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 신학

칼바르트의 신학

차 례

칼 바르트 신학 1

Ⅰ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2

1. 신학의 역사 2

F.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4

▦. 신 정통주의의 특징 5

▦ 신 정통주의가 한국에 왜곡되게 소개되어진 까닭 7

Ⅱ. K. Barth의 생애와 중요한 사건. 11

Ⅲ. 로마서 강해 제 1판 (1919)의 신학 14

1. 자펜빌에서의 바르트 14

2. 1914년 8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14

3. 로마서 강해 제 1 판의 신학 16

Ⅳ. 로마서 강해 제2판(1922)의 神學 18

1. 1판과 2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 : 18

2.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19

3. 위기와 심판의 신학 19

4.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의 불가해성 20

Ⅴ. 바르멘 신학선언(1934) 21

Ⅵ.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23

A. 성서관 23

B. 신론 24

C. 예정론 27

D. 삼위일체론. 30

Ⅵ 복음과 율법. 34

1. 전통적인 복음. 율법의 이해 34

2. 칼 바르트의 복음. 율법의 이해. 34

Ⅶ. 교회와 국가. 35

Ⅷ. 화해론( 4의 1권~ 4의 4권) : 가장 많은 분량할애. 심혈을 기울임. 35

Ⅸ. 죄론. 37

1. 칼 바르트(1886~1968) :

ㄱ. 스위스의 신학자. 독일에서 활동. 개혁파 신학자. 칼빈의 전통속에 있음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 신학자.

* 칼라너 : 20C, 카톨릭 신학의 교부

→ “20C 신학은 2명의 Kal 대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ㄴ. 죽어가는 교회에 생명을 주고 다시 살린 신학자.

ㄷ. 20세기의 모든 신학은 칼바르트에 의해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ㄹ. 몰트만 : 칼바르트의 신학 중에서 종말론에 잘못이 있음을 발견 →『희망의 신학』펴냄

ㅁ. 칼바르트의 신학 : “에수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에 그의 신학의 중요 내용이

들어있음 -성경을 긍정

ㅂ.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의 삶의 구주로 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배워서

그 은총. 사랑을 가르침.→『은총의 신학』

2. 대표 저서

ㄱ. Kirchliche Dogmatik Ⅰ/1~Ⅳ/4(KD): 교회교의학

Ⅰ/1~2 : 말씀론(계시론)

Ⅱ/ 1~2 : 신론

Ⅲ/ 1~4 : 창조론

Ⅳ/1~4 : 화해론

Ⅴ : 구원론, 종말론 등에 대해 쓰려고 했으나, 못쓰고 죽음

ㄴ. Gesameausgabe 1~ 17

ㄷ. 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1924)

ㄹ. Die theoologie und die Kirche(1928)

ㅁ. Theologische Fragen und Antworten(1957)

ㅂ. Der Römerbrief 1판(1919), 2판 -처음부터 다시 씀(1922) - 로마서 강해.

ㅅ. Die christliche Dgmatik im Entwarf(1927) - 기독교 교의학 개요.→ 바르트의 최초

조직신학 책 : 후에 ㄱ.의 이름으로 다시 고쳐 씀

ㅇ. Credo (1935) : 신학적 논의를 정리.

ㅈ.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thundert (1946)

- 19c 개신교 신학: 19c 신학자 평가.

ㅊ. Einführumg in die evandelische(개신교 신학 입문). Theologie. (1962)

-→ 『복음주의 신학입문』으로 번역

ㅋ. Nein! (1934)- 논문. 히틀러 통치시기와 맞물려 있음.

ㅌ. Dre Menschlichkert Gottes (1956): 후기 바르트 신학 이해에 분기점이 됨.

하나님의 인간성.

3. K. Barth에 관한 유명한 저서.

ㄱ. K. Kupisch. 『Karl. Barth』, 박종화 역. (바르트 전기)

ㄴ. E. Busch(마지막 바르트의 조교), Karl. Barths Lebenslauf (바르트 전기)

ㄷ. E. Jüngel. Barth - studien ←K.Barth를 정확하게 이해한 교수이며 바르트의 신학을

잘 연구한 인물이다.

ㄹ. G.C. Berkovwer,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 Barth

ㅁ. H.V.von Balthasar(카톨릭 신학자), Karl. Barth.

4.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ㄱ. 신론 - E.Jüngel, Gottes Sein ist im werden(하나님의 존재는 되어감에 있다.)

ㄴ. 기독론 - B. Klappert, Die Auferweckung des Gekreuzigte(십자가에 달린자의 부활)

ㄷ. 죄론 - W. Krötke, Sünde und Nichtiges bei Karl Barth.(칼바르트에 있어 죄와 무)

ㄹ. 화해론 - 한스큉, Rechtfertigung(칭의)

ㅁ. 정치신학 - F.W.Marqwardt, Theologie und Socialismus(신학과 사회주의)

→칼바르트를 사회주의자로 생각함

-김명용 교수. 기독교 사상. 『전기 바르트주의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 한신연 역, 『K.Barth의 정치신학』

5. C.van Til, Christanity and Barthianism - 칼바르트 신학을 가장 많이 비난. 신학적 객관성이 없다. 바르트에 대한 잘못된 비판을 수록한 책임

6. 오토 베버, 김광식 역 『칼바르트의 교회교의학』, 기독교 서회.

Ⅰ자유주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신학

1. 신학의 역사

1) 16C 1517년, 종교개혁에서 발전 → 종교개혁 신학: 루터, 칼빈

2) 17C → 정통주의 신학 : 종교개혁 신학의 후예임. 유사성을 가짐.

정통주의라고 볼 수 있으나 구별(차이점)을 가지고 있음

▲ 기독교 교의학의 난제:

A. 삼위일체 -칼빈과 세르베투스의 대결, 세르베투스는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가 셋 달린

신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 칼빈에 의해 사형(화형)당함

칼빈도 삼위일체에 대해 납득할만한 설명 못하고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이므로 그러하다고 믿는 것이라고만 함.

♣ 칼빈비판학자:

이것을 보면서 칼빈이 진정한 조직신학자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학자도 생김.

(칼빈을 성서주의자의 카테고리를 못 벗어 난다고 신랄하게 비판)

♣칼빈 옹호주의자:

칼빈은 성경앞에서 겸허한 사람이었다고 주장. 칼빈은 성경의 정신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함 →삼위일체 신비가 칼빈의 교리 중에서 미 해결 부분임.

B. 예수 그리스도의 두본성 문제 : 한 본체 안에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공존할 수 있는가?

C.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 두 사이의 역학관계가 애매 모호

▲ 예정론

가. 칼빈 : 예정 믿음. 인간의 죄는 인간의 책임.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다.

왜 그러냐? 그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비이므로 설명할 수 없다.

성경에 나온대로 믿어라.

나. T. Beza(calvin의 제자): 신정통주의 학자: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 해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결단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하는 것(제2 원인자) 같지만 하나님(제1 원인자)이 하신 것이다. →논리적이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

성경과 멀어지게 됨. 합리성 강조. 성서적 특징 결여

다 17c 신정통주의가 강조한 것

ㄱ. 인간의 전적 타락: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락한 존재. 오직 은총으로만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예정, 주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음. 인간의 이성, 양심은 죄를 만드는 공 장이다.

ㄴ. 성서의 축자영감 강조: 성경은 한자 한자 성령께서 불러 주신 대로 기록한 것이다.

성경의 절대 무오 주장 : 성령이 불러 주신대로 기계적으로 기록.

* 최근 : 기계적 영감과 축자 영감의 의미가 구별됨. 이 당시는 동일한 의미 가짐.

→무엇이 진리인가를 판단하는 최고의 법정이며 가치판단의 진위를 결정하는 최후의

법정은 “성경”

3) 18c : 계몽주의 시대

4) 19c : 개신교 자유주의 시대 - 옛 정통주의 신학의 붕괴, 새로운 정통주의 신학이 발생

A. 17c : 인간의 이성이 가치를 가지지 못함

교회를 찾아가 병을 고침 - 마귀에 의해 병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함

B. 18~19c: 새로운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이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됨.

병원에서 병을 고침 - 병원균이 있다는 사실 깨달음.

의학의 발달 - 이성을 사용함→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함

“인간의 이성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게 됨→ 하나님은 인간

의 이성을 통해 역사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위대한 역사(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

→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엄청난 신뢰를 가짐.

C. 인간의 전적타락 이론은 잘못된 교리라고 생각하게 됨

D. 위대한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절대무오의 성경을 분석하기 시작함 -

→이성의 잣대를 가지고 성경비평을 시작.

ㄱ. 초기에는 고전 비평만 했음: 희랍영웅, 전설을 분석하다 보니까 그 내용이 엄청나게

과장되었고, 이던 것은 사실이 아님을 하나씩 알게 됨

ㄴ. 성경에 이성의 잣대를 갖다대기 시작함.: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분석하면서 성경 안에 모순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게 됨 . 성경안의 오류를 발견

→절대무오의 성경의 권위 붕괴됨.: 성경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

☞ 성경안의 오류들의 예

* 창 6: 19~이하 노아의 방주 속에 동물 넣음, 암수 한 쌍씩 cf) 창 7:1~이하 : 암수 일곱씩

* 역대기. 열왕기 - 연대기가 서로 맞지 않음

* 막 14:3 - 머리에 향유를 부음

요 12: 3 - 발에 향유를 부음 (같은 사건 보도가 일치하지 않음)

* 막 15: 32 - 왼편강도, 오른편 강도 모두 예수그리스도를 욕함.

눅 23: 40~이하 - 한 강도만 예수그리스도를 욕함

☞ 문제가 되는 사실(fact)을 정확히 나열.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설명.

해석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함

ㄷ. 성경에 오류존재 →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성경은 위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다. 위 대한 종교적 체험을 기록한 책이다” 라는 새로운 성서관 주장. →계시성도 띠지만, 인간의 체험이므로 그 속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진위를 결정하는 최후의 재판정이 성경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된다. (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므로)

E. 자유주의 시대의 도래 및 전성기 (19세기)

△ 슐라이에르 마허, 리츨, 드뢸취, 헤르만, 하르낙에 의해

△ 정통주의 신학 약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대학 강의

정통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서 활동, 학계 (학문적 영역)에서는 밀려남

F.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신적체험의 산물인 성서← 성서관의 문제

ㄱ. 위로부터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밑에서부터 솟아난 것이다.

성경에 대한 근본적 이해 다름. 이성으로 객관적으로 발견하게 된 새로운 성경이해.

ㄴ. 계시적 특징,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그러나 인간의 체험을 통해 경험된 하나님의 모습이므로 많은 오류가 있다. 그리고 밑에서 솟아난 것임.

ㄷ. 기독교의 조상 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조상들도 신적체험을 하고 다른 종교의 경전

으로 남아있음 →그것에도 위대한 진리가 있다.

▲ 종교신학이라는 특징을 지님

ㄱ. 역사적 상대주의자인 트뢸취(슐라이에르마허도)가 종교다원주의의 이론 제공.

ㄴ. 자유주의신학의 위 ㄷ과 같은 특징→타종교에서의 구원의 길을 인정

▲ 이성의 신학

ㄱ. 이성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는 신학적 방법도입: 하나님의 말씀도 이성적 검증을 거침 (논리적이지 못한 것 거부)

삼위일체론이 거부당함.

예수그리스도의 두본성 문제도 거부당함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등의 초자연적 사건, 동정녀 탄생을 신화로 생각.

축마사건, 물위를 걸음, 예수의 선재도 과거 원시사회의 신화로 생각.

ㄴ. 이성을 기초로 출발 : 이성과 맞지 않는 기독교의 교의 거부당함.

▲ 인간 예수를 강조하는 기독론.

ㄱ.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이며, 종교적 천재일 뿐이다. →『예수전』이 왕성하게 출판됨

인간 예수의 삶을 조명함

ㄴ. 예수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아들인가?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

했으므로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음

→ 첫열매 : “양자론” 주장. 양자론의 성서적 근거.

ㄷ. 전통적 기독론 : 로고스 기독론

자유주의 기독론: 인간 예수에 초점을 맞춤

★ 자유주의 신학의 공헌 :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 시킴

→ 인간 예수 이해를 가능케함

♠슐라이에르 마허 :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이 충만한 사람, 모범적인 최초의 그리스도임

♠리츨 :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안에서 온 사람, 역사 밖에서 온 사람이 아님.

cf) 정통주의 : 하나님의 나라에서, 역사 밖에서 온 사람이라 함

♠ 하르낙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뒷받침할만한 증언은 신약성서에 없다.

