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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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출판사

 
 

 

기독교 강요 (전 4권)

 

 

 

 

 

 

 

 

 

 

 

 

 

인   쇄 : 2000년 4월 24일

발   행 : 2000년 5월 10일

저   자 : 죤·칼빈

역   자 : 김  충  호

발행인 : 송  준  식

발행처 : 한국출판사

주   소 : 서울시 동대문구 신설동 98-9(2층)

등   록 : 1996년 6월 3일 제6-0439호

전   화 : (02)926-6986

팩   스 : (02)926-6987
 
<제목 차례>

 

추천의 말 1

역자서문 2

서론 3

약어표 35

독자에게 드리는 글 -1559년­ 37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39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58

제 1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이 두 사이는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가 있는가? 58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슨 목적에 이르게 되는가? 61

제 3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 64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 무지, 악의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부패되었다 67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 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하신다 71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로 교사로서 필요하다 86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권위는 확실한 것으로 세워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기인된다는 것은 사악한 거짓이다 90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96

제 9 장  성경을 떠난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신앙의 원칙을 파괴한다. 106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진실하신 하나님만을 정립하신다. 109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112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127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131

제 14 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뚜렷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165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 184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 195

제 17 장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섭리의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207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이용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순결을 유지하신다 222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1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반항으로 전 인류가 저주에 떨어지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 원죄론 1

제 2 장  이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11

제 3 장  저주받을 짓은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한다 38

제 4 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54

제 5 장  자유의지를 변론하고자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반대에 대한 논박 60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추구해야만 한다 80

제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86

제 8 장  도덕적 율법에 대한 설명(십계명) 101

제 9 장  그리스도는 비록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마침내 복음을 통해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145

제 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149

제 11 장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165

제 12 장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176

제 13 장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갖추었다 184

제 14 장  중보자의 두 본질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190

제 15 장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직을 보아야 한다 199

제 16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으며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206

제 17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만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당연하며 알맞는 일이다 227

 

제 3 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1

제 1 장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진 사실들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1

제 2 장  믿음 : 믿음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설명 5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 회개 46

제 4 장  그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69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107

제 6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주장하는가? 118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 자기 부정 122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 자기 부정의 일부 132

제 9 장  내세에 대한 명상 140

제 10 장  현세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146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150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칭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174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81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185

제 15 장  행위에 대한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201

제 16 장  이 교리를 악평하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209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213

제 18 장  행위의 의를 보상이란 말에서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228

제 19 장  기독교인의 자유 238

제 20 장  기도 : 믿음은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252

제 21 장  영원한 선택,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 310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증 320

제 23 장  이 교리를 항상 거짓되고 부당히 평가해온 그릇된 비난들에 대한 반박 333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확실히 된다 : 더욱이 사악한 자들은 그들에게 운명지워진 공정한 파멸을 스스로에게 초래한다 347

제 25 장  최후의 부활 366

 

제 4 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끌고, 그 곳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외적인 수단 또는 보조 장치 1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모체(母體)가 되는 진정한 교회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1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와의 비교 25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34

제 4 장  고대의 교회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정치 45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제도가 고대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57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72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85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109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122

제 10 장  입법권 :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133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재판권의 남용 158

제 12 장  교회의 권징 :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172

제 13 장  맹세 :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191

제 14 장  성례 209

제 15 장  세례 231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일치된다 247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275

제 18 장  카톨릭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소멸하는 모독 행위이다 330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346

제 20 장  국가 통치 374

 

 
추천의 말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기독교강요, 성경주석, 설교집, 편지, 신학논문집 등은 실로 놀라운 대작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칼빈이 27세 때인 1536년에 출판된 「기독교 강요」야 말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트를 존재하게 한 기본적인 저서입니다. 「기독교 강요」는 칼빈이 일생동안 수정 보완하여 1559년 결정판이 나오기까지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상의 일관된 체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직도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능가할만한 신학적 저술이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신전의식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조직한 걸출한 작품입니다. 1536년 출판된 「기독교 강요」의 속표지에 기록된 대로 이 책은 바로 경건의 대전(Summa Pietati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을 창조주요, 구속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합니다. 1560년대부터 「기독교 강요」는 영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고, 특별히 옥스퍼드, 캠브릿지 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화란, 독일, 불란서 등에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 문학, 정치, 법학, 역사, 교육 등 학문의 모든 분야의 학생들에게 기본적인 책이 되어 그들의 사상이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 후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신학의 전 분야에 걸쳐서 중심서적이 되었고 인류역사에 이 책만큼 학문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영향을 크게 끼친 책은 없다고 봅니다. 그 이유로는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잘 준비된 학자요 경건한 목회자였습니다. 평생 병마에 시달리면서 그는 저술에 몰두했고, 유창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불어 실력에, 신구약 성경을 줄줄 꿰는 성경지식, 철저한 신전의식, 예민한 지성과 탁월한 학문, 그리고 굽힐 줄 모르는 의지가 이런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번역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라틴어, 불어, 영어, 독일어, 화란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헝가리어, 체코어, 일본어, 한국어 등이고 1999년에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한국어로도 여러 차례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일본어에서 중역된 것도 있고 더러는 생략된 부분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번역된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McNeill의 영어판을 대본으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라틴어에서 번역하는 것이 옳지만 아직도 그럴만한 준비가 없기에 영어대본을 사용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 번역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자세하게 번역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고 더구나 이 책은 영문을 함께 보도록 함으로써 독자들의 학문적 욕구를 만족시키도록 했습니다. 또 해설부분을 자세히 번역함으로서 「기독교 강요」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무쪼록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사랑하는 모든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이 번역판이 크게 유익할 줄로 알아 감히 기쁜 마음으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2000 년 4월 19일

정성구 박사 (총신대학교 총장, 한국 칼빈학회 회장,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장)

 
역자서문

우리의 인생항로에서 정확한 출발점과 종착점을 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외에 어떤 곳에서도 얻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하고 기독교인이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안내하는 가장 위대한 책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라고 하여도 과장되지 않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이다.

본 기독교 강요는 성경 연구의 기본적 목적이 무엇이며 성경에 포함된 내용을 어떤 목표에 귀착시켜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이미 생명의 말씀사에서 네 분의 고명하신 학자님께서 번역하여 내신 것을 알면서도 본 역서를 내는 것은 더 많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서로 진실된 논의 가운데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칼빈 연구에 일생을 헌신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저의 스승이신 한철하 박사님의 지도와 말씀사의 강요 번역당시를 회고하면서 서스름 없이 난해한 점을 파악하여 지적하시고 지도하신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학문에는 완전함이 없으며 끊임없이 부단하게 한 올 한 올 실을 꿰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일을 위한 오늘의 삶을 주님께서는 약속하신다. 많은 분들이 본서를 읽고 연구하여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귀한 삶이 영위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사역지로 떠나면서…

 
서론

영역된 기독교 강요는 수대에 걸쳐 인류의 신앙과 행동을 형성하면서 기독교 역사에 현저한 영향을 준책들 중의 하나이다. 아마 학구적인 기독교인들의 도서 목록에 4세기 동안이나 계속 위치를 유지한, 이것만한 신학 서적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광범위하여 본 책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수많은 문헌들이 이따금씩 나오기도 하였다. 한편 이 책은 기독교를 험난하고 가혹하며 편협하게 기술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켰다는 비난을 받으며, 한편으로는 성경 진리의 최고의 해석이며 복음주의적 신앙의 최고봉으로 격찬과 지지를 받았다. 또한 평가를 받지 못할 때에도, 실제 교회들의 삶과 각 개인들의 믿음에 대한 본 책의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정부 통치아래에서 예배를 금지당한 기독교인들에게 본 책은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본 기독교 강요는 역사의 변환기에서 사회의 기본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닫아지는 어느 곳에서나 경의를 표하며 한 쪽 한 쪽을 탐독하며 연구하였다. 모든 신학자들이 칼빈의 방법론이나 용어들과 매우 다르게 교육을 받는 현대에도, 이 불후의 작품은 계속해서 칼빈에 대한 심층 연구를 가하며, 기독교 교리와 사회적 직무 분야에도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다.

1.

The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칼빈의 처음 제목형태)는 종교개혁의 중심이 되는 활발한 성경적 은사를 가진 젊은이로부터 만들어졌다.

이 책의 저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또 그의 "돌연한 회심" 날짜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본 책은 고뇌와 투쟁의 산물이다. 소년시절을 대 교구 도시인 노용에서 보낸 후 그는 일찍이 파리 대학에 진학하였고 후에 오를레앙(Orlans)과 부르그(Bourges)에서 법학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법조계를 떠나 고전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왕성한 활동기간(1523-1533) 중에 그는 성경학, 복음적 열정, 박해 및 순교 등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그 시대의 종교적 위기를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Nicolas Cop)1)이 대학의 총장이 되었을 때, 칼빈은 콥이 1533년 11월 1일 강연한 총장 연설과 여러 가지로 관련되었다. 이 강연은 확실한 개신교적 발언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이것은 지나치게 성급하였다. 도리어 이것은 마가렛 드 앙골름(Marguerite d'Angoulme)이 통솔하는 성경적 휴머니즘에 영향을 미친다. 그 공작부인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성경을 불어로 번역한 영향력 있는 매우 나이가 많은 노학자 르페브러(Jacques Lef vre of taples)였다. 루터와의 친분이 약간 있었음이 이 연설문에 나타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 원리들을 신봉하였던 사람이 썼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연설문의 대담성은 당국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었고, 칼빈은 그것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피신하였고 그 다음해 거의 일 년 동안 숨어서 지냈다. 네락에 있는 르페브러를 방문한 후 그는 봄에 노용(Noyon)으로 가서 새로운 결정에 의해서 행동하였다. 그 곳에서 1534년 5월 4일, 어린 시절에 교육받았던 성직을 포기하였으므로 미개혁 교회 및 성직자와의 관계도 끊어버렸다.2) 비개신교 성경운동의 지도자로 은퇴한 르페브러와의 대담이 그를 개신교에 확실히 참여하게 만든 "회심"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에 복음주의적 신앙을 위한 계속적인 활동은 그칠 줄 몰랐다. 그 해(年) 말엽에 그는 열렬한 두 개의 서문을 썼는데, 이것은 조카 올리버땅(Pierre Robert Olivtan)이 삐에몬의 왈도파(Waldenses of Piedmont)를 위하여 준비한 불어 성경의 신약과 구약을 처음에 발행할 예정이었다. 이 책이 1535년 6월에 출간되었을 때, 바젤에서 칼빈은 체류하였고 그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3)의 원고는 거의 완성된 것이 확실하다. 이 책을 저술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아직 프랑스에 있었던 1534년경일 수도 있다. 뒤 틸레트(Du Tillet)가(家)는 앙골름의 끌래(Claix)에 "조용한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요약하면 그가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던 수많은 장서들이 후에 그의 저술에 영향을 끼친 자료들을 공급해 주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상황은 새로운 운동의 저명한 지도자들에게는 점차적으로 위험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어디를 가든지 질문자들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칼빈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안전한 피신처를 해외에서 찾기로 결정하였다. 1535년 1월 초에 그는 프랑스를 떠나 바젤로 갔다. 그 당시 많은 개신교인들은 박해가 점점 심해져 그곳을 피해 도주하고 있었다. 국왕인 프란시스 1세4)는 1534년 10월 18일의 벽보 사건에 대해 격분하였다. 미사에 대하여 격렬히 반대하는 내용이 수록된 벽보들이 공공건물에 붙었고 심지어 궁전 문에까지 붙여졌다. 수많은 혐의자들이 투옥되었고 화재가 연일 발생하였다.

칼빈은 1558년 발간된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대해 증언해주고 있다.5) 그는 연구를 위하여 "조용한 은신처"를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난 후 프랑스에서 발생된 수많은 화재 사건들과 그것에 관한 왜곡된 설명을 들은 상황을 간단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칼빈이 "바젤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신하고 있는"동안에 박해가 발생된 격렬한 반프랑스의 운동을 완화시키려고 프랑스 궁중에서 발표된 거짓 성명서들이 독일권에서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칼빈이 말한 대로 이 성명서들은 고난 받는 이들을 "제세례파 교도들과 선동적인 사람들"로 몰았던 것이다. 이러한 성명서는 파리의 감독이며 왕을 대신하여 독일 정부와 신학자들과 교섭하였던 기욤 뒤 벨라이(Guillaume du Bellay)가 작성한 것으로, 2월 초에 발행된 것으로 알려졌다.6) 칼빈은 이런 성명서들이 앞으로 야기될 유혈사태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고, 침묵을 지킨다고 하면 불충성의 비난에 대해서 전혀 변명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신실하고 '거룩한 순교자들'이 그렇게 부당하게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당면해 있는데 그는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었다.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몇몇은 개인적으로 잘 아는 친구들이었고, 그 중에는 특히 파리의 상인이며 삐에옹 출신의 왈도파 교인이었던 에띠엔느 드 라 포즈(Etienne de la Forge)는 1535년 2월 15일에 화형을 당하였다. 그의 말대로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죽음을 당한 형제들이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것에 대하여 그들을 변호하고" 외국인들을 감동시킴으로써 똑같은 고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처절한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1535 년 1월부터 8월까지 그의 책 저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에도, 그는 프랑스에서 발생하는 큰 사건들을 계속해서 들어 알고 있었다. 모든 출판 활동을 금지하려는 왕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1월 말에는 박해가 최악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왕의 종교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되는 노(老) 추기경 뒤쁘라(Duprat)의 죽음으로 박해가 약간 소강상태에 다다른 7월까지 계속되었다. 독일 루터파 교회와의 협상이 프랑스 궁정에 의해 2년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결렬되었다가 당시에 다시 재기되었다. 교회 개혁에 대한 협의차 파리를 방문해 주기 원하는 초청장이 멜란히톤(Melanchton)의 부처(Bucer)에게 전해지고, 이것은 칼빈이 [Institutio] 원고를 탈고한 후인 8월 28일까지는 계속되었다.7)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왕은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상황이 우호적일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똑같은 기간 중에 칼빈은 유럽에서 개신교 주장이 뮨스터(Mnster)에 중심을 둔 혁명적인 재세례파 운동으로 소문이 나빠지는 것을 염려할 이유가 있었다. 재세례파 옹호자들은 오랫동안 공격을 당하였다가 1535년 6월 말에 비참하게 진멸 당하였다. 칼빈은 그의 책이 1535년 프랑크푸르트 가을 전시회까지는 출간되기를 원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강요 서문에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 그의 이름과 날짜를 함께 기록한 8월 23일에 그의 원고는 탈고되지 않았다. 바젤의 인쇄업자인 플래터(Thomas Platter)와 라지우스(Balthasar Lasius)는 편집에 있어서 오포린(Jean Oporin)의 협력을 받아 즉시 작업을 진행하여 1536년 3월에 이 강요를 발행하였다. 초판의 라틴어 제목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에서 취급 할 전체적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모두 포함했다. 경건에 열성있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책이며, 최근 판이다.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이 책은 신앙 고백으로 왕에게 헌정되었다. 저자, 노용의 요한 칼빈, 바젤, MD XXXVI.

2.

두 부분으로 구분된 제목은 모두 심오한 뜻을 갖고 있다. Institutio란 단어 자체는 "교훈"(instruction) 또는 "교육"(education)이라는 의미로 익숙한 것이다. 본 책은 기독교 교리 개요로서 칼빈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하여 박해자인 왕에게 드리는 고백으로써 구성되었다. 왕에게 드리는 강력하고 직접적인 탄원서인 서문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것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역사적 위기를 실감나게 한다. 종교적 심성에 대한 기본적 관심은 그 계획이 장엄하며 명확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칼빈 시대의 문제점들과 개혁 교회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깊게 관계된다. 칼빈이 프란시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를 왕의 죽음 이전과 그 후에도 Institutio의 후기 판에 그대로 쓰인 것은 그의 특징적 방법이다. 그때 상황을 절실히 인식하며 쓰인 것이지만, 강요는 박해당하는 성경적 신앙 소유자들을 영구적으로 완전히 변호하는 것이다.

1536 년의 초판은 6장으로 되어 있다. 첫 네 장은 율법(십계명 해설), 신앙(사도신경 해설), 주기도, 성례전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루터의 교리문답서의 순서에 따라 배정된 것이다. 제 5장은 중세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5가지 성례전(견신례, 고해성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에 관한 논박으로 되어 있다. 제 6장은 기독교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논술한다. 그 책은(간단한 색인을 포함해서) 크기가 6⅛×4인치의 8절판이며 쪽 수는 520쪽이며 길이는 신약성경의 에베소서 끝까지 해당한다. 저자는 그것을 또다시 확장하여 1559년에는 최종 형태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분량은 대략 구약성경과 공관복음서를 합친 것과 똑같았다.8) 본서 출간 6개월 후에 칼빈은 제네바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출판한 지 1년이 채 못 되어 품절되었고 개정판을 발간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힘든 노동을 하면서 이 일에 착수하였지만, 칼빈이 개정판을 완성한 것은 바젤에 머물러 있는 1538년에 완성했다. 인쇄업자가 바뀐 것을 포함하여 약간의 시간이 지연된 후에 개정판은 벤델린 리헬(Wendelin Rihel)에 의해 1539년 8월에 슈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발간되었다.

제목이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아마 개정판과 초판을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책 제목 앞에 나오는 "마침내 진정으로 제목에 적당한"(at length truly corresponding to its title)이란 이상한 문구는 초판의 상세한 제목의 가정들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확실히 새로운 판의 우월감을 내포하고 있다. 칼빈은 그 책에서 구체화시킨 변화들을 스스로 축하할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은 6장 대신에 17장으로 되어 있지만 분량은 비슷하다. 이 책의 학문적인 비중은 어거스틴(Augustine), 오리겐(Origen) 및 기타 교부들 그리고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키케로(Cicero), 세네카(Seneca) 및 최근의 몇몇 학문적인 저술 등을 인용하여 거의 모두 포함시킴으로써 상당히 증가되었다. 성경 인용도 역시 증가되었다. 증가된 장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구약과 신약의 유사점과 차이점, 예정과 섭리 및 기독교인의 생활 등, 칼빈의 사고 형성에서 그 중요성에 인정되는 주제들을 취급하는 장들이 몇 개 있다. 1539년 8월 1일 독자에게 보내는 간략한 서신에서 저자는 초판에 결함이 있음에도 그것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인 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말하며, 개정판을 내는 목적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신학 지망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감독할 준비"를 시키는 데 사용될 하나의 교과서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의도로 이 책의 형태도 책상용으로 사용하기 알맞게 제작하였다. 계수에 오차가 있을지라도 그 책은 총 346쪽이며, 크기는 13×8인치이고, 학생이 기록할 수 있는 넓은 여백이 있다. 프랑스에도 보급된 개정판 일부에는 칼빈 이름의 "Alcuinus"로 읽도록 순서와 절차가 바뀌어져 있다.

초판 발행 무렵에 프랑스어 역이 칼빈 자신에 의해 준비되고 발행됐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프란시스 다니엘(Francis Daniel)에게 보내는 1536년 10월 13일자 서신에서 칼빈은 제네바 정착과 그 후의 와병에 대해 전하면서 그의 "소책자"(libellus)의 프랑스어 판 준비에 계속적으로 집념하였다고 말한다. 그 "소책자"가 강요(Institutio)였다는 가정은 가능성은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단계에서 칼빈이 그 논문을 가리켜 libellus라고 하였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539년 판 서문에서 1536년 판에 대해 사용한 말은 opus(저작번호)이기 때문이다. 로잔 논쟁(Disputation of Lausanne) 직후에 다니엘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믿음의 훈련과 고백(Instruction and Confession of Faith)의 준비에 바빴던 것이 분명하다.9) 이것의 프랑스어 판이 일반적으로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라틴어 판은 실제로 1538년 판과 똑같은 것이다.10) 이것은 강요의 핵심 논증들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으로서 간략하고 간결한 문체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실제로 "소책자"이지만, 그것의 라틴어 저작과 프랑스어 번역 출판에는 칼빈이 교회 재조직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하면서 수주일 동안에 가질 수 있었던 모든 시간들을 소모하였다. 그 해 가을에 칼빈은 출판하는 일 때문에 강요의 저작을 번역할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1536년 또는 1537년 프랑스어 판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프랑스어 판은 1541년 판이 유명하며, 칼빈이 1539년 라틴어 판을 번역한 것이다.

3.

프랑스어 판은 제네바의 장 기라드 출판사에서 발행되었고, 7¼×4½ 인치의 소형 판이며 822쪽인, 약간 거치른 인쇄의 소형 책이다. 이 책은 휴대가 간편하며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계획되었다. 프랑스에서 발행 허가의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발행 부수가 제한되었던 것이 분명하며 프랑스어권 스위스 사람들이 주 대상이었다. 그 책의 서두의 개요에는 학술적 사용에 대한 말이 없다. 목적은 "구원의 교리에 대한 교육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장(章)의 순서에 한 가지 변화가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것은 1539년 판에 프랑스 옷을 입힌 것뿐이다. 칼빈의 견해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프랑스 산문의 발전을 연구하는 학도들은 그것의 문체에 대하여 극찬하였다.11) 또한 그것은 연속적으로 중대한 사상의 표현 매개체로서 프랑스어가 최초로 사용한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랑스어의 특색을 그렇게 창조적으로 표현할 책이 소년 시절부터 습관적으로 라틴어로 생각하는 저자의 번역이라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이 프랑스에 보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가 취해졌고, 다른 억압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1542년 7월과 1544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그의 책들을 파리의 노틀담 사원 앞에 쌓아 놓고 불태운 사건이었다.

 초판의 모든 변경 요소들은 저작이 방대하면서도 그대로 존속된 것은 물론이지만, 새로운 서문들과 첨가된 자료들은 신학도들과 혹은 평신도들을 막론하고 그들에 대한 교육이 점차 저자의 의도하는 목표로 되어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1543년의 라틴어 제 3판(슈트라스부르그에서 리헬에 의해 두 번째 인쇄된 판)에는 네 장이 추가로 삽입되었고 그러므로 장(章) 수는 총 21장이 되었다. 이 판은 1545년에 재 발행되었고, 그 해에 증보판이 제네바의 기라드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기라드에 의해 출간된 1550년의 라틴어 판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1550년 판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은 번호를 붙여서 절을 구분한 점이다. 총 21장에서 총 1217개의 절을 볼 수 있다. 두 개의 색인이 권말에 추가되었는데, 첫 번째 것은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저자가 인용한 성구와 저자들에 대한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인쇄업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1550년에 파리에서 제네바로 왔다. 그는 프랑스에서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성경발행과 종교서적 발간이라는 그의 일생의 사업을 제네바의 목회자들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재개하였다. 이 사람이 곧 로베르 에스띠엔느 혹은 로베르투스 스테파누스(Robert Estienne or Robertus Stephanus)이다. 그는 새로운 학문과 종교개혁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헌신한 학자풍의 인쇄업자 가문인 대(大)에스띠엔느 가문의 유명 인물이었다.12) 1553년 2월에 그는 칼빈이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가장 훌륭한 [강요]를 발행하였다. 이 책은 13½×8¾인치의 2절판 크기였고 활자체는 아름다웠으며 오자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왕에게 드리는 헌사와 색인을 제외하고 본문만 441쪽이었다. 그러나 내용면에는 1550년 판에서 더 진전된 것이 없다. 아담과 장 리버리(Adam and Jean Rivery)형제들이 이 책의 본문은 바꾸지 않고 색인만 증보하여 8절 크기의 소책자로 1554년에 제네바에서 재 발행하였다.

현대의 독자들 중에는 초판에 더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번역서의 대본으로 사용된 1559년의 증보판보다는 1539년 판이나 그것의 프랑스어 판인 1541년 판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초기 단계에서 그들은 말하기를, 그 책이 덜 지루하고 논쟁적이며 충분히 포괄적이고 읽기에 더 편하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들에 대해 반박한다는 것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말할 나위 없이 초기 판들을 재 발행하는 일은 적절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판본들에 대한 저자 자신의 평가를 무시하고,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이상에 맞도록 그의 저서를 개작하기 위해 수많은 세월동안 심혈을 기울여 수행한 노력의 결실을 말살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559년의 라틴어 판은 칼빈의 가장 명백한 권위 있는 인정서를 수록하고 있는 것으로 항상 주장되어야 한다. 이 책 서두에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은 그의 저서를 풍부한 것으로 만들었던 그 이전의 개정판들에 대해 언급하고, "내가 기울인 노력들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이 저서가 현재와 같은 순서로 정리되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해 본 적이 없다"고 덧붙여 말한다. 그는 4일 동안 계속해서 열을 앓으면서 개정작업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이 일을 수행하도록"만든 열성의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들 가운데 표현된 성취감은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그 결과 라틴어 판에 대한 결정판이 되었고 1863년까지는 그것만이 전적으로 재 발행되었으며 번역판과 요약 판의 대본으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 결정판을 피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에 칼빈 신학에 대해 관심과 존중이 점차적으로 증대되었고,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신학적 저술들의 분명한 특징이 되었다. 연구의 초점이 우선적으로 [강요]에 집중된 것은 당연하며, 현대 연구에서 그 저서를 인용하는 경우에는 1559년 판을 인용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이다. 그 책의 절을 표시하고 인용하게 해주는 번호는(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처럼)신학적 논의에 있어서 공용어의 일부로 여긴다. 이 라틴어 판은 그 이전의 판본들보다도 분량 면에서 80%정도가 더 많다. 이 책이 모든 나라에서 오랫동안 관례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므로 학문적 교류를 목적으로 그 이전 판들로 돌아갈 실제적 가능성은 현재 전혀 없다.

이 책은 제네바에서 인쇄되었고 로베르 에띠엔느 인쇄소에서 1559년 8월 16일에 출간되었다. 앞에서 인용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에 칼빈이 서명한 날짜는 8월 1일이다. 유명한 인쇄업자요 생산적인학자였던 에띠엔느는 3주일 후에 사망하였고, 따라서 최종 형태의 [강요]는 그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그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in libris quatuor nunc primum digesta, certisque distincta capitibus, ad aptissimam methodum; aucta etiam tam magna accessione ut propemodum opus novum haberi possit.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now first arranged in four books and divided by definite headings in a very convenient way: also enlarged by so much added matter that it can almost be regarded as a new work.

다음에는 저자의 이름이, 그 아래에는 발행인의 이름이 유명한 올리브 가지 마크와 함께 나오고 맨 밑에는 GENEVAE / M.D.LIX이다.

4.

칼빈은 라틴어 판 강요를 더 이상 개정하지 않았다. 제네바의 장 끄레스뺑(Jean Crespin) 출판사에서 증보된 프랑스어 판이 1560년에 발행되었다. 칼빈은 이 번역판13)을 직접 준비하거나 주도하게 지도하였다는 것이 대다수의 현대 학자들의 견해이다. 이 책의 라틴어 판과 프랑스어 판은 똑같이 그 수요가 모두 광범위하였고 칼빈이 사망하기(1564) 전에도 여러 번 재판되었다. 1561년에 라틴어 판이 두 가지로 인쇄되었는데, 하나는 슈트라스부르그의 칼빈 전담 인쇄업자인 리헬이 출판한 것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2절판 책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앙트완느 레불 또는 안토니우스 레불리우스(Autoine Reboul or Antonius Rebulius)가 만들어낸 8절판 크기로 980쪽 분량의 책이나, 레불은 그가 권말에 장, 절을 예시하면서 알파벳순으로 색인을 삽입시킨 것은 독자들 다수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쪽 번호 없이) 59쪽 분량의 다소 방대한 이 색인은 후에도 라틴어 판 및 프랑스어 판과 함께 인쇄되었고, 때로는 아래에 언급된 말로라(marlorat)의 두 색인과 함께 인쇄되기도 하였다. 레불이 펴낸 책은 읽기 쉬운 작은 활자로 조판되었고 참조 성구가 적절하게 되어 있다. 후대의 라틴어 판들 가운데 두 가지가 특별히 중요한 편집상의 문제이다. 이것은 라이덴(Leiden)의 유명한 인쇄업자들인 엘제비르(Elzevir) 가문이 1654년에 출판한 유명한 2절판 [강요]와 1667년에 암스테르담의 쉽퍼(J. J. Schipper)가 발행한 [Opera Calvini]의 제 9권이다.

1560 년 프랑스어 판은 1561년에 제네바에서 두 차례 재판되었다. 1562년에는 제네바와 까엔(Caen)에서 각각 1회씩 인쇄되었고, 장소와 발행인 표시가 없는 두 가지 판본이 발행되는 등 모두 4회 발간되었다. 1563년에는 리용(Lyons)에서, 1564년에는 제네바에서 각각 출판되었다. 제네바의 인쇄업자 쟈크 부르죠아(Jacques Bourgeois)가 1562년에 발행한 8절판은 어귀스뗑 말로라(Augustin Marlorat)14)가 만든 두 개의 색인을 하나로 합한 최초의 [강요]였다. 말로라는 학자적인 성직자이며 이류 신학적 작가로 같은 해에 루엥(Rouen)에서 박해자들의 손에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두 개의 색인들 중에는 첫 번째 것은 강요에서 다룬 중요 문제들의 색인이며, 다른 하나는 인용되거나 강요에서 언급된 성구 색인이다. 말로라는 재미있는 서문을 썼는데, 그는 이전에 발행된 판본들의 참조 성구의 애매함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칼빈이 오로지 확인 문구만을 사용하는 곳에서도 성구를 완전히 제시한다. 이 유용한 색인들의 라틴어 판은 그 후의 라틴어 판 [강요]와 함께 간행되었다. 예를 들면, 프란시스 뻬렝(Francis Perrin)이 1568년에 제네바에서 펴낸 강요와 후대의 수많은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네덜란드어 판들이 그것들을 사용하였다.

프랑스어 이외의 외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은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1536년 판은 1540년에 부르고스(Burgos)의 프란치스꼬 엔지나스(Francisco Enzinas)에 의해 스페인어로 번역된 것 같다. 그는 멜란히톤(Melanchton)의 친구이며, 크랜머(Cranmer)의 보호를 받고, 칼빈의 통신원이었고 유명한 신약 학자요 번역가였다.14a)15)만일 최초의 스페인어 판이 칼빈 자신의 프랑스어 판보다 실제로 앞선 것이라면, 최초의 이탈리어 판은 보다 늦은 프랑스어 판에 의거하였다. 이탈리아사람이며 청년시인이며 종교적 이유로 제네바에 피신한 파스깔리(Giulio Cesare Pascali)가 그곳에서 1557년 이탈리아어 판을 만들어냈다. 파스깔리는 1551년에 개정되고 1553년과 1554년에 재 인쇄된 프랑스어 판을 일차적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제네바의 이탈리아인 피난자 교회의 가장 유명한 회원이며 비꼬(Vico)의 후작인 갈레아조 까라치 올리(Galleazzo Caracc oli)에게 헌정 되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칼빈이 일 년 전에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을 헌정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의 수많은 번역판들은 완성된 [강요]를 대본으로 하였다. 일찍이 1560년12월 5일에 네덜란드어 판이 엠덴(Emden)과 도르트(Dort)에서 동시에 출판되었는데, 번역자는 자기 이름의 머리글자만을 따서 "I.D."라고 만 밝히고 있다. 이 머리글자들은 요한네스 뒤르키누스(Johannes Dyrkinus d.1592)를 의미한다. 그는 상당히 저명한 목사요 저술가였고 그 당시에는 엠덴에 체류하였다.16) 1572년에는 하이델베르그에서 최초의 독일어 판이 발간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신학부 교수들이 작성한 것으로서 해석적인 개론이 첨부되어 있다.17) 이 번역판은 1582년에는 하이델베르그에서, 그리고 1597년에는 하나우(Hanau)에서 재 발행되었다. 같은 해에 스페인어 판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스페인계 피난자인 치프리아노 드 발레라(Cipriano de Valera)의 작품이다. 그는 제네바에 체류한 뒤에 영국에서 수년간을 보냈으며 캠브리지에서 매스터(master) 학위를 받았다.18) 1599년에 사망한 지리크 슈트렉(Jirik Strejc)의 체코어 판은 1617년에 제 1 권과 제 2 권이 발행한 것뿐이다. 헝가리어 판은 헝가리 개혁교회의 유명한 목사요 학자이며 시인인 알버트몰나르(Albert Molnr)에 의해(d. 1634년경) 1624년에 하나우에서 발행되었다.19) 아랍어 판이 취리히의 동양학자 죤 헨리 핫팅거(John Henry Hottinger 1667년 사망)에 의해 출판되었다고 학자들이 주장하였지만 입증된 적은 없다.

톨룩(A.Tholuck, 라틴어, 1834, 1846, 1872), 바움가르트너(F. Baumgartner, 1560년 프랑스어 판, 1888), 시주(A.Sizoo, 라틴어 판의 네덜란드어 역 판, 1931, 1949) 등에 의한 [강요]들은 오직 참고서적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라틴어 판을 번역한 베버(O.Weber)의 독일어 판(단행본, 1955)과 1560년 불어 판을 개작한 까디에르(J.Cadier)의 현대어 판(4권, 1955-1958)에는 분석적인 문제와 분류된 색인이 제시되어 있다. 마사끼 나까야마(Masaki Nakayama)가 라틴어 판을 번역한 일본어판이 1934년에 동경에서 출판되었고 1949년에 다시 발행되었다.

5.

본서의 독자들은 최초의 영어 판 강요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다. 1559년 판 이전의 라틴어 판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보급되었지만 기독교인의 생활을 취급한 제3권 6장10장만이 영어로 번역되어 권말에 별첨되었을 뿐이다.20) 그때 전 작품이 검은 활자의 2절판 크기인 멋진 책으로 나왔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The Institution of Christian Religion, wrytten in Latine by maister Jhon Calvin, and translated into Enhlysh according to the authors last edition. Seen and allowed according to the order appointed in the Quenes Maiesties instructions.

청동 뱀이 휘어감은 나무 십자가를 악수한 손들이 받쳐진 그림의 상징이 인쇄업자의 "주후 1561년에 레놀드 울프(Reinolde Wolfe)와 리차드 헤리슨(Richarde Harison)이 런던에서 인쇄함"이라는 간기(刊記) 다음에 나온다.

그 책 마지막 쪽에 발행 장소는 "Paules Churcheyard"이며, 발행일은 "1561년 5월 6일"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번역판은 라틴어 판이 제네바의 스테파누스(Stephanus) 출판사에서 출간된 지 21개월이 채 못 되어 런던에서 인쇄되었다. 그러나 발행인들은 쪽 후면에 책이 늦게 출간된 이유에 대한 사과 내용의 문구를 눈에 잘 띄지 않게 삽입하였다. 번역하는 작업은 죤 도우즈(John Dawes)에게 맡겼지만, 그는 "12개월 이상이 지난 후에" 원고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발행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완전히 다시 번역하도록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21) 본문 마지막에는 머리글자 "T.N."이 인쇄되었고, 그 다음 6쪽에는 각 장 제목과 간단한 색인 목록이 있다. 1562년의 제2판에서 역자는 간단한 서문을 삽입하고 이름의 머리글자로 서명하였다. 제목 쪽에 "Thomas Norton"이란 이름을 처음 기록한 것은 개정판인 제3판 때부터였다.

토마스 노턴(Thomas Norton, 1532-1584)은 그의 번역본이 출판되었을 때 약 29세였다.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노턴과 그의 친구요 법학도인 토마스 새크빌(Thomas Sackville)의 합작품인 The Tragedy of Gorboduc이 1561년 1월 5일 밤에 최초로 상연되었고 그리고 2주일 후에는 명령으로 여왕 앞에서 공연되었다. 영광스럽고 매우 감동적인 무운 시극은 현대 영국 비극의 최고봉이며 노턴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라틴어와 영어로 지은 초기의 시들처럼, 대단한 성공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부 시편들을 시로 개작한 작품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친숙하였으며, 그와 함께 종교서적의 번역서들과 교회의 문제를 논쟁적으로 취급한 몇 개 산문들도 유명하였다. 그는 서머셋 경(Duke of Somerset)이 칼빈과 편지를 교환하던 때에 경에게는 매우 조숙한 시기였다. 서머셋 사후에 칼빈이 그의 자녀들에 대해 안부 편지를 쓰고자 할 때, 답신을 대신 하도록 임명받은 사람이 노턴이었다. 1555년에 그는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딸과 결혼하였고, 후에는 대주교가 남긴 중요한 원고들을 공개하였다. 확실한 칼빈주의자로서 또한 그는 청교도들의 교회개혁조치들을 지지하였고, 한때는 감독들을 비판하여서 투옥되기도 하였다. 노턴은 1558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국회의 논쟁과 위원회에서의 활동으로 명성을 떨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는 로마 카톨릭, 특히 1569년의 반역에 관계된 자들의 재판에 참여하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거칠고 비난받을 만한 열정을 보였다. 학자적이고 다재다능하였지만 노턴은 문학과 직무에 있어서 주요 역할을 담당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그가 [강요]의 영어 번역자였다는 점에서 칼빈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22)

1574년에 제3판에서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 번역작업을 진행하였는가를 정확히 보여주기 위해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최초의 서문을 개정하고 증가하였다. 노턴은 유명한 두 인쇄업자들로부터 여왕을 위해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에드워드 휘트쳐치(Edward Whitchurch)이다. 그는 리챠드 그라프톤(Richard Grafton)과 함께 1539년에 Great Bible을 발행하였고 1549년에 [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출판하였다. 또 한 사람은 레지날드 또는 레이놀드 울프(Reginald or Reinolde Wolfe)이다. 그는 슈트라스부르그 태생으로 영문 서점가의 중심인물이었다. 역자가 번역을 마무리한 곳은 바로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에 있는 휘트쳐치의 집이었다. 노턴은 휘트쳐치의 부인이 그랜머(Granmer)의 미망인 곧 자기 본부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23) 휘트쳐치가 1561년 후반에 사망한 후 쓴 편지에서 노턴은 그를 가리켜 "노련한 열정의 복음 전도자", 즉, 내 생애에 가장 솔직하고 진실한 친구였다"고 한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비평적 조언에 감사를 표하면서 특히 데이비드 화이트헤드(David Whitehead)의 이름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화이트헤드는 그의 번역문을 라틴어 본문과 일일이 대조하였다. 화이트헤드는 1555년 프랑크푸르트(Frankfurt) 투쟁에서 에드워드의 "기도서"를 지지한 당과 연관되어 망명한 자로서 전(前) 메어리 여왕 당원이었다.(독학으로 취득하였지만) 학식이 높은 유명한 목사였으며, 그는 아마그(Armagh) 교구의 감독직을 사양하였고, 캔터베리(Canterbury) 감독직도 거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1845 년에 헨리 비버리지(Henry Beveridge)는 "노턴이 그의 일을 대체적으로 아주 충실하게 해냈다"고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어의 문체를 크게 손상시키면서 라틴어형식을 지나치게 고수하려한 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노턴 스스로가 칼빈의 저서가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의 논쟁들과 얽혀 있다"는 점에서 몹시 난해하기 때문에, 자신은 칼빈이 의미하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영어의 표현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칼빈의 말을 그대로 유지하였다"고 설명한다. 때로는 이 방법이 부자연스럽지만, 비버리지처럼 노턴이 "라틴어식 영어"를 사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오해하기 쉽다. 그의 번역이 엘리자베스 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명쾌한 산문은 결코 아니다. 어떤 권위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당시에 "대부분 성직자들과 번역자들의 작품"이었고 그 다음 세대들의 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허세와 꾸밈이 전혀 없었다.24) 제3판에서 노턴은 인쇄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오자들을 바로 잡을 수 있어서 만족하였다. 그는 이 오자들이 "자신의 글씨가 난필이라는 점과 그의 사본들에 나타나 있는 혼선들, 그리고 인쇄업자들만이 알고 있는 몇 가지 다른 이유들"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2차 개정 때에 약 300곳의 잘못된 곳을 지적하였고, 제3판에는 그러한 것들이 실제로 없다고 믿는다. 번역판에는 레불(A.Reboul)이 작성한 라틴어 색인의 번역판("Table of Matters Entreated of")이 당시 처음으로 첨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말로라(Marlorat)가 작성한 두개의 색인이 그의 서문 다음에 수록되었다. 이 1574년 개정판은 발행된 이후 약간의 변형을 거쳐 1578, 1582, 1587, 1599, 1611, 그리고 1634년에 재 발행되었다. 이 판본들, 특히 마지막으로 언급된 판본은 언어 변화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므로 1634년 판에서는 "Jhon Calvin"이 "John Calvin"으로, "truthe"가 "truth"로 "glorie"가 "glory"로, "geuen"이 "given"으로 바뀌었고, 초판에서 사용된 약어들이 모두 없어졌다. 이 작품을 현대어로 개정하려는 시도는 1762년의 글래스고우(Glasgow) 판에서도 계속되었다. 이 판본은 당시 유행하던 철자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식 표현이나 고어체의 표현들을 쉽게 고쳤다.

6.

그 이후부터는 노턴 역본이 재 발행되지 않았다. 전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다음 역본은 죤 알렌(John Allen, 1771-1839)의 것이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translated from the Latin and collated with the author's last edition in french. London: J.Walker, 1813.

알렌(Allen)은 핵크니에 있는 반국교의 아카데미의 학장으로 역임한 평신도였다. 그의 다른 저서들 중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초기 저서로서 "The Fathers, the Reformers, and the Public Formularies of England in Harmony with Calvin…(1811)"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고 현대 유대교에 대한 논문(1816)이 있다. 알렌이 번역한 대부분은 라틴어 판을 기초한 것이고 불어 판을 참고하여 개정한 것이다. 그는 두 가지 판을 모두 참고하였다. 비록 그가 노턴의 번역판을 "매우 낡고 거칠고 모호하다"고 일축하였지만, 번역 원칙은 양자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는 "직역과 의역의 중간 입장을 고수하였고 라틴어와 영어의 각 관용어구들이 허용하는 한 원본의 문체를 입각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탁월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실한 번역이 되었고, 칼빈의 격렬한 문장들과 생생한 비유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원문의 의미에 영향을 끼칠만한 오역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알렌의 번역은 특히 미국에서 계속 출간되었으니 1936년까지 30회에 걸쳐 재 발행되었다. 칼빈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는 1909년 판에는 "On the Literary History of Calvin's Institutes"25)라는 워필드(B.B.Warfield)의 귀중한 논문이 첨가되었고(칼빈의 초판이 출판된 후 400년이 된 시기를 맞추어 펴낸), 1936년 판에는 토마스(Thomas C. Pears, Jr.)가 "An account of the American Editions"이라는 논문을 첨가하였다. 알렌의 번역판은 미국 편집자들에 의해 약간씩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개정은 1841년에 죠셉(Joseph Paterson Engles)이 개정한 것이다.

알렌의 번역판의 독주기간은 길지 않았다. 1845년에 다음 제목의 번역판이 발행되었다.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A New Translation by Henry Beveridge.

위 제목의 역서는 칼빈 번역회(Calvin Translation Society)의 후원으로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출판되었다.26) 비버리지(Beveridge, 1799- 1863)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후에 그는 법률교육을 받았으며 저술을 본업으로 하였다. 그가 칼빈회에서 번역한 것들 중에는 1844년에 3권 1질로 발행된 칼빈의 "종교개혁에 대한 논문집"이 있다. 후에 그는 다른 학문에 전념하여 "인도 역사의 이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가 발행한 강요는 3권으로 되어 있고, 서론부분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발간된 후대 인쇄소들에 의해 누락된 항목들이 실려 있다. 그 항목들을 누락시킨 것은 손실임이 분명하다. 그중 하나는 칼빈회의 서기인 알버트 핏캐른(Robert Pitcairn)이 기고한 "Catalogue Raisonn of the Earlier Editions"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판본들 대부분을 유용하게 서술한 것으로서, 상당부분은 핏캐른이 상세하게 검토한 것들이다. 그러나 일부분이 누락된 것들도 있고 약간의 결함들도 있어서 그가 만든 목록은 완전한 안내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목록에는 강요 요약판 3권이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단역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초기 네덜란드어 판들과 독일어 판들에 대한 그의 정보도 결코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 비버리지가 쓴 서문의 한 특성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초기 판들의 제목 쪽을 잘 택하여 복사하여 적당하게 수록해놓은 것이다. 이것들은 1536, 1539(Alcuin 변형판), 1545, 1559, 1561년 라틴어 판과 1545년 프랑스어 판, 1557년 이탈리어 판, 그리고 1597년 스페인어 판에서 발췌 수록한 것들이다. 마지막 두 가지 역자의 서문이 처음 인쇄된 대로 다시 복제되었다.27)

비버리지가 노턴의 번역판을 낮게 평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아주 특이하지만, 그는 알렌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 않는다. 그 자신의 번역판은 질이 균일치 못하다. 몇몇 부분에서는 그가 사용한 초기 번역서보다도 현재의 용법이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자신이 노턴에 대해 "라틴어식 영어"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비판을 야기시키는 당연한 구절들도 있다. 어느 면에서 그는 먼저 번역한 두 번역자들보다도 정확하지 못한 면도 있고, 약간씩 빠뜨린 부분들도 많고 분명히 잘못 번역된 부분도 약간 있다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들의 번역은 대체적으로 훌륭한 것이며, 비버리지는 칼빈의 수사학적 능력을 의식하고 독자들에게 세련된 문장표현으로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7.

강요의 분량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워, 수많은 요약 판들이 일찍부터 출간되었다. 강요와 똑같이 이 요약 판들도 처음에는 라틴어로 발행되었고 그 후에는 여러 나라 언어로 출판되었다. 최초의 요약 판중의 하나는 영국의 칼빈주의 교리 순회 설교자로 인기가 대단한 버니(Edmund Bunney/Bunnie, 1540-1619)가 편찬한 것으로서 그 제목은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Compendium(London, 1576)이다. 그것은 [The Institutions of Christian Religion…compendiously abridged by Edmund Bunnie, bachelor of divinity…(London, 1580)]이라는 제목으로 메이(Edward May)가 번역하였다. 이 책은 발췌집이 아니라 주로 버니 자신의 말로 축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은 곧 들론(William Delaune, Laneus/Launeus/Lawne)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Epitome(London, 1583)]으로 대체되었다. 들론(d.1610)은 위그노파 망명자였고, 그의 책을 인쇄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며 종교가인 보트롤리어(Thomas Vautrollier, d.1587)였다.28) 그는 1576년에 영국 유일의 라틴어 판 강요를 발행하였다.29) [The Epitome]은 저자의 언어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요약의 대표적 모범이다. 이 요약판에는 8절판 크기로 371쪽에 달하는 강요의 자료들이 1559년 판의 번역을 제일 근접하고 균형 있게 따르면서 수록되어 있다. 칼빈이 그의 반대자들의 견해를 서술, 반박하는 곳에서 요약 판의 본문은 반대와 답변을 대화 형식으로 배열하였다. 처음에는 쪽이 매겨지지 않은 21쪽에는 강요의 논증 과정에 관한 "총목록"이 실려 있는데, 그것들은 괄호로 묶은 절과 소절의 구조로 세밀하게 나타난다.30) 들론은 그의 Epistola Nuncupatoria 또는 조폐국 국장인 마틴(Richard Martin)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그의 책을 가리켜 "신의 마음에 드는 정원에서 가져온 꽃다발"이라고 한다. 난외의 여백들은 세심하게 준비된 분석적인 주(註)를 하는데 이용된다. 이 책은 25쪽의 색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페더스톤(Christopher Fetherstone, Edinburgh, 1585)의 완역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사람이 훌륭하게 번역한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도 똑같은 해에 나왔다. 강요 요약 판의 발행은 궁핍한 학생이나 또는 읽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뜻하지 않는 행운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1650년에는 들론의 요약 판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고 1837년에는 영어판이 재 인쇄되었다.

널리 반포된 또 다른 라틴어 요약 판은 특출한 개신교 신학자이며 낫소(Nassau)의 헤르본 아카데미(Academy of Herborn)의 성경학자인 피스카토르(John Piscator/Fischer1546-1625)가 요약한 것이다. 피스카토르는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의 조교이며 계승자였고,31) 올레비아누스가 정리한 "요약판"을 수업에 활용하였다. 그의 [Aphorismi doctrine Christianae maximam partem ex Institutione Calvini excerpti sive loci communes theologici,(Herborn, 1589)는 학생들의 연구 토론을 위해 편집된 것이며, 그러한 요구에 의해서 1615년까지 무려 8판을 거듭하였다. 그것의 3판을 홀랜드(Henry Holland)가 [Aphorismes of Christian Religion in a verie compendious abridgment of M. J.Calvin's Institutions]라는 제목으로 영역하였고 리차드 필드(Richard Field)가 1596년에 런던에서 발행하였다. 피스카토르의 부제를 따라 본문은 28개의 장으로 분류되었다. 각 장에는 번호가 매겨진 일련의 "격언(aphorisms)"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최소가 8개, 최대가 34개에 이르는 등 다양하다. 격언의 길이는 한 문장에서부터 길면 몇 쪽에 이르기도 한다. 피스카토르는 논제라는 말보다 불확실성을 시사하는데 본문에 제시된 진술들은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말보다는 aphorismi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한다.

다른 강요 요약 판이 그 후 곧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라이덴 월룬 대학(The Walloon College at Leiden)의 평의원인 콜로니우스(Daniel Colonius)가 펴낸 [Analysis paraphrastica Institutionum theologicarum Johannis Calvini](Leiden, 1628)이다. 콜로니우스는 엘제비르(Elzevir) 인쇄소장의 사위였고, 편집자가 죽은지 1년이 되었을 때 엘제비르는 작은 활자로 아주 산뜻하게 인쇄된 12절판 크기의 책을 발간하였다(Leiden, 1636). 콜로니우스는 그의 책을 41개의 "논쟁"으로 분류하였지만, 원래 강요의 장점을 밝히고 주로 칼빈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Analysis paraphrastica]에 대해 워필드(Warfield) 박사는 학생들의 참고서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들론의 책과는 다르게 거기에는 난외 표제와 색인이 없다. 적은 950쪽에는 대략 강요의 삼분의 일을 포함하며, 이것은 간단한 요약 판보다는 조금 많은 분량이다.32)

8.

칼빈의 걸작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 신학의 정통적 진술로 매우 중요시된다. 그 저술은 주제의 범위가 기독교 신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되기까지는 끊임없는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그 저술의 포괄성이라는 면에서 당대의 여러 다른 신학 논문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은 구성 순서와 균형 그리고 판단의 실질적인 일관성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저작에는 수없이 확대되고 내용들이 재배열된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질서정연함은 설득력과 힘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활력 있고 도전적인 책으로서 독자에게 인격을 요구한다. 이것은 강요가 저자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내용을 설득력 있고 끈질기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회심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복종시켜 가르침을 잘 듣도록 온순하게 하셨다."33)라고 썼다. 그 깊고 끊임없는 내적 변화의 결과로서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살고 저작활동을 하였다. 강요의 첫 장에서 그는 '하나님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라는 주제를 감동 깊게 표현했다.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 전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 주권적 권능, 그리고 우리 인간들과 현재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그에게 있어 사변적인 사유의 결과도 아니며 사변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동기도 아니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변하는 지적 방종을 거절하였다. 만일 그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었다 해도 의식적으로 억제하였다. 그는 자신과는 관련 없는 탐구자의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는 하나님 스스로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그의 견해로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주제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및 우리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문제였다.34)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스럽게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배와 사랑과 순종으로 그분의 뜻을 거룩한 말씀에서 배우겠다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알려주신다.

칼빈의 정신세계는 굳건하게 결합된 교리적 논리 체계를 여러 부분으로 만들어내고 조립하는 효율적인 공장처럼 생각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칼빈의 대표작인 강요를 대한다면, 이러한 억측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독자들은 즉시 깨달을 것이다. 사려 깊은 독자는 저자의 지성과 그의 모든 영적 및 감정적 존재까지도 그의 저작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칼빈은 그 후에 시드니 경(Sir Philip Sidney)의 "네 마음을 보라, 그리고 써라"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훌륭하게 구사하였다. 또한 그가 "마음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고대 격언의 좋은 예증을 든다. 그는 직업적인 신학자가 아니며 정연하게 사고하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그의 믿음이 함축된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힌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을 가리켜 "Summa Theologiae"(신학 대전)이라 하지 않고 "Summa Pietatis"(경건 대전)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신력의 신비는 바로 경건에 있으며, 그 경건의 산물이 바로 그의 신학이다. 즉, 그의 신학은 마침내 경건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과제는(그의 원래 제목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경건의 총체와 구원 교리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본서를 준비하면서 유일한 목적이 "순수한 경건론을 유지함으로써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의 라틴어 최종판 서문에서 주장하였다.

칼빈의 입장에서는, 경건은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모든 경험은 사색에 대한 도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사유 능력 이면에 있는 경험들을 알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들을 최전선으로 이끌고 가는데, 그곳은 사고의 능력이 미치지 않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전진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최고의 신비인 성만찬의 신비를 그의 부족함­"나의 어린애 같은 작은 자"로 측량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35) 그러나 그는 독자들에게 성만찬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자신의 한계들로 인해 억제하지 말고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이해의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한다.36) 그러나 그와 같이 인식된 최전선 안에서 그는 아주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저술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말은 역사적 함축성과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이 말은 이제 비효과적이며 종교적인 감상적 태도나 위선적인 겉치레를 연상케 하는 것이 되었다. 칼빈과 그의 동시대인에게 경건이란 말은 고대의 이방 저술가들이나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불쾌한 함축이 전혀 없는 진실한 단어였다. 경건이란 가족이나 국가 또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하는 것, 즉, 칭찬할만한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칼빈은 한결같이 주장하기를,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건전한 지식을 얻기 위한 제일 먼저 행할 요건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이 원칙을 말할 때,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서 주신 유익들을 앎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였다. 경건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자신을 양육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돌보심이며 하나님은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을 지으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37) 경건(pietas)이란 말은 칼빈의 저작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며, 강요에서는 세속적인 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되풀이해서 나오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 종교와 경건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고 에밀 도머그(emile Doumergue)는 말한다.38) 미첼 헌터(Mitchell Hunter)는 말하기를, "경건은 그의 기본적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학문 자체로서의 신학이란 전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종교적 의미는 모든 것을 옹호하는 골격으로서 신학에 전념하였다."고39) 한다.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건전한 신학의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종교적 태도에 포함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택이며", 칼빈의 저서 여러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며, 하나님에 관한 관념들, 즉, 균형 잡힌 견해들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는 세밀한 면에서 저자에게 동의함으로 그가 그 자신의 종교적 투쟁의 상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마다 애매모호하게 의식하게 되는 종교적 통찰과 영적인 것들을 특별히 명석하게 지적으로 표현한 보고자였다.

칼빈의 명석한 표현들은 처음에는 독자들에게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독자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의 저술에 정통한 사람들도 일부는 그의 사상에 대하여 해명하기가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신학에 대한 해명들은 때때로 서로 상충되며, 강요에 나타나는 그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몇몇 견해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은 현대 개신교 신학 논쟁의 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고전 논문들의 공통된 운명이다. [강요]는 후대 사상가들의 사유 창고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이제 바르게 생각해낸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며, [강요]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게 하지 않고 그것을 미성숙한 표현들의 출처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연을 그의 은혜론과 관련하여 칼빈이 다룬 것은 특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40) 분명히 칼빈은 신에 대한 분별력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에 도저히 씻을 수 없게 새겨져 있음을 한편으로는 적극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놀라운 생각과 솜씨를 통해 우리의 감각기관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증거를 강조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암시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시며 그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과 함께 죄의 유산 때문에 매우 위태롭게 되어 그들은 그의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되고 보잘 것 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이 광명한 우주의 극장을 눈 가리고 더듬으며 돌아다닌다.41)

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곤경에 있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서 그분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셨다. 일반적으로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그는 정경과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정의할 때, 오직 성경에 쓰인 말씀에만 제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지혜로서 모든 선택과 모든 예언들로부터 기인한다."는 이 문맥에서 그가 말하는 영원한 지혜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고대의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한다.42) 따라서 만물을 지으신(요 1:1)말씀 곧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을 알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록된 말씀이 조물주이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확실하고 정확 무오한 권위를 갖게 되며 그가 항상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이 된다. 여러 논쟁들을 성경의 구절들과 관련시키는 것은 매우 놀라우며 이런 면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그가 성경 본문을 익숙하게 인용한다고 해서 무절제하고 지나치게 인용구만으로 끝나는 그러한 일은 거의 없다. 그가 지나치게 인용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 곳에서는 대체로 절대자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성경본문을 그도 역시 사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가 성경구절에 실제로 포함된 교리보다 더 많은 분량의 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구절을 지나치게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성경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논증에 맞지 않는 성경본문을 인용하여(다른 사람들처럼) 자의적인 영해를 함으로써 사용을 정당화하려고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그는 "성경으로 장난질하는 것"을 폭로하는데 항상 빈틈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단순하고 축자적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였다. 그는 교조적 해석을 확증하기 위하여 알레고리를 이용하는 것을 경멸하였고, 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을 입증할 때만 성경을 인용하였다.43) 하나님의 말씀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칼빈은 결코 의심한 적이 없으며, 그는 독자들도 이와 같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훗날의 논쟁에서 "축자적 무오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모든 강조점은 성경의 문자적 단어들보다는 성경의 메시지 그리고 내용에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알려준 신탁과 환상들에서 기원하며, 그들은 그 속에 담긴 진리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고 그것들을 이야기로 후손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며, 이러한 구전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후세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계시를 기록하게 하실 때까지만 계속하였다.44)

인간 저자들은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기록하고 있는 진리를 그들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가 성문서의 권위 문제를 강조할 때에도 그는 항상 저자의 마음으로 표현하며, 그가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어들이 아니라 메시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사도이자 저자들인 그들을 가리켜 성령의 "확실하고 진정한 기록자들"(프랑스어 판에서는 "선서한 공증인들")이라고 한 그의 말이 가끔 인용되는데,45) 이때에도 문맥은 성경의 단어들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표현하는 영감으로 된 교훈을 말한다. 그는 실로 영감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가 영감을 단어 자체와 관련시키는 것 같은 구절이 글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주된 관심은 단어의 정도를 넘어서 그 메시지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영감의 방법에 대한 그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강요]뿐만 아니라 그의 주석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칼빈보다는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대한 관심 문제였다. 그도 성경이 완전 무오함을 아무 조건 없이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들에 있어서는 단어의 입장에서 무오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솔직히 인정하였다. 그는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시편 51편 4절을 인용할 때 부정확하게 옮겼다는 점을 논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도들이 성경의 말씀을 인용할 때, 내용이 일치되게 인용한다면 만족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스럽게[liberiores]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단어를 양심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 [quare non tantum illis fuit verborum religio]"46) 여기에 사용된 verborum religio라는 표현은 해석중인 구절의 몇 개 단어에 대해 억지로 주도면밀한 것처럼 주장을 하여 논전을 벌이는 논적들을 경멸스럽게 묘사하는 말로 [강요]에서는 나타난다.47) 칼빈의 예리한 문체 감각은 성경 기자들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적용된다.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는 듯한 요한"은 "변변치 않은 천한 문체"를 사용하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메시지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48) 이사야의 "우아한 문체"와 아모스의 "거친 문체"가 모두 성령의 "위엄"으로 묘사되어 사용되고 있다.49)

성경의 신적 권위는 교회가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기인 된 것이 아니며 교회의 기초가 되는 성경 그 자체에 있다.50)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은 합리적인 증명이 가능하지만, 그렇더라도 건전한 신앙 형성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에게서는 분명하고 확실하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성적 사고보다도 훨씬 탁월하다. 경건에 필요한 것은 그 증거가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확실성은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 바로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사역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닫는다.51) 성령은 역시 성경의 해석자이며 우리들의 마음에 성경의 가르치심을 주신다.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성경을 성령의 지시에 따라 읽을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성도의 확실한 진리의 책이 된다. 더 나아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그 조직 원리로 삼으며,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우리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주요 임무이다.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경은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52) [강요]의 초점은 기록된 말씀을 알려주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구적인 관련성을 떠난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 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순종 등을 주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53)

그는 교회의 조직과 훈련의 지침이 되고 교회의 공중 예배를 주관할 원칙들을 당연히 성경에서 확인한다. 이것은 사도들 이후에 발생한 이러한 문제들의 혁신은 모두 성경의 판단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널리 만연하였던 미신에 대한 공격 무기를 성경은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또한 그는 보기에 성급하고 무책임하며 왜곡된 성구 해석을 제시하는 동시대인들을 혹평하였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가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마태복음 26장 26절을 말할 때, 그는 자신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 구절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얻는 것 못지않게 복종하며 연구하고, 성경 전체에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지켜야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에 처음으로 떠오른 것을 비뚤어진 열심을 갖고 아무 구별 없이 성급하게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깊이 생각한 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 의미에 의지하여,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그것에 반대하여 펼치는 견해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진실로 우리는 마음을 포로로 사로잡아서 우리의 마음이 단 한 마디의 저항이라도 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그 의미에 대하여 절대로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54)

10.

강요 전체에서 칼빈 자신이 고백하는 것은 어거스틴에게서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계속해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인간의 능력에 관한 반(半) 펠레기우스적 견해를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음에도 칼빈 이전의 인간 자신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어거스틴의 교훈을 새롭게 증명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오르바이스의 고트샬크(Gottschalk of Orbais)가 849년에 이단으로 징계 당한 후, 철저한 어거스틴주의의 대표자로 유명한 첫 번째 사람은 신학자이며 성직자였던 토마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으로서, 그는 '심오한 박사'(Doctor Profundus)라고 불리었으며, 1349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직된 직후에 사망하였다. 그는 De causa Dei contra Pelagium이라는 긴 논문에서 자신은 일찍이 어리석고 허무하게도 그의 주변에서 널리 유행하던 펠라기우스의 사상들을 받아들였으나 은총의 빛이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확신이 임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과 성경을 항상 인용하면서, "은총은 과거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예정은 공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유로우신[gratuitam:무상] 뜻에 따른다"고 주장한다.55)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도 비슷한 견해를 주장하였다.56) 그는 1358년에 어거스틴 수도회(Augustinian Hermits) 총회장으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교리적면에서 보면, 위클리프(Wycliffe)는 어거스틴의 제자였고, 죤 후즈(John Hus)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못한 위클리프적이었지만 거의 위클리프 못지않은 어거스틴계 인물이었다.57)

"종교개혁을 내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해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똑같다"라고 한다.58)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성경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검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거스틴에게서 자신들은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는 것을 두 종교개혁자들은 솔직히 인정한다. 칼빈은 후기 어거스틴주의 최대 거봉이라고 말할 수 있다.59) 실제로 그는 인간과 구원을 취급하면서 어거스틴의 대표적인 표현들을 대폭 인용하였기 때문에 이 항목들에 있어서 그의 교리는 아프리카인이었던 그의 대선배의 교리와 전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그의 견해가 어거스틴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무비판적인 제자가 아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다.60) 칼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영벌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특별한 결정이라고 하는 "이중 예정"을 명백히 주장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을 초월한다. 명백히 이러한 진술은 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확신을 성경독해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입증하고 그 확신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 칼빈 신학의 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다른 방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선택이란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진 것이라든가 아니면 선할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영원히 정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정통적이며 논의의 여지가 없는 신앙이다. 보다 앞선 몇몇 어거스틴 주의자들과 같지만 칼빈이 일부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정죄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결부시킨 것이다. 그러나 주장의 강도와 엄밀성은 그가 훨씬 큰 것은 저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고에 의해서 결정되며,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화를 당하는 것이 그 운명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그는 신학의 두 가지 상식들을 하나로 결합시켰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칼빈 자신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많은 독자들이 용납할 수 없거나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정죄 받은 자에 대한 이 선고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부정하거나 피할 수 없다.61) 칼빈은 영벌론을 대단히 엄밀하게 진술하고 재차 강조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지의 기능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 선택받지 못한 자를 "모른 체하고 지나가게"하는 것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은 "누락"이 아니라 "영벌"이다. 바울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말한다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모르는 체하고 지나쳐 버리는 자를 영벌에 처하신다"고 마찬가지로 간단한 주장을 한다.62)

칼빈은 이러한 결론을 해명하고 수호할 때에도 그것을 생각하고 몸서리 쳤으며, 거기에 내포된 도덕적 난점을 잘 알았다. 그는 죄의 주권자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 그 결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이 많으시며 공의로우시다. 비록 우리의 연약한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사랑과 공의가 이 땅에서 항상 표현된다. 칼빈이 예정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쏟은 것은 그 자신이 예정의 신비 앞에서 너무나 크나큰 충격을 받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던 사실에 의해서 설명된 것이다.63) 따라서 이 주제의 언급에 큰 관심을 가지는 것, 즉, 그것이 어떻게 선택되었을까 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성숙한 신도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겸손한 자세로" "이 높고 불가해한 신비"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선택의 열매들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외적인 유익이나 번영 등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력을 떨치고 번성하며 경건한 자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질 수밖에 없다. 선택받은 자의 축복은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확고한 보호를 확신하는 것과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기뻐하며 행복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11.

칼빈은 소위 중생, 즉, 영혼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것은 "육신의 금욕과 영의 부활"을 포함하는 신실한 회개를 동반한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할 때 우리의 옛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히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태어난다.64) 말하자면, 우리는 새로운 영적 기업, 즉, 이생에서는 결코 완전히 달성할 수 없는 완전을 향해 점차적으로 나아가는 것에 참여한다. 이런 불완전함은 실망해도 좋다는 충고가 결코 아니다. 즉, 그것은 미래 삶의 현실에 관한 분명한 의식과 연결되며, 그 삶을 우리는 열망하며 기다린다.65)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은 아니나, 우리는 순례와 훈련의 장소로 신중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칼빈은 이 세상에서의 의무나 이 세상이 누리는 혜택을 불쾌하거나 거절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균형 있고 통찰력 있고 실용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신앙 지침서를 다섯 장에 걸쳐서 제시한다.66)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의 형상은 우리 안에서 회복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침묵적인 조건 아래에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신다. 여기서 자기 부정과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내포한다. 아무리 그들이 고집이 센 자들이라도, 그들을 사랑하라고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그들로부터 발견해야 한다.67) 종말론에 대한 현재의 논쟁에 의하면 "미래의 삶에 대한 고찰"을 취급하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며, 이생에서도 도움 수단으로 이용하고 향유하는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다.68)

칼빈의 견지에서 성화(聖化)는 인생행로를 향하여 가는 동안 우리의 소명을 추구하며 경건의 진보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개혁시대에 충분히 논의된 신앙과69) 회개와 칭의 등의 교리들을 그는 독특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신앙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성실성의 확신 이상의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완전히 믿는 것이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한 믿음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성령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공로와 율법은 서로 달리한다. 칼빈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신앙을 경건과 사랑으로부터 분리시켜 취급하는 것을 비난한다.70) 루터도 역시 "믿음으로만 의롭게 산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만,71) 믿음이 스스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며 믿음은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드린다고 감히 말한다.

12.

제4권에는 묘하게 통합된 상당히 많은 새로운 자료들을 먼저 편집한 여러 부분에서 발췌된 것 그 자체가 잘 정돈되어 구성되어 있다. 칼빈은 이 책의 제목을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회와 그 안에 머무르게 하려는 초대의 영원한 방법과 조력"(The External Means or Aids by Which God Invites Us Into the Society of Christ and Holds Us Therein)이라고 표제 하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회'는 거룩한 공회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칼빈의 정신에 아주 잘 일치되는 이 대 주제를 취급하면서 그는 그의 능력과 재능을 모두 쏟았다.

그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공회"와 "성도가 교통하는 것"이란 말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는 루터의 견해를 옹호한다. 선택받은 자들로 구성된 불가시적인 교회의 구성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러나 불가시적인 교회는 구성원들을 서로 알고 있는 지상의 가시적인 조직 교회와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로 묘사한 키프리안(Cyprian)의 비유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 교회는 이런 자격으로 그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양육하며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될 것이다.72) 우리들은 가시적 교회에 "수많은 위선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믿음을 고백하고 삶으로 실행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써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운 판단으로 판단하여" 교회의 구성원들로 받아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진실된 진정한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신실하게 듣는 것, 성례전의 정당한 집행, 그리고 그것들보다는 아래에 있지만 본질적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공동체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것, 이러한 표지들로부터 진실하다고 인정한다. 그런 교회로부터 멀리하는 것은 위험이 아주 크다. 우리들 어느 누구나 결함이 있고, "눈을 흐리게 하는 무지"라는 병에 걸려있다. 그러므로 하찮은 이유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계몽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되는 사회라는 것이 본서에서는 특히 강조된다. 가시적 교회는 그것이 성취한 의미가아니라 그것의 발전과 목표라는 의미에서 거룩하다.73)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왜곡되고 훈련이 실패한 때에만 기독교인들이 그 조직을 떠날 수 있는 정당한 사유가 된다. 칼빈은 교황권을 고집하는 교회 안에서 참된 교회의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을지라도 거기에서도 같은 이유들을 발견하였다.74) 사역과 사역의 직분 그리고 그 기능에 관한 고귀한 교의가 신약성경의 증거를 기초로 하여 충분히 설명되고, 성직의 발전과 타락을 교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한다.75) 풍성한 교회가 지식을 기초로 하여 칼빈은 중세의 로마교회가 베드로에게 권위가 있다고 하며 교황권을 점점 더 비중 있게 하고 그것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맹렬히 논박하였다. 정도에 지나친 많은 욕설들을 관련된 장(章)들로부터 제거한다면, 그 문제와 관련하여 상당히 인상적인 자료들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계 세력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이 역사적 변화들을 고찰하였다.

그는 성직론에서 장로들과 구별되는 감독직을 별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관리와 훈련 기능을 맡은 고대의 성직제도를 매우 중요시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칼빈의 관점에서는 로마교회 성직제도의 최대결함이 시작한 것은 보니파체 3세(Boniface Ⅲ)가 전교회에 대한 교황권을 주장한 이후부터, 즉, 대(大) 그레고리 이후, 특히 교황 자카리와 프랑크의 통치가 삐뺑(Pippin) 사이에 협정이 체결된 시대이후에 교만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주장들이 야기되면서부터였다. 칼빈은 이런 동맹을, 권력을 장악하고 분할하기 위한 시도로 생각한다. 그는 9세기의 Pseudo­Isidorian Decretals를 효과적으로 폭로한 최초의 문서인[마그데부르크 세기들](Magdeburg Centuries 1559-1574)이76) 출현하기 이전에 이 장들을 저술하였지만, 그 사기문서들을 조소한다. 그는 콘스탄의 증여에 관한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의 폭로 기사를 읽었고77) 그리고 8세기의 문서 역시 위조라고 생각된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 주장의 결과로 부패가 점차 만연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 후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교황 지배 하에서의 상황이 "교회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까지" 이르렀다.78)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할 권위를 말씀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타락한 교회와 그 위원회가 담당하였다. 그는 위조문서들로 무장한 교황청이 세속적인 목표를 추종하면서 발생한 사법권을 수없이 남용한 사례들을 맹렬하게 공박하였다.79)

칼빈은 또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하여 훈련과 성례전을 건설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개혁교회 초기의 훈련 관행과 같은 점이 거의 없는 교회 훈련을 받은 현대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의미하고 있는 교회와 목회자의 권위가 매우 높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훈련이란 매우 실제적이고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이것은 지체들을 결합시키는 끈, 또는 자제를 위한 고삐, 혹은 아버지의 징계 회초리와 같은 것이다.80) 누구도 지위나 신분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의 훈련 과정을 면제시켜 줄 수 없다. 이런 과정들은 종교적 중요성을 갖고 실행되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법정을 주관하신다"는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추호도 없다. 훈련을 통하여 달성하려는 목표들은 세 가지이다. 교회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되며, 선(善)을 부패시켜서는 안 되며, 그리고 위반한자들은 회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81) 그러므로 훈련은 엄격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온화하여야 한다. 칼빈은 바울, 카프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크리소스톰이 위반자들을 형제애를 가지고 신중하게 다루었던 예들을 깊이 심사숙고한다. 우리들은 완고함으로 인하여 출교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포기하거나 기도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그들을 멸망에 빠지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82)

13.

이 주제들은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한 의미를 매우 확신 있게 나타낼 수 있도록 칼빈은 논하였다. 다섯 장(章)이나 성례전, 즉, 주의 만찬에 대하여 논하고 "성례전이라고 잘못 불리는" 다섯 의식을, 즉, 견진, 고해, 안수례, 서품, 혼인 등에 나머지 장들을 논하였다.83) 어거스틴의 "불가시적 은총의 가시적 형태"라고 규정한 성례전 정의를 인정하지만 그러나 칼빈은 "성례전이란 외형적 표식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이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하여 그는 말씀과 성례전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나타냈다. 이 관계에 의하면,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인장이며,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서약이며, 우리가 제자 됨을 여러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표징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믿음이고 성령께서 공급하는 보이지 않는 은총이 없으면 공허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세례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점이다. 유아세례에 대하여 구약성경의 합법적인 입회 성례전에서 할례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밖에도 칼빈은 가장 합당한 신약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들을 불러 팔에 안으시고 "천국은 이와 같은 자의 것"(마 19:13-14)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성도의 자녀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음을 막는 것은 곧 "죄"다.84) 특히 재 세례 파들처럼 세례 받지 않은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에게 반박할 수 없다. 이런 그릇된 견해들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임종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평신도가 세례를 베푸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세례의 예식을 갖추지 말고 신속하게 세례를 집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칼빈이 성례전을 잘못 이해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례 받을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정죄 받은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야기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당신의 자녀들로 받아들이셨음을 선언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례가 구원의 경륜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 의식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그는 쯔빙글리처럼 어린아이 시절에 죽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세례 받지 않은 자를 그것 때문에 정죄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 견해인 세례 중생론을 없애 버리면서, 칼빈은 어린아이들을 교회가 용납하고 교회에 자신을 입회할 마음을 점차적으로 배우고 교회의 보호와 가르침에 영향을 받을 때, 은밀한 영향력이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미래의 회개와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다"85)

'성찬식'을 논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루터 파에서 발전된 그리스도의 부활성체의 편재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례전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국한된다는 것은 거부한다. 다른 구절들에서 유추하여 "이는 내 몸"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인정해서는 안 되며 환유법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 그러므로 그 몸은 현재에도 하늘에 계시고 빵과 포도주에 제한될 수는 없다.86) 그러므로 성례전에 참예하는 자는 영적으로 하늘로 들리어 올라가 그 몸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이 교의는 칼빈주의 교회의 특징이다.87) 칼빈의 성례전론을 단순히 "영적 현존론"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그의 교리에 대한 표식으로서 적당치 않다. 그의 논리를 현대인들이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는 예정론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자신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비에 당면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나는 그 신비를 이해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경험한다."88) 어떤 면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성령의 비밀한 역사를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 교회의 공동체적 삶에서 이 성례전을 중대하게 평가함에 있어서는 칼빈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그는 성례전이 자주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건한 참예자의 종교적 경험을 열렬하게 묘사하고, 성례전에 참예함으로 나타나는 "사랑의 띠"를 갖는 그것이 사회적 의무라는 의미와 함께 강조한다.89) 로마교회의 미사(Mass)론에서 특별히 미사가 죄에 대한 보상행위라고 하는 주장에 대하여 공격하였다. 그는 미사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부정하고 성찬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소위 성례전이라고 불리는 나머지 다섯 의식을 옹호하는데 이용된 논증들에 대해서도 욕설로 공격하고, 그 의식들이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있고 초대교회에서 집행되었다는 주장을 반대한다.90)

14.

마지막 장(章) "국가"91)는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들 중의 하나이다. 처음에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와 같이, 이장은 칼빈의 사상이 정치적 행위와 세상이 아주 밀접함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헌사에서 청년 학자는 오만한 군주에게 선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정책을 제시한 자들의 사악한 조언을 거절하라고 감히 권고한다. 프란시스에게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요구하며 프란시스에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그의 유명한 "제후들의 거울"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시녀로 만든" 제왕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였는데,92) 그 말에 대한 언급으로 칼빈은 왕의 "진정한 왕권"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사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의 의무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마지막 장(III. xix)이 역시 머리에 떠오를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에 정부라는 주제가 도입되므로 인해서, 그에 대한 상세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등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강요]가 다른 항목으로 끝맺기를 원할 수도 있다. 1939년부터 1554년까지의 판본들에서는 이 장(章)은 처음에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 그 다음에는 두 번째에 위치하였었다. 그러나 1559년 판에서 그것은 1536년 판과 같이 강요의 결론 부분으로 다시 돌아왔다. 칼빈이 정치 사회라는 주제에 이렇게 중요한 위치를 할애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이 답변은 본 장 안에서 그리고 정치에 관한 그의 다른 저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93) 토마스 아퀴나스나 다른 스콜라학자들처럼 그가 정치를 취급함으로 그 주제는 신학의 한 영역이 되었다. 그 장에서는 성경을 풍부하게 인용하였는데, 다른 곳에서와 같이 여기에서도 성경은 그의 기본적인 안내서이다. 그러나 칼빈에게 이 주제가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는 통치자들의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종교개혁에 투신한 사람들의 운명과 교회 개혁이 어떻게 영향 받는가를 그는 항상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을 초판의 마지막 장과 비교해 볼 때 그것은 처음 것보다 약간 증보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종교개혁 반대자들이 종교개혁이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운동이라고 규정하던 뮨스터(Munster)사건이 절정에 달한 때에 쓰였다. 칼빈은 정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종교개혁을 위한 그의 변증의 일부이며 그 논문 전반에 걸쳐 주장한 교리들을 실제로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제나 절실히 느끼고 이미 잘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의 서신들은 그가 복음적 신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정치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증거들로 가득하다.

칼빈의 견지에서 주요 논점은 정치사회가 그리스도 교회를 섬기는 것임은 사실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니젤(Wilhelm Niesel)처럼 "그는 국가 자체만이 아니라 기독교 국가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오해의 여지가 있다.94) 그는 그리스도교와 영적으로 약혼하였다고 하면서 정치적 관심사들과 의무들을 무시하는 오만한 "열광주의자"의 견해를 맹렬하게 거절하였다. 정치적 국가는 퇴출시켜야 한다는 사상은 그가 보기에 불쾌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국가의 기능은 마치 빵과 물과 태양 및 공기 등의 기능과 다를 것이 없다. 국가의 영예스러운 위치는 훨씬 더 탁월하다",95) 국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목적에 기여하며, 이것은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가는 인간사회에서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기독교의 공적 형태를 보호함으로써 최대의 기여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호의와 지원에 의존하여야만 한다.

칼빈은 통치하는 사람들의 의무뿐만 아니라 정부형태도 관심이 있었다. 그의 주석에서 구약성경의 몇 명의 경건한 왕들을 찬양하였지만 그러나, 당시의 왕들에 대한 그의 언급을 보면 대체로 비호의적이었다. 이것은 그가 왕권 자체를 거부하는 것들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당시의 여러 정부 형태들을 대체로 인정하고 그것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정부와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억압적인 곳에서는 인내할 것을 요청하였다. 폭력혁명을 칼빈처럼 반대하려고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정부 체제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족정치 또는 귀족정치와 민주주의의 혼합형 체제"를 단연코 옹호한다고 정숙하게 선언한다. 이 유명한 최초의 진술은 1543년 판에서였고, 1559년 판에서는 그 진술 후에 그 특성에 대한 설명을 삽입하였다. 왕들은 선하며 유능한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인간에게는 결함이 있기 때문에 서로 돕고 권고하며 또는 지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억제할 수 있도록 다수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최상이다.96) 다수의 통치와 서로 형제적 교정의 원칙도 교회와 국가 기구의 각 단위들에 적용된다. 그 원칙들은 칼빈이 지도한 제네바의 성직자 모임과 행정관의 모임에서 통상적인 실행으로 증명되었다.97)

본서의 결말에 감동적인 문구들을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것을 제외하면 1536년 판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학 논문에서는 상식처럼 된 간결하고 놀라운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들에 의하면, 칼빈은 현대 국가들의 "세 계급들"은 왕의 억압에 대응하여 백성들의 자유를 지키는 합법적 수호자로서, 고대의 민선장관, 호민관 그리고 수석치안판사의 기능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온유한 어조로 제안한다. 이것은 반란을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행정장관들에게 법에 입각하여 직능들을 수행하라고 제안한다. 위에 언급된 고대의 행정관들이 백성들에 의해 선출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피상적일 수도 있다. 칼빈의 강요 마지막 절들은 힘이 넘쳐흐른다. 그 절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그의 교훈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정치적 행위 또는 이익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삭제하였다. 우리들은 왕들의 분노로 인하여 위협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가장 귀중한 희생의 대가로 구속하신 하나님께 복종하고 우리들은 신앙을 양보하거나 인간의 타락된 욕망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15.

다른 저서들처럼 칼빈의 [강요]가 널리 보급되고 인정되는 것은 그의 문체가 매우 훌륭하기 때문이다.98) 문체에 대해 논할 때, 주로 주장되는 것은 그의 프랑스어 문체일 때가 가끔 있지만,99) 동시대의 많은 학자들과 그 후의 학자들은 그가 라틴어 작가로 더 높이 평가한다.100) 슈트라스부르크에 거주하는 칼빈의 친구 죤 슈트름(John Sturm)은 1543년 라틴어 판 강요에 추천서를 쓰면서 그 저서와 저자의 특징을 적절히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죤 칼빈은 아주 예리한 판단력, 최고의 가르치는 은사 그리고 탁월한 기억력을 천부적으로 갖춘 사람이었다. 저술가로서 그는 다재다능하고 풍부하고 순수하다". 특출한 학자인 죠셉 스칼리지(Joseph Scaliger)는 "그의 문체가 신학자에게 가장 적절한 글로 매우 순수하고 우아하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d. 1609). 그분처럼 적절하게 묘사한 신학자는 분명히 거의 없다.

라틴어에 정통하게 된 것은 그가 받은 교육의 혜택이었다. 그가 성숙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라틴어를 최초로 가르쳐 준 파리 대학의 마두렘 꼬르디에(Mathurin Cordier)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칼빈에게 라틴어 학습을 입문시켰으므로 그가 훗날 성취한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101) 그래서 그는 14세 때 라틴어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 있었고 라틴어로 의사소통과 설득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그는 고전들을 연구하면서 굉장히 많은 라틴어 어휘들을 습득하게 되었다. 브렌(Q. Breen)은 그의 신학에 영향을 미친 "인문주의의 침전물"에 대해 말하고,102) 웬델(F. Wendel)은 '1532년 이후부터 다소간 칼빈은 인문주의자였다'고 진술한다.103) 이 작가들은 문체 이외의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라틴어 고전들이 문체 면에 끼친 영향은 그에게 결코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브렌은 말하기를, "그가 저술한 모든 것에는 분명히 우아함이 있고 고전의 명료함이 빛나고 있다"104)고 하였다. 그의 저술들을 읽으면서 보통 때보다는 다르게 웅변적이거나 풍자적일 때는 그가 키케로를 회상하는 경향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칼빈은 그 이전의 어떤 작가들의 "문체도 결코 모방하지 않았다". 키케로와 퀸틸리안은 칼빈이 고전의 모형들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나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을지 모른다. 베르망은 그가 특히 추상적 용어와 그의 어휘를 광범위하게 한 대중언어의 요소들을 상당히 많이 이용하는 점에서 그의 문체는 고전 이후 기독교적 라틴어에서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괄목하였다. 베르망은 또한 그의 어순을 강조할 때 임의로 변경하고, 동사는 문장 끝보다는 중간에 위치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강요]에서 그는 주절이 문미에 오는 글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지만, 키케로와 차이점은 그의 글에는 키케로의 인위적이고 운율적인 구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병행구문과 삼중구문, 동의어 반복 그리고 보다 복잡한 장치들을 이용하여 운율적 효과를 얻는다. 청각효과에 대한 관심은 두운, 유운(類韻), 반복, 재담, 각운 등을 제한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105) 칼빈은 성경 기자들의 문체가 어떻게 다른가를 명확하게 식별해낸다. 그는 특별히 우아하고 아름다운 성경 구절들을 즐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거칠고 꾸밈이 없는 언어가 사용되는 부분들에도 신성이 역시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부분적으로 지나친 수사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나타내지만 수사학과는 다른 "진리의 힘"을 진실로 가지고 있다.106) 문자화된 강론으로서의 성경을 그가 존중한 것은 칼빈의 문체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고전 전통을 없애는 영향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교부 시대의 저술가들에게서 분명히 나타나는 영향이 그의 논문들보다는 그의 대중설교에서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성경 저자들이 명료성, 단순성, 간결성이 있다고 그들을 격찬하는 경우가 매우 많으며, 이 세 가지 특성들은 그가 특별히 높이 평가하고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던 것들이다. 사실 그의 문체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의 사상을 명확하게 그리고 언어의 소비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간결함은 그가 가끔 찬양하던 특성이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는 이 원칙으로 그가 덧붙여 말하고자 하는 유혹을 어떻게 자제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는 장황한 저술가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특히 긴박한 종교 문제들이 논쟁되는 곳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이런 이유로 그가 존경하는 친구와 동료들이었던 부처107)와 파렐까지도 비판하였다.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잡하고 장황한"문체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반대하고 그의 문체와 자신의 문체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어거스틴까지도 같은 이유로 힐책하였다. 칼빈은 "당신도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어거스틴을 무척이나 존경하지만, 그의 장황함에 나는 불쾌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않겠네. 더욱이 나의 간결함이 더욱 간결하게 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108)

그가 문장을 간결하게 쓰는 법을 알았다고 하는 주장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도 길게 논문을 쓴 저자에 대해 그의 문장이 간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실 [강요]에는 우리가 지루할 정도로 문장이 길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구절들이 많다. 이것에 대하여 오늘날에는 특별히 강조되지 않는 당시의 어떤 신학적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문체의 한 특성으로서의 간결함을 판단하는 진정한 기준은 [강요]와 같이 방대하고 다양한 주제를 취급하고 계획한 길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가 간결성을 주장한다는 것이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비웃음거리일 수 있겠지만, 그의 표현들이 "과중하지 않다"는 것과 "그는 싫증나는 글귀들이라도 군말을 하지 않는다"는 에밀 파게(Emile Faguet)의 말이 아주 적절하다.109) 그의 문장과 단락들은 사상으로 가득하고 구성을 조금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압축된 표현들이라는 점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칼빈의 글은 심오한 확신 때문에 어느 구절에서는 웅변적 성격이 있는 긴박성이 있다. 그가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형식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브렌이 지적한 대로, 그의 논증은 형식면에서 보면 항상 삼단논법, 즉, 생략 삼단논법을 선호하는 것은 그의 간결성 욕구 때문일 것이다. 이것 때문에 한 명제는 독자가 메워야 한다.110)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논리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반면에 독자는 보다 빠르게 설득을 당한다.

간결성의 원칙을 일반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있다면 논의 중인 입장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난할 때 흔히 감정을 표현하는 형용사와 부사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칼빈은 비난과 욕설에 통달한 대표적 인문학자로 보는 경우가 있다. 욕설 당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는 모멸적인 폭언을 종종 구사하였고, 때로는 적대자의 정당한 견해를 공격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독자에게는 이러한 것이 칼빈의 저서를 부분적으로 손상시키는 것 같은 안타까운 작태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경우에 독설은 논증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이 논증의 힘을 강화시킬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서 기인된 시도이다.

칼빈의 설득력은 적의와 부정 때문이 아니라 그의 강한 긍정적 확신들과 그의 풍부한 저력에 나온다. 본서는 그가 후대들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다. 오늘의 시대를 사로잡고 있는 새로운 관심사들조차도 그 메시지의 관련과 진가를 조금도 퇴락시키지 않는다. 칼빈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주제들을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소홀하지 않는다…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주된 목적이며 인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한 가지 목적이면 모두 충분할 것이다".111)

 
약어표

ACW―Ancient Christian Writers.

ANF―The Ante-Nicene Fathers.

Aquinas, Summa Theol.―Thomas Aquinas, Summa Theologica.

Augustine, Psalms―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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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er, Source Book―Ayer, J. C., A Source Book of Ancicnt Church History.

Benoit, Institution―Benoit, J.-D., Jean Calvin :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livres I-III.

Cadier, Institution―Cadier, J. and Marcel, P., Jean Calvin :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tienne.

Calvin, Letters―Letters of John Calvin, ed. J. Bonnet.

Calvin, Tracts―Calvin's Tracts.

CC―Corpus Catholicorum. Werke catholischer Schriftsteller im Zeitalter der Glaubens-spalt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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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Commentary

CR―Corpus Reformatorum : Joh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nt omnia.

CR Melanchthon―Corpus reformatorum : Philippi Melanchthonis Opera quae supersunt Omnia.

CR Zwingli―Corpus Reformatorum : Huldreich Zwinglis Smmtliche Werke.

CSEL―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Doumergue, Calvin―Doumergue, E., Jean Calvin―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

Du Cange, Glossarium―C. du F. Du Cange, Glossarium ad scriptores mediae et infimae latinita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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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berg―Friedberg, E. (ed.), Corpus iuris canoni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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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fele-Leclercq―Hefele, C. J., ed. Leclercq, H., Histoire des conciles d'aprs les documents originaux.

Heppe RD―Heppe, H., Reformed Dogmatics. Tr. G. T. Thomson.

Herminjard, Correspondance―Herminjard, A-L., Correspondance des Rformateurs dans les pays de langue francaise.

GCS―Die griechischen Christlichen Schriftsteller der ersten drei Jahrhunde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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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L―The Loeb Classical Library.

LF―A Library of the Fathers of the Holy Catholic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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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XX―The Septuagint : Greek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Mansi―Mansi, J. D., Saceorum conciliorum nova et amplissima collectio.

MGH―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MPG―Migne, J. P.,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Graeca.

MPL―Migne, J. P.,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Latina.

MPNF―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MPNF―2 ser.―Second series of the above.

OS―Barth, P. and Niesel, W., Calvini Opera Selecta.

Pannier, Institution―Pannier, J., and others, Oeuvres compltes de Calvin :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Schaff, Creeds―Schaff, P., The Creeds of Christendom.

Smits―Smits, L., Saint Augustine dans l'oeuvre de Jean Calvin.

Vg.―Vulgate version of the Bible.

VG―Versio Gallica. French text of the Institutes.

Wendel, Calvin―Wendel, F., Calvin : Sources et volution de sa pense religieuse.

 
독자에게 드리는 글 -1559년­

이 책을 처음 발간했을 때, 나는 주님께서 무한하신 은혜로 이와 같은 성공을 주실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소책자를 쓸 때처럼 그 대부분의 문제를 개괄적으로 취급했었다. 그러나 많은 경건한 믿음의 독자들로부터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큰 호평을 받게 된 것을 깨닫고서는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더 분발하도록 격려해 주신 여러분의 열렬한 평가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 미력하나마 보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가장 큰 배은망덕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제 2 판에서도 증보를 시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 판이 거듭될 때마다 조금씩 증보했다. 물론 내가 이 작업에 기울인 노력에 대해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지만, 또한 만족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내가 증보하여 내어놓은 것에 대해 독자 여러분이 기꺼이 인정해 주리라고 믿는 바이다. 하여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열을 기울였는지에 대하여 나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지난겨울에 학질의 일종인 사일열112)에 걸려 죽음의 날이 임박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병세가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더욱 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이 책을 저술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이유는 내가 죽기 전에 책을 완성하여 성도들의 아낌없는 성원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이 보다 빨리 출간되었으면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러나 이것이 아마 빨리 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113) 무엇보다도 이 책이 하나님의 교회에 전보다 더 많은 유익을 준다면, 그것이 적당한 시기에 출판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허가로 만족하지 않고 또 무지한 자들의 어리석고 완고한 판단, 행악 자들의 비방과 훼손을 모두 무시해 버리지 않았다면 아마 내가 한 일에 대해 진정으로 옳은 보답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정열로 가득히 차고 넘치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믿음을 증진시키는 일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내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책을 맡은 이후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보존하여 교회를 유익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양심적으로 당연히 분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또 천사들도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도 더 터무니없는 비난으로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이 인쇄될 때에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회가 개최되고 있는 아우구스브르그(Augsburg)에서, 내가 교황제도로 변절하였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것과 쑥스럽게도 그 소문이 왕후들의 궁정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었다.114) 내가 초지일관의 지조가 굳은 사람이라는 증거를 많이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감사할 일이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그런 비열한 비방을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공정하며 자비로운 모든 판단자 앞에서 마땅히 그 비방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사탄이 비열한 거짓말로 나를 억누르며, 그런 모욕을 통해 나를 한층 더 약하게 하며 게으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곧 자기와 그의 모든 무리들과 함께 자신들을 속이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은혜로 내게 흔들리지 않는 인내를 주셔서 거룩한 소명의 길에서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을 내가 확실히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판에서 새로운 증거를 나의 경건한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나의 의도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쉽게 접근하여 아무런 장애 없이 그 말씀 안에서 삶의 걸음을 걸어 나갈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기독교의 개요를 개진하였고, 또 그러한 순서대로 그것을 배열하였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하기만 하면 성경연구의 기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성경에 포함된 내용을 어떤 목표에 귀착시켜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데 아무런 곤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이 마련되었으니, 만일 내가 이후에 어떤 성경주석을 내놓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115) 교리에 대하여 길게 논의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언제나 문제들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취급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필수적인 도구로서 본서가 주는 지식을 지니기만 하면, 이 방법은 경건한 독자들을 많은 어려움과 실증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이 나의 모든 주석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116) 지금 나는 그것을 말로써 설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본서 자체가 그 목적을 대신 하여 주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독자여! 이제 작별의 인사를 하고자 한다. 만일 여러분이 나의 이 책에서 어떤 유익이라도 얻게 된다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로 나를 도와주기 바란다.

1559년 8월 1일 제네바에서....

내가 쓴 작은 책으로써 변명의 구실에 힘썼던 그 사람들이 열심히 이렇게 불어났다.117)

어거스틴 서간집『나는 유익을 얻으면서 글을 쓰고 글을 쓰면서 유익을 얻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것을 고백한다』118)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獻辭)

지극히 위대하시며 고명하신 군주(君主)시며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프란시스 폐하께 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구원을 삼가 기원하나이다

1. 책이 처음 쓰일 당시의 배경

지극히 위대하신 폐하시여! 내가 이 책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이후에 폐하께 드릴 수 있는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였습니다. 다만 나는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서술하여, 종교에 열성 있는 사람들이 진실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에 도움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히 나의 동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하였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아주 작은 지식마저도 바로 알지 못하는 자가 매우 소수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펜을 들게 된 의도라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 내용이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악(邪惡)한 자들의 횡포가 극도에 달하여 폐하의 나라에서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책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나의 신앙고백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이것으로 나는 보람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는 현재 불과 칼로 나라를 소란하게 하고 있는 그 광인(狂人)들에게 광적인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교리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를 폐하께서 알게 되신다면 천만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이 교리는 마땅히 투옥과 추방, 몰수와 화형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육지에서나 바다에서 완전히 송두리째 없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교리의 개요(槪要)를 고백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주장을 폐하께서 가능한 증오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폐하께 아첨하였는가를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119) 그러나 그러한 것이 그들을 문책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고 하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죄가 없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폐하께서는 그 관대하심에 따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교리에 대한 증오심을 조장하기 위하여, 내가 폐하께 설명하려는 교리가 모든 사람의 판단과 법정의 많은 판결에 따라 벌써 오래 전에 정죄 받아 왔다고 주장하려 하여도, 그것은 이 교리가 편파적으로 반대자들의 음모와 세력에 의하여 맹렬하게 거절당했다는 것과, 또 거짓과 음흉함과 비방으로 교활하게, 그리고 기만적으로 억압을 받아 왔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변호도 듣지 않고 이 교리에 대하여 가혹한 선고를 내리시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처사이며, 따라서 이 교리를 반역과 악행으로 몰아 부당하게 비난하시는 것은 기만인 줄로 압니다.

가장 고귀하신 폐하시여! 우리가 개탄하는 것을 어느 한 사람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폐하께서 매일 같이 들으시는 것처럼 중상 모략하는 저 거짓된 비방에 대하여 폐하 자신이 증인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비방은 이러합니다. 곧 제왕의 주권을 탈취하며, 모든 법정과 그 판결을 전복시키며, 모든 질서와 정부를 전복하며, 사회의 평안과 안녕을 교란시키며, 모든 법을 폐기하며, 모든 통치권과 소유를 분산시키는 것, 간단히 말해서 모든 것을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이 곧 내가 고수하는 교리의 유일한 목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들으신 비난은 지극히 적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재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무서운 소문들이 널리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비방들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온 세계는 이 교리와 그 주장자들을 수천만 번 화형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인 줄 압니다. 이와 같은 가장 악독한 비방이 그대로 인정된다면 일반 대중이 이 교리에 대하여 증오의 마음을 품는다고 해서 누가 이상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일치하며 우리의 교리를 정죄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까닭인 것입니다. 재판석에 앉는 자들은 이러한 감정에 사로잡혀 벌써 집에서 출발 할 때부터 가진 편견으로 판결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백이나 확실한 증거에 의해 유죄로 판결된 것 이외의 것만 처벌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책임을 바로 수행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죄로 유죄 판결이 나왔습니까? 그들은 이 정죄 받은 교리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무슨 권리로 그들이 이 교리를 정죄하였습니까? 이제 옹호의 보루는 이 교리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리로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 변명의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2. 핍박을 받고 있는 신앙 동지들을 위한 탄원

무적(無敵)의 폐하시여!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폐하께서 충분한 심리(審理)를 해주시도록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혼란 속에서 이 주장은 전혀 법질서에 따라 취급을 받지 못하였으며, 또한 법적으로 신중하게 다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난폭한 격정(激情)에 따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내가 안전하게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얻기 위해, 지금 개인적인 변호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물론 사람마다 조국에 대하여 당연히 품어야 할 그런 애정을 나 역시 느끼고 있으나, 현재와 같은 사정 아래에서는 조국에 있지 못함을 조금도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의 주장이자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장을 지금 변호하려는 것뿐입니다. 이 주장은 현재 폐하의 나라에서 완전히 찢기고 유린당하여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것도 폐하의 승인도 없이 어떤 바리새인들의 횡포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자행하게 되었는가를 지금 여기서 묻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진리가 근절되고 파멸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불경건한 자들의 득세로 인하여 그것이 감추어지고 매몰되어 잠복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련하고 불쌍한 교회는 잔인한 학살로 인하여 쇠잔해지고, 혹은 추방당하고, 혹은 위협과 공포에 압도되어 감히 입 한번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상습적인 분노와 광란으로 이미 흔들리고 있는 벽(壁)을 계속 쳐서 그들이 시작한 그 일을 기필코 끝장을 내고야 맙니다. 한편 이러한 광포에 맞서서 교회를 변호하고 수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자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은 다만 무지한 사람들의 그 잘못과 무분별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온건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이 알고 있는 오류와 무분별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진리라고 부르며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의 지혜의 신비를 주시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조금도 멸시하지 않으신 지성 있는 사람들을 무지한 사람들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모두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영명하신 폐하시여! 특히 지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리가 그 존엄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우리들 가운데 잘 보존될 수 있을까 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기로의 선상에 놓여 있는 이때에 폐하께서는 이런 정당한 변호에 대하여 귀와 마음을 막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120) 사실 이런 문제들은, 폐하께서 들으실 만한 가치가 있으며, 인정하실 만하며, 폐하의 보좌에 합당한 문제입니다. 사실 진정한 왕국을 통치함에 있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왕은 이미 왕의 통치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약탈을 자행하는 처사인 줄 압니다.121) 더욱이 자기 나라가 하나님의 홀(笏), 곧 그의 거룩하신 말씀에 의해 통치되지 않는데도 그 나라의 영구한 번영을 기대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잠 29:18)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 무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우리의 비천함을 소홀히 한 나머지 우리의 주장을 들으시려는 노력을 단념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소인(小人)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비참한 죄인들이며, 사람들 보기에는 가장 천대를 받을 존재입니다. 그리고 만일 폐하께서 부르고 싶으시다면, 우리를 이 세상의 배설물이나 찌꺼기라고 불러도 무방하며(고전 4:13 참조), 이보다 더 추악한 이름을 붙여도 마땅한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다만 그의 긍휼밖에는 자랑 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고후 10:17-18 참조), 오직 이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얻었습니다(딛 3:5 참조). 그리고 사람 앞에서도 우리의 연약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고후 11:30, 12:5,9), 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조차도 최상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세계의 모든 영광 위에 우뚝 솟아나야 하며, 어떤 세상의 권세가 추종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인데, 성부께서는 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셔서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시 72:8). 그리고 이미 예언자가 주의 통치의 위엄에 대하여 예언한 것처럼(단 2:32-35, 사 11:4, 시 2:9)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쳐서 산산조각으로 부스러뜨리듯이 하나님은 철과 구리처럼 강하고 금과 은처럼 찬란한 온 세상을 그의 입을 막대기로 쳐서 흩어버리실 것입니다. 실로 반대자들은, 우리가 거짓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핑계로 삼아, 오히려 그것을 악하게 부패시킨다고 외치고 있습니다.122) 그러나 이것이 악의에 찬 중상모략일 뿐만 아니라, 심히 뻔뻔스러운 파렴치한 행동이라는 것은 폐하께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읽으시면 친히 아시고,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폐하의 열심과 관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적어도 우리의 신앙고백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모든 예언은 "믿음의 분수대로"(롬 12:6) 하라고 주장하여,123) 성경 해석의 확실한 표준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표준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검토되기만 한다면, 승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옷을 입기 위해 일체의 덕을 벗어 버렸다는 것, 하나님에 의해 생명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어떠한 선도 없다는 것,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것,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빛을 받아야 할 소경이라는 것,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세워져야 할 절름발이라는 것,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할 약한 자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모든 기회를 우리에게서 제거하였다는 것,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 보다 더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고전 1:31, 고후 10:17 참조) 우리가 이러한 사실과 이와 비슷한 것들을 말하면, 반대자들은 우리의 말을 가로막고, 그것은 자연의 맹목적인 빛, 가공적인 준비, 자유 의지, 영원한 구원의 공로가 되는 선행 그리고 일체의 공덕까지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불평합니다.124)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선(善), 덕(德), 의(義), 지혜(智慧)에 대한 찬양과 영광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생명의 샘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책망 받았다는 말을 우리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요 4:14).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스스로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렘 2:13) 사람들이 책망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형제요 화목자로 믿는 곳에 하나님이 화목케 하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과 또 우리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롬 8:32) 그 하나님으로부터 일체의 번영과 축복을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신앙에 적합하고 또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보물, 곧 구원과 영생에 대하여 확실한 기대를 가지는 것보다 더 신앙과 일치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며 그러한 신뢰의 확신은 오히려 교만과 억측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떠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됨과 동시에, 하나님에게만 모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자랑하기를 배우는 일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헛된 자랑을 내버립니다(고후 10:17, 고전 1:31, 렘 9:23-24 참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가장 위대하신 폐하시여! 우리가 주장하는 모든 부분을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두고"(딤전 4:10), 또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기"(요 17:3) 때문에 우리가 "이를 위하여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임을 폐하께서 확실히 찾지 못하신다면, 그 때는 우리를 악한 자들 중의 가장 악한 사람들로 생각하십시오. 이러한 소망 때문에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쇠사슬에 결박을 당하고, 채찍을 맞고, 웃음거리로 질질 끌려 다니고, 인권을 박탈당하고, 잔인하게 고문을 당하고, 또 이를 피하여 달아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가 극단의 곤경에 빠져 무시무시한 증오로 저주를 받으며, 중상모략으로 상처를 입고 최대의 모욕적인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반대자들을 보십시오. 반대자들은 사제계급에 속하는 자들로, 이 성직자들의 명령과 지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적대 행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열심에 움직이고 있는가를 나와 함께 잠깐 동안이라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고 모든 사람 중에 그 위치가 마땅히 확립되어 있어야 할 참 종교가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무시를 당하고, 소홀히 다루어지며, 멸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그들도 주저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말하는 소위 맹목적인 신앙(implicit faith)으로125) 교회의 판단에 복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이런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사도직의 수위성(首位性)과 그 거룩한 모교회의 권위를 반대만 하지 않으면,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공공연하게 모독을 당해 더렵혀져도 조금도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미사니, 연옥(煉獄)이니, 순례(巡禮)니, 혹은 이와 비슷한 사소한 것들을 위하여 그렇게도 잔인하고 맹렬하게 싸우고 있으며, 가장 확실한 신앙이 없이는 경건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는 하나도 입증될 수 없는 것들이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신은 배요"(빌 3:19), 그들의 부엌을 종교로 삼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들이 없으면 그들은 벌써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일 수도 없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사치스러운 음식으로 배불리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마른 빵 껍질을 씹어 먹고 있으나, 모든 사람은 이러한 연료가 없어 식어버린, 마침내는 완전히 얼어붙은 냄비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전념하는 자가 바로 자기 신앙에 대하여 가장 열렬한 투사임을 입증하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그들은 모두 자기 왕국의 안녕을 보존하거나 혹은 자기들의 배를 채우고자 하는 한 가지 목적에만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진지한 열성을 조금이라고 보여 주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3. 새로운 것과 불확실한 것 그리고 기적의 가치에 대한 적대자들의 힐난을 반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의 교리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증오와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험담으로 규탄하며 중상모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교리를 신기하고 최근에 생겨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 교리가 무슨 이적으로 확증되었는가를 제시하라고 우겨대며, 많은 거룩한 교부들의 동의와 가장 오래된 관습에 반대되도록 그런 교리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들은 묻고 있습니다. 이 교리가 교회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리주의(分離主義)임을 스스로 인정하던가, 아니면 그런 교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여러 세기 동안에는 교회는 전적으로 죽어 있었다고 말하던가,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자백하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교리가 수많은 종파, 수많은 선동적인 폭동, 수많은 방종을 발생시킨 것으로 보아 그것이 어떠한 것임을 그 열매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126) 더 많은 변론이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경신(輕信)하는 무리들, 무지한 무리들 앞에서 우리의 버림받은 주장을 모욕하기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역시 말할 수 있는 기회만 허락되었다면, 제멋대로 맹렬하게 퍼붓고 있는 그들의 이 가혹한 비난은 아마 점점 힘이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이 교리를 "신기(新奇)"하다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결코 신기하다는 말로 칭찬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이들이 이 교리를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데 대하여 나는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복음이 그들에게 신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롬 4:25)고 한 바울의 설교가 옛날부터 있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주장하는 말에서 신기하다는 점을 하나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오랫동안 파묻혀져서 알려지지 못한 것은 인간의 불경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회복되었으니 적어도 그 옛 주장은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할 줄 압니다.127)

이상과 같은 무지로 그들은 이 교리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 만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 1:3)라고 탄식하신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 교리가 불확실하다고 비웃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피와 생명으로 그들 자신의 교리를 확증해야 했다면,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값진 의미를 가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확신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죽음의 공포도,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적을 요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슨 새로운 복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미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진리로 확증하신 바로 그 복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이적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는 이상한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이적이란, 원래는 잘 안정되었던 마음을 오히려 불안하게 만드는 것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고 경박하며, 허망하고 거짓된 것들입니다. 비록 그 이적들이 신기한 것이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진리를 반대하는 데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호는 언제 어디서든지 이적, 또는 자연의 일반적인 질서에 의해서 경외함을 받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만일 이적의 정당한 목적과 그 효용을 성경이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들의 이 헛된 생각들은 한층 더 과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사도의 설교 다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이적들은 그 설교를 확증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막 16:20), 누가도 역시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 14:3)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을 다음과 같은 사도의 주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3-4, 롬 15:18-19 참조). 이 말씀에서 우리는 표적과 기사가 복음의 인장(印章)임을 알게 되었는데, 복음의 신앙을 파멸하도록 우리가 이것들을 악용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만 예정되어 있는 이 표적과 기사들을 허위로 확증하는 데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서 기자의 말대로, 이적보다 우위인 이 교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검토되며 고찰되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줄로 압니다. 그것이 확증되면, 그 다음으로는 마땅히 이적에서 확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건전한 교리의 표는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는 것입니다(요 7:18, 8:50).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의 시험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이적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어떤 다른 목적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것입니다(신 13:2이하). 사탄에게도 역시 이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능력이라기보다는 기만이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리석고 무지한 사람들을 오도하기에는 충분한 것입니다(살후 2:9-10 참조). 마술사들과 주술사들이 언제나 유명해진 것은 그들이 행한 기사 때문이었습니다. 우상 숭배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들의 이적에 의하여 조장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마술사와 우상 숭배자들의 미신을 우리에게 신봉케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옛날 도나투스파는 이 타격용 망치를 가지고 그들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이 있듯이 단순한 대중(大衆)들을 압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에게 한 것과 똑같은 답변을 우리도 역시 반대자들에게 하려고 합니다. 그 답변은 우리 주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예언하시며 이적 행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128) 그리고 바울도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살후 2:9)으로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이적들은 우상이나 마술사가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고후 11:14)이 사탄의 계교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 애굽 사람들은 애굽에 있는 예레미야의 무덤에 제물을 바치고 신적(神的)인 숭배를 드렸습니다.129)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예언자를 우상 숭배의 목적으로 악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그의 무덤을 이렇게 숭배한 대가로 뱀에게 물려도 나음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가장 공의로우신 형벌이라는 것(살후 2:10-12 참조) 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적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확실하여 조롱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반대자들이 말하는 이적은 다만 사탄의 유혹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버리고 허망한 데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신 13:2이하 참조).

4. 교부들이 개혁 교리를 반대한다고 하는 부당한 주장

더욱이 그들은 우리가 교부들, 즉, 초대 교회의 보다 순수하던 시대의 저술가들을 반대한다고 중상모략하고 있습니다.130) 마치 교부들이 자신들의 불경건을 옹호하였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만일 논쟁이 교부들의 권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면, 가장 겸손히 말한다 해도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이 교부들의 저작에는 많은 예들과 증거들과 탁월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역시 어떤 점에 있어서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범하게 되는 과오가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이 경건한 자들은 그들의 재능과 판단력과 정신력을 총동원하여 교부들의 결함과 실책만을 존경하고, 교부들의 탁월한 저작은 무시(無視), 와전(訛傳), 왜곡해 버렸습니다. 황금 가운데서 불순한 찌꺼기를 수집하는 것이 곧 그들의 유일한 과제였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 타당한 것인 줄로 압니다.131) 그런데 그들은 소름끼칠 정도로 법석대면서, 우리를 가리켜 교부들을 경멸, 또는 반대하는 자라고 하며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을 멸시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이 나의 현재의 목적이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주장하는 교리의 대부분을 교부들의 찬성을 얻어 입증한다 해도 조금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의 저술을 연구하면서 거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된 것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만물이 다 우리의 것"(고전 3:21-22)이로되, 이는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봉사하기 위해 있다는 것(눅 22:24-25), 그리고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것"(고전 3:23)이며, "누구를 막론하고 당연히 그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다"(골 3:20 참조)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종교에 대하여 전혀 확신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인물들도 모르는 것이 많고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 모순에 빠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네 선조의 세운 옛 지계석(地界石)을 옮기지 말지니라"(잠 22:28)고 한 솔로몬의 경고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전답(田畓)의 경계나 신앙의 순종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순종은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시 45:10)라는 것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풍유적인 해석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어째서 지계석(地界石)을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한 그 선조를, 어떤 다른 사람보다 사도들이라고 해석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제롬(Jerome)의 해석이었는데, 그들은 제롬의 말을 교회 법전에 인용하였던 것입니다.132) 그러나 만일 그들이 마음대로 선조들의 지계석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하였다면, 어째서 그들은 고의적으로 이것을 스스로 범하였겠습니까?

두 분의 교부가 있는데, 그 중 한 교부는 "우리 하나님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잔도 접시도 필요 없으시다"라고 하였습니다.133) 또 한 교부는 "거룩한 의식은 황금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황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황금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134)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이 한계를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의식을 올릴 때, 금, 은, 상아, 대리석, 보석, 비단을 사용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꾸미고,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으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육식을 하지 않는 날에도 마음대로 고기를 먹는다"고 말한 교부가 있었습니다.135) 그들은 사순절(四旬節)에 고기를 먹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주하였으니, 그들은 그 한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역시 두 분의 교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분은 "자기 손으로 일하지 않는 수도사는 흉한이나 산적과 같이 취급되어야한다"고 하였으며,136) 또 다른 교부는 "수도사는 비록 연구와 명상과 기도에 몰두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생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137) 그러면서 그들은 게으르고 배가 나온 수도사들을 사창굴과 홍등가에 두어 남의 재산으로 포식하게 하였으니, 결국은 이 한계를 범하고야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화상(畵像)이나 성자들의 화상이 교회당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섭고 가증한 것들이라고 어떤 교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138) "예배의 대상을 벽에 그려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한 개인의 선언이 아니고 교회 회의에서 결정한 교의이기도 합니다.139) 그러나 그들은 전혀 이 한계의 제한을 받을 수 없었던지 교회 구석구석마다 화상(畵像)들로 꽉 채워 놓았습니다. 또한 죽은 자에 대하여 인간의 예절을 다 갖추어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에는 그들을 편히 쉬도록 내버려두라고 어떤 교부는 말하였습니다.140)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무시하고 죽은 사람에 대하여 끊임없이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교부들 중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즉, "성찬시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실체와 인성이 신성에 연합하여 그대로 존속하는 것처럼 존속하게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141)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낭독될 때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주의 몸과 피로 화(化)한다고 공상을 할 때 그들은 이 한계를 범하는 것입니다.142)

모든 교회에 오직 한 개의 성찬만 있음을 제시하고, 사악하고 범죄한 사람들은 모두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으며, 또한 성찬식에 참석은 하고도 떡과 포도주를 받지 않은 자들을 심히 책망한 교부들이 있었습니다.143) 그러나 그들은 이 교부들의 한계를 멀리 떠나서, 교회당뿐만 아니라 사가(私家)에서까지도 미사를 행하였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이를 구경하도록 허락하였고, 아무리 불순하고 사악한 자라 하더라도 기부(寄附)만 많이 하면 얼마든지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초대하지 않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성례전에 성실히 참여하도록 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목적하였던 의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가 아니라, 자기네 행위를 내세우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역시 두 분의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교부는 "그리스도의 성찬에서 그 일부만을 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부분을 택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144) 또 다른 교부는 "주님을 고백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도록 명령받은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주님의 피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145) 그들은 이 한계도 저버리고, 전자가 파문의 형벌을 주었으며 후자가 정당한 이유로 부인한 그 사실을, 침범할 수 없는 법칙을 만들어 명령하였던 것입니다.146)

애매모호한 문제들을 결정할 때, 성경의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에 따르지 않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고 주장한 교부가 있습니다.147)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많은 제도, 많은 교회 법전, 많은 교리적 결정들을 확립해 놓았습니다. 다른 이단(異端)들 가운데서 몬타누스(Montanus)가 금식법을 처음 강요했다고 해서 이를 비난한 교부도 있습니다.148) 그러나 그들은 역시 이 한계에서도 멀리 벗어나, 금식을 가장 엄격한 법으로 설정해 놓았던 것입니다.149)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결혼이 금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오히려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순결하다고 주장한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부의 견해에 동의한 교부들도 있었습니다.150)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벗어나서, 성직자들에게 가장 엄격한 독신 생활을 하도록 법을 제정하였습니다.151) 또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들으며, 또한 우리 이전의 어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위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만물의 시작이신 그리스도의 명령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 교부가 있었습니다.152) 그들은 이 한계를 스스로 지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지키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선생들을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의 선생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어떤 교부는 "교회는 자신을 그리스도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제나 진실하게 심판하시지만, 교회의 심판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153) 그러나 그들은 이 한계를 무너뜨리고, 성경의 전 권위가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주장합니다.154)

모든 교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궤변가들의 교활한 행동으로 더렵혀졌고, 변증론 자들의 논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몹시 싫어하였으며 이구동성으로 증오하였습니다.155) 그들은 평생 동안 끝없는 논쟁과 궤변보다도 더 사악한 이론으로 성경의 단순성을 혼란하게 하며 흐리게 하는 일을 일삼아 왔으니, 과연 그들이 이 한계 내에 그대로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일 지금 교부들이 되살아나서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사변적(思辨的) 신학이라고 하는 그 이론을 들었다고 하면, 아마 이 이상 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논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부들이 가장 순종하는 자손들로 간주되기를 원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뻔뻔스럽게 교부들의 멍에를 저버렸는가 하는 데 대해서 만일 내가 상세하게 열거하기를 원한다면, 아마 나의 논술은 그 적절한 범위를 훨씬 초과할 것입니다. 아마 몇 달, 아니 몇 해라도 내게는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처럼 비겁하고 부패할 정도로 무지한 자들이어서 오히려 그들은 우리가 그 옛날의 한계를 범하였다고 서슴지 않고 비난합니다.

5. 진리를 버리고 관습을 따름

그들은 "관습"이라는 것에 호소하지만 여기서는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관습에 굴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를 가장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판단이 옳다면 선한 사람들은 마땅히 이 관습을 추구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정은 이와 다른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의 행동이 얼마 안 가서는 곧 관습이라는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일이라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다 좋은 것을 기뻐하는 것만큼 선한 상태로 되어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이 가진 개개인의 비행에서 공적인 과오가 초래되고, 혹은 비행에 대한 공통적인 일치가 초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선한 사람들은 그것을 법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구상에 범람하고 있는 악의 대양(大洋)이 하나가 아니며 많은 위험한 역병(疫病)이 이 지구상에 퍼져 있다는 것, 그리고 만물이 멸망을 향해 급속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인간사에 대하여는 체념하든지, 아니면 이 큰 악에 대하여 힘차게, 또는 맹렬하게 대항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제책은 이미 우리가 오랫동안 죄에 익숙해져 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공적인 오류가 지배적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의 영원한 진리만이 지배되고 준수됩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세월의 연속도, 오랫동안의 관습도, 인간의 음모에 의해서도 지배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민에게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사 8:12)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의 선민이 백성의 사악한 생각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시 이사야는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사 8:12-13)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과거와 현재의 많은 예증을 들어 우리를 대항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만군의 주를 거룩한 분으로 모신다면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시대가 이와 같은 불경건한 행동에 동의한다 해도 삼, 사대까지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은 강한 분이십니다(민14:18, 출 20:4 참조). 아무리 전 지구가 똑같은 불의에 가담한다 해도, 대중과 함께 범죄한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하나님은 실례를 들어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홍수로 전 인류를 멸망시키고, 한 개인의 신앙으로 전 세계를 정죄한 노아를, 그의 소수의 가족과 함께 구원하셨던 것입니다(창 7:1, 히 11:7). 요컨대 악한관습은 하나의 유행병과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이 대중과 함께 여기에 빠진다 해도, 망하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어디선가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을 마땅히 고려해야 할 줄로 압니다. 즉, "무지로 범죄한 사람은 비록 전적으로 사함을 받을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까지는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진리를 완강히 거부하는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156)

6. 교회의 성격에 관한 그릇된 견해

그들은 교회가 얼마 동안 생명을 잃었다던가, 혹은 현재 우리가 교회와 싸우고 있다던가 둘 중의 하나를 인정하게 하여 우리를 괴롭히려고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확실히 살아 있으며, 그가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서 다스리고 있는 한, 교회는 앞으로도 계속 그 생명을 지속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살아서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지속되며, 그의 보호하심으로 방어되며, 그의 능력으로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일단 약속하신 것은 틀림없이 이루시어, 자기 백성과 더불어 "세상 끝날까지"(마 28:20) 함께 계실 것입니다.157) 지금 우리는 교회를 대항하여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경건한 성도들이 항상 그를 경배한 것처럼 우리가 한 마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과 한 마음으로 한 분 하나님과 주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숭배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고전 8:6).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만을 인정하고, 이것을 묶어 둘 수 없는 테두리 안에 제한시키려고 함으로써 진리에서 멀리 떠났습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기초로 하여 논쟁의 방향을 바꾸려 합니다. 첫째 그들은 교회의 형체를 유형적이며 가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그 형체를 로마 교회의 교황청과 교직 계급제에 두고 있습니다.158)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이와는 반대로, 교회는 어떤 유형적인 형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형체는 그들이 어리석게 찬양하는 그런 외부적인 화려함에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혀 다른 표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합법적 시행입니다.159) 그들은 교회가 언제나 손가락으로 지적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야단을 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적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자주 훼손되지 않았습니까?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은 것을 몹시 불평했을 때 교회는 어떠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왕상 19:10,14)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오랫동안 교회가 그 외부적인 형체를 갖추지 않고 지나왔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후 교회가 자주 전쟁과 폭동과 이단으로 말미암아 압박을 받아, 전혀 빛을 비추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 당시에 살고 있었다면, 아마 어떠한 교회도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7천 명이나 남아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160)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지금까지 계속 전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경건한 성도들이 만일 눈에 보이는 형체를 요구하였다면, 그들은 낙담하지 않았을까요? 힐라리(Hilary)는 실로 민중들이 어리석게도 감독직의 위엄을 예찬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 가면 밑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해독(害毒)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일을 충고하겠습니다. 적그리스도를 경계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은 어리석게도 벽(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집과 건물로 알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과 건물 안에서 평안이라는 이름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들 안에 마침내 적그리스도가 자리를 잡게 될 것이라는 것에 어떤 의심이라도 있습니까? 오히려 이것들 보다 산, 산림, 감옥, 호수, 그리고 깊은 구릉이 더 안전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이런 곳에 추방되어 살면서도 예언하였기 때문입니다."161)

그러나 무엇이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뿔난 관을 쓴 감독들을 존경하게 하였습니까?162) 그것은 그들이 큰 도시들을 통치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을 종교의 신성한 고위 성직자라고 생각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어리석은 예찬을 깨끗이 물리치고, 오히려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는 주님만이, 교회의 외형적인 표시를 인간적인 관점에서 제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불경건 때문에 초래된 심판이라면 어째서 하나님의 그 의로우신 복수를 대항하려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지난날 인간의 배은망덕을 벌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신이 주신 진리를 반항하며, 그 빛을 소멸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어리석은 거짓말에 속게 하시고 깊은 어두움에 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하나님은, 흑암과 오류 가운데 흩어져 숨어있는 자기 백성들을 멸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은 바벨론의 혼란과 심각한 시련의 불꽃 속에서도 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단 3장).

그러나 나는 지금 교회의 형체를 거짓된 허식에 의해 판단하려는 그들의 욕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에 대한 논의를 장황하게 끌지 않기 위해, 이를 상세히 논술하지 아니하고 개략적인 진술을 하는 정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사도직을 계승했다고 하는 교황과 이 교황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성별되었다고 하는 감독들, 이 사람들이 주교관과 홀장(笏杖)을 가지기만 하면, 이것으로 그들은 곧 교회를 대표하며, 그들 자신이 교회 자체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교회의 목자이며 주님에 의해 성별(聖別)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론과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은 목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아론과 제사장으로 임명된 그 아들들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 하였던 것입니다(출 32:4). 이러한 논법에 따르면 아합 왕을 속인 400명의 선지자들이 어찌하여 교회를 대표하지 못하겠습니까?(왕상 22:12) 그러나 교회는 실로 고독하고 멸시를 받았지만, 진리를 말한 미가야 편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그 선지자들은 교회의 이름과 외형을 보이며 연합하여 맹렬히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위협하며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렘 18:18)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예레미야는 이 모든 선지자를 대항하여 홀로 파송을 받아, 율법이 제사장에게서, 모략이 지혜 있는 자에게서, 말씀이 예언자에게서 끊어지게 된다는 주의 말씀을 선언하였던 것입니다(렘 18:18, 4:9 참조). 그러한 허식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하기 위해 모였던 그 회의에서 빛나지 아니하였습니까?(요 11:47)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그 외부적 가면을 쓰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를 분리주의자로 만들고 반대로 사탄의 사역자들을 성령의 기관으로 삼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말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즉, 바젤 회의의 결정에 따라, 유게니우스(Eugenius)는 배척을 받아 교황직에서 폐위되고, 아마데우스(Amadeus)가 그를 대신하여 교황직에 오르게 된 후, 그들은 교회가 어떤 국민과 어떤 지역에 귀속되었다고 생각하였을까요? 그들이 아무리 극단으로 치우친다고 해도, 이 회의가 외면적인 형식에 관한 한, 합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한 사람의 교황에 의하여 소집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교황에 의하여 소집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게니우스는 자기와 합세하여 이 회의의 해산을 시도하였던 모든 추기경(樞機卿)과 감독들과 함께 분파(分派), 반역, 완고(頑固)라는 죄목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왕후들의 호의로 교황직을 완전히 회복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체적이며 신성한 대회(大會)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결정된 아마데우스의 선거는 결국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만 그 자신은 짖는 개에게 던져진 한 점의 편육처럼 추기경의 신분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163) 그 후 이 반역적이며 완고한 이단자들로부터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 사제들이 속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붙잡혀서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어느 편에 교회의 명칭을 부여해야 할까요? 이 회의가 외면적인 위엄에 있어서는 조금도 결함이 없는 회의였다는 사실, 그리고 교황의 두 교서(敎書)에 의해서 엄숙하게 소집되고, 의장은 로마 교황의 사절에 의하여 성별(聖別) 되었으며, 모든 사건이 질서 있게 처리되었고, 따라서 끝까지 그 위엄을 보존하였던 회의라는 사실을 그들은 부정할 것입니까? 그들은 유게니우스와 그의 모든 지지자(그들은 모두가 이 지지자들에 의하여 성별되었다)를 분리주의자로 인정할까요?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교회의 형체를 다른 말로 정의하게 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수가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고의적으로나 자발적으로 이단자들에게서 임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분리주의자로 간주하든지, 둘 중 어느 하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가 외적인 허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록 이전에는 찾아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이 허식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교회라는 미명 아래 방자하게 그들 자신을 온 세계에 과시했으니, 그들이야말로 교회의 치명적인 해독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그들의 도덕 생활이나 그들의 생활에 가득한 그 비극적인 악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그 말은 들어야 하나 행위는 모방해서는 안 될 바리새인이라고 자처하는 까닭입니다(마 23:3).164) 만일 폐하께서 조금만 여가를 내어 우리의 저작을 읽으신다면, 그들이 교회라고 하는 교리가 영혼의 치명적인 해독이며, 교회 반대의 선동자이며, 또한 교회의 파괴자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7. 개혁 교리가 물의를 일으켰다는 주장

마지막으로 그들은 우리가 교리를 가르칠 때는 많은 소요와 폭동과 논쟁이 일어난다는 것, 또는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미친 영향이 어떠하다고 불쾌하게 되풀이하여, 참으로 솔직하지 못한 행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실로 사탄의 악의에 돌려져야 할 죄악의 책임이 부당하게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에 돌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사탄이 편히 잠들고 있을 때는 결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중의 환심을 받으며, 세상의 갈채를 받음으로써, 쉽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그 거짓된 교리와 구별되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특징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깊은 암흑 속에 잠겨져 있던 몇 세기 동안, 거의 모든 사람은 세상 임금의 희롱과 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탄은 사르다나팔루스(Sardanapalus)165)처럼 안일과 향락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태평하며 평화스러운 왕국을 소유하는 동안, 우롱과 희롱을 일삼는 것 외에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부터 비취는 빛이 그의 흑암을 다소 약화시키고 "강한 자"가 와서 그의 나라를 어지럽히며 맹렬히 공격을 가하자(눅 11:22 참조), 그는 비로소 자신의 평소의 게으름에서 깨어 무장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첫째로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력을 행하게 함으로써 빛나기 시작하는 진리를 맹렬히 탄압하였습니다.166) 그리고 이것이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교활한 계획을 꾸몄습니다. 즉, 그는 반세례주의 자들과167) 악한들을 통하여 논쟁과 교리상의 충돌을 일으켜, 이것으로 진리를 모호하게 하며, 마침내는 이를 멸절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현재 두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계속 공격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사람들의 폭력을 이용하여 이 진정한 씨앗을 뿌리째 뽑으며, 힘이 미치는 데까지 가라지를 뿌려 진리를 질식시키고 그래서 그것이 성장도 결실도 할 수 없도록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만 하면, 사탄의 이 모든 노력은 완전히 무효가 될 것입니다. 주께서는 벌써 오래 전에, 우리가 사탄의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책략을 충분히 알려 주셨으며, 또한 그의 모든 계략에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방어 무기로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과 반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항하여 일으킨 그 가증한 소동의 책임을, 그리고 협잡배들이 일으킨 그 종파심의 책임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돌리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왕상 18:17)가 아니냐고 질문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소요죄(騷擾罪)로 몰아붙였습니다(눅 23:5, 요 19:7이하). 사도들은 백성을 선동하였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일이 있습니다(행 24:5이하). 오늘날 모든 혼란, 소동, 논쟁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자들의 행동과 앞에서 말한 자들의 행동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고발에 대하여 어떻게 답변해야 할 것인지 엘리야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즉, 오류를 퍼뜨리고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항하는 그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왕상 18:18).

그러나 이 한 가지 답변만으로도 그들의 그 무모한 행동을 물리칠 수 있지만, 한편 그와 같은 중상모략에 자주 동요되어 마음의 불안과 혼란에 빠지는 자들의 약함 때문에,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는 줄로 압니다. 이제 그들이 이러한 동요(動搖)와 혼란 속에서 비틀거리며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도들도 그 당시 오늘 우리가 당한 것과 똑같은 일들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쓴 글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졌다고 베드로는 말하였습니다(벧후 3:16).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을 듣고, 즉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롬 6:1 참조). 신자는 "법아래 있지 아니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들은 즉시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 수 있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습니다(롬 6:15 참조). 바울은 죄를 장려하는 자라고 비난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거짓된 사도들은 슬며시 침입하여 바울이 세운 교회를 파괴하려 하였습니다(고전 1:10이하, 고후 11:3이하, 갈 1:6이하). "어떤 이들은 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빌 1:17) 오히려 악의를 품고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한사람들이 있었습니다(빌 1:15). 어떤 곳에서는 복음은 거의 진보를 나타내지 못하였습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였고"(빌 2:21), 어떤 이들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벧후 2:22)라는 말과 같이 되돌아간 자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영의 자유를 육의 방종으로 악용하였습니다(벧후 2:18-19). 형제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환심을 산 후 경건한 신자를 위험에 몰아넣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고후 11:3이하). 형제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행 6장, 11장, 15장). 이러한 환경에서 사도들은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그들은 잠시나마 모르는 체 해야 하였겠습니까? 아니면 많은 논쟁의 온상이며, 많은 위험의 근원이며, 많은 치욕의 기회가 된 그 복음을 거절하고 피해야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롬 9:33, 벧전 2:8, 사 8:14 참조)이 되시며,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눅 2:34)을 입으셨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하고 소동과 공격의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진군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또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살아야 마땅한 줄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영원한 특성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고후 2:15)요, 우리에게는 복음은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이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라고 바울이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배은망덕하여 하나님의 이 특별한 축복을 더럽히지 않고, 구원의 유일한 확신을 그르치게 하여 파괴하지 않았다면, 아마 우리도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8. 왕에게 원수들의 중상모략을 조심할 것을 권하고 자신들의 결백함을 변호함

그러나 폐하시여! 이제 나는 폐하께 진언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폐하를 깜짝 놀라게 하려는 그 근거 없는 비난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새 복음(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은 사람들에게 반란의 기회를 제공해 주며, 범죄하고도 벌을 받지 않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죄를 짓게 하는 자"(갈 2:17)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요일 3:8)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추호도 의심을 받을 만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와 같은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우리가 왕국을 전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한 번도 파당적(派黨的)인 말을 하였다고 들은 적이 없으며, 폐하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우리의 생활은 안정되고 검소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는 현재의 망명 생활에서까지도 폐하의 안녕과 폐하의 나라의 번영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범죄하고도 벌을 면하려고 애쓴다는 말이 과연 있을 수 있는 말입니까? 우리의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비록 여러 가지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 있을는지는 모르나, 그들이 말하는 그런 심한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생활이 순결, 관용, 긍휼, 절제, 인애, 겸손 그 밖의 여러 덕행에 있어서 비방자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할 만큼 복음의 유익을 얻은 것이 거의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성실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며,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성호를 거룩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빌 1:20 참조). 그리고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특별히 찬양해야 할 바로 그 일로 인해서 사형을 받았지만, 비방자들의 질투 그 자체가 그들이 무죄하다는 것과 공민(公民)으로서 청렴하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음을 구실로 삼아 소동을 일으키거나168)(폐하의 나라에는 아직 한 번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를 죄악의 구실로 삼는 자가 있다 하면(이런 사람들을 나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법률과 법률이 규정한 형벌이 있으니, 그들의 과실에 따라 그들은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 파렴치한 사람들의 악한 행동 때문에 모독을 당하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폐하시여! 비방자들의 중상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경신(輕信)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미 그들의 유독(有毒)한 불법 행위를 상세하게 폐하 앞에 제시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상세하지 않았는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서문으로 거의 완벽한 변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는 것은 이 서문에서 우리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탄원에 폐하께서 귀를 기울일 마음이 있도록 하려는 것뿐입니다. 폐하의 마음은 현재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폐하께 드리는 우리의 변호, 즉, 이 신앙 고백을 조용히 또는 침착하게 한 번 만이라도 읽어 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폐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고발당한 자에게 변명할 기회가 없을 정도로, 악한 자들의 귓속말에만 폐하께서 귀를 기울이시게 된다면, 또는 무법하고 광포한 그들이 폐하의 묵인 하에 감금, 채찍, 고문, 참형, 화형 등으로 계속 박해를 가한다면(히 11:36-37 참조), 우리는 실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극심한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사 53:7-8, 행 8:33).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 것이며(눅 21:19),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능력의 손은 때가 되면 곤궁한 자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고 또 기고만장하여 날뛰며 우리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무장하고 틀림없이 나타나실 것입니다.

지극히 훌륭하신 폐하시여!

만왕의 왕 주께서 폐하의 왕좌를 의(義)로 확립하시며(잠 25:5), 폐하의 주권을 공평으로 견고하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1536년 8월 1일

바젤에서169)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170)

제 1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이 두 사이는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가 있는가?171)

1.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172)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 17:28) 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오직 한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는 이러한 축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치 시내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된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내 준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173)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의상을 빼앗긴 후부터 우리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수없이 많은 추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174) 얻지 못한다.175)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래적인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치우쳐져 있어서,176)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타락하여 오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한도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오염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것은 마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무레한 것이나 검으스레한 물체를 볼 때 완전히 횐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만일우리가 대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도 태양을 쳐다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은사를 평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가장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신기하게 감동시켰던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역겨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177)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비참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거의 혼비백산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거나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 사 6:5, 겔 2:1, 1:28, 삿 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한다(참조 욥 38:1이하).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 18:27)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 13).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되었거늘(사 6:10) 하물며 부패하고,(욥 13:28)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욥 7:5, 시 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발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지게 된다는 것이다(사 2: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하고 다음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슨 목적에 이르게 되는가?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실제로는 경배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합당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religion) 또는 경건(piety)178)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더라면,179) 우리는 자신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근본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오늘날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 시키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또한 어떤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안에서(고후 4:6 참조)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180) 우리는 여기서 전자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는 적당한 곳에서 다루고자 한다.181)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무한하신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지혜로 그것을 다스리시며,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바라고, 그에게서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그에게 돌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182) 종교를 낳게 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다만 헛된 추측으로 장난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183) 에피큐로스(Epicurus)가 말한 것처럼, 세계를 돌보지 않고 다만 안일에 빠져 있는 그런 종류의 신이 있다고 고백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184) 간단히 말해서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의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로는 우리의 안내자요 교사가 되는 이 지식으로 우리는 일체의 선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 등을 즉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선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으므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主)와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취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심판장이시며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 까닭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은 매우 무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한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신자에게 영생의 상급을 주시고 경건치 못하며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 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몸서리나는 생각일 것이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185)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되 아무 뜻 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진심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화려한 허식으로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제 3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186)

1. 이 자연적 은사의 성격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논란할 어떤 것도 없다.187)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모든 사람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188)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어디선가 발견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보다 시대에 뒤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189) 비록 다른 면에서 볼 때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관념은 인류의 정신을 깊이 점령하고 있으며, 집요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된다. 인간은 본의 아니게 다른 피조물을 자기 이상으로 높이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낮춘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예배드리기를 더 좋아한다. 이 사실은 신적 존재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거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이 증거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타고난 성격을 변경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사실 이 타고난 성격은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교만을 잊어버리고 가장 열등한 것에 대해서 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게 될 때 변화되는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적 발명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순박한 민중들을 속박하기 위해 교활하고 교묘한 간계로 종교를 창안해 내고, 이 하나님 예배를 만들어 낸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겠다.190)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속박시키기 위해, 교활한 사람들이 종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조작해 내서 이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존경심을 일으키며, 공포심을 갖게 하였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씨앗에서 싹이 움트듯이 인간의 마음에 종교적 영향을 낳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이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라는 명목으로 소박한 민중들을 교활하게 속인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더러 있었고,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들은 좋든 싫든 자기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항상 어렴풋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191) 보다 더 대담하고 방자하게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자 그 보다 더 비참하게 떤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가 공공연히 멸시하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또한 칼리굴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라는 것이다(레 26:36 참조). 이렇게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이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하나님의 복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오겠는가? 실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두려움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가끔 이러한 공포는 잠시 동안 사라져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즉시 돌아와서 새로운 공격을 취한다. 그들이 만일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나마 놓이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 술에 취했거나 흥분한 사람의 수면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잠자는 동안에도 평화로운 휴식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무섭고 떨리는 꿈으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자, 그 자신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실제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인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하다. 그리고 이 신념은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골수에까지 깊이 고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사악한 자들의 완고함 자체가 바로 충분한 증거가 된다. 디아고라스(Diagoras)와192) 그 동료들은 모든 시대가 믿어 오던 종교들을 희롱하였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193) 하늘나라의 심판을 조롱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냉소적인 비웃음에 지나지 않는다.194)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벌레가 쇠를 부식시키는 어떤 무엇보다도 더 예리하게 그 속을 파먹고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잘못된 것들이 없어지며, 종교심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며 개량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195) 왜냐하면(이제 뒤에서도 곧 말하겠지만)196) 세상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없애버리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파괴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열심히 만들어낸 마음의 그 완고함이 다 쇠약해지더라도 그들이 강하게 말살하고자 했던 그 신의 인식은 도리어 무성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싹트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곧 이것은 학교에서 비로소 배워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모태에서부터 터득하며 많은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이것을 잊어버리려고 할지라도 본성 그 자체가 아무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만약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철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영혼의 최고 행복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그리고 이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고 플라톤(Platon)이 자주 가르친 것도 다만 그런 의미의 것이었다.197)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매우 능숙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198)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추구하게 된다.199)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 무지, 악의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부패되었다

1. 미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신앙의 씨앗을200) 심어 주셨다는 사실은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백의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그것을 성숙하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3 참조). 더욱이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한 때 어떤 사람들이 잘못으로 미신에 빠진다고 말한바 있거니와, 그 뜻은 그들의 단순함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지만,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을 내딛든지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201)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함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2). 그는 또한 바로 앞 절에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공허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부언하였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에서뿐만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 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53:1)라고 말한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본능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미 부여받았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 본질을 제거하지는 않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게으름뱅이로 가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한다고 말하였다.202)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것을 운명에 맡기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203)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마 13:14-15, 사 6:9-10, 시 17:10 참조). 다윗은 다른 구절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1)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하였다(시 10:11).

비록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한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딤후 2: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식에서 몰아내고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덕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미신에 대하여 버릇처럼 변명한 그 공허한 변론이 전복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망령 또는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가를 또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다고 입증하신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들은 멸시 또는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만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에 알맞은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204)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8)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엡 2:12)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든 다신을 생각하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 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을 우상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말과 같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단정해야 한다.205)

4. 위선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이 강요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 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Statius)의 말은206) 이런 종류의 무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 잘 들어맞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해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 심판대가 무너지기를 열심히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그들은 심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신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들을 부패케 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악에 악을 더하고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위장함으로써,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아니하고 자기로 만족하며 또한,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을 성령의 고비로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방종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조차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런 혼란한 지식과 종교의 기원인207)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직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다. 그러나 위선자들(hypocrites)은 이러한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 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중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것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 데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신뢰한다. 마침내 그들은 그러한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을 얽어맴으로써 한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이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마침내는 꺼지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씨앗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나의 지금의 주장은 보다 더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안할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희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격하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에게 엄습해 오면 그들은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며 형식적이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 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

1. 하나님이 스스로 명백히 모습을 드러내시므로 우리는 모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축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요 17:3 참조).208)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209)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210) 그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2)라고 아주 적절하게 외쳤다. 말하자면 이 말은 우주 창조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신 이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과 같다.

시편 기자는 또한 같은 곳에서 능란하게 광대한 하늘을 왕궁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2-4)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영광이 위에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흔히 하늘을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시 11:4). 더욱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211)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히 11:3)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하였던 이유는,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 말로 일종의 거울(mirror)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천체에다 만민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시 19:2이하), 그 천체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관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9-20).

2.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수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212)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213)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214) 곧 우리가 갈렌의 노련한 기술로215)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3. 인간이 신의 지혜로우심을 최고로 증명한다

따라서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216)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싫증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217)라고 첨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을 깨우쳐 주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내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의 그 게으름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218) 이와 똑같은 이유로 다윗은 도처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4)라고 외쳤다.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2)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래서 다윗은 악마적인 교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는 자들의 그 광란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여기의 논전에 끌어내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또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훌륭한 탁월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교의 시인들도 상식과 경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사람들의 아버지"라고219) 불렀던 것이다. 진실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맛보고 다음에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 드리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를 바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킨다.220)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에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와221) 같이 그러한 고귀성을 이용해서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 우주에는 이러한 특권이 없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겨우 5척밖에 안 되는 버러지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한 곳에 다 동원되었단 말인가? 첫째, 그 영혼 안에 육체의 각 부분과 부합하는 어떤 기관이 있다고 먼저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에피큐로스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에 답하게 하자. 곧 원자의 집합이 어떻게 식물과 음료를 분해하여 한 부분은 배설물로 다른 부분은 피로 변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치 많은 영혼이 상의하여 한 육체를 다스리기나 하는 것처럼 무엇이 각 지체로 하여금 열심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가!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돼지 떼와222)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223) 부정한 방법에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224)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지체를 돕는 기능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실로 나는 천문학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제시한 한 실례로 인해 독자들은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225)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적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로 우리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를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면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예술과 유익한 것들의 창안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은 그가 받으실 찬양을 빼앗겨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른 근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 졌음을 경험이 풍부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욱이 전 우주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은밀한 영감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좋아하고 있다.

최초에 한 영이 있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부양한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고루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유리같이 빛나는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226)

이 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壯觀)으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도 헬라 사람과 라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발아 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227)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그 모독적인 시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228)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광적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 물론 경건한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경건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거슬리며 부적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건을 요하는 중대한 과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 사역의 열등한 과정과 혼동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229)

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 되심을 창조에서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고찰 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셔서 바로 이 분이 자연 전체를 주관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시며, 또한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적인 본성을 증거해 주는 그 놀라운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우리가 이 은사를 풍부하게 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처럼 더 불합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한히 거대한 이 천지를 지탱하신다. 때로는 단순한 그의 고갯짓 신호만으로도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뒤 흔들고, 불꽃으로 대기 전체를 태우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폭풍우로 대지를 휘저어 놓으시며 그가 원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잔잔케 하신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일어 계속 땅을 파멸할 것같이 보이는 큰 바다를 마치 공중에230)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을 견제하시며 때로는 심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격동시켰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의 증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특별히 욥기와 이사야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하여는 고의적으로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하여 우주 창조를231) 논할 때 더 적절하게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모습의 그 윤곽을 높게 추구하고, 낮게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다 같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공통적이라는 사실이다.232)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필연적으로 영원하시며 자존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그 유일한 이유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충분히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선포한대로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시 145:9 참조).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사역의 제2의 종류, 곧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는 모든 점에서 똑같이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233)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흉악한 행위에 대하여 형벌로 보복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악한 자와 행악 자가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은 채 날뛰도록 허용하시며 일시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많은 역경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경한 자들의 불법과 악의로 압박까지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그 불변적인 의의 법칙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한 가지 죄를 벌하실 때 그의 진노를 명백히 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죄를 미워하신 바는 뜻이요, 그가 많은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는 것은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그 형벌을 연기하신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긍휼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 얼마나 풍부한 기회를 주셨던가! 곧 하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비참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나누어주시고, 아버지의 사랑 이상의 것으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셔서 그들의 행악을 산산이 부숴 버리지 않으셨는가!

8.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생활을 좌우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절망적인 곤경에서 거의 멸망 직전에 빠져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또는 예상 밖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시 107: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절), 사로잡힌 자들을 음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10-16절),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절),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절), 뜨거운 열기와 한발로 땅을 태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절).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절) 이러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선지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경건한 자들은 기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불경자와 유기자(遺棄者)들은 그 입을 다물게 된다(42절).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234)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요(43절), 그리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가장 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이를 생각하는 데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사람 가운데 겨우 한사람235) 있을까말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흑암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경자의 그 흉악함이 순식간에 정복되고, 그들의 오만함이 꺾이고, 그들의 강한 요새가 무너지며, 그들의 무기와 갑옷이 산산 조각나며, 그들의 힘이 무너지고,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스스로 거꾸러질 때, 또 하늘 위에까지 높이 오른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땅 한가운데에 내던져질 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자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7), 눌린 자와 슬퍼하는 자를 궁지에서 구해 내시며, 절망자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다시 찾게 하시며, 소수이며 약한 비무장자가 많고 강한 무장자에게 승리할 때에도 또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 처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혼란하게 하시며(고전 1:20 참조), 그리고 "지혜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고전 3:19, 욥 5:13 참조) 하실 때, 그의 탁월성을 나타내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려고 하지 말고 그 하신 일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이 이상 더 장황하고 수고로운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닥치는 대로 말한 것들은 비록 적은 것이긴 하지만 눈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어디서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고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반드시 건전한 것이 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지식이다.236)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 능력을 우리 속에서 느끼며 그 은사를 우리가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을 통하여 한층 더 깊이 감동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 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권능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므로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행 17:27-28).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먼저 고백하고(시 145:3),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45:5-6, 시 40:5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 열중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력을 감탄케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깊이 감동시킨다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다시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237)

10.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238)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표본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이러한 표본이 위대한 사건들의 서곡이며, 따라서 이것의 완전히 드러남은 그 충분한 제시는 미래의 생활에까지 연기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한 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해를 받고, 중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능욕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본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는 번영하며 부요하게 되고, 엄연히 안정을 누리고 조금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즉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유명한 말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23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하신 사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요한 목적, 그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숙고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 지혜, 능력을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의, 선, 자비를 행사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불신자들이 인류의 통치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윗이 그들의 우매함을 탄식한 바 있지만(시 92:5-6),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들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하였다(시 40:12 참조). 그러나 이 논의는 후에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240)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12)

11. 창조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거나 온 땅을 두루 바라볼 때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가 우리 중 과연 몇이나 있는가?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만 있지 않은가? 사실,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에241) 의하여 회전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성에 대한 개념을 경솔히 파악하고, 즉시 자신의 육적인 망상과 광란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공허한 것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수한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위해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동일하다. 범인이나 둔한 자 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 같이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철학자가 얼마나 그들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하게 드러내었던가! 가장 미련한 자처럼 행한 다는 철학자들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신중했던 플라톤 역시 자신이 생각해 낸 둥근 구체(球體)242)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어 주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지도적인 인물들도 이렇게 방황하고 비틀거리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통치가 너무도 명백하게 섭리를 증거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고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만사가 생각 없는 운명의 의지에 의하여 뒤죽박죽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공허와 오류에 크게 기울어져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가장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이지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데 그 광기가 지나친 천박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 되었다

온 세상을 채우고 뒤덮은 그 무한히 더러운 오류의 진창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왜냐하면 각자의 마음은 미궁과243) 같아서 민족마다 여러 가지 허위에 각각 끌려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뿐만 아니라 거의 각 사람마다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거대하고 풍부한 샘에서 물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무진장한 신들이야말로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들은 각자가 극단적인 방종으로 흘러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혼란의 와중에 빠지게 하는 미신의 목록을 구태여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끝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의 그 맹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미신에 대하여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패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미개하고 교양이 없는 천박한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244)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엄밀히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가 다 허무한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토아학파(Stoics)는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명칭을 끌어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사상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각종의 제신에 속아 점점 더 심한 오류에 끌려 들어가는 일만 없으면 공허한 것에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수법이다. 애굽인들의245) 신비주의적 신학은 아무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들 모두는 용의주도하게 이에 대하여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처음 볼 때에는 이에 속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치고 종교를 기본적으로 부패하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극히 혼란한 다양성은 에피큐로스(Epicurearts) 학파와 그 외 경건을 경멸하는 자들을 대담하게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리도록 하였다.246) 그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와 심지어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스스로를 괴롭힌다고 주저 없이 추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아무 형벌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신들을 날조하여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불경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적인 무지의 연막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똑같이 불일치를 일으킬 만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탐구하는데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니 만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는 한층 더 어리석고 눈이 멀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모니데스(Simonides)는247) 폭군 히에로(Hiero)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그가 그렇게 희미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행 17:23 참조).248)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 13-15)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종교 행위를 거절하신다

우리는 이제 순수한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에 빠지게 된다한 분이신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정말 그들은 마음에 그러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그들의 확신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는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성령께서 선언하시기 때문이다(고전 10: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에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말한다(엡 2:12-13). 그리고 이 말은 한 국민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주장한 대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위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1:2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 받던 것은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산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합 2:18,20). 확실히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참된 경건에 거의 접근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신 말씀을 듣는다(요 4:22).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익하며 잘못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비록 큰 죄악에 빠져 있지 않고 혹은, 공공연하게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공통적인 이해에 근거한 순수하고 공인된 종교는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광란에 감염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라고 한 바울의 주장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고전 2:8). 그러나 가장 탁월한 자가 오류라는 어둠 속에서 헤맨다고 하면 민중의 찌끼와 같은 존재들에 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 형식을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진 의견은 비록 그것이 항상 막대한 오류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오류의 산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행 17:23 참조).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도 모두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였다(요 4:22). 그리고 가장 훌륭한 입법자들은 종교가 일반의 여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하였을 뿐, 그 이상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면 소크라테스(Socrates)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의식과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명령한 아폴로(Apollo)의 신탁을 예찬하였다고 한다.249) 그러나 세계를 멀리 초월하고 있는 것을 그들 자신의 권위로 정의할 수 있는 이 법칙은 어디서부터 인간에게 왔는가? 혹은 인간적으로 전해진 신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조상들의 법규나 민중의 제정을 누가 그렇게 감수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따르는 법이다.250)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의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뿐이다.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위해 비춰 주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 준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분명히 약간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바로 그 구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는 말씀을 첨가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곧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세계의 창조에서 명백히 보여졌다고 말한 곳에서도(롬 1:19)바울은 그러한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는 변명할 수 없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를 멀리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행 17:27),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접근의 결과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가르쳤다. 곧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16-17)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가 부족 하지 않는데도 자기를 알리시기 위하여 각종의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인류를 친절하게 이끄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길, 곧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15. 우리의 무능함이 죄이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우둔함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하더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잘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준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서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리고 비이성적인 피조물까지도 교훈을251) 주는데 정신박약이라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당연히 용납되기라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줄지라도 우리가 방황자요 방랑자로서 길을 잃고 헤맨다면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씨앗을 즉시 부패케 하여 훌륭하고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사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태만에 돌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는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성(神性)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그릇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엎거나 하여 그 사역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로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은 오직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부여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광채는 인간들에게 배은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동일한 죄의식 아래에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게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신의 임재를 그들 하나하나에게 예외 없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모으고자 하셨던 자들을 이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신 후,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둘러싸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지식 안에 우리를 묶어 두시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곧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노인이나, 눈이 흐린 사람 또는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거의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252) 그러나 안경의 도움을 받으면 정확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기 위하여 말없이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들 이외에도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 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253)

(성경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다른 족장들이 불신자와 구별 짓게 하신 하나님에 관한 그 깊은 지식에 도달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도움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도록 그들을 조명하여 준 그 특수한 신앙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말씀을 통하여 이 두 지식에 다 같이 도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먼저 오게 된다. 다음으로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다른 내적 지식이 여기에 더하여져서 이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지음 받은 만물의 유일한 창시자, 통치자로 알뿐만 아니라, 증보자의 위격을 가지신 구속주로서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세계의 타락과 자연의 부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제책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254)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양자로 삼으신 언약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들을 항상 불신자에게서 성별(聖別)하였다는 일부의 교리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확실한 특징에 의하여 모든 허망한 잡신들의 무리와는 구별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만은 논의를 할 것이다. 그 일련의 문제들을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 구속의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255) 우리는 신약성경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증거의 목적은 미로에서 어떤 불확실한 신성(神性)을 찾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있다.

2. 성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나 환상으로 나타내셨는지 혹은 인간들의 사역이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하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자손들에게 전승하여야 할 것을 그들의 마음에 알리셨다. 하여튼, 그들의 마음에 교리에 대한 견고한 확실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고 이해하였던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256)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일체의 인간적인 견해를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신앙을 주셨기 때문이다. 마침내는 진리가 계속적인 교훈을 통하여 대대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족장들에게 맡기셨던 그 말씀을, 말하자면 공적인 기록으로 엮으실 것을 결심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에서 율법이 공포되었으며 그 후에 율법의 선지자들이 해석자로서 또한 첨가되었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257)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보자로 삼는 신앙과 회개의 특수한 교리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과 많은 거짓 신들의 무리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백한 특징과 증거들로써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이 가장 영광스러운 극장의 관객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눈을 돌려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 월등한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흑암에서 태어난 자가 점점 더 둔감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한계를 잘 지켜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극소수요, 오히려 자신의 허망에 부풀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종교의 빛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하늘의 교리에서 그 시초를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258) 확실히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자신의 탁월한 섭리에 의해 인간을 특별히 고려하셨던 것이다.

3. 성경을 떠나면 우리는 죄악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며, 얼마나 심하게 각종 오류에 기울어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맹렬하게 계속 신기하고 인위적인 종교를 날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하늘의 교리가 망각으로 파멸되지 아니하고, 오류로 사라지지 아니하며,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된 증거로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형성(形成)에 찍혀진 자신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가 유익한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하셨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성실하게 명상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갈망한다면 이러한 올바른 길을 추구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바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하여 진실하게 또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법칙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자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16) 그 하나님의 광채는 말씀의 실(絲)로 인도 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迷宮)과 같은 것이라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길 밖에서 벗어나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절름거리며 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더 낫다.259) 그러므로 다윗은 순수한 종교가 번창하기 위해서는 이 지상에서 미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자주 소개하였다.(시 93:1, 96:10, 97:1, 99: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심에서 행사하시는 그러한 권능이란 의미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시는 교리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경은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1-2).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다윗은 여기서 또한 율법의 다른 유용성도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으로 말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언자는 뇌성(3절), 바람, 소낙비, 회오리바람, 폭풍우 속에서 땅을 뒤흔들고, 산들을 떨게 하며(6절), 백향목을 꺾으시는(5절) 하나님의 그 위엄 있는 음성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마침내는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는 공중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모든 음성을 불신자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다른 시편에서도 바다의 무서운 파도에 대해서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5).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그녀의 백성과 모든 백성이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예배를 드리되 유대인만이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씀하신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요 4:22).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권위는260) 확실한 것으로 세워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기인된다는 것은 사악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우선 여기서 성경의 권위261)에 대해 다소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공포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었을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을 벗어나거나 인간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 대한 신뢰를 감히 비난할 만큼 비극적인 오만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神聖)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39 참조).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 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더 충분한 논의와 더 주의 깊은 고찰을 하기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이 문제의 광범한 성격이 요구하는 중요성 보다 본서의 계획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해도 독자는 나를 양해해 줄 것으로 안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음과 같이 물을 때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믿게 할 수 있는가? 성경이 오늘날까지 완전하게 또는 상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문제들을 위한 확실한 규칙을 교회가 규정하지 않았다면, 한 책은 귀중히 여기고 다른 책은 제거하도록 누가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성경은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책이 정경(政經)에 편입되어야 하는가는 교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262) 이와 같이 교회라는 이름 밑에서 무제한의 횡포를 즐겨 행하는 이 불경한 사람들은 교회는 모든 것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관념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만 있다면, 자타(自他)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그 불합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어서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되고 또 그 판단에만 의존된다고 한다면, 그 영생의 확신을 찾고 있는 비참한 양심들의 상태는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답변을 얻을 때 그들은 그들의 동요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만일 인간의 만족에만 의존하는 그런 불안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라면,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2. 교회 자체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자들은 사도 바울의 단 한 마디 말로도 훌륭하게 반박할 수 있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20)고 사도는 증거하였던 것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회가 그 기원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선지자와 사도가 쓴 책이겠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으로 남게 된다고 하는 그들의 교활한 반대도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면, 그 교리가 어디서 발견되더라도 이 교회의 승인은 분명히 교회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63)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여 이에 승인의 인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과 논쟁점들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경건의 의무로서 교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성경을 존경하는 것이다. 교회의 법규에 의존하지 않는 한,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흑암에서 광명을, 검은 데서 흰 것을, 쓴 것에서 단 것을 가려내는 일을 배울 수 있는 가고 묻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진리의 명백한 증거5를 마치 흰 것과 검은 것이 그 색깔이 다르고, 또한 단 것과 쓴 것이 그 맛이 다르듯이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264)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 내세울 수 없다

참으로 교회의 권위가 복음을 믿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그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말이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265)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얼마나 나쁘게 또는 기만적으로 해석하였는가 함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마니교도들(Manichees)을 의식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니교도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아무 반론 없이 믿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마니(Mani)에 대한 신앙을 증진시키기 위한 구실로서 복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설득력을 가지고 그를 여러분들의 의견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 그는 여기에 더 첨가하여, "실로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자기가 만일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교회의 권위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복음을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의 말을 존중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확증하였다. 곧 "내가 나의 믿는 바를 예찬하고, 당신의 믿는 것을 비웃을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한 것을 알도록 초청하고, 후에 가서는 불확실한 것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자들을 떠나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직 충분히 바로 볼 수 없는 것을 먼저 믿으라고 초청하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 우리의 믿는 바를 이해하게 하는 자들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골 1:4-11,23) 이제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강화하며 조명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266)

이상의 말들이 바로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였던 말이었다. 이 말에서 누구나 다 명백히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인물이 의도한 바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결정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게 하는 서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경건한 자의 확실성을 전혀 다른 기초 위에 두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니교도들이 거절한 성경을 옹호할 생각으로 성경이 전체 교회의 승인을 얻었다고 마니교도들에게 자주 강조한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다음과 같이 파우스투스(Faustus)를267) 비난한 것도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곧 "그렇게 기초가 튼튼하고,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그렇게 영광스럽게 찬송을 받으며,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확실히 계승되어 온 복음의 진리를 그는 순종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권위가 사람의 결정이나 제정에 의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가 말한 것은 교회의 보편적인 판단을 제언한 것뿐이니, 그것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큰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을 능가할 수가 있었다. 신앙의 유익에 대하여(The Usefulness of Belief)268)라는 어거스틴의 소책자를 읽기 바란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한 대로 믿음의 유익이란 바로 탐구의 단서를 제공해 주며 그 적절한 시초를 형성해 주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견해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한 진리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도 강하다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269)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270)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로부터 얻은 신앙을 자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증거를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어 전 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려 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주의하게 또는 거짓되게 부르지 않은 것이 정당한 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진리에 의해서도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마련되기를 원한다면 곧 영원히 의심되는 문제로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또한 가장작은 말장난에도 놀라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271)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이 점을 논하게 될 때, 만일 하늘나라에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바로 그가 율법과 예언의 복음의 원저자(原著者)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은 많이 들 수 있다. 학식 있는 사람이나 최고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반대를 일으켜서, 이 논쟁에서 자기네의 정신력을 모두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절망적으로 파렴치해지기까지 강퍅해지지 않는 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표시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리고 이 사실에서 성경의 교훈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 거룩한 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른 모든 저작품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순결한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의 당돌한 거절을 억제하여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세워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272) 나 개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내게는 특별한 재주나 특별한 웅변을 하는 데 남보다 뛰어난 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교활한 자, 곧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지와 기술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활한 자들과 논쟁을 한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그들의 소란한 소리를 잠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트집들을 논박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된다고 하면, 그들의 뒷전에서 비밀리에 수군거리는 그 거만한 자들을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분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들의 비방에서 옹호했다 해서 이것이 곧 참된 경건이 요구하는 확실성을 그들의 마음에 즉시 새겨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종교를 전적으로 견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도 어리석게 혹은 경솔하게 믿지 않기 위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영감으로 말한 것을 합리적으로 입증해 주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요구한다.273) 그러나 성령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고 나는 답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기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274)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도 아무런 죄의 대가를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투덜거리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선(善)한 삶 가운데 더러 있다. 그것은 마치 성령께서 경건한 자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인장(印章)"이나, "보증"으로 불리어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다(고후 1:22).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기 전에는 그들은 영구히 수많은 회의 속에서 흔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5.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이다.275)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도리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276)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주 확실하게 단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논증이나 진실의 표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력과 짐작을 성경에 예속시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조급히 받아들였다가 그것을 엄밀히 조사한 끝에 곧 싫어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저 비참한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자기 마음을 미신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의 확실한 신적 위엄의 능력이 성경 안에서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되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고, 보다 더 효과 있게 순종하도록 마음이 끌리게 되며 또한 순종의 불을 태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올바르게 이사야를 통해서 선지자들과 온 백성은 다 자기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예언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께서 추호의 거짓이나 애매한 점이 없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사 43:10).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이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신이다. 곧 이것은 최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지식이며, 실로 이 지식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론에서 보다 더 안심하고 더 견고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의 계시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록 내 말이 그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믿는 자 개개인이 마음에서 경험하는 바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이 문제가 재론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여러 가지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277) 그러나 하나님의 영(靈)이 우리 마음에 인(印)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알고 지나가자. 겸손하고 순진한 독자들은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만족 할 것이다. 즉, 이사야는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하기를,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사 54:13)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선민(選民), 곧 전체 인류 가운데서 그가 구별해 내신 자들에게만 이 유일한 특권을 주신다. 실로 참된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민첩한 열망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곧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깊은 데로 내려갈꼬 네 마음에 이르지 말라 오직 그 말씀이 네 입에 있느니라"(신 30:12,14; 시 107:26 참조)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 이해(理解)의 보화를 감추기로 결정하셨다면 일반 대중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불합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기 까지는 나는 그들을 "일반 대중"이란 말로 부르기를 원한다. 더욱이 이사야는 예언의 교훈이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던 유대인에게까지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서, 동시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첨가 하였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1).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 반대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비밀은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 할 수 없다"(마 13:11 참조)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자.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 그리고 고전성. 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한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실성이 인간의 판단보다 더 높고 더 강하지 않는 한 논증으로 성경의 권위를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일반적인 동의로 그것을 확립한다든가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지원을 받아 확증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채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일단 성경을 그 존엄성에 따라 경건하게 받아들이며 일반적인 서적과는 달리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이전에는 마음에 성경의 확실성을 강하게 심어 주지 못하고 확신을 주지 못하던 논증들이 이제는 매우 유용한 도움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경륜이 얼마나 훌륭하고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세상적인 것을 조금도 풍기지 않는 이 교리의 천상적인 성격은 얼마나 완전하며, 이 교리가 그 모든 부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책에 위엄을 가져다주는 다른 특성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놀라운 확신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에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하늘나라의 그 숭고한 신비가 대부분 평범하고 겸손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더욱 화려한 웅변으로 꾸며졌다고 하면, 불경자들은 아마도 성경의 힘은 다만 웅변술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꼬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표현의 단순성 그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 존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말의 기교가 필요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고린도인의 신앙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고전 2:5)에 있다고 주장한 사도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하여 증거한 그의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4)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부적인 것에 의하여 유지되지 아니하고 진리 그 자체가 증명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분명해진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보시라.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시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278)

2.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 결정적이다

사실 선지자들 중 어떤 이들의 문체는 우아하고 명료하며 심지어는 화려하기까지 하므로 그들의 수사법은 어떠한 세속적인 저자들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나는 인정한다.279)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러한 실례를 보여 주심으로써, 비록 다른 곳에서 소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웅변에서 자기에게 조금도 결함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름답고 즐거운 말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다윗과 이사야,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의 글이나 또는 거칠지만 문체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목자 아모스나 예레미야 또는 스가랴의 글을 읽어 보면, 내가 이미 말한바 있는 성령의 위엄이 어디서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탄이 거짓된 탈을 쓰고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잡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흉내 낸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세련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천박한 언어로써 나약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교활하게 불경스러운 오류를 심어 우리 인간들을 속인다. 그리고 사탄은 언어의 진부한 형식을 사용하고 또 그것을 가면으로 쓰고는 자신의 사기 행각을 감추려고 한다.280) 그러나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한 허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쾌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트집을 잡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인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지 않는 선지자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교훈을 무미건조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상세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주요한 요점들만을 택하여 전체의 문제를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위에서 다룬 문제들과 함께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희랍의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281) 물론 모세도 새로운 하나님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받아들였던 것을 선언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은 그 언약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 외에 모세가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창 17:7). 모세가 듣지도 못한 것을 제시했었더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틀림없이 그들 모두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은 즉시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400년이라고 하는 연수(年數)에 대해서도 역시 그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창 15:13, 출 12:40, 갈 3:17). 모세가(그는 다른 모든 저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훨씬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리의 전승을 그렇게 먼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갔다고 하면 성경이 고전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보다 얼마나 우수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모세가 보여준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 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네의 고대 기원을 세계 창조 이전 6천년까지 소급하는 것을 믿으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적인 저자들까지도 저들의 수다를 항상 조소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내가 그것을 구태여 힘들여 논박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요세푸스(Josephus)는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이라는 저서에서 기억할 만한 증언을 고대 저자들로부터 인용하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 율법의 교리가 비록 읽혀지지도 않고 또 참되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아득히 먼 시대로부터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유명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282)

그리고 악독한 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의혹도 품지 못하게 하고, 사 악한 자들로 변명의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협에 대비하여 최선의 구제책을 강구하신다. 야곱이 약 300년 전에 영감을 받아 자기 자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모세가 상기 하고 있지만, 그는 이때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종족을 고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레위 사람으로서 자기 지파에게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창 49:5-6). 그는 분명히 자기 조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의 온 가문이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다.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였는데 그러한 모세를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그 사악한 불평을 기록할 때에(민 12:1), 육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였다고 볼 것인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했다고 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나는 여기서 많은 예증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율법서의 도처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이 분명하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적과 예언에 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公布)한 교리에 대한 확증들이다. 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는 것, 그곳에서 40일 동안 사람과의 교제 없이 있었다는 것(출 24:18), 율법을 선포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출 34:29),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뢰와 여러 가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오고 나팔 소리가 들려오되 사람이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출 19:16), 장막의 입구가 구름에 가려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출 40:34),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 악당 전체의 무서운 파멸로써283) 그의 권위가 기적적으로 변호되었다는 것(민 16:24), 그가 반석을 지팡이로 치자 당장에 물이 솟았다는 것(민 20:10-11, 출 17:6, 고전 10:4 참조), 그가 기도를 하자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는 것(민 11:9, 출 16:13, 고전 10:3 참조), 이러한 것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내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대하여 혹 누가 반대이론을 제기 한다면, 그러한 교묘한 이론(異論)에 대하여 나는 쉽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이 모든 사건을 온 회중 앞에서 공포하였는데 어떻게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세가 회중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 완고함, 배은망덕,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본 일도 없는 이적으로 직접 그들의 눈앞에서 자기 교리를 확신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6. 모세의 이적에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이적에 대하여 모세가 말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조금이라도 무슨 기회만 보이면 온 회중을 선동하여 떠들썩하게 반항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그런 불유쾌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도 명백하여 세속적인 저자들도 모세의 이적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의 아비는 그 이적들이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다(출7:11, 9:11).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돌로 치라고 할 정도로 모세는 미신을 증오하였다(레 20:6).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런 모세가 마술사였다고 억측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명성을 얻으려고 열심히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모세는 과연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과 형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것도 아님을 공언함으로써 일체의 비난의 표적들을 충분히 지워 버렸다(출 16:7). 그리고 일어난 사건 자체를 생각해 본다 해도 도대체 어떤 마술이 백성들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겠는가?(출 16:19-20)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많은 엄격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사악한 자들이 더 이상 불평함으로써 어떠한 성공도 거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온 민중이 교만하고 무례하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을 넘어뜨리려고 그들 중 몇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마다 모세가 속임수로 그들의 광포함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교훈이 모든 시대에 확신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가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더욱이 족장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 우위를 부여하게 한 것이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입증하는 대로 그 사실 자체를 생각해 본다면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다(창 49:10). 이 예언을 최초로 말한 자가 모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 책을 기록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다 지파의 왕권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사울이 즉위한 후 왕권은 베냐민 지파에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삼상 11:15).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삼상 16:13), 이때 왕권의 이양에 대한 무슨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던가? 양을 치는 평민의 가정에서 왕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 가정에는 7형제나 있었는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 다윗에게 그러한 영예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조차 하였겠는가? 어떻게 그가 왕국을 통치할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의 재간이나 노력, 혹은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서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모호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바 있는데(창 49: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른 예언들이 더 있지만 나는 여기서 이를 생략하겠다. 이 예언들은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그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다. 요컨대 모세의 한 편의 노래는(신 32장)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맑은 거울인 것이다.

8.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들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한층 더 명백하게 발견된다. 나는 여기서 단지 몇 가지의 실례만을 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체의 실례를 든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될 것이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사 39:6-7). 그 당시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오래 전에 예언한다는 것은, 아직 신적 영감에 대한 명백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못된다고 치자. 그러나 이사야가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도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의 근원이 하나님 이외에 도대체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1), 갈대아 사람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하며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경과하였다.284) 왜냐하면 이사야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고레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누구도 고레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바벨론과 싸워 그 강대한 왕국을 정복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자적인 수식도 없이 솔직하게 말한 이 이야기는 이사야가 사람의 추측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백성들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가 그들의 포로 생활의 기간이 70년이라는 것과 그들의 해방과 귀환에 대하여도 예언하였는데(렘 25:11-12, 29:10),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증거들에 의해 예언자들의 권위가 확증되었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주장한 바가 바로 그들이 말의 신빙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9).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대하여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같은 시대에 예언하였으며, 그 예언이 마치 상호간에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 진술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다니엘은 어떠한가? 그는 약 600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것이 마치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건의 역사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악한 자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충분히 억제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너무도 명백해서 교묘히 반대할 여지를 조금도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율법의 전승(傳承)은 신뢰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박함에 있어서 자신의 재치의 예리함을 보이기 위해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나 선지자들의 이름이 붙여진 채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285) 심지어는 모세가 실재의 인물이었던가를 감히 문제 삼는 자들까지도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었던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주먹이나 채찍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도록 보존되었다. 비록 그 율법이 제사장들의 소홀함으로 인하여 잠시 파묻혀 있었으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이를 발견한 후부터는(왕하 22:8, 대하 34:15) 대대로 계속해서 계승되어 왔다.286) 실로 요시야는 이를 공포할 때에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반이 널리 알고 있었고 또 당시에 유명하여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라고 하였다. 요시야는 그 원본을 성전에 보존하고,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하였다(신 17:18-19). 다만 이러한 일들은 있었다. 곧 제사장들이 옛날의 엄숙한 관습을 따라 율법을 공표하기를 중단하였고 백성들이 율법을 읽는 버릇을 게을리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의 권위가 확인되지 않은 때나 그것이 갱신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윗의 시편에 정통한 사람이 모세를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거룩한 저자들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저작은 오직 한 길을 통하여 직접 입에서 입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들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10.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 율법과 예언자를 보존하셨다

마카비가(家)의 역사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확실성을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생각하여 오던 것 중에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깨끗이 일소해 버리고 다음으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설치한 공격 무기로 그들을 역습할 것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모든 성경을 다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가진 사본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 말한다(마카비전서 1:56-57). 그러나 그 사본들이 어떤 공장에서 그처럼 빨리 위조될 수 있었겠는가287) 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냐하면 박해가 끝나자마자 즉시 그 책들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 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이를 익숙히 잘 알고 있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그 책들이 바로 성경이라고 인정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악한 자들이 서로 모의나 한 듯이 파렴치하게 유대인들을 모욕했지만,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종교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들은 모세가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全)역사의 동의로 그 거룩한 유구성이 확증된 이 책들을 가리켜 날조라고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개 같은 몰염치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추악한 비방을 논박하는 데 이 이상 더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맹렬히 타고 있는 불길 속에서 끄집어내듯이 이 말씀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인 폭군에게서 건져내셨던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지조를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보물을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게 하셨으며, 또한 총독들과 군인들의 온갖 맹렬한 조사를 좌절시키기도 하셨던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던 그 거룩한 기념비가 즉시 되돌아와서 이전의 위치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되고, 더욱이 그 위엄이 높아지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이적적이며 주목할 만한 성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후 곧 이어서 헬라어 성경이 나왔으며 이것은 전 세계에 보급되었기 때문이다.288)

이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의 그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 속에서 언약의 서판들을 건져 내셨다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거듭되는 재난으로 짓밟힘을 받고 기진맥진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는 그 속에서도 이 기록들이 손상되지 않고 본래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당시 히브리어는 멸시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교를 돌보지 아니하셨더라면 히브리어는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그들이 얼마나 자기네 모국어를 순수하게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예언서들을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고대성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해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여 보존하셨던가?(마 22:37-40)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최대의 숙적인 유대인들 곧 어거스틴이 기독교회의 사서(司書)들이라고289) 적절히 칭한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11)

11.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 로 확고부동한가! 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비천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많은 교만한 사람들은 그 문체의 단순성을290) 몹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리의 중심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논하고 있음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제 1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복음서의 기자들이 간단하게 요약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그들의 기록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 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 치듯 강하게 꾸짖는다.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 대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욕망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트집쟁이들을 대중(大衆) 앞에 나오게 하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적어도 그들의 둔한 마음을 각성시켜 줄 무수한 말씀들, 아니 그들의 조롱을 억제하도록 그 양심에 무서운 낙인을 찍어 줄 무수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작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 내재하는 하늘의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291)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교리를 이 세상 이상의 것으로 높이기에 충분하다.

마태는 이전에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배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하나도 이 세상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가 등등한 원수였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았던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지난날 그가 반대하던 교리를 변호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들 개들이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임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자. 또한 심지어 그들이 역사를 불신하도록 놓아두자. 그래도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그 자체는 소리 높여 부르짖을 것이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이 외에도 교회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또 다른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 성경이 공포된 이후, 오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전세계와 함께 성경을 억압, 전복하며, 혹은 인간의 기억에서 이를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은 종려나무와 같아서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존속하여 온 것이다. 사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궤변가나 웅변가 치고 성경을 반대하는 데 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했다고 하면 사방으로부터의 그 강력한 공격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 일치하였던 것은 한 국가나 한 국민만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만사에서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크게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러한 일치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서로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에 적지 않은 중요성이 이에 더하여진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의 등불로 삼아 빛을 발하게 하신 사람들의 경건을 말하는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되고 증언된 그 교리를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교자들은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용감하고 대담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담보를 치르고 우리에게 물려주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를 확고부동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 쳐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죽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되 잘못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를 지나친 광신(狂信)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하고 견고하며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이 밖에도 소수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약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였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게 변호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의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실로 성경을 확증하려는 인간적인 증거는 그 주요하고 우선적인 증거에 대하여 부차적인 보호자의 역할만 한다면 결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경고한 바, 사람이 그렇게 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292)

제 9 장  성경을 떠난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신앙의 원칙을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호소

더욱이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어떤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출현하여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293)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그 확신이야말로 참으로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음을 그들은 인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예언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어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성령에 의해서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에 이끌려 다녀 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는 것에 착념(着念)하라고 권고하였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경에 대한 찬사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l7)고 말하였다.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것이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광란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또한, 그들이 주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답변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이미 받은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앉혀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과 뜻을 같이할 때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야 한다(갈 1:6-9).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하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파멸에 이르는 이 가련한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 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된다는 말과도 같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성령은 노예 상태에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檢討)를 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립하고자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혹은 타락시키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294) 그러나 이 일 자체에서 그들은 성경을 무시한 데 대한 형벌을 치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후서3장 6절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들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효과적으로 새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295) 그것은 "영혼을 소생케 하고 우둔한 자도 지혜롭게 하는"(시 19: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8). 의심의 여지없이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296)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즉시 말씀을 폐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展示)를 위해 자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어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27,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思索)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하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의 빛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암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저 거만한 광신자들은297)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버리며, 또한 그 말씀에 결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몽상들을 아무 것이나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도 탁월한 조명이라고 생각한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와는 전혀 다른 절제(節制)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도구로 알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였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그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298) 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진실하신 하나님만을 정립하신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주의 구조299)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서 더욱 생생하고 더욱 상세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경 가운데서 보여 주신 것과 앞에서 본 대로 자기 사역에서 자신을 묘사하신 것이 동일한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만일 누가 이 문제를 보다 충분히 다루고자 한다면 일은 실로 방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목록(目錄) 정도를 마련해 주어 그것으로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되고, 또한 그들의 탐구가 확고한 목적을 향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신 그 특수한 언약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겠다(창 17: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수였던 자들을 자녀의 반열에 아무런 공로 없이 받아들이셨을 때 벌써 자신을 구속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주 창조에 관한 지식에 머물고 있을 뿐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에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신약성경으로부터 몇몇 구절들을 인용하여300)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최초의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그 섭리를 입증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되겠지만, 내가 지금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이 자기에게 부과된 한계를 뛰어 넘지 않고 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유의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으로서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로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자비하심과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그의 의지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반복적으로 칭송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분임을 보여 주는 실례들도 있다. 곧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 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장이심을 나타내시기도 하는 것이다.

2. 성경에 따른 하나님의 속성은 그의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실로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하나님의 특성을 더 명백하게 묘사하여 마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301) 모세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그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간결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오라 여호라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子輿孫)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여기서 우리는 두 번 반복된 그 위대하신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自存性)이302) 선언된 것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이 언급되었는데, 이들 완전성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우리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하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303)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산 경험으로 되는 것이지 헛되고 막연한 과장된 공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서 열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곧 그것은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그와 같은 명칭들을 사용하였다. 현재로서는 성경에서 여러 실례들을 찾지 않고도 시편 한 편만으로(시 145편) 충분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의 총체가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시 145:5). 더욱이 피조물에게서 볼 수 없는 것들은 여기에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이라고 하는 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셨는데, 비록 그 기록이 아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위와 동일한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 참조, 고전 1:31). 특히 이 세 가지는 꼭 알아야 할 것들이다. 첫째는 인애로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여기에만 달려 있다. 둘째는 공평 혹은 심판(Judgment)으로, 이것은 날마다 행악 자들에게 시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다 가혹하게 저들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셋째는 정직 혹은 의(義, Justice)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또한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충분히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권세, 거룩하심과 선하심, 어느 하나도 빠뜨려진 것이 없다. 사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에 관한 필수 불가결의 지식이 하나님의 확고 불변의 진리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공평과 정직으로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선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그의 인애가 도대체 어디서 오겠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하면(시 25:8-10) 여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무결한 생활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숭배자들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교리를 요약하고자 한다. 실로, 첫째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명백히 배척하며 거부하고 있음을 독자는 우선적으로 주의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일반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유일신 하나님의 존칭은 어디서나 알려졌으며 또한 존경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본래의 진정한 감정으로 말할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알아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왕국(God's Monarchy)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하나님의 유일성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304) 터툴리안(Tertullian) 또한 그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하였다.305)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의 허망한 생각에 의해 한결같이 거짓된 허구에 끌려들었거나 또는 빠져 들어감으로써 그 지각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지각하던 것은 다만 그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었다.306) 왜냐하면, 그들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까지도 어떤 종류의 신들이 그들 중에 임재하기를 열망하고 기도 시에 불확실한 신들에게 도움을 구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안정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특성을 상상함에 있어서 쥬피터(Jupiter), 머큐리(Mercury), 비너스(Venus), 미네르바(Minerva) 및 그 외의 여러 신들에 대한 상상은 비록 교양 없는 민중들의 그것처럼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들 역시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도피처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부패케 한 그 변절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307)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명하였다(합 2: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신자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신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308)

(예배에서의 형상(形象)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

1.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시적(可視的)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거칠고 우둔한 지성을 감안하여 보통 대중적인 방법으로 말하기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시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철학자들이 교묘하고 재치 있게 가르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자기 공론(空論)에만 집착하고 있는 한, 우매하게 된다는 것, 아니 발광하게 된다는 것을 보다 더 잘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보게 되는 그 독특한 정의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일체의 신성을 무(無)로 돌려 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하여 유일하며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309)

또 한편, 동시에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갈망하여 나무, 돌, 금, 은, 그밖에 생명이 없고 썩어질 물질로 신(神)들을 조형화(造形化)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야수적인 우매가 전 세계를 팽배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손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서에서,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고 요구한 후 자신이 어떤 예배를 받아들이고 어떤 예배를 거절하시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즉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4).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우리의 방자한 행동을 억제시키셨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키기 시작한 일체의 형태를 간단히 열거하셨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미련한 이방인들 역시 하늘의 별들을 보고서 그것들을 신들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동물이라고 하는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실로 희랍 사람들은 인간의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는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310)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들을 마치 하나는 종교, 하나는 나쁘거나 한 것처럼 서로 비교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미신 숭배자들이 하나님을 그들 가까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일체의 형상, 화상(畵像) 그리고 그 밖의 상징물들을 예외 없이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의 모든 형상적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지령에 더하신 이유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세의 책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만들까 하노라"(신 4:15-18). 이렇게,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형상을 적대시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는 이 문제를 가장 강조한 이사야 한 사람만을 예를 들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비물질적인 하나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무생물로, 무궁하신 하나님을 나무 조각이나 돌, 혹은 황금 조각과 같은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위엄은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허상(虛像)으로 더렵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사 40:18-20, 41:7, 29, 45:9, 46:5-7).

바울도 또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9). 이 말씀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이 세운 조상(彫像)과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그린 화상(畵像)은 모두가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만일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로부터 외치신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성령께서는 비참하고 맹목적인 눈먼 우상 숭배자에게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인용한 세네카의 불평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가장 천한 물질을 사용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신들에게 인간의 형태를, 어떤 이들은 야수의 형태를 입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남녀 혼성의 형태로, 어떤 이들은 몇 개의 다른 몸으로 형태를 입히고 그것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생기(生氣)라도 얻어서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괴물로 여겨질 것이다."311)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미신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상이 금지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우상 옹호자들의 변명은 한낱 천박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본질과 자연의 영속적인 질서에서 제시하신 것을 다만 한 국민에게만 국한시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제로 바울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그 오류를 반박할 때, 그는 유대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을 상대로 하여 말한 것이다.

3. 신적(神的) 존재로부터 직접적인 표징이라도 형상적 우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실로 하나님은 결정적 표적들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신적 위엄의 임재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대면하여 보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난날에 보이셨던 그 모든 표적들은 모두 다 인간의 교육을 위해서 적절히 고려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한 본질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이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11)은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세에게 더 친밀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출 33:1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못하고 단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고 하는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성령이 한번은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나셨다(마 3:16). 그러나 그 비둘기는 곧 다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순간적인 상징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성령을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그리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만족할 것이요 그에 대해서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모를 자가 누구이겠는가?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실 것에 대한 서곡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로 신격(神格)의 상징을 세우려고 하는 어떠한 구실도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 하에서 속죄소로부터 그 권능의 임재를 보여 주셨는데, 이 속죄소는 그 마음이 감격하여 자기를 초월하게 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응시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그룹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그 속죄소를 덮었다. 속죄소는 휘장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속죄소가 안치된 장소는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17-21). 여기서 완전히 명백해지는 것은, 이들 그룹을 본보기로 해서 하나님과 성자(聖者)들의 형상들을 수호하려는 자들이야말로 광란의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나는 도대체 그 하찮은 작은 형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는 데 그것들은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로 속죄소를 가림으로써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사람의 눈과 일체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인간의 만용(蠻勇)을 시정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선지자들은 환상에서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스랍들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사 6:2).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찬란하여 천사들도 그것을 똑 바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천사들에게서 비치는 그 희미한 섬광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룹이 율법의 옛 후견기간(後見期間)에312) 속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룹을 우리 시대를 위한 실례로 끄집어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유치한 시대, 말하자면 그러한 종류의 초보를 배우도록 의도된 시대는(갈 4:3)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교의 저술가들이 교황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유베나리스(Juvenalis)는 유대인들이 흰 구름과 하늘의 신격을 예배한다고 비난하였다.313) 그가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존재를 부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요 경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가시적인 형상이 있었다고 부질없이 꾸며대는 교황주의자들 보다는 더 진실하게 말하였다.314) 그러나 이 국민은 마치 물이 큰 샘에서 맹렬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또는 재빠르게 계속 우상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강렬하게 우상 숭배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알도록 하자.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공통적인 실패의 죄를 유대인들에게만 전가시키고, 죄에 대한 허망한 유혹에 빠져죽음의 잠을 자고 있다.

4. 우상과 화상(畵像)은 성경과 반대된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쓰인 말씀이 있다. 즉,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 135:15 참조, 115:4)고 하는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요 신이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서 생각해 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가 흙이나 돌보다도 금과 은을 들어 말한 것은, 그 물질의 광채와 가치가 우상에 대한 존엄을 더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는 일반적으로 생명이 없는 물질로 신들을 만드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지 못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동시에 그는 이에 못지않게 다른 문제 하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순간순간 덧없이 호흡을 하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너무도 우매하고 무분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영을 우상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일시적인 존재임을 고백하지315)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속(金屬)이 하나님으로 간주되어 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신격의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상의 기원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대체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저 이교 시인의 다음과 같은 조소는 가장 정당하다고 하겠다.

한때 나는

하나의 무화과나무의 줄기, 쓸모없는 나무토막이었네.

일꾼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316)

이와 같이 순간마다 생명이 꺼져 가고 있는 이 지상의 인간이 자기의 재주로 하나님의 존영과 그 이름을 죽은 나무줄기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저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인은 재담을 늘어놓기는 하나 종교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에 그와 그 동류의 풍자를 묵살하기로 하자. 오히려 극도로 어리석은 자들을 견책한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자극을 받으며 각성하도록 하자. 즉, 저 어리석은 자들은 동일한 나무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고기를 굽거나 삶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 자들이라고 그는 책망하였던 것이다(사 44:12-17).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그들을 율법을 범한 자라고 규정지을 뿐만 아니라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깨닫지 못한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사 40:21). 왜냐하면 무한하시면 불가해하신 하나님을 5척의 키로 축소시키려는 것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은, 이 가공할 일이 비록 자연의 질서에는 거스리는 것이나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언어로 미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상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사 2:8, 31:7, 37:19, 호 14:3, 미 5:13). 이 말씀으로 보아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형태는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확립된다. 선지자는 시편에서 이와 같은 비난을 한층 더 맹렬히 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사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명이 없고 무감각한 물질에게서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의 부패가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특수하게는 각 개인을 그와 같은 광란에까지 몰고 가기 때문에, 마침내 성령께서는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8)라고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화상도 조상(彫像) 못지않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희랍인들의 그 어리석은 궤변을 반박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훌륭하게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국민들보다 더 방종하게 화상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31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조각가가 그를 위하여 어떤 조상을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예술가가 어떠한 것도 조형(造型)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요,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함. 5-7)

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는 옛 속담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말이었다.318)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성령의 학교에서 이에 대하여 배웠더라면, 결코 그러한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8)고 하였으며,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 2: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다 같이 무익하고 거짓되었다고 하는 일반적인 교리를 결론지을 수 있다.

불경한 미신을 위해 형상을 남용한 자들이 선지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만일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확실한 원리로 결정한 것, 곧 우상은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주장을 예언자들이 전적으로 정죄한 것은, 모든 사람이 명백하게 아는 것이라고 나는 첨부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위에서 인용한 몇 구절에서 이와 같은 비교가 제시되었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분은 오직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구하는 것이 거짓이요 허망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되었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우리는 단지 예언자들이 가르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 교회의 교리도 역시 부분적으로 달리 판단한다

이 외에도 라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이 문제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 보라.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주장하였다.319) 어거스틴(Augustine)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형상을 신으로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다.320) 그러나 그의 말은 오래 전에 엘비타 교회 회의(The Council of Elvira)에서 제정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중 제36장에는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이 있어서는 안 되며, 예배를 받든가 찬양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 된다"321)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이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Varro)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 하였다는 사실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하였다"322)라는 말이다. 만일 바르로만이 이 말을 하였다면, 아마 그 말은 거의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더듬어 이와 같은 광명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히려 오류를 더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그것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된 것이 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둘째로, 형상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 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 이외의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形象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더 이상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게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하여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 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와 화상, 혹은 조상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體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는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우상은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그 거짓된 주장을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우상을 적당하게 장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의무를 다했더라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거룩한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방법이 아니라고 우리는 또한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쓰레기 같은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거기서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시선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마음의 주의를 성실하게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하여 다만 우상 이외에서는 배울 수 없다고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무식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 제자로 인정하신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도(道)의 계시로 영광의 옷을 입힌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했던 그 교리를 탈취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실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며(계 1:5), 요컨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을(롬 5:10) 충분히 또는 진실하게 배웠다고 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다 세웠겠는가?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 개의 십자가상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그들의 마음과 눈을 더 집착하게 될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은 예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

8. 우상의 기원 : 유형적인 신성(神聖)에 대한 인간의 욕구

다음으로 우상의 기원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創始)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323) 나는 이 왜곡된 습관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더욱 부채질한 도화선이라는 것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의 최초의 원인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죽은 자들의 형상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버지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으로 기록하였다(창 31:19).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말하자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홍수 후에는 세계는 새롭게 갱신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들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족장이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그 자손들이 우상 숭배에 바쳤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가장 무서운 심판으로 그 타락을 정화시킨 땅이 다시 우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노아는 쓰라린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수 24:2). 만일 셈의 자손이 매우 빨리 타락하였다면, 이미 조상 안에서 저주받은 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되겠는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한 것으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에 완전히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악에는 다시 새로운 악이 함께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수공(手工)으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의 기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례가 입증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1)고 하였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국행진(故國行進)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하였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항상 자기와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무분별하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像)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그것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어 왔다.

9. 형상을 이용하고자 하면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공상에는 즉시 숭배가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숭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 마치 거기에 신적(神的)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완전히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에 물들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그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像)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로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출 20:25).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제 2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324)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우상만을 예배하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든지, 거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 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던 그 저주받을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레 26:13).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을 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뻔뻔스럽게 동의하여(출 32: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밖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우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우상을 바꾸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동일한 신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많은 형상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많은 형상의 수만큼 많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형상에게 봉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신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우상 숭배자들이 구실로 삼았다고 어거스틴이 말한 그 변해서(辯解書)를 읽어 보라. 즉, 민중들이 우상 숭배의 비난을 받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한 것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형상물속에 보이지 않게 내주하는 한 실재라고 답변하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소위 "순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우상이나 그 우상에 의해서 표현된 영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하여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의 한 기호를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325) 그러면 어떻다는 말인가?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우상 숭배자는 누구든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형상물을 통하여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일단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즐겨 만들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새로운 계교에 미혹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이 우상을 통하여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재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와 같은 형상으로 예배한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 하였다.

10. 교회에서의 우상 숭배

이러한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찌하여 우상 앞에 엎드려 부복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기도하려 할 때, 하나님의 귀로 향하는 것처럼 우상에게 향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이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326)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서 어떤 것은 무시당하고 혹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존영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을 모방해서 만들 상(像)들에게 이렇게 심한 차별을 둘 수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들을 보기 위해 서원의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오늘날 마치 제단과 화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릅쓰면서까지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쉽게 떠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의 무한하고 또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사로잡고 있는 일반 대중의 우둔한 오류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에 대해 특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할 때 고백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옛날에는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27, 겔 6:4이하, 사 40:19-20, 합 2:18-19, 신 32:37).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감추어서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좀더 충분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327) 그들은 형상물에게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328)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dulia) 곧 영광이라는 것이 조상이나 화상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는 "예배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둠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 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해서 다른 별명(別名)을 붙인다 하더라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이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기지(機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들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들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그러나 나는 절대로 어떠한 상(像)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까닭에, 이 양자를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나는 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 이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거나 우리를 파멸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 20: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만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처술가들은 누구나 다 우상 숭배 행위를 한결같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즉, 인간의 시야에서 멀리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보기에도 흉한 형상물로 말미암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표현 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사건들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형상 또는 형태이다.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 데 다소 유익을 주나, 후자는 내가 보는 바로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교회내에 장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형상물은 후자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그들의 이와 같은 형상물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상물의 대부분이 얼마나 사악하게 또는 꼴사납게 조형되었는지, 또한 조금 앞에서 말한 문제로329)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 작업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탕녀의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비록 형상물의 사용이 어떠한 악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13. 교리가 순수하고 견고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별은 제쳐 두고라도 과거사의 표현이든 인간의 신체를 표현해 놓은 것이든, 어떠한 형상을 교회당 안에 두는 것이 과연 마땅한지에 대해 검토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만일 초대 교회의 권위에 감동을 받고 있다면 종교가 아주 번창하고, 순수한 교리가 우세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형상물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330) 그러나 성직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형상의 최초의 창시자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전시대(前時代)와 후시대(後時代)를 비교해 보면, 독자는 형상이 없었던 전시대의 고결성에 비해 후시대가 심히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이들 성스러운 교부들이 유용하고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을 교회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없이 지내도록 그들이 허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교부들은 형상물이 전적으로 무익하거나 혹은 거의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위험성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심사숙고한 끝에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들을 거절하였던 것이요, 그것들에 대한 무지와 나태 때문에 그대로 지나쳐 버린 것이 아니었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사실을 명백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 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331) 그는 다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우상이 수족(手足)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나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조금 지나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상은 입과 눈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데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걷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332)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상 예배뿐만 아니라, 우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경고한 이유인 것 같다(요일 5:21 참조). 그리고 경건을 거의 전부 파멸시킬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를 점령하였던 그 무서운 광란으로 말미암아 교회당 안에 형상물들이 세워지자마자, 소위 우상 예배의 표준이라는 것이 세워진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하여 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매하여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고 오히려 즉시 미신적인 예배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 위험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고의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그 말씀으로 성별(聖別)하신 바 살아 있는 상징 이외의 어떤 형상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의 신성에는 전적으로 부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와 성찬과 다른 의식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능으로 날조된 어떤 형상물 이상으로 우리의 눈을 강력하게 붙잡으며 생생하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보라! 교황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게 되면, 어떤 것을 가지고도 대신할 수 없는, 곧 비교할 수 없는 소위 형상물들의 혜택을 찾게 될 것이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니케아 회의(Nicene Council)가 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라도 이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의333) 명령과 그 후원 하에 800년 전에 개최 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334) 내가 무엇을 말하건 이 회의의 권위는 반대편에 유리한 편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심을 가진 자들의 그 발광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만큼 나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하자. 오늘날 형상물의 사용을 옹호하는 자들은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Carolus Magnus)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반박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335)

여기에 당시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John)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라고 말하고(창 1: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마땅히 형상물을 제단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마 5:15)라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더욱이 어떤 이들은 형상들을 우러러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6)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증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하였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8)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정관(靜觀)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데오도투스(Theodorus)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어리석음이야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된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誤用)

그들은 예배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반드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한 것(창 47: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 47:31, 히 11:21)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 부은 것 등을 들추어낸다(창 28:18). 그러나 이들 중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5),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9),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12). 이 여러 구절들은 그들에게는 가장 적절하며 결정적인 구절들로 생각되었다. 만일 누가 형상의 옹호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려고 한다 해도 아마 이 이상 더 그 어리석음을 들 수 있었을까? 미라(Mira)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제거하기 위해 그의 부감독의 꿈에 의해 형상물 숭배의 타당성을 확신하였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직접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나 되는 것처럼 신중히 다루었다. 이제 형상물의 조장자(助長者)들은 우리에게 그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역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존경할 만한 교부들이 성경을 그렇게 유치하게 다루고 불경건하고 악랄하게 찢어 놓고도 자신의 신용을 전적으로 상실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충격적인 주장

나는 이제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을 감히 입 밖에 토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혐오를 가지고 그들에게 대항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광태가 공적으로 폭로되고, 교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고대의 주장들이 적어도 형상 예배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Bishop of Amoriurm)는 형상 예배를 싫어한 사람들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어떤 이들은 희랍과 동방 나라가 당한 일체의 재난은 형상 예배를 하지 않은 죄 탓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시대에는 형상이 일체 없었는데 이들은 대체 무슨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만일 사람들이 황제의 상(像) 앞에 분향을 한다고 하면 성자들의 상에는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부언하였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도나 마르키온과 동류로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실로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 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자들이336)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 소극(笑劇)이 박수갈채 없이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337) 다음과 같은 한 문구를 첨가하였다. 곧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는 구절이었다.338)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속이려고 사용한 라트리아(la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이 회의는 예외 없이 형상물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된 종교는 우리를 유일신이신 하나님께 결속시킨다

더욱이 우리는 이 책 첫머리에서339)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냉랭한 공론(空論)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드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취급하였는데, 이것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 더욱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340) 현재로서는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단히 반복하고자 할 뿐이다. 즉, 성경이 유일신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 이름만 가지고 논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른 것에 귀속 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것으로 순수한 종교와 미신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것이 명백해진다. 의심할 여지없이 "종교"를 의미하는 헬라어 유세베이아 역시 정당한 예배를 뜻한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맹인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법칙을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는 "종교"(religion)라는 말을 아주 유식하게 렐레게레(relegere)라는 라틴어에서 끌어냈지만,341)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부자연스럽고 당치 않은 것이다. 그는 선량한 예배자는 자주 읽고 또 읽어서 참된 것을 성실하게 숙고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오히려 방종과 대치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다 생각 없이 그대로 붙잡고, 여기 저기 배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이란 것은 확고한 기반위에 서기 위해서 적당한 한계 내에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신이라는 말도 역시 규정된 방법과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쓸데없는 수많은 공허한 것들을 모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더 이상 어의(語義)를 생각하는 일을 그만 두더라도, 모든 시대에서 종교가 언제나 허위와 오류로 말미암아 타락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각없는 열심에서 나온 어떤 것을 허용한다고 해도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대는 핑계는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비록 이러한 고백이 모든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러운 무지를 나타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명시한 대로342)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존하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기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만일 인간이 자기를 가공적인 신과 혼동한다면 가혹하게 복수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하였다(출 20:5).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에 다음 두 가지를 포함시키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그들의 유일한 율법 수여자가 되게 하신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당연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예배하는 규범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그 용도와 목적이 다양하기 때문에, 앞으로 적절한 곳에서 이를 논하려고 한다.343) 현재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한 굴레가 인간에게 씌어져 저들로 하여금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하나님의 신성의 고유한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께 귀속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박탈당하고 그에 대한 경의는 더렵혀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미신이 농간을 부리는 그 교활함에 대해 더욱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외관상으로 미신은 지고하신 하나님을 버릴 만큼 다른 신들에게 기울어지거나 또는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미신은 하나님에게 최고의 지위를 허용하면서도, 수많은 저급 신들로 둘러싸고는 이 저급신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능을 행사하게 한다. 이렇게 은밀하게 또는 교활한 방법으로 해서 전적으로 한 분에게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여럿으로 조각이 나버리게 되었다.344) 이와 같이 옛날에는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무수한 신들을 신들의 아버지와 지배자 밑에 두었다. 그리고 이 신들 각자는 그 서열에 따라 최고신과 함께 천지를 통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세기 전부터 이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높여져서, 하나님 대신에 영광과 기도와 찬양을 받게 되었다. 실로 우리는 이러한 혐오스런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엄이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엄이 대부분 짓밟히고 소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최고의 권능에 대해서는 빈약한 의견을 다소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한편 우리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 여러 신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다.

2. 차이점이 없는 구별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소위 라트리아(ls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천사와 죽은 사람들에게 드려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된 것이다.345) 왜냐하면 교황주의자들이 성자(聖者)에게 돌리는 영광은 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전혀 차별 없이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난받을 때에는 예배(latria)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 하나 상처를 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우물쭈물 변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말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예배라는 사건 그 자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무시하는 자들을 누가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그들의 구별은 마침내 하나님께만 "예배"(cultus)드리고, 다른 것에는 "봉사"(servitium)한다는 것으로 요약이 된다. 헬라어의 "라트레이아"(latreiva)는 라틴어의 "쿨투스"(cultus)와 같은 것을 뜻하고, "두레이아"(douleiva)는 "세르비투스"(servitus)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자주 등한시되었다. 설사 이 구별이 변치 않는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이 두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곧 두레이아(douleiva)는 봉사를 의미하고, 라트레이아(latreiva)는 예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봉사가 예배보다 더 범위가 크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경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를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려울 때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는 보다 큰 것을, 하나님께는 보다 적은 것을 돌린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많은 저술가들은 그러한 구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이 적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3. 형상 숭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세밀한 구별은 그만두고 문제 자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 전까지는 어떠한 처지에 있었던가 함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dulia)하였더니"(갈 4:8)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라트리아"(latria)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미신이 변명될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는 사악한 미신에 "둘리아"(dulia)란 명칭을 붙임으로써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둘리아"(dulia)를 정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고 하는 이 말씀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셨을 때에도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346) 왜냐하면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요구한 것은 다만 엎드려 경배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347)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천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계 19:10, 22:8-9),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천사에게 드리고자 하였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종교와 결합된 경건한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신적인 경향을 띠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 천사에게 무릎 꿇어 "절(knelt)"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로 우리는 자주 인간이 예배를 받는 일에 대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말하자면 세속적인 경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이와는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다. 종교가 일단 예배 행위와 결합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행 10:25). 그의 경건은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최상의 경배를 드릴만큼 그렇게 불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베드로 앞에 "엎드리어 절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 대신에 그를 예배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의 그러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금하였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인간에 대한 예배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을 무차별하게 피조물에게 옮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기를 원한다면, 그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에게 속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관해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홀로 하나"라는 것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슥 14:9). 이 말이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예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후에 적절한 곳에서 거론하게 될 것이다.348) 왜냐하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선과 의를 규정하고, 따라서 인간이 제멋대로 예배를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일정한 규범에 그들을 붙들어 두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문제를 뒤섞어 독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올바른 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겠다. 다만 어떠한 경건의 의식이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 드려지게 될 때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신성모독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미신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태양과 별들, 그리고 우상을 위해 생각해 냈다. 다음에는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썩어 없어질 인간을 장식하고 신성한 것은 모두 더럽히고 말았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를 예배하는 원리가 비록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호신들, 저급신들, 또는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제물을 바치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큰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하나님만이 독점하고 있는 것을 수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349)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 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350)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神性)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을 신중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나타내지는 아니하셨을지라도 내가 이미 말한바 있는 두 특성을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제거하시며 인간 마음의 교만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하는 곳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불가해하신 분이시면서 또한 땅 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 완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니교도들의 오류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351) 이러한 오류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며 그의 무한성을 제한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저들이 감히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남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는 오류 그 자체가 저주받을 광란에서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발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352)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자라도,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 못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약한 수용 능력에 알맞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맴돌 뿐 결국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아무도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는 공상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353)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오류에서 막아 줄 간명하고도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354)라는 말이 인간의 고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와 같은 비난이 참으로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고 하였는데, 그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로355) 보았다. 왜냐하면, 본체(hypostasis)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어떤 이들이 해석한 대로, 마치 밀초 위에 찍은 도장과 같이 그리스도라 자기 안에서 성부의 본체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 하시되 부분적으로나 파생적으로가 아니고 아주 완전하게 포함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성부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3)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사도의 이 같은 말을 통하여,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곧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질을 다양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와 같은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처사요 심지어는 완고한 일로 생각된다. 구태여 이 말을 직역하기 원한다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위"(位)라는 말은 라틴 교부들만이 아니라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하였는데, 아마 이 교리에 동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prosopa, 얼굴)7a)356)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같은 표현은 성경 해석에 용이하게 하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단자들은357) "위"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358)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계몽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르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만일 이와 같이 불려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져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그릇된 교리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황설을 늘어놓는 불경한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쉬지 않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인간들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359)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 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360)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또한 하나님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우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근거 없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배척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매장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에 집착하여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취급한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힐라리(Hilary)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조문(條文)들을 무어라고 변명했던가?361)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었던가?362)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 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제롬(Jerome) 역시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363) 그러나 제롬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독(毒)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성실하게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는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는데364)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히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365)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Tripartite History) 제6권에서 "히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이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 적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366)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공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 용어를 제시한 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367)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떠한 신앙고백도 만들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68)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369)

그리고 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해서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毒筆)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게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370)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으며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비록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곧 세 신(神)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辯)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뜻

그러나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다.371)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372) 올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

7. 말씀의 신격

그러나 말을 더 발전시켜 나가기 전에, 나는 여기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해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의 차이점을 살피고자 한다.

확실히,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에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 편에서부터 나온 단지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어리석은 일이다.373) 오히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증거한 대로, 사도들(벧전 1:10-11)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위해 일한 후대의 모든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예언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靈)이 말씀의 영이었다고 하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중재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창조 사역에서 이것이 있으라, 저 것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모세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이 사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남의 허물 찾기를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은 명령이나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쉽게 피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해석가들인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2-3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은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조금도 모호한 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솔로몬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統轄)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22).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의지의 일시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분별없는 천박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자신의 계획과 심지어는 한층 더 은밀한 것까지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더불어 계속 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략히 언급한 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양자의 공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말하였는데 곧 "말씀"을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시며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요 1:1-3).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특수한 것을 귀속시켰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우주의 창조주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말씀은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고 동일하시고 또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8. 말씀의 영구성

여기 몇몇 개들이 짖고 있는데, 그들은 말씀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감히 부인하지 않지만 은밀히 그의 영원성을 훔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셨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74)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경솔하게 하나님의 본체 안에 일종의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인 사역과 관계되는 여러 명칭들은 창조 사역이 있은 후에 그에게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 불린 것). 그러나 하나님에게 새로운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말하는 그런 명칭은, 경건한 마음은 인정도 용납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무슨 우발적인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주장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이시요 후에는 만유의 창조주가 되신 바로 그 말씀이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납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고 모세가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어떠한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은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결론을 지으려 한다. 즉,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3)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벌써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시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벌써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토록 그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의 영원성과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은 입증이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더 나아가 나는 여기서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는 구속의 문제를 다룰 때까지 미루어 두고자 한다.37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시편 45편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6)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376) 이를 왜곡한 채 "엘로힘"(Elohim)이라는 명칭을 천사들과 최고의 권력자에게도 적용시켰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해 영원한 보좌가 세워진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지배자로도 불리는 분에게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명칭은 어떤 부가어(附加語)가 없이는 결코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출 7:1)이라고 하신 경우이다. 어떤 이들은 "바로에게"를 소유격 "바로의"라고 읽는데, 그것이야말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비범한 탁월성 때문에 뛰어난 것이 자주 "신적"인 것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그러한 해석은 곤란하고 무리한 해석이며, 더욱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 대권을 가진 분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 9:6).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그를 부르시는 이름이라"고 고쳐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성자를 다만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시키기 위해 명백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는 것이 이 선지자의 의도일 뿐인데 이 구절에서 그렇게 많은 칭호들을 성부이신 하나님께 쌓아 올린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전에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것과 같이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 23:5-6, 33:15 -16)고 한 예레미야서의 이 한 구절보다 더 명백한 말씀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른 명칭들은 다만 칭호에 지나지 않으며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그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 실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하신 성자만이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사 42:8)고 선언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신이 세운 제단에 이 명칭을 붙였고 에스겔도 새 예루살렘 성에 이것을 붙였다고 지적함으로써, 여기서도 애써 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단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붙여진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겔 48:35).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출 17:15)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다른 구절에 대하여는 더 큰 논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16)고 하는 구절에서, 위와 똑같은 이름을 예루살렘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는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지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오,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구절에서는 의의 근원과 원천이 설명되었고, 나중 구절에서는 의의 결과가 덧붙여 설명된 것이다.

10. 영원한 하나님의 천사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증거로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떤 교묘한 이론을 내세워 피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 6:11, 12, 20, 21, 22, 7:5, 9). 만일 이것이 천사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난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종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천사는 식물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 13:16). 실로 이 사실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 13: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표적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고 외쳤다. 이에 대하여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23)라고 답변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들이 조금 전에 천사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은 것은 천사였다고 주장한 세르베투스(Servetus)의377) 불신앙은 더욱더 가증하다 하겠다. 그러나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378)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중보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즉, 그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고 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을 취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마치 이 예언자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29)라고 한 모세의 말을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 32:30)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바울 역시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4).379) 왜냐하면, 그의 낮춤의 때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벌써 그 영원하신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가랴 2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른 천사를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권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슥 2:3,9). 나는 우리의 신앙이 안전하게 채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더 이상 열거하지 않겠다. 물론 이 증거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거의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은,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말 3:1)라고 예언된 말라기서의 구절이다. 확실히 성전은 유일하시며 지고하신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더욱이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증거들을 전부 다 수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개의 증거를 간단하게 선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미 육신을 입으시고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증명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적절한 증거가 될 것이다.

첫째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가, 혹은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사도의 교훈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사 8:14)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롬 9:32-33).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라고 선언한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10-11, 사 45:23)고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여기에서 그가 바로 그 영광이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편의 말씀 또한 분명히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8, 시 68:18).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나타내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방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게 하셨을 때, 그 위로 올라가심이 벌써 예표 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요 12:41, 사 6:1). 물론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성자에게 드린 하나님의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시 101:26). 또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시 96:7)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이러한 명칭들을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결코 남용이 아니다. 실로 시편에서 찬양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취하신 것들이다. 일어나서 시온에 긍휼을 베푸신 분이 그 분이시며(시 102:13), 모든 나라와 모든 섬들의 지배권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시 97:1). 요한은 말씀이 항상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1:1, 14), 어찌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그리스도께 돌리기를 주저하였겠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 :5)이라고 불러 공개적으로 그의 신성을 주장하였는데, 어찌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히기를 두려워하겠는가?(고후 5:10)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모순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딤전 1:17).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6-7).

그리고 요한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방 신이라고 트집 잡을까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고 말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한 한 증인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하나님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신 6:4). 더욱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5-6).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바울이 전혀 인정하지 않은 제2의 신을 상상하겠는가?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모두가 이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마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 분이 바로 자기가 항상 예배드리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하심 가운데 입증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신성(神性)을 판단한다면, 한층 더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태초로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자(요 5:17), 주님의 다른 말씀에 대하여는 극도로 둔감했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신다고 느꼈다. 그 결과 요한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18).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는데도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리고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 것들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만 속하는 일들이다(히 1:3). 그리고 그는 성부와 함께 세계 통치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다른 개개의 직무도 수행하셨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25)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이 말씀에 따라 이 권세는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주장하셨으며, 이적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하셨다(마 9: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하시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죄권을 소유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능은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결코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살피시고 꿰뚫어 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이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다(마 9:4, 요 2:25).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론짓게 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이적에서 얼마나 명백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입증되어지고 있는가! 선지자나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이적과 똑같거나 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끔 기도를 하셨다(요 11:4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님 자신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다른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것을 위탁하신 분이 어떻게 이적의 참된 창시자가 되지 못하겠는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고치며 귀신을 내어 쫓을 권능을 주셨다(마 10:8, 막 3:15, 6:7). 더욱이 그들은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할 때에, 그 권능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기 위해 이 사역을 수행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하였다. 혹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5:36, 10:37, 14:11).

더욱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반대하여,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주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380)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원 받은 분이 아니라 바로 구원 자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면(마 19:17),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의의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라, 창조의 시초부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 1:4)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신뢰하여, 감히 우리의 신앙과 소망은 그에게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누구든지 피조물을 신뢰한다고 하면 이는 신을 모독하는 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로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해석하였다. 곧 그 한 구절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11, 사 28:16)는 말씀이요, 다른 한 구절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12, 사 11:10)는 말씀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데도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성경의 증거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는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다. 어떤 무엇이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기도야 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 요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다른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그러한 호소의 한 실례를 보게 되는데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도행전에서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 9:13- 14)라고 증거한 것처럼, 이와 같은 실례는 그 후 모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신다는 말씀(골 2:9)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교리도 고린도인에게 소개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2).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고 명하셨는데(렘 9:24), 성자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의 근거라면, 누가 감히 그분을 가리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외에도 바울의 여러 서신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을 보면, 성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를 통하여 온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세우게 된다. 이 실제적인 지식이 아무런 쓸모없는 어떤 사변(思辨)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견실한 지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381) 실로 경건한 마음은 자신이 생명의 깨우침을 받았으며 조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성화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원한 신성. 14-15)

14. 성령의 신성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증거도 이와 같은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고 한 모세의 증거는 실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단장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16)고 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교묘하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 일에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382) 여기서 성령의 신적 위엄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리를 위한 최상의 확증은 익숙한 경험에서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께 돌리는 것과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가 배우는 것들은 모두가 피조물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 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또한 성령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분명히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만일 썩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현재의 성장하는 어떤 생명보다도 더 우수하고 탁월하다고 하면, 중생케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신 성령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은 빌려 온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 피조물 중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되지 못하지만(롬 11:34)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성령께서는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신다(고전 12: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은 자신의 역사에 의해서만 된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4:11).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므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성령의 사역이다. 능력, 성화(참조, 고전 6: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2: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라는 바울의 말은 특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곧 이어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11). 만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면, 선택을 하고 또 의지(意志)한다는 것은 결코 그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신적 권능을 성령에게 돌리고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으로 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5.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라고 칭호를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전 3:6-17, 6:19, 고후 6:16). 우리는 이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전으로 택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약속 하셨지만 이 약속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나무와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령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383) 그리고 사도는 가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3: 16-17, 고후 6:16)이라 불렀고 또 어떤 때는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전"(고전 6:19)이라고 불렀다. 성령을 속였다고 하여 아나니아를 책망하면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를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 구절 중에서 바울은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9, 행 28:25-26). 실로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이 만군의 주의 말씀이라고 변함없이 말하였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를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다(참조, 벧후 1:21). 그러므로 탁월한 의미에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이야말로 참되신 여호와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사야는,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10)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32, 막 3:29, 눅 12:10)면, 이 말씀은 분명히 성령의 신적 위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그 위엄을 범하고 훼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옛날 교부들이 사용한 많은 증거를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저들은 우주의 창조가 성자의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라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사야서에서는 "입술의 기운"(사 11:4)이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거가 빈약하다. 그리하여 나는 경건한 영혼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들만 진술하기로 하였다.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 하나님의 동일성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384)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 한다는 사실이다.

실로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385)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참조, 사 11:2) 그리고 은사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성령도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 12:11)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17. 삼위성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유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386)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슥 13:7)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32, 8: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 1:3, 히 11: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387)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 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 17: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26, 참조, 14: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18.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점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388)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389)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390)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9절)으로,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거하였으며(벧후 1:21, 참조, 벧전 1: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욱이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요 14:10)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391)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진술한 그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392) 즉,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393)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kuvrio", 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욜 2: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반(反)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

더욱이 사단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으로부터 뒤집어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위(位)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하여 왔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은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그 왜곡된 헛소리들을 반박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나의 특별한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었지, 강퍅하며 논쟁적인 사람들과 맞부딪쳐 싸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지금까지 평화스럽게 해석되어 온 진리를 사악한 사람들의 모든 비방에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끝까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진실로 성경의 감추인 신비에 대하여 논할 경우가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마땅히 냉정하고 아주 신중하게 사색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적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394)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395)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아노모에오스파(Anomoeans)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아직 다섯 편이나 현존하고 있다.396) 그러나 이 설교들은 그 건방진 궤변론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 보다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불행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들의 이해력에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397)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말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한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거추장스럽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헛된 일 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수와 같이 헛소리하는 너무나 많은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전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식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혼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로 이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즉시 많은 분파가 생겨났으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위의 구별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를 주장한 자들에 대하여도 문은 굳게 닫혀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르베투스나 그의 부류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저들의 오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삼위일체론자를 가리켜 보통 무신론자라고 불렀다.398) 나는 여기서 그가 삼위일체론자들을 공박하기 위해 생각해 낸 몰상식한 말들을 생략하려고 한다. 그 일로 이것은 그의 생각의 전체였다. 즉,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組)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위(位)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동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오심에 따라 그로부터 다시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 비유로 착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 안에와 심지어는 나무나 돌 속에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증보자의 위에 대하여 그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실로 "위(位)"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구에 대하여 구태여 장황하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399)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여 놓았기 때문이다(요 1: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셨다고 하면(요 17: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광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재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천지 창조 역사 이외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기서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소개되었다. 모세는 혼돈한 덩어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1:2).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이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셔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지의 혼돈한 물질들을 유지하시며 또한 여기에 미와 질서를 가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확실히, 세르베투스가 꿈꾼 것과 같은 하나님의 한 모양이나 표현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불경건한 사상을 더 공공연하게 드러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을 위해 눈에 보이는 아들을 작정하심으로,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세르베투스는 실재(實在)를 환상물로 바꾸어 이를 변형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새로운 우연적인 특성들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거짓되게 첨가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아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보통 피조물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는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동질적이며 영원히 하나님과 공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까지도 실질적인 신격을 부여하였다.

23. 성자는 성부로서의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늪400)에서 또 다른 비슷한 괴물이 나왔다. 어떤 악한들은 세르베투스의 불경건이 저지른 그 오명과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로 또한 당연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셨다고 해석하였다. 실로 저들은 이 가공스런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의 수여자"401)이시며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그 가식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해서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다 우월하므로402)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를 한 위격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답변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7),(아직은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명확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격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성부 이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하거나 하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1),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요 12: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거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었다(롬 9:33).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사 45:23)라고 말씀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하였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시 102: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시 97: 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므로(히 1: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께 옮겨진다고 하는 궤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예레미야의 말 또한 주의할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때부터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 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케 하신 창조주가 어떻게 자존하지 않으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부터 빌어 올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성부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런데 만일 전체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든가 아니면 성자에게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든가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까닭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 되든가 또는 전체에서 끌어 낸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 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롬 8:9)고 한 바울의 증거에 의하여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체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은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성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하면 성부가 이 본질을 성자와 공유하였는가 공유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반만 신이라고 날조하는 것은 가증스런 죄악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곤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 같이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공통된다는 사실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하면, 본질에 관한 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들이 해석한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여러 구절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함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한 마디 말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논할 것이다.403)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성자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人性)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이냐 선하지 않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들의 불경건은 그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것을 시인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신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주장을 한층 더 확증시켜 준다. 확실히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나는 또한, 바울은 하나님만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17), 지혜로우시며(롬 16:27), 참되시다고(롬 3: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에까지 끌어내리는 가고 묻고 싶다. 태초로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우신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으시다는 말인가? 더욱이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당연한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마땅히 자기에게 꿇기를 정당하게 요구하셨다고 하면(빌 2: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금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3). 만일 그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고 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써 그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다는 점에 있었다고 교묘하게 구별짓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 또는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증보자의 전(全)인격에 까지 미친다 하더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에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하게 마무리지어 놓았다(빌 2:6-7). 실로 그가 여호와로 불리시고, 그룹들을 타시며(참조, 시 18:10, 80:1, 99: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아무리 넋두리를 한다 하더라도, 이사야가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수는 없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내실뿐만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까지 회복시키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본질이 다양하게 되든가 아니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만 이름만의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지만 성부 다음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하나님 안에 위가 여럿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모세의 이 언급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독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되게 속한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자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 반론을 즉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는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란 명칭이 성부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하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은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나는 결론짓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23).404)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25. 신성한 본질은 삼위에게 모두 공통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405)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에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位)라는 점에서는 발생된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사위일체(四位一體)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면 아마 그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제신(諸神)의 삼위일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 라고 묻는 그들의 그 무가치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406)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成員)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우리는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본질을 이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불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 성령의 본질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동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면, 성부는 이때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반증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격의 근원이신 성부에게 한정된다고 대답했었다.407) 물론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위격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위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웠다고는 하지만(빌 2:7),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춰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였다고 하였으나(히 2: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 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 참조, 16:7, 20: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빛나는 광채의 그 완전함이, 육신을 입으신 자신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해 휠씬 뛰어나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4,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셨으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서는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1, 요일 5: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제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이들 새로운 신(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그를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마치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참되신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는 이입(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Irenaeus)에게서408) 많은 구절을 수집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자들을 다루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현재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해야 할 경우,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누가 그는 사실상 성부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은 종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3권 제6장을 읽으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2권 제46장에서 밝혀진 대로,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외에도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자와 성부를 다 같이 하나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제3권 제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하나님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제3권 제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세의 손을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분이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합 3: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3권 제18장, 제23장). 제4권 제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읽게 된다. 그리고 같은 책 제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409)

28. 터툴리안을 인용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들이 터툴리안(Tertullian)을 그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모호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애매하게 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삼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다만 위를 구별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가 말씀인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位)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그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성부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位)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Praxeas)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은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위격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그는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410)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교회의 모두 정평있는 교부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였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를 지지한다.411) 저스틴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 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다. 힐라리(Hilary)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더 예리하게 역설하였다.412)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 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연결이 안 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413) 그러므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그들의 파렴치함에는 더욱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게 된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희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와 이전 학자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 않았다. 이 악한들이 가장 적대시하였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들였던가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그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이론(異論)도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하였다.414)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친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ChristionDoctrine)라는 저서 제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거스틴이 그때 자신을 망각하였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여,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415)

사탄은 온갖 궤변으로 오늘날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나는 이상의 고찰이 이와 같은 사탄의 일체의 궤변을 충분히 물리쳤다고 경건한 독자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은 충실하게 설명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게 헛소리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는 내게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덕성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로 발생의 계속적인 행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416)

제 14 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뚜렷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1-2)

1. 우리는 인간의 사색으로써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진실한 의도를 살필 수도 없고 또 살펴서도 안 된다.

이사야가 거짓 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의 기초와 하늘의 운행을 보고도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사 40:21). 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이 더디고 우둔한 까닭에 신자들이 이교도들이 꾸며낸 거짓 형상(figmenta)에 빠지지 않도록 참 하나님을 더욱 더 명백히 묘사해야 한다. 철학자들의 판단에 있어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서술, 곧 하나님을 우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417)은 허무맹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혼돈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좀더 상세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창조의 역사가 명백해지며, 교회의 신앙이 이것들을 근거하여서 모세가 우주의 형성자요 창조자로 표현한 분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창조 역사에는 제일 먼저 시간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연속되는 연륜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와 만물의 최초의 기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식이 특별히 유익한 점은, 그것이 옛날 애굽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만연하였던 기괴한 이야기들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시초가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고, 또 우리가 넋을 잃고 그것에 경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 사악한 자들의 우롱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우롱이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전에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일찍이 천지창조를 하시려는 생각을 갖지 아니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간을 헛되게 지내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6천년도 되지 않았는데 세계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오랫동안 천지창조의 시기를 연기 하셨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정당한 일도 아니요 이치에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그 이유를 깊이 캐어내려고 노력한다 해도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중도에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겸손을 시험하시기 위해 고의적으로 감추어 두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 못 된다. 어떤 파렴치한 자가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고 어떤 경건한 노인에게 조롱 삼아 물었다. 이때 그 노인은 재치 있게, 하나님은 그런 호기심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답변하였다.418)

엄격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경고는, 많은 사람을 자극하여 그들을 사악하고 유해한 공론(公論)으로 몰아가는 방종을 제어해 줄 것이다. 요컨대, 지혜와 권능과 의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 눈으로서는 감히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모세의 역사를 우리 앞에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년이나 허약, 혹은 어떤 다른 결함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경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무능함도 그와 같아서, 하나님을 찾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419) 실로 방종에 빠져 있는 자들은 경고를 받고서도 그것을 묵살해 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파멸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모독적인 언사로 하늘나라의 일을 흐리게 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사물의 원인을 찾되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행하는 것이라고 개탄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420) 그는 다른 곳에서도, 공간과 시간의 끝없이 뻗쳐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똑같은 잘못이라고 조심스럽게 경고하였다.421) 사실 하늘의 범위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만일 어떤 사람이, 공간이 하늘보다 백배나 더 컸으면 하고 하나님께 아뢴다면, 이 무례한 언동에 대해 모든 경건한 사람이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그와 같은 광란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저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광대한 주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명으로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독점할 만한 충분한 사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또 이는 마치 6천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매우 진지한 명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한하기를 원하시는 울타리, 말하자면 우리가 제멋대로 방황하며 헤매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가두어 두시기를 원하시는 그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물자.

2. 6일간의 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선하심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엿새 동안에 완성되었다고 기술한다(창 2:2). 이러한 사실에 의해 우리는 일체의 허구를 떠나서 창조의 사역을 엿새로 나누어 일하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끌려가게 되므로, 그 창조 사역을 명상함에 전 생애를 바쳐도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의력이 얼마나 변하기 쉬우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어떤 경건한 사상도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함을 알고 있다. 여기서 또한 인간의 이성은, 신앙에 순종하여 제7일의 거룩하게 구별하여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안식을 배워 환영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한 것처럼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에 모든 선한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만물의 창조 순서에서 인류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422)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무것도 없는 텅빈 땅에 두셨다면, 또는 빛이 있기 전에 그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인간의 복지를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해와 별의 운행을 조정하시고 땅과 하늘과 물에는 생물로 채우시고 식량으로 풍부한 과실을 맺게 하실 때에, 앞을 내다보시며 열심히 일하시는 한 가족의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셨다. 비록 나는 여기에 대해 간단히 말했지만 이 문제를 보다 더 신중히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세가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확실한 증언이며 사신(使臣)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앞서서423) 모세는 하나님의 본질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하신 지혜와 영에 대해서도 말했으며 또한 모세가 이를 말한 것은 분명한 형상으로 자신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고자 한다.

(천사. 3-12)

3.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충분히 논하기 전에424) 먼저 천사에 관한 것을 잠시 언급해야 하겠다. 확실히 모세는 일반 대중의 무지에 고려하여, 창조의 역사 중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가 천사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소개했을 때, 저들이 수고와 직분을 바쳐 봉사해야 할 분이 바로 저들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모세는 통속적인 방법으로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작 첫머리에서 천사를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넣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은 성경이 여러 곳에서 천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명백히 또는 확실히 가르치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한 결코 그렇게 훌륭하고 고상한 표본이 생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교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 데 매우 필요하다. 천사의 성질의 탁월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기 때문에, 만일 천사를 한 분 하나님의 권위 밑에 예속시켜 억지로 그와 같은 지위에 처하도록 강요한다고 하면 그것은 천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들은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되었다.

마니(Mani)425) 역시 자기 일파와 함께 일어나서 스스로 만들어 낸 두 원리, 즉, 하나님과 마귀를 제기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선한 것들의 기원이라고 하고, 악한 성질의 창시자는 마귀이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광란에 미혹된다면 우주 창조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영광은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특성은 영원성과 자존성426)-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속성들을 마귀에게 돌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귀를 하나님의 칭호로 장식해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며 저항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그러한 주권이 마귀에게 주어진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니교도의 유일한 기초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 우주에 어떤 악한 성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정통 신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탄의 부패와 악의, 혹은 여기서부터 나오는 죄는 본성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부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427)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의 예증을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왜곡된 거짓사상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시야가 미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높이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니케아 신경에서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라고 부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쓸데없는 무익한 사색에 빠짐으로써 독자들이 신앙의 단순성에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도록, 경건의 규범이 명령하는 그 한계를 지키도록 계속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령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항상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나 덕을 세우는데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든가 혹은 가볍게 또는 대충 그것들을 다루실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기꺼이 단념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창조와 천사의 직능. 4-12)

4. 우리는 천사에 대하여 추상적 사고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하나님의 봉사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시 103:20-21). 천사들의 창조된 시간과 순서에 대해 무슨 논쟁을 일삼는 것은 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악하다는 증거가 아닐까?428) 모세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별들과 유성들 이외의 다른 종류의 천군들이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열심히 묻겠는가? 이 이상 더 길게 논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모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도록 겸손과 진실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더욱이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명상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용없는 문제들이 아니라 건전한 경건과 자기에 대한 경외, 참된 신뢰, 그리고 성결의 의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원하시므로, 이러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참으로 현명해지기를 원한다면, 쓸모없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천사의 성질, 계급, 수에 대하여 가르치는 그 공허한 사색을429) 떠나야만 한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에 더 집착하고 그러한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시하신 방법을 따르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자.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교훈으로 만족하고, 그가 일깨워 주신 그 전적으로 공허한 사변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이를 몹시 증오하게 될 것이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430) 하늘의 천사계급(Celestial Hierarchy)이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매우 교묘하고 예리하게 논하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대부분이 서툰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 저자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눈으로 실제로 본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고후 12:2) 바울도 그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본 그 은밀한 것을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고후 12: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리석은 지혜를 버리고 주께서 천사에 대하여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바를 성경의 그 단순한 교훈 안에서 검토하도록 하자.

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천사는 하늘의 영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임무를 통하여 자신이 작정하신 바를 모두 수행케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시 103:20-21). 이와 같이 하여 이 명칭이 천사들에게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하여 천사들을 중재(仲裁)의 사자(使者)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들도 또한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나왔다. 그들이 "천군"이라고 불리는 것은(눅 2:13) 호위병처럼 왕을 에워싸 왕의 위엄을 장식하며 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병들처럼 지휘관의 신호에 항상 주의를 집중하여 언제라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을 지휘관의 신호만 떨어지면 즉시 일에 착수한다. 아니 이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선포하기 위해 다른 선지자들도 그의 보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지만, 특별히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대 위에 오르실 때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 7:10)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권능과 능력을 놀랍도록 발휘하시며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저들은 권세라고 불린다(엡 1:21; 고전 15:24). 하나님은 세계에서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시고 집행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정사(政事), 때로는 권세, 때로는 주관하는 자로 불린다(골 1:16; 엡 1:21; 고전 15:24).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또한 보좌라고 불리기도 한다(골 1:16). 그러나 이 마지막 명칭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이것은 동등하게 적합한 해석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해석이기 때문이다.431) 그러나 성령께서는 천사의 사역의 고귀함을 높이기 위해 이 명칭을 제외하고 앞의 명칭들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적 위엄의 임재를 특별히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사용하신 이 기구들을 존경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더욱이 그들은 한 번 이상 신들이라 불려졌다(시 138:1). 이렇게 불려진 이유는, 그들의 사역에 있어서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마치 거울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창 18:1), 야곱(창 32:2,18), 모세와 다른 사람들(수 5:14; 삿 6:14; 13:10,22)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성경의 언급에 대하여 고대 교회의 저자들은 그 사자가 바로 그리스도였다고 해석하였는데,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자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더욱 자주 "신들"이라는 명칭이 그 모든 천사들에게 적용된다(창 22:11-12). 그것을 무슨 신기한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왕들과 통치자들이 지고하신 왕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해서 그들에게 존영(尊榮)이 주어진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이유에서 그 존영은 마땅히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한층 더 풍부히 빛내는 천사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6. 신자의 보호자이며 도움을 주는 자로서의 천사

그러나 성경은 위로와 신앙을 강화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교훈에 강조점을 둔다. 즉, 천사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자요 관리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천사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밤을 새우고 우리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고 따라서 어떠한 재앙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아 준다고 상기시킨다. 성경의 다음 두 구절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첫째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둘째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즉,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11-12)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말씀이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7)라는 말씀은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상의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키기로 하신 자들의 보호를 천사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의 천사는 도망자 하갈을 위로하고, 그녀의 여주인과 화목하기를 명령하였다(창 16:9).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천사가 그의 여행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창 24:7).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지금까지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신 주의 사자가 그들을 번창케 해 주시기를 기원하였다(창 48:16).

이와 같이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陣)을 보호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출 14:19, 23: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는 언제나 천사들을 사용하여 원수에게 보복할 자들을 일으키셨다(삿 2:1, 6:11, 13:3-20). 간단히 말하자면 이 이상 더 다른 실례를 열거할 필요가 없고, 다만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섬겼으며(마 4:11), 그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와 함께 있었다(눅 22:43)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렸으며(마 28:5-7; 눅 24:5), 그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해주었다(행 1:10).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우며, 우리를 해롭게 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보복을 수행한다. 성경에서 본 대로, 하나님의 사자는 예루살렘을 그 포위에서 건져내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185,000명을 쳐서 죽였다(왕하 19:35; 사 37:36).

7. 수호 천사들

그러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개개의 천사가 그들 각자에게 지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감히 단언할 수 없다. 다니엘이 바사인들의 천사와 헬라인들의 천사를 소개할 때(단 10:13,20, 12:1), 특수한 천사들이 왕국과 지방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그는 명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천사들이 항상 성부의 얼굴을 뵈옵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마 18:10), 이것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탁받은 어떤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그들 각 사람에게 자기를 보호하는 특수한 천사가 있다고 단정해야 할지에 대하여는 나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주장해야 할 것은, 한 천사만이 우리 각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사가 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한다고 했는데, 기뻐하는 자들이란 사실 모든 천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눅 15:7).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22)라는 말씀 역시 많은 수의 천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엘리사가 특별히 자기를 위해서 지정된 많은 불병거를 자기 사환에게 보여 준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왕하 6:17).

다른 구절보다 한층 더 분명하게 이 점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하나 있다. 즉,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형제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형제들은 두드리는 자가 베드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천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행 12:15). 이것은, 각 신자에게는 그들을 지켜주는 천사가 각각 따로 있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생각되어진 듯하다. 그러나 천사들 중 어느 한 천사가 베드로를 돌보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천사가 베드로의 영원한 수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데 우리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일반 대중들은 두 천사, 곧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있다고 상상하고는 그것이 마치 별개의 특성인 것처럼 각자에게 예속시킨다.432) 그러나 알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열심히 탐구한다는 것은 실로 무가치한 일이다. 모든 천군 천사가 자신의 안전을 계속해서 지켜준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 천사가 자신의 특별한 수호자로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한 천사에게만 국한시키는 자들은 저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온 회원들에게까지도 큰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를 사방에서 후원하며 보호하는 천군들과 함께 보다 더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무익한 약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8. 천사의 계급, 수, 모양

천사의 수와 계급을 감히 결정짓는 자들은433)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미가엘을 가리켜 "대군"이라 부르고(단 12:1) 유다가 그를 "천사장"이라고 부른 것(유 1:9)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도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심판 자리에 모으는 자가 바로 천사장이라고 말하였다(살전 4:16; 참조, 겔 10:5). 그러나 누가 이러한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천사들의 존귀의 정도를 결정짓고 각 천사들을 그 칭호로 구별 지으며 그 위치와 지위를 각자에게 배정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두 이름, 곧 미가엘(단 10:21)과 가브리엘(단 8:16; 눅 1:19,26) 그리고 토비트의 역사에서 이에 하나를 더 가한다면 제3의 칭호(라파엘)가 있는데(토비트 12:15), 이 명칭들은 그것들을 갖고 있는 의미로 보아 우리의 능력의 약함 때문에 천사들에게 적용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문제를 미결로 남겨 두기를 원한다.

천사의 수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53)라는 말씀을 듣고, 다니엘로부터는 그 천사의 수가 "천천이요……만만이며"(단 7:10)라는 말을 듣는다. 엘리사의 사환은 "불병거가 산에 가득함"(왕하 6:17)을 보았으며, 천사들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시 34:7) 있다고 기록된 것은 그 수의 막대함을 의미한다.434)

영들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의 이해력의 정도에 맞추어 그룹이나 스랍이라는 이름으로 천사들이 날개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단 유사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는 마치 번개가 하늘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더욱이, 천사의 수와 계급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계시를 알게 될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해 두자. 그러므로 너무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든가, 너무 확신 있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9. 천사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그러나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 이 점에 대해서435)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천사는 "부리는 영(靈)"(히 1:14)이며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의 봉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또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남은 일들을 수행하신다는 것 등이다. 고대 사두개인들은 천사라는 말을,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무하시는 충동이나, 또는 그가 내뿜는 능력의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행 23:8).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은 성경의 여러 증거와는 매우 반대되는 것으로, 어떻게 그런 유(類)의 무지가 그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 곧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계 5:11)이며,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53)라고 말한 구절, 그들이 기뻐한다는 구절(눅 15:10), 손으로 신자들을 붙들며(시 91:12; 마 4:6; 눅 4:10-11) 신자들의 영혼을 안식처로 인도하며(눅 16:22),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다고 한 구절(마 18:10),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 대하여는 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외에 천사는 실질적인 실체를 가진 영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논증하는 구절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436) 그것이 아무리 곡해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율법이 천사들의 손으로 전해졌다고 한 스데반과 바울의 말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행 7:53; 갈 3:19). 이와 마찬가지로 피택자들이 부활 후에는 천사와 같이 될 것이며(마 22:30), 심판의 날은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마 24:36), 그날에 주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마 25:31; 눅 9:26)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딤전 5:21) 자신의 훈계를 지키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한 바 있거니와, 그가 이때 의중(意中)에 둔 천사는 실체가 없는 성질이나 영감이 아니라 실재의 영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보다 더욱 뛰어나시다는 것(히 1:4), 세계는 천사들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는 것(히 2:5), 그리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히 2:16) 등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천사들이 축복받은 영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가 그들에게 적절하다고 이해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동서(同書)의 저자는 신자들의 영혼과 거룩한 천사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소집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히 12:22-23).

더욱이 우리가 이미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는,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오며(마 18:10), 그들의 호위로 우리는 항상 보호를 받게 되고(눅 4:10-11), 그들은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고(눅 15:10), 그리고 교회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여러 모양의 은혜에 놀라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한다고 하였다(히 1:6).437) 천사들이 자주 사람의 모양으로 거룩한 족장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들에게서 환대를 받았다는 것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창18:2).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중보자의 위격에서 얻은 탁월성 때문에 천사라고 불렸다(말 3:1). 여러 세대 전에 사탄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후 자주 새로이 일어나는 그 어리석고 불합리한 사상에 대비하여 순박한 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내게는 좋다고 생각되었다.

10. 신적 영광은 천사들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는 천사들이 모든 축복의 관리자요 공급자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미신에 대항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범하기 쉬운 과오는, 어떠한 존귀도 천사들로부터 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돌리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이 여러 면으로 빛을 상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헤아릴 수 없는 존귀가 천사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싸우고 있는 악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천사들을 높임으로써 그리스도를 천사들과 같은 수준에까지 끌어내린 자들과 큰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일체의 축복의 창시자라고 매우 열심히 주장하였다(골 1:16,20).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족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와 동일한 샘에서 물을 긷는 자들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확실히 신적 위엄의 광채가 천사들에게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요한도 계시록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10, 22:8-9)는 천사의 대답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천사들을 이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째서 직접 자기 스스로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신자의 안전을 위해 대비하시며 자비의 은사를 전달하시는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위험을 잘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은 필연성에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들 없이는 그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천사들을 그대로 두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을 덜기 위해 저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위로하기 위함이며, 이 위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선한 소망을 가지게 하거나 또는 안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주께서 스스로 우리의 보호자라고 선언하신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많은 위험과 그렇게 많은 해로운 것들과 그렇게 많은 종류의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주께서 만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은혜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유약하기 때문에 분명히 때로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절망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보호자에게 명령하여 우리의 안전을 보살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옹호와 보호 속에 감싸여 있는 한, 어떠한 위험이 닥쳐와도 우리는 모든 해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순수한 약속을 받고서도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1)하고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친절로 우리의 이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위대한 은총을 무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엘리사의 사환에게서 우리는 이에 대한 실례를 보게 된다. 그는 아람의 군대가 성을 에워싸 피할 길이 없음을 보자 자신과 엘리사가 마치 죽게 된 것처럼 그 마음이 공포로 가득하였다. 이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즉시 사환은 자기와 그 선지자를 보호할 불 말과 불 병거, 즉, 무수한 하나님의 사자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왕하6:17). 이에 힘을 얻은 사환은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만 해도 보기만 해도 거의 절망할 것 같았던 그 원수들을 대담하게 경시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천사 때문에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천사의 직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모든 의혹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 더 굳게 확립하는 데 목표를 두기로 하자. 실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돕는 자들을 마련해 두신 것은, 무수한 원수들이 마치 주의 도우심보다 우세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고 한 엘리사의 말에서 위안을 찾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세우신 천사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원조자로 바라보고 부르며 선포하도록 천사들이 그 손으로 우리를 똑바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께 붙들어 매어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우리의 몸을 맡기며 헌신하게 하여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만군의 주께서 서 계시는 사닥다리로 사람을 찾아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야곱의 환상에서 기술된 것을 우리는 마음에 담아 깊이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창 28: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만 천사들의 사역이 우리에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은 천사의 보호를 받으면서도(창 24:7) 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께 위탁하고 기도하며, 아브라함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베풀어주시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창 24:1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천사와 나누기 위해 천사들을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의 사역자로 삼은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우리의 신뢰를 천사들과 자신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자신의 도우심의 사역자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자비심을 더욱 베푸시도록 할 목적으로 천사들에게 경배하는 저 플라톤 철학을 물리쳐야 한다.438) 미신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우리 종교에 끌어들이려 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굽히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마귀. 13-19)

13. 성경은 원수와 대항하도록 우리를 미리 무장시켜 맞서게 한다

성경이 마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의도는, 모두가 우리들을 깨우쳐서 저들의 간교한 술책과 계략을 경계하며 따라서 이들 강력한 원수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 있고 강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 4:4), "이 세상 임금"(요 12:31)으로 불리고, "강한 자"(눅 11:21; 참조, 마 12:29),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우는 사자"(벧전 5:8)로 언급되는 것은,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한층 더 주의하고 경계하며 마귀와의 싸움을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사실은 가끔 명백한 말로 기록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말한 후 곧 이어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9)는 권고를 덧붙이고 있다.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경고한 후, 그렇게 크고 그렇게 위험한 싸움을 싸우는 데 적합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명령하였다(엡 6:13이하). 우리는 원수가 가혹하게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을 미리부터 경고 받아 왔다. 이 원수는 무모할 정도로 대담하며, 전투적 용맹을 가진 자이며, 가능한 모든 무기를 가졌으며, 전술에 노련한 자의 화신(化身)인 것이다.439)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우리는 부주의와 무기력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440) 오히려 그와 반대로 다시 불붙는 용기를 가지고 전투에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투는 죽을 때에야 끝이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하여 인내하도록 하자. 실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자각하고, 무엇을 시도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권고와 힘과 용기와 무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14. 사악함의 영역

더욱이 성경은 이 싸움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더욱 자극하며 격려하기 위해, 우리와 싸우는 원수의 수가 하나 둘 하는 소수가 아니라 군대이라고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놓였다고 성경은 말한다(막 16:9; 눅 8: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내어쫓긴 후에 악한 귀신에게 다시 그 장소를 허락해 주면 그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텅 빈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12:43-45). 실로 어떤 사람은 "군대" 마귀에 붙잡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눅 8:30). 그러므로 이상의 여러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무수한 원수들과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의 소수를 멸시하여 싸우기를 게을리 하며, 혹은 가끔 휴전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태만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나 마귀에 대하여 자주 단수로 언급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통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단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처럼, 불신앙의 무리들과 불경건 그 자체는 그들에게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그들의 왕과 함께 묘사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말씀하셨다.

15. 화해할 수 없는 투쟁

마귀는 어디서나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틀림없이 이 사실은 마귀와의 부단한 싸움에 우리의 마음을 불붙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큰 관심사로 여긴다면 마땅히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기울여 이를 소멸시키려는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언하는 일에 우리가 열심히 낸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자와 타협할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려고 함정을 파는 자와 화목해서도 안 되고 휴전을 해서도 안 된다. 창세기 3장에는 그러한 자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박탈하며 인간을 파멸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1-5절). 복음서의 기자들도 역시 그를 가리켜 "원수"라고 불렀으며(마 13:28,39), 영생의 씨앗을 부패케 하기 위해 가라지를 뿌리는 자라고 기술하였다(마 13:25). 요컨대,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거짓말장이요"(요 8:44)라고 하신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고 흑암으로 빛을 가리며 인간의 마음을 오류에 빠지게 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며 논쟁과 싸움을 일으켜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하며 인류를 자신과 함께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그는 본래 타락하고 사악하며 악의로 가득찬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공격하는 데 열중하는 그 성질은 극도로 타락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8)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실로 요한은 마귀를 모든 흉악과 불의의 창시자요 지도자이며 설계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6. 마귀는 하나님 창조의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마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의 본성에 속하는 이 사악함은 창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타락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에게 있는 정죄받아야 할 것들은 모두가 다 반역과 타락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전적으로 관계없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주님께서도, 사탄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진리에 서지 못하기"(요 8:44)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마귀가 진리에 서지 못한다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확실히 한때는 진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부름으로써, 전적으로 마귀 자신에게 돌려야 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지 않도록 하셨다.

이상의 사실들은 비록 간단하고 또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을 모든 비방으로부터 옹호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귀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많이 알거나, 혹은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해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마귀의 타락과 그 타락의 원인, 방법, 시기, 성질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성경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또는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가볍게 언급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유익도 없는 공허한 이야기로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성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덕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외에는 그 거룩한 말씀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시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필요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마귀의 성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즉, 악마는 창조시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자멸하였으며, 남을 파멸시키는 파멸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알아서 유익하기 때문에 베드로와 유다는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벧후 2:4),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6)을 용서하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택함 받은 천사에 대해 말한바 있는데(딤전 5:21),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버림받는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7. 마귀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있다고 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가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이 없이는 사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욥의 역사를 읽어보면,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타났으며(요 1:6, 2:1),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떠한 악도 감히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욥 1:12, 2:6). 또, 이와 같이 아합이 속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사탄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자기 일을 수행하였다(왕상 22:20-22). 이러한 이유에서 사탄은 역시 사울을 괴롭힌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가 그 불경건한 왕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삼상 16:14, 18:10). 그리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께서 "벌하는 사자들"을 통하여 애굽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시 78:49). 이상의 개개의 실례에 따라 바울은 불신자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살후 2:11). 그러나 조금 앞에서는 이를 사탄의 역사라고 불렀다(살후 2:9; 참조, 고후 4:4; 엡 2:2). 그러므로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권능하에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를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께 반항한다든가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 반항과 반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사탄의 의지나 노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본래 사악한 존재여서, 조금도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아주 완강하게 불순종하며 전적으로 반항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격렬하게 또 고의적으로 반항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악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악함이 마귀를 재촉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능의 고삐로 마귀를 잡아매고 제지하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창조주에게 순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촉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8. 승리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악령들을 굴복시키며 그들의 활동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신자들과 싸우게 하심으로써 신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기습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게 하시고 그들을 싸움으로 몰아넣으시고 자주 피곤하게 만드시며 패배시키게 하며, 공포에 떨게 하시며, 때로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게도 하신다. 그렇지만 악령들은 신자들을 정복하지도 못하며 박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악령은 불경자들을 정복하여 끌고 다니며, 그 영혼과 육체를 학대하고, 노예처럼 그들을 능욕하여 갖가지 수치스러운 행위를 일삼게 한다. 신자들은 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권고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9). 바울은 자기의 교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후 12:7)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도 이런 종류의 싸움을 면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훈련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창 3:15)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탄에게 정복된다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심한 타격을 받아 쓰러지기도 하지만 후에 다시 일어난다.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한 개인의 행위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복수로 다윗이 한때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어, 사탄의 선동으로 인구 조사를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삼하 24:1). 그리고 바울은 비록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는 자들에게도 아직 사죄의 소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딤후 2:25-26).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위에 언급한 약속은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할 이 세상에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이 싸움이 끝난 후 그 약속이 성취된다고 말하였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20)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실로 이 승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항상 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상 임금은 주님께 대하여 아무런 관계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요 14:30).

더욱이, 그 승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우리에게는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완성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때에 사탄과 그의 권세는 무너지게 된다. 제자들이 그들의 전도의 효력에 대하여 보고했을 때, 이 답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하셨다. 주님께서는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2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히 2:14),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모든 세력을 타파하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교회는 매순간 몇백 번이고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사탄의 광포의 세력은 그렇게도 강한데, 만일 우리의 인도자의 승리를 의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그 다양하고 끊임없는 공격에 대항하여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영혼에 대하여는 사탄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단지 자기 백성의 수에 넣지 않기로 하신 불경자들과 불신자들만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추방당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 세상을 소유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참조, 눅 11:21). 그는 또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고후 4:4)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엡 2:2)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일로서, 불경자들은 모두가 다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복수에 대행하는 사자들에게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 종속되었겠는가? 마지막으로, 저들은 저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한다(요 8:44). 왜냐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처럼, 불경자들은 타락하여 사탄의 형상을 지님으로써 당연히 그의 자녀로 인정되기 때문이다(요일 3:8-10).

19. 마귀는 어떤 상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거룩한 천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으키는 선한 영감 혹은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그 천박한 철학사상을 반박하였다.441)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육신에서 오는 악한 감정 혹은 마음의 불안이 바로 마귀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반박해야 한다.442) 우리는 이러한 반박을 간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적지 않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저들은 본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유 1:6) "더러운 귀신" 또는 변절한 천사(마 12:43)라고 불려졌는데, 이때 그 이름은 충동이나 마음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이해를 구비하고 있는 마음, 혹은 영(靈)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자녀와 비교하였는데(요 8:44; 요일 3:10), 만일 이 "마귀"라는 말이 악한 영감 이상의 뜻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그것은 무의미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요한은, 보다 명백한 말씀을 첨가하여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8)고 하였다. 유다 역시 "천사장 미가엘이……마귀와 다투어"라는 말씀에서, 악하고 배반한 천사를 선한 천사와 대립시켜 놓았다(유 1:9). 이것은 사탄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욥의 기사와 일치한다(욥 1:6, 2:1). 더욱이 그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마귀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느끼기 시작하여 부활시에는 특별히 느끼게 될 형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 4).

만일 마귀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가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그를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의해 지금 그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등의 표현들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 그러나 이 점은 주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지만 동시에 신기한 것만을 좋아하는 공상가들에게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증언은 저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의도한 바를 다 완수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불안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저들 자신과 저들보다 한층 더 단순한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그러한 현혹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고서도 원수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원수를 저항하는 일에 태만하거나 부주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창조에 관한 영적 교훈. 20-22)

20. 창조의 위대함과 풍요로움

한편 가장 아름다운 이 극장에서 도처에 표현된 하나님의 사역을 경건하게 즐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자.443) 왜냐하면,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444) 어디를 보나 눈에 띄는 것은 다 하나님의 사역임을 기억하는 일,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창조하셨는가를 경건히 명상하여 생각하는 일, 이러한 것들은 신앙을 위한 으뜸 되는 증거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의 질서에 있어서 첫째가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데 유익이 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모세가 간단하게 기록하였으며(창 1, 2장) 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특히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와 같은 사람들이 상세하게 설명한 우주 창조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445) 이 창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 이 권능으로 모든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을 산출하셨다는 것, 놀라운 계열에 따라 각종의 무수한 사물들을 구별하셨다는 것, 각기 종류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성질을 주시고 임무를 정하시며 처소와 위치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 만물은 부패하게 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종류가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도록 그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 등을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방법으로 어떤 피조물들을 배양하시되 끊임없이 그들에게 새 활력을 넣어 주시고 또 어떤 피조물에게는 번식력을 주시되 그것들이 죽을 때 그 종(種) 전체가 멸절되지 않도록 하시며, 천지를 놀랍도록 장식하시되 극도로 풍부하고 극도로 다양하고 극도로 아름답게 하여 마치 가장 정교하고 동시에 가장 풍부한 장식으로 꾸며지고 채워진 웅대하며 화려한 저택처럼 하셨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처럼 화려한 미와 많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표본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주 창조를 자세히 다루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몇 가지 점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독자들에게 경고한 대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우주에 대한 기사를 충실하게 또는 성실하게 기록한 모세와 그외 사람들에게서 한층 더 충분한 지식을 찾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어떤 목적에 적응시켜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깊이 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대부분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루었으며446) 따라서 현재의 목적에 관한 것은 두서너 마디로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이 이 우주의 형성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는가 함을 적절한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그 어떤 미사여구도 그와 같은 위대함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이 거룩한 명상에 몰두해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풍요함을 조용히 지켜볼 때, 그것들을 단순히 호기심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생각하고 또 진지하고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계속 그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목적을 가르치는 데 있기 때문에,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략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독자는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피조물에게서 보여 주신 그 명백한 권능을 아무 생각 없이 잊어버리고 그냥 넘겨 버리지 않는다면, 둘째로 누가 만일 마음에 감동을 받을 정도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배운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라는 것을 이해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외관상 이 이상 더 아름다운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무리를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함을 우리가 생각할 때 비로소 이 법칙의 첫째 부분이 예증된다. 그는 어떤 별들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치를 고정시켜 놓으셨으며, 어떤 별들에게는 한층 더 자유로운 운행을 허용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정된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셨으며, 모든 별의 운행을 조정하여 별들로 하여금 낮과 밤, 달과 해(年), 그리고 계절을 구분하셨고, 우리가 항상 보는 대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날을 조화롭게 조절하셨다.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는 것은 그처럼 큰 덩어리를 지탱해 나아가시며 천체를 신속히 운행하는 것과447) 그와 비슷한 일들을 관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의 몇 가지 예증만으로도 우주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밝혀 준다. 그렇지 않고 만일 내가 이 문제 전체를 설명하려고 결정하였다면,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수많은 이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수많은 증거는 우주에 있는 많은 종류의 사물의 수와 같으며, 실로 크고 작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의 수와 같기 때문이다.

22.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 법칙의 둘째 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만물을 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큰 은총에서 느끼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448) 바로 조금 앞에서 지적한 대로,449)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창조의 순서를 통해 스스로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창 1:31). 물론 하나님으로서는 창조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동시에 또는 단숨에 완성하신다는 것이 그런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하시는 것에 비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부성적(父性的)인 배려를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인간에게 유용하며 유익하다고 미리 아신 것들을 모두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는 이 가장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지 아닌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망은이겠는가? 또한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도 않았을 때 가장 풍부하게 모든 좋은 것들로 마련해 두신 것을 알고서도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언젠가는 우리의 궁핍을 채워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에 떤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이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힘입어 온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우리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듣는다(창 1:28, 9:2).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분명히 명목상의 빈 증여(贈與)로 우리를 조롱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녕에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결핍함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분배는 그의 솜씨와 권능으로 된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서 그의 성실한 보호 속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고 있는 그의 자녀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축복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하나님께서도 구원에 필요한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한 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완전히 신뢰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진 유익한 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인자하심의 아름다움에 의해 초대되었으므로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섬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450)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451)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452)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창 2:7, 18:27). 왜냐하면, "흙 집에 살며"(욥 4: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욱이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46)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453)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454)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25)이라고 불렀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20:28; 눅 12: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이다(행 23: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27).455)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456)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더(Osiander)는457)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458)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459)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46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461)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喩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462)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18).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7)이라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고 해서463)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5. 영혼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마니교도의 망상을 공박할 필요가 있다. 세르베투스는 이러한 망상을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소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창 2:7), 그들은 마치 무한한 신성의 어느 부분이 인간 속에 흘러 들어오기나 한 것처럼, 영혼을 하나님의 본질의 파생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악마적인 오류가 얼마나 우둔하며 얼마나 추악한 모순을 가져 왔는가를 지적하기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본질에서 인간의 영혼이 유출되었다고 하면,464) 하나님의 본성은 변화와 고뇌뿐만 아니라 무지, 사악한 욕망, 허약, 그리고 각종 죄악에도 예속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만큼 불안정한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서로 반대되는 동기로 말미암아 동요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산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무지로 인해 거듭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는 지극히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는 존재이다. 우리가 알기에 인간의 마음은, 시궁창이자 각종 불결한 것들의 잠복처이다. 그러므로 만일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신성의 은밀한 유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여러 불결한 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본성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실로 바울은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465)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8)고 말한바 있거니와, 이것은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특성에 있어서 그의 소생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은사로 우리를 장식하시는 한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다. 동시에 창조주의 본질을 분할하여 각자가 그 일부분을 소유한다는 것은 극단의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새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혼도 천사와 마찬가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창조는 유입이 아니라, 무로부터의 존재의 시작인 것이다. 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요 육체를 떠날 때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서(전 12:7),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체에서 일부 뜯어 낸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오시안더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환상에 빠져 스스로 불경건의오류에 말려들고 있다. 즉, 그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적 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본체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측량할 수 없는 큰 능력으로 우리를 자신과 비슷하게 만드실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아무리 이 기만을 위장하려 해도 저들은 건전한 독자들의 눈을 가려 마니교도의 오류를 보지 못하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그의 말에서, 인간은 본체의 유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권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추론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하였다. 이 성령은 분명히 우리 안에서 일하시되,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 본질로 만드시지는 않는다.

(아담의 타락 견해에서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 6-8)

6. 영혼과 그 기능

"영혼"의 정의를 철학자들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플라톤을 제외하고는 그들 중 영혼의 불멸적인 실체를 올바로 주장한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다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견해는 보다 정확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466) 다른 사람들은 영혼의 능력과 기능들을 현세의 생활에 너무 고착시키고, 육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였다.467)

실로 영혼은 무형의 실체임을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배웠다.468)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영혼이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육체 속에 거처하는 것 처럼 간주하여 거기에 머물며,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넣어 주고, 육체의 모든 기관을 각각의 행동에 적절하고 유용하게 할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며, 그리고 지상생활의 의무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것은 타락 때문에 분명하게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떤 흔적이 새겨진 채 인간의 죄악 자체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명성에 대한 그렇게 큰 관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수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수치심은 어디서 오는가? 명예로운 것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의 시초와 원인은, 인간이 의를 함양하도록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여기에 바로 종교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천상의 생활을 명상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처럼,469) 또한 이에 대한 지식이 그 영혼에 새겨져 있다는 것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완성되는 행복을 인간이 몰랐다고 하면 그는 사실상 지성의 가장 중요한 효용을 결여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주된 활동은 이것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감각적 영혼과 이성적 영혼이라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는 자들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 듯이 보여도470) 그들의 추리에는 확고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 경박하며 무익한 주장으로 우리 스스로가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기관의 감각적 활동과 영혼이 이성적 부분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고 저들은 말한다. 이는 마치 이성 그 자체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전쟁터의 군대들처럼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인간성의 타락에서 오는 것이므로 영혼의 기능들이 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능은 상호간에 충분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능에 대하여 정교하게 논하는 일은 철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겠다. 우리에게는 다만 경건의 덕을 세우기 위한 단순한 정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실로 나는 저들의 가르치는 바가 참된 것이며, 알아서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배워서 유익한 것이며, 또한 능숙한 솜씨로 수집된 것임을 인정한다. 이에 나는 저들을 연구하며 저들에게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어도 이를 금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오관(五官)이 있음을 인정한다. 플라톤은 이를 차라리 기관(器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으며, 이 기관에 의해 일체의 대상이 일종의 그릇처럼 공통 감각에 전달된다고 하였다.471) 다음에는 공통 감각에 의해 이해된 것들을 식별하는 공상력이 따른다. 그 다음에는 보편적 판단을 포함한 이성이 따른다. 마지막으로는 오성(悟性)이 있는데, 이것은 이성이 산만하게 생각한 것을 집중적이며 조용한 명상 속에서 정관(靜觀)한다. 오성, 이성, 공상력 등 영혼의 세 가지 인식 기능과 일치하는 세 가지 욕구 기능도 있다. 첫째는 의지인데, 이것은 오성과 이성이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둘째는 분노로, 이것은 이성과 공상력에 의해서 제시된 것을 포착한다. 셋째는 욕망으로, 이것은 공상력과 감각에 의해 제시된 것을 파악한다.472)

이상의 견해들은 참된 것이며 적어도 있음직한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우리를 돕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불분명한 데로 끌어넣을 것이 두렵기 때문에 이를 당연히 생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영혼의 능력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기능이라고 말하고 이성이 없다고 해 어느 다른 기능의 지도를 받아 이성에 복종한다면, 하나를 욕구적이라 칭하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 이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지적이라고 칭한다고 해도 나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행동의 원리, 즉, 감각, 오성, 욕구가 있다는 것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분을 짓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구분을 짓도록 하자. 이것은 분명히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분이다. 저들은 매우 단순하게 말하기를 원하면서도 영혼을 욕구와 오성으로 구분하여 이 둘을 이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저들은 가끔 후자를 관조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만으로 만족하고 적극적인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키케로는 이를 지력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473) 때로는 그것을 실천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과 악을 이해함으로써 의지를 다양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에는 옳고 의로운 생활방법에 관한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 저들은 또한 전자(前者) 곧 욕구를 의지와 정욕으로 구분하고, 저들이 "불레시스(bouvlhsi)"라고 부르는 욕구가 이성에 복종할 때에는 이를 "홀메(oJrmhv,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욕구가 이성의 멍에를 내던지고 방종에 빠질 때에는 "파토스(pavqo, 격정)"가 된다.474) 이와 같이 저들은 항상, 사람에게는 자신을 적절히 다스릴 수 있는 기능으로서의 이성이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7. 진실로 기본적인 능력으로서의 견해와 의지

우리는 지금 하는 수 없이 이런 식의 가르침에서 다소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학자들은 타락에 대한 형벌에서 오는 인간성의 부패를 모르고 사람의 전혀 대립되는 두 상태를 부당하게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두 부분, 곧 오성과 의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로 하자. 실로 이 구분은 현재 우리의 목적에 편리한 것이다. 그리고 오성이 하는 일은 대상을 식별하여 대상을 각각 시인하든가 시인하지 않든가 하는 것이다. 한편 의지가 하는 일은 오성이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선택하며 추구하고, 오성이 부인하는 것을 거절하며 피하는 것이다.475) 우리는 여기서, 마음 그 자체에는 활동이 없고 그것은 선택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사소한 논의에 붙들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476) 그는 이 선택을 욕구적 오성이라고 불렀다. 무익한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성은 말하자면 영혼의 지도자요 지배자이며 의지는 오성의 명령을 항상 유의하며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 오성의 판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에 있어서의 회피 혹은 추구는 마음에 있어서의 긍정 혹은 부정에 상응한다는 것을 진실하게 가르쳤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477) 오성이 의지의 방향을 얼마나 확고하게 지배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 두 기능 중 어느 하나에도 관계가 없는 힘이 영혼 안에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감각을 오성에 포함시킨다. 한편 철학자들은 이를 구별하여, 감각은 쾌락을 바라고 오성은 선을 추구한다고 한다. 여기서 감각적 욕구는 과도한 욕망 또는 정욕이 되고 오성의 경향은 의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좋아하는 "욕구"라는 말 대신에 보다 흔히 쓰이는 "의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478)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479)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480)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481)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 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482)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셨다.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483)

(철학자들의 의견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주장된다. 1-4)

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될 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단번에 완성하신 순간적인 창조주로 삼는다는 것은 차디찬, 그리고 무미건조한 사상이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와 다름없이 그 후 영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권능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가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망령된 이교도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경건치 못한 자들의 마음도 천지를 관찰할 때 창조주에게 그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 자체의 특수한 방법으로 창조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둔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사도의 주장,484) 곧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는 말씀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아무리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창조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에 일단 마주치게 될 때에 거기에 그대로 멈추게 된다. 기껏해야 그러한 일을 이룩하신 창조주의 지혜, 권능, 선을 판단하며 정관 할뿐이다(이것들은 이미 명백한 자명한 진리이며 원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더욱이 육신의 생각은, 보존하며 조정하는 어떤 일반적인 활동이 있는데 여기에서 운동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육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있으며 이것은 만물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발견한 즉시 그가 만물의 통치자요 보호자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보편적인 운동에 의하여 천체와485) 그 각 부분을 운행하시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만물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유지하시고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 통치자요 보존자이신 것이다(마 10:29). 그리하여 다윗은 우주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간단히 진술한 후에, 즉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라고 섭리의 영속적인 과정을 기술하였다. 곧 이어 그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시 33:13)라는 말씀을 추가하였으며, 그 뒤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말씀이 따른다. 모든 사람이 그처럼 명확하게 판단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돌보신다는 것은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우주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신중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가장 좋은 순서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우리를 인도한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 생기를 얻는다고 철학자들은 가르치며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저들은 다윗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도달한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27-30). 실로 저들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고 한 바울의 진술에 동의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바울이 주장하는 은총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을 알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조금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운명이나 우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점을 보다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치는 데로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정반대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486) 그런데 세상만사가 우연히 발생한다는 견해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공통적인 신념으로 되어 왔으며, 오늘날 역시 모든 사람들은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부패한 견해로 말미암아 섭리에 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확실히 흐려졌으며 뿐만 아니라 거의 매몰되다시피 되었다. 사람이 강도나 짐승을 만났다고 하자. 바다에서 갑작스런 강풍을 만나 파선을 당했다고 하자. 집이나 나무가 넘어져 압사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광야를 방황하다가 굶주림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자. 파도에 밀려 표류하던 중 마침내는 항구에 다달아 아슬아슬하게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고 하자.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사건들을 그것이 번영이든 불행이든 모두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원인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가 지배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생물들은 각각 본래 자신의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현재의 손으로 지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효력을 계속 부어 주시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이런 일 저런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신다.

태양의 힘보다 더 놀랍고 더 빛나는 힘을 가진 피조물은 없다. 태양은 그 빛으로 온 지구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 열로 모든 생물을 양육하고 소생시키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 광선으로는 땅에 풍요함을 불어넣지 않는가? 태양은 땅에 있는 씨앗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들이 파랗게 싹트게 하며 그것들을 키우고 강하게 하고 또한 신선한 자양분을 공급하여 마침내는 줄기를 일게 하지 않는가? 태양은 식물에 계속 따뜻한 온기를 공급하여 꽃을 피우고 다시 꽃에서 열매를 맺게 하며, 그 다음 뜨거운 열로 열매를 무르익게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수목이나 포도나무도 태양의 따뜻한 열로써 처음에는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내며, 다음으로는 꽃을, 그리고 이 꽃에서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전적인 영광을 요구하시기 위해, 태양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빛이 있게 하시고 땅이 각종 풀과 과실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창 1:3,11,14).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태양의 창조 이전에 존재한 것들의 원리 혹은 필연적 원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태양 없이도 스스로 일하시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셨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수 10:13), 히스기야 왕을 위해서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갔다는 것을(왕하 20:11; 사 38:8)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몇 가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양의 매일의 출몰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부성적인 은총을 새로이 기억할 수 있도록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겨울이 지나면 봄으로, 봄 뒤에는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계절의 순서에는 매우 커다란 그리고 한결같지 않은 다양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가 매년, 매월, 매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 하나님의 섭리가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을 주장하시는 동시에 이 전능을 우리가 인식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전능이란, 궤변가들이487) 상상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게으르며 거의 무의식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효과적이시며 활동적이시고 계속 일하시는 그런 전능을 말한다. 실로 전능은 한번 정해진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강에게 명하는 그런 혼란한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운동을 향해 작용하는 권능이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확실히 활동할 수 있으시되 때때로 일을 중단하시고 한가하게 앉아 있다든가 혹은 그가 이미 정해 놓은 자연의 질서를 일반적인 충동으로 계속 운행시키시기 때문이 아니라 천지를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기 뜻에 따르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만물을 조정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계획된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을 철학자들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운동의 기원이요 원인이기 때문에 그를 제1동인(動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488) 이는 역경을 당했을 때 신자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일에 확대된다면 이를 자연의 영향 하에 둔다는 것은 유치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하여 만물이 자유로운 과정에 따라 생성되도록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좁은 한계 내에 제한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 못지않게 자기들에게서도 가장 유용한 교리를 빼앗아 버린다.489) 왜냐하면, 인간이 만일 하늘, 공기, 땅, 물 등의 운동에 예속되었다고 하면 아마 인간보다 더 비참한 존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은 매우 무가치하게 약화될 것이다. 다윗은 아직 어머니의 젖을 먹는 어린아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웅변으로 찬양하기에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는데(시 8:2)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즉시 하나님의 돌보심에 따라 준비된 젖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떤 어머니의 젖은 풍부하나 어떤 어머니의 젖은 거의 말라 있다는 것은, 경험이 명백히 입증해 주는 것인 만큼 이것은 우리의 눈도, 우리의 감각도 피할 수 없는 일반적인 사실이다. 어떤 아기에게는 더 풍부하게 젖을 먹이시고, 어떤 아기를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로 찬양하는 자들은 여기에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된다. 첫째, 하늘과 땅을 소유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진심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축복하시기에 풍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이다. 둘째, 유익은 저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재난이 어디서 오든 그것들을 다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키시고, 자신의 권위로 극도로 광포하고 또 온갖 장비를 갖춘 사탄을 억제하시며 우리의 안녕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그의 명령에 복종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험을 만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미신적인 공포는 다른 방법으로는 조정할 수도 진정시킬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피조물에게서 위협을 받으며 강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마치 그 피조물에게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힘이나 있는 것처럼, 혹은 그것들이 우연하게나마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또는 하나님께는 그것들의 해로운 행위를 물리치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무서워 떤다고 하면, 이것은 미신적으로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렘 10:2)고 명하였다. 확실히 그는 모든 공포를 다 정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별들이 통치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행복과 불행은 별들의 결정과 징조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상한다. 따라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별이나 혜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신앙에서 피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즉, 피조물에게는 기이한 힘, 기이한 활동, 기이한 운동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시며 원하셔서 결정하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490)

4. 섭리의 본질

그러면 첫째로,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늘에서 팔짱만 끼고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491) 오히려 열쇠의 관리자로서 모든 사건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눈 못지않게 그의 두 손에도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예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난국과 당황케 하는 일을 언제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그 미지의 사건에 관한 걱정을 맡기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섭리는 행위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예지에 대하여 크게 떠벌리는 것은 지나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혼란되고 잡다한 통치로 보는 사람들의 오류는 그렇게 심하게 조잡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운동에 의해서 천체와 그 각 부분을 회전시키시며 운행시키시되 피조물 하나하나의 활동을 특수하게 지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용납될 수 없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편적이라고 하는 이 섭리에는 모든 피조물이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나 인간이 그의 자유 선택에 따라 이쪽 혹은 저쪽으로 향하는 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별을 지어 놓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인간에게 운동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 운동력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본성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계획에 따라 스스로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와 인간사 그리고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스려지기는 하나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 생각의 요점이다. 하나님은 게을러서 활동하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이 질병은 항상 세계에 충분하다)와 이에 못지않게 어리석은 사람들, 곧 하나님은 공중의 상반부(上半部)는 다스리시고 그 하반부(下半部)는 운명에 맡긴다고 공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말하지 않겠다.492) 말 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그 엄청난 광란에 대하여 충분히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일반적" 섭리와 "특별" 섭리)

그러므로 이제 나는(거의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견해를 반박하고자 하는데,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일종의 맹목적이며 애매모호한 운동으로 인정할 뿐 하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만물을 지도하시며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배치하시는 사실들을 그에게서 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이름만의 우주의 통치자일 뿐 실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배력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지배한다는 것은 지휘하는 것들을 결정된 질서에 따라 권위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그러나, 우주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특별히 돌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일반 섭리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겠다. 마치 만물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일단 결정하신 것은 저절로 운행되어 나가는 것처럼 여러 종류의 사물이 자연의 은밀한 충동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493)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할 뜻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해서,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확실하고 명백한 성격의 증거로 확증된 그 특별 섭리를 부당하게 가르치고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말한바 있는 휘장으로 그 특별 섭리를 가리는 자들도,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특수한 행동에만 잘못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시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서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의 교리. 5-7)

5.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운동의 시작은494) 하나님께 있지만, 그러나 만사가 자연적 경향의 강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혹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의 서로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그 각자에게 각각 일을 지정하시고 일정한 법칙을 제정해 주신 한, 즉, 그것들이 순탄한 행로를 따라 계속 동일한 과정을 유지하여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이 오고, 한 해가 지나면 또 한 해가 오는 한, 하나님의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심한 무더위에 심한 가뭄이 겹쳐 땅의 농작물을 태워 버리며, 어떤 때에는 때 아닌 비로 곡식이 해를 입고 또한 우박과 폭풍우로 불의의 재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날씨의 맑고 흐림, 그리고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그 기원을 별들의 근접과 다른 자연적 원인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별문제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성적인 사랑이나 심판을 표시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어떤 통상적인 힘을 넣어 주시고, 이것으로 인류에게 식물을 공급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매우 빈약하고 속된 허구이다. 이것은 마치 어느 해의 풍작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며, 흉년이나 기근이 하나님의 저주와 복수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 모든 논증을 수집한다는 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니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만족하자. 하나님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이슬과 비로 땅을 적실 때마다 자신의 은총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으며(레 26:3-4; 신 11:13-14, 28:12), 또 그의 명령으로 하늘이 철과 같이 굳어지고(레 26:19), 곡식밭이 충해와 다른 재앙들로 손상을 입게 되며(신 28:22), 우박과 폭풍우로 전답이 해를 당할 때마다(사 28:2; 학 2:17) 이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특수한 보응의 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실로 다윗은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시 147:9)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동물을 위협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때로는 적게 먹이시고 때로는 더 많이 가장 좋아 보이는 음식으로 먹이신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위에서 내가 말한 대로, 이것을 특별 행위에 국한시킨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왜냐하면, 성부의 뜻이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0:29).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에 따라 새들을 날게 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5-6)

6. 하나님의 섭리는 특히 인간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우주가 특별히 인류를 위하여495) 세워 졌음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도 역시 이 목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솔로몬도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고 그들로 말하게 하자.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인간 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와 솔로몬은 권능뿐만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솔로몬은, 마치 하나님의 손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정하는 자들의 이 경솔함을 훌륭하게 책망하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9).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어리석은 일이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들면 부러지는 나뭇가지에 그 밑을 지나던 행인이 맞아 죽었다고 하자. 이보다 더 우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살해자의 손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출 21:13). 마찬가지로, 제비를 뽑을 때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 제비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하신다. 조약돌을 무릎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거기에서 집어 올리는 것은 그들 각자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우연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다고 증언하셨다(잠 16:33).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13; 참조, 잠 22:2).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다 같이 이 세상에서 섞여 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처해 있는 상황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온 인류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은 결코 맹목적이 아니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자기 운명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짐을 벗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선지자도, 어떤 사람은 비천한 자리에 처해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높임을 받는 것이 인간의 수고와 운명의 탓이라고 하는 경건치 못한 자를 꾸짖는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판장의 직무를 벗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의 높임을 받고 어떤 이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그는 여기서 논증한다.

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현상을 조정한다

나는 또한 개개의 사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성격을 일반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바람을 일으켜 많은 메추라기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주셨다(출 16:13 ; 민 11:31).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보내 광풍을 일으키셨다(욘 1:4). 하나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생각지 않는 자들은 이것을 사물의 통상적인 과정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도, 불지도 못한다고 추론한다.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구름과 바람의 행로를 원하시는 대로 지도하시며 이 가운데서 자신의 특별한 권능을 실제로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하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3-4)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바다가 강한 바람으로 거센 파도가 일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임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시 107:25).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시 107:29). 다른 곳에서 그는 풍재(風災)로 백성을 치셨다고 말씀하셨다(암 4:9).

이와 같이 또한 인간에게는 본래의 생식력이 주어져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손이 없게 내버려두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자손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참조, 시 113:9). 이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시 127:3)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곱은 그의 아내에게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2)라고 했다. 이 논의를 곧 끝맺는다면, 우리가 음식으로 양육된다는 것보다 더 평범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지만 또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 8:3; 마 4:4)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힘을 얻는 것은 풍부한 떡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신 축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496) 반대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을 제하여 버리겠다"(사 3:1)고 위협하시는 것과 같다. 실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진지한 기도(마 6:11)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애로운 손길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양육하심으로써 한 가족의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시 136:25)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시 34:15)라는 말씀과, 또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16)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읽게 된다. 우리는 이 두 말씀에서,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어떤 모양으로든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자.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섭리는 피조물 가운데서 역사하여 자연의 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놀라우신 계획으로 본래의 명확한 목적에 순응하도록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운명, 우연, 우발성에 대한 토론. 8-9)

8.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이 아니다

이 교리를 비난하려고 하는 자들은 이를 스토아 학파의 운명론이라고 하여 비방한다. 어거스틴도 한때 이러한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497) 우리는 용어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운명이라는 말에 용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친 망령되고 공허한 말 중의 하나이며(딤전 6:20), 또한 사람들이 이 비방하는 말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이 운명론을 믿고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또는 악의에 찬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자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과(因果)의 계속적인 관계와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련의 연속에서 파생되는 필연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무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뜻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림을 받아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독자는 물을 것이다. 아무 일도 운명적으로나 우연적으로는 발생하지 않는가? 나는 이에 대하여 대답한다. 대(大)바실(Basil)은,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의 용어로서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은 절대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진실하게 말했다.498) 왜냐하면, 모든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는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이상적인 말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논박(Against the Academics)이라는 나의 책에서 자주 운명이라는 말을 언급한 데 대하여 나 스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사용할 때 어떤 여신이나 혹 다른 것을 나타내려고 뜻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외부적 사건에 있어서의 우연적 결과를 나타내려고 한 것뿐이다.499) '포르튜나'(fortuna, 운명)란 말에서 '우연히'(forte), '아마'(forsan), '혹시'(forsitan), '어쩌면'(fortasse), '뜻밖의'(fortuito)라는 말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며 따라서 모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은밀한 질서로 말미암아 조정되는 것이며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실로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주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서,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다"라고 할 것을 "이것은 운명이 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거스틴은 만일 무엇이든지 모두 운명에 맡겨버린다면 세계는 목적 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만사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선택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주장했지만, 곧 이어 그는 인간은 섭리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또한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는 원리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되는 대로 발생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또한 어떠한 우연한 일도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한층 더 명백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자주 사용한 "허용"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라고 그가 증명한 데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500) 확실히 그는, 한가하게 높은 망대에 앉아서 이것저것 허락하기를 즐겨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공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간섭이라고 말하는 의지는 말하자면 현실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원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9. 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의 높이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우연적이라고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운명이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며 만물을 되는대로 상하로 굴러가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은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들도 운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생각되든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에 따라 평가되든, 그것들은 표면상으로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인이 일단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숲 속에 들어갔다가 잘못하여 일행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는 강도를 만나 살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선견(先見)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정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각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장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선견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다"(욥 14:5)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능력에서는 이모든 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그런 죽음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성질상 우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을 다스리시며 그 목적을 향해 운명을 지도하신다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평가는 미래의 우발적인 사건에도 적용된다.501) 일체의 미래사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그 일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 속에서 그 미래사를 붙잡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견하시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운명"이라는 말이 전도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2:14-15, 3:19, 9:2-3,11)502) 인간은 처음 보아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제일 원인을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이 가르침은, 그 어떤 섬광이 흑암 속에서 항상 비취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마음에서 소멸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점장이들도, 비록 의심하여 흔들렸을망정 그들은 액운을 일부분은 하나님의 탓으로, 일부분은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보아서 궤(櫃)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삼상 6:9)고 말하였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점(占)에 속아 운명을 의지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불행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감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자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섭리의 고삐로 모든 사건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시는 가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실례에서 명백해질 것이다. 즉,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서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게 되어 부득불 사울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삼상 23:26-27).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종의 안전을 염려하셔서 사울의 가는 길을 방해하셨다고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또는 뜻밖에 싸움을 걸어 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이는 것도 신앙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밀한 추진이었다고 인정한다.

언제나 똑같은 이유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변동이 하나님의 손의 은밀한 활동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되지만, 그 필연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그 자체의 특수한 성격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뼈를 좋은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소유하셨던 만큼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의 뼈가 부러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뼈를 부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요 19:33,36).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 마찬가지로 결과적 필연과 결과의 필연의 구별이503) 학파들간에 분별없이 고안된 것이 아님을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뼈를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를 부러지지 않게 하심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을 자기 계획의 필연으로 제안하셨던 것이다.

제 17 장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섭리의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의 언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해석. 1-5)

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더욱이 인간의 성향은 쓸데없이 교묘한 것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유익하고 바르게 계속 사용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에 말려들어 거의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배정하셨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여기서 간단히 논의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와도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의 결정적 원리로서 이 섭리는 때로는 매개체를 통하여, 때로는 매개체 없이, 때로는 모든 매개체와 반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시되, 특히 더욱 친근히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지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경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자비 혹은 엄격하신 공의가 종종 섭리의 전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가 운명의 맹목적인 충동에 의하여 운행된다고 하는 사상이 슬그머니 잠입하기도 하고,504) 또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선동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처럼 던져서 가지고 우롱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항변하게도 한다. 실로 우리가 만일 정숙하며 침착한 마음으로 기꺼이 배우려 하기만 한다면 그 최종적인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데 최상의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실 것이다. 혹은 자기 백성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며 혹은 저들의 사악한 감정을 바르게 하시고 방종을 억제하시고 혹은 자기 부인을 실천케 하시고 혹은 나태에서 일으키시며 또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불경건한 자들의 교활함을 낮추게 하시고 그들의 책략을 전복시키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인이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부르짖어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할 때, 죄가 언제나 마음에 떠오르며 형벌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자극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각자가 응당히 받아야 할 형벌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은밀하신 계획에 더 많은 권위를 두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불행이 출생에 앞선다고 하는 경우, 마치 무죄한 사람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우리의 본성은 소리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밝으면 이 이적에서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증거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하시지 않도록 힘쓰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어두워지고 심한 폭풍우가 일어날 때 침침한 안개가 우리의 눈앞을 가리고 천둥이 귀를 때리며 공포로 우리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우리에게는 혼란해지고 뒤엉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은 여전히 평온하고 청명하다. 그러므로 세계의 이 혼란한 상태가 우리의 판단력을 빼앗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소동을 가장 잘 고안된 질서로 조정하심으로써 통제하신다는 것이며 그들을 바른 목적으로 향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추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방자하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고 그의 은밀한 계획을 조사하여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실에 대하여는 죽을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더 경솔한 판결을 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와 동등한 인간들에게는 겸손하여,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보류하기를 더 좋아하면서, 마땅히 경외해야 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심판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은 경건히 준수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를 지으신 이요,505) 우주의 창조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올바르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에서 오늘날 공교롭게도 많은 개들이 이 교리를 독살스러운 이빨로 물어뜯으며 혹은 적어도 소리내어 짖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이성이 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맹렬히 비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의 훈계로 만족하지 않고 우주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506) 실로 이것은 마치 우리의 가르치는 바가 다만 머리의 고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고, 또 성령이 도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수한 표현 형식으로 이를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소나마 살아있는 그들의 수치심이 그들을 억제하여 감히 하늘나라에 대한 모독을 토해 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분방하게 날뛰기 위하여는 우리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시 36:6)고 하신 성경의 말씀은 무슨 뜻으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하여 저들은 답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 구름이나 깊은 바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신 30:11-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심연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은밀한 뜻이 있다는 것이 된다.507) 바울 또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참조, 시 40:13-14). 실로 율법과 복음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으로 계시하기를 원하셨던 이 신비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 신자들의 마음을 "총명의 신"(사 11:2)508)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심연이 없었고, 다만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시 119:105), 생명의 빛(요 1:4; 참조, 8:12),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법은 당연히 심연이라고 불리며, 이는 그것이 우리 생각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건하게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몇 마디 말로 이 둘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열심히 깊이 묵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도록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명하는가를 보게된다. 욥기에도 역시 이 숭고한 교리가 기록되어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있다. 즉, 욥기의 저자는 우주의 구조를 상하로 두루 살피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장엄하게 논술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였다.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14). 이런 방법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있는 지혜와 그가 인간에게 주신 지혜를 구별하였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를 논할 때 지혜는 하나님께만 알려지고 "모든 생물의 눈에는 숨겨졌다"고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28:21). 그러나 조금 지나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는 탐구되기 위하여 일반에게 알려졌다고 부언하였으니,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욥 28:28)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뜻으로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의 질서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선한 의지로 율법에 의거하여 행동하지만,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는 율법에 의거하여 움직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의 율법이기 때문이다."50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주 통치의 권리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견실과 겸손의 율법으로 삼아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만물의 가장 공의로운 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궤변 철학자들이 지껄이고 있는 절대적 의지, 즉, 불경하게 또는 모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분리시켜 놓은 그런 절대적 의지가 아니라,510) 만물의 결정적 원리가 되는 섭리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이 섭리에서는 옳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불행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호마(Homer)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가멤논(Agamemnon)이 "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신과 운명의 여신에게 있다"511) 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의 죄책을 하나님께 뒤집어씌우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운명에 의하여 유괴된 것처럼, 그들은 플라우투스(Plautus,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젊은이가 "만사는 불안정하며 운명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인간을 몰아친다. 나는 나 자신을 절벽으로 끌고 가서 거기서 내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겠다"라고 한 것처럼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파멸 속에 던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또 다른 실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악행의 구실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리코니데스(Lyconides)는 다른 희극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동자였다. 나는 신들이 그것을 원하였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만일 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512)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탐구하며 배우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에 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동시에, 저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불경스러운 사람들은513) 어리석게도 불합리의 혼란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거의 혼동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시간을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자신을 지켜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강도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위험하다는 길로는 감히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이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지치도록 약을 너무 복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거친 음식을 삼가며, 어떤 이는 다 낡아서 무너져 가는 집에서 살기를 두려워한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을 고안해내며 열심히 그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를 시정해 보려고 시도한 이상의 모든 치료는 헛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과 죽음과 사, 건강과 질병, 평화와 전쟁, 그리고 인간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대로 혹은 얻으려 애쓰거나하고, 혹은 피하려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작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들은 또한 신자의 기도는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릇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이 기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작정해 놓으신 것을 주시도록 주님께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미래와 관계된 모든 계획은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신의 원하시는 대로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재 발생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리고, 분명히 그 사건과 직접 관계있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린다. 살인자가 한 선량한 시민을 죽였다고 하자.

그들은 이 살인자야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한 자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다던가, 혹은 간음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들의 말대로 하면, 주께서 예지하시고 정해 놓으신 것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대행자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병들어 누워있는데, 아들이 치료를 게을리한 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의 죽음만을 기다렸다고 하자. 그로서는 영원 전부터 그렇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 해서 그들은 모든 범죄를 미덕이라고 부른다.

4. 하나님의 섭리를 구실로 인간의 신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솔로몬은 미래 일에 대하여 논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섭리와 쉽게 조화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없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대담하게 계획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이 말씀은, 우리가 앞날을 준비하며 모든 문제를 정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에 항상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 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와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졌으며,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의 보호를 위탁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가 만일 우리에게 구조의 수단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되다. 하나님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주시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위험도 그것이 운명적인 것이 아닌 한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운명적인 한 이에 대한 여하한 대비책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벌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물리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와 얼마나 일치한가를 검토해보자.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면 주의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피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위험을 경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독자들은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위험이 독자에게 운명적인 것이 아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경계하도록 명하시는 것이다. 생명의 보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숙고하고 경계하는 기능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는 것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게으르고 태만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과하신 재난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살핌으로써 임박한 재난을 해결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 없이 무모한 짓을 하여 파멸한다. 그런데 만일 우매와 신중이 다 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체의 미래사를 의심스러운 사건들로 대항하게 하시며, 준비하셨던 예비책으로 끊임없이 반대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감추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미래사들을 극복하게 하시거나 우리의 모든 염려를 초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노출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된 수단으로 표현하신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역시 그들은 경솔하게 또는 그릇되게 과거의 사건들을 모두 하나님의 들어난 섭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 섭리에 좌우되기 때문에 절도나 간음, 그리고 살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의 간섭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주께서 빈곤으로 벌하고자 하셨던 자의 물질을 약탈한 도둑이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주께서 생이 끝나도록 하신 자를 죽인 살인자가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자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들은 형벌을 받아야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악한 성향에 의해 자극을 받고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배우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전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어디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포하신 뜻을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가 명령하신 것뿐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고집이며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악을 행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 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할 정도로 방종과 정욕에 깊이 빠져 앞 뒤 분별없이 행동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하고 무한하여 하나님은 악한 도구를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이론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도둑과 살인자 및 다른 행악자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정하신 심판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실이 그들의 범죄에 무슨 구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그들과 동일한 불의에 하나님을 연루시킬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로 그들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모두가 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생각을 합법적으로 사용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수단으로 해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태양의 열로 부패되고 노출된 시체의 악취가 어디서 오는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태양 광선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그 악취가 광선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514) 이와 같이 악의 실질과 죄책은 사악한 인간에게 있다. 이럴진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인의 봉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어떻게 그가 어떤 불결한 것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멀리서 하나님의 공의를 비방할 수는 있어도 이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이 개와 같은 뻔뻔스러운 행동을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에 대한 명상 : 섭리의 작용을 깨달을 때 오는 행복. 6-11)

6. 믿는 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이상의 여러 비방들, 곧 광인들의 헛소리는 섭리에 대한 경건하며 거룩한 명상으로 쉽게 쫓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상은 경건의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서, 이 명성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무엇 하나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따라서, 하나남의 특별 섭리가 자신을 지켜 보호하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선과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판명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다음으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양쪽을 모두 지배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확신한다. 그들이 선하든 악인이던,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이 모두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며 또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신자의 행복을 돌보신다는 증거하는 매우 분명한 약속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 때문이다(벧전 5: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1).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나는 너의 방패요"(창 15:1). "너로 …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램 1:18),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15). 실로 성경역사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길을 이처럼 열심히 돌보아 주심으로써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시 91:12)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말하는 자들, 곧 하나님은 개개의 피조물들을 특별하게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견해를 방금 위에서 거절한 것처럼,515)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특별한 돌보심을 인식하는 것이다.516)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마 10:29) 곧 이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마 10:31). 그리고 주님은 이 사실을 더 확대하여,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고 확신시키셨다(마 10:30). 머리털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인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거할 곳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실 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특수하게 표현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7. 번창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실례들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조정되는 혹은 남을 헤치지 못하게 그들의 악의가 억제되든 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접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의 눈앞에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출 3:21)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분별력을 빼앗으심으로써 그들이 건전하며 온건한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을 속이기 위해 사탄을 보내어 모든 선지자의 입을 거짓 영으로 채우게 하신 일이 있었다.(왕상 22:22). 또한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의 충고를 통해 르호보암의 정신을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르호보암은 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그 왕국을 빼앗기게 되었다(왕상 12:10,15). 때로 그들에게 분별력을 주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고 낙담케 하심으로써 그들이 생각한 바를 원하거나 계획하거나 혹은 수행할 수 없게 하신다. 간혹 그들이 자신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광포를 꺾으시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치명적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사전에 분쇄하셨다(삼하 17: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시며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 사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이 없이는 욥에 대하여 감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욥 1:12).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를 보면,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건 아니면 무생물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건 간에 일체의 번영과 인간의 욕망 전체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는 마음에, "그들의 마음을 내게로 기울여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들을 나와 연합하게 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신 것은 분명히 주님이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호 2:21-22)라는 말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축복만이 모든 번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어떤 역경에 닥쳐올지라도 그는 즉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인내와 마음의 평온을 그에게 가장 깊이 새겨 주실 것이다. 만일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을 계속 생각하였더라면 그는 형들에 대한 형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들의 불의를 잊었기 때문에 그는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형들을 위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창 45:7-8).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욥이 자기를 괴롭힌 갈대아 사람들을 주시하였더라면, 그에게는 복수의 불길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주께서 하신 일로 여기고,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이와 같이, 시므이가 다윗을 협박하고 또 그에게 돌을 던졌을 때, 다윗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더라면 아마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한 보복을 당장 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시므이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부하들을 진정시키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니 그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지나친 슬픔을 억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해하신 연고니이다"(시 39:9). 만일 분노와 성급함에 대하여 이 이상 더 효과 있는 치료법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명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크게 유익할 것이며 그 마음에 항상 다음과 같은 생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의 뜻이니 마땅히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뜻을 반항함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정당하고 유익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부당하게 해를 받았을 경우, 우리의 고통을 악화시키고 우리 마음에 복수심을 자극시키는 그들의 사악함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갈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원수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악을 행하였든지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며 그의 의로우신 섭리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 6:12), 영적인 원수 곧 마귀에 대한 것(엡 6:11)이라고 지혜로운 교훈을 주었는데, 우리들로 하여금 그 싸움에 스스로를 대비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충동을 진정시키는데 가장 유용한 교훈은, 하나님은 마귀와 모든 행악자들을 대항해서 싸우려고 무장하시며 우리의 인내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경기의 심판자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재난과 고난이 인간의 간섭 없이 일어날 때에는, 모든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하여 흘러나오고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신 28:2이하:15이하) 율법의 교훈을 상기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무서운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레 26:23-24).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아둔함을 죄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인류의 공통된 이해에 따라 번영이건 재난이건 모든 사건을 다만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고도 예배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예레미야와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훈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애 3:38; 암 3:6).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선언도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7).

9. 중재하는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은 제 이차적 원인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 인간적 친절에 대한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충심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고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또는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기를 노력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경할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가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게될 것이다. 만일 이 경건한 사람이 태만하거나 경솔하여 무엇인가 손실을 입었다면 그는 이것이 주님의 뜻에 따라 발생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역시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만일 잘 돌보아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 사람이 이미 넘을 수 없는 한계에까지 도달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를 이유로 그가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 사람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자기의 탓으로 여길 것이다. 살인이나 절도범에게 기만과 고의적인 악이 개재되었을 때, 그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여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범행에서 그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이 각각 스스로를 명시하는 대로 양자를 똑똑히 응시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미래사에 관하여 그는 이런 종류의 이차적 원인들을 고려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인간적 도움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원조를 청하는 데 있어서 그들과 상의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게을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신적 섭리의 합법적 기구로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낙착될 것인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주께서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것을 아는 일 외에는), 그는 지성과 이해가 도달할 수 있는 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열심히 동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당한 목표로 향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시킨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원조가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거나 또는 그것이 없다고 해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 떨 정도로 외부적인 원조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떨쳐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르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더욱이 그는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의 결정에 의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이러한 인식은 우리에게서 무모함과 자만심을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마음을 참된 소망과 신뢰와 용기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위험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경멸할 것이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을 보게 된다.517) 인간의 생활은 수많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무수한 죽음의 위기에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수많은 질병을 담는 그릇으로서 사실상 몸속에 질병을 보유하거나 그 원인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형태의 파멸 원인에서 모면할 수 없으며, 죽음에 둘러싸인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추위를 만나든 더위를 만나든, 인간은 위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이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어디로 눈을 돌리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대상은 신뢰할 가치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절박한 죽음으로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배를 타 보라.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단 한발자국의 거리가 있을 뿐이다. 말을 타 보라. 한 쪽발이 미끄러지면 우리의 생명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 보라. 지붕 위의 기왓장과 같이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무기가 우리의 손에 있든 친구의 손에 있든 역시 해악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보는 사나운 동물들은 모두가 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즐겁게만 보이는 정원에 몸을 감추려고 해도, 거기에도 때로는 뱀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옥은 계속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어, 낮에는 가난해지지 않을까. 밤에는 우리 위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위협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밭은 우박과 서리, 가뭄 그 밖의 재난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모와 이에 따르는 기근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해독과 복병, 약탈과 공공연한 폭행에 대하여는 여기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들은 때로는 집에서도 우리를 괴롭히고, 때로는 멀리까지 따라다닌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살아 있으나 반은 죽은 것과 다름없고 그런 사람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항상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과 같은 허약한 마음으로 불안하고 활기 없는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간혹 있을 뿐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갑자기 있는 일도 아니라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도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들이 역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와는 다른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례를 통해서 경고를 받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공포보다 더 무서운 재난을 달리 상상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을 맹목적이며 무모한 운명의 공격을 받도록 내버려두셨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인간이 운명의 지배하에 있을 때 느끼게 될 그 비참함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더욱이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에게 비칠 때, 그는 지금까지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운명을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담대하게 의탁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인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하여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91:3-6).

여기서 또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 나온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 118: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시 27: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그들이 이와 같은 굳은 확신을 가지는 것은, 세계가 우연히 도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은 어디서나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행복이 사탄이나 행악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섭리를 기억하거나 명상함으로써 힘을 얻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곧 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모든 행악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굴레를 씌운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억제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시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어떠한 음모도 꾸밀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꾸민 후에라도 준비할 수 없고, 충분히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사탄과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쇠사슬에 속박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하자.

이러한 생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줄 것이다. 그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방향을 돌리고, 그것을 지도해 나가는 것이 주님께 속하는 일인 것처럼,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방종하게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 정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도 주님께 속한 일이다.

이것을 확신한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여행이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고(살전 2:18),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었다고 말하였다(고전 16:7). 사탄에게서 그 여행의 장애물이 왔다고 말했다면 마치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를 뒤집어엎을 수나 있는 것처럼 사탄에게 막대한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모든 여행을 허락하시는 주관자라고 말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사탄은 그가 꾸미는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다윗은, 인생을 끊임없이 변전시키는 말하자면 회전시키는 각양의 변화 때문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 라고 하면서 이 피난처에 자신을 맡긴다. 다윗은 "인생행로", 혹은 "때"라는 말로 단수로 기술할 수도 있었음에도 "시대"(times)란 복수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상태가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계속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르신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군대를 연합하였을 때 유다 온 지방을 멸망시키고 황폐하게 하기 위해 밝힌 거센 불붙는 나무처럼 보였지만, 예언자는 이를 보고 그것은 겨우 연기가 나는 정도에 불과한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사 7:4)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바로가 부와 권력과 강한 군사력 덕분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바로 자신은 바다의 악어로 비유되고 그의 군대는 고기로 비유되었다.(겔 29: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통솔자와 그 부하들을 갈고리로 잡아다가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끌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만일 독자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가 최대의 비참이라는 것과 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반대에 대한 답변. 12-14)

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성경의 어떤 구절들이 방해가 안되었다면 섭리의 교리가 신자들에게 순수한 가르침과 위로를 준다는데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하였다고 본다(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천박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이것을 만족시키기를 원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고 현상계의 상황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첫째,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것으로 언급된 실례가 몇 군데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셨고(창 6:6),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11). 또한 자기 백성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즉시 그들에게 내리기로 결정하셨던 재앙을 돌이키시겠다고도 하셨다(렘 18:8). 둘째, 하나님의 작정 중 얼마가 폐기되었다고 언급된 곳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40일 후에는 니느웨성이 멸망한다고 선언하셨지만, 그후 그들이 회개하자 이전보다 더 은혜로운 선언을 그들에게 내리셨다(욘 3:4,10).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셨지만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에 감동을 받아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사 38:1,5; 왕하 20: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결정으로 인간사를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각자의 공로나 또는 하나님 자신이 공평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매년, 매일, 또는 매시간, 이런 일, 저런 일을 결정하신다고 많은 사람은 주장한다.518)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곧 하나님께 무지, 오류, 무력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후회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고의적으로 또는 기꺼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발생할 것을 알지 못하신다든가 이를 피할 수 없으시다든가 혹은 조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짓고 이를 즉시 후회하신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뜻하시는 바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성령은 후회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개치 않으신다는 것이다(삼상 15:29). 그리고 사무엘상 15장에서 이 둘이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대조해 보면 외관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는데, 이때의 마음의 변화는 비유적으로 기술된 것이다. 곧 이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사실적으로 명백하게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후회를 초월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그러면 "후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적인 용어에 따라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방식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둔하여 존엄하신 하나님에게까지 미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에 대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그 묘사가 낮추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묘사를 낮추시는 방법은 자신의 존재하는 그대로가 아니고 우리가 그를 지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하나님께는 마음의 혼란이 전혀 없지만 죄인에 대하여는 분노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께 무슨 감정적인 동요가 있는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경험에서 취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흥분하고 노한 사람의 용모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라는 말을 행동의 변화 이외의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행동의 변화로 자신의 불만을 증거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변화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정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정정은 후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번복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결의가 변경된 것도 아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그 변화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예견하시고 흡족해 하시며 작정하신 것을 끊임없이 방법으로 수행해 나아가신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확고하게 실행하신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하여 멸망을 선고하신 후 그들이 회개하자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것과(욘 3:10),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후 히스기야의 생명을 더 연장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사 38:5).519)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암시되었다는 것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단순한 확언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과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내어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는가?

또, 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그의 죽음을 암시하셨는가? 멸망에 대한 예고가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과 히스기야를 다 멸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죽음을 미리 경고하여 그 죽음의 다가옴을 멀리서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이란, 그들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회개케 하여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상 멸망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장수의 소망이 끊어졌던 것은 보다 오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와 같은 위협을 통해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을 회개케 하며, 그들의 죄값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피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의 성질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순한 암시 속에 한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사실은 또한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실례에 의해 확증된다. 아비멜렉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자 주께서는 그를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위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 20:3). 그러나 이비멜렉이 변명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7).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말씀에서 아비멜렉의 마음을 심하게 때리심으로써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 하셨고, 두 번째 말씀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명백히 표현하셨는데, 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다른 구절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전에 선언하신 바를 취소하셨기 때문에 그의 최초의 목적이 폐기되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경고하심으로써 그가 용서하고자 하는 자들을 회개케 하실 때에, 이는 자신의 뜻을 변경하거나 자신의 말씀을 변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음절씩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실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실한 것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27).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이용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순결을 유지하신다520)

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탄과 모든 악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하며 하시며 끌어내기도 하신다는 다른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활동하시면서 어떻게 그들의 범죄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시는지,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들과 더불어 일을 하시면서 어떻게 모든 죄책을 면할 수 있으시며 나아가서는 그가 사용하시는 자들을 어떻게 정당하게 정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육적인 생각으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행하는 것"과 "허용하는 것"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521) 왜냐하면, 사탄과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권 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목적에도 그들의 악을 지도해 나아가시고 또 그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고 하는 이 난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지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그릇된 점을 밝히려고 부정하게 힘쓰지만 않는다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에 놀란 자들의 겸손함은 아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으로 눈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으로 인하여 후에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저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속임수로 그 난점을 피하고 있다.5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러한 핑계를 거절하신다.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이 없이는 인간으로서는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결정하신 것 이외에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결정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앞에서 우리가 시편에서 인용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는 말씀은 분명히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말씀이다. 이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쟁과 평화의 참된 조정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인간은 하나님 모르게 혹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맹목적 충동에 의해서 닥치는 대로 무리하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특수한 증거들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난 것을 우리는 욥기 1장을 통해서 알고 있다(욥 1:6, 2:1). 실로 그 방법이 다르고 그 목적이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지 않으셨으면 사탄은 어떠한 일도 착수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건한 인물을 괴롭히기 위해 허락이 공공연하게 첨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시련의 장본인은 하나님이시며 사탄과 사악한 도둑들은 다만 그 대행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욥 1:21)라는 말씀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경건한 인물을 미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스바 사람은 잔인하고 사악하게 침입하여 남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욥은, 자신이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빈곤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사탄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들의 수고를 돌려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저 불신의 왕 아합이 기만당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자 이 목적을 위해 마귀는 자기가 봉사하겠다고 하였다. 이 마귀는 모든 선지자의 입에서 거짓말을 하는 영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았다(왕상 22:20,22). 아합의 무분별하고 미치광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 단순히 허용만이라는 허황된 공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자가 할 일을 작정도 아니하시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역자들에게 명령도 아니하시고, 다만 허락만 하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획책하였으며, 빌라도와 그의 병사들은 그들의 광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엄숙한 기도에서,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행 4:28)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행 2:23)이라고 설교한 것과 일치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은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 명확한 지식과 정하신 의지에 따라 유대인들이 행한 것을 결정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일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고 이와 같은 뜻의 말을 하였다. 압살롬은 근친상간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가증스런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2).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에서 행한 잔인한 일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였다(렘 1:15, 7:14, 50:25 및 그 밖의 여러 구절). 이러한 이유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다(렘 25:9).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꾸중(사 7:18 혹은 5:26)과 나팔소리(호 8:1)와 권위와 명령으로 말미암아 불경자들이 전쟁의 자극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습 2:1 참조).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들을 진노의 막대기요(사 10:5), 손으로 휘두르는 도끼라고 하셨다(마 3:10 참조).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무너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사28:21). 다윗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의로우신 심판장이라고 인정하였으며,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삼하 16:10)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삼하 16:11).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예를 들면, 열 지파의 배반과(왕상 11:31), 엘리의 아들들의 죽음과(삼상 2:34). 또 그와 비슷한 많은 사건이 있다. 성경을 적절하게 배운 사람이라면, 내가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다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이 바로 간결을 도모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예증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것을 대치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지껄이고 있는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망대 위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인간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2. 하나님의 충동이 어떻게 인간에게 전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충동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쁘심에 따라 임의로 인도된다고 하였는데(잠 21:1), 이 말은 확실히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 말은 "우리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에 의하여 하나님의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내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그가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욥 12:24; 참조, 시 107:40) 하신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계된 말씀들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자주 읽게 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포로 그 마음을 점령당하게 될 때 두려워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사울의 진영을 떠났는데, 즉,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었다(삼상 26: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며(사 29:14), 저들을 쳐서 현기증이 나게 하시고(신 28:28; 참조, 슥 12:4), 잠자는 영으로 저들의 눈을 감기시며(사 29:10), 광기로 저들을 채우시고(롬 1:28),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출 14: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분명한 증거를 요구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버리심으로써 사탄에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처럼 이 여러 구절들 역시 하나님의 허용과 관계된 구절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결은 너무도 어리석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들의 정신이 나간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하여 되어진 것으로 성령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롬 1:20-24).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며(출 9:12), 또한 그 마음을 더욱 완강하고(출 10:1) 굳게 하셨으며(출 10:20,27, 11:10, 14:8)고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회피하면서, 어리석은 트집을 내세우는데, 즉, 바로는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출 8:15,32, 9:34)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한 원인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행동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일한다는 두 사실이 미처 서로 완전하게 모순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반대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만일 완고하게 하는 것이 단순한 허용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본래 완고하게 된 동기는 바로에게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바로 왕이 수동적으로 완고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어리석은 해석이겠는가? 이 외에도 어느 경우에도 성경은 그런 생트집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출 4:21)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뜻으로 모세는 가나안 주민들에 대하여 저들이 싸우러 나아간 것은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수 11:20; 참조, 신 2:30). 다른 예언자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여호와께서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시 105:25)라고 반복하여 말하였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사 10: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경하고 완고한 인간을 가르쳐서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그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시행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명확한 결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탄의 중재 활동을 통하여 악한 자에게서 활동하시지만,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충동과 허용에 의해서 그에게 허락되는 한에 있어서만 자기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사울은 악한 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악령은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삼상 16:14)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사실은 사울의 광란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복수에서 온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또한 사탄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4:4). 그러나 유혹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면(살후 2:11),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이 일이 어디서 오겠는가? 첫째 이유에 의하면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겔 14:9)라고 하였고, 둘째 이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롬 1:28) 가장 무서운 정욕에 사로잡히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복수의 근본적인 창시자이시고, 사탄은 다만 그 복수의 대행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제2권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 예속을 다르게 될 때에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에,523) 나는 여기서 필요한 만큼만 간단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에 대한 결정적 원리로 삼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선택자에게서 그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기자를 복종케 하기도 한다라고.

3. 하나님의 의지는 통일체를 이룬다

지금까지 나는 성경에서 명백하고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들만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말씀에 악의에 찬 불명예의 낙인을 주저 없이 찍으려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비난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지를 구실 삼아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내게는 다르게 보인다"느니 혹 "이런 문제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식의 가벼운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권위를 반대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교만이 달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공공연히 저주한다면,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와 같은 건방짐의 실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대마다 불경한 사람들과 참람된 사람들이 있어서 교리의 이 부분을 반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성령께서 오랜 옛날 다윗의 입을 통해 "주께서……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윗은 방종한 사람들의 광기를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는데, 그들은 더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논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정죄할 권능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그들이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하여 참람된 말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비방의 안개를 깨끗이 거두셔서 자신의 의를 화려하게 빛내신다고 간단하게 경고하였다. 우리의 신앙도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어서온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요일 5:4), 높은 곳에 서서 이들 비방의 안개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첫째 반대는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반대 내용이다. 그것은 율법에서 공적으로 금지하신 것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서는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변하기 전에, 나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트집이 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목표로 한 것임을 거듭 경고해 두고자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경건한 욥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되어졌다(욥 1:21)고 확실하게 고백하셨다. 그가 도둑들에게 약탈을 당했을 때, 그들의 불의한 행동과 악행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채찍이었음을 인정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25)고 말하고 있다. 다른 선지자도 역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고 남의 흠잡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태한 허용에 의해서만 모든 일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 만사의 창시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는 이미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고 평안과 환난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다(사 45:7). 그리고 자신이 시키지 아니하시면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3:6). 내가 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원해서 하시는가 아니면 마지못해 하시는가를 저들이 말하는 일이다. 그러나 모세가 가르친 대로,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되어진 것이었다(신 19:5; 참조, 출 21:13 ).

이와 같이 누가에 의하면, 헤롯과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과 계획에 의한 예정으로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바를 행하기 위하여 공모하였다고 온 교회는 주장한다고 한다(행 4:28).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음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속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그 자체 스스로 모순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변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지가 하나이며 단일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하실 바를 원하기도 하기고 원하지 않기도 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소명을 "감추었던 비밀"(엡 3:9)이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 3:10)가 나타나 있다고 첨가하였다.524) 하나님의 지혜가 "다양하게"(고대의 해석가들은 이를 여러 가지 형태로 번역했음) 나타난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둔한 이해로 인해525) 하나님 자신에게 무슨 변화가 있다고 꿈꾸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하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적 무능력을 생각해야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16)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그것이 흑암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경건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쉽게 동의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인간은 가끔 선한 의도에서 원한다 그 예로, 선량한 자식은 자기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그가 죽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원하시는 것을 인간은 악한 뜻으로 원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악한 자식이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원하시는 경우가 있다. 즉, 전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지만 후자는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전자의 자식으로서의 경건은, 그가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을 원하는 후자의 불경건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와 일치한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각자의 의지가 향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여기에 따라 그것이 시인되기도 하고 부인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인간의 악한 의지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우신 의지를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전에, 타락한 천사와 모든 악한 자들이 태만하여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행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저들은 전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의지는 저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크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찾았다"(참조, 시 111:2). 그러므로 그 방법이야말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어서, 비록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그대로 되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못해 허용하시지 않고 기꺼이 허용하신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악에서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의 행위를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526)

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믿지 않는 자의 행위를 이용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비난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역시 다른 반대도 해결되거나 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인데,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불경자의 행동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획과 의도까지도 주관하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은 모든 악의 창시자이시며,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작성하신 바를 수행하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때문에, 그들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교훈이 잘못 혼동되어 있는데, 이 양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는 수없이 많은 실례들에 의해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 예로,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더럽혔을 때(삼하 16:22), 하나님께서는 이 파렴치한 행위를 통하여 다윗의 간음죄를 벌하려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이유로 해서 그 사악한 아들에게 근친상간의 죄를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아마 다윗으로서는, 그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말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삼하 16:10-11), 그러나 그 뻔뻔스러운 개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 순종을 칭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의 말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인정하고 참을성 있게 그 징계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고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즉,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밀한 심판으로 작성하신 것을 성취하시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이나 한 것처럼 용서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으로 선택된 것은(왕상 12:20), 인간의 사악한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불신실하게 다윗의 가문을 배반한 것으로 인해서 국민의 경솔함과 광기가 정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이 기름부음 받을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호세아의 말 가운데 얼핏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한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시며 또한 원치 않으시는데 그 나라가 세워졌다고 탄식하셨다(호 8:4).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함으로 여로보암을 왕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호 13:11). 여로보암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한편 하나님께서 저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를 내팽개치지 않고는 백성들은 다윗의 집을 배반할 수 없었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망은을 이처럼 벌하시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반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품으시고 정당하게 이 변절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여로보암도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왕국의 일부를 빼앗기 위해 대적을 일으키셨다고 성경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왕상 11:23).

독자들은 이들 두 사실을 주의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백성들이 한 왕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열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선지자는 예언과 기름 부음을 통해 아무런 생각도 않고 있는 여로보암의 마음에 왕국 계승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확실히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바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명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반역은 정당하게 정죄되고 있다. 저들이 정죄된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반대하여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후 르호보암이 백성의 소원을 거만하게 멸시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왕상 12:15). 신성한 통일이 분열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열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떠났는가를 유의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이와 비슷한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즉, 아합의 아들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후손이 모두 멸절당한 것은 백성들의 동의, 곧 저들의 조력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왕하 10:7). 참으로 예후는 "여호와께서……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 10:10)라고 진실 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미라의 백성들이 이 일을 도와준 데 대해서 꾸짖고 있다.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왕하 10:9)라고 그는 묻고 있다. 만일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동일한 행동에 인간의 죄가 나타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빛나고 있는가를 나는 이미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답변만으로도 언제나 충분할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내어 주셨으며 유다는 주님을 관헌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어째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근거에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527)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충동에 따라 불법을 저지르는 때에도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장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불만을 가진다면, 그들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시되 그들의 공적에 따라 보응하시니, 어느 누가 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528) 그리고 확실히 유다의 반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를 내어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범죄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구속의 명예를 유다에게 돌리는 것에 못지않게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이 심문에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혹은 무엇을 하였던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였던가이며,529) 그리하여 그들의 계획과 의지를 참작하려 하셨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이것이 조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력을 초월한다고 해서 성경이 명백히 입증하는 진리를 거절한 점에 있어서 자신의 완고함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를 잠시나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셨다면, 결코 예언자나 사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선포되는 것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비난하지 않고 공손하며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만하게 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떠들고 있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이 이상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여 반박할 가치가 없다.

 
제 2 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 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 장  아담의 타락과 반항으로 전 인류가 저주에 떨어지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 원죄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 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면 자기 자만이 없어진다. 1-3)

1.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530) 옛날 격언이 역설한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사에 대한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수치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어떤 필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비참하게도 자기기만에 빠지고 심지어는 눈뜬 소경이 된다는 것은 더욱이 혐오스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교훈은 정말로 귀중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를 더 이상 악용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이것을 악용하여, 자기 자신을 알라고 권하면서 자기의 가치와 우수성을 아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을 허망한 자신과 자만을 부풀게 만드는 것만을 자기 속에서 관찰하기를 바란다(창 1:27).

그러나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선천적인 우수성이 원래의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얼마나 위대했을까를 아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것이 조금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묵인 하에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알 때에 우리의 모든 자랑과 자기 확신이 사라지게 되며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하게 되고 수치심으로 위축될 것이다. 태초에 자기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창 1:27) 우리의 마음속에 선에 대한 열의와 영생에 대한 명상을 넣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수(野獸)와 구별하는 인류의 위대한 고귀성이 우리의 우둔함과 미련으로 인하여 매몰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과 이해력을 부여 받은 것을 감사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을 함으로써 궁극적 목표인 복된 영생을 향하여 매진해야 한다.

그러나 최초의 우수성을 생각할 때, 반드시 그것과 대조되는 우리의 추악하고 부끄러운 상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사람과 함께 우리는 원상태에서 타락한 것이다. 이 일이 근원이 되어 우리 자신에 대한 중오심과 불쾌감, 그리고 동시에 진정한 겸손이 생기며, 이로 인하여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선을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새로운 열정의 불길이 일어난다.

2. 인간의 본성은 천성적으로 거짓된 자기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자신을 반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서 자기의 능력을 믿는 모든 것들 빼앗으며 자랑할 만한 모든 것들을 빼앗고, 우리를 순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지혜와 행동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 수치심으로 우리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참한 빈곤과 수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의 선한 특징들을 생각하게 하는 원칙이 얼마나 유쾌한 것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은 다른 사람에게 아첨을 받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자신의 천성이 높이 평가되는 것을 알 때에 사람들은 자기의 천성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 점에서 대개 씻을 수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맹목적인 자애(自愛)는 모든 인간의 천성이므로, 자기들의 천성에는 가증하다고 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장 자연스럽게 믿어 버린다. 따라서 사람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할 풍부한 능력을 타고 났다는, 이 완전히 허망된 견해가 아무 외부의 지지가 없어도 일반적으로 자기 스스로 신뢰를 얻는다.531) 비록 비교적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하나님께도 조금은 양보를 해서 만사를 자기의 공로라고 하지 않는 듯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공로를 분배한 결과에는 자랑과 과신의 근거가 여전히 그들 자신에게 있게 된다.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 박혀 있으며,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 언행을 가장 기뻐한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대중 앞에서 인간성을 가장 듣기 좋은 말로 찬양한 사람의 말을 사람들은 듣기를 좋아하고 그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인간의 우수성에 대한 이런 예찬이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것은 자기도취 이외의 아무 성과도 없으며 참으로 거기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속여 결과적으로 철저한 파멸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모든 허탄한 보장을 믿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숙고하며 계획하고 시험하며 착수할 때에, 우리가 노력을 시작하자마자 건전한 이해력과 진정한 덕성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없어지며, 그래도 경솔한 돌진을 계속해서 드디어 멸망에 빠진다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끝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특징만을 생각하라고 하면서 우리를 만류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인식이 향상되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최악의 깊은 무지 속으로 빠질 것이다.

3. 자기 인식에 대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요 문제

그러므로, 지혜의 둘째 부분은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는 인류의 공통된 판단과 하나님의 진리는 일치한다. 그러나 그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상의 큰 차이가 있다. 육신적인 판단에 의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아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의 이해력과 정직함만을 믿고, 담대하게 덕을 닦으려고 노력하며 모든 죄악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탁월하고 존귀한 경지를 향해서 정성껏 노력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를 세밀히 검토하는 사람은 결코 용기와 자신을 과신할 이유를 찾아 낼 수가 없다. 자기 성찰이 깊어 가면 갈수록 더욱 낙심하며, 드디어는 일체의 자신을 맡기고 인생을 바르게 지도해 줄 것이 자기에게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시조 아담에게 주시고 또 참으로 우리의 가슴에 의와 선을 향한 열정을 불러일으킬 우리의 본래의 고귀성을 잊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는, 우리의 처음 상태나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영생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우리의 교만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을 꺾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러면 최초란 무엇인가? 우리의 타락 이전의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의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무리와는 완전히 멀어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처지가 싫어 신음하며 신음 중에서도 저 잃어버린 고귀성을 사모한다.532) 그러나 사람은 자기 안에서 기뻐할 원인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에게 믿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동의를 한다면, 이제 우리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인식을 분류해 보자.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533) 무슨 목적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지식에 힘입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내세 생명에 대하여 명상할534)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부족함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 부족함을 알게 될 때에 사람들은 극도의 정신적 혼란으로 땅에 엎드릴 것이며, 끝내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될 것이다. 첫째 점을 고려하면 자기의 의무의 성격을 인식하게 되며, 둘째 점에서는 그 의무를 실천하려는 자기의 능력의 한도를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교훈을 절차가 요구하는 대로 각각 논하겠다.

(담의 죄로 인간이 최초에 하나님께 받은 것을 상실하였고 전 인류 파멸을 가져왔다. 4-7)

4. 타락의 역사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창3장) : 믿음이 없음

하나님께서 엄한 벌을 주신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니라 흉악한 범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야기시킨 아담의 이탈에는 어떤 종류의 죄가 있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아담의 죄를 탐욕에 의한 무절제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유치하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과실을 먹지 않는 데 최고의 미덕이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다. 그때의 축복받은 그 기름진 땅에는 여러 곳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로 풍성했고 또한 풍성했을 뿐만 아니라 즐길 수 있는 종류도 굉장히 많았을 텐데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깊이 고찰하여야 한다. 아담의 복종심을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아담에게 자신이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었다. 나무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하나님 명령의 유일한 목적은 그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악한 정욕으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바랄 수 있다고 한 약속과 그와는 반대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맛보기만 하면 죽음이 있으리라고 한 무서운 경고가 그의 믿음을 시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여 벌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참으로 교만이 모든 악의 처음이었다는 어거스틴의 단정은 옳다.535) 사람이 자기의 처지에 만족하고 바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태초의 상태에 머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기록한 유혹의 성격에서 보다 완전한 정의를 얻어야 한다. 부정한 생각이 있었기에 여자는 뱀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그러므로 불순종이 타락의 시초였다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다. 바울도 이 점을 확인하고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 5:19).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목해야 할 점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반역한 것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에 빠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진실을 무시하고 허위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의 존엄 또한 우리 사이에 거하시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경배도 여전히 완전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불순종이 타락의 근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로 야심과 교만이 배은망덕과 함께 생겨났으니, 아담은 받은 것 이상을 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신 그 위대하고 풍성한 은혜를 파렴치하게 경멸했기 때문이다. 흙의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도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지 않는 것을 사소한 일로 보았으니 이 얼마나 해괴하고 흉악한 태도였는가!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이의 권위를 멀리하는, 아니 오만하게 자기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그 변절이 추악하고 가증한 죄라면, 아담의 죄를 관대히 보려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비루한 결단과 결합한 것이었다.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하나님을 중상모략하여 하나님에게 허위와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한 데 찬동한 것이다. 끝으로, 배신으로 인하여 야심이 생겼으며 야심은 참으로 완강한 불순종의 모태가 되었고, 그 결과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린 사람은 정욕이 이끄는 대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그 때에 사탄에게 귀를 열어 주었기 때문에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참조, 렘 9:21), 오늘날 우리가 같은 창문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 앞에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는536) 버나드의 가르침은 옳다. 왜냐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도 결코 거역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굴레는 다른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종은 일이라는 생각과 행복한 생활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러한 좋은 굴레가 된다. 그러므로 아담은 악마의 모독적 언사에 휘말려 한껏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소멸시킨 것이다.

5. 제일 첫 번째의 죄가 원죄이다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을 말한다. 아담이 하늘과 땅의 전체적인 자연 질서에 위배했을 때, 그 반역으로 인해서 인류를 파멸에 다다르게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롬 8:22)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롬 8:20). 원인을 찾는다면,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은 확실히 사람이 받을 벌의 일부분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전체에 편만한 저주는 아담의 죄에서 흘러 퍼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퍼지더라도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저 하늘 형상이 그에게서 없어진 후에 이 벌-처음에 그를 훌륭하게 장식했던 지혜와 힘과 성결과 진실과 공의가 없어지고 그 대신에 무지와 무력과 불결과 허영과 불의 등의 가장 추악한 병들이 생겨난 벌-을 받은 것은 그 사람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후손까지도 끌어넣어 같은 불행에 잠기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물려받은 부패이며, 이것을 교부들은 "원죄"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죄"라는 말은 본래의 선하고 순수했던 본성을 잃어 버렸다는 뜻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많은 분쟁이 있었다. 한 사람의 죄책으로 모든 사람이 그 죄책을 맡게 되어 죄가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상식과 가장 거리가 먼일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초대 교부들의 언급이 모호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적어도 그들의 설명은 충분한 설명이 부족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Pelagius)는 겁내지 않고, 아담의 죄는 그 자신의 손실을 초래했을 뿐 후손은 해하지 않았다는 모독적인 망상을 들고 나섰다.537) 사탄은 이 궤변을 가지고 이 질병을 덮어 가리워서 고칠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처음 사람으로부터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가 전달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증명되자(롬 5:12), 펠라기우스는 그 전달은 모방에 의한 것이지 번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므로 선한 분들이(그 중에서도 특히 어거스틴이) 우리는 외부에서 나타난 사악으로 인해서 부패한 것이 아니라 모태로부터 타고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538) 이점을 부인한다는 것은 지극히 파렴치한 짓이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외 무리가 모든 다른 점에서 파렴치한 짐승들이었다는 것을 저 거룩한 분의 경고에서 깨닫는 사람은 그들의 무모한 태도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은(시 51:5)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그는 자기의 부모의 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인애를 더욱 칭송하기 위해서, 자기는 잉태된 때부터 악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에게만 있는 일이 아님이 분명하며, 따라서 그는 인류의 공통된 처지를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순종한 씨의 후손인 우리는 날 때부터 죄에 전염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웠고 오염이 많았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욥기서에서 말하고 있다(욥 14:4).

6. 원죄는 모방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다

부모의 불결이 자녀들에게 전달되어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출생할 때부터 이미 오염되어 있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조상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천을 찾지 않는다면 이 오염의 시초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은 시조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뿌리였으며 따라서 그가 부패한 때에 인류가 당연히 부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해서 이점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9).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되었다(롬 5:17). 이런 관점에서 펠라기우스파들은 어떤 어리석은 주장을 할 것인가? 아담의 죄가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그 의가 우리 앞에 모범을 보이고 우리가 그것을 모방하기 때문인가? 누가 이런 모독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와 그에 따른 그의 생명이 전달 또는 나누어져서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이 논의할 여지가 없는 일이라면, 의와 생명은 아담에게서 상실되어 졌다가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는 결론이 따른다. 또 죄와 죽음은 아담을 통해서 은밀히 들어왔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없어진다는 결론이 따른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말은(롬 5:19) 결코 모호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보면, 아담은 우리를 자기의 멸망에 끌어넣어 자기와 함께 멸망하게 만들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은총으로 우리를 다시 구원해 주신다.

이렇게 진리의 빛이 투명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더 이상의 길고 자세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진 생명이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전 15:22). 그는 우리가 모두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죄의 병에 전염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불의의 책임이 없는 사람에게 정죄가 미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 발언의 다른 부분으로, 거기에서 그는 생명을 얻을 희망이 그리스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일이 나타나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의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그 놀라운 교제뿐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롬 8:10). 따라서 "우리는 아담과 함께 죽었다"라고 하는 말은 해석할 길이 하나밖에 없다. 즉,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불행과 멸망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까지도 같은 파멸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죄책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죄책은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며 그가 빠진 그 부패를 모든 후손에게 감염시켰기 때문이다.

바울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한 것은(엡 2:3), 모든 사람이 이미 모태에서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바울이 "본질"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가 아니라 분명히 아담에게서 부패한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죽음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가장 부당한 생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를 부패시키고 그것이 모든 후손에게까지 감염되고 만연된 것이다. 우리의 하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악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 3: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는 모두 그 앞에 생명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신다(요 3:5).

7.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죄

오염은 주로 영혼에 있는 것이므로, 자식의 영혼은 아버지의 영혼에서 유전된539) 것이냐고 하는 문제는 무척이나 교부들을 괴롭혔는데,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써 논의할 필요는 없다. 주께서 인간성에 부여하시고자 하신 은사들을 아담에게 위탁하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야담이 그 받은 은사들을 잃었을 때에, 자신만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은사는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받은 것이며, 그 은사는 한 사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주셨다는 말을 들을 때에 누가 영혼의 전이에 대해서 의심할 것인가? 그러므로 아담이 타락했을 때에 인간성이 벌거숭이가 되고 빈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아담이 죄에 전염되었을 때에 감염이 인간성에 잠입했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다. 썩은 뿌리에서 썩은 큰 가지가 나왔으며 여기서 나온 작은 가지에 부패가 전달되었다. 이와 같이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했고 자녀는 다시 그 후손에게 대대로 병을 옮겨 주었다. 바꿔 말하면, 아담에게서 시작한 부패는 선조로부터 후손에게 전달되어 끊임없이 흘러간 것이다. 전염은 육이나 영혼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염은 처음 사람이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후손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천품을 가지며 또 잃어버리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다.540)

자녀는 부모의 순결에 의해서 거룩하게 될 것이므로(참조, 고전 7:14), 경건한 부모에게서 자녀가 부패를 이어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펠라기우스파는 말한다. 그러나 이 궤변에 대한 논박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녀는 부모의 영적 중생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육적 번식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541)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사람은 썩은 본성에서 자녀를 낳기 때문에 무죄한 자녀가 아니라 유죄한 자녀를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느 정도 부모의 성결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받은 보편적 저주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책은 자연에서 오고 성결은 초자연적 은총에서 오기 때문이다.

(원죄는 본질이 타락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질에서 온 것은 아니다. 8-11)

8. 원죄의 본질

불확실한 일,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원죄의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자.542) 나는 여러 저술가들이 제시한 여러 가지 정의들을 연구하려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보기에 가장 진리에 맞는 듯한 것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에 "육체의 일"(갈 5:19)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울이 자주 죄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나오는 행위, 예컨대 간음, 우상 숭배, 도둑질, 미움, 살인, 열락 등을 그는 "죄의 열매"(갈 5:19-21)라고 부른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행위를 보통 "죄들"이라고 부르며, 바울 역시 그렇게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어느 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한 정죄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범행으로 인하여 받는 책임이 아니다.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죄 없고 책임 없는 우리가 아담의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가 그 저주에 함께 말려들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한 심판이 우리에게 왔으며, 또한 그가 전염시킨 것이 우리 안에 있어서 이것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거스틴은 죄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 사이에 전파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 죄를 자주 "타인의 죄"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죄는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543) 사도 바울도 가장 명쾌하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증언한다(롬 5:12). 즉, 그들은 원죄에 빠져 쌓였고 그 오점들로 더럽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젖먹이들까지도 모태에서부터 저주를 받았지만 그 책임은 다른 사람의 허물이 아니라 자기의 허물에 있는 것이다. 아직은 그들에게서 불의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불의의 씨는 그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본성 전체는 죄의 하나의 씨앗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죄로 인정된다는 결론이 된다. 허물이 없으면 처벌도 없을 것이다.

둘째,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이미 앞에서 언급된 육의 일을 하는-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시초의 의의 결핍"을 원죄라고 정의하는 사람들은 이 용어의 의미를 전적으로 이 정의에 포함시키지만 그 위력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544) 이것은, 우리의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결코 그냥 있도록 놔두지 않는 각종 악을 생산할 능력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원죄를 "육욕"이라고545) 말한 사람들은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사람에게 있는 것은 이해력으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또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육욕으로 더럽혀지고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보다 전적으로 인간은 육욕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첨부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9. 죄는 전 인류를 전복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고 나는 말한다. 저속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의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마음속 깊은 밑바닥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나타나는 부패를 소위 감각적 충동에 국한시키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또는 그 부패를 "불쏘시개"라고 부르며,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감성" 부분만을 유인 선동해서 죄에 끌어넣는다고 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완전한 무지를 폭로했다. 그는 부패가 있는 자리를 찾아내는 데 있어서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에 있다고 말하면서 육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 아니고 육에서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546) 이것은 마치 바울이 영혼의 본성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만이 초자연적 은총에 반대한다고 가르쳤다는 말과 같다. 바울은 부패는 영혼의 일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는 치명적인 들지 않은 순결한 부분은 없다고 가르치면서, 이 점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부패한 본성을 논할 때에, 눈에 보이는 욕망의 과도한 충동을 비난한 뿐만 아니라 특히 지성의 눈이 멀고 마음이 썩어 버렸다고 주장한다.547)

로마서 3장은 단지 원죄에 대한 것을 나타나게 한 것에 불과하다(1-20절). "새롭게 함"에서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영은 옛 사람과 육에 반대하며, 영혼의 저속한 감성적 부분을 시정하는 은총을 표시할 뿐 아니라 모든 부활의 완전한 개혁을 포함한다. 따라서 바울은 동물적 욕망을 없애라고만 명령하지 않고 거기에 더하여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요구한다(엡 4:23). 다른 곳에서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같은 권고를 한다(롬 12:2). 그러므로 영혼의 탁월함과 존귀성이 특히 빛나는 부분이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심히 부패하기까지 해서 치유를 받으며 새로운 본성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된다. 우리는 죄가 어느 정도로 지성과 심정을 모두 점령했는가를 곧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인간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만을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바울의 말과 같이, 육으로 향하는 생각은 모두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롬 8:7), 따라서 사망인 것이다(롬 8:6).

10. 죄는 우리의 천성이 아니고 우리의 천성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자기들의 허물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사람들은548) 물러가도록 하라. 아담의 상하지 않고 부패하지 않은 본성에서 하나님의 작품을 찾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의 부패속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우리의 멸망은 하나님이 원인이 아니라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처음 상태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을 미리 예방하셨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더 잘 마련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서 불평해서는 안 된다.549) 이런 반론은 뚜렷한 지나친 호기심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경건한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점은 후에 적당한 곳에서550) 논하게 될 예정의 비밀과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멸망한 원인을 본성이 타락한 데 돌리는 것을 잊지 말고 본성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그 분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이 치명적 상처가 본성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처가 외부로부터 온 것인가 또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죄로 인하여 상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것에 불평을 돌릴 이유가 없다. 성경은 이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 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전 7:29). 분명히 인간의 멸망은 그 책임을 인간에게만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었음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허무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1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성"의 "자연적인" 부패

그러므로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부패했지만 본성에서 타락이 유래 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주장한다.551) 우리는 그 타락이 본성에서 흘러 온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래 된 첨가된 성질이라는 것을 가리키려고 한다. "선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타락이 거의 상속권과 같이 모든 사람을 속박하고 있으므로 악행에 의해서 얻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2:3). 자기가 지으신 가장 작은 것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을 적대시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자체가 아니라 피조물의 부패를 미워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이 올바른 것이라면,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락했으며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 관련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없는 곳에서 우리의 육을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죄들을 "선천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552) 그리하여 마니교도들의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은 소멸된다. 그들은 사람에게 약한 본질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악의 원인과 시초를 의로우신 하나님께 돌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목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감히 다른 조물주를 만들었던 것이다.553)

제 2 장  이제 인간은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참한 노예의 신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논제의 위험성들 : 관점을 수립. 1)

1. 이제부터 우리는,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사로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가 노예 상태로 전락한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아니면 자유가 아직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과연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아야겠다. 그러나 이 문제의 진상를 보다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제 나는 논의 전체가 향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겠다. 오류를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양쪽에서 오는 위험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⑴ 인간은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전혀 없다고 들을 때에 즉시 이 사실을 구실로 자기만족에 빠진다. 자력으로는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듣기 때문에, 그런 추구는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듯 외면해 버린다. ⑵ 인간에게 사소한 것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며, 사람은 파렴치한 자기 과신으로 인하여 파멸하게 된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 위험성 모두를 지적한다.554)

이같은 두 위험에 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혀 없으며 심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는 편이 그의 천품에 최고의 고상한 덕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태만한 그를 더 날카롭게 자극하며 분발시킬 수 있다. 이 둘째 점의 필요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첫째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나는 본다. 인간이 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자랑을 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가장 고귀한 영예의 표시들이 뚜렷했을 때에도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그 자신의 배은망덕으로 말미암아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서 극도의 치욕된 상태로 떨어진 지금은 더욱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최고의 영예의 최정상에 올라 있을 때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점밖에 사람에게 돌린 것이 없다(창 1:27).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선행들로 인해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았을 때에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으며, 받은 축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잃어버린 지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며 적어도 자기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555)

또한, 우리의 지혜와 덕목에 대한 신뢰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동시에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그러므로 진실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는 사람들은 우리의 파멸에 신성 모독을 첨가하는 사람이다. 만약 우리의 자신의 힘으로 싸우라고 가르치는 것은 갈대로 우리를 높이 드는 것과 같아서 갈대와 비교하는 것조차 과대평가인 것이다. 이런 일들에 대하여 허망한 사람들이 생각하고 지껄이는 것은 모두가 연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반복해서 자유 의지는 옹호자들에게서 힘을 얻기보다는 그들에게 짓밟히는 편이 더 많다는556) 매우 타당한 말을 하곤 했다. 이 점은 서론의 의미로 말해 둘 필요가 있는데, 사람 안에 하나님의 힘을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이 밑바닥에서부터 뿌리 뽑혀져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이들은 이런 논쟁은 쓸데없다고 하지는 않더라고 전적으로 위험한 것이라고 해서 심히 싫어하기 때문이다.557)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근본 문제인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고 생각된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 의지론에 대한 비판. 2-9)

2. 철학자들은 이해력을 신뢰한다.

