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생명의 말씀 > 염려말고 삽시다
2 살아있는 교회
3 < 예화 > 자신의 일에 열심인 사람
4 우리의 소원은 통일
5 사랑과 희락과 화평
6 새 사람을 입었으면
7 어디에 만족이 있습니까
8 충성과 온유와 절제
9 인내와 자비와 양선
10 감사의 기도보다 간구 기도가 많음
1
제 목 : < 생명의 말씀 > 염려말고 삽시다
자료원 : 국민일보 박조준 갈보리교회 담임목사
구 절 : 마 6:25-34
⊙ 작은것에도 만족하며 날마다 최선을/마태복음 6:25-34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의 간절한 바람은 마음의 평화입니다.우리에게 건강
이 있고 재능이 있고 지식이 있고 돈이 있다고 해도 마음의 평 화가 없으
면 삶은 악몽이요 고통일 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의 평화를 그처럼 원하면서도 얻지 못하는 이유
는 무엇일까요.우리는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품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불평을 합니다.그 어떤 것이 성취돼도 만족감은 일시
적이며 더 큰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또 우리의 삶에는 항상 수많은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그것을 미리
걱정하는 것도 마음의 평화를 깨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평화를 파괴하는 적은 무엇입니까.그것은 우 리의 마음상태이며 갈
등이란 단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엔 항상 두 가지 본성이 존재합니다.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부
지런한 것과 게으른 것,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정직한 것 과 속이는
것,선한 것과 악한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두 가지가 언제나 마찰음을 냄
으로써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가 힘든 것 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1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
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이것이 인간의 고민입니다.구원
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못한 육신 사 이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는 염려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뿌리 내린 염려는
삶의 생명력과 기쁨을 앗아가며 질병을 갖다주고 의욕을 파괴합니다.
그런데 이런 염려의 상당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필요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남이 잘되는 것에 대한 시기심이나 어쩔 수 없는 당연 한 상황과
자신의 능력한계를 인정치 않음으로써 염려가 발생되는 경 우가 많기 때문
입니다.또 미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상상하며 걱정하 는 경우가 많습니
다.
사도 바울은 이런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 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 어야
합니다.그리고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 앞에 던져진 문제 를 잘 해결
해 나갈 수가 있으며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고 마태복음 6장34절에서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
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앞날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우리는 넘지
않아도 될 산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건너지 않아도 될 강을 생각 하며 염려
하고 있습니다.우리의 실제 삶속에서 하지 않아도 될 염려 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하루씩 살아간다는 것은 내일에 대한 오늘의 삶의 의미를 갖습니
다.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생동감 있게 감사와 기쁨을 느끼며 사는 것이 중
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매우 귀한 존재라는 사실
을 누 차 강조하셨습니다.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 대
해 결코 소홀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우리는 걱정과 근심을 떨
쳐버리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새로운 힘과 용기가 솟아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
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우리는 어려움이 많고 앞날이 불투명하고 걱정과 염려 가
많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깁시다.그리고 신앙안에
서 홀가분하고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발행일 : 930304
분 류 : 설교
2
제 목 : 살아있는 교회
자료원 : 박조준 목사 갈보리교회 예장통합
구 절 : 행 2:37-47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신 후 50일째 되
던 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믿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신 것은 사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
게 여러가지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부탁도 하시면서 한 가지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그것은, [내가 장차 너희를 떠나지마는 너희로 하여
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이요, 내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이 보혜사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계실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사신 후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시기를 바로 전에 연
약한 제자들을 불러 놓고 분부하신 말씀이 [예루사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것, 곧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다락방에 다같이 모였습
니다. 모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열흘 동안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열흘만에 오순절 아침을 당했는데, 갑자기 이
상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같은 것이 들려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혀와 같은 불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이상한 현상과 더불어 그 당시에 그곳에 모여 있던 모든 사
람의 마음속에는 성령의 충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열한 사도뿐만 아
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이 성형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
다.
= 이렇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된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될 것입
니다. =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 시
대의 교회가 이때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 날로써 성령의 시대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5절에
세례요한에 대해 증거하기를,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
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자
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벱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전에 삼손도 성령이 함게 할 때 능력을 얻어 불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울 왕도 성령이 함께 할때 능력 있는 왕이 되었습니
다. 다위 왕도 어린 소년 시절에 성령이 함께 해서 온 이스라엘 군대
가 두려워 떠는 적장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쳐 죽였습니다. 소로몬 왕
도 성령이 함께 하여 지혜의 왕이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가
령 이사야 44장 3절에 보면,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러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
게 내리리라] 고 하셨습니다.
요엘서 2장 28절에는 [그후에 내가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
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구약 시대의 결론을 지은 세레요한도 마가복음 1장 8절에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
례를 주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34절에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
거든 그가 공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는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분사입니다. 시간성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은 오순절 그 당시
에만 임하고 마는 걱이 아니라 오늘도 임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
습니다.
= 더구나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온 우주적인 축보입니다 =
요엘 선지가 강조한 것을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가 인용했습니다. [내
가 내 신을 만민에게 주리라] 성령은 남녀 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민
족을 차별하지 않고 임하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
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
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오순절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 베드로가 설교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 하루
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계속적인 축복입니다. 요한 보음
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서서 외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던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령에 이
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
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G.C.RYLE감독은 [성경은 어떤 부분은 금 글자로 인쇄된 부분이 있는
데 바로 이 말씀이 그 중의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수의
강이 뭇 심령 속에 흐를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특별한 축복,우주적인
축복,계속적인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말씀하는 성령은 그저 예수 믿게 되는 것만을 의미한 것
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 다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가리켜 위대
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
다.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
을 통해서 이와같은 고백을 하게 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와같은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
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시간에 신앙 고백을 하는데, 이것은 형식으
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데 의미가 있
는 것입니다.
=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에 속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마는, 아
직도 육신에 속해 있어서 마음에는 기쁨도 사랑도 평화도 없습니다.
사람들끼리 당파를 짓기를 좋아합니다.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예수
를 믿기는 하면서도 시기하는 마음이 있고 다른사람이 손해 보고 아파
하는 것을 보면 은근히 손뼉을 칩니다. 어떤 때는 죄를 범하고 마음이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의 확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언제나
주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기쁨과 사랑과 평안이 마음에 가득
합니다. 그 생활에는 감격과 감사가 가득하고 발전과 성장과 승리가
있습니다.
= 그러면 살아 있는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
바꿔 말해서 죽은 교회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
면 사데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수호자며 지지
자라는 것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게까지 될 때, 외형적인
기독 교회는 황금기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교회는 내적
으로 부패하고 무력하게 되어 결국 생명을 잃어가는 교회로 되어 버리
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수호자는 하나님이 되어야지 세상의 권력자가 교회의 수호자
가 될 때 교회의 생명은 잃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가 교
회를 옹호할 때 외형적인 교회는 성장하고 번성하고 활개를 치게 될지
모르지만 참된 교회의 모습은 사라지고 맙니다.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의 장식품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 행
사에 교회의 성직자를 세워 복을 받게 만듭니다.
권력을 짊어지고 있는 성직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
는 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가
하는데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게 됩니
다.그러므로 거기에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교회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스빈
다. 살았다는 이름뿐이고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주님께서 보실 때 너무 인위적인 것이 많았떤 것 같습니
다. 그럴수도 있을 것이, 권력자가 교호를 전적으로 후원하게 되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무엇을 하든지 권
력자의 처사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 교회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동안 살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
게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하여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무엇을 말합니까? 겉 모양만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의 모든 것을 갖추었습니다. 굉장한 조직이었
습니다.
그러나 거기 생명이 없을 때 그것은 살았다하는 이름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교회가 있다 해도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
게 되면 그 교회는 있으나마나 한 교회입니다. 아니 오히려 있어서 냄
새만 피우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죽은 교회는 부패하고 맙니다. 더럽습니다.
발행일 : 940517
분 류 : 설교
3
제 목 : < 예화 > 자신의 일에 열심인 사람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 목사
* 제목은 원제가 아닙니다. -KCM-
샘물같이(10월호 서문)
우리 한국의 동양화가 중에 혜촌 김학수 화백은 한국동란 때 북에서
혼자 남하하셔서 오늘까지 40여년을 북한에 두고온 가족을 생각하며
혼자 지내시는 분이십니다. 김화백은 어릴때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서 보는대로 그림을 그리고 아름다운 상상이 떠 오를 때 그것을
그리는 생활을 칠십평생 정진하는 동안에 대가가 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말하면 그림 한 폭을 그리면 수백,수천만원을 받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오는 세대에 남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구상한것이 한강전도입니다. 1300리가 넘는 험준한 한강줄기를
여러 번 답사하시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이제 그 그림을 마치면
400미터의 길이를 가진 세계 최대의 그림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 매일 여덟시간 이상을 작업하시는데 문자 그대로
식사시간을 잊어버리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복잡한 사념이 들어올 시간도 없다고 하십니다,
삶의 정열을 가진 어른이십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평생에 유혹을 받으신 기회가 있느냐고 묻는 젊은이에게
"유혹? 유혹에 빠질 시간이 있어야지"
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발행일 : 940309
분 류 : 예화
4
제 목 : 우리의 소원은 통일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 갈보리 교회 박조준 목사 ***
시편 126편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살다가
본국에 돌아온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아
직 포로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동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
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이소서. 눈물을 흘리
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자
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4-6)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신음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광복의 기쁨을선
물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감격도 잠시뿐 남북이 분단된 가운데 40여년 동안 소식마
저 끊기고 말았습니다. 북한의 2천 5백만 동포들은 지금도 자유를 누리
지 못한 채 신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1천만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히 기도한다면 남북의 장
벽이 허물어질 것을 믿습니다.
" 하나님, 이 민족에게 진정한 해방을 주시옵소서." 우리는 한 목소리
로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
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지금 어느 정도 응답을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늘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나타나기시
작했습니다. 소련이 변화되더니 중국마저 잠가둔 빗장을 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남북한 탁구단일팀이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뜨거운 동족
애를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포루투갈에서 남북한축구청소년 단일팀이선
전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원'을 목이 터지도록 불러대는 남북응원단을 바라보면서 손
바닥만한 구름이 점점 커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그 작은 구름이 소낙비로 변하게 될 것을 굳게 믿습니다. 북
한의 동포들에게 복음의 소나기가 내려 신앙안에서의 통일이 이룩될 것
을 믿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 소나기는 훨씬 더 강하게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한국은 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통
일은 세계평화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민족 최대의 선물인 복음안에서의 통일을 허락해 달라
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5
제 목 : 사랑과 희락과 화평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구 절 : 갈 5:13-26
*** 사랑과 희락과 화평 ***
본문:갈라디아서 5:13-26.
갈보리교회 : 박 조 준 목사
= 내 용 =
오늘 아침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스
도인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 자유에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서 방종한 생활과 살고 있는 것을 지적합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
의 자유란 절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 봉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 그 참 모습이 들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참 그리스도
인의 자유를 계속 누릴 수가 있습니까? 그 답은 성경을 쫓아서 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를 자유로운 상태에 머물게 해 주십니다. 성경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육체에 정력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우
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삶에
서 의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자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를 북돋아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가 없다
고 하시면 우리의 자유는 숙명적으로 방종으로 흘려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그 본성이 자꾸만 살아남을 경험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때
까지는 바울이 말하는 대로 선한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바로 하려고 할 것이면 날마다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육신이 죽고 영이 사는 생활"이것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스도 교인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육
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
면서도 아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떠나지 못하기 때문
에 육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말씀 가운데 기록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고 그랬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냐 하는 걸 보면 무슨 열매를
맺었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포도 열매를 맺었으면 포도나무임에
는 틀림없습니다. 사과를 맺었으면 사과나무임에는 틀립없습니다.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라고 하지만은 그 생활의 열매가 육신적인 열매를 맺는
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은 아직도 교회는 다니지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입니
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육신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
으로 받을 수 없다고까지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에 속한 사람은 어떠한 열
매를 맺습니다.? 오늘 아침 읽은 말씀 가운데 아홉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이 아
홉가지를 오늘 아침 다 생각할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중에서 세가지
사랑과 희락 그리고 화평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
니다.