☞이들의 이러한 인간예수 강조는 속죄론의 희생을 가져옴

→속죄론이 가능하려면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신이어야함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은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어야 함. 자유주 의 신학자에게는 속죄론이 없다. 바울에게서 나타난 속죄론은 고대 원시종교의 제의적 신화에 기초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 이러한 신화를 버려야 한다. (한 사람이 만인을 위해 죽는다는 우스꽝스러운 신화를)

★ 속죄론 : 자유주의와 정통주의를 구별하는 시금석임

▲ 사랑의 윤리 ← 정통주의를 능가하는 장점.

ㄱ. 자유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사람이 아님, 예수의 삶을 본받는 사람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본받음→자유주의자들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cf) 정통주의자들은 이것을 “도덕주의”라 평가절하시켜서 말함.

반대로 자유주의의 본질은 사랑임→이웃을 사랑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 의 지극한 사랑.→성경의 핵심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

ㄴ. 자유주의 신학의 장점이 여기에 있음 : 사랑의 실천

cf) 슈바이처의 기독론 →유대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 - 종말론적 사상에서 벗어나 지 못함→ 슈바이쳐는 예수를 통해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움

ㄷ. 정통주의자 :사랑의 실천보다 교리싸움에 치중.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교의는 분리하나, 봉사는 연합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움

★어떻게 한국교회가 일치할 수 있을까? 사랑의 실천(봉사활동)을 통해 일치될 수 있다.

▲ 역사의 진보에 대한 신앙

ㄱ. 역사는 진보한다. →하나님의 심성이 내재, 하나님의 심성이 이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 것이다. ← 인간에 대한 신뢰

ㄴ. 하르낙 :역사 앞에서의 경외

트뢸취: 역사 속의 하나님의 내재적 초월 - 하나님의 가면

트뢸취는 칼라너의 사상에 영향을 줌 → 19c~20c초, 학계에서는 자유주의 만연

교회내에서는 교회 신앙이 황폐하게 됨(자유주의의 부정적 영향)

5) 20c 칼바르트에 의한 200년 가까이 무너졌던 정통주의 회복→ 新정통주의

▦.정통주의 신학이 복고된 것임.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신신학(자유주의 신학)으로 잘못 알려짐

바르트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대립되는 정통주의 신학임.→독일에서는 교회가 사랑하는

학자임 (교회를 다시 살려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바르트가 위험한 학자가

된 것은 미국교회의 불행한 역사와 관련이있다.

▦.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에서 정통주의 신학으로

회귀하게 함→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 인간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무기사용을 통한

인명손실로 자유주의가 가진 낙관론 흔들림. 인간의 죄악성을 깨닫게 됨

▦. 신 정통주의의 특징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 인간의 체험기록이 아님.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성경이다.

A. “하나님 말씀의 신학” : 칼바르트 신학의 별명

cf) 20c 학자중 아무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았음.←자유주의의 득세로

B. 200년 전의 주장이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었을까?

바르트는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설명하기 시작함

예) 창 1장과 2장의 창조순서가 다름

C.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인간적 도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 + 인간적 도구

* 성경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이 성경 안에는 인간적 도구가 들어 있어 인간적

약점이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몇가지 인간적 약점 때문에 성경의 본질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 옛 정통주의자: 성경의 본질은 정확히 이해. 그러나, 성경이 기록된 방법을 잘못

이해함 *축자 영감설 *기계적 영감설로 인해 성경의 절대무오교리 지키려함

*많은 문제점 드러남. 절대무오, 성서 영감설 붕괴됨(주장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음)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보다는 그래도 옛 정통주의자를 인정함(잘못된 방법론을 강요

했으나, 성경의 본질을 잘 파악했으므로

*인간적 약점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세계관 등을 통해 전해지므로

D.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오류가 없음 * 절대무오의 하나님 말씀

* 성경이 절대무오는 틀림, 성경안에 인간적 약점이 있음

E. 루터의 성경관 인용 : 성경을 아기예수가 누워있는 구유(인간적 도구)와 같다고 함

*구유에 예수님이 누워 있다고 봐야 함. 지푸라기가 있는

구유만 보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오류임

*칼바르트도 루터와 일치하는 성경관 지님

△ 루터의 성경관

* 모세가 모세 5경을 기록하지 않았다 해도 상관 없다.

열왕기는 민수기에 비해 엄청나게 좋다.

* 요한복음, 바울서신(로마서), 베드로전서는 모든 책들 가운데 알맹이며 골수다.

* 사도 바울의 서신은 마태, 마가, 누가보다 훨씬 위에 있다.

사도 베드로의 서신은 ″ ″ ″ ″

* 히브리서는 세례받은 후의 죄인의 회개를 부정하고, 때문에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반대함

☆야고보서는 복음서와 바울서신에 비하면 지푸라기 서신이다. 따라서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

☆ 요한계시록은 예언의 책이나 사도의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고, 알려주지 않고 있다. *모든 판단의 표준이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계시하는 책이 위대한 책이며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잘 나타나지 않으면 정경으로서 가치가 없다.

성경 안의 책들이 상이한 가치를 띄지만, 전체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열광. 신비주의 반대. 성경말씀에 입각한 삶 강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우리 행위의 절대적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임

말씀이 성령의 문이다. 이 문을 닫으면, 하나님은 참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문 즉, 기록된, 설교된 말씀을 사용하시기 원하신다.

기록되어 있는 성경이 성령의 음성이 전해지는 문이다.

* 이러한 루터의 성경관이 Barth의 성경관과 비슷함이 많다고 학자들이 지적함

F. 성경을 떠나 예수 그리스돌를 만날 수 없다. (바르트)

cf) calvin의 성경관. : 루터 보다 구 정통주의에 가까운, 중간적 위치에 있음.

독일의 루터파 교회 * 칼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임 (아무 장애없이)

칼빈파 교회 (개혁파 교회) * 칼바르트의 신학을 받아들이기 어려움

17c 옛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려던 자들에 의해 갈등이 부분적으로 나타남. *다수는 수용

▶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강조

* 칼 바르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인 성자로 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자기계시 사건이다라고 함.

▶ 계시와 종교를 구분, 계시와 종교의 질적차이 강조.

* “성서 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라는 강연을 함: 너무나 놀랍고 새로운 세계가

성경안에 존재한다고 말함. 이를테면, 율법학자는 회칠한 무덤이고, 창기, 세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들어감, 일흔번씩 일곱 번 용서하는 것.

* 계시와 종교를 구별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역사에 감추어졌던 비밀이 여기 예수와 성경에 있다.

- “종교는 우상숭배이다.”

* 계시와 종교의 질적차이 구분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이론들)

▶ 속죄론의 회복

*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이다. (신성인정) 라는 이론이 속죄론과 관련있음.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서 전 인류의 구원과 죄의 속량을 보게됨.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장 결정적인 구원 계시사건으로 이해

*『화해론』-우리 대신 심판 받으신 심판 주: 예수의 대속, 여기에 인류의 희망이 있다.

▶ 하나님의 주권 강조

* 자유주의자들의 한계 :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 -인간의 무능성. 죄악성을 깊이 인식

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함(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 오류의 심각성 을 보게 함)

*역사의 희망, 역사를 변혁시키는 힘은 하나님의 행위 속에 있고, 인간은 단지 도구이다. *칼빈의 정신(Lordship)을 20세기에 바르트가 부각시킴

▶ 만남과 사건으로서의 진리

* 기독교의 진리는 만남과 사건의 진리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만남,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식되어진다.

* 자유주의(객관적 합리적 법칙만 인정) 공격 극복을 위한 법칙임(신학이론)

*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사건이므로 객관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없음.

*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받음 :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 신 정통주의가 한국에 왜곡되게 소개되어진 까닭 * 미국 교회역사와 관련이 있다.

* 1620년대 (17c) 청교도들의 미국이주 - 이들이 가지고 간 신학이 17c에 유행한

구정통주의 신학이었다. 이민 초기에 신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함 * 18c`19c까지

(엄밀하게 20세기까지) 이 신학이 그대로 미국의 신학을 지배

* 프리스톤의 C.Hotge, AA. Hotge, B.B. Warfield의 3대 거장들이 지닌 신학도 17c

구정통주의 신학임

*한국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도 당시 프리스톤의 영향을 받음 * 평양 신학교에서 17c

정통주의 신학이 가르쳐지게됨. - 한국 땅에서 이 신학이 20c를 지배하게 됨.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쳐진 것을 정통이라고 생각함)

그러나, 문제는 엣 정통주의 신학이 구라파의 자유주의 신학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데 있다. 한국의 현재 신학도 무너질 가능성이?

* 1800년대 (19c 중엽: 구라파는 자유주의 전성기) 미국에도 자유주의 물결이 침투해옴.

1870년대, 미국 북장로교회에 브릭스(Briggs)사건이 터짐 : 유니온 신학교 교수, 성경에

고등비평학 도입을 역설, 학생들에게 가르침 * 자유주의의 상륙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사건 - 브릭스는 파면됨 : 상륙했으나, 영향력 미미함, 동조자 없음을 의미

* 19c 말엽, 자유주의 풍미로, 미국신학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됨.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우려 높아짐 (19c까지는 자유주의 신학을 효과적으로 막아냄)

* 1895년 미국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나이애가라에 모여서 “보수주의 대연합” 태동시킴

-이것이 근본주의 신학임 * 자유주의와 고등비평학에 대항, 근본주의 5대 교리 만듬

ㄱ. 성경의 절대무오

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ㄷ.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ㄹ.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ㅁ.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전천년설 사상이 내표되어있음*개혁교회는 무천년설임)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가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임, 대신 5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으로 고쳐서 (세대주의에 대한 반대로..)

☞이 모든 것들은 자유주의에 의해 공격 받았던 기독교의 정통 교리들임

*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구라파의 자유주의 물결이 제거.방어됨

그 일파 칼빈주의자들 : 엣 칼빈주의 계승하려는 사람

BB. 워필드는 근본주의 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음.

* 세대주의자들(철저히 문자주의적임) : 영국인 Darby에 의해 만들어진 신학운동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미국, 특히 침례교 계통에 영향을 끼침. 예) 미국의 달라스 신학교: 세대주의자 본산

cf) 한국: 종말론 부분에 강하게 침투

세대주의적 종말론: 세상의 악함* 예수 그리스도의 공중재림, 일군의 신자들의 휴거* 지상의

7년 환란(환란시대(복음전파 가능)와 후환란시대 각각 3년 반씩, -역사상 유례없는 대 박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 천년왕국 계속됨* 곡과 마곡의 반란 일어남:마귀가 풀려나서 * 백보좌 심판-새하늘 새땅의 건설로 끝남

*구파 칼빈주의자와 세대주의자의 연합으로 서로 영향.-근본주의 5대 교리를 만듬

<세대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 인류역사를 7시대로 구분 (시대마다 구원의 수단이 달라짐) 아담→노아홍수→바벨탑→아브람~출애굽→모세~예수그리스도(율법시대)→오순절 성령강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까지 (은혜의 시대)→천년왕국

☞ 1910년까지 미국의 신학은 근본주의가 주류를 이룸, 자유주의가 약세.

☞ 세태주의 -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특히 종말론에서....)

←구원론에 있어 칼빈주의자와 차이가 있다.

▽ 구원의 도구가다르다. 근본주의는 구약의 사람들도 은혜로 구원받음,

▽ 종말론: 이중재림(세)과 1회재림(근) 개혁신학은 무천년설이 근본입장.

*1909~1915년, 『근본주의 총서』발간 : 근본주의 정신 홍보, 총12권, 두명의 평신도(와이먼

스튜어드)가 돈을 냄, 전국에 300만권 이상을 무료로 배부.

* 1895~1915년까지 근본주의에 의해 자유주의를 잘 막아냄.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근본주의의 붕괴가 본격적으로 나타남. BB.Warfield가 성경에 나타난 오류들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철벽의 교리 -- “최초의 성경 원본의 무오설” 주장: 우리가 가진 사본만 오류가 있는 것임. 최초의 성경(지금은 비록 없지만) 원본에는 오류가 없다.

* 1920년대 : 근본주의의 붕괴

ㄱ. H.E.Fosdick 사건 : 뉴욕시 제일 장로교회 목사 “근본주의자들은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함. 리라는 평신도가 이것을 인쇄, 사람들에게 배포 -- “근본주의자들은 자유를

억제하며 관용이 없는 자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절대적 교리로 주장하는 것들에만 관심하고 전세계가 무지, 빈곤으로 죽어가는데는 무관심하며, 교리적 논쟁만 일삼는다.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주장, 지금 이 시점에 해야할 일은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나는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이라고 는 한 순간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反 C.E.Macartney: 필라델피아 교회, 근본주의목사 “ 불신앙은 이길 것인가?”를 설교-

기독교와 자유주의의 상반성 주장 포스딕의 문제 노회, 총회에 제소. 포스딕이 사임당함.

이 사건을 계기로 근본주의자들의 관용심 없음, 비학문성, 비타협성이 드러남.

