다지 염려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단체들이 구성되는 실질적인 동기에 있다. 세상사

라는 것이 일괄평가가 어려운 것처럼 선교단체의 경우역시 한 울타리

안에 집어넣고 평가를 내리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내가 해야 한다, 내 교회가 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한다]라는 편협성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교를 위해 조직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특정인때뭄다

에 선교단체가 조직될 때도 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을 위해 선교단체가 조직된다는 것이다. 그럴경우

그 단체는 사람냄새가 물씬거리게 마련이다. 사람을 위해 선교의 옷을

입혀 놓았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기존의 선교단체만으로 선교역량을 발휘하기엔 충분

하다.

선교현장 접근에도 문제가 있다. 해외 어느나라 도시에 상사원 주재

원 유학생등 3백여명의 한국인이 모여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고 있

었다.

어느날 모교단에서 선교사 한 사람을 파송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

고 곧이어 작은교회가 간판을 걸게 되었다. 그후 석달이 채 안된 어느

날 A 교단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설립했다.

이에 뒤질세라 B교단 선교사가 상륙작전을 개시하고 간판을 걸었다.

그 덕택에 평온하던 교민사회는 사분오열되었고 실망한 나머지 교회

를 등진 사람도 적지않게 되었다. 누가 이러헌 졸렬한 처신을 선교라

고 이름 붙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백두산에 태극기를 꽃으면 되는 것

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제주도 깃발을 각각 꽃아야 된다는

고집과 다를바 없다. 때론 교권이나 금력의 횡포가 선교를 방해할 때

가 있다.

선교접근방법의 미숙때문에 빚어진 부정적 결과들이 이미 러시아와

중국 본토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회 선교창구의

일원화 내지는 협력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한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천하를 얻는 행위보다 더 귀하다. 구원해야

될 생명은 전세계에 널려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걸머 메어왔던 선교

의 빚을 갚을 수 있는 시점에 있다. 우린 어서 빨리 빚진자의 굴레를

벚어야 한다.

그리고 소총알을 한데 모아 대포탄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멀리 크

게 발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만이 가진 선교의 핵폭탄을 한

데모아 터뜨릴 때가 도래하고 있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122

분 류 : 조직신학

79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기독교 신앙을 윤리의 틀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

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니까. 기독교인이라는 윤리의 안경으로

들여다 본다면 솔직히 말해서 이땅에 성서적 기독교인이 몇사람이나

존재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의 윤리나 의를 주장하고 요청하는 그 사람도 따져보면 윤리

적 약점을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탈윤리적이

도 무방하다든지 반사회적이어도 상관이 없다는 논리나 발상이 통용된

다면 그것은 기독굔느 고사하고 종교로서의 가치도 인정받기 어렵다.

모든 종룐느 현실과 영원세계의 문제를 취급한다.심지어 사이비 집단

도 겉으로 표방하는 가르침속에도 도둑질이나 살인을 교리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윤리적 가치라든지 삶의 기준문제는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의 삶은 누구의 강요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

발적 결단에 의해 그 어떤 종교보다 바른 삶을 영위해야 한다.개신교

의 경우 개혁자들의 의지속에 이미 경건, 절제,극기가 포함되어 있었

으며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자세 역시 청빈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기독교의 경우 1920년대초에 물산장려운동 역시 교회가 앞장서

전개했다. 그리고 그 운동의 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밖에서 교회를 들어다보는 시각은 냉정하고 비판

적이다.

비판의 초점은 복음의 핵심이 허술하다든지 선교가 지나치다든지 하

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교회의 윤리적 삶의 부실과 사회적

역할의 외면 내지는 무관심에 있다.

같은 장소에서 1천2백만명이 각각 달걀 하나씩을 손에 쥐고 있다가

동시에 그 달걀을 깨뜨린다면 달걀을 깨지는 소리가 어느정도일까를

생각해본 일이 있다.

세종문화회관 파이프 오르간 소리보다 클까 작을까.아니면 대포소리

보다 클까 작을까. 음량을 실험해본 바 없기 때문에 이렇다 저렇다 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소리가 놀랄만큼 큰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천2백만자루의 촛불을 동시에 켠다면 대낮처럼 밝아질 것이

다. 뜻있는 사람들과 사회단체들이 호나경보전과 자연회복운동을 전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운동일수록 전국민의 호응이 전제될 때 성공

이 가능해진다.

기독교인 1천2백만명이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쓰다남은 수은찌꺼기

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고 오염물질을 방류하거나 방치하지 않는다면

시민단체 수백개의 노력보다 그 결실의 폭이 증가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본질인 복음선교는 제쳐두고 사회운동만이 마치

교회 기능의 전부인양 내세우고 강조하는것은 교회를 사회운동 단체

로 끌어내리는 결과가 된다.

교회는 세상 때문에 세상을 섬기는 것이아니다. 성서의 명령때문에

세상을 섬기고 개선의 정렬을 쏟는것이다.

복음을 외면한 사회운동은 구태여 교회의 타릉마 쓸 필요가 없다. 그

런 운동은 사회단체의 이름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래서 항상 교회는 문제 제기와 해답을 성경에서 찾게 된다.

대형금융사건의 주범이 기독교인이었다느니 공장폐수를 몰래 방류하

다가 적발된 공장책임자가 기독교인이었다느니 하는 부정적 현상을 일

소하려면 기독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체험할

때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교회는 어떤 운동을 제창하고 추진하는 일보다 인간개혁에

주력해야 한다.

내가 달라지면 가정이 달라질 것이고 내가 거듭나면 사회도 거듭나기

때문이다. 거듭난 기독교인 때문에 우리 사회가 밝아질 날이 올 것이

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115

분 류 : 조직신학

81

제 목 : 상담 ( 하나님세계 이해는 믿음뿐 )

문제) 저는 초신자로서 나름대로 성경 읽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 자꾸 의문이 생깁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

도의 성육신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신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

으로 이 땅에 올 수 있었을까요 또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사실도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신실한 믿음을 갖기위해

부끄럽지만 상담을 드립니다.

답) 흔히 말하는 초신자라는 것은 두가지 의미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

는 교회출석 기간이 짧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깊이가 얇다는 것

입니다. 20여년간 교회를 들락 거려도 초신자일 수 있는가 하면 3년여동안

교회를 다녔어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의

문이 생긴다든지, 성육신 사건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다든지 하는 것들은 일

반적 초신자 현상이기도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것들 때문에 교회밖으로 뛰쳐나갈 마음을 먹지 않

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신실한 믿음을 지닐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이해하는 통로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감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눈과 코와 입 그리고 귀, 혹은 접촉을 통하여 느끼고 얻은 결과에 따라 판

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성입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추리하고 그리고 판단을 통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나 신령

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감성이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

니다. 그리고 적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제한적

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이해한다든지 천국을 코로 냄새

맡고 깨닫는다든지 하는 따위의 이해방법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눈

으로 밤하늘의 별을 셀 수 있다는 것과 천체망원경으로 셀 수 있다는 것은

그 차이가 큽니다. 그리고 천체망원경으로도 셀 수 없는 별들의 세계가 얼

마나 많습니까.

동정녀 탄생의 경우나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합리적이면서 합리와 이성

을 초월한 세계의 사건들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

계나 신령한 세계는 믿음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믿고 나면

하나님의 존재가 인정되고 성경사화들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과학

의 세계는 알고나서 믿는 세계이며 신앙의 세계는 믿고 나서 아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가 풀어야 매듭은 알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믿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료원 : 충신교회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1

분 류 : 기타

82

제 목 : 상담 ( 이스라엘의 유대교에 대해? )

우선 유대교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하셨는데 유대교는 구약을 경전으로 삼

고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구약을 믿습니다만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성경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통 종교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

약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만 믿지, 오신 메시아, 예수

는 믿지 않습니다. 그게 문제예요. 예수가 메시아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거든요.

그리고 그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도 믿지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없는

종교,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구약만 가지고 있지 신약은 안 가지고 있는,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지금 구원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아마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시기 전에 구

약을 믿고 있었던 그 당시라면 아마 구원을 받았겠지요. 선택받은 백성이었

으니까, 개인의 신앙 고백을 통해서 말이죠, 그러나, 사도행전 4장의 말씀

을 보게 되면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준일이 없고, 우리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 고 했기 때문에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지요.

그 다음에 [장로교 신자인데 모파의 상품은 사지 않는다] 그건 잘하시는

거예요. 편협한게 아니예요. 왜냐면 그 상품을 사면 간접적으로 방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 거든요. 그 사람들이 그 상품 팔아가지고 무얼 하느냐?