위에서 우리는 영혼의 능력은 지성과 심정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므로,558) 이제 이 두 부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겠다. 철학자들은, 거룩한 빛이 가득하여 가장 효과적인 의견을 알리며, 우월한 힘이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이 지성 안에 있어서 등불과 같이 모든 생각을 비추며 왕과 같이 지배한다고 상상하는데, 이 견해는 그들 사이에서 대체로 분명하게 일치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감각에 의한 지각은 우둔하며 보는 것이 희미해서 항상 땅에서 기어 다니고 저속한 일에 얽매이며 결코 진정한 식별을 하는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고 상상한다. 만일 욕망이 이성에 복종하고 감성에 굴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덕을 추구하게 되고 바른 길을 계속하며 의지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감성의 노예가 될 때, 그 욕망은 감성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타락하여 마침내 정욕으로까지 전락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559)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내가 위에서560) 말한 능력들은 지성과 감각과 욕망 또는 의지(이 마지막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영혼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들은, 지성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은 선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주도적인 원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성은 그 자체의 우수성을 견지하며 자연이 부여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저 저속한 충동에 대하여서는, 감성은 사람을 오류와 망상으로 이끄는 것이지만 이성의 채찍으로 길들이며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엇보다 철학자들은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

때때로 인간이 자기 안에 이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심히 어려운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간은 쾌락의 유혹을 기뻐하며 혹은 행복에 대한 망상에 속기도 하고 혹은 무절제한 기호의 습격을 받아, 플라톤의 말과 같이,561) 여러 밧줄에 매인 듯 여러 방향으로 끌린다. 따라서 우리의 악한 견해와 악한 관습으로 인하여 자연이 우리에게 준 희미한 빛이 곧 꺼져 버린다고 키케로는 말한다.562) 이런 병들이 일단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그때는 아무도 그 맹렬한 힘을 쉽게 억제할 수 없다고 철학자들은 인정한다. 그들은 서슴지 않고 이 병들을 사나운 말에 비교한다. 병거를 모는 사람이 병거에서 떨어지듯이 이성이 혼란될 때에 이 병들은 아무런 억제도 받지 않고 마구 날뛴다고 한다.5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능력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면 그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말한다. 또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능력에 달렸다면 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유 선택으로, 우리는 하는 일을 하고 피하는 일은 피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싶을 때에 어떤 선한 일을 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어떤 악을 행한다면 그것을 피할 수도 있다.564) 참으로 어떤 철학자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신들의 선물이지만 우리가 선하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방자하게 호언하기까지 한다. 또한 코타(Cotta)의 입을 통하여 키케로가 한 말도 여기에서 왔다. "사람은 모두 자기 힘으로 덕을 얻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 결코 그 현명한 것을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한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의 덕에 대하여 칭찬을 받으며 자기의 덕을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이고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는 말한다. "행운은 하나님께 구하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다."565) 그러므로 모든 철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지도자인 이성에 따르며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

4. 일반적으로 교부들의 생각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자유의지를 인정했다. 자유 의지란 무엇인가?

교회의 저술가 모두가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있는 이성의 건정성에 중대한 손상이 있었으며, 악한 욕망으로 인하여 의지가 심한 노예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지나치게 철학자들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도 많이 있다.566) 그중에서 초기 사람들이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과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본다. 첫째로, 인간의 무력을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철학자들의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둘째로, 선에 대해서 이미 무관심한 육체에게 나태할 새로운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567)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식적 판단으로 어리석게 생각될 것을 가르치지 않기 위하여, 그들이 성경의 교리와 철학자들의 신념을 조화시키려고 타협시켰다. 그러나 둘째 점, 즉, 나태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점에 그들은 특히 유의했다. 이 점은 그들의 말에서 나타나 있다. 어디선가 크리소스톰도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우리의 권한에 맡기셨으므로 우리에게 자유로운 결정과 선택을 허락하시며 원하지 않는 사람을 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사람으로 받아 주신다." 또, "악한 사람도 원하기만 하면 선한 사람으로 변하는 일이 많으며, 선한 사람도 나태해서 타락하여 악하게 된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본성에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연성을 부담시키시지 않고 적당한 치료법을 제공하시며 모든 것을 환자 자신의 판단에 맡기신다." 또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일도 바르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몫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 은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움에만 의지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도 동시에 바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많이 쓴 표현 중의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것을 드리자. 그러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이다"하는 표현이다.568) 제롬도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우리는 시작할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신다. 우리는 힘써드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569)

확실히 이런 발언들은 덕에 대한 인간의 열의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오직 나태하기 때문이라고 논하지 않으면 우리가 타고난 나태를 분발시킬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이 일을 했는가는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인용한 이 의견들이 전혀 거짓이라는 것도 조금 뒤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도 교부들 특히 크리소스톰이 인간의 의지력을 찬양하고 있는데,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고대 교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주장이 다르며 혹은 동요하고 또 혼란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확실한 것을 얻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각 사람의 의견을 정확하게 나열하지 않고,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점만을 여기저기서 무작위로 인용할 것이다.

그들의 후대의 다른 저자들은 각각 인간성을 교묘하게 옹호하노라고 자랑하고자 했지만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사람은 감성부분에서만 부패하고 이성은 완전무결하며 의지 또한 대부분 손상이 없다고 하게 되었다.570) 동시에 "사람의 자연적인 천품은 부패되었지만 초자연적인 천품은 제거되었다"571)고 하는 그 유명한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나도 본성의 부패상을 분명하게 가르치고자할 때에는 이 말로 만족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초자연적 능력도 빼앗긴 그 사람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주의 깊게 고려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한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너무도 철학자들과 같은 말을 했다. 라틴 사람들은 인간이 여전히 올바른 것같이 항상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헬라 사람들은 더욱 외람된 말을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람은 각각 자기 손에 힘을 쥐고 있는 것처럼, 자력 또는 자주라고572) 불렀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천품으로 받았다는 원칙을 모든 사람이 일반 민중까지도 믿었다. 그러나 명성을 원하는 일부 사람들도 이 원칙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말의 영향력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성경의 단순한 증언에 의해서, 인간은 그 본성에 따라 선악간 어떤 가능성이 있는가를 결정하겠다.

모든 사람의 글에 자유 의지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지만 그것을 정의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교회 저술가들은 오리겐이 제출한 정의에는 찬성하는 듯이 보이는데, 오리겐은 자유 의지는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며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이라고 말했다.573)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을 자유 의지라고 한 어거스틴도 오리겐과 의견이 다르지 않다.574) 베르나르두스는 자유 의지를 정교하게 말하고자, "의지의 불멸의 자유와 이성의 틀림없는 판단 때문에" 그것은 "찬동"이라고 더욱 모호한 말은 했다.575) 안셈의, "공정을 위한 공정을 유지하는 능력"이라는 유명한 정의도 그다지 명백하지 못하다.576) 그 결과롬바르드와 스콜라 학자들은 어거스틴의 정의를 더 좋아했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의 정의가 더욱 분명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총이 없으면 의지는 자체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생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더 좋거나 혹은 설명을 더욱 자세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첫째, 선악을 구별하는 것은 이성이 하는 일이며 따라서 의지라는 명사는 이성을 가리키는 데 써야 한다고 그들은 의견을 일치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이라는 형용사는 좌우 어느 쪽이든 택할 수 있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577) 그리하여 토마스는, 원래 자유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자유 의지는 "선택 능력" 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으로 생긴 것이지만 보다 욕구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한다.578) 이제 우리는 그들이 자유 결정의 힘이 있는 자리라고 가르치는 곳이 어느 곳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이성과 의지인 것이다. 그들이 이 두 가지에 각각 얼마를 돌리는가를 보는 것이 우리가 다음에 할 일이다.

5. 교부들이 생각한 "의지"와 "자유"는 여러 가지였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지 않은 중간적인 것을579) 대개 인간의 자유로운 의견에 속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돌렸다. 이 점에 대하여 '이방인의 소명'이라는 저서의 저자는 감성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의 세 가지로 의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의 두 가지는 인간이 넉넉히 받았으며 마지막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친다.580) 이것이 옳은 생각인지는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 지금은 단지 다른 사람들의 발언만을 반박 없이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먼저 사회 활동 또는 외부적 활동을 위해서 자유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한 것이다. 나는 이 둘째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보지만 처음의 문제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 자신의 의견을 잘 표명하게 될 것이다.581) 그런데 스콜라 학자들은 세 가지 자유를 구별하여, 첫째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 둘째는 죄로부터의 자유, 셋째는 불행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한다. 처음 것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것이므로 결코 빼앗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는 죄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다.582) 나는 기꺼이 이 구별에 찬성하지만, 필연성과 강제를 혼동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 차이점의 범위와 이것을 염두에 둘 필요성은 다른 곳에서 밝혀질 것이다.583)

6. "역사하는" 은혜와 "협력하는" 은혜란?

만약 이것을 인정한다고 할 때, 사람이 선행을 할 수 있으려면 자유 의지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은총, 즉, 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는 특별 은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은총은 평등하고 아무에게나 차별 없이 분배된다고 하는 광신자들에584) 대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인간은 이 선을 행할 힘을 완전히 박탈당하였는지 빼앗겼는지, 아니면 비록 미약하지만 아직은 다소의 힘이 남아 있는가 하는 문제, 곧 자체만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은총의 도움을 얻으면 자기 몫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다. 명제집의 저자는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은총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처음 종류를 "역사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선을 행하려는 뜻을 효과적으로 가지도록 마련하다. 둘째 것을 "협력하는" 은총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하나의 보조로서 선한 의지를 따른다.585) 이 구분에서 내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선에 대한 효과적인 욕망을 하나님의 은총에 돌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 효과적이 되지 못하는데 도선을 추구한다고 암시하는 점이다. 그리하여 베르나르두스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단정하면서도, 인간은 자기의 충동으로 이런 종류의 선한 의지를 추구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롬바르드는 어거스틴에게서 이 구별을 얻어 왔노라고 하지만.586) 이 생각과 어거스틴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부분 또한 애매모호하여 부패한 해석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나는 싫어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조하는 은총과 우리가 협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 은총을 멸시함으로써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든, 그렇지 않고 그것에 복종해서 확인하든지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방인의 소명의 저자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성의 판단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은총을 버릴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버리지 않는 것이 바로 공로가 되는 행위이다. 그리고 성령의 협력이 없이는 할 수 없었을 일이, 자기의 의지로는 할 수 없었을 사람들의 공로로 인정된다."587) 내가 이 두 가지 점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 것은, 독자 여러분으로 하여금 비교적 건전했던 스콜라 학자들과 나의 생각에 얼마나 많은 차이점이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우리와 더욱 가까운 시대의 궤변가들은,588) 그들이 고대에서 더욱 멀어졌기 때문에 나와의 차이가 더욱 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에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유 의지를 사람에게 인정하는가는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을 행하거나 생각하는 능력이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강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롬바르드는 마지막으로 단언한다. 롬바르드에 의하면, 비록 우리가 악해서 죄의 노예가 되었고 또 죄를 짓는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경우라도 이 자유는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589)

7.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제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은 자유 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자유 결정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선과 악을 선택하는 힘을 동등하게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강요를 받지 않고도 자기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것에 훌륭한 이름을 붙여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이 강제로 죄를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원해서 노예가590) 되었으며, 인간의 그 의지는 죄의 족쇄로 묶여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귀한 자유인가? 사실 나는 말다툼을591) 몹시 싫어하며, 그 말다툼으로 교회는 쓸데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뜻이 있는 말과, 특히 치명적 오류와 관련된 말을 피하는 데는 신중하기로 나는 굳게 결심했다. 나는 묻고자 한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의지의 주인공이며 자기의 힘으로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자는 일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열심히 경고하기만 하면 이런 위험성은 제거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허위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람의 성향이며, 긴 강화에서 진리를 깨닫기보다는 한 마디 말에서 오류를 얻는 편이 더 빠른 것이다. 우리는 자유 의지라는 이 말에서 너무도 확실하게 이런 경험을 한다. 고대 저술가들의 뒤를 이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배들의 해석을 무시하고 이 말의 어원적 의미에만 집착하여 파멸적인 자신에 빠지고 말았다.

8. 어거스틴의 "자유 의지론"

교부들의 권위가 우리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항상 이 말을 쓰면서 동시에 이 말에 대한 그들의 해석도 분명하게 밝혔다. 우선,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한다.592) 다른 곳에서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그 주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직 어느 누구도 감히 의지의 결정을 부정해서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593)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욕망이 수갑을 채우고 정복했기 때문이다."라고594) 분명하게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의지가 죄악에 빠져 정복을 당했을 때에 인간의 본성은 그 자유를 잃기 시작했다.595) 또, 인간은 자유 의지를 악용하여 자기와 및 자기의 의지 모두를 잃어 버렸다. 또, 자유 의지는 노예가 되어 그 결과 지금은 의를 행할 힘이 없다. 또, 하나님의 은총이 해방하지 않은 것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또, 율법이 명령하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듯이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지 않지만, 성령께서 돕고 사람의 의지가 비록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에 의해 해방되어 복종할 때에는 하나님의 의는 실현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은 자유 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 버렸다고596) 다른 곳에서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다른 구절에서, 자유 의지는 은총에 의해 확립된다는 것을 밝힌 후에, 은총이 없어도 자기들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맹렬하게 꾸짖는다. "그러면, 어찌하여 비참한 인간들은 자유를 얻기도 전에 감히 자유 의지를 자랑하며, 또는 이미 자유를 얻었다면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것인가? 자유 의지란 말에 자유가 내포된 듯한 사실을 그들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그러므로 그들이 죄의 노예라면, 무슨 까닭으로 그들은 자유 의지를 자랑하는가? 사람은 자기를 정복한 사람의 노예가 된다. 이제 만약 그들이 자유함을 얻었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마치 자기의 노력으로 된 일인 것처럼 자랑하는 것인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분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리만큼 그들은 자유로운가?" 참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이 말의 사용을 조롱하는 듯이 보이다. 그는, 의지가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고, 곧 의로부터는 자유로우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이 말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붙인다. 사람은 의지의 결정에 의해서만 의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구주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한다.597) 사람의 자유는 의로부터의 해방에 불과하다는 그의 단정은 그 어리석은 이름을 적절하게 조롱하는 듯이 보인다. 이 말을 사용하면서도 나쁜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문제를 가지고 그를 괴롭히지 않겠다. 그러나 이 말을 보존하는 데는 반드시 큰 위험성이 따르며 따라서 폐기하는 것이 교회를 위해 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자신은 이 말을 쓰지 않기를 원하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도 이 말을 피하기를 바란다.

9. 교부들 사이에 있는 진리의 음성들

아마 내가 어거스틴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교회 저술가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애매모호한 말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저술에서는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나는 인정했는데 이것이 내게 대한 큰 오해를 일으킬 것 같다. 그들은 모두가 나와는 반대 입장이므로, 내가 그들에게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을 못하도록 빼앗으려고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단하고 성실하게 알려 주려는 것 외에는 내게 아무런 다른 의도도 없다. 이 문제에 대하여, 교부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일반 신자들은 항상 불안 중에서 허덕일 것이다. 때로 이 저술가들은, 인간은 자유 의지의 힘을 빼앗겼기 때문에 은총에서만 피난처를 구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사람에게 자신의 무장을 제공하거나 또는 제공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모호한 생각을 가르치면서도 그들은 인간의 덕성을 없는 것으로 또는 낮은 것으로 평가하였으며, 모든 선행에 대한 공로를 성령께 돌렸다. 그리고 이 점을 증명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나는 분명히 이런 생각을 가르친 발언을 몇 개 소개하겠다. 어거스틴도 자주 반복한 키프리아누스의 말이 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598) 이 말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라고 할 것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과 유케리우스는 생명나무를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면서 이 나무에 손을 내미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선악을 아는 나무를 의지의 결정이라고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 사람이 이 나무 열매를 맛보면 죽을 것이라고 한다.599) 이들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은 모두 날 때부터 죄인일 뿐 아니라 온통 죄덩어리라고600) 하는 크리소스톰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면, 사람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죄악이라면, 그의 의지의 힘에 어느 정도로 효과가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눌 수 있겠는가? 다른 저자들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말을 얼마든지 많이 지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유리한 것만을 택하고 나와 의견의 다른 것을 간교하게 묵살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기에, 나는 이들 증언을 파하겠다. 그러나 나는 감히 단정한다. 간혹 그들이 자유 의지를 지나치게 찬양한 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자기의 덕성에 대한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자기의 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그 진상을 간략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자기 칭찬을 버려야 한다. 10-11)

10. 자유 의지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본장의 서두에서 한 말을 한 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자기의 참화와 빈곤과 벌거벗음과 치욕을 깨닫고 완전히 압도된 사람은, 그렇게 됨으로써 자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이 진보한다는 말이다.601) 인간들이 자기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도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한 그들에게서 자기의 것을 너무 많이 빼앗길 위험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참으로 이 욕망이 우리의 마음에 침입해서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의 것을 찾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때에 우리는 우리의 처음 조상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기를"(창 3:5) 원하라고 권고한 바로 그 모사가 우리에게 이 생각을 암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게 하는 것이 악마의 말이라면, 원수의 조언을 듣고 싶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의 말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기의 힘이 많아서 자기를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 허무한 신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철저하게 꺾어 버리는 중요한 성경 구절에 귀를 기울여 그 만류를 받아야 한다. 예컨대, "무릇 사람이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또, "여호와는 말의 힘을 즐거워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도 기뻐 아니하시고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시 147:10-11). 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29-31). 이 모든 구절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호의를 원한다면 아무리 작은 힘일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약 4:6; 참조, 벧전5:5; 잠3:34).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약속들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3),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이 구절들은, 자기의 빈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으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유사한 구절들도 있다. 예컨대 이사야서에,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 영영한 빛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사 60:19). 틀림없이 주께서는 종들에게서 해와 달의 빛을 빼앗으시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만이 홀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므로, 그들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도 믿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11. 참된 겸손만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 철학의 기초는 겸손이라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은602) 항상 나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나를 더욱 기쁘게 한다. "웅변술의 제일 중요한 원칙은 무엇이냐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어떤 수사학자는 '화술이다'라고 그는 대답했다.603) 그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교훈들을 내게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항상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에서 단정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자기에게 어떤 덕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랑과 교만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겸손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겸손 이외에는 자기가 피난할 곳이 없다고 진심으로 느낄 때에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은 원래 사탄이다. 사람의 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우리 자신의 것은 죄뿐이 아닌가? 너 자신의 것인 죄를 버리라. 왜냐하면 의는 하나님께로서 오기 때문이다." 또, "무엇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인간성의 능력을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거짓된 자기변호가 아니다." 또, "누구든지 자기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에게서는 도움을 얻을 수 없다고 깨달을 때에, 그의 안에 있는 무기는 파기되고 전쟁은 끝이 난다. 모든 불경건의 무기를 우리는 부수고 태워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무기도 갖지 않은 상태로 있어야 하며 우리 자신 안에 아무 도움이 없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힘이 약해질수록 주님께서는 더욱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편 70편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의를 알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의를 기억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밝힌다. 결국 우리 자신은 죄악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만 설 수 있다고 한다.604)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대하여 하나님과 대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만큼 우리의 행복이 손상을 입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낮음을 고백하는 것은 그의 자비의 힘입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아직 아무런 확신도 없는 사람이 기꺼이 굴복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겸손에 자기를 굴복시키기 위하여 그 능력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자애와 야심이라는 병을605) 버리라고 요구할 뿐이다. 이 병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둡고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다(참조, 갈 6:3). 오직 나는, 이 병을 버리고 성경이라는 진실한 거울 속에서 비추어 자기를 바르게 인식하라고 요구할 뿐이다(참조, 약 1:22-25).

(인간의 천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 오성 12-17)

12. 초자연적인 천성들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성들은 타락했지만, 인간을 야만적인짐승과 구별할 만한 충분한 이성은 남아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의견이 상식화된 것을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 그 의견은 사람의 자연적인 은사는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서 부패하였으나 초자연적인 은사는 사람에게서 제거되었다는 것이다.606) 이 문장의 후반부는, 하늘 생명과 영원한 복락을 얻는데 충분했을 믿음과 광명의 의를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졌을 때에 동시에 영적 능력, 곧 영원한 구원을 얻을 희망으로 받은 은총을 빼앗겼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쫓겨나 영혼의 축복스러운 생활에 속하는 성질들이 온통 소멸되었으며, 중생의 은총에 의하여 처음으로 회복된다는 결론이 된다. 이런 성질은 곧,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성결 및 의에 대한 열성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회복시켜 주시므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인정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질들은 제거된 것이라고 결론할 수 있다. 그러나 지성의 건전성과 마음의 성실성도 동시에 제거되었다. 이것이 곧 자연적 은사의 부패이다. 오성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며 사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인 이성은 자연적인 은사이며, 따라서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일부분은 부패되어 기형적인 잔해가 남았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한다(요 1:5). 이 말에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표현되었다. 첫째로,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아직도 어느 정도 희미한 빛이 번득인다. 그것을 보면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천부의 이해력이 있다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그러나 둘째로, 이 빛은 짙은 무지가 덮어 질식시키므로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지도 사람의 본성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았지만, 사악한 욕망에 긴밀히 결속되어 있어서 바른 일을 추구할 수가 없다. 이것이 완전한 정의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에 인간의 영혼을 오성과 의지로 구분한 데 따라607)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 먼저 오성의 능력을 검토하겠다.

인간의 오성은 항상 맹목 무지하다고 단죄하며 아무 대상도 지각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역행할 뿐 아니라 상식적인 경험과도 반대된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일종의 욕망이 인간성에 내재한 것을 보며, 이미 그 진리를 맛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그것을 동경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오성은 원래 진리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지각 능력이 있다. 동물에게 이 은사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본성이 둔하고 비이성적이란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 동경은, 그대로 두면 곧 허무한 데 빠지기 때문에 경주에 참가하기도 전에 시들어 버린다. 실로 사람의 지성은 둔감하여, 바른 길을 지속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오류 사이를 헤매며 어둠 속을 더듬는 것같이 자꾸만 넘어지다가 마침내 길을 잃고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성은 진리를 추구하며 발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폭로한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허무에 눌려 가련한 수고를 하고 있는데, 때때로 마땅히 힘써 알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을 탐구하여 자기의 어리석은 호기심으로 괴로움을 당하면서 특히 이해해야 할 문제들에는 전혀 주의를 돌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일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세속 저술가들이 항상 이 타락상을 비난하고 있지만, 그들도 역시 거의 전부가 같은 타락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전도서 전체를 통해서 솔로몬은 사람들이 능통하다고 자처하는 연구 부문들을 열거한 다음에 결국 그것을 모두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단정한다(전 1:2,14, 2:11; 기타).

13. 세상적인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

그러나 오성의 노력은 아무 결과도 없을 정도로 언제나 무가치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608) 특히 아래에 있는 일들에 오성이 주의를 돌릴 때에 더욱 그러하다. 이와는 반대로, 오성은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하려는 관심이 없으면서도 거기에 대하여 다소의 경험을 하는 총명이 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일들을 탐구할 때에는 그 기능이 균등하지 못한데, 지성이 현세의 영역을 넘을 때에는 자체의 무력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지성이 그 능력의 정도에 따라 전진할 수 있는 범위를 더욱 분명하게알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땅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의 일을 이해하는 것이다. "땅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 진정한 공의, 또는 내세의 정복에 속하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현세에 관해서 의미와 관련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현세의 범위 내에 국한되었다. "하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정한 의의 본성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의미한다.

처음 것에는 정치와 모든 기계공작 기술과 문예가 포함된다. 둘째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뜻에 합치하게 하는 원칙에 대한 지식이다.

처음 종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이 사회적 동물이므로,609) 타고난 본능적 충동에 의하여 사회생활을 육성하며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사회생활상의 공정성과 질서에 대하여 보편적인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단체 생활은 모두 법에 의하여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법의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에 관해서는 모든 민족과 모든 개인이 한결같이 합의하게 된다. 교사와 입법가가 없어도, 법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발생하는 분쟁과 충돌에 대해 나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절도범과 강도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모든 법과 권리를 뒤집고 모든 법적 제재를 깨뜨리면서, 자기들의 정욕만이 법으로 행세하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공정하다고 인정한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며(이것은 더욱 흔한 허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금지한 일을 칭찬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사람들이 법을 미워하는 것은, 그 법이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경솔한 정욕에 미쳐서 명백한 이성과 싸우는 것이다. 오성으로는 시인하는 것을 정욕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다. 이러 종류의 갈등은 공정성에 대한 천부의 개념을 말살시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법의 여러 부분에 대하여는 서로 논쟁하면서도 공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지성이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지성은 바른 길을 따르는 듯이 보일 때에도 절름거리며 비틀거린다. 그러나 사회 질서의 씨앗이 모든 사람 속에 심어져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사실은 현세 생활을 정리하는 데는 이성의 빛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한다.

14. 학술과 예술에 관한 오성

다음으로 학술과 예술에 관해서, 우리는 모두 이것을 배울 만한 어느

정도의 적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인간의 총명이 나타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모든 학예를 배우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한 방면에 분명한 재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류의 공통된 능력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어느 한 가지를 배울 힘과 능력뿐만 아니라, 각 방면에서 새로운 것을 고안하며 선배에게서 배운 것을 더욱 연마 완성하기도 하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플라톤은, 이런 이해는 회상에 불과하다고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었다.610)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이해력의 시초가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있다고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는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오성에 보편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 선(善)은 보편적이므로, 여기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의 창조주께서는 저능아들을 창조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이 감사하는 생각을 많이 고취하신다. 하나님의 빛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편만하지 않을 때에 인간의 영혼은 어떤 천품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것을 이들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선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학예를 발견하거나 조직적으로 전수하거나 학예에 대한 오묘하고 탁월한 지식이 있다는 것은 소수 사람들의 특색이므로 이것은 공통한 총명에 대한 증거로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나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과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똑같이 부여되므로 선천적인 능력으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15.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세속 저술가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쓴 것을 보면, 거기에는 진리의 훌륭한 광명이 비치고 있다. 이 광명을 볼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은 비록 그 완전 상태에서 타락하고 부패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훌륭한 능력을 아름다운 옷과 같이 입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그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을 모욕하게 될 것이다.611) 그 이유는 영의 선물을 경시하는 것은 곧 영 자신을 경멸하며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고대 입법가들이 사회 질서와 규율을 아주 공정하게 수립한 데 대하여 우리는 그들 위에 진리가 비쳤다는 것을 부정할 것인가? 자연을 훌륭하게 관찰하며 교묘하게 묘사한 철학자들이 눈이 어두운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변론술을 생각하고 조리있는 화법을 가르친 사람들을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것인가? 의학을 발전시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전력한 사람들을 우리는 미친 사람들의 허튼 소리라고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싶은 존경심을 가지지 않고는 이런 문제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저술을 읽을 수 없는데, 그들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경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일은 훌륭하다 또는 고귀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왔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배은망덕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교의 시인들도 이런 일을 하지 않고, 신들이 철학과 법률과 모든 유익한 기술을 발명했다고 인정했다.612) 성경에(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613) 한 사람들은 아래에 있는 일을 탐구하는 데는 참으로 예리하고 투철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이 그 진정한 선을 빼앗긴 후에도 주께서는 많은 선물을 인간성에 남겨 두셨다는 것을 그들의 예를 보아서 깨달아야 한다.614)

16. 예술과 과학에 관한 인간의 재능도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동시에, 인류의 공동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누구에게나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성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브사렐과 오홀리압의 총명과 지식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그들에게 넣어 주신 것이었다(출 31:2-11, 35:30-35). 그러므로, 인간 생활에서의 가장 훌륭한 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멀어진 불경건한 사람들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묻는 것 역시 정당한 물음이 되지 못한다. 신자들 속에만 하나님의 영께서 계시다는 발언은(롬 8:9) 성결의 영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결의 영에 의해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별되는 것이다(고전 3: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성령의 권능으로 만물을 채우시고 움직이시며 살리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법칙에 따라 각 종류에 부여하신 그 성격에 따라서 하신다. 우리가 자연 과학과 논리학과 수학과 그 밖의 학술의 도움을 받으며 불신자들의 활동과 봉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도움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학술을 통해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이 태만에 대한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참조, 골 2:8) 진리를 이해라는 큰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를 참으로 축복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이해력과 거기에 따르는 지식은, 만일 진리의 견고한 기초가 그 밑에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즉시 첨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한 후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사람에게서 제거된 것과 같이 남아있는 자연적인 은혜들도 부패했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참으로 옳은 가르침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점에서 명제집의 선생과 스콜라 학자들은615) 그에게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은 은사들이 저절로 더럽혀질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오염된 후에는 그의 은사들은 깨끗할 수 없게 되었고, 그 은사를 이유로 칭찬을 받을 수도 전혀 없었다.

17. 12-16까지의 요약

이상을 요약하면, 우리의 본성에 이성이 고유하다는 것을 인류 전채에서 볼 수 있으며, 마치 동물이 감정을 가진 점에서 무생물과 다른 것과 같이 이성은 우리들과 동물들을 구별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자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이 결함이 하나님의 전반적인 은총을616) 덮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볼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하나님의 자비에 돌려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타락으로 인해 우리의 본성은 완전히 파멸되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판단력이 월등하다. 또 어떤 사람은 기술을 배우면 곧 깨닫는 총명이 있다.

이런 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은총을 보여 주시며, 하나님의 온전한 자비심에서 흘러 들어온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게 하신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우수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인가의 공통한 본성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총을617) 나타내시려는 것이 아닌가? 이 은총은 여러 사람을 그냥 지나감으로서 그 자체는 어느 사람에게도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그 소명에 따라 특별한 활동을 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사사기에 이런 예가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도록 부르신 사람들에게 "주의 신이 강림하셨다"고 한다(삿 6:34). 요컨대, 모든 특별한 사건에는 반드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다. 이렇게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용사들이 사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삼상 10:26). 사울이 왕으로서 성별될 것을 예언했을 때에, 사무엘은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했다(삼상 10:6). 그리고 이런 일이 정치의 전과정을 통하여 계속되었다는 것은 후에 다윗에 대하여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한 것과 같다(삼상 16:13). 똑같은 일이 다른 곳에서 특별한 행동에 관해서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호머까지도, 인간들의 타고난 능력이 우수한 것은 각각 제우스신이 주었을 뿐 아니라 "날마다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618) 일찍이 특별한 재능과 기술이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우둔해지는 것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수중과 뜻 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매순간마다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총명한 자의 지식을 빼앗으며(참조, 욥 12:20)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신다"라고 한다.(욥 12:24; 참조, 시 107:40).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 흔적을 보며, 이 흔적이 인류 전체와 다른 피조물들을 구별한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하기 전까지는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상실되었다. 18-21)

18. 우리의 오성의 한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분별할 수 있는가를 분석해야겠다. 이 영적 통찰에는 주로 세 가지 요소가 있다. ⑴ 하나님을 아는 것, ⑵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자비, 즉, 우리의 구원을 아는 것, ⑶ 하나님의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처음 두 가지 점에서는, 특히 둘째 점에서는 가장 위대한 천재들이라 할지라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두웠다. 물론 철학자들의 글에는 곳곳에 하나님에 대한 유능하고 적절한 발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발언들에서는 항상 일종의 경솔한 상상이 엿보인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참으로 주께서는 그들에게 자기의 신성을 조금 맛보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무지를 구실로 자기들의 불경건을 숨길 수 없게 만드셨다.619) 또 어떤 때에는 그들이 어떤 발언을 하게 만드시고, 그런 고백을 함으로써 스스로 고침을 받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관찰 태도로 인하여 사물을 보아도 진리로 향하지 못했으며, 진리에 도달할 수는 더욱 없었다. 그들이 어두운 밤에 들판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아서, 번갯불이 사라지고 다시금 그는 밤의 암흑 속에 빠진다. 빛의 도움으로 길의 방향을 잡을 수는 더욱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저술의 여기저기에 진리의 작은 물방울을 몇 개 우연히 떨어뜨리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을 더럽히는 해괴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지! 요컨대, 그들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하게 느낀 일조차 없다.(이러한 확신이 없으면 사람의 오성에는 무한한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성은 이 진리, 즉, 진정한 하나님은 누구신가, 또 그는 우리들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하나님이 되려고 하시는가를620) 이해하는 진리에 접근하거나, 또는 접근하려고 노력하거나, 심지어는 이 진리를 직접 목표로 삼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19. 요한복음 1:4-5 나타나 있는 인간의 영적 맹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 취해, 거룩한 일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이 전혀 맹목적이고 어리석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따라서 이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논의보다 성경의 증언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얼마 전에 인용한 구절에서621) 요한은 이 점을 아주 훌륭하게 가르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인간의 영혼에는 하나님의 찬란한 광명이 비추기 때문에 작은 불꽃이나 적어도 불똥이 없을 때가 없으며, 이런 조명이 있는데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다고 요한은 가르친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서는, 사람의 예리한 지성은 맹목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어두움"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한다(요 1:13). 이것은 육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빛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만한 높은 지혜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확언하신 것과 같이,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계시였다(마 16:17).

20.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중생의 영을 통해서(참조, 딛 3:5)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의 본성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 의심을 생각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예언자들을 따라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시 36:9).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는 사도 바울의 확언 또한 같은 뜻이다. 또, 세례 요한은 제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고 외쳤다. 요한이 "은사"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이 주는 일반적인 천품이 아니고 특별한 조명622) 이라는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천거한 자기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그의 불만을 보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께서 그의 영을 통해서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한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거룩한 일들을 알려 줄 힘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세까지도 백성들의 건망증을 비난하면서, 하나님에게서 은사를 받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적과 큰 기사를 네가 목도하였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 아니하셨느니라"(신 29:3-4). 만약 하나님의 행사를 보는 일에서 우리는 "장애"라고 그가 말한다면, 이 이상 더 표현할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기겠다고 약속하시며 이것을 특별한 은총이라고 하신다(렘 24:7). 분명히 이것은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비춰 주셔야만 영적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셔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44). 무슨 까닭인가?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산 형상이시며(참조, 골 1:15), 이 형상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광채가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던가?(참조, 히 1:3) 그러므로, 우리의 눈앞에 그 형상이 밝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눈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을 아는 능력을 가장 잘 묘사한 말씀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땅에 내려오신 것은 인간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계시하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던가?(참조, 요 1:18) 그리고 그는 그의 사명을 충실히 다 하시지 않았는가? 분명히 다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적 스승이 되어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리스도를 전파하더라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들만이 그리스도께로 온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듣는 것과 배움인가? 물론, 성령께서 놀랍고 특별한 능력으로 우리의 귀를 듣게 만들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이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라고 밝히신다. 교회의 갱신을 약속하실 때에, 그는 구원을 하기 위해 모으신 사람들은(사 54:7)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고 가르치신다(요 6:45; 사 54:13).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심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일을 예언하신다면, 불신자들과 세속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는 교훈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623) 바울은 이 문제를 진실하게 논의하고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18 이하). 모든 인간적인 지혜의 미련함과 허무함을 공격하여 철저하게 분쇄한 다음에(참조, 고전 1:18이하) 그는 단정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누구를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연의 광명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적 신비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나태하여 그 신비를 무시하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신비들은 사람이 통찰할 수 없도록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오직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신비는 미련한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과 귀와 마음의 능력을 초월한다고 찬양했다(고전 2:9). 참으로 그는 사람의 지혜를 휘장에 비교하고, 이것이 마음을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 사도는 선언한다(고전 1:20). 아직도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에 예리한 통찰력이 있다고 하며 그것에 의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비밀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략할 것인가? 이런 광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

21.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사람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다름 곳에서는 기도의 형식으로 하나님께만 돌린다. "하나님, 영과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구하노라"(엡 1:17). 이제 우리는 모든 지혜와 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듣는다. 그는 또 무슨 말을 하는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라고 한다.(엡 1:18상). 그들에게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면, 그들 자신은 눈이 먼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는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운운한다(엡 1:18하-19).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소명을 알 만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인정한다.

여기서 펠라기우스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교훈으로 사람의 이해력을 인도하시며, 이런 인도를 받지 않고는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얻게 하시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사람의 우매 또는 무지를 시정하신다고 말할 것이다.624) 그러나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다. 다윗에게는 율법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지혜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자기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원한다(시 119:18). 분명히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위에 비칠 때에 해가 땅 위에 솟아나지만, "빛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분이(약 1:17) 눈을 뜨게 하시거나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그 말씀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그 빛을 비추시지 않는 모든 곳은 암흑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은 가장 훌륭하신 선생으로부터 충분히 올바른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받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가르칠 진리의 영이 필요하지 않았다면(요 14:26), 그 선생은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행 1:4).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 결핍을 증명하신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조명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든지 서슴치 않고 인정해야 한다. 이 이상의 이해력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의 무지를 알지 못하므로, 그만큼 더 무지한 것이다.

(죄와 무지를 동일시하는 플라톤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는 미혹에 의해 생길 수 있다. 22-25)

22.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증거는 인간이 변경할 수 없는 것이며, 올바른 지식을 주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영적 통찰의 셋째625) 방면, 즉, 올바르게 살아가는 원칙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의로운 행위에 대한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말이다. 때때로 인간의 지성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더 높은 일들보다 오히려 이 일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듯이 보이는데, 이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리라"는 사도 바울의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롬 2:14-15). 만일 이방인들이 그 본성에 따라 그 마음에 율법에 의한 의가 새겨져 있다면, 우리는 물론 그들이 인생행로에서 전혀 맹목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연법에626) 의해 사람이 행위의 바른 표준을 충분히 배운다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사람에게 이 법 지식이 부여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한다면, 이성과 진리의 목표를 향해서 이 지식이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인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즉시 나타날 것이다. 바울의 말의 전후 관계를 본다면 이 점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앞에서,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며 율법이 없이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 없이 멸망한다고 말했다. 이방인들이 우선 심판을 받지 않고 멸망한다는 것은 부당하게 생각될 것이겠기에 그들에게는 양심이 율법을 대신한다고 바울은 즉시 첨부한다. 이것은 그들이 공정한 정죄를 받는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자연법은 사람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자연법은 공정과 불공정을 충분히 식별할 수 있는 양심의 깨달음이며, 사람이 무지를 구실로 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그들 자신의 증언에 의해 유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연법에 대한 정의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될 수 있는 한 죄의식에서 마음을 멀리하려고 하기가 쉽다. 플라톤이 그의 프로타고라스에서627) 우리는 오직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일 사람의 위선이 죄를 교묘하게 은폐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마음이 악하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프라톤의 발언은 옳은 발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죄인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에 붙잡히게 되며, 싫든 좋든 간에 간혹 눈을 뜨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 능력을 모르는 체하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말이다.

23. 선악에 대한 판단은 임의적으로 행해지는 한 그 판단은 애매모호하다

일반적인 정의나 문제의 본질에 관해 지성이 속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거기서 더 멀리 가려고 할 때에, 즉, 원칙을 특수한 경우에 적용할 때에는 틀리기 쉽다는 데미스티우스이628) 가르침은 더욱 옳다. 일반적인 질문을 한다면, 누구나 다 살인은 죄악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살인을 좋은 일로 생각한다. 간음자는, 일반적으로 간음을 정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스로 자기의 간음을 자랑한다. 이와 같이, 사람은 무지하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를 당하면 방금 설정한 일반적인 원칙을 잊어버린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시편 57:1에 대한 해석에서 어거스틴이 훌륭한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데미스티우스의 원칙에는 예외가 없지 않다. 악행의 수치가 양심을 심히 억압하기 때문에, 선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면서도 일부러 사악에 돌입하는 때가 있다. 이런 심리에서 나오는 말의 일례를 든다면, "나는 무엇이 더 좋은가를 알고 또 시인하지만 나쁜 편을 따른다"라고629) 한다. 내가 보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절조와 무절제를 지혜롭게 구별했다. "무절조가 득세할 때에는 혼란된 정신 상태 또는 격정이 지성의 특수한 지식을 빼앗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분별하는 악도 자기의 비행에서는 간파하지 못한다. 정신 혼란이 가라앉으면 곧 회개하는 마음이 돌아온다. 그러나 무절제는 죄를 깨닫더라도 소멸되거나 분쇄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완고하게 그 상습적인 악행을 택하며 계속한다."630)

24.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완전히 어긋나나, 둘째 돌판에 관해서는 비난받는 경우에서만 어긋난다

선악을 구별하는 일반적인 판단을 들을 때에, 우리는 그것이 모든 점에서 건전하며 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심정에 공정과 불공정을 구별하는 능력이 주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무지를 핑계로 삼지 못하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그 결과로 반드시 개개의 경우에 진리를 식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정도의 이해력이 있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떨기 시작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 그리고 완정한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으로 우리의 이성을 측정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이성이 맹목인 것을 깨달을 것이다. 확실히 그것을 첫째 돌판의 중요한 점들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631)

예컨대 하나님을 믿으라, 그의 고귀성과 의를 올바르게 찬양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고 안식일을 바르게 지키라는 점들이다(출 20:3-17). 자연적인 지각에 의지하는 사람이 이런 일들과 이와 비슷한 일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느낀 일이 있는가? 세속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에는, 그 허망하고 사소한 짓들을 버리도록 아무리 말해도 항상 다시 그리로 되돌아간다. 물론 그들은, 성실한 의도가 동반하지 않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632)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에 관해서 어떤 관념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증언하지만, 거짓된 방법을 고안해서 곧 이 관념을 부패시킨다. 경배에 관해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 힘으로 깨닫지 못하며 경고에도 유의할 수 없는 지성이 훌륭한 분별력을 가졌다고 말할 것인가? 둘째 돌판에 있는 교훈들에 대하여(출 20:12이하) 사람들은 좀더 이해력이 있는데, 이 교훈들은 그들 사이에 생활을 유지하는 일과 더욱 긴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간혹 인내심이 없는 것을 본다. 성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도, 불공정하고 지나치게 거만한 지배는 벗어버릴 방법만 있다면 참고 견디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하는 일반적인 판단은, 이런 지배를 참고 견디는 것은 비굴하고 비열한 인간의 특색이며 체면을 아는 자유인은 이런 지배를 떨쳐 버린다고 한다. 철학자들도 받은 손상에 대하여 보복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 과도한 교만을 비난하시며, 사람들이 수치라고 생각하는 인내를 자기 백성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육욕을 고려하지 않는데, 자연인은 정욕이라는 자기의 병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빛은 사람이 이 심연에 들어서고 부를 때에는, 극히 천한 표징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격동들을 의미한다. 마음을 조용하게 건드리는 악한 욕망을 그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25. 매일같이 우리가 잘못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플라톤이 모든 죄를 무지에 돌린 것을 우리가 위에서 비난한 것은 당연하다.633) 그와 같이, 모든 죄에는 계획적인 악의와 타락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우리는 배척해야 한다. 선한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경험으로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의 이성은 무수한 형태의 속임수에 압도되며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또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치며 무수한 곤란을 만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라고 함으로써(고후 3:5), 인생의 각 방면에서 우리의 이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밝힌다. 그는 의지나 감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무슨 일을 바르게 행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근면과 통찰력과 이해력과 신중성은 완전히 부패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을 고안하거나 준비할 수가 전연 없을 정도인가? 우리가 모든 천품들 중에서 가장 귀중한 천품이라고 생각하는 예리한 이성을 빼앗기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너무도 가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혜있는 자들의 생각은 헛것으로 아시며"(고전 3:20; 참조, 시 94:11),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시는 성령께서는(창 6:5, 8:21) 이 일을 가장 적합하다고 보신다. 만일 우리의 본성이 생각하고 선동하고 자신하고 시도하는 것이 모두 항상 악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성결과 의만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께선 기뻐하실 일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 있는 이성은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무참하게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도 이 무력함을 알고 주의 계명을 바로 배울 만한 깨달음을 얻기를 기도했다(시 119:34). 그가 새로운 이해력을 얻고자 한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 번 만이 아니라 그는 하나의 시에서 거의 열 번씩이나 같은 기도를 반복한다(시 119:12, 18, 19, 26, 33, 64, 68, 73, 124, 125, 135, 169). 이렇게 되풀이함으로써 이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곤란한가를 암시한다. 다윗이 자기만을 위해서 구한 것을 바울은 자주 모든 교회를 위하여 간구한다.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골 1:9-10; 참조, 빌 1:9). 그러나 사도 바울은,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할 때마다 동시에 이 일이 사람의 능력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언한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성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여, 우리의 눈을 위해서 햇빛이 필요한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에 조명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빛을 보기 위해서 눈을 뜨는 것은 우리 자신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열어 주시지 않으면 닫힌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634) 또 성경의 교훈을 보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 하루만 조명을 받고 그 후에는 자기 힘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방금 바울에게선 인용한 구절이 계속적인 전진과 성장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 뜻을 적절한 말로 표현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10). 거듭나고 진정한 경건에서 적지 않은 전진을 한 그였지만, 이미 받은 지식에서 후퇴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매순간 계속적인 인도가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허물로 잃어버린 바른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한다(시 51:10). 처음에 주셨다가 우리에게서 일시 빼앗으신 것을 다시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 26-27)

26. "선한"것과 "용납할 수 있는"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관련없다

이제 우리는 결정의 자유를 특히 좌우하는 의지를 검토해야 한다.635) 선택은 오성보다 의지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636) 우선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자연적인 본능에 의하여 선을 추구한다고 가르치며, 이 견해는 일반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인간의 의지의 고결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점을 알기 위해, 우리는 자유 선택의 능력은 이런 욕구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욕구는 마음이 숙고한 결과가 아니고 자연적인 경향에서 생기는 것이다. 스콜라 학자들까지도 이성도 몇 가지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 비교할 때에만 자유 의지가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637) 그들의 뜻은, 욕구의 대상이 선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또 선택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신중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람에게 있는 이 선에 대한 자연적인 욕망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사실 욕망은 사람과 동물에 공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동물들도 잘 살기를 원하며, 그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어떤 선한 것이 나타나면 그들은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훌륭한 영원불멸의 본성, 곧 이성이 있으면서도, 인간은 자기에게 참으로 선한 것을 이성으로써 선택하고 열심히 추구하지도 않으며 또 이성을 가지고 신중히 고려하거나 지성을 경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동물과 같이, 이성이나 숙고함이 없이 본성의 경향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의 충동으로 선을 구하게 되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의지의 자유와의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 대신에, 사람이 바른 이성으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알고 선택하며 또 선택한 다음에는 그것을 따른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여기서의 "욕구"는 의지의 충동이 아니라 본성의 경향을 의미한다. 둘째, "선"은 덕성이나 공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들이 잘 될 때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요컨대, 사람은 선한 것을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복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만, 성령의 충동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평안에 대한 사람의 자연적인 욕망은 의지의 자유를 증명하지 못한다. 금속과 돌에 그 본질을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증명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의지가 다른 점에서 완전히 또 깊이 부패해서 악한 것밖에 생산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으면 상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어서 선한 욕망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하겠다.

27. 우리의 의지는 성령이 없다면 선을 추구할 수가 없다

우리가 효과적으로 결심한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처음 은총에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영혼에 자발적으로 선을 갈구하는 능력이 있지만 너무도 미약해서 확고한 의도가 되거나 노력을 분발시키지 못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 오리겐과 다른 일부 고대 저술가들에게서 취한 이 견해가 스콜라 학자들에게 공통적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은 사람을 소위"단순한 자연"으로 고찰하는 것이 보통이었다.638) 그리고 사도바울의 말도 사람을 그와 같이 묘사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9,18).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여기서 추구하는 논법을 전적으로 곡해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투쟁은 논하고 있다(갈 5:17에서는 더욱 간단하게 언급한다). 그것은 신자들이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투쟁이다. 그러나 영은 자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서 온다. 더욱이 바울이 중생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으로, 그가 자기 안에 아무 선도 거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그는 곧 자기의 육을 의미한다는 설명을 첨부했기 때문이다(롬 7:18) 뜻은 무엇인가?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본래 내 안에서 선이 거하지 않는다. 나의 육에서는 아무 선한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변명이 따른다(롬 7:20). 이 변명은 영혼의 대부분이 선으로 기울어진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첨부된 결론은 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속의 법과 싸우는도다"(롬 7:22-23). 성령에 의해 중생했으면서도 아직 육의 잔재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마음속에서 이런 투쟁을 할 것인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비록 한때는 이 구절을 사람의 본성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했었지만 후에 그 해석은 잘못이며 부적당하다고 해서 철회했다.639) 그러나 만일 사람에게 은총과 별도로 선을 행하는 어떤 충동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충동이 아무리 적은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고후 3:5) 사도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모세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의 계획은 악할 뿐이라고 선언하시는 주님께서는(창 8:21)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이 한 구절을 잘못 해석했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의 의견에 오랜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존중하자. 우리는 모드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 전체가 죄의 세력 하에 있다면, 분명 그것은 죄의 중요한 자리인 의지가 필연적으로 가장 든든한 차꼬로 속박을 받고 있다는 말이 된다. 성령의 은총을 받기 전에 어떤 의지의 작용이 있었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 2:13)라는 바울의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소위 "준비"라고 말하는 생각을 일체 버리도록 하라.640) 신자들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도록 자기들의 마음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때가 있으며 다윗도 여러 구절에서 그렇게 했지만, 이런 기도를 하겠다는 욕망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 점은 다윗의 말에서 추론할 수 있다. 자기 속에 정한 마음이 창조되기를 원할 때에(시 51:10), 그는 물론 그 창조를 자기가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앞질러 모든 일을 하셨다. 이제 그대들은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기 전에 행동을 취하라. 어떻게?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라. 그대들에게 있는 것은 모두 그에게서 온 것이며 모든 악은 그대들 자신이 근원이라고 고백하라." 그리고 조금 뒤에, "우리의 것은 죄 의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641)

제 3 장  저주받을 짓은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한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 부패하여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완전히 재생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1. 육신이 인간의 전부이다

그러나 인간이 영혼의 두 가지 능력과 그 영혼을 가진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사람을 설명하는 것을 보는 것인 가장 좋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요 3:6)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인간 전체를 묘사한다면(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인간은 분명히 하나의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그렇다면, 과연 육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생각뿐이며 하나님의 공정한 법에 찬동할 수 없고, 간단히 말하면 죽음의 열매 이외에는 아무것도 낳을 수 없으리만큼 사악한가? 인간의 본성에는 육체 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서 어떤 선한 것을 꺼낼 수 있는가를 당신은 시험해 보라. 혹자는 말할 것이다. 육이라는 말을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만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상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642)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와 사도의 말씀에 의해 철저하게 반박된다. 사람은 "육"이므로(요 3:6)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요 3:3) 주님의 말씀이다. 신체적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영혼은 그 일부분만이 개조된다고 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새롭게 되어야만 다시 나는 것이다. 두 구절에 나타난 대조법이 이 점을 확인한다. 영과 육은 완전히 대립되어, 중간적인 것이 있을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영적인 아닌 것은 모두 "육적"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중생하지 않고는 결코 영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나면서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육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한 가능한 모든 의혹을 일소해 준다.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간다"고(엡 4:22) 설명한 다음에 바울은,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엡 4:23)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법하고 사악한 욕망은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에도 있으며 그러므로 마음도 새롭게 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는 조금 전에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부패하고 타락했다는 것을 그려 보였다. 이방인들은 모두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엡 4:17-18)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직 그의 바른 지혜와 공의에 합치하도록 개조하시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사도 바울의 이 말이 해당된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그가 곧 첨가한 비교를 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는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엡 4:20)고 경고한다. 실로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우리의 맹목 상태와 그 결과로 일어나는 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길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고 결론하게 된다. 이사야도 그리스도의 나라를 약속할 때에,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사 60:2)라고 하면서, 교회에 대하여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이 되시리라"고(사 60:19)예언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교회 위에만 비치고, 교회 밖에는 어두움과 무지한 맹목 상태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여기서의 그의 증거이다.643) 나는 사람의 허무성에 관한 도처에 있는 말씀들, 특히 시편과 예언서에 기록된 말씀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다음의 다윗의 발언은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허무와 함께 사람을 저울에 달면, 들려 허무보다 경하리로다"(시 62:9, 의역).인간의 생각은 모두가 우매하고 경망되며 헛되고 패악하다고 조롱을 받으니 인간의 오성은 여지없이 깨뜨려진 것이다.

2. 인간의 타락에 대한 증거로서의 로마서 3장

마음에 대한 정죄에 대해서도 이에 못지않게 엄격한 비난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나는 간결하게 하고자 한 구절만으로 만족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우리 본성의 전모를 보여 주는 가장 맑은 거울과 같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교만을 없애고자 몇 가지 증언을 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참조, 시 14:1-3; 5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참조, 시 5:9)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참조, 시 140:3)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참조, 시 10:7) 그 발은 피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참조, 사 59:7)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참조, 시 36:1; 롬 3:10-16,18). 사도 바울은 이런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으로 어떤 특수한 사람이 아닌 아담의 후손 전 인류를 공격하는 것이다. 또, 어느 한 시대의 부패한 것을 고발한다.644) 그런데 이 구절에서의 바울의 의도는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단순히 그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큰 재난에 휩쓸렸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치려 한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이 몰락하고 파멸한 것을 근거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 증언들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에 묘사된 바와 같은 것은 타락한 풍습이라는 결함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자체는 타락하고 버림받은 자이므로 주의 자비를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논법은(롬 3:23이하) 성립될 수가 없다. 나는 바울이 이 말씀들을 부적당하게 주워 모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하여 굳이 그 적합성을 증명하고 애쓰지는 않겠다. 도리어, 예언자들에게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바울의 독창적인 발언들이라고 가정했다. 우선 그는 사람에게 아무 의도, 즉, 아무 성실이나 순결이 없다고 하였고, 다음에 총명이 없다고 하였다(롬 3:10-11). 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하나님을 떠나 배반했다는 것은 총명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에게는 반드시 이 결함이 있다. 바울은 덧부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떨어져 나가 부패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만일 이런 점들이 인류의 유전적인 천품이라면, 우리의 본성에서 어떤 선한 것을 찾는 것은 무익한 행위이다. 물론, 이런 사악한 모든 특징들이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인정은 하면서도, 나는 이 히드라(hydra, 희랍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 달린 뱀, 근절하기 어려운 큰 재앙을 뜻함)와 같은 화근이 이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몰래 숨어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육체 내에서 병의 원인과 요소가 있을지라도, 비록 통증은 아직 격심하지 않더라도 그 병이 자라나고 있다면 그런 몸을 건강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혼에 이렇듯 많은 죄악의 열병이 있는 이상 그 영혼을 건전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비교는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병든 신체에도 아직 조금의 생명력은 남아 있는데 이 죽음의 심연에 빠진 영혼은 여러 가지 죄악의 짐을 졌을 뿐 아니라 선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은총은 때때로 정화시킬 수 없는 곳을 제한한다

앞에서 이미 답변했던 것과 같은 문제가 이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자기의 천성에 따라 일생동안 덕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다.645) 그들의 도덕적 행위에는 실수도 많았었지만, 나는 조금도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의 열렬한 성실은 그 천성에 어느 정도의 순결성이 있음을 증언했다. 이런 덕행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행위의 가치를 논할 때에도 자세히 말하겠지만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도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말하고자 한다. 이런 예들은 인간성이 완전하게 부패했다고 판단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경고하는 듯이 보이는데, 어떤 사람들은 천성에 고무되어 여러 가지 훌륭하고 뛰어난 행위를 했을 뿐 아니라 일평생 아주 고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본성이 부패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움직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은총은 본성을 정결하게 만들지는 않을지라도 내면적으로 억제하는 은총이다. 만일 주께서 각 사람의 마음이 정욕대로 날뛰는 것을 방임하신다면, 바울이 모든 인간성에 있다고 비난하는 악한 것이 모두 자기 자신 안에 참으로 있다는 것을 증거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시 14: 3; 롬 3:12).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 자신은 "발이 피흘리는 데 빠른"(롬 3:15) 사람들 편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손이 도둑질과 살인으로 더럽혀진 자,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는"자(롬 3:13), 행위가 무익하고 썩었으며 살인적인 자,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 가장 깊은 마음속이 썩은 자, 눈이 술책만을 찾는 자, 욕설할 생각이 간절한 자, 한 마디로 모든 부분이 무한한 사악을 행할 태세인 자가(롬 3:10-18)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모든 영혼이 바울이 담대하게 단언하는 악행들에 얽매어 있다면, 주께서 인간의 정욕이 자체의 경향대로 방탕하는 것을 허락하신다고 가정할 때의 결과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무리 미친 짐승도 이렇듯 제멋대로 날뛰지는 않을 것이며, 아무리 물살이 빠르고 급한 강이라도 이렇게까지는 광포한 홍수를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 주께서 그 선택하신 사람들의 이런 병들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는 곧 설명하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는, 그들을 제어하는 것이 만사를 유지하는 데 유익하다고 예견하시기 때문에 굴레를 씌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하신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추악상을 대체로 감추지 않으면서도 법이 무서워서 제한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직한 생활 태도가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어느 정도 그것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반 수준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우수한 인물이 되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패악한 인간성을 제어하셔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으시지만, 그렇다고 인간성을 내면적으로 정결하게 만드시는 것은 아니다.

4. 하나님이 주신 재능은 정직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타락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카밀루스(Camillus)와 카틸리나(Catilina)를 동등시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인간성은 열심히 연마할 때에 전연 선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카밀루스의 예가 증명한다고 해야 하겠기 때문이다.646) 참으로 카밀루스의 고결한 천품들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그 자체로 볼 때에는 마땅히 칭찬할 만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천품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이 선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우리는 그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만일 자연인이 이런 뛰어난 도덕적 완전성을 가졌다면 확실히 인간성에는 덕을 함양할 능력이 없지 않다고 추론해야 하지 않겠는가?647) 그러나 만일 그 마음이 사악하고 비뚤어져 전혀 정직성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또 카밀루스가 자연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마음이 역시 부패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외면상으로는 가장 고귀하고 성실한 사람도 언제든지 그 본성은 부패의 경향이 강한 것인즉, 그래도 우리는 이 점에서 인간성에 선을 행하는 힘이 얼마나 있다고 할 것인가? 덕성이 보이는 반면에 그 죄악의 인상도 깊은 사람을 유덕하다고 칭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의지가 자체의 패악성을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바른 일을 추구하는 능력이 그 의지에 있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쉬운 해결책이 있으니, 즉, 이런 것은 인간성에 공통한 천품이 아니라 원래 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과 정도로 내려 주시는 특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어떤 사람은 천성이 고귀하고 어떤 사람은 본성이 비열하다고 한다. 동시에, 양편을 인간성의 보편적 타락 상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특수 은총을648) 베푸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삼상 10:6).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호머의 전설을 인용하여, 왕가의 자손은 날 때부터 특색이 있다고 말했다.64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지배자가 될 운명인 사람들에게 영웅적 성품을 주시는 때가 많다. 역사상 유명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성품도 여기에서 왔다. 일반 서민들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아무리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기의 야심에 쫓긴다면 이 오점이 모든 덕성을 오염시켜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잃게 만들기 때문에, 세속 인간들의 탁월한 점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열의가 없으면 정직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 열의가 없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리라는 이사야서의 말씀은(사 11:2) 실로 당연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며, 이 두려움은 "지혜의 근본"인 것이다(시 111:10). 허망한 외관으로 사람을 속이는 미덕들이 정치적 집회에서는 칭찬을 받고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겠지만, 하늘 심판대 앞에서는 전혀 의롭다함을 얻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5. 인간은 강제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짓는 것이다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나아갈 수 없으며, 더욱이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이런 움직임은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시초가 되며, 성경은 이 전향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돌린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만일 자기를 "돌이키는"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로 "돌이키게"해 주시기를 기도했다(렘 31:18). 그러므로 예언자는 또한 같은 장에서 믿는 백성의 영적 구속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셨다"(11절)라고 하였다. 분명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마귀의 멍에 아래에서 살고 있는 한, 죄인을 단단히 묶어 놓은 족쇄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지는 남아 있어서, 가장 절실한 욕구로 죄를 향하여 기울어지며 달음질한다. 이것은, 사람이 이 필연성에 몸을 맡겼을 때 의지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의지는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으로, 선을 결심하면 이익이 되고 악을 결심하면 손해가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결심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악을 결심하는 것은 부패한 본성이 하는 일이며, 선을 결심하는 것은 은총이 하는 일이라고 베르나르두스가 가르친 것은650)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끌려들거나 인도된다고 말하는 나를 너무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하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에는 거룩한 분들이 한 말과 어긋나거나 어울리지 않는 점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필연과 강제를651)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싫어한다. 가령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시지 않은가? 악마는 필연적으로 악하지 않은가?"하고 질문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의 신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신이신 것과 선하신 것은 똑같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악마는 그의 타락으로 완전히 선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악한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어떤 신성모독하는 자가,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성격을 보존하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므로 선하시다고 해서 찬양을 받으실 자격은 없다고 모독한다면,652) 거기에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힘에 의한 충동을 받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무한히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선을 행하실 때의 하나님의 자유 의지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는 악마는 자기의 의지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어느 누가 사람에 대하여, 사람이 필연적으로 범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서 의지 행위의 정도가 적다고 말할 것인가? 도처에서 어거스틴은 이 필연성에 대하여 말했는데, 카엘레스티우스(Caelestius)가 그에 대하여 트집을 잡으면 반박했지만 어거스틴은 주저치 않고 단언했다. "사람은 자유로 죄에 빠졌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형벌인 부패는 자유를 필연성으로 변절시켰다.653)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는 언제나 죄의 필연성인 속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구별의 요점은,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했을 때에,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지 마지못해서 또는 강요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심정의 가장 간절한 욕구에 의한 것이지 힘에 의한 강제로 인한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정욕의 선동으로 한 것이지 외부로부터 강요를 받아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부패해서 움직이면 반드시 악한 일 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결국 인간은 죄를 짓는 필연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654)

베르나르두스의 글에도 어거스틴의 생각과 같은 것이 있다.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이 자유롭다. 그러나 죄의 개입으로 인해 인간은 일종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의지가 해를 입은 것으로서, 그렇더라도 그의 선천적인 자유는 박탈되지 않았다. 자기의 의지고 하는 일은 또한 자유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죄로 인해 타락한 의지는 어떤 추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자체의 필연성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필연성은 의지의 필연성이면서도 의지를 변명하지 못하며, 의지는 그릇된 길로 끌려가면서도 필연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이 필연성은 일종의 자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그는 말한다. 우리는 다른 멍에의 압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발적인 노예 상태의 멍에를 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웠던 의지가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된 것이니, 노예인 점에서 우리는 가련하고 의지에 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그의 결론은, "그래서 영혼은 한층 더 이상하고 악한 방법으로 일종의 자발적이며 잘못된 자유로운 필연성에 지배되며, 동시에 노예이며 자유롭다. 필연성 때문에 노예이며 의지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더욱 이상하고도 한탄스러운 것은, 자유롭기 때문에 영혼은 유죄하고, 유죄하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655) 분명히 독자들은 내가 신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것이다. 모든 경건한 사람들의 찬동을 얻어 어거스틴이 옛날에 가르쳤고, 거의 천 년 후에도 수도원들에서 보존되었던 생각에 나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롬바르드는 필연성과 강제를 구별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오류를 범했다.

(의지의 전환은 내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6-14)

6. 인간이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은 구원의 일에 무엇보다도 잘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주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성의 부패를 시정하며 치료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에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므로, 그가 우리 안에 하시는 그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즉시 우리의 빈곤상이 밝혀질 것이다. 사도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고(빌 1:6) 했을 때에, 그말은 "착한 일의 시작"이 회심의 맨 처음임을 의미하며 그 처음은 의지에 있다는 것을 뜻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선한 일을 시작하실 때에는, 먼저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의에 대한 사랑과 소원과 열의를 일으켜 주신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의를 향하도록 기울이고 다시 형성하여 인도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견인불발의 정신을 확립시키심으로써 그 사업을 완성하신다. 혹자는 자체의 힘이 약한 의지를 돕기 위하여 주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다고 할지 모르나, 성령께서는 이런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의지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른 곳에서 언명하셨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 속에 두고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겔 36:26-27).656)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개조되며 갱신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느 누가 감히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의 도움이 강화해서 선을 택하려는 효과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고 말할 것인가?

만일 돌이 부드러워서 어느 정도 굽히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사람의 마음도 그 불완전한 점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충하면서 바른 일에 복종하도록 개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에, 우리 마음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전혀 선한 것을 짜낼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켜 바른 일을 열망하게 만드실 때에 돌이 변하여 살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은 말살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그것을 대신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의지는 말살된다. 그러나 의지가 의지로서 말살되는 것은 아니다.657) 사람의 처음 본성에 속한 것은 사람이 전향할 때에 완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의지가 새로 창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의지가 지금부터 있기 시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악한 의지가 선한 의지로 변한다는 뜻이다. 또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같은 사도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고후 3:5) 증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약학 의지를 돕거나 부패한 의지를 바로 잡아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의지를 만들어 내기도 하신다고 한다(빌 2:13). 이것을 볼 때에,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의지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깊은 뜻으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고전 12:6).

그는 여기서, 전우주적 지배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많이 가진 모든 선한 일에 대하여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라고 함으로써 영적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한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다른 말로 같은 뜻을 표현한 일도 있다(고전 8:6). 여기서 그는 분명하게 새로운 창조를 찬양하며, 그 새로운 창조는 우리에게 공통된 본성에 속한 것을 모조리 쓸어버린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과 그리스도와의 대조를 깨달아야 한다. 이 대조를 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이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엡 2:10). 모든 선한 일의 시초는 둘째 창조에서 오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둘째 창조를 얻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증명하려고 하였다(참조, 엡 2:5). 그러나 극히 작은 능력이라도 우리 자신에게서 왔다면 우리도 다소의 공로를 나누어 받겠지만, 바울은 우리의 공로라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니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논한다. 이 말은 선행의 모든 부분은 그 시초의 움직임부터 하나님께 속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예언자도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이므로 하나님과 나눌 수 없다고 말한 후에, 곧 "우리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첨부한다(시 100:3). 문맥으로 보아 이것은 그가 영적 생명의 시작점인 중생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이 분명한데, 이는 그가 이어서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시 100:3). 또 그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 마땅한 찬양을 드릴 뿐 아니라 우리가 구원 사업에 참가했다는 생각을 명백히 일체 배제한다. 이것은 마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자랑할 점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7. 믿는 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의지는 먼저 은총을 통해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가 그 본성으로는 선을 버리며 오직 주의 권능에 의해 회심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의지는 일단 준비된 다음에는 그 회심에서 독자적인 구실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보면, 모든 선행에는 은총이 먼저 앞서지만, 의지는 은총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종자로서 그 뒤를 따른다는 말이 있다.658) 이 거룩한 분은 전혀 악한 의도가 없이 말한 것인데, 롬바르드가 전혀 엉뚱하게 왜곡을 하여 이러한 생각으로 변해버렸다.659) 그러나 내가 이미 인용한 예언자의 말과 그 밖의 구절들에는 두 가지 점이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첫째로, 주께서 우리의 악한 의지를 교정, 아니 말소하신다. 둘째로, 주께서 친히 악한 의지를 주님께로부터 난 선한 의지로 바꿔 주신다. 은총이 의지를 앞지른다는 의미에서, 나는 사람의 의지를 "수종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개조된 의지는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의지가 수종자가 되어 앞서가는 은총에 복종하는 것을 사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글에 "의지가 없으면 은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은총이 없으면 의지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660) 이것은 우리가 방금 바울의 말에서 본 바와 같이(빌 2:13), 은총이 의지까지도 움직인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인간의 의지를 은총의 수종자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선행에 있어서 은총에 다음가는 임무를 의지에 배당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원의 제일 원인을 사람의 공로에 돌리는 펠라기우스의 극악한 주장을 반박하려는 것뿐이었다.

당면 문제를 논의하는 데는, 은총이 모든 공로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어거스틴은 주장했다. 그리고 그 동안 은총의 영속적 효과라는 다른 문제는 도외시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이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논하였다. 주님께서는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먼저 활동하시며 원하게 된 사람의 결심이 헛되지 않도록 뒤를 따르신다고 어거스틴은 여러번 말하지만, 모든 선행의 근본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발언들은 너무도 분명하므로 긴 논평이 필요하지 않다."사람들은 우리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인 무엇을 얻기 위해 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라고 그는 말한다. 펠라기우스와 카엘레스티우스에 대한 논박(Against Pelaius and Caelestius)이라는 저서의 제 1 편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하신(요 6:45)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인간의 선택 능력은 도움을 받아서 마땅히 할 일을 알 뿐만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또한 행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의 문자가 아닌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실 때에, 그 결과로 사람은 그 배운 것을 앎으로써 깨달을 뿐만 아니라, 원함으로써 구하며 행함으로써 얻는다."661)

8.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점에 와 있으므로, 나는 성경의 아주 분명한 구절을 몇 개 들어서 문제를 요약하겠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성경을 일부러 왜곡시킨다고 하는 비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성경에도 얻었다고 주장하는 그 진리에는 저 거룩한 분, 어거스틴의 증언도 없지 않다는 것을 밝히겠다. 우리의 견해를 지지하는 성경 구절들을 일일이 다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므로,662) 나는 아주 간결하게 정선된 구절들만을 들음으로써 여기저기에 있는 나머지 구절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겠다. 그러나 이 기회에 나의 견해가 어거스틴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도 결코 시기상조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최고의 권의를 인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물론 하나님만이 선의 근원이라고 믿는 데는 쉽고도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리고 선으로 기울어진 의지는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원인은 사람 밖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는 바른 의지는 그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신(엡 1:4) 그 기쁘신 뜻에서 흘러 왔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에는 비슷한 이유가 하나 더 있으니, 곧 선을 결심하여 행하는 것은 믿음에서 유래하므로 우리는 신앙 자체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포하므로, 전심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도록 태어난 우리가 선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이키는 방법으로 "굳은 마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겔 36:26) 두 원칙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를 의의 방향으로 돌이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것을 말살시켜야 하며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온전히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언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점을 한 곳에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라"(렘 32:39) 하시고, 이어서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리라"(렘 32:40)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에스겔서에서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리라"고 말씀하신다(겔 11:19). 그는 여기에서 우리의 회심은 새 영과 새 마음의 창조라고 확언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에 선하고 바른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뜻을 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개조되지 않은 우리의 의지에서는 선한 것이 생길 수 없으며, 개조된 후에도 우리의 의지가 선한 것은 우리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항상 같은 결론이 따르기 때문이다.

9. 성경에 나타난 기도는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모두가 하나님께로서만 온다는 것을 특히 보여주고 있다

같은 뜻을 우리는 거룩한 분들의 기도에서 읽을 수 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왕상 8:58)라고 솔로몬은 기도했다. 그는 우리의 마음이 완고한 데 대하여, 우리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한 선천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반역하는 것을 자랑한다고 밝혔다. 시편에서도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옵소서"(시 119:36) 똑같은 기도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완고한 불복종으로 이끌리는 마음의 악한 마음과 순종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에 대한 시정이 대조되어 있는 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일시 은총의 인도를 잃었다고 느낀 다윗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을 때에(시 51:10), 이는 자기의 마음이 불결한 것으로 속속들이 가득 차 있으며 자기의 정신이 부패하고 비뚤어졌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그는 자기가 원하는 정결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부름으로써 과거에 받은 정결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았던가? 만일 이 기도야말로 경건하고 거룩한 성품의 표징이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663) 그에 대한 반박은 어렵지 않다. 곧, 다윗이 이미 어느 정도 회개를 했지만 이는 자기가 경험한 가련한 파멸 상태와 이전의 상태를 비교한 것이라는 간단한 반박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사람의 처지에 자기를 두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중생의 은혜로 주시는 것을 모두 자기에게도 달라고 적절한 기도를 드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것 같은 자기가 다시 창조되며 사탄의 소유권에서 해방되어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의 교만의 방종의 정도는 해괴망측하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곧 모든 일을 쉬라는 것보다 더 준엄한 주님의 요구는 없다(출 20:8이하; 신 5:12이하).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을 그만 두고 하나님의 일에 그 정당한 자리를 드리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한다. 우리의 몰지각이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분명하게 증언하신 은혜를 사악하게 묵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 15:4).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포도나무 가지를 줄기에서 끊어 수분을 빼앗으면 싹이 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체로는 과실을 맺을 수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의 본성에서 선을 행할 가능성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는(요 15:5) 결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자립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며 최소한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조차 일체 배제하신다. 그리스도께 접붙여질 때에 우리도 포도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다. 땅의 습기와 하늘의 이슬과 생명을 주는 태양열에서 포도나무는 성장에 필요한 힘을 얻는다. 그와 같이, 선행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 우리에게 돌아올 몫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지에는 이미 수액이 가득하고 결실하는 힘도 내포되었으며, 따라서 그 자체에 있는 것으로 어느 정도의 충당을 하기 때문에 땅이나 뿌리에서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어리석은 주장은664) 미련하고 쓸데없는 괴변이다. 그리스도의 뜻은 간단명료하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런 선한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에게서 떨어질 때 우리는 마르고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뜻으로 다른 데서는,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5:13).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선행의 처음 부분은 결심이며 다음 부분은 그것을 수행하는 강한 노력이다. 그리고 두 부분은 모두 그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결심이나 수행에서 우리 자신의 공로를 주장한다면, 이는 우리가 주의 공적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우신다고 말한다던 우리에게 무엇이 남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의지를 만드신다고 하면 의지에 있는 선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밖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결심까지도 우리의 무거운 육에 눌려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이 곤란한 싸움을 이기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는 정신력이 공급되며 이것은 뜻을 이루는 데 충분하다고 사도는 덧붙여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다음 구절에서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고(고전 12:6) 가르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665) 이 말에는 영적 생활의 전과정이 포함되었다. 다윗도 주의 진리에 행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곧 이어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첨가한다(시 86:11, 119:33 참조). 이 말씀은, 심정이 바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산란하여 견인의 힘을 얻지 못하면 곧 사라지거나 타락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자기의 행보를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한 다음에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싸울 힘도 주시기를 기도한다(시 119:133). 그러므로 이런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선행을 시작하시며 또 완수하시는 것이다. 의지가 올바른 일을 사랑하고 열렬히 원하며 그것을 추구하려고 분발하며 움직이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리고, 선택과 열심과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는 것이나, 끝으로 이 모든 일을 사람이 꾸준히 계속하며 최후까지 인내하게 하는 것도 모두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10.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를 움직이시는 방법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가르치며 믿어 온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다음에 거기에 대한 복종이나 항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지의 방향을 효율적으로 결정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라고666) 크리소스톰이 자주 반복한 이 말을 부인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고 우리가 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아직 순결한 상태가 남아 있었을 동안에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결심하시며 역사하실 수 없다면 자유 의지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사람이 실제로 분명히 보여 주었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이렇게 적은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 자신이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도가 가르치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선한 의지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듯이 성령으로 지시하며 다스리며 주관하며 지배하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 새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약속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의 교훈대로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실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겔 11:19-20, 36:27).

이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은 그 자체만으로 효력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주장을 한다.667)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거절하시지 않는다고668)(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오캄(Ockham)은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무차별적으로 생각하시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모두 그 사랑이 주어진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마침내 그 사랑을 구하게 되는 것은 하늘 은총의 입김이 불어 주신 사람들뿐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받으실 찬양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거듭나서 하나님의 인도로 움직이며 주관된다는 것은 분명히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다. 이런 이유로, 결심한다는 행동의 일부는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어거스틴이 바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또 거저 택하심에 대한 특별한 증거를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본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지만 은총은 그렇지 않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시는 사람 누구에게나 일반적으로 주신다고 하는 견해를 어거스틴은 재치가 있으면서도 깨어지기 쉬운, 반짝이지만 허망한 유리와 같은 궤변이라고 불렀다. 다른 곳에서 그는 말한다. "여러분은 어떻게 왔습니까? 믿음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길을 발견한 것은 자기라고 생각하는 동안에, 그 바른 길에서 벗어나 멸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 선택으로, 자유의사로 여기에 왔다고 말합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자만하십니까? 이것도 여러분이 주어진 것임을 알고 있습니까? 주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요 6:44)고 하십니다.669) 또 우리는 요한의 말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지배를 받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확고부동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 한다(요일 3:9). 여기서는 굳은 지조가 효과적으로 견인지구(堅忍持久)의 의지를 낳는다고 단정하므로, 궤변가들이 몽상하는 중간적인 움직임 곧, 사람이 자유로 수락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하는 중간적인 움직임이 분명히 배제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11. 궁극적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보충이 아니다

세상이 극악한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인내를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처음 은총을 받아들이는 동안은 각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인내심이 분배된다고 하는 이 오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멸시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의 이런 견해를 일소할 때에 처음의 견해 또한 자연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처음 은총을 감사하며 그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데 대한 보상으로 선물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 외에도, 그 은총은 혼자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협력할 뿐이라고 첨부하기 때문이다.670)

처음 논점에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 종들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기쁘고 좋은 것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일을 더 큰 은총을 더하여 계속할 만한 것으로 보셔서, 매일 새로운 은총의 선물을 쌓아 올려 그들을 풍성하게 만드시는 것이라고. "무릇 있는 자는 받게 되리라"(마 25:29; 눅 19:26)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마 25:21,23; 눅 19:17)는 말씀이 그와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경계해야 한다. 첫째로, 처음 은총을 합당하게 사용한 데 대한 상급으로 나중의 은총들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효과를 나타내게 만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급을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즉, 먼저 받은 은총을 선용할수록 뒤에 따르는 은총이 더욱 많다는 이 축복이다. 그러나 이 선용하는 것 역시 주님께로부터 오는 일이며, 상급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은혜에서 오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하는 은총과 협력하는 은총이라는 케케묵은 구별을 그릇되고 부당하게 악용한다. 물론 어거스틴도 이러한 구별을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역사로 시작하신 일을 협력으로 완성하신다고 아주 적절한 정의로 완화시켰다. 그것은 같은 은총이지만 그 효과의 모습이 다른 데 따라 이름이 달라졌다.671)

따라서 그는 은총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어 쌍방의 행동이 일일이 서로 합치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은총이 점점 더하여진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사람의 선한 의지보다 하나님의 많은 은사가 먼저 있고 사람의 선한 의지도 그 은사의 하나라고 말한 것은 이 문제와 관련돼 있다. 따라서 의지가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전연 없는 것이다. 이 점을 바울도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다음,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빌:13) 이 두 가지 일을 하신다고 첨부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은 거저 주신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대부분 우리가 처음 은총을 받은 후에는 우리 자신의 노력이 그 뒤에 오는 은총과 협력한다고 말한다.672) 이에 대해 내가 대답을 한다면 그들이 주님의 권능으로 일단 의에 복종하게 된 다음부터 우리는 자기의 힘으로 전진하며 은총이 하는 일을 따르는 쪽으로 기울어진다고 하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은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 은총을 따르겠다는 마음의 준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준비 태세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 곳에서나 시종 일관하신 하나님의 성령께서 처음에 복종하는 심성을 만드시고, 다음에 그것을 함양하며 그 지조를 더욱 강화시켜 인내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그들의 주장이 사람에게는 동료로서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할 고유의 힘이 있다는 뜻이라면 그들은 가장 가련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12. 인간은 단 하나의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와 무관하게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

무지한 그들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자기들의 뜻에 맞도록 곡해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이 발언을, 자신을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면 너무 교만하게 보일 것 같았기에 바울은 그 공로를 하나님의 은총에 돌림으로써 자기의 발언을 수정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수정 내용을 보면, 자기를 은총 안에서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라고 불렀다는 것이었다. 다른 점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이 이 어렵지 않은 문제에 많이 걸려 넘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도는 주의 은총이 자기와 함께 수고해서 자기를 동역자로 만들었다고 쓴 것이 아니라. 수고한 공로를 전부 은총에만 돌리는 의미에서 이 수정을 한 것이다. "수고한 것은 내가 아니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모호한 표현 때문에 그들은 속았고, 특히 라틴어 번역이 졸렬해서 헬라어 관사의 표현력을 잃어버렸다,673) 만일 축자적으로 번역한다면, 그는 은총이 자기의 동역자였다고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있는 은총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어거스틴은 이 점을 분명하게 그러나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사람의 선한 의지가 하나님의 은사보다 앞서는 때가 많지마는 모든 은사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다. 앞서는 그 의지 자체도 그런 은사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이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시 59:10, 참조, 시 58:11),674) "그의 인자하심이 나를 정녕 따르리니"(시 23:6)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원하게 되도록 은총이 그를 앞지르며, 원하는 사람의 소원이 헛되지 않도록 그의 뒤를 따른다. 베르나르두스도 어거스틴과 같은 생각으로 교회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제가 아무리 싫다 하더라도 저를 이끌어 원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걸음이 느린 저를 이끌어 달리게 만드소서"675)

13. 어거스틴은 또한 인간의 의지가 독자적으로 활동함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현대의 펠라기우스파, 즉, 소르본느의 궤변가들이 고대인 전체가 우리를 반대한다고 하는676)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어거스틴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겠다. 우리에게 대한 이런 비난은 그들의 조상 펠라기우스를 모방한 것임이 분명하다. 어거스틴 자신도 펠라기우스 때문에 같은 처지에 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여기서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간단히 언급하려는 것을 그는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글에서 더욱 자세히 논술한다. "만일 아담이 선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면 그는 그렇게 행할 은총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원하고 소원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 처음의 자유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였으나, 우리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더 큰 자유다." 롬바르드는 이것을 사람이 영원불멸을 얻은 후에 있을 완전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말한 것이라고 잘못된 해석을 했지만, 어거스틴 자신은 이런 생각을 막기 위해서 조금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의혹을 제거해 준다. "확실히 성도들의 의지는 성령의 큰 감동을 받아서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결심하게 만드시기 때문에 그들은 결심한다. 그런데 그들이 심히 약한 가운데서도 의기 충천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자(고후 12:9). 만일 그렇게 심히 약한 그들의 의지를 그 자체의 힘에 맡겨서, 만일 결심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으로 능력을 얻으라고 버려두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심하게 되도록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게 될 때에 그들의 약한 의지는 그 많은 시험에 굴복하고, 따라서 뜻을 관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약한 의지에 도움을 주시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동요하거나 분리됨 없이 전진하게 하시며, 따라서 아무리 약할지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그는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향에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반응하는가를 자세히 논한다. 참으로 그는 주께서 사람들 자신의 의지를 써서 그들을 이끄시지만, 그들의 의지는 이미 하나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677)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특별히 원하는 증언을 어거스틴으로부터 들어보도록 하자.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받거나 거절하거나 자유로 선택하도록 은총을 제시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그 선택과 결심을 다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이 은총이며, 그래서 거기에 따르는 선행은 은총의 결과와 결실이다. 그리고 은총에 복종하는 의지는 은총이 만들어낸 의지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우리의 모든 선행을 실현하는 것은 은총뿐이다"라고 말했다.678)

14.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는 전적으로 은혜에 의존시킨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은총은 의지를 빼앗지 않고, 악한 의지를 선하게 변화시키며, 선한 의지를 돕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끌려가듯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감동을 받아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이다. 은총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특별히 그리고 거저 주신다는 뜻을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보니파티우스에게 써 보냈다.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은총을 주신 사람들에게는 행위의 가치에 따라서나 의지의 가치에 따라서 주신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은총을 주시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때문에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같은 편지에서, 사람이 처음 은총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그 공로에 대해서 다시 은총을 더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는 강경히 논박한다. 그는 우리의 행동은 일일이 은총이 필요하며, 은총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며, 그래야만 은총이 참으로 은총이 된다는 것을 펠라기우스가 인정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발렌티누스에게 보내는 책망과 관용이라는 책 제8장에서 한 말보다 더 간단히는 요약할 수 없다. 거기서 어거스틴은 우선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같은 그 은총에 의해서 기쁨을 받으면 사람의 의지는 지속하게 되며, 불굴의 용기로 강화되며, 은총의 지배를 받는 동안은 결코 멸망하지 않지만, 은총에게 버림을 받으며 즉시 패망한다. 주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의해서 선으로 전향하며, 일단 전향하면 끝까지 선에 머무른다. 사람의 의지가 선을 향하게 되는 것과 방향이 정해진 후에 선에 머무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며, 사람의 어떤 공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자유 의지라고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즉, 은총에 의하지 않고는 의지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으며, 의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은총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679)

제 4 장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680)

(사탄의 통제를 받는 인간 : 그러나 성경은 타락한 자들의 마음을 냉담하게 만드는데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하심을 보여준다. 1-5)

1. 인간은 악마의 세력 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

내가 실수하지 않는 것이라면, 인간이 죄의 멍에를 메고 노예가 되어 자기의 본성만으로는 선을 사모하여 결심하거나 선을 추구하여 노력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증명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강제와 필연성의 차이를 지적했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나 역시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681) 그러나 인간이 악마의 종으로 매여 살 때에는, 자기의 뜻보다 마귀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편이 더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행동에서 마귀와 사람이 각각 담당하는 몫을 확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악한 행위에 하나님의 행동이 개입한다고 성경이 알리므로, 악행의 일부를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

어디선가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기수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 비교하고, 하나님과 마귀를 기수와 비교했다. "만일 하나님이 말을 타신다면 온화하고 숙련된 기수시기 때문에 말을 올바르게 인도하신다. 느릴 때에 박차를 가하시며, 너무 빠르면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 거칠 거나 너무 광태를 부리면 억제하시며, 도중에서 안가겠다고 앙탈할 때에는 억눌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에 올라앉게 되면, 모든 미련하고 방자한 기수와 같이, 말을 난폭하게 몰아 길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도랑에 처박으며, 벼랑에서 뒹굴게 하며, 찌르고 괴롭혀 결국 고집을 부리며 난폭하게 만든다."682) 더 좋은 비유가 생각나지 않으므로 우선 이것으로 만족하겠다. 자연인의 의지는 악마의 세력에 예속되어 그 선동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노예들이 싫으면서도 복종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의지는 싫어서 반항하면서도 악마의 명령을 듣도록 강요를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 있는 의지가 필연적으로 언제든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복종한다는 뜻이다. 주께서 자기의 영의 인도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을 주님은 공정한 심판으로 사탄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신다.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 4:4), 그들이 복음의 광명을 보지 못하고 멸망할 운명이 된다고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이 세상 신이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한다"(엡 2:2)고도 한다. 불경건한 자들의 눈이 먼 것과 이로써 일어나는 모든 죄악은 "사탄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나 죄악의 원인을 사람의 의지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사람의 의지에서 악의 뿌리가 솟아나며, 사람의 의지가 사탄 왕국의 기초, 즉, 죄의 토대가 된다.

2. 동일한 사건 안에서 하나님, 사탄, 인간이 모두 작용한다

이런 일들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훨씬 다르다. 이 점을 더 분명히 알기 위해서 우리는 갈대아 사람들이 저 거룩한 사람 욥에게 가한 큰 재난을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들은 그의 목자들을 죽이고 양떼를 약탈해 갔다(욥 1:17). 이제 그들의 행동이 악했다는 것은 더할 나 위 없이 분명하며, 모든 일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욥 1:12) 이 사건에서 사탄이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욥 자신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갈대아 사람들이 약탈한 것은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이라고 말한다(욥 1:21). 우리는 어떻게 동일한 이 일을, 사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만들거나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만드는 일이 없이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같이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우선 행동의 목적을 생각하고 다음에 행동하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해결은 쉽다. 주의 목적은 재난으로 자기의 종의 인내심을 단련하려는 것이었고, 사탄은 욥을 절망상태에 몰아넣으려고 애썼고,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 남의 재산을 빼앗아 이익을 보려고 했다. 목적이 아주 다른 것이 벌써 행동의 특색을 뚜렷이 나타낸다. 방법도 거기 못지않게 다르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을 사탄이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시며, 심부름꾼으로서 갈대아 사람들을 택하여 사탄의 지배하에 넘겨주신다. 사탄은 독을 묻힌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그 악행을 실천하게 만든다. 그들은 미친 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온 지체를 죄로 물들이며 더럽힌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사람들 위에 사탄이 지배력을, 즉, 악한 지배력을 행사할 때에, 사탄이 그들 속에서 역사 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하나님도 독자적 방법으로 역사 하신다고 한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인 사탄이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시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사방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만물을 유지하며 그 모든 활동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에 대해서는683) 언급하지 않고, 다만 모든 개개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그 특수한 행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같은 행위를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에게 돌리는 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으며, 목적과 방법을 구별할 때에 하나님의 의가 아무 흠 없이 빛나며, 사탄과 사람의 추악한 행동이 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

3. "냉담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부들은 이 사실을 단순하게 인정하는 것을 신중히 회피하는 때가 있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서 불경한 말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신중한 태도를 나는 진심으로 칭찬하는 동시에 우리가 단순히 성경의 가르침을 지킨다면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까지도 저 미신을 버리지 못한 때가 있었다. 예컨대, 마음이 강퍅하게 되며 눈이 어둡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예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684) 그러나 성경의 많은 구절은 이런 궤변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 이상의 것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어거스틴 자신도 율리아 누스(Against Julian)를 논박함이라는 글의 제 5 편에서, 죄는 하나님의 허락과 용인에 의할 뿐 아니라, 또한 전에 지은 죄에 대한 일종의 벌로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아주 길게 논증한다.685) 마찬가지로, 허용에 대해서 그들이 전하는 말은 너무도 약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버림받은 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강퍅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 돌아오게 하고 따라오게 하고 재촉케 하신다고 자주 말한다(사 6:10). 이 점을 나는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가르쳤다.686) 우리가 예지나 허용으로 도피하는 동안은, 이 역사의 성격은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역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발생한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의 광명이 제거되면 암흑과 맹목 상태만이 남는다. 그의 영이 제거되면 우리의 마음은 돌과 같이 굳어진다. 그의 인도가 없어지면 우리의 마음은 비틀리고 구부러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보며 복종하며 바르게 따르는 능력을 빼앗으실 때에, 하나님이 그들의 눈이 멀며 마음이 굳고 비뚤게 만드신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방법은 이 말들이 원래 가진 뜻에 훨씬 더 가깝다. 즉,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의 실시자인 사탄을 시켜 자기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뜻대로 사람의 목적을 정하며 의지를 격발하며 노격을 강화하신다. 그래서 시혼왕이 이스라엘 백성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만드시고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모세는 말하고, 즉시 붙여서 "그를 우리 손에 붙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이었다고 했다(신 2:3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혼 왕이 멸망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심으로써 그의 멸망을 준비하신 것이다.

4. 성경에서 하나님이 믿지 않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실례

첫째 방법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 것 같다. 즉,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욥 12:20 ; 참고, 겔 7: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욥 12:24 ; 참고, 시 107:40). 마찬가지로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사 63:17).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 하는 것보다, 그들을 버리심으로써 그들을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만드시는가 하는 것을 알린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범위를 넘은 증언도 있다. 예컨대,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드시는데 대해서,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출 7:3-4)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다(출 4:21). 그 후에 주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하며(출 10:1) "강퍅케" 만드셨다고 한다(출 10:20,27, 11:10, 14:8). 주께서 바로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지 않은 것이 곧 굳게 만드신 것인가?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주께서는 바로를 사탄에게 넘겨주셔서 그 강퍅한 마음이 아주 굳어져 버리게 하신 것이다. 앞에서 "내가 그의 마음을 억제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뜻이다(출 4:21).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 후에, 가는 곳마다 그곳 주민들이 그들을 원수로 대했다. 무엇이 그들을 선동했는가? 참으로 모세는 그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든 것은 주시라고 백성에게 설명했다(신 2:30). 확실히 예언자도 같은 사실을 말하면서, "그가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라고 한다(시 105:25).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지 못하게 되어서 범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을 "완강하게 만드셨다", 또 "변하셨다"고 한즉, 이것은 계획적으로 그들을 굽혀서 그런 상태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백성의 죄를 벌하려 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버림받은 자들을 통해서 실행하셨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은 도구에 불과했고, 실행하는 권한은 주님께 있었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휘파람으로 불러(사 5:26, 7:18), 이스라엘 백성을 잡는 올무와(겔 12:13, 17:20) 부수는 방망이로(렘 50:28) 쓰시겠다고 경고하신다. 또 산헤립을 도끼라고 부르며(사 10:15), 그 도끼를 친히 휘두르며 겨누어 그들을 찍으신다고 하시니, 자기는 수수방관하지 않는다고 명백히 선언하시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은 이 문제의 뜻을 잘 밝혔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사실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그들이 죄 가운데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에서 유래한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암흑을 나누시기 때문이다."687)

5. 사탄도 역시 하나님은 섬겨야 한다

주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섭리로 여러 가지 목적에 배정하실 때마다 사탄이 개입해서 그들을 선동한다. 이 점을 증명하는 데는 한 구절만 인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사무엘서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했다, 또는 사울을 떠났다는 말씀이 여러 번 있기 때문이다(삼상 16:14, 18:10, 19:9). 이것을 성령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불결한 영을 "하나님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영이 스스로 자신의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응해서 하나님의 한 도구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도 첨부해야겠다. 그는 오류와 유혹이 역사하는 것은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거짓을 믿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살후 2:10-11). 그러나 같은 행위에서도 주께서 하시는 일과 사탄과 악한 자들이 하려고 하는 일은 언제든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은 이 악한 도구들을 손에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셔서 자기의 공의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악한 그들은 행동함으로써 그 부패한 본성이 생각한 악한 일을 실현한다. 하나님의 존엄성을 변호하거나, 악한 자들의 변명을 배제하는 데 관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다른 점들은 섭리에 관한 장에서 이미 논했다.688) 여기서는 다만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사탄이 어떻게 지배하며, 사탄과 버림받은 자들 안에서 주께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를 간단히 알리려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외형적인 일에서 인간의 의지를 능가한다. 6-8)

6.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맡길 수 없다

우리가 전에 언급한 일이 있는 문제지만,689) 그 자체로서는 의롭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았으며 영적 생활보다 물적 생활을 지향한 행위에 있어서 인간에게 어떤 자유가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에서 인간에게 자유 선택을 인정해 주었다.690) 아마 자기들이 인정한 일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었다기보다, 중대하지 않은 문제를 논하기 싫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알 필요가 있는 중심점만을 고수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한 일을 선택하도록 자극을 받을 때, 의지가 그 쪽으로 기울어질 때, 또는 반대로 유해한 일을 우리의 지성과 마음이 피할 때에는, 주의 특별한 은총이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섭리의 힘이 미치는 범위를 본다면, 하나님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시는 대로 사태가 벌어질 뿐 아니라, 인간의 의지도 같은 목표를 향하여 기울어진다. 외부에 나타난 일들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 보면, 사태가 이런 정도로 사람의 판단에 맡겨진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부적인 일에서도 주께서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하신다고 선포하는 많은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결심 자체도 하나님의 특별한 자극에 좌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가장 귀중한 그릇들을 모두 빌려주었는데(출 11:2-3), 누가 그들의 마음을 그렇게 기울게 만들었는가? 결코 자진해서는 그렇게 기울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받았다기보다 주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는 애굽의 이교도라고 생각한 자기의 아들 요셉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창 43:14)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온 교회가 시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풀고자 하셨을 때에 잔인한 민족들의 마음을 길들여 인자하게 만드셨다(참조,시 106:46). 그러나 사울이 격노해서 전쟁 준비를 했을 때에, 그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시킨 것이라고 한다(삼상 11:6). 아히도벨의 모략은 신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압살롬의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삼하 17:14) 르호보암이 소년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게 한 것은 누구였는가?(왕상 12:10,14) 전에는 용맹하던 민족들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떨게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기생 라합까지도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했다(수 2:9 이하). 또 이스라엘 백성을 공포심으로 낙심하게 만든 것은 율법서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떨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아니고 누구였는가?(신 28:65)

7.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배는 우리의 자유를 압도하신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특수한 예이므로, 이것을 원칙으로 삼아서 모든 경우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항의할 것이다.691) 그러나 이 예들은 내가 주장한 것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길을 트고자 하실 때마다 외면적인 일에서까지도 사람들의 의지를 굽히며 돌리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그들의 자유를 지배하지 못하리만큼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고무에 의해서 인도된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바꿔 말하면, 가장 단순한 일을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많으며 쉬운 일에서조차 용기가 나지 않는 것에 반해 가장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지혜가 생각나며, 결정적인 중대 문제에서 모든 어려움을 배제할 용기가 생긴다.

이런 의미로 나는 솔로몬의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고 한 말을 이해한다(잠 20:12). 그는 귀와 눈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주신 그 기능에 대해서692)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글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한 것은(잠 21:1) 인류 전체를(그 일부인) 한 가지 종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의지가 모든 예속에서 해방된다면, 이 특권은 누구보다도 왕의 의지에 속할 것이다. 왕의 의지는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어느 정도로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왕의 의지가 하나님의 손으로 굽혀진다면, 우리들의 의지도 그 처지를 면할 수 없다. 이 점에 대해서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다. "성경을 착실히 연구하면, 하나님이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만드시고 선하게 된 의지를 선한 행동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므로, 선한 의지들은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보존하는 의지들까지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지들도 하나님의 권능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신다. 혹은 은혜를, 혹은 벌을 주시려고 그리고 참으로 가장 비밀한, 그러나 가장 공정한 판단에 의해서 기울이시는 것이다."693)

8. "자유 의지"의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여기서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점이 있다. 사람의 자유 선택의 능력은 사태의 결과에 의해서 판단할 것이 아니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미련한 생각을 한다. 가장 높은 군주들도 만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은 사람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적절하고 교묘하게 증명한 줄로 생각한다. 여하간,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이 능력은 사람의 내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며, 외면적인 성공으로 측정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는, 외부의 방해가 있더라도 사람이 결심한 일을 모두 실현하며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점에서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경향이 자유로우냐고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의 이 두 가지가 다 충분히 자유롭다면, 못이 두루 박힌 포도주통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Atilius Regulus)에게도 광대한 지역을 지배한 가이사 아구스도(눅 2:1)에 못지않은 자유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694)

제 5 장  자유의지를 변론하고자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반대에 대한 논박

(상식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1-5)

1. 첫째 주장 :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발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

그릇된 자유 개념에서 출발한 자들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없어지게 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견해를 공격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훼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의 입장은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다음에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공격한다. 우리는 그들의 공격 무기를 차례로 파괴하겠다. 만일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죄는 이제 죄가 아니며, 만일 자발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 있다고695) 그들은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도 이 무기로 어거스틴을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의 권위를 빌어서 그들의 무기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고, 먼저 문제 자체를 충분히 처리하겠다. 그러므로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죄라고 볼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나는 부정한다. 반대로, 죄는 의지적이므로 피할 수 있다는 그들의 추리도 부정한다. 만일 자기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쟁론하며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대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이 대답을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696) 즉,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으며 악한 일 밖에 결심할 수 없는 것은 창조에서 오지 않고, 인간성의 부패에서 왔다는 것이다. 악인들이 서슴치 않고 구실로 삼는 저 무능은 아담이 자기를 악마의 압제 아래에 기꺼이 넘겨주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를 결박한 부패의 쇠사슬은 처음 사람 아담이 자기의 창조주를 배반한 데서 생겼다. 모든 사람에게 이 반역죄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면, 아무도 필연성을 이유로 용서를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필연성이야말로 그들이 정죄를 받는 가장 명백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하면서 악마 자신을 예로 들었다. 이 예를 보아도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여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점은 뒤집어서,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의 의지는 선을 버릴 수 없지만, 여전히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나르두스도 같은 생각을 적절하게 가르친다. 즉, 우리는 필연성이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불행하고 이 필연성은 우리를 그 자체에 동여 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이 되도록 강요한다 라고697) 그들의 삼단 논법의 둘째 부분은 "자발적"에서 "자유"로 비약하는 오류를 범하므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 선택되지 않는 일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2. 둘째 주장 : 보상과 처벌이란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은 덕행과 죄악이 모두 의지의 자유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벌이나 상을 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한다. 이 논법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이지만 크리소스톰과 제롬도 어디선가 사용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제롬은 이것이 펠라기우스파가 잘 사용하는 논법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만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수고하지 않는 우리가 아니라 그 은총이 상을 받으리라"고 한 그들의 말까지 인용한다.698)

벌에 대해서는 우리가 죄책의 근원이므로 우리에게 벌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나는 대답한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우리가 자유로운 판단 아래서 죄를 짓거나 노예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특히 사람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 의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그 보상이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큰 모순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자주 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상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상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당연히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사에 대해서 주시는 것이다!"699) 확실히 그들은 자유 의지가 공로의 원천이 아니라면 공로가 있을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뚜렷이 본다.700) 그러나 이것을 큰 논쟁점으로 보는 점에서 그들은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이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서슴치 않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항상 가르친다. 예컨대, "사람들의 공로란 무엇인가? 홀로 죄가 없으시며 죄에서 해방해 주시는 그는 당연히 갚아야 할 의무에서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발견하신다. 또, "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시지 않고, 받을 자격이 없는 은총을 주신다. 만약 은총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라." 또,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죄는 우리의 것이지만,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상급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사에 상을 주시게 될 것이다." 같은 뜻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은총이 공로에서 생기지 않고 공로가 은총에서 생긴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조금 뒤에 결론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공로보다 먼저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서 자신의 공로를 나오도록 하려 하시며, 사람을 구원하실 이유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은사를 완전히 값없이 주신다"701)

그러면 이런 문장이 어거스틴의 글에 자꾸만 반복해서 나오는데, 무슨 까닭에 더 많은 증명을 열거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사도가 성도의 영광을 어떤 원칙에서 이끌어 내는가를 들으면, 우리의 논적들은 이 오류에서 더 잘 해방될 것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한다(롬 8:30). 그러면 신자들은 무슨 까닭에 면류관을 받는다고(딤후 4:8) 사도는 말하는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자비에 의해서 택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 의지가 성립할 수 없으면 공로도 없으리라는 이 허망한 공포심을 버리라. 성경이 우리를 불러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는 바로 그것을 무서워하며 도망한다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사도는 말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한하며 여러 가지이므로, 자기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우리 것으로 만드시고, 마치 우리 자신의 덕행인 듯이 그것에 상을 주신다.

3. 셋째 주장 :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은 말살될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크리소스톰에게서 취한 듯한 항의를 첨가하여 만일 선악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면, 동일한 본성을 나눠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악하거나 모두 선할 것이라고 말한다.702) 이 입장에 가까운 것이(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암브로시우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이방인의 소명(The Calling of the Gentiles)을 쓴 사람의 견해다. 그의 이론으로는 만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변덕스러운 상태에 버려두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703)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을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크리소스톰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바울이 열심으로 주장한 것을 모든 사람이 부패했을 뿐 아니라 악으로 넘겨졌다는 것을(참조, 롬 3:10)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함께, 모든 사함이 악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천적으로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는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만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그냥 버려두시는704) 사람들은 부패한 가운데서 쇠잔하며 드디어 소멸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발점에서 넘어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참으로 인내 자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다.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주신다. 무슨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굳게 견디어 내며 또 어떤 사람들은 동요 때문에 실패하는가 하는 이 차이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즉, 주께서 인내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며 자기의 권능으로 힘을 북돋아 주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는 사람들은 변덕스러움의 본보기가 되도록 자기의 권능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4. 넷째 주장 : 모든 훈계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만일 복종하는 능력이 죄인에게 없다면, 권면하는 것이 헛되며 경고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책망하는 것이 미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705) 옛날에 어거스틴이 비슷한 반대를 받았을 때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책망과 은총에 대하여](On Rebuke and Grace)라는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저 비난들을 충분히 논박하지만, 주로 반대자들을 불러 이 중심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오 사람아, 교훈을 통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깨달으라. 책망을 받아서, 그대에게 그것이 없는 것은 그대의 허물임을 깨달으라. 기도를 드려서,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를 깨달으라."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글에서도 거의 같은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교훈들을 사람의 힘을 표준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올바른 일을 명령하신 곳에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수행 능력을 풍부히 주신다고 말한다.706) 또 이 문제는 길게 토론할 필요가 없다. 우선 우리만이 이 입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모든 사도들이 우리 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이런 상대자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고 선언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떠나서 악을 행한 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며 징계하시지 않는가? 또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선행에 전심하라고 권하시지 않는 것인가? 고린도 신자들이 사랑을 등한시했다고 해서 바울이 얼마나 엄중하게 그들을 책망했는가?(고전 3:3, 16:14) 그러면서도 그는 주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그는 로마서에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한다(롬 9:16). 그러면서도 그 후에 여전히 경고하며 권고하며 책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슨 까닭에 주에게 간청해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서 저지른 일을 징벌하시는 헛수고를 하시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무슨 까닭에 바울에게 경고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버림을 당하고, 그 자비가 없이는 원하거나 달음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버려두라고 하지 않는가? 열렬히 구하는 사람일수록 곧 받을 수 있다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 최대의 근거를 주님 자신에 둔 것이 아닌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바울은 썼다(고전 3:7). 여기서 그는 교훈과 충고와 책망이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데 얼마나 이바지하는가를 알린다. 이와 같이, 모세가 율법의 계명들을 엄격한 제약 하에 두고(신 30:19), 예언자들이 범법자들을 얼마나 호되게 위협했는지 우리는 본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들은 사람이 깨닫는 마음을 받아야만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인정한다(예컨대, 사 5:24, 24:5 ; 렘 9:13이하, 16:11이하, 44:10이하 ; 단 9:11 ; 암 2:4). 또 마음에 할례를 주며(참조, 신 10:16 ; 렘 4:4), 돌같이 굳은 마음 대신에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참조, 겔 11:19),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율법을 새기며(참조, 렘 31:33), 결국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참조, 겔 36:26) 그의 교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그들은 인정한다.

5. 훈계의 의미

그러면 충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경건한 자들이 완고한 생각으로 충고를 거부하면, 그들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충고가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들의 양심을 두들긴다. 가장 거만한 자라도 충고를 실컷 냉소는 할지언정, 정죄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종하는데 필요한 유순한 마음을 받지 못했는데, 가련하고 약한 인간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완강한 마음을 그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탄이라고 할 수 없은즉, 그에게 어떤 변명할 구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은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하나님의 충고를 희롱할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충고의 힘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에게는 충고가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께서는 신자들 안에서 성령으로 모든 일을 하시지만, 도구로서의 말씀을 결시하시지 않고 신자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이용하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의 의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다는 것을 진리로 인정해야 한다. 예언서에 있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라고 한 말과 같다(겔 11:19-90). 그래도 그대는 항의하여 무슨 까닭에 그들을 성령의 인도에 맡기지 않고, 지금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 경고하는가? 성령이 밀어주시는 정도 이상으로 급히 전진할 수 없는 그들을 무슨 까닭에 충고로 괴롭히는가? 불가피적인 육의 연약 때문에 타락한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들이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징벌하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항의자여, 그대는 누구관데, 하나님에게 법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충고에 복종하도록 은총으로 우리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받도록 충고로 우리를 준비하신다면, 그대는 이 경륜의 어디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겠는가? 설사 충고와 견책이 신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전연 무용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에 충고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즉, 누가 감히 충고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조롱하겠는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충고는 우리 안에서 선에 대한 소원을 일으키며, 태만을 얼어버리며, 죄악과 그 달콤한 독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동시에, 반대로 죄악을 미워하며 싫어하게 만드는 능력을 완전히 발휘한다.

만일 더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내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707)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지성을 비추며 의를 사랑하며 함양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마음을 개조하셔서, 그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다.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그와 같은 혁신을 원하며 구하며 달성하도록 활발시키신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경륜의 방법에 의한 자기의 손의 움직임을 나타내신다. 버림받은 자들을 상대로 같은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들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다르다. 현재는 그들의 양심의 증언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심판 때에는 그들에게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이끄시는 사람이 아니면 자기에게로 올 수 없으며,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후에 온다고 말씀하시지만 하시지만(요 6:44-45), 역시 교사의 직책을 경시하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 성령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자기의 음성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바울은, 교훈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하나님에게는 아름다운 향기이므로 버림받은 자들 사이에서도 무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고후 2:15-16).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비난과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한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6-11)

6.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를 뜻하는가?

논적들은 굉장한 노력으로 성경으로 성경 구절을 수집한다. 쉬지 않고 모아서 비록 이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수효로 우리를 압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오합지졸이 아무리 화려한 겉치레를 보일지라도. 일단 백병전에 들어가 한두 번 얻어맞으면 즉시 제각기 도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적군의 대부대를 우리는 아주 쉽게 흩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용하는 구절들은 몇 개의 큰 제목을 붙여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절 몇 개에 대답 하나를 하면 폭하고, 일일이 처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의 교훈들을 가장 중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명백한 요구를 모두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훈들을 일일이 검토하며 그것에서 우리의 능력을 측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결·경건·복종·정조·사랑·유순을 명령하시며, 불결·우상 숭배·불근신·분노·약탈·교만 등을 금지하실 때에, 그는 우리를 희롱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산더미같이 모아 놓은 교훈들이 거의 전부를 분류한다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어떤 것은 우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요구한다. 어떤 것은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라고 한다. 또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일단 받은 사람은 그 은총 안에서 매진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먼저 이 모든 교훈에 대한 개론을 말하고, 다음에 그 세 종류를 논하겠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법규로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것은 진리인 듯하기도, 했으나 율법을 전연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율법은 준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무서운 죄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고 하는, 분명히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유를 우리에게 역설한다.708) 참으로 그들은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한 일이 없는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묻겠다.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갈 3:19),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이 죄를 만들어 낸다(참조, 롬 7:7-8),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이런 주장들은 무슬 뜻인가? 율법을 주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제한해야 했는가?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보다 훨씬 높은 데 두셨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정의를 보면, 확실히 율법이 실현하려고 목적한 것은 사랑이다(참조, 딤전 1:5).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마음에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소서라고(살전 3:12) 기도 할 때에, 그는 만약 하나님이 온 율법의 강령을(참조, 마 22:37-40) 우리의 마음속에 불어넣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귀에 들리는 율법에 소리가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7. 율법 자체가 은총에 이르는 길을 지적해 준다

만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율법은 생활 원칙이며 우리는 그 원칙대로 노련해야 한다는 것 뿐 이라면, 물론 나도 즉시 저들의 견해에 양보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여러 가지 효용을 충실히 그리고 분명히 설명하므로,709) 우리는 율법이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 해석에 따라 고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당면 문제에 관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설명한 다음에 즉시, 복종하는 힘은 하나님의 인애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가 이 힘을 받도록 기도로 간구 할 것을 명한다. 만일 명령만 있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이 그 명령에 응답할 만한가를 시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령에는 즉시 약속이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얻는 지지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덕성까지도 전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도움에 달렸다고 선언하므로, 우리는 율법을 준수하기에 충분한 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그 약속들이 넉넉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율법의 교훈들을 비교하는 것을 이 이상 더 강조하지 말라. 주께서는 율법으로 주시려는 의의 표준을 우리의 연약한 힘을 가늠 보아 적용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점에서 주의 은총이 지극히 필요한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준비가 빈약한가를 이 약속들을 보아서 더욱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목석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누가 믿겠느냐고 그들은 말한다.710) 아무도 이런 논법을 쓰지는 않는다. 악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들의 정욕이 하나님 뜻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죄책을 느끼게 될 때에, 그들은 목석이 아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무력에 대한 경고를 받고 은총에서 피난처를 구할 때에, 그들도 목석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의 심원한 발언들이 적절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를 일게 하신다."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사람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공경한다면, 교훈은 심히 유용하다." "믿음은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성취한다." "참으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명령된 것을 믿음이 성취하기를 원해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 자체를 요구하시지만, 찾으시는 것을 먼저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요구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며, 주시려는 것을 명령하시게 하라."711)

8. 여러 종류의 계명은 우리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교훈들을712) 검토하면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⑴주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많다(을 욜2:12 ; 겔 18:30-32 ; 호 14:2-3), 그리고 한편에서 예언자는 대답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등이다(렘 31:18-19). 주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며(신 10:16;렘4:4), 모세를 통하여 이 할례는 주 자신의 손으로 행하신다고 선언하신다(신 30:6). 어떤 곳에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시지만(겔 18:31), 다른 곳에서는 그 새로운 마음을 자기가 주신다고 하신다(겔 11:19, 36:26).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은총을 통해서 하신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우리는 율법과 약속 또는 계명과 은총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를 티코니우스의(성경 이해를 위한) 원칙 중에서 다섯째로 둔다.713)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종할 능력이 있다고 추론하는데 이러한 추론은 제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계명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⑵둘째 종류의 교훈들은 단순하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그의 뜻을 굳게 잡고 준행하라, 그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와 성결과 경건과 순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⑶셋째 종류는 바울과 바나바가 신자들에게 했다고 누가가 언급한 말, 즉,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한 권고다(행 13:43). 그러나 지조라는 그 미덕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가르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46:10)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한다(엡 4:30). 여기서 요구하는 것을 사람은 완수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서 주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러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같은 식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헌금 문제를 논할 때에 그들의 착하고 경건한 뜻을 여러 번 칭찬하지만(고후 8:11), 조금 뒤에 가서 "권고를 받는 마음을 디도에게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고후 8: 16-17, 의역). 만일 디도가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자기 입을 이용해서 남을 권고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직접 지도를 받지 않고서 기꺼이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9.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눠서 하는 일이 아니다

논적 중에서도 더 교활한 자들은 이 모든 증언에 대해서 궤변을 눌어 놓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도와주시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전력을 다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한다. 또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동등하게 나눠진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예언서에서 인용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3). 주께서 어떤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느냐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으니,714)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점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즉,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은총이 무리에게 약속되었다는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율법에 대한 복종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이유만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응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이 명백하다. 또, 예레미야의 다음 말은 어떤 괴변으로도 논박할 수 없다. 즉, 옛날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문자로만 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영이 언약에 개입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하게 만드시지 않으면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렘 31:32-33).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도(슥 1:3)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 거기서 하나님이 돌이키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회개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질적 번영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친절히 대해 주심을 입증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역경을 주셔서 우리에게 대한 불쾌감을 보이시는 때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불행과 재난으로 지친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고 불평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의의 모범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정직한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회개하는 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눠지는 듯하다는 논적들의 추론은 이 구절의 말씀을 일부러 곡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율법론에서 논할 것이므로,715)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10. (반대자들의 견해를 따를 것 같으면)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재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종류의 논법은 첫째 논법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주께서 우리의 의지와 언약을 맺으시는 약속들을 인용한다. "너희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14, 의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9-20). 또,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렘 4: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신 98:1).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을 인용한다(렘 26:3이하).

주께서는 이 축복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만일우리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거나 무효로 만들 힘이 없다면, 그 약속이 우리의 의지를 상대로 하는 것은 부적당하거나 희롱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점을 부연하기 위해서 그들이 말하는 웅변적인 항의들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일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우리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면, 자기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잔인하게 속이신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자기의 축복들을 전개해 보이시면서도 그것을 즐길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의 이 선심은 대단한 것이다. 걸대로 실현되지 못할 불가능한 일에 의존하는 약속이니 놀랍고 확실한 약속이로다!"716)

조건이 붙어 있는 약속들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할 것이다.717) 그때에 약속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데는 아무 불합리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이 전연 없는 것을 아시면서 자기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잔인한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런데 약속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다 같이 제시되므로, 양쪽에 다 유용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훈으로 불신자들의 양심을 찔러, 그들이 심판을 잊어버리고 죄악에 탐닉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사학을 받을 가치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언하도록 약속 안에서 그들을 부르신다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자기를 공경하는 자들을 축복 하시며, 자기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을 엄벌하시는 것이 완전히 공평하고 적합한 일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죄의 속박 하에 있는 불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한 번을, 즉, 그들은 악에서 떠나야만 마침내 축복을 받으리라는 법을 정하시는 것은 적절하며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경배자들이 받는 축복에서 그들이 배제되는 것이 정당한 처사임을 이해시키기만 해도, 이 법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은총을 간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백방으로 격려하시므로, 우리가 보인 바와 같이, 교훈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약속으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교훈으로 자기의 뜻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에, 우리의 불행을 알려 주시며, 우리가 얼마나 충심으로 그의 뜻에서 어긋났느냐 하는 것도 알려 주신다. 동시에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호소하라고 격려하신다. 그러나 교훈은 나태한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키지 못하므로, 약속을 첨가하적서 일종의 달콤한 생각으로 우리가 그 교훈들을 좋아하도록 유인하신다. 의에 대한 소원이 간절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열렬히 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즐겨한다면", 또 "너희가 순종한다면"이라고 하시는 호소의 말씀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결심하거나 순종하는 자유로운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무력함을 조롱하시는 것도 아닌 것이다.

11. 우리의 반대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온 비난은 만일 의지가 자유롭지 못한다면 의미를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논적들이 쓰는 셋째 종류의 논법은 앞에 있는 두 가지와 비슷하다. 그들은 배은망덕한 백성을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그 구절들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지극한 자비에서 모든 좋은 것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런 종류의 구절을 들면 다음과 같다.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민 14:43), "내가‥‥‥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이 집‥ ‥‥에 행하리라"(렌 7:13-14), 또 "너희는‥‥‥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렘 7:28). 이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했다(렘 7:29). 또 저희가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주께 복종하고자 아니하였으므로, 이 모든 재난이 저희에게 임하였다는(참조, 렘 19:16) 말씀이 있다.

이런 질책은 당장 다음과 같이 대답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곧 우리는 순경을 원하고 역경을 두려워했으며, 그 순경을 얻고 역경을 피하기 위해서 주께 복종하지 않고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도 않은 것은, 우리가 죄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어 해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도망할 수 없는 악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라고.

그러나 필연성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력하고 무익한 변명이므로, 나는 그것을 무시하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오를 변명할 수 있느냐고 묻겠다.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들이 패악해서 주의 자비의 혜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한 원인은 그들 자신의 패악한 의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해 보라. 악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은 자기의 멸망을 자초하지 않은 듯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얻으려고 애쓰는가? 그러나 만일 죄인들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고 징벌을 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완고하게 죄악을 계속 범한다면 큰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잔인하시다고 비난하기보다 자기의 무가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을 배울 것이며, 또 만일 그들이 배울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의 불행과 파멸의 원인인줄로 아는 자기의 죄에 싫증이 났다면, 그들 자신이 비참하고 길일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며, 주께서 책망으로 자기들을 깨우쳐 주신다는 사실을 충심으로 인정하며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책망이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 제 9장에 있는 다니엘의 위대한 기도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4-19절). 첫째 효과의 실례를 우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레미야를 보내 그들의 불행한 원인을 설명하라고 명하셨으나, 이 일은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였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라고(렘 7:27) 하신 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무슨 목적으로 귀머거리들을 당대로 노래를 부른 것인가? 그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그 말씀이 옳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불행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것은 사악한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자들은 계명에서, 또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서 무수한 증거를 끌어다가,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은 망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몇 개의 설명으로 독자는 그들에게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시편에서 유대인들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사악한 세대"라는 책망을 듣는다(시78:8). 다른 시편에서도 예언자는 동시대 아람들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고 권한다(시 95:8). 확실히 이것은 모든 완고한 마음이 사람들의 사악함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마음은 주께서 준비하신 것이니(참조, 잠 16:1)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굽힐 수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시 119:112) 유쾌한 생각으로 기꺼이 하나님에게 자기를 바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성향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같은 시편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시 119:36).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의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경고의 말에 유의해야 한다(빌 2:12-13). 참으로 사도가 그들에게 할 일을 지정하는 것은 육의 태만을 허락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그는 두려움과 조심성을 명령해서 그들의 자만을 깼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침을 기억하게 한다. 여기서 바울은 신자의 행동이 이를테면 피동적임을 분명히 알리며, 그들이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능력은 하늘이 공급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말한다. 또 베드로는 "너희 믿음에 덕을‥‥‥공급하라"고(벧후 1:5) 권하면서도, 우리가 무슨 일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듯이 이차적인 의무들을 우리에게 지정하지 않고, 다만 육에서 오는 나태를 분발시킬 뿐이다. 이 나태가 믿음을 자주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태만은 시정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신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하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살전 5:19)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받은 빛을 키우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짓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우둔한 생각은 쉽게 반박될 것이다. 바울이 명령하는 열성 그 자체는 하나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고후 7:1).

사실, 성결케 하는 직책은 성령이 홀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케 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는다. 요컨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고 한다(요일 5:18). 그런데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우리가 한 부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또 다른 부분은 자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사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 준 바로 이 보존이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도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다(요 17:15). 또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사탄과 싸울 태에는 하나님의 무기만으로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안다(참조, 엡 6:13이하).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시정하는 의미로 즉시 "성령을 통하여"라고 첨부한다(벧전 1:22).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고(요일 3:9)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전투에서 사람의 힘은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단히 밝힌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요일 5:4) 하는 말로 그 이유를 알린다.

(성경에 있는 특별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답변. 12­19)

12. 신명기 30:11이하

그러나 반대자들은 우리의 설명에 강력히 반대되는 듯한 구절을 모세의 율법에서 인용한다. 모세는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 앞에서 증언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718)

그런데 만일 이 말씀을 단순히 교훈으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당면 문제를 위해서는 적지 않은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판정한다. 이것은 계명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성향에 관한 것이지 계명들을 지키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의심이 남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믿을 수 있는 해석가인 사도 바울은 모세가 여기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롬 10:8). 그러나 어떤 완고한 사람이 있어서, 바울이 이 말씀을 복음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심하게 곡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사람의 대담성은 불경건한 것이지만, 우리는 사도의 권위를 빌 것 없이 그를 논박할 방법이 있다. 만일 모세가 교훈들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라면, 그는 백성에게 심히 허망한 자신을 불어넣은 것이 된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처운 일인 듯이 자기 힘으로 지키려 했다면, 그것은 파멸로 돌진한 것 외에 달리 무 이었겠는가? 율법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죽음이 걸려 있는 절벽을 지나야 하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능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모세의 이 말씀은 자비의 언약을 의미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는 율법의 규정들과 함께 그 자비의 언약을 공표했던 것이다. 몇 절 앞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필요가 있다고도 가르쳤기 때문이다(신 30:6). 그러므로 그는 곧 뒤에서 말한 그 능력을 사람의 힘에 두지 않고 성령의 도움과 보호에 둔 것이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 안에서 자기의 사업을 힘차게 실현하신다. 이 구절도 단순히 교훈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약속은 의를 얻을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는 전연 주장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능력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바울은 이러한 증언을 확인한다. 즉, 복음 안에서 주어진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어렵고 가혹하고 지키기에 불가능한 조건 아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쉽고도 언제든지 지킬 수 있으며 공적으로 따를 수 있는 조건하에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율법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은 모든 율법을 성취한 사람만 결국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말씀은(롬 10장) 인간 의지의 자유를 확립하는 데는 아무 가치도 없다.

13.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전제 한다는 주장

하나님께서 간혹 사람들을 시험하시는 의미에서, 은총의 도움을 철수하시고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노력의 방향을 돌리는가를 기다려 보신다고 하는 구절들을 반대자들은 자주 끌어온다. 예컨대 호세아서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내 얼굴을 구할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리라"는 말씀이 있다(호 5:15, 의역).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만일 이스라엘백성의 마음이 그 본유적인 능력으로써 어느 쪽으로든지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께서 그들이 자기의 얼굴을 구하게 될까 하고 생각하시는 것이 우스운 일일 것이라고. 마치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백성이 그들의 생활을 바르게 고치기까지 그들을 멸시하며 버리시는 듯한 일을 극히 자주 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자들은 이런 위협의 말씀에서 결국 무슨 결론을 내리려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백성이 자기 힘으로 회심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성경 전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회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와 싸우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고유 능력을 보유하는 조건으로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719)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증명하는가? 물론 그것은 그 구절이나 유사한 구절일 수는 없다. 사람에게서 물러서시고 그들이 자기 지혜만으로 무엇을 판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는 것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그 약한 정도에 따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말씀들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 백성은 완고해서 경고와 권고와 책망이 아무 효과도 없으므로, 나는 잠깐 물러서서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조용히 내버려두겠다. 오랫동안 재난을 겪고 나서 언제 나를 기억하고 내 얼굴을 찾게 되는지 볼 것이다." 주께서 떠나가신다는 것은 예언을 중지하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를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으로 조용히 말하자면 비밀히 시험하신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일을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공순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정을 받기 전에 역경의 채찍으로 타도되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완고한 고집에 노하시고 심지어 지치신 주님께서 잠깐 우리를 떠나실 때에-바꿔 말하면, 자기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조금씩 이라도 나타내시는 그 말씀을 일시 주시지 않을 때에-그리고 주가 계시지 않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시험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 관찰하며 시험하실 어떤 자유 의지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잘못 해석한다. 하나님이 일시 떠나시는 목적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720)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려는 것뿐이다.

14. 그러면 이 행위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가

그들은 또 성격이나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방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죄를 짓지만 거듭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한다고 인정된다. 죄가 우리에게서 왔다고 해서 우리에게 들리는 것이 옳다면, 같은 이유로 선행에서 우리가 하는 몫도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밀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거저 돌덩이처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첫째 자리를 드리지만 저 표현들은 우리의 노력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일러준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단순히 주장한다면, 나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원하는 떡도 "우리의"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다(참조, 마 6:11). 여기서 "우리의"라는 소유 대명사는, 원래는 우리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주기도에도 같은 어리석은 점이 있다고 조롱하든지, 그럴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의 선심에 의해서 할 뿐인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둘째 항의는 좀더 강하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의를 보존하며 율법을 지키며 열심히 선행을 한다고 확언하는 때가 많다. 이런 일은 마음과 의지의 고유한 기능이므로 만일 우리의 열성이 하나님의 힘을 어느 정도 나눠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성령에게도 돌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의 성령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시는가를 잘 생각하기만 하면, 이런 너절한 항의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들이 악의로 우리에게 던지는 비유는 적당하지 않다. 어떤 미련한 사람도 우리가 돌을 던지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721) 또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찬성과 배척, 원함과 원치 않음, 추구와 저항 등의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기능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허망한 것에 찬성하고 완전한 선을 배척하며, 악을 원하고 선을 원하지 않으며, 사악을 추구하고 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부패 행위를 자기의 진노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뜻대로 조종하셔서 사람의 썩은 손을 통해서 자기의 선한 사업을 실현하신다. 그러면 자기의 정욕만을 따라 노력하는 악인이 하나님의 권능을 섬길 때에, 우리는 그런 악인을 외부의 힘에 움직여 자기의 운동이나 감각이나 의지가 전연 없이 거저 굴러가는 돌에 비교 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문제되는 선한 사람들은 어떤가? 주께서 그들 속에 자기의 나라를 건설하실 때에 주님은, 의지의 본유적 성향에 따라 빗나간 정욕에 의해서 전후좌우로 끌리지 않도록 성령으로써 그들의 의지를 억제하신다. 그리고 성결과 의를 향하도록, 자기의 의를 표준으로 삼아 그 의지를 굽히며 형태를 주며 방향을 지시하신다. 비틀거리며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의지를 바로잡으며 힘을 주신다. 이런 뜻으로 어거스틴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용을 받을 분이고 자기는 행동하지 않느냐?"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을 하며 또 작용을 받습니다. 선한 사람의 작용을 받으면 여러분은 좋은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은 행동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돕는 이'라는 말은 여러분도 행동한다는 뜻을 보입니다.722) 이 발언의 처음 부분에서 그는 성령의 작용이 사람의 행동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을 추구하도록 지도를 받는 사람의 그 의지는 본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돕는다"는 말에서 우리도 무엇을 하는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고 곧 첨가하는데, 이 점은 우리 각 사람에게 무엇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나태를 조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을 연결해서, "결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고 바르게 결심하는 것은 은총에 속한다"고 말한다.723)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에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정복할 수 없고, 심지어 싸울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15.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격려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하나님의 은총과의 관계를 논할 때에, 그 은총은 사람의 의지를 지휘하며 규정하는 성령의 지배라고 해석된다. 성령이 지배하실 때에는 반드시 시정과 개혁과 갱신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시작은 우리의 것을 일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이런 기능들을 하시려면 반드시 움직이며 행동하며 재촉하며 참으며 보존하여야 한다. 따라서 은총에서 생기는 행동들은 모두 전적으로 성령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동시에 우리는 어거스틴이 "은총은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한다"고724) 가르친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즉, 사람의 부패하고 타락한 의지가 시정되어 의의 참된 지배를 받도록 지도될 때에, 그것은 재건된다고 한다. 동시에 새로운 의지가 사람 속에 창조된다고 한다. 본성에 있는 의지는 심히 타락하고 부패해서 새로운 본성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의 적합한 행동이라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다른 어떤 기의 것을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데서725) 인용한 어거스틴의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세인은 사람의 의지에서 사람 자신의 어떤 선을 찾아보려고 무익한 노력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 의지의 힘과 하나님의 은총을 혼합하려고 애쓰지만, 그런 혼합은 은총을 부패시킬 뿐이다. 마치 포도주에 쓴 흙탕물을 타는 것과 같다. 설사 의지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순수한 감동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를 타고났으므로, 하나님이 자기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하시는 일을, 한 편에서는 우리가 했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 것이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선을 향해서 지도하시는 그 마음도 우리의 것이요, 의지도 우리의 것이요, 노력도 우리의 것이다.

16. 창세기 4:7

그들은 여기저기서 다른 증거를 긁어모으지만, 이미 제시한 논박들을 잘 이해한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총명하지 않더라도 별로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에 있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발언을 인용한다(창 4:7). 그들은 이 말씀을 죄에 적용해서, 주께서 가인에게 약속하시기를, 만일 그가 죄를 정복하려고 애쓸 결심을 한다면, 죄의 힘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리라고 하신 듯이 말한다.726) 그러나 이 절을 아벨에 적용시키는 것이 말의 순서에 더 잘 맞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이 아우에 대해서 품은 악한 시기심을 책망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책망하신 점은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것만이 칭찬을 받는 것인데, 가인은 헛되이 범죄를 계획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우보다 나으려고 했다. 둘째로, 가인은 하나님에게서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할 줄 모르고, 아우가 자기의 권위 하에 있었는데도 그 아우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우리의 견해와 반대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 해석을 취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는지도 모르는 까닭에, 하나님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럴게 가정할 때에, 주께서는 이 발언 내용을 약속하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명령하셨을 것이다. 만일 명령하셨다면, 인간의 능력이 있다는 증명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히 설명했다. 만일 약속하셨다면, 가인이 정복하리라던 죄에 항복했으니, 그 약속은 어디서 실현되었는가? 그 약속에는 무언중에 조건이 예컨대, "네가 싸운다면 승리를 얻으리라"는 식으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그러나 누가 이런 핑계를 용인할 수 있는가? 이 지배가 죄에 관한 것이라면 말투가 명령법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정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일 자체로 보거나 문법의 원칙으로 볼 때, 가인과 아벨을 비교한다고 해야 한다. 장자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아우보다 낮게 된 것이 아니였다면, 아우 밑에 들었을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17. 로마서 9:16과 고린도전서 3:9

그들은 또 사도의 증언인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을 이용한다(롬 9:16).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은 비록 자체만으로는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도움을 받을 때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추론한다.727)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바울이 여기서 무슨 문제를 논하는가를 침착하게 생각한다면, 그의 발언을 이렇게까지 경솔하게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의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 오리겐과 제롬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편에서는 어거스틴을 대립시킬 수 있다.728) 그러나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들의 견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비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구원이 예비되었으며,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파멸과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뜻이다. 그는 바로의 예를 들어 악인들의 운명을 지적했다(롬 9:17).

그는 또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는(롬 9:15 ; 출 33:19) 모세의 증언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거저 선택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했다. 그리고 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결론지었다(롬 9:16). 그러나 만일 의지와 노력이 이 무거운 짐을 질 만한 힘이 없으니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바울의 발언은 부적당할 것이다. 이러면,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의 원함과 어느 장도의 달음박질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이 궤변을 그만 두라, 바울이 말하는 뜻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를 위해서 구원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은(사람의) 의지도 아니요 노력도 아닌 하나남의 자비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바로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4-5). "원하는 자로 말미암으며 달음박질하는 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부정했으니(롬 9:16), 원함과 달음질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암시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같은 식으로 추론한다면, 즉, 우리는 우리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바울이 부정하니 우리는 다소의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추론의 권리를 그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추론에서 결점을 발견한다면, 그들 자신의 추론에도 같은 오류가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확고한 추론을 한다. "그러므로 만일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논법을 뒤집어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째 추론이 불합리하므로, 어거스틴은 주께서 사람의 의지를 준비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선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바른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달음질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성취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729)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한 바울의 말을(고전 3:9) 비틀어서 똑같이 무지한 곡해를 한다.730) 이것이 교역자들에 국한된 말씀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동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무엇을 공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할 능력과 필요한 은사를 주신 다음에 그들의 수고를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18. 집회서(묵시 문학서 중의 한 책) 15:14-17

그들은 집회서의 저자를 들먹인다. 이 사람의 권위가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알고 있다. 나는 이 저자를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가 있지만, 가령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자유 의지를 어떻게 변호하겠는가? 그는 말한다. "사람이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은 그가 자기의 지혜의 힘으로 살도록 맡기셨다. 그에게 계명들을 주셨다. 그가 계명을 지키면 계명이 그를 지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앞에‥‥‥생명과 죽음, 선과 악을 두셨다. 어느 쪽이든지 그가 택하신 대로 주시리라고 하셨다"(집회서 15:14-17, 의역).731) 사람이 창조된 때에 생명이나 죽음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장하자.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은 이 능력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나는 솔로몬이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한 말에(전 7:29)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기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으므로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그가 가졌던 것이 모두 다 반드시 곧 그의 부패·타락만 본성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논적들뿐 아니라 집회서 저자에게도(그가 누구였든간에) 대답한다. 구원을 얻는 능력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우리는 그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대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편견을 일으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그대는 육의 악한 경향을 억압하며, 육이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면서 헛된 자기변호를 시도하는 것을 누르려는 생각뿐이며, 따라서 정직한 마음을 사람 속에 넣으신 것은 사람의 파멸이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그대가 대답한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주께서 처음에 사람에게 베푸신 여러 가지 장식을 사람이 자기의 허물 때문에 지금은 빼앗기고 없다는 점에서, 그대와 나의 견해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나 나나 사람은 지금 변호인보다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19. 누가복음 10:30

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어("절반 산채로") 길에 버려졌던 행인의 이야기를(눅 10:30) 무엇보다도 자주 인용한다. 이 행인은 인류의 큰 재난을 대표한다고, 거의 모든 저자들이 가르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것을 근거로 반대론자들은 추론한다. 즉, 행인을 "절반 산채로" 버렸다고 하니, 사람은 죄와 악마라는 강도를 만나 선했던 이전의 모습이 아무 흔적도 없어질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며 바른 이성과 의지가 조금은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절반 살았다"고 하겠느냐고 추론한다.732)

첫째로 내가 그들의 이 풍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확실히 교부들은 주의 말씀의 참뜻을 고려하지 않고 이 해석을 고안했다. 성경의 원칙이 지정한 한계를 넘어서 풍유(알레고리)를733) 해석해서는 안 되며, 어떤 교리의 완전한 토대로 삼는 것은 더욱 안 된다. 내가 이 허위를 근절하려면 그렇게 할 근거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절반 살았다"고 하지 않고 축복된 생활에 관해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죽은 우리를‥‥‥살리셨다"고 말하고(엡 2:5), 성도들이 "절반 살아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절반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의 광명을 받으라고 호소하지 않고, 잠자는 자와 무덤에 묻힌 자들을 상대로 한다(엡 5:14). 같은 식으로 주께서는 친히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왔다"고 하신다(요 5:25, 의역). 사소한 암시를 들어 이렇게 많은 분명한 발언들에 반대하는 그들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그러나 그들의 이 풍유가 확실한 증언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절반 살아 있다고 하니, 아직 건전한 데가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사람은 천상적이며 영적인 지혜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성은 없지만, 그의 지성에는 이해력이 있다. 그는 정직한 일을 다소간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은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속성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확실히 이런 속성들이 있다고 해서, 여러 학과들의 공통된 찬동으로 인정된 어거스틴의 견해를 우리가 버려야 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타락한 후에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을 거저 주시는 선한 것들을 빼앗겼고, 사람의 여러 가지 천품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고 한다.734) 그러므로 우리가 틀림없는 진리, 어떤 공성기로도 흔들 수 없는 진리라고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즉,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는 것이 불경하고 패악하고 악취가 나고 불순하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죄의 독소가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 호흡에서 나오는 것은 악취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선한 외관을 보이지만, 그 지성은 여전히 위선과 간계에 싸여 있고, 심정은 내면적 패악성으로 결박되어 있다.

제 6 장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추구해야만 한다735)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처럼 보인다. 1-2)

1. 중보만이 타락한 인간을 도우신다

인류 전체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다. 따라서 우리가 위에서 말한 시초에 있었던 훌륭한 고귀성은736)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도리어 큰 수치를 주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죄로 오염되고 더렵혀진 인간을 자기의 작품으로 인정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드디어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구속자로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에서 사망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우리가 논술한737)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더라도,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는 믿음이 따르지 않으면, 그 모든 지식은 아무 쓸데없는 것이다. 자연적인 순서로서는 우주라는 구조가738) 일종의 학교가 되어 그 안에서 우리가 경건을 배우고, 거기서부터 다시 영생과 완전한 복락으로 전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반역한 후로 우리는 어느 쪽으로 향하든 간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만나게 된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죄없는 다른 피조물들까지도 이 저주 하에 잡혀 있고 덮여 있으며, 우리의 영혼은 이 저주에 압도되어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아버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려고 하시더라도. 우리는 우주를 보고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739) 우리는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전혀 인정하시지 않고 인연을 끊으시는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으므로 당연하다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의 마음도 눈이 어두워져서 참된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둔해지고 은혜를 모르게 된다. 우리의 모든 감각도 뒤집혀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만큼 악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발언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수많은 기적이 가득히 들어찬 하늘과 땅이 웅대한 극장을740)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른다. 이것을 잘 보면 우리는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 믿음을 어리석다고 보아서 멸시한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인 성향과 맞지 않더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지금 우리가 멀어진 우리의 창조주에게로 돌아가서 그가 다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전도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틀림없이 처음 사람의 타락 이후로 중보를 떠나서는741)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구원을 얻게 하는 힘이 없었다(참조, 롬 1:16: 고전 1 :24). "영생은 아버지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믿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요 17:3) 그리스도의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문이라고(요 10:9) 모든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없이742) 모든 불경건한 자와 불신자들에게 천국을 열어 주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더욱더 추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발언을 복음 전파에 국한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에 대한 것은 곧 반박할 수 있다. 즉,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참조, 엡 4:18) 저주를 받은(참조. 갈 3:10) 진노의 자녀라고(참조, 엡 2:3) 선언된 사람들은 화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민족의 상식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 이런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방 종교를 잘못된 것이라고 정죄하시는 것과 똑같이, 율법 아래에서 구속자가 선민에게만 약속되었다는 그 이유를 알리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지 않는 경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된다. 또 이 근거 위에 서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없고 생명에 대한 희망을 빼앗겼다고 단언한다(엡 2:12), 그런데 요한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었고(요 1:4), 모든 세계가 그 생명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하므로(참조, 요 1:10), 그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가 화해자 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생명이라고 선언하신다(요 11:25, 14:6). 확실히 하늘을 이어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뿐이다(.참조, 마 5:9-10). 그뿐 아니라 독생자의 몸에 접붙임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자녀의 지위를 가진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부적당한 생각이다. 요한은 분명히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요 1:12, 의역).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아직 철저히 논할 생각이 아니므로, 언급하기만 하고 지나가도 충분할 것이다.

2. 구약의 중보가 없으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중보를 떠나서 하나님이 저 옛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이 없고 은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주신 일도 없다. 율법에 있는 제사는 그리스도만이 행하는 속죄에서만 구원을 찾으라고 신자들에게 명백히 가르쳤지만, 나는 그 제사들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의 기쁘고 복받은 상태는 언제나 그 토대가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었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을 포함시키셨지만(창 17:4), 바울은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할 후손은, 바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였다고 현명한 추리를 한다(갈 3:14).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사람이 모두 그의 후손인 것이 아님은 우리가 아는 바이기 때문이다(갈 3:16). 이스라엘과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은 아직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을 때부터, 하나는 택하심을 받고 하나는 버리심을 받았으니(롬 9:11),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참으로 장자가 버림을 받고 차남만이 자기의 지위를 지킨 것은 어떻게 된 일이었는가? 또 많은 사람들이 상속권을 빼앗긴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주로 머리인 한 분 안에서 인정되며,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직책인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약속의 구원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최초에 선민을 택하신 것도 중보의 은총에 의한 일이었다. 비록 모세의 글에 이 점이 분명한 말로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 충분히 알려져 있다. 아직 백성 위에 왕이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경건한 자들의 행복을 이미 노래에서 묘사했다. "여호와께서‥‥‥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 2:10). 이런 말로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교회를 축복하시리라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 생각과 부합되는 예언이 조금 뒤에 첨가되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그가 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삼상 2:35) 또 우리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가 다윗과 그 후손에게서 그리스도의 산 형상을 보기를 원하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다윗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권할 때에,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시 2:12)고 명령한다. 이와 일치하는 것은 복음서에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요 5:23)고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나라는 열 지파의 반란으로 인해서 붕괴했지만. 다윗과 그 후계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변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왕상 11:13,32)고 하셨다. 이와 동일한 약속은 두세 번 반복되어, 분명히 "내가‥‥‥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왕상 11:39). 얼마 후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라고 한다(왕상 15:4). 그 후에 사태가 거의 파멸 상태였으나,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한다(왕하 8:19).

간추리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버려두시고 다윗을 택하셔서 하나님 의 영구히 기뻐하실 사람을 삼으셨으니, 다른 곳에 있는 말씀과 같다. "실로의 성막 그리고 요셉의 장막을 싫여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시 78:60,67),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68),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시 78:70-71). 결론을 말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그의 교회를 보존하기로 정하셔서, 저 머리되시는 분에게서 그 건전성과 안전성을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라고 선언한다(시 28:8). 그는 즉시 기원을 첨가하여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라고 해서(시 28:9), 교회의 상태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뗄 수 없게 연결되었다는 뜻을 표시한다. 다른 구절도 같은 생각을 표명한다.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낙하소서"(시 20:9).743) 이 말씀은 신자들이 자신들은 왕의 보호 하에 피하여 있다는 이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도움에서 피난처를 얻으려 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 뜻은 다른 시에서 "여호와여‥‥‥구원하소서‥‥‥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는 말씀에도 포함되어 있다(시 118:25-26). 여기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을 받을 소망을 얻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다른 기원에서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데, 역시 같은 생각을 표명한다. "주의 우편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의 위에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17). 이 시편 기자는 모든 백성이 흩어진 것을 통곡하면서도 그들이 머리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회복되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백성이 외국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국토가 황폐하고 모든 것이 파멸된 상태에서 예레미야가 교회의 재난을 슬퍼했을 때에, 그는 특히 나라가 망해서 신자들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통곡한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애 4:20).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중보 없이는 인류와 화해하실 수 없으므로, 율법 하에서 거룩한 조상들이 믿어야할 대상으로서 항상 그리스도가 그들 앞에 제시되었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언약과 참된 신앙을 위해서 필요 불가결한 분이다. 3-4)

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한다

그런데 환난 중에서 위로가 약속되며 특히 교회의 구원이 묘사될 때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의 깃발이 예시되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받은 자와 함께 나오셨느니라"고 하박국은 말한다(합 3:13). 그리고 예언자들은 교회의 회복을 말할 때마다. 다윗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킨다(참조, 왕하 8:19) 또 이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약에 안정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사야가 한 대답이 매우 적절하다. 불신자인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 공격이 해제되어 도성이 곧 안전하게 되리라는 이사야의 증언을 물리쳤을 때에, 그는 갑자기 메시아에 관해 언급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사 7:14). 이런 말로 그는 비록 악한 왕과 백성이 고의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려는 듯이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거부했지만, 구속자가 지정된 때에 오실 것이므로 그 언약은 무효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하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모든 예언자가 항상 애써 선포한 것은 구속과 영원한 구원을 가져올 다윗의 나라였다. 그래서 이사야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라고 한다(사 55:3-4).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이 증언을 받지 못할 때에는, 심한 절망에서 신자들은 아무 소망도 가질 수 없었다. 낙망한 자들을 고무하시기 위하여 예레미야서에서 말씀하신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벗이며"(렘 23:5-6). 그뿐 아니라, 에스겔서에는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34:23-25)라고 하며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이 믿어지지 않는 거듭남을 논하신 후에,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라고 하신다(겔 37:24,26).

모든 경건자들의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에게만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나는 여러 사람에게서 몇 구절씩 수집하는 것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다. 예를 들면, 호세아서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두목을 세우고"라는 말씀이 있다(호 1:11). 그는 후에 이것을 더 분명히 설명해서,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라고 한다(호 3:5) 또 미가도 백성이 돌아오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명백히 말한다.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미 2:13). 아모스도 백성이 새로워질 것을 예언하려고,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라고 한다(암 9:11). 이 말씀의 뜻은 "내가 다윗의 가문에 다시 한 번 왕가의 영광을 일으키리니, 이것은 구원의 유일한 기치며, 이제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출현 시대에 더 가까워진 스가랴는 더욱 분명히 선포한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슥 9:9). 이것은 이미 인용한 시편의 말씀, "여호와는‥‥‥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힘이시로다‥‥‥여호와여 구원하소서" 하는 말씀과(시 28:8-9) 일치한다. 여기서 구원은 머리로부터 전신에 흘러내린다.

4.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백성이 이런 예언들을 듣고 깨달아, 직접 그리스도를 향해서 해방을 구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비록 그들은 수치스러운 타락 상태에 빠졌지만, 대원칙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서 교회를 구원하시며, 선민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실 그 언약거저 주신 그 언약은 확고부동하리라는 것이 그 대원칙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에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마 21:9). 어린이들이 부른 그 찬송가는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것 같고, 하나님의 자비의 유일한 보증은 구속자의 출현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믿기 위해서는 자기를 믿으라고 친히 명령하셨다. "너희는‥‥‥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믿음은 원래 그리스도로부터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곧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만, 완전히 굳은 믿음을 가진 분이 중보로서 사이에 있지 않으면 믿음은 점점 사라지며, 중보가 없으면 하나님은 너무도 존엄하고 높으시기 때문에 땅에서 기어 다니는 구더기와 같은 죽을 인생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라고744) 하는 일반적인 말에 나는 찬성하지만, 거기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데는(골 1:15) 이유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칭호는 우리에게 경고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만나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한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예언자들이 구속자에 대해서 가르친 것을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해석으로 모호하게 만들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절망 상태에서는 중보의 출현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으며, 교회를 해방하는 방법도 달리 없다는 것이 여론과 같이 인정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롬 10:4)745) 바울의 가르침은 유감이지만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율법 자체와 예언서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바울의 가르침은 바르고 확실하다. 다른 적당한 곳이746) 있겠기 때문에 여기서는 믿음에 대해서 아직 논하지 않지만, 독자들의 의견이 이 점에서 일치하기를 바란다. 즉, 경건 생활의 첫째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를 지켜 주시며,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드디어 우리를 모아 하나님 나라를 영원한 상속으로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최근에 말한 것이747)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더라도 구원을 얻게 하는 지식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 분명하게 된다. 그래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모든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를 세우시고, 그들이 그를 보며 그를 믿게 하셨다.

이런 의미로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광대무변한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아들 안에서 유한하게 되시고 우리의 작은 척도에 자기를 맞추셨다고 했다.748) 광신자 들은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유용한 발언을 불경건한 공상으로 바꾸어 마치 하나님의 완전하신 전체에서 흘러나는 신성의 일부분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듯이 곡해한다.749) 그러나 이레니우스의 말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된다는 뜻에 불과하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라고 한 요한의 말은(요일 2:23) 언제든지 옳았다. 천지를 만드신 최고의 존엄하신 분을 경배하노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에게 중보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참으로 맛보지 못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믿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모시지 않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그 지식은 잠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또 그 결과로 그들은 드디어 유치하고 추악한 미신에 빠져, 자기의 무지를 폭로했다. 현재 회교도들도 천지의 창조자는 하나님이라고 힘껏 외치지만, 그리스도를 부정하면서 우상으로 진정한 하나님을 대치하고 있다.

제 7 장  율법을750)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뜻하는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율법. 1-2)

1. 중보자는 타락한 인간만을 돕는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갈 3:17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증언들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온 것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원칙을 가르치는 십계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하신 종교 형태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모세를 입법자로 세우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말소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거저 받은 언약과 그들이 그 언약의 상속자임을 여러 번 그들에게 회상시켰다. 마치 그는 그 언약을 부활시키려고 파견된 것 같았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 의식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기름에서 나는 악취를 드리는 것보다 더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 자기의 더러운 살결을 씻어 버리기 위해서 물과 피를 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의 예배 형식은 진정한 것에 대응하는 그림자와 상징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전체가 전혀 우스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막에 속한 모든 것을 산에서 보이신 규례대로 만들라고 명령하신 구절을(출 25:40) 스데반의 설교와(행 7:44) 히브리서에서(히 8:5) 아주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이방인들이 너절한 짓에 정력을 소모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그 의식들에서 공연한 노력을 낭비했을 것이다. 경건을 위한 열성으로 노력한 일이 없는 무(無)종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진저리날 정도다. 그들은 무슨 까닭에 하나님이 저 고대 민족을 이 많은 의식으로 괴롭히셨느냐고 할 뿐 아니라, 이 의식들을 멸시하며 어린애 장난이라고 비난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율법의 목적에 주목하지 않는다. 율법의 형식을 그 목적에서 분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허망한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사를 명령하신 목적은 세상적인 일로 경배자들을 분주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님을 바로 저 모형이751) 알린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의 본성을 생각해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경배만이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의 많은 말들도 이 점을 증거하며, 유대인들의 미련함을 비난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물에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율법의 가치를 낮추려고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해석가였으므로, 목표에서 멀어져 가는 일반 사람들의 눈을 이런 방법으로 다시 그 목표로 향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은총을 보면, 우리는 확실히 율법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점이 없지 않다는 언급을 할 수 있다.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라고 모세가 그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다(출 19:6). 이것은 짐승의 피로 얻는 화해보다 더 위대하고 우수한 화해가 사이에 끼지 않으면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참조, 히 9:12이하). 아담의 후손은 모두 유전적 오염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다. 그러면 그들이 왕 같은 존엄한 지위에 오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만일 이런 탁월한 명예가 어떤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가장 합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러운 죄악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그들이 거룩한 머리 안에서 성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사장직의 권리가 그들 사이에서 잘 실현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모세의 말을 교묘하게 돌려, 유대인들이 율법 하에서 맛본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고 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2:9). 그가 이렇게 말을 바꾼 것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조상들보다 더 많이 얻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과 임금의 영예를 받았고, 중보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감히 자유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율법은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의 가문을 중심으로 드디어 건설된 왕국은 율법의 일부분이며, 모세의 제도 하에 포함되었다는 점에 우리는 여기서 잠깐 주목해야겠다. 따라서 레위 지파 전체에서와 다윗의 후손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고대인들의 눈앞에 마치 이중의 거울에 비치듯이 제시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며 자신의 부패에 오염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이 될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받은 후손이 나타날 때까지 유대인들은 "몽학 선생"의 감독 아래에 놓였다고 한 바울의 말은 옳다(갈 3:24).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친숙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 일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애들과 같았다.752) 의식들이 어떻게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는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했다. 이 점은 예언자들의 많은 증언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노염을 풀기 위해서 매일 새 제물을 드려야 했지만, 그들의 모든 악행을 다만 한 제물이 대속하리라고이사야는 약속했다(사 53:5). 다니엘도 같은 생각이었다(단 9:26-27). 레위 족속에서 임명된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다만 한 제사장에 대해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이 엄숙한 맹세로 선택하셨다고 한다(시 110:4 ; 히 5:6, 7:21). 그 때에는 눈에 보이는 기름을 부었는데,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서 다른 종류의 기름 부음이 있으리라고 선언했다(단 9:24). 여기서 무수한 예를 말하지 않고 히브리서 기자의 예를 보면, 그는 제 4장부터 제 11장까지, 그리스도의 때가 오기 전에는 의식들이 무가치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십계명에 관해서는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롬 10:4) 경고한 말에 주의해야 한다. 또, 의문 자체는 죽이는 것이지만(고후 3:6), 그리스도는 그 의문을 살리는 영이시라고 한다(고후 3:17). 율법의 마침이라는 발언은, 그리스도께서 의를 거저 전가해 주시며 중생의 영으로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쓸데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 즉, 마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더라도, 그 감당할 수 없는 멍에와 짐에 눌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 지식에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갈 3:19). 즉,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의를 얻는 듯이 말하는 악한 거짓 교사들을 상대로 사도는 논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서 율법 자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율법은 거저 택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포함한 아름다울 것이었다.

(우리는 도덕적인 율법을 수행할 수 없다. 3-5)

3. 율법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며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죄를 알고 용서를 구하게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율법을 배울 때에 변명할 여지가 더욱 없어진다는 것을 간단히 알아두어야 한다. 만약 율법이 완전한 의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럴 때에 인간은 하늘 심판대 앞에서 분명히 외로운 자로 인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을 선포한 후에,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놓았노라고 하면서(신 30:19), 주저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으로 삼았다.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보상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만일 우리가 이 길을 취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율법의 무력함이 나타난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다시 완전한 저주로 떨어진다. 나는 있는 일을 말할 뿐 아니라, 있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율법의 교훈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 것이므로, 사람은 제시된 약속을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 약속에서 혜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약속이 선하심으로 사람은 자기의 불행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구원받을 소망이 없어졌으므로 자기는 분명히 죽으리라는 위협을 느낀다. 여러 가지 무서운 협박이 몇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압박하며 괴롭힌다. 협박은 우리를 지나지 않고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추궁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가장 임박한 죽음을 볼 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약속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만을 볼 때에 우리는 낙심하며 당황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서 얻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정죄와 저주이기 때문이다(갈 3:10). 율법은 지키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도, 그 축복과 우리 모든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또한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희롱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행복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보이시며, 그것을 얻으라고 불러 인도하시며, 얻을 수 있다고 다짐하시면서, 한 편으로 그것을 감추며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드시니, 이것은 희롱과 다른 데가 없지 않은가? 나는 대답한다. 율법의 약속에 조건이 붙어 있는 점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행해야만 약속을 얻을 수 있으며 완전한 준수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약속을 주신 것은 허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인애로 우리의 행위를 보심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지 않으며, 우리도 복음이 보여 주는 그 인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율법의 약속에 아무 결실이나 결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 그 약속은 조건이 붙어 있더라도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베풀어주시며, 자기의 충만한 친절에 다시 다른 선물을 첨가하신다. 즉, 주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을 물리치시지 않고 도리어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완전히 만드시면서, 마치 우리가 조건을 이행한 듯이 율법이 약속하는 혜택들을 받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제목 하에753)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논해야 하겠으므로, 지금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5. 율법의 수행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했다. 제롬이 아무 저주함 없을 만큼754) 이 생각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일반 사람이 생각하므로, 우리는 곧 간단히 설명하여 재확인해야겠다. 나는 제롬의 생각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를 살펴야 하겠다.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구질구질한 말로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지금까지 있은 일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나는 "불가능하다"고 부른다. 우리가 가장 오랜 과거를 찾아본다 하여도 성도들은 사망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참조, 롬 7:24), 한 사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함을 다하며"(막 12:30)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사랑의 목표에 도달한 일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또 정욕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누가 이것을 반대하겠는가? 물론 나는 우리가 어리석은 미신으로 어떤 성자를 공상하는가를 안다. 하늘 천사들도 그 성자들처럼 순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또 경험에서 얻는 증거와는 반대된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도 육체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완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이 점을 지지하는 명백한 증언들이 성경에는 얼마든지 충분히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솔로몬이 말한다(전 7:20 ; 참조, 왕상 8:46).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한다(시 143:2). 욥은 여러 구절에서 같은 생각을 주장한다(참조, 욥 9:2, 25:4). 바울의 말은 가장 분명하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17).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에 바울이 드는 이유는 다 큰 것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것이다(갈 3:10 ; 신 27:26). 여기서 그는 아무도 그렇게 항상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전제한다. 성경에서 기록된 일은 영구적인 것,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펠라기우스파는 어거스틴을 궤변으로 괴롭혔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행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그들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물론 죽을 인생을 천사 같은 순결 상태에 끌어올리실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서 선언하신 것과 반대되는 일은 하시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755) 나는 이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실을 대립시키는 것은 생각이 부족하다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기를, 성경이 선언하는 것은 있지도 않고 또한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고 하면 이런 발언은 냉소해 버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하자.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마 19:25-26). 또 어거스틴은 우리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지 못한다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한다. "사랑은 지식에 따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애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땅에서 방랑하는 동안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전 13:12)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불완전하다."756) 그러면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력한 것을 볼 때에, 율법을 이 육신 생활에서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기를 바란다. 이 점은 바울의 다른 구절도 밝힌다.(롬 8:3).757)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주며, 거울처럼 우리의 죄 많음을 밝혀 줌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인도 한다. 6-9)

6. 율법은 엄격함이 우리에게서 모든 자기기만을 제거해 준다

그러나 이 문제 전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른바 "도덕적 율법"의 기능과 용도를758) 간단히 개관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그 기능에 세 부분이 있다.759)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유일한 의를 밝히는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며, 알리며, 죄를 깨닫게 하며, 결국 정죄한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눈이 어둡고 정신이 마비되었으므로, 자기의 무력함과 불순함을 알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자기의 허무함을 분명히 믿게 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의 정신력에 대해서 지나친 자신을 가지며, 자기가 택한 표준으로 재는 동안은 자기의 정신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게 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과 율법의 난해함을 비교하게 되면, 자기의 오만불손함이 다소간 꺾이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기의 능력을 아무리 굉장한 것으로 생각했더라도, 이 무거운 율법을 지고는 숨이 가쁘고 비틀거리는 것을 곧 느끼며, 결국은 심지어 넘어지며 지쳐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율법을 배운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의 눈을 맹목적으로 만든 그 교만을 탈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병도 고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가 자만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판단을 근거로 삼는 것을 버려두는 동안은 위선을 의로움 이라고 가장하며, 여기 재미를 붙여서 가짜인 여러 가지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은총에 반역한다. 그러나 그 모든 허구적인 가짜 의를 제쳐놓고, 율법의 저울로 자기의 생활을 저울에 달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는 자기가 성경에서 멀며, 참으로 지금까지 자기는 오염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 무수한 죄악이 자기 안에서 가득차 있는 것을 깨닫는다. 탐욕의 죄는 아주 깊고 꼬불꼬불한 구석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쉽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사도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롬 7:7). 율법이 탐욕을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끌어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련한 인간을 아주 비밀히 죽여 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그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

7.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은 그 가치를 감하지 않는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 그가 거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의 첫째 기능, 즉, 아직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이 경험하는 것뿐이다. 여기에 관련된 발언들이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그래서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으로서(고후 3:7) "진노를 이루게" 하며(롬 4:15) 죽인다.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가책이 더욱 커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럴 때에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범행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 자체만으로는 고발하며 정죄하며 멸망시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760)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율법을 공경하지 않거나 그 훌륭한 우월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지가 율법에 순종할 태세가 완전히 준비되어 있으면 율법을 알기만 해도 구원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맹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으므로, 원래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는 결과가 된다.761)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범법자임이 증명되므로,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명백하게 나타낼수록, 반대로 우리의 죄를 더욱 폭로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구원이라는 보상은 의에 달렸다고 율법이 확실히 다짐할수록, 그것은 악인의 열망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이 격언들은 결코 율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분명히 칭송하므로 가장 가치있는 발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사악과 부패로 인해서 율법이 우리 앞에 명백히 제시하는 복된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지지 없이 우리를 양육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감사하며, 우리에게 은총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로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며 새로운 은사를 더욱 많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8.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

우리 모든 사람이 사악하다는 것과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한다. 그러나 이 확인은 우리가 낙심해서 주저앉아 버리거나, 완전히 용기를 잃고 낭떠러지에 뛰어들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증언에서 마땅한 유익을 얻으면 된다. 율법이 악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아는 것이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참으로,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고 사도는 단언한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거나 멸망하게 버려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자기의 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다. 율법의 교훈에서 하나님은 다만 완전한 의에 보상을 주시며 그러나 이런 의는 아무에게도 없다. 반대로 악행은 엄격히 심판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을 대해서까지 은총과 인자로 충만한 빛이 난다.762)

9. 율법은 어거스틴이 말하고 있듯이 비난함으로써 우리가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주 말한다. 예컨대, 힐라리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가 율법의 요구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연약하여 피로할 때에, 율법은 우리에게 은총의 도움을 구할 줄 알라고 합니다." 아셀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글을 써 보내었다. "사람이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며 그 대책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을 구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유용합니다"라고. 또 로마의 이노센트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율법은 명령하고 은총은 실천력을 공급합니다"라고 썼다. 발렌티누스에게 보낸 글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라고 한다. 또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책망하며, 책망을 받은 우리가 두려워하며, 두려워하므로 용서를 빌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고 감히 행동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다." 또,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위대한 체하는 우리를 작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게는 의를 얻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궁핍하여 우리가 은총으로 피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한다. "주여, 행동하소서, 자비하신 주여, 행동하소서, 행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소서, 아니, 당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명령하소서,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입이 막히고 아무도 자기를 큰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작은 자가 되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게 하소서"763) 그러나 그가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764) 글을 썼는데, 내가 그의 증거를 많이 늘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율법의 둘째 가치를 이렇게 명백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첫째 가치에 의존한 것이라고 알았거나 또는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그 정확한 뜻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말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율법의 이 첫째 기능은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육을 억누른 후에 속사람이 새로워지며 다시 꽃이 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첫 인상에 놀라 절망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이 이런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버림받은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기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율법과 양심의 증거에서 철저한 타격을 받아, 마땅히 받은 것을 스스로 탄로시킨다.

(율법은 죄인과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구속한다. 10-11)

10. 율법은 부정한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율법의 둘째 기능은 적어도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있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강압을 느끼지 않으면 바르고 공정한 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그들이 억제되는 것은 속마음에 감동이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굴레를 쓰고 있어서 외면적인 활동에 손을 대지 못하며, 제멋대로 즐겼을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도 나아졌거나 의로워진 것이 아니다. 공포심이나 수치심이 방해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품은 것을 감히 실행하지 못하며, 날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시키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올라, 무서운 율법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곧 무엇이든지 하며 어디서든지 폭발할 자세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 자체를 극히 미워하며 입법자인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바른 일을 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실 때나, 하나님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때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쪽으로 기꺼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싫어서 반대를 해보지만 하도 무서워서 억지로 복종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 억제된 또 강요된 의는 인간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다.765) 주께서는 만사가 소란·혼돈하지 않고 사회가 평온하도록 이런 방법을 마련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을 허락한다면 사회는 소란하고 혼돈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4), 어리석은 육의 욕심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766) 받는 것이 유익하다. 하나님의 벌이 무서워서 적어도 외면에 나타나는 난동을 삼가는 동안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고 적지만, 그래도 의의 멍에를 담당하므로 조금은 야성이 꺾인다. 그 결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전혀 규율에 대한 초보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다음과 같은 교훈은 특히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해 언급한 듯하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9-10). 사도는 여기서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두면 한정 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고 가르친다.

11.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방해물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 3:24)라고 한 말은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다.

처음 종류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덕이 있고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그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다.

둘째 종류의 인간들은 굴레가 필요하다. 그들이 육의 정욕이 날뛰는 대로 포기하여 의를 전혀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을 굴레로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직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욕이 몹시 끓어올라 영혼을 결박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멸시하는 상태에 떨어뜨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대항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상속시키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즉시 중생시키지 않는 때에는, 그들에게 찾아오실 때까지 공포심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신다(참조, 벧전 2:12).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순결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는 데 유익한 공포심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많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암중모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이 굴레가 되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경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성령으로 중생해서 충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767)

(율법은 주로 믿는 자들을 깨우치며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믿는 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필요하다

셋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본래의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도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768)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렘 31:33; 히 10:16),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 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마치 주인의 마음에 들겠다는 성의와 준비가 있는 하인이 주인의 습관을 따르며 거기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 습관을 자세히 연구하며 관찰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필요성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율법을 매일 공부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더욱 순수하게 아는 일에서 새로운 전진이 없으리만큼 지혜가 많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또 우리는 배울 뿐 아니라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즉,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죄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아무리 정성껏 노력하더라도, 무관심한 육이 짐이 되어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율법은 육에 대해서 마치 가지 않는 게으른 나귀를 가게 하는 채찍과 같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율법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한다. 확실히 다윗은 율법을 찬양했을 때에 이 용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이 밖에도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컨대, 시 119:5). 이 구절들은 바울의 발언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도는 중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율법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서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자는 율법의 위대한 효용가치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종심을 불어넣으시고,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읽을 때에 그들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교훈뿐 아니라, 거기 동반하는 은총의 약속을 붙잡는다.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든다. 만일 율법이 명령과 위협만으로 사람의 영혼을 무섭고 놀라게 하여 괴롭히며 슬프게 만든다면, 율법보다 더 싫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윗은 특히 율법에서 중보를 인식했다는 것을 알린다. 중보가 없으면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13. 믿음이 깊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이 전적으로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769) 이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집어던지며, 율법의 두 판을 버린다. "죽음의 직분"이 포함된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악한 생각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추방하라. 모세의 훌륭한 교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서는 죽음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려 할 때에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신 32:46-47). 그러나 만일 율법에 의의 완전한 모범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르고 공정한 생활의 표준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변의 표준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생활은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라고 한 다윗의 발언은(시 1:2) 한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세상 끝까지 적용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적 순결은 우리가 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율법을 무서워하여 도망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지금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관인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그 완전성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일평생 애써야 하는 목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의무와 일치하는 동시에 또한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기진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참으로 인생 전체가 경주다(참조, 고전 9:24-26). 경주로를 다 달릴 때에, 지금 멀리 바라보면서 뛰어가는 그 목표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이른바 율법의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단절을 뜻한다. 14-17)

14. 율법이 어느 정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철폐되었는가?

그런데, 율법에는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권고를 반복해서 태만한 그들을 일깨워 주며 잠자는 그들을 꼬집어 자기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자 해서,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즉, 내가 말하는 도덕적 율법이 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770) 율법이 신자들에게 지금은 바른 길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해서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지금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넣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이 이와 같이 철폐된 데 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히 가르친다(참조, 롬 7:6). 주께서도 철폐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주께서는 자기가 율법을 폐하리라는 생각을 부정하셨는데(마 5:17), 만일 이 생각이 유대인 사이에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을 부정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구실도 없이 우연히 그런 생각이 생겨났을리가 없으므로, 아마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오류는 거의 모두가 진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 가운데서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주께서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고 선언하심으로써, 주의 강림으로 인해서 율법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고, 충분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그는 도리어 율법 위반을 고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교정함으로써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참조, 딤후 3:16-17).

15.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의식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계명의 힘에 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법은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명령을 솔직하게 실시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저주의 벼락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갈 3:10; 신 27:26). 사도가 "율법 행위에 속한"자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에 우리를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는 그 용서에 자기의 의의 근거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속박 하에서 비참하게 멸망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속박에서 풀러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속박을 의미하는가? 가혹하고 위험한 요구의 속박이다. 그것은 율법의 철저한 형벌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며 어떤 범행이든지 반드시 처벌하고야 만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 신 21:23). 바울은 그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갈 4:4-5)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갈 4:5).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끝없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억눌려 지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율법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고, 우리는 항상 여전한 경외심과 복종심으로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6. 의식적인 율법

의식들은 문제가 별개이다. 의식들은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의식을 끝내셨지만 그 신성은 조금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정하시며 존중하셨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의식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허무한 외관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의식들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의식을 정한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의식 준수가 쓸데없을 뿐 아니라 또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식은 그림자요 그 본체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골 2:17). 그러므로 이미 자기를 분명히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의식이 상징하는 것보다 멀리서, 또 휘장으로 가리워 있듯이 상징하는 것보다 지금은 의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진실이 더 잘 빛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은(마 27:51),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히 10:1) 전에 희미한 윤곽만으로 시작했던 하늘 축복이 명백하고 살아 있는 형상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눅 16:16) 여기 해당한다. 저 거룩한 족장들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대낮에 보는 것을 그들은 멀리서 희미한 윤곽으로 잠깐 보았을 뿐이라는 뜻이다.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교회는 이 초보적 단계를 아주 초월해야 하는가를 세례 요한이 설명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비록 속죄가 고대의 제사에서 참으로 약속되었고, 언약의 궤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증했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안정성이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림자에771) 불과했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은 준수하지 않게 되었으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폐지하시면서 자기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인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17. 우리에게 불리하게 기록된 유대관계는 삭제되어 있다

바울이 지적한 것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점이 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운운한다(골 2:13-14). 이 발언은 율법의 철폐를 확대해서 율법의 규정이 이제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정도까지 가는 듯하다. 이 말을 도덕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교훈보다 그 용서 없는 엄격성을 폐지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772) 그 생각은 잘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더 신중히 고려해서 그 본뜻은 의식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의문"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에서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한다(엡 2:14-15).773)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를 막힌 담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엡 2:14),이 발언이 의식에 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둘째 주석가들이 저 첫째 사람들을 바르게 비평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사람들도 아직 사도의 뜻을 썩 잘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두 구절을 세부까지 비교하는 것을 나는 옳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다짐하려고, 과거에 그들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런 장애물은 의식들이었다. 유대인들을 주 앞에 성별한 결례와 제사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했던 것이다. 그러면 골로새서에서 언급하는 것이 더 숭고한 신비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거기서 문제는 모세에 있는 규례들이며,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그 규례로 몰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가 더 깊은 데까지 논의를 전진시키는 것과 같이 이를테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이 구절에서도 같은 논의를 한다. 의식들에 관해서 순수해야 된다는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 의식들을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라고774)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골 2:14) 그뿐 아니라, 무슨 까닭에 우리의 구속을 그 증서가 "도말"되었다는 사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시키는가? 그러므로 문제 자체가 우리에게 더 내면적인 것으로 인정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옳은 해석을 얻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글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사도의 분명한 말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 그러하다. 곧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죄에 대한 속죄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참조, 히 10:1이하; 레 16:21).775) 유대인들이 제물을 드림으로써 얻은 것은 자기들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고백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자기 대신에 결례를 드렸다. 그들이 결례로 얻은 것은 자기의 불결을 고백하는 데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항상 자기의 죄와 불결에 대한 "증서"를 갱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를 준다고 해서 거기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의 글에 구약아래에서 없어지지 않던 범죄가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에 속량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히 9:15). 그러므로 사도가 의식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증서"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의 유죄와 불결을 공개적으로 확증했기 때문이다(참조, 히 10:3).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은총에 참여했다는 사실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총을 받았고 의식에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용한 의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게 만들었으므로, 사도는 그 구절에서 의식과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의식 자체만을 볼 때에는 사람의 구원에 "적대하는 증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람들의 의무를 증거하는 의무적인 법적 요구 문서이기776)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의식 준수의 의무로 얽어매려고 했을 때에, 바울은 정당한 논거에 입각해서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심원한 말로 다시 규정하며, 골로새 신자들을 향해서 만일 이 모양으로 끌려서 의식적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에 다시 빠지게 될 것인가를 경고했다(골2:16이하).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혜택을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영원한 속죄를 완수하신 후에 매일 준수하던 의식을, 죄를 증거할 뿐이고 말소하는 데는 아무 공헌도 할 수 없는 의식을 철폐하신 것이다.

제 8 장  도덕적 율법에 대한 설명(십계명)

(기록화된 도덕적 율법은 자연법을 말하는 것이다. 1-2)

1. 십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나는 율법에 있는 십계명에777)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언급한778) 점이 더욱 분명 하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맨 처음에 제정하신 공중 예배는 아직도 유효하다. 다음에 내가 말한 둘째 점, 즉,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경건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심판이 무서워서 원하지 않으면서도 부득이 중보에게로 마음이 끌렸다는 점이 확인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요약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생각하면 반드시 즉시 그의 존엄성과 직면하게 되며, 따라서 그를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779) 가르쳤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논했을 때에 우리는 이 가장 중요한 점을 설명했다. 즉, 우리 자신의 덕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신념을 일체 포기하고 참으로, 우리 자신의 완전한 빈곤상을 깨닫고 완전히 의기가 꺾여 우리는 순수한 겸손과 자기 낮추는 것을 배우게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780) 주께서는 율법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하신다. 첫째로, 합법적인 명령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시며, 자기의 신성을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그 경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신다. 둘째로, 자기의 의의 표준을 발표하신 후에, 우리의 무력함과 불의함을 꾸짖으신다. 우리의 사악하고 비뚤어진 본성은 항상 그의 의에 반대하며, 선을 행하기에 너무도 미약한 우리의 능력은 그의 완전성에서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내면적인 법이781) 기록되었다고 심지어 새겨졌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 두 판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영구히 무감각한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내면적으로 증언하며, 경고하며, 선과 악의 구별을 우리에게 보이며, 우리의 의무 태만을 비난한다. 그러나 사람은 오류의 암흑에 덮여 있어서, 이 자연법에 의해서는 어떤 경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확실히 사람은 경배에 대한 참된 이해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뿐 아니라, 만심과 야심이 가득하며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자기를 볼 줄 모르며, 이를테면 자기 속으로 내려갈782) 줄을 모른다. 따라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며 자기의 가련상을 인정하게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둔하고 또 거만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보셔서, 우리에게 성문법을 주시고 자연법에서 너무도 모호했던 것을 더욱 분명히 증언하며, 무관심한 우리를 각성시키며, 우리의 지성과 기억에 더욱 강력한 감명을 주려고 하셨다.

2. 율법의 냉혹성

그런데 율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곧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므로, 우리를 향하여 권리상 아버지와 주님의 지위에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과 존경과 사랑과 경외로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변덕대로 움직일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기뻐하시는 일만을 지속히 행하여야 한다. 그는 의와 정직을 기뻐하시고 사악을 미워하시므로 악한 배은망덕으로 우리의 창조주를 등질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의를 존중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율법에서 배운다.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 마땅한 존경이라면, 그에게 마땅한 유일한 경배는 의와 성결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빙자해서, 빈궁해진 채무자와 같이, 갚을 수 없노라고 핑계할 수 없다.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측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이시다. 즉, 의의 친구요, 불의의 원수시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올바른 일만을 요구하실 수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의무다.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다. 만일 죄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의 정욕이(참조, 롬 6:12) 우리를 속박해서 아버지에게 복종할 자유가 없어졌더라도, 우리에게는 불가피성을 구실로 변명할 근거가 없다. 필연성이라는 그 악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비하시며, 성결하시며 인자하게 복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 율법에서 배운다. 3-5)

3. 율법이 엄격함은 긍정적 목표를 가진다.

율법의 가르침에서 이 정도까지 도움을 입은 다음에, 우리는 그 가르침에 따라 자기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두 가지 일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로, 율법의 의로움을 우리의 생활을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경지에서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깨닫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으며, 그의 자녀로 인정될 자격은 더욱 없다. 둘째로, 우리의 능력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율법을 완수하기에 너무도 악할 뿐 아니라,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덕성에 대한 불신이 생기며,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따른다. 양심은 불의의 책임을 느끼면 불원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면 반드시 죽음이 무서워진다. 또 양심은 자기가 무력하다는 증거의 압력으로, 곧 자기의 능력에 대한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감정들은 겸손과 자기 낮춤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의 불의 때문에 당연히 영원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철저히 놀라서, 드디어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며 그것을 유일한 안전한 피난처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사람은 율법에 대한 빚을 갚을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깨닫고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므로, 다른 방면에서 도움을 구하며 또 기다릴 생각을 하게 된다.

4. 약속과 위협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의 의에 대한 존경을 받으신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의에 대한 사랑과 사악에 대한 증오를 우리 마음에 채우기 위해서 약속과 위협을 첨가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눈이 어두워 선한 일의 아름다움만을 보고는 감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극히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구하도록, 즐거운 보상으로 우리를 끌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덕행에 대한 상급을 많이 장만하셨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수고가 헛되지 않으리라고 선포하신다. 그와 반대로, 불의를 미워하실 뿐 아니라, 불의는 그의 존엄성에 대한 멸시이므로 친히 처벌하실 것이며, 이 벌은 면할 수 없으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백방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려고, 계명을 공손히 준수하는 자들에게는 현세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다 약속하신다.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징벌로서 현세의 재난과 함께 영원한 죽음이 있으리라고 위협하신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레 18:5) 약속과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갤 18:4,20) 그에 대응하는 위협은 확실히 미래의 무궁한 생명이나 죽음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仁慈)나 진노가 화제가 될 때마다, 인자에는 영원한 생명이 포함되며 진노에는 영원한 멸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에는 현세의 축복과 저주가 되는 일들도 많이 열거되었다(레 26:3-39, 신 28장). 그리고 그 형벌에는 하나님의 최고의 순결성이 나타나 있으며, 이 순결성은 사악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약속에서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의에 대한 보상이 사취(詐取)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그의 뜻뿐 아니라, 그의 놀랍게 후하신 마음도 증명되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해서 거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빚으로서 요구하실 완전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빚을 갚는 것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종에 대해서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복종은 기꺼이 하는 것도 아니며, 또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약속들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는 일부는 이미 말했고, 일부는 적당한 곳에서 더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783) 지금은 하나님이 율법 준수를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을 더욱 밝히기 위해서, 율법에 있는 약속들은 의를 비상히 칭찬하며, 동시에 불의를 더욱 미워하도록 형벌이 제정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죄인이 죄악의 유혹에 깊이 빠져,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잊는 일이 없도록 형벌이 있는 것이다.

5. 율법의 완벽함

주께서는 완전한 의의 표준을 주실 때에, 그 모든 부분을 자기의 뜻에 관련시키심으로써 순종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셨다. 사람이 경망한 생각으로 여러 가지 의식을 고안해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수록,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경건을 자랑하는 이 불경건은 인간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난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의를 얻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을 항상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직으로 선행이라고 인정되는 것들 가운데서 율법의 계명들은 좁은 부분에 배당될 뿐이고, 무수한 인간적 교훈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에게 한 말은 이런 방자함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신 12:28).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모세는 이미 백성에게 주에게서 여러 가지 판단과 교훈과 의식들을 받은 것이 모든 다른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혜와 총명이 된다고 증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첨가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신 4:9)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후에 그것으로 안식하지 않고, 엄격히 억제하지 않으면 새로운 가르침들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견하신 것이다. 이 율법에 완전한 의가 여기에 내포되었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이 말씀이 가장 강력한 속박 수단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들은 엄금된 생각의 무례를 삼가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물론, 같은 말씀이 우리를 속박한다. 의의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율법에 영구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 위에 선행을 고안하려고 굉장히 수고한다. 이 과오를 고치는 최선책은,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생각을 확고부동하게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거기는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를 가르치신 것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경배는 순종뿐이며, 새로운 행동 방식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모두 허사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그 범위 밖에서 선행을 하려고 애쓰면서 헤매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의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때로는 모든 미덕의 어머니와 수호자라고 부르며, 때로는 그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784)

(율법은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율법을 주신 분의 목적에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6-10)

6. 율법은 하나님의 법령이므로,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요구를 한다

그러나 주의 율법을 더 충분히 설명하려면, 율법의 기능과 용도에 대해서 내가 이미 설명한 것이785) 더 적절하고 유익하게 확인될 것이다. 다만 개개의 조항을 설명하기 전에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선, 율법에 의해서 인간의 생활이 외면적으로 정직하게 될 뿐 아니라, 내면적·정신적으로 바르게 된다는 의견에서 우리는 모두 일치해야 한다. 이 점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나, 충분히 유의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이다. 이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의 성격을 평가하려면, 그 입법자의 성격에 비춰 보아야한다. 만일 어떤 왕이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다면, 마음으로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을 원하더라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바꿔 말하면, 죽을 인간이 제정하는 법의 권한은 외면적인 사회 질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의 법규는 실지로 범행을 하지 않으면 위반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사를 역력히 보시며, 외관보다 내심의 순결에 더욱 유의하시므로,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실 때에 정욕, 분노, 미움, 남의 재산에 대한 탐심, 사기 등등을 금하신다. 하나님은 영적 입법자이시므로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상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영혼이 하는 살인은 분노와 미움이며, 도둑질은 악한 탐욕이며, 음행은 정욕인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법도 우연한 사건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의도를 문제시한다고 말할 것이다.786) 나도 그 점을 일정하지만, 그 목적과 의도는 외면에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법은 어떤 의도로 각 범행이 있었는가를 결정하지만, 비밀한 생각은 찾아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행에 손을 대지만 않으면 인간의 법은 만족한다. 그와 반대로, 하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상대로 내릴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키려면 우선 영혼을 억제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멸시감을 굳게 숨기면서, 눈과 발과 손과 신체 각 부위는 어느 정도 율법을 지키는 모양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내심은 전연 순종할 생각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을 사람의 눈에서 점잖게 감추기만 하면 원만히 무죄 방면이 된 줄로 생각한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들은 살인하려고 칼을 뽑거나, 창녀에게 가거나, 다른 사람의 재물에 손을 대거나 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살기(殺氣)를 품으며, 정욕이 타오르며, 시기하는 눈으로 모든 사람의 재물을 보며, 그것을 모두 빼앗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점이 없다. 나는 묻는다. 그들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비위에 맞도록 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유치하고 우둔한 짓이 생겼느냐고, 바울은 그들에게 강경히 항의하며 "율법은 신령하니라"(롬 7:14)787)고 역설한다. 사도의 뜻은, 율법은 영혼과 마음과 의지의 복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천사 같은 순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육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고 오직 성령의 향기만을 풍기는 것이 천사 같은 순결이다.

7.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회복하셨다

이것을 율법의 의미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바리새파는 악한 견해를 백성에게 감염시켰다. 율법에 거스리는 외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완수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험한 이 왜곡된 오류를 책망하시고, 부정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언명하신다(마 5:28).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단언하시며(요일 3:15), 마음속으로 노하기만 해도 "심판을 받게 되며", 중얼거리며 불평함으로써 성난 표시를 하는 사람은 "공회에 넘기울 자", 욕설과 저주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하신다(마 5:21-22 참조, 마 5:43이하). 이런 교훈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세와 같은 입법자라고 공상하며, 모세의 율법에 없는 것을 복음의 율법으로 보충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복음의 율법은 완전하다느니, 옛 율법을 훨씬 초월하느니788) 하는 말이 돌아다니게 되었으나,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지극히 해로운 생각이다. 앞으로 모세의 교훈 전체를 볼 때에, 이런 견해가 하나님의 율법에 얼마나 부당한 악평을 가하는가를 모세의 말로 밝히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조상들의 성결은 위선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며, 저 의의유일하고 영구한 규범은 버리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이 오류를 반박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성실성을 회복하셨을 뿐인데, 그들은 율법에 무엇을 첨가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리새파의 거짓말에 덮여 흐려지며 그들의 누룩으로 더럽혀진 율법을(참조, 마 16:6,11) 그리스도께서는 구출해서 깨끗하게 씻으신 것이다.

8. 올바른 의미에 도달하는 방법

우리의 둘째 의견은, 계명과 금지에는 말로 표현된 것 이상의 것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칙을 조절해서 레스보스 섬의 잣대가789)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을 함부로 곡해해서, 무슨 해석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함부로 처리함으로써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율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이해할 희망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똑바르고 확실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해석이 어구(語句)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옳은가를 탐구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사람이 설명을 덧붙인 해석이 되지 않고, 입법자의 순순하고 진정한 뜻을 충실히 나타낸 해석이 되게 해야 한다. 분명히 계명들은 거의 전부가 명백한 제유법(提喩法)이 사용되었으므로, 율법 해석을 언어의 좁은 범위 내에 국한하려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건전한 율법 해석은 언어의 범위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넘느냐 하는 것은 한도를 정하지 않으면 애매모호하다. 그런데 나는 계명의 이유(理由)에 주의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다. 즉, 각 계명에 대해서 그 계명을 주신 까닭을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훈은 모두 명령하거나 금지한다. 그 이유 또는 목적을 생각하면, 그 명령이나 금지의 진상이 곧 알려진다. 다섯째 계명의 목적은 존경을 받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존경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요점은, 하나님이 어떤 특출한 점을 주신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이 옳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들을 멸시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첫째 계명의 의도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이다(참조, 출 20:2-3, 신 6:4-5). 그러므로 이 교훈의 요점은, 진정한 경건, 즉,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경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불경건을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각 계명이 문제로 삼는 것을 탐구해서 그 목적을 찾아냄으로써 마침내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나 싫어하신다고 증언하시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같은 입장에서 반대쪽으로 추론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면, 반대되는 것은 싫어하실 것이며, 이것을 싫어하신다면, 그 반대를 기뻐하실 것이며, 이것을 명령하시니 반대되는 것은 금지하실 것이며, 이것을 금지하시니 반대되는 것은 명령하신다는 식으로 추론해야 한다.

9. 계명과 금지

우리가 지금 모호하게 언급하는 것은 실지로 계명들을 해석할 때에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으나, 마지막에 언급한 점에 대해서 다른 증거로 확인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되더라도 처음에는 혹 어리석게 생각될는지 모른다. 선한 일을 명령할 때에는, 그와 충돌하는 악한 일은 금지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이 점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한 일을 금지할 때에는 그와 반대되는 의무를 명령한다는 것도 상식적 판단으로 기꺼이 용납될 것이다. 참으로, 서로 유덕한 일을 칭찬하면, 그 반대인 죄악은 비난받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투어가 의미하는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세상에서는 죄악의 반대인 덕행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790) 우리는, 덕은 이 이상의 것, 죄악과 반대되는 의무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인간의 상식은 남을 해하지 말라거나, 그런 욕망을 품지 말라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이것도 있지만, 이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이웃의 생명을 도우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내가 하는 말이 무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부당한 고통이나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하신다. 그래서 동시에 형제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사랑의 의무들을 요구하신다. 이와 같이, 계명의 목적을 보면, 우리는 계명이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일을 언제든지 밝히 알 수 있다.

10. 강력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율법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어 죄를 몹시 혐오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를테면 반쪽 계명을 주시며, 원하시는 점을 분명히 표현하시지 않고 제유법으로 암시하실 뿐이었는가? 흔히 다른 이유들을 말하지만, 내가 특히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즉, 죄악의 추악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육은 항상 그것을 씻어버리고 그 위에 그럴 듯한 구실로 덮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종 죄악에 대한 더욱 강렬한 증오심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범행에 대해서 그 가장 무섭고 악한 요소를 본보기로서 치켜드시며, 우리가 그것을 듣고 떨게 하신다. 우리는 이 점에 속아서, 우리의 죄악을 평가할 때에 어느 정도로 숨겨진 것은 무시하게 되는 때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이런 기만에서 해방하시려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훈련하신다. 수많은 죄악의 전체를 이 몇 가지로 나누어, 각 종류의 추악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이것들을 연상하게 하신다. 예컨대, 분노와 미움이라는 이름만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나 미움을 저주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분노와 증오심이 금지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들이 얼마나 가증한가를 더 잘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들을 무서운 죄악의 수준에 두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서 감동을 받아, 지금까지 경한 듯이 보이던 범행의 중대성을 더 잘 숙고하는 보다 더 익숙해진다.

(율법의 두 판과 그 각각에게 올바로 주어진 계명 11-12)

11. 두 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두 판으로791) 구분된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한 인상적인 언급이 여러 번 있고, 건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거기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두 동의할 것이다. 또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알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두 부분으로 나누시고 모든 의의 전체를 거기 포함시키시며, 처음 부분에는 특히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경배에 관계된 종교적 의무들을 배정하시고, 둘째 부분에는 인간을 상대로 한 사랑의 의무들을 배정하셨다.

확실히 의의 첫째 토대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다. 이것이 무너지면, 의의 모든 다른 부분도 넘어진 건물의 깨어진 조각들같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한 편으로 하나님의 존엄성에서 그 영광을 빼앗는 불경한 모독 행위를 한다면, 도둑질이나 노략질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어떤 종류의 의라고 부르겠는가? 또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모독적 언사로 더럽힌다면, 음행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어떤 의가 되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고 소멸하려고 애쓴다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의라고 하겠는가? 경건이 없는 의를 떠드는 것은 헛된 젓이다. 이것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벤 시체를 아름다운 것으로서 전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불합리한 비이성적인 짓이다. 종교는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전체에 호흡과 건강을 주는 생명 그 자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사람은 상호간의 공정성과 사랑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의의 시초와 토대라고 부른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폐지하면, 사람들끼리 실천하는 공평과 금욕과 절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옳고 그름의 심판자로서 공경할 때에, 그러한 경배에서 그들은 서로 온화하게 또 해침 없이 살 줄을 알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근원과 정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첫 판에서 하나님께서는 경건과 올바른 종교적 의무들을 가르치시며, 거기 따라서 하나님의 존엄성을 경배하라고 하신다. 둘째 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거기 합당한 처신을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 주께서는 율법 전체를 두 제목으로 요약하셨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전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눅 10:27, 의역: 마 22:37,39). 주께서 율법을 구성하는 두 부분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두 판에 담긴 계명의 분류

율법 전체는 두 제목 아래에 포함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변명할 가능성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십계명으로 자기에게 대한 공경과 두려움과 사랑에 관한 모든 것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로 정하셨다. 계명의 구분법을 잘 알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각 사람이 자유로 판단해야 할 일임을 기억해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논쟁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득이 이 점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제출하는 구분법을 최근에 고안된 신기한 것인 듯이 웃거나 놀라는 독자들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을 열 마디 말씀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 의해서 자주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확실치 않은 점은 십계명의 수효가 아니라, 그 구분법이다. 처음 판에 계명 셋을 넣고 나머지 계명들을 둘째 판에 넣는 사람들은 우상에 관한 계명을 십계명에서 빼거나, 적어도 첫째 계명 속에 숨긴다. 주께서 그것을 독립된 계명으로 주신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들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째 계명을 어리석게 둘로 쪼갠다.792) 그뿐 아니라, 그들의 구분법은 비교적 순결했던 시대에는 몰랐던 일이다. 이 점은 앞으로 곧 알려질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처음 판에 네 조항을 넣지만, 첫째 계명 대신에 계명이 없는 약속을 넣는다. 그러나 나는 아주 분명한 증거에 의해서 설복되기까지는 모세가 언급한 열 마디 말씀을 십계명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 열 마디는 가장 아름다운 순서로 배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의견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더 가능성이 있는 듯한 것을 따르겠다. 즉, 그들이 첫째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 전채에 대한 서론의 위치에 두어야 한다. 그 다음에 십계명 중의 넷을 첫째 판에 두고, 여섯을 둘째 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순서로 계명들을 논하겠다. 오리겐은 마치 이 구분법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듯이, 아무 이의 없이 제시했다.793) 어거스틴도 보니파키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구분법을 지지하며, 계명들을 열거할 때에도 한 분 하나님을 경건한 복종으로 섬기라,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순서를 지킨다. 그는 이미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그것은 영적인 참 안식일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라고 말했다.794) 다른 데서 그가 처음 구분법을 좋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대단히 빈약하다.(첫째 판에 계명 셋을 넣을 때에) 셋이라는 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더욱 분명히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그곳에서, 다른 점들에서는 우리의 구분법을 더 좋아한다고 인정한다.795) 이 분들 이외에 마태복음에 대한 저 미완성 주석을796) 쓴 사람도 우리 편에 섰다. 요세푸스가 두 판에 각각 다섯 계명을 배당하는 것은 필연코 당시의 일반적 견해를 따른 것이리라.797) 이 구분법은 경건과 사랑을 혼동하는 점에서 불합리할 뿐 아니라, 주 예수의 권위에 의해서 반박된다. 마태에 의하면, 주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둘째 판의 규정 가운데 넣으신다(마 19:19).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로 하겠다.

(각 계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 13-50)

첫째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13. 머리말("나는……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 처음 문장을 첫째 계명의 일부분으로서 읽든지 또는 따로 분리하여 읽든지 간에, 그것이 율법 전체에 대한 일종의 서문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쪽으로 해도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첫째로, 율법을 제정할 때에는 그 율법이 멸시를 받아 폐지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제정하시려는 율법의 존엄성이 멸시를 받는 일이 결코 없도록, 특히 조처를 취하신다. 이 일을 확보하시기 위해서 삼중적인 증명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권위에는 권능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셔서, 선민이 그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그들을 억제하신다. 그들에게 은총을 약속하셔서, 은총의 즐거움으로 그들을 끌어 성결에 대한 열성을 일으키려 하신다. 유대 민족에게 주신 은혜들을 자세히 말씀하셔서, 자기의 친절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려 하신다.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권위와 합법적 지배를 의미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롬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 안에 있는 것이라면, 만물을 주께로 돌리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의 멍에를 메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인데,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해괴망측한 짓이겠기 때문이다.

14. 서문("나는……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에게는 명령할 권한이 있으며, 하나님께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 다음에, 사람을 부득이한 필연성만으로 강요하시는 듯한 인상을 주시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교회의 하나님이시라고도 선언하심으로써 즐거운 생각으로 그들을 다정하게 끌어당기신다. 이 말씀에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에(렘 31:33) 포함된 상호 조화가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영생불사를 확인하실 때에, 주께서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언명하신 사실을 논거로 삼으셨다(마 22:32).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택한 것은 너희에게 금생에서 은혜를 줄 뿐 아니라, 내생의798) 축복도 주기 위해서다"라고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율법의 여러 구절이 증언한다. 주께서 자비로 우리에게 자기 백성 가운데 있을 자격을 주셨으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백성과 성민으로 택하셨으며, 우리는 그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신 7:6, 14:2, 26:18-19의 융합).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거룩하게 되라"고 권고하신다(레 11:44, 19:2). 이 두 발언에서 예언자의 엄연한 힐문이 나왔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사랑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6).

15.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다음에 그의 은혜를 회상하신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배은망덕은 타기할 큰 죄악인 만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강렬한 감동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바로 최근에 있은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상시키셨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할 만한 놀랍고 위대한 은혜였으므로, 자손들에게도 효력을 미칠 것이었다. 또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들이 가련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그 자유를 주신 이에게 복종과 기꺼운 섬김으로써 경배하기 위해서라고 주께서는 말씀하려 하신다. 그는 또 우리가 진정한 경배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항상 자기의 어떤 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자기의 거룩한 임재(臨在)와, 우상이나 조작된 신들과의 차이를 알리신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허망한 데로 기울어 질 뿐 아니라, 경솔·담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으면 즉시 어떤 어리석은 공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799) 그러므로 이 악한 경향을 막는 치유책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함을 확실한 칭호로 장식함으로써 우리들을 이를테면 포위하시며, 우리가 전후좌우로 헤매거나 경솔하게 어떤 신(神)을 조작하지 못하게 하신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신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고자 할 때에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때에 쓰신 표식들을 그에게 입히며, 이를테면 그 표식들 안에 국한한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출 3:6), 예루살렘 성전에서 좌정하게 될(암 1:2, 합 2:20), "그룹들 사이에" 계시다고 하며(시 80:1, 99:1, 사 37:16), 그 밖의 비슷한 표현들을 쓰는 것은 하나님을 어느 한 곳이나 한 백성에게만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 규례에서 어긋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뜻을 표시하신, 그 하나님을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또 우리의 의견이 일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여기서 해방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실 권리가 있는 하나님께 그들이 더욱 열렬하게 헌신하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이 생각해서는 안되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포로 생활하던 시대는 우리 모든 사람의 영적 노예 상태를 예표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하늘 변호자께서 그 권능의 강한 팔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의 나라로 인도하시기까지 우리는 모두 영적 포로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자기 이름을 경배하게 만드실 의향으로, 바로의 견딜 수 없는 압박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 그와 같이 지금 그는 자기 백성이라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모두 악마의 무서운 힘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이 악마의 힘을 저 육체적 노예 상태가 예표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분기해서 가장 높으신 왕에게서 유래했다고 하는 그 율법에 유의해야 한다. 그가 만물의 근원이시므로 만물은 그를 궁극적 목표로 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모든 사람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데 사로잡혀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배우며, 친절하신 그에게서 모든 풍성하고 선한 것과 함께 영생의 영광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6. 첫째 계명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에 대해서 그 근거를 마련하시고 확립하신 후에, 첫째 계명을 말씀하신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는 자기만이 자기 백성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시며, 그들에 대해서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하거나 흐리게 하는 불경건과 미신을 일소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진실하고 열렬한 경건으로 자기를 경배하며 찬양하라고 명령하신다. 계명의 단순한 용어가 거의 이 뜻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있게 하면" 반드시 그에게 속한 것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고 금지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다른 신에게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이 수없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편의상 네 가지로, 즉, ⑴ 숭배(여기에 양심의 영적 복종이 부록같이 첨가된다), ⑵ 신뢰, ⑶ 기원(祈願), ⑷ 감사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나는 "숭배"(adoration)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의 양심을 바치는 것을 숭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다. ⑵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서 그를 굳게 믿고 안심하는 것을 "신뢰"라고 부른다. 그에게 모든 지혜와 의와 힘과 진리와 인애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와 연결될 때에만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⑶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과 도움만을 우리의 의지할 것으로 믿어 구하는 마음의 습성을 나는 "기원"이라고 부른다. ⑷ 모든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감사"라고 부른다. 주께서는 이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신에게 옮겨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신을 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종교를 멸시하는 악인들은 흔히 모든 종교를 통틀어 조롱하며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경건이 가장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존엄성을 명상하며 경외하며 경배하며, 그의 축복에 참여하며, 항상 그의 도움을 구하며, 그의 역사(役事)의 위대성을 인정해서 찬양으로800) 축하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유일한 목표로서 갈망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해야 한다. 미신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며, 여러 가지 신들 사이를 방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우리가 전에 말한 것을801)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는 모든 날조된 신을 몰아내야 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친히 요구하시는 경배를 부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감축하는 것은 부당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 항상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802)

다음에 있는 "내 앞에"라는 어구는 계명 위반을 더욱 가증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우리가 날조한 신으로 대신할 때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렴치한 여자가 자기 남편 앞에 정부를 끌어들여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권능과 은총으로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신다고 증언하신 것은, 그들이 새 신을 끌어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모독행위를 보시리라고 경고하며, 그들의 반역죄를 더욱 효과적으로 막으시려는 뜻이다. 이런 대담한 행위에는 불경건한 짓이 많이 첨가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만들든 간에, 자기에게는 모두 보인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건이 하나님의 시인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배교(背敎)에 대한 극히 은밀한 생각도 없는 맑은 양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자기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외면적 고백에서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전에서 완전하며 부패하지 않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의 가장 비밀한 구석까지도 보신다.

둘째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17. 볼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

앞의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히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자기 이외에 다른 신들을 상상하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제 그는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어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자기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떤 경배로 자기를 공경할 것인가를 더욱 밝히 선언하신다. 그러면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경배가 미신적인 의식으로 모독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합당한 경배를, 즉, 자기가 친히 제정하신 영적 경배를 따르게 하신다. 그뿐 아니라, 이 범행의 가장 큰 허물을 곧 외형적 우상 숭배를 극악한 잘못이라고 지적하신다.

이 계명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 부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예속시키려는 바꿔 말하면, 그를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무엄한 짓을 억제한다. 둘째 부분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일체 금한다. 여기서는 모독적이며 미신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시하기 위해서 보통 만드는 모든 형상들을 간단히 열거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해, 달, 기타의 광명체들을 의미하며, 또한 새도 의미한다. 신명기 4장에서는(17,19절) 그의 마음을 피력하시면서 새와 별에 대해 언급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지각없이 이 표현을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을803)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부분들은 저절로 알려지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겠다. 우리는 이미 제 1 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만드는 보이는 형상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가 되며 따라서 우상이 나타나면 즉시 진정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배웠다.804)

18. 둘째 계명의 위협적인 말

첨부된 경고는 우리의 태만을 버리게 하는 데 적지 않은 효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하나님인즉(또는, '강대'한, 즉, 하나님의 이 이름은 '힘' 이라는 말에서 왔기 때문이다),805) "나는 질투하여 내 이름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806)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만 우리가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여기에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알리시며, 그것을 멸시하거나 훼방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엘"은 "힘"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계명 본문에 그렇게 번역해 넣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떠한 동참자도 용인할 수 없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부르신다. 셋째로, 어떤 피조물이나 새겨 만든 형상에게 하나님의 존엄한 영광을 옮기는 자에 대항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수호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조상의 불경건을 모방할 손자와 증손자들의 대에까지 미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먼 후손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자비와 친절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해서 남편의 품성에 서시는 때가 심히 많다. 참으로 우리를 교회의 품안에 받아들이심으로써 우리와 맺으시는 인연은 거룩한 혼인과 같으며, 이것은 상호간의 신의를 기초로 삼아야한다(엡 5:29-32). 하나님은 진실하고 성실한 남편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시는 대신에, 우리에게서는 사랑과 정조를 배우자로서 요구하신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사탄과 정욕과 육의추한 욕망에 맡겨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배교를 책망하실 때에, 그들은 체면을 버리고 간음으로 더러워졌다고 개탄하신다(렘 3장, 호 2:4이하, 참조, 사 62:4-5). 거룩하고 정결한 남편일수록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처를 더욱 분하게 여긴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장가드신 주께서는(참조, 호 2:19-90) 우리가 그의 거룩한 혼인의 순결을 버리고 사악한 정욕으로 더러워질 때마다 불타는 듯한 질투를 나타내신다. 그가 특별히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거룩한 존엄성을 경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경배하거나 미신으로 경배를 오염시킬 때 이를 더욱 느끼신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절대로 부패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신을 섬길 때에 우리는 혼인의 맹세를 어길 뿐 아니라, 간부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혼인 침상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19.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이르게 하거니와"

하나님이 자기는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에 이르게" 하리라고 하시는 의미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죄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정성에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강제로 담당하게 않겠다고 친히 선언하신다(겔 18:20). 그러나 조부의 죄가 후대에 미친다는 이 문장은 자주 반복된다. 모세는 자주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여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시는 여호와여"하고 말했다(민 14:18, 출 34:6-7). 예레미야도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라고 한다(렘 32 :18). 어떤 사람들은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받는 벌로만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벌은 자녀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가하시는 때가 많으므로, 부모의 죄악 때문에 자녀들이 받아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의 죄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리라고 선언한다(사 39:6-7). 바로와 아비멜렉의 가문들도 아브라함을 해한 죄로 재앙을 받았다(창 12:17, 20:3,18). 그러나 이 점을 들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해석이라기보다 도피가 된다. 여기서와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현세에 국한된 벌보다 더 큰 벌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의로운 저주는, 악인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를 괴롭힌다고 해석해야 한다. 저주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아비에게서 가장 부끄러운 생활밖에 기대할 것이 없지 않은가? 또는 아비의 죄악 때문에 주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같은 멸망의 길을 갈 것이 아닌가? 끝으로, 가증한 사람들의 저주받은 후손인 그 손자와 증손자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돌진할 것이 아닌가?

20. 조상의 죄에 대한 벌이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모순되지 않는가?

우선 이런 벌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 않는가를 검토하겠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성품이 전적으로 정죄를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을 위해서 멸망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의 죄악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 어떤 불공정한 증오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도록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할 아무 근거가 없다. 추문이 자자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자기의 죄악 때문에 벌을 받아, 그들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다고 해서, 이와 같은 공정한 천벌에 대하서 누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에 대한 벌이 아들에게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신다(겔 18:20). 그러나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불행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고 하는 속담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겔 18:2). 그들이 생각한 뜻은, 자기들은 의롭건만 조상들의 죄 때문에 애매한 벌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노는 용서가 없고 은위의 병행도 없다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고 그들에게 언명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의로운 아들이 악한 아비의 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계명의 위협도 이런 뜻이 아니다. 주께서 악인들의 가문에서 자기의 은총과 진리의 광명과 그 밖의 구원 수단들을 제거하실 때에, 여기서 논의되는 벌이 실현되는 것이라면, 즉,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며 눈이 어두워진 자손이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 그들은 조상의 악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세상 고통을 받으며 드디어 영원한 멸망에 빠진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며, 그 원인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악인 것이다.

21.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를 천대까지807) 베푸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이 말씀은 성경에 자주 나오며(신 5:10, 렘 32:18), 교회에 대해서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하신(창 17:7) 엄숙한 언약에도 삽입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은 "의인이 죽은 후에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한다(잠 20:7, 의역).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양육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양육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경건자의 가문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신 언약에서 이 축복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신자들에 대한 특별한 위로가 있으며, 반대로 악인들에게는 큰 공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도 의와 악의 기억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시되어, 의에 대한 축복과 악에 대한 저주가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면, 의나 악을 행하는 당자들에게는 더욱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의 후손이 개선되며 신자의 후손이 타락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기의 선택을 방해할 수 있는 영구한 규정을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의인을 위로하며 악인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항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공허하거나 무력한 경고가 아니기만 하면 충분하다. 몇몇 악인에 대한 생전의 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증언하며, 죽을 때까지 벌을 면하는 죄인들도 모두 앞으로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증언이 된다. 그래서 아비의 덕택으로 아들이 받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를 보이시기 위해서 이 축복의 한 예를 드심으로써,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끊임없고 영구한 은혜를 증명하신다. 아비의 죄악을 아들에게서 추궁하심으로써 모든 악인들은 자기의 범법 때문에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 구절에서는 이 후자의 확실성에 특히 관심을 보이신다. 또 겸해서 자기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벌은 사대(四代)에 국한하시고 자비는 천대(千代)에 미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22. 계명의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의 존엄성을 우리가 거룩히 받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불순하거나 불경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금지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경외하도록 열성과 주의를 다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신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 항상 경외하며 조심하도록, 사고와 발언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논평할 때에도 그에게 영예가 되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열심히 준수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며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며 그의 거룩한 이름의 존엄성에 일치하며 그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야심이나 탐욕이나 재미를 위해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신비들을 경솔하게 또는 패악하게 왜곡 남용해서는 안 되며, 그 말씀과 신비들에는 그의 존엄한 이름이 새겨져 있으므로 항상 존경하며 존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련한 인간들이 흔히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물리치고, 우리는 그의 행적 훼방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줄로 인정하는 일에 관해서는 그의 지혜와 의와 인애를 찬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든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긋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허망되고 악한 일에 남용하여 더럽히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어 있으므로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존엄성이 사라지고 점점 멸시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기 쉬운 경솔한 태도도 심히 악하거든, 하물며 여러 가지 미신에 접신술과 무서운 저주와 불법한 제마술과 기타 악한 주문들에 악용하는 자들은 죄가 훨씬 더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계명은 특히 맹세와 관련이 있다. 맹세에서는 주의 이름을 가장 가증하게 악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성 모독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맹세를 언급하신다(참조, 신 5:11). 이 계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의 이름에 대한 경외에 관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계명이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용한 반복이 될 것이다. 사랑의 문제는 둘째 판에 미루었으며, 거기서 인간 사회를 해치는 위선과 위증을 비난하실 것이다. 율법의 구분법으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두 판에 배열하신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자기의 이름의 거룩함을 보호하지만, 인간 상호간의 의무를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결론한다.

23. 하나님께 한 고백으로서의 맹세

우선, 맹세란 무엇인가를 말해야겠다. 우리가 하는 말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이 맹세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모욕이 포함된 저주는 맹세라고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이런 확인법을 합당하게 쓰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경배라고 하는 구절이 성경에는 많다. 예를 들면, 앗수르 사람들과 애굽사람들을 불러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서 예언할 때에, 이사야는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리라"고 한다(사 19:18). 바꿔 말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써 그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 대해서도,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라"고 한다(사 65:16). 예레미야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내 백성을 가르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리라"고 말한다(렘 12:16). 또 우리가 증인으로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증언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불변하는 진리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을 진실에 대한 가장 적합한 증인이실 뿐 아니라, 숨은 일을 드러내어 진실을 확인하는 유일한 증인이며, 마음의 뜻을 아는 분으로 인정한다(고전 4:5). 사람들의 증언이 무력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달려가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한다. 특히 양심에 감추어 있는 일을 선언할 필요가 있을 때에 그렇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다른 신들로 맹세하는 자들에 대해서 심히 노하시며, 이런 맹세를 노골적인 반역으로 해석하신다.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다"(렘 5:7). 그리고 이 범과의 중대성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나는 멸절하리라"고(습 1:5-4)하는 처벌의 위협 속에서 선언하신다.

24.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짓 맹세

우리의 맹세에는 주의 이름에 대한 경배가 포함되기를 주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따라서 맹세에 경배가 아닌 거만이나 경멸이나 멸시가 내포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맹세를 하는 것은 사소한 모욕이 아니다. 율법에는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레 19:12). 하나님에게서 진실성을 빼앗는다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나 그를 허위의 옹호자와 승인자로 만드는 것은 그의 진실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라고 할 때에, "내 아들아‥‥‥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수 7:19)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대한 불경이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어떤 거짓으로 낙인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 것을 보면(요 9:24), 유대인들이 맹세를 시킬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 있는 표현들은 예컨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삼상 14:39),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4:44, 참조, 삼하 3:9, 왕하 6:31),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23, 롬 1:9) 등 이런 조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를 때에는 반드시, 만일 우리가 속인다면 하나님이 그 거짓 맹세에 대해 처벌해 달라고 비는 것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다.

25. 불필요한 맹세

진실할지라도 필요하지 않은 맹세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면, 하나님의 이름은 저속한 것이 된다. 그런 때에도 헛되이 부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동시에 맹세는 정욕이나 욕망을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서 허락하여 제정하신 것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불필요한 일에 맹세를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경건이나 사랑을 위한 경우 이외에 어떤 다른 필요성을 빙자할 수 없다. 이 문제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제멋대로 죄를 지으며, 그것이 관습이 되어 더 이상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경미한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보통으로 또 닥치는 대로 욕되게 하고 있다. 이 중대한 타락 행위가 오랫동안 계속되어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담대하게 되며 한 습성이 되어, 이것을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계명은 변할 수 없으며, 경고는 확고부동하여, 언젠가는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천벌이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다른 방면에서도 어기고 있다. 우리가 맹세할 때에 하나님 대신에 그의 거룩한 종들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사람들에게 옮기는 것이며(출 23:13) 분명히 악한 짓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특별한 계명을 주시며(신 6:13, 10:20),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특별히 금지하신 데는(출 23:13) 타당한 이유가 있다. 사도도 이 일을 분명히 증거하여,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는"(히 6:16-17)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고 썼다.

26. 산상수훈은 이런 종류의 맹세를 금지하지 않는가

재세례파는 맹세에 대한 이 신중한 태도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맹세를 예외 없이 배척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맹세 금지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신 것같이 전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마 5:34,37, 참조, 약 5:12)808)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생각 없이 그리스도와 충돌하며,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폐지하려고 지상에 내려오신 듯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의 원수로 만든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율법 아래에서 합법적인 것으로서 허가하실 뿐 아니라(이 점만으로 충분할 것이지만), 필요한 때에는 사용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2:10-11).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하시며(요 10:30), 자기는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으며(요 10:18), 자기의 교훈은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요 7:16) 말씀하신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시인하신 일을 후에 금지하며 비난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을 자기모순에 빠뜨리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다소의 난점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에 시간을 조금 소비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도하신 바를 주시하며, 그가 이 구절에서 목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율법을 완만하게 하거나 강화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가 거짓된 방법으로 매우 부패하게 만든 것을 다시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맹세를 전적으로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표준을 어긴 맹세만을 배척하셨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보통 위서만을 피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거짓맹세 뿐 아니라, 허망하고 무용한 맹세도 금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장 확실한 해석자이신 주님은 거짓 맹세뿐 아니라 맹세 자체가 나쁘다고 경고하신다(마 5:34).

무슨 까닭에 맹세하는 것이 나쁜가? 분명히 주께서는 헛되이 맹세하는 것을 의미하신다. 그러나 율법에서 칭찬하는 맹세는 건드리시지 않는다. 우리의 논적들은 "도무지"라는 말을 완고하게 붙잡고809) 더 강력한 추론을 하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맹세"에 붙지 않고 그 다음에 있는 맹세의 형식에 붙는다. 그들이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예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의 모든 구실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으면 천지를 두고 맹세하는 것으로 도망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막아버리신다. 우리가 겸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인 형태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생명의 빛이나 먹는 빵이나 자기의 세례나 그밖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표적을 두고 맹세한다.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는 구절에서(마 5:34-35) 미신을 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함부로 간접적인 맹세를 해도 나쁘지 않다고 하는 자들의 간교한 궤변을 논박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쓰지 않는 듯이 말하지만, 그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확실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천사의 이름을 하나님 대신에 쓰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이교민족들은 왕에게 아첨하는 의미로 왕의 생명이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는 악풍이 있었다. 이런 거짓된 신격화는 유일신의 영광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써서 우리가 하는 말의 확인을 얻으려고만 할 때도, 비록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이런 모든 너절한 맹세는 하나님의 존엄성을 해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금지하심으로써 이런 방자한 행동의 헛된 구실을 빼앗으신다. 내가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야고보도 같은 뜻으로 반복한다(약 5:1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짓인데도 불구하고 이 경솔한 짓은 언제든지 세상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라는 말을 문제의 핵심에 관련시켜서, 맹세는 예외 없이 불가하다는 듯이 해석한다면, 거기 즉시 첨가된 "하늘로도 말라‥‥‥땅으로도 말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이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허물을 경감해 준다고 생각한 그 궤변을 그리스도께서 반박하신 것이 분명하다.

27. 그러므로 재판 받지 않을 맹세는 필연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

주께서는 위의 구절에서, 율법이 금지한 맹세만을 비난하셨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가 가르친 완전성의 실례를 친히 보여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경우에 맹세하는 것을 주저하시지 않았다. 또 모든 점에서 선생에게 복종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제자들도 같은 예를 따랐다. 만일 맹세가 전적으로 금지되었다면, 누가 감히 바울이 맹세했을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사정상 필요한 때에 그는 서슴지 않고 맹세했으며, 어떤 때에는 저주까지 첨가했다(롬 1:9, 고후 1:23).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공적 맹세만이 이 금지에서 제외된다고 믿는다. 예컨대, 관리가 시키는 맹세, 군왕들이 조약을 엄숙하게 비준할 때에 쓰는 것, 또 백성이 군왕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 군인의 입대(入隊) 선서 등이다. 바울이 복음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맹세도 그들은 이 부류에 넣는다. 사도들은 직무상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적 사절이기 때문이다.810) 물론 이런 맹세들이 가장 안전한 것임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더 확실한 증언에 의해서 지지되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문제에서 관리는 증인에게 맹세를 강요할 의무가 있으며, 증인은 선서 하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사도는 인간의 분쟁은 이런 수단으로 해결된다고 말한다(히 6:16). 맹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계명에서 확고한 승인을 받는다.

또 고대 이교도들이 엄숙한 공직 선서를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하는 일반적 맹세는 하나님의 존엄성이 들어 있지 않다는 듯이, 거의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 맹세일지라도 성결한 의도로 신중히 또 경건하게, 그리고 사정상 필요해서 한 것이라면, 그것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할 것이다. 그런 맹세에는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인(私人)들이 중대하고 진지한 문제에 관련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 합당하다면(삼상 24:12),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기를 원하는 것은 더욱 큰 근거가 있다. 그대의 형제가 그대를 배신자라고 비난할 때에, 그대는 사랑의 의무로서 해명하려고 할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의 완강한 악의 때문에 그대의 명예가 위태롭게 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당한 때에 그대의 결백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원하더라도 범과가 되지 않는다. "심판"과 "증언"이라는 말들을 비교하면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문제는 작은 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례가 대단히 많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비멜렉과 한 서약을 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창 21:24, 26:31), 야곱과 라반은 확실히 사사로운 개인들로서 서로 맹세함으로써 동맹을 확인했다(창 31:53-54). 보아스는 개인으로서 약속한 결혼을 같은 방법으로 룻에게 확인했다(룻 3:13). 오바댜는 개인으로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엘리야를 설복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맹세로 확인했다(왕상 18:10).

이와 같이 우리의 맹세를 규정하는 가장 좋은 원칙은 경솔하며 무분별하며 함부로 하는 또는 너절한 맹세가 되지 말고, 정당한 필요가 있어서 하는 맹세가 되라는 것이다. 즉, 주의 영광을 변호하거나 형제의 덕을 세우려는 것이라야 한다.811) 이것이 이 계명의 목적이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28.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해서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없는 특별한 고려를 하므로, 해석하는 순서도 약간의 차이가 필요하다. 초대 교부들은 이 계명을 예시(豫示)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다른 상징들과 함께 폐기된 일이, 즉, 어느 하루를 외면적으로 지키는 일이 이 계명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812)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들은 문제의 절반만 언급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깊이 해석하며, 이 계명을 준수하는 세 가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첫째로, 제 칠일의 안식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안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다.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밖에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9. 약속으로서의 안식일 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서 이 영적 안식의 예시(豫示)가813)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 이 계명에 대해서와 같이 엄격한 복종을 명령하신 계명이 거의 없다(민 15:32-36, 참조, 출 31:13이하, 35:2). 모든 경건이 전복되었다는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안식일을 더럽히며 범하며 지키지 않으며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공경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고(겔 20:12-13, 22:8, 23:38, 렘 17:21,22,27, 사 56:2),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는 최고의 칭찬을 주셨다. 따라서 신자들도 다른 계명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대한 계시를 가장 존중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레위 사람들은 공회 앞에서 말했다.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느 9:14). 율법의 모든 교훈 가운데서 안식일을 극히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교훈은 이 신비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며, 모세와 에스겔이 이 존엄성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고 하며(출 31:13-14, 참조, 35:2),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라"고 하셨다(출 31:16-17). 에스겔은 이 뜻을 더욱 자세히 표현하지만, 그 요점은 안식일이 한 표징이라는 것과, 이 표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겔 20:12).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를 억제하는 것이라면, 외면적인 표징과 내면적인 실상 사이에 아주 긴밀한 일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쉬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를 바쳐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맡겨야 하며, 우리의 모든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한 우리 자신의 일은 일체 쉬고,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며(히 13:21),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도록(히 4:9) 해야 한다.

30. 제 칠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칠일 중 하루를 지키는 것은 이 영원한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었다. 주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그들이 더욱 경건하게 그 날을 지키게 권장 하셨다. 그가 조물주를 본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열심을 자극시키는 데 적지 않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완전수로 되어 있는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어떤 비밀한 뜻을 캐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수를 택한 것은 영구성을 표시하시려는 것이며, 이유가 있다. 모세의 말이 이 점을 지지한다. 그는 차례차례 계속되는 낮과 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이 그 창조주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날로 끝맺는다(창 2:3). 이 수는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주께서는 이와 같이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는 안식이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안에 있는 복된 안식을 가지기 시작하며, 매일 새로운 전진을 성취한다. 그러나 아직도 육과의 싸움이 계속하고 있으므로, "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대한 이사야의 말이(사 66:23) 실현될 때까지는,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는(고전 15:28) 안식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자기의 안식이 완성될 것을 백성에게 대략 알리시며, 그들이 평생 안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명상함으로써 이 완성을 동경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814)

31.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만일 누가 일곱이라는 수에 대한 이 해석을 너무 미묘하다고 해서 싫어한다면, 나는 더 간단히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께서는 하루를 정하셔서 백성이 율법의 지도하에 영적 안식을 끊임없이 명상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일곱째 날을 제정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혹은 그 날로서 충분하리라고 보셨다고 하며, 혹은 자기가 하신 예를 보여 주심으로 백성을 더욱 잘 분발시키려 하셨다고 하며, 흑은 적어도 그들이 조물주를 본받게 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안식일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셨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주로 제시된 신비를 우리의 수고를 영구히 쉰다는 점을 보존하기만 하면,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간에 별로 차이가 없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이 점을 회상하게 만들며, 신체적 노동만 하지 않으면 의무를 완전히 다한 줄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려고 반복 호소했다. 이미 인용한 구절 이외에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 58:13-14).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32. 넷째 계명은 어느 정도까지 외적인 법규를 벗어나는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둘째와 셋째 이유들은 고대의 그림자로 돌릴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똑같이 적용된다.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⑴ 일정한 날에 모여 말씀을 들으며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기도를 드려야 한다(참조, 행 2:42). 그리고 ⑵ 종들과 노동자들의 노고를 쉬게 해야 한다.815) 주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에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처음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만 봐도 증거가 많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둘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14-15). 또 출애굽기에서는,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숨을 돌리리라"고 한다(출 23:12). 이 두 가지 일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우리에게 명령하며,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모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 그러나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며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예정과 규정이 없이는 적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주께서 유대인들의 곤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우리도 같은 곤란을 느낀다면, 아무도 이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우리의 지극히 천명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일에도 유의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33.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지금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일에 관해서 소동을 일으키므로,816) 나는 부득이 이 문제를 길게 논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들을 지키기 때문에, 유대교의 정신을 받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것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가르친다(골 2:17). 그래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아직도 날들을 지키니, 자기는 그들 사이에서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냐고 염려한다(갈 4:10-11). 그리고 날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단언한다(롬 14:5).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사도가 어떻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를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지키는 목적을 사회 및 교회의 질서에 두지 않고, 영적인 일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보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육체노동을 쉰 것은 육체노동이 거룩한 연구와 명상을 방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중히 그날을 지킴으로써 옛적에 권장된 신비적 의식들을 존중하노라고, 일종의 소심에서 오는 상상을 한다. 사도는 날에 대한 이 어리석은 구별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사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합법적 날짜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가 세운 교회들을 이 목적으로 안식일을 보존했다.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하라고 지정했다(고전 16:2). 미신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주일보다 유대인들의 성일들에 위험성이 더 많았다. 미신을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놓았고,817)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34. 성일의 영적 준수

그러나 고대인들이 우리가 말하는 주일로 안식일을 대신한 데는 신중한 고려가 없지 않았다.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끝낸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림자였던 의식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가 된다. 나는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해서 교회를 그것에 예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들도 미신만 없으면 나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을 생각할 때에, 거기는 미신이 없다고 할 것이다.

요약하면,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상징으로 전달된 것같이, 우리에게는 그림자 없이 진리가 제시된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명상해야 한다. 또 말씀을 들으며 성례전을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압박해서는 안 된다.818)

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지정"만이) 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 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819)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820)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13-15, 58: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울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35. 이 계명의 폭넓은 범주

이 계명의 목적은,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경륜이821) 유지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그가 제정하신 상하 등급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신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하며 경의와 순종과 감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멸시, 고집, 배은망덕 등으로 그들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공경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의미가 넓다. 그래서 사도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할 때에(딤전 5:17), 그는 그들이 받아야 할 경의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들의 봉사에 대해서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어른을 인정하라는 이 교훈에 대해서 타락한 인간성은 강경히 반대한다. 인간성은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생각이 가득해서 아랫자리에 서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윗자리 가운데서도 그 본질상 가장 인자하고 남의 시기도 가장 받지 않는 종류를 예로 드신다. 이렇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을 더 쉽게 부드럽게 만들어 복종하는 습성이 생기도록 인도하실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용인하기 쉬운 복종으로 우리를 훈련하셔서 점점 모든 합법적 복종이 습성화하게 하신다. 복종하는 이유는 모두 같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상위에 두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자기의 이름을 나눠주셔서 그 위치를 유지하게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 "주" 등의 칭호는 오래 동안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칭호 중의 어느 것을 들든지 반드시 우리는 곧 그의 존엄성을 연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나눠주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광채의 불꽃으로 빛나게 하셔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 눈에 띄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인 사람은 이유 없이 거룩한 칭호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떤 신적(神的)인 것을 그에게서 인정해야 한다. "왕"이나 "주"가 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예에 어느 정도로 참여한다.

36. 명령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신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신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바르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출 21:17, 레 20:9, 잠 20:20) 처음 부분인 경의를 확인하신다. 즉, 멸시와 박대를 벌하신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확인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4-6절)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엡 6:1-3, 골 3:20).

37. 약속

권면하는 의미로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여기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복종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다 더 잘 알리시려는 뜻이다. 바울이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째 계명이라고 한 의도는(엡 6:2) 이 말을 바늘로 삼아 무감각한 우리를 찌르려는 것이다. 이미 첫째 판에 주어진 약속들은 어느 한 계명에 국한되지 않고 율법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명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신 땅에 대해서 특히 말씀하신다. 땅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증한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은혜를 오랫동안 받아 즐길 수 있는 장수함을 약속하심으로써 자기의 은혜를 증명하시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계명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여 나의 호의의 보증으로서 너희의소유가 될 그 땅에서 장수하면서 그 소유를 즐기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지구 전체가 축복 하에 있으므로, 현세 생활을 하나님의 한 축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장수도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한 증거라는 의미에서 이 약속은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나 고대 유대인들에게나 장수는 그 자체에 축복을 내포했다고는 약속하시지 않았지만, 장수는 경건자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알리는 한 관습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복종하는 아들이 미성년으로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자주 있더라도, 주께서는 천 평밖에 약속하시지 않은 사람에게 십만 평이나 주시듯이, 요지부동한 자세로 끝까지 약속을 실현하신다. 요컨대,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장수는 하나님의 호의를 증거하는 때에만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에 대해서 자기의 호의를 죽음을 통해서 훨씬 더 풍부하고 확실하게 증언하시며, 실지로 증명하신다.

38. 위협

이밖에도 주께서는 부모를 올바로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현세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동시에, 고집 세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저주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암시하신다. 이 계명이 확실히 실행되도록, 주께서는 그런 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율법에서 선언하시고, 처벌을 명령하셨다. 그들이 이 판결을 교묘하게 피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벌을 주신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많이 전쟁에서나 개인 싸움에서 죽으며, 혹은 다른 더 드문 방법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이 경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령에 이르기까지 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는지 모르나, 그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겨우 살아가며, 앞에는 더욱 큰 벌이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그 때에는 경건한 자녀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해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한 명령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엡 6:1). 이 점은 이미 언급된 원칙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부모가 앉아 있는 높은 자리는 주께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는 주의 영광의 일부를 나눠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율법을 어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부모가 아니고 우리를 참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이방인이라고 인정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군왕들과 귀족들과 그 밖의 각종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822) 그들이 윗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위세로 하나님의 존엄성을 끌어내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땅히 우리를 높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39. 계명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신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한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문제를 회피하려고 애쓰더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선언하셨고(요일 3:15),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자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다.

40. 이 계명이 생긴 이유

성경은 이 계명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우리의 혈육이라는 이중의 근거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신성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모든 인류의 관계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웃의 신체를 우리의 몸같이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이 권면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은총에서 귀결되는가를 논하겠다.823) 주께서는 사람에게 자연히 있으며 우리를 인도해서 이웃 사람의 생존을 돕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우리가 숙고하기를 원한다. 그 두 가지 일이란, 사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존경하며 그에게 있는 우리의 혈육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피를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는 살인죄를 피하지 못한다. 이웃의 안전에 해로운 일을 실행했거나, 시도했거나, 원했거나, 계획했다면, 그것은 살인죄로 간주된다. 또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이웃의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시 똑같이 율법에 대한 흉측한 위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체의 안전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은즉,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열성과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주께서 보시기에는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이니라"(출 20:14)

41.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신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이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42. 독신생활은?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로 놓아주신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본성의 상태 때문에, 또 타락 이후에 타오른 정욕 때문에 이중으로 여성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각 자기가 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 순결은 멸시하지 못할 덕성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사람에 따라 혹은 거부되고 혹은 부여된다. 그러므로 정절을 지키기 어려워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은 결혼에서 도움을 구하며, 그들의 부름의 정도에 따라 정조를 지켜야 한다. 이 교훈을(참조, 마 19:11)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절제에 대해 주신 타협안을 채용하지 않는 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그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자기는 하지 못할 일이 없노라고824) 내게 반대하는 사람이 지금 많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길을 걷는 사람들만을, 바꿔 말하면, 자기가 부르신 대로 걷는 사람들만을 도우신다(참조, 시 91:1, 14) 하나님의 도움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불가피한 일을 충족하려고 어리석고 경솔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명에서 떠나는 것이다. 주께서는 정절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확인하신다. 그것은 교회라는 몸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종류의 은사가 아니라, 소수 지체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를 구별하신다(마 19:12). 즉, 그들이 천국 일에 더욱 전적으로 또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고자가 되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즉시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히 하늘에서 "허락된" 자들뿐이라고 지적하셨다(마 19:11).그래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결론하신다(마 19:12). 바울은 더 분명히 말한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

43. 이 계명에 관련지은 결혼

비록 대단한 열의와 노력으로 전심전력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독신생활에서 정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주께서 자기의 사업에 곧 쓰실 수 있기 위해서 정해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특별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의 공개 선언에서 배웠다. 따라서 우리 능력의 정도에 합당한 생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우리의 본성에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주께서는 간음을 금하신다. 따라서 순결과 정조를 요구하신다. 순결과 정조를 보존하는 길은 다만 하나뿐이다. 각각 자기의 표준으로 자기를 측정하는 것이다.825) 아무도 결혼을 무익한 것이나 무용한 것이라고 경솔하게 멸시하지 말라. 처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독신 생활을 동경하지 말라. 또 동시에 독신 생활에서는 육신의 안식과 편리를 구하지 말고, 결혼 생활의 구속이 없으므로 경건의 모든 의무를 더욱 민첩히 다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 그리고 이 축복을 얼마 동안만 받는 사람이 많으므로, 독신을 계속하기에 자기가 적합한 동안만 결혼을 단념하라. 정욕을 억제할 힘이 없어지면, 주께서 이제는 결혼의 필요성을 자기에게 부과하신 것을 인정하라. 사도의 명령은 이 점을 증명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며(고전 7:2), 또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주 안에서 혼인하라"고 한다(고전 7:9). 사도가 말하는 뜻은 첫째로, 남자의 대부분은 무절제의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런 사람들은 불결과 싸우는 유일한 대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되 한 사람도 예외가 없도록 명령한다. 그러므로 무절제한 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약점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도의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다. 여자와 접촉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 마음속에서 정욕이 타오르는 사항이 무절제하다는 비난을 멸할 수는 없다. 바울은 "마음의 순결과 몸의 정조"를 합해서 정절이라고 정의한다.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고전 7:34) 이와 같이 사도는 위에서 언급한 교훈을 도리상 주장하면서, 창기와 합하여 몸을 더럽히기보다(참조, 고전 6:15이하) 처를 두는 것이 낫다고 할 뿐 아니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한다(고전 7:9).

44. 정숙과 정조

결혼한 남녀가 자기들의 결합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인정한다면, 동시에 그들은 정욕을 억제하지 않고 방탕하게 되어 결혼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권면도 받는 것이다. 결혼은 존귀하여 무절제의 추악을 덮지만, 무절제를 격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녀는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신중히 대하며, 혼인의 존귀상과 절제에 합당하지 않은 일은 전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주 안에서 맺어진 결혼 생활에 절도와 정숙을 회복해서 극단적 음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방탕을 힐난하여 엄격하고 당연한 비판을 내렸다. 즉, 결혼 생활에서 수치나 체면을 개의치 않는 사람은 자기 처를 간음하는 자라고 불렀다.826)

마지막으로, 여기서 음행을 정죄하시는 입법자는 누구신가를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그는 권리상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완전하기를 요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음행을 금하시는 동시에, 우리가 문란한 의복과 음탕한 몸짓과 추악한 말로 다른 사람의 정절을 유혹하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지나치게 방자하고 사치한 옷을 입은 청년을 향해서 아켈라우스가 그의 어느 지체가 불결한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 말에는827) 적절한 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어떤 부분에 불결이 나타나든 간에, 그것을 일체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정숙을 권장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서, 아무 의심도 없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정숙을 요구하신다면, 거기 반대되는 것은 일체 정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순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악한 음욕이 타오르는 것이나, 눈이 타락한 욕망으로 달리는 것이나, 몸에 음탕한 장식을 하는 것이나, 추잡한 말로 생각을 더럽히는 것이나, 욕망이 무절제한 생각을 타오르게 하는 것을 일체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죄악은 모두 정조의 순결을 더럽히는 오점과 같기 때문이다.

여덟째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

45.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출 13:7).828)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한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집어 가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 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는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기 수단을 보신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냉혹한 법을 보신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호림을 보신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한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에,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이다.829)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인 것이다. 자기가 소명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하기 때문이다.

46.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염려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의 처지로 만족하며 정직하고 합법적인 이익만을 얻는 데 힘쓴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순종하는 것이다. 또 불공평한 짓으로 치부하려 하지 않으며, 이웃의 재산을 빼앗아 우리 재산을 긁어모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또 잔인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의 피를 뽑아 거부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수단의 선악을 묻지 않고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긁어모아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키거나 방탕 생활에 낭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조력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모든 사람이 자기 것을 가지고 있도록 진실히 돕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이 없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야 할 때에는,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것을 내줄 생각을 하라. 그뿐만 아니라,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곤란을 나누며, 우리의 풍성한 것으로 그들의 곤궁을 도와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각각 어느 정도까지 남에게 대한 의무가 있는가를 알아서 성실히 빚을 갚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성들은 지배자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정치를 참고 견디며, 그들의 법과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롬 13:1이하, 벧전 2:13이하, 딛 3:1). 또 지배자들은 일반 백성을 돌보며 공공안녕을 유지하며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악인들을 처벌해야 한다. 만사를 처리할 때에 최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에게 근무 보고를 하려는 듯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참조, 신 17:19, 대하 19:6-7). 교회의 목사들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며, 구원의 교리를 불순하게 하지 않고(참조, 고후 2:17) 순수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해야 한다. 교훈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실생활의 모범으로 가르치라.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맡은 양들에 대해서 선한 목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라(참조, 딤전 3장, 딤후 2장, 4장, 딛 1:6이하, 벧전 5장). 신자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사도로서 그것들을 영접하며, 최고의 선생이 허락하신 영예를 그들에게 돌리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참조, 마 10:10이하, 롬 10:15, 15:15이하, 고전 9장, 갈 6:6, 살전 5:12, 딤전 5:17-18). 부모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자녀들을 양육하며 다스리며 가르치며, 학대로 노엽게 하거나 부모를 배반하게 만들지 말고(엡 6:4, 골 3:21), 부모답게 인자하고 친절하게 자녀를 사랑하고 포옹하여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다. 청년들은 노인들을 공경하라. 노인이 공경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노인은 부족한 청년들을 자기들의 우수한 지혜와 경험으로 지도하며, 그들을 가혹하게 책망할 것이 아니라, 온화하고 인자한 태도로 엄격한 언사를 완화해야 한다. 종들은 열심으로 부지런히 주인에게 복종하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충심으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듯 하라. 또 주인들은 종들에 대해서 까다롭고 고집을 피워, 공연히 엄격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들을 형제로 인정하며, 자기도 주님 앞에서 그들과 같은 종임을 인정해서, 서로 사랑하며 인자하게 대우해야 한다(참조, 엡 6:5-9, 골 3:22-25, 딛 2:9-10, 벧전 2:18-20, 골 4:1, 몬 1:16).

이와 같이 각각 자기가 처한 지위와 처지에서 이웃에게 무슨 빚을 졌는가를 생각하며, 또 진 것은 갚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항상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 원칙은 우리의 손뿐만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도 제정하셨으며, 그 의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홉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

47.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신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신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하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상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하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위서가 내포된다. 위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된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다.

48. 우리 이웃의 명예

그러나 우리는 놀라리만큼 경솔하고 냉정하게 이 죄를 짓는 때가 많다. 이 질병이 현저하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남의 죄악을 들추어 폭로할 때에 독성 있는 쾌감을 즐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으로 적절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형제의 명예가 거짓말로 손상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형제의 명예에 오점이 찍히지 않기를 원한다. 참으로 그는 거짓말만을 상대로 형제의 명예를 지키지만, 거기는 그것을 지키도록 위탁을 받았다는 생각이 포함되었다. 이웃의 명예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따라서 험담이 전적으로 정죄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험담이라고 하는 것은 징계할 목적으로 하는 비난이 아니며, 악을 시정하기 위한 비난이나 공정한 비평이 아니다. 다른 죄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기 위한 공개적 징계도 아니며, 미리 경고해 두지 않으면 무지 때문에 위험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는 사람들 앞에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아니다. 험담은 미워서 하는 비난이며, 악한 의도로 거저 훼방하고 싶어서 하는 비난이다.

실제로, 이 교훈은 농담을 가장해서 정중한 체하면서도 가시가 있는 신랄한 조롱을 하는 것까지도 금지한다. 재담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자들이 이런 짓을 하는 예가 있다. 그들은 이런 건방진 짓으로 형제들을 상하게 하여 고통스런 수치와 슬픔을 준다. 그런데, 우리의 혀뿐 아니라 귀와 마음도 지배할 권리가 있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볼 때에, 우리는 험담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나 불리한 비판을 너무 쉽게 표명하는 것도 다 같이 금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혀로 험담하는 병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심중의 악한 의도를 비난하시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고 사랑이 요구하는 대로 혀나 귀가 험담과 악랄한 농담에 끌리지 않으며, 이유 없이 교활한 의혹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언행을 공정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판단과 귀와 혀로 그들의 명예를 신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열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49. 이 계명의 뜻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이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도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830)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틀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으로 기울며 끌려드는 것을 금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기에 다시 자극을 받는 것까지 금하신다.

50. 가장 깊숙한 의로움

하나님께서 이런 위대한 고결함을 요구하시는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영혼이 전력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떤 영혼이 사랑이라는 목표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그것에 병이 들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형제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형제에게 해로운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것인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완전히 배어 있다면, 이런 공상을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탐욕이 있는 이상, 거기는 사랑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항변하기를 탐욕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며, 생각 속에 방향 없이 오락가락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상을 탐욕의 예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가 여기서 문제시하는 공상은 생각을 점령하는 동시에 탐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강렬히 욕심으로 자극하는 종류의 공상이다. 우리의 생각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놀라리만큼 열렬한 사랑이다. 한 점의 탐심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놀랍게 안정된 마음을 요구하시며, 사랑의 원칙에 어긋나는 자극은 바늘 끝만한 것이라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나의 견해에는 권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 계명을 이해하는 길을 나에게 처음으로 열어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831)

모든 사악한 욕망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듯한 거짓된 인상으로 우리를 가장 빈번히 매혹하는 것들을 그는 실례로 드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서 광분 난무하게 만드는 것들을 빼앗음으로써 그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율법의 둘째 판의 내용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사람에게 다해야 할 의무를 풍부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을 명상해야만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격을 토대로 삼아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 판에 있는 의무들을 가르치려고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내가 돕지 않아도 현명한 독자는 일부 사람들이 고집으로 탐심에 관한 계명을 쪼개서 두 계명으로 만드는 것을832) 비판할 것이다. "탐내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반복된 것은 우리 생각과 반대되지 않는다. 이웃의 "집"을 말씀한 다음에, 그 "집"의 내용을 "아내" 이하에 열거하신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은 히브리 사람들의 바른 예를 따라 우리도 한 계명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켜 침해를 받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도 분명하다. 손해를 입히거나 속여 빼앗고자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탐내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조차 금하신다.

(율법의 원칙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 51-59)

51. 율법의 개요

이제 율법 전체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묘사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요점을 상기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모세는 율법의 목표를 지적해야 할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율법의 교훈이 목적하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하며, 모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부종하게(꼭 붙어 있게)하려는 것이다(참조, 신 11:22, 30:20).

그런데 저 성결을 완성하는 데는 이미 언급한 두 가지 제목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과(신 6:5, 참조, 11:13),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레 19:18, 참조, 마 22:37,39). 참으로, 첫째는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충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바로 흘러나올 것이다. 이 뜻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고 가르친다(딤전 1:5).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선두에 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이 경건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를 훈련하기 시작하는 기초와 예비 단계를 가르칠 뿐이고, 사람을 진정한 목표인 선행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해다. 모세와 바울의 발언들에 나타난 것보다 더 위대한 완전성은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묻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적인 경배를 드리며, 계명에 복종하며, 주의 바른 길을 걸으며, 끝으로 순결한 양심과 진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라고 하는 교훈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율법의 계명들에서 경건과 사랑의 모든 의무를 찾으며 발견하는 해석은 확인된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절반만을 가르치지 않는 듯이 건조무미한 초보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율법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2. 성경이 왜 가끔 둘째 판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율법을 요약할 때에 때때로 첫째 판을 빼놓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을 두 판에 다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인과 신"을 "율법의 더 중한 바"라고 부르신다(마 23 :23). 여기서 신은 사람에게 대한 신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경건이라고 해석해서, 율법 전체에 적응한다.833)

확실히 이 해석은 어리석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의를 증명하는 행위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이유를 안다면, 다른 구절에서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 청년에게 주께서 다만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이유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8-19). 첫째 판에 대한 복종은 대개 심정의 의도로 하거나 의식에서 했기 때문이다. 심중의 의도는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위선자들은 항상 의식을 행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는 실지로 의를 우리 눈에 보여 준다.

예언자들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예언서에 매우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점을 잘 안다. 선지자들이 회개를 권고할 때에는 대개 첫째 판을 생략하고, 신실과 정의와 긍휼과 공정을 촉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두려움의 증거를 표적으로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율법 준수를 논할 때에 대개 둘째 판을 역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둘째 판에서 의와 성실에 대한 열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누구나 다 확인할 수 있으므로 구절들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예컨대, 사 1:17).

53. 믿음과 사랑

그러나 혹자는 "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결백하게 사는 데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는 모든 점에서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경건의 증거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점을 증언하시므로, 우리가 다할 의무를 자기에게 국한하시지 않고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하도록 훈련하신다(참조, 시 15: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엡 3:19, 1:5, 골 3 :14).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며(롬 13: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첨가한다(롬 13:8). 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고 한다(갈 5:14).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다(마 7:12).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을, 또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에 속한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보다 낮은 자리에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사람에 대해 바르고 공정하게 행하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목적은,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바르고 공정한 행위로 증거하는 훈련을 우리가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54.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우리가 확고하게 할 입장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을 위한 결실이 가장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계명에 가장 잘 합치하리라는 것이다.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해서는 율법 전체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한마디도 정한 것이 없다. 사람은 원래 너무도 이기적 경향이 강하게 태어났으므로 그리고 아무리 진리에서 벗어나더라도 이기심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미 너무 많은 이기심을 조장하거나 자극할 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834)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가장 착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며 노력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835)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깊이 박혀야 하는가를 표현하시기 위해서(레 19:18) 우리의 이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셨다. 이기심같이 강렬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법의 힘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궤변가들이 미련하게 공상하듯이, 주께서는 이기심에836) 첫 자리를 주시며 사랑을 둘째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837)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자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전 13:5). 이 궤변가들이 쓰는 논법은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즉, 측정되는 것은 언제든지 측정하는 표준보다 낮다고 그들은 말한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에 관한 표준을 정하시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기 예속시키신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에 못지않은 성의와 열심과 주의를 다해서 언제든지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55.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웃"이라는 말에는 가장 인연이 먼 사람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리셨으므로(눅 10:36), 우리는 사랑의 교훈을 인연이 가까운 사람들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인연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도와 줄 의무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혈족 관계나 친분 관계나 이웃 관계가 긴밀할수록 책임도 더 많이 서로 분담하는 것이 인류의 공통한 습성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점은, 우리는 사랑이라는 한 감정으로 인류 전체를 예외 없이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야만인과 문명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친구와 원수 등의 구별을 하지 말며, 사람을 사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838) 사람을 보는 법이 이와 다를 때에, 우리가 여러 가지 오류에 얽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향할 방향을 바르게 잡으려면, 먼저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볼 때에는 사랑보다 미움이 생기는 때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장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56. 복음적 권고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옛날에 모든 유대인에게 주셨고,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인데, 스콜라학파는 이것을 복종해도 자유, 복종하지 않아도 자유인 "권면"으로 바꿔 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흉악한 무지 또는 악의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 "권면"에 복종하는 의무를 수도승들에게 지우고, 그들은 이 "권면"을 준수하겠다고 기꺼이 서약했으므로 이 한 가지 점에서는 단순한 신자들보다 더욱 의롭다고 한다. 이 계명들을 율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짐이 되며, 특히 은총의 율법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인 것 같다는 것이다.839) 그들은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감히 폐지하려는 것인가? 율법책에 이런 구별을 어느 곳에 있는가?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심히 엄격한 계명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가? 배고픈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며(잠 25:21),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바른 길에 데려다 주며, 원수의 짐승들이 짐이 너무 무겁거든 도와주라고 하는 것은(출 23:4-5) 어떤 계명인가? 원수의 짐승들을 도와주면서 원수 그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지 말 것인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히 10:30, 참조, 신 23:35) 영원하지 않은가? 다른 데서는 더욱 평이하게 표현하여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다(레 19:18). 그들은 이런 말씀들을 율법에서 말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입법자시었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는 단순히 권고하실 뿐이라는 거짓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7.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참된 계명이다

네가 다음과 같이 묻노니, 그들이 감히 어리석은 해석으로 조롱한 이 발언들은 무슨 뜻인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눅 6:27-28, 마 5:44-45의 융합). 누가 여기서 크리소스톰과 함께, 이 발언들은 의무를 지우는 것이므로, 분명히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라고 결론짓지 않겠는가?840)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반열에서 배제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은 수도승들만이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수도승들만이 감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이론으로 추리한다면, 교회는 이방인과 세리의 무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너희가 친구에게만 친절하다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이방인과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했다(마 5:46-47, 눅 6:32, 마 18:17의 융합) 우리는 하늘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이라도 남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거스틴의 논법도 이에 못지않은 설득력이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친구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원수의 아내도 건드리지 말라고 금하시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주의 명령은 친구의 것이든 원수의 것이든 일체의 도둑질을 허락하지 않는다.841)

바울은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두 계명을 사랑의 원칙에 관련시킨다. 참으로 그는 이 계명들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포함시킨다(롬 13:9). 그러므로 바울이 틀림없이 율법을 잘못 해석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친구와 똑같이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그 계명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통한 멍에를 벗어 버리는 방자한 자들은 스스로 사탄의 아들들임을 확실히 폭로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 생각을 퍼뜨리는 것은 우둔하기 때문인가 또는 파렴치하기 때문인가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교부들 가운데는 이 말씀들이 참으로 계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이 없다. 그레고리우스 때에도 이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강경히 주장하는 바와 같다. 이 말씀들이 계명이라는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842) 또 그들의 논법은 얼마나 미련한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리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계명에 비교한다면 다른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복수심을 송두리째 마음속에서 뽑아 버리라는 것이나 모두 쉽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이런 요구들은 율법의 가장 사소한 점까지도(참조, 마 5:18, 눅 16:17) 연약한 우리에게는 모두 곤란하다. 우리의 덕행은 주 안에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오며, 뜻하시는 것을 명령하시 옵소서."843) 은총의 율법 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규례를 벗고 함부로 헤맨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그의 은총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풀리며,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이 새겨진다는 뜻이다(렘 31:33). 이 은총을 바울은 "법"이라고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관련시켜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이 은총을 대조시킨 것이다(롬 8:2). 이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말을 가지고 허무한 사색을 하고 있다.

58. 치명적인 죄와 가벼운 죄의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

그들이 "소죄"라고 부르는 것은 첫째 판을 위반하는 비밀한 불경건이나, 마지막 계명을 직접 어기는 것 같은 것들이다. 그들의 정의를 보면, 소죄는 의식적인 찬동이 없는 욕망이며,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지 않는 욕망이라고 한다.844)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마음속에 없는 경우가 아니면, 소죄는 거기 침투할 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마음이 불신의 간교한 술책에 압도되어 다른 곳을 둘러볼 때, 갑자기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할 때 이런 순간적인 충동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것은 영혼 속에 어떤 빈곳이 있어서 이런 유혹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 논의를 더 길게 끌 것 없이,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 속에 하나님 나라에 반대하는 원수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방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의 양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증명이 된다. 마지막 계명이 원래 여기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845) 어떤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했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이라는 죄를 범했고, 따라서 율법을 범한 자들이다. 주께서 금하시는 것은 타인에게 손해가 될 일을 결심하고 계획하는 것뿐 아니라, 탐심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도 금하신다. 주의 저주는 항상 율법 위반을 추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경미한 탐심이라도 사형 판결에서 면제할 근거가 없다. 어거스틴은 말한다. 죄의 경중을 달 때에는 "부정한 저울을 가져다가 우리 멋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생각에 따라 '이것은 무겁다, 이것은 가볍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인 성경을 하나님의 창고에서 내듯이 해서 이 저울로 경중을 달아야 한다. 아니, 우리가 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달아 놓으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846)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물론 바울이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부르는 것은(롬 6:23) 이 타기할 구별을 그가 몰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너무도 위선으로 기울어졌으므로 결코 이 완화제를 붙여서 우리의태만한 양심을 위무해서는 안 된다.

59. 죄는 모두 치명적인 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고 하신다(마 5:19). 율법에 대한 범행을 감히 가볍게 보아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이런 무리들이 아닌가? 그들은 율법의 명령뿐 아니라, 누가 명령하시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행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면,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약해서 사형이 즉시 따르지 않으리라고 공상하는가? 또 하나님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들이 미련한 궤변으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이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20). 방금847)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롬 6:23). 그들은 부정할 수 없어서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한 번만은 현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잠꼬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는 모두 죽을죄라고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기 때문이다. 죄는 율법 위반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도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성도로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제 9 장  그리스도는 비록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도 알려지셨으나, 마침내 복음을 통해서 상세하고 분명하게 계시되었다848)

(그리스도의 은총은 기대되며 천명되었다. 1-2)

1. 신약 사회의 이점

옛날에 하나님께서 화목과 희생의 속죄 의식과 여러 가지 제사를 통해서 자기가 아버지심을 증거하며849) 자기의 선택된 백성을 따로 세우기로 정하신 것은 허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한 광채가 나타나지만, 분명히 그 때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같은 형상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라기는 자기가 죽은 후에 예언자의 직책이 중단되겠으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유의하며 열심히 율법을 계속 지키라고 명령한 후에, 곧 "의로운 해가 떠오르리라"고 선언했다(말 4:2). 이런 말로 그가 가르치려고 한 뜻은, 율법은 경건자들을 그리스도가 오시리라는 소망 가운데서 살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리스도 강림시에 그들은 훨씬 더 많은 밝은 광명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 구원에 대하여는‥‥‥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으며"(벧전 1:10), 그것이 이제 복음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한다. 또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고 한다(벧전 1:12). 이 일들을 가르치는 것이 고대 백성에게 불필요하며 예언자들 자신에게 무가치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시키신 그 보화를 그들은 아직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들이 증언한 그 은총이 바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그들은 조금 맛보았을 뿐이나, 우리는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가 자기를 증언했다고 선언 하시면서도(요 5:46),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많이 받은 그 은총을 찬양하는 의미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으며 너희의 듣는 것을 듣는 귀는 복이 있도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이것을 갈망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느니라"(눅 10:23-24, 마 13:16-17의 융합). 하나님께서 보기 드물게 경건하던 저 거룩한 족장들 보다 우리를 더욱 돌보신다는 것은 복음의 계시에 대한 적지 않은 칭송이 된다. 이 생각과 잘 맞는 것이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기뻐했다는 구절이다(요 8:56). 아직 먼데 떨어져 있어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좋은 일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확신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 거룩한 족장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쁘게 살았다. 세례 요한이 한 말"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는 말은(요 1:18)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죽은 경건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빛나는 지식과 광명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우리의 처지를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희미한 윤곽을 잠깐 엿본 그 신비들이 우리에게는 밝히 나타났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지금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신" 그 독생자가(히 1:3) 옛날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셨다는 뜻이다. 이전에 그들이 해방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들의 지도자였다고 한 바울의 견해를(참조, 고전 10:4) 우리는 다른 곳에서850) 인용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라고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는 것은 사실이다(고후 4:6). 하나님이 이 자기의 형상 안에서 나타나셨을 때에, 이를테면 자기를 눈에 보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희미하게 그림자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대낮인데도 보지 못 하는 자들의 배은망덕과 타락은 더욱 가증하고 비열하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사탄이 어둡게 해서, 사이를 가리우는 수건이 없이 복음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고후 3:14-15, 참조, 4:4).

2. 복음은 계시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비밀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 복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교훈"(딤전 4:6)이라고 부르므로, 율법에서 하나님이 죄를 값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사람들과 화해하시겠다고 자주 약속하시는 것은 모두 복음의 일부분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바울은 공포심을 행위에서 구원을 찾을 때에 양심을 괴롭힐 공포심을 믿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음"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할 때에는, 하나님이 옛날 족장들에게 베푸신 자비와 아버지 같은 호의에 대한 증언들도 복음에 포함된다. 그러나 더 높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다. 이 용법은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가 지지한다(마 4:17, 23, 9:35).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옳다. 그리고 마가는 복음서의 머리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다(막 1:1). 이렇게 충분히 알려진 일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구절을 인용 할 필요는 없다.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복음으로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취하시기까지 족장들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 싸여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에는 명예로운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복음은 새롭고 특별한 종류의 사절이며(참조, 고후 5:20),이 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하신 일을 약속하신 진상이 아들에게서 실현되리라는 것을 실행하셨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이 되느니라"고(고후 1:20) 한 바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신자들은 체험한다. 이 약속들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참조, 고후 1:2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그 육신으로 완전히 성취하셨으므로, 실재(實在)의 이 산 계시가 새롭고 특이한 찬양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5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족장 야곱이 환상 중에 본 사닥다리를 암시하시는 듯하지만(창 28:12). 그의 강림이 얼마나 탁월한 일인가를 표시하시기 위해서, 그가 강림하심으로 인해서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가 모두 하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에 대한 논박 : 세례 요한의 중간적 위치. 3-5)

3. 약속들이 우리에게는 철폐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르베투스의 악마적 공상을 경계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위대함을 찬양하고자 하면서, 또는 그렇게 하는 체하면서, 약속도 율법과 동시에 끝난 것같이 약속을 전적으로 파기한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약속이 성취하는 데 참가하는 듯이 그는 말한다.851) 우리와 그리스도는 사이에 조금도 다르지 않은 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 전체에서 조금이라도 완성하시지 않은 것이 없다고 나는 방금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혜택들을 이미 지금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구원이 희망 속에 감취었느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골 3:3, 참조, 롬 8:24) 거짓말이던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즉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긴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요한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비록 그리스도께서 복음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은 현재의 완전한 영적 혜택이지만, 그 혜택을 받아 즐기는 것은 항상 희망의 보호 하에 숨겨져 있어서, 우리가 썩을 육체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가신 분의 영광으로 변모할 때까지 이를 것이다. 그때가 오기까지는 약속을 믿으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성령의 권위를 믿는 우리는 저 불결한 개의 모든 짖음을 침묵시켜야 한다. 바울의 말대로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딤전 4:8),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노라고 자랑한다(딤후 1:1).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옛날 거룩한 분들이 받은 것과 똑같은 약속을 받았다고 가르친다(고후 7:1; 참조, 고후 6:16-18). 끝으로 그는 우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엡 1:13)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 자신의 약속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에만 그를 받아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시지만(참조, 엡 3:17). 동시에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하나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고후 5:5-7). 그러면 하늘 생명을 완전히 실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좋은 일들을 보는 것이라고 하는(참조, 히 11:1)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잘 일치한다. 다만 우리는 약속들의 성격이나 특질에 있는 차이점, 즉, 율법이 예표로 미리 암시한 것을 복음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율법과 복음과의 대치가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로써 또한 행위의 공로와 의가 값없이 전가해 주시는 의를 대립시켜서 율법과 복음을 항상 잘못 비교하는 사람들도 우리는 반박한다. 이 대립은 물론 버려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율법"이라는 말로 의로운 생활의 표준을 의미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표준에 의해서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며,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살 소망을 전혀 주시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더하신다고 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약속된 보상을 받을 이만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전혀 없으므로, 우리는 다만 은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용서로 의로운 자로 인정된다는 것을 주장할 때다. 그러므로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것은 정당하다(롬 3:21이하, 갈 3:10이하, 기타).

그러나 복음은 다른 구원 방법을 제시할 이만큼 율법 전체를 폐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 약속한 것을 모두 확인하며 실현했으며, 그림자에 실체를 주었다.852)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라"고(눅 16:16; 참조, 마 11:13)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의 종들이 피할 수 없는 저주를 족장들도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그들은 초보훈련을 받았을 뿐이며 복음의 높은 가르침보다 훨씬 아래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고 부르지만(롬 1:16), 얼마 안 가서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고 첨부한다. 그리고 같은 서간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침묵 중에 감취었던‥‥‥그 비밀의 계시"라고 하지만(롬 16:25, 의역), 이 발언을 제한하는 설명을 붙여서, 그리스도는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알려지셨다"고 한다(롬 16:26). 이것을 보고 우리는 추리한다. 율법 전체를 볼 때에 복음은 계시의 명백함이 율법보다 다를 뿐이라고.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며 밝히 나타난 은총이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천국이 지상에 건설되었다고 말하며(참조, 마 12:28), 또 이 말에는 훌륭한 근거가 있다.

5. 세례 요한

요한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서서 양쪽에 관계된 직책을 담당하였다. 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이며 죄를 씻기 위한 제물이라고 불러(요 1:29) 복음의 본질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는 부활에서 드디어 빛난, 비할 데 없는 권능과 영광은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도들과 동등하지 않다고 말하셨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큰 이가 없으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말씀하신 뜻은 여기 있었다(마 11:1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들의 인품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요한을 모든 선지자들보다 앞에 세우신 다음에, 복음 전파를 최고의 지위에 올리시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데서 본 것과 같이, 이 복음 전파를 "천국"이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요한은 자기가 선지자들보다 낮은 듯이 자기는 한 "소리"에 불과 하노라고 대답한다(요 1:23; 참조, 사 40:3). 이것은 겸손을 위장한 말이 아니며, 진정한 사절의 직책은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았고, 말라기가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말한 대로(말 4:5), 자기는 선구자의 직책을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의 활동기간을 통해서 그가 한 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제자들을 준비한 것뿐이다. 그는 심지어 이사야를 인용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자기에게 명령하셨다고 증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그를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고 부르신다(요 5:35). 아직 완전한 대낮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여전히 복음 전파자로 여겨야 하는데 이는 그가 후에 사도들에게 위촉된 것과 같은 세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요 1:33). 그러나 요한이 시작한 일을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훨씬 자유롭게 완성해 나갔다.

제 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구약성경의 언약은 신약성경의 언약과 실제로 같다. 1-6)

1. 문제

이미 말한 바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 곧 창세 이후로 하나님이 택하사 자기 백성 중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 언약을 맺게 한 율법과 교리는 현재 우리 사이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853) 이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동일한 구원을 바라보았지만, 이 교제에서 그들과 우리는 경우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를 일종의 부록으로서 논하겠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수집한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의 차이점을 많이 논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당연한 조치로서 이 문제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논하는 몇 장을 특별히 마련해야 한다. 참으로 저 놀랄만한 불량배 세르베투스와 재세례파의 일부 미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은 돼지 무리에 불과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했을 일이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상 생활에서 살찌우셨지만, 그들에게 하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주시지 않았다고 그들은 지껄이기 때문이다.854) 그러면 이 악취 나는 오류에 경건한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신구약의차이점을 말할 때에 즉시 일어나는 난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그리스도 강림한 후에 우리들과 맺으신 언약이 얼마나 서로 같으며 또 얼마나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일치되는 주요사항

한 마디로 두 가지 점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동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이 하나다. 다만 처리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말해서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논의에 전진이 있겠다. 그런데 신구약의 유사성이라기보다 그 동일성을 밝히려면, 이미 고찰한 세부를 검토할 필요는 없겠다. 다른 곳에서 논의 될 문제들을 여기서 뒤섞는 것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 점을 주장해야겠다. 첫째로, 노력할 목표로서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것은 육적인 번영과 행복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영생의 희망을 주셨고, 신탁(神託)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 선택을 보증하시며 확인하셨다. 둘째로, 그들을 주에게 묶어 놓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 셋째로, 그들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며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리라고 믿었다. 둘째 점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는지 모르므로, 적당한 곳에서855) 자세히 설명하겠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셨거나 약속하신 축복은 모두 오직 그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왔다는 진리를 예언자들의 수많은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확증할 것이다. 셋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증거를 보였고, 첫째 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지 않았다.

3. 구약은 미래를 기대한다

첫째 점이 특히 바로 눈앞의 문제에 관계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논적들은 논란이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더욱 면밀히 주의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가 하는 설명에 빠진 곳이 있을 때에는, 설명을 추진하면서 보충하든지, 또는 다른 적당한 곳에서 첨가하겠다. 사도는 확실히 이 세 가지 점에 관해서 우리의 의혹을 제거해 준다. "오래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복음을 미리 약속하시고," 지정된 때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사도는 말한다(롬 1:2-3).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인한 의를 증언하며, 이것을 복음 자체가 가르친다고 한다(롬 3:21). 물론, 복음은 사람의 심정을 현세의 기쁨에 국한하지 않고, 영생을 바라보는 경지로 들어올린다. 지상의 쾌락에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안식을 얻는 희망을 전언함으로써 이를테면 사람의 심정을 하늘로 옮겨간다. 이 점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도‥‥‥복음을 듣고‥‥‥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엡 1:13-14). 또,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전에 복음 곧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골 1:4-5). 마찬가지로, "그는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그러므로 복음을 "구원의 말씀"(행 13:26),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 또 "천국"이라고 부른다(마 3:2, 13장). 만일 복음의 교훈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는 생명을 얻게 한다면, 그 복음의 약속과 선포를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일을 돌보지 않고856) 우둔한 짐승같이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관한 약속은 율법서와 예언서에 인봉되었고 새로운 백성을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857) 하는 패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율법에 복음이 약속되었다고 말하고, 조금 후에 "무릇 율법에 있는 것은 특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첨가한다(롬 3:19 의역). 바울은 다른 것과 관련하여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례히 유대인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몇 절 앞에서 자기가 복음이 율법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한 말을 잊은 것이 아니다(롬 1:2; 참조, 3:21). 복음의 약속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구약이 특히 내세(來世)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같은 이유로, 구약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토대로 삼았으며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포하는 것도 죄인이 자기의 공로와는 별도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며, 그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감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복음의 언약을 주셨다고 하며, 복음의 유일한 토대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누가 감히 거저 얻는 구원의 선물에서 격리할858) 수 있는가?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의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주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사도는 신자들의 전반적 경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이며, 이 권능을 신자들은 영원히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처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구원을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부른다(눅 1:54-55, 72-73). 주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으로써 옛날 맹세를 실행하신 것이라면, 구약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와 영생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859)

5. 언약의 비슷한 표징들

참으로 사도는 언약의 은총뿐 아니라 성례전의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를 동등하게 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한 형벌들을 사도가 예로 든 것은 고린도 신자들이 그와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도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우리가 특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을 받지 않겠다고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은총을 나타내실 때에 같은 상징들을 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참조, 고전 10:1-6,11).860) 그의 말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대들은 세례로 인치심을 받았고 매일 성찬에 참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는 놀라운 약속이 있으므로 그대들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고 믿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를 경멸해서 방자한 행동을 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런 상징이 없지 않았으면서도 주께서 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바다를 건넘으로써 세례를 받았고 뜨거운 태양을 가리워 준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바다를 건넌 것을 육적인 세례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영적 세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된다면, 사도의 논법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될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의 특권에 의해서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곧 계속되는 발언도 논적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 없다.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고전 10:3-4). 이것을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한다.861)

6. 요한복음 6:49, 54을 근거로 한 반대에 대한 논박

바울의 발언을 뒤엎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와(요 6:49),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6:54)는 말씀을 들어 반대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조화시키기 어렵지 않다. 주께서 그때에 상대로 말씀하신 사람들은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만 하고 영혼의 진정한 양식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해력에 알맞도록 말씀하셨다. 특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나와 그들의 육체를 비교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기적으로 권능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모세도 하늘에서 만나를 얻었을 때 광야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만나는 그 당시에 굶주린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도와준 것을 의미할 뿐이었고, 그들의 생각은 바울이 문제로 삼은 더 깊은 신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보다 자기에게서는 얼마나 더 위대한 은혜를 기대해야 하는가를 알리시고자, 이 비교를 말씀하셨다. 주의 백성이 광야에서 아사하지 않도록 주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늘 양식을 주시고 그들을 단시일 동안 지탱해 주신 것을 위대하고 기억할 만한 기적이라고 한다면, 영생을 주는 양식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를 추론해 보라고 하신다. 주께서 만나의 가장 중요한 면을 간과하시고 그 최저의 이용 가치만을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를 비난하려고 모세를 그에게 대립시키고, 모세는 궁지에 빠진 백성을 만나로 구출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훨씬 더 고귀한 은총을 전달하는 사람이며, 거기 비할 때에 백성의 신체적 요구를 만족시킨 것은, 비록 그들은 그것만을 중요시하지만 멸시해야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주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떨어뜨리신 것은 그들의 배만을 불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적 신비로서 주셨다는 것을,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적 생명을 예시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고전 10:1-5). 그러므로 그는 특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이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다. 주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똑같은 영원한 하늘 생명의 약속을 유대인들에게도 알리셨을 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 성례전으로 그 약속에 인을 치셨다고. 어거스틴은 『마니교도 파우스투스를 논박함(Against Faustus the Manichee)』이라는862) 저서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논의했다.

(영생에 대한 소망에 관한 주장은 구약성경의 족장들이 다가올 삶 속에서 약속이 이행될 것을 기대했음을 보여 준다. 7-14)

7. 그와 더불어 또한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들은 바와 같이, 족장들에게도 모두 공통적인 영적 언약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 독자들은 그것을 증명하는 말씀들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인용되기를 바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 소원대로 하겠다. 더욱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논적들은 더 확실히 반박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우선 제출하려는 증거를 재세례파는 무의미하며 심지어 우스운 것이라고 해서 멸시할 줄을 나는 알지만, 역시 그것은 정신이 건전하고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귀중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속에 큰 생명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미 거기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신 사람들의 영혼을 모두 살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는 씨며 항상 있다고 한 베드로의 말은 언제든지 타당했고(벧전 1:23), 그는 이 점을 이사야의 말로 추론하기도 한다(벧전 1:25, 사 40:8). 그런데 하나님께서 옛날 유대인들을 이 거룩한 유대로 자기와 연결하셨은즉, 그들을 성별하셔서 영생의 희망을 주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결합되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천지와 우주 만물에 편만한 전반적인 전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법도 만물에 각각 그 본성의 정도에 따라 생명을 주지만, 썩어가는 곤경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을 비추는 특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지식을 주는 동시에, 이를테면 그 영혼들을 하나님에게 결합시킨다.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와 같은 말씀에 의한 조명으로 하나님에게 밀착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불멸하는 나라에 틀림없이 들어갔다고 나는 단정한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참여했으며, 이 참여에는 영생의 축복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사귐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것도 아직 조금 분명치 못한 것 같은가?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 자체를 보기로 하겠다. 그렇게 하면 조용한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요, 반대자들의 무지도 충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의 종들과 언약하신 말씀은 항상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다(레 26:12). 선지자들도 보통 설명하기를, 생명과 구원과 모든 축복이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고 했다. 다윗이 자주 한 말에는 근거가 있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이것은 지상의 복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출하시며, 영원한 자비로 영원히 보호하시며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같을 말을 한다. "당신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죽지 않겠나이다"(합 1:12, 의역).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22). "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희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을 백성이로다"(신 33:29).

그러나 공연한 일로 애쓸 것 없이, 예언자들이 반복하는 경고를 들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동안, 우리에게는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하며 구원이 확실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시는 순간 그 얼굴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된다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하나님으로서 나타나실 때에 이 계시와 동시에 자기의 구원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조건은, 모세를 통해서 증언하신 대로(레 26:11),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계시는 사람은 동시에 생명을 받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 다른 설명이 없었지만, "나는‥‥‥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씀에서(출 6:7) 그들은 영적 생명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신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지 않은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격리되어 있으며 죽음 속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결합이 있을 때에는 영원한 구원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죽음보다 강하였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소망이 현세의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장래에까지 확대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 생명의 성격 묘사를 이렇게 해석했다는 것은 여러 구절이 증명한다. 신자들은 현재의 불행에 대해서 위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약속에는 둘째 부분이 있었고, 거기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을 위해서 지상생활의 한계를 넘어 더욱 연장되리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보장되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창 17:7). 후손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죽은 사람에게 대한 후의를 선언하셨은즉, 죽은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확실히 은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친구가 죽으면 그에게 호의를 보일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친구의 후손에게 그 호의를 옮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방해를 받지 않으므로, 자비의 열매를 죽은 자에게서 철회하시지 않고, 그들 때문에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출 20:6).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훌륭한 증거로 자기의 인애가 위대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시려고, 모든 후손에게까지 넘쳐흐르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그 은혜를 죽은 후에도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께서 당자들이 죽은지 오랜 후에 자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때에(출 3:6), 이를테면 이 약속을 실현하심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인하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만일 그들이 죽어 없어졌다면 이것은 불합리한 칭호가 아니었겠는가? 바꿔 말하면 "나는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가지 증거만으로 사두개파를 논박하셨다고 한다(마 22:23-32, 눅 20:27-38).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까지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는 모세 자신에게서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신 33:3)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점을 근거로 생사의 심판자이신 이가 인도하시며 돌보시며 보호해 주신 사람들은 죽음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10. 옛 사람들의 축복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의 중심점을 검토하겠다. 그들의 더 좋은 생명은 다른 곳에 있으며, 지상의 생명을 무시하고 하늘 생명을 명상하라는 것이 주께서 신자들에게 가르치시며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신 뜻인가 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점이다. 첫째로, 주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생활양식은 일종의 계속적인 훈련이었다. 그들이 현세 생활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가련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훈련이었다. 잃어버린 행복을 회상하기만 해도 지극히 슬펐던 아담은 고된 노동으로 겨우 살아갔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어려운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부족하다는 듯이(창 3:17), 남아 있는 위로 가운데서도 극도의 슬픔을 견뎌야 했다. 두 아들 가운데서 한 아들은 다른 아들에게 무참히 죽었다(창 4:8). 살아 있는 아들은 보기만 해도 밉고 몸서리쳐진 것은 당연하다. 한창 때에 참살을 당한 아벨은 인간의 재난을 대표하는 듯했다. 온 세상이 쾌락 추구의 태평세월을 보냈을 때에 노아만은 일생의 상당한 부분을 방주 건조로 시달렸다(창 6:22). 겨우 죽음을 면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백 번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고생이었다. 방주가 십 개월 동안 일종의 무덤 같았을 뿐 아니라, 그 오랜 시일 동안을 짐승들의 배설물에 거의 묻히다시피 하면서 갇혀 지내는 것은 비할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이런 큰 곤란을 극복하고 나서 그는 새로운 슬픔을 당했다. 자기 아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을 보았으며, 부득이 자기 입으로 그 아들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홍수에서 살아난 아들을 저주했다(창 9:24-25).

11.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에 그를 십만인의 가치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믿음은 믿는 자들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는 아브라함 족속의 일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창 12:3).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구석지고 으슥한 곳에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가 모든 신자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였으니(참조, 창 17:5),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를 신자들 사이에서최고의 존경을 받는 계급에서라도 제거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말소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의 경험을 보면,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창 12:1), 그는 고향과 부모와 친구들을, 즉, 인간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으로 인정되는 것들을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그에게서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으시는 것 같았다. 그는 거주지로 지정된 땅에 도착하자, 기근 때문에 그곳에서 쫓겨났다(창 12:10). 도움을 얻으려고 도망해 간 곳에서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창 12:11이하). 이것은 여러 번 죽기보다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거주지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 기근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자주 배를 곯아야 하며, 거기서 도망하지 않고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땅에서 산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할 것인가? 아비멜렉의 땅에서도 같은 궁지에 빠져 자기가 살기 위해서 처를 내놓았다(창 20:1이하). 불안한 방랑을 여러 해 계속하는 동안에, 종들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자기 아들같이 사랑한 조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창 13:5-9). 확실히 그는 이 이별을 자기의 수족을 끊는 것같이 느꼈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 조카가 원수들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창 14:14-16). 어디를 가나 무섭게 야만적인 이웃들이 있어서, 자기가 공들여 판 우물들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먼저 우물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비멜렉에게서 도로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창 21:25-31). 그런데, 그는 노쇠하여서도 자식이 없었다(창 15:2). 이것은 노년에 가장 서글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드디어 천만 의외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나(창 16:15), 이 아들의 출생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다. 마치 그가 여종을 교만하게 만들어 가정불화를 일으킨 듯이 사라가 원망하기 때문에 그는 지쳐 버렸다(창 16:5). 드디어 이삭이 났지만(창 21:2),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거의 원수같이 쫓아내어 버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창 21:9 이하). 이삭만이 남아 있어서 노쇠한 이 착한 사람이 의지할 아들이었는데, 그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잠시 후에 받았다(창 22:1이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삭이 병으로 죽었더라도 누가 아브라함을 가장 불행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희롱당한 것같이 아들을 얻었다가 그 아들 때문에 아들이 없는 슬픔이 갑절이나 더 고통스럽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삭이 낮선 사람에 의해 죽었다면, 그 부끄러운 죽음이 재난을 더욱 큰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재난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일평생 세파에 시달렸으므로, 비극의 일생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아브라함같이 적절한 모델을 얻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전하게 빠져났다고 해서, 그의 일생이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고 항변하지 말라. 무한히 많은 곤란을 당하면서 오랫동안 악전고투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산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지 않고 현재 여러 가지 혜택을 고요히 즐기는 사람을 우리는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다.

12. 이삭과 야곱의 믿음

이삭이 당한 고생들은 비교적 심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도 역시 지상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했다.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고(창 26:1),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겼다(창 26:7이하). 이웃들은 백방으로 그를 괴롭혀, 우물물 때문에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창 26:12이하). 가정에서는 그의 자부들이 큰 말썽을 일으켰다(창 26:34-35). 그의 아들들이 싸워서 괴로웠고(창 27:41이하), 이 큰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축복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창 28:1, 5).

야곱으로 말하면, 극도의 불행만을 겪은 사람의 특출한 표본이863) 되었다. 소년 시절에는 가정에서 형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세월을 보냈고, 드디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창 27:41-45). 부모와 고향을 떠나갔을 때에 이런 추방에서 오는 슬픔뿐 아니라 그의 외삼촌인 라반도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받아주지 않았다(창 29:15이하). 야곱은 칠년 동안 가장 힘들고 잔혹한 종살이를 했건만, 그것도 부족했고(창 29:20), 거기다가 흉계에 걸려 처까지 빼앗겼다(창 29:23-26). 둘째 처를 얻기 위해서 다시 종살이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창 29:27), 그 자신이 불평한 것과 같이 온종일 불볕에서 타며, 추위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 31:40). 이십 년 동안 이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매일 장인의 부당한 처사로 고통했다(창 31:41). 자기 가정에서도 아내들이 서로 맞서 미워하며 싸우기 때문에 집안이 항상 어수선하고 거의 분열 상태였다(창 30:1이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부끄럽게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창 31:17이하). 그래도 장인의 악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여행 도중에 그에게서 모욕과 질욕을 받게 되었다(창 31:23). 불원에 그는 훨씬 더 잔혹한 곤란에 부딪혔다. 형이 있는 곳에 접근했을 때에, 그는 잔인한 원수가 계획한 것 같은 죽을 위험성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에서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 무서운 공포심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창 32:7,11).

에서를 보고 야곱은 거의 죽은 사람같이 형의 발 앞에 엎드려, 의외의 호의를 느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창 33:1이하). 그 후 고향에 들어가자 사랑하는 처 라헬을 잃었다(창 35:16-20). 후에 그는 라헬이 낳은 아들이 다른 아들들보다 특히 사랑하던 아들이 짐승에게 찢겼다는 말을 들었다(창 37:31-32). 아들이 죽은 슬픔에 압도되어 오랫동안 울고 나서 모든 위로를 완강히 거절하고, 죽어 아들에게 가기까지 슬퍼할 것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는 동안에 딸 하나가 잡혀 강간을 당했고(창 34:2,5), 아들들이 담대한 복수를 감행해서(창 34:25), 그는 모든 지방 주민에게 미움을 받을 뿐 아니라, 언제 피살될는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창 34:30). 이 모든 일이 불안과 슬픔과 염세의 큰 원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맏아들 르우벤의 극악한 범죄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창 35:22). 처가 능욕을 당하는 것만도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하거든, 하물며 그 죄를 지은 자가 자기 아들이었으니,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근친상간의 추태가 있었다(창 38:18). 이렇게 많은 부끄러운 일을 겪으면, 아무리 재난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정신이라도 좌절될 것이다. 일생이 거의 끝나려 할 때에 그는 자신과 가족의 주림을 면하려고 하다가, 새로운 재난이 닥쳐온 소식을 들었다. 아들 하나가 옥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을 꺼내기 위해서 자기의 유일한 위로인 베냐민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창 42:34, 38). 이렇게 홍수같이 밀려오는 재난 속에서 야곱은 어떻게 일순간이라도 평화로운 숨을 쉴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는 자신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인으로서, 자기의 지상 생활은 짧고 험악했다고 바로에게 대답했다(창 47:9). 자기는 끊임없는 불행의 일생을 보냈고, 주께서 약속하신 번영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노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상에서 비참한 생애를 살았다는 그의 말은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이 옳았다면, 그는 땅의 일에 희망을 두지 않았다는 결론이 된다.

13. 족장들은 영원한 삶을 추구했다

만약 이 거룩한 족장들이 하나님에게서 축복된 생활을 받으려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복을 지상 생활 이외에 다른 축복을 생각하고 구한 것이다. 사도가 이 점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믿었으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원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9-10, 13-16). 만일 그들이 약속의 실현을 다른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다면, 지상에서 실현 될 가망이 없는 약속을 추구하여 마지않았다는 것은 목석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모세와 같이(창 47:9) 그들도 현세를 "나그네 길"이라고 불렀다고 바울이 우선 주장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이며 나그네라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만든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분명히 아주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무덤 이외에 "발붙일 만큼도" 얻지 못했다(행 7:5). 이것으로 그들은 사후에야 약속의 결과를 받으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그 땅에 묻히는 것을 심히 원해서 아들 요셉에게 맹세로 이 일을 약속시켰고(창 47:29-30), 요셉 또한 자기의 뼈가 흙이 되어 수백 년 지난 후에라도 그 뼈를 그 땅으로 옮겨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창 50:25).

14. 성도들의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끝으로, 족장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내세의 축복을 소망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만일 야곱이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에 장자의 권리를 그렇게까지 원했으며,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큰 모험을 했겠는가? 그 때문에 그는 외국으로 쫓겨가며, 거의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할 뻔했고, 소득은 조금도 없었다(창 27:41). 운명하려 할 때에 그는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로(창 49:18) 자기의 의도를 밝혔다. 만일 그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본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죽어 가는 줄을 안 그가 무슨 구원을 기다렸겠는가? 우리는 무슨 까닭에 거룩한 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가? 진리를 공격하려고 하던 자까지도 이런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았는가? 발람이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민 23:10) 그는 후에 다윗이 언명한 것같이 느낀 것이 아닌가? 다윗은 말하기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그러나 "불경된 자의 죽음은 극히 악하도다"라고 했다(시 34:21). 만일 죽음이 최후의 경계선이요 종점이라면864) 죽음에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사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다윗과 욥과 에스겔과 기타 인물들을 인용해서 이 논의를 계속한다. 15-22)

15. 다윗이 희망을 선포한다

우리는 아직 모세까지 왔을 뿐이다. 모세가 풍부한 각종 물자와 옥토에 대한 약속으로 육적인 백성을 유인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 것이 그가 다한 유일한 직책이었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시된 광명을 고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적 언약이 이미 분명히 확인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장 찬란하게 제시되었다.

우선 예언자들의 선배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에 따라 하늘 신비들을 다른 예언자들보다 아주 희미하게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모든 발언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목표를 겨눈 것이었다. 그가 지상 생활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했는가는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라는 말이 증언한다(시 39:12). "사람마다‥‥‥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시 39:5-6).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지상에는 견고한 것이나 완전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은 확실히 자기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은 신자들을 참으로 위로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이 명상을 권고했다.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인간의 단명함과 무상함을 말한 다음에, 이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라고 첨부한다(시 103:17). 이와 같은 그의 발언이 시편 102편에도 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시 102:25-28). 천지가 멸망하더라도 경건자들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굳게 서 있다면,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사야서에 있는 약속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전연 성립할 수 없다.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거기서는 의와 구원에 영구성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 영구히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영구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16. 미래의 삶에 적용되는 첨부적인 구절들

그가 시편에서 성도들의 번영에 대하여 노래하는 많은 구절들도 하늘 영광이 나타난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르게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의인을 위하여 빛이 동트며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이 밝아오도다"(시 97:11, 의역). 마찬가지로 "의인의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시 112:9).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시 112:10). 또,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시 140:13).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시 112:6). 또 다른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 하시나니"라고 한다(시 34:22).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악인의 정욕 때문에 고통당할 뿐 아니라, 찢기고 몰락하는 것까지 허락하시는 때가 많다. 선인들이 어둡고 누추한 곳에서 신음하는 것을 버려두시는데, 악인들은 거의 별 사이에서 빛난다. 또 자기의 얼굴의 광채로 선인들을 격려하셔서 그들이 영구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까지도 만일 신자들이 현세의 사태만을 주목한다면, 그들은 심히 중대한 유혹에 걸려, 마치 하나님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호의와 보상을 베푸시지 않는 것같이 생각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만큼 악인들은 심히 창성하며 번영하는데, 경건자들은 치욕과 빈곤과 멸시와 각종의 십자가에 눌려지낸다.865)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다윗은 말했다(시73:2-3). 그러나 그는 이 발언의 결론으로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닫겠나이다"(시 73:16-17)라고 한다.

17. 믿는 자들의 소망은 현세의 곤경을 초월하여 미래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의 이 고백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는 일은 매우 드물거나 전혀 없다는 것을 구약하의 거룩한 족장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 올려, 현세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거기 숨겨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곳이 곧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였다. 그들은 비록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확신에 의해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있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이 점은 다음 발언들이 증거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또,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시 52:8). 또,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시 92:12-14). 조금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호와여‥‥‥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시 92:5,7). 이 현상계가 하나님 나라의 출현에 의해서 전복될 때가 아니면 어디서 신자들의 아름답고 우아한 점이 나타나는가? 그들은 저 영원을 바라보면서 현세 재난의 일시적인 고통을 멸시하고 대담하게 부르짖었다.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시 55:22-23). 악인을 삼키는 영원한 파멸의 웅덩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악인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그 날을 형통하여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 가느니라"고도 한다(욥 21:13). 성도들의 위대한 평안은 어디 있는가? 다윗이 각처에서 한탄하듯이, 그들은 난폭하게 휘둘릴 뿐 아니라, 완전히 눌리고 소멸된다. 바꿔 말하면, 다윗은 바다의 파도보다도 더 불안정한 현세의 변화무상한 사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장차 심판대에 앉으셔서 천지의 영구한 상태를 확립하실 때에 하실 일을 내다보고 있다.

시인은 이 점을 다른 구절에서 적절하게 묘사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도다 아무리 고귀한 자라도 그 형제를 죽음에서 구속하지 못하며‥‥‥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 못하리로다‥‥‥지혜 있는 자는 죽고 악인과 우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 것을 그들은 보면서도 저희의 속생각에 자기 집이 영영히 있고 자기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땅에서 자기의 이름을 칭송하는도다 사람의 존귀는 장구치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 같으리로다 저희가 이같이 생각함은 우매의 극치이건만, 그 후손들은 그들을 열심히 본받는도다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모으시리니 사망이 저희를 지배하리로다‥‥‥빛이 동트면 의인이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소멸하여 음부가 저희 거처가 되리로다"(시 49:6-14).

현세의 소위 "행복"은 믿을 수 없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인데, 그것을 믿고 안심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조롱하는 것은,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훨씬 다른 종류의 행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들이 멸망한 후에 결경자들의 나라가 있으리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더욱분명히 밝힌다. 묻노니, 빛이 동튼다는866) 것은 현재의 이 시대가 끝난 후에 새로운 생명이 계시되리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18. 그들의 행복한 운명을 악인들의 운명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신자들이 불행 중의 위로와 고난에 대한 대책으로 사용한 저 큰 소망이 생겨났다. "주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시 30:5). 거의 한 평생을 계속한 곤란을 그들은 어떻게 순간에 제거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거의 맛본 일도 없는 그들이 어디서 이렇게 영구적인 은혜를 볼 수 있었는가? 만일 땅에 집착했다면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보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주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지되, 그것은 "잠시 동안"이며, 그들이 받는 "자비"는 "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했다(사 54:7-8). 그러나 하루 동안 꿈같이 행복했던 악인들에게는 영원히 계속하는 파멸이 있으리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다. 여기에 대한 발언들은 예컨대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잠 10:7),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시 34:21)가 있으며 사무엘서에 "주께서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라"(삼상 2:9)는 말씀도 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성도들은 아무리 곤란으로 시달리더라도 결국은 생명과 구원이며, 악인의 길은 즐거운 행복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점점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을 고대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인의 죽음을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겔 28:10; 참조, 31:18, 32:19이하; 기타). 악인들은 부활할 희망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생각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것이었다(시 69:28).

19. 욥, 영생불멸의 증인이다

다른 구절들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욥이 한 말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9:25-27).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싶은 자들은, 이 구절은 최후 부활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이 자기를 더 인자하게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한 그 첫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867) 지껄인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이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욥의 소망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고상한 소망에 도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들이 싫든 좋든 인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미래의 영생불사를 우러러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무덤 속에 있을 때라도 자기의 구속자가 자기와 함께 계시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현세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최후의 결정적 절망이지만, 그 죽음도 욥의 소망을 끊어버릴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그는 말한다(욥 13:15, 불가타역).

이런 발언들은 소수 사람들이 한 것이고,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증명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궤변가들은 나를 공격하지 말라. 나는 곧 대답하리라. 이 소수 사람들은 이런 발언에서 어떤 감추인 지혜를 우수한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비밀히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일반 사람들의 교사로 임명되어 하나님의 비밀들을 널리 발표했고, 그 신비들을 백성이 배워 경건의 지도 원칙으로 삼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유대인 교회에서 영적 생명을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논하시는 그 공개적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육적인 언약으로 돌리며, 땅과 땅에 붙은 재물에만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용납할 수없는 완악한 고집일 것이다.

20. 영생에 대한 예언자들의 증언

후기 예언자들에게 내려오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분야를 활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과 욥과 사무엘에 관해서 주장하는 점을 우리가 쉽게 증명했다면, 예언서들에서는 그 증명이 훨씬 더 쉽다. 주께서는 자비의 언약을 실행하실 때에 질서 정연한 계획에 따르셨다. 즉, 세월이 흘러 완전 계시의 때가 접근함에 따라 주께서는 날마다 계시를 더욱더 빛나게 하셨다.868) 따라서 맨 처음에 아담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을 때에는(창 3:15), 그것은 미약한 불꽃이 비치는 정도였다. 그 후에 점점 빛이 더욱 밝게 되어 더욱 강하고 더욱더 넓게 광채를 퍼뜨렸다. 드디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고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세계를 완전히 비추셨다(참조, 말 4장) 우리는 우리의 논점을 예언자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우리 앞에 거대한 산림같이 많은 자료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 책의 체재를 많이 벗어날 정도로 논해야 하겠고, 그렇게 한다면 이 문제만으로 큰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솔길을 표시해 놓았으니, 어지간히 총명한 독자라면 그 길을 따라 이 산림 속을 무사히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전에 그들에게 쥐어준 열쇠를869) 써서 앞길을 열어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경고하겠다. 즉, 믿는 백성의 행복을 선지자들이 말하며, 그런 행복을 현세에서는 흔적조차 보기 어려울870) 때마다 독자들은 그들의 특색에서 피난처를 구해 야 한다. 즉,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잘 추천하기 위해서 그 인애를 현세에서 받는 혜택의 모양으로 백성에게 이를테면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그림은 백성의 마음을 들어 올려, 땅을 초월하며 이 세상 초등 학문과(참조, 갈 4:3) 멸망해 가는 세대를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 그림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장차 올 영적 생명의 행복을 깊이 생각하도록 각성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21. 에스겔서에 있는 마른 뼈의 골짜기

우리는 예를 하나만 들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들은 이 민족 분산이 죽음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민족 부흥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서 이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썩어가는 시체들이 다시 살게 되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의 은혜는 여전히 있으리라는 것을 증명하시고자, 예언자에게 마른 뼈가 가득한 지면의 환상을 보이시고,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일순간에 그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라게 하시는 것을 보이셨다(겔 37 :1-14). 참으로 이 환상은 당시의 회의를 시정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주의 권능이 유대 백성의 부흥뿐 아니라, 훨씬 그 이상의 일을 하신다는 깊은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 간단한 명령으로 흩어진 마른 뼈들을 살려 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스겔의 말과 이사야에 있는 구절을 비교할 수 있다."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 26:19-21).

22. 다른 예언서들에서 부가한 구절들

혹 누가 모든 다른 구절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구절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미래의 영생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 구절들을 우리는 몇 개 설명했지만, 다른 구절들도 대개 같은 뜻이며, 특히 여기서 인용하려는 두 구절이 그러하다. 하나는 이사야서에 있다.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항상 있으리라‥‥‥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사 66:22-24). 또 한 구절은 다니엘서에 있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1-2).

23. 요약과 결론 : 영생 문제에서 신구약은 일치한다

아직 두 가지 점이 남았다. 즉, 구약의 조상들은 ⑴ 그리스도를 언약의 보증으로 소유하였고, ⑵ 미래의 행복은 그에게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둘은 비교적 분명하고 논쟁할 여지도 적기 때문에, 우리는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모든 술책으로도 공격할 수 없는 한 원칙을 담대히 견지하겠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구약, 즉, 옛 언약은 땅에 붙은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이 언약에 참으로 찬동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에 이런 생명에 대한 기대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자들은 주께서 유대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 또는 그들이 추구한 것은 배가 부르는 것, 육의 즐거움, 불어가는 재물, 외면적인 권력, 번성하는 자손, 기타 자연인이 갈망하는 모든 것뿐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위험스런 사상을 물리친다. 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금 약속하시는 "천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는" 천국에 불과하다(마 8:11).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은 복음의 은총을 상속할 자들이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옛날에 자기 백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에 포함되었다고 말했다(행 3:25). 주께서는 이 일을 말로만 증거하시지 않고 행동으로도 인정하셨다. 부활의 순간에 주께서는 많은 성도들을 자기의 부활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셨고, 그들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보도록 하셨다(마 27:52-53).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하신 일과 겪으신 고난은 우리들과 똑같이 구약 시대의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하셨다. 참으로 베드로의 증언과 같이, 우리를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믿음의 영을 그들도 받았다(행 15:8). 우리 안에서 영생 불사의 불티와 같으시며, 따라서 다른 곳에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한(엡 1:14) 그 성령께서 그들 속에도 마찬가지로 계셨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서 생명의 상속을 감히 빼앗을 것인가? 옛날 사두개파가 부활과 영혼의 존재를871) 부정할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것은(마 22:23; 행 23:8) 이 두 가지 교리를 성경이 이미 분명한 증언으로 인친 후였으므로, 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 유대 민족은 전체적으로 메시아의 지상적 왕국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 형벌을 받으리라고 성경이 벌써 예언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우둔함은 사두개파에 못지않게 해괴할 것이다. 제시된 하늘 광명을 거부하고 고의로 암흑을 덮어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을 내리셔서 그 마음을 어둡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읽으며 항상 그의 글을 깊이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을 수건이 가리워 그의 얼굴에 있는 빛을 보지 못한다(고후 3:13-15). 그래서 그들은 지금 모세의 얼굴을 그리스도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지만, 모세의 얼굴은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때까지 그들에게 항상 가리워 있으며 숨겨 있을 것이다.

제 11 장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다섯 가지이다 : 첫째로, 구약은 영적 축복을 일시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1-3)

1.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야 할 지상의 은혜를 강조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은 신구약간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또한 신구약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대립시키는 많은 구절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성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엄연한 통일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인정이다. 차이점들을 순서대로 토의하고 나면 이 점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거나 기억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은 넷이다. 다섯째 것을 첨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이 모든 차이점은 처리 방법에 관한 것이고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며, 그 점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신구약의 약속들이 같으며, 이 약속들의 토대도 같은 그리스도시라는872) 입장을 방해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은 첫째로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자기의 백성이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하늘 기업을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의 이 소망을 더욱 잘 배양하시기 위해서 그 기업을 땅에 붙은 혜택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들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내세의 은총을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계시했으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직접 내세를 명상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시던 수준 낮은 훈련 방법을 버리신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육체에 대해서 약속된 축복을 더 이상 초월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나안 땅은 훌륭하고 심지어 유일한 상급이라고 하는 말씀이 자주 있는 것을 그들은 듣는다.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하시는 가장 가혹한 벌의 위협은 소유한 이 땅에서 쫓겨나며 외국 땅으로 흩어지리라는 것임을 그들은 듣는다(참조, 레 26:33, 신 28:36). 그들은 모세가 말한 축복과 저주의 거의 전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증거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했다기보다 다른 민족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서슴치 않고 단정한다. 즉, 그리스도 교회가 한 외형을 보고 거기서 영적인 일들의 증거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상적 혜택을 유대인들에게 주셨을 때에, 친히 그들의 손을 잡아 천상적인 일에 대한 희망으로 인도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가끔 보여 준다. 따라서 이런 처리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지몽매, 아니 우둔의 극치였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반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을 최고의 궁극적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가 계시된 후로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 상속을 예표했다고 그들은 가르친다.87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즐긴 지상적 소유를 일종의 거울로 삼아, 자기들을 위해서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은 미래의 상속을 내다본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2. 지상에서의 약속은 구약에서 유년기 시절의 교회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지상의 일에 대한 희망을 구속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서신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유대 민족을 어린 상속인에 비교한다. 아직 자립할 수 없어, 후견인 또는 관리인에게 맡겨 돌보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갈 4:1-2). 바울은 주로 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비교하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기서도 그 비교론을 가장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유업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려서874) 그것을 상속해서 운영할 수 없었다. 같은 교회가 그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아직 유년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을 이 보호 감독 하에 두시며, 영적 약속을 주실 때에 아무 장식 없이 또 드러나 보이게 하시지 않고, 지상적 약속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예표된 것을 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생 불사의 희망을 주시기로정하셨을 때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하셨다. 그 땅은 그들의 소망의 최종목표가 아니었고, 그것을 봄으로써 진정한 유업을 아직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은 유업을 바라보도록 그들을 훈련하며 확고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더 높은 약속을 주셔서 그 땅이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가 아님을 알리셨다.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가 거져 듣고만 있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를 향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말씀은,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것이었다(창 15:1).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궁극적 상급은 오로지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초등 학문에서(참조, 갈 4:3) 무상하고 포착할 수 없는 상급을 구할 것이 아니라, 불멸의 상급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주께서는 그 다음에 땅에 대한 약속을 첨가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인애의 상징과 하늘 유업의 예표에 불과했다. 성도들도 이 일을 체험했노라고 각기 증언한다. 다윗은 현세의 행복으로부터 비약해서 저 최고의 궁극적 행복에 도달한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하나님은 나의…영원한 분깃이니라"(시 73:26, 참조, 시 84:2). 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그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 16:5). 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5).

이런 말을 감히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들에게는 이 세상과 모든 현세적 혜택을 초월한 소망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주에게서 받은 예표로 내세의 행복을 표시하는 때가 더 많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컨대, "대저 경건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리라"(잠 2:21),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욥 18:17, 참조, 잠 2:22, 집회서 41:9). 이사야서에는 예루살렘에 각종 재물이 풍성하며 시온에 모든 물건이 차고 넘치리라고 하는 구절이 많다(참조, 사 35:10, 52:1이하, 60:4이하, 62장).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출생지에서나 지상의 예루살렘에 적용될 수 없고, 신자들의 진정한 고향 "여호와께서 복과 영생을 명하신"(시 133:3) 저 하늘 도성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3. 유형별로 본 육체적인 은혜와 육체적인 처벌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합당하지 못 할 정도로 현세 생활과 그 행복을 너무 중요시했다. 그것이 경주의 종점인 듯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약한 분량에 따라 그들을 훈련하시려고 그 행복에 은총의 표적을 남겨 주신 것을 보고, 그들은 그 은총을 직접 보지 않고 표적을 기뻐하여 거기 더욱 끌렸다. 그러나 주께서는 현세의 혜택으로 신자들에 대한 자기의 인애를 증거하실 때에 이런 예시와 상징으로 영적 행복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한편으로는 신체적 처벌로 장차 악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증명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지상적인 일에서 더 현저히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벌도 마찬가지였다. 무지한 자들은 상벌간에 있는 이 비슷함과 일치라고 할 것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많이 변하셨다고 해서 놀란다. 과거에는 엄격하고 무서운 벌을 모든 범행에 일일이 또 신속히 내리셨는데, 지금은 이전의 노하신 기분을 버리시고 훨씬 부드러운 벌을 훨씬 드물게 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니교도들과 같이,875) 신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까지 공상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이런 의구심을 곧 일소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울로 가리운 형태로 언약을 주신 동안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의 은총은 지상적인 혜택으로, 그리고 영적 죽음의 중대성은 신체적 형벌로 표시하며 상징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둘째 차이점 :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습과 의식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4-6)

4. 이 차이점의 의미

신구약간의 둘째 차이점은 상징에 있다. 구약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 대신에 형상과 그림자를 보였을 뿐이고, 신약은 진상의 실체 그 자체를 현재 있는 것으로서 계시한다. 항상 이 차이점이 신구약이 대조될 때에는 거의 언급되지만, 히브리서에 있는 설명이 가장 자세하다.876) 그곳에서 사도가 논란하는 상대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면 경건 전체도 파멸된다고 생각했다. 이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는 예언자 다윗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예언한 것을 인정한다(시 110:4, 히 7:11).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으셨으므로, 제사장이 날마다 교체되던 제사장 제도는 폐지된 것이 확실하다(히 7:23). 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은 맹세로 제정된 것이므로 우세하리라는 것을 그는 증명한다(히 7:21). 그리고 나서 그는 제사장 제도가 변했으므로 언약도877) 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히 8:6-13). 율법은 그 자체가 약해서 완성에 이를 수 없었으므로, 이 변경이 필요했다고 그는 선언한다(히 7:19). 그 다음에 이 약점의 성격을 논한다. 율법에는 의의 행동이 외면적 신체적인 행동이 있었지만, 이런 행동을 준행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물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양심은 죄를 말소하거나 진정한 성결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가 있고 "일 자체의 산 형상"은 없다고 그는 단정한다(히 10:1). 그러므로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복음에서 나타난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히 7:19, 시 110:4, 히 7:11, 9:9, 10:1).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언약과 복음의 언약, 그리스도의 사역과 모세의 사역이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만일 약속들의 내용에 관한 비교라면 신구약간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경향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므로, 우리는 그것을 따라 진상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일찍이 영원불멸할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설명하겠다. 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시며, 이 성취에 의해서 언약은 최종적으로 확정되며 인준된다. 확정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주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의식들을 제정하셨고, 의식들은 이를테면 그 확인에 대한 엄숙한 상징이었다. 율법에 제정된 의식들은 그리스도에게 위치를 양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생겼다. 그런데 의식은 언약의 일시적인 속성, 첨가물, 부속물, 소위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약을 실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은 다른 성례전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이 구절에서 "구약"은 언약을 확인하는 엄숙한 방법을 의미하며, 그 방법은 의식과 제사에 포함되었다.

우리가 방법을 초월하지 않을 때에, 거기는 본질적 기반이 없으므로, 사도는 방법을 종결시키며 폐지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참조, 히 7:22). 그리스도께서는 이 언약에 의해서 영원한 성결을 선택된 자들에게 단번에 주시며, 율법 하에서 처리되지 못한 죄를 없애버린다.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주의 옛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이었는데, 그것은 그림자878) 같고 효과가 없는 의식 준수에 포함되었으며, 확고하고 실질적인 확인을 받기까지는 이를테면 미결 상태에 있는 것, 일시적인 것이었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되며 확립된 때에 비로소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의 잔"이라고 부르셨다(눅 92:20).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쳐질 때에 그 진리에 도달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는 뜻이다.

5. 교회의 유년기와 장년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고 사도가 말한 뜻이 분명하다(갈 3:24. 참조, 4:1-2). 사도는 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후사였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보호자의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에는 크고 빛나는 계시나 분명한 이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광명을 나눠주셨지만, 그들은 아직 그것을 여전히 또 멀리서 어렴풋하게 보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 미약한 이해 상태를 "어렸을 때"라는 말로 표현한다. 아동 교육의 방법으로서 이 유년기를 이 세상 초등 학문과 사소한 의식 준수로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비치시게 되면, 그로 인해서 신자들의 지식이 성숙하도록 하신 것이다(참조, 엡 4:13).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 구별을 시사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느니라"(눅 16:16. 참조, 마 11:13). 율법과 선지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들은 언젠가는 분명히 계시될 그 지혜를 예상하게 만들었으며, 그 지혜가 멀리 반짝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열렸다. 그리스도에게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 2:3)가 계시되었으며, 이 지혜와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가장 깊은 하늘 성소에 거의 이르게 할 수 있다.

6. 신앙이 깊었던 위인들도 옛 언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과 비교할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예언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훌륭히 받아서 지금도 전 세계를 그 힘으로 비출 만한 것이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한 우리의 견해는 움직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의 은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가르치신 그 통상적인 처리 방법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한 통찰력을 받은 예언자들이 가르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까지도 먼데 있는 물건같이 희미하였고 예표로 표현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탁월한 지식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었더라도, 그들은 민족의 전반적 훈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역시 어린이들로 인정됨을 면할 수 없었다. 끝으로, 그 때에는 시대적인 모호한 지식을 초월할 만큼 투철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4). 그러므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 확실히 이 특권을 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이 특출한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하늘 신비들이 더욱 분명히 계시되었다.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은 여기도 해당한다. 선지자들의 노고는 주로 우리 시대를 위한 것이었음이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벧전 1:12).879)

(셋째 차이점 :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7-8)

7. 이 차이점의 성경적 기원과 의미

이제 셋째 차이점을 논할 터인데,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얻은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을 다스렸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리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31-34 의역과 순서 변경). 이 말씀을 근거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한다. 율법은 문자적인 교훈이고, 복음은 영적인 교훈이며, 전자는 돌판에 새겼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에 새겼으며,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생명을 전파하며, 전자는 정죄를, 후자는 의를 전파하며, 전자는 무효하게 될 것이요 후자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고후 3:6-11). 사도는 예언자의 뜻을 해석하려고 한 것이므로, 두 사람의 취지를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의 말만을 검토하면 충분하겠지만, 그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예언자에 비해서 사도는 율법을 나쁘게 말한다. 율법 자체에 관해서 뿐 아니라, 일부 그릇된 율법 추종자들이880) 의식에 대한 도착된 열성으로 명료한 복음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류와 어리석은 편벽을 보고 바울은 율법의 본성을 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특이점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바울이 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므로, 율법의 고유한 특색만을 고려한다. 예컨대, 율법에는 처처에 자비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데서 빌려 온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본성만을 논할 때에는 율법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이 율법의 기능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다. 즉, 바른 일을 명령하고 악한 일을 금지하며,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범죄자들을 처벌로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부패를 변하거나 시정하지 못한다고 한다.

8. 고린도후서 3장에 따른 세부적인 차이점

이제 사도의 비교론을 한 항목씩 설명하겠다. 구약이 문자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의 역사가 없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이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그것을 사람들의 심정에 영적으로 새기셨기 때문이다(고후 3:6상). 둘째 대조점은 첫째 것을 밝힌다. 구약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저주 가운데 덮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약이 생명의 도구인 것은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3:6하). 구약이 정죄를 내림은 아담의 모든 자손의 불의를 고발하기 때문이며, 신약이 의를 줌은 하나님의 긍휼을 계시하며 이 자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이다(고후 3:9).

마지막 대조는 의식적 율법에 관련시켜야 한다. 구약은 현장에 없는 것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때가 오면 죽어 없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은 본체 그것을 나타내므로 영원히 굳게 서 있다(고후 3:10-11). 참으로 예레미야는 도덕적 율법까지도 무력하고 연약한 언약이라고 부른다(렘 31:32). 그러나 거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즉, 은혜를 잊은 백성이 갑자기 이탈했기 때문에 그 언약이 곧 파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위반의 책임은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언약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런데, 의식들은 무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에 의해서 폐지되었은즉, 폐기된 원인이881) 자체 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자와 영의 이 차이를 근거로 주께서 유대 민족에게 주신 율법에 아무 효과도 없었고, 그들 중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선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차이점을 지적하여 비교한 것은 은총이 풍부하게 된 것을 찬양하려는 뜻이다. 동일한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마치 성격이 달라진 듯이, 복음 전파에 은총을 풍성히 베푸신 것을 찬양한다. 복음 선포를 통해서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을 모든 민족 사이에서 불러 모으셔서 교회의 교제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라.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인 사람이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비교하지 않고 그들만을 본다면, 그들의 수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넷째 차이점 : 구약의 구속과 신약의 자유. 9-10)

9. 바울의 가르침

넷째 차이점은 셋째에서 생긴 것이다. 구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경은 구약을 "구속"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약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하므로 "자유"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한다(15절). 히브리서에 있는 구절도 여기 적용될 수 있다. 신자들이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이 아니라고 한다. 거기서는 이목에 접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그 무서운 음성이 울렸을 때에 백성은 듣지 않기를 구했으며, 모세까지도 겁이 났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 12:22).

바울은 우리가 인용한 로마서의 발언에서 이 점을 간단히 언급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상세히 설명한다. 거기서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해서 비유로 해석한다. 계집종 하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시내산의 상징이며, 자유 여인 사라는 복음의 근원지인 하늘 예루살렘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갈의 소생은 노예의 몸에서 났으므로 상속을 받을 수 없었고, 사라의 후손은 자유인이며 상속권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노예가 되지만, 복음에 의해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갈 4:22-31). 요약하면, 구약은 양심에 공포심과 전율을 불어넣지만, 신약의 은혜로 양심은 해방과 기쁨을 얻는다. 구약은 양심을 노예의 멍에에 구속하였지만, 신약은 너그러운 영으로 양심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항의한다고 가정하라. 곧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거룩한 족장들은 예외였으며, 분명히 우리와 같이 믿음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자유와 기쁨을 받았다는 결론이 된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 자유나 기쁨은 율법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족장들은 율법에 의해서 노예와 같이 압박을 받으며 양심의 불안으로 지치게 된 것을 느꼈을 때에 복음에 도망해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약의 일반법과는 별개로 구약의 폐해를 면하게 된 것은 신약의 특별한 결실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자유와 화신의 영을 충분히 받아서 율법에서 오는 공포심과 노예 상태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무리 복음의 은총을 통해서 받은 특권을 즐겼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일반 백성과 같이 의식 준수의 구속을 받으며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 상태와 비슷한 훈련의 상징인 의식들을 정확히 지켜야 했으며(참조, 갈 4:3-3), 그들에게 유죄를 고백하게 한 증서는(참조, 골 2:14)882) 그들을 의무에서 해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때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쓰신 일반적 처리 방법을 고려할 때에, 그들은 우리와는 현저히 달라서 속박과 공포의 언약 하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0. 율법과 복음

우리가 말한 둘째 이하의 세 가지 비교는883) 율법과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 비교에서 "구약"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을, "신약"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의미했다. 첫째 비교는884) 범위가 더 넓어서 율법 이전에 발표된 약속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약속들을 "구약"이라는 이름에 넣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예레미야와 바울의 발언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은총과 자비의 말씀을 구약과 구별했다. 어거스틴은 같은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적절한 말을 첨가했다. "하나님에 의해서 중생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으로 계명에 복종한(갈 5:6) 약속의 자녀들은(롬 9:8) 창세 이후로 모두 새 언약에 속했다. 그들이 복종한 것은 육적·지상적·일시적인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천상적·영구적인 혜택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보를 믿었고, 그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 선을 행하게 되며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885) 이것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즉, 성경에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특별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동일한 축복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우리와 어거스틴의 분석이 다른 점은 이와 같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는 말씀에 따라(눅 16:16) 복음은 분명하고 그 이전에 있어온 말씀의 경륜은 비교적 모호했다는 점을 구별하는 것이며 어거스틴은 다만 율법은 무력했고 복음은 견고하다는 구별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족장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그들은 옛 언약 하에 살면서도 거기 머무르지 않고 항상 새 언약을 사모해서 참으로 그것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의 그림자로 만족하고 마음의 시야를 넓혀 그리스도에 이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도는 맹목적이고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다른 일은 말하지 않더라도, 죽인 짐승에게서 죄의 대속을 얻겠다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맹목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는 외면적으로 물을 뿌려 영혼을 깨끗이 정결케 하며, 냉담한 의식들을 하나님이 즐기시는 듯이 그 의식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율법 준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어리석은 짓으로 엉터리없는 모순에 빠진다.

(다섯째 차이점 : 구약은 한 민족에 언급했으나, 신약은 모든 민족에 관계한다. 11-l2)

11.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너진다

다섯째로 첨가해도 좋은 차이점은 그리스도 강림할 때까지 주께서 한 민족을 택하시고 은총의 언약을 그 민족에 국한하셨다는 사실이다.886)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모세는 말했다(신 32:8-9).

다른 곳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써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느니라"(신 10:14-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한 백성만이 자기 백성인 듯이, 자기 이름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만 주셨다. 그들의 가슴에 자기의 언약을 안겨 주시다시피 하셨고, 자기의 숭엄성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모든 특권을 그들에게 퍼부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축복들은 보지 않고 화제에 오른 축복만을 고찰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달하심으로써 그들을 자기에게 결부하시고, 그들이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높이게 하셨다. 동시에 모든 다른 족속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헛된 길로 다니게 묵인하셨다(행 14:16). 그들의 치명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인 말씀 전파도 그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주의 제일 사랑하시는 아들이었고, 다른 민족들은 남이었다. 이스라엘은 인정과 신임과 보호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자체의 암흑 중에 방치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성별해 주셨으나, 다른 민족들은 속화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시는 영예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이 막혔었다. 그러나 만유를 회복하시기로 지정하신 "때가 차매"(갈 4:4) 주께서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자로 나타나셨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의 경계선 안에 국한하던 "담을 허시며"(엡 2:14), "먼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엡 2:17), 이는 그들이 함께 하나님과 화평하여 한 백성으로 융합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엡 2:16). 그러므로 지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갈 3:28), 할례나 무할례의 차별이 없고(갈 6:15),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다"(골 3:11) "그리스도께서는 열방을 유업으로 만들어 주었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시 2: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된 것이다(시 72:8, 참조, 슥 9:10).

12. 이방인들을 부르심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것은 신약이 구약보다 우수한 점을887) 밝히 표시한다. 참으로 이 점은 선지자들의 아주 분명한 발언이 여러번 확인했다. 다만 그 실현은 메시아 왕국이 나타날 때까지 연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까지도 전도의 초기에는 그 실현을 즉시 시도하시지 않고 연기하셨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마치며 치욕을 받으시는 기간을 끝내신 후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그 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야 하는 이름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실 때까지 연기하셨다(빌 2:9-10). 그래서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냄을 받지 아니하셨노라고 하셨다(마 15:24). 그리고 제자들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에 파송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일어 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마 10:5). 성경에 이방인을 부르시리라는 증언이 아무리 많았어도, 사도들은 그 일에 착수하려고 했을 때에 너무도 신기하고 해괴한 일같이 느껴져서 움츠렸다. 드디어 그들은 떠는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했으나,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또 그것은 당연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만을 택하시던 주께서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시고 그 선택을 버리신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예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띄는 일이 너무도 신기해서 이런 예언들을 읽을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을 부르시리라는 증거를 하나님이 옛날에 그들에게 주셨건만, 그 증거를 보고도 그들은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부르신 이방인의 수효가 아주 적었을 뿐 아니라, 이를테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접붙여서 그 민족에 가입시키셨다. 그러나 이제는 공개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동등하게 될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죽은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받아들이신 외국인들은 유대인과 동등시된 일이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일을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던 위대한 비밀이라고 부르며(골 1:26; 참조, 엡 3:9), 천사들에게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는 데는(참조, 벧전 1:12)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처리 방법이 다른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일관성을 의 심하는 자들에게 대답함. 13-14)

13. 보편적으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인가?

단순한 교리 설명의 범위내에서 나는 이 넷 또는 다섯 가지 점으로 신구약의 차이를 충실히 또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회 치리상의 이 변화와 교육 방법상의 차이와 예식 및 의식의 중대 변혁들을 비웃는다.888)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대답해야겠다. 다만 그들의 항의는 자세히 반박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간단히 대답하겠다. 항상 시종 여일하신 하나님께서 일찍이 명령하시고 권장하시던 일을 후에 비난하신다는, 이런 큰 변동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각 시대에 유익하다고 보신 대로 형식을 조절하셨다고 해서, 그 일만으로 하나님이 변하신다고 볼 것이 아니다. 농부가 가족에게 시키는 일이 겨울과 여름에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의 변덕스러움을 비난하거나, 자연의 연속적 질서와 일치하는 정규의 영농법에서 그가 이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장(家長)된 사람이 가르치며 명령하며 인도하는 방법이 영아기와 유년기와 청년기에 서로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때문에 그를 변덕스럽다고 하지 않으며, 목적을 버린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대 차이를 적절한 표지로 구별하신 것을 무슨 까닭에 변심이라고 비난하는가? 내가 둘째로 든 비교로 우리는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어린이들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청년에 비교한다(갈 4:1이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나이에 맞도록 초등교육에 국한하시고, 우리는 더 엄격하고 이를테면 더 어른다운 규율로 훈련하신 것이 어디가 변칙이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대에 가르치시고, 자기 이름에 대한 결과는 처음에 명령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계속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나는 것이다. 외면적인 형식과 방법을 바꾸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가지로 다르며 또 변하는 인간의 능력에 알맞도록 행동하신다.

14.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인간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런 다양성이 생겼는가? 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강림 후와 같이 처음에도 어떤 상징 없이 분명한 말씀으로 영생을 계시하실 수 없었는가? 맨 처음에 몇 가지 명백한 성례전으로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며, 성령을 주시며, 은총을 전 세계에 보급시키실 수는 없었느냐고, 이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고 너무 늦게 창조하셨다느니, 겨울과 여름, 낮과 밤이 교대하게 만드셨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싸우려는 것과 같은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무슨 까닭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를 때가 많더라도,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을 하나님이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동물의 희생 제물과 레위 족속의 사제 직분에 딸린 여러 가지 부속물들을 하나님이 옛날에 기뻐하셨는데, 지금은 멸시하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대체로 이런 외형적이며 덧없는 것들이 하나님에게 즐거움이나 어떤 감동을 주었다는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889)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정하신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청년기에 쓰는 최선의 치료법과, 같은 사람의 노년기에 쓰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전에 기뻐하던 치료법을 버렸다고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는 치료에 전념하면서 연령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가 장차 오시리라고 선포하는 데 필요했던 표징과, 그가 계시된 지금 그를 나타내는 표징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강림 후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백성 사이에 더욱 널리 퍼져 나갔고, 성령의 은총은 이전보다 더욱 풍부하게 쏟아졌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과 뜻으로 은혜를 자유로 분배하시며, 원하시는 민족들에게 광명을 주시는 것을 누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려는가? 원하시는 곳에서 말씀 전파를 일으키시며, 원하시는 방법과 정도로 자기의 교훈이 전진하며 성공하게 하시며,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에 대한 지식을 몇 세대 동안 빼앗으시며, 자기의 자비에 따라 다시 원하시는 대로 그 지식을 돌려주시는 것을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려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너무도 부드러운 중상이라고 본다. 단순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그들이 하나님의 의나 성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경건한 자들이 이런 중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 12 장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중보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 되셔야 한 이유들. 1-3)

1.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공간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중보자가 될 분이 동시에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것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보통 말하듯이) 단순한, 즉,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인간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 결정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최선의 길을 결정하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리워진 구름과 같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해 버렸기 때문에(참조, 사 59:2),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면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아담의 후손 중의 하나인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조상과 같이 모두 하나님을 보면 공포에 떨었다(창 3:8). 천사 중의 하나였는가? 그들도 우두머리가 있어야 했으며,890) 그의 연줄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견고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참조, 엡 1:22, 골 2:10).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우리에게 없으므로 존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림하시지 않았다면 사태는 확실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며(사 7:14, 마 1:23),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기에는 친근감이 충분히 가깝지 못하며 친밀함이 충분히 견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 사이에는 그만큼 큰 차이점이 있다. 사람이 본래대로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처지는 중보 없이 하나님에게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현상은 어떠한가? 치명적인 타락으로 죽음과 지옥에 떨어졌고, 무수한 오점과 부패로 더럽혔고 모든 저주로 압도되었다. 그러면 바울이 중보를 설명하면서, 그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지적하는 것은 훌륭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사도는 "하나님이신"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이 "사람"이라는 말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적당한 순간에 가장 적당한 대책을 쓰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친근하게 우리 사이에 두셨다. 그러므로 중보를 어디서 찾을까, 어느 길로 그에게 가야 하는가 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없도록, 성령께서는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참으로, 우리와 같은 육신이시므로 우리와 접촉해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분명히 성령이 여기서 가르치시는 뜻은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된 것과 같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891)

2. 중보자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인간이어야만 한다

이 점은 중보자가 성취하려고 한 것이 비상한 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의 임무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킴으로서 사람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지옥의 상속자들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시지 않았다면, 또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것을 취해서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본질상 그에게 속한 것을 은총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누가 중보의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증을 신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아들이 우리의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살로 자기의 살을, 우리의 뼈로 자기의 뼈를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엡 5:29-31, 창 2:23-24). 그는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도 되시려고, 쾌히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저 거룩한 형제 관계를 친히 칭찬하신다(요 20:17). 이와 같이 우리는 천국 상속의 확약을 받았다.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것인데, 그가 우리를 자기의 형제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형제면 또한 그와 함께 후사기 때문이다"(롬 8:17 의역)

똑 같은 이유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의 임무는 죽음을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의 자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세상과 공중(空中)의 권세들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보다 더 높은 권능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생명이나 의나 하늘 주권과 권위는 하나님에게만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로 정하셨을 때에,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 친히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참조, 롬 5:8).

3. 오직 참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해서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두 번째로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다. 즉, 불복종으로 멸망한 사람을 바로 고쳐서 불복종을 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행하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께서는 참 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으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으로서는 죽음을 느낄 수 없으며, 인간만으로서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겠으므로, 인성과 신성을 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는 데는 약한 인성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른 본성의 권능으로 죽음과 싸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박탈하는 자들은 그의 존엄성과 영광을 감축하거나, 그의 인애를 희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약화하며 전복시키므로, 인간에게도 적지 않은 해를 준다. 믿음은 이 토대 위에서 안정하지 않으면 굳게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대망했던 구속자는 하나님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분, 즉,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 이 일은 경건자들에게 혜택을 더한다. 그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무수한 신탁이 환영한 그 기름부음을 받은 분임을 더욱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방금 설명한 점을 특히 지지해야 한다. 즉, 우리와 그리스도가 본성이 같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한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가 죽음과 죄를 모두 정복하셔서 그 승리와 개선(凱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받은 육신을 제물로 바치셔서 그 대속 행위로 우리의 죄를 씻어 버리시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에 대답한다. 4-7)

4. 그리스도의 성육신되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다

이런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할 때에 필요한 근면하고 주도면밀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경박한 자나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자를 매혹하는 허망한 사변을 쉽게 버릴 것이다. 이런 사변의 예를 들면, 인류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인간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892) 창조된 처음의 질서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천사와 사람의 우두머리로 그들 위에 위치하셨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그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려고 육신을 입으셨다고 선포하므로, 다른 이유나 다른 목적을 상상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무슨 까닭에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약속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안다. 타락한 세계를 재건하며 멸망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표현되었으며, 신자들의 죄가 대속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신 후에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희망을 주려고 했다. 율법이 아직 발표되지 않은 때에도, 어느 시대에나 피 흘림 없이 중보가 약속된 일이 없으므로, 그는 인류의 불결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임명되셨다고 우리는 확실히 추론한다. 피를 흘리는 것은 속죄의 증표이기 때문이다(참조, 히 9:22).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를 선포할 때에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리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대한 모든 증언 가운데서 이사야의 유명한 말을 들면 충분할 것이다. 백성의 죄악을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손에 맞으며 평화의 징계가 그에게 내리며(사 53:4-5),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히 9:11-12), 그가 맞은 채찍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되며, 모두 양같이 그릇 행하여 흩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혀 모든 사람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리라고 한다(사 53:5-6). 가련한 죄인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자신을 임명하셨다고 하므로, 이 범위를 넘는 사람은 어리석은 호기심에 너무도 깊이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가 강림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으로써 우리를 모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증언을 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고 가르치기 전에 인류의 반역을 말한다(요 1:9-11).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직책에 대해서 선언하신 것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리라"(요 5: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마 18:1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마 9:12). 모든 구절을 인용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불러 이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다. 확실히,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명예로운 제사장직은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임명되기 때문이다(히 5:1). 또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아니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위해서(고후 5:19)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성결이 그에게 드리는 모든 칭호를 잃으실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즉,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는(롬 8:3-4) 바울의 발언도 소멸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셨을 때에, 이 거울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무한한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참조, 딛 2:11)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허사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취하기로 결심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이 명령을 받으신 유일한 이유로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아버지의 진노를 푸는 희생이 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또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 15,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 또 다른 구절에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23절과 융합)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육신을 취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리신다. 즉, 우리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희생과 속죄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같은 의미에서 사가랴도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눅 1:79)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오셨다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는 알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하듯이,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며"(골 2:3), 그를 떠나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울은 자랑한다(고전 2:2).

5.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을 것인가?

혹 누가 항의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정죄된 인간들을 구속하셨지만, 구원을 받아 안전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람의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이 모든 일은 방해 않는다고893)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고 성령이 선언하시므로,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본성의 동참자가 되셨는가를 더 탐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가 속죄를 얻는 대가로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그리스도에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할 뿐 아니라, 예정의 고원한 신비에까지 솟아올라가서, 인간성의 모든 방자함과 경망한 호기심을 적절한 말로 억제한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며"(엡 1:4-5),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받을 만한 자로 만드셨으며(엡 1:6), "우리는 그리스도 잔에서‥‥‥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고 한다(엡 1:7). 여기서는 확실히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모든 시대 이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 때에 하나님이 인류의 불행을 고쳐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894) 가령 우리의 대적자들이 다시 항의해서, 하나님의 이 계획은 그가 예견하신 인류의 타락에 좌우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내가 할 말은 이것이면 아주 충분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비밀한 결정으로 정하신 일 이상의 일을 물으며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불경건하고 외람된 생각으로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를 만들려고 덤빈다는 것이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직책을 논한 다음에, 에베소 신자들이 깨닫게 하는 영을 받아(엡 3:14-17)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즉, "모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엡 3:18-19) 올바른 기도를 드린다. 그는 마치 우리 마음의 주위에 계획적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리스도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화해의 은총에서 조금이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쁘다‥‥‥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임하셨다"라는 바울의 증언에 따라(딤전 1:15) 나는 기꺼이 이 일에 찬성한다. 또 같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지금 복음에서 계시된 은총은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라고 가르치므로(딤후 1:9) 나는 끝까지 항상 이 은총 안에 머무를 결심이다.

이와 같은 온건한 태도에 대해서 오시안더(Osiander)는 부당한 항의를 한다. 이전에 몇 사람이895) 간단히 언급한 이 문제를 그가 현대에 새로 일으킨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그는 외람되다고 비난하며, 성경에 이 공상을 반박하는 증언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는다. 바울은 이런 도착된 호기심에 굴레를 씌우지 않았던가!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속에 대해서 말한 후에 곧 우리에게 명령하기를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한다(딛 3:9). 어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미련한 생각으로 재치를 보이고자, 하나님의 아들은 나귀의 본성을 취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까지 일으킨다.896)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 해괴한 짓을 가증한 것으로 보아 타기하건만, 오시안더는 그것을 특별히 반박한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구실로 변명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귀중하거나 알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은 바울은(고전 2:2) 나귀가 구주라고 인정했는가! 또 그는 다른 곳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일하는 머리로 임명되었다고 전파하니(엡 1:10, 22), 속죄 사역을 위임받지 않은 어떤 다른 머리를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6.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

그러나 오시안더가 자랑하는 원칙은 전혀 보잘 것 없는 너절한 것이다. 사람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본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며,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히기로 이미 결정하신 이와 사람이 같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는 추론하기를, 아담이 시초의 올바른 상태에서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이것이 얼마나 너절한 편견인가를 자연히 이해한다. 또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자기가 처음으로 알아냈노라고 생각한다. 아담을 장식한 비상한 재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그의 안에 거하신 것이라고 한다.

아담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한(이것은 진정하고 가장 완전한 존엄성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우수성의 표지들을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점에서만 이 형상을 찾아야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인정한다. 따라서 아담에게 새겨진 우수성은 모두 그가 독생자를 통해서 창조주의 영광에 접근했다는 사실에서 왔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7),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창조주 자신의 영광이 보이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독생자의 덕택으로 이렇게 높은 영예에까지 승진되었다. 그러나 나는 첨가한다. 아들 자신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공통한 머리였다고. 이와 같이, 아담에게 부여된 존엄성은 천사들도 가졌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시 82:6), 그들이 그 아버지와 같은 어떤 성질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이 천사와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그 두 본성에서 나타나는 것을 아버지께서 원하셨다면, 오시안더가 천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었으므로 사람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하는 것은 무지해서 지껄이는 말이다. 천사들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면 항상 하나님을 직접 뷜 수 없을 것이다. 또 바울은 같은 뜻으로, 사람들은 천사들과 합하여 한 머리 아래서 서로 밀착해야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워진다고 가르친다(골 3:10). 요컨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늘에 영접될 때에 천사들의 형태를 취할 것이며(마 22:30),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형상의 처음 모형은 사람인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는897) 오시안더의 추론을 허락한다면, 누구든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이 천사들에게도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7. 오시안더에 대한 요점 하나하나에 대한 논박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아들의 성육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결정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오시안더의 걱정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담이 끝까지 순전한 상태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나 천사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걱정도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가 속죄주로서가 아니라 처음 사람으로서 태어나시기로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특권적 지위에서 떨어졌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멸망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우연이 없었다면 태어나시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그가 아담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죄를 제하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데(히 4:15), 오시안더는 무슨 까닭에 이 일이 무서워 떠는 것인가? 누가도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담의 후손이라고 인정한다(눅 3:38). 또 아담의 후손들을 그리스도가 멸망에서 구출하도록 그의 인간 상태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고전 15:47) 부르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다. 그리스도가 창조 이전에 오셨다면 그는 첫째 아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시안더는 분별없이 선언한다. 사람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형으로 삼아 인류가 창조된 것이라고.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담의 타락 사건을 자연을 회복할 필요성의 원인이된 이 타락 사건을 사람의 처음 창조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회복 사이에 둔다.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려고 나셨다는 결론이 된다. 그런데 오시안더는 서툴고 부적당한 추리로 아담이 그대로 근직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몸과 영혼에서 빛났을 것이라고. 이 형상의 광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만유의 머리시며 만유의 수위(首位)를 점유하신다는 것이 항상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시안더가 퍼뜨리는 무익한 궤변을 배제한다. 아담의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이 아들에게 육신을 입히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면, 천사들에게는 이 두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런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일에 오시안더는 경솔하게 달라붙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천사들에 대한 수위권이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그를 지도자로서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오시안더는 주장한다. 그러나 옳은 추리는 바울의 말에서 곧 나온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므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골 1:15). 이것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창조물 중의 하나로 계산되셔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었던 그 완전 상태의 세계는 그 이외에 다른 기원(起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되신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였다(골 1:18). 사도는 한 짧은 구절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⑴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가 천사들을 지배하시게 되었으며(골 1:16), ⑵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는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참조, 골 1:14).

오시안더의 다른 주장도 역시 그의 무지를 폭로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인간의 육신을 입으시지 않았더라도 천사들과 사람들을 모아 자기의 하늘 영광과 생명을 나누게 하며, 스스로 만물 위에 수위권을 행사하셨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성립하지 못하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오시안더를 항상 속이는 또는 그가 스스로 속는 그릇된 원칙이 있다. 곧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머리가 없었으리라는898) 것이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지도를 즐겁게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무슨 까닭에 자기의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시지 못하겠는가! 또 자기의 영의 비밀한 힘으로 자기 몸같이 사람들에게도 생명과 양식을 주어, 드디어 그들을 하늘에 모으며, 천사들과 똑같은 생명을 즐기게 하실 수 없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논박한 이 너절한 생각들을 오시안더는 가장 확고한 말씀으로 여긴다! 자기의 사변에 도취되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리석게 찬양한다. 후에 그는 훨씬 확고한 증명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아담이 자기 처를 보았을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말을(창 2:23) 그는 "아담의 예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이것이 예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가 같은 말을 하나님에게 돌리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말씀에는 모두 어떤 예언이 포함되었다는 말인가! 율법의 교훈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한즉, 오시안더는 그 교훈들에서 예언들을 찾아보라. 그뿐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인 의미에 자기를 국한하셨다면, 그것은 땅에 붙은 유치한 생각이었을 것이다(마 19:4-6).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문제는 교회와 자기와의 신비적 결합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성실뿐이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고 하며, 해소할 수 없는 이 결합을 아무도 이혼으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만일 오시안더가 이 단순한 뜻을 싫어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더 미묘하게 해석해서 제자들을 신비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그가 비난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바울은 오시안더의 망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의 살이라고 말하고(엡 5:30-31) 즉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엡 5:32). 아담이 이런 말을 한 뜻을 말하려 하지 않고, 결혼을 한 비유로 삼아,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가 되게 하는 그 거룩한 결합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말 자체에 나타나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고 하면서, 시정하는 의미에서 결혼의 원칙과 그리스도 대 교회의 영적 결합과를 구별한다. 이와 같이, 이 망령된 주장은 곧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너절한 생각들을 이 이상 더 상대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이 아주 간단한 논박으로 그 모든 것의 허무성이 폭로되겠기 때문이다. 다음의 엄숙한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양식을 넉넉히 주고도 남는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제 13 장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진정한 본질을 갖추었다

(고대 이단설에 관련해서 칼빈은 멘노 시몬스에게 대답함. 1-2)

1.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임에 대한 증명함

그리스도의 신성은 분명하고 확고한 증언에 의해서 다른 곳에서 증명했다.899) 따라서 내 생각이 잘못이 아니라면, 여기서 다시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보의 직책을 완수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의 인간성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옛날에 마니교도들과 마르키온파는 부정했다.900) 마르키온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지 겉모양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상했고, 마니교도는 그리스도는 천상적 육신을 받으셨다고 공상했다. 그러나 이 양자를 반박하는 강력한 성구가 많다. 왜냐하면 천상적인 후손이나 유령 같은 사람을 인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을 인해서 복이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것이다(창 12:3, 17:2, 7, 18:18, 22:18, 26:4). 또 영원한 보좌는 공중(空中) 사람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과 그의 육신의 소생에게 약속되었다(시 45:6, 132:11). 따라서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그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마 1:1). 이것은 공중에서 창조되었으나 처녀의 태중에서 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바울이 해석한 대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기" 때문이다(롬 1:3). 같은 사도가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자손이라고 가르쳤다(롬 9:5). 그렇기 때문에 주 자신도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자주 자기를 인자(人子)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자기가 참으로 사람의 씨에서 난 사람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시려는 뜻이다. 성령이 이 명백한 사실을 자주 선언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쓰며 아주 부지런히 또 단순하게 표현하셨는데, 이 일을 감히 기만으로 더럽히는 파렴치한 자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더욱이 증언을 더 많이 수집하려면 그것은 곧 얻을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고 하는 바울의 발언이다. 그리스도가 굶주림과 목마름과 추위를 느끼며 그밖에 우리의 본성에 있는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셨다는 것은 수많은 증거가 있다. 이 많은 증언 중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진정한 신념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그는 천사들에 관심이 없어서 그들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고(히 2:16),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으며, 이와 같이 "헐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시며"(히 2:14), 또, 우리는 그와 인연이 있는 덕택으로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르신다(참조, 히 2:11). 또, "그는‥‥‥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였도다. 이는‥‥‥자비하고 충성된 중보가 되려 하심이라"(히 2:17 의역),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15). 기타 무수한 구절들이있다. 우리가 조금 앞에서901) 언급한 것도 이 점에 해당한다. 즉, 세상 죄는 우리의 육신을 입은 이가 대속해야 했다고, 바울이 분명히 단언한다(롬 8:3) 확실히 이런 근거에서, 아버지가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은 모두 우리 것이 된다. 그리스도는 머리시며,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로 자란다(엡 4:16). 참으로,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기 위하여"(요 1:16)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그(그리스도)에게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요 3:34)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우연한 선물에 의해서 그 본질이 더 풍부하게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어리석은 모순된 이야기일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자신이 다른 곳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신가(요 17:19).