법적으로 Macarbney가 승리, 총회적으로 인기 떨어짐(근본주의에 대한 반대 여론 형성)

ㄴ. Scopes 재판 : 초등학교 교사인 스코피스가 진화론을 가르치면 안되는 주법을 어기고

가르침.(1925) Bryan 목사가 제소 - 법에 고소 : 원숭이 재판으로 알려짐

스코피스를 대변한 대로우(Darrow) 변호사(법률가)가 Bryan 목사와 논쟁.

스코피스가 법을 어겼으므로 유죄판결을 받고 100불 벌금을 내게됨.

법적 싸움은 스코피스가 졌지만, 여론에서는 근본주의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게 됨

☞1925년을 기점으로, 근본주의는 사향길에 접어들게 됨

ㄷ. 이 당시 미국 장로교회 활동 : 1924년 “Auburn(어번) 선언” 발표

1293명의 목사가 참여. 포스딕 사건 비판 (총회의 판결) -관용을 베풀 것을 주장.

1925년, 총회는 어두만이라는 사람이 총회장으로 선출됨 -근본주의 반대.

새로운 신학사상 인정, 수용함. - 미국 북장로교회의 주류가 바뀜.-근본주의를 벗어남

ㄹ. 이 당시 프리스톤은, 1915년, 스티븐슨이 교장으로 취임(중용적 입장을 취한 인물)

1921년, 비비 워필드의 죽음- 메이첸이 워필드의 죽음을 가장 애도함.

워필드의 죽음으로 신학방향이 조금씩 변함. 어번선언의 정신 받아들임

1926년, 메이첸(변증학 교수)이 북장로교 총회에서 교수 재인준을 거부당함(근본주의

학자이므로)→프리스턴의 분열 조짐 대두, 신학의 방향 여전히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음, 1920년대는 프리스턴이 우왕좌왕하던 시기임(자유주의, 신정통주의, 옛정통주의)

ㅁ. 1920년대, 신정통주의가 미국대륙에 상륙.

1920년대 후반, 프리스턴 다수의 신학자들이 신정통주의로 기울어짐.

프리스턴의 분열 - 메이첸, 옛 정통주의자, 근본주의자들은 떠남, 1929년, 필라델피아

에서 Westminster 신학교 설립 : 메이첸, 반틸(Vantil) Allis, wilson

1936년 이들이 미국의 정통장로교회라는 교단을 형성함

→메이첸, 반틸이 프리스톤을 떠나면서 칼바르트는 현대주의를 용인한 사실상의

자유주의자라고 몰아붙임.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의 가면을 쓴 자유주의라고 매도함

ㅂ. 1929년 분열이 1959년, 한국의 통합과 합동분열에 영향을 끼침.

예) 1953년, 기장의 김재준을 자유주의자라고 파면한 것도 마찬가지.(사실 신정통주의자임)

신 신학논쟁이 통합·합동의 분열 원인임. : 박형룡 박사의 영향력 때문- 그는 1920년대

프리스톤에 유학하여 메이첸의 애제자가 되었다. 메이첸의 신학을 따르게됨. 메이첸과

연대←프리스톤 분열후. 신정통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주장 : 한국산 메이첸임.

cf) 한경직 목사: 프리스톤의 본류와 관계맺음. (이 당시 유학하고 있었음)

ㅅ. 신 근본주의

* 1936년, 미국의 정통장로교회라는 군소교단이 형성됨 -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의해

이들 내부에 자체 분열 일어남 → 세대주의자들 때문

주초문제, 극장 출입문제(메이첸 계열에서는 용인, 메킨타이어 계열은 반대)

용인하자! : 신근본주의자. 반대! : 근본주의자.

*세대주의자 용인하고 신학교 설립: Faith theology seminary 성경 장로교회라는 교단

설립 (1937년) K.McIntire(맥킨타이어: 유명한 반공주이자, 한국에도 몇번 왔었음)에 의해

*암스텔담에서 ICC (International Council christan df church: 국제 기독교 협의회)를

만듬. : 신근본주의 세력 규합, 빌리그래함, 신복음주의자들도 정죄.

* Buswell을 중심으로 세인트 루이스에 신학교인 Covenent ~ 설립. “복음장로교회” 교단 이라 칭함

▽ 근본주의라는 개념이 안좋은 인식을 가지게 되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는 자신들을

개혁주의라 함 -- 극단적, 보수적으로 흐르는 개혁주의임.(김명용 교수曰)

신근본주의를 개혁주의로 규정, 신정통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우를 범함.

ㅇ. 복음주의←어찌보면 근본주의의 후예라고 볼 수 있으나 근본주의를 비판하여 자신을 구별함

* 근본주의를 떠난 보수주의자들중 상당수는 신정통주의에 가담.

예) 미국- 니버: 대표적 신정통주의자

*근본주의와도 신정통주의자와도 자기를 일치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에의해 1947년 Fuller

신학교가 개교됨 - Ockenga, Herry. Harrison. Ramm.

*이들중 Ockenga가 자신들의 운동을 “신복음주의 운동”이라 규정

K. henry는 크리스쳔 투데이 잡지를 편집, 출간하여 신복음주의를 선전 -빌리그래함도 여기에 속함, 독일의 신학자 P. Bayerhaus도 여기에 가담(그와 몰트만은 둘다 튀빙겐 출신이면서 라이벌 관계이다.)

* 19세기 말 ~ 20세기 초, 미국에 R.A.Torry(대천덕 신부 친할아버지)라는 부흥사에 의해 복음주의 운동 있었다. 이시기 운동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부흥운동의 연장선에서

있었던 운동.

Ockenga는 신복음주의 운동이라 명명. 지금은 그냥 ‘복음주의’라고 함.

* WCC는 1968년 웁살라 대회 -“하나님의 선교” 개념 제시

W.C.C의 급진화(, 1973. 방콕대회) 운동 강화, 자신의 세력 결집.

*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 개최. (wcc에 대항해서)

* 신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신정통주의의 신신학 이미지와 비슷할 것 같아 그냥 복음주의라 는 용어 사용

1974년 로잔 세계 복음화 대회 문서에 그들의 사상 잘 나타남, 그러나 새로운 보수신앙 으로 강한 힘을 가진 곳이 이 운동임. 신정통주의는 WCC에 포함됨 WCC안에서

가장 보수적 그룹으로 존재. WCC의 양면성: 보수성(신정통주의자)과 급진성(자유주의자)

*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항하는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 복음주의 운동임

ACTS : 복음주의

감신 : 자유주의

합동(총신): 근본주의

한신: 역사참여←김재준 목사 영향(신정통주의:전경연, 박봉랑) +(안병무, 서남동)

장신: 근본주의 + 복음주의 + 신정통주의

성서적 복음주의(이종성) - 성경을 중심으로 신학을 함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신학)

*복음주의의 특징

ㄱ. 근본주의 비판(역사성 결여, 문서운동 결여, 분리정책), 협력적 전도로 나아감 :

협력정책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를 위해 어지간하면 협력하자. -세상속에서의 선교,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교 주장.

ㄴ. 성경무오의 신앙 - 성경의 비평 인정하지 않음, 성경비평학 거부.

최근에는 low criticism은 받아들이지만 high ~은 거부한다.

ㄷ. 과학과 성경의조화를 위해 노력 - 6일 창조설을 6시대 창조설로 바꿈(6시대 구분

<근본주의의 약점>

1) 너무 축자영감에 빠져있음

2) 문자주의에 빠져있음

3) 관용심이 결여됨 -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과는 “식탁에 같이 앉지도 않는다”

한국 장로교단이 이토록 나눠지는 이유는 근본주의 때문이다.

4) 사회적 관심이 희박하다. -흑백문제, 기아문제 등등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없다.

5) 타계적 신앙에 집중되어있다.

역사는 갈수록 나빠진다고 본다. 역사 비관주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역사인식은 근본주의와 세대주의의 공통적 내용이며 미국 부흥운동 속에서도

발견된다. 이세상을 장망성(장차망할 성)이라고 본다.

<근본주의의 장점>

1)성경을 사랑하는 열정이 높다.

2) 중요한 교리를 지킴

3)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지킴.

* 김재준 목사는 신정통주의자다.

그는 역사책임적 신학을 전개하여 한국 진보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그 성향도 바르트의 바르멘 선언등 등에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에 의해 창조됨) 첫째날 : 한시기, 기간으로 생각.

근본주의자들의 비난받음 → 하나님의 시간으로서의 하루는 24시간 아님.

(과학에 아첨하는 자라고) 과학과 성경을 모두 살림

▲ 과학과 성경의 무리한 조화로 인해 생겨난 문제점 해결 :

창 5장의 족보 : 주전 4000년에 창조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옴. -간격이론 만듬: 아담→

창 5장→ 셋 →에노스 : 에노스가 셋의 친아들이 아닌 후손임을 애기하는 것임. 섯,

에노스 사이에 간격 있음, 필요한 사람만 기록.

노아홍수 :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생물, 모두 들어갈 수 있었을까? 부극곰, 펭귄,

고릴라를 어떻게 이동할 수 있었을까? Ramm 이 온 땅을 덮었다는 “온”을 전셰계아닌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규정 - 전세계 홍수설이 아닌 지역 홍수설 주장.

* 정치적 중립 : 당파성 싫어함, 정치적 문제에 중립지킴

* 선교에 우선권 가짐

Ⅱ. K. Barth의 생애와 중요한 사건.

1. 칼 바르트의 생애

▶ 1886년 출생 ~스위스 바젤에서

1904 ~1911 : 신학수업 기간 --전도사 함(제네바)

초기: 베른(Bern), 후기 : 베를린에서 수업(궁켈, 하르낙의 수업을 들음)

튀빙겐에서 Schlatter(보수적)로부터 배움.(아버지가 보수적인 사람이어서 바르트에게 보수적 신학을 배우길 원해서 튀빙겐으로 권유, 바르트는

숨이 막혀 못 견디고.....)

Marburg에서 공부한 후 졸업.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을 만남(수업

시간마다 감격, 눈물까지 흘릴정도 심히)

“증명되어 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는 명제←칸트영향(인간성, 자유성 배움)

1909년, 제네바 개혁교회 전도사.

▶ 1911 ~ 1921년, Safenwil에서 목사 (이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 때만

하더라도 그는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다.)

* 1918~로마서 강해 완성, 1919년 출판, 제 1 판.

* Tambach에서 『Der chtist in der Gesellschaft』(사회 속의 예수 그리스도)

라는 강연- 이 강연은 종교사회주의자들이 주최했었다.

→ 사람들에게 알려짐.

* 1921년 쾨팅겐 대학 교수.

▶ 1921~30년, 괴팅겐, 뮌스터 교수 시절.

* 괴팅겐 대학의 교수가 된 후 『Zwixchen den Zeiten』(시간들 사이에)라는

잡지발간 → 트루나이젠, 고가르텐과 같이 만듬, 이 잡지로 변증법적 신학자로 불려짐.

*1925년 뮌스터 대학으로 옮김

▶ 1930~35년, 히틀러와의 투쟁기( 초기, 히틀러 대항에 불붙인 사람이 바르트다)

* 1930년 본 대학으로 교수자리 옮김

* 본격적으로 히틀러와 투쟁 위의 잡지는 중단되고, 『Theologische Existenz

heute』(오늘의 신학적 실존) 이라는 잡지 발간 → 히틀러와 투쟁

* 1934, 5, 30~31 『Barmen 신학선언』발표됨.←고백교회 신학선언(칼바르트가 작성)

Bohn 대학 교수직에서 해직당함.

*자기 고향인 바젤로 돌아감. -이 시기, 히틀러의 강권정치 강해짐.

cf) 이때부터 고백교회운동의 신학적 지도자로서 본회퍼가 등장하기 시작함

▶ 1935~1962년, 바젤(Basel) 대학 교수 - 바르트 신학의 완숙기.『교회교의학』저술

1962년, 은퇴.

1968. 12. 10. 사망

2. 중요한 사건

1) 1915년 스위스 사회 민주당에 가입

자펜빌의 붉은 목사라는 별명을 듣게됨 -- 그는 사회주의자인가?가 중요한

신학적 문제로 대두 (1970년)

2) 1923년, 베를린의 하르낙 교수와 논쟁벌임

ㄱ. 쾨팅겐 대학 교수 시절임, 하르낙은 헤르만과 독일 신학의 최대의 원로로 있었음.

ㄴ. 이 논쟁으로 칼 바르트가 유명해짐.

ㄷ. 1920년 『성서적 질문. 관점. 조망』이라는 강연을 함, 하르낙이

이것을 읽고 자극 받음. 1923년, 하르낙이 『신학하는 자 중에 학문적 신학을

조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15개의 질문』이라는 문서를 공개적으로 발표

ㄹ. 바르트 - 신학의 과제는 설교다. 역사 비판학의 한계 강조.

