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예정론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과 칼빈의 예정론

김종희[천안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현대와 신학, Vol.27 No.-, [2002])

 

I서 론

 

다우이는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칼빈의 관점이 타락전예정론적일지라도, 예정론은 칼빈의 체계에서 구속론의 일부분으로 나타난다."1)라고 말함으로써 칼빈을 타락전예정론자라 보고, 벌콥은 칼빈이 인간의 최초의 범죄가 예정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타락전예정론자라고 생각한다.2) 바르트는 칼빈을 타락전예정론자로 보는 오텐3)의 입장과 달리 칼빈이 타락전예정론자인가를 증명하기가 어렵다고 한다.4)

 

하지는 칼빈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하지 않았다고 하며,5) 브와는 칼빈이 타락전예정론적인 형이상학적 관점과 타락후예정론에 충분할 윤리적 관점 사이에서 주저한다고 생각하고,6) 파티는 칼빈이 어떤 의미에서 양쪽을 다 찬성했다고 한다.7) 이렇게 일부 칼빈 연구가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타락전-타락후 예정론적 관점에서 보려고 하며 그 입장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논쟁적 관점으로 칼빈의 예정론을 볼 때 그 평가가 다양한 것은 칼빈의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그 논쟁적 관점에서 칼빈의 예정론을 볼 때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 논쟁이 칼빈의 예정론을 계승한 칼빈주의자들 사이에서 비롯된 것8)이라는 점에서 양 진영이 취하는 입장의 토대는 당연히 칼빈의 예정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논쟁점들이 칼빈 안에 통합적으로 공존하고 있을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 논쟁과 칼빈의 예정론을 서로의 관점에서 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그 논쟁에 나타난 용어의 의미부터 살펴보려 한다.

 

Ⅱ.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의 의미

 

뮬러(Muller)는 그의 사전에서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9) 타락전(supra lapsum)과 타락후(infra lapsum)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며, 예정에 관한 이러한 두 관점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개혁 교리의 발전에서 나타났다. "두 관점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영원하고 논리적인 "작정대상들의 순서", 혹은 작정된 것들의 순서에 관한 숙고에서 일어난다. 타락전예정론적 관점에 따르면, 개인들의 선택과 유기는 논리적으로 신적 창조작정과 신적 타락허용작정보다 앞선다. 신의 마음속에서 선택과 유기의 인간적 주제는 창조될 존재로서 타락할 존재(creabilis et labilis)로, 즉 창조될 가능성이 있고 타락할 수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이 관점에서 우선하는 하나님의 목적은 선택하는 자비와 유기하는 공의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반면 창조 자체와 타락 허용 작정은 제 2의 목적이거나 선택과 유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타락후예정론적 관점은 개혁교회들의 신앙고백적 입장인데, 자유의지로 인간을 창조하는 신적인 의지와 타락을 허용하는 작정을 구원으로의 선택 앞에 둔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선택의 인간적 주제는 영원 속에서 창조되고 타락한(creatus et lapsus) 존재로 보인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우선적인 목적은 자신과 친교할 인간의 창조이고, 어떤 사람들을 구원으로 선택하는 작정은 그 친교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타락 후 예정론적 관점은 그 표준적인 공식화가 하나님을,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을 구원 받도록 선택하시고 유기를 작정하시지는 않지만 나머지 사람들을 단지 간과하시는, 즉 자신들의 죄 가운데 있는 그들을 정죄에 남겨두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타락후예정론적 예정론은 타락과 은총의 구원 문제에서 일어나는 반면, 타락전예정론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전능성에 관한 좀더 추상적인 숙고에서 일어난다."

 

이상에서 뮬러는 두 견해의 차이를 작정들의 순서의 상이점으로 설명하면서 이것을 예정의 대상들의 차이점으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타락후예정론이 신앙고백적 입장이라는 점을 지적한다.10) 한편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타락전예정론자와 타락후예정론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타락전예정론자는 "신적 작정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하신 것은 창조와 타락보다 앞섰다는 관점을 가진 칼빈주의자들에게 적용된 이름으로 타락후예정론자와 반대된다."11)

 

다시 말해 "타락전예정론적 관점은 예정을 타락보다 앞서는 것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상위에 있는 것으로 보며, 창조, 타락,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 대한 구속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부분들로 본다."12) 한편 타락후예정론자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하신 것은 인간의 타락을 예지하신 후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을 이미 타락한 존재로 여기며 구제책이라고 생각하는 칼빈주의자들에게 적용된 용어로서 타락전예정론자와 반대된다."13)

 

타락후예정론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을 창조할 작정과 그들이 타락(변절)할 것이라는 것은 선택과 유기의 작정보다 앞선다. 선택은 타락을 사실로 가정한다.14) 타락후예정론자는 일반적으로 수블랍사리안(Sublapsarian)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후자는 더 이전의 용어로서 영어 저술가들에게 통상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둘을 구별하는데, 후자를 타락이 예지되었다는 관점과 연관시키고15), 전자를 타락이 하나님에 의해 허용되었다는 관점과 관련시킨다.16)

 

홀트롭에 의하면, 이 논쟁에 관련된 논쟁점은 볼섹 논쟁 중 베자(Theodore Beza: 1519-1604)에게서 암시되었는데, 그에게는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의 대상들을 아직 창조되지 않은 자들로 혹은 이미 창조되어 타락한 자들로 간주하셨는가 가 문제였다.17) 또한 베자에게서 암시된 것은 작정들의 순서이다.18) 베자에 의하면 선택의 작정은 인간의 타락보다 앞섰고 인간의 타락된 상태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로 예상되었다.19)

 

여기서 우리는 타락전예정론적 체계20)에 근거한 일관된 논리를 본다. 하나님의 작정들의 순서에 관하여 타락후예정론적 구도는 프랑소아 튜레틴(Francois Turretin, 1623-1687)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21) 그는 후기 칼빈주의의 전형적인 방법을 따랐는데, 타락전예정론이 구원의 근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견해는 하나님이 맨 먼저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둘째로 타락을 허용하시기로, 셋째로 어떤 사람은 멸망의 무리에서 선택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은 타락과 절망의 상태에 머무르도록 허락하시기로, 넷째로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선택된 자들의 중보자와 구세주가 되게 하시기로, 마지막으로 이들을 부르셔서 믿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성스럽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튜레틴이 여기에서 말하려는 내용은 하나님의 예정을 타락의 사건 이후에 정하셨거나 하나님이 타락을 작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작정들의 순서에서 예정이 타락 다음에 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관점의 차이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서, 또한 예정의 대상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서, 그리고 작정들의 순서에 관한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다. 타락전예정론자는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목적 속에 포함된 것으로 보며, 타락후예정론자는 타락을 하나님이 예지하신 것으로 보거나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으로 본다. 타락전예정론자가 예정의 대상을 아직 타락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면, 타락후예정론자는 타락한 존재로 여긴다. 작정들의 순서에 관하여 전자는 예정작정-창조작정-타락작정의 순서를 주장하며, 후자는 창조작정-타락작정-예정작정의 순서를 지지한다. 이 순저는 시간적 차이가 아니라 논리적인 차이이다.22)