요사에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는 흔해 은혜 충만히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
다고 자랑을 하고, 간증을 하고 심지어 자기처럼 되지 못하는 사람은 성령충만
히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우까지도 보게 됩니다. 사실 성령을 충만
히 받는 사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라고 할 것이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
각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듣기는 들었지마
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영적인 싸움에서 약하고 겁이 나고 맥이 없어
서 결국은 마귀에게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5장에서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
은 것은 당연한 일이요, 또 해야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
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나타나는 현상은 여러 가지이기때문에 한 마디로 말
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 생활과 인격이 열매로 나타나는
데 대개 아홉가지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기 되는 사랑과 희락 그리고 화평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그
리스도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인
에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으뜸되는 희락은 하나님 안에서의
희락이고, 가장 그윽하고 깊은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방문했을 때 형편을 여러분은 잘 기억하실 것
입니다. 처음에는 바울의 가르침을 잘 받아서 신앙 생활을 바로 잘해 왔었습니
다. 그런데 바울이 얼마 동안 자리를 빈 동안에 거짓 교사들이 살그머니 들어
와서 유대교의 할례에 대한 교훈을 아주 교묘하게 가르쳐서 저희가 크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서로 믿음으로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다 없어지게
되고 미움과 시기의 싹이 자라게 되고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발견했습니다.
사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음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저희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에게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으로 이 모든 약점을 덮어 줄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
회 성도들의 마음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거짓 교사가 들어가게
되고, 거짓 영이 들어간 다음에 성령의 역사가 줄어 들게 될 때는 전에는 상상
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여간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얼마나 얼마나 사랑했었습니까?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보세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
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얼마나 사랑했으면 바울에게 눈이 라도
뽑아 줄려고 했을까. 왜요? 바울이 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에 그 밝
은 광채를 본 다음에 눈이 좀 나빠지지 않았어요. 바울이 복음 전파 하는데 제
일 지장되는 게 눈병이거든요 그래서 아예 차라리 내 눈하고 바꾸었으면 선한
눈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할 정도로 눈을 뽑아 줄려고까지 했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저희에게서 사랑이 없어질
때 사랑의 반대인 미움의 행위가 나타나게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성령의 첫째 열매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이 계명을
명령으로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보세요." 새 계명을 너흐이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
가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8절에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요한 1서 4장 19절에도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
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
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잠언 25장 21절에
보면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은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했습니다. 자, 이렇게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데, 여러분 우리의 마
음은 어떻습니까? 안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가 없습니다. 이게 고백입
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게 되면 사랑 안하고는 못견딥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헬라어에는 사랑에 대해서 세가지 낱말이 있습니다.
"에로스" 라는 말을 있습니다. 이것은 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가페"라는 사랑이
있는데 이것은 신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에로스"정적이고 "필리
아" 인간적인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신적인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귀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요긴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면서
그 결론이 믿음.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
랑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너무 너무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가령,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
정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이 없는 가정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가족을 가지면 뭣합니까? 사랑이 없는 지옥인데 아무리 큰 집을 쓰고
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랑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남
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말씀할 때도 제일 강조한 것이 큰 집 사라, 높은 지위
얻어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할 때는 그리스도
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주신 것처럼 아내를 위해서 모든 걸
주는 사랑을 하라고 그랬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는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범사에 순종하며 사랑하는 것처럼 남편에게 범사에 순종하며 사
랑하라고 했습니다. 부부간 뿐이겠습니까? 가족 사이에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
간에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동포끼리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보세요 영원한 것입니다. 얼마 동안 사랑하다가
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할 때는 뭐 없이는 못 살것 같이
사랑하고 누가 반대해도 사랑하다가 얼마 안 가서 서로 사랑이 없어져 가지고
이혼하는 것을 봅니다. 이게 왜 그런줄 압니까? 이건 아가페적인 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것, 인간적인 것 언제
나 변합니다. 얼마 못 갑니다. 그러나 영적이고 신적인 아가페 사랑은 영원합니
다. 사랑은 길이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그랬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가페의 사
랑입니다. 사랑은 웅변적인 말이나 공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실제적입니다.
사랑은 큰일을 가능케 하는 믿음도 아니요 우리가 드리는 예물이나 예배가 아
닙니다. 그러면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에 간략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
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
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믿으며 바라며 참으며 견딘
다는 말의 순서를 보세요. 참는다는 말과 견딘다는 말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런
데 바울이 이 두 낱말 사이에 믿으며 바라며라는 말을 넣고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참으며 견디는 사랑을 완전히 보충해 주고 있습니다. 믿으며 바란다는
말은 미래의 뜻을 포함한 말들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인정하지만 그 고통이 지
나면 승리가 있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수고가 따르지마는 절대로 짐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만큼 행복합니다. 한 사람 사랑하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열 사람 사
랑하면 그만큼 넓게 행복해집니다. 백 사람을 사랑하면 행복의 그 범위가 그만
큼 넓어질 겁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면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
랑은 허다한 허물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원수들에게 돌에 맞아 죽으
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된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원수까지도 사랑
하니까 얼굴이 천사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볼 때 사랑으로 보세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천사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미움으로 보는 사람의 얼굴을
보세요 마귀 보고 싶으면 그저 그거 보면 됩니다. 왜요? 미움은 마음이 괴로워
서 그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볼 때 사랑으로 보아야 합니다. 성령 충
만히 받았다고 하면서도 남의 흉이나 보고 미워하고 하는 것은 성령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여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분이 계십니까? 무엇 가지고 알
수 있습니까? 사랑이 충만한가 그렇지 못한다. 하는 걸 보면 분명히 압니다.
복잡한 과정이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희락,기쁨은 성령의 둘째 말입니다. 사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기쁨의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13장 사랑의 열매를 말씀했고, 14장에는 평화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
했고, 15장에는 기븜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공통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와 같은 열매 가운데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 부터
왔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기준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기쁨도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평화도 세상이 준 것 같이 아니한 주님의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
의 종교입니다. 참 신앙에는 반드시 기쁨이 동반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에 주
는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은 세상에
주는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주신 기쁨입니다. 참된 기쁨은 주님
께 속해 있습니다.
시편 100편을 보아도 "온 땅이여 여호와를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
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했습니다. 세상이나 육신이 주
는 기쁨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기쁨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의 기쁨은
환경과 조건에 의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기뻐하고 흐린 날은 슬퍼
합니다. 일시적인 기쁨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기쁨은 영혼의 기쁨이요 하늘의 기쁨이요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내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맑아도 기뻐하고 흐려도 기뻐합니다. 형
통해도 기뻐하고 역경에도 기뻐합니다. 건강해도 기뻐하고 병들어도 기뻐합니다
들어와도 기뻐하고 나가도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의 마
음이 슬플 때는 무려해집니다.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우리에게 새
로운 힘을 더해 줍니다. 기뻐하는 생활이야말로 능력 있는 생활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기쁨으로만 하면 힘들은 게 없습니다. 똑같은 일이라
도 기쁨으로 하는 것과 기쁨 없이 하는 것은 하늘과 땅입니다. 가정에 일을 보
는 주부님들이 이 더운 여름에 집에서 빨리하고 밥을 기쁨으로 해 보세요. 내
식구가 맛있게 식사를 할 것 생각하고 기쁨으로 해 보세요. 내 식구가 깨끗한
옷을 입을 것을 생각하고 기쁨으로 빨래해 보세요. 힘이 덜 듭니다. 일이 잘
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주부가 기쁨이 없이 불평과 원망 가지고
일을 해보세요.' 나는 이 더운 여름에 밖에도 못 나가고 빨레나 푹푹.'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보세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일은 같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환난이 많고 죄악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성령을 통해서 기쁨을 소유해야 우리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혼란을 이기고 어려움이 변하여 밝은 날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일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들어 고생하는 여자를 고쳐 주었는데 이것 때문에
억울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억울해 하지도 않았습
니다. 그러면 저들에겐 감정이 무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오는 하늘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밤중
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미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듣게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에 간수도 예수를 믿게 되고 그의 가
정에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한
하늘의 기쁨은 놀라운 기적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봉사생활을 해도 기쁨이 필요합니다. 약한 사람을 도와 주고, 가난한
사람을 붙들어 주며 병난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역경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
아 주는데 힘이 필요합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옵니까? 주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오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때 우리가 봉사 생활을 할 수 있는 능
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봉사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수시로 닥치는 시험을
이기는데도 마음에 심령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임하는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라야 다가오는 모든 시험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빈 집에 도둑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예배당
도 다닌다고 하고 신앙 생활도 한다고 했는데 시험에 빠집니까? 교회는 다니지
마는 참 신앙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니까 마음 속에 성령을 통해 오는 기
쁨을 소유하지 못해서 그럽니다. 그 마음이 비어 있으면 마귀가 그 안에 쑥 들
어옵니다. 참된 신앙으로 그 마음 속에 주님이 주신 기쁨, 영혼의 기쁨으로 충
만한 사람은 세상의 기쁨을 볼 때 시시하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
에 기쁨을 볼 때 시시하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에 기쁨의 노래가
있으면 내 영혼에 참 만족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세상에 더러운 죄악이 침노
하지를 못합니다. 아직도 그런 기쁨 없습니까? 세상에 뭐 좀더 좋은 게 없겠나
생각해서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다가 마귀에게 딱 잡히고 여러분 마음 속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시험에
들지 않게 되시를 원합니다.
화평 이것은 세째 열매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
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이란 피상적이고 일시적입니다. 그것은 재물이나 지위
나 권력 같은 세상 환경에서 오는 것이고 또 다시 그 환경이 빼앗아가는 평안
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된 평안입니다. 환견에 좌우되지 아니하는 평안입니
다.
여려분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신앙 생활하면 아무
런 어려움도 당하지 아니하고 평안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
면 기독교나 미신이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
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준다 하였습
니다. 예수님의 평안이 무슨 평안이겠습니까? 육신적인 평안이겠습니까" 아마
육신적인 면을 따진다면 예수님처럼 고생한 사람이 세상에 없을 겁니다. 보세요
예수님이 날 때 어디서 나셨습니까? 마구에서 나셨습니다. 갓난 아기 때 애굽
에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30년 자라면서 아버님 목수의 집에서 고생하며 자랐
습니다. 학교라고는 문 밖에도 못 가보았습니다. 외국여행 한번도 못해 봤습니
다. 책이라곤 한 권 쓴 것도 없습니다. 전도하시는 동안에도 얼마나 고생하셨습
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는 깃들일 곳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어서 고생스러운 생활을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쫓아 다니면서 눈에 불을 켜고 이렇게 말하면 요렇게 비난하고 저렇게 말하면
저렇게 음모하는 이런 가운데 살다가 나중에는 십자가를 지신 분이 아닙니까?