反 하르낙 -- 신학교 교직을 설교직으로 바꾸는 자다.

ㅁ. 바르트 - 교회의 신학자: 신학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며 사랑하는 신학자.

하르낙 -- 아카데믹한 신학자: 신학함에 잇어 어떤 전제도 있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이전에 그 예수가 어떠했는가를 알아야 함. (역사적 예수의 모습) 그렇지 않은 신학자는 교회에 아첨하는 신학자다.

-- “우리가 설교하는 예수와 역사적 예수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

3) 나찌 히틀러와의 투쟁.

ㄱ.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 기초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적 아버지가 됨,

칼바르트의 신학이 독일 교회에 영향끼치며, 그이 신학적 권위가 높아짐

ㄴ. 골비쳐가 이시기에 그의 조교였음. 바르트와 함께 해직당함, 이후 계속 히틀러에

대항. 나치 수용소에 갇힘. 후에, 베를린 자유대학 교수가 됨

-반핵평화운동에 앞장섬

ㄷ. 골비쳐, 바르크 바르트(박순경교수가 영향받음)등이 바르트 신학을

좌파적으로 해석.

ㄹ. 1938년, 체코 프라하 신학자 로마트카에게 나찌에 저항할 것을 요구하는 편지

보냄. 중간에 나치에게 빼앗겨 나치 기관지에 실리는 등 문제 발생.

ㅁ. 현실에 민감했던, 현실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해석하려 했던 역사적 문제에

민감했던 신학자. “나의 신학은 전체가 구체적으로 표현했던 안했던 간에

정치적 문제에 민감했다.“

ㅂ. 신학은 가장 남성다운 학문 - 신학을 안했다면, 정치했을 것임.

4) 1935~1962년 교회 교의학 출판 (9,000페이지): 말씀, 신, 창조, 화해, 구원 (종말론)

*kirschbaum 이라는 여비서가 바르트를 도왔기에 가능, 1924년부터 알게됨. 1930년

부터 도와줌, 칼바르트 보다 먼저 죽었다. 그 뒤 바르트의 글이 나오지 않음.

5) 바르트가 사랑했던 사람.

ㄱ.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사진, 유명한 음악가 모짜르트의 사진이 그의

방에(서재) 걸려있음

ㄴ. 바르트 신학의 핵심 :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 하나님의 은총 깨달음.

“알프스의 산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것이 나의 신학이다.”

* 9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교회 교의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찬양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하나님 은총의 승리가 바르트의 신학이다.

* H.Vogel: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된)웃는 바르트“라는 제목으로 바르트

논문집의 한 단원을 정함

ㄷ. 모짜르트의 음악이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함

* “모짜르트 음악에서 나는 자유와 희열을 느꼈다”

* 만년에, 모짜르트에 관한 책도 씀.

*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칭찬받는 천사는 바하의 음악 아닌, 모짜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 천사일 것이다.”

* 나는 카톨릭 신자가 되기는 원치 않지만 적어도 14일 동안 교황이 되어 모짜르 트 음악을 축복해 주고 싶다.

6) 칼 바르트의 신학은 변천하고 있었다.

ㄱ. 신론 중심으로 6번의 신학변천이 있음 --김명용 교수 학위 논문

초기와 후기신학이 다름, 분명히 시기 구별을 해야 함.

ㄴ. 바르트 자신의 신학과 관계가 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대전제임

나의 모든 업적은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생각.

7) 칼 바르트의 적 : 그의 일생에 3부류의 적이 있었음.

ㄱ. 문화기독교*(19c, 자유주의) --인간적인 것을 신적인 영광으로 옷입힌 것임.

ㄴ. 경건주의자와 율법주의자.

* 바르트는 경건주의의 영향 받으며 삶--경건주의 왕국지역에서 자람→경건주의

비판: 경건주의의 지옥, 경건주의는 사탄을 만든다고 함.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들은 롬 7장에 스스로 빠져 있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의를 이루려고 하나 이루지 못함.

* 바르트의 신학 : 은총의 신학 --“나의 신학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은 100%, 심술사나 율법주의자다”라고 말함

* 자학, 비판, 용서없는 경건, 율법주의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율법주의자.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 못하는 율법주의자.

* 진정한 경건은 율법주의의 올무에 매여있지 않고 사랑하는 것에 있다.(자비,

사랑, 긍휼이 경건의 핵심이다.)

* 율법주의자 - 용서를 알지 못함←하나님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

(약 2: 13 긍휼없는 심판, 약 1: 27 고아, 과부를 돌아봄)

*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는 자들이라고 비난.

ㄷ. 로마 카톨릭

*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므로 -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교황의 영은

한 지붕 아래 동거할 수 없다. ←교황이 적그리스도의 역할을 하게됨

*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중요하게 여김 →교황에 반대로 나타남 : 개혁교회

기본정신이 되기도 함.

* 전기: 카톨릭을 적그리스도의 집단으로 봄. 그러나 1962~65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초청을 받아 교황과 만남, 바르트의 생각이 달라짐 →로마 카톨릭

새로운 카톨릭으로 출발. ←교회는 적그리스도는 아니다“라고 말함.

: 카톨릭 신학에 대한 오해, 부정확한 이해가 바르트에게 있었음 →카톨릭 신학자 들이 바르트를 연구한 후 얻은 결론.

ㄹ.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전적으로 교회를 지배되어야 한다는 기본정신 때문에

교황제도를 거부하고, 카톨릭과의 관계도 좋지 못했음.

Ⅲ. 로마서 강해 제 1판 (1919)의 신학

1. 자펜빌에서의 바르트

ㄱ. 철저한 자유주의자, 종교사회주의자였음.: 1914년 설교 본문 중

『영원한 창조주 인간의 아들들의 이성과 의지를 통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심』

『위대한 인간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인간은 이곳 땅 위에 있는 제 2의 신이다.』

『인간의 활동은 언젠가는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ㄴ. 사회주의 이념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숨어있다고 생각함.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주의 운동이고, 사회주의 운동이 현존하는 예수다.“ 네가 참된 사회주의자냐?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인임이 틀림없다. 네가 참된 기독교인이냐? 그렇다면,

참된 사회주의자가 되라” “사회주의는 복음의 불가피한 적용이다”

→ 사회주의운동과 하나님나라 운동을 일치시킴.

ㄷ. 자펜빌의 “붉은 목사”라는 별명을 가짐 : 공장 노동자를 의식화 시키며,

교인들에게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

2. 1914년 8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ㄱ.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지지하는 성명

발표, 헤르만과 하르낙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음(바르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 않던) 구라파에 만연된 자본주의 이념을 독일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구하려 한다는 주장을 빌헬름 2세가 함

ㄴ. 바르트는 “그해 8월 초순은 암흑의 날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학, 교의학, 신학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고 함. ←그가 독일인이 아니고 스위스인이었 으므로 더 충격을 받은 것임 “19c 신학으론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 다”고 말함

ㄷ. 1914, Naumann은, 전쟁과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현실의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조국의 노동자운동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전쟁을 위한 지출을 승인한다. 이제 유럽 전쟁의 뇌우 속에서 독일 이상주의자들의 국가적 희망 이 성취되고 있다”고 함.→바르트에게는 하나님 나라 실현의 이념이 사회민주주의 라고 생각 했는데 이것이 전쟁을 위한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었으므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19c 자유주의 운동을 새롭게 생각하게 됨.

ㄹ. 1914, Barth의 글에는 실마리, 해답 못찾음.

1915, 4, 독일 남서부 지방의 Bad Boll에 찾아감. 종교사회주의자인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를 만남. 1주일간 깊은 대화를 나눔 →해답을 찾기 시작함.

불룸하르트를 통해 로마서 강해 1판도 출판할 수 있게 됨. 새로운 바르트를 탄생 시킨 스승임.

ㅁ. 크리스토프 불름하르트 --

*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축마사건으로 유명함

* 경건주의자, 그러나,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강함. 아버지 때부터 철저한 하나님 중심 사상을 가짐. →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자다.(Jesus ist Sieger!) :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나타남. 바르트에게 굉장한

영향끼침(축마사건에서 연유되어 이어짐)

*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사상(축마사건)을 사회. 역사적 차원으로 발전시켜

인식함. : 개인. 역사의 궁극적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ㅂ. 바르트가 능력의 하나님을 찾아내기 시작함 (ㄹ, ㅁ을 통해) →신학의 주제가

하나님이어야 함을 깨닫기 시작함. ‘역사변혁은 사람이 아닌 예수를 통해서다’

라는 걸 불룸하르트를 통해서 배움. cf)신학의 주제를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옮긴 것이 로마서 강해 제 1권의 중요한 신학적 의의임. 승리자이신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ㅅ.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며, 너희가 살리라. Suchet Gott, so werdetihr leben!」

이라는 설교집을 이 시기에 펴냄.

: 자유주의자들은 200년간, 이 부분을 간과했었음.

ㅇ, 아라오라는 기독학생연합회에서 「Das eine Notwendige (1916) 단, 하나 꼭

필요한 것 -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꼭 필요한 것임을 강연. : 구원의

주체자가 누구인가를 강연.

ㅈ. 평화가 없음은 전쟁 때문이 아님, 전쟁도 평화없음의 근본원인이 못된다.

하나님이 평화다. 평화가 없음은 그 곳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 없이 평화를 이룩하려 했기 때문이다.

←로마서 강해 제 1 판을 지배하는 정신

3. 로마서 강해 제 1 판의 신학 - 1918년에 완성, 1919년에 출판.

ㄱ. 신학의 주제를 하나님으로 돌려놓음 :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20c에 태동함.

ㄴ.「성서안에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강연: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한 것이 아님.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어떻게

이끄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것이 성경이다.

ㄷ.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1)인간의 죄악성과 이성의 무능.

*인간은 땅 위의 제 2의 신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죄인이다.

*인간의 이성속에는 붉은 죄가 내재.(성령이 내재하는 것이 아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파괴, 이성은 절름발이가 됨: 유한한 것.

인간적, 일시적인 것 앎. 그러나 본질적. 궁극적인 것은 알지 못함.

*인간의 역사는 계시의 역사가 아님. 탐욕. 살인. 전쟁의 역사다.

2) 세상 속에 활동하는 죽음의 힘과 영의 힘의 구조적 차원.

*죽음의 힘과 영의 힘의 전투가 세상이라고 생각.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만 분쇄됨을 발견.

*헤르만의 제자였으므로 인간의 도덕을 신뢰,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힘으로 사랑의 왕국 건설 안됨을 발견. ←죽음의 힘 앞에서 무력, 도덕적 노력은 악의 왕국.

분쇄는커녕 악의 도구로 전락한다고 주장하게 됨.

* “세계사의 주제는 개별자로서의 사람의 마음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객관적 세력 즉, 죄와 의의 세력간이 투쟁이다. 이 세력들 중 어느쪽의 지배하에 존재하느 냐에 따라 개별자로서의 사람의 존재가 죽음으로 가느냐 삶으로 가느냐가 결판난다.

”--로마서 강해. 172쪽

→힘의 구조적 차원을 이해해야 함.: 구원과 계시는 개인적 노력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의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그 구원하 시는 능력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건설의 전제조건이다.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는 이 힘에 의해 지배 받고, 이끌림을 받는 곳에 존재.

*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이끌림 받는 곳에 만 존재하므로 하나님나라의 건설 이념이 될 수 없다.

3)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건설하신다.

가.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하나님 나라와 일치시켜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님 나라 운동과 일치시킨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을 뒤엎은 것임

나.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함. 사람의 진보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새롭 게 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든 사회 민주주의 를 위한 것이든 간에 신적인 것이 정치화 되어서도, 인간적인 것이 신성화 되어서 도 안된다.

다. “평화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하나님나라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형태도 인간이 만든 옛 형태를 대변할 뿐임. 참도움이신 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곤궁 에서 나온 것임( 이것이 사회주의가 기존하는 자존주의 체제에 대한 혁명을 의미 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혁명이라 부르는 것의 혁명을 의미한다. ”

라. 하나님의 나라는 레닌주의 이상이다. -- 로마서 강해 1판에서 인용: 이 말 때문에 마르크 바르트가 신학과 사회주의에서 칼바르트는 레닌주의 이상의 철저한 사회주 의자였다고 함.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회주의

이상을 극단화 시킨 레닌주의까지도 뒤엎어 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

것임. 하나님께서 스스로 앞장서서 건설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역설.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계를 말하려한 것이지, 레닌주의 보다 더 극단화된 사회주 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님.

마. 인간의 활동이 가지는 의미.

4) 세상을 부정하면서도 긍정하는 하나님의 활동의 변증법적 차원

가. 인간을 철저히 부정하는 표현이 많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긍정적 표현

(우리가 하나님의 군병이다...)이 있음. 이 부정과 긍정을 연결하는 것이 변증법임: 하나님은 정(Thesis 正)속에도 反(Antithesis)속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合 (Synthesis)속에 존재한다.