 

Ⅲ. 타락전-타락후 예정론

 

논쟁사 초기의 논쟁점은 인간의 타락이 작정되었느냐 아니면 단지 신적 예지의 대상뿐이었느냐에 관한 문제에 있었다. 이 논쟁점과 예정의 대상에 관한 논쟁점은 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에서 나타나는데,23) 그 논쟁은 베자의 예정론에 대한 코른헤르트(Dirk Coornhert, d. 1590)의 반대에서 발단되었다.24) 아르미니우스는 코른헤르트를 논박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고, 오히려 코른헤르트의 입장을 넘어 예정론을 부인하게 되었다.25)

 

이제 아르미니우스를 따르는 자들과 호마루스를 중심으로 한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으로 확대된다.26) 1610년 아르미니우스주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반대자들에 의해 이단의 낙인이 찍히게 되고 칼빈주의에 맞서 대항하기 위해 항변파(the Remonstrance)로 결집했다.27) 항변파로 결집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교의는 1610년 그들이 네덜란드의 정치권 앞에 제출한 5개 조항에 나타나 있다. 그 항의문은 우선 부정적이고, 그리고 그 후에 긍정적이다.

 

항변파인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칼빈주의의 5대 명제를 거부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알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타락 전에, 그리고 인간의 창조 이전에 조차, 변경될 수 없는 작정에 의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는데, 그것은 의나 죄, 복종이나 불복종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 때문이며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보이시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타락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첫 조상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공정한 정죄의 관점에서, 인류 가운데 한 부류의 사람들에게 타락의 결과들을 면제해 주어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으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나,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나이 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정죄에 내버려두도록 정하셨다. 셋째,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하여 죽으셨다. 넷째,성령은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피택자들 안에서 사역하셔서, 그 결과 그들은 틀림없이 회심하여 구원 받는다. 한편 회심, 믿음, 그리고 비록 나머지 사람들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외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초대 받을지라도, 구원에 필수적이고 충분한 그 은총은 그들에게 유보된다. 다섯째, 이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받은 자들은 완전히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결코 잃을 수 없으나, 끝까지 같은 은총으로 인도 받고 보존된다.

 

항의파는 이 교리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도 포함되지 않고, 비교훈적이며 위험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설교괴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28) 그리고 나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들의 5대 명제들을 주장한다. 그들은 제 1항에서 무조건적 예정에 대하여 예지에 의한 조건적 예정을 주장했다.29) 제 2항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가 피택자라고 하는 칼빈주의 주장에 반대하여 구속의 범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시킴으로써 보편속죄를 주장했다.30) 제 3항에서는 구속신앙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개개인 스스로는 회개와 믿음에 이를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한다는 점에서는 칼빈주의와 다르지 않았다.31) 그러나 이것은 다음에 오는 항과 밀접한 것으로서 여기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빈주의의 일치점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제 4항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반대하고 협력이라는 방법으로 불가항력적이 아니라고 하여 저항할 수 있는 은총을 주장했기 때문이다.32) 제 5항에서는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한 성도의 견인에 반대하여 "그들이 그 투쟁을 위해 준비되고 그의 도움을 바라고 수동적이 아니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임으로서 성도의 견인의 불확실성을 주장하였다. 이는 곧 구속의 불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이다.33)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을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이 그 논쟁의 전개에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 두 견해의 차이가 예정의 시점이나 예정의 대상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반대한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타락전예정론적인 측면(제 1항)과 타락후예정론적인 측면(제 2항)이 다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한 것 속에는 타락후예정론적 개념이 나타나있다(제 1항) . 여기에서 우리는 양 파의 쟁점이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이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두 개념을 모두 거부하고 그 중 한 개념을 채택하는 것은 논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점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들이 공격한 것은 절대예정론이었고, 이에 대하여 조건적인 예지예정론34)을 주장했으며,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성도의 견인이 불확실하다고 주장한 것은 이에 부수되는 논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항변파가 반대한 칼빈주의와 항변파의 주요 차이점은 예정의 근거에 관한 것이었다. 칼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절대적 예정론을 주장하는 데 반대하여 항변파로 결집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예지에 의한 조건적 예정론으로 그들과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반대한 것은 타락전예정론이 아니라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 자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35) 다시 말해 칼빈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차이점은 강조점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36) 항변파는 곧 반항변파(Counter-Remonstrants)37)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르트회의가 소집되었다.38) 이 회의는 그 참석자들의 구성 성분으로 볼 때 칼빈주의자들의 승리를 예고했다. 왜냐하면 그 회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배제된 상태로 열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회의에 참석한 칼빈주의자들 중에는 타락전예정론자들보다 타락후예정론자들이 숫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후자의 입장이 관철될 수 있었다.39) 다시 말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참석이 배제된 채 칼빈주의자들이 결정한 도르트신조는 당연히 칼빈주의 사상이 반영되었고, 칼빈주의자들은 타락전예정론자들을 대표한 호마루스와 그를 제외한 타락후예정론자들로 그 입장들이 나뉘어졌는데,그 두 견해 중에서 도르트회의가 택한 것은 타락후예정론이다.40)

 