기독교 파괴 공작하는데 쓰려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이단 세력, 이단 종파

를 확장하는데 그 돈을 쓰기 때문에 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료원 : 충신교회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1

분 류 : 기타

83

제 목 : 상담 ( 주일 성수에 대해 )

문제) 주일성수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금요철야 예배는 성경에 있는 것

입니까?

답) 주일 성수라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입

니다. 주일이라는 말은 주님의 날이란 말이지요. 즉 주님을 위해서 사용되

어지며 또 주님께서 주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아닙니다. 따라서 주일에 돈을 번다든

지,여행을 한다든지, 운동을 즐긴다든지, 교회에 안 가고 자기 하고픈 것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날은 온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도들과 거룩한 교제

를 나누고, 봉사하는데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마디로 주일성수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그날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 중요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아침예배 1시간 드리고 와서 꼼짝 안하고 문걸어닫

고 쉴 생각을 하고 있다든지, 나쁜 상념에 빠져 있으면서 주일을 보내는 것

은 주일성수의 의미를 곡해한 것이겠지요? 성서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일

성수는 일요일 하루만이 주의 날이라는 타이 아니라 365 일 전체가 주의 날

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 12장 1절의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의 말

씀처럼 우리의 매일의 삶을 주께로 드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주일성수의 참

된 의미랍니다.

그리고 금요 철야 예배를 말씀하셨는데, 성경에 [금요철야]라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국교회가 금요철야를 많이 하는데, 왜 금요일

이냐고 묻는다면 주일날에서 그다음 주일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있기때문에

신앙적으로 다시 한번 재무장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그 중간

날, 수요일을 수요기도회에 다시 모여 기도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한 장을

만든 것이라고 대답드릴 수 있습니다.

자료원 : 충신교회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1

분 류 : 기타

84

제 목 : 상담 ( 성서에는 담배피우지 말라고 했는데 )

저는 담배를 피우다 끊어본 경험이 없어서 제 경험을 말씀드릴 수는 없

군요 이런 문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담배를 피우는 분들이 많습니다. 끊어

야지 끊어야지 하면서도 못 끊거든요 세상 살아가는 데는 무슨 일에나 의지

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이 하는 것 안하는 의지가 있어야 됩니다.

또 남이 안하는 것 실천하는 의지도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이 없지 않으냐고 하시는데 성경에 피우라는 말도 없습니다.

부정적인 것을 자꾸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요. [먹어도 배부르

지 못할 것은 돈 주고 사지 말라]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담배가 해롭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즘에 구라파나 미국 쪽에서는 담배 안 피우

는 사람이 양반 축에 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피우면 창피한 걸로 되

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금연운동이 보편화되질 않았습니다. 다

만 아무튼 무익한 것이 담배랍니다. 자기가마음만 먹고 노력하기만 하면 끊

을 수 있는 술, 담배, 이런것 정도를 끊지 못하는 의지라면 담배나 술보다

더 밀도가 높고, 깊고, 강한 세상 유혹을 끊기란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어느날 갑자기 안 피우는것이 끊는 것이됩니다.

저희 교회 교인 중에서도 안 피우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하는 것 보았습

니다. 껌을 씹는다 은단을 먹는다 해봐야 안되더라고 합니다. 어느날 갑자

기 안피우니까 못 참겠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 참고 나서 다시 피울

까 생각하니 일주일 참은게 아깝더래요 그래서 열흘 참고, 보름 참고, 한

달 두달 참다보니 아주 잊어 버리게 되었답니다. 이제부터 당장 본인의 의

지를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담배를 피우지 말아보십시오. 하루

참고, 이틀 참고, 일주일 참고, 그만한 극기의 싸움도 없이 어떻게 다른 일

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료원 : 충신교회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1

분 류 : 기타

85

제 목 : 상담 ( 성경이 참 진리라는 증거는 )

종교마다 경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이 형성되기까지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경전을 이 지닐 수 없는 독자성과 유

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빙 젠슨]은 성경을 기적의 책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일된 하나의 주제를 놓고 1600년동안 36명의

저자가 기록했을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역사의 변동에도 아

랑곳없이 보존돼 온 베스트셀러로서의 고고성이 성경의 유일성을 강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성은 두가지 증거로 드러납니다. 하나는 내증입니다. 성경이

셩경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증

거와 함께 구구절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습니

다. 다른 하나는 외증입니다. 만일 성경이 거짓과 허위의 책이었다면 성경

이 햇빛을 본지 수년안에 사람들의 버림을 받고 폐기처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금도 진리의 고지에 우뚝선채 모든 인간의 사랑과 경외 속

에 진리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상대적 진리는 논리적으로도 참이 못됩니

다. 진리는 항상 절대성을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인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작품이라도 세번이상 읽기는 어렵습니다. 이유

는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십번 수백번을

거듭하여 읽는다고 해도 그때마다 새로운 영감과 교훈과 능력을 받게 됩니

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터줍니다. 이유는 성경은 불변의 진리이며 하나님

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길 진리 생명은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자신이 절대적진리이기 때문에 그를 증거하는 성경이 절대적인 진리임

은 단순논리이며 절대 논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성경은 믿음과 대전제

아래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난해구절의경우도 이성만으로

해석하러 든다면 그것은 영원한 미제사건이 되고 말것입니다만 믿음으로 풀

어간다면 난해가 은혜가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말해줄 성경구절은 성

경의 중심요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이 적합한 것이빈다. 물론 성경 한두 구

절로 진리를 대변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구원의 본질을 설명하는 구

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하십시오.

자료원 : 충신교회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1

분 류 : 기타

86

제 목 : 상담 ( 환경 때문에 기도문쓰고 있는데 )

하나님께 기도를 글로 쓴다는 것이 죄가 되진 않습니다. 힘은 드시겠지만

기도를 계속 느트해 나가시다보면 훗날 얼마나 예쁜 기도 노트가 되겠습니

까 그건 좋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쓰기만 하면 되느냐 그렇진

않습니다. 쓰지 않는 기도도 하셔야 돼요 그런데 지금 편지를 보면 가게를

하시는데 손님이 오면 기도에 방해가 된다는 거죠. 자칫 잘못하면 기도가

방해를 받기 때문에 기도생활을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가정주부

가 남편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에 보낸 다음에 기도를 하려면 전화가 오고

장사치가 들이닥치고 계량기를 보러오는 등 기도가 방해를 받는다구요, 그

러나 이 고배를 넘기셔야 돼요 그러니까 이 편지 보내신 자매님은 가게를

하는 도중에 기도를 하려고 하시니까 방해를 받는다고 그러시는데 그럼 기

도시간을 바꾸셔야죠 시간을 바꾸시고 또 가령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

도하시려고 하는데 방해를 자꾸 받을 경우에는 그 방해를 차단해야 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기도시간 만큼은 전화 플러그를 뽑아 놓는다든지 소음이

들리지 않는 골방으로 들어간다든지 해서 기도의 시간으로 정해놓은 그때만

은 꼭 지키려고 합니다. 기도의 방해요소들을 차단하는 노력도 해야합니다.

자료원 : 충신교회 /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301

분 류 : 기타

87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 하나 )

청년 사울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을 사사했고 유대인으로 로

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헬라문

화에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율법만이 세계를 변

화시키고 인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 부상하는 기독교와 그 교리를 전면 부정하고 박해의 선

봉에 서게되었던 것이다.그러나 그의 삶은 다메섹 회심사건으로 새로

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후 율법의 사람

에서 복음의 사람으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훗날 고백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든지 [구습을 좇

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으

라]는 고백은 그의 산체험이 준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란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백처럼 심령의 변

화이며 거듭남이었던 것이다. 심령의 변화는 곧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

을 변화시켰고 삶의 형식을 새롭게 정립하게 했다.

그것은 곧 자아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기적 삶에서 이타적 삶

으로의 전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유일 변도의 삶이 가치추구의 삶

으로 공식을 바꾼 것이었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사울의 삶은 소유에서 삶에로 급전하는 기적을

체험했다. 우리는 다시한번 새해 첫날을 보냈다. 그때마다 새로운 각

오와 결심을 되풀이하기에 진력이 날 정도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개혁과 새역사를 떠들어대곤 했다. 제도를 개혁하고 의

자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기를 수백번 되풀이했다.

그러나 우리네가 열망하던 새역사 새정치는 요원하기만 했다. 한국국

민이 가진 민주역량의 과시와 성숙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끝난 대

선은 곧 제7공화국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썩고 타락한 사람들은 신한국건설도 새정치의 구현도 불가능하다.

[새로움]이란 얼굴 바꾸고 옷갈아 입는 형식 변화로 성립되는 것이 아

니다. 비교적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들이 좋은 정부를 만들고 정치를

펴나갈 것이다.