예수의 일생은 육신적으로 말하면 한 마디로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며 여기 말씀하시는 주님에 평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령에 평안을 의
미합니다.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지마는 그 심령의 평안을 빼앗기
지 아니하는 참된 평안이었게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마음의 평안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언제나 같이 하는 생활을 할 때 오늘 깊
은 심령의 평안입니다. 사실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주님과 함께 한 사람은 언제
나 이런 심령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 왕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
데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환영하는 것을 본 헤롯은 좀더 인
심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도 헤아려고 사도 베드로를 구속해서 깊은 감옥에
가두고 군인들로 하여금 단단히 지키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형편을 언제 어떻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데
성경에 보게 돼면 베드로는 그날 밤에 감옥 안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던지 천사가 와서 깨울 때까지 잠을 잤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일 형장의 이슬이 될 수 밖에 없는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깊고 편안히 잠잘 수가 있었습니까? 그 마음이 평안했기 때문입
니다. 주님의 평안을 소유한 사람은 어떤 환경과 처지에 이르던지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새 흔히 말하는데 천만원짜리 침대에 누워서도 마음에 평화가 없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좋지 않은 단칸 방에 살아도 편안하게, 마음만 평안
하면 그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화평이 있어야 무슨 일을 해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화평이 있어야 건강도 좋아집니다. 마음이 화평해
야 학생이 공부를 잘 합니다. 마음이 화평해야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장사를 잘
합니다. 여러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그를 믿는 사람 마음 속
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불안과 초조 가
운데 사는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 충만히 받아서 사랑이 여러분 마음 속에 넘
치게 되실 바랍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화평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임해서 진정한 평화를 맛보며 이 험한 세상
을 살아갈 때 성령의 열매 가지고 승리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6
제 목 : 새 사람을 입었으면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 새 사람을 입었으면 ***
갈보리 교회 ; 박 조 준 목사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서 첫 반 부분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나중의 반 부분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부분에 대해서 언급
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먼저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 대해서 말한 다음
에 조금 전에 읽어 주신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
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새 사람을 입었을 때 소극적인 면을 어떻게 나타
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다음 주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대한 적
극적인 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려고 합니다.
이미 주신 말씀 17절에 보면 "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고 말씀했습니다. 이방인 그러니
까 옛 사람과 그리스도인이 다시 말해서 새 사람의 삶을 완전히 대조적으로 말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새사람이 되었으면 옛 사람으로 살아 갈 때와는 완
전히 다르게 살아야만 합니다. 옛 사람의 생활은 마음이 허망한 것으로 살았습
니다. 소위 실존주의 예술, 문학 및 철학이란 것은 인간의 공허성,인간의 무미
성, 인간의 초조함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허망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는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
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말하자면 옛 사람의
생활은 죽음과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인간 아니 하나님이
내버린 인간의 생활이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경계
있습니다. 그것을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라기보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그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신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그가 죄를 범해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아니한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때 그저만사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사실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 그러는 줄 압니까? 하나님이 아예 내던
져 버렸습니다. 될대로 되라 하고 버렸습니다. 버림 받은 존재를 아무리 죄 지
어도 거기에 대한 형벌을 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사람의 생활
태도가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19절을 보세요.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
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24절 이하에
도 비슷한 말씀들을 봅니다.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
했고,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다"했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감당지 못한 일을 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29절에 이하에
보게되면 "곧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한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
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
시여 내어 버려둔 사람이 바로 이렇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타난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천로역정에 나타난 기독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에 자기 자신이 놀
랄 정도로 멸망해 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제
일보입니다. 사실 복음 알기 전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게 못했
습니다.옛 사람의 생활 모습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감각 없는 자의 생활이었습니
다. 아파도 아픈 것을 모르는 생활이 감각없는 생활입니다.
더러워도 더러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생활이 감각없는 생활입니다. 죄를 범하면
서도 죄를 느끼지 못하는 생활이 바로 알지 못하고, 바로 느끼지 못하고, 바로
원할 줄 모르는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굳어져서 바로 느끼지 못하고 소원이 잘못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방탕에 방임해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올바른 신앙에서 떠난 것에서는 반드시 도덕적
인 방탕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소돔성에 그랬고, 고대 헬라가 그랬고, 고대 로
마가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서 자신을 방탕에 방임해서 모든 더러운 욕심을 따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감
각이 없다는 말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양심의 감각이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화
인 받은 양심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범하면서도 죄로 여
기지 아니하고 죄로 하나님을 삼으며 부끄러움을 오히려 영광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새 사람을 옷 입은 사람은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20절을 보십시
요.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 원문에 보
면 너희라는 말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옛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는 저희라는
말로 씁니다. 저희는 어두음 속에서 그 마음이 허망한 것을 행하고 총명이 어
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감각이 없어 부끄러운 것을 모르고 모든 더러운 생
활을 자행하는 자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오로지 너희만은 다른 사
람들은 몰라도 너희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배우
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까? 22 절을
보십시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
어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려고 할 것이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버
려야 합니다. 거듭나지 못했던 육에 속한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 영이 완전히 새로워져야 합니다. 벗어버리자고 버린다고 하는 것은 수양이나
교육이나 또는 훈련을 통해서 점점 더 개선되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사람은 완전히 죽어 버리고 새 사람으로 전혀 새롭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벗어버린다고 하는 말은 침례교에서 침례를 받을 때 침례
받는 세례복을 입기 위해서 평상복을 벗어버리고 침례복으로 갈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도 어두움이 이를 벗어버리고 빛에 갑옷을 입자고 말했
습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새롭게
하십니다. 로마서 12:2절의 말씀을 보아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
라 " 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은 심리를 가리킵니다. 사상의 중심을 말합니다. 새
사람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의
인격 전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구약 잠언에도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의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그 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겨에 보면 생각은 두가지가 있습
니다, 하나는 위에 것을 생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땅에 것을 생각하는 것입
니다. 위에 속한 생각이 있고 땅에 속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비록 땅에 살지만 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언제나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
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
는 것을 보아서 내가 위에 속해 있느냐 아니면 땅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을 나
스스로 판단 할 수 있습니다.
칼 칠치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게
뭐냐 하는 걸 알려면 뭐 그렇게 어려운게 아니고 밤에 자다가 戚을 번쩍 뜨는
순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 그게 바로 그 사람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잠을 자자다가 눈을 번쩍 뜨는데 주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이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잠을 자다가 눈을
번쩍 뜨는 순간 돈 그럽니다. 그건 돈 찾는 사람입니다. 아마 연애라는 사람은
눈 번쩍 뜨는 순간 미스 김 그럴 겁니다. 그건 미스 김을 찾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 속해 있나.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게 뭐냐 이것을 스스로 판
단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된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위에 것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 새롭게 되어라는 동사를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 부정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매일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속 사람이 매일 새로워질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의 그 사람도 새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 사람을 입었으면 어떻게
나타납니까? 다섯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거짓말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25절에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했습니다. 옛 사람이 주는 진
리보다 더 좋은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어 새 사람을 입었으면 새
사람된 증거로 거짓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에도 아홉째 계명에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말했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계명을 가장 많이 범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치고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거짓말은 나쁜 것입니다.
잠19:9절에도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고 경고했습니다. 옛날 아덴에는 거짓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했다고 합니다. 애굽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발
견되면 그 사람의 코와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애굽에서는 거짓말하는 사람은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이 거짓말을 하게 됩니까? 사실과 내 생각을 구별하지 못하는데
서부터 생기는 게 거짓말입니다. 가령, 그 아무개 아주 불친절해. 그 사람이 아
주 교만해, 그 사람 무슨 일이든 독단적이야 하는 이런 말들을 흔히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사귀어서 알고 보면 그 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발견하
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나 나 개인과 인상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 내가 받은 인상
이 꼭 정확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 소문이란 것은 정확한 것이 못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정확하다고 해도 좋지 않은 말은 아예 묻어 버리고 될
수 있는 때로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부족하기
때문에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부
족하기 때문에 실수가 있고 잘못이 있습니다. 실수 없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기억하지 말고 그것을 잊어야 합니다. 오래 기억하고 씹고 또 씹
으면 쓴물만 나옵니다. 잠언에도 땔감이 없으면 불이 꺼진다고 하는 말이 있습
니다.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사람이 없으면 자연히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의 물건을 도적질하는 것도 큰 죄지만은 훔친 물건을
사는 것도 공범입니다. 마찬가지로 나쁜 소문 전하는 것도 안 좋은 일이지만 그
이야기 재미있게 들어주는 것도 같은 죄를 범하는 일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본성이 타락됐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좋은 이야기
하면 별로 관심 없이 이렇게 더운 때는 건들건들 졸다가도 나쁜 얘기.흉보는 얘
기 하게 되면 벌떡 깨 가지고 흥미 있게 듣는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직도 새 사람을 입은 사람으로 마땅히 할 바 아닙니다.
전에 성 어거스틴는 그가 주도하던 식당에서 남의 허물을 얘기하는 사람은 식
당에서 환영하지 않습니다라는 글을 써 붙인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닌게 아
니라 식사를 달라면서 남의 허물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친구끼지 모여서 소나
닭잡아 먹다가 나중에는 친구까지 잡아먹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로 말
하면 교역자들 구역을 책임지고 심방하는 분들, 교인댁을 방문하는 분들이 끼치
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것 보십시요. 저 사람 아주 나쁜 사람이야. 밑에 손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남을 향해 찌르는 손가락이 둘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이 나머지 손가락은 누구
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둘이 남을 향하고 있으면 셋이 나
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흉보지 맙시다. 흔히 예수님도 말씀하
신 대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흉보기가 쉽습니다.
이런 경우뿐만 아닙니다. 언론이도 조심해야 합니다. 기사를 잘못 냄으로 다른
삶의 명예가 손상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침소봉대해서 남의 허물을 보도
하기 쉽습니다.
이사야처럼 우리의 입술이 성령의 불로 깨긋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입
술로 다른 이의 상한 마음을 고쳐 줄 수 있고, 약한 사람을 튼튼하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이 입으로 슬픈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고 튼튼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입으로 슬픈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고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말하고 진실을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서로 지체
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라에게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면 다른 지체가 고통
당하면 또 다른 이 지체도 고통을 당하는 게 사실아닙니까?
둘째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6절-27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
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1:19-20절에도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분 혹
은 성내는 것은 사사로운 일로 인해서 분을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사사로운 분, 공적인 분, 의로운 분이란 게 있습니다
나와 대립되는 감정 때문에 싸우는 분을 사분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분을 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런 분노는 될 수 있는대로 내지 말고 분이 난다고 해도
될 수 있는대로 더디내고 혹시 분을 내었더라도 오래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
다. 또 내게 잘못한다고 하더라도 분을 곧 풀고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분한
마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결과가 돼서 결국은 시험에 빠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니까 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신 말
씀에도 "분을 내어도"라고 말씀했습니다. 분을 낼 수가 있스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카인이 아벨에 대해서 분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그만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것
도 형제 사이에 살인의 비극이 벌어지게 된 걸 기억하게 됩니다.
카인이 아벨에 대해서 분한 마음을 품고 있다가 그만 인류 역사상 최초로 그것
도 형제 사이에 살인의 비극이 벌어지게 될걸 기억하게 됩니다. 분한 생각이
나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마귀가 틈탈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
입니다. 부부가 한몸이라고 말함니다만 어떤때는 생각이 안맞는수가 있고 이것
때문에 언쟁이 벌어지기도하고 심하면 손이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아여간 그렇
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쪽에서는 아예 딱 화를 내고서 부엌에 나가서 이젠 내가
말도 안한다고 싹 돌아 섭니다. 돌아서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
은 그 사람과 이틀도 말안하고 사흘도 말안하고 딱 버티고 있습니다. 아주 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세요. 분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마셔야 합니다. 해가 지도
록 품으면 반드시 마귀가 부부사이에도 시험합니다. 곧 푸셔야 합니다.