도르트회의에서 채택한 도르트 신조 조항들 중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하여 주장한 5가지 요점은 무조건적 선택41), 제한속죄42), 전적타락43), 불가항력적 은총44), 성도의 견인45)이다. 도르트신조가 타락후예정론적 입장을 반영한다고 할 때, 그것은 무조건적 선택을 나타내는 조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 1-7항 내용 중 "선택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창세 전에, 자기 자신의 주권적으로 기쁘신 뜻에 따라, 자기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원래의 올바른 상태로부터 죄와 멸망으로 타락한 전 인류 가운데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도록, 단지 은총으로 선택하셨다."는 구절에서 예정의 대상46)이 타락한 인류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그 입장이 타락후예정론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했던 조건적 예정론 속에서 나온 타락후예정론적 경향이 아님을 우리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르트회의 이후 초기의 쟁점인 인간의 타락이 예정에 포함되느냐 혹은 예지의 대상일 뿐이냐의 문제는 점차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지를 말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도르트회의에서 거부된 후, 예지라는 개념으로 예정을 말하는 것이 더 이상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타락후예정론자가 말하는 예지의 대상은 인간의 타락이었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지의 대상은 인간의 태도, 즉 신앙과 불신앙이었지만, 도르트회의 이후 예지를 말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노선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될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후기 타락후예정론자들, 예를 들면 리베트(Rivet) , 발레우스(Walaeus) , 마스트리히트(Mastricht) , 튜레틴, 무어 ( Mark, do Moor) 등은 모두 인간의 타락이 작정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47) 베르카우어에 의하면, 후기의 타락후예정론적 개념은 예지 안에서 해답을 찾지 않았으나, 죄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 될 수 있었는지의 문제는, 어떻게 그것이 일어날 수가 있었고 어떻게 그것이 이해될 수 있었는지의 문제 안에서 계속해서 존재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작정들의 순서에 관한 문제가 발생했다.48) 즉 타락전예정론자들은 예정작정-창조작정-타락작정의 순서를, 반면 타락후예정론자들은 창조작정-타락작정-예정작정의 순서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49)

 

Ⅳ. 타락전―타락후 예정론 논쟁의 관점에서 본 칼빈의 예정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의 차이점이 초기에는 타락이 예정에 포함되는가 혹은 예지의 대상일 뿐인가의 문제에 있었지만, 도르트회의 때와 그 후에는 후자가 타락을 하나님의 허용으로 볼지라도 양자 모두 타락을 하나님의 예정에 포함된 것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의 차이점이 예정의 대상에 관한 문제에 있었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작정들의 순서에 있게 되었음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쟁점과 관련하여 예정의 근거가 하나님의 주권이었는지, 아니면 자비 혹은 사랑과 공의인지에 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타락전예정론적 입장에서 첫 번째 작정은 예정의 작정이고, 그것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창조와 타락 작정은 예정 작정에 포섭된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최초의 예정작정이 실현되도록 하는 수단이다. 선택과 유기 작정은 다른 모든 작정들보다 앞선다. 이 작정에서 인간은 아직 타락한 사람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최초의 목적은 죄와 관련되지 않는다. 확실히, 이 입장에는 또한 죄와 궁극적인 유기(심판)와 관계가 있지만, 이것은 시간 안에서,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죄는 선험적 작정 안에서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기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행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다.50) 반면 타락후예정론적 입장에서는 상황이 다른데, 특별히 유기로의 작정과 창조와 타락으로의 작정 관계가 다르다. 이 입장에서는 죄와 심판(지상에서의)의 관계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 간주된다.51) 이 입장에 의하면 창조와 타락 작정은 논리적으로 유기와 선택 작정보다 앞서기 때문에, 하나님 의 계획에서 유기는 타락한 인류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이 유기는 그 성격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위이다.

 

이것은 타락후예정론적 입장이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그러한 것처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반응(하나님의 공의)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고 중심적이라는 것이다.52) 이러한 양자의 차이점을 좁히거나 그 접촉 점을 찾으려는 학자들이 있다. 컨닝함(Cunningham)은 그 논쟁의 주제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훨씬 더 자주 말해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차이점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한다.53)

 

다익은 "비록 타락전예정론적 표현이 종교개혁의 하나일지라도 타락후예정론적 표현이 칼빈의 가르침들과 상반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54) 또한 다익에 따르면, 그 원리들은 대조되지 않는다. 각 관점은 타락전예정론이 의지하지 않는 타락후예정론이 없을 정도로 서로 다른 쪽의 용어들을 사용하고, 양쪽은 모두 성경에 호소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한다.55) 바빙크도 양자 사이에 접촉점들이 있다고 말하고, 문제는 접근법에 있다고 생각한다. 엄격한 의미의 작정들과 내용에 관하여는 차이점이 없지만, 타락후예정론자는 역사적-원인적 순서를 고수하고, 타락전예정론자는 선험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타락후예정론자는 "선택과 유기가 타락한 세계와 관계하고 자비와 정의의 행위들로 표현되는" 모든 성경 구절들에 호소하는 반면, 타락전예정론자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하여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어떤 본문들"에 호소하고 다른 구절들을 정당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일방성의 결점이 있다.56) 카이퍼(Kuyper)는 타락전예정론에서도 타락후예정론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타락의 관계는 우리에게 불가해한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57)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죄의 관계는 "우리에게 계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58)

 

양자 사이의 차이점을 극복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양자에게서 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들에게서도 완전히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의 부주의는 그 논쟁의 차이점이 모두 칼빈의 후예들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착안하지 못한 데에 있다. 그들이 이 점을 주목했더라면 좀더 근본적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이 칼빈의 사상 중 일부분씩 만 취하였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양 진영의 통합 가능성을 칼빈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 모색은 먼저 그 논쟁점을 판단 근거로 하여 칼빈의 예정론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우선 첫 번째 사람의 타락이 예정에 포함되는지 예지의 대상뿐이었는지의 문제가 있다. 이와 관련되는 칼빈의 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이 부패 속에서 멸망할 때에,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타락하여 불행에 빠지고 그 후손들까지 끌어넣은 그 불행의 형벌을 치르는 것뿐이다."59) "하나님은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 안에서 그 후손들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하셨다."60)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칼빈은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예정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의 초기 논쟁점에서 보면, 칼빈은 분명히 타락전예정론자이다.

 

그 다음 우리는 예정의 대상을 판단 근거로 살펴볼 수 있다. 예정의 대상이 창조될 존재로서 타락할 인간으로 나타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영원한 예정으로 아담의 타락 이전에 전 인류와 모든 개인에게 무엇이 일어날지를 작정하셨는데, 그 영원한 예정은 고정되고 확정되었다."61)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이 목적들 중의 어느 한 쪽에 이르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가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62)

 

이것은 칼빈이 타락전예정론자라는 입장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칼빈에게서는 예정의 대상이 창조되어 타락된 인간으로도 나타난다. "첫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정죄되었으므로‥‥그 중에서 귀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그 자신의 의의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다."63) "정죄 된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자들을 선택하시고 그가 원하신 자들을 유기하셨다는 것은 신앙에 훨씬 더 적절하고 그래서 더 많은 열매를 가져 다 준다."64) "하나님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멸망하고 정죄 된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원하시는 자들을 그를 위하여 양자로 삼는다."65) "멸망된 자들이 은총으로 구원받는다."66)

 

이 구절들은 칼빈이 타락후예정론자라는 것을 지지한다. 한편 피기우스를 반박하는 다음과 같은 칼빈의 말에서는 타락전예정론적 개념과 타락후예정론적 개념 모두를 다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파괴하려는 피기우스와 같은 사람들은 두 가지 명제를 거부한다. 즉, 인간이 아직 온전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계획 속에서 인간에게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하셨다는 것과 하나님은 원하시는 자를 멸망할 무리로부터 선택하신다는 것을 피기우스는 거부한다."67) 전자는 타락전예정론적 입장이고 후자는 타락후예정론적 입장이다. 이처럼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점과 칼빈의 예정론을 연관시킬 때, 그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논쟁점은 첫 사람의 타락이 예정되었느냐 혹은 예지되었느냐라는 논점과 예정의 대상에 관한 논점이다.