2.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에 반대하는 자들을 논박함

반대자들은 자기의 오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구절을 제시하지만, 그들은 그 구절들을 심히 곡해한다. 그리고 내가 이미 입증한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들은 너절한 궤변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빌 2:7-8) 바울이 다른 데서 하는 말을 근거로 삼아, 마르키온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어떤 환상(幻像)을 입으셨다고 공상한다. 그러나 그는 바울이 말하는 의도를 전혀 무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몸을 가지셨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는 자기의 신성을 빛내셔도 당연했을 것이지만, 일개의 미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으로서 나타나셨다고 가르치려 한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받아 우리에게 복종을 권면하려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세상에 직접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수도 있었지만,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자진해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으며, 이런 비천한 처지에 만족해서 자기의 신성이 육신의 휘장으로 가리우는 것을 허락하셨다(참조, 빌 2:5-7).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무엇이었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처신하셨는가를 가르친다. 문맥 전체를 보아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워 참으로 인간적인 본성을 취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결론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은(빌 2:8) 잠시 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이 비치지 않고 사람의 형상만이 낮고 천한 처지로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은(벧전 3:18),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성을 쓰고 연약하셨던 것이 아니라면 무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설명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이 약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단언한다(고후 13:4). 그리스도는 자기를 스스로 낮추신 후에 새로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는 명백한 말씀이 있다. 그가 높임을 받으셨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몸과 영혼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이 해당될 수 없다.

마니는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난 둘째 아담이며 하늘에 속한다"고 한 말을(고전 15:47-48)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의 몸은 공기(空氣)의 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하늘에 속한 본질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으셔서 우리를 살리는 그 영적인 힘을 말한다. 그런데 이미 본 바와 같이, 베드로와 바울은 그 힘을 그리스도의 육신과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한 정통파 교리는 도리어 이 구절에서 큰 도움을 받는다. 만일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주장은,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요,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시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바울의 강렬한 주장은(고전 15:12-20 요약) 무의미할 것이다. 고대의 마니교도들과 현대의 그 제자들이 어떤 궤변으로(이 증명을) 회피하려고 노력 하더라도,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무의미한 말을 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약속되셨다는 의미에서만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한902) 이것은 비열한 도피다. 히브리말로 참사람을 "인자"라고 하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모국어의 이 용법을 보존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또 "아담의 아들"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해석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것 없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시편 제8편의 말씀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眷顧)하시나이까"(시 8:4, 히 2: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간성을 표현한다. 그는 죽을 운명의 부친에게서 직접 나신 것이 아니지만, 그의 근본은 아담에게서 유래했다. 그렇지 많다면 내가 이미 인용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그 자녀들을 자기에게 모아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히 2:14)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똑같은 본성을 나눈 동지와 동참자라고 분명히 선언한다. 이런 의미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고도 한다(히 2:11상). 이 말씀에 곧 이어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고 하므로(히 2:11하), 문맥으로 보아 그 뜻은 본성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 신자들을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했으니, 이렇게 존귀한 사람들을 부끄러워할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은총으로 낮고 부끄러운 인간들과 하나가 되시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고 한다(히 2:11하). 그뿐 아니라, 그렇다면 불경건한 자들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리라는 그들의 항의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육에서 나지 않고(참조, 요 1:13), 믿음을 통하여 영에서 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따라서 육신만으로는 형제 관계가 유대가 되지 못한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영예를 사도는 신자들에게 국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이 같은 원천에서 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할 때에,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사이에 끼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맏아들"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서투른 논쟁을 일으키려 한다. "형제 중의 맏아들"이 되시려면(롬 8:29) 그리스도는 맨 처음에 아담에게서 나셨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연령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예의 정도와 숭고한 권능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고(히 2:16)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하며, 그가 인류에게 은총을 베푸셨다는 의미로 이렇게 지껄이지만, 이것은 더욱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려 주신 영예를 더욱 높이려고 우리와 천사를 비교하며, 우리를 천사들보나 더 귀히 여기셨다고 한다. 모세의 증언을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는 증언을(창 3:15)신중히 고려한다면, 이 논쟁은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이 발언은 그리스도뿐 아니라, 인류전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를 얻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말씀으로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이기리라고 선언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서 나셨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여자가 절망에 압도되지 않도록 희망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혈통과 참된 인간성. 3-4)

3.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혈통 : 불합리한 생각을 폭로함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와 다윗 몸의 소생이라고 하는 증언들을 우리의 논적들이 풍유라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사악한 짓이다. "씨"라는 말을 풍유로 쓴 것이었다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구속자가 여럿이 아니라 하나뿐이라고, 즉, 그리스도뿐이라고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했을 때에(갈 3:16),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식으로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가 미리 약속되었다가 드디어 자기의 때가 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롬 1:3). 바울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부르기 전에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제 9장에서는 그를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확언한다(롬 9:5). 그런데, 만일 그가 참으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나신 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그 태중의 아이"라고(눅 1:42) 하는 것은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네 몸의 소생이 너의 보좌에 길이 있으리라"고 한 약속은(참조, 시 132:11 의역 ; 삼하 7:12 ; 행 2:30) 무슨 뜻인가?

그런데 그들은 마태가 기록한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 무용한 이론으로 궤변을 떨고 있다. 마태는 마리아의 조상들을 기록하지 않고 요셉의 선조를 기록했다(마 1:16). 그러나 그는 당시에 잘 알려진 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즉, 마리아가 요셉과 같은 가문에서 났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밝히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가는 이 점을 더욱 역설하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은 전인류에 공통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구주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사람의 선조인 아담에게서 나셨다고 한다(눅 3:38). 족보를 볼 때에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점에서만 다윗의 후손이심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새 마르키온파는 자기들의 오류를 감추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는 무에서 육체를 취하셨다는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자에게는 "씨"가 없다고903) 거만한 주장을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연의 원칙을 전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며, 그들이 제출하는 이유도 허무한 것이어서 쉽게 논박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철학과 의학에 속한 문제들을 논하지 않고, 그들이 성경에서 끌어 오는 항의만을 논박하면 충분할 것이다. 아론과 여호야다가 유다 족속에서 처를 취하였은즉(출 6:23 ; 대하 22:11), 만일 여자에게 생산하는 씨가 있다면 지파간의 차이에 혼란이 생겼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회 질서에 관해서 혈통을 따질 때에는 남자 측의 혈통을 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이 남성의 우선적 지위는 여자의 씨가 생식 행동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해결책은 모든 족보에 적용된다. 성경에서 사람의 이름을 열거할 때에는 남자들의 이름만을 기록하는 일이 많다. 그러면 우리는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것인가? 여자는 "남자" 가운데 든다는 것을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다. 성은 항상 남자의 성을 따르기 때문에 여자는 남편의 아이를 낳는다고 말한다. 자녀의 귀천은 부친의 신분에 따라 정한다는 사실에서 남성의 우위(優位)가 인정되지만, 노예 제도에서는 그와 반대로 "후손은 태(胎)를 따른다"고 법률가들은 말한다.904) 이것을 보면 어머니의 씨에서 자식이 난다고 추론해야 될 것이다. 어머니를 "생산자"라고905) 하는 것이 옛날부터 모든 민족에 공통한 말이다. 이것은 외숙과 질녀의 결혼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법과도 일치한다. 이런 법이 옳은 것은 근친(近親) 결혼이 되겠기 때문이다. 또 아버지만 다르면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남매가 결혼하는 것은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 수동적인 힘을 돌린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도 여자에 대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도 여자가 만들었다고 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났다고 하기 때문이다(갈 4:4). 그러나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염치도 버리고 방자하게 묻는다. 그리스도는 처녀의 경도씨에서 만들어졌다는 뜻이냐고.906) 나는 그가 어머니의 피와 결합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것이며, 그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에서 곧 추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하므로 그는 마리아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라고.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났다고 할 때에(마 1:5) 유사한 생산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태는 여기서 처녀 마리아를 그리스도가 통과한 수로(水路)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녀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에서 나셨다고 말함으로써 이 놀라운 생산방법과 보통 방법을 구별한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서 나며, 솔로몬이 다윗에게서 나며, 요셉이 야곱에게서 난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나셨다고 한다. 마태가 하는 말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것을 증명할 생각으로, 마태는 그리스도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이 한 가지 일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마리아가 요셉의 친척(이고 따라서 다윗의 족속)907) 이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인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4. 참된 인간이나 죄가 없으시고, 참된 인간인 동시에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를 누르려 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유치한 훼방이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후손이 된다면, 아담의 후손은 예외 없이 죄 아래 있다고 하는 일반 원칙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의 글에 있는 비교는 이 곤란을 곧 제거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그와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쳤느니라"고한다(롬 5:12,18, 15 의역). 이와 일치하는 다른 비교도 있다. "첫째 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땅에 속한 자연인(人)이요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났으니 천상적이라"(고전 15:47 의역).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셨다고, 같은 뜻을 가르친다(롬 8:3,4). 이와 같이 사도는 그리스도와 보통 인간을 훌륭히 구별하고,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시지만 허물과 부패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유치하게 지껄인다.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고 성령의 비밀한 역사로 마리아의 씨에서 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불결하지 않고 남자의 씨만 불결한 것이라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나셨다는 것뿐이 아니라, 그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어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에 있었던 생산과 같은 순결하고 오염이 없는 생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든지 확실한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있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촉구할 때에는 그의 참인간성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순결하시다고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도(19절) 신성에 대해서 하는 말씀일 수 없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전염이 없었다고 하지만, 아담의 씨에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식 그 자체는 불결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고, 아담의 타락에서 생긴 우발(偶發)적인 성질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완전성을 회복할 사명을 띤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인 부패를 면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불합리하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지적하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는 지상적인 신체라는 좁은 감옥 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철면피다! 무한한 본질을 가진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결합하여 한 인격이 되셨더라도, 우리는 그가 그 속에 갇혀 계셨다고는 공상하지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일이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지만, 하늘을 떠나시지 않고서 자의(自意)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시에, 맨 처음부터 하신 것과 똑같이, 끊임없이 우주에 편만하셨다는 것이다.

제 14 장  중보자의 두 본질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적 본질과 신적 본질에 대한 설명. 1-3)

1. 이중성과 통일성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는 발언을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말씀이 육신과 혼합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말씀이 그 거처할 성전으로서 처녀의 태중을 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기는 본질의 혼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위격(Person)의 통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결합·통일되어 두 본성은 각각 그 특이성에 손상을 받지 않은 대로 결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이루었다고908) 우리는 주장한다.

만약 위대한 이 신비와 유사한 것을 인간사에서 찾을 수 있다면, 가장 적절한 것은 두 가지 본질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 본질들은 각각의 특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리만큼 다른 본질과 섞인 것이 아니다. 영혼은 신체가 아니며, 신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은 영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신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당되지 않으며, 또 신체에 대해서 하는 말이 영혼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 또 사람 전체에 대해서 하는 말을 각각 영혼이나 신체에 대해서 한다면 반드시 부적당하게 된다. 끝으로, 마음의909) 특색을 신체에, 또 신체의 특색을 영혼에 옮기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들로 된 것은 한 사람이요 여러 사람이 아니다. 이런 표현들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된 한 인격(person)이 있으며, 이 인격의 기반으로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질이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910) 것을 의미한다. 성경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에는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만 말해야 할 일을, 또 어떤 때에는 그의 신성에만 속하는 일을, 또어떤 때에는 두 가지에 속하고 어느 한 쪽에만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돌린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 두 가지의 통일을 열심히 주장해서 드디어 양성을 서로 교환하는 때도 있다. 이런 표현법을 고대 저술가들은 "속성(屬性)의 상통(相通)"이라고911) 불렀다.

2. 신성과 인성과의 상호 관계

이 여러 가지 사실들은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많은 어귀에 의해서 사람의 조작이 아닌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설득력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 8:58)고 하신 말씀은 그의 인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 구절을 곡해하는 사람들의 비꼬인 논법을 나는 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계획에서와 경건자들의 마음속에서 구속자로서 이미 예지되었으므로, 영원 전에 계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912)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가 나타나신 때와 자기의 영원한 존재를 분명히 구별하시며, 자기의 권위는 아브라함의 권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고 명백히 높이시므로, 여기서는 자기의 신성에 고유한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선언한다(골 1:15, 17). 또 주께서는 창세전에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가졌다고 하시며(요 17:5),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신다고 하신다(요 5:17). 이런 속성들은 인간에게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종"이라고 하며(사 42:1, 기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며(눅 2:52),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요 8:50), "최후의 날을 모르며"(막 13:32 ; 마 24:36),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요 14:10), "그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며"(요 6:38),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졌다고 한다(눅 24:39). 이 모든 말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신 한, 어떤 것이든 자랄 수 없으며,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 하신다. 아무 일도 그에게서 숨길 수 없다. 그는 자기의 뜻으로 결정하신 대로 모든 일을 하시며, 사람이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런 속성들을 자기의 인성에만 돌리지 않고, 중보자로서의 위격과 조화되는 것으로 인정하며 자기의 속성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고유성 또는 특성의 상통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으며"(행 20:28),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고전 2:8) 말한 것과 같다. 요한도 같은 뜻으로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졌다"고 한다(요일 1:1). 물론 하나님은 피가 없으며, 고난 받지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그가 인간성으로서 하신 일을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유가 없지 않지만, 적합한 일은 아니다. 비슷한 예를 들면,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가르친다(요일 3:16). 따라서 여기서도 인성에 속한 성질을 신성과 나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아직 지상에 계시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요 3:13) 말씀하셨을 때에, 물론 육신을 쓰고 계신 사람이었으므로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사람이었으므로, 신인 양성의 통일을 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에 주신 것이다.

3. 중보자의 위격의 통일성

그러나 두 본성을 동시에 포함한 구절들이 요한복음에 많고, 그런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참본질을 가장 분명히 나타낸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신성이나 인성만을 말하지 않고 양성을 일시에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며(요 1:29), 원하는 사람을 살리며, 의와 성결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임명되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게 되셨다(요 5:21-23). 마침내 그를 "세상의 빛"이요(요 9:5, 8:12), "선한 목자"요, "유일한 문"이며(요 10:11,9), "참포도나무"라고 한다(요 15:1).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특권들을 받고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이 특권들을 가지고 계셨지만, 같은 모양이나 방법이 아니었으며, 또 인간에 불과한 인간에게는 이 특권들이 부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심판이 있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는(고전 15:24 의역) 바울의 말도 이와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7) 존엄성의 광채를 제쳐놓고 낮은 육신 밑에 숨어 계셨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순종하셨다(참조, 빌 2:8). 이 순종 생활을 마치신 후에 "드디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으며"(히 2:9) 최고의 주권자로 높아져서 그의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되었다(빌 2:10).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영광과 이름과 면류관,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바쳐,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앞에 계시게"(고전 15:28)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권능과 주권을 주신 것은 그의 손을 거쳐 아버지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참조, 막 16:19 ; 롬 8:34).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직접 뵙고 즐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옛날 교부들이 중보의 위격을 무시하며, 요한복음에 있는 가르침의 거의 대부분에 대해서 그 참뜻을 모호하게 만들며, 여러 가지 올무에 스스로 걸려든 그 오류를 용서할 수 없다.913) 그러면 올바른 해석의 열쇠는, 중보의 직책에 해당하는 일들은 신성이나 인성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914) 그러므로 세계의 심판주로 임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지배하실 것이며, 연약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우리를 아버지와 결합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 영광에 참가하여 하나님을 그 계신 그대로 뵙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는 중보의 직책을 다하셨으므로 아버지의 대사됨을 그만 두시고 천지창조 이전에 누리시던 그 영광으로 만족하실 것이다. 그리고 ""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 있는 지위를 표시할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의 위격에만 속한다. 바울의 발언은 이와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즉, 우리가 그의 신직 존엄성을 대면하여 보게 될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주로서의 권능을 그에게 맡기셨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주권을 아버지에게 돌려서, 그의 존엄성을 감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한층 빛나게 하실 것이다. 또 그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이 지금은 아직 휘장에 가리워 있지만, 그 때에는 스스로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와 세르베투스의 오류들에 대한 비난. 4-8)

4. 두 본질은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이 견해를 지혜롭게 적용한다면, 아주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나 완전히 무식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런 종류의 표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에 꼭 적합하지 않은 말이라고 해서 놀라리만큼 고통을 당한다. 이것은 이 표현들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중보자로저의 그의 직분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착한 해설자가 이 위대한 신비들을 그에 합당한 경건한 태도로 검토할 때에는, 이 여러 가지 발언들이 분명히 또 아름답게 서로 일치한다.915) 그렇지만 저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뒤섞어 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속성들을 붙잡고 그의 신성을 제거하며, 반대로 신성의 속성을 붙잡고 인성을 제거한다.916) 또 양성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해서 어느 한 쪽에만 적용되지 않는 속성들을 붙잡고 두 본성을 모두 제거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아니며, 또 사람이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며, 또 동시에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시므로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도 아니라고 쟁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두 성품이 통일되었으나 혼합되지 않은 것이므로, 인성 때문이 아니라 인성에 의해서까지도 우리의 주시며 하나님의 참아들이시다.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배척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별하지 않고 분리시키고자 해서 이중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성경은 분명한 목소리로 이 생각에 반대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처녀에게서 나신 이에게 적용하며(눅 1:32), 그 처녀 동정녀를 "우리 주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눅 1:43). 우리는 유티케스의 미친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격의 통일성을 증명할 생각으로 어느 한 본성을 파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증언을 많이 인용했고 그밖에도 증언이 많으므로, 가장 투쟁적인 사람이라도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조금 뒤에917) 나는 그들의 공상을 더 효과적으로 분쇄할 증언들을 첨가하겠기에 지금은 한 구절만 인용하면 충분할 것이다. 즉, 만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 몸과 다른 신성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르시지 않았을 것이다(요 2:19). 따라서 에베소 회의가 네스토리우스를 비난한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후에 콘스탄티노플과 칼케돈 회의에서 유니케스를 비난한 것도 정당하다.918) 그리스도의 두 성품을 혼합하는 것이나 분리하는 것은 모두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현대에도 그들에게 못지않게 흉악한 괴물 미가엘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본질과 영과 육과 그리고 세 가지 창조되지 않은 원소로 혼성(混成)된 허구(虛構)라고 주장했다.919) 우선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의 태중에서 났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 그의 궤변은 다음과 같은 방향을 취한다. 즉, 두 본성의 구별을 없애 버리고서는 그리스도는 약간의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의 혼합체이지, 하나님이며 또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논리 전체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림자 같은 형상들만이 있었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았다. 그리고 아들이 되는 영예를 받도록 예정되었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했을 때에 처음으로 그 그림자 같은 형상들의 진상 또는 효력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정녀에게서 난 중보자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며 또 그 이름을 가지는 존엄성을 받으시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거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내린 정의는 확고부동하다. 즉, 모든 시대 이전에920) 아버지에게서 난 말씀이 인성을 취하여 위격(hypostasis)의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은 "위격의 통일"을 정의해서 두 본성이 한 위격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네스토리우스의 망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 안에 거하였으며, 동시에 인간이 아니었다고 공상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말씀은 육신을 입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고 말하는 우리에 대해서, 세르베투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둘로 만든다고 비난한다.921)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할 뿐이다. 그가 사람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이셨다면, 인간이 되셨다고 해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지만, 영원한 생산에 의해서 항상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계셨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도 불합리한 주장이 아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이 점을 암시한다.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마치 율법아래에서 희미했던 "아들"이라는 이름이 앞으로 도처에서 분명히 알려지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도 같은 생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자유로 또 자신 있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다(롬 8:14-15 ; 갈 4:6). 옛날 족장들도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이 권리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에 나타나신 후에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알려졌다. 따라서 바울은 이 특권을 그리스도의 나라에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확고부동하게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와 관계없이 천사들이나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신 일이 없으며, 특히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값없이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시는 것이라고.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부자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세르베투스가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여기서는 속죄를 짐승의 피로 표시하던 것과 같은 상징이 문제가 아니다. 양자로 정하시는 일이 저 머리를 토대로 삼지 않았다면, 그들은 실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체들에게 공통된 것을 머리에 주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 나는 한 걸음 더 나가겠다. 성경에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데(시 82:6), 그들의 높은 위엄은 장차 올 구속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지위상 그들 위에 계셔야 했다. 나는 이 발언을 간단히 반복해서 인류에게도 적용하겠다. 창조 당시에 천사들과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공통된 아버지가 되시도록 지어졌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항상 머리가 되시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 만물의 으뜸이 된다고(참조, 골 1:15이하) 한 바울의 발언이 옳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결론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6.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들 되심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부터 시작했다면, 그는 인성에 관해서도 아들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 및 그와 같이 미친 사람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육신을 떠나서는 이 이름을 받을 수 없었겠기 때문이라고 한다.922) 그러면 그리스도는 두 본성에 의해서 또 두 본성에 관해서 아들이신지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들은 이렇게 지껄이지만 바울은 아주 다르게 가르친다. 인간의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를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양자가 되어, 또 은총에 의해서만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고 진정한 본질상의 아들, 따라서 유일한 아들이시며 이 표식에 의해서 다른 모든 아들들과 구별되신다.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영예를 주시지만, "진정한 독생자"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로서 받은 것을 그는 본성으로서 가지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많은 형제 중에서 "독자"가 되시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영예를 중보자의 위격 전체에 확대한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동정녀에게서 나시며 또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 제물로 아버지에게 바치신 분, 참으로 또 바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 그의 신성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그의 아들에 관하여‥‥‥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1-4). 무슨 이유로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을 따로 하는가? 이것은 그의 육신 이외의 무엇에 좌우된 일임을 알리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뜻으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고후 13:4). 이와 같이 그는 두 본성을 구별한다. 그가 어머니에게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받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받았다는 것을 그들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인성이 아닌 것, 인성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 가지로, 즉,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아들로 부르고 있다. 그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히브리어로는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인 만큼 이 이름에 대해서 그들은 싸움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를 "인자"라고 부르는 사실을 그의 인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한 것과 똑같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내가 언급한 구절, 즉,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라고 한 구절에서(롬 1:3-4) ,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며 저는‥‥‥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롬 9:5)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을 말한다. 이 두 발언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는데, 우리의 논적들은 무슨 권리가 있어서 육신으로 인자이신 분이 그의 신성에 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가?

7. 세르베투스의 빈약한 반증

그들은 자기의 오류를 변호하기 위해서 소란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시지 않았다고 하며(롬 8:32), 천사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자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눅 1:32).923)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논리가 얼마나 타당한가를 우리와 함께 잠깐 검토한다면, 이런 무익한 항의를 자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잉태된 이를 "아들"이라고 부르니, 그는 잉태된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는 이 결론이 옳다면, 요한이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며 저희가 손으로 만졌다고 하므로(요일 1:1),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에 말씀이기 시작하셨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예언서에 있는 것도 요한의 발언과 같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을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이니라"(미 5:2와 마 2:6의 융합) 만일 그들이 이런 식으로 주장할 결심이라면, 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는가? 나는 이미 증언했다. 우리는 이중의 그리스도를 공상한 네스토리우스에 찬성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우리와 형제이신 인연으로 우리를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우리에게서 육신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그 육신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시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현명하게 경고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놀랍고 특이한 은총의 빛나는 거울이시며,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영예를 얻으셨다고.924) 그러므로 그는 육신에서, 태중에서부터도, 이와 같이 훌륭히 탁월성으로 장식된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통일된 인격에 어떤 혼합이 있어서 그의 신성에 속한 것을 제거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 한 위격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되지 않다. 마치 그를 여러 가지 점에서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혹은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 것과 같다.925)

세르베투스의 다른 비방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는 상징적 의미 이외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그 때에는 다소 희미했지만,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 낳으신 말씀이시었다는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이시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다. 또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었다는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이 이름은 그가 자취하신 중보자의 위격에 속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다. 또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엡 3:15) 분과 아들 사이에 이미 그 때에 상호 관계가 있던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 증거를 근거로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이름이 교회내에서 유명하게 되기 전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고. 그러나 가령 솔로몬이 하나님의 무한한 숭고성에 대해서 하는 발언 하나를 가지고 그들은 논란할 수 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하면서(잠 30:4) 솔로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증언이 쟁론가들에게 충분한 무게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따라서 나는 이 증언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점을 제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악한 훼방꾼임을 보여 준다는 것은 밝혀 둔다. 이 밖에 고대 저술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증언했으므로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우리에게 반대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철면피는 가증하고 가소롭다. 이 두 저술가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눈으로 볼 수 없었으나 후에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926)

8. 세르베투스의 교리에 대한 납득이 가는 계시와 반증

세르베투스가 한 말에는 무서운 조짐이 많으며, 거기 찬성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추궁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의 태중에 잉태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옛날 마니교도들도 다음과 같은 공상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성경에 있으니(창 2:7)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영혼을 옮겨 받는다고927) 한다. 그들은 "아들"이라는 이름을 완강히 고집해서 본성들의 차이를 남겨 두지 않으며, 사람인 그리스도는 그 인간성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혼란한 말을 지껄인다. 그래서 솔로몬이 말하는(집회서 24:9. 참조, 잠 8:22이하) 지혜의 영원한 출산이 말살되며, 중보자에게 있는 신성이 무시되며, 또는 단순한 가현(假現)이 진정한 사람을 대신한다.

세르베투스는 더욱 졸렬한 기만적 언어로 자신과 타인을 현혹했다. 그의 말들을 논박한다면, 경건한 독자들이 그의 전례에서 경고를 받아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게 되겠고, 그만큼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단행본에서 반박했으므로,928)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문제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세르베투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은 처음부터 한 관념이었고, 그 때에도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인 사람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외면적으로 찬란한 말씀 이외의 하나님의 말씀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아들을 낳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어서 창조 자체에까지 행동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성령과 말씀을 혼동하여,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과 성령을 육신과 영혼 속에 분배하셨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세르베투스의 생각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출산(出産)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그 때에 한 그림자 같은 아들로 보이던 이가 드디어 말씀에 의해서 출산되었다고. 이와 같이 그는 말씀에 씨로서의 기능을 배정한다. 이런 생각이라면 개와 돼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처음 씨에서 창조되었으므로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결론이 생길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를 창조되지 않은 세 원소의 혼합체라고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산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났다고 상상하지만, 돌(石)들에도 그 정도에 따라 똑같은 본질적 신성(神性)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을 빼앗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육신은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로929) 되었고, 육이 하나님으로 변함으로써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와서 신성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말씀의 영원한 위격을 말살해 버리며, 우리의 구속자로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참으로, 그가 여러 번 반복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곧 아들은 예지와 예정에 의해서 하나님에게서 났지만, 종국적으로는 물질을 재료로 삼아 사람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물질은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세 가지 요소에서 빛났고 후에 세계의 처음 빛과(창 1:3) 구름과 불기둥에서(출 13:21) 나타난 요소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르베투스가 간혹 부끄러운 아기 모순에 빠지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너무도 지루할 것이다. 정신이 건전한 독자들은 이 요약을 읽고 이 더러운 개의 간교한 도피적 언사가 구원의 희망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육신이 신성 자체라면 그것은 신성의 성전이 아니겠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나서 육신으로는 참사람이었던 분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있다. 세르베투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말을(요 1:14) 자기 입장의 기초로 삼지만,930) 이것은 사악한 짓이다. 이 말은 네스토리우스의 오류에 대항하는 동시에, 유티케스의 불경건한 조작도 지지하지 않는다. 요한의 유일한 목적은 두 본성이 통일된 위격을 이루었음을 선언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제 15 장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보내신 목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푼 것을 알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그 안에서 세 가지, 즉, 예언적 사명, 왕직, 제사장직을 보아야 한다

(1. 그리스도의 3중의 구원 활동 : 첫째, 예언적 사명. 1-2)

1. 이 교리를 이해할 필요성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사명에대한 성구들

어거스틴의 바른 논술과 같이 이단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파하지만, 신자들과 공통된 근거가 없고, 이것은 교회에만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일을 심사숙고할 때에, 우리는 이단자들에서 그리스도의 이름만 찾아볼 뿐이고, 그가 실제는 그들 사이에 계시지 않음을 깨달을 것이다.931) 그래서 현재 "하나님의 아들, 세계의 구속자"라는 말을 교황주의자들이 드높이 외치지만, 그들은 이름만 허망한 구실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의 권능과 존엄성을 빼앗으므로,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은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19).

그러므로 믿음이 구원의 확고한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으며, 따라서 그 안에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해야 할 원칙이 있다. 즉,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임명하신 직책에 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932) 그러나 이 이름들을 알더라도 그 목적과 효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아는 것이 무가치할 것이다. 교황파주의자들도933) 이 이름들을 쓰지만, 이 칭호들이 각각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흥미도 없고 효과도 없이 사용한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93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예언자들을 연달아 보내시며, 구원을 위해서 충분하고 유용한 교리도 알려 주셨지만, 경건자들의 마음에는 항상 메시야가 와야만 이해의 완전한 광명이 있으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가득했었다. 진정한 종교를 깨달은 일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까지 이 기대가 침투했었다는 것은 "메시야가‥‥‥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한 여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요4:25). 또 이것은 유대인들의 경솔한 억측이 아니라, 분명한 계시에서 배운 믿음이었다. 이사야의 말은 특히 유명하다.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사 55:4). 다른 곳에서 이사야는 그를 "지혜가 위대한 사자(使者) 또는 해석자"라고 불렀다(사 9:6, 28:29 ; 렘 32:19의 융합).93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복음의 교훈의 완전함을 찬양해서 우선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고(히 1:1), 다음에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첨부하는 것이다(히 1:2). 그러나 예언자들의 공통된 임무는 교회가 기대를 잊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중보가 오실 때까지 그 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므로, 유대 민족의 이산(離散) 기간에 신자들은 저 정상적인 혜택을 빼앗겼다고 탄식했다.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시 74:9). 그러나 그리스도의 강림이 멀지 않게 되었을 때에 "이상(異象)과 예언자가936) 응할" 기한을 다니엘에게 지정하셨다(단 9:24). 그 뜻은 거기서 언급하는 예언이 권위 있게 확립될 뿐 아니라, 모든 계시의 최고의 완성이 가까웠으므로, 얼마 동안 예언자가 없더라도 신자들이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2. 우리에게 대한 그 예언자적 사명의 의미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이 세 가지 직책에937) 관계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율법 아래에서 제사장과 왕뿐 아니라, 예언자도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시야"라는 존칭은 약속된 중보자에게도 주셨다. 다른 데서 밝힌 바와 같이,938) 그리스도는 특히 그의 왕권에 관해서 또 그 왕권 때문에 메시야라고 부른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예언자와 제사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히 예언자에 관해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될 자에게 자유를‥‥‥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날을 전파하여"(사 61:1-2. 참조, 눅 4:18).

그가 성령에게 기름부음을 받아 아버지의 은총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방법으로 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직분을 가진 다른 교사들과 그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가르치는 직분을 다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받으셔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권능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신 완전한 가르침이 모든 예언을 종결시켰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만족하지 않고 밖에서 무엇을 가져다가 복음에 끼워 놓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린다. 하늘에서 우뢰같이 들려 온,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말씀은(마 17:5. 참조, 마 3:17) 모든 다른 사람들을 초월한 각별한 특권으로 그를 높이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 기름부음이 머리로부터 지체들에 확산되어, "너희 아들들이 예언하며 너희 딸들이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하는(욜 2:28 의역) 요엘의 예언과 같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로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며(고전 1:30), 다른 곳에서 "그의 안에 지식과 총명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고 말할 때에(골 2:3 의역), 그는 조금 다른 뜻을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 이외에는 알 가치가 있는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믿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하늘 은혜의 무한한 전체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내가‥‥‥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귀한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고 한다(고전 2:2 의역). 복음의 단순성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의 태도는 참으로 옳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언자로서의 위엄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말씀에 완전한 지혜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왕으로서의 사명 - 그 영적 성격. 3-5)

3.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원성

이제부터 왕권을 논하겠다. 이 문제를 말할 때에 먼저 그것은 본질상 영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경고하지 않는다면, 논의가 무의미할 것이다. 이 영적 성격에서 우리를 위한 그 효력과 혜택뿐 아니라, 그 모든 힘과 영원성이 추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원성은 다니엘서에서 천사가 그리스도의 위격에 돌리며(단 2:44),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백성의 구원에 올바르게 적용한다(눅 1:33). 그러나 이 영원성에는 또 두 가지가 있다. 또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고찰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 전체에 관한 것이며, 둘째는 각 개인 교인에 관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말씀은 첫째 종류에 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 번 맹세하였은즉 다윗에게 거짓을 아니할 것이라 그 후손이 장구하고 그 위는 해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시 89:35-37).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의 손을 통하여 자기의 교회의 영원한 보호자와 수호자가 되시겠다고 여기서 확실히 약속하신다. 이 예언의 진정한 성취는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죽은 직후에 나라의 대부분에 대한 권위가 붕괴되고, 한 사사로운 개인에게로 넘어가서, 다윗 가문에 수치를 주었기 때문이다(왕상 12장).939) 그 후에 권위는 더욱더 쇠퇴하여 드디어 슬프고 부끄러운 멸망이 되었다(왕하 24장).

이사야가 "그의 세대중에 누가 말하였으리오"라고 외치는 것도(사 53:8) 같은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죽음을 이기고 살아서 자기의 지체들과 결합되리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런 보호 하에서 교회가 확실히 영속하리라는940) 것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격렬한 동요로 끊임없이 고통하며 무섭고 비참한 폭풍들이 무수한 재난을 위협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안전하다. 다윗은 원수들이 대담하게 하나님과 그 기름 부으신 자의 멍에를 벗어 버리려고 하는 것을 웃으면서, "군왕들과 백성이 헛되이 분노하도다‥‥‥하늘에 계신 자가 강하여 그들의 공격을 넉넉히 분쇄하리라"고 한다(시 2:2, 4). 이와 같이, 그는 교회가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신자들에게 다짐하며, 교회가 압박을 받을 때마다 희망을 가지라고 격려한다. 다른 데서 다윗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고 한다(시 110:1). 아무리 많은 강적들이 교회를 전복할 음모를 할지라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영원한 왕으로 임명하신 그 확고부동한 결정을 전복시킬 힘은 그들에게 없다고, 다윗은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세계의 총력을 동원하더라도 교회를 전복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보좌를 토대로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우리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똑같은 "영원성"에서 우리는 영감을 받아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보아야 한다. 지상적인 멋은 모두 이 세상과 시간에 속했으며 참으로 순식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들어올리기 위해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언명하신다(요 18:36).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각 사람은 이 말에서 용기를 걷어 더 좋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생명이 지금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우리는 오는 시대에 이 은총이 완전히 결실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4.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사명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적인 것임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그 힘과 효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평생 십자가를 지고 투쟁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어렵고 가련하다는941) 사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된다. 만일 이 지상 생활의 저 편에서 하늘 임금의 통치의 혜택을 즐기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그 통치하에 지금 소집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즐겁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결하는 풍부한 오락,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행복은 하늘나라의 생활에 있다. 이 세상에서 한 국민이 번영하며 평안하려면, 한 쪽으로는 모든 재물이 풍부하며 국내가 평온해야 하며, 또 한 쪽으로는 외적에 대한 방위 태세가 강해야 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백성에게 풍부히 주시며, 영적 원수들의 모든 공격 앞에 결코 굴하지 않는 용기로 백성의 방위력을 강화하신다. 이것을 보면, 그는 내외 양면으로 통치하실 때에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유익한 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없는 것이며, 이 처음 받는 결실에 의해서 우리는 완전한 축복 가운데 하나님과 참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령의 힘을 믿고, 악마와 세상과 각종 장애물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항상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바리새파에 대답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의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으므로 볼 수 있게 임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눅 17:20,21).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왕이라고 공언하시고, 자기 아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농담 삼아 그의 표적을 보자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각각 자기의 양심을 들여다보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이다(롬 14:17).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땅에 붙은 일에 마음이 너무 쏠린 사람들이 미련한 영화를 꿈꾸지 못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간단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가르친다. 그 나라는 지상적이거나 육적인 것이어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높이 들어 올려 영생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과 기한(飢寒)과 멸시와 비난과 그 밖의 괴로움이 있는 이 세상을 참고 지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만 한 가지 일로 만족하자, 즉, 우리 임금께서는 결코 우리를 궁핍하게 버려두시지 않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며, 드디어 우리는 싸움을 끝내고 부르심을 받아 개선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지배는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모두 우리와 나누시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지금 그는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하시며 자기의 웅대한 미(美)로 장식하시며 자기의 부요하심으로 풍부하게 만드신다.942) 그러면 이런 혜택들은 우리가 자랑할 가장 풍부한 이유가 되며, 악마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아무 두려움 없이 싸울 확신을 준다. 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세상의 모든 비난을 용감하게 초월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아낌없이 풍부한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도 그의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영적인 본질 : 그리스도와 성부의 주권

그러므로 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에 쓰는 것은 기름이나 향기로운 연고가 아니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셨기" 때문이다(사 11:2). 이것이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다"고 시편이 선언하는 그 "즐거움의 기름"이다(시 45:7). 왕이 이와 같이 출중하지 않다면, 우리는 모두 가난하고 굶주릴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943) 그가 풍부하게 되신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풍성한 것을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부어 주시기 위해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하며(요 3:34), 이는 우리가 모두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하려든 것이라고 한다(요 1:16). 이 원천에서 바울이 말하는 풍성한 은혜가 흘러나온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이 발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성령에 있고 지상적인 쾌락이나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한 말을 충분히 확인한다. 따라서 그 나라에 참가하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

이 거룩한 기름부음의 상징이 그리스도의 세례 때에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즉,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와 그의 위에 와서 머물렀다(요 1:32 ; 눅 3:22). 성령과 그 은사를 "기름부음"이라고 부르는 것은(요일 2:20, 27) 새로운 일이 아니며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방법은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늘 생명에 관해서는, 성령이 주입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는 그 생명력이 한 방울도 없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거처로 택하시고, 우리에게 심히 필요한 하늘 보화가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다. 신자들은 왕의 힘을 받아 불굴의 자세를 견지하며, 왕의 영적 보화가 그들에게 풍부하다. 따라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그 후에‥‥‥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고 한 바울의 발언은(고전 15:24) 우리가 말한944) 이 영원성을 손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들 자신도‥‥‥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5:28). 저 완전한 영광 안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현재와 같지 않으리라고 바울은 말할 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셔서 아들의 손을 거쳐 우리를 주관하시며 양육하시며 지탱하시며 보호하시며 도우신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헤매는 그 짧은 기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 서 계시며, 우리를 점진적으로 인도하셔서 하나님과 굳게 결합하게 하시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그를 아버지의 대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며, 이 대리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전적으로 가진 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이를테면 간접적으로 통치하며 보호하기로 정하셨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고 설명한다(엡 1:20-23). 그가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이런 말로 바울은 또 그리스도의 나라와 현재 질서를 칭찬하며, 그것은 우리가 지금 연약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때에는 교회를 수호하는 그리스도의 임무가 완수될 것이므로, 하나님 이 친히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시리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같은 이유로 성경은 보통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주권을 행사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 위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주"라는 칭송을 받는 사람이 많으나(참조, 고전 8:5),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8:6). 이런 근거에서 이 분은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자기는 교회의 왕과 입법자라고(사 33:22) 선언하신 이와 같은 하나님이시라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다. 자기가 가진 모든 권능을 "아버지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아들이 시종 여일하게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지배하신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는 무슨 까닭에 중보의 위격을 취하셨는가? 그가 아버지의 품과 무한한 영광을 두고 내려오신 것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복종할 결심을 더욱 굳게 가지며, 하나님의 뜻에 모든 열성을 다하여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또 공손히 복종하는 경건자들을 위하여 왕과 목자의 임무를 겸행하신다. 그러나 그는 저희 모든 자들을 질그릇 같이 부술 철장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씀을 우리는 듣는다(시 2:9). 또 "그는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는 말씀도 듣는다(시 110:6). 우리는 현대에서 이런 일의 예를 몇 개 보지만, 완전한 증명은 최후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 심판은 또 그리스도의 통치의 최후 조치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 제사장직으로서의 사명 : 화해와 중보 6)

6.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그 목적과 효험을 간단히 말하겠다. 그는 순결하고 흠 없으신 중보자로서 자기의 성결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키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저주가 우리를 하나님께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또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우리에 대하여 노하신다. 따라서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주시며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속죄가 그 사이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이 직책을 다하려고 그리스도가 제물을 가지고 나오셔야 했다. 율법 하에서 제사장이 피를 들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히 9:7) 이것은 제사장이 신자들의 대언자로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었지만, 그들의 죄를 대속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없다는 것을 신자들이 알게 하려는 뜻이었다(레 16:2-3). 사도는 히브리서 7장부터 거의 10장 끝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길게 논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과를 말소하시고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으므로,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고 한다(히 9:22). 하나님께서는 "변치 아니하실" 엄숙한 행세로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하여,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다(시 110:4. 참조, 히 5:6, 7:15).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 말씀으로 우리의 구원 전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점으로 아시는 것을 제정하신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씻으신 후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불결한 범과와 죄 때문에 길이 막혔던 그 은총을 우리에게 얻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들과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효험과 혜택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영원한 중재자시며, 그의 호소에 의해서 우리는 호의를 얻는다. 기도에 대한 신뢰뿐 아니라, 경건자들의 양심의 평화도 여기서 생긴다. 그들은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자비를 안심하고 의지하며, 중보자를 통해서 성별된 것은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율법 하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질서가 있어서 한 분이 제사장과 제물을 겸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기에 합당한 것이 달리 없으며, 독생자를 하나님에게 드릴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행동하시는 것은 영원한 화해 원칙에 의해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며 친절하게 되시도록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위대한 직책에서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시려는 뜻이다(계 1:6). 우리 자신은 오염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제사장이므로,945)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에게 바치며, 자유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하며 향기롭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하신 뜻은 이것이다(요 17:19), 우리는 원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함께 우리를 아버지 앞에 성별하셨으므로, 오직 그의 성결이 몸에 가득히 배어 순결하고 정결한 자로서 심지어 거룩한 자로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하듯이, 성소에 기름을 부은 것은 이 때문이다(단 9:24). 우리는 이 기름부음과 그 당시에 사용된 그림자 같은 기름 부음과의 대조에 주의해야 한다. 마치 천사가 "그림자를 흩어버리면 참제사장직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히 그를 새로이 제물로 바치노라고 한 자들의 조작은 더욱 가증하다. 교황파는 매일 이 짓을 시도하며,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노라고 생각한다.

제 16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으며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우리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 1-4)

1. 구속자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한 말은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원래 정죄를 받아 죽고 멸망한 우리는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는(행 4:12) 베드로의 유명한 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다. "예수"라는 이름을 그가 받게 된 것은 이유 없이, 또는 우연히, 또는 인간의 결정으로 된 일이 아니라, 최고의 명령을946) 전달한 천사가 하늘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눅 1:28-33). 그 이유로서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다고 첨부하였다(마 1:21. 참조, 눅 1:31).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947) 언급한 점을 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구주가 되시도록 속죄주의 직책이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그가 구원의 종점까지 줄곧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속은 불완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견고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에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일체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버나드의 경고는 기억해 둘 만하다. "예수의 이름은 광명일 뿐 아니라 양식이다. 그것은 또 기름이다. 이 기름이 없으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마른다. 그것은 소금이다. 이 소금으로 맛을 내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이는 음식은 온통 맛이 없다. 끝으로,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는 향기가 없다."948)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이것은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확신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충분하고 확고한 토대를 얻으며,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지 이탈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자기 속에 내려가서949) 자기의 진상을 성실하게 생각한다면, 반드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적의를 느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노염을 푸는 방법과 수단을 애써 찾아야 하며, 여기는 충분한 배상이 요구된다. 죄인이 죄책에서 사면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항상 그들 위에 머무를 것이니, 필요한 것은 평범한 보증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므로 자기의 법을 어기는 자를 벌 없이 버려두시지 않고, 처벌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진노를 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잠깐 생각할 일이 있다. 즉, 우리를 앞질러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목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는 것은 어떻게 합당한 일이었는가? 만일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우리를 이미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특별한 보증을 주실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일종의 모순이 생기므로, 나는 이 문제들을 처리하겠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통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그의 희생으로 그들의 불의가 속량되기 전에는 그들은 저주 아래 있었다(갈 3:10,13).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화해되기 전에는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골 1:21,22) 이런 발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얼마나 가련한 파멸 상태에 있는가를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덮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우리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해방의 혜택을 경시했을 것이다.

예컨대, 누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대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대를 미워하셔서 그대가 당연히 받을 일을 하셨다면, 즉, 그대를 버리셨다면, 무서운 파멸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꺼이 또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그대를 은총 가운데 두시고 그대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험에서 그대를 구출하신 것이다"라고. 이렇게 들은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비의 덕택을 얼마만큼은 느끼며 체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즉, 그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진노를 받을 자,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면치 못할 자, 구원을 얻을 희망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길이 전혀 가망이 없는 자, 사탄의 종, 죄의 멍에를 멘 포로, 결국 무서운 멸망을 당할 운명이며 이미 멸망 중에 있는 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자. 또 이때에 그리스도가 그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모든 죄인에게 내리려는 그 벌을 자기가 대신 맡아 받으셨으며,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로 만든 죄악들을 자기의 피로 깨끗이 씻으셨으며, 이 속죄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올바른 배상과 희생을 드리셨으며,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으며, 이 터전 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성립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하나님의 인애가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에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재난에서 구출되었는가를 역력히 그려 보이는 이 모든 일에서 더욱더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인가?950)

요컨대, 우리 마음은 우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놀라며 압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도 생명을 붙잡는 열성이 부족하거나, 생명을 받아도 올바로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이를테면 우리의 원수이며, 그의 손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3.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화해보다 앞선다.

이 발언은 연약한 우리의 이해력을 고려한 것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최고의 공의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보이는 불의를 결코 사랑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거기 따르는 악한 생활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 있는 자며, 나면서부터 지옥의951) 저주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것을 잃지 않으시길 원하시므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우리는 비록 자신의 허물 때문에 큰 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피조물이다. 비록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지만, 그는 우리를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값없이 주시는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여 은총을 베풀려 하신다. 의와 불의는 화합할 수 없으며, 이 불화는 영구히 화해시킬 수 없으므로, 우리가 죄인인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실 수 없다. 따라서 적대관계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며, 우리와 완전히 화해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제시된 속죄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일소하신다. 이전에 불결하고 불순하던 우리가 그가 보시기에 의롭고 거룩한 자로 나타나게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목을 얻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미리 손을 쓰시는 것이다. 참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 4:19), 후에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노염을 받아야 할 불의가 우리 안아 그대로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정죄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결합하실 때에 한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또 굳게 결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눈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한다. 사실, 그를 힘입어야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죄가 돌아오면 하나님의 진노를 동반하는 것이다.

4. 속죄 사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생긴다 : 그러므로 속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받아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기초를 가졌다고 한다(엡 1:4-5). 이 일들은 명백하며 성경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포하셨다고 하며(요 3:16), 반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가지게 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고 하는(롬 5:10) 구절들도 서로 훌륭히 조화된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나는 어거스틴이 바로 이 점을 가르치는 구절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변함이 없다. 우리가 성자의 피를 통해서 화해를 얻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세상창조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도 독생자와 함께 아들들이 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무엇이 되기 전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전에 미워하시던 자들을 이제부터 사랑하시기 시작하도록 만드셨다는 듯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와 화해했다.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는 사도가 증언 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를 미워하신 때에도 놀랍고 거룩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시지 않은 우리의 상태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셨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의 피조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우리가 만든 것을 미워하시는 동시에, 그가 만드신 것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952) 이것이 어거스틴의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종과 죽음의 결과. 5-7)

5. 그리스도는 복종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는 이를 위해 평생 동안 복종을 실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와 친절을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953) 이 점을 증명하는 바울의 증언이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느니라"(롬 5:19). 참으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는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확대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갈 4:4-5). 그래서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의의 일부를 완성한다고 주장하셨다(마 3:15).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자유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고 언명하신다(마 20:28).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고 가르친다(롬 4:25).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려고" 오신 분이라고 선언했다(요 1:29).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화해자로 세우셨느니라"고 가르친다(롬 3:24-25).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죽으심으로 말미암아‥‥‥화목 되었느니라"고 한다(롬 5:9-10).

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다(고후 5:21). 모든 증언을 열거하려면 한정이 없을 것이므로 나는 그 전부를 인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중의 여러 구절을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사도신경"은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즉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간다. 여기에 완전한 구원의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보이신 복종의 다른 부분도 제외되지 않는다. 바울은 자초지종을 전부 포함시켜서 "그는‥‥‥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한다(빌 2:7-8). 그리고 참으로 죽음 자체에서도 그가 기꺼이 하신 복종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기꺼이 바치는 희생이 아니면 의를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는 "자기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을 때에(요 10:15),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적절한 말씀을 첨가하셨다(요 10:18). 이런 뜻으로 이사야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말한다(사 53:7. 참조 행 8:32).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서도 예수께서 나아가 군대를 만나셨다고 하며(요 18:4), 빌라도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순순히 재판을 받으셨다고 한다(마 27:12, 14). 물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약점들을 맡으셨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에게 대한 복종이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대한 그의 무쌍한 사랑에 대한 비범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즉, 무서운 공포심과 싸우며 저 잔인한 고통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우리를 도우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견지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감정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뜻에 전직으로 자기를 바쳐 복종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에게 합당한 희생을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사도가 시편에서 인용한 증언은 적절하다."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왔나이다"(히 10:7, 9, 시 40:7, 8). 그러나 괴로운 양심들은 오직 죄를 대속하는 제사와 성결에서만 안식을 얻는 것이므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생명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

(빌라도를 통한 정죄)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가 하나님의 하늘 심판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은 우선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정죄를 받으신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벌이 이 의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을 인간에게 더군다나 악한 불신자에게 정죄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총독"이라는 칭호를954) 말하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사야의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가르친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정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가 거저 죽으시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죽음의 종류를 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정죄를 자기에게 옮기는 동시에 우리의 죄책도 맡으심으로써 우리를 해방하는 죽음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가 도둑에게 죽거나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죽으셨다면, 이런 죽음에는 배상을 치렀다는 증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재판정에서 죄인으로서 고발을 당하시고, 유죄 증거가 제출되고, 재판관의 입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으므로, 이런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는 그가 죄인과 악인의 처지에 서신 것을 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의 신탁을 통해서 예언된 두 가지 일에 주의해야 하겠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많이 도우며 강화한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서 두 강도 사이에서 달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는 복음서 기자가 언급하듯이, "그는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고 한 예언이 실현된 것을 안다(막 15:28. 참조, 사 53:12). 무슨 까닭이었는가? 그가 의인이나 무죄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무죄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죄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정죄한 바로 그 사람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말을 들을 때에(빌라도는 여러 번 그의 무죄를 공중 앞에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마 27:23), 우리는 다른 예언자가 그는 도둑질하지 않은 것도 물어 주었다고 한 말을(시 69:4) 상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인과 악인을 대표하신 것을 보지만, 동시에 그의 빛나는 결백을 볼 때에, 그가 자기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지셨다는 것이 명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고, 총독의 공식 선고에 의해서 범죄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재판관 자신이 자기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언해서(요 18:38) 그가 의인이심을 선언했다. 바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할 죄책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전가된 것이 우리의 무죄 석방이 된다(사 53:12).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 대속적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로운 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맡아 받으셨는데, 그 벌이 지금도 우리를 위협하는 듯이, 우리는 평생 떨며 불안해 할 것이다.

6. "십자가에 못박힘"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도 독특한 신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의견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규정에서도(신 21:23)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완전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에게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또 율법에서 희미하게 예시된 일이었다. 그런데 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과 속죄 제물을 "아슈모트"955) 라고 불렀다. 이것은 원래 죄 자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성령께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이 제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를 맡아 쓰고 가는 속죄 염소와956) 같다는 것을 알리셨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 제물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려고 자기의 목숨을 "아샴"으로서(사 53:10),957) 곧 선지자들이 말한 것 같이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내주셨다. 그 제물 위에 이를테면 우리의 오점과 벌을 던져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만드신 것이다. 사도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증언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자기의 순결을 입히셨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롬 8:3) 같은 뜻인 듯하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드려 속죄 제물로서 죽으시게 한 것은 그의 희생으로 모든 배상을 치른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말뜻이 여기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사 53:6) 하는 예언자의 뜻은 분명하다. 즉, 더러운 불의를 깨끗이 하려는 사람이 책임 전가에 의해서 그 불의를 썼다는 것이다. 그가 못박히신 십자가가 이 일을 상징한다는 것은 사도의 증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갈 3:13-14, 신 21:23). 베드로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벧전 2:24). 우리는 바로 그 저주의 상징을 보고 우리를 압박하던 짐이 그에게 옮겨졌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저주에 압도되어 쓰러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는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 힘을 전적으로 꺾고 부수어 버리셨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죄에서 무죄 방면을 얻으며, 그가 받으신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수치가 가득하던 십자가가 개선하는 전차로 변한 듯이, 자기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얻으신 승리를 웅장하게 선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십자가에 못박으시고‥‥‥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골 2: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958)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자기를 드렸기" 때문이다(히 9:14).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과 씻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이시라는959)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놋대야가 되었다(참조, 엡 5:26, 딛 3:5, 계 1:5).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사도신경에는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묻히시며"라고 한다. 여기서도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 값을 치르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멍에 아래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죽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히 2:9) 하는 사도의 말도 이런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지 않게 하셨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해서 확실히 살게 하셨다. 그러나 그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즉, 그가 이를테면 죽음이 자기를 삼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죽음의 깊은 연못에 자기가 빠져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불원에 삼켜 버렸을 그 죽음을 자기가 삼키시려는 생각이었다(참조, "죽음을 삼키심"은 벧전 3:22의 불가타역에 있음). 그가 자신이 죽음에 따른 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시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는 것이었다(히 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장사지낸바 된 것도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 매장에 우리도 참가함으로써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매장되는 것이다. 사도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롬 6:5), "그와 함께 장사되어"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롬 6:4),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갈 2:19, 6:1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골 3:3). 이런 발언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범을 나타내 보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용하고 무효한 것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 죽음에 내포된 효력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는 우리가 받아 즐길 이중의 축복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묶여 있던 그 죽음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교리에 대한 설명. 8-12)

8. "지옥에 내려 가사"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보면, 사도신경에 있는 이 어귀가 교회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은 때도 있는 것 같다.960) 그러나 교리의 요점을 설명할 때에는 이 어귀를 보존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은 이 어귀를 생략하지 않는다.961) 그러므로 이 어귀는 얼마 후에 삽입되었고, 교회내에서 즉시 통용되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관례가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표현이 모든 경건자의 공통된 신념을 반영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다만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누가 언제 이 문구를 삽입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이 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점은, 거기 우리의 믿음의 전체가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문을 신경에 넣는 데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962) 이 신조가 우리의 구속 전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곧 명백하게 될 것이다. 즉, 이 신조를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신조에 아무 새로운 말이 없고, 그리스도의 매장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며,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963) 나는 이 말의 뜻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은 "무덤"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를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도록 설복한다. 그 자체로서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을 분명하고 쉬운 말로 표명한 다음에, 그것을 밝히기보다 도리어 모호하게 만드는 말로 되풀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주의한 짓이었겠는가! 같은 문맥에서 같은 일을 위해서 두 가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후자는 전자의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장사한 바 되셨다"는 것이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설명이 될 것인가? 둘째로, 우리 믿음의 중요한 점들을 적절하고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글에 이런 쓸데없는 반복 문구가 잠입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한 사람이라면 곧 내게 찬성하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9. 그리스도는 음부 세계에 가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해석이 달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하에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들에게 내려가서 이미 성취된 구속을 발표하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고 한다.964)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편에서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다"라는 말씀을(시 107:16) 인용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스가랴의 "그가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한다(슥 9:11 의역). 그러나 시편은 먼 나라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이며, 스가랴는 백성이 당한 바벨론의 비극을 깊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비교하는 동시에, 교회 전체의 구원은 낮고 깊은 곳에서 석방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럭저럭하는 중에 그곳을 지하에 있다고 생각해서 "림보"라는965) 이름까지 붙였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저술가들이 반복했고, 지금도 여러 사람이966) 참말이라고 열심히 옹호하지만, 여전히 이야기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유치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필요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석방하러 그리로 내려가셨을 것인가?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만 맛보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967)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망대'에 있는 또는 보통 번역하는 대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문맥으로 보아서,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영혼은 간절히 기다리던 강림을 목전에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에서 전적으로 배제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경건자들과 불신자들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양자를 무차별적으로 혼동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았다고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10. "음부에 내려가심"은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영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신경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것에 대해서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있는 설명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 아니라, 놀라운 위로가 가득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 육체의 죽음뿐이었다면, 그 죽음에는 효험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엄격한 천벌을 받으며, 그 진노를 진정시키며, 그 공정한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셔야 했다.968) 조금 전에969) 인용한 예언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한다(사 53:5). 예언자가 말하려는 뜻은 그리스도가 악인들을 대신해서보증과 담보가 되시며, 심지어 피고가 되셔서 그들이 받아야 하는 모든 벌을 참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벌을 받으셨다. 다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행 2:24). 그러므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악인들에게 가하신 죽음을 그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 뒤에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순서가 이렇게 뒤집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너절하고 가소로운 반대를 하는 것이다.970) 문제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즉,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의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

11. 성경 구절로 이 설명을 변호함

이런 뜻으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고 살아나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거나 능가될 수 없었음이라"고 한다(행 2:24). 베드로는 단순히 죽음을 말할 뿐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통에 붙잡히셨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오는 고통이며 죽음의 원인이다. 아무 두려움 없이 나서서 장난같이 죽음을 당하게 되셨다면, 그것은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몹시 무서워 하시면서도 그것을 피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무한한 자비를 참으로 증명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그리스도는 "그의 공포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는 것도(히 5:7) 같은 뜻임이 확실하다(다른 사람들은 "경외하심" 또는 "경건하심"이라고971) 번역하지만, 사실 자체와 표현 방법으로 보아서 그것은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죄인으로서 죽음에 삼켜 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또 참으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 멀어진다고 느끼며, 하나님에게 간구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연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멸망을 계획하신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심히 낙망하셔서 깊은 고민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마 27:46 ; 시 22:1) 외치지 않을 수 없으신 것을 우리는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외치심을 그리스도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972)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분명히 그의 심중에 있는 깊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셨다거나 노하셨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서, "내 마음을 안식하게 하는 자"라고 하신 이에 대해서(참조, 마 3:17) 노하실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이 미워하셨다면, 그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아버지의 노염을 푸실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엄격한 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아 고통을 받으셨으며(사 53:5), 노하시며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징을 체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힐라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가 다른 구절에서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이것들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하며, 또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계시지만, 사람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한 말도 우리 생각과 다르지 않다.973) 그러나 사도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있는데, 내가 무슨 까닭에 한 사사로운 개인의 증언을 인용하겠는가? 사도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결과를 회상하면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한다(히 2:15).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괴롭히며 압박하는 공포심을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하시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슬픔은 보통 슬픔이나 사소한 원인에서 생긴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이 곧 더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의 권세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정복하고 개선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죽음에 대해서 우리의 왕이 삼켜 버리신 그 일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참조, 벧전 3:22, 불타카역).

12. 오해와 오류에 맞서는 이 교리를 옹호함

여기서 어떤 배우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서운 훼방을 한다고 외친다. 그들의 항의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의 구원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시는 것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다음에 더 심한 중상을 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믿음과 반대되는 절망을 돌린다고 한다.974) 첫째로, 복음서 기자들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대해서 그들이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악한 짓이다. 죽으실 때가 가깝기 전에 그는 "심령에 민망"하여(요 13:21) 슬퍼하셨고, 그때가 다가오자 두려워 더욱 심히 떨기 시작하셨다(참조, 마 26:37). 그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운 시늉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도피다. 암브로시우스가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이,975)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슬픔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또 사실, 그의 영혼도 함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신체에 대해서만 속죄주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싸우실 필요가 있었다. 그가 움츠리지 않고 우리의 약점들을 담당하신 데서 그의 인애가아무리 찬양해도 다할 수 없는 그 인애가 빛난다. 따라서 이 일은 그의 하늘 영광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 또 사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위로도 우리의 고민과 비애에 대한 위로도 여기서 생겨난다. 즉, 이 증오자는 불행한 우리를 더 잘 구출하기 위해서 우리의 약점들을 체험하신 것이다(히 4:15).

그들은, 본질상 악한 일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면서(히 4:15) 이 두 가지 일을 조화시키시는 성령보다 그들이 더 현명하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연약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놀랄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는 폭력이나 필연성의 강요를 받아서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로서 굴복할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받으신 모든 고난은 조금도 그의 권능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이 훼방꾼들이 속아 넘어간 점이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에, 연약하셨을지라도 아무 죄나 오점이 없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격렬하고 충동적인 감정이 한도를 모르며 따라서 절제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논적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 표준으로 측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는 타락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감정의 움직임에서 극단을 억제하시는 훌륭한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는 점에서 우리와 같으실 수 있었지만(참조, 히 2:17), 이 특성에 의해서 그 느끼시는 법이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논적들은 반박을 당하자, 다른 허위 궤변으로 비약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무서워하셨지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무서워하신 것이 아니며, 도리어 이 저주와 진노에 대해서는 자기가 완전한 줄로 아셨다고 한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은 그리스도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보다 더 씩씩하지 못하며 겁이 많으신 것이 그에게 얼마나 명예가 되었겠나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도둑과 그 밖의 악인들이 거만하게 죽음을 서두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멸시하여 만용을 보이며, 어떤 사람들은 고요히 견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이 무서워서 놀라며 거의 마비되셨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항구성과 위대성이라고 할 것인가? 그에 대해서 기적적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일이 전해지는데, 격렬한 고민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 핏방울이 흘렀다는 것이다(눅 22:44) 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에 그는 비밀히 아버지에게 신음으로 호소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특별한 위로로 그의 용기를 고무해야 했다는 사실은(눅 22:43) 모든 의심을 흩어 버린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보통으로 죽으시면서 그 죽음이 무서워 심히 고민하며 피땀까지 흘리셨고, 겨우 천사들이 나타났어야 기운이 되살아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나약이었겠는가? 대답하라. 믿을 수 없이 비통한 마음에서 우러난 저 기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세 번 반복하신 저 기도는(마 26:39) 그리스도께서 보통 죽음보다 더 가혹하고 더 곤란한 싸움을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것을 보면, 내가 싸우고 있는 이 궤변가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대담하게 지껄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속되었다는 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뜻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셨는가를 바르게 느끼는 것이 우리의 지혜가 된다.

그런데 누가 묻기를, 그리스도는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지옥에 내려가셨더냐고 한다면,976) 나는 대답한다. 이 기도는 출발이었고, 여기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고. 즉, 그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서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가 얼마나 가련하고 무서운 고민을 하셨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의 영의 신적 능력이 일시 숨어 있고 육의 연약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통과 두려움에서 온 그 시련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연설에서"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고 한 말이(행 2:24) 실현되었다. 그는 이를테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셨지만, 하나님의 인애를 믿는 점에서는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이 점은 격렬한 고민 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하고 외치신 그의 비범한 기도가 증명한다. 그는 무한한 고통을 느끼셨지만 자기를 버리셨다고 외친 그 하나님을 여전히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이 점은 아폴리나리스와 이른바 단의론자(單意論者)들의 과오를 논박한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영이 있었으나 영혼은 없었다고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절반 사람에 불과하셨다고 한다.977) 그가 아버지에게 복종하시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복종하는 성향이나 의지는 영혼에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의 영혼이 불안을 느낀 것은 공포심을 구축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단의론자들과는978)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성에 따라서 원하신 일을 인간으로서는 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말한 공포심을 반대 감정으로 극복하셨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지 않겠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니(요 12:27-28), 이것은 분명히 커다란 모순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시면서도, 우리가 자신을 억제하려고 굉장히 애쓸 때에 보이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없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

13.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음에 있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에서 나타난 것은 무력함뿐이므로,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완전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며, 저주가 제거되며, 형벌을 완전히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벧전 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도 오직 그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979)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롬 4:25)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성격을 더 잘 표현한다. 그 뜻을 바꿔 말하면,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가 제거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의가 소생하며 회복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죽음에 굴복해 버리셨다면, 어떻게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이 싸움에 지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어 주실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어, 그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활의 덕택으로 그의 죽음은 우리 안에서 그 권능과 효력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4) 그 때에 그가 드디어 하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고, 이 권능은 그의 신성(神性)을 분명히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도 바울은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고난을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으셨다고, 같은 뜻으로 가르친다(고후 13:4).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완전성을 논할 때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즉시 계속해서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고 첨부한다(빌 3:10). 이와 긴밀히 일치하는 것이 베드로의 발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으니 이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지탱되는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래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권능이 특히 부활에서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동시에 그의 부활에 속한 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또 "부활"이란 말에 대해서도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이 표현법이 적용된다. 즉, 죽음과 별도로 부활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심으로써 승리자의 상을 타셨으므로, 즉, 부활과 생명이 있게 하셨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속임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고(고전 15:17) 주장하는 것은 바르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구절에서 정죄가 일으키는 공포심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한 후에, 더욱 역설하는 의미로, 확실히 죽으신 이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의 중보로서 하나임 앞에 나타나신다고 첨부한다(롬 8:34).

그뿐 아니라,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은 그의 십자가에 참가하는 데 달렸다고 우리가 이미980)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도 거기 부합하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합하여 접붙임이 된 것을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6:4) 따라서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서(골 3:3) 우리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어야 한다는 증명을 얻어낸다(참조, 골 3:5).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는 지상의 일이 아니라 위에 있는 일을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다(골 3:1-2). 이런 말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라고 권고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하여 의를 얻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셋째 혜택도 받는다. 즉, 그의 부활이 실증하는 일종의 보증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5:12-26에서 자세히 논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을 겪으셨고, 그가 죽을 인간으로서 입으셨던 그 육신으로 영생 불사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4. "하늘에 오르사"

부활과 승천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지상 생활과 십자가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영광과 권능을 더욱 완전히 나타내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나라를 창건하신 것은 비로소 승천하신 때였다. 그리스도는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이 일을 가리킨다(엡 4:10). 거기는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훌륭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셨으나,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되도록 하셨다. 지상에 우거하신 동안은 미천한 육신을 집으로 삼으시고 그 안에만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는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요 7:37),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믿는 자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첨부했다(요 7:39 의역). 주께서도 친히 이 점을 제자들에게 확인하셔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7). 그는 육신으로 계시지 않는 문제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을 고아같이 버리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요 14:18-19, 16:14).

사실, 그들은 그때에 더욱 확실한 체험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권위와 권능은 신자들을 축복 가운데 살며 기쁨으로 죽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성령을 얼마나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며, 얼마나 놀랍게 그의 나라를 확대하셨으며, 얼마나 그의 큰 권능을 발휘하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며 원수들을 흩으셨는가를 안다. 그러므로 승천하심으로써 육체적으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게 하셨지만(행 1:9), 그것은 아직 지상 순례를 계속하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직접적인 권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려는 뜻이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약속하신 일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을 실현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 가신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힘은 온 천지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며 보급되었다. 나는 내 말보다 어거스틴의 말로 이 점을 설명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서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가, 그리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는 순수한 가르침과 믿음의 원칙에 따라 육체적 임재로 이 일을 하려 하셨다. 그가 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되어 있었다."981) 다른 데서 어거스틴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은총에 의해서는, 그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20) 실현될 것이다. 말씀이 취하신 육신에 의해서는, 처녀에게서 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며 십자가에서 내리워 세마포로 싸여 무덤에 눕히며 부활로 나타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11) 실현되었다. 왜? 그는 40일 동안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들이 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가운데 승천하셨고(행 1:3, 9) 여기는 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막 16:19). 그러나 그의 숭엄성의 임재를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기 계신다(참조, 히 1:3). 그러므로 숭엄성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임재에 관해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6:11) 바르다. 교회는 육신의 임재로는 그리스도를 며칠 동안 모셨고 지금은 믿음으로 모시며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982)

15. "아버지 우편에 않아 계시다가"

결과적으로 곧 이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이 있다. 이 비유는 임금들이 정사를 맡기는 신하들을 자기 옆에 앉히는 데서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영접되셨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천지에 대한 주권을 받으시며, 위임된 정권을 엄숙히 장악하셨으며, 일단 차지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 날에 내려오실 때까지 통치를 계속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해석한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20-21. 참조, 빌 2:9), 또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고전 15:27),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엡 1:22). 이것으로 저 "앉아 계시는" 목적을 알 수 있다. 즉, 천지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숭엄성을 우러러보아 경탄하며, 그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가르치려고 사도들은 자주 이 일을 회상해서, 만사는 그리스도의 결정에 위임되었다고 했다(행 2:30-36, 3:21, 4장, 히 1:8). 그러므로 이 말은 그의 축복된 처지를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행 7:55) 중요한 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된 것은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의 숭엄한 권위였기 때문이다. "앉아 계시다"는 것은 하늘 심판대에서 주재하고 계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983)

16.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신앙에 주어지는 혜택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받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첫째로, 주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는 것을(요 14:3) 깨닫게 된다. 그가 우리의 육을 쓰시고 우리를 대신하시듯이 하늘에 들어가셨으므로,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엡 2:6). 그래서 우리는 소망만으로 하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믿음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된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의 예언자와 중보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이다(히 7:25, 9:11-12, 롬 8:34). 이와 같이, 그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자기의 의를 보시게 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해하게 하셔서, 자기의 중재로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가까이 가는 길을 준비하신다. 가련한 죄인들에게는 무서움이 가득했을 그 보좌를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깨달으며, 그 힘에 우리의 힘과 능력과 보화와 또 지옥을 이긴 영광이 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8. 참조, 시 68:18), 원수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백성을 풍성하게 만드시며, 그들에게 매일 영적 양식을 아낌없이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 앉으시사, 우리에게 자기의 권능을 주입하셔서 우리를 영적 생명으로 살리시며, 성령으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며, 각종 은사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교회가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도록 보호하시며, 그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반대하여 대적하는 원수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억제하시며, 끝으로 천지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계신다.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시다가 드디어는 그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고전 15:25. 참조, 시 110:1) 교회 건설을 완성하실 것이다.984) 이것이 그의 왕국의 진상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권능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셔서 최후의 치리를 완수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미래에 다시 오심. 17)

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있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지상에서는 이를테면 비천한 육신 밑에 숨겨졌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가 저 마지막 날에 나타내실, 눈에 보이는 임재(臨在)를 심사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옳다. 그는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행 1:11, 마 24:30). 그리고 그의 나라의 형언할 수 없는 숭엄성과 영생 불사의 광채와 신성(神性)의 무한한 권능과 함께 일단의 수호천사들을 데리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 날에 저리로부터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 25:31-33). 생사 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 4:16-17).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말을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저술가들 중에 이 표현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985) 우리는 물론 안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설명은 평이하고 분명하므로 신경에 훨씬 더 가깝다. 신경은 분명히 보통 사람이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뜻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한 바울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히 9:27). 최후 심판 때에 아직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은 겪지 않겠지만, 그들이 당할 변화는 죽음과 같을 것이므로 "죽음"이라고 불러도 부적당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전 15:51).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의 죽을 운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삼켜 버리고, 새로운 본성으로 직접 변화하리라는 것이다(고전 15:52). 이렇게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에 호출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바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전 4:16-17). 그런데 이 표현은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의 설교와(행 10:42)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엄명에서(딤후 4:1) 따온 것 같다.

(사도신경에 대한 결론 : 그리스도의 충족성. 18-19)

18. 심판자가 구속자시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위로가 생긴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는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광을 나눠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이다(참조, 마 19:28). 참으로 그가 심판대에서 우리를 정죄하실리는 만무하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왕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멸하실 수 있겠는가? 머리가 어떻게 자기의 지체들을 흩어 버리실 수 있겠는가? 우리의 대언자가 어떻게 자기의 피(被)보호자들을 정죄하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 우리를 정죄하려고 능히 나설 자가 없다고 사도가 담대히 외치므로(롬 8:34,33),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맡아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정죄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훨씬 더 확실하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바로 그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986) 그뿐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이가 그때에는 심판정에서 그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셔서(요 5:22) 영예를 주신 목적은 심판이 무서워 떠는 자기 백성의 양심을 그가 보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그것은 신경이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즉, 사도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공중(公衆)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987)

19.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에는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체적으로 또 그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행 4:12). 그러므로 그 가장 사소한 부분이라도 다른 데서 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추구한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고전 1:30).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를 구한다면, 그것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권에 있으며, 순결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잉태에 있으며,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탄생에서 나타난다. 그는 탄생하심으로써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우리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셨다(참조, 히 5 :2). 우리가 구하는 것이 구속이라면 그것은 그의 고난에 있으며, 무죄 방면이라면 그것은 그가 정죄 받으신 데 있으며, 저주를 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십자가에 있으며(갈 3:13), 배상을 치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희생에 있으며, 정결이라면 그것은 그의 피에 있으며, 화목이라면 그것은 그의 지옥에 내려감에 있으며, 육을 죽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무덤에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라면 그것은 그의 부활에 있으며, 영생 불사라면 그것도 그의 부활에 있으며, 천국을 상속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승천에 있으며, 보호나 안전이나 모든 풍부한 축복이라면 그것들은 그의 나라에 있으며, 안심하고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받으신 심판권에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 모든 종목의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데로 갈 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런 희망 저런 희망으로 떠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지마는 생각의 일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바른 길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풍부한 축복을 한번 참으로 안다면 이런 불신(不信)이 그들 속에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제 17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만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당연하며 알맞는 일이다

1.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한다

덧붙여서 이제 이 문제도 설명해야겠다. 궤변을 고집하는 어떤 사람들은988)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인정하면서도, "공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을 희미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듣기도 싫어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한 도구나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고, 베드로가 부르는 것과 같이, 생명의 주로는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행 3:15). 사실, 그리스도를 단순히 한 개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운다면, 공로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만한 가치를 사람에게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거스틴의 지당한 말과 같이 "예정과 은총의 가장 밝은 빛은 인간으로서의 구주 예수그리스도시다. 그는 선행하는 행위나 믿음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인간성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다. 한번 내게 대답해 보라. 어디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가 될 자격을 얻었으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말씀에 의해서 그 말씀과의 위격 통일을 얻을 자격을 얻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머리되신 분을 은총의 토대로 인정해야 한다. 이 은총은 머리로부터 모든 지체에 각각 그 분량에 따라 확산되어 간다. 이 사람이 은총을 받아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된 것같이, 모든 사람이 같은 은총에 의해서 믿음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인이 된다."989) 마찬가지로 다른 구절에서, "중보 자신보다 더 현저한 예정의 예가 없다. 다윗의 후손인 이 사람은 그의 의지의 공로가 먼저 있은 것이 아니건만 그를 의롭게 만드시고 결코 불의하게 되지 않게 하신 이가 저 머리의 불의한 지체들을 의롭게 만드신다"고 한다.990)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논할 때에, 공로의 시초가 그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일 원인인 하나님의 결정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이 오직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를 우리의 구원을 얻어주는 중보자로 세우셨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긍휼을 대립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종속되는 것은 그 일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통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거저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보다 하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공로도 우리를 위해서 중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호의와 그리스도의 순종을 각각 그 정도에 따라 우리의 행위와 대립시키는 것은 적당하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떠나서는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공로로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공로를 얻으신 것은 그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완화하며 그의 복종으로 우리의 죄를 말소하도록 미리 임명되셨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달렸으므로, 그리고 이 은총은 우리를 위해서 이런 구원 방법을 정했으므로, 모든 인간적 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립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대립시키는 것과 같이 합당하다.

2.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를 연결한다

이 구별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높은 원인 또는 근본으로서 첫 자리를 차지하며, 그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둘째로 근인이 되어 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는 형상인(形相因)에 불과하다고 항의한다면, 그럴 경우에 그는 여기 인용된 말씀이 뜻하는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을 축소하는 것이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구원의 질료(質料)를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 여러 성경 구절이 이 점을 분명히 증명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991)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이 말씀은 분명히 한 사실을 증명한다.

즉,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는 것이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키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를 임명하신 것이다. "노염을 푼다"는 말은992)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이치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동시에 노하셨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해하신 것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발언들은 모두 이 뜻을 표명한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2). "아버지께서는‥‥‥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엡 1:6). "이는‥‥‥십자가로 우리 둘을 한 사람 안에서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16 의역). 이 신비에 대한 설명은 에베소서 1장에서 얻을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가르치고 동시에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첨부한다(엡 1:4-5).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사랑하신 자들을 어떻게 은혜로 받아 주시기 시작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와 우리를 화해시키심으로써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의의 원천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죄인으로 살아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원수와 심판자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설명하듯이, 사랑의 시초는 의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 뜻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엡 2:3)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우리가 하나님의 노염을 풀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되는 때마다 이 구별이 나타난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얻으신 것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신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로를 아버지에게 돌리지 않고 그에게 돌리는 것은 바꿔 말하면, 은총은 그의 것이며 그에게서 온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3.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공로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복종에 의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참으로 우리를 위해 은총을 얻어 주셨다. 이 일을 확고부동하게 증언하는 구절이 성경에 많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배상을 치르시며,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받으시며,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노염을 푸셨다면 간단히 말해서, 의인이 확실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면 그는 자기의 의로 우리에게 구원을 얻어 주신 것이며, 이것은 공로로 얻으신 것이나 다름없으며, 이것은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듯이, 우리는 화목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을 얻었다(롬 5:10-11). 그런데 노여운 일이 없으면 화목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시던 하나님이 그의 아들의 죽음에 의해서 노염을 푸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셨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뜻이다. 그리고 곧 그 뒤에 있는 대조법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한 사람의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한다(롬 5:19). 이 말씀의 뜻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멸망할 운명을 받은 것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해서 우리는 의인으로 인정되어 은혜를 받게 된다는5a)993)것이다. 동사는 미래형이지만, 문맥으로 보아서 현재의 의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은사는994)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5:16).

4. 그리스도가 대신하심

그러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피로 우리가 깨끗이 되며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대속되었다는 뜻이다. "그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요일 1:7).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흘리는 바 나의 피라"(마 26:28 ; 참조, 눅 22:20). 그가 피를 흘리신 결과로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값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충분히 실시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한 말은(요 1:29) 이 점에 해당된다. 요한은 율법의 모든 제물에 그리스도를 대치시키고, 상징들이 나타낸 일이 그에게서만 실현되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모세가 자주 "불의는 대속되며 죄는 말소되며 용서를 받으리라"고 말한 것을 안다(참조, 출34:7 ; 레 16:34). 요약하면, 구약의 상징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과 권능을 잘 가르친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는(히 9:22) 원칙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이 점을 설명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결론한다(히 9:26). 또,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드리신 바 되셨고"라고 한다(히 9:28). 그는 이미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시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했다(히 9:12).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암송아지의 피로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못하겠느뇨?"라고(히 9:13-14 의역). 이것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속죄하며 노염을 풀며 배상을 치르는 힘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 그리스도의 은총이 너무도 약화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사도가 조금 뒤에 첨가하는 것과 같다.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율법 하에서 남아 있는 이전의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 9:15 의역).

바울이 제시하는 유추법(類推法)은 특히 숙고할 가치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운운한다(갈 3:13). 다른 사람들이 치러야 할 것을 치르심으로써 그들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신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 아니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사야의 증언도 분명하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사 53:5).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그가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노염을 푸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구절에 있는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하여 내가 그를 쳤느니라"는 말씀도(사 53:8 의역) 같은 뜻이다. "저는‥‥‥친히 나무에 달려‥‥‥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는 베드로의 해석을(벧전 2:24) 첨부한다면, 모든 의혹이 제거될 것이다. 우리는 정죄를 면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정죄의 짐을 지셨다고, 베드로는 말하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대가이다

우리를 사형에서 구출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대가(代價)를 치르셨다고, 사도들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995) 세우셨으니"(롬 3:24-25).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구속의 대가를 주신 것을(롬 3:24)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찬양하고, 다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안전하게 설 수 있도록 그 그리스도의 피에서 피난처를 얻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롬 3:25). 베드로의 발언도 같은 뜻이다.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 전 1:18-19). 만일 이 대가로 우리 죄를 위한 배상을 치른 것이 아니라면, 이 비교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값으로 샀다"고 바울이 말한다(고전 6:20). 만일 우리가 받을 벌을 그리스도에게 내린 것이 아니라면, "중보도 한 분이시니‥‥‥자기를 속전으로996) 주셨으니"라는 바울의 말도(딤전 2:5-6)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속을 "죄의 용서"라고 규정한다(골 1:14). 이 뜻을 바꿔 말한다면, "그 피가 우리를 위한 배상에 해당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또는 무죄 방면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에서 그는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를 도말하셨다"고 하는 구절도 이와 같은 뜻이다(골2:14). 사도는 우리의 죄책을 면제하는 대가지불 또는 배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이 말에서 우리는 추론한다.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있을 때에 율법에서 얻을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된다고. 같은 뜻을 바꿔 말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에서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레 18:5) 우리의 행위에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 얻는다. 이 점은 안디옥 설교도 분명히 확인한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느니라"(행 13:39 의역).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라면, 그리스도께서 그 짐을 담당하시고 마치 우리가 율법을 지킨 것같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신 것이 공로가 되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 주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사도가 다음에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가르친 것도 같은 뜻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율법하에 두신 것은, 우리가 치를 수 없는 것을 그가 치르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논하는 바와 같이(롬 4장), 행위가 없어도 의를 돌려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만이 우리의 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살을 "우리의 양식"(요 6:55)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안에서 생명의 본질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힘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의를 위한 대가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엡 5:2). 다른 곳에서도, "그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한다(롬 4:25).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결론짓는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은총에 의해서 지금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신다고.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사 37:35). 이사야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일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느니라"고 말하는 사도가 여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인이다(요일 2:12). 요한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쓰지 않지만, aujtov"("그이")라는 대명사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그의 습관이다. 주께서도 이런 뜻으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너희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다(요 6:57). 바울의 발언도 이와 합치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997)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6.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공로를 쌓지 않았다

그러나 롬바르드나 스콜라파와 같이,998)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공로를 세우신 것이 있느냐고 묻는 것은, 그들이 감히 이런 정의를 내리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호기심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자기를 위해서 어떤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내려오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밝히시며, 모든 의심을 일소하신다. 성경은 성부께서 성자의 공로에 의해서 성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 하지 않고, 그가 성자를 죽음에 내어 주시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것은(롬 8:32)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요 3:16. 참조, 롬 8:35,37). 또, 우리는 예언자들의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 9:6),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라고(슥 9:9) 하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또,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원수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하면서(참조, 롬 5:10) 바울이 그 사랑을 찬양하며 확인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일을 생각하시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요 17:19). 자기의 성결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버리신 분이 자기를 위해서는 얻으신 것이 없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시며, 이를테면 자기를 잊으셨다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이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면서 증언한 것을(빌 2:9) 저 사람들은999) 어리석게 여기에 적용한다. 그들은 묻기를 사람들과 천사들의 모든 능력과 덕성으로도 그 천 분의 일도 얻지 못할만한 것을 한 개인이 얻었으니, 즉, 세계의 심판자와 천사들의 머리가 되며 하나님의 최고의 주권을 받으며 자기 안에 저 숭엄성이 영원히 있게 하셨으니, 이것은 어떤 공로로 된 일이냐고 한다. 그러나 완전한 대답이 있다. 바울은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높여지신 이유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범으로 삼도록 그리스도의 높여지심은 낮아지심 다음에 있었다는 것을 밝힐 뿐이다. 그 뜻은 다른 데 있는 말씀과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 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제 3 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우리에게 그것으로부터 무슨 유익이 오며, 어떤 효과가 따르는가?

제 1 장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해진 사실들은 성령의 신비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1.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속시켜 주시는 띠로서의 성령

우리가 이제 이 문제를 검토하여야 한다.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은혜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사적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 아니고, 빈곤하고 곤궁한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 은혜들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그가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은 모두가 우리에게 무익,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까닭으로 그를 우리의 "머리"(엡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8:29)이라고 하였다. 또 우리 편에서는 그에게 "접붙임을" 받으며(롬 11:17),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고 하였다(갈 3:27). 이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기까지는 그가 가지신 것이,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것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서 제시된 것,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모든 사람이 무차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볼 때에 우리는 더 높은 견지에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 사리에 닿는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성령의 영원한 신성과 본질에 대해서 논술했다.1000)

여기서는 다만 이 한 가지 특별한 점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물과 피로 임하셔서" 성령으로 하여금 그에 관한 증거를 하시게 하셨다(요일 5:6-7 참조). 이것은 그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을 우리가 놓치지 않게 하시려는 의도이다. 하늘에 증거하시는 세 분이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 계신 것처럼, 땅에도 세 증거자, 즉, 물과 피와 성령이 있다(요일 5:7-8 참조). "성령의 증거"란 말이 되풀이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 증거가 우리의 마음속에 인(印)과 같이 새겨진 것으로 느끼며 그 결과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한 깨끗케 하심과 희생을 우리 마음에 인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하기를 신자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했다(벧전 1:2). 이런 말로써 베드로가 설명하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신 것이 허사로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신비롭게 물을 뿌려 우리의 영혼을 깨끗이 씻으신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바울은 깨끗이 씻는 일과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 말할 때에 이 두 가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된다고 한다(고전 6:11).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시는 띠는 성령이다. 그리스도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데 대해서 II권에서 우리가 가르친 것도 이것과 관련된다.1001)

2.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또 무슨 이유로 성령을 받으셨는가?

연구할 가치가 많은 이 문제를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성령을 받으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분리시켜 영원한 기업의 소망을 바라보는 무리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고 부른다(살후 2:13, 벧전 1:2, 롬 1:4). 이는 성령이 인간과 그 밖의 생물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힘으로 우리를 살리며 영양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생명의 뿌리와 씨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실 때가 있으리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극찬하였다. 요엘서에 특히 주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욜 2:28). 여기에서 예언자는 영의 선물을 예언자의 직분에 제한하는 것 같으나, 그가 이 비유로 알리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나타내심으로써 지금까지 하늘의 교리를 모르던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특히 성령을 아주 충만하게 주셔서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를 나눠주는 수종자와 청지기로 삼으셨다. 그래서 성령을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며,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1002)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롬 8:9). 여기에서 바울은 완전한 새롭게 함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롬 8:11).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사들로 인하여 찬양을 아버지께 돌리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똑같은 권한을 돌리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영의 선물들은 그리스도께서 맡아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목마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신다(요 7:37).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각 사람에게 성령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또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같은 영으로 하나님과 결합되셨을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권능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오신 것은 허사였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를 "둘째 아담"이라고, 곧 "살려주는 영"으로서(고전 15:45) 하늘에서 보내어진 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백성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어넣으시는 이 독특한 생명을1003) 바울은 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연적인 생명과 대조시킨다. 또 그는 신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원하는 동시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기를 간구한다(고후 13:13). 성령과 교통하심이 없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 바울은 또한 다른 구절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한 내용과 일치한다(롬 5:5).

3. 성경에 있는 성령의 명칭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그것을 완전하게 새롭게 하심을 논할 때에, 성경에서 성령을 어떤 칭호로 부르느냐는 것을 주목해 보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우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그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은 "양자의 영"이라고 불려진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하신다. 사실 그는 기도할 말까지도 알려주셔서 우리가 대담하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신다(롬 8:15, 갈 4:6).

똑같은 이유로 성령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印)"이라고 불려진다(고후 1:22, 엡 1:14 참조). 즉, 성령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같으며 죽은 자들과 같은 우리에게 성령은 하늘로부터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로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또 성령은 의로 말미암는 "생명"이라고 한다(롬 8:10 참조).

성령은 은밀한 중에 물을 주어 우리의 의의 싹을 돋게 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자주 "물"이라고 불렀으며, 이사야서에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 "내가 갈(渴)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3)라고 하였다."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는 구절을 인용한1004)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와 잘 일치된다. 성령은 깨끗이 씻으며 정하게 하시는 힘이 있으므로 물이라고 불리워지는 때도 있지만, 에스겔서에서 주께서는 "맑은 물"을 약속하시며 그 물로 백성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겠다고 하신다(겔 36:25).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시냇물같이 부으시고 그들의 생기를 회복하며 강하게 키우시기 때문에 "기름"과 "기름 부음"이라는 이름을 얻으셨다(요일 2:20, 27).

반면에 성령께서는 꾸준히 우리의 사악하고 무절제한 육욕을 태워버리시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렬한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시기 때문에1005) 우리에게 이러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때 성령을 "불"이라고(눅 3:16)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은 모든 하늘의 은사가 우리에게 흘러오게 하는 근원이 되는 "샘물"이며(요 4:14),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행사하시는 "주의 손"(행 11:21)으로 묘사되었다. 성령께서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으시므로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안에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성령의 은혜의 열매이다. 성령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어두운 마음과 사악한 마음뿐이다(갈 5:19-21 참조).

이미 앞에서 분명히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의 믿음이 성령께 몰두하게 되기까지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 분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우리의 밖에 계신 분실로, 우리에게서 먼 분으로 보기 때문에1006) 이를테면 그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분이 되고 만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머리"로(엡 4:15) 모신 사람들에게만 유익을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고(롬 8:29),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만이(갈 3:27) 그의 은혜를 입는다. 이와 같은 연합함이 있어야만, 적어도 우리의 입장에서 구세주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무익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우리가 그의 살 중의 살이 되며 그의 뼈 중의 뼈가 되어 그와 하나가 되는 저 거룩한 결혼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엡 5:3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만 우리와 결합하신다.

같은 성령의 은혜와 힘에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그의 아래 두시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다.

4.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믿음

그러나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이다. 그래서 보통 성령의 능력과 역사를 표현하는 말들은 대체적로 믿음과 관련이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부여되고, 이 사람들은 혈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요 1:12-13) 하나님과 혈육을 대조시키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불신앙으로 살았을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은혜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뜻이다(마 16:17).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1007) 이미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할 뿐이다. 에베소 신자들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엡 1:13) 한 바울의 말도 같은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성령을 우리 속에 계시는 선생이라고 가르친다. 이 선생의 노력으로 구원의 약속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며, 성령의 노력이 없으면 이 약속은 헛되이 우리의 귀를 스치고 지나갈 뿐이라고 한다. 또 바울은 같은 뜻으로, 데살로니가 신자들도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고 말한다(살후 2:13). 바울은 여기서 믿음의 근원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왔다고 간단히 일깨워주고 있다. 요한의 설명은 보다 더 명백하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 :24).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요일 4:13) 한 말도 같은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진리의 영"을(요 14:17) 제자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이 하늘의 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성령의 중심되는 사명으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들을 모두 생각나게 하는 일을 지정하셨다. 분별의 영이(욥 20:3) 마음의 눈을 뜨게 하지 않는다면 빛이 눈먼 자에게 비쳐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나라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주는 열쇠라고 불리워지며(계 3:7 참조), 성령의 비춰 주심이 곧 우리의 예리한 통찰력이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바울이 성령의 직분을(고후 3:6) 높이 평가하는 것은 만일 내적 교사이신1008)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가 주신 사람들을 그의 영으로 자신에게 이끌지 않으신다면(요 6:44, 12:32, 17 :6 참조) 교사들이 아무리 외쳐도 무익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따라서 우리도 그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과 불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시며"(눅 3:16), 그의 복음을 믿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 피조물이 되도록 하신다(고후 5:17 참조). 그리고 우리에게서 세상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고, 깨끗하게 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신다(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21 참조).

제 2 장  믿음 : 믿음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설명

(믿음의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다. 1)

1.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믿음에 관한 정의를 보다 명확히 제시한1009) 후에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믿음의 힘과 성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에1010) 설명한 것을 회고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율법으로 정하셨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어느 부분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율법에 있는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선언이 우리 위에 내릴 것이다.

둘째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이르기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보며 우리가 당해야 할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좋은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이런 비참한 재난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해방의 수단은 다만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구속자, 즉,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로 하셨다. 다만 한 조건은 우리가 견고한 믿음으로 이러한 자비를 받아들이며 꾸준한 희망으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기로 정하신 사람들은 이 믿음에 의해서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런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신념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현재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진정한 성격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검토하고 더욱 열성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실제로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1011) 보통으로 찬성한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그보다 더 깊은 무엇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사실 여러 학파들이 믿음을 논할 때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며,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1012) 허무한 공상을 통해 가련한 영혼들을 확정된 목표로 이끌지를 못하고 도리어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 6: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셔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요 8:12)이라고 하시고 다른데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신다(요 14:6).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시 36:9) 가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다(요 14:6).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시며, 그 다음에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신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눅 10:22). 이 일을 근거로 바울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고전 2:2).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21절) 증거했노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다.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7-18).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인다고 증언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며 그 지식이 우리에게 비친다고 하였다(고후 4:6).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여기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 즉,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 있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는다면1013)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멀리 숨어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계시하시려는 모든 것을 독생자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은혜를 전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진정한 형상을 표현하게 하셨다(히 1:3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분발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바 있다.1014) 이와 같이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오직 그 형상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훌륭한 말을 했다. 그는 믿음의 목표를 논할 때에 우리는 가려는 곳과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이어 모든 과오에 대해서 가장 견고한 방비를 갖춘 길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그분이라고 한다. 즉,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되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될 뿐이다.1015)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가 믿음의 안정성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 그 믿음에 대해서 자기가 그렇게 자꾸 역설한 점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벧전 1:21)하면서 양쪽을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한다.

(믿음은 지식을 내포한다. 참된 교리를 맹신이라는 스콜라의 사고는 흐리게 한다. 2-5)

2. 믿음은 방자한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있다

이 해독에 대한 책임은 다른 무수한 해독의 경우처럼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베일을 씌워 그를 숨겼다. 만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직시하지 않으면 끝없는 미로를 헤맬 것이다.

그들은 모호한 정의로 믿음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며 거의 말살할 뿐 아니라 "맹신"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비할 데 없이 엄청난 유치한 무지를 이러한 허구로 장식함으로써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을 속여 멸망하게 만든다.1016) 더 나아가, 문제의 진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허구는 진정한 믿음을 파묻을 뿐 아니라 완전히 파멸시킨다. 우리의 감정을 공손하게 교회에 복종시키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이른바 믿는다는 것인가?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knowledge)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질문하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이 성립됐기 때문에(고후 5:18-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교회에 굴복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할 때에(롬 10:10), 사도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맹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의 의의 근거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인정하라고(explicit recognition; 이해에 입각한 신앙) 요구한다.

3. 로마 교회의 "맹신"이라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우리는 무지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우리가 지금 안다는 것은 대개 함축적인 것이며, 우리가 육(肉)의 짐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갈 때까지 그대로 혼돈하리라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판단을 보류하고 교회와의 단결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요 17:3),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이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 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교리"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믿음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1017)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는데 시간을 더 보내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우리의 교리를 비교하도록 독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진리 자체는 명백하므로 자연히 그들을 충분히 또 쉽게 논박할 것이다. 그들은 무지의 많은 잔재에 믿음이 둘러싸여1018)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올바른 신자라고 부른다. 즉, 자기의 무지로 마비된 사람을 심지어 자기의 무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자기가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교회의 권위와 판단에 찬성하기만 하면 올바른 신자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믿음에는 이해가 따른다는 성경의 한결같은 교훈을 모르는 생각이다.

4. 올바른 믿음조차도 항상 오류와 불신앙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서 살고 있는 동안에 맹신이란 것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과 가리워진 것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오류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고요히 또 겸손하게 계속 노력하여 더욱 전진하는 것이다.1019) 그러므로 바울도 신자들에게 하는 권고에서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는 계시를 기다리라고 한다(빌 3:15). 육신을 벗어버리기까지는 원하는 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체험적으로 분명히 배우는 교훈이다. 평소에 매일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아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굴레로 우리를 일정한 한도 내에 제어하시며,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정하셔서(롬 12:3), 가장 훌륭한 교사라도 항상 배우겠다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들은 이와 같은 맹신의 분명한 본보기였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머뭇거리며, 가장 초보적인 진리조차 맛보기 어려웠다. 또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면서도 이해하는 점에서는 거의 진보가 없었다. 사실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지만, 주의 부활이 꿈같이 느껴질 뿐이었다(눅 24:11- 12, 요 20:8 참조). 그리스도께서 예전에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셨으므로 이때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참으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의 열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 살아날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도록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진실하신 분으로 믿은 이의 말씀을 여인들은 믿기는 했으나, 무지가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그들의 믿음을 암흑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아연실색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보고 그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스스로 발견한 후에 드디어 믿었다고 했다.

그때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숨은 믿음의 씨가 죽은 듯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씨가 그때에 새로운 힘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유일한 스승으로 존경하며 마음속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이, 그러나 아직 맹목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아 그분께서 자기들의 구주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을 하늘로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증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신앙에는 항상 불신앙이 섞여 있다는 것으로 증명은 충분하다.

5. 믿음의 필수적 선행으로 "맹신"

엄격하게 말해서 아직 신앙의 준비 상태에 불과한 믿음도 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서를 보면 복음의 교훈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기적에만 놀라서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공경하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공경하는 태도를 "신앙"이라는 훌륭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시초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은 왕의 신하는1020)(요 4:50) 집에 돌아가서 다시 믿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한다(요 4:53).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여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가 교훈을 잘 받는 사람, 언제든지 배우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구절에서 그가 믿노라고 한 것은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믿음이었으나, 둘째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들어간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요한복음에 있는 비슷한 예를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모여들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은 후에 여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요 4:42). 이런 예들을 보면 아직 초보적 지식은 없을지라도 듣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불리웠다. 물론 정확한 의미는 아니나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경건한 마음 자세에 이런 위대한 영예를 주시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이 태도와 배우려는 이 욕망은 교환주의자들이 조작한 "맹신"으로 만족하는 저 나태한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그 전적 무지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을(딤후 3:7) 엄중히 책망하는데, 하물며 완전한 무지를 계획적으로 택하는 자들은 얼마나 더 큰 수치를 당해야 할 것인가 !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와 믿음의 간단한 정의. 6-7)

6.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아버지께서 제시하시는 그리스도, 즉, 자신의 복음으로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이 도착할 목표를 지정하신 것같이 복음이 우리를 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로 가는 바른 길을 걸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서는 확실히 은혜의 보고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만일 그 은총의 보고가 닫혀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가르침을 불가분리의 동반자로 서로 결합시키며,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채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한다(엡 4:20-21).

그러나 믿음을 복음에 제한할 때에 복음을 구성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에서 그리스도가 더욱 완전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가르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딤전 4:6 참조).

이런 이유로 그는 다른 구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말한다(롬 10:4, 갈 3:25 참조).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고 특별한 가르침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이 되신 후에, 아버지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실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 더 쉽고 더 적당한 방법일 것이다. 우선 우리는 믿음과 말씀 사이에 영속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선포하신다(사 55:3). 요한은 이와 같은 믿음의 원천을 보여주려고,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라고 말했다. 예언자도 백성이 믿도록 충고하기 위해서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시 95:7)고 한다. "듣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자녀들과 외부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표지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을 가르치셔서(사 54:13, 요 6:45)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도록(요 6:45 참조)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은혜를 무분별하게 주신다면 왜 그분께서는 말씀을 소수 사람들에게 보내셨을까? 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보통 "신자"와 "제자"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사용하며 9장 36절에서는 한 여인에게까지 이 칭호를 적용한다(행 6:1-2, 7, 9:1,10,19,25-26,38, 11:26,29, 13:52, 14:20,28, 15:10,16-21).

그러므로 만일 믿음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이 목표로부터 조금이라도 방향이 달라진다면 그 믿음은 본성을 지키지 못한다. 그것은 불안하고 경박한 믿음과 막연히 오류를 믿는 심리 상태가 된다.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서 믿음이 배태되게 하는데 말씀을 심는 사람의 봉사가 필요한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할 것이다.1021) 그러나 말씀 자체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든 간에 거울과 같고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 간에 자신에게로 이끄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고 정의하며(롬 1:5),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충성한 것을 칭찬한다(빌 1:3-5, 살전 2:13 참조). 믿음의 뜻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1022)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 특히 이 점이문제이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하신가 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해서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의 말씀에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식의 근거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먼저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어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말씀의 권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며 약하거나 전혀 없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진실하시며(롬 3:3 참조),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딛 1:2 참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불가침의 진리라고1023) 확신해야 한다.

7.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약속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이 모두다 인간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때 믿음이 말씀 안에서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창 2:17).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것이었다(창 4:10).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결코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그 자체만으로는 믿음을 흔들리게 할 뿐이다. 우선 믿음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떻게, 무엇을 말하든지 하나님의 진실성을 지지하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묻는 것은 믿음은 주의 말씀에서 무엇을 발견하여 거기 의존하며 안주하는가1024) 라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진노와 징벌만을 깨닫는다면, 믿음은 어떻게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또는 그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피해서는 안되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아직 믿음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얻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믿음이라고 간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나 자비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식은 종종 슬프며 그 뜻이 선포될 때에 놀라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믿음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그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시며 염려하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이 사실이 우리에게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시다고 우리에게 증언할 수 있는 약속 곧 은혜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서는 안식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시편에서는 대개 자비와 진실을 서로 관련된 것같이 짝을 짓는다(시 89:14, 24, 92:2, 98:3, 100:5, 108:4, 115:1 등).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그 진실하심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의 자비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011),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시 36:5),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7:2, 라틴 역 116:2), "내가…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시 138:2).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는 예언서의 말씀들은 인용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시며 우리를 먼저 부르셔서 그의 뜻이 의심스럽거나 모호하지 않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편에서 그는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신다고 단정하는 것은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유일한 보증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미움과 진노의 표징이 각처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선하심을 의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게 중요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이 섞인 이해는 제거해야 한다. 그런 이해는 자체 내에 조화가 없고 자신과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거나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도 계속해서 주저함으로 흔들려서 확신 안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며 우리의 마음을 강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얻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를 할 수 있겠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을 근거로 두고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믿음"이란 용어에 대한 여러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들. 8-13)

8. "형식을 갖춘" 신앙과 "형식을 갖추지 않은" 신앙

더 나아가기 전에 독자들에게 방해물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난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우리는 소위 학파들이 문제 삼는 형성된 신앙과 미형성된 신앙이라는 무가치한 구별을1025) 논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며 경건한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구원에 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믿음을 일으키심으로써 우리의 양자됨을 증거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없는 자들의 신념을 감히 "신앙"이란 이름으로 장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가 반대한다. 우리는 이 이상 더 그들의 정의를 논박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앙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기 보다 무지하고 미련하게 떠들고만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는 이미 부분적으로는 말했고,1026) 남은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적당한 곳에서 말하겠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허구같이 어리석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과 동의를 동일시하며,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도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동의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1027) 그러나 그들은 먼저 알아야 할 일을 모르고 있다. 즉,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 것인지, 혹은 성령께서 신앙을 통해서 사람이 양자가 된 것을 증거하시는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에 어떤 속성이 첨가될 때에 그것이 같은 신앙인지, 또는 새것이며 다른 것인지를 물으면서 유치하게 떠든다. 그들이 이렇게 떠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성령의 독특한 선물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믿음은 그 시초에서 화해를 내포하는 것이며 이 화해에 의해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고 한 바울의 말을 숙고한다면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 냉담한 성격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이 논쟁을 종결시키는 데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암시했고 앞으로 더 자세히 되풀이하려는 그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이다. 즉, 문제된 찬동 그 자체는 두뇌에 속했다기보다 마음에 속했으며, 지성보다 감성에 속했다는 것이다.1028) 그러므로 그것은 "믿어 순종"하는 것으로 불리우며(롬 1:5), 주께서도 이 이외의 복종은 원하시지 않으셨다. 자신의 진실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연하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같이(요 3:33), 신자들은 그들이 마치 서명 날인하듯 이 진리에 인(印)을 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경건한 성향이 동의하는 것에 첨가될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1029) 하는 그들의 말이 우매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단정한다. 동의하는 것까지도 이런 경건한 성향을 근거로 삼는다.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동의함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명백한 논거가 있다. 믿음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므로(요 6:29 참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죄의 용서와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보내지셨을 뿐 아니라 성결을 위해서(고전 1:30 참조), 그리고 생명수의 원천으로서(요 7:38, 4:14 참조)보내지셨으므로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화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좀더 쉽게 표현을 한다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을 경건한 성향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9. 고린도전서 13:2 - 형성된 신앙과 미형성된 신앙의 차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한(고전 13:2) 바울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역설한다. 그들은 믿음에서 사랑을 제거함으로써 믿음을 기형으로 만들며 이 구절에서 바울이 "믿음"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를1030)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앞장에서 성령의 각종 은사를 방언과 능력과 예언 등을(고전 12:4-10)논하고 고린도 교인들에 게 그들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여 교회 전체에 더 큰 유익을 주라고 권고한 다음에 이어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한다(고전 12:31). 이런 모든 은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사랑에 기초를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 은사들의 목적은 원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이 일에 이바지하지 못할 때에는 은사의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앞에서 열거한 은혜의 은사들을 다른 이름으로 반복 열거하면서 설명을 덧붙인다. 그뿐 아니라 그는 "능력"과 "믿음"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즉,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능력 또는 믿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며, 방언과 예언과 기타 은혜들과 같이 불경건한 사람이 이 믿음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악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사랑에서 분리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오류에 빠진 근본 원인은 "믿음"의 뜻이 여러 가지라는 데 있다.1031) 그들은 믿음이 의미하는 것의 차이를 보려 하지 않고 이 말이 마치 어디서나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것으로 논하였다. 그들이 똑같은 오류를 지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야고보서의 구절에(약 2:21)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 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적 목적을 위하여 믿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불신자들 사이에 하나님께 대한 어떤 종류의 지식이 있는가를 밝혀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믿음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복음서의 이야기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진리로 생각한다. 이런 판단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우리가 직접 목격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보통 가지는 판단과 그 성질이 동일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논의할 여지가 없는 신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에 다소의 충격을 느낀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인 불경한 태도로 공격하거나 거부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복종하는 체하는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말 하지만 이것은 그 말을 잘못 사용하는1032) 것이다.

10. 형식을 갖추지 않은 신앙은 오직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서 믿음의 그림자나 외형에 불과하며 믿음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이런 그림자와 믿음의 견고한 실재와는 서로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것은 더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지적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고 하지만(행 8:13), 그는 조금 후에 불신앙을 드러냈다(행 8:18). 그가 믿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석한다. 그들은 시몬이 마음에 없는 믿음을 말로만 믿는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시몬은 복음의 존엄성에 압도되어 일종의 믿음을 보이며, 그리스도를 생명과 구원의 원천으로 친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는 잠시 동안 믿다가(눅 8:13),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기 전에 기운이 막혀버리거나, 심지어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즉시 시들어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눅 8:6-7).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약간 맛보고는 더욱 욕심이 나서 말씀을 움켜 붙잡으며 그 거룩한 힘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자기 생각에도 믿는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보이는 존경이 곧 경건이라고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경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동의는 어떤 종류이든 간에 마음속까지 침투하지 못하며 정착하지 못한다. 뿌리를 내리는 것같이 보이는 때도 있으나 그것은 살아있는 뿌리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허영심이 숨을 틈이 많으며 거짓이 잠복할 공간이 많다. 그것은 거짓의 위선으로 장식되어 스스로 기만하는 때도 많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그림자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마귀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마귀들도 믿고 떠는 일들을(약 2:19) 듣고 이해한다고 하나 우둔하여서 마귀들보다도 훨씬 열등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든 간에 결국은 공포와 절망에 빠지고 만다는 점에서 마귀들과 같다.

11.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는가?

바울은 믿음을 선택의 결과라고 했는데(살전 1:4-5),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 믿음의 광명을 받으며 복음의 힘을 느끼지만 버림받은 사람들도 때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거의 같은 감동을 가지며,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전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행 13:48 참조). 그러므로 사도가 버림받은 자들도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고 한 것이나(히 6:4-6),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일시적으로 믿는다고 하신 것은(눅 8:13)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빛을 굳게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며 변명할 여지를 주시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양자로 삼는 영은1033) 받지 못하더라도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이 양자가 된다는 확신을 가질 근거가 없지 않느냐고 어떤 사람이 항의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과 일시적인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유사점이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바울이 칭송한 확신, 즉, 높은 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갈 4:6, 롬 8:15 참조) 부르는 확신이 풍성하게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사람들만을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나게 하시며(벧전 1:23), 그 마음에 심으신 생명의 씨가 결코 죽지 않게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양자로 삼으시는 선물을 그 마음에 확실하게 인치시고 항상 또 확실히 존속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보다 낮은 정도의 작용을 하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신자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도 겸손하게 자기반성을 하며, 육의 확신이 들어와서 믿음의 확신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하라고 가르치신다. 이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혼돈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그것의 견고한 실체보다 그림자를 파악할 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령께서는 선택된 사람들에 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죄의 용서를 확인시켜 주시며 이 사람들이 특별한 믿음으로 그 용서를 잘 활용 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는 그들도 비록 혼란하며 불분명하면서도 화해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동일하게 믿음이나 중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위선의 가면을 쓰고 동일한 믿음의 시초를 가진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인식할 만한 광명을 그들의 마음에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식과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증거를 서로 구별하시므로 그들에게서는 그 인식이 완전한 결실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들을 참으로 죽음에서 구출해 그의 보호 하에 두시지는 않고, 다만 임시로 자비를 보이실 뿐이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믿음의 산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 주신다(마 24:13). 그러므로 반대주장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은혜를 보이신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그의 은혜에 대한 일시적인 인식을 후에 사라지고 마는 인식으로 조명하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2. 참 믿음과 거짓된 믿음

또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지식과 그 자비의 진실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지만, 하나님의사랑에 대한 인식이 세속적인 일들 때문에 소멸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인식은 믿음에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으며, 그 분의 진실하심에는 언제나 자기모순이 전혀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이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락하는 비밀의 계시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 계시를 통찰하고 마침내 그것에 도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을 그대로 이해한다거나 그 뜻의 진실성을 꾸준히 믿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오직 일시적인 인식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뿌리를 내릴 정도로 깊이 심지 못한 나무에 비할 수 있는데, 그런 나무는 몇 해 동안 꽃과 잎 뿐 아니라 열매까지도 열릴 수 있으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린다. 요약하면 첫 사람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말살된 것같이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들을 은총의 빛으로 비추시다가 후에 빛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아는 지식으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감동시키시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마음에 깊이 스며들게 하시는 것을 무엇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다. 동시에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곧 선택된 사람들의 믿음이 아무리 부족하고 약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위해 그들이 양자가 되었다고 하는 확실한 보증과 날인을 해주심으로써(엡 1:14, 고후 1:22 참조) 그분이 새겨두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말소되지 않지만 사악한 사람들 위에 비치는 빛은 후에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씨에 대해서는 선택된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며 그 씨를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을 거짓되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사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때가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 서로 사랑하겠다는 감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상 경험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경건한 충동이 왕성한 때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 같으신 분으로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하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삼상 9-11장).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신념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처럼 행동한다. 사랑의 영은 그리스도께만 주어졌고, 그 조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그 사랑의 영을 불어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한 말은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확신(갈 4:6 참조), 곧 위에서 말한 그 확신을 일으키는 사랑을 의미한다.1034)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면서도 그들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분노하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느낌으로써 놀라서 육적인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며, 나태를 버리고 분발하여 회개하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나 그들의 죄에 대해서 노하시며, 동시에 자비를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기도하며, 동시에 고요한 확신을 가지고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에게로 피한다. 이런 증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이 없기도 하거니와 믿음이 있는 체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충동적인 열성에 휩쓸려 그릇된 의견을 품게 되며 자신을 속인다. 확실히 이런 사람들은 심히 태만하여 올바르게 자기의 마음을 검토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 하셨다"(요 2:24-25)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일시적인 신앙과 살아 있는 영구적인 신앙 사이에 유사점이 많으므로 나는 그것을 "공통" 신앙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런 공통 신앙에서 낙오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 안에서 전진하라고 권면하시며, 나태함으로 인해서 이미 받은 빛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였으며(딛 1:1), 사라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산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라고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사람을 조롱하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야비한 것이다. 기만적인 구실로 믿음을 모독하는 이런 종류의 불경한 사람들을 야고보는 맹렬히 공격한다(약 2:14-16) 자기에게 없는 것을 담대하게 자랑하며, 공허한 겉치레로 남과 자기까지 속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딤전 1:5). 그러므로 그는 선한 양심을 믿음을 보관하는 상자에 비교한다. 이는 선한 양심을 버렸으므로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딤전 1:19, 3:9 참조).

13.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란 말의 뜻이 애매모호함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앞에 인용한 구절에서와 같이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훈만을1035) 의미하는 때가 많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집사들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딤전 3:9) 가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같은 뜻으로 그는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딤전 4:1).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디모데가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6 참조)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이 많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라 하고(딤전 6:20-21, 딤후 2:16 참조), 다른 곳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라고 불렀다(딤후 3:8). 그가 디도에게 그들을 꾸짖어(딛 1:13)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하라고 명령할 때에(딛 2:2 참조), "온전"이란 말은 단순히 순수한 교훈을 의미하며, 이 교훈이 경박한 인간성에 의해 쉽게 부패하고 타락된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골 2:3) 있으므로 믿음을 거룩한 교훈의 전체에 확대하는 것은 옳으며, 믿음을 거룩한 교훈에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음을 어떤 특별한 대상에 국한시키는 때가 있다. 예컨대 마태에 의하면 기와지붕을 뜯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그리스도께서 보셨다고 한다(마 9:2). 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백부장의 믿음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감탄하셨다(마 8:10). 그러나 그 백부장은 아들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요 4:47이하 참조), 아들을 고쳐야겠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승낙과 대답만을 얻고도 만족했고, 친히 와 달라고 간청하지는 않았다. 이 사정을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조금 전에1036) 우리는 바울이 "믿음"을 기적을 행하는 은사로 본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 되지 않았고 하나님을 열렬하게 경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는 교훈과 믿음을 동일시한다. 믿음이 사라질 것이라고(고전 13:10, 롬 4:14 참조) 기록할 때에 그는 확실히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이 사역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이런 표현법에는 비슷한 예가 담겨져 있다. 거짓된 고백이나 거짓된 표시를 "믿음"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나 이 그릇된 적용이1037) 악하고 타락한 종교를 "하나님을 경외함"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사마리아와 부근 지역에 이주시킨 이방 민족들이 거짓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함께 경외했다는 말씀이 성경에 자주 나온다(왕하 17:24-41). 이것은 그들이 하늘과 땅을 혼합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묻는 것은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기도하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며,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한다. 나는 믿음의 성격과 힘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제 7 절에 있는 믿음의 정의에 무엇을 암시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검토 : 지식의 요소. 14-15)

14. 믿음은 보다 차원 높은 지식이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정의의 각 부분들을 다시 검토하기로 하자. 그 정의를 자세히 검토하고 나면 아무 의심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다. 믿음은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려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마음은 믿음에 도달한 때라도 그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에는 그 신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자체의 능력으로 지각한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힘이라고 바울은 아름답게 묘사한다(엡 3:18-19 참조). 그가 말하는 뜻은 우리의 마음이 믿음에 의해서 얻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무한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모든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뜻의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주께서는 그 비밀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다(골 1:26, 2:2 참조). 그러므로 믿음을 자주 "인식"이라고1038) 부르며(엡 1:17, 4:13, 골 1:9, 3:10, 딤전 2:4, 딛 1:1, 몬 1: 6, 벧후 2:21), 요한은 믿음을 "지식"이라고1039) 부르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요한은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고 언급한다(요일 3:2). 또 그들은 확실히 이 일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다기보다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더욱더 강화된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밝힌다. "우리가…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6-7). 이런 말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아는 일들은 우리 앞에 있지 않고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고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15. 믿음은 확신을 내포한다

우리는 확신의 더욱 견실한 항구성을 표현하기 위해 "확실하고 견실한"이라는 말을 첨가한다. 믿음은 의심스럽고 변하기 쉬운 견해로 만족하지 않으며, 모호하고 혼돈된 관념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믿음은 완전하고 확정된 확실성을 요구한다. 이런 확실성은우리가 어떤 일을 체험했을 때와 증명했을 때에도 경험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불신앙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우리는 불신앙으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기 때문에, 각각 어려운 투쟁을 겪지 않고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마음으로 확신할 수 없다. 특히 현실생활과 부딪힐 때에 사람은 모두 흔들리며 그 숨은 약점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뛰어난 칭호를 사용하여 그 권위를 높이시는 것은 당연하다. 성령의 의도는 내가 언급한 병을 고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게 하시려는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시 12:6)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시 18:30)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솔로몬도 바로 이 생각을 거의 같은 말로 확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잠 30:5). 그러나 시편 119편은 거의 전체가 이 점을 증명하므로 다른 구절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권하실 때마다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앙을 책망하신다. 우리의 심정에서 사악한 의혹을 일체 근절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도 거의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완전히 확신하는 듯하면서도 그 선하심을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국한시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인지를 의심하며, 비참한 불안에 눌려 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위대하며 풍성한 것과 많은 사람이 그 자비를 받은 것과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비가 자기들에게도 임할까 또는 자기들이 그 자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이 추리를 도중에서 그치면 그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에 힘과 확고한 평안을 주지 못하고 불안한 의심으로 괴롭힌다.

그러나 이와 훨씬 다른 완전한 확신을1040) 느낄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런 확신은 항상 신앙에서 기인된다고 한다. 우리들을 위하여 명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은 이 믿음이다(골 2:2, 살전 1:5, 히 6:11, 10:2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의 감미로움을 우리가 참으로 느끼며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확신이 생길 수 없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에서 확신이1041)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1042) 생긴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고 하였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가 평온한 마음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거기는 바른 믿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담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확신하는 데서만 생길 수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란 말은 확신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믿음의 확실성과 두려움과의 관계. 16-28)

16. 믿음의 확실성

사실 믿음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자비의 약속은 우리의 외부에서만 타당하고 우리의 내부에서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 약속을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화평"이라고 부르는 확신이 드디어 생긴다(롬 5:1). 혹은 화평을 확신에서 온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화평은 일종의 확신이며, 이 확신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양심을 평온하며 평화롭게 만든다. 이 확신이 없으면 양심은 늘 놀라며, 그 혼란과 고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분오열의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과 자기를 잊어버리고 잠시 잠이 드는 때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참으로 일시적인 망각이며, 이 가련한 망각도 얼마 가지 못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이 되살아나서 양심을 찢으며 고통을 가한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해서 인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 아버지시며 그 분의 관용을 근거로 삼아 모든 일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신자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들을 신뢰하며 의심 없이 구원을 굳게 바란다. 사도는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히 3:7)이라는 말로 이 점을 밝힌다. 그래서 사도의 생각으로는 천국의 유업을 확신 있게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주를 올바르게 신뢰한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마귀와 사망을 자신 있게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니면 신자가 아니다. 바울의 간략하고 능숙한 요약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고백하였다(롬 8:38-39). 그러므로 같은 방식으로 사도는 부름 받은 우리가 얻을 영원한 기업의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의 눈이 올바로 조명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엡 1:18). 바울은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암시를 가르친다. 즉,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그것에 대한 큰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7. 시험에 맞서 투쟁하는 믿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자들의 경험은 매우 다르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자주 임하는 불안으로 시련을 받을 뿐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 흔들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시험은 너무도 강렬하여 믿음의 확실성과는 조화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위에서 말한 주장을 지지하려면 이 난제를 해결해야겠다. 확실히 우리는 한편으로 믿음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의심의 기미가 없는 확증이나 불안의 습격을 받지 않는 확신을 상상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신자들이 자기의 불신앙과 부단히 싸운다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우리는 신자들의 양심이 아무런 동요도 없는 평화로운 안식을 누린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들이 어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얻은 그 확실한 신념에서 떨어지거나 떠나게 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경에는 다윗의 믿음보다 더 뛰어나거나 또는 기억에 남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우리가 그의 생애 전체를 바라볼 때 그러한 인상을 받는다. 다윗은 자기의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는 탄식을 무수히 말했는데 그런 탄식의 예를 몇 개만 들겠다. 그는 감정이 불안해하는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비난할 때에 자기의 불신앙에 대해서 어찌 분노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시 42:5, 11, 43:5). 확실히 놀라며 당황한다는 것은 불신앙의 명백한 징조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데서 우리는 더 완전한 고백을 읽는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시 31:22). 다른 구절에서 그는 불안하고 비참한 혼란 중에서 자기 자신과 논쟁을 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까지 언쟁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시 77:9, 7). 그 다음에 있는 말은 더욱 심하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시 77:10). 그는 절망에 빠져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로 인정하며 자기가 회의로 고통하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마치 투쟁에서 쓰러진 것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한때 자기를 도와주시던 그의 손을 돌려 자기를 멸망시키려 하신다. 그래서 그는 심한 풍랑에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그 평안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시 116:7).

그러나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 모든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은 신자들의 마음을 지켜주며, 그 효력에 있어서는 참으로 종려나무와 같다(시 92:12). 종려나무는 모든 짐과 싸우면서도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그래서 다윗은 압도된 듯이 보일 때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서 일어섰다. 자신의 무력과 싸우며 불안한 순간에도 믿음을 잡으려고 매진하는 사람은 이미 총체적으로 승리를 얻었다. 이런 추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말씀은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27:14)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 말씀에서 겁이 많은 자신을 드러내며, 같은 생각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안스런 감정에 자주 붙잡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에 불안을 느낄 뿐 아니라 그 결점을 고치려고 정성껏 노력한다.

만일 다윗과 아하스를 공평하게 비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큰 차이를 발견할 것이다. 이 악하고 위선적인 왕에게 이사야가 파견되어 그의 불안을 고치려 하였다. 이사야는 왕을 향하여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고 말했다(사 7:4). 아람(Ahaz) 왕은 어떠하다고 했는가? 그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는 말이 위에 기록되었다(사 7:2). 그래서 그는 약속을 듣고도 여전히 떨고 있다. 그러므로 불신앙에 대한 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가 들어갈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떨다가 드디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무거운 시험에 눌리며 거의 뭉개질 정도가 되더라도 끊임없이 일어선다. 거기에 어려움과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마음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예언자와 함께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시 119:43).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마치 그들의 믿음이 쓰러진 것처럼 그들은 간혹 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싸움을 계속한다. 그리고 기도로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하여 해이한 생활로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18.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갈등

이 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1043) 언급한 영과 육의 분열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 분열은 여기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경건한 사람은 속마음에 분열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낌으로 감미로운 느낌이 일부에 스며들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재난의 쓴맛을 알고 슬퍼한다. 한편에서는 복음의 약속을 믿고 안심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죄를 알고 공포에 떤다. 한편으로는 생명을 소망하여 기뻐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직시하고 전율한다. 이런 변동은 믿음이 불완전한 데서 생긴다. 현세 생활에서는 불신앙의 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신앙으로 충만하게 채우며 차지하는 행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긴다. 육의 잔재 속에 안주하는 불신앙이 마음 안에 배태된 신앙을 공격한다.

만일 신자의 마음에 확신과 의심이 섞여 있다면 우리가 돌아가는 결론은 언제나 이것이 아닌가? 즉, 믿음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막연하고 혼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에 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신앙의 책동으로 사면초가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불신앙의 밑 없는 수렁에 빠져버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얻어맞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갈등의 결말은 언제나 같다. 곤란한 문제들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듯하던 믿음이 결국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다.

19. 약한 믿음도 진실한 믿음이다

요컨대 처음에 지극히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곧 평화롭고 평온하고 우리에 대하여 은혜로우신 얼굴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먼데서 하나님을 보다 분명히 볼 수 있어서 우리가 결코 속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하므로1044) 더욱 꾸준하게 전진한다. 전진할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그리고 더 확실히 보게 된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조명될 때에 처음에는 많은 무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 무지는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어떤 일들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아는 것이 모호하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데에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이는 마음이 깨닫는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적이며 으뜸이 되는 부분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치 옥중에 갇혀서 반쯤 희미해진 햇빛이 좁은 창으로 비스듬히 비치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다. 그가 태양을 완전히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꾸준히 비치는 그 빛을 보며 그 은혜를 받는다. 이와 같이 아무리 짙은 암흑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육신의 쇠사슬에 매인 우리도 변하지 않는 확신을 가지기에 필요한 빛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그 찬란한 빛을 조금이라도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다.

20. 신앙의 약점과 장점

사도는 여러 구절에서 이 두 가지 점을 다 좋게 가르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12)라고 하며,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라고(고전 13:12)하면서 바울은 참으로 거룩한 지혜가 현세에 있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조금 밖에 부여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시사한다. 이 말씀들의 뜻은 우리가 육신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동안은 믿음이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불완전하므로 더욱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무한한 것은 우리의 부족한 척도로 측량할 수 없으며 우리의 좁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무언중에 가르친다. 바울은 교회 전체에 관해서도 이 점을 밝혀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은 자기의 무지가 장애와 방해물이 되어 그만큼 가까이 접근해야 할 곳까지 가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 같은 바울은 아주 적은 믿음이라도 그 순수한 맛을 확실히 맛볼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즉,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노출된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결과로 변화하여 주의 형상과 같이 된다고(고후 3:18) 바울은 언급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극도의 회의와 공포는 반드시 이런 무지에 둘러싸이게 된다. 그뿐 아니라 무수한 각종 시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양심이 죄의 짐에 눌려 혹은 불평하고 신음하며, 혹은 자책하며, 혹은 비밀히 중얼거리며, 혹은 노골적으로 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역경이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든지, 오는 양심이 스스로 자체 내에서 진노의 증명과 근거를 발견하든지 간에 불신앙은 여기서 무기와 계략을 삼아 신앙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공격하는 목적은 언제나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신 것같이 무서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21.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방패이다

믿음은 이런 공격을 견디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방위 태세를 강화한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 우리를 공격하며, 우리를 돌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라고 우리를 생각하게 할 때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지만 그의 고통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것이므로 그는 또한 자비로우시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불의를 벌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충격을 받을 때에 믿음은 여기에 대항해서 죄인이 주의 자비를 얻으려고 나아가기만 하면 주께서는 언제나 모든 불의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한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이 아무리 이상하게 번뇌와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확신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시험하며 괴롭히는 모든 싸움은 이 확신을 굳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심각한 압박을 받는 듯한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불평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전혀 들어주시지 않을 듯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만일 그에게서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기도할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적다고 그리스도의 꾸지람을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마 8:25-26). 실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실 때에 그들을 제자의 대열에서 축출하거나 불신자와 동일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 결점을 털어 버리라고 역설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한 말을 반복한다. 믿음의 뿌리는 신자의 가슴에서 결코 뽑히는 법이 없고 가장 깊은 속에 굳게 박혀 있어서 믿음이 아무리 흔들리고 전후좌우로 구부러지는 것 같아도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이를테면 적어도 잿더미 아래서도 잔존한다. 또 이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썩지 않는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과 똑같은 열매를 맺으며, 씨의 번식력은 결코 완전히 소멸되거나 죽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성도가 낙망하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목전의 사태로 보아서 그들이 파멸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의 희망은 원대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욥 13:15). 실상은 이러하다. 불신앙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지배력을 얻지 못하고 밖에서 공격을 가할 뿐이다. 불신앙의 무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다만 괴롭힐 뿐이며 혹은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것은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훈과 같이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다(엡 6:16). 이 방패를 들면 그것은 원수의 무기의 힘과 대항해서 완전히 물리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공격력을 약하게 만들며 우리의 급소를 찌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굳센 용사가 맹렬한 창의 공격을 받아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는 것과 같다. 그리고 믿음 자체가 상처를 입을 때 그것은 용사의 방패가 창에 맞아 터진 곳이 있지만 창에 꿰뚫리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은 항상 일어서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 23:4)고 다윗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사망의 음침한 곳을 다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굳센 신자라도 무서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곁에 계셔서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아 주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곧 사라지고 확신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악마가 아무리 위대한 계략으로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믿음이 거하는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상 결국 물러나고 만다.1045) 그래서 결과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자들은 모든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오며 새로운 힘을 얻은 후에는 곧 다시 전쟁터로 나아간다. 그뿐 아니라 요한이 편지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라고 한 말이 실현된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의 믿음은 한두 번 정도 전투에서만 또는 어떤 특수한 공격에 대해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천 번 공격을 당할지라도 전세계를 이길 것이라고 단정한다.

22. 옳은 두려움

"두렵고 떨림"에는(빌 2:12) 다른 종류도 있다. 이것은 믿음의 확실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 예를 보고 신자들이 그것을 자기들에 대한 경고로 생각하며 같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때에 신자들은 이런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진다. 또는 자신의 가련한 상태를 반성하여 전적으로 주를 의지할 줄 알게 되고, 주를 떠난 자신들은 어떤 바람보다도 불안정하며 덧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는 때에 신자들은 두렵고 떨림을 경험한다. 사도가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징벌을 일일이 묘사하는 이유는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이 같은 악행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고전 10:11). 사도는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확신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의 태만을 일깨울 뿐이다. 대개 육신의 태만으로 믿음은 강화되기보다는 파괴되는 편이 더 많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실패를 근거로 삼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롬 11:20)고 권고할 때에 그는 우리가 자신의 확고함에 자신이 없는 듯이 흔들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의도는 우리의 교만을 없애며 우리가 자신의 힘을 경솔하게 과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후에 그들 대신에 받아들여진 이방인들이 기뻐 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자들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관만을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또한 개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비교하여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앙과 배은망덕에 대한 당연한 벌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다음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최근에 양자가 된 은혜를 교만이나 허영으로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았을 때에 양자의 계약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 남은 것 같이 이방인들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 나타나 이 미련한 육적인 자신으로 부풀어 자멸에 이르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악용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의 이 말을 선택된 신자들에게 적용하더라도 겁낼 것은 없다. 자부심을 억제하는 목적은 육의 잔재에서 쳐지나 간혹 성도의 마음속에 잠입하는 이 교만이 헛된 확신으로 방자하게 날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과 양심의 정기를 잃는 것과는 문제가 아주 다르다. 공포심을 불어넣어 양심의 기운을 잃으면 양심은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지 못하여 평안을 잃어버린다.

23. "두려움과 떨림"

그러므로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가르칠 때에, 사도는 우리가 주의 권능을 높이며 자기를 아주 낮추는 것이 습관화 되도록 하라고 요구할 따름이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마음에 확신을 얻게 되려면, 우리 자신을 믿지 말 것과 자신의 파멸 상태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뜻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경배하리이다"(시 5:7).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경건한 두려움을 올바르게 결합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엄하심 앞에 나아갈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며, 그 존엄하신 광채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며 항상 두려워하는 사람은 복되다고(잠 28:14)한 솔로몬의 말 역시 진리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며 넘어지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고 우리를 더욱 조심성 있게 만드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느낄 때 혼미한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회복하며 낙심했던 마음이 그의 안에서 되살아나며 절망에 빠졌던 마음이 그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소생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무서워하는 동시에 확고한 위안을 얻는 것은 전혀 무방한 일이다. 눈을 자기의 허무성에 돌렸다가 하나님의 진실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 속에 공존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태만과 불안이 공존하는 것과 같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수고를 피하려고 아무 고통도 없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추궁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백성이 겸손하도록 훈련시키시며 그들이 역전 분투하는 동안에도 능히 자기를 억제하며 지배할 수 있도록 하신다.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서 사도가 말한 의도도 분명히 이것이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그의 백성에게 올바른 의욕과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하는 능력을 주신다고 한다(빌 2: 12-13).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언자가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고 한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낳을 뿐만 아니라 낙심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한 때에 그 은혜의 감미로움과 즐거움은 그 사람의 마음을 경외와 동시에 찬탄으로 가득하게 채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권능에 겸손히 복종하게 한다.

24. 확실성이 확고부동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는 최근에 어떤 사이비 교황주의 신봉자들이 슬그머니 교묘하게 꾸며내기 시작한 유해한 철학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전해온 유치한 회의적 사상을 옹호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공상에 도피처를 구하는 것이다. 즉, 불신앙이 섞인 확신이란 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에게서 완전한 소망의 근거를 발견한다는 것을 그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항상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이 무가치함을 보고 동요하고 주저하기를 바란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양심을 소망과 공포 사이에 놓고 가끔 번갈아 가면서 이쪽저쪽으로 왕래하게 만든다. 그들이 말하는 소망과 공포의 관계는 소망이 높아지면 공포는 억압되고 공포가 다시 올라가면 소망은 다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믿음의 확실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사용하던 노골적인 수단이 이제는 무효하게 된 것을 알고 은밀한 수단으로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가끔 절망에 빠지는 확신이란 어떤 확신인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면 거기에는 확실한 구원이 있고 돌이켜 자신을 보면 거기에는 확실한 멸망이 있으므로 불신앙과 소망이 교대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그가 멀리 나타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셔서 그의 모든 은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이 이론을 그들에게 향하여 말하려 한다. 자신을 돌아보면 그대들에게는 확실한 멸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대들에게 나눠주셨으므로 그의 것은 모두 그대들의 것이 되며, 그대들은 그의 일부분이 된다. 참으로 그와 하나가 되며, 그의 의는 그대들의 죄를 눌러버리며 그의 구원은 그대들이 받을 정죄를 말소하시며, 그의 높은 가치로 인해서 그대들의 무가치함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중재하신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그 친교의 유대를 우리는 용감하게 두 손으로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려 산 것이니라."(롬 8:10)고 가르친다. 이 사람들의 쓸데없는 생각대로 한다면,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죄인이므로 여전히 사망과 정죄를 면할 수 없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한 말은 훨씬 다르다. 그는 우리는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그 정죄를 삼켜 버렸다고 가르친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내가 앞에서 말한 이유를 든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결합해서 계실 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마침내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1046) 믿음이 연약하여 좌우로 맹렬한 공격을 받아 중단되는 일이 있으며, 시험의 짙은 암흑 속에서 그 빛이 꺼지는 일이 있다고 한 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은 영원히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25. 믿음의 두 가지 면에 대하여 베르나르드가 한 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할 때에 비슷한 추론을 한다. 그의 교회 봉헌에 관한 제 5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끔 나의 영혼을 반성합니다. 그런 때에 나는 영혼에서, 말하자면 두 가지 상반되는 국면을 발견하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나의 영혼을 그대로 보면 그것은 무로 돌아간다고(시 72:22 불가타 역) 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말입니다. 영혼이 가진 가련상을 일일이 들어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의 짐을 지고 암흑에 둘러싸였으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육정과 정욕이 끓어오르며, 망상이 가득하여 항상 악에 쏠리며, 각종 죄악에 끌리는 영혼한 마디로 말해서 수치와 혼미가 가득한 영혼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의로운 행실들을 진리의 빛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그것은 모두 월경 중인 여인의 더러운 옷과 같음을(사 64:6)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의한 행실들은 무엇에 비교할 것입니까?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3). 그러면 무엇이라고 해야겠습니까? 틀림없이 '사람은 헛것' 같을 뿐입니다(시 144:4). 사람은 무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게 보시는 사람이 어떻게 전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떻게 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용기를 냅시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필경 우리의 무엇인가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오 '자비의 아버지!'(고후 1:3) 오 가련한 자들의 아버지 !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에게 마음을 두십니까?…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당신의 보물이 되겠나이까?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사 40:17). 참으로 당신 앞에서 그러하나이다. 그러나 당신 안에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의 진리가 판단하면 그러하오나 당신의 진실하신 의도에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께서는 참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없는 것을 부르시므로 그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므로 그들은 있습니다. 그들 자신만으로는 없으나 당신이 함께 계셔주시므로 그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것같이, 그들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롬 9:11).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의 연결은 경탄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서로 연결된 것은 확실히 서로 파멸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그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무엇인지를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세히 검토한다면, 즉,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다른 편으로 보면 크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검토해 본다면…우리의 자랑은 적어 보이겠지만 이전에 비해서 아마 더 크고 근거도 더 훌륭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자랑하리라고 믿습니다"(고후 10:17).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는 곧 자유를 얻으리라(렘 17:14 참조)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높은 망대에 올라 하나님의 도성을 찾으며, 그의 성전을 찾으며, 그의 집을 찾으며, 그의 신부를 찾도록 합시다.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존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1047)

26.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하나님에 대한 공경함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서는 모든 성도가 증언하며, 어떤 곳에서는 이것을 "지혜의 근본"이라 하고(시 111:10, 잠 1:7), 다른 곳에서는 "지혜" 자체라고 한다(잠 15:33, 욥 28:28). "여호와를 경외함"은 하나이지만 그 근본 의미는 이중적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주인으로서의 경배를 받으실 고유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리고 동시에 충성된 종으로서 처신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주를 아버지로서 순종하는 것을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공경"이라 부르시고 주인으로서 섬기는 것을 "경외" 또는 "두려움"이라고 부르신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6)라고 말씀 하신다. 여기서는 두 말을 구별하시면서도 서로 융합시켰다. 그러므로 주께 대한 우리의 경외는 공경과 두려움이 섞인 것이 되어야 한다. 한 마음이 이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진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분이신가를1048)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죄를 짓고자 하는 육의 욕망은 불손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억제하려면 우리를 자기 능력 아래 두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즉시 생각해야 된다. 그리고 악한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사람들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27. 자녀와 종의 두려움

더욱이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18)고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는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생기는 공포심이며, 신자의 두려움과는 아주 다르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벌만 피할 수 있다면 그들은 태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시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진노에 대해서 말만 들어도 무서워 떤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들 위에 그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언제든지 자기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을 벌보다 더 두려워하며, 마치 벌이 목덜미 위에 얹혀 있는 듯이 벌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벌 받을 일을 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한다. 그래서 사도는 신자들을 향해서 "누구든지…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1049) 임하나니"(엡 5:6)라고 말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신자들에게 임하리라고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방금 열거한 악한 행위들을 하는 불경건한 무리에게 임할 진노를 생각하라고 경고하여 신자들이 그런 행위를 할 욕망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위협만으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허락을 내리시면, 우둔하고 나태한 그들은 마음이 굳어 더욱더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한번 얻어맞으면 싫든 좋든 간에 그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두려움은 보통 "종의" 또는 "비굴한" 두려움이라고 불려지며 자녀들에게 합당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두려움과 대조된다. 어떤 사람들은 세밀한 구별을 해서 중간적인 두려움을 끼어 넣는다. 이것은 비굴하고 강요된 공포심이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키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기꺼이 올바른 두려움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1050)

28. 신앙의 보증하는 것은 지상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는 한 아무 선도 부족할 수 없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약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충분히 확신하게 된다.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라고 예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요약하여 말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되는 것을 해소시키고 은혜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고 한다(엡 2:14).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케 되실 때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막는 위험은 일소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파악한 믿음은 금세와 내세에 대한 약속을 얻었으며(딤전 4:8), 모든 좋은 일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었다. 그러나 좋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종류의 일들이다. 믿음은 물론 이 세상에서의 장수나 부귀를 기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이런 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믿음은 한 가지 확신만 있으면 만족한다. 곧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이 우리에게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가진 가장 중요한 확신은 내세의 생명을 기대하는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의 생명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포옹하신 사람들은 어떤 불행과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전한 행복으로 느끼는 데는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운을 요약해서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모든 좋은 일이 이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어떤 좋은 일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를 생명보다도 더 감미로우며 귀한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시 63:3).

요컨대 모든 일이 우리의 소원대로 잘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증오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행복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따라서 불행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아버지의 얼굴같이 비친다면,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구원을 돕는 수단이 될 것이므로 불행이 곧 행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가지 불행을 열거하면서 그런 불행에 의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자랑한다(롬 8:35, 39 참조).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항상 모든 번영의 근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말한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공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세운다.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시 23:4)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은혜 안에서 평화를 찾지 않으면, 또한 저 시편에 있는 말씀을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으면, 항상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신앙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값없이 주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29-32)

29.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지탱한다

믿음은 원래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약속 위에 선 것이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의 기초로 본다.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명령과 금지 약속과 경고 등 모든 일에 참되시다는 것을 확신한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공손히 받아들이며 금지 사항들을 지키며 경고하신 것에 유의한다. 그러나 믿음은 원래 약속에서 출발하며 약속에 안주하며 약속에서 끝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므로 이 생명은 징벌에 대한 선언이나 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약속하는 값없이 주신 약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조건부의 약속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약속은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며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구원의 약속으로 그것을 강화해야 하며, 이 약속은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우리의 가련함을 보면서 주께서 기꺼이 또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고(롬 10:8) 증언한다. 그는 복음과 율법의 교훈을 구별하며 약속도 구별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사신들을 보내어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지 않으신다면(고후 5:19-20 참조) 믿음을 확립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자주 믿음과 복음을 서로 관련시킨다. 자기가 복음 전파의 직분을 받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롬 1:5) 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친다(롬 1:16-17).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므로(고후 5:1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완전히 확고한 증언은 믿음이 알고자1051)하는 복음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값없이 주신 약속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야말로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악행을 심판하시며 징벌하시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신 분"이며(시 86:5 참조), "자비로우시며"(시 103:8),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시 103:8), "만유에 친절하시며"(시 144:9),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시 145:9)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30. 믿음이 은혜에 대한 약속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유

나는 피기우스(Pighius)나 그와 같은 개들이 짖는 것을 상대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들은 이 제한성을 공격하여 믿음을 산산조각을 낸 다음에 한 조각만 붙잡을 생각인 것 같다.1052)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든지 은혜의 소망을 주시든지 하나님의 성실성이 믿음의 공통된 대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도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 노아가 그것을 두려워한 사실을 사도는 믿음으로 돌린다(히 11:7). 만일 절박한 징벌을 두려워서 믿음이 나온 것이라면, 믿음을 정의할 때에 경고를 제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은 마치 우리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부분을 고려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같이 부당한 비난을 한다. 우리의 의도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역설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값없이 주신 약속에 도달하기까지는 믿음이 견고하게 설 수 없다. 둘째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하지 않으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을 결코 화해시키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점은 다 유의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악한 자들과 구별하며 신자를 불신자와 구별하는 믿음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은 모두 정당하며, 그의 경고는 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신자라고 부를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성립될 견고한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믿음을 논하는가? 구원의 길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정의할 때에 이 특별한 효과를 역설하며, 신자와 불신자를 분리하는 표지로서 각자의 특색을 말하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요컨대 악의를 가진 자들이 이 주장을 헐뜯으려면 그들은 반드시 바울까지 비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롬 10:8).

31. 신앙에 대한 말씀의 의미

이 점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전에1053) 나무의 열매를 위해서 산 뿌리가 필요한 것과 같이, 믿음을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것을 다시 한 번 추론한다. 이는 다윗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시 9:10).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의 상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인자하심을 증거하실 때에 생긴다. 이 점을 예언자는 다른 곳, 곧 "주의 말씀대로…주의 구원"(시 119:41)에서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하오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한다(시 119:42 ,40 ,94). 여기서 우리는 우선 믿음과 말씀의 관계를 다음에는 그 결과인 구원을 주목해야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제외하지 않는다. 이 권능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이 서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합당하게 공경할 수 없다.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평범한 말을 한 것같이 볼 수도 있다. 즉, 축복받은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믿었다고 바울은 말한다(롬 4:2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자신에 관해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고 한다(딤후 1:12).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의심이 얼마나 자주 마음속에 잠입하는가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에 당연한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적지 않게 진보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능력이 있으시다고 우리는 모두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시험을 당하여도 무서워 쓰러지며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절감시키고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하여 우리를 위협하는 사탄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사야는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당당하게 논한다(사 40:25이하, 40-45장에서도 빈번히). 이사야가 용서와 화해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에는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하며 불필요한 긴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때가 많다. 그러나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 법칙으로 온 우주 전체를 얼마나 놀랍게 주관하시는가를 상고한다. 그러나 여기에 현 사태를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우리의 귀는 말씀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그 진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유력한 능력을 선언하는 것은 다른데서1054) 말한 바와 같이 경건한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권능을 활용하여 곤란에 대처하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이신 것을 증명하실 때에 행하신 업적들을 회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구속에 관하여 자주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번 자기들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 구원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윗의 예를 보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그들이 앞으로도 하나님을 굳게 믿도록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가 버림을 받은 듯이 보여질 때에 우리는 시야를 넓혀 하나님의 이전의 은혜를 회상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시편에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시 143:5)라고 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 하리이다"(시 77:11)라고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행하신 일들에 대한 생각은 말씀이 없으면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증거로 조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단정한다. 이 단정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래와 리브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은 열렬한 신앙이 불타는 듯했으며, 말씀의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이기 때문이다. 사래는 약속받은 후손을 얻으려는 열망으로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다(창 16:2, 5). 사래가 여러 가지로 죄를 지은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가 열성으로 흥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내에 머물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욕망이 신앙에서 나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택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약은 속임수로 아들에게 축복을 얻어 주었다(창 27:9). 그녀는 남편 곧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전달하는 사람을 속이고 아들에게 억지로 거짓말을 시킨다. 여러 가지 간계와 기만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더럽힌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롱함으로써 그가 할 수 있는데 까지 그 약속을 깨뜨렸다(창 27장).

그러나 이 행위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고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었지만 신앙이 없는 행위가 아니었다. 리브가는 지상적인 유익을 얻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큰 곤란과 위험이 넘치는 일을 성취하려고 분투노력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소한 장애물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족장 이삭에 대해서도 비록 둘째 아들에게 영예가 옮겨진 것에 관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맏아들 에서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신앙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예들을 보면 신앙에는 확실히 과오가 섞이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진정한 신앙은 항상 이기는 법이다. 리브가의 특별한 과오가 축복을 무효로 만들지 않은 것과 같이 그녀의 믿음도 말살되지 않았다. 이 믿음은 대체로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문제의 행동도 신앙이 발단과 원인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점에서 인간적인 심리를 드러내 보이는데 사람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단속을 완화하면, 아주 재빨리 곁길로 들어서 버린다. 그러나 사람의 태만과 무력은 신앙을 흐리게 할지라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동시에 이 예들은 우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를 경고하며 우리가 이미 가르친 것을 확인한다. 곧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사래와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비밀히 속박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순종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면, 정도를 벗어난 술책을 쓰다가 제정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32. 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

또 우리가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안에 포함시키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사도는 복음 전체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포함시킨다(롬 1:17 참조).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가르친다(고후 1:20). 이 사실에 대한 이유는 알기 쉽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을 통해서 자신의 선하심을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자주 받고 또 받으면서도 도리어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해서 이 사실에 또 다른 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정하는 때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마음속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 수 없고 짐승들이 그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받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자기들을 위해서 주신 약속을 상습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더욱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약속은 우리 마음에 신앙을 일으킬 때에 처음으로 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리의 배신 때문에 약속의 힘과 특성이 소멸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의 선하신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재촉하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약속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데1055) 이점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 17:5),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안에 거하고 머문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 사랑이 우리들 위에 쏟아진다. 이는 바울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16).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재하실 때 은총은 반드시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사도는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며(엡 2:14), 다른 곳에서는 진실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와 연결시키는 띠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롬 8:3 이하 참조). 따라서 우리는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며 실현된다고 당당하게 가르친다(롬 15:8).

어떤 예는 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예컨대 수리아 사람 나아만(Naman)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예언자에게 물었을 때에 중보자에 대한 교훈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경건하다고 칭찬을 받았다(왕하 5:1-14, 눅 4:27). 이방인이요 로마 사람인 고넬료가 유대인들이 그것도 그 일부 사람들이 겨우 희미하게 알고 있던 일을 분명하게 알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구제와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행 10:31). 그리고 나아만의 제물은 예언자의 대답에 의해서 인정되었다(왕하 5:17-19). 신앙이 없이는 이 두 사건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빌립이 만난 내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에게 다소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는 예배하기 위해서 수고를 하며 비용을 들이면서 어려운 길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행 8:27). 그러나 빌립이 울었을 때에 그가 중보자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이 나타났다(행 8:31). 나는 그들의 신앙이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위(位)라고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권한과 직분에 대해서까지도 함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비록 조금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원리를 가르침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시가 모르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먼 예루살렘까지 왔을 리가 없다. 고넬료는 유대교를 믿게 되자 확실히 오래되지 않아서 참 교리의 기초를 알게 되었다. 나아만에 대해서는 엘리사가 그에게 사소한 일들을 가르쳐주면서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애매모호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에 정한 제사를 실천했으며, 그 제사의 목표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들의 율법의 제사는 이방인들의 거짓 제사와 구별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된다. 33-37)

33.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에 효과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사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그들은 지식에서 생기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심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1056)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도달하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갈 3: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성령의 선물이 하나뿐이었다면, 바울이 성령을 "믿음의 결과"라고 한 것은 불합리한 말이었을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끊임없이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만드신다고 하면서 그 여러 가지 은사를 열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일들을 바울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요 6:65) 하는 것은 대단히 모순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얼마나 은밀하고 고상한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사람이 얼마나 우둔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지각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확고 불변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4.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고전 2:11) 아무도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사물에서도 하나님의 진실성을 잘 믿지 못하면서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이해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을(고전 2:9 참조)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진실성이 확고부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서 사람의 통찰력은 완전히 압도되어 무력하게 되므로 주의 학교에서 전진하는 첫걸음은 자기의 통찰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베일같이 우리를 덮고 "어린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마 11:25, 눅 10:21) 하나님의 비밀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마 16:1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교훈이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원이 필요하며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권능만이 여기에서 성공할 수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그러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라고 말씀하신다. 일찍이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만이 그를 보았다(요 1:18과 요 5:37의 융합).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단 끌려가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이해력은 초월한 경지에 이른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를테면 새로 날카로운 시력을 얻어 이전에 눈을 멀게 했던 그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또 인간적인 이해력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드디어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며, 이전에 심히 어리석고 미각이 둔하던 것과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눅 24:27)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눅 24:45) 하시기까지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비록 사도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배웠지만 그들이 귀로들은 바와 같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 주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실필요가 있었다(요 16: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이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비치지만,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멀었다. 따라서 성령이 내면적 교사가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 없다.

35. 인간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다른 장소에서 자연의 부패상을 논할 때에 우리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기에 부적당하다는 것을 자세히 밝혔다.1057) 따라서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여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고 바울의 말만을 회상하려고 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 우리에게는 원래 없는 믿음 그 자체를 바울은 "믿음의 마음"(고후 4:13)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 안에서 "하나님이…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기를 기도한다(살후 1:11). 여기서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르며, 그것을 형용사로서 구별하는 대신 "선을 기뻐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 이와 같이 그는 사람 자신이 믿음을 일으킨다는1058) 것을 부인하며,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첨가한다. 고린도서에서 그는 믿음은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근거로 삼는다고 말한다(고전 2:4-5). 그는 사실 외부적인 기적에 대한 말도 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눈이 어두워 이 기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곳에서 말한 인치심을 포함시킨다(엡 1:13, 4: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광스러운 선물로 그의 크고 풍성하신 은혜를 더 완전히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 선물을 무차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고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특권으로서 주신다. 이에 대한 증거들을 우리는 위에서 인용하였다. 증거의 충실한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감탄하여 "우리 구주께서는 믿음이 공로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서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요 6:65), 두 사람이 듣는데 한 사람은 멸시받고 한 사람은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멸시받는 사람은 자기 때문인 줄로 여기고 세움을 입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같이 자랑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른 구절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이유로 한 사람에게만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가?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이것이 십자가의 깊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의 어떤 깊은 곳에서…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나온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어째서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그 어째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가? 이 점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밑 없는 구덩이며, 십자가의 깊이다. 나는 찬탄할 수는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1059)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의 힘으로 우리를 조명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실 때에 동시에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시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참여하게 된다.

36. 마음의 문제로서의 믿음

이제 남은 일은 지성이 흡수한 것을 마음속에 부어넣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말씀이 두뇌의 상층부에서 돌아다녀서는 안되고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은 시험의 모든 전략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방위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조명이 지성에 진정한 이해력을 준다면,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 또한 성령의 능력임은 더욱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하는 마음은 우매한 마음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이다.1060) 지성이 사상을 얻는 것보다 마음이 불신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성령이 날인하는 일을 맡으셔서, 이미 마음에 확실성을 심어준 그 약속들을 마음에 인치시며, 마음을 견고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보증의 직책을 맡으신다. 사도는 "너희도…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엡 1:13-14) 되느니라고 단정한다. 바울이 이를테면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인을 치셨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지 않는가? 우리 중에 복음을 확고하게 하신다고 해서 그는 성령을 "약속의 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같은 방식으로 고린도서에서도 그는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소망의 확신과 담대함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의 보증이 그 확신의 기초라고 한다(고후 5:5).

37. 의심은 믿음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말한 것을1061) 잊지 않았으며, 경험에 의해서 자주 그것을 회상하게 되는데 곧 믿음은 여러가지 의심에 시달려 신자의 마음은 평안한 때가 거의 없으며, 적어도 항상 평화로운 상태를 즐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격 무기가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지라도 그들은 시험의 골짜기에서 일어서며 망대 위에 굳게 선다.

참으로 우리가 시편에 있는 말씀을 굳게 잡고 있으면 이 확신만이 믿음을 키워 주며 믿음을 보호한다.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1-3)라고 하였고 다른 시편도 이 아름다운 평안을 찬양한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5). 다윗이 항상 평온하며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고, 그 범위 내에서는 자기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경멸한다고 장담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한다. 이사야서에서 "너희가…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이라고 했으며(사 30:15), 시편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하였다(시 37:7). 이런 구절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이라고 말한다(히 10:36).

(여기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의 항의를 논박함. 38-40)

38. 신앙의 확신에 관한 스콜라 철학자의 오류

그러므로 우리는 스콜라 철학자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판단 할 수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각 사람이 스스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부에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도덕적 판단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1062) 사실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삼아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생각을 판단해야 된다면, 우리는 추측으로 은혜에 전혀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하고 값없이 주시는 약속에 대응해야 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순결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한다면, 대체로 우리는 어떤 신념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1063) 논하기로 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이는 특히 믿음과 가장 반대되는 것은 의심과 유사한 모든 것이며, 추측도 그 하나님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전도서에 있는 증언을 항상 인용하여 그 뜻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악행을 범한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사람이 알지"(전 9:1) 못한다고 한 말씀이다. 라틴어 성경의 번역이 잘못이라는 것은 묻지 않더라도 솔로몬이 이 말을 하는 뜻은 어린이들이라도 오해할 수가 없다. 현존 상태를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미움으로 추궁하시며 누구를 사랑으로 안으시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헛수고를 하는 것이며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이 솔로몬의 의도이다. 또한 "의인과 악인이며…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라 한다(전 9:6).1064)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번창하게 하시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며, 괴롭히시는 사람에게 항상 미움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미련한 천성을 증명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할 일에 대해서도 인간성은 심히 우둔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조금 전에 사람과 짐승이 동일하게 죽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과 짐승의 혼과의 차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전 3:19). 이 말을 읽는 사람이 영혼 불멸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추측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의 사태를 눈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도 전혀 확실하지 못하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이 바른 정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재함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경솔한 추정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미약한 이해력을 표준으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판단하려는 것이라면, 그런 경우에 한해서 나는 그들의 주장에 양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바울과 함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느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고 말하는데 그들이 성령을 모욕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에게 대항하여 소리를 칠 수 있는가? 성령께서 주신 계시를 허위, 불확실, 모호 등의 말로 비난하는 것이 무서운 모독 행위라면, 그 확실성을 단정하는 우리는 무슨 죄를 짓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감히 그리스도의 영을 자랑하는 것도 대단히 무모한 짓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세상의 선생으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초에 대해 이렇게 수치스러운 실수를 하며 이렇게 우둔한 짓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 그들이 쓴 글이 남아 있어서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명한다(롬 8:1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 정신으로 움직이며 하나님의 영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가르치기를, 우리는 성령의 명령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령만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한다(롬 8:16).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나 올바른 기도를 인도하셔야 할 성령을 배제한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한다(롬 8:9 참조).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독교를 조작한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된 부활의 소망이 우리에게 없다고 한다(롬 8:11). 그들은 이런 느낌이 없는 소망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혹 이렇게 대답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나 확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겸손한 태도이다1065).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 반성하며, 그리스도를 소유했는지를 시험해 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하였다(고후 13: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3:24, 4:13)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확언하셨는데(사 44:3, 욜 2:28 참조), 우리가 이 영을 받지 않고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믿음은 특히 성령의 특별한 사역인데 그 믿음을 성령에게서 분리시키려는 것은 성령을 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점은 경건의 초보이므로 성령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감히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만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가장 가련한 장님의 표시이다. 이런 자랑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40. 우리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불확실성

그들은 믿음의 확고부동성을 해하려고 한편으로만 애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공격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의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인내 하는데 대한 지식은 어디까지나 미결이라고 말한다.1066) 도덕적 추측에 의해서 우리가 이 순간에는 은혜를 가졌다고 단정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훌륭한 확신이 남을 것인가 ! 사도가 하는 말은 훨씬 다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그들은 사도가 특별한 계시를1067) 받아서 그런 확신을 가졌던 것이라고 쓸데없는 해석을 지껄인다. 그러나 그들은 피할 수 없이 단단히 잡혔다. 바울이 논하는 것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믿음으로 얻는 은혜이며 그만이 체험한 일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약하고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실 두렵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설명하듯이(벧전 5:6),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강하신 손아래 낮출 줄을 알게 하는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확실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믿음의 본성은 현세 생활이 지나간 후에 있을 미래의 영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을 통하여 하늘의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러므로 이런 자랑은 교만과는 전혀 다르다. 만일 이 자랑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행동은 겸손이나 순종을 증거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악행으로서 도리어 그의 극심한 배은망덕을 폭로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 및 사랑과의 관계. 41-43)

41. 히브리서 11장 1절에 있는 믿음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표현하려면, 믿음의 합당한 기초가 되는 소망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따라서 그 소망을 제거한다면 믿음은 완전히 무너진다. 아니,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믿음을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정의와 그가 믿음을 논할 때에 사용한 모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가르친다(히 11:1). 그런데 그가 사용한 실상(hypostais, 휘포스타시스)이란 말은 일종의 밑받침을 신자의 마음이 그 위에 의지하며 그 위에서 평안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언약하신 것들을 확실하게 또 안전하게 소유한 것이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상의 뜻을 확신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1068) 가정에서 한 말인데, 나는 더 많이 통용되는 해석을 취하지만 이런 해석도 싫어하지 않는다. 동시에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마지막 날 "책들이 펴 놓일" 때까지(단 7:10) 우리의 구원에 속한 사물들은60a)1069)너무도 고상하여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을 것이며,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이 사물들을 소유하는 방법은 다만 우리의 감각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며, 우리의 지각 능력을 모든 세상 물건의 저편으로 향하게 하는 것, 곧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확실히 소유했다고 믿는 것들은 소망 가운데 있는 것,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가 믿음을 "명시" 또는 "증거"라고 부를 때에 또는 어거스틴이 자주 번역한 것같이1070) "현재 없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신"이란 말은 헬라어는 "엘레그코스"(e[legco", 히 11:1)이다. 바울은 마치 믿음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의 증거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봄이요, 모호한 것들의 명료함이요, 현재 없는 것들의 현존이요, 숨은 것들의 보임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하나님의 비밀들, 특히 우리의 구원에 속한 비밀들은 그대로는 또는 그 본성대로는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이미 실행된 것,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리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다고 확신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

그러나 사람의 믿음이 깨우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면, 그것과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가 간직하신 그 풍성한 행복을 알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번 감동을 받으면 사람은 그 행복감에 압도되며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비틀어지고 사악한 마음이 이런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으로 바로 하늘에까지 들려가고 비장된 하나님의 보고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신성한 경내에 들어간다. 여기는 불결한 마음이 들어가 더럽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먼저 있다고1071) 가르치는 것은 미친 말에 불과하다. 우리 속에 처음으로 자랑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1072) 다음과 같은 베르나르드의 말은 훨씬 더 바르지 않은가? 바울이 신자들의 "자랑"(고후 1:12)이라고 부른 양심의 증거는 셋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선,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믿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값없이 주시지 않으면 영생도 행위의 공로로서는 얻을 수 없다. 조금 지나서 그는 부언한다. "이런 것들로써 충분한 것이 아니고 이것들은 아직 믿음의 시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면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믿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죄가 용서되려면 성령의 증거도, 즉, 구원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용서하시며 공로를 인정해 주시며 상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보 단계에서 굳게 설 수 없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1073)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적당한 곳에서 논하게 되겠고1074) 지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4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뗄 수 없는 동반자로서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한다. 이 소망을 제거한다면, 아무리 웅변적으로 또 아름다운 말로 믿음을 논할지라도 믿음이 없다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075)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하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시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내는 때를 기다린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요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되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 8: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해 주어 도중에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 2:3)고 한 예언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사 8:17) 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한다(벧후 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똑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깊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시 90:4, 벧후 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다.

4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기반 위에 섰다

이러한 관계와 유사점으로 인해서 성경은 간혹 "믿음"과 "소망"이란 말을 서로 바꾸어 사용한다.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가르칠 때에(벧전 1:5), 그는 소망에 해당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소망은 곧 믿음을 위한 자양분과 힘이라고 우리는 이미 가르쳤기 때문이다.

같은 편지에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한 것과 같이(벧전 1:21) 믿음과 소망은 간혹 결합된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나타나기까지 우리 자신의 소원을 보류한다고 하여(빌 1:20) 소망에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내가 이미 인용한 히브리 11장(1절)1076)을 보면 이 모든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바울은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같은 뜻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쫓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다시 말하면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밑에 숨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가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를 소망의 두 가지 근원이라고 한 것이1077)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다. 희망의 목표는 믿음의 목표와 다를 수 없다.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이미 분명히 설명하였다.1078) 이를테면 이 목표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롬바르드가 어떤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가를 듣는 것이 마땅하다. "공로 없이 무엇을 감히 소망한다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참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라고1079) 그는 말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는 하나님을 진실하시다고 믿는 사람을 경솔하고 참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하는 것이니 누가 이런 짐승들을 마땅히 경멸하지 않을 것인가? 주의 자비에서 모든 것을 대망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자비를 의지하고 안심하는 것은 불손한 짓이라고 한다. 참으로 훌륭한 선생이다. 저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논쟁가들의 학과에서 이 사람의 제자들이 배출된 것도1080) 그럴 듯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인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가지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성을 기꺼이 믿고 그의 자비만을 의지하며 행위에 대한 신뢰를 버리면서, 감히 견고한 소망을 품는다. 하나님께서는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하셨다.

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 회개1081)

(믿음의 결과는 회개이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오류를 논평함. 1-4)

1. 믿음의 결과로서의 회개

믿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유하는가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그의 은혜를 받아 즐기는가를 우리는 부분적으로 가르쳤을 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결과에 대해서 설명을 첨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장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죄의 용서가 복음의 전체라고 하는 데는(눅 24:47, 행 5:31)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논의가 이 두 가지 논제를 누락시킨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고 불완전하며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회개와 죄의 용서는 곧 새로운 생활과 거저 얻는 화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 따라서 이치로 보나 가르치는 순서로 보나 여기서 이 두 가지를 다 논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곧 할 일은 믿음에서 회개로 변이되는 것이다.1082) 이 제목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사람이 믿음으로만 그리고 단순히 용서에 의해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경우가 더욱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제생활은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일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회개가 항상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1083)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여 죄가 용서됨을 알리는 목적은 죄인들이 사탄의 압박과 죄의 멍에와 타락한 생활의 속박에서 풀려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하려는 것이므로 이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의 과오를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서며 회개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고1084) 하며, 회개가 믿음을 따르거나, 나무의 열매같이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의 능력을 깨달은 일이 없고 사소한 이유로 이런 생각을 한다.

2.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요한이 전도할 때에 먼저 백성에게 회개하라고1085) 역설하고 다음에 천국이 가깝다는 것을 첨부하였으며(마 3:2, 4:17), 사도들이 받은 전도 명령의 내용도 똑 같았다고 누가가 전하는 바와 같이(행 20:21) 바울도 이런 순서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글자의 순서를 미신적으로 고집하면서 그 말들을 함께 연결하는 의미를 무시한다. 주 그리스도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전도할 때에 그들은 은혜 자체와 구원의 약속에서 회개에 대한 이유를 이끌어 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하늘나라가 가까왔으므로 회개하라."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

마태는 요한이 전도한 말을 전한 다음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에게서 성취된 것이라고 하며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마 3:3, 사 40:3). 그러나 예언서에서는 그 소리가 우선 위로의 말과 기쁜 소식으로 시작할 것을 명령한다(사 40:1-2). 그렇지만 회개의 근원이 믿음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회개를 하게 만들기까지에 어떤 시간의 공간적 사이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데 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믿을 수도 없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 명백하게 논하겠다. 은혜를 깊이 알게 되기 전에, 또는 은혜를 맛보기도 전에, 양심의 가책에 눌리게 되거나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속은 사람들도 혹 있을 것이다. 또 이 시초의 공포심을 어떤 사람들은 미덕으로 인정한다.

이는 그것이 진정하고 올바른 복종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1086)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가 또는 경건 생활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시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 곳에 올바른 생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서 그의 지체들에게 전달하는 그 영이 지배하셔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는 시편의 말씀과 같이(시 130:4),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셨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복종을 기뻐하신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죄를 관대히 용서해 주시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호의를 알리는 표지이다.

호세아의 권고는 이 점을 알려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용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비극의 수단으로 덧 붙여서, 사람들이 죄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 잡아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회개로부터 시작하려는 자들의 미친 짓에는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들은 새로 개심한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참회하라고 명령하고 이 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런 사람들이 재세례파에 대단히 많고 특히 영적이라는 세상사람들의 말을 굉장히 기뻐하는 사람들이1087) 그렇다. 그들의 동반자인 예수회 회원들과1088) 그들과 비슷하다는 사람들도 그렇다. 분명히 그들은 경박한 생각으로 회개를 겨우 며칠 동안으로 제한하나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3. 죽임과 살림

그러나 회개에 대해서 잘 아는 어떤 사람들이 훨씬 전에 성경의 표준에 따라 단순하고 진지하게 말한 것이 있다. 그들은 회개는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의1089)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죽임"에 대해서 그들은 죄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된 영혼이 슬퍼하며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지 죄를 진정으로 알게 된 때에는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며, 다음에 진정으로 자신을 싫어하며, 자신이 가련한 자, 멸망할 자인 것을 인정하며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되면(여기서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과 타격을 받게 된다. 교만이 꺾이고 낙담하여 떨며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것이 회개의 시초요 보통 이것을 "통회"(contrition)라고 부른다. "살림"은 믿음에서 생기는 위안이라고 해석된다. 바꿔 말하자면 죄의식으로 좌절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싸였던 사람이 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즉,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깨닫고 일어나며 정신을 차리며 용기를 회복하고, 말하자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죽임"과 "살림"이라는 말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회개의 힘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살림"을 기쁨(laetitia)이라고1090) 혼란과 공포에 빠졌던 마음이 진정된 후에 받는 행복감이라고 해석한다면,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살림"이라고 한 부분은 거룩하고 헌신적으로 살겠다는 소원을, 곧 중생에서 생기는 소원을 의미한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살기 시작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죽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4. 율법하의 회개와 복음하의 회개

다른 사람들은 회개란 말의 뜻이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특징으로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율법의 회개"라고 부른다. 죄인은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의 회개"라고 한다.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인은 큰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과 공포심에 대한 위로와 불행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다.1091) "율법의 회개"에 대한 실례로서 그들은 가인과(창 4:13), 사울과(삼상 15:30), 유다를(마 27:4) 든다. 이 사람들의 회개에 대한 성경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자기들의 죄가 중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처벌자와 심판자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생각에 압도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생에서 이미 지옥에 들어간 사람, 하나님의 존엄하신 진노 앞에 벌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으며,1092) 그들의 회개는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 "복음의 회개"의 예는 죄의 가시에 찔려 통증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생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 주께로 돌아선 사람들이다. 히스기야는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확신을 얻었다(왕하 20:2, 사 38:2). 니느웨(Ninevetes) 사람들은 멸망하리라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지만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진노를 그치시고 자기들 쪽으로 돌아서시기를 바라고 기다렸다(욘 3:5,9).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것이 큰 죄였다고 고백하고 이어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삼하 24:10). 나단(Nathan)의 책망을 듣고 다윗은 자기의 간음죄를 인정하고 주의 앞에 엎드렸고, 또한 용서를 기다렸다(삼하 12:13,16).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의 회개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이렇게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베드로 자신의 회개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몹시 울었으나(마 26:75, 눅 22:62), 소망을 버리지는 않았다.1093)

(회개를 정의함 : 그 요소들인 육의 죽임과 영을 살림을 설명함. 5-9)

5. 정의

이런 이야기는 다 사실일지라도, 내가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보면, "회개"란 말의 뜻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을 회개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1). 여기서 그는 회개와 믿음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진정한 회개는 믿음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서로 분리할 수는 없을지라도 구별은 해야 한다. 믿음 안에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나 믿음과 소망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회개와 믿음도 영구적인 줄로 묶여 있지만, 서로 결합할 필요는 있어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을 전체적으로 "회개"란 말로 이해하며, 믿음이 이 회심의 중요 부분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하는지는 회개의 능력과 본질을 설명하면 곧 밝혀질 것이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전환 또는 귀환이라는 뜻에서 왔다. 헬라말은 마음 또는 의도를 바꾼다는 뜻에서 왔다. 그리고 내용도 이 두 가지 어원에 밀접히 대응된다. 그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며, 우리의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회개의 좋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곧 회개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일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다.1094) 그리고 회개의 요소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는 것과 성령에 의한 삶으로서 성립된다.

옛날 예언자들과 그 후의 사도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권고하며 설교한 회개의 뜻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설교자들이 얻으려고 노력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기들의 죄를 알고 당황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가슴을 찔린 사람들이, 자기들이 노여우시게 한 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한 태도를 가지며, 진정한 회개로 바른 길에 다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께로 돌아서라 또는 돌아가라", "바른 정신을 차리라", 또는 "회개하라"(마 3:2)1095)등의 말은 같은 뜻으로 서로 바꿔 쓰인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정욕대로 방종하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하며, 그들의 지도자가 부르는 곳으로 언제든지 갈 생각을 하게 됐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했다고 한다(삼상 7:2 참조). 또 요한과 바울은 모든 행동에서 이런 회개를 보이며 증거하는 생활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한다(눅 3:8, 행 26:20, 롬 6:4 참조).

6.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그러나 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가 결론한 정의를 좀더 분명히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회개를 세 가지 제목으로 나누어 검토해야 한다. 첫째로, 회개는 "하나님께로 생활을 전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가 변모할 것을 요구한다. 영혼은 그 옛 성질을 벗어버려야만 비로소 새로운 갱신과 조화되는 행위를 낳을 수 있다. 이 변화를 표현하고자 선지자는 회개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에게 새 믿음을 가지라고 한다(겔 18:31).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자주 가르친다(신 6:5, 10:12, 30:2, 6, 10). 이 말은 예언서에서 자주 반복되었다(렘 24:7). 또 모세는 회개를 "마음의 할례"라고 불러서 가장 깊은 감정까지 검토한다(신 10:16, 30:6).

그러나 회개의 진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예레미야 4장에 있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1, 3-4) 여기서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사악한 생각을 때어버리지 않으면, 의를 행하려 하여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리라고 주께서 단정하시는 것을 보라. 또 그들의 마음을 철저히 움직이시려고 그들이 대하고 있는 분은 술책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경고하신다.1096) 이는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가지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약 1:8 참조). 그러므로 위선자들이 여러 가지 의식으로 가시적으로는 회개하는 척하면서 자기들이 압박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불법의 무거운 짐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는 그 서투른 노력을 이사야는 야유한다(사 58:6). 거기서 그는 또 어떤 의무를 다하면 진지하고 올바른 회개가 되는가를 훌륭하게 밝혀 준다.

7.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 생긴다

둘째로, 우리는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대에 오르셔서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시는 날이 오리라는 잘못된 생각이 마음속 깊이 철저하게 박힐 때에, 가련한 죄인은 일순간도 평안하지 못하고 심지어 호흡까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오직 어떻게 생활 방식을 고쳐야 심판대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회개를 전할 때에는 심판에 관해서 언급하는 때가 많다. 예레미야의 예언서에는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렘 4:4). 바울이 아덴 사람들을 책망할 때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다(행 17:30-31). 그밖에도 여러 구절이 있다.

성경은 간혹 과거에 받은 벌을 가리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만일 죄인들이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벌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명기 29장(19절 이하)에 이런 예가 있다. 죄를 무서워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생각이 회심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의 원인이라고 한다(고후 7:10). 우리가 벌을 싫어할 뿐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할 때에,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당연한 생각이다. 우리가 날카롭게 찔리지 않으면, 우리의 육의 태만은 고쳐지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더 깊이 찌르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찔림은 목석같이 둔한 우리의 육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쇠망치로 때려눕히듯 해야 되는 고집도 있다.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실 때에 더욱 엄격하게 하지 않으실 수가 없다. 잠든 자들을 조용하게 달래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알게 되는 말씀들을 나는 열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회개의 시작이 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사람의 생활이 모든 덕으로 가득 찼다고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활은 세상의 칭찬은 받겠지만 하늘에서는 가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그의 권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리와 영광을 도적질하는 불경 행위이기 때문이다.

8. 죽임과 살림은 회개의 구성 부분이다

셋째로,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린다는 두 부분으로 성립된다는 말을 설명해야겠다. 이점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은 육적인 사람들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맞도록 단순하고 무뚝뚝하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그들은 "행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라"고 한다(시 37:3, 8, 27의 융합). 마찬가지로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사 1:16-17)라고 하였다. 그들이 사람들을 향하여 악을 떠나라고 호소할 때 요구하는 것은 악과 패역함이 가득한 육을 전멸시키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벗어버리며 우리가 타고난 성질에서 떠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 자신에서 나온 것을 무엇이든지 일소하지 않으면, 우리의 육을 완전히 말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육의 감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롬 8:7 참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첫걸음은 우리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선지자들은 변화된 상태를 회개의 열매 곧 의와 공의와 자비라고 부른다. 마음이 의와 공의와 자비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으면 이런 의무들을 때때로 이행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의 영혼을 감화시키시며,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정으로 그의 거룩함에 깊이 잠길 때 우리의 영혼이 참으로 새로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 있으므로 자기 부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바른 길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세상과 육을 포기하며 우리의 악한 욕심과 작별하고 심령으로 새로워지라는 명령을 받는다(엡 4:22-23). 참으로 "죽임"이란 말 자체가 우리의 이전 성질을 잊어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죽임"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검이 우리를 쳐 죽이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건 생활의 초보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자녀 가운데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공통된 본성이 죽어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다.

9.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

이 두 가지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참할 때에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 부패한 본성이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부활에 참가한다면 우리는 그 부활의 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하나님의 의에 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1097) 사도가 가르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했으며 같은 뜻으로 다른 구절에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 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참조)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입은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생명의 기업을 받도록 양자로 삼으신 모든 사람을 완전히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 회복은 한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평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어떤 때에는 느린 걸음으로, 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바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고후 4:4)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엡 4:24 참조) 해석하는 것을 공격하여 이것은 현세 생활의 상태와 하늘 영광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논쟁가이며 배반자인 스타필루스(Staphylus)의 패역은 더욱 극심한 것이다.1098) 그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정의할 때에 그 완전무결한 상태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형상은 그의 안에서 더욱 빛난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도록 하신다.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 생활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한다. 10-15)

10.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기의 무력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1099)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서 죄를 짓게 되며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성도들이 육욕(concupiscence)의 병에 잡혀 있어서 가끔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저술가들의 생각을 많이 연구할 필요도 없이 어거스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부지런히 충실하게 수집했기1100) 때문에 독자들이 고대인들의 의견에 관해서 확실히 알고 싶으면 그에게서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우리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1101)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연약"이란 말로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연약"함을 느끼는 일이나 그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떤 행동이나 동의가 이어질 때, 즉, 처음으로 나타난 강력한 경향에 의지가 굴복할 때에 한해서 그것이 죄가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들의 육 속에 의와 싸우는 패악성, 곧 육욕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거스틴이 "죄"라는 말을 항상 피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는 모든 죄들이 어떤 원천을 통해서 육적인 욕망 속에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원천을 '죄'라고 부른다. 성도들에게 관한 한, 죄는 땅에서 지배력을 잃고 하늘에서 소멸된다." 이런 말로 그는 신자들이 육의 욕망에 굴하는 동안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11. 신자들 속에서 죄는 지배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며,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 구원을 실현하심으로써 교회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한다(엡 5:26-27). 우리는 이 말씀이 죄의 본체보다도 죄의 행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중생시킴으로써 이 일을 참으로 실현하시며, 그래서 죄의 지배는 소멸된다.

이는 신자들이 성령의 주시는 힘을 받아 죄에 대하여 우세하게 되며 드디어 싸움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롬 6:6), 죄의 법이(롬 8:2 참조)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 흔적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무기력을 의식하게 하여 겸손하게 만든다. 이런 흔적에 대해서는 마치 그것이 아주 없는 것같이 책임을 추궁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책이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죄책에서 해방된다.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성경에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견해를 확인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한 말보다 더 명백한 어떤 증언이 필요한가? 우선거기에서 바울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말한다(롬 7:6). 이 점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1102) 밝혔고 어거스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논리로 이 점을 증명한다.1103) 그가 "악"과 "죄"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를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말들을 억지로 흠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것이 악이란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의를 방해하는 것이 죄란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정신적 불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죄책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병에 대한 이런 사실들은 바울이 모두 공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간단히 다룰 수 있는 믿을 만한 지시를 율법에서 받는다. 율법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다(신 6:5, 마 22:37). 우리 영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야 된다고 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떠나서 허망한 것으로 끌려가려는 경향이나 생각을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가지고 있거나 들여올 수 있는 사람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어떤 감정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이 영혼의 능력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능력들이 허망하고 패악한 생각에 굴할 때에 거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만큼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육의 모든 욕망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저 육욕의 병을 "불이 잘 붙는 물건"(tinder)이라고 부르며 죄의 원천1104)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12. "타고난 부패"란 무슨 뜻인가

사람의 본성에 따라서 느끼는 욕망은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주신 것인데,1105) 그것을 모두 완전히 정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사람의 성격에 새기신 경향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향들을 없애려면 인간성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인데, 우리가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에 반항하는 대담하고도 불손한 충동들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으므로 인간의 모든 능력은 오염되고 부패하여 그의 모든 행동이 항상 무질서와1106) 무절제에 빠질 경향이 크다. 이는 이런 경향들이 자제력의 결핍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경향들을 악하다고 주장한다. 더 간단한 요약을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악하며 죄라고 가르친다. 욕망은 우리가 타고난 그 욕망 때문이 아니고 무질서한 것이기 때문에 죄이다. 그뿐 아니라 욕망이 무질서한 것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에서 순결하거나 진지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얼른 보기에는 어거스틴의 생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는 펠라기우스파가 자기에게 씌우려는 오명을 너무 무서워해서 "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죄의 법은 성도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고, 죄책만이 제거된다고 기록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우리 생각과 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1107)

13. 신자들이 여전히 죄인인데 대한 어거스틴의 증언

그의 생각을 더 잘 나타내는 다른 말들을 소개하겠다. 율리아누스를 논박함(Aginst Julian)이라는 논문집의 제2편에 이런 말이 있다. "죄의 법은 영적 중생에 의하여 사함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죽을 육신 안에 남아 있다. 신자들을 중생시키는 성례전에서 죄책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신자들이 대적해 싸우는 상대인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에 그것은 남아 있다." 다른 구절에서 "그러므로 저 위대한 사도 자신의 지체 안에도 있는 죄의 법은 세례에서 사함을 받으나 제거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다른 구절에서 "암브로시우스(Ambrose)는 죄의 법을 '불법'이라고 부르며, 이 불법에 대한 죄책은 세례에서 제거되나 불법 자체는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스리는(갈 5:17)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라고 했다. 제 5 편에 있는 구절은 더욱 분명하다. "마음의 눈이 어둡다는 것은 동시에 죄며 죄에 대한 벌이며 죄의 원인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죄인 것이다. 그 때문에 교만한 심령이 마땅한 벌을 받으니 죄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심령의 잘못 때문에 어떤 죄를 지을 때에 그는 죄의 원인이다. 마찬가지로 선량한 정신이 열망하는 것을 반대하는 육의 소욕은 동시에 죄요 죄에 대한 벌이요 죄의 원인이다. 마음이 지배하는데 대한 불복종이 육욕에 내재하니 육욕은 죄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의 행실에 대한 댓가이니, 그것은 죄에 대한 벌이다. 반역함으로써 동의하는 자 또는 전염으로 난 자에게서는 그것은 죄의 원인이다.1108) 여기서 그는 조금도 모호한 점이 없이 그것을 죄라고 부른다. 오류가 굴복하고 진리가 강화된 때 그는 중상을 덜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요한복음에 대한 제 41 설교에서 그는 논쟁을 떠나서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육으로 죄의 법을 섬긴다면, 사도 자신이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라고 한 말대로(롬 6:12) 행하라. 그는 죄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죄는 반드시 여러 분의 지체 속에 있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육욕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야고보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라고 한 말을 들어 반대한다.1109) 그러나 이것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악한 행위 혹 실제로 나타난 죄들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악한 의도까지도 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운 행동과 악한 행위를 "무절제한 욕망의 후손"이라고 부르며, "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여기서 무절제한 욕망은 악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14. 완전성이라는 환상에 반대함

오늘날의 어떤 재세례파 사람들은 영적 중생 대신 어떤 광적인 무절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사상을 공개적으로 교만하게 떠벌리지 않았다면, 사람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미쳐 버린다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감히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만드는 자들이 그 모독적인 철면피로 인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부정직과 정직, 의와 불의, 선과 악, 덕과 죄의 구별을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인가? 그들은 말하기를 "이런 구별은 옛 아담이 받은 저주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음행과 정절, 성실과 간사, 진실과 허위, 공평한 거래와 강탈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재세례파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쓸데없는 공포심은 내버리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1110) 이런 해괴한 말에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맹목적인 정욕에 눈이 어두워 상식을 내버린 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상이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어떤 그리스도를 조작해 내려는가? 그들은 어떤 영을 내뿜는가? 우리는 한 그리스도와 한 성령을 인정한다. 이 영에 대해서는 선지자들이 천거했으며, 우리에게 계시된 대로 복음이 선포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영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다. 이 성령은 살인, 음행, 술에 취함, 자만, 투쟁, 탐욕, 사기 등의 수호자도 아니요 도리어 사랑, 겸손, 절주, 온화, 평화, 절제, 진실 등의 창시자가 되신다. 성령은 선악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이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며, 반대로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구별하는 총명이 가득하신 분이다. 성령은 사람을 선동하여 허랑방탕한 정욕으로 몰아 보내지 않고, 도리어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분간하여 사람들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야수적인 미친 태도를 논박하려고 더 애쓸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혼란을 일으키는 유령이 아니다. 그들은 이 운명을 꿈에서 만들어 냈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대한 지식을 성경에서 진지하게 찾는다. 성경에서 우리는 성령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파견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부정과 불결을 씻어버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신다. 이와 같은 순종이 성립되려면, 저 사람들이 고비를 늦추려고 하는 그 육욕을 먼저 누르고 굴복시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정화되지만,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완전과는 아주 먼 우리는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며, 죄 속에 얽혀 있으나 매일 그 죄와 싸워야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태만과 부주의를 떨어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우리의 육의 전술에 부지불식간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보다 더 많이 전진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사도는 사탄의 사자 때문에 여전히 괴로움을 당했으며(고후 12:7),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고후 12:9)졌으며, 그 자신의 육안에 있는 영육의 분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롬 7:6이하 참조).

15. 고린도후서 7장 11절에 있는 회개

사도가 회개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곱 가지 원인과 결과 또는 부분을 열거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간절 또는 신중, 변명, 의분, 두려움, 사모, 열심, 징벌의 일곱 가지이다(고후 7:11). 내가 이것들이 원인인지 또는 결과인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또 이 일곱 가지는 회개와 연결된 경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제쳐놓고도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설명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고후 7:10) 신중함이 생긴다고 한다. 하나님께 대해서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서 강렬한 불만을 느끼는 사람은 동시에 부지런하며 주의하게 되어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으며, 마귀의 간계에 대해서 더 훌륭한 예비 조치를 취하며, 성령의 지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또는 안도감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된다.

다음은 "변명"이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부인하거나 자기의 허물을 적게 만들려고 하는 변명이 아니다. 여기서 변명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보다 용서를 비는데 치중하는 정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집이 세지 않은 아이들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용서를 빌고 또 용서를 받기 위하여 부모에 대한 공경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자기가 의로우며 무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용서를 받으려고 변명한다. 다음에 죄인이 마음속으로 애통하며 자신을 비난하여 자신에 대하여 노하며 자신의 패역성과 하나님께 대한 배반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의분을 느끼게 된다.

바울이 "두려움"이란 말을 사용한 때에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자기의 마땅히 받아야할 것과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하고 무서운가를 생각할 때에 느끼는 그 떨리는 마음이다. 그런 때에 우리는 비상한 불안으로 고통하며, 이 고통으로 인해서 겸손을 배우며 앞으로 더욱 조심하게 된다. 그러나 전에 말한 신중함이 두려움에서 생긴다면, 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모"란 말을 쓴 것은 의무를 이행하는 열심과 기꺼이 순종하는 태도를 표현하려는 뜻인 듯하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특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직접 여기에 연결시키는 열심도 관련된다. 이 말은 우리가 나는 무슨 짓을 했으며 또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로 빠져들었을까를 생각할 때에 자극되어 일어나는 열심을 의미한다.

끝으로 "징벌"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며 자신의 죄를 예리하게 검토할수록 하나님께서 더욱더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바라는 대로 되려면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게 된 영혼이 처벌자의 일을 맡아 그 자신을 벌해야 한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확실히 알게 된 때에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과 당혹함과 번민과 자기혐오와 그 밖의 죄에 대한 생생한 인식에서 일어나는 다른 감정들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에 자신이 삼켜지지 않도록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공포에 싸인 양심은 무엇보다도 절망 상태에 빠지기 쉽다. 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사람을 볼 때에 사탄은 이 절망이란 전술을 사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은 슬픔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 다시 솟아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겸손의 결과를 낳으며, 용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 두려움은 얼마든지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죄인은 사도의 명령에 따라 자기 불만과 과도한 공포에 눌려 지쳐버리는 일이 없도록(히 12:3) 항상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치면 회개를 통해서 우리를 자신 앞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이일에 대한 베르나르드의 충고도 유익하다. "죄에 대한 슬픔은 그것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여러분이 한 일을 생각하고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리를 가끔 떠나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들을 생각하는 상쾌한 고원 지대로 올라가라. 쓴 쑥에 꿀을 섞어 보라. 달게 해서 마시면 쓴 것이 약이 된다. 여러분이 겸손하게 자기를 반성한다면, 그와 같이 자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1111)

(회개의 열매 :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과 용서, 평생 계속하는 회개. 16-20)

16. 외면적인 회개와 내면적인 회개

이제 우리는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표준으로 삼아서 자기의 생활을 진지하게 판단하면 할수록, 그가 보여 주는 회개의 징조는 더욱 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실 때에, 자주 율법 개개의 교훈이나 둘째 돌판에 있는 의무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는 성령은 먼저 우리의 속마음의 원천이 불결한 것을 정죄하시고 그 다음에 진지한 회개의 표지인 외면적인 증거에 대해 언급하신다. 나는 조금 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묘사할 때에 이 일에 관한 일람표를 독자들 앞에 제시하겠다.1112) 나는 예언서에서 증거를 수집하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미련함을 가끔 멸시하면서 그들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또한 그들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므로 외면적인 정직한 생활이 회개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1113) 마음의 내면적인 태도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경고를 받을 것 없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요엘서에 있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는 말씀이(욜 2:13) 이해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충고를 야고보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말로(약 4:8) 간결하게 표현한다. 여기서는 처음 문장에 첨가된 것이 있으나 다음에 근원과 원인을 밝힌다. 곧 사람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으려면, 은밀한 더러움을 씻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자기를 낮추며 육을 길들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외면적인 훈련 방법이 있고 공적으로는 이 방법을 회개의 증거로 사용한다(고후 7:11). 또 이런 훈련은 바울이 말하는 "징벌"에서 생긴다(고후 7:11). 고통하는 마음의 특색들을 든다면, 누추한데서 신음하고 통곡하며 찬란한 것이나 모든 장식을 회피하며 모든 오락에서 떠나는 것이다. 다음에 육의 반역이 얼마나 큰 사악한가를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억제할 모든 방법을 구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반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인가를 잘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겸손하게 영광을 돌리기까지는 편안할 수 없다.

회개의 열매를 논할 때에 옛날 저술가들은 이런 훈련을 자주 말했다.1114) 그러나 그들은 회개의 힘을 훈련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이런 훈련에 너무 치중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독자들은 나의 솔직한 발언을 용서하리라). 이 문제를 현명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그들이 두 가지 점에서 적당한 한도를 넘었다고 보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육체의 훈련을 강력하게 권장하며 지나치게 칭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시해야 할 일은 다소 희미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징벌을 가할 때에 그 징벌들은 교회의 온유함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엄격한 것들이었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1115)

17. 회개의 외면적 실천이 주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엘서에서(욜 2:12) 통곡하며 금식하며 재를 쓴다는 것을 읽고 회개는 주로 금식이나 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116) 이런 오해는 풀어야 한다. 요엘서에서 말한 주께로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 것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것은 참으로 회개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통곡하며 금식하는 것은 회개에 항상, 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가 아니고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 요엘은 유대인들에게 큰 재앙이 오리라고 예언했으므로 회개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슬픔을 외부에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예방하도록 그들을 권고하였다. 범죄한 사람이 재판관 앞에 나타날 때에 그의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 긴 수염, 엉킨 머리, 상복을 입고 애걸하는 것과 같이,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았을 때에 그의 엄격한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가련한 모습으로 비는 것이 마땅했던 것이다. 굵은 베와 재는 옛날에 더 적합한 듯하나, 주께서 우리를 파멸이나 재앙으로 위협하시는 듯한 때에는 언제든지 울며 금식하는 것이 매우 합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어떤 위험한 일을 나타내시려고 할 때에, 징벌을 내릴 준비와 무장이 다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백성에게 울며 금식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좋다. 바꿔 말하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에게 슬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가 그들의 악행이 심판을 받게 됐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대의 교회 목사들도 자기 백성들 위에 파멸이 임박한 것을 볼 때에, 속히 금식하며 통곡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곧 목사들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욜 2:13) 더욱더 주의와 노력을 다해서 항상 경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식이 반드시 회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금식은 특히 재앙이 있는 때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그가 떠나셔서 제자들이 슬픔에 잠기게 될 때까지는 그들이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마 9:15) 금식과 애통을 연결시킨다. 나는 공적인 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신자의 생활은 검소와 절제로 조절되어, 평생이 일종의 항구적인 금식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교회의 규율 문제를 논할 때에1117) 다시 연구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할 따름이다.

18.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점을 삽입하고자 한다. 즉, 외면적인 고백을 "회개"라고 부를 때에, 내가 설명한 회개의 진정한 의미에서 탈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개는 죄책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며, 동시에 벌과 심판대 앞에서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옷을 입고 재에" 앉는다는 것은(마 11:21, 눅 10:13),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대 범행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노하실 때에 우리의 자기혐오를 표시하는 증거에 불과하다. 이런 고백은 공적이며, 천사들과 세상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들의 태만을 책망하기 위해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하나님에 의해서)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한다(고전 11:31). 우리의 회개에 대해서 사람들을 의식적이며 공개적인 증인으로 세우는 것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의 일부이며, 이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죄, 탄로되지 않도록 가식적으로 숨기는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면 그런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짓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마땅할 뿐 아니라 큰 죄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잊은 것이라도 회상해서 고백해야 한다. 다윗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최근에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면서, 그는 모태에 있었을 때까지 돌아가서 자기를 검토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자기는 육의 더러움에 감염되어 있었고 부패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시 51:3-5). 또한 그는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군중 속에 숨으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넣음으로써 벌을 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윗의 행동은 훨씬 다르다. 자기는 바로 유아 시대부터 부패했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악행에 악행을 거듭했노라고 고백하며, 자기의 죄책을 공공연하게 확대한다. 다른 곳에서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회상하면서, 젊었을 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다(시 25:7).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며 우리의 악행을 통곡하면서 하나님에게 사죄를 간구한다면,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실천하도록 명령을 받은 회개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사람들의 회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치스럽게도 타락을 했거나, 제멋대로 방종한 생활에 뛰어들어 죄를 지었거나, 일종의 반역을 감행해서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났던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회개를 권고할 때에, 이를테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소생을 의미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한 백성이 "회개"했다고 할 때에, 그들은 우상 숭배와 그 밖의 중대한 죄악에서 돌아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하는"(고후 12:21) 죄인들 때문에 슬퍼 울리라고 선언한다. 이 구별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회개하라는 호소를 받는 사람이 적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가 부주의하게 될 염려가 있다. 곧, 육을 죽이는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열한 욕망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며 악습은 자꾸만 싹이 트므로 우리는 육을 죽이는데 대한 관심을 늦출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에서 떼내어 죽음의 올가미에 걸어 넣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요구되는 특별한 회개가 있다고 해서 일상적인 회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두고 이런 회개에 계속해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19. 회개와 용서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복음이 회개와 죄의 용서라는 두 제목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께서 자기의 백성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해서 그들을 진정한 의에 복구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자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였다(마 3:2, 4:17). 회개하라고 권고함으로써 요한은 그들이 스스로 죄인인 것과1118)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육을 죽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그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 때에, 하나님 나라란 것은 죄의 용서와 구원과 생명과 그 밖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서를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하였다(막 1:4, 눅 3:3). 이것은 죄의 짐에 눌려 지친 그들로 하여금 주께로 돌아서며 용서와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도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가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막 1:15). 우선 그는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의 보고가 열렸다고 선언하셨다. 다음에 회개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려고 하셨을 때에, 자신이 "고난을 받고…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전파될 것"이라고 하셨다(눅 24:26, 46-47).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은 "예수를…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라고 전파하였다(행 5:30-31).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성향과 노력은 모두 부패하고 악하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가 선포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한 구속과 의와 구원과 생명이 되셨다는(고전 1:30) 말씀을 들을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고 무죄한 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말을 들을 때에 거기서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 내가 다른 곳에서 증명한 것과 같이,1119)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믿음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이 자비에 의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므로 믿음과 회개는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20. 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

죄에 대한 증오심이 회개의 시초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를 처음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상대자들은 가련하고 고통 받는 죄인들뿐이며, 신음하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주리며 목마르고 슬픔과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뿐이다(사 61:1-3, 마 11:5, 28, 눅 4:18).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려면 회개를 목표로 노력하며, 일생을 통해서 회개에 몸을 바치며, 끝까지 회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나부르시는 목적은 회개시키려는 것이었다(마 9:13 참조). 그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파견되셨으나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사악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다(행 3:26, 5:31 참조). 성경에는 이런 증언이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는 그의 자비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라고 그는 말씀하신다(사 56:1). 또,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6-7).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한다(행 3:19). 그러나 이런 조건은 우리의 회개가 근거가 되어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주께서는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를 알리신다. 따라서 이 육신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결점과 아니 우리의 타고난 영혼 그 자체와 싸워야 한다. 플라톤은 죽음을 명상하는 것이 철학자의 생활이라고 했다.1120)

그러나 우리는 더욱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다. 즉, 육을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여,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를 심히 싫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싫어하되 진흙 구덩이에 박혀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속히 가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生)과 사(死)에 접붙임을 받아 계속적인 회개에 유의하게 되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먼저 의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면1121) 결코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가장 순수한 것인 동시에 성경의 진리와 가장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개와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

21. 회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점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하며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보고 놀랐다(행 11:18, 고후 7:10). 바울은 디모데에게 불신자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딤후 2:25-26).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신다고 선포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권고를 보내신다. 그러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에 달렸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창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자기 능력으로 더 훌륭한 본성을 입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전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으로 살리신다. 엄밀히 말한다면, 회개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도 증거한 대로 이미 밝혀졌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왕성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역사 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보면,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호소하고 슬퍼하면서, 버림을 받았다는 일종의 표지로서 자기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사 63:17). 배교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제외하려고 한 사도는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히 6:4-6).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그의 은혜를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의 고요하고 기쁜 얼굴로 그들을 그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불경하여 용서하실 수 없는 자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만드시며 그들에 대해서는 진노를 나타내신다.

의식적으로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도는 이런 벌이 있으리라고 위협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버리며, 하나님을 조롱하며, 그의 은혜를 멸시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며 짓밟으며(히 10:29), 참으로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다(히 6:6). 어떤 엄격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듯이, 바울은 모든 의식적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고1122)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교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독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의 여지없이 엄격한 벌을 내리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고 하였다. 다른 구절에서도 그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 있으리라."(히 10:26-27)고 하였다.

옛날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ts)가 미친 듯이 날뛴 것은 이런 구절들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선량한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난 냉엄한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이 서한에는 사도적 정신이 그 모든 부분에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짓된 작품이라고 믿었다.1123)

그러나 우리는 이 서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의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로, 사도는 그의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우리가 사도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대된 자로 만들려고 하지 아니한다면, 사도가 이런 예외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서 결론은 어떤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일이 없으나, 한 가지 죄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절망적인 광기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22. 용서할 수 없는 죄

그러나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할 이 가증한 죄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1124) 그러나 이런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이 죄는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과(마 12:31-32)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헛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 세상에서 범할 수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거스틴의 정의가 옳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그런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에게 내려진 은혜를 시기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다고 한다.1125) 그들이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히 모든 다른 정의를 쉽게 능가할 수 있는 진정한 정의를 이제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진리의 조명을 받아 무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진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항거만이 그들의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서,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즉시 부언하셨기 때문이다(마 12:32, 눅 12:10, 막 3:29 참조). 그리고 마태는 "성령을 거스르는 훼방" 대신에 "훼방의 영"이라고 기록하였다.1126)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비난을 던지면서 어떻게 동시에 성령을 비난하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지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기만 하면 그 진리를 소멸시키려는 의식적인 의도는 없는 사람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임을 알고 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 즉, 이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 복음의 가르침을 극악한 말로 저주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이 복음에서 온 것인 줄 안다면 기꺼이 진심으로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논박하며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확신하면서도 그 양심이 여전히 반대를 계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인 조명에 반항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성령을 거슬려 훼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유대인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었는데, 스데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대적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항하였다(행 6:10). 그들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부득이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악하고 불결한 생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항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인 줄을 알면서도 그 교훈에 항거한다. 주께서 책망하신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Beelzbud)"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중상하였다(마 9:34, 12:24). 그러므로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불신 앞에서 모르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에(딤전 1:13), 그는 이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와 불신앙이 합해서 바울이 용서를 얻게 했다면, 지식과 불신앙이 합한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여지가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주의해 보면,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한두 번 하는 타락이 아니고,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버리는 그 보편적인 반역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의 서한에서,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선택받은 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요일 2:19)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이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떠났으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잘못되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권하면서 그는 큰 진리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배척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척한다는 뜻은 방탕, 무절제한 생활로 단순히 주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 아니고 주의 가르침 전체를 고의로 또 의식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만성이 "타락"과 "죄를 지음"이란 말들에 있다(히 6:6, 10 :26). 그래서 노바티아누스파는 "타락"을 해석할 때 그것은 주의 율법에서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고 배웠으면서도 절도 행위나 음행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한다.1127)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여기는 암시적인 대조법이 있어서 전에 말한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이를테면 전인이 배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후에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히6:4-5), 그것은 성령의 조명을 의식적인 불경건으로 없애고 하늘의 은사의 맛을 뱉어 버리는 자들은 성령에 의한 성화에서 스스로 단절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유린하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불경건이란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뒤에 있는 다른 구절에서 "고의로" 이라는1128) 말을 첨가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서는 속죄의 제사가 다시없을 것이라고(히 10:26)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위한 계속적인 속죄의 제물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서신의 거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회생을 거부하면 다른 희생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명백하게 부정할 때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한다.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빌면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전혀 용서를 받을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냉혹하며 주의 자비와는 이질적인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용서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 영원히 눈이 어두웠고, 그 결과로 회개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에서의 경우에도 이 점에 반대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사도는 후에 에서의 예를 이 점에 적용하여, 에서가 잃어버린 상속권을 회복하려고 눈물과 통곡으로 구했으나 헛수고였다고 말한다(히 12:16-17). 이것은 예언자가 한 경고에 버금가는 진리이다. 예언서에는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한다(슥 7:13). 이런 말들은 진정한 회심이나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궁지에 빠졌을 때에 느끼는 불안을 표시할 뿐이다. 그들이 전에 태연하게 무시하던 일, 곧 그들의 모든 행복은 주의 도움에 달렸다는 사실을 궁지에 빠진 다음에야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도움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을 괴로워하는 것이지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부른다"(슥 7:13)는 말과 사도의 "눈물"(히 12:17)이란 말은 절망 상태에 빠진 악인들을 괴롭히는 저 무서운 고통을 의미할 뿐이다.

여기에 깊이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인이 회개하기만 하면 곧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하신(겔 18:21-22) 하나님께 자기 분열이 생기는 결과가 초래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1129)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결코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재난을 당해서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고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여전히 도망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맹목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회심"이니 "기도"니 하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그러나 문제가 있다. 사도는 가짜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아합이 용서를 받고 그에게 내리게 되어 있었던 벌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만년의 행동을 보면, 그가 다만 갑작스런 공포심에서 떨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왕상 21:28- 29). 그는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재를 쓰고 땅에 누웠으며(왕상 21:27), 그에 대한 증거로 보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여전히 완고하고 악의를 품고 있었던 이상 옷을 찢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위선자들은 이와 같이 얼마 동안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이다. 아합에 대한 벌은 경감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느끼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비록 은밀했으나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다.

에서에게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거절을 당했으나, 그의 눈물로 인하여 현세의 축복은 허락되었다(창 27:4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영적 상속은 두 형제 중에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에서가 무시되고 야곱이 선택됐을 때에 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위안은 남아 있었다. 즉,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창 27:28).1130)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진지한 회개를 하도록 더욱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하게 또 충심으로 회심할 때, 무가치한 자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수단으로 강퍅한 자들 위에는 어떤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인가를 배운다. 지금도 강퍅한 자들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얼굴과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며 무시하는 것을 하나의 재미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울음이 거짓이며 마음이 부정직한 것을 아시면서도, 자주 손을 내밀어 그들의 재난을 완화하셨다(시 78:36-37 참조). 그들이 곧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바와 같다(57절). 이와 같이 지극히 인자한 처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지한 회심으로 인도하려 하셨고 또한 그들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시 징벌을 중지하심으로써 항구적인 법으로 자신을 속박하시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위선자들에 대해서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하시며 벌을 배가하셔서, 그들의 거짓을 불쾌하게 생각하심을 알리신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하신다는 선례를 보이셔서, 경건한 사람들은 생활을 고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게 핍박을 아는 교만한 자들은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만드신다.

제 4 장  그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고백과 통회에 관한 스콜라 교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 1-6)

1. 스콜라학파의 회개에 관한 교리

이제부터 회개에 대한 스콜라학파의 궤변가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이 책을 간단한 교과서로 만들려고 부심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추구함으로써 책의 체제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은 무수한 책을 써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미혹에 조금이라도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서 상투적인 말들을 인용하여 쓰지만 그런 말들은 회개의 힘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예컨대, 회개는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우는 것이며, 울어야 할 죄를 다시 짓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과거의 악행에 대해 통곡하는 것이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슬퍼하는, 즉, 과거 행동에 대하여 슬픔으로 자기를 벌하는 것이며, 자기가 하였거나 찬성한 악행에 대한 심령의 슬픔과 영혼의 괴로움인1131)것이다. 교부들의 이런 말들에 대해서 논쟁가들은 부인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합당한 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회개를 정의하려는 뜻이 아니었고, 구원을 받기 전에 짓던 죄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듣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궤변가들이 이런 종류의 말들을 정의로 바꾸고 싶다면, 첨가할 만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말들이 달리 있다. 예를 들면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즉, 그는 "회개는 죄를 씻어버리는 약이며, 하늘에서 온 선물이며, 놀라운 힘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1132)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후기 스콜라 학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이 교부들의 정의보다 더 졸렬하다. 그들은 외면적인 훈련을 너무 고집하기 때문에, 그들의 방대한 책들을 읽어도 회개란 일종의 고행이라는 것, 즉, 조금은 육(肉)도 길들이며 허물도 징벌하는 것이라는 인상밖에 받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말씀의 내면적 변화와 거기 따르는 생활의 진정한 개선에 대해서는 탄복하리만큼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은 통회(contrition)와 성찰(attrition)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또한 사람의 영혼을 여러 가지 근심으로 괴롭히며, 불안과 고뇌와 번민의 바다에 집어넣는다. 사람의 심령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나서는 약간의 가벼운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모든 고통을 치료한다.

그들은 회개를 교묘하게 정의하여 심령으로 하는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으로 나눈다.1133) 그들은 삼단 논법을 구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분법은 그들의 정의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논리학자들의 논법에 따라 이 스콜라 학자들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추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입으로 고백하지 않더라도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울 수 있고 울어야 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과거의 악행을 통곡할 수 있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슬퍼하는 과거 행동을 다시 벌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기의 구분법을 유지하겠는가? 이는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는다면, 고백 없이도 회개가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답변하기를, 이 구분법은 회개를 한 성례전으로 생각할 때, 또는 회개의 전체 완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때 고해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해석을 그들은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들은 나를 비난할 까닭이 없다. 좀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를 하지 않은 자신들을 비난해야 한다. 나는 미련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그 정의 자체로 환원시킨다. 논쟁 전체의 요점과 기초는 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 교사들의 임의에 맡겨두고 우리는 다만 여러 가지 부분을 순서대로 관찰하기로 하자.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신비한 비밀이라고 선전하지만, 나는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다. 이것은 부지중에 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이 교묘하고 세밀하게 논한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을 검토하는 것이 내게는 그다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나, 내가 그렇게 꼼꼼하게 하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는 사소한 문제로 독자들을 피로하게 만들뿐이다. 그들을 흥분시키는 문제들, 그리고 가련하게 그들이 번민하도록 만드는 문제들을 보면,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떠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죄에 대한 고집은 그냥 있는데 한 가지 죄만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또는 하나님께서 내린 벌이 보속이 될 수 있느냐, 또는 큰 죄에 대하여 자주 회개를 반복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들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들은 사람은 가벼운 죄에 대해서만 매일 회개한다고 추악하고도 불경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롬(Jerome)이 한 말을 기초로 하여 회개는 "파선 후의 두 번째 판자"라고1134) 하는 심한 오류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동물적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과오를 그 천 분의 일내지 그 이하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2. 스콜라학파의 회개의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

그러나 이것이 당나귀의 그늘에 관한 싸움이1135) 아니고 가장 중대한 일, 즉, 죄 사함 받는 일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회개의 세 가지, 즉, 심령의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신앙의 전분야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문제이다. 즉, 무엇 때문에, 어떤 법으로, 어떤 조건하에, 얼마나 쉽게 또는 어렵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가장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지식이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양심은 평안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으며, 확신이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도리어 양심은 끊임없이 떨며, 흔들리며, 불안하며, 고민하며, 동요하며, 증오하며,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다.

그러나 죄 사함이 그들이 붙이는 조건에 달렸다면, 우리들에게 그보다 더 불행하고 비통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통회와 용서를 얻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하면서, 그것은 충분한 통회, 즉, 바르고 완전한 통회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1136) 그러나 동시에 언제 사람이 자기의 통회가 바르게 실천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죄를 더욱 싫어하며 미워하도록 조심스럽게 또 날카롭게 격려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는 슬픔은 후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후 7:10). 그러나 큰 죄에는 거기 해당하는 큰 슬픔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사죄의 확실성과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요구할 때에, 참으로 통회하는 양심은 색다른 방법으로 고통을 받으며, 죄에 대한 충분한 통회를 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게 된다. 자기가 진 빛의 분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빚을 갚았는지 분간할 수 없다. 스콜라 학자들은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하라고 말하나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돌아올 뿐이다. 누가 능히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는 데 전력을 다했노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양심은 오랫동안 자기와 씨름하며 오랫동안 싸우기 위해 힘쓰고도 쉴만한 피난처를 여전히 찾지 못한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안심하기 위해서 억지로 슬퍼하며 억지로 눈물을 짜냄으로써 통회를 실행하려고 한다.

3. 죄인의 통회가 아니라, 주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의 비난을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런 통회론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나, 진실하지 않은 거짓된 슬픔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이유로서 죄를 깨닫고 고통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진심으로 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는 죄 사함을 받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첨가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양심을 괴롭히는 것을 우리의 한 의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폐지하였다. 죄인은 자기의 통회나 눈물을 문제 삼지 않고 두 눈으로 주의 자비만을 주시한다고 가르쳤다.1137)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과하며, 갇힌 자를 놓아주며, 슬픈 자를 위로하시기 위해서(사 61:1, 눅 4:18) 오셨을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마 11:28)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회상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에 배가 불러 자기의 빈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악에 대한 치료법을 구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일체 제외된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도 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도 지지 않았으며, 마음도 상하지 않았으며, 포로 되거나 그 몸이 갇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공정하고 완전한 통회란 것을 하면, 그 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죄인이 자기의 불행과 동요와 피로와 포로된 상태를 인정하며, 새로운 원기 회복과 안식과 자유를 얻을 곳이 어딘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구하라고 죄인에게 명령하는 것, 결국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4. 고백은 명령이 아니다 : 깨끗함을 받은 나환자들에 대한 스콜라파의 은유적 추리를 반박함

지금까지 교회법 학자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는 고백 문제에 대해서 항상 큰 분쟁이 있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교훈이 고백을 명령한다고 주장하고 법학자들은 교회법이 명령할 뿐이라고 주장한다.1138)

그런데 이 논쟁에서 신학자들의 파렴치함이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논쟁을 위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나 모두 잘못 인용하며 그 뜻을 몹시 왜곡하였다. 이렇게까지 하고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알자, 남보다 더욱 민첩하게 보이고 싶은 자들은 핑계를 만들어, 고백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에서 나왔지만, 그 형식은 실정법에서 얻었다고 한다. 물론 가장 무능한 보잘 것 없는 법률가라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부르신 것을 하나님의 법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이의 제기도1139) 마찬가지이다. 아담은 이의를 말하듯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운운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창 3:12).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서 형식은 민법에서 온 것이다. 그들이 어떤 증거에 의해서 형식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 고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증명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주께서 나환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다고 말한다(마 8:4, 막 1:44, 눅 5:14, 17:14). 무슨 뜻인가? 고백하라고 보내셨다는 말인가?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고백을 듣기 위해서(신 17:8-9)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은유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즉, 모세의 율법에 제사장들이 나병의 진행 정도를 분간하라는 규정이 있고(레 14:2-3),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이에 대해서 선고하는 것이 사제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내친걸음에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이 구절이 그들을 영적 나병의 심사관으로 만든다면, 그들이 자연적, 육체적 나병을 심사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추리는 성경을 조롱하는 것이다. 즉, 율법에는 나병을 심사하는 일을 레위족 제사장들에게 위임하였으니 우리가 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법적 심사관이 되자고 하는 논법이다!

이제 나는 대답하겠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 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제사장들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께로 옮겨져서, 그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모든 권리와 명예도 그에게 옮겨졌다. 만일 그들이 은유를 따르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제사장으로 모시고 그의 심판 자리에 모든 일에 대한 무제한의 권한을 집중시키라. 우리는 이 일을 기꺼이 허용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은유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민법을 예전과 하나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나환자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셨는가? 제사장들이 그에게 율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율법에는 병이 나은 나환자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며 제물을 드려 속함을 받으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된 나환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명령하는 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8:4). 참으로 이 기적은 제사장들을 위한 증명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나환자라고 선언했었는데, 이제 그들은 나았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싫든 좋든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증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의 기적들을 검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핑계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기적이 그들 앞에 증거가 된다. 그래서 다른 구절에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라고 한다(마 24:14). 마찬가지로 "너희가…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신다(마 10:18). 다시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더욱 강력한 유죄 선고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이 크리소스톰의 의견에 찬성하고 싶다 해도, 그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 때문에, 즉,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으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한다.1140) 그러나 이런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사람의 지지를 구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법적 권리는 모두 제사장들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실 때, 그들 가운데는 복음의 원수임을 공언한 자들도 있어서, 그 입을 막아 놓지 않으면 그들은 항상 복음을 반대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파의 사제들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강제로라도 저주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편에 그들을 공공연히 가담하도록 하게 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일꾼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5. 나사로를 풀어준 것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은유가 매우 중요한 듯이, 둘째 논거를 동일한 근원, 즉, 은유에서 끌어낸다. 중요시하는 것은 버려두겠으나 나는 같은 은유를 그들 보다 더 그럴듯하게 인용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나사로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한다(요 11:44).1141) 우선 이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는 말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셨다고 보는 편이 가능성이 더 많은 추측일 것이다(유대인들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은 주의 기적을 사기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며, 그의 큰 권능을 보여주시려는 뜻이었다). 그는 죽은 자에게 손을 대시지 않고 말씀만으로 살리셨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유대인들이 모든 사악한 의심을 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직접 돌을 굴려 젖히며, 썩는 냄새를 맡으며, 분명히 죽었다는 증거를 보며, 주의 말씀의 능력만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며, 살아난 사람을 제일 먼저 만져보게 하신 것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생각하였다.1142)

그러나 가령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떤 주장을 한 것인가? 주께서 제자들에게 풀어주는 권한을 주셨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 사건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훨씬 더 적당하고 교묘한 처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자 하셨다. 즉, 그가 살리신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풀어주고 그들의 죄, 즉, 하나님 자신이 잊어버리신 죄를 기억하지 않도록 또 하나님 자신이 용서하신 죄인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이 너그럽게 보신 일들로 죄인들을 책망하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께서 자비를 베푸시며 용서하고자 하시는데 신자들이 벌을 주겠다고 냉혹한 태도로 허물을 캐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을 제일 확실히 일으키는 것은 재판관의 비유이다. 그는 너무 엄격하고 몰인정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제 그들을 보내서 그들의 은유적 해석을 퍼뜨리게 하자.

6. 성경적인 고백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명백한 증거로 무장했다고 상상하고 접근전으로 다가온다. 곧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온 사람들은 죄를 자복(自服)했으며(마 3:6), 야고보는 우리가 "죄를 서로 고하며"라고 하였다고 한다(약 5:16).1143)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이…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하는 증표로서 물세례를 주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가 세례를 주었을까? 세례는 죄 사함에 대한 상징이다. 죄인들과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고서 이 상징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야고보가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라고 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바로 다음에 있는 말씀에 유의했다면, 이 구절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기도하라"고 하였다(약 5:16). 그는 상호 고백과 상호 기도를 결합하였다. 우리가 사제들에게만 고백해야 된다면 또한 그들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의 말에서 사제들만 고백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그가 우리에게 서로 고백할 것을 요구할 때에, 그는 서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그가 사용한 "알렐로이스(ajllhvloi")란 말은 "서로", "교대로", "번갈아", 혹은 그들이 원한다면 "상호간에"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상호간에 고백을 실행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특권을 사제들에게만 돌리기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는 일도 사제들에게만 위탁한다.

이런 하찮은 말들을 전부다 버리라. 우리는 사도의 견해를 취하자. 그것은 단순 명료한 생각이다. 즉, 우리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약점을 알았으므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데, 그들은 왜 야고보의 말로 우리를 비난하는가?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먼저 고백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교회, 즉,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저주를 선언한다. 그것은 주께서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이다(갈 3:22). 주의 뜻은 "모든 입을 막고"(롬 3:19),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롬 3:20, 고전 1:29 참조).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로우시다고 하며(롬 3:4 참조)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비밀 고백의 후대 기원설의 증거. 7-8)

7. 고대 교회에는 의무적인 고백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이, 자기들이 말하는 고백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나는 놀란다. 물론 고백하는 관습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유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이전에는 고백에 대한 법이 전혀 없었다. 더 오랜 법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들고 나섰을 것이 틀림없고, 겨우 라테란 종교회의(Lateran, 1215년)의 명령으로 만족하여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허위 교서의 조작을 주저하지 않고 만들어내어 그것들을 가장 오랜 교회 회의가 정한 것이라고 하며, 고대에 대한 존경심을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속인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증명하듯이, 이노센트 3세가 고백을 해야 된다는 함정을 파 놓은 것은 겨우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1144)

그러나 연대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법이 조잡한 말을 쓴 것 자체가 법의 위신을 불신하게 만든다. 이 선량한 신부들은 남여 양성1145)의 모든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자기의 사제 앞에서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익살꾼들이 농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이 명령은 양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양성체인 남성이나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자기의 사제"란1146)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들의 제자들은 더욱 큰 부조리를 폭로한다.

교황의 이 삯군 논쟁가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이 법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로부터 이런 법이 나올 때까지는 1200년이 경과했다. 경건과 교리가 소멸되고, 목회자의 망령에 불과한 자들이 모든 권한을 통틀어 떠맡은 후에 이런 횡포가 드디어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역사 서적과 그 밖의 다른 고대 저술가들의 분명한 증언을 보면, 고백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정한 법이 아니고 감독들이 제정한 교회 행정상의 한 규율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될 만한 여러 증언 중에서 하나만 제시하겠다. 소조멘(Sozomen, 5세기 전반)은 감독들이 정한 이 법이 서방에서, 특히 로마에서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 직무를 위해서 장로들 중의 한사람이 특히 지명되었다고 한다. 교황주의자들이 하늘 열쇠는 사제 계급 전체에 공통으로 맡겨져 이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철저히 논박한다. 참으로 그것은 사제들에게 공통된 직책이 아니라, 특히 이 일을 위해서 감독이 선택한 사제 한 사람만의 직책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도 대성당에서는 청죄 사제라고 해서 중대 범죄를 조사하고, 징계로서 견책할 사람을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조메누스는 부언하기를, 콘스탄티노플에 이 관습이 있었으나 어떤 부인이 고백을 가장하여 어떤 부제와 애정 관계를 가졌던 것이 발견되어, 거룩함과 학식으로 유명하던 감독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이 사건을 이유로 고백의 행사를 폐지했다고 한다.1147) 이 미련한 자들아 귀 기울여 들으라. 만일 비밀 고백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무슨 까닭에 넥타리우스가 감히 그것을 폐지했겠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며, 모든 교부들이 칭송한 넥타리우스에게 그들은 이단설과 분파의 죄명을 씌우려는가? 그러나 이런 선고를 내린다면 그들은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소조메누스의 말에 의하면, 이 교회에서는 고백의 관습을 일시 등한시했을 뿐 아니라, 아주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만일 정직하게 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한 불가침의 법을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동방 교회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백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크리소스톰이 분명한 증언을 한 문구들은 심히 많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었으므로 그들이 그와 반대되는 말을 감히 중얼거린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가 한 말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해서 씻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죄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창피하거든 자기의 영혼에게 매일 고하십시오.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르는 동료 하인에게 고백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쳐 주실 하나님에게 고백하십시오. 침상에서 죄를 고백해서 양심이 매일 자기의 비행을 인정하게 하십시오." "그뿐 아니라, 증인 앞에서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죄를 검토하십시오. 이 재판에서 증인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고백을 보시게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연단 위에 데려다가 동료 하인들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죄를 폭로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양심을 들고 가서 그의 앞에 펼쳐 놓으십시오. 가장 훌륭한 의사이신 주님께 여러분의 상처를 보이고 그에게서 약을 얻으십시오.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책망하시지 않고 인자하게 고쳐주십니다"

"물론 사람에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릅니다. 동료에게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을 퍼뜨릴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돌보시는 친절한 의사이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써 "나는 너희들이 강단 중앙에 올라와서 여러 증인들 앞에 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죄를 나에게만 비밀히 말해서 나로 너희들의 아픈 상처를 고치게 하라"고1148) 하였다. 그들을 얽매고 있는 그 구속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양심을 풀어주려고 크리소스톰이 이런 글을 쓴 것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며, 감히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죄의 고백 : 공적 및 사적 고백. 9-13)

9. 하나님 앞에서 고백함

그러나 문제 전체를 더 분명하고 쉽고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어떤 종류의 고백을 배울 수 있는가를 충실히 이야기하려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이 만든 조작품들을 이야기하겠다. 물론 그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큰 바다를 누가 능히 쏟아놓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의 비밀 고백의 요점을 내포한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부끄러운 일이나, 나는 옛날 번역가들이 "찬송한다"는 말을 "고백한다"는 말로 번역한 것을 회상한다는 것이 부끄럽다(시 7:17, 9:2, 95:2, 100:4, 117:1).1149) 이것은 가장 무식한 평신도라도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대담한 짓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관해서 쓴 것을 그들의 포악한 법으로 옮겨 놓은 것은 폭로하는 것이 좋다. 고백에는 마음을 명랑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에 있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란 말을(시 42:4) 끌어넣는다. 만일 이런 수정이 정당한 일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되었으니, 경건한 독자들은 그들의 담대한 것이 더욱 가중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공정한 징벌에 의해서 그들이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을 의지할 생각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런 가장(假裝)에 속을 위험성은 없을 것이다.

이는 성경에는 이 일에 관하여 고백하는 한 가지 방법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며 잊어버리며 씻어버리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주께 죄를 고백하자. 주님은 의사이시므로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도록 하자.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며 노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주께 화해를 구하도록 하자. 마음속을 아시며1150) 모든 생각을 아시는 이는 주님이시니(히 4:12 참조), 우리는 그의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속마음을 쏟아 놓자. 끝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다윗은 말한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다윗의 다른 고백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 51:1) 다니엘이 한 말도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 9:5). 성경에 자주 나오는 다른 고백들도 있고, 또 이것을 인용한다면 거의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1: 9). 우리는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괴로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의 앞에 엎드려 고백해야 한다.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비난하며 정죄하면서, 그의 선하심과 자비로 무죄 선고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10.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함

이와 같은 고백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입으로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한 사람에게 한 번만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자기의 수치와 하나님의 큰 자비와 영예를 진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을 들었을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였다(삼하 12:13). 바꿔 말하면, 이제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판정받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내가 하나님에게 감추려고 하던 일들까지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비밀히 고백한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 필요한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주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규례를 정하셔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일정한 말을 낭송한 다음에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하셨다(레 16:21 참조). 그것은 각 사람이 공정한 자기 평가를 하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고백함으로써 우리 사이에서와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밝히 보이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11. 온 회중이 죄를 고백함

이런 종류의 고백은 교회에서 평상시에도 실행해야 하며 사람들이 어떤 공통된 죄를 지었을 때에는 특별히 실천해야 한다. 모든 백성이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의 지도아래 행한 것은 이 특별한 고백의 실례였다(느 1:7, 9:1-2). 그것은 그들이 모든 백성의 공통된 반역죄로 형벌을 받아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했으며, 수도와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종교가 퇴폐하였기 때문에 우선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해방의 은혜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중 가운데는 소수의 죄없는 사람들이 있는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약하고 병든 몸의 지체이므로 자기의 건강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그들도 다소의 감염을 면할 수 없으며, 죄책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그 밖의 재앙을 당할 때마다, 애통과 금식과 그 밖의 방법으로 우리의 죄지었음을 표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우리는 모든 다른 일의 근본이 되는 이 고백을 가장 중요시해야 한다.

평상시의 고백은 주께서 친히 권장하셨다는 사실 이외에, 고백의 유용성을 생각한다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감히 그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집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서 있는 것이므로 우선 우리 자신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은 그것은 모든 기도에서 하는 일이며 우리는 용서를 빌 때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고 말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기만족과 우둔과 태만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공적 고백의 행사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것이 유익한 규례가 될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께서 제정하신 의식은 율법의 교육적 임무의1151) 일부였지만, 그 이면에 있는 실재는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에게도 관계된다. 또 사실 잘 지도되는 교회들이 이 관습을 지켜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우리는 안다.

즉, 주일마다 목사가 자신과 교인들의 이름으로 고백문을 작성해서, 모든 사람의 사악함을 고발하며 주의 용서를 간구한다.1152)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열쇠로 기도의 문호를 개방하여 각 개인은 개인적으로, 온 회중은 공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2. 영혼의 치료에 있어서 개인적 고백

성경은 개인적 고백의 두 가지 형식을 인정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니, 우리가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된다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약 5:16) 이 개인적 형식의 고백이다. 야고보가 말한 뜻은 우리가 자기의 약점들을 서로 알린 후에 서로 충고하며 위로함으로써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형식은 이웃을 위한 고백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가 어떤 해를 받았을 때에, 그의 노여움을 풀고 그와의 화해를 위해서 사용하는 형식이다. 처음 종류의 고백에서 야고보는 누구를 상대로 고백할 것인지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교우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택하는 자유를 남겨 놓았지만 누구보다도 적당한 사람은 목사일 것이므로 우리는 목사들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목사들이 더 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며 교정하도록 말로 가르치며, 죄가 용서된다는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하도록 그 직책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마 16:19, 18:18, 요 20:23). 상호 충고와 상호 견책의 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목사들은 특별한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그 확신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목사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우리의 양심에 불어넣어 주는 증인과 보증인으로 임명된 사람들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이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해방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직책이 그들에게 있다고 들을 때에,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1153)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죄의식으로 혼자서 마음속에 불안과 고통을 느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제시하신 대책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죄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며, 위로를 얻기 위해서 목사의 적극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사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복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것을 직무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항상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이 없으면, 일정한 멍에로 사람의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고백은 자유 선택에 맡기며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권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또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규정으로 강요하거나 술책으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된다. 고백하는 당사자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고백하게 하여, 완전한 위로를 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직무에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이 자유를 허용할 뿐 아니라, 이 자유를 수호하며 굳게 방위해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들의 횡포와 교인들의 미신을 피할 수 있다.

13.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고백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두번째 종류의 고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렇게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의 죄과로 인해서 깨어진 사랑이 다시 회복된다.

교회 전체에 해를 입히게 된 사람들이 그 죄를 고백하는 것도 이런 종류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중대시하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형제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먼저 공정한 배상으로 화해하기까지는 거룩한 예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악한 행동으로 교회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교회의 화해를 얻어야 할 이유는 더욱 크다.1154)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 신자는 시정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시 교회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후 2:6).

키프리안이 회상한 초대 교회의 고백 형식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 참회한 후에 고백하러 와서 감독과 교직자들의 안수로 친교의 특권을 받는다."1155) 성경에는 이와 다른 형식의 고백은 전연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혼을 속박하지 말라고 매우 엄격하게 금하셨으니, 새로운 올가미로 영혼을 얽매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동시에 양들이 성만찬에 참가하기를 원할 때마다 목자 앞에 나가서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각지에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 하면 괴로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혜택을 입으며, 견책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견책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박과 미신은 항상 물리쳐야 한다.

(열쇠의 권한과 죄의 사면. 14-15)

14. 열쇠의 권한에 대한 그 성격과 가치

열쇠의 권한은 다음 세 가지 고백에서 적용될 수 있다. 즉, 교회 전체가 그 허물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간구할 때, 한 개인이 어떤 현저한 범행으로 일반적인 죄를 짓고 회개를 표명할 때, 또는 괴로운 양심 때문에 목사의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 그에게 자기의 잘못된 점을 고할 때이다. 타인에 대한 죄를 제거해야 될 경우에는 방법이 다르다. 이런 때에는 양심의 평안도 고려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증오심을 없애고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의 줄로 묶어 주는 것이다(엡 4:3 참조).

그러나 우리가 더욱 자발적으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말한 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온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같이 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서 유일한 피난처를 구할 때에 화해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임석해서(고후 5:20 참조) 죄의 사면을 선언한다는 것은 평범하거나 사소한 위로가 아니다. 이미신이 그 임무를 공정하게, 바른 절차에 따라 그리고 경건하게 수행할 때에는 열쇠의 권한이 유익하다고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약간 멀어진 사람이 용서를 받고 형제적 단결에 다시 참가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뉘 죄든지 땅에서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하여질 것이요"라고 하신(요 20:23, 마 18:18의 융합) 그 사람들에게서 자기도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죄를 특별한 치료법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사면을 받을 때에, 그 효과와 은혜는 공적 사면에 못지않게 크다. 이는 어떤 사람은 신자 전체에 주는 일반적인약속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고 아직도 용서를 받지 못한 것 같아서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목사에게 심중의 비밀을 털어놓고,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는 복음의 말씀이 특히 자기를 향해서 목사의 입에서 들려올 때 그는 마음에 확신을 얻으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불안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열쇠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항상 주의해서 복음 선포와 관계없는 어떤 권한도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나는 교회 행정 관리 문제를 논할 때에 이 문제도 다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매고 푸는 권리는 말씀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156) 이 점은 특히 열쇠를 사용하는 데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의 은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은 열쇠의 권한은 완전히 이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사실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5. 고백에 대한 천주교 교리의 요점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양성"의 모든 사람은 분별 연령에 도달하는 즉시로 자기의 모든 죄를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자기의 사제에게 고백해야 하며, 그들에게 죄를 고백하겠다는 확고한 의도가 없으면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회가 제공될 때에 이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들 앞에 닫힌다고 한다. 그들은 사제에게는 죄인을 매고 풀어주는 열쇠의 권한이 있으며 이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운운하는(마 18:18) 그리스도의 말씀이 헛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157)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이 권한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맹렬히 싸운다. 어떤 학자는 열쇠는 본질적으로 하나뿐이라고, 즉, 매고 푸는 권한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열쇠를 잘 쓰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식은 부속물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권한과 결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1158) 또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너무나 무제한적인 면허라고 보고 분별과 권한이라는 두 가지 열쇠를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완화책이 사제들의 부패를 억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열쇠들을 만들었다. 분별하는 권위라는 열쇠는 선고를 내릴 때 사용하는 것이고 권한이라는 열쇠는 그 선고를 실행할 때에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으로서의 지식을 첨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매고 푸는 일을 단순히 죄를 용서하며 말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못한다. 그것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나 곧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11, 25)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가 매이고 누가 풀릴 것이며, 누구의 죄가 용서를 받으며 누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라고 한다. 또 고백을 받고 죄를 용서하거나 남겨둘 때, 또는 파문이나 성사 참가의 허락을 선고할 때, 이런 선언을 한다고 한다.1159)

끝으로 그들은 아직도 곤란한 문제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며 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을 사제들이 혹은 매며 혹은 풀어 주는 일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하늘에서 매이거나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런 때에 그들이 최후로 도피하는 수단은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즉, 열쇠의 권한을 위탁하는 데는 한 가지 제한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들의 선고가 그의 심판대 앞에서 시인되리라고 약속하셨으나, 그 선고는 매이거나 풀리는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공정하게 표명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1160) 그런데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이 열쇠의 권한을 모든 사제에게 주셨고 사제들은 서품시에 주교의 손에서 받지만 그것을 자유로 쓰는 권리는 교회 직무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수중에만 있으며, 파문을 당하거나 직권 정지를 당한 교직자들도 열쇠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열쇠들은 녹이 쓸고 묶여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겸손하고 정신이 올바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모루 위에서 새로운 열쇠들을 만들어내고 교회의 창고는 이런 열쇠로 잠겨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후에 적당한 곳에서1161) 논할 것이다.

(천주교 교도들의 오류들을 그리고 고백과 보속에 관련된 유해한 관습을 서평함. 16-25)

16. 모든 죄를 열거하여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부터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씩 간단히 대답하겠다. 여기서는 법으로 신자들의 영혼을 속박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또는 없는가 하는 문제는 말하지 않고 적당한 곳으로1162) 미루겠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죄를 말해야 된다는 법을 만들며, 고백하겠다는 확실한 의도가 없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며, 고백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낙원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지껄이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죄는 모두 고배해야 되는가? 다윗은 죄를 고백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또 바르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고 외쳤다. 다른 곳에서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였다(시 38:4). 그는 우리의 죄의 구렁이 얼마나 깊은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에는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으며, 이 히드라(hydra,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인 뱀)에게는 얼마나 많은 머리가 있으며, 죄는 얼마나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악행의 깊은 구렁 밑에서 주를 향해서 나는 눌렸나이다, 묻혔나이다, 숨이 파히나이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시 18:5),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지며"(시 69:2-3, 15-16), 원컨대 손을 내밀어 주소서, 나는 힘이 빠지고 죽어 가나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의 죄들을 낱낱이 세려고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자기의 죄를 세려는 생각을 할 것인가?

17.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준다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행위로1163) 인해서 영혼에 가장 참혹한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을 검토하여, 그들의 양식에 따라 죄를 큰 가지와 작은 가지와 잎으로 나눴다. 그 다음에 죄의 성질과 분량과 환경을 고려하여, 문제는 다소 전진하였다. 그러나 더 전진하여 사방이 하늘과 바다가 되었을 때에는1164) 항구나 정박지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는 더욱 큰 덩어리가 나타났다. 참으로 갈수록 태산이었다. 먼 우회로를 돌았어도 탈출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케단과 칼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1165) 드디어 결과는 절망뿐이었다.

여기서 이 도살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상처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사람마다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1166) 치료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불안이 끼어들었다. 참으로 "나는 시간을 더 들였어야 할 것을 나는 정성이 부족했다. 나는 소홀해서 잊어버린 것이 많다. 내가 부주의해서 잊어버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고통이 가망 없는 영혼들을 혹독하게 책망했다.

그들은 이런 고통을 감하려고 또 다른 약을 사용했다. 너의 태만함을 회개하여라. 완전한 부주의가 아니라면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상처를 감싸지 못하며, 고통을 덜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꿀을 탄 독약같이, 처음 맛보기에는 불쾌하지 않으나 모르는 사이에 깊이 침투한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무서운 소리가 항상 그를 압박하고 귓속에서 울린다. 확실한 위로가 아니고는 이 공포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

여기서 독자들은 생각해 보라. 일 년 동안에 한 모든 행동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으며, 매일 지은 죄를 어떻게 함께 모을 수 있겠는가? 하루에 한 실수만을 밤에 생각하더라도 기억이 희미할 것이다. 우리에게 밀려드는 죄의 수와 종류는 그렇게 많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교적 중대한 죄를 서너 개 눈여겨보고는 이 고백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야만적이고 우둔한 위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검토해서 압박됨을 느끼며,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하나님일까 보냐"라고(요일 3:20)한 요한의 말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 지식을 가지신 심판자를 보고 그들은 떤다.

18.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데서 오는 악영향

더욱이 이런 무서운 독약에 아첨하는 말을 섞어 많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런 감언이설이 하나님을 만족시킨다거나 심지어 자기들까지도 참으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는 대양 한복판에서 닻을 내리고 일시 항해를 정지한 것이나 지쳐서 길가에 주저앉아 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 점을 증명하는 데 힘을 들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법인가를 요약해서 말하겠다. 첫째로, 그것은 전혀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당황하게 만들며 파멸과 절망에 떨어뜨릴 뿐이다. 다음으로, 이 법은 죄인들에게서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는 위선자로 만든다. 참으로 그들은 죄를 일일이 열거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서, 자기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수렁과 비밀한 죄와 그 추악성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알았다면 특히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고백에 대한 확실한 지도 원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우리의 죄의 심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세리의 고백이 이 원칙에 따른 것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눅 18:13). 그 말은 "저는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죄인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저의 죄들이 얼마나 큰지를 저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자비의 심연으로 저의 죄의 심연을 삼켜버리소서"라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죄는 하나도 고백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말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고백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의 앞에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 놓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인이라는 한 마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죄의 오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종류가 많은가를 잘 알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불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결의 성질이 어떠하며, 정도와 종류가 얼마나 넓고 많은가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 빛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며, 얼마나 많은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인정해야 한다. 상처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심한 매를 맞았는가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쏟아 부은 때에도 아직 죄가 남아 있다는 것과 죄악의 깊은 속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다윗과 함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마땅하다(시 19:12).

그들은 고백하겠다는 생각이 확실한 때에만 죄가 용서되며, 고백할 기회가 제공됐을 때에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의 문이 닫힌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주장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죄의 용서는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을 읽을 때에, 거기에 어떤 고해 신부의 귀에 대고 고백했다는 말씀은 없다. 고백을 받을 신부나 고백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그들은 고백을 할 수도 없었다. 그 후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백 제도는 없었으며, 이런 조건이 없이도 죄는 항상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스러운 일을 오랫동안 논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영원히 서 있다.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1-22). 이 말씀에 감히 무엇을 첨가하는 자는 죄를 결박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결박하는 자이다.

사건 내용을 듣지 않고서는 재판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재판관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이 직책을 맡은 것이 우선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것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원칙들을 그들은 태연하게 조작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들은 매고 푸는 직권이 그들에게 위임되었다고 자랑한다. 마치 그 직권이란 것이 어떤 재판권과 수사권인 것같이 말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리 전체는 이런 권리가 사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죄인이 사면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사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사면해 달라는 간구를 받으시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죄의 목록을 들어도 그것이 정화하며 완전한지1167)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사람의 말만 듣기로 하지 않는다면, 사면은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면 처분 전체는 믿음과 회개에 달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점은 사람이 사람에게 선고를 내려야 할 때에,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따라서 매고 푸는 일의 확실성은 지상의 재판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직무를 합당하게 수행할 때에, 그는 다만 조건부로 사면할 뿐이다. 그러나 죄인들을 위해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하는 말씀을 하셔서(요 20:23),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 약속된 용서가 하늘에서도 인정될까 하는 의심이 그들의 마음에 없게 하셨다.

19. 비밀 고백을 비판함

그러므로 우리가 귓속말로 하는 고백을 공격하며 우리 사이에서 추방하기를 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악한 제도는 여러 가지로 교회에 해를 끼친다. 비록 이 제도가 그 자체로는 무해하다고 하더라도 실지로 그것은 무익하고 무효할 뿐 아니라, 많은 불경과 모독과 과오를 야기했으니, 누가 그것을 즉시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대단히 유효하다고 해서 어떤 이용 가치를 선전하지만, 그것은 거짓 가치거나 전혀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특히 한 가지 이용 가치만을 중시한다. 즉, 고백하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것이 큰 벌이되어 죄인은 그 후에는 더욱 주의하게 되며,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하나님의 징벌을 피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각 사람이 최고의 하늘 심판대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심사를 받으라고 할 때에, 그것은 사람에게 크게 수치를 주며 충분히 그를 겸손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한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한 양심에 대한 증인이 되실 때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 얼마나 이익이라고 할 것인가!1168)

그러나 그들의 선전 자체가 전혀 거짓말이다. 이는 신부에게 고백한 사람들이 입을 닦고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잠 30:20)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들은 아주 대담하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죄 지을 담력을 얻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일 년 동안은 고백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거나 정신을 차리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계속 죄에 죄를 거듭하면서 한 번에 모조리 뱉어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 뿐만 아니라, 뱉어버린 때에는 짐을 벗은 것 같이 생각하며, 신부를 절친한 친구로 만들었으니 심판을 하나님에게서 신부에게 이양하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잊어버리시게 만든 것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어느 누가 고백하러 갈 날을 고대할 것이며, 어느 누가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고백하러 갈 것인가?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같이,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신부들은 아마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재미있는 일화같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나는 귓속말 고백에 관련된 무수한 몸서리치는 이야기로 많은 지면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다. 저 거룩한 분이1169) 음행에 관한 풍설 하나를 듣고 자기 교회에서 아니 자기 교구민의 기억에서 고백을 제거한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면, 지금같이 수많은 매음과 간음과 근친상간과 음행 방조 사건이 있는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경고를 받는다.

20. 열쇠의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고해 신부들은 이 목적을 위해 열쇠권이란 것을 주장하며, 그들의 왕국의 배를 전적으로 소위 "이물과 고물"을1170) 그 능력에 의존시킨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열쇠를 주신 것은 아무 뜻도 없다는 말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8:18) 아무 근거도 없다는 말인가?1171)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 여기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열쇠를 주신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점은 내가 최근에 설명했고 다시 파문론에서 특히 자세히 논하겠다.1172)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의 이런 요구의 구실을, 그들의 신부들은 사도들의 대리도 아니며 후계자도 아니라고 한 칼로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이 점도 다른 데서 다루게 될 것이다.1173) 그런데 그들은 방위 태세를 강화하려고 공성 병기를 가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장치를 파괴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성령을 주시기 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선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 열쇠의 권한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우선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지시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열쇠를 사용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노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지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허무한 것,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술책으로 그들은 완전히 패배를 당한다. 그들이 열쇠로 열 수 있다고 자랑하는 문이 어떤 문이든 간에 그들에 대해서는 항상 성령을 가졌느냐, 즉, 열쇠를 판단하며 보관하시는 성령을 가졌느냐고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가졌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성령은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그들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말은 하지만 감히 솔직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매라고 하신 것을 풀며, 주께서 풀라고 명령하신 것을 매는 일을 아무 분별없이 반복하는 신부 따위에게는 열쇠의 권한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21. 사제가 매고 푸는 것은 불확실하다

해당되는 사람이나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분간하지 않고 매며 푼다는 극히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그들의 유죄가 드러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지식이 없으면서도 권한을 남용한다. 권한을 선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권한 자체는 악한 행사자들에게 부여되었다고 그들은 글에 쓴다. 그러나 그 권한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것이다(마 16:19, 18:18). 그리스도의 약속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권한을 맡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매며 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매이거나 풀릴 사람의 가치에 따라서 제한된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매이거나 풀리는 데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매이거나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들과 교회에는 이 해당 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신자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을 선언할 수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교회는 "음란 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맬 때에 확실한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시 이 말씀으로 교회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위로한다. 그러나 무엇을 매며 무엇을 풀어야 할는지를 모르는 이 권한, 알지 못하면 매지도 못하며 풀지도 못한다는 이 권한은 대체 무슨 권한인가? 불확실한 사면을 하면서, 자기들이 받은 권위에 의해서 사면하노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상상적인 권한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불확실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도 상당수의 사제들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합당하게 쓰지 않으면 이 권한은 무효라는 것을 인정한다.1174) 그렇다면 나를 풀어주는 사람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한다고 내게 믿게 할 사람은 누군가? 만일 그가 악한 사람이라면, 그는 허황된 사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 그는 "그대에게서 무엇을 매거나 풀어야 할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열쇠를 공정하게 쓸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에게 해당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대를 사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평신도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말을 차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교도와 마귀라도 그만한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풀어주는 데 대한 확실한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없으나 그대에게 공로가 있으면 나는 그대를 사면할 권위를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열쇠는 분간하는 권위요 실행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고문으로서, 즉, 고문으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첨가된다고 설명했을 때에,1175)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자기들이 정욕대로 무례히 지배하기를 원한 것이다.

22. 열쇠의 권한을 그릇되게 쓰는 것과 바르게 쓰는 것과의 차이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 의존하는 사면은 언제나 애매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당한 사역자들도 그 의무 이행에 있어서 적지 않은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의 신앙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역자 자신이 그들의 사면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아무 위로도 아닌 위로까지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항의한다고 해도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은 사제가 죄에 대해서 들어 알기까지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용서는 사제의 판단에 달렸고 그가 용서받을 만한 사람을 현명하게 분간하지 못하면 그의 행동 전체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권한은 조사와 결부된 재판권이며, 용서와 사면은 이 재판권에 한정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고한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밑 빠진 수렁이 있다. 이는 고백이 완전하지 않으면1176) 용서받을 희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둘째로, 죄인이 죄를 정직하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사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끝으로 사제들은 너무나 무지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구둣방 주인이 밭갈이하는 것만큼도 그 직무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나머지도 거의 모두 당연히 자신을 의심해야 할 위인들이다. 이런 데서 교황의 사면에 관한 혼란과 주저가 생긴다. 그것은 그들이 사제라는 사람을 사면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사제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고와 조사와 증명을 거친 문제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선량한 선생님들에게 묻기를, 죄를 용서받은 후에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할는지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은 사제가 방금 낱낱이 들은 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선언하든 간에, 비난받을 다른 죄가 아직 남아있는 동안은 그 선언은 효과가 없다고 고백해야 될 것이다. 고백하는 사람의 편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는 사제의 재량에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양심이 치명적인 불안에 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이런 모든 모순이 전혀 없다. 사면은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대속을 구하며, 그가 베풀어주신 은혜로 만족한다면, 그는 이런 신뢰감을 조건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령으로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명령을 죄인에게 전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 없다. 주께서는 친히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마 9:29, 마 8:13참조). 주님 자신의 이 일반적인 원칙을 교황청에서는 사악한 생각으로 멸시하지만 죄인은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받기만 하면, 이 간단한 조건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

23. 그릇된 주장을 폭로함

열쇠의 권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뒤섞어 놓는가를 나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고 약속했다. 더욱이 적당한 곳은 교회 행정을 다루는 부분일 것이다.1177) 그러나 내가 독자들에게 기억하기를 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부는 복음 전파에 관한 것이었고 일부는 파문에 관한 것이었는데(마 16:19, 18:15-18, 요 20:23), 그들은 이 말씀을 불합리하게 왜곡해서 비밀한 고백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죄를 인정하며 용서함으로써 행사하는 사면권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분명히 이런 원칙은 거짓말이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에 도움을 주는 사유는 용서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며, 이 증언은 복음이 값없이 주는 약속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규율에 의존하는 다른 종류의 고백은 비밀한 죄와는 상관이 없고, 교회에 대한 공적 범행을 제거하기 위한 징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만 죄를 고백하거나 평신도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사제가 조사관으로서 관여하지 않고서는 불충분하다고 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증거를 수집한다. 그들의 근면은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고대 교부들이 신자들에게 목자들 앞에 죄의 짐을 풀어놓으라고 충고한 것은 죄를 일일이 고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런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롬바르드와 그의 동료들이 너무도 패악해서 왜곡되고 고의적으로 위서를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그들의 거짓으로 속이려 한 것 같다. 참으로 그들도 푸는 일은 항상 회개에 동반하는 것이므로 회개한 사람은 아직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사실은 풀린 것이라고 바르게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죄를 용서한다기 보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활하게 이 "선언"이란 말에 조잡한 오류를 도입해서 교훈을 예식으로 바꿔 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은 교회가 보기에도 사면을 얻은 것이라고 첨부한다. 이렇게 그들은 공동 훈련을 목표로 제정된 일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쪽으로 끌어갔으나 원래는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중대하고 알려진 허물을 저지른 죄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겸비한 태도에서 타락하고 부패해져서 새로운 용서 방법을 덧붙인다. 즉, 벌과 보속을 명령한다.1178)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단일체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희생물들이 분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회개와 신앙을 요구하시므로 이 분할 또는 이의는 완전한 모독 행위이다. 이것은 마치 사제가 호민관의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개입하여1179) 우선 호민관 앞에 엎드려 매를 맞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순수한 자비심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24. 요약

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이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이 거짓 고백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들의 무익한 노력은 논박을 받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이 여러 가지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들을 고의로 곡해한다는 것을 나는 증명했다. 이 법은 사람이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 명백하므로 나는 그것을 압제자의 악법인 동시에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그의 말씀에 붙들어 매시고 사람의 권력에서 풀어 놓으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애되지 않기를 원하신 일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사람이 규정할 때에,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모독 행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죄를 용서하는 데 있고 이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포악한 제도는 세상이 가증한 야만 세력의 압박 아래에 있었을 때에 도입된 것임을 나는 밝혔다. 여기에 첨부하여 나는 이것이 유해한 악법인 이유를 말하였다. 이 법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현저한 곳에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빠뜨리며, 관심이 없는 곳에서는 허무한 감언이설로 쓰다듬고 달래어 사람들의 태만을 조장한다. 끝으로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완화책은 모두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를 위장하는 것이며, 순수한 교훈을 혼란하게 하고 모호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5. 천주교의 교리를 개탄하며 논박함

그들은 고해성사에서 셋째 자리를 보속 교리에 둔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모든 공허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과거의 악행을 그치고 행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보조적인 방법에는 눈물과 금식과 예물과 자선 행위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방법들로 우리는 주의 노여움을 풀며,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갚으며, 우리의 범행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죄책을 용서하셨으나, 공의의 법에 의하여 벌을 보류하신다. 보속에 의해서 속량되어야 하는 것은 이 형벌이라고 한다.1180) 이 모든 말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우리의 범행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행위의 공로가 그 사이에 끼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로도 죄의 범죄에 대한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보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에 대해서 나는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를 대립시킨다. 성경에는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없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첫째로, 용서는 순수한 관용에서 주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돈을 받고 영수증을 쓰는 채권자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받지 않고도 친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빚을 말소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보속이란 생각을 일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거저"라는 말을 붙이는가?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신념으로 이렇듯 강력한 노호로 때려 부순 보속 교리를 여전히 일으켜 세우는가? 주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실 때에(사 43:25), 용서의 원인과 근거는 그의 선하심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밝히 선언하시지 않는가? 또한 온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행10:43). 이것은 다른 모든 이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용서를 "보속"이란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그들은 보속을 보조 수단으로 도입하는 듯하지만 용서를 보속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성경에 있는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위임만 의지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바울이 선언한 것과 같다(고후 5:19). 그리고 바울은 곧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고후 5:21)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법과 이유를 첨부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준다. 26-27)

26. 그리스도는 완전한 보속을 제공하셨다

그러나 심히 패악한 그들은 죄의 용서와 화해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됐을 때에, 단 한 번 있는 일이며, 세례 받은 후에는 보속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의 열쇠에 의해서 나눠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나는 불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두 명이 아니고 모든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주 분명히 글로써 자기들의 오점을 폭로하였다. 그들의 선생은1181) 베드로의 교훈에 따라(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 발언을 시정하는 예외를 덧붙인다. 곧 세례에서 죄에 대한 모든 현세적 징벌이 완화되지만 세례 후에는 회개의 도움으로 더욱 경감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회개가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1182) 그러나 요한이 한 말은 훨씬 다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 그는 분명히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죄의 대속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들과 단 한 번 화해하셨고, 지금은 그대들 스스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변호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회복시켜 주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고 한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이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1: 36 참조).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므로 그는 죄를 위한 유일한 제물이시며 또한 유일한 화목의 제물이시며, 유일한 보속물이시다. 죄를 용서하는 권리와 권한은 아버지께 고유한 것이며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1183) 이 점에서 그는 아들과 구별되시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정도에 둔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맡으시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이루신 속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데, 다만 자신의 보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화해시키는 영예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지 않아야 한다.

27. 로마 교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며, 양심으로부터 확신을 일소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고려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완전히 지켜 손상됨이 없도록 하며, 양심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1184)

이사야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사 53: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하셨다고 한다(사 53:5-6). 베드로는 이 뜻을 다른 말로 반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한다(벧전 2:24). 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음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한다(갈 3:1, 롬 8:3의 융합).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회생 제물이 되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 짐을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죽음의 벌을 모두 지웠을 때에, 그의 육신에서 죄의 세력과 저주는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거짓말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면, 최초의 정화가 있은 후에 우리는 각각 회개에 의한 보속의 분량에 비례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력을 느낀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타락할 때마다 다만 그리스도가 가르친 보속을 회상하라고 한다.

이제 그들의 어리석고 흉악한 주장들을 눈앞에 놓고 보라. 그들은 처음 죄를 용서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작용하나, 그 후에 우리가 타락하면 우리의 행위가 함께 작용해서 두 번째 용서를 얻는다고 한다.1185)

이런 원칙들이 성립한다면, 전에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던 기능은 손상됨 없이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을까?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지우며 그를 통하여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 죄의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죄는 보속으로도 속해 진다고 들을 때에 양심은 어떤 진정을 얻겠는가? 언제 사람은 보속의 분량에 대한 자신이 생길 것인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하신 지를 항상 의심하며 항상 불안하며 항상 떨 것이다. 사소한 보속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며 죄의 큰 짐을 경시한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1186) 적당한 보속으로 어떤 죄를 속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일 백 평생의 죄를 위한 보속을 바쳐도 부족하리 만큼 많은 죄에 압도될 때에는,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죄의 용서를 선언할 때에 그 상대는 세례 지망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품안에서 오랫동안 양육을 받아 온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중생한 자녀들이다. 바울이 극찬한 사신의 임무, 즉,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는 이 말씀은 외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생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 작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위탁한다. 그가 골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할 때에(골 1:20) 그는 교회가 우리를 받아들인 순간에 이 일을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은 글의 전후 문맥을 보아서 곧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는다고 그는 말한다(골 1:14). 이와 같은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더 많이 인용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차이점과 반대 의견을 비관적으로 검토함. 28-39)

28. 소죄와 대죄

여기서 그들은 한 도피 수단으로서 어떤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즉, 소죄로, 어떤 죄는 죽을죄라는 대죄로 어리석은 구별을 한다. 대죄를 위해서는 무거운 보속이 필요하고 소죄는 더 쉬운 수단으로 주기도와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과 미사에서 받는 사면으로 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우롱한다. 항상 소죄와 대죄를 말하면서도 마음속의 불경과 불결을 소죄라고 하는 것 외에는 죄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한다.1187) 그러나 의와 불의의 표준인 성경의 교훈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신자들의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죽을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며(롬 8:1), 죄가 인정되지 않고 용서를 받아 말소되기 때문이다(시 32:1-2 참조).

그들은 우리의 이 주장을 중상모략하여, 죄들의 동등성에 관한 스토아파의 역설이라고1188) 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입으로 그들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이 대죄라고 하는 죄들 가운데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대죄들은 동시에 다 같다는 결론이 곧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율법에 대한 순종은 생명의 길이며(레 18:5, 겔 18:9, 20:11,13, 갈 3:12, 롬 10:5, 눅 10:28 참조) 법을 어기는 것은 죽음이라는(롬 6:23, 겔 18:4,20 참조) 정확한 언급이 있으므로 그들은 이 선고를 회피할 수 없다. 죄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그들은 보속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한 가지 죄를 보속하는 데 하루가 필요하다면, 이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 더 많은 죄를 짓는다. 가장 의로운 사람도 여러 번 넘어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잠 24:16 참조). 죄들을 보속하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동안에도 많은 죄를 무수히 많은 다른 죄를 짓는다. 이렇게 죄를 보속할 수 있다는 보증이 제거되었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가? 어떻게 감히 보속을 하겠다고 여전히 생각하는가?

29. 죄의 용서는 벌의 면제가 포함된다

그들이 몸을 빼려고 애쓰나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물은 떨어지지 않는다."1189) 그들은 죄와 벌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죄책이 용서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벌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속은 원래 벌을 면제받는 것과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190)

이 얼마나 경박한 짓인가! 그들은 죄책의 용서는 값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벗을 위해서는 기도와 눈물과 그 밖의 각종 준비를 해야 된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에 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 이런 구별과 완전하게 반대된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충분할 정도로 증명했다고 믿지만, 다른 증언들을 첨부해서 이 꿈틀거리는 뱀들이 다시는 꼬리도 사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렘 31:31, 34). 이 말씀의 의미를 다른 예언서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고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4),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1-22, 27 참조). 그들의 의로운 행실을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그 행실들을 마음속에 새겨두는 일은 하시지 않겠다는 뜻과 사실상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같은 뜻을 표시하는 다른 말씀들도 있다.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도말 하였으니"(사 44:22),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우리가 이런 말들에 주의한다면, 거기에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려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면 그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계산하신다. 벌을 주신다면 죄를 기억하고 계신다. 재판에 붙이신다면 숨기시지 않는다. 죄의 가볍고 중함을 고려하신다면 등뒤로 던지시지 않는다. 검토하신다면 구름같이 쓸어버리시지 않는다. 죄를 드러내신다면 깊은 바다에 던지시지 않는다. 어거스틴도 분명한 말로 이 점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셨다면 죄를 보시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다. 죄에 주의하고자 하시지 않았다면 벌하지 않으시려고 한 것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무엇 때문에 '죄를 덮었다'고 하시는가? 죄가 보이지 않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보심은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191)

그러나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 죄를 용서하시는가를 듣기로 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이 말씀들의 뜻을 간단히 알아보고 싶은가? 한편으로 주께서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욥 14:17), 불의가 "봉함 되었고"(호13:12), 또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새겨 졌거늘"(렘 17:1)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런 어귀들은 벌을 내리시리라는 뜻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께서 이와 반대되는 말씀들로 모든 벌을 용서하신다고 확언하신 것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이 내가 붙인 설명에 주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1192)

30. 그리스도의 특별 희생만이 벌과 죄책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만일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가 나무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그의 몸에 지셨다고 말할 때에(벧전 2:24), 우리는 그가 우리 죄에 해당한 벌을 받으셨다는 의미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 점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 53:5)라는 더욱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란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 우리가 받았어야 할 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죄에 대한 벌을 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에 그것을 보통 구속(ajpoluvtrwsi")이라는1193) 말로 부른다(롬 3:24, 고전 1:30, 엡 1:7, 골 1:14 참조). 바울은 단순히 보통으로 이해하는 그런 의미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하기 위한 대가와 보속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속전으로서1194) 자기를 바치셨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딤전 2:6). "주님 앞에서 화해란 것은 회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회생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어거스틴은 묻는다.1195)

그러나 죄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에 확정된 것이 우선 우리에게 든든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거기서 주께서는 이러 저러한 모양의 배상을 정하시지 않고 제물을 드려 완전한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모든 속죄의 의식을 극히 자세하게 또 엄격한 순서로 결정하신다(출 30:10, 레 4:1-7, 16, 민 15:22이하). 여호와께서는 전혀 죄에 대한 배상을 행위로 치르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속죄의 제물만을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그의 심판을 무마하는 한 가지 보속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은 사람의 행위로 인정되지 않고 그 본질에 따라서, 즉, 그리스도의 특별한 회생에 따라서 판단되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배상을 요구하시는가를 호세아(Hosea)는 간단하게 웅변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라고 했으니, 이것은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라고 했으니(호 14:2), 이것은 참으로 보속을 의미한다.

그들이 더욱 교묘한 도피 수단을 강구해서 영원한 벌과 일시적 벌을 구별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일시적 벌을 해석하여 영원한 죽음을 제외한 모든 벌, 즉, 하나님께서 몸이나 영혼에 내리시는 모든 벌이라고 하지만, 이런 제한은 그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인용한 구절들이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책을 용서하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면제하신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다윗과 다른 예언자들은 죄의 용서를 빌 때마다 동시에 벌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빌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들은 주의 자비를 약속할 때에, 거의 항상 벌과 사면에 대해서 가르친다. 바빌론 포로 생활을 종결시키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 주께서는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신다(겔 36:22, 32). 이 말씀은 확실히 두 가지를 다 값없이 주신다는 뜻이다. 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책을 면하게 된다면 죄책에서 생기는 벌도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31. 그릇된 해석을 폭로함 : 하나님의 심판에는 형벌적인 것과 교정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 있는 증언들로 무장하고서 어떤 논거를 제시 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간음과 살인에 대한 책망을 듣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간음으로 인하여 태어난 아들이 죽음으로써 후에 벌을 받았다(삼하 12:13-14)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용서된 후에도 받지 않을 수 없는 벌에 대해서 보속으로써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자선사업으로 죄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권하였다(단 4:27). 솔로몬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기록하였고(잠 16:6), 다른데서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다(잠 10:12). 베드로도 이 견해를 인정한다(벧전 4:8). 누가복음에서 주께서는 죄인인 여인에 대해서 같은 뜻으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119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항상 이렇게도 패악하며 완고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관찰했다면 또 이것은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윗에 대한 이 책망에 포함된 벌은 보복과는 훨씬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책망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징계의 목적을 깨닫기 위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징계가 하나님께서 불경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진노로 추궁하시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알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문제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는 보복의 심판, 또 하나는 징계의 심판이 라고 부르겠다.

보복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신다. 즉,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뜨리시며 좌절시키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결합된 벌이다.

징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엄하심은 노여움에 이르지 않으며, 멸망시키려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 교정이나 경고이다.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그의 범행을 헤아려 범죄 자체에 벌을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징계할 때에는 복수나 학대하려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더 조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와 조금 다른 비유를 사용하지만, 결국 같은 뜻을 말한다. "아들도 채찍으로 맞고 노예도 맞는다. 그러나 노예는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아들은 훈계를 받아야 할 자유인과 아들로서 징계를 받는다. 아들에게는 교정이 시련과 개선이 되며, 노예에게는 응징과 벌이된다.1197)

32.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연 다르다

이 문제 전체를 속히 요약하기 위해서 두 가지 차이점 중의 첫째 것을 들겠다. 벌이 보복인 때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나타나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결코 내리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욥 5:17, 잠 3:11-12, 히 12:5-6).

이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해서 충분히 지적되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이를테면 일종의 지옥의 통로를 우리에게 묘사해 보이며,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영원한 저주를 이미 멀리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고치거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초보적인 경험이 도리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음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죽음에 내어주시지는 않는다(시 118: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으로 맞은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였고 자기들의 진정한 교육을 촉진시켰다고 고백한다(시 119:71). 우리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성도들은 벌을 받을 때에 평온한 마음으로 임했으며, 항상 첫째 종류의 벌을 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 10:24-25). 그뿐 아니라,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한다(시 6:1, 38:2).

그리고 주께서 성도들의 죄를 징계하실 때에 그들에 대해서 노하신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때가 많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이사야서에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라고 하는 말씀이 그와 같다(사 12:1). 마찬가지로 하박국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미가에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9)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당한 벌을 받는 사람은 큰 소리로 불평을 말해도 무익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함으로써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업을 욕되게 하셨다고(사 47:6, 42:24 참조)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영원히 욕되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나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엄한 벌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그 심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조금만 엄격하게 벌하며 찌르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를 입히시므로 그들 자신은 지옥의 벌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며 그래서 그들로서는 자기의 악행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더욱 조심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용서를 비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에서 진노보다도 자비를 더욱 분명히 증거하신다.1198) 하나님께서 신실한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은(삼하 7:12-13) 지금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 이 계약의 효력은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30-3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자비를 더욱 확신하게 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의 후손들을 단련하실 때에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온화하며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벌을 느끼는 사람들 편에서는 극심한 공포심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예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이 관대한 징계를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사 48:10). 은처럼 한다면 너희는 완전히 타버렸을 것이라는 말이다(사 43:2 참조). 주께서는 징계가 주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만 백성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도록 징계를 완화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 생활에 전심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악인도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 신음하지만, 그는 이 일을 숙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하신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말하며 반항하며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과 정신 착란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경고로 생각해서 즉시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간절히 구하게 된다. 가련한 영혼들의 이와 같은 고민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진노의 징조만 보이더라도 백 번이나 기절할 것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에는 둘째 차이점을 보기로 하자. 악인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미 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짐의 진노의 이런 증거를 무시한다고 해서 벌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바른 정신을 차리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자시며 처벌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지팡이로 맞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하나님에게서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일들은 과거보다 미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뜻을 내 자신의 말보다 크리소스톰의 말을 빌어 표현하려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벌을 내리신다. 과거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를 교정시키시려는 것이다."1199) 어거스틴도 "그대들이 받는 고통과 불평하는 일은 벌이 아니고 약이다. 정죄가 아니고 징계이다. 기업에서 배제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채찍도 배제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형제들이여, 온 세상이 불행에 신음하고 있으나, 인류의 모든 불행은 처벌 선고가 아니라, 의약에서 오는 고통이다."라고 말한다.1200) 이 구절들을 인용하기로 정한 것은 내가 이상한 말을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패악한 마음으로 모든 처벌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배반 행위를 자주 책하시며 분노가 섞인 불만을 말씀하시는 뜻도 여기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사 1:5-6). 예언서에는 이런 언급이 가득하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벌하시는 목적이 오직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며 회개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을 간단히 밝히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나라를 빼앗았을 때에 그에게 보복의 벌을 내리셨다(삼상 15:23). 다윗의 어린 아들을 빼앗았을 때에(삼하 12:18), 그를 교정하시려고 질책하신 것이다. 바울의 말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의 손으로 고통을 받는 일이 있지만, 이것은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징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어거스틴은 분명히 우리 편을 든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똑같이 받는 벌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 벌이 분투와 노력의 기회가 되며, 악인들에게는 죄의 용서가 없으며 불의에 대한 처벌이 된다. 여기서 그는 다윗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받은 벌을 열거한 다음에, 이 벌들은 그들의 자만을 꺾으며, 이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경건을 단련 내지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한다.1201) 이사야가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서 충분히 징계를 받았으므로 그 불의가 용서되었다고(사 40:2) 말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벌을 치르는 데 달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말을 바꿔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 그 벌이 무겁고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이미 오랫동안 슬픔에 지쳤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자비를 베푸신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때가 되었고, 너희 마음이 기뻐하며 나를 아버지로 느낄 때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시며, 그 자식에게 조금 가혹한 벌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비록 그것이 정당하고 엄격한 처사였지만, 후회까지 하신다.

34.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신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무장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렘 25:29),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느끼는 심한 고통이 보복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처벌하는 자를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진노와 적의로 밖에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채찍을 저주와 영원한 정죄라고 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를 벌하실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결국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 대해 노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비하시며 인자하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가 자기의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시 88:16). 또 모세가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시 90:7-9) 한 것과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다윗은 신자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징계에 의해서 압박보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징계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참으로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아끼시며 그들의 범죄를 무시하시면서, 자기 백성에게는 더욱 엄격하신 듯할 때에,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위로를 받아야 할 이유를 첨부한다. 즉, 율법으로 훈계를 받는다고 한다. 이 훈계에 의해서 신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때에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불경건한 자들이 제멋대로 과오에 돌입하는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한다. 그 벌이 영원한 것인지 또는 현세적인 것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질병이 악인들에 대한 주의 진노와 보복의 수단으로서 주어지게 될 때에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 자체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35. 다윗이 받은 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벌하신 목적을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살인과 간음을 하나님이 노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시는 충실한 종이 이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대단히 노하신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다윗이 감히 다시는 이런 범죄를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에게 어떤 배상을 하도록 하기 위한 벌이 아니었다. 주께서 한 교정책으로서 무서운 전염병을 그의 백성에게 보내신 것도(삼하 24:15)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구 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책을 거저 용서하셨지만, 이런 죄를 벌하는 것이 모든 시대에 본을 보이며 다윗의 교만을 깨기 위하여 합당한 처사라고 보셔서, 다윗을 채찍으로 심히 냉혹하게 징계 하셨다.

인류의 보편적인 저주에 대해서도(창 3:16-19 참조)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도 우리의 처음 조상이 죄에 대한 벌로서 받게 된 그 모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이런 시련에 의해서 경고를 받는 것으로, 즉,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어기는 우리의 죄에 대해 얼마나 심히 노하시는가 하는 경고를 받는 것으로 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하고 낙심하며 겸손하게 되어, 더욱 간절히 진정한 행복을 구한다. 현세에서 당하는 재난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연 어리석은 짓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런 뜻으로 기록했다고 나는 본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목적이 악행을 계속하는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면, 회개한 후에는 벌이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120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성질에 따라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더 엄하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더 친절하고 관대하게 다루신다. 따라서 얻어맞고도 죄를 그치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그 굳고 완고한 마음을 책망하셔서(렘 5:3), 자기가 내리는 벌은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에브라임은 한쪽은 익고 한쪽은 익지 않은 번병과 같다고 책하신다(호 7:8). 교정이 그들의 마음속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 죄를 익혀내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만드시겠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곧 관대하게 대하시리란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엄격하게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고한 태도가 그에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자진해서 고치면 그 엄격한 처사는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이 굳고 무지하여 징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극히 현명하신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한 공통된 채찍으로 일평생 훈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셨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의 예만 보고 많은 다른 예에 대해서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을 그들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눅 18:14). 거기는 아무 벌도 따르지 않았다. 베드로도 용서받았다(눅 22:61). 암브로시구스가 말한 것과 같이, 그가 울었다는 말씀은 있어도 속죄물을 바쳤다는 말씀은 없다.1203) 중풍병자는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마 9:2) 벌은 받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사면은 모두 값없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법칙은 특별한 양상을 가진 한 가지 예에서 취할 것이 아니라 빈번히 나타나는 이런 예들에서 찾아야 한다.

36. 벌에 대한 보속으로서의 선행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간하여 공의를 행함으로써 죄를 속하고 빈민을 긍휼히 여김으로써 죄악을 속하도록 설득했을 때에(단 4:27), 그는 그 공의와 긍휼을 하나님께 대한 화해의 제물과 벌에 대한 배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다른 몸값이1204) 있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라! 다니엘이 "속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고 사람에 관한 말이다. 그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오 왕이여, 당신은 지금까지 부정을 하였으며 포악한 지배를 했으며, 낮은 사람들을 압박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강탈했으며, 백성을 가혹하고 부당하게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불법 징수와 포악과 압박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긍휼과 공의를 행하십시오."라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한다(잠 10:12).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 절을 전부 인용한다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는 것이다(잠 10:12). 대조법을 상용한 그는 여기서도 미움에서 생기는 악한 일들과 사랑에서 생기는 결과들을 대조시킨다. 그의 뜻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서로 물고 빼앗고 비난하고 손해를 입히고 매사에 트집을 잡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많은 일을 숨겨주며 보지 않는 체하며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허물을 옳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관대하게 보며 비난으로 악화시키지 않고 충고로 고쳐준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취지도 확실히 여기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 말씀의 품위를 저하시키며 뜻을 간교하게 곡해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벧전 4:8 참조).

솔로몬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가르친 것은(잠 16:6),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른다든지, 또는 하나님께서 이런 보속으로 화해하시고 내리시려고 하던 벌을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정신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시리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죄가 그칠 때에 주의 진노도 진정되며 심판도 그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솔로몬은 용서의 원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치고 진정한 회심의 수단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직과 사랑의 실천을 기뻐하시는데, 위선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아우 소용도 없는 거짓된 예식을 하나님 앞에서 강행하는 것을 예언자들이 자주 비난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식으로 친절과 인정을 찬양하여 이런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히 13:16). 그리스도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접시를 깨끗하게 하는 데만 유의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무시하는 것을 비웃으시며, 구제를 함으로써 모든 것을 순결하게 만들라고 가르치셨을 때에(눅 11:3941, 마 23:25 참조), 속죄를 하라고 역설하시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오히려 주께서는 어떤 종류의 순결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가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도 논하였다.1205)

37. 죄인이었던 여인

누가복음에 있는 구절에 관해서는(눅 7:36-50), 주께서 제시하신 비유를 건전한 정신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대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주께서 그 여인을 선뜻 용인하셨으나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죄인인지를 알았다면 용납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속는 그리스도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주께서는 자신이 용서해주신 그 여인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이러므로…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1-47). 이 말씀은 그 여인의 사랑이 사죄의 원인이 아니고 증거라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비교한 것이다. 그 사람이 탕감받은 것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교는 다음과 같이 적용 되어야한다. 즉, 너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은 죄인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용서를 받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저 여인의 사랑을 보고서 너는 당연히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납법인 증명, 즉, 결과적인 증거에 의해서 어떤 일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주께서는 그 여인이 어떻게 용서를 얻었는가에 대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셨다(눅 7:50).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증거한다.

38. 천주교회 교리는 교부들의 권위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 널리 나타나 있는 보속설은 나의 생각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저술이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이 점에서 타락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날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새로운 보속설 변호론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글을 쓸 정도로 야만적이고 무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기록했다. "자비를 간청하는 데서는 조사가 그친다. 자비를 탄원하는 곳에서는 심판이 진정된다. 자비를 구하는 곳에서는 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비가 있는 곳에는 심사가 없으며, 자비가 있는 곳에서 받는 대답은 용서된다."1206) 이런 말은 아무리 곡해된다 해도 스콜라 학자들의 주장과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저술한 교회의 교리(The Dogmas of the church)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회개를 통한 보속은 죄의 원인을 끊어버리며 그 원인들의 시사를 허용하지 않는다."1207) 이 말을 보면 지은 죄에 대해서 갚는 것이 보속이라고 하는 주장은 고대에도 일반적으로 조소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그때에 보속을 후에 조심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과 항상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앞에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고1208) 한 말을 나는 인용하지 않겠다. 이런 말은 그의 글과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어디선가 자선 사업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는 다른 곳에서 이 항의에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회생이다. 세례에서 완전히 소멸된 죄뿐 아니라, 그 후에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잠입하는 죄까지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호소한다(마 6:12). 그리고 저 유일한 회생을 통해서 죄는 용서된다."1209)

39. 스콜라 학자들은 교부들의 교훈을 부패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보속을 하나님에게 치르는 보상이라고 하지 않고 파문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에 행하는 일반적 증언이며 그 증언에 의해서 자기들의 회개를 교회에 확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탄식과 그 밖의 의무를 지워서, 참으로 진심으로 이전 생활을 미워한다는 것을, 또 이전 행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자 한다는 것을증명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보속을 치렀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편람(便覽, Enchiridion)에서 라우렌티우스(Lauremtius)에게1210) 이 점을 바로 이런 말로 표현했다. 이와 같은 고대 의식이 현재 사용되는 고백과 보속의 근원이다. 이 훌륭한 형식의 그림자도 남지 못하게 한 무리는 참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겠다(마 3:7, 12:34 참조).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때로 다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것을 나는 안다. 또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1211) 그들이 잘못한 것 같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군데 오점이 있는 그들의 글을 이 사람들이 불결한 손으로 만질 때에는 전부가 더러워지고 만다. 또 교부들의 권위에 의해서 논쟁해야 된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어떤 교부들인가? 그들의 지도자인1212) 롬바르드가 그의 편찬을 만들기 위해서 인용한 저술가들의 대부분의 저술은 수도승들의 무의미한 광적인 발언을 모은 것이고 이런 발언들이 암브로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등의 이름으로 유포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증거의 거의 전부를 어거스틴의 책 회개에 대하여(On Repentance)에서 취했다. 이것은 어떤 열광적인 문필가가 필자의 우열을 묻지 않고 되는대로 끌어 모아 서툴게 꿰매어 놓은 것이다. 저자를 어거스틴이라고 하지만, 다소의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그의 저술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1213) 내가 스콜라 학자들의 미련한 행위를 명백하게 검토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나는 독자의 짐을 덜고자 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신비스러운 비밀이라고 자랑한 것을 폭로해서 웃음거리로 만들며 그들에게 수치를 주는 것은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 칭찬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설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냥 지나가겠다.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1214)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1215)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1216)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1217)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1218)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참조).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1219)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1220)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1221)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 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1222)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25, 롬 15:19 참조).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7 참조).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1223)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15 참조).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11 참조),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1224)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1225)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연옥설 지지용으로 인용된 구절들을 바로 해석함으로써 연옥설을 반박함. 6-10)

6. 연옥설은 논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끼로 이미 그들의 "연옥"을 쪼개고 베고 송두리째 넘어뜨렸으므로 이제 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연옥 문제를 모르는 체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분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이 문제에서는 맹렬한 충돌이 생길 뿐이고 덕을 세우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1226) 나는 그 심각성이 중대하지 않다면 이런 무가치한 것은 무시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러나 연옥설은 많은 신성 모독으로 구축된 것이며, 매일 새로운 모독으로 지탱되며, 여러 가지 중대한 죄악을 선동하고 있으므로 도저히 묵인할 수 없다. 대담하고 경박한 자들이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연옥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혹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또 사람들은 연옥을 간교한 사탄이 조작한 일종의 "계시"로 믿었으며, 이 생각을 확립하기 위해서 무지한 자들이 성경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했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난의 비밀한 곳에 침입하려는 인간의 무엄한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용인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죽은 자들에게서 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히 금지하셨다(신 18:11). 그의 말씀을 불결하게 타락시키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이런 것은 모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일시 허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속죄를 구할 때나 보속을 다른 데로 돌릴 때에는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소리로 옥과 폐에서 나오는 큰 소리로 -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연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부숴 버린다. 그 자들의 이 연옥은 죽은 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죄에 대한 보속을 치른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보속이라는 생각이 부서지면 연옥 자체도 송두리째 뽑혀지고 만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를 위한 유일한 보속과 유일한 속죄와 유일한 정화라는1227) 것이 분명하다면, 연옥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연옥을 옹호하기 위해서 매일 모독적인 말을 하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연옥이 종교 생활에서 빚어내는 비교적 사소한 죄악들과 이 불경건이 근원이 되어 흘러나오는 그 밖의 무수한 일들도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7. 복음서에 연옥설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 구절들을 거짓되게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구절들을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마 12:32, 막 3:28-29, 눅 12:10), 그들은 주께서 동시에 오는 세상에서 어떤 죄는 용서된다는 뜻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228)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죄에 대한 죄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과 연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벌은 연옥에서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죄책이 이 세상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욕설을 막기 위해서, 더 분명한 논박을 하겠다. 이런 부끄러운 죄악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 희망이 전연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주께서는 그것이 용서를 결코 받지 못하리라고 만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더욱 역설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양심이 현세에서 경험하는 심판과 부활시에 공적으로 내릴 최후의 심판을 구별하셨다. 주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악한 반역은 즉각적인 파멸이라고 생각하여 조심하라. 성령이 제시하는 빚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끝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끝날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할 것이며, 천국에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것이다."(마 22:32-33 참조)이다.

그들은 또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를 끌어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만일 이 구절에서 재판장은 하나님이고 송사하는 자는 악마요, 관예는 천사요, 감옥은 연옥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공정과 화합을 더 절실하게 역설하시기 위하여, 공정과 선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율법의 문자를1229) 완고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험과 재난을 자초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누가 보든지 명백하다. 그렇다면 연옥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8. 빌립보서와 계시록과 마카비후서에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1230)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 바울의 말에서(빌 2:10) 그들은 증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땅 아래"는 영원한 저주에 묶여 넘어간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생각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그 말을 연옥에서 고통하는 영혼들에 적용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로 사도가 진정한 경배를 의미했다면 그들의 추리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단순히 그리스도께 지배권이 부여되어 모든 피조물을 복종시키게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땅 아래 있는 자"는 마귀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와서 공포와 전율로 심판자를 인정할 마귀들을 의미한다고(약 2:19, 고후 7:15 참조)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 예언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롬 14:10-11, 사 45:23).

그러나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라고 한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물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말하는 만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성이 없는 것과 무생물도 포함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부분이 하늘 꼭대기로부터 지구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 모양대로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데 불과하다(시 19:1 참조).

그들이 마카비 가문의 역사에서 인용하는 것은(마카비후서 12:43)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성경의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정경으로 인정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선 그는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인정했는가? 그는 "유대인들은 마카비서를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 책은 침착하게 읽거나 듣는다면 교회에 무익하지 않다."1231)고 말했다. 그러나 제롬은 아무 주저함이 없이 마카비서의 권위는 교리를 증명하는 데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1232) 키프리안이 기록했다고 하는 고대의 저술인 신조의 해석에 관하여(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를 보면, 마카비서가 고대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1233) 또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무익한 논의에 시간을 보내는가? 저자 자신이 끝에 가서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간청함으로써(마카비후서 15:39), 자신이 충분한 존경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사람은 확실히 그것을 성령이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유다의 경건을 칭찬하는 이유도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예물을 보냄으로써 종말의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였다는 특색뿐이었다(마카비후서 12:43). 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유다의 행위를 구속의 대가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죽은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행동은 미신적인 것이었으며 잘못된 열성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 후로 율법에 의한 회생이 없어진 줄 알고 있는데, 그 옛날 관습을 현재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짓이다.

9.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강력한 전투 부대를 제공하며, 이 군대는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인용한 바울의 말은"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3,15)고 한 것이다. 이것이 연옥의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연옥의 불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없애버리고 우리는 순결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 중에는 이 말의 뜻을 달리 해석한 사람이 매우 많다. 그들은 불을 환난 또는 십자가로 보며, 주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그 백성이 육의 더러움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그들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였다.1234) 그리고 이편이 공상적인 연옥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과도 의견을 달리한다. 나는 이 구절을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해석을 소개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사도들과 성자들은 모두 이 연옥의 불을 통과해야 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그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리라는 것을 안다. 사도들과 성자들의 공로가 모든 교인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준다고 상상하면서 그들도 연옥을 통과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일부사람들의 업적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업적이 시험을 받으리라고 언명한다. 이것은 내가 하는 논박이 아니고 그런 해석에 반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또 그들의 해석에는 더욱 어리석은 점이 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행위 때문에 불을 통과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들이 지극히 성실하게 교회를 건설했다면 그 업적이 불로 시험을 받은 후에 상을 받으리라고 말한다.1235)

우선 우리는 사도가 사람의 두뇌로 고안해낸 주장들을 "나무와 풀과 짚"이 라고 비유적으로 부른다. 이 비유는 나무를 불에 넣으면 곧 타버리는 것과 같이, 이런 것도 시험을 받게 되면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하나님의 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기의 비유의 줄거리를 따라 각 부분의 상호 관계를 종합하여 성령의 시험을 "불"이라고 부른다. 금과 은은 불에 가까이 두면 둘수록 그 순수성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된다. 그와 같이 주의 진리는 조심스럽게 영적 검토를 거치면 거칠수록 그 권위가 더욱 완전히 확립된다. "나무와 풀과 짚"은 불에 넣으면 즉시 타버린다. 그와 같이 인간의 조작품은 주의 말씀을 토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시험에 견뎌나지 못하고 즉시 몰락하고 소멸한다. 간단히 말하면, 조작한 교리는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이 불에 타버리기 때문에 "나무와 풀과 짚"에 비교되지만 그런 교리를 태워 없애버리는 것은 주의 성령뿐이다. 따라서 교리들을 시험할 불은 성령이다. 이 성령에 의한 시험을 바울은 성경의 통례에 따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고전 3:13). 주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때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주의 진리가 빛을 나타내는 때에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불"은 성령에 의한 시험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공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고전 3:15) 어떻게 저 불을 통과하여 구원을 얻는가? 사도가 어떤 사람들을 겨냥하여 두고 말하는지를 알면, 이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합당한 기초 위에 부적당한 재료로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신앙의 중요하고 필요한 교리에서는 떠나지 않지만, 덜 중요하고 덜 위험한 교리에서는 곁길에 들어, 자기들이 생각해낸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섞어 넣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조작품과 함께 그들의 공력까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것처럼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전 3:15). 바꿔 말하면 그들의 무지와 망상이 주 앞에서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권능으로 그것들이 깨끗이 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금같은 순수성을 이 추악한 연옥설로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10. 초대 교회에 호소하는 것도 로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교회가 지켜온 극히 오랜 관습이라고 말한다.

이 항의에 대해서 바울은 자기의 시대까지도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교회를 부적당한 기초 위에 세우는 사람은 모두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한다(고전 3:11-15)

그러므로 나의 반대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과거 1300년 동안 있은 관습이라고1236) 항변하나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 어떤 계시에 의해서, 어떤 전례에 의해서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기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의 예를 보더라도 이런 일은 전연 없었다. 애도와 매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많으나, 이런 기도에 대해서는 일점일획도 볼 수 없다. 문제가 중요할수록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싸들을 위해서 기도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합법적인 전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1237)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감히 했는가? 그들은 인간 본성의 약점에 굴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한 일은 모방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롬 14:23), 신자는 양심에 확신이 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특히 기도에서 이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강요한 것은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슬픔을 덜어줄 위로를 구했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하나님 앞에서 표시하지 않는 것은 몰인정한 것같이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인간성이란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아는 일이다.

또 일반적으로 공인된 풍습이 불붙은 나무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모든 이교도들 사이에 옛날부터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있었고 매년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탄은 이런 술책으로 우둔한 인간들을 속였지만, 그는 바른 원칙에서 그들을 속이기 위한 기회를 얻었다. 즉, 올바른 원칙이란 죽음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이생에서 다른 생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미신 자체가 이교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내세 생활에 생각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사람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이 마치 없어진 것같이 그들을 위해서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여기서부터 저 잘못된 정신이 생겨났다. 장례식이나 연회나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그릇된 경쟁심에서 시작한 일이 새로운 것을 추가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교황권의 신성성을 표시하는 중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완전한 위로가 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장한다(계 14:13). 그리고 그 이유로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부언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인정에 빠져서 교회 안에 패역한 기도 풍습까지 장려한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 들이 기록한 일은 당시의 사회 풍습과 무지로 인해서 허용되었다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교부들도 오류에 휩쓸려 들었다는 것을 단정한다. 부주의한 경신(輕信)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판단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권할 때에 그들이 많이 주저한 것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제단에서 예식을 행할 때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자기를 기억하라고 간곡하게 요망했다는 것을 그의 참회록(Confession)에서 밝힌다. 이것은 분명히 한 노인의 요구였고 아들은 그것을 성경의 기준에 의해서 시험하지 않고 자기의 자연적인 애정을 다른 사람들이 시인해 주기를 원했다.1238) 그뿐 아니라, 그가 쓴 사자(死者)를 위하여 할 일(The Care to Be Taken for the Dead)이라는 책에는 너무도 많은 의혹이 있어서, 그 냉정한 태도는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미련한 열심을 즉시 꺼버릴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냉정한 상상들을 읽으면 정성이 있던 사람들도 성의가 없어질 것이다.1239) 이 관습에 대해서 이 책이 주는 유일한 지지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지금까지 있는 관습이니, 멸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은 경건한 행동같이 생각된다는 점에서는 나도 교회의 고대 저술가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속일 수 없는 지켜야 할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우리의 기도에 집어넣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그것은 어떤 기도를 받으시고자 하는가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나 복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허락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더럽히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고대 교회가 이를테면 그들과 오류의 동지가 된다고 자랑한다면, 나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고대인들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한 기념으로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연옥에 대해서 그들은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의 현재 논적들은 그들이 상상해낸 연옥을 하나의 신앙 조항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고대인들은 성만찬에서, 죽은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에게 형식적으로 간혹 기도했을 뿐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열렬히 추진하며, 끈덕지게 선전함으로써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보다 그것을 우선시킨다.1240)

참으로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은 고대에 사용된 죽은 자를 위한 모든 기도를 분명히 부정한다. 그런 증언을 제시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일례로서 어거스틴이 한 말을 들 수 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람은 죽은 후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면 모두 평안한 휴식을 얻는다고 어거스틴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신자가 예언자와 사도와 순교자들과 똑같이 죽은 후에 즉시 복된 휴식을 얻는다고 증거한다.1241)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나는 묻고자 한다.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한 유치한 미신에 대해서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런 미신은 무수히 많지만 그 대부분이 너무도 괴상해서 도저히 점잖게 꾸밀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무지몽매를 이용해서 그들이 비열한 장사를 하며 그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추악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선량한 독자들은 양심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제 6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주장하는가?

1. 논설의 의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1242) 중생의 목적은 신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순종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받은 자녀로서의 자격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갈 4:5, 벧후 1:10 참조).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둔하여 많은 자극과 도움이 필요하므로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의 열성이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토대로 생활을 설계하는1243)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를 서술함에 있어서 나는 문제의 내용이 복잡 다양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중대성으로 보아서, 만일 자세히 논하려면 방대한 저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한 훈계를 기술하는 데도 옛날 교부들은 무수한 말을 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마디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해서 권장하려고 해도 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자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생활지침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개개의 덕목을 상술하거나 여러 가지 충고를 하는 등의 탈선을 할 생각은 없다. 이런 것은 다른 분들의 글에서, 특히 교부들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정리된 생활로 인도될 수 있는가를 경건한 사람에게 보여주며, 그의 각종 의무를 결정할 어떤 보편적인 준칙을 간략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열변을 토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나, 내게 적당하지 않은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원래 간결한 것을1244) 좋아하며 더 많이 말한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더 길게 가르치는 것이 많은 환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뿐 아니라, 이 저서의 계획으로 보아서, 교리의 단순한 개요를 가급적 간단하게 제시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바른 것과 고상한 것의 한계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개개인의 의무와 수다한 덕목을 끌어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이 문제에 대한 고유의 질서가 있으며, 그 처리 방법이 지극히 아름답고 모든 철학적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철학자들은 명예욕이 강했기 때문에 자기의 민첩한 두뇌를 자랑하기 위해서 논술이 지극히 정연하고 명료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솔직하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어떤 조직적 방법을 정확히 또는 부단히 따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규정하실 때 그는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암시하신다.

2. 그리스도인 생활의 동기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교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양상이 있다. 첫째는, 우리의 본성에는 의에 대한 사랑이 전연 없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의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된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지 않도록 준칙을 정하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권장하는 심히 많고도 훌륭한 비유가 있다. 그 중에서 얼마는 이미 다른 곳에서 보았고 여기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레 19:2, 벧전 1:15-16). 의의 기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길을 잃은 양들같이 흩어져서 이 세상의 미로를1245) 헤매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모으셔서 자신과 만나게 하셨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이 그 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게 굳게 결합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악이나 불결과는 아무 접촉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그의 영광의 가장 특이한 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표는 이것이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자 하면 우리는 항상 이 목표를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사 35:8, 기타). 세상의 사악과 부패에 잠겨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평생 거기서 주저앉아 있다면, 구원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주의 백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거해야 한다는 충고가 있다(시 116:19, 122:2-9 참조). 주께서 이 도성을 자신의 것으로 성별하셨으므로 주민의 불결로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흠이 없고 의를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시 15:1-2, 24:3-4). 이는 그가 거하시는 성소가 마구간 같이 오물이 가득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기를 그리스도 인격과 그의 구속 행위에서 얻는다

성경은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일깨우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을 때에(고후 5: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형상을 인치시고(히 1:3 참조), 우리가 그 형상과 같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면 도덕 철학을 철학자들만이 충분히 또 조직적으로 진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처리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자.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특히 덕에 대한 교훈을 할 때에, 본성대로 살라고1246) 할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근원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다. 또한 우리의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창조 당시의 본연의 상태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친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게 된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세우셨고 우리는 그 모범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한 가지일보다 더 효과적인 어떤 것을 요망할 수 있는가? 아니, 이 한 가지 일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한가? 주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즉, 우리의 양자 관계의 유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의에 몸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반역하는 사악한 배신행위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열거하고 그 은혜와 우리의 구원의 각 부분에 대해서 일일이 충고할 계기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으므로 만일 우리가 자녀다운 생활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는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말 1: 6, 엡 5:1, 요일 3:1).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를 씻어 정결하게 하셨고 세례를 통하여 그 정결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또다시 타락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엡 5:26, 히 10:10, 고전 6:11, 벧전 1:1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지체인 우리 자신에 오점이나 결점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엡 5:23-33, 고전 6:15, 요 15: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승천하셨으므로 우리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늘을 동결해야 한다(골 3:1이하). 성령께서 우리를 성전으로서 하나님께 바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빛나도록 주의하며, 추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우리의 영혼과 몸은 하늘의 불멸과 퇴색하지 않는 면류관을 받기로 정해졌으므로(벧전 5:4),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을 주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보존하도록 힘 있게 노력해야 한다(살전 5:23, 빌 1:10 참조). 이런 충고들은 우리의 생활을 건설하는 기초로서 가장 복된 것이다. 철학자들에게 가서 이와 같은 것을 구하려고 해도 무익할 것이다. 그들은 덕을 권장할 때에, 기껏 고상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인간 본래의 존엄성이란 생각을 결코 넘지 못한다.1247)

4.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가장 깊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휘장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칭하고 싶은 사람들을 여기서 책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그들은 그의 신성한 이름을 얼마나 염치없이 자랑하고 있는가? 참으로,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면, 그와의 친교를 가질 수 없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교훈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를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은 욕망에 속아 썩어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엡 4:22,24).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넓은 지식과 유창한 말주변으로 무엇이라고 지껄이든 간에, 그리스도를 아는 체하는 그들의 태도는 거짓이며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고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 분야에서는 오성과 기억력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을 해득하려면 복음이 영혼을 전적으로 점령하고 속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1248) 그러므로 아니면서 그런 체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모독 행위를 못하게 하고 교사인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처신하라. 우리는 종교 생활의 근원이 되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 교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우리의 속마음에 들어가며, 다음에 일상생활이 되며, 우리를 개조하고 동화시킴으로써 복음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인생의 스승으로 믿기에, 그것을 궤변술로 타락시키는 자칭 철학자들을 볼 때에 격분하여 그들을 철학계에서 축출한다.1249)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혀끝에서 복음을 굴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천박한 궤변가들을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훨씬 더 당연하지 않은가? 복음의 효력은 마음속 가장 깊은 감정에까지 침투해서 영혼 안에 자리를 잡고 인간 전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하는 충고보다 백 배나 더 심각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불완전과 노력

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 생활에서는 복음만을 호흡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원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복음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복음적 완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에서 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 교회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다. 목표에 조금은 접근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을 버린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을 눈앞에 세우라. 우리가 분투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들을 일부분은 실행하고 일부분은 우리의 생각대로 버리는 식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과 우리가 나눈다는 것은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어디서나 그에 대한 경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실을 요구하신다(창 17:1, 시 41:12 기타). 이 말은 마음의 진실한 단순성, 아무런 간사함이나 가장이 없는 마음, 두 마음과 반대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올바른 생활의 출발점은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이 영적인 생활에서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함양하고 체득하기 위해서 마음의 깊은 감정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친다.

그러나 지상 감옥인 육체를1250)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해서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의 미미한 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전진할 생각으로 우리가 시작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비록 아주 짧은 거리일지라도 매일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출발은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길에서 다소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중단치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사소한 때에도 낙심하지 말라. 원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나으면 무익한 노력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계속 분투노력하라. 우리의 목적은 선한 일에서 평소보다 조금씩 나아 져 드디어 선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분과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 만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다.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 자기 부정

(탈속과 자기 부정의 기독교 철학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1-3)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인간 생활의 규율을 위하여 가장 잘 마련된 적절한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제공한다. 그러나 하늘 교사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 율법에 제시된 준칙과 부합하도록 더욱 명백한 계획에 따라서 인도하는 것을 좋게 보셨다. 그 계획의 출발점은 신자의 의무에 대한 개념인데, 그 의무는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롬 12:1).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권면이 나온다(롬 12:2).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별되며 바치어져, 금후로는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명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속되게 사용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현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 참조) 주의 것이라면 우리가 멀리 피해야 할 오류가 무엇이며, 일생의 모든 행동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소유를 잊어버리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라(롬 14:8, 고전 6:19 참조).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의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참으로 얼마나 큰 유익을 얻겠는가! 우리의 사욕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멸망시키는 해독이듯이 유일하고 안전한 피난처는 아무것도 아는 체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자기 힘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주의 인도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이 것을 제일보로 삼으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육적인 생각을 버린 빈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명하시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건만, 철학자들은 이 변화를 몰랐다. 바울은 이것을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다(엡 4:23). 저들은 이성만을 사람 안에 있는 지배 원리로 설정하고 이성의 소리만을 따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인생행로를 이성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1251)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며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사람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며 지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한다(갈 2:20).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함

여기서부터 두 번째 요점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한 걱정은 물론 경시하면서 우리의 열성을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 신실히 바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전진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1252) 충심으로 느낄 만큼 마음의 자세를 확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것을 모두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에 맡길 뿐 아니라, 하고자 하는 것까지도 양심적으로 온통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아는 사람은 동시에 모든 허탄한 생각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부정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이다(마 16:24 참조)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함이나 그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연 허용하지 않는다(딤후 3:2-5 참조). 이와 반대로 자기 부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때에는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횡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기에는 선한 것이 있다고 해도 타락한 명예욕으로 더럽혀진다. 주의 계명에 따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친절을 베푸는 예가 있으면, 그런 사람을 내게 보이라. 자기 부정의 심정이 강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덕은 덕 자체를 위해서 추구돼야 된다고1253)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안하무인격으로 거만하여 그들이 덕을 추구한 것은 자랑할 기회를 얻으려는 생각이었고 그밖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속 풍조에 아부하는1254) 사람과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모두 아주 불쾌히 여기시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마 6:2,5,16), 창녀와 세리들이 그들보다 천국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마 21:31).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를 바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아직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무수한 죄악이 숨어 있다."고1255) 한 옛말은 옳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추구하며,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잘 정돈된 생활의 각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간단하나마 더 분명하게 설명을 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바울은 우리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했다.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장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물을 제거했다. 첫째는 불경건인데, 우리의 천성은 이쪽으로 너무나 많이 기울어져 있다. 둘째는 세상 욕심인데, 이것이 미치는 범위는 더욱 크다. 불경건이란 것은 미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두려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상 욕심은 육의 정욕과 같은 것이다(요일 2:16, 엡 2:3, 벧후 2:18, 갈 5:16, 기타 참조). 이와 같이 율법의 두 돌판에 관련해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을 버리며,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는 인생의 모든 행동을 세 부분으로 묶어 둔다. 즉,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이다. 이 가운데서 근신은 정절과 절제뿐만 아니라, 세상 재물을 순결하고 검소하게 사용하며 빈곤을 참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의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주는1256) 공정성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다(롬 13:7 참조). 다음으로, 경건은 세상의 불법에서 분리된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켜 참으로 거룩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서로 결합되어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끈으로 묶이게 될 때 완전무결한 상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육의 이성과 작별하고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며아니, 버린 후일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며, 세상의 더러움 속에서 천사의 생활을 명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올무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복스러운 영생을 우리에게 환기시키며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살전 3:5 참조).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나타나셨던 것같이 세상 종말에 오실 것이며 그 때에 그가 행하신 구원의 결과를 보이실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 전력을 다해 하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을 일소한다. 참으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우리의 천국 기업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나그네같이 살라고 가르친다.1257)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자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4-7)

4. 자기 부정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 부정이 일부는 사람과 관계되고 다른 부분, 즉, 그 중요 부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인 관계의 행동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빌 2:3), 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롬 12:10 참조)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서 본성의 감정을 우선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와 비교해서 남은 모두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부끄럽지 않은 것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곧 마음이 부풀어 올라 그 자만심으로 거의 터질 정도가 된다. 우리는 우리를 침범하는 죄악들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려고 애쓰며, 한편으로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구실로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선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때도 있다. 우리가 감탄하는 재능이나 우리보다 우수한 재능을 다른 사람이 발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경시하며 배척해서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에게 과실이 있다면 우리는 엄하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추악하게 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교만하여 자신은 평범한 운명에서 제외됐다는 듯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원하며 모든 인생을 거만한 태도로 욕하거나 적어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보며 멸시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평민은 귀족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배우지 못한 사람은 유식자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더 낫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그 가슴속에 일종의 왕국을1258)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인격과 도덕 생활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충돌 점에 이르게 되면 독을 뿜는다. 모든 일에 명랑하고 유쾌한 동안에는 분명히 온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 때에도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투쟁욕과 이기심은1259)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다. 이것을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뽑아버리는 것밖에 다른 치료법이 없다.

성결의 교훈은 이 전염병을 일소해버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잊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사람은 그의 배은망덕을 폭로한다. 바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를 오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남지 않을 것이지만 낙심하게 만드는 일은 많을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재능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재능을 높이며 그 사람들을 존경하라는 것이 우리가 받은 명령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영예를 주셨는데, 우리가 그 영예를 그들에게서 빼앗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큰 죄악일 것이다.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물론 좋은 말로 칭찬할 것이 아니나 관대히 보아주라고 우리는 배웠다. 결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땅히 호의와 존경으로 대할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대로 한다면, 우리는 관대하고 겸손하게 대할 뿐 아니라 다정하게 그리고 한 친구로서 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친절을 체득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다.

5.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돕는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웃의 유익을 구하려고 할 때 자기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말하자면 자기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방면에서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사랑의 일이라고 가르친 그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하였다(고전 13:4-5). 우리에 대한 요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상당히 가혹하게 다루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시기만을 위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해서 우리 자신과 재산을 무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을 기꺼이 내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우리의 천성으로 보아서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러한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는 모두 일정한 조건 아래 위탁된 것이라고 경고한다. 받은 은혜를 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그 조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사용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친절하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 전체는 우리의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서 분배하라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위탁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배웠다(벧전 4:10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규칙이나,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한 더 타당한 권고를 생각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일보 전진해서 우리의 은사를 신체 기관들의 능력에 비교한다(고전 12:12이하). 어느 기관도 자신을 위해서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사로운 필요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각 기관은 다른 기관들을 위해서 그 능력을 쏟아놓는다. 온 몸에 공통적으로 유익하게 된 때에 비로소 각 기관은 자체 능력의 혜택을 받는다. 그와 같이 경건한 사람도 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위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하며,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을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이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돌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관용과 자선에 대한 우리의 규칙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우리의 청지기 직책에 관해 하나님께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바른 청지기의 유일한 자격은 사랑을 표준으로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이익에 대한 열심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을 결합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기 위해서 이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상고 시대에 그가 주신 가장 작은 선물들에까지 이 규칙을 적용하셨다. 곧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고 주시는 혜택을 우선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고서 받아쓰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백성들이 증거하도록 하셨다(출 23:1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의 손으로 창조주에게 바친 때에만 거룩하게 된다면, 바치지 않고 쓰는 것은 분명히 부패한 남용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풍부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인간의 관용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예언자의 말과 같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시 16:2-3). 그리고 율법의 규정에 해당하는 일을 현재도 행하기 위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거룩한 제사에 비교하였다(히 13:16).

6.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종류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우러러본다

그뿐 아니라 선을 행하다가 곧 낙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을 막기 위해서(갈 6:9) 우리는 마땅히 바울이 말한 다른 생각을 더 첨가해야 한다. 그는 "사랑은 오래 참고…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고전 13:4-5).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히 13:16). 그러나 사람은 그 자신의 공로로 판단한다면, 대부분이 심히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 성경은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돕는다.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 형상에 대해서 경의와 사랑을 표시하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믿음의 식구들 사이에서(갈 6:10),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만날 때에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를 그에게 주셨다. 주께서는 우리 자신의 골육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셨다(사 58:7). 가령 "그가 비루하고 무가치하다"고 하자. 그러나 높으신 주께서는 낮은 그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형상을 주셨다. 그 사람에게 봉사할 아무런 의무도 우리에게 없다고 말하자. 그러나 우리에게 크고 많은 은혜를 주시고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우신 주께서는, 이를테면 그를 자신의 자리에 두시고 그를 향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들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그에게는 우리가 그를 위해서 조금도 수고해 줄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를 우리에게 추천하신 하나님의 형상에는 그대 자신과 그대의 전소유를 바칠 가치가 있다. 또 그는 우리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불의한 행동이나 저주로 그대의 감정을 상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까지도 우리가 그를 사랑으로 포옹하며 그를 위해서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중단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마 6:14, 18:35, 눅 17:3). "그는 당연히 나와는 아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리라. 그러나 주께서 당하신 일은 과연 당연했는가? 주께서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때에, 자신이 그 죄를 맡겠다고 하시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을 유익하게 해주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축복으로 대한다는 것은(마 5:44)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전혀 반대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확실히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악의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1260)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그 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말소하며 삭제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 그들을 사랑하며 껴안게 만든다.

7. 보이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이런 자기 부정은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수행할 때에 한해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의 의무를 다 실행하고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수행했다고 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외면적으로는 모든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면서도 진정한 의무 이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덕한 체하면서도 반드시 자랑하는 얼굴이나 심지어 거만한 말로 물건을 주어서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또 이 비참하고 불행한 시대에, 사람들은 구제품을 나눠줄 때에 대개는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흉악한 짓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명랑한 얼굴이나 다정한 말로 유쾌하게 의무를 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자기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의 처지에다 자기를 두고 그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며 견디는 것같이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비와 인자의 정에 이끌려 자신을 돕는 것같이 남을 돕게 되어야 한다.

이런 심정으로 형제를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은 교만이나 비난으로 자기의 의무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곤란한 형제에게 도움을 줄 때에 그를 멸시하거나 자기에게 빚을 진 노예같이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짓은 온 몸이 재생시키려고 애쓰는 병든 기관을 비난하거나 갚아줄 수 없으리만큼 많은 도움을 다른 기관들에게서 받았다고 해서 병든 기관에게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불합리한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기관들 사이에 배당된 일은 거저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 법칙에1261) 따라서 보답하여야 할 것, 거부하면 흉악한 결과가 될 그런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일을 수행한 사람은 자기에게 다른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부자들은 자기 소유에서 얼마를 내어준 다음에는 다른 부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이웃들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것이며, 이웃에 대해서 친절한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재력이 미치는 데까지 계속할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범위가 넓은 때라도 사랑의 법에 따라서 한계를 정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자기 부정의 원칙. 8-9)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자기 부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곧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부분을 더 자세히 반복하겠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것이 많으므로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부분이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고 관대하게 만드는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현세 생활에서 평안과 평온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의 뜻에 맡기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그에게 일임해서 길들이며 복종시키도록 하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듯한 일에 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의 욕망은 날뛰며 중단될 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가난한 살림과 낮은 가문과 이름 없는 처지를 우리는 경탄하리만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 따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야심이나 탐욕의 목표에 도달하며 한편으로는 빈곤과 비천을 피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해서 지칠 정도에 이른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들이 취할 길이 하나 있다. 첫째로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않고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번영하겠다는 욕망이나 희망이나 계획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1262) 그러므로 안심과 확신을 품고 주께서 주시는 복에 몸을 맡기며 거기서 안식을 얻으라. 육은 자체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또는 사람들의 호의에 의해서 부귀를 구할 때에, 아무리 자체만으로 충분한 듯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주나 노고도 주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의 축복이 있기만 하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기쁜 결과가 될 것이다. 주의 복이 전연 없어도 우리는 어느 정도의 영광과 재산을 얻을 수 있다(사악한 자가 굉장한 재산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본다).1263)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티끌만한 행복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우리가 얻는 것은 모두 우리의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얻으려는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9.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의지하라

그러므로 일이 잘 되며 좋은 결과가 나타나려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만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복이 없으면 각종 불행과 재난이 우리를 괴롭힌다.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민첩한 두뇌와 근면이나 사람들의 호의나 공상적인 행운을 믿고 부귀를 탐내어 애쓸 것이 아니라, 항상 주를 우러러보며 주의 지도를 받아, 주께서 정하신 우리의 처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선 우리는 사악한 행동, 책략, 간계 그리고 탐욕 등의 수단으로 재물을 움켜잡으며 지위를 강탈하려고 날뛰어 이웃을 해하는 일이 없게 되고 우리의 순진성을 버리게 하지 않는 사업만을 하게 될 것이다.

사기와 강탈과 그 밖의 악한 술책을 쓰는 곳에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도움이 임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순결한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오며,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왜곡된 생각과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억제해서 재산을 모으려는 지나친 욕망의 불길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야심적인 갈망을 없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을 바라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신 일을 복 주심으로 도우시리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끝으로,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초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더러운 처지를 혐오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일이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며 빈부와 귀천은 일체 하나님의 뜻으로 배정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기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만 의지하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이 미친 듯이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악한 술책을 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자기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일이 잘 될 때에 그것을 자기의 공로나 자기의 근면, 노력, 행운 등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공로로 돌릴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사업이 번창하고 자기 일은 진척이 미미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그는 평온과 겸손한 마음으로 이 부진한 상태를 참고 견딜 것이다. 자기가 얻은 보통 정도의 성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세속적인 사람이 경칩하는 심리에 비하면, 그의 마음은 더 평화로울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는 최고의 부귀보다 더 위대한 안식과 평화를 주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위로는 나의 구원이 될 것이므로 그는 자기의 사업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의 태도가 이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인도에 일임하면서 자기는 젖뗀 아이가 어미의 품에 안긴 듯하며,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힘쓰지 아니한다고 증거하였다(시 131:1-2).

10.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우리가 말한 신자의 평화와 인내는 여기에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현세 생활에서 당하는 모든일에 미쳐야 한다. 자신을 주께 전적으로 드리고 생활의 모든 부분을 남김없이 하나님의 뜻에 맡긴 사람만이, 자신을 온전히 부정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태연한 사람은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처지에 대해 하나님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심경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우리가 불의에 당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병이 우리를 거듭 괴롭힌다. 혹은 전염병이 만연하기도 하며, 전쟁의 참화를 입기도 한다. 얼음과 우박이 일년 추수를 전멸시켜 흉년이 들며 우리를 가난에 빠지게도 한다. 처자와 이웃을 죽음에 빼앗기며 집이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한다. 이런 재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며, 난 날을 미워하며, 하늘과 태양을 싫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독적인 구변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고 잔인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할 때에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설사 일가친척이 떠나고 집안이 적적하게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주를 찬양하며 내 집에 계신 주의 은혜는 내 집을 황량한 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에 주의를 돌릴 것이다. 추수한 것이 서리나 우박을 맞으며, 혹은 얼어서 전멸하여 굶어 죽을 위험이 있을 때에도 그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굳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할 것이다(시 78:47 참조).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시 79:13)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추수의 성과가 극도로 나쁜 때라도 주께서 식량을 주실 것이다. 병고에 시달릴 때에도 심한 고통에 용기가 꺾이거나 불안하고 초조하여 하나님에게 간언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징계는 공정하며 인자하심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평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권한에 영원히 양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 이교도들이 생각한 위안이란 것은 우매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배격해야 한다. 견고한 마음으로 역경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들은 역경을 운명에 돌렸다.1264) 운명은 소경이며1265) 사려 분별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1266) 그와 반대로 경건 생활의 입장은 선악간 운명을 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무책임한 힘으로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장 정연하고 공정하게 배정하신다고 믿는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 자기 부정의 일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각각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1-2)

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그러나 경건한 마음은 더 높은 데로,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올라오라고 하시는 데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제자가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경지이다(마 16:24).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할 자로 인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곤란과 노고와 불안이 많은 생애각양각색의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며 일정한 시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그는 이 계획을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자녀에 이르기까지 적용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셨고 그를 심히 기뻐하셨지만(마 3:17, 17:15), 사실은 그를 관대하게 혹은 너그럽게 다루시지 않으셨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생애에서 끊임없는 십자가의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 전체가 일종의 끊임없는 십자가에 불과하였다. 사도는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시는" 것이 합당했다고(히 5:8)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조건을 무슨 까닭에 우리는 모면하려고 할 것인가?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그 조건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친히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도는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얻도록 정하셨다고 했다(롬 8:29). 따라서 불행과 재앙이라고 할 만한 궁지에 빠지더라도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있다. 곧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서, 그가 복잡다단한 재앙의 미로를 통과하여 하늘의 영광을 얻으신 것같이, 우리도 각양의 고난을 통과하여 같은 영광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행 14:22). 바울은 다른 데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줄을 알게 되는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를 알게 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게 될 때 그의 빛나는 부활에 참여할 준비가 된다고(빌 3:10-11) 말했다. 역경의 고통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가혹한 성격을 완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주와 사귐을 가짐으로써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증명하려는 목적 이외에는 십자가를 지실 아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계속적으로 십자가 밑에서 지내야 할 이유가 많다. 첫째로 우리의 천성은 모든 것을 우리의 육에 돌리는 경향이 너무도 강하다. 우리의 연약함을 눈앞에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곧 자기의 선을 과대평가한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우리의 선을 꺾어지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을 믿고 의기양양하며, 이런 자신감이 허탄한 것임을 모른다. 또 자신의 선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아도 자기의 능력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오만 불손의 태도를 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교만을 억제하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심히 무능함과 연약함을 증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치욕, 빈곤, 근친의 죽음, 병 기타의 재난들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이러한 재난이 있는 동안 우리는 견뎌내지 못하고 곧 굴복한다. 이렇게 자만심이 건여 하나님의 힘을 구할 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만이 재난을 이기고 굳게 버티는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지극히 거룩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을 얻게 하시지 않으면 자신의 용기와 지조를 과신한다. 이런 자기만족은 심지어 다윗의 마음속에까지 스며들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1267) 다윗은 번영했을 때에 태만하여 감각이 마비되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를 믿어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위대한 예언자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무슨 일인들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평화로운 때에 자기의 위대한 지조와 인내심을 자랑했으나 역경에 처하게 되자 그 자만심이 꺾이고 모든 것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자는 이렇게 자기의 병이 증명됨으로써 경고를 받아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육에 대한 사악한 신뢰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맡겼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체험하며, 이 점에서 풍성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보호를 받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필요하다. 3-6)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롬 5:3-4) 가르친다. 환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꾸준히 참고 견디는 동안에 그들은 체험한다. 이런 인내는 자기의 힘으로는 전연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는 약속하신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성도들은 인내를 통해서 체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망도 강화된다. 그들이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앞으로도 과거와 같이 확고부동하리라는 것을 기대한다면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가 서로 연결되어 십자가에서 솟아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칠에 대한 그릇된 과대평가를 바로 잡으며 우리를 기르게 하는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십자가는 육에 대한 우리의 위험한 신뢰를 없애버린다. 이렇게 교만이 건인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가르치며 그 결과로 우리는 낙심하거나 항복하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승리의 뒤를 이어 소망이 생긴다. 이는 주께서 약속을 지키심으로써 앞으로도 신실하시리라는 확증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만 가지고도 우리는 평소에 십자가를 질 필요가 얼마나 큰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1268)

그리고 자기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깨끗이 없애버리는 것은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의 무능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의 무능을 느끼면 자기를 믿지 않게 될 것이요, 자기를 믿지 않으면 그 대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안심하면 그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끝까지 버티어 굴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버티면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무조건 확신하면 그만큼 소망이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다.

4.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히시는 데는 다른 목적도 있다. 즉,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순종심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순종 이외의 어떤 다른 순종을 그들이 표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각종 은혜가 그들 안에 숨은 채로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그것들을 오해할 여지없는 증명으로 밝히 드러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들에게 주신 인내력과 지조를 밖으로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신다고 한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말씀들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그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거절하지 않은 사실로 그의 경건을 증명하셨다(창 22:1,12). 베드로도 몸을 불로 연단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련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고 가르친다(벧전 1:7). 신자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훌륭한 은사인 인내심을 활용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하고 명백하게 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각종 덕성을 주시고 그 덕성들이 사장되어 결국 소멸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자극하며 발동시키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성도들에게 고난이 없으면 인내력도 없을 것이므로 그들이 받는 고난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또 십자가에 의해서 순종을 배운다. 자기의 경박한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들의 소원대로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따른다는 뜻을 깨닫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역경을 견디라."고 충고할 때에, 옛 속담은 "하나님을 따르라."고1269) 했다고 세네카(Seneca)는 회고했다. 이런 말로 고대인들이 암시한 것은 손과 등을 하나님의 채찍에 내맡기는 때에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이 지우시는 멍에를 참으로 멘다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우리는 백방으로 이 순종의 습관을 우리에게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결코 거부해서는 안 된다.

5. 십자가는 약이다

이와 같은 순종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항심을 생각해야 한다. 일순간이라도 부드럽고 관대하게 다루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는 우리의 육의 충동은 강렬해진다. 기운 좋은 말을 부리지 않고 먹이기만 하면, 며칠 후에는 더욱 날뛰어 길들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전에는 순종하던 기수도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시던 일을 우리는 항상 하고 있다. 살이 오르고 비대하게 되자, 우리를 먹여 살리신 이를 발로 찬다(신 32:15). 하나님의 은혜에 끌려 그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는 반대로 악의를 품고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고도 계속해서 타락한다. 따라서 우리가 충동으로 날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징벌을 내려 억제시킬 필요가 있다. 한없이 풍부한 재산 때문에 방탕에 흐르지 않도록, 자신의 영예를 자랑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그밖에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또는 운 좋은 일들로 거만하게 되지 않도록, 주께서는 십자가의 치료법을 적당히 적용하셔서 우리의 광분하는 육을 제압하시며 굴복시키신다. 사람에 따라 건강 회복에 유익한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 같은 병이라도 우리는 같은 정도로 앓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똑같은 거친 치료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이런 십자가로, 저 사람은 저런 십자가로 시련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의사께서는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치료하시고, 다른 사람은 거친 방법으로 깨끗이 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병이 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6.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내다보시는 동시에, 우리의 지나간 죄들을 시정하실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셔야만 우리가 합당한 순종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즉시 우리의 지나간 생활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런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반드시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라는 충고는 주로 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은 훨씬 더 좋은 개념을 제공한다. 즉, 주께서 역경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1:32). 그러므로 심이 어려운 환난에서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관용을 발견해야 한다. 그 분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을 촉진시키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은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받는 정죄를 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성경이 다른 곳에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고 교훈하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채찍을 깨달을 때에, 악한 행실이 고질이 된 절망적인 사람들같이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잘 배우는 자녀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우리가 타락했을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멸에 몰아넣으신다. 그러므로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옳은 말씀이다(히 12:8).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인자하심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견디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히 사악한 자들이다. 성경은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불신자는 고질적이며 철두철미한 악의 노예와 같이 징계를 받으면 더욱 악하게 되고 더욱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신자는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아들같이 회개할 줄 안다. 우리는 어느 쪽에 들기를 원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했으므로1270) 여기서는 이 간단한 언급으로 만족하고 더 말하지 않겠다.

(박해와 기타 재난에서 십자가를 짐. 7-8)

7.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음

그런데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은 독특한 위로가 된다. 하나님을 위한 군인에게 이 특수한 휘장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영예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의를 위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사탄의 거짓말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든지 또는 악한 자에 대항해서 선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보호하든지 간에, 우리는 세상의 멸시와 미움을 받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명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나님에게 우리의 노력을 바치는 것을 슬퍼하거나 근심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복되다고 선언하신 일들을 하면서(마 5:10),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빈곤까지도 그 자체로 본다면 불행이다. 마찬가지로 추방, 모욕, 감옥에 갇힘, 치욕 등도 불행이며 죽음은 최고의 재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으로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하심에 만족하고, 육의 그릇된 평가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사도를 본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행 5:41) 기뻐할 것이다. 우리가 무죄하고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불신자들 때문에 재산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물론 인간 사회에서는 몹시 빈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의 진정한 재산이 불어난다. 자기 집을 쫓겨난다면1271)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더욱 친근하게 영접을 받을 것이다. 괴로움과 멸시를 당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만큼 더 견고하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게 된다. 모욕과 수치를 당한다면,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서 더 훌륭한 자리를 얻는다. 죽임을 당한다면, 복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우리 앞에 열릴 것이다. 주께서 크게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신 일들을 현세의 허망한 일시적 유혹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8. 십자가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더 위로를 얻는다

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치욕이나 재난을 받을 때에, 우리는 성경에 있는 이런 경고의 말씀에서 충분한 위로를 받는다. 따라서 주께서 주시는 이런 고통들을 기꺼이 또 즐겁게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은혜를 모르는 자들일 것이다. 특히 이런 십자가는 신자가 지는 것이 가장 적당하며, 베드로가 가르친 것과 같이(벧전 4:12이하),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에게는 치욕을 받는 것이 백 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딤전 4:10) 박해뿐 아니라 비난도 받으리라고 바울은 특히 경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세평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고후 6:8)

그러나 즐거운 태도를 취하라고 하는 것은 심신의 고통과 아픔을 전연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과 근심이 없다면, 십자가 안에서의 성도의 인내도 없을 것이다. 빈곤과 병과 치욕에 각기의 고통이 있으며, 죽음에는 공포심이 따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들을 태연하게 견디는 것이 무슨 용기나 절제가 될 것인가? 이런 경험은 그 성질상 고통스러운 것,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통으로 인한 곤란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도리어 그 고통으로 연단을 받아 용감하게 저항하며 그것을 극복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용기가 나타난다. 날카롭게 찌르는 자가 있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급하고 과격한 행동을 억제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인내가 나타난다. 비통한 일로 상처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위안에서 안식처를 얻는다면, 거기서 신자의 즐거움이 빛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나, 스토아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9-11)

9. 스토아 철학자들과 달라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한다

신자가 인내와 절제를 견지하기 위해서 자연히 느껴지는 슬픔과 싸우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적절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십자가를 참고 견딘다는 것은 완전한 마비 상태가 된다든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옛날 스토아 철학자들이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한 우매한 말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인간성을 버리고 역경이나 순경(順境)에 대해서 슬픈 때나 기쁜 때나 똑같은 느낌을 가진다. 아니, 돌과 같이 전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1272) 이 장엄한 지혜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그들이 묘사한 인내는 인간 사회에서 발견된 일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엄격하고 까다로운 인내를 체득하려고 했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 생활에서 인내의 힘을 추방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새로운 스토아 철학자들이1273) 나타나서 고통으로 신음하며 우는 것뿐 아니라, 슬픔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까지도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대개 한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행동보다 사변으로 시간을 보내며, 이런 불합리한 생각 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우리 주께서 말씀뿐 아니라 행동으로 배격하신 이 냉혹한 철학은 우리가 상대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주께서는 자신의 불행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제자들에게도 같은 뜻으로 가르치셨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요 16:20). 아무도 죄라고 하지 못하도록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4)라고 밝히 선언하셨다. 당연한 말씀이다. 울음을 일체 배격한다면, 주님 자신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의 몸에서는 눈물이 피방울 같이 흐르지 않았는가?(눅 22:44) 공포심은 모두 회의라고 낙인을 찍는다면, 주께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는 기사를(마 26:37, 막 14:33)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슬픔을 싫어한다면, 주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라고 하신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인가?

10. 현실의 슬픔과 현실의 인내는 서로 충돌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이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자연히 느껴지는 슬픔을 뿌리칠 수 없어 견디고 버티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내를 무감각으로 생각하고 용기와 지조가 있는 사람을 목석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혹한 불행이 괴롭혀도 굴복하지 않으며, 비통한 일이 있어도 영적 기쁨이 넘치며, 불안이 눌려도 하나님의 위안으로 소생하여 용기를 회복하는 성도의 인내를 성경에서 칭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참는 동안에도 성도의 마음속에서는 인간성에 배치된다고 느끼는 것을 피하며 무서워하는 자연적인 심리와 이 여러 가지 곤란까지도 헤쳐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진하겠다는 경건한 뜻이 서로 싸우고 있다. 주께서 이 상극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고 말씀하셨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을 때에 베드로가 저항하면서 억지로 끌려갔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그의 순교는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큰 열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지라도 인간성을 벗지 못한 그로서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의지에 끌렸다. 앞으로 당할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면 공포심을 못 이겨 도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생각하고는 자신의 공포심을 극복하고 딛고 일어서서 기꺼이 또 즐겁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와 순종으로 가득하여, 모든 반항하는 감정을 길들이고 극복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십자가가 무엇이든 간에, 또 마음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우리는 굳게 참고 버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역경은 가혹하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우리는 병모로 신음하며 불안해하며 건강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가난에 시달려 걱정과 슬픔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치욕과 멸시와 불법적인 처사를 당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을 묻으면서 자연히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주의 뜻이니, 주의 뜻을 따르자는 그 한 가지일 것이다. 고통의 가시가 찌르며, 신음과 눈물이 그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마음을 이렇게까지 요동하게 만드는 이 일들을 기꺼이 참도록 마음을 돌리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11. 인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

십자가를 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데서 발견한 우리는 철학적인 인내와 기독교적인 인내의 차이를 간단히 정의해야겠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련을 받는다고 이해하며, 이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의 높은 견지이지만, 이 경지에 도달한 철학자는 극히 적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1274) 이것은 하나님께 항거하려고 해도 무익하므로 그에게 양보하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필연적이라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라면, 도피할 수 있는 때에는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아주 다르게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는 의와 공정이요, 다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런 생각으로 인내를 권한다. 빈곤이나 추방이나 감옥에 갇힘이나 모욕이나 병이나 근친의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일이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생기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질서가 정연한 정의1275) 이외의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가 매일 짓는 많은 죄악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더 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우리의 육이 그 본성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그 정욕을 길들이며, 이를테면 멍에를 쓰는 습관이 생기게 하는 것은 완전히 공평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공정과 진실을 위해서는 우리가 고생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백한 공정성이 우리가 받는 고난에 나타난다면, 우리가 거기 대해서 불평하거나 항거하는 것은 반드시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불가피하니 양보해야 한다."는 효력 없는 주문은 이제 들리지 않고 우리는 생명력과 효력이 충만한 교훈, 즉, "항거는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초조와 불안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항하는 무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삼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듣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과 유익이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야 우리는 기뻐하기 때문에,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고난을 겪게 하시는 바로 그 행동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을 마련하신다고 언명하심으로써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우리가 받은 고난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 마음과 평온한 마음으로 그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고난을 참고 견딜 때에 우리는 필연성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우리가 자연히 그 가혹함을 느끼며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동시에 영적인 기쁨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다. 여기에서 감사하는 마음도 생긴다. 이는 기쁨이 없으면 감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는 유쾌하고 기뻐하는 마음에서만 올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분명히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 9 장  내세에 대한 명상1276)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2)

1. 현세 생활의 허무성

어떤 환난이 우리를 압박하든 간에, 우리는 현세를 무시하는데 익숙해지며, 그렇게 됨으로써 내세를 활발하게 명상하기 위한 그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본성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강한 동물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고 우리가 이 애착심에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를 끌어내시며 우리의 태만을 없애버리기 위해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늘의 영생불멸을 동경하지 않거나 그것을 얻으려고 평생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후의 영생을 바랄 수 없다면 우리의 처지는 야수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으로서 하나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계획이나 노력이나 행동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우둔함은 우리의 지성이 부귀영화의 허망한 광채에 마비되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탐욕, 야심, 정욕 등에 억눌려 더 높이 비약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영혼 전체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의 행복을 구한다. 주께서는 이 악한 사태를 없애기 위해서 현세 생활의 불행을 끊임없이 증명하심으로써 그 허무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현세에서 깊고 든든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전쟁이나 소란으로, 강탈이나 기타 피해로, 그들의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들이 곧 없어질 재물을 너무 탐내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을 너무 믿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추방으로, 흉작으로, 화재로, 기타 방법으로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으시며, 적어도 풍족하지 못한 처지에 있도록 제한하신다. 그들이 마음 놓고 결혼 생활을 즐기지 않도록,1277) 주께서는 악한 처나 불량한 자녀나 가족의 죽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며 교만을 꺾으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관대히 다루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허영심으로 부풀고 자신감으로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들에게 병과 재난을 보내어, 이 모든 좋은 것은 없어지는 것, 불안정하고 무상한 것임을 눈으로 보게 하신다.

십자가의 훈련을1278)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깨닫는 때라야 우리는 올바로 전진을 할 수 있다. 현세 생활은 그 자체만을 본다면, 불안과 동요와 불행이 무수히 많고 순수한 행복은 아무 데도 없다. 인생의 행복이란 것은 모두 확실하지 못하며 곧 없어지며 허망하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이 섞여 있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동시에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바라며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분투노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을 생각할 때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세 생활을 철저히 무시하지 않으면, 참으로 정신을 차려 내세를 원하며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사랑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따라서 영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악한 족쇠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 현세 생활에는 우리를 꾀는 것이 많으며, 즐겁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런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재앙의 아픈 자극을 끊임없이 받으면서도 인생의 가련상을 고려할 만한 각성이 없는데 만일 부하고 행복한 기쁨이 장구히 지속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생은 연기나(시 102:3 참조) 그림자 같다는 것은(시 102:11 참조) 유식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제일 잘 아는 속담이다. 이 생각을 대단히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처럼 등한시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 우리는 마치 지상에서 영생 불사할 작정인 듯 모든 일을 시작한다. 시체를 묻거나 묘지를 통과할 때에는 죽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철학을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도 우리의 철학은 일시적이어서, 돌아서면 곧 사라지고 전연 기억이 없다. 극장에서 좋은 장면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박수갈채와 같이 결국 증발하고 만다. 죽음을 잊어버릴 뿐 아니라 죽을 운명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우리는 경솔하게 지상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누가 "사람은 하루살이"라는1279) 속담을 말하면, 우리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없이 하는 일이고 존재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 말로 충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경험을 통해서 지상 생활의 가련상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확신하게 된 후에도 지상 생활에 최고의 선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여전히 인생에 대한 어리석고 비열한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실 때에는 우리의 태만을 떨쳐버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시하고 전심전력하여 내세의 생명을 명상하도록 해야 한다.

(무상하고 불완전한 현세 생활을 바르게 평가하면 내세를 명상하게 된다. 3-6)

3. 지상 생활을 감사함

신자는 현세 생활을 무시하더라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일이 없도록 습관화돼야 한다. 아무리 무수한 불행이 가득하더라도 현세 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하나로 보는 것이 옳으며, 결코 경멸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아무 은혜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중대한 배신의 죄를 짓게 된다. 특히 현세 생활은 신자들의 구원을 촉진시키는 데 전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현세 생활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공개하시기 전에, 그보다 작은 증거로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받는 은혜이다. 이렇게 현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듯이 무시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 생활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결코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아주 많고 분명한 성경의 증거들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 자체가 또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우리에게 권고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빛을 보게 하셨고 자연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셨고 자연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이를테면 우리가 현세에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앞으로 하늘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들이 우선 지상에서 싸우고 노력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싸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를 얻기 전에는 개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는 현세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넓으신 인자하심을 맛보기 시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완전히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상 생활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그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본성은 지상 생활에 애착을 느끼지만, 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 가장 불행한 상태를 생각하게 되며, 과도한 애착에서 해방되려고 할 것이다.

4. 영생에 대한 올바른 동경

현세 생활에 대한 잘못된 애착을 억제한 것만큼 더 좋은 생활에 대한 욕구를 강화해야 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고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죽는 것이 다음으로 좋다고(전 4:2-3 참조)한 사람들의 판단이 건전하다는 것을1280)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광명과 진정한 종교가 없는 그들이 현세에서 불행하지 않고 추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겠는가? 친척의 생일이 돌아오면 슬피 울고 그들을 장사지낼 때에는 엄숙히 기뻐한 사람들의1281) 행동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믿음에 대한 바른 교훈을 몰랐고 그 자체로는 복되지도 않고 갈망할 만 하지도 않은 것이 신자들에게는 유익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포자기해서 생각을 그만두고 말았다.

따라서 신자가 죽을 운명의 인생을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원래 비참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동시에, 더욱 큰 열성으로 곧 내세의 영생을 명상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내세의 삶에 비하면 현재의 삶은 무시해도 무방할 뿐 아니라, 완전히 멸시하며 싫어해야 한다.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라면 땅은 타향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곧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죽음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육신에서 놓이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육신은 감옥이1282)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것은 곧 불행이 아닌가? 세상을 작별할 때까지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한다"(고후 5:6).

그러므로 지상 생활을 천상 생활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곧 멸시하며 짓밟아버려도 된다. 물론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들지 않는 한 현세 생활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죄로 우리를 사로잡는 현세 생활을 미워하더라도 현세 생활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하간 우리는 현세에 대해서 염증이나 증오를 느끼며 그것이 끝나기를 바라더라도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세상에 남아 있을 각오를 하며 우리의 염증에 불평이나 초조감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현세는 주께서 우리를 배치하신 초소와1283)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소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초소를 지켜야 한다. 바울이 육신의 질곡에 너무 오랫동안 매여 있던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구속되기를 갈망하여 탄식한 것은 사실이다(롬 7:24).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느 쪽이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언급한다(빌 1:23-24). 그는 생사간 어느 것을 통해서라도(롬 14:8)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편이 하나님의 영광에 제일 큰 도움이 되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라면 우리는 죽고 사는 시간을 하나님의 결정에 일임하되, 죽음에 대한 열의가 뜨겁게 타올라야 하고 동시에 그침 없이 그것을 늘 명상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영생불멸과 비교해서 죄로 우리를 얽어매는 현세 생활을 경시하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버릴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한다.

5.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기는 고사하고 죽음에 대한 커다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말만 듣고서도 어떤 지극히 비참하고 불길한 그 무엇인 듯 벌벌 떠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우리가 죽어 없어진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자연적인 지각이 공포로 긴장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더 큰 위안으로 그런 공포심을 극복하고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경건의 광명이 마음속에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이 육체라는 장막은 불안전하고 불완전하며 썩을 것, 곧 없어질 것, 쇠퇴하는 것, 썩어가는 것이지만, 분해된 후에는 곧 새로워져서 견고하고 완전하여 썩지 않는 영광으로 결국은 하늘의 영광으로 빛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신념은 본성이 무서워하는 것을 우리가 도리어 열렬히 주하게 만들 것이 아닌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유랑 생활에서 소환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즉, 하늘나라로 돌아가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아무 위안도 얻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살아 있기를 갈망하지 않을 것도 없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1284) 나도 물론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있을 평생 불멸을 존중해야 하며, 거기서 우리는 지상에서 결코 얻지 못하는 견고한 상태를 얻으리라고 주장한다. 신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는 것은 옷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옷을 입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라고(고후 5:2-3) 바울은 적절히 가르친다. 짐승들과 나무나 돌 같은 무생물까지도 자기의 현존 상태의 허무함을 느끼고 부활이 있을 마지막 날을 동경하며, 그때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허무성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롬 8:19이하). 그런데 우리는 오성(悟性)의 빛을 받았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의 영의 조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존망이 문제가 될 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땅위에서 썩어가는 것을 초월하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해괴망측한 현상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럴 장소도 아니다. 나는 맨 처음에 평범한 일들을 상론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소심한 사람들은 키프리아누스의 논문 죽음에 대하여(On the Mortality)를1285) 읽기를 바란다. 만일 그들을 철학자들에게 보낸다면, 철학자들이 죽음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기의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쁘게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로 결론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자. 바울도 이 점을 표준으로 신자들을 구분하고(딛 2:13, 딤후 4:8 참조), 성경은 완전한 행복을 증명하려고 할 때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지적한다. 주의 말씀에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신다(눅 21:28). 묻노니, 우리 주께서 우리를 기쁘게 하며 밝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계획하신 일이 우리를 슬프게 하며 당황하게 만들뿐이라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우리의 주라고 자랑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더 건전한 견해를 가지고 육에 속한 우매하고 맹목적인 욕망이 항거하더라도 서슴지 않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생각해서 동경할 뿐 아니라, 신음과 탄식으로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는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악한 일과 불행한 일이 가득한 이 말없는 심연에서 우리를 구해내시고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6. 내세에 대한 열망은 신자에게 위로를 마련해준다

신자들은 누구나 자기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지상에 있는 동안은 모두 "도살할 양같이"(롬 8:36)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늘의 것에 전념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극복하며, 그 현존상태를 초월하지 못한다면(고전 15:19 참조), 그들은 심한 절망적인 비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머리를 높이 들어 모든 지상적인 것을 초월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비록 악한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며 깊은 평화를 즐기며, 호사스러운 재물을 자랑하며, 온갖 환락에 젖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1286) 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신자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그들의 교만 때문에 모욕을 당하며, 그들의 탐욕 때문에 재산을 강탈당하며, 그밖에도 그들의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신자들은 이런 재난까지도 쉽게 견뎌낼 것이다. 이는 주께서 그의 평화의 나라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영접하실 날이 임박했기 때문인데 그 날에 주께서는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계 7:17, 사 25:8 참조), "영광과…환희의 옷"을(집회서 6:31) 입히시며, 형언할 수 없는 그의 희락의 단맛으로 만족하게 하시며, 자신과의 숭엄한 친교에 들게 하셔서, 결국 그들이 자신의 행복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창성한 악한 불신자들은 철저히 몰락시키실 것이다. 그들의 즐거움이 고통으로 그들의 웃음이 울음과 애통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평화를 양심의 가책으로 어지럽히시며, 그들의 방종을 꺼지지 않는 불로 벌하실 것이다(사 66:24, 마 25:41, 막 9:43,46, 계 21:8 참조).1287) 또 경건한 사람들의 인내를 모욕하던 그들을 경건한 이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공의에 대해서 증거한 것과 같다. 즉, 그는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는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한 불행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며, 경건한 이들을 괴롭히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하였다(살후 1:6-7).