분한 마음은 마귀의 온상과 같습니다. 분한 마음이 있으면 악덕과 음모를 일으
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분한 마음을 오래 품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는 도둑질
하지 말라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8절에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 여덟째 계명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입니
다. 이 말은 남의 재산을 존중히 여기라는 계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가장 어렵고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계명
을 범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에 손해를 주고 법에
걸려서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절도
와 강도는 교도소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더 큰 도둑은 교도소 밖에
있습니다. 도둑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예배
당에는 예배하는 사람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때는 도둑이 들어옵니다. 그
래서 헌금을 훔쳐 갑니다. 가방을 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감고 기도하는 동
안에 훔쳐 가지고 달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험한 세상이요 조심해야 할 세상
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미국 뉴욕에서 훔치기 잘하는 유명한 총각 남자기 있었
습니다. 시카고에 소매치기로 유명한 두목 여자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
에 어떻게 뉴욕 소미치기 대장 남자하고 시카고 소매치기 대장 여자하고 우연히
만나 알게 되어서 서로 사랑하게 되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애를
낳게 되었습니다. 산모가 병원을 가서 해산을 하는데 애가 나오면서 손을 꽉 지
고 나왔습니다. 간호원이 목욕을 시키는데 손을 펴 보았더니 애기 손에서 금반
지가 하나 있습니다. 이상하다 해서 알아보았더니 자기 손에 금반지를 어느새
애가나오면서 빼 가지고 나왔습니다. 물론 그거 만든 얘기입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입니다. 험한 세상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고 빈궁한 자를 구제하라고 했
씁니다. 도둑질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직
한 상행위를 통해서 부당한 이윤을 얻는 것도 말하자면 도둑질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소를 잡는 사람들이 근수를 조금 더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소에다가 물을 먹여 잡아가지고 물 먹은 만큼 더 받아 먹는다면 그의 소가 어마
어마 하다고 합니다. 이것도 사실은 도둑질입니다. 반면에 남의 일을 맡아서
일하면서 일삯 만큼 일하지 않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내가 30만원에 합당한 일
을 해야지 안하는 건 그거 도둑질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도둑질하지 말고
도리어 빈궁한 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제손으로 추구하고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자본가가 되는 게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기심을 가지는 것은 죄입니다
부유하게 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욕심을 가지는 것은 죄입니다. 이윤
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입니
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그것
도 도둑질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도둑질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게 되
면 악을 행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있는 것이 많고 넉넉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게 있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게 되면 하나님이 그것을 채워 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리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 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더러운 말 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선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 말씀한 후에 우리의 입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놀라운 선물입니다. 짐승이 아무리 훌륭하고 영리하다고 해도
말하는 짐승이 없습니다. 말하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에만 부여된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특권을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여기 더러운 말은 영어로 Eagle Talk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악한 말이란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싸프러스란 말인데 썩은 나무, 썩은 열매란 뜻이 있습니
다. 썩은 나무, 썩은 열매란 뜻이 있습니다. 썩은 것은 더럽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해도 건설적인 말이 아니라 파괴적인 말, 화합하는 말이 아니라 갈
라 놓는 말,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깍아내리고 비틀고 헐뜯고 맥빠지
게 하는 말은 더러운 말입니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시면서 '이 독사 자식들
아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는 마음이 가득한 것이
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면 다른 사람 헐뜯고 손해
시키는 말 대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북돋어
주는 말을 해야할 할 것입니다. 잠언 12:18절에 보면 "혹은 칼로 찌름 같이 함
부로 말하거니와 지례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입
을 통해서 나오는 말의 남의 가슴을 칼로 찌는 것 같이 고통을 주는 생활이 되
어서는 안됩니다. 양약처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치료해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0절에 "하나님
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
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일 무엇임을 성경에 밝혀 말씀했습니
다.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거짓말과 도둑질과
더러운 말 이런 것들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왜 우리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구속의 날까지 인을 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에 소유
된 인을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기쁨과 승리 그리고 영
광의 부활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인을 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바
로 그 보증인 것입니다.
31절-32절에 버릴 것과 취할 것을 말씀하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다 버
려라 . 그리고 교회가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취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
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새 사람을 옷입었습니다. 그랬
으면 부정적인 요소를 다 버리고 하나님 따라서 , 예수님 따라 사는 삶에 축복
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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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어디에 만족이 있습니까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 어디에 만족이 있습니까 ***
갈보리교회 : 박 조 준 목사
오늘 아침 우리는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이 전도서를 기록한 분은 유명한 솔
로몬 왕입니다. 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동안 인간이 살아가는데 좋게 생각하고 흠모하는
몇 가지 면에서 그것이 사람들이 밖에서 볼 때는 좋아 보일런지 모르지만 사실
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읽어 주신 말씀 가운데 10절 이하에 말씀을 특별히 중심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가령, 인간이 육신적인 괘
락을 즐겨하는데 물론 그것이 순간적으로는 좋아 보일런지 모르지만 잠시 잠깐
뿐이고 그후에 오는 허탈감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
다.
아마 인류 역사상 솔로몬 만큼 육신의 향락을 누려 본 사람도 거의 없을 것입
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육신의 향락
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런지 모릅니다. '육신의 쾌락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 진짜 맛을 몰라서 그럽니다. '아
나처럼 그러니 재미를 보고 말하라고 하지요. 세상에 뭐니뭐니해도 이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일찍이 여러분 즐기신 것 이상의 육신의 쾌락을
다 맛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결론이 육신의 쾌락 그것도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합니다. 훌륭한 사업은 어떻습니까?
솔로몬은 그것도 헛되다고 말했습니다.
가령, 제가 여러분더러 사어비 아무리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거 다 헛됩
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마 이렇게 말씀할 분이 계실런지 모릅니다. 목사님은 사업
을 해 보지 못해서 그러죠. 큰 사업을 한번 해 보면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
습니다만 거기에 재미가 있습니다. 사업이 잘 돼서 사업체가 하나씩 둘씩 늘어
나고 돈이 돈을 모아서 생각하고 계획했던 일이 잘되어가고 사회적으로 어디가
도 인정을 받게 되고 돈도 구애 받지 않고 쓰고 싶은 대로 써 보면 사람 사는
맛이 나죠. 세상에 권력 가진 사람이 뭐 별게 있습니까? 그게 큰 사업을 하게
되면 제 손아래 들어옵니다. 사실 국회의원도 장관도 별게 아닙니다. 모두 우리
사업하는 사람 배경으로 해야 정치도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정치 자금 없이 어
떻게 정치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학자들이 좋다고요. 글쎄요 저는 사업을 하느라고 공부를 많이 못했습
학자들이 뭐 별게 있습니까? 한달에 돈 얼마씩만 주게 되면 고문이란
이름으로 또 그밖에 어떤 것이라도 고용해서 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금력의 세상입니다. 목사님, 이 세상
에선 돈만 벌면 다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면으로 보면
조금 전에 말씀하시는 분에 말씀이 옳습니다. 큰 사업 벌여 놓고 자신도 그 수
를 정확히 기억 못할 정도에 많은 중역진과 사원들을 거느리고 호의호식하면서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만나서 합의하고 함께 의논하고 어디
가나 사장님, 회장님하고 모시게 되면 세상에서 높은 사람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전도자 솔로몬은 그것도 헛되다
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이 여러분 누리는 것 몇 배나 누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려는 분이 계실런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육신이 괘
락이나 큰 사업 같은 것 헛되다는 것이 어떤 면으로는 사실일런지는 모르겠습
니다만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명예나 권세 같은 거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람
이 아무리 돈 좀 있다고 큰 소리치고 제 잘난 체하는 거 우스운 일일런지는 모
르지마는 사람에게 있어서 명예야 이거 얼마나 귀한 겁니까? 명예를 돈주고 살
수 있습니까?
옛말에도 호랑이도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권력 보수 얼마나 멋있습니까? 권력 앞에 누가 감히 덤벼
듭니까? 우리 한국 같은 상황에서는 권력이란 한번 잡아 보십시오. 사람 사는
게 이렇구나 하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저는 그런 권력을 잡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전도자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으로서 권력을 차지
했었고 특별한 지혜를 얻은 왕으로서 인근의 모든 나라의 왕들에게까지 존경의
대상이 되었었고 명예와 덕망을 한몸에 지니고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까? 그럼
에도 불구하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도 헛되어 인간에게 참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건 제 말이 아니고 이런 거 다 경험
해 보신 분의 말입니다.
사실 인간에게 참 행복과 만족을 주는 것은 밖에서 다른 사람이 보는 대로는
아닙니다. 아, 저 사람이야 행복하고 만족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 그분을 찾아가서 말씀해 보세요. 당신은 만족하지요. 행복하지요. 한번 물어
보세요. 여려분이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실 겁니
다.
제가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어느 가정으로부터 심방 요청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인이 저녁이 되어야 들어오니까 목사님 수고스럽지만 저녁 7시 후에 시
간 맞쳐서 오시는데 다른 교회 식구들 다른 분 데려오시지 말고 혼자 와 주세요
꼭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약속한 시간에 그 댁에 갔
더니 방배동에 있는 아주 고급 주택가의 부촌입니다. 한 보통 대지만 하더라도
5백펴이 넘고 집이 100평이 넘는 큰 저택들이에요. 또 들어가 보니까 아주 잘
꾸며 났습니다. 사장님으로 계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간다고 했더니 그 댁의 할
머니, 사장님 내외분, 아들 내외, 손녀 아직 출가하지 않은 두 딸이 있었는데
다 기다리고 있다가 아주 정중하게 영접을 해 주었습니다. 뭐 나무랄 때 없고
부족함이 없고, 만족스러운 이런 행복한 가정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부를 묻고 '어떻게 사업이 잘 되시냐' 하고 물었더니 사장님
말씁이 '사업이야 혼자 하는 거아니고 여러분이 다 함께 하는 거니까 뭐 별거
있겠어요. 이제 제가 며칠 후에 미국을 위주해서 몇 나라를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세요. 그럼 혼자 가시나요.' 그랬더니'아니요 우리나라에서 사업하는 사업
계 몇 분이 대표해서 함께 가게 되었고 아마 이번에 가게 되면 경제분야에 대해
서 의논할 일이 있어서 미국 대통령도 만나 뵙게 될 것이고, 외국의 경제 각료
들과도 만나 뵙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눈물이 글썽해
서 저에게 호소하는 것처럼 말씀했습니다.
제가 이 얘기를 하는 것은 남의 가정 비밀을 얘기하자는게 아니고 그날밤 저
는 그 댁에서 본 일 같은 꼭 같은 일들이 우리 교회에서도 성도님들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목사님, 우리 이 이를 좀 잘 인도해 주세요.' '아, 글쎄요. 제가
아는 대로 사장님 바쁘신 가운데도 출석 잘 하시지요. 또 주변 분들에게도 확실
하고 착실한 분으로 인정을 다 받고 있는데 또 무슨 걱정할 게 있으세요.'
'글쎄 목사님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못해서 그래요. 이 이가 교회를 나가긴 나
가두요 아직 멀었어요. 교회 일보다 사회 일에 더 열심이니까요. 그리고 나이도
오십이 훨씬 넘었는데 앞으로는 교회 일에 좀도 힘써야 되지 않겠어요. 근데
그렇지 못해요. 교회는 생각이 거의 없고 그저 예배당 나가는게 고작이에요.'