 

왜냐하면 그 세 번째로 분류될 수 있는 논점인 하나님의 작정들의 순서에 관한 문제는 칼빈에게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논쟁점들 중 주요한 것은 예정의 대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논점은 그 논쟁의 후기에 와서는 무의미해졌고, 도르트회의 이후에 발전된 세 번째 논점 안에는 두 번째의 논점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칼빈을 분석할 때, 그에게서는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이 모두 나타남을 본다.

 

Ⅴ. 결론: 칼빈의 관점에서 본 타락전―타락후 예정론

 

위에서 우리는 칼빈 안에 타락전예정론적 측면과 타락후예정론적 측면 모두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곧 칼빈 안에 그 논쟁에서 대두된 차이점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칼빈이 둘 중 한 쪽의 입장에 충실하지 않았다 해서 그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논쟁이 칼빈의 예정론을 계승한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서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토대가 칼빈 안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양 진영의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의 예정론에서 어느 한 부분을 일방적으로 각각 선택하여 발전시킴으로써 그들의 간격이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 논쟁적 관점에서 칼빈을 평가하는 것보다 칼빈의 관점에서 그 논쟁을 평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빈은 그의 최종판 「기독교 강요」68)에서 하나님의 구속활동을 서술함에 있어 구속 받을 필요가 있는,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69) 시작한다. 그리고 구속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예정 작정은 구원론 끝70)에 놓인다. 그 전개 순서는 역사적 혹은 시간적 순서이며. 논리적 순서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칼빈의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 나타나는 구원론의 시간적 전개 순서와 그 논리적 순서를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의 관점과 연관시켜 생각한다면, 타락전예정론은 논리적 순서의 처음, 곧 하나님의 예정 작정에 강조점을 둔 것이며, 타락후예정론71)은 역사적 순서의 처음, 곧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의 상태에 강조점을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은 칼빈의 예정론에서 그 어느 한 쪽만 강조된 것도 아니고, 어느 한 쪽이 경시된 것도 아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 논점들의 관계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이 어느 한쪽 없이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밀접하여서 분리될 수 없는 것과 같다.72) 따라서 칼빈의 눈으로 볼 때,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관점의 차이, 혹은 강조점의 차이인 것이다.73) 이렇게 타락전-타락후예정론 논쟁의 칼빈적 뿌리를 발견할 때, 우리는 그 논쟁에서 노정되는 차이점들이 칼빈의 예정론 안에서 포용될 수 있음을 본다.

 


 

각 주

1 E. A.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New York and London: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2), p. 186.

2 "다익 박사에 의하면, 고려되는 두 관점들은 그 본래적인 형식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도 신적 작정에 포함되었느냐는 문제에 관한 입장의 차이였다. 인간의 타락의 구성 요소가 되는 인간의 최초의 죄가 예정되었는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신적 예지의 대상이었는가? 그것들의 본래적인 형식에서 보면, 타락전예정론은 전자의 입장이고 타락후예정론은 후자의 입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분명히 타락전예정론자였다." Louis Berkhof, Systematic Thelolgy (Grand Rapids,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6), p. 118.

3 H. Otten, Calvins thelolgische Anschauung von der Pradestination(M?ncben, 1938), p. 9lf.

4 Karl Barth, Church Dogmatics. 4vols. ed. W. Bromiley and T. F. Torrance. trans. G. W. Bromiley, J. C. Campbell, Iain Wilson, J. Strathearn McNab, Harold Knight, and R. A. Stewart (Edinburgh: T. & T. Clar, 1978), Ⅱ/2:127.

5 ) "그 당시에는 그것이 특별한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들 중에는 타락전예정론적 관점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타락후예정론적 관점을 나타내는 구절들도 있다." Charles Hedge, Systematic Theology, 3vols. (New York: H. 0. Houghton and Company. 1871), 2: 316.

6 Henri Bois. "La pr?destinalion d'apr?s Calvin," Eturdes sur la R?forme (Paris: Librairie Armand Colin, 1919): 670ff., quoted in Charles Partee, Calvin and Classical Philosophy (Leiden, 1977), p. 144.

7 Partee, p. 144. 파티는 "칼빈은 신론을 다룰 때 (supralapsarians와 함께) 죄가 긍정적으로 작정되었다고 가르치고, 인간론을 다룰 때 (infralapsarians와 함께) 죄가 허용적으로 작정되었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어떤 입장도 죄의 문제를 풀지 못한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든다.

8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ed., s.v. "Infralapsarian."

9 R. A.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s, 1985), p. 292.

10 신앙고백들이 infra(타락후예정론) 개념으로 기우는 것은, 예정이 언급될 때마다 죄와 멸망에 귀착된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된다. supra(타락전예정론) 개념에서 실제적인 심판이 죄책을 전제하기 때문에, 시간 안에서의 정죄는 직접적으로 죄와 관련되지만, 유기 작정 자체에 관련되지 않는다. 예정 작정은 모든 공로들과 과실들보다, 그래서 또한 창조 작정과 타락 "작정"보다 앞선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는 현재하지 않는다. Berkouwer, p. 265.

11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ed., s.v. "Supralapsarian."

12 Ibid., s. v. "Infralapsarian."

13 Idid.

14 1865 W. G. T. Shedd Christ. Doctrine Ⅱ. 192 in The Oxford English Dictionry, 1989 ed., s. v. "Infralapsarian."

15 다시 말해서 sublapsarian은 하나님이 선택 작정에서 자기 백성을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로 간주하셨다고 생각한다. 1731 in Bailey vol. Ⅱ. 1756 in Broughton Hist. Dict. of Relig. 1775 Ash. Infralapsarians. in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ed., s. v. "Infralapsarian."