→ 긍정. 부정이 아닌 긍정과 부정이 흘러나오는 출발선상에 하나님이 계신다.

나. 사회주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운동이 아님. 그러나, 하나님 나라 운동일 수 있음→ 하나님께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도구로 쓰시기 원하신다면, 이 전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 자체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아님. 이 시점에서 하나님 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도구로 사용 하시기를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춤.

→ Warten// Eilen

ㄱ. Wsrten : 기다려라.

Eilen : 서둘러라.

ㄴ.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활동하시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함. (Warten)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활동하시는가를 발견했으면,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서 (Eilen) 그 활동에 동참해야 한다. 이럴때 죄악된 우리는 하나님의 군병이요,

팔이 될 수 있다.

그 때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고 계신다.

ㄷ.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활동하시는가를 깨닫기 이해서는 한 손에는 신문을

(정확한 현실 파악), 한 손에는 성경( 하나님의 뜻 파악)을 들고 있어야 한다. →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목사의 과제다.

★로마서 강해 1판은 200년동안 사장되어 있던 신학의 ‘주어’를 찾아 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ㄹ.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활동하시는가를 설교해야 함.(신문, 성경을 읽고 깨달음

으로서)

5) 역사속에서 성장하는 하나님의 나라.

ㄱ.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주역이 되어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나라.

ㄴ. 불룸하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음.

예) 개혁신학의 전통: 역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봄

세대주의,부흥사: 역사에 대해 부정적으로 봄. → 개혁교회에 영향을 끼침.

ㄷ. 주기도문 - “나라이 임하옵시며 ~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하나님께서 주도 하여 만드는 하나님의 나라. 역사책임적 의미. 마13: 31~32 - 하나님 나라의 성장 암시

계시록 - 역사에 대한 희망이 저변에 깔려 있음→종교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역사내의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음.

1997. 4. 25.

Ⅳ. 로마서 강해 제2판(1922)의 神學

-1921년 완성, 1922년 출판

1. 1판과 2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 완전히 다른 책:

1) “돌하나도 처음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함

2) 1판을 쓴 후에 로마서 주해를 잘못했다고 생각. 새로운 신학적 관점에서 새로이 주석.

그 배경: 키에르케고르의 哲學의 영향 - ‘역설’, ‘도약’ 등의 개념 인식하기

시작.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

이 시기에 바르트는 프란츠 오버벡(F. Overbeck 바젤대 교수)의 영향, 하인리히 바르트의 글을 통해 플라톤, 칸트의 영향.

트루나이젠( 바르트에게 토스토 예프스키를 소개한 사람. 세계적인 목회자, 바르트 신학을 목회학에 운용함)과 토스토예프스키를 통해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곤경을 깨닫기 시작.

고가르텐, 에밀 부루너와 결별 - 나치의 가능성 수용의 신학이었으므로

불트만 --신학적 견해 때문에 결별

-키에르 케고르를 통해 역설, 도약, 결단, 위기의 신학을 알게 됨.

3) 하나님은 전적 타자다. : 신학의 주제는 여전히 하나님임. 그러나, 신학의 주제인 하나님의 인식이 달라졌다. 하나님은 세상을 변화, 새롭게 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 1판 정신의 핵심. 2판에서는 하나님이 전적 타자(totalitar aliter)로 등장하심: 하나님은 이 세상과 관련이 없다. 이 세상을 위기로 몰아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 변증법적 관계로 사람과 하나님의 협력이 1판에서는 가능함. 그러나, 2판에서는 협력 가능성을 제거함: 자유주의 신학의 잔재라고 생각함.

4) 칼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1판의 신학과 유사해짐-더 원숙함

→ 1판과 다른 바르트가 등장.

2. 2판 신학의 내용: 자유주의를 박살낸 책으로 유명

1. 하나님과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

1) 하나님과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

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Gott ist im Himmel und du auf Erden” :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는 보잘것 없는 존재다. - 19c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철저한 질적차이와 단절을 강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극단적인 質的인 差異 의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죽음의 선’이 가로놓여 있다. ‘빙하의 계곡이 있다.’ = 죽지 않고는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가 이 세계로 넘어올 수도 없고, 인간적인 것이 신적인 세계로 넘어갈 수도 없다. 결국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을 죽이는 것.

有限과 無限의 극단적 차이를 강조.

---> 歷史의 發展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수 있다는 사상을 전적으로

부정.

(로마서 1판은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 성장의 가능성을 언급.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다고)

“우리가 긍정보다도 더 깊게 부정 속에 몸담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더 깊이 죄 속에 빠져 있다는 의미밖에는 없다.”

“이 세상의 樂觀主義와 悲觀主義 속에는 하등의 差異가 없다... 하나님은 세상을 무한히 부정하신다... 하나님은 차안과 피안의 피안이며... 우리의 죽음의 죽음이며, 우리의 비존재의 존재이다...”

2. 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그 근원과 목표를 갖고 있지 않는 운동이다.”

“시간적인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결단코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영원 속에 있다.”

“시간은 영원을 수용할 수 없다.”

시간과 영원의 근본적 차이 설명, 시간은 결단코 영원을 닿지 못한다.

“구원사라는 것도 하나의 위기일 뿐이다. 구원사 역시 하나의 육체적인 것일 뿐이다.” “Keine Foederal Theologie!"(어떤한 계약신학도 있을 수 없다) :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인 것을 매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도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의 구원사는 계속되는 위길일 뿐이다. 구원사 역시 육체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어떠한 계약신학도 있을 수 없다. (Keine Föderaltheologie !)

그렇다면 교회는? 교회도 신의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즉 교회 역시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3. 위기와 심판의 신학

로마서 강해 2판의 신학을 ‘위기의 신학’이라고 한다. 왜? 인간적인 것은 하나님과 부딪히면 죽는 것이다. “전세계는 하나님의 진노의 흔적일 뿐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역사를 위기에 몰아넣고 심판하시고, 멸하시는 존재이다.” - 전세계의 역사는 낙관적으로 신의 나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역사일 뿐이다. “시간과 영원히 마주치는 곳에서 세계는 위기에 휩싸이고 조각조각 부서지게 된다.”

--> “종교는 신앙과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종교는 죽음의 선을 스스로 넘으려는 시도일 뿐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 이렇게 부정적인 입장을 표출하게 된 이유? 전쟁이 끝났을 무렵 기록되기 시작. 세계대전의 종전 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이해. 일차대전의 폐허 위에서 바르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그 폐허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 글을 통해 엄청난 감동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 로마서 강해 2판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과 쌍벽을 이루는 당시의 위기적 서구인의정신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대표적 저술로 이해된다.

또 종교와 문화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가 인간의 창의력을 종합하려는 신프로테스탄트적 종합을 파괴하는데 촛점(틸리히).

인간이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떠는 것’(das

Heilige)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고상한’ 예수는 신앙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그 고상한 것을 심판하신다. 이 역사 속에는 인간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4.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의 불가해성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없다면, 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며, 무엇을 신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 땅 위에 있는 그 책은 신적인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사도 바울이나 예레미야의 하나님을 할 수 있다는 긍정성까지도 부정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말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한다. 이는 바울과 예언자와 하나님 나라의 사도들에게도 타당하다 모든 인간의 말은 예외 없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증언으로부터 자유롭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증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해 보려는 노력이지만, 실상 성공하지 못한 좌절된 인간적 언어의 도구에 불과하다.” - 인간의 언어는 절대로 신적인 것을 나타내지 못한다. 1922년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강연):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께 대해 언급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가지 곧, 우리의 ‘해야 한다’와 ‘할 수 없다’를 알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답이 없는 답이다.

5.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역설적 가능성( 이것이 답임)

: 세상과 하나님 사이는 원과 직선이 만나는 접점과 같다고 봄. 이 접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 그러나 이 계시를 인간의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좌절된 인간의 말이 되고 만다. 번쩍하는 순간을 시간 사이에 있는 순간(Zwischen den Zeiten:시간들 사이에)임. Paradox가 일어남. 하나님의 계시와 만나는 순간. 이 세상속에 불가능한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역설적 불가능한 가능성(역사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가 없음→이것을 “원역사”라함.(Urgeschichte)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예수인 고상한 인간만 발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원역사의 차원(Zwischen den Zeiten)에 있음.

3. 로마서 강해 2판 신학의 평가

하지만,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제2판 이후 즉시 자기 신학의 결함을 인식. 여기에서 그의 관심은 자유주의 신학을 붕괴시키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아직 그 대안을 내어놓지는 못했다. 이 책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

*장점

1) 인간의 죄악성의 깊이를 끝까지 인식.

2) 19세기 문화 기독교주의의 오류를 청산.

3)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였던 sola fidei가 회복되었다 - 바울적 기독교가 새로 출발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바르트가 존경한 신학스승: 예레미야, 바울, 루터, 칼빈, 키에르케고르 - 바르트는 의도적으로 슐라이에르마허를 배제: 구원받을 수 없는 곤경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

* 문제

1) 인간과 세상, 역사가 상실될 위험. 하나님은 역사를 새롭게 하는 분이다. 하나님을 세상 밖으로 몰아내서는 안된다. ‘전적 타자’란 새로움의 타자로 이해해야지, 역사밖에 홀로 존재하는 전적 타자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모든 인간적인 것을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타자성은 성육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 후기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간성을 발견: 1956 Humanity of God, Die Menschlichkeit des Gottes: 바르트는 기독론적 신학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인간성을 발견하게 됨. 로마서 강해 제2판에서는 이를 미처 알지 못함. => 여기에서 바르트는 인간, 세상, 문화의 긍정성 발전시키기 시작(이는 기독론을 근거로) , 창조세계에 대한 긍정성,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찬양.

로마서강해 제2판 이후 바르트 신학의 변화가 초래.

Christliche Dogmatik : 하나님 말씀의 3중양태 - 예수 그리스도, 성경, 교회의 설교. 이 세가지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중재하는 특징을 가진다. -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 등장. 이 구조는 바르멘 신학선언과 비슷한 시기에 완성.

* 틸리히는 로마서 강해 2판을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걸 강조한 책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력을 종합하려는 신프로테스탄트 사상을 파괴하려던 책이라고 평가를 하였다. 2판을 쓸 때만해도 바르트는 ‘말씀의 신학’이 아니었다. 로마서 강해 2판은 신학적인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니라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책일 뿐이다. 새로운 신학을 시작하기 위한 부수는 작업이었을 뿐이다.

Ⅴ. 바르멘 신학선언(1934)

1. 배경

전후 독일의 상황은 참혹. 엄청난 전쟁부채. 재건이 거의 불가능. 희망 상실.

이런 상황에 히틀러 등장, 집권. 집권후 2년이 채 안되서 600만 실업자 해결. 히틀러는 전쟁을 통해서만 독일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알았다. 공장주들의 재산 몰수/국유화(국민들의 지지), 세계최초로 고속도로 건설,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

☞ 이때에 일군의 목회자, 신학자들이 히틀러 통치의 위험성 인식:

‘고백교회’ 시작.

히틀러의 지배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

1933년 독일 교회 총선거 실시: 당시 독일교회 연맹(Deutsche Christen)이 지지하던 루드비히 뮐러가 독일의 국가 주교로 당선. 독일교회 연맹은 히틀러 어용단체. 독일의 국교회가 히틀러 통치의 앞잡이로 됨. 이 그룹이 성명서 발표.

1933.8.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1933.12. ‘모든 민족들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한 하나님께서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아돌프 히틀러와 그가 이룩한 국가 사회주의 속에서 그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었다.’

1934.3. ‘독일 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떄문이다.’

1934.3 ‘히틀러가 그리고 국가사회주의가 독일민족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자 성령의 길이다’

☞ 하나님이 히틀러를 통해서 오셨으며, 국가사회주의가 하나님께서 이상적으로 생각하시는 영원한 모습이 구현된 국가라는 이해.

이같은 독일교회 연맹에 저항해서 일군의 신학자, 교회 지도자들이 바르멘에서 총회를 개최. 여기에서 발표한 성명서를 ‘Barmen Theologische Erklaerung’ (1934.5.29-31)이라고 함. 여기에 참여한 이들을 일컬어 고백교회의 일원이라고 함. 이와 함께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 형성. 이들은 히틀러 집권초기에 히틀러 통치의 위험성, 악마적 특성을 일찍이 간파.

2. 기초위원

Barth(개혁파 대표), Breit(루터파 대표), Asmussen(연합교회 대표), Sasse(교회사가) 4사람이 바르멘 신학선언 기초를 위한 위원으로 선출. 이것이 바르트 신학선언으로 된 원인? Breit와, Asmussen이 자는 사이에 바르트가 다 씀. Sasse는 아파서 안 옴. 바르트는 이 신학선언으로 인해 독일교회의 신학적 아버지로 존경.