이것은 참으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다. 이 위안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절망 상태에 빠지거나 이 세상의 허망한 위안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다. 예언자까지도 악한 자들이 현세에서 번창하는 것을 너무 깊게 생각했을 때 거의 실족할 뻔했노라고 고백한다(시 73:2-3).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경건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말로를 볼 때까지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시 73:17).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만일 신자들이 눈을 돌려 부활의 능력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귀와 육과 죄와 악한 자들을 결국 이겨 낼 것이다.

제 10 장  현세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현세 생활에서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 즐겨 사용하라. 1-2)

1. 두 가지 위험 : 잘못된 엄격한 금욕과 잘못된 방종

성경은 이런 초보적인 교훈으로 동시에 지상의 복리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은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친다. 이 문제는 우리의 생활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등한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사는 데 필요한 보조 수단들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필요하다기보다 즐거움을 주는 듯한 것들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든지 그것을 깨끗한 양심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침을 지켜야 한다. 주의 말씀에 이 방침을 정하신 것이 있는데, 현세 생활은 주의 백성들이 하늘나라로 가려고 서두르고 있는 나그네의 생활이라고1288) 한 것이다(레 25:23, 대상 29:15, 시 39:13, 119:19, 히 11:8-10,13, 16:13,14, 벧전 2:11).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단순히 지나갈 뿐이라면, 현세의 좋고 유익한 사물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갈 길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돕는 범위 내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전 7:30-31)고 우리에게 올바로 권고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끄럽고도 좌우로 경사져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설 수 있는 곳에 발을 든든히 붙이도록 해 보자. 엄격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때에 무절제와 방종한 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달음질한다. 이 미친 듯한 죄악의 위험성을 보고 무절제와 방종을 시정하고자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점에서는 선하고 거룩한 이 사람들이 생각한 유일한 방안은 필요성이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만 물질의 이용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1289) 그들의 생각은 경건한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엄격하였고 주의 말씀에 비해서 사람의 양심을 더욱 구속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성이라고 한 것은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은 일체 멀리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맨 빵과 물 이외에 다른 음식물을 첨가하는 것은 일체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도 더 엄격하였다. 테베사람 크라테스(Crates)는 재산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된다고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1290)

물질 사용에 있어서 육의 무절제를 변명하며, 방종한 쾌락 생활의 길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들은 내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한 일같이 생각한다. 이 자유에는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을 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에 맡겨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정확한 법률 조문으로 양심을 구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합당한 사용에 대한 일반적인 표준이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

2. 대원칙

우리가 다룰 원칙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선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지, 우리를 멸망시키시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용은 방향이 바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주시하는 사람이 가장 곧은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은 필요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의복의 목적은 필요성뿐만 아니라, 외모와 풍습을 단정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풀과 나무와 열매는 여러 가지 이용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그와는 별개로 모양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졌다(창 2:9 참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시 104:15)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 이용하며 어느 정도까지 이용할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주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옷을 꽃에 입히시고 우리 코에 달콤한 향기를 풍겨 보내게 하셨는데, 우리의 눈이 그 미를 느끼며 코가 그 향기를 느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주께서는 빛에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도록 구별하여 만드시지 않았는가?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에는 그것들을 다른 금속이나 돌보다 더 귀중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주시지 않았는가? 한 마디로 주께서는 필요한 이용 가치를 떠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드시지 않았는가?1291)

(우리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런 각종 은혜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탐욕스럽게 재물을 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따라 충실히 섬겨야 한다. 3-6)

3. 선물을 주신 분을 우러러보면, 옹졸한 생각과 방종을 막을 수 있다

그러면 피조물의 이용을 필요한 용도에만 제한하는 몰인정한 철학을 버려라.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에게서 빼앗는 사악한 생각이며, 인간을 무감각한 목석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육의 정욕을 억제하는 데도 이만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육의 정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한없이 흘러넘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292) 육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구실로, 무엇이든지 육욕에 허락한다. 정욕을 억제하는 방법의 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뜻은 우리가 그를 인식하며 그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도록 하시려는 데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연락과 폭음 폭식으로 둔하게 되어 경건과 소명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감사는 어디 있는가? 만일 우리의 육의 힘이 끓어 넘치고 추악한 정욕이 정신을 침범하며, 죄의 더러움이 바르고 고상한 일들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의복이 사치한 탓으로 우리 자신에 탄복하고 남을 멸시한다면, 또는 그 우아하고 찬란한 옷을 입고 부끄러운 일을 준비한다면, 의복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생각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찬란한 옷에 잡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 있는가? 즐거운 일들에 모든 감각이 예속되어 정신이 압도된 사람들이 많다. 대리석과 금과 그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리석이 되었고, 말하자면 금으로 변했고, 색칠한 우상과 같이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방의 냄새와 그 좋은 향기에 마비되어, 정신적인 것은 전연 냄새를 맡지 못한다. 다른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태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의 남용을 허락하는1293) 것은 명백하게 다소간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롬 13:14) 한 법칙이 확인된다. 만일 우리가 육욕에 너무 양보한다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무한정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4. 영생을 갈망하는 것도 우리의 외면적 생활을 바르게 결정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현세에서의 생활을 멸시하고 하늘의 영생불멸을 명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법칙이 나온다. 첫째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는 바울의 교훈이다(고전 7:29-31). 둘째는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세상 물건을 쓰되 쓰지 않는 것같이 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폭음 폭식과 식도락과 건물과 의복의 사치와 야심과 자만과 교만과 까다로운 성벽뿐만 아니라, 천국 생활을 생각하며 영혼을 함양하려는 우리의 열의를 방해하거나 탈선시키는 모든 관심과 취미까지도 끊어버린다. 옛날에 카토(Cato)가 "의복에 대한 관심이 크면, 덕에 대한 무관심도 크다."고 한 말은 옳다. 옛날 속담을 사용하면, 육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사람은 영혼에 대해서는 대개 등한하다.1294)

그러므로 외면적인 일에 대한 신자의 자유를 고정된 조문으로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자유는 이 법에 복종해야 한다. 즉, 될 수 있는 대로 쾌락에 흐르지 말라. 오히려 불필요하게 풍요한 것은 형적도 없이 끊어버리도록 불굴의 정신으로 싸우라. 방탕한 것은 입에 담지 말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보조물들이 장애물로 변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라는 것이다.

5. 검소와 위탁물인 지상 소유에 대하여

둘째 법칙은 가난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없이 지내며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절제의 법칙을 지킨다면 그들은 주님의 학교에서 많이 전진할 것이다. 또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점에서는 주의 제자라는 증거를 보일 길이 없다. 대부분의 죄악이 물욕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제외하고라도, 빈곤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여유가 생기는 때 대개는 반대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초라한 의복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비싼 옷을 자랑할 것이요, 빈약한 음식으로 만족할 수 없어 더 좋은 음식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하는 사람은 그런 음식을 얻게 되는 때에 무절제하게 남용하게 될 것이다. 빈곤하고 낮은 처지를 부득이 참기는 하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사람은 명예를 얻는 때에 반드시 교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저 사도의 모범을 따라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빌 4:12).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지상 물질을 이용하는 데 대한 세 번째 지도 법칙이 있다. 사랑에 대한 교훈을 논할 때에 그것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을 때1295) 이 법칙에 의하면,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며 우리의 유익에 충당되도록 하셨을 때에, 그 물질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우리가 언젠가는 청산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보던 일을 셈하라."는(눅 16:2) 말씀을 항상 귀에 들리게 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 셈을 누가 요구하시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곧 극기와 단정한 정신과 검소와 절제를 권장하시고 무절제와 자만과 허식과 허영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다. 유용한 물질을 분배하더라도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을 시인하시지 않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물건이 사람의 정신을 정절과 순결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 마음을 흐리게 할 때에는 친히 전적으로 배격하셨다.

6. 주의 부르심이 우리의 생활양식의 기초임

끝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주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이 모든 행동에서 각각 자기의 소명에1296)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큰 불안으로 타오르며, 얼마나 경박하고 방탕하며,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움켜잡으려는 야심이 얼마나 맹렬한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매하고 경솔한 우리가 만사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그 독특한 생활양식에 따라 의무를 지정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한계를 경솔히 벗어나지 않도록, 그 다양한 생활들을 소명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각 개인에게는 주께서 지정하신 생활 방식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초소와 같아서,1297) 사람이 생각 없이 인생을 방탕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지정하신 것이다. 이 구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의 앞에서 이 구별의 표준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적 이론과는 그 판단이 훨씬 다를 때가 많다. 철학자들도 조국을 압제자의 손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이 직접 압제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죄하셨다(삼상 24:7,11, 26:9).1298)

그러나 이 이상 더 예를 들지 않겠다.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시초와 기초는 주의 부르심에 있다는 것만 알면 넉넉하다. 주의 부르심에 전심하지 않는 사람은 의무의 길을 결코 바르게 걷지 못할 것이다. 간혹 칭찬할 만한 일을 할는지 모르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배척을 받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생활의 각 부분 사이에는 조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이 이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에 가장 잘 정리될 것이다. 소명의 한계를 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경솔하게 굴어서 소명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미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자기의 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열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알면, 걱정과 수고와 곤란과 그 밖의 짐이 있더라도, 적지 않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더욱 기꺼이 직무를 수행할 것이요, 일가의 가장은 그 의무에 전심할 것이다. 각자의 생활양식에서 받는 불편과 근심과 권태와 불안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것이라고 믿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참고 견딜 것이다. 여기서 또한 소명임을 알고 순종하면, 아무리 낮고 천한 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날 것이며 아주 귀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1299) 유일한 위안이 생길 것이다.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 용어를 정의함. 1-4)

1. 칭의의 교리가 갖는 그 위치와 의미

율법 아래서 저주를 받은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회복하는 수단이 단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즉, 믿음으로 회복하는 수단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이미 설명했다고 믿는다. 믿음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것과 믿음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결과도 설명했다고 믿는다.1300) 이제 이 설명들을 요약하겠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흠 없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선물 중의 둘째인 중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말했다.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보다 가볍게 논했다. 왜냐하면 먼저 믿음은 선행을 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문제가 부분적으로 관련된 선행의 문제를1301)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문제들을 철저하게 토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 토의를 진행할 때에, 이것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1302)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가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서 더 잘 나타날 것이다.

2. 칭의의 개념

우리는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표현들의 뜻을 설명하도록 하자.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며, 의롭기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미워하시므로 죄인이 죄인인 동안은 그리고 죄인으로 인정되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나타난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굳게 서며 모든 죄인들은 넘어진다.

무죄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서 공정한 재판관 앞에 불려갔을 때에, 그의 무죄한 사실대로 판결이 나면, 그는 재판관 앞에서 "정당한 것이 인정되었다."("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죄인들과의 교제에서 풀려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증거하시며 확인해주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사람의 생활이 순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는 증언을 얻을 만할 때에는,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또는 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성경에 있는 용법

이 사실을 확인하는 명백한 증거가 성경에 많다. 우선 이것이 이 용어의 바른 뜻이며 가장 많이 통용되는 뜻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구절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것은 너무 긴 작업이고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의 논제인 칭의를 특별히 다룬 구절을 몇 개만 소개하겠다.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눅 7: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고 하셨다(눅 7:35). 첫 구절에서(29절) 누가는 백성이 하나님께 의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일이 없으며, 온 세상이 빼앗으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35절에서도 누가는 구원에 대교리의 정당성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그 자체가 정한 것이다. 누가의 이 두 구절은 같은 표현을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과 그의 교훈에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드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스스로 옳다(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실 때에(눅 16:15), 말씀하시는 뜻은 그들이 선행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가 없으면서 의롭다는 세평을 얻으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이 뜻을 더 잘 이해한다. 히브리어로는 자기의 죄를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정죄를 받는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부른다. 밧세바가 자기와 솔로몬이 "죄인"이라고 한 것은(왕상 1:21)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와 아들은 수치를 당하며 죄인과 정죄받은 자들같이 인정되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전후 관계로 보아서, 라틴어로 읽을 때에도 이 말은 어떤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해석해야 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3a)1303)

그러나 당면한 문제에 관련해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에(갈 3: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하신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점은 그가 결론으로 외친 말에서 더욱 명백하게 나타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변호하며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끝으로, 보속이 도입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의 용서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래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고 할 때에(눅 18:14), 그가 어떠한 행위의 공로로 의를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가 옳은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행위가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가 죄의 고백은 합법적인 칭의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1304)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용어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 표현하려는 내용 자체를 주시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의심도 없다. 에베소서 1장 5-6절에서 바울은 확실히 "용납"이란 말로써 칭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액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좋은 구절은, 그가 복음 전파사명의 요점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때문이다(고후 5:18-20). 나는 독자들이 이 구절 전체를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이는 바울이 조금 뒤에 일종의 설명을 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화해의 수단이었다고 한다(고후 5:18-19 참조). 그가 "화해됨"이란 말과 "의로 인정됨"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고 가르치는데, 이 주장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오시안더(Osio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

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그러나 오시안더(Osiander)는 "본질적 의"라는1305)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리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문제들로 넘어 가기 전에, 이 황당무계한 공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변은 단순히 무기력한 호기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성경에서 많은 증거를 수집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이며, 우리는 그와 하나인 것을1306)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결합의 유대를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속는다. 그가 빠진 난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신비한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이입하기 위해서 마니교와 비슷한 그 무엇을 생각하였다.1307) 여기서부터 다른 공상이 생겨났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인간성의 원형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308) 그러나 나는 간단한 서술을 원하므로 그전의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오시안더는 말하는데 우리도 그 말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고 하는 데는 반대한다. 그리고 그는 이 원칙을 그의 기만적인 개념들에 잘못 적용한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바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인인 것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계획대로 다른 곳으로 넘겨야 할 문제를 여기서 간단히 다루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그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견해에 응답할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발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 안에 주입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스도뿐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도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맹렬히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것을 옳은 생각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패역하게 왜곡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내주의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골 2:9), 그의 안에서 우리도 신성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에 관해서 따로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사람들을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도록 도울 뿐이다.

그 다음에 그는 여러 가지 실체를 혼합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하심으로 우리를 그의 일부로 만드신다고 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며,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섞이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아무 중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더욱 밝히 나타낸다. 즉, 우리는 중보자의 은혜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히 또는 완전히 제공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1309)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합한다

가령 그가 한 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에, 본질의 결합에 의해서 그는 우리 것이 되시며 그것은 그가 사람이시므로 우리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신성의 본질이 우리 안에 주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이런 진미를 먹어도 해(害)가 덜했을 것이며, 이 망상으로 인한 큰 싸움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다.1310)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한다. 그는 이 논쟁 전체를 통해서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10a)1311)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한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첫째 점을,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은 용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중생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하신 후에, 그들의 악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들을 본성대로 버려두시겠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쉽다. 그리스도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신 사람에게 동시에 양자의 영을 주셔서(롬 8:15), 이 영의 힘으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개도하신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 열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태양의 빛이 지구를 덥게 하고 태양의 열이 지구를 비춘다고 하는가? 목전의 문제에 대해서 이 비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는가? 태양은 그 열에 의해서 땅에 생명과 열매를 주며, 그 광선에 의해서 땅을 비추며 밝게 한다. 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한쪽의 특성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은 이성이 금한다.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흔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한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에(고전 1: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는다.1312)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구원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출발점으로 삼아우리는 거룩하며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논할 때,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성경에 관해서 오시안더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그릇된 해석을 한다. "일하는 자"가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바울의 언명에 대해서(롬 4:4-5), 그는 "의롭다함"을 "의롭게 만든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똑같이 경솔하게 그는 로마서 4장 전장을 곡해한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인용한131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도(롬 8:33) 그는 동일한 속임수로 변질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는 단순히 죄책과 무죄 방면이 문제가 된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 대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결론에 있어서나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오시안더는 자기 자신이 무능한 해석자임을 증명하였다.

"의"라는 말에 대한 그의 논의도 이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덕에서 뛰어나게 된 후였다고 주장한다.1314) 이것을 보면, 그는 두 개의 건전한 발언에서 출발하여 그릇된 생각으로 하나의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여기서 언급된 의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과정 전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는 탁월하게 선한 사람이었고 장기간 그것들을 견지함으로써 더욱 선을 쌓았지만, 여기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은 다만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능숙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 사실에서 칭의에는 행위가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능력이 없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고 오시안더는 항변한다. 나도 이 항의를 기꺼이 인정한다. 만일 믿음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다 한다면, 믿음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 하는 일을 부분적으로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상상을 하지 않는다. 올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는 기능을 그리스도에게 옮긴다. 우리는 믿음을 일종의 그릇에 비교한다.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의롭다 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 궤변가가 "믿음은 그리스도다."라고1315) 말하는 그 왜곡된 비유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금이 들어 있다고 해서 질그릇을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치는 마찬가지다. 믿음 자체는 가치나 값이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다. 돈이 가득한 질그릇이 부자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은 의를 닫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이자 분배자시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으로 우리는 칭의를 고려할 때에 "믿음"이란 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처리하였다.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외면적인 말씀의 작용으로 내면적인 말씀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주장으로 그는 우리를 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켜 그의 외면적인 신성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할하지 않고 그 육신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주신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또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중보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오시안더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신성에 관해서 옳게 적용된 것이라면, 특히 그리스도께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으로 적용된 것이다. 한쪽의 의가 다른 쪽의 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부터 계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과(고전 1:30)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것은 중보자로서의 위격의 특이한 점이다. 이 위격에는 신성이 내포되지만 고유한 명칭에 의해 중보자는 아버지나 성령과는 구별된다.

오시안더는 여호와가 우리의 의가 되시리라고 약속한 예레미야의 말 하나를(렘 51:10, 23:6, 33:16 참조) 어리석게도 기뻐한다. 그러나 그는 이 말에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라는(딤전 3:16 참조) 사실 밖에는 추론해 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1316)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말을(행 20:28) 인용했다. 이 말에서 죄를 대속한 피는 하나님의 것이며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누가 이런 추악한 오류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안더는 이 대단히 유치한 항변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기뻐 날뛰며, 여러 장에 호언장담을 늘어놓는다.1317)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은 곧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여호와가 다윗의 후손이 되실 때에 경건한 자들의 의가 되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이사야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는(사 53:11)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이는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그가 의롭게 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과 그 이유로서 아들이 의롭다는 것을 부언하신 사실과 가르침 안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시는 그 방법과 수단을 두셨다는 것에 유의하자. 여기에 있는 다아트(t[d)라는 말은 피동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1318)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 2:7)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에 따라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그의 의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에, 이 비교적 낮은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게 할 수밖에 없다.

9. 중보자의 하시는 일로서의 칭의

만일 오시안더가 이 사역은 그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신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첫번째 반박은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반박에 관해서는 그가 큰 망상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의 영혼을 그의 피로 정결하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회생으로 그의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죄책을 사면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요약하면, 제사장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의 힘으로는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일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롬 5:19 참조). 그러나 그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지 않고(빌 2:7) 어떤 다른 방법으로 복종 하셨겠는가?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다른 말로서 바울은 의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육신에만 둔다. 그런데 나는 오시안더가 바울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의를 큰 소리로 찬양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유령 같은 "본질적 의"를 확인하시는 듯이 개선가를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은 뜻이 훨씬 다르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이 시인하시는 의라는 옷이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도 다 아는 일이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요 12:43, 5:44).1319) 간혹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의의 근원이며,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인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은 이 표현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회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오시안더가 우리와 의견이 일치한다면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성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의와 구원에 인을 치시고자 하셨을 때에, 자신의 육신으로 확실한 보증을 삼으셨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고(요 6:48), 그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부언하셨다(요6:55). 이런 교수 방법은 성례전에서 볼 수 있다.1320) 성례전은 우리의 믿음을 부분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의와 구원의 두 가지가 그의 육신에 내주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 하며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중보자 안에서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평소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서 열려 있는 샘이라고 말한다. 깊고 은밀한 샘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을 우리는 이 샘에서 길어내며 또 중보자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로 나온다. 이런 방법으로 또 이런 의미에서, 만일 내가 제시한 확고하고 분명한 이유들을 오시안더가 수락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이 일은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나누게 하시는 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오시안더의 트집에 속지 않도록,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이 비할 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1321)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의 친교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함으로써 믿음을 의로 생각한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중상을 반박하였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비우고 나가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그만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리를 빼앗는 것같이, 그는 우리를 중상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유대를 멸시하는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여 큰 오류를 범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광적인 오류, 즉, "본질적 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쯔빙글리과(Zwinglian)"라고 불러 그의 악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그들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본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만하고 자신의 기만에 걸린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뿐 아니라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공결해야 할 세계적 학자들까지도 공격한다. 나는 나 개인의 문제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공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게는 아무런 악한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 일을 더욱 진지하게 변호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와 본질적 내주를 열광적으로 고집하는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른다. 우선, 그가 성만찬에서 몸을 먹는다고 공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일종의 조잡한 혼합물로서, 우리 속에 자신을 주입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불어 보내어, 우리가 그와 함께 참으로 의롭게 되게 하신다고 한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 또는 거룩이나 완전성이라고 한다.

나는 그가 제시하는 성경의 증명들을 반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허비하지 않겠다. 그는 그릇되이 성경을 인용해서 그 뜻을 왜곡하여 하늘의 삶을 현세의 상태로 바꿔버린다.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너희로…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라고 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실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복음의 약속이 현재 이루어진 것 같은 생각이다. 참으로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 3:2).1322)

나는 한 작은 예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이 무가치한 일들을 무시한다.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하고 무익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오시안더 사상의 둘째 단계,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의롭다고 하는 데는 더 많은 해독이 숨어 있다. 나는 총명하고 경건한 독자들이 이 가상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다지 유해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냉담하며 내용이 빈약하며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구름 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고요한 기도, 즉, 속죄를 믿고 은혜를 받아들여,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중 의라는1323) 것을 구실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불경건이다.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이다. 그는 또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한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다른 구절에서 칭의가 송사와 대립되는 것과 같다. 이 대조법을 보더라도 이 표현이 법적인 용어에서 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히브리어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1324) 이 말의 근원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따라서 그 경향과 뜻이 여기서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허물의 사함을 얻고…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시 32:1, 롬 4:7) 행위가 없이 받는 의를 묘사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이 완전한 정의인지 또는 불완전한 정의인지를 오시안더는 내게 대답하라. 바울이 예언자를 인용한 것은 죄의 용서가 의의 일부분이라든가 또는 사람을 의롭다 하는 일의 부수물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주장을 지지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바울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의 전체를 포함시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어주시며, 그 불법을 용서하시고, 그 죄과를 그 앞으로 돌리시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바울이 판단하고 인정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즉, 자기의 원래의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여전히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4 참조) 매우 다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에,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시며, 어떤 때에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 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부분적인 의만으로는 우리의 양심에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어떤 주장이 사람의 마음에 의혹을 불어넣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동요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자유롭고 담대한 기도를 방해하여 평화와 평온과 영적 기쁨을 주지 못할 때에, 그런 주장은 패악한 것이며 완전히 깨뜨려야 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반대 명제를 써서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며(갈 3:18),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헛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14). 행위에 중점을 두는 믿음은 흔들린다. 이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행위에서는 의지할 것을 전연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와 중생을 오시안더는 "이중의 의"라는 말로 혼동하지만, 바울은 명백하게 구별한다. 그는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해서자기가 받은 바른 성품,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비통하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한 의에서 피난처를 구하며, 거기서 생명과 사망과 비난과 기아와 전쟁과 기타 고난을 영광스럽게 극복하였다고 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롬 8:38-3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으며, 그래서 그는 자랑할 확신이 감해지지 않으며, 그가 조금 전에 자기의 처지라고 통탄해 하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차이는 불의의 짐에 눌려 신음하지만 동시에 승리의 확신을 품고 모든 공포심을 극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또 익숙히 살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항변을 와해시킨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 "이중의 의"를 털옷같이 입히지만, 역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적어도 본래의 의가 없는 자들이 세상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일정한 비례에 따라1325)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인간적인 의 대신에 거저 주시는 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구분할 수 있는가? 한 근씩인가 또는 한 푼씩인가? 물론 그는 확신이 없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므로 좌우로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말씀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최고의 심판자가 값없이 사면하실 때에 그를 정죄하며, "나는…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고 하시는 말씀이 그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참람한 행위인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견제하신 모세의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용서하시지 말아 달라고 한 뜻이 아니라, 백성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책하지 말고 모두 한결같이 사면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써 자기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의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12. 오시안더를 논함

오시안더가 독자들에게서 숨기고 있지 않다고 장담하는 그 신비에 대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주목하도록 경고한다. 우선 그는 장황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데(그의 말을 쓴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의는 중보자로서의 위격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의로써 그의 밧줄을 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린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논쟁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지만(고전 1:30), 이것은 영원한 말씀에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의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참으로 그의 영원한 지혜였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이 이름을 그에게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것을(요 17:5 참조)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에 적용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잘 부합한다.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도 빛은 암흑에 비취었으나(요 1:5),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의의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리고 자기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기까지는(요 8:12), 그 빛은 숨겨져 있었다.

또 오시안더는 미련하게도 의롭다 하는 능력은 어느 피조물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천사와 인간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반격한다. 천사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보속을 치르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성과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인 그리스도께 속한 일이었다.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율법에 복종하셨기 때문이다(갈 3:13, 4:4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의 신성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심히 비열한 비난을 가한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중 한 가지 성은 버리고 더욱이 두 하나님을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애려고(히 2:14 참조)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보면, 우리는 그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영광을 빼앗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를 밝힐 뿐이다. 이 점에서 오시안더는 가증스런 오류에 빠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된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와 권능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주장한다. 나는 그가 무분별하고 상식을 벗어나서 성경 구절들을 무수히 인용하여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며, 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본질적 의"라고 해석해야 된다고 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무시하겠다. 예컨대 다윗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의에 호소할 때에 백 번 이상 호소하지만 오시안더는 번번이 서슴지 않고 그 뜻을 곡해한다.

그가 제기하는 다른 반대도 더 강력한 것이 못된다. 그는 우리를 바르게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것이 의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며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키며 일을 행하게"(빌 J:13 참조) 하신다고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개조하셔서 우리 생활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하시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손을 통해서 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성령의 모든 충만하심을 맡기셔서, 그의 풍성함에서 지체들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신다. 다음에, 비록 의는 그의 신성의 은밀한 원천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가(요 17:19)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 자신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우셨으며 만일 아버지의 뜻이 그를 밀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1326) 오시안더가 첨부하는 내용도 이에 못지않게 불합리하다.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공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1327) 이것은 오시안더 자신과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수단인 그의 공상에 아무것도 더 첨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의 원천이며 시초이시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로우며,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이런 추론을 누가 누구에게 허락하는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의로 호심경을 삼으신다"고 한다(사 59:1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미 주신 무장을 빼앗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속자가 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는가? 예언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 이외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시지 않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아무 도움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뜻을 간단하게 다른 말로 바꿔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한다(롬 3:25). 그러나 이 말이 그가 다른 곳에서 "단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롬 5:19)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 가련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에 전적으로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희롱으로 그리스도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자이다(막 15:17, 기타).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1328)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한다.1329) 우선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한 쪽을 세우면 다른 쪽은 넘어져야 할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로 하자. 사도는 "모든 것을…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고 한다. 여기서는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멸망한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자랑이 없어진다고 말한다(롬 3:27). 여기서 행위에 의한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믿음이 모든 자랑을 없애버린다면, 행위에 의한 의를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로마서 4장에서 불평이나 구실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그러므로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에 바울은 반대 개념을 써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산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4)라고 다른 논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은혜로서 주시는 의는 믿음에 따라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의 공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 이런 의를 생각 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는 작별해야 한다.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성경의 뜻을 곡해하며 무의미한 트집 잡기를 오락으로 삼는 이 궤변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묘한 핑계를 발견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행위"의 뜻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 자기의 자유 의지의 노력으로 율법적인 문자에 따라서만 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영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의는 그리스도의 영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며, 우리 자비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의를 가로채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가 미련하다는 것을 설복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도입하는 이 대오에서는 어떤 명칭이 그 행위들을 미화하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배제된다(갈 3:11-12).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에 의한 의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 믿음에 의한 의라는 것이다(롬 10:5,9).

그뿐 아니라, 후에 적당한 곳에서 알게 되겠지만1330)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의롭다하는 힘을 믿음에 돌릴 때에는 영적인 행위까지도 중요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전연 없었다고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1331) 한 바울의 말은 문자적이며 또는 외적인 유덕한 모양이나 자유 의지의 노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조작품을 유치하게 혼합한다. 더구나 그들은1332) 그에 못지않게 패악한 사상을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감염시킨다. 두려움에 떠는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데도 그들은 영과 은혜라는 가면으로 하나님의 자비까지도 덮어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과 함께 율법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의롭게 될 만한 특별히 유익한 행위가 없으므로 행위로써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황주의에 속한 일반 사람들과 스콜라 학자들은 여기서 이중으로 속는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화신이 믿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해 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8)고 한 말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저술을 보면, "은혜"라는 말을 쓸 때에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길이 두 가지라고 설명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다 하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자극을 받아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한다. 둘째로, 이 사랑을 통해서 마귀가 우리를 사로잡는 데 사용하는 죄가 소멸되어,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구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1333)

이와 같이 롬바르드가 칭의 안에서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선행으로 인도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그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멀리서 따라갈 뿐이며, 바르게 본받지 않고 상당히 어긋난 쪽으로 가기까지 한다. 어거스틴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롬바르드는 모호하게 만들며 어거스틴의 생각이 다소 오염된 때에 롬바르드는 아주 썩게 만든다.

스콜라 학파들은 점점 더 타락해서 드디어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적어도 그의 표현 방법을 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사람에게 의를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온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지만, 여전히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며,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한다.1334)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한 성경의 판단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해서 이와는 훨씬 다르게 가르친다. 즉,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기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한다. 참으로 칭의의 순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다른 아무것도 찾으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상태만을 보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실 이유를 자신 안에서 찾으신다.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체험인데 죄인이 복음의 교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였으나 그가 받을 영원한 의는 그가 원하는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장만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을 하나씩 숙고한다면, 우리가 표명한 의견이 분명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논술한 순서보다 더 좋은 순서로 배열할 수도 있을 것이나 여러 가지 점이 서로 부합하여 우리가 전체 사항을 바르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배열순서는 문제가 아니다.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믿음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위에서 확립한 것을 여기서 회상해야 한다. 복음에서 제시되는 의를 믿음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의가 제시된다고 하므로 행위에 대한 고려는 일체 배제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구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 10:5)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 10: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롬 10: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서, 율법은 행위에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중요한 구절이며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는 율법의 모든 조항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를 많은 곤란에서 구출해 낼 수 있다. 바울이 약속과 율법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빈번히 대립시키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갈 3:18). 같은 장에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그런데 물론 율법에도 그 자체의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비교가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면, 복음의 약속에도 어떤 특이한 점이 있을 것이다. 복음의 약속은 값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 아닌가? 사람이 자기의 힘과 자유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주책없이 의를 자랑할 때에, 그런 의만이 배척되는 것이라고 하여1335) 나를 반대하고 위협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바울은 오해할 여지가 없는 말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롬 8:3 참조). 보통 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는 없다. 물론, 율법의 극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런 사랑을 품게 만들 때에 왜 그것이 우리의 의의원인이 되지 못하는가? 성자들도 사랑이 불완전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상을 받을 공로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18.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구절은 이것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참조). 행위는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믿음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주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율법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관계를 보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들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가 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복음이 말해주는 의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이유가 없다(롬 4:2-3)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주장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보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의가 성립된다고 부언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참으로 그가 여기서 쓰는 말들의 뜻은 이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는 조금 후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받으며, 이 일은 은혜로써 오는 것이라고 부언한다. 또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이 유업은 거저 받는 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16 참조). 믿음이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바울의 추론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는 다른 구절에서도 확실히 같은 의미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것이라"고 가르친다(롬 3:21). 그는 율법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행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나 행함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19. "믿음만으로" 통해서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롬 3:28)1336) 하는 우리의 교리에 대해서, 궤변가들이 잡는 트집이 어느 정도로 공정한가를 독자는 이제 알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이 교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 4:2이하) 주장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려는가? 거저 주는 선물과 행위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가?바울이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고(롬 1:17) 한 말을 그들은 어떤 기만 수단으로 회피할 것인가?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거짓된 구실, 분명히 어리석은 구실을 만들어서 이 "만"이란 말을 제거해야 된다고 고집한다. 모든 것을 행위에서 빼앗는 사람이 모든 것을 믿음에만 돌리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 열거하는 말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여기서 그들은 교묘한 궤변을 쓴다.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고 오리겐과 기타 고대 교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미련한 구실에 불과하다. 그들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는 배제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지껄인다.1337) 끊임없는 언쟁으로 그 방면에 능숙하게 된 그들은 논리의 초보자라 이해하지 못한다. 사도가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할 때에 정신없이 지껄인 것인가?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3:18), 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신 27:26).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의식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거나, 의를 어기는 사람들에게만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구절들이 도덕적인 면의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의롭다 하는 권한에서 도덕적 행위가 배제된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같은 목적으로 다른 논법을 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으로(롬 3:20), 의는 생기지 않는다. "율법은 진노를 키우게"하므로(롬 4:15),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양심에 확신을 주지 못하므로 의도 주지 못한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므로 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행함 없이 얻는 것이다(롬 4:4-5).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므로 우리의 자랑은 제거되었다(롬 3:27).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1-22). 그러면 이런 발언들은 의식적 행위에 적용되고 도덕적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감히 지껄일 수 있으면 지껄여 보라. 어린 학생들이라도 그런 철면피를 야유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는 능력이 율법에 없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은 확실히 율법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20. "율법의 행위"

사도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라는 제한을 첨부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설명할 수 있다. 행위는 귀한 것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하나님이 시인하시기 때문이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인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행위에 대한 의를 하나님에 천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당연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가 의라는 이름과 보상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또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사도는 다른 곳에서, 언약을 한 후 사백삼십 년이 지나서 율법을 주셨다고 선언한다(갈 3:17). 무지한 자들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의로운 행위가 있을 수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 논법을 비웃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와 허락이 있어야만 행위에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에는 행위에 의롭게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생각한 것이다. 그가 칭의의 조건을 율법의 행위에서 빼앗으려고 할 때에,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한 분명히 이유는 율법의 행위만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임이 명백하다.

그는 간혹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고 모든 행위를 부정한다. 예컨대 다윗의 증거를 근거로 삼아서, 행위와는 별도로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롬 4:6, 시32:1-2).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트집을 잡더라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저 특수한 표현을 일반적 원칙으로1338) 생각한다.

또 그들은 세밀하나 어리석은 구별을 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한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으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에 의존한다고 한다.1339) 사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만이(갈 5:6)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가 역설하는 일이 모두 와해되고 말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4). 바울이 그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연히 보상을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 이외에는 믿음의 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

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1340)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 우리가 항상 돌아가야 할 원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인인 동안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라고 잘 표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니, 하나님의 얼굴을 죄인에게서 돌이키시게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죄인을 상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이질적인 일이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구라고 가르친다(롬 5:8-10). 그래서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주께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만일 행위에 의해서 판단된다면, 그들은 죄인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내가 이미1341) 인용한 바울의 말은 이 두 가지 점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증거를 인용하여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행위와는 별도로 의를 돌려주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윗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롬 4:6-8, 시 32:1-2). 분명히 다윗은 여기서 의를 말하는 대신에 복을 말한다. 그는 죄가 용서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므로 우리는 다른 정의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구원을 아는 지식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노래한다(눅 1:77). 바울이 안디옥 사람들에게 구원의 요점에 대하여 설교할 때에도 이 원칙을 따른다.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얻는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1342)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1343) 그는 전에도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1344) 라고 말한 적이 있다.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신중히 고찰할 만한 점이다. 참으로 여기서는 저 경박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의롭게 되기 때문이라고1345) 하는 이 경박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며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다. 자기 밖에서 의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의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극히 분명하게 주장한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1346)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여 기서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히 또 풍부하게 가졌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졌다고(롬 8:3-4)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만 한가지이며, 우리는 전가에 의해서 그것을 얻는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조금 전에 한 말에서도 똑같은 뜻을 표명한 것이 명백하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1347)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이 의의 한 예로 해석한 암브로시우스의 말은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야곱은 자기에게 장자의 권리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의 옷 안에 숨고 향기 나는 형의 겉옷을 입은 후에(창 27:27)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아버지의 호감을 얻고 자기를 위하여 축복을 받았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맏형 그리스도의 고귀한 순결 밑에 숨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의46x)1348)말은 이렇다. "이삭이 옷의 향취를 맡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기 때문이다."1349)

참으로 이것은 진리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한다.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칭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 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이 모든 일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완전히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지만, 이 일들이 얼마나 필요하냐 하는 것은 이 논의 전체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분명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무리의 논의는 인간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행위의 성실성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놀랄 만큼 경솔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단정한다.

사실 행위에 의한 의를 가장 자신 있게, 가장 요란하게 떠드는 자는 현저한 병에 걸려 괴이한 모습을 보이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뒤뚱거리는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느낀다면, 그렇게 까지는 우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면 그것을 존중할 줄도 모르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수도원의 회랑에 앉아서 누구든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행위 가치에 대해서 쉽게 지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며, 경박한 언쟁을1350)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유희를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의에 관해서 유익한 탐구를 하고 싶으면, 유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늘 심판자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1351) 이것이 그 문제이다. 우리는 이 심판자를 우리의 마음이 본래 상상하는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마음에 그려야 한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워지며(욥 3:9) 그의 힘은 산들을 녹이며 그의 진노는 땅을 떨게 만든다(욥 9:5-6 참조). 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며(욥 5:13), 그의 순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불결하여(욥 25:5 참조), 그의 의는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으며(욥 4:18 참조), 유죄한 자를 무죄하다고 아니하시며(욥 9:20 참조), 그의 복수에 한번 불이 붙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간다(신 32:22, 욥 26:6 참조). 그가 사람들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하여 심판대에 앉으셨다고 생각해 보자. 누가 그의 보좌 앞에 자신 있게 설 것인가?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라고(사 33:14-15) 선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 아무도 나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무서운 말이 들려온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또 다른 곳에도 쓰여 있듯이 참으로 모든 사람은 곧 멸망할 것이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욥 4:17-20).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5-16)라고 하였다.

사실 욥기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를 말한다. 이 구별은 계속할 가치가 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는 의 앞에서는 검사에 견딜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은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지만 천사들의 거룩도 하늘 저울로 달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의를 나는 논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기록된 율법의 표준에 따라 우리 생활을 검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저주를 말씀하신 것에 공포와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둔감하다. 예컨대 이런 일반적인 저주가 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신 27:26). 간단히 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우리는 허망한 자랑을 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위로 향하고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만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할 것을 가졌노라고 누구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갈 때 우리의 그런 확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또 우리의 육체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관련해서 한없이 무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의 영혼에도 나타난다. 가까운 물건만을 볼 때에는 눈의 식별력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태양을 볼 때에는 우리의 시력은 엄청난 광채로 마비되며, 땅에 있는 물건을 볼 때에 느끼던 강한 힘은 없어지고 무력함을 느낄 뿐이다.1352) 그러므로 우리는 빈껍데기뿐인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동등하거나 또는 우월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일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우리의 야성이 길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하신 대답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사람에게로 가서 당신의 의를 교만하게 자랑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의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성령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다른 종은 조금 다른 뜻으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 히 듣는다. 곧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천 가지 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하나도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인 바울이 자기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지만,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고전 4:4), 그는 이런 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3. 진정한 의의 증인으로써 어거스틴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이런 예는 성경에 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저술가들도 모두 이것이 그들의 견해란 것을 표시하였다. 어거스틴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객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가지 희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딤전 2:5-6 참조)1353)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행위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 있는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희망을 남기지 않는다. 베르나르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나는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

세상은 위험하고, 육체는 내리누르며, 마귀는 올무를 놓는다. 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대한 죄를 지었으며 나의 양심은 어지럽다. 그러나 나는 내 주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1354) 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후에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분명히 그에게 자비가 있으면 나에게도 공로가 있다. 주의 자비가 풍성하면, 나의 공로도 똑같이 풍부하다. 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의 의는 또한 저의 의옵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를 나의 의로 만드셨다.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을 전적으로 안전하게 만드시는 일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의 완전한 공로가 된다."고 했고 같은 뜻으로, 그는 평화를 유지하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당신의 영광이 여전히 쇠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평화가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겠나이다. 또한 일체의 영광을 거부하나이다. 제 것이 아닌 것을 횡령한다면, 주신 것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한 구절이 있다. "무슨 까닭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자랑할 더욱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에 있지 않은가?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이는 특히 예언서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겔 36:22,32).

공로로는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는 것이 곧 넉넉한 공로이다. 그러나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은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 베르나르드가 선행에 대해서 공로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목적은 위선자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위선자들은 방자한 죄악 생활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곧 이 점을 설명한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행복하다."

교회는 담대할 이유는 있으나 공로는 없다. 공로가 있으나, 가치 있는 공로가 되게 하려면 있는 체하지 않아야 한다.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공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담대하게 자랑한다. 주의 풍성한 자비가 자랑할 까닭을 넉넉히 제공하기 때문이다.1355)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한다. 4-8)

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기만이 없어진다

이것은 사실이다. 각성한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에는, 이것만이 안전한 피난처이며 마음 놓고 호흡할 곳임을 깨닫는다.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인간의 가장 회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비교는 지극히 엄격한 시험이 될 것이며, 마음속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의지까지도 드러낼 것이다. 바울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한 것과 같다(고전 4:5).

이렇게 되면 게으르게 숨어 있던 양심은 이미 잊어버린 일까지도 모조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고소하는 마귀는 지금까지 우리를 시켜 짓게 한 죄악을 모두 알므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곳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도취에 빠져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위선은 그 때에는 당황하며 붕괴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느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난 체 하는 그 위선뿐이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이런 광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즐겁고 평화롭게 자기의 의를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빼앗길 것이다. 꿈에 많은 대물을 쌓았다가도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1356)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본래 맹목적이다. 이는 아무도 잘난 체하는 악폐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악폐가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고 선언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라고 솔로몬은 말한다(잠 21:2).

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잠 16:2)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 망상 때문에 무죄 방면이 되는가? 물론 되지 않는다. 같은 구절에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잠 16:2) 하였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 다신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런 아첨에서는 유익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알면서 자기기만에 빠져 멸망해서는 안 된다. 자기 검토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이는 우리의 패악성의 비밀한 곳을 심판대의 빛으로 철저히 드러낼 필요가 있으며,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에 있는 말씀들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4, 6),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6).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그 때라야 우리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욥 9:20)는 욥과 같은 체험을 할 것이다.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불평한 말인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이란 말은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 참으로 그는 여기서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이 검토의 엄격성은 우리를 완전히 놀라게 할 때까지 되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약 4:6, 잠 3:34 참조).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하고 부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의 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파멸적인 위선을 가르친 것이다.1357)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과 자기 마음에 느끼는 것이 반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악행이다. 그러나 올바른 느낌을 가지려면, 우리는 즉시 자기에게 있는 고귀한 듯한 것을 일체 짓밟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라는(시 18:27, 라틴역 17:28 참조)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하는 것을 의지한다. 자기의 비참함과 빈곤함을 알고 진실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나 겸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께서 스바냐서에서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1-12)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누가 겸손한 사람인가를 분명히 지적하시지 않는가? 그 사람은 자기의 빈곤함을 알고 고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랑한다"고 하신다. 번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하시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주를 바라는 것만을 남겨주셨다. 이사야서에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손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고 하였다.

우리는 "통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땅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겸손한 사람과 함께 높임을 받으려면,1358) 우리 마음에 이런 통회로 인한 상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교만이 꺾이며, 수치와 치욕을 당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주께서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설명하셨다(눅 18:13). 세리가 한 행동을 가짜 겸손의 표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더 가까이 오지 못한 것,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그가 충심으로 느낀 것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개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보통 사람들, 즉,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주 두 번씩 금식하며, 가진 것의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감사하노라고 한다(눅 18:11-12). 그의 공개적인 고백에서는 그에게 있는 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눅 18:14). 그러므로 우리의 겸손을 주께서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즉, 우쭐하는 생각이 차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며 따라서 자비를 받을 수 없다. 아무도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때 그리스도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슬픈 자를 위로하되…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 61:1-3). 이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만을 불러 자신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마 11:28). 그리고 다른 곳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마 9:13).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만족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된다. 행위에 대한 자신이 없더라도 자기만족은 있을 수 있다. 많은 죄인들이 그 죄악 생활의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취한 것처럼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얻으려고 애쓸 줄을 모른다. 자기의 의에 대한 확신과 같이 그런 태만도 버려야만 우리는 비워지고 주린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주의 앞으로 달려가, 주의 주시는 좋은 것으로 배부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된다.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안을 때에"라고 말한다.1359) 그가 우리 안에서 공로를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선물을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드도 이와 일치하는 뜻으로 교만한 자들을 불성실한 하인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기를 지나쳐 가는 은혜를 자기의 것인 듯이 생각하여 사소한 일에도 자기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마치 벽이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 빛을 낸다고 하는 것과 같다.1360)

이 문제에 시간을 더 보내지 않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이며 확실한 원칙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말하겠다. 즉,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즉,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다.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한다. 즉,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1361) 하며,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의가 문제될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라는1362) 간곡한 권고가 매우 자주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라고 증거한다(롬 3:25). 그러나 그는 곧 이 의를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을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고 인정되며, 자격 없는 자에게 의의 선물을 거저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는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다(롬 3:19). 이는 사람에게 자기를 변호할 구실이 있는 동안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소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에는, 우리가 우리의 불의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겔 20:43),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20:44).

만일 이런 일들이, 즉, 우리 자신의 불의를 알고 고민하며, 무가치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의 일부라면, 우리는 그의 거저 주시는 의롭다하심을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훔치려 하는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렘 9:23), 그러나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고전 1:31, 렘 9:24) 했을 때에, 그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된다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바울은 이 말씀을 이런 뜻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30-31). 그가 말하는 뜻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이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물론 사태는 이렇다. 즉,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참으로 바울은, 사람에게서 자랑할 구실을 완전히 빼앗은 때라야 세상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고 생각한다(롬 3:19 참조).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고 선포하면서, "자랑하리라"는 말을 첨가한다(사 45:25). 이것은 선민은 주를 자랑하며, 주 이외의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 위하여 주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앞에 있는 구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자랑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즉,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힘은 여호와께 있다고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사 45:24). 단순한 고백이 아니고, 맹세로써 확인된 고백을 요구하는 데 유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되는대로 겸손을 가장 하면서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기 때문이다. 교만한 생각이 없이 자기의 의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이는 이런 자기 평가에는 반드시 자기 신뢰가 따르며, 스스로에게서는 반드시 자랑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찬양은 전적으로 주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말대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롬 3:26)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그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엡 1:6) 말한 후에, 이 뜻을 반복해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부언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벧전 2:9). 베드로의 의도는 분명히 신자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만이 들려, 육에 붙은 모든 자만을 압도하며 침묵시키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의의 한 부스러기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는 불가피하게 모독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물을 때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의를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라는 솔로몬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히 무한한 추악 속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양심 속으로 깊이 내려가서1363) 자기가 한 일을 검토한다면, 그가 얻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모두 잘된 듯이 달콤한 안도감을 즐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인가?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을 볼 때에 그의 심판 앞에서 확고한 평화를 느끼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지옥에 빠지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도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만큼 견고한 의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의에 관한 손익은 무익하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태연하게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런 때에 한해서 우리가 가진 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 점을 역설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 말보다 그의 말로 표현해 보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롬 4:14). 사도는 우선, 만일 의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의 행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거나 율법을 준수하는 데 좌우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며 배제된다고 추론한다. 아무도 그런 약속을 믿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아무도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을 완수했다는 확신이 결코 생길 수 없다. 이에 대한 증명은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한 눈으로 자기를 본다면, 누구든지 자기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 있게 제멋대로 생활하며, 심지어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자화자찬을 대립시켜, 하나님의 법적 절차를 중지하도록 강요하려는 듯이 행동한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위선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에 파묻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훨씬 다른 근심과 고민이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의혹이 잠입하고, 드디어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는 무거운 빛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보라, 믿음은 벌써 눌리고 소멸되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2:5, 고후 13:4 참조).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바울은 약속이 무용하며 무효하게 되리라는 또 다른 점도 첨부한다. 우리의 공로에 따라서 약속이 실현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경지에 언제 도달할 것인가? 실로 이 둘째 점은 첫째 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약속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실현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약속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은혜에 의한 약속을 확립하기 위해서 기업은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할 때에 기업은 풍성하게 확인된다.

자비와 신실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약속하시는 것은 신실하게 실행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구원을 구하기 전에, 우선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고 말한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 119:76). 이 순서는 바르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다만 그의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근거로 삼고 그 위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깊고 든든하게 세우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 행위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행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 안에서 그들을 영원히 지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약속하셨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맹세하셨다.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 일을 선포할 때에, 아무도 불안을 느껴서는 안 된다."1364)라고 하였다. 베르나르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신다(마 19:25-26). 이것이 우리가 믿는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의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품는 이유의 전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우리는 그의 의지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누가 아느뇨"(전 9:1 참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사 40:13 참조). 여기서 믿음이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고, 진리가 우리를 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모르는 것, 아버지의 가슴속에 숨겨 있는 것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성령의 증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롬8:16) 우리의 마음에 확신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심으로써 설득해주실 필요가 있다. 확실히 이 일에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중간 통로가 있다.1365)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양심의 완전한 확신으로 붙잡은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은 확립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의심이나 불안이 있으면 약속은 무효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또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는 약속은 흔들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의가 우리를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행위를 문제로 삼지 않고 신앙만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는 전연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가랴의 유명한 예언은 성취된다. 즉, 이 땅에서 죄악이 제거될 때에는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슥 3:10) 하였다.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언자의 뜻이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쓰는 비유를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논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외면적인 복을 영적 은혜의 모형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키는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과(사 9:6) "우리의 화평"이라고(엡 2:14) 부른다.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푼 회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1366)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나는 왜 비교적 모호한 증거를 사용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롬 5:1)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에 평화와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바울의 시종 여일한 주장이 있다.

동시에 그는 이 확신의 근원을 밝힌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는 때라고 한다(롬 5:5).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모든 신자를 대표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는다(롬 8:35,39의 융합). 저 피난처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떨지만, 주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면 죽음의 암흑 속에서도 안전할 것이다(시 23:1,4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중생한 우리가 영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은1367) 은혜의 감미로움을1368) 맛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터키 사람이나 다른 불신 국민들같이 올바른 기도법도 모른다. 그것은 바울이 증거하듯이, 아버지의 아름답고 다정한 이름을1369)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믿음은 우리 입이 저절로 열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갈 4:6, 롬 8:15) 하지 않는 믿음은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이런 일은 중생의 선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육신에 있는 동안 중생은 항상 불완전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각종 원인을 내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책은, 천국의 기업에 대한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한다.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이다(렘 17: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 8: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 94: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 36:1, 롬 3: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시 14:2). 요컨대 그들은 육이다(창 6: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갈 5: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선 나는 불신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현저한 재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1370) 또한 티토나 트라얀의 공정과 온건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안의 정신 착란, 방탕, 잔인성 등과 다름이 없다든가 또는 티베리우스의 음탕한 생활과 베스파시안의 이 점에 있어서의 절제 생활이 다름이 없다든가 하는 것, 또는 개개의 덕과 죄악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바른 길과 법을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내가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그 죽은 모습까지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의와 불의를 혼동한다면 세계에 어떤 질서가 남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마음에 착한 일과 악한 일의 차이를 새겨 두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의 경륜에 의해서 그 차이점을 가끔 확인하신다. 사회에서 유덕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현세의 복을 많이 주신다. 이것은 그런 덕의 겉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비록 외면적이며 가장한 의일지라도 그에 대한 현세적인 보상을 반드시 주신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방금 인정한 주장, 즉, 이런 덕은, 더 적절하게 말해서 이런 덕의 형상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결코 칭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말은 여전히 옳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 멀어진 사람은 그 덕망이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 마음이 오염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에, 상보다도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의와 극기와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이 선한 사업을 심히 망칠 뿐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행에 대한 진지한 열성보다도 단순한 야심이나 이기심이나 그 밖의 악한 동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 근원인 마음이 불결하고 부패했으므로 덕과 비슷하여 사람의 눈을 속이는 악행과 같이 덕행이라고 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바른 일의 목적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것을 목표로 삼은 노력은 "바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명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그 패악한 의도로 보아서 죄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훌륭한 행위를 했던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 카토와 유사한 사람들도 행위로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의 광명이 없었고, 그들의 행위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는 그들에게 없었다. 그것은 의무 수행이 행동보다 의도에 의해서 그 가치가 판단되기 때문이다.1371)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고(요일 5:12) 하는 요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평생 멸망으로 또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 급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과 일치되는 말을 어거스틴도 했다. "우리의 종교는 의와 불의를 행위의 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의 법에 의해서 분별한다. 믿음이 없으면 선행 같은 것도 죄로 변한다."1372)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생각을 비유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이런 사람들의 열성은 길을 벗어나서 달음질을 계속하는 사람과 같아서 힘을 다하여 달릴수록 더욱더 목표에서 멀어지며 더욱더 불행하게 된다.

따라서 바른 길에서 절며 가는 편이 길 밖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그는 말한다.1373) 끝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도 없으므로 분명히 그들은 나쁜 나무와 같다. 보기에 아름다운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은 맛도 좋을는지 모르나 몸에는 조금도 좋지 않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의에 대하여 무가치할 뿐 아니라, 확실히 정죄를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듯이 우리는 무슨 까닭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는(히 11:6) 사도의 말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며(요 5: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한다(고후 5: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위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한다(엡 2:4-5). 다른 곳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다(롬 4: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는 의미에서(롬 11: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차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위에서1374) 인용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 2:8-9 참조)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 1:9)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딛 3:4-5,7) 인정해야 한다. 이 고백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의를 빼앗는다. 즉,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만일 행위의 의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가 의롭다 하심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분명히 그는 이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만일 행위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은혜는 벌써 은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롬 11:6). 주께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마 9:13) 말씀하신 뜻도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죄인만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를 가장하면서까지 들어가려고 애쓸 것인가?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애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스럽거나 모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비에 부당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악의는 큰 압력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좀더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이 분명하므로 내 자신의 말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주장을 세우겠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모사한 다음에 회복의 순서를 아름다운 말로 첨가한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 59:15-16). 하나님을 도와 구원 사역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 있는 것인가? 다른 예언자도 죄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호 2:19,23). 이것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첫 연합을 의미하는 계약이며,1375) 이 계약이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우리의 의가 설 곳은 전연 없다.

사람은 다소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대체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의 이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하나님께서 멸시하시는 원수들이 또 그들의 행위가 어떤 용납될 만한 것을 하나님 앞에 보낼 수 있겠는가? 의롭다함을 얻고 또 친구로서 영접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 철저하고 노골적인 원수라는 것을 진리는 증거한다(롬 5:10, 골 1:21 참조). 칭의가 사랑의 시초라면, 어떤 행위에 의한 의가 그보다 먼저 있을 것인가?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요일 4:10) 성실하게 깨우쳐 준다. 여호와께서도 이미 예언자를 통해서 똑같은 뜻을 가르치셨다. "내가‥‥‥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4).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기꺼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때문에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은 이 뜻을 오해하여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1376)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전 6:11). 베드로도 같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화의 사역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벧전 1:2). 만일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는다면, 이 정결(淨潔)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받은 때에(빌 1:29), 드디어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틀 받는다. 7-8)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분류 중에서1377) 둘째 종류와 셋째 종류가 포함된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한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죄인이 그의 심판대 앞에 가중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악한 마음이 지적되어도 여전히 자기들에게 아무 의도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기들의 불의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에게 조금은 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신다.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 2:11-14).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 마음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일평생 악하게 산사람도 주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히 악한 사람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로 인정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또 이 말씀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 때문에 오염된다고 언명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름을 제거해야 한다. 또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시는 비유는 얼마나 적절한가! 이는 주께서 명령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취하시는 입장은 다르다. 주의 율법에 거룩하다고 한 일도 악인의 불결 때문에 오염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신다. 부정한 손이 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8. 사람과 행위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도 아름답게 다루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備)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사 1:13-16, 58:1-5 참조).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께서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확실히 주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시지 않으신다. 율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그는 도처에서 가르치신다. 이 시초가 배제되는 때에는 그에게 드리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된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게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노엽게 할 것이다. 이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잠 15:8). 그러므로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된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일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1378) 가르친 이들은 참으로 옳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서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하였다(창 4:4).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열납하신다고 지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신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고(렘 5:3)한 말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은 믿음에 의해서만 순결하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성령이 선언하셨다(행 15:9). 그러므로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첫째 기초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넷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1379)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1380)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전 7:21, 왕상 8: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인가?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라.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競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욥 25:5).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다(겔 18: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약 2: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한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1381)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이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1382) 언제든지 성립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별로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이다.1383)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다.1384) 즉,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 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고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138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신다(롬 4: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엡 2: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합 2:4) 예언자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 31:1, 롬 4:7)라고 한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한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녀야 한다. 끝으로, 값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한다(고후 5: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낸다. 즉,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한다(엡 2:8-9).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할 성자들의 잉여 공로설(supererogatory merits)을 검토·반박함. 12-21)

12. 반대자들의 핑계

이 문제에 관해서 스콜라 학자들이 도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핑계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충분한 고유의 가치가 있지만, "받아들이는 은혜"인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1386)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행위에 의한 의가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행위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일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범한 불법은 잉여 업적에 의해 보상된다고 한다.1387)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에 불과하다. 아버지께서는 값없이 베푸시는 선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시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시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며 순결하며 결백하다고 인정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완전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 나타나며 우리를 보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의를 받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끊임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 이 순결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우리의 추악과 불결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묻힌 듯이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오면 옛 사람이 죽어 분명히 파괴된 우리를 선하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셔서 새 아담과 함께 복된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리도록 하자.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썩지 않는 몸을 받아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 15:45이하 참조).

13. 직무 이상의 행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무거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자체로는 확실히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행위 자체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의 용서를 받는 때만은 예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개의 행위에 대해서 그 보상으로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의 일들을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레 18:5). 그리고 모든 일을 꾸준히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 유명한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신 27:26, 갈 3:10). 이런 말씀은 부분적인 의라는 공상을 철저히 논박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말씀들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것 이외의 의를 하늘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무 이상의 행위"가 충분한 배상을 제공한다고 하는 그들의 상습적인 모호한 말은 건전치 못한 생각이다.1388) 왜 그런가? 그들은 벌써 쫓겨난 자리로 항상 되돌아가지 않는가? 즉, 부분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입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정하지 않을 일을 그들은 뻔뻔스럽게 사실인 듯이 전제한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으면 행위에 의한 의를 전연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주께서는 자주 확언하신다. 우리에게 의가 없으면서도 모든 영광을 빼앗긴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즉, 하나님께 절대로 굴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소한 행위를 자랑하며, 다른 보속으로 자기에게 없는 의를 사려고 하는 우리는 얼마나 패악한가?

보속이란 생각은 이미 철저히 분쇄되었다.1389) 우리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무의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악한 것으로 보시는지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참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모든 의를 한데 뭉치더라도 죄 하나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한 번 범법한 것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그 결과로 동시에 구원을 회복할 능력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우리는 안다(창 3:17). 그러므로 사람은 보속을 치르는 능력을 빼앗겼다. 자기의 보속 능력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원수에게서 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거나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가 있다고 단정하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인정하시려면, 먼저 우리의 죄가 가려지며 용서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며, 보속을 밀어 넣는 자들은 그 은혜를 악하게 모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를 모범으로 삼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경주를 하며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야 한다(빌 3:13-14).

14. 우리의 의무를 완벽히 수행한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불가능하다

잉여 업적을 자랑하는 것, 이것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는 교훈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가장이나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마음에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불필요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드려야 할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진지하게 깨달으며 생각하라고 명령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명령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종이며, 율법의 의무를 다하는 데 정신과 몸을 다 바치더라도 그 전부를 이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모든 의로운 행실과 그 이상의 행실도 이 모든 일들 중의 하나에도 해당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면 우리 각 사람은 이 목표에서 심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책임 분량 이상으로 무엇을 축적했노라고 감히 자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은 항변하기를 비록 나는 필요한 의무들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무들보다 더 많이 행하도록 노력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1390) 할는지 모르나, 이런 말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데1391) 공헌할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율법의 일부라면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자발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5. 하나님은 현재 우리 자체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직무 이상의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자랑한 것을 부당하게 적용한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했노라고 자랑하였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했을 뿐 아니라, 의무의 한계를 넘어 보수도 받지 않고 봉사를 하였다(고전 9:1이하).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행동은 약한 형제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한(고전9:12) 그 이유에 유의하지 않는다. 거짓된 악한 일꾼들이 가장된 친절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 하며, 그 위험한 사상을 퍼뜨리며, 복음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나 또는 그런 흉계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피할 수 있으면서도 남에게 손해가 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도는 주를 위해서 의무 이상의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복음을 맡은 지혜 있는 청지기는 그런 일을 회피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바울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다. 끝으로 가령 이런 이유가 명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크리소스톰이 한 말은 언제나 옳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노예의 소유물과 같은 처지에 있다. 즉, 그것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다.1392) 그리스도께서도 비유에서 이 점을 숨기시지 않는다. 종일토록 여러 가지 노동을 하고 저녁때에 돌아온 하인에게 우리가 무슨 감사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눅 17:7-9). 그는 우리가 감히 요구하지 못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종이라는 처지에 요구되어지는 일 이상의 것을 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능력은 온전히 우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따위의 잉여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잉여 업적은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도 없으며 시인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공로를 하나님 앞에 제출한다면 용납되지도 않을 것이다. 잉여 업적이 있다면 그 의미는 한 가지뿐이다. 즉, 예언서에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라고 한 것이다(사 1:12). 그들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런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참으로 이 한가한 랍비들이 그늘진 안락의자에 앉아서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 심판자가 심판대에 앉으실 때 그런 허무한 의견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심판대 앞에 가서 우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확신을 추구해야만 하고 학교나 길목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1393)

16. 행위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해독을 머릿속에서 뽑아버려야 한다. 즉, 행위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자랑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한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최고 심판자의 자비를 찾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청산할 것을 요구하신다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다윗은 말한다(시 143:2). 욥이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이라고 할 때에(욥 10:15), 그는 하나님의 최고의 의에 천사들도 응답하지 못하는 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의 엄격한 법도 앞에서 욥은 무용한 저항을 하지 않고 기꺼이 굴복할 뿐 아니라 그가 체험한 의는 모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즉시 시들어버릴 것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자기 신뢰를 없애버리면 자연히 모든 자랑도 사라질 것이다. 행위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 앞에서 붕괴될 때, 누가 행위에 의가 있다고 믿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가 부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함을 얻고 자랑하리라"고 한다(사 45:25).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사 61:3) 하는 말은 진리이다. 행위를 믿고 안심하는 일이 전연 없으며 행위의 영광을 기뻐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정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항상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릇된 자신감에 속아 교만하게 된다.

17.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가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動力人)은1394)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質料人)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지으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엡 1:6 참조)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한다(롬 3:24). 우리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진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 3: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친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롬 3: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인을 가리킨다. 겸해서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엡 1: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1395)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 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18. 그러나 선행의 모습은 믿음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다.1396)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1397)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합치점은 이것이다. 즉,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본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된다. 즉, 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무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에 자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하는 기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 8: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 준다.

19. 행위는 소명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이나(잠 14: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사실은(창 24:40, 왕하 20: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런 발언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힘의 흔적이 섞여 있는 것뿐임을 의식한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된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한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이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3:18).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한다(엡 3: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이유를 말한다(롬 8:37).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자들의 자기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1398)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 138: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77: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139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양심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기를 원한다.

21. 때때로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는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을1400)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動力人)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質料人)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目的人)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1401)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면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 8: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고(롬 6:23) 가르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슨 까닭에 그는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것처럼 의와 죄를 대조시키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를 생명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했으면 완전했을 대조를 이렇게 변형하여 씀으로써 어느 정도 깨뜨렸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법으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는 결과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들은 원인보다도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 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그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없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저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제 15 장  행위에 대한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 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 1-4)

1. 잘못된 물음과 올바른 물음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다. 즉,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직 믿음에 제한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1402)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망상에 빠져 끌려 들어가게 된다.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그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공로가 있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증명된다는 듯이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1403) 행위의 의는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준수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완전성의 최고에 올라서서 가장 사소한 어떠한 범법도 없는 사람이 아니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여기서 별개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칭의를 위해서 행위는 결코 충분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는 있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우선 이 "공로"란 말에 대해서 서론적인 말을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이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1404) 진실한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저술가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큰 해독을 끼치고 유익은 극히 적은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기 바란다. 선행의 가치는 다른 말을 사용해도 잘 설명될 수 있고 폐해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공로"란 말을 쓸 필요는 무엇인가? 이 말에 얼마나 큰 잘못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준 독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참으로 그것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자주 이 말을 썼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그들이 이 작은 말 한마디를 잘못 써서 후세에 잘못의 원인을 남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께만 돌리리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405)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1406)

그러나 우리는 말보다도 일 자체를 보아야 한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음은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한 베르나르드의 말을 나는 이미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첨부해서 그 거친 표현을 완화한다. "따라서 공로가 있도록 유의하라. 공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인 줄 알라. 결실을, 즉,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그러면 빈곤과 감사할 줄 모르는 망은과 교만 등의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복되다." 이 말보다 조금 전에 그는 그가 사용한 공로란 말의 경건한 뜻을 충분히 설명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 2:13 참조)."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는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겔 36:22,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충분한 공로가 된다.1407)

3. 선행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결한 것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주시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 준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성경에는 우리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이 있다(눅 17:10). 우리는 주를 위해서 필요없는 일을 한 것이 없고, 다만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감사받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갈 6:9, 살후 3:13 참조)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다.

이 점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인정한다면 공로를 믿는 생각이 일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공로라는 개념까지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궤변가들처럼1408)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주의 것으로서 보존한다.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선한 일들을 그의 불결로 더럽히고 오염시킨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오점이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을 받을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쓴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인가!

나는 여기에서 각 사람의 상식에 호소한다. 너그러운 사람에게서 토지 사용권을 얻은 후에 그 토지의 소유권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은 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주인이 너그럽게 해방시켜 준 노예가 해방된 노예의 낮은 처지를 숨기고 날 때부터 자유인이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번의 노예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받은 은혜를 바르게 누리는 방법은 받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은인에게 돌아갈 칭찬을 빼앗지 않으며, 그가 우리에게 넘겨준 것은 여전히 그의 것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면 하나님께는 어떤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우리는 각각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반증에 대답함

"하나님께 대한 공로"란 말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궤변가들이 성경의 말씀을 오용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집회에서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집회서 16:15). 다른 구절은 히브리서에 있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한 말씀이다(히13:16).1409)

나는 집회서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여기서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의 저자가 그가 누구였든 간에 쓴 말을 충실히 인용하지 않는다. 희랍어 원본에는 이와 같다. pavsh ejlehmosuvnh poihvsei tovpon. e{kasto?gar kata; ta; e[rga aujtou' euJrhvsei("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그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 집회서 16:14). 이것이 정확한 원문이며 라틴 역이 오역이라는 것은 이 낱말들의 구조뿐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장의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히브리서의 인용문에는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만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사도가 쓰는 희랍어의 뜻은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용납하신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는 정도 이상으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의 선행도 항상 불결한 점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시며 우리에게 대해서 노하신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선행은 도저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거나, 우리에 대한 자비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검토하실 때에 그 최고의 법에 의하시지 않고 자비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마치 완전히 순결한 것같이 용납해주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치가 없는 행위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무한한 은혜를 보상으로 주신다. 경건한 학자들이 선행은 현세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게 하며 영원한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지만1410) 나는 이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께서는 거의 항상 수고에 대한 보상과 싸움에 이긴 면류관을 하늘에 두신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풍성히 받는 사실을 행위의 공로에 돌리고 은혜와는 절연시키는 것은 성결의 교훈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하시며(마 25:29, 눅 8:18), 적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많은 일을 맡게 되리라고(마25:21) 하시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신자들이 풍부하게 되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그의 자비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신다(요 1:16 참조). 그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다(사 55:1). 그러므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락과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고려하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선물까지도 이런 영예를 받게 하신다.

(인간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데 반대함. 5-8)

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근본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만일 이런 문제들을 과거에 올바르게 처리했다면 그렇게 많은 소란과 분열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도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3:10 참조).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고전 3: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울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는다(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이유는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 1:30). 참으로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엡 1:4-5). 바울의 말들을 더 인용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죽음의 정죄에서 구속되고 멸망을 면하게 되었으며(골 1:14-20 참조), 하늘 아버지에 의해서 자녀와 후사로 선정되었으며(롬 8:17, 갈 4:5-7 참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으며(롬 5:9-10),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아 멸망하거나 넘어질 위험성이 없게 되었고(요 10:28),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롬 11:19 참조), 이미 영생에 참가했으며 소망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이므로 우리 자신은 미련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으며,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가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우리는 불결하지만 그가 우리의 순결이 되셨으며, 우리는 약하며 사탄에 대항할 무장과 방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가도하며 지옥문을 분쇄하시려고 그가 하늘과 땅에서 받으신 권세가(마 28:18)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몸을 쓰고 다니지만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것이 모두 우리 것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주안에서 성전이 되기를 원한다면(엡2 :21 참조) 이 터 위에 서서 건축이 진행되어야 한다.

6.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것과는 다른 생각을 배웠다. 각종의 "도덕적"인 선행을 발견해서 그것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접목 붙임을 받기 전에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음 속에 있다고(요일 5:12) 하는 성경의 말씀은 마치 거짓말인 듯이 말이다. 죽음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명이 있는 열매를 낳을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는(롬 14:23) 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마 7:18, 눅 6:43 참조). 이 가장 해악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실 수 있는 권능을 얼마나 남겨 놓았는가?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를 얻어주셨다. 즉,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어주셨다. 그러나 이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현재 할 일이라고1411) 한다. 아, 이 얼마나 거만하고 파렴치한 불경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감히 그의 권능을 박탈하며 그를 사실상 짓밟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적인 증거는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유익은 각 개인이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자들이 다음 구절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6:40 참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의 주사가 되었다(딛 3:7, 롬 5:1-2 참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므로(요일 3:24),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굳게 연결된다. 그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은 하늘 자리에 앉는다(엡 2:6). 그들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며(골 1:13), 구원을 얻는다. 이 밖에도 유사한 구절이 무수하다. 그 구절들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를 얻는 능력 또는 구원을 얻는 능력뿐만 아니라 의와 구원 둘 다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면 즉시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의 후사와 의에의 참여자와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그리고(여기 그들의 거짓을 더욱 잘 논박하는 점이 있다) 공로를 세울 기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부 옮겨 받는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오류의 어머니인 소르본누(Sorbonne)의 학파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경건의 요점, 즉, 이신 칭의를 빼앗았다. 참으로 그들은 말로는 사람은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고백하나, 후에 이것을 설명할 때 선을 행하는 것은 의롭다 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근거를 내세운다.1412) 그들은 믿음을 농담처럼 말하는 듯하다. 성경에 믿음이란 말이 자주 반복되므로 믿음을 말하지 않으면 대단히 거북하겠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선행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쳐다가 사람에게 넘겨준다.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본다면, 그런 선행은 사람을 칭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공로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려는 듯이 선행은 자유 의지의 능력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첫째 원인이 은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 의지에 의해서 모든 공로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1413) 이런 생각은 후기 궤변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피타고라스인 퍼터 롬바르드도 이렇게 가르쳤다. 이 사람을 그들과 비교한다면 정신이 바르고 건전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롬바르드가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말하면서도1414) 이 교부가 선행에서 야기되는 영광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심히 주의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소경 같았음을 참으로 분명히 나타낸다.

위에서 자유 의지를 논했을 때1415)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말을 몇 가지 소개했다. 그의 저작에는 비슷한 말들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공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또, 우리의 모든 공로는 은혜로써 온 것뿐이며 우리의 능력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를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1416)

롬바르드가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성경에 대한 훈련이 잘됐던 것 같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그와 그의 제자들을 논박하는 말로서는 사도가 한 말보다 더 명백한 것을 바랄 수 없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자랑을 금한 다음에 자랑이 잘못인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중생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서 선한 일이 나타날 수 없으며, 우리의 중생은 전적으로 일점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했노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연 없다.

끝으로, 그들 소르본느 학파들은 선행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친절하게 고려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1417) 사람들의 양심에 가르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공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교훈으로 분명하게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준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확실히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신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믿음 없이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말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일을 하려면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반드시 먼저 마음에 확정하라고 가르친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일한 기초에서 손가락 넓이만큼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일단 기반이 놓이면 현명한 공사 감독은 그 위에 똑바로 건물을 짓는다.

우리가 교훈과 충고를 받을 필요가 있을 때에 사도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8-9),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며(벧전 4:3),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귀하게 쓰려고 택한 그릇이므로 모든 불결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딤후 2:20-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마 16:24, 눅 9:23) 알려주실 때에,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다 언급되었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악의 모든 뿌리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를 실행할 준비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범에는 인내와 온유 뿐 아니라, 경건과 거룩에 관한 모든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고(빌 2:8),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성취하셨으며(요 4:34, 눅 2:49 참조),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고(요 8:50, 7:16-18 참조),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요 10:15, 15:13 참조). 그는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눅 6:27,35, 23:34 참조).

만일 위로가 필요하다면 놀라운 위안을 주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 4:8-10),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딤후 2:11-12),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면 그가 부활하신 모양대로 부활할 것이다(빌 3:10-11)‥‥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러므로 "사망이나‥‥‥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우리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롬 8:38-39), 모든 일이 우리의 유익과 구원으로 바뀔 것이다(롬 8:28 참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모두 거듭나며‥(벧전 1:3),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간다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증언으로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며(벧후 1:10), 나무와 같이 그들의 열매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다고(마 7:20, 12:33, 눅 6:44)1418) 우리는 말한다.

제 16 장  이 교리를 악평하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

이 말은 어떤 철면피한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한 마디로 넉넉하게 반박한다. 우리가 사람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악한 사람들은 선행을 폐지한다느니, 또는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한다느니 하고 우리를 중상모략 한다. 또 우리가 칭의는 값없이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이것은 의로 가는 길을 너무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 우리의 교리는 시키지 않아도 이미 죄를 짓는 경향이 너무도 강한 인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1419) 이런 거짓된 비난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한 발언으로 충분히 반박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하나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하려 한다. 그들은 이런 칭의를 통해서 선행이 폐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추악한 생활로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더럽히면서도 이렇게 떠드는 그들을 우선은 내버려두겠다. 믿음을 찬양하면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일을 슬퍼하는 체 한다. 만일 행위를 장려하며 강화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곧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분이요 우리의 믿음은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1420)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려 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주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시며 우리가 이 은혜들을 누리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가 자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뿐이므로 그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신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쇠퇴하게 하는가?

또 그들은 우리가 공로에 대한 관심을 빼앗을 때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선을 행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말이다. 후에 더 분명히 설명하겠지만1421) 여기서 우선 말한 김에 말하자면 독자들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미련하게도 보상으로부터 공로를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행하는 능력을 주실 때나, 행위에 대한 상을 주실 때나, 똑같이 너그러우시다는 원칙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차후에 적당한 장소로 미루겠다.

그런데 그들의 항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지적하면 족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로,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은 바른 생활을 하려고 주의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이런 견해는 완전히 잘못이다.1422) 사람이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노동을 파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한 짓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드리는 경배와 값없이 하는 사랑을 받고자 하신다. 그리고 보상을 받을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용납하신다.

사람을 정녕 자극해야 된다면 우리가 구속과 부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이 이런 자극을 주는 예를 들어본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이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사악한 배은망덕을 폭로한다(요일 4:19,10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히 9:14) 일단 깨끗함을 얻은 우리가 새로운 악에 물들며 저 거룩한 피를 모독한다면, 그것은 우리답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다(히 10:29).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74-75). 우리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롬 6:18). "우리 옛 사람이‥‥‥십자가에 못박힌 것은"(롬 6:6)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면 그의 지체인 우리는 마땅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며 지상에서는 나그네 같이 살아 우리의 보화가 있는 하늘을 사모해야 한다(골 3:1-3, 마 6:20 참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작정지었다(살전 5:9). 우리는 성령의 전이며 이 전을 더럽히는 것은 불법이다(고전 3:16-17, 고후 6:16, 엡 2:21). 우리는 어두움이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이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엡 5:8-9, 살전 5:4-5 참조).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불결한 생활이 아니라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다(살전 4:7). 이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불법한 욕망을 버리고 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4:3). 우리가 받은 것은 거룩한 부르심이며(딤후 1:9), 그 요구하는 것은 순결한 생활이요, 그 이하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목적은 의에 순종하려는 것이다(롬 6:18). 우리의 사랑을 고무하는 논법으로서 요한의 말보다 더 강력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요 13:34 참조)라고 말한다. 사랑을 계속 실천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며, 마귀의 자녀인 암흑의 자녀들과 다르다(요일 3:10, 2:10-11). 다시 바울의 논법을 들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떨어지지 않으면 한 몸의 지체가 되며(고전 6:15,17, 12:12), 서로 일을 도와야 한다(고전 12:15 참조). 거룩한 생활을 하라고 부르는 요한의 말보다 더 강력한 외침을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 요한은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요일 3:3). 마찬 가기로 바울은, 우리는 양자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고후 7:1) 말한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의 모범으로 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다는 말씀을 듣는다(벧전 2:21, 요15:10, 13:15 참조).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는 행동의 동기가 된다 : 행위는 종속적인 것이다

이 몇 개의 성경적인 증명은 단순히 맛을 본 데 불과하다. 만일 모든 관련 성구를 인용한다면 여러 권의 책을 편집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도의 글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모든 선한 일을 가르쳐주는 충고와 격려와 책망의 말이 가득하다(딤후 3:16-17 참조).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로를 말하는 일이 없다. 그들이 가장 강력한 충고를 할 때에 그 근거로 삼는 생각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고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의 서신 전체에 걸쳐 논한 다음에, 구체적인 권고를 하는 대목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권고한다(롬 12:1). 참으로 우리의 행실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마 5:16) 이 한 가지 이유가 있으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도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면 넉넉히 선을 행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1423)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공로를 역설함으로써 혹은 강제적으로 노예적인 율법 준수를 다소간 실현할는지 모르나, 우리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서1424) 우리에게는 선행을 권장할 근거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이런 율법 준수를 하나님이 친히 기뻐하시는 듯이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언명하시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하는 것을 금지하신다(고후 9:7).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정신을 각성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해서 자주 사용하는 충고 방법을 멸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롬 2:6-7, 마 16: 27, 고전 3:8, 14-15, 고후 5:10 기타).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충고라든지, 가장 중요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또 우리는 이 점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그러한 공로를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점은 후에 알게 될 것이다.1425) 끝으로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공로를 지지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하는 바이다. 의롭다함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잡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먼저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면 성화를 추구하기에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하는 것은(시 130:4) 우리의 이 교리를 아름답게 시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의 기초가 된다고 예언자는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출발점은 그의 자비를 신뢰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교황주의자들이 공로가 있는 일이라고1426) 하는 그 경외는"공로"란 말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경외는 죄의 용서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

우리가 죄를 값없이 용서받는 것이 의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들은 죄를 짓도록 선동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1427) 중상모략 중에서도 제일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는 죄의 용서가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으로 값을 치를 수 없고 따라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밖에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장 거룩한 피를 흘리셔서 많은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제외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대속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무도 추악해서 이 가장 순결한 피의 샘이 아니면 깨끗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듣는 편이 선행을 뿌림으로써 깨끗해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죄를 무서워하는 생각을 더 많이 일으킬 것이 아닌가? 또 다소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깨끗함을 얻은 후에 다시금 진흙탕에 뒹굴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샘의 순결을 흐리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말대로 믿는 사람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고 말한다(아 5:3).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죄의 용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어떤 사람들이 의의 존귀성을 더럽히는지 분명히 밝혀졌다. 그들은 배설물에 불과한(빌 3:8)1428) 그들의 무가치한 보속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 있는 체한다. 죄책은 너무도 무거워서 이런 가벼운 쓰레기로는 대속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너무도 중대한 범과여서 이런 무가치한 보속으로는 사면을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만이 사면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들은 의가 없어질 때에는 보속 행위로 회복되고 수리될 수 있다고 말한다.1429) 우리는 의는 너무도 귀한 것이어서 어떤 행위에 의한 보상도 충분히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밖에 없다. 죄의 용서와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다음 장에 속한다.1430)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율법에 관련된 행위 : 고넬료의 예. 1-5)

1. 스콜라 논법을 언급하고 논박함

이신칭의를 뒤집어엎으려고 하고 또는 약화시키려고 사탄이 그 앞잡이들을 통해서 사용하는 다른 논법들을 이제 추궁하겠다. 나는 이 중상모략 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논박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우리가 선행에 반대한다는 말을 못할 것이다.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든가, 선행이 선하지 않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후예들이 되어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복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또 다른 계략으로 우리를 공격하므로 우리는 반격을 계속하겠다. 우선 그들은 주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신 율법의 약속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 약속이 완전히 폐지되기를 원하는가 또는 완전히 유효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폐지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고 모순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추론한다.1431)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신 7:12-13),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왜하지 아니하면"(렘 7:5-7, 23) 내가 너희 중에서 다니리라. 이와 같은 구절을 천 개라도 들 수 있으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구절들은 뜻이 다르지 않고 내가 인용한 구절에 대한 해설로 그 뜻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율법에서는 복과 저주(신 11:26), 그리고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고 모세는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복이 무용, 무익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칭의가 믿음에만 의한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1432) 만일 우리가 율법을 붙잡고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복을 잃고 모든 범법자들에게 예정된(신 27:26 참조) 저주가 우리 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주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았고,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는 전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으며, 이 저주와 진노에서 해방되려면 율법의 권능에서 떠나서 이를테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풀려 자유를 얻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육적인 자유가 아니다. 육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우리를 율법 준수에서 이탈시키며, 모든 일에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선동하며, 자물쇠가 부서지고 고비가 풀어진 것같이 우리의 육욕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므로 울며 회개하는 양심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율법의 결박과 족쇄에서 그리고 그 저주와 정죄의 압박에서 양심이 해방된 것을 알려준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을 때에 우리는 이 자유를 얻는다. 말하자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석방된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은 믿음으로 얻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한 일은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게 하여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2. 우리는 행위를 통해 율법의 약속을 완성시킬 수 없다

이와 같이 율법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약속들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율법의 약속에는 율법을 지킨다는 조건이 붙어 있고, 율법을 지켜야만 약속도 성취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건은 결코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의의 일부를 우리의 행위에 맡기고 남은 부분을 자신의 사랑으로 보충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취된 의로서 그리스도만을 지정하신다. 사도는 그와 유대인들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고 말한 후에, 그 이유를 덧붙인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의에 도달하는 도움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것이다(갈 2:16). 신자들이 믿음에 의한 의가 율법과는 많이 다른 것을 알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의를 얻으려고 율법에서 믿음으로 옮겨가는 것이라면, 그들은 확실히 율법의 의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에게 내려질 보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도 좋으나 그와 동시에 잘 생각해야 할 사실이 있다. 즉, 우리는 너무도 패악하기 때문에 믿음에서 다른 의를 얻기까지는 율법에서 아무 유익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서 그의 종들을 위해서 마련하신 보상을 회상하고는 즉시 그 보상을 폐기하는 죄를 인정한다. 시편 19편 12절에서 그는 율법의 유익을 높이 찬양하나 곧 외친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와 완전히 일치하는 다른 구절에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시 25:12 참조) "여호와의 모든 길은‥‥인자와 진리로다"라고 한 후에(시 25:10) 그는 첨부한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 25:11). 이와 같이 율법에는 만일 행위의 공로로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비가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비는 결코 율법의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3.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을 통해서 실현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약속을 주셨으나 약속은 아무 결실도 없이 사라질 뿐인가? 바로 위에서 나는 이런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참으로 약속이 행위의 공로와 관련되는 동안은 아무 유익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만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폐기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겔 20:11 참조),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레 18:5) 잘 알려진 약속이 있으나, 사도는 이 약속에는 아무 중요성도 없다고 가르친다(롬 10:5, 갈 3:12 참조). 우리가 거기서 끝난다면 약속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가장 거룩한 종들도 많은 허물이 있고 율법을 완수하지 못하므로 약속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으로 대치될 때에 이 약속은 죄를 값없이 용서한다고 선포함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될 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판정하실 뿐 아니라 저 언약 아래서 율법 준수자들이 받기로 되어 있던 복을 우리의 행위에 주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율법에서 의와 거룩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치러주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보상에서 행위가 은혜를 얻는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종들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그들의 행위는 언제든지 칭찬보다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을 포용하시며, 행위와 관계없이 다만 믿음의 중재에 의해서 그들을 자기와 화해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의 가치를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그의 아버지 같은 너그러우심과 선하심으로 우리의 행위를 영광의 자리에 끌어올리시며 다소의 가치를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셋째 이유는 이 행위들은 모두 부패한 것이어서 덕이라기보다 죄라고 인정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점을 보시지 않고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궤변가들이 망상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행위에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한 고유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나 언약이 있기 때문이며1433)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행위를 높이 평가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자기들의 모든 어리석은 주장을 훌륭히 회피한 듯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공로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 행위가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행위는 우선 믿음만을 토대로 한 칭의와 죄의 용서가 선행되지 않으면 선행도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오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약속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신자들의 행위가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요,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들은 그 중에서 하나만을 보고 다른 둘은 가장 중요한 것은 보려고 하지 않았다.

4.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이중으로 용납을 받는다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 즉,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라는 말을 인용한다.1434) 아주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말을 근거로 하여 그들은 만일 사람이 똑바른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만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비가 죄인을 도와주시므로 행위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얻게 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이중으로 용납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경의 구절들을 서로 부합하도록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에서 그의 자비심을 일으키는 비참한 상태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에 하나님께 용납될 때에는 전혀 아무 선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각종 악이 속에 가득하고 또 그를 뒤덮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어떤 천품을 근거로 해서 그에게 하늘의 부르심을(히 3:1 참조)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공로에 대해 헛된 꿈을 꾸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저 주시는 자비를 분명히 나타내 보이신다. 그들은 고넬료에게 말한 천사의 말을 왜곡해서 그들의 사악한 태도를 폭로한다. 그들은 천사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다고 한 말을(행 10:31), 사람이 선행에 대한 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1435) 사실상 고넬료가 진정한 지혜,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진 것을 보면 이미 지혜의 영의 조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바울이 성령의 가장 확실한 열매라고 가르친 의를(갈 5: 5)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성령에 의해 성결케 되었다. 그에게 있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했으나 그는 이 일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 일들을 함으로써 은혜를 받을 만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유일한 이유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두면 완전히 멸망할 것을 아시고 그의 멸망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를 해방하시려고 자비를 베푸시는 데 있다. 참으로 성경에는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 교리를 반대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이제 우리는 어째서 이 용납이 사람의 의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가를 그리고 사람은 이 위대한 은혜를 받을 가치가 전연 없는 가련한 죄인이지만, 그런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베푸신다는 순수한 증거가 곧 이 용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5.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중생한 자의 선행을 기뻐하시는가

사람을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하신 주께서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사람을 자신의 자녀로 성별케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셔서 새로운 생명의 모습으로 만드셨으므로 이제는 그의 영의 선물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그를 포옹하신다(고후 5:17 참조). 이것이 베드로가 언급한 "받으신다"는 것이며(행 10:34, 벧전 1:17 참조), 신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후에 이 용납에 의해서 그 행위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벧전 2:5 참조). 이는 주께서 자신의 영으로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선한 일을 사랑으로 포옹하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위 때문에 신자들을 "받으시는" 것은 오직 자신이 그 행위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는 그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한층 더하는 의미로 그가 주신 행위까지도 "받으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주께서 그들을 귀히 쓸 그릇으로 택하시고(롬 9:21) 기꺼이 진정한 순결로 장식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선행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또 이런 행위에 붙어 있는 결함과 오점을 인자하신 아버지께서 용서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것같이 선하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요약하면, 그가 이 구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에 그들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신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1436) 중생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얼굴을 보실 때마다 당연히 그것을 사랑하시며 존중히 여기시므로 거룩과 의를 지향하는 신자들의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도 죽을 육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죄인이며 그들의 선행은 아직도 불완전하며 육의 죄악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에 대해서나 그 행위에 대해서나 그대로는 받으실 수 없고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포용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친절하시며 자비로우시다고 증거하는 구절들은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는‥‥‥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 7:9)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후세 사람들은 격언같이 사용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라고 엄숙하게 기도했고(왕상 8:23), 느헤미야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느 1:5).

진실로 주께서는 그의 모든 자비의 언약에서 그의 종들이 바르고 성결한 생활로 보답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주의 선하심을 조롱하는 자가 없도록 하시며 교만한 자가 마음속에 스스로 위로하여 악한 생각대로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다(신 29:19). 따라서 주께서는 언약으로 맺어진 자들이 항상 의무를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언약은 처음에 자유로운 합의로 성립한 것이었고 영구히 그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그의 손이 깨끗하기 때문에 상을 받았다고 언명하면서도(삼하 22:21, 시 18:20 참조) 내가 말한 근원을 가리키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다고 하였다(삼하 22:20). 거기서 다윗은 자기의 입장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지만, 모든 선물에 선행하며 그 원인이 되는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칭의를 행위에 연결시키는 구절들을 검토함. 6-15)

6. 옛 언약에 있는 은혜의 약속과 율법에 있는 약속은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런 표현들과 율법의 약속과는 다르다는 것을 겸해서 고찰하는 것이 유익하다. 내가 "율법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의 책들 여러 곳에 보이는 약속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중에는 복음적인 약속도 많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율법의 시행에 직결된 것을 나는 율법의 약속이라고 부르며, 이런 종류의 약속은(이름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위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할 때에(신 7:9, 왕상 8:23, 느 1:5 참조) 이 말씀은 성실한 마음으로 주와 언약을1437) 맺은 주의 종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며, 주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보여주는 방법은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를 내려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두려워하며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자비의 약속들은 당연히 이 목적, 즉, 우리가 그 유익을 주시는 분을 경외하며 공경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켜야 할 항구적인 의무를 지적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경외하기 위해서 그의 자녀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양자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항상 부르심을 받은 쪽을 향해서 노력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주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신자들의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생활로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실행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의 영의 지도를 받아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자녀의 정직한 휘장을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15편 1절에 교회 백성에 관해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은 것도 이에 관련시켜야 할 것이다. 그 대답은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시 24:4 참조). 마찬가지로 이사야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라고 했고(사 33:14), 그 대답은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등이다(사33:15). 여기에 묘사된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는 그 기초가 아니라,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자신과의 교제에 인도하시며 그 교제 안에서 보호하시며 강하게 하시는 방법이다. 아버지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의를 사랑하시므로 신자들을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영으로 자신과 연결된 그들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성도들에게 열어 주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설 영원한 자리를 마련하는 제일 원인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자비하신 주께서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고, 계속 보호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묻는다면, 우리는 다윗의 시에(시 15:2이하 참조) 묘사된 중생과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

7.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의로움"을 언급하지 않는가?

그러나 훨씬 더 어려운 듯한 구절들이 있다. 거기서는 선행에 "의"라는 아름다운 칭호가 붙었고, 사람은 그런 선행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대부분은 처음 유형에 관한 것인데 계명의 준수를 "칭의" 또는 "의"라고 부른다. 둘째 유형의 실례는 모세의 글에 있듯이 "우리가‥‥‥모든 명령을‥‥‥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는 말씀이다(신 6:25). 만일 이것은 율법적인 약속이고, 불가능한 조건이 붙어 있으므로 결국 무의미한 것이라고 항변한다면, 동일한 대답을 할 수 없는 다른 항변도 있다. 예컨대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네 의로움이 되리라"고 하였다(신 24:13). 예언자도 같은 일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치욕을 복수한 비느하스의 열성이 그에게 의로 정하여졌다고 한다(시 106:30-31).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기뻐 뛰는 이유가 여기 풍성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에 의한 의롭다함이 확립된 후에 행위에 의한 의롭다함이 폐지되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들은 여기에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서, 만일 행위로부터 의가 나온다면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율법의 교훈을 "의"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 그러하므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HUCIM"(후킴)을 희랍어의 "의"(righteousnesses)라고 번역한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일러둔다.1438)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는 나의 주장을 쾌히 양보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행할 의무가 있으므로, 완전히 복종한 후에도 여전히 "무익한 종"이다(눅 17:10).

그러나 주께서 율법에 의라는 영예를 주셨으므로, 우리는 주가 주신 것을 제거하지 않고, 율법에 대한 복종이 의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또 각 계명을 지키는 것을 의의 일부라고 인정한다. 다만 조건은 나머지 부분들에 의의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의는 아무 데도 없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포기하는 것은 율법의 의 자체에 결함이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육이 연약하여 우리에게서는 율법의 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의 명령들을 간단히 "의"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행위에도 이 말을 적용한다. 예를 들면, 스가랴와 그의 처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라고(눅 1:6) 할 때에, 그들의 행위를 행위 자체의 성격에 따라서 본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입장에서 평가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내가 지금 한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부주의하게 희랍어로 번역한 사람의 것을 근거로 하여 원칙을 세울 수 없다. 그러나 누가에게는 전해 받은 문서에 어떤 변경을 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눅 1:3) 나는 이 점을 논하지 않겠다. 이는 율법에 포함된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의라고 칭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 전체를 지키지 않으면 그 의에 도달하지 못하며, 율법을 범할 때마다 그 의를 깨뜨리게 된다. 율법은 의만을 명령하므로, 율법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에 있는 계명들은 그 하나하나가 의로운 행위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여러 가지 행위에서 범법자가 되었으므로, 한 가지 행위만 가지고는 의롭다는 칭찬을 받을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 한 가지 행위도 불완전하고 항상 어디엔가 결점이 있는 것이다.

8.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갖는 이중적 가치

그러나 이제 둘째 유형을 고찰할 터인데 여기는 특별히 곤란한 점이 있다. 바울이 믿음의 의를 증명하는 말로써, 아브라함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한 것보다(롬 4:3, 갈 3:6) 더 확고한 증명은 없다. 비느하스의 행위에 대해서도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했으므로(시 106:31) 믿음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보아서 우리는 행위에 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승리를 이미 얻은 듯이, 믿음이 없으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의를 완성하는 것은 행위라고 주장한다.1439) 여기서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간청한다. 만일 의에 대한 진정한 표준을 성경에서만 구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궤변을 늘어놓지 않고 성경의 여러 부분을 서로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하는 방법을 나와 함께 경건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숙고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의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신칭의가 피난처가 된다는 것을(롬 5장 참조) 바울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행위에 의한 의에서 제외된다고 담대하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똑같은 확신으로 바울은 아무도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는 반면에(롬 3:20 참조),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행위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과, 믿음에 따라 의가 확립된 후에 행위에 어떤 가치를 주느냐 하는 것과는 문제가 서로 다르다.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서 평가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하지 못하며, 사람은 자기의 어떤 행위를 믿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으므로, 행위의 도움이 일체 제거된 채로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칭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즉,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은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있게 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은 후에 따르는 선행은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하지 않고 다른 입장에서 평가된다. 행위에 있는 모든 결함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으로 덮이고, 모든 오점은 그리스도의 순결로 깨끗케 되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허물의 죄책이 도말되고, 선행까지도 항상 더럽히는 허물의 불완전이 묻혀 버린 후에는, 신자들이 행하는 선행은 의롭다고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의로 인정된다(롬 4:22).

9. 이신칭의는 행위에 의한 의의 기초가 된다

만일 누가 믿음에 의한 의를 부정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사람이 다른 행위에서는 범법자이면서도 한두 가지의 거룩한 행위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느냐고 문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물론 어리석다고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 범법하는 사람이 많은 선을 행한다고 해서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느냐고, 다시 묻고자 한다.

반대자는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의 모든 계명을 완전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율법이 크게 선포하기 때문이다(신 27:26). 다시 나는 불순하다거나 결함이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행위가 있는지 묻고자 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별들도 깨끗하지 못하며(욥 25:5), 천사들도 의롭지 못하다고 하였다(욥 4:18).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런 행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반대자는, 부수적인 범법으로나 자체의 부패로 인해서 더럽혀지지 않으므로 의롭다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감당할 수 있는 선행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순하며 불결하며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사랑은커녕 보아주실 가치조차 없는 행위라도 의로 인정된다는 확정적인 결론이 이신칭의에서 나온다면 무엇 때문에 반대자들은 행위에 의한 의를 자랑함으로써 이신칭의를 배척하려고 애쓰는가? 믿음에 의가 없다면 이런 행위의 의를 자랑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닌가?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을1440) 낳기를 원하는가? 불경건한 자들의 발언들은 이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그들은 이신칭의가 행위에 의한 의의 시초이며 기초이며 원인이며 증명해주는 것이며 본체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행도 의로 간주되므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문제의 진상을 말하는 것이 좋겠다. 만일 행위에 의한 의는 그 성격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인정되든지 간에 이신칭의에 의존한다면, 이신칭의는 이 관계로 인해서 약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더욱 강화되며, 그 힘은 더욱 강력하게 빛나게 된다. 또 우리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얻은 이후에 따르는 행위를 중시하더라도 그런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기능을 떠맡는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는 행위가 이 기능을 믿음과 나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신 칭의가 전적으로 유지되지 않으면 행위의 불결이 폭로될 것이다. 또한 사람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으므로 그 자신이 의로울 뿐만 아니라, 그의 행위까지도 자체의 가치 이상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10. 행위는 죄가 용서받을 때만 용납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반대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1441) 행위의 부분적인 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완전한 것같이 시인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인정하는 근거를 생각해 본다면 모든 곤란은 해결될 것이다. 용서를 받은 후에 하는 행위라야 용납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지 않으신다면 이 용서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무죄로 우리의 불의가 덮여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행위도 모든 허물이 그리스도의 순결로 묻혀 버리며 우리에게 책임이 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의롭고 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믿음으로만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이 행위의 의가 그 성격이 어떻든 간에 믿음과 값없이 얻은 칭의에 의존한다면, 또 후자에 의해서 실현된다면, 그것은 믿음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원인에 대한 결과와 같이 믿음에 종속시켜야 한다. 행위의 의에는 이신 칭의를 배척하거나 흐려지게 할 권리가 전연 없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복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고 우리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려고, 특히 다윗의 말을 역설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롬 4:7-8 참조). 어떤 자들은 행위에 복을 돌리는 듯한 무수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12:1),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시 1:1), "시험을 참는 자"(약 1:12), "공의를 지키는 자들"(시 106:3),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시 119:1), "심령이 가난한 자", "온유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마 5:3,5,7)들은 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바울이 말한 진리를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 칭찬 받을 성질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그 비참한 상태에서 해방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 불행한 상태로 있게 된다. 성경에서 격찬하는 모든 복도,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복을 받기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사람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복을 받은 후에는 다른 복들도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로 얻는 복은 최고의 또 가장 중요한 복일 뿐 아니라, 유일한 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만일 이것만을 근거로 삼은 다른 종류의 복이 이 복을 해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별문제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신자들에게 보통 적용되는 "의롭다"는 단어에 대해서 고심할 이유가 훨씬 적어졌다.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생활이 거룩하기 때문인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지로 의 자체를 실현한다기보다 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므로, 그들의 의는 이신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신칭의가 그 근본이기 때문이다.

11. 야고보는 바울에 반대하는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진실하게 반대하는 야고보가 여전히 문제라고 말한다.1442) 야고보는 아브라함까지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하며(약 2:21), 우리도 모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한다(약 2:24).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그들은 바울을 야고보와 싸우게 만드는 것인가? 그들이 야고보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과 모순되지 않도록 야고보의 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바울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고 언급하신다(롬 4:3, 갈 3:6). 우리도 율법의 행위와는 별도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동일한 성령이 야고보를 통해서는 아브라함과 우리의 믿음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위로 성립된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가 당착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이 구절들은 어떻게 서로 조화되는가?

우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최대한으로 뿌리 깊게 수립하려는 것을 믿음에 의한 의를 송두리째 뽑아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에 평화를 주는 문제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즉, 그들은 이신칭의를 비방하기는 하지만 양심이 의지하는 의의 표준은 세우지 않는다. 의에 대한 모든 확신을 제거하는 것밖에 그들의 자랑이 없다면, 그들이 소원대로 승리를 거두게 하라. 또 그들이 진리의 빛을 꺼버리고 거짓의 흑암을 퍼뜨리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들은 그 비참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굳게 서 있는 곳에서는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야고보의 말을 가지고 아킬레스(Achilles)의 방패1443) 같이 끈덕지게 우리를 위협하지만, 그 말은 그들을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의 의도를 살펴보고, 다음에 그들의 망상에 대해 언급하겠다.

그 당시에는 또 이것은 교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화이기도 하지만 신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전연 소홀히 하면서도 거짓으로 믿는다고 자랑함으로써 그 불신앙을 노골적으로 폭로하는 사람이 많았다. 야고보는 여기서 이런 사람들의 어리석은 확신을 조롱한다. 그러므로 그의 의도는 진정한 믿음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 경박한 사람들이 내용 없는 믿음의 모양만을 자랑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며, 방탕한 생활에 자신들을 내맡기고도 태연한 그 어리석음을 폭로하려는 것이었다.

이 배경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반대자들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를 곧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중의 오류, 즉, 첫째로는 "믿음"이란 말에서, 둘째로는 "의롭다함"이란 말에서 오류에 빠졌다.

진정한 믿음과는 거리가 먼 허망한 견해를 사도가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양보이며 그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그는 맨 처음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는 말로 밝힌다(약 2:14) 그는 "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졌으면"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있노라 하고"라고 한다. 좀더 내려가서 그런 믿음은 귀신들이 가진 지식보다도 못하다고 조롱할 때에(약 2:19) 그의 뜻을 더욱 명백하게 나타낸다. 그리고 끝으로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20). 이런 정의를 보면 그가 말하려는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라고 그는 말한다(약 2:19). 만일 이 믿음이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뿐이라면, 이런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런 믿음을 제거한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에서 무엇이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격이 아주 다른 것이다. 진정한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다만 우리를 그리스도께 결합시킬 때뿐이며, 그와 하나가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진정한 믿음이 의롭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12. "의롭다함"이란 말을 야고보는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였다

둘째 허위까지 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문제를 끝내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일부분을 행위에 둔다고 한다.1444) 야고보와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또 야고보 자신을 조화시키려면 "의롭다함"이라는 말을 바울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의 불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되고 우리가 의로운 자로 인정될 때에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야고보도 이런 견해를 가졌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운운하는 모세의 말을(창 15:6, 약2:23) 인용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 말을 인용한 전후 관계를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하셨을 때 자기의 아들을 제단에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위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는 것이다(약 2:21).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약 2:23). 만일 결과가 그 원인보다 먼저 있다는 것이 불합리하다면, 모세가 여기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의로 인정되었다고 하는 증언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삭을 제단에 드림으로써 나타난 복종에 의해서 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이삭이 났을 때에 이스마엘은 이미 소년이었고, 그 이스마엘이 잉태되기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여러 해 후에 보인 복종에 의해서 의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야고보는 사건의 순서를 잘못 거꾸로 만들었든지 이것은 상상하는 것조차 부당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야고보에게는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만한 것처럼 이때에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려는 의도는 없었든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확실히 야고보는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의를 공표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진정한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명한다. 공상적이고 속이 빈 믿음의 가면만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는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의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곤란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설명하는 줄로 생각하는데, 이 점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망상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체하며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한 확신을 분쇄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야고보의 말을 왜곡하든 간에, 야고보의 말은 두 가지 개념을 표현할 뿐이다. 즉, 내용이 없이 겉으로만 믿는 체하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 신자는 이런 외형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으로써 자기의 의를 공표한다는 것이다.

13. 로마서 2장 13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하는 바울의 말을(롬 2:13) 인용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그들은 거의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암브로시우스의 해결 방법을 통하여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의 이행이 곧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한다.1445) 나는 이 생각은 단순한 회피에 불과하며 길이 열려 있으므로 전연 불필요하다고 본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미련한 확신을 공격하는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경멸하면서도 자기들만 율법을 아노라고 주장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아는 것만으로 너무 기뻐하지 말라는 뜻으로, 율법에서 의를 구하는 사람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구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준수하도록 노력하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물론 율법의 의가 행위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행위의 가치와 공로에 의가 있다는 것조차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완수한 사람을 하나라도 내놓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직 증명이 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한 뜻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은 전후 관계가 충분히 증명한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모두 불의하다고 정죄한 다음, 그는 더 자세히 논한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이것은 이방인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이것은 유대인에 관한 말이다(롬 2:12).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결점은 못본 체하고 율법만을 자랑했기 때문에 바울이 여기에서 특히 적절한 말을 첨부하였다. 율법을 정한 목적은 그 소리를 듣기만 하면 사람들이 의롭게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한다면, 그리고 그런 때에 한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대들은 율법에서 의를 찾는가? 율법을 들었노라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별로 중요성이 없다. 행위를 보이라. 그대들을 위해서 율법을 정한 것이 무익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공언할 수 있을 만한 행위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행위가 없었으므로 율법을 자랑할 권리도 전연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반대 논법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즉, 율법의 의는 완전한 행위에 있다.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실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율법에서 오는 의는 없다는 것이다.

14.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이 자기의 행위에 호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판단으로 검토되도록 신자들이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 대담하게 제시하며, 그것을 근거로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는 구절들이 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런 구절들을 인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운다. 예를 들면,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시 7:8),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시 17:1),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흠을 찾지 못하셨으니"(시 17:3),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시 18:20,21,23), 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시 26:1),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 26:4), 또,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시 26:9),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시 26:10-11) 등이다.

나는 위에서1446) 성도들이 행위에서 얻는 듯한 확신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 인용한 증거들을 그 전후 관계에(perijstasin, complexum) 따라서 또는 보통 말하듯이 경우에 따라서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후 관계는 이중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을 완전히 조사해서 생활 전체의 성격에 따라 정죄 또는 무죄 언도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특수 문제에 대한 판정을 원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서 자기들의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악한 자들과 비교해서 그들의 의를 주장한다.

우선, 어떤 사람을 의롭다 하는 것이 문제인 때에는, 어떤 특수한 일에서 그의 입장이 올바를 뿐 아니라, 그의 전생애를 통해서 일종의 의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을 인정해 달라고 하나님의 판단에 호소하면서도, 자기가 모든 점에서 죄가 없고 허물이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에만 구원에 대한 확신을 두지만, 하나님이 불공평한 박해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복구하시는 것을 믿고 결백한 사람들이 압박을 받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제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반대자들을 부르면서도, 그들은 엄격한 검토에서 하나님 자신의 순결에 해당할 만한결백이 자기에게 있다고는 자랑하지 않는다. 다만 반대자들의 악의와 부정직과 간계와 사악에 비교할 때에, 자기가 성실하며 정직하며 단순하며 순결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기뻐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기와 원수 사이를 심판해주시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라고 말했을 때에(삼상 26:33),그는 여호와께서 각 사람을 그 공로에 따라 검토하시고 상벌을 가하시라고 한 것이 아니라, 사울의 악한 것과 비교해서 자기가 얼마나 결백한가를 하나님께 언명한 것이다. 바울도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한 것을 자랑하며 이 일에 대해서 양심의 증거가 있다고 할 때에(고후 1:12, 행 23:1 참조),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자랑을 의지하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의 중상에 못 이겨 악인들의 악평에 대항해서 자기의 성실과 정직을 변호하며, 자기의 입장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임을 믿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지만, 이것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고전 4:4).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흐린 시력을 훨씬 초월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의 위선에 비교해서, 하나님을 증인과 심판자로 모시고 자기의 결백을 변호하지만, 하나님만을 상대로 할 때에는 이구동성으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라고 부르짖는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불신하고 기꺼이 노래한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15. 신자들은 완전한가?

위에 인용한 구절들과 같은 다른 구절들도 있으므로, 그것을 기초로 자기의 주장을 세울 수도 있겠다. 솔로몬은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한다(잠 20:7). 마찬가지로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에스겔도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라고 한다(겔 18:9,21, 33:15 참조).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부정하거나 애매모호하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 나올 사람이 없으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난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서는 완전한 생활이 비록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일지라도 영생을 향해서 일보 전진하는 것임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근원이 무엇인가? 주께서 은혜의 언약으로 받아들이신 사람들에 대해서, 그 행위의공과를 검토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안아 주시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스콜라 학자들이, 행위는 "받아 주시는 은혜"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것을 이런 뜻으로 해석한다. 율법의 언약에 따라서 판단한다면 행위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받아 주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가치로 승격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1447) 그러나 신자의 행위는 자체의 오점과 다른 범행으로 더럽혀 지기 때문에 주께서 이 두 가지를 다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즉, 사람에게 값없이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또 여기서 사도가 신자들의 완전성을 원하므로 신자들이 주의 날에(고전 1:8, 살전 3:13, 5:23 참조)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골 1:22, 엡 1:4 참조) 그의 기도는 우리에게 시기적절한 충격을 준다. 과거에 콜레스티우스(Coelestius)의 추종자들은 현세에서의 의의 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도의 이 말씀들을 힘차게 역설했다.1448)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을 따라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점을 간단히 대답하겠다. 신자는 모두 이 목표를 향해서 노력하며,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날, 흠이나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골 1:22 참조). 그러나 현세에서는 가장 훌륭한 계획도 진보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고 주와 완전히 결합될 때뿐이다.1449) 그러나 나는 성도들에게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는 "우리가 성도들의 덕을 완전하다고 할 때에, 이 완전성에는 성실하고 겸손하게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1450)고 하였다.

제 18 장  행위의 의를 보상이란 말에서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상을 말하는 구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1-4)

1. "행위에 따른 보상"의 뜻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마 16:27)1451) 하는 말씀들을 생각하겠다. 같은 종류의 구절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 2:9,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마 25:34-35).

여기에 첨가할 것은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수라고 하는 발언들이다. 이런 종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 손의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잠 12:14, 사 3:11의 융합),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 13:1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2),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23),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오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롬 2:6)하는 말씀은 설명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이 표현이 원인보다 일의 순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완성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만이 자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는, 정하신 순서에 따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것을 얻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행위에 따라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빌 2:12)한 말은 적절하며 그 때문에 그들은 선행에 몸을 바치는 동시에 영생을 명상한다. 이 말씀과 같은 다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신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명령이 있다(요 6:27 참조). 그러나 곧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는 말씀이 첨가된다(요 6:27). 이것을 보면 "일한다"는 말은 은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의 장본인이라든지, 구원은 그들의 행위에서 유래한다든지 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신자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주 예수님의 날까지 그것을 또한 완성하실 것이다(빌 1:6).그러나 이 일이 완성되는 것은 그들이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늘 아버지와 같이 되며 참으로 자녀답게 되는 때이다.

2. 보상은 "기업"이다

"보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첫째로 우리는 천국이 종이 받는 삯이 아니고 자녀들이 받는 기업이라는(엡 1:18) 것을 진실되게 믿어야 한다.

주께서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만이 이 기업을 향유할 수 있으며(갈 4:7 참조), 그렇게 되는 데는 양자로 삼으신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엡 1:5-6 참조).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하시는 구절에서도, 그것을 명백하게 "기업"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것이 다른 원천에서 온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행위를 열거하시고 그것을 실행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으로 갚으시며, 하늘을 차지하라고 부르신다(마 25:35-37).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상속권에 의해서 차지해야 한다고 첨부하신다(마 25:34). 바울은 노예들에게 충실히 자기의 의무를 다하면서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을 대망하라고 명령하지만 그 보상을 "유업의 상"이라고 한다(골 3:24). 이런 구절들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규정된 용어로써 영원한 복락을 행위의 결과로 기인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신 데 돌려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행위를 동시에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 있는 예를 하나만 들면 이 문제는 밝혀진다. 이삭이 나기 전에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 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의 자손은 번성해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으리라고 했다(창 15:5, 17:1이하, 18:18 참조). 여러 해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명령을 받은 대로 아들을 제단에 바칠 채비를 했다(창 22:3). 이렇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이 약속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창 22:16-18). 우리가 여기서 듣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았는가? 그 명령을 받기 전에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지 않았는가? 신자들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고려되기 전에 주께서 주신 그 은혜, 즉, 하나님 자신의 자비 이외에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이유가 없는 때에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셨다고 우리가 여기서 밝히는 점에는 애매모호한 데가 조금도 없다.

3. 은혜로서의 보상

그러나 행위가 있기 전에 값없이 주신 것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속이거나 희롱하시는 것이 아니다. 약속하신 것들을 주실 것 혹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명상하고, 우리에게 제시된 복된 소망을 하늘에서 얻으려고 행위를 통해서 노력하도록, 주께서는 선행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약속의 열매가 성숙하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가는 우리의 행위에 그 결실의 공을 돌리는 것은 마땅하다. 사도는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사랑의 의무를 열심히 이행했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소망 때문이었으며 그 소망은 복음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두 가지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골 1:4-5). 그들이 복음에서 그들의 소망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그 소망을 지탱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뿐이라고 언급한다. 베드로의 발언도 이와 일치하여 경건한 사람들은 "때"가 오면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하였다(벧전 1:5). 바울은 그들이 이 때문에 수고한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일평생 달음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을 전한다.

주께서는 그가 약속하시는 보상을 우리가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자신을 집주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그들을 포도원에 보내서 일을 시킨다. 제 일시(오전 7시)에도 보내고, 제 이시, 제 삼시(오전 9시)에도 보내고, 심지어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보낸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을 때 모두에게 같은 삯을 준다(마 20:1이하). 이방인들을 부르심이라는 고대 저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쓴 것이라고 하나, 저자가 누구였든 간에, 그는 이 비유를 간단하고도 바르게 해석했으므로 나 자신의 말보다 그의 말을 사용하겠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그의 은혜는 하나뿐이지만, 부르심은 각양각색임을 밝혀 보이신다‥‥‥제 십일시에 포도원에 갔어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게 된 사람들은 분명히‥‥‥날이 저물 때에, 즉, 일생이 끝날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한다. 주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은혜의 탁월성을 나타내려고 하신다.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별도로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 많이 수고했으나 늦게 온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 처사를 보고 자기들이 받는 것은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1452)

끝으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다. 즉,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인애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포용하실 때 이루어지는 복된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신 복을 소유하는 것 또는 그것을 소위 "즐기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내세에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고(막 10:30) 또 다른 곳에서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5:34)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이 있을 때에 양자되는 일이 나타날 것을 "양자 됨"이라고 부르고(롬 8:18이하), 그 후에 그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해석한다(롬 8:23).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영원한 사망1453)인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받아들여져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이 일은 다만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행위에 대한 보상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라고 하는(벧전 1:9) 베드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질 수 있다.

4. 보상의 약속이 지니고 있는 목적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당연하게 보상을 받을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을 이유가 전연 없다. 오히려 반대로 성결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대에서 힘을 얻으며 이런 위로로 생기를 얻지 못한다면 즉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 약한 우리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도움을 얻는다.

우선 우리는 각각 자기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즉, 모든 신자에게 초보로 가르치는 첫 단계이다. 그 다음에 십자가의 훈련으로 일평생 그들을 연단시키시며, 그들이 현세의 유익을 바라거나 의지하지 않게 하신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절망에 부닥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한다(고전 15:19). 주께서는 큰 고난 가운데도 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머리를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라고 경고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으라고 하신다.

주께서는 이 복을 "상", "보수" 또는 "보상"이라고 부르신다(마 5:12, 6:1이하, 기타 참조).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불행과 고난과 중상과 그 밖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선례를 따라(고후 6:13,히 10:35, 11:26 참조) 영생을 일종의 "보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생에서 자신의 백성을 노고로부터 안식으로, 박해로부터 번영하며 즐거운 상태로,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 빈곤으로부터 부요로,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당한 모든 재앙을 변화시켜 더욱 큰 복으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은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성결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롬 8:30).

다만 우리는 공로와 보상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궤변가들은 우리가 밝힌 목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관련성을 고집한다.1454)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은 다소의 위로로 육의 약함을 도우시려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허영으로 교만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보상에서 행위의 공로를 결론짓거나, 행위와 보상을 서로 비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론들에 대한 답변. 5-10)

5.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할 때(딤후 4:8),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대답한다.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의로우신 재판장은 면류관을 상으로 주셨을까?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라고 하는 은혜가 앞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당연히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 미리 부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당연히 받을 상으로서 주어질 것인가?"1455) 또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인다. 주의 자비가 우리의 행위에 있는 모든 불의를 덮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는 우리의 행위에 의를 전가하실 수 있겠는가? 그의 무한하신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행위에서 벌을 받아야 할 점을 삭제해 버리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늘 영생을 은혜라고 부른다. 영생이 행위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교만을 더욱 키우는 동시에 우리의 용기를 돋운다. 그 외에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므로,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동시에, 이들 행위가 추악한 찌꺼기로 더럽혀져 있어서 주의 심판의 표준대로 평가한다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는 다만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가르친다.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하는 말은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에게 보낸 세 번째 책에서 하는 말을 보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두 사람을 비교한다. 한 사람은 경탄하리 만큼 거룩하며 완전한 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은 정직하게 살며 건전한 생활 습관을 가졌지만, 아직도 불완전한 점이 많다.

끝에 가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둘째 사람은 물론 도덕 생활에서 처음 사람보다 못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다. 그는 그 믿음에 따라 살면서,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자신을 책하며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치욕은 자기에게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선행에 대한 사랑을 받는다. 이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가 이린 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행위가 없으면 믿음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지만, 그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기 때문에(갈 5:6 참조) 버림받은 믿음이 아니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합 2: 4) 그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도 받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면 선행같이 보이는 것도 죄로 변하기 때문이다."1456) 확실히 그는 여기서 우리가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 즉, 선행의 의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승인 하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6.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

다음에 있는 구절들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뜻이 비슷하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며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1457) 여기서 선행은 우리가 복된 영생에서 열락할 재물에 비교되고 있다. 나는 성령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대답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마 5:21)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 사람들이 현세에서 즐길 물건들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현세의 생명은 곧 꿈같이 사라질 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참으로 누리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곳으로, 즉,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거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미리 보내고, 일시 불편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데 그것은 오래 살 곳으로 재산을 많이 보낼수록 더 기쁘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늘이 고국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재산을 여기에 두었다가 갑자기 옮겨지게 되어 손해를 보는 것보다 그리로 미리 이전해 놓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전할 것인가? 그 방법은 확실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는 모두 자신에게 준 것으로 간주하신다(마 25:40 참조). 여기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잠 19:17)라는 유명한 약속이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바치는 것은 모두 주의 손에 저축되기 때문이다. 성실한 보관인이신 주께서는 때가 오면 많은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의무는 우리를 위해 주의 손에 감추어 두는 재산이라고 하리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이 일은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또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므로 누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에서부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쪽으로 비약하고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오류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 증거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증거들에서 올바르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돌아보실 가치도 없는 우리의 봉사가 그 어느 하나라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7.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

그들은 사도의 말을 빌려 우리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그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이런 환난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보낸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살후 1:5).

진정으로 사도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하늘로부터‥‥‥나타나실 때에"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살후 1:6-7) 말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1458)고 말한다.

첫째 구절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기서는 공로의 가치를 의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로 택하신 우리를 맏아들인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시고자 하시기 때문에(롬 8:29), 그리스도께서 우선 고난을 당하신 후에 드디어 예정된 영광에 들어가신 것과 같이(눅 24:26),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행 14: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환난을 받을 때,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보통 그의 양들에게 찍으시는 표를 우리에게도 찍으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인정된다. 그것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갈 6:17) 가지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의 발언들을 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그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진다(고후 4:10) 우리는 그가 고난을 받으신 그 모양대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빌 3:10-11).

바울이 첨가하는 이유도,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 뜻을 바꿔 말한다면, "여러분을 괴롭힌 원수들에게 그 괴롭힌 데 대한 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일치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수고를 그치고 쉬며 평화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과 일치합니다"라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히 6:10)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봉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 것은 그의 공의에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치며, 만일 잊으신다면 그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가 되리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게으른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감당한 수고는 헛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는 뜻이다. 이 약속도 다른 모든 약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자비의 언약이 선행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 못 하리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의 언약만이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근거 위에 서서, 우리의 봉사가 아무리 무가치할지라도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주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이 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하지 않으시며 한번 하신 약속은 지키시리라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은 당연히 줄 것을 준다는 공정성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실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한 말은 유명하다. 이 거룩한 분이 그 말을 기억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 자주 반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 말을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새겨두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인용하겠다. "신실하신 주께서는 스스로 우리의 채무자가 되셨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1459)

8. 사랑에 의한 칭의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들을 인용한다. "내가‥‥‥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삼아 이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믿음보다 사랑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며, 물론 사랑의 힘은 더 크다고 한다.1460) 그러나 이 궤변도 아무런 문제없이 반박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처음 구절에 있는 말은 진정한 믿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1461) 둘째 구절도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바울이 사랑을 믿음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사랑에 더 많은 공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비효과적이며, 영향력이 많으며, 더 많이 봉사하며, 영원히 찬성하지만, 믿음은 얼마 동안만 유용하기 때문이다(고전 13:2이하 참조). 만일 우열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첫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바울의 발언과는 관계가 없다. 참으로 그가 역설하는 점은,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는 한 가지뿐이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사랑이 믿음보다 더 크다고 가정한다면, 건전한 판단력을 아니, 완전히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가 이 가정을 근거로 사랑이 더 많이 의롭다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믿음에 있는 의롭다하는 힘은 행위의 가치에 있지 않다.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한다. 이러한 칭의를 믿음이 붙잡을 때에, 믿음이 의롭다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반대자들에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의롭게 한다고 주장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사랑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선하신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그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의 논법은 훌륭하게 전개된다. 우리가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은 한 도구에 불과 하다. 이 도구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얻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며, 의의 전체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사랑이 믿음보다 나으므로 우리는 사랑의 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왕은 구두 직공보다 무한히 훌륭하기 때문에 구두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법이다. 이 한 가지 삼단 논법만으로도 소르본느 학파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만일 어떤 궤변가가 여기에 뛰어들어,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란 말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단히 훌륭하고도 든든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열거하는 은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관련되기 때문에, 요약하는 의미에서1462) 그것을 모두 "믿음"과 "소망"에 포함시킨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해석하는 재능, 그리고 지식은 모두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현세에서 우리는 다만 소망과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과 소망을 말할 때에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13상반절), 즉, 은사의 종류는 아무리 많을지라도 모두 이 셋에 연결되는 것인데"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하반절).

셋째 구절에서 그들은 만일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면(골 3:14), 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므로, 사랑은 의의 띠일 것이라고1463) 추론한다. 우선 바울이 완전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르게 조직된 교회가 서로 잘 단결된 때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묻지 않겠다. 또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이런 추론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가? 나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들을 모두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이 완전성을 얻지 못하리라고 언제든지 그들을 반대하는 대답을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는 사람은 모두 사랑을 이루는 경지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완전성을 실현할 희망도 전연 없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9. 마태복음 19장 17절

미련한 현대 소르본느 학파는 아무 근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성경 구절들을 들어서 우리에게 던진다. 나는 그것을 일일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하는 어떤 말은 너무도 엉뚱하여 나는 그것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내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끝내기 전에, 먼저 그들이 매우 좋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하겠다.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신다(마 19:17).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고 은혜의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그들은 묻는다.1464)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시고 그 사람들에게 알맞도록 대답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모르는 생각이다. 여기서는 율법사가 주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묻는 사람의 인품과 질문 자체가 이와 같은 주의대답을 유발시킨다. 율법의 의를 굳게 믿는 습성이 몸에 밴 율법사는 행위에 대한 확신 때문에 눈이 어두웠다. 그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의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의의 완전한 거울이 있는 율법으로 그를 돌려보내시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우리도 행위에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똑똑히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교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생명의 길을 떠나 사망의 구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겠는가? 우선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생명의 길에서 벗어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율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립되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들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식별할 수 있어야만, 구원을 회복하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피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약하면, 우리가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계명에 의해서 완전한 의를 배운다. 그러나 도중에서 실패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아무도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율법에 의한 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다른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께서는 율법사가 행위에 대한 허망한 자신감을 가지고 교만한 것을 마시고, 그가 영원한 사망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자각하도록, 그에게 율법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와 같이,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겸손하게 된 사람들에게 율법은 전연 말씀하시지 않고 은혜의 약속으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10.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성경을 잘못 이용하려고 하다가 지쳐버린 그들은 드디어 교묘한 궤변을 말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믿음을 "일"이라고(요 6:29) 한 사실에 관해서 그들은 트집을 잡는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은 우리가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추론한다.1465) 그들은 마치 믿음이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렇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며, 이것은 복음선포서인 우리에게 제시되는 자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들여 이 어리석은 말들을 분쇄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용서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은 외부의 압력이 없더라도, 그 자체의 약점에 의해서 충분히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반론은 참된 듯해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힐 수 있으므로, 말이 나온 김에 이것을 처리하려 한다. 서로 반대되는 것에는 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것이 상식이며, 죄는 그 하나하나가 우리의 불의로 인정되는 것이므로, 선행에 대해서도 그 하나하나를 의로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사람이 정죄를 받는 것은 원래 불신앙에만 기인하는 것이고, 개개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지만,1466) 나는 이에 만족할 수 없다. 불신앙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물론 그들과 생각을 같이한다. 불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헛걸음이고, 그 후에 개개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와 불의를 잴 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똑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듯해서, 이 점에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행위에 의한 의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테면 이 직선을 일평생 어김없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될 수 없다. 이 직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불의에 빠진다. 이것을 보면 의는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복종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싫증나는 일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의를 판정하는 척도는 아주 다르다. 음행하는 자나 도적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거스린 자이므로 한 가지의 범행으로도 죽음에 해당한다. 이들 궤변가들은 야고보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약 2:10- 11)이라고 한 말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각 개의 죄에 대해서 공정한 벌이 죽음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죄는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공정한 진노와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 즉, 많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경우에도 선한 행위 하나를 하면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이론가라고 하겠다.

제 19 장  기독교인의 자유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교리는 필요하며, 이 자유에 포함된 세 부중에 서 첫 부분은 갈라디아서 1-3장에 있다. 1-3)

1. 자유에 대한 기독교인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자의 자유를 말해야 하겠다. 복음의 가르침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은 이 제목에 대한 설명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이것을 모르고는 양심은 거의 아무 일도 확신 있게 행할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일에 머뭇거리고 위축되며 항상 불안과 동요를 느낀다. 자유는 특히 칭의에 따르는 것이 그 칭의의 힘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참으로 하나님을 신중하게 경외하는 사람은 이 교리에서 오는 비길 데 없는 유익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불경건하고 루키아노스(Lukianos)적인 인간들1467), 즉, 비꼬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 교리를 교묘한 말로 희롱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취한 자들이어서, 어떤 파렴치한 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여기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적합하겠다. 앞에서 몇 번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일이 있으나,1468) 자세한 논의는 지금까지 미룬 것이 유익했다.

그 이유는 이 방자한 인간들에게 제때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자마자 정욕이 끌어 오르거나 큰 소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버려두면 가장 선한 일까지도 가장 사악하게 더럽힌다. 어떤 자는 이 자유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께 대한 일체의 복종을 버리고 거리낌 없는 방탕 생활에 뛰어든다. 또 어떤 자는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모든 절제와 질서와 분별을 폐기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혼란 중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독교적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이런 위험 사태의 원인을 일소할 것인가?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나 복음의 진리나 영혼의 내적 평화를 모두 바르게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교리의 이 중요한 부분이 삭제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동시에, 보통 제기되는 어리석은 항의에 대처하는 것이다.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는 세 부분이1469)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성도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는 데 있어서 율법에 의한 의를 일체 잊어버리고 율법을 뛰어넘어 더욱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으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칭의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버리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즉, 행위를 전혀 계산하지 않아야 한다. 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소한 행위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행위의 분량이나 한도를 측정할 수 없고, 율법 전체에 대한 채무자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논의할 때에, 율법을 일체 언급하지 않으며, 행위에 대한 생각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의롭게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무가치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양심에 확신을 얻고 싶으면 율법을 일체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서 율법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하다고 추론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1470) 그것은 율법이 비록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신자들의 양심에 관계할 수 없을지라도, 신자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며 충고하며 권고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매우 다르므로, 우리는 바르게 또 양심적으로 구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 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살전 4:7, 엡 1:4, 살전 4:3 참조). 이때에 신자들에게 의무를 알려 주며 거룩과 결백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것은 율법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갈 때에 무엇이라고 대답하며 어떤 확신으로 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양심이 고민할 때에는,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한 완전성이 전연 미칠 수 없는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서 제시해야 한다.

3. 갈라디아서에 있는 주장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논증은 거의 전부가 이 점을 증빙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의식에서 해방되는 자유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해석가들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들이 이 점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1-4). 이 구절들에는 확실히 의식에서 벗어나는 자유보다 더 고상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나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의식을 논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그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폐지된 율법의 옛 그림자를 다시 그리스도의 교회에 끌어들이려고 애쓰는 거짓 사도들과 논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 전체의 근본이 되는 고차원적인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저 유대교적인 그림자가 복음의 명료성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에, 그는 모세의 의식에서 예시된 일들이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나타났다는 것을 밝힌다. 그 다음에, 이 순종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는 극히 사악한 관념을 저 사기꾼들이 일반 신도들에게 불어넣었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강경한 태도로, 신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더욱이 저 무가치하고 유치한 것들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율법의 정죄에서 풀려났다는 것과(갈 4:5),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문제는 당연히 우리가 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신자들의 양심은 자유를 얻었다고 다짐하여, 그들이 불필요한1471) 일에 의무를 느끼지 않도록 한다.

(둘째는, 율법의 강요를 받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는 양심의 자유이다. 4-6)

4. 율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신자들은 진실로 순종을 확립한다

첫째에 의존하는 둘째 부분은, 양심이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멍에를 벗은 양심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1472) 율법의 지배 하에서는 양심은 항상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우선 이런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꺼이 순종할 생각을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이 뜻을 곧 분명하게 깨닫기 위해서 예를 들겠다.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신 6:5) 이 일을 실행하려면, 먼저 우리의 영혼에서 모든 다른 감정과 생각을 없애버리며,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욕망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우리의 힘을 이 한 점에 집중시켜야 한다. 주의 길에서 모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전진한 사람도 이 목표로부터는 아직 멀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지한 애정으로 깊이 사랑하지만 그들의 마음과 영혼의 많은 부분에는 육적인 욕망이 차 있어서 그들을 끌어당기며, 하나님을 향한 급속한 전진을 방해한다. 그들이 분투노력하는 것은 사실이나, 육이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며 그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완수하는 것같이 어려운 일이 없다고 느끼는 그들은 어떻게 해야 옳은가? 그들은 의욕과 열망이 있으며 노력도 하지만, 어떤 일에서도 요구되는 완전성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을 해보아도 또 하려고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뿐이다. 만일 누가 생각하기를, 그의 행위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에 있는 선한 점을 받아주시리라고 한다면,1473) 이런 결론은 그를 속일 뿐이요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다. 율법의 준엄성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은 모든 불완전을 정죄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선하다는 판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율법에 대한 위반이란 것을 깨달을 것이다.

5. 구속에서 해방됨으로써 우리는 기꺼이 순종할 수 있게 된다

율법의 표준으로 측정한다면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율법의 저주 하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저주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일올 하기 위해서 가련한 영혼들은 어떻게 진지하게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율법의 이 엄격한 요구에서 아니, 율법의 전체적인 준엄성에서 해방되며, 아버지같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면, 그들은 쾌활하게 또 열렬하게 응답하며 하나님의 지도를 따를 것이다. 요약하면, 율법의 멍에를 짊어진 사람들은 주인으로부터 매일 일정한 일을 하도록 명령을 받는 종과 같다. 종들은 명령받은 일을 정확하게 완수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주인 앞에 감히 나가지 못한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너그럽고 솔직한 대우를 받는 아들들은 불완전하고 흠이 있는 일까지도 아버지 앞에 내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원하신 대로 일을 완수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순종한 행위와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시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봉사가 아무리 사소하며 졸렬하고 불완전 할 지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도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일을 확약하신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말 3:17). 여기에서 "섬긴다"는 말이 사용되는 한편, "아낀다"는 말은 분명히 "관대하다, 또는 인자하게 허물을 묵인한다"는1474)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우리에게는 이 확약이 절실히 필요하며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애쓰는 일은 모두 무익한 것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므로 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이 그에게 대한 공경을 표시한다고 인정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대해서불경이 되는지 또는 공경하는 것이 되는지를 모르고 의심하며 두려워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공경하면서 행동할 수 있겠는가?

6. 은혜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은 신자들은 남은 죄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또 히브리서 기자가 거룩한 조상들이 행했다고 기록한 모든 선행을 믿음에 돌리며, 믿음만으로 그 행위들을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히11:2이하, 11:17 기타). 로마서에는 이 자유에 대해서 유명한 구절이 있다. 바울은 거기에서,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롬 6:14),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롬 6:12,14). 그는 그 앞에서 신자들에게 그들의 "죽을 몸에" 대해서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하며(롬 6:12),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충고했다(롬 6:13). 그러나 신자들은 자기들이 아직도 정욕이 가득한 육체를 지니고 있으며, 죄가 자기들 안에 살고 있다고 항의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된 이 자유의 위안을 첨가한다. 그가 한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신자들은 아직 죄가 근절됐다든지 또는 의가 자기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죄를 언제까지나 노여워하시는 듯이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은혜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는 율법의 규정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으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은 이 자유의 목적이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 : 로마서에 의한 증명. 7-9)

7. 기독교인의 자유의 셋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 자체로서는 "무해 무익한"1475) 외부적인 사물에 관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교적 의무에도 얽매여 있지 않고, 그런 사물을 때로는 이용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이용하지 않는 것은 전혀 무방한 일이다. 그리고 이 자유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것인데, 만일 모른다면 우리의 양심은 결코 평안히 쉴 수 없으며 미신도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육식을 자유롭게 먹는 일과 휴일 문제와 옷 입는 문제 등에 대한 논의를 상기시킨다고 해서, 이것을 무익하고 경박한 행동이라고 보며, 우리를 몰상식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한 번 함정에 빠지면 멀고 복잡한 미로에 들어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트, 내의, 냅킨, 손수건등에 아마포를 써도 좋겠는지를 의심하게 되면, 다음에는 대마포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고, 드디어 거친 삼베에 대해서까지 의심이 생길 것이다. 또한 식사할 때에 냅킨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는 손수건이 없어도 괜찮겠는가의 문제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맛있는 좋은 음식을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은 검은 빵을 먹거나 보통 음식을 먹거나 간에, 더 나쁜 것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불안을 느낄 것이다. 단 포도주를 보고 놀라는 사람은 양심에 꺼림칙해서 맛없는 포도주도 마시지 않을 것이고, 결국 보통 보다 맑고 좋은 물까지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속담에서 말하듯이, 요컨대, 길에 있는 짚을 밟아도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1476)

여기서 중대한 논쟁이 벌어지데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어떤 것을 쓰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하는 것과 우리가 무엇을 계획하거나 실행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어떤 사람들은 낙심해서 반드시 깊은 혼란의 와중에 빠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일정한 길이 없으므로 제멋대로 멸망의 길을 걸어간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의심에 휘말려든 사람들은 어디를 보아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 뿐이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선물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쓰는 자유

바울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한다(롬 14:14). 바울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만일 우리의 자유가1477) 하나님 앞에서 근거가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모든 외적인 일들은 우리의 자유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미신적인 생각이 우리 앞에 장애물을 제시할 때는, 대체로는 정결한 것도 우리에게 더러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緣故)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2-23)고 덧붙여 말한다.

이런 혼란 가운데서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행하는 사람들은 대담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반대되는 여러 가지 일을 강요에 못 이겨 할 때에, 큰 두려움으로 마음이 압도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에 의해서 모든 것이 거룩해진다고 증거한다(딤전 4:4-5).

그런데 내가 말하는 이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비와 양선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좋은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셨다는 명확한 신념을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우리는 이 자유가 향하는 방향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목적에 따라 아무 양심의 거리낌이나 마음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는 모든 의식이 포함된다. 이런 의식들에 대해서 우리의 양심은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강요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의식들이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 되도록 자신의 주관 하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9. 기독교인의 자유를 탐식(貪食)과 사치에 악용하지 말라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이 자유의 힘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 떠는 양심을 진정시키는 데 있다. 이는 신자들의 양심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혹은 우리가 끝내지 못한 일이나, 우리의 육의 허물로 더러워진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해서, 혹은 무해 무익한 것들의 사용 문제에 대해서 불안과 동요와 고민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자기의 정욕대로 악용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런 자기의 욕망을 변호하는 구실로 삼는 자들이나, 자유는 사람들 앞에서 쓰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약한 형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를 행사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종류의 인간들이 현재 더 많은 죄를 짓고 있다. 사치를 누릴만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화찬란한 연회와 몸치장과 저택을 즐기며, 이웃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가지려 하며, 부유한 것을 굉장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런 모든 일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변호하며, 이런 것은 무해 무익한 일이라고 한다. 나도 무해 무익하게 사용한다면 그들이 하는 말을 인정하겠으나 이런 일들을 탐내며 크게 자랑하며 낭비하는 때에는, 그 자체로는 용인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죄악 때문에 더러워진다.

바울의 발언은 무해 무익한 것들을 잘 구별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무엇 때문에 이제 위로를 받고 배부르고 웃고(눅 6:24-25), 상아 침상에서 잠을 자며(암 6:4), "전토에 전토를 더하며"(사 5:8),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포도주를 갖추는(사 5:12)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는가? 확실히 상아와 금과 재산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로 사람이 쓰도록 허락된 것, 아니 지정된 것이다. 우리는 웃지 말라거나, 배부르지 말라거나, 조상이 물려준 재산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 말라거나, 음악을 즐기지 말라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거나 하는 명령을 받은 일이 없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물질이 풍족하며, 열락과 쾌락 속에서 뒹굴며, 배불리 먹으며, 현재의 쾌락으로 머리와 정신이 몽롱하며, 항상 새로운 쾌락을 갈구는 것, 이런 짓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을 버리라. 무절제한 낭비를 그르치는 허영과 교만을 버리라. 맑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깨끗이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각성하며 절제할 때에 사람은 이런 복된 선물들을 합당하게 쓰는 법을 깨달을 것인데, 이런 절제가 없으면 평범한 쾌락까지도 지나친 것이 된다. 옷은 초라해도 마음이 고귀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1478) 자색 옷과 비단 옷을 입었어도 마음이 단순하고, 겸비한 예가 있다. 그러므로 생활이 빈곤하거나 보통이거나 부유하거나 간에, 사람은 각각 그 처지대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생활을 위해 공급해 주신 것이요 사치하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법칙은 다음과 같은 것인 줄로 알아야 한다. 즉, 바울과 함께,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만족할 줄 알며, 낮아질 줄도 알고 높아질 줄도 알며,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배부르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모든 형편에 대처할 줄을 알아야 한다(빌4:11-12).

(기독교인의 자유와 약한 형제들과의 관계 그리고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 10-13)

10. 기독교인의 자유를 남용해서 약한 사람들을 해하는 것은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하는 일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자유가 안전하지 않다는 듯이, 무분별하고 어리석게 그들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은 약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 독자들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자유가 없다면 자기들에게 자유가 없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1479) 나는 그들이 고기를 먹는 것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들은 자유로 인하여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새 것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만 그것을 얻는다는 것과,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사하지 않는 것도 자유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기를 먹거나 계란을 먹거나, 붉은 옷을 입거나 검은 옷을 입거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는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고도 오히려 여분이 있다. 자유는 원래 양심을 위한 것인데 양심은 이제 자유롭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이 앞으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고, 한 가지 빛깔의 옷만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유는 감해지지 않는다. 사실, 그들은 자유이기 때문에 맑은 양심으로 먹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의 약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가장 위험한 잘못이다. 우리는 약한 형제들을 참으며,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해를 줄 경솔한 일은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자유를 선언하는 것이 중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약한 자들을 돌보라고 특별히 우리에게 명령하셨으므로, 우리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서 이 한도를 지켜야 하겠다.

11. 넘어지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러면 여기서 나는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일에 대해서,1480) 그것을 어떻게 구별하며, 어떤 것을 피하며, 어떤 것을 무시할 것인가를 논하겠다. 이렇게 하면 우리의자유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후에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분명한 지지가 있고 말의 뜻을 바르게 표현한다는 한도에서 "걸리게(걸림을 준다) 한다"는 것과 "걸린다(걸림을 받는다)"는 것을 보통 구별하는데, 나는 이 구별을 찬성한다.

우리가 경박해서, 혹은 방종해서, 혹은 경솔해서, 바른 순서나 장소에 어긋나는 어떤 불미한 행동을 함으로써 무지하고 단순한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때에, 그것은 걸리게 하는 것이라고 불려진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행위자에게서 유래할 때 그것은 그가 걸리게 한다고 일컬어진다.

악한 행동이나 부당한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악의로 또는 악한 의도로 그 행동을 변하여 넘어지는(죄를 짓는) 기회를 만들 때1481) 그것을 걸린다고 말한다. 여기에 걸리게 "하는 것"은 없지만, 악한 해석가들이 그렇게 이해한다. 첫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약한 사람들만이 넘어진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걸림에서는 악한 성품과 바리새적 교만을 가진 사람들이 넘어진다. 따라서 하나는 약자의 걸림이요, 또 하나는 바리새적 걸림이라고 부르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고려하면서 자유의 사용을 조절할 것이다. 바리새적 엄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약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양보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라고 그는 말한다(롬 14:1). 또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3). 이밖에도 같은 뜻을 가진 구절들이 많은데, 여기서 말하기보다 각각 적절한 때에 찾아보는 것이 적당하겠다. 요점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롬 15:1-2)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148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 10:29,32),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은 우리의 약한 이웃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니 사랑은 모든 일에서 우리를 그들의 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가 충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한 다음에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걸림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주의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는 그들이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니, 그대로 버려두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마 15:14).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었다고 주님께 고했는데(마 15:12), 주님께서는 그들과 그들의 걸림을 무시하라고 대답하셨다.

12. 기독교인의 자유를 올바르게 사용하며 올바르게 포기하는데 대하여

우리가 누구를 약한 자로 보며 누구를 바리새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냐 하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로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구별을 없애 버린다면, 걸림을 주는 문제에 관해서 자유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때에 자유는 항상 큰 위험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유를 어느 정도로 조절하며 어느 정도로 걸림의 대가로 치뤄져야1483) 하는가에 대해서 바울은 교훈과 실천으로 가장 분명한 정의를 내렸다고 나는 본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행 16:3).

그러나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다(갈 2:3). 그가 한 행동은 다르나 목적은 같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을 때, 그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19-20),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라고 하였다.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효과적일 때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를 적당히 제한할 수 있다.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한 까닭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3-5). 거짓 사도들의 부당한 요구로 인해 약한 형제들의 양심의 자유가 위태롭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주장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랑을 추구하며 이웃의 덕을 세우는 데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무엇보다도 명백한 규칙은, 이웃의 덕을 세우는 결과가 될 때에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고, 이웃에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는 자유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랬던 것같이 자신도 자유를 포기하는 지혜를 가졌노라고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결코 그 지혜를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평온을 보호하기 위해서 일체 자유를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이웃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웃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간혹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만큼 중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외적인 일에 대한 자유의 권한을 그에 게 주신 목적은, 그가 모든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욱 예민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13.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걸리게 함을 피하는 문제에 대해서 내가 한 말은 모두 중간적인 무해 무익한 일들에 관한 것이다. 꼭 해야 할 일들을 걸리게 함이 무서워서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의 자유를 사랑보다 아래 두어야 하는 것과 같이, 사랑 자체는 믿음을 완전히 지키면서 그 아래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사랑을 제단에 이르기까지라도(마 5:23-24 참조) 고려하는 것이 합당하다. 즉,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노하게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소동을 일으키며, 무슨 문제든지 조용하게 처리하지 않고 난폭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무절제를 우리는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온갖 악한 일의 괴수 노릇을 하던 자들이 이들에게 걸림이 되지 않도록(고전 8:9 참조) 행동하겠노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런 말도 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이웃들의 양심을 악으로 인도했으며, 특히 그들 자신은 여전히 같은 진흙탕에 갇혀 있어 빠져나올 희망이 없다. 또 이웃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실천의 모범을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젖을 먹여야 된다고 상냥한 태도로 말하면서, 사실은 이웃을 그들의 가장 악하고 치명적인 생각 속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젖으로 먹였노라고 한다(고전 3:2). 그러나 만일 그 때에 교황주의자의 미사가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 있었다면, 바울은 젖을 주기 위해서 희생을 드렸을 것인가? 그랬을 리가 없다. 젖은 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꾀어서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허위를 일시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언제까지 그런 젖을 자녀들에게 먹일 것인가? 자녀들이 경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자라지 못했다면 훌륭한 젖으로 키우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들을 더 날카롭게 공격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그들의 진부한 주장은 반박할 가치조차 없으며, 건전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미 당연한 멸시를 받고 있다. 둘째로, 나는 이미 특수 논문들에서1484) 충분히 증명한 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독자들이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사탄과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게 만들려고, 또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우리는 굳세게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위험이 앞에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서 손톱만큼도 벗어날 자유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용인하시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구실 하에서도 불가하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정부에 대한 자유와 양심의 관계. 14-16)

14. 모든 인간적법에 대하여 양심은 자유롭다

우리가 이미 서술한 자유의 특권을 받은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양심이 이제 한 경지에 도달했다. 즉,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자유롭기를 원하시는 문제들에 관해서 여러 가지 관례의 올무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인간의 권한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큰 은혜를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를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양심도 그 받은 유익을 빼앗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 그리스도께서 큰 희생으로 얻어 주신 것을 우리가 경시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가 금이나 은이 아닌 자신의 피로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벧전 1:18-19). 바울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사람에게 예속시킨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갈 2:21 참조). 갈라디아서의 몇몇 장에서는,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 자유를 확고하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희미하게 되며 심지어 말살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전력을 다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양심이 법과 규칙에1485) 얽매인다면(갈 5:1,4 참조), 양심은 확실히 자유를 잃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문제이므로 더 자세하고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규정한 것을 폐지하는 문제에 관해서 한 마디라도 말이 나면, 마치 인간의 모든 복종이 동시에 제거되고 타도되는 듯이, 한편에서는 선동적인 사람들이, 또 한편에서는 중상자들이 즉시 큰 소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15. 두개의 왕국

그러므로 우리는 이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먼저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로서 여기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통치로서 여기서는 인간으로서 또 시민으로서 사람 사이에 유지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를 배운다. 보통 이 두 방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관할권이라고1486) 부르는데 이는 부적당한 명칭은 아니다. 첫 번째 종류의 통치는 그 뜻이 영혼의 생활에 속한 것이요, 둘째 것은 현세 생활에 관한 것, 즉, 의식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게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데 관한 통치이다. 전자는 마음속에 있고, 후자는 외면적인 행동을 규제한다. 하나는 영적인 나라, 또 하나는 정치적인 나라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구별한 것과 같이, 이 둘은 항상 각각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한 쪽을 고찰할 때에는 다른 쪽은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 이를테면 사람에게는 두 세계가 있으며, 두 세계가 각자 다른 임금과 다른 법률의 권위 하에 있다.

이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자유에 대한 복음의 교훈을 사회질서에 잘못 적응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외부적인 통치에 관해서 인간 사회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자유롭다고 해서 모든 육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다.

다음에, 영적인 나라에 적용되는 듯한 제도 가운데도 착오가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런 제도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하므로 합당하다고 인정할 것과,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과를 구별해야 한다. 세속 정치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1487) 교회법에 대해서도 지금은 말하지 않겠다. 자세한 논의는 제 4 편에서 하는 것이 더 적당하겠고, 거기서는 교회의 권한도 논하게 될 것이다.1488)

현재의 논의에 대한 결론을 말하겠는데,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문제 자체는 그다지 불분명하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외부의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1489) 선명하게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곤란을 당한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벌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정부에 복종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에(롬 13:1,5) 문제가 더욱 곤란하게 된다. 바울의 발언 때문에 양심은 세속적 법에도 매인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이제부터 영적 통치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전부 부정될 것이다.

이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 양심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원을 더듬어 정의를 내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과 이해력으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파악하며, 그 사물을 "안다"고 하는 것이 "지식"이란 말의 유래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감각이 사람에게 결합된 증인같이, 하나님 앞에서 고소를 당할 죄를 감추지 못하게 할 때에, 이 감각을 "양심"이라고1490) 부른다. 양심은 사람이 마음속에 아는 것을 숨기지 못하게 하며, 도리어 그것을 추궁해서 드디어 유죄를 선언하기 때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일종의 중간적 존재이다. 바울도 양심을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라고 말했다(롬 2:15-16). 말하자면, 단순한 지식이 사람 속에 숨어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끌어가는 이 지식은 일종의 보호자이다. 즉, 사람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서 하나도 흑암 속에 묻혀 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임명된 보호자이다. "양심은 일 천명의 증인이다"1491)라고 하는 옛 격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같은 이유로 베드로도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을(벧전 3:21) 마음의 평화,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한다면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나타날 때의 마음의 평화와 동일시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는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라고 하는 것은(히 10:2), 우리가 해방 또는 무죄 방면 된 것으로 인정되며, 죄가 다시는 우리를 고소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16. 양심의 구속과 자유

그러므로 행동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 맑은 양심은 곧 심령의 내면적 성실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한다(딤전 1:5 참조). 후에 같은 장에서, 어떤 사람들이 착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고"(딤전 1:19) 말함으로써, 바울은 양심과 이해력이 얼마나 다른가를 가르친다. 바울의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활발한 심령과, 경건하며 거룩하게 살려는 진실한 노력을 의미한다.

이따금씩 양심을 사람들에게도 상관시키는 일이 있다. 누가가 전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언명한다(행 24:16). 그러나 이것은 선한 양심의 결과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에 한 말이고, 원래는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법이 양심을 구속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 없이 법이 그 사람을 구속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해서 모든 정욕을 배제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음란한 말이나 방탕한 행동을 일체 금지하신다. 나의 양심은 사람이 지상에 한 명도 없더라도, 이 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무절제하게 사는 사람은 형제들에게 나쁜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책으로 그 양심이 묶여 있다.

그 자체로는 무해 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다른 고려를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남을 넘어지게 만들 일을 일체 하지 않아야 하는 동시에, 양심은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에 대해서,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28-29)라고 말했다.1492) 이미 경고를 들었으면서도 이런 고기를 먹는 신자는 죄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는 필요하지만, 신자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를 유지하고 있다. 이 법은 외면적인 행동을 구속하면서도 양심의 자유는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20 장  기도 : 믿음은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1493)

(기도의 본질과 가치 1-3)

1. 믿음과 기도

지금까지 논의를 통한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인간에게는 선이란 것은 전혀 없고, 구원에 도움이 될 것도 전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곤란에 빠진 자기를 구해낼 힘은 자기 밖에서 구해야 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이 계시는 기꺼이 또 거저 주신 것이라는 설명이 후에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호와께서는 불행한 우리에게 행복을, 궁핍한 우리에게 모든 부를 주시겠다고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보고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시고, 우리의 믿음이 전적으로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모든 기대가 그를 의지하며, 우리의 소망이 전적으로 아들에게 밀착하여 안식을 얻게 하신다. 이것은 삼단 논법으로 이끌어낼 수 없는, 저 은밀한 숨은 철학이다.1494)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하여 그 빛을 보게 하신 사람들만이 이 철학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다(시 36:9).

그러나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교훈을 받은 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에게 없는 것이 모두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게 하셔서(골 1:19, 요 1:16 참조) 마치 우리가 넘쳐흐르는 샘물에서 물을 퍼내듯 은혜를 그리스도께로부터 얼마든지 얻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아는 것들을 찾으며, 기도로 그에게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주인이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신 것과, 그에게 구하라고 상기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의 앞에 가서 달라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땅 속에 감추인 보화가 어디 묻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어도 그 보화를 무시하는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등한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정하였다. 믿음이 복음에서 나는 것과 같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받는다(롬10:14-17). 그는 조금 앞에서도 꼭 같은 뜻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마음속에 복음의 증거를 인치는 영, 즉, 양자의 영이(롬 8:16), 우리의 정신을 고무시켜 감히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원을 아뢰게 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아무 의심 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롬 8:15).

그런데 이 마지막에 언급한 점을 우리는 앞에서 이미 간단하게 다루었기 때문에,1495) 이제 더 자세히 논해야 되겠다.

2. 기도의 필요성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 곁에 우리를 위해 저장되어 있는 보물에 우리의 손이 닿으려면 기도의 힘을 빌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교통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말씀만으로 약속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었고, 필요한 때에는 또 약속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늘 지성소에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대해도 좋다고 약속하신 것은 또한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다. 주의 복음이 우리에게 가리켜 주었고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본 보화를 기도로 파낸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고 기도를 드리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유익한가? 이는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유일한 안전한 요새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다고(욜 2:32 참조) 하늘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의 일들을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는 그의 섭리와, 약하고 거의 쓰러지려고 하는 우리를 지탱하는 그의 힘과, 비참하게 죄에 눌려 있는 우리를 받아들여 은혜를 입혀주시는 그의 인자하심이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도함으로써 기원한다. 따라서 우리의 양심에 특별한 평화와 안식이 온다. 우리는 긴급히 필요한 일을 주 앞에 알리고 나서, 우리의 어려운 일들을 주께서 샅샅이 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주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돌보아 주실 의사와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완전히 안심한다.

3. 반대 의견 : 기도는 없어도 되지 않는가? 기도해야 하는 여섯 가지 이유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상기시켜 주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점에서 곤란을 당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를 아시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마치 우리의 목소리로 깨우시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졸고 계시거나 심지어 주무시고 계시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지를 모른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 때문이 아니고 우리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 자기들에게 이익이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며, 이 인정을 기도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당연히 받을 것으로 여기시는데 이 입장은 정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그 유익도 우리에게 돌아온다. 따라서 저 거룩한 조상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 있게 찬양하면 할수록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하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다. 엘리야의 예만 보아도 넉넉할 것이다. 그는 아합 왕에게 비를 분명히 약속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지만 그래도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애써 기도하며, 사환을 일곱 번 보내서 확인하게 했다(왕상 18:42). 이는 자기가 한 예언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생기가 없어지거나 태만해지지 않도록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감각이 무디고 마비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을 지켜보시며,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도와주시는 때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도하는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 일 듯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거룩한 군원의 닻으로 믿고 그에게 달려가서 피난하는 습관이 붙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의 눈앞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내놓으며, 우리의 속마음을 토로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시 145:15-16 참조). 넷째로, 우리가 구하던 것을 얻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끝으로, 우리의 연약한 정도에 따라서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가 곤란한 때에 그에게 빌 길을 친히 열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언제나 도와주시며, 말씀으로 달래시는1496) 것이 아니고 즉각적인 도움으로 지켜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결코 졸거나 게으른 일이 없으시면서도, 게으른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잠자며 게으르신 것 같은 인상을 주시는 때가 많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우리가 그 분을 찾으며 그분께 간구해서 큰 유익을 얻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을 기도에서 떠나게 하려고,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일을 지키시며 우리가 귀찮게 간청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라고1497) 떠들고 있으나, 그들의 행동은 너무도 미련하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라고(시 145:18) 하신 주의 증거가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말로 떠들어대면서, 주께서 언제든지 기꺼이 주시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간구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께서 자진해서 너그럽게 주시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기도로 그것을 얻는 것으로 인정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 시편에 있는 저 인상적인 말씀이 증거하며, 여기에 해당하는 비슷한 구절들이 많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시 34:15). 이 문장은 경건한 이들의 구원을 스스로 열심히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태한 경향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믿음의 훈련을 제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곤란하고 눈먼 자들을 돕기 위해서 지켜보고 계시지만,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더 잘 증명하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려 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것과(시 121:4), 그는 마치 우리가 게으르고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우리를 잊어버리신 듯이 활동이 없으시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사실이다.

(올바른 기도의 법칙. 4-16)

첫째 법칙 : 경외. 4-5

4. 하나님과의 대화에는 경건한 초자연성이 필요하다

정당하고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 위한 첫째 법칙은, 하나님과 대화하려는1498) 사람에게 합당한 정신과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 자세를 바르게 하려면, 우리를 곁으로 이끌어 하나님을 바르고 순수하게 주시하지 못하게 하는 육신적인 근심과 생각을 버리고 전심전력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정신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정신이 세상적인 것을 초월하여 어떠한 근심으로도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큰 근심으로 인하여 기도할 열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깊은 구덩이에서 죽음에 직면해서 근심은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를 향하여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본다(시 130:1 참조).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원래 떠돌아다니는 우리의 정신이 이질적이고 외부적인 염려 때문에 이리저리 끌리거나, 하늘을 잊고 땅에 얽매이는 일이 없도록, 모든 염려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그 자체를 높이 초월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눈멀고 미련한 이성이 고안 해내는 것을 일체 하나님 앞에 가져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그 허무한 본성의 한계 안에 붙들려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순결한 상태를 목표로 비약해야 한다.

5. 무례하며 불경건한 기도를 배척함

두 가지 일에 우리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노력을 기도에 바쳐야 하고, 흔히 그렇게 하는 것처럼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경외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경박한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과는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기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도 쓸데없는 생각들이 어느새 스며들어 기도의 진행을 막거나, 굴곡이 많은 곁길에 들게 하여 앞으로 나감을 더디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의 친밀한 대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데,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혼합함으로써 그분의 크신 인자하심을 모독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치 못한가를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마치 보통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같이, 기도 중에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깊이 생각하여, 세상적인 걱정과 애착을 일체 버리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만이 충분하고 합당한 기도 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 것은 생각을 높이 비약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다고 사람들이 느꼈기 때문이다. 시편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라고 하였다(시 25:1).성경에서는 "기도하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예컨대, 사 37:4).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찌끼 위에" 주저앉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렘 48:11, 습 1:12 참조).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시고, 우리의 근심 걱정을 자신의 가슴에 털어놓으라고 친절하게 권할수록, 하나님의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이 은혜를 무시하는 우리의 죄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은혜를 더 중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며, 정신과 노력을 정성스럽게 기도에 바쳐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정신은 이 여러 가지 장해물과 굳세게 싸워서 이기고 초월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라는 또 다른 점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을 그의 앞에 쏟아놓으라고 하셨지만(시 62:8, 시 145:19 참조), 우매하고 사악한 감정은 무엇이든지 날뛰게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경건한 사람들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들의 방자한 뜻에 양보하시기까지 인자하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점에서 중대한 죄를 짓는 것이 보통이다. 경솔하고, 몰염치하고, 무례한 태도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나님께 감히 조르며, 어떤 망상이든지 닥치는 대로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내놓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우둔하고 우매해서 사람 앞에서도 말하기를 심히 부끄러워해야 할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감히 하나님 앞에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런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행동은 세속 문인들도1499) 희롱하며 미워하기까지 했지만, 이 죄악의 세력은 언제나 강력했다. 그래서 야심가들은 쥬피터(Jupiter)를 수호신으로 택했고, 인색한 자들은 머규리(Mercury)를, 지식을 탐하는 자들은 아폴로(Apollo)와 미네르바(Minerva)를, 군인들은 마르스(Mars)를, 음탕한 자들은 비너스(Venus)를 택하였다.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지금도 친구끼리 농담과 잡담을 할 때보다 기도 중에 불법한 욕망을 더 관대하게 버려두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절한 대우를 이렇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우리의 소원을 그의 권력에 굴복시키며 억제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이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고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한다.

성령이 올바른 기도를 도우신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능력이 역부족하다. 따라서 보조 수단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집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간절히 거기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둘 다 훨씬 낮은 곳에 서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둘이 다 기력이 없어 낙망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 방향으로 끌려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한 우리를 도우시려고 우리 기도의 교사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기도에 있어서 바른 것이 무엇임을 알려 주시며 감정을 조절해 주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께서 직접 기도하시거나 탄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확신과 소원과 탄식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타고난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생각하게 만드신다. 또 바울이 신자가 성령의 지도로1500) 하는 탄식을 "말할 수 없는"것이라고 형용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기도의 훈련을 참으로 받은 사람들은 기도 중에 맹목적인 불안으로 마음에 혼란이 일어나며 가슴이 답답하여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를 모르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려 해도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주저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특별한 은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태만을 감싸면서, 기도하는 일을 하나님의 영에게 떠맡기고, 자신은 본래 빠지기 쉬운 무관심 상태에 머물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맡아 주실 때까지 우리는 졸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불경건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무기력하고 침체된 자기를 혐오하며 성령의 도움을 구하자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라고 권하면서도(고전 14:15), 동시에 깨어 있으라고 우리게 권고한다. 바울이 말하려는 뜻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고무하여 기도를 이루도록 힘을 주시지만, 우리 자신의 노력을 방해하거나 정지시키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둘째 법칙 : 진심으로 자기의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 6-7

6. 필요성을 느끼면 모든 비현실성이 배제된다

둘째 법칙은,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제나 자신의 무력을 느끼며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그것을 얻고자 하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기도에 첨가해야 한다는 것이다.1501) 기도를 드릴 때에 마치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듯이, 일정한 형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간구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치명적이 되기 때문에 기도가 그들의 곤란에 대한 필요한 대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은 냉담하여서 여전히 습관적으로 이 의무를 이행하며 자기가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막연하고 몽롱하게 자기의 부족을 느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그 느낌이 현실 문제가 되지 못하고, 그 기도가 자기에게 부족한 것에서 해방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지 못한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또는 적어도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이 없으면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의 거짓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보다 더 가증하고 저주스러운 일이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히 직접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방금 말한 것과 같이, 인류는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해서, 기도라는 행동만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을 기원하는 때가 많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라도 다른 데서 오리라고 확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미 가졌다고 믿고 있다.

이것보다는 덜 심한 듯하면서도 역시 허용할 수 없는 결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야겠다는 한 가지 원칙이 몸에 습관이 되어서, 아무 명상도 없이 기도를 중얼거린다. 진정으로 갈망하며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얻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원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특히 삼가야 할 일이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구하는 일들은, 얼핏 보기에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한 것이 아닌 듯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열의와 성의를 가지고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컨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때(마 6:9, 눅 11:2), 우리는 그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는 일을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같이 정성껏 기도해야 한다.

7. 기도가 우리의 일시적 기분에 좌우되는 때가 있는가?

우리는 항상 똑같은 절박감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한다. 야고보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고(약 5:13) 구별해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너무나 게으른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도록, 필요한 때에는 하나님께서 더 아픈 자극을 주셔야 한다. 다윗은 이것을 "주를 만날 기회"라고 부른다(시 32:6). 그가 다른 데서도 자주 가르치는 것과 같이(시 94:19 등), 곤란과 불안과 공포와 그 밖의 시련이 우리를 가혹하게 압박할수록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는 듯이,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그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이 우리는 "무시(無時)로‥‥‥기도"해야 한다고 한 것도(엡 6:18, 살전 5:17) 옳은 말이다. 아무리 일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디를 보나 기뻐할 일들이 주위에 가득하더라도,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은 없다. 포도주와 곡식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는 떡 한 조각이라도 맛볼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지하실과 창고들도 그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위험이 순간마다 우리를 노리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포심 때문에도 기도를 하지 않는 때가 없어야 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자기의 많은 죄를 알고 있는데, 언제까지 그 죄와 벌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급히 도움을 받지 않아도 좋도록, 시험이 우리에게 휴전을 제의하는 때가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생각하는 열성이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서, 같은 기회가 항상 우리에게 있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다. 나는 아직 견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뒤로 미룰 것이다.1502)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살전 5:17) 권고하며, 우리의 태만을 책망하는데, 그것은 이 끊임없는 주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법칙은 하나님께 대한 위선과 교활한 거짓을 기도에서 배제하며 멀리 추방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하신다고 약속하셨고(시 145:18), 전심으로 찾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리라고 말씀하셨다(렘 29:13-14). 그런 이유로 자기들의 추악한 것을 즐기는 자들은 전혀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바른 기도에는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고 하며(요 9:31), 그들의 기도는(잠 28:9, 사 1:15 참조) 그들의 제물과 같이(잠 15:8, 21:27 참조)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라는 말씀이 많다. 자기의 마음에 빗장을 지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귀가 닫힌 것을 발견하며, 마음이 냉혹해서 하나님의 엄격한 처사를 도발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관용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 또한 예레미야서에서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렘 11:7, 8:11)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일평생 더럽히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자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고의 수치로 여기신다. 따라서 이사야서에서 유대인들에게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라고 책망하신다(사 29:13).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분께 대한 경배의 모든 부분에서 거짓은 가증한 일이라고 선언하신다. 야고보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약 4:3) 한 말은 이에 적용된다. 곧 다음 글에서 알게 될 일이지만,1503) 경건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그들의 가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 이"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요일 3:22) 경고한 것은 무용한 일이 아니다. 악한 양심은 우리 앞에 열려져 있는 문을 닫히게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성실하게 경배하는 사람들만이 올바르게 기도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기도하려고 준비할 때에는 자기의 악한 행실을 혐오하고, 거지와 같은 처지와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이것은 회개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셋째 법칙 :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라. 8-10

8. 우리는 겸손하게 자비를 빌기 위하여 기도한다

여기 우리는 셋째 법칙을 첨가한다. 즉, 기도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은 겸손하게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리며, 자기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곧, 자기 신뢰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가치를 티끌만큼이라도 주장해서 허영과 교만에 부푼다면, 하나님 앞에서 멸망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순종하여 모든 교만을 없애버린 예를 여러 번 말한바 있는데 그들 모두는 거룩할수록 주 앞에 나갈 때에 더욱 겸손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칭호를 주셔서 칭찬하신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矜恤)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8-19). 다니엘은 어떤 사람들 같이 정도를 벗어난 말을 하면서 대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들 가운데 섞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한 개인으로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면서 그로부터 피난처를 구한다. 그는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自服)하고"라고 하는(단 9:20) 웅변적인 말을 한다. 다윗도 자기의 예를 들어 이 겸손한 태도를 가르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이와 같은 모범으로 이사야도 기도한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 이니이다"(사 64:5-9).

그들이 의지한 확신은 한 가지밖에 없었던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자기들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예레미야도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배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렘 14:7)라고 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을 쓴 사람이 누구였던 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당신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당신 앞에서 자비를 비옵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옵나이다"(바룩 2:18-1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 3:2).

9.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간단히 말하면, 올바른 기도의 시작과, 그 준비는 겸손하고 성실하게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너그러운 화해를 얻기까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용서하시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실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의 여러 곳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믿는 자들이 이 열쇠로 기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빌지 아니하는 때에도 "여호와여 내 소시(小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시 25:7). 또"나의 곤고(困苦)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다(시 25:18). 이것을 보면 우리는 매일 최근의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있은 듯한 죄까지도 고백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예언자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중대한 죄 하나를 고백하고 나서, 자기가 그 죄에 감염된 곳, 곧 모태(母胎)를 말한다(시 51:5). 이것은 타고난 부패성을 근거로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전 생애의 죄들을 종합해서 더욱더 엄격하게 자기를 정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쉽게 받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성자들이 항상 많은 말로써 죄의 용서를 빈 것은 아니나, 성경이 전하는 그들의 기도를 자세히 검토한다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기소할 생각을 얻게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든지 우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고자 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의 양심을 조사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근심 걱정을 솔직하게 토로할 용기가 생길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믿지 않는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마다 무서워 떨 것이다.

사람들이 벌을 면하기를 기원할 때에 특별한 고백이 하나 더 있다. 즉, 그들은 동시에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인은 그대로 두고 결과만을 제거하려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병든 사람이 자신에게 나타난 증세만을 치료하고 병의 원인 자체를 등한시하는 미련한 짓을 배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외적인 표징으로 우리에 대한 호의를 증명하시는 것보다, 우선 우리에게 대해서 호의를 가지시는 것을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이 순서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뜻이며 만일 우리의 양심이, 그와의 완전한 화해를 느끼며 그를 전적으로 "사랑스럽게"(아 5:16) 여기지 않는다면, 그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더라도, 그것은 그다지 유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도 우리에게 이 일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로 작정하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9:2).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특히 원해야 할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셔서 그의 은혜 가운데 두시기를 원하고 그 다음에 화해의 열매로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셨다.

그러나 특히 현재의 죄를 고백하여 모든 죄와 벌이 용서되기를 간구하는 동시에, 기도가 용납되도록 하는 일반적인 전제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는 값없이 주시는 자비를 근거로 삼지 않으면 하나님께 결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한 말은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율법 하에서도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용납되게 하기 위해 죄의 대속으로 기도를 성별했다(창 12:8, 26:25, 33:20, 삼상 7:9 참조).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먼저 그들의 부정한 것을 깨끗이 씻어버린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만을 믿고 기도를 드리지 않는 다면, 그들은 이 큰 특권과 영예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10. 자기의 의를 말할 것인가?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빌 때에 간혹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듯하다. 예컨대 다윗은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했고(시 86:2),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했다(왕하 20:3, 사 38:3 참조). 그들이 이런 말로 표현하려고 한 뜻은, 자기들이 중생하여 하나님의 종과 자녀인 것이 증명되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1504)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의 눈이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신다"는 것을 가르치신다(시 34:15). 또 사도 요한을 통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고 가르치신다. 이 여러 구절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공로에 따라서 기도의 가치를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실하며 정직하며 무죄하다는 것을 바르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신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이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눈을 뜨게 된 장님이,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듣지 아니하신다고 한 말은(요 9:31)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온 것이다. 성경에서는 "죄인"이란 말이 보통은 의에 대한 아무 욕망도 없이, 자기의 죄 가운데서 안주하며 잠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동시에 경건에 대한 갈망이 없으면, 아무도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약속과 성도들의 증거는 부합하는데, 이 성도들의 증거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순결이나 무죄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바라는 것이 자기들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또 성도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원수들의 불의에서 구제되기를 원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수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서, 보통 이런 종류의 기도를 드린다. 이런 비교에서 그들이 자기들의 의로움과 순진함을 내세움으로써 문제의 공정성을 보아서도 도움을 주시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움직이시게 했다고 하여, 그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맑은 양심을 가짐으로써, 주께서 진정한 경배자들을 위로하시며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주신 약속들로 자기의 입장을 확인하는데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이 복을 그들의 마음에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고 믿는 그의 확신은 다만 하나님의 관용을 근거로 한 것이며, 자신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법칙 : 확신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라. 11-14

11. 소망과 믿음은 공포심을 극복한다

넷째 법칙은, 이와 같이 우리는 진실로 겸손한 마음에 정복되고 압도되더라도, 동시에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있으리라는 확고한 소망을 품고 기도하도록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것과 그의 공정한 벌을 느끼는 것은 외관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의 악행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잘 조화된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바와 같이, 회개와 믿음은 뗄레야 뗄 수 없이 굳게 결합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키고 다른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1505) 그와 같이 기도에도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이 일치점을 다윗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표현했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7) 그는 하나님의 인자에 믿음을 포함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경외를 빼놓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게 할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무가치를 깨닫고 모든 교만과 자기 신뢰를 잊어버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이란,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감미롭고 완전한 평안으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평화로운 평안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일이 소원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그들에게는 아무 근심도 없고, 어떤 욕망도 타오르지 않고,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성도들을 가장 잘 자극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드는 기회는 그들이 자기의 부족을 느껴 마음이 괴로운 때이다. 이런 때에 그들은 극도의 불안을 느껴 거의 미칠 듯 하다가 이런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 위에 비쳐 마침내는 믿음으로 인해서 불안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현재의 곤고한 처지에 눌려 신음하며 장래의 더 큰 곤란들을 두려워하여 고민하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곤란을 참을 수 있게 되며 위로를 얻으며 앞으로 곤란을 벗어나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의 기도가 두 가지 감정에서 시작하며, 그 두 가지를 내포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즉, 그는 현재의 곤경에서 신음하며 앞으로 다가올 곤란을 두려워하여 불안해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피난처를 얻으며, 언제든지 그가 도와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은혜를 기원하면서도, 그것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믿음 부족함에 극도로 노여워하실 것이다.

기도와 믿음

그러므로 기도는 우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한 법칙이며, 이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과 가장 잘 조화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모두 이 원칙에 유의하도록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1506) 다른 곳에서도 같은 말을 확인하신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야고보의 말로 이것과 일치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약 1:5-6). 여기서 그는 믿음을 의심에 대치시킴으로써 믿음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의심과 혼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응답이 있을는지 없을는지 확신이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고 그가 첨부한 말도 주목할 만하다(약 1:7 참조). 그는 이런 사람들을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한다(약1:6).1507) 그래서 다른 구절에서 올바른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부른다(약 5: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믿는 대로 주신다고 자주 말씀하셨는데(마 8:13, 9:29, 막 11:24), 이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얻는 것은 모두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람들은 그다지 주의하지 않으나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라는 바울의 말의 의미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믿음에서 기도가 시작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은 오직 복음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알게 된, 아니, 그것이 깊이 계시된 사람들에 한 한다고 분명히 주장한다.

12. 기도가 허락된다는 확신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박함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상의 요구 조건을 전연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고 인자하시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라는 요구 조건을 우리가 신자들에게 가르칠 때에, 그들은 이것을 가장 불합리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한 기도를 드려본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굳게 믿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부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믿음의 힘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런 사람들은 공상밖에 해본 일이 없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을 상대로 논의할 가치가 어디 있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요구하는 확신의 가치와 필요성은 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양심이 대단히 무딘 사람이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바울이 한 말을 굳게 지켜야 한다. 복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알게 되고, 그 자비가 자기들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들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없다(롬 10:14).

그러면 예컨대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이 저의 기도를 들으실는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불안에 견딜 수 없어 당신께로 도망을 갑니다. 제게 무슨 가치가 있다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성도들의 기도와는 다르다. 성령께서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도 그렇지 않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사도는 우리에게 명령한다(히 4:16). 그는 다른 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가르친다(엡 3:12).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신념을 두 손으로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점은 주께서 친히 명령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모범으로 가르친다. 만일 굳건한 믿음이란 말을 쓸 수 있다면, 그런 믿음에서 생겨난 기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소망에 뿌리를 박은 기도, 이런 기도만이 하나님께 용납된다. 사도는 믿음을 말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나, 확신뿐 아니라, 담대하게 또는 자유롭게라는 말까지 첨가한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와 불신자들을 구별하려고 한다. 불신자들은 우리와 섞여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이다. 본 교회는 시편에 있는 대로 기도한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 33:22). 다른 데서 예언자는 같은 조건을 설정한다. "내가 아뢰는 날에‥‥‥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시 56:9),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 이런 말들을 보면, 소망을 첨가하지 않는 기도는 허공에 던져진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망은 망대와 같아서, 우리는 거기서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본다. 바울이 주는 충고의 순서도 여기 부합한다. 그는 신자들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고(엡 6:18) 권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명령하기를,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한다(엡 6:16-17).

여기서 독자들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회상하기 바란다. 즉, 믿음은 우리의 불행과 궁핍과 부정과 결합된다고 해서 무너지지 않는다.1508) 신자들은 무거운 죄의 짐에 아무리 심히 눌리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무서워 할 죄과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간다. 이런 느낌이 있으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에게로 가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기도를 제정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굴거나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을 높이 평가하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를 고백한 후에, 자녀가 곤란한 문제들을 부모에게 털어놓듯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고통을 호소하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우리의 죄는 당연히 우리가 기도하도록 견딜 수 없는 아픈 자극을 줄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체험으로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시 41:4).

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이런 창은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비할 데 없는 자비로써 이런 경우에 적합한 치료제를 첨부하셔서, 우리의 모든 혼란을 진정시키시며 근심을 덜며 공포심을 없애버리신다. 그리고 장애물은 물론이고 평탄하지 못한 곳까지도 없이 하여 스스로 길을 준비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친절히 이끄신다.

13.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 기도의 원동력이 된다

우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심으로써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 경우에, 주께서는 우리의 불경한 완고함을 책망하신다.1509) 시편에 있는 말씀 보다 더 정확한 명령은 생각할 수 없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 50:15). 그러나 경건 생활의 의무 중에서 기도처럼 성경에서 자주 명령하는 것이 없으므로, 나는 이 점을 자세히 논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신다(마 7:7). 그러나 이 명령에는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필요한 일이다. 이 명령에 순종해야할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쉽게 받아 주시며 우리가 가까이 가는 것을 환영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을 확인한다면, 직접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을 피하려고 애쓰는 자들은 반역자이며 완고할 뿐만 아니라, 약속을 불신하기 때문에 불신앙의 선고를 받게 된다. 위선자들의 행동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뚜렷하다. 그들은 겸손하고, 온유한 모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교만한 태도로 무시하며 하나님의 친절한 초대를 의심하여, 하나님께 드릴 예배의 주요 부분을 빼앗는다. 옛날 사람들이 모든 거룩한 일은 제물을 바치는 데 있다고 생각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거절하시고(시 50:7-13), 사람들이 곤란한 때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언급하셨다(시 50:15).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것을 요구하시며 정성스러운 순종을 명령하시는 때에, 의심의 깃발이 아무리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도피할 구실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항상 나오는 하나님을 부르라는 많은 명령의 말씀은 모두 우리에게 확신을 불어넣기 위해서 우리 눈앞에 세운 깃발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시고 우리가 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는 것은 비할 데 없는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친히 길을 열어 주신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 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이 따라오기를 원하시며 그가 친히 명령하시는 아름다운 곡조에 감화되어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어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

특히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찬미이다. 우리는 이 찬미의 내용을 믿고 모든 장애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1-2) 하나님께서 이런 찬미를 받으셨다는 것처럼 기쁘고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찬미는 간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허락하시는 것이 그의 성품에 가장 잘 맞는 일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 예언자는 소수의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시 50:15)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라서 다윗은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을 주장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삼하 7:27). 이 말을 보아서 우리는 이 약속이 다윗에게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그는 두려워했으리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라는(시 145:19) 일반론으로 무장한다. 사실 우리는 시편에서 이러한 경향을 불 수 있다. 즉, 계속되던 기도의 문맥이 중단되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혹은 그의 선하심으로, 혹은 그의 신실한 약속으로 그 기도의 문맥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얼른 보기에 다윗이 이런 말들을 부적당한 곳에 삽입시켜 기도의 흐름을 절단하며 기형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들은 새로운 연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열성이 식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명상하는 것은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시들어 가는 우리의 정신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도록 적당한 것을 삽입하며, 이 일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14. 확신을 가지며, 무서워 떨 것이 아니라 경외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심히 감미로운 이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냉담한 태도를 취하거나 전혀 느낌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미로를 헤매기를 좋아하며,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물 없는 웅덩이를 파며(렘 2:13),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운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잠 18:10) 솔로몬은 말한다. 요엘은 장차 올 무서운 파멸을 예언한 다음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2, 롬 10:13)라는 인상적인 말을 첨가한다. 이것이 사실은 복음의 진행 과정에 대한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안다(행 2:21). 백 명에서 한 명도1510) 하나님께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사 65:24) 친히 선포하셨다. 다른 데서 하나님은 꼭 같은 영예를 전 교회에,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에 주신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1511)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시91:15).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1512) 나는 모든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다만 두드러진 것들을 택하려 한다.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지를 맛볼 수 있으며, 이렇게 예리한 자극을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태만하며 머뭇거릴 때에 우리의 배은망덕이 얼마나 완고한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라는 말씀을 항상 귀에 쟁쟁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사야와 요엘에서 인용한 말씀과 같다. 거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확약하시며, 우리가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을(벧전 5:7, 시 55:22)고 향기로운 제물같이 기뻐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아무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이 약속의 특별한 열매를 받는다. 하나님의 존엄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떨게 될 것이지만, 이 약속의 말씀이 있으므로 이 말씀을 믿고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가장 다정스러운 이름을 황송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사하신다.

다음으로 이렇게 많은 권유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의 기도와 의지할 것은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며, 기도의 가치와 기도가 실현되리라는 소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었고 또 그 약속을 의지하기 때문이다.1513)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다른 데서 지지를 받을 필요가 없고, 이리저리 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거룩한 조상들과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거룩하였다고 해서 칭찬을 받았으나, 우리에게는 거룩한 점이 없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는 기도하라는 공통된 명령을 받았고 공통된 믿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한다면, 이 점에서 당연히 그들의 동료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151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청하여 친절하시겠다고 선포하심으로써 극도로 가련한 사람에게도 구한 것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저 일반적인 표현 양식에 유의해야 한다. 일반적이므로(세상에서 말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는다. 조건은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마음이 성실하며, 자신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끼지 않고, 겸손하며,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거짓말로 하나님을 부르는 위선이 그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우리를 자신에게로 오도록 권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오는 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다윗의 기도 태도도 이로 인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삼하 7:27-29). 또 다른 데서는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라고 했다(시 119:76).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의 무장을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두려워하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조상들을, 특히 야곱을 본받는다.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감당할 자가 못 된다고 고백한 다음에(창 32: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더 큰 일을 구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창 32:11-12 참조).

그러나 불신자들은 구실이 무엇이든 간에, 곤란한 때에 하나님께 피하여 그를 찾으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새로운 신이나 우상을 만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하나님께 돌아갈 영예를 빼앗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경건한 사람들을 근심 걱정에서 해방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동안은 조금도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순종 이상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앞에서 담대한 기도 정신은 공포, 경외, 염려 등과 잘 조화되며, 엎드린 자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와 같이 조화되지 않는 듯한 표현들이 서로 훌륭하게 부합된다.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그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한다(렘 42:9, 단 9:18). 다른 곳에서도 예레미야는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렘 42:2)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자주 "기도를 올린다"고 하기도 한다. 히스기야가 자기를 위하여 예언자의 중보 기도를 청하면서 한 말도 같은 것이다(왕하 19:4). 다윗은 자기의 기도가 "향과 같이" 올라가기를 갈망한다(시 141:2).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보호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그가 너그럽게 약속하신 도움을 서슴지 않고 간구하지만 수치감을 버린 듯이 경솔한 자신감으로 의기양양해 지지는 않는다. 도리어 약속의 계단을 밟아 올라갈 때에, 여전히 자기를 낮추어 기원자의 태도를 견지한다.

(하나님께서는 불완전한 기도도 들어주신다. 15-16)

15. 사악한 기도를 들으신다

여기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고 고요하지 못한 생각에서 나온 기도를 들어 주셨다는 기사가 있기 때문이다. 요담은 충분한 까닭은 있었으나, 격분과 복수심에서 세겜 주민들의 멸망을 기원했고, 후에 그대로 되었다(삿 9:20). 그 저주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제력이 없는 격분을 시인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삼손도 이런 격정에 못이겨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라고 말했다. 의분도 다소간 섞여 있었지만, 지배적인 것은 타는 듯한, 따라서 사악한 복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허락하셨다. 이런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법칙대로 하지 않는 기도라도 효과가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보편적인 법칙은 개개의 예에 의해 폐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간혹 특수한 충동을 받은 소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 대해서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배려가 있었다. 제자들이 엘리야의 예를 따르도록 경솔하게 청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르는구나"(눅 9:55, 어떤 고대 사본에는 이 말이 있음역자 주)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도라 해서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는 것이 아니며 실례를 보더라도 성경의 교훈은 분명한 증거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하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시며, 부당한 고통을 받아 그의 도움을 간구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들어주신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평과 호소가 그의 앞으로 올라갈 때에, 비록 그들에게는 티끌만큼도 받을 자격이 없을지라도, 그는 그의 심판을 단행하신다. 부당한 압박을 받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여 허공을 치듯 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의 잔인, 강탈, 폭행, 정욕 및 기타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당돌함과 광분을 억압시키시며, 그들의 포악한 권력을 전복 시키셔서 눌린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믿음이 없이 하늘에 닿지 못하는 기도라도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시편에서는 분명히 가르친다. 여기에서는 곤란을 당한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자연적인 감정으로 토로한 기도를 구별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증명한다(시 107:5, 13,19). 하나님께서 이렇게 친절하신 것은 그들의 기도가 받을 만하다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런 경우에 의해서, 불신자들의 기도가 버림을 받지 않을 때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는 것을 역설 또는 명시하시려는 것이며 동시에 불신자들의 호소도 때로는 유익한 것을 보고 진정한 경배자들이 더욱 더 기도하도록 격려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을 떠나거나, 혹은 불신자들이 소원대로 된 것을 보고, 그들이 큰 이득이라도 얻은 것같이 시기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아합이 회개하는 체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감동하셨다는 말을 했다(왕상 21:29).1515)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그 분의 노여움을 풀려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는 곧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편 106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호소를 들어주시는 것을 보고서도 유대인들이(시 106:8-12)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완악한 본성으로 돌아간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신다(시 106:43, 106:13이하 참조)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사사기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울 때마다, 비록 그들의 눈물은 거짓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다(삿 3:9 참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어주시는 하나님께서는(마 5:45), 동기가 정당하고 곤경에서 구출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그 애원을 무시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것과 같다. 더 큰 구원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사무엘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어려워 보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시하지 않으셨는데도 소돔을 위해서 기도했고(창 18:23), 사무엘은 분명한 금지 명령이 있었는데도 사울을 위해서 기도했다(삼상 15:11). 수도가 파멸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예레미야도 같은 행동을 하였다(렘 32:16이하). 그들의 기도는 거절되었으나,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온건한 독자들이 만족할 만한 해답이 있다. 즉, 무가치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신 하나님의 보편적 원칙에 비추어 볼 때에, 이 특별한 경우에는 그들의 의견이 잘못되었으나, 그들에게 전혀 믿음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현명한 말을 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기원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하는 기도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그 뜻은 감추어 있고 변함없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현명하신 결정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1516) 옳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사건들의 결과를 조정하셔서, 믿음과 과오가 섞여 있는 성도들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 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들 자신의 변명은 될 수 있으나 타당한 모범으로 삼을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적당한 정도를 지나친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착실한 약속이 없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 다윗의 말은 적절하다. "깨(Awake)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시 7:6). 여기서 그는 현세적인 어떤 은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16.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유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나는 올바른 기도를 위한 법칙 넷을 말했으나, 그것은 너무 엄격하게 요구할 것이 아니다. 완전한 믿음이나 회개가 없을 때, 열성과 올바른 기원이 없을 때이런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거부하시리라는 것이 그 원칙들의 뜻이 아니다.

나는, 기도는 경건한 자와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대화이나 우리는 경외와 겸손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잡다한 요구를 함부로 늘어놓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탐내는 일이 없도록 하며, 생각을 고상하게 하여 하나님을 순결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하나님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1517)

이 법칙을 충분하게 또 올바르게 실행한 사람은 없다. 일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윗의 불평에도 무절제한 경향을 보이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가 고의로 하나님께 간하거나 하나님의 판단에 항의했다는 것이 아니라, 약해서 넘어질 듯한 그로서는 자기의 슬픔을 하나님의 품에 내던지는 것밖에 달리 위로를 얻을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말을 다 관용하시며 우리의 무지를 용서하신다. 참으로 이런 자비를 베푸시지 않는다면, 기도할 자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려 했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열성과 인내로 기도했지만 감정이 격동하였으며 아니, 때로는 끓어 넘쳤다. 이것은 우리가 설정한 첫째 법칙과 조화되지 않는 일이다.

특히 시편 39편의 끝을 보면, 이 거룩한 자는 격렬한 슬픔에 휩쓸려 거의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절망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손을 거두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 속에서 썩을 생각밖에 하지 않는 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고의로 격정을 폭발시키거나, 보통 악인들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할 뿐이다. 이런 시련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과 잘 조화되지 않는 기원도 입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고, 성도들도 합당한 일과 유익한 일을 충분히 생각해보지 못하는 예가 있다. 이런 결점이 있는 기도는 모두 배척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기의 죄를 슬퍼하며 자기를 책하며 즉시 올바른 자신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신다.

그들은 제 2 법칙에1518) 관해서도 죄를 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냉담한 자기와 재차 싸워야 하며, 자기의 부족과 불행에 대한 느낌도 그다지 절실하지 않아서 열렬한 기도를 드릴만 한 자극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자주 기도에서 멀어지고 거의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무기력하고 불완전한 기도, 또는 중단되고 막연한 기도는 거부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높이 들릴 때에 한해서 그의 기도는 합당하다는 이 원칙을,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의 마음에 심어두셨다. 여기서 두 손을 드는 형식이 생긴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1519) 이것은 모든 시대와 백성에게 공통된 형식이며, 지금도 실행되고 있다. 그러나 두 손을 들 때에 자신의 마음이 그대로 땅에 붙어 있는데도 냉담한 자기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용서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신자들이 이 문제를 경시하지 않지만, 기도에 참으로 능숙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윗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痛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라고 말한 제사의 십분지 일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사람은 항상 이중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는, 많은 죄를 지은 줄 알면서도 그 느낌이 미약해서 자기를 혐오하는 생각이 당연히 있어야 할 정도로 절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자기의 죄를 올바르게 슬퍼하고 완전히 낙심하여 그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신 경우에, 그들은 심판자이신 그의 진노가 자기들에게 내리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신앙의 연약함과 불완전은 신자들의 기도를 부패하게 만든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결점을 용서해주신다. 그 분께서는 마치 그들의 믿음을 소멸시키기로 굳게 작정하신 것처럼 어려운 시련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신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시련은, 마치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듯이,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때이다(시 80:4, 79:5 참조).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라고 할 때에(애 3:8) 그는 격렬한 불안에 사로잡혔던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무수해서, 성도들의 신앙은 의심이 뒤섞여 있고 또 의심으로 혼란 상태에 빠지므로 믿고 바라는 중에도 무심코 신앙의 결핍을 드러낸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수록, 성도들은 더욱 더 노력해서 자기의 결점을 시정하며, 기도의 완전한 표준에 매일 더욱 접근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치료책을 강구한다는 것이 도리어 새로운 병을 만들어 깊은 재난에 빠진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포함된 많은 결점을 하나님께서 무시하시지 않는다면, 공정한 입장에서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타기(唾棄)하실 것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은 신자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신 있게 자기를 용서하게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엄격한 자기 응징을 통하여 이런 장애를 극복하도록 노력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사탄이 그들을 기도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막으려고 애쓰더라도, 그들은 장애를 돌파해야 한다. 비록 모든 장애를 배제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즉시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그것을 향해서 분투하고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용납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 17-20)

17.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갈 가치가 없다. 우리는 수치감과 공포심에 못 이겨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이 수치감과 공포심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친히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대언자와(요일 2:1) 그의 앞에 있는 중보자로(딤전 2:5, 히 8:6, 9:15 참조)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인도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아무것도 거절하실 리가 없는 것과 같이, 아들이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하는 것도 거절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다. 또한 내가 믿음에 대해서 위에서 가르친 것은 모두 이 점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희망도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으면 기도의 유익과는 단절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두려운 존엄성을 생각하면1520) 우리는 그 순간 떨지 않을 수 없으며, 자기의 무가치를 느끼고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타나셔서 두려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변화시켜 주시기까지는 우리는 떨 수밖에 없다. 사도의 교훈에도 우리는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서 자비와 은혜를 받으며,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다(히 4:16).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이 있는 것과 같이, 특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명령이 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 16:24).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6), 그리고 "너희가‥‥‥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청하는 사람들은 완고하게 그의 명령을 멸시하며 그의 뜻을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구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없는데, 이 점은 분명하고 논박할 여지가 없다. 참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말한다(고후 1:20). 즉, 모든 약속이 확인되고 실현된다는 것이다.

18.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승천하신 후에는 자신의 중보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 그때의 상황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26).

처음부터 중보자의 은혜가 없으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응답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가르치신 것을 보면 성소 안으로 들어간 것은 제사장뿐이었고, 그는 두 어깨에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메고, 같은 수효의 보석이 달린 흉패(胸牌)를 가슴에 붙이고 들어갔다(출 28:21). 그리고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성전 뜰에 서 있었고, 거기서 제사장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참으로 제물까지도 그 가치는 기도를 확인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장차 있을 일을 예시한1521) 이 율법의 의식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도록 금지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며, 이 분이 우리를 그 두 어깨에 메고 그 가슴에 달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서 실현되도록 하신다.1522) 그뿐 아니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불결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그것에 피를 뿌려 정하게 하신다고율법의 의식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성도들은 무엇을 얻고자 할 때에 제물에 소망의 근거를 둔 것을 우리는 안다. 기도를 용납하게 하는 것은 제물이란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제(素祭)를 기억 하시여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시 20: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중보로 노여움을 푸시고 경건한 자들의 기도를 받으셨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엇 때문에 제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시작할 새로운 시기를 정하셨는가? 이 은혜가 지금은 더욱 빛나는 것처럼 우리 가운데서 더욱 인정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는 같은 뜻으로 조금 전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요 16:24)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은 제자들이 중보자의 직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모두 이 기본적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승천하신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하여 이전보다 더 확실한 변호자가 되시리라는 것을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특별한 은혜로 위로하시기 위해서 중보자의 직분을 취하시고, 그들이 지금까지 받지 못한 특별한 복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치셨다. 즉, 그들은 그의 보호를 믿고 더욱 자유롭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복을 누리리 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도는, 이 새로운 길을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히 10:20). 만일 우리만을 위해서 예정된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이 은혜를 우리가(속담같이) 두 팔로 껴안지 않는다면, 우리의 완고한 불순종은 더욱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이다.

19. 그리스도께서는, 신자 상호간의 중재에 있어서도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유일한 통로는 그리스도이시므로(요 14:6), 이 길에서 벗어나며, 이 통로를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바른 길이 없다. 하나님의 보좌에 그들을 위해서 남아 있는 것은 진노와 심판과 공포뿐이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인을 치셔서(요 6:27 참조) 우리의 지도자와(마 2:6) 머리로(고전 11:3, 엡 1:22, 4:15, 5:23, 골 1:18) 삼으셨으므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에게서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적어 놓으신 표지를 파괴하거나 훼손하려고 꾸준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중보자로 제정되었고, 그의 중보에 의해서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분, 기도를 쉽게 들어주시는 분이 되신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들은 서로 중재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이런 기도를 통해서 상호의 구원을 하나님께 호소한다. 사도가 이런 기도를 언급했으나(딤전 2:1), 신자들의 상호 중재 기도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 우리들이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자발적으로 아무 이해타산이 없이 사랑하며, 그 사랑하는 감정이 넘쳐 중재 기도로 나타나는 것같이, 그런 기도는 또한 한 머리와 관련이 있다. 이런 기도들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지 않으면 아무 기도도 사람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는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하는 모든 중보 기도는 저 유일 한 중보 기도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확정된 원칙으로 여겨야 한다. 참으로 특히 이 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배은망덕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각각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실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호소하는 것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거절하셔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교회의 변호인들로 임명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각각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남용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행위이니, 그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20.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며 불변한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요, 신자들은 중보 기도의 중보자라고1523) 지껄이는 궤변가들의 무의미한 말을 들어 보라. 마치 그리스도께서는 일정한 기간 동안에 한 번 중보 직책을 다하시고, 영원불변하는 중보 직책은 종들에게 맡기셨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영광의 작은 일부라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베어 내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친절히 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매우 다르다. 이 사기꾼들을 무시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하여, 경건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하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요일 2:1) 요한이 말할 때 그 뜻이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만 우리를 위해서 대언자가 되셨다는 것인가, 또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는 것인가?

바울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고(롬 8:34) 주장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다른 곳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딤전 2:5) 할 때에, 그는 조금 전에(딤전 2:1-2) 말한 기도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라고 말한 후에 바울은 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첨가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라고(딤전 2:5) 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리스도인들은 기도에 의하여 서로 다른 사람을 권고한다. 그러나 진정한 중보자는 한 분 뿐이시다. 그를 위하여 중보하는 사람은 없으나,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중보하신다"라고 동일한 설명을 한다. 사도 바울은 머리되시는 주님 밑에 있는 탁월한 지체였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였으며, 교회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진정한 제사장은 상징적으로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확고한 사실로 하늘의 내부 성소, 곧 실재(實在)하고 영원한 성결의 자리에 이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롬 15:30, 엡 6:19, 골 4:3). 또 그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자처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요구한다.

그 이유로서 그는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라고 한다(고전 12:25-26). 이렇게 모든 지체가 지상에서 애써 일하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그들보다 먼저 승천하신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다(요일 2:2). 만일 바울이 중보자였다면 다른 사도들도 그러했을 것이요, 만일 중보자가 여럿이라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은 한 분 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한 말은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면(엡 4:3)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한다(롬 12:5).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같은 말을 한다. "그러나 당신이 대제사장을 구한다면, 그는 하늘 위에 계신다. 그는 거기서 당신을 위해서 중보라고 계신다. 또한 당신을 위해서 땅에서 죽으셨다"(히 7:26이하 참조).1524)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를 위해서 애원하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실 때에는 그의 죽음의 힘이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 기도로서의 효과를 가진다고 이해한다(롬 8:34 참조).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하늘 성소에 들어가시며, 이 세상의 종말까지(히 9:24이하 참조) 홀로 백성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시며, 백성은 멀리 바깥뜰에 머물러 있다고 이해한다.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그릇된 교리를 배척함. 21-27)

21.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중보의 영광을 빼앗는다

육신으로 죽고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성자들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기도를 드릴 때에, 그들이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요 14:6) 통하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다른 이름으로 받아주신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꿈에도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소환해서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하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기를 원하신다(골 1:20, 엡 1:10). 그러므로 그를 떠나서는 들어갈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멀어질 정도로 성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것은, 미친 짓은 아니더라도 우매의 극치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이런 일이 보통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지금도 이른바 교황 제도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대개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빈번히 성자들의 공로를 내세우며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묻노니, 이것은 그리스도께만 속한다고 우리가 이미 주장한 그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지위를 성자들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조작한 소위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해서 누가 누구에게 한 마디라도 계시했다는 것인가? 그것이 천사였는가? 마귀였는가? 성경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조작을 했는가? 참으로, 항상 하나님 말씀에 근거가 없는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요, 그런 때에 그것은 자체에 신앙이 없음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나 성자들의 중재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그들이 불안에 눌려 있다는 사실에서 이것이 유래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든지, 또는 그리스도께서는 너무 엄격하신 것같이 느낀다. 첫째로, 이 혼란한 심리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며 유일한 중보라는 칭호를 그리스도에게서 빼앗는다. 그러나 이 칭호는 하나님께서 독특한 특권으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며, 그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은 이런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탄생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그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어 결국 그가 하신 일과 받으신 고통에서 그가 당연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박탈한다. 그의 행적과 수난 당하신 것을 보면 그 분 만이 중보자이시며, 또 그렇다고 생각해야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내던져 버린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버지로 나타나시는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형제로1525)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 대해서 형제애를 가지셨고 그의 사랑에 비교할 만한 인자하고 다정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형제로서의 그리스도를 분명히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를 그에게로 보내면, 그의 안에 우리를 든든히 세운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우리의 입이시며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말한다. 그는 우리의 눈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우리의 오른손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아버지께 우리 자신을 바친다. 그가 중간에 개입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성도들이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1526) 만일 그들이, 교회에서 공중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항의한다면 이런 항변은 무가치한 핑계에 불과하다.1527)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죽은 사람들의 기도나 공로와 뒤섞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혀 무시하고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예배 때의 글과 성가와 산문에서1528) 죽은 성자들에게 온갖 영예를 돌리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22. 성자 숭배

그러나 우매의 정도가 심해져서 지금은 명백히 미신으로 기울어진 이 경향은 제지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방자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성자들의 중재를 생각하게 된 후로 사람들은 각 성자에게 특별한 기능을 돌리고, 일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성자에게 또 어떤 때는 저 성자에게 중재를 기원한다. 그 다음에 각 사람이 어떤 한 성자를 자기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그의 보호를 신뢰하게 되었다. 옛날 예언자가 이스라엘을 책망한 것처럼(렘 2:28, 11:13), 도시의 수에 따라 신을 설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구수에 따라서 신을 정하였다.

그러나 성자들은 모든 소원을 하나님 뜻에만 관련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명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키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고 어떤 다른 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자들에 대해 우매하며 육적이며 모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들이 성자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서 각 성자는 자기를 숭배하는 자들에 대해서1529) 사적인 편애를 품었다고 한다.

그리고 끝으로, 성자들을 돕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구원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기도하는 무서운 신성 모독을 여전히 감행하는 자들이 지금도 아주 많다. 가련한 인간들은 정당한 입장에서, 곧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질 때에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다.

이런 무신앙의 더 큰 기괴한 일은 그것이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는 않겠다. 바르바라(Barbara), 카타린(Catherine), 기타 성자들의 조각이나 그림 앞에 엎드려 그들은 "우리 아버지"라고 중얼거린다. 사제들은 이런 미친 짓을 고쳐 주거나 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이득의 냄새를 맡고 그것을 시인하며 장려하면서 이런 추악한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면 엘리기우스(Eligius)나 메다르드(Medard)에게1530) 하늘에서 내려와 종들을 도와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하도록 거룩한 동정녀가 그 아들에게 명령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구실로 변호하려는가? 고대의 칼타고 회의에서는 제단 앞에서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다.1531) 당시의 거룩한 사람들은 악습의 세력을 완전히 꺾지 못했으나, 적어도 극단화를 방지해서, "성 베드로시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는 식의 기도로 공중 기도를 더럽히지 않도록 한 것 같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서슴지 않고 옮기게 되었으니, 이 악마적인 거만이 얼마나 더 광범위하게 퍼졌겠는가?

23. 성경의 혼란한 해석은 성자들의 중보 기도를 지지하려고 이용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중보 기도의 기초는 성경의 권위에 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들은 천사들이 기도했다는 기사가 성경에 자주 나온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의 기도가 천사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1532) 그러나 현세를 떠난 성자들과 천사들을 비교하고 싶으면,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 되었고 구원을 얻을 후사를 섬기는 임무를 받았다는(히 1:14) 것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는 임무가(시 91:11) 천사들에게 위촉되었고, 천사들은 우리를 둘러 진치며(시 34:7), 우리에게 경고와 격려를 하며 우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임무를 천사들은 받았지만, 성자들은 받은 일이 없다. 죽은 성자들과 천사들에 대해서 성경이 그 직무를 여러 가지로 구별한 것을 보더라도, 그들이 천사와 성자를 터무니없이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재판관 앞에서도 변호사 자격이 없는 사람은 감히 변호인의 임무를 행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에 직책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변호인들을 하나님께 강제로 떠맡기려고 하는 이 벌레 같은 인간들은 어디서 이 위대한 면허를 얻은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돌보는 직무를 천사들에게 맡기셨다. 그 결과로 그들은 성회에 참석하며, 교회는 그들이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보고 경탄하는 무대가 되었다(엡 3:10). 특히 천사들에게 속하는 것을 다른 데로 옳기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정하신, 침범해서는 안 되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부패하게 만든다.

그들은 그 민첩한 두뇌로 다른 증거를 끌어온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하셨다(렘 15:1).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산 사람들을 위해서 중재한다는 것을 모르셨다면 어떻게 이런 말씀을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하셨겠느냐고1533) 묻는다. 나의 추론은 그와 반대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대로 모세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중재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이 직접 나오게 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성자가 그 일을 하리라고 믿을 수 있는가? 모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일을 훨씬 잘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렘 15:1 참조)라고 하셨으므로, 죽은 사람들은 확실히 산 자들을 위해서 중재한다고 논쟁자들이 이런 무가치한 궤변을 계속한다면, 나는 더욱 그럴 듯한 추론을 하겠다. "만일 모세가 중재했다고 할지라도"라고 하였으니, 자기 백성이 극도로 곤란했을 때에도 모세는 중보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더 다른 사람은 중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온유함이나 인자나, 아버지 같은 관심 등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모세에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궤변가들은 냉소함으로써 자기들을 훌륭히 무장시킨 줄로 생각한 바로 그 무기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간단한 발언을 그와 같이 곡해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주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전에는 모세나 사무엘 같은 사람들의 기도를 잘 들었으나,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이 백성의 변호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에 불과하다. 에스겔서에 있는 비슷한 구절에서도 아주 분명한 뜻을 알아낼 수 있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그 자녀를 구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겔 14:14). 여기서는 "만일 이 셋 중의 둘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하는 뜻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사람, 즉, 다니엘은 그 때에 살아 있었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년 시대에 경건의 가장 훌륭한 증거를 보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분명히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또한 바울은 다윗에 대해 말할 때에, 그가 기도로 후손들을 도왔다고 하지 않고, 다만 그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했다(행 13:36).

24. 죽은 성자들은 세상의 근심 걱정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일생을 통해서 순전히 경건과 자비의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서 경건에 대한 욕망을 모조리 빼앗을 것이냐?"고1534) 항의한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조사하려는 호기심이나 욕망이 없다. 그와 같이 아마 그들도 여러 가지 특별한 욕망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이 일에만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는 신자의 구원에 못지않게 악인들의 멸망이 포함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의 사랑은 물론 그리스도의 몸이 가지는 친교의 범위 내에 머물며, 그 교제의 성격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그들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역시 그들의 안식을 버리고 지상의 근심 걱정에 끌려들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그들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그리고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고 해서(딤전 2:1-2, 약 5:15-16) 성자들에게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신자 상호간의 기도는 그들이 서로 곤란과 짐을 나누는 동안 그들의 사랑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한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것은 주님의 교훈이 있기 때문이며, 주의 약속도 있기 때문이다. 주의 교훈과 약속 이 두 가지는 언제든지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죽은 이들의 경우에는 이런 이유들이 하나도 없다. 주께서 그들을 우리에게서 데려가셨을 때에, 그들과의 접촉점을 우리에게 전혀 남겨놓지 않으셨으며(전 9:5-6),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들에게도 우리와의 접촉점을 남겨놓으시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 믿음으로 우리와 연결되었으니, 그들이 우리에게 대해서 한결같은 사랑을 지금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묻노니 우리의 음성을 들을 만한 귀가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또는 우리의 곤란을 지켜볼 만한 밝은 눈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누가 알려주었는가? 사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가 성자들에게 비치고 그 빛에 의해서 성자들은 마치 거울 속을 들여다보듯이, 인간 만사를 눈여겨본다고1535)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지껄인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특히 그들같이 담대하게 주장하는 것은, 우리 머리 속의 몽롱한 상태를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한 판단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을 하며 성결을 짓밟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와 원수가 된다고 자주 언명한다(롬 8:6-7 참조). 또한 우리의 헛된 생각을 전적으로 정죄하며(엡 4:17), 우리의 이성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우러러보라고 명령한다(신 12:32 참조).

25. 족장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옹호하려고 성경에 있는 다른 증거들을 가장 사악하게 왜곡한다. 그들은 야곱이 자기 자손들도 자기 이름과 자기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했다고 한다(창 48:16).1536) 우선 우리는 부른다는 이 형식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이었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도와달라고 부른 것이(기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례는 성자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우매한 자들은 미련하게도 야곱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나 그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형식까지도 유치하게 오해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이 말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온다. 이사야에는 여자들이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그 보호 하에서 살 때에, 남자의 이름으로 칭함을(=부름을) 받는다고 나와 있다(사 4:1).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른다는("칭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민족의 조상임을 말하는 것이며, 자기들의 시조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한 것은 자기 이름을 퍼뜨리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자기의 후손이 완전한 복을 얻으려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언약을 계승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후손들이 최고의 복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의 혈족으로 인정되기를 기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그들에게 언약을 계승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후손들로서는 이런 기억을 기도에 삽입함으로써 죽은 이들의 중재 기도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언약을 생각하시도록 한 것이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도들이 조상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언서에서 교회가 이구동성으로 증거한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上古)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사 63:16).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다.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 63:17). 그들은 중보 기도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언약의 유익에만 유의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 예수께서 계시고, 그의 손으로 영원한 자비의 언약을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에 다른 이름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성경 말씀이 족장들을 중보 기도자로서 확인한다고 이 훌륭한 교사들은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많은 중보 기도자들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교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가장 낮은 자리도 그들 사이에서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가? 저 교사들이 어떤 종류의 찌끼에서 그들의 대변자를 만들어내는가는 세상이 잘 안다. 교사들은 내게 대답해 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보다 앞에 두셨고, 최고의 영광의 자리에 올리셨는데, 아브라함을 버리며 묵살하는 것이 어떻게 합당하단 말인가? 이런 관습은 고대 교회가 알지 못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관습이 새로운 것이란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옛 족장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이름이 다양하면 최근에 생긴 부패한 관습을 용서받을 것같이 생각하는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위해서" 백성에게 자비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다고(시 132:10 참조) 항변한다.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과오를 지지하기는커녕 도리어 강력하게 반박한다. 다윗이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는 모든 성도들과 구별되어, 그의 손을 거쳐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언약을 고려한 것이고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선포한다. 다윗이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인 점에서 본다면, 다윗에게 특별했던 것은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26.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듯이 성자들도 기도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자들의 기도에 응답이 있었다는 말이 자주 있는 데서 영향을 받는 것 같다.1537) 왜 응답이 있었는가? 물론 기도했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말에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시 22:4-5)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들을 본받아 기도하여 저들과 같이 응답을 받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당치 않은 불합리한 추리를 해서, 이미 기도에 응답을 받은 사람들만이 앞으로도 응답을 받으리라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무엇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가? 야고보는 엘리야에게 독특한 특권이 있었으므로 우리가 그 특권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경건하고 순수한 기도의 무한한 힘을 가르침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이 기도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이런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굳게 믿지 않는 다면, 우리는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과 호의를 악의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실 때에 어느 한 사람이나 몇 사람에게만 한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시겠다고 언급하셨다.

반대자들은 성경에 많이 있는 경고를 고의로 멸시하는 듯 하므로, 그들의 무지는 더욱 용서할 수 없다.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 권능을 독점했으므로 우리가 그의 요청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이었는가? 다윗 자신은 아주 다른 주장을 한다. "주께서 나를 후대(厚待)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142:7),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시 52:6, 64:10),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 34:6).1538) 시편에는 이런 종류의 기도가 많고, 다윗은 자기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들어주심으로써 의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며, 그의 예를 보고 용기를 얻어 소망을 가지게 되도록 하나님께 호소한다. 이제 한 가지 예만 더 드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하도록 하자.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시 32:6). 이 성구를 내가 더욱 기꺼이 인용한 것은, 교황 제도를 옹호하기 위하여 고용된 논쟁가임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이 구절이 죽은 자들의 중보 기도를 입증하는 것같이 말하기 때문이다.1539) 다윗은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 하나님의 온유와 인자하심에서 생겨날 결과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이 고용된 논쟁가들은 다윗의 뜻이 다른 데 있었던 것같이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유의해야 될 점이 있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경험은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데 비상한 도움이 된다.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러 가지 은혜를 확신의 근거로서 회상하는 구절들이 많으나, 시편의 독자들은 잘 알겠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인용하지 않는다. 야곱도 자기의 예를 들어 같은 뜻을 가르쳤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10). 그는 약속을 말하지만, 약속뿐만 아니라 그 결과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대해서 변하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더욱 용기 있게 믿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달라서, 너그러우심에 싫증을 느끼지 않으시며 힘이 다하는 일이 없으시며, 그 자신의 성품으로 인하여 존귀를 받으실 분이시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현명하게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시 31:5)라고 말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은 믿을 만 하시다고 첨가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히 불변하지 않으시다면, 그의 은혜를 받더라도 그를 믿으며 그에게 기도할 만한 충분히 확고한 기대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때마다 우리에 대한 호의와 신의를 예시하시며 증명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기대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거나 속이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7. 성자들의 중보 기도에 대한 교리를 결론적으로 논박함

종합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관해서, 성경이 가장 중요시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의 의무를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모든 제물은 그 다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를 다른데 드리는 것은 분명한 신성 모독이다. 따라서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 하셨으리이까"(시 44:20-21). 또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기뻐하시며,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신다. 끝으로, 말씀을 기초로 한 믿음은 올바른 기도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멀어지는 기도는 즉시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1540) 성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이 영예는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하였다. 중보하는 직무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리스도특유의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1541) 이 중보자가 성결케 하시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신자들이 서로 교우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다.1542)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중보를 믿으면서 자기와 다른 교우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뿐 아니라, 이 중보의 직무를 죽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우리는 가르쳤다.1543) 그 이유는 성경에는 죽은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한 곳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호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자주 권하지만, 죽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하며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약 5:16) 두 가지 권고를 결합하여 언급함으로써 무언중에 죽은 사람들을 제외하였다.

그러므로 이 과오를 정죄하는 데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올바른 기도는 믿음에서 생기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생기며(롬 10:14,17), 하나님의 말씀에는 상상에 불과한 중보 기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자를 자기들의 대언자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신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형식의 기도가 가득하나, 이런 중보 기도의 예는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황주의자들은 그것이 없으면 아무 기도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뿐 아니라, 이 미신은 분명히 믿음이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들은 대언자로서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에게 이런 자격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둘째 점을 쉽게 증명하는 것이 그들의 뻔뻔스러운 주장이다. 그들은 성자들의 변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고작 제시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는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하게 접근할 가치가 없다는 것뿐이다.1544) 우리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 불발한 우리의 결론은 이것이다. 즉, 영국에서 숭배하는 성자 죠지(George)나 히폴리투스(Hippolytus)나1545) 이와 비슷한 유령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도 무가치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일도 하실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의 종류 : 개인기도와 공중기도. 28-30)

28. 개인기도

기도는 원래 간원과 간구에 한한 것이지만, 기도와 감사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 이름으로 총괄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다. 바울이 열거하는 것은 처음 종류에 속한다(딤전 2:1 참조). 요구하며 간구함으로써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널리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구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은혜를 구한다.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에 합당한 찬양을 돌리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을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에 돌린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다(시 50:15).1546) 양쪽을 항상 사용하라는 성경의 명령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무거운 빈곤의 짐과 체험상의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우리를 사방에서 압박하는 곤란은 많고 또 강력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신음하며 탄식하며 애원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거룩한 자들은 역경을 모르는 경우에도, 자기의 죄책감과 무수한 유혹의 침범에 직면하므로, 아무리 거룩한 자라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의 제물을 드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주셔서, 우둔하고 태만한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게 하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한다면,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는 크고 많으며 어디를 향하나 강력한 기적이 많이 보여 우리는 거의 압도될 정도이므로, 찬양과 감사를 드릴 이유와 기회가 언제든지 있다.

이 일들을 좀더 충분히 설명한다면, 이미 충분히 증명한 바와 같이,1547) 우리의 소망과 재산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기 때문에, 그의 복을 얻지 못하면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소유는 번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항상 하나님께 맡겨야 하며(약 4:14-15 참조) 우리가 결정하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손과 뜻 아래서, 즉, 그가 도우시리라는 희망으로, 결정하며 말하며 행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믿고 계획을 세우며 실행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서 무슨 일을 착수하는 사람들도 같은 저주 아래 놓여 있다(사 30:1, 31:1 참조). 또 우리가 여러 번 말한 것과 같이,1548)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그를 바르게 공경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받을 때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순전히 너그러우신 뜻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들에 대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 쓸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결론도 나온다. 바울이 모든 것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딤전 4:5) 증거할 때에, 그는 동시에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서 거룩하며 순결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말씀"을 그는 환유법에 의해서 "믿음"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깨닫고, 아름다운 말로 "새 노래"를 그의 입에 두셨다고 공언한다(시 40:3). 그의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 침묵은 곧 원망을 의미한다는 암시가 자연히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마다 그에게 감사할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선포하면서, 신자들에게 새로운 특별한 노래를 부르라고 역설한다(사 42:10). 같은 뜻으로 다윗은 다른 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히스기야와 요나도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결과에 대해서 같은 형태로 증명한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여 노래하리라고(사 38:20, 욘 2:9) 하였다.

다윗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같은 법칙을 지시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시 116:12-13). 교회는 다른 시편에서 이 법칙을 따른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여 우리를 구원하사‥‥‥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1549)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시 102:17,18,21). 사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시도록 간구하며, 자기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감사할 의무를 가지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사용하고 선포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래서 호세아는 교회가 앞으로 구속을 받을 것을 말한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 14:2)

하나님의 은혜는 찬양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자연히 신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라고 말한다(시 116:1).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자기가 경험한 도움을 말하면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한다(시 18:1). 이 감미로운 사랑에서1550) 흘러나온 찬양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감사와 결합되지 않은 간구는 모두 사악하다고 한 말의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한다(빌 4:6) 불평, 권태감, 초조감, 비통, 공포 등의 마음 상태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게 감정을 조절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여기서는 거의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해서 완전히 실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때마다 더욱 거룩한 연관을 지어 우리에게 그를 찬양할 의무를 지우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로 우리의 기도가 성별되며, 그렇지 않으면 부정할 것이라고 가르쳤다. 마찬가지로 사도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면서(히 13:15),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입은 부정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것을 보면, 교황주의자들이 대부분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대언자"라고 부르는지 모르고 있으니, 그들은 이상하게 홀려 있는 것이라고 추론하게 된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이유는(살전 5:17-18, 딤전 2:1,8 참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때와 모든 장소와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 드리며,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바라며, 모든 일을 위하여 그를 찬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인데 이는 그 분께서는 우리에게 찬양하며 기도할 확실한 이유를 주시기 때문이다.

29. 공중기도의 필요성과 위험성

끊임없는 기도는 특히 개인의 사적 기도에 관한 것이지만, 교회의 공중 기도에도 어느 정도로 연관된다. 그러나 공중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찬성하여 합의된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끊임없이 드릴 수 없고, 또 그런 공중 기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을 정하게 되는데 하나님께는 어느 시간이라도 상관없지만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적당하도록 일정한 시간을 합의하여 결정하며, 바울의 말대로 교회의 모든 일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고전 14:40) 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각 교회가 가끔 어떤 감동을 받아서 더욱 자주 기도하며,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더욱 큰 열성으로 기도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견인에 대해서는 끝에 가서 논하려 한다.1551)

그런데 이 문제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금하신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것과는1552)(마 6:7)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금하시는 것은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나 긴 기도나 깊은 감정이 섞인 기도가 아니다. 그가 요구하시는 것은 많은 말, 유창한 말로 하나님의 귀를 자극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거나 사람을 설복하듯이 하나님을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1553)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개선식에서 하듯이 기도에서 호화찬란한 외식(外飾)을 보인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저 바리새인은(눅18:11) 마치 이런 기도로 거룩한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어보려는 듯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칭찬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도 교황주의자들 사이에는 같은 이유로 빈말의 반복이 유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기도를 자꾸만 되풀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태산같이 많은 말로 자기선전을 한다. 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이런 유치한 조롱을 금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들리는 기도는 진실해야 하며,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패한 요소와 근사한 것이 또 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께서는 동시에 배척하신다. 위선자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많은 목격자가 있기를 갈망하며, 시장에 자주 다니면서 기도하여 세상의 환호를 잃지 않으려고 한다(마 6:5). 우리는 이미 기도의 목표에 대해서 말했으므로1554), 즉, 하나님을 찬양할 때나 그의 도움을 간구할 때나,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으므로 기도의 본질은 정신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또는, 기도는 원래 속마음이 감동된 것이요,1555) 그 감동 받은 것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롬 8:27 참조) 쏟아 놓으며 펼쳐 놓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늘 교사께서는 최선의 기도법을 정하셨을 때에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데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면, 은밀히 보시는 우리 아버지께서 들어주시리라고 하셨다(마 6:6). 빈말과 허식적인 기도로 사람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위선자들을 멀리하라고 하신 주께서는 또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더 훌륭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주께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뜻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마음속으로 침잠할 수 있는 고요한 곳을 찾아 모든 생각을 집중하며, 마음속으로 깊이 파고들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감동시키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속 가까이에 계실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다(고후 6:16 참조).

주의 말씀은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는 은밀한 것임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기도는 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무수한 근심 걱정에서 멀리 떨어진 고요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도 기도에 더욱 집중하시고자 할 때에는 항상 군중으로부터 멀리 떠나 고요한 곳을 찾아가셨다. 주께서는 이렇게 행하심으로써 우리가 이런 보조 수단을 경시하지 않도록 깊은 인상을 주고자 하신 것이다. 원래 너무도 불안정한 우리의 마음은 이런 수단으로 기도에 더욱 열성을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때에는 군중 속에서도 기도하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필요하다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한다(딤전 2:8).1556) 끝으로, 우리가 생각할 점이 있다. 신자들의 거룩한 집회에서 기도하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은밀한 곳에서, 또는 자기 집에서 기도한다는 뜻도 모르는 자이다. 또 단독으로 사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보다 사람들의 의견을 더욱 존중하기 때문에 아무리 쉬지 않고 공중 기도에 참가하더라도 장황한 기도를 드릴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공중 기도를 멸시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일찍부터 그런 기도를 영예로운 명칭으로 장식하셨는데, 특히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셨다(사 56:7, 마 21:13). 이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는 뜻은 기도하는 일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활이며, 성전을 깃발같이 세워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에 참가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약속도 첨가되었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예언자가 이 시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드리는 기도에는 반드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기쁜 노래를 부를 기회를 항상 주시기 때문이다. 율법의 그림자는 없어졌으나 지금도 확실히 옛날과 같은 약속이 우리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의식으로 우리들 사이에 믿음의 단결을 조성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확인하셨을 뿐 아니라, 바울도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

30. 하나님의 성전은 교회 건물 자체가 아니고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신자들의 공기도를 명하시므로, 우리에게 는 이 공기도를 드릴 공공의 성전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기도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자기 골방으로 들어간다는 거짓 구실을 만들 기회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구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마 18:19-20). 즉, 공기도를 멸시하시지 않는다고 확언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주님의 뜻은, 이런 공기도에는 외식(外飾)이나 무가치한 인간적 영광을 추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하며, 마음의 은밀한 곳에 진지하고 성실한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교회 건물의 합당한 사용법이라고1557) 한다면, 또 사실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정식 장소라든지, 교회 건물에 어떤 비밀한 신성성이 있다든지 하는 생각을 경계해야 한다. 수백 년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 건물 자체에 계시며, 거기서는 우리 기도를 더 가까이 들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건물 자체가 거룩하므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게 만드는 것처럼 꾸몄다.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의 거룩한 성전에서 기도하고 싶으면 우리 자신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미련한 생각을 유대인이나 이교도들에게 일임 해두자. 우리가 받은 계명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장소를 구별할 것 없이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요 4:24) 구하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성전이 기도와 제물을 드리는 일에 제공된 것은 사실이다. 그 때에는 진리가 숨겨졌었고 이런 그림자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진리가 산 현실로 우리에게 나타난 지금은 우리가 물질적인 성전에 집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성전 건물 안에 가둔다는 조건으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한 성전의 모양을 명상하는 훈련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손으로 만든 성전 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사야와 스데반은 엄숙하게 책망하였다(사 66:1, 행 7:48-49).

(노래와 일상 언어로 사용하는 문제. 31-33)

31. 기도 중에 말하며 노래하는 문제에 대하여

여기서 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기도 중에 쓰여지는 말과 노래는 심령의 깊은 느낌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1558) 그것들이 입술이나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킨다. 이런 짓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존엄성을 조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의 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말은 미치는 범위가 더 넓지만 여기서 말하는 잘못된 점을 책망하는 데도 관련이 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마 15: 8-9).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14).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말과 노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의 감동과 관련된 것이면 극력 장려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깨어 있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여러 가지 보조 수단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불안정하며 쉽게 변하며 해이하여져 여러 방면으로 흩어져 버린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신체 각부에서 어느 정도로 빛나야 하므로, 노래와 이야기를 통해서 혀가 이 일을 하도록 맡겨진 것은 특히 합당하다. 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전하며 선포하도록 독특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혀는 주로 공중 기도에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기도는 신자들의 집회에서 하는 것이며, 이런 기도로 우리는 한 공통된 음성과, 이를테면 같은 입으로 모두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한 영과 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공개적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각각 서로 그 교우에게서 신앙 고백을 받으며, 교우의 행위에서 권유와 고무를 얻도록 한다.

32.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

겸해서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문제를 논한다면, 이 관습은 심히 오랜 것일 뿐 아니라 사도 시대에도 있었다. 이것은 바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마찬가지로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말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처음 구절에서 바울은 음성과 심령으로 노래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다음 구절에서는 신자들이 서로 덕을 세울 수 있는 신령한 노래를 장려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밀라노 교회는 암브로시우스 때에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관습이 세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때에 밀라노 교회는 발렌티니아누스의 모친 유스티나가 정통 신앙에 맹렬히 반대해서,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욱 끊임없이 기도에 전심할 때였다. 그 후에 서방 교회들은 밀라노 교회를 본받았다.

이는 조금 전에 어거스틴이 이 관습은 동방 교회에서 왔다고 말한 이유이다.1559) 그는 또 저서 재고론(Retractations) 제 2 권에서 말하기를, 아프리카에서는 한창때에 이 관습을 시작했다고 한다. "호민관을 지낸 힐라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칼타고에서 최근에 시작한 이 관례에 대해서 악의를 품고, 기회 있는 때마다 비난 공격을 했다. 그 때의 노래는 성체를 들기 전 또는 성체를 사람들에게 나눠줄 때에, 성찬대 앞에서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교우들의 권고로 내가 그에게 답변했다."1560)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합당하고 엄숙한 태도와 조화를 이룬 노래를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행동에 확실히 위엄과 운치를 더하며,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하겠다는 진정한 열성을 일으키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곡조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마음을 덜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거스틴도 이 위험성을 많이 염려해서 어떤 때는 아타나시우스가 지킨 관례가 확립되기를 원했노라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음성에 억양을 적게 붙여서, 노래를 한다기 보다 말하는 것같이 들리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노래에서 받은 유익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거스틴은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1561) 그러므로 이렇게 적당한 정도를 지킨다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확실히 대단히 거룩하고 유익한 일이다. 그러나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존엄성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33. 기도는 일상용어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중기도도 종래의 관습 같이 라틴 사람들 사이에서는 헬라 말로,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틴말로 드릴 것이 아니라, 온 회중이 아는 국어를 사용해야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온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말은 교회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한다. 사랑이나 친절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바울의 권위와 그가 한 분명한 말에서 다소 감동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고전 14:16-17).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방자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사도의 솔직한 비난을 무시하고 태연하게 외국어로 장구한 기도를 고고하게 드리지만, 그 말의 뜻은 자신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고 말하였다. "영"이란 말은 방언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혜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능력을 받고 방언과 지성, 즉, 이해력을 분리함으로써 은혜를 남용하였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공중기도에서나 개인기도에서나 이해력을 동반하지 않은 말은 하나님께서 심히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느낀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지성은 열렬한 생각으로 불붙듯하여 방언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기도를 위해서는 방언이 필요하지 않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예외가 있다면 마음속에 남용되는 힘이 부족해서 기도를 제대로 못할 때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동이 압도적이어서 자연히 방언의 행동이 일어날 때이다. 가장 훌륭한 기도도 때로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느낌이 격동된 때에 방언이 말로 터져 나오며 다른 지체들은 어떤 동작을 하게 된다. 한나가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는 것도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삼상 1:13), 모든 성도들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항상 하는데, 그런 때에 그들의 기도는 단편적인 말로 되어 폭발한다.

기도할 때에 보통 보는 몸짓, 예컨대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등은 하나님을 더욱 공경하기 위한 것이다.

(주기도문 : 처음 세 기원에 대한 해설. 34-43)

34.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이 된다

이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더욱 확실한 방법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의 양식 자체를 배워야 하는데, 하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그것을 가르쳐주셨다(마 6:9이하, 눅 11:2이하). 우리는 이 양식에 의해서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심과 관용에 감사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어린이들이 어려운 근심 걱정이 있을 때마다 부모의 보호 아래로 달려가 피난처를 얻는 것같이, 우리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으라고 경고하시며 역설하신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지를 우리의 빈곤이 얼마나 심한 것인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공정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한지 등 충분한 인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보충해 주셨다. 즉,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 양식을 정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기도해도 좋은 것과, 우리에게 유익한 것과, 우리가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한 도표에 적은 듯이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이 친절하신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큰 위안을 받게 된다. 곧, 우리가 구하는 것이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으며,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조금도 부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우리는 거의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기도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기술이 없는데다가 성취되면 도리어 자기들에게 해로울 일을 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어떤 고대 시인의 말을 빌어, 가장 훌륭한 기도라고 생각한 것을 결정하였다. "제우스 신이여, 우리가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를 상관하실 것 없이 가장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그리고 좋지 못한 일들을, 비록 우리가 원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명령하소서."1562) 참으로 우리의 욕심대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짓이라고 판단될 만한 총명이 이 이교도에게도 있었다. 동시에 그는 우리 인간의 불행을 밝힌다. 성령이 바른 기도 양식을 가르쳐주시지 않는다면(롬 8:26)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 때에 반드시 위험한 일을 초래할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 양식을 성령으로부터 배운다는 이 특권을 우리는 더욱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친히 우리 입에 말씀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일체의 동요가 없게 하였기 때문이다.

35. 구분과 중요한 내용

이 기도의 모범 양식에는 여섯 가지 기원이 포함되었다. 일곱 제목으로1563) 구분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찬성하지 않는 것은 복음서 기자가 반의 접속사(αλλα, 마 6:13역자 주)를 사이에 넣은 의도는 두 부분을 결합하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저희들이 유혹의 압박을 받게 버려두실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력한 우리를 도우셔서 넘어지지 않게 구해주옵소서"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도 우리와 의견이 같다.1564)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일곱째 자리에 첨가된 것은 해석상으로는 여섯째 자리에 넣어야 한다.

이 기도는 그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중요시 하지만, 처음 세 기원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점에만 유의하고 소위 우리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남은 세 기원은 우리 자신을 돌보는 일에 관련되며,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구해야 할 것에 대해 특히 배정되었다. 그래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는 것이 자유로운 마음에서 하는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를 하나님께서 시험하려 하시므로, 우리는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아 이 한 가지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기원과 같은 부류의 다른 기원들에 관해서도 꼭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하는 대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면 그 결과로 우리 자신도 거룩하게 성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이익에는 눈을 감아, 전혀 보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사적 이익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 때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세 가지 일을 여전히 원하며 기도해야 한다. 모세와 바울이 한 일을 보면, 그들은 자기를 생각하거나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맹렬한 열의로 자기의 멸망을 갈망하는 것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멸망하는 것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출 32:32, 롬 9:3).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할 때에도 우리 자신의 유익을 기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면 이 양식도 구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1565) 그러면 이제부터 주기도문을 해석하기로 하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36. "우리 아버지"

우선 우리는 바로 우리가 전에1566) 말한 사실에 봉착한다. 즉, 우리는 모든 기도를 다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 다른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놓는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사람이 누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아주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예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참 아들이시지만 그 자신의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로1567) 주셨는데 이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신 이 위대한 복을 우리가 확고한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양자로 삼으신 그 은혜에 의해 본래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것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요 1:12)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가 그를 대할 때에도 이렇게 부르기를 원하신다. 이 한없이 다정한 이름으로 그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불신감을 없애려 하신다. 아버지의 사랑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 대한 그의 무한한 사랑을 증명하시는 데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요일 3:1) 부르는 것 이상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사람의 선함과 자비를 초월하는 것과 같이, 그의 사랑도 육신의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며 훌륭하다. 따라서 땅에 있는 모든 아버지들이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잊으며 자기 자녀들을 버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시 27:10, 사 63:16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딤후 2:13). 우리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예언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낯선 사람이나 외국 사람에게 보호를 청하여 몸을 맡기려는 아들은 동시에 반드시 자기 아버지의 잔인한 처사나 빈곤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데서 도움을 구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빈곤이나 수단의 결핍이나 잔인성과 지나치게 엄격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7. "우리 아버지":이 호칭 형식은 우리를 격려할 것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비록 친절하시고 인자하시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매일 우리를 불쾌하게 생각하시게 되므로, 우리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만일 인간 사회에서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을 때에, 변호인을 시켜서 자기 일을 호소하게 하며, 중재인을 시켜 화해하려고 하며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아버지 앞에 나가서 겸손하게 탄원하는 태도로 죄를 고백하고 아버지의 자비를 간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면, 이런 때 그 아버지로서는 아들의 간청에 감동되지 않은 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의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는(고후 1:3 참조) 어떻게 하실까? 그 분께서는 다른 사람들의 호소보다 직접 애원하는 자녀들의 눈물과 신음에 더욱 주목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직접 호소하라고 권고하신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자비와 친절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포심에서 행하는 일이며, 거기는 절망적인 심리의 흔적이 없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풍부하신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비유로 묘사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눅 15:11-32). 어떤 아들의 마음이 아버지를 떠나, 그의 재산을 방탕한 생활에 낭비하고(13절), 모든 일에서 그에게 큰 죄를 지었다(18절). 그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려 아들을 껴안고, 그가 용서를 빌기 전에 먼저 용서하며,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 기꺼이 달려가 맞이하며(20절) 위로하고, 다시 사랑받는 아들로 만든다(22-24절). 사람에게도 이렇게 큰 애정이 있다는 것을 보이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에게서 기대해야 할 사랑이 얼마나 더 풍부한가를 가르치신다. 그는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시다. 문제는 은혜를 모르고 반역하며, 사악하고 완고한 우리가 그의 자비를 여전히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하는 데 달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자신이 그러한 아버지라고 하는 확신을 더욱 강화시키시기 위해서 우리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부르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버지, 당신은 자녀들에 대해서 풍성하고 위대한 애정을 품으셨고, 언제든지 그들을 용서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하신 아버지를 가질 가치가 없는 저희들이지8?당신께서는 우리를 향해 아버지로서의 애정만을 품으신 것을 확신하며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의 자식들인 저희는 당신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좁은 마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양자된 것을 보증하실 뿐 아니라, 이 일에 대한 증거로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큰 목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갈 4:6, 롬 8:15).

그러므로 어떤 주저하는 생각이 우리 앞을 막을 때마다, 우리는 이 공포심을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하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면서 그의 지도로 담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38. "우리 아버지":이 호칭 형식은 우리와 교우들과의 친교를 확립한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교훈은 각각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모두 공통적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들 사이에 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준다. 왜냐하면 자비와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다는 똑같은 권리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동등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한 아버지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되시며(마 23:9), 우리가 얻는 좋은 것이 모두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기꺼이 또 진심으로 서로 나누지 못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을 뻗치기를 원한다면, 이 합당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형제들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훌륭하신 아버지의 보호가 그들 위에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들을 총애하신다면 다른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인간 사회에서 한 가족의 아버지를 진정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그의 가족 전체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백성과 가족과 그리고 그의 기업에 대해서까지도 아버지께 대한 것과 똑같은 열성과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이는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존중하셔서 독생자의 충만(엡 1:23)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즉, 현재 눈에 보이며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기도 중에 기억해야 한다는 법칙과 일치해야 한다.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정하셨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하며 바라는 것이 인정을 받을 일일 뿐 아니라 경건한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의 가족 곧 바울이 모든 일에 있어서 특히 우리에게 부탁한 사람들에 대해서(갈 6:10) 특별한 애정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요약하면, 우리의 모든 기도는 우리 주께서 그의 나라와 그의 가족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공동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어야 한다.

39. 기도와 자선을 비교함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나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때에도 우리의 마음이 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피하려 하지 말고, 모든 일을 거기에 관련시키라는 뜻이다. 이런 기도는 각각 개인적으로 드리지만 그 기도가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은 공통된 기도이다. 다른 일과 비교하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자기들이 알고 또 보기에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람이 이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을 모두 알 수도 없고 모두 구제할 수도 없으므로 고통 받는 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빠뜨리게 된다. 그와 같이, 교회라는 공동 사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특수한 기도를 드릴 때, 즉, 하나님께서 잘 알려 주신 사람들의 곤란이나 자기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릴 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와 자선은 모든 점에서 같은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주는 일은 궁핍한 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도를 통한 도움은 아무리 먼 곳에 있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줄 수 있다. 이런 도움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포함한, 따라서 저들도 포함한, 일반적인 기도 양식을 통해서 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이 그 당시 신자들에 대해서, 다툼 없이 어디서나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역설한 사실을 들 수 있다(딤전 2:8). 바울이 다툼은 기도의 문을 닫는다고 경고한 것은 신자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를 드리라는 뜻이었다.

40.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다는 말씀이(마 6:9)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울타리 안 같이 둥근 하늘 안에 둘러싸여 갇혀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솔로몬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왕상 8:27). 예언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그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말씀하신다(사 66:1, 행 7:49, 17:24 참조). 이렇게 말씀하시는 뜻은, 그가 어떤 특수한 공간 내에 갇히신 것이 아니고 만물에 편만(遍滿)하시다는1568) 것이다. 그러나 우둔한 우리의 지성은 그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보다 더 숭고하거나 존엄한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란 말로 그의 영광을 표시하게 되었다. 우리의 감각 기관들은 어떤 것을 지각하면, 그것을 그 장소와 결부시키는 것이 보통이므로 하나님을 모든 공간을 초월한 곳에 둔다.

그래서 그를 찾으려고 할 때에 우리는 육체와 영혼의 모든 지각을 초월해야 한다. 둘째로, 이 표현에 의해서 우리는 그를 부패하거나 변하지 않는 영역으로 높인다. 끝으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힘으로 우주 전체를 포용하시며 유지하시며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크시며 또는 높으시며, 이해할 수 없는 본질을 가지셨으며, 무한한 위력을 가지셨으니 영생 불사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생각은 높이 비약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자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꿈꾸게 되고, 우리의 작은 척도로 그를 재며, 그의 뜻을 우리의 감정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가 그의 섭리와 권능으로 천지를 지배하신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요약한다면, "아버지"라는 이름이 우리의 눈앞에서 그려 주는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을 품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라는 다정한 이름은 신뢰감을 일으킬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의심스러운 거짓 신들에게 끌리지 않게 하는 힘이 있으며, 우리의 마음이 독생자로부터 천사들과 교회의 유일한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을 허락했다. 둘째로,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어서 온 우주가 그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그리고 그는 기꺼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도움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히 그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사도는 말한다(히 11:6).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낮은 자들에게도 그의 섭리가 미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이 초보적인 지시에 의해서 바울은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 교육을 한다.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라고(빌 4:6) 명령하기 전에 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빌 4:5) 서두를 끄집어낸다. 이것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는 것을(시 34:15, 벧전 3:12 참조)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마음의 의혹과 혼란으로 자기 마음속에서만 기도를 되풀이할 뿐이다.

41. 첫째 기원

첫째 기원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것이다(마 6:9). 이 기원의 필요성은 우리의 큰 수치와 관련이 있다. 우리의 배은망덕과 악의로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참담함과 미친 듯한 불경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는가? 비록 모든 불경한 사람들이 신성 모독적인 방자한 행위로 영광을 흐리게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은 여전히 거룩하게 빛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니"(시 48:10). 예언자의 이 선언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곳에서는 그의 권능도 나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위력, 선하심, 지혜, 공의, 자비, 진리 등에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의 거룩하심을 부당하게 빼앗고 있으므로, 그것을 옹호할 힘이 우리에게 없을지라도, 적어도 기도 중에라도 관심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요약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거나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반드시 최고의 경의를 품어야한다. 이와 반대되는 현상은 지금까지 너무도 흔했던 신성 모독이며, 이것은 지금도 세상에 만연되어 있다. 우리 사이에 조금이라도 경건한 기풍이 있다면, 이 기원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하나님 이외의 모든 다른 이름과는 관련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될 때에, 거룩은 그 순수한 영광을 나타낸다. 우리가 여기서 받은 명령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수호하셔서 모든 경멸과 불경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전 인류를1569) 복종시키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만드시기를 기원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부는 교훈으로, 또 일부는 행동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므로 우리가 그를 거룩히 받드는 것도 이 두 가지 방면에서 그의 것을 그에게 돌리며, 따라서 그에게서 오는 것을 모두 받아들일 때에만 가능하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의 표지를 각양각색의 업적에 새겨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자비심뿐만 아니라 그의 엄격하심도 찬양해야 하며, 이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 사이에서 그 정당한 권위를 가지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우주 통치의 어디를 보아도 그가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원에는 다른 목적도 있는데, 그것은 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모든 불신과 불경이 일소되며, 소멸되며, 거룩하게 받드는 일을 흐리게 하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비방과 조롱이 추방되며, 모든 모독 행위를 침묵시키고, 존엄하신 하나님께서 더욱 더 빛나시게 되는 것이다.

42. 둘째 기원

둘째 기원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것이다(마 6:10). 이 기원에는 새로운 점이 없지만, 첫째 기원과 분리시킨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가장 중대한 일에 대해서도 태만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문제의 성질상 철저히 이해되어야 했을 것이 사실은 그렇게 되지 못한 때에는 우리는 거기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논의를 연장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모두 사로잡아 마침내 완전히 격멸 시키시기를 기원한 다음에, 거의 똑같은 기원을 하나 더 첨가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는 전에1570) 있었지만, 여기서 간단히 반복하겠다. 사람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과 지상 생활을 경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로 약속하며 하늘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항거하는 모든 육의 정욕을 그의 영의 힘으로 바로 잡으신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의 법도에 맞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순서를 바르게 지키는 것은 자신의 일부터 처리하는 사람들뿐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평화스러운 상태를 어지럽게 하며 그 순결을 더럽히는 일체의 부패를 자기에게서 깨끗이 씻어버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왕의 홀(笏)과 같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그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도록 만드시기를 하나님께 기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일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감동을 통해서 그의 말씀의 역사를 나타내시고, 그 말씀이 마땅히 받을 높은 영예를 받게 되는 때이다. 그 후에 우리는 불경한 자들 곧 하나님의 권위를 미친 듯이 한사코 거역하는 자들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굴복시킴으로써 나라를 세우신다. 그러나 방법은 여러 가지이니, 즉, 방자한 자들을 길들이시며, 길들일 수없는 자들은 그 교만을 꺾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계 각지로부터 자기 앞으로 모으시도록, 교회와 교인의 수효를 늘리시도록, 교회에 각종 선물을 주시도록, 교회 사이에 바른 질서를 확립하시도록, 그러나 순수한 교리와 경건의 원수들을 모두 타도하시도록, 그들의 계획과 노력을 분쇄하시도록이런 일들을 매일 기원해야 한다. 이것을 보아도 매일 전진하도록 열심을 다하라는 명령이 무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사는 순조롭게 추악한 죄를 말끔히 씻어버리며 완전한 고결에 도달하며 성장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오실 때까지 완전성의 실현은 지연된다. 그 때에는 바울이 가르친 대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다(고전 15:28).1571)

이와 같이, 이 기도는 우리를 세상의 부패에서 물러서게 하려는 것인데 이 세상의 부패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의 나라가 우리 안에서 번영하지 못하게 한다. 이 기도는 동시에 육을 죽이려는 열심을 일으켜야 한다. 끝으로 이 기도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나라를 확장시키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후 4:16).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가 그의 의에 순종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빛과 진리를 더욱더 찬란하게 빛내심으로써 사탄의 나라의 어두움과 거짓이 소멸되는 때에 이루어진다. 그 때가 오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그의 영의 도움으로 그들을 바른 생활로 인도하시며, 그들의 인내력을 강화시키신다. 그러나 원수들에 대해서는 그 악한 음모를 전복시키시며, 그 전략과 기만 술책을 폭로하시며, 그 악의에 대항하시고, 그 완고한 태도를 억압하시고, 드디어 자신의 입김으로 적그리스도를 죽이시며, 그리스도 강림의 광채로 모든 불경건을 멸망시키실 것이다(살후 2:8).

43. 셋째 기원

셋째 기원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이다(마 6:10). 이 기원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존하며 하나님 나라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 하신다"는 뜻을 쉽게 또는 즉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때문에 따로 첨가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왕이 되신다고 하는 것을 이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아니다. 또한 만물을 주관하시며 그 목적을 향하여 인도하시는 은밀한 뜻이1572) 아니다. 사탄과 사람들이 하나님께 맹렬히 대항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그들의 공격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이용하셔서 이미 결정하신 일을 실행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복종하는 하나님의 다른 뜻에 주목해야 한다. 또 그래서 하늘과 땅을 비교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며, 열심으로 그의 명령을 이행한다(시 103:20).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은 아무 것도 행해지지 않으며, 천사들도 완전히 평화롭고 공정한 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지상 생활도 이런 표준을 따르며 모든 고난과 사악이 제거되기를 우리는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육의 욕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께 복종시키지 않는 사람은 그의 뜻에 안간힘을 써서 대항한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부패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또 이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우리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과 심령을 창조하시도록(시 51:10)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신의 것은 완전히 없애버려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일치가 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욕망의 자극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요약하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심령을 주관하실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의 내적인 이끄심을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싫어하게 된다. 그 결과로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모순된 우리의 모든 감정을 허망하고 무력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첫째 부분의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주기도의 처음 세 기원을 보았다. 이 기원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표로 삼고, 자신이나 자신의 이익은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비록 이런 기도로 인하여 우리 자신에게 풍성한 유익이 오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기원하는 일들은 우리가 원하고 구하지 않아도 때가 오면 나타날 것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원하고 구해야 한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가치가 있다. 이렇게 기원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다고 열렬하고 성실하고 철저하게 맹세를 한 종과 자녀임을 증거하며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이렇게 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시키겠다는 이 소원과 열의를 품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으로 인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이 일들은 실현될 것이므로, 그 결과는 그들에게 혼란과 멸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마지막 세 기원의 해설. 44-47)

44. 넷째 기원

다음에 있는 둘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일에 관계한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서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다(고전 10:31)우리에게 유익한 것만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1573)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처음 세 기원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신다. 그 다음에야 우리 자신의 일을 돌보도록 허락하시는데, 거기에는 제한이 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모두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죽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롬 17:7-9).

그러나 이 기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평안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에 일임하여 그가 먹여 주시고 보호해주시도록 한다.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육신까지도 보호하고 지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빵 한 조각, 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를 기대함으로써 우리가 이런 사소한 일로 믿음을 실천하게 하신다. 그 이유는, 우리는 악하여 우리의 영혼보다 육신에 대해서 더 민감하며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영혼을 위탁하고도 여전히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육에 속한 일을 염려하며, 포도주와 양식과 기름이 풍부하게 자기 앞에 없으면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많다. 그림자 같은 짧은 현세의 생명이 우리에게는 영원불멸의 생명보다 이렇게도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육신을 위한 근심을 단연 포기한 사람들은 즉시 그보다 더 위대한 일들 곧 구원과 영생까지도 하나님에게서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를 심히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한다는 것은 신앙의 적지 않은 단련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의 골수에 박힌 이 불신앙을 버릴 적에, 우리는 큰 유익을 얻는다.

어떤 학자들은 "초실체(超實體)적인" 빵에1574) 대해서(마 6:11) 철학적으로 논하고 있으나,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유수같은 이 짧은 인생에서 하나님께 양육자의 직무를 맡기지 않는다면 이 기원은(마 6:11) 불완전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이유는 모독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것이 당연한데, 땅의 근심 걱정에 관심을 둘 뿐 아니라 하나님까지 이 일에 끌어넣는다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한다.1575)

이런 생각은 마치 아버지의 축복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음식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딤전 4:8) 한 말씀은 쓸데없는 기록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죄의 용서가 신체의 영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낮은 것을 앞에 두셔서 우리를 점진적으로 남은 두 가지 기원으로 천상 생활에 속하는 기원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우둔한 것을 고려하셨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배정해 주신 정도로 만족하고 부정한 계략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도록, 우리는 다만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된다고 명하셨다. 동시에 우리는 그 양식이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모세의 글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노력이나 노고나 우리의 손만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했다(레 26:20, 신 8:17-18 참조). 사실 음식이 풍부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영양 있게 변하도록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는 가난한 사람 못지않게 부자에게도 필요하다. 풍부한 포도주와 양곡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1576) 사람은 주리고 목말라 넘어질 것이다.

"오늘" 또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것과 같이, "날마다"라는 말과 "일용할"이라는 형용사는, 곧 없어질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을 억제한다. 우리에게는 보통 이런 욕망이 한정 없이 불타듯 하며, 여기에 다른 악이 더 붙게 된다. 우리는 소유가 필요 이상으로 풍부할 때에는 쾌락과 오락과 허식과 기타 사치에 허비한다. 그러므로 그날그날 쓰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오늘 우리를 먹여주시니, 내일도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아무리 물건이 풍부히 들어와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고 지하실에 포도주가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하루에 필요한 것만을 기원해야 한다. 주께서 복을 주셔서 우리의 소유가 계속 불어나게 하시며 유효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소유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에 있는 것까지도 주께서 시간마다 조금씩 우리에게 주시고, 그것을 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은 자부심이 강하여 좀처럼 믿지 않기 때문에 광야에서 그의 백성에게 만나를 양식으로 주면서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특별한 증거를 보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신 8:3, 마 4:4)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이 예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물질적인 수단으로 생명과 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그의 권능만이 그 생명과 힘을 유지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그래서 그는 보통 반대되는 예를 들어 우리를 가르치신다. 즉, 가끔 빵의 힘을(또 지팡이의 힘이라고도 하신다) 꺾음으로써 먹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지 않고 쇠약해지게 하시며(레 26:26) 마시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하신다(겔 4:16-17, 14:13 참조).

그러나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욕망으로 무수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이나, 소유가 풍부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산적한 재물을 믿고 아무 근심도 없는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 기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원하는 것을 사실은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혹은 철저히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들의 탐욕을 감춘다. 그러나 기도는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 온통 쏟아놓는 것이라야 한다. 또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을, 즉,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분께 구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우리의 권리에 의해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므로(신 8:18 참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점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당하고 무해한 노고에 의해서 얻은 것은 우리 것이라고 부르지만, 사취(詐取)한 것과 강탈한 것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을 해하면서 얻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달라고 요구한다는 사실은, 그 일용할 양식이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든 간에, 우리 자신의 기술과 근면과 손으로 얻은 것같이 보이는 때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우리의 수고가 참으로 좋은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복이 있을 때 뿐이기 때문이다.

45. 다섯째 기원

다음에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한다(마 6:12). 이 기원과 다음 기원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요약하신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해서 맺으신 영적 언약도 두 부분만으로 성립한 것과 같다.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라는 것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라는 것이다(렘 31:33-34, 33:8 참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우선 죄의 용서를 말씀하시고, 곧 이어 둘째 은혜를 첨가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를 지탱하셔서, 우리가 모든 시험에 굴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빚"이라고 부르신다. 이렇게 용서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저히 빚을 만족하게 치를 수 없는데, 이 용서는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에서 온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빛들을 너그럽게 탕감하시며, 우리에게 그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자비로 스스로 만족을 거두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놓아 우리의 몸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롬 3:24 참조). 그러므로 자신이나 타인의 공로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이런 만족으로 죄의 용서를 산다고1577) 믿는 사람들은 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자기들에 대한 고발에 동의할 뿐이며, 심지어 자기의 증거로 자기에 대한 정죄를 확정시킨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혜로 풀림을 받지 않으면 자기들은 빚진 자임을 고백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경멸하며, 자기의 공로와 만족을 하나님께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비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는 완전하여 용서를 빌 필요가 없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1578) 귀의 유혹을 받아 과오에 빠지는 사람들을 그들의 제자로 삼도록 내버려두라. 다만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은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치시며 죄인만을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아첨하는 말로 죄를 장려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아무리 육의 죄악을 벗어버리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위험성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세밀한 의무까지도 이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무 오점이 없는 순결함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기를 원하며, 이 일을 위하여 열성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속에 그의 형상을 점진적으로 회복하시며, 그렇게 하시는 동안에 우리의 육에는 항상 다소의 오점이 남아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권위에 의하여, 평생 죄의 용서를 빌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면, 그들에게서 모든 흠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신진 교사들을 누가 용납할 것인가? 그들은 완전한 무흠(無欠)이라고 하는 유령으로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며,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 요한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다(요일 1:10).

또 이 악한들은 이런 노력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일부를 말살하고 파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언약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킨다. 그들은 지금까지 결합되어 있던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모독 행위를 자행할 뿐만 아니라, 가련한 영혼들을 절망 상태에 몰아넣어, 불경건하며 잔악한 짓을 한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히 반대되는 나태한 상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자신과 동류들을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을 갈망하는 것은 동시에 죄의 멸절(滅絶)을 구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항변하나, 이것은 심히 유치한 생각이다. 주기도의 처음 부분에서는 최고의 완전성이 우리 눈앞에 제시되고, 다음 부분에서는 우리의 무력한 상태가 제시된다. 이와 같이, 이 두 부분은 훌륭하게 서로 조화되며, 우리가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우리의 곤경을 위해 필요한 대책을 경시하지 않게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끝으로,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도 용서를 받기를 기원한다(마 6:12). 즉, 행동으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말로 모욕하는 등,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해한 모든 사람을 우리가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것같이, 우리도 용서받기를 기도한다. 그것은 위법이나 불법에 대한 죄책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있는 일이다(사 43:25 참조).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분노와 미움과 복수심을 기꺼이 버리고, 부당한 처사를 기꺼이 말끔하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만일 우리가 현재 우리를 해하거나 이미 해한 모든 사람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에 미워하는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복수를 계획하며 해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심지어는 우리의 원수의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각양 호의를 보이며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런 우리가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지 말라고 비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시라고 빌기 때문이다(마 7:12 참조). 참으로, 이 기도의 뜻은,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우리에게 하시지 마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끝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조건을 붙인 것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니 우리도 용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마치 우리가 받을 용서의 이유가 있음을 말하듯 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위로하시려는 뜻도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미움과 시기와 복수심을 깨끗이 없애버린다면, 우리는 그렇게 남을 용서해준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도 그만큼 확실하다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 이 조건을 한 표로서 첨가하신 것이다.

이 표의 또 다른 의도는, 주께서 그 자녀들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시려는 것이다. 즉, 복수심이 강렬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약하여 항상 적의를 품고 행동하며, 자기들에게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진노가 다른 사람들에게 임하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을 자녀들 가운데서 제외시키려고 하신다. 주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감히 주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점은 누가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었다(눅 11:4).

46. 여섯째 기원

여섯째 기원은(마 6:13),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대응하는 것이다(잠 3:3, 고후 3:3).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반드시 끊임없는 싸움과 어렵고 괴로운 투쟁이 따르기 때문에, 이 기원에서 우리는 승리를 얻는데 필요한 무장을 갖추며 보호를 받기를 추구한다. 이 기원에서 우리가 받는 지시는, 성령의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우리를 굽히시며 지도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성령의 도움은 사탄의 모든 전술과 모든 맹공에 대해서 우리가 절대로 굴복하지 않게 만드시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시험의 모양은 참으로 각양각색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생각은 시험이다. 우리의 육욕이나 사탄의 선동으로 우리의 생각이 율법을 범하려 할 때 그것은 시험이다. 또한 그 자체로서는 악하지 않은 것들도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에, 시험이 된다(약 1:2,14, 마 4:1,3, 살전 3:5 참조). 이런 유혹들은 좌우에서 오는데, 바른편에서 오는 것은, 예컨대 재물, 권세, 명예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찬란하고 좋은 듯해서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며, 그 감언이설로 마음을 미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간계에 걸리고 그 감미로움에 취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왼편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은, 예컨대 빈곤, 치욕, 경멸, 고난 등이다. 사람들은 이런 곤란을 당하여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망 상태에 빠져 확신과 소망을 버리고, 드디어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멀어진다.

우리의 육욕이 일으키거나 혹은 마귀의 간계에 의해서 제시되는 두 가지 시험과 싸워 굴하지 않게 하시기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우리를 지탱하시며 격려해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의 원수가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불어넣든 간에 그 악한 적들의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굳게 서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생기고 일의 결과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더라도, 우리가 그것이 선한 결과로 변할 수 있기를, 즉, 순경(順境)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역경(逆境)에서 낙심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이 전혀 없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분발하도록 자극을 받으며 시험에 의해서 압력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너무 활동하지 않아서 태만해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시험이 오기를 원한 것은 불합리한 일이 아니었고(시 26:2 참조), 주께서 날마다 그의 선민을 시험하시는 것도 이유가 없는 일이 아니다(창 22:1, 신 8:2, 13:3). 이런 때에 주께서는 치욕과 빈곤과 고난과 기타 곤란으로 선민들을 징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탄의 시험은 서로 다르다. 사탄은 사람을 시험하여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혼란에 빠뜨리며 낙심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연단시키심으로써 그들의 성실을 시험하시며, 실천을 통해서 그들의 힘을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리고 억제하지 않으면 방종에 흐르며 한정 없이 자만하는 육의 세력을 꺾으시며 정화하시며, 달군 쇠로 지지듯이 하신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무장과 준비가 없는 사람을 습격해서 불시에 타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동시에 벗어날 길도 마련하시며, 그가 가하시는 모든 것을 그의 백성이 꾸준히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신다(고전 10:13, 벧후 2:9).

"악"이라는 말을 마귀로 해석하느냐 또는 죄로 해석하느냐 하는 것 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사실, 사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원수이며(벧전 5:8), 더군다나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죄로 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기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험에도 정복되거나 압도되지 않고, 도리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에 대항해서 주의 힘으로 굳게 설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는 것이다. 이 기원의 목적은 우리가 주의 돌보심과 보호를 받아 안전한 입장에서 모든 유혹에 굴복함 없이, 도리어 죄와 죽음과 지옥의 문과(마 16:28) 마귀의 나라 전체를 견디고 이기려는 것이다. 이것이 악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위대한 용사인 마귀와 싸우는 것이나,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희롱이 될 것이다. 이 싸움을 위해서 자신감 있게 전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상대하는 원수가 얼마나 사나우며 무장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1579) 여기서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는 사자의 입을 피하는 것같이(벧전 5:8) 마귀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 주께서 우리를 임박한 죽음에서 구해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찢기고 그에게 삼키우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가 잠잠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할 것이다"(시 60:12, 시 107:14 참조). 능력과 자유 선택의 힘을 가졌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원하는 대로 그것을 믿게 버려두라. 우리는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하고 굳세게 서는 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도에는 얼른 보기보다 더 깊은 내용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사탄과 싸우는 것이라면, 성령이 충만해서 우리의 약한 육을 완전히 버리기까지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 죄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새롭게 우리에게 풍부하게 내리고 더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가 완전히 충만해서 모든 악을 극복하고 승리하게 되리라고 예상한다.

야고보의 증거와 같이(약 1:13), 우리를 시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이므로,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를 굴복시키는 모든 시험은 원래 우리의 정욕이 그 원인이며(약 1:14), 우리의 정욕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의문은 이미 부분적으로는 해결되었다. 또 야고보가 말한 것은 우리는 자신이 죄를 지은 줄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그 죄를 하나님께 전가하는 것은 무익하며 부당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생각되실 때, 우리를 사탄에게 넘겨주시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배교자의 심리와 추악한 욕망에 빠뜨리시며, 시험에 빠지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공정하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인을 확실히 아시지만 사람은 모르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서 배교자의 눈을 어둡게 하시며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셔서 그의 복수의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려고 하시는 때가 많은 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이 기도가 부적당한 표현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47. 결론

특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소유물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이 세기원은 우리가 전에 말한1580) 점을 분명히 알려 준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공개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교회 일반의 덕을 세우며 신자 상호간의 교제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이 함께 양식과 죄의 용서를 얻으며,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해방되기를 기도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담대하게 기원하며 받으리라고 확신해야할 이유가 첨가되어 있다. 이것은 라틴어 번역에는1581) 없지만, 빼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합당하다. 즉,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그의 것이라고 하였다(마 6:13).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하고도 평온한 안식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중얼거리는 것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비록 가련하고, 무엇보다도 무가치한 것들이며, 아무 칭찬할 점도 없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기도할 이유가 있으며, 언제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우리 아버지께서 빼앗을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끝에 가서 "아멘"이란 말이 첨가되었다(마 6:13). 이 말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고 싶다는 열의를 표명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이미 실현되었고, 속이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1582) 약속하셨으므로 앞으로도 반드시 모두 실현되리라는 우리의 소망이 강화된다. 또 이런 소망은 우리가 전에 제시한 기도 형식과 일치한다.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단 9:18-19).1583) 이런 말에 의해서 성도들은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서 기도를 들어주실 이유를 구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그런 목적을 얻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며,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도 오로지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결론적인 고찰 : 주기도의 완전성과 다른 말을 쓰는 자유에 대하여. 48-49)

48. 지켜야 할 표준으로서 주기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온통 이 기도 형식에 포함되어 있다. 이 기도문은 우리의 최대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이를테면 기도의 표준이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선생으로 정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하신다(마 17:5).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였으며(사 11:2), 사람이 되셔서는 위대한 지혜의 사자로서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으셨다(사 9:6, 28:29, 렘 32:19의 융합).

그리고 이 기도는 모든 점에서 완전해서, 이것과 관련을 지울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거나 이질적인 것을 첨가한다는 것은 불경한 짓이며 하나님의 시인을 받을 수 없는1584) 짓이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요약하신 것은 그에게 합당한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요컨대 그가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이 범위를 넘어 다른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원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에 무엇을 첨가하려는 것이니, 이런 짓은 광적인 모독에 불과하며, 둘째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범위 내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면서 자기들의 날뛰는 욕망대로 멀리 빗나가 헤맨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믿음이 없이 기도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런 기도는 모두 신앙과는 관계없이 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이 굳게 서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근거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보이신 표준을 경시하고 자기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힘껏 싸우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이 주기도를 "합법적 기도"라고1585) 부른 것은 옳은 말이며 훌륭한 말이다. 그는 은연중에 모든 다른 기도는 법 밖에 있고, 따라서 금지를 당한다는 뜻을 표시하였다.

49. 우리는 주기도의 용어의 형식보다 내용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이 기도의 형식에 구애되어 그것이 일점일획이라도 변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우리가 사용해서 유익을 얻을 다른 기도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고, 용어는 많이 다르나, 그 기도들은 같은 성령이 만드신 것이다. 같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암시하시는 기도는 많으나, 그 용어가 주기도와 비슷한 것은 없다. 우리가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이 기도에 요약되어 포함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거나 기대하거나 요구해서는 안 되며, 설사 용어는 전혀 다를지라도 뜻이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는 모든 기도와 경건한 이들이 드리는 기도는 주기도와 관련시켜야 한다. 참으로, 이 기도같이 완전한 기도는 달리 찾아 볼 수 없으며, 더 완전한 것은 더군다나 없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과, 사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이 기도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또 그 구조도 지극히 정밀해서, 아무도 개선해보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요약하면, 이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르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셨고. 필요한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특정 시간에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데 대하여. 50-52)

50. 일정한 시간에 기도함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앙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고 위에서1586) 말했으나, 우리는 연약해서 여러 가지 보조수단으로 지탱하며, 나태해서 자극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각각 이 기도의 실천을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들을 지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 시간들이 오면 반드시 기도를 드리며, 그 시간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완전히 기도에 바쳐야 한다. 그런 시간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과를 시작하기 전,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먹고 난 때, 밤에 자려고 할 때이다.

그러나 시간들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갚는 듯이, 그리고 시간 이외에는 갚을 빚이 없다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일종의 훈련이며, 따라서 이 연약함은 훈련을 받아야 하고 계속 자극을 받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곤란을 당할 때, 우리는 속히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 또 자신이나 타인의 일이 순조로운 것을 보면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써 그의 손이 도와주신 것을 인정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어떤 특수한 일에 묶어 두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어느 때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방법으로, 무슨 일을 해달라고 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주기도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법을 제정하거나, 어떤 조건을 가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과 방법과 때와 장소 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결정하시도록 일임하라는 것이다.1587)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마 6:10). 이런 말로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 뜻에 복종시키며, 우리의 뜻을 재갈로 제어하듯 함으로 해서 감히 하나님을 지배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원을 조정하시며 지도하시도록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시킨다.

51. 기도는 인내로 참으면서 계속하라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복종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에 지배되도록 한다면, 우리는 기도를 참고 계속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욕망을 보류하고 주를 기다리면서 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주께서 나타나시지 않더라도 항상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며, 사람들이 보기에 주께서 무시하는 것 같은 기도들에 대해서도, 결코 들으시지 않은 것이 아님을 적당한 때에 말씀하시리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요구에 응하시지 않더라도,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는 한결같은 위로가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열성에 도취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첫 요구를 들으시고 곧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시고 적의를 가지셨다고 속단하고서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일체 버리고는 기도를 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평온한 마음으로 우리의 희망을 뒤로 물려가면서, 성경이 강력히 권장하는 견인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시편에서 보면, 다윗과 기타 신자들은 기도에 거의 지치고, 듣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많은 말로 허공만 치듯 한 때에도, 기도를 그만두지 않는다(시 22:2).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둔 믿음이 모든 사태를 초월하지 못하면, 그 말씀의 권위가 효력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악한 언행으로 하나님을 괴롭혀 노엽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과 어떤 조건하에 계약을 맺는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마치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종인 듯이, 자기들이 정한 법으로 하나님을 얽매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즉시 복종하시지 않으면 격노하며 불평을 말하며 항의하며 중얼거리며 하나님께 대해서 미친 듯이 날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자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자비심으로 허락하시지 않는 일을 그들에게는 허락하신다. 이스라엘의 자손이 이 점을 증명하는데 그들의 기도를 주께서 들어주시지 않은 편이, 고기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를 삼키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다(민 11:18,33).

52. 응답이 없는 기도가 있는가?

그러나 오래 기다린 후에도 기도에서 받는 유익을 감각으로 알 수 없거나, 기도의 결과를 지각할 수 없더라도, 우리의 믿음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게 만든다. 즉, 유익한 것을 얻었다는 확신을 준다. 우리가 곤란한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곤란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겠다고 자주 또 확실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빈곤한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며, 고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이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의 백성의 기대와 인내에 실망을 안겨 주실 수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대신하실 것이다. 이는 모든 좋은 일이 그 안에 있고 심판 날에, 즉, 그의 나라가 나타나는 때에 그는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허락하실 때에도 반드시 우리가 원한 그대로 응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는 듯하면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요한이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5)고 한 말의 의미도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공연한 말을 많이 한 것같이 보이지만, 특히 유익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원대로 하시지 않는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친절히 잘 들어주시며, 그의 말씀을 믿고 가진 소망은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 않겠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이 인내심에 의하지 않으면 오래 서 있을 수 없으므로, 이 인내심으로 하여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주께서 그 백성에게 가하시는 시험은 가볍지 않으며, 훈련도 쉽지 않다. 그들을 극단으로 모는 때가 많으며, 그렇게 몰린 그들이 진창에 빠져 하나님의 다정한 은혜를 맛볼 때까지 거기 오랫동안 있게 하신다. 그리고 한나가 말한 것같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신다(삼상 2:6). 괴로움을 당하고 고독하고 거의 죽게 된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유의하시며 현재의 불행을 끝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소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지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이 소망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잠시도 기도를 쉬지 않는다. 기도는 끊임없이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 21 장  영원한 선택,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1588)

(예정 교리는 중요하므로 무례한 논의나 침묵은 불가하다. 1-4)

1. 예정론의 필요성과 이것이 가져오는 이로운 결과 : 호기심의 위험성

생명의 언약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전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또는 같은 정도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판단이 매우 놀랄 만큼 깊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 다양성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결정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주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면 즉시 중대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나지만, 경건한 마음으로 선택과 예정에 대해서 바른 길을 따라 생각하는 바를 결정할 때에 비로소 문제가 해결된다. 많은 사람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일반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으로 예정되고 어떤 사람들은 멸망으로 예정된다는 것 같이 불합리한 일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1589) 그러나 그들이 그릇된 생각으로 스스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은 다음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놀라게 하는 그 흑암 속에서 이 교리의 유용성뿐 아니라, 그 깊은 향기로운 열매까지도 알려진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알기까지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충분히 또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한 선택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소망을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시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절하신다는 이 대조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명백하게 드러낸다.

이 원칙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으며, 진정한 겸손을 얼마나 감소시켰는가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일체 무시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결정하신 사람들을 선택하시지 않는다면, 꼭 알아야 할 다음의 사실을 알 길이 없다고 바울은 단정한다.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만일 행위로 된 것이면 은혜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행위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참조).1590) 오직 하나님께서 너그러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의 과정을 회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것을 제거하고자 하는 자들은, 드높게 찬양하며 선포해야 할 이 일을 극도의 악의로 희미하게 만들며, 겸손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바울은 분명하게, 백성 중에서 남은 일부분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돌릴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다만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그 구하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구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며, 또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실 수 없으므로 보상을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문을 닫고 아무도 이 교리를 맛볼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을 꼭 같이 해한다. 이 교리 이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진지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없다. 또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같이, 우리가 굳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공포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며, 무수한 위험과 함정과 필사적인 투쟁 속에서도 우리를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겨 보관하게 하신 것은 모두 안전하리라고 약속하신다(요 10:28-29).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끊임없는 공포심으로 불행할 것이라는 것을 추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한 세 가지 은혜를1591) 모르고,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우리 사이에서 제거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준다. 이 점에서 교회가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지는데 그것은 베르나르드가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피조물 사이에서 발견되거나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놀랍게도 복된 예정의 품속에 그리고 또 가련한 정죄 받은 대중 속에 교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1592) 라고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다.

그러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서론으로서 두 가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이미 다소 곤란한 것인데, 사람의 호기심 때문에 심히 복잡하게 되고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은 아무리 억제하려고 해도 금지된 샛길을 방종하며 높은 곳으로 돌입한다. 그대로 버려두면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찾아내며 해명하려고 한다. 이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 각처에 있고, 그 중에는 다른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도1593) 있으므로 적당한 시기에 그들에게 이 점에 관한 그들의 의무의 한도를 깨우쳐 주어야겠다.

첫째로, 예정을 탐구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곳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에 들어가 빠져나올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 깊이 감추어 두기로 정하신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탐색하거나, 가장 숭고한 지혜를 사람이 영원 자체로부터 풀어내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경외함으로써 찬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그의 비밀의 뜻은 그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하셨다. 우리에게 관계되며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신 범위 내에서 계시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 예정 교리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야 한다

어거스틴의 글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어디까지나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임금님의 침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다. 주께서 그의 위대하고 선택된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요 16:12), 그 분께서는 조금도 원망을 품으시지 않았다. 우리는 걸음을 계속해서 전진하며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아직 깨달을 수 없는 일들을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저 끝날이 되면, 그 때에는 우리가 지금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될 것이다."1594) 우리가 주께 대해서 알아도 좋은 모든 일을 탐구할 때에, 주의 말씀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가 주에 대해서 보아야 할 모든 것을 보려고 할 때에, 우리의 눈을 비추어주는 빛은 주의 말씀뿐이다. 만일 이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곧 모든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씀의 한계를 넘는 순간에 바른 길을 벗어나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거기서 반드시 헤매며 미끄러 넘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점을 명심해야 하는데, 즉, 예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 이외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길 없는 황야를 걸어가려는 것이거나(욥 12:24 참조) 또는 어두운 데서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 못지않게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있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자. 여기에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이1595) 있기 때문이다. 알려고 갈망하는 것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심지어 치명적인 일에 대해서는, 우리는 차라리 자진해서 묻지 않는 것이 좋다. 경박한 호기심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 때에는,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는 생각으로 억제하는 것이 종을 것이다. 즉, 물도 너무 많이 먹으면 좋지 않은 것과 같이, 호기심으로 영광을 탐구하는 자는 영광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잠 25:27 참조). 이 오만 무례한 행동은 우리를 파멸에 빠뜨릴 뿐이므로, 우리는 당연히 단념해야 한다.

3. 둘째 위험성 : 선택의 교리에 대해 걱정스런 침묵하는 것

이런 폐해를 없애려는 생각으로 어떤 사람들은 예정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는다. 암초를 피하듯이,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1596) 그들은 이 신비한 문제를 논할 때에는 심히 침착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이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므로, 쉽사리 제한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올바른 한도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지성에 관한 확실한 법칙을 찾아야 한다. 성경은 성령의 학교이며, 여기서는 필요하고 유익한 지식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동시에, 유익한 지식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예정에 대해서 밝힌 것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악한 자로 보일 수 있으며, 알리지 않았어야 좋을 것을 공표했다고 성령을 비난하고 냉소하는 자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귀를 열고 듣는 것을 우리는 허락해야 한다. 다만 제한 조건은, 주께서 입을 여시지 않을 때에는 신자도 즉시 모든 탐구의 길을 닫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침착한 태도의 한도는, 배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를 따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그치실 때에는 우리도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위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라고 하는(잠 25:2)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건 생활과 상식으로 보아서 이 말은 모든 일에 무차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구별하는 길을 찾아서 겸손과 침착의 자세를 보이며 짐승과 같은 무지로 만족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세는 이 점을 간단한 말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이 하늘 명령을 근거로 삼아서만 율법의 교훈을 연구하도록, 모세는 사람들에게 권고한다. 또 그는 이 이유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이 범위 안에 머물라고 했다. 즉,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비밀에 침입해 들어가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4. 이 교리에 위험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한다

불경한 사람들은 예정에 관해서 갑자기 어떤 점을 붙잡고 비난하며 욕하며 떠들어대며 조롱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파렴치 때문에 우리가 제한을 받는다면, 그들과 같은 무리가 모독하지 않는 신앙 문제는 거의 없으므로, 우리는 믿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리들을 숨겨야 할 것이다. 완악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가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아셨다는 사실을 들을 때, 하나님의 본질 안에는 세 위(位)가 있다고 들었을 때에 못지않게 교만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들은 우주 창조 이후로 5천년이 약간 지났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폭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잠자는 상태에 있었느냐고 묻는다.1597) 요컨대, 그들은 무슨 말을 들어도 반드시 조소하며 공박한다. 이런 모독적인 언사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 우주 창조에 대해서 침묵을 지킬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이 점에서나 다른 모든 점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심히 강력하므로, 악인들의 험담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소논문 견인의 은혜에 대하여(The Gift of Perseverance)에서 이 점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짓 사도들이 바울의 진정한 교리를 중상하고 비난했지만, 바울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논의가 경건한 사람들에게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방해하며, 믿음을 흔들며 속마음을 어지럽게 하며 공포심을 불어넣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어거스틴도 예정에 대한 설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난을 여지없이 반박했다.1598) 게다가 이 점에 있어 여러 가지 어리석은 생각들이 공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적당한 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다.1599) 다만 내가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인정하기를 바라는 점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주께서 비밀로 그대로 두신 것은 탐색해서는 안 되는 동시에, 공개하신 것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한편으로 과도한 호기심을 가졌다는 비난을 피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도 은혜를 모른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다. 어거스틴도 이 생각을 잘 표현하였다.

곧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굽어보면서 천천히 걷듯이 성경도 약한 우리가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면서 전진하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성경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하였다.1600) 그러나 약한 영혼들을 어지럽게 할까 해서 조심하기 때문에 또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정을 아주 묻어버리고자 하는 사람들은1601)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어리석고 사려가 없다고 비난하는 그 교만을 어떤 애매한 구실로 덮을 것인가? 그들의 태도는 마치 자기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느끼는 그 위험성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정의 교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교회에 해로운 일을 지각없이 누설하셨다는 듯이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각 개인에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며 설명함. 5-7)

5.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 : 이스라엘의 선택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는 아무도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생명의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선고하시는 그 예정을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 특히 예지를 예정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잡다한 반대 의견으로 예정설을 묻어버린다.1602) 물론 우리는 예정과 예지를 다 하나님 안에 두지만,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눈앞에 항상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미래나 과거가 아니라 모든 것이 현재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개념을 통해서 생각하고 계실 뿐 아니라, 참으로 그 모든 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것같이 보시며 식별하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예지는 우주전체를 통해서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우리는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고 부르며,1603) 이 작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예정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생이 예정되며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이 중의 어느 한 쪽 결말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개개인에게서 증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한 예로서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각 민족의 장래도 그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밝히셨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신 32:8-9). 그 구별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밝히 알 수 있다. 다른 백성들이 제외되고 마른나무와도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서 한 민족이 특별히 선택되었다. 그러나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모세가 후세 사람들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우수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그들이 구원을 얻은 원인에 대해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열조를 사랑하셨고 "그 후손 너를 택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신 4:37).

다른 장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신 7:7-8). 모세는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하늘과‥‥‥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10:14- 15).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으므로(신 7:6) 성별되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는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신 23:5). 신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시 47:4)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선물들을 누리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물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알뿐만 아니라, 저 거룩한 조상 자신도 자기와 자손들을 위해서 그런 큰 영예를 얻을 만한 높은 덕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교만을 더욱 효과적으로 분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그들에게 이런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책망하신다(출 32:9, 신 9 :6 참조). 예언자들도 유대 백성들이 부끄럽게도 은혜를 배반하고 떠났기 때문에 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그들 앞에 하나님의 이 선택을 자주 언급하여 책망했다(암 3:2).

여하간 이제 하나님의 선택을 사람의 가치나 행위의 공로에 연결시키려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백성보다 한 백성을 총애하신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 심지어 악하고 완고한사람들까지도 총애하신 것은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말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를 이런 방법으로 증명하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항의를 할 것인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며, 하늘을 향해서 모욕의 돌을 던져도 하나님의 의를 건드리거나 상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리어 돌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때나,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어야 될 때에는 이 거저 주신 언약의1604) 원칙을 상기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우리 자신"을 배제하기 위하여 첨부된 부정어는 공연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풍성하게 가진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그렇게 큰 영예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구하셨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예언자는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만을 만족하게 생각하라고 하면서,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고 한다(시 105:6).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가 선택의 결과임을 말한 후에, 결론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너그럽게 행하신 것은 "그의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시 105:42 참조). 온 교회의 찬송도 이 교리와 일치한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시 44:3) 그런데 "땅"을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포함한 비밀한 선별을 의미한다는데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다윗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백성에게 권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사무엘은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라고 백성들에게 소망을 고무시켰다. 이와 같이 다윗도 자기의 신앙이 공격을 받을 때에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라고 하면서 무장을 갖춘다. 그뿐 아니라, 선택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서, 첫째 해방과 둘째 해방, 그리고 그 사이의 여러 가지 은혜로 확인되었으므로, "선택한다"는 말은 이사야서에서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사 14:1). 예언자는 미래를 묘사하여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같이 보였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모으실 것인데, 그것은 그 순간에는 무효로 된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의 선택이 확고부동하다는 표징이 되리라고 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여(사 41:9),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이 놀랍도록 너그러우시며 끊임없이 계속됨을 역설한다. 스가랴서에 있는 천사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표현하여, "여호와께서‥‥‥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라고 한다(슥 2:12). 마치 하나님께서 혹심한 징벌로 이 도성을 버리셨거나, 민족의 포로 생활로 인하여 선택이 중단된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선택의 표징이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닐지라도, 선택 자체는 여전히 침범할 수 없다.

6. 둘째 단계 : 이스라엘 백성 개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

우리는 이제 선택이 둘째 단계 곧 제한적인 성질을 첨가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가 분명히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 어떤 사람은 버리시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보호하셔서 그의 자녀들 사이에 두셨다. 이스마엘은 영적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는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에서가 제외되고, 그 후에 무수한 사람들이거의 모두 온 이스라엘이 제외되었다. 이삭 안에서 그의 후손이 부르심을 받았다. 같은 부르심이 야곱에게 계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신 것도 똑같은 일례이다. 이 일은 시편에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8:67-68)라고 훌륭하게 선포되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이 변경을 통해서 밝히 드러낸다. 이스마엘과 에서의 무리가 양자된 지위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 자신의 결함과 죄책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위반하고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민족보다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시편을 보면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시147:20)라고 언급되어 있다. 두 단계를 보아야 한다고 내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 온 민족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오직 그의 관용을 베푸실 때에 어떤 법에 의해서 구속을 받으시지 않고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은혜의 평등한 분배를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은혜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전인류 가운데서 선택되었을 뿐 아니라, 거룩한 가문에서 선별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인데, 불충하고 불경하여 은혜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경멸하였기 때문이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고 하나님께서는 물으신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 1:2-3, 롬 9:13)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이 다 한 거룩한 아버지께로부터 난 언약의 상속자, 즉, 거룩한 뿌리의 가지들이었으므로, 그리고 야곱의 자손은 그 존엄한 지위를 가지도록 용납되었으므로, 둘 다 당연히 특별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맏아들인 에서가 제외되고, 출생으로 보면 그보다 낮은 그들의 조상 야곱이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중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며, 그들이 그 이중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한탄하셨다.

7. 실제적인 선택으로서의 개인의 선택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원하시는 사람을 거저 선택하시며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신다는 것이 이제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 분께서 개개인에게 구원을 제공하실 뿐만 아니라 결과의 확실성이 보류되거나 의심스럽지 않도록 배정하시는 것을 알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은 아직 절반 밖에 해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바울이 말하는 저 독특한 후손으로 인정된다(롬 9: 7-8, 갈 3:16이하 참조). 선택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수중에 놓였다. 그러나 그 후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썩은 지체로 인정되어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선택의 효과가 나타나며 참으로 영속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로 올라가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 머리 안에서 그의 선민을 모두 모으시며 풀 수 없는 끈으로 그들을 자기에게 결합시키셨다. 다른 민족들을 배제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선택하신 데에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머리에 접붙임을 받아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에게서 은혜의 더욱 위대한 힘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방금 인용한 말라기서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께서 영생의 계약을 맺으시고 어떤 민족을 자신에게 부르실 때에는, 그 중의 일부를 위해서 특별한 선택의 방법을 사용하시지, 무차별적인 은혜로 모든 사람을 효과적으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고(롬 9:13), 훌륭한 논법을 전개한다.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라고(말 1:2) 하신 말씀은 이조상의 모든 후손들에게 적용되는데, 예언자는 이 사람들과 에서의 후손들을 대조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신 채로 지나치시는 일이 없는 선택의 실례를 우리 앞에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부르는 것에 바울이 관심을 갖는데(롬 9:27, 11:5, 사 10:22-23 참조), 그 까닭은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하여 사라지고, 극히 적은 일부만이 남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한 민족에 대한 전체적인 선택이 때로는 확고하며 유효하지 못한 이유는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참고 견디어 언약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중생의 영을 즉시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 내면적인 은혜만 그들을 보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없는 외면적인 변화는 인류가 버림을 당하는 것과 극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선택되는 것 사이의 중간 상태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했지만(신 32:9, 왕상 8:51, 시 28:9, 33:12 기타), 그 중에는 이방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와 구속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의미한 약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버리는 많은 배반자들보다 자기가 거저 주신 은혜에 주의하신다. 배반하는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신실은 배제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를 위하여 남은 몇 사람을 보존하심으로써 그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롬 11:29).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민족들보다 아브라함의 자손 사이에서 계속적으로 교회를 모으셨다는 사실은 그의 언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이 언약을 어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언약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그것을 소수에 국한시키셨다. 요약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공통으로 택하신 것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에게 주신 더 큰 은혜를 나타내 보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상징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한 자손들과 이삭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영적 후손들을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갈 4:28). 단순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헛되고 무익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말은 반드시 언약을 모욕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 변할 수 없는 계획은 본질적으로는 이 영적 후손들에게서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느 쪽으로나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성경의 구절들에 비추어 취해야 할 견해가 분명히 나타나기까지 기다리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선택 교리의 요약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고도 변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 구원으로 받아들이실 사람들과 멸망에 내어 주실 사람들을 오래 전에 걱정하셨다고 말한다.

선택된 사람들에 관해서 이 계획은 그들의 인간적 가치와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정 무흠하면서도 불가해한 판단으로, 저주에 넘겨주신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을 닫으셨다. 그런데 선택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이 선택의 완성인 영광으로 들어갈 때까지, 칭의도 선택을 나타내는 한 표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명과 칭의에 의해서 선택된 자들을 인치시는 것과 같이, 버리신 자들에 대해서는 그의 이름에 대한 지식이나 성령에 의한 성결의 길을 끊으심으로써, 이를테면 이런 표로써 어떤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가를 계시하신다. 여기서 나는 예정론을 뒤집어엎기 위해서 어리석은 사람들이 조작한 여러 가지 공상을 무시하겠다. 그런 공상은 말로 표현되면 즉시 자체의 허위성을 충분히 증명하게 되므로 반박할 필요도 없다. 나는 다만 유식한 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단순한 이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과,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제의하는 것들을 잠깐 검토하겠다.

제 22 장  성경의 증거에 의한 이 교리의 확증

(선택은 공로에 대한 예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목적에서 온다. 1-6)

1. 선택과 공로에 대한 예지

지금까지 우리가 서술한 입장과 특히 신자들이 값없이 선택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반대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공로를 미리 아시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들을 구별하신다고 생각한다.160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 선택하시고, 악한 의도와 불경건한 생활로 기울어질 성향을 가지리라고 보시는 사람들을 죽음의 저주를 받도록 결정하신다고 한다.

이렇게 예정을 예지의 보자기로 덮음으로써 그들은 예정을 모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예정의 근원이 다른 데 있는 것같이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일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각 시대의 중요한 학자들도 품은 것이었다.1606) 내가 이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 두는 것은 학자들의 이름이 나오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입장이 큰 타격을 받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는 너무도 확실하고 명백하여 사람의 권위가 그것을 움직이거나 압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잘 모르고 권위도 없으면서 이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공격하므로 나는 그 불손한 태도를 그대로 버려둘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한다.1607) 그러나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이 하나님과 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 분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값없이 베푸신다고 하는 말은, 경험의 뒷받침이 없는 말이 아니다.1608)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했느냐 하는 문제도, 그 평가의 원인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무엇 때문에 소나 나귀가 아니고 사람이 되었는가를 대답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개로 만드실 권능도 있었지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그들은, 짐승들이 자기들의 처지에 대해서 마치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는 듯이, 하나님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허락하려는가? 반대론자들도 아무 공로 없지 특권을 얻은 사실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판단의 표준에 따라 은혜를 다양하게 베푸시는 것보다 더 공평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논쟁을 개인들의 문제로 돌려, 그들이 거기서 불평등을 발견하고 따라서 이 교리를 더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예를 생각하고 떨며 이 숭고한 신비에 대해서 무책임한 지껄임을 그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을 인간으로서 잉태되셨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태중에서 당연히 천사들의 머리와, 하나님의 독생자와, 아버지의 형상과 영광, 그리고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 되셔야 했던 것은(히 1:2이하 참조) 어떤 덕행에 의한 일이라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언급하였다. "우리에게는 교회의 머리 자신께서 하나님의 거저 주신 선택의 가장 분명한 거울이 되어주신다. 따라서 지체인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의로운 생활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되신 것이 아니라, 값없이 그 영광을 받으셔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선물을 나눠주시게 되었다."1609) 만일 여기서 누군가가, 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모두 그와의 거리가 이렇게 먼가, 왜 우리는 모두 부패했는데 그만순결 그 자체이신가 라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의 정신 이상뿐 아니라 파렴치까지 폭로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과 제외됨의 고유한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다면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도 빼앗게 해 보라.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선포하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바울이, 우리는 "창세 전에"(엡 1:4)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에, 그는 우리 편에 있는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 중에서 그의 선택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에게 눈을 돌려, 생명의 교제에 받아들이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몸에서 지체로 선택하셨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고귀한 기업을 받도록 택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들을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할 때에(골 1:12), 이것을 언급하였다. 만일 장차 올 생명의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 은혜보다 선택이 선행한다고 하면, 지금 우리를 선택하시도록 그를 움직일 만한 무엇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발견하실 것인가? 바울의 다른 말이 내가 말하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다. "곧 창세 전에" "우리로‥‥‥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선택하셨다고(엡 1:4-5) 그는 말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기쁘심"과 우리의 공로를 대조시킨다.

2. 선택은 창조 이전의 일이며 공로에 대한 예지와는 관련이 없다

더욱 완전한 증명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구절의(엡 1:4-5) 각 부분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각 부분을 종합하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바울은 그들을 "선택된" 자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틀림없고 그도 곧 이렇게 언명한다. 그러므로 "선택된"이란 말을 복음이 선포된 시대에 국한되는 것으로 그릇 해석하는 사람들은 비열한 허위로 이 말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다.1610) 바울은 "창세 전에" 선택되었다고(엡 1:4) 말함으로써 가치에 대한 고려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사람들과 또 후에 아담 안에서 동등한 인간들이 될 사람들을 서로 구별할 조건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다면, 각 사람이 그 자신 때문에 선택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 중에서 분리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은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하반절)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선택의 원인을 예지라고 생각하는 과오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덕은 선택의 결과라고 바울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더욱 고차원적인 원인을 묻는다면, 바울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셨으며, 이 일은 "그 기쁘신 뜻대로" 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엡 1:5상반절). 이런 말로 그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상상하는 선택의 수단을 일체 배제한다. 영적 생활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는 다만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사람들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주고자 하신 은혜를 그들이 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각각 간직해두신 것이라는 이 한 가지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3. 선택받음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지 거룩하기 때문에 선택받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 결정이 지배하는 곳에는 행위에 대한 고려가 있을 수 없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는 이 대조법을 전제하지는 않으나, 그가 다른 데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리고 "우리로‥‥‥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말에 의해서(엡 1:4), 우리는 모든 의혹에서 풀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혔다.1611) 만일, "우리가 거룩하리란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고 말한다면, 바울이 말하는 순서를 뒤집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도록 우리를 택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택하신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선택받음으로 해서 거룩케 된다고 하는 생각과, 행위 때문에 선택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일치할 수 없다. 그들은 자주 궤변을 사용하여, 주께서는 이미 있은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보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공로에 선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라고 하지만,1612) 이런 말에는 정당성이 없다. 신자들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동시에 그들에게 있을 거룩은 선택에서 유래했다는 뜻이 암시된다. 선택에서 유래한 것이 선택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하겠는가?

바울은 자기가 말한 것을 확인하는 듯이 후에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그 기쁘심을 따라"(엡 1:9)라고 말한다. "그 기쁘심을 따라"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리실 때에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고려를 하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은 곧 부언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오로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한다(엡 1:6 참조). 우리가 선택된 데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말은, 확실히 그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경우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택하실 때에 각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면, 그 선택은 거저 주시는 은혜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라고(요 15:16) 하신 말씀은 모든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공로를 배제하실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먼저 제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제자들에게는 선택될 아무 이유도 없었으리라는 것을 지적하신다. 또 바울이,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한말은(롬 11:35)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앞지르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의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을 과거에나 미래에나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신다는 것이 바울이 밝히려고 한 것이다.

4. 로마서 9-11장과 유사 구절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논법을 더욱 깊이 반복하여 더욱 자세히 전개한다. 그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한다(롬 9:6). 비록 모든 사람이 상속권에 의해서 복을 받았지만 그 상속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논의는 유대 사람들이 교만하며 거짓된 자랑을 하는 데서 생겼다. 그들이 자기들을 "교회"라고 주장했을 때에, 그들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자기들의 결정에 의존시키려고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 교황주의자들은 이 거짓된 구실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에는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적자(嫡子)의 지위에서 서자(庶子)로 전락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모든 사람 위에 엄연히 있어서 그들을 지배하며, 독자적으로 양자됨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들은 그의 경건 때문에 구원의 소망이 확보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의 배반 때문에 상속권이 말살된다면 바울이 그의 독자들에게는 이 비밀의 선택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그 원인은 하나님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밖에서 구할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 모두가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의 상태가 그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바울은 야곱과 에서의 예를 들어 논의를 더욱 전개해 나간다. 두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고, 어머니의 태중에 함께 있었지만, 맏아들의 권리는 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옮겨졌다. 이 변경은 하나의 전조(前兆)와 같은 것으로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 일의 근원과 원인을 묻는다면, 예지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덕성과 죄악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의 피상적인 논법의 요점은, 야곱이란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이셨고, 에서에게서는 무가치하다고 예견하시는 사람들은 버리신다는 것을 보이셨다고1613) 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이렇게 대담한 주장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창 25:23 참조). 만일 두 형제 사이에 차이를 둠에 있어서 예지가 그에 어떤 관련을 가졌다면, 여기서 때를 말한 것은 확실히 부적당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장차 있을 덕에서 오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선택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바울은 왜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하는가? 그가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경솔한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고 따라서 야곱의 경건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곧 대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가 은혜를 얻게 한다면,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야곱이 나기 전에, 그가 성장한 것 같이, 이미 당연히 확정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도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야곱의 선택은 행위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사도는 행위를 말함으로써 미래나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행위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연히 대립시킨다. 그 한 편을 확립함으로써 다른 편을 교묘하게 부정하고자 한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고려할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이고, 사람들 자신이 무엇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끝으로, "선택"과 "목적"이란 말들을 보면(롬 9:11), 사람들이 보통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과는 별도로 안출해 내는 원인들이 모두 이 원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실하다.

5.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행위에 대한 주장을 반박한다

선택에는 행위도 관여한다고 하는 사람은 이 점들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구실을 사용할 것인가? 이는 그들의 입장이 사도의 주장을 직접 회피하려는 것이기 때문인데 사실상 두 형제 사이의 구별은 그들이 나기 전에 확정된 것이므로, 그것이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만 의존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주장이다. 그들의 궤변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그 무엇이 있다면 사도가 그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께서 선택의 은혜를 통하여 주시기를 이미 결정하신 것 이외의 선한 것을 사람에게서 조금도 예견하실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선행을 그 원인 앞에 두는 어리석은 짓으로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신자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결정만을 기초로 한 것이며, 이 은혜는 행위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사도의 말이다. 우리는 이를테면 눈앞에 그에 대한 실례를1614) 보고 있다.

에서와 야곱은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서, 아직 같은 태중에 있으며, 세상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꼭 같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한 쪽은 받으시고, 다른 쪽은 버리신다. 한 가지 나은 것은 다만 장자 상속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무시하시고, 장자의 것을 빼앗아 아우에게 주셨다. 다른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획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멸시하시며, 육신의 자랑거리를 일체 박탈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이스마엘을 제외시키시고 이삭을 사랑하신다(창 21:12). 므낫세를 제쳐놓으시고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다(창 48:20).

6. 야곱이 선택된 목적은 지상의 축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누가 나를 가로막고, 우리는 내세의 삶 전체에 관해서 이런 낮고도 사소한 유익들을 근거로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며, 장자의 영예를 받은 사람이 곧 하늘의 기업을 받기로 선택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고 가정하자. 이는 심지어 바울까지도 위에서 인용된 증거들을 사용할 때, 성경을 왜곡하여 생소한 의미로 해석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1615)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도가 경솔하게 잘못 말했거나 고의로 성경의 중언들을 오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1616) 그는 우리의 반대자들이 감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접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감춰져 있었던 야곱의 영적 선택을 지상적인 표징으로 표현하려고 하셨다는 것이다. 야곱에게 부여된 장자 상속권을 내세와 관련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복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은 각종 곤란과, 고통과 쓸쓸한 타향 생활과 많은 슬픈 일과 비통한 근심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을 위해서 그의 나라에 준비하신 영원한 영적 복을 외적인 복으로 증거하셨다고 확실히 깨달았을 때에, 바울은 서슴지 않고 그 외적인 복에서 영적 복을 증명하는 증거를 찾은 것이다(엡 1:3이하 참조). 우리는 또한 가나안 땅도 하늘나라 처소의 증표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야곱이 천사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나누기로 되었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공로에서는 다르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되었으며, 버림을 받은 에서와 구별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사도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고 하셨다고(롬 9:15) 대답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실 이유를 그들 자신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자신의 긍휼에서만 취하신다고 하는 것이(롬 9:16) 주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의 구원은 오로지 주 자신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자신 안에서만 확립하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로 내려가는가?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분의 긍휼만을 가리켜 주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가? 주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그의 긍휼 가운데 국한시키시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우리의 관심의 일부를 우리 자신의 공로로 향하게 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고 하는,(롬 11:2) 소수의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을 미리 아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한가한 망대 위에서, 자신이 직접 하시지 않는 일을 다만 예지하실 뿐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그러한 뜻에서이다. 누가가 전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이란 말이 있다(행 2:23).

베드로가 말하는 하나님은 확실히 구경꾼이 아니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편지할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부른다(벧전 1:2).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정하시는 그 은밀한 예정을(벧전 1:2) 적절하게 표현한다. "뜻"이란 말을 동의어로서 첨가할 때에 이 말은 보통 확고한 결심을 의미하므로 베드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주관하실 때에 자신의 외부로 나가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같은 장에서 그리스도를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어린양이라고 말한다(벧전 1:19-20). 하나님께서는 어디에서 인류의 구원이 올 것인지를 보시려고, 하늘에서 내려다보신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무의미한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미리 알려진 사람들은, 바울이 보기에는 군중 가운데 섞인 소수에 불과하고, 군중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스스로 가장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위선자들의 교만을 억제하기 위해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라고 한다(딤후 2:19). 요약하면, 바울은 이런 말로써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지적한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 전체요, 또 하나는 그들에게서 분리되어 나온 사람들로서 사람은 올 수 없으나 하나님이 보시는 곳에 숨겨 있는 자들이다. 바울의 이 말이 모세의 말에서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언급한다(출 33:19). 이 말씀은, 외적인 상태는 같은 선민에 관한 것이었으나 마치 그가 일반적인 선택 안에 일부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가 포함되어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더욱 거룩한 보화같이 여겨진다고 한 것과 또한 공통된 언약이 있다고 해서 소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대열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서 자신이 값없이 은혜를 나눠주시며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다만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또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단언하신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거절을 당하는 일이 없이 자비가 내려진다.

이런 때에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예측하거나 그 일부를 취득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에 관하여 자기를 찬양할 것을 요구하신다.

(선택과 유기(遺棄)의 이 근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함. 7-11)

7. 선택에 관한 그리스도의 증거

이제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최고의 심판자시요 주이신 분의 발언을 듣기로 하자. 그는 청중의 마음이 완고하여 그들 앞에서 하시려는 말씀이 거의 다 수포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 이 장애를 극복하시려고 외치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요 6:37).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요 6:39).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증과 보호를 받게 되는 발단은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혹 어떤 사람은 여기서 논의의 방향을 돌려 믿음으로 자발적으로 복종한 자들만이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항의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무수한 군중이 배반하여 전세계를 뒤흔들지라도 선택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확고한 계획이 하늘보다도 더 견고할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선택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었느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낯선 자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너무도 명백하여서, 어떤 궤변의 구름으로도 덮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4-45) 만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면 선택은 전반적인 것이 되겠지만, 현재 신자가 소수인 데서 분명한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주신 제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소유였다고(요 17:6) 말씀하시고 조금 후에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라고 하신다(요 17:9, 요 15:19 참조). 그러므로 전세계가 그 창조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이 제한된 소수만을 저주와 진노와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어 멸망의 운명을 면하게 한다. 그러나 세상 자체는 그 예정된 대로 자멸하게 버려두신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이시지만, 아버지와 함께 선택권을 주장하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신다(요 13:18). 어디서 택하셨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세상에서"라고 대답하신다(요 15:19).

그러나 제자들을 아버지께 맡기시는 기도에서 그는 세상을 제외시키신다(요 17:9).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만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택하신 자를 아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인류가운데서 특별한 일부분 곧 그 덕의 성질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에 의해서 구별되는 일부의 사람들을 암시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선택의 창시자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아무도 자기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탁월한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다를 "마귀"라고 부르시면서도 자신이 택하신 자라고 하신다(요 6:70). 이것은 그의 사도직에 관해서만 하신 말씀이다.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자주 말하는 것과 같이(예컨대, 갈 1:16, 엡 3:7), 사도직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음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거울이지만, 그 자체에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다는 사도직을 충실히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귀보다 더 나쁠 수 있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자신의 몸에 접붙이신 사람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요 10:28). 그 이유는 그들을 보존하시는 것이 그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만유보다 크신"(요 10:29)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1617) 그가 다른 곳에서, "아버지여‥‥‥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11-12)라고 하신 말씀은 오용되기는 하지만1618) 모호한 점은 없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의의 선택으로 원하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로 만드신다. 이 일의 본질적인 원인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시는 은밀한 뜻으로 만족하시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교부들의 생각, 특히 어거스틴의 주장

그러나 암브로시우스와 오리겐과 제롬은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자기의 은혜를 선용하리라고 예견하신 대로 사람들 사이에 은혜를 나눠주셨다고 생각했다.1619) 그뿐 아니라, 어거스틴도 오랫동안 이 견해를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잘 알게 된 후에는 이 생각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강경하게 반박했다.1620) 사실, 그는 철회한 후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이 오류를 고집하는 것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도가 이 궤변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는 아직 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운 말을 한 다음에, '그런 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라는(롬 9:14)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공로를 예견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을 피난처로 삼았다."1621)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선택 이전의 모든 공로를 일체 배제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립하는 하나님의 예지를 변호하는 사람들의 이론은 여기서 확실히 무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창세 이전에 선택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하게 되리라고 예견하셨기 때문이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요 15:16) 말씀하시는 분은, 선한 것을 미리 보셨다는 말씀을 전연 하시지 않는다. 만일 그가 우리를 택하신 것이 우리가 선하게 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라면, 그는 또한 우리가 그를 택하리란 것과 그 결과도 예견하셨을 것이다."1622) 교부들의 권위에 의지하기를 원하는 우리들은 어거스틴의 증거를 중요시해야 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자기가 다른 교부들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 점으로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려고 했으나, 그는 명쾌한 증명으로 이런 증상의 허위성을 밝힌다.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긍휼히 여기시는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불경건한 자를 경건하게 만드셨을 것이다. 그러나 불러 주시고자 하는 사람을 부르시며, 원하시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신다."1623) 만일 내가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한 책을 만들려고 했다면, 그가 한 말 이외에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곧 증명할 수 있을 것이지만, 장황한 말로 독자들을 괴롭히고 d皐?않다.

이제 우리는 교부들이 침묵을 지킨다고 생각하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심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었다. 바울은 행위를 고려할 것을 제의함으로써 한 마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 바울은 여전히 곤란한 논의를 계속했는가? 그렇게 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께는 건망증이라는 허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간단명료하게,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따라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출 33:19) 하신 말씀이 문체를 결정한다. 이것은 마치 그가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가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고, 그밖에 아무 이유도 없다"라고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여전히 진리이다."1624)

9. 자유로이 주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같은 공적이 가능한 한, 선택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공로를 "예지"한 것과 관련이 없는가?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궤변에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로에 대한 예지는 예정하는 이의 입장에서는 예정의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에게도 부를 수 있다. 즉, 예정에 대한 특별한 평가에 의해서는 그렇게 부를 수 있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공로로 영광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셨다고 말한다."1625) 주께서는 우리가 선택에 있어서 단지 그의 선하심만을 보기를 원하신다. 그 이상의 무엇을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지혜 있는 체하는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도 궤변으로 싸우고자 한다면 토마스의 궤변을 반박할 방법이 있다. 그는 선택된 자들에게 공로를 근거로 어느 정도의 영광이 예정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예정하시고, 그 은혜에 의해서 그들이 영광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우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항의를 제시하여, 은혜를 받기로 예정되는 것은 생명을 받기로 선택되는 것에 종속되는 것 곧 후자에 대한 일종의 시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은혜가 예정된 사람들은 훨씬 전에 영광을 가지기로 결정된 자들이며, 주께서 그 자녀들을 선택에서부터 의롭다 하시는 데까지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광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은 은혜에 이르도록 예정되는 것의 원인이고,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하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논쟁은 무익한 것이다. 오래 전에 교회의 어떤 저술가가 "하나님의 선택을 공로에 돌리는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1626) 바르게 말한 적이 있다.

10. 하나님의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부르시면서 몇 사람만 선택하여 받아들이신다면 자가 당착이 될 것이라고 항의한다. 이와 같이 이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약속의 보편성은 특수한 은혜의 구별을 배제한다. 또 어떤 온건한 사람들도 이렇게 말함으로써 진리를 압박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문제를 막으며, 여러 사람의 호기심을 억제하려고 한다.1627) 이것은 대단히 좋은 생각이나, 모호한 회피는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 의도로 시인할 수 없다. 거만하게 선택을 욕하는 자들은 구역질이 날 정도의 궤변이 아니면, 수치스러운 오류를 말하고 있다.1628)

나는 다른 곳에서, 성경이 이 두 가지 생각, 즉, 외적인 전도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오도록 부르심을 받지만 회개와 믿음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두 가지 생각을 조화시킨다는 것을 말했고, 곧 그 일부를 반복하겠다.1629) 나는 그들의 주장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으므로 그것을 부정한다. 한 도시에는 비가 올 것이나 다른 도시에는 한발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시며(암 4 :7),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을 선언하시는 분은(암 8:11)모든 사람을 불러야 한다는 어떤 고정된 법을 만드심으로써 스스로를 구속하시지 않는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전도하는 것을 금하시고(행 16:6) 그를 비두니아로부터 마케도냐로 향하게 하신 분은(행 16:7),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이 보화를 분배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그의 구원의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특별히 보내신다는 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더욱 명백하게 보여주신다. 즉, 그들만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 인류 전체가 차별 없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신다(사 8:16). 그러므로 교회의 자녀들을 위해서만 그 개개인을 위해서만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 구원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도 실제로 똑같이 유익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분명히 이 가르침을 그릇되게 저속화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복음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널리 전해지고 있으나 믿음의 선물은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사야는 "주의 팔"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한다(사 53:1). 만일 이사야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완고하여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와 사악한 생각으로 복음을 멸시하는 결과가 생긴다고 했다면, 보편적인 소명의 이 측면이 어느 정도 인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사람들에게 팔을 나타내 보이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가르치는 것은(사 53:1) 결코 사람의 죄책을 경감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는 다만, 믿음은 특별한 선물이므로 외면적인 가르침을 듣기만 해서는 무익하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 나는 설교만이 또는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느냐고 이 교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요한복음 1장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요 1:12)할 때, 확실히 여기에서는 뒤섞여진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신자들 곧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요 1:13) 특별한 지위가 부여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말씀 사이에는 상호 일치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1630)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씨가 가시덤불 속에나(마 13:7) 돌밭에(마 13:5) 떨어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불복종의 태도를 고집하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는 눈과 들을 귀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오지 않을 줄을 아시면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어떻게 모순이 없다고 할 것인가? 어거스틴의 대답을 빌리겠다. "그대는 나와 논쟁을 하려는가? 나와 함께 놀라며 '오, 깊도다!' 하고 감탄하라.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두려운 마음으로 일치하여, 오류로 멸망하지 않도록 하자."1631) 그뿐 아니라, 바울이 증거하는 것과 같이, 선택이 믿음의 모체라면, 선택이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은 일반적이 아니라고 하는 논법을 그들에게 돌려보낸다. 그 이유는, 이 원인과 결과의 연쇄에서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추론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할 때에(엡 1:3-4),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들만을 택하신 것이므로, 신령한 복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 아무도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영광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리 택하신 사람을 값없이 비추어 주시는 것임을 알라고 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권고한다(딛 1:1). 베르나르드가 한 말은 옳다. "그리스도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라고(마 13:11) 말씀하실 때에, 그의 친구들은 각각 이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누군가?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롬 8:29), 또 하나님의 위대한 은밀한 계획을 알고 있는 자들이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 아신 일은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자기 백성이 되도록 예정하신 사람들 이외에는 이렇게 위대한 비밀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조금 뒤에 그는 결론을 내린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17). 예정하셨으므로 영원부터요, 하늘의 복을 주시므로 영원까지이다. 전자는 처음이 없으며, 후자는 끝이 없다."1632)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베르나르드를 증인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는가? 주께서 직접하시는 말씀이 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얼굴의 광채에 놀란다는 것이다. 또 참으로, 믿음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면, 믿음을 선택과 연결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 순서는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에서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39-40).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다면, 그의 아들을 그들 위에 두시고 모든 사람을 신앙의 거룩한 유대로 그의 몸에 접붙이셨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특별한 담보 곧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으신 사람들을 위해서 보존된 담보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요 10:4-5).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양들의 귀를 주께서 뚫으셨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1633) 하늘의 은혜에 의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그의 양이 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은 이길 자가 없는 하나님의 힘이 보호함으로써 영원히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가르치신다(요 10:29). 따라서 불신자들은 그의 양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신다(요 10:26).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제자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 가운데(사 8:16, 54:13 참조), 그들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인용한 증거들은 견인을 의미하므로, 동시에 선택의 변함없는 항구성도 증명한다.

11. 제외되는 것도 행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기는 일이다

이제 버림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려 한다.1634)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도는 동시에 관심을 보인다. 야곱이 아무 선행의 공로가 없이 은혜를 받게 된 것과 같이, 에서는 아직 범죄로 더럽혀진 일이 없으면서 미움을 받았다(롬 9:13). 우리가 행위에 눈을 돌린다면, 우리에게도 분명한 일을 사도가 보지 못했다는 것같이 되어, 그를 모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사도가 행위를 보지 않았음이 증명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직 선악간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을 때에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버림을 받았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행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다음에 그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는 문제를 언급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의 의를 가장 화실하고 분명하게 옹호할 수 있을 듯한 방법을 쓰지 않는다.

즉, 에서에게는 그의 사악함에 따른 보상을 주신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버림을 받은 자들도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움을 받는다고 하는 다른 해결 방법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는 결론을 첨가한다(롬 9:18). 바울이 두 가지를 다 하나님의 결정에만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에 우리가 다른 이유를 확정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제외하시는 데 대해서도 그의 뜻 이외에 아무 이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신 대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기도 하고 강퍅하게 만드시기도 한다고 하실 때, 이 말은 하나님의 뜻 이외에서는 다른 원인을 찾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제 23 장  이 교리를 항상 거짓되고 부당히 평가해온 그릇된 비난들에 대한 반박

(유기는 선택과 하나님 뜻의 작용이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1-3)

1. 선택이 있을 뿐 유기란 없단 말인가?

그런데 인간의 오성(五性)은 이런 말들을 들을 때에, 그 교만을 억제할 수 없어, 전투 나팔이나 들은 듯이 함부로 날뛰며 소동을 일으킨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으려는 듯이 선택을 용인하면서도 누군가 정죄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무지하고 유치한 짓이다. 버림과 대조되지 않으면 선택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따로 구별하신다고 말하면서, 선택만이 소수에게 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우연히 또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는다고 말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163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신다. 그리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정하신 기업에서 그들을 제외하고자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천사들까지도 찬양하는 하나님의 불가해한 계획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칠 때에, 그 말씀을 듣고도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은 용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1636) 자비가 하나님의 손과 뜻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퍅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손과 뜻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롬 9:14이하). 또 바울은 내가 말한 사람들과는 달라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서 거짓 구실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고, 진흙이 토기장이와 언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경고할 뿐이다(롬 9:20). 그런데 하나님께 정죄를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마 15:13)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말씀의 뜻은 분명히,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농장에 거룩한 나무로서 심어주시지 않은 사람들은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말씀은 유기의 표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무리 분명한 일이라도 그들에게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논란을 그치지 않는다면, 건전한 믿음은 바울의 충고로 만족해야 한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롬 9:22-23) 하나님과 싸울 까닭이 없다고 한다. 독자들은 바울이 모든 수군거리는 중상의 기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권능에 대한 궁극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데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우리의 모든 지력을 삼켜버리는 깊은 판단을 우리의 결정에 예속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관대하게 용인하시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배척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할까 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라고 무가치한 대답을 한다. 이것은 "멸하기로 준비된"(롬 9:22)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심하기를 기다리면서 참으신다고 바울이 생각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어거스틴은, 권능과 인내가 결합될 때, 하나님은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능으로 주관하신다고1637) 이 구절을 바르게 설명한다. 그들은 또 다음과 같이 첨가한다. 진노의 그릇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되었다"고 하며, "하나님은 긍휼의 그릇들을 예비하셨다"고(롬 9:23)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동시에, 멸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하여,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다른 표현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앞에 있는 문구의 가혹한 점을 완화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지만, 멸하기로 준비된 일을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 이외의 어떤 것에 옮긴다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짓이다. 이 점은 바로 앞에 있는 문맥에서도 언급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셨다고(롬 9:17)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고 하였다(롬 9:18).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 강퍅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결론이 된다. 적어도 나는 어거스틴이 가르친 것을 지지한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이리를 양으로 만드실 때에,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극복할 만한 더 강력한 은혜로 그들을 개조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완고한 자들을 회심시키시지 않는 것은 더욱 강력한 은혜를 나타내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1638)

(첫째 반대론 : 선택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폭군인 셈이다. 2-3)

2. 하나님의 뜻이 곧 의의 표준이다

경건하고 온건한 사람들과 자기가 사람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발언들만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악독한 개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내뿜는 독은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우리는 필요한 대로 그 하나하나에 대답하려 한다.

미련한 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난을 들으셔야 하는 듯이 여러 가지로 항의한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아직 아무 죄도 짓지 않고 그를 노엽게 한 일도 없는데, 무슨 권리로 그들에 대해서 노하시는가? 원하는 대로 사람을 멸망에 내어 주신다는 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라기보다 폭군의 변덕과 같다"고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공과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결정만으로 영원한 죽음에 예정된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쟁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만일 이런 생각이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다면, 한 가지 점만 고려하더라도 이런 생각을 충분히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호기심만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악한 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또 그러해야 마땅하다. 만일 하나님의 뜻에 어떤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보다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은 그 먼저 있는 것에 지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합당치 않다. 하나님의 뜻은 의의 최고 표준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그가 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무엇이든지 의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1639) 대답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왜 그것을 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어떤 것을 찾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은 자기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해야 한다. 없는 것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것까지 발견하지 못하게 될 염려가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곰곰이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효과적인 제지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저주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의 대담한 태도에 대해서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도움도 받음 없이 그의 의로 충분히 자기변호를 하실 것이다. 즉, 그들의 양심에서 모든 궤변과 구실을 빼앗고 그들의 유죄를 선언하시고 정죄하실 것이다.

또 우리는 "절대적 권력"이라는 허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속적인 개념이므로 우리에게는 당연히 가증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법인 무법한 신을 상상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말과 같이, 정욕에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아무 허물도 없을 뿐 아니라, 완전성의 최고 표준이며 모든 법의 법이다.1640)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답변하실 의무가 있다는 생각과 또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따라서 우리는 허용된 범위를 넘으려고 할 때에는 시편에 있는 말씀 곧 죽을 인생이 하나님을 판단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항상 승리자가 되시리라는 경고의 말씀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시 51:4)

3. 하나님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들에 대해서 공평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심으로써 원수들을 억제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태연하게 조롱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도록,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무기로 주신다. 만일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사망의 심판을 받을 일을 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왜 처음부터 어떤 사람들을 사망에 예정하셨느냐"고1641) 우리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대답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본성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시려고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빚을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로 더럽혀졌으므로 하나님께는 극히 가증할 뿐이다. 이것은 폭군적인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공의의 입장에서 가장 공평하게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주께서 사망으로 예정하시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본성의 상태에 의해서 그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불공평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그들이 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그들을 묶어 영원한 재난에 넘겼다고 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쟁론하게 해 보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신다면, 하나님의 이 변호 방법에 대해서 그들은 어떤 항변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 전부가 썩은 덩어리에서 생겨났다면,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 자기들의 본성이 자연히 자기들을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싫든 좋든 간에 느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으로 사망에 예정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공정하시다고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항의하는 그들의 심사가 얼마나 패악한가는 그들이 정죄의 원인을 고의로 은폐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스스로 정죄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을 정당화해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정죄를 내리시는 당사자라고 내가 백 번 말할지라도 이것은 옳은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에 새겨져 자꾸만 눈에 띄는 죄책을 신속하게 씻어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우리의 의문에 귀속하지 않는다. 4-7)

4. 하나님의 정의 속에는 역시 하나님의 법령이 숨겨져 있다

그들은 다시 다음과 같이 항의한다. 즉, 지금 그들의 정죄의 원인이라고 하는 그 부패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미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그들이 부패 속에서 멸망할 때에, 그들은 아담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타락하여 불행에 빠지고 그 후손들까지 끌어넣은 그 불행의 벌을 치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 자신의 피조물들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속이는 이는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1642) 인류가 지금 빠져 있는 이 비참한 상태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또 우리는 결국 항상 하나님의 뜻의 단독 결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과, 그 결정의 이유는 하나님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말했다.1643)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비난을 받으셔야 한다는 결론은 여기서 직접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그들은 그러한 대답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참으로 변호되지 않으며 우리가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궤변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시고 싶은 대로하시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을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과는 전연 다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생각하라고 할 때보다 더 강력한 이유를 말할 수 있는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어떻게 불의를 용인하실 수 있는가?(창 18:25 참조).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본성에 속한 일이라면, 하나님은 본성에 따라 의를 사랑하시며 불의를 미워하신다.

따라서 사도는 자기의 주장이 곤란을 당한 것같이 도피하는 구실을 찾지 않고,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표준으로 측량하거나 사람의 약한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것임을 밝힌다. 사도는 하나님의 판단에는 심히 깊은 기초가 있어서(롬 11:33), 사람의 마음이 그 깊이를 알려고 하면 완전히 삼켜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것까지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또,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어떤 법으로 판단하려 하며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 일을 비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미한 짓인가를 가르친다. 비록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만, 솔로몬의 말은 잘 알려져 있다.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는 미련한 자들과 범법하는 자들에게 각각 그 삯을 주시느니라"(잠 26:10 제네바 성경 참조). 솔로몬은 여기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죄인들에게 그의 영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결정에는 그들에 대한 벌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자기에게 있는 이성(理性)이라고 하는 극히 약한 척도로 무한자를 측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정신 착란에 빠진 자들이다! 바울은 고결한 지조를 지키는 천사들을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고 부른다(딤전 5:21). 만일 그들의 변함없는 충성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른 천사들의 반역은 그들이 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실에 대한 원인은 그들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 이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버리심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안에 숨겨져 있다.

5. 하나님의 감추어진 법령은 샅샅이 파헤쳐 질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경외되어야 한다

그러면 여기에 마니(Mani)나 콜레스티우스(Coelestius)의1644) 제자, 즉, 하나님의 섭리를 훼방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는 지극히 위대하여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므로(롬 9:19-23 참조) 섭리에 대한 이유를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일인가! 이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이 제한되어, 그가 생각할 수 없는 일은 하나님도 하실 수 없기를 원하는가?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말한다. 주께서는 멸망으로 갈 줄을 분명히 미리 아신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고자 하셨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 물을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1645)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의 논쟁에 끌어내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의로우신 최고 지배를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이다. 의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왜 불의를 문제 삼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악한 자들의 입을 막으며, 그들이 감히 떠들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 하나님께서 그의 위대한 사업을 그대들의 무지에 맞도록 조절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일들이 육에 대해서는 감추어졌다고 해서 악하다는 말인가? 그대들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은 "큰 바다"라는 것을(시 36:6) 그대들은 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결정하신 일을 그대들의 좁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대들의 정신 착란에 빠진 탐구욕으로 그 "바다"에 뛰어든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그대들 자신의 멸망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대들의 이성이 말한다.

욥기와 예언서들이 하나님의 알 수 없는 지혜와 무서운 권능을 선포하는데, 그대들이 적어도 두려운 마음으로 자기를 억제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일 그대들의 마음이 괴롭거든, 부끄러워 할 것 없이 어거스틴의 충고를 들으라. "사람인 그대는 내게서 대답을 들으려 한다. 나 역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는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라고(롬 9:20) 하시는 이의 말씀을 듣자. 믿는 무지는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 공로를 구하라. 그대는 형벌만을 발견할 것이다. '깊도다!'(롬 11:33). 베드로는 모른다고 하며, 도적은 믿는다. '깊도다!' 그대는 이유를 찾는가? 나는 깊음 앞에서 떤다. 그대는 이론을 말하라. 나는 찬탄하겠다. 그대는 변론하라. 나는 믿겠다. 나는 깊음을 본다. 그러나 밑바닥에는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놀라운 일을 발견했기 때문에 쉬었다. 그는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라고 하는데, 그대는 측량하려고 하는가? 그는 하나님의 길을 찾을 수 없다고 하는데(롬 11:33), 그대는 찾아내려고 하는가?"1646) 더 계속하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급한 그들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이미 성령을 통해서 바울의 입으로 하신 변호 이외에 다른 변호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말하기를 중지할 때, 우리는 바른 말을 잊어버린다.

6. 둘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

그들의 불경건은 또 다른 반대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직접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죄하신 죄인을 정당하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경한 자들은 지껄인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만들어 놓은 일들을 왜 사람들에게 죄로서 전가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해야 좋은가? 하나님의 결정에 반대해서 싸울 것인가? 그것은 전연 불가능한 일이므로 해보아도 무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원인이 하나님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교회의 저술가들이 보통 사용하는 변호법을 피하려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악은 사람의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예지는 사람이 죄인으로 인정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변호를 하면 궤변은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계속되어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 예견하신 악을 막고자 하셨다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므로, 그의 예정된 계획에 의해서 사람을 지상에서 그렇게 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모두 하도록 창조되었다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피할 수 없이 하는 일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할 것이다.164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어려움을 바로 해결할 것인가를 살펴보아야겠다. 우선, 모든 사람은 솔로몬이 한 말에 찬성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보라, 만사의 처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구원과 사망의 결정도 그의 권한 내에 있으므로, 그는 그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죽기로 결정되어 출생하여서, 그 멸망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도록 정하셨다. 만일 누가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섭리에 의해서 그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악행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일부를 말하는 것이요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 학자들도 간혹 이런 해결책을 사용했으나, 주저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1648) 스콜라 학자들은 이것을 의지하고서, 이에 대해서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는 듯이 말한다.1649) 사실, 나도 예지만이 피조물들에게 필연성을 부과하는 것이 아님을 선뜻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예지도 사물의 원인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왈라(Valla)가 거룩한 일들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 더욱 명쾌하고 현명한 견해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주장은 유익하다고 했다. 그리고 생사는 하나님의 예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다.1650)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예견하시기만 하고, 그의 결정에 의해서 배치하시거나 제한하시지는 않는다면, 그의 예견과 인간의 상황의 필연성과의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묻는 것도 일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래의 사건들을 예견하시는 것은 그런 사건들이 생기도록 자신이 결정하셨기 때문이므로, 그들이 예지에 대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만사는 하나님의 결정과 명령으로 발생하는 것이 분명하다.

7. 하나님께서는 죄로 타락하는 것을 예정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반역으로 멸망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말씀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결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고(시 115:3) 선포하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 중의 가장 고귀한 존재를 목적이 불확실하게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들은, 사람에게는 자기의 운명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공과에 따라서 처리하시겠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정하신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만일 이런 무익한 조작이 용인된다면, 아무 것도 의지하시지 않고 자신의 비밀한 계획에 따라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 있을 것인가? 그들이 싫든 좋든 간에 예정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나타난다. 한 조상의 죄 때문에 모든 후손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은 저절로 생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인류 전체에 관해서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을 왜 한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이런 핑계로 그들의 노력을 낭비하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영원한 사망에 예속되었다고 선언한다(롬 5:12이하 참조). 이 일은 자연에 돌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의를 변호하려는 이 훌륭한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지푸라기 하나에 매달려 있으면서, 높은 지붕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다시,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면, 아담의 타락이 무수한 후손을 어린아이들까지 불가피하게 영원한 사망으로 끌어넣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무서운 결정이란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165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의 결말이 어떻게 되리란 것을 예견하셨으며,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결정하고 명령하신 것이므로 미리 아셨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의 예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경솔하고 부주의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장차 있을 일을 모르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늘 심판자를 비난할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정당한 또는 명백한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예정에 적용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어리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사람의 타락과 그로 인해서 후손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결정에 따라서 그렇게 되도록 마련하셨다.

이는 장차 있을 일을 모두 예견하시는 것이 그의 지혜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의 손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며 주관하는 것은 그의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문제들과 같이 이 문제도 훌륭하게 처리한다. "우리가 바르게 믿으며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지극히 건전한 일이다. 즉, 만물의 주이신 하나님, 만물을 지극히 선하게 만드신 하나님(창 1:31 참조), 또 선에서 악이 생기리란 것을 미리 아셨으나, 악한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보다 악에서 선을 만들어내는 것도 자신의 전능한 선하심의 일부임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생활을 정하실 때에, 그들의 생활에서 우선 자유 의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며, 그 다음에 자신의 은혜의 복과 자신의 공의의 결정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이시도록 마련하셨다."1652)

(하나님이 아담의 타락과 버림받은 자들의 유기를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결정하신 일이다. 그러나 이를 공의로 하셨다. 8-11)

8.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은 뜻과 허락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의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악한 자들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 때문이지, 그것을 뜻하시기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1653)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는 것을 뜻하시지 않았다면, "허락"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만 하고 아무 것도 뜻하시지 않았는데 사람이 자기 힘으로 멸망을 초래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의 영장이 어떤 상태에 있으리란 것을 원하고 확정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하나님의 뜻은 사물의 필연성이며"1654)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것은 필연코 발생하는데 이는 그가 예견하신 일들이 참으로 발생하는 것과 같다고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런데 펠라기우스주의자나 마니교도나 재세례파나 에피큐로스파는(우리의 상대는 이 네 파이다) 자기들과 악인들을 변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 때문에 강압을 받는다고 하여 필연성에 항의하지만1655) 그들은 이 문제에 적용될 만한 논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정이 하나님의 비밀의, 그러나 흠 없는 공의를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이 상태에 예정될 만하다는 것은 확실하므로, 그들이 예정에 의해서 당하는 멸망이 정당하다는 것도 그것에 못지않게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멸망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존하되, 그 원인과 기회는 그들 자신 안에 있다. 첫 사람이 타락한 것은 주께서 그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일이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 충분히 나타나리라고 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화제에 오를 때는 그의 공의를 생각해야 한다. 찬양할 만한 것은 모두 반드시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한대로 넘어지지만, 자기의 허물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하는 그 악은 어디서 왔는가? 창조에서 왔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앓도록,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나온 것에 대해서 시인하시는 도장을 이미 찍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자신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순결한 천성을 더럽혔다. 그리고 그의 타락에 의해서 모든 후손을 자기와 함께 멸망으로 끌어넣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가까운 인류의 부패한 본성에서 정죄에 대한 명백한 원인을 보아야 하며, 감추어진, 전연 알 수 없는 원인을 하나님의 예정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을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복종시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그 지혜의 수많은 비밀 앞에 굴복해야 한다. 아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무식한 것이 유식한 것이며,1656) 변태적인 지식욕은 일종의 정신 이상이다.

9. 둘째 반대론에 대한 반박을 요약함

내가 아직 이 사악한 구실을 침묵시킬 만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을 것이다. 나는 불경건한 사람들의 불만을 완전히 막을 만한 증거를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미리 말한 것은 모든 반대론의 이유와 구실을 배제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악한 자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용서를 받을만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자기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으며, 특히 이 필연성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자기들에게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당연히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멸망하도록 예정했다고 그들 자신이 불평하는 그 하나님의 결정에는 그 자체의 공정성이 있어서, 우리는 알 수 없으나 아주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받는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지극히 공정한 심판이 내리는 벌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이 정죄 받은 원인을 찾기 위해서 감추어진 성역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시선을 돌리고, 정죄의 진정한 원천인 자기들의 부패한 본성은 못 본 체하는 것은 패악한 행동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비난을 막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하여 증거하신다. 사람은 현재 당하고 있는 재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창조되었지만, 재난이 생기는 근인(根因)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순결하게 창조하신 상태에서 부패하고 불순하고 패악한 상태로 타락했다는 것이 그가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10. 셋째 반대론 :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편파적이라는 견해가 된다

하나님의 예정을 반대하는 자들은 셋째 어리석은 이론으로 예정을 중상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의 상속자로서 받아주시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멸망에서 면제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된 일이라고 우리가 주장하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시는 것인데 성경은 각처에서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느냐고 항의한다. 그들은 또 성경에 모순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에는 공로에 대한 고려가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결론을 내린다.

먼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 뜻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사람"(person)이란 말은 사람(man)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 보통 호감, 품위, 권위 등의 인상을 주거나, 또는 미움, 경멸, 치욕 등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은 예컨대 재산, 권위, 가문, 지위, 조국, 육체적인 미(美) 등등이며(신 10:17 참조), 또 빈곤, 곤궁, 비열, 사악, 치욕 등이다. 그래서 베드로와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아니하신다고 가르친다(행 10:34, 롬 2:11, 갈 2:6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을 구별하시지 않으며(갈 3:28),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 편을 받아들이고 다른 편을 물리치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657) 야고보도 하나님의 판단에는 재산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을 선언할 때에(약 2:5), 같은 말을 사용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심에 있어서 자유인이나 노예를 차별하시지 않는다고 한다(골 3:25, 엡 6: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로를 전연 고려하시지 않고, 다만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어떤 사람들은 자녀로 택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버리시며 정죄하신다고 우리가 말할 때에, 아무도 이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더욱 만족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로가 다르지 않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을 버리시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선택을 받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도록 하는 무엇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아무 것도 없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또 그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고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선대하시는 이유를 자신의 선하심에서 찾으신다고 추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다른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한 사람만을 고려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자유로 나타나는 것이다.1658) 다른 구절에서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의 교만을 꺾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사람의 외모에 매이지 않는다.

11. 예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같은 태도로 예정하시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편파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사악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보시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벌하실 것이며, 결백하다고 보시면 그 엄격한 심판을 모든 사람에게서 철회하셔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고자 할 때에 그의 심판을 일체 포기하셔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모든 사람이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도 죄책이 공통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몇 사람을 구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벌을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한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 옳다고 대답한다. 그들이 이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베푸시는 능력을 빼앗으려는 것이거나, 베푸시는 것을 용인하더라도, 적어도 심판을 전적으로 포기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말이 여기에 가장 합당하다. "첫 사람으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정죄를 받았으므로‥‥‥그 중에서 귀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진 그릇은 그 자신의 의의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다. 그러나 다른 그릇이 천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은(롬 9:21 참조) 이유를 탐구할 문제가 아니고 심판에 돌릴 문제이다."1659)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시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벌을 주시지만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받을 이유가 없는 은혜를 분배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비난도 받으실 이유가 없다. 마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는 빚을 탕감해주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빚을 받아낼 권리가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자비하시므로 원하시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으며, 공정한심판자이시므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주지는 않는다.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 주심으로써 그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실 수 있다‥‥‥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것이 무엇임을 나타내실 수 있다."1660) 바울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갈 3:22)라고 기록할 때에, 그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빚진 분이 아니시라는 말을 첨가하여,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라고 하였다(롬 11:35).

(예정을 선포하는 것은 유해하지 않고 도리어 유익하다. 12-14)

12. 넷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곧은 생활에 대한 열정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예정론을 뒤엎기 위하여 만일 그것이 옳다면 선행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전적으로 파멸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자기의 생사(生死)는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명령으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들을 때에, 누가 하나님의 예정은 자기의 노력으로 막을 수도 없고 진전시킬 수도 없으므로,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포자기에 빠지며 정욕에 끌리는 대로 무모한 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다.1661) 분명히 그들이 전연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추악한 모독적인 언사로 예정설을 더럽히는 돼지들이 많으며, 그들은 이런 구실로 모든 충고나 책망을 회피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일단 결정한 처리 방법을 알고 계신다. 구원으로 결정하셨다면 적당한 때에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실 것이요, 사망으로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반대해서 싸운들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1662)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 위대한 신비를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신자에게는 훨씬 다른 태도를 가르치며, 이런 사람들의 범죄적인 미친 태도를 효과적으로 반박한다.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불경건하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비밀을 찾아 덤비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교만을 꺾고 항복하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떠는 동시에, 그의 자비를 존중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신자들이 목표로 삼는 것도 이것이다. 그러나 이 돼지들이 꿀꿀거리는 데 대해서는 바울이 적당하게 침묵하게 만든다. 그들은 아무 걱정 없이 죄악 생활을 계속하노라고 말한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 사이에 들어 있다면, 죄가 그들의 궁극적 구원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선택된 목적에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엡 1:4). 만일 선택의 목표가 거룩한 생활에 있다면, 선택은 아무 선행도 하지 않는 구실을 우리에게 준다기보다, 도리어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생활에 집중하겠다는 열의를 일으키며 자극할 것이다. 구원을 얻기에는 선택으로만 충분하다고 해서 선행을 중지하는 것과, 선택을 해주신 목적인 선의 추구에 몸을 바치는 것, 이 두 가지가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비교해 보라. 그리고 이런 신성 모독적 언행을 일소하라. 그것은 선택의 질서 전체를 뒤엎는 악한 행위이다.1663)

그러나 그들은 더욱 모독 행위를 확대함으로써 하나님께 정죄 받은 자가 결백하고 정직한 생활을 하여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더라도(딤후 2:15), 그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은 전연 파렴치한 거짓말이다. 이런 노력이 선택 이외에 어디서 올 것인가? 버림을 받은 자들은 천하게 쓰도록 만든 그릇이므로(롬 9:21 참조), 아무리 심판에 대해서 무익한 저항을 계속하더라도, 그 끊임없는 범죄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며 분명한 표지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그들 위에 선언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여 마지않는다.