손바닥만한 땅떵어리를 여러 갈래로 갈라 놓고 정치 욕구를 충족시켜

왔던 지도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자기몸을 찢어도 민족은 나눌 수 없다는 사람, 자기 몸을 산화해서라

도 민족을 살리겠다는 사람, 그사람들이 신한국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나누거나 교단을 나누는 사람 교회나 교단을 이익집단으로 전락시키고

자리지키기에 비인간적 행동을 주저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도 그곳을 떠나야 한다.

자신을 가리켜 [죄인중의 괴수 ]라고 절규했던 바울처럼 우리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할때 그리고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던 요나처럼 스

스로 책임자가 될때 한국교회나 한국사의 내일은 밝아질 것이다.

그리고 얻은자는 너그럽게 잃은자는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읽고 새

로운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새역사와 새 람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에게만 부여되는 하나님의 상급인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30108

분 류 : 조직신학

88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성경은 우월성은 시종의 여일성과 명확성에 있다. 다시 말하면 시작

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이다. 천지만물의 시작을 밝히는 창세기로 시

작하여 그 끝을 알리는 계시록으로 성경은 끝난다.

그러기에 기독교 신앙은 시작과 끝을 중요시한다. 제아무리 시작이

화려해도 끝마무리가 시원찮으면 의미가 없다.

특히 상품의 경우 마무리는 그 제품의 가치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신

용도를 제고시켜 준다. 동일한 재료로 만든 상품이라도 어라허게 만들

었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그것은 인생과 신앙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성공의 의미는 성공 그 자

체에 있기보다는 그 마무리로 판가름난다. 최상의 성공을 이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올바르게 마무리하지 못하면 졸지에 최하의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최하의 높지대에 머무는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하면 최상의 자

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최하도 최선을 다하면 최상이 될 수 있

고 최상도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최하가 되는 것이다.

야곱의 열한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을 예로 들수 있다.

그는 어린시절 형들에 의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가 가까스로 목

숨을 구한뒤 애굽에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인신매매범도 아닌 형들이 그를 팔아 넘긴 것이다. 그는 애굽에 들어

가 다시 보디발장관의 집에 종으로 넘겨졌다. 그리고 다시 누명을 쓴

채 감옥에 들어갔다. 짧은 기간에 그 누구도 견디기 어려운 굴욕과 원

한과 고통을 골고루 겪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불행한 삶을 마무리하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30세 청년시절에 히브리인의 신분을 가진채 애굽의 국무총리

가 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마무리에 실패한 사람이 있

고 성공한 사람이 있다.최고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마무리의 실패로 물

러난 독재자가 있는가하면, 실패와 굴욕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 인물

도 있다.

70년만에 스스로 붉은 깃발을 내린 러시아의 경우 그들이 안고 있는

두가지 큰 숙제가 있다. 하나는 경제재건이고 다른하나는 민주화의 마

무리다. 만일 그들이 두가지 숙제를 풀지 못한다면 어떤 혼란에 말려

들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통일이후 독일의 진로역시 어떻게 통독 후유증을 치유하느냐에 따라

앞날이 좌우될 것이다. 우리 역시 모처럼 만든 민주화의 벅찬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마무리에 실패하면 후퇴할 것이고 성공하면 선진민주국가의 대열에

끼게 될 것이다.

민주화는 시민의 민주역량에 비례한다. 민주주의는 책임과 질서 그리

고 결연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 시험장이랄 수 있는 대선정국의 혼탁양상은 한마디로 수요

와 공급이 만들어 내는 썩은 드라마이다.

다시말하면 손을 내미는 자와 쥐어 주는자의 합작품인 셈이다. 달라

니까 주고 주겠다니 받는다는 통속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래가지고

지도자가 된다면 슬프고 또 슬프다.

누가 뭐래도 1988년에 있었던 서울올림필은 민족사의 큰 획을 긋는

쾌거였다.

그리고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회복의 호기이기도 했다.그러나 우리는 마무리에 실패했다. 그 기

회는 두번 다시 우리 곁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달란트 맡은자들의 경우도 그들이 해낸 마무리 결

과에 따라 상벌이 수여되었다.

12월은 마무리의 달이다. 삶과 신앙은 그 마무리에 따라 가치를 달리

한다. 우리가 교회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인생과 신앙의 질을 높이고

그 비결을 익혀 가기 위해서이다. 교회는 인생과 신앙, 이 두가지를

마무리하는 도장인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211

분 류 : 조직신학

89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왜 교회에 가야하나 )

그리스도와 성탄사건을 과거지사로만 이해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 다

시 말하면 2천년전 베들레헴 사건으로 취급해 버린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와는 상관이 없게 된다. 그러나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있었던

성탄사건이 2천년이 나이테에도 아랑곳 없이 세계적 사건으로 확산되

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한 아기의 탄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베들레헴 밤하늘을 비춘 별빛외에 조용하게

이루어졌다.그러나 그 사건은 이스라엘 조야를 발칵 뒤집어놓고 말았

다.

우선 맨먼저 헤롯왕이 길길이 뛰었고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렇게 시

작된 그리스도의 수난사는 갈보리 언덕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엘리엘

리라마 사박다니]를 절규하기까지 계속되었다.

성탄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구속사적 의미를 들수 있다.

33년동안의 예수 행보는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아다. 그러나 오

로지 그분의 성육신은 [인류구원]이었다.

구약예언의 초점역시 메시아를 통한 구속이었으며 신약에 열거된 그

리스도의 행적 역시 구원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볼때 기독교 신앙이란

구속사적 연결괴를 외면한채 성립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구원문제를 외면한다든지 구원신앙이 분명치 못하다면

기독교 신앙일 수도 없고 기독교인이 될 수도 없다.

때로 기독교의 교리체제가 독선적이라느니 비타협적이라는 비판을 받

을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만이 지니는 유일신 신앙과 진리성

때문이다. 타협이 가능한 진리라면 이미 그것은 진리의 자리를 포기한

것이다.

둘째, 민중중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구약종교는 대중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사장에 의해 집전되는 제

사를 통해 형성 유지되는 미개방 종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가 민중과 밀

착되어 있다.우선 출생현장이 베들레헴 말구유였다. 그리고 최초로 성

탄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은 목자들이었다.

성탄의 메시지는 귀족이나 의회에 전달되지 않고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동들에게 전해졌다. 그뿐인가. 피난에서 돌아온후 유년기와 청

년기를 보냈던 곳이 나사렛동네였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란 예수,그리하여 그는 진정 민중의 아

픔을 치유하는 메시아였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소수의 엘리트그룹에

대한 관심보다는 고통받는 민중과 함께 아픔을 나누셨다. 기독교는 그

리스도처럼 민중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대중성을 가져야 한다.

셋째, 변혁과 변화가 일어났다.

예수가 가는 곳에는 항상 문제가 일어났다. 바닷가에 가시면 거기서

문제가 일어났고 산에 오르시면 산에서 사건이 터졌다. 어느집에 들어

가시면 거기서도 일이 벌어졌다.

단, 그것은 긍정적 사건들이엇다. 배고픈 사람들이 먹게 되었고 파도

가 잔잔하게 되었고 병든자가 고침받았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 그리고

죄인이 회개했고 귀신이 물러갔다.

역사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인간존재가 변했다. 에수가 들어간 나

라도 변했다. 예수가 들어간 나라도 변했다. 스칸디나비아에 예수가들

어간후 그들 나라가 변혁되었다.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 한국 역시 예

수 때문에 변했고, 달라졌다.

넷째, 더불어 사는 삶속에 성탄의 현대적 의의가 있다.

성탄사건은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모든 것을 나누기 위해 오신 사건

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우는자와 함께 울고 웃는자

와 함께 기쁨을 나누셨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울타리밖의 소리를 듣

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에 응답하는 것이다. 교회만을 위한 교회라면 이

미 그 존재가치에 종언을 고한 셈이다. 성탄, 교회 역사. 세계는 더불

어 어우러졌을때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225

분 류 : 조직신학

90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교회만큼 다양성을 가진 공동체는 드물다. 나이 계층 수준 직업등에

있어서 그렇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복음 발전과정을 보면 이방인과 유대

인이 복음을 받아 들였고 귀족과 평민이 함께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

리고 제사장 피장이 남녀노유 군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초대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교회의 경우 역시 예외가 아니다. 80지난 노인이 있는가 하면 10

대 청소년이 있다. 최고의 지성을 지닌 교수가 있는가 하면 국졸학력

의 할머니도 있다.

이처럼 지상교회는 다양한 계층과 성격으로 집합되어 있는 특수공동

체인 하나님의 나라 역시 그 사람들이 들어갈 곳이기 때문에 다양한

집합이라는 점에서는다를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일정한 목표를 향해 전열을 정비하고 행진

할 수 있는 힘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한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유일신 신앙

과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관 때문이다.