3. 내용

전체가 6조로 구성. 각 조마다 성경구절 인용, 성명서 따라나옴.

제1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요 10.1,9):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들어야 할 단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Das eine Wort Gottes)이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 때나 죽을 때나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 한 분 하나님의 말씀 외에 다른 사건이나 능력이나 형상이나 진리를 설교의 자료로 사용하며 하나님의 계시가 있는 것처럼 전하는 그릇된 이론을 우리는 배격한다.”

---> 신격화된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를 배격한다는 것을 의미. 히틀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가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이 외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듣고자 하려는 것을 배격한다는 것. 히틀러와의 투쟁의 동기가 내재. 여기에 바르트 신학이 뚜렷이 내재해 있다. 계시는 성서, 예수 그리스도, 설교외에는 없다. 이 외에 제2, 제3의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 이런 관점에서 바르트는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철저히 배격.

제3조. ‘ ’(엡 4.15,6): “그리스도의 교회는 형제들의 모임이며, 이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과 성례전을 방편으로 현재 주님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이 그리스도의 교회는 은총을 입은 죄인들의 교회로서, 죄 많은 세상 한 복판에서 그 자신의 신앙과 순종과 복음과 질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는 이 교회 뿐이고, 이 교회 만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그의 위로와 지도를 받으면서 살고, 또 살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가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모습들을 교회가 제 마음대로 작정한 어떤 것이나, 현재 유행되고 있는 세상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가르치는 그릇된 이론을 배격한다.”

---> 교회를 강조.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정적 계시, 그분의 몸은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 이처럼 바르트가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 히틀러와 투쟁할 때 에밀 브룬너가 아무 생각 없이 Natur und Gnade를 씀. 이에 대해 바르트는 Nein! 바르트는 Natur가 결국에는 히틀러를 긍정하게 한다고 생각. 이 논쟁의 핵심: ‘접촉점’. - 우리는 이 논쟁을 당시의 역사 속에서 읽어야. 이때 고가르텐은 [복음과 민족문화의 일치]라는 책 저술. 이에 대해 바르트는 너같은 친구와는 다시는 안논다. 결별. 함께 출간하던 Zwischen den Zeiten을 폐간하고 Theologische Existenz Heute를 새로 발간. 1935년 결국 본대학 교수직에서 해직.

===> 히틀러와 투쟁하던 시기에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와 설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함. 즉, 이 ---만은 그 역사적 정황 때문에 비롯. 후기 바르트는 자연신학에 대한 인식이 에밀 브룬너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음. 자연계시의 가능성 인정.

1997. 5. 2.

Ⅵ.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A. 성서관

1..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양태

1) 예수 그리스도 - 계시된 말씀

2) 성서 - 기록된 말씀

3) 설교 - 선포된 말씀

바르트가 히틀러와 싸우고 있을 때에는 세 가지 양태만, 후기 바르트에 가서 는 세 가지만에서 ‘만’자가 사라진다.

가장 근원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성경은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말씀. 그러므로 성서는 비평할 수 있다고 봄.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맞지 안을 때는 성경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두 번째 권위는 성경.

세 번째 권위인 설교는 성경에 일치해야. 그렇지 않으면 성경에 의해 비판을 받아야.

성경과 교회의 선포 사이에 신학의 자리가 있다: 교회의 설교는 신학적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곧, 성경과 일치하는가의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

2.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인간적 증언인 성서

바르트는 성서가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봄. 성경은 첫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쨰로는 계시에 대한 인간적인 증언이라고 봄. 옛 정통주의의 오류는 성경이 계시에 대한 인간적 증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기계적 영감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성경 안에는 수많은 인간적 요소, 인간적 제한성이 존재하고 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를 파악하는데 실패한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자. 그들은 성경이 인간적 증언이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성경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실패.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바르트의 영감론은 실재영감론(Realinspiration).

3. 계시하시고 은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다. 신앙이 없을 떄에 성경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계시를 계시로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계시인 동시에 은폐이기 떄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하나님이 인간의 형태로 오셨기 떄문. 이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고자 낮아지고, 인간의 말 속에 숨어 있는 것은 놀라운 일.

4.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성

계시인 동시에 은폐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가?: ‘사건’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은폐의 문을 여시고 말씀을 주실 때, 그 사건이 일어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게 된다: Ereignis, Akt. 이 ‘사건’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5. 인간적 증언으로서의 성서의 가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은 반드시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가? 바르트는 성서적 증언들의 유일회적 가치를 주장.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특별한 자들이고 독보적인 자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이들. “이들의 현존은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하나님이 이 증언을 떠나서 말씀하실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증언에 묶여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제를 배타적으로 이해하고, 다른 어떤 제삼의 법정이나 다른 어떤 권위를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복음주의 교회 및 참된 교회의 존립이 결정되는 문제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증언에 묶여 있다. 이 증언을 통해서만 우리는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성경이라는 권위 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요구하는 것은 참된 교회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것.

그렇다면, 성경이나 설교를 볼 때, 설교에서의 오류나 실수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르트는 그런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적인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 그리고 그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은 일어난다고 생각. 이는 설교만 아니라 성경도 마찬가지. 성경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때 인간적 약점도 함께 드러난다.

6. 정경의 표준

이 문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못 듣느냐가 결정적인 표준이 된다. 이는 종교개혁자들의 표준이었던 ‘성경은 스스로 성경되게 한다’는 말을 새롭게 표현한 것. 즉, 성경의 권위는 성경 스스로가 입증하는데, 그 핵심은 그 문헌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정경이라는 것. 오늘날의 정경에 들지 않은 책 중에서도 그 책을 통해서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경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결정하는 자 - 전체교회가 해야 한다. 만일 성경 이외의 다른 문헌들 속에서 전체 교회가 명확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경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12사도의 교훈,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는 정경에 삽입할 가치가 있다고 봄. 약, 요이삼, 계은 정경에서 제거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고 봄.

바르트에 의하면, 정경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때문에 종교개혁시대에 정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 역사적으로 볼 때 정경의 결정은 오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러나 오늘날 누군가가 기록한 글을 정경으로 넣을 수는 없다. 정경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하고 기록한 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

B. 신론

1.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강조하게 되면, 칼빈의 예정론(이중예정)과 같은 결론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한 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 칼빈의 이중예정에 표현된 하나님의 자유를 바르트는 그런 자유는 변덕의 자유다. 이런 하나님은 천상의 폭군이라고 비판.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상일 뿐. 바르트가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는 이유는 이러한 신을 청산하려는 의도가 내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은 지옥에 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언급되지 않는 신은 우상일 뿐이다. 과거 칼빈주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가 강조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상을 심어주고 말았다. 칼빈주의 예정론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은 없다. : 바르트는 칼빈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칼빈 속에 드러나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개혁하고자 노력.

“하나님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가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와 같은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자비와 의

* 바르트는 신의 두 가지 모습을 하나로 만드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의 속에서도 나타난다.

‘의’에는 심판의 개념이 많다.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과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두 개의 신관을 가지고 있다. 정통주의 신학은 이 양자를 동시에 강조해왔다.

바르트는 이 두 개의 개념은 하나님을 십자가 밖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의 자비라고.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의는 하나이다. 자비롭지 않은 하나님의 의는 없다: 율법 역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표출된 것.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그 의의 핵심은 형벌받아야 될 우리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지시고 고통 당하시고, 대신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즉, 그것은 극단적인 하나님의 사랑(자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란 결국 하나님의 자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 후기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의 심판 개념이 없어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자애로우시다.”

그렇다면 심판이란 뭔가? 그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어두운 어떤 것이다. (---> 바르트의 죄론과 연결)

바르트의 이같은 개념은 많은 신학적 논쟁을 초래.

여기에서 바르트는 율법주의와 결별: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도 이 하나님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흘러넘칠떄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다. 율법적으로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율법주의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십자가에 더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람은 참으로 선한 사람으로, 하나님과 닮은 존재로 된다. ---> 철저하게 ‘은총의 신학’을 전개.

3. 하나님의 불변

* 문제: 하나님의 뜻이 변치 않는다면, 인간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칼빈주의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하신 것이라면 변경되지 안 는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반면, 바르트는 “하나님의 불변은 석고상과 같은 무감각, 또는 움직일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죽어있지 않고 살아계신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만남이고 역사임을 뜻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있어서 수동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기도에 포기란 있을 수 없다. 기도의 포기란 비신앙의 위로받을 수 없는 행위이다.” - 바르트는 적극적인 기도를 강조:“기도하지 않는 것은 허락될 수 없는 인간의 사치이다.”

“하나님의 자유를 근거로 신자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결정하심이 존재한다.”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기도보다 앞서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의 기도에 뒤 따르기도 한다.”

--->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만남이요 역사라는 것을 반영. 따라서 인간은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한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불변이란 뭔가? 하나님의 불변을 헬라 철학적으로 이해한 것이 잘못이었다. 하나님의 불변이란, 그분의 ‘인격성의 불변’을 의미. 인격성의 불변이란, 그분의 사랑, 은총, 약속과 같은 것들의 불변을 의미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살리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의로우시고 오래 참으신다는 것, 곧 하나님의 삶과 인격은 영원히 불변한다.”

4. 하나님의 전능

후기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 깊이 사고. 바르트는 하나님의 전능이 그분의 무능함 속에 있음을 발견: 십자가 신학의 발전 결과.

십자가 속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승리하셨는가가 나타난다. “그는 자기에게 반역하는 자를 때리고 심판하고 힘으로 승리해서 그의 전능한 힘으로 정복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사랑과 거대한 은총의 힘으로 승리하신다. 그의 능력은 멸시받음과 순종 속에 나타나고 있다. 만군의 주님께서 승리하시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고 십자가 속에서 나타난다.” KD Ⅳ/1

인간에 대한 위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신이 바로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다.

‘무능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전능’ - 정치신학에 응용되고 있다: Politics of Jesus(요드) :빌 2:6의 그리스도 찬가에 기독교의 역사철학이 드러나 있다.

Moltmann, Ohne Macht Möchtig : 기독교의 전능은 벌거벗은 전능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 속에 나타나는 전능이다.

* 이 모든 것들은 자연신학적으로는 알 수 없다.

1997. 5. 9.

C. 예정론

* 예정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 많음.

* 전통적 예정론(칼빈주의 예정론)의 내용 - ‘이중예정’

영원전에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다.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축복으로,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저주로 예정하셨다.”

칼빈: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사전에 정해졌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저주에 이르도록 사전에 정해졌다.” “성경이 뚜렷이 밝혀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의 계획에 의해 오래 전에 구원을 주실 사람을 정해 놓으셨으며...” “그러므로 선택자 야곱은 여러 면에 있어서 에서와 하등 차별을 둘 것이 없으나, 하나님의 차별에 의해 유기된 에서와 현격히 구별된다.” “유기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은 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과 바울을 반대하는 것이다.”(롬 9:13-16, 19-21) - 칼빈은 이중예정의 성서적 근거를 주장.

* 칼빈주의 5대 신학강령의 핵심; 예정론 -> 17c 칼빈주의에 영향

* 1618년 도르트 신조도 이를 근거로 확정.

1 인간의 전적 무능

2 제한된 속죄: 예수의 속죄의 죽음은 소수의 무리에게만

3 저항할 수 없는 은혜: 하나님의 절대주권 강조.

4 성도의 견인: 택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끄신다.

* 유기된 자의 입장에서는?

* 예정론에 대한 반론

1. 예정론은 운명론이다: 이 역사는 결정된 대로 기계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운명론 → 기계론.

2.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모순된다: 예정론은 성경에도 기록된 인간의 자유의지를 희생시킨다.

3.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된다: 인간의 죄 역시 하나님의 예정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 이에 대해 예정론자들의 주장: 하나님은 죄 지을 것 을 알고 계셨다. 죄 짓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므로 망하는 것은 너희의 자유 의지로 망하는 것이다.

4. 예정론은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낙심시킨다:

5. 예정론은 개인을 불공평하게 대한다 -> 이에 대해 예정론자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불공평에 대해 불평할 수 없다. : “지옥에 가는 자들 의 이빨 가는 소리도 하나님의 의를 찬양한다.” ->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고 있음을 나타내기 떄문.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의이지, 인 간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의인 것은 아니다.

6. 예정론은 선한 도덕에 비호의적이다

7. 예정론은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는다: 이미 구원과 멸망이 확정 되어 있다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

8. 예정론은 보편구원을 가르치는 성경구절과 모순된다.