아내 마를 듣고 있더니 사장님이 말을 가로 막으면서 '아니 이봐 목사님한테 별
얘기를 다 하네. 아니 내가 월급받는 사장으로서 월급 받는 만큼은 일해야 될
거 아니요. 또 당신도 아는대로 여기저기 관계하는 데가 여러 곳 있지마는 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거 아니요. 나라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니 안 할 수 없잖
습니까. 내 사정을 좀 봐 주셔야 될 거 아니요.' 사장님 부인이 말을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것 보세요. 남들은 나보고 얼마나 행복하냐고 다 부러워하고
요. 밖에서 볼 때면 우리가 불행할 조건은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만족하지 뭐
부족한게 있어요. 어떤 친구 사장 부인은 나 만날 때마다 노골적으로 말하기를
[ 나는 당신 남편 같은 멋쟁이와 한번 살아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말하
는데 이거 농담인줄은 아는데 전 그말을 들을 때면 몹시 괴로워요. 외국에
가면 이 이가 무슨 짓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 제
생각 좀 해 보세요. 난 어떨 때는 막 미칠 지경이에요.' 옆에 있던 사장님이
'아' 이 사람이 목사님 앞에서 참 못할 말 다 없네. 아니 내가 전에 외국 갔을
때 내 방에 어떤 여자 다 넣어 주었는데, 그 유혹 뿌리쳤다고 내 당신에게 분
명히 말했잖아.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아직 나는 못 믿어. 애들 앞에서 이것
무슨 창피야.' .' 뭐이 창피해요 다 아는 사실인데요. 그런데 왜 잠자다가 잠
자리에서 요시꼬상, 요시꼬상 해요.' 옆에서 듣다보니 목사 앞에서 싸움하겠어
요. 그래서 제가 '그날 밤 두 분이 주무시지 못했겠네요'하고 말을 잘랐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저녁이 다 뭡니까? 밤새 싸웠습니다. 이튿날은 회사에 나가서
피곤하지만은 짜증이 나서 한참 동안 밑에 사람에게 짜증을 부렸죠.'
'목사님 그 뿐인줄 아세요. 이 이가 이렇게 사업 잘 하죠. 영어 잘 하지요. 외
모 남한테 떨어지지 않지요 그럼 무슨 파티를 하면 이쁜 여자들이 졸졸 쫓아 다
녀요. 그러면 이 이는 좋아 가지고 함께 어울려요. 난 그 꼴 못봐요. 그래서 난
혼자 남아 가지고 택시 타고 집에 돌와와요. 이러는 내가 오죽 하겠어요.' '그
럼 그날 밤 또 못 주무셨겠네요.' '못 자는게 뭐에요. 저 사람이 나 죽으면 어
떤 여자와 결혼할까 생각하면 뒤목줄이 뻣뻣해지면서 혈압이 올라 살 수가 없어
요.'
그래서 제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 더해 봐야 소용 없을 것 같아서 '자.
그러면 사장님 할 일이 하나 있네요.' '뭔데요.' '사장님이 부인 외에 다른 여
자 보고 봐도 인사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옆에 있던 부인이 희
색이 만연하여 '아니. 목사님 제마음을 어쩌면 그렇게 잘 아세요. 제가 그래서
수고스럽지만은 목사님 오시라고 했어요.'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대학 다니는
딸들이 있다가 ' 거 남편 노릇하기 대개 힘들겠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밖으로 볼 때는 저 집이 부족한 게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한번 가서 물어보세요. 만족합니까? 아닙니다. 거기에
만족이 있는게 아닙니다. 인간의 만족이나 행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가
산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거기 만족이 없습니다. 인간은 소
유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욱 많은 것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돈이 적을 때보
다 돈이 많으면 욕심이 더 생기는 법입니다. 거기 만족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가난해도 줄줄 알고 풍부해도 줄줄 알아 모든 일에 배고
프며 배부르며 일체 자족의 기교를 배웠노라 했습니다. 이것은 궁곤해서 가난해
서가 아니라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자족의 기교를 배웠다.
그랬습니다.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아는
삶의 비결이고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은을 사랑하고 자기
마음을 거기에 두기 때문에 자기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만족하다고 생각하는 사
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요새 시간을 내서 지역마다 교인들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한 두달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실 심방이란 거 거의 하지 못하고 특별한 환자인 경우 한
번씩 그저 가 보고 했는데 이렇게 교인들 댁을 방문하고 보니까 참 얼마나 내가
목사 노릇 제대로 못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고. 죄송한 마음도 가지게
되고 한편은 교인들도 얼굴 가까이 대하고 또 교인들 사정도 다 듣고 그걸 위
해서 하나님 앞에 같이 기도할 때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고 좋은지 모릅니다.
한 지역에 갔더니 거기는 아파트에 사는 분들이 많은데 열 셋평 아파트에서
사는 분들이에요. 아마 이 자리에도 그 분들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응접실은
없고 그저 현관 들아가게 되면 부엌 있고, 조그만 방 두개 있고, 화장실 하나
있고 그래요. 그런데 거기 수십명이 모이니깐 바글바글 하고 좁은 방이 메워서
어디서 찾아볼 수 없는 화기애애하고 명랑하고 감사하고 또 친절하고 얼마나
간절한지 몰라요. 방이 넉넉지 못해서 고생이 많으시겠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아직은 애들이 어리니까 괜찮다고'하면서 '애들이 혹 크게 되면 문제가 있을
거에요' 하면서 어떤 집에는 이들이 큰 집이 있는 가령, 딸만 둘이든지 아들이
딸하고 있으면 뭐 어릴 때는 괜찮은데 다 큰 다음에 동기간이어도 한 방에 들어
갈 수 없으니까 결국은 아들은 딴 방에서 자고 큰 딸아이를 데리고 부모가 같이
잠잘 수밖에 없는데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딸아이가 옷을 갈아 입으려고 하면 아
무리 딸이지만 아버지가 앉아 있기 미안하니까 다른 방으로 건너가야 되고 이젠
그런 불편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제가 다른 구역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구역도 아파트인데 그 댁은 좀
넓은 아파트입니다. 방이 뭐 여섯개가 된다고 합니다. 참 괜찮은 아파트인데,
그래서 그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구역에 갔는데 아파트 열 셋평인간 되는데
이렇게 고생을 하더라고 참 그 분 그저 방 하나만 더 있으면 만족하겠다고 그
러더라고 그랬더니 그 주인 하는 말씀이 '목사님,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방이
여섯개인데요. 그래도 만족이 없어요. 방이 여섯개가 아니라 열개가 되어도 만
족이 없습니다.
잠언 30장 15절에 보면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지 아니하다 하는 자가 바로 이와 같으니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거머리 아시죠. 모내기 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다리가 우물우물 해
서 만져보면 시커먼 벌례가 다리에 딱 붙어 있는데 붙어 가지고 피를 빨아 먹
는 곤충입니다. 이 놈의 거머리는 왠만큼 먹어서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떡해
서 다고 다고 빨아 먹습니다. 인간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렇게 배가 불러도
계속 빨아 먹고 다고 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운 욕망은 만족이 없습니다. 자연은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은혜는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지만 탐욕은 그 어떤 것에
도 만족을 느끼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정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그랬습니다. 돈만 알고 돈만을 사랑
하고 돈이면 다 되고 돈으로 무엇이든지 살 수 있는 것 같지만은 실상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만족과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에스겔 7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
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 은과 금이 절대로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1절에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
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했습니다. 재산이 불어나게 되면 더 좋은 집을
지어야 합니다. 거기에 맞는 가구로 고급 가구를 장만해야 합니다. 재산에 어
울리는 차를 사야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야 합니다. 더 많은 손님을
대접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더 많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것
외에 모든 것. 사실은 내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맡아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법적인 소
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까지도 눈으로 보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진 등기서류에 재산이 많습니까? 그저 눈으로 보고 좋아하는 것입니
다. 여러분 서류에 저금한 것이 많이 적혀 쌓여 있습니까? 눈으로 보는 것입니
다. 실상은 여러분 것 아닙니다. 더구나 소유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그것에
대한 염려도 더하게 되므로 마음 놓고 휴식할 수 있는 여가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주신 12절을 보세요.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
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라." 일반적으로 고단하게 온종일을 산 사
람들은 자기가 일한 것만큼 받게 되면 그것으로 족하고 아무런 고민 없이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의 잠은 몹시도 답니다. 자기도 노동함으로써 인
해 피로하기 때문에 잠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고 깊이 잠들 뿐만 아니라 그에
게는 잠을 방해 할 정도로 머리를 채우고 있는 염려라는 게 없습니다. 그는 먹
은 것도 먹을 것도 적을지 모르지만은 그의 피곤함이 그의 잠을 재워 주는 것도
소화가 잘 되고 잠도 잘자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지런하게 힘써 일하
는 그리스도인 역시 잠을 잘 잘 수있는 평안히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전도하고, 열심으로 심방하고, 교회에 봉사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편안히 쉴
수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해야 할 사람이 일하지 아니하면 이런 고민 저런 걱정으로 인해서 잠
을 잘 이루지 못한 것처럼 마음의 평화도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
히 일해 보세요. 저녁에는 가만 놔두면 졸려서 잠잘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낮잠을 곤히 자보세여. 밤에 잘래야 잠이 오지 않고 눈은 말똥말똥해서
세상에 그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기가막힐 노릇이 없습니다.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은 단잠을 나는 축복을 받습니다. 일하지 아니한 사람은 마음에 평화도
없고 의심과 번민과 고통과 좌절에 빠져 버립미다. 바꿔 말해서 내가 지금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마음의 평화가 없습니까? 기쁨이 없습니까? 만족이 없습
니까? 감사가 없습니까? 그 이유를 알아보세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변한 게 아니고 내가 변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을 회
복하세요. 첫결심을 가지세요. 그럴 때 약속하신 대로 참 평화, 만족이 여러분
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더구나 소유가 넉넉한 사람치고 마음이 편안하기
가 어렵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없어져 봐야 그게 다니까 편안합니다. 내려가
봐야 그보다 더 내려갈 때도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은 이
돈이 언제 없어지지 않겠나 걱정합니다. 현찰을 많이 서랍에 넣어 보십시요. 잠
이 편안히 옵니까? 언제 도둑이 들어오지 않나 해서 얼마나 겁이 납니까? 이거
맘이 안 놓인다 해서 은행 통장에 갖다 넣어 보십시요. 도둑이 들어와 가지고
통장 가지고 도장까지 달래 가지고 비밀 번화 알아가지고 은행가서 찾을 때까
지 인질로 잡아놓는데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잠이 오지 않습니다. 좀더 많아
보십시요. 요시 실명제 한다는데 언제 실명제 하나 또 그렇게 되면 추적을 당할
텐데 어떡하나 잠이 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자기 땅에 풍보한 소출을 냈을 때 그 부자가 뭐랬습니까
내가 어떻게 할까? 꼭 정했습니다. 소유가 넉넉해서 많이 먹어도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북한에서 한국 동란 때 그러니까 40년 전에 남하해
가지고 빈손 들고 내려와 가지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가 어떻게 강한 분이요.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동안 그만한 형편이 되기까지 그는 그저 문자 그대로 안 먹고 안쓰고 열심히
돈만 벌었습니다.