16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ed., s. v. "Infralapsarian."

17 이 질문은 1552년 1월 12일 Bea가 Bullinger에게 보내는 편지(Corr. 1, 76ff. CO xiv, 243ff.[1585])의 중심에 있었다. Holtrop, pp. 26. 40. n. 87. 곤잘레스는 이 논쟁이 Peter Martyr Vermigli(1499―1562)가 개혁신학에 들여 놓은 방법론의 결과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신학 내용은 칼빈과 부처와 매우 근접하지만, 그의 방법론은 당대인들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반영했는데, 그의 영향으로 후기 개혁신학은 연역적인 방법으로 신적 작정들로부터 개별자들에게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한 방법론적 접근 방법 때문에 후기 개혁 신학자들은 예정론을 신론이라는 표제하에 두었다고 한다. Gonzal?z, pp. 268-269.

18 1865 W. G. T. Shedd Christ. Doctrine Ⅱ. 192에서는 베자가 예정론에 관하여 supra-lapsarian 진술을 채택했는데 그것은 infra-lapsarian 표현보다 더 엄격하고 배타적(repelling)이라고 말한다. quoted in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ed., s. v. "Infralapsrian." 19 베자는 칼빈의 초청을 받아서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가르쳤는데(Gonzal?z, pp. 354-355), 그는 어떻게 해서든 칼빈을 위해 ㄴ투쟁했다. 예정 교리가 가장 자주 비판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화력을 집중시킨 곳도 바로 예정교리였다. 1555년 그는 칼빈을 비판한 카스텔요의 비판에 답하기 위해 「예정표」(Tabula praedestinationis)를 펴냈다. 이 책은 1582년 「예정교리에 관하여」(De praedestinationis doctrina)에 실려 사실상 재인쇄되었는데, 이것은 이 주제에 관한 베자의 생각이 평생동안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 논문은 그 자체가 베자가 처음에 제시한 대칭적인 표를 적용하고 해설한 내용이다. 이 논문에서 베자는 예정을 모든 신학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구조 곧 틀로 본다. 신학의 시작은 하나님의 영인한 목적, 구도, 또는 작정이다. 그 구도로써 하나님은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호의를 입을 사람들과 유기되어 저주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셨다. 베자는 이 시점에서야 비로소 창조교리를 논하며, 창조교리 다음에 아담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온 인류의 타락을 논한다. 타락을 논할 때 허용이라는 범주를 유용하게 사용한다. Holtrop, 「기독교 강요 연구핸드북」 박희석. 이길상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pp. 438-445. 1582년의 「예정표」는 1555년 판을 대부분 압축 수정한 것인데,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Ibid., pp. 445-446.). 가장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예지이기도 한 영원하고 지고하고 불변한 작정-―> 예정(유일한 중재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통해 선택되고 구원받을 자들에 관한 예정, 유기되고 정당하게 저주를 받을 자들에 관한 예정)--> 의로운 상태로 이루어진 창조-―>아담 안에서 이루어진 온 인류의 자연적이고 순전히 자발적인 부패(그리스도께로의 효과적인 부르심/부패로 인한 정당한포기, 들음으로 말미암는 믿음/강팍케 함, 믿음의 결과들/강팍케 된 결과들. 자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영원한 죽음)―->하나님의 영광(그 분은 지극히 자비하시고, 지극히 공외로우시다). 20 베자가 예정론에 관해서 쓴 여러 논문에서도 이런 사고를 추적할 수 있다. Responsio(1558). Confessio(1559). Questiones et Responsiones(1570). Acta Colloqu? Montisbelligartensis(1589), quoted in ibid. p.449. 21 Gonzal?z, pp. 363-364. 22 Berkhof에 의하면, 논쟁점의 차이는 신적인 작정들의 시간적 순서에 관한 상이한 견해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은 어느 한 부분이나 또는 그것의 모든 부분에서 영원적이며 따라서 어떤 시간적인 순서를 그것이 포함하는 다양한 요소들에게 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Berkhof, p. 118. 그러나 곤잘레스에 의하면, 후대에 infralapsarian이라는 용어는 애매하게 사용되었는데, 튜레틴이 지지했던 개념(작정들의 순서로서, 창조-타락-선택과 유기-그리스도-선택자들을 부르심)과 선택작정이 하나님의 타락에 관한 예지를 뒤따르거나 때때로 실제적인 타락을 뒤따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Gonz?lez. 3:277-278. 이로써 후대의 본래적인 쟁점은 작정들의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순서였지만, 시간적 순서의 의미로도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Holtrop은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supras" (타락전예정론자들)는 하나님이 타락 전에 예정했다는 입장을 가지고. "infras"(타락후예정론자들)는 하나님이 타락 후에 예정하셨다는 입장을 가진다고 시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현대 작가들은 오류를 범했다. 이들은 모두 여전히 하나님이 인간의 실제적인 타락 전에 그리고 그와 관계없이 예정하셨다고 생각한다. 양쪽은 영원부터 시간으로의 논리적인 순서를 보았는데, 결정적인 행위는 전자에서 일어났고 (근인 혹은 이차적인 원인들을 통하여) 그것의 시행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다고 추정한다. 모든 작정의(decretal), 타락의(lapsarian) 신학자들은 그러한 기본 개념을 공유한다. " P. C. Holtrop, The Bolsec Controversy on Predestination. from 1551 to 1555: The Statements of Jerome Bolsec, and the Responses of John Calvin, Theodore Beza, and Other Reformated Theologians. 2vols, (Lewiston/ Queenston/ Lampeter: The Edwin Mollen Press, 1993). 1 :27. 한편 Otto Ritschl은 타락을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예정을 창조와 관련시킴으로써 그 용어를 바꾸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엄격하게 말해서, 이 이론은 보다 더 정확하게 supracreatianism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0. Ritschl, Dogmengeschichte des Protestantismus (1926), Ⅲ, 295. quoted in Berkouwer, p. 263. 그러나 Berkouwer는 리출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견들이 있음 을 이렇게 지적한다. "왜냐하면, 비록 supra-그리고 infra-가 창조를 넘어갈지라도, 이 논쟁에서 그 용어들은 lapsus에, 즉 인간의 타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관심사는 예정과 타락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그래서 Ritschl의 제안은 그 문제를 명료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명료하게 한다." Berkouwer, p. 263. 23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1989 ed., s.v. "Infralapsarian."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 용어들은 아르미니우스논쟁에서 발전되었다. Partee, p. 144. 그러나 베르카우어는 다음과 같이 칼빈주의자들을 넘어 루터,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불링거에게 이 용어를 이미 적용하고 있다. "본래 그것은 예정과 타락의 관계에 관한 다른 해석들의 문제였다. 다익에 따르면 두 가지 다른 대답들이 주어졌다.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대답으로서, 그들은 모두 타락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불링거의 대답으로서, 그는 감히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였지만 단지 예지에 관하여 말하고 싶어했다." G. C. Berkouwer. Divine Election. trans. Hugo Bekker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0), p.257. 