--- cf. L. Boetnner, 「칼빈주의 예정론」, 홍의표(역)

* K. Barth의 예정론 비판

바르트는 신개념에 근본적 문제가 있다고 봄. 영원전에 일군의 무리를 지옥에 보내는 신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런 신은 단연코 없다! 하나님은 지옥에 가는 마지막 사람의 생명도 건져내기를 원하시며,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비와 긍휼의 신. 그 십자가 앞에서 지옥에 가는 자들의 명단을 영원 전부터 작정하고 계신 신을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신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미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다. 이는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파악하지 않음으로 인해 빚어진 일. 이러한 천상의 폭군을 몰아내야 한다: 바르트가 계시신학을 전개하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 하나님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바르트의 기독론적 신개념은 1942년 CD Ⅱ/2에서 완벽하게 드러남. 바르트는 1936년에 예정론에 관한 논문 “Gottes gnadenwahl” 발표. 양자 간에는 상당한 차이.

1. 1936년 예정론의 특징

완벽하게 기독론적으로 집중되지는 않음.

1) 하나님은 선택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신다(눅 17:34): 전통적 예정론과

유사

2)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이 없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고 버리는 사랑이다. “육은 심판을 언급하지 않는 사랑을 말하지만, 영은 말씀을 우리에게 말해 주신다. 보편적 은총 속에서 저주가 폐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3)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tne)이 아니고, 우리의 버림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에 의한 우리의 버림받음 인식. “우리는 하나님의 버림을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에서 인식할 수 있다.”

4) 그리스도는 선택과 버림의 중재자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과 선택이,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와 버림이 주어진다. 이를 중재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5) 선택은 하나님의 현존하는 자유의 행위와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믿음과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지금 일어나고 있다 - 전통적 예정론 비판: 전통적 예정론은 현존하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간과한다고 비판. 전통적 예정론의 신개념은 이신론의 신과 비슷하다고.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고 지금 우리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 일어나고 있다.

6)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 예정론은 객관적이라기 보다는 믿는 자의 고백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7) 선택과 유기는 영원전에 완성된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다. 지금은 그 선택이 일어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가서야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가 구별될 것이다.

☞ 아직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명확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 초점: 예정을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하려고. 믿음 속에서 경험되는 고백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이해.

1997. 5. 16.

2. 1942년 이후(CD Ⅱ/2)의 예정론: 하나님의 심판의 개념 사라짐.

1.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규정(Selbstbestimmung Gottes)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로 영원 전에 결정하셨기 떄문에 예수 그리스도밖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 일면 사변적. but, 이는 십자가의 계시의 사건을 영원 전으로 투영하는 바르트 신학 사상의 과정 속에서 형성.

2.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는 신은 이미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편적 원리나 상상에 의해서 찾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는 선택을 위한 결의였다. 영원 전에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 예정론은 기쁘고 즐겁고 위로해 주는 복음이지 공포와 기쁨이 섞인 어떤 것은 결코 아니다. 예정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정을 말한 것이다. 인간을 버리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사건은 이러한 하나님의 결의가 나타난 사건.

4. 하나님의 이중예정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뜻한다. 인간을 선택하시고 대신 자기를 버리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요약한 것이 이중예정이다: 하나님의 이중예정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다른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Der einzige Verworfene)이다. CD II/2 p. 358? so “이중예정은 복음의 총화다.”

5.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버림의 계시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극단적 대리적 교환에 의한 인간에 대한 선택의 계시이다: 인간이 심판받을 자리에 하나님이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교환을 받으신 교환의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건을 보면 인간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계시되어있다

---> then, 믿음의 기능은? ‘만인구원론’인가? 이에 대한 대답:

6. 하나님의 선택은 고정된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역사이고 만남이고 사건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영원히 일어난다. 그러므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이다.

7. 현 역사 속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버렸기 떄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은총이고 선택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행위는 두 개의 결과를 초래한다. 버림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가 끊임없이 거부당하는 곳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과 같은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이 믿음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곳, 즉 하나님의 자비로운 불신(?)이 거부당하는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폐기된 버림의 그늘이 존재한다.

8. 믿는 자는 선택된 자이다. 믿는 자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가 바로 이 영원한 선택의 표준이다.(이 점은 1936년과 동일) - 예정은 ‘고백’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지금 믿는 순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동시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바르트는 후에 이 개념을 폐기).

* 정리: 바르트는 1942년의 예정론에서부터 기독론적 신관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행위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신이지, 심판하고 버리는 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유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폐기한 ‘불가능한 가능성’, 하나님의 은총의 ‘그늘’이지 본질이 아니다.

* 1942년 예정론의 특징:

i) ‘신관’ - 버리는 신은 없다는 것.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사랑이고 은총이라는 것.

ii)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를 십자가에서 사색.

* 예정론의 분석과 종합

ⅰ)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이중예정의 교리는 잘못이다.

전통적 이중예정의 근거: 롬 9 - 바르트는 롬 9장의 주석이 잘못되었다고 봄: 롬 9장이 하나님의 주권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를 분별해야. 바울은 이중예정을 가르치려 롬 9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 유대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방인조차도)들이 약속의 자녀. 이렇게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사람이 힐문할 수는 없다는 것.

ⅱ) Moltmann; 예정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다. 「희망의 신학」(1964) 발표 이전 몰트만은 칼빈주의 연구에 몰두: 「예정과 성도의 견인」

예정론 연구에 있어서 문제점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과의 관계에 대한 것. 칼빈주의의 기계론적 예정론 강조로 인해 예정론에 대한 혐오감 초래하기도. 몰트만은 예정론에 대한 이같은 오해에 유감. 예정론이야말로 복음을 표현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 교리라고 생각. “엡 1” - 선행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 이 듣고 믿는 인간의 행위는 운명적으로, 기계론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ⅲ)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Zufälligkeit)과 무상성(Hinfälligkeit)을 반대하는 교리이다.

ⅳ) 예정론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을 말하는 교리이다.

ⅴ)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이다.

ⅵ) 예정론은 하나님의 攝理를 전하는 교리이다.

* 오늘날 예정론은 바르트와 몰트만을 거쳐 복음적인 예정론으로 정리됨. 바르트는 예정론과 관련하여 신론에 대해, 몰트만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공헌.

1997. 5. 24.

D. 삼위일체론.

* 삼위일체론에 대한 반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K. Braaten, No other Gospel: 니터의 No other name?을 반박하면서 종교 다원주의를 반박하는 가장 중심적인 교리는 삼위일체론이라고.

성서신학자: 성서에는 삼위일체론이 발견되지 않는다.

* 삼위일체론의 이단들

① 삼신론: 하나님은 세 분이시다.

② 일신론:

ㄱ. 종속론 - 예수는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 아리우스주의, 여호 와의 증인(예수는 성부와 동일한 신이 아니라, a god에 불과하다)

but, 빌 2:6ff(그리스도의 비하): 종속론의 오류를 증명.

ㄴ. 양태론 - 일명 ‘정통주의 이단.’ : 하나님이 세 역할을 가진다고 설명.

ㄷ. 양자론 - 일명 ‘자유주의 이단.’ :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 예수의 선재성 부정. 예수와 인간의 질적 차이 부정. 이들은 성령을 하나님의

에너지 혹 능력으로 이해.

☞ 일신론은 십자가를 진지하게 보지 않기 때문에 잘못.

C.f. 예수가 과연 聖子인가? 이 질문은 삼위일체론 논쟁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판넨베르크.

W. Pannenberg, Grundzüge der Christologie - 대따 중요:

삼위일체론의 중요성 강조. 삼위일체론이 정초되는 장소는 바로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이라고.

J. Moltmann

E. Jüngel

☞ 이들은 삼위일체론이야말로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정초하고 있으며, 성경 도처에서 체계화된 것이라고 봄. 삼위일체론 이야말로 기독교회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강조한 것은 자유주의가 횡행하던 당시의 시대상황과 비교해 볼 때 혁명적 특징을 지닌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의 역사다라고 주장.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를 하나의 인간으로 이해한 반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자신의 역사라고 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성령과의 관계: 영원 속에서 영원의 반복.

하나님은 “1 Person(한 분)이고 3 Seinsweise(존재양태)를 지닌다”. 한 분

하나님은 세 번 반복하실 수 있다.

---> Q. ㄱ. 이는 양태론이 아닌가?

ㄴ.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었다면 하나님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없나?

이에 대해 바르트는 하나님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고 함.

*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 터툴리안 - "una substantia, tres persone"

터툴리안의 persona는 오늘날의 인격과는 다르다. 그것은 (배우가

쓰는)‘mask’, 즉 ‘역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persona에 ‘인격’이라는 의미가 첨가되기 시작. ---> 오늘날 persona는

무조건 인격의 의미.

바르트는 이 persona의 연구를 통해 터툴리안 당시 여기에는 인격의 개념이 없고, 역할의 개념만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바르트의 정의는 터툴리안의 정의를 오늘날 독일어로 정확히 번역한 것. 문제는 터툴리안의 정의에 양태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로 인해 서방교회의 전통 속에서 정통주의자들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 성향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 동방교회: μια ουσια(하나의 실체),  τρεισ υποστασισ(세 개의 인격) -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것을 인식. 그런데 이를 터툴리안이 라틴어로 옮기면서 문제가 발생. 동방교회가 세 분이 하나의 인격을 가진다고 본 반면,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인데 세 개의 역할을 한다고 이해.

이 때 우리는 초대교회에 교리의 정통성은 동방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조는 모두가 동방에서 결정되고 있었음. 동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말하는 자들을 모두 이단으로 정죄. 다만 이 세 분 하나님의 하나의 우시야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 그것은 무슨 뜻인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서방교회 측에서 본다면, 정통의 표현이고, 20세기에 삼위일체론을 부활시켰다는 공헌을 한 것 같다. 하지만, 동방교회 전통에 입각해서 본다면,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전체적으로 양태론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동방교회 전통은 하나님을 세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97. 5. 30.

* 몰트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의 가장 커다란 진전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에서 이루어진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서방교회 신학자가 동방교회와의 대화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 서구신학에서 삼위일체론 논쟁을 다시 야기. 삼위일체론은 철저히 계시와 성경에 입각한 것이고, 단지 논리적 모순을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이를 증언하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한다면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드러나게 된다: 일신론은 자연신학이며, 철학적 신개념에 불과하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이신 신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다(마 28:19; 고후 14:13). 이 세 분 하나님은 각각 다른 하나님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내어주셨을 뿐이다.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봄.

그렇다면 삼신론인가? 몰트만은 일신론과 삼신론 중 오히려 삼신론이 성서에 더 잘 부합한다고 이해. 그러나 삼신론은 이단이다. 삼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이어야.

그렇다면, 어떻게 삼위일체론이 가능한 것인가? 몰트만은 계시에 입각해서 이를 언급해야 한다고 봄. 성서를 떠나서 사변해서는 안된다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여기에서 ‘하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너희가 나를 알았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보았고 또 알았느니라.”(요 14:7ff)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10)

---> 예수는 한 번도 자신이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삼위일체론은 본래 3 = 1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와 하나님, 성령이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고 있으며 상호 ‘침투’(perichoresis)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하나인 것은 상호 침투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자들은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와 성령의 영광을 함께 볼 수 있게 된다. 삼위일체론은 이 세 분 하나님이 신비하게 결합하고 있다는 독특한 존재양태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잘 드러나 있다. μια ουσια(하나의 실체),  τρεισ υποστασισ(세 개의 인격)

===> 몰트만은 바로 이 사실을 밝혀 냄. 십자가에 달린 이는 성자만 아니라, 성부와 성령이 함께 달렸다고 봄. 십자가에는 삼위일체적인 고난의 형식이 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달게 하는 고난을, 아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고난을 당한다. 둘은 함께 십자가에 달리지만 각각 다른 방식으로 고난을 당한다. 삼위일체론은 바로 이 사실을 밝히려고 한 것이었다.

===> 이후 서구신학에서 삼위일체론 논쟁 초래.

ⅰ) 몰트만의 관점을 수용,지지; 동방교회, 서방교회 신학자 중 상당수. 이들은 터툴리안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

ⅱ) 몰트만에 대한 비판; 바르트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 이들은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생각을 고수. 때문에 바르트의 전통 아래 있는 이들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을 한 분으로 만들지 못한다며 비판. 이들은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

Ⅴ. 인간론.

1. 인간 이해의 전제: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 이전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어디에서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인간에 대한 이해: 유물 론적 인간이해/ 관념론적 인간 이해.

바르트는 양자를 모두 거부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참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파악되는 인간의 모습.

1)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인간: “하나님을 위한 인간”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자, 이웃을 위한 인간이었 다고 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존재이며, 이웃을 위한 존재라고 봄.

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죄인이다.

ⅱ) 인간은 왕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ⅲ)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과

사랑의 fellowship을 형성하고 사는 존재.