수십만의 교회가 흩어져 있고 수억의 크리스천이 전세계에 흩어져 있

으면서도 그들이 동일한 의식을 갖는 원인이 있다면 하나라는 신앙

때문인 것이다. 교회의 외적 측면에나 표출된 사건만으로는 불가능하

고 불확실하다.

교회당의 건물양식이 다양하고 건축구조가 다양하듯 눈에 보이는 세

계 교회의 형태는 결코 일관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내뿜는 체취역시 각양일 수밖에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눈에 보이는지상교회는때로 부정적 요소들 때문에 세인의 비판

대에 오를 때가 있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기대와 역할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회의 실

체는마치 빙산과 같아서 드러나지 않은 요소들과 부분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가령 연말구제나 자선운동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라면 수십상자를

내놓고 얼굴을 내미는그런 아류의 자선운동을 교회는 외면한다. 말없

이 베푸는 그리스도의 온정과 사랑을 이름없이 빛도없이 전세계교회가

2000여년동안 계속해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해도 그렇다. 전국 사회봉사단체의 거의가 기독교

인이나 교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하라]는 성서의 교훈때문에 실체와 실상을 밝히지

않은채 금년 성탄절 역시 사랑의 실천에 전국 교회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유난히 금년 세밑은 그 냉기가 심하다고 한다. 사회복지시설이나 불

우한 이웃을 찾는 손길이 적다고 한다. 그 이유를 불경기와 선거탓으

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도대체 이번 대선에 쏟아부은 돈은 얼마나 되는가. 그 돈의 출처는

어디며 행방은 어딘가. 그리고 그 돈들이 가치있고 생산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졌다면 이나라의 경제들은 어떻게 달라졌을 것인가.

보나마나 천문학적인 그 돈들은 배설물로 흘러버렸을 것이고 길바닥

에 휴지로 날렸을 것이 뻔하다.

공존의 윤리는 공유의 실천이 있을 때 가능해진다. 경제적 부나 기득

권을 독점 독식하는 구조 속에서는 더불어 잘사는 삶의 성립이 불가능

해진다.

우리가 걸핏하면 소리지르는 경제정의라는 것들은경제교과서속에서

찾는 경제용어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고 손으로 움켜 잡을 수 있는 현실

적 사건이어야 한다.

춥고 고독한 계절, 보다 더 소유한 사람들은 보다 더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을 펴야 한다. 교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웃의 아

픔과 역사의 신음을 외면한채 언제까지 교회는 도도한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성탄계절에 생각나는 것이 많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218

분 류 : 조직신학

91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흔히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일컫는다. 이유는 모든 인간은 대상과 양

태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종교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샤

머니즘에서 고등종교 신앙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부르는 신의 이름이

다르고 경배형태가 각양각색이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불렀다.

그 뜻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것이다. 위를 바라본다는 것은 인

간의 종교성을 의미한다. 위를 향하여 올라가는 것은 인간만이 지는

종교성이며 미래지향성이다.

하등동물일수록 땅밑을 파고든다. 뱀이 그렇고 쥐가 그렇고 지렁이가

그렇다.

그러나 상위 지향적인 인간이 땅밑을 파고 든다든지 지평성에만 연연

하다면 그것은 자포자기이며 전락일 수밖에 없다. 창조의 과정부터가

인간은 미래지향적이며 위를 바로보는 존재로 피조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만 유일하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다시 말하면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을 호

흡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수를 셀수 없어 많다. 이성적 결단이라든지 감

성적 삶, 그리고 자체와 진취등 짐승이 가지지 못하는 우월하고도 고

상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우월성은 영혼 때문이다. 개나 고양이나 돼지에겐 영

적 에배 행위가 없다. 그것들은 먹고 즐기고 배설하는, 그리고 생식번

성의 일차원적 삶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사람됨은 영적 사건으로 두드러진다.

자신의 하나님의 피조물이면 그분의 섭리와 통치아래 머무는 존재임

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짐승처럼 살 수는 없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는 모든 것들, 예를 들면 건강 물질 재주등이하

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위탁물이라는 믿음을 지니는 사람이라면 제멋

대로 낭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게 하는 강의실이다.

거기서 하나님을 알고 배운다. 그리고 바로 사는 도리를 일깨우게 된

다. 교회의 존재가치를 무시하거나 희석시키려는 시도가 있다.그러한

시도는 두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하나는 교회의 부정적 형태들 때문에 교회를 비판하는 무교회운동이

며 다른 하나는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이단운동이다. 기독교 2천

년사에 드러난 모든 운동은 교회를 떠나려는 교회밖의 운동과 교회로

돌아가려는 교회안의 운동으로 대별된다.

교회를 등지거나 교회를 떠나는 운동은 그 수명이 짧게 마련이다. 그

러나 교회와 더불어 시작하거나 교회중심으로 일어난 운동들은 그 길

이가 길고 탄탄하다.

교회는 다양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러나 강한 응집력과 결속

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면에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개혁자의

선언은 웅변으로 다가선다.

교회는 한 신앙 한 이념으로 성립된 공동체여서 좀처럼 와해되거나

산화되지 않는다. 이념이나 신념도 없이 단순한 정략이나 이해때문에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 정치행보라면 몰라도 교회는 그런 삶의 과정

이 용납될 수 없다.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아

들]이라는 신앙과 고백이 교회의 기초이다.

그리고 그 위에 교회는 영원한 터를 잡고 있는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경배의 대상을 유일신이신 하나님 한분으로 한정한다.

그 어떤 개인도 사상도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배금주의

나 우상숭배 그리고 권력숭배나 성물숭배도 거부한다. 경배 대상설정

은 행.불행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

라...]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120

분 류 : 조직신학

92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선택]이라는 용어는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한 사건으로 시작

되는 선택역사는 바울의 선택신앙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그 맥을 이어

나오면서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언제나 일방적이며 주권적이다. 협상이나 타협의 절

차나 과정이 무시된채 하나님의 일방적 의사와 결정에 따라 선택된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과 다른 점은 오류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일시적 단견에 의해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계획과 섭리

에 의해 진행된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사건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

엘 민족 공동체를 선택하시려는 전초작업이었고 나아가 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룩하시려는 위대한 섭리

였다.

선택신앙에 철저했던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신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에 우선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

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선택하셨

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는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도 증거된다. 이러한 근인과 원인들을 한데

묶어 놓고 본다면 기독교와 선택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다.

선택, 그것은 종교 신앙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인간사에서 매우 중요

한 비중을 갖는다.

한 나라의 경우 지도자의 선택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이스라엘의 초

대왕이었던 사울과 두번째 왕이었던 다윗의 차이점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품성이나 신앙에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사울은 백성이 선택한 민선왕이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뽑은 신정왕이

었다. 즉 사울은 사람들 눈에 드는 왕이었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

는 왕이었다.

그러기에 다윗을 가리켜 [이는 내 마음에 합한자]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정하고 뽑은 왕은 사람들의 구미를 돋우고 그들의 비위를 맞

추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뽑은 왕은 하나님의 낮

을 살필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사울과 다윗을 갈라놓은 커다란 분수령이었던 것이다.

우린 흔히 가장 이상적 정치형태를 민주주의라고 일컫는다. 민주주의

란 민이 대접받고 설 자리에 서고 자신들의 주권을 에누리없이 행사하

는 정치형태야말로 가장 이상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치와 삶의 근본이 되는 신본주의와 비길수는 없

다.민주주의의 발상지는 성경이며 기독교신앙이다.민주주의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된다. 그것은 유신론 민주주의와 무신론 민주주이다.

실존철학이 무신론 실존주의와 유신론 실존주의로 구분되듯 민주주의

형태도 그렇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인간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믿고

인간이 향유하는 모든 주권역시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으로 알며 그 믿

음 위에서 정치의 나래를 펴나가는 것은 유신론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인간 제일의 기치를 내걸고 하나님을 외면한채 인간지상왕국

건설을 꿈꾸는 것은 무신론 민주주의이다. 우리는 지금 두 정치형태의

쌍곡무를 지켜보면서 제7공화국 태동을 기대하고 있다.

유신론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어

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열망일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204

분 류 : 조직신학

93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10월 28일 휴거설을 사이비 해프닝으로 끝났

다. 주모자는 법의 심판대에서 서게 되었고 추종자들은 길 잃은 양떼

처럼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휴거교리] 자체가 심판대에 선것은 아니다. 그리고

추종자들이 흩어졌다고 해서 휴거자체가 무산된 것은 아니다.

휴거일로 예고됐던 10월 28일밤 어느 술집에선 술꾼들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었다고 한다. 내기의 내용이 과연 오늘밤 예수가 오느냐 오지않

느냐 하는 것이었다니 기가 막힌다.