24 베자의 예정론에 나타난, 선택의 작정이 인간의 타락보다 앞섰고 인간의 타락된 상태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로 예상했다는 입장에 대하여 1589년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사상가 쿠른헤르트가 도전하였다. 그는 절대 작정들이 죄와 죄인의 정죄를 필수적이고 불가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러한 작정들의 교리가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나타냈다고 반대하였다. 그의 책 「베자와 칼빈의 주장에 답합」(Responsio ad Argumenta Bezae et Calvinae)이 이러한 입장을 표명했다. 쿠른헤르트는 평신도로서 네덜란드의 국무대신이었다. H.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Philadelphia, Pennsylvania: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58), pp. 82-83. 25 프랑케대학(Franker)의 교수인 리디우스(Lydius)는 베자의 예정론을 반대한 쿠른헤르트의 책에 응답하도록 부탁받았다. 그는 이번에는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에게 쿠른헤르트의 입장을 반박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쿠른헤르트의 책을 연구해보았을 때, 그 자신이 의심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사실상 쿠른헤르트의 입장을 넘어 예정론을 부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보편은총과 자유의지의 교리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는 유기의 작정을 거부하고, 원죄의 교리를 완화시켰다. 후에 그 호마루스(Francis Gomarus, 1563-1645)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아르미니우스는 호마루스와 공개적으로 논쟁하게 되었다. 호마루스는 그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이제 주요한 논적이 되었다. 논쟁은 곧 네덜란드 전역에 퍼졌다. 그는 정부에 회의를 소집하도록 신청했으나, 그 회의가 열리기 전(1609년)에 고통스러운 병으로 사망하였다. Buis, p. 83.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3 vols. 6th ed. (New York and London: Harper & Brothers, Franklin Square, 1889), 1:510-511. John T. McNei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London, Oxford, Na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pp. 263-264. 26 시몬 에피스코피우스(Simon Episcopius, 1583-1644)는 레이던대학에서 호마루스와 아르미니우스 밑에서 공부했는데,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을 가진 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운동의 다른 지도자들은 위텐보게르트(James Uytenbogaert, 1557-1644), 바르네벨트(John Van Older Barneveldt, 1549-1619), 그리고 유명한 그로터우스(Hugo Grotius, 1583-1645)였다. Buis. p. 83. Schaff. 1:511. McNeil, p 264. 27 Schaff, 1:512. 28 Ibid., 1:517. 29 첫 번째 조항.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고 불변한 계획에 의하여, 창세 전에, 타락하여 죄 많은 인류 가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의 아들 예수를 믿고 이 신앙과 신앙의 복종 안에서 이 은총을 통하여 끝까지 인내할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 안에서 그리고 진노 아래에서 회심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들을 남겨놓으시기로,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에 그들을, 요 3:36의 복음의 말씀에 따라 정죄하시기로 결정하셨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가 그에게 머문다' 라는 요 3 : 36 말씀과 다른 성경구절들에 따라 또한 그렇게 결정하셨다. Ibid., 3 : 545-546. 30 두 번째 조항. 따라서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셔서, 그들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에 의해 구속과 죄의 용서를 획득하셨다. 그러나 요 3:16, 즉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복음의 말씀에 따라 신자 외에는 아무도 실제로 이 죄의 용서를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저는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는 요한일서 2:2의 말씀에 따라 그러하다. Ibid.. 3 : 546. 31 세 번째 조항. 인간은 배교와 죄의 상태에서 혼자서 고립하여 생각할 수도 의지할 수도 없고 참으로 선한 것(구속 신앙과 같은 것)은 아무 것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혼자서 구속은총을 갖지 못하고, 자유의지의 힘으로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나 없이 너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요 15:5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참으로 선한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그리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다시 태어나고, 오성, 성향, 흑은 의지, 그리고 그의 모든 능력들 속에서 새로워지는 것이 필요하다. Ibid., 3:546-547. 32 네 번께 조항. 이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선의 시작, 계속, 그리고 성취인데, 중생한 사람 자신으로는, 선행하거나 보조적이고, 각성하는, 뒤따르는 그리고 협력하는 은총 없이는 선을 생각할 수도 의지할 수도 행할 수도 없고, 어떤 악으로의 시험도 항거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선한 행동이나 태도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들려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 은총의 작용 형식에 관하여, 많을 사람들이 성령을 저항했다고 사도행전 7장과 그밖의 여러 곳에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항력적이 아니다. Ibid., 3:547. 33 다섯 번째 조항. 참된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럼으로써 그의 생명을 주는 성령의 참여자가 된 자들은, 성령에 의하여 충분한 능력을 가져서 사탄, 죄, 세상 그리고 그들 자신의 육신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그것은 언제나 도우시는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렇다고 잘 이해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시험 속에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돕고, 그의 손을 그들에게 내미신다. 그리고 그들이 그 투쟁을 위해 준비되고 그의 도움을 바라고 수동적이 아니라면, 요10:28에 있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지키셔서, 그들은 결코 사탄의 간계나 권세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기거나 잘못 인도될 수 없다. 그러나 과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생명이 처음 시작된 것을 다시 버릴 수 있거나, 현재의 악한 세계로 다시 돌아올 수 있거나, 그들에게 인도된 거룩한 교리로부터 떠날 수 있거나, 선한 양심을 잃어버릴 수 있거나. 은총이 결여될 수 있는지 그것은 우리의 마음들을 충분히 설득하여 그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가르칠 수 있기 전에, 더 특별하게 성경으로부터 결정되어야만 한다. Ibid., 3 : 548-549 34 이러한 견해는 초기의 논쟁에서 인간의 최초의 죄에 대한 관점 중 그것이 신적 예지의 대상이었다고 주장했던 타락후예정론적 견해를 넘어서는 것이다. 35 이와 같은 결론을 가지고 있는 자는 John L. Girardeau이다. 그는 복음주의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반대한 것은 Supralapsarianism적 칼빈주의가 아니라 칼빈주의 자체였다고 주장한다. John L. Girardeau, Calvinism and Evangelical Arminianism: Compared As Te Election, Reprobaation, Justification, and Relatef Doctrines (Columbia, S.C. W.J.Duffie; and also New York: The Baker and Taylor Col., 1992). 