그분이 양복 한번 제대로 입는 걸 난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작업복이고 넥
타이를 매워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언제나 작업복, 신발도 그저 다 꿰진 것
신고 다니고 그랬습니다. 돈 안쓰기로 유명했구요. 주위 분들 하고도 무슨 회
식하더라도 언제나 얻어 먹었지 자기 돈 내서 대접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돈 모았습니다. 그런데 육십이 되면서 생각이 좀 달라지기 시작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돈 모으느라고 안 먹고 안 쓰고 이렇게 살았는데 이제는
현찰이 몇 십억 정도 재산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좀 먹어도 괜찮겠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대단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생각하기를 그래도 내가 평생 먹고 싶던 것이 있었는데 그건
쇠고긴데 돈 모으려고 내가 쇠고기 한번 먹지 못하고 살았는데 앞으로 쇠고기
르 좀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어떤 쇠고기가 좋겠나 생각하더니 그래도
딱딱하고 맛도 부드럽고 고기질이 좀 괜찮은데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거 햄버거
가 있다고 하는데 그거 먹으면 값도 그만하면 싸고 맛도 괜찮고 부드럽고 괜찮
겠다 싶어서 어떻게 어떻게 해 가지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햄버거를 한보따리
사다 놓고는 그걸 큰 냉장고 안에 냉동고에 집어 넣고서는 이 분이 아침에도
햄버거, 점심에도 햄버거, 저녁에도 햄버거 그저 하루 세께 내내 햄버거만 먹습
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돈 벌 때는 그런거 먹어 보지 못하고 시장에 나가서 먹을 때
는 꼭 700원짜리 짜장면만 먹었습니다. 평생 짜장면만 먹다가 이 햄버거를 먹으
니까 하! 맛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저 내가 이렇게 맛이 있는 햄버거
를 못먹고 여태껏 살았구나. 이제라도 고기를 먹게 되었으니 감사하다. 그저 먹
을 때까지 먹자 해서 몇 달 동안 아침 점심 저녁으로 햄버거만 먹는데, 아. 그
러니까 몸도 전에 보다 좋아지고 이것 봐라, 역시 사람이 이렇게 잘 먹어야 몸
도 나는 거 아니냐. 자기 몸이 좀 부대해지는게 그렇게 대견할 수 없었습니다.
6개월 동안을 그랬는데 6개월 동안 아침도 햄버거, 점심도 햄버거, 저녁도 햄버
거를 먹었는데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가서 알아 보았더니 동맥경화증이 심하
다고 했습니다. 햄버거를 자꾸 먹어 보세요. 동맥경화증이 틀림없이 생깁니다.
너무 잘 먹어도 병이 생깁니다.
전에 아하수에로 왕 같은 분은 주연이 파한 다음에 손님들 다 보내놓고 잠자리에
드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시편에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습니
다. 오늘 주신 말씀 13절에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
유주가 재물이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왜 많은 재물이
해를 끼치기 쉽습니까? 재물이 많으면 사람이 대개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세
상에 마음을 두기가 쉬워서 그럽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씀했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세상의 유혹도 많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재물 많으면 자연히 세상에
끌려 가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걱정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다가 놓쳐
버립니다.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 가지고 날아가 버린다고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늘 주신 15절 -16절을 보세요.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
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이것도 페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
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그랬습니다. 여려분 세상에 올 때 많은 것 가지
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빈손 들고 옵니다. 또 가실 때 많은 것 벌어 놓은 것
가지고 갈 자신 있는 분이 있습니까? 빈손 들고 올 때처럼 가야 한다는 말입니
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공수래 공수거'란 말고 같은 말입니다. 빈손 들고 왔
다가 빈손 들고 가요. 아랍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 죽은 다음에 입는
옷이 뭡니까? '수의'입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그럽니다. 없기 망정이지
있으면 다 집어 넣고 갈겁니다.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는 게 세상입니
다.
여러분, 이 말 오해하지 마세요.그럼 예수 믿는 사람은 돈도 벌지 말고, 명예
도 소용 없고 권세도 누리지 말고, 지식도 얻지 말란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가지고 내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이걸 바로
사용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어디서 만족을 얻으려 했습니까?
내 만족은 주께 있나이다. 이런 고백을 다 할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
다. 내가 만족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육욕의 것으로
그의 잔이 넘치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을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잔이 넘치리라. 만족하리라" 말
씀했습니다. 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
라. 어디에 만족이 있습니까?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모시고
우리 남은 생애를 만족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9
제 목 : 충성과 온유와 절제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 충성과 온유와 절제 ***
갈보리 교회 : 박 조 준 목사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중 여섯가지를 생각했습
니다. 첫째, 세가지 열매인 사랑과 기쁨 그리고 화평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말합니다. 둘째, 세가지 열매인 인내와 자비 그리고 양선은 그리스
도인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 맺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오늘 생각하게 될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그리스도인 자신에 대해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나무가 좋으면 열매도 좋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입
니다. 나무는 좋은데 열매가 나쁘다 하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나무가
어떤 나무냐 하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무엇으로 이것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생활의 열매를 보아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입
니까?" 라고 무을 때 그들에게 대답하신 말씀은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을 보아
서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너희가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지금하고 있는
일을 보고 네가 무엇인지 판단하라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
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일날 찬송과 성경책을 끼고 예배당에 나오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았으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다
니면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아닙니다. 제자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
로서 화평케 하는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불합케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열매 아홉가
지 가운데 그 마지막 세가지 충성과 온유와 절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충성입니다. 성경에 보면 충성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충성이란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충성은 하나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나
님은 미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한 대로 꼭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아들
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땅을 주셨습니다.
여호수아 21:4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충성 혹은 미쁘심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는 그 품
격에 있어서 충성이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을 만한 것
과 같이 그 자녀된 우리도 다른 사람이 믿을 만한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사실 사람에게 아무리 재주가 많고 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충성의
요소가 그 성격에서 결여된다고 할 것이면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으로 볼 때 지식인과 기술자는 상당히 많이 양성이 되었
습니다. 물론 지식과 기숙이 현대 사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말로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제가 듣는 대로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나가서 많은 건설공사를
하고 또는 우리 국내에서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 가지고 외국에 수출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가 보면 건설공사에도 하자가 생기고 물건을 만들어
흠이 생기고, 그런데 다른 선진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건축을 했다가 하자가 생
긴다든지 물건이 잘못된다든지 하면 다시 받아 가지고 물건을 바로 만들든지 건
축에 하자가 생기면 그 어디에 잘못되고 왜 그렇게 됐는지 상당한 시간과 경비
를 소비하면서 연구하고 뜯어 고치고 이유를 파악하느라고 노력하는데, 우리나
라 사람들은 건축공사를 해놓았는데 하자가 생기면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책임
자를 만나 가지고 뇌물을 주면서 좀 잘 봐 달라고 그래서 무바시킨다고요. 이것
은 신실하자 못한 사람들의 생활 방법입니다. 이런 것은 반드시 고쳐야 세계 경
쟁에서 이길 수가 있지 무마시키거나 눈감아 달라는 것 가지고는 경쟁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재능과 능력은 좀 부족해도 충성된 사람이 종래에는
축복을 받고 성공합니다.
이웃나라 일본 사람이 아주 참 약삭빠른 데가 있고 얄미운 데가 좀 솔직히 있
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세계적으로 앞장서서 나가는데 그 중 하나는 진실합
니다. 무슨 일 맡겨 놓으면 누가 감독을 하던 안 하든 자기 할 일을 다 합니다.
잘못되면 고칠 것 다 고칩니다. 이번 2층에 와이드 비젼을 일본 사람들이 와서
설비했습니다마는 우리 기술자들이 보고 감탄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
들 같으면 두 즐 있는 것 한 줄로 맞추면 그렇게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수백개 되는 줄을 맞추고 또 맞추고 밤새도록 하는
일에 그만 감동을 했던 거예요. 세상에서 성공할려면 진실하면 성공합니다.
잔꾀 가지고는 얼마 못갑니다.
우리가 다 재능과 지식과 기술이 타고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
는 삶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이 꼭 알아야 할 품
격은 누구나 다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충성된 남편,충성
된 아내, '충성된 부모,충성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충성된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느 사회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다 믿어 줍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의 무슨 직분을 맡았다고 해서 명함
까지 가지고 다니면서 선전을 해 믿게 만들어 놓고는 곧 돌아서서 사기를 칩니
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면 그 책임이 세
상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보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공부 좀 못 해도, 돈 좀 없어도, 집
이 좀 없어도 다른 건 없어도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 이게 보람 아닙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충성된 자녀를 찾으시고 충성된 사람을 더러 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충성의 열매를 알아 보실 수 있습니까? 얼마를 맡았던지 충성
해야 합니다. 적든지 크든지 충성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소위 달란트
비유가 그것을 말해 줍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사람, 두 달란트 맡았던 사람
이 갑절을 남겨 가지고 왔을 때 주인이 말하기를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
은 일에 충성했으니 내가 큰 것으로 네게 맡기라라' 말씀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라야 큰 곳에도 충성합니다. 어떤 사람은 요긴하게 맡아야 하고
큰일 맡겨야 한다고 하지 조그만한 일 맡기면 그까짓것 시시해서 안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큰 것 맡겨도 사실 제대로 못합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가서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있으면서도 종의 일에 충성
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인데 종살이 할 사람인줄 아
시요.' 그리고 그 일에 충성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불평하고 원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요십은 종이 되었을 땐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이굽의
총리가 되어서 큰 직분 맡았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었어도 그 자레에서 충성했
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목장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있으면서 양 주인에게 충성
했습니다. 나중에는 온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몰입대두였고 그 왕
의 자리에서 충성되게 자기 책임을 담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 맡았으면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처음 얼마 동안은 충성되게 성실하게 일합니다. 처음 몇 해 동안
은 성실하게 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충성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때는, 학생 때는 충성했다고 하는데 사회이이 되어서도 충성합니
까? 어떤 분은 결혼 전에는 충성했다고 하는데 결혼 후에도 충성합니까?
어떤 분은 가나나할 때는 충성했다고 하는데 돈 번 후에도 충성합니까? 어떤 분
은 한가할 때는 충성했다고 하는데 바쁠 때도 충성합니까?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했습니다. 시종
여일하게 충성해야 합니다. 한 직장에서 20년, 30년 근속한 분을 왜 존경합니까
? 물론 옮길 기회도 있었겠지만은 자기가 맡은 일 끝까지 20년, 30년 일했으니
얼마나 충성된 일꾼입니까? 더구나 충성은 어떤 환경에서도 충성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뿐 아니고, 잘 될 때뿐만 아니고, 칭찬 들을 때뿐만 아니라 어려울 때
잘 안되고 욕이 돌아오고 무시당할 때 충성하는게 참된 충성입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에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을 볼 수 있고 가정이 어려울
때 어진 아내를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맡은 청지기입니다. 우리에게
재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지식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지위가 있습니까? 우리
에게 재물이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위탁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인인 것뿐입니다. 관리인은 맡은 것이 자기 것은 아
니지만은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충성할
수 있습니까?
디모데 전서 1:1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충성에 대한 비결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능력을 주는 분도 그리스도
이고 나를 충성되다고 인정해 주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 속
에 감사와 감격이 있었습니다.
나는 능하기 못한데 내게 능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충성되지 못한데 충성
된다고 인정해 주어서 이런 귀한 직분 소중한 직분을 맡겨 주셨으니 내게 맡겨
주신 이 직분을 내가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 안타
까운 마음이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맡았던지 맡은 일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만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온유입니다. 항상 주님 말씀한 가운데서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
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8절 이하에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
로 오라 내가 너희는 쉬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2장에도 장
차 오실 메세아에 대해서 예언하신 가운데 장차 오실 분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이렇게 온유하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소개한 것은 양처럼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양은 다른 짐승에게 손해를 입는 일은 있
어도 다른 짐승을 손해를 입히는 것이 없는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양과 같이
온유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심령을 충만히 받게 되면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
를 닮아서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이 우리의 성품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온유한 성품의 사람은 어떻습니까?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겸손합니다.
혹 우리 가운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니 , 뭐 하나님께 대해서 교만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
지 아니합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께 대해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많고
또 겸손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
는 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시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내게 어떤 불행이나 어떤 고통, 어떤 실패나 어떤 슬
픔이 온다고 해도 온유한 사람은 불평하지 아니합니다.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하시나 하면서 원망하거나 반항하지 아니합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
서도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 낙십하거나 좌절되지 아니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할 것이면 조용히 참고 견대는 것이 온유한
사람이 하시는 일이라고 할 것이면 조용히 참고 견대는 것이 온유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그저 순종합
니다.