10월 28일이 지난 어느날 저녁 텔레비젼 쇼프로에 참여할 진행자가

늦게 나타나자 진행자 한사람이 [늦는걸 보니 휴거됐나보죠]라며 너스

레를 떨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빗나간 휴거설이 뿌려낸

낙진들이었다.

한국기독교역사 1세기동안 이번처럼 휴거설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일

은 없었던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최후사건인 휴거가

그렇지 않다.

휴거는 결코 코미디처럼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수많은 예

언으로 채워져 있다. 구약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에 관하여 신악은 오

신 예수와 다시 오실 예수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예언된 모든 사건들은 그대로 성취

되었다. 오직 유일하게 남은 예언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종말과 재림사

건이다.

다른 예언들이 오차없이 실현되었던 것처럼 마지막 예언도 그대로 현

실화될 것이다.

일부 빗나간 종말론 때문에 비롯된 몇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첫째 위에서 언급한대로 종말이나 휴거자체가 희석되고 무시되

는 경향이다. 물론 전혀 관심도 없었던 휴거교리가 일반 매스컴을 통

해 홍보비 한푼 들이지않고 그것도 장기간 화면과 지면을 차지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러나 휴거가 사람들의 입에 조롱거리처럼 회자되고 있다는 것은 불

쾌한 일이다.

그 사건의 충격이 지나간 어느날 축호전도에 나섰던 교인들이 있었

다.

어느집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더니 주인이 물을 열었다. 예수 믿고 구

원받으라고 전도하자 대뜸 [왜 안올라가고 왔어요]하며 문을 닫더라는

것이다. 이것 역시 휴거 후유증인 셈이다.

둘째 휴거 신앙이 느슨해졌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28휴

거설을 믿지는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

나 그날이 불발로 마무리되자 마치 휴거가 몇백년 연기나 된듯한 여유

를 갖게 되었다.

놀라운것은 10.28사이비 휴거설은 거짓계시를 조장하는 사탄의 그럴

싸한 역사였다는 점이다. 휴거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그네들 말에

의하면 7천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1천2백만 넘었다는 크리스천에 비하면 7천은 작은 수이다. 그러나 그

숫자를 개별화하면 많은 숫자이다. 사탄은 성경의 휴거진리를 교란하

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거짓 환상과 음성과 날짜를 암시했다.

그리하여 교회에 상처를 내고 교인들을 그릇된데로 오도하는 득을 얻

은 셈이다.

교회가 마지막 외쳐야 할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

원과 재림이다.

고난받는 교회들이 그때마다 위로와 소망을 가졌던 메시지는 다시오

실 그리스도의 심판과 영원한 왕국이었다.

하나를 전체화하는 것도, 그리고 전체를 하나로 최소화하는 것도 바

람직한 작업은 아니다. 하나는 하나 그대로 놓고 이해해야하며 전체는

전체로서의 존재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한가지 실수때문에 기독교 전체를 부정하거나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

다. 지금 이시간에도 재림을 예정하신 하나님의 시침은 어김없이 돌고

있을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127

분 류 : 조직신학

94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다양한 종족과 언어의 출발은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상태는 한 언어 한 구음, 한 종족이었으나 그것을 구실로

인간들은 헛된 일을 경영하기에 이르렀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다.

그들이 경영했던 헛된 일이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인간의 능력과

이름을 높이고 명성을 떨치자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다는 것이

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종족간의 갈등이나 방언의 혼잡은 바벧탑사건으로

마자초한 심판의 결과인 것이다.

그후 인간들은 방언아니 종족의 단일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나 그 노

력은 무위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방언의

통일 가능성을 예시해 주었다.

물론 오순절의 방언사건은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성령의 비상조치였

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이 방언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사건은 그 당시로서는 각각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

들이 공통된 방언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는 기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 차원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서 천국시민들이 사

용하게 될 통일된 방언의 예표적 의미를 제시해준다.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이념이나 관습에 앞서 동일언어의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개인이나

집단끼리는 공동체 형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는 자보 자위 자익을 위해 연합공동체등을 만들었다.

예를들면 안전보장을 전제한 국제연합이라든지 구라파의 정치 경제 통

합을 전제한 EC라든지, 아시아국가들의 아세안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한부적 연합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합집산이 가

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일 뿐이다.

인간들의 손과 머리로 교파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저마다 색다른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그 간판들은 지상에서만 유효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한시적 지상교회들이 교파지상주의나 교권지상주의

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생단체들 가운데 교회만큼 그 뿌리가

깊고 그 나무가 큰 공동체가 없다. 그리고 교회만큼 힘을 가진 단체도

없다. 교회는 두가지 힘을 향유한다.

하나는 조직속에서 생성되는 가견적 힘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임

하는 신령한 힘이다. 그것은 곧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인 것이다.

교회는 그 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 나가며 발전해 나간

다. 교회는 지엽적이거나 자질구레한 사건들이라면 견해를 달리하고

입장을 달리한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들, 예를들면 진리수호라든지 교회의 존폐 문제라

든지 선교의 장애가 발생한다든지 하는등의 사태가 돌발할 때는 뜻과

행동을 집합한다.

그것은 교회의 궁극적 목적과 지향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다양성속의일치를 실감할 수 일아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것은 바로 교회이다.

소리없이 잠잠한 것같으면서도 건드리면 그 소리가 큰 공동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면 그 반경이 큰 거인 침묵하다가도 포효하는 생

명체, 바로 그것이 교회인 것이다.

그뿐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섰다하면 교회라는 빈축을 받

으면서도 그 깊이를 따져보면 단 하나로 귀결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도 정권도 그 어느 집단도 교회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

고 심지어 무신론 세계속에서도 죽지않고 생명력을 지녀온 강인한 공

동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영원한 교회로 들림받을 때까지 계

속하여 성장할 것이며 성숙을 향해 진일보하게 될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113

분 류 : 조직신학

95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다양한 종족과 언어의 출발은 바벧탑사

건 이후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의 상태는 한 언어, 한 구음,

한종족이었으나 그것을 구실로 인단들은 헛된 일을 경영하기에 이르렀

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그

들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다.

그들이 경영했던 헛된 일이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인간의 능력

과 이름을 높이고 명성을 떨치자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자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종족간의 갈등이나 방언의 혼잡은 바벡탑사건으

로자초한 심판의 결과인 것이다. 그 후로 인간들은 방언이나 종족의

단일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나 그 노력은 무위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방언의 통일 가능성을 예시해 주었다.

물론 오순절의 방언사건은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성령의 비상조치

였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이 방언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

다. 오순절의 방언사건은 그 당시로서는 각각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공통된 방언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는 기적을 이해된다.

그러나 그 사건은 차원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서 천국시민들이 사

용하게 될 통일된 방언의 예표적 의미를 제시해준다.하나의 민족 공동

체가 형성되려면 이념이나 관습에 앞서 동일언어의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개인이나 집단끼리는 공동체 형

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는 자보 ( 自保 ) 자위( 自衛 ) 자

익 ( 自益 ) 을 위해 연합공동체등을 만들었다. 예를들면 안전보장을

전제한 국제연합이라든지 , 구라파의 정치 경제 통합을 전제한 E C 라

든지, 아시아 국가들의 아세안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한부적 연합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합집산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일 뿐이다. 인간들의

손과 머리로 교파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저마다 색다른 간판을 내걸

긴 했지만 그 간판들은 지상에서만 유효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한시적 지상교회들이 교파지상주의나 교권지상주

의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생단체들 가운데 교회만큼 그 뿌

리가 깊고 그 나무가 큰 공동체가 없다. 그리고 교회만큼 힘을 가진

단체도 없다. 교회는 두가지 힘을 향유한다.

하나는 조직속에서 생성되는 가견적 힘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부

터 임하는 신령한 힘이다. 그것은 곧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인 것이

다.

교회는 그 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 나가며 발전해 나

간다. 교회는 지엽적이거나 자질구레한 사건들이라면 견해를 달리하고

입장을 달리한다. 그러자 중대한 문제들, 예를 들면 진리수호라든지

교회의 존폐 문제라든지 선교의 장애가 발생한다든지 하는등의 사태가

돌발할 때는 뜻과 행동을 집합한다.그것은 교회의 궁극적 목적과 지향

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다양성속의 일치를 실감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이다. 소리없이 잠잠한 것 같으면서도 건드리면 그

소리가 큰 공동체, 없는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면 그 반경이 큰 거인,

침묵하다가도 포효하는 생명체, 바로 그것이 교회인것이다.