13. 다섯째 반대론 :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정론이 마치 경건한 생활에 대한 모든 충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악의에 찬 파렴치한 훼방을 한다.1664) 이 문제 때문에 혹자가 어거스틴을 크게 악평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망과 은총에 관하여 발렌티누스에게 보냄(Rebuke and Grace, to Valentinus)이라는 글을 써서 그 악의를 일소하였다.1665) 경건하고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정칙하고 양순한 사람들을 만족시킬 만한 몇 가지 점을 간단히 말하겠다. 바울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택을 분명한 말로 공공연하게 선포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보았다.1666)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경고와 훈계를 하는 데 대해서 냉담하였는가? 선량한 열성가들에게 그들과 바울의 열의를 비교해 보게 하라. 바울의 강렬한 열의에 비하면 그들은 얼마나 냉담한가를 깨달을 것이다. 사도는 모든 의심을 제거하는 원칙을 말하였다.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살전 4:7),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살전 4:4),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요컨대, 바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긴 설명이 없더라도, 그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들을 사도가 잘 조화시켰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는(요 6:65) 말씀은 거짓도 아니며, 그의 명령에 상반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를 계속하여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 그들을 믿음 안에서 보존하여 끊임없는 유익을 얻게 해야 한다. 그러나 예정에 대해 인식함을 막지 말라. 그래야만 복종하는 자들도 자기의 힘으로 되는 일같이 자랑하지 않고 주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마 13:9) 하신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권고하며 전도할 때에, 그들은 기꺼이 순종하지만,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응한다(사 6:9).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러나 왜 이 사람들은 귀가 있고 저 사람들은 없는가?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롬 11:34). 감추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명백한 것을 부정할 것인가?" 나는 어거스틴의 말을 충실히 옮겼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보다 그의 말에 더 강력한 권위가 있을것이므로, 그의 글을 인용하기로 하자. "만일 이 말을 듣고 무감각하고 태만하게 되어, 종래의 노력을 버리고 마음대로 정욕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해서 한 말을 거짓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선해질 것을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빠져 있는 악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그들은 착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하리라고 예지하셨다면, 그들이 지금은 아무리 선한 점이 보일지라도 악하게 될 것이 아닌가?"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서, "그러면, 예컨대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다른 오류들을 범하게 되는 때에, 하나님의 예지에 대한 말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류해야 하는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이유와 진실을 말할 필요성은 문제가 서로 다르다. 진실을 말하지 않을 이유를 모두 찾아내는 것은 지루한 일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하나는, 이해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더하기 위해서 우리가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악하게 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해도 이와 같은 사람들의 지식이 증가되는 것도 아니요, 더욱 악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진리를 우리가 말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더 악해지고. 우리가 침묵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더 악해진다면, 그런 진리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진리를 얻도록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쪽도 진리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력이 더 있는 사람은 손해까지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듣고 받아들인다면, 그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될 수 있다‥‥‥또 우리는 성경의 증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진리를 말함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넘어지게 말까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허위에 빠지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끝으로 그는 이 생각을 압축해서 더 명쾌하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그 뒤를 이은 교회의 교사들이 두 가지를 다 했다면, 즉,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루며, 동시에 신자들을 경건한 생활 훈련 하에 붙들어 놓았다면 왜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대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진리의 구속력을 느끼면서도 '예정에 대한 말은 옳다고 하더라도 일반 사람들에게 선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을 옳게 생각하는가? 확실히 이 말씀은 선포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게' 해야 한다(막 4:9, 마 11:15, 눅 8:8). 그러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에게서 받지 않으면 누가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할 것인가? 받지 않는 사람은 거부할는지 모르나, 받는 사람은 받아서 마시고, 마시면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도록 경건을 선포해야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이런 예정을 선포해야 한다."1667)

14.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바르게 선포하는 데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저 거룩한 분은 덕을 세우려는 비상한 열의로 진리를 가르치는 방법을 조절하여, 가능한 한 실족하게 하는 일을 현명하게 피하였다. 그는 진리를 말하더라도, 동시에 적당한 표현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회상시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뜻으로 멸망하도록 예정되었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면, 그는 태만한 마음을 조장할 뿐 아니라, 악한 의도에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만일 미래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미 정죄되었으므로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가르치는 말이라기보다 저주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런 사람들은 미련한 선생이거나 악하고 불길한 예언자이므로 교회에서 물러나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1668) 그는 다른 곳에서, 책망을 하지 않고서도 그가 원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시는 분께서 긍휼을 베푸시며 도움을 주실 때, 사람은 책망에서 유익을 얻는 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러나 왜 사람에 따라 방법이 다른가? 결정권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흙에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후에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망을 들음으로써 의로운 길에 들어오거나 돌아올 때에, 그들의 마음속에 구원을 실현하는 분은, 누가 심고 누가 물을 주든 간에, 오직 자라게 하시는 그 분이(고전 3:6-8) 아닌가? 한 번 어떤 사람을 구원하기로 정하시면 사람의 자유 의지가 그 결정에 저항할 수 없는 그 분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 곧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데서 다 행하시는 이'(시 135:6), 장차 있을 것들도 만드신 이(사 45:11)의 뜻에 사람의 뜻이 저항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사람이 방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지를 이용해서 그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실 때에, "그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 역사 하신다. 즉, 내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붙잡으시며 움직이시며 그들에게 내적으로 역사 하셔서 그들 자신의 뜻으로 그들을 이끄신다." 그러나 그 직후에 첨가하는 말을 빠뜨릴 수 없다. "우리는 누가 예정된 수효에 포함되며 누가 포함되지 않는지를 모르므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원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마다 우리의 평화에 참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평안은 평안의 자손들 위에 머물 것이다(눅10:6, 마10:13 참조). 따라서 우리의 입장으로서는‥‥‥건전하고 엄격한 책망을 의약품처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서 그들 자신이 멸망하지 않도록 또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예지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책망이 유익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1669)

제 24 장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확실히 된다 : 더욱이 사악한 자들은 그들에게 운명지워진 공정한 파멸을 스스로에게 초래한다

(선택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가입된다. 1-5)

1. 소명은 선택에 의존하며, 따라서 전적인 은혜의 사역이다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것과. 악한 자들의 눈이 어두워지며 마음이 굳어지는 데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약속의 보편성이 모든 인류를 동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를 반박할 때 이미 다소 말한 바가 있다.167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자신 안에 감추어 두시지만, 부르심으로 그 선택을 나타내실 때에는 무차별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롬 8:30). 이것은 그들을 후에 영화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실 때에 이미 자녀로 정하셨으나, 그들이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그 위대한 복을 소유하지 못한다. 반대로, 부르심을 받으면, 이미 선택에 어느 정도 참여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성령을 바울은 "양자의 영"(롬 8:15)이라고도 하고, "인치심"과 "미래의 기업에 보증"이라고도 한다(엡 1:13-14, 고후 1:22, 5:5 참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속에 장차 양자가 되리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인치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이런 뜻으로 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말씀을 우리는 이미 인용했다.1671)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5).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다른 곳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신다(요 6:44). 어거스틴은 현명하게 이 구절을 설명했다. "진리(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것이(요 6:45) 사실이라면, 오지 않는 사람은 배우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올 수 있는 사람도 오겠다는 뜻을 품으며 그대로 행하지 않는 한 그가 실제로 오리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은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실제로 온다. 그리고 이 결과에 이미 가능성의 유익과 의지의 움직임과 행동의 결과가 나타나 있다."1672) 다른 곳에서는 더욱 분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는 말씀은(요 6:45),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고서 내게 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온다면 오지 않는 사람은 확실히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우지 않았다. 만일 듣고 배웠다면 왔을 것이다‥‥‥아버지께서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들에게로 오도록 가르치신다는 이 가르침은 육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조금 뒤에, "그러므로 이 은혜는 사람의 마음 위에 비밀히 베푸시는 것인데, 강퍅한 마음은 이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은혜를 주시는 목적은 우선 마음의 강퍅함을 제거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서 들을 때‥‥‥하나님께서는 강퍅한 마음을 없애주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겔 11:19, 36:26)‥‥‥이와 같이 그들을 약속의 자녀의 그릇으로 만드시며, 영광을 위하여 예비하신다(13장).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가르치시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람은 모두 긍휼로 가르치시고, 가르치시지 않는 사람은 심판으로 가르치시기 때문이 아닌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기' 때문이다"(롬 9:18, 14장)167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사람들을 자녀라고 부르시며, 스스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그들을 부르심으로써 가족 안에 받아들이시고 자신과 연합하여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경은, 부르심과 선택이 연결될 때, 이 일에서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 이외의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충분히 보여준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어느 모로 보든지 긍휼만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의 말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이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원하고 달음박질하는 것 사이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통 이해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사람의 소원과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가 돌보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는 어떤 의미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의도움을 받으면, 구원을 얻는 일에서 그 의미가 부여된다고 한다.

그들의 이 너절한 반대에 대해서 나는 어거스틴의 말로 반박하겠다. "만일 사도가 말하는 것이, 주께서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면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말을 돌려서, 사람의 소원과 달음질이 없으면 긍휼만으로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하게 불경건한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는 모든 것을 주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로 돌리고, 우리의 소원과 노력에는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1674) 이 거룩한 분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들이 여기서 제기하는 궤변을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노력과 원하는 것이 없다면, 바울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구원의 일부를 사람의 노력에 돌리는 것을 보고, 그들의 오류를 이 문장의 전반부에서 비난하고, 후반부에서 구원의 전체를 하나님의 긍휼에 돌린다. 또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부르심만을 끊임없이 선포하지 않는가?

2. 부르시는 방법은 오로지 은혜에만 의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그뿐 아니라, 부르심의 성격과 적용까지도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한다.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에 의한 조명이다. 우리는 예언서에서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사 65:1).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자비가 이방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을 때에 그를 어떤 곳에서 취하셨는가를 회상시키신다. 즉, 아브라함은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고 하신다(수 24:2-3 참조). 하나님께서 가치 없는 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주실 때 그의 인애가 거저 주시는 것임을 충분히 또 분명히 보여주신다.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 증거를 배척하기 때문에 더욱 엄중한 심판이 그들 위에 내려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악인들에게는 그의 영의 효과적인 역사를 허락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내적인 소명은 우리를 속일 수 없는 구원의 보증이다. 여기 요한의 말이 해당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4:13 참조).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값없이 자신을 내어 주셨을 때에, 육은 적어도 응답했노라고 하여 그 일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지 않으면 육에는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없다고 밝히신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각 사람의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선택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점에 대한 현저한 실례를 누가의 보고에서 볼 수 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를 들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말씀으로 교훈을 받은 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다(행 13:48). 부르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만이 주관하고 있는데 부르심이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부정한다면, 이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3.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에 주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선택에 동의함으로써 하나님의 협력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위를 점한다. 이는 우리가 받는 것은 믿는 능력뿐이고, 믿음 자체는 아니라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은 생각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1675) 성령의 은혜를 그렇게까지 약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어떤 이유로 선택을 믿음에 의존시킨다. 마치 믿음에 의해서 확인되지 않으면 선택은 의심스럽고 효력이 없게 된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우리에게 관계된 범위 내에서는 선택이 확인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이 감추어져 있다가 밝히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이 말의 뜻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지금 확인된다는 것, 이를테면, 지금 인침을 받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라야 선택이 효과를 나타내며, 여기서 그 타당성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물론 복음에서 확신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까지 파고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 깊은 바다가 우리를 삼켜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을 우리에게 밝히 보이실 때, 우리는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며 결과가 원인을 압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대로 우리는 비추임을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데, 이 찬란한 빛에 눈이 부시어 선택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이상 어리석고 부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동시에 우리는 자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믿고 간구하리만큼 우리의 신뢰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강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가까우며 우리 입과 마음에 있는(신 30:4)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름 위를 떠돌아다니려는 잘못된 갈망을 품었다. 그러므로 이런 경솔한 태도를 침착한 믿음으로 억제하며,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말씀으로 우리에 대한 그의 감추인 은혜를 충분히 증거하실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만 우리에게 풍부하게 물을 배급하여 마시게 하는 그 수도관이 우리가 그 원천에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한다.

4.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올바른 방법과 그른 방법

선택이 우리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느끼게 하는 믿음, 즉, 복음에 대한 믿음에 선택의 힘을 의존시키는 것은 잘못이므로 우리가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할 때에 가장 좋은 순서를 따르려면 선택을 확실히 증명하는 표징들, 즉, 부수적인 표징들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에 사용하는 가장 중대하고 위험한 유혹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릇된 곳에서 선택을 탐구하겠다는 악한 소원을 일으킨다. 내가 "그릇된 곳에서 탐구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 불과한 자가 하나님의 지혜의 깊은 내부로 침입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최고의 영원에까지 침투해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기에게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밑이 없는 소용돌이 속에 몸을 던져 그것에 삼키우고 말 것이다. 그는 풀려날 수 없는 무수한 올무에 걸리며, 볼 수 없는 암흑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고 할 때에, 어리석은 그의 이해력이 무서운 파멸의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 이 유혹은 우리의 거의 전부가 다른 어느 유혹보다도 가장 많이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만큼 더욱 치명적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면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선택되었다는 어떤 계시가 있는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한 번 이런 생각을 마음에 가지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견딜 수 없는 고민으로 불행에 빠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 생각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다. 이런 경험은1676) 이런 사람들이 예정에 대해서 얼마나 비루한 공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양심을 점령하여 동요를 일으키며, 하나님과의 평화와 평온을 잃게 만드는 오류가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선을 면하려면, 우리는 조심스럽게 이 바위를 피해야 한다. 여기 부딪치고서 멸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예정에 대한 논의를 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고의로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만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는 뱃길은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상쾌하다고도 하겠다. 자기들의 선택을 더욱 확신하려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그의 말씀과 별도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치명적인 심연에 빠져버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선택을 바르고 합당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의 탐구 방법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출발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매일 받는 은혜가 저 은밀한 선택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한 것과 같다(사 25: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일종의 증거품같이 쓰셔서, 우리가 허락되는 범위 내에서 그의 계획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알도록 우리에게 확인하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증거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가를 생각해보아야겠다. 베르나르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적절한 말을 했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서 말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결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의 평화의 목적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위에 여전히 있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그들의 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선행을 갚아준다. 그래서 주의 자비의 놀라운 방법으로 선한 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까지도 서로 협력하여 선한 결과를 나타낸다‥‥‥‥'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 나의 의를 위해서는 하나님만 내 편에 계시면 충분하다. 나는 그에게만 죄를 지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전가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신 모든 일은 마치 그것이 없었던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 뒤에, "오, 진정한 안식처로다! '거할 곳'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합당하도다. 오, 하나님을 뵙는 곳, 성내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나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자하고 다정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감화를 체험하는 곳이로다! 이 환상은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위로를 준다. 불안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고 도리어 진정시킨다. 우리의 감각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안정시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안식을 느낀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평화로운 것을 제공하신다. 그리고 안식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곧 우리들의 진정한 안식이 되는 것이다"1677) 라고 말한다.

5. 선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하며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자비하심과 인자하신 마음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선 그리스도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은 오직 그리스도 위에 머무신다(마 3:17참조). 우리가 구원과 생명과 천국의 영생을 구하려면,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곳이 없다. 그만이 생명의 샘이며, 구원의 닻이며, 천국의 상속자이시다. 그런데 선택의 목적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가 그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선택의 목적을 아무리 이모저모로 생각해보아도, 결국은 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은 그들 자체로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엡 1:4).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실 수 없었다면, 따라서 그들을 미리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자들로 만드시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그의 나라를 상속하는 영예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선택의 보증을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보아야 하는 거울이며, 우리가 이렇게 보는 데는 아무런 자기기만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영원 전부터 정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그의 자녀로 삼으려고 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계속하고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계 21:27 참조) 너무나 분명하고도 확고한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의 확실한 친교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즉, 자신과자신의 모든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복음 선포를 통해서 증거하셨다(롬 8:32). 우리는 그로 옷 입으며(롬 13:14), 그에게까지 이르러(엡 4:15), 그가 살아 계시므로 우리도 살 게 하려 하신다고 한다.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셔서(롬 8:32, 요 3:15 참조)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셨다는(요 3:16) 것이다. "이를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한다(요 5:24).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며(요 6:35), 이 떡을 먹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하신다(요 6:51,58). 다시 말하거니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로 인정하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인정되는 이상의 무엇을 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초월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목표라면, 그의 안에서 이미 얻은 것, 그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그의 밖에서 찾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미친 짓인가?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영원한 지혜이며, 불변의 진리이며, 견고한 계획이시므로, 우리는 그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구하는 아버지의 뜻과 조금이라도 다를까봐 염려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버지의 뜻의 처음부터 영원까지를 우리에게 충실히 계시해 주신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도 이 생각을 항상 가져야한다. 선택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를 촉진시키지만,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오 하나님, 만일 저를 선택하셨으면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조건을 붙여 흥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만족하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는지를 다른 데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기록된 바른 생각을 바르게 이용할 줄을 안다면, 이 지혜는 우리를 여러 가지 함정에서 구해낼 것이다. 일정한 한도 내에 두어야 할 일을 이리저리 끌어내는 것은 삼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호 하에서 선택된 자들의 인내는 안전하다 : 반대론자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해석함. 6-11)

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그들의 선택이 불변하고 영속하다는 확신을 주신다

우리의 선택의 확고성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는 일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우리의 확신을 든든하게 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아는 지식으로 비춰주시고 교회의 품에 안겨 주신 사람들을, 또한 그가 돌보시며 보호하신다고 한다. 그가 받아 주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셨고, 영생을 얻도록 보호하게 하셨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모든 사람을 그의 보호 하에 두셨다고 선언하신다(요 6:37,39, 17:6,12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맡기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 위에 세우신 유일한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보호 하에 받아들이셨는지를 아직도 의심한다면, 이 의심에 대한 대답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기꺼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시며,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의 양떼에 넣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요 10:3).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는 인자하신 마음으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우리를 맞이하러 오신다. 그는 우리를 그의 양떼에 넣으시고 그의 우리 안에 두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의 상태에 대한 불안이 몰래 숨어든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선택된 자들이 부르심을 받는다고 가르치며(롬 8:30) 그리스도께서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시기 때문이다(마 22:14). 참으로 바울은 과도한 자신을 가지지 말라고 권고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또한 그대는 하나님의 백성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대를 찍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접붙이실 수 있기 때문이라(롬 11:21-23 참조)고 한다. 끝으로 견인1678)을 첨가하지 않으면 부르심과 믿음도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또 견인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런 불안에서 해방시키셨다. 확실히 미래에 적용될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마 15:13)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은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뜻을 역으로 암시하신다. 요한의 말은 이 뜻과 부합한다.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일 2:19). 그리고 바울이 생명과 죽음, 현재와 미래의 일을 이겼노라고 당당하게 발언을 하는 이유도(롬 8:38)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의 자랑은 견인의 은사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확실히 이 생각을 모든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한다. 다른 곳에서도 같은 생각을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다윗도 믿음이 약해진 때 이와 같은 도우심을 의지했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138: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는 것은(눅 22:32)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일을 보아서 우리는 그들의 경건이 변함없기를 기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거부를 당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은 떨어져 나갈 위험성이 없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 일에서 무엇을 깨닫기를 원하셨는가? 우리는 이미 그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반전하리란 것을 확신하라는 것이 아닌가?

7. 참으로 믿는 사람은 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다시 떨어져 멸망으로 급행하는 것은 매일 있는 일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은 하나도 멸망시키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멸망의 자식"만은 제외하셨다(요 17:12).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매달린 일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진심으로 신뢰해야만 우리는 선택을 굳게 확신할 수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라고(요일 2:19) 요한은 말한다. 선택된 자들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표징이 그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신자들에게 복음의 말씀에서 구하라고 권고하는 것과 같은 선택에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있다고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예가 있다고 해서 주의 약속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진정한 믿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들이며, 그가 그들의 보호자와 목자가 되시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요 3:16, 6:39 참조). 우리는 조금 뒤에 유다에 대해서 말하겠다.1679)

바울은(고전 10:12 참조) 신자들의 단순한 확신을 금하지 않고, 순전히 우둔하고 육적인 자신을 금한다. 이런 자신은 거만과 자만과 타인에 대한 멸시를 낳으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경외심을 없애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게 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가르칠 때, 유대인들이 제외되고 그 대신에 자기들이 용납되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무정하고, 교만한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한다(롬 11:18이하 참조). 그는 또 두려움을 품으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겁을 내며 마음을 흔들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다른 곳에서 말한 바와 같이,1680)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하게 받으려고 준비할 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감이 결코 약화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신자들을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파벌들을 상대로 말한다. 교회가 두 파로 갈려서 경쟁과 분열이 생겼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특별하고 거룩한 백성의 자리에 놓였으니, 두려움과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고 경고한다. 그들 중에는 교만해진 사람이 많았고, 그들의 그러한 자만은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1681) 우리의 희망이 미래에 곧 죽음의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았으며, 우리의 장래를 의심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소망의 성격과 가장 반대되는 생각이란 것을 알았다.

8. 일반적인 소명과 특별한 소명(마 22:2이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신(마 22:14)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매우 큰 오해가 있다. 위에서 분명히 말한 점을 굳게 지킨다면, 이 말씀에는 모호한 데가 없을 것이다. 즉,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인 소명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복음 선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복음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서(고후 2:16 참조), 또 더욱 엄격한 정죄의 기회로서 제시하시는 사람들도 부르신다. 다른 종류의 소명은 개별적인 것이며, 대개는 신자들에게만 주신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을 비추시어, 선포하신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머물게 하신다. 그러나 간혹 신자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비추어 그도 참여하게 하시지만, 후에 그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시며 더 심한 맹목으로 벌하시는 일도 있다.

그런데 주께서는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소수 사람들에게만 바르게 존중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을 어떤 임금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왕은 장중한 연회를 베풀고자 사자들을 사방에 파견하여 많은 사람을 초청하나, 수락하는 사람이 심히 적다. 각각 일이 있어서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거절하기 때문에 왕은 할 수 없이 네 거리에서 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부르기로 한다(마 22:2-9). 여기까지는 이 비유를 외면적인 소명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주께서는 후에 첨부해서, 하나님을 좋은 주인으로 비유하신다. 주인은 이 식탁 저 식탁으로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한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면, 합당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이 그 부정한 옷으로 연회의 기쁨을 모욕하는 것을 묵인하지 않는다(마 22:11-13). 나는 이 말씀이, 믿노라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왔으나 그리스도의 성결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이런 치욕을, 이런 암적 존재를1682) 언제까지나 참으시지 않고, 비열한 그들에게 합당한 처분을 내려 그들을 쫓아버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었다(마 20:16 참조). 그러나 이것은 신자들이 자기의 선택에 대해서 생각할 소명은 아니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소명은 악인들에게도 공통된 것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소명은 중생의 영이 동반한다(딛 3:5 참조). 중생의 영은 장차 있을 기업의 보증이며 확인하는 인인데(엡 1:13-14), 그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 이 인을 우리의 마음속에 거두신다(고후 1:22). 요약하면, 위선자들이 진정한 경배자들과 같이 경건을 자랑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자리에서 그들을 쫓아내실 것이다(마 22:13). 이것은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시 15:1).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 24:4, 15:2이하 참조).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6) 이와 같이 성령은 신자들에게 참으라고 역설하신다. 또한 이스마엘 자손이 교회 안에 섞여 있어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 사람들은 결국 가면을 벗고 수치스럽게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9. 유다의 예는 반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같은 이유는 바로 위에서1683) 언급한 예외, 즉,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라고(요 17:12)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예외에도 해당한다. 이 표현은 정확하지 않으나 모호한 것은 아니다. 유다가 그리스도의 한 양으로서 뽑혔던 것은 그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에서 다른 곳에서 그가 사도들과 함께 선택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직무에 관련된 말씀이었다.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신다(요 6:70). 바꿔 말하면, 그를 사도직에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선택을 말씀하실 때에는 선택된 자들 중에서 그를 멀리 버리신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요 13:18). 만일 누가 이 두 구절에 있는 "택한다"는 말을 혼동한다면, 그는 심한 곤란에 빠질 것이나, 그 차이에 주의한다면 사태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알뿐이고, 선택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고 한 것은 위험한 오류이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모든 사람에게 두려워하며 떨라고 권고하며, 그 이유로서는 우리는 오늘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지만, 앞으로 무엇이 되겠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1684) 그러나 이런 말은 그가 이 돌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을 충분히 알려 준다. 그는 선택을 행위의 공로에 의존시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낙심할 이유를 충분히 제공하고, 그들의 마음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을 그들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신뢰로 전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자들은 우리가 처음에 한 말의 뜻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바르게 이해하면 예정은 믿음을 조금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장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끔 우리의 이해 수준에 맞도록 말씀을 조절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겔 13:9).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속한다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생명책에 기록하기 시작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에 의해서(눅 10:20)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빌 4:3). 그러나 에스겔서의 말씀은 선택된 사람들 가운데 지도자같이 보이던 자들이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표시할 뿐이다. 시편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시 69:28, 계 3:5 참조)라는 말씀과 같다.

10. 부름받기 전에 선택된다. 따라서 선택의 씨앗은 없다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양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출생 직후도 아니며, 모두 동시에 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데 따라서 되는 일이다. 그들이 저 최고의 목자에게로 모아지기 전에는 모두 다 같이 황야를 헤맨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궁극적인죽음의 멸망으로 돌입하는 것을 특별한 자비로 막아 주시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들도 아담의 후손이요, 인류에 공통된 부패한 냄새를 피운다. 그들이 순전한 불경건으로, 심지어 절망적인 불경건으로 끌려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안전을 돌보시며 손을 그들에게 뻗쳐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날 때부터 일종의 선택의 씨가1685) 심어져 있어서 그 힘으로 그들은 항상 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지지되지 않으며, 우리의 경험1686) 자체로도 부정한다. 그들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선택된 사람들은 비추임을 받기 전에도 경건 생활을 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흠 없는 생활을 하였고(빌 3:5-6) 고넬료는1687) 구제와 기도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사람이었다고 한다(행 10:2). 바울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만 고넬료에 대해서는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바이다. 그는 그 때에 이미 성령의 조명을 받아 중생했고, 다만 복음의 분명한 계시만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수의 예에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것인가?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 항상 경건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소크라테스(Socrates),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스키피오(Scipio), 쿠리우스(Curius), 카밀루스(Camillus) 등의1688) 고귀한 생활을 보고, 이 사실을 근거로 우상 숭배의 암흑 속에 버림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거룩함과 순결함을 성의껏 추구했다고 추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성경에는 그들을 명백하게 부인하는 곳이 한 둘 뿐이 아니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중생 전의 상태를 묘사한 것을 보면, 이 씨는 한 알도 보이지 않는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그 때에 너희는……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2).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9).

그러나 그들은 이런 말이 참되신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도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그런 무지 속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다시는 거짓말이나(엡 4:25) 도적질을(엡 4:28)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의 말은 파렴치한 무고죄가 될 것이다. 또 그들은 다른 구절들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고린도서에는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고전 6:9-10) 말한 후에 즉시 이어, 그들도 모두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바로 이런 죄를 짓던 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았고 그의 영에 의하여 해방을 얻었다고 첨가한다(고전 9:11). 마찬가지로 로마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롬 6:19).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롬 6:21).

11. 씨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속하신 것이다

그러면, 악에 철저하고자 하는 듯이 가장 추악하고 가증한 죄 속에서 뒹굴면서 평생을 여러 가지 더러운 생활을 하던 사람에게서 어떤 선택의 씨가 싹텄다는 말인가? 만일 바울도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말할 생각이었다면(고전 6:9-11 참조), 그들을 이런 추악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가 얼마나 컸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베드로도 그의 추종자들이 선택의 영원한 씨에 대해 감사하도록 권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방인의 정욕을 따른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다고 경고한다(벧전 4:3). 실례들을 든다면, 기생 라합에게는(수 2:1) 믿기 전에 어떤 의의 씨가 있었는가? 예언자들의 피로 온 예루살렘이 거의 적셔졌을 때의 므낫세(왕하 21:16), 죽는 최후 순간에 회개를 생각한 도적(눅 23:42)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떤 선택의 씨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이 성경에 없는 일을 꿈꾼 이런 주장을 버리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즉, 멸망으로 갔다. 이 멸망의 구렁에서 구출하기로 결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는 적당한 때까지 연기하시며, 그 동안은 다만 그들이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의 죄는 저지르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자들을 처리하시는 방법. 12-17)

12. 타락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처리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심으로써 영원한 계획으로 그들에게 예정하신 구원을 완성하시는 것과 같이, 타락한 자들에 대한 계획도 그들에 대한 심판으로 시행하신다. 그러면 현세에서 치욕을 받으며 사후에는 멸망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 그의 진노의 도구가 되며 준엄성의 실례가 되도록 창조하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이 예정대로 되어지도록 하나님께서는 흑은 말씀을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며, 혹은 말씀의 선포를 통하여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지각을 마비시키신다. 듣는 능력을 빼앗으시는 예는 무수하므로 그 중에서 가장 명백하고 현저한 것을 하나만 택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약 4천년이 경과하였고, 그 동안에 그 분께서는 구원의 교리의 빛을 모든 이방인들에게 숨기셨다. 그들을 무가치하다고 보셨기 때문에 이 위대한 은혜를 나눠주시지 않았더라도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후손들 또한 조금이라도 더 가치가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험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말라기가 유력한 증인이 된다. 그는 그들의 불신앙과 심한 모독적인 행위를 폭로하면서 구속자가 오리라고 선언한다(말 4:1이하). 그러면 왜 구속자를 전자에게는 주시지 않고 후자에게만 주셨는가?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계획을 넘어 더 깊은 원인을 추구하는 사람은 쓸데없이 고통만 당할 것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지 않으면, 포피리(Porphyry)의 어떤 제자가 하나님의 공의를 태연하게 헐뜯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1689) 아무도 부당하게 멸망하지 않으며, 어떤 사람들이 멸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인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궤변을 사용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말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고 심판자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정죄하시고 그의 빛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눈을 어두운 상태에 버려두심으로써 그의 예정을 이루어 나가신다. 눈이 먼 예는 매일 볼 수 있고, 성경에도 증거가 많다. 같은 설교를 백 명이 들을 때, 20명은 곧 순종하는 믿음으로 그 설교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거나 비웃거나 싫어한다.1690) 이런 차이는 그들의 악의와 타락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본성은 다른 자들과 똑같은 악의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고 묻는(고전 4:7) 바울의 질문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심중에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의 말의 의미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은 그들 자신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이다.

13. 말씀의 선포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는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를 내리시고 다른 사람들은 버리시는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가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행 13:48).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롬 9:21-22) 이유 외에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거스틴과 같이 다음의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악인들의 뜻을 선하게 만드실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러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는가? 그의 뜻이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왜 다른 데 있는지는 그만이 아신다."1691) 즉, 우리는 분에 넘치는 지혜를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크리소스톰과 같이, 원하는 사람, 손을 뻗치는 사람은 하나님이 끌어당기신다고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적절하다.1692)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차이는 하나님의 판단에 있지 않고, 온전히 사람의 결정에 있는 것같이 될 것이다. 사실, 사람의 마음 자체에는 그런 충동이 없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도 성령의 자극이 필요하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부인이었으나, 바울의 말을 듣고 유익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실 필요가 있었다(행 16:14). 이것은 한 여인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경건의 길에서 전진하려면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을 보내셔서 사람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하고자 하시는 일이 많다는 것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주는 왜 바로에게 그렇게 많은 요구를 하시는가? 사자를 자주 보내심으로써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을 보내시기 전에 결과를 아셨고 또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애굽으로 돌아가라"(출 4:19),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21).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셨을 때에도, 완고하고 배반하는 백성에게 보내신다고(겔 2:3) 미리 경고하셔서, 그가 귀가 먹은 자들을 상대로 노래하게 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셨다(겔 12:2).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그가 전하는 말이 불같이 되어 백성을 나무같이 멸망시키며 흩어버리리라고 하신다(렘 1:10, 5:14 참조). 이사야의 예언은 이 점을 더욱 철저하게 주장한다. 그를 보내시면서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 마 13:14-15, 막 4:12, 눅 8:10, 요 12:40, 행 28:26-27, 롬 11:8 참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되 그들의 귀를 더욱 막히게 하시려는 것이며, 빛을 비추시되 그들의 눈을 더욱 멀게 하시려는 것이며, 진리를 가르치시되 그들을 더욱 우둔하게 하시려는 것이며, 약을 쓰시되 그들을 낫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예언을 적용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능히 믿지 못한 것은(요 12:39) 하나님의 이 저주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고자 하시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씀을 수수께끼에 싸서 보내심으로써 그들이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고 더 심한 우둔에 빠지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신비유를 사도들에게만 해석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실 때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신다(마 13: 11). 알아듣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의 허물인지를 생각하고, 더 묻지 말라. 말씀에는 모호한 점이 많을지라도, 악인의 양심을 정죄할 만한 빛은 언제든지 충분히 있다.

14. 마음이 강퍅해지는 원인

주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분명하지만, 왜 이렇게 하시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아야겠다. 사람들의 불경건과 사악과 배반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1693)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 차이, 즉, 왜 어떤 사람들은 굴복하여 순종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강퍅한가의 이유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모세에게서(출 9:16) 주목한 점까지 전진해야 한다. 즉, 주께서 처음부터 모세를 세우신 것은 주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시려는 것이었다(롬 9:17). 버림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의 악의와 사악한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첨부해야 할 조건이 있다. 즉, 그들이 그 패악한 상태에 넘겨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정당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판단이 그들을 세워, 그들의 정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에 엘리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유일한 훈계를 무시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었다고 할 때에(삼상 2:25), 그 구절은 그들 자신이 사악해서 그런 완악한 태도가 생겼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을 그 완악한 상태에 버려두신 이유도 언급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그의 확고부동한 결정이 그들을 멸망에 예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도 이와 같이 같은 뜻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하였더라"(요 12:37-38, 사 53:1). 요한은 완악한 자들을 책망 받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성령께서 그 맛을 보게 하시기까지는 그 맛을 모른다는 이유로 만족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는 이사야의 말을(요 6:45, 사 54:13) 인용하시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이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교회와 멀어진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이유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확인한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참조) 복음이 선포될 때마다 그것이 어떤 사람을 노하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배척을 당한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복음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다(고전 1:22-24 참조). 그는 조금 전에(고전 1:21) 이런 사람들을 "믿는 자들"이라고 불렀지만, 믿음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그 당연히 차지할 자리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정하는 의미로 두 번째 발언을 첨부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의 원인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돌리도록 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조금 뒤에 그들을 "하나님께서‥‥‥택하사"라고 가르친다(고전 1:27-28).

불경건한 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서, 하나님은 그 무절제한 권능으로 가련한 피조물들을 학대함으로써 잔인한 쾌락을 누린다고 불평한다.1694)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일 천 가지 죄상에 대해서 한 가지도 만족한 변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악인들이 당하는 일은 하나님의 지극히 의로운 판단에 일치하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 일에 대한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높은 지혜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무지를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15. 여기에서 말한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성경 구절:⒜ 에스겔 33:11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경을 인용해서 반대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 구절에서는 악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반대의 소리를 높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부정하시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간단하게 설명하여, 그것이 우리가 위에서 표명한 견해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에스겔서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한 말을(겔 33:11), 그들은 인용한다.1695) 만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인류 전체에 적용하기를 기뻐하신다면, 복종할 가능성이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고무하시지 않고, 매일 불러도 마음이 점점 완악해지는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시는 것과 같이, 복음 선포와 기적은 유대에서보다(마 11:23) 니느웨와(마 12:41 참조) 소돔 사람들 사이에서(마 11:23) 더 많은 효과를 나타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속하기를 원하신다면, 은혜를 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므로 여기서 예언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받은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구별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대립시킨다면, 그것은 이 구절에 대한 극심한 곡해가 될 것이다.1696) 예언자의 진정한 뜻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용서의 소망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죄인이 마음을 돌이키기만 하면 물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주신다는 것이 예언자가 전하는 소망의 요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원하시는 동안은 그가 죽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자들의 회개를 원하시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경험은 가르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속임수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외면적인 부르심은 그것을 듣고도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의 모든 핑계를 빼앗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베푸시는 은혜의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죄인이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목적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보증하려는 것이며, 악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과 친절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이중으로 커진다는 느낌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든지 회개하는 자를 맞이하신다. 그러나 에스겔을 포함한 모든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친다.

16. ⒝ 디모데전서 2:3-4, 기타 유사한 구절들

둘째로 그들은 바울의 글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다(딤전 2:3-4).1697) 이 구절은 위에서 말한 이유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나의 대답은, 첫째로, 하나님이 어떻게 그 일을 원하시는 가는 문맥상으로 보아 분명하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점을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며, 그들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고 한다. 만일 반대자들이, 이 일은 그들이 구원의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확정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다음의 모세의 말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하나님께서 어떤 백성들에게는 복음의 빛을 주시고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서는 빼앗으신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떤 사람들은 경건의 교훈을 겨우 그 희미한 초보라도 맛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순수한 인식에도 결코 이르지 못했으니,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점을 보아서, 바울이 추론하는 뜻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조금 전에 디모데에게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에서 엄숙한 기도를 드리라고 명령하였다(딤전 2:1-2). 그러나 거의 소망이 없는 종류의 인간들을, 즉, 그리스도의 몸 밖에 있을 뿐 아니라, 전력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파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다소간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시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3-4). 바울의 이 말은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층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구원의 길을 막으시지 않고, 자비를 베푸셔서 아무도 그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을 표명할 뿐이다.

다른 말씀들도 하나님께서 그의 감추신 판단 안에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하셨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들이 돌이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모든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선언할 뿐이다. 만일 반대자들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신다는 말씀을(롬 11:32 참조) 끝까지 주장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는 뜻에서 다른 곳에 있는 말씀을 제시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이 말씀은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신(출 33:19) 말씀과 조화가 되도록 해석해야 한다. 자비를 반드시 베푸셔야 할 사람들을 택하시는 그 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기서 바울은 개인들이 아니고 사람의 계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항상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눈이 어두워 극력 반대하는 자들이지만 왕과 고관들까지도, 복음에 참가하게 만드실 자유가 하나님께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벧후 3:9) 한 말을 근거로, 그들은 더욱 강력한 반대론을 제기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곤란은 그 다음 구절에서 곧 해결된다. 왜냐하면 회개하여야 한다는 그의 뜻은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심은 분명히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퍅한 마음을 주시되 소수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6:26).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신 말씀은(슥 1:3) 부적당한 말씀일 것이다.1698)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생각해주시지 않으면 죽을 인생은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사람 편에서 회개를 선택한다면, 바울은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라고(딤후 2:25)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친히 회개를 권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은밀한 활동을 통해서 선택된 자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예레미야는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렘 31:18-19).

17. 다른 반대론들에 대답함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의 약속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약속이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증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불가침의 결정과 반대되는 일을 원하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구원의 약속은 그것이 아무리 보편적일지라도, 그 약속의 결과를 주의해본다면, 버림받은 자들이 예정되었다는 것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는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그것이 우리 안에서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믿음이 사라지면, 동시에 약속도 폐지된다. 이것이 약속의 성격이라면, 약속과 예정이 서로 어긋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포옹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진노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언하신다.1699) 나는 이 말씀들은 서로 완전히 합치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하나님의 자비를 찾으며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자비가 미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조명해주신 사람들만이 그의 자비를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예정하신 사람들만을 조명하신다. 약속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확실하고 신실하여 어김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그 분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증거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사람이라고 하시는가? 믿음만 있으면 죄인들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경건한 자들이 양심에 더욱 든든한 확신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피난처를 제공했는데도 그 은혜를 잊고 거절했기 때문에 죄의 속박을 피하여 숨을 만한 피난처가 없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복음을 통해서 이 두 종류 사람들에게 모두 제시되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과 불경건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믿음, 즉, 하나님의 조명이다. 그 결과 경건한 사람은 복음의 의사를 느끼고, 불경건한 사람은 복음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한다. 조명 자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척도가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는 그리스도의 비탄을(마 23:37) 인용하지만, 이 말씀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사람의 자격으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의 은혜를 계속 거절한 데 대해서도 책망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논제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정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전하시려고 주도면밀하게 노력하셨다는 것과, 그들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자기들의 욕망에 몰두하여 함께 모이기를 완강하게 거절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악한 의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중의 뜻을 가지셨다고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 없다고 항의한다.1700) 그들이 이 항의의 뜻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나도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감정을 품으시고 그의 위엄 있는 자리보다 낮은 데까지 내려오신다고 하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들이 이런 구절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께서는 배반하는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손을 뻗치셨으며(사 65:2),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온종일 수고하셨다. 이런 표현이 비유적인 것임을 무시하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적용한다면 여러 가지 무익한 혼란이 생길 것이지만, 인간적인 것을 하나님께 옮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혼란은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데서 제출한 해결 방법이면1701) 충분할 것이다. 즉,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가지로 생각되지만, 하나님 자신은 이것이나 저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듯이(엡 3:10) 하나님의 각종 지혜에 따라 우리의 지각을 마비시키셨다가 마침내 일시는 그의 뜻에 어긋나는 듯이 보이는 일이 그가 놀라운 방법으로써 뜻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다.

그들은 경박한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므로, 이미 죄를 지어 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버리신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이 돼지와 개들에게까지도 미친다는 것을 잊은 듯한 말이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들은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들 중에서도 꽃을 따듯 소수만물 택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러나 이 훼방하는 자들이 악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여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말씀이 있다. 곧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라고 하신 것이(마 5:45),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실 때의 그 소수에게(마 25:34) 기업을 맡기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그 어느 하나라도 미워하시지 않는다고 항의한다.1702) 이 점을 나는 그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나의 주장은 여전히 확고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자들은 저주를 받을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롬 10:12) 첨부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들은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기뻐하심에 따라,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시며"(롬 9:24), 아무에게도 매이시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고 한 구절을 가지고 항의를 제출할 때(롬 11:32, 갈 3: 22의 융합),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이 그 구원을 그의 자비로 돌리기를 원하신다고 말하여 항의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러면 양편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제출될 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바울과 함께 이 심오한 비밀 앞에서 두려워 떠는 이것이다. 그러나 완악한 자들이 떠든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바울이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라고 한 말을 외쳐야 한다.

이는 어거스틴의 올바른 주장과 같이, 사람의 공의를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의 공의를 측량하려는 사람들은 사악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703)

제 25 장  최후의 부활

(최후의 부활에 대한 교리 주장 1-4)

1. 부활의 소망의 중요성과 이 소망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

의의 태양이신(말 4: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시고,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딤후 1: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요 5:24), "이제부터‥‥‥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 2:19).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이것은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려운 싸움 가운데서 심한 괴로움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곳에서 소망의 특성에 대해서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며(롬 8:25),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므로(히 11:1), 이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1704) "우리가‥‥‥주와 따로" 거하기 때문이다(고후 5:6).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한다(골 3:3-4). 그러므로 우리의 놓인 처지는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이다(딛 2:12-13). 따라서 우리는 피로하여 우리의 길을 돌아가거나 또는 우리의 위치를 버리는 일이 없도록,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높이 하늘로 향하여 끌어올리는 것이며,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기쁨 속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벧전 1:8-9).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있는 소망을 주목한다고 바울은 말한다(골 1:4-5).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시하면서 하늘을 의지하며, 지상에 있는 것에 조금도 끌리지 않고 약속된 복을 바라볼 때,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 말씀이 참으로 실현된다(마 6:21).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믿음이 드물다. 우둔한 우리들이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것처럼(빌 3:14) 어려운 일은 없다. 태산 같은 불행이 우리를 거의 압도할 뿐 아니라, 우리가 현세의 복의 유혹을 기꺼이 물리치고, 지나가는 그림자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얻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속 인간들은 우리를 조롱한다. 끝으로, 우리의 상하, 전후에는 무서운 유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땅 위의 일들에서 해방시켜 멀리 있는 하늘 생활에 붙들어 매놓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올바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습성이 생긴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는 것이다.

2. 하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것이 부활 소망에 동기를 준다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열심히 논하며, 심지어 서로 논쟁까지 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최고선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은 플라톤뿐이었고,1705) 플라톤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그 연합의 거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것이 없었으므로, 그의 무지는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지상의 나그네 생활에서도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다. 그러나 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 더욱 더 우리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연합이 완전히 실현되어 우리가 만족할 때까지 이것은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위에서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였다.1706) 그래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 목표를 보여주며(빌 3:8), 자기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빌 3:13) 이 목표를 얻기까지 노력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도 이 목표를 열심히 추구해야 하며, 세상에 붙잡혀 태만 죄로 심한 벌을 받지 않도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의 특색은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한다(빌 3:20).

그리고 신자들이 이 경주에서 용기를 잃지 않도록,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동반자라고 한다. 그는 도처에서 형태도 없는 폐허를 보므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고대한다고 한다(롬 8:19). 아담의 타락이 자연의 완전한 질서를 혼란에 빠뜨린 후에, 사람의 죄로 인해서 피조물들이 받게 된 속박은 그들에게 중대한 슬픔이 되었다. 그들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연히 타락 전의 완전한 상태를 동경한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이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하였다(롬 8:22). 이것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가(롬 8:23) 자신의 부패 속에서 쇠약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또 적어도 사람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는 무생물들을 모방하지도 못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세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바울은 종말에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부른다(롬 8:23 참조). 우리의 부활의 모든 부분이 이미 완성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단번에 제물이 되셨으므로(히 10:12),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죄와 상관없이‥‥‥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어떤 곤란이 우리를 괴롭힐지라도 우리는 이 구속을 생각함으로써 그것이 완성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한다.

3. 바라는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다 :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원형이다

이 문제는 중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이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정당하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고전 15:13-14).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는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직면하여 있으며(고전 15:30 참조) 참으로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기 때문이다(롬 8:36, 시 44:22). 따라서 우리가 양자가 되며 우리의 구원이 실현된다고 하는 복음의 권위는 그 일부뿐만 아니라 전체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무리 시간이 들더라도 싫증을 내서는 안 된다. 내가 이 간단한 논의를 이때까지 연기한 것은,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독자들이 더욱 높은 곳에 오를 줄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생과 영광을 입으셔서, 온 몸이 그 머리(그리스도)와 같이 되게 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의 실례로서 우리에게 몇 번이든지 보여주신다.

완전히 썩어버린 몸이 때가 오면 드디어 부활하리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는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적다.1707) 이런 견해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으나 이 사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큰 장애물을 믿음이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준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면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1708) 우리를 둘러싼 불행 가운데서(고후 4:8-9 참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예수를 쥐어 떼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추론한다(고전 15:16).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하나의 기존 원리로 인정했다.

오히려 각 지체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모든 지체에 완성되어야 할 것이 머리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모든 지체들이 모든 점에서 머리와 동등해진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한다(시 16:10, 행 2:27 참조). 우리도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이 믿음의 일부를 가질 수 있지만 그 완전한 결과는 모든 부패를 면하고 완전한 몸을 다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복된 부활에 참여할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 보증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언급하며(엡 1:20 참조), 끝날에 심판자로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한다(빌 3:20-21).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골 3:4),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번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사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명"이라고 부르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을 것을 소생시키시려는 것이라고 한다(롬 8:11 참조).

나는 지금 간단하게 취급할 뿐이나, 이것은 더욱 자세히 취급할 수 있으며 더욱 찬란한 해설을 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다만 이 얼마 되지 않는 말에서 경건한 독자들은 각자의 믿음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얻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내세의 동참자로 삼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 아버지께서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은 그가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요 11:25). 이 거울에서 부활의 산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과 같이, 이 오랜 기간에 싫증이나 초조를 느끼지 않는다면, 부활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하는 견고한 기초가 된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생각대로 분초를 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해서,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그에게 붙은 자"라고 충고한다(고전 15:23).

우리 모두의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번 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입증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실이라고 한 것을 유치한 이야기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겁에 질린 여자들이 전해준 이야기, 또 공포심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 된 제자들이 확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빛나는 기념품을 성전이나 공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시지 않았는가? 왜 빌라도 앞에 그 두려운 자태를 나타내시지 않았는가? 왜 제사장들과 온 예루살렘에 자신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시지 않았는가?1709)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이 정당한 증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대답한다.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약하다고 해서 경멸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이 모든 일이 주관되어, 공포심에 압도되었던 자들이 무덤으로 가게 되었다. 얼마만큼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경건한 열성 때문에, 또 얼마만큼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갔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사실에 대한 목격자가 될 뿐 아니라, 그들이 눈으로 본 일에 대해서 천사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여인들이 한말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다가 스스로 사실에 직면하게 된 사람들의 신실성을 우리는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일반 사람들과 총독이 풍성한 증거가 제시된 후에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나 다른 표징들을 볼 기회를 빼앗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덤을 인봉하고 파수꾼이 지켰지만(마 27:66), 사흘째 되는 날에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눅 24:3, 마 28:6,11, 27:24 참조). 뇌물을 받은 병정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마 28:12-13,15). 이는 마치 제자들이 한 군대라도 제압할 수 있다거나 또는 무기로 무장을 했다거나, 심지어 이런 짓을 할 만한 충분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제자들을 쫓아버릴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은 왜 그들을 쫓아가서 민중의 도움으로 그 중에서 몇 명이라도 잡지 않았는가? 빌라도는 참으로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 천사들의 소리가 울렸다(마 28:6, 눅 24:6 참조). 하늘 광채가 그들이 사람이 아니고 천사임을 명백하게 알려주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의심을 제거해주셨다(눅 24:38).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여러 번 만났고, 그 손과 발을 만져보기도 하였다(눅 24:40, 요 20:27 참조). 그들의 의혹이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행 1:3), 드디어 그들의 눈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행 1:9). 이 광경은 열 한 제자에게만 보여진 것이 아니라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졌다"(고전 15:6). 그리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면서 자신이 살아나신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주 되심을 확실히 증명하셨다. 이것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라고(요 16:7) 이미 예언하신 바와 같다. 그리고 바울을 노상에 엎드러지게 만든 것은 죽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으며, 바울은 자기가 공격하고 있는 분이 최고의 권능을 가지셨다는 것을 느꼈다(행 9:4).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이유로 스데반에게 나타나셔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게 하셨다(행 7:55). 이렇게 많은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불신앙일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어리석은 고집이다.

4.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육신 부활에 대한 근거이다

부활을 증명하려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미 말했다. 바울은 간단하게 이 점을 가르친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여기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이며, 우리의 지각을 압도하는 위대한 기적이다. 따라서 부활에 대해서 어떤 자연 현상을 상상하는 것은 가장 부적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계에서 증거를 빌려,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논박한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고전 15:36). 씨를 뿌리면, 썩은 것으로부터 곡식이 돋아나므로, 부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만일 우리가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기적에 올바르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실은 그다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이감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권능에 그 마땅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아니면, 장차 올 부활을 참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는 이 신념에 고무되어 이렇게 부르짖는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사 26:19). 다윗은 절망적인 처지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라고 한다(시 68:20). 욥은 사람이라기보다 시체같이 되었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그날이 오면 자기가 완전한 사람으로서 일어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즉, 그의 권능을 보이시려고)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라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5-27),1710)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부활에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듯이 교묘하게 왜곡하지만, 그들은 논박하려는 점을 도리어 확인한다. 거룩한 사람들은 곤란을 당할 때에 무엇보다도 부활의 비유에서 위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에스겔에 있는 구절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고, 그들 앞에 길이 열리리라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들이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것과 같다고 했을 때에, 에스겔은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 중에 들에 마른 뼈가 가득하고 그 뼈에 힘줄과 살이 붙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다고 한다(겔 37:1-10), 예언자는 이 비유로 백성이 돌아갈 소망을 가지게 하였지만,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구원에 대해서도 부활이 그 모형이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음성이 생명을 준다고 가르치신 후에, 유대인들이 그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즉시 다음과 같이 첨가하셨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 5:28-29)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 전투 중에도 개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에게 내세를 약속하신 분은 우리가 맡긴 것을 지켜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딤후 1:12). 의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되었고, 의로우신 심판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실 것이므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딤후 4:8).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은 우리에게 미리 내세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가운데 나타나실 때에,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고통으로 갚으시며, 부당한 핍박을 받는 우리에게 안식으로 갚아주시는 것은(살후 1:6-8) 하나님의 본성에 합당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곧 그 다음에 첨가하는 말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그의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며 모든 복음을 믿는 자로부터 기이히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다(살후 1:10).

(이 교리에 대해 반대하는 다양한 계층의 반대가 논박되었음. 5-9)

5. 이교도들의 반대론을 장례 의식으로 반박함. 천년 왕국론자들의 오류

사람들은 부활을 항상 생각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일체 잊어버리게 하려는 신중한 계획이나 세운 것처럼, 죽으면 만사가 끝나고 인간은 소멸한다고 하였다.1711)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은(전 9:4) 당시의 일반적인 상식을 표현하였다. 다른데서는,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고 한다(전 3:21). 모든 시대에 이 동물적인 어리석은 생각이 널리 퍼졌고, 교회 내에까지 침입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공언했고(막 12:18, 눅 20:27, 행 23:8), 영혼은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무지를 변명의 구실로 삼지 못하도록, 본성의 놀라운 충동에 의해 사람들은 그들의 눈앞에 항상 부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매장 풍습을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도 이런 풍습이 오류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도 매장 의식은 엄수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같은 풍습이 이방인들 사이에도 존속하여, 그들 앞에 놓인 부활의 형상으로 그들이 깨우쳐지기를 원하셨다. 매장 의식은 유익하지 못했지만, 만일 우리가 그 목적을 현명하게 통찰한다면 우리에게는 유용한 것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을 모든 사람이 함께 고백했다는 것은, 그 불신앙에 대한 중대한 반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체와 함께 부활의 기억도 묻어버리도록 사탄은 그들의 감각을 마비시켰을 뿐 아니라, 부활론의 이 부분을 각종 거짓말로 혼란시켜 결국 부활론 말살하려고 하였다. 바울 시대에 사탄이 그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고전 15:12이하 참조). 그러나 조금 후에 천년 왕국론자들이 뒤를 이어,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을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다.1712) 그들의 조작은 너무도 유치해서 논박할 필요나 가치가 없다. 그들의 오류에 구실을 준 것이 계시록임이 분명하나, 그 계시록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천이라는 수는(계 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도리어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한다(마 25:41,46).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시력으로 볼 수 없으며 지력으로도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세의 생명의 기업을 향유하는 기간을 천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얼마나 큰 비난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들이 그의 영광으로 변모하게 될 그리스도 자신도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시지 못하기 때문이다(고전 15:13이하). 만일 그들의 복이 유한하다면, 그들의 복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 요약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일을 전혀 모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권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려는 악의를 품고 행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권능은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삼켜지고, 영생이 완전히 회복되는 때에 비로소 실현된다.

이 사람들은 악한 자들이 영원한 벌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극심한 잔인성을 돌리게 될 것이 두렵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은 소경에게도 들여다보이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배신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스스로 잃은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그 나라를 빼앗으시는 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처사이며 그들의 죄는 일시적인 것이라고1713) 말한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들이 범죄함으로 침해한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들의 허물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벌이 죄의 정도를 넘는다고 그들은 말하지만1714) 이런 모독적인 언사는 참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공경할 줄 모르고 도리어 경멸하면서, 한 영혼이 멸망하는 것을 더 큰 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박한 자들이 떠드는 것에 우리가 논박할 가치를 인정하는 것같이 되어, 앞에서 한 말과 다르게 되겠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무시하겠다.

6. 육신은 부활하고 영혼은 불멸한다

그뿐 아니라, 호기심이 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두 가지 망상을 제기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전인이 죽는 것같이, 영혼이 몸과 함께 부활하리라고 생각하였다.1715) 또 어떤 사람들은 영의 불멸을 인정하면서, 영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되리라고 주장하였다.1716) 즉,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였다.

이 두 가지 생각 중에서 처음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창조를 논할 때에 다소간 언급한 것이 있으므로,1717) 여기서는 독자들에게 이 생각이 얼마나 동물적인 오류인가를 다시 한 번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영을 이 무상한 인생에서만 몸을 살려 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고, 성령의 전을 말살하며, 결국 우리에게서 신성이 가장 빛나며 영생 불사의 증거가 분명히 보이는 이 영에게서 불멸이라는 은사를 빼앗는다. 그 결과, 몸의 처지가 영혼의 처지보다 좋고 더 탁월하게 된다.

성경의 교훈은 훨씬 탁월하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집에 비유하고, 우리는 죽을 때에 이 집을 떠나며, 이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것을 "장막"을 "벗을" 때가 왔다고 말했다(벧후 1:14). 그러나 바울은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하고(고후 5:1), 이어서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고후 5:6),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고 한다(고후 5:8). 만일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 있지 않는다면, 몸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겠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사도는 "의인의 영들"이 모인 곳에 우리도 모였다고 함으로써(히 12:23) 모든 의심을 일축한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는 저 거룩한 조상들과의 교제에 들어갔으며, 이 조상들은 비록 몸은 죽었으나, 우리와 같이 경건한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들과 결합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몸을 벗은 영혼이 그 본질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복된 영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도적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눅 23:43)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분명한 증거를 믿고, 죽을 때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거나(눅23:46), 또는 스데반을 본받아 믿는 자들의 신실하신 "목자와 감독"이라고 불려 질 수 있는(벧전2:25)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행 7:59).

그런데 우리의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은 마땅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는가 등의 문제로 공연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1718) 그러나 모르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요 12:32 참조), 한편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말씀은 없다. 하나님께서 숨기신 일을 어떤 선생이 우리에게 나타낼 것인가? 장소에 대해 묻는 것도 미련하고 무익한 일이다. 영혼은 몸과 같은 차원을 가진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 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눅 16: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한다. 동시에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라고 명령하며, 영광의 면류관을 그 때까지 연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한계, 즉,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약속된 영광을 즐길 때를 기쁘게 기다리던 복된 안식으로 들어가며, 모든 일은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보류된다는 한계를 지키고 만족해야 한다. 버림받은 자들의 운명은 확실히 유다서에 있는 마귀들의 운명과 같다. 즉, 마귀들은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져 있을 것이다(유 1:6).

7. 현세에서 입고 있던 몸으로 부활함

어떤 사람들은 영혼은 현재 입고 있는 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다른 몸을 받는 것이라고 상상하지만1719) 이것도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극심한 오류 중의 하나다. 마니교도들은 이 생각에 대해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1720) 무가치한 이유를 말했다. 그들은 영혼의 하늘 생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그 영혼은 불결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육은 마귀가 만든 것이므로 본성이 불결하다고 한 그들의 망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1721) 내가 여기서 밝히려는 것은,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것이 지금 우리 안에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부활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뿐이다. 우선 바울은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라고(고후 7:1) 명령하므로,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고후 5:10)한 판단은 이것의 결과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 말과 부합하는 말을 했다.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과 혼과 아울러 그들의 몸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까지 완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기원한다(살전 5:23).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으로 성별하신 몸이(고전 3:16) 부활의 소망이 없이 썩어버린다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신자들의 몸은 또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가?(고전 6:15) 하나님께서는 몸의 각 부분을 그에게 성별하라고 명령하시지 않는가? 사람의 혀가 그를 찬양하며,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며(딤전 2:8),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지 않는가?(롬 12:1)

사람의 이 부분에 대해서 하늘 심판자께서 이렇게까지 빛나는 영예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시는데, 죽을 인생이 그것을 회복될 소망이 없는 흙으로 돌린다는 것은 얼마나 미친 짓인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과 영혼은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영혼뿐만 아니라 몸으로도 주를 섬기라고 우리에게 충고한 바울은(고전 6:20),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이라고 확실히 주장한 그것이 영원한 부패의 운명을 당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하리란 것을 무엇보다도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한다(고전15:53). 만일 하나님께서 새로운 몸을 만드신다면, 이 성질의 변화는 어디서 생길 것인가? 만일 성경이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했다면 이 모호한 표현이 그들에게 너절한 반대를 할 구실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를 가리키면서 이 육체가 썩지 않으리라고 약속하므로, 새 몸이 생긴다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부인한다. "참으로, 그가 자기의 손에 피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상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터툴리안은 말한다.1722)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라고 말하고,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한 사실을(롬 14:11) 잔소리꾼들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사 49:18)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는(사 45:23, 롬 14:11) 말씀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그의 글을 받을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이 각각 일생 동안 한 일을 고해야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만일 새 몸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이런 말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다니엘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단 12:2) 한 말에는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네 가지 원소에서 새로운 재료를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에 명백한 이유가 나타난다. 죽음이 인간의 티끌에서 생겨난 우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회복은 그 죽기 시작한 육체에 속한다. 바울이 부활을 주장했을 때 아덴 사람들이 웃은 것을 보면(행 17:32), 그가 어떤 전도를 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웃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만일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몸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두려워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른 말씀도 이와 꼭 같이 분명하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우리는 영혼들이 무덤 속에서 쉬고 있으며, 거기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할 것인가? 오히려 그의 명령이 있을 때 몸이 그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된다면 머리와 지체들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새 몸을 입으셨는가? 그렇지 않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그는 말씀하셨다(요 2:19). 그는 전에 입으셨던 죽을 몸을 다시 입으셨다. 속죄 제물로 바친 몸이 소멸되고 새로운 몸이 대치되었다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고(고전 15:12이하) 사도가 선포한 이 연관성을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사는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은 현저한 예를 보아서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을 때에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무덤에서 나왔다"고 한다(마 27:52-53 참조). 이 일이 우리가 대망하는 부활의 전조 또는 보증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일은 이미 에녹과 엘리야에게 있었던 일과 비슷한 것이었다. 터툴리안은 그들을 "부활의 후보자"라고 불렀다. 이는 그들이 몸과 영혼의 부패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보호 안으로 영접되었기 때문이다.1723)

8. 육신을 존중하는 장례의 의미

나는 이렇게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악하고 대담한 자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속일 틈을 남겨 놓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은 귀찮겠지만 불편을 참기 바란다. 내가 지금 논의의 상대로 하는 이 경박한 사람들은 부활이 있을 때에는 새 몸이 창조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해야 되겠다고 느끼는 것은, 오랫동안 부패하여 없어진 시체가 원상으로 회복된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보이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오직 불신앙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몸의 부활을 대망하라고 역설한다. 바울은 세례를 우리의 미래 부활에 대한 보증이라고 한다(골 2:12). 성만찬은 우리가 입으로 영적 은혜의 상징들을 받을 때에, 부활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촉구한다. 우리의 지체를 의에 순종하는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롬 6:13,19) 바울의 충고는, 그가 그 후에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한 말과(롬 8:11)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전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발과 손과 눈과 혀를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 바치더라도, 그 봉사의 열매와 보상에 참여할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울은 직접 이 점을 확인한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3,14). 더욱 분명한 것은 그 다음에 있는 말이다. 즉,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였다(고전 6:15,19). 그리고 조금 뒤에 구속의 값을 우리의 몸에까지 확대하는 것과 같이(고전 6:20), 바울은 부활을 정숙과 거룩에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바울의 몸(갈 6:17), 그리스도의 영광을 많이 나타낸 그의 몸이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랑하였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행 14:22),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기치 하에 훈련시키시고 승리의 찬사로 장식하시는 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소망을 품는 데 대해서 아무 의혹도 생기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이 시험하는 모든 환난을 맡으시고 환난에는 생명을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외면적인 의식을 통해서 율법 하의 거룩한 조상들에게 이 믿음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셨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724) 매장하는 몸들을 위해서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장례는 왜 생겼겠는가?

영생 불사의 상징인 향료와 기타 물질은 회생 제물과 같이 율법 하의 가르침의 모호한 점을 완화하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매장 풍습은 미신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성령은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장례에 대해서도 믿음의 중요한 여러 가지 신비에 못지않게 많이 유익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적은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마 26:10) 이유도 확실히, 장례는 모든 것을 썩히고 말살하는 무덤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갱신의 광경을 그려보게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례를 극히 엄숙하게 지키는 것을 족장들도 시인하였거니와, 그런 엄수는 그들이 장례를 믿음에 대한 가치 있는 도움으로 생각했다는 증거가 된다. 만일 아브라함의 눈앞에 이 세상보다 더 높은 가치와 종교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그 아내의 무덤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세밀한 주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창 23:4,19). 즉, 그는 아내의 시체를 부활의 표징으로 장식함으로써 자기의 믿음과 가족의 믿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은 야곱이 한 일이다. 그는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희망이, 죽을 때에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자기의 뼈를 그리로 가져가라고 명령하였다(창 47:30). 묻노니, 그가 새 몸을 입게 될 것이라면, 없어지고 말 흙에 관해서 지시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면, 부활 교리와 같이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는 교리도 없다.

어린이들까지도 "부활"과 "다시 산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방금 창조된 것에 대해서는 "다시 살아났다"고 하지 않는다. 더욱이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요 6:39)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도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잔다"는 말은 몸에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같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묘지를 침소라고 부른다.1725)

부활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부활의 모양에 대해서 다소의 암시를 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고전 15:51), 우리가 절제하며, 너무 자유롭고 미묘한 사색을 하지 않도록 당부하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물로 바치신 그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다만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다른 특성에 있어서는 탁월하였다. 이 점을 바울은 잘 아는 예를 들어 주장한다(고전 15:39). 사람과 짐승의 육체는 본체가 같으나 성질이 다르며(고전 15 :39), 모든 별은 같은 재료로 되었으나 그 광채가 다른 것과 같이(고전 15:41),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 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기 위해서 우리의 썩을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는 성질을 버리고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고전 15:53-54). 하나님께서는 모든 요소들 마음대로 지배하실 수 있으므로 흙과 물과 불에게 그것들에 의하여 소멸된 것을 모두 복구하도록 명령하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도 이 점을 비유로 언급한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사 26:21)

그러나 죽은 지 오랜 사람들과 그 날 아직 살아 있을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니"라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15:51). 죽는 때와 둘째 생명이 시작하는 때의 사이에 간격을 둘 필요가 없다.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은 상태로 살아날 것이며, 살아있는 자들은 갑자기 같은 영광으로 변화할 것이다(고전 15:52-53).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죽게 될 신자들을 같은 말로 위로하며, 그 때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앞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먼저 부활하리라고 한다(살전 4:15-16).

만일 사도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히 9:27)한 말을 인용해서 반대한다면, 설명은 어렵지 않다. 본성이 변할 때에는 죽는 듯한 인상을 주며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린 때에 죽음에 의해서 모두 새로워지리라는 것과, 변화가 갑작스러운 경우에는 몸과 영혼이 분리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서로 잘 부합되는 일이다.

9. 불신자의 부활

그러나 여기서 더 어려운 의문이 생긴다. 즉, 무슨 권리로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도 부활하는가? 부활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독특한 은혜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죽음의 정죄를 받은 것을 안다(롬 5:12, 고전 15:22 참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서 오셨다(요 11:25). 그는 모든 인류에게 무차별하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는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자들이 믿음으로만 받는 것을 완악하고 눈이 어두운 자들이 얻는다는 것처럼 부당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 그러나 확고부동한 사실이 있다. 한쪽은 심판의 부활로, 또 한쪽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이며(요 5:29). 그리스도께서는 "양과 염소를 분별하러" 오시리라는 것이다(마 25:32). 나의 대답은, 우리가 여기 해당하는 일들을 일상 경험에서 보기 때문에, 이 일을 신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해서 전세계의 유업을 빼앗겼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된 것처럼 보통 음식도 먹을 자격을 빼앗겼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는" 것은(마5:45) 현세 생활에 있어서 그의 무한하신 은혜를 끊임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속한 것이 악인들에게도 풍부하게 베풀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인정한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소유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구실이 없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악인들은 놀라운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의 친절을 체험하는 일이 많고, 경건한 사람들이 받는 복을 훨씬 능가하는 때도 있지만, 이런 체험은 그들에게 더욱 엄중한 정죄가 된다.

덧없는 지상의 혜택에 의해서 부활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들이 생명의 샘이신 하나님에게서 처음 단절되었을 때에 그들은 마귀의 죽음을 당하여 완전히 멸망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하여 중간 상태가 마련되었고, 그들은 생명에서 끊어져 죽음 속에서 살게 되었다. 악인이 우연히 부활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지금 주와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억지로 끌려가더라도, 그것이 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심판주 앞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죽음으로 멸망하는 것은 가벼운 벌이 될 것이다. 그들은 심판주에게서 완악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말한 입장을 지키며, 바울이 벨릭스(Felix)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 같이 앞으로 있을 부활을 기다린다고 한 유명한 고백을(행 24:15) 고수해야 하지만, 성경은 부활과 하늘 영광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가르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은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信經)에서도 복된 생명에 관해서만 언급한다.

(사람의 내세 생활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영원한 즐거움 또는 하나님께로 부터 소원해진 영원한 불행. 10-12)

10. 영원한 복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릴 것이라는 예언은(사 25:8, 호 13:14, 고전 15:54-55) 그 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을, 즉, 부활의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행복이 얼마나 탁월하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 가장 작은 부분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하리라는 말을 들으며, 또 그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동안은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지각에서 아주 멀고, 또 희미한 것으로 둘러 쌓여있다. 그 날이 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기까지는(고전 13:12 참조)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라고 요한은 말했다(요일 3:2).

따라서 예언자들은 그 영적인 복을 그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물질적인 언사로 대강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을 조금이라도 맛보면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키므로,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잠깐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은 성경이 여러 군데서 우리에게 가르친다. 예컨대, "아브람아 나는‥‥‥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하신다. 다윗의 말이 이와 부합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5-6). 다른 구절에서도 "나는‥‥‥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벧후 1:4).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 이는 그가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겠기 때문이다(살후 1:10). 만일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권능과 의를 그의 선택된 자들에게 나눠주시며, 아니, 자신을 그들에게 푸셔서 즐기게 하시며, 심지어 그들을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면, 우리는 이 은혜 안에 모든 행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 명상에서 상당히 전진했으나, 우리의 영적 능력을 이 신비의 높이에 비교할 때, 우리는 아직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더욱 침착해야 하며,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대담하게 솟아올라 하늘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또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 더 알려고 하는 과도한 욕망의 유혹을 느낀다. 이런 상태에서 무가치하고 유해한 질문이 자꾸만 생겨난다.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질문들은 더욱 다르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즐기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변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런 질문을 유해하다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선물을 분배하실 때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빛을 비추시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기장 좋은 선물을 주실 때에도 그 영광의 정도가 똑같지 않으리라고1726) 성경은 가르친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날에(살전 2:19)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살전 2:20) 한 바울의 말이나, "너희도‥‥‥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마 19:2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에게 영적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고, 하늘에서는 영광으로 그들을 장식하시리란 것을 안 바울은, 자기 수고에 해당하는 특별한 면류관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딤후 4:8).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직무가 존귀하다는 것을 가르치실 때, 그에 대한 결실은 하늘에 저장되어 있다고 하셨다(마 19:21 참조). 다니엘서에도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다(단 12:3). 자세히 연구해보면 성경은 신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할 뿐 아니라, 각 사람에게 특별한 보상을 약속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서‥‥‥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한다(딤후1:18). 이 점을 확인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마 19:29) 하신 약속이다.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의 영광을 각양각색의 선물로 나타내기 시작하시고 점점 그 영광을 증대하시는 것과 같이, 하늘에서 그 영광을 완성하실 것이다.

11. 무용한 질문들을 처리함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분히 증명하기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방해가 되는 난문들을 피하여 정해진 한계를 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무익한 문제들을 공연히 연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문제에 대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경박한 행동을 조장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무익한 지식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또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얼마나 다를까, 처녀들은 기혼 여성들과 어느 정도 다를까, 하고 묻는다.1727) 요컨대, 그들은 하늘을 샅샅이 뒤져서 알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회복시킬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영원한 복의 상징인1728) 천사들과 같이 되었으므로(마 22:30) 이 위대하고 비할 데 없는 풍성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 복은 보기만 해도 큰 즐거움이며, 알기만 하고 이용하지 않아도 큰 기쁨이며, 우리가 지금 향유한 모든 즐거움을 훨씬 초월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가령 우리가 이 지상에서 모든 쾌락이 구비된 가장 풍부한 곳에 있다고 상상할 때, 가끔 자기의 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는 일에 지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자기의 무절제로 인해서 평탄한 생활에 자주 파동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썩을 생명에 무익하다 하더라도 아무 악이 없는 맑고 순수한 즐거움은 행복의 극치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속의 찌끼와 그 밖의 퇴폐물은 회복과는 먼 것, 그것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계속 묻는다. 나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점을 인정하지만, 바울처럼 이런 결함이 고쳐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죄에서 시작한 결함이며, 그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그들은 계속해서, 후손들의 복도 그때에는 끝날 것인데 인류를 위해서 어떤 더 좋은 상태가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 이 곤란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성경이 자손의 복을 극구 찬양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손에 의해서 자연의 질서를 그 목표를 향하여 계속 전진시키는 데도 해당된다. 그러나 완성된 상태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그러나 유혹이 부주의한 사람들을 곧 붙잡아서 점점 깊은 미로로 끌어들인다. 그 결과로 각각 자기 의견에만 만족하고 논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결의 첩경은 우리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될 때까지 "거울"과 그 "희미함"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것이다(고전 13:12). 어떻게 하면 하늘로 갈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천만 명 중에서도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하늘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싶어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태만해서 가상적인 승리를 미리 상상할 뿐, 실지로 싸우는 것은 싫어한다.

12. 버림받은 자들의 처지

악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의 중대성은 적당하게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물질적인 비유를 쓰게 된다. 예컨대 어둠, 울음, 이를 갊(마 8:12, 22:13), 꺼지지 않는 불(마 3:12, 막 9:43, 사 66:24), 심장을 갉아먹는 죽지 않는 벌레(사 66:24) 등이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려고 하신다. 예컨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 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사 30:33). 이런 자세한 모사는 악인들의 처지를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게 하지만,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점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된 처지가 얼마나비참하냐 하는 것이다.1729) 그뿐만 아니라 도저히 그 압력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접촉하는 모든 것을 맹렬한 불처럼 삼켜버린다. 둘째,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실시하는 데 이바지하므로, 주의 진노를 공개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생물과 기타 만물이 자기를 향하여 무서운 분노로 타오르며, 자기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했다고 느낄 것이다. 따라서 사도가 불신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은(살후 1:9)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 예언자들이 물질적인 비유로 우리의 공포심을 일으킬 때, 그들은 우리의 태만에 맞설 만한 과장된 언사를 사용하지 않지만, 해와 달과 우주 전체의 현상을 통해서(마 24:29 기타) 장차 올 심판의 예감을 그들의 교훈에 섞는다. 따라서 가련한 양심은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괴로움을 당하며,1730) 원수가 된 하나님께 찢기는 듯, 치명적인 창에 찔리는 듯, 하나님의 번개가 때리는 듯, 그의 무거운 손에 눌려 부서질 듯한 느낌으로 일시도 안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공포 가운데 한 순간이라도 서 있는 것보다 차라리 끝없는 깊음이나 구렁으로 내려가는 것이 오히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쉴 새 없이 하나님의 포위를 당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일인가? 이 점에 대해서 시편 90편에 잊지 못할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보시는 것으로 모든 죽을 인생들을 흩으시며 멸망시키시지만, 자신을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격려하시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겁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들에게 더욱 용기를 주셔서 계속 전진하게 하신다(시 90:7이하).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고전 15:28) 전진을 계속하게 하시는 것이다.

 
제 4 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끌고, 그 곳에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외적인 수단 또는 보조 장치

제 1 장  모든 경건한 자의 모체(母體)가 되는 진정한 교회1731) :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체가 되는 거룩한 보편적 교회. 1-4)

1. 교회의 필요성

먼저 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가 복음을 믿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키우며 목적지까지 향상시키려면 무지하고 게으르고 또 경박한 우리들에게는 외적인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약점을 대비해서 필요한 보조 수단도 첨가하셨다. 또한 복음 전파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이 보물을 교회에 맡기셨다.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셔서(엡 4:11)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고 마지막으로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우선 성례를 제정하셔서 성례에 참가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자라게 하며 돈독 하는데 매우 유익한 보조 수단임을 느낀다. 우리는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어서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섭리로 우리의 능력에 적절한 방법을 취하셔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을 지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을 가르치는 계획에 의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 정치와 교회 직제와 권세를 논하며 다음에는 성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민 정부를 논할 필요가 있다.1732)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든 일이 교황 제도에서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그 부패한 상태를 경건한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그것을 버리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우선 교회를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즐거워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 동안만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 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어른이 되고 드디어는 믿음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므로"(막 10:9 참조)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1733) 율법 하에서 이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이러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의 증거와 같다(갈 4:26).

2. 교회와 신조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신조에서 우리가 "공회를 믿는다"라고 하는 조항은 보이는 교회뿐만이(현재 우리가 본 제목 하에서 논하는) 아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들 죽은 사람들까지를 의미한다. "믿는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양떼와 사나운 짐승들을 다른 말로 구별할 수 없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전치사 in("안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맡긴다"라는 뜻을 첨가하는 전치사)을 넣는 사람이 많으나 그럴 필요는 없다. 고대에는 이것이 일반적이었고 또 증거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교회사에 기록된 니케아 신조도 이 전치사를 붙였다.1734) 그러나 교부들의 글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만 해도 아무런 문제없이 인정되었다. 어거스틴이 그렇게 말했고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신조 해설(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을 쓴 사람도(그가 누구였든 간에) 그렇게 말했다.1735) 그뿐 아니라 그들은 전치사를 붙이는 것은 부적당한 표현이 된다고 분명히 말하며 상당한 이유를 첨가하여 자기들의 견해를 지지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실하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를 믿고 의지한다" 또는 "몸의 부활을 믿고 의지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을 원하지는 않지만은 바른 용어를 택하고 싶다. 공연히 애매모호한 말을 쓰기보다는 보다 적절한 표현법을 원한다.

그러나 그 목적은, 마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하고 하나님의 원수들도 그것에 못지않은 잔인한 분노로 격분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멸시킬 수는 없으며 그리스도의 피를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지도 못할 것이고 오히려 어느 정도 유익을 주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과 그의 내적 부르심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아시며"(딤후 2:19), 바울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모두 인을 치셨기 때문이다(엡 1:13). 그들은 하나님의 훈장을 달고 있어서 버림받은 자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 속에 보잘 것 없는 작은 무리가 숨어 있고 몇 개의 밀알이 쭉정이 더미 속에 묻혀 있으므로 우리는 교회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만 완전히 맡겨야 한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이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생각할 때 우리가 이 연합된 교회에 분명히 접붙임을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선택받은 무리를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모든 다른 지체들과 연합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앞으로 다가 올 기업을 받으리라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를 보편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가 나누어지지 않는 한(고전 1:13참조)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교회도 둘이나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므로(엡 1:22-23 참조) 한 머리를 의존하며 서로가 한 몸이 되고 한 몸에 달린 지체들같이(롬 12:5, 고전 10:17, 12:12,27) 서로 단단히 결합된다(엡 4:16 참조).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또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심은 영생을 다 같이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시키기 위함이다(엡 5:30).

우리 주위에 있는 우울하고 황폐한 광경은 교회의 남은 자가 하나도 없다고 외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교회를 숨겨두신다는1736)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 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하신다(왕상 19:18).

3. 성도가 서로 교통함

신조의 이 항목은 또한 어느 정도 외면적인 교회에 적용된다. 즉, 우리는 각각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형제적 일치를 유지하며 교회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고 말할 필요도 없이 양떼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덧붙였다. 고대인들은 대개 이 구절을 빼놓았지만1737) 그것은 옳지 않은데, 그 구절은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원칙 아래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절의 뜻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혜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르게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것은 시민 사회의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시민 사회에서는 각 사람의 사유재산이 허락되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서 재산 소유권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바와 같이(행 4:32) 신조는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된 공동체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은 바울이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바로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시라는 것을 참으로 확신한다면 그들은 서로 형제애로 묶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들이 받는 은혜를 서로 나누지 않을 수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이 일에서 어떤 유익을 받게 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교회를 믿는 근거는 자기가 교회의 지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전 세계의 조직이 무너지더라도 교회는 동요되거나 넘어질 수가 없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똑같이 동요하거나 파멸될 수 없다. 둘째, 교회는 영원불변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같이 믿는 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품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진리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끝으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되는 약속들이 있다.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욜 2:32, 옵 1:17),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 46:5). 교회에의 참여는 힘이 강하며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머물게 한다. "서로 교통함"이란 말1738) 자체에 풍성한 위로가 있다. 주께서 그 지체들에게 주시는 모든 것과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확신할 때, 신자들이 받는 모든 은혜는 우리의 소망을 굳세게 만든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의 연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이미 말한 바와 같이)1739) 그런 교회를 꼭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눈으로 분명히 볼 수는 없을지라도 교회는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은 교회를 여전히 존중해야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와 선택받은 자를 구별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소유가 되었으며, 우리도 그 일원이 될 때에는 그와 같은 위대한 은혜를 나눠 받게 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4. 눈에 보이는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논할 생각이므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1740) 단순한 칭호에서 배워야 한다. 이는 이 어머니가 우리를 잉태하고 낳으며 젖을 먹여 기르고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천사같이 될 때까지(마 22:30) 보살피고 지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생명으로 들어갈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연약한 우리는 일평생 교회에서 배우는 자로 지내는 동안 이 학교에서 떠나는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이것은 이사야와(사 37:32) 요엘이(욜 2:32) 말한 것과 같다. 에스겔도 그들과 같은 뜻으로, 하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거절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겔 13:9). 그와는 반대로 진정한 경건 생활을 향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등록된다고 한다(사 56:5, 시 87:6 참조). 그러므로 시편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 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시 106:4-5)라고 말한다.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은총과 영적 생명의 특별한 증거를 그의 양떼에 제한시킨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언제든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역자들을 멸시하지 말라. 5-6)

5. 교회를 통한 교육과 그 가치 및 의무

이제 우리는 이 논제에 관한 문제점들을 제시하도록 하자. 바울의 서신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고"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썼다(엡 4:10-13).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순간에 그의 백성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 있지만 그들이 교회에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즉, 하늘 교리를 전파하라고 목자들에게 명령하셨다. 모든 사람을 똑같은 규정 아래 두셔서, 모든 사람이 온유하고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이 일을 위해서 임명된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게 하셨다. 이사야는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의 나라를 구별하는 표지를 말했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회의 손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 양식을 무시하는 사람이 모두 굶주려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만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으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바울의 말과 같다(롬 10:17).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데(롬 1:16),(역시 바울이 증거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을 복음 전파에 의해서 나타내신다(ibid).

이 계획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옛날에 거룩한 회중이 성소 앞에 모이기를 원하셨으며, 거기서 제사장의 입을 통하여 교리를 가르침으로써 믿음의 일치를 얻게 하시려고 하셨다. 성전을 하나님이 "쉴 곳"(시 132:14), 지성소를 하나님이 "거하는 곳"과(사 57:15)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곳이라고 한다(시 80:1). 이런 영광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다만 하늘 교리를 전파하는 일이 존경과 사랑과 경의와 위엄을 얻게 하려는 의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시를 받는 죽을 인간이 나타남으로써 성전과 성소의 가치가 많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평가할 수 없는 귀한 보물을 질그릇인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고후 4:7) 우리들에게 알리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며 또 이 질서의 창시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곳에 계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그의 백성이 점이나 요술이나 초혼술이나 기타 미신에 빠지는 것을 금하신 후에(신 18:10-11, 레 19:31) 그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만한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즉, 그들에게는 항상 예언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신 18:15 참조). 옛날에 백성을 천사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땅에 교사들을 세워서 천사의 직책을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인간을 사용하여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옛날에 율법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사장들을 해석자로 삼아 사람들이 율법의 참 뜻을 그들의 입을 통해 배우도록 하신 것과 같이(말 2:7 참조), 지금도 우리가 율법을 정독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울 교사들을 임명하신다.

이 일은 이중으로 유익한데, 한 편으로는 우리가 목사의 말을 하나님자신의 말씀같이 들을 때 이것을 아주 좋은 수단으로 삼아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신다. 또 한 편으로는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스스로 우리를 향하여 우레 같이 말씀하시면 우리가 도망할 것이므로 사람인 해석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끄신다. 참으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압도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와 같은 친근한 교수 방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비천한 사람들이 교사로 부르심을 받음으로 인해서 말씀의 권위가 손상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기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입과 혀를 성별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1741) 자신의 음성이 들리게 하셨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입으로 선포되는 구원의 교리를 기꺼이 그리고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은 외면적인 수단에 매이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평범한 교수 방법에 매이게 하셨다. 광신자들은 이 방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걸린다.

자만심이나 증오심, 경쟁심으로 인하여 단독으로 독서하고 명상하더라도 충분한 유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들은 집회를 무시하며 설교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연합의 거룩한 관계를 끊기에 전력을 다하므로 이 신성하지 못한 분리에 대한 당연한 벌을 면하지 못하고 반드시 극악한 오류와 추악한 망상에 빠지게 된다. 우리 사이에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이 풍성해지려면 우리는 이 신앙생활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고 높이 평가하셨다. 광신자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귀를 막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예언자와 경건한 교사들은 불경건한 무리와 어려운 투쟁을 했다. 이 자들은 완고해서 사람의 말과 전도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 멍에를 메지 못한다. 이것은 전도를 통해서 우리 위에 비취는 하나님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옛날 신자들은 성소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시 105:4), 이런 명령이 율법에서 자주 반복된 것은(시 27:8, 100:2, 105:4, 대상 16:11, 대하 7:14) 옛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과 예언자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살아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울이 자기의 복음 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췬다고 말한 것과 같다(고후 4:6).

더욱이 가증한 것은 배교자들의 태도다. 그들은 교회들을 분열시키는데 온힘을 기울이며, 결과적으로는 양들을 우리에서 몰아내서 이리들의 입에 던진다. 우리는 이미 인용한 바울의 태도를 지켜야한다.

즉, 교회는 오직 외면적인 복음 선포에 의해서만 성장하며 성도들은 한 결속에 의해서만 결합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배우고 증진함으로써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질서를 지킨다는 것이다(엡 4:12 참조).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옛날 율법 아래에서 모든 신자가 성소 앞에 모이라는 명령을 받은 목적은 특히 여기에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신 곳을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부른다(출 20:24 참조). 분명히 그는 경건에 대한 교훈이 없는 곳은 무익하다고 가르친다. 확실히 다윗도 그와 같은 이유로 원수들의 포학과 잔인성 때문에 하나님의 장막에 가지 못하는 것을 애통해 한다(시 84:2-3). 이런 불만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다른 즐거움만 남아 있으면 성전에 가지 못하는 것쯤은 매우 하찮은 일이며 즐거움에 손실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은 속을 태우며, 이 한 가지 곤란과 불안과 슬픔 때문에 괴로워 거의 죽을 지경이라고 탄식한다. 분명히 이것은 신자들에게는 공중 예배보다 더 큰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 예배에 의해서 자기의 백성을 단계적으로 향상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 자신을 족장들에게 나타내시며 영적으로 알리려고 하신 것을 깨달아야한다. 따라서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시 42:2 참조), 미신을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도 한다(시 132:7, 99:5, 대상 28:2).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머리를 앙모할 때 거기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일치는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엡 4:13 참조). 이 원칙을 떠나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위해 지은 신전은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모독할 뿐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처럼 저속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그들과 같은 모독 행위를 저질렀다. 스데반은 이사야의 말을 빌려,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라고 그들을 책망했다(행 7:48, 사 66:1-2). 하나님만이 그의 말씀으로 성전들이 자신에게 올바르게 사용되도록 성별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 경솔하게 일을 시작한다면 기이한 조각품이 이 잘못된 출발에 달라붙어 한없는 해독을 퍼뜨리게 된다.

아하수에로(XerXes, 크세록세스) 왕이 현자들의 권면에 따라 경솔하게 희랍에 있는 모든 신전을 불사르거나 파괴한 것은 어디든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신들이 벽과 지붕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742)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며, 그러면서도 우리와 자리를 바꾸거나 우리를 땅에 속한 수단에 국한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실 능력이 없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속한 수단으로 무리를 마치 병거에 싣듯이 해서 그의 하늘 영광에 올리신다. 곧 무한하여 모든 것을 충만케 하며 하늘보다도 더 높은 하늘 영광에 올리시는 것이다.

6. 목회의 의미와 한도

우리 시대에 들어서 목회의 효력에 대한 큰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의 위엄을 대단히 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죽을 인간들에게 옮기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목사나 교사들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통찰하여 어두운 생각과 완고한 마음을 시정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1743) 우리는 이 논쟁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양쪽의 쟁점들은 두 가지 성경 구절들을 분명하게 지적함으로써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⑴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의 주축자로서 전도에 성령을 결합시키시며 전도의 유익을 약속하신다. ⑵ 또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과외면적인 보조수단을 구별하시며 신앙의 출발점과 그 모든 과정을 자신만이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하신다.

1. 말라기에 의하면 제 2 엘리야의 임무는 사람들의 생각을 밝혀주며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하는 것이었다(눅 1:17, 말 4:5-6).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수고한 열매를 얻도록 그들을 보내신다고 언급하신다(요 15:16). 베드로는 이 열매를 간단히 정의해서, 우리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라고 한다(벧전 1:23).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으로써" 고린도 신자들을 "낳았으며"(고전 4:15) 그가 사도됨을 그들이 "인친다"고 자랑한다(고전 9:2). 그뿐 아니라, 자기는 의문의 일꾼이 아니며 말로 사람들의 귀에 호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자기의 가르침이 무익하지 않게 하노라고 한다(고후 3:6). 이 같은 뜻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자기의 전도함은 지혜의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고전 2:4). 또 갈라디아 사람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갈 3:2). 간단히 말하면, 바울은 여러 구절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할뿐만 아니라 자기는 구원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노라고 한다(고전 3:9이하).

2. 이 모든 말을 하면서도 바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티끌만큼도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지 않았다.이 점을 그는 다른데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골 1:29)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살전 3:5). 또 이처럼 덧붙인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 2:8).

그뿐 아니라 다른 구절들을 보게 되면 그가 사역자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하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마찬가지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이 두 가지 일의 일부라도 자기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라고 경고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이 임명하신 교역자들 앞에 배우겠다는 정신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교육 방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온건한 멍에를 신자들에게 지우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그 결과에 의해서 알게 될 것이다.

(보이는 교회 :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교회의 표식. 7-9)

7.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우리가 알 수 있는,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앞에서 논한 것으로 이미 명백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경에는 두 가지 교회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교회"라고 하는 말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과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지체가 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는 현재 지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때가 많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며,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만드신 성직을 보존한다. 이런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가 가득한 사람들 또한 중상하는 사람들이 심히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얼마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잠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재판 기관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기 불가능하거나 강력한 규율이 언제나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교회는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1744) 하나님의 눈에만 보인다고 믿어야 한다. 그와 같이 우리는 나중 말한 것, 즉,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며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

8. 우리의 판단의 한계

따라서 주께서는 분명한 표시와 증거로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을 지적하셨다. 이미 바울의 말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아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이다(딤후 2:19).1745) 이것은 사람들의 경솔한 판단을 억제하시려는 조치였다. 또, 평상시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한 판단은 우리의 이해력이 도저히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전히 멸망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해 부름을 받아 바른 길로 돌아오며, 누구보다도 굳건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넘어 진다. 그러므로(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따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1746) 주께서는 주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는 자들을 아시며 표를 해 두셨다. 주님의 눈만이 주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과 구원의 종점에 이르기까지(마 24:13) 참고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알아보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께서는 누가 그의 자녀로 간주될 것인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다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주께서는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적응시켜 주셨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그 대신 사랑의 판단으로 대치하셨으며, 그것으로 우리는 믿음의 고백과 삶의 모범과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와 더불어 같은 하나님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1747)

그뿐만 아니라, 그의 몸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고 더욱 분명한 표식에 의해서 그 지식을 뚜렷하게 하셨다.

9. 교회의 표식과 우리가 이를 판단에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여기서 교회의 얼굴이 나타나며 우리의 눈에 보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며 또 듣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성례를 지킬 때에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엡 2:20 참조).1748)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하신 주의 약속은 반드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요점을 명백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보편적 교회는 모든 나라에서 모은 큰 무리다. 그 보편적 교회는 나누어져 여러 곳에 퍼져있지만 거룩한 교리의 한 진리에서 서로 일치하며 같은 종교 생활의 유대로 연합되었다. 이와 같이 보편적 교회 아래 개교회가 포함되며, 그 개교회들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도시와 촌락에 설립되어 각각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각 개인이 신앙 고백에 의해서 이런 개교회의 일원으로 인정될 때, 비록 그들이 보편적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재판에 의해서 출교되지 않는 이상 그들은 보편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개인과 개교회에 관한 판단의 기준은 조금 다르다. 경건한 무리에 참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들을 용납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교회의 전반적 합의에 의해서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 대접하고 신자로 인정해야 할 경우가 있다. 우리는 표결로 그들을 교회의 회원이라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그들이 차지한 자리가 합법적으로 그들에게서 빼앗기기까지는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회원 전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달라야 한다. 한 단체로서 말씀을 선포하고 공경하며 성례를 집행하고 있다면 물론 그것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런 일들에는 결실이 있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귀들이 분열시키려고 애써 온 보편적 교회의 통일을 유지한다. 동시에 우리는 각 지방의 필요에 따라 설립된 합법적 회중에게서 그 권위를 빼앗지도 않는다.

(이런 표식을 지니고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많아도 버려서는 안 된다 : 분열의 죄. 10-16)

10. 교회의 표식과 권위

말씀을 선포하며 성례를 지키는 것을 우리는 교회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표식으로 결정했다.1749) 이 일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반드시 결실이 있으며 또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즉시 결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들이고 언제나 말씀이 거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효과가 나타난다. 어쨌든, 복음 선포에 경건하게 귀를 기울이고 성례를 경시하지 않는 곳에서는 우선 교회의 형태가 보이며, 그것은 속임수도 아니요 모호한 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권위를 멸시하거나 경고를 무시하거나 또 그 지도를 반대하거나 그 징계를 경시해서도 안 된다. 그 교리를 버리고 그 단결을 파괴하는 것은 더욱 용인할 수 없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심히 중요시하시므로, 교회가 말씀과 성례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떠나는 교만한 사람을 배반자와 배교자로 여기신다. 주께서는 교회의 권위를 존중히 여기시므로 그것이 침범을 당할 때에는 자기의 권위가 떨어지게 된 것으로 믿으신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요 "하나님의 집"이라고(딤전3:15) 부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이런 말의 뜻은,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진리의 충실한 파수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봉사와 수고에 의해서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셨고, 영적 양식과 구원에 유익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스스로 한 가족의 아버지이심을 보이고자 하셨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자기의 신부와(엡 5:27) "그의 몸이니‥‥‥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으로(엡 1:23) 택하여 세우셨다고 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평범한 찬사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이러한 악한 분리를 회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복시키려고 전력을 다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맞아 분쇄되는 것이 당연하다. 또 우리가 모독적인 불충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우리와 맺어주신 혼인을(엡 5:23-32 참조) 피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죄악은 상상할 수도 없다.

11. 표식이 가지는 신성한 효험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식들을 깊이 명심해서 주의 뜻에 따라 존중해야 한다. 두 표식 전부를 혹은 그중 하나를 제거하고 말살하려고 사탄은 최대의 음모를 꾸민다. 때때로 그들은 교회의 진정하고 참된 특색을 없애기 위해서 이 표식들을 없애버리며 파괴하려고 한다. 또 어떤 때에는 이 표식들을 대대적으로 멸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 사탄은 그 간계에 의해서 어떤 시대에는 말씀에 대한 순수한 선포를 없애 버렸으며, 지금도 변함없는 악의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성직을(엡 4:12) 타파하려고 애쓴다. 주께서 주의 교회의 특색을 충분히 나타낸다고 생각하신 표식들이 보일 때 그런 집단에서 탈퇴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위험한 아니 치명적인 유혹인가? 우리는 두 가지 방면으로 깊이 유의해야 한다. "교회"라는 이름에 속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자칭하는 모든 집단에 이 표준을 시금석으로1750) 적용해야 한다. 만일 말씀과 성례에서 주께서 인정하신 규칙을 지니고 있다면 그 집단은 거짓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집단이 교회에 바칠 존경을 확신있게 드려야 한다. 그러나 말씀과 성례가 없으면서 교회를 자칭한다면, 우리는 반대 방면에 대해 경솔과 교만을 피해야 되는 것과 같이 여기서도 세밀한 경계심으로 이런 거짓에 대처해야 한다.

12. 표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경솔한 분리를 막을 수 있다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성례를 순수하게 집행한다면 이런 표식이 있는 단체를 교회로 인정해도 좋다는 충분한 보장이 된다. 이 원칙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데, 이 표식을 보존하고 있는 한 다른 결점이 많더라도 우리는 그 공동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 어떤 과오가 끼어들 수도 있지만 이런 사태가 우리를 교회와의 교통에서 멀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진정한 교리의 모든 조항이 똑같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모든 사람이 종교의 진정한 원칙으로 확신하고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 등이다. 교회들 사이에는 다른 신조들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것이 신앙에 의한 연합을 깨뜨리지는 않는다. 가령 한 교회는(경쟁심으로 날뛰거나 자기 의견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육체를 떠난 영혼은 곧 하늘로 날아간다고 주장하고 다른 교회는 어느 곳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면서도 주를 향하여 사는 것으로 확신한다고 할 때, 어느 교회가 사도가 말한 이 한 점에서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것인가? 즉,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빌 3:15).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비본질적인 문제들에1751) 관해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은 충분히 알려 주지 않는가? 맨 먼저, 우리는 모든 점에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무지로 인해서 마음이 다소 어두워졌으므로, 우리는 어떤 교회도 남겨두지 않거나 아니면 신앙생활의 본질에 손상이 없고 구원도 상실하지 않을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릇된 생각을 용서하거나 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극히 적은 오류라도 그것을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며, 아첨과 묵계로 조장하려는 생각도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소한 의견 충돌 때문에 경솔하게 교회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건 생활을 건전하게 유지하며 성례전의 집행을 주께서 제정하신 대로 지키는 교리를 안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는 곳은 교회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시정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이 이 점에 해당된다.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전 14:30). 이것을 보면 각 교인은 그 받은 은혜의 정도에 따라 회중의 덕을 세울 책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1752) 다만 책임을 이행할 때에 예절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교회의 교통을 버려도 안 되고 교회 안에 머무를 때에 교회의 평화와 합법적 권장을 깨뜨려도 안 된다.

13. 교회 내의 물의가 생긴다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잘못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1753)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Cathari)파가1754) 그러했고 도나투스(Donatists)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의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들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긴 원인을 우리 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게으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게으름을 벌하실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인자한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극단적인 엄격주의에 열중한다.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엡 5: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마 13: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둔다(마 13: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마당과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여 있게 된다(마 3: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 짐이 되리라고 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인 것과 교리적인 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 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 1: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 1:11, 3:3, 5:1, 6:7, 9:1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 5: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 15: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람을 돕지 못했다(고전 13: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 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갈 1:2).

15. 사악한 자들과의 교제

그들과 또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파렴치한 사람을 교회에서 물리치지 않았다고 해서 엄중하게 책망했으며(고전 5:2), 다음에 일반적 원칙으로서 파렴치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는 식사를 하는 것조차 잘못이라고 단정한다고(고전 5:11) 항의한다. 여기서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데 주의 만찬을 나누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느냐"고 외친다.

만일 개와 돼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것이 큰 수치란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만일 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팔린다면 그것은 더욱 큰 수치일 것이다. 물론 교회의 질서가 잘 잡혀 있다면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을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합당한 자와 합당치 못한 자들을 무분별하게 저 거룩한 잔치 자리에 앉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라고 해서 경계심이 항상 강렬한 것이 아니며 때로는 보다 관대하거나 또는 엄격하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드러난 악인들도 성도의 무리에서 반드시 제거되지 못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사태는 바울이 고린도 서신에서 날카롭게 책망했으므로 나는 그것이 과오임을 인정하며 변명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교회가 의무를 게을리 하더라도 각 개인에게 즉시 떠날 결심을 할 권리는 없다. 악인들과 친밀히 지내지 않고 일부러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는 것이 경건한 사람의 의무인 것을 나는 물론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과 친밀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그들이 밉다고 해서 교회와의 친교를 거부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악인들과 함께 주의 떡을 나누는 것을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점에서 그들은 바울보다 훨씬 엄격하다. 바울은 성찬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지키라고 권고할 때, 각각 서로 검토하라든지 또는 전교회를 검토하라고 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자기를 살피라고 요구한다(고전 11:28). 만일 합당치 못한 사람과 함께 성찬을 받는 것이 불가하다면 회중 가운데 우리를 더럽힐 불결한 사람이 있는지를 조사하라고 바울은 틀림없이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각각 자기 자신만을 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는 합당치 못한 사람이 끼어 있더라도 우리에게 아무 해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사도가 그 다음에 한 말은 이런 뜻과 부합한다.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전 11:27-29).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자기에게"라고 한다. 이것은 옳은 말이다. 누가 용납되고 누가 배제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위는 개인들이 가져서는 안 된다. 이 판단은 교회 전체에 속한 것이며 합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는 행사할 수 없다. 이 점은 후에 자세히 말하겠다. 그러므로 합당치 못한 어떤 개인의 성찬 참가를 자기가 금지할 수 없고 또 금지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악한 생각일 것이다.

16. 완벽에 대한 그릇된 주장은 왜곡된 의견에서 나온 것이다

의에 대한 잘못된 열성 때문에 착한 사람들도 이런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지만, 이런 신경과민은1755) 진정한 거룩과 거룩에 대한 진정한 열성에서 생기기보다는 자만심과 교만 그리고 거룩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대담하게 교회 탈퇴를 선동하며 기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모든 사람을 경멸하며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 외의 별다른 이유가 없다. 어거스틴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말했다. "교회의 규율을 경건하게 유지하려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에(엡 4:3) 항상 유의해야 한다. 이 상호 관용의 교훈을 지키라고 사도는 명령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그 시정책으로 처벌을 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며 따라서 시정책이 아니다. 이 악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미워한다기 보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세우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좋아하는 평범하고 약한 사람들을 끌고 가거나 적어도 분열시키려고 한다. 자만심에 부풀고 미친 듯이 완고하며 거짓말로 중상하고 음모로 문제를 일으키는 이 악한 무리는 강직, 엄격한 체해서 그들에게 진리의 광명이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되, 더욱 온유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며 성실한 사랑과 평화로운 단결을 유지하라고 명령한다. 그들은 이 원칙을 모독적인 분파 행위로 더럽히며, 형제들을 공동체에서 제거하는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경건하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하게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끈기 있게 참으며 사랑으로 애통하라. 하나님께서 시정하시거나 추수 때에 가라지를 뽑으며 쭉정이를 키질하실 때까지 기다리라"(마 13:40, 3:12, 눅 3:17).1756)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이 갑옷을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힘차고 용감하게 의를 옹호하는 듯 하면서도 유일한 의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의 교통을 이 눈에 보이는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으므로, 악인들이 밉다고 해서 이 공동체의 표지를 깨뜨리는 사람은 성도의 교통에서 탈락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은 큰 무리 가운데 주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거룩하며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그들의 눈에는 뜨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또 그들은 병든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과오를 결코 기뻐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주를 깊이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재삼 분발하며 더 고결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지극히 성결한 사람도 심히 유감스러운 과오를 범하는 때가 있으므로 사람을 한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며 거룩한 신비에 참가하는 것은 이 모든 권능이 일부 불경건한 사람들의 죄로 인해서 허비될 가능성보다 교회의 집회를 위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그들은 진정한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가 완전치 못한 거룩으로 분열의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고 도리어 교회 내에서 죄의 용서를 실천할 기회를 준다. 17-22)

17. 교회가 거룩하다는 것

또한 그들은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교회는 특히 어떤 의미에서 거룩한가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전하지 않은 한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국 교회는 하나도 남기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은 옳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5-27). 그러나 주께서 주름 잡힌 것을 펴며 티를 씻기 위해서 매일 수고하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매일 전진하면서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즉, 하루하루 전진하지만 아직은 거룩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하겠다.1757)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욜 3:17),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사 35:8, 52:1 참조)라고 예언하였다. 모든 교회 회원이 흠이 없다는 뜻으로 이 예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과 완전한 순결을 열심히 갈망하기 때문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순결을 그들에게 인정하신다. 또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성화의 증거를 보기 어려운 때가 많을지라도 우리는 천지 창조 이후로 주의 교회가 없는 때가 없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대가 마지막으로 완성될 때까지도 주의 교회가 없는 때는 없을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류 전체가 처음부터 부패하고 타락했지만 주께서는 이 오염된 덩어리 속에서 어떤 그릇은 귀히 쓰도록 항상 성별하셔서(롬 9:23이하) 주의 자비를 받지 않는 시대가 없도록 하신다.

이 일은 확실한 약속으로 다짐하셨다. 예컨데,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였다"(시 89:3-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13-14) 그리고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렘31:35-36) 등이 그것이다.

18. 예언자들의 실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모든 예언자들이 여기에 대한 실례를 제공한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요엘과 하박국이 기술한 예루살렘 교회의 참상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백성과 관리와 제사장들이 모두 심하게 부패하자 이사야는 주저치 않고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고 했다(사 1:10). 종교는 멸시를 당하며 정말로 부패하기도 했다. 도덕적으로는 절도, 강도, 배신, 살륙, 기타 악행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을지라도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교회를 새로 세우지도 않았고 새로운 제단을 쌓고 따로 제물을 바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 사이에 말씀을 두시고 그들 사이에 의식을 제정하셔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셨다고 예언자들은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인들이 모인 한가운데서 깨끗한 두 손을 들어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이런 의식들에 의해서 자기가 더럽혀진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그런 곳에 끌려가기 보다는 차라리 백 번 죽는 편을 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분파를 만들지 않은 것은 오직 연합을 열망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크고 많은 비행을 저질렀어도 거룩한 예언자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을 분리하는 것을 불가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일부 사람들의 도덕 생활이 우리의 표준에 맞지 않거나 심지어 기독교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이유만으로 우리가 감히 교회의 교통에서 즉시 탈퇴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요구일 것이다.

19.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보여준 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에는 세상 형편이 어떠했는가? 그때에도 바리새인이 말할 수 없이 불경건했고 일반 사람들이 방종한 생활을 했지만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일반 백성과 함께 같은 의식에 참여하며 같은 성전에 모여 공중 예배를 실천했다. 깨끗한 양심으로 같은 의식에 참가하는 사람은 악인들과 함께 있다고 해도 감염되지 않는다고 믿지 않았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보고도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적어도 그리스도의 권위에 굴복하라. 키프리아누스는 적절한 말을 했다.

"교회 안에 가라지나 불결한 그릇들이 있는 것 같더라도 우리 편에서 교회를 떠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알곡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질그릇을 부수는 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며 주께는 철장도 맡겨져 있다(시 2:9, 계 2:27). 아무도 하나님 아들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며, 쭉정이를 키질하고 짚을 타작하거나(마 3:12, 눅 3:17 참조) 인간적 판단으로 모든 가라지를 갈라내면 충분하다고(마 13:38-41 참조) 하지 말라. 사악하고 미친 생각은 이런 완고하고 불경건하고 무례한 행동을 취하므로 참으로 오만하다."1758)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확립해야 한다. 첫째,(하나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교회의 보이는 교통에서 의식적으로 탈퇴하는 사람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둘째, 소수의 죄악이나 다수의 죄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교회 의식에서 우리가 신앙을 적합한 방법으로 고백하지 못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목사나 또는 평신도인 다른 개인이 무가치하다고 해서 경건한 양심이 상처를 입지는 않는다. 성례를 불결한 사람들이 집례한다 해도 거룩하고 고결한 사람에게는 여전히 깨끗하고 유익한 것이다.

20. 죄의 용서받음과 교회

그들의 심술궂음과 교만은 한도를 넘어서, 사소한 결점이라도 있을 경우에는1759) 교회라고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실 고결한 교사들이 신자들에게 향상되어야 한다고 권고하며 일평생 죄 짐을 지고 신음하면서 용서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 가르칠 때에, 그들은 그런 교사들을 비난한다. 사람들은 이런 방법에 의해 완전성에서 멀어지게 된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항의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향해서 완전하게 되라고 권고할 때, 우리의 노력이 게으르거나 열성이 없어서는 안되며 노력을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지상에서 경주를 계속하고 있는 동안 자신이 완전하게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의 마귀적인 공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교회를 말한 다음에 죄의 용서를 말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예언서를 보면, 교회 안에 있는 백성과 권속만이 죄의 용서를 얻는다(사 33:14-24). 그러므로 우선 하늘 예루살렘을 건설하는 일이 있어야 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그곳으로 오는 모든 사람의 불의를 도말되게 해야 한다. 내가 하늘 예루살렘을 우선 건설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가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는 성도의 공동체에서만 자비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176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와 나라에 들어가는 첫 어귀는 죄의 용서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언약도 없고 하나님과의 결속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서 "그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편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호 2:18-19)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자신의 자비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도 주께서는 진노로 흩으신 백성을 다시 모으셨다고 선포하시면서,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신다(렘 33:8) 따라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징에 의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처음으로 가입을 허락 받으며, 세례는 우리가 우선 하나님의 인애로 우리의 누추함을 씻어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가족에 가입하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21. 교회의 일원들에게는 용서가 계속된다

주께서는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단번에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양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교회 안에서 보존하며 보호하신다. 아무 소용도 없을 용서라면 그런 용서를 제공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 경건한 사람들은 주의 자비를 한 번만 주신다.

그것은 무익하고 허망하리라는 것을 모두 자신들의 경험으로 아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여러 가지 약점이 일평생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특히 자신의 가족들에게 약속하시는 것은 분명히 공연한 일이 아니다. 화해의 소식을 매일 그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일평생 죄의 흔적을 가지고 다니므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우리를 붙들어 주지 않는 다면 우리는 일순간이라도 교회 안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고 그 자녀들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든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라는 몸에 접붙임을 받은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관용과 중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에 의한 성화에 의해서 용서를 받았고 또 매일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한다.

22. 열쇠의 힘

이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교회의 열쇠를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그 권한을 주신 것은(마 16:19, 18:18, 요 20:23) 믿지 않다가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그 죄를 용서해 주기를 원하셨다기 보다는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이 직책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바울이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화해의사명이 맡겨졌다고 하며 그 직책에 의해서 그들에게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반복해서 권면하도록 한 것은(고후 5:18,20) 이 점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교통에서 우리의 죄는 교역자들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용서된다. 즉, 이 직책을 받은 장로들이나 감독들이 복음의 약속으로 신자들의 양 팀에 힘을 주어 용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혹은 공적으로 혹은 사적으로 이 일을 실천한다. 개인적으로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약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공중 앞에서 전도할 때나 각 가정에서나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증거하며 각 사람에게 구원의 교리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충고했노라고 말한다(행 20:20-21).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남달리 거룩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몸을 쓰고 사는 이상 여전히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둘째, 이 은혜는 교회에 속한 것이어서 교회와의 교통을 유지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 셋째, 이 은혜는 교회의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통해서 혹은 복음 선포로 혹은 성례 집행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열쇠의 권한은 주로 여기에서 두드러지며 주께서는 이 권한을 신자들의 단체에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각각 주께서 용서를 두신 곳에서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공적 화해는 권징과 관계된 것이므로 적당한 곳에서 논하겠다.1761)

(신도들의 공동사회 내에서 용서받는 사례를 설명해 주는 서건들. 23-29)

23. 모든 신도들은 자기의 죄가 용서되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말한 광신자들은 교회에서 구원의 유일한 닻을 빼앗으려 하므로 우리는 이 유해한 견해에 대항하도록 양심의 무장을 더욱 튼튼해야 한다. 과거에는 노바티아누스(Novatianists)파가1762) 이런 사상으로 교회를 흔들었으며, 지금은(노바티아누스파와 별로 다름이 없는) 일부의 재세례파가 이같은 광증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례로 거듭나서 아무 육적인 오점도 없는 순결하고 천사 같은 생활을 하는 것같이 말한다. 세례를 받은 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은 은혜를 받은 후에 타락하는 사람에게는 용서받을 소망이 없다고 하며 처음 중생했을 때 받은 용서 이외의 다른 용서를 용납하지 않는다.1763)

비록 이 오류를 성경보다 명백하게 반박한 것은 없지만(노바티아누스를 따랐던 자들이 많았던 것과 같이) 이 자들로 하여금 이 오류를 믿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기와 남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광분하고 있는가를 간단히 알려 주려고 한다.

첫째, 주의 명령에 따라 성도들은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마 6:12) 반복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의심 없이 고백한다. 또 주께서는 자신이 주실 것만을 구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그들의 기도는 허사가 아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겠다고 확언하시지만 이 죄의 사면에는 특별한 약속으로 인을 치셨다. 우리는 무엇을 더 원하는가? 주께서는 죄를 고백하라고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며 또한 일평생 계속 고백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면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거나 또는 죄를 범하면 은혜를 전연 닫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주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시는가,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마 18:21-22)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를 그의 자비를 본받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한두 번만 용서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놀라 주를 부를 때마다 용서하신다.

24.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율법

교회의 초창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족장들이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을 때(창 37:18) 그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고 선택을 받아 언약에 참여했으며 근면한 조상들에게서 의와 정직에 대한 교훈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범하려고 한 죄는 가장 타락한 도적들조차 꺼려할 것이었다. 나중에는 유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누그러져서 동생을 팔았지만(창 37:28) 이 역시 참을 수 없는 잔악한 행위였다. 시온과 레위는 그들의 누이동생의 일로 세겜 사람들에게 불법전인 복수를 하여(창 34:25) 자기 아버지에게 정죄를 받았다. 르우벤은 추악한 정욕으로 자기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다(창 35:22).

유다는 음행을 즐기고자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며느리와 동침하였다(창 38: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된 백성 사이에서 추방되기는커녕 족장으로 세움을 받았다.

다윗은 어떠했는가? 공의를 실시하는 최고 통치자로 있었을 때에 그는 무고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자기의 맹목적인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하였다(삼하 11:4,15). 그는 이미 중생한 사람이었고 중생한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이방인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이런 죄를 범했고 또 용서를 받았다(삼하 12:13).(개인들의 예는 이만 하고) 율법과 예언서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가 약속될 때마다 여호와께서는 백성의 죄를 용서하실 용의가 있다는 것을 보이신다. 배교한 이 백성이 주께로 돌아설 때 모세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난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신 30:3-4).

25. 옛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도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 예언서

그러나 나는 끝없이 예를 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수한 죄로 뒤덮인 백성에 대한 이런 자비의 약속은 예언서에도 가득하다. 반역보다 중한 죄는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과 교회와의 분열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죄를 이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가령 사람이 그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본부가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 하느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렘 3:1).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 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렘3:12).

죄인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도리어 마음을 돌이켜 사는 것을 바라노라고 언급하시는 이에게 다른 감정이 있을 리가 없다(겔 18:23,32, 33:11).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그는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빌며 기도의 응답이 있기를 원했다. 그는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저희가 사로잡혀 간 땅에서 스스로 깨닫고 그 사로잡은 자의 땅에서 돌이켜 주께 간구하기를 우리가 범죄하여 패역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하며‥‥‥주께서 그 열조에게 주신 땅 곧 주의 빼신 성과‥‥‥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왕상 8:46-50)라고 기원했다. 그리고 주께서 죄를 위한 제물을 매일 드리도록 율법에 제정하신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민 28:3이하). 주의 백성이 항상 죄의 질병으로 괴로워할 것을 예상하시지 않았다면 이런 치료 방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26. 새 언약 하에서 하나님이 죄 많은 신자들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그자들은 이 은혜를 빼앗겼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은혜를 계시하셨는데도 주께 죄를 지은 신자들이 용서를 빌며 자비를 받을 길이 막혀 버렸다는 말인가? 구약시대에는 성도들이 죄의 용서를 위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비가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타났으며 주께서 풍부한 자비를 베푸셨고(딛 1:9, 3:4, 딤후 1:9)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해가 실현되었다고(고후 5:10이하) 성경은 명백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성경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는 끊어지거나 감해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위에 더욱 풍성하게 흘러내린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대한 증거도 없지 않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천사들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리란 말씀을 베드로는 들었으면서도(마 10:33, 막 8:38) 하룻밤 사이에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면서 저주까지 했다(마 26:7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서를 받았다(눅22:32, 요21:15 이하). 데살로니가 신자들 가운데는 무질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회개하라는 권고의 한 방법으로 징벌을 받았다(살후 3:14-15, 3:6 참조).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까지도 베드로는 기도하라고 권하여(행8:22), 절망 상태로 몰아넣지 않고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했다.

27. 타락한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온 교회가 가장 가증스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을 때 바울이 그 지도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온유하게 그들을 죄에서 풀어 주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이탈은 사소한 죄가 아니었다(갈 1:6, 3:1, 4:9).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보다 더 심한 죄를 지었는데, 보다 가증스런 죄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주의 자비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사실 불결하고 음란하고 방종한 생활로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 회개하라고 분명하게 권고했다(고후 12:21). 진정한 솔로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에게 엄숙하게 확증하신 여호와의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 언약의 말씀은 이것이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30-33). 끝으로, 다름 아닌 사도신경의 순서에1764) 의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죄에 대한 은혜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을 배운다. 교회가 설립되면 죄의 용서도 첨가되기 때문이다.

28. 무의식적인 죄만 용서를 받는가?

좀더 사려가 깊은 일부 사람들은 분명한 성경 말씀에 의해서 노바티아누스 사상이 논박되는 것을 보고, 모든 죄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의적인 허물, 즉, 사람이 알면서도 기꺼이 빠진 죄만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1765)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지은 과오 이외에는 어떤 죄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의 고의적인 죄를 대속할 제물과(레 6:1이하) 모르고 한 행위를 대속할 제물을(레 4장) 각각 따로 드리라고 주께서는 율법에서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고의적인 죄에 대한 대속을 거부한다는 것은 심히 악한 생각이다. 주께서는 육적인 제물을 인으로 삼아 성도들의 고의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확인하셨으므로, 이 용서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희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명백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또 분명히 율법에 통달했던 다윗이 모르고 죄를 지었다고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백성의 간음죄와 살인죄를 매일 처벌한 다윗이 이런 것이 큰 죄라는 것을 몰랐던가?(삼하 11장) 족장들이 동생을 죽이는 것을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겠는가?(창 37:18이하)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정욕과 불결과 음행과 미움과 분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 배웠던가?(고전 5장) 신중한 경고를 받은 베드로가 자기의 선생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을 몰랐던가?(마 26:74)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가 그렇게 관대하게 나타나는 데에도, 박정한 우리가 그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29. 고대 교회에 있었던 "두 번째 회개"에 대한 문제

고대 저술가들은 신자들이 매일 받은 용서는 가벼운 과실, 즉, 육이 약하기 때문에 범하게 되는 가벼운 과실에 대해서 뿐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엄숙한 회개는 더욱 크고 가증스런 죄에 대한 것이며, 세례와 같이 한 번 이상 반복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했다.1766) 우리는 이 견해에 대해서, 그들은 첫번 회개 후에 타락한 사람들에게서 또는 소망을 빼앗으려고 했다든지 또는 다른 과실들을 하나님 앞에서 적은 것같이 경시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교부들은 성도들이 믿음을 잃고 비틀거리는 일이 많으며 때로는 공연한 맹세를 하고 가끔 화를 내며 심지어는 욕설을 터뜨리고 이 밖에도 주께서 심히 싫어하시는 악습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일들을 "경미한 과실"이라고 부른 것은 큰 추태를 부려서 교회에 알려지는 드러난 범죄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교회적으로 시정해야 할 만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용서를 받는 것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의 죄가 주 앞에서 용서를 받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엄격하게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서 제명을 당할 만한 죄를 경솔히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지도 법칙인 주의 말씀은 더욱 온화한 태도를 명령하신다. 권징 시행이 지나치게 엄격해서 권징의 중심 대상인 사람이 슬픔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고후 2:7) 우리는 이 점을 위에서1767) 매우 자세히 논했다.

제 2 장  거짓 교회와 참된 교회와의 비교

(참된 교리와 예배를 떠나면 카톨릭이 주장하는 참된 교회란 무효가 되고 만다. 1-6)

1. 근본적인 구별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우리는 특히 존중해야 하며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는 영원한 표식으로 만들 정도로 이 일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1768) 즉, 이 일이 건전하고 순결하게 유지되는 곳에서는 도덕적 과실이나 병폐가 있더라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교회 내에 사소한 과실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그 합법성을 부정할 정도로 교회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용서해야 될 과실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중요한 교리를1769) 손상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을 말살하지 않는 과실 그리고 성례에 대해서 주의 합법적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복시키지 않는 과오는 용서해야 된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요새에 허위가 침입해서 필수적인 교리의 핵심과 성례의 효험이 파괴될 때에, 분명히 교회는 죽게 된다. 목을 찔리거나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의 교훈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말에도(엡 2:22)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는데, 이 교훈을 없애버린 후에 교회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의 이 핵심뿐이므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2. 로마 카톨릭교회와 그 주장

교황 제도하의 이러한 상태, 즉, 거기 얼마나 많은 교회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1770)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사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며, 이 조직이 순수한 빛을 꺼 버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미신으로 더렵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많고 치명적인 비행에 참여하지 않아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어질 염려가 없다. 교회와의 교통은 그것이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기타 악행에 우리를 빠뜨리는데 이바지 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회를 극찬하여 세상에는 그들 외에 다른 교회는 없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문제가 결말이 난 것처럼, 자기들의 교회의 자랑거리인 복종을 감히 버리는 사람은 분리주의자이며 그 교리에 감히 반대하는 사람은 이단자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근거로 자기들에게 진정한 교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그들은 고대의 기록을 근거로 과거 이탈리아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있었다는 일들을 이야기한다. 건전한 교회들을 창설하고 피를 흘려 그 교리와 교회의 건물을 설립한 저 거룩한 분들을 자기들의 뿌리로 삼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회는 영적 은사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순교자들의 피로 성별되며 주교들의 연속적인 계승에 의해서 보존되고,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어거스틴 등이 이 계승을 중히 여겼다고 회고한다.1771)

그러나 나와 함께 이러 주장들을 잠깐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고 천박한 것인가를 곧 깨닫게 해줄 수 있다. 사실, 그들도 나에게서 배워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그들에게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들의 주장을 옹호하려고 할뿐이므로, 나는 몇 가지 점만 이야기함으로써 선한 사람들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기만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우선, 나는 그들이 왜 아프리카와 이집트와 아시아 전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고 묻겠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를 유지해 왔다고 자랑하던 주교들의 계승이 이 여러 지방에서는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교들의 계승이 끊어진 일이 없고 애당초부터 줄곧 주교가 존재한 자기들의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 앞에 희랍을 들이댄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나는 다시, 그들은 왜 희랍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가 소멸됐다고 하느냐고 묻겠다.(그들이 교회를 유일하게 보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주교들이 희랍에서는 계속해서 계승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희랍 사람들을 분리파라고 하는데, 무슨 권리로 그렇게 말하는가? 사도 교구에서 떨어졌으므로 특권을 잃었다고 대답한다.1772)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들은 더욱 특권을 잃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따라서 조상들의 손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건전하고 순수하게 보존하고 그 진리대로 삼지 않는다면 계승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3. 거짓 교회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표시 난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옛날 유대인들이 맹목, 불경건, 우상 숭배 등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을 때 하던 주장을 지향하고 있을 뿐이다. 로마 카톨릭 교도와 같이, 유대인들은 성전과 의식과 제사장들의 활동을 굉장히 자랑하며 그것을 표준으로 교회를 확실히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 대신에 겉모습을 자랑하지만 그런 것은 교회와는 거리가 먼 것이며 또 없어도 교회는 훌륭히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유대인들의 미련한 자신감을 꺾는데 썼던 논증을 사용하려고 한다.

즉,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4) 주께서는 주의 말씀이 전파되고 양심적으로 지키는 곳이 아니면 어떤 성전도 자신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소의 그룹들 사이에 머무르며(겔 10:4) 이곳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가 되리라고 백성들에게 약속하셨지만, 제사장들이 사악한 미신으로 예배를 타락하게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는 그의 영광을 다른 곳으로 옮기시고 성소에서 거룩한 성격을 빼앗으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로서 성별된 듯 하던 성전까지도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세속적인 것이 되었으니,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과 장소에 매이며 형식적인 행사에 끌리고 교회라는 이름과 외형만 있는 곳에(롬 9:6) 항상 계셔야 한다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아무 근거도 없다.

또 바울이 로마서 9장부터 12장1773) 사이에서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듯이 보이면서도 복음의 교훈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복음을 핍박한다는 사실이 연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교리를 설명한 다음에 이 문제를 처리한다. 유대인들은 교회의 외형에 필요한 것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진리를 대적했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가 이렇게 부정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비교해서, 자유인인 어머니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기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많다고 한다(갈 4:22이하). 바울은 더 나아가 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 율법이 시내산에서 전해진 것같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그래서 종으로 나서 자랐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회의 자녀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서자이면서 하나님의 참 자녀들을 교만한 태도로 멸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으며(창 21:10), 이 신성한 명령을 믿고 그들의 무미건조한 자랑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들의 외형적인 고백을 자랑한다면 이스마엘도 할례를 받았었고, 그들이 연대가 오래 되었다고 자랑한다면 그는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제외되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바울은 교리적으로 순수하고 합법적인 근원에서 난 자들만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다고 대답한다(롬 9:6-9).

이 이론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자신의 사자 또는 통역자로 삼는다고 언약하셨다고 해서 자신이 그의 자손인 사악한 제사장들에게 매이는 것은 아니라고 하신다. 참으로, 제사장 계급의 존엄성을 특히 존중해야 된다고 하면서 항상 예언자들에게 반항하는 제사장들의 거짓된 자랑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돌려 대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주장을 기꺼이 인정하시면서, 자신은 언약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들 편에서 응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계승자들이 연속적으로 또 진심으로 선인들을 본받지 않는다면 이 계승에 무슨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자기들의 근본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모든 영예를 박탈당한다(말 2:1-9). 가야바의 선조에 경건한 제사장이 많았고(참으로 아론으로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중단되지 않고 제사장직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저 사악한 무리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고 한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세속적인 정치에서도, 브루투스나 스키피오나 카밀루스1774) 같은 사람들을 계승했다고 해서 칼리굴라, 네로, 헬리오가발루스의 무리가 행한 폭정을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특히 교회 기관에서 진리를 무시하고 인간의 계승 관계만을 중시한다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주교들이 계속 계승되는 곳에서 일종의 상속권에 관한 것처럼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거룩한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잘못이며, 학자들이 그런 생각을 한 일도 전혀 없다. 처음부터 학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리에 변동이 없었던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들은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한 충분한 방어책으로서 한 원칙을 채택했다. 즉, 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만장일치로 확고하게 보존되어 온 교리로 모든 새로운 오류에 대항하여 싸웠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 사람들이 우리가 공경하는 또 공경해야 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을 더 속이려고 애쓸 이유는 없다. 그들이 교회를 정의하려고 할 때, 속담에 있듯이 그들에게 물이 붙어 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1775)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의 자리에 추악한 창녀를 앉히기 때문에 그들은 진창에 빠져 버린다. 우리는 이런 것들로부터 속지 않기 위해서(다른 이들도 있으나) 어거스틴의 권면을 생각하기로 하자. 그는 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산적한 추문에 가려지는 것처럼 희미해지고 때로는 평온한 때를 만나 평온무사하며 혹은 고난과 시험의 파도에 휩쓸린다." 가장 강력한 기둥들이 믿음을 위해서 용감하게 추방을 감수하며 혹은 세계 각지에서 숨어 지낸 일이 많다는 것을 그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1776)

4.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립되었다

이와 같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일 큰 대적이면서도 교회의 이름으로1777) 지금 우리를 괴롭히며 무식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성전과 사제 계급과 그 외의 외부 장식을 내놓지만, 단순한 사람들의 눈이나 현혹시킬 헛된 외화에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교회가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다. 이는 아래와 같은 말씀들이 주께서 그의 백성에게 인치신 영원한 표식이기 때문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느니라"(요 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러나 조금 전에 주께서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4-5)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는 표식으로 교회를 교시하셨는데 왜 우리는 교회를 찿느라고 미친 사람같이 행동하는가? 표식이 보이는 곳에는 틀림없이 교회가 있으며, 표식이 없는 곳에는 교회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줄 만한 것이 전혀 없다. 교회의 기초는 사람의 판단이나 사제 계급이 아니라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교훈이라고 바울은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킨다(엡 2:20). 참으로 예루살렘과 바벨론,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탄의 권모술수의 차이점을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요약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홀로, 즉, 그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상상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것을(렘 7:4 참조) 어느 누가 분명히 깨닫지 못할 것인가?

5. 종파 분립과 이단의 비난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분파와 이단의 죄를 뒤집어씌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들과 다른 교리를 선포하며 따로 기도 집회를 갖고 세례를 베풀며 성만찬과 기타 거룩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비난이지만 길고 어려운 변호가 필요하지는 않다.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단과 분파를 구별해서, 이단자들은 잘못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지만 분리론자들은 이따금씩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것이라고 한다.1778)

그러나 사랑의 결합은 믿음의 일치에 달려 있으므로, 이 후자는 전자의 출발점과 종점과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연합을 우리에게 권고할 때 요구 조건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때 우리의 의지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상호간의 호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교회의 연합을 권하면서,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는(엡 4:5) 입장이라고 한다. 참으로 바울은 우리에게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칠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빌 2:1-5) 또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라고(롬 15:5) 첨부한다. 주의 말씀을 떠나서는 신자간의 일치가 없고 오직 악한 사람들의 갈라지는 파당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6. 그리스도가 머리됨이 연합의 여건이다

키프리아누스도 바울을 따라, 교회 전체의 화합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감독으로 모시는 경우에만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한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결실이 많으므로 널리 퍼져 많은 교회가 된다. 빛이 하나이면서 그 광선은 많은 것과 같다. 나무의 가지는 많으나 그 굳센 줄기는 하나이며, 줄기는 땅 속에 튼튼히 뿌리를 박고 있다.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흐르고 많은 시내가 각각 자체의 풍부함에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다. 태양에서 오는 광선을 보라. 태앙 자체는 갈라지지 않는다. 나뭇가지를 꺾어 보라. 꺾인 가지에서는 움이 돋지 않는다. 시냇물의 근원을 막아 보라. 시내는 말라 버린다. 그와 같이 교회는 주의 빛을 풍성하게 받아 전 세계에 퍼뜨리며, 그 빛 하나하나는 각지에 확산된다."1779) 그리스도의 모든 지체가 수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항상 우리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이단설과 분파 행동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머리이신 분을 찾지 않고 하늘 교사의 교훈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회를 떠난 우리는 이단이라고 외치도록 내버려두자. 우리가 떠난 유일한 원인은 진리를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을 그들이 절대로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외에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저주하는 말로 우리를 추방한 것을1780) 나는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사도를 분파주의자라고 정죄하고 싶지 않다면 그들의 행동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그의 이름 때문에 회당에서 쫓겨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다(요 16:2). 주께서 말씀하신 이 회당들은 당시에 합법적 교회로 인정되었다. 이제 우리는 쫓겨났고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생긴 일이란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 대해서 좌우간의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문제를 검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점을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는데, 이는 나로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가기 위해서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배와 재판권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교는 고대 이스라엘과 비교된다. 7-11)

7.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태는 여로보암 때의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우상의 압제 하에 억눌려 있던 모든 교회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것은 예언자들이 기술한 고대 이스라엘 교회와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법들을 지킬 때에는 그들 중에 진정한 교회가 있었다. 즉, 하나님과 은혜로 교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을 모두 얻었다. 율법에서 진리의 교리를 얻었으며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교리를 선포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아 종교에 입문하며 그 밖의 성례를 실시함으로써 믿음을 강화시켰다. 주께서 교회에 주신 영예로운 칭호들은 확실히 그들의 사회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 후에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 숭배와 미신에 빠져 그 특권의 일부를 잃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의 성례를 집행하는 일을 맡기신 백성에게서 누가 감히 교회라는 이름을 제거했는가? 또 주의 말씀을 공공연하게 짓밟고도 벌을 받지 않으며, 교회의 가장 중요한 힘과 생명 자체가 되는 말씀 선포를 말살해 버리는 무리를 누가 감히 통 털어서 "교회"라고 불렀는가?

8.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는 남았다

그러면, 혹자는 유대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후에는 그들 사이에 교회의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첫째, 타락에도 몇 가지 정도가 있었다고 나는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 백성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경배에서 타락했을 때 그것이 같은 정도의 타락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금송아지를 만들며 불법적인 예배 장소를 정했을 때에 그의 종교를 완전히 부패시켰다(왕상 12:28이하). 유대 백성도 종교의 외형까지 위조하기 전에 악하고 미신적인 풍습에 오염되었다. 여로보암 때에 이미 여러 가지 타락한 의식을 일반적으로 가르쳤으며 채택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여전히 율법을 가르쳤으며 제사장이 있었고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들이 존속했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쓸 만한 교회가 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아합 왕 때까지 사태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그 후에 더욱 악화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왕들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혹은 아합과 같았으며 혹은(아합보다 조금 낫다는 것이) 여로보암을 본받았다. 그러나 하나도 예외 없이 모두가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였다. 유대에서는 가끔 변화가 있었다. 어떤 왕들은 거짓된 미신을 조작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타락시켰고 어떤 왕들은 쇠퇴한 종교를 재건했다. 드디어는 제사장들까지도 가증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성전을 더럽혔다.

9. 카톨릭 교회는 부패하였으며,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면, 교황주의자들은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에 못지않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서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했었다는 것을 부정해 보라. 그들의 과오도 될 수 있는 대로 변명해 보라. 그러나 그들은 추잡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교리 방면에서도 더 순수한 점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실제적으로는 더욱 불순하다. 하나님께서, 또 보통의 판단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증인이 될 것이다. 심지어 사태 자체까지도 나는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그들의 교회와 교통하도록 강요하고 싶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일을 요구한다. 첫째는 우리가 그들의 기도와 성례와 의식에 참가해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모든 명예와 권세와 재판권을 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점에 대해서, 나는 상태가 완전히 부패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예언자들은 모두가 개인적으로 제물을 드리지도, 따로 기도회를 드리지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는 그들에게는 솔로몬의 성전에 모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신 12:13,11).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그 직분에 머무를 가치가 없는 자들이었지만 성례를 집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셨고(출 29:9) 면직하신 일이 없으므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예언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즉, 에언자들은 미신적인 예배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지 않았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무도 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람들-교황주의자들-에게는 어디에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과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거의 명백한 우상 숭배로 더렵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통의 중심 유대는 미사인데 이것을 우리는 가장 큰 신성 모독으로 혐오한다. 우리의 이 태도가 바른 것인지 또는 경솔한 것인지는 다른 곳에서1781) 알려질 것이다. 지금은 우리와 예언자간의 경우가 이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악인들의 의식에 참석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 이외의 것을 보거나 또는 거기 참석하라고 그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다.

만일 모든 점에서 유사한 예를 원한다면, 이스라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다. 여로보암의 칙령에 따라 종전과 같이 할례를 행했으며 제물을 드렸고 거룩한 율법을 지켰으며 조상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금지된 가짜 예배 형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한 일을 모두 불가하다고 정죄하셨다(왕상 12:31). 벧엘에서 예배하거나 제사를 드린 예언자나 경건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누구든지 내게 보이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짓을 하면 반드시 신성 모독으로 몸을 더럽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을 교회의 교통을 중요시하되 교회가 부패하고 모독적인 의식으로 타락했을 경우 그런 교회를 경솔하게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10. 우리가 부패한 교회를 멀리해야하는 이유

둘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주장할 것이 더욱 많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대해서 그 판단만을 공경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며 그 경고에 순종하고 그 징계로 마음을 고치며 모든 일에 그 교통을 양심껏 보존해야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에 복종하게 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상황이 같거나 혹은 더 낫다면 예언자들이 당시의 유대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정한 것을 우리도 교황주의자에게 기꺼이 양보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예언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모임이 신성 모독이고(사 1:14) 그들에게 찬성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불법이란 것을 여러 번 공언했다. 만일 그들의 모임이 교회였다면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나 미가와 같은 사람들이, 유대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그 밖의 종류의 사람들(당시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무할례자 보다도 더 나쁜 자들이라고 해서 미움을 받은 자들) 이 하나님의 교회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의 집회가 교회였다면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딤전 3:15) 거짓의 버팀목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막(Taberacle)이 아니라 우상을 두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악한 음모에 불과한 그 모임들에서부터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와 미신과 불경건한 교리에 오염된 현대 회중들을 교회, 즉, 그리스도인이 교리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와 완전히 일치해야 하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들이 교회라면 열쇠의 권한이 그들의 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열쇠는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그들 중에서는 그 말씀이 파괴되었다. 또 만일 그들이 교회라면 "네가 무엇이든지 매면" 운운하신(마 16:19, 18:18, 요 20:23) 그리스도의 약속이 그들 사이에서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종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들과의 교통을 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약속이 헛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적어도 이 점에서 교회가 아니다. 끝으로, 그들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불경건을 가르치는 학교들과 각종 오류의 소굴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들이 교회가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신자들의 합법적인 회중과 불신자들의 집회를 구별하는 표식이 없어지거나 할 것이다.

11. 교황 제도 하에 남아 있는 교회의 자취

옛날에는 교회의 일부 특전이 유대인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그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파멸을 면하게 하신 교회의 흔적이 교황주의에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한 번 맺으셨으나, 그것을 보존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언약이 그 자체의 힘으로 그들의 불경건과 싸우면서 생명을 유지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언약이 그들 중에 존속한 것은 확실하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들의 배반은 주의 진실을 말소할 수 없었고, 비록 그들의 불결한 손이 할례를 더럽혔을지라도 그것을 여전히 여호와의 언약의 진정한 표징이며 거룩한 성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난 사람들을 주께서는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셨으며(겔 16:20-21), 이 사람들은 오직 특별한 복에 의해서 여호와께 속하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언약을 세우신 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과 스페인과 영국에서도 같은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들이 적그리스도의 압제로 억압을 당할 때 주께서는 자신의 언약이 침범되지 않도록 두 가지 방법을 쓰셨다. 첫째, 언약의 증거인 세례를 유지하셨다. 사람들은 불경건하지만 여호와 자신의 입으로 성별하신 세례는 그 효력을 보존한다. 둘째, 교회가 완전히 죽지 않도록 여호와 자신의 섭리로 교회의 다른 흔적들을 남기셨다. 건물이 헐릴 때에 기초와 폐허가 남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적그리스도가 교회를 기초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주의 말씀을 멸시한 사람들의 배은망덕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교회가 무서운 혼란과 분열을 겪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이렇게 파괴된 후에도 절반쯤 헐린 건물이 남도록 하셨다.

12. 건전한 요소가 있을지라도 타락한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절대로 교황주의자에게 유일한 교회라는 칭호를 주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 사이에 교회들이 있는 것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1782) 오히려 우리는 다만 신앙 고백의 표준인 성례뿐만 아니라 특히 교리에 있어서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진정하고 합법적인 교회 제도를 주장한다. 다니엘과(단 9:27) 바울은(살후 2:4) 하나님의 성전에 적그리스도가 앉으리라고 예언했다. 우리가 보기에 저 사악하고 가증스런 왕국의1783) 수령과 기수는 로마 교황이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지배력이 그리스도나 교회의 이름을 말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압제 하에 있는 교회들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 교회들을 그의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더럽히며 잔인한 지배로 괴롭히고 독약과 같은 악하고 치명적인 교리로 부패시키며 거의 죽였다. 그 교회들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파묻혀 숨겨졌으며 복음은 타도되었고 경건은 추방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거의 말살되었다. 요컨대, 모든 일이 혼란에 빠져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보다도 바벨론의 모습이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그 교회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 비록 비참하게 분산되어 있지만 기적적으로 보존하셨기 때문이며, 표식 특히 악마의 간계와 인간의 패악도 파괴할 수 없는 교회의 표식이 다소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논의에서 특히 유의해야 하는 표식들이 없으므로 나는 그 교회들에게는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합법적인 교회 형태가 없다고 말한다.

제 3 장  교회의 교사들과 목회자 : 그 선정과 직분

(하나님이 주신 직분 : 이 기능은 고귀하고 필요하다. 1-3)

1.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봉사를 필요로 하시는가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통치하기 위해서 쓰시는 교회의 교직 제도를 말해야 하겠다. 하나님만이 교회를 지배하시며, 교회 안에서 권위 또는 우월한 지위를 가지셔야 한다. 그리고 이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행사된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게 우리들 중에 계시는 것이 아니므로(마 26:11). 우리는 그가 사람들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들에게 말로 분명하게 선포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위임하셨으나 그것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이양하신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사업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노동자가 일을 할 때에 도구를 쓰는 것과 같다.

나는 먼저 설명한 것을1784) 한 번 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도움이나 도구가 없어도 사업을 친히 하시거나 천사들을 시켜서 하실 수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방편으로 삼아 일하시는 편을 택하신다.

이런 방편으로 우선 우리에게 대한 관심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을 택하여 세상에서 그의 사자가 되게 하시며(고후 5:20 참조) 그의 비밀한 뜻을 해석하게 하신다. 그를 대표하게 하신다. 이것으로 우리를 그의 성전이라고 부르시는 것이(고전 3:16-17, 6:19, 고후 6:16)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신다.

사람들의 입들 통해서 마치 성소에서 말씀하시는 것같이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시기 때문이다.1785)

또 이것은 겸손을 위한 가장 훌륭하고 유익한 훈련이 된다. 우리와 같거나, 때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가 말씀에 복종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즉시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다해 경건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가 그의 능력의 임재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렇게 위대한 위엄을 보고 놀라지 않을 것인가? 누가 그 끝없는 광채에 당황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흙에서 나온 보잘것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그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없을지라도 그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겨 배우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을 가장 잘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늘 지혜의 보화를 약한 질그릇에 숨기신 것은(고후 4:7) 우리가 얼마나 그 보화를 귀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려는 의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서로 합하여서 사랑을 보다 올바르게 양육하는 한 끈이 있다. 그것은 곧 한 사람이 목사로 임명되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제자가 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한 입에서 공통된 교훈을 받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만으로 만족해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이렇게 인간이 교만하다) 서로가 남을 멸시하며 또 멸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교회를 한 끈으로 묶으시고 이것이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힘 있는 수단이라고 미리 알고 계셨다. 그래서 구원과 영생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그들의 손을 거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하셨다. 이 점을 숙지하면서 바울은 에베소서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4-7)라고 기록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말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8,10-16).

2. 교회를 위한 성직의 의의

바울은 사람의 목회는 신자들을 결속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이라는 말로 사람의 목회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울은 교회를 손상 없이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교회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만드신 안전 대책으로 교회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바울은 말한다(엡 4:10). 이 일이 실현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 직책을 목회자들에게 위임하시고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통해서 선물을 교회에 분배하시며, 그는 이 제도 안에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스스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이심으로써 그 제도가 허망한 것이나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 성도들의 갱신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세워지며(엡 4:12), 이렇게 우리는 범사에 머리이신 그에게까지 자라여(엡 4:15 참조) 서로 함께 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사이에서 예언 활동이 활발하고 사도들을 영접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교리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행함으로써 우리는 모두그리스도의 연합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이 질서와 이런 교회 정치를 폐지시키려고 하든지 또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교회를 파멸시키며 파괴하려고 힘쓰는 사람이다.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빛과 열이 또 음식이 필요하지만, 지상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및 목회적 직분이 더욱 더 필요하다.

3. 복음 선포의 직책은 특히 풍요하다

위에서1786)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직제도를 옳게 보시고 온갖 가능한 방법으로 그 위엄을 칭찬하시는데, 이는 성직이 우리 사이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으며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교사들을 세우신 것은 그들에 대한 특별한 은혜라고 증언하신다. 예언자에게 명령 하셔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외치게 하시며(사 52:7), 사도들을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신다(마 5:13-14).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찬사로,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눅 10:15).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이 문제를 마치 고의로 논의하듯이 했을 때 기록한 구절이 가장 확실하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성령과 의와 영생을 제공하는 일이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한다(고후 4:6, 3:9). 이 구절들과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의 뜻은 성직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다스리며 유지하는 방식, 곧 주께서 영원히 제정하신 이 방식이 우리들의 무시와 멸시 때문에 폐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직이 확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뿐만 아니라 실례로 공포하신다.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더욱 풍부하게 비추려고 하셨을 때,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내어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셨다(행 10:3-6). 바울을 불러 자신을 알게 하시며 교회에 접붙이고자 하셨을 때, 친히 그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그를 사람에게 보내어 그 사람에게서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의한 성결을 받게 하셨다(행 9 :6). 하나님의 대변자인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발표하지 않고 그렇게 할 사람을 부르도록 명령하신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자들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람에게 맡겨 배우게 하시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이 바울을 셋째 하늘로 이끌어 가 말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만하게 만드시기로 이미 정하셨다(고후 12:2-4) 그러면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이런 증거로 그 유용성을 증명하신 성직을 멸시하거나 또는 무용지물이라고 해서 폐지할 것인가?

(성경에 있는 직분들을 설명한다. 4-9)

4. 에베소서 4장에 있는 여러 가지 직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정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첫째로 사도, 다음은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끝으로 교사라고 부른다(엡 4:11). 이중에서 끝에 있는 둘만이 교회 내의 평상직이요, 처음 것은 주께서 그의 나라의 초창기에 세우셨고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시키신다.

사도들이 하는 일의 성격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막 16:15) 명령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사도들에게는 아무 제한도 두지 않으시고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고 하셨는데, 이는 각 국민 사이에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증명하기위해서, 자기는 어느 한 도시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여기 저기 전파하였고 다른 사람이 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고 주의 이름을 듣지 못한 곳에 교회들을 세웠노라고 한다(롬 15:19-20). 그러므로 사도들이 파견된 목적은 반역하는 세상을 돌이켜 하나님께 올바르게 복종하게 만들며 복음을 전해서 세계 각지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세계에 그 터를 닦아 두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전 3:10).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엡 4:11). 이러한 자는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도들보다는 지위가 낮지만 그들 다음에 있으면서 그들을 대신해서 활동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디모데, 디도 및 그 외의 비슷한 사람들이 전도자였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 다음 두 번째로 임명하신 70인의 제자들도 아마 전도자들이었을 것이다(눅 10:1).

이렇게 해석한다면(이 해석은 바울의 말과 의견에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이 세 가지 직책은 교회 내의 항구직으로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 세우거나 교회를 모세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 한 당시에 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주께서 그 후에 간혹 사도들을, 적어도 그들 대신에 전도자들을 일으키신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1787)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돌이키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직책이 바르게 조직된 교회 내에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임시직"이라고 부른다.

다음이 목사와 교사로 교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직책들이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점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교사들은 제자 훈련이나 성례 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하는 일을 맡지 않고 성경을 해석하는 일만을 맡았다. 이는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1788) 목사직은 이 모든 의무를 겸한다.

5. 임시직과 항존직

우리는 이제 교회 조직에서 어떤 것이 임시직이며 어떤 것이 항존직으로 제정되었는가를 생각하겠다. 전도자와 사도를 한 덩어리로 뭉친다면 우리는 상응하는 두 쌍을 볼 수 있다. 현대의 교사들은 고대의 선지자에 그리고 목사는 사도에 해당한다. 선지자의 직분은 그 탁월한 특수 계시의 은혜 때문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나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 매우 비슷하며 그 목적이 똑같다. 그래서 새로운 복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할 목적으로 주께서 택하신 열두 제자들은 가장 높은 서열에 있었다(눅 6:13, 갈 1:1). 그런데 "사도"라는 말은 원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사역자들은 주께서 자기의 사자로서 파견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듣지 못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세상이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열두 제자에게(후에 바울이 첨가된 그들에게) 특별한 칭호를 주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바울은 다른 장소에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이 명칭을 적용하고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던" 사람들이라고 했다(롬 16:7). 그러나 그가 엄밀히 구분해서 말하고 싶을 때에는 처음 등급에만 이 말을 적용한다. 또 이것이 성경의 일반 용법이다(마 10:1). 그러나 목사들은(각각 그에게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사도들과 똑 같은 책임을 맡았다. 이제 그 책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더 분명하게 듣기로 하자.

6. 사도들과 목사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셨을 때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1789) 복음을 전파하며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죄 사함을 얻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그러나 주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자기를 본받아 그의 몸과 피의 거룩한 상징인 떡과 잔을 분배하라고 명령하셨다(눅 22:19,20). 여기서 사도의 자리에 앉는 사람들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법이 부여되었고, 이 법에 의해서 그들은 복음을 선포하며 성례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사도를 사칭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목사들은 어떤가? 바울은 자기뿐만 아니라 그들 전체에 대해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한다(고전 4: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감독은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다"(딛 1:9)고 말한다. 이 구절들과 흔하게 자주 나타나는 비슷한 구절들을 보아서, 우리는 목사의 직분에는 복음을 전하며 성례를 집례 한다는 두 가지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가르치는 방법은 공개적인 강론만이 아니라 각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가르칠 수도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을(행 20:20-21) 그들도 안다고 말하였고, 조금 뒤에 자기는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했다(행 20:31). 그러나 나는 지금 선한 목사의 은사를 자세히 알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목사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보이려는 것뿐이다. 즉, 그들이 교회 위에 임명된 것은 무위도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사람들에게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며 거룩한 성례를 집례하고 올바른 치리를 유지하며 실시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임명된 모든 사람을 향하여 주께서는 만일 그들의 태만으로 인해서 또 어떤 사람이 무지 때문에 멸망한다면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겔 3:17) 선포하신다. 바울이 자신에 관해서 한 말은 그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6-17). 끝으로, 사도들이 전세계를 위해서 한 일을 목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양떼를 위해서 해야 한다.

7. 목사는 자기 교회에 매여 있다

우리는 목사를 각각 그 교회에 파송하지만, 동시에 한 교회에 매여 있는 목사가 다른 교회를 돕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분란이 생겨서 그가 있어야 한다든지 어떤 애매모호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조언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질서가 필요하다. 즉, 목사는 각각 모든 일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일정한 임지나 목적이 없이 돌아다니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보다 목사 자신들의 이익을 생각해서 마음대로 교회를 버리고 함부로 한 곳에 모이는 것은 혼란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사는 각각 자기의 한계로만족하며 다른 사람의 영역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이 결정을 될 수 있는 대로 전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일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에 세운 교회들에 각각 처음으로 장로들을 임명했고(행 14:22-23) 또 바울은 디도에게 명해서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게 했다(딛 1:5).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에 대해서(빌 1:1) 또 골로새 교회의 감독 아킵보에 대해서(골 4:17) 말한다. 그리고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주목할 만한 설교를 기록했다(행 20:18-19).

그러므로 교회를 다스리며 돌보는 일을 담임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이 법에 자기가 구속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법률가들의 말과 같이) 교회 소유지에1790) 매이지 않았다. 즉, 꽁꽁 묶여 그 땅에 매여 있어서 공공의 복리가 요구하는 때에도 그리고 그 요구가 정당한 방법과 순서를 밟아 온 때에도 그 땅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 곳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자기에게 유리하다고 해서) 그곳을 떠나거나 그곳에서 놓이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유익하다 할 때에도 자기의 사사롭게 개인적인 결정으로 할 것이 아니라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한다.

8. 말씀을 전하는 직분 : 장로

내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 "장로", "목사" 또는 "사역자"라고 부른 것은 성경이 이 말들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이다.1791)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모두 "감독"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디도에게 각 도시에 장로들을 임명하라고(딛 1:5) 명령한 직후에, "감독은‥‥‥책망할 것이 없고"라고 한다(딛 1:7, 딤전 3:1참조). 다른 데서는 한 교회에 있는 여러 감독에게 문안하였다(빌 1:1). 사도행전에는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이야기한 기사가 있는데(행 20:17), 그는 그들을 "감독"이라고 부른다(행 20:28).

지금까지는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만을 생각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야 하겠다. 우리가 인용한 에베소서 4장에서(엡 4:11)1792) 바울은 다른 직분들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와(롬 12:7-8) 고린도전서에서(고전 12:28)는 다른 직분들을 능력, 병 고치는 은사, 통역, 다스리는 것, 구제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가운데서 두 가지는 일시적인 것이며 길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하겠다. 그러나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

다스리는 사람들은(고전 12 :28)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다고 나는 믿는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롬 12:8) 달리 해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근엄하고 거룩한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잘못을 시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1793) 말하겠다. 그런데 이런 직분이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경험상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직분은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9. 집사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롬 12: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바울은 처음 문장에서 구제 물자를 나누어주는 집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둘째 문장은 빈민과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과부들도 두 번째에 속하였다(딤전 5:9-10). 여자들이 맡을 수 있는 공적 직분은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뿐이었다. 이 해석을 인정한다면(또 인정해야 한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교회를 위해서 구제 사업을 관리하는 집사들과 직접 빈민들을 돌보는 집사들이다.(섬기는 일:집사직)라는 말에는 더 넓은 의미가 있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빈민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맡긴 사람들이다. 그들의 기원과 임명과 직분에 대해서는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했다(행 6:3).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은 매일 구제에서 제외된다는 소문을 터뜨렸기 때문에, 사도들은 자기들은 말씀 전하는 일과 공궤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직한 사람 일곱 명을 선택해서 이 일을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부탁했다1794)(행 6:1이하).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회에는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고 우리도 그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과 안수. 10-16)

10. 소명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어야 한다

성회에서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지만(고전 14:40) 질서가 가장 잘 지켜져야 할 때는 교회 정치를 확립할 때이다. 여기서는 무슨 일을 불규칙하게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썽을 일으켜 떠드는 사람들이 가르치는 일이나 다스리는 일을 경솔하게 맡지 못하게 하려고(주의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소명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의 공적 직분을 맡지 못하도록 특별히 주의했다. 진정한 사역자로 인정되려면 먼저 합당한 방법으로 소명을 받아야 하고(히 5:4), 다음에 이 소명에 응해야 한다. 즉, 명령을 받은 일은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바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사도직을 주장하려고 할 때에는 거의 언제나 자기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과 자기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암시한다(롬 1:1, 고전 1:1). 그리스도의 이 위대한 일꾼도 자기가 주의 명령으로 사도직에 임명됐다는 것과 위임된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교회에서 발언할 권위를 감히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이 이런 영예를 가지겠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이 직분 완수의 필요성에 관해잠깐 언급했으므로 지금은 소명만을 논하겠다.

11.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

이 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네 가지 점을 이해해야 한다. ⑴ 어떤 종류의 사역자가 될 건인가? ⑵ 어떻게 ⑶ 누구에 의해서 임명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⑷ 임명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련된 외형적인 엄숙한 소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비밀한 소명은1795)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 일꾼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아는 일이며, 교회는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제공된 직책을 받는 것은 야심이나 탐욕이나 그 밖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소원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의 속마음이 더 잘 증거한다.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의 인정을 얻으려면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런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비록 깨끗지 못한 양심으로 이 직분에 임하는 사람도 그의 사악한 심사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교회 앞에서 합당하게 부르심을 받는다. 또한 사람들은 평신도에 대해서 그들이 성직에 적당하고 유능하리라고 생각할 때에는 흔히 소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좋은 목사의 경건을 겸한 학식과 그 밖의 은사는 확실히 이 직분을 위한 일종의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런 높은 자리에 예정하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셔서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임직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이 여러 가지 직책을 논할 때, 각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특히 가져야 할 은사를 먼저 열거했다(고전 12:7-11).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제목 중의 첫째이므로 이제부터 그것을 논하고자 한다.

12. 누가 어떻게 사역자가 될 수 있는가

바울은 두 구절에서(딛 1:7, 딤전 3:1-7) 어떤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충분히 논한다. 요약하면, 건전한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그들의 권위를 빼앗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만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다(딤전 3:2-3, 딛 1:7-8). 집사와 장로들에 대해서도 같은 요구를 한다(딤전 3:8-13). 우리는 항상 그들이 맡은 직무에 합당하고 충분하도록, 즉, 그 직분 수행에 필요한 기능을 알고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주셨다(눅 21:15, 24:49, 막 16:15-18, 행 1:8). 그리고 바울은 선하고 진정한 감독을 그려 보인 다음에,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를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디모데에게 충고한다(딤전 5:22).

내가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선택하는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때에 갖추어야 할 종교적 경외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가는 신자들이 장로를 세웠을 때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했다(행 14:23 기타) 그들은 무엇보다도 엄숙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반드시 최고의 경의와 주의를 가지고 그 일을 시도했다. 그러나 특히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분별의 영을 하나님에게 간구했다(참조, 사 11:2).

13. 누가 사역자들을 택할 것인가

우리가 논할 셋째 점은 어느 누가 사역자들을 선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도들의 소명은 다른 것들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확실한 표준 이 될 수 없다. 사도직은 특별한 직분이었고 그 자리를 더욱 현저한 표식으로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도가 될 사람들을 친히 주의 입으로 임명하실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의 명령만으로 임명되어 임무 수행에 나섰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유다의 후임자를 구했을 때에도 감히 한 사람을 확정하지 않고 두 사람을 내세워서 주께서 제비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결정하시게 했다(행 1:23-26). 바울이 자기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자라고 한 말도(갈 1:1,12 참조)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람으로 말미암은"이라는 첫 말씀은 모든 말씀 선포자들과 공통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이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말씀은 바울에게 독특하고 또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점을 자랑한 것은 합법적인 목사가 가질 것을 가졌다는 자랑뿐만이 아니라 사도직을 표시하는 휘장까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는 바울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위해서, 그는 보통 제자이고 처음 사도들만이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가 암암리에 공격을 받는 것을 알고는 그의 전도의 위엄을 보호하기 위해서 부득이 자기는 모든 점에서 다른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자기는 보통 감독같이 사람들의 결정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입과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으로 선택되었다고 언명했다.

14. 사람을 통해서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이 감독을 임명하는 것이 합법적 소명과 모든 점에서 조화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는 이 관습을 증명하는 구절이 많다. 방금 인용한 바울의 말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도 이 관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평상시에 사역자를 선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도들에게 특유한 점이 자기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특권을 행사하셔서 바울도 임명하셨지만 동시에 교회를 통한 소명이라는 규율을 이용하셨다.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행 13:2). 성령께서 자신의 선택을 확인하신 후에 이렇게 따로 세우며 안수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자들을 임명한다는 교회 규율을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언급하신 후에 교회가 그를 지명하게 하심으로써 가장 명백한 실례로 이런 질서를 시인하셨다. 맛디아를 선택했을 때에도(행 1:23)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사도직은 심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한 사람을 사도로 선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세워서 그 중 한 사람이 제비로 뽑히게 했다. 이와 같이, 이 선택은 하늘의 명확한 확인을 얻었지만 조금도 교회 질서를 무시하지 않았다.

15. 평신도의 투표

사역자를 선택하는 것은 교회 전체인가,1796) 또는 그의 동료들과 도덕적 책망을 맡은 장로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의 권위로 임명되는가 하고 혹자는 사역자 임명에 대하여 물을 것이다.

이 권위를 한 사람에게 주어야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딛 1:5). 디모데에게도 비슷한 말을 한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 5:22).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와 그레데에 있는 디도가 교회를 다스릴 때에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속은 것이다. 디모데와 디도가 다른 사람들 위에 있은 것은 건전하고 좋은 충고를 하려는 것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증거를 위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나는 비슷한 예를 들어 나의 주장을 밝히겠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각 교회에 장로를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방법에 대해서 투표를 했다고, 즉,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1797) 라고 기록했다(행 14:23). 그러므로 이 두 사도는 장로들을 "택했다"고 하지만 당시의 헬라 사람들의 선거 풍속에 따라 교회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로마의 역사가들도 어떤 집정관이 민회를 열고 새로 치안관들을 "택했다"고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투표를 받으며 선거를 주관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분명히 바울은 자기의 권리라고 주장한 것보다 저 큰 권리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허락했을 리가 없다. 바울은 항상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감독들을 "택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은 교회 전체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감독을 선정하며 공중의 결정과 증언에 의해서 감독이 적임자임을 증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서 유래한 일이라고 한 키프리아누스의 주장은 옳은 말이다. 사실 레위족의 제사장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성별하기 전에 온 백성 앞에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레 8:4-6, 민 20:26-27). 맛디아를 사도로 보선한 것도 같은 방법이었고(행 1:15이하) 일곱 집사도 신자들이 보고 찬성하는 가운데서 임명했다(행 6:2-7).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이런 예들을 보더라도 성직자를1798) 임명할 때에는 반드시 일반 신도들이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야만 그 임명이 모든 사람의 증거로 검토되며 공정하고 합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역자의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합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적당한 듯한 사람들을 일반신도의 합의와 승인을 얻어서 임명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선거는 다른 목사들이 주관해야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만 회중이 경박함과 악한 의도나 무질서 때문에 탈선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6. 임명

우리가 소명의 마지막 점이라고 한 임명식이 아직 남아 있다. 사도들이 사역자를 임명했을 때에 안수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의식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이 관습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성별 받기를 원할 때 그 위에 손을 얹음으로써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려고 할 때에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창 40:14). 우리 주께서 어린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에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마 19:15). 유대인들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제물에 안수한 것도(민 8:12, 27:23, 레 1:4, 3:2,8,13, 4:4,15,24,29,33 기타) 같은 뜻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안수함으로써 그들이 사역자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눈에 보이는 은사를 신자들에게 베풀 때에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행 19:6). 여하간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를 임명할 때마다 사용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목사와 교사와 집사들을 성별했다.

안수에 대해서는 일정한 가르침이 없지만 사도들이 항상 이 방법을 쓴 것을 보아서, 이 방식을 엄밀히 지키는 것이 곧 가르침을 대신할 것이다. 확실히 이 의식은 직분의 위엄을 교회에 알리는 징표로서 유용한 동시에, 임명을 받는 사람에게 대해서도 앞으로는 그가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한 매인 몸이라는 것을 경고한다. 그뿐 아니라, 안수의 진정한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면 그것은 허무한 표징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어떤 것도 이유 없이 교회 내에 세우시지 않는다면 이 의식도 하나님에게서 유래한 것이므로, 미신적으로 악용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무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회중 전체가 사역자에게 안수한 것이 아니고 목사들만이 안수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항상 여러 목사가 안수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곱 집사들과 바울과 바나바와 몇몇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여럿이 안수한 것이 분명하다(행 6:6, 13:3). 그러나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럿이 아니라 자기가 디모데에게 직접 안수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말한다(딤후 1:6). 바울이 장로회의 안수에 대해서 디모데전서에서1799)(딤전 4:14) 한 말을 나는 장로들이 안수했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임명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장로로 임명했을 때에 안수에 의해서 그대가 받은 은혜가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

제 4 장  고대의 교회상태, 교황제도 이전의 교회정치1800)

(사역의 역사적 발전 : 사역자의 세 부류 : 가르치며 다스리는 장로들, 그 중에서 선택된 한 사람의 감독, 대감독. 1-4)

1. 고대 교회는 성경에 있는 원형에 충실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논한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우리들에게까지 전해 온 교회 정치 질서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이다.1801) 이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고 진지하게 만들며 더욱 잘 기억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금부터 고대 교회의 특색을 고찰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고대 교회의 특색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 볼 수 있다. 당시의 감독들은 여러 가지 교회법을 발표해서 성경에 없는 뜻까지 표현한 듯이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있는 독특한 형태와 일치하도록 세밀하게 주의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결정에는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혹 그들의 처리에 부족한 점도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을 보존하기 위해선 진지하게 노력했고 또 그렇게 잘못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들이 무엇을 지켰는가를 간단하게 확인하는 것은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는 세 부류의 사역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교회의 사역자들도 세 부류로 나뉘었다. 장로 계열에서 ⑴ 일부는 목사와 교사로 선택되고 ⑵ 나머지 장로들에게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책망하고 지도하는 일을 맡겼으며 ⑶ 빈민을 돌보고 구제 물자를 분배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독경사와 시제는 아직 정확한 직분을 표시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을 "성직자"라고 부르며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일정한 일을 시켜 자기들의 임무를 잘 이해하도록 훈련시켰는데, 이것은 적당한 때가 오면 곧 직분을 맡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후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다.1802)

그러므로 제롬은 다섯 가지 교회 계급을 말하고, 그것을 감독, 장로, 집사, 신자, 학습 교인(catechumen)이라고 했다. 그 밖의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에게는 특별한 지위를 주지 않았다.1803)

2. 감독의 지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을 모두 "장로"라고 불렀다. 각 도시에서는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지위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불화를 막으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감독에게 훨씬 더 많은 영예와 위엄을 가지고 있어서 동료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독은 원로원에서 집정관이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즉, 사무에 대한 보고를 하고 의견을 물으며 의견을 말하고 충고하며 권고함으로써 모임의 의장이 되며, 모든 행사를 그의 권위로 주관하고 회의 결정 사항을 심사하는 등, 집정관이 한 일들을 감독이 장로회에서 집행하였다.

고대 사람들 자신은 이 제도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사람들의 합의로 시작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제롬은 디도서 주해에서 말한다. "감독과 장로는 꼭 같다. 마귀의 유혹으로 교회에 불화가 생기고 사람들이 나는 바울 파다, 나는 게바파라 하기 전에는(고전 1:12, 3:4 참조) 장로들의 협의로 교회를 운영했다." 그 이후에 불화의 씨를 없애기 위해서 감독권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교회의 관습에 따라 주관하는 사람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와 같이 감독들도 자기들이 장로들보다 높다는 것은 주께서 정하신 일이 아니라 교회의 관습에 의한 것이며, 장로들의 협력을 얻어서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1804) 그러나 제롬은 다른 곳에서, 이 제도는 매우 오랜 것이라고 한다. 즉,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복음서 저자 마가의 시대에서부터 헤라클라스와 디오니시우스의 시대까지 장로들은 항상 동료 한 사람을 뽑아서 더 높은 지위에 앉히고 "감독"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805)

그때에는 각 도시에 장로회가 있었으며 그 장로회는 목사와 교사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권고하며 징계하는 직무를 이행했다. 이것은 바울이 감독들에게 명령한 일들이다(딛 1:9). 또 그들은 후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거룩한 단체에 들어온 청년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각 도시에는 일정한 지역이 할당되어, 그 지역 내에서 장로들을 뽑으며 그 지역을 교회의 몸의 일부로 생각했다. 장로회는 교회의 조직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한 감독 아래에 있었다. 감독은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위엄을 가졌지만 동시에 형제들의 회의된 안건에는 복종했다. 그러나 감독이 맡은 지역이 너무 넓어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없는 곳이 있을 때에는 장로들을 그런 지역에 배치해서 작은 일들을 대신 처리하게 했으며, 이들은 지방 전체의 감독을 대표했기 때문에 이런 장로들을 "지방 감독"1806) 이라고 불렀다.

3. 감독과 장로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하는 직분에 대해서 본다면,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을 전파하며 성례전을 시행하는 데 전력을 다하여야 했다.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 것은(아리우스가 교회를 소란하게 만든 후) 알렉산드리아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삼부사(Tripartite History)의 제 9 권에서 말한 바와 같고,1807) 제롬은 이 사실에 대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1808)

확실히 진정한 감독임을 실제로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 감독을 자칭한다면 이상한 일로 인정됐을 것이다. 고대 사람들은 엄격해서, 사역자들은 모두 주께서 요구하신 직분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한 시대의 관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미 고대 교회의 순수성이 많이 부패해서 교회가 거의 붕괴되었지만 그래도 감독이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에게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죽은 것이다. 설교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니지 않는 감독은 숨은 심판자의 진노를 자기 위에 내리게 한다." 또 다른 곳에서도 말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깨끗하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행 20:26), 우리 자신에게 죄악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시키는 감독이라 불리우는 우리는 바울의 말에 의해서 유죄로 선고되고 강압을 느끼며 유죄가 증명된다. 매일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미지근하고 잠잠한 우리는 그들을 죽이는 자들이다."1809) 그는 자기나 다른 감독들이 일에 대한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묵묵하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직분을 절반 완수한 감독들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며,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건전한 교리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감독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는 것은 교회의 오랜 원칙이었다.

4. 대감독과 총대감독

각 지방마다 대감독 한 사람이 있었으며, 니케아 회의에서 총대감독 이 대감독보다 지위나 위엄이 더 높다고 결정한 것은1810) 규율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극히 드문 관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위는 어떤 교회 내의 문제가 몇 사람으로서는 해결될 수 없을 때에 그 지방의 교회 회의에 맡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창설된 것이다. 만일 문제가 크거나 어려워서 더 광범한 토의가 필요한 때에는 교회 회의와 함께 총대감독들을 소집했고, 이 외에는 교회 전체의 총회에 상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조직된 것을 교권 제도(hierarchy)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 말을 부적당하다고 보며 또한 이 말은 분명히 성경에 없는 말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정치에 관한 문제에 관한 한1811) 사람들이 주권이나 지배를 꿈꾸지 않도록 조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용어를 등한시하고 사실 자체를 볼 때에, 우리는 고대 감독들에게 하나님이 그 말씀에서 정해 두신 것과 다른 어떤 교회 통치 형식을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사와 부감독 : 재산과 구제 물자의 관리 : 하부 성직자. 5-9)

5. 집사의 직분

당시의 집사직은 사도 시대와 성격이 같았다.1812) 그들은 매일 신자들이 바치는 예물과 매년 교회에 들어오는 수입을 받아들여서 적당하게 쓰는 일을 맡았다. 즉, 감독이 결정한대로 사역자들과 빈민들의 생활비로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년 그 분배 상황을 감독에게 보고했다. 교회법이 어디서나 감독을 교회의 모든 재산의 관리인으로 지정했다는 사실은 감독이 직접 그 일을 처리했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공적 원조를 받을 사람들을 집사에게 지정하며 남는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 또 얼마씩 주라고 지시하는 것이 감독의 책임이었다. 그는 집사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지를 조사해야 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정했다고 하는 교회법에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감독에게 교회의 일을 관할하는 권한이 있다고 선포한다. 사람들의 영혼이(이것은 더욱 귀중한 것이다) 감독에게 위탁되었다면 그가 재산 관리에 관계하는 것은 더욱 적당하다. 그의 권위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장로들과 집사들을 통하여 빈민에게 분배되며, 두려움과 주의 깊게 처리되어야 한다"1813) 그리고 안디옥 회의에서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모르게 교회 일을 처리하는 감독들을 억제하도록 결정했다.1814)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더 이상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그레고리우스의 여러 서한을 보면, 당시의 다른 교회법들은 효력을 잃은 것이 많았지만 집사가 감독의 지도아래에서 빈민들을 돌본다는 규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처음에는 빈민 구제 사업을 돕는 부집사(sub-deacon)가 있어서 집사들 밑에 있은 듯하나 이 구별은 점점 불투명해졌다. 그뿐 아니라 부감독(archdeacon)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제롬은 그의 시대에 이미 부감독이 있었다고 하지만1815) 그들이 생긴 것은 교회 재산이 많이 늘어나서 보다 정확한 새로운 관리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부감독들은 교회의 수입과 재산과 설비 그리고 매일의 헌물을 전부 책임저 맡아보았다. 따라서 그레고리우스는 살로나의 부감독에 대해서, 만일 누가 태만하거나 속이기 때문에 교회 물품이 하나라도 없어진다면 그의 죄로 인정될 것이라고 엄명했다.1816) 그러나 부감독들은 신자들에게 복음을 읽어 주는 일과 기도에 대한 권고를 하는 일도 맡았으며, 성만찬에서 잔을 내어 주는 직분도 가졌었다.1817) 이런 일들은 그들의 지위를 높이는 의미로 지정된 것이며, 그들이 더욱 양심적으로 직분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직무란 것이 이런 여러 가지 표징으로 알려졌다.

6. 교회 재산의 운용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교회 재산이 어떻게 사용되며 어떻게 분배되었는가를 판단할 수 있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나 돈은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고 하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 저술에서 자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을 향해서, 그들은 자기 소유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행위를 한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나눠줘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 있는 것같이 최대의 두려움과 공경으로 치우침이 없이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크리소스톰과 암브로시우스, 어거스틴 및 그 외에 그들과 같은 감독들이 엄숙한 항의를 하면서, 자기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직했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공적인 경비로 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은 올바른 일이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서도 인정된 일이다(고전 9:14, 갈 6:6). 또 고대의 어떤 장로들은 자기의 유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스스로 빈민이 되었다. 따라서 사역자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도록 그리고 빈민들도 무시되지 않도록 분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검소한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역자들이 사치하고 방종한 생활을 할 정도로 많이 받지 말고 꼭 필요한 정도로만 받도록 규정했다. 부모의 재산으로 생활할 수 있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제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그들이 빈민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는다면 그것은 모독 행위가 될 것이며, 그렇게 남용하는 것은 곧 자기들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고전 11:29).1818)

7. 수입을 넷으로 나누었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일은 처음에는 무보수로 또 자발적으로 맡았었다. 감독과 집사들은 자유의사로 충실했으며 그들의 고결한 양심과 순결한 생활이 법을 대신했다.1819) 그러나 일부 사람들의 탐욕과 악행으로 인해서 악한 선례가 생겼기 때문에, 이런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교회법을 제정하여 교회 수입을 네 부분으로 나누게 했다. 성직자들과 빈민들과 교회 건물들의 수리를 위해서 그리고 넷째로는 타지방과 본지방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각각 한 몫을 마련했다.

어떤 교회법에서는 이 넷째 부분을 감독에게 맡겼지만 이것은 내가 말한 구분법과 다르지 않다. 감독에게 맡겼다고 하더라도 감독의 개인 수입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혼자서 쓴다든지 마음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감독들에게 요구한 것과 같이(딤전 3:2) 손님을 접대하는 데 넉넉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겔라시우스와 그레고리우스도 이렇게 해석한다. 겔라시우스는 감독들이 비용을 요구한 것은 포로와 나그네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는 더욱 분명히 말한다. 사도 교구의 관습은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에게 모든 수입을 사분 할 것을 명령한다. 즉, 한 부분은 감독과 그의 가족에게 손님 접대와 생활 유지를 위해서 돌리고, 한 부분은 성직자들에게 또 한 부분은 빈민에게 그리고 넷째 부분은 교회 수리에 돌린다.1820) 그러므로 감독은 검소한 보통 정도의 의식에 넉넉한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요구할 수가 없었다. 만일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을 하는 감독이 있으면 즉시 동료들의 책망을 받았고, 복종하지 않으면 그 지위를 빼앗겼다.

8. 교회 재산을 빈민들에게 분배했다

처음에는 교회 성물을 장식하는 데 비용을 아주 적게 들였으며, 나중에 교회가 점점 풍부하게 됐을 때에도 이 점에서는 여전히 절제했다. 교회에 기부가 들어오면 빈민을 위해서 그대로 고스란히 보관해 두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지방에 기근이 들어 달리 구제 방법이 없었을 때에 키릴루스는 교회의 기물과 예복들을 팔아서 그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 아미다의 감독 아카키우스도 무수한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사 직전에 있을 때 자기 교회의 성직자들을 모아 놓고 이 유명한 연설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잡수시거나 마시지 않으시므로 접시나 잔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기물을 녹여 그 가련한 사람들을 위해서 식량을 사며 몸값을 치르게 했다.1821) 제롬도 교회들이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공격하면서 당시의 툴루즈의 감독 엑수페리우스를 칭찬했다. 이 감독은 주의 몸을 버들가지 바구니에 담고 주의 피를 유리그릇에 담으면서도 빈민은 한 사람도 굶기지 않았다고 했다.1822) 내가 아카키우스에 대해서 한 이야기를 암브로시우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 포로들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서 그가 교회의 거룩한 기물을 깨뜨렸다고 해서 아리우스파가 비난했을 때 그는 훌륭한 변명을 했다.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금을 가지지 말라고 하신 분은 교회를 모으실 때에도 금을 취하시지 않았다. 교회가 금을 가진 것은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값을 치르기 위해서, 곤란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무엇인가? 앗수르 사람들이 주의 성전에서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실어 갔는지를(왕하 18:15-16) 우리는 모르는가? 모독적인 적국이 가져가기보다는 빈민 구제를 위해서 제사장이 금은을 녹이는 편이 다른 방법이 없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왜 저렇게 많은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버려두었느냐? 네게는 그들을 살리기에 넉넉한 금이 있었다. 왜 저렇게 많은 포로들이 끌려가는데 한 사람도 도로 사지 않았느냐? 왜 저렇게 많은 포로가 적에게 죽었느냐? 너는 쇠그릇보다 살아 있는 사람 그릇을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대들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하나님의 성전에 장식물이 없을까 염려했습니다.'라고 할 것인가? 주께서는 대답하실 것이다. 성례에는 금이 필요 없다. 금으로 사지 않은 것은 금을 기뻐하지 않는다. 성례의 장식은 포로들을 도로 사는 것이다." 요컨대, 암브로시우스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을 우리는 대단히 옳은 말이라고 본다. "그 때의 교회 소유는 모두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뜻으로, "감독이 가진 것은 모두 빈민의 것이었다"1823)라고 하였다.

9. 직분들의 준비 단계

지금까지 열거한 것이 고대 교회의 직무들이었다. 이 외에 교회 저술가들이 언급한 것에는 분명한 직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훈련과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를 위한 묘목판을 남겨 두기 위해서 부모의 허락과 인정을 얻어 소년들을 영적 군대에 모집하여 보호하며 교육했다. 어렸을 때부터 소년들을 훈련시켜서 직분을 맡게 될 때에 무식하거나 미숙하지 않도록 했다. 이 예비 훈련을 받는 청년들을 다 성직자(clerics)라고 불렀는데, 더 적당한 이름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 전체를 성직자(clergy), 즉, 주의 상속 재산이라고 부른 것을(벧전 5:3) 오해한 데서 적어도 그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도 자체는 특히 거룩하고 유익한 것이었다. 이 제도에 따라 몸을 성별하며 교회에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감독의 지도 아래에 육성했다. 그것은 또 훌륭한 예비 교육을 받은 사람들만이 교회에 봉사하게 하는 길을 확보했다. 청년들은 어려서부터 거룩한 학문을 배우며 엄격한 훈련을 쌓아 근엄하고 거룩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세상 근심을 떠나 영적인 문제와 연구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병들이 모의 전투를 통해서 진짜 전투를 배우는 것과 같이 그들은 일정한 초보부터 훈련을 받아 정식 성직자의 직분을 맡았다. 처음에는 교회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문지기"라고 불렀다. 그 후에는 "시제"라고 해서 감독의 집안일을 도우며 항상 감독을 따라 다녔다. 이것은 첫째는 주교의 명예를 위해서였고 다음에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신자들에게 점점 알려지며 신자들의 칭찬을 받는 동시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을 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장로가 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게 될 때에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강단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이와 같이 각종 훈련에서 그 부지런함을 증명하도록 단계적으로 승진되어 마침내 부집사가 되었다.1824)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런 일들은 신규 모집자들에 대한 훈련이었지 교회의 진정한 사역자로서의 직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역자의 선택 및 임명의 변천사 : 집권자들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찬성으로 감독을 선택한다. 10-15)

10. 주로 바울의 지시대로 : 평신도들의 찬성

우리는 사역자들의 소명에서 생각할 첫째 점과 둘째 점은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며 이 일을 위해서 얼마나 주의해야 되느냐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고대 교회는 이 문제에서 바울의 명령과 사도들의 전례를 따랐다. 그들이 목사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서로 모여 최대의 경외와 열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1825) 더욱이 바울이 세운 표준에 따라 선택할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을 심사하는 일종의 심사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감독에 대해서 바울이 요구한 것보다(딤전 3:2-7) 더 많은 것을 요구해서 다소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과오를 범했나. 특히 얼마가 지난 후에는 독신 생활을 요구했다.1826)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례는 바울이 정한 것과 일치했다.

셋째 점에 관해서도, 즉, 누가 사역자들을 임명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항상 한 가지 절차만을 따르지는 않았다. 고대에는 일반 신도의 찬성이 없이는 아무도 성직자 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에 문의하지 않고 아우렐리우스라는 사람을 독경사로 임명한 것에 대해서 애써 변명했다. 그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관습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논하기 시작한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직자들을 임명할 때 여러분에게 문의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재질을 함께 심사숙고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입니다."1827) 그러나 이런 사소한 임무에는 큰 위험성이 없었고 또 당사자들은 오랜 견습 생활을 하였으며 큰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의 동의를 묻지 않게 되었다.

그 후 감독직을 제외한 다른 교직에 관해서도 일반 신자는 적격자를 선택하고 임명하는 일을 감독과 장로들에게 일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단, 한 교구에 새로 장로가 임명될 때는 아마 예외였을 것인데, 그런 경우에는 그곳 주민들이 분명히 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자기들의 권리를 보유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부집사가 되는 데에도 반드시 당시의 엄격한 규율 아래서 장기간의 성직자로서의 경험이 있어야 했다. 이 계급에서 시험에 통과되면 집사가 되었고 집사로서 충실하게 행동하면 장로로 승진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이 보는 데서 다년간 시험을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승진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점을 처벌하는 교회법이 많았으므로 이 대책을 등한시하지만 않으면 나쁜 장로나 집사의 출현으로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 임명에도 반드시 시민들의 찬성이 필요했다. 이 점은 아나클레투스가 제정했다는 교회법 제 1 편 제 67 부가1828) 증명한다. 끝으로, 임명식은 매년 일정한 날에 있었다. 이것은 신자들의 찬성이 없이 몰래 기어드는 사람이나 증인이 없이 너무 쉽게 승진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1. 감독 선거에 대한 찬성 : 데오보도레트 시대까지

신자들이 자기의 감독을 선택하는 자유는 오랫동안 보존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원하지 않는 감독을 억지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안디옥 회의에서는 신자들이 반대한 사람을 임명하는 것을 금지했다.1829) 이 점에 레오 1세는 열렬하게 찬동하여 다음과 같은 말들을 했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또는 그 대다수가 요구한 사람이 선택되게 하라" 또 "모든 사람 위에 앉힐 사람은 모든 사람이 선택하게 하라. 알려지지 않고 시험해 보지 않은 사람을 임명하려면 강제로 밀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선택하고 신자들이 원한사람을 택하라. 그리고 총대감독의 결정을 얻어 지방 내의 감독들이 그를 성별하라."1830) 그뿐 아니라, 거룩한 교부들은 신도의 이 자유가 결코 축소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가 넥타리우스를 임명했을 때에 모든 성직자와 신도의 승인이 없이 취임시키는 것을 거부했다. 이 사실은 로마 종교 회의에 보낸 서한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어떤 감독이 후계자를 지명할 때에는 교인들이 확인해야만 그 지명이 효력이 있었다. 이런 예와 그 형식을 우리는 어거스틴이 에라클리우스를 지명한 때에 볼 수 있다.1831) 데오도레트는 아타나시우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베드로에 관하여 언급할 때 장로들이 그 지명을 인정했고 관리들과 지도적 시민들과 모든 교인들이 만장일치의 환호로 승인했다고 덧붙여 말했다.1832)

12. 평신도와 성직자의 균형

라오디게아 회의가 선거를 군중에게 일임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에는1833)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많은 사람이 만장일치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군중은 확신이 없으며 상반되는 이해로 서로 갈라진다"는 것이1834) 보통이다. 그러나 이 위험성에 대해서 훌륭한 대책을 강구했다. 처음에는 성직자들만이 따로 후보를 선거해서 관리들이나 원로원과 지도급 시민들에게 제시했다. 이 사람들은 심사숙고한 후에 그 선거가 바르다고 보이면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이 원하는 다른 사람을 다시 선출했다. 다음에 문제를 일반 신자들에게 제출하는데, 신자들은 이미 결정된 일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동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신자들에게서부터 시작할 때에는 그들이 특히 누구를 원하는가를 아는 것으로 그쳤다. 신자들의 소원을 들은 후에 성직자들이 선택했다.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할 수도 없었고 일반 신자들의 어리석은 소원을 성직자들이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었다. 레오는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제시한다. "시민들의 소원과 신자들의 증언과 중요 인물들의 결정과 성직자들의 선택을 얻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중요 인물들의 증언과 성직자들의 일치된 의견과 관리들과 신자들의 찬성을 따라야 한다." "다른 방법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말한다.1835) 라오디게아 회의의 결정은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이 부주의한 군중에게 끌리지 말고 필요한 때에는 그들의 지혜와 성의로 군중의 어리석은 소원을 억제하라는 뜻에 불과하다.1836)

13. 성직자들과 통치자들

이 선택 방법은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시행되었고 아마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는 그의 서한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디서나 새로 감독을 임명하는 문제가 생길 때, 그는 성직자들과 관리들과 신자들에게 관례적으로 글을 보냈다. 그 도시의 행정 제도에 따라서는 시장에게도 글을 보냈다. 교회 사정이 어지러워 인근 감독에게 선거를 조사하게 한 때에도 그는 항상 모든 사람의 서명을 받은 엄숙한 결정을 요구했다. 콘스탄티우스라는 사람이 밀라노 감독으로 선출됐을 때에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많은 밀라노 사람들이 제노아로 도망했기 때문에, 그레고리우스는 그들까지 돌아와서 회의를 열고 그 선거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합법적인 선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1837) 참으로 교황 니콜라스가 로마 교황 선거법을 이런 방식으로 확립한 후 아직 500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방식은, 우선은 추기경들이 선거하고 다음은 나머지 성직자들이 그들과 합류하고 끝으로 일반 신도의 찬성으로 선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방금 인용한 레오의 결정을 인용하면서 이 결정은 후세에 계속 유효해야 된다고 명령했다. 악한 사람들의 악의 때문에 정직한 선거를 하기 위해서 성직자들이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도 일부 신자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명령했다.1838)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황제의 직접 관할 아래에 있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두 교회에 대해서만 황제의 동의가 필요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암브로시우스에게 권한을 주어 밀라노의 감독 선거를 감시하도록 파견한 것은 시민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취한 특별한 조치였다.1839) 그러나 옛날 로마에서는 감독 지명에 대한 황제의 권위가 대단한 영향력이 있어서, 그레고리우스는 비록 자기는 엄숙한 의식으로 이미 신자들의 부름을 받았었지만 황제의 명령으로 교회 감독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1840) 그러나 당시의 관례는 다음과 같았다. 즉, 관리들과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이 누구를 지명하면 그는 곧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는 그 선거를 시인하고 확인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반대해서 취소시켰다. 그라티아누스가 수집한 교령들도 이 관례와 모순되지 않는다. 그 교령집에는 교회법에 의한 선거를 국왕이 제쳐놓고 자기의 마음대로 감독을 임명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으며 이렇게 폭력으로 추천된 감독을 대감독들이 성별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뿐이다.1841) 교회의 권리를 빼앗아 전권을 한 사람의 기분에 맡기는 것과 합법적인 선거를 국왕이나 황제가 자기의 권위로 확인하도록 이 영예를 양보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14. 임직 절차

이제 우리가 논할 것은 고대 교회에서 사역자 선거가 있은 후에 선거된 사람들을 임직시키는 의식이다. 라틴 교회는 이 의식을 서품 또는 축성이라고 불렀고 희랍 교회는 거수 또는 안수라고 불렀다.1842) "거수"는 원래 손을 들어서 하는 선거를 의미한다.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는 대감독이 지방 내의 모든 감독들과 함께 모여 선거된 사람을 임직시킨다는 내용이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길이 멀거나 건강, 기타 사정으로 모일 수 없는 감독들이 있을 때에도 적어도 세 사람은 모여야 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문서로 찬성을 증명해야 했다. 이 규정은 사용하지 않은 때도 있었지만 여러 종교 회의 후에 부활시켰다.1843) 적어도 정당한 이유가 없는 사람은 모두 모여야 했는데, 그 목적은 선출된 사람의 교리와 행실을 자세히 조사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조사를 하지 않고는 임명식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을 보더라도 당시의 감독들은 선거 후에 부르지 않고 보통 일반 선거에 임석했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사회자가 되어 군중 사이에 소란이 생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일반 신자들에게 자격자를 사제로 선택하거나 무자격자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사도적 전통을 근실히 그리고 굳게 지켜야 한다. 이것은 현재 거의 모든 지방에서 지키고 있다. 즉, 임직식을 바르게 거행할 수 있기 위해서 지방 내의 인근 감독들은 전부 지도자의 임직이 있을 신자들 앞에 모여야 하며 신자들 앞에서 감독이 선택되어야 한다.1844) 그러나 감독들이 모이는 것이 늦고 이 지체되는 것을 악용해서 선거 운동을 하는 자가 있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선거 후에 도착한 때라도 선택된 사람을 합법적으로 심사하여 승인한 후에 성별하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1845)

15. 대감독에 의한 성별

이것은 여러 곳에서 예외 없이 시행되었다. 그 후에 점차로 다른 관습이 생겼다. 선택된 사람들이 중앙 도시에 가서 임명을 받고자 했다. 여기에는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야심 때문이며 또 옛 질서가 쇠퇴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로마 교구의 권위가 높아진 후에는 다른 더 나쁜 관습이 유행했다. 이탈리아의 감독들은 거의 전부가 로마에서 성별을 받으려고 했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의 서 한들을 보면 알 수 있다.1846) 고대 권리를 유지한 것은 몇 개 도시에 불과했고 이 도시들은 쉽게 양보하지 않았는데, 밀라노가 그 예였다. 이 권리를 보유한 것은 아마 지방 중앙 도시들뿐이었을 것이다. 한 지방의 감독들이 모두 그 지방의 중심 도시에 모여서 대감독의 성별 식을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식은 안수하는 것이었다.1847)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집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감독들과 다른 장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엄숙한 회합에서는 일정한 장식을 감독들이 달았을 뿐이다. 그들은 장로와 집사들을 임명할 때에도 안수를 했을 뿐이다. 감독은 각각 자기 교회의 장로회와 함께 장로를 임명했다.1848) 모두 공동으로 행동했으나 감독이 의식을 주관하며 모든 일을 그의 주장 하에 했기 때문에 임명식도 "그의"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고대 저술가들은 장로와 감독의 차이점은 장로에게 임명의 권한이 없는 것뿐이라고 자주 언급한다.1849)

제 5 장  전체적인 교황제도가 고대교회 정치의 형태를 완전히 전복시켰다

(평신도의 투표 없이 무자격자를 임명했다. 1-3)

1. 감독직에 필요한 자격을 무시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로마 교황청과 그 모든 예속된 단체들이 지키고 있는 교회 정치 제도와 그들이 항상 말하는 성직제도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우리가 기술한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를 그들의 교회와 비교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이렇게 비교한다면 우리를 교회의 이름으로 압박하며 말살하려고 광분하는 그들의 교회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사역자가 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선 소명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 다음에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가를 고찰하겠다.

우리는 먼저 주교부터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논술의 처음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영광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이 문제를 조금만 논하더라도 그들의 수치가 크게 드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나는 현재 쓰고 있는 이 글이 어떤 것인가를 잊지 않고, 단순한 교훈이 되어야 한다는 그 한계를 넘지 않겠다.

그러나 수치심을 아직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현재 통상적으로 어떤 종류의 주교들이 선택되는가를 대답해 보기 바란다.

학식에 대하여 심사를 하던 관습은 확실히 너무도 구식이 되었다. 그러나 학식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설교를 할 줄 아는 사람보다 법정에서 변호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한다. 분명히 지난 100년 동안 거룩한 학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주교는 백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내가 그 이전 시대를 말하지 않는 것은 그때가 더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현대 교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도덕 생활을 평가한다면 고대 교회법이 무자격자라고 판단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술고래가 아니면 음행하는 자였고, 이런 죄가 없는 자는 노름꾼이나 사냥꾼이거나 또는 어딘가 생활에 허랑 방탕한 면이 있었다. 어떤 결점은 그다지 중대한 것이 아닐지라도 고대 교회법은 그런 사람을 감독직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어리석은 짓은 열 살도 되지 않은 소년을 교황의 허락으로 주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파렴치와 어리석음은 극도에 달해서, 자연적인 감정으로 보아도 불쾌한, 이 해괴망측한 죄악을 보고도 무서워 할 줄을 몰랐다. 이것을 보더라도 이런 부주의와 무관심이 있은 곳에서의 선거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1850)

2. 주교 선거의 권리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박탈했다

지금은 주교를 선거하는 권리를 평신도로부터 완전히 박탈했다. 투표, 찬성, 서명 승낙, 기타 유사한 일이 모두 없어지고 전권이 참사회 의원들에게 이전되었다. 참사회 의원들은 마음대로 주교직온 수여하고 직접 신도들에게 소개한다. 신도들에겐 그를 검토하라는 것이 아니고 받들어 모시라는 것이다.

그러나 레오는 이것은 이성이 허락하지 않으며 극악한 사기라고 규탄한다.1851) 키프리아누스는 평신도의 찬성에 의한 선거만이 하나님이 주신 권리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증거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관습은 하나님 말씀에 배치된다는 것을 밝힌다.1852) 아주 많은 종교 회의의 교령은 다른 방법을 엄중하게 금지하며, 그렇게 한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다.1853)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교황 제도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나 교회의 권리에 의한 교회법에 입각한 선거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폐해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권리를 빼앗은 사실을 누가 변명할 수 있는가? 그들은 주교 선거에서, 평신도와 관리들은 올바르고 건전한 판단력보다도 증오심과 당파심으로 움직이므로 이렇게 부패한 시대에는 문제의 해결을 소수에게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854) 분명히 이것은 개탄해야 할 상황에 있어서의 악에 대한 비상 치료책이었다. 그러나 병 자체보다 치료약이 더욱 치명적인 듯한 이때에 왜 이 새로운 폐단을 고치지 않는가? 그들은 교회법에는 선거 절차가 정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1855)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감독을 선거하기 위해 모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정해 놓은 법칙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장 신성한 법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감독의 참 모습을 그리신 말씀 한 마디가 마땅히 수만 개의 교회법보다 더 비중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장 비열한 정욕으로 부패하여 법이나 공정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법을 정하더라도 그것은 문서로서 묻혀 있을 뿐이다. 술고래나 음행자나 지독하게 상습적인 노름꾼들이 주교로 추천되어도 대개는 침묵하거나 심지어(계획적인 듯이) 승인한다. 나는 과장하지 않는다. 주교직은 간음하는 자들과 뚜쟁이들에게 대한 보수가 된다. 총사냥꾼과 매사냥꾼들이 주교가 되는 때에는 일이 아주 잘 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추행을 조금이라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잘 가르치며, 다투지 않으며 운운하는(딤전 3:1-7, 딛 1:7-9)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옛날 신자들에게는 훌륭한 법이 있었다. 그러면 왜 선거하는 책임을 신자들에게서 빼앗아 이런 자들에게 옮겼는가? 분명히 평신도들의 소란과 분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 그 책임을 평신도에게 돌리지 않고, 모든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철저한 철면피가 되어 이기적인 야심으로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제멋대로 흔동하는 자들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3. 태만한 결과로 통치자들이 간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한 구제책으로서 간섭하게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이다.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감독 선거 문제로 도시에 소동이 일어난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선거권을 시민들에게서 빼앗으려는 생각은 아무도 감히 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런 결점을 회피하며, 결점이 발생할 때에는 시정하는 다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진상은 다음과 같다.

일반 신자들이 선거에 더욱더 무관심해지기 시작하여 그 책임을 장로들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에, 장로들은 이 기회를 악용하여 전제를 하게 되고 후에 새로운 법을 발표해서 자기들의 전제를 확립했다.

그뿐 아니라, 임명식은 단지 순전한 흉내뿐이었다. 그들이 한 심사는 내용이 극히 공허하고 천박한 것이어서 장식할 외형조차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지방의 집권자들이 로마 교황과의 합의로 얻은 주교 임명권은 교회에 아무런 새로운 손실도 야기시키지 않았다.1856) 선거권을 참사회 의원들에게서 빼앗았을 뿐이기 때문이며, 참사회 의원들도 정당하게 그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도둑질한 것이었다. 참으로 추악한 예가 있었다. 경건한 군주라면 이런 부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은 궁정에서 주교를 파견해서 교회를 장악하게 했다. 일반 신자들이 원하지 않은, 적어도 자유로운 발언으로 승인하지 않은 주교를 강압적으로 떠맡긴다는 것은 교회를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내에 무질서한 관례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에 군주들에게 자기들의 주교를 내세울 구실을 주게 되었다. 군주들은 자기들보다 권리가 더 많지 않은 자들이 자기들처럼 권리를 악용하고 있을 바에는 차라리 자기들이 그 권리를 차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직록 수여에 관련된 폐해. 4-7)

4. 사제와 부제를 임명하는 데 관한 폐해

이런 고상한 소명을 근거로 주교들은 자신들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제들을 임명하는 권리가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1857) 이것은 고대의 제도를 부패시키는 심히 사악한 행위인데, 그것은 그들이 임명하는 자는 신자들을 인도하고 양육할 장로들이 아닌 제사를 드리는 사제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제를 임명할 때 그 부제들에게 진정한 직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 즉, 성작과 성반에 관한 의식만을 시킨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칼케돈 회의(451)에서는 목회 의무가 없는 임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즉, 임명된 사람에게는 그 직책을 수행할 곳을 지정하라고 했다.1858) 이 결정은 두 가지 이유로 매우 귀중하다. 첫째, 교회는 불필요한 경비를 부담하지 않으며 빈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서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둘째, 임명된 사람들은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엄숙한 선서로 맡은 그 직책의 의무를 다할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지도자들은(종교에서는 먹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므로) 성직 취임 자격을 먼저 생활 유지에 충분한 수입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그 수입은 자기들의 교회 재산에서 오든지 또는 사제직에서 오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제나 부제를 임명할 때에, 그들이 일할 곳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생활할 재력이 있기만 하면 성직을 준다. 그러나 칼케돈 회의가 요구한 성직 취임 자격이 생활비의 연수입이라고 하는 이 해석을 누가 용인할 수 있는가? 이런 경솔한 임명을 방지하려고 최근의 교회법에는1859) 주교가 임지 없지 그냥 임명한 이들 성직자들의 생활을 돕는 것을 금지했다. 이 규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새로운 기만 수단이 고안되었다. 즉, 어떤 성직에 임명되든지 임명된 자는 그 칭호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 합의에 따라서 생활비 청구 소송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여기서 생겨난 수많은 협잡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자들은 일 년에 다섯 푼도10a)1860)받을 수 없는 성직록에 대해서 자격이 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

어떤 자들은 비밀 약정으로 성직록을 빌려 쓰고, 곧 갚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갚지 않는 때가 있다. 이 밖에도 이런 종류의 기괴망측한 일들이 많이 있다.

5. 임명식은 가짜

이런 심한 악폐를 타파하더라도, 일할 곳을 주지 않으면서 사제를 임명한다는 것은 언제든지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1861) 그들은 다만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사제를 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도록 임명하고 집사는 구제 물자를 수집하기 위해서 임명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지나치게 화려하게 가장함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가식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견실한 것이 없고 가짜뿐인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의식은 유대교에서 온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이므로 회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반 신도의 찬성을 물어보는 진정한 심사와(그들이 유지하는 그림자는 말할 것도 없이) 그 밖의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옛 의식을 본받노라는 그들의 서투르고 얼빠진 흉내와 그 우스운 몸짓들을 나는 그림자라고 부른다. 주교들은 대리를 시켜서 서품식이 있기 전에 후보자의 학력을 시험한다. 그들은 무엇을 물어보는가? 미사를 올릴 수 있는가, 교과서에 나오는 보통 명사나 동사의 변화를 아는가, 어떤 말의 뜻을 아는가, 이런 질문뿐이다. 그들은 성경의 한 절에 대해서도 그 뜻을 설명할 줄 몰라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유치한 초보지식이 없더라도 돈이나 권력의 배경이 있으면 사제가 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다. 서품식에서 성단 앞으로 인도될 때에도 변함없는 협잡이 계속된다. 그들은 이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느냐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누가 세 번 묻는다. 그러면 그들을 본 일도 없는 사람이 형식에 결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연극의 한 몫을 담당하고 나서서, "그들은 자격이 있습니다"라고1862) 대답한다. 이 거룩한 신부님들은 어디가 나쁜가? 그들은 이런 공공연한 모독 행위를 함으로써 뻔뻔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냉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이런 관습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분명하고 무서운 악행을 감히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면, 옛날에 케레스(로마의 농업 여신)의 성스러운 의식들을 폭로한 사람들과 같이,1863) 그들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한다. 만일 그들이 진정 어떤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6. 성직록의 정체

그러면 그들은 성직록을 수여하는 문제에서는 얼마나 올바른 행동을 하는가? 성직록 수여는 이전에 임명식과 결합된 것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들은 이 일을 아주 다양하게 행한다. 주교들만 사제직을 수여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이 "수여자"라고1864) 불리는 곳에서도 그들이 항상 전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성직록을 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고 주교들은 수여한다는 명예만 가지고 있다. 또 학교에 의한 지명, 단순한 또는 교환 조건이 붙은 양도, 추천, 우선권, 기타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같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하나도 비난할 수가 없다. 나는 현재 교황 제도 아래에서는 고대인들이 정의한 의미의 성직 매매가1865) 없이 수여되는 성직록은 백에 하나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모두 돈으로 산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간접적인 배경이 없이 성직록을 받은 예가 스물에 하 나라도 있으면 내게 증명해 보라, 어떤 자들은 친척이나 인척 때문에, 어떤 자들은 부모의 세력으로 승진한다. 또 어떤 자들은 아첨으로 환심을 산다. 요컨대, 사제직을 수여하는 목적은 교회에 유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얻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성직록(benefice)이라고 말의 본래 뜻으로는 "은혜"라고 한다. 그들은 이것을 군주들의 하사금에1866) 지나지 않는 것, 군주들이 기사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또는 수고에 대한 보수로서 주는 것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이발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 노새 모는 사람, 그 밖의 비천한 사람들에게 이 상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지금 각지의 법정에서는 다른 사건보다도 사제직에 관한 소송 사건들이 가장 시끄럽다. 결국 사제직은 마치 개들에게 던져서 사냥하게 하는 사냥감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또는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에 덤벼들 듯이 교회의 재산에 덤벼들었으며 또는 소송을 해서 교회를 얻었고 또한 돈으로 샀다. 어떤 자들은 추악한 아첨으로 얻기도 하고 또 어떤 자들은 말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때에1867) 이미 아저씨나 친척에게서 유산으로 받기도 했다. 사생아가 아버지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교회도 있다. 이런 자들을 그들은 "목자"라고 부르니 차마 이것을 들을 수 있는가?

7. 해괴한 악폐

평신도들이 비록 부패하고 무법한 행동을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무법 하거나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욱 해괴한 일이 있다. 한 사람이-어떤 사람인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자기 한 몸도 다스릴 수 없는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다섯이나 여섯 교회에 동시에 임명된다! 지금 군주들의 궁정에서는 각각 수도원장 직이 셋, 주교직이 둘, 대주교직 하나를 가진 소년들을 볼 수 있다.1868) 한 참사회 의원이 성직록을 다섯이나 여섯, 일곱씩을 차지하고서 수입만 받으면서 그곳 교회들은 전혀 돌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런 관습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곳에서 비난한다는 것을 역설하지 않겠다. 나는 이 무질서를 금지한 엄격한 법규가 여러 회의에서 결정됐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지 않겠다. 그들은 이 법규들을 언제나 마음대로 맹렬하게 배척한다. 단지 나는 이 악폐들은 해괴하다는 것, 즉, 하나님과 자연과 교회 제도에 반대된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한 약탈자가 동시에 여러 교회를 점령하는 것이나, 비록 원하더라도 자기의 양떼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을 목자로 임명하는 것은 다 해괴한 악폐다.1869) 그럼에도 불구하고(극도로 파렴치한) 그들은 모든 비난을 피하려고 이런 가증하고 추악한 것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린다. 또 그들은 외람되게도 이런 악행에 저 가장 거룩한 사도 계승권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계승의 공로로 교회는 결코 멸망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고 자랑한다.

(성직을 가진 수도사와 참사회 의원과 기타 인물들의 무성의와 나태. 8-10)

8. "사제"가 된 수도사들

이제 그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가를 보자. 이것은 합법적인 목자를 판단하는 둘째 표식이다.

로마교회에서 임명되는 사제들 중의 일부는 수도사들이고 일부는 그들이 "세속 신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다. 이 두 무리 가운데서 수도사들은 고대 교회가 모르는 자들이었으며, 교회 안에 자리를 가지는 것은 수도 생활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고대에는 수도원에서 교회로 옮긴 사람은 수도사를 그만두었다. 심히 부패한 시대에 있던 그레고리우스까지도 이런 혼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장이 된 사람들에게 교회의 직분에서 떠나라고 했다. 수도사로 있는 것과 성직자로 있는 것은 서로 배치되므로 아무도 동시에 이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이유였다.1870) 교회법에 부적당하다고 선언한 사람이 어떻게 그 직무를 수행하느냐고 내가 물으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들은 물론 이노센트와 보니파키우스의 실패로 끝난 칙령을 인용할 것이다. 이 교황들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그대로 있으면서 사제의 명예와 권한을 받게 하였다.1871) 그러나 무지한 바보가 로마 교황청을 차지할 때마다, 한 마디로 모든 고대 전통을 전복해도 좋다는 이 주장은 무슨 논리인가? 이 점은 후에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교회가 비교적 순결했을 때에는 수도사가 사제의 일을 본다는 것을 큰 모순이라고 생각했다는 것만 말하겠다. 제롬은 그가 수도사들과 함께 있을 동안에 사제의 직분을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고 자기는 사제들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1872) 그러나 한 걸음 양보해서 묻고자 한다. 그들은 사제직의 어떤 부분을 실천하고 있는가? 몇몇 탁발 수도사들은 전도를 하고, 그 밖의 수도사들은 모두 자기의 방에서 성가를 부르거나 미사곡을 중얼거린다. 마치 사제들이 이런 목적을 위해서 임명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거나 사제직의 성격이 허락을 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제의 임무는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성경이 명백하게 확인한다(행 20:28). 그러므로 이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옮긴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완전히 변경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모독이 아닌가? 그들이 임명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사제에게 명령하신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명백하게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는 이것이다 . 수도사는 자기의 수도원으로 만족하라. 성례전을 집행하거나 공적 직책에 속한 일을 하려고 주제넘은 짓을 하지 말라.1873) 사제가 되면서 처음부터 사제의 진정한 직분은 다하지 않을 작정0?하고, 사제라는 이름은 가지면서도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노골적인 우롱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그들은 대답할 수 있는가?

9. 성직록을 받는 사제들과 고용살이를 하는 사제들

이제 세속 신부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 들의 말대로 성직록을 받는다. 즉, 사제로서의 생활비를 받는다.1874)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미사를 집례하거나 성가를 부름으로써 매일 노동을 하여 이런 일에 대한 삯을 받아서 살아간다.

성직록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주교나 목사같이 영혼을 고치는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생활하는 기품 있는 사람들도 있다. 성당 사제 참사회 의원, 교구 사제, 고위 성직자,1875) 지도 신부 등등이 그 예다. 그러나 이미 일을 뒤집어 놓은 그들은 크고 작은 수도원들을 세속 사제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소년들에게도 준다. 그들은 이른바 "특권으로", 즉, 일상 관습으로 이렇게 한다.

보수를 목적으로 고용된 사제들은 지금 하는 일 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 지금같이 전세계에 무수하게 퍼져 돈을 벌기 위해서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방법으로 자기 몸을 파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감히 내놓고 구걸할 수 없어서, 또는 그렇게 해서는 이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굶주린 개같이 돌아다니면서 싫어하는 사람들을 졸라댄다. 개가 짖듯이 성가시게 굴어서 조금이라도 빼앗아 시장기를 면하려고 한다. 사제의 영예와 직책이 이렇게 된 것이 교회에 얼마나 큰 수치인가를 내가 말로 표현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극심한 악폐에 해당하는 논의를 독자는 나에게서 기대할 이유가 없다. 나는 간단하게 말한다. 하나님 말씀이 명령하고(고전 4:1, 요 10:1이하 참조) 고대 교회법이 요구한 대로 사제의 직책은 교회를 양육하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를 섬기는 것이라면 미사를 파는 일만을 일삼거나 그것만으로 삯을 받는 이 모든 사제들은 그 직분을 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할 합법적인 직분도 없다. 그들에게는 가르칠 곳이 없으며 다스릴 사람도 없다. 요약하면,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는 제단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귀신들에게 드리고 있다(고전 10:20 참조). 이 점은 다른 곳에서 알게 될 것이다.1876)

10. 여러 가지 성직들의 겉치레

나는 외면적인 악폐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제도에 뿌리를 박은 내면적인 폐악만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들이 듣기 싫어하는 맡을 덧붙여 말하겠다. 사실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참사회 의원, 부주교, 부속 예배당 사제, 참사회 의장, 기타 하는 일이 없이 성직록을 먹는 자들은 모두 같은 종류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그들은 말씀 선포와 권징의 엄수, 성례 집행을 귀찮은 짐이라고 해서 던져 버렸다. 진정한 장로라고 자랑할 무엇이 그들에게 남아 있는가? 노래가 있고 찬란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장로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관습, 습관, 오랫동안 공인된 일들을 그들이 주장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정의와 대결시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것이 진정한 장로이며, 진정한 장로로 인정되고 싶은 사람은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표준을 따르라는 이 어려운 요구에 그들이 응할 수 없다면 적어도 원시 교회의 권위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라. 그들의 현상을 고대 교회법에 따라서 판단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하지 못할 것이다. 참사회 의원으로 타락한 자들은 옛날 장로들과 같이 감독과 공동으로 교회를 다스리며 그의 동료로서 목회하는 일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1877) 그들의 이른바 "참사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진정한 교회 정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부속 예배당 사제와 그 밖의 쓸데없는 성직들도 적지 않다.

그러면 이 모든 자리들을 어떤 계급으로 간주해야 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고대 교회의 관례는 확실히 그들을 장로의 직위에서 제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장로로 자칭한다. 그러나 이 가면은 벗겨야 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이 설명하고 고대 교회가 요구한 장로직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며 거리가 먼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성직들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이 제정하시거나 고대 교회의 관례가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교회에 주신 영적 제도를 설명할 때에는 그들에게 어떤 자리도 주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들이 내가 더 알기 쉽고 확실하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부속 예배당 사제와 참사회 의원 그리고 부주교와 참사회 의장과 그 밖의 무위도식하는 자들은 장로의 가장 중요한 직책에 새끼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이 명예를 도둑질하며 그리스도의 거룩한 제도를 침범하는 것을 우리는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교와 목사와 부제들의 부패와 탐욕. 11-19)

11.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

이제 주교들과 교구 사제들을 언급할 차례이다. 그들이 그 지위를 보존하도록 노력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그들이 직분을 다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거룩하고 훌륭한 것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위임된 교회를 기만하고 교회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서 여전히 목자로 행세하려고 하며, 목자의 직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시외에 나가 본 일이 없는 고리 대금업자를 농부나 포도원지기라고 하며 전쟁터와 병영만을 돌아다니고 법정이나 법률 서적은 본 일도 없는 사람을 변호사라고 한다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보고 누가 불쾌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더욱 우스운 것은 교회의 합법적인 목자로 인정을 받고자 하면서도 목자의 일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기 교회를 다스리는 체하는 사람조차 몇 명이 되는가? 일평생 교회의 수입을 받아먹으면서도 한 번도 그 교회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자기가 오거나 사환을 보내서 자기 수입에 손해가 없도록 한다. 이런 부패가 처음으로 생기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렇게 무위도식을 원하는 자들은 특권으로 의무를 면했다. 지금은 누구든지 자기 교회에서 사는 것이 희귀한 예외이다. 사환이나 소작인에게 농토를 맡기듯이 그들은 그들의 대리자들에게 교회를 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양을 한 마리도 본 일이 없는 사람이 양떼의 목자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는 생각이다.1878)

12. 이 폐단의 초기 : 그레고리우스와 베르나르두스

이미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폐단의 씨가 약간 있어서, 교회 지도자들이 점점 가르치는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강경하게 불만을 말한 것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사제들은 가득하지만 추수를 하는 사람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사제직을 맡으면서 직분을 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를 신부(아버지)라고 보지 않으며 겸손해야 할 곳을 교만한 주인의 자리로 바꾸어 버린다." 또, "그러나 목자들이여, 보수를 받으면서도 일은 하지 않는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보기에만 바쁘면서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한다. 전도하는 일을 버렸다. 주교라는 명예를 가졌으나 그 직책을 다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받을 벌은 더욱 중하다.1879) 단지 직책에 대한 성의와 노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그레고리우스가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책망했는데. 평생에 한 번 강단에 서는 주교가 거의 없거나 또는 몇 명밖에 되지 않고 다른 성직자들은 백에 하나도 되지 않는 것을 본다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지금 그들은 정신이 이상해져서, 신자들에게 설교한다는 것은 주교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사태가 더욱더 악화되어, 그는 이 계급 전체를 날카롭게 공격했다.1880) 그러나 그 시대의 주교 계급은 지금보다 상당히 순수했던 것 같다.

13. 선전과 현실

그러나 현재 교황 제도 하에 있는 교회 제도의 외형을 잘 고찰한다면, 강도들의 소굴에서도 그렇게까지 법도 없고 체면도 없는 철면피한 난잡한 행동은 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참으로 거기서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과는 다르고 이질적이며 고대 교회의 규정과 관례에서 타락했고 자연이나 이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이런 무질서한 제도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이 지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대의 타격이 된다. 그들은, 사도들의 권한이 그들에게까지 계승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교회의 기둥이요 종교 지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요 신자들의 머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나무 조각에 대고 말하듯이 이런 미련한 말을 쉴 새 없이 끊임없이 지껄인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자랑을 할 때마다 나는 그들과 사도들의 공통점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잠자는 동안에 받을 수 있는 세습적인 작위가 아니라 그들이 한사코 도망하는 전도의 직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들의 지배를 적그리스도의 독재라고 선언할 때에 그들은 의례히 그것은 위대하고 거룩한 분들이 자주 칭찬한 존엄한 성직제도라고 말한다.1881) 저 거룩한 교부들은 교회의 성직제도, 즉, 사도들에게서 그들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영적 통치를 칭찬했으나 현대의 혼란 상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교회가 혼돈하고 공허한 가운데서, 주교들은 대부분 무례한 바보들이며 믿음에 대한 초보적 상식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유모에게서 방금 떨어진 덩치만 큰 아이들이다. 아주 예외적으로, 좀더 학식이 있는 주교가 있으면 그는 주교직을 호화찬란한 생활을 할 권리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의 교황 제도에서 교회 담당 신부들은 구두장이에게 밭을 갈 생각이 없는 것같이, 양떼를 먹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바벨의 혼잡보다 더 심하며(창 11:9),교부들이 규정한 것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14. 사제들의 도덕 수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도덕 생활을 본다면,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은 어디 있는가(마 5:14, 13) 인생의 영원한 지표라고 할 거룩함은 어디 있는가? 오늘날 무절제와 나약과 주색 등, 모든 정욕에 깊이 빠진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 이름난 계급은 없다. 그들처럼 온갖 기만과 사기와 반역과 배반에 능숙한 계급도 없다. 사람을 해하는 일에 그들같이 교묘하고 대담한 계급도 없다. 나는 그들의 거만과 자만과 탐욕과 잔인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 전체가 방종한 데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이런 악폐에 진저리가 났으므로, 내가 부당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성이 없다. 그러나 그들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을 하나만 말하겠다. 만일 고대의 교회법에 따라 그들의 행위를 판단한다면, 파문을 면하거나 적어도 면직을 당하지 않을 주교가 거의 한사람도 없고 교구 신부들은 백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만큼 성직자들의 행위를 더욱 엄중하게 책망하라고 하던 옛날 규율은 폐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이 완전히 그러하다. 로마 교황의 기치 아래에서 일하며 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이제 가서 그들의 사제 계급을 서로 자랑하라. 그들에게 있는 이 계급은 분명히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사도들에게서나 교부들에게서나 고대 교회에서 온 것도 아니다.

15. 부제

이제 우리는 부제들과, 교회 재산을 처리하는 그들의 지극히 거룩한 임무를 보기로 하자.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이런 목적으로 그들의 부제(집사에 해당하는)를 임명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제에게 제단에서 봉사하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또는 노래하거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을 시킬 뿐이다.1882) 구제 물자 분배나 구제하는 일과 같은 그들이 옛날에 하던 일은 전연 없다. 나는 지금 제도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이 현재하고 있는 일을 보면 그것은 하나의 직분이라기보다는 사제가 되기 위한 단계에 불과하다. 미사에서 부제가 하는 일은 한 면에서는 고대를 흉내 내지만 내용은 없다. 그들은 성별하기 전에 제물을 받는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관습은 신자들이 성만찬에 참석하기 전에 서로 입을 맞추고 성단에 구제 물자를 드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을 먼저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다음에 구제품으로 표시했다. 빈민들의 심부름꾼인 집사는 들어오는 것을 받았다가 분배했다.1883) 지금 빈민들은 구제품을 바다에 던진 것같이 얻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 부제직으로 교회를 희롱한다. 사도들이 제정한 것이나 고대 교회의 관습에 비할 것이 전혀 없다. 참으로 그들은 재산 분배를 다른 데로 옮겨서 상상할 수 없는 혼란을 일으켰다. 강도들이 사람의 목을 찌르고 강탈한 물건을 나누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은 교회의 목을 찌르듯이 하나님 말씀의 빛을 꺼버린 다음에 거룩하게 쓰도록 봉헌한 물건은 모두 자기들이 나눌 전리품과 약탈품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을 나누고 각각 힘 자라는 대로 많이 집어 갔다.

16. 교회 수입의 분배

내가 여기서 설명한1884) 고대의 관습들은 혼란이 야기되었을 뿐 아니라 완전히 말소되고 은폐되었다. 이런 약탈품으로 부자가 된 도시 주교와 사제들이 참사회의 이익이 되면 약탈품의 대부분을 압수해서 자기들끼리 나눴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한계에 대한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분배가 무질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어떤 결정을 했든지, 적어도 고대교회 수입의 절반이 빈민에게 가던 것이 지금은 한 푼도 가지 않게 만들었다. 교회법은 명백하게 사분지 일을 빈민들에게 배당하고 또 사분지 일을 감독에게 배당해서 손님 대접과 기타 자선 사업에 사용하게 했다. 성직자들이 자기의 배당금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나는 말하지 않는다. 교회와 건물, 기타에 배당된 나머지도 필요한 때에는 빈민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그들의 가슴속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이 먹고 입는 것이 모두 도둑질한 것, 아니 신성 모독 행위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도 그들은 태연할 수 있느냐고 나는 묻고자 한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적어도 그들이 속이려는 상대가 감각과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항상 교회 안에 아름답고 정연한 질서가 있다고 자랑한다. 부제직이 도둑질과 강도질을 하라는 면허인지를 간단하게 대답해 보라.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부제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교회 재산의 관리가 완전히 모독적인 약탈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17. 교회의 참 광채와 거짓 광채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대단히 훌륭한 기만책을 쓴다. 그들은 교회의 위엄이 이런 장엄한 외관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을 시켜 노골적으로 파렴치한 자랑을 한다. 즉, 사제 계급이 군왕들같이 호화롭게 보여야만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에 대해서 고대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이 실현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교회에 이런 일들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만 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시 72:10-11 주해 참조)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사 52:1).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사 60:6-7). 내가 만일 그들의 후안무치함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면 나는 바보같이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만일 어떤 유대인이 이런 말씀들을 악용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를 묻는다. 물론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에 대해서 영적 의미로 한 말을 육과 세상에 옮겼다고 비난할 것이다. 이는 예언자들이 땅에 속한 물건을 사용하여 교회 안을 비춰야 할 하나님의 하늘 영광을 비유적으로 그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말에 있는 이 복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 제일 빈약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의 권능은 그 때에 가장 풍성했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이런 발언들의 뜻은 무엇인가? 어디 있든지 간에, 진귀하고 고상한 것은 모두 주에게 예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들에 대해서 명백히 한 말, 즉,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흘을 바치고 왕관을 그의 발아래 던지며 그들의 재물을 교회에 바치리라고 한 말이 데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같이 참으로 또 완전하게 실현된 일이 있는가? 그는 그의 자색 옷을 벗고 통치자의 표지를 내려놓은 후에 일반 신도의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교회 앞에 부복해서 엄숙하게 참회했다.1885) 그뿐 아니라, 그와 같은 경건한 다른 군주들도 교회의 교리를 순수하게 보존하며 건전한 교사들을 장려하고 보호하려고 노력과 주의를 기울인 때처럼 예언이 완전히 실현된 때가 있었는가? 그러나 그때의 사제들은 불필요한 재산이 많지 못했다는 것이 암브로시우스가주재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충분히 나타나 있다. "주의 사제들은 빈곤이 영광이다.1886) 확실히 당시의 주교들은 재산이 있었고, 만일 외면적인 화려가 교회의 진정한 장식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의 진미와 화려한 옷과 많은 하인들과 웅장한 저택을 자랑하는 것은 목회자의 직책에 가장 배치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겸손과 검소의 길을 걸었으며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자들 사이에 제정하신 빈곤한 생활을 따른 것이다.

18. 교회 재산의 부정한 사용과 정직한 사용

이 점에 대해 시간을 많이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현재 교회 재산을 처리하는 아니 낭비하는 방법이 하나님 말씀이 추천하며 고대 교회가 준수한 진정한 부제직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요약하려 한다. 중용을 지키라는 것은 거룩한 물건들의 논질이 요구하며 사도들과 거룩한 교부들이 교훈과 실천으로 명령한 것이다. 현대 교회에서 중용의 길을 볼 수 있는가? 고대의 검소는 말하지 않더라도 정직한 중용의 길을 일체 배척하고 있다. 극단적인 것, 부패한 현대 취미에 맞는 것만을 좋아한다. 동시에 살아 있는 성전들은 돌보지 않고 가장 작은 잔이나 병 한 개를 아껴서 수천 명의 빈민이 굶어 죽는 것을 버려둔다. 내 자신의 생각으로 가혹한 판단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경건한 독자에게 이 한 가지 일을 고려하기를 청한다. 즉, 내가 이미 언급한 툴루즈의 엑수페리우스 주교나 아카키오스나 암브로시우스나 그밖에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지금 다시 살아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는 것이다.1887) 물론 빈민들의 심한 곤궁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불필요한 것인 듯이 돈을 다른 데로 빼돌리지 않을 것이다.(빈민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돈을 쓰는 데에는 여러 가지 해독만이 있고 유익은 하나도 없다는 점은 여기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이 물질들은 그리스도에게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뜻에 따라서 분배해야 한다. 그의 명령에 위반되는 일에 낭비한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것으로 계산하려 해도 그것은 허사일 것이다. 그러나 진상을 말한다면, 교회의 경상 수입에서 이런 일에 쓰는 부분은 많지 않다. 아무리 넉넉한 주교구와 대수도원일지라도 그리고 기증 재산이 풍부한 성직록을 아무리 많이 겸할지라도 사제들의 한없는 욕심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죄를 면하려고, 빈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을 미신적인 일에 쓰도록 신자들을 유혹하여 교회를 지으며 조상을 세우며 그릇을 사며 예식 복을 준비한다. 이런 식으로 이 밑 없는 구렁이 일상 구제 물자를 삼켜버린다.

19. 성직자의 재산과 권력

그들이 농지와 소유 재산에서 받는 수입에 대해서, 내가 이미 말한 것 이외에 또 온 세상이 보는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 주교와 수도원장이라고 하는 자들이 수입의 대부분을 얼마나 충실하게 처리하는가를 우리는 안다. 여기서 교회의 질서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검소와 중용과 절제와 겸손의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 세상 집권자들에게 옹호하지 않겠다고 고용인의 수효를 늘리고 찬란한 건물과 화려한 의복과 빈번한 연회에 경비를 들였으니 이것이 합당한 일인가?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며 간단한 음식으로 만족하라는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딛 1:7) 촌락과 큰 저택들을 점령할 뿐 아니라 큰 지방과 온 나라들까지도 빼앗았으니 이 얼마나 그들의 직무에 배치되는 것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다면 고대 종교 회의들의 결정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그 회의들에서는 감독이 자기 교회에서 멀지 않은 작은 집에서 살며 값싼 음식을 먹고 값싼 가구를 사용하라고 했다.1888) 주의 사제들은 가난한 것이 영광이라고1889) 한 아퀼레이아 종교 회의의 발표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제롬이 네포티아누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손님으로서 그의 작은 식탁에 자주 앉아야 한다고 한 명령을 그들은 너무 엄격하다고 해서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제롬이 곧 첨가한 말에는 부끄러워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주교의 영광은 빈민을 돌보는 것이며 모든 사제의 수치는 재산을 모으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말했다.1890) 그들이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자기들의 수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이 점을 추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들 사이에 합법적인 부제직이 없어진 지 오래라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며 이로써 그들이 교회의 한 미점이라고 해서 부제직을 자랑하는 것을 더 이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는다.

제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1891)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한 가설들을 반박한다. 1-7)

1. 카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교회 제도에 있었던 여러 가지 계급들이 후대에 부패하고 점점 더욱 악용되어, 현재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 이름만이 남아 있고 실제로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찰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 뜻은 경건한 독자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카톨릭교에 어떤 교회가 있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런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함으로써 분파의 죄를 우리에게 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조 전체의 갓돌(capstone)에 대해서, 즉, 로마 교황청의 권위 권에 대해서는 아직 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세계의 교회가 그들의 독점물이란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이 수위권을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도 아니며 고대 교회가 사실상 인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논한 제도들과 다르다. 그 계급들은 먼 고대에 만들어져서 시대가 흐르는 동안에 완전히 부패하고 마침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유일한 유대는 우리가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되지 않고 여전히 복종하는 것이라 또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한다.1892) 그들이 우리에게서 교회를 빼앗고 자기들만이 독점하려고 할 때에 특히 의지하는 논점은 하나인데, 즉, 자기들에게는 머리가 있고 교회의 단결은 그 머리에 달렸으며 그 머리가 없으면 교회가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로마 교황청을 머리로 여겨,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는 목이 잘린 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직 제도를 논할 때에 언제든지 출발점으로 삼는 원칙도 이것이다. 즉, 로마 교황은(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그리스도 대신해서 모든 교회를 주관하며 로마 교구가 모든 다른 교구들 위에 수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교회가 잘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위권의 정체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

2.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밝히겠다. 그들이 말하는 성직제도, 즉, 교회 조직의 진정한 형태를 위해서 어느 한 교구의 위신과 권한이 모든 다른 교구들을 능가하며 전체의 머리가 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런 필요성을 교회에 강요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부당한 법에 굴복시키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대자들은, 그 주장을 증명하려면 먼저 이런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은 율법에 있는 대제사장직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설치하신 최고 재판소를 언급한다.1893)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쉬우며, 그들이 한 가지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한 민족에게 유익한 일을 온 세계에 확대해야 된다는 이유는 없다. 한 민족의 근본법과 전세계의 근본법은 훨씬 더 다르다. 유대인들은 주위가 온통 우상 숭배 민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러 가지 종교에 마음이 유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처소를 세계의 중심지에1894) 두셨다. 그들의 단결을 더잘 유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대제사장 한 사람을 임명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같이 진정한 종교가 전 세계에 퍼진 때에 동서의 지배권을 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어느 누가 간파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한 지방을 한 사람이 다스리므로 세계도 한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도 이런 모방은 불가하다. 대제사장이 그리스도의 한 예표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제사장직이 옮겨졌을 때에 권리도 옮겨졌다(히 7:12). 누구에게 옮겨졌는가? 교황은 자기가 교황이 된 때에 그 권리를 이양 받았다고 감히 파렴치한 주장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이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자나 후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이 제사장직은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일도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의해서 또 현재 아버지 앞에서 하시는 중보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노염을 푸시기 때문이다.

3.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예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서 우리를 속박하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짓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시적인 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의 견해를 확인할 만한 것을 신약성경에서 한 사람에게 말했던 것밖에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이다(마 16:18). 또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고 하신 말씀도 그들은 인용한다.1895)

그러나 그들의 증명에 충분한 근거가 있으려면, 그들은 우선 양을 먹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지배권이 위임되었다는 것과 매는 것과 푸는 일은 곧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찬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주께서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도 교회를 먹이라고 권고한다(벧전 5:2).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무엇을 준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베드로는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나누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익한 언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다른 말씀을 보겠다.

다른 구절에서, 매며 푼다는 것은 죄를 그대로 두거나 또는 용서한다는 뜻이라고(요 20:23)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매며 푸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에 반복 설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장 훌륭한 설명을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동시에 이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고후 5:18, 10:6).

4.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

매는 것과 푸는 데 관한 구절을 그들이 얼마나 망측하게 왜곡하는가 하는 것을 앞에서 간단히 지적했지만1896)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1897) 지금은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답에서 그들이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하는가를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이리라고 하셨다(마 16:19). 만일 "열쇠"라는 말과 매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면 모든 논쟁이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노고와 곤란이 많은 것이므로 교황은 그것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그런 일은 그에게 아무 이익도 주지 않고 도리어 그의 쾌락만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1898)

복음의 교훈이 우리 앞에 하늘을 열어 주는 것이므로 "열쇠"라는 말은 적절한 은유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이며 풀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으며 어떤 사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더욱 속박을 받는다는 뜻에 불과하다. 교황이 이 일만을 자기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를 시기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계승하면 수고만 많고 이익은 적겠기 때문에 교황은 싫어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된다. 나는 이 약속 자체에는 사도의 직분이 존귀하다는 뜻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사도직과 수고는 분리할 수 없다. 내가 제시한 이 정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파렴치한 짓일 것이며, 만일 이 정의를 인정한다면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그의 동료들에게 주신 것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인격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교리의 권위 자체가 손상될 것이다.

그들의 항의는 참으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나는, 이 바위를 향해서 돌진한들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증명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즉, 같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모든 사도에게 주어진 것과 같이, 매고 푸는 권한도 모든 사도가 공통하게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베드로를 온 교회의 통치자로 임명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때에 약속하신 것을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시에 부여하신다. 이를테면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다(마 18:18, 요 20:23). 한 사도에게 약속하신 것과 똑같은 권리를 모든 사도들에게 허락하셨은즉 어떤 점에서 베드로가 동료들보다 우월한가? 그들은 그가 단독으로 또 공동으로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공동으로만 받았으므로 우월하다고 말한다.1899) 내가 키프리아누스나 어거스틴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시지 않고 교회의 일치단결을 명령하시는 뜻으로 하신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모든 사람이하나인 것을 알리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베드로와 똑 같았고 영예와 권한을 동등하게 나눠 받았다. 그러나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인 것을 보이시려는 뜻이었다."1900) 어거스틴은 다음처럼 말한다.

"만일 교회의 신비가 베드로에게 없었다면 주께서는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9)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라면 교회에는 열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가 열쇠를 받았을 때에 그것은 온 교회를 상징한 것이다." 또 다른 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질문을 받은 후에 베드로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마 16:16)라고 대답했고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말씀을 받았다. 이것은 그만이 매고 푸는 권한을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연합을 몸소 상징했다. 따라서 연합이 모든 사람 안에 있으므로 한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1901)

5.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마 16:18) 어느 다른 사람에게는 하신 일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에 대해서 바울과 베드로 자신이 한말과는 다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 대해서 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한다(엡 2:20-21).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돌이 되라고 명령하며, 저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돌 위에 놓여(벧전 2:5-6) 각각 우리의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또한 서로 연합하라고 한다(엡 4:16, 골 2:19참조). 그들은 그가 특히 그 이름을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제일인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영예나 지위를 물론 베드로에게 기꺼이 돌린다. 만일 그들이 원하면 모든 사도들 중의 첫 자리를 주어도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 위에 수위권을 가진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대체 이런 연역법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는 열성과 교리와 용기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출중했고 그러므로 그에게 지배권이 있다는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지위가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간적으로 앞섰었고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기 때문이다(요 1:40,42). 그러나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주어라. 그러나 지위의 영예는 권력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사도들이 대개 베드로에게 이 영예를 준 것을 안다. 그는 집회에서 발언하며 토론과 권고와 충고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했다(행 2:14이하, 4:8이하, 15:7이하). 그러나 권력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읽어볼 수 없다.

6. 기초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아직 이 논쟁을 제기하지 않았으나1902) 우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주장하겠다. 즉, 그들이 베드로라는 이름 하나를 기초로 하여 교회 전체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은 심히 무력한 논법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사기를 시작했을 때에 내세운 어리석은 주장은 논박은커녕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하셨으므로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운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 몇몇 교부들도 있었다고 그들은 아직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이런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왜 교부들의 권위를 내세워서 하나님에게 반대하는가? 진실로, 왜 우리는 이 말씀의 뜻에 대해서 논쟁하는가? 그것은 어떤 애매모호한 점이 없고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말씀이다. 베드로는 자신과 교우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언했다(마 16:16).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바울의 말과 같이 기초는 하나뿐이며 그 이외의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3:11). 또 나는 여기서 교부들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증언을 인용하려고 하더라도 나는 거부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1903)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무용한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 쪽의 대표적인 지지자들이1904) 오래 전에 많이 논술하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7.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도 성경 자체보다 더 훌륭한 해결을 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사도들 사이에서 어떤 직책과 권한을 가졌으며 또 어떻게 행동했고 다른 사도들은 그를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이 기록들을 전부 읽어 보라. 그렇게 하면 베드로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동등했으며 그들의 동료였으나 주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모두 회의에 제출하며 해야 할 일에 대한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에게 의견 발표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결정도 그들에게 맡기고는, 그들이 결정하면 그대로 따르며 복종했다(행 15:5-12). 목자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상관의 권위로써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료로 보며 동료들 사이의 관례대로 다정하게 권고했다(벧전 5:1이하). 그가 이방인과 가까이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것은 부당한 비난이었지만 답변하고 과실이 없는 것을 밝혔다(행 11:3-18). 그는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라고 동료들이 명령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행 8:14). 그를 보냄으로써 사도들은 그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했고, 명령에 복종하여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는 그들 위에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료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갈라디아서 하나만을 보면 우리는 곧 모든 의심을 버릴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거의 두 장에 걸쳐 자기는 사도로서 베드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그가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그에 대한 복종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요리상으로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베드로도 그런 일은 전혀 요구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함께 일하기 위한 동료로서의 악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방인 사이에서 그가 받은 은총은 베드로가 유대인 사이에서 받은 은총보다 적지 않았다고 한다(갈 1:18, 2:8). 끝으로, 베드로의 행동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때에 바울이 시정했고 베드로도 그 책망에 순종했다고 한다(갈 2:11-14). 이 모든 기록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동등했거나 적어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사이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분명하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의 동료이지 상전이 아니므로 아무도 사도직에서 그들을 자기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 내의 단독 통치권은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다. 8-10)

8.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베드로에 대해서 그가 사도들 중의 제일인자였고 다른 사도들보다 탁월한 위신을 가졌다고 하는 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예를 일반적인 법칙으로 만들며, 한 번 있었던 아주 다른 일을 영구화할 이유는 없다. 사도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두머리이었다. 그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열두 명 위에 한 명이 서 있었다고 해서 십만 명 위에도 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열두 명이 한 명을 세워 자기들을 통솔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연이 이것을 허락하며, 인간의 자연법도 집회에서는 비록 모든 사람의 권한이 같을지라도 한 사람은 사회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지도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로마 시대에) 집정관이 없이는 원로원 회의가 없었고 재판장이나 검사가 없이는 법정이 열리지 않았다. 의장이 없는 위원회나 회장이 없는 협회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베드로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수위권을 주었다고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1905)

그러나 소수 사이에 있는 일을 직접 세계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다. 아무도 단독으로 전세계를 지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일부뿐 아니라 전체에서도 유일한 최고수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루미들과 벌들은 언제든지 하나의 지도자만 택할 뿐 여럿을 택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서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제출한 예를 인정한다. 그러다 벌들은 한 통치자를 선거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모이는가? 모든 여왕벌은 각각 자기 집 만으로 만족한다. 그와 같이 두루미들도 떼마다 지배자가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개교회마다 자체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 아닌가? 다음에 그들은 정치 관계의 예를 든다. "다수 지배는 좋지 않다"1906)라고 한 호머의 말을 인용하며, 군주 정치를 칭찬한 세속 문인들의 발언도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대답은 쉽다. 호머의 율리시즈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군주 정치를 칭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말한 뜻은 한 사람이 전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같이 권력은 동료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07)

9.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전 세계가 한 군주의 지배 아래에 포섭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전혀 어리석은 카톨릭 교회의 생각을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교회 조직에서도 같은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아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우리는 바울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한 몸에 포함시키면서도 머리라는 영예와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남겨 두는 것을 알지 않는가? 바울이 각 지체에 일정한 분량과 일정한 제한된 기능을 배정하여 완전한 은총과 최고의 지배권이 그리스도에게만 있게 하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권위와 이름으로 지배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정당하다고 항의할 때에, 여기 대해서 그들이 의례히 쓰는 궤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상에 있는 그의 대리자로서 그의 밑에 한 행정 수반이 있지 못할 것은 없다고1908)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이런 직위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 궤변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공급되는 힘은 전적으로 각 지체에 보급되며 그 힘은 하늘에 계시는 유일한 머리에서부터 흘러온다고 한다(엡 4:16). 그들이 더 분명한 설명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이시며 이 영예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확언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대리로 임명하신 사람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이 영예를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명이 있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읽을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충분히 반박할 만한 구절만 많다(엡 1:22, 4:15, 5:23, 골 1:18, 2:10).

10.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여러 번 교회의 산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러나 하나인 머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의 묘사를 통해서, 한 머리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지만(행 1:9)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엡 4:10).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계실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봉사의 직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주께서는 각 지체에 베푸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우리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엡 4:7). 그러므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운운한다(엡 4:11). 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위에 자신의 대행자를 세우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게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특히 그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따라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신 사람들의 봉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왜 그의 기능을 위임하신 사역자의 머리에 의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하나가 되는 문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라고 한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특수한 방법을 배정하면서도 모두에게 공통된 일을 배정한다. 그는 연합을 권장할 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고(엡 4:4- 5) 말한 다음에 왜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제사장을 첨가하지 않았는가?1909) 그런 사람이 임명된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적절했을 것이다. 그 구절을 잘 생각해 보라. 확실히, 바울이 교회의 신성하고 영적인 통치를 그리려고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성직자 계급 제도"라고 불렀다. 그는 목사들 사이의 단독 지배 제도를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바울은 신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방법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역자들의 머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각 받은 은혜의 분량에 따라(엡 4:7) 각 지체에게 독특한 기능을 부여한다(엠 4:16).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늘의 성직자 계급 제도와 땅의 성직자 계급 제도를 비교해서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할 필요도 없다.1910) 하늘 제도에 대해서 분수에 넘게 지혜로운 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며, 땅에 있는 제도를 세울 때에는 주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에서 그 개략을 진술해 보이신 형태 이외의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영원한 수위권을 소유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11-13)

11.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 내에서의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확정되었으므로 그것은 끊임없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이 주장을 정신이 올바른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베드로의 교구가 로마에 설정되어 로마 시의 감독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온 세계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증명하려는가? 그들은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이 높은 영예를 어떤 권리에 의해서 한 장소에 결부시키는가? 그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살았고 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는 예루살렘에 계셨고 거기서 감독직을 다하셨고 죽음으로써 그의 제사장직을 완성하시지 않았는가? 목자장, 최고의 감독, 교회의 머리이신 그도 한 장소에 대하여 영예를 얻으실 수 없었는데 그보다 훨씬 열등한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베드로는 로마에 정좌했으며 따라서 베드로가 수위권자의 교구를 거기에 설치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치하다는 정도를 넘은 미련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논리를 쓴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최고의 교사요 예언자 중의 으뜸 되는 모세가 그의 사명을 다하고 또 죽은 그 광야에(신 34:5) 수위권의 자리를 설치해야만 했을 것이다.

12.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유쾌한 논법을 쓰는가를 보기로 하자.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서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감독좌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특권으로써 그 수위권을 가져야 한다고1911)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처음 감독좌는 어디 있었는가? 그들은 안디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당연히 수위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안디옥은 첫째인 때가 있었다고 그들은 인정하지만 베드로가 그곳을 떠나서 로마로 이주함으로써 그 영예까지도 옮겨 온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교황 마르켈루스가 안디옥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베드로의 감독좌는 처음에 당신들과 함께 있었습니다만 후에 주의 말씀에 따라 이곳으로 감독좌를 옮겼습니다. 이와 같이 첫째인 때도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로마 감독좌에 양보했습니다"1912) 그러나 묻노니, 저 어진 사람이 주께서 그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계시를 받았는가? 이 문제를 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면, 그들은 이 특권이 인적인 것인지 또는 물적인 것인지 아니면 혼합된 것인지를 대답해야 한다.1913)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은 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특권은 장소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만일 물적인 것이라면 일단 한 장소에 준 다음에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거나 하더라도 그 장소에서 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얼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장소만을 고려할 수 없고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대답을 택하든 간에 로마는 결코 자기의 수위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곧 또 쉽게 추론하며 증명할 것이다.

13.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

그들이 상상하는 대로 수위권이 안디옥으로부터 로마로 이전되었다 고 가정하자. 그러면 왜 안디옥은 둘째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는가?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수위권을 차지한다면 둘째 자리는 그가 처음에 감독좌를 설치했던 곳에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가 안디옥보다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는가? 일개 제자에 불과한 사람의 교회가 베드로의 감독좌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 어떻게 합당한 일인가? 각 교회의 영예가 그 설립자의 위엄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나머지 교회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바울은 세 제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을 말하고 이 사람들은 기둥과 같다고 한다(갈 2:9). 만일 베드로에 대한 경의로 로마 교황청에 첫 자리를 배정한다면 요한과 야고보가 살았던 에베소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은 당연히 둘째 자리와 셋째 자리를 받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대 총감독좌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맨 끝자리를 차지했었고1914) 에베소는 맨 끝 구석 자리에도 붙을 수 없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과 다른 사도들이 주관한 교회들과 그 밖의 교회들은 서열에서 전연 무시되었다. 제자에 불과했던 마가의 감독좌는 영예를 받았다. 그들은 저 순서는 상하가 바뀐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 교회의 영예의 정도는 그 설립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원칙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베드로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4-15)

14.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그리나 나는 베드로가 로마에 있는 교회를 주관했다는 그들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유세비우스가 베드로는 로마교회를 25년간 다스렸다고 한 것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약 20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고(갈 1:18, 2:1이하) 그 후에 안디옥에 온 것이 분명하다(갈 2: 11). 여기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7년, 유세비우스는 25년이라고 계산한다.19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베드로를 죽였다고 그들이 말하는 네로의 통치 끝까지는, 37년밖에 되지 않는다. 주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은 티베리우스의 재위 제 18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대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20년을 감한다면 겨우 17년이 남고 이것을 두 감독구에 나눠야 한다. 만일 그가 안디옥에 오래 머물렀다면 로마에는 잠깐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서를 썼고(롬 15:25) 예루살렘에서 잡혀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4년 전에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주관하고 있었다면 그의 이름을 빠뜨렸을 리가 없는데 로마서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며 아는 사람은 모두 말하는데(롬 16:3-16) 베드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길고 난해한 증명을 할 필요가 없다. 일 자체와 로마서의 논법 전체가,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그를 무시했을 리가 없다고 높이 외친다.1916)

15.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

그 후에 바울은 한 죄수로서 로마에 호송되어 왔다(행 28:16). 누가는 그가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한다(행 28:15). 베드로에 대해서 누가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바울은 여러교회에 편지를 썼다. 어떤 편지에서는 교우들의 이름으로 문안을 보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에 거기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만일 베드로가 있었다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곁에는 디모데 같이 주의 일을 충실하게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모두 자기 일만을 생각한다고 불만을 말한다(빌 2:20- 21). 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가 처음 변명했을 때에 아무도 곁에 없었고 모두 그를 버렸다고 더욱 심하게 불만을 말한다(딤수 4:16). 그러므로 그 때에 베드로는 어디 있었는가? 그가 로마에 있었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가 복음을 버렸다고 바울의 비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수치인가?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부언했기 때문이다(딤후 4:16). 그러면 베드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언제 로마의 감독좌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적어도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 교회를 주관했다고 하는 점에서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그 저술가들은 누가 베드로의 후임이었느냐 하는 점에서 의견이 다르다. 혹은 리누스라 하며 혹은 클레멘트라고도 한다.1917) 또 그들은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이 논쟁했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1918) 어거스틴도 미신에 대해서 논할 때에,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이긴 날에 금식을 하지 않는 로마의 습관은 경솔한 의견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끝으로,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덮어놓고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아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생각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곳 감독이었다는 것, 특히 오랫동안 감독이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또 이 문제에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사도직은 유대인을 위한 것인 반면에 그의 사도직은 우리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고(갈 2:7-8) 바울이 확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언약한 협력 관계가(갈 2:9) 우리 사이에서 유효하기 위해서, 아니 성령께서 하신 임명이 우리 사이에서 확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는 베드로의 사도직보다도 바울의 사도직에 더욱 유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그들의 책임을 나누셔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바울은 우리들에게 보내셨다. 자,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그들의 수위권을 찾도록 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근거는 지극히 빈약하다.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은 하나로 통합하는 머리였기 때문이 아니다. 16-17)

16.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옹호를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고대 교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고대 교회를 살펴보겠다. 그들은 한 공리처럼 자랑하는 것이 있다. 즉, 교회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땅 위에 최고의 머리가 있어서 모든 지체가 그 머리에 복종해야 하며, 따라서 주께서는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다음에는 계승권에 의해서 로마 교황청에 주셨으며 세상 끝까지 거기에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자랑할 때에 이 관습은 맨 처음부터 항상 지킨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증거들을 악의로 왜곡하기 때문에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즉, 로마의 교회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이 큰 경의를 표명하며 경건하게 언급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베드로의 전도로 로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생각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유력했기 때문에 이 생각이 로마 교회에 호감과 권위가 돌아가게 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서방에서는 로마 교회를 존경하는 뜻으로 "사도의 교구"라고 불렀다.

둘째,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아마도 그곳 사람들은 교리와 지혜와 수완과 풍부한 경험 등에서 다른 곳 사람들보다 훌륭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참작해서 로마 시의 명예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더 훌륭한 재능들이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

셋째, 동방과 희랍과 아프리카에서까지도 교회들이 의견 차이로 많이 흔들렸을 때 로마는 그들보다 고요했고 문제가 적었다. 그래서 지위를 빼앗긴 경건하고 거룩한 감독들이 로마에 가서 피난처를 얻은 예가 많다. 서방 사람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두뇌가 예민하지 못하고 느린 편이었기 때문에1919) 새것에 끌리는 점도 적었다. 저 불안한 시대의 다른 교회들보다 로마 교회가 문제가 적었고, 한번 받은 교리를 더욱 굳게 지켰다는 사실은 그 권위를 많이 높였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설명하겠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에서 로마 교회는 적지 않은 존경과 칭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17.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의 논적들이 다른 교회들에 대한 수위권과 최고 권력을 로마에 주고자 한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먼저 그들이 그렇게 역설하는 연합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간단히 보여주고자 한다. 네포티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롬은 연합의 여러 가지 예를 말한 후에 끝으로 교회의 성직 계급 제도를 언급한다. 각 교회에는 그 자체의 감독과 수석 장로와 부감독이 있으며 교회의 질서는 모두 그 치리자들에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1920) 이렇게 말하는 그는 로마 교회의 장로인데 그는 교회 질서에서 연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는 한 머리가 모든 교회를 연합시키는 유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당면한 논증에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잊어버리고 빠뜨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만 허락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기꺼이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의 진정한 기초는 키프리아누스가 뛰어난 말로 묘사한 것임을 제롬은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직은 하나요, 이 '전체'의 한 부분을 각 감독이 차지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요, 결실이 늘어남에 따라 교회는 많은 수로 널리 퍼져 나간다. 태양의 광선은 많으나 빛은 하나이며, 나무에 가지는 많으나 굳센 줄기 하나가 땅 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으며,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흘러 각각 자체의 풍부한 데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고 갈라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도 주의 빛을 풍부하게 받아 많은 광선을 온 세상에 발한다. 그러나 하나의 빛이 각처에 확산되는 것이다. 몸의 연합은 깨뜨려지지 않고 교회의 가지들은 온 지구 위에 뻗어 나가며 넘치는 시내들을 쏟아 보낸다. 그러나 머리와 근원은 하나이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는 음녀가 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집을 알며 정절과 정숙으로 결혼의 신성함을 지킨다." 이 말들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 전체를 거느리는 보편적 감독이라고 한다. 이 머리 아래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전체의 부분들을 차지한다고 한다.1921) 완전한 감독직이 그리스도의 수중에만 있고 각 감독은 그 일부분을 가진다면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은 어디 있는가?

이런 말들을 인용한 목적은 카톨릭 교도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원리, 즉, 지상의 한 머리 아래에서 성직 계급 제도의 통일이 된다는 생각을 고대 교부들이 전연 몰랐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제 7 장  로마 교황권의 기원과 발달 : 로마 교황권이 세력을 확대하여 무제한으로 교회의 자유를 압박하게 되기까지

(초기의 로마 교구는 지위가 높지 않았다. 1-4)

1. 니케아와 에베소의 회의에서 로마 교구가 가졌던 지위

로마 교황청의 지상권이 고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대해서 니케아 회의의 결정보다 더 일찍 확인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결정에서총감독 중의 첫째 자리가 로마 감독에게 주어졌고 그에게 인근 교구들의 교회도 보호하라고 명령했다.1922) 이 회의는 이와 같이 그와 다른 총감독들 사이에 한계를 정하고 그들에게 각각 한계를 지정했으나 그를 모든 총감독의 머리로 세우지 않고 지도자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 때의 로마 감독 율리우스를 대신해서 비투스와 빈센티우스가 회의에 참석했었는데, 그들에게는 넷째 자리를 주었다.1923) 만일 율리우스가 교회의 머리였다면 왜 그의 대리자들을 넷째 자리를 담당케 하였는가라고 묻고자 한다. 성직계급의 순서를 정확하게 반영했다고 볼 수 있는 이 회의에서 어떻게 아타나시우스가 회의를 주관할 수 있었겠는가?1924) 에베소 회의에서는(로마 감독) 코일레스티누스가 자기 교구의 위신을 확보하려고 계략을 쓴 것 같다. 자기의 대표들을 보내면서, 자기가 가더라도 회의를 주재하게 될 알렉산드리아 감독 키릴루스를 자기의 대리로 만들었다.1925) "이렇게 위임한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이름을 첫 자리에 두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그의 대표들은 낮은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자격으로 의견 진출의 기회를 받으며 그들의 순서를 기다려서 서명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총감독은 코일레스티누스의 이름을 자기 이름과 연결시켰다.

제 2 차 에베소 회의에서는 레오의 사절들이 출석했음에도, 알렉산드리아 총감독 디오스코루스가 그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회의를 주재했으니1926)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회의는 성자와 같은 플라비아누스를 정죄하고 유티케스를 용서하며 그의 불경건을 묵인했으므로 정통적인 회의가 아니라고 로마 측은 항의할 것이다. 그러나 회의가 개최되고 감독들이 서로 자리를 배정했을 때, 로마 교회의 대표들도 이것이 신성한 합법적인 회의인 듯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첫 자리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내주었다.1927) 첫 자리가 자기들의 권리라고 믿었다면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로마 감독들은 자기들의 영예를 위해서 최대의 요구를 했고, 그 때문에 위험한 충돌을 일으켜 교회를 괴롭히며 불안하게 만들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오는 자기의 사절들에게 첫 자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너무도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알고 단념했던 것이다.

2. 칼케돈과 제 5 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다음에 있은 칼케돈 회의에서는 황제의 양보로 로마 교회의 대표들이 첫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이것을 최고의 특권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마르키아누스 황제와 풀케리아(Pulcheria) 황후에게 이 자리를 청원했을 때 그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지 않고 다만 에베소 회의를 주재한 동방 감독들이 모든 일을 소란하게 만들며 권한을 남용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따라서 근엄한 장식이 필요하며 과거의 심히 경박하고 혼란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이 임무에 적합할 수 없으므로 레오는 다른 사람들의 결함과 무능을 이유로 삼아 주재권을 자기에게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1928) 정상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 특별한 은전으로써 얻고자 하는 것은 관습법에 속한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전임 의장들이 일을 잘못했기 때문에 새로 다른 의장이 필요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면 이런 일은 과거에 없었고 앞으로도 영구화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에 대처하는 것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칼케돈 회의에서 로마 감독이 첫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 자리가 로마 교구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근엄하고 유능한 의장이 필요한데 의장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무절제와 무규율로 자격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말을 레오의 한 후계자가 행동으로 인정했다(오랜 후에). 열렸던 제 5 차 폰스탄티노플 회의에 대표들을 보냈을 때 그는 첫 자리를 다투지 않고 콘스탄티노플의 총감독 멘나스가 의장이 되는 데에 곧 찬성했다. 어거스틴이 참석했던 카르타고 회의에서도 로마 감독의 권위가 토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주재한 것은 로마 대표가 아니라 그곳의 대감독 아우렐리우스였다. 사실 이탈리아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에(아퀼레이아 회의) 로마 감독은 출석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대해서 영향력이 많았던 암브로시우스가 회의를 주재했다. 로마 감독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었다. 그러므로 암브로시우스의 명망이 당시에는 밀라노 교회를 로마 교회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1929)

3. 후대에 로마 감독들이 자칭한 높은 칭호는 초기에 없었다

카톨릭 교도들이 놀랍게 자랑하는 "수좌 대주교(primate)"와 기타 교만한 칭호들이 언제 어떻게 잠입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키프리아누스는 자주 코넬리우스를 언급하면서, "형제", "동료 감독", 또는 "동료"라고 부를 뿐이다. 그러나 코넬리우스는 후임자 스테파누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를 자기와 또 다른 감독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약간 엄격한 말로, 그의 거만과 또한 그의 무지를 비난한다.1930) 우리는 모든 아프리카 교회가 키프리아누스 이후에 이 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안다. 카르타고 회의는 아무도 "사제장" 또는 "첫째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고 다만 "제일 교구의 감독" 이라고 부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더 오랜 고대 기록을 본다면, 당시의 로마 감독은"형제"라는 보통 이름으로 만족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순수한 진실의 형태가 계속된 동안은 후대 로마 감독이 점점 오만 무례한 태도로 자칭하기 시작한 이름들은 전혀 들을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최고 감독"이니 "지상 교회의 유일한 머리"니 하는 칭호들을 들었더라도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때 로마 감독이 이런 이름을 감히 자칭했다면 당시의 용감한 사람들은 그의 미련한 행동을 곧 억제했을 것이다. 제롬은 로마 교회의 장로였으므로 사실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 교회의 위신을 주장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도 로마 교회를 그 당연한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것을 본다. 만일 권위를 원한다면 세계는 일개 도시 보다 크다. 왜 그대들은 한 도시의 관습을 내게 제시하는가? 교회법들을 어기고 교만한 행동을 하는 단지 몇 명의 주장을 변호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로마나 굽비오나 콘스탄티노플이나 레기오나 어디 있든지 간에 감독은 다 동일한 가치를 가졌고 다 동일한 사제직을 가졌다. 재물의 힘이나 빈곤의 비천 때문에 감독이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이 아니다.1931)

4. 그레고리우스 1세는 "보편적 감독"이라는 칭호를 거부했다

"보편적 감독"이라는 칭호에 대해서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는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콘스탄티노플의 요안네스가 이 싸움의 발단 원인이 되었다. 그는 보편적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이런 짓을 한 일이 없었다. 이 논쟁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자기의 권리가 빼앗긴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 그 이름 자체가 세속적이며 모독적이고 적그리스도의 선봉이라고 강경히 반대했다. "만일 '보편적'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넘어지면 교회 전체가 그 지위에서 넘어진다고 한다"고 그는 말했다. 다른 곳에서는 "우리의 형제요 동료인 감독이 유일한 감독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모든 감독들을 경멸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대단히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 교만은 적그리스도의 시대가 이미 가까이 왔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천사들과의 동료 관계를 멸시하고 최고의 특별한 자리에 오르려고 한 자를 그는 분명히 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율로기우스와 안디옥의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전임자들 가운데는 이 속된 말을 쓰려고 한 사람이 없었다. 만일 한 총감독을 '보편적'이라고 부른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총감독'이라는 칭호를 빼앗게 된다. 그러나 형제들의 영예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유리한 자리를 요구하려는 욕망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사악한 말에 찬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신앙의 단결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과 스스로 높이는 것을 억제해야 된다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이것은 나의 확신에서 나온 말이다. '보편적 감독'을 자칭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불러 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높이는 점에서 적그리스도의 선봉, 즉,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를 높다 하여 뽐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의 아나스타시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일한 뜻을 말한다. "나는 처음 배교자가 창안한 미신적이요 교만한 말에 관련된 그의 자만심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는 우리와 평화를 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당신의 영예에 대한 손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감독이 '보편적'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면 그 보편적 감독이 넘어질 때 보편 교회도 넘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 영예는 칼케돈 회의에서 레오에게 제공되었다고 한 말은 아무런 진실성도 없다. 그 회의의 의사록에는 그런 말이 없기 때문이다. 레오는 이 회의가 폰스탄티노플 교구에 유리한 결의를 한 데 대해서 비난하는 편지를 많이 썼다. 그런 레오가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를 거부했다는 것이 사실이었다면 이 가장 그럴 듯한 증거를 무시했을 리가 없다. 명예를 욕심 낸 그가 자기에 대한 칭찬이 될 일을 알면서도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칼케돈 회의에서 이 칭호가 로마 감독에게 수여되었다고 생각한 그레고리우스는 속은 것이다. 그가 이 칭호는 거룩한 회의에서 출발했다고 단언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사악하고 속되며 가증하고 교만하며 모독적이며, 아니 마귀가 생각해 내고 적그리스도의 사자가 발표한 것이라고 하는 이 우스운 사태를 나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는 한 감독에게만 무엇을 준다면 모든 감독이 당연히 받을 영예를 빼앗길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의 선임자가 거절한 것이라고 첨부한다. 다른 구절을 인용한다. "아무도 이런 이름으로 불러 주는 것을 원한 일이 없다. 감독 계급에서 자기만이 독특한 영광을 차지한다면 모든 형제들의 영광을 부정하는 것같이 되겠기 때문에 아무도 이 외람된 칭호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1932)

(황제 및 대감독들과의 관계에서 로마의 권위는 제한되었다. 5-10)

5. 로마의 재관권의 시초

로마 감독이 모든 교회 위에 재관권(jurisdiction)을 가졌노라고 하며 그 권리는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문제를 이제 논하겠다. 나는 과거에 이 문제로 인한 많은 논쟁이 있었던 것을 안다. 로마 감독이 다른 교회들을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은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수단으로 로마 교구가 점점 어느 정도의 권력을 얻게 되는가를 여기서 검토하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차지하게 된 얼마 오래지 않은 그 무제한적인 지배력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겠다. 이 문제는 적당한 곳으로 미루겠다.1933) 여기서는 얼마나 빠른 시기에 또 어떤 방법으로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에 대한 불법적인 권리를 잡으려고 서둘렀는가를 간단히 보는 것이 좋겠다.

콜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아들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의 치세 시에, 동방 교회들이 아리우스파 때문에 분열과 소란을 겪었을 때 정통신앙의 지도적 옹호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추방을 당했다. 이 재난을 만난 그는 할 수 없이 로마로 가서 로마 감독의 권위로 원수들의 광태를 억누르며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힘을 주려고 했다. 그는 당시의 로마 감독 율리우스의 정중한 대접을 받았고 서방 감독들이 그의 주장을 지지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경건한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절실했고 로마 교회가 가장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권위를 그에게 기꺼이 허락했다 그러나 이 사태는 그들이 로마 교회와의 친교를 심히 존중했다는 것과 그 친교의 길이 끊기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는 것뿐이고 그 이상의 다른 뜻은 없었다.

그 후에 악한 사람들도 로마 교회의 위엄을 많이 높였다. 그들은 합법적인 판결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로 도망해서 피난처를 얻었다. 자기의 감독에게 정죄를 받은 장로나 자기 지방의 교회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감독은 저마다 곧 로마에 호소했다. 또 로마 감독들은 원근 각지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 일종의 특별 권력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런 호소들을 상식에 벗어날 정도로 환영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플라비아누스에게 정죄를 받은 유티케스는 부당한 처사를 당했다고 레오에게 호소했다. 레오가 즉시 이 악한 주장을 지지한 행동은 성급하고 경솔한 것이었다. 그는 마치 플라비아누스가 무죄한 사람을 변호도 듣지 않고 정죄한 것같이 그를 통렬히 공격했으며, 이 야심이 성공해서 유티케스의 불경건을 일시 옹호할 수 있었다.1934)

아프리카에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떤 악한이든지 정규 재판을 받게 되면 곧 로마로 도망해서 자기 나라 사람들에 대한 온갖 중상모략을 늘어놓았다. 그뿐 아니라 로마 감독은 언제든지 개입할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당돌한 태도 때문에 아프리카 감독들은 해외로 호소하는 것을 금지하며 그런 사람은 파문하기로 결정했다.1935)

6. 당시의 로마가 가졌던 권한의 특색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로마 교구가 어떤 권리와 권한을 가졌던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교회의 권한은 네 가지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 감독 임명과 회의 소집과 상소 수락 또는 재판권과 징계 명령 또는 견책의 넷이다.1936)

모든 고대의 회의들은, 감독은 각각 그곳의 대감독이 임명하라고 명령했다. 로마 감독이 자기 감독구역 이외의 감독을 임명하라고 한 회의는 없다. 그러나 이탈리아 감독들은 모두 로마에 가서 취임식을 하는 관습이 생겼다. 다만 대감독들은 자기들이 이런 종속 상태에 끌려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감독이 임명될 때 로마 감독이 장로 한 사람을 파견해서 의식을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참석하게 했다. 라우렌티우스가 죽은 후에 콘스탄티우스가 밀라노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이런 예가 있었던 것을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아주 오랜 규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경의 표시와 예의로 대표들을 서로 파견하여 취임식에 참석시키며 동지 관계를 표명했다. 이렇게 자발적이던 일이 후에 하나의 의무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전에는 로마 감독의 임명권이 니케아 회의의 결정에 있는 것과 같이 그 자신의 감독구역에, 즉, 로마가 있는 지방의 교회들에 한정되어 있었다.

취임식에는 종교회의 서한을 반드시 보냈고, 이 서한에 보면 로마 감독이 어떤 점에서도 다른 감독들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취임식이 있은 직후에 대감독들은 의례히 엄숙한 문서로 그 신앙을 고백하며 거룩한 정통적 회의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신앙을 표명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승인을 교환했다. 만일 로마 감독이 신앙 고백을 다른 대감독들에게서 받기만 하고 자기는 고백하지 않았다면 그는 상전으로 인정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 고백을 듣는 동시에 자기도 고백하며 공통된 법에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상전이 아니고 동료라는 표징이었다. 이 관례는 그레고리우스가 아나스타시우스와 콘스탄티노플의 키리아쿠스에게 그리고 그 외 모든 총감독들에게 동시에 보낸 편지들에 나타나 있다.1937)

7. 상호 충고

다음은 충고 또는 견책의 문제를 보기로 한다. 로마 감독들은 다른 감독들에게 충고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충고를 받았다. 이레니우스는 빅토르가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위험한 논쟁을 일으켜 교회를 소란하게 했다고 해서 그 경솔한 행동을 엄중하게 책망했다. 빅토르는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복종했다.1938) 당시의 감독들은 로마 감독에 대해서, 그가 죄를 지을 때에는 언제든지 충고하며 견책하는 자유를 행사했다. 로마 감독 편에서도 필요한 때에는 다른 감독들에게 그 의무를 회상시키며 그 과실을 책망했다. 키프리아누스가 스테파누스에게 갈리아 지방 감독들에게 경고를 하라고 권고했을 때에 그는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더 큰 권한에 두지 않고 모든 감독들이 공통으로 가진 권위에 두었다. 내가 묻는 것은, 만일 스테파누스가 갈리아를 관리하고 있었다면 키프리아누스는 "그들은 당신의 사람들이니 명령하시오"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달랐다. "우리들을 서로 연결하는 형제적 동지애는 우리가 서로 충고할 것을 요구한다"고1939) 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매우 온유했던 이 사람이 스테파누스가 너무 거만해졌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아주 엄격한 말로 그를 공격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로마 감독은 자기의 지방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재판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8. 회의 소집권

회의 소집에 대해서는, 한 지방의 회의를 일정한 때에 소집하는 것 은 그 지방의 대감독이 할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로마 감독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더욱이 세계적인 회의는 황제만이 소집할 수 있었다.1940) 만일 어느 감독이 회의를 소집하려고 했다면 그의 지방 이외의 감독들이 소집령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곧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공평하게 모든 감독을 소집했다. 참으로 소크라테스의 기록에 의하면, 율리우스는 자기를 안디옥 회의에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동방 감독들에게 항의하며 로마 감독에게 알리지 않고는 아무 일도 결정하지 말라는 교회법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1941) 그러나 이것이 교회 전체를 구속하는 결정에 대해서 하는 말인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로마시의 오랜 역사와 위대성 그리고 로마 교구의 위엄을 보아서, 로마 감독이 출석하지 않은 회의에서 종교에 관한 보편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로마 감독이 출석을 거부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러나 이 일과 교회 전체를 지배하는 일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리는 로마 감독이 지도적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가 지금 주장하는 것, 곧 로마 감독이 모든 감독을 지배했다고 하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

9. 위조문서를 이용했다

넷째 종류, 즉, 상소를 받는 권한이다. 상소를 받는 법정에 있는 사람에게 최고 권한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로마 감독에게 상소하는 사람이 많았고 로마 감독 편에서도 사건 심의를 맡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가 월권행위를 할 때마다 세상은 그를 비웃었다. 동방과 희랍은 물론이고 갈리아 감독들까지도 로마 감독이 그들 위에 불법적인 권위를 행사하려는 것으로 보일 때에는 강력하게 저항했다.1942)

아프리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토론이 계속되었다. 어거스틴도 참석한 밀레비스 회의에서 바다 건너로 상소하는 자들을 파문한 후에 로마 감독은 이 결정을 수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대표들을 보내서 니케아 회의가 이것을 하나의 특권으로서 자기에게 준 것같이 보이려고 했다. 대표들은 니케아 회의의 의사록을 가지고 가서, 로마 교회 서고에 보관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감독들은 자기의 주장을 변호하는 로마 감독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저항하는 동시에, 콘스탄티노플과 다른 희랍 도시에는 의심할 여지가 적은 사본들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 결과 로마측이 주장한 것이 동방 측의 기록에는 없는 것이 발각되었다. 그래서 로마 감독에게 최고 재판권을 주지 않는다는 결정이 확인되었다.1943) 이 부끄러운 사건에서 로마 감독 자신의 철면피가 드러났다. 그는 사르디카 종교 회의를 니케아 종교 회의로 바꾸려고 사기를 꾸미다가 그 명백한 협잡이 탄로 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회의에 보낸 위조 서한을 첨가한 자들의 사악한 심사였다. 그 서한은 어떤 카르타고 감독이 쓴 것으로, 거기서 필자는 자기의 선임자 아우렐리우스가 감히 로마 감독에게 대한 복종을 철회한 교만을 정죄하며 자기와 자기 교회는 복종하겠노라고 하면서 한 탄원자로서 용서를 빌었다.1944) 로마 감독의 권위를 증명하는 비범한 고대 문서들이란 것은 이런 것들이다. 고대 문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졌지만 거기에 있다는 증거는 유치한 것이어서 장님이라도 그 협잡을 느낄 수 있다. 그 위조 서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악마 같은 담력과 고집으로 교만해져서 그리스도와 성 베드로에게 반역했으니 당연히 저주와 정죄를 받아야 한다."밀레비스 회의에 참석한 어거스틴과 다른 여러 교부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이 하찮은 글을 반박하기 위해서 많은 말을 할 필요는 무엇인가? 카톨릭 교도들도 겸허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심한 수치심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라티아누스도, 동기가 악의였는지 또는 우직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외에 상소하는 자는 파문한다"는 저 결정에 대해서는 "로마 감독에게 상소하지 않고"라는 예외를 첨가했다.1945) 한 가지 일을 위해서 제정한 법임을 누구든지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한 가지를 그 법에서 제외한다는 이 몰상식한 짐승 같은 자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해외에 호소하지 말라고 한 결정은 바로 로마에 상소하는 것을 금한 것이다. 이 훌륭한 해석가는 로마를 이 통상법에서 제외했다.

10. 콘스탄티누스와 멜키아데스 감독과 아를(Arles) 종교 회의

그러나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위해서 초기의 로마 감독에게 어떤 재판권이 있었는가를 명백하게 할 만한 역사적 사실을 하나 들겠다. 카사에 니그라에의 도나투스가 카르타고의 카에킬리아누스 감독을 고발했고 피고는 변론도 해보지 못하고 정죄를 받았다. 그는 감독들이 자기를 반대해서 공모한 줄을 알고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 사건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넘겨졌다. 황제는 문제가 교회의 재판에서 결정되기를 원하여, 로마 감독 멜키아데스에게 사건 심의를 위촉하고 동시에 이탈리아와 갈리아와 스페인의 감독들을 몇 명 동료로 구성했다. 교회 내의 사건에 대한 상소를 심의하는 것이 로마 감독의 정상적인 재판권에 속한 것이었다면 왜 멜키아데스는 자기의 권위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 따라 다른 감독들의 동참을 허락했는가? 왜 자기의 직권으로 재판을 하지 않고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움직였는가? 그러나 그 후에 있은 일들을 듣기로 하자.

카에킬리아누스는 로마에서 이기고, 카사에 니그라에의 도나투스는 중상을 했다가 실패했다. 그는 상소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상소에 대한 심의를 아를의 감독에게 위촉했다. 아를의 감독은 로마 감독이 결정한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신중하게 검토하려고 재판 석에 앉았다. 만일 로마 감독에게 더 이상 상소할 수 없는 최고의 권한이 있었다면 왜 멜키아데스는 자기보다 아를의 감독이1946) 선택되었다는 이 수치스런 모욕을 용인했는가? 또 이렇게 한 것은 어느 황제였는가? 로마 감독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의 노력뿐만 아니라 제국의 전력을 거의 다했다고 그들이 자랑하는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로마 감독이 가지고 있던 권한은 지금 그들이 선전하는 것과는 거리가 대단히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로마 교황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최고 지배권을 주셨다고 선언하며 전 세계의 지지를 얻어 모든 시대에 그 지배권을 행사했노라고 거짓말을 한다.1947)

(5, 6세기 교황들의 태도 : 로마 대 콘스탄티노플. 11-16)

11. 위조와 횡령

나는 로마 교황들이 모든 것을 그들의 교구에 돌리며 거기 대해서 확신 있는 권리 주장을 하는 서한과 교서와 교령이 얼마나 많은가를 안다. 그러나 약간의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서들은 내용이 단조롭기 때문에 한번 맛을 보면 곧 어디서 만들어 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어떤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나클레투스가 "게바"는 "머리"라는 뜻이라고 했다는 저 유명한 해석을 참으로 아나클레투스가 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그라티아누스는 그런 기록을 남겼다. 지금 카톨릭 교도들은 로마 교구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라티아누스가 제멋대로 모아 둔 이런 너절한 이야기들을 악용하면서 우리에게 대항한다. 암흑시대에 단순한 사람들을 속이던, 그 똑같은 거짓말을 그들은 이 광명한 현대에도 팔고 다닌다.1948)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을 논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다. 그것들은 완전히 어리석은 모순이기 때문에 분명히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나는 초대 교황들의 진짜 서한들이 현존하는 것을 인정한다. 거기서 그들은 굉장한 칭호를 사용하여 로마 감독직의 위대성을 주장한다. 레오의 어떤 서한도 이런 종류에 속한다. 레오는 학식과 웅변에 대한 지나친 자랑과 권세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교회들이 그의 과대 망상적인 주장을 믿어 주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자랑에 불쾌감을 느끼며 그의 권세욕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희랍과 근처 지방들을 관할하는 자기의 대리로 데살로니가의 감독을 임명한 일이 있다. 갈리아를 위해서 아를의 감독 또는 다른 감독을 임명했다. 스페인을 관할하는 대리로서 세빌랴의 감독 호르미스다스(Hormisdas)를 임명했다. 그러나 그런 임명을 할때 마다 로마 대감독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특권에 손상이 없게 한다는 조건으로 이런 임명을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레오 자신의 언급에 의하면, 이런 특권 중의 하나는 무슨 일에 대해서 의심이 생길 때에는 우선 로마 대감독에게 문의하라는 것이라고 한다.1949) 그러므로 이 대리직들을 주는 조건은 감독이 그 정상적 재판권을 행사하며 대감독이 상소를 받고 지방회의가 교회 문제를 처리하는 데 대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 감독이 아무 재판권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 다만 교회간의 친교의 성격과 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분쟁을 해결할 목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12.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의 교황의 권력

그레고리우스 시대에는 이미 고대의 방법이 많이 변했다. 로마 제국은 흔들리고 분할되었으며 갈리아와 스페인은 큰 재난이 반복되었고 일리리쿰은 황폐했으며 이탈리아는 약탈을 당했다. 아프리카는 계속되는 재난으로 거의 파멸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런 무질서한 정치 정세에서 적어도 신앙을 지키려고 또는 전멸을 면하려고 각지의 감독들은 모두 로마 감독과의 연락을 더욱 긴밀히 했다. 그 결과로서 로마 교구의 위엄뿐만 아니라 권력이 현저히 증대되었다. 나는 이렇게 된 원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으나 적어도 로마 감독의 권력이 이전 시대들보다 한층 더 신장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마음대로 무제한으로 지배한다는 것과는 아주 달랐다. 로마 교구는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사악하고 완고한 감독을 동료들의 힘으로는 그 의무의 범위 내에 머무르게 할 수 없을 때 로마 감독은 그의 권위로 그런 자를 굴복시키며 억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권리를 존중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자기도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충실히 지킨다고 진정을 토로한 일이 있다. "나는 야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에게서도 그가 당연한 권리로서 가진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나는 매사에 형제들을 존중하고자 한다." 그의 저술에서 그의 수위권이 위대하다고 자랑한 말은 "과오를 범하고도 사도적 교구에 복종하지 않을 감독을 나는 모른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첨가한다. "과오가 없을 때에는 겸손의 질서에 따라 모두 동등하다." 그는 죄를 지은 감독들을 시정하는 권리를 맡는다. 그러나 모든 감독이 그 의무를 다할 때에는 자기도 다른 감독들과 동등하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가 자기의 권리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원하는 사람은 찬성하고, 싫은 사람은 항의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비잔틴의 수좌 대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사람은 지방 종교 회의에서 정죄를 받은 후에 그 결정을 완전히 부정했다. 동료들이 그의 고집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는 그레고리우스에게 심사하도록 지시했다.1950) 여기서 보면 그레고리우스는 정상적인 재판권에 위반하는 일은 전혀 시도하지 않고, 다른 감독들을 돕기 위해서 하는 일도 다만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 했음을 알 수 있다.

13. 그레고리우스 재임 중에 교황직에 가한 제한

그러면 로마 감독 그레고리우스가 가졌던 권한은 비상 대책이 필요한 때에 다른 감독들을 방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돕기 위해서완고하고 무절제한 감독들에게 저항하는 것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자기는 모든 사람의 시정과 교정을 언제든지 받겠다고 말하는 그는 자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권한을 인정하는 이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한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다른 서한에서 그는 아퀼레이아 감독에게 로마에 와서 자기와 다른 감독들 사이에 벌어진 교리상의 논쟁에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런 명령도 자기의 권위로 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유일한 재판장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종교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시대에는 아직 겸허한 생각이 있어서, 로마 감독의 권한에는 넘을 수 없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고 로마 감독 자신은 다른 감독들의 밑에 서지 않는 동시에 위에 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히 그레고리우스는 이런 사태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감독이란 명목 하에 세상에 끌려가며, 평신도였을 때보다 더 많이 세상 걱정으로 고통을 느낀다고 자주 불만을 말했고 그의 높은 자리에서 번잡한 세속 문제로 인해 압박을 당한다고 했다. 또 다른 구절에서, "행정의 무거운 부담에 눌려 나의 마음은 하늘의 일들을 향해서 전혀 비약할 수 없다. 나는 사건들의 많은 파도에 밀려다니며, 저 고요한 여가가 있은 후에는 다시 거친 인생의 폭풍에 시달린다. 나는 바다 밑에 가라앉았고 폭풍이 나를 삼켜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1951)라고 했다. 이런 말들을 보면 그가 현대에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목자의 일을 못하면서 목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세속 정치에서 물러섰고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황제의 백성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부득이한 필요가 없는 한 다른 교회들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의 직무에만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미궁 속에 든 것같이 느꼈다.

14.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수위권을 다투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952) 그 때의 콘스탄티노플 감독은 수위권 문제로 로마 감독과 다투고 있었다. 황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후에는 제국의 위엄을 위해서 그곳 교회도 로마 교회 다음 가는 지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 로마 교회에 수위권을 부여한 것도 그때에 제국의 수도가 거기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라티아누스에게 교황 루키우스의 교서라는 것이 있어서, 대감독과 수좌 대감독이 주관해야 하는 도시들은 이미 존재했던 행정 기구에 따라서 결정됐다고 했다. 교황 클레멘스의 교서란 것도 옛날 로마 시대 에 이교의 제주들이 있던 도시들에 총대감독들이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1953) 이것은 허황한 글들이지만 사실에서 이어 온 것이다. 될 수 있는 한 변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당시의 실정대로 지방을 편성하고, 그 지방 내에서 가장 위엄과 세력이 있는 도시에 수좌 대감독이나 대감독을 배치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투리노(Turin)회의에서는 각 지방의 행정 중심지에 우선적으로 감독을 둔다고 결정했다. 행정의 중심이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 일이 있으면 대감독의 권리도 새 중심지로 옮겨간다고 했다.1954) 로마 감독 이노센트는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간 후에 로마의 옛 위엄이 쇠퇴한 것을 보고는 자기 교구의 장래를 염려해서, 제국의 중앙 도시들이 변할 때마다 교회의 대 감독구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반대되는 법을 선포했다. 그러나 종교 회의의 권위가 한 개인의 의견보다 우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노센트의 주장을 불신하는 것이 마땅하다.1955) 여하간 그는 그 자신의 규정을 가지고 제국의 세속적 질서에 따라 대감독들을 배치하는 것이 처음부터 있었던 제도였다는 것을 밝혔다.

15. 콘스탄티노플이 인정받은 것을 레오는 분개했다

이 오랜 규정에 따라, 제 1 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므로 그곳의 감독은 로마 감독 다음가는 특권을 가진다고 결정했다.1956) 그러나 훨씬 뒤에 칼케돈에서 같은 결정이 통과됐을 때 레오는 맹렬히 반대했다 그는 600여명의 감독들이 결정한 것을 감히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다른 교회들에게 준 영예를 박탈해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주었다고 통렬히 비난했다. 도대체 왜 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세상을 괴롭히게 되었는가? 그는 니케아 회의가 이미 선포한 일은 책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한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는 듯이, 또는 총대감독구들을 배정한 목적이 교회를 조직하려는 데 있지 않고 다른 데 있는 듯이 생각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조직은 시대의 정세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니케아 회의가 한번 알렉산드리아 교회에 부여한 권위를 다시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주어서는 안 된다는 레오의 주장은 쓸데없는 것이었다.1957)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이 결정은 시대의 정세에 따라 취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여기에 주로 관련되었던 동방 감독들은 왜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는가? 디오스코루스 대신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 그들이 세운 프로테리우스는 분명히 출석했었고, 위엄이 깎인 다른 총대감독들도 출석했었다.

반대한다면 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지, 지위에 변동이 없는 레오가 할 일이 아니었다. 당사자들은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찬성을 하는데 로마 감독만이 항의했다. 그 동기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얼마 후에 있을 일을 예측한 것이 분명하다. 옛날 로마의 영광이 쇠퇴하는데 따라, 콘스탄티노플이 둘째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와 첫자리를 다투게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레오의 반대는 회의의 결정이 찬성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후임자들은 자기들이 패한 것을 알고는 조용히 완강한 태도를 포기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을 둘째 총대감독으로 생각하는 것을 인정했다.

16. 단식자 요한의 교만과 그레고리우스의 겸손

그러나 조금 지난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주관한 요한이, 자기는 "보편적 총대감독"이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이때에 그레고리우스는 자기 교구의 정당한 입장을 지키려고 꾸준히 반대했다. 요한의 교만과 광태는 참으로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교구의 범위를 제국의 판도와 일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자기가 가지겠다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가 그 칭호를 쓰든 간에 그것은 사악하고 불경건하고 너무 가증한 칭호라고 하며 극도로 싫어했다. 다른 곳에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율로기우스가 비슷한 칭호로 자기를 부른데 대해서 화를 내기까지 했다. "귀서의 서두에 저를 '보편적 감독'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제가 금지한 존칭을 일부러 쓰셨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치에 닿는 이상의 것을 남에게 주시면 그만큼 귀하는 빼앗기게 됩니다. 형제들의 영예가 깎이는 것을 저는 자신의 영예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편 교회의 영예와 형제들의 생명과 힘이 곧 저의 영예입니다. 그러나 귀하가 저를 '보편적 감독'이라고 부르신다면 그것은 저에게 전적으로 주시는 것을 귀하 자신에게는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1958)

참으로 그레고리우스의 입장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마우리티우스 황제의 후원을 받은 요한은 끝까지 목적을 관철하려고 애썼다. 그의 후계자 키리아쿠스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찬탈자들인 포카스와 페핀과의 관계를 통해서 로마의 권한이 확립되었고 그 후에 확대되어 교회에 해를 끼쳤다. 17-18)

17. 마침내 교황의 수위권이 확립되었다

마침내 마우리티우스 황제가 살해된 후에 그 뒤를 이은 포카스가 왜 로마 측에 더 호의를 보였는지는 모르지만(아무 분쟁도 없이 로마에서 대관식을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가 원한 일이 없는 것을 보니파키우스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로마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논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면 황제의 이 혜택도 로마 감독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조금 후에 희랍과 아시아 전체와 로마와의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로마 감독에 대한 갈리아의 존경은 자기 뜻에 맞는 경우에만 복종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페핀이 나라를 점령한 뒤 처음으로 갈리아는 굴복을 하게 되었다. 이는 로마 감독 자카리아스가 페핀의 배신과 강도 행위를 도와서 합법적인 왕을 추방하고 나라를 약탈물처럼 빼앗게 하고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갈리아 교회들에 대한 로마 교구의 재판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강도들이 약탈물을 나누듯이, 이 훌륭한 신사들은 진정한 왕에게서 빼앗은 지상의 지배권은 페핀이 차지하고 자카리아스는 모든 감독들의 머리가 되어 영적 권력을 잡기로 한 것이다.

(새로 시작한 일의 통례대로) 이 권력도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후에는 샤를마뉴 대제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그 사람도 로마 교황의 노력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교황의 덕을 입은 사람이었다.

각처의 교회들이 전부터 쇠퇴했었다고는 생각되지만, 그 때에 갈리아와 독일의 교회들의 옛날 형태가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파리 궁정 공문서 보관소에는 당시의 간단한 기록들이 남아 있는 데, 그 중에서 교회에 관한 것은 페핀과 샤를마뉴가 로마 교황과 맺은 협정에 언급되어 있다.1959) 이 점을 보아서, 그 이전에 있은 양해 조건이 이때에 변경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8.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 시대까지의 교회의 쇠퇴

그때부터 사태는 날로 악화되어 로마 교황청의 전제정치는 점점 강화되고 증대되었다. 이렇게 된 원인의 일부는 감독들의 무지에 있었고 일부는 그들의 태만에 있었다. 한 감독이 모든 것을 독점하고 법과 권리를 무시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려고 더욱 더 날뛸 때에, 다른 감독들은 그의 야심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비록 용기는 있었지만 진정한 학식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큰 일을 할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베르나르두스 시대에 로마가 모든 거룩한 일을 어떻게 또 얼마나 광범위하게 더럽혔으며 교회 질서 전체가 얼마나 붕괴되었던가를 알 수 있다. 베르나르두스는 야심가, 욕심꾸러기, 성직 매매자, 신성 모독자, 축첩자, 근친상간한 자, 그 밖의 모든 극악무도한 자들이 전세계로부터 로마에 모여들어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교회 내의 영예를 얻거나 지키려고 애쓰고 있으며, 사기와 기만과 폭력이 휩쓸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는 당시의 재판 절차가 교회나 일반 법정에 합당치 못한 가증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교회에는 야심가들이 가득하며, 도적들이 길가는 사람들에게서 약탈한 물건을 소굴에 돌아가서 나눌 때와 같이 아무도 범죄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입법자의 입에 주의하는 사람은 적고 모두 그의 손만을 쳐다본다. 그럴 듯한 일이다. 그 손들이 교황의 모든 일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향해서 잘했다, 잘했다고 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얻은 약탈물로 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자들의 거리에 빈민들의 생명이 흩어져 있다. 진흙 창에서 은이 번쩍거린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달려든다.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힘센 사람이 집어간다. 또는 빨리 달리는 자가 가진다. 그러나 이런 도덕성, 아니 이런 죽음은 당신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일들 속에서 당신은 많은 값진 치장을 첩첩이 두르고 목회의 의무를 수행한다. 감히 말한다면, 그것은 양을 치는 목장이 아니라 마귀들을 먹이는 곳이다. 물론 베드로가 이렇게 실천했고 바울도 이런 놀이를 했다. 당신의 법정은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보다 선물을 받는 것에 익숙해 있다. 악인들이 거기서 이익을 얻지 못한다 하나 선인들은 손해를 본다." 상소가 악용되는 데 대한 그의 말을 읽고 전율을 느끼지 않을 경건한 사람은 없다. 끝으로 로마 교황청이 재산권을 횡령하는 그 한없는 탐욕에 대해서 베르나르두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나는 교회들이 수군거리는 공통적인 불만을 말한다. 교회들은 갈기갈기 찢기고 수족이 잘렸다고 외친다. 잔인한 타격들을 한탄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 교회가 전혀 없거나 또는 거의 없다. 무슨 타격이냐고 묻는가? 감독들은 수도원장을, 대감독들은 감독들을 끌어내는 등의 일과 그 밖의 그와 비슷한 일들이다. 이런 일을 용서할 수 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행동으로 당신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의는 증명하지 못한다. 당신들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짓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마땅히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을 임명한 목적은 각 사람의 영예와 지위를 보존하라는 것이지 결코 그 영예와 지위를 탐내라는 것이 아니다."1960)

나는 많은 예들 중에서 이 몇 가지만 언급하기로 했는데, 이는 교회가 얼마나 심하게 쇠퇴되었는가를 독자들이 아는 동시에 이 큰 재난 때문에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슬픔과 고민에 빠졌던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후대 교황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와 베르나르두스의 원리에 반대되는 주장을 했다. 19-22)

19. 현대의 교황 제도와 그 권력 주장

지금 우리는 중간 시기(레오와 그레고리우스의 시대)에 로마 교황이 가졌던 우월한 지위와 광범위한 재판이 교회의 것이었다고 인정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교황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의 지상의 영토나 세속적 통치권은 말하지 않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1961)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는 영적 지배와 현대의 실정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그들은 교황을 간단하게 정의해서, 지상에 있는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이며 전세계의 보편적 감독이라고 한다.1962) 그러나 교황들은 자기의 권위에 대해서 굉장히 거만하게, 명령권은 자기들의 손안에 있고 다른 사람들은 복종해야 하며 자기들의 발언은 베드로의 거룩한 음성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받아들여야 하고 지방 종교 회의들은 교황이 함께 참석하지 않으므로 효력이 없으며 자기들은 어떤 교회에 대해서든지 성직자를 임명할 권한이 있고 또한 다른 곳에서 임명된 자들을 로마에 소환할 권한이 있다고 한다. 그라티아누스가 긁어모은 것에는 이런 따위의 말이 무수하지만 독자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나는 되풀이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요점은, 로마 감독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최고의 재판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교리를 판정하고 정의하든, 법을 제정하든, 규율을 세우든, 또는 재판을 하든, 로마 감독만이 최고 결정권을 가졌다고 한다.

또 그들이 "보류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취하는 특권들을 설명한다면 장황하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무한한 권력을 악용할 때 그 정욕을 조절하거나 억제할 만한 재판권을 지상에 전혀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는 수위권을 가졌으므로, 아무에게도 이곳의 교구가 판정한 것을 재심을 할 권리는 없다고 말한다. 같은 식으로, 로마 교황은 심판자로서 황제나 왕이나 교직 계급 전체나 신자들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한 사람이 자기를 모든 사람 위에 심판자로 올려 앉히고서 자기는 아무 사람의 심판에도 복종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런 태도는 더할 나위 없는 오만 불손한 교만이다. 그러나 교황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파괴하며 황폐하게 만든다면, 온 교회를 혼란에 빠뜨린다면, 목자로서의 직분을 강도 행위로 바꾼다면 그런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심지어 철저하게 악한 교황이라도 책임을 질 의무는 없다고 한다. 교황들이 한 말을 들어 보라.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사람이 결정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 교구의 감독은 하나님 자신이 판단하시기로 보류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마찬가지로, "예속자들의 행위는 우리가 판단하지만 우리의 행위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판단하신다."1963)

20. 무모한 권력 주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위조문서들

이런 종류의 교황의 포고들에 무게를 가중하기 위하여 그들은 고대 교황들의 이름을 바꿔 넣고는 맨 처음부터 일이 그렇게 확정된 것같이 보이려고 한다. 우리는 고대의 회의들이 로마 감독에게 허락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그 이상의 무엇을 교황에게 돌리는 것은 최근에 조작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뻔뻔스러워 부끄러움을 모르는 극도에 달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답서를 날조했다. 아무리 먼 지방에서도 로마 감독에게 미리 문의하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고대의 규정에 있는 금지 사항이라고 아나스타시우스가 확언한 것으로 되어 있다.1964) 이것이 전혀 사실 무근한 주장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영예와 위신을 위해서 서로 경쟁적인 처지에 있는 사람이 이렇게 로마 감독을 높이는 말을 했으리라고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이 적그리스도들이 정신이 나가고 눈이 멀 정도가 되어, 건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이자들의 악행이 뚜렷이 보이게 한 것은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9세가 만든 요령집과 클레멘스 교령집과 마르티누스 부록서에는 야만 민족의 왕들과 같은 방약무인한 광포와 전횡이 도처에 노골적으로 또 요란하게 나타나 있다. 카톨릭 교도들은 이런 교령들을 근거로 교황 제도를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지금 교황 제도 하에서 어디서나 신탁 같은 힘을 가진 저 유명한 말들이 생긴 것이다.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 교황은 회의들을 초월한다. 교황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감독이며 지상 교회의 최고 수령이다.1965)

그들의 우매한 교회법 학자들은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들을 학교에서 지껄이며, 카톨릭 신학자들도 그들의 숭배하는 사람에게 아부하려고 그런 말들에 찬성할 뿐 아니라 갈채까지 보내지만 나는 그것을 말하지 않겠다.

21. 지금 교황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레고리우스는 배척한다

그들을 최대한으로 엄격하게 취급해야 함이 마땅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 심한 교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키프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할 것이다. 그는 회의를 주재했을 때에 감독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를 감독들의 감독이라고 말하거나 동료들을 강제적으로 복종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는 없다." 또 조금 후에 카르타고에서, "아무도 사제들의 왕 또는 첫째 감독이라고 부르지 말라"고1966) 한 결정을 반대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모으며 회의들에서 많은 법규를 모으고 고대인들의 저서에서 많은 의견을 모아서, 로마 감독들을 그 당연한 자리에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너무 추궁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이런 말들은 하지 않겠다. 그렇더라도 로마 교황청의 이 훌륭한 보호자들은 그들도 아는 바와 같이 그레고리우스가 저주한 "보편적 감독" 이라는 칭호를 어떤 파렴치한 태도로 감히 변호할 생각인지를 대답해 보라, 만일 그레고리우스의 말을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감독을 보편적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를 적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이 된다.

"머리"라는 말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레고리우스는 다른 곳에서 말했다. "베드로는 몸의 가장 중요한 지체였다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는 특수한 사람들의 집단에서 각자 머리였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지체는 한 머리 아래에 있다. 율법 이전의 성도들과 율법 아래의 성도들과 은혜 안에 있는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하는 지체들로 선정되었다. 또 아무도 자기를 '보편적'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로마 감독이 자기에게 명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실은 그레고리우스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율로기우스가 자기는 "당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했을 때에 그레고리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명령'이란 말을 저에게 들리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누구이며 당신이 누구신지를 저는 압니다. 등급에서 당신들은 저의형제시요 덕성에서는 저의 부모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명령한 것이 아니고 유익하다고 본 일을 삼가 지적한 것입니다."1967)

로마 감독은 자기의 재판권을 무제한으로 확대함으로써 다른 감독들뿐 아니라 각 교회에도 무섭고 중대한 손해를 입힌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교회들을 갈기갈기 찢으며, 폐허가 된 다른 교회들을 이용해서 자기의 권한을 강화하려 한다.

그는 자신을 모든 심판에서 면제시키며, 자기의 변덕을 곧 법으로 여 길 만큼 전제적인 지배를 하기를 원한다. 이런 행동은 확실히 교회 질서와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며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그것은 경건한 마음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인간적인 감각에도 전혀 배치된다.

22. 현재의 교황권의 부패상

그러나 나는 개개의 문제점을 일일이 검토하지 않기 위해, 로마 교황의 가장 충실하고 훌륭한 지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교황 제도의 현상을 옹호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고 호소한다. 그레고리우스나 베르나르두스와 같은 거룩한 분들은 자기 시대의 교회 상태를 개탄했지만 그 때에 비하면 현재의 교황 제도가 백 배나 더 부패한 것이 분명하다. 그레고리우스는 자기가 실질적인 일 때문에 마음이 너무도 산만해진다고 자주 불만을 말했다. 감독이란 구실로 세상에 다시 끌려가며, 평신도로 일했을 때보다 더 큰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고, 번잡한 세속문제에 눌려 마음이 하늘 일들을 향해서 비약 할 수 없으며, 사건들의 많은 파도에 밀려다니며 거친 인생의 폭풍에 시달려 "나는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1968) 그는 세속적인 사무를 보면서도 설교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필요한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그들을 바로잡아 주며 교회를 다스리고 동료들에게 의견을 말하며 의무를 다하도록 권면했다. 이 모든 일을 하고도 틈을 타서 저술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바다 밑에 빠졌다고 자신의 불행을 한탄했다. 당시의 행정 사무가 "바다"였다면 현재의 교황 제도는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때와 지금은 어디가 서로 같은가? 지금은 설교도 없고 권징도 올바르게 지켜지지 않으며 교회들에 대한 열의도 없고 아무런 영적 활동도 없다. 모름지기 있는 것은 세상뿐이다. 그래도 이 미로를1969) 가장 질서 정연한 것같이 찬양하고 있다.

베르나르두스가 당시의 죄악들을 보았을 때에 그는 어떤 불만을 토로했으며 얼마나 통탄했는가?1970) 그가 만일 현재의 말세를, 타락 시대보다도 더 나쁜 우리의 시대를 본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모든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비난한 것을 신성한 것이라고 고집할 뿐만 아니라, 분명히 성자들이 전연 알지 못한 교황 제도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증거를 악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심한 패악인가? 나는 베르나르두스 시대에는 모든 일이 극도로 부패해서 현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레오와 그레고리우스의) 중간 시기에서 구실을 찾는 자들은 철저하게 파렴치하다. 그들은 형제들의 일인 독재를 옹호하기 위해서 고대 로마공화국의 상태를 찬양하는 자들과 같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자유에 대한 찬양을 빌려다가 그들의 전제 정치를 장식하려고 한다.1971)

(후기 교황권을 규탄한다. 23-30)

23. 로마에는 교회나 감독직이 있는가

끝으로, 우리가 이 모든 일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로마에 이런 혜택들이 있을 만한 교회가 없으며 이런 특권 계급을 유지할 만한 감독 또한 없다고 우리가 말하게 되면 새로운 충돌이 생기게 된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주장이 거짓말이란 것을 증명했지만 그것이 사적인 말이라고 가정해 보자. 즉,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베드로는 전 교회의 머리로 임명되었으며, 그가 받은 영예를 로마 교황청에 맡겼고, 고대 교회의 권위가 그것을 시인하고 오랜 관습이 확인했으며, 모든 사람이 항상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권한을 로마 감독에게 주었고, 그는 모든 사건과 모든 사람의 재판장이었으며 어떤 사람의 재판도 받지 않았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원한다면 더 많이 가정해도 좋다. 나는 한 마디로, 로마에 교회와 감독이 없으면 이런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교회가 아닌 것이 교회들의 어머니가 될 수 없으며 감독이 아닌 자가 감독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로마에 사도적 교구가 있기를 원하는가? 진정하고 합법적인 사도직을 보이라. 그들은 최고의 주교가 있기를 원하는가? 주교를 보이라. 그들은 어디서 교회와 비슷한 것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가? 그들은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며 항상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 참으로 교회는 그 자체의 명백한 표식에 의해서 알아볼 수 있으며, "감독직"은 한 직책의 이름이다. 나는 지금 사람들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영원히 빛나야 할 교회 질서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요구하는 봉사가 어디 있는가? 장로들과 감독들의 직책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1972) 회상하자.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추기경들의 직책을 검사한다면 그들은 장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로마 감독에게 어떤 감독의 자격이 있는지를 나는 알고자 한다. 감독직의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둘째 임무는 성례전을 집례 하는 것이다. 셋째는 충고하고 권고하며 죄 짓는 자를 바로잡고 신자들을 거룩한 권징 하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들 중의 어떤 임무를 행하고 있는가? 하는 체라도 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감독으로 인정되기를 바라는가를 말하라. 그는 감독직의 어느 일부분에 새끼손가락을 대는 흉내조차 내지 않는다.

24. 배교

주교와 왕은 처지가 다르다. 왕은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그 영예와 칭호를 유지한다. 그러나 주교를 비판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고려해야 하며, 이 그리스도의 명령은 언제든지 교회 안에서 효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도들에게 이 난문의 문제 해결을 부탁한다. 나는 그들의 교황은 주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주교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이 둘째 명제에서 이기려면 저 첫번 명제가 허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로마 교황에게는 주교의 특징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그 특징과는 반대라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참으로 나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그의 교리인가 또는 그의 행실인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까? 어디서 그칠 것인가? 현재 전세계는 패악하고 불경한 교리가 팽배하며 각종 미신이 가득하고 무수한 과오로 눈이 어두웠으며 대대적인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데, 나는 이 모든 악의 원천이 로마 교황청이 아닌 것이 없으며 적어도 거기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복음의 교리가 부흥하려는 데 대해서 로마 교황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전력을 다해서 억압하려고 애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승리한다면 그들의 나라가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레오는 잔인했다. 클레멘스의 손은 피로 물들었다. 파울루스는 흉악했다.1973) 그러나 이 사람들이 진리와 싸우게 된 동기는 그들의 성격에 있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쫓아내지 않고서는 자기들이 평안할 수 없겠기 때문에 자기들의 강단과 가정과 생명까지도 지키려는 듯 싸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무서운 배교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사도적 교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미친 듯이 복음을 박해해서 적그리스도임을 온 세상에 선언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리가 될 수 있겠는가? 베드로가 건설한 것을 불과 칼로 모조리 부수는 사람이 베드로의 후계자가 될 수 있겠는가? 교회의 진정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교회를 끊고 그 사지를 뜯어버리며 그 몸을 갈기갈기 찢는 사람이 교회의 머리일 수 있겠는가? 옛날의 로마는 참으로 모든 교회들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자리가 되기 시작한 후로는 더 이상 과거와 달라졌다.

25. 적그리스도의 왕국

우리가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1974) 부르는 것을 보고 우리를 중상 모략하는 자와 욕설을 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한 말을 폭언이라고 본다. 사실 우리는 그를 본받으며 그가 한 말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바울의 말을 우리가 왜곡해서 로마 교황에게 적용한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없도록, 나는 바울의 말은 교황 제도에 해당한다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으리라고 했다(살후 2:4). 성령께서는 다른 곳에서 안티오쿠스를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묘사하시며, 그의 나라는 곧 자만과 하나님께 대한 훼방일 것이라고 하신다(단 7:25, 계 3:10, 13:5).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우선 신체보다도 영혼에 대한 압박이며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추론한다. 둘째로, 이 전제는 그리스도나 교회의 이름을 말살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악용하며 교회의 이름을 가면으로 뒤집어쓴다고 추론한다. 처음부터 있어 온 이단과 분파들은 모두 적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묘사에서 배교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예고하는 것은(살후 2:3), 전반적인 배교가 교회를 점령할 때에 비록 교회의 일부 신자들은 각지에 흩어져서 신앙의 진정한 단결을 유지하겠지만 가증한 자의 자리는 높여지리라는 뜻이다. 바울은 그의 시대에 적그리스도가 이미 그 불법의 은밀한 활동을 시작했고(살후 2:7) 후에는 공공연하게 그 일을 완성하리라고 첨가한다. 이 말을 우리는 한 사람이 이 재앙을 일으키거나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사도는 적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아 자기가 차지하리라고 한다(살후 2:4).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를 찾아내려고 할 때에 우리는 이 점을 가장 중요한 표식으로 삼아야 하며 특히 이런 자만이 교회를 공공연하게 흩어 버리기까지 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이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 특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을 파렴치하게 자기에게 옮긴 것이 분명한 때에, 우리는 그가 저 불경하고 가증한 왕국의 지도자이며 기수인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26. 교황권은 진정한 교회 질서에서 멀리 떠났다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역사가 길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대항해 보라. 그렇게까지 만사를 철저히 뒤집어놓고도 그들은 주교직이 없는 곳에 주교직의 영예가 있는 듯이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있었던 교회를 펠라에 옮기셨다고 유세비우스는 말한다.1975) 한번 일어났던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수위권의 영예를 한 장소에 붙들어 매 놓고 과거에 수위였던 주교구를 차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현재 그리스도를 가장 미워하는 원수이며 복음의 최고의 적이며 교회를 가장 황폐하게 만들며 모든 성도의 가장 잔인한 도살자인 자를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리요 베드로의 후계자요 교회의 제일 주교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습고 미련한 짓이다. 나는 교황의 기만과 교회의 올바른 질서가 얼마나 다른가를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점만 보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의혹이 사라질 것이다.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교의 직책을 인장에만 국한시키지 않을 것이며 더욱이 모든 사기와 기만의 본거지에1976) 국한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거기서는 교황의 영적 지도를 사기와 기만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랑하는 로마 교회는 하나의 궁정으로 변한 지가 오래며 지금 로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궁정뿐이라고 한 말은 옳다. 나는 여기서 사람들의 악행을 말하지 않고 교황 제도 자체가 교회 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27. 교황들의 악행과 이단설은 그들의 권력 주장과 전연 반대된다

이제 현실의 인간들을 본다면 그리스도의 대리가 어떤 인간들인가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물론 율리우스와 레오와 클레멘스와 파울루스는 신앙의 기둥일 것이며 종교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일 것이지만, 이 사람들은 루키아누스의 문하에서 배운 것 이외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1977) 그러나 나는 왜 3-4명의 교황들을 들먹임으로써 교황들이 모든 추기경들과 함께 오래 전에 고백했고 또 지금도 고백하는 종교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의혹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가? 그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비밀 신학의 제 1조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며, 제 2조는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기록과 교훈은 허위요 기만이란 것이다.1978) 그리고 내세와 최후의 부활에 관한 교리들은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3조이다.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또 그렇게 말하는 자는 극히 적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전부터 교황들의 상례적인 종교였다. 이것은 로마를 아는 사람이라면 잘 아는 사실이지만 카톨릭 신학자들은 여전히 쉬지 않고 사랑한다. 즉,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라고 하셨으므로(눅 22:32) 그 그리스도의 특권에 의해서 교황은 과오를 범할 수 없도록 마련되었다고 한다. 나는 그런 파렴치한 희롱으로 그들이 얻는 이득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들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도 존경하지 않을 만큼 사악이 극에 도달했다는 것을 온 세상이 알게 할뿐이 아닌가?

28. 요한 22세의 배교

그러나 내가 말한 교황들은 설교로나 저술로 그들의 신앙을 발표하지 않고 단지 식탁이나 침실이나 방안에서 무심코 드러냈을 뿐이므로 세상에 대해서는 그 신앙이 숨겨졌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만일 그들이 주장하는 특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싶다면 교황 명부에서 요한 22세를 삭제해야 한다. 이 사람은 영혼은 사멸적인 것이어서 육체와 함께 죽어 부활하는 날까지 죽은 대로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 그때에 로마 감독직이 그 모든 지주와 함께 붕괴되었다는 것은 파리 학파가 프랑스 왕을 충동해서 교황이 자기주장을 취소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 외에는 이 심한 광증에 반대하는 추기경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로써 쉽게 알 수 있다. 교황이 신속하게 회개하고 이 사실을 상례에 따라 전령관을 통해서 발표하지 않을 경우 프랑스 국민은 교황과의 교통을 끊으라고 왕은 명령했다. 이런 부득이한 강요에 의해 교황은 자기의 과오를 철회했다고 당시에 살아 있던 쟌 제르송(Jean Gerson)이 말했다.1979) 이런 일도 있었기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2)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으므로 교황청과 교황들은 신앙 문제에서 과오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반대자들의 발언에 대해서, 나는 그들과 더 길게 논쟁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요한 22세가 이런 추악한 과오로 진정한 신앙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베드로의 감독직을 계승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베드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후세 사람들에게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교황 무오설 자체도 대답할 필요가 없는 유치한 이야기이다. 굳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모두 그의 후계자들에게 적용할 경우, 그 후계자들은 모두 사탄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셨다(마 16: 23). 참으로 이 나중 말씀을 우리가 그들에게 돌려 대는 것이 그들이 처음 말씀을 우리에게 던지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29. 교황들의 도덕적 방종

그러나 나는 이런 바보짓으로 그들을 상대로 경쟁할 생각이 없다. 그러므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그리스도와 성령과 교회를 한 장소에 묶어 두고 거기서 다스리는 자가, 거기는 과거에 베드로의 교구였기 때문에 비록 마귀일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대리요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불경건한 짓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극도로 어리석고 몰상식한 짓이라고 나는 단정한다. 로마 교황들에게 오래 전부터 전연 종교가 없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종교에 대한 최대의 원수였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에 세운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이(살후 2:4), 베드로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교황들을 그리스도의 대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교황들의 행실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들에게 주교다운 특징이 하나라도 있는가를 그들이 스스로 대답하게 하라. 첫째, 로마 시민들이 지금과 같은 식으로 생활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눈을 감고는 말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시인하고 있으니 이것은 전연 주교답지 못한 태도다. 주교의 직책은 엄격한 규율로 신도의 방종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서 너무나 가혹한 처사일 것 같기에 그 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그들의 가족과 추기경들의 거의 전부와 그들의 성직자 전체와 함께 온갖 사악과 추악과 불결과 또 각종 범죄와 비행으로 더럽혀져서,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 괴물에 가깝게 되었으니 이러한 그들이 주교일 수 없다. 내가 그들의 사악한 정체를 더욱 폭로하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1980) 그들의 추악한 진창을 건너는 것은 불쾌한 일이며 듣는 사람들의 깨끗한 귀는 아껴야 한다. 또 나는 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줄로 생각한다. 즉, 비록 로마가 과거에 교회들의 머리인 때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현재는 교회의 발에 붙은 새끼발가락으로 볼 가치도 없다. 이 점을 나는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30. 추기경들

추기경들(cardinals)에 대해서, 나는 그들이 갑자기 큰 인물로 등장한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 이름은 감독들에게만 붙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추기경들"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그들을 로마 교회에 한정하지 않고 다른 모든 교회에도 있는 것으로 말했다. 따라서 기본적인 사제는 감독일 뿐이다.1981) 더 이른 시대에는 이런 이름이 사용된 기록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옛날에는 감독보다 낮았고 지금은 감독보다 훨씬 높다. 어거스틴이 한 말, 곧 교회 내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직명에 의하면 감독직이 장로직보다 높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어거스틴은 제롬보다 낮다고1982) 한 말은 유명하다. 이 말은 로마 교회의 장로를 다른 장로들과 구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감독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이 생각은 실천되어, 카르타고 회의에서는 로마 교구를 대표해서 출석한 감독과 장로가한 사람 중에서 장로는 끝자리에 앉게 했다.1983) 그러나 옛날 일들을 너무 추궁하지 않기 위해서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로마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의 형편을 보면, 거기서도 장로들은 끝자리에 앉았고 서명도 장로들끼리 따로 했다. 집사들은 서명할 자리가 없었다. 사실 집사들은 회의에 참석해서는 감독 밑에서 가르침과 성례에 관한 심부름을 했을 뿐이다. 지금은 그들의 처지가 변해서 왕과 황제들의 사촌들이 되었다. 확실히 그들은 그들의 머리와 함께 자라서 현재와 같은 위엄의 절정에 도달한 것이다.

내가 이 점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작정한 것은, 현재의 로마 교구가 자신의 특권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변호하던 고대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독자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거에는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은 로마에 진정한 합법적인 감독직이 없으므로, 옛날의 외관과 속이 빈 껍질만 남은 채로 있다. 실로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가 교회와 철저히 반대되는 것이었으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자주 기록한 일이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울면서 말하며 신음하면서 선언한다. 사제 계급이 내부적으로 타락했으므로 대외적으로도 오래 유지될 수 없다."1984) 이런 사제들에 대해서는 말라기가 한 말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말 2:8-9). 사악하고 파렴치한 교황주의자는 하늘과 땅에서 사람들과 천사들이 존중하며 거룩하게 여겨야 할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로마 교황권에 굴복시키고 있으니, 카톨릭의 성직 계급 제도의 절정이 얼마나 높은지는 독자들이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제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회의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1-9)

1. 교리에 관한 교회의 권위 : 그 임무와 한계

이제부터 제 3 부, 즉, 교회의 권한에 대해서 논하겠다. 교회의 권한의 일부는 개개인의 감독들에게 속하고 일부는 지방 회의에 또는 총회의에 속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 권위이며 이것이 교회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권한이다. 그리고 이 권한은 교리에 대한 권한과 재판권1985) 그리고 입법에 대한 권한으로 나뉜다.1986) 교리 방면에는 신조를 제정하는 권한과 신조를 설명하는 두 부분의 권한이 있다.

자세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교회의 권한에 대한 주장을 들을 때에 그 권한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하라고 경건한 독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다. 권세를 주신 것은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10:8, 13:10). 이 권한을 합당하게 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이라고 생각한다(고전 4:1).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역자들이 그리스도께서 그 권위를 유지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않아야 한다. 즉, 그뿐만이 교회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저의 말을 들으라"고 성경이 말했기 때문이다(마 17: 5).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마지못해 억지로 행사할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한도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변덕에 끌려 이리저리 탈선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이 권한을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특히 유익한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권한을 허락한다면 곧 독제로 타락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이 전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리 추방되어야 한다.

2. 교리에 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이 권위와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들의 사도나 후계자들에게 주실 때에 개인에게 주시지 않고 그들이 임명되는 그 직분에 주셨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선포하도록 위탁을 받은 그 말씀에 주신 것이다. 그들 모두를 차례로 검토해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에 따라서만 가르치며 대답하는 권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직분을 맡도록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동시에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리고 오직 주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씀만 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을 백성 앞에 내세워 말을 선포하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할 말을 가르치신다. 그들은 주의 말씀 외의 어느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예언자인 모세의 말을 다른 예언자들의 말 이상으로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미리 명령을 받았으며 주께서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할 수 없었다(출 3:4이하). 그러므로 백성이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한다.(출 14:31).

제사장들의 권위도 멸시를 받지 않도록 가장 엄중한 벌칙을 첨부해서 마련하셨다(신 17:9-1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께서는 레위와 언약을 세워 그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게 하셨다고(말 2:4,6) 말씀하심으로써 어떤 조건하에서 제사장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하는 점을 밝히신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말 2:7). 그러므로 제사장이 자기의 말을 사람들이 듣기를 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보여야 한다. 즉, 주에게서 받은 명령을 충실히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규정되었다(신 17:10-11).

3. 교리에 관한 예언자들의 권위

예언자의 권한에 대해서 그 일반적 특징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한 말씀이 에스겔서에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 3:17).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말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는가? 주에게서 주신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말씀이라고 감히 확신있게 자랑하듯 말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똑같은 생각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렘 23:28). 그는 확실히 모든 선지자들이 지켜야 할 법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 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명령하신 것에 그 무엇을 덧붙여 가르치는 것을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모두 "겨"라고 하신다(렘 23: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면 어떤 예언자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예언서에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경고",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등의 표현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그것은 당연하다.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한탄했고(사 6:5) 예레미야는 자기는 아이가 되어 말할 줄을 모른다고 자백했다(렘 1:6).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자기 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더러운 입과 미련한 말 외에 무엇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입술은 거룩했고 순결했다. 예언자들이 자기가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이 경외심의 구속을 받을 때 그들은 비상한 권능과 훌륭한 이름으로 장식되었다. 주께서는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렘 1:10), 주께서 주의 말씀을 그 입에 두셨기 때문이라고(렘 1:9) 즉시 그 이유를 첨가하셨다.

4. 교리에 관한 사도들의 권위

사도들을 보면 참으로 훌륭한 칭호를 많이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다(마 5:13-14).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눅 10:16) 그들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마 16:19, 18:18, 요 20:23 참조)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그 직분에서 얼마만큼 허락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사도"이므로, 마음대로 지껄일 것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명령만을 충실하게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사명을 정하신 말씀은 분명하다. 즉, 그가 명령하신 모든 것을 천하 만민에게 가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20). 그러나 그 자신도 이 법칙을 받으셨고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누구든지 이 법칙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즉,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신다(요 7:16).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유일하고 영원하신 교사였고 아버지께서는 그를 만물의 주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 모범에 의하여 모든 일꾼들이 가르칠 때에 따라야 할 법칙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며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이를테면 주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5.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이 원칙이 처음부터 교회를 지배했고 또 지금도 지배해야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다름에 따라 배우는 방법도 다르다. 현재의 질서는 이전에 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우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마 11:27)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옳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 영원한 지혜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비밀을 홀로 계시 받으신 분에게서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마음으로 이해하거나 입으로 발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 거룩한 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울로 삼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알았다(고후 3:18 참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지혜와 빛과 진리이신 아들을 통하시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밖의 사람들이 하늘 교훈에 대해서 얻은 것은 모두 이 원천에서 마신 것이다. 예언자들이 발표한 하늘의 말씀도 모두 꼭 같은 원천에서 퍼낸 것이다.

이 지혜는 항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아니다. 옛 족장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는2a)1987)비밀한 계시를 사용하셨고, 동시에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적을 첨가하셔서 그들에게 말하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 족장들은 받은 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주께서 그들이 그와 같이 전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자녀들과 그 자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들을 때에 그것이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우기를 기뻐하셔서, 말씀을 글로 기록하게 하시고1988)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가르칠 교훈을 거기서 얻도록 하고 가르치는 교리가 모두 그 표준에 일치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이 선포된 후에, 제사장들은 "주의 입에서" 말씀을 얻어 백성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다(말 2:7).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율법에 포함시키신 교리에 없는 이질적인 것은 결코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다. 참으로 율법에 가감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셨다(신 4:2, 13:1).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율법에 새로운 말씀을 첨가하셨는데, 그것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니고 율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 불과했으며, 앞일을 폭언한 것을 제하면 새로 첨가한 것은 없었다. 예언을 제하면 그들은 율법을 순수하게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약한 양심들이 만족할 만한 더 분명하고 더 풍부한 교훈을 나타내시고자, 예언들도 기록하여 말씀의 일부로 간주하도록 명령하셨다. 동시에 역시 예언자들이 성령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역사를 말씀에 첨가하셨다. 나는 시편도, 예언서에 포함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예언서에 돌리는 것이 시편에도 있기 때문이다.1989)

그러므로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과 역사들로 구성된 문서는 그 전체가 고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교사들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에서 오시기까지 이 표준에 일치한 교훈만을 가르쳐야 했다. 그들의 직책은 하나님의 입에서 받은 말씀으로 백성에게 대답하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은 불법이었다(신 5:32). 이것은 말라기에 있는 유명한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날까지 율법을 기억하며 존중하라고 명령하신다(말 4:4). 이와 같이, 주께서는 그들을 이상한 교리로부터 보호하시며 모세가 그들에게 충실하게 보여준 일에서 추호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다윗이 율법의 우수성을 웅변적으로 선언하고 또 여러 가지 율법을 찬양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시 19:7이하). 즉, 모든 완전성이 율법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유대 사람들은 다른 것을 갈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7.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는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심사숙고해야 할 일을 모두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전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이나 이제 의의 태양을 비추셨으므로1990) 지금 우리에게는 정오의 밝은 빛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빛이 있다. 참으로, 사도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히 1:1-2) 했을 때 그는 평범한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 곧 그가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말씀하시는 방법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간혹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또는 예언에 예언을, 계시에 계시를 첨가하면서 말씀하시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가르치는 활동을 그 아들 안에서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궁극적이고 영원한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우리에게 나타나신 때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의 신약 시대를 전체적으로 "마지막 때"1991)(요일 2:18), "이 말세"(딤전 4:1, 벧전 1:20),"말세"(행 2:17, 딤후 3:1, 벧후 3:3)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 꼭 완전성을 만족하게 생각함으로써 그 이상의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조작한 것을 인정하지도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특별한 특권으로 아들을 우리의 교사로 임명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명령하신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참으로 아버지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마 17:5) 간단한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교사로 추천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무게와 힘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사람들의 교리에서 끌어내어 아들에게만 데려가시며, 구원에 대한 모든 교훈을 오직 아들에게서만 구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에게 붙어 떨어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과 같다. 요컨대(그 말씀에 있는 것과 같이) 아들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또 생명의 말씀이 자신을 우리에게 친밀하고 명백하게 계시하셨은 즉, 우리는 무엇을 사람에게서 기대하고 또 바랄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셨으니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감추어 두셨으며(골 2:3), 참으로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지혜와(완전무결한 지혜, 요일 19:23), 메시아에(만사를 계시하리라고 기대된, 요 4:25) 합당한 말씀을 하셨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뒤에 다른 사람들이 할 말을 전혀 남겨두시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8.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 즉, 우선은 율법과 예언서에 다음에는 사도들의 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거나 교회 내에서 자리를 내줘서는 안되며, 교회 안에서 인정된 교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지시와 표준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에게 허락된 것은 옛날 예언서들에 있는 것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도들은 고대에 기록된 성경을 해설하며 또 거기서 가르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때에도 주의 지도를 받아야 했으니, 곧 그리스도의 영이 선도자가 되어 그들이 할 말을 어느 정도 불러 주신 것이다.1992) 그들이 생각 없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을 때에(마 28:19-20)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조건으로 그들의 사명을 제한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에 더 깊은 인상을 주시기 위해서 같은 곳에서 같은 말씀을 두 번 되풀이하신다(마 23:9-10). 그리고 그들이 무지해서 주의 입에서 듣고 배운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와 영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며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다(요 16:13). 그리스도께서 입으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니(요 14:26) 우리는 이 한계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9.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주님에게서 잘 배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이외의 일을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그는 말한다(벧전 4:11). 즉,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처럼 주저하거나 떨면서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은 종답게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하라는 것이다. 이것은(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든)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을 전적으로 배척하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신자들의 교회에서 가르치며 배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그 지위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규정이나 그들의 조작물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만이 효력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 즉, 영적 무기이며, 하나님의 충실한 병사들은 이 무기로 "모든 전략을 파괴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후 10:4-5). 이제, 여기에 교회의 목사들이(이름은 무엇이든 간에) 받아야 할 최고의 권한이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일을 담대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세상 권력과 영광과 지혜와 교만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힘을 받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족을 세우고 사탄의 가족을 넘어뜨릴 수 있으며, 양들을 먹이고 이리들을 쫓아낼 수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또 반항하며 완고한 자들을 나무라고 책망하며 굴복시킬 수 있고, 매기도 하고 풀 수도 있다. 끝으로, 필요한 때에는 청천벽력과 번갯불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1993)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틀림없이 받아썼고1994) 따라서 그들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들은 성경에 봉인돼 있는 것을 가르치는 직분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한 사역자들을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복종하도록 하신 그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할뿐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개인과 교회 전체에 허락된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개인에 관해서는, 주께서 바울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사도로 임명하신 것이 확실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후 1:24). 바울에게도 지배할 권한이 없다고 그가 말했는데 누가 감히 그런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목자에게는 그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자들이 의심 없이 믿으며 지지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방자한 태도를 바울이 인정했다면,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두세 사람이 예언할 때에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하는(고전 14:29-30) 규정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아무도 남겨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에 굴복시켰다.

그러나 보편 교회의 문제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바울은 이런 의문을 예상하고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이렇게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한다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거기서만 단식을 얻는다면, 온 세계가 하는 말을 위해서 어떤 자리가 남아 있을까?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믿음은 사탄과 지옥의 모든 간계와 전세계에 대항했을 때 굴복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견고성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보편적 법칙이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새로운 교리를 제창할 능력을 박탈하시는데 이는 거짓말이나 속이는 말을 하실 수 없는 진실하신 하나님만이(롬 3:4) 영적 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선생이 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개개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대해서 또 적용된다.

(말씀에 의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과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10-16)

10. 카톨릭 교회의 주장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교회의 권한과 과거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스스로 감독과 종교 지도자로 사칭한 저 영적인 폭군들의 권한을 비교한다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후 6:15). 나는 그들이 어떻게 또 어떤 부끄러운 방법으로 압제했는가를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단지 그들의 교리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교리를 우선은 문서로 옹호하고 다음에는 칼과 불로 지지한다.

그들은 전체 회의가 교회의 진정한 현상이라고 하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원칙을 용인한 다음에, 그들은 곧 이런 회의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서슴지 않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회의들을 지배하고 구성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전체 회의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결정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본다.1995) 그래서 그들이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지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에 굳게 확립되며 그들이 시인한 것이 우리에게 아무 의심 없이 시인되고 그들이 정죄한 것은 우리에게도 정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교리를 만들어 내며, 후에 이 표준에 따라 신조를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긍정하든 아니면 부정하든 그들의 모든 교리에 확고하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지적인 신앙이 아니면 적어도 맹신으로 찬동하라고 한다.1996) 이것은 새로운 신조를 만들어 낼 권한이 교회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1.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 있다

우선 그들이 어떤 이론으로 교회가 이 권위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가를 듣기로 하자. 그 다음에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보겠다.

그들은, 교회는 결코 그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버림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을 것이라는(요 16:13 참조) 훌륭한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습적으로 말하는 그 약속 중에는 교회 전체를 상대하는 동시에 신자 개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 많다. 그리스도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고(요 14:26-17)1997)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약속은 사도를 전부에게 하신 것인 동시에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하신 것이며 또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아들이신 제자들 뿐 아니라 앞으로 가입될 다른 제자들에게까지도 하신 약속이다. 그러나 그들은 큰 위로가 가득한 이런 약속을 신자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어 근원에서 모든 신자들을 끊어버릴 뿐이 아닌가? 나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각양각색의 은혜를 받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신자 개인에 비해서 하늘 지혜를 더 완전하고 풍부하게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하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지혜와 총명의 영을(사 11:2 참조) 평등하게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성경의 말씀을 왜곡해서 그들의 악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이질적인 의미로 정화시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주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며 그의 영으로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참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 영은 오류와 무지와 허위와 암흑의 영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와 지혜와 진리와 광명의 영이시며, 이 영에게서 그들은 그 받은 것에 대한 진상을 배우게 된다(고전 2:12). 곧 그들이 받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엡 1:18) 배우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육신으로 살 동안에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으며 그것을 약간 맛볼 뿐이다.(롬 8:23)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무력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한도 내에 신중하게 머무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만일 제멋대로 멀리 방황한다면 진리와 허위의 구별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교사인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지 않겠기에, 바른 길을 완전히 떠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가 바울과 함께 자기들을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빌 3:12).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하다고 자랑하지 않고 매일 전진하려고 노력을 계속한다.

12.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성도에게 부분적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면 교회 자체에는 완전히 속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진리가 있는 듯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의 분량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시므로(엡 4:7), 그 은사들을 종합하면 교회 전체로서는 중요한 은사가 하나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논적들이 자랑하는 것과 같은 완전무결하게 풍성한 상태와는 항상 거리가 멀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점에서나 부족하여 그 가진 것이 불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주께서는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회가 겸손하고 경건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상은 교회에 주시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여기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알고 있다. 주께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하셨으며(엡 5:26-27), 따라서 다른 곳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딤전 3:15) 부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앞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교회 내에서 하시는 일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매일 그의 모든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며 깨끗하게 씻기시고 닦으시며 그 얼룩을 씻어 버리신다면, 분명히 그들에게는 아직도 결점과 오점이 있으며 성화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신자가 흠이 있으며 불결한 점이 있는데 교회가 모든 점에서 완전히 거룩하며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이야기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결하게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성화의 시초가 보일 뿐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은 지성소이신(히 9-10장)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거룩하심으로 교회를 완전히 충만하게 하실 때에 나타날 것이다. 교회의 티와 주름 잡힌 것이 씻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매일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남은 것을 완전히 제거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일 이 해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펠라기우스파와 함께, 신자들의 의는 이 세상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해야 될 것이다. 또 가타리파나 도나투스파와 함께, 교회 안에 있는 약점을 일체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1998)

둘째 구절은, 이미 다른 곳에서 본 바와 같이1999)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르다. 바울은 디모데를 진정한 감독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킨 다음에, 그렇게 한 목적은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에서 처신하는 법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디모데가 이 일을 위해서 더욱 경건한 열설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첨가한다(딤전 3:15).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에 의해서 교회 안에 보존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엡 4:13) 그러므로 진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진리를 충실히 보관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활동과 직무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보관이 이와 같이 예언자적 및 사도적 직무에 있다면, 진리의 보존은 주의 말씀이 순수하게 또 충실하게 보존되느냐 보존되지 않느냐 하는 데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13.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논적들이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반대하는 점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그들의 발언이 이 점에 관련되어 있고, 그들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으므로 말씀이 없어도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고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는 진리만을 생각하며 말할 수 있으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또는 그 말씀과 별도로 무슨 일을 제정하더라도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2000)

교회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처음 말한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모든 자기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 발언이 옳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논적들은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 밖에 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권위는 말씀에 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씀에서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또, 그리스도의 신부요 제자인 교회가 그 남편과 선생에게 복종해서 그의 말씀에 항상 깊이 유의한다는 것은 이상한일이 아니다. 바르게 정돈된 가정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며, 질서가 잡힌 학교에서는 선생의 가르침만을 듣는다. 그러므로 교회도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며 자기 생각대로 무엇을 생각해 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치신 곳을 자기의 지혜의 한계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자기의 이성이 고안해 낸 것을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말씀을 근거로 한 일에서는 어떤 불신이나 의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확신과 확고부동한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 또 교회는 그 받은 약속들을 전적으로 확신함으로써 신앙을 지탱하는 훌륭한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가장 훌륭한 인도자인 성령이 자기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보혜사……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다(요 16:13)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성령 그가……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겠기"때문 이라고(요 14:26)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요 12:50)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요 12 :49, 14:10), 우리도 복음과는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의 완성이심과 같이(롬 10:4),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다.2001) 이것이 크리소스톰의 말이다.

이제 우리는 논적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주께서는 교회에 근신할 것을 명령하셨고(벧전 1:13, 4:7, 5:8, 기타 참조),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금하셨다(신 4:2, 계 22:18-19 참조).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같이 말한다.

14. 전승은 성경보다 낮다

여기서 그들은 또 다시, 교회는 사도들의 글에 몇 가지를 첨가할 필요가 있었다느니, 사도들은 자신이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 것을 차후에 말로 보충했다느니 하고 중얼거린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도 사도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셨다(요 16:12). 그들은 이것을 성경에는 없으나 관습에 의해서 받은 명령이라고 설명한다.2002)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주께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의 제자들은 아직 유치했고 거의 가르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를 문자로 기록했을 때에도 그들은 무지몽매해서 기록에 빠뜨린 것을 나중에 구전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들이 진리의 영에 의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아(요 16:13) 글을 남긴 것이라고 하면, 그들이 복음의 교훈에 대한 완전하고 분명한 지식을 온통 기록에 남기지 못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혹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록된 것 이외에 어떤 것이 계시되었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그들이 감히 지적하려고 한다면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내놓을 것이다. "주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데 우리 가운데서 누가 감히 '이 일들이라, 저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감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떤 증거를 제공할 수 있는가?"2003) 그러나, 말하자면 이자들이 헐뜯어 쓸모없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도 문서에는 주께서 그때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계시의 열매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린 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왜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15. 교회의 교리적 천명에는 모순이 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명령하는 것에 감히 반대하는 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마 18: 17)2004)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교회의 모든 교리와 명령은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냐고 그들은 말한다. 첫째도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교리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다만 교회가 책으로 죄악을 시정하는 권위를 주장하시며 충고와 책망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의 판단에 항거하지 말라고 하실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악한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몰염치하게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만을 근거로 한 교회의 합의를 아무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2005) 누가 이것을 부인하는가?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교회는 주의 말씀에 없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상의 것을 그들이 요구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들을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며 주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강경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나를 논쟁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에게 이런 권위를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식자들은 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결정한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말할 경우, 불경하고 사악한 무리의 궤변이 대대적으로 밀려들어오리란 것도 식자들은 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산헤드린 공회에 교회라는 이름을 주셨는데(마 5:22), 이것은 제자들이 후에 교회의 성회들을 공경할 줄 알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에 각 도시와 각 촌락이 교리를 만들어 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16. 반대자들의 예는 빈약하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드는 예도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의 명령보다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옹호하기 위해서 교회의 권위에 피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것은 매우 가련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다르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충분하게 밝히겠다.2006) 같은 식으로, 그들은 니케아 회의가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질이라고 선언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항의한다.2007)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아리우스를 정죄한 교부들이 근거 없는 짓을 한 것같이 그들에 대해서 중대한 오해를 한다. 아리우스는 예언서와 사도 문서에 포함된 교훈 전체를 믿으라고 했지만 니케아 교부들이 하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한 본질"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2008) 그러나 성경에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주장이 자주 반복되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하나인 참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자주 부르는 것을 볼 때에, 니케아 교부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한 본질이라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성경이 본래의 뜻을 설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2009) 데오도레트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서론으로 진술했다. 거룩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에는 성령이 정하신 교훈이 있으며, 복음서와 사도 서신은 예언서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24a)2010)충분히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는 불화를 버리고 성령의 말씀에는 문제의 설명을 얻기로 하자2011) 그때 이 거룩한 충고에 반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교회가 자기의 것을 첨가할 수 있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모든 일을 계시하지 않았다든지, 적어도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모든 일을 말하지 않았다든지, 그밖에 이와 비슷한 항의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이 하는 생각이 바르다면 첫째,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권한을 빼앗는 악행을 했으며 둘째, 교회의 권한을 옹호하려고 일어선 감독들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들의 이 침묵은 배신 행위였다. 그들은 이런 행동으로 교회의 권리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오도레트가 그들은 황제가 한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했기 때문에2012) 이 새 교의를 당시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것이 확실하다.

제 9 장  교회 회의들과 그 권위

(교회 회의의 참된 권위. 1-2)

1. 두 가지 서론적인 말

교회에 관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점을 내가 모두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대전제를 옹호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회의가 교회를 대표한다고 하며, 교회에 대해서 하는 말을 곧 회의에 옮기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교회의 권한을 완강하게 주장하는 유일한 목적은, 될 수 있는 한 많은 권한을 박탈해서 로마 교황과 그 측근자들에게 주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서론적인 말을 간단히 해야겠다.

내가 여기서 엄격한 태도를 취하려 하는 것은 내가 고대의 회의들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존경하며 또 모든 사람이 존경하기를 원한다.2013) 그러나 여기서 지켜야 할 규범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회의를 주관하며 그의 이 권위를 아무 사람도 나누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리다. 그리고 나는 전체 회합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의 지배를 받을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내가 회의에 돌리는 것이 논적들에 비해서 적다는 것은, 마치 회의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우리를 반대하는 것처럼 내가 회의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완전하게 증명하며 교황 제도를 전멸시킬 만한 충분한 장비 곧 주의 말씀이 있으므로 다른 것들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경우에는 고대의 회의들이 대체로 이 두 가지 일을 위한 충분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하게 될 것이다.

2. 교회 회의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자. 회의들에 어떤 권위가 있는가를 성경에서 살펴본다면 그리스도의 약속보다 분명한 말씀은 없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것은 작은 모임과 세계적 회의 모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회의라야 그가 그 가운데 계시겠다는 부대조건에 있다. 따라서 우리의 논적들은 아무리 감독들이 모인 회의를 말한다 해도 그들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의란 것을 우리가 믿도록 증명하지 않는다면 회의들이 성령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우리는 믿지 않을 것이다. 선하고 정직한 감독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과 같이, 불경하고 사악한 감독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을 공모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회의들이 발표한 교령들에는 이 사실을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이 점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2014)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는다고 한 마디로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도록 하자.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고(신 4:2, 12:32, 잠 30:6, 계 22:18-19 참조) 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결정대로 일을 처리하는 자들과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즉, 완전한 지혜의 유일한 표준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들의 두뇌로써 신기한 것을 조작하는 자들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회의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고 진정한 합법적 회의와 그렇지 않은 회의들을 구별하는 특별 표식을 지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결코 이 구별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레위 족속의 제사장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가르치게 하셨다(말2:7).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에게도 항상 이 일을 요구하셨다. 이 규정을 사도들에게도 부여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언약을2015) 어기는 자들은 제사장직의 영예나 그 밖의 어떤 권위도 가질 자격이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의견에 나의 신앙을 예속시키려고 하는 나의 논적들은 이 어렵고 난처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목자들의 결점 때문에 회의들도 오류를 범한다. 3-7)

3. "목자"가 없어도 또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는 교회 내에 자립 자존할 수 있다

그들은 목자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교회 안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또 교회 자체도 총회의에서 나타내 보여야만 존재2016)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예언자들이 자기들의 시대에 충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남겼다면 그들의 생각은 항상 진리가 아니다. 이사야 시대에 예루살렘에는 교회가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교회의 목자들에 대해서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다.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사 56:10-11). 호세아도 그와 비슷한 말을 한다.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수꾼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호 9:8). 호세아는 빈정대는 뜻으로 그들을 하나님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들의 제사장직이 가짜란 것을 가르친다. 교회는 예레미야 때까지도 존속했다. 그가 목자들에 대해서 한 말을 들어보자.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6:13).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렘 14:14). 예레미야의 말을 너무 많이 인용하지 않기 위해서 독자들이 23장(렘 23:1이하)과 40장을2017) 읽기 바란다. 같은 시대에 에스겔은 다른 곳에서 역시 엄격하게 같은 사람들을 질책한다. "그 가운데서 선지자들의 배역함이 우는 사자가 식물을 움킴 같았도다‥‥‥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번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겔 22:25-26) . 같은 뜻의 말이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언서에는 비슷한 말씀이 자주 나온다. 사실 이보다 더 자주 나오는 말씀은 없다(사 9:14, 28:7, 29:10, 렘 2:8,26, 5:13,31, 6:13, 8:10, 13:13, 14:14, 23:1, 27:9 기타).