보십시요. 전에 요셉이 그처럼 억울하게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가게되고 거
기서 종살이를 하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
금도 불평을 하거나 누구를 시비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
하거나 형들에 대한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하거
나 형들에 대한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곳에서 순종하고 자기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전혀 그의 책임이 아닌데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갑자가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리게 되고 하루 아침에 귀한 자녀 10남매가 몰사하는 비보가
접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
니다.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고 여호와께서 거두시니 오직 여호
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
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반항하지 아니하고 낙
심하지 아니하고 참고 견대어서 모든 일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무엇이
든지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온유한 성품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쓴
자를 내게서 옮겨 주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온유한 사람은 사람에게도
온유합니다. 구약 잠언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란 말이 있습
니다. 우리나라에서 내려오는 말이란 " 툭 해서 다르고 탁 해서 다르다. 혹은
아 해서 다르고 어해서 다르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해
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건드리고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 버리고 사람의 마음
을 빡빡긁어 내리는 말을 골라서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 왜 그런지 아십
니까? 마음이 온유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을 보는데도 눈은 같은 눈인데 다정한 눈길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
나 같은 눈인데 눈에서 칼이 나는 것처럼 무섭게, 날카롭게, 독살스럽게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부드럽게 대합니다.따라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줄 압니다.
에베소서 4:2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비난하기에만 급급하고
위로하기에는 인색한 것이 현대인의 특색입니다. 그러나 온유와 관용 그리고
용서는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디도서 3:2에도 "아무도 훼방
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부터보고 장점을 보지 못하
는 사람에게는 평생 행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흠만 자꾸 쫓아다니면 찾아
보십시오. 세상에 그거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점, 훌륭
한 점을 자꾸 찾아 보십시오. 이거 말하자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누가 혹시 누
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에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주님께서부터 얼마나 큰 죄를 용서 받았습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큰 죄를 용서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진 죄라야 거기에다 비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용
서 못해서 우리가 얼마나 속이 상하고 그럽니까. 주님은 온유하셔서 자기를 십
자가에 못박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신 것을 꼭 기억하시고
주님의 온유를 본받으십니다.
끝으로 절제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중 지막 열매입니다.우리가
인생을 동조하는데 있어서 승리할려고 할 것이면 절제가 꼭 필요합니다. 고린
도 전서 9:25절에도 "모든 일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한다" 했습니다.
가령, 운동 경기를 하는 선수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절제를 합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가고, 하
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고 그러면 운동선수 되질 못합니다. 절제를 하여 훈련을
받아야 운동선수가 됩니다. 썩을 세상에 면류관을 얻게 위해서도 이렇게 훈련을
하고 절제를 해야 하는데 하물며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절제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몸도 쳐서
복종케 한다고 오늘 본문에 말씀했습니다. 이것 말하자면 절제를 의미합니다.
내 몸을 쳐서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습니다. 절제라는 말은 영어로는 'Self
Control'이라는 말을 씁니다. 자기 자신을 조종하고,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관리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 몸안에는 여러 가지 욕망과 본능이 있습니다. 이 욕망과
본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절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육신
을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유혹과 시험이 일어날 때 이것을 잘 이겨
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의 품격을 열거할 때도 믿음에 덕을,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더 하라고 말
씀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이 아데네에 있는 청년들에게 늘 권한 말이 두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한가지는 네 자신을 알라 하는 말이고 다른 한가지는 네 자신을 다스
리라 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전에 플라톤은 인간의 말과 생활이란 검은 말과
흰 말이 끄는 수레와 같다고 하면서 흰 말은 우리 인간의 이성을 의미하는 것
이고, 검은 말은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생의 수레가 넘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잘 가려고 할 것이면 이성인
희 말이 수레를 끌고 나갈 때 나가야지 검은 말, 육신의 정력과 모든 본능에 맡
기게 되면 그만 수레가 외딴곳으로 가다가 떨어져서 부서져 버리고 만다.
그랬습니다.
우리 동양의 유명한 성년 가운데 공자 선생님도 '군자유삼기'라는 말을 했습니
다. 군자가 세가지 경계할 것이 있다고 가르쳐습니다. 첫째는 젊어서 혈기가
미정할 때는 색에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장년이 되어 혈기가 강하게 되면
싸우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나이 들어 혈기가 쇠한 때는 욕심이
많아지니 노욕을 경계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절제를
해야 인생을 승리로 끝마칠 수가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여러 가지 절제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만 식욕을 절제해야 합니다.
인류의 조상 하와가 시험에 빠진 것이 바로 식욕 때문에 아닙니까? 마귀의 유
혹을 받아서 너 조금 먹기만 하면 하나님처럼 된다 그러니까 그걸 듣는 순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만 같으니까 제 손으로 가서 따 먹었습니
다. 자기만 따 먹을 뿐만 아니라 남편 아담에게 따서 주어서 먹게 만들었습니다
먹는 것을 통해서 시험이 들어옵니다. 둘째 아담되시는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실 때 마귀가 나타나서 가지고 제일 먼저 시험한 것이 무엇인줄 아
십니까?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먹지 못할 것 먹게 만들
려고 하는 것 이게 바로 시험 아닙니까? 옛날 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마
찬가지입니다. 이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왜 생깁니까? 안 먹을 것 먹어서 생기
는 것이 부정부패가 아닙니까? 에서는 그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본을 팔아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정신이 들어서 후회했지마는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오늘도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돈 몇 백만원 몇 천만 때문에 자기의 인격을 팔고, 양심을 팔고,
명예를 팔고, 친구의 의리르 팔고, 나라와 민족을 파는 에서 같은 사람이 얼마
나 많습니까? 먹는 것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안 먹어도 될 것은 안 먹어야 됩니다. 뭐 가끔 잊어버릴만 하면 제가
말씀합니다마는 술 담배는 안 먹어도 살 수 있습니다. 안 먹어도 될 건 안 먹
는게 절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본능은 성욕입니다. 우리가 이것 또한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식욕 자체가 죄가 아닌 것처럼 성욕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잘못 쓰므로 말미암아 다스릴 줄을 몰라서 죄가 들어
여러분 삼손을 기억하지요. 그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 얼마나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감히 삼손에게 달려 들지도 못할 정도였습니
다. 그런데 삼손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 사람에게 그만 붙잡혔
습니다. 손과 발이 밧줄에 꽁꽁 묶였습니다. 두 눈이 뽑혀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에 놀랍던 힘이 다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연자맷돌이나 돌리는
초라한 사람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에 패했습니까? 정력을 다스리는데
패했습니다. 드릴라라는 블레셋 여자 간섭에게 원수에게 매혹이 되어서 정력
을 다스리지 못해서 결국 블레셋 사람에게 결박을 당하고 참혹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삼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력을 다스리지 못하면 오늘 누군나가
그렇게 됩니다. 예배당에 다닌다고 안 그런 줄 압니까? 내 듣는 대로 예배당
그렇게 열심히 잘 다니면서도 정력에 매어서 나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는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무서운 적을 이기고 다스릴 수 있습니까? 성령이 힘밖에 없습
니다. 결심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힘으로도 몸으로도 못합니다. 어떤 분은 자
기 부인 앞에 잘못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회개한다고 합니다. 그
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성령
충만히 받아서 사랑과 기쁨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예수님 닮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축원합니다. 아멘 .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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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인내와 자비와 양선
자료원 : 갈보리교회 박조준목사
*** 인내와 자비와 양선 ***
박 조 준 목사
지난 주인 아침 시간에는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가운데서 첫째인 사랑과 둘째
인 기쁨 그리고 셋째인 화평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열매는 사람이 하나님
께 대해서 맺는 열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힘써서 되는 게 아니고, 내가 결심해서 하
는 일이 아니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자연히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어떤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도 기뻐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븜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 기쁨이 있는 사람에게는 심령의 힘이 있습니다. 봉사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
다. 시럼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왜 사람이 시험에 듭니까? 마음에 기쁨이
없기 때문에 여기 가면 기쁨이 있나 저기 가면 있을까 기웃기웃 하다가 유혹도
받고 시험을 받습니다. 마음 속에 기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이 화평의 열
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습니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죄를 품과 있는 동안은 하나님
과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과 있는 사람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
도 도망간다고 했습니다. 왜 도망갑니까? 두려워서 그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밑에 나
와서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과 정결함을 받고 성령의 물로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게 생각함으로 은혜 받고자 하는 것은 그 다음 열매인 인내와
자비와 양선입니다. 지난 시간 생각한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하나님을 향해 맺
는 열매라고 할 것이면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인내와 자비와 양선은 인간
을 향해서 맺는 열매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인 덕목입니다. 그 첫째가 인내
, 오래참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거나 핍박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오래 참는 것이 부족해서 불행
한 일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 잠언에 보면 인내에 대한 교훈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인간 사회
에서는 오래 참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가령 잠언 12장 16절에 보면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리라." 잠언 15장 18절에 보면 그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리라."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습니다.
옛날 장군 가운데 왕양명이 '산중유파적이나 신중난파적이라.' 그러지 않았습
니까? 산속에 있는 적을 물리치는데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내 마음 속에 있
는 적을 물리치는 게 그렇게 어렵다. 그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분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 대문에 그것을 참는 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한 사람인 야고보와 같은 사람, 요한 같
은 사람 예수님의 생활을 보고 닮아가노라고 했지마는 참는 일에는 실패했습니
다.
여려분 알다시피 예수님의 일해이 전도를 하러 가시다가 날이 저물어 가는데
사마리아 동네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몇 사람을 보내 이 동네
에서 좀 쉬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러 들어보냈습니다. 요사이 같으면 숙박시설
이 다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구차스러운 부탁을 할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특정한 지역 외에는 어디에나 숙박 시설이 없기 때문에 날은
저물어 오고 밤을 지내야 되게 되면 민가를 찾아 가서 내가 사정이 좀 이렇게
되었으니 날이 밝을 때까지 여기서 하루 저녁 쉬어 갈 수 있도록 부탁을 해가
지고 밤을 지내게 되는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일행은 한 두명이 아니고 열명이 넘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아주
적대관계에 놓여 있지 않았습니까? 피차가 서로 헐뜯고 싫어하는 사이인데, 예
수님의 일행이 하루 저녁 쉬고 갈 수 없으냐? 하는 청원이 그만 한마디로 거절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아니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 한하겠다고 하는건지
그것도 하룻밤 자고 신세 지겠다는 것이 뭐냐.어림도 없다.'딱 거절을 당했습
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 보고 했습니다. '뭐 바늘 구멍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단 한마디에 거절 당했습니다. 이 말을 보고를 듣
고 있던 요한이 '선생님 그 놈들은 그냥 놓아두어요, 아예 이번에 하늘에서 벼
락을 내려서 몽땅 쓰러 버립시다.' 벼락 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홀딱 타 버립
니다. 그럼 별명을 어떻게 지었습니까? 환옥에 우뢰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팔
팔해서 성나면 참지를 못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면 억울한 일 당하고, 화
를 내고 참지 못하는 것 야고보, 요한만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입니다.