그뿐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섯다하면 교회라는 빈축을

받으면서도 그 깊이를 따져보면 단 하나로 귀결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도 정권도 그 어느 집단도 교회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고

심지어 무신론 세계속에서도 죽지 않고 생명력을 지녀온 강인한 공동

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영원한 교회로 들림받을 때까지 계속하여 성장

할 것이며 성숙을 향해 진일보하게 될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벧엘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104

분 류 : 조직신학

96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 하나 )

구약성서 창세기에 의하면 다양한 종족과 언어의 출발은 바벧사건 이

후부터였음을 알 수 잇다. 그 이전의 상태는한 언어, 한 구음, 한 종

족이었으나 그것을 구실로 인간들은 헛된 일을 경경하기에 이르렀고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고 그들

을 온 지면에 흩어 버리셨다.

그들이 경영했던 헛된 일이란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 인간의 능력과

이름을 높이고 명성을 떨치자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

다.

오늘 우리가 겪는 종족간의 갈등이나 방언의 혼잡은 바벧탑사건으로

자초한 심판의 결과인 것이다. 그후로 인간들은 방언이나 종족의 단일

화를 위해 노력해 왔으나 그 노력은 무위로 끝나곤 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은 방언의 통일 가능성을 예시해 주엇

다.

물론 오순절의 방언사건은 복음의 세계화를 위한 성령의 비상조치였

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이 방언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순절의 방언사건은 그 당시로서는 각각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

들이 공통된 방언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었다는 기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 차원을 넘어 영원한 세계에서 천국시민들이 사

용하게 될 통일된 방언의 예표적 의미를 제시해준다.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려면 이념이나 관습에 앞서 동일언어의

사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의사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개인이나

집단끼리 공동체 형성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는 자보 자위 자익을 위해 연합공동체등을 만들었다.

예를들면 안전보장을 전제한 국제연합이라든지, 구라파의정치 경제 통

합을 전제한 EC라든지, 아시아 국가들의 아세안등을 들 수 잇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한부적 연합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합집산이 가

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나일 뿐이다.

인간들의 손과 머리로 교파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어 저마다 색다른

간판을 내걸긴 했지만 그 간판들을 지상에서만 유효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한시적 지상교회들이 교파지상주의나 교권지상주의

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생단체들 가운데 교회만큼 그 뿌리가

깊고 그나무가 큰 공동체가 없다. 그리고 교회만큼 힘을 가진 단체도

없다.

교회는 두가지 힘을 향유한다. 하나는 조직속에서 생성되는 가견적

힘이며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임하는신령한 힘이다. 그것은 곧 눈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다것이다.

교회는 그 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 나가며 발전해 나간

다. 교회는 지엽적이거나 자질구레한 사건들이라면 견해를달리하고 입

장을 달리한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들, 예를들면 진리수호라든지 교회의 존폐문제라

든지 선교의장애가 발생한다는지 하는등의 사태가 돌발할 때는뜻과 행

동을 집합한다.

그것은 교회의 궁극적 목적과 지향점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다양성속의 일치를 실감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면 그

것은 바로 교회이다. 소리없이 잠잠한 것 같으면서도 건드리면 그 소

리가 큰 공동체 없는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면 그 반경이 큰 거인 침묵

하다가도 포효하는 생명체, 바로 그것이 교회인것이다.

그뿐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섰다하면 교회라는 빈축을 받으

면서도 그 깊이를 따져보면 단 하나로 귀결되는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도 정권도 그 어느 집단도 교회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

고 심지어 무신론 세계속에서도 죽지않고 생명력을 지녀온 강인한 공

동체인 것이다.

그러고 그 교회는 영원한 교회로 들림받을 때까지 계속하여 성장할

것이며 성장할 것이며 성숙을 향해 진일보하게 될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113

분 류 : 조직신학

97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현대인 모두는 결핌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자원 식량 산소등 삶의 기본적인 것들로부터 가치 정신 신앙등 형이상

학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넉넉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러다보니 마음의 여유도 없고 삶의 여유도 없다. 그 결과는 뻔하

다, 각박하고 살벌한 경쟁적 삶의 양상이 풍미하고 있다. 문제는 정

신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들이다.

돈이 모자라면 아껴쓸 수 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 어느 정도까지의

조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 빈곤이나 나아가 영적 결핍증은 해결

의 길이 많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결핍의 근원이 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예를들면 인간들이 마루잡이로 버린 산업쓰레기나 화폐폐기물들이 환

경을 망까뜨리고 나아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다.

죽어가는 환경과 함께 인간도 죽어가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타락한

심성이 그 주범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풍요로운 것이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에덴

동산에의 정경은 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엇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진정

한 의미나 가치는 경관의 아름다움만은 아니었다.

악이 없는 세상이라는 점이 그 동산의 심미였다. [추미] 도 아름다움

이라고 한다지만 그러나 악이 미적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인간의 악이 에덴동산의 환경을 파괴하고 시작했고 생명을 잃어버린

적막의 동산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환경파괴의 역사는 산업화의 부

산물만은 아니다. 이미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던 창세기

3장에서 환경파괴는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모든 빈곤이나 결핍의 원인은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되

었고 태초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고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은 염려의 한계를 넘어 생존문

제와 직결되기에 이르렀다.

경제문제전문가들과 환경연구가들 그리고 미래학자들은 이러한 심학

한 국면들이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한데나리온에 밀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게6:6)라고 했다. 이것은 식량 값폭등에 대한 예언이다. 소말

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는 매년 수백만명이 기아로 굶어 죽어가고 있

다.

그런가하면 지구촌 한쪽에서는 식도락을 즐기고 향락산업이 번창하는

모순이 전개되고 있다. 제아무리 내 것이라고 해도 내멋대로 쓸 권리

는 없다. 그것은 반사회적 작태일뿐이다. 교회는 풍요로운 마음과 영

혼을 일구는 터전이다.

경쟁과 긴장으로 연속되는 삶의 경주를 잠깐 멈추고 자신의 영성을

되찾아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는 쉼터이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로서의 위상 정립에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

다. 교회는 역사 현실 위에 그 몸체를 세우고 존재한다. 현실을 외면

한다든지 사회의 아픔을 도외시하는 것은 교회본연의 태도와 위배된

다. 신앙의 힘은 각박한 마음과 삶속에 윤활유를 주입시켜준다.

그래서 여유있고 넉넉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준다. 바울 같은 경우

[나는 비천과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고 실토했

다. 얼마나 멋진 삶의 자셍니가. 그리고 그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그가 지녔던 신앙과 가치관 때문이었다.

인간이 향유해야 될 영원한 풍요를 지평선 위에서 찾는 것은 무모하

고 어리석다.영원한 것은 영원한 데서만 찾을 수 있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102

분 류 : 조직신학

98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으리 위하여 [사람은 가치로 결정하고 물건은

값으로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질좋은 물건일수록 값이 비싸고 효용가치가 높을수록 부가가치도 높

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은 값으로 가치를 정할 수 있다.

소유는 수천억이지만 가치는 만원꼴로 못되는 경우가 있는 가하면

소유는 작아도 그 사람이 지니는 가치는 억천을 넘는 경우도 있다. 인

간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사느냐이기 보다는 얼마나 바

로 사느냐이다.

그렇다고 해서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이유는 소유 자체가 악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가치관의 정립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은 아니다. 상당기관

동안 자아실현과 함께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처한 문화

사회 때문에 그 사람이 처한 문화사회 환경이라든지 가족 구성 그리고

삶의 과정등이 가치관 형성을 결정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흔히 인격이 표현되는 창구를 셋으로 본다. 하나는 지적 능력

의 창구이다. 바로 알고 판단하는 일련의 지적행위들을 의미한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흑과 백을 바로 알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이 있

을때 바른 삶을 지켜나갈 수 있게 된다.

둘은 정적인 창구이다. 정서나 느낌이나 감정의 표현등을 일컫는다.

신앙도 지적신앙만을 강조하다보면 감정의 메마름 때문에 윤기없는 피

부처럼 되기 쉽다.

인격의 경우 역시 정적부분이 개발되고 발달될때 훈훈하고 인정이 넘

치는 삶이 가능하게 된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야 된다는 말

은 그런 의미에서 깊이 새겨야할 말이다.

셋은 의지적 창구이다. 확인하고 판단하고 느낀 것을 실천하는 행동

을 의미한다.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삶과 접목시키는 의지적 노력이 없다면 그것은 팔 잘린 신체와 다를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 삶의 도장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성경의 진리를 가

르치고 배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이중성과 사회구조의 이중구조때문에 가슴아파한

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역사의 삶의 정황속에 실현하기위해

행동한다.

기독교인의 잘못된 삶때문에 지탄이나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아니

다. 그것으니 잘못 정립된 소수 기독자의 가치관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든지 교회의 가르침이 잘

못되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에서 기독교신앙에 근거한 애국은 특정목적이나 부가가치를 전

제하지 않은 순수한 것이며 진실한 것이다.