4. 목자들의 변절은 예언되었다

혹자는, 유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을지 모르나 우리 시대에는 이런 큰 폐단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참으로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언명하셨는데, 이는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벧후 2:1)라고 베드로가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교사와 목자의 칭호를 자랑하는 자들에게서 위험이 오리라고 베드로가 예언하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목자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장 큰 위험인물들이라고 얼마나 자주 예언하였는가?(마 24:11,24, 행 20:29-30, 딤전 4:1, 딤후 3:1이하, 4:3) 참으로 바울은 적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으리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살후 2:4).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거기서 말하는 무서운 재난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목자로서 앉아 있는 자들에게서 오리라는 것이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이 가장 큰 재앙의 시초가 이미 가까이 왔다고 말한다. 즉,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2018) 말한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29-30). 목자들이 단시일에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었다면 오랜 세월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얼마나 많은 부패가 그들 사이에 생기겠는가? 그런 예를 위해서 여러 장을 메꿀 필요가 없다. 진리라고 해서 항상 목자들의 가슴에서 육성되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건전성 또한 그들의 상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거의 모든 시대의 실례가 우리에게 경고한다. 목자들은 교회를 보존하기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마땅히 교회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해야 한다. 그러나 빚을 갚는 것과 갚지 못한 채 빚을 지고 있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5. 목자들을 잘 식별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모든 목자들의 권위를 일률적으로 경솔하게 손상시키는 것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나는 다만 목자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목자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곧 그렇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할 뿐이다. 그러나 교황과 그의 측근 주교들은 목자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만을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뒤섞어 버린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결코 진리의 빛을 빼앗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이 항상 자기들 사이에 계시고 교회는 자기들과 존망을 함께 한다고 우리들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마치 고대 백성들의 배은망덕을 벌하시던 하나님의 심판이 지금은 세상을 벌하지 않을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정신을 둔하게 만드셨다(슥 11:17). 현대의 이 철저하게 우둔한 인간들은 옛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던 자들이 부른 노래를 자기들도 지금 부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진리와 싸울 때에 한 말은 이것이었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렘 18:18)

6. 회의들도 진리에 맞설 수 없다

따라서 총회의들에 관한 다른 반대에도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다. 예언자들의 시대에 진정한 교회가 유대인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때 제사장들의 총회의가 개최되었다고 하면 거기 나타난 교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목자들 전체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렐 4:9).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2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미 3:6). 생각해 보라. 가령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면 어떤 영이 그 집회를 주관했겠는가? 이 일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아합이 소집한 회의였다(왕상 22:6,22). 예언자 400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악한 왕에게 아첨하려는 목적으로만 모였기 때문에, 주께서 사탄을 보내셔서 거짓말하는 영이 모든 자의 입에 있게 하셨다. 모든 자들의 투표로 진리는 정죄되었다.

즉, 미가야는 이단자로 몰려 얻어맞고 옥에 갇혔다(왕상 22:26-27). 예레미야도 같은 일을 당했고(렘 20:2, 32:2, 37:15이하) 다른 예언자들도 그같이 당했다(마 21:35, 23:29이하 참조).

7. 요한복음 11:47에 있는 예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을 만한 다음의 예를 보면 다른 예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대적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모인 회의는(요 11:47)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결함 도 없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제사나 그 밖의 의식에 참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엄숙하게 회의가 열리고, 대제사장이 주관하고, 제사장들이 모두 출석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그의 교훈을 배척했다(마 26:57이하). 이 행동은 그 회의에 교회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논적들은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위험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누가 그런 보장을 했는가? 이런 중요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은 태만 죄라고 하겠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바울의 입을 통해서 목자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그런 배교가 있으리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의 파멸을 보지 않으려고 고집하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목자들의 회의로 성립된다는 생각을 우리는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어느 곳에서도 목자들이 영원히 선하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고 오히려 그들이 악하게 되는 때가 있으리라고 언명하셨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시는 것은 우리가 더욱 주의하며 경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성경을 떠났기 때문에 회의들은 타락했고 니케아와 칼케돈 회의도 결함이 있었다. 8-11)

8. 회의들의 결정은 얼마나 타당한가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회의들에는 아무 결정권도 없다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결정권은 있다. 나는 여기서 모든 회의를 배척해야 된다든지 또는 모든 회의의 결정을 취소하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모든 것을 깎아 내리고, 누구에게나 회의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게 만든다고 내게 말할 것이다.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어느 회의의 결정이 있을 때마다 회의는 언제, 무슨 문제로, 무슨 목적으로 열리고 또 어떤 사람들이 출석했는가를 사람들이 먼저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 다음에 회의에서 취급할 문제를 성경을 표준으로 하여 검토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회의의 결정이 자체의 중요성을 지니고 또 이전의 판단에 비추어 고려되어져야 하지만 내가 언급한 검토를 방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어거스틴이 막시미누스 반박론에서 요구한 신중한 태도를 모든 사람들이 가지기를 바란다. 회의들의 결정 사항들에 대해서 이 이단자가 논란하는 것을 간단한 말로 침묵시키기 위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니케아 회의를 내세우거나 당신이 나에게 아리 미눔 회의를 내세워서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후자 의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당신은 전자의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와 문제, 주장과 주장, 이유와 이유가 어느 한쪽의 특수한 권위가 아닌 쌍방의 공통된 권위, 즉, 성경의 권위에 의해서 서로 싸우게 하라.2019)

이렇게 하면 회의들은 그 마땅히 가져야 할 위엄을 가지게 될 것이며, 동시에 성경은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표준으로서 더 높은 수준에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과 제 1 차 에베소 회의와 칼케돈2020)과 그 밖의 이와 같은 초기의 회의들을 거룩한 회의들로서 기꺼이 공경하며 받아들인다. 이 회의들은 신앙문제에 관해서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 데 심사숙고 했다. 거기에는 성경에 대한 순수하고 진솔한 해석이 있었을 뿐이며 거룩한 교부들은 당시에 있던 신앙의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해서 영적인 지혜로 이 해석을 적용했다. 그 후에 있은 일부 회의에서도 우리는 경건에 대한 진정한 열성이 빛나는 것을 보며 통찰력과 교리와 지혜의 분명한 증거를 본다. 그러나 사태가 대체로 악화됨에 따라, 우리에게 더 가까운 최근의 회의들에서 우리는 교회가 그 황금시대의 순수성에 비해서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볼 수 있다.

나는 부패가 더 심한 때에도 회의에는 훌륭한 감독들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옛날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원로원의 결의 방법이 나쁘다고 한탄한 것과 동일한 일을 경험했다. 의견의 무게는 보지 않고 수효만 보기 때문에 더 좋은 부분은 더 큰 부분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런 회의들은 불경건한 교령을 많이 발표했으나 여기서 그 실례를 열거할 필요는 없다. 그런 예는 너무 많고 또 다른 사람들이 이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덧붙일 만한 것이 별로 없다.2021)

9. 회의들이 서로 충돌했다

그러면 회의들이 서로 충돌한 이야기를 내가 할 필요가 있는가? 일치하지 않는 두 회의 중의 하나는 불법적인 것이라고 해서 내게 항의하는 사람은 그렇게 항의할 근거가 없다. 무엇을 표준으로 그런 판단을 하는가? 만일 내가 속은 것이 아니라면 표준은 하나이다. 즉, 성경에 의해서 어느 쪽 교령이 정통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가부를 구별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레오 황제 때 열린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교회 안에 세운 형상들을 전부 끌어내어 부셔 버리기로 결정했다. 곧이어 이 회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이레네 여왕이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는 형상들을 다시 복구하도록 판결했다.2022) 이두 회의 중 어느 쪽을 우리는 합법적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교회 내에 형상들을 두기를 허락한 두 번째 회의가 그 후에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얻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습관에는 항상 우상 숭배의 위험성이 동반한다고 말한다.2023) 그의 선배였던 에피파니우스는 기독교회 안에 형상이 있다는 것은 불법이며 가증한 일이라고 더욱 강경하게 말했다.2024)

이렇게 말한 사람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이 회의를 인정하겠는가? 그러나 역사가들이 진실을 전하고 우리가 회의 기록 자체를 믿을 때, 그 회의에서는 형상뿐 아니라 형상을 숭배하는 것도 인정했던 것이다. 이런 교령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성경 전체를 곡해하며 찢어버리면서 성경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여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한 바 있다.2025) 하여튼,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많은 회의들에 대해서 모든 사람과 천사들의 저울인 주의 말씀에 따라 그 경중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성경을 표준으로 우리는 칼케돈 회의를 받아들이며 제 2 차 에베소 회의를 배척한다. 에베소 회의에서는 유티케스의 이단설이 승인되었고 칼케돈 회의에서는 정죄되었기 때문이다.2026) 거룩한 분들은 이 문제를 오직 성경에 표준하여 판단했으며, 우리는 그들 앞에서 빛나던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 앞에서도 빛나도록 그들을 본받아 판단한다. 자,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가서 성령이 그들의 회의에 굳게 결박되어 있다고 그들의 상습적인 자랑을 하도록 하라.

10. 회의들과 인간적 결함

그러나 저 고대의 비교적 순수한 회의에도 결함이 있었다. 박식하고 현명한 분들이 참석했었으나 눈앞에 닥친 문제에 몰두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예견하지 못했으며, 혹은 더 중대한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덜 중요한 일에는 주의하지 못했고, 혹은 사람인 관계로 지혜가 부족해서 기만당하기도 했으며, 혹은 감정에 휩쓸린 때도 있었다. 가장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이 나중 문제는 모든 사람이 그 우수성을 인정하며 또 당연히 그런 인정을 받은 니케아 회의에서 현저한 실례를 볼 수 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조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원수인 아리우스는 언제든지 싸울 용의가 있었고 그들은 그와 직접 맞붙어 싸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아리우스의 오류와 싸울 생각으로 모인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큰 위험성을 잊어버리고 심지어 엄숙과 겸손과 예의 등도 잊어버리고는, 오히려 아리우스를 도우러 온 것같이 하여 이길 싸움을 놓쳐 버렸다. 내부 불화가 일어나 그들은 서로 욕설을 하며 아리우스를 공격할 붓을 들어 동지를 공격했다. 입으로 추악하게 비난하며 서로 고발하는 선전문을 돌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서로 찌르고 상처를 입었을 정도로 분쟁이 격화되었다. 황제는 그들의 생활을 조사하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비난하기보다 칭찬함으로써 그 무절제를 징계했다.2027) 그 후에 있었던 다른 회의들도 여러 가지 점에서 실패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더 이상의 긴 증명은 필요 없다. 누구든지 회의록들을 읽어보면, 중대한 과오들은 그만 두고라도 많은 결점들을 발견할 것이다.

11.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로마 감독 레오는 칼케돈 회의를 교리에서는 정통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지각없는 경솔과 야심이 있었다고 서슴지 않고 비난했다. 그는 이 회의의 합법성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과오를 범했을지도 모른다고 노골적으로 단정했다.2028) 내가 이런 과오를 밝히려고 애쓰는 것을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는 구원에 필요하지 않은 문제에서는 회의들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우리의 반대자들은 인정하기 때문이다.2029) 그러나 이것은 공연한 수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피할 수 없을 때에는 입으로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모든 회의의 모든 결정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무분별하게 우리에게 강요할 때에는 처음에 인정한 것 이상을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회의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또는 과오가 있다 해도 우리가 진리를 분별하거나 그들의 과오를 따르지 않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나는 이런 사태에서 무엇을 생각 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할뿐이다. 즉, 성령께서는 경건하고 거룩한 분들을 주관하셨지만 그들에게 인간적인 일이 생기는 것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사람을 너무 신임하지 않도록 하셨는데, 이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어느 회의에서도 좋은 결말을 본 일이 없다고2030) 한 것보다는 나은 견해다. 이는 모든 회의가 예외 없이 결말이 나빴다고 주장할 때, 그는 회의들의 권위를 그다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 회의들에 대해서는 일일이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신조를 제정하며 원하는 대로 무슨 교리든지 받아들이는 권위가 지방 회의에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전체 회의에 생각하면 쉽게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 먼 인도자에게 순종하지 말라, 후대 회의들의 결정에도 성경에 비추어 볼 때 과오가 있었다. 12-14)

12. 맹종은 불가하다

현대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할 만한 도움을 이성에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최후의 가련한 도피 수단을 사용한다. 즉, 이 사람들 자신은, 비록 그 마음과 생각이 둔하고 심정과 의지가 철저하게 악할지라도 인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히 13:17) 주의 말씀에는 변함이 없다고 한다.2031) 과연 그런가? 사실 이런 자들은 지도자가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여호수아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주의 선지자요 훌륭한 목자였던 여호수아를 주께서 그 직책에 임명하실 때에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어보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8,7). 그러므로 주의 율법에서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영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목자들의 교훈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경계하라고 주께서 자주 경고하신 것은 무슨 뜻인가?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또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 요한의 충고도 헛것이 될 것이다(요일 4:1). 천사들도 이 비판을 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탄과 그 거짓말은 오죽할까?(갈 1:8)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5:14)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어떤 목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가 하는 것과, 무분별하게 모든 목자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칭호에 놀라며 우리까지도 끌려가서 그들과 같은 소경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어떤 이름으로 가장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끌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께서 우리들에게 특히 경고하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이 해답이 옳다면, 대제사장이든 대주교든 교황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눈 먼 인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들과 함께 같은 벼랑에서 떨어지게 할뿐이다. 따라서 이름이 회의나 목자나 주교라고 해서(그 가운데는 진정한 이름과 가짜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말과 행동을 증거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의 영을 검토하며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3. 성경 해석을 위한 회의들의 실제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우리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권한이 교회에게 주어진 일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는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교회에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교리에 관한 토론이 일어날 때에는 진정한 감독들이 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문제된 교리를 검토하는 것이 가장 좋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교회의 목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을 받아 서로 일치하게 되는 결정은 목자들이 각각 자기 집에서 혼자 생각한 후에 신도들에게 가르친다든지 또는 몇 사람이 모여서 교리를 작성하는 것보다 더욱 무게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감독들이 모이면 무엇을 어떤 모양으로 가르칠 것인지를 공동으로 심사숙고할 수 있을 것이며 다양성 때문에 생기는 불만을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로 바울도 교리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이 방법을 권한다. 교리를 분별하는 일을 각 교회에 일임하면서(고전 14:29 참조) 바울은 더 중대한 경우에 따를 절차를 보여 준다. 즉, 교회들은 서로 심리하며 인정하라고 한다. 경건한 감정이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상한 교리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리고 더 큰 분열이 생길 위험성이 보일 경우, 교회들은 먼저 모여서 문제를 검토하며 정당한 토의를 하고 그 다음에 성경에 입각한 결정을 내려서, 일반 신도들의 의혹을 제거하며 악하고욕심 많은 사람들의 입을 막아 감히 문제들을 더 만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아리우스가 일어났을 때에 니케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그 권위로 저 불결한 사람의 악한 노력을 분쇄해서, 그가 흔들어 놓은 교회들의 평화를 회복하며 그의 모독적인 가르침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을 주장했다. 그 후에 유노미우스와 마케도니우스가 새로운 소동을 일으켰을 때에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그들의 미친 생각에 대한 대책을 일으켰다.2032)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불경건이 전복되었다. 사탄이 흉계를 꾸밀 때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방법으로 단결을 유지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타나시우스와 바실이나 키릴루스 같은 진정한 교리의 수호자들을 주께서 모든 시대와 모든 곳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제 2 차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유티케스의 이단설이 이겼고2033) 거룩한 기억을 남긴 플라비안과 다른 경건한 사람 몇 명은 추방을 당했으며, 그밖에도 이런 비행이 많았다. 이것은 극히 악한 성격을 가진 논쟁가 디오스코루스가 회의를 주관한 것이지 그리스도의 영이 주관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교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나도 인정한다. 진리는 교회 안에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회의가 진리를 억압할지라도 주의 놀라운 보호를 받아, 때가 오면 진리는 다시 일어나 승리한다. 그러나 한 회의의 투표에 의해서 채택되는 성경 해석이 확고한 진리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4. 회의의 결정에 대해서 카톨릭 교회는 그릇된 평가를 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권은 회의들에 속하며 더 상소할 길이 없다고 카톨릭 교도들이 주장할 때에 그들의 목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들은 회의의 모든 결정을 "성경에 대한 해석"이라고 부름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구실로 악용한다. 연옥과 성자들의 중보 기도와 은밀한 고백과 기타 비슷한 문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한 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2034) 그러나 이 모든 일이 교회의 권위에 의해서 허락되었으므로,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의견과 관습에 의해서 용인되었으므로 그 하나하나를 성경에 관한 해석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한다. 결코 그뿐이 아니다. 어떤 회의가 무엇을 결정하면, 비록 성경이 분명히 반대할지라도 그것은 "해석"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만찬에서 잔을 주시면서 모두 그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셨다(마 26:27-28). 콘스탄스 회의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사제만 그 잔을 마시라고 했다.2035)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전혀 반대되는 이 결정을 그들은 "해석"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바울은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2036) 마귀들의 위선이라고 한다(딤전 4:1-3).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는, 성령께서는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거룩하고 귀한 것이라고 언명하신다(히 13:4). 그들은 후대에 와서 그들이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한 것을 성경에 대한 진정하고 순수한 해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이질적인 것은 고안할 수가 없다. 누가 감히 반대 의견을 말하면 그들은 이단자라고 판정한다. 교회의 결정은 상소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해석이 옳은가를 문제로 삼는 것을 불법이라고 한다. 내가 왜 이런 파렴치를 공격하겠는가? 그것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성경 인정권이란 것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겠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판단에 굴복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의 타당성을 사람의 변덕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는 모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2037) 그러나 다음의 한 가지 질문만은 하겠다. 만일 성경에 권위가 있는 것이 교회의 인정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어느 회의의 결정을 인용 할 것인가? 나는 그런 결정이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왜 아리우스는 요한복음에 인용된 증거에 의해서 니케아 회의에서의 패배를 인정했는가?2038) 카톨릭 교회의 의견에 의하면, 회의의 승인이 아직 없었으므로 아리우스는 그 증언들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증거로서 "경전"(canon)이라고 하는 고대의 목록을 제시하며 교회의 판단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시 묻는다. 어느 회의에서 그 경전이 공포되었는가? 그들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 사이에는 경전에 대해서 일치한 적이 없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제롬이 한 말에 중요시해야 한다면 마카비서와 토비트와 집회서와 기타 유사한 책들은 다시 외전의 지위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카톨릭 교회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2039)

제 10 장  입법권 : 교황은 이 권한으로 지지자들과 함께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압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다

(교회법과 교회 전통, 하나님 앞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양심. 1-4)

1. 근본 문제

교회 권한의 제 2부를 논하겠다.2040) 카톨릭 교도들은 이 부분을 입법권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수많은 인간적 전통, 즉, 가련한 영혼들을 묶어 매는 수많은 그물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다른 사람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비양심적인 인간들이다(눅 11:46, 마 23:4 참고),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은밀한 고백에 관한 그들의 교리가 얼마나 잔인한 도살 행위인가를 말했다.2041) 그들의 다른 법에는 그렇게 심한 폭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참을 수 있는 듯한 것도 잔혹하게 양심을 억압한다. 나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타락시키는 것이나 유일한 입법자인 하나님의 권리를 빼앗는 데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이 권한, 즉, 법을 정해서 양심을 속박할 합법적 권리가 교회에 있느냐 하는 면에 대해서 논의하겠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정치 질서를 취급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규범에 따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영적 자유가 손상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 말씀과는 별도로 사람들이 발표한 모든 명령을 "인간적 전통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 전통들에 반대한다. 규율이나 성실이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유익한 교회의 거룩한 제도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목자로 인정받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야만적인 도살자 같은 자들이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한계 없이 야만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제지하려는 것이 우리가 노력하는 목표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법은 "영적"이고 영혼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한다.2042) 그러나(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2043)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방법으로 침해을 당하며, 그가 신자들의 양심에 주신 자유는 이런 방법으로 완전히 압박과 버림을 당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법을 지키라고 명령하며, 그 법을 지킴으로써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구하라고 가르치며, 종교와 경건은 모두 그들의 법을 지키는 데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극히 사악한 짓이지만 나는 지금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는 문제들에 관한 한, 양심을 다시 속박하지 말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2044) 양심은 자유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양심은 한 왕이시며 해방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나의 자유의 법, 즉, 복음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를 유지할 수 있다. 양심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아야 하며 아무 속박도 받지 않아야 한다.

2. 카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로 만든다

이 입법자들은 그들의 법을 자유의 법, 부드러운 멍에, 가벼운 짐(마 11:30)이라고까지 자부한다.2045)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란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법을 참혹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버리고 그들 자신이 만든 법과 하나님의 법을 태연하게 또 적극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구원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사람들도 이 올가미에 걸려 있는 한, 도저히 그들처럼 자유를 느낄 수 없다. 바울은 이 문제를 깊이 다루었고 어느 한 가지 일에 대해서도 감히 사람들을 제재하려고 하지 않았다(고전 7:35). 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은 주께서 자유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서 의무를 지운다면 그것이 양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았다. 그러나 이 자들은 억압적 태도로 이루 다 셀 수 없는 법을 공포하고는, 어기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벌을 받을 것이며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법이라고 하면서 심히 엄격하게 실행한다.2046) 그 가운데는 지키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 많은 데다 그런 법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렸으니 그것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크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어떻게 당황하지 않으며 극도의 공포와 고민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러므로 여기서의 내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내적으로 속박하며 또 구원에 필요한 일을 명령하는 듯이 하면서 의심과 가책만을 던져 주는 이 법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3. 양심의 본성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모른다. 즉, 외면적인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충분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2047) 또 바울이 형벌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라고(롬 13:1이하) 가르친 사실도 이 문제를 더 난처하게 만든다. 바울의 교훈에서는 양심은 세상 법률에도 매여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앞장에서2048) 한 말과 이제 논하려는 영적 지배에 대해서 하려는 말은 모두 다 허사가 될 것이다.

이 곤란을 해결하려면 우리는 먼저 양심이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양심의 정의를 알기 위해서는 "양심"(conscience)의 어근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물건의 개념을 지성과 오성으로 파악할 때에 우리는 "안다"고 하며, 여기서 지식이란 말이 생겼다.2049)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판단을 마음으로 의식하며 이 의식이 한 증인같이 붙어 있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감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우리를 심판대 앞에서 고발할 때에 이 의식을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일종의 매개물로서, 사람이 아는 것을 마음속에서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며 그 죄과를 인정할 때까지 추궁한다. 바울도 이런 의미에서, 양심이 사람들의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한다고 가르친다(롬 2:15-16). 단순한 의식이라면 병 속에 밀봉한 것같이 사람 속에 평안히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심은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세우며, 사람에게 붙여 놓은 감시인과 같이 그의 모든 비밀을 감시하고 하나도 어둠 속에 숨기지 못하게 한다.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이라는 격언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2050) 같은 논법으로,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신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갈 때에 느끼는 마음의 평화와 "선한 양심의 하나님께 대한 응답"을(벧전 3:21 참조)11a)2051)동일시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는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라고(히 10:2) 하는 것은, 우리는 해방 또는 자유 함을 얻었으므로 죄가 다시 우리를 고발할 수 없다는 뜻이다.

4. 양심의 속박과 자유

그러므로 행위가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과 같이 양심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 선한 양심은 곧 속마음이 올바르게 서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하였다(딤전 1:5). 뒤에 양심과 오성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착한 양심을 버렸기" 때문에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했다고 같은 장에서 말한다(딤전 1:19). 바울은 이런 말을 사용함으로써,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활발한 열망이며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겠다는 성실한 의도라는 것을 가르친다.

사람을 상대로 양심을 운운하는 때도 있다. 누가의 보고에 의하면, 바울이 자기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선한 양심으로 행하고자 노력하노라고 단언한다(행 24:16).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은 선한 양심의 유익이 사람들에게 흘러가며 그들에게 미리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원래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2052)

그러므로 율법이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또는 다른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우리에게만 의무를 지을 때에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맨다고 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는 온갖 정욕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가지라고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음란한 말과 행동을 완전히 금하신다. 이 세상에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도 나의 양심은 이 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무절제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의 형제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감에 묶이기 때문이다.

본래 무해 무익한 일에 있어서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일이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야 양심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한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고전 10:28-29). 만일 신자가 미리 경고를 받고도 이런 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죄를 짓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먹지 않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 아무리 필요하다해도 먹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양심의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이 법은 외면적인 행위만을 제재하고 양심의 자유는 침범하지 않는다.

(인간들과 교황들이 정한 법에 대한 양심의 입장 : 하나님만이 입법자이시다. 5-8)

5. 인간들이 만든 법은 양심에 대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제 인간이 만든 법을 보기로 하자. 만일 그런 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필요한 일인 듯이 우리의 양심에 짐을 지우기 위해서 정한 법이라면, 우리는 그런 짐은 불법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양심은 사람을 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지상의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구별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전세계가 무지의 암흑 속에 가장 깊이 묻혀 있던 때에도 이 조그마한 빛은 남아 있었다. 즉, 모든 인간적 판단보다 사람의 양심이 더 높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했다. 후에 그들은 그렇게 고백한 것을 한 마디로 부정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때에도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증거가 나타나서 인간의 학대로부터 양심을 구출하게 하셨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서2053) 생겨난 곤란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벌을 피하려는 생각뿐만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면(롬 13:5), 위정자들의 법률은 우리의 양심에 대해서도 지배력을 가졌다는 결론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우리는 먼저 유(類)와 종(種)을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개의 법률은 우리의 양심에 적용되지 않지만, 위정자의 권위를 우리들에게 추천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다. 바울이 논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임명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롬 13:1). 또한 그는 위정자들이 제정한 법이 영혼의 내면적 통치에 적용된다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만든 어떤 법보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바른 생활의 영적 규율을 여러 곳에서 찬양하기 때문이다.2054)

지금까지 말한 여러 가지 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만 역시 주목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즉, 위정자나 교회가 만든 인간의 법을(선하고 공정한 법인 때에) 지켜야 하지만 그 자체로는 양심을 구속하지 않는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는 그 일반적인 목적에 관련된 것이지 명령하신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새 형식을 명령하며 자유로운 문제에 대해서까지 의무를 지우는 법규들은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6. 교회는 양심을 속박하는 독립된 법을 정할 권리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것이 현재 교황 제도에서 "교회법"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만이 하나님께 대한 진실하고 필요한 경배라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이런 법은 수많으며 그만큼 영혼을 잡으려는 올가미도 무수하다. 우리는 율법을 설명할 때에 이 문제를 잠깐 언급했다.2055) 그러나 여기가 올바른 논의를 하기에 더 적당한 곳이 되겠기에, 될 수 있는 한 순서적으로 문제 전체를 요약해 보겠다. 또 거짓 주교들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가르칠 권리가 있노라고 하는 그 횡포적 태도를 우리는 최근에 충분히 논했다고 생각하므로, 이 문제는 전적으로 제외하고 여기서는 그들에게 있다고 하는 입법권만을 논하겠다. 거짓 주교들은 우리의 양심에 새로운 법의 짐을 지운다. 그들이 내세우는 구실은 영적 입법자로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것과, 따라서 교회의 통치를 자기들이 맡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이중의 반역자라고 한다.2056)

그들이 진정한 감독(주교)이라면 이 점에서 나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할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많은 권위는 아닐지라도 교회를 합당하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정도는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이 존경해 주기를 바라는 것과는 본마음이 다른 자들이므로 월권행위를 하지 않고는 극히 적은 권위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점도 다른 곳에서 이미 검토했으므로,2057) 여기서는 진정한 감독들에게 속한 권한을 이 사람들도 권리로서 가졌다고 인정하자. 그렇게 하더라도 나는 그들이 신자들을 지배하는 입법자로 임명되어 마음대로 신자들의 생활 규칙을 정할 수 있다든지 또는 그들이 결정한 규칙을 신자들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즉, 나는 그들에게 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들이 생각해낸 것을 의무적으로 지키라고 교회에 명령할권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 권한은 사도들이 몰랐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친히 여러 번 사역자들에게 거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사도들의 선례와 하나님의 명백한 금지 명령을 어기면서 감히 이 권리를 잡으려고 했으며 현재도 그것을 옹호하려고 하는지 나는 심히 이상하게 생각한다.

7. 모든 자의적 지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침범이다

주께서는 선한 생활을 위한 완전한 표준에 필요한 것은 모두 그의 율법에 포함시키시고, 아무도 그것에게 첨가하지 못하게 하셨다.2058) 이렇게 하신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우리 생활의 주인과 인도자로 생각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그 표준에 일치시킨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이다. 의로운 생활은 전적으로 그렇게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순종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한다.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1-12)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의 권위와 법으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이 한 가지 특권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이사야를 통해서 이미 말씀하셨다. 약간 불명확한 표현이었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요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사 33:22). 이 두 구절이 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은 영혼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신 이에게 있다는 것을 밝힌다. 사실 야고보는 이 점을 명백하게 말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아무도 이 권한을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혼의 유일한 지배자로 인정해야 한다. 오직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은 동시에 지배자와 재판장과 입법자와 구주를 겸하셨다고 한 이사야의 말과 같다(사 33:22). 그러므로 베드로는 목자들에게 그 직분에 관한 충고를 할 때에, 양떼를 먹이며 맡은 무리 곧 하나님의 기업인 신자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라고 한다(벧전 5:2-3). 하나님께서 자기 것으로 확보하신 것을 사람에게 이전하는 것이 불법이란 것을 잘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교회 안에서 무엇을 명령하려고 덤비는 자들의 권한이 완전히 말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8.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서 용인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방법

문제 전체의 근본은, 만일 하나님이 유일한 입법자이시라면 사람이 이 영예를 빼앗는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께서 이 영예를 자기만이 가지겠다고 하시는 이유를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 이유는 두 가지라고 이미 말했다. 첫째, 모든 의와 거룩의 완전한 표준은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하나님을 알면 선한 생활을 완전히 알게 된다. 둘째,(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고 합당하게 예배하는 방법을 구할 때에)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셨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섬겨야 한다.

이 두 가지 이유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인간이 만든 어떤 법이2059) 의 말씀에 반대되는가를 쉽게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법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에 관계된 것이며, 양심이 그 법을 지킬 의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꼭 지켜야 할 종류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든 모든 법을 우리는 이 저울로 달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완전한 기준이 있어서 이 기준에 따라 모든 일에 과오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부담으로 교회를 억압하려고 하는 거짓 사도들과 싸운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골 2:8) 첫째 이유를 사용했고, 비슷한 문제로 갈라디아 교회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갈 5:1-12) 둘째 이유를 더 많이 사용했다. 골로새서에서 그는 논한다. 즉, 주를 어떻게 경배한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주께서는 성실하고 충분하게 우리를 가르쳐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 법은 사람에게서 배우려고 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만드는 지혜는 전부 복음에 포함되었다고 1장에서 말한다(골 1:28). 2장의 처음에서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 있다고 말한다(골 2:3). 그리고 그는 결론을 내리기를 신자들은 헛된 철학과 인간의 법에 속아 그리스도의 양떼에서 멀리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하였다(골 2:8). 그러나 2장의 끝에 가서는 모든 자의적(自意的) 숭배를2060), 즉, 모든 원시적 경배를 더욱 단호하게 비난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만들어 냈거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에 관해서 그들이 마음대로 공포한 교훈이라고 한다(골 2:16-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모든 법을 불경건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하나님의 지배만을 받아야 할) 양심을 각종 올가미에 걸려들게 하지 말라고 역설하는 구절들, 특히 5장은(갈 5:1-12) 뜻이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지적하기만 하겠다.

(예배 의식을 제정한 교회법은 전제적이며 경박하며 성경에 배치된다. 9-18)

9. 이미 말한 원칙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교회법은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 전체는 실질적인 예를 들어야 더 분명하게 되겠기에, 더 진행되기 전에 이 교리를 우리의 시대에 적용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우리는 교황과 그 앞잡이들이 교회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교회법"은 너무나 해로우며 불경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은 그것을 거룩하며 구원에 유익하다고 하여 옹호한다. 그런데 교회법에는 의식에 관한 것과 규율에 관한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두 가지를 다 공격하는 것은 정당한가?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정당하다.

우선 법을 만든 자들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가장 진정한 경배는 바로 그들의 이 법안에 담겨 있다고 분명히 말하지 않는가? 그들이 의식을 지시하는 목적은 그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단지 무지한 대중의 잘못된 인식으로 이런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책임을 가진 자들의 승인을 얻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나는 그들이 모든 경건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행하는 여러 가지 가증한 것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그들이 조작한 법에 예속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장 사소한 전통을 지키지 않아도 그것이 극악한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가르친 것, 즉,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 법을 인간의 결정에 예속시키는 것은 우리도 참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특히 그들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배반이라고 확언했다(골 2:20). 또 그들이 자기들의 명령을 모두 준수하도록 지극히 엄격하게 양심을 결박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에게 반대할 때에 우리는 바울과 공동 전선을 펴는 것이다. 바울은 신자의 양심을 인간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갈 5:1).

10. 교황 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허무맹랑한 조작을 종교라고 부를 때 이 패악에는 반드시 다른 부패가 따른다.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도 이런 일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유전(遺傳)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폐기한다고 하셨다(마 15:3). 나는 현대 입법자들과2061) 싸울 때에 나 자신의 말을 쓰고자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들이 이기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 년 동안 철저하게 악한 생활을 계속한 것보다도 연말에 은밀한 고백을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악한 일이라고 하니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온 몸을 매일 음행으로 더럽힌 것보다도 금요일에 고기를 조금 맛본 것을 더 악하다고 하며, 모든 지체를 동원해서 가장 악한 죄악을 열심히 지은 것보다도 어떤 꼬마 성자의 날에 정직한 일을 위해 손을 움직인 것이 더 큰 죄라고 하고, 사제가 일 천 번 간음죄를 지은 것보다도 한 사람을 상대로 합법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더 악한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모든 약속을 어긴 것보다 맹세한 순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악하며, 가난한 사람의 곤경을 돌보지 않는 것보다도 교회들을 괴상하고 쓸데없는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데 낭비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고, 전인류를 학대하는 것보다 우상에게 경의를 표시하지 않고 지나는 것이 더 악하다고 한다. 합당한 기도를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는 것보다 무의미한 말을 길게 중얼거리지 않는 것이 더 큰 죄라고 한다. 그들의 유전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무시하는 것은(마 15:3) 무슨 까닭인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할 때에는 냉담하고 소홀한 자들이, 그들 자신의 명령은 그 속에 경건의 모든 능력이라도 포함된 양 정확하게 지켜야 된다고 열심히 또 분주히 역설하니 이것은 무슨 짓인가? 하나님의 법을 어긴 데 대해서는 단지 정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자기들의 명령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투옥과 추방과 불과 칼로 처벌한다.2062)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가혹하지 않으면서, 자기들을 멸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증오심으로 끝까지 박해를 가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모든 법이 전복되는 것은 침착한 마음으로 그저 바라보라고 가르치면서, 소위 교회의 교훈을 한 획이라도 어기는 것은 중대한 일인 양 떠든다. 우선 사소한 일과(하나님이 보시기에) 무해 무익한 일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재판하며 추방한다는 것은 큰 죄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이 경미한 악에 불과하다는 듯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갈 4:9> 말한) 세상의 초등 학문을 더 높이 평가한다. 간음죄에서 거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음식 문제로 재판을 받으며, 창녀와 관계한 사람에게는 아내가 금지된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람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짜 순종의 결과인 것이다.

11.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하며 무익하다

이 교회법들에는 우리가 마땅하게 생각지 않는 두 가지 결점이 있다. 첫째, 교회법에는 대체로 무익한 것들과 심지어 어떤 것은 미련하기까지 한 준수 사항들이 규정되어있다. 둘째, 경건한 양심은 그 수많은 규정에 압박되며 일종의 유대교에 돌아가서2063) 그림자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교회법들을 무익하고 미천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육적인 지혜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육의 지혜는 교회법을 즐기며, 그것을 제거하면 교회가 완전한 기형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며(골 2:23), 또 그렇기 때문에 그 엄격한 태도로 육신을 길들일 수 있는 것같이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건전한 경고다. 바울은 인간의 전통이 지혜의 외형을 쓰고 거짓으로 속인다고 말한다. 이 속이는 빛깔이 어째서 생기는가? 사람들이 가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지혜는 자기 것을 알아보며, 그것을 알아본 다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참으로 훌륭한 것이 있어도 자체의 허영심과 잘 맞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교회법은 그 멍에로 사람의 마음을 땅에 닿도록 내리 짓밟아 일어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자기를 낮추는 훈련을 위해서 적합한 지시를 주는 듯이 보인다. 끝으로, 교회법은 육의 쾌락을 억제하며 엄격한 금욕으로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 같기 때문에, 현명한 조치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단순한 사람들이 그 거짓에 속지 않도록 그 가면을 벗겨 버리는가? 바울은 교회법들의 허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처럼 일일이 반박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골 2:22). 참으로 그는 교회 안에 있던 모든 가짜 예배가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가짜 예배가 인간을 기쁘게 할수록 더욱 신자들의 의심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즉, 외면적 겸손의 가면은 진정한 겸손과 완전히 다르므로 곧 식별된다는 것과 초보적인 규율은 신체 훈련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사실들이 신자들을 위해서 인간의 유전을 충분히 반박해 주기를 원했다. 원래 신자들을 위한다는 구실로 이 유전들을 무지한 사람들에게 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 그들의 신비는 기만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무지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속적 지혜로 심히 교만한 사람들까지도 화려한 의식에 굉장한 매력을 느낀다. 참으로 위선자들과 경박한 여자들은 그렇게 아름답고 좋은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많은 의식들을 더 깊이 연구하고 또 경건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 가치를 실제로 알아 본 사람들은 첫째, 그 의식들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너절하다는 것과 둘째, 화려한 허식으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므로 기만이란 것을 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카톨릭 교사들이 그 속에 큰 신비가 숨어 있다고 하는 의식들인데, 우리는 그 의식들에서 순전히 우롱과 기만만을 경험할 뿐이다.2064) 그런 것을 만들어 낸 자들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짓으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데까지 타락했다는 것은 이상한일이 아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이방인들의 미친 짓을 본받기도 하며 모세의 율법에 있는 고대의 의식들을 원숭이같이 경솔하게 흉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동물을 제물로 바치며 그밖에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일 뿐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다른 증명이 없더라도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서투른 혼돈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 의식의 목적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마비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은 사실 자체가 분명하게 보여 준다. 또 그들의 최신식 교회법도 규율을 유지한다기보다는 파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위선자들은 그것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그러나 좀더 철저하게 연구하는 사람은 그것이 규율의 그림자요 금방 사라지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13. 카톨릭 교회법은 무의미한 축적으로 유대교적 요소로 양심을 괴롭힌다

둘째 점을 본다면, 이런 유전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효가 불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일종의 유대교가 의식에 나타나며 어떤 규정은 경건한 마음에 잔인하게 고통을 가한다.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 대해서, 하나님의 교훈은 무시되고 매사에 선입견이 가득하여, 축일(祝日) 8일간에 맨발로 땅을 디디는 사람을 술에 만취된 사람보다 더 엄격하게 책망한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비로 자유롭게 하신 교회가 유대인들보다 더 심한 압박을 받는다고 하였다.2065) 저 거룩한 분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현재의 속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보고 얼마나 한탄을 했겠는가? 그의 시대에 비해서 지금은 법의 수가 열 배나 더 불었고 그 일점일획을 백 배나 더 엄격하게 강행한다. 이와 같이 이 악한 입법자들은 한번 권위를 잡으면 중단하지 않고 계속 명령하고 금지하여, 끝내는 극도의 신경과민 상태에까지 미치게 된다. 이 사정을 바울은 명쾌한 말로 간파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골 2:20-21)라는 말에는 먹는다와 만진다는 두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수많은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먹는다는 뜻을 취한다. 그리고 여기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의 수법을 훌륭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우선 미신에서부터 출발해서, 먹지 말라고 할뿐만 아니라 조금 씹는 것조차 금지한다. 여기서 이기면 다음에는 맛도 보지 말라고 한다. 또한 여기서 인정을 받으면 다음에는 손가락으로 만지는 것까지도 불법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14. 의식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려는 것이지 숨기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인간이 만든 법들의 압제를 비난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는 가련한 양심들이 그 법들에 의한 수많은 명령과 가혹한 강요에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규율에 관한 교회법을 논했다.2066) 그리스도를 거의 묻어 버리고 우리를 유대교적 상징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의식들에 대해서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거스틴은 말한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새 백성의 공동체를 성례로 결속하셨다. 그것은 몹시 그 수가 적고 뜻이 아주 훌륭하며 지키기가 매우 쉽다."2067) 이 단순성에 비해서, 현재 보는 바와 같이 교회를 얽어매고 있는 무수한 각종 의식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 그 정도는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이 패악한 상태를 몇몇 교활한 사람들은 교묘하게 변명한다. 그들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리 사이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너무 많으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초보적인 규율이 마련되었으며, 강한 사람들은 비록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약한 형제들에게는 유익한 것이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도 약한 형제들에 대한 의무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의식을 산더미같이 쌓아 올려서 그들을 억압하는 것은 그들을 보호하는 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옛 사람들을 구별하시고, 옛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표식과 비유로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그런 외면적인 부속물이 없이 더 단순하게 가르치신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어린아이가 그 연령의 능력에 따라 보호자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보호 하에서 제한을 받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를 받았다(갈 4:1-3). 그러나 우리는 어른같이 관리인의 보호에서 해방되었고 기초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주께서는 그의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있으리란 것과 그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 것인가를 확실하게 예견하셨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와 유대인들을 구별하셨다.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들을 도우려면,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신 유대교적인 것을 부활시킨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옛 백성과 새 백성과의 이 차이에 유의하면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리라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요 4:23). 사실 그때는 줄곧 와 있었다. 새로운 경배자들이 옛날 경배자들과 다른 점은,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이를테면 여러 가지 의식으로 감싸서 비유적으로 나타냈지만 지금은 이런 의식들을 폐지하고 하나님을 더욱 단순하게 경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차이점을 혼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인정하신 질서를 뒤집어엎는다.

당신은 경험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도울 만한 의식을 전혀 주지 않는다는 말이냐고 물으리라. 그렇지 않다. 나는 그런 도움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를 숨기는 것이 아닌 나타내는2068) 방법을 사용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전혀 어렵지 않은 소수의 의식을 우리에게 주셔서 임재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더 많은 의식을 주셔서 임재하시지 않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삼으셨다. 그리스도는 임재하시지 않았는데, 이는 능력이 아닌 그를 알리려고 사용한 수단에 임재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 수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적게 하고 지키기 쉽게 하며 표현을 존귀하고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실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있다.

15. 부패한 의식들을 속죄의 제사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세상 사람들이 이미 감염되어 있는 치명적인 견해를 말하고 싶지 않다. 그 견해는, 의식은 곧 제사로서 그 제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노염을 충분히 풀고 죄를 깨끗이 씻으며 의와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인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질적인 오류는 선한 일들을 부패시킨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에 관해서도 사람은 이 점에서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경솔하게 만들어 낸 행위를 그렇게 존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영생을 위해서 공로가 된다고 믿는 것보다 더 비열한 짓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위에 보상이 따르는 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 자신이 그 행위를 순종의 증거로서 받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는 그 자체의 가치나 공로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높이 평가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위, 그러나 사람이 성취하지 못하는 행위의 완전성이다. 우리가 행하는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사랑에 의해 은혜를 받게 되며, 행위 자체를 본다면 우리의 순종은 약하고 부족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없는 행위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겠다. 나는 현재 논의되는 문제를 되풀이 하겠다. 즉,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순종만을 주목하신다. 이것은 예언자를 통해서 언명하신 바와 같다. "내가‥‥‥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렘 7:22-23). 거짓된 행위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사 55:2) 마찬가지로,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마 15:9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가련한 백성들로 하여금 저 너절한 외형적인 일에서 의를 구하도록 만든 사실을 결코 변명할 수 없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의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늘 심판대 앞에서 그 의가 자기들을 지켜 주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무대 위의 연극 장면같이 또는 마술의 주문같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들을 과시하는데, 이 또한 비난을 받아야 할 과오가 아닌가? 의식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지 않을 경우 확실히 모두가 부패하고 유해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현재 교황 제도 하에서 사용하는 의식들은 가르침과 분리되고 순전히 무의미한 표징으로 사람들을 구속한다.

끝으로,(사람의 배는 간교한 기술자이기 때문에) 욕심 많은 사제들이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 고안한 의식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작은 어떻든 간에 지금은 모든 의식이 더러운 이익에 팔려 있어서, 이 불경하고 모독적인 장사를 교회에서 일소하려면 그 의식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잘라 버려야 한다.

16. 일반적인 통찰과 그 적용

이 논술은 완전히 현대에 관한 것으로서, 내가 인간이 만들어낸 법에 대한 지속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느 시대에 막론하고 유익하지 않은 것이 하나 도 없다. 이 미신이 스며들어, 사람들이 자기가 조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할 경우 이 목적으로 만들어낸 모든 법은 즉시 타락해서 심한 폐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교훈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고 놀라도록 하겠다고(사 29:13- 14) 어느 한 시대뿐만이 아닌 모든 시대에 대하여 이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많은 경고를 멸시하고 치명적인 이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드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마음이 어두워져서 계속적으로 모든 미련한 짓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떠나서 모든 시대의 인간적 전통 곧 교회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배척해야 할 인간적 전통이 어떤 것인가를2069) 이해하고 싶다면 바로 우리가 위에서2070) 제시한 것이야말로 확실하고 분명한 정의가 될 것이다. 즉,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법이며 사람들이 만든 법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을 규정하려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필요한 일들에 대한 규정을 만든다는 구실로 양심을 여러 가지 가책으로 속박하려는 것이다. 만일 이 두 가지 목적 중의 어느 하나에 또는 그 두 가지 목적에 다른 결점들을 첨가한다면 그 법들이 너무 많아서 복음의 명료성을 애매모호하게 만들며, 그것은 진정한 경배 행위가 아니라 무익하고 무가치하고 전혀 건설적인 점이 없으며, 추하고 비루한 이익을 얻으려는 계략이며, 너무도 지키기 어려우며, 부끄러운 미신으로 더럽혀졌다는 이런 여러 가지 점을 본다면 이 법들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내포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7. 카톨릭의 교회법은 교회법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의 전통은 그들 자신에게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그들이 변명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들은 교회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교회의 권위는 그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 점이 인정된다면, 그들의 전통은 성령의 계시요 하나님을 경멸하는 불경한 자가 아니면 그 전통을 멸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곧 나오게 된다. 또 그들은 큰 권위가 있어서 모든 일을 한다는 듯이, 그들의 관습의 적지 않은 부분이 사도들에게서 내려온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하나의 예만 본다면 사도들이 다른 상황에서 한 일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도들은 회의를 열고 회의의 결정으로서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삼가도록 이방인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행 15:20,22).2071)

그들이 자기선전을 위해서 교회의 이름을 사칭한다는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2072) 목전의 문제를 위해서 우리는 가짜 교회의 모든 거짓과 가면을 벗겨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 교회가 우리의 제일 관심사가 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교회의 표준에 일치하도록 우리 자신을 형성하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서 마음대로 날뛰며 새로운 법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옛날에 교회에 주신 법은 영원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또 다른 구절에,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고 하셨다(잠 30:6).

이것이 교회에 하신 말씀이란 것을 그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금지된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감히 자기가 만든 것을 하나님의 교훈에 붙여서 섞었다고 그들은 자랑하니 이것은 교회의 반항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의 위선은 교회를 심히 모욕하는 것이며, 우리는 도저히 그 위선에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이 심히 경박해서 하나님의 계명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미친 듯이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을 쫓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경솔한 인간적 충동을 생각할 때에 "교회"를 들먹이는 것은 거짓이요 가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를 경배하는 일과 구원의 교훈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무것도 가담하지 말라고 보편 교회에 명령하셨으며, 이 금지의 말씀에는 조금도 복잡한 뜻이나 희미하고 모호한 점이 없다.

그들은 이것이 율법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요 그 후에 예언과 복음 선포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렇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예언과 복음은 가감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보충한 것이라고 덧붙여 말한다.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아무것도 가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의 율법은 이를테면 그것을 둘러싼 것이 많기 때문에 모호한 점이 있지만, 아무것도 가감하지 말고 주께서 그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끝내는 그 사랑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더 분명한 교훈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과 복음에 아무것도 가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신 것을 왜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사람이 만든 의식으로 예배하는 것을 가장 불쾌하게 생각하신다고 옛날에 선언하신 주께서는 지금도 변함이 없으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놀라운 말씀을 하신 것이며 그 말씀들은 항상 우리 귀에 쟁쟁해야 한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렘 7:22-23). 또,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부지런히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하였으나"(렘 11:7). 이런 구절들은 그 외에도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출한 것이 다음 구절이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그러므로 이 방면에서 교회의 권위를 빙자한 인간적 조작은 모두 불경건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조작을 교회에 돌리는 것이 거짓이란 것도 쉽게 증명될 수 있다.

18. 카릭의 교회법은 사도들이나 "사도적 전통"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그들이 교만하게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이 인간의 전통을 우리는 거리낌 없이 공격한다.(우리를 미워하는 논적들은 거짓말로 부당한 비난을 하지만) 우리는 교회를 멸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찬양인 순종의 찬양을 교회에 돌린다.2073) 그러나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한 한계를 넘은 것 같이 말함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주를 거역하게 만드는 자들로부터 크나큰 해를 입게 만든다. 나는 교회의 권한을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교회에 대한 주의 명령과 주의 명령을 지켜야 할 교회의 의무를 숨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파렴치이며 악한 생각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와 일치하기를 원한다면 또 그것이 마땅한 일이므로 주께서 우리와 교회에 무엇을 명령하셨는가를 알고 기억하는 것이 더욱 합당한 일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한 마음으로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 주께 순종한다면 우리가 교회와 잘 일치하게 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를 억누른 이전통의 근원이 사도들에게 있었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사도들의 교훈 전체의 목적은 새로운 규정으로 양심에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과 우리 인간의 조작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또 역사 서적과 고대 기록을 조금이라도 믿을 수 있다면, 사도들은 카톨릭 교회가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을 몰랐을 뿐 아니라 들은 일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도들의 명령이 기록에 남지는 않았으나 관습과 관례에 의해서 전달되었다고 그들이 지껄이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생존시에는 사도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을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성령의 시로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요 16:12-13).2074) 이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을 했다.2075) 여기서의 논증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 충분하겠다. 사도들이 오랫동안 알지 못한 큰 신비가 있었는데, 그 신비의 일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풍습이었고(어떤 것은 유대인 혹은 이방인들 사이에서 오래 전에 발표된 것이었다), 일부는 미련한(수영도 할 줄 모르고 글자도 모르는)2076) 신부들이 굉장히 빨리 집행하는 어리석은 몸짓과 무의미하고 작은 의식들이다. 이런 것을 신비라고 하여 그들은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사실 어린아이들과 광대들도 적절하게 흉내 내며 이 거룩한 의식들의 가장 적합한 집행자가 될 만하다. 역사 서적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 이런 여러 가지 사실을 본다면, 이 산더미 같은 의식들과 관습들은 갑자기 교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 시대 직후에 생존했던 저 거룩한 감독들이 질서와 규율에 관한 일들을 만든 후 차례로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은 신중한 태도가 부족했으며 호기심과 욕심이 많았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신기한 일들을 생각해 내는 점에서 선임자들을 능가하려는 어리석은 경쟁심이 더욱 치열해졌다. 또(신발명으로 후계자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애쓴 그들은) 자기의 발명품이 불원간 무용지물이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준수를 더욱 엄격하게 요구했다. 이 어긋난 열심2077) 때문에 이런 의식의 대부분이 생겼으며, 그들은 이런 것들을 사도적이라고 선전한다. 이 점은 역사 서적들도 증명한다

("사도적"이라고 사칭하는 무익한 의식들이 축적되었다 : 약한 양심들에 대한 의무. 19-22)

19. 사도 시대 이후에 축적된 무익한 의식

이른바 "전통들"을 완전히 나열해서 장황하게 떠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예만 들고자 한다. 사도 시대에는 주의 만찬을 아주 간단하게 지켰다. 사도 직후의 사람들은 이 신비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무엇을 덧붙였으나 그것은 배척할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련한 모방자들이 후계자가 되어 때때로 하나 둘씩 덧붙이다가 마침내는 현재 미사에서 보는 사제복과 성찬 장식과 몸짓과 그 밖의 필요 없는 장치 전체를 고안해 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일반 교회 내에서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한 일을 옛날 사람들은 사도들이 물려준 것으로 확신했다고 항변한다. 그들은 이 점에 대한 권위로서 어거스틴을 끌어댄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겠다. "온 세계가 지키는 일들을 우리는 사도들 자신이나 전체 회의들이 제정한 것으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사도들과 전체 회의들은 교회 내에서 가장 건전한 권위를 가졌다. 예컨대 그런 행사들은 주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강림과 기타 유사한 사건들을 교회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매년 의식을 행하여 기념한다."2078) 어거스틴이 말한 예가 아주 적은 것을 볼 때에, 그는 믿을 만한 권위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 당시에 통용된 관습들, 즉,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단순하고 지나치게 빈번하지 않고 정중한 의식들만을 존경하려고 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알아내지 못하겠는가? 이것과 카톨릭 교회에서 모든 작은 의식까지도 사도적인 것으로 인정하라고 신자들에게 강요하는 것과는 얼마나다른가!

20. 어거스틴의 말을 해석한다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나는 한 가지 예만 들겠다. 그들의 성수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곧 "사도들에게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치 역사 서적들이 이 발명을 어떤 로마의 감독에게 돌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2079) 그 로마 감독이 사도들에게 물어 보기만 했던들 그런 이상하고 부적절한 상징으로 세례를 더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 역사서들이 기록한 것처럼 성수의 기원이 오래되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의 말에, 그 당시의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발 씻으신 것을 엄숙하게 모방하는 것은 그 의식이 세례의 일부라는 인상을 줄 염려가 있다고 해서 피했다는 것이 있다.2080) 이 말을 보면 세례와 비슷한 씻기는 일이 당시에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하여튼 나는 세례가 매일 상징적 행위로 그것을 회상함으로써 반복된다고 하는 생각을 부정한다. 이런 관습은 사도들의 정신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나는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다른 일들을 사도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겠다. 그는 추측만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며 이런 중대한 문제를 추측만을 근거로 해서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끝으로, 어거스틴이 말한 일들이 사도들에게서 전래된 것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더라도 신자가 자유로운 양심으로 채용할 수 있는 경건한 행위(무익할 때에는 폐기할 수 있는 행위)를 정하는 것과 어떤 법을 만들어서 올가미같이 양심을 잡아 속박시키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전통들의 창시자가 누구였든 간에 현재 그것이 큰 폐해로 타락한 것을 보았으므로, 우리는 창시자에 대한 경의를 훼손하지 않고서도 그 전통들을 당연히 폐지할 수 있다. 그런 전통들을 권했을 때에 언제까지고 변하지 말라고 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21. 사도행전 15:20에 있는 명령

그들의 압제를 변명하기 위해 사도들의 선례를 인용해도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원시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없는 결정을 했고, 그 결정으로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명령했다(행 15:20)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일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면 그들의 후계자들이 정세가 요구하는 때마다 같은 관례를 따르는 것을 허락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이냐고2081) 말한다.

그들이 다른 일에도 이 일같이 항상 사도들을 따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사도들은 거기서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언하며 이를 강력한 논리로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 회의에서 베드로는 제자들의 목에 멍에를 메게 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고 언명했으니(행 15:10), 만일 그 후에 그런 멍에를 지우는 데 찬성했다면 그는 자기 견해를 뒤집는 것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도들이 자기들의 권위로, 우상의 제물이 되었던 고기와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라고 이방인들에게 명령했다면 그것은 멍에를 메우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금지했기 때문에 여전히 양심에 의혹이 있다. 그러나 그 결정 자체의 진실한 뜻에 유의한다면 이 의혹은 쉽게 해소시킬 수 있다. 그 결정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이방인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과, 율법을 지키라고 그들을 괴롭히거나 짐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이다(행 15:19,24,28). 여기까지는 우리의 입장에 유리하다. 그러나 곧 예외가 따른다(행 15:20,29). 이것은 사도들이 정한 새로운 법이 아니라 사랑을 해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명령이다. 이방인의 자유에서 일점일획도 제거하지 않고, 다만 형제들에 대해서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며 자유를 남용해서 형제들을 넘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고할 뿐이다. 이방인들은 형제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둘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역시 특수한 일을 명령한다. 그 시대에 적합한 범위 내에서 형제들을 넘어지게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일을 피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에 자기들의 생각으로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이지 않는다.

22. 약한 형제들에 대한 의무

이것은 마치 아직 기초가 확립되지 않은 교회들을 맡은 목사들이 신자들을 향해서, 함께 있는 약한 형제들이 강하게 될 때까지는 금요일에 다른 사람이 보는 데서 고기를 먹지 말라, 거룩한 날에 공공연히 일을 하지 말라는 등의 당부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일들은 미신이 아닌 이상 그 자체로는 무해 무익한 것이지만, 그 일을 함으로써 형제들을 넘어지게 할 경우에는 반드시 죄가 된다. 현재 상황으로는 형제 앞에 이렇게 나타난다면 반드시 그들의 양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게 된다.

여기서 이 목사들은 주께서 명백하게 금지하신 대로 넘어지게 하는 일을 미리 방지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모략 중상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목사들이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죄를 짓게 하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죄를 짓는 것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역설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주께서는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당신들에게 명령하신다. 당신들이 우상의 제물이 되었던 고기와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먹으면 반드시 형제들을 넘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대들에게, 남을 넘어뜨리면서까지 먹지는 말라고 주의 말씀에 따라 명령한다." 사도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바울이 제일 잘 증명한다. 그가 쓴 글은 회의의 결정과 확실히 일치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아노라‥‥‥그러나‥‥‥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1, 4, 7, 9). 이 일들을 잘 생각하는 사람은 후에 사도들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전제를 변명하는 자들의 위장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자들은 마치 사도들의 명령이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초가 된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항변에 대한 이 답변을 그들이 인정한다고 자백하지 않고 도망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무슨 권리로 그들이 감히 사도들의 명령을 무시했는가를 내게 대답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방지하려고 한 가벼운 범죄와 분쟁의 위험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법은 그 목적에 의해서 판단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법은 사랑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고 사랑에 속한 것을 명령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 법을 어기는 것은 곧 사랑을 유린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조작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첨가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법을 만든 시대와 당시의 관습에 적응한 것뿐임을 그들이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예배에서 쓰는 관습과 인간의 창안을 성경과 그리스도 자신께서 배척하신다. 23-26)

23. 교회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증거와 모순된다

이런 법들은 우리들에게 백 배나 더 부당하며 유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외 없이 복종하라고 주장한다. 오류에도 찬성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문제는, 우리는 속박된 자들이므로 우리의 지도자들의 가혹한 명령을 참아야 하며 또 우리에게는 그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께서는 그의 말씀의 진리를 그들에게 대립시키시며 우리를 이런 속박에서 해방시켜, 그의 거룩한 피로 사신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다(고전 7:23). 주의 피의 은혜는 주께서 말씀으로 여러 번 확인하셨다. 악의에 찬 그들은 그 주장과는 반대로 우리의 신체에 중대한 압박을 가하려고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에서 자유를(즉,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빼앗고 노예처럼 학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점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이 묵과하겠다. 그러나 우 리는 주께서 자신의 것이라고 엄격하게 주장하시는 그 나라를 주에게서 빼앗는 것을 얼마만큼 중대한 일로 생각하는가?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서 주를 경배하는 것은 곧 주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다. 주를 경배하는 법에 대해서 주 자신이 유일한 입법자로 인정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일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께서 이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시는가를 주의 말씀에서 들어보자. "이 백성이‥‥‥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13-14). 다른 구절에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9)라고 한다. 참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러 가지 우상 숭배로 부패했을 때 그 모든 악의 원인은 이 불순한 혼합에 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새로운 의식들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역사를 보면 바빌로니아의 왕이 사마리아에 데려온 이민들은 그 땅의 하나님의 판단과 법을 모르기 때문에 야수의 밥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의식에 있어서 죄를 범한 것은 아니나 주께서는 그들의 화려한 허식을 기뻐하시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의 말씀에 없는 것을 생각해 내서 예배 법을 어겼기 때문에 주께서 벌을 내리셨다. 그렇게 되자 그들은 벌에 놀라서 율법에 정한 의식들을 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경배는 아직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도하고 경외하지 않기도 했다고 두 번 반복하였다(왕하 17:24-25, 32-33,41). 이 기사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일부는 우리의 조작품을 섞지 않고 그가 명령하신 대로만 경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경건한 왕들을 자주 칭찬하는 것도, 그들이 모든 교훈대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왕하 22:1-2, 왕상 15:11, 22:43, 왕하 12:2, 14:3, 15:3, 15:34, 18:3 참조). 그뿐이 아니다. 어떤 조작된 예배에서는 비록 불경한 점이 겉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역시 하나님의 교훈에서 떠난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것을 엄중하게 비난하신다.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모형도를 얻어다가 만든 단은(왕하 16:10) 성전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 같았다. 왕은 이 단에서 유일신에게 제물을 드리며 종래에 있던 단보다 더 훌륭한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인간의 조작품을 사용하는 것은 불순한 부패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는 왕의 참람한 처사를 미워하셨다(왕하 16:10-18).2082)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계시될수록 우리의 방자한 시도는 더욱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고 하신 그 예루살렘에 므낫세 왕이 새로운 단을 쌓은 것은(왕하 21:3-4) 그의 범죄를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권위를 공공연하게 무시했기 때문이다.

24. 하나님은 사악한 예배를 미워하신다

사람의 계명으로 주를 경배하는 자들을 주께서 놀라게 하시겠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시며(사 29:13-14), 사람의 교훈으로 경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마 15:9) 언급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종교 문제에서(즉, 하늘의 지혜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만을 의지하는 의미를 생각한다면, 인간성의 고집에 따라서 행하는 패악한 의식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데에는 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이 정한 법에 따라 경배하는 자들도 법에 복종하는 점에서는 겸손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복종하는 법을 하나님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들의 전통에 속지 말라고(골 2:4이하) 강경하게 경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그것을 ejqeloqrhskeiva(에델로드레스케이아)라고도 부른다. 자의적 숭배, 즉,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사람이 고안한 종교라는 뜻이다(골 2:23,22). 하나님만이 지혜롭기 위해서 우리의 지혜와 모든 사람의 지혜가 어리석게 되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사람이 고안한 빈약한 관습을 하나님이 인정하시리라고 기대하며 할 수 없다는 듯이 가짜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지 저(바른)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수백 년 동안 또 우리가 기억하는 한, 조물주보다 피조물이 더 많은 권위를 가진 곳에서는(롬 1:25 참조) 그렇게 해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어떤 이교보다도 더 많고 더 어리석은 미신이 종교를(이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다면) 더럽히고 있다. 사람의 지성은 참으로 사람과 같은 육적이며 우매한 짓 외의 무엇을 생각해낼 수 있겠는가?

25.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반증을 논박한다

또한 미신 지지자들은, 사무엘이 라마에서 희생을 드린 것은 율법에 없는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기뻐하셨다고 한다(삼상 7:17). 이 주장은 논박하기 쉽다. 사무엘이 쌓은 단은 유일한 단에 대립하는 둘째 단이 아니었고 또 언약의 궤가 있을 처소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살고 있던 곳을 가장 편리하다고 선택한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가감하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지하셨으므로(신 4:2), 이 거룩한 예언자에게 거룩한 의식을 새로 만들어 내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마노아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비상하고 특별한 경우였다고 말하려 한다(삿 13:19). 그는 한 사사로운 개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렸고 또 하나님의 가납도 없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자기의 경솔한 충동적인 생각으로 하지 않고 하늘의 영감을 받아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노아에 못지않은 기드온은 죽을 인간들이 생각해 낸 예배 법을 하나님이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증명하는 현저한 예가 되었다. 기드온이 만든 에봇(ephod) 때문에 그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이 큰 화를 입었다(삿 8:27). 요컨대 경박한 조작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참으로 신성한 예배를 더럽힐 뿐이다.

26.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러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 사람들이 백성에게 지운 견딜 수 없는 짐을 그리스도께서 견디라고 하신 것은(마 23:3) 무슨 까닭이냐고 그들은 묻는다.2083)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마 16:6) 무슨 까닭인가? 마태의 설명에 의하면 "누룩"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섞어 넣는 사람의 교훈이었다(마 16:12). 사람의 교훈은 일체 멀리 피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 점을 볼 때에, 저 다른 구절에서도 바리새인들의 독특한 유전으로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원치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 또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도 순순하게 해석하기만 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은 나오지 않는다. 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통렬히 비난하셨고, 바리새인들의 생활에는 본받을 것이 없을지라도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해석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행하라고 먼저 청중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교사들의 나쁜 행실 때문에 교리까지도 멸시하지 않도록 백성에게 경고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치만을 말해서는 믿지 않고 항상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을 요구하므로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인용하겠다. "주의 양떼는 감시인이 여럿이다. 아들도 있고 삯꾼도 있다. 아들인 감시인은 진정한 목자다. 그러나 삯꾼도 필요하다. 지상의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서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린다. 양들이 삯꾼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삯꾼을 통해서 목자를 따르는 것이다(요 10:11-13 참조). 삯꾼은 주께서 스스로 지명하신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것은 행하지 말라(마 23:2-3). 주의 말씀은 '삯꾼들을 통해서 목자의 음성을 들으라'는 뜻이 아닌가?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가르치신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법을 가르치려 한다면 듣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라"2084) 이것이 어거스틴의 말이다.

(교회 정치와 예배를 바르게 정리하는 길, 예절과 사랑과 자유로운 양심. 27-32)`

27. 교회법의 필요성

사람의 유전은 사람의 양심에 불경건한 속박을 가하는 것이며 사람 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무지한 사람들은 교회의 질서를 형성하는 모든 법을 말살하려고 하는 예가 많다. 그들의 과오도 여기서 논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이 점은 매 우 오해하기 쉽다. 두 가지 종류의 규칙들이 어떻게 다른가는 처음 보아서는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유사점 때문에 속는 사람이 없도록 이 문제 전체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우선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일이 있다. 모든 인간 사회는 공공의 평화 촉진과 화합의 유지를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조직될 필요가 있다.2085) 그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거래에는 언제든지 어떤 절차가 있으며, 공공 생활의 예절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성 자체를 위해서도 그 절차는 필요하다. 이 점은 특히 교회에서 준수되어야 한다. 모든 일이 정연한 법아래 있을 때에 교회는 가장 잘 유지되며, 화합이 없으면 전혀 교회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한(고전 14:40) 바울의 명령에 성의껏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습과 마음은 각양각색이며 사람들의 판단과 성향은 상충되므로 명확한 법의 규정이 없으면 견고한 조직을 이룰 수 없다. 또 일정한 형식이 없으면 절차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에 도움이 되는 법들을 배척하지 않으며, 심지어 교회에서 법을 없애 버리면 곧 교회의 근육들이 분해되어 완전히 불구가 되며 결국 흩어지고 만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바울의 요구도 연합의 유대라고 할 만한 규정들을 첨가해서 질서와 예절을 확립하지 않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규정에서 경계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규정이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따라서 여러 가지 가책으로 양심을 속박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 규정을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연결시키며 따라서 규정을 지키는 것이 경건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28. 올바른 교회법의 문제

그러므로 불경건한 교회법, 즉,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종교를 모호하게 만들며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는 교회법과2086) 올바른 교회 규정을 서로 구별하는 아주 훌륭하고 확실한 표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교회법의 목적이 다음의 두 가지나 또는 그 중의 하나인 것, 즉, 신자들의 성회에서는 모든 일이 적절하고 위엄 있게 행해지고 또 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애와 절도의 유대로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구별의 표식을 알 수 있다. 법은 공공의 예절을 위해서 만든 것임을 깨달을 때, 인간의 조작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측정하려는 자들이 빠진 미신이 없어진다. 또 법이 공통적인 관습과 관치된 것임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전통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양심에 큰 공포를 던져 주는 법의 의무와 필연성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우리가 함께 노력해서 서로 사랑을 배양하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명령한 예절과 질서의(고전 14:40) 뜻을 더욱 분명히 정의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거룩한 사물에 대한 경건한 생각을 조성하기 위해서 의식을 행할 때에 이러한 보조 수단에 의해서 우리의 경건한 마음이 고무되도록 하는 것이 예절의 한 목적이다. 또 하나의 목적은 모든 존경할 만한 행동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겸양과 근엄한 태도가 크게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질서에 관해서 첫째로 중요한 점은, 책임자들은 훌륭하게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올바른 권징에 순종하는 습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질서 정연하게 교회를 세운 후에는 교회의 평화와 평온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29. 예배에서의 진정한 예절 : 허식을 피하라

따라서 우리는 헛된 즐거움만 있는 곳에는 예절이 없다고 말한다.2087) 이런 예를 우리는 교황주의자가 의식에서 쓰는 연극적인 도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는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가면만이 있을 뿐 유익이나 결실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예절은 거룩한 신비에 대해서 경외를 표시하는데 적합한 것이며 경건의 합당한 연습이고 적어도 예배 행위에 합당한 장식이 될 것이다. 이것은 결실이 없지 않고 거룩한 사물에 대해서 고도의 겸양과 경건과 경외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신도들에게 가르치게 될 것이다. 의식이 경건의 연습이 되려면 우리를 직접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우려는 질서는 일시적인 호화로움에 불과한 너 절한 허식이 아니라 모든 혼란과 야만성과 불순종과 소란과 분쟁을 제거하는 조치를 의미한다.

처음 종류의 예는 바울의 글에 있다. 비속한 술잔치와 주의 성만찬 을 혼합해서는 안 되고(고전 11:21-22) 여자가 공중 앞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다(고전 11:5). 우리의 일상 관습에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예컨대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고 모자를 벗는 것, 주의 성례를 집행할 때 경솔하게 하지 않고 정중하게 하는 것,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 합당한 예를 갖추는 것 등 그밖에도 이 종류에 속하는 관습들이 있다.2088)

둘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공중 기도와 설교와 성례를 위해서 시간을 정하고 설교 시간에는 정숙해야 하며 일정한 자리에 앉으며 찬송을 함께 부르고 일정한 날을 정하여 성례를 거행하며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라고(고전 14:34) 한 것 등이다. 특히 권징을 유지하기 위한 일들, 예컨대 교리 문답과 교회의 견책과 출교와 금식과 그 밖의 유사한 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거룩하고 유익한 교회법이라고2089) 인정하는 것은 그 전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식에 관한 것이요, 둘째는 권징과 화평에 관한 것이다.

30.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성이 있다. 한 편에서는 거짓 주교들이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자기들의 불경하고 독재적인 법을 변명하려 하며, 다른 편에서는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폐단을 듣고 거룩한 법이 있을 여지를 일체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성경에서 이끌어 낸 법들 곧 인간이 만들기는 했으나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법들만을 인정한다고 언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엄숙한 기도를 드릴 때 무릎을 꿇는 데 대해서, 문제는 그것이 사람의 전통인가? 즉,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가 주의해서 지키라고 한(고전 14:40) 예절의 일부라는 의미에서는 하나님에게서 왔다. 그러나 명백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암시된 것을 표시한다는 의미에서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다.

이 한 가지 예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 종류 전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판정할 수 있다. 즉, 주께서는 진정한 의의 글자 전체와 그의 위엄 앞에 드리는 예배의 모든 국면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한 말씀에 충실히 포함시키며 분명히 표현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에 관해서는 주의 말씀만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외형적인 규율과 의식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자세히 명령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이런 일은 시대의 형편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시고 한 형식이 모든 시대에 적합하다고 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주신 전반적 규정, 즉, 교회의 질서와 예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표준에 따라 결정하자는 것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끝으로, 주께서는 특수한 지시를 하지 않으셨으며 이런 일들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도 민족과 시대의 풍습에 여러 가지로 순응해야 되기 때문에,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적인 관습을 변경 또는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제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물론 충분한 이유 없이 경솔하고 갑작스럽게 개혁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무엇이 해가 되고 무엇이 덕이 되는지는 사랑이 가장 잘 판단할 것이다. 사랑을 인도자로 삼으면 모든 일이 안전할 것이다.2090)

31. 교회법과 관련된 속박과 자유의 문제

이제 이 표준에 따라 제정된 규정들에 대해서 자유로운 양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물론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닌, 언제든지 순종한다는 경건한 심정으로 지켜야 한다. 규정을 경멸해서도, 태만한 부주의로 인하여 빠뜨리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물론 교만이나 고집으로 공공연하게 어기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이런 극도의 주의와 경계에 무슨 양심의 자유가 있겠는가? 실로이것들은 우리를 속박하는 영원이고 정된 제재 규정이 아닌 인간적인 연약을 돕기 위한 외형적 초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문제는 아주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가 모두 이런 초보적 형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서로 사랑을 함양할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점은 위에서2091) 든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외출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면 종교는 여자의 수건에 있다는 말인가? 잠잠 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신성하므로 그것을 어기면 큰 죄가 된다는 말인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나 시체를 묻는 것이 거룩한 의식이어서 그것을 어기면 반드시 죄가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웃을 돕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있어서 머리에 쓸 틈이 없을 때, 벗은 머리로 이웃에게 달려가더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잠잠하고 있는 것이 합당한 곳이 있는 것과 같이, 발언하는 것이 합당한 곳도 있다. 병으로 인해서 무릎을 굽힐 수 없는 사람은 서서 기도를 드려도 전연 무방하다. 끝으로 수의가 없거나 관을 운반할 사람이 없을 때, 죽은 사람을 묻지 않고 시체를 썩을 때까지 두는 것보다는 적당한 때에 묻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한 지방 고유의 관습이나 인정이나 중용의 규범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을 지시한다. 사람이 잊어버리거나 경망하여 이런 규례에서 어긋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멸하기 때문이라면 이런 고의적인 행동은 비난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예배 일시와 예배 장소의 건축물, 어느 날 어느 시편을 부를 것인가 하는 등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 단,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리 날과 시간을 정해 두는 것과 모든 사람을 수용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있는 것이 편리하다. 공공질서에 관계된 사항을 각 사람이 마음대로 바꾸도록 버려둔다면 이런 세밀한 일에서 생긴 혼란이 큰 분쟁의 씨가 될 것이다.

이 문제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해서 각 개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모든 사람이 같은 일을 좋아하는 예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여기서 어느 누가 큰 소리로 불평을 말하며 없는 지혜를 있는 체 한다면, 그는 주 앞에서 어떤 이유로 그의 신경과민을 변호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변론하는 것은 우리의 풍습도 아니요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는 일이라고 한(고전 11:16) 바울의 말을 우리는 만족하게 생각해야 한다.

32. 준수해야 할 사항은 적어야 하고 또 덕을 세우는 것이라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순수한 이 관습을 부패시키거나 흐리게 만드는 오류가 잠입하지 않도록 심히 주의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규정을 세우든 간에 분명히 유익하다는 것이 나타나야 하고 수효를 아주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충실한 목사의 교훈으로 패악한 의견이 나올 길을 막아야 한다. 이런 점을 앎으로써 얻는 결과는 첫째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각자의 자유를 지키며 동시에 각 사람은 위에서 말한 예절이나2092) 사랑에 대한 고려가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 그의 자유에 다소의 제한을 가하게 될 것이다.2093) 둘째로, 우리는 이 일들을 지키더라도 미신에 빠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까다롭게 준수를 요구하지 않고, 의식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대한 더 좋은 예배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외형적인 규율의 차이로 교회끼리 서로 멸시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여기서 영원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규정의 운용과 목적을 전적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두게 될 것이다. 만일 교회를 위해서 필요하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일부 규정의 변경뿐만 아니라 지켜오던 규정의 폐기까지도 용인할 것이다. 다른 환경 하에서는 불경건하지도 않고 예절에 어긋나지도 않는 의식일지라도 현 상황 하에서는 기회를 보아서 폐기하는 것이 합당하리라는 사실을 우리의 이 시대는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과거의 사람들의 마음이 어둡고 무지해서) 교회들은 지금까지 부패한 견해와 완강한 집념으로 의식에 집착했다. 따라서 옛날에 의식을 제정했을 때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그 자체로는 현저히 불경건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런 여러 가지 의식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교회에서 무서운 미신들을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없다.

제 11 장  교회의 재판권과 교황제도에서의 재판권의 남용

(재판권과 권징 : 열쇠의 권한과 국가 행정. 1-5)

1. 교회 재판권의 근거는 열쇠의 권한에 있다

질서 정연한 교회 상태에서는 가장 중요한, 교회 권한의 셋째 부분이 아직 남아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재판권이다.2094) 그런데 교회의 재판권은 전적으로 도덕적 권징에 관한 것이며 이 점은 곧 논하게 될 것이다. 도시에 집권자와 정치 제도가 없으면 그 도시가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교회에도(이미 말한 것이지만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영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국가 행정 조직과 다른 것이지만 국가 행정 조직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이 재판권은 그 영적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형성된 질서에 불과하다.

이 목적을 위하여, 처음부터 교회에 재판소를 설립하고 도덕적 문제에 대하여 견책을 하고 죄악을 조사하며 열쇠의 직책을 다하게 했다.2095)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다스리는 직분을 언급한 것은(고전 12:28) 이 제도를 지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로마서에서도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라고 했다(롬 12:8). 그는 여기서 국가 관리를 상대로 말한 것이 아니라(그때에는 신자 가운데 이런 사람이 없었다) 목사들과 협력해서 교회의 영적 통치를 담당한 사람들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 디모데서에서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과 말씀은 선포하지 않고 통치하기만 하는 장로들을 구별했다(딤전 5:17). 이 둘째 종류의 장로들은 분명히 도덕적인 문제를 감독하며 열쇠 권한을 사용하는 일을 위해서 임명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이 권한은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열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적인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신자들의 이름으로 엄격하게 경고하며,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서 듣지 않을 때에는 신자의 공동체에서 제외해 버리라고 명령하셨다(마 18:15-18). 그런데 이런 경고와 충고는 그 원인을 조사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재판소와 절차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열쇠의 약속을 무효로 만드는 것과 출교를 폐지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에 어느 정도의 재판권을 부여해야 한다. 마태복음 16:19과 요한복음 20:23과는 달리 이 구절은 일반교리에 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의회의 재판권이 장차 그리스도의 양떼에 옮겨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정치 제도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교회 내의 제도로 설치하시고 엄중한 제재력을 부여하신 것이다. 또 이것은 합리적인 처사였다. 그 이유는 그런 권한이 없으면 멸시를 받는 교회의 판정을 경솔하고 미련한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 조금씩 다른 두 가지 일을 설명하는 것을 독자들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매고 푸는 데 대한 구절이 두 곳에 있다. 하나는 마태복음 16장인데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후에, 즉시 그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승인되리라고(마 16:19) 첨부하셨다. 요한복음에서도 사도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쉰 후에(요 20:22)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 나는 이 말씀에 대해서, 알기 쉽고 무리하지 않고 편견이 없는 해석, 즉, 자연스럽고 순조롭고 쉽게 해석을2096) 하겠다. 죄를 용서하거나 그대로 두는 데 관한 이 명령과 매고 푸는 데에 관해서 베드로에게 하신 약속은 전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만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를 맡기실 때에 매고 푸는 직책도 주셨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노예였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에 의해서 풀려 자유를 얻으며(롬 3:24 참조), 그리스도를 해방자와 구속자로 인정하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사슬에(유 6 참조) 매이리라는 것이 복음의 전체가 아닌가?

모든 민족에게 가서 이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사도들에게 맡기셨을 때에(마 28:19 참조), 주께서는 그 명령이 자기의 것이며 자기에게서 나온 것임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그 명령을 이 고귀한 증언으로 높이셨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도 자신들과 그들의 선포를 받을 사람들에게 큰 힘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도들이 전도 활동을 할 때에 그 사명에 대해서 항상 완전한 확신을 갖도록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들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와 염려와 곤란과 위험을 무릅써야 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피까지 흘려야 했다. 그들의 확신이 허망하지 않고 강력한 것임을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즉, 이런 근심과 어려움과 위험 가운데서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며, 전세계가 그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을 공격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의 장본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지 않으므로 그들은 그들에게 주신 교리의 진실성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확증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동시에 청중에 대해서는, 복음의 교리는 사도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며2097) 땅에서 난 음성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음성이라는 것을 틀림없이 확증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죄의 용서와 영생의 약속과 구원의 기쁜 소식은 인간의 힘으로 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선포에 있어서, 사도들은 심부름하는 것뿐이며 그들의 입을 도구로 삼아 모든 일을 말하고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확언하셨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진정한 약속이며 그들이 선언한 정죄는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이라고 확증하셨다. 그뿐 아니라 이 증언은 모든 시대에 주신 것이며 또한 언제든지 확고 불변해서, 어떤 사람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든 간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언이란 것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확신할 수 있게 한다. 이 하나님의 선언은 최고 심판대에서 발표하시고 생명책에 기록되었고 하늘에서 확고 불변하게 준비되었다. 우리는 그 구절들에서 열쇠의 권한은 복음 선포에 불과하며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권한이라기보다 심부름이라고 단정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고 그의 말씀에 주셨으며, 사람들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2. 매고 푸는 권세

마태복음 18장에 있는 다른 구절은 우리가 말한 대로 매고 푸는 권세에 관한 것이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7-18). 이 구절은 처음 구절과(마 16:19)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고 약간 그 뜻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아주 달라서 서로 연결이 없을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두 구절에는 같은 점이 있다. 즉, 두 구절은 다 일반적인 발언이며, 매고 푸는 같은 권세(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와 같은 명령과 같은 약속이 두 구절에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즉, 처음 구절은 특히 말씀을 맡은 자들이 실천하는 전도에 관한 것이고 둘째 구절은 교회에 맡겨진 출교 규정에 관한 것이다. 교회는 출교시킨 사람에 대하여 구속력이 있다. 그를 영원한 멸망과 절망에 집어넣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과 품행을 책망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정죄를 받으리라고 항상 경고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연합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판정을 완강하게 무시하거나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정죄된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신자들에 의한 이런 판단이 주님 자신의 선고를 발표하는 것에 불과하며 신자들이 지상에서 판정한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그대로 인정된다고 확언하신다.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패악한 사람들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회개하는 사람들을 은혜 안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판단할 뿐이며, 하나님의 법은 불확실하거나 땅에서 생긴 의견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말씀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과오를 범하거나 하나님의 판단에 어긋날 수 없다.

나는 이 두 구절을 간단하고 알기 쉽게 또 다르게 해석했다고 생각한다. 자기도취에 빠진 이 미친 사람들은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삼아서 혹은 고해를, 혹은 출교를, 혹은 재판권을, 혹은 입법권을, 혹은 사면을 무분별하게 확립하려고 노력한다. 참으로 첫째 구절을 인용해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확립하려 한다.2098) 이와 같이 그들은 열쇠를 어느 자물쇠나 문에 마음대로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일평생 자물쇠 제조업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3. 국가의 재판권과 교회의 재판권

이 모든 일은 임시적인 것이었고 집권자들이 우리의 종교를 믿지 않았을 때에만 통용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2099) 이 생각은 그릇된 것인데, 그들은 교회의 권한과 국가의 권한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것 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형벌을 주며 강요하는 칼의 권한, 즉, 강제적 구속력이 없다. 집권자와 같이 투옥이나 기타 형벌을 가할 수 없다. 문제는 죄인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자신을 스스로 징계하여 회개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매우 다르다. 당연히 교회는 국가가 할 일을 담당하지 않으며 국가는 교회가 행하는 일을 할 수 없다. 다음의 예가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할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있을 때 질서가 있는 도시에서는 그에게 투옥의 형벌을 가할 것이다. 음행하는 자라면 비슷하거나 더 엄중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법률과 관리와 외형적인 정의는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불평불만을 말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여기서 그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성만찬에 참가시킨다면 그리스도와 그의 신성한 제도에 손상을 입히게 될 것이다. 또 불미한 행동으로 교회에 누를 끼친 사람은 엄숙하게 회개를 선언함으로써 자기가 지은 죄를 제거해야 된다는 것이 도리 상의 당연한 요구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논거는 빈약하다. 그들에게는 이런 기능을 수행할 행정관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교회에 맡기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정관리들은 게으르며, 데오도시우스 황제2100) 와 같이 자신이 징계를 받아야 할 경우도 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 전체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반대자들이 말하는 대로한다면, 지금은 목사들이 분명한 비행도 책망하지 말고 질책이나 비난, 책망 등도 전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법과 칼로 이런 일들을 시정해야하는 그리스도인 관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정관리가 형벌과 신체적 제재로 교회 내에서 죄악을 씻어 버리는 것과 같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는 관리들을 도와서 죄를 짓는 사람이 점점 적도록 힘써야한다. 그들의 기능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서로가 연결되어 도와야한다.

4. 교회와 그리스도인 관리

진실로, 그리스도의 말씀을(마 18장) 보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기에 묘사된 것이 일시적인 교회 제도가 아니라 확정된 영구적인 제도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경고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가 관리에게 고발한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관리들이 교회의 직분을 맡는다면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일년 또는 수년 동안을 위한 약속이라고 해야 하는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운운하셨다(마 18:18).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새로운 제도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유대 백성의 고대 교회에서 항상 지켜오던 것을 본받으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교회가 처음부터 행한 대로 영적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교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표명하셨다. 또 이 점은 모든 시대가 똑같이 확인한다. 황제들과 관리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했을 때에 이 영적 재판권은 즉시 폐지된 것이 아니라 다만 국가의 권한을 손상하거나 그것과 혼동되지 않도록 조절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옳은 처사였다. 경건한 관리자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복종하는 일에서 자기를 제외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는 교회에 복종하는 것은 이런 복종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결코 교회의 판단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암브로시우시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황제에게 더 큰 명예가 있는가?"2101) 선한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관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이 권한을 빼앗는 사람들은, 그릇된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패하게 할뿐만 아니라 사도 시대 이후에 있었던 모든 거룩한 감독들이 관리의 영예와 직책을 잘못된 구실로 빼앗았다고 비난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5. 교회 재판권의 영적 성격

또한, 우리는 이전에 교회의 재판권이 어떻게 바르게 행사되었으며 어떻게 남용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만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그리스도의 진정한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폐지해야 할 고대 관습과 회복해야 할 고대 관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교회 재판권의 목적은 죄악을 막으며 발생한 불상사를 제거하는 것이다. 재판권을 행사할 때에 고려해야 할 점은 두 가지다. 즉, 이 영적 권한은 첫째, 칼의 권리에서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며 둘째, 한사람의 결정이 아닌 합법적인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2102) 행사 되어야한다. 교회가 비교적 순수했을 때에는 이 두 가지 점을 모두 준수했다(고전 5:4-5).

그런데 거룩한 감독들은 권한을 행사하는 수단으로 벌금이나 투옥이나 그 외의 국가의 벌칙을 쓰지 않고 오직 주의 말씀만을 사용했다. 이것은 합당한 일이었다. 교회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엄중한 벌, 이를테면 그 최후의 벼락같은 벌은 출교 선고이며 이것은 불가피한 때에만 사용한다. 이 처벌을 행하는 데에는 물리적 강제력이 필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힘만을 믿는다. 요컨대 고대 교회의 재판권은 목사들의 영적 권한에 대해서 바울이 말한 것을 선언함으로써 실천된 것에 불과하였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이 일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침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므로, 이 교훈이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가족에 속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을이 교훈에 따라 판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사적으로 경고하거나 더 엄격하게 시정해야 할 사람들을 소환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또 성만찬의 위대한 신비를 모독하게 될 사람들이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외인들을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고전 5:12), 교회의 자녀들은 그들의 죄악에 대해 견책을 받는다고 하면서 그 때에는 신자 중 아무도 면제되지 않는 심판이 실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주교들의 부당한 권력에서 발생된 폐해들. 6-10)

6. 고대 교회에서는 어느 개인이 법을 집행하지 않았다

이 권한은(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2103) 한 사람이 잡고 마음대로 행사한 것이 아니라 장로회의 수중에 있었다. 장로회와 교회와의 관계는 시의회와 시와의 관계와 같았다. 키프리아누스는 당시에 이 권한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때 대개 성직자 전체를 감독과 관련시켰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는, 성직자들이 다스린다는 것은 사실 심의에서 일반 신자들을 제외시킨다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감독이 된 후로 성직자들의 충고와 신자들의 찬성을 얻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2104) 그러나 일반적인 관습으로는 교회의 재판권이 장로 회의를 통해서 행사되었고, 이 장로에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2105) 두 종류가 있었다. 어떤 장로들은 가르치는 일에 임명되었고 어떤 장로들은 도덕적인 문제 감찰하였다. 이 제도가 점점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해서 벌써 암브로시우스 시대에는 성직자들만이 교회 재판에 참석했다. 그는 여기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시했다. "고대의 회당과 그리고 그 이후의 교회에는 장로들이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떤 무관심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관습이 없어졌다. 아마 자기 혼자서 훌륭한 체하려는 지식인들이 나태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교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06) 적어도 그 당시에는 이 제도가 아직 용인될 수 있었지만 저 거룩한 분은 더 좋았던 상태가 다소 부패한 것을 이와 같이 분하게 여겼다. 만일 그가 현재의 폐허에서 옛 건물의 흔적조차 거의 찾을 수 없는 것을 본다면 얼마나 통탄을 할까? 우선 주교는 법과 권리를 침범하면서 교회에 주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원로원을 축출하고 집정관이 단독으로 권위를 잡은 것과 같다 그러나 주교가 다른 사람들보다 영예가 더 높은 것과 같이 회의의 권위는 개인의 권위보다 더 높다. 공동체의 권한을 한 사람이 자기에게 옮기고 전횡의 길을 열며 교회에 속한 것을 강탈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제정하신 회의를 억압하고 해산했다는 것은 심히 악한 비행이었다.

7. 재판권과 권징의 타락

그러나(한 가지 폐단은 다른 폐단을 생기게 하는 일이 많으므로) 주교들은 교회 치리를 자기들이 보호할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경멸하여,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했다. 그 결과로 생긴 것이 "판사"들이다.2107) 나는 어떤 사람들이 이 일을 맡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은 세속 재판관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맡은 소송은 지상의 사물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여전히 "영적 재판권"이라고 부른다. 다른 폐단은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그들은 싸움이 벌어지는 법정을 뻔뻔스럽게도 "교회의 법정"이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하며 출교를 선언한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을 우롱하고 있다. 어떤 빈민이 빚이 있을 때에 그를 소환한다. 출두하면 유죄 판결을 받는다. 판결을 받고도 빚을 갚지 않으면 경고를 받는다. 두 번째 경고가 있은 다음의 단계는 출교다. 출두하지 않으면 재판을 받으라는 경고를 받는다. 지체하면 경고를 받고 곧 이어 출교를 당한다. 묻노니,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나 고대의 관습이나 교회 절차와 조금이라도 같은 점이 있는가?

그러나 죄악을 책망하기도 한다. 즉, 그들은 음행, 방탕, 만취, 기타 유사한 비행들을 버려둘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묵인함으로써 조장하고 시인한다. 일반 신자들의 그러한 비행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비행도 묵인한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을 부른다. 묵인하면 너무 태만하다는 비난을 듣게 되기 때문에 또는 돈을 받아먹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관련된 약탈과 강탈과 횡령과 신성 모독 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 자리에 대개 어떤 인간들이 임명된다는 것도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카톨릭주의자들이 그들의 영적 재판권을 자랑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절차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며, 암흑이 광명과 다른 것과 같이 그들의 재판권은 고대의 관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이것만 말해도 충분할 것이다.

8. 주교들의 세속적 권력은 주교직의 의미와 모순된다

우리는 진술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모두 말하지 않았고 우리가 말한 것도 몇 마디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소위 영적 권세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승리한 줄로 믿는다. 즉, 교황과 그 당당한 측근자들이 자랑하는 이 영적 권세는 불경건한 압제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도 부당한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영적 권세"라는 말에 나는 여러 가지를 포함시킨다.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있던 시초의 순수성에서 가련한 신자들을 떠나게 만든 그 대담한 태도, 가련한 신자들을 올가미로 매던 그들의 악한 전통, 부주교와 판사들을 통해서 행사하는 그들의 가짜 교회 재판권 등, 이런 것들 모두가 그들의 영적 권세에 속한다. 만일 그리스도의 나라가 우리 사이에 건설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교황의 나라는 즉시 전복되며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그들이 주장하는 무력의 권세를 논하려고 하지 않는다.2108) 이것은 양심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109)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은 항상 그들답다는 것을, 즉, 교회의 목자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들의 정체는 아주 판이한 것을 말해 둘 가치가 있다.

내가 비난하는 것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계급 전체의 공통된 범죄, 즉, 그 극심한 해독이다. 그들은 풍성한 생활과 자랑스러운 칭호로 장식하지 않으면 계급의 손과 발이 잘리는 듯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구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지배력과 지상의 권위를 가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주께서는 말씀하셨다(마 20:25-26, 눅 22:25-26). 이 말씀의 뜻은, 목자의 직분은 군주의 직책과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차이점이 아주 심해서 한 사람이 겸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세가 두 직책을 겸했다는 것은 첫째, 희귀한 기적에 의한 일이었고 둘째, 사태가 정돈될 때까지의 일시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정확한 형태를 지정하셨을 때 모세에게는 일반 정치권을 남겨 두시고 제사장직은 그의 형 아론에게 넘겨주도록 하셨다(출 18:13-26). 이것은 옳은 조치였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짐을 진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이 점을 삼가 지켰다. 교회의 진정한 형태가 지속된 동안은 무력의 권리를 도둑질하려고 생각한 감독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암브로시우스 시대에는 "사제들이 제국을 탐내는 것보다 황제들이 사제직을 더욱 탐낸다"는 속담이 있었다. 암브로시우스가 "궁궐은 황제의 것이요 교회는 사제의 것이라"고2110) 말한 것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9. 주교들이 군주의 권세를 장악했다

주교들이 아무 부담이나 걱정 없이 주교직의 칭호와 영예와 재산을 향유하도록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주교들이 전혀 하는 일이 없지 않도록 무력의 권리를 그들에게 주었다. 주었다기보다는 그들이 도둑질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 파렴치한 행동을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재판 사건에 개입하고 도시와 지방의 행정에 관계하며 자기의 본직과는 아주 동떨어진 활동을 하는 것이 주교들의 의무였는가? 그들의 본직만 수행해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다른 일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전적으로 또 계속적으로 주력하기에는 오히려 힘이 부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고해서,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이 제대로 찬란하게 나타나며 또 이렇게 하여도 그들의 사명수행에 그다지 큰 지장이 되지 않는다고 서슴지 않고 장담한다.

첫째 점에 관해서는, 거만한 임금들까지도 두려워할 만한 높은 자리에 주교들이 오를 것이 성직에 합당한 장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와 논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영예에 중대한 손상을 입히셨고 더할 나위 없는 폭언을 하셨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마 20:25-26, 막 10:42-44, 눅 22:25-2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먼저 받고 견디신 법칙보다 더 어려운 것을 그의 종들에게 부과하시지 않았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관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다(눅 12:14). 그는 재판하는 자리를 거절하시며, 설사 그 일이 그의 직분과 똑같더라도 그는 하시지 않았으리란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주께서 스스로복종하신 그 계급에 그의 종들은 들어가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들이 말로 하는 것같이 실지 경험으로도 이 일을 쉽게 증명하기를 원한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 이 마땅하지 않다고(행 6:2) 생각했다. 주교들은 사도들에게서 배우려 하지 않으므로 한 사람이 선한 주교와 선한 군주의 일을 겸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큰 은사를 받아서, 그들 후에 태어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어렵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음식을 베푸는 일을 함께 맡게 된다면 반드시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고백하였는데, 사도들에게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 소인들이 어떻게 백 배나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해보겠다고 하는 것조차 엄청나게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자기 과신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짓을 행했다. 일의 성과는 분명하다. 그 결과 그들은 본직을 버리고 다른 쪽 진영으로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10. 주교들이 어떻게 세속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카톨릭주의자들이 사소한 시초로부터 출발해서 조금씩 조금씩 크게 불어난 것은 틀림없다.2111) 단숨에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를 수는 없었다. 어떤 때에는 교활하고 부정한 술책으로 은밀하게 전진해서, 일이 나타나기까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어떤 때에는 기회를 엿보아서 공갈과 위협으로 군주들에게서 조금씩 그 권력을 빼앗았다. 또 어떤 군주들의 마음이 후한 것을 보면 그 미련하고 그릇된 선심을 악용했다.

과거에는, 분쟁이 생기면 경건한 사람들은 소송을 피하기 위해서 판단을 주교에게 맡겼다. 주교의 성실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감독들은 자주 이런 문제에 관계되어(어거스틴이 어디선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2112)) 그 일을 매우 성가시게 여겼지만 하는 수 없이 수고를 해서 관계자들이 법정에서 싸우지 않도록 했다. 카톨릭주의자들은 자진해서 중재에 맡긴 일을 법정의 소란과는 전혀 다른 정상적인 재판권으로 만들었다.

얼마 후에 여러 도시와 지방이 이따금씩 각종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들은 주교들의 성실을 믿고 그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놀라운 간계로 보호자의 입장에서 주인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폭력과 파쟁으로 많은 권력을 잡게 되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주교들에게 재판권을 기꺼이 넘겨 준 군주들은, 여러 가지 동기가 있었겠지만 그들의 선심에 다소의 경건의 색채가 있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들은 그 미련한 선물로 교회의 복리를 도운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교회의 진정한 권징을 타락시킨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교회의 권징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군주들의 큰 기증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악용한 주교들은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주교가 아니란 것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사도적 정신이 있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바울의 말로 대답했을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고후 10:4) 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자신과 후계자들과 교회를 파멸에 몰아넣었다.

(교황들이 무모하고 부정직한 권력을 주장하며 세속적 권력을 찬탈했다. 11-16)

11. 교황이 세계의 수위권을 가지게 된 시초

마침내 로마감독은 적당한 귀족령에 만족하지 않고, 처음에는 왕국들에 손을 대고 다음에는 제국 자체에 손을 댔다. 그리고 순전히 강탈한 땅을 이런 구실 저런 구실로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때에는 신이 주신 권리로 가졌다고 호언하며, 어떤 때에는 콘스탄티누스가 기증했다고 거짓말하고 또 어떤 때에는 다른 소유권을 주장했다. 나는 우선 베르나르두스의 말로 대답한다. "그가 다른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이런 주장을 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은 사도적 권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줄 수 없었고, 자기에게 있는 것 곧 교회들을 돌보는 일을 후계자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교사이신 주께서 두 사람 사이의 재판장으로 임명되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므로(눅 12:14), 제자와 종이 된 사람은 자기가 모든 사람을 재판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는 국가의 법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첨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귀하들의 권한은 비행에 관한 것이지 소유에 대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재산이 아닌 비행에 관한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는 것과 재산을 분할하는 것 중 어느 편이 당신에게 더 큰 영예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 비천하고 세속적인 일들에는 그 자체의 재판관, 즉, 땅의 군주들이 있다. 당신들은 왜 다른 사람의 경계를 침범하는가? 마찬가지로, "당신을 높은 자리에 앉히신 것은"(교황 유게니우스에 대해서 하는 말) "무엇 때문인가? 권세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기를 중요시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섬기는 일이 준 것이지 주인 노릇하는 권리가 부여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예언자의 일을 하려면, 그에 필요한 것은 홀이 아니라 호미란 것을 알라." 또, "사도들이 주인 노릇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감히 주인이면서 사도직을 자기 마음대로 일컫는다든지 사도이면서 주인 노릇을 하든지 한 쪽을 택하라." 그리고 곧 이어 "사도직의 형태는 이것이니, 곧 주인 노릇은 금지되었고 심부름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113)라고 말했다. 베르나르두스가 이렇게 한 말이 진리란 것은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며, 설령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 사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두 칼에 대한 최고 권리는 하나님의 권리에 의해서 자기에게 속한다고 로마 교황은 아를(Arles) 회의에서 파렴치하게 선언했다.2114)

12.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는 어리석은 사기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에 관해서는, 당시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허황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이야기란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서를 보지 않더라도 그레고리우스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한 적절하고 완전한 증인이다. 그는 황제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반드시 "지극히 영명하신 주"라고 부르며, 자기는 "무가치한 종"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어떤 구절에서는 "그런데 폐하께서는 폐하의 지상 권력으로 인하여 사제들에 대하여 너무 쉽게 노하시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탁월하신 고려로 그들을 종으로 삼으신 분을 생각하셔서 그들을 지배하실 때 적당한 경의도 표시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레고리우스가 일반 백성과 함께 황제에게 복종하며 그들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기를 원한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위해서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구절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건한 군주들에게 만수를 허락하시며 폐하의 치하에서 그의 자비에 따라 우리를 처리하시리라고 믿나이다"2115)라고 했다. 내가 이런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제를 철저히 논의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카톨릭 교회가 교황의 지상의 권세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 거짓말인가를 독자들이 겸해서 알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승소할 희망이 없는 이 송사를 변호하겠다고 교황에게 자기의 수고와 혀를 팔아먹은 아우구스티누스 스테우쿠스(A. Steuchus)의 파렴치한 행동은 더욱 추악한 것이다. 발라(Valla)는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완전히 반박했다. 그것은 박학다식한 사람으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논의에 유용한 것을 모두 말하지는 못했다. 여기서 스테우쿠스가 덤벼들어 그의 추악한 강변으로 투명한 빛을 흐리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주인의 입장을 위해서 한 변호는 무가치한 것이며, 발라 편을 변호하는 익살꾼의 변론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황이 돈을 주고 이런 옹호자들을 사는 것 같다. 또 스테우쿠스 같이 돈을 받을 속셈으로 속아서 고용된 논쟁가들도 못지않게 가치 있는 인물이다.2116)

13. 헨리 4세와 힐데브란드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언제 이 조작된 제국이 일어나기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교황들이 군주들에게 복종하며 반드시 황제의 인정을 받아서 교황이 된지는 아직 5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황제 헨리 4세는2117) 성격이 경솔하고 무분별하며 지혜가 없으면서 담대 무쌍하고 생활이 난잡하여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이 질서를 변경할 기회를 주고 말았다. 헨리가 그의 궁정(court)에서 독일 제국의 주교구를 장악하고 혹은 팔며 약탈자에게 맡기고 있을 때에, 황제의 도전을 받은 힐데브란드는 자기의 체면을 세울 그럴 듯한 구실을 잡았다. 그는 정직하고 경건한 입장을 취한 듯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호의와 도움을 얻었다. 그러나 헨리는 오만불손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영주들이 미워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를 자칭한 힐데브란드는 원래 불결하고 악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종국에는 그 악한 의도가 탄로되었다. 그래서 그와 공모하던 많은 사람들이 배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업적을 남겼다. 그의 후계자들은 황제의 멍에를 벗어버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황제들을 굴복시키고도 해를 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2118) 그뿐 아니라 그 후에는 줄리우스 시저보다 헨리와 비슷한 황제들이 많아서 굴복시키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교황의 탐욕을 강경하고도 합법적인 수단으로 억압할 필요가 있는 때에도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비겁해서 궁중에만 앉아 있었다. 저 유명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가 아름다운 색채로 위조된 것과, 이 문서를 근거로 교황은 서방 제국이 자기에게 이양된 것같이 꾸민 것을 우리는 안다.

14.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저주받은 교회 재산 유용

그 후로 지금까지 교황들은 혹은 사기로 혹은 배신행위로 혹은 전쟁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땅을 침략했다. 약 130년 전에는(그때까지 자유시였던) 로마 시 자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넣어 현재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약 200년 동안 권력을 장악하거나 증대하기 위해서(이것은 로마 시에 대한 공작보다 먼저 시작한 것이었다) 기독교 세계를 괴롭혔고 거의 파멸 상태에 빠뜨렸다.

옛날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교회 소유지의 관리인들이 교회 재산인 부동산에 손을 대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소유권의 증거로서 자기의 어떤 소유 표식을 설치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주교 회의를 열고 이런 모독 행위를 강경하게 비난한 후에, 자기 명의로 소유권 문서를 작성함으로써 재산을 점령하려고 한 성직자들을 저주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일을 시켰거나 알고도 처벌하지 않은 주교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물었다. 모두 "저주"한다고2119) 대답했다. 일개 하급 성직자가 소유권 문서를 작성함으로써 얼마의 토지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 저주를 받을 일이었다면, 교황들이 다른 사람들의 영토를 빼앗을 목적만으로 전쟁과 유혈, 군대의 살륙, 도시의 약탈과 파괴, 민족들의 학살과 왕국들의 황폐 등을 200년 동안 계속해 왔으니 이런 짓들에 대해서는 어떤 저주를 해야만 넉넉히 강력한 처벌이 될까? 참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다. 그들이 모두 그 가진 세속 권력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이나 건전한 요리나 교회의 안전성에는 하등의 위험도 가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배력에 대한야욕 하나에 정신이 팔려 맹목적으로 돌진한다. 예언자의 말과 같이 강포로 다스리지 않으면(겔 34:4) 만사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5. 카톨릭 성직자들의 치외 법권

카톨릭 성직자들은 재판권에 자기들의 치외 법권을 첨부한다. 개인 문제로 국가의 재판관 앞에 나가는 것을 자기들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민에 공통된 법정과 법률에서 면제돼야만 교회의 자유와 위신이 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문제에 관해서는, 교회의 권리를 아주 엄격하게 선언한 고대 감독들은 법에 복종한다고 해서 자기들이나 교회가 손상을 입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 경건한 황제들은 필요한 때에는 의례히 성직자들을 불러 재판했지만 항의하는 성직자가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니코메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어떤 감독이 경솔하게 소란을 일으킨다면 그의 오만한 태도는 하나님의 사역자의 공적 권위에 의해서, 즉, 나의 권위에 의해서 제지될 것이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선한 감독들은 황제의 권한에 반대하지 않고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며 우리의 법률에 복종한다."2120)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믿었고 아무 항변도 하지 않았다.

교회 내부의 사건들을 감독의 판정에 맡긴 것은 사실이다. 그 예로, 어떤 하급 성직자가 국법을 어기지 않고 다만 교회법을 어겼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는 국가의 재판소에 호출되지 않고 감독의 재판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관한 문제나 원래 교회에 속한 다른 문제가 논쟁 중인 때에는 거기에 대한 재판은 교회에 맡겼다. 암브로시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에게 보낸 서간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선제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을 뿐 아니라 법으로 명령하셔서, 신앙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는 직책상 자격이 있거나 관할상 외인이 아닌 사람이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정하셨나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성경이나 고대의 선례들을 존중한다면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는 반복하지만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는 그리스도인인 황제들에 관해서 판정하는 것은 감독이며 감독들에 관해서 황제들이 판정하지 않는 것이 관례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이까?" 마찬가지로, "폐하, 감독들이나 신자들이 보내 주기만 하면 저는 폐하의 회의에 가고 싶나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송사는 교회에서 신자들 앞에서 심리해야 된다고 말하나이다."2121) 암브로시우스는 영적 사건, 즉, 종교에 관한 사건은 세속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국가 재판소에 제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태도를 모든 사람이 찬양한다. 그러나 그는 만일 물적 강제력이 동원된다면 주장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나에게 위임된 곳을 스스로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요를 당한다면 나는 저항할 도리가 없다. 우리의 무기는 기도와 눈물뿐이기 때문이다." 이 거룩한 분의 탁월한 겸손과 지혜 그리고 위대한 정신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황제의 모친 유스티나는 그를 아리우스파에 끌어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교회를 치리하는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다. 만일 그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환을 당하여 궁중에 갔다면 추방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중대 논쟁에서 황제는 재판관으로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시대의 필요성과 문제의 영원한 성격이 이런 태도를 요구했다. 그의 찬성으로 이런 선례를 후세에 남기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그는 판단하였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할 때에는 그는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과 교회의 권리를 무력으로 옹호한다는 것은 감독이 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에 관해서는 그는 황제의 명령대로 할 용의를 보였다. "만일 황제께서 공납을 원하신다면 우리는 거부하지 않고 교회 토지에서 공납을 바칠 것이다 만일 땅을 원하신다면 황제에게는 그것을 차지할 권력이 있다. 우리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2122) 그레고리우스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폐하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사제들에 관한 문제에 간섭하는 것은 폐하의 관례가 아니다. 무슨 일에든지 우리의 죄가 폐하에게 짐이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2123) 그레고리우스는 황제가 사제들을 일체 재판하지 금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 재판에 맡겨야 할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16. 감독들도 세속 재판에 복종했다

이런 예외를 설정함으로써, 거룩한 분들은 종교심이 약한 군주들이 전제적인 폭력으로 임의로 교회의 내부 행정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예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군주들이 그 권위로 교회 문제에 간섭하는 것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며, 교회의 권징을 해소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확립하려는 것이라면 그런 개입을 비난하지 않았다. 교회에는 강제력이 없으며 또 강제력을 추구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나는 국가의 강제력을 말한다), 법률과 칙령과 재판으로 종교를 지탱하는 것은 경건한 군주들의 의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야만족에게 쫓긴 감독들을 받아들이라고 어떤 감독들에게 명령한 일이 있다. 그 때에 그레고리우스는 황제의 명령이 정당한 것을 알고 감독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했다. 같은 황제가 그레고리우스 자신에게 콘스탄티노플의 요안네스 감독과 화해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그는 자기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세속 재판소에 대한 치외 법권을 자랑하지 않고 양심이 허락하는 대로 복종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마우리키우스가 이런 명령을 감독들에게 한 것은 경건한 군주로서 당연한 처사라고 말했다.2124)

제 12 장  교회의 권징 : 주로 견책과 출교로 나타난다

(진정한 권징에서 열쇠의 권한은 어떤 것인가? 권징의 목적과 절차. 1-7)

1. 교회 권징의 필요성과 성격

교회의 권징에 대한 논의를 나는 여기까지 미루어 왔으나 여기서도 간단히 논하고 나머지 주제로 넘어가려 한다. 권징은 대개 열쇠의 권한과2125) 영적 재판권에 근거를 둔다.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교회를 성직자와 일반 신자의 두 가지 계층으로 나누겠다. 교회의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성직자"라고2126) 부르겠다. 먼저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하는 공통적인 권징을 논하고 그 다음에 공통적인 권징 이외의 특별한 권징이 규정되어 있는 성직자들을 논하겠다.2127)

권징을 싫어하고 말만 들어도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런 사람들은 교회도 하나의 사회란 것을 알아야 한다. 조그마한 가족 같은 사회에서도 규율이 없이는 올바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면 가장 질서가 지켜져야 할 교회에서는 규율이 더욱 더 필요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교훈이 교회의 생명인 것같이, 권징은 그 근육이며 이 근육에 의해서 몸의 지체들이 서로 결합되고 각각 그 자리에 지탱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권징을 폐지하거나 그 회복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고의로 하든지 또는 모르고 하든지 간에 결국 교회를 해체시키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각기 제멋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둔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교리를 전파하기만 하고, 사적인 충고와 시정과 기타 보조 수단을 첨가해서 교리를 지탱하며 실천하게 하지 않는 다면 다 사람이 제멋대로 행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반대해서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며 길들이는 굴레와 같으며, 나태한 사람을 고무하는 자극과 같고, 더 깊은 타락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써 부드럽게 징벌하는 아버지의 매와2128) 같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억제하려는 생각이나 방법이 없어서 교회가 참화를 당할 위험이 보일 때에는 이 절박한 상태가 시정책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사용한 시정책은 이 권징뿐이다.

2. 교회 권징의 단계

권징의 첫 기초는 사적인 충고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즉, 어느 교인이 그 의무를 기꺼이 다하지 않거나 불손한 행동을 하거나 점잖지 못한 생활을 하거나 비난받을 행동을 했을 때에, 그는 충고를 받을 용의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필요한 때에는 형제에게 충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특히 목사와 장로들이 깨어 있어서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들의 의무는, 신자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교훈으로 충분한 성과가 없을 때에는 각 가정에 다니면서 경고와 충고를 하는 것이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또 각 가정에서 가르쳤다고 하였으며(행 20:20),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 했으므로(행 20:31)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라고(행 20:26) 하였다. 목사는 모든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설명할 뿐 아니라, 그 가르침을 존경하지 않거나 지킬 성의가 부족하다고 본 사람들에 대해서 의무를 지키라고 요구할 권리와 수단까지도 가지고 있어야만 목사의 교훈에 힘과 권위가 있다.

만일 이런 충고를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그 죄악을 계속함으로써 충고를 무시한다는 태도를 보일 때에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증인들 앞에서 두 번째로 충고하며 그 후에는 교회 재판소, 즉, 장로회에2129) 불러 공적 권위로 더욱 엄중하게 충고하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다. 이것은 만일 그가 교회를 존중한다면 굴복하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도 굴하지 않고 그 악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그 때에는 교회를 경멸하는 자로 인정해서 신자의 공동체에서 제거하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명령하셨다(마 18:15,17).

3. 숨은 죄와 나타난 죄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은밀한 허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우리는 사적인 죄와 공적인 또는 공개적으로 나타난 죄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2130) 전자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에게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 :15)고 말씀하신다. 나타난 죄에 대해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20)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하셨는데(마 18:15), 이 "네게"라는 말씀은(순순히 해석한다면) "너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면"이라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죄를 짓는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책망하라고 디모데에게 명령한 바울은 베드로에 대해서 그대로 실행했다. 베드로의 죄가 공중의 죄로 번질 정도가 됐을 때에, 바울은 사적으로 책망하지 않고 교회 앞에 베드로를 끌어냈던 것이다(갈2:14).

그러므로 올바른 행동 절차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비밀한 죄를 징계할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절차를 밟아야 하며, 드러난 죄에 대해서는 그것이 참으로 공공연하게 나타난 죄인 경우에는 즉시 교회가 엄숙하게 책망해야 한다.

4. 경한 죄와 중한 죄

또 우리는 허물인 죄와, 범죄 또는 부끄러운 행동을 구별해야 한다.2131) 후자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충고나 견책뿐만 아니라 더 엄격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근친상간 죄를 범한 고린도 교회 신자에 대해서 바울은 말로 징계할 뿐 아니라 소식을 들은 즉시로 출교의 벌을 내렸다(고전 5:3이하).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의 말씀에 따라 죄를 처벌하는 교회의 영적 재판권이 교회의 건전성의 지주가 되며 질서의 기초가 되고 단결의 유대가 되는 까닭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드러난 간음범과 음행자, 절도와 강도, 반역자와 거짓 맹세한 자, 거짓 증거를 하는 자와 그 밖의 유사한 무리와(경한 죄에 대해서 충고를 받고도 하나님과 그 심판을 냉소하는)불손한 자들을 공동체 생활에서 제거하는 것은 불합리한 처사가 아니라 주께서 주신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교회의 이런 판단을 멸시하거나 신자들의 투표에 의한 이 정죄를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이것이 자신의 선고를 발표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교회가 땅에서 한 일은 하늘에서도 확인된다고 선언하셨다. 교회는 패악한 자를 정죄하라는 주의 말씀을 받았으며 회개한 자는 다시 받아들이라는 말씀도 받았다(마 16:19, 18:18, 요 20:23). 나는 이 권징의 유대가 없어도 교회와 오래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주께서 미리 예견하신 그 보조 수단을 제거하고도 우리가 무사히 지낼 수 있다면 문제는 다를 것이다. 참으로 이 권징의 각종 사용법을 안다면 권징의 절실한 필요성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5. 권징의 목적

교회가 이런 시정책과 출교를 사용하는 데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엡 5:25-26 참조) 마치 악하고 타락한 자들의 음모 단체인 듯한 인상을 주어 하나님에게 치욕이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골 1:24), 이런 추하고 썩는 지체에 의해서 부패된다면 그 머리에도 어느 정도의 치욕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신성한 이름에 수치를 씌우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더럽히는 악행을 하는 사람들이 교회라는 가정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한다. 또 여기서 우리는 주의 만찬의 제도를 보존하며 무분별하게 제공함으로써 성찬을 더럽혀서도 안 된다.2132) 성찬을 분배하는 일을 위임받은 사람은 합당치 못한 사람을 당연히 돌려보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을 의식적으로 성찬에 참가시킨다면 마치 그리스도의 몸을 개에게 던져준 것과 같은 모독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옳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사제들이 권세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감히 아무도 제외시키지 못하는 것을 엄중하게 공격했다. "그대들의 손에서 피 값을 요구할 것이다(겔 3:18, 33:8). 그대들이 사람을 무서워하면 그는 그대들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대들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나 자색 옷이나 왕관들을 무서워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더 큰 힘이 있다. 나는 그렇게 더러운 일에 가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으며 피를 흘리기를 진정으로 원한다.2133) 그러므로 이 가장 신성한 신비에 치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성찬 분배에는 신중한 태도가 극히 필요하다. 그렇게 되려면 교회의 재판권을 행사해야 한다.

둘째 목적은, 흔히 있는 것과 같이 악한 사람들과 항상 교제함으로써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인간은 바른 길을 벗어나기 쉬우므로) 나쁜 행동을 보면 우리도 바른 생활을 버리고 다른 데로 끌리기가 아주 쉽다. 사도가 근친상간 자를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을 때에도 사람에게 있는 이런 경향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그는 여기에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예견하고 그와의 모든 교제를 금지했다.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고전 5:11).

셋째 목적은, 비루한 자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시작하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더 부드럽게 처리를 받았으면 더욱 고집을 썼을 사람들이 자기의 악행에 대한 징벌을 받고 매를 맞아 뉘우치며 유익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 사도는 이런 뜻으로 말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살후 3:14). 마찬가지로, 다른 구절에서는 저 고린도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면서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고전 5:5). 즉, 바울은 그를 임시로 정죄해서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한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하는 것은 마귀는 교회 밖에 있고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2134) 어떤 권위 있는 분들은 이 어구는 모종의 육체적 고통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2135) 내게는 대단히 의심스럽게 생각된다.

6. 권징은 경우에 따라 처리 방법이 다양하다

이렇게 목적을 열거한 다음에는 교회가 그 권한의 범위 내에서 권징의 이 부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우선 위에서 말한 구별을 생각하라. 어떤 죄는 공적이고 어떤 죄는 사적이며 또는 비교적 은밀에 속한다.2136) 공적인 죄는 한두 사람만이 본 것이 아니라 공연하게 지은 것이며 온 교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 비밀한 죄라고 한 것은 위선자들의 죄와 같이(이것은 교회가 판단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숨겼다는 뜻이 아니라, 중간적인 것, 즉, 아는 사람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은 공개되지 않은 죄를 의미하는 것이다.

처음 종류의 죄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단계가(마 18:15-17) 필요하지 않고 그런 죄가 나타나면 교회는 당사자를 불러서 그 죄에 해당되는 시정책을 취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규칙에 따라 둘째 종류에 대해서는 죄인이 고집을 부리기까지는 교회 앞에 문제가 제출되지 않는다. 교회 앞에 제기된 때에는 범죄와 허물의 구별을 고려해야 한다. 경한 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처벌보다는 말로만 징계해도 충분하다. 이런 경우에도 온화하고 아버지 같은 태도로 해서 죄인의 마음을 완고하게 또는 혼란하게 만들지 않아야 하며 그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여 시정 받은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추악한 행동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한 방법으로 징계할 필요가 있다. 추악한 행동으로 교회에 중대한 손상을 입힌 사람이 책망만 받는다는 것은 불충분하고, 얼마 동안 성찬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켜 회개의 확증을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를 말로 책망했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 추방했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그를 오래 버려 둔 것을 책망했다(고전 5:1- 7).

교회 상태가 더 좋았던 고대에는 합당한 치리가 계속되는 동안은 이절차를 지켰다. 범죄하며 교회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있으면 그런 사람은 우선 성찬에 참가하는 것을 금하고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교회 앞에서 회개한 증거를 보이도록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실수한 사람에게는 회개의 표식으로서 엄숙한 의식을 지키도록 명령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교회가 만족할 정도로 의식들을 지키면 안수함으로써 회개한 죄인을 다시 받아들여졌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자주 "화목"이라고 불렀다. 그는 또 이런 의식을 간단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을 참회한다. 다음에 공중 앞에서 고백하고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찬에 참가할 권리를 얻는다." 감독과 성직자들은 화목을 선고할 권한이 있었지만 키프리아누스가 다른 곳에서 밝힌 것과 같이 동시에 교회원들의 찬성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2137)

7. 고대 교회에서는 권징이 모든 위반자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었다

아무도 이 권징에서 제외되지 않았으므로 군주나 평민이나 모두 복종했다. 또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권징이었고 그리스도께 모든 군주들이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데살로니가에서 있은 학살 사건2138) 때문에 암브로시스의 명령으로 성찬예식 참가를 금지 당했을 때, 황제로서의 형식을 일체 벗어버리고 교회 회중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속아서 저지른 자기의 죄를 통곡하며 신음과 눈물로써 용서를 빌었다. 위대한 왕들도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애원하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또 교회의 심판을 받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할 것도 아니다. 그들은 궁 안에서 거의 아첨만을 듣고 있기 때문에 더욱 사제들의 입을 통해서 주의 책망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도리어 사제들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이미 논했다. 단지 나는 이 점만을 첨가한다.2139) 바울이 사람을 출교한 조치는 합당한 것이었으나, 거기에는 장로들이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승인과 찬성했다는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 일반 신도가 대책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증인과 감시인이 되어 사태를 알며 소수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일이 처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참으로 이 조치의 과정 전체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를 증거하는 엄숙성이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재판권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해야 한다.

(권징은 온건하게 실시하라 : 엄격주의를 논박한다. 8-13)

8. 교회 권징의 엄격주의와 온건구의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엄격한 태도에 "온유한 심령"(갈 6:1)을 결합하는 것이 교회로서 합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명령한 것처럼, 벌을 받는 사람이 너무 심한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고후 2:7)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고치려고 하다가 도리어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고치려는 목적으로 본다면 온화한 방침이 더 좋을 것이다. 출교하는 목적은 죄인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자는 것이며, 신자들 사이에서 나쁜 습관을 제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훼방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극을 받아 본받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일들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엄격하며 어디서 그쳐야 할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죄인이 교회에 대해서 회개한 증거를 보이고 그 증거에 의해서 그의 힘이 닿는 대로 교회에 끼친 잘못을 씻어 버린다면 더 이상 그를 추궁해서는 안 된다. 추궁한다면 그 때에는 엄격함이 한계의 도를 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는 고대인들의 과도한 엄격주의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그것은 주의 명령에서 완전히 떠난 것일 뿐만 아니라 극히 위험한 짓이었다. 엄숙한 참회와 친교정지를 혹은 7년 혹은 4년 혹은 3년 혹은 종신토록 계속하게 했으니2140) 큰 위선이나 철저한 절망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또 다시 타락한 사람이 두 번째 회개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평생 교회에서 축출했다는2141) 것도 유익하지 않았고 도리에 합당하지도 않은 처사였다. 건전한 정신으로 이 문제를 숙고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고대인들이 이 점에서는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공적인 관례를 비난하는 것이지 그것을 추종한 사람들을 모두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관습을 싫어하면서도 시정할 수 없어서 참고 견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키프리아누스는 자기가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란 것을 언명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오는 것을 참고, 온유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나는 모두 교회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나는 우리의 동료 병사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진영과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집합되기를 갈망한다. 나는 모든 일을 용서하며 많은 일을 묵인한다. 형제들을 모으겠다는 열망으로 나는 하나님께 대한 허물을 자세히 법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 용서해서는 안 될 허물까지 용서하는 나는 거의 허물을 범한다고 하겠다. 나는 회개하면서 돌아오며 겸손하고 단순한 보상으로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을 즉시 받아들이고 완전히 사랑한다."2142) 크리소스톰은 좀더 엄격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친절하신데 그의 사제가 엄격한 체 할 까닭은 무엇이냐"2143)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에 대해서 얼마나 온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안다. 분열을 버리고 돌아온 사람은 서슴지 않고 본래 있던 감독 구에 받아들였으며, 그것도 회개하면 즉시 받아들였다.2144) 그러나 반대되는 관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판단을 버리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9. 교회 권징에 따르는 우리의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온유한 태도는 교회 전체에 필요하다. 교회는 타락한 사람을 온유하게 대해야 하며, 극도로 엄격한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바울이 지시한 대로 그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야 한다(고후 2:8). 마찬가지로 평신도들도 각각 이와 같은 온건하고 온유한 태도를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에서 추방된 사람들을 선택된 사람들의 수효에서 삭제하거나 그들이 이미 멸망한 사람인 것같이 절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을 교회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사람으로 그러나 떨어져 있는 동안에만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이 온유한 태도보다 완고한 태도를 보일 때라도 우리는 그들을 주의 판단에 맡기고 그들의 일이 앞으로는 지금보다 잘 되기를 희망해야 한다. 또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판단과 손안에만 있는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 아니라 주의 법에 따라 각 사람의 행위의 성격만을 판단해야 한다. 이 방침을 따를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만을 의지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권능을 제한하며 율법으로 그의 자비를 국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판단의 자유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장 악한 사람을 가장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며 이질적인 사람을 접붙이시고, 외인을 양자로 삼으셔서 교회에 들여놓으신다.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시며 그들의 경솔한 생각을 억제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경망해서 분수에 넘치는 판단의 권리를 감히 주장하게 된다.

10. 출교는 교정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마 18:18)라고 약속하셨을 때 이 매는 일의 효력을 교회의 견책에 한정하셨다. 이렇게 하는 것은, 출교 당하는 사람들을 영원한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품행과 생활이 비난을 받는 것을 듣고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정죄를 받으리란 것을 확신하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출교와 저주는 다르다. 저주는 모든 용서를 거부하고 사람을 영원한 멸망에 정죄하는 것이다. 출교는 그의 도덕적 행위를 처벌하며 징계하는 것이다. 출교도 벌을 주는 것이지만 장차 정죄를 받으리란 것을 미리 경고함으로써 사람을 불러 돌이켜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가 돌아온다면 언제든지 화해와 교제의 회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뿐 아니라 저주는 좀처럼 또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의 권징은 출교된 사람들과 친밀한 접촉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지만 우리는 온갖 수단을 다해서 그들을 바른 생활로 돌이키며 교회에 돌아와서 함께 연합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사도도 이런 뜻으로 그들을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가르쳤다(살후 3:15). 사적 견책과 공적 견책에서 이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권징에서 도살 행위로 타락할 위험성이 있다.

11. 교회 권징에 대한 완고한 과격주의를 배척한다

권징을 온건하게 실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있다. 도나투스파에 반대한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같이, 평신도들은 장로회가 죄악을 부지런히 시정하지 않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교회를 즉시 떠나서는 안 된다. 또 목자들은 시정해야 할 것을 소원대로 전부 씻어 버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직책을 돌리거나 비상한 엄격주의로 교회 전체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어거스틴은 참으로 옳은 말을 했다.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책망으로 시정하고 또 시정할 수 없는 것을 공정하게 비난하고 건실하게 참으면서 평화의 유대를 깨뜨리지 않고 제거하는 사람은 자유로우며 모든 저주에서 풀려난다." 다른 구절에서 그는 그 이유를 말했다. "교회 권징의 방법과 수단이 경건하게 유지되려면 서로 용납함으로써 지키라고(엡 4:2) 사도가 우리에게 명령한 것 곧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엡 4:3)에 주의해야 한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 형벌의 약은 무용할 뿐 아니라 유해하게 되며 약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잘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서 권징을 엄격하게 세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과격한 시정책으로 우정의 유대를 끊지도 않는다." 어거스틴은, 교회 안에 허물이 남아 있지 않도록 목자들은 끝까지 노력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각 힘 자라는 데까지 노력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악한 사람들을 지지하거나 그들과 함께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을 경고하고 책망하며 시정하는 일을 등한시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 죄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또 악한 사람들을 성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할 수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오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과오로 죄를 짓는다는 것을 어거스틴은 인정한다. 다만 그가 원하는 것은, 주께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신(마 13:29) 그 신중한 태도이다. 여기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와 함께 "시정할 수 있는 것은 인자한 태도로 시정하라. 시정할 수 없는 것은 길이 참으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슬퍼하며 신음하라"2145)고 결론을 내린다.

12. 혼란을 일으키는 엄격주의 : 도나투스파와 재세례파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도나투스파의 신경과민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회 내에 있는 허물을 감독들이 말로 책망하면서 출교로 처벌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에(감독들은 출교가 무익하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감독들이 규율을 위반했다고 맹렬히 공격하고 그리스도의 양떼로부터 불경건한 분리를 감행했다. 오늘날의 재세례파나 그와 같은 행동을 한다. 모든 점에서 천사같이 완전하지 않은 곳에는 그리스도의 모임이 없다고 하며,2146) 열성을 구실로 해서 있는 계몽을 일체 부정한다. 어거스틴은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악을 미워하지 않고 자기들의 투쟁을 즐기기 때문에, 자기들의 이름을 자랑함으로써 약한 사람들을 유혹해서는 자기들 편으로 끌어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분열을 일으키려고 한다. 교만으로 으스대며 미친 듯이 완고하고 거짓말로 중상하고 소란스럽게 선동을 하면서, 자기들에게 진리의 빛이 없는 것을 융통성이 없는 엄격주의의 그림자로 감추어 버린다. 그들은 성경에서 명령한, 사랑을 지키며 화평의 연합을 보존하면서 온전한 방법으로 형제들의 죄악을 시정하라는 일들을 바꾸어서 모독적인 분파와 제거의 구실로 악용한다. 공정하게 엄격해야 할 때 사탄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만들며 평화와 단결의 유대를 부패케 하고 파괴시키려고 애쓰면서"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14)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화평과 연합의 유대가 확고한 동안은 사탄은 아무 해를 입힐 힘이 없으며 그의 음모의 덫은 약해지고 파괴 공작은 사라져 버린다.2147)

13. 어거스틴은 분별력이 있는 권징을 요구한다

어거스틴이 특히 권면한 것은 한 가지로서, 죄가 교인 전체에 전염되기 시작할 때에는 엄격하고 강력하게 권징을 세우는 엄격한 자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분리를 권하는 것은 불경건하고 교만하게 되므로 무익하고 유해하며 모독적이다. 그런 권고는 담대한 악인들을 시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약하고 선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2148)고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권고한 것을 몸소 실천했다. 가르타고의 아우렐리우스 감독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성경이 엄격하게 비난한)술 취함으로 인한 폐해가 아프리카에 널리 펴졌는데도 처벌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명한 후에, 감독 회의를 열어서 대책을 강구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첨가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일들은 난폭한 방법이나 가혹한 또는 강압적 방법으로는 제거할 수 없나이다. 명령보다는 교훈으로, 위협보다는 충고로 제거되는 줄 압니다. 많은 죄인들을 다를 때에는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를 상대로 할 때에는 엄격한 태도가 필요합니다."2149) 그러나 그의 말은 감독들에게 공적 범죄를 묵인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또는 더 엄격하게 처벌할 수 없으니까 침묵을 지키라는 것도 아니다. 이 점을 그는 후에 설명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정한 결과가 죽음이 되지 않고 신체에 건강을 가져오도록 될 수 있는 대로 방법을 완화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평화를 어지럽게 할 위험성이 없을 때에는 결코 악한 사람들을 떼어버리라고 한 사도의 교훈을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다른 의미로 이 일을 실천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또 이 원칙도 지켜야 합니다. 즉,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2150)(고전 5:3-7, 엡 4:2-3).

(개인적 및 공적 금식의 가치와 목적 : 준수해야 할 원칙들. 14-18)

14. 죄를 공적으로 서로 고백한다

권징에는 본래 열쇠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목사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신자들에게 금식이나 엄숙한 간구 및 그 밖의 행동으로 겸손과 회개와 신앙을 나타내기를 권고하는 부분이다. 여기 대해서 때와 방법과 형식을 정한 것이 성경에는 없고 교회의 판단에 완전히 맡겼다. 또한 이 부분의 준수는 유익한 것으로서 초대 교회에서는 사도들의 시대부터 항상 관례가 되었다. 그러나 사도들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율법과 예언서를 본받았던 것이다. 거기서는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을 모으고 기도와 금식을 정했다(욜 2:15, 행 13:2-3). 그러므로 사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자기들에게도 유익하리라고 예견한 그 일을 행한 것이었다. 다른 행사들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할 수 있다. 그런 일들을 함으로써 신자들은 의무감에 눈을 뜰 수 있고 의무와 순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다.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실례를 찾아볼 수 있어 수집할 필요가 없다. 요컨대 신앙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서 종교 회의나 교회 재판으로 해결해야 할 때, 목사를 선택하는 데 대해서 문제가 있을 때,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를 토의해야 될 때 또는(전염병과 전쟁과 기근 같은)주의 진노의 심판이 나타난 때 등, 이런 때에는 언제든지 목사들이 신자들에게 공적 금식과 특별 기도를 권고하라는 것이 거룩한 규정이며 모든 시대에 유익을 주는 규정이다. 구약성경에 있는 증언들을, 그리스도 교회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듯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더라도 사도들이 이 관습을 따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도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금식에 대해서 몇 마디 말하고자 한다. 금식의 가치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이 심히 많다. 또 어떤 사람은 금식을 무익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배척한다.2151) 또 세상이 금식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므로 그것은 미신으로 타락하기 쉽다.

15. 금식의 목적

성결하고 합당한 금식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육신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약화시키며 굴복시키기 위해서, 또는 기도와 거룩한 명상을 위해서 우리의 심신을 더욱 잘 준비하도록, 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자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서 금식을 한다.

첫째 목적은 공적 금식에는 해당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신체 구조와 건강 상태는 모두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첫째 목적은 개인적 금식에 더 합당하다.

둘째 목적은 양쪽에 공통된 것이다. 기도를 위해서 이런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교회 전체나 각 개인 신자나 마찬가지이다.

셋째 목적도 공통적이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라 전체에 전쟁이나 전염병이나 다른 재앙으로 형벌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통적인 채찍을 맞을 때에는 온 백성이 자기를 책망하며 죄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주의 손이 어느 개인을 칠 때에는 그는 단독으로 또는 자기의 가족과 함께 죄를 고백해야 한다. 문제는 근본적으로 마음속의 동기에 있다. 그러나 속마음이 올바르게 감동되면 외면적인 증거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공통의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 때에 외적 증거가 나타나게 되며,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이 함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의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의 예를 들어 서로 권면하게 된다.

16. 금식과 기도

따라서, 금식은 자기를 낮추는 표식이 되므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2152) 공적인 것이나 사적인 것에 공통된 것이지만 사적인 경우보다는 공적인 금식이 더 자주 이용된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권징에 관해서 본다면, 어떠한 중대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려고 할 경우 금식을 기도와 함께 정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의 중대 사명을 하나님께 더욱 잘 맡기기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했다(행 13:3). 또 이 두 사람도 후에 각 교회에 일꾼을 임명했을 때에 금식과 기도를 함께 행하곤 했다(행 14:23). 그들이 이런 금식을 한 목적은 기도를 더욱 정성스럽게 드리며 기도에 방해되는 일을 제거하려는 것뿐이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배가 부르면 마음을 하나님께로 충분히 끌어올릴 수 없으며 정성과 열성을 다해서 기도에 정신을 집중하며 계속할 수 없다. 누가가 안나에 대해서 한 이야기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안나가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를 섬겼다고(눅2:37) 누가는 말했으나, 금식함으로써 주를 경배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 거룩한 여인이 이런 방법으로 기도를 계속하는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느헤미야가 동족의 해방을 위해서 열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에도 그러한 금식을 했다(느 1:4). 그러므로 바울은 결혼한 남녀가 거리낌 없이 기도와 금식에 전념하기 위해서 일시 서로 떨어져 있는 일은 옳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도의 보조 수단으로서 금식을 첨가하며 이런 목적이 아니라면 금식은 그 자체로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경고한다(고전 7:5). 또 바울이 부부는 서로 의무를 다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고전 7:3), 일상 드리는 기도에 대한 말이 아니라 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17. 금식과 회개

또 전염병이나 기근이나 전쟁이 심하게 날뛰기 시작하거나 어떤 재앙이 한 지방과 주민에게 몰아 닥쳐올 듯한 때에 주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목사는 교회에 금식을 권고할 의무가 있다. 주께서 위험 신호를 보이시는 것은 형벌을 내리실 준비와 무장이 됐다고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에 죄인이 재판관의 자비심에 호소하기 위해서 긴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에 검은 옷을 입고 그 앞에 엎드려 탄원한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겸손한 차림으로 주의 엄격한 형벌을 면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이 주께 영광이 되며, 사람의 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를 위해서도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 또 요엘이 한 말을 보더라도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는 관습이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나팔을 불며, 성회를 모으며, 금식일을 정하며, 등등을 명령을 했을 때에(욜 2:15-16) 그는 일반적인 관습을 말한 것이었다. 그는 조금 전에 백성의 부끄러운 행실에 대한 재판이 정해졌고 심판의 날이 가까웠다고 말하고 죄인들을 불러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라고 했다(욜 2:1 참조). 그리고 백성들은 속히 굵은 베와 재를 쓰고 울며 금식하라고 외쳤다(욜 2:12). 즉, 여호와 앞에 엎드려 외적인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사실 당시에는 굵은 베와 재가 그것을 잘 나타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사정이 요구할 때에는 모임과 울음과 금식과 기타 유사한 행동이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2153) 이것은 사람이 자기를 낮추며 겸손한 태도를 고백하기 위한 거룩한 훈련이며, 따라서 우리는 비슷한 곤란을 당했던 고대인들보다 이 훈련을 덜 이용할 까닭이 없다고 본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운 이스라엘 백성의 교회뿐 아니라(삼상 7:6, 31:13, 삼하 1:12), 요나의 전도밖에 듣지 못한 니느웨 사람들도(욘 3:5) 자기들의 슬픔을 금식으로 표시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해서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당신은 이것이 외형적인 의식이며 다른 의식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다고 항의하는데, 그렇지 않다. 금식은(과거에 항상 유익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훌륭한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채찍으로 징계를 받을 때에 지나친 자신과 태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한층 더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자신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도 금식은 유익한 경고가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지 않는 제자들을 변호하실 때, 금식이 폐지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재앙이 올 때에 금식하라고 하시며 금식과 애통을 연결시키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마 9:15, 눅 5:34-35)2154)

18. 금식의 성격

그러나 용어의 뜻을 오해하지 않도록 무엇이 금식인가를 정의하겠다. 우리는 금식에 대하여 음식을 억제하며 절제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조금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에 가깝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외에도 다른 종류의 금식이 있다. 즉, 하루 동안 또는 일정기간 동안 다소간 정상적인 생활을 줄이며 보통 때보다 식사를 더 엄격하게 제한하기로 맹세하는 임시적인 금식이다. 이런 금식에는 때와 음식의 질과 양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때라는 것은 금식하는 목적에 적당한 때에 금식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엄숙한 기도를 위해서 금식한다면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음식의 질은, 훌륭한 것을 제거하고 소박한 보통 것으로 만족하며 맛있는 것을 입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에 대해서는, 보통 때보다 적고 가볍게 먹으라는 것이다. 필요해서 먹는 것이지 음식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신, 공로 사상, 위선적인 금식, 사순절 행사 등은 위험한 것이다. 19-21)

19. 금식에 대한 오해

그러나 과거에 미신이 침입해서 교회에 큰 해독을 끼친 것과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우리는 항상 특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금식을 전혀 하지 않는 편이 열심히 지키는 금식이 거짓되고 유독한 생각으로 부패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목사들이 극도로 충실하고 지혜롭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이런 유해한 사상에 몇 번이고 빠지게 될 것이다.

첫째, 목사들은 요엘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고 한 것을(욜 2:13) 항상 권고해야 한다. 즉, 마음속의 감화와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혐오와 진정한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진정한 슬픔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금식 그 자체를 높이 평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이런 일들에 대한 부차적 보조 수단으로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면 금식은 아무 유익도 없다. 사람에게 순진한 마음이 없고 외형과 표징만으로 가장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마음속에는 불경하고 불결한 생각이 있으면서도 금식을 했으니 하나님을 만족시켰다고 생각한 유대 사람들의 그 위선을 통렬하게 공격했다. "이것이 주께서 택하신 금식이냐"고 했다(사 58:5-6의 융합). 그러므로 위선적인 금식은 무익하고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장 가증한 짓이다.

이와 비슷하고 철저하게 피해야 할 해악은, 금식을 공로가 있는 행위나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경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금식 자체는 무해 무익하며 그 원래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면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행위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할 것 없이 그 자체만으로 필요한 행위들과 금식을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미신이다. 옛날 마니교도들이 이런 망상을 했다. 그들을 반박하면서 어거스틴은, 금식은 오직 내가 열거한 목적들에 의해서만 판단해야 하며, 이런 목적과 관계될 때에 한해서 하나님께 인정된다고2155) 분명 하게 가르쳤다.

셋째 오류가 있는데, 이것은 그다지 불경건하지 않지만 역시 위험한 오류이다. 가장 중요한 의무 중의 하나인 듯이 금식을 엄격하고 엄밀하게 지키라고 요구하며, 세상 사람들이 금식을 실행하면 어떤 고상한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금식을 과도히 찬양하는 것이 이 셋째 오류이다. 이 점에서 나는 미신의 씨를 뿌리며 또한 그 후에 일어난 압제의 원인을 제공한 고대 저술가들의 죄를 전적으로 용서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들의 글에는 금식에 대한 건전하고 현명한 발언들이 간혹 있지만, 그 후에 금식을 가장 중요한 덕 중의 하나로 만드는 지나친 찬사에 자주 부딪치게 된다.

20. 교회사에서 금식은 타락했다

그 때에는 벌써 사순절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은 이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에게 특별한 봉사를 한다고 생각했고 목자들은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모방하는 것이라고2156) 해서 권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복음 선포를 시작하심으로써 복음은 사람의 사상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교훈이란 것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마 4:2). 그런데(이미 명백한 논거에 의해서 여러 번 논박된)이런 순전한 망상이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주 금식하지 않으셨다. 매년 금식하라는 법을 정하실 생각이 있었다면 자주 금식하셨을 것이나 한 번밖에 하신 일이 없으며, 그것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준비하신 때였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본받게 하시기를 원하셨다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금식하셨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자기를 본받게 하려고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기에 대하여 경탄할 만한 예를 보이려고 하셨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금식하신 이유는 모세가 여호와의 손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에 금식한 이유와(출 24:18, 34:28) 다르지 않았다. 모세에게서 기적이 나타난 것은 율법의 권위를 세우려는 것이었으므로,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복음이 율법보다 못하다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그 기적을 빠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 그를 본받는다는 구실로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그런 모양의 금식을 제정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예언자들과 조상들은 모든 경건한 행사에 대해서 극진한 열의가 있었지만, 그들 중에서 모세의 금식을 본받은 사람은 없었다. 엘리야가 40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행했다고 한 것은(왕상 19:8),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버린 율법을 회복하는 사명을 그가 받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도움이 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동이라고 해서 금식을 정당화한 것은 미신이 가득찬 잘못된 열성이었다.2157)

그러나 금식하는 방법도 놀라울 정도로 각양각색이었다. 이 사실은 소크라테스 전기 제 9 권에서 인용한 카시오도루스의 기록에 남아 있다. 로마에서는 3주일간 금식했는데, 일요일과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금식이 계속되었다. 일리리아와 희랍에서는 6주간, 다른 곳에서는 7주간이었으나 이따금씩 중단되기도 했다. 택하는 음식도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빵과 물만 먹었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야채를 첨가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생선과 닭고기를 끊지 않았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2158) 어거스틴도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서한에서 이 차이를 언급했다.2159)

21. 금식 기간에 사악한 방종에 빠졌다

그 후에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일반 사람들의 그릇된 열성에 주교들의 무능과 훈련 부족 그리고 그들의 지배욕과 전제적인 엄격주의가 겹쳤다. 무서운 사슬로 양심을 결박하는 악법이 제정되었다. 육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모독적인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오류의 극치에 이르렀다. 그리고 단 하나의 비행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듯 철저하게 어리석은 금욕의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우롱하기 시작했다. 가장 훌륭한 진미를 먹으면서 금식을 찬양했다. 다음에는 어떤 진미를 먹어도 만족해하지 않는다. 금식 기간같이 음식이 풍부하고 종류가 많고 맛이 단 때가 없다. 그들은 이런 음식과 사치한 장식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금식 기간에 다른 때보다도 더욱 배불리 또 추악하게 먹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 요컨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경배라고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에 모든 진미를 풍성하게 먹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최악의 불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돼지기름이나 썩은 고기를 검은 빵과 함께 조금이라도 먹는 것이다. 제롬은 그의 시대에 이런 어리석은 짓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기름을 먹지 않기 위해서 각지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구해 왔다. 심지어 자연 법칙을 어기고, 물을 마시지 않는 대신에 달고 비싼 음료를 만들게 하여 잔으로 마시지 않고 조개껍질로 마셨다고 했다.2160) 그때에 소수 사람들 사이에서 행해지던 악한 것을 지금은 모든 부자들이 행하며, 그들이 금식하는 목적은 진미를 더욱 호화롭게 먹으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한 일에 대해서 나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한 마디만 말하겠다. 로마 카톨릭주의는 금식 문제에서나 권징의 다른 부분 어디에서도 바른 것, 성실한 것, 질서가 잘 잡힌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칭찬할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듯이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성직자 독신 제도는 유해한 새로운 제도다. 22-28)

22. 성직자들의 권징과 그 타락

이제부터 교회 권징의 둘째 부분, 즉, 특히 성직자들에게 적용되는 부분을 논하겠다. 이것은 고대 감독들이 자신들과 자기 계급에 부과한 교회법에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성직자는 사냥, 도박, 환락 등에 빠지지 말고 고리 대금이나 장사도 하지 말고 난잡한 무도회에도 참석하지 말라는 등등이다. 이런 교회법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 교회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벌칙도 첨가했다. 감독이 이 법에 따라 자기에게 속한 성직자들을 다스리며 그들로 하여금 의무를 지키게 하도록, 성직자들을 다스리는 권한이 각 감독에게 주어졌다. 이런 목적으로, 매년 순시하며 종교 회의를 열어서 직책을 등한히 하는 사람이 있으면 경고하고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그 죄에 따라 벌을 주었다. 감독들은 각 지방별로 매년초기에는 매년 두 번씩회의를 열고 누가 직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가를 판정했다.2161) 성직자들에 대해서 너무 가혹하거나 너무 난폭한 감독이 있으면 성직자들은 종교 회의에 호소할 수 있었다. 성직자 한 사람만이라도 불만을 말할 수가 있었다. 죄가 있는 사람에 대한 가장 엄중한 처벌은 면직시키는 것과 성찬 참가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구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폐회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 회의의 날짜를 정했다.2162) 세계적인 회의를 소집하는 것은 고대의 모든 소집장이 증명하는 것과 같이 황제만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163)

이런 엄격한 제도가 실시되는 동안은 성직자들은 자기들의 모범과 행동에 나타난 것 이상을 신자들에게서 말로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에 대해서 보다 자신들에 대해서 훨씬 더 엄격했다. 또 이와 같이 일반 사람들은 이를테면 더 온유하고 관대한 규율로 다스리면서, 성직자들끼리는 서로 더욱 엄격하게 책망하며 다른 사람들 보다 자기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다.

이 모든 권징이 폐물이 됐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이는 오늘날 이 계급보다 더 방종하며 방탕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또 그러한 노골적인 방종한 생활을 전세계가 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고대의 전통이 완전히 매장된 것으로 보이지 않도록, 그들이 일종의 그림자로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그림자가 고대의 관습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원숭이의 흉내가 사람이 이성과 계획으로 하는 일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크세노폰의 글에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즉,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상의 법규에서 추악하게 타락했으며 엄격한 생활을 버리고 나약해지고 사치에 빠졌으면서도 그 수치를 숨기기 위해서 이전의 의식들을 조심스럽게 지키더라는 것이다. 고레스 때에도 아직 금주와 절제의 기풍이 왕성해서 코를 풀 필요가 없었고 또 코를 푸는 것을 수치라고까지 생각했었는데, 후손들 사이에서는 코를 풀지 말라는 것이 하나의 종교적 관습이 되었고 탐식으로 인해서 생긴(썩을 정도가 된) 콧물을 들이 삼키는 것을 허락했다. 그래서 고대의 교훈에는 술잔을 식탁에 들고 오는 것을 불법이라고 했으나, 후대에는 술에 취하여 들려 나갈 정도로 취하는 것을 용인했다. 하루에 한 번만 먹으라는 법이 있었다. 이 훌륭한 후계자들은 이 법을 폐지하지 않고 다만 주연을 정오부터 자정까지 계속하였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하루 갈 길을 다 갈 때까지는 먹지 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법으로 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피로를 피하기 위해서 하루 길을 두 시간으로 단축시키는 것이 용인되었고 또 관습이 되었다고 했다.2164) 카톨릭교가 거룩한 교부들과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타락한 규정들을 내세울 때마다, 크세노폰이 이야기한 예는 어떤 화가도 그 이상 더 선명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 만큼 그들의 가소로운 모방을 충분히 비난할 것이다.

23. 사제 독신제는 성경에 배치된다

그들은 사제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2165) 한 가지 일에서만은 사정없이 냉혹하고 엄격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음행이 횡행하면서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나 자기들의 추악한 독신 생활을 믿고 모든 범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또 이런 금지는 그들의 모든 전통이 얼마나 크게 유해한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런 금지 때문에 교회는 착하고 유능한 목자들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죄악의 시궁창을 교회 안에 끌어들였으며 많은 영혼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확실히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뿐만이 아닌 일체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불경건한 횡포를 가한 것이었다. 첫째, 주께서 각자의 자유에 맡기신 일을 사람이 금지한다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었다. 둘째, 이 자유를 침범하지 말라고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며 주의시키셨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바울이 여러 구절에서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기를 원했다는(딤전 3:2, 딛 1:6)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바울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말세에 결혼을 금하는 불경건한 자들이 있으리라고 단언하고 또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마귀라고(딤전 4:1,3) 한 것 보다 더 강력한 발언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혼을 금하는 것은 마귀의 교훈이라고 한 것은 한 예언이요 성령의 신성한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성령께서는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서 처음부터 교회를 무장시키고자 하셨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는 몬타누스와 타티아노스파와 엔크라티스파와 기타 이단자들에 대한 이 선고를 부정함으로써 깨끗이 피한 것같이 생각한다. 이단자들만이 결혼을 정죄하고, 자기들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제 계급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만 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166) 마치 이 예언이 처음에 저 이단자들에게서 실현되었으나 자기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한다. 또는, 그들은 결혼을 모든 사람에게 금지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결혼을 금지한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이 유치한 궤변을 들을 가치가 있는 것같이 행동한다. 마치 어떤 폭군이 도시의 일부분만을 부당하게 압박하는 법률은 부당한 법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24. 결혼을 금지하고 영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사제들이 일반 사람들과 구별되는 표식이 있어야 한다고 항변한다. 이는 사제들은 어떤 장식으로 탁월해야 된다는 것을 주께서 예견하시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사도가 선한 감독의 완전한 모범을 묘사했을 때 필요한 조건으로서 다른 은혜와 함께 감히 혼인도 요구했으므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고 교회의 모습을 더럽힌다고 비난한다. 나는 그들이 이 말씀을(딤전 3:2, 딛 1:6)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안다. 즉, 첩을 가진 사람은 택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2167) 또 나는 이것이 새로운 해석이 아니란 것을 인정하지만 전후 관계로 보아서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해석이다.2168) 바울은 즉시 감독과 집사들의 아내는 어떤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을 지시했다(딤전 3:11). 바울은 결혼을 감독의 덕의 하나로 치며, 카톨릭 교회는 결혼을 교회 제도에서 용인할 수 없는 죄과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런 일반적인 비난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결혼을 교회법에서 육의 불결과 오염이라고 불렀다.2169) 어떤 곳에서 이런 것을 만들었는가를 각각 잘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결혼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보셔서 자기와 교회와의 신성한 연합의 모양이 되게 하셨다(엡 5:23-24,32). 결혼의 존귀성에 대해서 이보다 더 훌륭한 찬사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영적 은혜의 형상이 비치는 것을 불결하다느니 오염되었다느니 하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25. 여기에 반대하는 성경적 이론을 반박한다

그런데 그들의 금지 규정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백하게 상반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호할 자료를 성경에서 찾는다.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집행 순서가 돌아올 때마다 순결하고 티없는 몸으로 성물을 다루기 위해서 아내와 따로 자야 했다(삼상 21:5이하 참조). 그러므로 훨씬 더 고귀하고 매일 집행하는 우리의 신성한 의식들을 결혼한 사람이 집행한다는 것은 심히 부적당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복음 선포와 레위족의 제사장직이 똑같은 일이라는 생각이다. 이는 레위족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딤전 2:5) 그 완전한 순결로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키시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원형2170)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모습을 죄인이 모든 점에서 나타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윤곽이라도 보이기 위해서 제사장들은 성소에 접근할 때 인간의 관습 이상으로 몸을 정결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합당하게 상징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하늘 심판대의 모형인 장막에 나타나서 백성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조정자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지금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사와 제사장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사도는 결혼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귀히 여겨야 하며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한다(히 13:4). 그리고 사도들 자신이 몸소 결혼함으로써 결혼은 아무리 훌륭하고 거룩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을 증명했다.2171) 바울은 그들이 아내를 가졌을 뿐 아니라 데리고 다녔다고 증언한다(고전 9:5).

26. 고대 교회와 독신주의

그러므로 그들이 이 장식적인 정절을 필요한 물건이라고 하면서 선전하고 다녔다는 것은 무섭도록 파렴치한 행위였다. 그들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거룩했던 고대 교회에 큰 치욕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이 사도들을 무시한다면(사실 그들은 가끔 사도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감독 계급의 결혼을 묵인했을 뿐 아니라 결혼에 찬성한2172) 모든 고대 교부들에게는 무엇이라고 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고대 교부들은 주의 성례전을 합당하게 집행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성물에 대한 추악한 모독을 장려했다는 말인가? 니케아 회의에서 독신 생활을 요구하자는 선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언제든지 미신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런 자들은 무슨 신기한 것을 생각해서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 있었는가? 자기 아내와 동거하는 것이 정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선언한 파프누티우스의 의견이 채택되었다.2173) 그러므로 교부들은 여전히 결혼을 신성한 일로 인정했으며 결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직책 수행에 어떤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27. 독신주의의 후기 발전

그 다음에 독신 생활을 미신적으로 숭배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순결을 광적으로 찬양하는 시대였고, 대개가 순결에 비교할 만한 다른 덕성은 아무것도 없는 듯이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을 정죄한 것은 아니나 그 위엄을 많이 떨어뜨렸기 때문에, 결혼하는 사람은 완전성을 추구하는 열의가 부족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제가 되는 사람에게 결혼을 금하는 교회법이 생기고, 그 다음에는 독신자가 아니거나 또는 부부의 합의로 동침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면 사제에 임명하지 않는다는 법이 생겼다. 나는 이런 규정들은 사제 계급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는 듯했기 때문에 고대에 많은 환영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의 논적들이 고대의 관습을 근거로 삼는다면, 나의 첫째 대답은 사도 시대와 그 후 수백 년 동안 감독들이 자유로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딤전 3:2). 사도 자신들과 그들을 계승한 가장 권위 있는 목자들은 아무 문제없이 이 자유를 이용했다. 우리는 더욱 중요하고 더욱 오랜 시대의 교회를 본받아야하며, 그때 칭찬을 받으며 관례가 됐던 일을 불법이니 불미하다느니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순결을 극단적으로 갈망하고 혼인을 싫어하기 시작한 시대에도 사제들에게 법으로 독신을 요구한 것은 독신 생활 자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기혼자보다 독신자를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들은 독신 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무리하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음행에 대해서는 심히 엄한 벌을 내렸으나 결혼한 사제들에 대해서는 사직을 명령했을 뿐이다.2174)

28. 독신 제도하의 폐해

그러므로 이 새로운 압제를 지지하는 자들이 독신 제도의 변호의 구실을 고대에서 찾을 때마다, 우리는 그 고대 사람들이 생각한 정절을 그들의 사제들에게서 회복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간음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제거해야 하며, 고귀한 침소를 더럽힌 사람들이 각종 정욕에 빠졌으면서도 아무 벌도 받지 않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하고, 모든 방종을 억제하던 규율을 다시 살려야 하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교회를 더럽혀 온 가장 부끄러운 악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켜야 한다고 그들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들이 이런 요구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유에 맡긴 일과 교회에 대한 유용성에 의존하고 있는 일을 의무라고 주장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충고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직자들에게 독신 생활의 족쇄를 채우는 교회법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의 원수들이 고대의 이름으로 사제들의 거룩한 결혼을 훼방하는 그 철면피를 식자들에게 폭로하려는 것이다.

저술이 남아 있는 교부들을 본다면, 제롬을 제외하고는2175) 그들이 자기 생각을 말할 때에 아무도 결혼의 존귀성을 악의로 공격한 사람이 없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크리소스톰이 한 찬사만으로도 족히 만족하리라 믿는다. 그는 순결을 특별히 찬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결혼을 추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을 보라. "제 일급 정절은 성실한 순결이요, 두 번째는 충실한 결혼 생활이다. 그러므로 둘째 종류의 순결은 결혼 생활의 깨끗한 사랑이다."2176)

제 13 장  맹세 : 경솔한 맹세로 불행한 속박을 받은 사람들

(맹세의 본질 : 맹세에 대한 일반적 오해. 1-7)

1. 타락과 여러 가지 위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매우 귀중한 피의 값으로 교회의 자유를 사셨건만 그 교회가 잔인한 압제에 눌리며 산더미 같은 전통에 거의 압도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각 사람의 개인적 광태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의 사역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일을 허락하신 것도 정당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경시하는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이 지운 짐을 모두 지고도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각 자기만이 부담할 짐을 더 많이 찾아내며 자기의 함정을 팜으로써 더욱 깊은 곳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열심으로 맹세를 만들어 내어서는 공통된 사슬 위에 덮고 엄한 의무를 첨가했다. 우리는 소위 "목자"들이 교회를 마음대로 지배하며 악법으로 가련한 영혼들을 옭아매어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부패시킨 것을 이미 밝혔다. 그러므로 이것과 관련된 이 다른 악을 여기서 함께 논함으로써 세상이 그 자체의 패악한 성질에 따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보조 수단들을 항상 힘껏 방해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부적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맹세의 폐해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독자들은 이미 제시한 여러 가지 원리를 회상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첫째로 가르친 것은 사람의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훈련하는데 필요한 것은 모두 율법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2177) 또 우리는 주께서 우리가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지 않게 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올바른 의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단순한 복종에 포함시키셨다고 가르쳤다.2178)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가식된 예배 행동을 아무리 우리가 기뻐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곧 판단할 수 있다. 또 확실히 주께서는 친히 여러 구절에서 그런 행동들을 명백하게 거절하실 뿐만 아니라 심히 미워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서 떠난 맹세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맹세는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맹세를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맹세는 어느 정도로 구속력이 있는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 "맹세"라고 부른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상대가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그들에게 갚을 의무가 있는 것을 약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정성스러운 행동으로 상대해야 할 하나님 자신에게 맹세한 것은 마땅히 훨씬 더 엄밀하게 지켜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상하게도 미신이 모든 시대에 그 세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아무런 판단이나 생각도 없이, 심지어 혀가 돌아가는 대로 즉시 하나님에게 맹세를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무례하게 우롱하는 미련한 짓들, 때로는 어리석고도 해괴한 짓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이 불손한 짓을 흉내 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원래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난 수백 년 동안 이것은 가장 흔히 보는 악행이었다. 각처에서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꿈에서 생각난 것이면 무엇이든지 열광적으로 맹세했다. 이 점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가를 나는 악의를 가지고 과장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세히 이야기하지도 않겠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맹세를 논의하는 것은 결코 공연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겸해서 말해 두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2. 우리가 맹세하는 상대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맹세가 합당하며 어떤 맹세가 나쁜 것인가를 실수 없이 결정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 ⑴ 누구를 상대로 맹세하는가? ⑵ 맹세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⑶ 어떤 의도로 맹세하는가?

첫째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셔서, 아무리 사람의 눈에 훌륭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자의적 숭배일지라도2179)(골 2:23) 일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우리 자신이 조작한 모든 자의적 숭배를 하나님이 미워하신다면,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승인하는 경배가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하시리라는 증거가 없는 일을 우리의 마음대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다 죄가 된다는(롬 14:23) 바울의 교훈은 모든 행동에 적용될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으로 생각할 때에 해당한다. 바울은 음식을 구별하는 문제를 논했는데, 만일 그런 가장 사소한 일에서도 믿음이 분명한 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실패하거나 과오가 될 수 있다면, 가장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우리는 종교적인 의무를 무엇보다도 중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맹세에 관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경계할 것은, 우리가 경솔한 짓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양심의 확신이 없으면 결코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솔한 짓을 할 위험성이 없으려면, 우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한 일과 무익한 일에 대한 명령을 받아야 한다.

3. 맹세하는 사람

맹세 문제에서 생각해야 할 두 번째 점에는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을 헤아려야 하며 우리의 소명을 생각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축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나 자기의 소명과 상반되는 일을 맹세하는 사람은 경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는데 그 은혜를 멸시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의 수중에 두셨으므로 우리는 자기의 힘을 믿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 약속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것이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맹세는 합당치 않다고 한 오렌지 회의의 결정은 참으로 옳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가 그에게서 받은 선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180) 하나님께서는 어떤 것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어떤 것은 공정한 입장에서 주시지 않는 것이므로 바울이 가르친 대로(롬 12:3, 고전 12:11), 사람은 받은 은혜의 분량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 맞도록 분량을 정하셨으므로 우리의 맹세도 그 분량에 맞도록 하라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를 넘어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한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 된다. 예를 들어, 바울을 죽이기까지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음모꾼들의 이야기를 누가가 기록했는데(행 23:12), 그 계획이 악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사람의 생사를 자기들의 힘으로 좌우하려고 한 그 경솔은 용서할 수 없다. 입다는 경솔한 열성으로 경솔한 서원을 하였으며, 그 미련한 행동으로 인하여 벌을 받았다(삿 11:30-31). 이 종류의 맹세에서 독신주의는 첫째 자리를 차지할 만한 만용이다. 사제와2181) 수도사와 수녀들은 자기의 연약함을 잊어버리고, 독신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평생 독신을 계속하고 따라서 그런 맹세를 하라는 교훈을 그들은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받았는가? 그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말씀하신 "사람의 독거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창2:18)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에는 심히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그들이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절제의 은사는 필요한 경우에 제한된 기간만 허락되는 편이 더 많은데, 그들은 어떻게 감히 이 일반적인 소명을 자신 있게 일평생 벗어버리는가?

이런 완고한 행동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신 6:16, 마 4:7)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에 역행하는 것, 하나님께서 현재 주시는 은사를 우리의 것이 아닌 듯이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동이다. 그들은 감히 이런 짓을 할뿐만 아니라, 일종의 독신 생활을 굉장히 찬양하기 위해서 감히 결혼을 "오염"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제정하는 것을 자기의 존엄성에 배치된다고 생각하시지 않았으며(창 2:22),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선언하셨고(히 13:4),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혼인식에 가셔서 처음 기적으로써 경의를 표명하기까지 하셨는데(요 2:2,6-11), 이 모든 사실을 그들은 무시한다.

그들 자신의 생활이(그것을 그들은 "천사 같다"고 부름으로써 더할 나위 없는 파렴치함을 드러내지만) 독신 생활과 순결은 문제가 다르다는 훌륭한 증거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과 그 밖의 더 악하고 더 부끄러운 것들에2182) 비교함으로서 천사들에게 큰 해를 끼치고 있다. 또 사실 자체가 명백하게 반박하는 논증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자기를 과신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고 교만하게 행동할 때에 주께서 보통 내리시는 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사실이다. 그들의 숨은 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만 해도 기가 막힐 정도이므로 차마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우리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일체 맹세하지 말라는 것에는 반대할 여지가 없다. 한 가정의 가장이 처자를 버리고 다른 짐을 지겠다고 맹세하며, 공직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선출을 받고도 사사로운 시민이 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소명에 어긋나는 맹세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를 멸시하지 말라고 우리가 말한 것은 설명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물의 주인으로 만드셨고 우리가 만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예속시키셨다. 따라서 우리를 도와야 할 외부적인 사물에 우리 자신을 예속시켜 그 구속을 받는다면, 그런 일이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봉사가 되리라고 기대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여러 가지 일을 지킴으로써 자기를 얽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일에서 우리가 해방되고 면제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위험성을 피하려면 우리는 주께서 그리스도 교회 안에 제정하신 경륜에서2183) 결코 떠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4. 의도에 따라 맹세를 분류하다

이제 셋째 점을 말하겠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맹세하는 의도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속마음이지 겉모양이 아니므로 같은 일도(마음에 가진 목적이 변하는 데 따라) 어떤 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어떤 때는 심히 불쾌하게 한다. 술을 마시지 않는 행동 자체가 거룩한 것같이 생각해서 마시지 않기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미신이다. 어떤 나쁘지 않은 목적으로 맹세한다면 아무도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올바른 맹세가 될 수 있는 목적은 네 가지다.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 중의 두 가지는 과거에 관련시키고 다른 두 가지는 미래에 관련시키겠다.

과거에 속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나타내는 맹세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겠다는 맹세다. 전자는 감사의 실천이요, 후자는 회개의 실천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타향 생활에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야곱의 서원은(창 28:20-22) 처음 종류에 속한다. 고대에 경건한 왕이나 지도자들이 의로운 전쟁을 하려고 했을 때에, 승리를 얻는다면 화목제를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도 한 예가 된다. 또는 어떤 중대한 곤란이 있을 때에 주의 구원을 빌면서 이런 서원을 했다. 시편에서 서원을 말하는 구절들은(시 22:25, 56:12, 61:8, 116:14,18)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어떤 재난이나 어려운 병이나 그 밖의 위기에서 구출해 주신 때에는 이런 맹세가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엄숙한 표시로서 서원의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경건한 사람의 의무와 상반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잘 알려진 예를 하나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탐식의 죄로 어떤 비행을 저질렀을 때에 자기의 무절제를 징벌하기 위해서 얼마 동안 맛난 음식을 먹지 않기로 하는 것과, 자기를 더욱 엄격하게 얽어매기 위해서 맹세하는 것은 조금도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보편적인 법을 제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맹세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허락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그러므로 자유에 맡기기만 한다면 이런 맹세는 허락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5. 미래에 관한 맹세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래에 관한 맹세는 우리를 더욱 조심스럽게 만드는 것도 있고 우리의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하는 것도 있다.

가령 달리 나쁘지 않은 일에 관해서 자기가 직접 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할 수 없는 것을 그런 특수한 죄에 대한 경향성을 - 자기에게서 발견한다고 할 때, 맹세를 함으로써 그것을 일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결코 미련한 일이 아니다. 예컨대 사람이 어떤 몸의 장식이 위험하다고 생각나면서도 거기에 대한 욕심의 유혹을 느낄 때, 자기에게 굴레를 씌움으로써, 즉, 그것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제일 좋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경건에 필요한 의무를 잊어버리거나 게을리 할 때에는 맹세를 해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태만을 떨쳐버리는 것이 나쁜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이 두 가지 맹세가 일종의 초보적인 훈련이란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힘이 부족할 때에 보조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무지하고 미숙한 사람들에게는 유익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목적 중의 하나를 위한 맹세는, 특히 외형적인 일에 관한 것은 허락된다. 단, 그런 맹세도 하나님의 승인으로 지지를 받고 우리의 소명과 일치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한정되어야 한다.

6.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하여

이제 일반적으로 합당한 맹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는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맹세가 하나 있다. 그것은 세례 받을 때 하는 것이며 교리 문답과 성찬 참가로 확인된다. 성례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으로,2184) 이 계약에 의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영생을 주신다. 그리고 우리는 순종할 것을 주에게 약속한다. 이 맹세의 형식 또는 적어도 그 요점은, 사탄을 물리치고 몸을 바쳐 주를 섬기며 주의 거룩한 계명에 순종하고 우리의 육의 악한 욕망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롬 1:3,14 참조). 성경이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요구되는 이 맹세가 거룩하며 유익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며 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러한 복종을 지속할 수 없지만 그런 사실도 지장이 되지 않는다. 이 규정은 은혜의 언약에2185) 포함되어 있으며 이 언약에는 죄의 용서와 성결의 영이 함께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하는 약속에는 용서와 도움을 구하는 기원이 결합되어 있다.

개개의 맹세를 판정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표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 맹세의 성격을 틀림없이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거룩한 것이라고 단언한 맹세들도 매일 실행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나는 수효나 시기에 대해서는 감히 어떤 지시도 할 수 없으나, 나의 충고에 순종하는 사람이면 신중하고 일시적인 맹세만을 할 것이다. 빈번히 맹세를 너무 많이 하게 될 경우, 바로 그 반복으로 인해서 맹세의 종교적 성격이 전적으로 떨어지게 되며 맹세는 미신으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영구적인 맹세로 자기를 얽어매는 사람은 그 맹세를 실행하기 위해서 많은 곤란과 피곤을 느끼거나 오래 계속하는 맹세에 지쳐 맹세를 깨뜨리고자 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7. 사악한 맹세

그런데 과거 수백 년 동안 맹세에 대한 큰 미신 때문에 세상이 고통을 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배인 듯이2186) 금욕을 맹세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하겠다고 자기를 얽어매며 또 어떤 사람은 일정한 날에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맹세해서 그런 날이 다른 날보다 특별히 거룩한 것처럼 망상을 했다. 훨씬 더 유치한 일들을 아이가 아닌 어른들이 맹세했다. 거룩한 곳으로 기원 순례하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하여 종종 걸어가거나 반나체가 되어 여행하였는데 이처럼 피곤케 함으로써 더 많은 공로를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믿을 수 없는 열정으로 얼마 동안 추구한 이런 일들을 앞에서 말한 표준들에 비춰 검토한다면, 허무하고 무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불경건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육은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경배를 가장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거기에는 치명적이며 저주받은 생각들이 있다. 위선자들은 이런 미련한 짓을 하고 나서 특별한 의를 얻었다고 믿으며 경건 생활을 전적으로 외형적인 일에 두고 또 그런 일에는 그다지 주의를 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을 모두 멸시한다.

(수도사들의 맹세와 수도원 생활의 쇠퇴. 8-10)

8. 고대 교회의 수도원 생활

개개의 형식을 열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수도사들의 맹세는 교회의 공적 판단으로 인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매우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간단하게 논하겠다.2187)

우선, 현재의 수도원 제도를 역사가 오래된다는 이유로 옹호하는 사람이 있을 듯한데, 옛날의 수도원 생활은 훨씬 달랐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장 엄격하고 어려운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갔다. 역사가들이 전하는 것을 보면, 리쿠르구스의 법으로 살던 스파르타 사람들과 같이 수도사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했고 그들의 규칙은 더욱 엄격했다고 한다. 그들은 땅에서 자고, 마시는 것은 물뿐이었으며, 먹는 것은 빵과 야채와 풀뿌리였고, 맛있는 것이라곤 주로 기름과 콩이었다. 사치한 음식이나 육신의 쾌락을 일체 단절하였다. 만일 안식이 있는 증인들이-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바실리우스와 크리소스톰과2188) 같은 목격자들이-전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런 이야기는 과장된 것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런 예비적 훈련으로 수도사들은 더 큰 임무를 위해서 준비했다. 수도원 학교들은 성직자가 될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신학교였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사람들은 모두 수도원에서 양성된 후에 감독이 되었고 그밖에도 같은 시대의 여러 위대하고 특출한 인물들이 이 점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어거스틴도 그의 시대에 교회에 성직자들을 공급한 것은 대개 수도원이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가 카프라리아 섬의 수도사들에게 보낸 글에 이런 말이 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결심을 지켜 끝까지 지속하기를 나는 권합니다. 어머니인 교회가 여러분의 수고를 요구할 때에 너무 기쁘게 맡을 것도 아니요 나태한 마음으로 거절할 것도 아닙니다. 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한가한 생활 때문에 교회의 요구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어머니인 교회의 해산을 도우려는 선한 사람들이 없다면 여러분 자신도 태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신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는 사역에 관해서 말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만일 수도원을 버린 사람들을 성직자로 선택하게 되면 그들 자신의 몰락을 초래할 뿐 아니라 성직 전체에도 심한 치욕과 손상을 입히게 됩니다.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적당하고 우수한 사람들을 성직자로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피리를 잘 불지 못하는 사람이 훌륭한 음악가가2189) 된다고 하지 않는 한 나쁜 수도사가 훌륭한 성직자가 된다고 우리를 우롱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들에게 이런 파멸적인 교만을 조장하며 성직들이 이렇게 중대한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필요한 극기심이 있더라도 필요한 훈련이 없으면 좋은 수도사라도 좋은 성직자가 되지 못합니다."2190) 이런 구절들을 보면, 경건한 사람들은 보통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 규칙에 의해서 교회를 다스리는 준비를 하며 이 중대한 직책에 더 적합하고 유능하도록 훈련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수도사들의 대부분은 무식했으므로 그들이 모두 이 목적을 달성했다거나 이런 목적을 가졌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적격자들만이 선택되었다.

9. 수도원 생활에 대한 어거스틴의 묘사

어거스틴이 초기 수도원의 형태를 묘사한 중요한 곳은 둘이다. 카톨릭 교회의 품행에 관하여(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라는 책에서 그는 마니교주의자들의 중상모략에 반대하여 그 직책에 대한 거룩함을 방어하였으며, 수도사의 행위에 관하여(On the Work of Monks)라는 제목이 붙은 다른 책에서는 수도원을 타락시키기 시작한 일부 수도사들을 공격한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가르친 것을 요약하겠다. "그들은 이 세상의 유혹들을 멸시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공동생활을 하며, 기도와 독서와 토론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교만하게 뽐내거나 고집으로 무질서하거나 질투로 인하여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으며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모두 자기 손으로 먹을 것을 벌어들이면서 마음에 항상 하나님을 생각한다. '원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일해서 얻은 수익을 갖다 주고, 원감들은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관리하며 '아버지'라고 부르는 원장에게 보고한다.

이 아버지들은 그 행실이 거룩할 뿐 아니라 거룩한 교리와 모든 일에도 탁월하다. 그들은 '아들'들을 가르치되 교만한 태도가 없다. 큰 권위로 아들들에게 명령하며 아들들은 기꺼이 순종한다. 하루가 끝날 무렵, 아직 식사를 하기 전에 각각 자기 방을 나와 아버지 앞으로 모인다. 한 아버지 앞에 적어도 3,000명이 모인다"(이것은 주로 애굽과 동방에 대한 말이다). "그 다음에 건강에 충분할 정도로 음식을 먹으며, 비록 검소한 보통 음식일지라도 과식하지 않도록 자기를 억제한다. 이와 같이 고기와 포도주를 끊어 욕망을 길들일 뿐만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도 끊는다. 어떤 권위 있는 사람들은 이 둘째 종류의 음식은 '깨끗한 것'이라고 하여 항상 어리석고 부끄러운 변호를 하며, 고기와는 아주 구별된다는 이유로 그러한 음식에 대한 비열한 욕망을 묵인한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벌고 또 음식을 절제하기 때문에 남는 것이 많은데, 먹고도 남는 것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남은 것을 모을 때에도 주의하지만 나눠 줄 때에는 더욱 주의한다. 일부러 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나 남은 것은 결코 보관하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한다." 그 다음에 그는 밀라노와 다른 곳에서 실지로 본 내핍 생활을 회상하면서 말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무에게도 견딜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권하지 않으며 거절하는 짐을 지우지 않는다. 자기는 약해서 따라갈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정죄하는 일도 없다. 그들은 사랑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라는 말씀을(딛 1:15) 그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음식을 마치 부패한 것처럼 배척하지 않고 욕망을 억제하며 형제애를 유지하도록 정성껏 경계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라는 말씀을(고전 6:13) 잊지 않는다. 그러나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먹지 않는 강한 사람들이 많다. 흔한 음식, 사치하지 않은 음식으로 살고 싶다는 소원만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그들은 건강한 동안은 절제하지만, 병이 나서 건강상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음식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 없다.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많으나 포도주 때문에 더러워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허약한 형제들이나 포도주가 없이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인자하게 포도주를 준다. 허망한 미신 때문에 포도주를 거절하는 미련한 사람들에게는 더 거룩해지기 전에 더 허약해지지 않도록 형제와 같은 태도로 충고한다. 그들은 결심으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만 육체의 연습은 일시적이란 것을 알고 있다. 특히 형제우애를 지켜 음식과 말과 옷과 안색이 모두 사랑에 합치하도록 힘쓴다. 한 사랑으로 모이며 한 사랑을 위해서 노력한다. 사랑에 어긋나는 것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과 같이 악한 일로 생각한다. 사랑에 반대하는 사람은 축출하고 피한다. 사랑을 비웃는 자는 하루도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2191)

저 거룩한 분은 이런 말로 옛날의 수도원 생활을 그린 것 같다. 그의 말은 길었으나 여기에 넣기로 했다. 내가 여러 곳에서 같은 이야기를 수집한다면 아무리 간결하게 만들어도 이보다 길어지겠기 때문이다.

10. 수도원 생활의 초기와 후기를 비교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논거를 끝까지 추궁할 생각이 없다. 다만 고대 교회에는 어떤 종류의 수도사들이 있었으며, 그때의 수도원 생활은 어떤 것이었는가를 간단히 말하고자 할뿐이다. 그렇게 하면 현명한 독자들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현재 수도원 제도를 지지하는 자들이 역사가 장구하다고 주장하는 그 파렴치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하고 합당한 수도원 생활을 우리에게 그려 보인 어거스틴은 주의 말씀이 우리의 자유에 맡긴 일들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일체 배제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런 일들을 무엇보다도 엄격하게 요구한다. 옷의 빛깔이나 모양과 음식의 종류와 그 밖의 너절하고 무의미한 의식들에 관한 규정을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인정한다. 어거스틴은 수도사들이 남의 덕으로 놀고먹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짓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의 시대에 질서가 잘 잡힌 수도원에서는 이런 예가 없었다고 한다.2192) 현대의 수도사들은 무위도식하는 것을 그들의 성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명상 생활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우수하며 천사들에게 가까이 근접한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에게서 나태한 생활을 박탈한다면 과연 명상 생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끝으로, 어거스틴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한 경건 생활의 의무를 실천하며 돕는데 불과한 수도원 생활을 요구한다. 그가 형제적 사랑을 중요시하고 거의 유일한 법칙이라고 할 때, 그것은 소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만 뭉쳐서 교회 전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음모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것인가?2193) 그의 의도는 다른데 있다. 수도사들의 모범이 교회의 단결을 보존하는 데 어떤 광명을 보여 주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점에서 현대 수도원 생활의 성격은 너무도 다르며, 반대된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이보다 더 다른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대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꾸준히 열성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경건으로 만족하지 않고 어떤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조작해서는 그것을 명상하며 모든 사람들 보다 더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

(수도원의 완전성을 말함은 잘못이다. 11-14)

11. 수도원 생활은 상태가 완전한가?

만일 그들이 이것을 부정한다면, 나는 왜 그들은 그들의 계급에만 완전하다는 칭호를 붙여 위엄을 더하고 하나님의 모든 소명에서는 그 칭호를 빼앗느냐고 그들에게 묻겠다. 나는 그들의 궤변적인 답변을 안다.

수도원 생활은 그 자체 내에 완전성을 포함했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성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2194) 그들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선전을 할 때, 교육을 받지 못해 무지한 사람들을 올가미로 잡으려 할 때, 자기들의 특권을 주장하려 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자기들의 위신을 높이려고 할 때에 그들은 완전 상태에 있다고 자랑한다. 추궁을 당해서 이런 헛된 교만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그 때에는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했다는 등의 속임수를 쓴다. 아직 도달하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들보다 완전을 더욱 추구하는 상태에 있노라고 한다. 동시에 세상에서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것만이 천사적이고 완전하며 모든 허물이 제거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허위를 이용해서 그들은 심히 유리한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제심을 몇 권의 서적에 묻어 두었다. 이것은 용인할 수 없는 우롱이요 허위란 것을 어느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대할 때에, 그들은 수도원 생활을 완전성을 얻는 길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것을 돌리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겠다. 그들이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수도원 생활과 다른 생활 방식을 구별하는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경에 한 마디도 인정한 일이 없는 이런 제도에 이렇게 큰 영예를 돌리며, 하나님의 다른 모든 소명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고귀한 칭호로 장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생활에 비해서 무가치하다고 하는 것을 어느 누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친히 자신의 증거로서 찬양하신 모든 생활양식보다도 이 위조품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한 신성모독이 아닌가?

12.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생활 법칙은 모든 신자를 위한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을 그들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고 한 나의 말이 중상모략이라고 마음대로 주장해 보라.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자신을 훌륭하게 고발한다. 자기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보다 더 무거운 짐을 졌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복수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는 등의(마 5:33이하) 복음의 권고를 그들은 지키겠다고 약속하지만 일반 그리스도인들은 이 권고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근거를 어느 고대인에게서 찾으려는가? 이런 생각을 한 고대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한 마디도 빼지 않고 모두 순종해야 된다고 고대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선언했다. 이 훌륭한 해석가들이 그리스도께서는 권고하셨을 뿐이라고 상상하는 이 여러 가지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명령하셨다고2195) 고대인들은 서슴지 않고 꾸준히 가르쳤다.2196) 그러나 앞에서 우리는 그들의 해석이 가장 유해한 오류란 것을 말했으므로, 현대 수도원 생활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마땅히 배척해야 할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간단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 전체에 명령하신 공통된 생활법칙보다 더 완전한 원칙을 고안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2197) 이런 견해를 근거로 삼아 세운 것은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13. 마태복음 19장 21절의 의미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완전성에 대한 다른 논의를 끌어들이며 이것을 가장 강력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의를 물은 청년에게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21).

나는 그들이 그대로 행하든 행하지 않든, 우선은 행한다고 가정하겠다. 그들은 모든 소유를 버렸으므로 자기들은 완전하게 되었노라고 자랑한다. 만일 이것이 곧 완전성이라고 하면, 사람이 모든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바울의 가르침은(고전 13:3) 무슨 뜻인가? 사랑이 없으면 완전성은 그것을 가진 사람과 함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이것은 어떤 완전성인가? 여기서 그들은, 그것은 완전성의 유일한 행위가 아니라 최고의 행위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바울은 다시 높은 소리로 반대한다. 이런 재산 포기가 없어도 주저하지 않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골 3:14)라고 하였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 의견 충돌이 없으며, 그 한 편이 사람의 완전성은 모든 소유를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런 포기가 없어도 완전성은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 19:21)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말씀의 뜻을 아주 분명하게 알려면 누구를 상대로 하신 말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2198) 어떤 일을 해야만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한 청년이 묻는다(마 19:16, 눅 10:25 참조). 행위에 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마 19:17-19).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율법은 그대로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패가 없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여호와의 율법에 있는 옛 교훈과는 다른 어떤 생활 방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셨다. 또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의의 교훈이라고 확증하시며, 동시에 자신이 어떤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르쳐 백성에게 율법을 버리라고 선동하는 듯이 전하는 거짓말을 반박하신다.

어떤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청년에게는 헛된 자신감이 가득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율법의 교훈은 다 지켰노라고 대답한다(마 19:20). 그가 도달했노라고 자랑하는 그 경지에서 무한히 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의 자랑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그는 최고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것같이 율법에는 완전한 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율법 준수를 영원한 구원의 길이라고 부르는 사실만 보아도 이 점은 알 수 있다. 청년은 의를 완수했노라고 담대하게 대답했지만, 그 의를 향한 그의 전진이 얼마나 적은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단점을 찾아 낼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고 마음이 거기에 매여 있었다. 그가 자기의 숨은 상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상처를 건드리신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라고 하신다(마 19:21). 그가 자기 생각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면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떠나가지 않았을 것이다(마 19:22).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방해가 되는 것을 일체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염병같이 생각해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욕심 많은 부자 청년에게 그의 전재산을 버리라고 명령하신 것은 야심가에게 그의 모든 영예를 버리라고 하며, 방탕한 사람에게 그의 모든 쾌락을 버리라고 하고, 파렴치한 사람에게 그 정욕을 채우는 수단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고에 감동되지 않는 양심은 이런 방법으로 그 특유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깨닫도록 각성시켜야 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이 특별한 예에 일반적인 해석을 붙여서 마치 그리스도께서 재산 포기와 완전성을 동일시하신 것 같은 인상을 주려고 헛된 노력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지나친 자기만족에 빠진 청년에게 그의 상처를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며, 율법에 완전히 순종했노라는 그의 주장은 잘못이며 아직도 그는 완전한 순종에서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교부들이 이 구절을 오해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서 자발적으로 빈곤해진 체하는 기풍이 생겼고 땅에 속한 물건을 일체 버리고 벌거숭이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생각이 나타났다.2199) 그러나 선하고 온순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한 해석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뜻에 대해서 의문이 없으리라고 믿는다.

14. 수도원들의 분파주의

그러나 교부들에게는 후대에 생긴 것과 같은 완전 사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수도원 궤변가들이 이중의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조작한 사상이다. 수도원 생활을 세례에 비교하며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둘째 세례라고 선언하는 모독적인 교리는 교부 시대에는 아직 없었다. 교부들이 이 모독 행위를 진심으로 미워했다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거스틴은 고대 수도자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하며 그들은 완전히 사랑에 전념했다고 한다.2200) 그러나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랑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로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수도원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여러 가지 사실이 알려 준다. 왜, 특이한 직분을 가지며 개인적으로 성례를 집례 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자 사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연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시작한 비교를 계속해서 곧 끝낸다면 그들과 고대 수도사들과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고대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살았지만 따로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성례에 참가하며 성회에 출석하며 신자의 일원으로 처신했다. 현대 수도사들이 사적인 제단을 따로 설치한 것은 단결의 유대를 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 전체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 사이에 평화와 사랑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제정하신 일반 성직 제도를 멸시한다. 현재 있는 수도원은 모두가 분파주의자들의 소굴로서, 교회의 질서를 교란하며 신자들의 사회에서 분리되었다. 이 분리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종파명을 취했다. 바울이 극도로 저주한 일을(고전 1:12-13, 3:4) 그들은 파렴치하게 자랑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혹은 이 선생 혹은 저 선생을 자랑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눈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대신에 베네딕트파라고 자랑하며, 어떤 사람은 프란체스코파, 어떤 사람은 도미닉파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이런 이름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붙이고는 보통 그리스도인과 다른 체하니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불법이 아니고 무엇인가?2201)

(고대의 주장과 수도원의 주장은 서로 다르다 : 신약성경에 있는 과부와 여집사는 수녀가 아니었다. 15-19)

15. 수도사들의 행실이 타락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고대 수도사들과 현대 수도사들의 차이점은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수도사가 아닌 수도원 제도에 대해서 말했으며, 소수 사람들의 생활에 포함된 허물들이 아니라 수도원 생활 그 자체에서 분리할 수 없는 허물들에 대해서 말했다는 것을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의 품행에 큰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은 분명하다. 즉, 그들같이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계급도 없으며, 파쟁과 미움과 당파열과 음모가 맹렬한 곳도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욕을 억제해서 노골적인 추태를 부리지 않는 것을 성적 정결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정결한 생활을 하는 수도원이 몇 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홍등가가 아니라 정결한 성역이라고 할 만한 수도원은 열에 하나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 그들의 음식은 얼마나 검소한가? 그들은 우리에 있는 돼지들같이 뚱뚱하다. 내가 그들을 너무 혹평한다는 불평이 생기지 않도록 그만 말하겠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몇 가지 점에는 고발자로서 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사태를 아는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수도사들이 대단히 훌륭하게 정절을 지켰다고 증거하는 동시에 부랑자 같은 수도사들도 있었다고 불만을 말한다. 이 부랑자는 간교한 속임수로 단순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며 순교자들의 유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추한 장사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뼈를 순교자의 유골이라고 속여 팔고 다녔고, 그밖에도 비슷한 여러 가지 비행으로 수도사 계급의 수치를 샀다고 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덕을 닦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이, 수도원에서 타락한 자들보다 더 악한 인간도 본 일이 없다고 한다.2202) 그가 지금 살아서, 거의 모든 수도원에 이런 통탄할 여러 가지 죄악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 죄악들이 거의 수도원이 넘칠 정도로 가득한 것을 본다면 무엇이라고 말할까? 나는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아는 사실만을 말한다.

그러나 이 비난이 모든 수도사들에게 예외 없이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과 규율이 수도원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시행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아주 다르게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있었다. 그와 같이 현대 수도사들은 거룩했던 고대에 비하여 타락하기는 했으나 그 무리 가운데 소수의 선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악한 사람들의 큰 무리 가운데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 있다. 그들은 멸시를 받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괴롭힘을 당하며, 심지어는 아일랜드 격언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 사이에는 착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학대를 받는 때도 있다.2203)

16. 고대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의문

고대와 현대의 수도원 생활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목적을 달성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두건을 쓴 친구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고대 교회의 예를 도입하는 것은 거짓이며, 양자 사이에는 원숭이와 사람과 같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려고 한다.

동시에 어거스틴이 칭찬한 고대의 형태에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나는 아주 엄격한 규율을 외형적으로 실천한 그들에게 미신적인 점이 없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들에게는 지나친 외식과 집착된 열성 또한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2204) 모든 소유를 버리고 땅에 속한 모든 근심에서 떠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건한 가장이 모든 탐욕과 야심과 육의 다른 정욕을 버리고 일정한 직업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가정을 다스리는 일에 전심하는 편을 하나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신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은둔해서 명상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인류를 미워하는 것처럼 사막이나 광야로 도망하고 주께서 특별하게 명령하신 의무들을 저버리는 것은 온유한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다. 수도원 생활에 다른 악한 일이 없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교회에 무익하고 위험한 선례를 도입했다는 것은 확실히 작은 죄악이 아니었다.

17. 수도사들의 맹세, 특히 독신 생활에 대한 맹세

그러면 오늘날 수도사들을 더 훌륭한 계급에 가입시키는 맹세의 본질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들은 자기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거짓 경배 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데, 나는 위에서 말한 증거를 가지고 그들의 맹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2205)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이나 승인을 받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어떤 생활 방식이든지 생각해 내는데, 나는 그것은 경솔한 것이며 따라서 불법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옹호할 근거가 없으며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14:23)이기 때문이다.2206)

그뿐 아니라 현대 수도원 제도에 포함된 여러 가지 비뚤어지고 불경건한 예배 행위에 자기를 얽어맬 때, 나는 그들이 몸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악령에게 바친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독적인 의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를 더럽혔을 뿐이었는데,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은 자녀를 하나님이 아닌 마귀에게 제물로 바쳤다고(신 32:17, 시 106:37) 말하게 허락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두건이 붙은 옷과 무수한 미신으로 몸을 둘러싸는 수도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은 어떤 맹세를 하는가? 그들은 마치 결혼할 필요를 느끼지 않도록 미리 하나님에게서 해방의 언약을 받은 것같이 하나님께 영원한 순결을 약속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이 맹세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으므로(마 19:11-12) 이 특별한 은사가 우리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라. 육의 괴로움을 느낄 때에는 언제든지 주의 도움을 받으라. 주의 힘을 받을 때에만 그들은 저항할 수 있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그들에게 제시된 대책을 멸시하지 말라. 절제의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혼하라고 권하는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고전 7:9).

내가 "절제"라고 하는 것은 음행으로 더럽히지 않도록 몸을 순결하게 가질 뿐만 아니라 마음의 순결도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외형적인 방종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타오르는 정욕도 경계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께 몸을 완전히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절제의 맹세로 자기를 매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던 관습이라고 말한다.2207) 물론 나는 이 관습이 고대에 허락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가 완전무결해서 그 때에 한 일은 모두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후에 저 융통성이 없는 엄격주의가 잠입해서, 일단 맹세한 후에는 돌이킬 여지가 없게 되었다. 이 점은 키프리아누스가 분명히 표현했다. "처녀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했으면 겸손하고 정결하게 또 아무 거짓 없이 그 처지에 머물러 있어라. 이렇게 하면서 강하고 견고한 태도로 순결의 보상을 기다려라, 그러나 계속하고 싶지 않거나 계속할 수 없으면 죄를 짓고 불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결혼하는 것이 좋다."2208) 지금 그들은 절제의 맹세를 이런 공정한 방법으로 시정하려고 하는 사람을 온갖 비난으로 괴롭힌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대의 관습에서 훨씬 많이 떠났다. 맹세를 지킬 수 없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 대해서 완화책이나 사면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결혼해서 육의 무절제를 고치는 것은 음행으로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것보다 더욱 흉악한 죄라고 파렴치하게 선언한다.

18. 디모데전서 5장 12절에 있는 과부들의 경우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고집을 부리며 이런 맹세는 사도 시대에도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힘쓴다.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가 결혼한 과부들은 처음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라고(딤전 5:11-12) 바울이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대해서 헌신과 봉사를 약속한 과부들은 영구적인 독신 생활을 약속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후세 사람들과는 달리) 그 자체가 경건한 일이라고 생각해 모두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몸으로서 결혼의 멍에에 매이지 않아야만 맡은 일을 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2209) 그러나 맹세를 한 후에 재혼을 생각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그들은 정욕에 끌려 그리스도를 배반한다고 한 바울의 말은 당연하다(딤전 5:11). 그는 첨가하는 의미로, 교회에 약속한 일을 하지 않는 자들은 세례를 받을 때에 한 처음 약속까지 어기고 취소한다고 첨부한다(딤전 5:12). 처음 약속에는 각자 자기의 소명을 완수해야 된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혹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체면을 잊어버리고 예의에는 일체 관심도 없으며 온갖 방종과 불결에 빠지고 그 방탕한 생활은 전혀 기독교 신자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해석을 매우 기뻐한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하겠다. 그 때에 교회 일을 보도록 허락을 받은 과부들은 영구히 독신을 지키겠다는 조건을 수락했다. 그 후에 그들이 재혼했다면 우리는 바울이 말한 대로 그들이 타락했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염치를 버리고 기독교 신자답지 못한 무절제한 사람이 되었다(딤전 5:13)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 한 약속을 어겼을 뿐 아니라 경건한 여성의 위치에서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첫째, 그들이 독신 생활을 선언한 데에는 그들이 하려는 일과 결혼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생각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들의 소명이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독신을 서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둘째, 육의 가시 때문에 고통하거나 불결한 생활에 빠지는 것보다, 차라리 결혼을 선택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그들이 맹세로 매여 있었다는 생각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바울은 상식적으로 위험성이 없을 나이를 지정했다. 특히 한 번 결혼한 것으로 만족하고 이미 모범적인 절제 생활을 한 사람만을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독신을 서약하는 데 우리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그런 맹세를 하나님께 대한 경배라고 오해하며 절제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이 경솔하게 그런 맹세를 하기 때문이다.

19. 수녀들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바울의 이 구절을 수녀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합당한가? 여집사들을 임명한 목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거나 노래를 불러 하나님의 노염을 풀라는 것이 아니었고 여생을 무위도식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빈민들에 대한 교회의 사업을 도우며 자선 사업에 열의와 정성과 힘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독신을 서약한 것은, 결혼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어떤 경배를 드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독신으로 있는 편이 임무 수행을 위해서 더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들은 청년기의 초기나 성년기에 이런 맹세를 하고 후에 자기들이 뛰어내린 벼랑이 무엇인지를 뒤늦게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든 위험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때에 거룩하고도 안전한 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반대자들의 두 가지 논점을 너무 추궁하지 않기 위해서, 60세 미만의 여성의 독신 서약을 받는 것은 불법이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사도는 60세가 된 부인들만을 허락하며(딤전 5:9), 젊은 부인들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라고 권고한다(딤전 5:14). 그러므로 처음에는 12세에, 다음에는 20세에, 후에는 30세에 서약을 허락하는 것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 어리고 경험이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소녀들에게 혹은 속임수로, 혹은 폭력과 위협으로 이 저주의 굴레를2210) 씌우는 때도 있으니 이것은 더욱 허용할 수 없다.

나는 나머지 두 맹세는2211) 공격하지 않고자 한다. 단지 한 마디만 말하겠다. 이 맹세들의 현상을 보면 여러 가지 미신이 붙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맹세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우롱하게 되도록 맹세 자체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사소한 점까지 일일이 혹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반박으로 만족하겠다.2212)

(불법적이고 미신적인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 20-21)

20. 허용할 수 없는 맹세도 지켜야 하는가?

어떤 종류의 맹세가 합당하며 하나님이 받으시는가를 나는 분명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무지하고 양심이 나약한 사람들은 어떤 맹세를 싫어하거나 또는 옳지 않다고 보면서도 맹세한 의무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때가 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어기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죄가 더 많지 않은가 해서 극심한 불안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여기서 도와주어야 한다.

모든 불안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나는 불법적이거나 부적절한 생각에서 나온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대해서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 사이의 계약에 있어서 계약의 상대자가 우리에게 대해 구속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약속만이 우리를 구속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특히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우리의 양심의 증거가 있을 때에 한해서 바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한 원칙은 변함이 없다. 바울이 한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가납된다고 확신하는 믿음은 모든 천한 일의 근본이며 따라서 만일 의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 일은 죄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이런 확신이 없이는 어떤 일도 시도할 수 없다면 혹 무지해서 어떤 일을 경솔하게 시작했을 경우 그 과오를 깨달았는데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솔하게 한 맹세는 이런 종류에 속하므로 아무 구속력이 없을 뿐 아니라 반드시 철회해야 한다. 이미 증명한 바와2213) 같이 그런 맹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가증스러운 것이다. 불필요한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는 것은 공연한 짓이다. 내가 보기에는, 경건한 양심을 안정시키고 모든 불만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는 이 한 가지 증명만으로도 넉넉할 것이다. 즉, 순결한 원천에서 나오지 않고 합당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행위는 모두 하나님께서 부인하시며 또 그런 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금하실 뿐만 아니라 계속하는 것도 금하신다. 따라서 오류와 미신에서 생긴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도 없으며 우리도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21. 수도원 맹세를 파기하는 문제

이 설명을 이해하는 사람은 수도원을 떠나 존경할 만한 생활로 돌아선 사람들을 지지하며 악인들의 훼방을 물리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수도원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파약과 거짓 맹세의 중죄를 고발하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과 교회에 그들을 매는 소위 "끊을 수 없는" 유대를 끊었다는 것이다.2214) 그러나 나는 사람이 확인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취소하실 때에는 거기에 아무런 유대도 없다고 주장한다. 둘째,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오류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그들이 매여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지금은 진리를 알고 광명을 얻었으니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율법에 매여 있던 우리를 그 저주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면(갈 3:13), 사탄이 속이는 그물에 불과한 저 외형적인 족쇄로부터는 더욱 우리를 구출할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복음의 광명으로 조명하시는 사람들을 미신으로 짊어지게 된 모든 굴레에서도 풀어 주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풀려난 사람들이 처음부터 독신 생활에 부적당한 사람들이었다면 변호할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며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킬 수 없는 맹세가 반드시 그 영혼을 멸망에 빠뜨린다면, 사람은 그런 맹세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제의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마 19:11-12) 절제의 맹세를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설명했다.2215)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이 말한다. 모든 수도원에 불결한 일이 만연하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안다. 개중에는 비교적 단정하고 점잖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순결한 것은 아니다. 불결의 악은, 억압하고 제한하더라도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본성을 거슬러 자기들에게 없는 것을 탐내며, 주께서 그들의 힘에 미치는 범위 내에 두신 구제책을 멸시하고, 무절제의 병을 그들이 극복할 수 있다고 완고한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만을 무서운 실례로 처벌하신다. 그들을 완고하다고 했는데, 결혼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받고 그 대책으로 주께서 결혼을 허락하심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멸시하며 또 결혼을 멸시하겠다는 맹세로 자기를 묶는 것은 완고하다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 14 장  성례2216)

("성례"란 말의 뜻 :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 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다른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의 시행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성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간단하고도 적절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식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식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식으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 정의를 택하든지 간에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와 뜻은 차이가 없다.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라고 가르친다.2217)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내용을 더 분명하게 잘 설명한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너무 간단해서 애매모호한 곳이 있다. 교육이 부족한 사람은 많이 속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말을 더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더 충실한 표현을 만들기로 했다.

2. "성례"라는 말

성례란 말을 고대인들이 이런 뜻으로 사용한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번역자가 희랍어의 musthvrion(뮈스테리온, 비밀, 신비)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에, 특히 신성한 사물을 의미할 때에는 반드시 "성례"라고 번역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 1:9)라고 되어 있다. 또,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엡 3:2-3)이라고도 되어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골 1:26-27)고 되어 있다. 디모데 전서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라고 되어 있다. 그는 "비밀(secret)"이란 말을 쓰면 위대한 일을 낮추게 되는 듯해서 그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을 "sacrament"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교부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 라틴 사람들이 "sacraments"라고 한 것을 헬라 사람들은 "mysteries"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말의 뜻이 꼭 같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들에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디선가 이 점을 말한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sacraments'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2218)

3. 말씀과 표징

그래서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 제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며 말하자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붙들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 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신체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2219)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은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나 믿음이 없이 속삭이는 것, 소리에 불과한 것, 마술사의 주문같이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을 성별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아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 행위였다. 그들은 신부가 축성경(the formula of consecration)을 중얼거리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뜻도 몰라도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교리에 관한 것을 조금도 얻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라틴어로 말했다. 후케는 미신이 팽창해서, 그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쉰 소리로 속삭여야만 축성이 잘된다고 믿게 되었다.

성례의 말씀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훨씬 다르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이 되리라, 말씀의 힘이 아니면, 물이 몸에 닿아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그 위대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말씀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말씀 자체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뒤에 남는 힘은 서로 다르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사도는 말한다(롬 10:8). 따라서 사도행전에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고 하였으며(행 15:9), 사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3:21).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이 믿음의 말씀에 의해서 세례가 성별되고, 깨끗케 하는 힘이 세례에 있게 되는 것임이 확실하다."2220)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우리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 사도들이 따라서 행한 일 그리고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가 지킨 일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어떤 표징을 주실 때에 그 표징과 교훈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교훈이 없으면 우리의 감각 기관은 단순히 표징만을 볼뿐이어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이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단순하지 않은 미묘한 내용이 없는 딜레마로 우리와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안다면 우리는 그 뒤에 오는 성례에서 새로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알지 못한다면(성례의 힘은 전적으로 그 말씀에 있으므로) 성례전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정부 문서나 그 밖의 공문서에 찍는 인장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다. 반대자들은 이 비교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 자신이 분명히 할례를 "인"2221)이라고(롬 4:11) 부르기 때문이다.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하는 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성례는 이 약속에 인을 친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약속들 자체를 보면 모두 서로 확인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분명한 것일수록 믿음을 지탱하기에 적당하다.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 이 점에서 성례가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그것이 약속을 우리 앞에 사생화를 그리듯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성례와 문서에 찍는 인장은 다르다고 하는 반대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2222) 두 가지가 다 이 세상 물질로 된 것이므로, 성례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인을 찍어 확인하기에 불충분하며 인장은 보통 무상한 일에 관한 군주들의 법령에 찍어 확인하는 것이라고 반대론은 구별한다. 그러나 신자는 눈으로 성례를 볼 때에 눈에 보이는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명상에 의해서(내가 비유적으로 암시한) 여러 단계를 밟아 성례 안에 감취어 있는 숭고한 신비를 향해서 올라간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주께서는 그의 약속을 "언약"(창 6:18, 9 :9, 17:2)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약의 "표"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비유를 얻을 수 있겠다. 돼지를 잡을 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잡는 행위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돼지는 아무 내면적 또는 고상한 신비가 없이 잡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손을 서로 잡게 되는 때가 많은데, 바른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해서 말로 발표한 언약일지라도 말이 선행할 때에는 이런 언약의 표징에 의해서 그 언약의 법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우리가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선생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미련한 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2223)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2224)

성례를 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빠른 비유를 쓸 수도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에는 기둥으로 받친 것같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 또는 성례를 거울에 비교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2225)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에 의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지이다. 7-13)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옳지 못한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성례가 악인들에게도 제공되지만 악인들은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한 정죄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똑같은 논법을 쓴다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서도 그것을 배척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를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복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문서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공문서에 찍힌 인장이 군주의 것이며 그의 뜻을 확증하는2226) 것인 줄 알면서도 진짜 인장을 우롱하며 비웃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주하기까지 한다. 내가 위에서 한 비교는 이 두 가지에 다 해당되므로 더욱 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 깨닫는다. 마치,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며 구원을 얻으라고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뜻을 전달하면서 말씀의 효력이 성례에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2227)

따라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성례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성례에 포함시킨다. 예컨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2-13). 그러나 그가 성례를 악용하는데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것들을 허무하고 차디찬 그림자와 다름없이 간주한다. 바울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에서 역사하는 것을 불경건하고 패악한 위선자들이 사악하게 아무리 억압하며 애매모호하게 하고 감추려 할지라도 성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어디서나 또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참으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영 또한 성례가 약속하는 것을 여전히 계시하며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옳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인장과 같다고 단정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항상 사용하는 논리는 너무나도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이 이미 좋은 것이라면 더 좋아질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또 꾸준히 믿어 동요 않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228) 그들은 주께서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눅 17:5) 좋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믿음을 가진 듯이 확신에 찬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그런 믿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막 9:24)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그들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었고 불신을 제거하면 더욱 좋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양심이 어떤 논법보다도 그들을 더 잘 논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인임을 자백한다면(좋든 싫든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들 자신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빌립이 내시에게 그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행 8:37) 말한다. 믿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세례가 믿음을 굳게 할 여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은 자기의 마음 한쪽 구석에 믿음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어떤 명사의 말에 자기는 배우면서 늙었다고 했다.2229)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아무 진전 없이 늙는다면 우리는 심히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의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항상 성장해서 마침내는 완전히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엡 4:13). 그러므로 사도행전 8장 37절의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열렬한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무슨 일을 성의와 진심으로 하는 것을 "마음을 온전히 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시 119:10), "내가‥‥‥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1, 138:1) 등등이다. 그러나 거짓되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에는 보통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2230)라고 책망하신다(시 12:2).

여기서 그들은, 만일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성령을 주신 것은 헛수고였으며 성령이야말로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이 있으며 또 그 일을 한다고 첨가하여 말한다. 나는 물론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고유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의 보고를 알게 되고, 성령의 광명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감각이 둔해서 영적인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 말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한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2231)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관해서는(이미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2232) 내가 이 특수 임무를 성례에 돌리는 것을 독자들은 생각해 내기를 바란다.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해서 그 자체만으로서 믿음을 증진하거나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2233)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해서,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눈은 햇빛에 의해 보게 되고 귀는 음성의 소리에 의해 듣게 되지만 눈에 빛이 비칠 수 있는 예리한 시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눈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귀가 듣기에 적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코 소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빛을 보는 데 있어서 시력이 하는 일과 우리의 귀가 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 청력이 하는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는 일, 즉, 믿음을 잉태하고 유지하며 자라게 하고 또 확립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가정하자(이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두 가지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즉, 성령의 힘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며, 이 교사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차이는 오직 하나뿐이다. 즉,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이렇게 볼 때에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는 반대론도 곧 사라지게 된다. 믿음을 증진시키거나 강화하는 일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면, 믿음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께 부당한 처사가 된다는 반대론이 있다. 우리는 믿음을 강화 증진시키는 일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 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표현이 애매모호하다고 한다면 아주 명백하게 해 줄 비유를 첨가하겠다. 어떤 일을 하도록 어떤 사람을 말로 설득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의 의견에 기울어지게 하며, 어느 정도 우리의 충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만한 모든 논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 편에 우리의 이론의 가치를 헤아릴 만한 예리한 판단력이 없다면 우리는 헛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또 그에게 배우겠다는 마음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도가 없거나 우리의 성실과 지혜를 신용해서 우리의 의견을 채용할 만한 경향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이론으로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권위를 멸시하는 곳에서는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설득도 별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좋은 특성이 모두 있을 때 우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곧 순종하게 되며 비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신다. 우리들이 귀에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당연히 순종해야 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에 전달한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게 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굳게 서며 더욱 강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 확인을 새김으로써 효력이 나타나게 하실 때이다. 동시에, 빛들의 아버지께서(약 1:17) 태양 광선으로 우리 몸의 눈을 비추시는 것같이 성례를 통해서 일종의 중간적인 광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 성질이 외적인 그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말씀을 "씨"라고 부르셨다(마 13:3-23, 눅 8:5-15). 황폐해지고 버려두었던 땅에 씨가 떨어지면 죽어 버리지만 잘 가꾼 땅에 심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고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면 모래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씨에서 곡식이 나서 자라며 결실하는 것같이 씨와 말씀에 같은 생각이 적용된다면, 말씀에서 믿음이 생기고 또 그것이 자라며 완성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여러 구절에서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가를(고전 2: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는 성령의 일꾼으로서 일하노라고 자랑한다(고후 3:6). 마치 불가분의 유대로 성령의 능력이 그의 전도에 결합되어 사람의 마음을 내면적으로 조명하시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사역자를 농부에 비교하는데, 이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말씀하려고 함이다. 농부들은 땅을 애써 가꾼 다음에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한다(고전 3:6-9).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심은 씨가 하늘의 복으로 자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구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창 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음을 기억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엡 2:11). 여기서 사도는 약속의 표를2234)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환유법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에 빵과 또 다른 음식을 주시며 태양으로 세계를 비추시고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 그러나 빵과 해와 불도 주께서 이런 도구들로써 그의 복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다. 성례의 한 가지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앞에 놓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아니 우리에게 약속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대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유용하시는 일꾼이다. 피조물을 우리의 유익의 원인이라고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성례와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향해서 비약해야 한다.

13. sacramentum의 단어

어떤 사람들은 sacramentum이란 말에서 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이름난 문필가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했지만 "표징"에 해당하는 뜻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 말은 군인이 입대할 때에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병들이 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며2235) 군대 복무를 고백한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2236) 그들은 다른 비교를 덧붙임으로써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로마 사람은 토가(겉옷의 일종)를 입고 희랍 사람은 팔리움(겉옷의 일종)을 입었으며 로마에서 각 계급에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같이(원로원 계급을 기사 계급과 구별한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 기사 계급을 평민과 구별한 반지), 우리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2237)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faith)"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유추법을 따른 것이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맨툼(sacramentum)"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대인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즉, 주께서는 "사크라맨타(sacramentum의 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16, 겔 37:27).

그러나 나는 이런 자세한 점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분명한 논거로써, 고대인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오직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2238) 우리는 반대자들이 외적인 표징에서 이끌어 낸 비교들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점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이 둘째 점에 적용한다면 이 비교들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성례를 제정하신 용도와 목적대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며 우리의 교리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이 신비들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성례 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14-17)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례의 힘을 약화하며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그들과는 반대로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힘을 성례에 주셨다는 것은 성경의 어디를 읽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는다.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찾으라고 하며 하나님에게서 그들을 점점 분리시켜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허망한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율법의 성례는(즉, 현재 그리스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 우리가 죽을죄로 장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의로우며 은혜를 준다고 궤변가들의 각 파는 이구동성으로 가르친다.2239) 이런 생각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유해한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과거 수백 년 동안 넓은 지역에 이 생각이 만연해서 교회에 큰 손실을 입혔다. 확실히 그것은 마귀적인 생각이다. 믿음과 관계없는 의를 약속함으로써 이 관념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둘째, 성례를 의의 원인이라고 함으로써2240) 원래 땅에 붙고자 하는 경향이 심한 사람의 가련한 마음을 이 미신에 옭아매어,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을 믿고 안심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 두 가지에 대한 긴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도록 우리가 그 악한 것들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약속과의 관련이 없이는 성례에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약속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제시하는 동시에 불신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고 사람이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것 이상의 것을 성례를 통해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마치 성례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처럼,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의 보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으며, 그것은 성례라는 인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복음 선포에 의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표징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보이는 표징이 있어도 진정한 성화가 없을 수 있다고2241)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그의 다른 글에도 있는 것처럼,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 입고 성례를 받는 데까지 이를 때도 있으며 성화의 생활에까지 이르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 상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공통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둘째 상태는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다.2242)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어거스틴이 자주 말한 것과 같이 성례와 성례의 본체와의 구별이 생긴다. 이 구별의 의미는 진상과 외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성례는 그 의미하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고2243) 한 것은 두 가지가 분리되는 데 대해서 말한 것이다. 또 유대 사람들에게 대해서 쓴 것도 같은 의미에서이다. "성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나 은혜 곧 성례의 힘은 공통적이 아니다. 그와 같이 중생의 씻음 곧 세례는(딛 3:5) 지금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 머리와 함께 중생하게 되는 은혜 자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2244)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주의 만찬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성단에서 받아먹고 죽으며 또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의 떡 조각이 유다에게 독이 된 것은 고가 악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선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2245) 조금 뒤에, "이 본체로 이루어지는 성례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성례가 어떤 곳에서는 매일 거행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먹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는다. 성례의 본체는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할뿐 아무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또 첨부한다. "먹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즉, 보이는 성례가 아니라 성례의 힘에 도달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내적으로 먹는 사람이지 외적으로 먹는 사람이 아니다. 이로 씹는 사람이 아닌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2246) 이점에 대해서는 각처에서 받는 사람의 무자격에 의해서 성례가 그 실체에서 분리되며 허망하고 무용한 형태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눠 가짐으로써 우리는 유익을 얻으며 따라서 그만큼 성례에서 유익을 얻는 것이다.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만일 이것이 간단해서 그 뜻이 다소 애매모호하다면 나는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와 구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성례를 의와 구원의 원인이라고 유식한 주장을 하는 피터 롬바르드의 오류는 더욱 용인할 수 없다.2247) 우리는 사람이 교묘하게 만들어 내는 모든 원인을 버리고 이 한 가지 원인만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성례가 제시하는 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그렇다면 악인들은 배은망덕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쓸모없게 만들고 폐기하느냐고 혹 물을 것이다. 내 말은 성례의 힘과 진실성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와 선택에 의존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여전히 견고하며 그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제시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의해서 성별된 상징이 실지로 그 이름같이 되며, 그 자체의 힘을 유지하는 것을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유익을 받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몇 마디로 잘 해결했다. "만일 우리가 육적으로 받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영적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렇지 못하다."2248)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에서 어거스틴이 성례를 그 진상에서 분리한다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할 때에도 양자를 동시에 구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적인 표징에 너무 긴밀히 매달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처럼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과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2249) 그는 여기서 피해야 할 두 가지 과오를 지적한다. 첫째 과오는, 표징을 받을 때 그것을 주신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태도를 취하며, 우리의 반대로 그 비밀한 뜻을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킴으로써 표징이 우리에게 대해서 전혀 결실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과오는, 우리의 마음을 보이는 표징보다 더 높이 비약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표징에서 오는 것 인양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익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게 만드신다. 외적인 표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유인해 간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유익을 얻지만, 표징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면 그 가치는 부끄럽게도 완전히 말살되는 것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액체들은 그것을 받을 그릇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부어도 흘러 없어질 뿐이다. 그릇 밖에는 온통 묻을지언정 그릇 속은 텅 빌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대인들이 성례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조금 과장해서 기록한 것에 있어서 비슷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성례에는 숨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난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2250)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자나 언약의 비준을 전하는 담보물이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성례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사자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지 않고, 다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성례는 담보물과 표이므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 확증한다. 성례가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특히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영의 능력의 임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집행할 때에 결실이 없고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표징으로 약속하며 표현하시는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신다. 표징은 그 창시자이신 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자체의 효력을 가졌다. 여기서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께서는(그들이 말하는) 그의 고유한 능력으로 행동하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을 외적인 상징들에 맡겨 버리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든, 그 도구가 그의 최초의 활동에 아무런 손상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성례에 대한 이 교리가 가르쳐질 때에 성례의 위엄이 높이 칭찬을 받고 그 효과가 분명하게 알려지며 그 가치가 풍성하게 선포된다. 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용을 지켜서 성례에 돌리지 않을 것을 돌리거나 성례에 속한 것을 빼앗는 일이 없게 된다. 동시에 칭의의 원인과 성령의 능력이 그릇이나 수레2251) 안에 있듯이 물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저 그릇된 교리가 제거되고, 어떤 사람들이 간과하는2252) 저 최고의 능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즉, 목사가 설명하며 외적인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취하시며 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이 점을 현명하게 경고한다. "어떻게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성결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성례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신다. 또한 거기에는 보이는 성례의 모든 결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한 성화가 없이는 이 보이는 성례들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2253)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18-20)

18. 광의의 성례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 성격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어떤 때에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으로 나타내신다.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창 2:9, 3: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창 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생명나무는 나무였고 무지개는 무지개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가 새겨진 후에는 새로운 형태가 생겼고 전과 다른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허망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도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 곧 땅이 홍수로 인하여 멸망치는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읽는다. 그러므로 어떤 이론가가 우리의 믿음의 단순성을 우롱하려고 저렇게 많은 색깔은 맞은편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자연의 주인이며 주재자이신 하나님 곧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도록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우매함을 우리는 비웃는다.2254) 하나님께서 해와 별과 땅과 돌에 이런 기념의 뜻을 인치신다면 이 모든 자연물은 우리에게 성물이 될 것이다. 은 덩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은 덩어리는 자연 상태에 있을 뿐이지만 관인이 찍힐 때에 은전이 되며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건에 말씀으로 표를 하셔서 단순한 자연물이던 것이 성물이 되게 하실 수는 없겠는가?

둘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연기 나는 풀무 속에 있는 빛을 보이셨다(창 15:17).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을 때, 양털은 이슬에 젖게 하시고 땅은 마르게 하시며 또 그와 반대로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양털은 마르게 하셨다(삿 6:37-40). 히스기야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일영표에 있는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9-11, 사 38:8). 이런 일들은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므로 역시 성례였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연합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2255)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맨 처음에 종들을 위해서 경건을 위한 일정한 행사를 제정하셨다. 그 후에 사탄이 이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다.2256) 그래서 이방인들이 여러 가지 비밀 종교에 입교시키는 의식과 그 밖의 타락한 의식들이 생겼다. 이런 의식들은 오류와 미신이 가득한 것이었지만 사람이 종교를 고백할 때에는 외형적인 표징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런 의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모든 표징이 나타내야 할 진리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회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성한 상징들 곧 진정한 경건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의 그 근본 목적에서 어긋나지 않는 상징들을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성한 상징들은 무지개나 나무와 같이 단순한 표징이 아닌 의식이다. 혹은 여기서 주어진 표징은 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 표징들은, 우리가 위에서2257) 주께서 오는 은혜와 구원의 증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쪽에는 고백의 표,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2258)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상호 협약이 개재하기 때문이다. 즉, 이 의식들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례를 의식이라고 부르며,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키신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경륜에 따라 성례는 각 시대에 맞도록 다양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창 17: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결례와(레 11-15장) 희생과 다른 의식들이(레 1-10장) 첨가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마 28:19, 26:26-28). 나는 교회 전체가 쓰도록 제정된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목사들을 취임시킬 때2259) 안수하는 것을 성례라고 부르는데 반대하지는 않으나 또한 그것을 정규적인 성례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보통 성례라고 생각하는 다른 행사들의 지위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것이다.2260)

그러나 저 고대의 성례들은 현대의 성례전들과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을 잡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또는 형상으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인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2261)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후 1:20).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2262) 산상에서 모세 앞에 제시된 율법대로의 회막과 예배의 하늘 모형(출 25:9,40, 25:30)도 여기에 속한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고대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동안에 어렴풋이 그를 예시했고, 현재의 성례는 이미 임재 하셨던 그리스도를 확증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현을 예시한다. 21-26)

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일들은 하나씩 설명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즉,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끊어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그뿐 아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이 복된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그들에게 회상시키며 확인하는 표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창 22:18), 그 후손에게서 유대인들도 복을 얻으리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후손은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였고(갈 3:16),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아담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할례와 아브라함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바울이 가르친 일이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즉, 할례는 믿음의 의를 알리는 한 표징이었다(롬 4:11). 바꿔 말하면, 그 후손을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시는 일종의 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적당한 기회에 할례와 세례2263)를 더 자세하게 비교하겠다.

세례와 결례는 그들의 본성이 자신의 부정과 추악함과 오염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추악을 씻어 없애 버릴 다른 씻음을 약속했다(히 9:10,14). 이 씻음은 그리스도였다. 우리는 그의 피로 씻음을 받으며(요일 1:7, 계 1:5), 하나님 앞에 그의 순결하심을 가지고 가서 우리의 추악함을 덮는다.

희생은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2264)에 대해서 어떤 보속을 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있어서 피를 흘리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충분한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보속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였다(히 4:14, 5:5, 9:11). 그는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그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한 인류의 불순종을 그의 순종으로 말소하셨다(롬 5:19).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성례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더욱 완전하게 계시 될수록 성례는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계시하신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얻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은 씻음을, 피는 보속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말과 같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 곧 씻으며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도 이 일을 증거하신다. 참으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물과 피는 깨끗하게 하며 구속하는 증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성령은 이런 증거를 우리가 확신하게 만드신다. 이 숭고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온 때에(요 19:34)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우리의 성례의 원천이 라고 불렀다.2265)

우리는 아직도 이 점을 좀더 자세하게 논해야 하겠다. 확실히 성령의 은혜도시대의 전후를 비교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한복음 7장에서(요 7:8-9,38-39) 추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 하에서는 그림자가 있었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말도(골 2:17)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도의 의도는 고대에 있었던 은혜의 증거에서 효력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세례와 성만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려고 하시는 것과 같이 고대에는 은혜의 증거로 족장들에게 증명하려고 하셨다. 바울의 의도는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것을 찬양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율법 하의 의식들이 폐지된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러나 우리는 옛 율법과 새 율법의 성례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스콜라 학파의 교리를 완전히 배척해야 한다.(이 교리는 내친 김에 언급할 뿐이지만) 그들은 옛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할 뿐이고 새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의 실재로서2266) 준다는 듯이 구별한다. 참으로 사도는 조상들이 우리와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고 가르치며, 그 식물은 그리스도라고 설명했을 때에(고전 10:3) 신약의 성례에 대한 것과 똑같이 구약의 성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통을 계시한 것을 누가 감히 헛된 표징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또 바울이 다룬 일의 성격상 그의 주장은 분명히 우리 편을 지지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빈약한 지식과 기독교의 무의미한 칭호와 외적인 표를 믿고 감히 하나님의 판단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이신 엄격한 태도를 예를 들어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죄악에 빠진다면 그들이 받은 벌이 우리에게도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각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비교가 적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짓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가 금한 은혜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다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성례에서 그 은혜가 같다고 했다. 영혼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특권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했다. 또 그가 다른 곳에서 믿음의 의를 인치는 인이라고 부른 할례에(롬 4:11) 돌린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우리의 세례에 돌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현재 성례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받았다. 즉, 그리스도와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례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힘을 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느꼈다. 즉, 성례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인치는 도장이었으며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히브리서를 잘 해석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에 의해서는 죄는 속죄되지 않으며 그 옛 그림자들은 의를 위해서 중요하지 않았다고(히 10:1) 하는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거기서 논의되는 비교를 무시하고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는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점만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의식들은 아무 실속 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고만 생각했다.2267)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율법의 의식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효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그들은 항의하는 방법으로, 바울의 글에서 "의문에 속한 할례"에(롬 2:29) 관한 말을 인용할 것이다. 의문(儀文)에 속한 할례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하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언명은 할례를 세례보다 훨씬 낮게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롬 2:25- 29, 갈 5:6, 6:15, 고전 7:19 참조).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은 말을 세례에 대해서 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바울 자신이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왔을 때 받은 외면적인 씻음은, 만일 마음까지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되지 않고 또 끝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전혀 무시하신다고 말했다(고전 10:5 참조). 그 다음에 베드로는, 세례의 실상은 외면적인 씻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양심의 증거에 있다고 했다(벧전 3:21).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비교했을 때 손으로 행한 할례를 완전히 멸시하는 것 같다고(골 2:11-12)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할례의 위엄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미 폐지된 할례를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는 옛 그림자를 버리고 실체 안에 굳게 서 있으라고 신자들에게 충고한다. 이 교사들은 당신에게 몸에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이미 몸과 영혼에 영적으로 할례를 받았으므로 당신은 실체의 계시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림자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는 실체를 가졌다고 해서 그 모형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조상들 중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이 있었지만 외면적인 할례가 그들에게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반대를 막기 위해서,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즉시 부연하여 말한다(골 2:12). 이것은 고대인들을 위해서 할례가 한 일을 지금은 세례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곧 세례에 대한 부당한 처사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그러나 그 다음에 있는 것, 즉, 유대인들의 의식은 모두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요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것은(골 2:17)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최근에 언급한 일이 있다.2268) 참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히브리서의 여러 장에서 논의된 문제들이다. 동물의 피는 양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하고(히 9:12이하),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지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였으며(히 8:4-5, 10:1),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의식들에서 완전한 것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했으며(히 7:19, 9:9, 10:1), 그 외에도 이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나는 이미 간단하게 말한 것을2269) 반복한다. 즉, 바울이 의식들을 그림자라고 한 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식들의 성취가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때까지 보류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는, 이것은 효력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표시하는 방법에 대한 말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권능과 임재를 신자들의 마음속에 느끼게 만드셨지만,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까지는 모든 표징이 그가 계시지 않은 것같이 그를 예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이 모든 구절에서 바울은 단순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의식만으로 경건이 성립된다고 가르친 거짓 사도들을 상대로 바울은 싸우며,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의식들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만을 말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목적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들은 그 진정한 본연의 의미로 인정되지 않고 사악하고 거짓된 해석으로 왜곡되었다. 그 합당한 사용이 아니라 미신적인 악용이 문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의식은 모든 힘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의미하는 본체가 제거될 때에는 표징이 가진 것도 일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만나를 몸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하실 때에 자기의 말씀을 그들의 유치한 생각에 맞추셔서, 영혼에 영생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그분께서 더 좋은 음식을 나눠준다고 말씀하셨다(요 6:27).

그러나 반대론에 대한 더 명확한 대답을 원한다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있는 모든 화려한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지향하지 않는 한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둘째, 그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그가 드디어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의식들은 성취되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의식들이 폐지된 것은 그림자가 태양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이 이상의 논의는 세례와 할례를 비교하기로 결정한 곳으로2270) 미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간단히 말할 뿐이다.

26. 유사점과 차이점 : 어거스틴의 구별

현대의 가련한 궤변가들은 우리의 표징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글에서 성례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읽고 속은 것 같다. 어거스틴의 발언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옛 율법의 성례들은 구주를 약속했을 뿐이나 우리의 성례는 구원을 준다." 여기 있는 표현과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궤변가들은 자기들의 과장된 교리까지 발표했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인들의 글과 상반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한 말의 뜻은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예고했지만 우리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2271) 파우스트에 대한 반박문에서도 "그들의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약속이었고 우리의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표다."2272)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들의 것은 그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그를 대표했으나 우리의 것은 이미 오신 그를 임재하시는 것같이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표시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른 곳에서 말했다. "율법과 예언자들에게는 장차 있을 일을 예고하는 성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성례들은 옛날 성례들이 장래의 사건이라고 선포한 것이 이미 나타났다고 증거한다."2273) 그러나 성례의 본질과 그 효력에 대한 생각을 그는 여러 곳에서 설명했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성례는 표징은 달랐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같았으며 보이는 외형은 달랐으나 영적 능력은 같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표징에 동일한 믿음이 있다. 즉, 서로 다른 표징은 서로 다른 말과 같은데 이는 말은 때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며 표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우리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나 그 음료의 물질은 달랐다. 그러므로 표징은 변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반석이었으나(고전 10:4)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제단 위에 안치되셨다. 그들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물로 믿고 마셨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는지는 신자들이 안다. 외적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마신 것은 다르다 그러나 내면적인 의미를 보면 그들은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2274) 또 다른 구절에서, "이 신비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은 외형에 있어서가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반석으로 대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2275)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2276) 우리 것은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주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신구약간의 차이에 부합한다.(우리가 고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증인으로 생각해서 자주 인용하는) 어거스틴도 이런 뜻으로 가르쳤다. 즉,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셨을 때에 그 수는 더 적으며 의미는 더 숭고하고, 능력이 더 훌륭한 성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이다.2277)

독자들이 간단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곧 궤변가들이 소위 opus operatum2278)(행한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것은 거짓일 뿐 이며 성례의 본질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제정하실 때, 모든 것을 빼앗긴 가련한 신자들이 아무것도 성례에 가지고 오지 말고 오직 간구하는 태도만을 가지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례를 받음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이 받는 행동조차(그들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할 뿐이므로) 그들의 공로로 돌릴 수 없다.

제 15 장  세례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징표이다. 1-6)

1. 세례의 의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2279)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이런 목적은 모든 성례2280)에 공통된 것이라고 이미 가르쳤다). 세례의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차례로 논하겠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에 세 가지 것을 가져다주는데 이제 그것을 하나씩 논하고자 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첫째 것은,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는(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더 설명하자면)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문서와 같다고 하겠다. 믿는 자는 모두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마 28:19, 행 2:38).

따라서 세례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와 표식에 불과하며 군인이 그 직업의2281) 표지로서 사령관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은 사람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막 16:16)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2. 세례의 효력은 말씀 없이 물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다음 말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엡 5:26). "우리를 구원하시되‥‥‥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그리고 베드로에 의하면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고 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며 구원한다거나 물 자체에 깨끗하게 하며 중생하게 하며 새롭게 하는 힘이 있거나 여기에 구원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성례에서 이런 은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의 말 자체가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의 말은 마치 생명의 말씀과 물로 주는 세례를 결합해서, 마치 "우리의 정결케 됨과 성화에 대한 소식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이런 세례를 통해서 그 소식이 인치 듯 확인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곧 이어 베드로는, 이 세례는 육에서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서 온 선한 양심이라고 한다(벧전 3:21). 실로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는 정결이지 결코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씻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에 피를 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씻는 진정한 물두멍이라고 확증하는 이 물에 대해서, 물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물의2282) 힘에 돌리는 사람들의 자기기만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례의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논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요소와 그 밖의 모든 수단들이 떠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그러나 세례는 과거를 위해서만 받은 것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해서는 마치 전에 받은 세례의 힘이 소진한 것처럼 어떤 다른 성례에서 새로운 속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초기에는 이런 오류 때문에, 생명이 위급하거나 임종시가 아니면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받아야만 일생 동안 지은 죄의 용서를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대 감독들의 글에는 이런 어리석은 경계심을2283) 공격하는 말이 많다. 언제 세례를 받든지 간에 우리는 일생 동안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마음을 굳게 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세례는 한 번 받은 것이며 지나간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세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얻었다. 그의 순결은 영원히 풍성하고, 어떤 오점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묻어 버리며 깨끗하게 씻어 버린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앞으로는 마음대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사실은 그런 대담한 짓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은 오직 자기의 죄에 지치고 눌려 있는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것이며, 그들을 일으키며 위로할 것이 있도록 그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고 했다(롬 3:25).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만 가련한 죄인들 곧 양심의 가책으로 상처받아서 의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를 지을 기회와 방종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야기시킬 뿐이다.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나는 세례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중생했을 때에 세례만으로 받은 사죄를 세례 후에는 회개와 열쇠의 덕택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2284) 그러나 이런 생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열쇠의 권한도 세례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세례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죄인은 교회의 활동, 즉, 복음 선포에 의해서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선포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죄의 씻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씻음을 나타내는 표징과 증거는 곧 세례가 아닌가? 그러므로 죄의 사면은 세례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류는 저 고해 성사라는 허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문제는 전에 언급했고 앞으로2285) 적당한 곳에서 그 논의를 완결하겠다.2286) 본성이 야비해서 외형적인 사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갖는 인간이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보조 수단을 고안해서 이 결점을 폭로했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세례 그 자체가 고해 성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일평생 고해하라고 권고한다면 세례의 힘도 똑같은 한도까지 확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기의 죄과를 알고 괴로울 때마다 단호하게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유일하고 영원한 죄의 씻음을 받았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세례는 또 다른 유익을 준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는 것과 그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알려 준다. 참으로 사도가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롬 6:4). 사도는 이런 말로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분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말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경고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것을 파악한다. 즉,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셔서 우리를 그 죽음에 접붙이려 하신다는 것이다(롬 6:5).2287)

가지가 그 접붙인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을 취하듯이,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롬 6:8).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야 한다고(롬 6:11) 권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논법을 사용했는데,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장사된 후에 할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어 버렸다는(골 2:11-12)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이미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에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른다(딛 3:5).2288) 이와 같이 먼저 죄의 용서와 의의 전가가 우리에게 약속되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개조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약속된다.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이 세례에서 받는 유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임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는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친교를 맺으시고자 하시는 그 연합과 친교의 가장 견고한 유대로서 세례를 공통분모로 삼으시기 위하여 자기의 몸으로 세례를 성별하셨다(마 3:3).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혀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한다(갈 3:26-27) 이와 같이 우리는 세례의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그리스도를 세례의 고유한 목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도들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마 28:19)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된 것은(행 8:16, 19:5)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세례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주는 사람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도 같이 불러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것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비할 데 없는 인애에 따라 우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려고 그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도록 우리사이에 이 중보자를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결과 중생을 위해서, 이를테면 아버지에게서는 원인을, 아들에게서는 질료(質料)를 그리고 성령에게서는 효력을 얻으며 또 분명하게 분별한다. 그래서 요한이 처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후에 사도들도 그러한 세례를 주었다(마 3:6,11, 눅 3:16, 요 3:23, 4:1, 행 2:38,41).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이런 중생을 의미했고 "죄의 용서"는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는 다르지 않다 : 그 뜻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7-9)

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요한의 사명과 후에 사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똑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다르다고 해서 세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교훈이므로 같은 세례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과 사도들은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쳤고 그 점에서 서로 일치했다. 즉, 다 같이 회개를 위해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그리스도에게서 회개와 죄 사함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다(요 1:29). 요한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이며 의로우신 화해자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사도들은 이 고백에 무엇을 덧붙여 말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양자를 구별하려고 애쓴 고대 저술가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권위를 너무 존중해서 성경의 확실성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세례 요한이2289)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주장한 누가의 말은(눅 3:3) 듣지 않고, 요한의 세례에는 죄의 용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겠는가? 어거스틴도 요한의 세례에는 죄를 용서받을 소망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는 실제적으로 용서되었다고 미묘한 구별을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2290) 누가가 요한은 그의 세례에서 죄의 용서를 약속했다고 분명히 증거하는데 왜 이 표현을 약화해야 하는가?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차이는 한 가지뿐이다. 즉,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이미 나타나신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눅 3:16, 행 19:4)는 것이다.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성령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내렸다는 사실은 세례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사도들이 행한 세례도 그리스도의 세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세례도 요한의 세례보다 성령이 더욱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도록 파송되기 이전의 신자들보다 더 많은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행 8:14, 17).

나는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고 초대 저술가들이 말한 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행 19:3,6) 읽고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은 다음의 적당한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겠다.2291)

그러면, 요한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마 3:11, 눅 3:16) 이것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요한은 세례의 종류를 구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그리스도의 인격을 비교한 것이다.

즉,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권능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의 혀와 같이 보내신 날에 눈에 보이는 이적으로 나타났다(행 2:3). 사도들은 이이상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었는가? 지금 세례를 주는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가? 그들은 외적인 표징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고, 내면적인 은혜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이 점은 고대 저술가들도 각처에서 가르치며, 특히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누가 세례를 주든 간에 그리스도만이 주재하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2292)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우리가 이야기한 육을 죽이는 일과 깨끗이 씻는 일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시되었고,2293)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다(고전 10:2). 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지배와 잔인한 속박에서 구출하셔서 홍해에 그들이 건너갈 길을 만드신 후에(출 14:21) 그들의 뒤를 바싹 따라온 바로와 애굽 군대를 바다에 빠지게 하신 것은(출 14:26-28) 몸을 죽이는 일을 상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주께서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즉,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으며, 우리의 바로인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지치게 만들지만 그는 이미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세례는 우리에게 약속하며 상징한다. 그러나 애굽 사람의 시체가 바다 속에 잠기지 않고 바닷가에 있어서 그 무서운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을 해칠 수는 없었던 것과 같이(출 14:30-3l), 우리의 이 원수도 여전히 위협하고 무기를 휘두르며 그 존재를 느끼게 하지만 정복할 힘은 없다.

구름에는(민 9:15, 출 13:21) 깨끗이 씻는 일의 상징이 있었다. 주께서 그들을 구름으로 덮어 서늘하게 해 주셔서 무자비한 태양열로 인하여 기진맥진하게 되지 않도록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며 보호를 받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덮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불꽃의 엄습을 받지 않게 된다.

그 때에는 이 신비의 뜻이 애매모호해서 아는 사람이 적었지만, 이 두 가지 은혜 외에는 구원을 얻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후사로 택하신 고대 조상들에게서 두 은혜의 표징으로 빼앗으려고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0-13)

10.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그런데 세례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선전했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고집하는 생각이 있다. 그들은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원죄가 없어지게 되며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고, 아담이 창조된 대로 바르게 살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그 의롭고 순결한 본성을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회복한다고 가르친다. 이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교사들은 원죄나 원래의 의나 세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과 같이2294)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키며, 그 부패로 인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고, 다음에는 성경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 것이(갈 5:19)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점에 신중하게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로 인정된다. 의와 결백과 순결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아들까지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죄의 씨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본성은 죄의 씨이며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이 저주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고 취소되었다는 확약을 받는다.(이미 말한 바와 같이)2295) 주께서는 이 표징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다 완전히 용서되었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는데 오직 전가에 의해서만 의를 얻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의롭고 결백하다고 간주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 점 중의 또 하나는, 이 비뚤어진 성질이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곧 앞에서 "육체의 일"이라고(갈 5:19)2296) 한 것을 만들어 낸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가 끊임없이 불꽃과 불똥을 내뿜으며, 샘에서 쉬지 않고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 죽음의 몸에서 해방되며 자기를 완전히 벗어버릴 때까지는 사람의 정욕은 결코 죽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물론 세례는 우리의 바로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으며(출 14:28) 우리의 죄가 죽는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죄가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우리를 더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육체라는 이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안2297)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우리가 충실히 붙잡고만 있으면 죄의 흔적은 지배적인 세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 안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기만에 빠지거나 자기의 죄악 생활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죄를 짓기 쉬운 사람들이 안심하고 죄악 속에서 잠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의 가시에 찔려 고민하는 사람들이 기진맥진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아직 전진하는 중에 있음을 생각하여 매일 정욕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것을 훌륭하게 전진한 것으로 믿어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인 육신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 때까지 끊임없이 씩씩하게 싸우며 전진하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완전한 승리를 향해서 매진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력을 했는데도 아직 적지 않은 곤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겠다는 분발심을 일으키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목적은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 죽이는 일은 우리의 세례와 똑같이 시작해서 우리가 매일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에게로 옮겨갈 때에 완성될 것이다.

12. 바울의 내적 투쟁 : 로마서 7장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다.2298) 그는 값없이 주시는 의를 논한 다음에,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점을 논거로 삼아 우리는 행위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추론하기 때문에(롬 6:1,15)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이 중생의 약속을 세례에서 받는다고(롬 6:3이하) 첨부한다. 따라서 죄가 그 지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롬 6:12). 바울은 신자에게 항상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위로의 말을 첨가한다(롬 6:14).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손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 폐지의 성질을 논하고(롬 7:1-6) 동시에 지금까지 두 번 연기해온 이 문제2299), 즉,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논한다(롬 2:12-24, 7:7-13). 그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굳게 결합되기 위해서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우리가 자신의 부패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가련함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저 부패한 본성은 세속 사람들에게서 곧 나타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대로 산다) 바울은 중생한 사람, 즉, 자기를 예로 든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기의 육의 흔적과 싸우며2300)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 해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다고 한다(롬 7:18-23).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롬 7 :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평생 감옥 생활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생각하고 심히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위로의 말을 첨부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롬 8:1) 하였다. 바울은 주께서 일단 은혜로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접붙이시고 세례에 의해서 교회의 공동체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속하는 동안은(비록 죄에 포위를 당하고 자기 속에 죄를 가지고 다닐지라도)죄책과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울의 단순하고 바른 해석이라면 아무도 우리가 이상한 생각을 가르친다는 인상을 가질 이유가 없다.

13. 세례는 고백의 표

또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 된다. 참으로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2301)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끝으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혀와 우리의 모든 지체가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능력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것을 본받아 같은 노력을 하도록 격려를 받게 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전 1:13). 그가 암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그에게 몸을 바치며 그의 이름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세례 때에 한 고백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는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는 그 상징된 약속을 믿고 받아야 하며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14-18)

14. 표징과 실상

이미 주께서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을 설명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세례를 어떻게 사용하며 또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판단하기가 쉬울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므로 만드신 분의 손에서 직접 받는 것같이 받아야 한다.

이 표징을 통해서 말하는 이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 증명이 된 일로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어 깨끗이 하며 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 주시는 이도 주님이시며, 우리를 그의 죽음에 참여하게 하고 사탄에게서 그 지배력을 박탈하며 우리의 정욕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이도 주님이시며, 참으로 우리와 연합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그가 이 여러 가지 일을 우리 안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이 물로써 외적으로 깨끗해지고 물에 잠기며 물에 둘러싸이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참되고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성례의 가장 확실한 원칙은 이 유사점에 있다. 즉, 우리는 물질에서 영적인 것을 마치 눈앞에 있는 듯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적인 것을 이런 형상으로 나타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은혜가 성례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자체의 힘으로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께서 이 표를 이용해서 우리에 대한 주의 뜻을, 즉,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때문이다. 또 주께서는 우리의 눈에 단순한 외형만을 보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임재 하는 실재에 인도하시며 외형이 상징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신다.2302)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여기에 대한 증명으로서 우리는 백부장 고넬료의 예를 들기로 한다. 그는 이미 사죄와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역시 세례를 받았다(행 10:48). 그는 세례에 의해서 사죄를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욱 확실하게 단련되었다. 참으로 보증을 얻어 확신이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만일 세례 자체의 힘으로 죄가 씻기는 것이 아니라면, 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했느냐고(행 22:16, 9:17-18 참조) 더러는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자각하는 데 따라 받아 얻게 되며 이 점은 주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증거하실 때나 혹은 이 확증하신 것을 더욱 충분하게 또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실 때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한다. 아나니아의 말은‥‥"바울이여, 당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오, 주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세례를 받고 확신을 얻으시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표징과 실체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세례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성례와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도 믿음으로 받는 정도만큼만 얻을 뿐이다.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배은망덕의 증거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아야 한다. 세례에서 주신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가 우리의 고백의 상징인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죄의 용서는 순결하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증거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가입해서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화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이 마지막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가‥‥‥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바울은 말했다(고전 12:13).

16. 세례는 집례 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단정한 것, 즉, 성례는 집례 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옳다고 하자 성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며,2303) 이점에서 우리는 성례를 집례 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편지가 전해질 때 필적과 서명만 충분히 인정되면 전한 사람이 누구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성례에서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우리 주의 필적과 인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논법은 목사의 가치에 의해서 성례의 힘과 가치를 측정한 도나투스파의 오류를 깨끗하게 반박한다. 지금 재세례파는 우리가 교황제도 아래에서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므로 올바르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304) 따라서 그들은 격렬하게 재세례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며(마 28:19) 누가 집례하든지 세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의 미련한 생각에 대항할 강력한 이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례를 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심지어 하나님을 멸시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무지와 신성 모독에 참가하도록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세례를 준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 다른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례였다면 거기에는 확실히 죄를 사하고 육을 죽이며 영을 다시 살리고 그리스도께 참가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불결하고 배교한 제사장에게서 할례를 받아도 무방했으며, 그런 표징이 무효하다고 해서 반복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그것은 그 진정한 원천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세례가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거행되어야 된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도, 부분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해서 전체의 효력을 무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 오점도 없는 순결한 세례가 되기 위해서 구비해야 할 조건을 우리는 가르치지만 우상 숭배자들이 더럽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고대에도 여러 가지 미신 때문에 할례가 부패했지만 여전히 은혜의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요시야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냈을 때(왕하 18, 22, 23장),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그런데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 몇 해 동안에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의 의도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례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무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눈이 멀고 믿음이 없어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항상 확고하며 믿을 만했다고 대답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고 믿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믿을 만 하시다(롬 3:3) 모든 사람이 멸망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세례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무시했고 약속이 없으면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감사할 줄 모른 우리의 맹목과 완고함을 자책한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시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약속을 모든 신자에게 실행하신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세례에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참으로 우리의 불신으로 인하여 약속은 우리 안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자,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그러므로 주께서 유대 백성을 회개하라고 부르실 때, 이미 말한 바와 같이2305) 그들은 불경건하고 모독적인 인간들에게서 할례를 받았으며 오랫동안 똑같이 불경건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시지 않고 다만 마음을 돌이키라고 권고하셨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언약을 깨뜨렸을지라도 그 언약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견고하게 남아 있었고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깨뜨리는 제사장의 손에서 그 언약을 받았으며, 그 후에는 그 언약을 더럽히며 무효화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시 세례를 주었다고(행 19:2-7) 주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불붙은 창을 던진다고 상상한다. 요한의 세례와 우리가 지금 받는 세례가 똑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그릇된 교훈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배운 후에 그 바른 믿음으로 다시 세례를 받았으니 바른 교리가 없는 세례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하며 또 우리는 지금 처음으로 맛보게 된 진정한 종교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2306) 중의 그릇된 열성분자가 헛된 미신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사실에 두고, 요한이 이렇게 무식한 제자들을 파송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리가 없다. 성경에는 성령을 찬양하는 구절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성령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바울이 묻는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부여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받은 것은 요한의 참 세례였으며 그리스도의 세례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정한다.2307)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들은 바울에게서 진정한 교리를 배웠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2308) 그러나 나는 더 단순하게 해석해서 성령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안수함으로써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은혜를 "세례"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불과 성령의 세례에 대한 주의 말씀을(행 1:5) 회상했다고 한다. 베드로도 고넬료와 그 가족과 친척에게 이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같은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다(행 11:16).

또 이것은 그 다음에 첨가된 말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곧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라고 했다(행 19:6). 누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던 화술에 따른 것이다. 즉, 우선은 사실의 요점을 말하고 그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2309) 글의 전후를 보면 누구든지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 위에 내리셨다고 한다. 이 둘째 표현은 세례의 성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무지가 처음 세례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두 번째 세례로 시정 해야 된다면 가장 먼저 사도들부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도 3년 동안이나 더욱 순수한 교리를 조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는 주의 자비로 우리의 무지가 매일 교정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시 침례를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강이 있어야 충분할까?

(필요 이상의 의식과 여성에 의한 세례에 반대한다. 19-22)

19. 그릇된 세례식과 바른 세례식

이 신비의 힘과 가치와 유용성과 목적은 이제 충분히 명백해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외형적인 상징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행해서 사람들의 무모한 짓을 억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비천한 일인 듯이, 축복 기도라기보다는 주문이라고 할 것을 고안해서는 물을 참으로 성별하는 것을 더럽혔다. 그 후에 촛불과 성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숨을 내쉬는 것이 세례의 문을 여는것이라고 생각했다.2310) 나는 이런 이질적인 잡동사니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든지 첨가하는 것을 배척할 권리가 있다. 사탄은 복음이 시작될 때 처음부터 미련하고 속기 쉬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사기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더욱 야비하게 우롱을 했다. 그래서 침과 그 밖의 값싼 허식을 노골적으로 함부로 끌어들여 세례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2311)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좋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마음을 죽이는 화려한 연극을 세례에서 일체 제거한다면 세례가 얼마나 개선될 것인가? 세례 받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학습 교인이 배워야 할 신앙고백 문을 낭송하며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학습 교인에게 세례를 준다(마 28:19). 그리고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 이상한 오염에 파묻힘이 없이 그 완전한 광채를 나타낼 것이다.2312)

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부어 뿌리기만 하느냐 하는 이런 세밀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가 다른 사정에 따라 교회가 자유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례를 주다"라는 말은 잠근다는 뜻이며 고대 교회에서는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2313)

20. "긴급한" 세례에 반대한다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 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도 여기서 말해 두어야 하는데,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 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들이나 모든 남자들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그가 임명하신 사도들에게만 이 일을 명령하셨다. 그는 친히 합법적인 관리인의 직책을 다하시고(눅 22:19), 그것을 본 제자들에게 그대로 성만찬을 집례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분명히 그들이 자기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여 있고 당장에 성직자가 없을 때에는 평신도가 세례를 주는 것이 거의 교회의 초기부터 오랫동안 행한 관습이 되었다.2314)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지지할 만한 건전한 이론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관습을 따랐거나 묵인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거스틴의 말에도 이 의문이 나타나 있다. "평신도가 부득이한 경우에 세례를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반복해야 된다고 경건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직책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거나 소죄밖에 되지 않는다."2315) 여자들에 관해서는, 카르타고 회의에서 여자는 일체 세례를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2316)

그러나 병자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신다고 언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창 17:7) 이런 뜻이다. 어린아이들의 구원은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그 자체만으로서 충분한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만큼 그렇게 불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는 잘못 설명된 교리가2317)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조심성이 적어졌다. 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멸망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우리의 형편은 하나님의 옛 백성들보다 더 나쁘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 아래에서보다 지금은 더 제한된 듯하다. 이는 그 때에는 난지 8일 이전에 구원을 줄 만한 효력이 있던 약속이(창 17:7, 12절 참조) 지금은 어떤 표징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효력이 없으리라고 하니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폐지하러 오셨다고(마 5:17 참조)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이 태어나기 이전의 관습은 우선 터툴리안의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집례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더욱이 사제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2318) 여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허락한 마르키온을 에피파니우스는 책망했는데, 그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인이다.

나는 생각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잘 안다. 정녕 부득이한 때의 비상 대책과 보통 관습과는 아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가 여자들에게 세례를 집례할 권리를 주는 것은 웃음거리라고 선언하면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이 부패한 관습을 어떤 구실 아래에서도 용서할 수 없다고 정죄한 것이 분명하다. 제 3 편에서 그는, 성모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가르치면서 전혀 보류 조건을 첨가하지 않는다.2319)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십보라가 한 일을 인용하여 옳지 못한 주장을 한다(출 4:25).2320) 십보라가 돌을 집어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노염을 풀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가납하셨다고 그들은 추론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다면 앗수르에서 온 이주민들이 시작한 할례 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왕하 17:32-33).

그러나 저 미련한 여인이 한 일을 모방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다른 타당한 이유들로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선례로 삼아서는 안 되는 드문 일이었으며(할례를 집행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제사장들에게 하셨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없으므로) 또 할례와 세례는 문제가 다르다고 내가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한 충분한 반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며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세례를 행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셨으므로,(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아론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히 5:4) 아무도 그 영예를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소명을 받지 않고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타인의 직책 을 빼앗는 것이 된다(벧전 4:15 참조).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극히 사소한 일도 양심에 의심을 갖고 행하면 죄가 된다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롬 14:23). 여성이 세례를 집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칙을 범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훨씬 더 중대한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마 19:6, 막 10:3).2321)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더 말하지 않겠다. 독자들은 십보라에게는 하나님께 어떤 봉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모세가 위험한 것을 보고 십보라는 불평하면서 노하여 아들의 포피를 땅에 던지며 남편을 나무랐기 때문에 남편까지도 하나님께 대하여 노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 사건은 순전히 십보라의 성급함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아들의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님과 남편에게 불평을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모든 다른 점에서는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남편이 있었는데 자기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의 남편은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으뜸가는 예언자 모세였으며, 이보다 더 큰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나타난 일이 없었다. 십보라의 할례 거행이 그 때에 허락되지 않은 것도 지금 감독 앞에서 여성들이 세례를 집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논쟁을 쉽게 즉각적으로 해결할 원칙이 있다. 즉, 유아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력하다는 듯이 우리가 그 언약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대한 불법 행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2322)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례나 어떤 첨가물 때문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에 이 성례에 일종의 인을 첨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효이기라도 하듯 그 약속에 효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 약속을 확증시하려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자녀가 세례를 받는 목적은,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외인이었다가 지금 처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약속의 복을 받아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으므로 이 엄숙한 표징에 의해서 교회에 가입되기 위한 것이다.2323)

그러므로 이 표징이 생략될 때에, 그 원인이 나태나 멸시나 부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위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규정을 존경하는 편이, 즉,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게서만 성례를 구하는 편이 훨씬 더 거룩한 일이다. 교회에서 받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에 결부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제 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일치된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1-6)

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그러나 현재 일부의 열광적인 사람들이 유아세례 문제로 교회를 소란하게 하며 선동을 계속해서 그치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광태를 억제하기 위하여 여기 부록을2324)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교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평화를 중시하며 또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무 까다롭게 시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이 강화가 세례의 비밀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체계화할 것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공격할 때에 그럴 듯한 논거를 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외람된 생각과 타락한 호기심이 끌어들인 것이며, 결국에는 우매한 자기만족감으로 경솔하게 관습화된 것이라고 한다.2325)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위에 확고하게 확립된 성례가 아니면 가느다란 실에 달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올바르게 깊이 생각할 때에, 만일 주의 거룩한 규례에 대한 이런 중대한 비난이 잘못되고 부당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규례의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 만일 경솔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이 드러날 경우에는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표준으로 세례의 진정한 준수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확실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폐지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오만불손한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세례의 의미를 결정한다

표징을 올바르게 고찰하는 것은 그 외형적인 의식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을 제정하실 때 의식이 표시하도록 하신 그 약속과 영적 비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잘 알고 또 인정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가치와 목적, 즉, 그 본질을 완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물질과 물질적인 외형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세례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세례가 표현하는 내면적 신비를 생각해야 한다. 이 일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례의 견고한 진상 이를테면 그 본체를 파악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될 때에 그는 외형적으로 물을 뿌리는 이유와 가치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일들을 멸시하고 무시하면서 관심을 전적으로 보이는 의식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례의 힘이나 성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물의 의미나 가치까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발언은 성경의 여러 구절이 분명하게 확증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이상 더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세례가 주는 약속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효력과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는 우선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긴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일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다. 다음에, 세례는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가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중생하여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다고 한다. 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한 가지 첨가시키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상징이2326) 된다.

3. 세례와 할례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할례가2327) 있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표징이 어떻게 서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서로 같은가를 검토하기로 하자. 이렇게 검토한다면 둘 사이의 비슷한 관계가2328)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그와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7:7,10). 그리고 모든 것을 풍부하고 충족하게 가질 것이라고 하셨다(창 17:1,6,8).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손을 모든 복의 원천으로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영생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해석하시고,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증명하셨다. 곧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눅 20:38, 마 22:32). 그러므로 바울도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주께서 어떤 멸망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출하셨는가를 가르칠 때에, 그들이 할례의 언약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그리스도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다고 추론했다(엡 2:12). 이 모든 것은 언약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접근하며 영생에 들어가는 첫 단계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으리라고 하는 세례의 약속에 해당한다. 후에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결백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신다(창 17:1). 이것은 육을 죽이는 것 또는 중생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무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의 포피를 베어 버리라고 권고함으로써(신 10:16)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고 설명하며, 이 때문에 땅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신 10: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실 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이, 모세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육신에 받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신 30:6). 또 아무도 자기 힘으로 진정한 할례를 얻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이 모든 일은 예언자들도 자주 반복하여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많은 a뻘??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렘 4:4, 겔 16:30).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에서 받는 것과 같은 영적 약속을 조상들은 할례에서 받았다. 할례는 그들에게 죄 사함을 받음과 육을 죽이는 것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두 가지를 겸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기초라고 한 우리의 가르침과 같이 그가 할례의 기초가 되신 것도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로 인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창 12:2-3). 이 은혜에 인을 치기 위해서 할례의 표징이 첨가된 것이다.

4. 차이는 오직 외적인 것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표징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두 표징의 힘은 약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는데) 그 약속은 두 표징에서 똑같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혜와 사죄와 영생이 약속되었다. 다음에 표현된 것 중생도 같다. 두 표징의 기초, 즉, 이런 일들을 실현시키는 기초도 같다. 그러므로 성례의 힘과 성격을 평가하는 표준이 되는 내적 신비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는 외형전인 의식에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약속과 거기에 표현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외형적인의식은 다수 경미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할례에 속한 것이 모두 세례에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2329) 모든 성경 해석을 검토하라고 가르친(롬 12:3,6) 사도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어떤 유사한 관계와 비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는 것이 곧 교회에 처음으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표현이었으며,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에 참가하겠다고 고백하는 표였기2330)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성별되어 그의 백성으로 인정되며 우리 편에서도 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한 일을 세례가 우리 사이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그런데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물이라는 요소와 외형적인 관례에 그치고 그 영적인 신비에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말을 하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말을 한다고 할 것이 아닌가? 이 영적 신비를 설명한다면, 세례를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그들도 참여하게 하셨다(창 17:12 참조).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무의미한 상징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우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조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 시대 유대인의 유아들과 똑같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일에 그들이 참가한다면 표징을 그들에게 거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상을 안다면 왜 그들을 외형에서 쫓아 보낼 것인가? 외형적인 표징은 성례의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다만 표징을 말씀과 따로 고려한다면 어느 편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 우리는 표징이 말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표징은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보다 낮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모든 반대론자들을 충분하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할례2331)에는 일정한 날이 있었다고 하는 반대론은 도피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들같이 날짜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날짜를 정하시지 않으면서 엄숙한 의식으로 유아들을 자신과의 언약에 받아들이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더 확실한 지식을 열어 준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옛날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창 17:14 참조) 옛날 유대인과 동일하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도 유효하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관계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관계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명백하다. 그리스도가 와서 아버지의 은혜를 축소시키셨다고 하는 흉악하고 모독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대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어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으므로 거룩한 자손이라고 불렀다(스 9:2, 사 6:13). 그와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거룩하다고 인정되며 한쪽 어버이만이 신자일지라도 거기서 난 자녀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결한 자손과 다르다고 사도는 확언한다(고전 7:14). 그런데 주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직후에 외적인 성례로 유아들에게 그 언약을 인치라고 명령하셨다(창 17:12). 그런데도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는 인을 치지 않겠다는 구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할례 이외의 상징으로 여호와의 언약을 확인하라는 명령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없으며 그 할례는 오래 전에 폐지되었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주께서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할례를 제정하셨으나 할례가 폐지된 후에도(우리와 유대인 사이에 공통된)주의 언약을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언약은 공통되고, 언약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공통적이다. 확인하는 방법만이 다르다. 그들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던 우리를 위해서는 세례가 대신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유대인들이 후손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모호해지고 확실성이 적어질 것이다. 이런 말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중상모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신 사랑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욱 명백하고 풍부하게 땅 위에 부어졌으며 사람들에게 선언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율법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있던 때보다 이 은혜를 더 심한 악의로 은폐하거나 혹은 나타내더라도 더 무력한 증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

7. 예수님과 어린이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자비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기 위해서란 것을 세상에 알리시려고 자신에게 데려온 유아들을 다정하게 안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마 19:13-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신 것과 세례에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을 들어 안으시고 축복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기도로 보살펴 주자고 말한다.2332)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행동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 19:14)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을 안으시고 기도와 축복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의 뜻을 행동으로 확증하셨다.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친교의 상징이 아닌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표징은 그들에게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교회에 가입된 그들을 천국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입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쫓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 장식하시는 유아들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으며 그가 기꺼이 영접하시는 어린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그리스도의 이 행동은 아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으시고 안으시며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것이며 그들을 성별케 하셨음을 선언하신 그 행동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

이 구절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다른 옹졸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서 혼자 올 수 있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버린 아기들과 어린아이들"2333)이라고 부른다(눅 18:15, 마 19:14, 막 10:13 참조). 이 두 마디의 희랍 말은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다"라는 말은 "접근한다"2334)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의 거미집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이들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런 자의 것"이라고2335) 하셨으므로, 천국은 유아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건전한 논점도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인정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이 나이 때문에 자신에게 외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셨을까? 유아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실제로 젖먹이들을 의미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사람들이 이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마 19:14). 유아들이 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면 "이런 자"라는 말은 유아 자신들과 유아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성경의 확고한 승인을 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들의 미련한 항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을 빼놓는 것이 아니므로, 올바른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기사를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행 16:15,32).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법칙으로 만족한다. 성찬의 제정 정신을 숙고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에서도 이 원칙을 지킨다. 참으로 세례의 제정목적에 주의만 하면 세례는 큰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서 세례를 빼앗는 것은 곧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 오랫동안 유아세례는 사람들이 몰랐던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 퍼뜨린다.2336) 이 점에서 그들의 부정직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고대의 저술가라도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2337)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유아세례를 무가치하며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이 행사에서 오는 유익을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부모들과 세례를 받는 유아 자신들에게2338) 오는 유익을 간단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만일 무익하다는 구실로 유아세례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조롱하는 것이 되는데, 그들이 유아세례에 반대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중 할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육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곧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주께서는 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미련한 생각을 압도하는 다른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이 거룩한 제도는 우리의 믿음에 특별한 위로를2339) 주며 무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출 20:6)2340)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충만함을 품는다.

주의 약속만으로도 우리의 자녀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이의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르게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어린이들도 세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기 자식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표를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고 한 그 위협을 우리는 깊이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멸시하는 자에게는 주시겠다고 한 은혜를 거부하시며 취소하시기 때문이다(창 17:14).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다. 10-16)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미친 짐승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이 거룩한 제도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데 쓰는 논법들에 대하여 검토하겠다. 첫째, 그들은 세례와 할례의 유사성 때문에 너무도 구속과 제한을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두 표징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분리시켜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이 두 표징은 서로 의미가 다르고 각각 포함된 언약도 아주 다르며 어린이들에 대한 소명도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첫째 점을 증명하려고 할 때에, 들은 할례는 육을 죽이는 모형이었으나 세례의 모형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 우리의 입장을 잘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근거는, 세례와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우리는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옛날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준 의미를 우리에게는 세례가 나타내 보인다고 추론한다.2341)

언약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만용으로 성경을 남용하며 곡해한다. 그것도 한 구절만이 아니라 취급하지 않는 구절이 없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철저히 육적인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같이 만든다. 그들과의 언약은 현세 생활을 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준 약속은 현세의 물질적 유익이었다고 한다.2342) 이런 주장이 승인된다면, 유대 민족은(우리 안에 있는 돼지들을 살찌우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배부르다가는 영원한 멸망에 빠질 운명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할례와 첨가된 약속을 우리가 말하면, 할례는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으며 그 약속은 육적인 것이었다고 그들은 곧 대답하기 때문이다.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할례가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다면 우리는 세례도 그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사도는 어느 한 쪽이 더 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에 거하는 죄의 몸을 벗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른다(골 2:11). 후에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고 첨부한다(골 2:12). 이런 말씀은, 세례의 실천과 진상은 곧 할례의 진상과 실천이며 둘은 똑같은 의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들은 이전에 할례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던 일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세례가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두 표징의 약속과 신비는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설명했으므로 이제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이상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신자들에게, 바로 영적인 하늘 일을 나타내는 표징을 땅에 붙은 것, 문자 그대로의 표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잘 생각하라고 경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생각을 어둡게 만들지 못하도록,2343) 그들이 아주 파렴치한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한 가지 항의를 여기서 논박하겠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재가하셨을 때에 그 언약을 포함한 근본 약속이 영적이며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또 그 약속을 받은 조상들도 그들이 열망한 영생에 대한 확약을 얻으려고 그 약속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은(마땅한 일이었으며)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호의를 지상적이며 물질적인 은혜로 증명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영적인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소망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이 은혜를 그의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다른 약속을 첨가하셨다(창 15:1,18). 유대 민족에게 주신 모든 지상적인 약속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약속들은 저 영적 약속을 원천으로 삼아야 하며 영적 약속이 항상 첫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신구약간의2344) 차이를 논할 때에 이미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간단히 논한다.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그들은 "자녀들"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사람들을 그의 자녀라고 불렀고 지금은 그의 믿음을 본받은 사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구별한다. 그러므로 할례에 의해서 저 언약의 공동체에 접붙임을 받은 신체적인 유아들은 신약 시대의 영적 유아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생을 얻도록 중생한 사람들을 예시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2345) 이런 말에는 희미하게 진리의 불꽃이 보인다. 그러나 이 경박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우선 손에 닿는 것을 잡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들러붙어서는 일체 여러 가지 일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해서 속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건전한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그의 영적 후손들의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의 자리를 일시 차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본래 그와 혈연이 없었지만 그의 자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갈 4:28, 롬 4:1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복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후손에게 약속된 일은 전혀 없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큰 오류이다. 우리는 성경의 확실한 인도를 받아 더 나은 목표를 향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그 후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다(창 12:3). 동시에 그와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확약하신다(창 17:7). 그리스도를 이 복의 근원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이 약속을 계승하게 되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은 모든 족속 사이로 널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세계 각지에서 신자들이 모여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하늘 영광 가운데 앉으려는 것이었다(마 8:11). 그러나 그보다 수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에게 그와 똑같은 위대한 자비를 베푸셨다. 다른 모든 민족들을 제쳐놓으시고 이 한 민족을 택하셔서 얼마동안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만 한정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자신의 소유와(출 19 :5) 자신의 사신 백성이라고(출 15:16) 부르셨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 은혜를 확증하는 할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이 상징으로 가르치려 하셨다. 이 일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씀은 영생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로 일단 결정한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도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후에 그는 믿음으로 인한 의를 확인하는 일인 할례를 표징으로 받아서 무할례자와 할례자, 즉,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대에 가졌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조상이 되었다(롬 4:10-12).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영예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할례자들의 조상이었다. 사도가 말하듯이(엡 2:14),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담이 허물어진 후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세례가 있으므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의식만을 자랑하는 자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들만의 조상이란 생각을 명백하게 부정한다(롬 4:12). 지금은 세례에서 물밖에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헛된 생각을 같은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반대론자들은 또 사도의 다른 구절을 내놓을 것이다(롬 9:7). 거기서 사도는 육신으로 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에 의하여 난 자만이 그의 후손으로 인정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브라함 의 혈통에 의한 후손에게 어느 정도의 지위를 주는 데 비해서 사도의 말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논하는 문제점을 더 주의해 보아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후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이런 혈통 자체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마엘과 에서를 예로 든다(롬 9:6-13). 외인과 같이 제거된 이 두 사람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참다운 후손이었지만 축복은 이삭과 야곱에게로 갔다. 이 사실에서 사도가 후에 주장하는 결론이 나온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롬 9:15-16) 그러나 언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즉,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언약의 이름으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혈통을 헛되이 믿는 것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일단 맺으신 언약은 결코 수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로마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후손이 그 위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논한다. 이 위엄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복음의 첫째가는 자연적인 후계자였고, 비록 그들이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무가치한 자로 버림을 받았지만 하늘의 복이 이 민족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사도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하고 언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거룩하다고 부른다(롬 11:1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가치가 있다고 여기신 세대에 큰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우리와 그들을 비교하는 듯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유복자 또는 조산아라고 부르며 적자가 아니라 양자라고 한다. 또 마치 가지를 꺾어서 다른 나무줄기에 접붙인 것 같다고 한다(롬 11:17).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특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가정에서 맏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예는 그들에게 제공되었고, 그들은 제공된 것을 거절하며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완고해서 복음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사도는 그 복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15.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를 어떤 저울로 달아야 할 것인가를 알아본다.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서자나 외인들과의 구별은 물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그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시기 위해서 할례로 인을 치셨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형편이 이와 같다. 바울이 그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그 부모에 의해서 성화된다고 논하는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는 그 부모에게서 동일한 성화를 받는 다고 가르친다(고전 7:14). 이 점을 근거로 그는 불결한 죄가 있는 사람들은(고전 7: 15)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우리의 반대론자들이 내린 결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옛날에 할례를 받은 유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한 영적 유아시기를 예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라고 말했다(롬 15:8).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마치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후손에 적용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께서 일단 약속하신 일을 이행하시려고 유대 민족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한 것처럼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언약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에게 비유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사도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은 뜻으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행 2:39) 언약을 받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당연히 복음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언명하며, 다음 장에서는(행 3:25) 그들을 "언약의 자손", 즉, 상속자라고 부른다. 위에서 인용한 사도의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사도는 유아들에게 새겨진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해석한다(엡 2:11-13).2346)

만일 우리가 그들의 너절한 말을 듣는다면, 주께서 율법의 둘째 계명에서 그의 종들의 후손들에게 천 대까지도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약속은 어떻게 되겠는가?(출 20:6)2347) 우리는 여기서 비유로 회피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경박한 핑계가 될 것이다. 그 약속은 폐기되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율법이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영원히 유익한 것이 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마 5: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대해서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믿어야 한다.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더욱이 그들이 내세운 세례와 할례의 차이점은 우습고 조리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모순된다. 세례는 영적 전투의 첫날에 속하지만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이 끝난 제 8일에 속한다고2348) 그들은 말한 다음, 즉시 이 말을 잊어버리고는 논조를 바꾸어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의 모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례는 매장이라고 부르며 이미 죽은 자가 아니면 매장할 수 없다고 한다. 미친 사람의 정신없는 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조리가 없을까? 처음 언급한 대로한다면 세례가 할례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요 둘째 언급에서는 할례보다 뒤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공상을 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말씀이라고 숭배할 때,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말한 차이점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제 8일에 대해서 비유를 말하고2349) 싶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대 저술가들에 의하면 여덟이라는 수는(제 8일에 있은) 부활에 관련시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부활에 달렸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이다. 혹은 현세 생활의 전과정에 관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세 생활에서는 육을 죽이는 일은 생명이 끝나고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2350)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 8일까지 미루신 목적은 아직 연약한 유아들을 생각하신 것으로서 이는 갓 난 핏덩어리 같은 아기에게 할례의 상처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351)

이미 죽은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매장된다고 하는 말은 훨씬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어 장사지낸바 된다고 하지만 그 조건으로서 우리는 죽은 후에 육을 죽이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롬 6:4) 확실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비슷한 속임수로서, 세례가 할례와 같아야 한다면 여성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트집을 잡는다.2352) 이스라엘 자손의 성결이 할례의 표징으로 확인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 표징으로 남녀가 다 같이 거룩하게 되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남자의 몸은 본래 할례로 인칠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에게만 할례를 행하였으나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통해서 여자들도 할례의 동반자와 협력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이런 미련한 말들을 물리치고 세례와 할례와의 유사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내적인 신비, 즉, 약속과 가치와 효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답변한다. 17-20)

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곧 어린이들은 그 나이로 인하여 세례가 의미하는 신비, 즉, 영적 중생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아주 갓난아기는 영적으로 중생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어린이들이 거듭나기에 적합한 연령이 될 때까지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2353)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도처에서 이 모든 이론에 반대한다. 어린이들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롬 5:12이하) 어린이들은 죽음 가운데 버려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명령하신다(마 19:14). 무슨 까닭인가?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에게 참가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추방과 죽음을 선고한다.

만일 그들이 이런 선고를 주저하면서 어린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오류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충분히 반박된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선언하므로(고전 15:22),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소망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구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를 받아야 하며(엡 2:3) 죄 중에 잉태되어(시 51:5) 항상 정죄 아래 있다고 하므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열리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본성을 떠나야 한다. 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말씀보다 더 명백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고전 15:50)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려라(이것은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생명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이 진리라면(요 11:25, 14:6) 우리는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유아들이 어떻게 중생하느냐고 묻는다.2354)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구원을 받을 유아들을(어떤 유아들은 확실히 구원을 받으므로) 주께서 먼저 중생시키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부패가 그들에게 있다면, 오염된 것이나 부패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계 21:27) 유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오염된 것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다윗과 바울이 주장하듯이, 유아들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면(엡 2:3, 시 51:5) 그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대상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 심판자 자신께서 하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다시 난 사람들에게만 열린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는데(요 3:3) 우리는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런 반대론자들을 침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 한 증거를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 거룩하게 만드셨으며(눅 1:15) 다른 태아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 여기서도 그들은 우롱하면서 핑계를 말하지만 아무 소득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것은 한 번만 있었던 일이며 이 한 가지 예를 근거로 주께서 유아들을 매양 이렇게 다루신다는 직접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고 우롱한다. 그러나 우리도 이런 논리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제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의 힘을 좁은 범위 내에 가지려고 하는 그들의 악한 불법 행위를 폭로하려는 것뿐이다. 그들의 다른 궤변도 역시 무가치하다. 그들은 "모세로부터"라는 말은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 방법에 의해서 "어렸을 때부터"라는 말과 같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말을 했을 때에는, 요한은 나기 전부터 성령이 충만하리란 것을 의미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법칙을 강요해서, 원하시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을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힘은 적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아이도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만드셨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갓 난 유아기부터 거룩하게 함을 받으셨다. 그것은 연령의 구별 없이 그의 선민들을 자신 안에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으로 범한 불복종의죄를 씻어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육을 입으셨다. 육으로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육을 취하시며 성령의 거룩함으로 충만하셔서 그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얻는다면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는 유아 시기가 성화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이 현세에서 불려가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화되고 거듭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다. 반대론자들은 성경에서 성령은 썩지 않을 씨,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은 중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벧전1:23).2355) 그들은 이 점에서 베드로의 발언을 오해하였다. 베드로는 복음을 듣고 배운 신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중생의 유일한 씨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유아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 할 수 없다고 하는 추론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유아들을 중생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으로서는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 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마음대로 유아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권능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불완전한 논법일 것이다.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그러나 믿음은 듣는 데서 생기는데(롬 10:17), 유아들은 아직 듣지 못하며, 그들은 선악을 모른다고 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신 1:39)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반대론자들은 말한다.2356) 그러나 사람들은 사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도가 들음을 믿음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에 보통 사용하시는 순서와 방법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지 결코 하나님에게 일정 불변의 법칙을 지정하며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그런 다른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부르셨으며 내적인 방법으로, 즉, 설교와는 별도로 성령으로 마음속을 비추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한 유아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유아들이 조금 후에 완전히 즐길 은혜의 일부분을 지금 받는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충실한 삶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데 있다면, 어떤 어린이들이 아주 갓난아이 때에 죽어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 갈 때에 확실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접되어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의 빛의 완전한 광채로 비추시려는 유아들을 지금 작은 불꽃으로 비추시기를 기쁘게 여기신다면, 그것을 불가하다고 할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그들을 이 육신의 감옥에서 구출하시기 전에 그들의 무지를 제거하시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그들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믿음을 받는다든지 또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와 똑같은 지식을 가졌다고 경솔하게 단정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은 채 남겨 두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큰 소리로 부정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둔한 교만을 나는 조금이라도 억제하려고 한다.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그러나 이 점을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례를 회개와 믿음의 성례라고 덧붙인다. 갓난 유아기에는 회개나 믿음이 생길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세례의 의미가 허무한 것이 되지 않도록 유아들에게 세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2357) 그러나 이런 창은 우리를 향한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증거를 보아서 할례 또한 회개의 표란 것은 아주 분명하다(렘 4:4, 9:25, 신 10:16, 30:6 참조). 그리고 바울은 할례를 믿음으로 인한 의의 인이라고 부른다(롬 4:11).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유아들의 몸에 할례의 인을 치셨는지는 하나님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세례와 할례는 경우가 같으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한쪽에 주는 것을 다른 쪽에 거부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유아 시기는 영적 유아들을 상징한 것이라는 상투 수단으로 도망하려 한다면 이 길은 이미 막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의 성례로서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셨으므로, 지금 유아들을 세례에 참가시키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일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그런 것과 같이, 이 일에서도 불경건한 자들의 훼방을 충분히 물리칠만한 지혜와 의가 빛난다. 유아들은 비록 할례를 받는 순간에는 그 표징의 뜻을 그들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죽이는 할례를 참으로 받았으며, 이 죽이는 일은 장성한 후에 실행할 것이다. 요컨대 이 반대론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유아들은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며, 아직은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세례의 의미를 곡해해서 우리에게 반대하는 것은 이 대답에 의해서 모두 결정적으로 반박된다. 바울이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를 때에(딛 3:5) 그는 세례에 이런 부전을 붙였다. 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세례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추론한다.2358) 그러나 우리는 할례도 중생을 의미했으므로 중생한 사람이 아니면 할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얼마든지 그들의 추론을 반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일이 우리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이미 여러 번 시사한 바와 같이) 할례를 흔드는 경향이 있는 어떤 논법도 세례를 공격할 힘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한 권위에 근거한 일은 아무 이유가 없을 지라도 확고부동하지만,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하신 것이 아닌 유아세례나 그 밖의 비슷한 일들에는 그런 경의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2359)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일단 이 딜레마에 빠진 이상 그들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 유아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합당하며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비난을 받아야 하든 지의 둘 중의 하나이다. 그 명령에 불합리한 것이나 어리석은 점이 없었다면 유아세례를 행하는 일에서도 불합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신다. 21-22)

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 논제에 대해서 불합리하다는 낙인을 찍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씻어버리는 주장이 있다.2360) 즉, 주께서 선택하시기로 의도하신 유아들이 중생의 표징을 받았으나 장성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힘으로, 주만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 만일 그들이 장성해서 세례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갓 태어났을 때 그들에게 중생의 표를 주어 일평생 그 뜻을 명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들에게 새로워지겠다는 열의가 불일 듯 일게 될 것이다.

바울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다고 가르치는 것도(롬 6:4, 골 2:12)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말은 세례를 받을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근본 교리를 선언하려는 것뿐이다. 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세례 전에 매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모세와(신 10:16) 예언자들도(렘 4:4) 유아시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할례의 의미를 생각나게 했다.

동일한 취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편지하였다(갈 3:27).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는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는 그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은 이 신비의 뜻을 이해한 다음에 표징을 받아야 하지만 유아들은 다른 순서를 밟는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곧 설명하겠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한 구절이 그들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구절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례는 몸의 오염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이 고백하는 증거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3:21). 사실 이 구절에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위해서는 공허한 허풍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즉,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2361) 그러나 그들은 실상이 표징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야 한다는 틀린 생각을 되풀이한다. 이는 할례의 진상도 선한 양심의 동일한 증거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양심의 증거가 할례의 진상의 기초가 된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에 할례는 장래를 위해서 부여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리신다. 따라서 유아 세례에 있어서 주께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현재적인 효과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성례의 나머지 의미는 후에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22.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런 종류의 논법은 모두 성경을 반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비슷한 나머지 논법들을 간단하게 추궁하겠다. 그들은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받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시한다.2362) 이 점을 인정할 때에 우리의 견해는 큰 지지를 받게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이미 죄인이므로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서 자비의 소망을 빼앗으시지 않고 오히려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실제보다 훨씬 낮은 표징을 그들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 따라서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들에게 다시 던진다. 즉, 유아들은 죄 사함을 받으므로 그 유아들에게서 그 표징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께서 물로 씻어 생명의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인용한다(엡 5:26). 그들 자신의 오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을 인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쉬운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씻으실 때에 세례에 의한 확증을 원하신다면, 어린이들에게 이 증거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이들을 천국의 상속자라고 부르셨으며(마19:14) 그들은 당연히 교회의 일부로 인정된다. 그리고 바울이 교회는 물로 씻음으로써 깨끗하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보편 교회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다른 곳에서(고전 12:13)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한 말도 우리는 같은 식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유아들이 그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 우리의 믿음의 요새에 가하는 그들의 공격은 맹렬하기만 하며 사용하는 무기 또한 많기도 하다.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 23-24)

23. 어른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이제 그들은 사도 시대의 관습을 보고, 그 때에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회개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먼저 회개하고 다음에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고 권고했다(행 2:37-38). 마찬가지로, 빌립에게 내시가 세례를 받겠다고 청했을 때 빌립은 그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행 8:37).2363) 이런 기사를 읽고 그들은 먼저 믿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례를 허락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법을 인정한다면 처음 구절은 믿음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에 회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증명이 될 것이며, 둘째 구절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두 구절은 서로 보충하고 따라서 서로 연결시켜야 된다고 대답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구절들도 이 두 구절과 비교해야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서 뜻을 해석해야 할 구절이 많다.2364) 여기에 인용된 구절이 그 예다. 베드로와 빌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생각하며 믿음을 이해할 만한 나이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회개하고 믿는다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유아들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할례의 표를 받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을 배워야 했다. 할례에 의해서 확인된 언약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그는 민족적으로 외인이었기 때문이다.2365)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여호와께서도 역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에, 우선 할례를 주시면서 그 표징의 의미를 감추시려 하지 않고 먼저 그와 맺으시려는 언약이 무엇인가를 언명하셨다(창 15:1).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은 후에 그를 성례에 참가하게 하셨다(창 17:1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성례가 믿음 다음에 있었고 그의 아들 이삭의 경우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 먼저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그때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던 장성한 아브라함을 이제는 언약의 공동체에 받아들이려고 했으므로 먼저 언약의 조건들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공정한 행위였지만 그의 갓난 아들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은 약속의 내용에 따라 상속권에 의해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는(문제를 더 간단명료하게 표명하기 위해서) 신자들의 자녀들이 이해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약에 참가하면, 언약의 조건에 대한 서약을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표징을 거부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을 자기를 위해서 낳은 자녀라고 부르신다(겔 16:20, 23:27). 그 후손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창 17:7 참조) 사람들의 어린이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불신자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연결되기 전에는 언약의 공동체에 대해서 외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표징의 의미가 그에게 잘못 이해되고 또 이해되지 않을 때에 그가 표징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도 이런 뜻으로, 이방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을 때에는 언약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엡 2:12). 내가 오해하지만 않았다면 이 간단한 발언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장성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으므로, 언약 사회에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믿음과 회개가 있기까지는 그들에게 세례를 휘장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난 유아들은 직접 언약의 상속자로서 태어났으며 하나님께 용납하였으므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2366) 죄를 고백한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서 기자가 한 말도(마 3:6) 이것과 관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교도가 세례를 받겠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만족할 만한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쉽게 세례를 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을 해석한다 :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고 해서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5-30)

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더욱이 그들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요 3:5) 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례에는 현재의 중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친히 세례를 중생이라고 부르시지 않느냐고 한다. 유아들에게 중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인데, 우리는 무슨 구실로 중생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세례를 그들에게 허락하느냐고 한다.2367)

우선 그들은, "물"이란 말이 있다고 해서 이 구절은 세례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곡해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후에, 니고데모가 육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성령, 즉, 믿는 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는 데 있어서 물과 같은 일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간단하게 "물과 성령"을 "물인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또 이것은 신기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3장에 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눅 3:16, 요 1:26,33 참조)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이 성령을 주는 것이며, 성령은 중생시키는 일에서 불의 기능과 성격을 가진 것과 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며, 성령은 물이 몸에 대해서 하는 일을 영혼에 대해서 수행한다. 나는 다른 분들이 다른 해석을 한다는 것을 알지만2368) 이것이 참뜻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을 구하는 사람은 모두 그 본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불쾌하고 너절한 비난을 하기로 작정한다면(그들이 원하는 것을 인정한 다음에) 세례가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고 그들을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보면 물이 성령보다 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영적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영적 은사가 세례 후에 오는 것이라면 나는 바른 주장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너절한 반대론은 일체 버리고, 우리는 내가 제창한 단순한 해석을 고수해야 한다. 즉, 생명수인 성령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 보내는 자들의 공상을 전적으로 배척해야 한다.2369) 그들의 가정에 따라서 세례는 어른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경건에 대한 초보 지식을 올바르게 배우고 세례를 받을 날이 가까운 어린이가 모든 사람의 기대를 어기고 돌연히 죽을 경우에 그 어린이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인가? 주의 약속은 분명하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5:24).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세례는 멸시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멸시한다면 주의 언약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며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세례를 받을 능력을 빼앗긴 사람은 멸망한 것으로 곧 인정해야 할 만큼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들의 공상에 찬성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할 만큼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사정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예외 없이 정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모든 유아들에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유아들에게 천국을 주신(마 19:14)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들의 의견이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관계된 일을 우리가 다 인정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 소득이 있으려면 우리가 이미 확립한 교리를2370) 그들은 우선 논박해야 할 것이다.

27.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세례의 제정 자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견고한 보루가 된다고 자랑한다. 마태복음의 맨 끝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먼저 그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고 다음에 세례를 주라는 둘째 명령을 하셨다고 한다(마 28:19). 그리고 그들은 마가복음의 맨 끝장에 있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첨가한다(막 16:16). 세례를 주기 전에 가르치고, 세례에는 믿음 다음가는 둘째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의 음성이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이상 무엇을 더 구하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또 주 예수께서는 서른이 되시기까지 세례를 받으시지 않음으로써 친히 이 순서의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마 3:13, 눅 3:21-22).2371)

기막힌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자승자박하고 그 무지를 폭로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신 때부터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세례를 주게 하셨는데,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제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마치 이 두 구절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것같이, 거기서 세례에 관한 법칙을 연역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들의 이 오류를 묵인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대체 이 논법은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은밀한 곳이 아닌 넓은 들판으로 밖에 도망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니며‥‥‥전파하라‥‥‥세례를 받는"(막 16:15) 또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막 16:16)이라고 한 말씀의 순서에 집착해서 세례를 주기 전에 전파해야 하며 세례를 받으려고 하기 전에 믿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세례부터 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주께서는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에 관해서, 위에서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고찰하였다(요 3:5).2372) 그들이 고집하는 대로 해석한다면, 여기서 세례를 먼저 말씀하셨으므로 영적 중생보다 세례가 먼저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물로" 거듭나라고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28.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없다

그들이 논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이 근거도 이제 얼마만큼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한 말로 풍성하게 변호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점잖지 못한 방법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내용이 충실한 대답을 하겠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한 부록으로 첨가하시면서 세례를 주는 일은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천하 만민에게 보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목적은 그들이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잃어버렸던 사람들을 각지에서 그의 나라로 모으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물론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그 후에, 이런 사람들이 배운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첨부하시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부언하셨다(막 16:16). 이때 하신 설교에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한 마디라도 있었는가?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형식의 논법인가? 장성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믿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는 논법을 쓴다.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복음을 가르치라는 말씀밖에 이 구절에서 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아세례를 막는 장벽을 쌓을 수 있으면, 어디 쌓아 보라.

29. 예수님은 성년자의 세례의 원형이시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를 장님이라도 볼 수 있도록 나는 명백한 비교를 사용하여 그것을 폭로하겠다. 일하는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사도가 말한 것을 구실로 삼아(살후 3:10), 유아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에게 침을 뱉어도 당연하지 않은가? 왜 일정한 종류와 일정한 연령층의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을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우에서 우리의 논적들의 논법이 더 능숙하다고 할 수 없다. 어른들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을 그들은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성숙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정한 원칙에 이 연령층을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예도 그들의 입장을 전혀 돕지 않는다.2373) 그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서른 이후였다(눅 3:23, 마 3:13). 이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가르침으로 세례에 든든한 기초를 주려고 하셨다. 요한이 앞서 놓은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교훈으로 세례를 확립하려고 하셨을 때, 그 제정하시는 일에 더욱 큰 권위를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몸으로 그 제도를 거룩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즉, 자기가 가르치기 시작하신 때에 실천하셨다.2374) 요컨대 그들은 이 구절에서 세례는 복음 선포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밖에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서른 살로 정하는 것이 좋다면, 그들은 왜 이대로 행하지 않고 그들이 보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세례를 받는가?

이 나이를 고집한 그들의 한 교사인 세르베투스까지도 스물 한 살이 되기 전에 벌써 예언자라고 자랑하기 시작했다.2375) 마치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전에 교회의 교사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사람을 신용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30. 세례와 성만찬

더욱이 그들의 항의는 계속된다.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즉 세례를 허락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2376) 마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큰 차이점을 가르치지 않은 듯이 말이다. 사실 고대 교회에서는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은 키프리아누스와 어거스틴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2377)그러나 다행히 이 관습은 폐지되었다. 세례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일종의 입문식이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한다는 표징이며 중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그러나 성만찬은 유아기를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다.

이 구별은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주께서 일정한 연령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성만찬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지 않고, 다만 주의 몸과 피를 분간하며 자기의 양심을 검토하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그 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하신다. 각각 자기를 검토하고 반성한 마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시라고 한 바울의 교훈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고전 11:28) 그러므로 우선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유아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다(고전 11:29).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하심을 바르게 분변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유아들에게 영양분 있는 음식을 주지 않고 독을 주려고 하겠는가?2378)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의 명령은 무슨 뜻인가?(눅 22:19, 고전 11:25)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사도가 주의 말씀에 의해서 명령한 것은 무슨 뜻인가?(고전 11:26) 유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때 이 일을 기억하라고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가? 유아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힘과 유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선포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례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하나도 지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표징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구약에 있는 비슷한 표징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런 차이를 보았다. 세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할례는 유아들에게 행하라고 하셨다(창 17:12). 그러나 성만찬으로 대체된 유월절에는 아무 손님이나 무분별하게 참가시키지 않고, 그 뜻을 물을 만한 나이가 된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먹을 수 있었다(출 12:26). 이 사람들에게 건전한 지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렇게 분명한 일을 보지 못하겠는가?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과 결론. 31-32)

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사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독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나 역시 괴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가 주장하는 이유들을 간단히 처리할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재세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자가 아닌 실로 그 족속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서 그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가짜 이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상징들은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들을 또는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2379)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다. 세례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인데 세례의 완전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우리가 일생 동안 한 걸음씩 계속적으로 전진해서 마침내 완전성에 도달할 것을 요망하는데, 첫날에 사람에게서 완전성을 찾는 것은 미련한 생각이다.2380)

2.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는 것을 기념하라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해낸 것은 논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그가 세례에 적용하는 말은, 각각 "자기를 살피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1:28) 알려 주는 것과 같이 성만찬에 관련시켜야만 정당하다. 세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없다. 그러므로 아직 어려서 자기반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도 좋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3. 그는 셋째 항의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여전히 죽음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요 3:36), 믿을 힘이 없는 유아들은 자기가 받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아담의 후손 전체가 빠져 있는 전반적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복음을 멸시하고 자기들에게 제시된 은혜를 교만하고 완강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고하신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은 모두 아담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된다는 반대 논법을 제출한다. 따라서 유아들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므로(마 19:15, 막 10:16) 그들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성령으로 나는 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요 3:8 참조)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성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데 따라 복종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씀을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짓이다.

4. 그의 넷째 항의는, 물질적인 것이 먼저 오기 때문에(고전 15:46) 영적인 세례를 위해서는 더 나이를 먹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육으로 난아담의 후손이 모두 모태에서부터 정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즉시 대책을 마련하시지 못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해를 지정하셨다는 생각을 세르베투스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울이 확언하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녀도 본성대로 한다면 혹 멸망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다(고전 7:14).

5. 다음 세르베투스의 비유에서, 다윗이 시온 성에 올라갈 때에 장님과 절뚝발이들이 아닌 강건한 군인들을 데리고 갔다고(삼하 5:8) 한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소경들과 저는 사람들을 하늘잔치에 초대하셨다는 비유를 인용한다면(눅 14:21) 세르베투스는 이 난문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또 나는 절뚝발이들과 불구자들이 이전에 다윗과 함께 일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에, 순전한 거짓말로 꾸며낸 이 논리를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6. 그는 또 다른 비유를 말한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였지(마 4:19) 유아들을 낚는 어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복음의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슨 뜻이냐고(마 13:47) 반문한다. 그러나 나는 비유 놀이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사도들이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을 때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라는 명령은 결코 받은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또 나는 아직도 알고 싶은 일이 있다. 복음서 기자는 그들을(인간)이라고 부르는데(마 4:19, 이 말은 예외 없이 인류 전체를 포함한다), 왜 세르베투스는 유아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가?

7. 그의 일곱째 항의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고전 2:13-14) 영적이 아닌 유아들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바울의 말을 사악하게 곡해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울은 교리에 대해서 말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의 허망한 지혜를 너무도 자랑하므로 바울은 아직도 하늘 교리의 초보를 배워야 하는 그들의 우매함을 책망한다. 누가 이 말을 근거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육에서 난 유아들을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선택하셔서 자신에게 성별하시지 않는가?

8. 그는 그들이 새로운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는 영적인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반박하는데 여기에 대한대답은 어렵지 않다. 즉, 유아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양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을 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는 선택되었다는 상징만 있으면 그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만찬에 관해서 명백하게 요구하신 자기 성찰을 그들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9.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을 성찬에 초대하신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기념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허락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안아 주시기까지 한 유아들은 장성할 때까지 특이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외인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사람이 나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해괴한 일이라고 항의한다. 나는 대답한다. 영혼은 성찬을 외형적으로 먹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음식을 받으며, 따라서 유아들은 상징을 받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음식이 되신다. 그러나 세례는 경우가 다르다. 세례에 의해서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 그들 앞에 열릴 뿐이다.

10. 세르베투스는 다시, 착한 관리인은 적합한 때에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준다고(마 24:45) 항의한다. 나는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는 어떤 표준으로 우리가 세례 받을 때를 결정하며 유아기는 세례 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그는 주께서 밭이 희어지는 동안에 속히 추수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고 첨가한다(요 4:3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사도들이 자기들이 수고한 목전의 결실을 보고 더욱 분발해서 전도하라고 하신 것뿐이다. 누가 이 말씀에서 추수 때만이 세례에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11. 그의 열한 번째 논거는 초대 교회에서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이다(행 11:26).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가 부분에서 전체를 추론하는 서툰 논법을 보았다. 제자라고 한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이미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모세의 제자가 된 것과 같다. 그러나 올바른 논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확언하신 유아들을 외인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것이다.

12. 세르베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이지만 유아들은 성찬에 참가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만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원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안으셨다는 것은(마 19:13-15, 막 10:13-16, 눅 18:15-17) 그들을 택하셨다는 진정한 표였다.2381) 이 선택에 의해서 유아들은 어른들과 연합되었으며, 일시 성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라는 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은(눅 23:40-43) 성찬에 참가한 일이 없었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형제가 될 수 있었다.

13. 다음에 그는 양자의 영에(롬 8:15)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없으며, 양자의 영은 오직 듣고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라고(갈 3:2) 첨가한다. 나는 대답한다. 그는 항상 그릇된 논법으로2382) 돌아간다. 여기서도 어른들에 대해서만 한 말을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전후를 전도한다. 거기서(롬 10:17, 갈 3:5)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보통 방법은 자기가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 성실한 교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직무와 수고를 통해서 자신의 손을 뻗치심으로써 택하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을 논거로 한 법칙을 세워, 하나님께서 다른 비밀한 방법으로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시는 것을 감히 금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14. 그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항의한다(행 10:44-48).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예로 일반적 원칙을 연역해 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시와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보면(행 8:27-28, 8:12), 주께서는 다른 순서에 따라 세례가 성령의 은사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15. 열다섯째 이유는 어리석다는 정도를 넘는다. 그는, 우리는 중생에 의해서 신들이 되지만 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며(요 10:34-35, 시 82:6 참조)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자들에게 신성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의 한 가지 망상이지만 여기는 그것을 검토할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시편의 한 절을 곡해해서 이런 이질적인 뜻으로 바꾼다는 것은 극히 파렴치한 행동이다. 예언자가 왕들과 집권자들을 "신들" 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직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능숙한 해석가는 특수한 통치 명령에 관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복음의 교리에 적용해서는 유아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 한다.

16. 또 그는 유아들은 말씀에 의해서 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한다. 복음의 교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참으로 적합하다면 우리를 중생케 하는 썩지 않는 씨이지만(벧전 1:23), 우리가 아직 배울 나이가 아닌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독자적인 중생 예정표에 따르신다.

17. 후에 세르베투스는 다시 비유로 돌아가서, 율법에서 갓 난 양과 갓 난 암염소는 희생으로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적인 해석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나는 곧 반박할 수 있다. 즉, 초태생은 모두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고(출 13:2) 양이나 염소나 일 년 된 어린 수컷을 희생물로 사용했다(출 12:5). 이것을 보면, 우리는 결코 강건한 성인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최근에 태어난 아직 어린것을 희생으로 택하신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8. 그뿐 아니라 요한이 준비한 사람들만 그리스도에게 올 수 있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요한의 직무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이 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안아 주시고 축복하신 어린이들은(마 19:13-15, 막 10:13-16, 눅 18:15-17) 요한에게서 준비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 자, 이제 세르베투스와 그의 그릇된 원칙은 물러가도록 하라!

19. 드디어 그는 트리스메기스투스와2383) 여자 점장이들에게2384) 호소해서, 거룩한 씻음은 어른들에게만 적합하다는 증거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교도들의 모독적인 의식에 일치시키려 하며 트리스메기스투스의 뜻에 따라서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얼마나 존경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존중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에게 성별하시며, 비록 어린 나이로 인해 그 효력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한 상징에 의해 그들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속죄 의식에서 무엇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례에 적용함으로써 할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불변의 법칙을 변경하는 것을 우리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 끝으로, 그는 만일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면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이 한 웃음거리로 세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해서 하나님과 논쟁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아직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이 보통 할례를 받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할례를 우롱거리로 집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파괴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마치 발광한 듯이 가장 우매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끌어다가 자기들의 오류를 변호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고집을 이런 불합리한 생각으로 처벌하신다. 나는 세르베투스가 그의 재세례파 아우들을 지지하는 힘이 약했다는 것을 밝혔다고 믿는다.

32. 우리의 어린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언쟁과 논쟁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경솔한 짓인가를 이제 신중한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이런 심히 미묘한 수단으로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유아세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신과 영적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경건한 자들로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들의 자녀까지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말씀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후손을 돌보아 주셔서 우리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일에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이처럼 인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시 48:10) 사탄이 이렇게 큰 군대를 동원해서 유아세례를 공격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증거를 우리에게서 빼앗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눈앞에 놓인 약속도 결과적으로 점점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불경건한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나태함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즉시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키는 길을 가르치겠다는 강력한 자극을 느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애를 흐리게 하려는 악의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의 권속, 즉, 교회의 일원으로 가입시키시기 때문이다.

제 17 장  그리스도의 성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2385)

(주의 만찬은 빵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영적 양식을 제공한다. 1-3)

1. 표징과 본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고 종이 아닌 아들로 여기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일을 걱정하시는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를 평생 먹여 주신다.2386) 또 그것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이 계속되는 너그러움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도록 담보물을 주셨다. 즉, 독생자의 손을 거쳐 그의 교회에 행한 성례 영적 잔치를 주시고 이 잔치에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생명을 주는 떡임을 확증하시며, 이 떡을 우리의 영혼이 먹음으로써 진정하고 복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요 6:51).

이 숭고한 신비를 아는 것은 매우 필요하며, 이 신비는 아주 위대한 것이므로 우리는 주도면밀하게 설명을 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사탄은 이 한량없는 보화를 교회에서 빼앗으려고 오래 전부터 검은 구름을 퍼뜨렸으며, 그 후에 이 광명을 덮어 버리기 위해서 논쟁과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여 이 거룩한 음식을 맛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도 똑같은 술책을 사용했다.2387) 그러므로 나는 우선 문제를 무지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한 다음에 사탄이 세상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사용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겠다.

첫째, 표징은 떡과 포도주다. 이 표징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서 우리를 중생시키신 후에 교회라는 그의 공동체에 접붙이시며 택함을 받은 그의 권속으로 만드신다. 그와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서 생명을 가지게 하시고, 우리의 그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시기 위해서 끊임없이 양식을 주심으로써 지혜 있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신다.

그런데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힘을 회복하며2388) 하늘 영생에 도달할 때까지 몇 번이고 기운을 얻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신자가 은밀하게 연합된다는 이 신비는 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2389) 우리의 적은 능력에 가장 적당한 보이는 표징으로 그 신비의 형상을 보여 주신다. 참으로 담보물과 표를 주심으로써2390) 우리가 마치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하게 알게 하신다. 이 잘 알 수 있는 비교는 아무리 미련한 마음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양식을 받는다. 이제 우리는 이 신비스러운 복의2391) 목적을 알 수 있다. 곧 주의 몸이 이미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면서, 우리는 지금 먹을 수 있으며 먹음으로써 우리는 그 독특한 희생의 역사를 우리 속에서 느끼고 또 우리의 영구적인 음료가 되기 위해서 주의 피가 이미 우리를 위해서 흘려졌다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키시려는 것이다. 거기에 첨가된 약속의 말씀도 이 뜻을 알린다.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전 11:24, 마 26:26, 막 14:22, 눅 22:19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미 희생된 그 몸을 받아먹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명령의 의도는, 우리 자신이 그 몸을 먹는 것을 인해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우리 안에 효력을 나타내리란 것을 확실하게 판단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다(눅 22:20, 고전 11:25). 이것은 우리가 맛보도록 그 거룩한 피를 우리에게 제공하실 때마다(그 피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한) 그가 이미 자신의 피를 흘려 확인하신 그 언약을 얼마간 새롭게 하시고 또 존속시키시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의 특별한 결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경건한 영혼들은 이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증거를 얻는다. 그 결과 우리는 그가 상속하신 영생이 우리의 것이라는 확신을 감히 가질 수 있다. 또 그가 이미 들어가신 천국은 그에게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서도 분리할 수 없으며, 그가 우리의 죄를 마치 자신의 죄인 양 지시고 우리에게서 그 책임을 면제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정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이다.2392) 즉, 우리와 함께 인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자신이 땅에 내려오심으로써 우리가 하늘로 올라갈 길을 준비하셨으며, 우리의 죽을 생명을 가지심으로써 우리에게 그의 영생을 주셨고, 우리의 무력함을 받으시고 그의 힘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빈곤을 받으시고 그의 풍부하심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또 우리를 억압하던 우리의 죄의 짐을 스스로 지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

3.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우리는 이 성례에서 모든 일에 대한 완전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목전에 계시며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해야 한다.2393) 주의 말씀은 거짓이 없으며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받아 먹으라. 그리고 마셔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마 26:26-28과 고전 11:24의 융합, 막 14:22-24, 눅 22:19-20 참조). 받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것이 우리 것임을 알리며, 먹으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우리와 일체가 됨을 알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의 몸을 주시며 피를 흘리신다고 엄히 말씀하심으로써 그 두 가지가 그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몸과 피를 취하셨다가 다시 내놓으신 것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이 성례의 강한 힘이 그 힘의 거의 전부가"너희를 위하는" 또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말씀에 있다는 것을 신중하게 관찰해야 한다. 주의 몸과 피를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서 주시지 않았다면2394) 지금 그 몸과 피를 분배할지라도 우리에게 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로 주의 몸과 피를 상징하게 하셔서 그것이 우리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다.

그래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2395) 일종의 유추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인도된다.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떡을 받을 때2396) 우리는 곧 비교되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곧, 떡이 우리의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피의 상징으로서 포도주가 제시되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포도주가 신체에 주는 유익을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비슷한 영적 유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영양을 주며 유쾌하게 하고 힘을 주며 기쁘게 하는 것이다.2397) 저 가장 거룩하신 몸을 주시며 피를 홀리신 사실에서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것을 받는가를 잘 생각한다면, 떡과 포도주의 여러 가지 성질은 유추해서 그것을 우리가 받을 때에 얻는 일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때에 성만찬으로 말미암아 보장된 약속 이것은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느끼는 신비이다. 4-7)

4. 성만찬이 주는 약속의 의미

그러므로 성례에서는 더 이상의 생각이 없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그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다(요 6:48,50).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십자가에서 그 약속이 실천되며 모든 점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효력을 산 체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또 구원에 이르도록 먹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실 때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름을 성례에서 빌려 오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2398)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으로 주셨고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죽을 성질을 공유하게 되심으로써 그의 신적인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실 때, 또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가 받을 저주를 자기가 받으시고 자신의 축복으로 우리를 가득하게 하실 때, 스스로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삼켜 없애실 때(벧전 3:22, 고전 15:54 참조) 그리고 부활하셔서 그가 입으셨던 우리의 이 썩을 육을 영광과 썩지 않음으로 입히실 때에(고전 15:53-54 참조) 그는 자신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5. 믿음으로 참예자가 되는 법2399)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것은 복음에 의해서 할 수 있으나 성찬을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할 수 있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 그러므로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하며 우리가 떡을 끊임없이 먹을 때에 맛과 향기를 느끼게 하고 그 떡의 힘을 느끼게 만든다.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떡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나셨다가 죽지 않으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떡이 아니실 것이다. 그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효력과 결과가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지금 우리를 위해서 생명의 떡이 되실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께서는 아름답게 표현하셨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51). 물론 이 말씀의 뜻은 그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위한 영적 생명의 양식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몸은 죽음을 당하시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과거에 그가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몸을 버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그의 몸을 떡으로서 주셨다. 지금 그는 십자가에 달린 자신의 몸을 복음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어 먹게 하시며, 성찬의 거룩한 신비로 자신을 주시는 것을 확인하시고, 외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내면적으로 성취하심으로써 매일 그의 몸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과오를 경계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표징을 경시함으로써 신비와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는 표징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표징을 지나치게 찬양함으로써2400) 신비 자체를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며 이 떡에서 신자들은 영생을 위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은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저 고귀한 설교에서 자기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들에게 권고하신 말씀은(요 6:26이하) 더 명확하고 더 숭고한 무엇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께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참여하는 것을 "먹는다" 또 "마신다"는 말로 표현하셨다. 몸에 영양을 주려면 떡을 보는 것보다 먹어야 하는 것과 같이, 영혼도 그리스도의 힘으로 영적 생명을 얻으려면 그에게 진실로 또 깊이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참으로 나는 이것은 믿음으로 먹는 것에 불과하며 다른 먹는 법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과 그들이 하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 즉, 그들에게는 먹는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뿐이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에 의해 우리의 살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2401) 그의 살을 먹으며 이렇게 먹는 것은 믿음의 결과라고 말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먹음이 곧 믿음이요 나에게는 먹음이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로는 사소한 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사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라고 가르치지만(엡 3:17), 아무도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시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모두가 사도의 말을 믿음의 현저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믿음에 의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심으로써(요 6:48), 구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믿음에 의존할 뿐 아니라 떡을 먹으면 몸에 생기를 주는 것과 같이, 참으로 그를 먹음으로써 그의 생명이 우리 속에 옮겨져서 우리의 생명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6. 이 일에 관한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의 생각

그리고(그들이 수호자로 여겨서 인용하는) 어거스틴은, 우리가 믿음으로 먹는다고 했을 때에 먹음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이라고 한다. 나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널리 나타나신 분으로서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와 결합시켜 그는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분으로서 받아들인다고 첨부한다. 나는 저 표현을 전적으로 물리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뜻을 정의할 때 그것이 완전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나는 다른 곳에서 어거스틴이 이 표현을 자주 사용한 것을 본다. 예컨대 그는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On Christian Doctrine)라는 책의 제 3편에서 말한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라는 어구는(요 6:53) 하나의 비유이다. 즉, 우리는 주의 수난에 참여하며, 그의 살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상했다는 사실을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또 베드로의 설교로 회개한 3,000명은(행 2:41) 그들이 잔인하게 흘린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마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주 많은 다른 구절들에서는, 믿음의 유익을 칭송하며 우리의 몸이 떡을 먹고 기운을 얻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기운을 얻는다고 한다.2402)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에 의해서만 아니라 그의 몸 자체에 의해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만드신다"2403)고 하였다. 그의 말은, 이런 선은 믿음 이외의 근원에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단순한 상상으로 생각할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할뿐이다.

성찬을 외형적인 고백의 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금 말하지 않겠다. 성례를 총괄적으로 다룰 때2404) 이미 그들의 과오를 충분히 논박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독자들은 잔을 "피로 세우는" 언약이라고 부르실 때에(눅 22:20) 믿음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속이 표현된다는 점을 이해하기를 바란다. 이 약속을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찬을 바르게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7. 생각과 말로 다 묘사할 수 없다

더욱이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교제인가를 알리려고 할 때 우리는 성령에 참여할 뿐이라고 하며 살과 피는 말하지 않는다.2405) 나는 이 사람들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살은 참된 양식이며 피는 참된 음료요(요 6:55),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고(요 6:53) 한 것과, 또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이 그들의 좁은 묘사의 범위를 초월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우선 그들의 묘사를 간단명료하게 처리하고 그 다음에 그들과 반대로 과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과오를 논하겠다. 이 엉터리 박사들은 조잡한 생각으로 먹고 마시는 데 대해서 어리석은 방법을 고안해 내는 동시에 그리스도에게서 그 자신의 살을 벗기고 그를 하나의 환상으로2406)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들과 긴 논쟁을 하게 되겠으나 이것은 이 위대한 신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할 것이며, 나의 지성으로는 이 신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이 신비의 숭고함을 나의 유치한 척도로2407) 헤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오히려 나는, 독자들이 이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정신적 관심을 국한시키지 않고 내가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이 올라가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모든 것을 말하려고 애쓴 후에도 이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말한 것이 아직도 적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지성은 나의 혀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지성조차 문제의 위대성에 정복당하고 압도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 앞에서는 오직 경탄할 수밖에 없으며 지성도 생각을 할 수가 없고 혀도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비록 그럴지라도 나는 어떻게든지 나의 견해를 요약하겠다. 그것은 바른 견해라고 믿으며 경건한 사람들의 찬성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생명을 주는 이 교제는 성령께서 실현시키신다. 8-10)

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육신을 거처로 삼으신다

먼저,2408)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의 말씀, 즉,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배운다(요 1:1). 즉, 생명의 원천이었으며 만물은 항상 이 원천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말씀"(요일 1:1) 혹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기록하여(요 1:4),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 속에까지 흘러들어 그들에게 호흡하며 살아가는 힘을 불어넣으셨다고 한다.

또 후에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을 입으시고 우리가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지게 하신 때에만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첨부한다(요일 1:2). 그는 이미 피조물들에게 그의 힘을 부어 주셨지만, 사람은(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생명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어) 도처에서 사망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영생의 소망을 받으려면 말씀과의 교제에 영접될 필요가 있다. 우리와 거리가 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이 충만하다고 들을지라도 우리의 안과 밖에 죽음만이 보인다면 우리는 얼마만큼의 확신과 안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명의 그 원천이 우리의 육신 안에 거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서 멀리 숨어 계시지 않고 우리가 그에게 동참하리란 것을 알려 주신다. 그는 또 그가 거처로 삼으신 우리의 육에 생명을 주시며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영생의 양식을 얻게 하신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요 6:48,51)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그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생명이실 뿐 아니라 내려오심으로써 그가 취하신 육신에 그의 힘을 부으셔서 그곳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와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러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그의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으로 음료이며(요 6:55), 신자들은 이 양식에서 영양을 얻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육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 경건한 자들에게 특별한 위로가 된다. 그것은 이와 같이 그들이 쉽게 생명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그들 앞에 생명이 값없이 제공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생명을 받아들이도록 가슴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9. 그리스도의 몸이 생명을 준다는 의미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 그 자체에 우리를 살리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처음 상태에서는 죽을 성질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또 영생을 입은 지금도 그 자체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는 우리에게 전달할 생명이 충만하므로 "생명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나는 키릴루스와 함께,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아버지 앞에서 가지셨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때에 가지신 은사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인성에도 생명이 충만해서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한 사람은 동시에 생명에 참여한다고 가르치신다.2409)

우리는 잘 아는 예로 이 일의 성격을 설명할 수 있다. 물은 샘에서 마시며 샘에서 긷고 수로를 통해서 밭에 그 물을 대지만, 그 자체에서 흘러 나와 이렇게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근원이 있어서 그 근원이 끊임없이 물을 제공한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살은 다함이 없는 풍부한 샘과 같아서, 하나님께로부터 자신 안으로 흘러오는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이제 하늘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사도도 이런 뜻으로 말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그러나 그는 "머리"시며(엡 4:15),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연락하고 상합하여‥‥‥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 4:16)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5).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영과 몸으로 우리와 전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면 모든 일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결합되는 그 긴밀한 교제에 바울은 더욱 훌륭한 이름을 붙여 "우리는 그 몸의 뼈와 살의 지체"라고 했다(엡 5:30). 끝으로, 모든 말보다도 더 위대한 이 일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그는 강화를 "이 비밀이 크도다."2410)라는(엡 5:32) 감탄문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바울은 너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설명하는 것보다는 경탄하는 편을 택했는데 그런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심히 미친 짓이라고 하겠다.

10. 성찬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

요약하면, 떡과 포도주가 신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양식으로 삼는다. 영혼이 그리스도에게서 참으로 영양을 얻어야만 그 표징의 유추가 적용된다. 또 이 일이 있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우리가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기운을 얻어야 한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우매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즉,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2411)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그의 생명을 우리의 뼈와 골수에까지 침투시키듯이 우리 속에 그의 생명을 부어 주신다는 것을 성찬에서도 증거하시고 인을 치신다. 성찬에서 그는 무익하고 허무한 표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약속하신 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실현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또 영적 잔치에 참석하는2412) 모든 사람들에게 성찬이 의미하는 실재를 제시하시며 보여 주신다. 비록 신자들만이 그 실재를 받아 유익을 얻지만 그들은 이 크고 너그러운 은혜를 진정한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라고 말한다(고전 10:16).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며, 의미하는 실체의 이름을 표징에 준 것이라고2413) 항의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나는 물론 떡을 떼는 것이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본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도 우리는 상징을 보여줌으로써 본체도 보인다고 올바른 추론을 한다.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신다고 말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허망한 표징을 제시하신다고는 감히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떡을 떼는 것으로 그의 몸에 참여하는 것을 참으로 표현하신다면, 그가 참으로 그의 몸을 제시하며 보이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 손에 그의 몸의 상징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 몸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이는 표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는 확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그 몸 자체도 받았다는 것을 똑같이 확신해야 한다.

(외형적 표징과 보이지 않는 실재와의 관계를 스콜라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잘못 표현했다 그리고 화체설도 하나의 예다. 11-15)

11. 성례의 의미와 본체와 효과

그러므로(교회 안에서 항상 인정되었고 지금도 건전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가르치는 대로) 나는 성찬의 거룩한 신비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물질적인 표징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우리의 미약한 능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영적 진상으로서 이것은 동시에 그 상징들에 의해서 표현되며 전시된다.2414)

이 진상의 성격을 잘 아는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에 나는 대개 세 가지 것을 지적한다. 즉, 의미와 의미에 의존하는 본체와 이 두 가지에서 나타나는 힘 또는 효과의 세 가지다. 의미는 약속에 포함되었으며 약속은 표징에 내포되어 있다. 본체 또는 실체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시다. 효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

이 모든 것은 믿음과 관련이 있으나,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이해력과 상상력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하는 궤변을 인정하지 않는다.2415) 약속이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외형과 단순한 지식에서 머물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에게 참여하며 즐기라는 것이다. 진실로 나는, 신자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참여하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속과 의를 가지며 그의 죽음에서 생명을 가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은혜들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에서는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나는 말한다. 즉, 참으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고 모든 순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의해서 제시된다. 무슨 까닭인가? 첫째는 우리가 그와 한 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그의 본체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능력도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적으로 임재하는가

이제 나는 미신이 고안해 낸 엉뚱한 혼합물을 검토하겠다. 여기서 사탄은 신자들의 마음을 하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리스도가 떡이라는 요소에 고착되신 것같이 상상하는 사악한 오류를 그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교묘한 장난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심에 대해서 로마 교황청의 재주꾼들이 조작한 임재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에 임재해 있어서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으며 삼킬 수 있다고 한다. 교황 니콜라스는 베렌가리우스에게 그의 회개의 증거로서 이런 형태의 자설을 취소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그 사용된 말이 너무도 괴상했기 때문에, 주해서(Gloss)의 저자는 독자들이 현명한 경계심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베렌가리우스의 것보다 더 악한 이단설을 거기에서 연역해 낼 위험성이 있다고 외쳤다.2416) 그래서 피터 롬바르드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려고 굉장히 애를 쓰면 서도 나중에는 다른 생각으로 기울어졌다.2417)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인간의 몸에 공통된 일반적인 특색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으며,(이미 하늘에 받아들인바 되어)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돌아오실 때까지(행 3:21) 하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끌어다가 썩을 요소들 밑에 둔다거나 몸이 어느 곳에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합당치 못한 행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2418)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몸과 영과 영혼이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결의 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이 줄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수로와 같아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성질과 소유는 수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2419) 우리는 태양이 지구 위에 광선을 부음으로써 본질의 일부를 지상에 던져 지구의 소산물이 나게 하고 기르며 자라게 하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어째서 태양에 비교했을 때 그리스도의 영은 그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빛이 적을 것인가?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일을 말할 때 그 힘을 전적으로 성령에 관련시킨다. 한 구절이 여러 구절을 넉넉히 대표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의 영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롬 8:9).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일,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가하는 일을 배제하지 않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소유하며 우리 안에 모시게 하신다고 가르친다.2420)

13. 스콜라 학자들의 오류 : 떡을 하나님으로 오인한다

스콜라 학자들은 이런 야만적인 불경건에 공포를 느껴서 더 신중하게 말을 한다.2421) 그러나 그들도 기만적인 궤변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제한된 또는 육체적인 모양으로 포함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2422) 그러나 다음에 자기들도 이해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양식을 생각해 낸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그리스도는 그들이 말하는 "떡의 형태"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떡의 본질이 그리스도로 변한다고 할 때 거기 남아 있다고 하는 횐 빛에 그 본질을 결부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리스도는 성례에 포함되었으면서도 하늘에 여전히 계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관련성의 임재가 아닌 임재를 주장하지 않는다.2423)

그들은 자기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말을 인용해 오지만 그들 전체의 공통된 목적은, 전에는 떡이던 것이 성별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떡의 외형 밑에 숨어 계신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또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분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롬바르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체가 보이는 것이며 성별 후에 떡의 형태 아래 숨어 있으며 덮여 있다."2424) 이와 같이 떡의 형상은 우리의 눈이 살을 볼 수 없게 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런 말로 어떤 함정을 파려고 하는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많은 추측을 할 필요가 없다. 사태 자체가 분명하게 알려 준다. 과거 수백 년 동안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도자들까지 얼마나 큰 미신에 붙잡혀 있었는가 하는 것과 지금도 교황 제도하의 교회 지도자들이 미신에 잡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붙어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진정한 믿음인데도, 그들은 거기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임재를 조작하고, 그런 임재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교묘한 궤변으로 인하여 떡이 하나님으로 생각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화체설

여기에서 저 가공적인 화체설이 생겼고 그들은 지금 다른 신조보다 이 사상을 위해서 더욱 맹렬하게 싸운다.2425) 이 공간적 임재를 처음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의 본질과 혼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떡이 몸으로 변한다는 허구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떡이 재료가 되어 몸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형상 밑에 숨기 위해서 떡의 본질을 없애버리신다는 것이다.2426)

그러나 그들이 성경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의 일치한 의견까지2427) 멸시하고 저 괴물을 나타낼 정도로 무지하고 우매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는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가끔 "변화"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표징의 본질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신비에 바친 떡은 보통 떡과는 훨씬 다르며 지금은 떡이 아닌 무엇이라는2428) 것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성찬이 지상적인 부분과 천상적인 부분으로 성립된다고 도처에서 분명하게 선언하며 지상적인 부분은 부정할 수 없는 떡과 포도주라고 해석했다.

우리의 논적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그들의 교리를 확인하기 위한 지지를 고대에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주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반대하기 위해서 고대를 내세운다. 화체설이 대두된 것은 그다지 오래지 않다. 더욱 순수한 교리가 아직 강성하던 더 좋은 시대뿐만 아니라 순수성이 다소 부패했던 시대에도2429) 화체설은 알려지지 않았다.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이 떡과 포도주란 것을 분명한 말로 인정하지 않는 고대 저술가는 한 사람도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신비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간혹 여러 가지 칭호로 그 떡과 포도주를 구별한다. 성별 할 때 비밀한 변화가 생겨서 이제는 떡과 포도주가 아닌 무엇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는 것은 내가 방금 말한 바와 같다.2430)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물질적인 요소들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고, 이제 그 요소들은 단순히 배에 들여보내기 위한 보통 음식과는 종류가 다른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뜻으로 말한다. 요소들에서 영혼을 위한 영적 양식과 음료가 제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변화가 있다면 한 가지 물건이 다른 물건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전과 다른 것이 된다는 뜻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동의한다. 만일 그들의 상상에 일치시키려는 것이라면 나는 세례에서는 어떤 변화를 느끼는지를 문의 할 것이다. 이는 교부들도 여기서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썩을 요소에서 영혼을 영적으로 씻는 일이 생긴다고 말하면서도 물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은 주의 만찬에서 "이것은 내 몸이라"(마 26: 26)고 하신 것과 같은 일이 세례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는 뜻이 분명한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는 말에 있는데, 이 변화라는 말의 뜻은 성찬에서나 세례에서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궤변으로2431) 자기의 공허함만 나타내는 자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그러나 성찬에서 표현되는 진상에 대한 살아 있는 형상이 죄적인 표징에 없다면 성찬의 의미는 부적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도는 자기의 살이 양식이 된다는 것을 외형적인 상징으로 증거하시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진정한 떡이 아닌 떡의 빈 외형만을 내주셨다면, 우리를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추 또는 비교는 어디에 있는가? 엄밀하게 말해서, 의미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의 형태를 먹는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세례에서 물의 형상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는 씻긴다는 확실한 보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런 거짓된 외형은 우리를 주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상의 표징이 하늘의 것과 동일하지 않으면 성례의 본질은 말살된다. 따라서 만일 진정한 떡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비의 진리는 우리에게서 소멸된다. 다시금 나는 반복한다.2432) 성찬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약속, 즉,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약속(요 6:51)의 볼 수 있는 증거에 불과하므로, 보이는 떡은 영적인 떡을 나타내는 중개물의 직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려고 주시는 모든 은혜를 잊어버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떡의 외형만 있고 떡의 진정한 본성은 남아 있지 않는다면, 바울은 왜 우리가 모두 한 떡에 참여하는 한 떡과 한 몸이라고 추론했는가?(고전 10:17)

15. 화체설의 근거와 이론

그들이 먼저 오류에 미혹되지만 않았더라면 사탄의 간계에 속는 추태를 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오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싸여 사람의 입으로부터 위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공상을 하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었는데, 즉, 그들 사이에서는 성별은 요술의 주문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떡이 성물이 된다는 원칙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마치 세례의 물은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이 첨가될 때에 즉시 우리를 위해서 전과 다른 것으로 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비슷한 다른 성물의 예를 보면 이 점이 더 명백하게 나타날 것이다.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난 물은(출17:6) 성찬의 포도주가 우리에게 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을 조상들에게 표시하는 표이며 표징이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고전 10:4). 그리고 그곳은 짐을 나르는 짐승들과 가축도 물을 마시는 곳이었다. 예를 통해서, 지상적인 요소들을 영적으로 사용할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 요소들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그 요소들이 약속을 확인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자주 반복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까지 들어 올리려고 계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오라고 부르기는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떡 밑에 숨어 보이시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완고한 생각으로2433)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무한한 공간을 뛰어넘어 하늘 저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자연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더 유해한 대책으로 시정하려고 한다. 지상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들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 접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요구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두스 시대에 이미 더 조잡한 표현이 사용되었으나 화체설은 아직 인정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어느 시대를 보아도 이 신비에서는 영적인 실재가 떡과 포도주에 결합되었다고 모든 사람이 말했다.2434)

용어에 대해서 그들은 날카로운 대답을 하노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문제된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세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해서 비록 뱀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전과 같이 지팡이였다고 한다(출 4:2-4, 7:10). 그러므로 떡은 새로운 본질이 되지만 오용에2435) 의해서 눈에 나타나 보이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며 이것을 합당치 못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 찬란한 이적과 그들이 조작한 어떤 사람도 볼 수 없는 환상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 또는 근사점을 발견하는가? 마술사들은 술법을 사용하여 자기들도 자연 질서를 초월한 신적 능력으로 피조물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애굽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모세가 나서서 그들의 속임수를 들춰내고 그의 지팡이가 다른 모든 지팡이를 삼키게 함으로써 그 무엇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이 자기편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출 7:12). 그러나 그때의 변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현재의 경우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조금 지나서 지팡이는 다시 본래의 형태로 돌아왔다(출 7:15). 그뿐 아니라 그 일시적인 변화가 본질적으로 생겼는지 혹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마술사들의 지팡이를 언급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예언자는 그것을 뱀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변화가 아닌 것을 변화라고 암시하는 것같이 될 것을 염려해서였다. 마술사들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속인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2436) 이것과 바울의 말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예컨대 "우리가 떼는 떡"(고전 10:16), "이 떡을 먹으며‥‥‥때마다"(고전 11:26),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행 2:42) 및 기타 유사한 구절들이 있다. 애굽 사람들의 눈이 마술사들의 주문에 속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세의 경우는 사태가 더욱 의아스럽다. 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시고 그 뱀을 다시 지팡이를 만드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천사들에게 육체를 입히셨다가 잠시 후에 다시 벗기시는 것과 같이 쉬웠다. 만일 이 신비의 성격이 같든지 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 그들의 해결책에 그럴 듯한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외형적인 상징의 진정한 본질이 그리스도의 살에 해당되지 않는다면,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이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은 진실하고도 합당한 약속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여전히 확실하다.

그리고 한 가지의 오류는 다른 오류를 생기게 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화체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서의 한 구절을 너무도 어리석게 곡해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말하는 것조차 싫다. 예언자는 그의 떡 속에 나무가 들어 있다고 불평함으로써(렘 11:19) 잔인한 원수들이 그의 떡 맛을 쓰게 만들었다는 뜻을 표시한다.2437) 다윗도 그의 떡이 쓸개로, 그의 음료가 식초로 더럽혀졌다고 비슷한 비유로 한탄한다(시 69:21).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비유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하려고 하며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마치 우리는 그들의 무지를 용서하며 수치를 묻어 줄망정, 예언자의 참 뜻에 반대하는 원수로서 싸움을 계속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치욕을 더해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몸의 편재설을 편협한 문자적 해석이라고 반대하는 이유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영적 친교에 관한 견해를 설명한다. 16-31)

16. 반대론

다른 사람들은 표징과 표시되는 것과의 사이에 유추가 없으면 신비의 진리는 없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성찬의 떡은 참으로 지상적인 썩을 요소의 본질이며, 그 자체 내에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그 밑에 그리스도의 몸이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한다.2438)

만일 그들의 말이, 진상은 표징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근거로 이 신비에서 떡이 제시될 때 몸도 함께 제시되는 것이라는 뜻이라면2439) 나는 강하게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떡 속에 둠으로써 몸의 본성과 반대되는 편재성이 몸에 있다고 하며 또 "떡 밑에"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몸이 떡 밑에 숨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므로, 우리는 숨겨져 있는 궤변을 잠깐 폭로할 필요가 있다. 나는 여기서 문제 전체를 정식으로 논하지 않고 다만 적당한 곳에서2440) 곧 하게 될 논의의 기초만을 제공하고자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이지 않고 무한하며 떡 밑에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내려오셔야만 몸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 올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색깔로 숨기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간적 임재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은 공간적인 결합과 접촉이나 조잡한 형태의 포괄 관계가 아니면 살과 피를 나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적 존재를 부인한다

한번 경솔하게 생각한 오류를 완강하게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가진 일이 있는 유일한 부피는 하늘과 땅만큼 크고 넓다고 자랑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태에서 아기로 나서 자랐으며 십자가에 달렸다가 무덤 속에 계셨는데, 이것은 출생과 사망과 그 밖의 사람으로서의 직책을 다하시기 위해서 일정한 섭리에 따라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또 부활하신 후에 그의 평상시의 육체의 모양으로 보이셨으며(행 1:3, 고전 15:15) 하늘로 올리우셨고(행 1:9, 눅 24:51, 막 16:19) 승천 후 마지막으로 스데반과(행 7:55) 바울에게(행 9:3) 보이셨는데, 이것도 그가 하늘에서 왕이 되신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같은 섭리에 의해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2441) 이것은 마르키온을 지옥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2442) 그리스도의 몸이 이런 상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유령이나 환영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더 교묘한 핑계를 사용한다. 성찬에서 주시는 몸은 영광과 불멸의 몸이며, 따라서 몸이 여러 곳에서 성찬 밑에 포함되어 있거나 어디에도 없거나 또는 아무 형태도 취하지 않더라도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시기 전날에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어떤 종류의 몸이었는가? 잠시 후에 내주시려는 죽을 성질의 몸을 주셨다는 것은 그때 하신 말씀이 증거하지 않는가? 그들은 그가 이미 산상에서 세 제자가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마 17:2) 말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광채를 보이신 것은 제자들에게 영생 불사의 맛을 미리 보이시려는 뜻이었다. 또 그들은 거기서 이중의 몸을 보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영광으로 장식된 그리스도의 몸을 본다. 그러나 처음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분배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맞으며 기운이 다해(사 53:4) 나환자같이 부끄럽게 쓰러질 시간이 임박했었다(사 53:3참조). 그때에는 전혀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한 곳에서는 죽을 것, 낮은 것으로 보였으나 다른 곳에서는 불멸하는 또 영화된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그것은 마르시온에게 큰 창문을 열어 주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들의 견해가 옳다면 같은 일이 매일 생길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상징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고 그들은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2443)그러나 이런 해괴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수치를 전혀 수치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건드리지도 않는 우리를 공격하며 무서운 모욕을 가한다.

18.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들어 올릴 때에 임재를 인식한다

만일 그들이 주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에 고착시키고자 한다면, 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분리될 것이다. 떡은 잔과는 별개로 제시되므로 떡에 붙은 몸은 잔에 있는 피와 나누어질 것이다. 그들은 몸이 떡 속에 있고 피가 잔에 있어서 각각 차지하는 공간에 의해서 떡과 포도주 사이에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므로, 몸과 피가 서로 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감출 도리가 없다.

병재(竝在)에 의해서 피는 몸 안에 있으며 몸은 피 속에 있다고2444) 하는 그들의 상투적인 주장은 전혀 불합리하다. 몸과 피를 포함한 상징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눈과 마음을 가진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가서 그리스도 나라의 영광 속에서 그를 찾는다면, 상징들이 완전하신 그에게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떡이라는 상징 하에 그의 몸을 먹게 되며 포도주라는 상징 하에 그의 피를 따로 마시게 되어 결국에는 그를 완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그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몸으로 승천하셨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즉, 아버지의 권능과 존귀와 영광으로 다스리신다. 이 나라는 공간 가운데 위치가 한정되거나 경계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어디서든지 뜻대로 권능을 행사하시며 아무런 방해도 받으시지 않는다. 권능과 힘으로 자신의 임재를 알리시며 자신의 백성 중에 항상 계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그들 안에 계시고 마치 육체로 계시듯이 그들을 지탱하고 강화하며 살리며 해를 받지 않게 하신다. 요약하면,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며 자신의 영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런 모양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19.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 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2445)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거나 떡 속에 포함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제한해서는 안 된다2446)(이렇게 하게 될 경우 분명히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끝으로, 그의 키를 낮게 하거나 여러 조각을 만들어 동시에 여러 곳에 분배하거나 그가 하늘과 땅에 가득한 무한한 부피를 가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진정한 인성에 배치된다. 우리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제한이 있다. 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를 끌어내려 세상의 썩을 요소들 밑에 두거나 지상의 피조물에 고착시킨다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⑵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돌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무한하다고 하든지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시다고 한다면 이 둘째 제한을 어기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만 제거한다면,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표시되는 바와 같이 주의 몸과 피를 참으로 또 실질적으로 나눠 가지는 일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즉, 신자들은 상상력이나 이해력만으로 받지 않고 다름 아닌 영생을 위한 영양으로서 본체를 즐긴다는 뜻을 표현해야 한다.

사탄의 무서운 마술이 여러 사람의 정신에 착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세상이 견해를 싫어하거나 편견 때문에 변호의 길이 막힐 까닭이 없다. 확실히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모든 점에서 성경과 일치한다. 불합리한 점, 막연한 점, 애매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진정한 경건과 건전한 교훈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거슬리게 하는 것이 전혀 없다. 다만 궤변가들의 무지와 야만성이 교회를 지배한 시대에는 이런 밝은 광명과 계시된 진리가 부당한 압박을 받았다. 지금도 사탄은 말썽꾼들을 통해서 온갖 비방 중상으로 진리의 위엄을 더럽히려고 이 문제에 유달리 애를 쓴다. 따라서 이것을 더욱 신중하게 주장하며 변호할 필요가 있다.

20. 말씀으로 제정하심

그런데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행동 자체를 논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특히 여기에서 가장 그럴 듯한 항의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우리에게 씌우는 부당한 오명을 벗기 위해서 먼저 그 말씀부터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세 복음서 기자와 바울이 기록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가지사 축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마 26:26, 막 14:22, 고전 11:24 참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전 11:24). 잔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막 14:24). 그러나 바울과 누가는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한다(고전 11:25, 눅 22:20).

화체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대명사는 떡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성별은 말씀의 내용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대명사가 가리킬 수 있는 본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2447)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에 대해서 양심적이라면,2448)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그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허구는 떡이던 것이 지금은 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집어 제자들에게 주신 것을 자기의 몸이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떡을 집으셨다. 그러므로 그 떡을 아직 보이고 계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떡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그 형상에 옮기는 것처럼 불합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est"("몸이다"의 "이다")라는 말을 "본질이 변화된다"는2449) 뜻이라고 해석해서 더욱 무리하고 난폭하게 왜곡된 주해로 도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체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다"를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뜻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나 어떤 언어에서도 들은 일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에 떡을 남겨 두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매우 다르다. 그들 중에서 온건한 편인 사람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고수하지만 후에 그 엄격한 태도를 버리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떡 안에 그리고 떡 밑에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2450) 그들이 주장하는 정체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말했고 앞으로도 곧 더 말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다만 말씀만을 논하려는데, 그들은 그 말씀에 의해서 떡은 몸의 표징이므로 떡을 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든 은유를 피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 단순하게 지적하신 말씀에서 그들 자신의 아주 다른 용어로 비약하는가? "떡은 몸이라"고 하는 말과 "몸은 떡과 함께 있다"고 하는 말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떡은 몸이라"는 단순한 발언은 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난관을 벗어나려고 애썼다.