가령,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체로하겠다고 로마 병사들이 달려드니까
그 베드로가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가 있느냐. 우리
선생님을 누가 다치게 하느냐. 그래서 제자장에 종 말고라는 사람이 있는데, 내
가 치는데 귀가 싹 잘라졌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를려고 한 건
아니고 가눙데를 자를려고 했는데 말고가 피하니까 귀가 싹 잘라졌습니다. 그것
옳은 말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떨어진 귀를 주워 붙이면서 이것까
지 참아랴.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해. 참아라 하고 말씀하셨읍니다. 공교롭게
도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시던 제자 베도로, 야곱,요한 이 세상이 성경에 나오는
데 인내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완전히
변화해서 인내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어떤 억
울한 일을 당할 때 발칵 화는 내는 경우는 없습니까? 아직도 나는 성령 충만히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갈라디아서 5장20
절에 육체에 열매에 대해 말하면서 분내는 것이 그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에베소
4장 31절에 하나님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게 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성내는 것, 분노는 하나니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
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오래 참지 못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해 드린 적은 없었습니까? 그래서 에베소4장26절 이하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하여금 틈을 타지 못하게 하여라
" 그랬습니다. 여러분 분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결국 마귀한테 시험듭니다. 가
인이 아벨에 대한 분한 마음을 품고 있더니 결국 그 동생을 들로 끌고 나가서
쳐서 죽였습니다. 분한 마음은 살인을 낳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분한 생
각이 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분한 생각 가지고
며칠이나 갑니까? 그러나 가만히 보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분한 생각 가지고 며
칠이나 갑니까? 며칠은 고사하고 몇 시간이나 갑니까? 왜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분한 생각을 품으면 그것 오래 가지고 있어서 그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게 되고 결굴 다른 사람에게
도 손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분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떠났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20장 22절에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품격 가운데 오래 참는
성품, 인내는 정말 귀한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핍박하고 경멸
할 때 오래 참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0장 35절 이하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
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인내하게 되면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이 우리게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옥편에 앉으셨다고 하면서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
여 피곤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이처럼 자기에게 거역한 것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는데 사랑의 화신인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
로 인내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부터 세상을 떠나시는 순간까
지 갖은 육신의 빈곤과 곤욕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심리적인 고통은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친척들은 예수
님이 미쳤다고 말했습니다. 고향 사람은 그의 전도를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오
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를 '선지자가 제 고향에서는 대접 받는게 아니라'
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도 참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줄줄 따라 다녔습니까? 예수님의 일생은
한 마디로 중상과 모략, 욕, 선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딴 궁리를 해서 마음을 섭섭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제자 중 한 사람 그것도 가장 신임할만 해서 돈을 맡겼던 사람의 손을
빌어서 할 일을 배신을 당할 때 그 마음 얼마나 아팠을까. 짐작이 갑니다.
그는 십자가에 고통까지도 참으셨습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
리라는 너희를 온전하게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우리 신앙 생활이 온전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혹 육신에 노고로 허덕이고 고생하는 분이 계십니까? 빈곤한 생활로 어
려운 짐 지고 고생하는 분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오해로 상심한 분이 계십니
까? 모략과 중상으로 가슴 아파하는 분이 계십니까? 고독한 가운데서 외로워서
남물래 눈물 흘린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오래 참고 견디신 예수님을 바라보십
시다. 인내의 주님을 생각하십시다. 그래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맥빠지지 아니하고 인내의 주님을 따라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자비입니다. 영어 성경 번역에 보면 자비라는 말을 (Gentleness 혹은
Kindness란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에는 善자를 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념적이 아니고 실천적인 의미에서 남을 대할 때 부드럽게 대하고, 인자하게
대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5장 7절에도 "긍휼히 여기
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받고 남에게는 주는 것이
기독교 윤리에 대원칙이고 받고 주는 일이 잘되면 잘 될수록 우리의 생활은
더욱 더 건전한 생활을 될 것입니다.
저는 영국에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 여사에게 주는 기념 훈장 속에 헬라
에 유명한 웨시야스이 말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긍휼을 행하는 일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서만 아니라 말로도
할 수가 있습니다. 돈으로도 말로도 할 수 없을 때는 눈물로 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복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자비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특별하게 불쌍한 환경에 있는 이들을 대해
서 하는 태도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과 동시에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는 하
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자비를 강조해서 말한 건 우리 기독교에
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도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유교에서도 자비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양해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성령들도 우리에게 가르
쳐 준 것이 자비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는 하나의 자연계시
에 의한 것으로 사람의 양심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특수한 것은 같은 자비인 것 같지마는 하나님은 자비하신
성품을 단순히 우리에게 가르친 건만 아니고 그 아들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이 육신이 되어서 세상에 나타나서 세상에서 그러하여금 자비가 무엇인가를 실
지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가르치신 것만 아니라 보여 주셨습니다. 나타내 주셨
습니다. 성경에도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주님
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자비를 나타낼 수가 있습니까? 우선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이 곧 자비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합니
까? 그거야 옛날 부터 가난한 나라도 어떻게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혹 그렇게 대답하신 분이 계실런지 모릅니다. 얼른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잠언21장
13절에 분명히 보세요.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가난한 사람 하나 도와 주세요'
하고 부르짖는데 귀 딱 막고 안 도와 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할 건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나와 '이거 도와 주세요'하면 하나님이
귀 딱 막는다는 사실 그거 하나만은 알아야 합니다. 누가 복음 6장 38절에도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이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을 향해서 내 힘껏 자라는 것 주면 하나님은 그냥 계시지 아니하고
후히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겠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자
고로 남 불쌍한 사람 너무도 많이 도와 주었기 때문에 저 사람 폐가 했다는 말
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 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폐가할 정도로 도와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와 주
면 하나님은 갚아 줍니다. 하나 도우면 하나님은 열로 갚아 줍니다.
그리고 잠언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
는 것이니 하나님이 갚아 주리라." 어떤 때는 아버지가 애더러 갑자기 무얼 구
할려고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아들에게 '야, 너 돈 까지고 있으면 돈 좀 꾸어
달라.' 그래서 아들은 아버니께 천원을 꾸어 드렸습니다. 다음에 아버지가 갚
을 때 아들에게 천원으로 갚아 줍니까? 이천원 삼천원으로 더 줍니다. 이게 아
버지 입니다. 가난한 사라을 도와 주는 것, 하나님께 꾸어 주는 일이라는 사실
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넉넉한 것으로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비단 많은 물질로 도와
주는 것이 못되더라도 우리가 언제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친절을 얼마나 요구하
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양과 목양의 비유를 기억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구원 받은 양 어린 소자 하나에게 친절을 베푼사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흐가 영접했고 내가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
라.' 이때 의인들이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주여, 우리가 어느때 주에 주리는
것을 보아서 공개했으며 주님이 목마르신 것을 보며 언제 마시게 했습니까?
어느 때 나그네 되시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영접했으며 주님이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혀 주셨습니까? 어느때 병들고 또 옥에 갇힌 것 보고 가서 뵈였습니까?
그때 임금이 대답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 곧 그것이 소자입니다. 내가 갚을 수 있
사람에게 주는 건 꾸어 주는 겁니다. 또 더 많은 이득을 기대하고 주는 건 뇌
물입니다. 열을 주고 백을 받겠다는 건 뇌물이지요. 만일에 그대로 안되면 어떻
게 하는 줄 압니까? 사직 당국에 고발합니다. 저놈 내가 얼마 주었는데 안 해
주었습니다. 요새는 둘 다 걸린다니까 고발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세상적인
계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나한테 갚을 힘이 없는 사람을 돕는
게 이게 바로 자비다. 그 말입니다.
20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쳐는 유능한 의사였고, 백년대학교의 교수였고,
유명한 철학자여, 바하 음악을 전공한 세계적인 파이프 올리겐리스트요 또 훌륭
한 신학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불쌍한 사람을 돌봐 준 자비의 사람
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자비의 손이었습니다. 그 손을 가지고 바하 음악을 연주
한 올리겐스트요,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의 손이었습니다 때로는 병원을 짓
기 위해서 손수 벽돌을 쌓느라고 거칠어지고 피가 나는 봉사와 자비의 손이 요
구됩니다. 그 손 위에 행복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끝으로 양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착한 일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선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의
열매로 자연히 착한 행실의 열매로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
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했습니다. 빛의 자
녀인 그리스도인이 맺어야 할 열매는 착함입니다.
착한 것은 적극적인 겁니다.
로마서12:19 이하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
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
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마태복음 6:35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선대하며 그러니까 원수를
착함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 일본 속담에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게 향
냄시를 피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 깊은 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하고 나를 돌보아 주는 사람을 돌보아 주고 나
를 위해 주는 사람을 위해 주고 나를 아껴 주는 사람을 내가 아껴 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 손해를 주고 헐뜯고 나를 비난하
고 나를 미워하고 악선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쉬운 게 아닙니다. 나를 저주
하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 아무나 하는 일이 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 때마
다 우리는 만인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을 원합니다. 예수님은 아
무런 흠과 죄가 없으신데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주
님은 십자가 위해서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지금하는 일을 몰라서 그럽니다..' 이런 마
음을 가지면 용서 못할 죄가 어디에 있겠습까? 선한 사람은 원수와 다투지 않습
니다.
잠언에 보면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 흐리어짐과 샘이 더러워짐
과 같다." 그랬습니다. 의인과 악인이 다투면 으례히 악인이 이기지요. 그러나
의인이 악인 앞에 일시 굴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물 물이 잠시 흐려지는 것
과 같다. 그 말입니다. 나쁜 사람이 조용하고 맑은 우물물에 와서 막대기로 휘
저어 놓으면 잠시 동안은 그 맑은 물이 흙탕물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갑니까? 곧 맑아집니다 왜요? 샘물이 맑은 물이 계속 솟아나
기 때문에 곧 깨끗해집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잠시 굴복하는 것이 완전한 실패
는 아닙니다. 결국은 의인이, 선이 이깁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악하게 굽니다. 그러나 내가 대항하지 아니하면
그 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무슨 물건을 하나 가져왔는데
내가 그 물건을 받지 아니하면 그 물건을 어떻게 할 겁니까? 가지고 자기 집에
돌아갈 겁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데 내가 그 저주를 받지 않으면 어
떻게 됩니까? 그 저주는 그 사람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함부로 저주하면 안됩니다. 그 사람이 저주 받을 일 안했으니
그 저주가 누구에게 옵니까? 나에게 옵니다. 그러므로 될 수만 있으면 자주 칭
찬을 칭찬 자격이 없으면, 축복 받을 자격 없으면 그 축복이 누구에게 옵니까?
여러분 성경의 교훈이 얼마나 적그적인지 몰라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악에
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입니다. 악을 악으로 대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악을 선으로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어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힁게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
든지 내 오른 빰을 치거든 왼 뺨도 돌려대라.' 또 '너희 이웃을 사랑하고 내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던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 핍작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인내의 열매 맺게 되시를 바랍니다. 좀 분한 일이 있어도,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 있어도 성령으로 예수님처름 오래 참는 열매를 맺읍시다.
그리고 자비의 열매를 맺게 되시를 바랍니다. 불상한 사람 돌봐 주는 자비의
열매 맺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양선의
열매, 착한 일의 열매 맺게 되시를 바랍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
을 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다 하는 인정을 받는 승리적인 삶을 사는 여려
분 모두 되시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발행일 : 940215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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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감사의 기도보다 간구 기도가 많음
자료원 : 박조준 목사님
사람이 자기를 위한 간구기도는 많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한테 감사드리는 기도는 적다.이런 이야기가 있다
천사가 간구의 기도를 담으려고 그릇을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온 천하를 다
니며 담아 보았지만 온 천하는 고사하고 한나라 말할 것도 없고 한 고을에
서 다 차버렸다고한다.
이것은 물론 이야기이다. 그러나 얼마나 우리가 자기를 위한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간구 기도도 많이 해야되겠지만 진정 감사의 기도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발행일 : 920810
분 류 : 예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