예를들면 교회마다 때를 가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 동기가 정권을 장악해 보겠다든지 대권을 넘겨다 보려는데 있

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은 가치관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지 못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정립된 가치를 삶속에 적용하고 현실화하는 고달픈 노력이 부

족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익히고 닦아온 가치대로만 산다면 이미 우리사회는 지

상낙원이나 선진국가가 되고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단히 날마다 올바른 가치관을 세우고 그

가치에 따라 사는 가파른 훈련과 연마를 거듭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

는 그일의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빛과 소금의 의미나 가치는 거기서 찾아져야하고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도 교회는 보다 나은 가치창조와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023

분 류 : 조직신학

99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2 )

교회는 다음의 다섯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첫째는 예배기능이다. 교회가 갖는 모든 예배행위는 모든 기능과 행위

에 우선한다.

만일 예배를 소홀히 취급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본질

에서 떠나버린 것이다.

구약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예배를 위하여 성막 성소 성전이 세워졌고

예배에 관한 제반 규례가 제정되었다.

예배기능은 그 대상이 절대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이시다. 피조

물인 인간은 창조주를 향하여 경배와 찬양을 드릴 의무를 지닌채 세상

에 태어나고 그리고 삶을 유지해 나간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생활 속에서 예배가 삭제된다면 그것

은 자신의 의식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삭제하겠다는 도전과 다를 바

없다.

둘째는 선교기능이다.

선교란 기독교의 복음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행위를 말한다.

훗날 선교문제를 별도로 취급할 기회가 오겠지만 교회의 선교는 땅끝

까지 증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절대명령에 근거한다.

절대명령은 절충이나 타협을 배제한다.

액면 그대로를 수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물론 선교신학자들의 견해는

각양각색이다.

기독교의 복음을 문자적으로 전하는 행위를 선교로 보는 입장이 있는

가하면 사회변혁과 개조에 참여하고 주도하는 일련의 사회행동을 선교

로 보는 입장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주된 관심이 인간의 영혼구원에 있는데 반해 후자는

사회현상과 역사현실에 있다.

이러한 상반된 듯한 입장의 차이때문에 두 신학적 견해가 마치 대립

적 관계로 이해될 때가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기독교선교의 진

수는 두 입장이 교차하고 만다는 접목점에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다시말하면 개인의 영혼 구원과 사회구원의 문제는 이원화되어야 할

성격이 아니라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접목을 필요로 하는 관계여야 한

다는 것이다.

셋째는 교육기능이다.

한권의 책인 성서로 민족교육을 시작한 유대인들은 지금도 모든 삶과

교육의 뿌리를 성서에서 도출해내고 있다.

교회가 지향하는 교육의 최종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자]는

것이다.

모든 교육에 목적과 목표가 있듯이 교회교육목표와 최종목표와 목적

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게하자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교회교육이이상이 실현된다면 이상

국가의 실현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넷째는 친교기능이다. 교회는 부단히 선교의 영역을 넓히고 교육의

뿌리를 깊게해 나가면서 더불어 사는 친교기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발생과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친교공동체로서의 기능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은 신인간의 화해를 성립시켰음을 물론,

종서화합과 게층간의 갈등과 반목의 담을 무너뜨렸다.

다섯째는 봉사기능이다.

교회는 철저하게 봉사기능을 수행하는 단체이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옆으로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지구촌가족 전

체를 섬겨야할 기능적 책임을 안고있다.

성경의 교훈은 남을 섬기는 자가 큰 자이며 대접을 받고자 하면 먼저

남을 섬겨야 한다고 교훈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사업기관들은 대부분 기독교가 세웠거나 그 운

영관리를 책임지고 있다. 그도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는 섬기는

훈련을 부단히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씩 사회봉사에 인색한 교회상을 들춰내는 언론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특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회는 자신이 한 일

을 과장하거나 홍보하는데 소극적이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사회봉사에 소극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종교 어느 단체에 못지않게 오늘의 교회는 역사를 싸매고 사회를 섬기

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016

분 류 : 조직신학

100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1 )

신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이상이나 삶은 현실이나 지상적인데 있지

않다 신앙의 결론적 이상은 영원한 것이며 내세적인데 있다.

그러나 현실이나 삶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며 신앙원

리에 어긋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사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해서 였다.

기독교인의 이상은 영원한 것이지만 발 붙이고 사는 삶의 현주소는

현실세계이기 때문에 현실과의 접촉이나 조화가 요청된다.

단 그것은 신앙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성립되어야 한다.

교회란 바로 그러한 바람직한 삶을 훈련받는 곳이며 사회적 응열과 정

화능력을 배양받는 곳이다.

혹자는 1천만을 넘는다는 기독교인의 대사회적 기여도나 영향력에 대

하여 무엇을 하느냐는 식의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1천만이 넘는 기독교 인구가 자리잡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

실이 왜 이 모양이냐는 힐난인 것이다.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교인들 가운데는 다양한 직종과 품성의 소유자

들이 있기 때문에 그중에는 못된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잇다.

그렇다고 해서 극소수의 부정적 결과만으로 기독교 전체를 평가하거

나 매도하는 것은 상식밖의 처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언론의 부정적 시각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하는 올바른 삶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그 사람이 지니는 가치관은 그 사람의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 떼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정한 사람이라면 그 가치의

쟁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최상의 가치로 삼은 사람은 정권창출을

위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그가 지닌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양식과 행동의 방

향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은 실로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 어느 국민학교 저학년교실에서 있었던 일. 장래의 희망을 각각

밝히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는 대통령이 어떤 아이는 실업인이 되고 싶

다고 했다.

그중에 한 아이는 고속도로에 모텔을 짓고 자동차 고치는 서비스센터

와 주유소를 차려 주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유는 얼마전 아빠와 함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차가 고장났는데 주

유소도 없고 차를 고치는 곳도 없어서 고생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

다.

이것은 소박한 소시민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이 우리 사회를 밝고 맑게 해줄 것이다.

둘째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교회는 모든 기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로 하여금 올

바로 살아가는 훈련을 시켜야 한다.

또 1천만 기독굔인들은 저마다 삶의 현장속에서 자기자리를 굳건히지

키며 살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역시 기독교인이 보다 낫다] 라는 평가를 끌어 내야 한다.

바로 배우고 살기만 한다면 그런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은 문제도 되

지 않는다.

기독교인을 단순한 도덕종교나 윤리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한 도덕과 윤리강령을 제시하고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외면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와같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부단히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연무대이며 요람이다.

인격을 다듬고 삶을 가꾸는 정원사의 역할을 교회는 부정적인 면만을

들여다보고 배교를 부채질하는 것은 교회의 진면목을 미처 다 찾아내

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올바른 삶의 도장이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1009

분 류 : 조직신학

101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인간은 일생동안 수를 셀 수 없는 만남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만남들은 희로애락을 좌우하며 행불행을 결정한다.

누구를 만나느냐, 왜 만나느냐 언제 만나느냐에 따라 절망과 고뇌의

숲속으로 굴러 떨어질 수도 있고 행복과 환희의 정상에 오를 수도 있

다.

인간은 요람에서 고고성을 터뜨리기 끈끈한 만남을 체험한다. 가위로

자르면 끊어는 나약한 탯줄에 목숨을 건 한 생명이 모체와의 만남을

유지하며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아니 훨씬 그 이전 부정모혈의 정상적 만남을 통한 양태의 중요성을

외면해선 안된다. 우린 흔히 비정상적 성접촉을 통하여 태어난 생명

을 사생아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그 불명예는 한생명의 일생을 괴롭힌다. 때로는 비극의 원인

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상적 과정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좋은 만남이 있는가 하면 나쁜 만남의 길이가 긴것도 있고 짧은 것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영원에 빗대면 하나의 점이며 찰나에 불과하다. 비

교적 만남이 긴 것을 꼽는다면 부모와 자식 그리고 부부를 들 수 있

다.

그 어떤 우정이나 관계보다 그 만남의 지속기간이 길다. 그러나 그것

도 따져보면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

이별이 있고 사별이 있고 분가가 있고 출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린

여기서 인간은 문이다. 우린 여기서 인간은 홀로 서야 하는 존재라는

당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홀로 서기엔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데 있다.

시련이나 고통, 실패나 좌절, 그리고 나아가 질병이나 죽음 앞에서 어

쩔 수 없는 존재라는데 문제가 임아다.