더 대담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말한다면 떡은 몸이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문자론자임을2451) 확실하게 증명한다. 그렇다면 떡이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그런 분명한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해도 그들에게 유익이 없을 것이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의 전체가 제공된다고 모든 사람이 일치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하고 썩을 요소에 대해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모독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하는 말과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하는 말은 서로 뜻이 같으냐고 묻고자 한다. 다르다고 인정한다면(그들은 싫더라도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디가 다르다는 것을 대답해야 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일 것이다. 즉, 떡은 성례적인 의미에서2452) 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일반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문법으로 검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나는 모든 문자 고수파에게, 누가와 바울이 잔을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부를 때(눅 22:20, 고전 11:25) 그들은 앞 문장에서 떡을 몸이라고 부를 때와 같은 뜻을 말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신비의 한 부분에 대해서 품은 존경심을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똑같이 품었기 때문이다. 말이 간단하면 뜻이 막연하고, 더 긴 이야기가 뜻을 더 잘 밝힌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자주 한 마디 말에서 떡이 몸이라고 추론할지라도 나는 여러 마디 말에서 떡은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라고 적합한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바울과 누가가 한 것보다 더 충실하고 확실한 해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미 주장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감소하고 싶지 않다.2453) 그들이 말에 대해서 맹렬하게 싸우는 미련한 고집을 논박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바울과 누가의 권위에 의해서 나는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그의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생각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나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과 싸우는 것이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외하므로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을 감히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없노라고 아무리 외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는 이유들을 모두 배제할 수 있는 타당한 구실이 되지 못한다.

동시에,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세우는 이 언약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확인된 언약은, 우리를 그와 하나가 되게 하는 저 비밀한 교통이 그 언약에 결합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확고한 말씀의 비유적 해석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본체와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본체의 이름이 비유적으로 상징에 주어졌으나 매우 적절한 유추가 없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풍유와 비유를 말하지 않겠다. 내가 도피처를 찾으며 목전의 문제에서 이탈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표현을 일종의 전유라고 말한다. 성경에서는 신비한 일들을 논할 때 보통 전유 법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예컨대 "할례는 언약이라"(창 17:13), "어린양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출 12:11), "율법의 희생은 속죄라"(레 17:11, 히 9:22)와, 끝으로 "물이 흘러나온 광야의 반석은"(출 17:6), "그리스도시라"(고전 10:4)라는 표현들은 뜻을 옮겨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이름을 옮길 뿐 아니라 보이는 표징의 이름도 표징이 의미하는 것에 붙인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으며(출 3:2) 언약궤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부르고(시 84:8, 42:3)2454) 비둘기를 성령이라고(마 3:16) 부른 것과 같다. 상징은 그 의미하는 것과 본질이 다르지만 후자는 영적이며 하늘의 것이요 전자는 물질적이며 지상적이므로, 상징은 성별에 의해서 대표하게 된 그 본체를 상징하는 단순한 빈 표일 뿐 아니라 그 본체를 정확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본체에 붙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창출한 상징들이 목전에 있는 것의 표지라기보다는(상징은 목전에 있는 것을 잘못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목전에 없는 것들의 형상이면서도 없는 일들의 명칭으로 장식되는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들은 그것들이 항상 명확하고 틀림없이 의미하는 사물들의 이름을 차용하며 이것들에 실재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심히 유사하며 근사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논적들은 우리를 "비유파(tropists)"2455)라고 부르는 등 불쾌한 재담들을 많이 덮어씌우는 것을 그만 둬야 한다. 그들은 우리 성례에 관한 어구들을 성경의 일반 어법에 따라서 설명했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만, 성례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이 전유에서 일종의 공통된 근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도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영전 음료가 솟아난 반석을 그리스도였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이(고전 10:4)반석은 보이는 표징이었고 그 밑에 영적 음료가 참으로 있었으나 영적 음료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을 떡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떡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우리가 참으로 먹도록 제시하실 때 사용하신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가 새로 안출된 것이라고 경멸하는 사람이 없도록, 어거스틴이 같은 방법으로 느끼며 말한 것을 소개하겠다. "만일 성물들이 그 표시하는 사물들과 유사점이 없다면 그것은 전혀 성물이 아닐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사점으로 인하여 성물은 자주 실물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대표하는 성물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대표하는 성물은 그리스도의 피인 것과 같이 믿음의 성물은 믿음이다." 어거스틴에게는 비슷한 구절이 많지만 일일이 그것을 열거하는 것은 무용한 일일 것이다. 이는 이 한 구절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독자들은 저 거룩한 분이 에보디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동일한 것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성례에서 전유가 자주 또 보통으로 사용된다고 단정할 때 성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것은 경박한 회피다. 이 회피를 인정한다면 일반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을 추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동물은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으므로 소와 말은 움직이는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논법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거룩한 분이 다른 곳에서 한 말이 있으므로 이 이상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의 표징을 주셨을 때 그것을 그의 몸이라고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으셨다고 한다. 또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내력은 놀랍다. 이는 자기의 몸과 피의 형상을 제정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는 잔치에 유다를 부르셨기 때문이다"2456)

22. "이다"라는 말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모르는 고집불통의 사람이 "이것은‥‥‥이다"2457)라는 표현을 고집하면서 이 신비는 다른 모든 신비와 다르다고 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쉽다. 그들은 이 연결 동사는2458) 강조하는 힘이 있어서 비유적 표현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떡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2459)이라고 부르는 곳에도(고전 10:16) 이 연결 동사가 있다. 그러나 참여는 몸 자체와는 다르다.

참으로 성물들이 고려되는 곳에는 거의 같은 말이 나타난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est의 미래형)"(창 17:13),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2460)이니라"(출 12:11, 12:43 참조). 요약하면, 바울이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est의 완료형)"고 할 때(고전 10 :4) 여기에 있는 연결 동사는 왜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는 것보다 강조하는 힘이 적은가? 요한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est의 과거형)"고 말할 때(요 7:39) 여기에 있는 연결 동사("계시다")의 힘은 어떤 것인가? 만일 그들이 자기의 원칙에 충실하다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존재하기 시작하신 것같이 그의 영원한 본질이 파괴될 것이다. 끝으로, 세례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est의 부정형) 한(딛 3:5)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를 그들은 대답해야 한다. 세례가 분명하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2:12) 그들을 가장 강력하게 논박한다. 그는 사람의 몸과 비교한 다음에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첨부한다(고전 12:12).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체들에게 있는 독생자를 의미한다.

이 정도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이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선전하지만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들은 그런 중상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결코 그들에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들보다 더욱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다룬다. 참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완고한 태도를 옹호하는 구실을 주기만 하면 그 말씀의 참 뜻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을 그들의 안이한 확신이 보여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우리의 검토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입술로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인간적 감각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가증스럽게 교만을 부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비난이 얼마나 편파적인가 하는 것은 대체로 이미 밝혔고 또 앞으로 더 밝히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믿으며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지시하실 때 즉시 응답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정한 뜻을 연구하는 것이 죄냐 하는 것만이 문제이다.

23. 순전한 문자적 해석은 불가능하다

이 선량한 선생님들은 학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문자에서 조금이라도 탈선하는 것을 금지한다.2461)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을 "용사"라고 부를 때에(출 15:3)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이 말은 너무도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을 사람과 비교해서 한 것이라고 믿는다.

참으로 고대의 신인 동형 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이 정통 교부들을 괴롭힌 것도 오직 이 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컨대 "하나님이 보신다"(신 11:12, 왕상 8:29, 욥 7:8 기타), "하나님의 귀에 들렸다"(민 11:18, 삼하 22:7, 왕하 19:28 기타), "그의 손을 펴셨다"(사 5:25, 23:11, 렘 1:9, 6:12 기타), "땅은 그의 발등상이라"(사 66:1, 마 5:35, 행 7:49)고 하는 어구들을 열심으로 모았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에게 몸이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 몸을 빼앗는다고 항상 외쳤다.2462) 이 원칙을 인정한다면 한정 없는 야만적인 사상이 믿음의 빛을 덮어 버리게 될 것이다. 이 광신자들이 성경의 일점일획을 남기지 않고 들춰내서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주장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그들은 어떤 해괴하고 어리석은 말인들 하지 않을까 ?

반대론자들은, 역경에 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특별한 위로를 준비하신 그리스도께서 막연한 말씀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했을 리가 없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는 사실상 우리의 주장을 지지한다. 떡은 몸의 상징이므로 떡을 몸이라고 하신 것은 비유라는 것을 제자들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런 해괴한 일에 반드시 마음이 어지러워 졌을 것이다. 요한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제자들은 조금만 난해한 문제에 부딪혀도 당황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나님께로 가시겠느냐고 서로 물으며, 어떻게 세상을 떠나실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도 하나님을 보기 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요 14:5-8, 16:17), 그렇다면, 모든 이성이 거부하는 것 곧 자기들이 보는 곳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떡 밑에 포함되어 있다는 불합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서슴지 않고 그 떡을 먹음으로써 찬성의 뜻을 표명한다.

이것을 보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와 같은 뜻으로 이해한 것이 분명하다.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이름이 표징에 옮겨진다는 것을, 즉, 성물들에는 드물지 않은 이 일을 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우리와 같이 제자들에게도 확실하고 분명한 위로가 되었는데 그것은 수수께끼에 가려진 위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해석을 듣고 뒷걸음질 치는 이유는 오직 그들이 마귀의 홀림에 빠져 눈이 어두워지고 그래서 어려운 수수께끼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놀라운 비유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분명하다.

그뿐 아니라, 만일 우리가 이 어구를 정확하게 고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잔과 떡에 대해서 따로따로 말씀하신 것은 모순이었을 것이다. 떡을 몸이라고 부르시고 포도주를 피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혼동된 반복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과 피를 서로 가르는 구분이다. 사실 떡과 같이 잔에 대해서도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며, 반대로 떡을 피라고 해도 옳을 것이다. 만일 이 상징들을 채택한 목적을 알아야 한다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나는 물론 그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아무리 몸을 빼려고 해도, 떡이 피며 포도주가 몸이라는 이 불합리가 항상 그들의 오류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들은 떡과 몸은 서로 다른 물건임을 인정하면서,2463) 한 쪽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다른 쪽을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지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뜻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옷과 사람은 서로 다르지만 옷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옳다고 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설명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들은 고집을 부리며 모욕을 주는 것을 승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미친 듯이 왜곡하며 혼동한다는 것과 우리는 충실하고 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우리는 실지로 증명했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에게 불어넣고 있으니, 이 궤변가들이2464) 얼마나 부당한 일을 우리에게 하는지는 독자들이 쉽게 판단할 것이다.

24. 우리의 해석은 이성에 지배되었다고 하는 비난에 대답한다

그러나 부정직하다는 수치를 완전히 씻어버리려면 또 한 가지 비난도 말살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의 이성에 매여서 자연의 질서가 허락하며 상식이 명령하는 것밖에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는다고2465) 호언장담한다. 이런 사악한 중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르친 주장을 보라고 권고하였는데, 그것은 내가 이 신비를 인간의 이성을 표준으로 측정하거나 자연 법칙에 예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준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로 우리의 영혼을 먹여 주시지만 우리의 몸은 떡과 포도주에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자연과학에서 배웠는가를 나는 묻는다. 영혼을 살리는 이 힘은 어디로부터 육체에 오는가? 누구든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 기뻐하는 일도 아니다. 요컨대 우리의 주장을 맛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밀한 힘을 경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선량한 열성가들은 자기들을 위한 기적을 조작해서는 그 기적이 없어지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권능도 사라지게 한다.

나는 내 교리의 의도를 성실하게 생각하라고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하고자 한다. 나의 주장은 상식에 의존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믿음의 날개를 타고 이 세상을 초월한 다음에 하늘을 향해서 높이 솟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살과 피의 본질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외형적인 상징과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한다. 이 간단한 말에 포함된 많은 기적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우둔하다는 정도를 넘은 사람들이다. 땅에서 태어나 죽음을 당한 살에서 우리의 영혼이 영적이며 천상적인 생명을 빌린다는 것 이상으로 자연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 하늘과 땅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그 멀고먼 거리를 넘어 서로 연결될2466) 뿐만 아니라 하나가 되어, 영혼이 그리스도의 살에서 영양을 얻는다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은 우리가 사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어느 정도로 국한시키려고 한다는 추악한 거짓말로 우리에게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은 미련한 오해를 하고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궁색한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하셨는가 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셨다고 단정한다. 죄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히 4:15, 2:17 참조). 우리의 살의 본성은 무엇인가? 그 자체의 일정한 부피를 가졌고 한 곳에 있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같은 살이 여러 다른 장소를 점유하며 아무데도 없으며 따라서 부피나 형태가 없게 만들 수는 없느냐고 말한다. 미친 사람이여, 왜 그대는 하나님의 권능이 살을 동시에 살이 되게 하며 또 살이 되지 않게 하라고 요구하는가? 그대는 하나님께서 빛을 동시에 빛과 암흑이 되게 하시라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빛은 빛이며 암흑은 암흑이고 살은 살이기를 원하신다. 물론 원하실 때에는 빛을 암흑으로 만드시며 암흑을 빛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빛과 암흑이 다르지 않기를 요구한즉 그대는 하나님의 지혜의 질서를2467)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살은 살이고 영은 영이어야 한다. 만물은 각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태와 조건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의 조건은 일정한 장소에 있어서 크기와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을 취하셨으며, 어거스틴이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살에 부패하지 않는 성질과 영광이 주어졌고 그 살에서 자연과 진리가 제거되지 않았다.2468)

25. 말씀은 이해와 해석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밝힌 말씀이 있다고 그들은 대답한다.2469) 즉, 말씀의 뜻을 밝히는 해석의 은사를(고전 12:10) 교회에서 추방하는 권리를 우리가 그들에게 허락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말은 옛날 신인 동형 동성론자들이2470) 하나님에게 몸이 있다고 하던 때나 마르키온과 마니교도들이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또는 유령 같은 몸을 생각하던 때와 같은 말씀이다. 이런 사람들도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서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려고 했다. 예컨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라는 말씀을 인용했다.2471)

그러나 이 대식가들은 그들 자신의 두뇌가 조작한 괴물에 의해 자연 질서가 온통 뒤집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권능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이 상상한 것으로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려고 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보이지만 땅에서는 무수한 떡조각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는 추론을 하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찬에서 주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신체적으로 먹는다는 개념을 연역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입견에 끌려서 성경 전체가 큰 소리로 반대하는 이 궤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조금이라도 감소한다고 하는 비난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권능에 최고의 찬양을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고 비난하며, 그리스도의 입으로 약속된 일은 상식으로는 믿기 어렵다고 해서 배척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서 나는 전에 말한 것을 반복한다. 믿음의 여러 가지 신비에서 우리는 상식의 인도를 받지 않고, 배우겠다는 고요한 태도와 온유한 정신으로 야고보가 교훈한 바와 같이(약1:21) 하늘에서 내려 주신 교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는 문제에서는 우리가 유익하고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혀 생각하시지 않은 기적을 상상한다. 그러나 이 공상에서 여러 가지 추악한 불합리가 생겨날 때에, 그들은 이미 경솔하게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의 심연에 뛰어들어 이 방법으로 진리의 빛을 끄려고 한다. 여기서 그들의 다음과 같은 교만하고 괴팍한 태도가 생겨났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방밑에 숨어 계시는가를 알고자 하지 않고 '이것이 내 몸이라'고 하신 말씀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우리는 신중하고 순종하는 태도로 연구함으로써 성경 전체와 같이 이 구절에 대해서도 건전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

처음에 언뜻 생각난 것을 덮어놓고 경솔하게 붙잡는 변태적인 열성을 우리는 취하지 않는다. 도리어 부지런하게 명상한 후에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시는 뜻을 받아들인다. 이 뜻을 근거로 하여 거기에 반대되는 모든 지상의 지혜를 내려다본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 뜻에 대해서 감히 한 마디도 항의하지 못하게 하며 그 교만을 꺾어 감히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태도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했다. 성경에 그다지 통달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우리의 설명은 성경의 일정불변한 용법에 비춰볼 때 성례들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모두 안다.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를 본받아,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눅 1:34) 묻는 것을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6.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제의한 교리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연역되었으며, 그 말씀의 권위를 근거로 삼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경건한 사람들의 믿음이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될 것이기에,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간결하게 이 점도 밝히겠다. 부활하신 때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하며2472)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보관되어 머무신다는 것은(행 3:21 참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 나는 그들이 이 점을 증명하는 구절들을 거만하게 회피한다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겠다(요 14:12,28, 16:7), 세상을 떠나시겠다(요 16:28)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들은 떠나신다는 것은 죽을 성질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2473) 그러나 이런 논법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말과 같이 자기의 부재중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성령을 대신 보내시지 않았을 것이다. 부재중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뒤를 잇지 않으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을 생명의 상태를 취하려고 하늘 영광에서 다시 내려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령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반대 현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보내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육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항상 이 세상에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마 26:11, 요 12:8).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자기가 항상 가난하거나 가련한 상태에 있거나 이 짧은 생명의 욕구에 예속되지 않으리라는 뜻을 말씀하신 데 불과하다는 것같이, 이 말씀을 깨끗이 말살했다고 생각한다.2474) 그러나 이 구절의 전후 관계는 분명히 이런 해석에 반대한다. 여기서는 곤궁이나 빈곤이나 지상 생활의 가현성이 문제가 되어 있지 않고 경배와 영예가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름을 부은 것을 제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낭비이며 거의 사치에 가까운 짓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낭비한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그런 영예를 받도록 항상 함께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셨다(마 26:8-11)

그리고 어거스틴은 조금도 애매모호한 점이 없는 말로 우리의 설명과 같은 설명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신체의 임재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실행하셨기 때문이다(마 28:20). 그러나 말씀이 입으신 육에 관해서는 처녀에게서 나시고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셨다가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에 싸여 무덤에 놓였다가 부활로 나타나신 그 육에 관해서는'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왜? 신체적인 임재로 40일 동안 제자들과 교제를 가지셨고,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두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이다(행 1:3,9). '그가‥‥‥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 그는 하늘에 올리우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막 16:19). 그러나 그는 여기에 계신다. 그의 위엄의 임재는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1:3). 그의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는 항상 우리는 그를 모시고 있으나 육의 임재에 관해서는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옳다. 교회는 육의 임재에 따라서는 그를 수일 동안 모셨을 뿐이며 지금은 믿음으로 그를 가졌으며 눈으로는 볼 수 없다."2475)

여기서 어거스틴은(역시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 사이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혜 안에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는 놀라운 일을 포함시킨다. 다만 우리는, 이 참여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물질적 요소 밑에 포함되어 있는 가상한 몸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주께서는 사람이 만지며 볼 수 있는 살과 뼈를 가지셨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요 20:27).

또 "떠나간다"와 "올라간다"라는 말들은 떠나며 올라가는 것같이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 실지로 그 말에 표현된 대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하늘의 일정한 구역을 한정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이것이야말로 들추어내기를 좋아하는 무익한 질문이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2476)

27. 위에서 말한 올라간다는 뜻

그러나 우리는 왜 "승천"이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는가? 이 말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 뜻이 아닌가?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하늘은 그리스도의 지배의 위엄을 의미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승천 자체의 모양은 어떠했는가? 바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높이 들려 올라가시지 않았는가? 복음서 기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리워 가셨다고 하지 않는가?(행 1:9, 막 16:19, 눅 24:51) 이 영리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란 것을 신자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보는 데서 구름 가운데로 들려 가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임재를 우리가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가 일순간에 사라지시거나 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시기 전에 구름이 그를 싸버릴 수는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공중으로 높이 들려 올라가시며 구름이 그의 아래 있음으로써(행 1:9) 다시는 그를 땅 위에서 찾을 수 없으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때, 우리는 그의 주소는 이제 하늘이라고 추론해도 무방할 것이다. 바울도 하늘로부터 오실 그를 기다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빌 3:20). 그러므로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경고하며, 하늘로 올린우신 이 예수는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여기서도 건전한 교리의 원수들은 한 미봉책을 강구해서는 그것을 영리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땅을 떠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백성 사이에 보이지 않게 계시며, 그 때가 되면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시리라고 생각한다.2477) 이것은 저 천사들은 이중의 임재를 암시했으며 단순히 제자들을 승천의 목격자로 만들어 아무 의심도 남지 않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천사들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그대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그는 그의 하늘나라를 되찾으셨으므로, 이제부터 그대들은 그가 세상에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들어가신 것은 하늘을 독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과 모든 경건한 사람들을 그의 곁으로 모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28. 어거스틴의 증언

그러나 이 기형적인 교리의 수호자들은 고대 저술가를 특히 어거스틴의 시인2478)에 힘입어 그것을 장식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완고한 시도를 간단하게 폭로하겠다. 그들은 박식하고 경건한 분들의 글에서 증거를 수집했다.2479) 나는 남이 이미 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원하는 사람은 그분들의 노작에서 그러한 것을 찾도록 하라. 나는 이 문제에 관련된 어떤 자료도 어거스틴의 글이라도 모으지 않고, 몇 가지 증언만으로 그가 전적으로 우리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2480)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거스틴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려고,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즉, 일찍이 십자가에 달린 희생 제물이 분배된다는 생각이 그의 저서에 자주 나타나는 것같이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인데, 그는 그것을 "감사" 또는 몸의 성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뜻으로 "살"과 "피"라는 말들을 썼는가를 구태여 우회적인 방법으로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성물들은 그 의미하는 것과의 유사성으로 인하여 그 이름을 믿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몸의 성물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고 그 자신이 설명한다. 잘 알려진 다른 구절도 이 설명과 일치한다. "주께서는 표징을 주셨을 때에, 서슴지 않고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몸이 지상에 떨어져 입에 들어간다고 분명히 기록했다고 다시 항의한다. 물론 그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며 그는 이 두 가지 말을 서로 연결시킨다. 이 신비가 실행된 후에 떡은 없어져 버린다고 하는 그의 발언은 이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이 일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행할 때 기적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일이라고 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의 논적들이 경솔하게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뜻이다. 즉, 신비로운 떡을 제자들에게 내주셨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를테면 자기 자신을 손에 들고 계셨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유사성을 표시하는 부사 "이를테면"을 넣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빵 속에 참으로 또 진실로 들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밝힌다. 물론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공간 내의 위치를 빼앗긴 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데도 없으므로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권능을 행사하시는 성찬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구차한 궤변이다. 그리스도의 살에 관해서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이 거룩한 분은 다음과 같이 신중하게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살에 불멸성을 부여하셨으나 그 본성은 제거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이 살의 형태로 각처에 널리 퍼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할 때 그의 몸의 실재성을 제거하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반드시 각처에 있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한 위격이며 둘이 다 한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며, 사람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하늘에 계신다." 만일 그가 논한 교리에 반대되는 일이 성찬에 있었다면, 이 중대한 성찬의 신비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었을까? 그러나 조금 뒤에 있는 말을 주의해서 읽는다면 성찬도 이 일반적인 주장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든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어거스틴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동시에 인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전적으로 각처에 계신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즉, 교회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몸으로서 하늘의 어느 곳에도 계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연합시키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하늘에서 가져오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담겨 있어야만 참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실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하늘에서 가져오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유하느냐 하는 것을 설명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표징을 통해서, 세례의 성례를 통해서, 성단의 양식과 음료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소유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표시하는 상징가운데 그가 미신적인 의식을 넣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문제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살의 임재와 십자가의 표징을 비교할 때 그는 두 몸을 가진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밝힌다. 하늘에 보이게 앉아 계시면서 떡 속에 비밀히 숨어 계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분명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가 곧 뒤에 첨가한 것을 보면 된다.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는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고, 살의 임재에 관해서는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옳다(마 26: 11).

그들은 그가 곧 첨가한 말이 있다고 반박한다. "형언할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은혜에 관해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마 28:20)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서 그들은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몸과 항상 대립되는 권위에 한정되었고, 살은 분명히 은혜나 권능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른 구절에서도 동일한 대조를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영적으로 함께 계시기 위해서 자기의 신체적 임재를 철회하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구절에는 그가 살의 본질과 성령의 권능을 구별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어거스틴은 자주 같은 종류의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과 건전한 교훈의 표준에 따라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신체적으로도 계실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도 그들에게 와서 계실 것이며 세상에 있는 교회 전체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리라고 하셨다"(마 28:20, 요 17:12 참조).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가 신체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구원하기 시작하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영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신체적으로는 그들을 떠나려고 하셨다. "신체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임재 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신적 권능을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하늘로부터 우리 위에 부어 주신다는 것을 밝힌다.

29.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성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임재라는 속임수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는데, 이제부터 그들이 얼마나 그 속에 잘 숨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그리스도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말을 그들은 성경에서 한 마디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신이 건전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일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떡이라는 가면 밑에 숨어 있지 않다면 성찬 때에 그 몸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과 우리와의 논쟁점이다. 그것은 결코 한 원칙으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지껄이는 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중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본래 그대로 보이지만 성찬에서는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얼마나 훌륭하게 성립되느냐 하는 것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베드로의 증거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늘은 그를 마땅히 받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행 3:21).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공간의 각처에 계시나 형태는 없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일반적인 자연의 법칙에 복종한다는 것은 영광의 몸의 본성으로서는 잘못이라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대답에는(모든 경건한 사람이 당연히 가증하게 여기는) 세르베투스의 불건전한 생각이 따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삼켜졌다는 것이다.2481) 나는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보이지 않는 모양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을 영화된 몸이 받은 한 은사라고 한다면, 몸의 본질이 말소되며 신성과 인성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에, 만일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서 한 곳에서는 보이게 나타나며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의 부피로 존재하는 몸의 본성은 어디 있으며 몸의 통일성은 어디 있는가? 터툴리안은 훨씬 올바른 주장을 했다. 즉, 성찬식에서는 영적 생명의 담보와 보증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우리 앞에 놓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진정한 것이며 또 자연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2482) 확실히 그리스도께서도 영화된 몸에 대해서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고 하셨다(눅 24:39).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는 만질 수 있으며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의 살의 실재성을 증명하셨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으면 살은 없어진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이 조작한 특별 섭리란 것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그 주장하시는 뜻을 무조건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시므로 유령이 아니라고 스스로 증명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의 본성에 고유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을 제거한다면, 몸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이 어느 쪽으로 몸을 피하든 바울은 그들이 조작한 처방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도는"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한다(빌 3:20-21).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특성들을 우리도 가지게 되어, 모든 사람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몸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기대할 바가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까지 심한 불합리를 믿을 우매한 사람을 찾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면서 어느 공간에도 들어 있지 않는다는 특성을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 돌리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그들은 육신의 부활을 부정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육신을 버리지 아니하셨으며 우리도 그와 공통된 부활을 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우리의 육신으로 그와 함께 같은 영광에 참여하는 동참자와 동반자로 만드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을 취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보속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으로 수난을 받으신 것과 같이 부활하실 때에도 동일한 참 육신을 받으셨고, 그 육신을 하늘로 가지고 가셨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어느 교리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우리가 우리의 부활과 우리의 승천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터툴리안이 말한 대로 우리가 부활하리라는 보증을 가지고 하늘로 가셨다는 것이다.2483) 그러나 만일 우리의 이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참으로 부활하지 않으며 천국에도 올라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소망은 얼마나 무력하고 덧없는 것이 되겠는가? 그러나 몸이 공간 안에 있다는 것, 자체의 부피와 형태를 가졌다는 것이 몸의 진정한 본성이다. 자, 이제 사람의 마음과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는 이 미련한 허구는 사라져라!

어떤 의도로 그리스도께서 떡 밑에 숨어 계시다고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과 결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상징에서 머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지상에서 철회하기를 원하셨고, 그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시기 전에 여인들이 그를 만지는 것을 금지하셨다(요 20:17). 마리아가 진정과 열성과 경외의 태도로 급히 주의 발에 입 맞추려 했을 때, 하늘로 올리워 가실 때까지 만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금지하신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늘에서만 자신을 찾기를 원하셨다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그는 후에 스데반에게 보이셨다고(행 7:55) 하는 그들의 항의에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그의 처소를 바꾸실 필요가 없이 그의 종의 눈에 여러 층의 하늘을 꿰뚫는 맑은 시력을 주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행 9:4).2484)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닫힌 무덤에서 나오셨으며(마 28:6) 닫힌 문으로 제자들에게 들어가셨다고(요 20:19) 항의한다. 이 사실도 그들의 오류를 옹호하지는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호수 위를 걸으셨을 때에 물이 포장도로와 같은 길을 제공한 것같이(마 14:25) 그가 가까이 가셨을 때에 단단한 돌이 길을 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의해서 돌이 옮겨졌다가 그가 통과한 다음에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다. 닫힌 문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딱딱한 물체를 통과하셨다기보다는 거룩한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셔서 비록 문은 잠겨 있었을지라도 놀라운 방법으로 돌연히 제자들 사이에 분명히 서 계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엠마오까지 함께 가신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누가복음의(눅 24:31) 기사를 그들은 인용하지만 이것도 그들에게는 유익이 되지 못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다만 없어진 것이다. 같은 증인 누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셨을 때 주께서는 알아볼 수 없는 새 모습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이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한다(눅 24:16).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처소에 따라 다르게 만들며 그 자신과도 다르게 만든다. 요컨대 그들은 그렇게 상상함으로써 직접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인 말로 그리스도의 육신에서 한 영을 만들어 낸다. 또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혀 반대되는 여러 가지 성질을 부여한다.2485)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이중이라는 필연적 결론이 발생된다.

30.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배척한다

보이지 않는 임재에 대해서 그들이 지껄이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무한성은 여전히 증명되지 않을 것이며, 무한성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떡 밑에 넣어 두려는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각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성찬 때에 떡 밑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저 편재성이라는 해괴망측한 생각을 도입했다.2486)

그러나 성경의 확고하고 분명한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가 증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적인 몸의 한도에 따라 국한되어 있었다. 또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모든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으로 옮기실 때에는 전에 계시던 곳을 떠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약속을(마 28:20) 인용하지만 이 약속도 몸에 적용할 것이 아니다. 첫째, 항구적인 연결이 성립하려면 성찬 집행과는 별도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신체적으로 거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성찬의 떡 밑에 넣어 두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사납게 싸울 타당한 이유가 없다. 둘째, 문맥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의 살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고, 다만 제자들에게 무적의 원조를 약속하여 사탄과 세상의 모든 공격에 대항해서 그들을 보호하며 지탱하게 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사명을 주신 다음에, 그들이 주저하거나 또는 사명을 수행하더라도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하지 않도록 그가 함께 계시겠다는 확약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셨다. 그들은 반드시 보호를 받을 것이며 아무도 이 보호를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들에게 만사를 혼동 시키려는 생각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의 모양을 구별할 필요가 있었을까?

분명히 일부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부끄러운 무지를 폭로해서 큰 수치를 당할지언정 오류는 추호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카톨릭 교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교리는 오히려 용서할 수 있으며 적어도 과격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투쟁 열에 취해서, 그리스도 안에는 양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과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육신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마치 양성의 결합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어떤 중간적 존재가 합성됐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참으로 유티케스가2487) 그렇게 가르쳤고 세르베투스도 그의 뒤를 따랐다.2488)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양성이 있지만 그 양성들은 각각 그 고유의 특징을 본래대로 유지하며 아무 손상을 받음이 없다고 분명히 추론한다. 그들은 유티케스가 당연히 배척을 받았다는 것을 부끄러워서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그가 정죄된 원인을 무시하는 것이 이상하다. 그는 양성의 구별을 제거하고 위격의 단일성을 역설함으로써 하나님으로 사람을 또 사람으로 하나님을 만들었다. 지금 그들이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끌어오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혼합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 착란인가?

그들이 자기들 편을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속성의 교통"2489)을 멸시하는 것도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거룩한 교부들은 오래 전에 속성의 교통이란 말을 만들어 유익하게 사용했다.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고전 2:8) 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수난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배척과 모욕을 당하며 육신으로 수난을 당한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영광의 주시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는 또 하늘에 있는 인자였는데(요 3:13), 이는 육신을 따라 인자로서 지상에 살던 바로 그 그리스도가 하늘에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면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고 한다. 신성이 하늘을 떠나서 신체라는 감옥에 숨었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은 비록 만물에 충만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해서 육체로 거하셨다는 뜻이다(골 2:9). 즉, 본래대로 그리고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거하셨다는 뜻이다.2490) 스콜라 학자의 상투적인 구별을 언급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는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2491) 이 발언의 힘을 스콜라 학자들 자신이 정직하게 고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라는 어리석은 공상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자는 그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므로 항상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성찬에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즉, 그리스도 전체가 계시지만 완전히 계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판하러 나타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31.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에서 살이 떡 속에 있지 않으면 살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비밀히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 올리신다면 우리는 그의 임재를 똑같이 즐길 수 있으리란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임재의 방법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고, 우리는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편이 올바른지는 독자들이 결정하라. 단 그리스도께서 떡 밑에 숨어 계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는 성찬에서 제거된다고 하는 중상모략은 그만 둬야 한다. 이 신비는 천상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와 우리가 결합되기 위해서 그를 지상으로 끌어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참가하는 신체적 임재의 참된 성격. 32-34)

32. 이 신비에 대한 복잡한 해석들을 배척한다

만일 누가 이 일이 어떻게 생기느냐고 문의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고상한 비밀이어서 나의 지성으로 이해하거나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고백할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비밀을 이해한다기보다 경험한다.2492)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 이의 없이 받아들여 그 진리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는 그의 살은 나의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영혼의 음료라고 선언하신다(요 6:53이하). 나는 나의 영혼을 그에게 드려 그런 양식을 받아먹게 한다. 거룩한 만찬에서 그는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그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며 마시라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참으로 그가 친히 주시며 또 내가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위엄에 합당하지 않거나 그의 인성의 실재성과 양립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생각들만을 물리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으로 충돌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천국 영광에 들어가셔서(눅 24:26) 모든 지상적인 상태를 초월하셨다고 가르치며, 동시에 진정한 인성에 있어서 고유한 일들이 그의 인성에도 있다고 엄밀하게 밝힌다.

이것을 믿을 수 없다거나 이성과 합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나라 전체는 영적인 것이므로, 그가 교회에 대해서 역사 하시는 일을 이 세상의 이성에 예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 다른 신비들과 같이 이 신비도 사람이 집행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하는 일이지만 천상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다.2493) 몸의 임재는 이 성례의 성격이 요구하는 임재인데, 이 임재는 강력한 권능과 효과로 나타나서 우리의 마음에 영생에 대한 부동의 확신을 줄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도 영생 불사하리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 참으로 우리의 육은 지금 그의 영원불멸의 살에 의해서 생명을 얻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영생 불사에 참여한다.

자기의 과장된 생각으로 이 한계를 넘는 사람들은 그런 복잡한 생각으로 단순하고 평이한 진리를 흐리게 할뿐이다.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나와 함께 잠깐 신중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지금 논하는 성례는 그 전체를 믿음과 관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언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몸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는 사람들 못지않게 우리의 믿음에 풍성하고 훌륭한 양식을 먹인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의 영혼과 혼합된다느니 우리의 영혼에 주입된다느니 하는 그들의 생각을2494) 배척한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의 본질에서 생명을 우리의 영혼에 불어넣으신다면 참으로 그의 생명 자체를 우리 안에 불어넣으신다면 그것으로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바울이 모든 성경 해석이 따르기를 요구하는(롬 12:3,6) 믿음의 유추는 확실히 이 문제에서 우리의 견해를 현저하게 지지한다. 평이한 진리에 완강히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의 표준을 따르고 있는가를 반성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요일 4:2-3). 이 사람들은 숨기거나 또는 깨닫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에게서 육신을 빼앗는다.

33.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따라서 실제적으로 참여한다 : 불신자가 성찬에 참가하는 문제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성찬 참여에 대해서도 판단해야 한다. 그들은 떡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삼키지 않는다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중대한 해를 가하게 된다. 우리가 가르치고 고대 교회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이 신비의 능력이 과거 400년 동안을 당연히 받을 존경을 받았다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이었을 것이다. 무서운 분쟁을 일으킨 여러 가지 추악한 오류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나2495) 지금이나 교회는 그로 인하여 고통을 당했고 또 당하고 있다. 동시에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은 성경에 전혀 없는 과장된 임재 양식을 주장한다.

그들은 마치 경건의 전체가 속담에 있듯이 "이물과 고물"이2496) 그리스도를 떡 밑에 가두어 두는 데 있는 것같이 미련하고 경솔하게 생각한 이런 주장에 대해서 떠든다. 일찍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우리 것이 되는가, 또 일찍이 흘리신 그의 피에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참여하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소유하며 그의 모든 은혜를 우리도 즐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가장 중요한 일들을 보지 않고, 아니 무시하고 거의 매장하면서 이 한 가지 곤란한 질문, 즉, 그리스도의 몸은 어떻게 떡 밑에 또는 떡의 형태 밑에 숨어 계시느냐고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우리가 먹는 방법에만 주의한다고 함으로써, 영적으로 먹는데 대한 우리의 주장이 모두 참으로 또 실제로 먹는 것과는 반대된다고 거짓되게 떠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 둠으로써 육적 방법으로 먹고,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힘이 우리와 그리스도를 결합하는 유대라고 함으로써 영적 방법으로 먹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신자가 받는 유익 또는 효과만을 말한다고 하는 그들의 항의 또한 옳지 않다. 우리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 자신이 성찬의 본체이시기 때문이다. 결과는, 그의 죽음의 희생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씻겨지고 그의 피에 의해서 우리가 깨끗해지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우리가 하늘 생명을 바라보는 경지에까지 높여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것이 성찬이라는 롬바르드가 시작한 우매한 공상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비뚤어졌다. 롬바르드의 말을 인용한다면, "떡과 포도주의 형태들은 성물이고 본체는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성물이며 본체다. 그의 신비로운 살은 본체요 성물이 아니다." 또 그는 "상징된 또 포함된 것은 그리스도의 고유의 살이다. 상징되었으나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신비로운 몸이다"라고 했다. 나도 그리스도의 살과 거기에 포함된 효과적인 영양을 그가 구별한 데는 찬성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살을 성물이라고 하며 심지어 떡 속에 포함되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오류이다.

여기에서 성례전으로 먹는데 대한 그들의 잘못된 해석이 생겼다. 그들은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도 비록 아무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 졌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상상했다.2497)

그러나 성찬의 신비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 자체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똑같이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으며 그것은 맛을 모르는 사람인 포도주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추론한다. 만일 생명과 힘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불신자에게 준다면 당연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부당하게 쪼개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분명한 말씀이 반대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그들은 이 구절에서는 성례전의 먹음이 문제가 아니라고 반론한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면 반드시 유익을 얻는다는 과오를 그들이 반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반론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그것을 먹은 후에 얼마나 오래 그것을 보존하고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여기에서 그들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없으리라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배은망덕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이 감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한다. 물론 나도 그것을 인정하며, 악한 사람들이 이 신비의 권능을 말살하려고 아무리 전력을 다할지라도 그 권능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공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과는 문제가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영적 양식을 제공하며 이 영적 음료를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먹고 어떤 사람들은 도도하게 거절한다. 거절을 당한다고 해서 그 양식과 음료가 본성을 잃어버릴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비록 맛은 없지만 역시 살이라는 비교에 의해서 그들의 견해는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미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어거스틴처럼) 바꿔 말한다면, 사람은 믿음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만큼 성찬에서 얻어갈 뿐이다.2498) 이와 같이 성찬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참으로 성찬의 진리성과 효과는 여전히 감소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외형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간다.

만일 악인들이 썩을 떡 외에는 아무것도 받는 것이 없다면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의미를 상실한다고 그들이 항의를 한다면, 이미 대답도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받는 일 자체에서 인정할 것이 아니라 그의 변함없는 선하심에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사람들이 거절하는 것을 언제든지,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며 참으로 값없이 제공하신다. 그리고 온 세계가 범할 수 없는 성찬의 완전성은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자들에게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가 굳은 바위 위에 떨어지더라도 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만 흘러내리는 것과 같이,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 완고한 마음으로 물리쳐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씨가 불 속에서도 싹이 틀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합당치 못한 말이다.

그리스도를 부적당하게 영접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멸망시키기 위해 오셨겠느냐고 하는 그들의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를 부적당하게 영접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음을 초래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사람이 죽음을 초래한다고 했다.

또 그들은 씨가 가시덤불 속에서 싹이 났으나 가시나무에 기운이 막혀 죽어 버렸다는(마 13:7) 그리스도의 비유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한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일시적인 믿음의 가치를 논하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다를 베드로와 동등한 동지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비유는 도리어 그들의 오류를 논박한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씨는 길에 떨어지고 어떤 씨는 돌밭에 떨어져서 모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고 하신다(마 13:4-5). 이것을 보면, 불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의 완고한 마음이 방해물이 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오시는 것을 막는다는 결론이 된다.

성찬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신자가 우물에 인도되어(요 4:6-15 참조)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생명을 퍼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거나 또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은 후에 더욱더 그와 함께 자라 마침내는 그가 하늘 생명에서 우리를 그와 완전히 결합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성찬의 존귀성을 훌륭하게 칭송하는 것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고전 11:27) 항변한다.2499) 그러나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곧 그들이 정죄당한 것은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과의 거룩한 연합의 보증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짓밟음으로써 이 신비를 모독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34. 불신자의 성찬 참가에 대한 어거스틴의 생각

사람의 불신이나 악의 때문에 성례에서 무엇이 빼앗기거나 그 상징하는 은혜가 말살되지 않는다는 교리는 고대 저술가들 중에서 특히 어거스틴이 주장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개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사람들이 그의 발언을 이 문제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잘못된 것인가를 그의 말을 인용해서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들은 예전 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으면서도 성령의 권능이나 은혜의 효험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신중하게 말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요 6:54,50,51), 즉, 그는 보이는 성찬뿐만 아니라 성찬의 권능을 받는 사람이요 참으로 외형적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받는 사람이며 그리고 이로 씹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합일체인 본체의 예전적 상징은 주의 성만찬에서 제시되어 어떤 사람은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지만, 성찬이 상징하는 본체는 누가 참여하든 모두가 다 생명을 얻고 아무도 죽음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제시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본체"를 "몸"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의 은혜라고 부르며 또 이 은혜는 본체에서 분리할 수 있다고 궤변을 쓰는 사람이 없도록,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조가 이런 애매모호한 말들을 일소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이는" 것 중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은 보이는 상징만을 받는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모든 의혹을 더욱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이 떡을 위해서는 속사람이 굶주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첨부한다. 모세와 아론과 비느하스와 그밖에 만나를 먹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출 16:14이하). 왜 그들은 보이는 양식을 영적으로 이해했으며, 영적으로 주렸고 영적으로 맛보고 영적으로 배 부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도 보이는 양식을 받는다. 그러나 성찬과 성찬의 권능과는 서로 다르다. 조금 후에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도 그 안에 거하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육신으로 또 보이게 그 몸과 피의 표징을 이로 씹을지라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도 그는 보이는 표징과 영적으로 먹는 것과를 대립시킨다. 이 대립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은 영적으로 먹지 않아도 예전 적으로는 실제적으로 먹는다고 하는 그들의 오류가 반박된다. 또 어거스틴은 불경하고 불결한 사람들에게는 표징을 먹는 보이는 행동 이외에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말, 즉, 다른 제자들은 그리스도인 떡을 먹었으나 유다는 그리스도의 떡을 먹었다는 말이 나왔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몸과 피에 참가하는 일에서 분명히 불신자들을 제외한다. 그는 다른 데서도 같은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떡을 유다에게 주셨으며 그것으로 그가 마귀에게 묶여 넘어간 것을 왜 이상하게 생각하는가? 그와는 반대로 사탄의 사자를 바울에게 보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완성하시지 않았는가?"(고후 12:7)참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바울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고전 11:29) 한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의 떡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도 악하게 받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가를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더욱 자세하게 말한다. 입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행위로는 부정하는 악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논할 목적으로(또 악인들은 예전 적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는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일들은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지체와 창녀의 지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6:15).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라고 말씀하실 때에(요 6:56), 그는 그의 몸을 예전 적으로 먹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먹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그 뜻은 곧 그리스도께서 먹는 사람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꿔 말한다면,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내 몸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신다고 말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말이 될 것이다."

독자들이 예전 적으로 먹는 것과 실제로 먹는다는 이 대립을 잘 생각한다면 아무 의심도 남지 않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같은 의미를 다음과 같은 말로 언명한다. "그대의 입을 준비하지 말고 마음을 준비하라. 이 만찬은 마음을 위해서 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받을 때에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를 받을 때에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안다. 우리는 적게 받으나 그것으로 마음의 영양을 얻는다. 그러면 양식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여기서도 어거스틴은 악인들이 먹는 것을 보이는 상징에 제한시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신앙으로만 받는다고 가르친다. 다른 구절에서도 어거스틴은 선인과 악인이 함께 상징들에 참여한다고 명백하게 말한 다음에, 후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다는 것을 부인한다. 만일 그들이 본체 자체를 받는다면 그는 자기의 입장에 더 유리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또 다른 곳에서도 먹는 일과 그 유익이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만일 성찬에서 눈에 보이게 받는 것이 참으로 영적으로 먹으며 영적으로 마시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모든 사람의 생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볼 수 있는 몸을 보이라. 어거스틴의 생각에 의하면 모든 진상은 영적이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예전 적으로 먹을 때에는 불신앙 때문에 실제로 가는 문이 닫히며 그렇게 먹는 것은 보이게 또는 외형적으로 먹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먹으면서도 영적으로는 먹지 않을 수 있다면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의 뜻은 무엇이겠는가? "너희가 보는 이 몸을 너희는 먹지 않으며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흘릴 피를 너희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한 성례를 명령하였으니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너희들에게 생명을 줄 것이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께서 희생으로 바치신 바로 그 몸이 성찬에서 제공된다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먹는 방법에 주목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이미 하늘 영광 속에 영접되어 지금은 성령의 비밀한 힘에 의해서 우리 위에 생명을 불어 보내신다는 것이다. 나는 어거스틴의 글에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성례에서"라는 말을 첨가해서 자기의 뜻을 설명한다. 또 다른 구절에서는 영적으로 먹는데 대해서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혹 반대론자들이 내가 어거스틴의 말을 너무 자주 인용한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으므로, 나는 그의 말을 하나만 인용해서 그들이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그는 "성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서만 그 상징하는 결과를 나타낸다"2500)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에 의해서 상징된다는 것을 감히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악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키릴루스도 같은 의견이었다는 것은 그의 말이 증명한다. "녹은 밀랍에 다른 밀랍을 부어서 완전히 섞는 것같이, 주의 살과 피를 받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필요가 있다. "이런 말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그 권능이 분리될 수는 없지만 예전 적으로만 먹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참으로 또 실제로 먹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또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까닭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바위와 돌이 빗물을 받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에서 비를 내리시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배척한다. 35-37)

35. 물질 숭배를 배척한다

이 일을 앎으로써 어떤 사악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성찬에 집어넣은 물질 숭배에서2501) 쉽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논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몸에는 영혼과 신성이 함께 있으며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된다."

우선 그들의 병재설이2502) 부정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려는가? 그들은 몸에서 영혼과 신성을 분리하는 것은 우매한 짓이라고 역설하지만, 어떤 건전하고 바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그들은 삼단 논법으로 깨끗하게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과 피에 대해서 따로따로 말씀하시고 그가 임재하시는 모양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불확실한 것을 가지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양심이 좀더 엄숙한 느낌으로 불안을 느낀다면 그들은 그 삼단 논법과 함께 곧 해체되며 녹아 버릴 것이 아닌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책임 추궁을 당할 때에 굳게 의지할 곳은 하나님의 말씀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사도들의 교훈과 모범이 자기들에 반대된다는 것과 자기들에게는 자기 이외의 권위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즉시 실신하고 만다. 이 충격에 다른 날카로운 가책도 부과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명령도 받지 않은 듯이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배가 문제되는 마당에서 성경이 한 마디도 지지하지 않는 일을 그렇게 경박하게 시작해도 좋겠는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겸손한 태도로 모든 생각을 하나남의 말씀에 복종시켰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받아 먹으라……마시라"는(마 26:26-27) 주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며, 성찬을 예배하라고 하지 않고 받으라고 하신 주의 이 명령에 순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예배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명령에서 어긋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진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에 이런 신념처럼 귀한 것은 없다. 사도들의 선례를 보면 그들은 엎드려 숭배한 것이 아니라 앉아서2503) 받아먹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 사도 시대의 교회 관습을 보면, 누가가 기록하는 대로 신자들은 함께 예배하지 않고 떡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행 2:42). 사도들의 교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자기가 그들에게 전한 것은 주께서 받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1:23).

36. 이런 숭배는 미신이며 우상이다

이런 일들을 보면, 경건한 독자들은 이런 숭고한 문제에서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을 떠나 우리 자신의 두뇌의 공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를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것을 생각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불안이 없어질 것이다. 경건한 사람이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늘로 높이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도와 영적 신비들의 높은 곳을 볼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게 하는 것이 성찬이 하는 일이라면, 외형적인 표징에서 그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는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떡 앞에 엎드려 거기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미신적인 경배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상징들에 우리의 겸비한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을 니케아 회의가 금지한 것은 확실히 이 폐해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2504) 같은 목적으로 옛날에는 성별하기 전에 회중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마음을 높이 들어 올리라고2505) 권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신중하게 보고한다.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우리가 볼 수 있고 따라다닐 수 있는 곳에서 거두시고 자신에 대한 우리의 육적인 사고 방법을 일소하셨다. 그뿐 아니라 성경이 그리스도를 회상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가 마음을 높이 들어 하늘에서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를 찾으라고 한다(골 3:1-2). 이 원칙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둔하고 육적인 개념이 가득한 위험한 예배 방식을 고안해 낼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에 대한 예배를 고안해 낸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을 떠나 제멋대로 상상한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배에 대한 말씀을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성경이 빠뜨렸을 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성경이 반대하는 것을 무시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신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은사를 주시는 분 대신에 그 은사를 경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면 무엇이 우상 숭배인가? 여기에는 이중의 죄가 있다. 하나님에게서 빼앗은 예배를 피조물에게 옮길 뿐만 아니라(롬 1:25 참고), 하나님의 거룩한 떡을 가증한 우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선물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욕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귀와 눈과 마음과 지성과 혀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훈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교사, 즉, 성령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전진하므로 아무것도 다른 데서 얻어 올 필요가 없으며 또 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면 기꺼이 알고자 하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

37. 성별된 떡으로 행하는 미신적인 의식들

그러나 한번 올바른 한계를 넘은 미신은 한정 없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은 더욱더 타락했다. 표징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성찬의 제정 정신과는 전연 이질적인 의식들을 만들어 냈다. 이 경배는2506)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만일 성찬에서 그렇게 한다면 나는 표징에서 머물지 않고 하늘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만이 합당한 경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실로 그들은 떡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경배한다고 장담하는가? 그들은 소위 성체를 성별해서는 행렬에서 들고 다니며, 사람들이 보고 경배하며 기도하도록 엄숙하게 전시한다. 그것이 어떤 권능으로 올바르게 성별되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물론 그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받아 먹으라"고 하셨다고 나는 항의한다. 나의 이 항의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약속과 명령이 결합되었을 때에 명령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로 분리되면 약속도 전혀 약속이 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비슷한 예를 보면 이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는 약속을 주셨다(시 50:15). 만일 사람이 베드로나 바울에게 기도하면서 이 약속을 기대한다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모든 사람이 외치지 않겠는가? 그러면 먹으라는 명령을 무시하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지체가 잘린 약속만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과는 이질적인 의식들에 악용하는 사람들의 소행이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과 결합된 명령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약속을 주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의 떡을 다른 목적으로 전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짓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미 성찬이라는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돕는다는 것을 논했다.2507) 그러나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여기서 주께서는 이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그 은혜를 우리 손에 쥐어 주시며 우리가 그것을 깨닫도록 깨우치신다. 동시에 이런 풍성한 은혜를 잊지 말고, 합당한 찬양으로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며 감사함으로 축하하라고 충고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제자들에게 성찬을 제정하셨을 때 이것을 행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가르치셨다(눅 22:19). 바울은 이 말씀을 "주의 죽으심을‥‥‥전하는 것이니라"고 해석했다(고전 11:26). 즉, 생명과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서 이구동성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고백으로 주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도 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성찬의 목적이 분명히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다. "주의 죽으심을(심판하러)오실 때까지 전하라"는 명령은(고전 11:26) 우리의 믿음이 성찬에서 인정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라는 뜻에 불과하다. 이것이 성찬의 둘째 사용법이며, 이것은 외형적인 고백으로 나타난다.

(특히 중요한 점들 : 상호간의 사랑, 설교의 동반, 병든 영혼의 약, 합당하게 먹음, 합당한 형식과 빈번한 집행. 38-46)

38. 성찬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 내포되었다

셋째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 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서 성찬을 제정하셨다.2508)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떡은 이 단결을 표현한다. 떡은 많은 밀알로 만들었으나 그 밀알들이 섞여서 서로 구분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한마음으로 일치단결해서 어떤 불화나 분열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2509) 바울의 말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나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6-17). 우리가 이 생각을 깊이 명심한다면 성찬에서 큰 은혜를 받을 것이다. 즉, 아무 형제라도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배척하거나 박대하거나 그 밖의 어떤 모양으로든지 넘어지게 한다면, 우리의 비행은 반드시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를 상하게 하거나 멸시하거나 학대하게 된다. 우리의 형제들과 불화하면 반드시 동시에 그리스도와 불화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반드시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된다. 형제들은 우리의 지체이므로 우리 자신의 몸과 같이 그들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몸의 일부에 고통이 있으면 그 고통은 전신에 퍼지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한 형제가 어떤 곤란을 받으면 버려두지 말고 깊이 동정해야 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자주 성찬을 "사랑의 유대"라고 부른 데에는2510)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도 그를 본받아 서로 헌신을 약속하며 실행하라고 권고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게 하고 계시는데, 무엇이 우리가 서로 사랑할 것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자극할 수 있겠는가?2511)

39.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다른 곳에서2512)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고 한 말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거나 고백을 연습하거나 의무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거나 하는 이 모든 일을 위해서는 설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하에서 일어나는 것같이 성찬을 말없는 행사로 만드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짓이다. 그들은 성별의 힘을 전적으로 사제의 의도에 의존시킨다.2513) 이 신비의 뜻은 누구보다도 회중에게 설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같이 처리한다. 따라서 또 다른 오류가 생겨났다. 즉, 성별을 완성하는 약속은 물질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물질들을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향해서 내 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떡을 먹으라고 제자들을 향해서 명령하시며 그들이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리라고 약속하신다. 바울도 약속이 떡과 잔과 함께 신자들에게 제공된다고 가르친다. 분명히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마술적인 주문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마치 물질이 들어야 한다는 듯이 말씀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씀은 듣는 사람들의 덕을 세우며 그들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박혀 떠나지 않으며 그것이 약속하는 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효력을 나타내는 산 설교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경우에 병자들에게 분배하기 위해서 성별된 떡을 남겨 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무익한 일이다. 병자들이 받을 때에 성찬을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낭독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이 신비의 뜻을 바르게 설명하고 표징을 분배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침묵에는 남용과 과오가 따른다.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고 신비의 뜻을 설명함으로써 받는 사람이 유익하게 받게 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성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성별의 효과가 병자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그런 성별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고대 교회의 선례가 있다고 말한다.2514) 나는 이 말을 인정한다. 그러나 과오가 큰 폐해를 일으키는 이런 중대 문제에서는 진리자체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40. 성찬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한다는 뜻

우리는 주의 만찬의 이 거룩한 떡은 영적 양식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참으로 귀한 진미가 된다. 그것을 맛볼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이심을 느끼고 감사할 마음이 생기며 신자들끼리 서로 사랑하자는 권고를 받는다. 이와는 반대로 이 빵을 받아도 믿음이 영양과 힘을 얻지 못하며, 감사할2515) 생각이나 사랑할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무서운 독약이 된다. 물질적인 음식도 나쁜 체액이 가득한 위에 들어가면, 또 그 자체도 상하고 썩은 것이면 영양보다 해를 준다. 그와 같이 이 영적 양식도 악의와 사악으로 부패한 영혼에 들어가면 더욱 큰 파멸을 일으킨다. 양식 자체에 과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주의 축복으로 성결하게 된 것일지라도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딛 1:15)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주의 몸을 분별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말한다(고전 11:27,29). 믿음의 흔적도 없으며 사랑하겠다는 열의도 없이, 돼지같이 성찬에 뛰어드는 이런 사람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몸이 자기들의 생명이란 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만큼 그 몸을 모욕하며 그 존엄성을 박탈한다. 끝으로, 그들은 그런 모양으로 받음으로써 그 몸을 모독하며 더럽힌다. 또 그들은 형제들과 불화해서 멀어져 있으며 감히 그리스도의 몸의 신성한 상징과 자기들의 불화를 섞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찢기고 분할되지 않는 것은 그들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독적인 불경건으로 주의 몸과 피를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더럽히는 그들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한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이렇게 합당치 않게 먹는 그들은 자신의 정죄를 초래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성찬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고백하며 모든 다른 보장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고발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되며 자기의 유죄 판결에 날인한다. 또 그들은 미움과 악의로 형제들에게서, 즉,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서 분리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만이 구원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기 자기 자신을 살핀 다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령한다(고전 11:28).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즉, 사람은 각기 자기 속으로 내려가서2516) 홀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자기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구원을 충심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는가? 그리고 깨끗하고 거룩한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를 주며 함께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누어 줄 용의가 있는가? 자기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되는 것과 같이 자기편에서도 모든 형제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생각하는가? 자기는 그들을 자기의 지체로서 아끼고 보호하며 돕기를 원하는가? 이런 것들을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의무들을 우리가 지금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정성껏 노력하며 향상시켜서 일단 출발한 우리의 믿음이 매일 자라도록 하라는 것이다.

41. 누가 "합당"한가

합당하게 먹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려고 할 때, 그들은 보통 가련한 양심들을 무섭게 괴롭히면서도 올바른 결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 그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합당하게 먹는다고 했다. 그 "은혜의 상태"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린 상태라고2517) 해석했다. 이런 교리는 지상에 있던, 또 있는 모든 사람을 성찬에서 제외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절망과 멸망뿐이다. 우리는 아무리 전력을 다하더라도 전진이 없을 것이며, 합당하게 되고자 굉장히 애쓴 다음에도 결국 가장 합당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상처를 고치려고 그들은 합당하게 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힘 자라는 데까지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모든 행위를 검토함으로써 통회와 고백과 보속으로 자기의 죄를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적합한 곳에서 이 속죄의 성격을 밝혔다.2518) 현재 문제가 된 일에 관해서 말한다면 이런 대책들은 자기의 무서운 죄에 놀라고 낙심하는 양심들을 위해서는 너무도 무력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만일 주께서 의롭고 결백하지 않은 사람을 성찬에 참가시키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확신하려면 엄중한 경계심이 필요할 것이다. 최선을 다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했다는 확신을 가질 근거는 무엇인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전력을 다했다는 확신을 언제 가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에게 합당하다는 정확한 확신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에 대한 죄를 먹고 마신다고 하는(고전 11:29) 무서운 금지령 때문에 문은 항상 잠긴 채로 있을 것이다.

42. 믿음과 사랑은 필수 조건이지만 완전성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교황 제도에서의 지배적인 교리의 성격과 그것의 출처를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떨며 슬퍼하는 가련한 죄인들에게서 성찬의 위안을 빼앗는다. 그러나 성찬에 의해서 복음의 모든 기쁨이 죄인들 앞에 제시된다. 참으로 악마가 죄인들을 가장 신속하게 멸망시키는 방법은, 지극히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먹이고자 하시는 이 양식을 맛보지 못하고 먹지 못할 정도로 그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멸망으로 돌진하지 않기 위해서, 이 거룩한 잔치는 병자를 위한 약이며 죄인을 위한 위로이고 빈민을 위한 희사라는 것과, 건강하고 의롭고 부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먹지 못하면 신체의 힘이 없어지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굶주려 기절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므로, 우리 안에 그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우리의 추악함과 우리의 소위 합당치 못함을 하나님에게 드림으로써 하나님의자비가 우리를 그의 앞에 서기에 합당하도록 만들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 실망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낮춰서 하나님께서 들어 올리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고발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게 하는 것이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찬에서 권면하시는 그 연합을 갈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그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므로 우리도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한 정신과 한 마음과 하나의 말을 원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곰곰이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들이 우리를 놀라게 할 수는 있으나 결코 절망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 선한 것도 없고 죄로 더럽혀져서 거의 죽게 된 우리가 어떻게 주의 몸을 합당하게 먹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생각을 고쳐야 한다. 즉, 우리는 빈민으로서 친절한 희사자에게 가고, 병자로서 의사에게 가며, 죄인으로서 의롭게 만드시는 분에게 그리고 죽은 자로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간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타당성은, 첫째로 만사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 있으며, 둘째로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충분한 사랑에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불완전한 것을 키우시며 더 좋은 것으로 만드신다.2519)

어떤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우리와 일치하면서도 타당성의 표준 자체에 대해서는 아주 그릇된 생각을 한다. 그들은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믿음과 또 우리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등한 사랑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앞에서 말한 사람들과 같이 이 가장 거룩한 만찬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의 견해가 인정된다면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다는 죄책이 지적될 것이므로, 성찬을 받는 것은 반드시 합당치 못한 행동이 되겠기 때문이다. 성찬을 헛되고 불필요한 것으로 산들 정도의 완전성을 성찬을 받는 사람에게서 요구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우둔한 짓이다. 이는 성찬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곧 약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고무하고 자극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아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43. 성만찬의 합당한 집행

성찬의 외형적인 집행에 대해서는 예컨대 신자들이 떡을 손에 쥘 것인가, 신자들끼리 나눌 것인가? 각기 받은 것을 먹을 것인가? 또 잔을 집사들에게 돌릴 것인가,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인가? 또 떡에는 누룩을 넣을 것인가? 넣지 않을 것인가? 포도주는 붉은 것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흰 것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은 불필요한 것이며, 교회의 생각대로 어느 쪽을 채용해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고대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떡을 손에 쥐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끼리 나누라"고 말씀하셨다(눅 22:17). 역사서들을 보면, 누룩을 넣은 보통 떡을 써 왔는데 로마 감독 알렉산더가2520) 처음으로 무교병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기한 것으로 일반 사람들의 눈을 끌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건전한 경건을 가르쳐야한다. 나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명이 없고 너절한 연극은 이미 정신이 마비된 사람들의 감각을 속일뿐이지만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보다 훨씬 찬란하게 빛나며 신자들에게 훨씬 풍부하고 감미로운 영적 위안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미신에 속아 정신이 둔해진 사람들을 마음대로 인도하면서 사람들을 종교에 잡아 둔다고 한다. 이런 신기한 짓들을 오래 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옹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고대에는 세례에서 기름을 사용했으며 액막이가 사용되었다는 것과2521) 사도 시대 직후에 성찬은 여러 가지가 혼합되어 부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고질적인 당돌한 태도에서 온 것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항상 제멋대로 경솔한 짓을 하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아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에 비추어 천사들과 온 세상을 판단하게 하신다(고전 6:2-3, 갈 1:8).

그러면 이 복잡한 의식들을 일소하기 위해서는 성찬을 교회 앞에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2522) 집행한다면 합당한 집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공중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설교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은 후에 목사가 성찬의 제정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에, 목사는 성찬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는 동시에 주께서 금지하신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 후에 목사는 우리들에게 이 거룩한 양식을 주신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며 원래 이런 잔치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우리를 주의 자비로 합당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들을 노래하든지 또는 무엇을 읽든지 해야 하며, 목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적당한 순서로 신자들이 가장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성찬이 끝난 후에는 진지한 믿음과 신앙 고백을 그리고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권고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조용하게 산회해야 한다.2523)

44. 성찬은 자주 집행하라

성찬에 대해서 지금까지 말한 것을 보면, 현재의 통례와 같이 일 년에 한번,2524) 그것도 형식적으로 받도록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주 성찬을 받도록 제정하셨고, 자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이런 회상에 의해서 믿음을 강화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드리고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하며, 또 성찬을 자주 받음으로써 상호간의 사랑을 증진하고 서로 사랑을 증명하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단결하는 데서 사랑의 유대를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표를 받아 그 상징에 참여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에 관련된 모든 의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하여, 필요하고 능력이 미치는 대로 아무도 형제를 해할 수 있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며 도울 수 있는 일을 빠뜨리지 않도록 한다.

누가가 사도행전에 기록한 것을 보면, 사도 시대의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는" 것이 습관이었다(행 2:42). 이와 같이 교회의 집회에서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며 구제하는 것이 철칙이 되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런 질서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바울 서신에서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고전 11:20).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이 질서가 계속되었다.

아나클레투스와 칼릭스투스의 교회법에 성별이 끝난 후에는 교회 밖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참여해야2525) 한다고 하였다. "사도적"이라고 부르는 고대 교회법에도 "끝까지 남아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로서 마땅히 교정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디옥 회의에서도 교회에 들어와서 성경 말씀을 듣고도 성찬에는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허물을 고치기까지 교회에서 제거하라고 결정했다. 제 1차 톨레도 회의에서는 이 규정이 완화되었으나 적어도 온화한 용어를 사용했으나 역시 설교를 듣기만 하고 성찬에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경고를 하라고 하고, 경고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제명하라고 결정했다.2526)

45. 참여할 의무에 대한 어거스틴과 크리소스톰의 견해

거룩한 분들은 이런 법을 정해서 성찬을 자주 받는다는 사도들 자신이 정한 관습을 유지하며 보호하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 빈번한 성난 참여가 신자들에게 유익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등한시해서 점점 폐지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자기 시대에 대해서 말했다. "이 일의 신비는, 즉, 그리스도의 몸의 연합의 신비 어떤 곳에서는 매일 주의 식탁에 진설하며 매일 그 식탁에서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받는다. 어떤 사람들은 받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에 이른다."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제 1 서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몸과 피에 매일 참여하며, 어떤 사람들은 일정한 날에 받는다. 어떤 곳에서는 성찬을 제공하지 않는 날이 없고, 어떤 곳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또 어떤 곳에서는 일요일에만 제공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반 사람들은 간혹 더욱 해이해졌기 때문에, 거룩한 분들은 그런 무관심을 묵인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그들을 엄격하게 책망했다. 에베소서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설교에서 이런 예를 볼 수 있다. "잔치를 욕한 사람에 대모해서 '왜 식탁에 앉았느냐'고 묻지 않고 '왜 들어 왔느냐'고 묻는다(마 22:12). 신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석한 것은 악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초대를 받고 잔치에 와서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먹을 생각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잔치와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와 같이, 당신들은 이 가장 거룩한 음식을 받으려고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을 때 그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당신들도 그들 중의 하나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참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았겠는가? 당신은 저는 합당치 못합니다 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기도에 참여하기에도 합당치 못하다. 기도는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려는 준비이기 때문이다."2527)

46. 일 년 일회의 성찬 참여에 반대한다

일 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이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 제피리누스가 이 명령을2528) 했다고 하지만 현재의 형태를 가진 교령이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 그의 명령은 교회를 위해서 그다지 불리한 조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신자들이 모일 때마다 성찬이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대부분이 성찬을 받았다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시에 성찬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세속 우상 숭배자들과 섞여 있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표징으로 그 믿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저 거룩한 분은 질서와 제도를 위해서 모든 신자가 성찬에 참가함으로써 신앙을 고백하는 날을 정하였다. 제피리누스의 성찬 규정을 후인들이 악하게 왜곡해서는 일 년에 한 번 성찬을 받으라는 법을 만들었다.2529) 그 결과로, 거의 모든 신자가 한 번 성찬을 받으면 남은 일 년 동안의 의무를 깨끗이 다했다는 듯이 아무 관심이 없이 지낸다.2530)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처사였다. 주의 식탁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진설해서 성찬이 선언하는 약속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게 하는 것이 옳다. 물론 아무도 강요할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을 권고하며 고무해야 한다. 타성적으로 태만한 사람들은 책망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다 굶주린 사람같이 이 풍성한 식사에 모여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일 년에 하루만을 지정해서 남은 일 년 동안은 사람들을 태만하게 만드는 이 관습을 내가 처음에 마귀의 간계라고 불평한 것은 부적당하다고 할 수가 없다. 참으로 우리는 이 악습이 이미 크리소스톰 시대에 잠입한 것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긴 것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그는 이 문제에 관한 큰 불균등을 통탄했다. 신자들은 어떤 때에는 깨끗한 때에도 자주 오지 않다가 부활절에는 깨끗하지 못하면서도 왔다고 한다. 그리고 탄식한다. "아, 관습이로다! 아, 외람된 생각들이로다! 그러므로 매일 진설해도 허사요, 우리가 성단 앞에 서 있어도 허사로다. 우리와 함께 참여하는 사담이 하나도 없도다."2531) 크리소스톰은 결코 그의 권위로 이 관습을 승인한 일이 없다.

(평신도에게 잔을 주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 47-50)

47. "한 가지만 행하는 성찬"을 논박한다

성찬의 절반을 하나님 백성의 대부분에게서 도둑질하는 또는 강탈하는 다른 규정이2532) 같은 곳에서 생겨났다. 피의 상징은 소수의 삭발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의 특별 소유이지 불경한 평신도에게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벧전 5:3) 이렇게 부른다. 준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는 모든 사람이 마시라고 했다(마 26:27). 사람들은 감히 새로운 반대되는 법으로 그 명령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마시면 안 된다고 명령한다.

이런 입법가들은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그들의 투쟁이 불합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이 거룩한 잔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불상사가 생길 위험성이 있다는 구실을 내세운다. 이것은 그런 위험성을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가 예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실로 그들은 하나만 있으면 넉넉히 둘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미묘한 논법을 사용한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그것은 그 몸에서 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전체이다. 그러므로 몸은 병존에 의해서 피를 포함한다."2533)는 것이 그들의 논법이다. 우리 인간의 생각을 조금 고리를 늦춰 제멋대로 하게 버려 둘 경우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가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주께서는 떡을 우리에게 보이시면서 그것을 자신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보이시면서 그것을 자기의 피라고 부르신다. 인간의 이성은 담대하게 거기에 반대해서 그 떡은 피며 포도주는 몸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과 표징을 써서 자기의 몸과 피를 구별하신 것은 아무 이유도 없었으며, 그리스도의 몸이나 피를 하나님과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고 하는 태도이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전체를 의미하셨다면, "이것이 내 몸이라, 이것이 내 피라"고 하시지 않고 "이것이 내라"고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성경에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마 14:27, 요 18:5, 눅 24:39).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떡과 따로 잔을 제정하셔서 자신은 우리의 양식과 동시에 음료로도 완전무결하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절반을 빼앗긴다면 그가 주시는 영양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가령 그들의 구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즉, 병존에 의해서 피가 방 속에 있으며 몸이 잔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주께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강화를 경건한 사람에게서 빼앗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궤변을 물리치고 이중의 보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규정에서 받는 유익을 굳게 지켜야 한다.

48. 사도들은 다만 "희생을 드리는 자"로서 잔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은 거짓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마귀의 사자들이(성경을 조롱하는 그들의 상습에 따라) 궤변을 지껄이는 것을 안다. 첫째로 하나의 단순한 행위에서 교회가 항상 지켜야 할 원칙을 연역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행위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거짓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잔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행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이 명령하신 말씀이다(마 26:27). 그리고 바울도 그것을 이런 행위로서 기억하고 하나의 고정된 명령으로서 지키라고 권고했다(고전 11 :25).

그리스도께서 이미 선택해서 "희생을 드리는 자"의 계급에 가입시키신 사도들만이 이 성찬에 참가하는 허락을 받았다고 그들은 다른 구실을 내세운다.2534)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들은 이 질문들에서 도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자기의 거짓말 때문에 쉽게 논박을 받을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전연 없는 이 해결책을 어떤 신의 말이 그들에게 주었는가? 성경에는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은 사람이 열둘이었다고 한다(마 26:20).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희생을 드리는 자"라고 불러서 그리스도의 위엄을 떨어뜨리지 않는다(우리는 적당한 곳에서 이 용어를 논하겠다2535)).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열두 제자들에게 주셨지만 그들도 같은 일을 하라고, 즉, 서로 나누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더 좋던 시대로부터 사도 시대 후 일 천년이 지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두 가지 상징에 다 참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성찬에 참가시키셨는지를 몰랐던가? 여기에서 머뭇거린다든지 질문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가장 타락한 파렴치일 것이다. 교회 역사서들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들이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2536) 터툴리안은 말한다. "육신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이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영양을 얻기 위해서이다."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에게 말한다. "폐하께서 어찌 이런 손으로 주의 거룩한 몸을 받으시겠나이까? 어찌 주의 귀중한 피를 폐하의 입으로 감히 마실 수 있겠나이까?" 제롬은 "성찬을 집례하며 사람들에게 주의 피를 분배하는 사제들"을 언급한다. 크리소스톰은 말한다. "구약 율법에서와 같이 사제가 일부분을 먹고 회중이 다른 일부분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한 몸과 한 잔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성찬에 속한 것은 모두 사제와 신도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 어거스틴도 여러 구절에서 같은 뜻을 확언한다.2537)

49. 후대까지 평신도도 잔을 받았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잘 알려진 사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인가? 희랍계와 라틴계의 저술가들의 책을 모두 읽어보면 이런 증거는 풍부하게 발견될 것이다. 또 교회에 약간의 성실성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이 관습이 폐지되지 않았었다. 로마 최후의 감독이라고 불러도 좋은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시대에도 이 관습을 지켰다고 말한다. "어린양의 피가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제 들음으로써 안 것이 아니라 마심으로써 알았다." "그의 피는 신자들의 입에 쏟아졌다."2538) 그의 사후 400년을 지나서 모든 일이 이미 타락했을 때에도 이 관습은 아직 남아 있었다.

또 단순한 관습이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침범할 수 없는 법으로 인정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제도에 대한 경외심은 그 때에 왕성했고, 주께서 짝지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것은 신성 모독임을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겔라시우스도 그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성체의 한 조각만을 받은 후에 잔은 받지 않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들은 어떤 미신에 매여 있으므로, 성찬 전체를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연 참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 신비는 분할하면 반드시 큰 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키프리아누스가 말한 이유들에 유의했으며 그 이유들은 당연히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것이었다. "장차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 피를 흘리라고 가르치거나 권고할 수 있는가? 또는 우리가 우선 교회 내에서 그들이 성찬 참가의 권리로서 주의 잔을 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순교의 잔에 합당하게 만들 수 있는가?" 교회법 학자들이 겔라시우스의 저 명령을 사제들에게2539) 국한시킨다는 것은 너무 유치하므로 반박할 필요조차 없다.

50.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잔을 줄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셋째, 왜 그리스도께서는 떡에 대해서는 단순히 먹으라고만 하시고 잔에 대해서는 모두 마시라고 하셨는가?(막 14:22-23, 마 26:26-27) 의도적으로 사탄의 간계에 반대하려고 하신 것과 같다.

넷째, 만일 주께서 성찬에서(그들이 말하는 대로) "희생 드리는 자"들만을 존중하신다면, 누가 감히 주께서 제외하신 외인들을 성찬에 참가하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또 주만이 주실 권한이 있는 선물에 대해서 그가 명령하시지 않는데 누가 감히 자기에게 권한이 없는 그 선물에 참여하라고 부르겠는가? 참으로 그들에게 주의 명령과 모범이 없다면, 어떤 확신으로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을 감히 일반 신자들에게 감히 분배하겠는가?

다섯째,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전한 것을 주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은(고전 11:23) 거짓말이었는가? 후에 그는 모든 사람이 무차별하게 두 상징에 다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전했노라고 언명한다(고전 11:26). 모든 사람이 아무 차별 없이 참여하는 허락을 받는다는 관례를 바울이 주에게서 받았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거의 전부 쫓아 버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관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제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는 하나님에게서 받았노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후 1:19).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감히 교회의 이름으로 이 가증한 짓을 숨기며 옹호한다. 마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명령을 언제든지 유린하며 폐기하는 적그리스도가 교회인 것같이 또는 종교가 번성하던 사도 시대의 교회가 교회가 아니었던 것같이 행동한다.

제 18 장  카톨릭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소멸하는 모독 행위이다

(미사는 모독적이며 성만찬을 말살한다. 1-7)

1. 로마 교회의 교리

사탄은 이런 여러 가지 간계로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짙은 어두움으로 덮어 희미하게 만들고 더럽히려고 애썼다-적어도 교회 내에 그 순수성이 유지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마귀가 한 표징을 들어 올려 성만찬을 희미하게 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완전히 소멸해서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을 때에 무서운 가증한 일은 극치의 절정에 달했다. 마귀가 극악한 오류로 거의 전세계의 눈을 멀게 한 때에 이 일이 있었는데, 곧 미사는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제물과 예물이라는 신념을 그가 퍼뜨린 것이다.

나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파들이2540) 처음에 이 교리를 어떻게 용인하였는가를 묻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의 난해하고 교묘한 주장을 우리는 물리친다. 그런 주장을 아무리 궤변으로 변호하더라도 그것들은 성찬의 찬란한 빛을 흐리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로마의 적그리스도와 그의 예언자들이 전세계에 감염시킨 견해를 상대로 싸우려 한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기를 바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드리는 사제와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미사라는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미사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며 이 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화해시킨다고 한다.2541)

이것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의 조직이 일종의 유화 수단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속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보속을 드리기 위해 날조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사도 이 관념을 표현한다.2542) 그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는 뜻은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이 악폐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았으며, 외형적인 선 밑에 악폐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고,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라는 말한 마디에 믿음의 전체가 포함되었다고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리 찬란하게 장식할지라도 미사는 그리스도에게 큰 모욕을 가하고,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은폐하며. 그의 죽으심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죽으심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빼앗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하는 성찬의 힘을 약화시키며 소멸시킨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증명한다면, 이 가장 무거운 도끼로도(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끊어서 파헤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가 있겠는가? 이 빛이 그 밑에 숨은 악을 폭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덮개가 있겠는가?

2.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

그러면 제일 처음에 한 말, 즉, 미사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을 가한다는 점을 밝히겠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들이 일정 기간 임명을 받는다고 했으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제사장으로서 성별을 받으신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을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제사장직도 영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계승할 후계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생하시는 분이므로 뒤를 계승할 대리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영원히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하셨다(히 5:6,10, 7:17,21, 9:11, 10:21, 시 110:4, 창 14:18). 이 신비는 오래 전에 멜기세덱에게서 예시되었다. 성경이 그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한 번 소개한 후에 다시는 그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은 그의 생명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유사점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금 매일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그 예물을 드릴 제사장을 지정해야 하며, 그들은 후계자와 대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이런 대신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빼앗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우편에서 그를 쫓아내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제사장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제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보좌할 뿐이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은 여전히 존속한다고 그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라. 사도의 말이 그들을 붙잡고 도망하지 못하게 한다. 제사장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많은 제사장들이 생겨난다고 한다(히 7:23). 그러므로 죽음의 장애를 받으시지 않는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동료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멜기세덱의 선례로 무장하여 그들의 불경건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고 했으므로(창 14:18) 이것은 그들의 미사를 미리 보인 것이라고 그들은 추론한다. 떡과 포도주를 주는 점에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2543) 이것은 너무도 천박하고 미련한 생각이어서 논박할 필요조차 없다. 멜기세덱은 행군과 전투로 지친 아브라함과 동행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어 그들의 기운을 북돋우려고 했다. 이 행위와 제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세는 저 거룩한 왕의 친절을 칭찬한다(창 14:18). 이 사람들은 성경에 아무 말도 없는 신비를 조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과오에 다른 색을 칠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말씀이 곧 뒤따르기 때문이다(창 14:18). 그들은 사도가 축복과 관련시켜 한 말을 왜곡해서는 떡과 포도주에 적응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했다(창 14:19). 여기서 사도는(그보다 더 훌륭한 해석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의 탁월한 지위를 추론한다.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히 7:7). 만일 멜기세덱이 음식을 준 것이 미사의 제물을 예시하는 것이었다면, 가장 사소한 일까지도 가려내는 사도가 그런 중대한 일을 잊었을까?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그들은 사도 자신이 제시하는 논법을 격파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죽을 성질의 인간들이 제사장이 될 권리와 영예는 없어졌다고 사도는 주장한다(히 7:17-19).

3.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나는 미사에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은폐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제단을 쌓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즉시 전복시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면(히 9:12) 이 희생의 힘과 효력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 하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소가 송아지 이상의 존경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소나 송아지의 희생의 효력과 힘이 약했다는 것은 그것이 자주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영원히 깨끗하게 하는 힘이 없다고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한 번 행하신 희생은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한다(히 9:26).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이런 말들에 사도는 다시 첨가해서, 우리는 단 한번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주목할 만한 말을 한다(히 10:18,2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으로(요 19:30) 이 뜻을 표시하셨다. 우리는 사람이 운명할 때에 하는 말을 예언이라고2544) 생각한다. 운명하시려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그의 한 희생에 의해서 모두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확언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희생을 완전하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마치 그것이 불완전한 것인 양 그리스도의 이 희생 위에 매일 수많은 조각을 잡아매도 좋을 것인가? 이 희생은 단 한 번 행한 것이며 그 힘은 전적으로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확언할 뿐만 아니라 높이 외치며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불완전하며 무력하다고 고발하지 않는가?

매일 수십만 번씩 희생을 드리도록 마련된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유일한 희생으로서 아버지 앞에 드리신 그 수난을 묻어 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명백하고 공개된 진리와 싸우려고 한 것은 대담한 사탄이었다는 것을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거짓말의 조상이 자기의 기만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간계를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희생이나 또는 다른 희생이 아니라 같은 희생을 반복하는 것뿐이라고 마귀는 말한다.2545) 그러나 이런 연막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사도는 이 문제를 논할 때에 항상 다른 제사는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 한 제사는 단 한 번 드려졌고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리한 사람들은 더 비밀의 틈새로 빠져나간다. 즉, 미사는 반복이 아니라 적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궤변도 간단하게 반박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 번 제물로 바치신 것은, 그의 희생을 매일 새로운 예물로 확인하라는 조건이 아니라 그의 희생의 혜택을 복음 선포와 성찬 집행에 의해서 우리에게 분배하라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하고(고전 5:7) 우리에게 명절을 지키라고 명령한다(고전 5:8). 십자가상의 제물이 우리에게 충분히 분여되어 우리가 향유하며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곧 이 희생을 우리에게 적당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말한다.

4. 말라기 1:11에 의한 주장

미사의 희생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이상의 어떤 근거를 말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예언에서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때가 오리라고 약속하신다(말 1:11).2546)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부르심을 받으리라는 문제를 말할 때에, 예언자들이(그들에게 권하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묘사하기 위해서 율법의 외형적인 의식을 사용한 것은 새삼스럽거나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이방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를 믿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더 똑똑하게 알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항상 자기 시대의 예표를 통하여 복음에 계시된 진리를 묘사했다.

예컨대 주께로 향하는 것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며(사 2:2-3, 미 4:1-2),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각양각색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고(시 68:29, 72:10-11, 사 60:6이하),(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모든 신자가 받게 될) 하나님께 대한 더 풍부한 지식을 꿈과 이상이라고 표현한다(욜 2:28). 그러므로 그들이 말라기에서 인용하는 것은 이사야에 있는 다른 예언과 같다. 이사야는 앗수르와(사 19:23) 애굽과(사 19:19,23 참조) 유다에(사 19:24) 각각 제단이 있으리라고 예언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성취된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둘째, 지금 그 제단들이 어디 있으며 언제 쌓은 것이냐고 묻는다. 셋째, 그들은 이 나라들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같은 제단이 각각 배정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런 일들을 깊이 생각한다면, 이사야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가 전세계에 퍼지리라는 것을 자기 시대의 적합한 예표를 통하여 예언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자주 보기 때문에 더 열거하려고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미사 이외의 다른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도 가련하게 속고 있다. 신자들은 지금 주께 진정한 제사와 깨끗한 예물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곧 말하겠다.2547)

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나는 이제 미사의 셋째 기능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참으로 죽으신 사실을 소멸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유언자가 죽어야만 유언이 확정되는 것과 같이, 우리 주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유언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인하셨다(히 9:15-17). 이 유언을 감히 변경하거나 거기에 새로운 무엇을 첨가하는 자들은 주의 죽으심을 부정하며 무시하는 자들이다. 미사는 새로운 전혀 다른 유언이 아니고 무엇인가? 미사는 드릴 때마다 죄의 새로운 용서와 의의 새로운 획득을 약속하며 따라서 지금은 미사의 수만큼 유언도 많아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이 새로운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아니, 수많은 죽음으로 이 수많은 미사의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진실로 죽으신 사실을 말살한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은가? 미사는 직접 그리스도를 다시 죽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유언이 있으면 유언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기 때문이다(히 9:16). 미사는 그리스도의 새 유언을 전시한다. 그러므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제물은 반드시 죽여서 바쳐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제물이 되신다면 그는 순간마다 수많은 곳에서 잔인한 죽음을 당하셔야 될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사도의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신을 바쳐야 했다면 그는 천지 창조 이후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을 것이라고 한다(히 9:25-26). 나는 그들이 곧 대답하며 우리를 중상모략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일이 없고 지금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비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과 사가 그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불경하고 사악한 교리의 어리석은 결과를 밝히려고 할뿐이다. 나는 사도 자신의 말로 이 점을 증명한다. 비록 그들이 이 희생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2548) 백 번 항변할지라도 나는 사람의 변덕에 따라 희생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의 제도가 붕괴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도의 확고한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히 9:22).

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한다

이제 나는 미사의 넷째 기능, 즉,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우리가 인정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점을 논해야 한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자기가 구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용서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의 용서를 가져다주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미사에서 죄의 용서를 얻는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자신을 구속한다는 조건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었다고 호언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탄의 사자들은 이미 이런 교리를 퍼뜨리며 현재 이 교리를 선전과 칼과 불로 옹호하고 있다. 즉, 우리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바칠 때, 우리는 예물을 바치는 이 행위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친다.2549)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속의 한 예로 보며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속자인 것을 깨닫는다는 생각이 아닌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수난에서는 무엇이 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만찬에서 용서의 확약에 인을 치실 때에, 제자들을 이 행위에서 머물라고 하시지 않고 그의 죽음의 희생으로 그들을 보내시면서, 성찬은 회상하게 하는 것(이른바) 기념행사라는 것을 보이신다. 즉, 이 행사에 의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속죄 제물이 단 한 번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희생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첨부해서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에 묶지 않는다면 그 이해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7. 미사는 성만찬을 폐기한다

이제 마지막이다.2550)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 기억하게 하신 장면인 성찬은 미사에 의해서 제거되고 파괴되며 폐지된다는 점에 도달했다. 참으로 성찬 자체는 하나님의 한 선물이며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미사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치르는 값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속으로서 받으신다고 한다. 이 희생과 성찬의 신비가 서로 다른 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여기서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배은망덕 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우리는 생명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소생된다는 것을 약속한다. 미사의 희생은 아주 다른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면 매일 희생이 되셔야 한다고 한다. 성찬은 교회의 공적 집회에서 분배되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로 뭉치는 그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미사의 희생은 이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분열시킨다. 마치 성찬이 사제들에게 이양되었다는 듯이 신자들을 대신해서 제물을 드려 주는 사제가 있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지배하게 된 후로, 성찬은 주의 명령대로 신자들의 교회에 나눠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미사가 잠입할 문이 열렸고, 이것은 주께서 제정하신 영적 교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수찬 정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물을 먹으려는 사제들이 모든 신도에게서 자기를 격리시키기 때문이다.2551)(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거니와) 아무리 많은 군중이 참석했을지라도 신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때에는 나는 그것을 개인적 미사라고 부른다.

(초기의 관습과 오해의 발생. 8-11)

8.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

나는 "미사"라는 말의 출처를 확정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드린 예물들에서 온 것 같다.2552) 그래서 고대 저술가들은 대개 복수형을 썼다. 그러나 나는 용어 문제의 논쟁을 피하고, 개인적 미사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에 정반대되며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불경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성찬을 받아서 우리끼리 나누라는 것이 아닌가?(눅 22:17) 바울은 이 명령을 어떻게 지키라고 가르치는가? 떡을 떼는 것, 즉,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고전 10:16) 그러므로 한 사람이 받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을 때 거기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 한 사람은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받아먹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명령에 의한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나눠야 할 것을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바울의 말씀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들에게 나누기 위해서 떡을 떼지 않는 곳에는 주의 만찬이 없으며 변태적이요 거짓된 모방뿐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말한다.

그러나 거짓된 모방은 곧 타락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위대한 신비를 타락시키는 것에는 반드시 사악한 결과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미사에는 사악한 남용이 있다.(종교에서는 한 가지 잘못은 다른 잘못을 반복 생산하기 때문에) 제물을 나누지 않는 관습이 일단 잠입한 후에, 그들은 교회의 어느 구석도 빼놓지 않고 수많은 미사를 행하며 신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자들을 한 곳에 모아 서로 하나가 되는 신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미사에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고 떡을 제시해서 그것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선전하게 하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이 약속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약속을 주신 뜻은 결코 불결하고 부정한 자들이 언제든지 또 어떤 악한 목적을 위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신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지킴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기쁨을 소유하라는 뜻이다.

9.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이외에도 이런 타락은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에는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 중에서 특히 파렴치한 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우리가 다른 문제에 관련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고대 교회가 전적으로 그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2553) 또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면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강론을 끝내기 전에 우리의 미사 박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즉,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여러 가지 제사보다 더 힘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시는 줄을(삼상 15:22) 그들도 알기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데 대해서 그들은 명령을 받은 일이 없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아무나 제사장직의 영예를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만이 얻으며,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 제사장직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셨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을(히 5:4-5) 그들도 듣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사제직에 대해서, 그것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영예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지 않은 그들 자신이 악하고 경솔한 생각으로 뛰어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제직을 옹호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점일획도 찾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사제가 없이는 드릴 수 없다는 그들의 제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10.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로 간주했는가?

만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 여기저기에서 문장을 떼어다가 그것을 권위로 삼고서, 성찬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고안한 가짜 제사를 시인하느냐에 관한 문제일 경우 고대 저술가들은 이런 모독 행위를 절대로 옹호하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물론 그들은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어디서나 선언하듯이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유일하고 진정한 제사에 대한 기념이라는 뜻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면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실 미래의 희생 제물에 대한 예언을 찬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거룩하게 바치며 또 그 몸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바친 희생에 성대한 기념을 축하한다." 여기서 그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뜻을 집사 베드로에게 보내는(이 글의 필자가 누군지를 나는 묻지 않지만) 신앙론(Con- cerning Faith to Peter the Deacon)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2554) "우리를 위해서 육신이 되신 독생자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말라. 그에게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에게 구약 시대에는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지금은 그에게(그와 한 신성을 가지신)아버지와 성령에게 전세계의 거룩한 교회가 떡과 포도주를 끊임없이 드린다. 저 육적인 제물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드리실 그리스도의 살을 예시했으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흘리실 그의 피를 예시했다. 그뿐 아니라 이 제사에는 우리를 위해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회상하며 감사하는 뜻이 포함되었다."2555)

따라서 어거스틴 자신도 여러 구절에서 이 제사는 찬양의 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끝으로, 우리가 주의 만찬을 제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바치신 특이하며 진정하고 유일한 제사에 대한 기념과 형상과 증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자주 발견할 것이다.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권 24장에도 잊을 수 없는 구절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저 특이한 제사를 논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제사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누구에게,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목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그 유일하고 진정한 중보자는 그가 희생을 드린 분과 여전히 하나이며, 그가 위해서 희생을 바치신 사람들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며, 희생을 바친 이와 희생으로 바친 것도 하나이다."2556)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예를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2557)

11. 교부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신에서 이탈했다

우리는 고대 저술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광경이 거의 우리 눈앞에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전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갈 3:1). 그러나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이 기념행사에 대해서, 주의 제정 정신과 맞지 않게 오해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성찬론에는 희생이 반복된다는 적어도 새롭게 된다는 듯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2558)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명령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성찬은 하나님의 만찬이라고도 하며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만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고대 저술가들에게 불경건이 있었다고 정죄할 수 없다. 이것은, 나는 그들이 이 신비 전체에 대해서 경건하고 정통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며, 주의 특이한 희생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려는 생각을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다소의 허물이 있었던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이나 복음의 성격이 허락하는 정도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를 엄격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괴팍한 신비로운 해석만은2559) 그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순수한 제정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 그림자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있는 제물 관념 : "제물"이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 : 미사는 신성 모독이다. 12-18)

12.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

만일 부지런히 깊이 생각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모세의 제사와 우리의 성찬 사이의 차이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모세의 제사는 오늘날 성찬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지만(레 1:5) 그 보여 주는 방법이 달랐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희생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명령을 받아 예시했으며 그리스도 대신에 희생 동물이 제시되었고 제물을 드릴 제단이 있었다. 요컨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릴 희생의 모양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도록 모든 일을 행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후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제정해 주셨다. 즉, 아들이 그에게 드리신 희생의 유익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 대신에 잔치상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 대신에 성직자들을 성별하셔서 거룩한 잔치를 분배하게 하셨다.2560) 신비가 숭고하고 신성할수록 더욱 경건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간적인 지성의 모든 외람된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교훈만을 굳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또 성찬은 주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할 경우, 우리는 사람의 권위나 오랜 규정으로 인하여 주의 성찬에서 털끝만큼도 어긋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이미 잠입한 모든 과오를 일소하려고 할 때에,(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그들을 저 유일한 제정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며 이 원천에서 영원한 원칙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전 11:20이하).

13. 희생의 성격

sacrifice(희생, 제물, 제사)와 Priest(제사장, 사제)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와 언쟁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내가 이 논의에서 이 말들을 사용한 뜻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모든 거룩한 의식과 종교적 행동을 "제물"이라는 말로 표시하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의 일관된 용법에 의하면 희랍 사람들이 , 혹은 , 혹은 라고 부른 것을 제물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모두 이 말에 포함된다.2561)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과 구별해야 한다. 즉, 신비적 해석을2562) 허용할 수 있는 구별이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그림자를 가지고 제물의 보편적인 진리를 그의 백성에게 보이려고 하셨다. 제물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전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제물은 보속의 의미로 죄를 위해서 드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면제되었다. 또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상징과 경건의 증거였다. 이런 제물은 어떤 때에는 간구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빌고, 어떤 때에는 감사의 형식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증거하며,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경건의 표시로서 새로 언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둘째 종류에 속하는 것이 번제와 전제와 예물과 첫 이삭과 화목제였다.2563)

따라서 우리의 제물도 두 가지로 구별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교육적 의미로 하나는 "찬양과 경외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2564)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하고 또 드리는 경배와 예배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원한다면 "감사의 제물"2565)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무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자기의 몸과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제물은 "화목의 또는 속죄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심판에 대한 보속을 행하고 죄를 씻어 깨끗이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씻음으로써, 모든 불결이 제거되고 순수한 의가 회복된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 하에서 속죄하기 위해서 바친 동물을 희생 제물이라고(출 29:36)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거나 죄를 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희생을 예표 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생은 실제로 그리스도만이 최종적으로 성취하셨는데 이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의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확인하셨다(요 19:30). 즉,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며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희생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 어떤 다른 희생을 바칠 필요가 전혀 없다.

14. 미사를 판매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며 의를 얻는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또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 희생에 대해서 극악한 치욕과 참을 수 없는 모독을 가한다고 단정한다. 새로 예물을 드리는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미사를 드리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의 광태는 한정 없이 확대되어, 그들의 미사는 그들이 마음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특히 지정하지 않는 한 교회 전체를 위해서 공통적으로 평등하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은 사소한 일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이 상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그들의 미사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가 받은 값을 받을 수는 없었으나 조상과 어떤 유사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숫자를 같게 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은 30개에 팔았으나(마 26:15) 이 사람들은 프랑스의 계산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를 동전 30개로 판다.2566) 유다는 한 번 팔았으나 이자들은 몇 번이든지 판다.

헌물을 바침으로써 사제들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푼 후에 속죄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부인한다. 신약의 제사장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히 9장). 그리스도에게 모든 제사장직이 옮겨졌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모든 제사장직이 종결되고 폐지되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옛날 제도를 폐지하시고 새 제도를 만드시지 않았으므로 사도의 주장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히 5:4). 그러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도살하는 자라고 호언하는 이 모독자들은 어떤 철면피를 쓰고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을 자칭하는 것인가?

15. 유사한 허식과 망상에 대한 플라톤의 발언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 제 2 권에 훌륭한 구절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옛날의 속죄제를 논하면서, 악한 사람들이 이런 제물에 의해서 자기의 비행이 가려져서 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며 마치 신들과 계약을 한 듯이 더욱 마음을 놓고 방탕하게 생활하는 그 우매함을 비웃는다. 플라톤은 여기서 현대의 미사가 행하는 속죄의 관습을 언급하는 것같이 보인다. 불공평한 거래로 과부들을 괴롭히고, 고아들의 물건을 강탈하며, 빈민을 괴롭히며, 협잡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위증과 사기로 남의 소유를 점령하며, 폭력과 공갈로 남을 압박하는 것이 악한 짓이란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 모든 일을 반복하고 이런 짓들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진실로 이 문제를 잘 검토한다면, 이 사람들을 가장 격려하는 신념이 있는데 곧 그들은 값을 치르는 것같이 미사의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푼다고 또는 적어도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쉬운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이런 속죄제를 드리면 지옥에서2567) 받을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짐승같이 미련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런데 현대 미사의2568) 대부분과 매년 행하는 기념행사는 악한 자들을 일평생 가장 잔혹한 폭군이었던 자들과 가장 욕심 많은 강도였던 자들과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자들을 연옥의 불에서 빼내기 위해서 값을 치른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6. 그리스도의 교회의 "감사 제물"

우리가 "감사의 제물"2569)이라고 부르는 둘째 종류의 희생에는 사랑의 의무가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을 존귀하게 한다.2570) 또 이 둘째 종류에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모든 예배행위가 포함된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저 더 큰 제사 곧 우리의 영혼과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는 제사에 의존한다(고전 3:16 기타). 외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은 우리 자신을,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며 그 영광을 더욱 나타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거나 죄의 용서를 얻거나 공로로 의를 얻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 죄책이 면제를 받은 후에 드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에게 기꺼이 열납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미 예언자의2571) 말에서 안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한 이 제사는 계속될 것이다. 예언자의 말은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 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우리는 결코 이 제사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피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2572)고 명령한다(롬 12:1, 벧전 2:5-6 참조). 여기서 "영적 예배"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의미가 있다. 사도는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언중에 모세의 율법에 있는 육적인 제사와 대립시킨다.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라고 한다(히 13:16). 그래서 빈궁한 바울을 도운 빌립보 교회 신자들의 관용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신자들의 모든 선행은 영적 제사인 것이다.

17. 찬양의 제물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나는 왜 증거를 많이 찾아내려고 하는가?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율법의 외형적인 지도하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 민족에게 공통된 진리가 육적인 제물의 기초가 되었다고 예언자들이 분명하게 선포했다. 다윗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과 같이 올려지기를 기원했다(시 141:2) 호세아는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입술로 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며(호 14:2-3), 다윗은 "영화롭게 하는 제사"라고 부른다(시 50:23, 51:19). 사도도2573) 그를 따라 감사를 "찬미의 제사"라고 부르고 그것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설명한다(히 13:15). 주의 만찬에는 이런 종류의 제물이 없을 수 없다. 성찬에서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고전 11:26)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곧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는데(벧전 2:9), 이는 사도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부르는 찬미의 제사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중재자가 계신다. 우리를 위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고유를 아버지께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히 9:24)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가 들어갈 길을 열어 주신다(히 10:20).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물을 드리는 제단이시며(히 13:10 참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의 안에서 행하게 하신다.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은 그리스도시라고(계 1:6) 말한다.2574)

18. 미사는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미사라는 이 가증한 것에 대해서 아직도 소경이 볼 수 있고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금잔에 넣어 드리는 미사는 세상의 모든 왕과 백성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든 자에 이르기까지 취하게 만들며 졸음과 현기증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짐승들보다도 더 둔감해진 그들은 구원의 배를 조종해서 전적으로 이 죽음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확실히 사탄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포위하고 함락시키기 위해서 이 이상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든 적이 없다. 진리의 원수들이 현재 미친 듯이 잔악한 수법으로 싸우는 것은 바로 이 헬렌2575)이라는 음녀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헬렌과 같은 음녀를 상대로, 영적 음행이라는 가장 가증한 행위로 몸을 더럽히고 있다. 그들은 거룩한 미사의 순결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구실로서 여러 가지 야비한 악폐를 제시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들에 새끼손가락 하마도 대지 않는다. 미사를 이용한 그들의 비열한 장사와2576) 불결한 이익, 한정 없는 탐욕 등에도 나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사의 가장 거룩한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단순한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지적할 뿐이다. 이 거룩한 점이 있기 때문에 미사는 수백 년 동안 존경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지극히 위대한 신비를 그 존귀성에 합당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큰 일일 것이다. 또 나는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추악한 부패상을 이 신비들과 혼합하고 싶지 않다. 미사가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를 아무 부속물이 없는 상태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철두철미하게 온갖 불경과 훼방과 우상 숭배와 신성 모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17장과 18장에 대한 결론 : 기독교의 성례는 둘뿐이다. 19-20)

19. 세례와 주의 만찬만이 성례이다

신약 시대의 초기부터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 교회에 전해지는 두 가지 성례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의 전부를 이제 독자들은 간단히 알게 되었다. 세례는 이를테면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신앙생활의 입문이다. 그러나 성찬은 일종의 계속되는 양식이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신자인 가족들에게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과 한 믿음과 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이 세례도 하나뿐이며(엡 4:4-6) 이는 자꾸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해서 분배되어 일단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 성례 이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례는 없으므로 신자의 교회는 다른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성례를 제정하는 것은 사람이 선택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분명하게 설명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 점을2577) 곧 이해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알리시며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성례를 제정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사 40:13, 롬 11:34) 이 점을 이해할 것이다. 즉, 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또 우리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며 무엇을 거절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짐하며 믿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떤 표징을 내놓고 하나님의 의도나 약속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표징을 주셔서 우리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더 간단하게 또 더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더 분명히 말한다면, 결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이더라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자기의 힘으로 성례를 제정할 수 없다.

20. 성례를 첨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두 가지 성례로 만족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셋째 성례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도 원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보통 성례 이외에 시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서 여러 가지 성례를 주셨다. 예컨대 만나와(출 16:13, 고전 10:3), 반석에서 흐르는 물과(출 17:6, 고전 10:4), 놋뱀과(민 21:8, 요 3:14), 그밖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이런 변천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이런 무상한 형태에서 머물지 말고 더 좋은 것, 폐하거나 끝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기다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된 후로 우리는 사정이 훨씬 달라졌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한없이 풍부한 이 보화에 어떤 새로운 것이 첨가되기를 바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갈망하고 바라보며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의 영광을 완전하게 나타내시며(고전 15:24) 우리에게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요일 3:2)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만을 구하며 배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시대를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요일 2:18), "모든 날 마지막"(히 1:2) 또 "말세"(벧전 1:20)라고 부르며, 공연히 새로운 교리나 계시를 기대해서 속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2), 아들만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으며(눅 10:22),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 같으나(고전 13:1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범위 내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충분히 나타내셨다.

그런데 교회 안에 새로운 성례를 만드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시지 않은 것과 같이, 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도 사람이 조작한 것을 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물을 넣으면 포도주가 변질되고 묽어진다. 누룩을 뿌리면 반죽한 덩어리 전체가 시어진다. 그와 같이 사람이 자기 생각을 첨가할 때 하나님의 신비는 더럽혀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집행되는 성례들이 그 시초의 순결성에서 많이 타락한 것을 본다. 어디를 보아도 행렬과 의식과 무언극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례가 성립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언급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들은 무수한 의식에 짓밟혀 머리를 들 수 없게 되었다. 세례에서는(우리가 이미 당연한 비난을 한 것같이)2578) 빛나며 주시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 즉, 세례 자체를 볼 수 없지 않은가? 성찬은 미사로 변모된 후에 완전히 매장되었으며, 이런 것 외에는 일 년에 한 번 보이는 찢기고 잘린 반조각의 성찬뿐이다.

제 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2579)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다섯 가지 성사(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 1-3)

1. "성사"라는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성례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을 본다면, 교훈을 잘 받고 건전한 사람들은 호기심에 더 끌리거나 주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이외의 것, 즉,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것을 성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가지 성사라는 관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며 모든 학파와 설교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아직까지도 깊이 자리 잡고 있다.2580) 따라서 나는 남아 있는 다섯 가지의 소위 성사들을 낱낱이 엄격하게 검토해서 그 기만을 벗기고, 단순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 진상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성사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밝힌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 이름에 대해서 논쟁을 시작하는 것은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며 이 이름이 남용되는 것을 공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만물의 주인이며 따라서 마음대로 사물에 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경건한 태도만 유지된다면 다소 부정확한 말을 쓰더라도 용인할 수 있다. 나는 사물이 말을 따르는 것보다 말이 사물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사란 말은 문제가 다르다. 일곱 성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라는 정의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 일곱 가지를 모두 성령의 그릇, 의를 부여하는 기구,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고 한다.

진실로 면제집(the Sentences)의 대가 롬바르드 자신도,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사들은 그것들이 예표하는 것을 줄 수 없었으므로 그것들이 성사라고 불려지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한다.2581) 나는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훌륭한 약속으로 장식하신 상징들을 성사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 쪽으로는 사람이 제멋대로 고안하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없이 행하는 의식들에 이 영예를 돌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사라는 단어의 정의를 바꾸든지 아니면 그 단어 사용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종부 성사는 성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상과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추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으므로, 이런 오류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용어 자체를 문제로 삼아 그들에게 도전한다. 여기서도 그들은 이 의식에는 외형적인 표징과 말씀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이것을 성사라고 인정한다.2582) 명령도 없고 약속도 없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반대할 수밖에 아무런 대책이 없지 않은가?

2.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용어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해서 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무적의 논리로 확인한 것, 즉, 성례 제정권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 진심으로 성사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해서 신자의 양심에 용기와 위안을 주어야 한다. 양심은 사람에게서는 결로 이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나 천사가 이것을 증거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사 40:13, 롬 11:34)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과 합당한 권위로 증거하신다. 성사는 하나님의 언약 또는 약속에 날인하는 장이다. 그러나 물질과 이 세상의 원소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 형성되고 예정되지 않으면 약속에 날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사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이런 위대한 신비를 이런 비천한 물질 속에 숨긴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적절한 말과 같이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사와 다른 의식들을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도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므로(행 7:60, 9:40, 20:36, 21:5, 26:14) 신자들도 무릎을 꿇으면 곧 성사가 될 것이다. 제자들은 동쪽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하므로 동쪽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성사가 될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각처에서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며(딤전 2: 8) 거룩한 분들은 자주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고 하므로(시 63:4, 88:9, 141:2, 143:6) 두 손을 펴 드는 것도 성사가 될 것이다. 결국 성자들의 모든 몸짓이 성사로 변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이 더 곤란한 문제들과 관련이 없다면 여기에 시간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3. 성례가 일곱 가지란 것은 고대 교회가 몰랐다

만일 그들이 고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교회 저술가들 가운데서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숫자가 언제 잠입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라는 말을 아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사용했는가? 경건에 관한 모든 외형적인 의식과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로 만족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나는 어거스틴의 증언을 인용하겠다. 그는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이 논의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복음서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우셨다는 것이다(마 11:29-30). 따라서 새로운 백성의 사회를 단결시키는 수단으로서, 수가 아주 적고 지키기 쉬운 그러면서도 의미가 매우 깊은 성례를 정하셨다. 이것이 곧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별하는 세례와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과 기타 정경에 시인된 것이다."2583) 또 기독교 교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자신과 사도들이 몇 가지 표징을 지정하셨다. 그것은 수가 많지 않고 쉽게 행할 수 있으며, 뜻이 극히 숭고하고, 극히 깨끗하게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세례와 주의 몸과 피의 기념이다."2584) 왜 어거스틴은 이 신성시되는 "일곱"을 말하지 않는가? 만일 당시의 교회에서 일곱이 확인되었다면 그가 빠뜨렸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다른 데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숫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참으로 세례와 성찬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두 가지 신비가 특히 존귀하고 다른 의식들은 지위가 낮다는 뜻을 무언중에 표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성사의 박사들에게는 주의 말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굉장한 거짓말로 자랑하는 고대 교회의 찬성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위 성사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견진례는 성사가 아니다 : 교육한 후에 받아들이던 고대의 관습을 회복 하라. 4-13)

4. 고대 교회의 관습

고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장성하면 감독 앞에 서서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학습 교인이 된 어른들은 믿음의 신비를 올바르게 배워 감독과 회중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유아 세례를 받은 청년들은, 아직 교회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았으므로 소년기의 마지막이나 청년기의 초기에 부모가 다시 한 번 감독 앞에 데려다가 당시에 사용된 일정한 교리 문답 형식에 따라 심사를 받았다. 이 행동 자체가 이미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었지만, 더욱 존중하는 의미에서 안수하는 의식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청년들은 믿음이 인정된 후에 엄숙한 축복을 받고 물러갔다.

고대 저술가들은 이 관습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2585) 교황 레오가 한 말이 있다. "이단에서 돌아온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게 하지 말고 그가 받은 세례에는 성령의 권능이 없었으므로 감독의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하라." 여기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령을 받는 의식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그가 한 말의 뜻을 다른 곳에서 설명한다. "이단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르는 안수례에 의해서 믿음을 굳게 하라. 그는 세례를 받았으나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롬도 루시퍼파에 대한 반대론에서 이 점을 말한다. 나는 제롬이 이 행사가 사도 시대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또 그는 이 축복하는 행위가 감독들에게만 허락되었으나 법적 필연성보다도 감독직에2586) 대한 경의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완화 조건까지 첨부한다.2587) 그러므로 나는 일종의 축복 형식에 불과하다는 안수례에 전심으로 찬성하며 지금 그 순수한 사용법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5. 로마 카톨릭교가 가르치는 완성된 견진례의 의미

그러나 후대에 와서 실체를 거의 소멸하고 일종의 가장된 견진을 하나님의 성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세례에서 죄의 결백을 위해서 받은 성령을 주어 은혜를 더하게 하고, 세례를 통하여 중생해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싸워 나갈 힘을 더해 주는 권능이 견진례에 있다고 말한다. 견진례를 행할 때에는 기름을 바르며 일정한 선언을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너에게 이 거룩한 십자가의 표를 치며 구원의 성유로 너를 견진하노라."2588) 모두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일점일획도 보여 줄 수 없다. 그들의 성유가 성령의 그릇이란 것을 그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진하고 미끈미끈한 액체인 기름을 보지만 그것뿐이다. 어거스틴은 "물질에 말씀을 더하라, 그러면 물질은 성물이 될 것이다"2589)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그 기름에서 기름 이외의 무엇을 보이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말씀을 내보이라고 하겠다. 만일 그들이 성물을 분배하는 일꾼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또 그것이 마땅하지만 나는 더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꾼이 지켜야 할 첫째 법칙은 명령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일을 하라고 한 명령을 보이라, 그러면 나는 한 마디도 더 말하지 않겠다. 만일 받은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그 대담한 보복 행위를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왔는지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다. 만일 그들이 "사람에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 세례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서"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을 너무 중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감히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마 21:25-27). 그러므로 견진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그것을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복시키려면 먼저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6. 사도들의 안수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진실로 그들은 사도들의 선례를 들어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무 일도 경솔하게2590)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며, 만일 그들이 사도들을 진실하게 따른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행 8:14-17). 누가는 이 안수하는 일을 자주 언급한다(행 6: 6, 8:17, 13:3, 19:6)

나는 사도들이 한 일 곧 그들이 받은 직책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듣는다. 주께서는 그 때에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놀라운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은사를 부어 주셨으며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그 은사들을 나눠주시고자 하셨다. 나는 이 안수에 어떤 깊은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들이 이 의식을 행한 것은 안수를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 천거하며 이를테면 바친다는 것을 이런 몸짓으로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그 때에 행한 직책이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안수하는 일도 보존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시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니 안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령의 지도가 없으면 교회는 존속할 수 없으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목마른 사람들은 자기에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원불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요 7:37, 사 55:1, 요 4:10, 7:38 참조).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 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이 배우들은 어떤 점에서 사도들을 추종하고 있는가? 성령의 분명한 권능이 즉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안수로 그것을 실현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수할 권리가 있다고 장담하는가? 사도들이 안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7.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을(요 20:22) 성령을 받는 성사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사도들의 기도로 명백한 성령의 은혜를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사도들이 안수한 목적은, 그 후손들이 원숭이들처럼 단순한 흉내로 아무 유익이 없이 냉담하고 공허한 가짜 표징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안수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사도들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더라도(그들의 변태적 열성을 제하면 사도들과의 유사점은 없지만),2591) 그들이 "구원의 기름"이라고 부르는 그 기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 기름에서 구원을 구하라고 가르쳤는가? 누가 기름에 신앙을 굳게 하는 권능을 돌리라고 가르쳤는가?2592) 바울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떠나라고(갈 4:9) 가르치며 이런 유치한 행사에 구속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배척하지(골 2:20)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기름을 "구원의 기름"2593)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기름은 배를 위한 것이요 배는 기름을 위한 것이나 주께서는 두 가지를 다 폐하실 것이다(고전 6:13 참조) 사용하면 없어지는 이 모든 무력한 물질은 영적이고 결코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대는 세례에 사용하는 물이나 성찬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도 같은 척도로 판단하느냐"고 묻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리 앞에 제시되는 물질의 본질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물질 위에 새기신 형상이며, 이 성물의 힘은 전적으로 이 형상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물질이 그 본질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례에서 우리 눈앞에 놓이는 떡과 포도주와 물에 대해서는 바울이 한 말이 항상 적용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고전 6:13) 그것들은 이 세상 형적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3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별되어 성물이 된 점에서 그 물질은 우리를 육신 안에 붙들어 놓지 않고, 참으로 또 영적으로 가르친다.

8.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름이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먹여 키우는가를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이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세례에서는 죄의 결백을 위해서 견진례에서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며, 또 세례에서 우리는 중생해서 생명을 얻고 견진례에서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견진례가 없으면 세례가 올바르게 완성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다. 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가?(롬 6:4-5)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바울은 우리의 육을 죽이며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서는 "우리로 또한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롬 6:6)하며,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라고 한다(롬 6:5). 이것이 바로 전투 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모든 점에서 그들이 잘 복종하는 체하는 교회는 왜 존경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밀레비스 회의의 결정보다 더 강력한 반대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누구든지 세례는 다만 죄의 용서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런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누가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행 8:16) 말한다. 누가의 이 말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롬 10:10). 누가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나타난 힘과 보이는 은혜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행 2: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면 여기서 사탄의 악하고 위험한 기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을 세례에서 몰래 떼기 위해서, 세례에서 진실로 받는 것을 그의 견진례에서 받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리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세례에 속한 약속을 세례에서 분리해서 다른 데로 이전한다. 우리는 이제 이 훌륭한 기름 바르는 것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한다(갈 3:27).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하게 하는 약속은 세례에서 받지 않았다"2594)고 말한다. 처음 것은 진리의 음성이요, 나중 것은 허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견진례에 대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바른 정의를 할 수 있다. 즉, 견진례는 세례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며, 세례의 기능을 엄폐하거나 내지 폐지한다.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 약속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또는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으로 더럽혀진 기름이며 단순한 사람들을 속여 암흑 속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9.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말하기를 신자는 모두 세례를 받은 후에 안수에 의해서 성령을 받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주교의 견진례를 받아 성유를2595) 바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 된다고 첨가한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에 속한 일은 모두 성경에 지시되고 포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교의 진정한 형태를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 배우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늘 진리와 그리스도의 교훈 전체는 그리스도인의 초보에 불과하고, 기름이 그들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이 문장 하나로 성유를 받은 일이 없는 모든 사도와 많은 순교자들이 정죄를 받는다. 그 당시에는, 그들 위에 부어서 기독교의 모든 세밀한 점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들 기름, 아니 아직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이 사람들 자신이 자기의 주장을 훌륭하게 논박한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되는 신자들에게 세례 후에 기름을 바르는가? 그들의 양떼 가운데 있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도 왜 그대로 버려두는가? 빠뜨리면 반드시 중대한 죄를 쓰게 될 일을 신자들이 빠뜨리는 것을 왜 그렇게 비겁하고 나태하게 버려두는가? 갑자기 죽어서 기회가 없었던 사람 이외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도 필요하고 필수적인 일을 그들은 왜 더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견진례가 멸시받는 것을 그렇게 너그럽게 버려둠으로써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언중에 고백하고 있다.

10. 카톨릭 교회는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요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거룩한 기름 바르는 일을 세례보다 더욱 존중해야 된다고 단정하고 그 이유로서 세례는 모든 사제들이 행할 수 있지만 견진례는 주교들의 손으로만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596) 그 까닭은 자기들의 조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장 거룩한 제도를 함부로 멸시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아, 모독적인 입이로다! 너는 너의 악취 나는 입김과 중얼거리는 주문으로 더럽혀진 기름을 감히 그리스도의 성례에 대립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별한 물과 비교하는가? 그러나 너의 무례함에는 이것들은 사소한 일이었고 너는 심지어 이것을 원했다. 이런 말들이 바로 거룩한 교황청의 대답이며 사도적 삼각좌의 신탁이다.2597)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런 광증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견진례를 더 존중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견진례가 더 큰 힘과 유익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더 훌륭한 사람들이 신체의 더 훌륭한 부분, 즉, 앞이마에 행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또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더 유리하고 견진례는 덕을 더욱 증진시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이유를 말함으로써 스스로 도나투스파임을 폭로하지 않는가? 그들은 성례의 가치를 집행자의 가치에 따라서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교의 손은 더욱 가치가 있으므로 견진례도 더욱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겠다.2598) 그러나 주교의 이 대단히 위대한 특권의 근원에 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변덕 이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도들만이 성령을 주었으므로 사도만이 그 권리를 사용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주교들만이 사도인가? 대체로 주교들은 사도인가? 그러나 이 점도 우리는 양보하기로 한다. 그들은 왜 같은 논법으로 주교들만 성찬의 피에 손을 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주께서 사도들에게만 피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평신도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왜 주장하지 않는가? 사도들에게만 주셨다면, 왜 주교들에게만 주셨다고 추론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는 사도들을 단순한 사제들로 만들고 여기서는 현기증이 나서 방향이 달라지고 갑자기 사도들을 주교라고 한다. 끝으로,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울은 그에 의해서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행 9:17-19). 나는 이 한 가지를 첨가하겠다. 만일 이 직책이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 주교들에게 속한다면, 왜 그들은 감히 그것을 일반 장로들에게 이전했는가?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서 우리는 이 일을 읽을 수 있다.2599)

11.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시하는 이유는 경박하다

하나님의 세례보다 견진례를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들의 다른 이유들도 얼마나 경박하고 어리석은가? 견진례에서는 기름을 이마에 바르지만 세례에서는 머리 위에 바른다고 한다.2600) 세례에서는 기름을 쓰고 물은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악한들이 그들의 누룩으로 성례의 순수성을 더럽히려는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데 대하여 나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2601) 성례들은 인간의 수많은 조작품들에 끼여 있어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빛을 보일 틈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그때 내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 자신의 선생들을 믿으라. 그들은 세례에서 물을 무시하고 전혀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기름만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는 이마도 물에 적셔진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물과 비교할 때 그대들의 기름에는 세례에서 쓰든지 견진례에서 사용하든지 간에 일고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기름의 매매 가격이 더 비싸다고 주장한다면 그 더 많은 값으로 인하여 본래 거기에 있는 가치까지도 더럽혀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철저하게 추악한 사기를 비밀리에 퍼뜨리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견진례는 세례보다 덕을 더 많이 증진시킨다고 지껄이는 그들의 셋째 이유는 그들의 불경건을 폭로한다.2602) 사도들은 안수함으로써 성령이 보이는 은혜를 나눠주었다. 이 사람들의 기름은 어떤 점에서 유익을 주는가? 그러나 한 가지 모독 행위를 여러 가지 모독 행위로 감싸는 이 지도자들은2603) 물러가도록 하라.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려고 애쓰기보다 끊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12. 고대 교회의 관습은 견진례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명할 만한 논거를 빼앗긴 것을 알고서, 그들의 상습대로 견진례는 가장 오랜 관습이며 여러 시대의 찬성으로 확정된 것인 듯이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안 될 것이다. 성례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하신다. 견진례가 성례로 인정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에 대해서 정확하게 논하고자 할 때 어디에서도 두 가지 성례밖에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은 견진례가 고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믿음의 피난처를 사람들에게서 구한다면, 이 자들이 성사라고 사칭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결코 성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고대인들은 안수에 대해서 말하는데 과연 그들은 그것을 성사라고 했는가? 어거스틴은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단정한다. 이제 그들은, 그는 안수를 견진례라고 생각하지 않고 치유적인 것 또는 화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추악한 구별을 하면서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그의 책이 현존하며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다. 만일 어거스틴이 그 책에 쓴 의미를 왜곡한다면, 나는 그들이 나를 여전히 질욕하는 것을 버려 둘뿐만 아니라 내게 침을 뱉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 그는 분파 행동을 버리고 교회의 연합에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주께서 평화의 유대에 의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도록 안수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례를 반복하지 않고 안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차이점을 알려 준다. "안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안수의 의미란 것은 다른 구절을 보아도 분명하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위대한 은사이며, 사랑이 없으면 다른 거룩한 것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위해서는 모두가 무가치하다. 그 사랑의 유대를 위해서 바르게 돌아선 이단자들에게 안수를 하는 것이다."2604)

13. 진정한 견진

나는 성례의 기형적 유령이라고 할 이 견진례가 나타나기 전에 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한 그 관습이 보존되기를 충심으로 원한다. 그들이 공상하는 견진례로서 남기자는 뜻이 아니다. 견진례를 말하면 반드시 세례를 멸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어린이들이나 청년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교육 방법으로서 보존하자는 것이다. 최선의 교육 방법은 이 일을 위해서 지도서를 준비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모든 기독교회가 찬성하며 반대하지 않는 신조의 대부분을 단순하게 요약해서 포함시켜야 한다. 열 살 된 어린이가2605) 교회 앞에 서서 신앙을 고백하며 신조마다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어떤 점을 모르거나 이해가 불충분하면 가르쳐 줄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보는 데서 어린이는 하나의 진정하고 진지한 믿음을 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고백할 것이다.

이 규율이 지금 시행된다면, 자녀 교육은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등한시하는 게으른 부모들을 반드시 각성시킬 것이다. 자녀 교육을 무시하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앙 문제에 관해서 견해가 더욱 일치하게 될 것이며 신앙에 대한 무지도 적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신기한 사상에 경솔하게 끌려가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조직적인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고해도 성사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14-17)

14. 고대 교회내의 참회

다음 자리에 그들은 고해를2606) 두고 어지럽고 무질서한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에서 양심은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회개에2607) 대한 성경의 교훈과 그들의 주장을 자세하게 말했다. 이제는 고해를 하나의 성사라고 하는, 지금까지 교회와 학교에서 지배적인 의견을 확립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가를 간단하게 논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교회의 의식을 구실로 삼아서 그들의 조작품을 확립하려고 하므로 우선 그 고대 의식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겠다. 고대인들이 공적인 회개에 있어서 준수한 의식은 지정된 보속을 이행한 사람들을 엄숙한 안수에 의해서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안수식은 죄를 용서한다는 표징이었고, 이 표징에 의해서 죄인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섰으며, 교회는 그의 죄에 대한 기억을말소하고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받았다. 키프리아누스는 안수를 자주 "평화의 수여식"2608)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행위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며 신자들의 존경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항상 감독의 권위가 개입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제 2 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회개하는 사람을 장로가 미사에서 공중 앞에 화해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결정했다. 또 오랑주 회의에서는 "참회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화해의 안수 없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라. 만일 병이 나으면 참회자 중에 들어가고 때가 차면 감독에게서 화해의 안수를 받게 하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제 3 차 카르타고 회의는 "감독의 허락이 없으면 장로는 참회자를 화해시키지 말라"2609)고 결정했다. 이 모든 발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유지하고자한 엄격성이 과도한 관용 때문에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회자를 더욱 신중하게 검토할 것으로 기대되는 감독이 심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는 다른 구절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성직자 전체가 안수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적당한 기간을 참회한 다음에 성찬에 와서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찬에 참가할 권리를 받는다."2610)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 일은 타락했고 마침내 공개적인 참회와는 별도로 사적인 사유에도 이 의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라티아누스는 공적 화해와 사적 화해를 구별했다.2611)

나는 키프리아누스가 말하는 고대의 관습은 거룩하고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판단하며 현대에도 회복되기를 바란다. 최근에 생긴 관례에 대해서 나는 감히 배척하거나 혹평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참회에서 안수하는 것은 사람이 정한 의식일 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며, 이것은 무해 무익한 외형적인 행위라고 알고 있다. 물론 멸시할 것은 아니지만 주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천거된 의식들보다 지위가 낮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15.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카톨릭 교회와 스콜라 학자들은(왜곡된 해석으로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상습자들이므로) 여기서 성례를 찾아내려고 고심한다. 갈대에서 옹이를 찾는 자들이므로 이상할 것은 없다.2612) 그러나 죽을힘을 다한 후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려서, 문제는 복잡하고 미결 상태이며 애매모호하고 혼란한 채 여전히 두통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회개, 바꿔 말하면 통회의 표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통회가 이 성사의 본체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외형적인 고해와 내면적인 회개가 합해서 한 상징일 것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성사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에 불과 하며 내면적인 회개는 성사의 본체 및 성사라고 말한다.2613) 그뿐 아니라 죄의 용서는 본체일 뿐이지 성사가 아니라고 한다.2614)

우리가 위에서 제출한 성례의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성사를 검토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께서 제정하신 외형적인 의식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정의가 그들도 복종해야 하는 법칙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이 가장 거룩한 분으로 생각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이는 성례들은 육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성례를 계단으로 삼아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올라가게 하시려는 것이다."2615)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에서 그들은 이와 유사한 무엇을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을 성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안에서 한 가지 일을 보고 다른 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형태가 있고 이해되는 것은 영적 결실이 있다."2616) 이 말과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영적 결실을 대표하는 외형적인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16. 왜 사면을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짐승들을 그들의 투기장에서 죽이기 위해서, 만일 여기서 성사를 구한다면 외면적 또는 내면적 고해보다 사제가 선언하는 사면(absolutio)을 성사라고 하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한 자랑이 아니겠느냐고 제의한다. 이 사죄 선언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신념을 강화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소위 열쇠의 약속, 즉,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마 18:10, 마 16:19 참조) 약속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새로운 율법의 성사들은 그 표현하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사제의 사면을 받아도 이런 사면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혹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항변이다. 그들은 성찬에서 이중의 먹음을 가정하여(선악간 모든 사람의)예전적인 먹음과(선한 사람들만의)2617)영적인 먹음을 구별하는데, 왜 그들은 이중의 사면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그 문제를 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는 훨씬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2618) 다만 나는 여기서, 그런 의심 때문에 사제의 사면을 성사라고 부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입을 빌려서, 보이는 성사가 없는 성화가 있으며 내면적 성화가 없는 보이는 성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택받은 자들에게서만 성사는 그 표시하는 것을 실현한다"고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나 다른 사람들은 성화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전자는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만 후자는 오직 선인들에게만 해당된다"2619)라고 한다. 그들이 무척 애를 쓰면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렇게 분명한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은 어리석게도 속았을 뿐만 아니라 밝은 햇빛2620) 속에서도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17.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사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들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것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단정한다. 첫째로는 그런 성사의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약속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기서 전개되는 의식은 사람이 조작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성사의 의식은 하나님만이 제정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증명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위 고해 성사에 관해서 만들어 낸 것은 거짓이며 협잡이다.

그들은 이 가짜 성사를 "파선 후의 둘째 판자"라는 적당한 이름으로 장식했다. 세례에서 받은 결백의 옷을 죄로 더럽힌 사람은 고해에 의해서 그 결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제롬의 말이라고 한다.2621) 그들이 설명하는 뜻대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누가 했든지 간에 분명히 불경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가 죄에 의해서 말소된다는 생각이다. 또 죄인이 죄의 용서를 얻으려고 할 때마다 자기가 세례를 받은 것을 회상해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며 세례에서 약속된 죄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신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제롬이 거칠고 부적당하게 말한 것, 즉, 교회가 파문해야 할 정도로 세례에서 떠난 자들은 회개함으로써 세례를 회복한다고 한 말을 이 훌륭한 해석가들은 자기들의 불경건에 맞도록 고쳐 버렸다.

그러므로 세례를 고해 성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 될 것이다. 이는 충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보장의 인장으로서 주시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의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이것은 성경의 말씀과 부합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에서는 분명히 이런 해석을 확정된 원칙으로 선포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어거스틴이 쓴 것으로 보이는 소책자 베드로에게 주는 신앙론(Concerning Faith to Peter)에서는 세례를 "믿음과 회개의 성사"2622)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저자가 불분명한 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는가? 복음서 기자의 말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 그는 "요한이‥‥‥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한다(막 1:4, 눅 3:3).

(종부 성사는 야고보서 5:14-15을 오해한 것이며 성례가 아니다. 18-21)

18.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셋째 거짓 성사는 종부 성사이다. 이것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으로 사제만이 사람의 임종시에 행하며 그때 다음과 같은 형식의 말을 한다. "이 거룩한 도유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가장 인애하신 자비로, 네가 봄으로써 들음으로써 맡음으로써 또는 맛봄으로써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지어다" 그들은 종부 성사에 두 가지 힘, 즉, 죄를 용서하며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상상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혼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들은 야고보가 이 성사를 제정했다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이것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4-l5)2623) 이 도유는 우리가 위에서 안수에 대하여 설명한 것과2624) 같은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며, 사도들을 본받으려는 것이지만 이유도 없고 유익도 없다.

마가의 기사를 보면, 사도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했을 때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고 병자를 고치며, 병자를 고칠 때에는 기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하였다(막 6:13).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해서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한 것은 이것과 관련된 말이다.

이런 외형적인 일에 있어서 주와 사도들이 아주 자유롭게 행동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런 의식에 깊은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님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려 하셨을 때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바르셨으며(요 9:6) 어떤 소경은 만져서 고치셨고(마 9:29) 어떤 소경은 말씀만으로 고치셨다(눅 18:42).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어떤 병은 말만으로 고쳤고(행 3:6, 14:9-10) 어떤 병은 만져서 고쳤으며(행 5:12,16) 또 어떤 병은 기름을 발라 고쳤다(행 19:12).

그러나 도유와 그 밖의 방법들은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도유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교육이 없고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징을 보고 이런 위대한 권능의 근원을 깨닫게 하며 사도들의 권능으로 돌리지 않게 하려는 상징에 불과했다. 기름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다(시 45:7).

그러나 병을 고치는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동안 나타내기를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가 영원히 놀라운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나눠주신 권능을 위해서는 도유가 하나의 성사였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지금은 도유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런 권능을 나눠주는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19. 종부 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그들은 도유를 성사로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다른 상징들을 성사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실로암 같은(요 9:7) 목욕하는 못을 지정해서 병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몸을 잠그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헛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도유하는 것보다 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청년 위에 엎드림으로써 그를 살렸는데(행 20:10), 왜 그들은 죽은 사람 위에 엎드리지 않는가? 왜 침과 먼지로 성물을 만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다른 예들은 한 번씩 있었던 것이고 이것은 야고보가 명령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교회가 아직도 하나님의 이런 복을 받던 시대를 대표해서 말한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지금도 같은 힘이 그들의 도유에2625)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다르다. 그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우롱하는 것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생명과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게 되면 감각과 시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신체의 살아 있는 감각을 속이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노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물론 주께서는 어느 시대든지 그의 백성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같이 필요할 때마다 그들의 약함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사도들의손을 통하여 주시던 보이는 권능이나 기적은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였으며, 사람들의 배은망덕도 한 원인이 되어 일찍 소멸하고 말았다.

20.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름을 상징으로 삼아, 그들이 받은 치유의 은사는 그들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란 것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증거했다. 따라서 아무 효력도 없는 썩은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기름을 그렇게 부르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해서(마 3:16, 요1:32) 모든 비둘기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들 자신이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그저 그들의 도유는 성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도 아니며 아무 약속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면 된다. 참으로 우리가 성사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란 것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점을 요구할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 의식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기를 요구한다. 지금 할례를 기독교 교회의 한 성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첨부된 것이지만,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이 없으며 거기에 관련된 약속도 같은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종부 성사에 관해서 맹렬히 주장하는 약속을 우리가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 자신도 체험으로 그것을 밝힌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병을 고친다기보다는 죽이고 난도질하는 것이 더 능한 이 백정들이 이 의식을 행하는 것도 잘못이다.

21. 카톨릭 교회는 야고보가 "제정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도유에 관해서 야고보가 지시한 일은 현대에도 적용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도저히 득세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들이 이긴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실행한 도유가 옳다는 증명에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모든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기를 원하는데(약 5:14), 이자들은 병자가 아니라 이미 운명하려는 임종시의 시체 같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바른다.2626)

고통을 완화하는 강한 치유력이 또는 적어도 영혼에 위안을 주는 칠이 그들의 성사에 있다면, 기회를 놓치기 전에 치료하지 않는 그들은 잔인한 자들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이 병자에게 도유하기를 바라는데 이 사람들은 젊은 사제만을2627) 도유자로서 허락한다. 야고보서에 있는 "장로들"이란 말을 "사제들"2628)이라고 해석하며 복수를 사용한 것을 한 장식이라고 하는 것도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당시의 교회에는 사제들의 큰 무리가 있어서 성유를 가마에50a)2629)들고 긴 행렬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야고보가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단순하게 명령하는 것은 보통 기름을 바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가복음에도 다른 기름 이야기가 없다(막 6:13). 이 사람들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이 아니면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많은 입김으로 더워진 기름, 긴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아홉 번 무릎을 꿇어 인사한 기름이다. 세 번 무릎을 꿇으면서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기름이여" 하고 인사하며 다시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성유여" 하고 그 다음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향유여"2630)라고 한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푸닥거리를 배웠는가? 야고보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서 기도를 드릴 때, 만일 죄가 있으면 용서를 받으리라고(약 5:14-15), 즉, 그의 죄책이 면제되고 벌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름이 죄를 씻어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병석의 형제를 위해서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가 무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소위 "신성한", 즉, 가증스러운 도유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고 사악한 거짓말을 한다. 야고보의 증거를 제멋대로 함부로 악용한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익을 얻는가를 보라. 우리가 이 증명에 더 애를 쓰지 않도록 그들의 연대기까지도 우리의 곤란을 덜어 준다. 어거스틴과 같은 시대에 로마 교회를 주재한 교황 이노센트는, 장로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나 후손들이 필요한 때에는 기름을 사용하라는 관례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연대기의 저자 시지베르이다.2631)

(소위 신품 성사는 성직의 7계급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 신품 예식과 그 기능을 비평한다. 22-33)

22. 한 성사인가 또는 일곱 성사인가

그들의 목록에서 넷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품 성사인데,2632) 이것은 다산적이어서 일곱 성사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일곱 성사가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셀 때에는 열 셋을 세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또 모두 한 사제직을 향한 단계이므로 한 성사를 구성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수 없다. 분명히 각각 다른 의식이 있고 또 그들도 각각 다른 은혜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인정한다면 일곱 성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또 그들 자신이 분명하고 똑똑하게 일곱 가지를 선언하는데 왜 우리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같이 논의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첫째, 그들이 신품을 성사라고 선전할 때 얼마나 많은 또 어떤 불쾌한 불합리를 우리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가를 우선 간단히 취급하겠다. 둘째, 교회들의 성직자 임명식을 대체로 성사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겠다.

그들은 일곱 가지 신품, 즉, 성직 계급을 말하며 그것을 "성사" 라고 부른다. 일곱 신품은 수문품과 강경품과 구마품과 시종품과 차부제품과 부제품과 사제품이다. 그들은 이 일곱 계급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한다고 까지 말하며, 이 직위들에 승진되면 그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승진됨에 따라 은혜가 증대되며 더욱 풍부하게 쌓인다고 한다.2633)

그런데 이 수효 자체는 성경을 왜곡한 데서 신성시하게 되었다. 이사야는(사 11:2) 여섯 가지만을 말하는데, 그들은 성령의 일곱 가지 권능에 대해서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는 여섯으로 국한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데서는 성령을 "생물의 신"(겔 1:20), "성결의 영"(롬 1:4), "양자의 영"(롬 8:15)이라 하고, 이사야서에서는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총명한 자들은 개선교회의 모습을 따른다고 하면서 일곱 신품이 아닌 아홉 신품을 말한다.2634) 그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삭발을 첫 계급으로 그리고 주교직을 마지막 계급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삭발을 제거하고 대주교를 한 계급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시도루스의 구분은 다르다. 그는 성가 대원과 강경사를 구별해서, 성가 대원은 노래를 부르며 강경사는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성경을 낭독한다고 한다. 교회법은 이 구분을 따른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 가운데서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것을 따르고 어느 것을 피하라고 하는가? 우리는 일곱 신품이 있다고 할 것인가? 스콜라 학파의 대가 롬바르드는 그렇게 말하지만 가장 유식한 학자들은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그 학자들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가장 거룩한 교회법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2635)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거룩한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이렇게도 의견이 일치한다.

23.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직분을 다 가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 계급에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동료로 만들어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 내셨을 때(요 2:15, 마 21:12) 문지기의 직분을 다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양의 문이라"고(요 10:7) 하심으로써 자신이 문지기이심을 알리신다.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심으로써(눅 4:17) 강경사의 기능을 다하셨다. 귀먹은 벙어리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셔서 그를 다시 듣게 만드셨을 때에(막 7:32-33) 구마사의 직책을 다하셨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하심으로써(요 8:12) 시종이심을 증거하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요 13:4-5) 차부제의 일을 하셨다. 만찬에서 몸과 피를 분배하셨을 때에 부제의 일을 하셨다(마 26:26).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마 27:50, 엡 5:2) 사제의 역할을 다하셨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을 기록한 것이 사람이라면, 대체 어떻게 웃지도 않고 이런 내용을 기록했을까 해서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활함을 가장 잘 발휘해서 "시종"이라는 칭호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며 시종을 세촉 봉사자라고 부른다.2636) 이것은 마술 용어라고 나는 추측하는데, 여하간 어떤 나라나 어떤 국어에도 없는 말이다. ajkovlouqo"(시종의 라틴어 acoluthus의 어원인)를 희랍 사람들은 "하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정색을 하고 이런 의견들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내 자신이 당연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만큼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24. 낮은 계급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여자들까지도 이런 말에 속지 않도록 그 허망한 정체를 폭로시키고 지나가야겠다. 그들은 굉장히 찬란하고 엄숙한 의식으로 강경사와 성가대원과 문지기와 시종들을 임명해서 각각 직책을 위임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소년들이나 적어도 그들이 "평신도" 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시키고 있다. 촛불을 켜며 병에서 포도주와 물을 따르는 것은 그런 일로 살아가는 소년이나 가련한 평신도가 제일 많이 하지 않는가? 바로 그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또 그들이 역시 교회 문을 열고 닫지 않는가? 시종이나 문지기가 교회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누가 본 일이 있는가? 어려서 시종의 일을 하던 사람이 시종으로서 성직자가 되면 시종의 일을 하지 않으니, 결국 그들은 어떤 칭호를 가지게 되면 그 칭호에 해당하는 직책을 버리려고 신중하게 계획하는 것 같다. 그들이 성사에 의해서 성별되며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만들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직책을 태만히 하고 돌보지 않는 것은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면,2637) 그들은 동시에 그들이 굉장히 치켜세우는 성직들이 현대 교회에서는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시종으로 성별되지 않으면 초와 병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소년들과 세속 사람들에게 그 일을 시키며 성별된 입술만 불러야 한다는 성가를 소년들에게 맡기고 있으니, 그들의 교회는 전적으로 저주로 가득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또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구마사들을 성별하는가? 나는 유대인들에게 구마사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나 그들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행 19:13). 이 거짓 구마사들이 한 번이라도 그들의 공적 직무를 실행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정신병자와 학습 교인과 귀신 들린2638) 사람들에게 안수할 권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귀신을 이해시킬 수 없다. 귀신들은 그들의 명령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명령한다. 그들 중에는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 십분의 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급 성직에 대한 그들의 막연한 말은 무식하고 불쾌한 거짓말들을 꿰맨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교회 제도를 논할2639) 때 옛날 시종과 문지기와 강경사들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는 다만 성직의 일곱 계급이라는 이 최신식 발명에 반대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이 신발명에 대한 이야기는 무식한악덕 변호사들 곧 소르본느 신학파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쓴 글에서만 읽을 수 있다.

25. 성별 의식, 특히 삭발식

이제부터 그들이 사용하는 예식들을 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성직자로 채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 공통된 상징을 준다. 즉, 머리 꼭대기를 깎아서 왕적 위엄을 나타내게 한다. 성직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다(벧전 2:9). 그러나 모든 교회에 주신 것을 독점하며 신자들에게서 빼앗은 칭호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교만하게 자랑한 그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교회 전체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이자들은 그 말을 왜곡해서는 삭발한 소수에 대해서만 "거룩한자가 되라"고 한 것같이(벧전 1:15-16, 레 20:7, 레 19:2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만을 산 것같이(벧전 1:18-19), 또 그들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같이(벧전 2:5, 9) 주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유도 말한다. 머리 꼭대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마음을 주에게 개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고후 3:18) 하나님의 영광을2640) 보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입과 눈의 과오를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머리를 깎는 것은 세상 것을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리에 남아 있는 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서 보존하는 좋은 사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일은 상징으로 표시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소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마 27:51). 그들은 이런 일들을 정수리로 상징했으므로 직책도잘 이행한 것으로 믿고 실제로는 전혀 직책을 이행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들은 이런 사기와 협잡으로 언제까지 우리들을 기만하려는 것인가? 약간의 머리털을 깎음으로써 성직자들은 풍성한 세상 물질을 포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귀와 눈의 정욕을 죽였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욕심이 많고 미련하고 정욕적인 계급이 세상에 또 있는가?2641) 왜 그들은 거룩하다는 허위의 표징을 외형적으로만 보이면서 진실로 거룩함은 드러내지 않는가?

26. 나실인들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이제 성직자들의 삭발은 나실인들로부터 근원과 근거가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예전들은 유대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아니 유대교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까지도 서원이 있어서 성결하게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행 18:18) 그들이 덧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무식만을 폭로할 뿐이다.2642) 이 기록은 브리스길라에 대한 것이 아니며 아굴라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삭발은 바울과 아굴라의 어느 편에도 관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선례가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즉, 바울은 성화를 위해서 삭발한 일은 없고, 삭발한 것은 약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것뿐이다. 나는 평소에 이런 서원을 경건의 서원이 아니라 사랑의 서원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온유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 자신이 자기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같이 되며 운운하는 말로 밝혔다(고전 9:20).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임시로 순응하기 위해서 한 번만 단기간 동안 그렇게 했다. 이자들이 나실인들의 성결 행위를 본받으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것은 옛 유대교를(민 6:18, 6:5 참조) 계승하는 척하면서 다른 유대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직자들은 머리를 길러서는 안되고 공처럼2643) 깎아야 한다는 교서는 이런 종교적인 의혹에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기록된 것이다. 남자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서 가르친(고전 11:4) 사도가 마치 성직자의 공같이 빡빡 깎은 머리 모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것을 보고,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한 다른 예전들의 효력과 가치에 대해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27. 삭발에 대한 역사적 해석

어거스틴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성직자의 삭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여성적인 남자나 또는 남자답지 못한 매끈하고 우아한 맵시를 내려는 사람들만이 머리를 길렀기 때문에, 성직자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좋은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머리를 자르든지 깎든지 해서 여성적인 장식을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삭발이 유행하게 되자 어떤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자기들의 거룩함을 자랑하려고 머리를 길렀다.2644)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장발이 유행하게 되고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과 같이 항상 장발이던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자, 성직자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짝지어서 머리를 깎은 것 같다. 마침내 더 부패한 시대가 와서 모든 이전 풍속이 악용되었거나 또는 미신으로 타락했을 때, 성직자들의 삭발은 미련한 모방뿐이고 아무 이유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신비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성사를 인정하게 하려고 그 미신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한다. 문지기들은 성별될 때에 교회의 열쇠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경사들은 성경을 받는다. 구마사들은 미친 사람들과 학습 교인들에게 사용할 주문을 받는다. 시종들은 초와 병을 받는다. 이런 의식들에는 비밀한 힘이 있으며 또 이런 물건들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와 표시가 될 뿐 아니라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의식들을 성사로 인정하려고 하므로 성사의 정의에 따라서 그렇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결론을 언급한다면, 나는 스콜라 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이런 하급 계급들을 성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을 가르치는 사람들 자신이 이런 계급들은 원시교회에 없었고 여러 해 후에2645) 고안된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포하므로, 하나님만이 제정하시는 것이니 천사나 사람이 제정해서는 안 된다. 약속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28. "사제"와 "장로"

아직 남은 세 가지 계급을 그들은 "중요" 계급이라고 부른다. 이중에서 소위 차부제를 여기에 옮겨 온 것은 하급 계급이 생겨난 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 계급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성직"이라고 불러서 존경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의 규정을 부정직하게 남용해서 자기들의 구실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로 또는 사제의 계급을 먼저 논하겠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말이 같은 뜻이라고 하며, 장로나 사제의 임무는 성단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서품식에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는(레 5:8 참조) 권한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는 표로서 성체를 담은 성반을 받으며, 축성하는2646)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으로서 두 손에 기름을 바른다. 그러나 의식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2647)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를 그들은 이 이상 더 사악하게 타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미사를2648) 논할 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선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제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해하는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맹세로써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지명하고 성별하셨으며(시 110:4, 히 5:6), 그리스도에게는 생명의 끝이나 후계자가 없게 하셨다(히 7:3). 그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와 화목의 제물을 드리셨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다(계 1:6, 벧전 2:9 참조).2649)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 즉, 우리 자신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제물을 바쳐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죄를 대속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받은 직책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 직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그들의 사제직은 불경하며 신성 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이 의식을 감히 성사라고 부르는 그들은 철저히 사악하다.

장로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천거하셨으며 나는 기꺼이 그것을 인정한다. 거기에는 의식이 있으며, 이것은 처음에 성경에서 취했고, 다음에 바울이 공허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은사의 충실한 표라고 증거한다(딤전 4:14). 그러나 나는 이 의식을 셋째 성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직책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예를 기독교의 사역자들에게 주셨다고 해서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자랑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과 성례를 맡는 관리인들을 임명하라고 명령하셨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임명하라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마 28:19, 막 16:15) 양떼를 먹이라고(요 21:15) 명령하셨으나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속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의 임무를 올바르게 맡아서 꾸준히 수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 28:20 참조).

29. 사제의 임명식

의식들은 현실과 잘 일치한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 주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셨다(요 20:22). 이 상징은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을 의미했다. 이 선한 사람들은 이 숨을 불어넣는 것을 보존하여 마치 그들의 목에서 성령을 불어 내는 것처럼,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중얼거린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흉악하게 위조한다. 배우들의 몸짓은 어느 정도 예술적이며 뜻도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든지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흉내 내는 원숭이와 같다. 그들은 주를 본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우리가 본받으라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다(요 11:43).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다(마 9:5, 요 5:8 참조). 왜 그들은 모든 죽은 사람과 중풍병자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입김을 불어 그들을 성령의 은사로 가득 채워 주심으로써 그의 신적 능력의 증거를 보이셨다. 그들이 입김을 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이며 거의 도전하는 것이 되지만 물론 효력도 없고 그 무능한 몸짓으로 그리스도를 희롱할 뿐이다. 참으로 그들은 감히 성령을 주노라고 주장할 정도로 후안무치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경험이 증명한다. 그들이 사제로서 성별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이 변해서 나귀가 되며 바보가 변해서 미치광이가 된다고 경험은 외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점에 대해서 그들과 다투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의식에 반대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이적의 상징으로서 하신 일을 그들이 본받는다는 것이 원래 잘못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노라는 구실은 도저히 그들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변호가 될 수 없다.

3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누구에게서 도유법을 배웠는가? 그들은 사제직의 근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서 배웠다고 대답한다.2650) 그들은 자기들이 경솔하게 사용하는 것이 자기들이 고안한 것이라는 것은 고백하지 않고 항상 나쁜 선례를 들어서 자기변명을 한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계승했다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모든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만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그 모든 제사장직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말했고 또 히브리서가 주석 없이도 분명히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그 모든 제사장직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게까지 모세의 율법을 좋아한다면, 왜 수소와 송아지와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가? 참 으로 그들에게는 고대의 장막과 유대교적 예배 전체의 상당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송아지나 수소를 제물로 드리지 않는 것은 그들의 종교의 결함이다. 이 도유식이 할례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이 행위의 가치에 대한 바리새적 관념과 미신을 덧붙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의의 근거로 믿었다. 이 사람들은 도유식에 영적 은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레위 족을 본받으려고 갈망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목자의 직책을 포기한다.

31. 도유는 쇠퇴한 의식들에 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씻을 수 없는 표지를 새기는 거룩한 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름은 먼지와 소금으로 씻어 버릴 수 있고(더 단단히 붙은 것이면) 비누로 닦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지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2651) 기름이 영혼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흉내 내면서도 그가 한 말을 잊어버렸는가? "만일 물에서 말씀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물에 불과할 것이다. 물을 성물로 만드는 것은 말씀이다."2652) 그들은 기름에 동반할 어떤 말씀을 보이려는가?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할 것인가?(출 30:30, 28:41, 29:7 참조) 모세는 그밖에도 아론을 장식할 속옷과 에봇과 관과 거룩한 관에 대해서(레 8:7,9)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속옷과 띠와 관에 대해서(레 8 :ㅍ13) 명령을 받았다. 모세는 수송아지를 죽여 그 기름을 불사르는 일에 대해서(레 8:14-16), 수양을 죽여 불사르는 데 대해서(레 8:18-21), 다른 수양의 피로 그들의 귓부리와 옷을 성별하는 데 대해서(레 8:22∼24), 그밖에도 무수한 예식에 대해서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기름 바르는 것만을 좋아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2653) 그러나 그들이 뿌려 받기를 원한다면, 왜 기름보다 피를 뿌려 받지 않는가? 확실히 그들은 영리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교를 꿰매어서 한 종교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르는 기름은 소금,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악취가 난다.

남은 것은 안수례다. 나는 이것이 진정하고 영적인 임명식에서는 하나의 성사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웃음거리 연극과 안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으며 약속이 우리를 인도해 가야 할 그 목표를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표징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그 원래의 목적인 진실된 일에 적용해야 한다.

32. 부제

또 사도 시대와 어느 정도 순수하던 교회에 있었던 집사직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나는 거기에 해당한다는 부제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2654) 그러나 고대의 집사들과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부제들은 어디가 같은가? 나는 부제들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과실을 문제로 삼아 그 사람의 교리에 대해서 불공평한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아무도 그런 불평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부제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사도 교회가 집사로 임명한 사람들을 증거로 드는 것이 부정직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제를 돕는 것 곧 성사에 있어서의 모든 일이 세례와 성유와 성반과 성작의 일을 도우며, 예물을 가져다가 성단에 드리며, 성찬상을 준비해서 덮으며, 십자가를 들며, 신자들에게 복음서와 사도 서한을 읽어서 들려주는 일들이 부제의 직책이라고 말한다. 부제들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제 그들이 임명되는 절차를 보기로 하자. 부제가 임명될 때 주교만 안수한다. 주교는 피임명자의 왼쪽 어깨에 기도서와 영대를 얹어서 주의 가벼운 멍에를 받았다는 것을(마 11:30) 알게 하며 그의 왼쪽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바치도록 한다. 주교는 복음의 말씀을 주어 부제가 복음 선포자임을 인정하게 한다. 이 모든 일과 집사가 한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향을 태우고 성상의 먼지를 털며 교회를 청소하고 쥐를 잡으며 개를 쫓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임명한 사람을 마치 사도로 임명한 듯이 카톨릭 교회는 행동한다. 누가 이런 계급의 사람들을 사도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비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한 연극으로서 임명한 이 사람들을 그들은 앞으로 부제라는 거짓말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그 직책의 성격을 충분히 밝힌다. 그들은 부제들을 레위 족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근본과 시조는 레위의 아들들이라고 한다.2655) 그렇게 하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예복을 빌려 부제들에게 입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33. 차부제

차부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면 적당하겠는가? 옛날에는 빈민구제 사업을 맡았던 그들에게 카톨릭 교회는 하찮은 일, 예컨대 성작과 성반, 물이 든 병, 성단에서 쓰는 수건 등을 가져오는 일과 손 씻는 물을 붓는 일 등을 시킨다. 그들이 예물을 받아 온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탐식하고 저주를 받게 마련인 예물을 의미한다.

그들의 성별식은 이 직책에 아주 잘 일치한다. 차부제는 주교에게서 성반과 성작을 받으며 부주교에게서 물이 든 병과 기도서와 기타 폐물들을 받는다.2656) 그들은 이런 쓰레기에 성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며, 위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2657)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만 말하면 흥분할 것이다. 즉, 약속과 연결된 의식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또는 의식에서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확실한 약속이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약속을 확인하는 의식을 찾는다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또 그들이 사용하는 의식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성사가 있을 수 없다.

(에베소서 5:28과 기타 구절들을 오해한 데서 혼인 성사라는 그릇된 주장이 생겼다 : 결혼에 관련된 폐해. 34-37)

34.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맨 마지막은 혼인 성사이다.2658)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창 2:21-24, 마 19:4이하),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그것을 성사로서 집행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2659) 또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하고 거룩한 규정이며, 농업과 건축업과 구두 수선과 이발업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법적인 규정이지만 성례는 아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확인하시는 외형적인 의식이 지정되어 있어야 한다. 결혼에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신성한 일, 즉,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연합의 표징이라고 말한다.2660)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시는 상징을 "표징"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다. "표징"은 비교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면, 나는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예리한 가를 밝히겠다. 바울은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한다(고전 15:41-42), 여기에 성사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은‥‥‥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신다(마 13:31). 여기에도 성사가 하나 있다. "천국은‥‥‥누룩과 같으니라"(마 13:33). 이것은 셋째성사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라고 한다(사 40:10-11). 넷째 성사다. 다른 곳에서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라고 한다(사 42:13). 이것이 다섯째 성사다. 결국 어디서 끝이 나며 어디에 한계가 있을 것인가? 이런 논리대로 한다면 성사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있는 비유와 직유의 수만큼 성사가 있을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르리라"고 하였은즉(살전 5:2) 심지어 도둑질도 성사가 될 것이다. 이 궤변가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지껄이는 것을 누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포도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시며(요 15: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신(요 15:1)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양떼를 거느린 목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요 10:27)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런 비유들을 성사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2661)

35. 그들은 에베소서 5:28을 잘못 적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바울의 말로 우리를 공격하면서, 바울은 "성사"라는 말을 결혼에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266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28-32)2663)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땅과 하늘을 혼합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이 자기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내세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정하신 교회에 애정을 쏟으시는 것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라고 한다(엡 5:28-29).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자신같이 사랑하셨으며 신부인 교회와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바울은 모세가 아담이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라고 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자기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하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다(창 2:23). 바울은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와 우리에게서 영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확언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이며 그와 한 살이 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그는 요약해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호한 뜻에 속지 않도록, 자기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갈빗대 하나를 떼어서 우리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밀이다. 즉, 그가 강하셨을 때에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도록, 그는 약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앞으로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였다(갈 2:20).

36. "비밀"이란 말의 번역과 그들의 혼인을 경시에서 이 혼란이 생겼다

그들은 "sacrament"란 말에 속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에 대한 벌을 온 교회가 받는 것은 옳은가? 바울은 "mystery"라고 말했다. 이 말을 번역한 사람은 이것이 라틴 사람들의 귀에 생소하지 않은 말이므로, 그대로 두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밀"(secret)이라고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sacrament"란 말을 사용했으나 바울이 사용한 "mystery"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2664)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어학에 재주 없음을 요란하고 한탄하게 하자. 어학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쉽고 분명한 일에서 오랫동안 가장 부끄럽게 속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 한 곳에 있는 "sacrament"란 말을 그렇게 고집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무시하는가? 디모데전서와(딤전 3:9) 에베소서에서도(엡 1:9, 3:3,9) 라틴역 성경의 번역가는 "mystery"에 대해서 항상 "sacrament"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 실수는 용서하라. 거짓말쟁이들은 적어도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2665)

그러나 그들은 혼인을 성사라는 이름으로 장식하고 나서 그것을 부정과 부패와 육적인 추악이라고 부르니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경거망동인가? 사제들을 이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들은 사제들을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결합의 정욕을 막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적 결합 자체도 이 성사의 일부라고 하며, 이것만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자연에 합치하는 비유라고 가르친다. 남녀는 육체적 연합에 의해서만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두 가지 성사를 발견했다. 하나는 하나님과 영혼과의 성사로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같으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성사로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을 여전히 성사라고 한즉 그리스도인에게 이 일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사는 서로 모순이 있어서 도저히 일치할 수 없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교리에는 다른 불합리도 있다. 그들은 성사에서는 성령이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성적 결합을 하나의 성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은 결코 이 결합에 임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2666)

37. 카톨릭 교회의 교리의 결과는 폭압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일로만 교회를 우롱하지 않고 이 오류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헛된 말과 사기와 비행을 첨가했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혼인을 하나의 성사로 만듦으로써 가증한 일들의 소굴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혼인을 성사라고 일단 결정한 다음에 그들은 혼인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혼인은 영적 문제이므로 세속 재판관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법을 정해서 그들의 전제력을 강화했으나, 어떤 법은 노골적으로 불경건한 것이었고 어떤 법은 사람에 대해서 심히 불공평한 것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부모의 승낙 없이 미성년자들이 혼인한 것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친척끼리의 결혼은 7촌끼리라도 불법이고 설사 결혼했다 해도 취소해야 된다고 한다.2667) 그들은 모든 민족의 법과 모세의 규례에도(레 18:6이하) 반대되는 촌수를 만들어 낸다. 간음하는 아내를 버린 사람은 재혼할 수 없으며, 대리 부모는 서로 혼인할 수 없고 사순절전 제 3 일요일부터 부활절 후 8일까지, 요한의 탄생일 전의 3주간 그리고 강림절부터 예수 현현 대축일까지는 결혼할 수 없으며 이 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규정이 있다.2668)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오래 그들의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제는 빠져나가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귀들의 등에서 사자 가죽을 벗기는 데 조금은 성공했다고 믿는다.

제 20 장  국가 통치2669)

(국가 통치와 영적통치의 관계. 1-2)

1.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의 차이

우리는 사람이 이중의 통치2670)하에 있다는 것을 확립했고, 영혼, 즉, 속사람에 대한 그리고 영생에2671) 관계된 통치에 대해서는 다른 데서 자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둘째 통치, 즉,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외적인 도덕성만을 확립하는 통치에 대해서 논하겠다.

내가 지금까지 토의해 온 영적인 신앙론과 이 문제는 성질이 다른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앞으로 하는 말을 보면 두 가지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아니 부득이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지금은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한 쪽에서는 미친 야만인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제도를 뒤엎으려고 날뛰고 있는 동시에 또한 편에서는 군주들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군주의 권력을 과장해서는 하나님 자신의 지배에 대립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기2672) 때문이다. 이 두 가지 해독을 다 억제하지 않으면 순수한 믿음도 없어질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마련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에 있는 경건에 대한 열성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입증하게 되기 위해서 이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선 문제 자체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앞에서 한 구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2673) 서로 성질이 완전히 다른 이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혼동을 피해야 한다. 복음은 자유를 약속하며 이 자유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왕이나 집권자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우러러본다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 위에 어떤 권력이 군림하는 동안은 자유의 혜택을 입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전세계를 새로운 형태로 개조해서, 법원이나 법률이나 집권자나 자유를 속박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과 영혼을 구별하며 덧없는 현세와 영원한 내세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세속적인 지배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세상의 초보적인 제도에서 찾으며 거기에 한정하려는 것은 유대적인 허망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영적인 결실이며, 이 영적 결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2674)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고 부여되는 자유는 전적으로 그 자체의 한계 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자. 굳세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갈 5:1) 우리에게 명령하는 사도가 다른 곳에서는(고전 7:21) 종들에 대해서 그 입장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니, 이것은 국민 생활에서의 노예 상태와 영적 자유가 완전히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의 다른 발언들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하나님 나라에서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 하나이며(갈3:28), 거기에는 헬라 사람과 유대사람, 할례자와 무할례자, 야인과 스구디아 사람,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신다고 한다(골 3:11). 사도의 이 말들의 뜻은, 우리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든 또는 우리가 어느 나라 법률 지배 하에서 살든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런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상태에 있어도 아무런 구별이 상관없다는 것이다.

2. 두 가지 "통치"는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구별한다고 해서, 통치를 그 성질상 부패한 것,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마구 날뛰기를 좋아하는 광신자들은 이런 생각을 외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 대해서 죽은 우리는(골 2:10) 하나님 나라에 옮겨져 하늘 존재들 사이에 앉아 있으므로,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는 일에 대한 비열하고 세속적인 근심 걱정에 얽매인다는 것은 우리의 훌륭한 입장에 맞지 않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짓이라고 그들은 말한다.2675) 그들은 재판과 재판소가 없으면 법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재판이나 재판소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 죽이는 것이 불법이라면 왜 법률을 만들며 재판을 하느냐고 한다. 그러나 이런 통치는 그리스도의 영적이고 내적인 나라와는 서로 다르다고 우리가 방금 지적한 것과 같이, 우리는 이 둘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영적 통치는 지상에 있는 우리 안에 이미 하늘나라가 시작하게 만들며, 이 죽을 덧없는 생명 속에서 영원불멸의 복락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국가 통치에 지정된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를 사회생활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 정의와 일치하도록 인도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게 하며, 전반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현세 생활을 없애버린다면, 나는 이 모든 일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조국을 갈망하는 한편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생활에는 이런 보조 수단들이 필요하다면, 사람에게서 이러한 것들을 빼앗는 사람들은 바로 그에게서 인간성을 빼앗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 교회는 완전해야 하며 교회의 통치만 있으면 다른 법률을 대신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완전성에 대해서 우매한 공상을 한다. 극도로 엄격한 법으로도 억제할 수 없는 그렇게까지 완강하고 거만한 악인들이 만일 어떤 악한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짓을 할까? 악행을 억제하는 권력이 전혀 없을 경우 그런 악인들은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국가 통치는 필요하며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3-7)

3. 정부의 주요 임무

그러나 정부의 실질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더 적당한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2676) 여기서는 정부를 폐지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야만적 행위라는 것만을 알리고자 한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진실로 그 위치는 훨씬 더 귀중하다. 이런 것들이 하는 일, 즉,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 우상 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밖에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치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2677)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2678)

내가 위에서는 종교를 바로잡는 임무를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 밖에 두는 것 같았는데2679) 지금은 그 일을 정부에 맡긴다고 해서 아무도 놀라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 진정한 종교에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모독을 가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줘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정부를 시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이 마음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경건에 대해서 법을 정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앞에서나 여기서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부의 각 부분에 대한 나의 논의를 읽는다면, 그 명쾌한 설명의 도움을 얻어 문제 전체에 대한 사고 방법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정부에는 세 부분이 있다.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의 표준이 되는 법과, 법에 의한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이 있다.2680)

그러면 먼저 집권자의 지위에 대해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합당한 소명인가 그리고 그 지위의 성격과 그 권한의 범위는 어떠한가를 고찰하겠다. 다음에 기독교적 정부는 어떤 법으로 운영되어야 하는가를 고찰하고, 그 법은 국민에게 어떤 유익을 주며 국민은 집권자에게 복종할 어떤 의무가 있는가를 마지막으로 고찰하겠다.

4. 집권자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주께서는 집권자의 지위를 시인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장식하시며 우리에게 극구 천거하신다.2681)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집권자로서 일하는 사람들을 "신들"이라고 하시므로(출 22:8, 시 82:1,6) 이런 이름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위임과 권위를 받았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표, 이를테면 대리자로서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궤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명이다. 그는 "성경은‥‥‥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하셨다(요 10:35).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지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모세와 여호사밧이 유대 각 도시에 임명한 재판관들에게 명령한 것과 같이(신 1:16-17, 대하 19:6), 사람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하는 일을 맡기셨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세상의 모든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잠 8:15-16). 이것을 바꿔 말한다면, 지상의 모든 일에 대한 권위가 왕들과 다른 권력자들의 수중에 있다는 것은 인간성의 패악성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명령에서 유래한 일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사를 처리하기를 기뻐하시며, 사람들과 함께 계심으로써 그들이 법을 제정하며 재판소에서 공의를 실시하는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의 은사의 하나로 인정하는 것도(롬 12:8) 이것을 가르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스리는 은사는 은혜의 다양함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배되며,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 은사를 사용해야 된다고 한다. 바울은 원시 교회에서 공적 규율을 유지하며 주관하는 신실한 사람들의 회의에 대해서 말하고 이 직책을 고린도서에서(고전 12:28) "다스리는 것"이라고2682) 부르지만, 정부가 하는 일도 이와 같은 것이므로 사도가 모든 종류의 공정한 지배를 우리에게 천거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를 공정하게 논하려고 할 때 훨씬 더 명백하게 말한다. 권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롬 13:2),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권세는 없다고 한다(롬 13:1). 그뿐 아니라 주권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선을 행하는 사람을 칭찬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한다고 한다(롬 13:3-4). 우리는 거룩한 분들의 예를 첨가할 수 있다.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다윗과 요시야와 히스기야와 같이 왕위에 있었고, 어떤 이들은 요셉과 다니엘같이 고관이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같이 자유를 얻은 백성들의 지도자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지위를 시인하신다고 언명하셨다. 따라서 정권은 하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5. "그리스도인"들이 집권자들을 부인 또는 배척함은 불가하다

무정부 상태를 일으키고자 하는 자들은,2683) 비록 고대에는 왕이나 사사들이 무식한 사람들을 지배했지만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써 실현하신 현재의 완전 상태와 그런 노예적인 통치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항의한다.2684) 이런 말은 그들의 무지와 교만만을 폭로할 분이다. 그들에게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완전성의 백 분의 일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물이 어떻든 간에 그들을 논박하기는 쉽다. 다윗이 모든 군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권고했을 때(시 2:12), 그는 그들이 그 권위를 버리고 사생활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권력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시게 하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열왕이 교회의 양부가 되며 왕비들이 교회의 유모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사 49:23), 그들의 영예를 빼앗지 않고 도리어 고귀한 칭호를 주어 하나님의 경건한 경배자들의 수호자로 삼았다. 이사야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경에 특히 시편에 이런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다(시 21, 22, 45, 72, 89, 110, 132).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바울이 한 말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공중 집회에서 왕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충고한 다음에 곧 그 이유를 첨부한다. "나아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2). 이런 말로 바울은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

6. 위정자들은 하나님의 대리로서 그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이 점을 위정자들은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직책을 다하겠다는 큰 자극을 받으며, 임무 수행에 따르는 곤란이 아무리 많고 중대할지라도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일꾼으로 임명되었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고결함과 슬기와 온유와 극기와 결백에 대해서 큰 열성을 가져야 하겠다고 자기를 스스로 일깨우고 격려할 것이 아닌가? 자기의 재판석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찌 뻔뻔스럽게 불공정한 재판을 허락하겠는가? 하나님의 신실을 발표하는 도구로 지정된 줄 아는 입으로 어찌 감히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하도록 지정된 손인 줄 알면서 무슨 양심으로 악한 법령에 서명할 것인가? 요컨대 주권자들이 자기는 하나님의 대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모든 주의와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하였으므로(렘 48:10), 의로운 소명을 받고도 거짓된 행동을 하는 자는 더욱 큰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세와 여호사밧이 재판장들에게 임무 수행을 권면했을 때,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말을 가장 설득력이 있는 말로 인정했다(신 1:16).2685)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하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 함도 없으시고"(대하 19:6-7). 또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라고 한 말씀이 있다(시 82:1). 이 말씀은 주권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라는 것을 알리며, 앞으로 그들은 그 정치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서 그들이 임무에 대한 용기를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 또 이 경고를 그들은 중요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어떤 과오를 범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행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심판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게 되기 때문이다(사 3:14-15 참조). 또 그들은 불결한 일이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로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거룩한 직책을 맡았다0?곰곰이 생각할 때에 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7. 집권자의 강제력은 그의 지위를 인정받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이렇게 많은 증언을 들으면서도 마음을 고치지 않고 기독교적 경건의 입장에서는 이 거룩한 직책을 배격해야 된다고 외치는 자들은 하나님 자신을 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거룩한 직책을 비난하면 반드시 하나님 자신에게 욕이 되기 때문이다. 그자들은 집권자만을 배척하지 않고 하나님까지도 버림으로써 자기들 위에 왕이 되시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의 통치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삼상 8: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정부를 일체 배격하는 현대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방인의 왕들은 그들을 주관하지만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말고 첫째 되는 자는 가장 작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눅 22:25-26)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나 정부를 가지는 것을 일체 금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2686) 참으로 교묘한 해석가들이다. 그러나 제자들 사이에 누가 제일 윗자리에 설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다. 이 헛된 야심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그들의 직책은 한 사람이 모든 다른 사람들 위에서는 왕국들과는 다르다고 가르치셨다. 나는 이 비교가 왕들의 위엄에 어떤 불명예를 주는 것이냐고 묻는다. 참으로 이 말씀은 왕위와 사도직과는 다르다는 것 이외에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뿐 아니라, 집권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고 인정해야 된다는 점에서는 구별이 없다. 바울은 그들을 통틀어서,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권세는 없다고 말한다(롬 13:1). 그리고 가장 유쾌하지 못한 일, 즉, 일인 집권이 다른 일보다 더 천거된다. 일인 집권은 모든 일을 자기 뜻에 굴복시키는 한 사람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 예속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고대의 용감하고 고귀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정치 못한 판단을 막기 위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에 의해서 왕들이 군림한다고 명백하게 주장하며(잠 8:15 참고) 특히 왕을 공경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잠 24:21, 벧전 2:17).

(정부의 형태들과 집권자들의 임무 : 전쟁과 과세의 문제. 8-13)

8. 각종 정부 형태

국가 조직을 생각할 자격이 없는 개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는 어떤 형태의 정부가 가장 좋을까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무익한 소일거리일 것이다. 또 이 문제는 단순하게 해결할 수 없고 신중한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토의의 성격은 크게 환경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계없이 정부 형태를 서로 비교한다면 어느 것이 제일 유용한지를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모두 같은 조건으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왕국이 전제국으로 타락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정치가 소수인의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민중의 지배가 난동으로 타락하는 것은 가장 쉽다. 철학자들이 논하는 정부의 세 가지 형태에 대해서 그 자체만을 생각한다면, 나는 귀족 정치 또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2687)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귀족 정치 자체가 가장 좋다기보다는, 항상 공정하며 바른 생각만을 하는 자제력이 강한 왕은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뛰어난 총명과 지혜로써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를 아는 왕도 드물다. 그러므로 사람의 결함이나 실패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정권을 운영하는 편이 더욱 안전하고 보다 견딜 만하다.2688) 그래서 여러 사람이 서로 돕고 가르치며 경고할 수 있다. 만일 한 사람이 불공평한 자기주장을 하게 되면 여러 사람이 그 고집을 비난하며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이 증명하는 바이며, 주께서도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민주 정치에 가까운 귀족 정치를 제정하셔서 그의 권위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주께서는 다윗을 세워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실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좋은 형태 아래 두려고 하셨다(출 18:13-26, 신 1:9-17). 또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써 조절하고 견고한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 제도가 가장 좋다고 인정하며, 이런 형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이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굳세게 노력한다면 나는 그들은 이 직책에 어긋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인정한다. 참으로 집권자들은 전력을 다하여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유가 감소되는 것을 방지해야 하며 침범 당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2689) 이는 그들이 자유의 수호자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각성과주의가 불충분하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해서 불충실하게 되며 조국에 대해서는 반역자가 된다.

그러나 주께서 다른 형태의 정부를 지정해 주신 사람들이 정부 형태를 바꾸려는 생각으로 바로 이 기능을 떠맡으려고 한다면, 이런 행동을 생각하는 것조차 미련하고 무익하며 더욱이 전적으로 유해한 짓이다. 그러나 한 도시만을 보지 않고 전세계를 본다면, 적어도 먼 지역들을 본다면, 여러 나라가 여러 가지 정부에 의해서 통치되도록 하나님의 섭리가 지혜롭게 배정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원소들이 균등하지 않은 비례로 결합되는 것과 같이 나라들은 각각 그 독특한 부동의 형태에 따라서 가장 잘 단결된다. 그러나 주의 뜻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모두 필요하지 않다. 왕국들에는 왕들을 세우며 자유 도시들에는 원로들이나 시의원들을2690) 세우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사는 곳에 주께서 세우신 사람들에게 공손히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9. 율법의 두 돌판에 대한 고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집권자의 직책을 겸해서 설명해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그 직책을 어떻게 서술되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일을 하는가를 설명하겠다. 그 직책이 율법의 두 돌판에 까지 미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속 학자들의 글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집권자의 직책과 입법과 공공복지에 대해서 논한 사람은 반드시 종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부터 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을 제일의 관심사로 삼지 않으면 원만하게 정부를 수립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권리를 무시하고 사람의 일만을 돌보는 법률은2691) 앞과 뒤가 서로 뒤바뀐 것임을 모든 학자가 인정했다. 이와 같이 모든 철학자들이 종교를 가장 중요시하며 이 일에 대한 모든 민족의 관찰이 보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만일 그리스도인인 군주들이나 집권자들이 이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기의 태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가 대표하는 하나님과 또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주권을 가지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며 선양하는 데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가 부패하거나 소멸되었을 때에 그것을 재건하거나 종교를 보호하여 순수하고 흠결 없는 종교가 번창하도록 한 거룩한 왕들을 성경에서는 매우 칭찬한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성경은 무정부 상태를 악으로 인정한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마음대로 행했다고 한다(삿 21:25).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무시하고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확립하는 일에만 유의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을 증명한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지상 생활의 분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의 이름으로 지배자들을 임명하시고 훨씬 더 중요한 일, 즉, 하나님의 법에 따라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배해야 하는 일은 무시하셨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혁명에 대한 열기로 날뛰는 과격분자들은 유린당한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려고까지 한다.2692)

둘째 판에 관련해서, 예레미야는 왕에게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경고한다(렘 22:3). 시편 82편에 있는 충고도 같은 뜻이다. 왕들은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라고 하신다(시 82:3-4). 모세는 자기의 대리자로 임명한 사람들에게, "너의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 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고 명령하고 또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라고 했다(신 1:16- 17). 일일이 인용하지는 않겠으나, 성경에는 왕된 자들은 말을 많이 두지 말고 탐욕을 멀리하며, 형제 위에 교만하지 말고 주의 율법을 일평생 항상 묵상하며(신 17:16-19), 또 재판장들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뇌물을 받지 말며(신 16:19),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 곳에 있다. 내가 여기서 집권자들의 직책을 설명하는 목적은, 그들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집권자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임명하셨는가를 알리려는 것이다. 집권자들은 공중의 무죄와 겸손과 예절과 평온의 보호자와 옹호자로 임명되었으며 사회 전체의 안전과 평화를 확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윗은 이 모든 덕의 모범이 되겠다고 언명했다. 자기가 왕위에 오르면 어떤 범죄에도 찬성하지 않으며, 불경건한 자와 중상하는 자와 교만한 자들을 미워하고, 각처에서 정직하고 충성된 사람들을 구해서 그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시 101, 특히 4,5,6,7절).

그러나 집권자들은 악인들의 침해를 받는 선한 사람들을 지켜 주지 않고 압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지도, 원조하지도 않는다면 이 직책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거나 깨뜨리는 노골적인 악인들과 범죄자들을 엄격하게 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무기로서 받았다(롬 13:3).2693)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 솔론(Solon)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는 모든 정치 조직은 상벌에 의해서 유지되며 상벌을 제거하면 도시들의 규율은 붕괴되고 소멸된다고 말했다.2694) 덕행에 대해서 명예가 주어지지 않으면 공정과 정의에 대한 열의가 식는 사람이 많으며 엄격하게 벌을 주지 않으면 악인들의 정욕을 억제할 수 없다. 예언자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종합해서 왕들과 집권자들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고 명령했다(렘 22:3, 21:12 참조). 참으로 정의는 무죄한 사람들을 지켜 주며, 감싸주며, 보호하며, 변호하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공평은 담대한 악인들을 방어하고 그 폭행을 억압하며 그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

10. 집권자들의 강제력 행사는 경건과 양립한다

그러나 여기서 곤란한 문제가 생긴다. 곧 하나님의 법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금지하며(출 20:13, 신 5:17, 마 5:21) 하나님의 거룩한 산(교회)에는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고 예언했다면(사 11:9, 65:25), 어떻게 집권자들은 경건하면서도 동시에 피를 흘리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집권자가 벌을 주는 것은 자기의 마음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평을 실시하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문제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주의 율법은 살인을 금한다. 그러나 살인자는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꾼들에게 칼을 주어 모든 살인자를 치게 하신다. 경건한 사람들을 해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해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여기서는 사람의 경솔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모든 일을 명령자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따르는 동안은 우리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악행을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정의를 억제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어떤 법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일꾼들을 비난하려고 하는가? 바울은 그들이 공연히 칼을 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위하여 보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롬 13:4). 그러므로 군주들과 다른 집권자들이 그들의 순종을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가납하실 만한 경건과 의와 정직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딤후 2:15 참조), 우리는 그들이 이 임무에 전력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세가 주의 권능에 의해서 동족의 해방자로 임명된 것을 자각했을 때에 애굽 사람에게 손을 댄 것도(출 2:12, 행 7:24) 이런 염원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족의 신성 모독을 처벌하기 위해서 하루에 삼천 명을 죽인 것도 같은 동기였다(출 32:21-27). 다윗이 그의 임종시에 아들 솔로몬에게 요압과 시므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같은 뜻이었다(왕상 2:5-6,8-9). 따라서 그는 또 그 땅의 악인들을 진멸해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모든 행악하는 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왕의 한 덕행이라고 했다(시 101:8).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라고 솔로몬을 칭찬한 것도(시 45:7, 44:8) 이 부류에 속한다.

온유하고 너그러운 성격을 가졌던 모세가 왜 이런 야만성이 불타올라 진중을 왕래하면서 형제들을 도륙하고 그들의 피가 사방에 낭자하게 만들었는가? 또한 일평생 극히 온유하던 다윗이 어떻게 임종시에 요압과 시므이의 백발이 평안히 묘지로 가지 못하게 하라고 아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유언을 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벌을 시행함으로써 그 잔인한 행위로 그들의 손을 깨끗하게 하였으며, 만일 사람을 아꼈다면 자기 손을 더럽혔을 것이다.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고(잠 16:12) 솔로몬은 말한다.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잠 20:8), "지혜로운 왕은 악인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로 그 위에 굴리느니라"(잠 20:26),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을 것이요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 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잠 25 :4-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잠 17:15),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잠 17:11),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잠 24:24). 칼을 빼어 들고 죄인과 악인을 추궁하는 것이 집권자들의 진정한 의라면, 자포자기한 악인들이 도살과 살륙을 자행할 때에 칼을 집에 넣어 두기만 하고 피를 흘리지 않는 집권자들은 최대의 불경죄를 범하게 될 것이며 선하고 의롭다는 칭찬은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돌연히 나타나는 잔인하고 가혹한 처사나 고소당한 사람들의 암초라고 당연히 불려지는 법정은2695) 물론 배척해야 한다. 나는 부당한 잔인성을 두둔하지 않으며, 항상 인자한 정신이 없이 공평한 판결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관용은 국왕들의 최선의 고문관이며 솔로몬의 말과 같이 왕위는 인자로 말미암아 가장 견고해진다(잠 20:28). 어떤 고대 저술가가 관용은 군주들의 가장 중요한 선물이라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2696)

그러나 집권자의 양쪽에 다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엄격으로 병폐를 고치기보다 해를 주게 되든지 또는 관용에 대한 미신적인 애착으로 가장 잔인한 온유에 빠질 수 있다. 즉, 무력한 친절의 낭비로 파멸을 당하게 된 많은 사람들을 버려두게 된다. 네르바(Nerva)의 치세 중에, 지배자가 아무 일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불행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행하다고 사람들은 바른 말을 했다.2697)

11. 정부의 전쟁 수행권

그러나 왕과 국민은 공적인 보복을 하기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수행하는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들에게 영토 내의 평온을 유지하며 불온한 사람들의 선동을 억제하고 압제를 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악행을 처벌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면, 개인의 평안과 모든 사람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나 선동적인 소란을 일으키는 자나 또는 남을 폭압하며 학대하는 자들이 있을 때에 그들의 광증을 억제하는 것보다 더 그 권력을 적합하게 사용할 기회가 있겠는가? 법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면, 법의 실시를 부패하게 하는 악인들의 노력을 겪는 것도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몇 사람만을 해한 강도들을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한 나라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버려 둘 것인가? 아무 권리도 없는 외국에 침입해서 괴롭히는 원수는 그가 왕이건 가장 미천한 사람이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다 똑같은 강도요 따라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공정성과 집권자의 직책으로 보아서, 집권자들은 공정한 처벌로 개인들의 비행을 무력으로 억제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맡아 지키는 영토가 적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전쟁으로 방어해야 한다. 성령께서도 성경의 많은 증거를 통해서 이런 전쟁을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신다.2698)

12. 전쟁에서의 자제와 인도적 정신

그러나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을 해도 좋다고 가르치는 증거나 전례가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첫째, 전쟁을 해야 될 이유는 옛날과 같이 지금도 있으며 집권자들이 그 지배 아래에 있는 주민을 방위하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둘째, 이 문제에 대한 명백한 말을 사도들의 글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 정부를 조직하려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이 점에서는 아무변화도 일으키지 않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거기에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과 같이 기독교 교리가 모든 전쟁을 배척한다면, 군인들이 구원에 관한지도를 요청했을 때 무기를 버리고 군대에서 완전히 물러서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줄로 알라"는 충고를 받았다(눅 3:14).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라고 했으므로 무기를 드는 것을 전혀 금지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이라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도록 특히 조심하는 것이 모든 집권자들의 의무다. 벌을 줘야 할 때라도 격분에 휩쓸리거나 증오심에 사로잡히거나 무자비한 가혹함으로 해서는 안 된다.

또 그들은 벌을 받을 사람의 특별한 과실만을 보지 말고 그에게 있는 인간의 공통된 본성에 동정하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2699)또 적에 대해서, 즉, 무장 강도에 대해서 무장해야 할 때에도 그렇게 할 기회를 찾아서는 안 되며, 절대로 필요하지 않다면 주어진 기회도 피해야 한다. 전쟁은 평화를 모색하는 것같이 하라고 한 이교 철학자의 요망보다2700) 우리가 하는 일이 훨씬 더 훌륭해지려면, 우리는 무기에 호소하기 전에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끝으로, 이 두 가지 경우의 어느 쪽에서도 집권자들은 사적인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 되며 국민을 위한 고려만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받은 권력을 남용하게 되며, 이것은 심히 악한 일이다.

그뿐 아니라, 전쟁을 하는 이 권리가 있기 때문에 수비대와 동맹 관계와 기타 민간 방위 수단을 강구하게 된다. "수비대"는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 도시들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맹"은 곤란한 문제가 일어날 때에 서로 도우며 협력해서 인류의 적을 타도하자는 인근 군주들의 조약을 의미한다. "민간 방위 수단"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사물을 의미한다.

13. 정부의 과세권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공물과 세금은 군주들의 합법적인 수입이며, 이것을 그들은 주로 공무의 공적 경비에 사용하겠지만 호화로운 가정생활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생활은 이를테면 그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위엄에 붙어 다닌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과 히스기야와 여호사밧과 그 밖의 거룩한 왕들은 또 요셉과 다니엘은(그들의 지위의 존귀성에 따라) 경건을 위반하지 않고서도 공공 경비를 많이 사용했고, 에스겔서를 보면 왕들에게는 많은 토지가 배당되었다(겔 48:21). 거기서 예언자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을 묘사했으나 인간 사회의 합법적인 왕국의 모범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군주들 편에서도, 그들의 수입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재산이란 것과(바울도 그렇게 확언한다, 롬 13:6) 그것을 낭비하거나 약탈하면 반드시 분명한 불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요망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은 거의가 국민의 보혈이므로,2701) 아끼지 않는 것은 극도의 잔혹 행위가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부과하는 각종 조세는 필요한 공공의 재원에 불과하며 이유 없는 과세는 전제적 착취란 것을 그들은 숙고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군주들은 낭비와 사치를 조심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타오르게 된 그들의 탐욕에 기름을 부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신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불쾌감을 사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에서든지 합당한 한도를 알아야 한다. 사사로운 개인들도 일반 시민의 공통된 지출보다 군주들의 비용이 많은데 대해서 경솔하고 파렴치한 비난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교훈을 이해해야 한다.

(공법 및 재판 절차와 그리스도인의 의무와의 관련. 14-21)

14. 구약성경의 율법과 각국의 법

국가 조직에서 집권자 다음가는 것은 법률이다. 법률은 국가의 가장 튼튼한 힘줄이며,2702) 키케로는 플라톤을 따라 법률을 나라의 영혼이라고 부른다. 법률이 없으면 집권자의 지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집권자가 없으면 법률에 힘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법은 무언의 집권자요 집권자는 살아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옳은 말이다.2703)

기독교적 국가는 어떤 법에 의해서 통치될 것인가 하는 것이 나의 논제라고 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법인가 하는 긴 논의를 나에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논의는 끝이 없을 것이며 여기서 우리가 목적하는 것과는 문제가 다르다. 나는 간단히 지나가는 말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용될 수 있는 법은 어떤 것이며 어떤 법이 사람 사이에 실시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겠다.

만일 여기서 위험한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을 것이다. 모세의 정치 체제를 무시하고 국가의 관습법으로2704) 통치하더라도 나라는 바르게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 이 관념이 얼마나 위험하며 선동적인가는 다른 사람들이 고려하게 하고, 나는 이 생각이 잘못되고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모세에 의해서 발표된 하나님의 율법 전체는 보통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2705)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씩 고찰해서, 거기 있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해당되고 어떤 것이 해당되지 않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들도 도덕에 관한 율법에 속한다고 하는 사소한 문제에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이 구분을 가르친 고대 저술가들이 뒤의 두 가지가 도덕에 관한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도덕에 관한 율법은 변동이 없는데 비해서 다른 두 가지는 변하거나 폐지될 수 있기 때문에, 도덕에 관한 율법이라고 부르지 않고 첫째 종류에만 이 이름을 적용했다. 도덕에 관한 율법이 없으면 도덕의 진정한 거룩함이 지탱될 수 없고 올바른 생활을 위한 불변의 표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5. 도덕에 관한 율법, 의식에 관한 율법 및 재판에 관한 율법을 구별한다

우선 도덕에 관한 율법을 본다면 거기에는 두 부분이 있다. 한 부분은 순수한 믿음과 경건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또 한 부분은 진실한 애정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한다. 따라서 도덕에 관한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을 정돈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 정해 주신 의의 표준 곧 참되고 영원한 표준이다. 하나님의 영원불변한 뜻은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에 관한 율법은 유대 사람들의 후견인과 같았다. 여호와께서는 이를테면 유년기에 있는 유대 민족을 의식에 관한 율법으로 때가 찰 때까지 훈련하는 것을 좋게 생각하셨다(갈 4:3-4, 3:23-24 참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면 모든 민족에게 자신의 지혜를 완전하게 나타내며, 그 때에 비유로 예표하신 일들의 실체를 보이려고 하셨다.

재판에 관한 율법은 유대 민족의 통치를 위해서 주신 것이었으며 그들이 허물없고 평화롭게 살 수 있기 위해서 지켜야 할 공평과 공의의 형식들을 정하신 것이었다.

의식의 관례는 유대인 교회가 항상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하도록 했으므로, 경건에 대한 교훈에 포함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경건 자체와는 구별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재판에 관한 율법의 형태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이 명령한 그 사랑을 가장 잘 보존하려는 의도만을 가진 것이었지만 사랑의 교훈 자체와는 다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경건이 의식에 관한 율법을 폐지하고도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재판에 관한 율법을 폐지했을 때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영원한 의무와 교훈은 여전히 남을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각 민족은 자체에 유익이 있다고 예상되는 법을 만들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런 법은 사랑이라는 영원한 표준에 일치해야 하며 형태는 틀린 지라도 목적은 같아야 한다. 도적들을 존중하며 난잡한 남녀 관계와 기타 더욱 추잡하고 더욱 어리석은 행위를 허용하는 야만적인 법들이 법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법은 정의의 입장에서만 가증한 것이 아니라 인도적 정신과 예절 바른 생활의 입장에서도 가증한 것이다.

16. 법의 단일성과 다양성

우리가 모든 법에서 다음 두 가지를 검토할 때에 내가 한 말의 뜻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헌법과 그 헌법의 근거가 되는 공정성이다. 공정성은 당연한 것이므로 모든 법에서 동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따라서 법의 대상이 무엇이든지 이 동일한 목적이 모든 법에 적용되어야 한다. 헌법은 부분적으로 환경에 지배된다. 따라서 모든 헌법이 공정성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동등하게 추구한다면 그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 율법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율법은 자연 법칙의 증거에 불과하며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기신 양심의 증거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2706)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공정성의 개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만이 모든 법의 목표와 표준과 한계가 되어야 한다.

그 표준에 따라서 구성되며 그 목표를 향하며 그 한계를 지키는 법이라면, 그런 법이 유대인들의 법이나 우리의 법과 다르더라도 우리는 배척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법은 도둑질을 금한다. 유대에서 도둑에게 준 형벌은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다(출 22:1-4). 다른 민족들의 상고 시대의 법들은 도둑질에 대한 벌로서 두 배를 배상하게 했다. 그 후에 생긴 법들은 나타나는 도둑과 나타나지 않는 도둑을 구별했다. 형벌이 다름에 따라 혹은 추방, 혹은 태형, 혹은 사형에 처했다. 위증에 대한 유대인들의 벌은 손해를 끼친 것만큼 유사한 또는 동일한 손해를 받게 하늘 것이었다(신19:18-21). 다른 나라 법에서는 큰 수치만 주거나 또는 교수형에 처하거나 십자가에 달았다. 살인죄에 대해서는 모든 법전이 사형에 처했으나 처형 방법은 달랐다. 간음죄에 대한 벌은 어떤 나라에서는 가벼웠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무거웠다. 그러나 그렇게 다양하면서도 모든 법이 같은 목적을 추구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법이 하나님의 영원한 법과 같이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위증을 처벌한다. 그러나 처벌 방법은 같지 않다. 또 같을 수도 없고 같은 것이 유리하지도 않다. 어떤 나라는 살인자를 잔혹하게 처벌해서 무서운 본을 보이지 않으면 살인과 강도 사건이 빈발해서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한층 더 가혹한 벌을 주어야 하는 시대도 있다. 나라의 치안이 문란해지면, 거기에 따르는 폐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새로운 법이 필요하게 된다. 무기가 힘을 쓰는 전시에는 벌에 대한 비상한 공포심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살벌한 기풍이 휩쓸 것이다. 가뭄이나 전염병이 유행하는 때에는 벌을 더욱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오든 것이 다 파괴될 것이다. 극형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어떤 특수한 죄악으로 달리는 민족들이 있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 가기 위해서 이런 다양성으로 적절하게 대처하는데, 만일 이 다양성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에 대해서 심한 악의와 증오심을 가진 사람이 아닐까?

모세를 통해서주신 하나님의 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법을 채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는데, 이것은 전혀 무가치한 발언이다.2707) 다른 법들을 시인하며 채택할 때에는 단순한 비교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나라와 민족의 상태를 보아서 한다. 모세의 법을 폐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법은 원래 우리를 위해서 정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 모세의 손을 통해서 법을 주신 것은 그 법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며 모든 시대에 실시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을 스스로 지키며 보호하시기로 하셨을 때에 특히 그들에 대한 입법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래서 현명한 입법자답게 특히 그들을 고려해서 법을 제정하신 것이다.

17. 그리스도인은 법정을 이용해도 좋으나 증오심과 복수심은 품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자리에 둔 문제, 즉, 법과 재판과 집권자는2708) 그리스도인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유용한가를 검토하겠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문제는, 사사로운 개인이 집권자들을 어느 정도로 공경하며 어느 정도로 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집권자들이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스도인은 복수를 하거나 소송을 제기하거나 법에 호소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경건의 입장에서는 집권자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2709)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여기에 반대해서,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사자라고 단언한다(롬 13:4). 사도의 뜻은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임명하셨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집권자의 도움과 지지를 받아 악인들의 악행과 불의의 희생이 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딤전 2:2). 우리가 이런 혜택을 입는 것이 불가하다면 하나님께서 집권자를 주셔서 우리를 보호하게 하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집권자에게 도움을 호소하더라도 경건에 위반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사람들을 취급해야 한다. 소송 광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싸우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소송을 해도 무서운 증오심과 맹렬한 복수심으로 날뛰며 고집과 앙심으로 상대자들을 파멸에 몰아넣기까지 한다. 그리고 부정을 행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법적 절차를 밟는다는 구실로 하여 그런 악행을 변호한다. 그러나 형제를 상대로 법에 호소하는 것이 허락된다고 해서 그 형제를 미워하거나 또는 해하겠다는 무모한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무자비하게 괴롭혀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18. 그리스도인이 소송하는 동기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때에 한해서 그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원고의 기소와 피고의 변호를 위해서 소송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즉, 피고가 지정된 날에 출정해서 될 수 있으면 이의를 제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말하며 자기의 당연한 권리에 속하는 것만을 옹호하려고 할 때에 그는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또 반대편의 원고도 신체와 재산에 부당한 압박을 받았을 때, 법관의 보호를 청하며 고소 이유를 말하고 공정하고 선한 결과를 구한다면 그도 역시 소송을 바르게 이용하는 것이 된다. 그는 해하려는 생각이나 복수하려는 욕망이나 가혹한 증오심이나 투쟁욕을 일체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자에 대한 적의에 휩쓸리지 않고, 도리어 자기의 입장을 양보하며 어떤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용의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악의로 차고 시기심으로 더럽혀지고 복수심에 찬 위협과 투쟁욕으로 타올라 사랑이 손상될 때에는 가장 공정한 주장을 위한 소송까지도 불경건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야 할 원칙이 있다. 즉, 마치 분쟁 중인 사건이 이미 평화롭게 해결되며 조정된 것같이, 사랑과 성의로 상대자를 대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소송을 바르게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이런 온건한 태도는 어떤 소송 사건에서도 볼 수 없으며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나도 현재의 사정으로 보아 공정한 소송 당사자가 드물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악으로 더럽히지 않는다면 이 원칙은 여전히 선하고 순결하다. 집권자의 도움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선물이라는 말을 듣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과실로 그 선물을 더럽히지 않도록 더욱 정성껏 경계해야 한다.

19. 법적 절차를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

모든 법정 투쟁을 엄금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과 깨끗한 자에게 깨끗할 수 있는 선물의 하나를(딛 1:15) 거부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행동을 부끄러운 것이었다고 비난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바울은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중상을 논박하며 동시에 그들의 간계와 악의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행 24:12이하) 법정에서 자기의 로마 시민으로서의 특권을 주장했으며(행 16:37, 22:1,25), 필요한 때에는 불의한 재판장을 기피하고 가이사의 법정에 호소했다(행 25:10-11).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한 명령과 모순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법정에서 복수심을 멀리 축출한다(레19:18, 마 5:39, 신 32:35, 롬 12:19). 사건이 민사에 관한 것일 때 사건을 공안 수호자인 재판장에게 순진하고 단순하게 맡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바른 길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또 악을 악으로 하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롬 12:17). 이런 생각은 곧 복수심이다. 그러나 사형에 해당하거나 그 밖의 중대한 범죄인 경우에라도 우리는 고발자에게 불타는 듯한 복수심이나 사적 피해에 대한 원한을 품고 법정에 나갈 것이 아니라 사회를 해하려는 흉포한 사람의 노력을 방지하겠다는 생각만을 하라고 요구한다. 복수심을 버린다면 그리스도인은 복수하지 말라는 명령은 파괴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주께서는 그리스도인은 복수심을 품지 말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의 손을 기다리라고 하셨으며 압박과 괴로움을 받는 자들을 위해서 친히 복수하시겠다고 약속했으므로(롬 12:19),자기나 타인을 위해서 법관의 원조를 청하는 사람은 천당의 보호자가 하실 복수를 앞질러 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법관이 하는 복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같이(롬 13: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사람을 시켜서 원수를 갚으신다.

20.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참으나 친절과 공평한 마음으로 공공 이익을 수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하시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겉옷을 주라고 명령하신다(마 5:39-40).2710)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의 복수심을 철저하게 싫어하여 악을 악으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 더 해를 받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관용과 인내심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참으로 그들은 중상과 손해를 받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들이다. 악인들의 악의와 사기와 조롱에 대한 방비가 없다. 그뿐 아니라 이 모든 재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태연자약해서, 한 가지 해를 받으면 다른 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일평생 계속적으로 십자가를 지겠다는 것만을 자신에게 약속한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를 해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며(눅 6:28, 마 5:44 참조), 선으로써 악을 이기려고 노력해야 한다(롬 12:21).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승리다. 이런 정신으로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복수를 가르친 것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의 몸이 상하고 재산을 빼앗기더라도 그런 해를 받는 즉시 악인을 기꺼이 용서할 것이다(마 5:38이하).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평온하고 온건한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원수에 대한 친절을 유지하면서도 법관의 도움을 얻어 자기의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사회 복지에 대한 열의로 극악한 죄인 곧 죽음에 의해서만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죄인의 처벌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다. 어거스틴은 이 여러 가지 교훈을 바르게 해석한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은 악인이 선하게 되기를 원하므로 악인의 악의를 참고 견딜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선인의 수효를 증가시킬 수 있으며 악인의 악을 본받아 스스로 악인의 무리에 가담하지 않게 된다. 둘째, 이 교훈들은 밖에 나타나는 행위보다 속마음의 준비 태세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심과 호의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간직하면서, 겉으로는 그들에게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잘되기를 원해야 하기 때문이다.2711)

21. 바울은 소송을 좋아하는 성품은 배척하지만 소송은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소송을 죄악시했다고 하는 항의 역시 잘못이다(고전 6:5-8). 그의 말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 내에 소송에 대한 과소한 열기가 팽창해서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들의 종교가 불신자들의 조롱과 악평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바울은 첫째, 그들의 과격한 분쟁으로 인하여 복음이 불신자 사회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비난한다. 둘째, 교우들끼리 이렇게 싸우는 것을 책망한다. 그들은 자기의 손해를 인내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서로 남의 소유를 탐내며 까닭 없이 서로를 공격하며 가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덮어놓고 모든 논쟁을 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친 듯한 소송 열을 배격한 것이었다.

자기가 손해를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재산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싸우기까지 한 것을 바울은 그들의 과실 또는 약점이라고 부른다. 조그마한 손실에도 곧 분개해서 법정에 달려가 고소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분노로 너무 많이 기울어지고 인내심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한다. 참으로 기독교 신자는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언제든지 자기의 권리를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행동해야 한다. 법정에 가면, 돌아올 때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되지 않을 수 가 없다. 손해가 너무 클 때 그리고 사랑을 잃지 않고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법에 호소하더라도 바울의 말에 배치되지 않는다. 요컨대(우리가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이)2712)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좋은 지혜를 각 사람에게 줄 것이다. 사랑을 버리고 하는 일과 사랑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분쟁은 절대로 공정하지 못하며 경건하지 못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불의한 통치자도 공경하며 순종하라. 22-29)

22. 공경

집권자들에 대해서 그 지배 아래에 있는 국민이 해야 할 첫째 의무는 그들의 지위를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2713) 집권자들의 지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권한으로서 주신 것으로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대표자로서 존경해야 한다. 세상에는 집권자에게 큰 경의를 표시하며, 순종할 만한 집권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회 복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집권자들을 일종의 필요악으로만 인정한다. 왕을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명령은(벧전 2:17)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과 왕을 경외하라고 가르치는 것도(잠 24:21) 같은 뜻이다.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말에는 왕에 대한 진실하고 솔직한 생각이 포함되었다. 왕과 하나님을 연결한 솔로몬은 왕은 거룩한 존귀와 위엄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도 우리는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롬 13:5). 사도의 말의 뜻은, 국민은 다만 군주나 통치자가 무서워서 그들에게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반항하면 즉시 복수할 무장을 하고 있는 원수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개 굴복한다). 국민이 집권자에게 복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게 된다. 통치자들의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집권자들의 인물을 논하지 않는다. 우매나 나태나 잔인성 그리고 악행이 가득한 악한 행실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은폐하거나, 이 악을 덕이라고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집권자의 지위 자체는 영예와 존경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권자들을 높이며 그들의 지위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들도 공경해야 한다.

23. 복종

여기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즉, 통치자들을 충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은 그들에 대한 복종을 증명해야 하며, 그들의 포고에 순종하거나 세금을 내거나 공직과 방위 임무를 맡거나 그 밖의 명령을 이행함으로써 복종심을 실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롬 13:1-2)라고 바울은 말한다.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라고 한다(딛 3:1). 또 베드로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고 말한다(벧전 2:13-14).2714) 그리고 복종하는 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복종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통치자들의 안전과 번영을 하나님께 빌라고 첨부한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1-2).

여기서 아무도 자기기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집권자에게 항거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무장하지 않은 집권자를 모욕하고도 형을 받지 않을 수 있을 듯이 보일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이 모욕에 중벌을 줄 준비를 갖추고 계신다.

그뿐 아니라 나는 사사로운 시민이 공중 앞에서 지켜야 하는 자제심도 일종의 복종으로 인정한다. 개인으로서의 시민은 자기를 억제해서 공적인 일에 일부러 간섭하거나 공연히 집권자의 직무를 침범하거나 정치적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의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소동을 일으키거나 자기가 손을 댈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자기 손을 묶어 놓아야 한다. 자유로운 손을 가진 것은 집권자뿐이므로 문제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민은 명령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배자가 명령할 때 사사로운 시민은 공적 권위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군주들의 자문관들을 보통 그들의 귀와 눈이라고 하기 때문에,2715) 군주들이 명령으로 임명해서 일을 시키는 사람들은 그들의 손이라고 할 수 있다.

24.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하라

지금까지 우리가 묘사한 집권자는 참으로 그 칭호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즉, 국부,2716) 시인이 말한 국민의 목자,2717) 평화의 수호자, 의의 보고자, 무죄한 사람을 위한 복수자이다. 그러므로 이런 정부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어리석다고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반 군주들은 당연히 유의해야 할 일에 등한하며 아무관심도 없이 자기의 쾌락만을 추구해 왔다. 또 일부 군주들은 자기 일에 열중해서 법과 특권과 재판과 청탁 편지를 경매에 부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반 국민의 돈을 빼내서는 심히 어리석은 증여에 낭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강도질을 하고 집을 털며 부녀자를 강간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

따라서, 이런 자들을 집권자로 인정해서 가능한 한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말에 설복당할 사람은 많지 않다. 집권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직책에도 어긋나는 이런 큰 치욕과 범죄 속에서는 집권자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없으며, 선행하는 자를 표창하며 행악 자를 벌하기 위해서 임명된(벧전 2:14) 하나님의 사자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배자의 존귀성과 권위를 가르치지만 그들은 이런 사람을 지배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런 타고난 감정은 모든 사람에게 있으며, 사람들은 합법적인 임금들을 사랑하고 공경한 것같이 항상 폭군들을 미워하며 저주했다.

25. 악한 지배자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본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앞으로 인도해 줄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공정하고 충실하게 직책을 다하는 군주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할뿐만 아니라, 어떤 수단으로든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비록 군주로서의 직책을 조금도 이행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권위에 또한 복종해야 한다. 주께서는 사람들의 안전을 유지하시기 위해서 집권자의 직책을 그의 최고의 선물이라고 증거하시며 집권자들에게 한계를 지정하시지만,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집권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오직 그에게서 권위를 받은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통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애의 진정한 표본의 증거이며,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은 국민의 사악을 벌하시기 위해서 세우셨고, 지배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합법적인 권력에 주신 거룩한 위엄을 부여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여기에 대한 확증을 첨가하겠다. 그러나 악한 임금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내리시는 진노란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욥 34:30, 호 13:11, 사 3:4, 10:5, 신 28 :29). 아무도 내게 반대하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강도나 남의 가정을 더럽히는 간음하는 자나 남을 죽이려고 애쓰는 살인자와 같이 왕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성경은 이런 모든 재난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잠깐 머물러 사람들의 마음에 잘 이해되지 않는 이 일을 증명하겠다. 아무 영예도 받을 가치가 없는 심히 악한 인간이라도, 만일 공적 권력을 잡고 있다면 그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그의 공의와 심판의 사자에게 주신 저 고귀하고 거룩한 권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적 복종에 관해서는 가장 훌륭한 왕이 있다고 가정할 때에 그에게 드릴 그 공경과 존경을 악한 지배자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려야 한다.

26. 성경은 악한 왕에게도 복종하라고 요구한다

성경은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우리에게 자주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나게 하므로, 나는 우선 독자들이 그 섭리에 주의하여 하나님께서 나라들을 배치하며 원하시는 대로 임금들을 임명하시는 섭리의 특별한 작용을 신중하게 고찰하기를 바란다. 다니엘서를 보면 여호와께서는 때와 기한을 변경하시며 왕들을 혹은 폐하시고 혹은 세우신다(단 2:21,37). 마찬가지로, 이는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다(단 4:17) 성경에는 이런 구절들이 많은데 이 예언서에는 특히 많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정복한 느부갓네살이 어떤 임금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강력한 침략자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정복자였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주께서는 그가 하나님을 위해서 애굽 땅을 정복한 수고 때문에 그에게 그 땅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다(겔 29:19-20). 또 다니엘은 그에게 말했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인생들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 어느 곳에 있는 것을 무론하고 그것들을 왕의 손에 붙이사 다 다스리게 하셨으니"(단 2:37-38). 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아들 벨사살에게 말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단 5:18-19). 우리는 하나님에서 어떤 왕을 임명하셨다는 것을 들을 때에, 왕을 공경하며 두려워하라는 저 하늘 명령을 곧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가장 악한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두신 자리에 서슴지 않고 두게 될 것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들에게 저 받을 고통에 대해서 경고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1-17) 왕들은 율법에서 모든 자제와 근신하는 훈련을 받았으므로, 물론 이런 일들을 왕의 권리로서 할 것은 아니었다(신 17:16이하). 그러나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권리라고 하였다. 백성은 복종해야 하며 항거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무엘의 말을 다른 말로바꾼다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곧 왕들의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횡포는 극도에 달할 것이나 그것을 억제하는 것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즉, 왕들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다.

27. 예레미야 27장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경우

그러나 예레미야서에 명심할 만한 구절이 있다. 상당히 길지만 우리의 문제전체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주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나는 내 큰 능과 나의 든 팔로 땅과 그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나의 소견에 옳은 대로 땅을 사람에게 주었노라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였나니 열방이 그와 그 아들과 손자를 섬기리라 그의 땅의 기한이 이르면 여러 나라와 큰 왕이 그도 자기를 섬기게 하리라마는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렘 27:5-8,17).

저 가증하고 잔악한 폭군이 왕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복종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그는 폭군이었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왕위에 앉았으며 왕의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므로 그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것은 불법이 된다고 하신 것이다. 모든 왕의 권위를 세우는 동일한 명령이 가장 무가치한 왕까지도 임명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생각하며 눈으로 본다면 결코 선동적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왕은 그 공적에 따라서 처우해야 한다고 하며, 우리에게 대해서 왕답지 못한 왕에게 우리가 피지배자로서의 예를 다하라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은 선동적인 생각이다.2718)

28. 왕 개인을 존엄하다고 하는 성경의 증거

그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유한 것이었다고 하는 항의는 무가치하다. 우리는 주께서 어떤 이유로 그 명령을 확인하시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렘 27:6), 그러므로 그를 "섬기라 그리하면 살리라"(렘 27:17)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나라를 받은 것이 분명한 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 어떤 사람을 왕위에 오르게 하실 때에는 그의 통치를 원하신다는 결의를 우리에게 보이신다. 이점에 관한 성경의 일반적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솔로몬의 잠언 28장에서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라고 하며(잠 28:2), 욥기 12장에도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라고 한다(욥 12:18). 이 점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섬기고 사는 것뿐이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글에는 또 다른 명령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간 바벨론이 평안하기를 힘쓰며 그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나라가 평안하면 그들도 평안하겠기 때문이라고 하신다(렘 29:7). 여기서는 모든 재산을 잃고 고국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정치적으로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다른 구절에서 우리의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과는 다르다(마 5:44). 여기서는 정복자의 나라가 안전하며 평안하도록 기도해서 그들도 그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하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에게 왕으로 지명되어 거룩한 기름으로 부음을 받았을 때에도 무고한 박해를 가하는 사울의 목숨을 여전히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께서 왕국의 영예로써 사울의 생명을 성별하셨기 때문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고 했다(삼상 24:6). 또,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라고 했다(삼상 24:10). 또,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라고 했다(삼상 26:9-11).

29.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국민이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는 그들에게 최대의 존경을, 따라서 최대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자주, 우리는 인물을 검토해서는 안 되며 여호와께서 불가침의 위엄을 새기신 그 직위를 여호와의 뜻에 의해서 그들이 지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반복한다.

그러나 통치자들도 통치를 받는 국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점을 근거로 삼아서 공정한 지배자들만을 섬겨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논리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은 서로 책임을 지니고 있다. 가령 부모와 남편이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하자.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심히 냉혹하고 난폭해서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엡 6:4) 자녀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므로 지치게 만든다고 하자. 아내를 사랑하며(엡 5:25) 연약한 그릇으로 인정해서 아끼라는(벧전 3:7) 명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심한 학대를 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자기 구실을 하지 않는 그 악한 자들에게 여전히 순종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각각 "그들의 등에 달린 주머니를 보려고"2719) 해서는 안 된다. 즉, 남의 의무를 묻고자 해서는 안 되며 자기의 유일한 의무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잔인한 군주가 우리를 학대할 때, 욕심이 많거나 방탕한 자가 우리를 착취할 때, 태만한 자가 우리를 무시할 때, 악하고 모독적인 자가 신앙을 이유로 우리를 괴롭힐 때, 이런 때에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의 비행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비행은 꾸준히 주의 채찍으로 징계를 받는다(단 9:7 참조).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겸손하게 되며 불안과 초조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또 생각해야 한다. 이런 병폐를 시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주의 도움을 간청할 수 있을 뿐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보의 물과 같이 하나님이 마음대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잠 21:1).2720)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의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시 82:1)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입 맞추지 않는 왕들과 땅의 모든 법관들은 주의 앞에서 넘어지며 부서질 것이다(시 2:10-12). 불의한 법을 제정해서 빈민을 불공평하게 재판하며 미천한 사람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과부에게 토색하며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도 모두 여호와 앞에서 멸망할 것이다(사 10:1-2).

(그러나 헌법상의 관리들은 왕들의 폭정을 막아야 한다 : 우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30-31)

30. 하나님은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개입하시는 때가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섭리가 나타난다. 어떤 때는 그의 종들 가운데서 공공연한 복수 자를 일으키셔서 악한 정부를 처벌하며 부당한 압박을 받는 그의 백성을 참혹한 불행에서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어떤 때는 다른 의도를 품고 다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열광을 인도하셔서 이 목적을 달성하신다. 그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하셨고(출 3:7-10), 옷니엘을 시켜 수리아 왕 구산의 폭력에서 구하셨으며(삿 3:9), 다른 왕들이나 사사들을 통하여 그 밖의 압제에서 구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교만을 애굽 사람을 통해서 누르시고 애굽 사람들의 거만을 앗수르 사람들을 시켜 꺾으셨다. 앗수르 사람들의 흉포는 갈대아 사람들로, 바벨론의 오만은 고레스가 메대 사람들을 굴복시킨 후에 메대 사람들과 바사 사람들로 꺾으셨다.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배은망덕과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에 대한 그들의 불경하고 완고한 태도는 앗수르 사람들과 혹은 바벨론 사람들을 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분쇄하며 처벌하셨다.

처음 종류의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취하라는 하나님의 합법적인 소명에 의해서 파견되었고, 그들이 무력으로 왕들에 대항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왕들에게 주신 그 존엄성을 조금도 침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에서 무력을 받아 우세한 힘으로 열등한 힘을 굴복시켰다. 이것은 왕들이 부하들을 처벌하는 것이 합법적인 것과 같다. 그러나 둘째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곳으로 인도되어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실행했으나 그 마음에는 오직 악행만을 계획했을 뿐이다.

31. 국민의 자유를 보호할 헌법상의 의무가 있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행위가 그 자체로서는 어떻게 판단되든 간에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일들 성취하신다. 즉, 거만한 왕들의 피비린내 나는 홀을 꺾으시며 용인할 수 없는 정부를 전복시키신다. 군주들은 듣고 떨라.2721)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집권자들의 권위를 멸시하거나 침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집권자들이 가장 무가치한 사람들이며 악행을 다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더럽힌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하나님의 지극히 중대한 명령으로 확립되었으며 존중할 만한 위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폭한 독재를 시정하며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이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곧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명령은 복종하며 고통을 참으라는 것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사사로운 개인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만일 지금 왕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국민의 관리들이 있다면(예컨대 고대 스파르타의 왕들에 대립한 감독관, 로마 집정관들에 대한 호민관, 아테네의 원로원에 대립한 지방장관 그리고 현재 각국 국회가 중요 회의를 열 때에 행사하는 권한 같은 것) 나는 그들이 왕들의 횡포한 방종에 대하여 그 직책대로 항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미천한 일반 대중에 대한 군주들의 폭정을 못 본 체한다면 나는 그들의 이 위선을 극악한 배신행위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된 줄을 알면서도 그 자유를 배반하는 부정직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2722)

32. 인간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집권자들의 권위에 마땅히 복종해야 된다고 했지만 그 복종에는 항상 한 가지 예외가 있어야 한다. 실로 예외라기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즉, 우리는 이런 복종으로 인하여, 모든 왕들의 욕망도 마땅히 복종해야 할 분에게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 왕들의 모든 명령도 그분의 명령에 양보해야 하며 왕들의 권력은 그분의 위엄 앞에 굴복해야 한다.2723) 그분을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분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왕들의 왕이시며, 주께서 입을 여실 때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또 누구보다도 더 중요시해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들 위에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께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을 존경하지 말라. 이런 경우에는 집권자들이 가진 위엄을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정한 최고의 권력 앞에 굴복한다고 해도 그들의 위엄은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으로 다니엘은 왕의 불경건한 칙령에 복종하지 않은 자기가 왕에게 어떤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단 6:22-23).2724) 이는 왕이야말로 자기의 한계를 넘어 사람들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하여 자기의 권한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의 악한 포고에 순종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다(호 5:13).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그들은 왕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새로운 우상을 따르게 되었다(왕상 12:30). 그들의 자손도 같은 식으로 왕들의 명령에 곧 복종했다. 예언자는 그들이 왕의 칙령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들을 엄하게 책망했다(호 5:11). 거짓된 겸손은 결코 칭찬할 수 없다. 조정에 있는 간신들은 겸손을 가장하고 단순한 백성을 속이면서, 자기들이 왕명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죽을 인간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셔서 그들로 인류를 지배하게 하셨다는 듯, 또는 지상의 권력을 주신 분 앞에서는 하늘의 권력들도 떨고 굴복하는데도 그분에게 복종한다면 지상의 권력이 축소된다는 듯이 생각한다. 나는 절개를 지키는 데에는 어떤 큰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안다. 왕은 항거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며, 솔로몬은 "왕의 진노는 살륙의 사자와 같다"고 했다(잠16:14). 그러나 하늘의 사자인 베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행 5:29) 칙령을 선포했으므로, 우리는 경건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받는 편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얻도록 하자. 또 우리의 용기가 꺾이지 않도록 바울은 또 다른 자극을 주어 우리를 격려한다. 이는 곧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회생하셨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악한 욕망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욱이 그들의 불경건한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고전 7:23).

하나님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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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꼴라스 콥은 파리의 저명한 의사이며 학자였던 길롱 콥(Guillaume Cop)의 아들이었다. 연설하기 몇주일 전에 그는 국왕의 누이였던 마가렛드 왕굴렘의 주장을 대학에서 강력하게 지지하였는데, 그의 Mirror of a Sinful Soul은 소르본에서 정죄를 당한 바 있었다. 콥의 연설(Concio academica)은 칼빈의 저술에 수록되어 있다. CR X. ii. 30-36;OS I. iv

2) 이 사건들과 칼빈의 회심에 대해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P. Imbart de la Tour, Les Origines de la Rforme I. 478-568; J. Vinot, Histoire de la Rforme franaise des origines a l' dit de Nantes, Pt. ii, ch. i; F. Wendel, Calvin:Sources et volution de sa pense religieuse, pp. 20-26; J.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ch. vii.

3) 이 단어 institutio는 복수형 institutiones로 때때로 사용하는데 법에 관한 라틴어 저서들의 제목에서 가끔 나타나고 기독교 저술가들은 이것을 여러 주제들에 대한 개요 제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예를 들면, 락탄티우스(Lactantius), 암부로즈(Ambrose), 이시도르(Isidore), 폴 집사(Paul the Deacon), 힌크마르(Hinkmar), 버나드(Bernard)등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단어를 선택함에 있어 에라스무스(Erasmus)가 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1516) 또는 길롬 부데(Guillaume Bud)가 L 'Institution du prince(1516)에서 그것을 사용한 용법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비록 부데의 책은(1547년에 이르기까지)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칼빈의 손에 이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부데 가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의 제목이 보른(L. W. Bor's)의 역서에서는 The 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기독교도 왕자의 교육)으로 번역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Institutio 대한 일반적인 역어는 "instruction"(훈련, 교육)이다. 따라서 독일어판들은 이 말을 Unterweisung(가르침) 또는 Unterricht(교육)로 번역하며, 네델란드어판은 onderwijsinghe(현대어로는 onderwijzing임)으로 번역한다. 또한 브렌(Q. Breen)의 John Calvin:A study in French Humanism. pp. 119 ff, 맥나일(J. T. McNeill) Christian Hope for World Society, pp. 90-95를 참조하라. 복수형은 1654년에 엘즈빌(Elzevir)판에서 처음 사용되기 이전에는 책 전체의 제목으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영어판에서는 1813년 이전까지는 "institution"은 참고문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책 전체가 출판된 이후에는 책 제목으로 항상 사용되었다. 그러나 1580년에 번니(Edmund Bunney)의 요약판 번역자인 에드워드 메이(Edward May)가 "Institutions"를 사용하였고, 헨리 홀랜드(Henry Holland)가 1596년 피스카토르(John Piscator)의 Aphorisms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이 형태를 취하였다. 알렌(John Allen)이 1813년에 논문 전체를 번역하면서 Institutes라는 단어를 채택하였고, 그 이후에는 이 형태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p. xlv를 보라).

4) 1515년부터 1547년까지 재위한 프랑스 왕인, 프란시스는 르네상스 후원자였다. 그의 정책은 교회 장악 확보를 목표로 하였다. 이것은 교회 개혁이란 개념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지만, 왕국 내의 개신교도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점차 적대적으로 되었다.

5) CR XXXI. 23-27; 번역. Comm. Paslms I. xli ff; LCC XXIII. 51 ff.

6) J. Vinot, op. cit., p. 129.

7)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1517-1948, ed. Ruth Rouse & Stephen Neill, p. 40을 보라.

8) Institutio 초판들에 관한 완전한 연구는 영어권에는 없다. 최고의 연구로서는 Benjamin B. Warfield의 논문이 있는데, 이는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Rview X(1899), 193-219에 수록되었고 약간 수정되어 Allen's의 번역판(1909)에 수록되었다. D. Clement는 Bibliothque curieuse historique et critique, ou Catalogue raisonn de livres difficiles trouver VI. 64-102에서 그가 알고 있는 여러 초판들의 특징들에 대한 정보를 적당히 편리하게 제공해 주지만, 이 뛰어난 저서는 현재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드물다. Corpus Reformatorum에 수록된 칼빈 저서들(CR XXIII에는 방대한 양의 설명이 있지만 이는 P. Barth와 W. Niesel이 편집한 Opera Selecta(OS) III. vi에 제시된 설명으로 대치되었다.

9) The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는 P. T. Fuhrmann이 내용주를 붙여 Instruction in Faith(1537)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10) CR XXII. 7.

11) 칼빈의 프랑스어 문체에 대한 유능한 문학 비평가들이 극찬하는 논평들은 매우 많다. 페이지 lxviii 이하를 보라. E. Doumergue도 [Jean Calvin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IV. 5-8)에서 이러한 논평들 가운데 일부를 인용한다. 또한 J. Pannier의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I. xxii-xxiv를 참조하라.

12) Robert는 인쇄업의 설립자인 Henri Estienne(d.1520)의 아들이었고 그 자신이 최고의 고전문학 학자였고, 귀중한 저술을 펴낸 저자였다. 파리에서 그는 Mathurin Cordier으로부터 편집적인 도움을 받았다. Mathurin은 파리에서 청년 칼빈에게 라틴어에 대한 열정을 일깨워준 사람이었고, 그 역시 제네바에서 일생을 마친 자이다.

13) CR 편집자들은 1560년의 프랑스어판이 제1권 1장부터 7장까지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칼빈 자신의 저작이 아니며 그의 감독을 받지 않고 부주의하게 만들어졌다고 확신다(CR III. xxv-xxvii, XXI. 56.87 f), 이러한 견해는 Doumergue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J. W. Marmelstein의 [ tude Comparative des textes latins et franais de l'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tienne de Calvin]에서 최초로 강력한 반박을 받았다. Marmelstein은 문체상의 결함을 근거로 하는 논증에 대해 1541년판에도 유사한 착오들이 있음을 들어 반론을 폈고, Nicolas Colladon과 Theodore Beza의 명백한 말을 인용하여 칼빈이 직접 그 번역판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P. Barth와 W. Niesel이 OS III. xxxviii-xlviii에서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한 J. Cadier가 현대판인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stienne I]에 대한 그의 서문(x-xiii)에서 J. D. Benoit가 그의 프랑스어판인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 I]에 대한 머리말(9 ff)에서 각각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이 논증의 유력함으로 우리들은 Marmelstein의 주장을 거의 수용할 수밖에 없다. 영어판의 번역자들은 프랑스어판을 인정함에 있어서 서로 견해가 다르다. Norton(1561)은 1559년의 라틴어판을 "저자의 최종판'이라고 하였고, 반면에 Allen(1813) 1560년의 프랑스어판에 대해 동일한 표현을 사용한다. 번역판이 칼빈의 손을 거쳤다거나 칼빈 자신의 저작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의 번역 작업 연대를 대체로 1559년의 라틴어판 출간 이전으로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몇 군데 의도적으로 변형시킨 곳이 있지만 라틴어판을 번역한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록 칼빈이 프랑스어판에 나타나는 변화들을 그 후에 출판하면서 라틴어 판들에도 적용시킬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이 할만 하다. 이 사실은 프랑스어판이 특별히 일반용으로 의도된 것이고, 원본과 몇 가지 다른 점들은 라틴어 원본에 적합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한 경우에도 1559년 라틴어판은 국제적 보급을 위해 칼빈이 최종적으로 편집한 [강요]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권위를 아울러 갖는다.

14) Marlorat(1506-1562)는 전직이 어거스틴계 수사(修士)였으나 개신교 목회자가 되었고 보(Vaud) 교구를 담당하였고 쁘와시(Poissy) 회의에 참석하였고(1561), 루엔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수많은 글들 중에는 신약성경 주해가 포함된다(1561)(Eugene Haag and mile Haag, [La France Protestante VII. 256-259; CR I. xiv).

14a)15)Enzinas는 그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Elao"라고 하였으며, "Topeia"로 표시된 발행장소는 Ghent일 것이다. B. F. Stockwell은 Valera가 1597년에 번역한 것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재판한 것에 "Historia literaria de la institucion"이라는 서문을 쓴 바 있다.(pp. xx. f.)

16) Dyrkinus가 번역한 책들 중에 신약성경, Heinrich Bullinger의 [Hausbuch], 칼빈의 바울 서신 주석서들 등이 있다. 그의 생애에 관한 중요 사실들은 P.O. Molhuysen 등의 편집한 [Nieuw Nederlandsch Biographisch Woordenboek] IV. 547 ff에 A.A. van Schelven이 기고한 "Johannes Dyrkinus"라는 논문과 W.Hollweg의 [Heinrich Bullinger's Hausbuch](pp. 92 ff.)(그의 이름 철자가 여러 가지로 나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번역판의 사본들(Institutie ofte onderwijsinghe der Christlicken religie)이 Leiden의 대학 도서관과 런던의 네덜란드 교회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것은 1566년과 1578년에는 도르트에서, 1596년에는 라이덴에서 재판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1602년에 Charles Agricola가 펴낸 책으로 대체되었고, 다시 이것은 William Corsman이 1650년에 만든 우수한 역서에 위치를 양보하였다.

17)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Das ist underweisung inn Christlicher Religion in Vier B cher verfasset. Durch Herrn Johannem Calvinum. Aus Lateinischer und Frantz schischer Sprach treulich verteutscht Gedruckt in der Churf rstlichen Statt Heydelberg durch Johannem Meyer. M.D.LXXII."(콜비대학 도서관<Colby College, Waterville, Maine>에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자들과 교회 관계자들(Kirchendiener)이 기독교도 독자들에게 보내는 3쪽 반 분량의 글로 시작되며, [강요]를 비할 바 없는 "summa Christlicher Religion"이라고 격찬하고, 독일어판은 라틴어판의 번역이며 쉽게 의역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번역자들의 이름은 전혀 밝히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1572년 당시 하이델베르그 대학 신학부에는 Caspar Olevianus(1536-1585), Zacharius Ursinus(1534-1583), Hieronymus Zanchius(1516-1590), 그리고 Pierre Boquin(1500-1582년경) 등 저명한 개혁파 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하였다는 것이다.

18) Valera는 엘리자벳 여왕 통치 기간 대부분 동안에 영국에 체류하였다. 그의 [강요] 서문에는 개신교 피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여왕의 정책을 열렬히 찬양하는 문구가 있다. 그는 초기의 스페인어 성경 번역에 기여하였다. 1637년에 유명한 제네바의 Giovanni Deodati는 Valera의 [강요] 3천부가 스페인 전역에 보급되었다고 진술하였다(T. McCrie,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pain, p.374). Valera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L.J.Hutton저(著)[Church History XXVII](1958), 23-31에 실린 "A Spanish Heretic:Cipriano de Valera"를 보라.

19) 초기 체코어판과 헝가리어판의 각주에 대해서는 Loesch의 [Luther, Melanthon, und Calvin in sterreich-Ungarn], pp.356 ff를 보라. 또한 Pitcairns의 "Catalogue Raisonn of the Earlier Editions of Calvin's Institutes"에 있는 목록들을 참조하라. 이 논문은 H. Beveridge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Edinburgh, 1845) I. lxvi에 수록되어 있다.

20) The Life and Communicacion of a Christen Man으로서 1549년에 Thomas Broke에 의해 번역되었다. Broke는 당시에 도버와 칼라이스 항구의 관리였다. 서문에 그는 전 작품을 번역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번역가로서 그는 탁월하지는 못하며, Norton보다 못한 것이 분명하다. 주 65번을 참조하라.

21) 이 판의 일부 인쇄본들에는 발행인의 메모가 누락되었다. 그 가운데 한 권이 하바드 안도버 도서관(Harvard Andover Library)에 소장되어 있다. John Dawes는 아마도 1570-1602년 사이에 Suffolk 주(州) Sutton의 교구목사였던 같은 이름의 캠브리지 졸업생(M.A., 1540)일 것이다. [Alumni Cantabrigenses], 제1부 1권(1922), 19를 보라. 우리는 1560년 9월에 발행된 [John Sleidan의 Reign of Charles V, A Fameuse Cronicle of oure time called Sleidanes Commentaries]와 1561년 3월에 나온 Henry Bullinger의 [A Hundred Sermons upon the Apocalips]를 번역한 Ipswich의 John Daus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이 중요한 책들의 발행일자들을 보면 비록 기대한 만큼의 만족스러운 [강요] 번역 원고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를 용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원고가 뜻밖에 사고로 유실되었거나 파손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

22)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에는 Norton에 대한 Sidney의 좋은 논문이 게재되어 있다. 그가 지은 18개의 운율서들이 T.Sternhold와 J.Hopkins의 [The Whole Book of Psalms collected into English Metre(런던, 1562)에 나온다.

23) Norton은 대주교의 셋째 딸인 Margery Cranmer와 1555년에 결혼하였다. 유명하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칼빈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던 뉘렘버그(Nuremberg)의 개혁 지도자인 Andreas Osiander의 조카였다:I. xv. 3, 5; II. xii. 5-7; III. xi. 5-12.

24) 권위자는 런던에 있는 성 바울 교회의 부감독인 Alexander Nowell이다. Norton은 1570년에 Nowell의 라틴어 교리문답 3편 가운데 하나를 번역하였는데, Nowell은 Norton의 번역판이 훌륭한 영어의 모범이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Anthony Wood는 Norton이 "라틴어에 자신을 얽어매었다"고 비평한다(R. Churton, Life of Alexander Nowell, p.176). 현대 영어로 개편된 Norton의 번역서를 참조하려면, The Fathers of the English Church VIII. 1-141을 참조하라.

25) 앞의 주 8에 언급됨.

26) 1843년 5월에 설립된 이 협회는 Calvin의 강요, 주석, 논문 및 서신들을 번역하여 발간하였다(1845-1855).

27) Beveridge는 번역판의 부록으로 강요를 요약한 다음 글을 수록했다. "One Hundred Aphorisms, Containing, within a narrow compass, the substance and order of the four books of the Institutes." 그는 한 각주에서 이 자료를 제공한 사람이 Rev. William Pringle of Auchterarder라고 밝힌다. 다른 출처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Aphorisms"는 "Centum Aphorismi"의 번역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원문은 J. Le Preux 가 1590년과 1607년 편집한 Geneva Latin판과 1654년의 Elzevir Leiden판 그리고 J.J.Schipper가 1667년에 편집한 Amsterdam판에 각각 실려 있다. Le Preux는 서문에서 그것들이 영국에서 인쇄된 Guillaume Delaune의 목록에서 발췌한 "ex tabulis Gulielmi Launaei in Anglica excusis collecti"이라고 말한다. 한편 Elzevir과 Schipper판에서도 "Aphorisms"의 출처가 위와 동일한 것이라고 밝혀져 있다. 이 모든 것에서 가리키는 것은 우리가 아래에서 살펴본 Delaunes의 [Epitome](1583)에 있는 정교한 칼빈의 교리 목록표이다. 문서들을 비교해 보면 Le Preux의 진술은 사실임이 즉각적으로 확증된다. Delaune의 표현들은 일련의 100개 명제들로 편집되었고, 이때 그가 각장에서 언급한 말들은 생략되었다. D. Clement가 Le Preux의 서문을 인용한 것(op. cit., VI. 85)은 본 편집자로 하여금 처음으로 이러한 확인이 도달하게 하였다. [The One Hundred Aphorisms]이 다소 확대된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영어로 처음 번역된 것은 1596년의 일이다. 그것들은 Robert Hill의 [The Contents of Scripture]에 포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페이지가 따로따로 매겨진 두 개의 부록이 있다. 그 부록의 하나는 "C.I"의 [The Consent of Foure Evangelists]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Aphorisms인데, 그것은 [An Hundredhh Aphorismes, Short Sentences sumarily containing the matter and Method of Maister Calvines Institutions, in far other order than that set out by piscator: taken out of the last and best edition]이라는 제하에 실려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판(edition)은 Piscator의 판본이 아니라 Le Preux의 1590년 판일 수도 있는 [Institutio]판이다. 숫자적으로 훨씬 많은 Piscator의 "Aphorismi"는 Delaune에게서 유래된 [Aphorisms]와는 사실상 유사한 점이 없다. Hill과 "C.I"의 책은 1596년에 런던에서 Adam Islip에 의해 인쇄되어 Richard Jackson에게 바쳐졌다. [The Hundred Aphorisms]는 불어판으로도 출판되었다. Pitcairn은 그의 에세이(cf. 위의 주 18번)에서 Charles Icard의 1713년 불어판의 한 특징으로 통하는 Aphorisms 시리즈를 언급하지만, Beveridge의 서론에서는 이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A.Tholuck은 Beveridge가 이용하고 있는 그의 라틴어 판(Berlin, 1834, 1846)에서 [Centum Aphorismi]를 아무 설명 없이 그의 부록으로 첨부하고 있다.

28) 에딘버러와 런던에서의 Vautrollier의 활동은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에 수록한 그에 대한 논문에 기술되어 있다. Vautrollier의 스페인어판 강요와 많은 종교 서적 번역서들을 발행한 인쇄업자 Richard Field의 부인이 되었다. Vautrollier 사후에 Field는 블랙프라이어즈(Blackfriars)에서 인쇄업을 계속하였다. 스트라트포트(Stratford)와 런던의 Shakespeare가(家)와 그의 부친의 관련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 자신은 Shakespeare의 초기 작품들을 몇 권 인쇄하였다.

29) 라틴어판 [강요]를 준비하면서 Vautrollier는 Edmund Bunney에게서 편집 도움을 받았다. 이 탁월한 판본은 [Loci communes]와 Peter Martyr Vermigli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세밀한 난외주가 특징이다. [Loci communes]는 Peter Martyr가 남긴 기록들(d. 1562)과 런던의 불란서인 목회자 Robert Masson의 "arranged according to Calvin's system"을 1575년에 결합시킨 작품이다. 그것은 1576년에 런던에서 처녀 출판되었고 1580년과(Vautrollier에 의해) 1583년에 재 인쇄되었다. 1576년판 [Institutio]에 대한 Vautrollier의 서문(Typographus Lectori)과 C. Schmidt의 [Peter Martyr Vermigli, Leben und ausgew hlte Schriften]p.295를 참조하라.

30) 이 부분은 위의 주 27에서 다소의 현대 편집자들이 강요에 첨부시킨 "One Hundred Aphorisms"의 출처로 언급된다.

31) Caspar Olevianus는 칼빈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는 Zacharias와 공동으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를 집필하였다(1563). 1576년부터 1584년까지 Berleberg에서, 후에는 Herborn에서 교수하였고 158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 epitome(Herborn, 1586)]에 대해서는 P.Henry의 [Das Leben Johann Calvins III]188을 참조하라. Henry도 역시 헤르본에서 1586년에 발행된 역자미상의 독일어 요약판과 Theodor Zwinger의 [Institutes] 분석서인 [Theatrum Sapientiae]에 대해 언급된다.

32) 확실히 18세기에는 새로운 강요 요약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요약판이 나오게 된 것은 H. P. Kalthoff의 [Christliche Unterweisung in einem kernhaften Auszug]가 1828년에 엘버펠트(Elberfeld)에서 발행되면서부터이다. Samuel Dunn의 [Christian Theology Selected and Systematically]도 같은 종류의 책이며 1840년 웨일즈너로 번역 출판되었다. Elzenga의 네델란드어 요약판인 [Calvijn's Institutie of onderwijzing in den Christlijken Godsdienst]가 1903년에 캄펜(Kampen)에서 발행되었고 B.Wielenga가 후에 동일한 제목(부제는 다름)으로 보다 큰 책을 편찬하였다. 또한 더 충실한 것으로는 E. F. K. M ller가 훌륭하게 요약한[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이 있다. H. T. Kerr 의 [A Compend of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은 원문의 약 십분의 일이 실려있는 것으로서 Allen의 번역서에서 사려깊게 선택한 선문(選文)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우 자유롭게 번역한 제4권을 제외시킨 J.P.Wiles의 [John Calvin's Instruction in Christianity, an Abbreviated Edition of the Institutes]는 D.O.Fuller에 의해 더욱 짧게 요약되었다. J.T.McNeill의 [John Calvin on the Christian Faith; Selections from the Institutes and Other Writings](Library of Liberal Arts, No. 93)에는 발췌문들이 논평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데, 초록(抄錄)의 대본으로는 또다시 Allen의 번역본이 사용되었다. 보다 크고 J.T.McNeill의 서론이 첨가되어 있는 한 [Institutes]의 초록집이 Ching Yu Hsu에 의해 중국어로 번역되어 홍콩에서 출판되었다(2권). (Christian Classics Library, published by the Board of Founders of Nanking Theological Seminary 발행; 편집주간, Francis P. Jones; 2d series, Nos. 4,5).

33) 시편 주석 서문, CR XXXI. 21. Cf. LCC XXIII. 52.

34) "Non quis sit apud se, sed qualis erga nos." I. x. 2. Cf. I. ii. 2; III. ii. 6.

35) "Infantiae meae modulo." IV. xvii. 7.

36) "Multo altius assurgere contendant quam meo ductu possint", ibid.

37) I. ii. i.

38) Jean Calvin, IV. 29.

39) The Teaching of Calvin, 2d revised edition, p. 296.

40) P. Barth, "Das Problem der natrlichen Theologie bei Calvin", in the series Theologische Existenz Heute, No. 18; G. Gloede, Theologia naturalis bei Calvin; E. A. Dowey, Jr.,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ch. III and appendix 3; W. M. Horton, contemporary Continental Theology; An Interpretation for Anglo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translated by H. Knigth, pp. 39-53.

41) I. iii. 3; I. v. 3-5, 8. 인간의 죄는 그의 의지만이 아니라 그의 지성도 완전히 해쳤다는 것에 대한 칼빈의 강조는 여기에서 상기해야 한다. ch. II. ii. 12-25.

42) I. xiii. 7.

43) III. iv. 4-6.

44) I. vi. 2.

45) IV. viii. 9.

46) CR XLIX. 49. 마찬가지로 칼빈 자신의 성경 인용도 의미상 일치되기는 하지만 단어 사용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때가 종종 있었다. cf. J. A. Cramer, De Heilige Schrift bei Calvijn, pp. 116-141; J. Haroutunian in LCC XXXIII. 31-35.

47) IV. xvii. 20. 여기에 사용된 다른 문구는 "literae exactores", 즉, "문자 강요자"이다.

48) I. viii. 11.

49) I. viii. 2.

50) I. vii. 1-2.

51) I. vii. 5; I. viii. 13.

52) 요한복음 5:39에 대한 주석 참조; CR XLVIII. 125.

53) 야고보서와 유다서에 대한 루터의 서문을 참조하라. "진정으로 거룩한 책들은 모두 함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강조한다[Christum predigen und treiben]는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비평의 참된 표준은 그것들이 그리스도를 강조하는지 안하는 지의 여부를 우리가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비록 베드로와 바울이 그것을 가르쳤다 해도, 사도적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은 설혹 가롯 유다, 안나, 빌라도 또는 헤롯이 그것을 가르쳤다 해도 사도적이라 할 수 있다(Dr. Martin Luther's sammtliche Werke LXIII. 156 f.). Works of Martin Luther VI. 478의 번역을 참조하라. 이외에도 I. ix. 3을 참조하라.

54) IV. xvii. 25.

55) Thomae Braduardini archiepiscopi olim Cantuariensis De causa Dei contra Pelagium et de virtute causarum, libri tres, 이는 Henry Saville(London, 1618)이 저작에 대한 분석은 Joseph과 Isaac Milner의 공저인 History of the Church IV. 79-106에 실려 있다. Chaucer의 Nun's Priest's Tale에서는 Bradwardine이 Augustine과 Boethius와 동급의 인물로 언급된다. 이 시인은 다음의 시편에서 예정에 내포된 문제들을 익살맞게 지적하기는 하지만 논하는 것은 삼간다. But I ne kan nat bulte it to the bren. As kan the hooly doctour Augustyn, Or Boece, or bisshop Bradwardyn… I will nat han to do of swich mateere. Bradwardine은 탁월한 수학자였고, 따라서 그의 논문에는 수학적 논의와 그의 뜨거운 신앙이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다. Saville가 편집한 책의 pp. 327, 420과 H. A. Oberman, Archbishop Thomas Bradwardine, a FourteenthAugustinian ch. I, v, vii을 참조하라. 또한 G. Leff, Bradwardine and the Pelagians: A Study of His De causa Dei and lts Opponents도 참조하라.

56) Gregory of Rimini는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자들을 은혜와 자비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영원한 징벌은 각 개인이 자유 의지를 악용하거나 은총에 저항할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와는 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 P. Vigneau, Justification et prdestination au xiv sicle: Duns Scot, Pierre d'Auriole, Guillaume d'Occan, Grgoire de Rimini, ch. iv를 참조하라. 그리고 Oberman의 op. cit., pp. 211-223도 참조하라.

57) M. Spinka, John Hus and the Czech Reform: Advocates of Reform: From Wyclif to Erasmus(LCC XIV), pp. 196 f., 249. 261 f.

58) B. B. Warfield, "Augustine", HDRE II, 224.

59) 그러나 거의 일세기 후에 코넬리우스 얀센이 어거스틴의 죄와 은총론을 새롭게 평가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60) H. Barnikol는 Die Lehre Calvins vom unfreien Willens und ihr Verhltnis zur Lehre der brigen Reformatoren, und Augustins에서 칼빈은 어거스틴 신학을 다시 투옥시킨 자라고 본다. J. B. Mozley는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지금도 유용한 그의 저서 A Treatise on the Augustinian Doctrine of Predestination에서 특히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그리고 칼빈에게 주의를 기울이면서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동일한 주제를 다룬 어느 누구보다도 구별하고 있다. A. D. R. Polman의 De praedestinatieleer van Augustinus, Th. van Aquino, en Calvijn을 참조하라. [강요]에는 어거스틴에 대한 언급이 무수하게 많다. 대체로, 칼빈은 성경를 확증하는 것으로서만 어거스틴의 말을 이용한다. 그러나 III. xxiii. 1, 5, 11, 13, 14와 IV. vi. 4등과 같은 몇 곳에서는 논증의 대의를 파악하기 위해 어거스틴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어거스틴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는 L. Smits가 Saint Augustine dans l'oeuvre de Jean Calvin에서 제시한 증거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I. 254-271을 보라. Smits는 두 신학자들의 저서를 이용하여 저술하였다. 제2권에서는 상세한 통계 도표들이 수록되어 있다. 주목할 만한 다른 연구서들로는 J. Cadier, "Calvin et Saint Augustine", in Augustinus Magister(Communications du Congrs International Augustinien) II. 1033-1056과 D. Nauta, Augustinus en de Reformatie가 있다.

61) III. xxiii. 7.

62) "Quos Deus practerit, reprobat" III. xxiii. l.

63) III. xxiii. 14.

64) III. iii. 8-10.

65) III. vi. 5.

66) III. vix. 이는 The Golden Booklet of the Christian Life(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황금 소책자)로 알려졌고 흔히 별책으로 발행되기도 한다. 이 부분이 1550년 라틴어 표본에 있는 대로 따로 인쇄된 것은 1550년 제네바에서였다. 위의 각주 19를 보라.

67) III. vii. 6.

68) III. ix. x.

69) III. ii. 7. E. A. Dowey, Jr.는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ch. iv에서 특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관련될 때 칼빈의 신앙론을 정확하게 논하고 있다.

70) III. ii. 9.

71) III. iii. i; III. xi. 7.

72) IV. i. 4.

73) IV. i. 7-18.

74) IV. ii. 1-2. 9. 11-12.

75) IV. v.

76) 1400년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교회사를 Matthias Flacius의 지도하에 루터교 신학자들이 편찬하였고, 그것들은 바젤에서 발간되었다(1559-1574).

77) 753년과 775년 동안에 위조된 것이 분명한 이 문서는 Constantine 대제(306-337)가 서부 유럽 대부분에 대한 지배권을 교황 Silvester 1세에게 양도할 것으로 묘사한다. Valla의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o는 1439년에 씌어졌고 1540년에 바젤에서 인쇄되었다. cf. IV. xi. 12.

78) IV. vii. 26.

79) IV. xii. 6, 7.

80) IV. xii. i.

81) IV. xii. 5.

82) IV. xii. 8-11.

83) IV. xiv

84) IV. xvi. 7.

85) IV. xv. 20; xvi. 20. 26.

86) IV. xvii. 22, 30.

87) 이에 대한 대표적인 고백적 진술은 "우리는…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를 우리의 영적 생활을 위해 우리의 영혼 안에…진정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벨기에 고백(Belgic Confession)제 35조의 진술이다.

88) Experior magis quam intelligam IV. xvii. 32.

89) IV. xvii. 38, 42, 44.

90) IV. xviii. 1-14; xix.

91) IV. xx.

92) City of God V. xxiv.

93) 칼빈이 저서들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구절들을 뽑아 선집으로 만든 것을 J. T. McNeill이 서론을 쓰고 편집한 John Calvin on God and Political Duty에서 찾아 볼 수 있다(Library of Liberal Arts, No. 23).

94) The Theology of Calvin, p. 230.

95) IV. xx. 3.

96) IV. xx. 8.

97) J. Mackinnon, Calvin and the Reformation, pp. 163 f.; J.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162, 187. 제네바의 교회법에 대해서는 Project d'Ordonnances ecclsiastiques(1541), in OS II. 325-345를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그것이 1561년의 개정된 법과 제네바의 학원법 다음에 나온다. LCC XXII. 58-71에 실린 역문을 참조하라. Cf. CR X. i. 15-30; B. J. Kidd, Documents of the Continental Reformation, pp. 588-603.

98) 칼빈의 신학에 우호적이든 비우호적이든 많은 학자들의 그의 문체에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그의 인격에 대한 일반적 언급들과 함께 찬사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칼빈 번역회(Calvin Translation Society)가 발행한 그의 이론속에서 주석(Edinburgh, 1854), pp. 376-464에 인용되고 있다. 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VII. 270-295에도 이에 견줄만한 평가들이 수립되어 있다. 이 평가들이 다른 것들과 함께, J. Pannier의 Calvin crivain, sa place et sa rle dans l'histoire de la langue et da la littrature franaise. See also L. Wencelius, L'Esthtique de Calvin, pp. 344-373을 참조하라.

99) F. Brunetire, "L'Oeuvre littraire de Calvin," Revue des Deux Mondes 161(Paris, 1900), 898-923; Pannier, op. cit.; Pannier, Introduction to the Institution of 1541 I. xxii ff.; A Lefrance, Calvin et l'loquence franaise.

100) 불란서의 저술가요 법학자인 Etienne Pasquier(d. 1615)와 유명한 감수 Bossuet(d. 1704)는 칼빈의 라틴어를 칭찬하지만 그에 반대하는 여러 저술가들 가운데 포함된다. 그들은 위의 주 97번에 열거된 저서들에서 인용된다. Cf. W. Leon, "Le Classicisme de Calvin", Humanisme et Renaissance V(1938). 231-246.

101)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에 대한 헌정 서신(1550); J. Lecoultre, Maturin Cordier et les origines de la pdagogique protestante dans les pays de Iangue franaise.

102) Q. Breen, John Calvin;A Study in French Humanism, p. 146.

103) F. Wendel, Calvin; Sources et evolution de sa pense religieuse, p. 21.

104) Breen, op. cit., p. 148.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칼빈은 최상급 반에게 "문체를 열심히 다듬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CR. X. 1. 79; OS II. 370).

105) A. Veerman, De Stijl van Calvijn in de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pp. 26 ff., 60 ff., 72 ff., 76 f., 92-110, 121 ff.

106) I. viii. 1, 2.

107) Simon Grynaeus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를 참조하라. 이는 로마서 주석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CR X. ii. 406; 번역, LCC XXIII. 75).

108) 1549년 9월 1일자로 파렐에게 보낸 편지(CR XIII. 374). 이 말은 Farel의 한 책에 대한 비평가운데 나오는데, 그 책은 당시 곧 발간될 예정이었던 La Glaive de la parole vritable일 것으로 추정된다. Seneca주석 서문에서 밝힌 Seneca의 문체에 대한 그의 견해도 이와 비교할만한 것으로서 주목할만하다(1532). 그는 문장이 우아하지만 "상당히 장황한 편이다." Cf. Pannier, Calvin crivain, p. 10; A. M. Hugo, Calvin en Seneca, pp. 177 ff. 같은 책 p. 231에 Hugo가 영역한 서문이 있는데 이를 참조하라.

109) E. Faguet, Seizime sicle, tudes littraires, p. 190. 16세기 프랑스 작가들에 대한 이 책에서 그는 칼빈을 정확히 연구하고 있다. pp. 127-197.

110) Q. Breen, "John Calvin and the Rhetorical Tradition", Church history XXVI(1957). 14 f.

111) 예레미야 9장 24절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번역. LCC XXIII. 125).

112) 칼빈은 학질의 일종인 사일열에 걸렸던 1558년 10월부터 1559년 5월 사이에 본서의 최종 개정판과 이사야 주석을 출판하였다. Beza, Vita Calvin, CR Ⅹ?, 156(tr. H. Beveridge, Life of John Calvin by Theodore Beza, pp. 82 f.).

113) "Verum sat cito si sat bene." Suetonius의 기념비적인 작품 Lives of the Caesars, Augustus Ⅱ. ⅹⅹⅴ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Sat Celeriter fieri quidquid fiat satis bene"(LCL Suetonius Ⅰ. 158). Petrarch도 그의 Epistolae rerum senilium ⅹⅵ. 2(Opera, Basel, 1581, Ⅱ. 965)에서 그와 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그노교도이자 시인인 Guillaume du Bartas의 업적으로 잘못 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문구는 Shakespeare의 작품 Macbeth Ⅰ. ⅶ에 나타난 구절 "단행해서 일이 끝난다면 당장 단행함이 좋을 것 아닌가"의 의미와 같은 맥락이 아닌지?

114) 이것은 Augsburg에서 1558년 2월 25일부터 3월 28일까지의 기간 동안 개최된 의회를 뜻함.

115) 이 말은 칼빈의 첫 번째 성경주석인 로마서 주석(1539년 10월 18일에 시작되어 1540년에 출판됨)이 나오기 전 1539년 8월에 출판된 본서 제2판에 나타나 있다.

116) 1539년과 1554년 사이에 출판된 여러 판의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다. "로마서 주석이 한 좋은 예를 제공해 줄 것이다."

117) 칼빈의 자작시, 라틴어판에는 2행시, 1561년 프랑스어판에는 4행시.

118) 어거스틴이 Maresellinum에 보낸 편지(MPL 33. 585; tr NPNF Ⅰ 490, FC 20, 150).

119) 1534년 10월 18일의 플라카드벽보(Placards) 사건 이후 프랑스에 일어난 박해를 말한다. 프랑스의 종교 개혁파는 선동적인 극단파들로 구성되고 있다는 비난 A. L. Herminjard의 Correspondance III에서 설명하고 있다. 프란시스 1세가 의원들에 보낸 편지는 적절한 자료일 것이다(Herminjard, Correspondance III 249ff), 복음주의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격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풍문이 퍼지기도 했다. 프랑스 왈도파(Waldenses)가 처한 곤경을 칼빈은 마음에 두고 있었다. 1535년 8월 4일 Farel과 Viret는 왈도파 교도들이 "잔인하고 야만적인 박해"를 당하고 있음을 알리는 편지를 스위스와 독일과 복음주의자들에게 보냈다. 슈트라스부르그의 Capito가 보낸 회답은 칼빈이 왕에게 헌사를 바친 날과 같은 1535년 8월 23일이었다.

120) 비슷한 내용이 제 4권 xx. 29, 31항과 롬 13:1-7주석에도 나옴.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 V xxiv(MPL 41. 170; tr. NPNF II. 104f)에서 나온 "왕자들의 거울" 이라고 한 것과 비교해 보라. 여기 나온 마지막 문장은 Plautus, Trinummus 317; sarta tecta tua praecepta(LCL. Plautus V. 126)를 생각나게 한다.

121) "Nec iam regnum ille sed latrocinium execret"이 말은 "공의가 제거되면 나라가 거대한 강도의 집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한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을 모방하고 있다. City of God, IV. iv.(MPL 41. 115 tr: NPNF II. 66).

122) Alfonsus de Castro(d. 1558), Adeversus omnes heareses I. iv(1543년 판, fo 7, 8). 이단자들을 알파벳 순으로 정리해 놓고 있다. 이 저서의 저자는 스페인 사람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왕 Philip 2세를 섬긴 프란시스회 수사였고, 유능한 논쟁가였다.

123) "Fidei analogia" 참조 IV. xvii. 32. 또한 로마서 12장 6절에 대한 주석서와 John Owen의 영국판, P. 461에 있는 주를 참조하라. 로잔의 신학 교수 William Bucanus는 그가 힘들여 저술한 교리문답서인 Institutiones Theologicae(Geneva, 1605)에서 "믿음의 분수를 성경의 여러 곳에서 명백하게 설명되고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신학상의 중요 문제들에 대한 일반적 진술과 공리에 맞는 항구불변의 신성인식"이라고 정의하였다(Tr. Robert Hill [1606], p. 44). 참조. Heppe RD. pp. 34-36.

124) 선행에 의한 공로와 공적의 보고(寶庫)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Clement VI의 교령집 Unigenitus(1343)에 나와 있다(Extravagantes Communes IX. ii: Friedberg II. 1304ff). 참조. III. v. 2-5.

125) 맹목적 신앙과 명백한 신앙의 문제는 3권 2장 2-5에서 취급되고, 한편 T. Aquinas도 Summa Theol. II. IIae. ii. 5-8에서 논한다. 아퀴나스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명백히 믿어야 한다는 견해를 배격하고,(art. 6.) "남을 가르치는 고위 성직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명백히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26) 이 말은 종교개혁 출발 시부터 있었던 것으로서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변론의 핵심들이다. 루터를 반박하는 그들에 대해서는 OS III 13-15의 각 주들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으로는 John Eck의 Enchiridion locorum communium adversus Lutheranos(1526; 확대판은, Enchiridion locorum communium adversus Martinum Lutherum et asseclas eius, 1532)인데, 이는 Henry VIII와 Thomas More에게 증정된 것이다. 이 책은 1600년까지 91판 거듭 되었다. Eck는 John Fisher of Rochester, John Faber, Kaspar Schatzgeyer, Jerome Emser, Augustin Alveld 등 루터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였다. 초판에서 그는 루터의 입장들을 29개 항목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앞의 다섯 항목이 중요하다. 그것들은 교회와 교회의 권위, 교회공의회, 교황청의 지상권, 성서, 믿음과 공적 등이다. 다른 주제들에는 미사와 기타 성례전들, 출교, 면죄부, 고행, 이단자 화형, 유아세례 등 일련의 쟁점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계열의 저자들 중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자는 Alfonsus de Castro(참조. 위의 각주 4)와 Josse Clichtove(Judocus Clichtoveus, d. 1543)이다. 후자는 네덜란드인으로 파리의 Collge de Navarre의 교수였고, 처음에는 Lefver를 지지하였는데, 1525년에는 Antilutherus를 펴내고 종교개혁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것은 세 권으로 된 방대한 논문이며, 중세의 교황권의 성직제도와 신학을 지지하는 많은 논증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보다 더 방대한 책의 저자인 John Cochlaeus(d. 1552)는(Nuremberg 근처의) 벤델슈타인 태생이다. 그의 De authoritate ecclesiae et scripture, adversus Lutheranos(1524)는 중요한 반(反)루터 저작 가운데 최초의 것에 속한다. 그의 De sacris reliquis Christi et sanctorum eius(1549)는 칼빈의 Treatise on Relics(1543)에 대한 답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또한 Melanchthon과 Bullinger를 반박하는 저서도 남겼다. 이 계열의 저술가들에 대한 최초의 연구소와 저작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려면, "The Catholic Reform in the Sixteenth Century, G. H. Tavard. Church History XXVI(1957), 275-288을 참조하라. J. Bohatec, Bud und Calvin, pp. 128ff를 또한 참조하라. 여기에서는 칼빈이 염두에 두고 있는 최대의 대적자들을 Barth와 Niesel이 빠뜨렸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대적자들 가운데는 Cochlaeus와 서신을 교환하였던 Bud가 포함된다. Bohatec은 Bud가 Cardinal Sadoleto와 Avranches의 감독 Robert Cenau와 함게 1534년 10월 18일의 플라카드 사건(Placard incident)이후에 왕을 선동하여 그로 하여금 복음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이 되게 하였음을 보여준다.

127) "Postliminii iure"이 말은 소유를 확실히 하기 위해 재산이나 권리의 회복에 대하여 사용하는 법률 용어이다. Postliminium의 문자적 의미는 "문지방 뒤에", 즉, 보호를 뜻한다.

128) Augustine. John's Gospel xiii. 17(MPL 35. 1501; tr. NPNF VII. 93). 어거스틴은 여기서 바로왕의 마술사들을 인용하고 있다(출 7:12).

129) 본래의 주석에서 지시된 대로 Jerome의 글에는 나오지 않고 Isidore of Seville(d. 636)의 글에 나온다. De ortu et obitu patrum xxxiii. 74(MPL 83. 143).

130) 교부 문헌에 대한 칼빈의 구사력은 그가 이 글을 쓸 때인 1535년 이미 잘 훈련되어 있었다. 이 글에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는 저작까지도 언급되어 있다. 1536년 10월 5일의 로잔느에서, 칼빈은 "고대의 거룩한 박사들"(the holy doctors of antiquity)의 성찬론이 Tertullian과 Cyprian, Chrysostom, Augustine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칼빈 자신과 그의 동료들이 그들을 거부하였다는 비난에 답변하였다(참조, LCC XXII. 38ff).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서 교부들의 권위있는 지위를 인정하였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교부들의 오류상과 상호 다양성이라는 제한과 그들보다 위에 있는 성경권위라는 제한이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그들은 157개의 주제들에 대한 교부들의 서로 다른 견해들이 소개되어 있는 Peter Abailard(1142년 사망)의 유명한 Sic et Non(V. Cousin, Ouvrages indits d'Ablard, pp. 1-169)과 비교해 보도록 유혹한다. 칼빈은 Abailard에게 도움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칼빈은 역시 고대 학자들의 개인적 견해를 지적하였는데 그 목적은 고대 학자들 각자의 차이점 보다는 중세기 당시의 옹호자들과의 차이점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Alfonsus de Castro는 Cyprian, Ambrose, Chrysostom, Jerome, Augustine, Gelasius, Gregory, 그리고 Bede를 인용하면서 이들을 루터의 견해와 반대된다고 말하고, 수사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Nam si Lutherus ait, Cyprianus negat; Lutherus ait, Hieronymus abnuit;Lutherus ait, Augustinus contradicit; Lutherus ait, Ambrosius obstat." Adversus omnes haereses I. vii(1543. ed, fo. 13 F. G). 칼빈은 여기서도 보통 때와 같이 루터나 그 반대자들의 이름을 듣지는 않았으나 논쟁에 익숙해 있음을 보여준다.

131) Cassiodorus, De institutione divinarum literarum i(MPL. 70, 1112).

132) Gratian, Decretum II. xxiv. 3. 33(Friedberg I. 999; MPL 187. 1508).

133) 아미다의 감독 Acacius는 포로로 잡힌 페르시아인들을 위해 양식을 구하려고 교회의 금그릇과 은그릇을 녹이려 할 때에 그의 아래 성직자들에게 위와 같이 말하였다.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vii. 21(MPG 67. 781-784; tr. NPNF 2 ser; II 164). 칼빈은 여기에 나오는 자료를 Cassiodorus(583년 사망)과 편집한 Tripartite History에서 얻었다. Histioria tripartita(XI. 16)에 있는 이 문구는 MPL 69. 1198; CSEL 71. 651f에 나온다.

134) Ambrose, De officiis clericorum, ii. 28(MPL 16, 140; tr. On the Duties of the Clergy NPNF 2 ser. X. 64).

135) Cyprus의 Trimithus 주교인 Spyridion에 대한 Sozomen이 자기 책에 기록한 Ecclesiastical History i. 11; Cassiodorus, Historia tripartita I. 10(MPL 69. 895; tr. NPNF 2 ser II. 247).

136) 이 말은 분명히 이집트의 Arsino 근처에 있던 수도원 원장이었던 Serapion에 관한 언급이다. 그는 수사들에게 일하여 자기 먹을 것을 벌어들이라고 요구했다. Sozomen, op. cit., vi. 28; Cassiodorus, Historia tripartita VIII. i(MPL 69. 1103; tr. NPNF 2 ser II. 365).

137) Augustine, On the Work of Monks xiv40. 560-564; tr. NPNF III. 511-513).

138) 제롬이 그의 Letters li. 9에서 번역한 "Epiphanius to John of Jerusalem"(CSEL 54. 411; tr. NPNF 2 ser. VI. 89). Cyprus의 Salamis 감독이었던 Epiphanius는 Anablatha 교회에서 그가 형상이 그려진 커텐을 찢어버리고 평범한 것으로 대치했다고 말했다. 그는 예배당 안에 있는 형상들은 "우리의 종교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A. D. 394). 참조, I. xi 11, 16; I. xii. 2.

139) 스페인에서 개최된 Elvira 회의(Illiberitanum), A. D. 305년경, 교회법 xxxvi; "교회 안에 형상(picturas)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예배와 숭배의 대상을 벽에 그려서는 안 된다." HefeleI. 240; Mansi II. 264.

140) Ambrose, De Abraham I. ix. 80(MPL 14. 472).

141) "Et tamen esse non desinit substantia vel natura panis et vini" Gelasius, De duabus naturis in Christo adversus Eutychem et Nestorium, Tract. iii. 14(Epistolae Romanorum Pontificum, ed. A. Thiel, I 541).

142) 1215년에 개최된 제 4차 Lateran 회의의 교회법은 제안의 성례전에서 떡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살로,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된다고 선언한다(Mansi XXII. 954; Hefele-Leclercq V. 1325; tr. 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s p. 338).

143) Chrysostom, Commentary on Ephesians, ch. 1, hom. iii. 4, 5(MPG 62.28-30; tr. NPNF XIII. 63-65); Gratian, Decretum(De consecratione) III. ii. 18(Friedberg I. 1320; MPL 187. 1759)에 인용된 바 있는 Calixtus.

144) 분명치는 않으나 교황 Gelasius의 것으로 간주되고 Gratian(Decretum III. ii. 12; Friedberg I. 1318; MPL 59. 141; 187. 1736)에서 발견된 구절에서 성례를 받는 사람들은 떡과 포도주를 함께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둘 다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령받는다. "aut integra sacramenta percipiant, aut ad integris arceantur" 평신도들에게는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으로 인해 성경의 분파, 특히 후스파(Hussites)의 항의가 일어났다.

145) Cyprian, Letters 1vii. 2(CSEL 3. ii. 651f.; tr. ANF [letter 1iii. 2] V. 337).

146) 콘스탄스 회의, 제 13소회(1415). 두 종류의 성찬을 정의했다. 이것은 Martin V의 교서 In eminentis(1418)에 의해 확증되었다(Texts in Mansi XXVII. 727f., 1215, 1219).

147) Augustine, De peccatorum meritis et remissione et de baptismo parvulorum II xxxvi. 59(MPL 44. 186; CSEL 60. 128; tr. NPNF V. 67f.): "성경이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 애매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성급한 판단을 피해야 한다." 참조, Augustine, Letters cxl. 37.85(MPL 33.576; tr. FC 20.135).

148)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 18(MPG 1. 472; tr. NPNF 2 ser. I. 235 ff.)에 인용된 Apollonius.

149) Gratian, Decretum III. 1 iii. 9(MPL 187. 1734; Friedberg I. 1354f.).

150) Sozomen(Ecclesiastical History i. 23)은 완전한 금욕주의자인 고해신부 Paphnutius가 여기에 나오는 선언에 의해 성직자 독신제의 필요성을 반대함으로써 니케아 회의(325)의 결정을 좌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51) 성직자 독신 생활법의 발전에 대해서는, H. Leclercq의 부록 "La Legislation conciliaire relatif au clibat ecclsiastique." Histoire des conciles II 1321-1348; Schroeder, op. cit., pp. 105, 107, 192f.; H. C. Lea, History of Sacerdotal Celibacy.

152) Cyprian, Letters lxiii. 14(CSEL 3. ii. 712;tr ANF [letter lxii. 14] V. 362).

153) "Non igitur debet ecclesia se christo praeponere" Augustine, Contra Cresconium Grammaticum Donatistam ii. 21(MPL 43. 482; CSEL 52. 385).

154) John Eck(Enchiridion [1526], ch. i. [1541, fo. 76]와 그 외 다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이 견해는 Zwingli와 그 동료들에 의해 거듭 거부되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탄생한다"는 반대 면제는 1526년 Ilanz 논쟁에서와 1528년 Bern 논쟁에서 확증되었다. 참조, I. vii. 2, 주 4.

155) Tertullian. De praescriptione haereticorum vii(CCL Tertullianus I. 192; tr. LCC. V. 35f);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I. xxxi(MPL 34, 57; tr. NPNF II. 550; FC 4. 102-103).

156) Cyprian, Letter lxiii. 17(CSEL 3. ii. 715; tr. ANF [letter lxii] V. 363). and lxxiii. 13(CSEL 3. ii. 787; tr. ANF [letter lxxii] V. 382).

157) 참조. IV. i. 17. 종교개혁 신학은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가 이 세상에서 불멸적이고 영속적이라는 교회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왔다. 따라서 Bullinger(Fifth Decade[1551], Sermon 1)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하나님의 공회는 대대로 우리와 함께 있어 왔고…세상 끝까지 지상에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LCC XXIV. 293). 참조, Second Helvetic Confession XVII. i. "Semper fuisse, nunc esse, et ad finem usque seculi futuram esse ecclesiam"(Schaff, Creeds III. 271); J. H. Heidegger;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계속 존속하도록 되어 있다."(Medulla theologiae Christianae[1696] XXVI. 11); Westminster Confession XXV.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의 교회가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또한 Heppe RD, p. 664; J. T. McNeill, "The Church in Sixteenth-Century Reformed Theology", Journal of Religion XXII(1942), 256f을 보라.

158) Eck(Enchiridion[1526], ch, i)는 루터파 신도에게 모든 신도의 회중인 교회는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들이 결정하는 것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참조,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s I. vi(1543년판, fo, 9K-10E).

159) 참조, Augsburg Confession II. vii(Schaff, Creeds III. 60)와 본서 IV. i. 7.

160) 참조. IV. i. 2와 Second Helvetic Confession XVII. 15(Schaff. Creeds III. 276).

161) "Male enim vos parietum amor cepit." Hilary of Poitiers, Against the Arians or Auxentius of Milan xii(MPL 10. 616).

162) 주교가 쓰는 주교관의 튀어 나온 부분은 뿔이라 불렸다.

163) 여기에서 언급된 사실들은 다음의 사실들이 포함된다.: 교황 Eugenius IV는 1439년 6월 25일에 열린 Basel 회의에서 폐위되었다. 같은 해 11월 5일에, 전에 금욕 생활을 채택한 Savoy의 공작 Amadeus VIII가 선출되었고, 다음 해 1월 1일에 Felix V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Engenius는 새로운 황제 Frederick III.(1440-1493)의 지지를 얻어, 1449년 4월 7일에 Felix가 폐위되자, Sabina의 추기경이요 Savoy의 교구장이 되었다.: L. Pastor, History of the Popes from the End of the Middle Ages(tr. F. J Antrobus) I. 328f.; M. Creighton, History of the Popes from the Great Schism to the Sack of Rome III. 20ff., 109f.; Cambridge Medieval History VIII. 40 f.

164) Eck, Enchiridion(1526), ch. ii, ad finem. 마태복음 23장 3절을 인용하여 성직자들은 존경할 것을 권고함.

165) 앗수르 왕 Ashurbanipal(668-626 B. C.)이란 이름에 대한 헬라어 형태, 전설에 의하면(사실과는 반대), 그는 게으름과 방종 가운데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절망에 빠져 자기 집에서 분신자살을 한다.

166) 이사야 6장 10절을 주석과 R. S. Wallace의 "말씀 전파를 통한 그리스도 나라의 필연적 진보에 대한 이러한 암시적 반응"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라.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 92ff를 보라.

167) 전통적 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된 용어.

168) 이것은 1534-1535년의 Mnster 사건을 가리킨다.

169) 여기에 기록된 날짜는 이중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처음에 A. Lefranc가 지적한 대로, 1535년 8월 23일 이어야 한다. Beveridge는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의 1845년 번역판 I. xi f. 를 보라. 1536년 3월에 발간한 칼빈의 제 1판은 왕에게 올리는 헌사 끝머리에 연도의 표시 없이 "X. Calendas Septembres"(즉 8월 23일)이라는 날짜를 제시한다. 앞에 위치한 8월은 분명히 사실이며, 실로 1541년 1545년 프랑스어판에는 "vingttroysiesme D' aoust mil cinq cent trente cinq"라도 되어 있다. 그러나 8월 1일은 1539년 라틴판 서문(헌사가 아니라)의 날짜였고, 그 후 라틴판은 이 날짜를 헌사에 옮겨 붙였다. 동시에 1536년이라는 연도는 분명히 1536년판 끝머리에 제시된 출판 날짜로부터 부주의하게 삽입되었을 것이다. A. Lefranc,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estienne…1541, Introduction, p. 4:OS I. 283; III. 30; Benoit, Institution I. 49.

170) 제목에 하나님의 "존재"라는 단어 대신에 "지식"(knowledge)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칼빈 신학의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계시가 중심됨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똑같이 삼위일체와 창조와 섭리의 교리들을 포함하는 "창조주"란 단어도 하나님의 존재보다는 오히려 그의 계시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는 중세와 근대 칼빈주의자들의 스콜라적 신론(神論)에서 훨씬 현저하게 강조된다. I, II권의 제목들과는 다르게, III권에 이르러서야 칼빈의 인식론은 충분하게 나타난다. III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에 대한 것이다. 특히 믿음 안에서 지식이란 의미에 대해서는 III, ii를 참조하라. "지식"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는, 여기에서 cognitio이고 제1장의 제목에는 notitia이다. 칼빈은 이 두 단어를 함께 사용하였으며, 그의 불어 판(1541)에는 모두 cognoissance로 번역하였다. 그가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지, 칼빈에게 있어서 "지식"은 결코 단순하고 순수한 객관적 지식은 아니다. 참조, III. ii. 14. 그는 여기서 종교적 관점에서 본 지식의 뜻을 가장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칼빈의 "지식"은 현대 용어로 "실존적 이해"라는 말에 가장 알맞는 뜻이다. 앞서 말한 두 단에 외에도 칼빈은 "지식"을 뜻하는 단어들로 agnitio(인지, recognition), in-telligential(지각, perception) 그리고 scientia(전문지식, expert knowledge) 등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B. B. Warfield의 "Calvin and Calvinism"(pp. 29-130)와 P. Lobstein의 "La Connaissance religieuse d'aprs Calvin", Revue de thologi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XLII(1909)pp. 53-110에서 취급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가장 중요한 연구들은 창조주에 관한 지식과 구속주에 관한 지식(본 권 상권 2부의 제목을 참조하라.)을 연관시키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학자와 저서는 다음과 같다. T. H. L. Parker,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A Study Calvin's Theology, E. A. Dowey, Jr.,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ch. 2.

171) 1539-1554년 사이에 출판된,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와 "인간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1559년 판에서 그는 서로의 밀접한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 제 1 장을 분리시키고, 제목과 내용 면에서 "양자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가"를 강조했다. 그리고 이전의 제 2 장은 더욱 보완되어 마침내는 제 2 권 각 장의 서두가 되었다. I. xv. 1; II. i. 1; II. viii. 1의 첫 단어들이 의미하고 있는 것들을 주의하여 보라.

172) 이 단어는 세 번이나 교정된 것으로 강요의 매번 출판되는 초두에 나온다. 1560년의 불어 판은 다음과 같이 건전한 지식의 양면의 연합 관계를 보다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또한 각자 자신을 안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말은 칼빈 신학의 한계를 정하여 주고, 이후의 모든 말을 좌우하며, II권의 초두와 I. xv. 1과 II. viii. 1과 같은 중요한 부분에서 되풀이되고 있다.(참조, Doumergue, Calvin IV. p. 245ff.; J. Kstlin, "Calvin's Institutio nach Form und Inhalt", Theologische Studien und Kritiken <1868>, p. 55; Lobstein, op. cit., p. 63.) 여기서 언급된 칼빈의 기본 개념은 Alexandria의 Clement가 쓴 Instructor iii, 1(MPG 8. 555f.; tr. ANF II. 271: "인간이 자신을 알게 되면 하나님도 알게 된다.")에서 발견되며, Augustine의 글에서도 가끔 나타난다. Augustine 의 Soliloquies I. ii. 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그것뿐인가?" "그 외에는 없다." 그리고 II. i. 1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다.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알게 하시며 또한 당신도 알게 하옵소서"(MPL 32. 872, 886; tr. LCC VI. 26, 41). 참조, Aquinas: "교회의 교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만 취급한다. 그리고 피조물의 경우는 그들이 그들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을 때에 한하여 다룬다." Summa Theol. I. i. 3(tr. LCC XI. 38f.). 칼빈도 창세기 주석(영어판 p. 60)의 서론 부분인 "개요"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피조물에 관한 지식사이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그 순위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 구절은 다음의 것들과 비교될 수도 있다. William Farel's Sommaire de la foi(1525), i, ii, Calvin,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 i-iv(OS I, 378-381; tr., P. T.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1537>, pp. 17-21).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1630년 4월 15일에 Descartes가 Marin Mersenne 신부에게 보낸 중요한 편지 가운데서, 여기 칼빈의 말과 필적할 만한 말을 한 점이다. 그는 "인간 이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사용하도록 주셨으므로 인간은 그것을 활용하여 하나님과 자신을 알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Oeuvres de Descartes; C. Adam과 P. Tannery, I. p. 144.). 또한 그는 Discourse on Method(1637)에서 칼빈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영혼의 존재를 논증하려고" 하였으며, 이 문제를 그의 Meditations in Prime Philosophy(1641)에서도 다루었다(참조, Meditations iii, v과 vi.).George Berkeley는 그의 저서 Treatise on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1710)에서 "하나님과 영혼만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173) 겸손과 자기 지식의 밀접한 관계성은 칼빈에게 있어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이다. 참조, II. ii. 10-11; II xvi, 1; III. ii. 23; III. xii. 5, 6; IV. xvii. 40. 겸손이 없는 자기 지식은 교만이 되며 모든 잘못의 근본이다. I. v. 4; II. i. 1-3.

174) 참조. I. v. 3, 각주 11.

175) "Sui notitiam."우리 자신들에 대한 지식에는 전 인류와 전 피조물이(인간은 소우주이다. I. v. 3) 다 포함될 수 있다. 따라서 I. xiv 과 II. i-v과 함께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176) 칼빈은 "본성", "타고난", "본래"라는 말을 두 가지의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⑴ "본성은 악이 전혀 없는 창조될 때의 완전 상태를 의미한다.(악마가 창조될 때는 완전하였던 것까지도 포함함.) 예, I. xiv. 3,16. ⑵ "본성"은 여기서 사용된 바와 같이 완전 상태에서 타락한 인간과 천사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II. i, 10, 11에서 전자와 분명하게 구별되고 있다. II. i, 11의 초두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란히 사용하고 있다. 이 구별은 하나님의 창조와 죄에 대한 관계와 칼빈이 전적 부패 교리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 그리하여 "본성"의 이 같은 이중 사용이 이해되면 칼빈이 말하는 "본성"의 뜻은 그때그때 문맥을 통해서 쉽게 결정되는 것이다.

177) "Horror ille et stupor."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 때에 갖게 되는 이와 같은 근본 요소는 Rudolf Otto 가 Das Heilige(tr. J. W. Harvey, The ldea of the Holy)에서mysterium tremendum 이라고 칭한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참조, 다음에 나오는 I. ii. 2와 I. iii. 2를 보라. 이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은 악한 자들에게는 절대적인 공포이다.

178) pietas,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복합된 것으로서,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의 전제 조건임을 칼빈은 즐겨 강조한다. 참조, I. iv. 4. 여기에 나오는 pietas의 내용은 칼빈이 1537년에 말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즉, "참된 경건의 요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를 주님으로 참되게 경외하여, 그의 공의를 용납하고, 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는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Instruction in Faith(1537), tr. P. T. Fuhrmann, pp. 18f.(원문. OSⅠ.379). Erasmus, John Sturm, Melanchthon, Cordier에 관하여 "Pietas Literata"를 검토하고자 하면 다음을 참고할 것. P. R. Bolgar, The Classical Heritage and Its Beneficiaries, pp. 329-356.(본서에서는 pietas를 대개 "경건"으로 번역하였음.)

179) "Si integer stetisset Adam." 칼빈에게 있어서 "자연 신학"을 논할 때 locus classicus인 I. ii-v의 지배적 사상이 이 구절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는, "아담이 의로운 존재로 남아 있기만 했더라면"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건전한 자연 신학의 기초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러한 건전한 자연 신학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성경만이 창조주를 알고 창조에 나타난 그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인 것이다(I. vi. ff). 참조. 서론, pp. Iiii. ff. 또한 칼빈은 이와 비슷한 말을 1534년에 쓴 신약의 서문(Olivtan's French Bible 출판, 1535)에서 말하고 있다(CR IX. 791; LCC XXIII. 58).

180) "Duplex…cognitio." 1559년 판 강요에 첨가된 이 "이중" 지식의 구별은 완성판 강요의 초석이다. 칼빈은 일련의 방법론을 서술함에 있어서 이 점을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1559년 판에서 이 서술 과정을 분명히 하였다. 참조, I. vi. 1, 2; x. 1; xiii. 9, 11, 23, 24; xiv. 20, 21; II. vi. 1. 그러므로 제 I 권 5장 이하에서는 성경의 특별 계시가 나오지만, 구속주에 관한 지식은 I 권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181) 소위 "첫 번째" 지식은 제 I 권 전체에 걸쳐서 다루어지고 있고, "두번째" 지식은 II권에서 IV권에 걸쳐 광범위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II권 6장부터 "두 번째" 지식이 다루어진다. 그런데 II권 6장은 1559년 판에 처음 나오는 장으로서 이중 지식 중 두 번째 요소로 넘어가는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래서 II권 4장의 죄에 관한 교리는 두 권 사이에 나오고 구속론보다 앞서 다루어짐으로써 속죄를 받아야 할 계기를 마련해 준다.

182) "Virtutum Dei Sensus."

183) 참조. I. x. 2; III. ii. 6. "우리를 향한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칼빈은 에스겔 1:26(CR XL. 57)에 대한 In Praelectiones in Ezechielem과 다른 곳에서 신관을 사색적으로 정교하게 다루는 것을 비판했다. 여기서는 스콜라주의자들을 언급한 것이지만, 1552년 1월 Bullinger에게 보낸 편지인 "familiariter inter nos"에서 Calvin은 심지어 Zwingli가 De Providentia(CR XIV. 253)라는 그의 저서에 "Knotted Paradoxes"란 말을 사용했다고 하여 그를 비난하고 있다.

184) Epicurus(342-270 B.C.)의 많은 저작물은 오직 단편들로만 현존한다. 따라서 칼빈이 그를 알게 된 것은 주로 Cicero의 De finibus와 De natura deorum을 통해서 인듯하다 De natura deorum의 제 1 권에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신(神) 개념에 대한 해석과 비평이 주로 취급되어져 있다. Cicero의 대화에서 얻은 인상을 요약한 것이, 즉, 본문의 글이다. 아카데미 회원인 Cotta 는 Epicurus가 사실상 신들을 폐기하였다고 통박하면서 우리와는 상관없는 안일하고 냉랭한 신들을 주장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의 신 개념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성경 신학자인 칼빈이 이와 같은 주장에 동조하지 않을 리 없다. 참조. Cicero, Nature of the Gods I. xlii, p. 117; I. xliii. 120ff.(LCL판, pp. 112 ff.); Calvin,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 i, ii(OS I. 378f.; tr.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pp. 17-19); 참조. I. iv. 2; I. v. 4, 12를 보라. Cicero 연구가로는, 파리의 헬라어 학자인 William Bud가 있는데, 그는 칼빈과 잘 아는 사이였다. J. Bohatec, Bud und Calvin, p. 74를 보라.

185) 두려움과 함께하는 믿음에 관하여는 Melanchthon을 참고할 것. Loci communes(1521), ed. H. Enge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ed. R. Stupperich, II. i. 119ff.(시리즈물임); tr. C. L. Hill(Th. Kolde의 1910년도 판에서),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p. 211ff.

186) "Hominum mentibus naturaliter…inditam."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3장)는 죄로 말미암아 소멸되었다(4장). 마찬가지로, 자연계에 있는 하나님의 표적과 징조들(insignia, specimina)을 통해(v. 14) "밖에서 오는" 계시도 소멸되었다. 그래서, 칼빈은 iii-v장에서 인간론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I. xv장에서는 인간 창조를, II. i-v장에서는 죄로 인한 파멸을 취급하고 있다.

187) "Divinitatis sensum." 이 말과 "종교의 씨앗"은(참조, I. iv. 1) 주로 하나님에 관한 성스러운 지각을 뜻하며, 하나님께 대한 도덕적 반응인 양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참조, I. i. 3과 요한복음 주석 1:5, 9. 칼빈은 요한복음 1:5을 주석하기를, "부패한 본성에 아직도 남아 있는 빛에는 두 가지 주요한 요소가 있으므로, 첫째는 모든 인간에게 심겨진 종교의 씨앗이며, 둘째는 그들의 양심 가운데 새겨진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다"라고 했다.

188) 참조.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II. x(LCL판, pp. 172ff.).

189) 이교도(ethnicus)는 Cicero를 가리킨다. 모든 사람들이 신에 대한 원래 타고난 감각과 암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칼빈의 견해는 Cicero의 대화, On the Nature of the Gods에 나오는 인물들의 전제와 일치하고 있다. 그 인물들 중의 하나인 에피큐로스 학파의 Velleius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선입관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는 민족이나 종족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Nature of the Gods, I. xvi. 43(A. S. Pease, M. Tulii Ciceronis De natura deorum, pp. 294f,; LCL판, pp. 44f.).

190) 이 부분과 다음 항에서는 계속해서 Cicero의 Nature of the Gods의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 책은 에피큐로스 학파의 신 개념을 반박하고 있다. 에피큐로스 학파는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미신을 피하고 사람들을 정부에 복종시킬 목적으로 종교를 고안해 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다. 칼빈은 De scandalis(1550)에서 당대의 몇몇 사람의 이름을 들어 무신론자로 반박했다(CR VIII. 44ff., 주 5; OS II. 200f.). J. Bohatec은, Bud und Calvin, pp. 149-240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특별히 인용하고 있다. Pierre Brunel, Agrippa von Nettesheim, tienne Dolet, Simon Villanovanus, Bonaventure des Priers, Franois Rabelais, Antonius Goveanus, Jacques Gruet.

191) 로마 황제임(A.D. 37-41). Tiberius Caesar의 종손(從孫)이며 후계자였음. Suetonius의 말에 의하면, 이 타락한 황제는 신들을 무시했으나 천둥만 치면 무서워 벌벌 떨면서 침대 밑으로 숨었다고 한다(Lives of the Caesars, IV. Ii; LCL Suetonius I. 482.). 참조, 칼빈의 공관복음 주석, 마태복음 26:69-75(tr. LCC XXIII. 322).

192) Melos의 Diagoras(무신론자로서 Socrates와 동시대 인물)와 Cyrene의 Theodore 그리고 궤변론자 Protagoras를 Cicero는 대표적인 무신론자들로 취급했다.(이 세 사람은 모두 불경하다는 이유로 Athens에 추방당함.)(Nature of the Gods, I. i. 2; I. xxiii. 63; LCL판, pp. 4f., 61f.)

193) Syracuse의 폭군 Dionysius(B.C.405-367). 그의 신성 모독과 약탈 행위는 Cicero의 Nature of the Gods III. xxxiv. 83(LCL판, pp. 368.f.)에 언급되어 있다. 참조, Comm. Seneca On Clemency, I. xii(CR V. 92)에 있는 Calvin의 인용문.

194) "Sardonius risus" 칼빈이 이 말을 인용할 때 그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Vergil의 속담을 회상한 듯 하다. "Sardonius amarior…herbis",(Sardonian <Sardinian>의 약초보다 더 쓰다).(Eclogues vii. 41; LCL Vergil I. 51.)

195) 칼빈은 Cicero의 Nature of the Gods에 나오는 아카데미 회원인 Cotta와는 의견을 달리한다. Cotta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에 대하여 신앙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강화되고 인간의 시대와 세대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언급했다.(Nature of the Gods II. ii. 5; LCL판, pp. 126ff.)

196) 참조. I. iv. 1.

197) Plato, Theaetetus 176. 인간이 악을 피하고 참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같이 의롭고 거룩하고 지혜로워야 한다."(LCL Plato II. 128f.). 참조, Phaedo 107 C(LCL Plato I. 386-371).

198) 확실히 Plutarch의 대화, Bruta animalia ratione uti에서 인용한 글이다. 그 대화에는, Circe가 짐승으로 만든 Gryllus가 타락한 인간들의 행동보다 동물의 행동이 우월하다는 예를 지적하고 있다(7장).(LCL plutarh, Moralia XII. 516ff.)

199) 참조. II. ii. 12, 17, 거기에 보면, "이성"은 인간을 짐승과 구별 지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0) 참조. I. iii. 1, 각주 2.

201) 칼빈은 1538년에 발행된 라틴 원리 문답에서도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CR V. 323-324).

202) 참조. I. ii. 2, 각주 7.

203) Cicero, Nature of the Gods, I. xx. 54; I. xxx. 85.; I. xliv. 123(LCL판, pp, 52ff., 82f., 118f.).

204) 참조. I. xi-xii, IV, viii, 3,4,8,9,11,13; IV, ix. 8; IV. x. 8, 16-18. 우상 숭배를 금하는 둘째 계명은 이교도와 카톨릭 교회를 비난하는 칼빈의 일관된 주제이다.

205) 칼빈은 여기서 Lactantius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고 그의 Divine Institutes I. ii. v, vi, xx과 IV. v에 있는 그의 교훈들을 요약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진리"라는 시금석을 이교 신앙에 일관하여 적용시키고 있다.(MPL 6. 120f., 129ff., 456ff.; tr. ANF VII, 11, 13ff., 32ff., 104f.).

206) "Timorem Primum, fecisse in orbe deos." 참조, Statius, Thebaid III. 661: "Primus in orbe deos fecit timor"(LCL Statius I. 500f.)

207) "Pietas, ex qua demum religio nascitur." 서론, pp. li f.를 볼 것. Calvin은 이 견해를 여러 번 강조해서 언급하고 있다. 참조. I. ii. 1; I. iv. 1; I. ix, 제목; II. vi. 4; III. iii. 16; IV. i. 5; IV. 1.9; IV. 1. 12; IV. xx. 9, 10, 13, 15; 예레미야 주석 10:25; Instruction in Faith(tr. Fuhrmann, P. 19). 참조. Cicero, Pro. Plancio xii. 29: "Pietas fundamentum est omnium virtutum"(LCL판, p. 442).

208) 참조. Aquinas가 한 말로 자주 인용됨.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오직 하나님을 명상하는데 있다"(Contra gentes iii. 37<tr. A.C. Pegis, Basic Writings of St. Thomas Aquinas ii. 60>); Augustine, Confessions X, xx. 29: "내가 당신을 찾을 때 나는 행복한 삶을 찾나이다"(MPL 32. 791; tr. LCC X. 219).

209) 칼빈은 모든 계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축복된 삶이라고 주장한다(참조. I. x. 2).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하여 창조에 나타난 이 계시의 효과는 인간의 죄를 더욱 심화시킨다. 참조. I. vi. 1, I. v. 14-15; II. ii. 23.

210) 참조. I. iii. 1; I. xiii, 21; 1538년의 요리 문답에 보면 하나님의 본성은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의 이해력이 미치지 못하는 먼 곳에 감추어져 있다.(CR V. 324)라고 했고, 1542년 판에 보면, "우리의 이해력은 그의 본체를 파악할 수 없다"라고 했다(CR VI 16).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서 그 자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적응시킨다." 참조. 창 3:8 주석, 고전 2:7 주석.

211)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을 시적으로 표현한 글은, 칼빈이 1534년에 쓴 후 1535년 6월에 Olivtan's French Bible에서 출판한 그의 신약 서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CR IX. 793; tr. LCC XXIII. 59f.). 참조. J.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vinism, P. 232. 이러한 글들은 칼빈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지만, 그의 신학에 있어서도 역시 필요한 것이다. 자연인은 "영광으로 가득 찬 극장 안에 있으면 눈이 어두워서" 자연의 증거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어 내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시편 145편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묵상하도록 되어 있다.(I. v. 8, 9; I. vi. 2; II. vi. 1). 칼빈의 이러한 글은 L. Wencelius의 L'Esthtique de Calvin, 1장, 2장에 많이 인용되어 있다.

212) 참조. Cicero, Nature of the Gods II. ii. 4. 여기서 Cicero는 하늘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이 최고의 지성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한다(LCL판, pp. 124f.). 시편 19:4 주석에서 칼빈은 "하늘의 광채가 배움의 전당의 교사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213) "Divinae sapientiae arcana." 아마도 Seneca가 Lucilius에게 보낸 절박한 권면의 편지 가운데 있는 말을 생각해 낸 것 같다. 그는 고상한 학문에 전념하면 자연의 비밀(natura arcana)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Epistulae morales cii. 28; LCL Seneca III. 184). 칼빈도 일반 학문은 성경에 있는 신적 지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214) 칼빈은 인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많이 언급한다. 참조. 시편 139:15 주석: "손가락의 손톱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인체의 구조에 나타난 그 기묘한 솜씨." 칼빈은 이 논제를 되돌려서 부활을 논증하기도 한다. 참조, III. xxv. 7, I. xv. 3; Wencelius, op, cit., pp. 37f.; Cicero, Nature of the Gods II. lvi. 140(LCL판, pp. 256ff.).

215) 버가모의 Claudius Galenus(ca. 131-200)는 고대 헬라의 의학 지식의 최고봉으로서 철학자요 의사요 해부학자였다. 여기에 인용된 것은, 인체의 각 부분의 기능에 관한 그의 periv crava" morivwn(De usu partium)에서 인용한 것이다. Galen의 업적에 대한 설명은 L. Thorndike의 A History of Magic and Experimental Science I. 117-181에 기록되어 있다.

216) "microvcosmon." 대우주 또는 전우주와 대조되며 또한 그와 유사한 소우주인 인간에 대한 Aristotle의 사상은 그의 Physics viii. 2에 나타나 있다. "자, 이것이 동물에게서 일어날 수 있다면 전우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 아닌가? 또한 소우주 안에서(evn micrw/' covsmw/') 일어날 수 있다면, 역시 대우주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tr. R. McKeon, Basic Works of Aristotle, p. 359; 참조. LCL Aristotle, Physics, II. 286f.). 이 개념은 후대 많은 작가들에게서도 반복되며, 르네상스 이후에는 자주 사용되어 흔한 상투어가 되고 말았다. 참고. G. P. Conger, Theories of Macrocosms and Microcosms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pp. 59-72.

217) 이 항과 다음 항에서. 참조. 행 17:26-29 주석.

218) "In se descendere." 칼빈이 자기 성찰을 위해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인간은 자기 성찰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면하게 되고 동시에 자신의 죄악성을 발견하게 된다. 참고. I. i. 2; I. v. 10; II. viii. 3; III. xx. 6; IV. xvii. 40; Reply to Sadoleto(tr. LCC XXIII. 251). 참조. Augustine, Confessions VII. x: "나는 당신의 인도함을 받아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갔나이다"(MPL 32, 786; tr. LCC VII. 146).

219) Aratus는 Cilicia의 Soli 사람으로 기원전 270년경에 명성을 떨친 헬라의 시인이며 천문학자였다. 바울이 사도행전 17:28에 인용한 것은 그의 시 Phaenomena이다. 그의 작품은 Cicero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참조. Cicero, Nature of the Gods, II. xli. 104f.; II. lxiii. 159(LCL판, pp. 222f., 276f.). 참조. I. xv. 5.

220) Cicero, Nature of the Gods II. ii. 4, Ennius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 것임. "Father of Gods and men"(신들과 사람들의 아버지, LCL판, PP. 124-125).

221) 불어 판은 "Cyclopes"를 "des geans ou hommes sauvages"로 대체했다. 헬라 신화에서 Zeus는 Titan과 싸울 때 Cyclopes가 제공해 준 무기로 인해 도움을 받았었다. 그런데 Cyclopes는 Zeus가 해방시켜준 보기 흉한 거인이었다.

222) 참조. horace, Epistles, I. iv. 15:"a hog from Epicurus' herd"(에피큐로스의 떼로부터 온 돼지 한 마리, LCL판, Satires, Epistles, and Ars Poetica, PP. 276f.).

223) 참조. Aristoltle, De anima, II. 1. Aristotle은 육체와 영혼의 밀접한 상호 관계를 논하고 나서 영혼이 "그 안에 잠재적 생명을 지니고 있는 육체의 현존의 첫 단계"라고 하며, "영혼은 육체에서 분리할 수 없다"라고 계속하여 주장했다.(R. Mckeon, Basic Works of Aristotle, PP. 555f.; LCL Aristotle, On the soul, pp. 68-73).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 분명히 이 두 번째 주장을 부인한다.

224) 아리스토텔레스의 불신앙에 관한 이 구절은 아마도 Pietro pomponazzi의 De immortalitate animae(1516)에서 인용한 듯하다. 그 책에서는 영혼 불멸은 철학적으로는 변증할 수 없으며 다만 계시에 근거해서만 인정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책은 J. H. Randall에 의해 The Renaissance Philosophy of Man, ed. E. Cassirer, P. O. Kristeller, and J. H. Randall, PP. 257-381에서 소개되고 번역되었다. 참조. OS III. 48f.

225) 여기에서 나온 전체 문장은 Cicero의 Tusculan Disputations, I. xxiv-xxvii(LCL판, pp 64-79)에 나온 말로서 칼빈이 이를 조금 바꾸었을 뿐이다.

226) Vergil, Aeneid VI. 724-730(번역, H.R. Fairclough, LCL Vergil I. 556f.).

227) Vergil, Georgics IV, 219-227(번역, H.R. Fairclough, LCL Vergil I. 210ff.).

228) Lucretius, De rerum natura, i. 54-79(LCL판, PP. 6f.).

229) 이 말 역시 Lactantius의 말인데 그는 Seneca를 스토아학파의 최고 학자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가 "자연을 하나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Divine Institutes II. ix(CSEL 19. 134; MPL 6. 299; tr. ANF VII. 53). 그러나 Lactantius는 자연과 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오는 혼동을 지적하고 있다. op. cit., III. xxviii(CSEL 19. 264; MPL 6. 438; tr. ANF VII. 97).

230) 칼빈의 전통적인 우주관에 의하면 "물은 원소이기 때문에 순환되어야 하고, 또 물은 공기보다는 무겁고 흙보다는 가벼운 원소이기 때문에 지구의 전 표면에 흐르고 있어야 한다." 창세기 1:6-9 주석. 하나님께서는 창조시에 물들을 나누어 마른땅이 나타나도록 하셨는데, 이제는 그 물들을 모래 제방이 아닌 "영속적 명령"에 의하여 제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 지구에 바닷물이 범람치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뿐이라는 사실이다. 바닷물은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한다." 예레미야 5:22 주석. 참조. 시편 33:7 주석.

231) 참조. I. xiv. 1-2, 20-22.

232) 1559년 판 Institutes에서 칼빈이 첨가한 그의 방법론에 관한 이 설명은,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논쟁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성경 구절들은 그의 논쟁의 필수적 요소들이 아니고 비교적이고 확증적인 것에 불과하다(참조. I. x. 2).

233) 참조. I. xvi-xviii에 하나님의 섭리와 사회생활과의 관계가 주로 다루어지고 있다.

234) 칼빈은 하늘과 땅을 극장(theatrum)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 극장 안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I. vi. 2; I. xiv. 20; II. vi. 1; III. ix. 2; 창세기 1:6 주석, 시편 138:1 주석 등.

235) 참조. I. iv. 1.

236) Calvin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관하여 두뇌와 마음(cerebrum과 cor)을 여기서 구분하고 있는데, 후자를 더 중요시한다. 참조. I. ii. 1; III. ii. 36; III. vi. 4. 그의 교리를 실존적 성격에 관해서는 E.A. Dowey의 The Knowledge fo God in calvin's Theology, PP. 24-28을 보라.

237) Augustine, Psalms, Ps. 144. 6(MPL 37. 1872; tr. LF Psalms, V1. 319).

238) 참조. III. ix.

239) Augustine, City of God I. viii(MPL 41. 20; tr. NPNF II. 5).

240) 참조. I. xvi. 6-9.

241) "Caeca fortunae temeritate." 참조. 본 항에 나오는 "temeraria fortunae voluntate"와 I. xvi. 2; I. xvi. 8; I. xvii. 1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말들을 볼 것. 고대 세계에서 의인화되고 신격화된 "운명의 여신"인 Fortuna는 서구인들의 환심을 얻었고, 르네상스 시기에는 한창 유행되었다. 그래서 우연과 운명의 개념들은 일상생활에 나타난 신적 섭리를 반대하여 크게 유행되었다. 칼빈은 이 부분과 다른 여러 구절에서, 이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제기한 반대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Lactantius, Divine Institutes III. xxviii. 45(CSEL 19. 264; tr. ANF VII. 97); Augustine, e.g., City of God V. ix-xi(MPL 41. 447-450; tr. NPNF II. 90-93); Retractations I. i. 2(MPL 32. 585). 참조. C. N. Cochrane, 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 pp. 478ff.; H. R. Patch, "The Tradition of the Goddess Fortuna", Smith College Studies in Modern Languages III, pp. 204-230; A. Doren, Fortuna im Mittelalter und in der Renaissance, pp. 71-144.

242) plato, Timaeus 33 B(LCL plato VII. 62f.). 참조, Cicero, Nature of the Gods. I. x. 24. 여기서 Velleius는 plato의 구체보다 다른 네 개의 기하학적 도형이 더 낫다고 빈정거리는 말을 했다(LCL판, pp. 26f.).

243) 칼빈의 글에서 자주 나오는 "미궁"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좌절과 혼동의 상징으로 쓰인 것이다. 참조. I. vi. 1; I. vi. 3; I. xiii. 21; III. ii. 2-3; III. vi. 2; III. viii. 1; III. xix. 7; III. xxi. 1; III. xxv. 11; IV. vii. 22. 종교 문학에 있어서 미궁의 개념이 가장 인상깊게 설명된 것은, J. A. Comenius의 The Labyrinth of the World and the Paradise of the Heart(1623)(tr. M. Spinka)이다.

244) 지성인들 사이의 신관에 관한 의견의 대립은 Cicero로 하여금 Nature of the Gods를 쓰게 하였다(참고. I. vi. 14; LCL판, pp. 16f.).

245) Eusebius, praeparatio evangelica III. iv(MPG 21. 171f.); Augustine, City of God VIII. xxiii, xxvii(MPL 41. 247ff., 256: tr. NPNF II. 159f., 165); plutarch, De Iside et Osiride 11(LCL Plutarch, Moralia V. 28-29).

246) 칼빈은 여기서 에피규로스 학자들을 실제적 무신론자로 비난하고 있는 Cicero의 Nature of the Gods의 여러 인용 구절에(예, I. ii. 3; I. xxiii. 63; I. xxx. 85; I. xlii. 117 I. xliii. 121)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Rabelais와 같은 동시대 인물에 대한 은근한 비난도 염두에 두었다. 참조. J. Bohatec, Bud und Calvin, pp. 226ff.

247) 이 일화는 Cicero의 Nature of the Gods I. xxii. 60(LCL판, pp. 58-59)에 있다.

248) 자연 신학(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특별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본 장 12항까지의 주제이다. 모든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은 이상의 모든 말들은 자연 신학에 대한 Calvin의 견해를 보여 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Calvin의 견해는 그의 전 작품에서 일관성 있게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자연 신학의 효용성에 대한 Calvin의 견해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자연 관찰에 있어서의 자연 신학의 역할에 대해서는 해석자들 간에 날카로운 대립이 있다. 참조. I. x. 2-3; K. Barth and E. Brunner, tr. P. Fraenkel, Natural Theology; W. Niesel, The Thelolgy of Calvin, pp. 39ff.; E. A. Dowey, The Knowledge fo God in Calvin's Theology, pp.64ff. Barth는 그의 Gifford Lectures인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Reformation에서 자연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은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예. lectures i, xx.

249) Xenophon, Memorabilia IV. iii. 16(LCL판, pp. 306f.).

250) Cicero는 그의 저서에서 Cotta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곧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견해는 "조상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의견이기 때문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Nature of the Gods III. iv. 9(LCL판, pp. 294-295). Lactantius도 이것을 인용하고 있다. Divine Institutes II. vii(CSEL. 19. 124; MPL 6. 285; tr. ANF. VII. 50).

251)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은 칼빈의 중심 사상이다. 참조. I. v. 1. 2.

252) I. xiv. 1과 창세기 주석 "Argument" 및 다른 곳에서 반복되는 이 직유는, 창조에 나타난 창조주의 계시에 관련된 것으로서, 성경의 역할에 관한 칼빈의 결정적인 견해인 듯하다. 현대 칼빈 연구에서는 이러한 표현과 그 적용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참조. BB. Warfield, Calvin and Calvinism, pp. 260f.; P. Barth, Das Problem der nat rlichen Theologie bei Calvin, G. Gloede, Theologia naturalis bei Calvin; T. H. L. Parker, The Doctrine of the Knowledge of God: A Study in Calvin's Theology; I. v. 12.의 각주 41.

253) 참조. II. i-v.

254) 참조. II. vi, vii, III, 여러 곳. 언약에 관하여는, II. viii. 21; II. x. 1-5, 8; II. xi. 4, 11; III. xvii. 6; III. xxi. 5-7; IV. xiv. 6; IV. xv. 22; IV. xvi. 5, 6, 14; IV. xvii. 20 등을 보라.

255) 참조. II. v. 7; II. xvi. 5-12.

256) 칼빈은 여기서 성경의 기원에 있어서의 영감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의 뜻으로 보아 그는 기계적 축자 영감론이 아닌, 유기적 영감론을 옹호하고 있다. 참조. J. T. McNeill, "The Significance of the Word of God for Calvin", Church History XXVIII(1959), 131-146.

257) 참조. II. vii, viii.

258) "Omnis recta cognitio Dei ab obedientia nascitur." 이 문장을 K. Barth가 인용하여, 교의 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Kirchliche Dogmatik I. i. 17; tr. G. T. Thomson.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I. 19).

259) Augustine, Psalms, ps. 31. ii. 4.(MPL 36. 260; tr. LF Psalms I. 253); Sermons cxli 4:"Melius est in via claudicare quam praeter viam fortiter ambulare"(MPL 38. 778; tr. LF Sermons II. 656f.). 참조. Sermons clxix. 15(MPL 38. 926; tr. LF Sermons II. 870f.).

260) 참조. IV. viii. 성경의 권위와 영감에 대한 문제를 취급함.

261) 7-9장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성령의 위격과(I. xiii. 14-15) 성령의 구속 사역(3권 전체, 특히 1-2장)에 관한 교리들은 내증(內證) 교리와 직접적인 신학적 전후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칼빈은 독자들에게 "다른 곳"(I. vii. 5)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대체로 그대로 묵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성경의 교리를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3권 2장의 인식론적 문맥에서 완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는 Calvin의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참조. Warfield, Calvin and Calvinism, p. 71외 여러 곳; Doumergue, Calvin IV. 68, 247; Dowey, The Knowledge fo God in Calvin's Theology, pp. 87, 157-164, 174.

262) 참조. Bullinger의 De scripturae sacrae authoritate(1538). fo. 4a. 성경 해석에 있어 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Cochlaeus의 De authoritate ecclesiae et scripture(1524)와 De canonicae scripture et cathalicae ecclesiae authoritate, ad Henricum Bullingerium(1543)에서 변호되고 있다. 그의 후기 저서에서(3장) 그는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가 우월하게 주장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4장에서는) 교회는 성경에 관한(circa scripturas) 권위를 가진다고 했다. 또 그러한 권위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참조. John Eck, Enchiridion(1533), ch. i. fo. 4a-6b.

263) 참조. 서론, pp. lxiff. 교회보다 성경이 선행한다고 보는 이 견해는 개혁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루터는 그의 Lectures on the psalms(Werke WA III. 454)에서 "성경은 신적 진리와 교회의 모체이다"라고 했다. 참조. K. Holl, Gesammelte Aufstze zur kirchengeschichte I. Luther, 288ff.; R. E. Davies, The problem of Authority in the Continental Reformers, pp. 41f.;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73ff.

264) 참조. I. vii. 5.

265) Augustine, Contra epistolam Manichaei quam vocant fundamenti V(MPL 42. 176; tr. NPNF IV 131); "나로서는 교회의 권위에 의하여 감동됨이 없이는 복음을 믿을 수 없다." Luther는 그의 소책자 That the Doctrines of Men Are to Be Rejected(1522)에서. 이 문장에 있어서의 Augustine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칼빈의 해석을 충분히 예견하였다.(Werke WA X. ii. 89;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451ff.)

266) Augustine. Contra epistolam Manichaei quam vocant fundamenti xiv(MPL 42. 183; tr. NPNF IV. 136).

267) Augustine, De ordine II. ix. 27-x. 28(MPL 32. 1007f.; tr. R. P. Russell, Divine providence and the problem of Evil:A Translation of Augustine's De ordine, pp. 122-127); Against Faustus the Manichee xxxii. 19(MPL 42. 509; tr. NPNF IV. 339).

268) Augustine, The Usefulness of Belief i. 2, 3(MPL 42. 65ff.; tr. LCC VI. 292ff.).

269) I. vii. 1.

270) 참조. Aquinas, Summa Theol. I. i. 10:"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271) 성경의 진리에 대한 칼빈의 성령 내증 교리에 관하여는 다음을 참고하라. I. vii. 4; III. i. 1; III. i. 3f.; III. ii. 15, 33-36; Geneva Catechism(1545) xiv. 91; xviii. 113(OS II. 88, 92; tr. LCC XXII. 102, 105); 딤후 3:16 주석; Doumergue, Calvin IV. 54-69; Dowey, op. cit., pp. 106ff.;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30-39; G. S. Hendry, The Holy Spirit in Christian Theology, pp. 72-95.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I. 5은 개혁주의 교리를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272) 참조. Lactantius, Divine Institutes III. i(CSEL 19. 178; tr. ANF VII. 69).

273) Barth와 Niesel에 의하면 이 구절은 "Capnio"(Antoine Fume)가 파리에서 Calvin에게 1542년 말에 아니면 1543년 초에 보낸 편지와 관련이 있다(OS III. 70, note 1). 그 편지는 Herminjard의 Correspondance VIII. 228ff.와 CR XI. 490ff.에서 읽을 수 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의회의 자문관으로서, 기독교의 영원한 형벌 교리와 기타 교훈들을 조롱하는 파리에 있는 어떤 집단의 위험스런 부정적 견해들을 경고하기 위해 쓴 것이다. 그때 그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지지자들을 얻기 위해 "감언이설로 많은 경솔한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J. Bohatec은 그 집단의 지도자로 Rabelais, Des Priers, Dolet등을 들고 있다. 그는 편지의 많은 구절들이 칼빈의 De scandalis(1550)에 출처된 말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Jacques Gruet의 견해는 그가 숨긴 원고가 1550년 4월에 발견됨으로써 드러났는데 Fume에 의해 보고 된 내용들과 비슷하다.(Bud und Calvin, pp. 221f.; OS III. 70, note 1; CR XIII. 567-571.) 참조. I. viii. 5, note 6.

274) 참조. Hilary of Poitiers, On the Trinity I. xviii: "우리가 오직 그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그 분(하나님)은 그 자신에 관한 가장 적합한 증인이시다"(MPL 10. 38; tr. NPNF 2 ser. IX. 45).

275) "aivpovpiston." 참조. I. vii. 2(end) and Hendry, op. cit., pp. 76ff.

276) 참조. "Summary of Doctrine Concerning the Ministry of the Word and Sacraments"도 Calvin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CR IX. 773-778; tr. LCC XXII. 171- 177), 특히 5, 6항.

277) 성령의 은밀한 활동과 증거에 대한 문제는 III. i. 1에서 재론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다루어 소개하고 있다. 이는 3권의 주제이기도 하다. 각주12 참조 할 것.

278) 여기서 칼빈이 언급한 말은 그의 체험담이다. 그는 우선 고전을 탐독한 후에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문학적 기쁨 대신에 성경이 주는 깊은 감동과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구절을 인용하여 H. Strohl은 John Sturm의 Strasbourg Academy를 언급하고 있고, 또한 divus라는 칭호가 Sturm에 의해 Cicero에게, Bucer에 의해 Plato에게, Zwingli에 의해 Seneca에게 각각 붙여졌음을 H. Strohl은 말해 주고 있다(La Pense de la Rforme, pp. 78f.). 1541년 불어 판의 같은 구절에 관해서 J. Pannier은 Calvin의 경우와 비교될 만한 체험에 대해 Lefvre의 인용문을 인용하고 있다(Psalterium quintuplex, 1509): "한 줄기 빛이 너무도 눈부시게 내 눈을 비추어서 인간의 교훈들은 성경 연구와 비교하면 어두운 그림자같이 생각되었다."(Pannier, Institution I. 310, note b on p. 69.)

279) 성경 저자들의 특별한 웅변적 감화력에 관하여는, Augustine의 On Christian Doctrine IV. vi. 9-vii. 21(MPL 34. 92-98; tr. NPNF II. 577-581)을 볼 것.

280) Justin Martyr, First Aplolgy liv-lx. 여기서 그는 악령들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을 흉내 낸다고 했고, 그런 것들은 이교 설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며, Plato는 모세로부터 이를 참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MPG 6. 107-118; tr. LCC I. 277-281).

281) Tatian은 그의 저서 Address to the Greeks(ca. 170) xxxi, xxxvi-xli에서, 모세는 Homer 및 다른 모든 알려진 작가들보다 훨씬 이전의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Clement of Alexandria(Stromata I. xv), Theophilus of Antioch(To Autolychus III. xxiii), Eusebius(Ecclesiatical History IV. 30, Praeparatio evangelica II. i), Augustine(City of God XVIII. xxxvii, on Christian Doctrine IV. vi) 외에도 다른 대표적인 기독교 작가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Tatian의 최초의 글들은 E. Schwartz판 O. Gebhardt와 A. Harnack의 Texte und 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altchristichen Literatur IV. i. 31f., 37-43(tr. ANF II. 77f., 80f.)을 볼 것.

282) Augustine, City of God XVIII. xl(MPL 41. 599; tr. NPNF II. 384). 유대 역사가인 Flavius Josephus는 유대인의 고대성(古代性)에 관하여 Apion을 반박하는 그의 두 저서에서, 모세의 율법은 이교 입법자들의 법률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며 더 공의롭고 또한 인도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참조. Contra Apionem I. xxii; II. xxxvi; II. xxxix(CSEL 37. 36, 132, 137ff.; LCL Josephus I 226ff., 394ff., 405f.).

283) Calvin은 Harmony of the Four Last Books of Moses에서 여기에 언급된 구절들을 취급하고 있는데, 모세에 대한 반역에 대해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민 16). 그는 하나님이 모세를 기적적으로 보호하고 계신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종들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Calvin은 그 당시 모세 5 경의 권위를 의심한 비평가들은 옛날 모세를 대항했던 자들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참조, De scandalis, OS II. 186, 201f., 각주 1-5. 당대의 반대자들에 대한 Bohatec의 글은 I. vii. 4의 각주 14를 볼 것.

284) 이사야 45장의 연대에 관한 현대적 견해는 Calvin의 것과는 물론 다르다.

285) 참조. I. vii. 4, 각주 14 ; I. viii. 3, 각주 4; Bohatec, op. cit., pp. 164, 178, 216- 228, 239.

286) 참조. Justinian, Digest I. ii. 2. Corpus iuris civilis, ed. P. Krueger, Digesta, p. 34; tr. C. H. Monro, The Digest of Justinian I, p. 23.

287) Antiochus IV, Epiphanes, of Syria(176-164 B.C.). 유대인을 핍박한 자로서 그의 폭정은 마카비 반란을 유발 시켰다.

288) 70인경. B.C. 150년경에 완성됨.

289) "Ecclesiae christianae librarios…appellat," 참조. Augustine, Psalms, 시 56: 9; "Librarii nostri facti sunt"(MPL 36. 366). 중세 라틴에서 librarius란 말을 다양하게 사용한 경우는 Du cange, Glossarium을 볼 것. Norton은 이 부분을 "도서 보관자들(Keepers of the librarie)"라고 번역함.

290) 이 항은 I. viii. 5의 문제와 계속적인 연관성이 있다. 참조. I. vii. 4, OS II. 201.

291) 참조. I. vii. 5; I. viii. 1.

292) Augustine, The Usefulness of Belief xvii. 36(MPL 42. 92; tr. LCC VI. 322).

293) 이러한 자유사상가(Libertine)들의 견해는 Calvin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의 소책자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et furieuse des Libertins(1545)(CR VII. 147- 248). 특히 ix-xi(173-181)을 볼 것.

294) lbid., col. 174.

295) Calvin은 여기서 성경의 여러 책에 관한 루터의 유명한 학설과 근접하고 있는데, 루터는 그의 야고보서와 유다서 강해 서문에서 성경의 정경성의 시금석은 그리스도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가의 여부에 있다고 했다("ob sie Christum Treiben, oder nicht"). 참고, 서론 p. lvi, 각주 52

296) I. vii. 4-5.

297) "Tumidi isti evnqousiastaiv"(광신자들).

298) 이 제목은 정확히 말하면 제 3항에만 해당된다. Calvin은 1항과 2항에서 창조와 성경이 하나님께 대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를 비교 검토하여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제 1 권의 나머지 장에서는, 천지 창조를 통해서도 알 수 없고 성경의 "안경"을 쓰고서도 창조 사역에서 찾아낼 수 없는,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창조주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다.

299) Lombard, Sentences I. xlv. 11(MPL 192. 643). 참조. Augustine, De ordine I. i-iii(MPL 32. 977ff.; tr. R. P. Russell, Divine Providence and the Problem of Evil, pp. 6-11); Enchiridion xxiv. 95f.(MPL 40. 276; tr. LCC VII. 394f.).

300) 참조. I. xvii. 2, 각주 3. 참고. 소책자 Calumniae nebulonis cuiusdam de occulta providentia Dei…ad easdem responsio(1558), Calvin의 이 소책자에서 인용되고 또 대답되고 있는 Sebastian Castellio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책에 보면 Calvin은(7항)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받고 있다. 즉, Calvin은 하나님께서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두 가지 의지를 가지심으로써 괴롭힘을 받고 있어서, 결국은 그가 이것을 말할 때, 다른 것을 생각하며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Calvin은 약간 흥분조로 대답하고 있다(CR IX. 287f., 302ff.).

301) "eivconicwv""

302) "caiv autnsivan" 참조. I. xiv.3

303) 참조. I. ii. 2; III. ii. 6.

304) Justin, De monarchia i. 2(MPG 6. 314ff.; tr. ANF I. 290f.).

305) Tertullian, The Testimony of the Soul ii(MPL l. 611; CCL Tertullianus I. 176; tr. ANF III. 176).

306) Augustine, Letters xvi, xvii(alias xliii, xliv)(MPL 33. 81-85; tr. FC 12. 37-43).

307) I. v. ll.

308) 11-12장은 예배 문제를 취급한 것으로서, 삼위일체, 창조, 섭리의 교리에 관한 중요한 서론이다. 이들 중 얼마간은 제 2 계명의 해석에서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있다. 참조. II. viii. 17에 보면 Calvin은 이 구절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참되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창조주에 관한 "지식"의 기초이다. "냉랭한" 공상은 배제된다.

309) "왜냐하면 그 자신의 말씀들을 통해서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그 자신에 관해 적당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Hilary of Poitiers, On the Trinity I. xviii(MPL 10. 38; tr. NPNF 2 ser. IX. 45)

310) Maximus of Tyre(A.D. 150년경) Philosophoumena ii(ed. H. Hobein, PP. 18ff.; tr. T. Taylor. The Dissertations of Maximus Tyrius II. 188ff.).(Taylor's Dissertation xxxviii = No. ii in Hobein.)

311) City of God VI. x(MPL 41. 190; tr. NPNF II. 119). 기독교인의 예배 행위에 있어 우상 사용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 Augusine은 여기서 현존하지 않는 우상들을 반박한 세네카의 글을 인용한다. 서방에서 우상 타파 논쟁이 가열된 와중에서 Lyons의 Agobard 감독이 826년경에 쓴 논문 Against the Superstition of Those who Think that Worship Ought to Be Offered to Pictures and Images of the Saints(MPL 104. 199-228)은 주목할 만하다. Augustine과 기타 교부들의 사상에 의존한 이 작품의 간단한 개요는 A. Cabniss, Agobard of Lyons, Churchman and Critic, pp. 54f.에서 찾아볼 수 있다. Agobard의 견해는(이것은 Libri Carolini와 관계 있음. 참조. 14항. 각주 28) Calvin의 것과 어떤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범죄케 하는 우상들이 "부서져 가루가 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MPL 104. 208).

312) 참조. II. xi. 2.

313) 이 구절은 Juvenal. Satires V. xiv. 97에서 빌어 온 것이다. "Nubes et caeli numen adorant" (Cavin:adorent). (LCL판, pp. 270f.와 각주 3).

314) Eck, Enchiridion(1526), xv장(1541, xvi장). 형상에 대한 ECK의 옹호는 파리의 신학자 Josse Clichtove(왕에게 드리는 인사말, 각주 8)가 Propugnaculum ecclesiae adversus Lutheranos I. x(Paris, 1526)과 Compendium veritatum adfidem pertinentium contra erroneas Luthernorum assertiones(Paris, 1529) xxii장, fo. 122b-127a에서 다룬 문제와 비교될 수 있다. 후자는 1528년 파리 대회(the Synod of Paris)의 반 루터파에 대한 결정의 해석으로, Francis I세에게 보내는 제언으로 시작하여 프랑스 내의 루터파의 활동에 경종을 울려 준다.

315) 참조. III. ix. 2.

316) Horace, Satires I. viii. 1-3(CLC판, pp. 96f.). 참조. Lactantius, Divine Institutes II. iv. 1(CSEL 19. 107; tr. ANF VII. 44).

317) 이 말은 동방 정교회(the Eastern Orthodox churches)에서는 서방 교회와는 다르게 예배를 드릴 때 어떤 형태의 신상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HDRE VII. 81. 참조. L. Brhier, La Sculpture et les arts mineurs byzantins, pp. 7. 16.).

318) Gregory 대제, letters IX. 105; XI. 13, 둘 다 Marseilles의 감독 Serenus에게 보내진 것이다(MGH Epistolae II. 112, 273f.; MPL 77. 1027f., 1128); ECK, Enchiridion(1526), xvi장; Clichtove, compendium, to. 124a.

319) Lactantius, Divine Institutes I. viii, xv, xviii(CSEL 19. 29f., 55f., 63-67; tr. ANF VII. 18, 26-30); Eusebius, Praeparatio evangelica II. iv; III. ii(MPG 21, 163, 175); Augustine, City of God VI. vii. 1; VI. viii. 1; VIII. v. xxvi(MPL 41, 184, 186, 229f., 253f., tr. NPNF II. 115f., 147, 163).

320) "기독교 성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설치하는 것은 죄악이다." Augustine, Faith and the Creed vii. 14(MPL 40. 188; tr. LCC VI. 360); 참조 De diversis quaestionibus, qu. 78(MPL 40. 90).

321) Council of Elvira(305년경). Francis I 에게 드리는 인사말, 각주 21을 볼 것.

322) Augustine, Gty of God IV. ix, xxxi(MPL 41. 119. 138; tr. NPNF II. 69, 74f.). Varro의 작품은 여기서 Augustine에 의하여 언급되고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323) 솔로몬의 지혜서(Wisdom of Solomon) 14:15-16.

324) Calvin은 동음이의(同音異義)를 사용하고 있다. "Deum affigant ubicunque affingunt."

325) Augustine, Psalms, 시 113. ii. 4-6(5절에 관하여)(MPL 37. 1483f.; tr. NPNF<시 115> VIII. 552).

326) Augustine, psalms, 시 113. ii. 4-6.

327) I. xi. 16; I. xii. 2.

328) Calvin은 헬라어 "eivdwlodouleiva"와 "eidwlolatreiva"를 사용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John Cochlaeus는 Calvin의 Inventory of Relics에 답변하면서, 둘리아(dulia), 즉, 종이 주인을 섬기는 행위와 라트리아(latria), 즉, 신에게 드리는 예배행위 사이의 초대의 구별을 논하였다. De sacris reliquiis Christi et Sanctorum eius(2549), 2-3장. 참조. 각주 27과 I. xii. 2-3.

329) I. xi. 7.

330) Calvin은 여기서 "혼합주의자들"의 교훈에 찬성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후에 Vincent of Lrins의 교훈에 귀의하여, 기독교의 연합과 개혁의 기초로서 "초대 5세기 동안의 일치"를 주장했다. 참고:J. T. McNeill. Unitive protestantism, pp. 271ff.; W. K. Ferguson, The Renaissance in Historical Thought, pp. 41f. 49f. 1538년의 라틴어 판 요리문답에서 Calvin은, 그리스도인들의 연합과 화평을 지지하였으면서도 마귀는 혼합주의를 추구하도록 우리를 충동질한다고 외쳤다. "adsyncretismum agendum admovere debet"(OS I. 431).

331) Augustine, Letters cii(MPL 33. 337; tr. FC 18. 161); Cty of God IV. xxxi(MPL 41. 137f.; tr. NPNF II. 81).

332) Augustine, Psalms, 시 113. ii. 5f.(MPL 37. 1483f.; tr. NPNF<시 115편> VIII. 552f.).

333) Irene는 780-802년까지 동방제국의 여왕이었다. 불어판에서 Calvin은 그녀를 "Irene라고 하는 사악한 Proserpine(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여왕)"이라고 했다.

334) 제 2 차 니케아 회의. 787년. 제7회기(Mansi XIII, 377f.; tr. H. 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 132). 이 회의에서 proscunhsi"(우상에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것. bowing in venerafion)는 허용하기로 하고, latreiva(실제 예배, actual worship)는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한다고 하여 금하였다. 참조. I. xii. 3; hefele-Leclercq III. 2. 772f. 니케아 회의에서 토의된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E. J. Martin, A History of the Iconoclastic Movement, 6장을 볼 것.

335) 1550년 판 강요의 14-16항은 Calvin이 Libri carolini라는 책에서 인용해 온 것이다. 이 책은 제 2 회 니케아 회의(787년)의 결정에 대응하여 샤를마뉴 대제의 지시에 따라 쓰인 4권의 책으로서 프랑크푸르트 대회(Synod of Frankfort, 794년)에서 공인되었다. 이 책은 1549년에 Jean du Tillet에 의해 출판되었다. 본문에 인용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Libri Carolini I. 7, 9, 10, 13, 23, 24, 28, 30; II. 5, 6, 10; III. 7, 15, 17, 26, 31; IV. 6, 18. 참고. MPL 98, 1022f., 1027ff., 1034f., 1053f., 1057f., 1061f., 1065f., 1071ff., 1075f., 1127ff., 1142f., 1148f., 1170ff., 1180ff., 1197ff., 1221ff. OS III. 103f.의 각주들은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Leges III. Concilia II. 본문에 언급되었다. 편집자는 여기서 Cavin이 다른 사람이 한 말을 그 회의에서 자주 거론된 "동방의 대표 요한"이 말한 것으로 두 번이나 잘못 인용했다고 지적하였다. Calvin의 인용문들은 이 외에는 모두 본문과 일치한다.

336) "eivconomajcoi."

337) 보통 로마 극장에서 연주의 맨 마지막에 보내는 의례적인 박수갈채를 말함. 참조. horace, Ars poetica V. 154f.(LCL판, pp. 462f.와 각주 e).

338) 참조. 11항 각주 21, Calvin, On 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1549)(CR VI. 463; tr. Tracts I. 131).

339) 참조. I. ii. 2; I. v. 6, 9, 10.

340) II. viii. 17-19; IV. x. 8-31.

341) Nature of the Gods II. xxviii. 72(LCL판, pp. 192f. 각주 a). Lactantius는 이 어원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종교와 미신적 경외를 구별하는 Cicero의 방법을 비난했다.(Divine Institutes IV. xxviii; CSEL 19. 389; tr. ANF VII. 131).

342) I. iv. 1; I. v. 8.

343) 특히 II. viii을 볼 것.

344) Augustine, Cty of God IV. ix(MPL 41. 119; tr. NPNF II. 69).

345) 참조. I. xi. 11, 16.

346) 참조. I. xi. 11, 각주 21; P. Lombard, Sentences III. ix. 1(MPL 192. 775f.). Aquinas는 latria(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dulia(특출한 피조물에게 드리는 숭배)를 구별하고 있으며, 또한 hyperdulia(복된 동정녀에게 드리는 경배)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dulia를 언급하고 있다.(Summa Theol. II. Hae. lxxxiv. 1; ciii. 4). 참조. Eck, Enchiridion(1526.1533), xv장.(1541, xvi xvi장);"De imaginibus Crucifixi et sanctorum."

347) "proscuvnhsi"

348) II. vii, viii.

349) Calvin은 기독교 강요의 모든 판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사도신경의 첫째 조목인 창조주에 앞세워 취급하였다. 그러나 1559년 판부터는 신앙의 유일한 대상인 그리스도론 다음에서 취급하였다. 본 판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III. ii에서 다룬 신앙과 함께 성령의 구속 사역에 종속되어, 충분한 인식론적 토론이 없이 이 장에 제시되었다. 그 밖의 것들은 내용 면에서 많이 중복되었으나 순서는 변하지 않았다. 성부는 I. xiv 이하에서, 성자는 II. vi 이하에서. 성령은 III. i 이하에서 각각 취급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중세 신학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의 공통된 특징인 신적 속성("virtutes." 여기서는 "권능"이라 하였다.) 에 대한 체계적 나열을 Calvin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밀접하게 다룬 것이 I. x. 2이지만 그것은 체계적인 것이 못 된다. virtutes Dei(하나님의 권능) 에 관한 언급:I. v. 10; I. xiv. 21; III. xx. 40-41; 롬 1:21 주석. 독자들은 Calvin의 글에서 하나님께 사용된 "주권"(sovereignty)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G. B. Beyerhaus, Studien zur Staatsanschauung Calvins, iii장, "Calvins Souvernittslehre", 특히 p. 58). 다만 보통 지정된 주제는 섭리 교리에서 나타나는데 전통적 용어인 "전능"(omnipotence)(참조. I. xvi. 3)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Beveridge와 Allen은 그들의 번역판에 칼빈의 원저서에는 있지 않은 "주권"이란 단어를 가끔 삽입하였다.

350) Seneca, Natural Questions, 서언, I. 13(tr. J. Clarke, Physical Science in the Time of Nero, p. 7).

351) 페르시아의 마니(277년경 사망)에 의하여 창성된 이원론파. 참조,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XI. xiii. 17(MPL 34. 436); De haeresibus xlvi(MPL 42. 34-38); Contra Julianum, opus imperfectum I. cxv-cxxiii(MPL 45. 1125-1127).

352) 이 파(派)는 메소포타미아에서 Audius(372년 사망)에 의해 창설된 것으로, 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모양을 가진다고 가르쳤다. 참조, Augustine, De haeresibus(이단론) 1-50(MPL 42. 39).

353) Calvin은 본 항과 3항에서 당시의 반삼위일체론자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많은 견해들을 언급하고 있다. Barth와 Niesel은 Michael Servetus(1553 사망), Matthaeus Gribaldi(1564 사망), George Blandrata(1585 사망), Valentine Gentile(1566 사망), Gianpaulo Alciati(1573년경 사망) 등의 작품을 상세하게 논하였다.(OS III. 109ff.). 이들의 사상과 활동은 E. M. Wilbur의 A History of Unitarianism:Socinianism and Its Antecedents를 참고할 것. 전통적 정통주의가 "삼중신"(三重神) 또는 "삼신"(三神)들을 인정했다는 비난은 Servetus의 De Trinitatis erroribus, 1531, I, fo. 21(tr. E. M. Wilbur, On the Errors of the Trinity I. 30, 31, pp. 33f.; Harvard Theological Studies 16)에 나온다. 이 분야에 관한 후대의 연구 문헌은 G. H., Williams에 의해 조사되었다. LCC XXV. 285ff. 와 "Studies in the Radical Reformation: A Bibliographical Survey of Research Since 1939", Church History XXVII(1958), 46-69.

354) Servetus, op. cit., I, fo. 35, 36(tr. Wilbur, op. cit., I. 50, 51, pp. 55f.).

355) Calvin은 여기서 히브리서 1:3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다: "Caracthvrth'", "uJpostavsew" auvtou'"(라틴 Vulgate, figura substantiae eius, KJV, "the express image of his person", RSV, "the very stamp of his nature"로 각각 번역됨). substantia(본질) 대신에 subsistentia(실재)를 "uvpov-stasi"의 라틴어 번역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의 작가 Boethius 와 Cassiodorus에 의해서인데, 이 번역은 중세기에도 유행되었다. Calvin은 이 말을 빌어서 삼위일체의 위의 구별을 주장하였다. 참조, Aquinas, Summa Theol. I. xxix. 2. Origen, De principiis I. ii. 2(GCS 22. 28; tr. G. W. Butterworth, Origen On First Principles, p. 16); Augustine, On the Trinity V. viii. 10; VII. iv. 7(MPL 42. 917, 939; tr. NPNF III. 92, 각주 7; 109f.); A. Blaise, Dictionnaire Latin-Fran ais des auteurs chr tiens 및 Du Cange, Glossarium, s. v. "subsistentia."

7a)356)"provswpa"(단수, provswpon). 라틴어 Persona에 해당됨. 이 단어는 "얼굴", "용모", "가면"이란 말에서 "인격"이란 의미를 가지게 되어, 특별히 삼위일체 교리에서는 "세 현현", "三位"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참조. 4항, 각주 11.

357) 참조. 2항, 각주 6.

358) "Morosi" OS III. iii에서 언급된 대로, Calvin이 Bullinger의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염두에 두었다면(Utriusque in Christo naturae tam divinae quam humanae…assertio orthodoxa, 1534), 1559년 판 이전의 그의 강요에는 이러한 암시가 없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536년 판에서는 morositas를 heretici와 같이 취급했고, 1557년의 Response to the Questions of George Blandrata에서 Calvin은 반삼위일체론자에게 morosus라는 형용사를 적용시켰다. CR IX. 329. 참조. IV. I. 16, 20.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1537년에 Pierre Caroli와 Calvin이 벌인 논쟁에서 Bullinger는 Calvin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확실하다. 참고. Oswald Myconius에게 보낸 Bullinger의 편지. 1537년 7월 23일(Hermingard, Correspondance IV. 264f,; CR X. 2. 116f.; OS III. iii, 각주 4).

359) omoousivou, consubstantial(동일 본질). 니케아(325년) 신조에서 강조된 단어로서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는 데 사용되었다.

360) 연대상의 순서가 잘못되어 있다. Arius는 337년에 죽었고 Sabellius는 250년경이 전성기였다. provswpa에 관한 그 교리는 Schleiermacher에 의해 주장된 삼위일체 견해와 비교되었다. C.C. Richardson. The Doctrine of the Trinity, 7장.

361) Hilary of poitiers, On the councils xii ff.(MPL 10. 489f.; tr. NPNF 2 ser. lX. 7f.).

362) Augustine, On the Trinity VII. vi. 11(MPL 42. 945; tr. NPNF 111 ff.).

363) Hilary, On the Councils xxvii. 67-71(MPL 10. 525ff.; tr. NPNF 2 ser. IX. 22).

364) Jerome, Letters xv. 3, 4(CSEL 54. 64f.; tr. MPNF 2 ser. VI. 19).

365) Augustine, On the Trinity V. viii-x(MPL 42. 916f.; tr. NPNF III. 91f.).

366) Cassiodorus, Historia tripartita VI. 21(MPL 69. 1042),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iii. 7(tr. NPNF 2 ser. II. 81)에서.

367)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우리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 비밀히 간직되어져야 하는 진리들을 대담하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잘못을 범하게 한다." Hilary, On the Trinity II. ii(MPL 10. 51; tr. NPNF 2 ser. lX. 52).

368) Hilary, On the Councils xxvii. 63(MPL 10. 522f.; tr. NPNF 2 ser. IX. 21).

369) Augustine, On the trinity VII. iv. 7, 9(MPL 42. 939; tr. NPNF III. 109 ff.). Augustine은 삼위일체 교리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용어의 불충분성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동물이나 나무들의 종류를 평범한 예로 들어 설명하기도 했다.

370) Barth와 Niesel은 여기서 Calvin이 한 말은 Arius와 Sebellius뿐만 아니라 Servetus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지적하였다. 참고. Os III. 115; De Trinitatis erroribus I. fo. 21ab, 22b, 23b; III. 80ab(tr. Wilbur, op. cit., I, pp. 33ff., 123f., 131f.; Harvard Theological Studies 16).

371) 참조. 2항, 각주 6.