ⅳ)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존재이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 게 하며 살아야 한다.(칼빈의 영향)

2)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웃을 위한 인간: “만남으로서의 인간”

인간은 다른 인간을 위한 존재이며, 다른 인간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그 가장 핵심적인 만남은 남자와 여자의 만남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만남 속 에 인간성의 본질이 들어있고, 진정한 비밀이 들어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하나님을 닮은 관계라고 봄.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드러난다.1) 바르트는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이 관계성 속에 성부와 성자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투영되어 있다고 봄. &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 속에 인간을 참된 인간으로 만드는 신비가 숨어있다고 봄.2) 창 1:26-28을 주석하면서 바르트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성부와 성자 간의 사랑의 관계의 analogy 라고 함. 이 사랑의 관계 속에 진정한 인간의 본질이 들어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현존하는 남녀관계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의 아날로기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남녀관계는 타락, 혹 전도되어 있기 때문.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의 진정한 아날로기는? 신앙안에서 성화된 사랑의 관계가 진정한 아날로기가 될 수 있다.

Cf.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전통적 이해: 서구신학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의 이성, 영적 기능을 의미;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러나 이같은 이해는 인간을 구분하고 반쪽으로 나눠버리는 결과를 초래. 어거스틴은 신플라톤 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인간의 육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졌기 때문. 어거스틴에 의한 기독교 신학의 영혼화는 잘못.

Ⅵ 복음과 율법. : 1935, 『복음과 율법』이라는 책을 씀.

1. 전통적인 복음. 율법의 이해

▲ 율법의 기능

→ 죄를 깨닫게 함.

→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가는 몽학선생(가정교사)임.:

인간의 무능, 하나님의 심판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총에 목말라 하게 하고

하나님께로 인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은총이 있음을 깨닫게 함.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율법의 기능: 정죄, 죄를 깨닫게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계속 순환됨(루터 신학의 맹점도 여기에 있음)

2. 칼 바르트의 복음. 율법의 이해.

1) 율법과 복음이 아님, 복음과 율법으로 하는 것이 순서가 바르다.

2) 율법이 제기능을 하려면, 복음 속에 있어야함.

3) 율법은 은총속에 있고 은총의 형식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가 심판받을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죄를 깨달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연인이 심판받을 죄인임을 알지 못함.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함. 복음밖의 사람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 율법으로는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게 할 수 없음. 복음속에 있는

사람만이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다. (율법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죄를 깨달음) 이를테면 사도 바울- 죄인중에 괴수다. 롬3장의 이구절은 1: 16~7절에 나오는 복음의 빛 아래서 해석.→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율법은 본질적으로 은총속에 있다.

그때에 비로소 율법은 제기능을 발휘한다. 은총의 현실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율법은 복음안에있다.) 복음으로 부터 온다.

: 자연인은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 능력은 복음, 은총속에

있다. 율법의 이미는 실질적으로 “~해야 한다.”인데 이 말은 “~하게 될 것이다.” 라는 은총의 말로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 ☞ 성령께서 역사 하실 때, 새로운 마음, 가능성, 기회를 주셔서 우리가 변화되어 ~을 할 수 있게 됨: 하나님의

은총속에 복음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임. ▷십계명 1조가 전체 십계명 을 지킬 수 있느냐의 시금석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은 가능성, 우리는 행할 수

없는 것을 성령께서 하게 하심. 가능케 하심. 율법주의, 경건주의의 지옥은

복음이 아닌, 율법에 의존하는 것임.

▲ 율법은 인간을 살리기 위한 생명의 영의 법이다. : 율법은 원래 선한 것이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선하게 되고, 해방되고, 거룩해지며,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임. 율법이 복음 속에 있을 때에 이런 기능을 갖게 됨. →율법자체가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의 계명이었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 산다. 예) 살인하지 말라→사랑. 평화를 이루어라.

섬겨라→섬김의 삶을 통해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해 감.

Ⅶ. 교회와 국가.

1. 교회. 국가 사이에는 목적의 차이가 있다.

교회의 목적-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나라 건설: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므로.

국가의 목적-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지 않다. : 신자와 불신자의 공동체이므로.

따라서 이 둘은 일치할 수 없다.

1) 종교적 문제 - 국가는 중립적일 수 밖에 없다.

2) 교회 목표 - 하나님 나라.

국가 목표 - 인간적 의미에서의 정의의 수립: 인간적 관점에서의 치안유지, 혼란, 죄방지, 자유. 평화유지

3)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의 질서가 다름.

4) 1)~4)는 루터적 전통 속에 있음. : 두왕국 개념 - 교회는 영적질서 · 국가는 세상적 질서를 담당.

2. 루터와 근본적으로 차이나는 것.

☞교회와 국가 사이에는 유비가 있다.

1) 유비개념: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추님이시기도 하다.

교회안에 그의 뜻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도

교회의 질서가 국가의 질서가 되어야함. (1)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나?

2)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목표.

국가: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이 섞인 시민 공동체이므로 성경의 사상을 그대로 적용하지 못함. 시민 공동체에서 적용 가능한 질서는 교회안에 질서 가운데 세상적 유비(근사치)를 찾아야 한다.

예) 성경 - 형제 공동체 정신( 이상적 하나님 나라)→시민공동체에 적용하지 못함. 근사치를 찾아내야 함.: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그 근사치임(칼 바르트)

성경- 칭의론 →시민공동체에서 범죄자도 풀어주어야 하나? →인권을 위한

노력으로 나타남.

성경 - 하나님 자녀의 완전한 자유→ 법적, 정치적 자유를 획득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어감. 독재. 왕정체제 반대.

성경- 원수사랑 →원칙적인 비폭력의 길을 찾아가야 하지만,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음. 독재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 는 성경말씀을 실제로 시민공동체 안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음.

3)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음(김명용 교수 曰): 아날로기(유비개념)은 현실성 있고, 성경의 정신을 시민공동체에서 적용시킬 수 있으므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음.

4) 바르트의 사회민주주의: 하나님 나라와 유비된다고 생각. 교회는 정치적 차원에 서 사회민주주의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

Ⅷ. 화해론( 4의 1권~ 4의 4권) : 가장 많은 분량할애. 심혈을 기울임.

1) 객관적 화해론을 발전시킴.

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

맺음→전통적 입장.

이것이 과연 옳은가?

나. 바르트는 잘못 가르쳐진 것이다라고 함.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되고,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때는 예수께서 만인의 죄를 지고 2000년전 십자가에서 돌아 가신 그 때이다. 이미, 그 때 나의 죄도 청산, 도말되는 어마어마한 놀라운 사건 일어남. 이미 이 때 만민이 하나님과 화해함.→ “객관적 화해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과 화해: “ 주관적 화해 론” 나의 믿음. 결단에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만민은 하나님과 화해함. :

“객관적 화해론”

라. 바르트는 만인 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인가? 만민이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되고 만민이 하나님과 화해하였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르트 : “나는 만인 화해론을 주장한 것이지, 만인 구원론(Allerlösungslehre)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라. 만인 화해론과 만인 구원론. : 2차대전 어떤 사람이 나찌군을 피해 알프스 산 으로 도망감. 1945년, 나치군이 망함. 독일에는 자유의 물결이 밀려옴.

해방이 됨. 이 산에 숨어 있는 사람은 자유·해방을 경험하지 못함.

▷화해: 나치가 망하는 사건, 마귀권세 망함.

구원: 화해 +a가 있어야 함. 이 숨어있는 사람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임. 누군가가 나치가 망했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산으로 찾아가야 함. 이것이 전도임. 만일 그 사람이 믿지 않고 따라서 세상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도 있음→ 거절.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생활을 청산

하고 내려오는 것이 믿음이며 이것을 통해 그 사람은 구원. 자유 해방을 얻게 됨.→ 화해와 구원 사이의 시간이 전도. 선교의 시간이다. 따라서 화해와 구원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칼 바르트)

마. 만인 화해론이 성경적인가? 성경적이다. (바르트)

바. 만인 화해론은 결국은 만인 구원론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대한 바르트의 대답이 없다. - 구원론을 쓰지 못하고 죽었다.

(거절과 구원의 긴장 관계를 그대로 둔 채)

2) 칼 라너(K.Rahner) “ 객관적 화해론”을 발전 시킴.

가.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음.

나. 바르트가 주장한 “객관적 화해론”이 신학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

한단계 더 발전시킴. 이것이 정당하다면, 모든 인간은 출행부터 하나님의 은총과 접맥되어 있다고 봄. → 객관적으로 관통된 그리스도의 은총 : 바르트 의 것을 발전시킨 이론. 이교도든, 그리스도인이 든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접맥되어 있음. →모든 사람은 그들의 삶 속에 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경험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은총을 경험하고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임을 알지 못해 다른 신의

이름으로 표상한다. 예)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들의 삶속에서 부처의 대자 대비로 표상, 불교의 대자대비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었다. (→ 상대적 가치밖에 있음 - 그 은총을 왜곡시키고 온전하게 알지 못함) ☞종교간 대화의 문을 열어 놓음(칼 라너)

다. 제 2차 바티칸(1962~1965) 공의회가 칼 라너의 이론을 정당한 발전으로 수용. : 타 종교속에 “말씀의 씨앗”이 있다고 표현함→ 타종교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갖도록 공헌. 그러므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타종교와 대화하는 것이 좋다고 함. 그러나, 이것이 “타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님. (예수 그리스 도 은총의 파편들이 타종교 안에 들어 있다.) :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다리 역할을 함. : 말씀의 씨앗이 타종교 속에서 어마어마하게 전도되어 나타나므로 이것에서 예수 그리스도 은총을 발견하는 건 어렵다. 말씀의 파편 을 가지고 구원을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대부분 카톨릭 신학자의 입장)

Ⅸ. 죄론.

칼 바르트 : 죄는 크게 세가지다. 교만(Hochmut). 태만(Trägheit), 기만(Lüge)

1. 교만.

가. 인간의 죄악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의 삶의 반대를

알면 그것이 조임을 알 수 있다.

나. 창세기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

다. 왜 교만이 죄인가? : 인간은 근본적으로 피조물,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의를 주장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함. 이러한 모습이 죄 다. 필요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음. 그런데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고 함은 교만으로서의 죄다.

라. 교만으로서의 죄의 결과: 좌절, 비참. 인간이 오류에 빠지는 것임. 구약에서 금송 아지 쫓다가 망하는 것처럼 망하는 삶으로 끝나게 됨.

2. 태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태만,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태만☞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태만

1) 태만 : 게으름 - 자기의 권한. 능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

2) 인간은 왕같은 존재인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염려나 불안이 없다.

왕같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이 하나님과 사귐속에서 살 때는 왕같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관계. 사귐은 포기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 이 태만이다.

3) 태만의 결과 : 인간의 곤궁으로 나타남. 곤경 속에서 삶. →비인간화됨. 도덕적 결함들이 발생.

4) 인간의 염려 자체가 죄임 : 자신의 실존을 포기하는 것임.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임 : 하나님과의 사귐속에서 이탈해서 자기 혼자 해보려다 이루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되므로.

5) 교만으로서의 죄와 반대 개념에 있음 - 자기의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자기 의 존재를 비참하게 격하시킴.

♤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태만으로서의 죄

1) 인간은 사랑을 하면서 살도록 되어있음. 사랑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를 느끼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 →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규정성. →거부. 사랑하지 않는 삶 으로 전락하는 것이 태만임.→비인간화 됨.

2) 인간다운 삶 상실. 고독, 미움. 분노. 갈등을 느낌→ 살인, 전쟁으로 이어짐. 자신에 대한 가학적 행위인 자살로 이어짐.

3) 이웃과의 사귐이 인간의 본질인데 이것을 거부.

3. 기만 - 거짓말하는 죄

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 다스리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음. 스스로 중립적이 됨. 진리를 비진리로 만들고, 스스로 객관화된

진리를 만들려고 함.←기만으로서의 죄 예) 무신론 : 하나님의 존재하심 - 진리

2) 마귀 : 거짓말하는 자, 미혹의 영.

3) 비진리를 진리로, 진리를 비진리로 만드는데 에 기만으로서의 죄가 존재

이 세상을 가짜 신이 다스림. 가짜 신이 최고의 진리로 등장( 불의와 타협, 돈을 섬기는 사상)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가? 그것의 구분이 모호해진 세상. 따라서 가짜신 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4) 우상이 지배하는 세계: 기만으로서의 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 재물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5) 악한 영의 활동 : Nichtiges - 십자가에서 멸망당한 마귀의 힘이 실제로 활동 무성 (無成?性?) 의 힘이 이 세상을 지배.


1).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영혼과 육체를 포함한 전인격으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 특히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이신 성자를 닮았다. 그 성자는 바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G. von Rad. -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존재로 창조된 것.

2). 서구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에로스와 아가페를 구분; 에로스 < 아가페
바르트는 이 구분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 이같은 구분에는 영을 강조하고 육을 천시하는 헬라철학이 내재 but, 성서에는 영을 강조하고 육을 천시하는 어떤 말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성서는 남녀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의 유비로써 나타난다; 호세아, 아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