그렇게 볼때 인간은 버팀복이 필요하고 기둥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네 발걸음을 교회로 옮기는 것이다. 교

회는 만남의 장소이다. 이웃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다. 여기

서 교회가 이웃과 하나님을 만나는곳이라는 것은 만남의 제한성을 뜻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받드시 교회에서만 이웃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소로 정해진 교회는 코이노니아와 하나님 예배의 최

적소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제한된 세월 사오십년의 만남이라는 것은 반목과 갈등,

다툼과 증오로 얼룩지게 마련인데 영원히 싫증나지 않는 만남이 있다

면, 그리고 날이 갈수록 새롭고 신선해지는 만남이 있다면 그 기쁨

을 어디에 비길것인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영적 사건이지 육체적 경험은 아니

다. 함께 차를 마시다든지 가루수 옆길을 걷는다든지 하는 등의 육체

적 접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기 때문에 그 만남은 더욱더 신비롭고 그 만남은 다음과 같은 특

성을 지닌다.

첫째 영원한 만남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제아무리 길고 긴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시쳇말로

검은 머리가 파뿌리되는 만남이라고 해도 그것은 고작 50여년 남짓하

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

둘째 불변의 만남이다.

천년이나 만년을 만난다고 해도 변덕스런 만남은 의미가 없고 지루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영원히 변치않는다. 이유는 영원불

변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생명의 만남이다.

만남때문에 불행해지고 파멸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만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만남을 통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삶을 얻게된다.

넷째 은혜의 만남이다.

절대자와 상대자의 만남,유한한 존재와 영원존재의 만남, 절대 거룩

하신 분과 죄인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린 그 은혜의 교량을 건너

오늘도 하나님을 만난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0925

분 류 : 조직신학

102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 왜 교회에 가야하나 )

[말씀에 의하여 세상은 정복되어 왔으며 말씀에 의하여 교회는 구원

받아왔으며 말씀에 의하여 교회는 다시 정돈될 것이며 비기독교인은

힘없이 쓰러질 것이다]

이 말은 에릭슨이 쓴 [젊은 루터] 에 나오는 말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의지를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했던 힘은 하나님의 말

씀인 성경이었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그 위상을 결정하는 척도는 그 교회가 성경

적인가 아닌가에 있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이 건전한가, 불건전한가를

가름하는 척도역시 성경대로 사는가 살지 않는가에 있다.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 표현하고 기록

했다는데 있다.

다시말하면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읽고 이해하는 것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해석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성경해석이나 공부의 방향과 진전에 따라 신앙입장과

신학노선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동일한 재료지만 재료방법에 따라 음식맛이 달라지고 모

양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한국교회는 성경공부운동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경우는 선교역사의 사경회 역사가 동시적이었다고

할만큼 성경공부와 함께 사경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운동은 계속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교회별 성경공부외에도 선교단체 학원중심 혹은 개인이 이끄는 공부

단체등 그 수를 셀 수 없는 성경공부운동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바람직한 신앙의 성숙을 기대하려면 지적 접근인 성경공부만

을 강조해선 안된다.그리고 정적 접근인 성령운동만을 강조해도 안된

다.

사도행전의 구조는 말씀이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성령의

역사 있는 곳에 말씀의 운동이 일어났다.

자칫 잘못하면 성경공부는 신앙의 정서나 정열을 냉각시키는 역할을

하기 쉽다. 그런가 하면 성령운동은 끈떨어진 풍선처럼 허공으로 비상

할 염려가 있다.

신앙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도 균형잡힌 교회가 건전한 교

회이다.

그리고 올바른 성경공부라야 올바른 신앙과 교회를 정립하는데 제몫

을 하게 된다. 올바른 성경공부는 어떤 것인가.

첫째, 교회중심의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는 교회밖과 교회안의 성경공부는 교회밖과 교회안의 성경공

부로 대별된다. 그리고 교회밖의 성경공부는 건전한 것과 불건전한 것

해서는 안될 것과 괜찮은 것으로 나뉜다.

교회밖의 성경공부의 경우 누가 왜 어떻게 하느냐의 해답이 분명해야

한다.

둘째, 성경중심의 성경공부이다.

[성서로 성서를 해석한다] 는 것은 개혁자들의 성경해석방법론이었

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특정집단이나 개인의 경험, 속단이 가미되거나 강

조 되어선 안된다. 성경의 교훈과 선포가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계시

를 받았다는 등의 허구로 혹세무민해서는 안된다.

에스겔 13장에 의하면 [자기마음에서 나는대로 예언하는 자] [본 것

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자][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

라 예언하는자] [허탄한 것과 거짓점궤를 보면서 예언하는 자] 들은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며 이스라엘 땅에 들어가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리라고 하였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셋째, 실천하는 성경공부이다.

성경공부의 주된 목적은 진급이나 지식축적이나 수료에 있지 않다.

만일 성경을 십년씩 공부하면서도 삶의 변화나 신앙성장의 진보가 없

다면 오히려 중단하는 편이 좋다.

왜냐하면 세월과 횟수가 거듭될수록 말씀역성이 커질것이기 때문이

다. 한말씀 한말씀을 그날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노력과 결단이

있을 때 성경공부의 의미나 진가는 드러난다. 그렇게 볼때 성경공부는

결과가 중요하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발행일 : 920918

분 류 : 조직신학

103

제 목 : 기독교란 무엇인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없이 바른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어렵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과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

교회를 다니긴 하지만 교회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

면 교회생활은 열심이지만 신앙생활은 바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신앙생활은 있지만 생활신앙은 없다고 짖거

한 어느 신학자의 말은 일리가 있다.

바람직한 교회생활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올바른 신앙을 지녔을 때 성립된다.

첫재, 거룩한 공동체이다.

교회의 형성과 성립은 인간의 발상이나 의지에 의해서 된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집단처럼 세속적 조직이나 관리가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의 경우 거룩한 공동체여야 했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내와 남편의 관계로 묘사한 것이나 신약의 경우 신부와 신랑으로 묘

사한 것등이 교회와 거룩한 공동체의 성격을 일별 해주고 있다.

교회는 거룩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마16:18) 이기 때문에

거룩한 동기와 방법으로 운영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교회가 영리이윤추구 집단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곧 교회의 타락을

뜻한다.

기독교 2000년사를 조망해 보면 교회가 집단이익이나 실리추구에 급

급했을 때 세속화되었고 타락했다.

만일 교회때문에 덕을 볼 것인가 아니면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교회에

덕과 유익을 끼칠것인가의 양자택일을 요청받는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회생활이다.

둘째, 선교공동체이다.

교회를 만드시고 이 땅에 존재케하시는 궁극적 이유는 선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본질적 자질을 상

실된 교회이며 존재의의를 포기한 교회인것이다.

교회는 모든 역량과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선교에 주력해야 한다.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는 분부 역시 교회의 사명을 명시해

주고 있다.

우린 흔히 선교를 논할 때 선교사 파송이나 해외선교만을 생각할 때

가 있다. 그러나 선교의 출발은 개인전도에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전도의 경험과 영혼구원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선교를 논

할 수가 있으며 선교단체의 장이 될수 있다.

가령 선교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는 사람들이 선교단체의 장을 차지하

고 있다면 그것은 선교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셋째, 영원공동체이다.

구약의 경우 선택하고 성별된 하나님의 백성은 신약에 이르러 교회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영원한 천국의 예표로 이 지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을 지향한다. 그래서 교회는 한시적 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가 영원적이라는 것은 그 권위와 지속성에 있어서 시간적 제한을

뛰어 넘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해하지

못하는 (마16:18)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은 공동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집단이나 정권도 교회와 맞설 수는 없다.

그리고 교회를 파괴할 수는 없다. 교회는 반석위에 세워졌으며 음부의

권세도 흔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넷째, 그리스도의 몸이다.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속에 드러나는 바울의 교회관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며 교회는 그의 몸이며 우리는 그 몸에

연결된 지체들이라는 것이다.

이 교회론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발가락은 지체의 가장 하단부위에

속한다.

그러나 발가락이 잘리면 온 몸이 전율하고 피가 흐른다. 이유는 한몸

이기 때문이다. 언필칭 교인이라면 겁없이 교회를 욕하고 공격하는가

하면 칼을 휘두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난도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교인이면서도 교회를 객관화 시켜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작태 역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다섯째, 친교공동체이다.

교회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지체로서의 연합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

기 때문에 서로 돕고 보완하는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교회는 반목하

고 질시하는 행위가 용납될수 없다.

손이 발을 미워하고 입이 코를 시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교회는 근본적으로 친교지향 공동체이다. 그리고 반목과 질시로 얼룩

지고 암울해져가는 현실속에서 위로와 사랑의 오아시스가 있다면 교회

말고 어디에 그런곳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른 교회관이 정립될때 바른 교회생활은 성립된다.

자료원 : 국민일보 충신교회 박종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