36 David N. Steele and Curtix C. Thomas, The five points of calvinism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1963), p. 22. 37 칼빈주의자들 혹은 호마루스주의자들. 38 1611년 하구(Hague)에서 양 파 사이에 회의가 열렸으나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 하였다. 1613년 델프트(Delft)에서의 논의, 그리고 1614년 그로티우스가 준비한, 평화를 위한 네델란드 주들의 칙령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 했다. 아르미니우스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논쟁과 복잡한 준비 끝에, 도르트 전국회의는 1618년 11월 13일 국회가 소집하여 1619년 5월 9일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은 84명의 참가자들과 18개의 세속적 위원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서 58명은 네덜란드인들이었고, 나머지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팔라티네이트, 나싸우, 헤세, 브레멘, 스위스 대표들이었다. 외국의 개혁 교회들은 적어도 투표할 권리가 있는 세 명이나 네 명의 대표자들을 보내도록 초청받았다. McNeil, p. 265, Schaff, 1 :512-515. 39 Schaff, 1:513ff. 40 도르트신조 때부터 타락후예정론을 교리로 택하는 반면 타락전예정론을 정죄하지도 않는 것이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41 제 1―7항. 선택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창세 전에, 자기 자신의 주권적으로 기쁘신 뜻에 따라, 자기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원래의 올바른 상태로부터 죄와 멸망으로 타락한 전 인류 가운데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도록, 단지 은총으로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영원부터 중보자와 피택자들의 머리로, 그리고 구원의 원천으로 지명하셨다. 이 피택자들은 비록 본래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지도 않고 더 가치가 있지도 않았고, 그들과 함께 공통적으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피택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시어 그에 의해 구원받게 하시며, 그리고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그의 교제에 그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이끄신다. 그래서 그들에게 참된 신앙, 정의, 그리고 거룩을 주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의 교제 속에서 그들을 강력하게 보존하셔서, 결국 그의 자비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영화로운 은총의 부요함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Ibid. 3:582 42 제 2―8항. 하나님의 아들의 가장 귀한 죽음의 자극적이고 구속하는 효과가 모든 피택자들에게 미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은혜로운 뜻이고 목적인데, 이는 그들에게만 의롭게 하는 신앙의 선물을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기 때문이다. Ibid., 3: 587. 43 제 3.4―3항.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리고 어떤 구속적 선을 행할 수 없고, 악해질 경향이 있고, 죄 안에서 죽은, 더욱이 노예 상태에 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다. Ibid., 3:588. 44 제 3.4―9항. 그러나 하나님이 피택자들 안에서 그의 선하신 기쁨을 이루시거나 그들 안에서 참친 회개를 일으키실 때. 복음이 그들에게 외적으로 선포되어지게 하시고 성령에 의해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조명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변할 수 있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중생의 성령에 의해 사람의 깊은 곳에 임하셔서 닫혀진 마음을 여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할례받지 않은 마음에 할례를 주시며, 지금까지는 죽었던 의지일지라도 그 의지에 새로운 능력을 부어 주시고 소생시키신다. Ibid., 3 : 589. 45 제 5―3항. 내주하는 죄의 잔재물과 죄와 세상의 유혹 때문에, 회심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능력에 남겨져 있다면 은총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들을 끝까지 자비로 강하게 하시며, 강하게 보존해 주신다. Ibid., 3 :593. 46 다익도 도르트회의 시대의 논점은 예정의 대상이었고, 그가 살고 있던 시대에도 그러하였다고 했다. H. M. Yoo, Raad en Daa: Infra- en supralapsarisme in de Nederlandse gereformeerde theologie van de 19e en 20e eeuw. (Kampen, 1990), p. 261 47 Berkhof. p. 118. 48 Berkouwer. p. 258. Walker는 타락전예정론자와 타락후예정론자의 논쟁점은 예정이라는 신적 "작정"의 "순서"와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타락전예정론자는 하나님이 영원히 개인들의 선택과 비선백을 작정하신 후 이 절대적인 작정이 수행될 수 있도록 수단으로서 타락을 허용하신다고 보며, 타락후예정론자는 하나님이 타락이 발생하도록 허용하신 후에만 개인들의 선택과 비선택을 작정하신다고 본다. W.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burch. 4th ed. (Edinburgh: T. & T. Clark Ltd., 1986), p. 540. 워커는 그의 같은 책 제 3판에서는 그 논쟁이 신적 목적들의 순서와 관계가 있다고 하면서, 타락전예정론자의 입장은,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그 후에 타락을 그 작정이 수행될 수 있도록 수단으로서 타락을 허용하셨다는 것이며, 타락후예정론자의 입장은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지하시고 허용하신 후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선택을 작정하셨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제 3판에서 사용된 '신적 목적들의 순서'라는 말 대신 제 4판에서는 '예정이라는 신적 작정의 순서'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며, 제 3판에서는 타락후예정론자의 입장을 설명하는 가운데 "예지하시고 허용하셨다"는 구절을 사용한 반면, 제 4판에서는 "허용하셨다"는 구절을 사용함으로써 "예지"라는 말을 생략하였다. 이러한 표현의 차이점은 제 3판에서는 초기 논쟁점과 후기 논쟁점이 복합되어 반영된 반면, 제 4판에서는 후기논쟁점이 반영된 것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49 그러나 다익은 실제적인 논쟁점이 순서에 있다는 견해에 반대하였다. Dijk, chapter I quoted in Berkouwer, pp. 256-257. Berkouwer에 의하면, supra와 infra의 논쟁은 본래 순서의 문제에 관심하지 않지만 이 문제는 예정과 타락에 관한 숙고에서 일어났다. 그는 타락전예정론자들에 의하면 예정의 대상이 창조될 가능성과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이고, 타락후예정론자들에 의하면 창조되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한다. Berkouwer, p. 263, Cf. 1797 Encycl. Brit. (ed, 3) ⅩⅧ, 84/Ⅰ, in The Oxford English Dictiorary, 1989 ed., s.v. "Supralapsarian." 50 Berkouwer, p. 258. 51 Ibid. 52 Ibid., pp. 258-259. 53 William Cunningham, Historicaf Theology. 2vols. (Pennsylvania : The Banner of Truth Trust. 1994), 2:435. "참으로 그 주제는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해 훨씬 더 자주 말해진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보통 그것을, 칼빈주의에 반대되는 편견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이용하려고 애쓰는데 첫째로는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그러하며... " 54 Dijk. 48ff., quoted in Berkouwer. pp. 260-261. 55 Ibid., pp. 50ff., quoted in Berkouwer. p. 261. 56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Ⅱ. pp. 351-52. A. G. Honig. Handboek der Gereformeerde Dogmatiek, p. 268, quoted in Berkouwer, pp. 260, 347., quoted in Ibid. 57 A. Kuyper, E Voto, Ⅱ, 172, quoted in Berkouwer, p. 262. 58 Ibid. Cf. L. J. Hulst는 Supra en Infra, Een Woord van Verdediging en Toclichting der Confessioneele Gereformeerde Leer er Practijk Omtrent de Predestinatie en het Genadeverbond (Grand Rapids. 1892)에서 Kuyper와 supralapsarianism에 반대한다. quoted in Berkouwer. p. 262. 59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59 edition. trans. Ford Lewis Battles,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Hereafter quoted as Inst.), Ⅲ, 23, 4 (OS 4, 397): "Quum ergo in sua corruptione pereunt. nihil aliud quam poenas luunt eius calamitatis in quam ipsius praedestinatione lapsus est Adam, ac posteros suos praecipites secum traxit." 60 Inst., Ⅲ, 23, 7 (OS 4, 401): "Nec absurdum videri debet quod dice, Deum non modo primi hominis casum, et in so posterorum ruinam praevidisse: sed arbitrio quoque suo dispensasse." 61 Concerning, p. 121 (CO 8. 313): "aeternam Dei praedestinationem. qua de toto geners humano, et de singulis hominibus quid futurum esset statuit. antequam cecidisset Adam. fixam et decretam fuisse:" 62 Inst., Ⅲ, 21, 5 (OS, 4, 374): "Praedestingtionem vocamus aeternum Dei decretum, quo apud se constitutum habuit quid de unoquoque homine fieri vellet. Non enin pari conditione creantur omnes: sed aliis vita aeterna, aliis damnatio aeterna praeordinatur. Itaque prout in alterutrurn finem quisque conditus est, ita vel ad vitam vel ad mortem praedestinatum dicimus." 63 Idid., 7. 22; l. 18(MPL 33.824; tr, FC 30.206; 204), quoted in Inst., Ⅲ. 23. n. 25 64 Concerning, p. 125 (CO 8): "Altera autem pars, quod ex damnata Adae sobole Deus quos visum est eligit, quos vult reprobar, sicuti ad fidem excreendam longe est, ita maiore fructu traetatur." 65 Ibid., p. 49 (CO 8, 254): "Electio Dei gratuita, qua sibi ex perdito damnatoque hominum genere quos visum est adoptat". 66 Ibid., p. 178 (CO 8, 360): "Ibi est gratia, qua salvi fiunt qui perditi erant." 67 Ibid.. p. 101 (CO 8. 297): "peraeque a Pighio utrumque damnari: Deum ab initio, quum adhuc integer foret hominis status, quod postea futurum esset. decrevisse : et nunc ex perdita massa eligere quos voluerit." 68 칼린의「기독교 강요」최종판의 구성에 관한 논쟁에서 우선 사도신조에 따라 네 부분으로 되었다고 하는 입장-제1권은 하나님 아버지, 제2권은 성자, 제3권은 성령, 제4권은 교회에 관하여 다루었다고 봄-과,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제1권)과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제2권-제4권)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주로 대립되는데, 그 대표적 논쟁서를 꼽는다면 후자의 경우는 다우이 (Edward A. Dowey)의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52)를, 전자의 경우는 다우이를 비판한 파커(T. H. L. Parker)의 Calvin's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Edinburgh: Oliver and Boyd, 1969)을 들 수 있다 칼빈의 말(Inst., I. 2. 1)을 근거로 하여 판단해 볼 때, 최종판 「기독교 강요」는 네 권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두 추분으로 되어 있다고 블 수 있다. 참조: 이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pp. 54-62. 69 Inst., Ⅱ. 1-5. 70 정확히 말하면 3권 25장 '최후의 부활' 바로 앞에 놓인다. 71 칼빈의 타락후예정론적 개념은 성경의 조절 기능과 관련시켜 이해될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선택과 성경의 조절 기능을 다음과 같이 연관시키고 있다. "성경은 가끔, 우리의 이해력에 맞추어, 하나님의 선택을 이 부르심과 칭의로써 이미 드러난 것이라고만 한다. 그 이유는, 그의 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은 가끔 택함을 받은 자가 아닌 자들에게도 그의 능력을 보여 주신 그런 예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선택받은 자들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의 수에 계산되지 않을 수도 있다(롬 9:11.25-26. 10:20. 11:7,24,28; 호 2:23).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유일하고 불변적인 섭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자녀들 즉,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받은 자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롬 8:1 14)." Inst.(1536). p. 59 (CO 1. 73). 72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1539-1554년판들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이라는 제목의 장들로 시작했다. 그러나 1559년판에서 그는 제1장을 분리하여 제목과 내용에서 "그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되는가"를 강조함으로써 이들의 밀접한 연관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전의 제2장은 훨씬 확장되어 제2권의 연속적인 장들의 서두가 된다. Inst., Ⅰ, 1, 1, n. 2. 칼빈은 1559년판 「기독교 강요」의 서두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은 연관되어 있다. 이들은 어떻게 연관되는가"라는 제목하에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Inst., Ⅰ.1, 1)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73 이것은 타락후예정론적 관점이 신앙고백적 입장일지라도 개혁교회가 타락전예정론을 정죄하지 않는 것을 보아도 그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추정할 수 있다. 1905년 Utrecht신경은 "선택론에 관하여 우리의 신앙고백들은 타락후예정론적인 표현을 따른다. " 그러나 "이것은 타락전예정론적인 표현을 배척하거나 정죄한다는 것을 전혀 내포하지 않는다"라고, 이 논쟁에 대해 간단히 개관했다. (Acta 1905, 207) "표현"이라는 말은 반드시 서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특별한 접근법을 암시한다. 분명한 의도는 평화를 요구하는 것이고, 타락전예정론과 타락후예정론 사이의 고백적이고 종교적인 분열은 거부된다. 한편 타락전예정론적 관점을 개혁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로 표현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고, 다른 한편 타락전예전예정론적 관점을 고수하는 자를 방해하는 것도 허용될 수 없다. Berkouwer. p.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