372) Tertullian, Against Praxeas ii, ix(CCL Tertullianus II. 1160, 1168f., tr. ANF III. 598, 603f.). E. Evans, Tertullian's Treatise against praxeas에는 비평적 본문이 실려있다. pp. 90, 97f., 번역판 pp. 131, 140. praxeas는 극단적인 모나키아 이단의 대표로서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다고 주장하였다(성부 수난설). K. Barth는 Calvin의 성자 교리를 논함에 있어서, Calvin이 1537년과 1540년에 Pierre Caroli와 논쟁을 벌일 당시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그의 정통성은 신학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있다고 논하였다(Kirchliche Dogmatik. I. i. 438f.; tr. G. T. Thomson,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I. 477ff.). 사실 이 논쟁에 있어서 Caroli의 도전을 받은 Calvin은 이단적인 의도는 없었으나, 니케아 신조와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수용한다고 선언하기를 거부했다. 참조. CR VII. 204f.; Herminjard, Correspondasnce IV. 185ff., 239f.

373) 7항과 8항에서 비난을 받은 견해들이 servetus의 글에 나타난다. Servetus, De Trinitatis erroribus II, fo. 47a(tr. Wilbur, op. cit., II. 4, p. 75).

374) Servetus, op. cit. 참조. I. xiii. 22; 요 1:1 주석. Bucer, In sacra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 1553년 판, fo. 221ab.

375) II. xii-xvii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376) 중세 유대인 주석가들, 즉, Rashi(1105년 사망), Abrabam Ibn Ezra(1167년 사망), David Kimchi(1235년 사망)에 의해 표명된 견해들이다. 참조. L. I. Newman, Jewish Influences in Christian Reform Movements, 325f., 350f.

377) Servetus의 이름이 강요에서는 여기에 처음으로 나온다.

378) Justin, Dialogue with Trypho lvi, lviii, cxxvii(MPG 6, 595ff., 607ff., 771ff.; tr. ANF I. 223, 225, 263); Tertullian, Aguinst Marcion III. ix(MPL 3. 333; CCL Tertullianus I. 519f.; tr. ANF III. 328).

379) 참조. I. xiv. 9; 행 7:30 주석.

380) Servetus, op. cit., III, fo. 77f.(tr. Wilbur, op. cit:, III, 12f., pp. 119ff.).

381)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편집 H. Engelland, p.6; "Mysteria divinitatis rectius adoraverimus quam vestigaverimus"(tr. C.L. Hill,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 67).

382) 참조. 행 20:28 주석. 14-20항에 관한 설명은 B. B. Warfield,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편집 S.G. Craig) 5장을 볼 것.

383) Augustine, Letters clxx. 2(MPL 33. 749; tr; FC 30. 62).

384) 참조. Luht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1529)(Werke WA X. ii. 389).

385) Macedonius(360년경 사망)의 추종자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반(半)아리안주의 감독이었는데 성령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부인했다.

386) Gregory of nazianzus, On holy Baptism, oration xl. 41(MPG 36. 418; tr. NPNF 2 ser. VII. 375). Calvin은 헬라어에서 그 문장을 인용하고 그것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387) Servetus, De Trinitatis erroribus, fo. 7ab(tr. Wilber, op. cit., pp. 13f.).

388) 참조. Augustine, Faith and the Creed ix. 17(MPL 40. 189; tr. LCC VI. 362); On the Trinity I. i. 2, 3(MPL 42. 820f.; tr. NPNF III. 18).

389) 참조. I. xiii, 25; I. xvi. 3; I. xvi. 5.

390) "Et Filio" 이 말은 니케아 신조의 서방 교회 본문으로 "Filioque"에 해당한다.

391) Augustine, Psalms, 시 109:13(MPL 37. 1457; tr. NPNF <시 110> VIII. 542f.); John's Gospel i-v(MPL 35. 1682f.; tr. NPNF VII. 222); psalms, 시 68. 5(MPL 36. 895; tr. NPNF <시 69> VIII. 301).

392) 이 항의 문장들이 반삼위일체론자들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Calvin의 Response to the Questions of George Blandrata에 있는 글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분명하다.(CR lX. 325ff.; 참조. CR XVll. 169ff.). 참조. OS I. 134, 각주 1. 이 문서의 연대는 1557년 여름으로 되어 있다.

393) CR XVll. 169ff.

394) 참조. I. v. 7.

395) Hilary, On the Trinity I. xviii(MPL 10. 38; tr. NPNF 2 ser, IX. 45). "매일 같이…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은 K. Barth에 의해서 인용되었다.(Kirchliche Dogmatik I. i. 317; tr. G.T. Thomson,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I. 345).

396) Chrysostom, Homiliae de incomprehensibili Dei natura, Contra Anomoeos v. 7(MPG 48. 745ff.). 아노모에오스파는 그 이름이 뜻하는 봐와 같이 성부와 성자는 서로 같지 않다고 가르친다.

397) 참조. I. v. 12, 각주 36.

398) Calvin은 Servetus가 그 자신과 삼위일체 교리를 변호하는 자들을 가리켜 "삼위일체론자"라고 불렀을 때 당황했던 것 같다. 이것은 Chris-tianismi restitutio, De Trinitate I 에 자주 나온다. "Athei vere sunt trintiarii omnes"라는 Servetus의 말은 상기 작품 p. 31를 보라. Mr. Chalmers McCormick은 John Campanus(1500-1575년경) 연구에서 정통 교리의 "반대자들"을 trinitarii라고 한 증거를 발견하였다. 이러한 예는 1537년경의 책(Amoenitates literaria Xl <1729>. 32-42)인 George Witzel의 글을 J. G. Schelhorn이 인용한 구절들에서 찾을 수 있다. G. Richter, Die schriften George Witzels, p. 183. Servetus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논란의 대상이 된 것처럼 trinitarius란 말의 뜻을 반복하였다. 아마도 수도원의 계급의 명칭으로 그 말이 오래 전에 사용되었던 것을(1197)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399) "lovgo"

400) Valentine Gentil을 뜻함. Geneva에서 Gentile가 받은 재판에 관한 문서들은 H. Fazy에 의해 편집되었다. proc s de Valentin Gentilis et de Nicolas Gallo(1555). 기촉적 자료들은 CR IX에 있다.

401) "Essentiator." 참조. Gentile의 제 2 고백, 1558년 8월, CR IX. 393f. 배경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알고자 하면 J. Mackinnon, Calvin and the Reformation, pp. 166f.을 보라.

402) "catj ivevochvn."

403) II. xii ff.

404) 부주의로 요한복음 4:23과 24의 순서가 뒤바뀌어있다.

405) 참조. I. xiii. 18, 각주 40; I. xiii. 28, 각주 65; I. xvi. 3, 각주 65; I. xvi. 5, 각주 12. 정통 교리를 비평할 때 C.C. Richardson은 본 장의 24항과 25항을 실례로 사용한다. The Doctrine of the Trinity, pp. 58f.

406) Gentile, Epistola 5에서(CR IX. 390f.; Fazy, op. cit., pp. 65f.). Vincent of L rins는 Nestorius가 사위일체(quaternity)를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Commonistory xvi(MPL 50. 659; tr. LCC IX. 59).

407) I. xiii. 20. 23.

408) lrenaeus, Against Heresies III. vi. 4(MPG 7. 863; tr. ANF I. 419).

409) Irenaeus, op. cit.(참고한 순서를 따르면), III. vi. 1; II. xxvii. 2; III. ix. 1; III. xii. 13; III. xv. 3; III. xx. 4; IV. v. 2-3(MPG 7. 860. 803. 868f., 907. 919, 945, 984f.; tr. ANF I. 418, 398, 422, 435, 440, 451, 467).

410) Tertullian, Against Praxeas(참고한 순서를 따르면), ii, vii, ix, xiv, xviii, xx, iii, i, ii, xi, ix, xxvi(MPL 2. 157, 162ff., 174, 177, 179, 154ff., 166f., 164, 189f.; CCL Tertullianus II. 1159-1196; tr, ANF III. 598, 601f., 603f., 609, 613, 610f., 599, 597, 598, 608f., 603f., 622). E. Evans, Tertullian's Treatise Against Praxeas는 이 항들에 대해 비평적인 글들을 싣고 있다. pp. 89-123, 번역본 pp. 130-172.

411) Justin, Apology I. vi. xiii; tr. ANF I. 164, 166f.; Servetus가 이를 인용하였음. Christianismi restitutio, De trinitate I. p. 33.

412) Hilary, On the Trinity I. v; II. vi(MPL 10. 28, 55; tr. NPNF 2 Ser. IX. 41, 53).

413) Ignatius는 서한들의 진실성은 19세기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jacques Lefvre는 1498년판에서 많은 가짜 서한들을 그의 것으로 보았다. 이 서한들은 ANFI에 있는 W. Cureton의 Corpus Ignatianum(1849)에서 번역된 것이다. 빌립보에 보내는 가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있다(xiii장). "40일의 기간을 경히 여기지 말라"(Cureton, p. 155; tr. ANF I. 119; 참조. LCC I. 81ff.; OS III. 150, 각주 6, 7).

414) Augustine, On the Trinity I. iv. 7; VI(MPL 42. 824, 923-932; tr. NPNF III. 20, 97-103); On Nature and Grace lxi. 71-lxvi.(MPL 44. 282-286; tr. NPNF V. 146-149); Against Julian II. i. l-II. ix. 32(MPL 44. 671-696; tr. FC 35. 55-96).

415) "삼위에는 동일한 영원성과 동일한 권능이 속한다. 성부 안에는 단일성이, 성자 안에는 동등성이, 성령 안에는 단일성과 동등성의 조화가 있다."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 v.(MPL 34. 21; tr. NPNF II. 524). 그리고 Augustine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보낼 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자"(요 15:26)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들어, 삼위의 위격들은 동등하나 성부는 모든 신격의 시작(principium totius deitatis)이라고 했다. On the Trinity IV. xx. 29(MPL 42. 908; tr. NPNF III. 85. 각주 6).

416) Lombard는 "성자는 항상 낳음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그의 Sentences I. ix. 10-15에서 언급하면서 Gregory, Origen, Hilary등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MPL 192. 547ff.).

417) 참조. I. v. 5, Cicero, Nature of the Gods I. xiii, 33(LCL판, pp. 34-35).

418) Augustine, Confessions Xl, xii(MPL 32. 815; tr LCC VII. 253).

419) 참조. I. 12, 15와 I. vi. 1의 예, "spectacles."

420) Augustine,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I. ii. 4(MPL 34. 175).

421) Augustine, City of God XI. v.(MPL 41. 320; tr. NPNF II. 207).

422) 참조. I. xiv. 22.

423) I. xiii. 22-24.

424) I. xv. II. i.

425) 참조. I. xiii. 1, 각주 3.

426) "auvtushva."

427) Augustine은 City of God XIX. xiii(MPL 41. 641; tr. NPNF II. 409)에서 "natura, in qua nullum bonum est, non potest"라고 마니교도들을 논박했으며, Against Julian I. v. 16, 17(MPL 44. 650f.; tr. FC 35. 18ff.)에서 인간의 악은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의 부패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참조. Contra Julianum, opus imperfectum I. cxiv(MPL 45. 1124f.).

428) Augustine, City of God XI. ix(MPL 41. 323-325; tr. NPNF II. 209f.); Lombard, Sentences II. ii. 1(MPL 192. 655).

429) "mataiwvmata."

430) "Dionysium illum, quicunque fuerit." 이 말의 출처는 Pseudo-Dionysius, Decoelesti hierarchia(MPG 3. 119-368; tr. J. Parker, The Celestial and Ecclesiastical Hierarchy of Dionysius Areopagitica)이다. Calvin은 여기서 아마도 Luther의 Babylonish Captivity(바벨론 포로)의 안수식에 관한 항목을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가 누구였든지 간에(quisquis fuerit) 이 Dionysius를 크게 신임하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사실 건전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Luther, Werke WA VI. 562, 참조. Works of Martin Luther II. 275). Luther가 소르본느 신학 대학에 의해 1521년 4월 15일에 정죄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구절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7:34의 Dionysius Areopagitica의 것으로 된 5세기말 경의 여러 작품들의 익명의 저자는 17세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431) 참조. CR LII 85; Dante, Divine Comedy(신곡), Paradise(천국편) xxviii. 97- 139(Pseudo-Dionysius를 따르면)과 Milton의 글(Paradise Lost <실락원> V. 601, 769); "Thrones, ① Dominations, ② Princedoms(또는 principalities), ③ powers, ④ virtues."

432) 참조. Calvin의 공관복음 주석. 막 5:9. "모든 사람에게는 그의 수호자인 많은 천사들이 있다."

433) Origen은 천사장 라파엘, 가브리엘 및 미가엘에게 특별한 직분이 있다고 했다. De principiis I. viii. 1(GCS 22. 228; MPG 11. 176; tr. ANF IV. 264f,; Butterworth, Origen On First Principles, pp. 193f.). 천사들의 계급과 여러 직능을 서술함에 있어서 중세 신학은 Pseudo- Dionysius의 영향을 받았으나, Calvin은 그 권위를 배척했다. 참고:Lombard, Sentences II. ix(MPL 192. 669), Aquinas, Summa Theol. I. cvi-cxiv. Calvin은 본 항의 처음과 말미에서, 위의 4항에서와 같이 Aquinas가 천사들에 대해 지나치게 공상적으로 다룬 것을 통박했다. 천사들의 직제와 수호신들에 관해서는 Summa Theol. I. cviii, cxiii을 참고할 것.

434) 참고. 시 34:7 주석. Calvin은 많은 천사들이 각기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도록 임명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435) 참고. I. ix. 1, 각주 1.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des Libertins xi(CR VII. 179f.)에서 Calvin은 천사에 관한 Libertines의 이교도적인 개념을 기술하고 있다.

436) "Spiritus naturae subsistentis."

437) 참조. 6, 7항.

438) plato, Epinomis E 984(LCL Plato VIII. 462f.). 여기서는 마귀들도 중보자로 보고 그들에게 기도를 드림으로써 존귀를 돌렸다. 참조. Symposium 202(LCL Plato V. 178f.). Calvin은 여기서 Cratylus를 인용하고 있는데, Benoit에 의하면 이것은 잘못된 것 같다(Institution I. 196); "Cratylus 398"은 OS III. 164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그 구절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

439)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간의 대결은 Calvin에게 있어 때때로 깊은 관심사가 되었다. 참조. K. Frhlich, Gottesreich, Welt und kirche bei Calvin, pp. 19ff.

440) "Socordia vel ignavia," Sallust가 쓴 War with Catiline lii. 29와 lviii. 4, 그리고 Letter to Caesar x, 9: "Quorum animos socordia atque ignavia invasit"(LCL판, pp. 106. 118. 482)에서 온 말인 듯 하다.

441) I. xiv. 9.

442)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des Libertins xii, xxii, xxiii(CR VII. 181, 228, 239).

443) 참조. I. v. 8, 각주 27; I. vi. 2; II. vi. 1; III, ix. 2.

444) I. v. 1-5.

445) Basil, Hexaemeron(6일간의 창조에 관한 설교)(MPG 29. 3-207; tr. NPNF 2 ser. VIII. 52-107); Ambrose, Hexameron(CSEL 32 I. 1-261; MPL 14. 133- 288). 창조에 대한 유력한 기독교 정통적 견해는 하나님께서 무로부터(ex nihilo)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참조. I. xv. 5. 고대 에피큐로스 학파는 이 견해를 부인하였다. Lucretius는 "Nil posse creari de nilo"를 썼다(De rerum naturai. 155; LCL판, p. 12). Augustine도 Faith and the Creed ii. 2(MPL 40. 182; tr. LCC VI. 354f.)에서 무(無)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했다. 다만 그는 개인의 영혼 기원 교리에 관해서는 막연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IV. 1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대로 무에서부터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만드셨다." 참조. E. Brunner, The Christian Doctrine of Creation(tr. O. Wyon) II. 9ff.; L. B. Gilkey, Maker of Heaven and Earth, pp. 46f., 88; H. A. Wolfson, "The Meaning of ex nihilo in the Church Fathers, Arabic and Hebrew Philosophy, and St. Thomas": Medieval Studies in Honor of J. D. M. Ford, pp. 355-367.

446) I. v. 1-4.

447) "Calelestis machinae." 참조. I. x. 1, 각주 2. Joseph Addison의 찬송 "The Spacious Firmament on High"(저 높고 푸른 하늘과)는 Calvin의 것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448) 이 말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CR XXVI. 255; XX VIII. 22, 232; XXXII. 89, 428; XXXIII. 572; XXXVI. 589; XLI. 67; XLIII. 254; XLIV. 5. 물질 세계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신앙은 에피큐로스 학파에 반대하여 스토아 철학자들이 옹호하였다. 그러나 Lucretius는 정면으로 이를 부정했다. 참고. 그의 저서 De rerum natura v. 156f.(LCL판, pp. 350f.). Cicero는 그의 저서 Nature of the Gods II. lxii. 154-lxvi. 167(LCL판, pp. 273-283)에서 스토아 학파의 대변자인 Balbus를 통하여 "세계는 신들과 인간들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라고 길게 논술하였다. 이에 동의하여 Lactantius는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어떤 필요성이 있어서 만드셨음에 틀림이 없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계는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 졌다고 말했는데 사실 옳은 말이다."라고 말했다. Epitome of the Divine Institites lxviii(CSEL 19. 752; tr. ANF VII. 252).

449) I. xiv. 2.

450) Calvin은 강요에서 인간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본 장에서는 창조 당시의 인간을 그리고 II. i-iv장에서는 타락한 상태의 인간을 각각 다루고 있다.

451) 참조. I. i, 1; I. v. 2-3; I. xv. 1; II. viii. 1.

452) II. i. 3.

453) 참조. Tertullian, Against Marcion II. ix(CSEL 47. 346; CCL Tertullianus I. 484f.; tr. ANF III. 304); Augustine, Retractations I. x. 3(MPL 32. 600).

454) 참조.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I. xxvii(LCL판, pp. 78f.); Nature of the Gods II. liv. 133-lxi. 153(LCL판, pp. 251-271); Aristotle, De partibus animalium 686. 25-35(tr. Aristotle, Selections, ed. W. D. Ross, pp. 181ff.). 잠에 관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Tertullian은 이교도들의 다양한 견해를 인용하기도 하고, 비평도 했다. On the Soul xlii-xlix(CCL Tertullianus II. 845-855; Tertullian, De anima, ed, J. H. Waszink의 주석, pp. 58-67, 461; tr. ANF III. 221-227).

455) Peter Martyr Vermigli(1562 사망)도 같은 말을 했다. Loci communes I. xii 27-28(1576판, pp, 101f.).

456) Ovid, Metamorphoses I. 84ff.(LCL판, p. 8); 참조. Cicero, Nature of the Gods II. lvi. 140(LCL판, pp. 256ff.).

457) Andreas Osiander(1498-1552)는 Nuremberg에서 목회한 루터교의 저명한 목사였으며 1549년 이후 K nigsberg 대학의 교수로 봉직했다. 1550년에 그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칭의 교리를 발표했고(III. xi. 5,6과 각주 참고할 것), 같은 해에 단편 논문인 An filius Dei fuerit incarnandus…(만약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해야 했을까,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를 발표했고,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논문인 De imagine Dei quid sit를 첨부했다. Calvin은 Osiander가 그의 논문 An filius Dei에서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이 성육신은 필연적이었다고 한 교리를 거부했다. 참고.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126, 133ff., p. 126, 각주 1. Osiander가 Copernicus의 획기적 작품인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1543)을 소개하여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하다.

458) 원문은 복수형 "eos"로 되어 있음; 참조. VG, "selon leur reverie."

459) Servetus, Chistianismi restitutio(1553), dial. iii On the Trinity, p. 102.

460) 참조. Bernard, Concerning grace and Free Will ix. 28(MPL 182. 1016).

461) I. xv. 8에 반복됨. 참조. Seneca, Moral Epistles lxi. 8: "Rationale enim animal est homo"(LCL Seneca, Moral Epistles I. 276). Chrysippus(B.C. 206년 사망)가 헬라어로 이런 표현을 하였음. Liddell and Scotl, Greek-English Lexicon, s.v. "logicov"."

462) "In renovatione imaginis Dei." 이 항에서 renovatio와 reparatio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한 것은 방법론상으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창조 당시의 인간의 대부분 모습은 구속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함으로써 비로소 알려 진다. 참조. II. ii. 12; 고전 15:44-59주석;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67ff., 129f.

463) Augustine, On the Trinity X. xi, xii; XIV. iv, vi, viii; XV. xxi(MPL 42. 982-984. 1040-1042, 1044f., 1088f.; tr. NPNF III. 142f., 186ff,. 194; LCC VIII. 88f., 103f., 168f.); City of God XI. xxvi, xxviii(MPL 41. 339, 342; tr. NPNF II. 220f.).

464) "Si ex Dei essentia per traducem sit anima hominis." 참조. I. xiv. 20, 각주 29; II. I. 7, 각주 10; II. xiv. 8. Calvin은 분명히 영혼 유전설(traducianism 혹은 영혼 전이설)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 교리는 모든 인간 영혼이 신적 본질로부터 아담에게 본래적으로 유전(tradux)되었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는 정반대의 영혼 창조설을 주장한다. 이는 무에서의(ex nihilo) 신적 창조 행위는 어린아이가 출생할 때마다 발생한다는 교리이다. Calvin은 Augustine에게서 많이 인용하고 있다. 특히 City of God XI. xxii(MPL 41. 336; tr. NPNF II. 217)을 볼 것.

465) 참조. I. v. 3, 각주 12.

466) Plato, phaedo 105-170; phaedrus 205-209; Alcibiades I. 133(LCL plato I. 364-373; I. 468-481; VIII. 210f.); Cicero, Tusculam Disputations I. xxvii. 66(LCL판, pp. 76f.).

467) Pietro Pomponazzi, De immortaliate animae(1516) iv(tr. W. H. Hay in E. Cassirer, P. O. Kristeller, J. H. Randall, The Renaissance philosophy of Man. pp. 286-297). 참조. I. v. 4, 각주 17.

468) 위의 2항.

469) 참조. III. ix.

470) 참조. Plato, Republic lV. 439 CD(LCL plato, Republic I. 396f.).

471) Plato, Theaetetus 184 D(LCL Plato II. 156f.).

472) Themistius, In libros Aristotelis de anima paraphrasis II. VII.(ed. R. Heinze, pp. 36, 120-122).

473)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VI. 2(LCL판, MP. 328f.); Cicero, De finibus II. xi. 33f.; V. vi. 17; V. xiii. 36(LCL판, pp. 118ff., 408f., 432f.).

474) Themistius, op. cit., VII(ed. Heinze, pp. 113f.).

475) plato, phaedrus 253 D(LCL plato I. 492f.).

476)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loc. cit.

477) 참조. II. ii. 12-26.

478) "hgemonivcon." 참조. Plato, protagoras 352 B(LCL plato lV. 224); plutarch, De virtute morali 441C 3(LCL plutarch, Moralia VI. 22); Tertullian, On the Soul xiv(Waszink, op. cit., pp. 17ff.), CCL Tertullianus II. 800; tr. ANF III. 193).

479)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loc. cit.

480) II. ii. 2-4.

481) Augustine,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II. vii. 9(MPL 30. 200f.).

482)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xi. 32(MPL 44. 936; tr. NPNF V. 484f.).

483) 1539-1554년 판에서, Calvin은 섭리와 예정 문제를 같은 장에서 함께 취급하였다. 그러나 최종 판에서는 둘을 완전히 분리시켜, 섭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관련하여 여기서 취급하고 예정은 III. xxi- xxiv에 가서 성령의 구속 사역을 다룰 때 논하고 있다. 참조. Benoit. Institution I. 221, 각주 2; P. Jacobs, prdestination und Verantwortlich-Keit bei Calvin, pp. 64-66, 71 et passim.

484) I. v. 14.

485) "Orbis machinam." 참조. I. x. 1, 각주 2.

486) "Fortunae et casibus fortuitis." 참조. I. v. 11; I. xx. 8과 각주들.

487) "Sophistae." Calvin은 이 말을 다른 개혁자들과 인문주의자들과 공통으로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난할 때 가리켜 이들에게 사용했다.

488) 참조. I. xiii. 18, 각주 39, Aquinas, Summa Theol, I. xix. 6:"결과는 보편적 원인의 질서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

489) Andreas Hyperius는 그의 사후에 출판된 Methodus Theologiae(Basel, 1568)에서 이 견해를 비난하고 있다(pp. 232ff. 252). Hyperius(1511-1564)는 개혁주의 학자로서 Marburg 대학 교수였다.

490) 이 문제는 Calvin이 Avertissment contre l'astrologie judiciare(1549)(CR VII. 509-544, 특히 cols. 523-525-533.)에서 법성학(法星學, judicial astrology; 점성학의 한 분야)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참조. J. Bohatec, Bud und Calvin, pp. 270-280. 여기서 Calvin의 법성학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견해는 플로렌스의 독실한 기독교 신플라톤주의자인 Pico della Mirandola(1494 사망)의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 참고. L. Thorndike, A History of Magic and Experimental Science IV. 534ff. 참조. I. ii. 2, iv. 2,

491) 참조. I. ii. 2, 각주 7; I. iv. 2; Cicero, Nature of the Gods I. ii. 3; I xvii. 45; I. xix. 51; I. xl. III(LCL판, pp. 4f., 46f., 50f., 106f.).

492) Pietro pomponazzi의 견해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참조. 그의 저서 De fato, de libero arbitrio, et de praedestinatione(1520) II. i, iv, v. Barth와 Niesel은 섭리 교리를 부정한 13세기의 아베로이스주의자들(스페인 출생의 모슬렘 철학자이자 의사인 Aver es(1126-1198)를 추종하는 자들로서, 섭리의 교리를 부정하며 영혼은 가사적인 것이라고 함.)인 Siger de Brabant와 Boethius of Dacia를 관련시켜 이를 인용했다(OS III. 193).

493) Calvin은 바울은 히브리서 저자로 보지 않고 있다. 참조. 히브리서 주석. "Argument"에서 그는 "교훈의 방법과 문체로 보아 분명히 바울이 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494) 참조. I. xiii. 18, 각주 40.

495) 참조. I. xiv. 22, 각주 32.

496) 참조. III. xx. 44.

497)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 v. 10-vi. 12(MPL 44. 577ff.; tr. NPNF V. 395f.).

498) Basil,(Homilies on the psalms) 시 32:4(MPG 29. 329f.).

499) Augustine, Retractations I. i. 2(MPL 32. 585); Against the Academics I. i; III. ii. 2-4(MPL 32. 905, 935f.; tr. ACW XII. 35f., 98-101).

500) Augustine, De diversis quaestionibus, qu. 24, 27, 28(MPL 40. 17f.); On the Trinity III. iv. 9(MPL 42. 873; tr. NPNF III. 58f.).

501) 참조. 공관복음 주석 마 10:29. Calvin은 모든 우발적 사고를 하나님의 섭리의 작용 안에 포함시켰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V. 2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만물이)…같은 섭리에 따라 제 2 원인을 따라서 필연적으로나 자유 의지대로 혹은 우발적으로 일어나도록…." 참조.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우발 사고에 인용한 문구들은 Heppe RD, 12장 pp. 265ff.를 볼 것.

502) "Eventus."

503) Aquinas, Summa Theol. I. xix. 3. Barth와 Niesel은 여기에 동조하는 Bonaventura, Duns Scotus, Erasmus, ECK등을 인용하면서, Luther가 그의 저서 Deservo arbitrio(Werke WA XVIII. 615ff.)에서 이 견해를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Melanchthon의 입장은 Aquinas나 Calvin의 것과 다르지 않다. Loci communes, 1543(CR Melanchthon XXI. 649f.); Loci theologici, 1559(ed. Engelland, op. cit., pp. 229f., 233).

504) 참조. I. v. 11, 각주 34; 시편 주석 36:6, 73:1. C. Trinkhaus는 이 구절을 사용하여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의 운명에 대한 혼란된 성격을 반대하는" Calvin의 입장을 설명한다. "Renaissance Problems in Calvin's Theology", Studies in the Renaissance III, ed. W. Peery, P. 65.

505) Calvin은 모든 사람이 모든 환경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본다(negotium cum Deo). 참조. III. iii. 6; III. iii. 16; III. vii. 2. Calvin은 이 확신을 체험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면, Farel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그는 제네바로 돌아갈 결심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썼다. "내가 가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mihi esse negotium cum Deo). 이 편지가 쓰인 날짜는 1540년 10월 24일이다. Bonnet는 1541년 8월로 추측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CR Xl. 100; tr. Calvin, Letters I. 281).

506) 이 비난은 Sebastian Castellio와 그의 지지자들이 Calvin을 반대하여 제기한 것임에 분명하다. 참조. Calvin, Calumniae nebulonis cuiusdam…ad easdem responsio, 1558(CR lX 269, 279). 참조. I. xviii. 1, 각주 3.

507) "Aliam voluntatem absconditam." Calvin은 여기서 하나님께 두 의지가 있음을 서술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깊은 내면의 오묘막측한 심연(참조. I. xiii. 1-2)과 계시 자체의 신비들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참조. I. xviii. 2-3; "그의 의지는 하나요 단순하지만 우리에게는 다양한 것으로 보인다"(3항). I. xviii. 1, 4(의지와 교훈의 구별)도 참조하라. III. xx. 43, III. xxiv. 17, 각주 31.

508) 참조. I. xvi. 1; III. ii. 14.

509) Augustine, On Diverse Questions, qu. 27.(MPL 40. 18).

510) 참조. Calvin,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e. 여기서 그는 공의와 분리된 "절대 권능을 하나님께서 귀속시키는 Sorbon파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공박하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분리시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태양열에서 빛을 혹은 태양의 불에서 태양의 열을 흔쾌히 제거할 것이다.…하나님을 율법과 단절시키는 자는(Deum exlegem qui facit) 그에게서 그의 영광의 일부분을 빼앗는 자이다"(CR VIII. 361). 이와 비슷한 내용이 Sermons on Job lxxxviii(욥 23:1-7)에 있다. "스르본느 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절대적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지옥에서 발명된 극악 무도한 모독이다"(CR XXXIV. 339f.). 참조.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 212. 여기서 칼빈이 한 비난을 Ockham도 확증했다. Super quatuor libros sententiarum subtilissimae quaestiones I. xvii. 2; 참조. Gabriel Biel, Epythoma et collectorium circa quatuor sententiarum libros I. xvii. 2. Wendel은 일반적으로 소르본느파의 주창자로 알려진 Duns Scotus를 조금 다른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Wendel, Calvin, pp. 92f.).

511) Homer의 Iliad xix. 86f.에 있는 것으로, 무사들의 모임에서 Agamemnon이 한 말임(LCL Homer, Iliad II. 342f.).(Calvin은 헬라어로 된 원문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512) "Deus impulsor fuit" 등. Plautus, Aulularia 737, 742에 있는 Lyconides의 말임. "Deus impulsor mihi fuit…deos credo voluisse; nam nisi vellent, non fieret, scio"(LCL Plautus I. 310) 앞에서 언급된 "젊은이"는 Plautus의 Bacchides에 나오는 Pistoclerus를 가리킴.

513) 여기의 불경스러운 사람들은 자유 사상가들을 말함. 참조. Contre la secte phantatique des Libertins xiii-xvi(CR VII. 183-198). 본장의 3, 4, 7, 8항은 이 소책자에 나오는 많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514) Augustine, Faith and the Creed iv. 10(MPL 40. 187; tr. LCC VI. 359).

515) I. xvi. 4.

516) Luther, Tesseradecas consolatoria(14가지 위로), 1520. 여기서 그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섭리의 손길로 돌보신다는 사실을 감명 깊게 말하고 있다. Werke WA VI. 110f., 125f.; tr. B. Woolf, Reformation Writings of Martin Luther II. 28ff., 55ff. Calvin의 시편 주석에도 이런 내용의 표현들이 많이 있다.

517) "Inaestimabilis piae mentis foelicitas," 참조. I. v. 1, 각주 2.

518) Origen, De principiis III. I. 17(GC S 22. 228; MPG 11. 283ff.; tr. ANF lV. 322; G. W. Butterworth, Origen On First principles, pp. 193f.).

519) 참조. Erasmus, De libero arbitrio arbitrio, ed. J. von, Walter(Quellen schriften zur Geschichte des protestantismus 8), pp. 38, 79; Calvin, Sermons sur le cantique deu roi Ezekias(사 38:9-20)(CR XXV. 252-579).

520) 본장은 1559년판에 새로 증보된 것으로서, 다른 곳에서(예:II. iv, v; III. xxiii, xxiv.) 산발적으로 나오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521) Lombard, Sentences I. xlv. 11(MPL 192. 643). 참조. Augustine, De ordine I. i-iii(MPL 32. 977ff.; tr. R. P. Russell, Divine Providence and the Problem of Evil, pp. 6-11); Enchiridion xxiv. 95f.(MPL 40. 276; tr. LCC VII. 394f.).

522) 참조. I. xvii. 2, 각주 3. 참고. 소책자 Calumniae nebulonis cuiusdam de occulta providentia Dei…ad easdem responsio(1558), Calvin의 이 소책자에서 인용되고 또 대답되고 있는 Sebastian Castellio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책에 보면 Calvin은(7항)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받고 있다. 즉, Calvin은 하나님께서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두 가지 의지를 가지심으로써 괴롭힘을 받고 있어서, 결국은 그가 이것을 말할 때, 다른 것을 생각하며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Calvin은 약간 흥분조로 대답하고 있다(CR IX. 287f., 302ff.).

523) II. iv. 1-4.

524) "polupoivcilon."

525) 신앙과 인간의 무능력 또는 우매함의 두 가지 주된 요소는 Calvin의 다음과 같은 논리의 기초가 되고 있다. 즉, Calvin은 3항과 4항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금하는" 것을 "의지하시되" 그렇지만 의지는 여전히 "하나요 단순"하다고 하는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의식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논리는 성경에 종속된다. 그리고 Calvin의 경우 특히 특출하게 두드러진 것으로서, 논리는 계시된 비밀의 한계를 초월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참조. I. xiii, 1-3; III. ii. 14; III. xxiv. 17; 특히 III. xviii. 10에서도 똑같은 근거로 결론을 거부하고 있다.

526) Augustine, Enchiridion xxvi. 100f.(MPL 40. 279; tr LCC VII. 399f.); Augustine, Psalms, 시 111:2(라틴어 성경, 시 110. 2)(MPL 37. 1464; Calvin 시편 주석 111:2).

527) Augutine, Letters xciii. 2(MPL 33. 324; tr. FC 18. 63).

528)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xxi. 42(MPL 44. 907; tr. NPNF V. 462)

529) Augustine, Psalms. 시 61. 22. "Discutit Deus quid quisque voluerit; non quid potuerit"(MPL 36. 746; tr. LF <시 62편> psalms. III. 208); Augustine, John's Gospel vii(요 4:7). "Non quid faciat homo, sed quo animo et voluntate faciat"(MPL 35. 2033; tr. NPNF VII. 503f.).

530) 칼빈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에 관하여 본 강요의 서두에서 한 말을 여기서 다시 거론한다. 참조. I. i. 1 및 본장의 1절과 4절. 그리고 Erasmus, Enchiridion 3(영역, LCC xiv. 308ff.)을 보라. "Gnw'qi sautovn"(또는 "seautovn")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Delphi에 있는 신전에 새겨져 있었고, 이 말이 Xenophon의 Memorabilia IV. ii. 24­29(LCL edition, pp. 286f.)에 기록된 Socrates의 훈화의 제목이 되었다. Cf. Aristotle, Rhertoric II. xxi. 1395a(LCL edition, pp. 282ff.). 이 말을 Cicero는 여러 번 인용 논평했다. 예컨대, "Apollo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할 때 그는 '너의 영혼을 알라'는 뜻으로 말했다." Tusculan Disputations I. xxii. 52(LCL edition, pp. 62f.). 이 생각과 칼빈의 해석이 일치한다.

531) Cicero, Nature fo the Gods III. xxxv. 87, 88에서 아카데미파의 Cotta는, 지성과 덕성과 믿음은 우리 자신 안에 있으나, 안전과 재물과 승리는 신들에게서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영역, LCL edition, pp. 372-375).

532) 칼빈은 여기서 의지부자유론의 힘찬 움직임을 나타내 보인다고 pannier는 말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창조된 목적을 깨닫는 동시에 현재 도덕적으로 무력함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힘과 구원을 하나님에게서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pannier, Institution I. 311, p. 84의 주 a).

533) Cf. I. xv. 1-4.

534) "Vitagque futurae meditationem." Cf. III. ix.

535) Augustine, psalms, ps. 18. ii. 15(MPL 36, 163; 영역, LF psalms I. 138f.).

536)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xviii(MPL 183, 923; 영역, S. 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179).

537) Pelagius(354-420년경)는 영국 출신의 수도사였다. 아담의 죄로 인해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락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그 결과로 어거스틴은 일련의 논문과 서간으로 자신의 주장을 해석하며 옹호했다. 참조. Augustine, Retractations I. xiii. 5(MPL 32. 604); Against Julian III. xxvi. 59(MPL 44. 732f.; 영역, FC 35. 159f.). 펠라기우스는 자기보다 더 전투적인 동지인 아일랜드 출신의 Coelestius와 함께 로마에서부터 북부 아프리카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소아시아를 순방하면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412년과 418년의 카르타고 공의회에서와 418년의 황제 칙령으로 정죄되었고, 그 후로 교황 Zosimus는 그때까지 두둔하고 옹호하던 Coelestius를 정죄하는 데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단설에 포함된 개념들을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서는 선천적으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이단설의 핵심이다. 이 논쟁에 관한 문서들을 간단하게 발췌한 것이 H. 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p. 74-87에 있다. A. Souter가 펠라기우스의 글을 편집하였다. Pelagius's Expostitions of the Thirteen Epistles of St. Paul, Texts and Studies IX(Part I, Introduction; Part II. Text).

538) Cf. Augustine, City of God XVI. xxvii: "인류의 조상이 공통하며, 저 한사람 안에서 모든 아기들이 죄를 지었으므로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였다…아기들은…실제상의 죄가 아닌 본원적(本源的)인 죄 속에서 태어난다"(MPL 41. 506; 영역, MPNF II. 326). 같은 뜻의 어거스틴의 다른 문장들이 Smits II. 30과 OS III. 233f.에 인용되었다. 펠라기우스가 처음으로 어거스틴에게 반대하게 된 원인은 인간의 무력함을 의미하는 어거스틴의 유명한 주장에 있었다(Confessions X. xxix. 40; X. xxxi. 45): "Da quod iubes et iube quod vis"("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오며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MPL 32. 796. 798; 영역, LCC VII. 225, 228). Cf. II. v. 7, 주 17; II. viii. 57, 주 67.

539) 여기서 칼빈은 많이 논의된 트라툭스(tradux)라는 말을 쓰면서 개인 영혼의 기원에 대한 교부들의 논의를 생각하고 있다. 참조. I. xv. 5, 주 15. 어거스틴과 칼빈은 모두 창조된 인류의 단일성은 역설하지만 유전설은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하나의 요소가 아담의 영혼에 옮겨져서 모든 인간 영혼의 근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영혼 유전설(traducianism)이다. 사실 칼빈은 이 주장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에 대립되는 영혼 창조설(creationism)에도 반대했으며, 이것은 Vincentius Victor가 미숙한 형태로 발표했었다. Augustine, On the Soul and Its Origin I. iv; II. xiv(MPL 44. 477; 507f.; 영역, NPNF V. 316; 340f.)을 보라. 중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견해에 대해서는, Laon의 Anselm의 글에 대한 E. R. Fairweather의 주를 참조하라(LCC X. 261, 주 2). 이 논쟁 전체에 대해서는 C. Hodge의 Systematic Theology II. iii과 J. F. Bethune­Baker의 An Introduction to the Early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pp. 302ff.을 보라. 칼빈주의 신학은 각각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신다고 하는 영혼 창조설에 찬성했다. Hodge는 p. 64에서, "Calvin과 Beza와 Turretin과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창조론자였다"라고 말한다. 종교 개혁에 반대한 사람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말한 사람이 있었다. Cf. Alfonso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II, s.v. "anima"(1543, fo. 34C-35A).

540) Benoit는 여기서 요한복음 3:6에 대한 칼빈의 주해를 인용한다. 그 주해에서는, 원죄는 육신의 출생에 의하여 보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예정으로 우리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부패하게 된 것이며,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던 은사들을 아담으로 인하여 빼앗기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541) Cf. Augustine. "Regeneratus non regenerat filios carnis, sed generat."("거듭난 사람도 거듭난 육의 아들들을 낳는 것이 아니고 그저 낳는 것이다.") On the Grace of Christ and on Original Sin II. xl. 45(MPL 44, 407; 영역, NPNF V. 253).

542) Acts of the Synod of Trent with the Antidote I, session 5, decree 1(CR VII. 425f.; 영역, Calvin, Tracts III. 86ff.).

543) Augustine. On the Grace of Christ and on Origin이 Sin, loc. cit.

544) 멜란히톤은 원죄를 일컬어 "우리를 죄로 끌고 가는 선천적 성향과 어떤 선천적 충동 및 힘(genialis impetus et energia)"이라고 한다. 그는 불꽃이 위로 향하는 것과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따라서 스콜라파와 같이 원죄와 실제의 죄를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원죄는 "운초의 의(義)의 결핍"이라는 스콜라파의 주장에 찬성하면서도 그는 원죄의 정의로서는 미흡하다고 역설하며, 죄는 기본적인 자애(自愛)에서 생기는 적극적인 불경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Loci Communes(1521), ed. H. Engelland(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ed. R. Stupperich, II. i. 17ff.); 영역, Kolde의 1910년판 C. L. Hill,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p. 81ff.

545) 어거스틴은 On Marriage and Concupiscence라는 논문에서 concupiscence라는 말을 많이 썼는데, 거기에는 그 말은 "우리의 죄 많은 육에 있는 죄의 법"이라는 넓은 의미로 쓰였다(I. xxxiv)(MPL 44. 435; 영역, MPNF V. 277).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해지는 문제를 논하면서 Peter Lombard는 원죄를 "fomes peccati, id est, concupiscentia"("죄의 불씨, 즉, 육욕")이라고 형용하고, 원죄는 "(아담을 통하여 concupiscence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부패하게 만드는 선천적인 죄과"라고 부른다. Sentences, II. xxx. 7f.(MPL 192. 722). 참조. LCCX. 352f.에 원죄에 관한 Stephen Langton의 재미있는 전형적인 스콜라파적 논법이 있다.

546) Lombard, Sentences, II. xxx. 7.; xxxi. 2-4(MPL 192. 722. 724).

547) Cf. II. ii. 15, ad finem ; II. iii. 2.

548) 칼빈이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des Libertins(1545)(CR VII. 184f.)와 Epistre contre un certain Cordelier(1547)(CR VII. 347, 350ff.)에서 자유주의자들을 공격했을 때 이 점도 지적했다.

549) Cf.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XI. iv. vi, x, xiii(MPL 34. 431-434).

550) III. xxx-xxiv; cf. I. xv. 8. 강요의 1539년 판과 1541년 판의 여기에 해당하는 구절에서, 칼빈으로서는 처음으로 "predestination"(예정)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Pannier는 말한다(Pannier, Institution I. 312). 그러나 이 단어의 동사형은 이미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OS I. 390; 영역, P. T.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p. 36)에서 사용되었다.

551) Cf. I. i. 2, 주 7; I. xiv. 3, 주 11.

552)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I. i. 3(MPL 34. 221); Contra Julianum, opus imperfectum V. xl(MPL 45. 1477).

553) Cf. I. xiii. 1.

554) Augustine, Letters ccxv(잠 4:26의 해석)(MPL 33. 971ff.; 영역, FC 32. 65ff.); John's Gopel liii. 8(MPL 35. 1778; 영역, NPNF VII. 293f.).

555) 칼빈의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OS I. 382; 영역,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p. 23)에도 같은 말이 있다. 참조. Pannier, Institution I. 95(p. 312에 관한 주 a).

556) Augustine, John's Gospel lxxxi. 2(MPL 35. 1841; 영역, NPNF VII. 345); Letters ccxvii, 3(MPL 33. 981; 영역, FC 32. 80f.).

557) 자유의지에 관한 에라스무스의 루터 반박문 De libero arbitro diatribhv가(ed. J. von Walter, Quellenschriften zur Geschichte des Protestantismus 8, pp. 1, 5ff.) 취한 입장. 이 논문의 많은 부분이 The portable Renaissance Reader, ed. J. B. Ross and M. M. McLaughlin, pp. 677-693에 번역되었고, 전편의 번역은 LCC XVII에 있다.

558) I. xv. 7.

559) Plato, Republic IV. 14ff.(LCL Plato, Republic I. 394ff.); Aristotle, De anima III. x. 433(LCL ed., pp 186-191).

560) I. xv. 6.

561) Plato, Laws I. 644E(LCL Plato, Laws I. 68f.).

562)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III. i. 2(LCL ed., pp 226f.).

563) 참조. Plato, Phaedrus 74ff., 253D-254E(LCL Plato I. 494-497).

564)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III. 5. 1113b: "덕행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으며 죄과도 그렇다. 우리의 행동 능력 안에 있으면 또한 우리의 행동하지 않는 능력 안에 있다"(영역, R. McKeon, Basic Works of Aristotle. p. 972; 참조. LCL ed., pp. 142f.); Seneca, Moral Epistles xc. 1.(LCL Seneca, II. 394f.).

565) Cicero, Nature of the Gods III. xxxvi. 86f.(LCL ed., pp. 372f.).

566) 칼빈은 그의 저서 De Scandalis(1550)에서도, 어떤 교부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돌림으로써 철학자들에게 과도한 경의를 표시했다고 비난했다(CR VIII. 19; 참조. Benoit, Institution II. 25).

567) 칼빈은 교부들을 언급하면서 에라스무스를 포함한 동시대의 인본주의자들에 해당하도록 논의를 다소 조절한다. Pannier, Institution I. 313(p. 101의 주 a)를 보라.

568) Chrysostom, De proditione Judaeorum, hom. i(MPG 49. 377); Homilies on Genesis: hom. xix. 1; hom. liii. 2; hom. xxv. 7(MPG 53. 158; 54, 466; 53. 228).

569) Jerome, Dialogus contra Pelagianos III. 1.(MPL 23. 569).

570) Duns Scotus, In sententias II. xxix. 1(Opera omnia XIII. 267f.).

571) 이 문장은 문체와 사상에 있어 어거스틴을 그대로 닮은 것으로 중세기에 작성되었다. Lombard는 Sentences II. xxv. 8(MPL 192. 207)에서, "alia sunt corrupta per peccatum, id est naturalia…alia subtracta"("어떤 것, 즉, 자연적인 것은 죄로 부패했고…어떤 것은 제거되었다")라고 했다. Augustine, Questions on the Gospels ii. 19도 보라. 거기에서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하여 어기스틴은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이해력이 있는 점에서는 살았지만 죄에 억압되는 점에서는 죽었다. 따라서 사람은 "절반만 살았다"(semivivus)라고 한다(눅 10:30)(MPL 35. 1340). 이와 관련된 다른 글들로는, Augustine, On Nature and Grace iii. 3; xix. 22(MPL 44. 249f.-256f.; 영역, NPNF V. 122; 127f.); Pseudo­Augustine, Hypomnesticon(또는 Hypognosticon), contra pelagianos et caelestinos III. viii. 11(MPL 45. 1628)이 있다. 또, II. v. 19, 주 38; 본절의 주 21; 12절의 주 53; 16절의 주 62; 겔 11:19-20에 대한 주해; T. F. Torrance, Calvin's Doctrine of Man, ch. vii도 보라.

572) "auvtexouvsio"." 교부 중에서 이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로 생각된다. 그는,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이라는 바울의 말은(고전 13:11) "말씀에 순종하여 자주적이(auvtexouvsiou")된 우리들"에 해당되는 것이 라고 해석했다. Instructor I. vi. 33(GCS Clemens Alexandrinus I. 110; MPG 8. 289f.; 영역, ANF II. 217).

573) Origen, De principiis III. i. 3(GCS 22. 197; MPG 11. 252; 영역, ANF IV. 303; Butterworth, Origen on First Principles, p. 159).

574) 참조. Augustine, Sermons clvi. 9-13(MPL 38. 855-857; 영역, LF Sermons II. 767-770); Pseudo­Augustine(St. Victor의 Hugh학파), Summa sententiarum iii. 8(MPL 176. 101); Lombard, Sentences II. xxiv. 5(MPL 192. 702) 및 본절의 주 18. 또, OS III. 246, 주 3; Smits II. 31을 보라.

575) Bernard, De gratia et libero arbitrio ii. 4(MPL 182. 1004; 영역, W. W. Williams, Concerning Grace and Free Will, p. 10).

576) Anselm, Dialogus de libero arbitrio iii(MPL 158. 494): "Potestas servandi rectitudinem propter ipsam rectitudinem."

577) Lombard, Sentences II. xxiv. 5(MPL 192. 702).

578) Aquinas, Summa Theol, I. lxxxiii. 3.

579) "Res medias"("중간적 사물")은 헬라어 ajdiavfora의 번역(참조. 독일어의 Mitteldinge), III. xix, 7-9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의 논의를 보라. II. ii. 12-14; II. iii. 5도 보라.

580) Prosper of Aquitaine, De vocatione omnium gentium(450년경) I. ii. 이 논문은 Ambrose의 작품들과 함께 1492년에 Basel에서 출판되었고, 그의 이름을 가칭한 글들과 함께 NPL 17에, 그리고 이본(異本)이 Prosper의 작품들과 함께 MPL 51에 포함되었다. 여기서 언급된 구절을 위해서는 MPL 17. 1075; 51. 649f.와 영역, P. de Letter, St. Proper of Aquitaine, The Call of All Nations(ACW XIV), p. 27을 보라. 참조. M. Cappuyns, "L'Auteur deu De vocatione omnium gentium", Revue Bndictine XXXIX(1927), 198-226.

581) II. xii-xviii.

582) Lombard, Sentences II. xxv. 9(MPL 192. 708); Bernard, De gratia et libero arbitrio iii. 7(MPL 182. 1005; 영역, W. W. Williams, Concerning Grace and Free Will, pp. 15f.).

583) II. iii. 5.

584) 여기서 칼빈은 Laelius Socinus를 암시하는 것 같은데, 이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서에서(1555년 6월 5일), 칼빈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은총이 효과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버림받은 사람들에게서의 "성령의 낮은 작용"을 구별했다. Responsio ad aliquot Laelii Socini quaestiones, 2-4(CR X. 163ff.).

585) Lombard, Sentences II. xxvi. 1(MPL 192. 710).

586) Bernard, De gratia et libero arbitrio xiv. 46(MPL 182. 1026; 영역, W. W. Williams, Concerning Grace and Free Will, p. 48);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xvii. 33(MPL 44. 901; 영역, NPNF V. 457).

587) Prosper of Aquitaine, The Call of All Nations II. iv(MPL 51. 96; 영역, ACW XIV. 96).

588) 이전의 "비교적 건전했던" 스콜라 학자들과 "근래의 궤변가들"을 구별한 데 주목하라. 칼빈은 후자들에 Ockham 및 그의 해석가들과(예, 1495년에 죽은 Gabriel Biel) 칼빈 시대의 소르본느 대학 신학자들을 포함시킨 듯하다.

589) Lombard, Sentences II. xxv. 8(MPL 192. 708). 참조. II. ii. 15(죄인에게도 선한 것이 존속함을 설명한다); II. iii. 2(특히 끝의 문장을 참조하라. 여기서는 사람에게 아무런 선한 것도 없다고 한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칼빈의 용어에 과장이 있다는 것과 그런 말의 근거가 된 신학적 입장이 나타난다. 그는 그런 입장에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선한 성질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에게는 "선한 것이 전연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참조.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OS I. 381; CR XXII. 36f.; 영역,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5, p. 22): "성경은 사람이 죄의 노예임을 자주 확언한다…사람의 심정에는 독소가 전체에 깊이 배어서, 죄의 열매밖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II. iii. 2-4에서 이교도들에게 있는 덕성은 "선물"이며 인간의 패악한 상태에도 상대적으로 선한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한 것에 유의하라. T. F. Torrance는 그의 Calvin's Doctrine of Man, 7-8장에서 칼빈 사상의 이 방면을 많이 밝혔다.

590) "evqelovdoulo"." Pannier는,(Montaigne의 친구) Etienne de Ba tie는 이미 1548년에 유명한 정치 논문 La servitude voluntaire(자원한 종살이)를 썼다고 지적한다.

591) "logomaciva"."

592) Augustine, Against Julian II. viii. 23(MPL 44. 689; 영역, Fc 35. 83f.). 참조. Calvin, Institution in Faith(1537), 5(OS I. 381; CR XXII. 36; 영영, Fuhrmann, p. 22).

593) Augustine, John's Gospel liii. 8(MPL 35. 1778; 영역, NPNF VII. 293).

594) Augustine, Letters cxlv. 2(MPL 33. 593; 영역, FC 20. 163f.).

595) Augustine,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 iv. 9(MPL 44. 296; 영역, NPNF V. 161).

596) 위의 문장들에서 인용된 어거스틴의 다른 구절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Enchiridion ix. 30(MPL 40. 246; 영역, LCC VII. 356f.);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viii. 24(MPL 44. 607; 영역, NPNF V. 414), I. iii. 6(MPL 44. 553; 영역, NPNF V. 379), III. vii. 20: "Hominis libera, sed Dei gratia liberata, voluntas"("사람의 자유로운,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해방된 의지")(MPL 44. 603; 영역, NPNF V. 412); Sermons cxxxi. 6(MPL 38. 732).

597) Augustine,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xx. 52(MPL 44. 234; CSEL60), 208f.; 영역, LCC VIII. 236f.); On Rebuke and Grace xiii. 42(MPL 44. 942; 영역, NPNF V. 489);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 ii. 5(MPL 44. 552; 영역, NPNF V. 378).

598)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iii. 7; iv. 8(MPL 44. 964, 966; 영역, NPNF V. 500). 여기서 어거스틴은 Cyprian, Testimonies Against the Jews, to Quirinus III. iv에서 인용한다:"아무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MPL 4. 764; 영역, ANF V. 528). 같은 문장이 다른 글에서도 인용되었다.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V. ix. 25-26(MPL 44. 627f.; 영역, NPNF V. 428).

599)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VIII. iv-vi(MPL 34. 375ff.); Eucherius(434-450년까지의 Lyons 감독), Commentarii in Genesim I, 창세기 2:9의 주해(MPL 50. 907).

600) Erasmus가 출판한(Basel, 1530) Chrysostom의 저적집에서는 이 말들이 강림절 첫째 일요일 설교에 나타나는데, 그 후의 판에서는 이 설교가 포함되거나 언급되지 않았다(OS 1III.252, 주 2).

601) II. ii. 1; 참조. II. i. 1-3.

602) Chrysostom, De profectu evangelii 2(MPG 51. 312).

603) 프랑스어판에는 Demosthenes의 이름이 나타났고, Quintilian(Institutio oratoria XI. iii. 6 <LCL Quintilian IV. 244f.>)은 Demosthenes를 이 일화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letters cxiii. 3. 22(MPL 33. 442; 영역, FC 18. 282)에서 이 이야기를 사용했다. 칼빈은, 수도원과 스콜라파의 도덕론자들과 같이 교만이 가장 큰 죄과이며 겸손이 최고의 덕성이라고 한다. 참조. Sermons on Job lxxx(CR XXXIV. 234; 영역, A. Golding, 1580 edition, p. 376), 여기서는 경손을 "최고의 덕…모든 덕의 어머니와 근본"이라고 한다. 칼빈은 Nursia의 Benedict의 Rule of Monks vii, "겸손의 12 단계"에 있는 고전적 구절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J. McCann,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pp. 36-49; 영역 LCC XII. 301-304). 참조. Bernard의 경건 지도서 De gradibus humilitatis et superbiae(이 글의 라틴 원문 및 주석이 B. R. V. Mills, Select Treatises of St. Bernard에 있으며, 그 영역은, B. R. V. Mills의 The Twelve Degrees of Humility and Pride이다).

604) Augustine, John's Gopel xlix. 8(MPL 35. 1750; 영역, NPNF VII. 273); On Nature and Grace liii. 62(MPL 44. 277; 영역, NPNF V. 142); Psalms, 45. 13(MPL 36. 523); Psalms, Ps. 70. 1. 2(MPL 36. 876; 영역, NPNF <PS. 46, 71> VIII. 160. 315).

605) "filautiva" caiv filoneiciva" morbo."

606) 위의 4절의 주 17과 18과 21; Augustine, On Nature and Grace iii. 3; xix. 21; xx. 22(MPL 44. 249, 256f.; 영역, NPNF V. 122, 127f.)을 보라

607) I. xv. 7, 8.

608) 칼빈은 계속되는 언급에서 예술을 빠뜨렸지만 그는 예술에 깊이 감탄했다. 참조. I. xi. 12: 창세기 4:20의 주해 Comm. Harmony Books of Moses, 출애굽기 20:4, 34:17. 이 문제를 논한 참고서들:L. Wencelius, L'Esthtique de Calvin II. v, vi; J. Bohatec, Bud und Calvin, pp. 467-471.

609) Seneca, On Clemency I. iii. 2; On Benefits VIII. i. 7(LCL Seneca, Moral Essays I. 364f.; III. 458f.); Lactantius, Divine Intitutes VI. x, xvii(CSEL 19. 515, 545; MPL 6. 668, 696; 영역, ANF VII. 173, 182). 창세기 2:18에 대한 주해에서 칼빈은, "사람이 사회적 동물로 창조된 원칙"에 대하여 말한다. 참조. Comm. Seneca On Clemency I. iii(CR V. 40).

610) plato, Meno 81f., 84(Dialogue of Plato, tr. Jowett I. 361ff.).

611) 참조. I. iv. 3, 주 6. "진리가 어디서 나타나든간에"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께서 확증하신다고 하는 생각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칼빈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선천적 능력들을 여기서는 주로 현세적이며 "저급한" 일들과 관련시키지만, 다른 곳에서는 이교 철학자들이 종교적 진리의 요소들을 인식했다는것을 자주 인정한다. I. iii. 1; I. v. 3을 참조하라. 우리가 주목할 것은, 칼빈은 성경 이외의 자료들과 자연인에게서 발견되는 진리를 환영하지만 Duns Soctus가 가장 잘 대표한 생각, 즉, 서로 조화되지 않는 두 가지 진리가 있다는 생각이 칼빈에게는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진리가 두 가지 수준으로 나타나며, 그 중의 하나는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사물에 대해서만 유용하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그는 Lactantius와 입장이 같다. 이 사람은, 철학자들은 "사물의 전체", 즉, 세계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사람이 그를 경배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각각 약간의 진리를 보았다고 말했다. Lactantius, Divine Institutes VII. vi-vii(CSEL 19. 605f.; MPL 6. 757, 759; 영역, ANF VII. 203f.). 철학이 사물의 본성을 탐구할 때의 진리는 "주께서 나는 진리라고 하신 그 진리다"라고 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말이 다소 이상한 것 같기는 하지만,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Stromata I. v. 32; GCS II. 21; 영역, ANF II. 307). 칼빈은 여기서 어거스틴의 말 "In ipsis(즉, 이교 학자들) reperiuntur nonnulla vestigia veritatis"("그들에게서는 약간의 진리의 흔적이 발견된다")를 염두에 둔 것 같다(Against Julian IV. xii. 60; MPL 44. 767; 영역, FC 35. 218). 디도서 1:12의 주석에서 칼빈은, 비록 악인이 말한 것일지라도 참된 말이면 모두 하나님께서 온 것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4:36의 주석을 참조하라.

612)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I. xxvi. 64(LCL ed., pp. 74f.).(Cicero는 Plato, Timllaeus 47을 인용한다.)

613) "fuciouv""

614) 참조. II. iii. 2(끝 부분).

615) Lombard, Sentences II. xxv. 8(MPL 192. 707). "스콜라 학자들"을 여기에 첨가한 것은 Lombard의 Sentences에 주석을 붙인 스콜라 학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장 4절의 주 17, 18과 12절의 주 53을 보라.

616) "Generalem Dei gratiam." 칼빈의 이 개념을 A. kuyper와 H. Bavinck의 뒤를 이어 H. kuiper(Calvin on Common Grace)가 깊이 연구했으며, 그 후에 다른 학자들이 여러 가지로 논했다. 여기서 표명된 생각을 설명하는 구절이 본서에 많이 나온다. 예:I. iii. 1-3; I. iv. 2("자연의 광명"); I. v. 3-4; I. v. 7-8; I. xi. 12; I. xiii. 14; I. xvii. 1; II. ii. 12-27; II. iii. 3; II. vii. 1; III. ii. 32; III. vii. 6; III. ix. 3; III. xiv. 2; III. xx. 15; IV. x. 5; IV. xx. 1-4; IV. xx. 9-11. H.Kuiper는 이 구절들뿐만 아니라 칼빈의 저서 전체에 산재한 많은 언급들도 논했다. 참조. Benoit, Institution II. 42, 주 1. 칼빈의 주장을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실례는 C. Van Til의 Common Grace에 있다. Kuiper와 그의 선배들이 이 용어를 쓸 때에는, 인류에 있는 선한 것은(종교적 갈망, 단정한 행위, 사회생활에서의 친절, 예술적 및 과학적 업적 등)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칼빈이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II. ii. 13-15에 해당하는 1541년 프랑스어판 본문에 대한 Pannier의 주를 보라. Institution I. pp. 314f.(p. 117의 주 a; p. 119의 주 b와 c).

617) 공통된 은총이나 여기서 말한 특수한 은총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 특수 은총은 능력, 덕성, 용기 등의 특수한 천품으로서, 이것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기에 적합하지만 그 자신은 인간에게 공통된 타락 상태에 그대로 있을 수 있다. 참조. II. iii. 4(거기서 칼빈은 이런 관점에서 카밀루스와 사울, 그리고 플라톤이 언급한 호머의 영웅들을 논한다).

618) "oivon evp h'mar a{ghsi." Homer, Odyssey xviii. 137(LCL Homer, Odyssey II. 206f.).

619) I. iii. 1, 3.

620) 참조. I. ii. 2, 주 6; I. x. 2, 주 6; III. ii. 6, 주 14.

621) II. ii. 12. 또한 요한복음 1:5의 주해를 보라.

622) 참조. 본장 16절의 주 62.

623) 참조. I. vii. 4-5; II. v. 5(후반부); III. xi. 19; III. xxiv. 2.

624) 참조. II. i. 5, 주 9. 어거스틴에게서 많은 구절이 Smits II. 32f.와 OS III. 264에 인증 되었다.

625) 참조. II. ii. 18에 연결된 것.

626) 참조. II. vii. 1-2, 51; 로마서 2:14-16에 대한 주해; G. Gloede, Theologia naturalis bei Calvin, pp. 178ff.; 참조. Bohtec, J. Calvins Lehre von Staat und Kirche, pp. 20-35; E. Brunner, Justice and the Social Order(M. Hottinger 역, p. 233); J. T. McNeill, "Natural Law in the Teaching of the Reformers," Journal of Religion XXVl(1946), 168-182.

627) Plato, Protagoras 357(LCL plato lV. 240f.).

628) Themistius, In libros Aristotelis de anima paraphrasis VI(ed. R. Heinze, p. 112).

629) "Video meliora proboque, deteriora sequor." Ovid, Metamorphoses VII. 20에 있는 Medea의 말에서 온 것이다(LCL ed., Metamorphoses I. 342).

630)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VII. 1-3. 1145-1147(LCL ed., pp. 374-377; 영역, McKeon, Basic Works of Aristotle, pp. 1036-1042).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성과 지식을 동일시하는 플라톤의 견해에 반대한다.

631) 참조. II. viii. 12, 주 16.

632) "그들은 재물을 버리고, 경건하며 순결한 마음으로 신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Cicero, De legibus II. viii. 19, 24(LCL ed., pp. 392f., 400f.).

633) II. ii. 22, 주 74.

634) Augustine,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I. v. 5(MPL 44. 153f.; 영역, NPNF V. 45f.).

635) 의지에 대한 "검토"는 2장에서 시작하여 5장까지 계속된다.

636) II. ii. 4.

637) Aquinas, Summa Theol. I. lxxxiii. 3.

638) Origen, De principiis III. i. 20(GCS 22. 234f.; MPG 11. 294ff.; 영역, ANF IV. 324; Butterworth, Origen On First Principles, p. 157); Chrysostom, Homilies on Hebrews, hom. xii. 3(MPG 63, 99; 영역, LF 44. 155); Lombard, Sentences II. xxiv. 5(MPL 192. 702); Duns Scotus, In Sententias I. xvii. 2. 12; 3. 19(Opera omnia X. 51b, 74a).

639)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 x. 22(MPL 44. 561; 영역, NPNF V. 384). 칼빈이 "자연인"이라고 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점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활발하게 토론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어거스틴이 처음에 채용했던 견해를 취했지만, 어거스틴은 칼빈이 지적한 대로 본 인용에서는 결국 그 견해를 버렸다. J. Nichols의 영역인 Arminius, dissertation on the seventh Chapter of Romans(Works of James Arminius), II. 287-322를 보라.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논하는 사람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며 은총하에 있지 않고 율법하에 있다"(322면). 루터는 그의 로마서 강의(Lectures on Romans, 1515-1516)에서, 로마서 7:24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한 말을 "여전히 육적인 사람"의 발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하면서 이것은 영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Werke WA LVI. 346).

640) John Fisher(Rochester의 감독, 1504-1535),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1523), pp. 548f.; J. Cochlaeus, De libero arbitrio hominis II, fo. L 6b; A.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IX(1543 ed., fo. 125 D-F).

641) Augustine, Sermons clxxvi. 5-6(MPL 38. 952f.).

642)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1523), pp, 560ff., 568f.;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p. 61ff.; J. Cochlaeus, De Libero arbitrio I. fo. E 2bff. 이 저서들에 의하면,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사람이 많지만은 그것이 선을 선택하는 자유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으며, 다만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이 없이는 그 경향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643) 참조. Cyprian; "Salus extra ecclesiam non est"; Letters lxxiii. 21(CSEL. 3. ii. 795; 영역, ANF V. 384).

644) 참조. II. i. 6.

645) II. ii. 12.

646) Sallust, The War with Catiline iii. 5(LCL ed., pp. 8ff.)에 Catiline의 악한 본성이 묘사되었다. 그는 Cicero에게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반대로 무명으로 지낸 고귀한 애국자 Camillus는 Horace와 Vergil과 Juvenal이 찬양했다. 참조. Augustine, City of God II. xvii, xxiii; III. xvii(MPL 41. 61f., 96f; 영역, NPNF II. 32. 37. 54).

647) Augustine, Against Julian lV. iii. 16ff.(MPL 44. 774ff.; 영역, FC 35. 179f.)

648) "Speciales Dei pratias"…"Speicalis gratiae" 등의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II. ii. 17, 주 63, 64; II. iv. 7, 주 13; 본 4절에서의 Camillus에 관한 말.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이 훌륭한 영웅적 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저 특수한 천품을 칼빈은 하나님의 특수 은총에 돌린다.

649) Plato, Cratylus 393f.(LCL plato VI. 38-45).

650) Bernard, Concerning Grace and Free Will vi. 16(MPL 182. 1040; 영역, W. W. Williams, p. 32).

651) 루터는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이 구별을 했다. "내가 말하는 필연은 강제가 아니며, 변동할 수 없다는 의미의 필연이다." 악인은 악을 자발적으로 행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악행을 버리지 못한다고 루터는 설명한다. Luther, De servo arbitrio(Werke WA XVIII. 634; 영역, H. Cole, The Bondage of the Will, p. 72). De Castro는 저 두 가지를 거의 동일시한다. Adversus omnes haereses IX(1543, fo. 123D).

652) 칼빈은 그의 저서 Defensio doctrinae de servitute humani arbitrii contra A. Pighium(1543)에서 Pighius가 이 견해를 가졌다고 비난했다(CR. VI. 333f.). Albert Pighius는 Louvain 출신 학자로서 로마에서 Adrian VI 이하의 교황들을 섬겼고,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서책들을 썼다. 칼빈의 논문은 그의 De libero hominis arbitrio et divina gratia(Cologne, 1542)에 대한 대답이었다. 참조. Augustine, On Nature and Grace xlvi. 54(MPL 44. 273; 영역, NPNF V. 139).

653) Augustine,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 iv. 9(MPL 44. 295; 영역, NPNF V. 161); On Nature and Grace lxvi. 79(시 25:17을 인용. "de miserationibus meis" 나의 고난에서(라틴역, 시 24:17)(MPL 44. 286; 영역, NPNF V. 149).

654) Reinhold Niebuhr도 다른 용어로 같은 구별을 하여 사람은 "불가피하게" 죄를 지으나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다.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first series, pp. 251-264.

655)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xxi. 7, 9(MPL 183. 1174f.; 영역, S. 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498.); Lombard, Sentences II. xxv. 5, 9(MPL 192. 707).

656) Lombard, Sentences II. xxiv. 5; II. xxv. 16(MPL 192. 702. 709);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 6.

657) 의지는 제게된 후에 대체되는가, 또는 동일한 "선천적 선물"이 갱신되는가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의지에 대한 칼빈의 용어들에 대해서는 본장의 7, 10, 12, 13, 14절들을 보라.

658) Augustine, Letters clxxxvi. 3. 10(MPL 33. 819; 영역, FC 30. 196).

659) Lombard, Sentences II. xxvi. 3(MPL 192. 711). 참조. John Fisher, Assertio Lutheranae confutatio, p. 604; "Auxilium Dei paratum est omnibus"(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준비되어 있다.).

660) Chrysostom, Homilies on Matthew, hom,. lxxxiv. 4(MPG 58. 756; 영역, NPNF X. 494f.).

661) 칼빈은 여기서 어거스틴의 여러 저작에 있는 글들을 요약했다. Enchiridion ix. 32(MPL 40. 248; 영역, LCC VII. 358);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I. xviii. 28(MPL 44. 168; 영역, NPNF V. 56); On the Grace of Christ and on Original Sin I. xiv. 15(MPL 44. 368; 영역, NPNF V. 223).

662)(한역에서 "재고한다", "생각한다"고 한 말은 영어에서) "recount"와 "account"며, 이것은 칼빈의 라틴어가 "recenseantur"와 "censeo"여서 일종의 재담이 된 것을 반영한다.

663) J.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 pp. 565f.

664) 이것은 A. Pighius의 논법이다. De libero hominis arbitrio et divina gratia(1542), fo. 97.

665) II. iii. 6.

666) "Quem trahit, volentem trahit": Chrysostom, De frendis reprehensionibus 6(MPG 51. 143); Homilies on the Gospel of John, hom. x. 1(MPL 59. 73; 영역, NPNF XlV. 35; FC 33. 95) 칼빈은 요한복음 6:44의 주해에서 그 문장을 "그릇되고 세속적인 주장"이라고 한다.

667)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viii. 13(MPL 44. 970; 영역, NPNF V. 504f,).

668) Lombard의 Sentences에 대한 Gabriel Biel의 주석에 있는 말을 칼빈은 미심쩍은 듯이 Ockham에게 돌린다. Biel, Epythoma pariter et collectorium circa guatuor sententiarum libros II. xxvii. 2. Herborn의 Nicholas(Ferber)의 말을 참조하라.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quod in se est) 다하면 그는 할 일을 충분히 한 것이며, 협력하는 은총이 그를 도우리라(Locorum communium adversus huius temporis haereses enchiridion xxxviii(ed. P. Schlager, 1529년판, CC 12. 132).

669) Augustine, Sermons xxvi. 3, 12, 4, 7(MPL 38. 172. 177. 172f., 174); xxx 8, 10(MPL 38, 192).

670) Lombard, Sentences II. xxvi. 8. 9; xxvii. 5(MPL 192. 713. 715).

671)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xvii. 33(MPL 44. 901; 영역, NPNF V. 457f.); Enchiridion ix. 32(MPL 40. 248; 영역, LCC VII. 358f.).

672) Erasmus, De libero arbitrio(ed. J. von Walter), pp. 75f.(눅 15:11-24, 고전 5:10, 롬 8:26에 대한 그의 해석을 근거로 한 것); Eck, Enchiridion(1532) L.7b.

673) 고린도전서 15:10에 대한 주해를 참조하라. 여기서는 에라스무스의 해석을 언급하는 듯하다(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 72). 여기서 논의되는 부분은 많은 사본에 "hv cavri" tou' qeou' hv suvn evmoiv"라고 되어 있으며, 칼빈이 말하는 관사는 둘째 hv 다.

674) 불가타역(시 58:11)을 따른 것.

675)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xi. 9(MPL 183. 876; 영역, S. 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121).

676)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사의 "4. 교부들이 종교 개혁의 교리에 반대한다는 선전"을 참조하라.

677)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xi. 31f.; xii. 33, 38; xiv. 45(MPL 44. 935f., 939f., 943; 영역, NPNF V. 484f., 487. 489f.); Lombard, Sentences II. xxv. 3(MPL 192, 707).

678) Augustine. Letters cxciv. 5: "Omne bonum meritium nostrum non in nobis faciat nisi gratia"(MPL 33. 880; 영역, FC 30. 313).

679) 14절에서 인용 또는 언급된 어거스틴의 글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On Grace and Free Will xx. 41(MPL 44. 905; 영역, NPNF V. 461);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xx. 52(MPL 44. 233; 영역, NPNF V. 106); Letters ccxvii. 5, 16(MPL 33. 984f.; 영역, FC 32. 86); Sermons clxxvi. 5, 6(MPL 38. 952f.; 영역, LF Sermons II. 907f.); On Rebuke and Grace viii. 17(MPL 44. 926; 영역, NPNF V. 478); Letters ccxiv. 7(MPL 33. 970; 영역, FC 32. 61f.).

680) 참조. III. i. 3.

681) 참조. II. iii. 5.

682) 이것은 분명히 Pseudo­Augustine, Hypomnesticon II. xi. 20(MPL 45.1632)의 변형이다. 루터는 그의 저서 Bondage of the Will에서 이 비유를 썼다(Werke WA XVIII. 635; 영역, J. L. Parker and D. R. Johnston, The Bondage of the Will, pp. 103f.). 참조. Martin Luther, Ausgewhlte Werke, ed. H. H. Borcherdt, Eragnzungsband, pp. 46f.; E. G. Schwiebert, Luther and His Times, pp. 691f. 또한 Augustine, Psalms, Ps. 33:5; 148:2(MPL 36. 310; 37. 1938; 영역, NPNF VIII. 74, 673)도 보라.

683) 참조. I. xvi. 4.

684) De praedestinatione et gratia(이 글을 어거스틴의 저적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며, 펠라기우스에 가까운 면이 있다), chs. vi, vii(MPL 45. 1668)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는 우리를 만드시기 전에 미리 우리를 아셨고, 바로 그 예지에서 아직 만드시지 않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저작임을 의심하지 않은 듯하며, 이 논문은 어거스틴의 두 Basel판에(둘째 것은 에라스무스의 편집) 실려 있었다가, 1577년의 Louvain판에서 처음으로 삭제되었다. MPL 45. 1665에 있는 "admonitio"와 H. Pope, St. Augustine of Hippo, p. 387을 보라. 또 Smits I. 191f.를 보라.

685) Augustine, Against Julian V. iii(MPL 44. 786ff,; 영역, FC 35. 247-250).

686) I. xviii.

687)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xvi. 33(MPL 44. 984; 영역, NPNF V. 514).

688) I. xvi-xviii.

689) II. ii. 13-17.

690) 이것은 루터파가 하는 말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 I. xviii에 있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에는 사회생활에서의 의를 행할 자유가 다소간 있으나…하나님의 의를 행할 능력은 없다." 참조. Melanchthon, Locicommunes(1535)에는, 사람은 "외면적인 사회적 행위"에 관해서 어떤 선택 능력을 보유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는 갱신됨이 없어도 자력(自力)으로 어떤 외면적인 법률 행위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철학자들이 사람에게 있다고 바르게 주장하는 의지의 자유다"(CR Melanchthon XXI. 374). 칼빈은 이런 모든 인간적 선택과 행위를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범위내에 둔다.

691)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 66.

692) 프랑스어 판에서 표현이 다르다. "Mais de la grace speciale que Dieu fait aux hommes de iour en your"("하나님이 하루하루 사람들에게 주시는 특수한 은총에 대하여")

693)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xx. 41(MPL 44. 906; 영역, NPNF V. 461).

694) 카르타고 사람들과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그들에게 돌아가서 참살을 당한 Regulus의 덕행을 Cicero와 Horace와 Seneca와 그밖의 로마 문필가들이 칭찬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항해서, 로마의 신들이 충실한 사람을 구출하지 못했다는 실례로서 레굴루스의 이야기를 들었다(City of God I. xv; MPL 41. 28; LCL Augustine, I. 68ff.; 영역, NPNF II. 11).

695)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 25.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파인(Eclanum의) 율리아누스를 반박한 미완성 논문에서, 같은 논법의 여러 가지 형태를 반복한 후에 그것에 대답한다. Contra secundam Juliani responsionem, imperfectum opus I. xlvi-xlviii, lx, lxxxii, lxxxiv, cvi(MPL 45. 1067-1071, 1081, 1103f., 1119f.);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 ii. 2(MPL 44. 293; 영역, NPNF V. 160); On Nature and Grace lxvii. 80(MPL 44. 286; 영역, NPNF V. 49).

696) II. iii. 5. 앞으로 이 구절에서 이미 말한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같은 구절을 가르킨다.

697)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xxi. 7, 9(MPL 183. 1174f.; 영역, S. 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498f.).

698)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III. 5. 1113b(LCL ed., pp. 142f.); Chrysostom, Homily on the Passage "The way of man is not in himself"(Jer. 10:23)(MPL 56. 153-162); Jerome, Letters cxxxiii. 5(CSEL 56. 249; 영역, NPNF 2 ser. VI. 231); Dialogue Against the pelagians I. 6(MPL 23. 501).

699) Augustine, Letters cxciv. 5. 19(MPL 33. 880); "Cum Deus coronat merita nostra nihil aliud coronat quam munera sua"("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영역, FC 30. 313); On Grace and Free Will vi. 15(MPL 44, 890; 영역, NPNF V. 450).

700) 이 구절에서 동시대의 의견들이라고 하는 것은 Cochlaeus, De libero arbitrio와 Erasmus, De libero arbitrio에 있는 것들이다. 또한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p. 50, 53, 59; OS III. 299에 있는 인증들을 보라.

701) Augustine, Psalms, PS. 70. ii. 5(MPL 36. 895; 영역, NPNF <PS. 71> VIII. 324). Sermons. clxix. 2(MPL 38. 917)에는 어거스틴의 다음 문장이 있다. "Nihil in eis invenis unde salves, et tamen salves"(당신은 그들에게서 그들을 구원하실 이유를 발견하시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702)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 xxiii. 5(MPG 53. 204).

703) Prosper of Aquitaine, The Call of All Nations II. iv(MPL 17. 1112; 51. 689f.; 영역, ACW XIV. 96.). 참조. II. ii. 5, 각주 27.

704) "Praetermittist."

705)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p. 40f.; Herborn, Locorum communium enchiridion xxxviii(CC12. 132).

706)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iii. 5(MPL 44. 918; 영역, MPNF V. 473); On the spirit and the Letter(MPL 44. 199; 영역, NPNF V. 83-114).

707) 칼빈은 여기서 성경 말씀과 성령의 작용이 결합될 필요성에 대해서 특색 있는 주장을 한다. 참조. I. vii. 4; III. i의 여러 곳과 첨부된 주들.

708) 참조. II. vii. 5; Eck, Enchirition(1541), fo. 188a.

709) 참조. I. vi. 2; II. vii. 6, 10-12.

710) 참조. Origen, De principiis III. i. 5(GCS 22. 200; MPG 11. 254; 영역, G. W. Butterworth, Origen On First Principles, p. 162; ANF IV. 304); Augustine, Sermons clvi. 12. 13(MPL 38. 857; 영역, LF Sermons II. 769f.).

711)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xvi. 32(MPL 44. 900; 영역, NPNF V. 457); Letters clxvii. 4 15(MPL 33. 739; 영역, FC 30. 45); Enchiridion xxxi. 117(MPL 40. 287; 영역, LCL VII. 409); Confessions X. xxix. 40; xxxi. 45(MPL 32. 796, 798; 영역, LCC VII. 225, 228); psalms, Ps. 118. xvi. 2(MPL 37. 1545; 영역, LF psalms V. 381); On the Gift of perseverance xx. 53(MPL 45. 1026; 영역, NPNF V. 547).

712) 본 장의 6절

713) Augustine, On the Grace of Christ and on Originul Sin I. xxx f.(MPL 44. 375; 영역, NPNF V. 228); On Christian Doctrine III. xxxiii(MPL 34. 83; 영역, NPNF II. 569). 어거스틴은 Tychonius가 390년경에 제출한 성경 이해의 7원칙 중의 셋째 것을 여기서 지적한다. 티코니우스 도나투스파였는데, 그 파의 지도자들에게 정죄되었다.

714) 본 장의 7절과 8절.

715) II. vii. 8, 9.

716) 이런 구절들과 논법들의 대부분은 루터와 반대자들이 Schatzgeyer, Erasmus, Cochlaeus, De Castro, Faber등­이미 사용했다. OS III. 308에 있는 인증들을 보라.

717) II. vii. 4; II. viii. 4; III. xvii. 1-3, 6, 7.

718)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Erasmus, De libero arbitrio(ed. von Walter, pp. 36f.); Eck, Enchiridion(1541), fo. 185a; Herborn, Locorum communium enchiridion xxxviii(CC12. 12P).

719) Herborn, op. cit., Loc. cit.; Acts of the conference of Ratisbon, 1541(황제가 제출한 문서에 포함되어 있음)(CR V. 518).

720) "oivqenivan"

721) 참조. Cochlaeus, De libero arbitrio(1525) I. fo. B la; C 8b f.

722) Augustine, Sermoms clvi. 11. 11(MPL 38. 855f.; 영역. LF Sermons II 769). 본절 최후의 문장이 언급하는 것은 이 구절이다. 또한 On Rebuke and Grace ii. 4(MPL 44. 918; 영역, NPNF V. 473)을 보라.

723) Augustine, Sermons clvi. 9. 9; 11. 11-12(MPL 38. 855f.; 영역, LF Sermons II. 769). 참조. Bernard, Concerning Grace and Free Will vi. 16(MPL 182. 1010; 영역, W. W. Williams, pp. 32ff.).

724)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xx. 41(MPL 44. 905; 영역, NPNF V. 461).

725) 참조. II. ii. 11 및 그 절의 각주 51에 열거된 전거들.

726) Herborn, op. cit., xxxviii(CC. 12. 130);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lX(1543, fo. 123E).

727) Erasmus, De libero arbitrio(ed. von Walter), p. 49.

728) Origen, Commentary on Romans vii. 16(Rom 9:16)(MPG 14. 1145); Jerome, Dialogue Against the Pelagians I. 5(MPL 23. 500f.); Augustine, Enchiridion ix. 32(MPL 40. 248; 영역, LCC VII. 358f.).

729) Augustine, Letters ccxvii. 4. 12(MPL 33. 983; 영역, FC 32. 84).

730) Eck, Enchiridion(1532) xxxi. L 5a;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lX(1543, fo. 124D).

731) 에라스무스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무슨 까닭에 집회서가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는지를 모르겠다고 첨부했다. De libero arbitrio(ed. von Walter), p. 19.)

73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hvmiqanh'("거반 죽은")라는 말을 라틴어 성경에서는 semvivus("절반 살아 있는")이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5세기의 Pseudo-Augustine, Hypomnesticon III. viii. 11f.에서 펠라기우스에 가까운 풍유(諷諭)적 해석을 받았다. 즉, 타락한 인간에게 상(傷)한 자유 의지가 남아 있다고 했다(MPL 45. 1628f.). 참조. Augustine, Questions on the Gospels ii. 19(MPL 35. 240). Venerable Bede(영국 신학자, 673-735)는 이 풍유를 다소 변형했다. "그들은 그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빼앗았지만, 이성(理性) 감각을 말살할 수 없었으므로, 그를 절반 산 채로 버렸다"(In Lucae evangelium expositio III. x.(MPL 92. 469). 루터의 반대자들은 이 구절을 이용했다. 참조. Herborn, Locorum communium enchiridion xxxviii(CC 12. 129).

733) 칼빈이 성경에 대한 풍유적 해석을 배척한 데 대해서는 III. iv. 4, 5와 갈라디아서 4:22-26의 주해를 보라. 그는 후자에서 "자연스럽고 명백한 뜻"을 요구한다. 또한 창세기 2:8; 사도행전 33:18; 예레미야 31:24; 다니엘서 8:20-25, 10:6등에 대한 주해를 참조하라.

734) 참조. II. ii. 4, 12.

735) 이 6장 전체와 7장의 1-2절은 1559년판에서 전혀 새로 나타난 자료다. 이 자료는 칼빈이 "이중(二重)의" 지식에(I. ii. 1, 각주 3, 4를 보라) 의해서 강요를 새로 조직한 것을 밝힌다. 제 2권의 표면상 주제인 구속자에 대한 지식 문제는 본장에서 처음으로 논하기 시작한다. 구원론을 율법으로 시작하지 않고,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철저한 구절로 시작한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율법을 복음의 약속과의 관련하에 둔다. 특히 제 6·7·9장의 제목들을 보라. 더 흔히 쓰이는 "율법과 복음"보다 "복음과 율법"이라는 표현이 칼빈에 적합하다. 본절 초두의 문장들은 1559년에 첨가되 여러 절(節)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며, 강요의 구성과 이미 논한 주요 제목들을 연상시킨다. 참조. II. vii. 1, 각주 1.

736) I. xv. 1-3, 8.

737) 1권의 여기 저기에서.

738) "Mund; fabrica"; I. x. 1, 주 2를 참조하라.

739) 참조. II. vi. 4; II. ix 1.

740) 참조. I. v. 8; I. vi. 2; I. xiv. 20.

741) 참조. 다음 절과 II. xii, xiv.

742) Erasmus, Colloquies, "Convivium religiosum"에는 고대인들의 경건과 덕행에 대한 절찬과 함께 그 유명한 말이 있다. "거룩하신 소크라테스여, 우리를 위해 기도하소서." 참조. Coelius Secundus Curio, De amplitudine beati regni Dei(1554)(Gouda, 1614), II. 136ff., 147ff.; Zwingli, Exposition of the Faith(1530), ch. xii. 쯔빙글리는 유덕한 이교도들과 구약성경의 영웅들과 "하나님 어머니 동정녀"를 열거해서, 이들도 내세에 신자들과 함께 있으리라고 한다. 열거된 이교도들은 Theseus, Socrates, Aristides, Autigonus, Numa, Camillus, the Catos, the Scipios 등이다(Zwingli, Opera, ed. M. Schuler and J. Schulthess, IV. 65; 영역, LCC XXIV. 275). 칼빈은 이런 의견들에 반대한다.

743) 시편 20:90에 대한 주해

744) 참조. III. ii. 1-7

745) 참조. II. vii. 2; II. viii. 7.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시라"는(롬 10:4) 뜻은 I. vi. 2; II. vii. 2; III. ii. 6에 나타난다. 즉, 율법과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화해 사업을 부분적으로 예상했다는 것이다. 참조. 로마서 10:4의 주해에서, "율법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746) III. ii.

747) II. vi. 1

748) Irenaeus, Adversus haereses IV. iv. 2(MPG 7, 982; 영역, ANF 1, 466)

749) Gentile은 성부가 성자의 "essentiator"("본질 곧 주는 이")시라는 자기의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서 Irenaeus의 글을 썼다(CR IX. 395). 참조. I. xiii. 23, 각주 51.

750) 칼빈이 생각하는 "율법"이라는 말의 뜻은(1)모세의 종교 전체와(II. vii. 1).(2)선민에게 특별히 계시된 도덕법(주로 십계명) 및 예수께서 요약하신 것(II. viii), 또는(3)각종 민사법과 재판법과 의식(儀式)법이다(IV. xx. 14-16; Comm. Harmony Four Books of Moses; cf. Decalogue "supplements"). 이 가운데서 "도덕법"은 "의의 진정하고 영원한 원칙"이며(IV. xx. 15), 가장 중요하다. 이 도덕법은 이하 6-15절에서 세 가지 "효용"과의 관련하에 세 번 나타난다. 칼빈은 율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세째 효용"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지만, 루터는 정죄적 기능을 가장 중요시한다. 참조, 루터의 갈라디아서 3:19에 대한 주해, 칼빈은 정죄 기능은 그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 "부수(附髓)적인" 것이라고 본다(고후 3:7; 롬 7:10-11에 대한 주해에서). 율법은 그리스도와 관련될 때에 한해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 칼빈의 지론이다. 참조, 요 5:38; 행 13:39; 롬 10:5 등에 대해 주해. Sermons on Galatians xxvi(CR L. 603); Benoit, Institution II. 15에 있는 주.

751) "Typus ille." typus라는 말의 기본적인 뜻은 벽에 그린 형상이다. 일반적으로 눈 앞에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표지(標識)를 이르는 말이다. 칼빈은 율법이 명령한 의식들을 복음에­의식들을 폐지한 복음에­나타난 완벽하고 명백한 계시의 "예표"(豫表) 또는 "전조"(前兆)라고 보았다. 참조. II. vii. 16; II. viii. 28; II. ix. 3, 4; II. xi. 2-6; III. xx. 18. 이 예표설은 개혁파 신학의 거의 불변하는 특징이 되었다. 참조, Heppe RD, p. 403, Westminster Confession VII. 5.

752) "Similes fuerunt pueris." 바로 앞에서 갈라디아서 3:24에 언급한 것을 보라. 고대 히브리민족 발전 도상에는 아동기에 해당하는 것이 있었다고 칼빈이 자주 되풀이한 생각은 그의 예표설과 연결되었다. 그런 정신 상태에서는 구약 성경에 나타난 유치한 정신 능력에 적합하도록 계시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참조, I. xi. 3; II. xi. 2; 창세기 1:16과 2:8에 대한 주해.

753) III. xi. 1-7.

754) Jerome, Dialogue Against the pelagians I. 10; III. 3(MPL 32. 525, 599).

755) Augustine,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 iii. 8(MPL 44. 295; 영역, NPNF V. 161);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xxvi. 66(MPL 44. 245f.; 영역, NPNF V. 113f.). 본 절의 논법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5:17에 대한 주해를 참조하라.

756) 이와 비슷한 말이 있는 곳은, On the Spirid and the Letter xxxvi. 64f.(MPL 44. 242.; 영역, NPNF V. 112f.); On Man's Perfection in Reghteouseness viii. 17ff.(MPL 44. 299ff.; 영역, NPNF V. 164f.).

757) II. xii. 4; III. iv. 27; III. xi. 23.

758) "Officium usumque legis." "율법의 이용 가치" 문제는 강요의 최종판이 나오기 전에는 십계명 해설 다음에 논의되었었는데, 여기서는 그 앞에 놓였다. 언약과의 관련으로 보아 이 편이 적합하며, 특히 율법의 "주요한" 이용 가치는 그리스도인을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는(본장 12절) 입장에서 그러하다. 루터가 말한 율법의 두 가지 효용을 참조하라. 갈라디아서 3:19, 4:3에 대한 주해(영역, E. Middleton. pp. 281ff., 324f.).

759) Melanchthon은 Loci communes 1521년판에서, 죄를 밝히며 양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고유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1535년판 이후에서는 칼빈이 여기서 설명하는 세 가지 효용을 도입했다. Loci communes(1521). ed. H. Engelland(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ed. R. Stupperich, II. I. 122); 영역, C. L. Hill. op. cit., p. 215; Loci praecipui theologici(15590, ed. Engelland, op. cit., pp. 321-326; p. 321의 각주 13. 여기서는 로마서 1:18을 근거로 율법의 둘째 효용을 역설한다. 협화 신조(協和信條)에서는 셋째 효용을 올바로 인정한다(제 6조).

760)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i. 2(MPL 44. 917; 영역, NPNF V. 472).

761) Ambrose, De Jacobo et vita beata I. vi. 21f.(MPL 14. 637).

762) 8절 끝의 두 문장은 강요 1539년 판에 처음 나타났으나, 칼빈의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 영역,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11, p. 35에 있다.

763) 이 구절들에서 인용된 어거스틴의 글들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Letters clvii. 2. 9.; cxcvi. 2. 6; clxxvii. 5(MPL 33. 677, 893, 766; 영역, FC 20. 325; 30. 336, 97); On Grace and Free Will xvi. 32(MPL 44. 900; 영역, NPNF V. 457);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iii. 22(MPL 44. 214; 영역, NPNF V. 92); psalms, ps. 70. i. 19; 118. xxvii. 3(MPL 36. 889; 37. 1581; 영역, LF Psalms V. 434). 본문에 있는 "로마의 이노센트"는 교황 이노센트 1세(402-417)이다.

764) 이 논문은 MPL 44. 201-246; 영역, NPNF V. 83-114에 있다.

765) 비슷한 말이 IV. xx. 3에 있으며, Melanchthon은 publicae pacis causa("공안을 위하여")라고 한다.(Loci praecipui theologici, ed. Engelland, op. cit., p. 322); 또 IV. xx. 14-16을 참조하라.

766) "Paedagagia"인데, 1545-1557년의 프랑스어 판에서는 "pedagogie"로 했다가, 1560년 판에서는 "instruction puerile"로 했다.

767) 참조. II. viii. 51-59.

768)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ed. Engellond, op. cit., p. 133(영역, C. L. Hill, p. 229).

769) 이것은 자유파 뿐만 아니라(참조.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des Libertins, CR VII. 206f., 220, 229, 233), 요한 아그리콜라도 비난하는 뜻이리라. 이 사람은 루터와 결별하고, 그리스도인은 구약 율법의 어느 부분도 지킬 의무가 없다고 해서, 1537년에 반(反)율법 논쟁을 일으켰다. 참조 Werke WA XXXIX. i. 342ff.; HDRE, "Antinomianism."

770)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 in Engelland, op. cit., pp. 120ff., 126f., 132ff.(영역, Hill, op. cit., pp. 214ff., 220f., 229ff.); Zwingli, of True and False Religion(CR Zwingli III 710; 영역, Latin Works of Huldrich Zwingli, ed. S. M. Jackson, III. 14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불을 두셔서,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라의 불을 붙이게 하셨다."

771) 구약 유법은 "그림자 같은" 성격을 가졌으며 전조로서 기능을 한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II. viii, 28, 29도 보며, LCC XXIII, 29f.를 참조하라.

772) Melanchthon, Scripta exegetica(골 2:14의 주해 부분)도 이런 생각이 없다(CR Melanchthon XV. 1256); 참조, 그의 Loci communes(1521)의 De abrogatione Legis라는 부분(ed. Engelland, op. cit., pp. 132ff.; 영역, Hill, op. cit., pp. 221ff.)

773) Bucer, Metaphrase of enarrationes perpestuae epistolarum D. Pauli Apostoli I. ad Romanos, Strasbourg, 1536, p. 205; "여기서(골 2:14) 바울이 '증서'라고 하는 것은 의식법을 의미한다. 이것을 베드로는 우리 조상이나 우리도 능히 폐지 못하던 멍에라고 했다."

774) "Chirographum," 헬라어의 "Ceivrovgrafon."

775) Augustine, On the Merits and Romission of Sins I. xxvii. 54(MPL 44. 139; 영역, NPNF V.35).

776) "Solennia instramenta."

777) 중세기에는 무수한 종교 지도서들이 평신도 교육을 위해서,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해설했다. 영국 York의 대주교 J. Thoresby가(1373년 사망) 썼다고 하는 Lay Folk's Catechism도 그 하나다. Pannier는 Les fleurs des commandemens(1490, revised 1516)이라는 십계명에 대한 프랑스어 소책자가 있었다고 한다(Institution I. 322, p. 197의 각주). 종교 개혁 시대에 이 세 가지를 교리 문답서에 쓰기 시작한 것이 루터였고(1529), 칼빈은 그의 저서인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에서 이 제목들을 순차로 논했다(영역,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8, pp. 24-32).

778) I. vii. 1-2.

779) I. i. 2.

780) II. i-vi.

781) "Dictat lex illa interior." 이 절의 아래서 "in lege naturali"("선천법에 의해서")라고 한 것과 비교하라. 강요에서 선천(=자연)법을 언급할 때에는, 여기서와 같이, 대개는 양심과 관련시키며, 국가의 실정(實定)법 및 형평(衡平)법과,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의무와 관련시키는 때도 많다. II. ii. 22에서는 선천법에 대한 바울의 중심적 구절인 로마서 2:14-15을 사용했다. 또 보라. II. vii. 3-4; II. viii. 1-2, 53; III. xix. 15-16; IV. x. 3; IV. xx. 11("자연적인 공정성"), IV. xx. 15(사랑의 표준), IV. xx. 16("도덕적 율법은…자연법이 하는 증언"). 십계명은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하신 조문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을 표현·천명한다는 칼빈의 견해는 전통적인 것이다. Cicero, De republica III. xxii에, 바른 이성(理性)의 법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본성과 일치한다는,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Lactantius는 이 구절 전체를 인용하며, 어느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이와 같이 의미 심장하게 제시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Divine Institutes VI. viii(CSEL 19. 508f.; MPL 6. 660f.; 영역, ANF VII. 171). 참조. Augustine, Confessions II. iv. 9(MPL 32. 678; 영역, LCC VII. 54). Aquinas는 자연법을 상당히 자세히 논했다. 예컨대 Summa Theol. I. IIae. questions xci. 1-3; xciv; c. 1-5에서 그는 십계명의 원칙들과 선천적(자연적) 이성의 원칙들을 동일시한다. 자연법과 마태복음 7:12의 황금률을 관련시키는 것도 보통이었다. 예컨대 Gratian, Decretum I. i(Friedberg I. 2). J. T. McNeill, "Natural Law in the Thought of Luther", Church History X(1941), 211-227에 이 배경에 대한 언급들이 있다. 칼빈에 관해서는 McNeill, "Natural Law in the Teaching of the Reformers", Journal of Religion XXVI(1946), 168-182 및 거기 인용된 문헌을 보라. 칼빈의 주해와 설교에서 주목할 만한 언급이 있는 곳들은, 로마서 2:14-15의 주해, Sermons on Deuteronomy cxix(신 19:14-15)(CRXXVII. 568); Sermons on Job ci(욥 28:1-9)(CR XXXIV. 503ff.); Comm. Harmony Four Books of Moses, "Pracfatio in legem"(CR XXIV. 209-260). 여기서도 십계명은 선민을 위해서 자연법을 특별히 조절하여 재(再)표명한 것으로 보며, "모세의" 입법 전체를 열 가지 법으로 분류했다.

782) 참조. I. i. 2, 각주6. 이 구절은 율법과 양심이 회심(回心)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칼빈의 견해를 간명하게 제시한다.

783) II. V. 10; II. vii, 4; III. xvii. 1-3, 6. 7.

784) Augustine, City of God XIV. xii.(MPL 41. 420; 영역, NPNF II. 273); On the Good of Marriage xxiii. 30(MPL 40. 393; 영역, NPNF III. 411); Contra adversarios legis et prophetarum I. xiv. 19(MPL 42. 613).

785) II. vii. 1-12.

786) 참조.Plato, Laws IX. 862(LCL Plato, Laws II. 228f.)

787)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ed. Engelland, op. cit., p. 73; 영역, Hill, op. cit., p. 153.

788) Melanchthon, Loci communes, loc, cit,; pp. 130f.; 영역, Hill, p. 224ff.; Aquinas, Summa Theol. I. IIae, xci. 5. 참조. 시편 19:8의 주해.

789) Lesbos섬의 잣대는 그 곳 주형공들이 사용했다는 납으로 만든 글신자재한 잣대였고, 이것을 예로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사물을 설명했다. Nicomacheam Ethics V. 10. 1137b(LCL ed., pp. 314f.).

790) Aguinas, Summa Theol. I. IIae. xcviii. 1.

791) 하나님께 대한 의무들과(1-4) 사람들에 대한 의무들을(5-10) 요구하는 두 계열의 계명들과 두 "돌판"을(출 24:12; 고후 3:3 기타)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생각을 칼빈도 채용했다. 그는 본장 12절과 마태복음 22:37의 주해에서 이 입장을 옹호했다.

792) 이 배열법은 Lombard, Sentences III. xxxiii. 1. 2(MPL 192. 830f)에 있고, 로마 카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가 추종한 것이다(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 1521, ed. Engelland, op. cit., p. 46). Catholic Encyclopedia의 논문 "Commandments of God"는 어거스틴을 인용해서 이 구분법을 지지하며, 칼빈의 것은(Bucer가 이미 말한 것이지만)Philo Judaeus와 Origen에게서 시작했다고 한다.

793) Origen은 출애굽기 20:4을 "제 2계명"이라고 부른다. Homilies on Exodus hom. viii. 3(MPG 12.355).

794)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iv. 10(MPL 44. 594; 영역, NPNF V. 406). 여기 있는 안식일 계명의 예시에 대해서는 II. vii. 1, 각주 2를 참조하라.

795) Augustine, Letters lv. 11(MPL 33. 217; 영역, FC 12. 276); Sermons xxxiii. 3; "Propter Trinitatem tria praecepta"("삼위일체이므로 세 계명")(MPL 38. 208).

796) Eruditi commentarii in Matthei Evangelium, opus imperfectiem, 이 저자불명의 저작은 Chrysostom의 설교집과 함께 발간되었다(hom. xlix, MPG 56 910).

797) Josephus, Antiguties of the Jews III. v. 8. 101; III. vi. 5. 140(LCL Josephus IV. 364f., 380.). 참조. LCC XXIII. 118. 각주 7.

798) 참조. II. x. 10-18에서 칼빈은 선택된 사람들에 금생에서 내세의 행복을 대망하기도 하지만, 고난이 많다는 것을 자세히 말한다.

799) I. iv. 3.

800) "Laudisqu confessione," 참조. III. iv. 9에서 칼빈은(라틴어 성경) 시편 42:4에 있는 "confessio"를("찬양"의 오역) 고해성사를 정당화하는 증거는 인용하는 데 반대했다.

801) I. xiii. 1.

802) I. xii. 3.

803) Augustine, City of God XIX. xxiii(MPL 41. 654; 영역, NPNF II. 415-418).

804) I. xi. 2, 12.

805) "Nam hoc Dei nomen a fortitudine ductum est."

806) 라틴어 원문은 간접화법

807) "Mille generationes." 여기서와 신명기 5:9의 히브리 원문은 "천대까지 자비를 베푸신다"고 번역해야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며, 그의 이 생각은 강요의 모든 판과 Instruction in Faith(영역, Fuhrmann, p. 26)에 나타났다. II. x. 9에서도 반복되고, Four Books of Moses의 출애굽기 20:6에 대한 주해에 네 번 나타났다. 여러 프랑스어 성경과 일부 영어 및 독일어 성경들도 이런 뜻으로 번역했다. 참조. J. M. P. Smith, The Bible: An American Translation; L. Segond의 프랑스어 개역; Fr. Noetscher의 독일어 번역; A. H. McNeile, Westminster Commentaries, Exodus, p. 117. 칼빈은 이 구절을 반복 사용해서(예, IV. xvi. 9) 하나님의 자비가 광대 무변하다는 증거로 삼는다. 인구가 지구상에 존속하리라는 칼빈의 기대에 이런 구절들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역설하는 것도 현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808) 칼빈은 이 견해를 재세례파 사이에서 보았고, 그들을 반박하는 Psychopannychia를 1534년에 써서 1542년에 발표했다. 또 1537년에 제네바에서,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그들과 논쟁했다. Zwingli는 이미 1527년에 In Catabaptistas strophas elenchus라는 논문에서 이 견해에 반대했다(Zwingli, Opera, ed. M. Schuler and J. Schulthess III. 406ff.; 영역, S. M. Jackson, Selected Works of Huldreich Zwingli, "Refutation of Baptist Tricks", pp. 206ff.). 칼빈은 이 문제를 Brieve instruction contre les erreurs de la secte commune des Anabaptistes(1544) 제 7조에서 논했다(CR VII. 92ff.; 참조, OS III. 361). 참조. W. E. Keeney, The Development of Dutch Anabaptist Thought and Practice, 1539-1564(Hartford Seminary dissertation, 1959), pp. 212ff.

809) Zwingli, In Catabaptistas strophas elenchus, 1527, loc. cit.; Calvin, Brieve instruction contre les erreurs de la secte commune des Anabaptistes(1544), pp. 95f.

810) 여기서 배척된 의견들을 Zwingli와(op. cit., p. 408) 칼빈 자신의 1536년된 강요가 채용했었다(ch. 5; De lege, mandatum iii; OS I. 45f.).

811) Bucer, In sacra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 perpetuae(Strasbourg, 1536), pp. 135ff.

812)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iv. 10(MPL 44, 194; 영역, NPNF V. 406); Sermons cxxxvi. 3(MPL 38. 752). 참조. II vii. 16, 각주 22.

813) "Spiritualis guietis adumbrationem"; 28절의 "umbratile"("예시")를 참조하라. 안식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하늘 안식의 예시라고 하는 28-29절의 생각은 이미 어거스틴에게 있었다. 예컨대,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loc. cit.; Sermons ix. 3. 3; xxxiii. 3.3(MPL 38, 77, 208); Letters lv. 9. 17(MPL 33. 212; 영역, FC 12. 274).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논한 데 대한 자료들을 편리하게 보여 주는 것은 J. A. Hussey, Sunday, Its Orgin, History, and Present obligation(Bampton lectures, 1860), lectures iii-vi.

814) Grogory the Great, Moralia in Job xxxv. 8. 15-17(욥 42:8에 대하여)(MPL 76, 757ff.; 영역, LF XXXI. 671ff.). 참조. Bucer, In sacra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 perpetuae, pp. 299f.

815) Bucer, op. cit., p. 300.

816) 이런 "들뜬 사람들이" 1537년에 제네바에 나타났다. Colinaeus 또는 Colon이라고 하는 시민이 세례와 안식일에 대해서 비정통적인 사상을 가진 까닭으로 투옥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1537년 7월 31일에 Thonon의 목사 Christophe Fahri가 제네바 목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되었다. Herminjard는 자세한 주와 함께 이 편지를 수록했다(Correspondance IV. 270ff).

817) 이 구절과 다음 34절을 보면 그리스도교의 일요일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XXI 8에서는 일요일은 유대교회 안식일을 "주의 첫 날로 변해서"계속할는 것 뿐이지만, 칼빈은 안식일을 폐지하고 교회의 질서와 영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채용한 기독교의 독특한 제도라고 보았다.

818) 여기서 칼빈은 Cassiodorus, Historia tripartita IX. 38을 염두에 두었고, 이 구절은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v. 23에서 왔다(MPL 69. 1153; MPG 67. 625f.; 영역, NPNF 2 ser. II. 130). 그러나 하인(下人) 계급의 압박을 피하려는 칼빈의 관심과 비교할 만한 것이 이 교부 문서에는 없다. 루터는 그의 대(大)교리 문답(1529년)에서 노동자의 휴일을 중요시했으며, 영국 개혁가 John Hooper와 Thomas Becon도 마찬가지였다. 참조. Parker Society, Hooper, Early Works, pp. 337-351; Becon, Catechism. etc., pp. 82f.

819) 참조. Albertus Magnus, Compendium veritatis theologicae(Venice, 1485) V. 62; Aquinas, Summa Theol. I. IIae. c. 3 ad 2; II IIae. cxxii. 4 ad 1.

820) Catholic Encyclopedia의 논문 "Constitutions"와 "Constitution, papal"을 보라. 칼빈은 의식적으로 안식일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중세기에는 일요일과 관련된 엄격한 율법주의가 횡행했고, 그 후에 일부 신교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중세기의 고해 지도서들은 일요일에 일을 하면 중한 벌을 준다고 했다. 참조. J. T. McNeill and H. M.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Records of Civilization XIX), index, s.v. "Sunday." 칼빈의 견해는 제2헬베티아(서서) 신앙고백 XXIV의 입장과 같다(유대교식으로 이날을 지키는 것을 전혀 용인할 수 없다고 했다).

821) "Dispositionis", 참조. I. xiii. 6; "Dispositionem vel oeconomiam."

822) 참조. IV. xx. 32.

823) III. vii. 2-7; III. xx. 38, 45-46; IV i. 11-19; IV. xiv. 9; IV. xvii. 38-40.

824) Eck Enchiridion, ch. xix.(신부들의 독신 생활에 관해서)(1541, fo. 129b)

825) Horace, Epistles I. vii. 98의 생각을 반영한다.(LCL ed., Horace, Satires, Epistles, and Ars peotica, pp. 302f.).

826) Augustine, Agalnst Julian II. vii. 20; 여기서 Ambrose의 고린도전서 7:29의 주해를 인용했으나, 이 주해본은 상실되었다(MPL 44, 687; 영역, FC 35, 79).

827) OS III. 383, 각주 2

828) "Unicuique…suum."

829) Luther와 Bucer도 같은 생각을 역설했다. 참조. Bucer, Dasihm, selbs(Trait'e de I'amour du prochain)(1523); 프랑스어역, H.H. Strohl(Prais, 1949), pp. 55f.; 영역, P.T. Fuhrmann, Instruction in Christian Love, p. 40.

830) 참조. II. ii 24; III. iii. 11-13; IV. xv. 11-12.

831) Augustine,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xxvi. 64-66(MPL 44. 242ff.; 영역, NPNF V. 112ff.). 열째 계명에 대한 어거스틴의 다른 글들이 Smits II. 36에 많이 지적되었다.

832) 참조. II. viii. 12, 각주 16.

833) Melanchthon, Annotationes in Evangelium Mathaei(1523), fo. 46a.

834)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 xxiii-xxvi(MPL 34. 27ff.; 영역, NPNF II. 528f.).

835) 제 54절의 여기까지의 문장들과 비슷한 구절이 루터의 책에도 있다. Short Exposition of the Decalogue, the Apostles' Creed, and the Lord's prayer, 1520(십계명의 부분의 결론)(Werke WA VII. 214; 영역, B. L. Woolf, Reformation Writings of Martin Luther I. 82f.). 여기서 한 말이 그대로 Betbchlem, 1522(Werke WA X. ii. 388)에서 반복되었다.

836) "filauti;a."

837) 참조. Lombard, Sentences III. xxviii. 1; xxix. 1(MPL 192. 814f.); Aquinas, Summa Theol. II IIae. 26. 4. 5. 이 절에서 칼빈은 "사랑"에 해당하는 라틴어로서 amor, dilectio, charitas의 세 단어를 썼다. 칼빈의 글에서 여기서나 다른 곳에서 이 말들의 차이를 까다롭게 캐는 것은 무익한 짓이며, 동시대의 다른 문필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거스틴의 City of God(1522)를 면밀히 편집한 Ludovico Vives는, 성경에서 amor와 dilectio는 뜻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세속 문필가들은 가벼운 사랑을 위해서 dilectio를, 열렬한 사랑을 위해서 amor를 썼다고 했다. 그는 dilectio보다 amor가 음담에 더 자주 사용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Augustine, Of the Citie of God, with the Learned Comments of Jo. Lod, Vives <London, 1620>, p. 478.). 자세한 연구서인 Hlne Ptr, Caritas:tude sur le vocabulaire Latin de la charit Chrtienne도 같은 결론을 내린다. 특히 79-98면을 보라. Augustine과 Isidore of Seville(636년 사망)과 그 밖의 라틴계 기독교 저술가들에게서 가르치는 바가 많은 문장들에 인용되었다. 교부들의 라틴어에 나타난 차이를 Isidore가 지적한 것은 대체로 타당한 것 같다. amor와 dilictio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쓸 수 있고, caritas는 좋은 의미로만 사용된다(Isidore, Libri differentiarum II. xxxvii. 142; MPL 83. 92).

838) 참조. III. vii. 6.

839) 참조. Aquinas, Summa Theol I. IIae, cviii. 4; II. llae, clxxxiv. 3; clxxxvi; Melanchthon, Loci communes, 1521(ed. Engelland, op. cit., p. 118).

840) Chrysostom, De compunctione cordis I. 4(chrysostam, Opera, Paris, 1834, I. 157; MPG 47. 399f.); Chrysostom, Adversus oppugnatores vitae monasticae III. 14(MPG 47. 372ff.).

841)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 xxx. 32(MPL 34. 31; 영역, NPNF II. 531f.); 여기서 로마서 13:10의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기를 논하면서,"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842) Gregory the Great, Homities on the Gospels ii. 27. 1(MPL 76. 1206).

843) Augustine, "Da guodiubes et iube quod vis," confessions X. xxix. 40; xxxi. 45(MPL 32. 796, 798; 영역, Lcc VII. 225, 228). 참조. On Grace and Free Will xv. 3(MPL 44.899; 영역, NPNF V. 456ff.); On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xx. 53(MPL 45. 1026; 영역, NPNF V. 347);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iii. 2(MPL 44. 214; 영역, NPNF V. 92), 참조, II. v. 7, 각주 17.

844) Aquinas, Summa theol, I. uae. lxxiv. 10; 참조. III. iv. 28.

845) 본장의 49-50절에서

846) Augustine, On Baptism, Against the Donatists II. vi. 9(MPL 43. 132; 영역, NPNF IV. 429).

847) 본장의 58절에서.

848) 이 장은 1559년판에서 전체가 새로 첨가되었으며(II. vi의 각주1를 보라). 언약의 범위내에서의 율법의 위치를, 그리고 율법의 첫째 목적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데 있음을 더욱 역설한다. 그러나 이 장의 내용은 10∼11장에서 많이 재론되며, 이 두 장은 대체로 1539년에 쓴 것이다.

849) 참조. I. vi. 1-4

850) I. xiii. 10.

851)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1553), pp. 294, 324; Epistolae ix(같은 책에 있음), p. 601; CR VIII. 667f.에도 있다.

852) 참조. II. vii. 16; II. viii. 28, 29 및 거기 붙은 각주들

853) 칼빈은 이 장에서, 특히 1-5절 및 8절에서 언약론을 전개한다. I. vi. 1, 각주 3에 열거된 구절들을 보라. Zwingli, Oecolampadius, Willam Tyndale, Bucer, 그리고 Bullinger는 모두 은총의 언약을 신학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그들의 언약 사상을 Heidelberg의 종교 개혁가 Zacharias Ursinus와(1583년 사망) Caspar Olevianus(1587년 사망),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Robert Rollock가(1599년 사망) 주장했다. 언약 신학이 완성된 것은 17세기였고, Westminster 신앙고백의(1647년) 제 7장과, 많은 영향을 끼친 John Cocceius의 저서 Summa doctrinae de foedere et testamento Dei(1648)에 나타났다. 은총의 언약과 행위의 또는 본성의 언약을 병치( 置)하는 이 확대 부분을 칼빈은 예상하지 않았다. 관련 사실을 간단히 알려 주는 논문들은, L. J. Trinterud, "The Origins of Puritanism", Church History XX(1951), 37-57; E. H. Emerson, "Calvin and Covenant Theology", Church History XXV(1956), 136- 144; 그리고 Scotland에 관해서는, S. A. Burrell, "The Covenant Idea as a Revolutionary Symbol", Church History XXVII(1958), 338-350. 또 보라. G. Schrenk, Gottesreich und Bund in lteren Protestantismus(G tersloh, 1923); G. D. Henderson, "The Idea of the Covenant in Scotland", The Burning Bush: Studies in Scottish Church History, ch. iv.

854) Servetus는 칼빈이 여기서 배척한 견해를 고집해서, "율법에서 죄의 용서는 육적이며 지상(地上)적이었고", 믿음도 그러했다고 주장했다. Christianismi restitutio(1553), pp. 322, 324; 참조, pp. 233, 237ff., 305, 314, 321-326.

855) III. xx-xvii

856) "Neglectaque animae cura" Pannier는 이 점이 재세례파에 대한 비난의 하나였다고 보다 Institution III. 288와 p. 10의 각주 b.

857) Servetus, Dialogorum de Trinitate libri duo; De justitia regni christi I. 1. 4, fo. C 7a, D16, D2a(영역, E. M. Wilbur, The Two Treatises of servatus on the Trinity, pp. 225, 230f.).

858) Servetus, De Justitia regni christi, III. 3, fo. E. 2a(영역, Wilbur, op. cit., pp. 243f.).

859) Bucer도 역시 그리스도를 고대의 언약과 연결시켰다. Metaphrases et enarrationes perpetuae epistotarum D. Pauli Apostoli, 1536, p. 159 참조. Benoit, Institution II. 198 교부들의 견해로서 칼빈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Irenaeus, Against Heresies IV. ix. x(MPG 7, 996-1000; 영역, ANF 1.472ff.); Augustine, 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of the Catholic church xxviii. 56-58(MPL 32. 1333; 영역, NPNF IV. 56f.)을 보라.

860) 참조. 고린도전서 10:1-5의 주해.

861) Bucer, Metaphrases et enarrationes perpetuae epistolarum D. Pauli Apostoli, p. 158에 고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성례전들은 본질에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 절과 다음 절에서 비난을 받은 견해들은 대부분 Servetus가 말한 것이다.

862) Augustine, Reply to Faustus the Manichaean XV. ii; XIX. 16(MPL 42. 314, 356; 영역, NPNF IV. 219, 244). 마지막 문장은 1553년도판에서 인용한 것이다.

863) "Extromae infoelicitatis insigne est exemplar"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족장들이 평생 고난과 불행만을 맛보았다고 칼빈이 본다는 사실은 그의 저작에 나타나는 무수한 구절들과 일치하며, 이 글들을 읽어 보면, 칼빈이 금생의 번영을 선택과 결부된 것으로 보았다고 하는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참조.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222f., 418ff. 야곱에 대해서는 Ambrose, On the Duties of the Clergy ii. 5(MPL 16. 114ff.; 영역, NPNF 2. ser. X. 46)을 보라.

864) "Ultima linea et meta," 참조. Horace, Epistles I xvi. 79 "Mors ultima linea rerum est"("졸음은 만사의 경계선").(LCL ed., Horace, Satires, Epistles, and Are Poetica, p. 356).

865) 칼빈은 구약에 있는 약속들의 종말적인 면을 역설하기 때문에, 현세에 대한 희망적인 요소가 그 약속들에 있는 것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참조, Pannier, Institution III. 290(p. 25의 각주 d).

866) "Lucis exortum" 이것은 위에서 시편 49:6-14를 인용할 때에 "빛이 동트면"("exorta Luce")을 넣은 것에 대응한다.

867) 참조. III. xxv. 4. 칼빈은 psychopannychia에서 "영혼이 잔다"는 교리에 반대하며, 욥기에서 많은 귀전을 끌어와 해설했다.(CR V. 228ff.; 영역, Tracts. III. 486ff.).

868) 칼빈은 이 주목할 만한 구절과 다른 여러 곳에서 계시의 전지적 성격에 대한 견해를 강력히 주장했다. 아침 빛이 더욱 밝아진다는 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3:23의 주해 및 Benoit, Institution II. 213, 각주 3을 참조하라. Pannier, Institution III. 32, 291; Fuhrmann, God­centered Religion, pp. 84f. 또한 색인 3의 "적응"도 보라.

869) 참조. II. ix. 1-4.

870) "Vit minima vestigia." 참조. 본장의 11-14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세상적 번영을 얻지 못한다고 칼빈은 계속 역설한다.

871) "Animarum substantiam." 프랑스어판에서는, "Immortalite des ame."

872) 참조. II. x. 1.

873) Servetus는 율법의 약속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으로 실현되지만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얻고, 젖과 꿀로 만족했다"고 주장했다. De justitia regni christi(1532) I. fo. D. 16; 영역, E. M. Wilbur, op. cit., p. 230.

874) 참조. I. xi. 3; II. ix. 3.

875) Servetus, De justitia regni christi III. fo D 8a-b; 영역, Wilbur, op. cit., pp. 240f. 마니교가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배척한 데 대해서는 Augustine, 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 x. 16(MPL 32, 1317; 영역, NPNF IV. 46)을 보라.

876) 참조. II. ix. 4; 히브리스 7-10장의 주해

877) "Testamenti." 이 절과 다른 곳에서 칼빈은 testamentum 과 foedus라는 단어들을 라틴어 성경에서와 같이 서로 바꿔 쓴다.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tyriB] 와 헬라어로 diaqhvch. 두 라틴어 단어는 성경인용 및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의미할 때를 제하고는 보통 "언약"이라고 번역했다. 참조 III. Viii. 21; II. X. 7; III. Xiv. 6; III. Xvii. 6; III. Xxi. 1,5, 7; IV. Xiv. 6. 다른 라틴어는 pactio와 pactum이다.

878) "Umbratili." 참조. II. vii. 1; II. ix. 3, 4; III. xx. 18, 각주 29.

879) 참조. II. ix. 1.

880) "Legis cacovxhloi"

881) 라틴어의 "infirmitatis"("무력함의")는 프랑스어판에서는 "그 폐기의"로 되어 있다.

882) "Chirographa." 참조. II. vii. 17, 각주 25.

883) 본장의 4, 7, 9절에서

884) 본장 1절에서

885)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iv 6-12, 특히 11(MPL 44. 591-597; 영역, NPNF V. 346-351).

886)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 1535(CR Melanchthon XXI. 454).

887) "Supra Vetus tostamentum Novi excellentia."

888) Barth와 Niesel은 Sebastian Frank의 paradoxa(1535), paradox 86(fo. xlviib ff.)에도 이런 주장들에 대한 대답같이 보이는 것이 있다고 지정하며, Frank는 이런 의견들은 "자주 들었다"고 하므로 아마 그의 재세례파 사람들에게서 들었으리라고 추측한다(OS III. 435, 각주 2).

889) 본장의 5절과 13절.

890) 그리스도는 사람들뿐 아니라 천사들도 주관하시는 머리시라는 칼빈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의 다음 글을 보라. Responsum ad fratres Polons(1560), CR IX. 338; "primatum tenuit etiam super angelos"("천사들도 주관하신다"). 골로새서 1:20의 주해를 참조하라.

891) 참조. 히브리서 4:15의 주해.

892) 이런 주장은 Osiander와 Servetus도 한다. Osiander, An filius Dei fuerit incarnandus(1550), k 2a, 2b;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 Do regenerotione superna I. pp. 370, 382. 칼빈은 5-6절에서 이 점을 재론한다.

893) 이것은 Osiander의 발언을(op. cit., loc. cit.)언급한 것이다.

894) 이 구절은 칼빈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타락후적인 견해보다 타락전적인 견해를 취했음을 간단히 알린다. 이 문제는 칼빈의 사후 얼마되지 않았던 화란에서 논의되었다. 참조. Me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263f. 개혁파 신학에서의 ordo salutis에 관한 전형적 참조 자료에 대해서는 Heppe RD, pp. 146ff를 보라.

895) Osiander는 자기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들로서 Alexander of Heles, Duns Scotus, 특히 John pico delia Mirandola를 들었다(op. cit., fo. A. 4a-B/a) 참조. OS III. 443, 각주 2에는 상기 저자들의 글이 입증되었다.

896) William of Ockham(1349년경 사망). Centilogium theologicm(Lyons, 1495)(Lombard의 Sentences에 대한 Ockham의 주해서에 첨부된 저서), Concl. 7. A

897) Osiander, op. cit., 6-7절에서 언급된 구절들은 이 저서의 folios C 3a-I 3a에 흩어져 있다.

898) "avcevfalon."

899) I. xiii. 7-13.

900) 마니교도에 대해서는 I. xiii. 1, 각주3을 보라. Pontus의 마르키온은 주후 150년경에 로마에서 가르쳤다. 그의 중요성은 구약성경을 배척한 것과 영지주의적(노스틱) 이원(二元)론을 주장한 데 있다. 그리스도의 몸이 물질이었음을 부정하며,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한 데 그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이 나타났다. 칼빈은 당시의 "마르키온"파를 염두에 두었고, 그 한 사람인 Menno Simons(1496-1561)는 Mnster사건 후에 화란의 재세례파를 재건했다. 멘노의 의견들은 화란말이나 북부 독일의 Oostersch 방언으로만 발표되었고, 칼빈은 주로 동부 Frisia의 Norden의 Martin Micron을 통해서 그를 알게 되었다. 미크론은 1554년과 1556년에 몇번 멘노와 논전하며, 1556년과 1558년에는 주로 성육신 문제에 대해 서로 소책자를 발표했다(Complete Works of Menno Simons. L. Verduin의 화란어로부터의 영역, J. C. Wenger의 편집, Harold Bender의 멘노 전기를 첨부, p. 25). 이미 멘노에 반대한 John Lasca의 논문, Defensio verae…doctrinae de Christi incarnatione를 Bremen의 Albert hardenberg가 1545년에 칼빈에게 보냈다. 이글은 Menno의 Brief and Clear Confession(1544)(영역, Verduin, op. cit., pp. 419-454)에 대한 대답이었다. 멘노의 다음 글들도 보라. The Incarnation of Our Lord(1554)(영역, Verduin, op. cit., pp. 783-943); Reply to Martin Micron(1556); Epistle to Martin Micron(1556). 이 소책자들 중의 처음 것에서 멘노는 칼빈이 이 아래서 인용한 히브리서 2장의 구절들을 해석하는 데 많은 지면을 사용했다(역역의 823-832면). 그의 논법은 요약하기가 약간 어렵다. John Lasco에 반대해서 그는 주장했다. "말씀이 우리의 육(肉)을 쓰셨다거나, 신성이 기적적으로 우리의 인성과 결합했다는 말은 성경 전체에 한 자(字)도 없다"(p. 829).(그가 죽은 후에 멘노파는 이 교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환상이었다고 한 고대의 가현(假現)설(Docetism)을 어거스틴은 엄격히 배척했다. Sermons lxxv. 7-9(MPL 38. 477; 영역, NPNF VI. 338f.).

901) II. xii. 3.

902) 참조. Augustine, Against Faustus ii. 4; v. 4(MPL 42. 211, 222, 영역, NPNF IV. 157. 168f.).

903) "Mulieres contendunt esse avspovrsud."이 문체를 멘도는 그의 Roply to Gellius Faber(1554)등에서 전개했다(Jelle Smit, 즉, Gellius Faber는 원래 신부였다가 Emden에서 목사가 되었다). 멘노는 생식에서 여자의 담당은 수동적일 뿐이며, "아버지가 아이의 진정한 근원이다."라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했다. Reply to Gellius Faber p. 768; 참조. 그의 Reply to Martin Micron; 영역, Verduin, op. cit., pp. 849f., 886-892, 906.

904) 이 표현은 Justinian의 Institutes I. 3, 4와 Digest I. v. 5, 2에 있다(Corpus iuris civilis; Institutiones et Digesta, ed. p. Krueger <Inst., p. 2; Dig., p. 35>; 영역, J. B Moyle, The Institutes of Justinian(5th ed., pp. 6f.); C. H. Monro, The Digest of Justinian I, pp. 24f.).

905) "Genitrices."

906) 참조. Menno, Reply to Martin Micron; 영역, Verduin, op. cit., pp. 896, 908.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 이 소책자에 있는 다른 구절들이 언급되어 있다.

907) 프랑스어판에는 첨가되었다. "et par consquent de la race de David"("따라서 또한 다윗 족속이었다는 것을")

908) 칼빈은 이 장의 처음 문장들에서와 같이, 장 전체에서 칼케돈 신조의 정통을 고수한다. 이 문제에 대한 참고서:A. Grillmeier(ed.,) Das Konzil von Chalkedon, III. 487-529(J. S. Witte, "Die Christologie Calvins");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115ff. 참조. S. Cave, The Doctrine of the Person of Christ, pp. 151f.

909) 칼빈은 1536년판에서와 같이 "anima"라는 말을 쓰지 않고 "animus"를 썼다.

910) Augustine, Sermones clxxxvi(MPL 38. 999); Enchiridion xi. 36(MPL 40. 250; 영역, LCC VII. 361f.). 사람이 영혼과 육신의 통일체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말씀과 사람의 통일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911) "ivdiwmajtwn coinwniva." 이른바 communicatio idiomatum, 즉,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속성의 상호 교환이라는 교리다. 이 교리는 Nestorius 논쟁(428-451년경)에 가끔 나타났으나, 그보다 먼저 Tertullian, Origen, Nyssa의 Gregory, Ephiphanius 등이 불완전한 형태로 주장했다. 이 토론에 대한 참고서:C. J.. Hefele, Conciliengeschichte II(1856). 127f.; Hefele­Leclercq II. i. 231f.; 영역, History of the Councils III. 8, 9. 참조. Tertullian, Of the Flesh of Christ v(CC II. 880; 영역, ANF III. 525); Cyril of Alexandria, "ajllhvloi" ajnacrina" ta; tw'n fuvsewn ivdiwvmata"(요 3:13을 인용), De incarnatione Unigeniti(MPG 75. 1244); Leo the Great, Letters xxviii. 5(MPL 54. 771f.; 영역, NPNF 2 ser. XII. 41 및 각주 7); Athanasius, Discourses Against the Arians iii. 31(영역, NPNF 2 ser. IV 410f.); John of Damascus, Exposition of the Orthodox Faith III. iii-iv(MPG 94. 993f.; 영역, NPNF 2 ser. IX. 43-49). Hefele를 근거로 한 발언이 NPNF 2 ser. XIV. 208f. 에 있다. 칼빈은 이 교리를 시인하여 설명하지만(2절), 루터파가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도처에 있다고 주장해서 이 교리를 이용하는 것을 배척한다. 참조. IV. xvii. 29, 30; Luther, Werke WA XXV. 309. Servetus는 이 교리를 누차 공격했다. 예컨대, De Trinitatis erroribus I. 15, fo. 10b; III. 12-76ab; 영역, Wilbur, op. cit., pp. 18, 118. 제 2차 헬베티아 신앙 고백은 이 교리를 주장했다(XI. 10)(Schaff, Creeds III. 256; 영역, p. 852; Kidd, Documents, pp. 113f.).

912) 참조.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 De Trinitate III, p. 96.

913) Eutyches와 단성론자들의 의견에 가까웠던 고대 저술가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참조. Cyril of Alexandria, Expositio in Evangelium Johannis(요 5:19, 5:30, 8:28의 주해)(MPG 73.757f., 386ff., 832ff.). OS III. 517을 보라.

914) 이 점에서 이 다음에 있는 문장들을 칼빈이 1558년경에 폴란드의 George Blandrata 및 그 밖의 삼위 일체 반대론자들과 충돌한 사건을 반영한다. 참조 Responsio ad nobiles polonos et Francisum Stancarum Mantuarum(CR IX. 354 ff.); Ad guaestiones Geogii Blandratae responsum(CR IX. 332); Valentine Gentile의 제 2 차 고백(CR IX. 392).

915) Augustine, Enchiridion xi. 36(MPL 40. 250; 영역, LCC. VII. 361f.).

916) Servetus, De Trinitatis erroribus I. fo. 2bff.; II. fo. 58ab(영역, Wilbur, op. cit., pp. 6-11, 90ff.); Dialogues on the Trinity I. fo. A. 6b-7b(영역, Wilbur, op. cit., pp. 195ff.).

917) 6-8절에서

918)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아주 분리시킨 탓으로 431년에 에베소 교회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의 주동으로 정죄되었다. 카릴로스의 가르침을 과장한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의 부정할 정도로 경시해서, 448년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 정죄 되었다. 451년의 칼케돈 회의에서 채택된 신경에서는 두 사람의 교리가 모두 부정되었다. 참조. IV. v. 6; IV. vii. 1. 9; 문헌과 참고서를 위해서는 Ayer, Source Book, pp. 504-521을 보라.

919) 참조.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 De Trinitate, dial, II. pp. 250f.

920) "Ante saechla."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는 "ante omnia saecula"("모든 시대전에")라고 했다.

921) Servetus, De Trinitatis erroribus I. 54ff., fo. 38a ff.(영역, Wilbur, op. cit., pp. 59 ff.)

922) 칼빈이 염두에 둔 것은 Servetus뿐 아니라, 삼위일체 반대론 자들이었던 George Blandrata(이탈리아사람, Giorgio Blandrata), Valentine Gentile, John paul(Gianpaulo) Alciati다. 참조. I. xiii. 20-25과 거기 첨부된 각주들, CR VIII. 651f.(칼빈에게 보낸 Servetus의 둘째 편지; 이것은 그의 Christianismi restitutio, p. 580에서 취한 것임); CR IX. 392f.(Gentile의 둘째 신앙고백); CR XVII, 169ff.(칼빈에게 보낸 Blandrata의 편지). 이 저자들과 그들의 활동 및 의견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보라. E. M. Wilbur, A History of Unitarianism:Socinianism and Its Antecedents, pp. 302ff., 308-321.

923) Servetus, De Trinitatis erroribus I. 9, fo. 6a; 영역, Wilbur, op. cit., pp. 11f.

924) Augustine, City of God X. xxix. 1(MPL 41. 308; 영역, NPNF II. 199).

925)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 pp. 577ff.(Servetus가 칼빈에게 보낸 첫째 편지며, CR VIII. 649ff.에도 있음), 580(둘째 편지, CR VIII. 651f.).

926) Servetus, De Trinitatis erroribus II. 5, fo. 48ab; tr. Wilbur, op. cit., pp. 76ff.; Tertullian, Against Praxeas ii, iii, xv(MPL 2. 156-159; CCL II. 1178ff.; E. Evans, Tertullian's Treatise Against Praxeas, text, p. 107; tr. p. 151; tr. ANF III. 598, 610f.); Irenaeus, Against Heresies III. xvi. 6; III. xxi. 10(MPG 7. 925, 954f.; tr. ANF I. 442, 454). 참조. CR VIII. 507ff., 522, 535, 574; IX. 394ff. Augustine, On True Religion xvi. 30(MPL 34. 134f.; LCC VI. 239); John's Gospel iii. 18(MPL 35. 1403; tr. NPNF VII. 24); Against the Letter of Manichaeus Called Fundamental xxxvii. 42(MPL 42. 202; tr. NPNF IV. 198); On the Trinity II. ix. 15(MPL 42. 854.; tr. NPNF III. 44).

927) "Ex traduce Dei." 참조. I. xv. 5; II. i. 7, 각주 10; 또 OS III. 181, 469; Smits, II. 29, 37에 있는 참고 자료들을 보라.

928) 여기서 말하는 책은 칼빈이 Defensio orthodoxae fidei de sacra Trinitate(1554)(CR VIII. 457-644; tr. H. Cole, Calvin's Calvinism, pp. 25-206).

929) "omoousivon"

930) 이 앞에 있는 문장들에서 칼빈은 Servetus의 Christianismi restitutio에 있는 무수한 구절들을 염두에 두었다. Barth와 Niesel의 OS III. 470f.에 이 저서에서의 절의 제목과 함께 그 구절들이 있는 면이 열거되었다. 언급된 순서대로, 그 면들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578, 92f., 679f., 205f., 591f., 683, 164, 202f., 355, 145, 159, 162, 269, 263, 590, 150, 680, 683, 205, 250, 159, 119f., 265f. homoousros와 hypostasis에 대해서는 특히 269면을(De trinitate II)보라.

931) Augustine, Enchiridioni 5(MPL 40, 233; tr. LCC VII. 339).

932) 그리스도의 직책을 칼빈이 예언자와 제사장과 왕의 세 가지로 보는 데 대해서는 J. F. Jansen, Calvin's Doctrine of the Work of Christ를 보라. 이 체계적 설명의 배경에 대해서 Jansen은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20-38면). 그리고 칼빈은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책에는 대체로 유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의 전형적 저서들에서는 이 삼중의 직책이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명론을 구성한다. 참조. H eppe RD, pp. 452-487; C. Hodge, Systematic Theology II. 459-609; W. Cunningham, Historical Theology II. 238ff.; E. D. Morris, Theology of the Westminster Symbols, pp. 322-343; Westminster Confession VIII; Larger Catechism 43-45; Shorter Catechism 24-26; T. F. Torrance, The School of Faith, Introduction, pp. lxxvii-xcv, ciiif.

933)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I. xxii. 2.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이는 입법자요, 어떤 이는 제사장이요, 또 어떤 이는 왕이다. 그러나 모든 은총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들이 모두 합동한다."

934) II. vi. 2-4.

935) 프랑스어판에서는 "Ange ou ambassadeur du haut conseill"("지혜가 많은 사자<使者> 또는 사절<使節>")이라고 했다. 이사야 9:6의 주해에서 칼빈은 자기의 이 번역을 따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기묘자라, 모사라 할 것임이라"는 번역을 옹호한다.

936) "Prophetam" 프랑스어판에는 "Prophetie"(예언)이라고 되었으나 라틴어 역시 히브리 원문과 일치한다.

937) 참조. Bucer, "Rex regum christus est, summus sacerdos, et prophetarum caput"(그리스도는 왕의 왕이시오, 최고의 제사장이시오. 예언자들의 머리시다") Enarrationes in Evangelia(1536), p. 607. Benoit는 칼빈이 이 발언에서 생각을 빌어 왔으리라고 추측한다(Benoit, Institution II. 267, 각주 8).

938) II. vi. 3.

939) 칼빈은 분명히 10지파가 여로보암에게 붙은 것과(왕상 12장), 열왕기하 24장에 기록된 재난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참조. CR XXX VIII. 401, 409.

940) 진정한 교회는 세상에서 영속한다는 생각은 개혁파 교회론의 필수 요소다. 참조. Heppe RD, p. 664; McNeill, "The Church in 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 Journal of Religion XXIV(1944), 102f. K. Barth는(Kirchliche Dogmatik I. ii. 771-774에서) 교회의 유지 보존은 말씀의 영속적 재생(再生) 능력과 관련되었다고 역설한다. 말씀의 힘 때문에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가(creatio continua) 있으며, 성경이 없으면 교회는 "즉시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영역, G. T. Thomson, Doctrine of the Word of God. I. ii. 688-691).

941) 칼빈의 특색을 나타내는 말이다. 참조. 마태복음 25:34의 주해. "경건자의 생활은 슬픔과 불행이 가득한 유랑 생활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께서 그들에게 "강건하고 활기찬 정신을 주셔서, 역경을 극복할 수 있게 하신다." 칼빈은 저서에는 유사한 발전이 많다. 몇 가지 예가 McNeill의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222f.에 있다.

942) 참조. "Spirituales eius divitiae"("영적보화"), 곧 이어서 5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943) 위의 2절을 보라.

944) 위의 3절을 보라.

945) 칼빈이 특히 신자의 제사장직에 대해서 한 말은 희소하고 비조직적이지만, 다른 문제를 논할 때에 이 교리에 대해서 한 말은 그 내용이 루퍼의 생각과 대체로 같다.

946) 천사가 마리아에게 선포한 구원의 "명령"은 누가복음 1:28-33에 있다.

947) II. vi. 1

948)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v. 6(MPL 183. 340f.; tr. S. J. Eales, Life and Work of St. Bernard IV. 83f.).

949) 참조. I. i. 2; I. v. 3 및 구절들에 첨부된 각주들

950)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사람이 응답할 때 속죄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생각이(보통 Ahailard의 이름과 연결되는 이 생각이) 이 문장에서 일시 암시되는 듯하지만, 칼빈의 생각은 아벨라르드와 다르다 칼빈은 Anselm의 대신설을 고수했다고 역설한 E, Brunner의 견해가 옳다. The Mediator(O. Wyon역), pp. 438ff., 458, 507.

951) "Gehennae."

952) Augustine, John's Gospel cx. 6(MPL 35. 1923f.; tr. NPNF VII. 411).

953) 사도신경에서 가장 초자연적인 조항같이 보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표현은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주로 그의 인성을­아담이 한 후손이시었음을­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Pannier는 말했다. Institution II. 382(P. 98의 각주 a). 참조. T. F. Torrance, The School of Faith, Introduction, pp. lxxxf.

954) "Nomen praefect."위에서는 "Praeside Judaeae라고 했다. 그러나 빌리도의 관명은 "Procurator Judaeae였다.

955) "jwsca"

956) "caqarmavtwn"

957) "sca"

958) "다른 사도"라는 말을 씀으로서 칼빈은 히브리어의 기자가 바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번 바울이 아니라고 한다. 참조. 히브리서 주해서의 "개론"과 13;23의 주해

959) "apol u;trwsin cai a;ntilutron caiv i;lasthvri;on." 참조. 누가복음 21:28; 로마서 3:24; 골로새서 1:14; 디모데전서 2:6; 히브리서 9:5, 11:35.

960) 칼빈은 Erasmus의 Explanation of the Apostles' Creed(1533)를 따르고 있다. Omnia Opera D. Erasmi(Basel, 1540) V. 967f. 이 교리가 늦게 나타난 것과 신조에 가입된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A. Vacant and E. Mangenot, Dictionnaire de thologie Catholique, 논문 "Descent de Jesus aux enfers"(4권). 이 교리에 대한 언급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는 359년에 Thrace의 Nice에서 가진 교회 회의의 "날짜(359년 5월 22일)가 붙은 신경"에 있다. 이 일을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ii. 37이 기록했다(MPG 67. 280; tr. Ayer, Source Book, p. 318; H.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 61).

961) 어거스틴은 학습 교인들을 상대로 한, 사도신경에 대한 설교에서(De symbolo ad catechumenos)(MPL 40. 627-656; tr. NPNF III. 369-375) 이 제목을 제거했다. 칼빈 이전에 지옥 강하를 문제시하거나 배제하는 신학자들이 있었다. Reginald Pecock은 1440년에 신경 개정(改訂)을 제안하면서 이 조항을 빼어 버렸다. 참조. J. Lewis, Life of the Learned and Right Reverend Reynold Pecock, pp. 210, 221-225, 316, 325.

962) 이 문장을 1559년에 삽입한 것은 이 신조에 대한 비판이 재연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1553년 6월 17일에 John Lasco가 Bullinger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London에 있는 독일 피난민 교회의 목사 Walter Deloenus가 이 신조는 "주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이므로"(참조. 마 15:13) 제거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견책을 받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유해한 논쟁이 생겼다고 한다(Lasco, Opera, ed. a. Kuyper, II. 677f.). 참조. OS III, Addenda, p. 517; Deloenus(또는 Devlin, Delvin)에 대해서는 Original Letters Relative to the English Reformation, edited for The Parker Society II. 575, 588을 보라.

963) 이런 견해를 Bucer가 주장했고(Enarrationes in Evangelia, 1536, pp. 511f., 792ff.), Beza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964) Aquinas, Summa Theol. III. lii. 5: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에 내려가셨을 때에, 그 수난의 권능으로 성도들을 이 형벌에서 구출하셨다. 그들은 벌을 받아 영광의 생명에서 제거되어 있었던 것이다…."

965) Aquinas는 Summa Theol. III. Supplementum lxix. 4-7에서 limbus patrum의 문제들을 검토하며, 그것과 limbus puerorum을 구별했다. 조상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출해 주실 때까지 limbo에 억류될 것이며, 따라서 희망과 안식 상태에 있으나, 어린이들은 limbo에서 "축복된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이 전연 없이" 지낸다고 한다. 참조. A. Vacant and E. Mangenot, Dictionaire de th ologie Catholique, article "Limbes."

966) 참조. Irenaeus, Against Heresies IV. ii; V. xxxi.(MPG 7. 976ff., 1068ff.; tr. ANF. I. 463f., 504f.);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 pp. 621f.(세르베투스가 칼빈에게 보낸 첫째 편지며, CR VIII. 682f. 에도 있다); Peter Martyr Vermigli, Loci communes III. xvi. 8.

967) 아마 Zwingli의 Exposition of the Faith의 "Christ the Lord"라는 부분의 해설을 언급하는 듯하다(Zwingli, Opera, ed. M. Schuler and J. Schulthess, IV. 49; tr. LCC XXIV. 252). 지옥 강하 문제에 대하여 참조하라. Peter Martyr, Loci communes III. "Simple Exposition of the Articles of the Creed" 20 and III. xvi. 8-25(1576 edition, pp. 476, 814-825).

968) 본장의 8절과 9절의 각주 17과 20을 참조하라. 칼빈은 지옥 강하에 대한 이 생각을 Psychopannychia(1534년 저술, 1542년 발표, CR V. 224; 영역, Calvin, Tracts III. 628)에서 처음으로 암시했다. 신경의 이 조항에 대한 유력한 해석은 Aquinas의 것이었다. Lombard와 Albertus Magnus가 비교적 산만하게 논의한 이 교리에 어느 정도의 확고성을 부여한 것은 Aquinas였다(Summa Theol. III. lii. 2, 4-6, 8). Pannier가 말하듯이(Pannier, Institution II. 383, p. 107의 각주 a), 칼빈의 설명은 "완전히 독창적"이라고 할 수 없다. Nicolas of Cusa와(예컨대, 시 30:11에 대한 설교에서) 그를 따른 Pico della Mirandola도 지옥 강하를 그리스도의 고민으로 설명했다. 루터는 신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 지옥에 들어가셨다는 생각을 채용했다. 트렌트 회의의 교리 문답은(49절) Aquinas를 따라, 그리스도께서(구약의) 조상들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을 limbo에서 구출하셨다고 언명했다. 이 조항에 관한 논의의 복잡한 역사에 대해서는 J. A. Dietelmeier, Historia de descensu Christi ad inferos literaria, pp. 160-191과 거기 인용된 자료들을 보라.

969) 위의 5절.

970)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救贖)적인 고민을 겪으신 것이 지옥 강하의 뜻이라고 하는 칼빈의 설명을 Sebastian Castellio가 조롱했다. 이것은 1544년 3월에 칼빈이 Viret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다(CR XI. 688; tr. Calvin, Letters I. 409). 여기서 배척을 받는 견해는 분명히 Castellio의 것이다. 참조. CR XI. 675; Herminjard, Correspondance IX. 158, 185.

971) 불가타역, "Exauditus est sua reverentia"

972) Cyril, De recta fide, Oratio ii. 18(MPG 76. 1555ff.).

973) Hilary, On the Trinity IV. xlii("mortem in inferno perimens" "지옥의 죽음을 멸하시며"); III. xv("Dei filius in inferis est; sed homo refertur ad coelum"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계시지만, 사람은 하늘로 들려 간다")(MPL 10. 128, 24; tr. NPNF 2 ser. IX. 84, 66).

974) 본장 8절의 각주 17과 10절의 각주 25를 보라. 여기서 칼빈은 Castellio의 비판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고, Barth와 Niesel은 말한다. 칼빈의 견해에 반대한 Castellio의 설명 이외에 그들이 아는 것은 없지만, 어떤 루터파의 사람이 여기서 논의된 비난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OS III 497, 각주 1). 영국에서는 1552년에 케임브리지에서 있었던 토론에서 Christopher Carlisle이 이 조항을 거부했기 때문에 논의가 벌어졌다(Dietelmeier, op. cit., pp. 205ff.). Carlisle의 주장은 1582년에 발표되었다. Touching the Descension of Our Savior Christ Into Hell.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그 다음 해에 London에 있는 독일 피난민 교회의 목사 중의 한 사람이 비슷한 의견을 말해서 소란했었다(위의 8절의 각주 17). 참조. Herminjard, Correspondance IX. 158, 각주 3; CR XI. 675. 그 후에 Robert Parkes가 Thirty-nine Articles의 제 3조에 관련해서 공격을 재개하였고, 칼빈파의 Andrew Willet가 응수했다(Limbomastix, 1607).

975) Ambrose, Exposition of Luke's Gospel x. 56-62(MPL 15. 1910ff.).

976) 이것은 Castellio의 의견을 언급하는 듯하다. 10절의 각주 25를 보라.

977) 라오디게아의 Apollinaris(360년경)는 "처녀 마리아에게서 받은 신체 안에" 하나님의 로고스가 "영혼으로서 내주하셨다"고 가르쳤다(Lietzmann). 참조. C. E. Raven, Apollinarianism; H. Lietzmann, From Constantine to Julian(A History of the Early Church, Vol. III), pp. 209f.

978) 단의(單意)론자들은 단성(單性)론으로 인한 분열을 해소하려고, 7세기에 나타났다.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에게 한 본성이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서 칼케돈의 결정을(451년) 거부했는데, 단의론자들은 Heraclius 황제의 타협적인 칙령을(638년) 기초로 삼아 두 본성을 인정하면서 한 능력 또는 의지(qevlhma)만을 인정했다. 그들의 주장을 제 3차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는(681년) 13회기에서 명확히 배척했다(Mansi XI. 1054; Ayer, Source Book, pp. 671f.; 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 130).

979) Pannier는 여기서 칼빈적 경건의 부활관에서 오는 승리적 음향에 주의를 촉구하면서, 칼빈의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1537)를 인용한다. 참조. OS I. 402; Fuhrmann, Instruction in Faith, p. 50; Pannier, Institution III. 383. p. 108의 각주 b와 c.

980) 위의 7절

981) 여기 인용된 말은 Augustine, John's Gospel lxxviii 1(MPL 35. 1835; tr. NPNF VII. 340f.)에 있는 몇 문장에 대략 해당한다.

982) Augustine, John's Gospel 1. 13(MPL 35. 1763; tr. NPNF VII. 282).

983) Augustine, Faith and the Creed vii. 14(MPL 40. 188; tr. LCC VI. 360f.).

984) 칼빈은 교회의 찬란한 승리를 갈망하지만, 교회가 지상에 있는 동안에 승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참조. Pannier Institution II. 384, p. 114의 각주 a.

985) Augustine, Farth and the Creed viii 15(MPL 40 188; tr. LCC VI. 361.).

986) Ambrose, De Jacobo et vita beata I. vi(MPL 14. 673f.).

987) 문예 부흥 이전에는 사도신경은 사도들 자신이 작성한 것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Lorenzo Valla와(1440년경에 Contra calumniators…apologia, Opera 1540. p. 800) Erasmus가(Ratio verae theologae, 1518, Opera 1540, V77)이 전통적 견해를 부정했다. 참조. Schaff. Creeds I. 23; F Kattenbusch, Das apostolische Symbol I. 1-15; OS III. 506f.

988) Laelius Socinus에(1562년 사망)대해 언급하는 듯하다. Calvin, Responsio ad aliquot Laelii Socini quaestiones(1555)(CR X. I. 160-165). Socinus가 제기한 질문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칼빈의 대답에서 추론할 수 있다. 칼빈은 처음 대답에서 언명하였다. "하위에 있는 것들은 반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 원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단순한 자비에서 사람이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동시에 개입하지(et simul imterveniat) 못한다는 법은 없다.

989)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xv 30, 31(MPL 44. 981f., tr. NPNF V. 512)

990) Augustine, On the Gift of Perseverance xxiv 67(MPL 45. 1034; tr. NPNF V. 552).

991) "i;lasmovn."

992) "Placatio."

5a)993)carastaqhvsontai(롬 5:19).

994) "cavrisma."

995) "i;lasthvrion"

996) "a;ntilutron."

997) "i;pevr cristou'"

998) Lombard, Sentences III. xviii. 1(MPL 192. 729ff); Aquinas, Summa Theol. III. lix 3(tr. English Dominican Fathers, Summa Theol. III. Second number, pp. 455f.). Bonventura, In sententias III. xviii. 1, 2(Opera omnia, ed. College of St. Bonaventura, III. 379f.). 참조. Augustine, John's Gospel civ. 3(MPC 35. 1903; tr. NPNF VII. 395).

999) 프랑스어판에서는 소르본느 학파가 이런 오해를 일으킨다고 했다.

1000) I. xiii. 14-15

1001) II. xv. 2

1002) 요한복음 1:13에 대한 칼빈 주석에서 사용된 말:"믿음은 중생으로부터 나오고",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영"과 "성령"을 구별한 것처럼 그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참조, N. Ferre,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God, pp. 250 f.; N. Bulgakov, Le Paraclet, pp. 145ff. G.S.Hendry는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베타적 의미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주장한다. The Hoiy Spirit in Christian Theology, p. 26; 참조. pp. 44ff., 119. H.P.Van Dusen에 의하면, 바울이 "마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란 상이한 용어들이 서로 교체될 수 있는 것처럼'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면서, 성령의 기본 개념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변화시키는" 존재라고 한다.: Spirit, Son, and Father, pp. 66f.

1003) "Singularem quam suis vitam inspirat filius Dei." "suis"에 대한 프랑스어는 " ses fidles"이다. Cadier는 칼빈이 때로 라틴어의 fideles와 pii 뿐 아니라 sui를 fideles란 말로 번역하였고, 거기에서 sui라는 대명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가리키고, 간혹 강조한 의미로 electi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Cadier, Institution III. 11, 주 2.

1004) 본장 2절.

1005) "Corda nostra incendit amore Dei et studio pietatis"편 손 위에 놓인 불타는 심장으로 표현된 칼빈에 의해 사용된 상징에는 이러한 표어가 붙어 있다. "Cor meum quasi immolatum tibi offero, Domine" 루터의 로마서 서문(1522)에 나오는 말을 참조하라. 거기에 보면 믿음 "마음을 불타오르게 한다"(cor in fiammat)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요한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자 일기에 기록된 체험에서 반영되었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을 때에…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 나오는 칼빈의 말과 비슷한 내용은 신비주의자들의 글에 무수하고 아퀴나스의 글에도 약간 나오지만, 그 비슷함이 사실이라기보다 말뿐인 경우가 종종 있다. 예컨대 LCL VIII. 210-213에 나오는 Richard Rolle(1349년 사망)의 Incendium amoris에 관한 R.C. Petry의 논평과 거기에는 인용된 연구들을 참조하라.

1006) 본장 제1절

1007) II. ii. 18-21, 인간 이성의 한계에 관하여.

1008) 위에서 성령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이 사용된 것을 주의하라. 칼빈은 자주 그리스도가 교사라는 생각을 표현하였다. 마태복음 17:5에 대한 공관복음서 주석에서 칼빈은 "그의 말을 들으라" 라는 말씀이 "ad unicum doctorem Christum", 즉, 교회의 유일한 교사이신 그리스도께 돌아가도록 교회를 환기시키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참조, 요15:14 주석:"Ordinatus est ecclesiae magister et doctor unicus", 요 15:20; 20:30 주석에 나오는 비슷한 표현들; Sermons on Daniel xlvi(단, 12: 5-7에 관하여), CR XLII. 150. 로고스인 그리스도가 지도교사 혹은 교사라는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그의 책인('O Paidagwgov")에서 전개시켰다.

1009) 믿음의 정의는 제7절 이하에서 시작된다.

1010) II. vii. 3.

1011) Melanchthon은 Loci communes(1521)의 "칭의와 믿음"이라는 절에서 "궤변가들"이 영적 힘이 없는 역사적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이러한 opinio valgaris(통속적 견해)를 가졌다고 비난한다(Ed. h. Enge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ed. R. Stupperich, II. ⅰ. 99; tr. C. L. Hill(Th. Kolde의 1910년판에서),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 185).

1012) I. ii. 2; I.x.1; II.vi. 4

1013) 참조. IV. viii. 5.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은 칼빈이 항상 가르치는 교훈이다. 참조, II. vi. 2. 거기서 그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약의 "거룩한 선조들"이 신앙한 대상이라고 한다. 참조, E. A.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p. 164;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 33.

1014) III. i. 4.

1015) Augustine, City of God XI. ii(MPL 41, 318;tr NPNF II. 227).

1016) Lombard, Sentences III. xxv. 1-4(MPL 192, 809f.); Aquinas. Summa Theol. II II ae. ii. 5-8. 아퀴나스는 맹신을 가르치면서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을 지혜있는 자들의 신앙을 맹신한다"는 주의를 주었다(art.6)(tr. LCC XI. 250f.). 참조, III. ii. 5. 여기에서 칼빈은 요한복음 4:53과 사도행전 8:27, 31을 인용하면서 "맹신"이란 용어를 수용하여 사용한다. 참조, Augustine. The Usefulness of Belief xi. 25-xiii. 29(MPL 42, 82-86; tr. LCC VI. 311-315);Bonaventura, Commentary on Sentences(In libros sententiarum) III. xxv. l. qu. 3(Opera omnia III. 582ff.).

1017) Ockham. De sacramento altaris, ch.ⅰ: "로마 교회가 분명히 믿는 것이라면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나는 모두 믿으며, 그 이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The De sacramento altaris of Willian of Ockham, edited and translated by T. B. Brich, Ⅰ. 164f.). 참조, Biel, Epythoma pariter et collectorium circa quatuor sentiarum libros(1510) III. xxv. qu. unica, 주 2).

1018) "Implicita" 칼빈은 이 단어를 다른 뜻으로 이용하고 있다.

1019) Vincent of Lerins, Commonitorium I. xxiii. 28f.,:"시대와 세기가 경과함에 따라 개인과 집단 전체에, 또 일개인과 교회 전체에 있어서 신앙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진보 곧 커다란 발전과 활기찬 진보"가 요구되고, 그러면서도 "동일한 교리"가 보존되야 한다(MPL 50, 667f.; tr. LCC IX. 69; 참조, p.31). 참조, III. ii. 19.

1020) "Aulicus" 라틴역에는 "regulus"라 되어 있음, 요 4:49.

1021) IV. i. 5

1022) 참조, I. ii. 2; I. x. 2, 주 6.

1023)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389).

1024) 참조, II. ii. 15. 주 58.

1025) Lombard, Sentences III. xxiii. 4f.(MPL 192, 805f.); Aquinas, Summa Thol. II II ae. iv. 3, 4(tr. LCC XI. 268f.).

1026) 본장 Sce. 2.

1027) Augustine, Predestation of the Saints ⅱ. 5(MPL 44, 963; tr. NPNF V. 499f.); Lombard, Sentences III. xxiii. 5(MPL 192, 805f.);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II. xxiii. art. 3. qu. 4, 5(Opera omnia IV, 505-511); Aquinas, Summa Theol. II. II ae. iv.4(tr LCC XI. 269f.).

1028)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원래 지성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칼빈의 견해에 관해서는 또한 I. v. 9, 주 29; III. ii. 33. 36을 참조하라.

1029) 본장 Sec. 10 참조.

1030) 참조, Auqustine. On Baptism I. ix. 12(MPL 43, 116; tr. NPNF IV. 417).

1031) "poluvsamon" 야고보서 2:21에 관한 해석에 대해서는 III. xvii. 11을 보라.

1032) "Per catavcrhsin."

1033)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양자"에 대한 바울의 개념(롬 8:15, 23; 9:4; 갈 4:5; 엡 1:5; 요 1:12 참조)을 칼빈은 Institutes에서 빈번히 사용한다.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II. vi. 1; II. vii. 15; II. xi. 9; II. xii. 2; III. i. 3; III. ii. 22; IV. xi. 6; III. xiv. 18; III. xvii. 6; III. xviii. 2; III. xx. 36f.; III. xxi. 7; III. xxii. 1,4.

1034) 이것이 처음 문장들과 관계가 있음은 명백하다. 본장 Sec. 15와 III. xx. 11, 12, 28도 참조하라.

1035) "Sana pietatis doctrina"

1036) III. ii. 9.

1037) catavcrhsin

1038) "Agnitio." 참조, Ⅰ.ⅰ. 주1.

1039) "Scientia."

1040) "plhroforla"."

1041) "Fiduciam."

1042) "Audaciam."

1043) II. i. 9; II. ii. 27; II. iii. 1.

1044) 참조, II. ii. 22-25; III. ii. 4, 주11. c. Trinkhaus는 본절을 인용하여, "플라톤은 사람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칼빈은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무지한 상태에 떨어졌다고 주장한다"라고 말했다. "Renaissance Problems in Calvin's Theology"

1045) Augustine, John's Gospel Iii. 9(요 12:31에 대하여)(MPL 35, 1772; tr. NPNF VII. 289)

1046) 참조, II. i. 1; III. ii. 17.

1047) Bernard of Clairvaux, In dedicatione ecclesiae, sermon ⅴ(MPL 183, 531- 534; tr. St, Bernard's Sermons for the Seasons, by a priest of Mount Melleray II. 419-426).

1048) 참조. I. ii. 2; I. x. 1; II. vi. 4.

1049) "In filios diffidentiae":엡 5:6, 라틴역.

1050) Augustine, John's Gospel 1xxxv. 3(MPL 35, 1849; tr. NPNF VII. 352); Epistle of John ⅸ. 4(MPL 35, 2047 f.; tr. NPNF VII. 515); Lombard, Sentences III. xxxiv. 5-8(MPL 192, 825f.); Aquinas, Summa Theol. II. IIae. xix. 2, 8.

1051) "Cuius agnitionem fildes requirit." 참조. Anselm, Proslogion, Preface(MPL 158; tr. LCC X. 70; 그리고 E. R. FairWeather, ibid. pp. 65ff.에 인용된 문헌.

1052) 칼빈이 신앙을 정의한 것(1539년판 Institutes의 제4장에 대해 Utrecht의 부감독이 었던 Albert Pighius는 "모호"하고 "혼란"하여 "그릇된 확신"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Controversiarum praecipuarum…explicatio(1542), ch. ii. fo. 58a-60a

1053) 본장 Sec. 6.

1054) I. xvi. 3.

1055) 칼빈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 점을 자주 주장한다. 특히 요 3:16, 주석을 참조하라.

1056) 참조, I. v. 9; III. ii. 1, 8, 36; Augustin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ii. 5(MPL 44. 963; tr. NPNF V. 499); Cadier, Institution III. 56, 주 1.

1057) II. ii. 18-25.

1058) "Motu."

1059) Augustine, Sermons cxxxi. 2, 3; Clxv. 5(MPL 38, 730, 905; tr. LF Sermons II. 586f., 839f.).

1060) 참조, I. v. 9; III. ii. 8, 33; III. vi. 4.

1061) 본장 17절.

1062) Bonaventura도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V. xx. 1. dubium 1(Opera theologica selecta) IV. 514)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는 Augustine의 Sermons cccxciii(MPL 39, 1713)에서 인용한다. 참조, Aquinas, Summa Theol. Ⅰ. IIae. cxii. 5("사람은 자기가 은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가")(tr. LCC XI. 180 ff.).

1063) III. xv.

1064) 주 54에서 인용한 Bonaventura와 Aquinas를 참조하라;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VII(1543, fo. 133). 라틴역:"Nescit homo utrum amore anodio dignus est." RSV는 이와 아주 다르다.

1065) 참조, Cochlaeus, Philippicae in apologiam Philippi Melanchthon(1534) III. 42; J. Latomus, De fide et operibus Opera adversus haereses(1550), fo. 141b f.); A. Pighius, Controversiarum praecipuarum…explicatio, fo. 506 ff. Pighius는 fiducia, 곧 "확신있는 믿음"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을 공경한다.

1066) Latomus, op. cit., loc. cit.

1067) Aquinas, Summa Theol. Ⅰ IIae. cxⅱ. 5(tr. LCC XI. 181).

1068) "Nisi quis uvpovstasin pro fiducia accipere malit."

60a)1069)VG 1560.

1070) Augustine, John's Gospel lxxix. 1; xcv. 2(MPL 35. 1837, 1872; tr. NPNF VII. 342, 369);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I. xxxi. 50(MPL 44. 181; tr. NPNF Ⅴ. 43)

1071) Lombard, Sentences III. xxiii. 9; xxv. 5(MPL 192. 807, 811).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II. xxxvi. 6(Opera selecta III. 813).

1072) 참조, Luter, On Christian Liberty(1520); "Fluit ex fide charitas" Werke WA VII. 66;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338);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ed. H. Enge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II. i. 114(tr. C. L. Hill,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 204.

1073) Bernard, On the Feast of the Annunciation of the Blessed Virgin i, 1, 3,(MPL 183, 383f.; tr. St. Bernard's Sermons for the Seasons, by a priest of Mount Melleray III. 137).

1074) III. xviii. 8.

1075) III. ii. 6.

1076) 칼빈은 "10장"이라고 기록했으나. 이것은 히브리서 11장 1절 잘못 기록한 것이다. 참조 본장 41절.

1077) Lombard, Sentences III. xxvi. 1(MPL 192.811).

1078) III. ii. 7.

1079) Lombard, Sentences loc, cit.

1080) 이 견해에 대한 Bonaventura의 비평을 참조하라.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II. xxvi. 1. qu. 4(Opera selecta III. 571).

1081) 칼빈은 중세기의 선배들과 같이 "Poenitentia"라는 말을 회개와 참회에 대해 모두 사용한다. III. iv. v. IV. xix. 14-17에 있는 교회 참회에 대한 논의와 IV. xii에 있는 교회 규율론을 참조하라. 본장에서는 믿음과의 관련 하에서 회개를 논한다. 제 9절에서는 회개를 중생과 동일시한다.

1082) 여기에서 회개를 크게 중요시하는 것은 Bucer가 그의 저서 In sacra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Geneva판, 1543년, fo. 97b)에서 한 주장과 일치하고 또 거기에서 사용한 언어와 비슷하다. 칭의보다 회개를 먼저 논의하는 이 놀라운 순서를 선택한 것은 칼빈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회개가 성결에 미치는 영향에 우선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역설하기 위함이다. Niesel은 이것이 로마주의자들의 반대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평하지만, 더 적극적인 신학적 의도도 또한 있었다고 시사한다. The Theology of Calvin, p. 128.

1083) 중생이 믿음의 결과로서 믿음에 따른다는 종교개혁 교리는 요한복음 1:13에 대한 주석에서도 강조되었다. 참조, III. ii. 1. 주 3,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ed. Eng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II. i. 112-114, 149f.; tr. C. H. Hill,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p. 202ff., 249f.).

1084) 참조. sec. 2의 끝에 있는 말들; Luther, Ninety-five Theses(1517) 1; "Christus…omnem, vitam fidelium poenitentiam esse voluit"(Werke WA I. 233); Augsburg Confession, art, xii.

1085) "Ad resipiscentiam." 본장 Sec. 5참조. Bucer에 의하면(주 15)보라, "본심으로 돌아오다"는 뜻인 resipiscere라는 동사가 마태복음 3:2에 있는 poenitentiam agere와 함께 결합되어 있다.

1086) Aquinas, Summa Theol. II. IIae, xix. 2, 8 여기에서는 "아들로서의", "종으로서의", "세상에 속한" 두려움과 관련시켜 "시초의 두려움"을 논한다. tr. LCC XI. 311ff., 321f.

1087) 참조. CR VII. 56; Zwingli Opera, ed. M. Schuler and J. Schulthess, III. 388(tr. Selected Works of Huldreich Zwingli, ed. S. M. Jackson, p. 178.

1088) Loyola, Spiritual Exercises, sections on penance, e. g., First Week. sec. 82, on exterior and interior penance(The Spiritual Exercises of St. lgnatius; tr. L. J. Puhl, p. 370).

1089) 이 용어들은 Melanchthon에 의해 사용되었다. 참조, Loici communes(1521), section on penance(ed. Engelland, op. cit., p. 149; tr. Hill, op. cit, pp. 249f.). 참조 Apop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XII. 26(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p. 257, 주 2.

1090) 칼빈이 여기서 "기쁨"(laetitia)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Bucer의 말을 반영한다: Bucer, In sacra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 "Certe longe plus mellis quam fellis, laetitia quam quam tristitiae obtinens"(1543, edition, fo. 33b).

1091) Bucer(op. cit., loc. cit)는 율법적 회개와 복음적 회개라는 구별을 받아들인다. Melanchthon은 여기에 소개된 사울과 유다의 예를 사용하며, "유다와 베드로의 통회를 구별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본다. 참조,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XII. 8(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p. 254; cf. p. 258; Concordia Triglotta, pp. 254.).

1092) Melanchthon, Apology, loc. cit.; Calvin, Comm. Acts 2:37­38.

1093) Melanchthon, Apology, loc. cit., 사울과 유다와 베드로에 대한 말씀을 인용한다. Bucer, op. loc. cit., 탕자와 행 2:37을 인용한다.

1094) 칼비는 시편 주석 서문에서 인상적인 말로 자신의 회심은 지연되었으나, "돌발적"이었다고 회고하였다(LCC XXIII. 52). 여기서 그는 평생 계속되는 것으로 간주된 회개를 설명하기 위해 "회심"이란 말을 사용한다.

1095) 참조, Bucer, op. loc. cit., 1536년판, p. 85; 1543년판, fo. 33b.

1096) "Monet cum Deo esse nogotium." 참조, Introduction pp. li ff.; III. iii. 16; III. vii. 2; III. xx. 29; IV. xi. 2.

1097) 본장 주 1을 참조하라. 여기서 칼빈은 중생이란 사람 속에 본래 있었으나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1539년판에서 영과 육의 갈등과 자연인과 중생한 인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내용은 OS IV. 63에서 추가 되었다.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128f.

1098) Frederick Staphylus(1512-1564)는 비텐베르그 대학 출신이었으나, Luther의 사상과 은사 Melanchthon을 반대하고(1553년), 종교개혁을 공격하는 글을 썼다. Theologiae Martini Lutheri trimembris epitome(1558). 이것은 당시에 출판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작 속에 들어있는 문구에 관한 것인데, 이 저작은 Staphylus의 저작집에 포함되어 있다; In causa religionis sparsim editi libri, in unum volumen digesti(Ingolstadt, 1613), Part II. col. 35.

1099) 칼빈이 여기서 사용한 "fomes"란 단어는 원래 "부싯깃", "불쏘시개"를 의미하는데, 창 37:8(라틴역)과 Tertullian과 Augustine과 기타 교부들에 의해 죄에 대한 자극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스콜라 신학에서 그것은 일평생 완전히 박멸할 수 없는. 억압할 수 없는 죄의 내면적 활동을 의미하는 잘 알려진 용어였다. Lombard, Sentences II. xxx. 7f.; II. xxii. 1(MPL 192.722, 726f.); Aquinas, Summa Theol. I. IIae. Ixxiv. 3, reply to obj. 2.

1100)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V. x. 27; IV. xi. 31(MPL 44.629-632, 634-639; tr. NPNF V. 429.432f.).; Against Julian the Pelagian I. i. 3; II. iii. 5-v, 14; II. viii. 23; II. ix. 32(MPL 44.642, 673-675, 688ff., 695f., tr. FC 35. 56f., 59ff., 68ff., 82-92). Barth와 Niesel은 칼빈이 암시하는 점과 관련해서 Augustine이 초대 교부들에게서 인용한 문구들을 재인용하였다. Cadier, Institution III. 77, 주 4도 보라.

1101) "Concupiscentiis," 참조, Augustine, John's Gospel xli. 8, 10(MPL 35. 698; tr. NPNF VII. 232f). 다음의 인용문의 출처는 Augustine, Sermons clv. 1(MPL 38.841; tr. LF Sermons II. 747f.)이다.

1102) II. ii. 27.

1103) Augustine, John's Gospel xli. 11(MPL 35.1698; tr. NPNF VII. 234); Sermons cliv. 1(MPL 38. 833f.; LF Sermons II. 735); Against Julian III. xxvi. 61f.(MPL 44.733f.; tr. FC 35.160ff.). 참조, IV. xv.12, 주 20.

1104) "Quem formitem appellant." 본장 주 19를 참조하라.

1105) 참조, J.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1523), p. 150.

1106) ajtaxia.

1107)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 xiii. 27; III. iii 5(MPL 44,563,590f.; tr. NPNF V. 385f., 404). 또한 Augustine의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 xxxix. 70(MPL 44. 150f., tr. NPNF V. 43); Against Julian II. i. 3; II. iv. 8; II. v. 12; IV. xix. 61(MPL 44.673, 678f., 682, 860; tr. FC 35. 57. 65f., 372)도 참조하라.

1108) Ambrose, On Isaac or the Soul viii. 65(MPL 14. 553; CSEL 32.668); Augustine, Against Julian II. ix. 32; V. iii. 8(MPL 44.696, 787; tr. FC 35. 95, 247ff.).

1109) 1698; tr. NPNF VII. 234. 본장, 주 25에서 인용된 Fisher를 참조하라.

1110) 자유주의파 중의 극단이었던 Quintin파가 중생의 교리를 엄청나게 왜곡한 것을 칼빈이 그의 저서 Contre la secte des Libertins xviii(CR VII. 200ff.)에서 묘사한 것을 참조하라.

1111)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 2(MPL 183. 824f.; tr.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55.

1112) III. vi-X.

1113) 참조. 본장 sec. 6, 주 16.

1114) 칼빈이 "vetusti scriptores"이라고 한 말 속에는 교부들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참회 교본인(libri poenitentiales)의 저자들도 포함될지는 모든다. 이런 교본들에는 때로 육체에 대한 가혹하고 엄격한 징벌이 규정되어 있다. 참조, J. T. McNeill and H. M.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p. 5, 30ff., 142ff., 258ff., 348.

1115) IV. xii. 8-13.

1116) Jerome Commentary on Joel 2:12(MPL 25. 967).

1117) IV. xii. 14-21.

1118) Bucer, In sacra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1536년판, pp. 35, 85, 259).

1119) III. iii. 1.

1120) Plato, Apology of Socrates 20A, B; 41 C, D; Phaedo 64A, B; 67 A-E 81A(LCL Plato I. 106f., 142ff., 222f., 232-235, 280ff.).

1121) "Nisi prius iustitiae amore captus." 참조. Luther, Letter to J. Staupitz, 1518년 5월 30일; "Quod penitentia vera non est, nisi quae ab amore iustitiae et Dei incipit"(Werke WA I, 525; O. Scheel, Dokumente zu Luthers Entwicklung, 2d ed., p. 10; tr. Works of Martin Luther I. 40, Luter, Sermons on Repentance(Werke WA I. 320).

1122) 참조, I. Clement ii. 3. 칼빈은 이 견해를 재세례파의 견해로 간주한다: Brief Instruction Against the Anabaptists(CR VII. 73f.). Zwingli가 인용하고 답변한 제세례파의 Schleitheim 신조를 보라(Zwingli, Opera, ed. M. Schuler and J. Schulthess, III. 390; tr. S. M. Jackson, Selected Works of Huldreich Zwingli, pp. 180f., tr. J. C. Wenger from the German text", "The Schleitheim Confession of Faith", Mennonite Quarterly Review XIX[1945], 248). 참조. IV. xvi. 1, 주 2.

1123) 터툴리안 시대의 몬타누스파와 이후의 노바티아누스파는 타락한 자들을 참회에서 배제하는, 그들의 엄격주의(rigorism)를 지지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6:4-6을 논거로 삼았다. 이것은 히브리서가 정경에 포함되는 것이 지연된 한가지 원인이었다(Brescia의 Filaster[397년 경 사망]가 De herseibus lxi[난외 lxxxix]에서 이 사실을 확인함; MPL 12,1202). 참조, J. Moffatt,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Hebrews, pp. xviii, xx. 터툴리안이 몬타누스파에 가입했을 때 그는 이 구절을 해석하여, 배교자들은 참회할 능력이나 참회의 기회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1124) Augustine, unfinished Exposition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xxii(MPL 35.2104); Letters clxxxv. 11. 49(MPL 33.814; tr. FC 12.188f.).

1125) Augustine, Sermon on the Mount I. xxii. 73(MPL 34.1266; tr. NPNF VI. 30f.); Bede, Exposition of Mathew's Gospel II. 12(MPL 92.63).

1126) "Ponit Spiritum blasphemiae"(VG, "esprit de blaspheme"); 마태복음 12:31의 Froben판(Basel, 1538)본문과 일치한다. 헬라어 본문은 tou' pneuvmato" blasfhmiva 이다(문자적으로 "성령의 훼방"이란 뜻이며, RSV에는 "성령에 대한 훼방"이라 되어 있다).

1127) 이러한 맡은 노바티아누스파 논쟁 문헌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키프리안은 노바티아누스가 배교(또는 배반)와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동일시한다고 비난한다(MPL 35,2304). 참조, O. D. Watkins, A History of Penance I. 17. 132-221.

1128) "Voluntarie."

1129) 본장 sec. 21.

1130) 70인역(LXX)과 라틴역(Vg.)에 따라(창 27:38, 39 주석에서와 같이), 칼빈은 창세기 27장에 있는 야곱의 축복을 에서의 축복과 서로 바준다. 그러나 히브리서 11:20을 참조하라.

1131) 참조, Gergory the Great, Homilies on the Gospels II. hom. xiv. 15(MPL 76. 1256); Columbanus, Penitenial(600년 경) A. l(MPL 80.223; tr. J.T.McNeil, Medieval Handbook, of Penance, p.250); Pseudo-Ambrose, Sermons xxv. 1(MPL 17, 655); Lombard, Sentence IV. xiv. 1(MPL 192,869); P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viii. 22(MPL 40. 1120). 최후의 저작은 1100년경에 비로소 나타났으나, 스콜라 철학자들은 이것을 진본으로 간주하여 권위를 부여했고, Spannheim의 Trithemius는 1495년경에 그것을 처음으로 위작이라고 선언하였다. 본장은 Smits에 의해 인용된 Institues(II. 263)에서 위 책에 대한 17번의 언급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1536년판에서 인용한 네 개의 예외도 포함하고 있다. 참조, III. iv. 39, 주 83; Smits I. 184,190.

1132) Chrysostom, Homilies on Repentance, hom. vii. 1(MPG 49,338). 고백을 죄에 대한 치료약으로 보는 견해는 초대 교부들과 중세 고백 지침서의 상투적인 견해이다. 참조, A.Harnack, Medizinisches aus der altesten Kirchengeschichte(Texte und Untersuchungen zur Geschichte der altchristlichen Literatur VIII<1892>), pp. 137ff.; McNeil, and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p. 44f., 182; McNeil,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pp. 44f., 114, 119, 134, 179, 315. 칼빈의 Ecclesiastical Ordinances(1541)에는 "사람을 상하게 할 정도의 엄격함은 피하라. 교정조차도 치료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CR X i. 30; tr. LCC XXII. 71).

1133) "고해의 세 부분"인 통희, 고백, 보속은 중세기의 무수한 저작에서 정식으로 논술되어졌다. 이러한 체계는 Lombard의 Sentences IV. xvi. 1(MPL 192, 877)와 Gratian의 Decretum II. i. 40(Friedberg I. 1168)에서 볼 수 있다. 후서에서 이 체계는 크리소스톰이 저술한 것으로 잘못 간주되어 회개에 관한 저작(Opera, edited by Erasmus, 1530, II. 347; 1547 editon, V. 904)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참조, Melanchthon, Loici communes(1521), section "Vis peccati et frutus"(ed. Engelland, op. cit., p. 35; tr. Hill, op., 103; 이 두 편집자들은 통회의 준비 단계인 회오에 대해서 유익한 주를 달았다). 여기서 칼빈이 언급한 "방대한 책들"이란 보통 Summae confessorum이라고 부르는 정교한 논문들을 포함할 것이다. 참조. A. M. Walz Compendium historiae ordinis praedicatorum, p 145. 루터는 이러한 삼중적 참외 개념을 여러 번 공격했다. 예컨대, Werke, WA VI. 610; VII. 112를 보라. Fisher는 루터에게 답변하면서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io(1523), pp. 156-178에서 상세히 그것을 변호한다.

1134) 소죄를 매일 회개하는 것에 대하여 참조, Augustine, Enchiridion xix. 71(MPL 40. 265; tr. LCC VII. 38); Caesarius of Ares(d. 542)in MPL 39. 2220; Columbanus, Regula coenobiails Kirchengeschichte, ed. O. Seebass in Zeitschrift fr Kirchengeschichten XV(1895), 366-386, sec. 1(tr. McNeil and Gamer. op. cit., p.258); Aquinas, Summa Theol. III. lxxxvii. 1. 회개를 "파선후의 두 번째 판자"라고 묘사하는 것을 루터는 "성 제롬의 위험한 말"이라고 부른다(Babylonish Coptivity, section on Baptism, Werke, WA VI; tr. Works of Martion Luther II. 219, 222). Jerome, Letters lxxxiv. 6; cxxx. 9(MPL 22. 748, 115; NPNF 2ser. VI. 178. 266)을 보라. 참조, Lombard, Sentences IV. xiv. 1(MPL 192.869; tr Lcc X. 348). 제롬의 문구는 트렌트 종교회의, session 6, ch.xiv에서 승인되었다. Schaff, Creeds II. 105.

1135) "De asini umbra rixam esse". 이솝(B. C. 570년경) 우화에서, 당나귀를 빌려주고 도보로 따라가던 주인이 정오가 되어 타고 가던 사람의 당나귀 그늘밑에서 쉬는 권리에 대해 논쟁한다. "당나귀의 그늘에 대해서 논쟁한다"는 말은 희랍 저술가들의 상투어가 되었다. 에라스무스(Adagia<1523> I. iii. 52)는 이 표현을 데모스테네스와 관련시킨다. 참조, Plutarch, Moralia X. 434f.).

1136) Biel, Epythoma pariter et collectorium circa quatuor sententiarum l-ibros IV. ix. 용서를 얻기 위한 통회에 대해서 참조, C. R. Meyer, The Thomistic Concept of Justifying Contrition, pp. 60f., 190ff. 참조, II. ii. 4, 주15 III. iv. 17, 주36)

1137) III. iii. 20, 참조, Melanchthon, Loici communes, ed. Engelland, op. cit., pp. 92, 96, 119; tr. Hill, pp. 117. 181f., 211.

1138) 고백에 대한 중세기 신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의 서로 다른 다양한 많은 견해들은 H. C. Lea, History of confession and Indulgences I. 168ff.에 인용되어 있다.|Lombard의 Sentences IV. xvii. 1-4(MPL 192,880ff.와 Gratian의 Decretum II. I. 30-37 Friedberh I. 1165-1167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1139) "Exceptionem item, quia responderit Adam quasi excipiens". 칼빈은 법률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exceptio는 정식으로 제출되는 항변 또는 이견를 의미한다.

1140) Chrysostom, Homilies on the Canaanite Woman, hom. ix(MPG 52. 456f.).

1141) P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x. 25(MPL 40. 1122); Gratian, Decretum II. I. 88(Friedberg I. 1188).

1142) Pseudo-Chrysostom, Contra judaeos, Gentiles et haereticos(MPG 48. 1078).

1143) 수많은 중세기 저술가들은 은밀한 고백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상투적인 성경 본문들을 사용하였다.

1144) 가짜 교서(초기 교황들의 것으로 간주됨)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프랑스에 850년 경에 나타났다. 참조, P. Hinschius, Decretales Pseudo-Isid-orianae et Capitula Angilramni; E.H. Davenport. The Forged Decretals; J. Haller, Nikolaus I und Pseudoisidor; P.Fournier and G.Le Bras, Histoire des collections canoniques en Occident depuis les fausses dcrtales jusqu'au decret de Gratien I. 196f; W.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pp. 167-189.

1145) 제4차 라테란 종교 회의(1215) canon xxi. Text in Mansi XXII. 1007ff.: Hefele- Leclercq V. 1350. 칼빈이 "양성"이란 말에 대해 비웃는 것을 보면 그가 중세기 학자들 사회의 농담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H.C.Lea(op. cit, I. 230)는 Williusque of Ware(1300년경)를 인용하였다. "스콜라 학자들은 omnis utriuspue sexus라는 문구를 익살스럽게 설명하기를, 이말은 베타적으로 양성 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결합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다." 1379년경에 Richard Hemslay가 Newcastle on Tyne에서 설교할 때 농담으로 이 용어를 언급했다고, 로마로 불려가서 무례한 행동에 대한 견책을 받았고, "양성의 리차드 수도사"라고 별명을 받았다. 참조, W. A. Pantin, The English Church in the Fourteenth Century, pp. 164f.

1146) "Proprius sacerdos", 라테란 교회법은 각 사람이 "자기의 사제"에게 고백하라고 명하였다. 관할권이 문제되는 곳에서는 이 용어가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수도사들도 고백 활동에 참여케 된 후에 더 그러하였다.

1147) Sozomen, Ecclesiastical History vii. 16(ed. R.Hussey <Oxford, 1860>, II. 724ff.); Cassiodous, Tripartite History IX. 85(MPL 69, 1151; tr. MPNF 2 Ser. II. 386ff.).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v. 19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떤 상세한 내용에 있어서는 이것과 다르다. 참조, McNeil,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p. 98.

1148) 여기 인용된 네 가지 발언은 칼빈 시대에 크리소스톰의 말로 인정되었고 에라스무스가 1530년에 출판한 Opera에도 포함되었다. 첫째 발언은 시편 50편에 대한 설교 ii.sec.5에서 나왔고, MPG 55. 580ff. 에 크리소스톰의 말이 아닌 것으로 주어져 있다. 둘째 발언은 Sermon on Penance and Confession에서 나왔고, 1530년판, V. 512(1547년판, V. 906)에는 있으나, MPG에는 없다. 다른 발언들은 참으로 그가 친히 한 말로 인정되고 출처는 다음과 같다. Incomprehehensible Nature of God, Against the Anomeans, hom.v. 7(MPG 48,746); Discourses on Lazarus iv.4(MPG 48. 1012).

1149) 시편 7:17에서 히브리어 hd:/a("크게 찬송하다"라는 뜻의 hd:y: 에서 유래)는 70인역에 ejxomologhsavmenai(엑소몰로게사모나이)라고 번역되었다. 불가타역에는 confiteri(고백하다)에서 번역되었다. 참조, 시편 9:1; 42:4.

1150) "Cognitor". 불가타역(히 4:12)에서는 "discretor"로 되어 있다.

1151) "Paedagogia".

1152) 칼빈이 제정한 strasbourg 예배식문(1539)과 Geneva 예배식문(1542)은 Bucer가 사용한 고백 형식을 사용하였다. 여러 판본의 이문들을 포함한 본문 CRVI. 173ff.; tr. B. Thompson, "Refomed Liturgies in Translation iii. Calvin"; Bulletin of the Theological Seminary of the Evangelical and Reformed Church XXVIII(1957), 52f. 참조, W. D. Maxwell,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pp. 112-119.

1153)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아래서 고백과 사면을 행사하는 목사의 권위를 칼빈이 높이 평가한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참조. J-D. Benoit, Calvin, directeur d'ames, pp. 245f.; McNeill,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pp. 197. 209.

1154) 칼빈의 Ecclesiastical Ordinances(1541)은 이런 경우에 거쳐야할 절차를 규정해 놓았다(CR X i. 29f.; tr. LCC XXII. 70f.).

1155) Cyprian Letters xvi. 2(CSEL 3. ii. 518; tr. ANF [letter ix.2]IV. 290).

1156) IV. xi. xii.

1157) 참조, 본장 7절. Lombard는 여기에 소개된 견해를 주장한다. Sentences IV. xvii. 2. 4; IV. xvii. 1(MPG 192. 881. 883. 885). 본절에는 어거스틴의 저작들에 관련된 말들이 무수히 많다; 참조, Smits II. 39.

1158) 이 견해는 Alexander of Hales, Summa theologiae IV. qu. lxxix. memb. 3. art. 1에서 언급되고 반대되었다.

1159) Lombard, Sentences IV. xviii. 4.6.7.8; IV.xix. 1(MPL 192.866-889).

1160) thesaurs ecclesiae에 대한 교리는 Alexsander of Hales에 의해 규정되고 Summa theologiae)IV. q. lxxiii. memb.lart.1; memb.3.art.5) Aquinas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수정되었다. 이 교리는 재판권(열쇠의 권한)과의 관계에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로 논의되었다. Clement VI의 칙령 Unigenitus(1343)에서 이 교히가 감명하게 정의되었다(Friedberg II. 1304; tr. Bettenson Documents of rje christu$ian Church, pp. 259f.; J.F.Clarkson, et al., The Church Teaches, p. 31). 이것의 근원은 값없이 쏟아 고갈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참조,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V. xx. part 2. art. 1. qu. 3,4(Opera omnia IV. 521-525); Lea, op. cit., I. ch. vii; I. 506; R. Seeberg, History of Doctrines; tr. C.E.Hay. II. 139. 고해와 대리적 공로에 관한 개념들은 Hales보다 수백년전에 등장한 참회 지침서의 상투적 공로에 관한 개념들인 것으로 인정되야 한다(McNeill and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48, and index, s.v. "composition"). 보고의 교리는 1517년에 루터에 의해 공박을 받았고 그의 초기 논적들에 의해 열심히 변호되었다. 예컨대,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io(1523), ch. xviii(pp. 298-312)을 보라

1161) III. v. 2.

1162) IV. x.

1163) "Carnificina". 종래의 고해 제도는 양심을 고통속에 그대로 버려둔다는 이유로 루터와 멜란히톤과 칼빈에 의해 항상 공격 받았다. 특히 Luther, Explanations of the Ninety-five Theses, 7th thesis(Werke WAI. 542f.,; tr.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ed.H.Grimm; general ed., H.T. Lehmann, 31.100,103); McNill, A History of the Cure of Souls, pp. 166f.을 참조하라.

1164) "Caelum undique et undique pontus"; Vergil, Aeneid III. 193(LCL Vergil I. 360). 자세한 죄목에 대해서는, McNeil and Gamer, op. cit., pp. 19f., 341f Paeudo-Augustine, De vara et falsa poenitentia xiv. 29(MPL 40. 1122)를 참조하라.

1165) 속수 무책인 사람이 처한 곤경을 묘사한 plautus의 적절한 말이다. "Nunc ego inter sacrum saxumque sto. nec quid faciam scio. "The Captives 617(LCL Plautus I. 522f.).

1166) 참조. III. iv. 2, 주 6); Alxander of Hales, Summa theologiae IV. qu. lxix. memb. 8

1167) "Iusta et integra enumeratio". 참조, 본장 22절. 죄를 "완전히", 즉, 하나도 남김없이 또는 숨김없이 고백하라는 요구는 8세기 이후 고백 지침서들에서 자주 역설되었다. 완전한 고백을 위해서 긴 일련의 질문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참조, McNeill and Gamer, op.cit.pp. 154. 214. 281. 315ff., 380.396.403

1168) 참조, Tertullian, On Repentance x; "사람의 눈에는 숨길지라도 하나님에게는 숨길 것인가?…비밀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공중 앞에서 죄를 사면받는 것보다 더 나은가?"(LCC Terullianus I. 337; tr. ANF III. 664).

1169) 넥타리우스를 가리킨다. 본장 7절을 참조.

1170) "Proram(ut aiunt)" et puppim". Cicero는 이것을 희랍 격언이라고 말한다. Letters to His Friends XVI. xxiv. 1(LCL 판, III. 374). 참조, IV. xvii. 33; IV. xviii. 18.

1171) Lombard, Sentences IV. xvii. 1MPL 192,880).

1172) 본장 14절과 IV. xii.

1173) IV. v. 1-4; IV. vi.

1174) Lombard, Sentences IV. xix. 1,5(MPL 192.889,892).

1175) 본장 15절 주 28 참조.

1176) "Ubi integra non est confessio", 참조, 본장 18절을 주37

1177) IV. xii. 1-13.

1178) Lombard, Sentences IV. xvii, 4.5; IV xviii. 6.7(MPL 192. 882f., 887F.). 롬바르드는 dist. xvii에서, Pa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xvii에서, Pa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viii. 22(MPL, 40. 1120f.; Smits II. 263)를 많이 인용한다. 참조, III. iv. 1. 주1

1179) "Tribuni personam sustinens, Deo intercederet". 고대로마에서는 원로원과 민회에서 제안된 안건에 대해서 호민관이 임의로(intercessio)의 권리, 즉,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B.C. 400년경.

1180) 참회(값을 지불함으로써 벌을 면하는 것)에 있어서 오랜 내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후에,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것과 같이, Lombard와 Gratian은 보속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Lombard, Sentences IV. xvi. 4(MPL 192.879); Gratian, Decretum II. xxxiii. 3. 1. 42, 63(MPL 187. 1523, 1544; Friedborg I. 1168, 1177).

1181) 참조, 고후 5:19-20 주석.

1182) 이것은 Lombard, Sentences III. xix. 4(MPL 192, 797)의 요약이다.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iv. 5; 행위는 지옥의 고통을 경감시킨다.

1183) II. xvi 3-5.

1184) 참조. III. xiii. 3.

1185) 아퀴나스는 고해 성사가 없이는 죄가 제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Summa Theol III. lxxvi. 4, reply to obj. 3. 참조, Council of Trent, session 5, canon xxix. Schaff, Creeds II. 116f.

1186) III. xii. 1, 5.

1187) 참조. Lombard, Sentences IV. xiv. 4(MPL 192. 879); Aquinas, Summa Theol. III. lxxxvii. 3; I IIae. lxxxviii.

1188) 참조, Comm. Zech. 5:4. Lactantius, Divine Institutes III. xxiii. 8(CSEL 19. 253; MPL 6.427; tr. ANF VII. 93)에서는 이 가르침이 Zeno의 것으로 여겨진다. 참조. Cicero, Promurena xxix. 6; "Omnia peccata esse paria"(LCL, p.222);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 p. 158; Melanchthon, Loci communes, ed. Engelland, pp. 138f.; tr. Hill. pp. 237ff.

1189) 이것은 Cicero가 한 말이다; On Duties III. xxxiii 117(LCL판, p.398).

1190) Anqinas, Summa Theol. III. lxxxvi. 4; III. Suppl. xv. 1. 참조, I. IIae, lxxxvii. 4;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V. xviii. part 1. art. 2. qu. 2; "Poena inseparabilis est la culpa…Dominus dum remittat culpam, remittat poenam totam"(Opera selecta IV. 460).

1191) Augustine, Paslms, Ps. 32(Latin, Ps. 31), ii. 9(MPL 36,264;tr. LF Psalms I. 228).

1192) 이 놀라운 문장은 1536년판(OS I. 119)부터 변함이 없었고, 전후 관계의 위치가 조금 변경되었을 뿐이다. 칼빈이 자신의 주해가로서의 기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조. CR VII. 248 "우선 나의 가르침이 유익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는 그가 나의 의견이나 나에게 유의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1193) "a;poluvtrwsin"(목적격으로 사용)

1194) "a;ntivlutron"

1195) Augustine, Psalms, Ps. 129. 3(MPL 37.1697; tr. NPNF VIII.13).

1196) Aquinas, Summa Theol. III. lxxxvi. 1,4, reply to obj. 3; III. xlix. 1;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1543, fo 147D;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on I peter 4:8), p. 302; Eck, Enchiridion, ch. ix.

1197) Pseudo-Chrysostom, De fide et lege naturae iii(MPG 48. 1085). 아들의 벌은 노예의 벌과 대조되어 본서 III. viii. 6에서 다시 소개된다.

1198)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노여움"과 "그의 자비에 대한 훨씬 더 두드러진 증거를 대조한다; Enchiridion viii. 27(MPL 40.245; ed. O.Scheel,p.18; tr.LCC Vii. 355).

1199) Pseudo-Chrysostom, Sermo de poenitentia et confessione, in the edition of Chrgsostom edited by Erasmus(Basel, 1530), V. 514(1547 edition, V. 907).

1200) Augustine, Psalms, Ps. 102(Latin Ps. 101). 20(MPL 37. 1332; tr.NPNF VIII. 500); Ps. 139(Latin, Ps. 138). 15(MPL 37. 1793; tr. LF Psalms VI. 204).

1201) Augustine,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I. xxxiii. 53-x-xxiv. 56(MPL 44.182ff.; tr. NPNF V. 65-67). "어거스틴은 우리와 견해가 같이 한다"고 하는 칼빈의 주장에 대한 다른 많은 예에 대해서는 Smits I.271을 보라. De aeterna Dei praedestination에 나오는 "Totus noster est"(CR VIII. 266)라는 말을 참조하라.

1202) Chrysostom, Homilies on Providence, to Stagirius III. xiv(Basel edition, 1547. V. 666; MPG 47.493f.).

1203) Ambrose, Exposition of the Gospel of Luke X. 88; "그가 한 말은 찾을 수 없으나, 그가 울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CSEL 32. iv. 489.8; MPL 15.1918). 참조. Gratian, Decretum III. xxxiii. 3.1.1(MPL 187.1520; Friedberg I. 1159).

1204) "avpoluvtrwsi""

1205) III. xiv. 21; comm.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 23:25; Luke 11: 34-41.

1206) Pseudo-Chrysostom, Homily on. Ps. 50, hom. ii. 2(MPG 55.577).

1207) Pseudo-Augustine, De dogmatibus ecclesiasticis xxiv(MPL 58.994).

1208)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 x. 2(MPG 53.83ff.).

1209) Augustine, Enchiridion xix. 72(MPL 40.266;ed. O.Scheel, p. 46;tr.LCCVII. 382);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vi. 16(MPL 44,600; tr.NPNF V.409f.).

1210) Augustine, Enchiridion xvii. 65(MPL 40. 262f.; tr. LCC VII. 377); Gratian, Decretum II. xxxiii. 3.84(Friedberg I. 1183; MPL 187. 1533).

1211) 본장 38절.

1212) "Coryphaeus".

1213) 칼빈은 진본임을 의심치 않고 Pseudo­Augustine 본문들을 여러번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후대 저술인 De vera et falsa poenitentia는 경멸적으로 배척하였다. 참조. III. iv. 1, 주1; III. xiv. 8에서는 이 저작에서 한 가지 발언을 인용하며, 그 발언에 찬성하였다.

1214) 참조. N. Paulus, Geschichte des Ablasses am Ausgange des Mittelaters; W. E. Lunt, Papal Revenues in the Middle Ages: I. 111-125, documents in II. 148-485; B. J. Kidd, Documents Illustrative of the Continental Reformation, pp. 1-20.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v. 1에 있는 말, "면죄부는 교회의 법정에서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유효하다." 그 이유는 "하나인 신비적인, 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보속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1215) "Helleboro."

1216) "Plumbum semper novum afferri, novos nummos elici." 참조. Grievances of the German Nation Against the Roman Curia.(1521), ed C. G. F. Walch, Monimenta medii aevi(Gttingen, 1757), I. i. 109; Kidd, Documents, pp. 113f. 교황 교서에 납으로 만든 인장을 찍는 서기들은 plumbatores로 불렀다. W. E. Lunt, Papal Revenues in the Middle Ages II. 298.

1217) 본장 1절. 참조. III. iv. 15, 주30. 아퀴나스 이후로, 스콜라 학자들은 공로의 보고를 분배하는 최고 권위를 교황에게 있다고 하였다(Summa Theol III. Suppl. xxvi. 3) 이것은 종교개혁 반대자들에 의해 옹호되었다. 레오 10세의 교서 Exsurge Domine(1520년 6월 15일)가 루터의 오류를 열거한 가운데는 그가 "교황이 면죄부를 허락하는 근원인 교회의 보고"를 거부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Thesaurus Ecclesiae, unde Papa dat indulgentias, non sunt merita Christi et sanctorum"(제17오류).(Kidd, Documents, no. 38, p.77).

1218) Decretals V. xxviii. 14(Friedberg II. 889);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e. xxvi. 3;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 art. xvii, p. 305.

1219) Leo I, Letters cxxiv. 4; clxv 5;(MPL 54. 1064f.; tr. NPNF 2 ser XII. 107); clxv. 5(MPL 54.1163); Leo I, Sermons lxv. 3(MPL 54.359f.).

1220) Augustine, John's Gospel lxxxiv. 2(MPL 35. 1847; tr. NPNF VII. 350);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V. iv. 6(MPL 44. 613; tr. NPNF V. 419).

1221) 참조. III. v. 2, 주 4;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v. 1. 2; Eck, Enchiridion, ch. xxiv(1533); Fisher, Confutatio, pp. 304ff.

1222) 본장 3절과 주8에 인용된 구절들.

1223) Augustine, Psalms, Ps. 61.4(MPL 36. 730; tr. LF<Ps. 62> Psalms III. 187); John's Gospel 2 xlvii. 2(MPL 35. 1733; tr. NPNF VII. 260).

1224) coinwniva

1225) Luther,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positio 33(Werke WA I. 235).

1226) 메란히톤이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1530년)과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1532년)에서 연옥 문제를 제외한 것을 가리킨다.

1227) 본장 2절 및 아퀴나스의 연옥론,(Summa Theol III. Suppl., Appendix II)을 보라.

1228) Lombard, Sentences IV. xxi. 1(MPL 192. 895); Eck, Enchiridion(1526), ch. xxv;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vi. ll(MPL 183. 1100; tr. S. 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405f.). 연옥설을 지지하기 위해 마 12:32을 인용하였다.

1229) "Sumum ius", 즉, 율법의 문자를 완전히 요구하는 것, 이것은 공정 또는 분별있는 공의와 구별된다. 칼빈은 summum ius, summa iniuria(Cicero, On Outies I. X)를 염두에 두었음이 명백하다. 이 격언은 당시에 잘 열려졌던 것이고 루터도 사용하였다. 참조. McNeill, "Natural Law in the Thgought of Luther", Church Histiory X(1941). 220.

1230) "Infernorum." 여기서 논박되는 견해는 Eck, Enchiridion(1526), ch. xxv에 있다. 참조. Herborn, Enchiridion xlvii(CC 12. 162).

1231) Augustine, Against Gaudentius I. xxxi. 38(MPL 43. 729).

1232) Jerome, Preface to the Books of Samuel and Malachi(MPL 28. 556f.)

1233) Rufinus, Commentary on the Apostles' Creed xxviii(MPL 21. 374). 이 논문은 키푸리안에 대한 에라스무스 판에 키푸리안의 저작으로서 출간되었다. 칼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조. IV. I. 2, 주 5).

1234) Chrysostom, Homilies on Repentance, hom vi. 3(MPG 49. 317f.); Augustine, Enchiridion viii. 68(MPL 40. 864f.; tr, LCC VIII. 379f.); City of God XXI. xxxvi. 1, 2(MPL 41. 743f.; tr. NPNF I. 473f.). 참조. Lombard, Sentences IV. xxi 1-3. 이 책은 고전 3:15을 연옥과 관련시킨다.

1235) Augustine, Enchiridion, loc. cit.

1236) 아퀴나스는 Summa Theol III. Suppl. lxxi. 2-8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에 대해 길게 논한다. 이 기도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에게는 유익을 주지만, 지옥의 변방(limbo)에 있는 세례를 받지 않는 아이들과 하늘에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Qu. lxxi. 10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면죄부에 대해 논한다. 참조. J. Latomus, De quibusdam articulis in ecclesia controversis(Opera<1550>, fo. 199a); J. Cochlaeus, Confutatio ccccc articulorum M. Lutheri ex xxvi sermonibus eius, xviii(art. 305); Augustine, Enchiridion xxix. 109f(MPL 40.283; tr LCC VII. 405).

1237) Tertullian, Exchortation to Chastity xi; On Monogamy x(CCL Tertullianus II. 1031. 1243; tr ANF IV. 56. 66f.).

1238) Augustine, Confessions IX. xi. 27; IX. xiii. 37(MPL 32.775,779f.; tr. LCC VII. 195.200).

1239) Augustine, On Care for the Dead(MPL 40.591-610; tr. NPNF III. 539-551). 어거스틴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1240) Augustine, Enchiridion xviii. 69; xxix. 110(MPL 40.265.283f.; tr. LCC VII. 381, 405); Tertullian, Exchortation to Chastity와 On Monogamy, 본장 주24에서 인용됨;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lxxi; Latomus, 본장 주 23에서 인용됨; Paris Faculty of Theology, Instruction on the Articles of Melanchthon(1535),art. 12, in Daniel Gerdesius, Historia reformationis sive annales evangelii seculo XVI. IV. 86.

1241) Augustine, John's Gospel xlix. 10(MPL 35. 1751; tr. NPNF VII. 273f.). 참조 Psychopnnychia(1534년 제술; 1542년 출간)에 나오는 이 주제에 관한 칼빈의 논의(CR V. 177-231; tr. Calvin, Tracts I. 419-490).

1242) III. iii. 9. III. vi-x에 대해서는 서론, pp. xlii, n. 19, 그리고 Ix, n. 65를 보라. 6장은 이어지는 4장(10장까지)의 서론이다.

1243) "Rationem vitae formandae."

1244) 이 점에 관한 Introduction, pp. lx. f에 있다.

1245) "Per mundi labyrinthum", cf. I. v. 12, 주 36.

1246) Cicero, On Duties III. iii. 13(LCL판, pp. 120f. 245ff., 344ff.); Seneca, On the Happy Life viii. 2(LCL Seneca Essays II. 116f.); "행복하게 사는 것은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1247) Cicero, De finibus II. xxi. 68; II. xxiii. 76(LCL판, pp. 156f., 164ff.); Seneca, Moral Epistles lxxxiv. 13(LCL Seneca, III. 284f.).

1248) Cf. III. ii. 36, 주 52.

1249) Seneca, Moral Epistles cviii. 23; xlviii, 4, 12(LCL판, Seneca, III. 244; I. 316., 320f.).

1250) "In terreno hoc corporis carcere", Cf. III. ix. 4, 주 7, and III. xxv. 1, "carnis ergastulo inclusi."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는 생각은 플라톤에게서 왔다. cf. Phaedo 62B, 81E, 83A; Cratylus 400(LCL 판, Plato I. 216f., 284f., 288ff.; Plato VI. 62f.).

1251) 위에 있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로 시작하는 인상적인 문장들은 "기독교 철학"에 관한 칼빈의 개념에 내용을 첨부한다. Cf., p. 6, 주8; III. viii, 9, 주7.

1252) 참조, I. xvii. 2, 주2.

1253) Cicero, De finibus III. xi. 36; "도덕적 가치 이외에는 선하다고 여길 것이 없다"(CLC 판, pp. 254f.); De legibus I. xiv. 40(LCL판, Laws and Republic, pp. 340f.); Seneca, Dialogues VII. ix. 4(LCL Seneca, Moral Essays II. 122f.); Diogenes Laertius, Lives and Opinions of the Philosophers VII. lxxxix. 127(LCL판, II. 196f.). 참조, Laetantius, Divine Institutes V. xvii. 16(CSEL 19, 454; MPL 6<ch. xvii>. 606; tr. ANF VII. 153).

1254) Livy, History III. xxxiii. 7(LCL Livy, II. 110)에서 온 말. 인간의 허영심과 자만심에 대해 언급한 많은 예들 가운데 I. i.2; I.iii. 1; II.i.4; III.xiii.1을 보라.

1255) "Mundum vitiorum esse reconditum in hominis anima".

1256) "Ut reddatur unicuique quod suum est". 참조, 롬 13:7; III. v. 7, 주 16; IV. xx. 3, 주9; 디도서 강해 2:11-14;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와 공평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취급(ejpieiceiva), Nicomachean Ethics V. 10(LCL 판, pp. 312f.).

1257) "Decet perigrinandum esse in mundo". 칼빈은 여기서 자세한 논술 하지않고 지나가는 나그네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앞으로 있을 영광을 위해 준비하는 세상의 나그네라고 생각했다. CF. II. ix. 4-5; III. x. l; Augustine, City of God, XV. vi(MPL 41.442; tr. NPNF II. 287).

1258) 본장 제2절을 참조하라. 칼빈은 자만심이 치명적인 죄의 근원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받아들인다. I. i. 2, "ingenita est omnibus nobis suporbia".; II. I. 1을 보라. 여기서 칼빈은 지식인들의 우월감과 자기만족을 책망하며, 지적인 은사에 대한 인본주의적 자기만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즉, 예를 들어 그런 자기만족은 Edward Dyer경의 유명한 시에 나타났다(1588년).|"내 마음은 내게 한 왕국이라네|거기서 나는 완전한 기쁨을 얻나니|신(神)이나 자연이 배정한|지상의 모든 복락보다 훨씬 뛰어난 기쁨."

1259) "th'" filoneiciva" cai; dilautla""

1260) 위에 말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참조하라. 또 I. xv. 3-4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동물보다 나은 점을 모두 포함하여(3절), 그것은 아담의 죄도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고 했다(4절). 참조, II. viii. 45.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에 대해 봉사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예증이 더 있다. 이에 대해서는 W. Kolfhaus, Vom christlichen Leben nach Johannes Calvin pp. 328ff.;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p. 150ff.를 보라. Bucer도 Das ihm selbs niemant sonder anderen lebem soIl…(1523)에서 유사한 주장을 했다; tr. P. T. Fuhrmann, Instruction in Christian Love. p. 29.

1261) "Naturae lege", 이 절에서 칼빈은 기독교의 사랑과 자연 법칙을 함께 논한다. 참조: Seneca의 "사람은 서로 돕기 위해서 났다"("Homo in adiutorum mutuum genitus est"). De ira I. v. 2(LCL Seneca, Moral Essays I. 118f.).

1262) 제8절과 제9절은 칼빈에게 자주 나오는 주제를 논하였다. 하나님을 망각하고도 세속적 번영을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은 저주를 받은 번영이다. 경건하게 살면서 가난한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행복한 상태이다. 참조; II.x.12, 주11; III. xx. 46.

1263) 참조. I. xvii. 10; III. ix. 6; III. x. 5.

1264) 참조. I. v.4.

1265) "a[scopo""

1266) 세네카는 그의 논문, On Tranquillity of Mind viii, xi에서 종교와는 관계없이 변덕스러운 운명에 대처하려면 용기를 가지라고 권한다. Moral Epistles cvii. 7에서 "Fortiter fortuita patiemur"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Epistles lxxvi. 23에서는 "신(神)의 법칙에 따라" 생긴 일에 대해서 비슷한 말을 한다(LCL Seneca, Moral Essays II. 240-262; Epistulae morales III. 226; II. 106f.).

1267) 참조, Comm. 시 30: 5, 7.

1268) 참조, Luther, Fourteen Comforts(1520) i. 7(Werke WA VI. 110; tr. B.L. Woolf, Reformatiom Writings of martin Luther II. 43).

1269) Cicero와 Seneca는 옛 교훈으로서 "하나님을 따르라"는 훈계를 소개했다. Cicero, De finibus III. xxii. 73(LCL판, pp. 292f.); Seneca, On the Happy Life xv. 5 LCL Seneca, Moral Essays II. 138).

1270) I. xvii. 8; III.iv. 31,35

1271) 이 절은 칼빈이 프랑스와(1535) 제네바를(1538) 탈출한 후인 1539년 판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Olivtan의 프랑스어 판 신약 성경에 칼빈이 1543년에 쓴 서문에 나오는 구절과도 비슷하다(Cr IX. 809).(LCC XXIII. 67f. Haroutunian의 번역을 보라).

1272) 위안에 대한 고대 문헌에는 이런 예가 많다. Cicero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고통은 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리석은 삼단 논법을 구성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예증했다. Tusculan Disputations II. xii. 20(LCL판. pp. 176f.). 참조, McNeil, A Hiostory of the Cure of Souls, pp. 26-36. 여기서 칼빈이 눈물과 불안을 인정한 데 대해서는 Wallace, Calvin's De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191을 참조하라.

1273) 칼빈은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많이 배웠으나, 기독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그들의 사상을 배척했다. 예컨대 "아파데이아"(ajpaqeiva)의 원칙, 즉, 모든 감정을 배척하는 것과 그와 관련된 운명론을 취하지 않았다. 참조, I. xvi. 8; III. iv. 28; III. vii. 15, 그리고 부각된 각주들; Comm. Ezek 1:4; 17:10; Matt. 10:29; L. Zanta, La Renaissance du Stoicisme au seizime Sicle, chs, i.ii; Q. Breen, John Calvin: A Study in French humanism ch. lv.

1274) 참조, Seneca; "[Creator] seripsit quidem fata, sed sequitur" On Providence v. 8(CLC Seneca, Moral Essays, I. 38).

1275) 여기에 있는 번역은 VG의 영향을 받았다; "Qu'il ne fait rien sinon d'une justice bien ordonn".

1276) 참조. J. Bohatec, Bud und Calvin pp. 416-420; 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tr. H. Knight, pp. 41-54; W. Kolfhaus, Vom christlichen Leben nach Johannes Calvin pp. 539-565;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att II. ch. iv.

1277) 참조, Augustine, On the Good of marriage(MPL 40. 373-391; tr. NPNF III. 399-413).

1278) 참조, III. viii. 3.

1279) "Hominem animal esse ejfhvmeron", 참조, Plato. Laws XI. 923(LCL Plato, Republic II. 506).

1280) Theognis Elegies 425-428(LCL Greek Elegy I. 280f.);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I. xlviii. 113f.(LCL 판, pp. 136f.); Herodotus, History I. 31(self- immolation of Cleobis and Biton)(LCL Herodotus I. 34ff.).

1281) Euripides on Cresphontes, quoted in Latin by Cicero, Tusculan Disputation I. xlviii. 115(CLC판, pp. 138f.).

1282) Plato, Phaedo 64A, 80E(LCL Plato I. 222f., 280f.); Cicero, tusculan Dispulation I. xlix. 118(LCL 판, pp. 142f.). 참조, Melanchthan; "Neque vero Christiana est vita, nisi assiduo moreamur", Loci communes, ed. Englland, p. 156; tr. Hill, p. 259. 감옥으로서 몸에 대해서는 III. vi. 5, 주9를 참조하라.

1283) 참조, III. x. 6, 주9.

1284) VG에 있는 이와 상용하는 문장은 "그러나 혹자는 만물이 존재를 지속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고 번역될 수 있다.

1285) Cyprian, On the Mortality(주후 252년의 흑사병 유행에 대하여)iii 1(CSEL. 3, 294ff,; tr. ANF V. 470).

1286) 참조, I.x.2; III. viii. 8.

1287) III. xxv. 12을 보라. 거기서 칼빈은 저주받은 사람들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비유들을 해설한다.

1288) 참조. III. viii. 3, 주7.

1289) 참조. Augustine, On the Good of Marriage ix. 9(MPL 40.380; tr. NPNF III. 403); Psalms, Ps. 4. 8(MPL 36.81; tr. Lf Psalms I. 21).

1290) Diogenes laertius, Lives and Opinions of the Philiosophers VI. v. 4(LCL판 II. 90f.).

1291) 미(美)에는 단순한 유용성을 초월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칼빈의 입장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장이다. 창세기 4:20 주해를 보라. 음악은 우리의 필요보다는 즐거움에 주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가치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되며 배척하는 것은 더욱 안 된다"(LCC XXIII. 355). 보다 자세한 예증을 위해서는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p. 137ff.; L. Wencelius, L'Esthtique de Calvin, pp. 112., 134을 보라.

1292) 본장 1절 끝. 5a.

1293) cf. VG

1294) Ammianus Marellinus는 "Magna cura cibi, magna virtutis incuria"라는 말은 Cato가 했다고 한다. De rebus gestis(ca. 390) XVI. v. 2(LCL판, I. 214).

1295) III. vii. 5.

1296) 칼빈의 직업관에 관하여: Karl Holl, "Die Geschichte des Worts Beruf", Gesammelte Aufstze III. no. 9,189-219; Hauser, "L'Economie Calvnienne," Etude sur Calvin et le Calviisme, pp. 227-242; G. Harkness, John Calvin; The Man his Ethics chs. viii-x(본 절에 대해서는 특별히 p. 21을 보라). Miss harkness는 M.Weber의 과장된 결해를 아마도 너무 점잖게 비평했다. M.Weber의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tr. T. Parsons에 대해 R. H. Tawney는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에서 대체로 지지한다. Weber의 논문은 대단히 훌륭하나 직업에 관한 칼빈의 말들은 적절하게 보지 못하였다. 이 점을 다루고 있는 다른 연구들을 간략히 기술한 것이 있다. J.T. McNeill, "Thirty Years of Calvin Study", Church History XVII(1948), 232-235R. S. Wellace는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에서(칼빈의 윤리적 가르침 전체를 종교와 관련하여 독립적 입장에서 검토한 중요한 작품) 직업의 개념을 조명한다.|특히 Part III. chs. iii-vi. 참조: Kolfhaus, op. cit, pp. 420-443. 좀더 최근의 저서인 A. Bise 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은 칼빈에 대한기본적인 지식을 적용하여 여러 가지 이론을 집중하고 Weber의 해석에 반대되는 견해를 제지한다. 특히 Pant II., ch.vi,pp. 447-514를, 그리고 직업 문제에 대해서는 part II. ch.v.pp. 391-414을 보라. Protestantism and Capitalism, The Weber Thesis and Its Critics(ed, R.W.Green)도 가치가 있는 저작이다. W.S.Hudson, H Se, H.M. Robertson, A. Fanfani, A.Hyma등이 논평에 참가하였다. 참조. II.x.12, 주11.

1297) 참조. Cicero, On Old Age xx. 73; "피타고라스는 인생에서 우리가 배치된 보루와 요새를 우리의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떠나는 것을 금한다."

1298) 참조, IV. xx. 25-30; Seneca, On Benefits VII. xv. 2; xx. 3(LCL Seneca, Moral Essays III. 490f., 504f.).

1299) 일상생활의 가장 미천한 일이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그것을 빛나게 한다는 칼빈의 원대한 견해를 볼 수가 있다.|참조. Wallace, op.cit., p. 155.

1300) 참조. II. xii. 1; III. ii; III. iii, 기타.

1301) III. iii. 1; III. iii. 6-10

1302) 믿음에 의한 칭의 교리의 근본적 중요성에 대하여는:Melanchthon, Locicommunes(1535)(CR Melanchthon XXI. 420);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IV. 2(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pp. 158f); Doumergue, Calvin IV. 267-271; J.S. Whale, The Proestant Tradition, pp. 43f을 보라.

3a)1303)칼빈이 말하는 히브리어는 aF;j이다. 복수형은 열왕기상 1:21에 사용되었다.

1304) Ambrose, Exposition of Psalm 118x 47(CSEL 62. 231; MPL 15. 1418).

1305) 칼빈은 여기서 의롭다함에 대한 오시안더의 극단설을 공격한다. 오시안더와 칼빈 사이의 논쟁점을 간단히 다룬, W. Niesel의 The Theology of Calvin, 133면 이하와 "Calvin Wider Osianders Rechtfertigungslehre", Zeitschrift Fr Kirchengeschichte XLVI(1927), 410-430을 보라. 오시안더의 사상은 그의 저서 Disputation on Justification(1550)과 Confession of the Only Mediator and of Justification by Faith(1551)에 나타나 있다. 이 저서들과 그의 다른 저서 An filius Dei fuerit incarnandus(cf. I.xv. 3, note 8)가 일으킨 루터파 내의 논쟁에 대해서는 간략한 논술이 Concordia Triglotta, pp. 152-159에 있다. 그리스도는 오직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시며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에게 "본질적 의"를 부여하신다고 하는 그의 견해는 십자가상의 고통을 통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종교개혁의 교리를 무효화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본장 8절을 참조하라.

1306) 어거스틴이 De Trinitate X. xii.. 19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고 하며, 사람의 마음은 기억과 지력과 의지에 새 부분을 가졌다고 한 것을 오시안더는 반박하고(On filius Dei B 3a;부록으로 있는 De imagine Dei), 사탄도 이것들을 가졌다고 했다(B 4a).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갇혀 있었고(C 2a),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부터 하나님 안에 있었다(D b). 아담이 처음에 가졌던 의를 아담 안에 내주한 하나님의 의라고 정의하였다(F 4a).

1307) 참조. Augustine, Sermons clxxxii. 4(MPL 38.986; tr. LF Sermons II. 956f.); On Christ's Agony x. 11(MPL 40.297); City of God XI. xxii.(MPL 41. 336; tr. NPNF II. 217);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 ii 2(MPL 44.572; tr. NPNF V. 392); Unfinished Treatise Against Julian III. clxxxvi; II. clxxviii(MPL 45. 1325,1218f.);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II. viii. 11(MPL 34.202).

1308) Osiander, An filius Dei E 3b-4a; D 1b-2a. 참조. I. xv. 3, 주8; II. xii. 4-7

1309) 여기서 지적된 점들은 오시안더의 Confession(A 4b; G la)에서 전개되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서만 의가 부여된다는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을 반박하려고 노력한다. 본장 8절과 10절의 참조하라.

1310) "Nomen iustitiae et verbum iustificandi".

10a)1311)"Sepiae". 오징어에 대한 묘사는 Aristotle, Part of Animals IV. v(LCL edition, pp. 318f.); Pliny, Natural History IX. xxiv. 45(tr. J. Bostock and C. H. Riley II. 417)에도 나온다. 이 비유는 Tertullian, Against Marcion II. xx. 1(CCL Tertullianus I. 497; tr. ANF III. 312f.)에도 사용되었다.

1312) 이 앞의 문장들에서 칼빈은 오시언더의 Confession(E 3a와 M 3b의 사이에 있는 발언들을 언급한다.

1313) 본장 3절

1314) Osiander, op. cit., E 3ab; G la-3a; O 4a-p 3a.

1315) Osiander, op. cit., G 1b-2a. 본절에서 이 저서에 대한 많은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다. Cadier, Institution III. 200, 주9. 본장 8-12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그의 신성에 국한시키며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견해를 칼빈은 맹렬히 공격한다.

1316) II. xiv. 2.

1317) VG에서는 본문이 여기와 다르고,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그는(수탉같이) 볏을 세우고 호언장담으로 여러 면을 채운다.

1318) 참조. 이사야 53, 11 주해.

1319) 본절에서 프랑스어판은 라틴어판을 다소 확대하여, 의미를 더 분명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듯하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삽입되었다. "그가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두 물 사이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상 받는 것보다 세상에서 훌륭한 명예를 유지하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1320) 참조. IV. xvii. 4; Cadier, Institution III. 201, 주4; R.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 167ff. 성만찬의 신적, 인간적 관계는 칭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하나님으로서 또 사람으로서의 사역에 대응한다.

1321) "Mystica…unio"; VG; "Union sacre". 참조. 본절에 있는 "의의 친교와""영적유대"(conjunctio); III. ii. 24; IV. xvii. 8-12. 칼빈은 경건한 신비주의자가 신적 존재의 영역에 흡수되다고 가르친 일이 없다고 니이젤은 말한다.|The Theology of Calvin, p. 126; cf. pp. 144, 222.

1322) Osiander, Confession R la, T lb. VG는 여기에 삽입하였다. "Osiander tire de l que Dieu a mesl son essence avec la nostre"

1323) 본장 6절과 11절을 참조하라. 루터파의 오시안더 반대자들은 칼빈과 같이 오시안더는 칭의와 중생을 혼동한다고 하였다. 니이젤은 "이중의 의"를 논하였다.|"Calvin wider Osianders Rechtfertigungslehre"(본장 5절 주 5에 인용). pp. 418f. 본장 6절에 있는 "두 가지 은혜"를 보라.

1324) 칼빈은 이 삽인구로 오시안더의 판단을 공격하는 동시에, 그가 히브리어를 많이 쓰면서도 해석자로서 무능하다고 비난한다.

1325) "Secundum ratam partem". 이것은 상법(商法)문구인 pro rata parte의 변형이다. 여기서 영어의 "prorate"가 나왔다.

1326) Osiander, Confession N 4b-o 3a.

1327) II. xvii. 1.

1328) 참조, Horace, Satire I. i. 61; "At bona pars hominum decepta cupidine falso"(LCL edition, p. 8).

1329) Fisher, Confutatio. pp. 65ff; Cochlaeus, Confutatio ccccc articulorum M. Lutheri, articles 26,462; Cochlaeus, Philippicae in apologiam Philippi Melanchthonis(1534) III. 10, fo. H. 2b, 3a.

1330) 참조. III. xiv. 9.

1331) 본장 13절에서 인용한 로마서 4:2.

1332) "이 사람들"은 16세기에 중세기 제도를 지지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은 칭의와 은혜를 스콜라 학자들 보다더 더 패악하게 다뤘고 하나님의 자비를 감춰버렸다. OS IV. 198이하에서 Faber, Cochlaeus, Schatzeyer, Fisher, Latomus에 관한 참고 문헌을 보라. 트렌트 총회의 session 6(1547년 1월 13일)에서 결정된 교회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저주하는 조항 33개를 포함한 칭의에 관한 중요 조항이 로마측의 논쟁을 종식시켰다(Schaff, Creeds II. 89-118). 참조:Melanchthon, Acta Concilii Tridentini anno MDXLVI celebrati(구력에 의한 연수); 특히 믿음만을 통한 칭의의 교리를 정죄한 제9조에 대해서 멜랑히톤이 영감에 찬 대답을 한 것을 보라(n 7b 이하).

1333) Lombard, Sentences III. xix. 1(MPL 192. 795f.).

1334) 참조. Augustine, Sermons cxxx. 2(MPL 38, 726,; tr. LF Sermons II. 581f.); On the Spirit and the Letter xiii. 21(MPL 44.214; tr. NPNF V.92), et passim. Smitss II. 41에 다른 참고 문헌이 있다.

1335) Eck, Enchiridion, ch. v; Council of Tent, session 6, canon i(Schaff, Creeds II. 110).

1336) 루터는 로마서 3:28을 번역할 때에 "믿음만으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멜랑히톤이 이것을 지지하였다.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IV. 73(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I. 174; Concordia Triglotta, p. 141). 칼빈은 sola fide를 쓸 때에, 이 말에 대해 많은 공격이 있었던 것과 트렌트 회의가 전적으로 정죄한 것을 알고 있었다(주 31을 보라). 참조: Fisher, Confutation, p.60; Herbon, Enchiridion iv(CC 12.27).

1337) 오리겐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분명히 잘못인 듯하다. 제룸이(Commentary of Romans, ch. 3, MPL 30.66) 펠라기우스에서 인용한 말이 있다(OS IV. 203). 또 Pseudo­Ambrose, Commentary on Romans 3(MPL 17.79)에도 있다. Herborn, Enchiridion iv(CC 12.30), 그리고 기타 논쟁가들도 사용하였다.

1338) "Quin generalem exclusivam obtineamus"

1339) Fisher, Confutatio pp. 65f., 80; Herborn, Enchiridion iv(CC 12, 27 ff.; Cochlaeus, Philippicae III. 10; De Castro, Adversus haereses VII, art "fides"(1543, fo. 24K-105D).

1340) 본장 2절과 4절.

1341) 존장 4절

1342) Augustine, City of God XIX. xxvii(MPL 41. 657; tr. NPNF II. 419).

1343)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xiii. 15(MPL 183.892;tr. S.J.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141).

1344) Bernard, op. cit., xxii. 6,11(MPL 183.880,884; tr. Eales, op. cit., IV. 126, 130).

1345) Lombard, Sentences II. xxvii. 6(MPL 192.715); Duns Scotus, On the Sentences II. xxvii. 1.3(Opera omnia XIII. 249).

1346) "Nos haberi iustos"

1347) "암브로시우스의 말은 이렇다…과오를 덮기 때문이다"; 1553년판에서 첨가되었다.

46x)1348)참조, 고린도후서 주석 5:21(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논함).

1349) Ambrose, On Jacob and the Happy Life II. ii. 9(CSEl 32. ii. 36f).

1350) "logomaciva"

1351) 이 문장은 1539년 8월에 간행된 라틴어판 강요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1539년 3월 18일에 Sadoleto가 제네바 시 정부에 서한을 보낸 것과, 동년 9월 1일 칼빈이 답변한 내용과 관련이 있는 문장이다. Sadoleto는 개혁파 쪽으로 개종한 사람은 "최고 심판자의 무서운 법정에서" 어떻게 대답할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설득력 있게 회답했다. OS I. 451, 480-486; tr. Calvin, Tracts I. 16, 55ff.; LCC XXII. 246-250을 보라.

1352) 참조. I. i. 2.

1353)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v. 15(MPL 44.599;tr NPNF V. 409).

1354) "Tubatur…non perturbabitur"

1355) Bernard, On the Psalm, He That Dwelleth(Ps. 91) xv. 5(MPL 183. 246);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lxi. 3;xiii, 4; lxviii. 6(MPL 183.1072,836.1111; tr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367,69,424f.).

1356) 참조. I.i.2;I. v. 3, 10; II. viii. 1; III. xiii. 3.

1357) 참조. Cochlaeus, De libero arbitrio hominis(1525), fo. O 7a; "Non sumus natura impii"(우리의 본성이 불경건한 것이 아니다.")(우리에게 두 발이 있는 것이나 별을 향하여 얼굴을 들고 걷는 것이 죄가 아니다…죄는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다).

1358) 참조. II. i. 2; II. ii. 11. 주49.

1359) Augustine, Sermons clxxiv. 2(MPL 38.941; tr. LF Sermons II. 891f.).

1360)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iii. 5(MPL 183. 836; tr. Eales, op. cit., IV. 70).

1361) "Sarta tecta", 직역하면 "꿰매고 덮은"이며, Plautus가 이런 뜻으로 썼다; Trinummus 317(LCL Plautus V. 126).

1362) III. iv. 9, 주 19. 참조.

1363) III. iv. 27. III. 5. 주 7. 참조.

1364) Augustine Psalms, Ps. 88. i. 5(MPL 37. 1123; tr. LF Psalms IV. 243f.).

1365) Bernard, Sermon on the Dedication of a Church V. 6(MPL 183.523; tr. St. Bernard's Sermons for the Seasons, by a priest of Mount Melleray, II. 424).

1366) 칭의에 대한 오시안더(Osiander)의 견해를 비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참조: III. xi. 5, 주 5.

1367) 이것도 오시안더에 관련된 말, 참조: III, xi. 6, 주 13.

1368) "Gratiae dulcedinem."

1369) "Suavissimum illud patris nomen." 참조: I. xiv. 2, 22; III. xx. 35-38.

1370) I. v. 3, 5; I. xv. 2-4. 참조.

1371) Augustine, Against Julian IV. iii. 16ff., 21.25-26(MPL 44.744ff., 749ff.; tr. FC 35.179ff., 186f., 189f.).

1372)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v. 14(MPL 44.597f.; tr. NPNF v. 404).

1373) Augustine, Psalms, Ps. 31. ii. 4(MPL 36, 259f.; tr. LF Psalms I. 253f.).

1374) II. xiii. 2.

1375) "Foedus." II. x. 1-5. III. xvii. 2; III. xxi. 5-7참조. 여기 열거한 곳에서 칼빈은 그의 "계약 신학"(契約神學)을 약술한다. 계약 신학에는 선배들이 있었다. 은혜의 언약에 대한 대표적 발언은 I. vi. 1; II. viii, 21; II. x. 7; xi, 4, 7, 11; IV. xiv. 6에도 있다.

1376) Aquinas, Summa Theol. I. II ae cxii. 2; Duns Scotus, On the Sentences III. xix. qu. unica. 8(Opera omnia XIV. 719).

1377) 본장 1절 참조.

1378) Pseudo-Augustine, De vera et falsa poenitentia xv. 30(MPL 40.1125); Gregory the Great, Letters IX. 122, as quoted in Gratian, Decretum II. iii. 7. 5(Friedberg I. 527).

1379) Melanchthon, Loci communes, ed. Enge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II. i. 145; tr. Hill, P. 245. 참조.

1380) Bucer, In quatuor Evangelia enarrationes(1536, p. 122; 1553, fo. 75a). 참조.

1381) Latomus, De fide et operibus(Opera<1550>, fo. 135a ff.).

1382) 본장 1절.

1383) VG;"le princict poinct de la dispute, que nous avons avec les papists."

1384) II. ii. 6, 주 35; III. xiii. 3; III. xvii. 7 참조. VG에는 이것이 설명되어 있다. "가련한 세상 사람들은 지금까지 속아서,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에게서 의롭다함을 얻을 준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으며, 또 이 모독적인 생각이 지금까지 설교와 신학교를 지배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다. 교황 제도의 모든 가증한 것들을 유지하려는 자들은 지금도 이 생각을 지지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말한 것처럼, 항상 우리와 같은 의견을 가졌다."

1385) Aquinas, Summa Theol I. II ae. cxiii. 1; cxiv. 3.

1386) Duns Scotus, On the Sentences I. xvii. 3. 25f.(Opera omnia X. 84a); Jean Gerson(d. 1429), De vita spirituali, corollary x(Opera omnia, ed. L. E. Du Pin, III. 13).

1387) Bonaventura, On the Sentences IV. xx. Part 2. art. 1. qu. 3(Opera selecta IV. 507);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v. 1.

1388) 12절에서 배척한 견해를 가르킨다. 참조: 주 18.

1389) III. IV. 25-39.

1390) Aquinas, Summa Theol. I. II. ae. cix. 4.

1391) "Ad dilectionem." II. viii. 54, 주 61; III. xviii. 8, 주 11 참조.

1392) Chrysostom, Homilies on Philemon ii. 4(MPG 62.713f.).

1393) III. xii. 1참조.

1394) Aristotle, Physics ii. 3. 7(LCL Aristotle, Physics I. 128ff., 166f.); Metaphysics I. iii(LCL Metaphysics I. 16f.); Aquinas, Summa Theol. I. xix. 8; II II ae. xv. 1, 2참조 Louis Goumaz는 이 원인들을 이용하여 그의 예리한 논저의 틀을 삼는다. La Doctrine du salut d'aprs les commentaires de Jean Calvin sur le Nouveau Testament, 특히 pp. 93ff., 184ff., 225ff., 249ff. 구원의 네 "원인"을 각각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

1395) Herborn, Enchiridion xliv(CC 12.154ff.); Latomus, De fide et operibus(Opera<1550>, fo. 138a).

1396) III. xvii. 14.

1397) III. xii. 2.

1398) III. xxiv. 4;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178f.; F. Wendel, Calvin. pp. 209f. 참조.

1399) Augustine, Psalms, Ps. 137.18(MPL 37.1783f.; tr, NPNF<Ps. 138, sec. 13> VIII. 635.

1400) 본장 17절과 주 25 참조.

1401) "Tantae Dei benignitatis gloriam"

1402) "Praecipuum…Causae cardinem." 이 말은 의식적으로 III. xi. 1, 주 3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되어 있다.

1403) II. vii. 3.

1404) 터툴리안이 이런 뜻으로 "공로"란 말을 쓴 것에 반대한다. 참조: Tertullian, Apology I. xxi. 16; On Repentance ii(CCL Tertullianus I. 125, 322; tr. NPNF III. 35, 657 f.).

1405)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xv. 31(MPL 44.983; tr. NPNF V. 513); Psalms. Ps. 139.18(MPL 37. 1814; tr. NPNF<Ps. 140, sec. 16> VIII. 644); Ps. 84.9<MPL 37.1073; tr. NPNF<Ps. 85, sec. 6> VIII. 406).

1406)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 xxxiv. 6(MPG 53.321).

1407)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1xviii. 6(MPL 183. 1111; tr.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419).

1408) Lombard, Sentences II. xxvii. 5(MPL 192.715); Aquinas, Quodlibetal, Questions IV. vii.

1409) Eck와 Herborn, 기타 종교개혁 반대자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음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선행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Eck. Enchiridion, ch. V(1533 edition, fo. 28 a-32b), Herborn, Enchiridion v(CC 12.32).

1410) "Solius fidei praemium." 참조. III. xi. xvii. 7, 8. 10.

1411) Duns Scotus, On the Sentences III. xix. qu. unica. 8(Opera omnia XIV. 719).

1412) 아퀴나스에 의하면, fides informata("형식적 신앙")는 사람의 행위가 없는 신앙이며, fides formata("내적인 신앙")는 사랑을 행하는 신앙이라고 한다. Summa Theol. II ae. cxiii. 4; cxiv. 3, 4, 8; II IIae. v. 3(tr. LCC XI. 189f., 206-209, 214f., 282-284).

1413) Aquinas, Summa Theol. I. IIae. ciii. 3; civ. 3, 4; cix. 2(tr. LCC XI. 140f.). Contra gentes iii. 149에서 아퀴나스는 지적한단. "첫째 원인이 이차원인들에 미치는 영향이 곧 하나님의 도움이다…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의 활동을 깨뜨리지 않으신다. 실제로 그 활동들의 원인이 되신다"(tr. A. T. Gilby, St. Thomas Aquinas: Philosophical Texts). p. 158).

1414) Lombard, Sentences II, xxvi-xxviii(MPL 192. 709-719). Smits는 어거스틴에서 여기서 논의되는 문제에 관련된 구절 26개를 찾아냈다. 이 구절들의 특색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Psalms, Ps. 68(VG., Ps. 67). 41(MPL 36, 838; tr. LF Psalms III. 351); Enchiridion ix. 32, xxviii. 106; xxxi. 117(MPL 40. 248, 282, 287; tr. LCC VII. 358f., 403f., 409).

1415) II. ii. 8.

1416) Augustine, Psalms, Ps. 144.11(MPL 33.1876,; tr. LF<ps. 145>psalms VI. 325); Letters cxciv. 4. 16-19(MPL 33. 879ff.; tr. FC 30. 31. 311-313).

1417) Aquinas, Summa Theol. I. IIae. cxii. 5(tr. LCC XI. 180f.)에서 욥기 36:26과 고린도전서 4:3을 인용해서, "사람은 자기가 은혜를 받았는지를 확실히 단정할 수 없다"고 한다.

1418)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ed, H. Eng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II i. 112; tr. C. L. Hill, The Loci communes of Philip Melanchthon, p. 212.

1419) Eck, Enchiridion, ch. v(1533 edition, fo. 24b f.).;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p. 9f.("온갖 불경건에 문을 열어 준다"); Cochlaeus, Philippicae III. 15, 20, 20-62; fo. I 2b, fo. K 1b-2a("불경건의 만연"), fo. N. 2a.

1420) 이 말은 외면적으로 보기에 III. xi에서 오시안더에 반대한 칼빈의 논법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거기서도(6절)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면서, 둘은 "분리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여기서와 같이 고린도전서 1:30을 인용한다. 참조: III. xx. 45.

1421) III. xviii.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 78; De Castro, Adversus haereses XII(1543, fo 150)참조. 에라스무스의 글은 다음 책에 변역 수록되었다: The Portable Renaissance Reader, ed. J. B. Ross and M, M. McLaughlin, p. 684 참조; L. Goumaz, La Doctrine du salut, pp. 259ff.

1422) J. Faber, De fide et operibus xxiii, xxv(Opera<1550>, fo, 103b f.).

1423) Chrysostom, Homilies on Genesis, hom. xxvi. 5,6(MPG 53. 235-239).

1424) 본장 2절 참조.

1425) III. xviii. 3.

1426) E. g., Latomus, De fide et operibus(Opera<1550>, fo. 141ab).

1427) 참조,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 10; Cochlaeus, Philippicae III. 21(fo. K 1b-2a) on the Saxon Visiations(1528). 둘째 문헌은 C. Bergendoff의 영역에 있다.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40.269-320.

1428)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V. part 2. art. 1. qu. 4.(Opera selecta IV. 350ff.). 참조.

1429)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ii. 3; xv. 1.

1430) "Ex capite proximo.""Proximo"는 여기서 잘못이다. 1539년판에서 "다섯째"; 1543-1544년판들에는 "아홉째"로 되어 있다. 참고할 곳; III. iii. 19; III. iv. 25, 27, 30).

1431) 이런 논법은 루터의 반대자들이 사용했다. 예컨대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p. 23ff., 33; Latomus, De fide et operibus, Opera<1550>, fo. 141 ab).

1432) II. vii. 3.

1433) "Ex pacti ratione," 참조. Bonaventura, On the Sentences II. xxvii. 2. qu. 3.(Opera selecta II. 659); De Castro, Adversus haereses X: "ex pacto…ex conventione"(1543. fo. 160 B. C.).

1434) III. xxiii. 10; Cochlaeus, Philippicae III. 13, fo. H 4a; Lombard, Sentences III. xxv. 4(MPL 192, 810)참조.

1435) Aquinas, Summa Theol. I. IIae. cix. 6(tr. LCC XI. 146ff.); III. Suppl. x. 4, reply to obj. 3; Iix. 4, reply to obj. 2. cf. Eck, Enchiridion. ch. v; Herborn Enchiridion xxxviii(CC 12. 128-132).

1436) I. xv. 4.

1437) "Foedus" III. xiv. 6, 주 6; III. xxi. 5-7 참조.

1438) "dicaiwvmata", 이것은 히브리어의 j'yQij 에 대한 70인역, 칼빈은 "법령"으로 번역하고 싶어 한다. 불어역에는 "edits ou statuts."

1439) 7, 8, 10절에서 "믿음으로만"을 고집하는 데 주목하라. 행위가 칭의를 완성한다는 견해는 루터의 반대자들이 자주 주장했고, 트렌트 회의에서 간명하게 확인되었다: canon xxiv of the Decree on Justification(Schaff, Creeds II. 115).

1440) 불어역에는 다음 말을 첨가하여 뜻을 명확히 하였다: "que les enfans meurtrissent leur mre."

1441) Fisher, Confutatio, p. 492.

1442) 이신 칭의에 반대한 사람들은 자연히 야고보서의 구절을 애용했다. 그것은 특히 루터가 요한 바울의 글에 비해서 야고보서는 "참으로 지푸라기와 같은 서신"이라고 했기(1552)때문이었다. 참조: kaspar Schatzgeyer, Scrutinium divinae Scripturae pro concilatione dissidentium dogmatum(1552)ii(CC 5. 27); De Castro, Adversus haereses X(1543, fo. 128E); Fisher, Confutation, p. 76; Aquinas, Summa Theol. II. IIae. iv. 4(tr. LCC XI. 269).

1443) 호메로스 이후에 생긴 Aethiopsis 전설에 언급한 것. 아킬레스는 뒤꿈치에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 약점은 그가 불사신이 되기 위해 물에 담겼을 때 그의 어머니 테티스가 손으로 뒤꿈치를 붙잡아 생긴 것이라고 한다.

1444) 바울과 야고보는 교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의롭다함"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참조: Cadier, Institution III, 282, 주 1. 칼빈은 Sermons on Various Passages of Genesis(아브라함의 칭의에 관한 세째 설교)에서 이중의 칭의에 대해서 말한다. 우선, 부르심을 받는 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용서가 있고, 그 후에 "우리의 행위에 관해서도 순수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있다(CR XXIII. 718-719). 참조:로마서 8:30에 대한 주해, 여기서는 선택과 부르심을 칭의의 다른 방면, 즉, 일평생 계속되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별한다. Cadier에 의하면, 바울은 칭의를 첫째 의무로 다루고, 야고보는 둘째 의미로 다룬다고 한다.

1445) 교황주의자는 로마서 2:13을 이런 의미로 인용했다. 예컨대 Eck, Enchiridion, ch. v(1533 edition, fo. 23a). "Ambrose를 Ambrosiaster"라고 읽었다. 이것은 Erasmus가 붙인 이름이지만, Ambrose의 동시대인이었고 Commentary on Paul's Epistles의 저자이다. 이 책은 오랫 동안 Ambrose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로마서 2:13에 대한 그의 주해를 보라(MPL 17.67).

1446) III. xiv. 18-20.

1447) gratia acceptans(받아주시는 은혜)라는 교리를 전개한 것은 프란시스코파의 스콜라 학자 Duns Scotus와 Ockham 이었다. Eck와(Enchiridion, ch. v)동시대의 다른 사람들도 주장했다.

1448) Augustine,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 i(MPL 44.292f.; tr. NPNF V. 159f.). 콜레스티우스는 펠라기우스와 동시대인이었다; Cf. II. I. 5, note 8.

1449) Augustine, On Man's Perfection in Righteousness ix. 20(MPL 44. 301f.; tr. NPNF V. 165f.).

1450) Augustine, Against Two Epistles of the Pelagians III. vii. 19(MPL 44.602; tr. NPNF. V. 411).

1451) 이 서두는 III. xiv. 14의 첫 문장과 관련이 있다. III. xvi. 2, 주 3을 보라. 공로와 보상을 결부시키는 논법("ubi merces ibi merita", "보상이 있는 곳에는 공로가 있다", Cochlaeus, Phililppicae III. 65, fo. N 2b)은 로마 신학의 상식이였다. 참조, De Castro, Adversus Omnes haereses IX(1543, fo 150); "Quomodo toties auditur praemium, ubi prorsus nullum est meritum?"(공로가 없는데 어떻게 보상이란 말을 자주 듣게 되는가?)

1452) Pseudo­Ambrose, The Call of the Gentiles I. V(MPL 17.1091). MPL 51에 있는 Prosper의 본문에는 여기에 있는 문장들이 없다. II. ii. 5, 주 27을 보라.

1453) III. xxv. 12 참조. 어거스틴의 관련 구절들에 대해서는 Smits II. 43을 보라.

1454) Aquinas, Summa Theol I IIae. cxiv. 1(tr. LCC XI. 203f.); Cochlaeus, Philippicae III. 65.

1455) Augustine, On Grace and Free Will vi. 14(MPL 44.890; tr. NPNF V. 449). 디모데후서 4:8은 Eck, Enchiridion, ch. v(1533 edifion, fo. 26a)에도 인용 되었다. J. Clichtove, Improbatio quorundam articulorum Martini Lutheri(1533)에 같은 구절을 인용하고 묻는다. "의의 행위: 그것은 공로가 아니고 무엇이냐?" 참조, Fisher, Confutatio, art, i. p. 66; Herborn, Enchiridion v.(CC 12.33).

1456)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I. v. 14(MPL 44.598; tr. NPNF V. 409).

1457) De Castro, Adversus haereses, s. v. "opera", XI(1543, fo. 140 A): Latomus, De fide et operibus(Opera<1550>, fo. 133a). on Luke 16:9 and I Tim. 6:17-19.

1458) 히브리서 6:10은 이런 의미로 Herborn Enchiridion(CC 12.33)에 인용되었고, 트렌트 회의의 "칭의에 관한 교령"(Decree on Justification, ch. xvi, Schaff, Creeds II. 107)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영원한 생명은…보상(merces)으로서…그들의 선행과 공로에 대하여 충실히 제공된다."

1459) Augustine, Psalms, Ps. 32. ii. 1. 9; Ps. 83. 16; Ps. 109. 1(MPL 36. 284; 37. 1068; 37. 1445; tr. LF<Ps. 33> Psalms I. 317f.; <Ps. 34> IV. 164;<Ps. 110> V. 229f.; Sermons clviii. 2. 2(MPL 38.863; tr. LF Sermons II. 779.)

1460) Fisher, Confutatio, p. 63; De Castro, Adversus haereses VII. s. v. "gratia"(1543, fo. 128ab, 132b); Lombard, Sentences III. xxiii. 5(MPL 192. 811); Aquinas, Summa theol, I IIae. cxiii. 4, reply to obj. 1; II IIae. xxiii, xxvii(tr LCC XI. 342-368). 참조. Augustine, Enchiridion xxxi. 117(MPL 40. 287; tr. LCC VII. 409).

1461) III. ii. 9-13.

1462) "cat! avnacefalaivwsin."

1463) 참조. III. xvii. 15; Duns Scotus, On the Sentences I. xvii. 3. 22(Opera omnia X. 82); Cochlaeus, Philippicas III. 10.

1464) De Castro, Adversus haereses VII(1543, fo. 128 C B; K. Schatzgeyer, Scrutinium divinae Scripturae pro conciliatione dissidentium dogmatum,(1522) ii(CC 5. 26); Cochlaeus, Philippicae III. 55, fo. M 3b; Clichtove, Improbatio, fo. 14a(on Matt. 19:12).

1465) Eck, Enchiridion, ch. v; "Fides, opus vocatur"("믿음을 일이라고 부른다", 1533 edition, fo. 25b, 요한복음 6:29을 인용했다. 칼빈의 요한복음 6:29에 대한 주해를 보라.

1466) 여기서 칼빈은 루터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기록해 남긴다. 다음 구절들에 대한 루터의 설교를 보라; 마가복음 16:14(1552년 5월 29일); 마가복음 8:1(1523년 7월 19일, Werke WA X. iii. 141f. XII. 637; cf. XXI. i. 360.)

1467) "Lucianici homines", 즉,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200년경에 사망)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 루키아노스는 작품 De morte Peregrini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생활을 풍자했다.

1468) II. vii. 14, 15; III. xi. 17, 18.

1469) Melanchthom, Loci communes(1521), ed. H. Eng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II. i. 129; tr. C. S. Hill, pp. 214f. 1559년판(Loci praecipui)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네 단계로 구별한다. 죄의 용서, 성령의 조명, 모세의 법에 매이지 않는 생활, 그리고 상관없는 일들에 관한 양심의 자유(ed. Engelland, op. cit., II. ii. 764-772).

1470) 참조, Servetus, On the Righteousness of Christ's kingdom(1532) iii. "율법과 복음과의 비교", D 7a-8b(tr. Wilbur, Two Treatises of Servertus, pp. 239-241).

1471) 칼빈은 "필요하지 않은 일에서의" 양심의 자유를 주장한다. 참조, Rupert Meldenius(Peter Meiderlin), Paraenesis votiva pro pace ecclesiae(1626), motto at end; "In necessariis unitas, in non necessar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McNeill, unitive Protestantism, pp. 267f., 주 12; 311).

1472)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 ed. Engelland, p. 137; tr. Hill, p. 2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에 의하여 율법을 지키도록 유도된다."

1473) Fisher, Confutatio, art. xxxi, p. 492.

1474) Parcere pro indulgere vel humaniter ad vitia connivere"(VG:"dissimulant les vices"). 칼빈이 히브리어 lm'j]을 "묵인한다 또는 아낀다" 따라서 "용서한다 또는 불쌍히 여긴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데 관해서는, 그의 예레미야 15:5과 요엘 2:18에 대한 주해를 보라.

1475) "a;diavforoi" 무해 무익한 사물들, 이 문제는 칼빈 당시에 자주 논의되었다. 참조, Melanchthon, Apology of the Augsburg Confession XV. 52(Concordia Triglotta. pp. 328f.;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adiaphora를 지키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칼빈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것이 T. W. Street, John Calvin on Adiaphora, an Exposition(박사 논문, Union Theological Seminary, New York, 1954). 본절에 언급하여 Street박사는 adiaphora에서의 자유를 칼빈이 중요시했다고 역설한다(pp. 66f.). 참조, IV. x. 22;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p. 309f.

1476) 내핍 생활이 강제적이며 점점 더욱 심하게 되는 데 비해서 철저한 비평을 하는 것과, III. x. 1-4에서 하나님의 현세적 선물을 절제 있게 이용하라고 충고하는 것을 비교하라. 초기 수도원 규정 가운데 어떤 것은 극단을 피하라는­특히 단식에 대해서­경고가 보인다; 예컨대 Cassian, Conferences xxi. 13, 14(MPL 41. 1187-1190; CSEL 13. 587-590; tr. NPNF 2 ser. XI. 508f.); Sayings of the Fathers X. 1(LCC. XII. 105), 그러나 Namisias의 Dioscorus는 장기간에 걸쳐서 음식을 결정적으로 줄이는 것을 칭찬했다: Sayings of the Fathers IV. 13(LCC XII. 50).

1477) "Res omnes externas libertati nostrae subiicit." 참조. III. x. 4: "In rebus externis libertas"("외면적인 일에 대한 자유"). 본절과 다음 절에서 무해 무익한 일에 대한 칼빈의 기독교적 견해가 표명되었다. 이것은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서 칼빈이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배운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참조: E, F. Meylan, "The Stoic Doctrine of Indifferent Things and the Coriception of Christian Liberty in Calvin's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Romanic Review VIII<19837>, 135-145).

1478) 이 말의 출처는 아직 찾지 못했다.

1479) 1522년에 스위스의 쮜리히 시민들이 성경적 자유를 축하하기 위해, 금요일에 고기를 먹는 만찬회를 열었고, 출판업자 Christopher Froschauer와 몇몇 사람들은 쯔빙글리의 면전에서 "말린 소시지 두 개"를 먹었다(Kidd, Documents, p. 390).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사건들을 회상했을 것이다.

1480) "De scandalis." 종교 생활에서 남을 넘어지게 하는 문제를 칼빈은 논문 De scandalis(1550)(OS II. 162-240; CR VIII. 1-84; tr. A. Golding, A Little Booke Concernyng Offences, 1567)에서 다루었다. 참조.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at end; ed. Engelland, op. cit., pp. 161ff.; tr. Hill, op. cit., pp. 265ff.

1481) 본절에서 칼빈은 여러 가지 말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offensio", "offendiculum", "scandalum." 참조, Melanchthon; "스캔들은 이웃의 믿음이나 사랑에 상처를 주는 걸림이 되는 것이다"(ed. Engelland, op. cit., p. 161; tr. Hill. op. cit., p. 265f.).

1482) 고린도전서 10:29의 순서를 뒤집은 것이다. 16절 끝부분에 바로 인용이 나온다.

1483) "Vei moderanda…vel offendiculis redimenda" 대답은 사랑과 이웃의 유익을 고려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을 위선적인 구절로 삼아서는 안 된다(13절).

1484) 여기 말하는 기록들은: Epistolae duae de rebus hoc saeculo cognitu appime necessariis(Basel, 1537)(OS I. 287-362; Epistle i tr. in Calvin, Tracts III. 360-411; On Shunning the Unlawful Rites of the ungodly); What a Believer Ought to Do…Among the Papists(1543)(CR VI. 537-578; tr. R. G.<1548>; The Mynde of John Calvyne, What a Faithfnl Man Ought to Do, Dwelling Among the Papists); Excuse of John Calvin to the Nicodemites(1544)(CRVI. 589-614);On Avoiding Superstition(1549)(CR. VI. 617-640); De scandalis(1550)(OS II. 162-240).

1485) "constitutions."는 칼빈이 IV. x. 8, 9에서 언급하는 교황 제도의 규정들을 의미한다.

1486) 참조, 13세기의 교황들은 "plenitudo potestatis in temporalibus et in spiritualibus." 여기 반대한 것은 Marsiglio of Padus와 William of Ockham이었다. 특히 Ockham, De imperatorum et pontificum, potestate, ed C. K. Brampton, chs. i-iv, pp. 5-10; ch. xi. p. 24.

1487) IV. xx.

1488) IV. x. xi.

1489) "Conscientiae forum." 참조, IV. x. 3; R. J. Deferrari and others, ALexicon of St. Thomas Aquinas, s. v. "forum", p. 443. Catholic Encyclopedia, art. "forum."

1490) HDRE IV에 있는 "conscience"라는 항목의 첫 구절과 "Greek and Roman"이라는 절을 보라(특히 pp. 39ff.). Cicero, Nature of the Gods III. xxxv. 85(LCL edition, pp. 370f.). Plutarch, Moralia 476(LCL Plutarch, Maralia VI. 234 f.). Aquinas, Summa Thel. I. lxxix. 13. I. IIae. xix 5; De veritate xvii. 5(A. T. Gilby, St. Thomas Aquinas: Philosophical Texts, p. 115); W. F. Arndt and F. W. Gingrich, A Greek 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Greek, s. v. "suneivdhsi""(여기 인용된 문헌들).

1491) Quintilian, Institutes of Oratory V. xi. 41(LCL Quintilian II. 294f.). 참조. Comm. Seneca, On Clemency I. xiii; "magis vis conscientiae"(CR V. 102).

1492) 참조. sec. 11. note 16.

1493) 이 장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기도론 중에서도 특출한 것으로, 사려가 깊고 내용이 풍부하며 논조에 경건한 열기가 있다. 유명한 기도론으로는 Tertullian, De oratione(CCL Tertullian I. 257-274; tr. ANCL XI. 178-204); Origen,(MPG 11. 415-562; tr. LCC III. 238-287; ACW XIX. 3-140); Gregory of Nyssa, On the Lord's Prayer(MPG 44. 119-1194); Augistine(MPL 47. 1113-1127)과 Hugh of St. Victor(MPG 176. 977-988)의 소논문 들이다. R. S. S. Wallace는 기도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에 제 1장을 할애하고, 칼빈의 많은 저서들로부터 인용한다.: 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p. 271-295.

1494) 기독교 철학에 대한 주와(제 1권, p. 6, note 8; III. vii. 1, note 1), 한 계급으로서의 철학자들에 대한 언급을(I. v. 12; I. xv. 6; III. vii. 2; III. vi. 1, 3; III. viii. 9)참조.

1495) 참조, 양자에 대한 언급(II. vii. 15; II. xix. 5-7; III. i. 3; III. ii. 11, 22; III. xi. 6; III. xiv. 18; III. xvii. 6; III. xxviii. 2).

1496) "Nec lactare eos verbis," 참조, VG; "Et qu'il ne les allaite point de vaines parolles."

1497) 참조, Sencea, Epistles xxxi. 5(LCL. Seneca, I. 222 f.).

1498) 칼빈이 기도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라고(Colloquium; 5절에서 familiare alloquium 이라고)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Augustine(Letters, cxxx; MPL 33. 502-509); Cassian(MPL 49. 769), Benedit(MPL 66. 329). the Vitae Patrum, Story of Balaam and Josaphat xx(MPL 73. 520), 어떤 의미에서는 Aquinas(Contra gentes iv. 22). 칼빈은 이 관념에 일체의 불경, 준비없음, 경솔 등의 요소가 섞이지 않도록 특히 주의하였다. 본장 16절의 처음 문장들을 참조하라.

1499) 참조, Horace, Satires I. viii. 1-3(LCL edition, pp. 96ff.); 이사야 44:10-17; Erasmus, Colloquies, "The Shipwreck"(tr. C. R. Thompson, Ten Colloquies of Erasmus, pp. 6 ff).

1500) "Duce Spiritu,"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같이(I. vii 4, 5), 성령의 자극으로 기도에서 지도를 받는다.

1501) 기도를 단순히 외우는 것과 구별하여 실존성을 역설하는 점은 Origen, On Prayer xii(LCC II. 261 f.)와 같다. 참조; Aquinas, Summa theol. I. IIae. xxxiii. 13(주의는 기도를 공로 있게 만든다); Luther, Larger Catechism, part 3(주기도문 서론)(Bekenntnisschriften der Evangelisch­Lutherischen Kirche, p. 668). Treatise of Good Works, Third Commandment, sec, iv(Werke WA VI. 232; tr. Works of Martin Luther I. 225f.).

1502) 본장 51절을 보라. 제 7절은 1551-1557년 프랑스어판과 상당히 다르다. 프랑스어판에 대해서는 Benoit, Institition III. 483f., 30 주(a)를 보라.

1503) 본장 8절을 보라.

1504) 본장 3절.

1505) III. iii. 1-5.

1506)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 395); Treatise of Good Works, loc. cit.

1507)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 396).

1508) III. ii. 22-26.

1509) 1536년판과 1539년판의 해당 장소에는 12-15절에 있는 논술보다 다소 길다. 여기에서 1539년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의 불행한 상태를 의식하는 것이 가시같이 우리를 끊임없이 찌르지만, 동시에 지극히 은혜로우신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것을 첨가하셨다. 그것은 기도하라는 명령과, 우리가 구하는 것은 얻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 WAX. ii. 395)

1510) 참조, I. iv. 1; I. v. 8; III. xxiv. 12.

1511) "Clamavit ad me." 시편 91:15에 대한 주해에서 칼빈은 "invocavit me"("저가 내게 간구하였다", 현재 완료)을 사용; 라틴역은 "clamabit ad me"("저가 내게 간구하라", 미래형); 현대어 번역들도 미래형을 쓴다.

1512) 본장 13절.

1513)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 395).

1514) 본장 12절.

1515) III. iii. 25.

1516) 어거스틴의 말을 변형시킨 것: City of God XXII. ii. 1-2(MPL 41. 753; tr. NPNF II. 499f.).

1517) 본장 4, 5절

1518) 본장 6절

1519) 참조:본장 5절과 29절; 주해(시 63:4; 행 20:36; 딤전 2:8). 기도할 때에 두 손을 드는 것은 고대에 보통 있는 관습이었고(HDRE X. 183, 201), 이 자세는 수도원에서와 교회에서 징벌을 행할 때도 적용되었다. 참조: McNeill and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p. 33f., 144, 146. 칼빈은 공중 예배에서 무릎을 끓는 것에 찬성했다. IV. x. 30.

1520) "Horribifis Dei maiestas," 참조, III. xxiii. 7; "decretum…horribile."

1521) "Umbratilis." 참조, II. vii. 1, 16; II. viii. 28; II. ix. 3, 4; II. xi. 2-6.

1522) 참조, Comm. Harmony Four Books of Moses, Ex, 28; 9-21.

1523) Clichtove, De veneratione sanctorum(Paris, 1523) I. x(fo. 26b-29b); Eck. Enchiridion, ch. xiv(1533 edition, fo. 476, 49a); Latomus, Adversus M. Bucerum de controversiis…altera plenaque defensio(Cologone, 1545), fo. I 1b­M 4b. Latomus는 어거스틴을 인용하여(City of God XXII. x. 기타), 어거스틴은 성자들에게 기원하는 것을 지지했다고 주장한다(fo. L la­2b).

1524) Augustine, Against a Letter of Parmenianus II. viii. 16(MPL 43. 600).; Psalms, Ps. 94. 6(MPL 37, 1220f.; tr. LF<Ps. 95> Psalms IV. 389).

1525) 본장 36절을 보라.

1526) Ambrose, On lsasc or the Soul viii. 75(CSEL 32, 694; MPL 14. 520).

1527) Eck, Enchiridion, ch. xiv(1533 edition, fo. 49b), 로마서 15:30을 인용했다.

1528) "Prosis" Proses는 기도서에서 사도의 선한과 복음서 사이에 있는 문구들, 읽거나 노래한 산문시 같은 것. Oxford English Dictionary에서 "Prose, 2. Ecclesiastical"을 보라.

1529) 참조: 주 31에 있는 인용서들 및, J. Faber, De intercessione sanctorum, adversus J. Oecolampadium(Opuscula <1537> II. first title), c l b­f 4a, esp. e la.

1530) Eligius(660년 사망)와 Medard(545년 사망)는 유명한 성자였고, 칼빈의 고향인 Noyon시의 감독들이었다.

1531) "Semper ad Patrem dirigatur oratio" Third Council of Garthage(397), Canon x xiii(Mansi III. 884). Augustine, City of God VIII. xxvii. l; XXII. x(MPL 41. 255, 772; tr. NPNF II. 164 f., 492); Against Faustus xx. 21(MPL 42. 384 f., tr. NPNF IV. 262).

1532) Eck, op. cit., fo. 48b.

1533) Eck, op. cit., fo. 46b;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lxxii. 3.

1534) Eck, op. cit., of. 49a; De Castro, Adversus haereses(1543 ed., fo. 164 B, E).

1535) Eck, op. cit., fo. 47a­48a.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 llae. 1xxxiii. 11.

1536) De Castro. Adversus haereses(1543, fo. 164B, C).

1537) Eck, op. cit., fo. 49a; De Castro, op. 198A.

1538) 이 인용구는 라틴역의 시편 51:8과 63:11을(KJV에서도 숫자는 같다)뒤섞은 것같이 보인다.

1539) Eck. op. cit., fo. 47b(시 32:6을 인용).

1540) 본장, 26절.

1541) 본장, 17-19절.

1542) 본장, 20절.

1543) 본장, 21절.

1544)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lxxxii. 2;Eck, op. cit., fo. 50b; De Castro, Adversus, haereses fo. 197E.

1545) 죠지는 가바도기아(행 2:9)의 성자; 303년에 순교했다. 그를 영국에서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사자 왕 리챠드가 십자군에(1189-92)참가한 이후였다. 히폴리투스라는 성자가 3세기에 둘이 있었다. 그 중 더 유명한 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의 회원이었다. 이는 학자요, 논쟁적이어서 추방을 당했다가 화해했으나, 236년에 순교했다.

1546) "In die necessitatis" 분명히 구약 외경인 시락 6:10에서 왔다.

1547) 본장 1절.

1548) Ibid.

1549) "Confiteamur." 참조. III. iv. 9. 주 19.

1550) "Ex hac dulcedine amoris." 14절 첫 문장에 있는 "tanta dulcedine"를 보라. dulcedo("sweetness")라는 낱말은 중세기 신비주의 용어에서 아주 특출한 것이었다. Bernard, St. Victor와 Richard, Rolle, Ruysbroeck등에서도 그러했다. 번역된 구절들을 위해서는 LCC XIII. 68ff., 105f., 210f., 235. 313ff.를 보라.

1551) 본장 51절.

1552) "battologivan."

1553) "Negotium cum Deo." 참조, I. xvii. 2; III. iii. 6; III. iii. 16; III, vii. 2, 그리고 부가된 주들.

1554) 본장 4절.

1555) "Cordis affectum." 참조, III. 1. 3, 주 6; Bucer, Enarrationes in quatour Evangelia(1536), p. 157.

1556) 개인 기도와 공중 기도를 모두 사용하신 그리스도의 예를 들면서, 칼빈은 여기서 회중의 공중 기도로(30-33절의 제목으로) 옮겨갔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개혁파 교회들이 20세기에 추진한 예전(禮典)운동에 대해서는(이 운동은 칼빈이 정한 범위를 넘는 것이다). J. D. Benoit, Liturgical Renewal; Studies in Catholic and Protestant Developments on the Continent, pp. 9-68을 참조.

1557) "Templorum usus." 참조, 사도행전 9:31에 대한 주해,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요 집이다."

1558) 종교개혁 이전에 노래가 악용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쯔빙글라는 노래를 폐지하고 성경 낭독으로 대신했다(1525년), Conrad Grebel도 같은 입장을 취해서, 회중의 합창을 시작한 Thomas Mntzer를 비난했다(LCC XXV. 75).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주저없이 공중 예배에서 노래가 차지하는 지위를 주장하고, 시편을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가사로 사용했다. 참조. L. Wencelius, L'Esthetique de Calvin, pp. 250-303; f. Blume, Die evangelische Kirchenmusik; C. Garside, Jr., "Calvin's Preface to the Psalter a Reappraisal", The Musical Quarterly XXXVII(1951), 566-577. 노래할 때에 심령과 마음을 바치라는 칼빈의 충고는 여러 기독교 문서에 이미 나타났다. 특히 Benedict의 Monastic Rule xix에 "Ut mens nostra concordet voci nostrae"("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음성과 일치하도록")라고 하였다. J. McCann, The Rule of St. Benedict in Latin and English. p. 68.

1559) Augustine, Confessions IX. vii. 15(MPL 32. 777; tr. LCC VII. 187).

1560) Augustine, Retractations II. xi.(MPL 32. 634).

1561) Augustine, Confessions X. xxxiii. 50(MPL 32. 800; tr. LCC VII. 230f). 이와 관련하여, 어거스틴은 시편 가창(歌唱)에 사용되는 곡조들이 예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없애버리고 싶은“때도”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칼빈과 같이, 노래를 폐지하지 않고 개량하는 것을 택했다.

1562) Plato, Alcibiades II. 142E, 143A(LCL Plato VIII. 249).

1563) Augustine, Enchiridion xxx, 115f.(MPL 40. 285; tr. LCC VII. 408). 루터는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일곱째 기원이라고 부른다. 참조, Eine Kurze Form(A Short Exposition of the Decalogue, the Apostles Creed, and the Lord's Prayer, 1520<Werke WA VII. 229;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384> 참조.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 1592<Werke WA XXX. i. 264 ff., 306.>).

1564) Pseudo­Chrysostom, Homilies on Matthew(incomplete work), hom. xiv(MPG 56. 715).

1565) 참조, Bucer, Enarrationes in quatuor Evangelia(1536), p. 209

1566) 본장, 21, 37, 38절들.

1567) 본장, 21절.

1568) "Diffundi per omnia"; VG; "ains qu'il par tout et remplit toutes Choses"

1569) "Humanum genus." 41, 42절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인류 전체에서 승리한다는 미래의 보편성에 대한 칼빈의 개념을 밝힌다. 이 제목은 그의 주해에 자주 나온다. 참조, Comm. Ps. 2:8; 21:8; 28:57; 45:16; 47:8; 110:2; Matt. 6:10; 12:31; John 13:31f.; R. S. Wallace, Ca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p. 110f.

1570) III. iii. 19; III. vi-x.

1571) 참조 IV. i. 17; Peter Martyr Vermigli, Loci communes II. xvii. 14(1576 edition, p. 462).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싸워 승리한다는 칼빈의 생각을 논한 것은 K. Frhlich, Gottesreich, Welt und Kirche bei Calvin, pp. 19-28. 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pp. 114ff.를 보라. 칼빈의 종말론은 이 절의 끝에 요약되었다.

1572) 참조, I. xviii. 3; III. xxiv. 17.

1573) 본장, 35절.

1574) Comm, Harmony of the Evangelists, 마태복음 6:11에서 칼빈은 라틴역에 있는 "panis supersubstantialis"란 번역을 "심히 어리석은"것이라고 하며, 이 번역을 Erasmus가 지지한 것을 "경박"하다고 했다.

1575) Tertullian, On Prayer vi(CCL Tertullianus I. 260.: tr. ANF III. 680)에서, 그리스도가 생명의 양식이므로(요 6:35), "일용할 양식"은 영적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논한다. 참조, Augustine, On the Sermon on the Mount II. vii. 25-27(MPL 34. 1279 ff.: tr. NPNF VI. 41f.).

1576) 참조, I. xvi. 7.

1577) 참조, II. xv, xvi, xviii.

1578) 이것은 Spirituals(신령파)니, Libertines(자유파)니 하는 사람들을 암시하는 말이다. Sermons on Galatians ii(갈 1:1-5)에 있는 말 "어떤 터무니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중생하면 더 이상 죄의 용서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된다고 상상한다"(CR L. 298);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des Libertins xviii(CR VII. 205)을 보라. 칼빈이 특히 마음에 둔 것은 Quintin파다. Quintin은 극단파였고, 1530년에 Tournai에서 화형을 당했다. III. iii. 14, 주 30을 보라.

1579) 루터의 유명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그 전문이 Werke WA XXXV. 455f.에 있다) 원수의 위협적인 힘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원수의 "궤휼과 권세" 참조, H. Obendieck, Der Teuful bei martin Luther pp. 53-59, 165-170. Bunyan의 Grace Abounding과 The Pilgrim's Progress에서 묘사된 Christian과 Apllyon과의 싸움에서도 영혼과 그 원수 사이의 충돌이 힘있게 표현되었다.

1580) 본장 38, 39절.

1581) 마지막에 있는 축도는 신약성경의 가장 오랜 사본들이나 라틴역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582) 루터도 주기도문 맨 끝에 있는 "아멘"에 대해서 비슷한 해석을 한다. 그의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 Exposition of the Catechism"(1529)(Werke WA XXX. i. 308)을 보라. 라틴어는 독일어보다 표현이 더 강하다. "Certo tibivmnia illa donabuntur"("반드시 그 모든 것을 그대에게 주시리라").

1583) 본장 8절.

1584) 참조, Augustine, Letters cxxx, 12. 22f.(MPL 33. 502f.; tr. FC 18. 393).

1585) Tertullian, On Flight in Persecution ii. 5(CCL Tertullian II. 1138; tr. ANCL XI. 359).

1586) 본장 4절.

1587)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 397).

1588) 칼빈은 예정론을 매우 강조하지만, 예정론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는 신론에서 하지 않고 구원론에서 하며, 구원론에서도 구원론의 중요 골자가 밝혀지기까지 미루어졌다. 칼빈은 성경을 근거로 논증하며 어거스틴을 많이 참조한다. 그가 어거스틴을 더 많이 인용하게 된것과, 예정론이 확대된 것에 대해서는 Smits, I. 45f., 61f., 104f., 109를 보라. 사실상 그의 입장은 대체로 중세 어거스틴파의 글에서, 특히 Thomas Bradwardine과 Gregory of Rimini같은 14세기 사람들에게 예견되었다. Interoduction, sec X. wn 54 B. Mozley, A treatise on the Augustinian Doctrine of Predestination; K. Ermisch, Predestination, On Historical Sketch; P. Vigneau, justification et Predestination an xive siele: Duns Scot, Pierre d'Auriole, Guillaume d'Occam, Gregoire de Rimini, ch. iv.; H. A. Oberman, Archbishop Thomas Braduardine, a fourteenth­Century Augustinian; G. Leff. Bradwardine and the Pelagians. 초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중요한 논의서는 Jerome(Girolamo) Zanchi, De Praedestinatione(1562); J. Piscator, Disputatio theologica de praedestinatione(Herborn in Nassau, 1592)이다. Zanchi의 논문을 이용하고 주로 번역한 것이 A. Toplady, The Doctrine of Absolute Predestination(London, 1769)이다. 이것은 웨슬리에게 대답한 글이다. 웨슬리는(Dialogue Between a Predestinarian and His Friend와 기타 관련 문서에서 18세기의 알미니안 사상을 발표한다. 현대 칼빈주의의 저술로는 B. B. Warfield, The Plan of Salvation; L.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K. Barth, Gottes Gnadenwahl(Theologische Existenz Heute, No. 47)등이 있다. Wondel은 Calvin. pp. 199-216에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해박하고 유익한 논의를 하였다. 다른 참고 문헌에 대해서는 그의 책 p. 200에 있는 주 100을 보라.

1589) 이런 태도를 취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칼빈은 주로 Erasmus, Eck, Albert Pighius를 염두에 두었을는지 모른다. 이 사람은 각각 자유 의지에 대한 논문을 써서 루터의 예정론을 공격했다. 여기서 Jerome Bolsec의 기소사건(1551)에 관련된 문헌들도 보라(CR VIII. 145).

1590) 참조. Aquinas, Summa Theol I. cxi.; cxiv. 5에 있는 이 구절에 대한 논의, 칼빈은 예정론을 다른 때에 겸손을 강조한다. 그는 다른 데서도 겸손의 덕을 높이 칭찬한다. II. ii. 11, 주 49를 보라.

1591) 즉, 방금 말한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우리의 진실한 겸손, 참조, Cadier, Institution III. 394.

1592)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1xxviii. 4(MPL 183. 1161 ; tr.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480f.).

1593) "다른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1539년에 기록)은 Zwingli를 두고 한말이다. 칼빈은 Zwingli의 강론 On Providence(주로 예정론에 관한 것)을 1552년 1월에 Bullinger에게 보낸 비밀서신에서 비난받았다. 이 편지는 볼링거가 1551년 12월에 그에게 보낸 편지를 반영한다(CR XIV. 215. 253; OS IV. 370, 주4). 여기서 칼빈은 "만일 자네가 보기에 그른 것 같으면, 기꺼이 자네의 훈계를 들을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1594) Augustine, John's Gosple liii. 7(MPL 35. 1777; tr. NPNF VII. 293).

1595) "Docta ignorantia" III. xxiii. 8을 보라. 이 말의 출처는 Augustine, Letters cxxx. 15. 28(MPL 33. 505; tr. FC. 18. 398)이다. 칼빈보다 한 세기 전에 이 말을 제목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 문제를 논한 중요한 철학서가 나왔다; Nicolas of cusa, De docta ignorantia(1440), ed. P. Rotta; tr. G. Heron, Of Learned Ignorance(John Rylands Library Bulletin XXI<1937>, 2).

1596) 참조, Melanchthon, Loci theologici(1535)<CR Melanchthon XXI. 452); Cadier, Institution III. 395, 주 6, 본장 제 4절 주 12를 참조하라.

1597) 참조, I. xiv. 1.

1598) Augustine, On the Gift Persererance xiv-xx(MPL 45. 1013-1020; tr. NPNF V. 538-547).(어거스틴의 제목에서는 "dono"로 되어 있다. 참조. Melanchthon, op. cit.(CR Melanchthon III. 337, 452).

1599) 이런 "생각"들은 III. xxiii.에서 논박된다.

1600)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V. 3, 6(MPL 34. 323).

1601) Barth와 Niesel은 이 말이 베른 시의 정책을 가리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른 시의 목회자들과 행정관들은 1551년 12월 7일에 제네바 시에 공한을 보내어. "교회의 평온과 평화"를 위하여 예정론 문제에 대해 "논의 중지"를 요구했다(CR. VIII. 237-242).

1602) Pighius, De libero arbitrio IV.(in Controversiarum praecipuarum…explicatio, 1542). fo. 64bf.; IX. ii. fo. 159b. 참조, III. xxii. 1-8; III. xxiii. 6. 다음에 있는 문장들에서 칼빈은 예정과 예지를 분명히 구별한다. F. Wendel은 여기에 나오는 칼빈의 견해가 Augustine, Aquinas, Luther, Bucer, Duns Scotus등의 여러 가지 입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이기 위해 논문들을 인용한다(Wendel, Calvin. pp. 202, 206f.).

1603) 이 간단한 정의와 함께 본장 7절의 후반을 참조하라. 또 Wendel, Calvin, pp. 211f.를 보라.

1604) 은혜의 언약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I. vi. l, 주 3; II. x. 1, 주 1; II. xi, 4, 주 6: III. xiv. 6, 주 6; III. xvii. 6; III. xxi, 6, 7. 또한. L. Goumaz, La Doctrine du Salut. pp. 151ff.; Heppe RD, ch. xvi; T. F. Torrance, The School of Faith, Introduction, pp. i. lxiii, 1xxiii, cxxf를 보라.

1605) Wimpina, conrad, Sectarum, errorum, hallutinationum, et schismatum…concisior Anacephalaeosis(1528) III. De Praedestinatione I. iii. fo. R 3a. Piscator는 "선택은 예견된 믿음에 의존하는가"라는 문제를 부정적 입장에서 상세하게 논한다: Disputatio theologica de praedestinatione, pp. 88-172. 참조. J. Wolleb, Christianae theologiae compendium 21(Basel, 1626), Heppe RD, p. 167에 인용되어 있는 것.

1606) 본장 8절.

1607) 참조. Pighius, De libero arbitrio VII. fo. 1186f.

1608) 칼빈은 그의 예정설을 성경에 기초로, 관찰과 경험에 일치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참조. III. xxiv. 4, 12, 15; Doumergue, Calvin IV. 437; K. Barth. Gottes Gnadenwahl, pp. 12f. 칼빈의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에도 비슷한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예컨대, 외면적으로는 부르심을 받은 듯한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는 심히 적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명백한"사실이라고 주장한다(CR VIII. 298f.; tr. H. Cole, Calvin's Calvinism, p. 95).

1609)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xi. 30"(MPL 44, 934f.; tr. NPNF V. 484); On the Gift of Perseverance xxiv. 67(MPL 45. 1033f.; tr. NPNF V. 552).; Sermons clxxiv. 2(MPL 38. 941f.; tr. LF Sermons II. 891 f.). 그리스도 안에서 양자로 입양된다는 논제는 21장 마지막 절에 나온 것을 근거로 여기서 재론된다.

1610) 칼빈은 이 견해를 그의 논문 On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1552)(CR VIII, 255f., 260, 344; tr. H. Cole, op. cit., pp. 22ff., 29, 181)에서 공격하였다.

1611) 본장 1절에서 시작된 에베소서 1:4을 근거로 한 논의를 포함한다.

1612) 참조, sec. xxii. 9. 주 21; Aquinas, Summa Theol 1. xxiii. 5; 영광이 공로에 의해 획득되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기로 미리 정하신다(tr. LCC XI. 110); Clichtove, Improbatio, fo. 86.

1613) Pighius, De libero arbitrio VII. fo. 117ab; IX. ii. fo. 157ff. 버림받은 자들은 무가치하리란 것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신다.

1614) "uvpotuvposin"

1615)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J. von Walter, p. 54.

1616) 참조. III. xxi. 4, 7.

1617) 선택된 자들의 지속적인 인내는 하나님의 최고 권능에 의존한다(Dei potentiam quae maior Omnibus est). 이 권능은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행사된다.

1618) "catacrhstikh'."

1619) Ambrosiaster(참조, III. xvii, 13, 주 15), Commentary on Romans, Rom 8; 29(MPL 17, 134); Origen, Commentary on Romans VII. viii(MPG 14, 1126); Pelagius, on Rom. 8:29(in Jerome's Works)(MPL 30. 684f).

1620) Augustine, Retractation I. xxiii. 2-4(MPL 32. 621 f.); Exposition of Romans lv, lx(MPL 35, 2076. 2078).

1621) Augustine, Letters cxciv. 8. 35(MPL 33. 886; tr, FC 30. 327); On the Predestintion of the Saints iii. 7(MPL 44. 964f.; tr. NPMF V. 500).

1622) Augustine, John's Gospe 1xxxvi. 2(MPL 35. 1851; tr. NPNF VII. 353).

1623) Augustine, On the Gift of Perseverance xix. 49(quoting Ambrose, Exposition of Luke's Gospe i. 10; vii. 27)(MPL 45. 1024; tr. NPNF V. 546); On the Grace of Christ and Orginal Sin I. xlvi. 51(MPL 44. 383).

1624) Augustine, Letters clxxxvi. 5. 15; "electio gratiae, quae non invenit eligendos sed facit"(MPL 33. 821; tr. FC 30. 202).

1625) Aquinas,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 xli. 1, art. 3; Summa Theol l. I. xxiii. 5; 참조, 본장 3절 주8.

1626) Pseudo-Ambrose(즉, Prosper of Aquitaine)의 The Call of the Gentiles I. ii에 있는 글이라고 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이 저작의 Migne 본문에는 이 글이 없다(MPL 17; MPL 51).

1627) 참조, Melanchthon's letter to Calvin, 1543년 5월 11일(CR XI. 541; Herminjard, Correspondanc VIII. 343f.); Melanchthon, Loci theologic(1543)(CR Melanchthon XXI. 914 ff.). 멜란히톤의 이 저작의 프랑스에 번역에 칼빈은 서문을 썼는데(1546년), 거기서 그는 선택에 관한 논쟁점을 회피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CR IX. 849).

1628) 칼빈과의 논쟁에서 선택은 "비난한 자들"은 예컨대 1551년 제네바에서 추방된 Jerome Bolsec과 예정론, 선택, 자유의지에 관한 세 편의 대화체 글을 쓴 Sebastian Castellio 였다.

1629) III. iii. 21; III. xxiv.

1630) 참조, III. ii. 6, 7, 31; Melanchthon, Loci theologici 1535(1543)(CR Melan chthon XXI, 451, 916).

1631) Augustine, Sermons xxvi. 12, 13(MPL 38. 177).

1632) Bernard, Letters cvii. 4,5(MPL 182. 244f; tr.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 356-359).

1633) "Nisi quia divinitus perforatae sunt illis aures." 이 비유는 목자가 자기 양의 귀에 소유권 표시를 하는 것을 가리킨다.

1634) 참조, Wendel, Calvin. pp. 212ff.

1635) 루터파의 견해들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예정과 선택에 관한 Formula of Concord IX의(마지막) Epitome, 3, 4에서, 예지는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선택은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미친다고 한다(Concordia Triglotta, pp. 832f.). 참조, Melanchthon, Loci theologici(1543)(CR Melanchthon XXI. 915. f).

1636) II. iv. 4.

1637) Augustine, Against Julian V. iii. 13(MPL 44, 790f; tr. FC 35. 254f.).

1638)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s ii. 4(MPL 44. 962; tr. NPNF V. 499); Sermons xxvi. 5. 5(MPL 38. 173).

1639) Augustine도 자주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On Genesis, Against the Manichees I. ii. 4.(MPL 34. 175)을 보라.

1640) 참조, Calumniae nebulonis cuiusdam de occulta providentia Dei, reply to art. i(CR IX. 288f.; tr. H. Cole, Calvin's Calvinism,<1856>, pp. 266f.).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또는 전체적인 의지에 관한 스콜라 학자들의 의견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것에 반대할 뿐 아니라 대단히 싫어한다. 그런 견해는 하나님의 통치 능력에서 그의 공의를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 문장에서 흔히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는 견해를 논박하고 있다. 이 점은 본장 4절 중에서 재론된다. 유명론(唯名論) 신학자들이 말한 potentia absoluta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F. Wendel의 논의를 보라. 거기서 Wendel은 그 문제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한다(Wendel, Calvin, pp. 92ff). 참조. Doumergue, Jean Calvin IV. 120f.

1641) Augustine, Unfinished Treatise Against Julian I. xlviii; II. viii(MPL 45. 1069f., 1145).

1642) 참조,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 80.

1643) 본장 2절.

1644) 원문에는 "Coelestinus"라고 되어 있다(칼빈은 여기서 "Caelestinus"라고 오기했다). 참조. l. xiii. l, 주 3; III. xvii. 15, 주 18; 본장 8절.

1645) Augustine, Letters clxxxvi. 7. 23(MPL 33. 824; tr. FC 30. 207).

1646) Augustine, Sermons xxvii. 3. 4; 6.6; 7.7(MPL 38. 179-182).

1647) Erasmus, op. cit., p. 48.

1648) 참조, III. xxii. 8, 주 15.

1649) Lombard, Sentences I. xl. 4. I. xxxviii. 4(MPL 192. 632, 628).

1650) 칼빈은 독자적으로 루터와 같이 Lorenzo Valla(1457년 사망)가 예정론의 동지라고 주장한다. Erasmus도 그의 De libero arbitrio에서 이 점을 인정하고 칼빈이 여기서 하는 말과 같이, "Valla는 권위있는 신학자들 중에서 거의 권위가 없다"고 덧붙인다(op. cit., ed. von Walter, p. 13). 루터는 이 문제에 관해서 와 의 이름을 연결시켰다(Werke WA XVIII. 640). Valla의 Dialogue on Free Will(De libero arbitrio)는 M. Anfossi가 편집하고, C. Trinkhaus가 번역하여 다음 서적에 포함시켰다. E. Cassirer, P. O. Kristeller와 J. H. Randall, The Renaissance Philosophy of Man, pp. 147-182. 특히 pp. 174-178을 보라. Valla의 Dialogue는 1518년에 Basel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1651) "Decretum quidem horribile, fateor." VG; "Je confesse que ce dcret nous doit epouvanter." 참조, "horribilis Dei maiestas," III. xx. 17. 칼빈은 하나님께서 버림의 근원이시라고 선포하는 데 있어 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강경하다. 이 문제는 그의 논문 On the Eternal Predestination of God(참조, VIII. 316ff.; tr. H. Cole, Calvin's Calvinism, pp. 128ff.)에서 다루어졌다.

1652)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x. 27(MPL 44. 932; tr. NPNF V. 482 f.). 칼빈은 아담에게 원래 자유 의지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참조. l. xv. 8).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뜻하는 것이라고 고집하며, 따라서 사람의 의지가 약한 것과 하나님의 은혜와 심판이 강력한 것을 밝힌다. 참조, Cadier, Instifution III. 427, 주 2.

1653)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 53.

1654)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VI. xv. 26(MPL 34. 1350).

1655) 참조. II. iii. 5; II. v. 1, 2.

1656) 참조. III. xxi. 2, 주 8.

1657) 참조, III. xvii. 4.

1658)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I. vii. 13-16(MPL 44; 579-583; tr. NPNF V. 397-399).

1659) Augustine, Letters clxxxvi. 7. 22; 6. 18(MPL 33. 824. 823; tr. FC 30. 206; 204).

1660) Pseudo-Augustine, On Predestination and Grace iii. 3(MPL 45. 1667 f.).; Augustine, On the Gift of Perseverance xii. 28(MPL 45. 1009; tr. NPNF V. 536).

1661) Erasmus, De libero arbitrio, p. 10 J. Faber, De absoluta necessitate x vii(Opuscula quaedam <Leipzig. 1537>, fo. e4a).

1662) 참조, Quintinsts에 칼빈의 묘사: Contre la secte phantastique des Libertins(CR VII. 247).

1663) 참조. III. xxii. 2-3.

1664) 참조. II. v. 4-5; Congregation sur I'election ternelle de Dieu(CR VIII. 107); Calumniae nebulonis cuiusdam de occulta providentia Dei(1558), 11th charge(CR IX. 275-281; tr. H. Cole, Calvin's Calvinism. pp. 323-328).

1665)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MPL 44. 915-946; tr. NPNF V. 472-491).

1666) II. xxii. 1-6.

1667) Augustine, On the Gift of Perseverance xiv. 37; xv. 38; xvi. 40(MPL. 45. 1016-1018; tr. NPNF V. 540ff).

1668) Augustine, op. cit., xx. 51; xxii. 61(MPL 45. 1025, 1030; tr. NPNF V. 546f., 550).

1669) Augustine, On Rebuke and Grace v. 8; xiv. 43, 45; xv. 46; xvi. 49(MPL 44. 920, 942-946; tr. NPNF V. 474, 489ff.). 참조. Introduction X. 주 59.

1670) III. xxii. 10-11

1671) III. xxii. 10.

1672) Augustine, On the Grace of Christ and Original Sin xiv. xv. xxxi(MPL 44. 368, 376f; tr. NPNF V. 223f., 225).

1673) Augustine, On the Predestination of the Saint viii. 13, 14(MPL 44. 970f.; tr. NPNF V. 505).

1674) Augustine, Enchiridion ix. 32(MPL 40, 2`48; ed. Scheel, pp. 21f.; tr. LCC VII. 358). 여기서 논박하는 것은 Erasmus(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 49)와 자유 의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견해다.

1675) 처음에 말한 "어떤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 저술가들이고, 여기 "어떤 사람들"은 루터파, 특히 멜랑히톤이다. Loci theologici(CR Melanchthon XXI. 451, 914)를 보라. 여기의 논증은 본장 2절의 논증과 연결된다.

1676) 다시 경험에 호소한다(III. xxii. 1, 주 4와 본장 6절을 보라). 말씀을 떠나서 확신을 구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고통을 받지만,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으며 양자된 것을 깨닫는다.

1677) Bernar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xxiii. 15, 16(MPL 183, 892f; tr. Eales, Life and Works of St. Bernard IV. 141 f.).

1678) "Perseverantia."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인내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교부의 저술은 어거스틴의 On the Gift of Perseverance이다. 이 저서는 Institutes에 자주 인용되었다(MPL 45. 993-1022; tr. NPNF V. 523-552).

1679) 본장 9절.

1680) III. ii. 22.

1681) III. ii. 39.

1682) "carkinw vmata."

1683) 본장 7절.

1684) Gregory The Great, Homilies on the Gospels II. hom. xxxviii. 14(MPL 76. 1290).

1685) "Semen…electionis." 참조. sec. 11. Bucer는 선택된 사람들이 회심하기 전 죄악에 거하고 있을 때에도 경건의 씨(pietatis seminaria)를 보인다고 주장한다(In Evangelia enarrationes on Matt. 4:18<1530. fo 122a; 1543, fo. 121a>). 칼빈은 여기서와 아래에서 Bucer의 이 구절을 염두에 두었다.

1686) 참조, III. xxii. 1, 주 4.

1687) 개혁자들은 반대하기 위해 고넬의 경우가 자주 인용되었다. 칼빈은 이 사건을 다음에서도 논했다. 사도행전 22-32장 주석; I. xii. 3; III. ii. 32; III. xvii. 4.

1688) 참조. II. iii. 4.

1689) Augustine, Letters cii 4. 22(MPL 33. 379; tr. FC 18. 164) Jerome, Letters cxxxiii. 9(CSEL 56. 255; tr. NPNF 2 ser. VI. 278).

1690) 참조. I. iv. 1; v. 8; III. xx. 14.

1691) Augustine, On Genesis in the Literal Sense XI. x. 13(MPL 34. 434).

1692) 본문에는(크리소스톰의 글) "Homil. do convers. Pauli"이 인용되어 있다. Chrysostom, De ferendis reprehensionibus et de mutatione nomium, hom. iii. 6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1530년 Basel판에서 De ferendis reprehensionibus et conversion Pauli(MPL 51. 143)로 되어 있고, 거기 "Qui verotrahit volenfem trahit, humique iacentem ac manum porrigentem"이란 말이 있다. 칼빈은 "거짓된 불경한 주장"이라고 말했다.(요한복음 6:44 주석). 참조, II. iii. 10. 주 25.

1693) Erasmus, De libero arbitrio, ed. von Walter, p. 53.

1694) lbid., p. 79ff.

1695) J. Faber, Adversus absolutam necessitatem rerum, contingentium,(Opuscula quaedam <Leipzig, 1537>, fo. B. 3a); Piighius, De libero arbitrio VI. fo. 92a. Calvin, Calumniae nebulonis cuiusdam(CR IX. 292). 칼빈은 이 저서에서(col. 276) 그의 논적(Castellio)가 에스겔 18:32을 인용한 것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nolo mortem pecatoris"라고 인용했다(vg. morientis). tr. H. Cole. Calvin's Calvinism, p. 275.(참조. 겔 33:11).

1696) 베르나르드는 그의 Sermon on Christ's Nativity에서 로마서 9:18과 에스겔 18:32를 인용하여 이 점을 논한다(MPL 182, 128f).

1697) Faber, Adversus absolutam necessitatem, loc, cit.; Pighius, De libero arbitrio IX, fo. 160b; Calvin, Congrgation sur I'election eternelle de Dieu(CR VIII. 112); De aeterna praedestinatione Dei(CR VIII. 366f.); Calumniae nebulonis cuiusdam(CR IX. 292). 참조. Melanchthon, Loci theologici(CR Melanchthon XXI. 452, 915).

1698) Faber, op. cit., xvii(Opuscula I, fo. E 5a); Calvin, Calumniae nebulonis cuiusdam, loc. cit.

1699) 16절의 마지막 문장으로부터 여기까지는, 분명히 멜랑히톤의 1535년간 Logi communes에 있는 말이 언급된 듯하다(CR Melanchthon XXI. 419, 428, 451f.).

1700) 참조. I. xvii. 2, 주 4; I. xviii. 1-4.

1701) I. xviii. 3; III. xx. 43.

1702) 이 구절은 많은 예정론 반대자들이, 특히 Pighius(De libero arbitrio VII. ii. VIII. ii.; IX. ii; folios 115b, 135ab, 163a)와 Castellio의 주장을 반박한다. 칼빈은 Calumniae nebulonis cuiusdam(CR IX. 275f.; tr. Cole, Calvin's Calvinism, p. 264에서 Castellio를 인용한 바 있다. Castellio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이 그 새끼를 사랑하게 만드셨으므로 자기의 자식인 사람을 틀림없이 사랑하실 것이며, 아무도 멸망을 위해 창조하시지 않았다. 사람을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등이다.

1703) Pseudo-Augustine, Of Predestination and Grace ii(MPL 45. 1667).

1704) "Carnis ergastulo…inclusi." 참조. III. vi. 5, 주 9; III. ix. 4.

1705) Plato, thesetetus 176 AD(LCL Plato II. 126-129); Laws IV. 715E-716E(LCL Plato I. 292-297).

1706) 본장 1절의 중간부분 참조, III. xviii. 3.

1707) Plato, Phaedo 105-107(LCL Plato I. 362-271); Cicero, Tusculan Disputations I, xlix. 118(LCL 판, pp. 142f.). Democritus는 지상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Pliny, Natural History VII. lv. 189; LCL Pliny II. 634).

1708) 1539년판에서는 정상적인 이성으로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점을 더 많이 취급한다. 거기에는 1536년판에 있는 문장들도 사용되었으나, 현재 본문에서는 그것이 삭제되었다. 참조, OS IV. 435, 주 b와 c; Pannier, Institution(1541) II. 161f. 일부를 소개하면, "이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니나, 인간 이성으로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철학자들이 영혼 불멸을 알고 있었지만, 몸의 부활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얻을 수 있다.

1709) Origen, Against Celsus II. 59, 63, 70(MPG 11, 889f., 898f., 905f., GCS 2, 182, 184f., 192f.; tr. ANF IV. 455f., 460).

1710) 참조, II. x. 19; Sermons on Job lxxii(CR XXXIV. 127f.). 여기서 욥기 19:25를 잘못 해석한 사람들은 제세례파를 가리킨다. 참조, Brieve instruction contreles erreurs de la secte commune des Anabaptistes(1544)(CR VII. 138f); tr. A Shorte Instruction for to warn all good Christian People against the Pestiferous Errours of the Common Secte of Anabaptists(London, 1549), fo. L la-2a; Psychopannychia(CR V. 229ff.; tr. Calvin, Tracts III. 487 ff.).

1711) Horace, Epistles I. xvi. 79(LCL 판, pp. 356f.).

1712) "천년왕국론자"(Chiliasts, millenarians)라는 이름은 고대의 여러 종파에 붙여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천 년 동안 지배하리라고 믿었다. 참조, "Chiliasmus" in Reallexikon fr Antike und Christentum II.(1951), 175 ff.; N. Coh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pp. 158-162. 참조. Augustine, Cty of God XX. vii. ix(MPL 41, 666-669, 672-675; tr. NPNF II. 426, 430).

1713) 이 만민구원론은 John Denck, Balthasar Hubmaier, Sebastian Franck 같은 재세레파 사람들과 Melchior Hofmann등이 지지했다. 그들의 저술에 대해서는 LCC XXV. 86, 112, 145, 182를 보라. 어거스틴은 신풀라톤주의자인 Porphyry(233-302)의 제자들에게 같은 취지로 답변했다. Letters cii. questions 2. 8; 4. 22; 5. 28(MPL 33. 373, 379, 381; tr. FC 18. 153. 164. 168. 170).

1714) Augustine, Letters, loc. cit.

1715) 참조. Calvin's preface to Psychopannychia(CR V. 171f. ; tr. Calvin, Tracts III. 415). 칼빈은 "영혼 수면(睡眠)"론을 공격하면서 교황 요한 XXII(1316-1334)의 이단설에 대해 언급한다. 이 교황은 성도들의 영혼은 부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뵙지 못한다고 했는데, 1333년에 파리 신학자들은 이 주장을 단죄했다. 참조, Catholic Encyclopedia, art. "John XXII."

1716) 이 구절은 영혼이 부활시에 새로운 몸을 받으리라고 한 Laelius Socinus의 견해를 언급하는 듯히다. 제 7절을 보라.

1717) I. v. 5; I. xv. 2.

1718)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lxix 2.

1719) 제 7절과 제 8절의 자료는 거의가 칼빈이 1549년 6월에 Laelius Socinus에게 보낸 서한에서(CR XIII. 309-311) 가져온 것이다. Barth와 Niesel은 1551년판 강요의 221-223절을 인용했는데, 이 텍스트는 인용된, 서한에 더욱 가깝다(OS IV. 443ff).

1720) Augustine, Against Adimantus xii. 5(MPL 42. 146).

1721) 이것은 마니교의 견해이다. 참조, Augustine, Sermons xii. 10-11. 11(MPL 38. 105f.). Unfinished Treatise Against Julian I. cxv. f.(MPL 45. 1125).

1722) "Cutem ipsam tenens"; Tertullian, On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Ii(CCL Tertullianus II. 955; tr. ANF III. 585).

1723) Tertullian, op. cit., lviii(CCL Tertullianus II. 1007; tr. ANF III. 590).

1724) 본장 제 5절.

1725) 칼빈은 "Cemetery"가 어원적으로 잠자는 곳이라는 뜻임을 상기시킨다. 불어판에는 다음 말이 첨가되어 있다; "qui vaut autant Comme dormitorie."

1726) Augustine, Psalms, Ps. 70. ii. 5; Ps. 102; 7(MPL 36. 896; 37, 1321; tr. LF <Ps 71> Psalms III. 437; <Ps. 103> V. 42f.).

1727)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ciii. 3;"(성도들에 대한)다양한 이야기는 그 자매의 다양한 정도에 따라서 구별된다"; 처녀와 순교자, 그리고 교사들의 하늘나라에 있는 보화(마 19:21)에 대해서 qu. xcxvi, 특히 art. 11을 보라.

1728) Aquinas, op. cit., qu. xci. 세계의 갱신에 대한 논술, 참조, P. E. Schramm; Kaiser, Rom, und Renovatio, "renovatio Mundi;"의 개념을 12세기까지 자세히 연구한 것, McNeill, Christian Hope for World Society, ch. IV; "Rome and World Renewal".

1729) 어떤 "물질적 비유"로 지옥을 묘사하더라도, 칼빈에게 있어서 지옥의 본질은 "alienari ab omni Dei societate"이다. 참조, Milton, Paradise Lost V. 877, 여기서 Abdiel은 satan에게 "O alienate from God., O spirit accurst"("오, 하나님에게서 소원된 자여, 오, 저주받은 영이여")라고 한다.

1730) "Diro turbine," 단테의 지옥편 제 6장에서 단테가 버질과 함께 제 3 지옥권을 횡단 할 때에, 악취 나는 찬 비와 우박과 진눈깨비가 끊임없이 억수같이 퍼부어졌다는 것을 회상하게 된다. 그러나 문맥은 전혀 다르다.

1731) 칼빈이 강요에서 교회론에 할당한 지면을 보면 그가 교회론을 대단히 중요시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의 신학 가운데 이 부분은 거의 해석가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다음에 열거한 책들은 현재 그의 교회론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가고 있다는 것을 예증한다. Th. Werdermann, "Calvins Lehre von der Kirche in ihr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in Calvinstudien, pp. 236-338; Doumergue, Calvin V; L. Goumaz, La Doctrine du salut, pp. 312-336; A. Lecerf, "La Doctrine de I'Eglise dans Calvin", Revue de th ologi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IX(1929), 256-270; P. Barth. "Calvins Verst ndnis der Kirche, "Zwischen den Zeiten VIII. 216-233; P. Imbart de la Tour, Las Origines de la R forme IV. 98-115; H. R. Petry, The Meaning of the Chruch in the Thought of Calvin; R. C. Pearcy, "Calvin's Conception of the 'Cammunio Sanctorum" Church History V(1936), 227-238; P. T. Fuhrmann, Godcentered Religion. ch. vi; J. T. McNeill, "The Church in Sixteenth­Century Reformed Theology", Journal of Religion XXII(1942), 251-269;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ch. 13: LCC XXIII. 361-406(selections from the Commentaries; W. Mueller, Church and State in Luther and Calvin, pp. 77-125; G. Macgregor, Corpus Chiristi: The Nature of the Church According to the Reformed Tradition.

1732) 이 문장 안에 제 4권의 윤곽이 나타난다. 교회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으로 앞 문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는" 지상의 선택된 자들을 모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전권에 걸쳐 전개된다. 참조. Peter Martyr Vermigli(1500-62), Loici Communes, 1576판, "Simplex expositio" 35, P. 484.

1733)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Cyprian, 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 vi(CSEL 3. i. 214; tr. LCC V. 127f.); Against the Writings of Petilianus III. ix. 10(MPL 43. 353); Pseudo Augustine, On the Creed(De Symbolo) iv. 13(MPL 40. 668). 초대의 비유들에 대해서는 J. H. Plumps, Mater Ecclesiae(1943). ch. iii.을 보라.

1734) 이것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대한 말인데, 유세비우스의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칼케돈 회의 회의록(Acts of the Council of Chalcedon)에 있으며, 여기에 전치사 eis가 나타난다. cf. Schaff, Creeds I. 22; II. 45-51, 58. "in ecclesiam"이라는 말은 Cassiodorus의 Tripartite History III. 6(MPL 69. 951)에 있다. 전치사의 유무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은 라틴어로도 표현하기 어렵고 영어로도 불가능하다.

1735) Augustine, On Faith and the Creed x. 21(MPL 40. 193; tr. NPNF III. 331); Pseudo­Augustine, On the Creed, loc. cit., note 3. above; Pseudo­Cyrian(i. e., Rufinus, 345?-410), On the Exposition of the Apostles' Creed xxxvi(MPL 21, 373; tr. NPNF 2 ser. III. 557; ACW XX. 71).

1736) "Quasi in latebris." 교회는 영적이라는 점에서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는 상태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볼 수 없다. 교회의 영속성에 대해서는 II. xv. 3, 주10을 보라. 에스겔 16:53의 주해에서 칼빈은 "이 세상에는 항상 교회가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씨를 숨겨 두신다(oportetenim semper esse in mundum)"고 말한다.

1737) Rufinus. op. cit., xxxix(MPL 21. 377; tr. NPNF 2 ser. III. 558; ACWXX. 74); 참조, W. A. Curtis, A History of Creeds and Confessions, pp. 61f., 64

1738) 일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사를 서로 나누는 공동체라고 하는 칼빈의 생각은 루터와 흡사하다. 참조. Luther, Treatise on the Sacrament and on the Brotherhoods i. 4(Werke WA II. 743;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10; McNeill, Unitive Protestantism, pp. 27-33, and in Rouse and Neill,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pp. 30ff.; P. Althaus, Communio Sanctorum, Die Gemeinde in Lutherischem Kirchengedanken; R.C. Petry, as cited in sec. 1, note 1, above; G. MacGregor, Corpus Christi, p. 9.

1739) "비밀한 선택"등등에 대해서는 위의 제2절을 보라.

1740) 여기서 "어머니"라고 부른 교회는 가시적 교회다. 신자를 낳으며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의 역할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참조: Cyprian, Letters iv. 4; lxxiii. 21(CSEL 3. ii. 477. 795; tr. ANF V. 282, 384); Augustine, Enchiridion xvii. 65; "교회가 없으면 죄의 용석 없다"(MPL 40. 262f.; tr. LCC VII. 377); Augustine, Sermons lvi. 4. 5(MPL 38. 379; tr. LF Sermons 1. 69f.); First Epistle of John iii. 1(MPL 35. 1998; tr. NPNF VII. 476). 칼빈의 에베소서 4:13 주해에, "교회는 모든 경건한 신자의 공통된 어머니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자녀를­왕이나 농민을 꼭 같이­낳고 먹이며 키운다. 이 일은 성직자들이 한다"라고 되어 있다. 참조. Wendel, Calvin, p. 224.

1741) "하늘교리"(본절)의 사역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말한다. 칼빈의 Homilies on I Samue x1ii에는 그리스도 교회의 예언자와 목사들은 "바로 하나님의 입"이라고 되어 있다(CR XXXIX. 705). 칼빈은 복음 선포의 직책을 그만큼 귀중하게 생각한다. 계속해서 그는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교만을 경고한다. 참조, G. MacGregor, Corpus Christi, P. 52.

1742) 이것은 Cicero(106-43 B.C.)가 한 이야기다. Laws II. x. 26(LCL 판 pp. 450f.).

1743) 여기 있는 문장들은 각각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태도를 가리킨다고 편집자들은 생각했으나 근거를 밝히지는 못했다. 칼빈은 집단을 생각한 것이 아니고 개인들의 의견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1744) 선택된 모든 자들의 불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은 어거스틴에게 있었으며, 위클리프(Wycliffe)도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 참조. Augustine, City of God passim; On Baptism III, xix. 26(MPL 43. 152; tr. NPNF IV. 445); Wycliffe, De ecclesia Wyclif Society edition, 37:"Universitas fidelium praedestinatorum," so also Hus, De ecclesia: ed. S. H. Thomson, pp. 2f., 8; tr. D. S. Schaff, The Church by John Hus, pp. 3, 6; J. T. McNeill, "Some Emphases in Wyclif's Teaching", Journal of Religion VII(1927), 452 ff.; Unitive Protestantism, pp. 25f. 니임의 디트리히(Dietrich of Neim)와 같은 공의회 위원론자들도 이 개념을 잘 알고 있었다(LCC XIV. 150 이하 참조). 루터도 비슷한 말을 빈번히 사용했다. Preface to Revelation(S mmtliche Schriften XIV(St. Louis, 1898); tr. Works of Martin Luther VI. 488). 루터와 쯔빙글리의 인용은 OS V. 12. 주1에 있다. 참조. J. Courvoisier, La notion d'Eglise chez Bucer, pp. 68 ff.; Wendel, Calvin, pp. 225 f.; H. Strohl. La Pense de la Rforme pp. 174-181; McNeill, Unitive Protestanitism, pp. 39-45; Augusburg Confession(1530), articles Vii Viii.

1745) 본장 2절을 보라.

1746) Augustine, John's Gospel xlv. 12(MPL 35. 1725; tr. NPNF VII. 253 f.).

1747) 참조. Luther. Enchiridion piarum preactionum(1529)(Werke WA X. ii. 394). 참조, 본장 20절 주 30.

1748) Augsburg Confession, art. vii, 여기서는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르게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칼빈은 교회의 권징을 중요시하지만 교회를 인식케하는 표지라고는 하지 않는다. Bucer(1491-1551), Scripta Anglicana. p. 36에는 권징을 표지의 하나라고 했다. 참조. Wendel, Calvin. p. 228. The First Scots Confession(1560) 18장과 Belgic Confession(1561) 29조에서도 권징을 셋째 "표지"라고 한다.

1749) 본장 9절을 보라. "복음의 선포가 경건하게 경청되는 곳"이라는 중요한 말이 바로 첨가된 것을 주목하라. 참조 칼빈의 Articles of the Faculty of Paris with the Antidote. art. xvii(CR VII. 29, 31; "ubi verbum eius auditur"; tr. Calvin, Tracts I. 103). 또 요한복음 5:24에 대한 주해를 보라. "그런데 그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명을 얻는다고 그는 주장한다. '듣는다'는 말은 믿음을 의미한다…그러나 믿음이 자리를 잡는 곳은 귀가 아니고 마음이다."

1750) "Ad Lydium lapidem" Lydia의 돌(연한 검은 빛의 벽옥)은 금의 순도를 시험하는데 사용되었다.

1751) 참조. IV. ii. 1. 신조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구별을 칼빈은 단정적으로 논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의 사상 전체의 뼈대가 되었다. F. Wendel은 이 개념에 칼빈의 교회 연합에 관한 주장을 뒷받침 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고린도전서 3:11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CR XLIX. 1354);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근본 교리는,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굳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의 유일한 기초[anique fondament]이기 때문이다." 이 강요에서 "예컨대"(qualia)라는 말로 소개된 신조들은 물론 칼빈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전부 열거한 것은 아니다. 17세기에 George Calixtus, Pierre Jurieu, Samuel Werenfels J. A. Turretin 등이 제안된 다양한 자유주의적 교회 통일안에는 이러한 근본 신조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참조 Rouse and Neill, A History of the Ecumenical Movement pp. 79ff., 92f., 107. 111.

1752) 고린도전서 14:29-33. 40을 근거로 개혁교회와 청교도 교회들은 교회 신자들이 성경토론에 참가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그것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칼빈은 고린도전서 14:30에 "더 좋은" 이란 말을 삽입했다). 참조.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301. 318f.; Pannier, Institution II. 133, note a, p. 386.

1753) "Aerii daemones." VG에는 "Anges de paradise."(낙원의 천사들)참조. 루터는 Carlstadt 와 M nzer의 광신을 비웃는 뜻으로 "하늘의 예언자들"이라고 했다(1525년).

1754) 칼빈은 "카타리"란 말로써 알비파(Albigensians, 1200년 경)보다는 종종 "카타리"라고 불리운 노비티아누스파를 의미한 것이 분명하다. 참조. 본장 23절. VG는 "Cathares"를, 즉, "순결한 자들"이라고 설명했다. 본절에서는 제세례파를 비난하지만 자기들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다른 모든 분파들도 책망하고 있다. 완전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제세례파의 주장은 설교자들과 세례파 형제들 사이의 베른 협의회의 결의문(1538년)에 예시되어 있다(Acta des Gespr chs zwischen predicanten uund Teuffbruederen inn der Stadt Bern. Staatsarchiy Bern. "Unn tze Papiere". t. 80)(film copy in Goshen College Libray). 참조. Zwingli Opera ed. Schuler and Schlthess, III. 390; Jackson, Selected Works of Huldreich Zwingli, pp. 180f. 교회의 거룩함은 결함이 있지만 향상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pp. 27-35를 보라. 본장 13-16절에서 칼빈은 스위스 제세레파의 여러 가지 입장을 반박한다. 17절에서는 교회의 전체적인 거룩에 대한 토론에서 교회 신자들의 개인적인 거룩으로 화제를 바꾼다.

1755) "Morositatem", I, xiii. 3, 주 9와 본장 20절에 있는 "심술궂음"을 보라.

1756) Augustine, Against the Letter of Parmenianus III. i. 1; III. ii. 15(MPL 43. 81ff., 64; CSEL 51. 98. 118). W. E. Keeney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제세례파의 완전주의의 여러 측면을 검토했다. The Development of Dutch Anabaptist Thought and Practice 1539-1564. 특별히 pp. 178-185를 보라.

1757) 참조. 본장 13절. 미래 시제는 1539년판 4장에서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거기에는 현재 13절에 있는 자료가 이 구절 다음에 있다(CR I. 540. 546). Consult Pannier, Institution II. 123. 133.

1758) Cyprian, Letters liv. 3(CSEL 3. ii. 622f.; tr. ANF V. 327).

1759) 참조. 회의 의사록(Acts of the Conference, Staatsarchiv Bern, "Unn tze Papiere." t. 80. fo.) 87f.

1760) 절대적인 거룩을 참예의 조건으로서 요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란 것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의미의 교회의 영구적인 활동이며, 이 교통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아도 분명하다. Eine Kurze Form…des Glaubens(1520)(Werke WA VII. 219;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373); "나는 이 회중 내에 죄의 용서가 있으며 다른 곳에는 없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첨조, Enchiridion Piarum Precationum(Werke WA X. ii. 394).

1761) IV. xii. 참조. Pannier, Institution II. 146 f.; pp. 388f.의 주를 보자.

1762) 참조. 13절 주24.

1763) Acts of the Conference…Staatsarchiv Bern. "Unn tze Papiere." t. 80. fo. 106ff., 110ff.; OS V. 26. note 3.

1764) "Dispositione", 즉, 사도신경에 배열된 문장의 순서.

1765) 제세례파의 견해를 가리킨다. 스위스의 샤프하우젠에 가까운 슐라이트하임에서 1527년 2월 24일에 채택된 신앙고백(전부7조)의 제2조에 이런 견해가 언급되었다(J. C. Wenger가 독일어에서 옮긴 영역이 Mennonite Quarterly Review XIX(1945). 243-256에 있다. 칼빈은 불역을 사용했다(ibid. p. 243). 쯔빙그리의 라틴역(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388-413)을 W. J. McGlothlin 이 영역한 것이 Baptist Confessions of Faith, pp. 3-9에 있다. 참조. III. iii. 21. 주 42; IV. xiv. 1. 주 2; IV. xx. 2, 주7.

1766) 참조. Augustine, Against Two Letters of the Pelagians I. xiii. 27; xvi, 28(MPL 44. 563 f.; tr. NPNF V. 385f.);(자주 회개한다는 것은 겉으로만 회개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Clement of Alexandria 는 Stromata II. xiii. 57(GCS 15. 143; MPG 8. 995-998; tr. ANF II. 360f.); Tertullian, On Repentance vii. ix(CCL Tertullianus I. 332 ff., 336; tr. ANF III. 662f., 664. and Elucidation ii. p. 669).

1767) 23-29절은 1539년 판에 처음으로 나타났고 거기에는 "위에서"(supra)라는 말이 적절했다. 엄격한 징계에 대한 경고는 IV. xii. 8-11에 있다.

1768) IV. i. 9-12.

1769) 참조. IV. i. 주 21

1770) 이 문장은 중세기 교황제도에 반대하는 견해를 나타낸다. 이 견해는 제 4권의 여러 장에서 지배적이다. 참조. Pannier, Institution II. 142.

1771) Fisc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 pp. 15ff., 32ff., 390ff.

1772) 이미 1519년에 루터는 라이프찌히 논박에서, 그리이스 사람들은 로마에서 분리 되었으므로 신앙에서 타락하며 구원을 잃었다고 한 Eck 의 견해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런 불경스런 언사보다 더 가증한 것은 없다"(Werke WA II. 262. 276). 본절에 대해서는 P. Wernle, Der evangelische Glaube III. Calvin 362를 보라.

1773) 정확히 말하면 11장이다. 참조. 로마서 11:35 주해.

1774) 참조. II. iii. 4, note 5.

1775) Cicero의 말을 지시한다. "sed aqua haeret, ut aiunt."(On Duties III. xxxiii. 117 <LCL판, p. 398>).

1776) Augustine, Letters xciii. 9. 30f.(MPL 33. 336f.; CSEL 24. ii. 476f.; tr. FC 18. 85 ff.).

1777) 참조. Eck. Enchiridion locorum communium, ch. 1. 교회의 권위를 옹호한 무수한 사람들이 어떻게 특징지워 질 수 있다.

1778) Augustine, Questions on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xi 1-2(MPL 35. 1367f.). 참조. Peter Martyr Vermigli, Loci communes, Ⅳ. 33(Latin, 1576, p. 801; Engalish, 1583, IV. 86).

1779) Cyprian, 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 v(MPL 4. 501f.; CSEL 3. i. 213f.; tr. ANF V. 423; LCC V. 127).

1780) "Notorios et pertinaces haereticos…fuisse declarantes. eosdem…condemnamus." 교황 레오 10세(1513-1521)의 칙서 Exsurge Domine(1520년 6월 15일). 참조. Mansi XXXII. 1051; Kidd, Documents, p. 79.

1781) 참조. II. xv. 6; IV. xviii. 15.

1782) 자주 인용되는 문장. 이 문장은 칼빈이 교황제도를 공박하면서도 로마 교회 내에 건전한 요소들이 남아있다고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참조. IV. viii. 11, 12, below; G. MacGregor, Corpus Christi, p. 51.

1783) 적 그리스도(살후 2:4). 이 용어를 칼빈은 교황 제도에 빈번히 적용했다(cf. III. xx. 42; IV. vii. 4. 25; IV. xvii. 1; Comm. I. John 2:18). 이 말은 종교개혁 이전에 이런 의미로 많이 사용했다. 참조. art. "Antichrist" in the HDRE I. 581; H. Preuss, Die Vorstellungen vom Antichrust im sp teren Mittelater, pp. 145. 153; Lutter, On the Execrable Bull of Antichrist(1520)(Werke WA VI. 597-612). "적그리스도의 교황"이라는 칼빈의 생각에 대한 참조: H. Berger, Calvins Geschichtsauffassung, ch. 8, pp. 73. 92; 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pp. 117-122.

1784) IV. i. 5.

1785)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Prologue 6; IV. xxvii. 59(MPL 34. 18. 118; tr. NPNF II. 520, 595).

1786) IV, i. 5; IV. iii. 1.

1787) 주로 루터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른 곳에서 칼빈은 자주 루터를 칭찬한다. 칼빈은 Defensio adversus Pighium에서 루터를 "복음의 빛을 다시 비추게 한 그리스도의 탁월한 사도"라고 부른다(CR VI. 250).

1788) 교사("doctor" 또는 teacher) 의 직분은 칼빈의 성직제도에서 높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참조. 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Geneva(1541)(CR XI. 15f., 21; tr. LCC XXII. 58. 62f.); J.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Edinburgh, 1868) I. 426ff.; G. MacGregor, Corpus Christi, p. 218; R. W. Henderson, The Doctoral Ministry in the Reformed Churches(Hanvard Dissertation, 1959).

1789) Sec. 4, above.

1790) "Veluti glebae addictus." "Gleba"는 배당된 일정한 땅이며, 고대 로마에서는 빚을 갚기 위해서 국벅으로 채권자의 노예가 된 사람을 "addictus"라고 불렸다. 첨조. A. Berger, Encyclopedic Dictionary of Roman Law, "Addictus", "Adscriptus", "Gleba" 등의 항목을 보라. 봉건시대의 법률에서 glebae addictus는 예속 농민이었다(독일어의 h riger). 그들은 일정한 농지에 매여 있었으나 그 땅 안에서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다.

1791) 이와같이, 칼빈은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근거로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책이라는 장로 교회제도의 근본 원칙을 주장한다. 본절은 IV. iv. 4, 등과 비교 할 필요가 있다. 초기의 감독과 대감독과 총대감독(patriarch)들이 권징에 참가한 것을 시인한다. IV. ix. 4, 주 6도 보라. 이 견해는 중세기에, 특히 Padua의 Marsilius에 의해서 잘 알려졌다. 그의 Defensor Pacis를(ed. and tr., A. Gewirth, I. 271ff.)보라. 영어로는 John whigift 와 John Jewel과 Richard Hooker가 "Presbylter"를 취한데 대해서 N. Sykes, Old Priest and New Presbyter, pp. 43f.를 보라.

1792) 에베소서 4:11에 대해서는 본장 4절을 보라.

1793) 사역자들이 senatus(장로회)를 조직해서 징계의 권위를 가졌다. 참조. IV,, 6, 주 10.

1794) 제네바 교회에는 두 종류의 집사가 있었다. 즉, 구제품을 분배하는 집사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집사들이었다. 칼빈은 사도행전 6장에서 구제 사업을 맡은 일곱 사람을 "집사"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는 없고 빌립보서 1:1과 디모데전서 3:8-13에 있다. T.M. Lindsay, The Church and the Ministry in the Early Centuries, pp. 115-118에는 그 일곱 사람을 집사라기 보다 장로라고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또 IV. xix. 32-33에 있는 comment를 보라.

1795) 참조. The True Method of Reforming the Church(1548)(CR VII. 624 f.; tr. Calvin. Tracts III. 281 ff.). 10-16절에 대해서는 J. L. Ainslie, The Doctrines of Ministerial Order in the Reformed Churches of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ch. vi를 보라. 성령에 의한 내적 소명에 대해서는 J.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I. 428f.를 보라.

1796) 칼빈은 언제나 세속 정치에 있어서나 교회 정치에 있어서나 개인보다는 다수가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참조. IV. iv. 10-11; IV. xx. 8. 예를 들면, 여기서 그는 감독이거나 그 밖의 고위 성직자 한 사람에게 교회에 사역자를 임명하는 무제한적인 권위를 주는 데 반대한다. 사도행전 14:23 주해에서 장로들(목사들)의 선거는 "모든 사람의 투표에 의해서(suffragiis) 결정된다"고 한다. 참조. The True Method of Reforming the Church(CR VII. 634f.; tr. Calvin. Tracts III. 294 ff.).

1797) csirotonevw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거수로 선거함"이다. 이것은 희랍 도시 국가들의 공통된 방식이었다(Liddell and Scott,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에서 csirotonevw와 csirotoneiva를 찾아보라).

1798) Cyprian, Letters lxvii, 4(CSEL 3. ii, 738; tr. ANF V. 370). 여기서 "성직자"라고 번역한 것은 "sacerdos"인데, 후기 교부들은 보통 이 말을 감독이란 뜻으로 썼다.

1799) 디모데전서 4:14에 있는 presbutevrion(장로회)에 대한 참조: H. Lietzmann The Founding of the Church Universal(tr. B. L. Woolf, pp. 59ff.); T. M. Lindsay, The Church and the Ministry in the Early Centuries pp. 196, 198. Lindsay 는 presbutevrion을 "kirk session"(당회)이라고 번역하고, Ignatius 의 편지에서 12개의 참고문을 든다(p. 198, 주 4). J. Bannerman 은(op. cit., II. 284) 디모데전서 4:14 에 있는 장로의 안수를 가리켜 "성경의 실례에 나타난 장로 임명"이라고 한다. The Apostolic Ministry ed. K. E. Kirk, p. 232에서 T. G. Jalland 는 presbutevrion을 "The Presbyterate."(장로회)라고 번역한다.(RSV)는 "장로들"이라고 복수로 번역해서 이 말의 집합적 성격을 잃어버렸으나, 이 단어는 "장로회"라고 번역되어야 한다(눅 22:66). 디모데전서 4장 14절의 주해에서 칼빈은 presbutevrion을 "장로들의 집단"(장로회)이라는 의미의 장로직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는 임명하는 행위에 치중할 뿐이지 임명하는 단체에 치중하지 않는다. 참조. Cadier's comment. Institution IV. 67. 주 1.

1800) 제4장부터 제7장까지 칼빈은 상당히 많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이론을 전개한다. 그가 이용한 근본 문서들을 주에서 지적하겠다. H. Berger(Calvins Geschichtsauffassung), H. Quistorp(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기타 학자들이 칼빈의 역사 개념을 해명했으나 그의 역사관은 아직 완전히 검토되지 않았다.

1801) IV. i. 5, 6; IV. iii.

1802) 제 9절을 보라.

1803) Jerome, Commentary on Isaiah IV(Isa. 19: 18)(MPL 24. 185f., 191).

1804) Ignatius, Letters, Magnesians vi;Trallians iii(LCL Apostolic Fathers I 200-202, 214f); Cyprian, Letters xiv. 4; xix, xxxiv. 4(CSEL 3. ii. 512, 526, 570; tr. ANF <letters V. xiii, xviii, respectively> V. 283, 293, 297); statuta ecclesia antiqua, canons xxii, xxiii(Mansi III. 953; 이 논문에서 H. Leclercq, in Hefele Leclercq II. i. 108-120); Jerome, Commentary on Titus, ch. 1(MPL 26, 562f.)을 보라.

1805) Jerome, Letters cx1 vi 1(CSEL 56, 310; MPL 22. 1193; tr. NPNF 2 ser. VI. 288).

1806) cwpepijskopoi(지방 감독들). 즉, 시골 감독들, 기독교가 인구가 많은 도시로부터 인구가 적은 촌락으로 퍼져 나간 시대에 지방 감독들은 중앙 도시와 중앙 교회의 권위 아래 있었다. Pellicia 는 그들과 periodeutai(순회 심방인)을 동일시한다. A. A. Pellcia, The Polity of the Christian Church, tr. J. C. Billet, Sec. II, ch. xi. pp. 88-90. 지방 감독들은 안디옥 회의(341년) canon x에 의해 인정을 받고 제한을 받았다(Mansi II, 1311; text and translation, J. Fulton, Index canonum<2d ed., 1883>, p. 238f.; tr. Ayer, Source Book, p. 364). 그들은 독립된 성직 계급이 된 적이 없다.

1807)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X. 38(MPL 69. 1156), from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v. 21(MPG 67. 623-626; tr. NPNF 2 ser. II, 129).

1808) Jerome, Letters lii. 7(CSEL 54. 428; tr. LCC V. 322; tr. NPNF 2 ser. VI. 93).

1809) Gregory the Great, Letters I. 24(MGH Epistolae. 32; MPL<I. xxv> 77, 472f.); Homilies on Ezekiel I. hom. Xi. 10(MPL 76. 910). 칼빈은 그레고리우스(교황 589-604). 시대를 교회가 순수하던 고대와 타락한 중세기의 사이에 있었다고 본다. 참조, IV. vii. 16, 17 주들.

1810) 니케아 회의(325) Canons iv, vi(Mansi II. 670f.;Fulton, Index canonum, pp. 122f., 124 f.,; tr., With comment, H. J. Schroeder, Disciplinary Dercrees of the General Councils pp. 26, 30f.);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canono ii(Mansi. III. 589;Fulton, op. cit., pp. 174f.; Schroeder, op. cit., p. 90); 돈을 받고 임명하는 자는 그 계급을 빼앗긴다; 칼케돈 회의(451) canon xxviii(Mansi VII. 369; Fulton, op, cit., pp. 190f.; Schroeder, op. cit., p. 90); 돈을 받고 임명하는 자는 그 계급을 빼앗긴다; 칼케돈 회의(451) canon xxviii(Mansi VII. Fulton, op, cit., pp. 190f.; Schroeder, op. cit., p. 125f.). 참조, IV. iii. 8; IV. vii. 15; Pseudo­Dionysius, De ecclesiastica hierarchia(MPG 3. 369ff.).

1811) 참조. IV. iii. 15, 주 13; IV. V. 11. 독단적인 지배로부터 보호된다면 칼빈은 감독의 재판권과 차별권을 분명히 인정한다. 칼빈은 "성직제도"(hierarchy)라는 말을 싫어한다.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는 J. Pannier, Calvin et Iepiscopat를 보라. J. L. Ainslie, The Doctrines of Ministerial Order in the Reformed Churches(1940)는 칼빈의 가르침을 감독제에 대한 반대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이해인 듯 한다. 참조. McNeill, "The Doctrine of the Ministry in Reformed Theology", Church History(1943), 77-97; review of Ainslie's book, Journal of Religion XXII(1942), 219ff.; G. MacGregor, Corpus Christi pp. 197-211.

1812) IV. iii. 6.

1813) Apostolic Canons(4세기 후반) xl; text and translation in Fulton, Index canonum, pp. 93f.; cited in Gratian, Decretum(1140년) II. xii. 1. 24(MPL 187. 893 Friedberg I. 685).

1814) 안디옥 회의(341) cannon xxv(Mansi II. 1319; Fulton, op, cit., pp. 247f.).

1815) Jerome, Letters cx1vi. 1(CSEL 56. 310; tr. NPNF 2 ser. VI. 288. LCCV. 386f.).

1816) Augustine. Sermons ccclvi. 1(MPL 39. 1574). 살로나(Salona)의 감독직을 맡은 부감독 Maximus에게 그레고리 1세는 수많은 편지를 보냈고 또 Maximus 에 관해서도 많이 썼다. 그레고리는 Maximus 에게 횡령, 성직 매매, 권리 침해 등의 죄과에 답변하기 위해 출정하라고 명령했다. Gregory, Letters IV. xx.: IV. iii; VI. xxv(MGH Epistolae I. 254, 382, 402ff.; MPL 77. 750, 795 f., 815-818; tr. NPNF 2 ser XII. 172f., 189, 195 ff.). Maximus 는 드디어 그레고리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1817) Apostolic Constitutions viii. 9. 12, 13(MPG 1. 1086, 1091, 1110; tr. ANF VII, 485, 486f., 490).

1818) 본질에 대한 참조; Augustine, Letters d clxxxv. 9, 35; cxxvi, 8-10(MPL 33, 809, 480f.); Sermons ccl v. 2. 2(MPL 39. 1570); Apostolic Canons xli(J Fulton, Index canonum, pp. 92f.). Apostolic Canons 는 Gratian의 Decretum II. xii. 1. 23f.; II. i. 2. 6(MPL 187. 822f., 543; Friedberg I. 685, 409)에 인용되었다. 그 라티아누스는 둘째 인용에서 끝에 있는 발언을 제롬이 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현존 저작에는 보이지 않는다.

1819) Sallust, The War with Catiline ix. 1(LCL 판, pp. 16f.); Augustine, City of God II. xvii(LCL 판, I. 196f.).

1820) Gratian, Decretum II. xvi. 3, 2; xii. 2. 30(MPL 187. 1029, 909; Friedberg I. 789, 697), from Gregory I, Letters 56(MGH Epistolae II. 333; tr. NPNF<Letter liv> 2 ser. XIII. 74f.). 성직자의 건전한 빈곤화 제안이 중세기에 여러 가지로 진전되었다. 특히 다음을 참조하라. Marsilius of Padua, Defensor Pacis II. iv. 6; tr. and ed. A. Gewirth, II. 218.

1821)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V. 37; XI. 16(MPL 69. 1017, 1198), from Sozomen, Ecclesiastical History iv. 24(tr. NPNF 2 ser. II. 319f). and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vii. 21(tr. NPNF 2 ser. II. 164).

1822) "Exuperius, Tolosae episcopus, ciduae sareptensis imitator, esuriens pascit alios"("Exuperius, bishop of Toulouse, in imitation of the widow of Zarephath<I Kings 17:9>. when hungry himself, feeds others"). Jerome, Letters cxxv. 20(MPL 22. 1085; CSEL 56. 141; tr. NPNF 2 ser. VI. 251).

1823) Ambrose, On the Duties of the Clergy II. xxviii. 137f.; Letters xviii. 16; xx. 16(MPL 16. 140. 977; er. NPNF 2 ser. x. 14. 419. 424).

1824)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I. xliii. 11(MPG 20. 622; tr. NPNF 2 ser. I. 288. with notes); Cyprian, lv. 8; xxxviii. 1(CSEL 3. ii. 629, 649ff; tr. ANF<letter li> v.v. 311f., 329); Jerome, Letters 1ii. 5(MPL 22. 531; CSEL 54. 421; tr. NPNF 2 ser. VI. 91; LCC v. 319). 칼빈은 "성직자"라는 말을 부적절하다고 본다. 참조. IV. xii.

1825) Clement of Rome, First Letter 44(LCL Apostolic Fathers I. 82-85; tr. LCC I. 63f.); Cyprian, Letters 1v. 6; 1xvii. 4(CSEL 3. ii. 629. 738,; tr. ANF <Letter 1i. 4> v. 328. 370).

1826) 성직자들의 독신 생활에 대한 참조. IV. xii. 23; IV. xiii. 8; Ayer, Source Book pp. 411-418; F. Cabrol, Dictionnaire art. "Celibat", H. C. Lea, History of Sacerdotal Celibacy; H. Leclercq, "La L gislation conciliare relatif au clibat ecclsiatique", in Hefele­Leclercq II. ii. 1341-1348; art "Celibacy" in Encyclopaedia Britannica, Eleventh edition, by G. G. Coulton. 많은 종교개혁 반대자들이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강경하게 지지했다. 예를 들면, J. Latomus, Adverus Bucerum de controve(CC 8. 73-101); A Pighius, Controversiarum praecipuarum in comitiis Ratisbonensibus tractatarum…explicatio(Cologne, 1542), ch. xiii, FF la­HH 1b; A. de Castro, Adversus haereses(1543), fo. 1990.

1827) Cyprian, Letters xxxviii(CSEL 3. ii. 579 ff.; tr. ANF<Letter xxxii> V. 312).

1828) Apost Conons xlii­xliv(J. Fulton, Index canonum, pp. 94f.); Gratian, Decretum I. lxvii. 1; lxxv. 7(Friedberg I. 253, 267; MPL 187. 351, 368).

1829) Council of Antioch(341) canon xviii(Mansi II. 1315; Fulton, op. cit., pp. 242ff.). 이 조항에서 "완전한 종교 회의"와 대감독의 출석을 요구했다.

1830) Leo I. Letters X. 6; l xvii(MPL 54. 634, 1203; tr. NPNF 2 ser. XII. 10, 110). 제 167 서한에 있는 조건은, 감독은 "성직자들이 뽑고, 평신도들이 원하고, 지방 감독들이 대감독의 승인을 얻어 취임시킨다"는 것이다. 참조. Letters xiv. 5(MPL 54. 673):"대감독이 결정할 때에는 득표수와 공로가 우세한 사람을 택한다."

1831)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V. 9(ed. T. Gaisford, p. 414; MPG 82. 1217 f.; GCS 19. 312; tr. NPNF 2 ser. III. 138). Augustine, Letters ccxiii(MPL 33. 966 ff.; tr. FC 32. 52-57); 이것은 어거스틴의 보좌인이요 후계자인 Eraclius(Eradius는 잘못)의 선거에 관한 생생한 자료이다.

1832)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iv. 20(ed. T. Gaisford, pp. 346 f.; MPG 82. 1181 f.; GCS 19. 69; tr. NPNF 2 ser. III. 126).

1833) Council of Laodicea(ca. 363) canon xiii(Mansi II. 565; text and translation in Fulton, Index canonum, pp. 254f.; tr. with notes NPNF 2 ser. XIV. 131). 칼빈은 사역과 선거에 일반 신도의 투표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라오디게아 회의의 결정과 마찬가지로(그라티아누스도 이 결정을 채용했다), 선거에서 군중이 소란한 행동을 하는 데는 반대한다. 일정한 절차를 따라야 하며 소란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1834) "Incertum scindi studia in contraria vulgus." 이것은 Vergil, Aeneid II. 39(LCL Vergil I. 296)에 있는 것을 개작한 것.

1835) Leo I, Letters ix. 1; x. 4, 6; clxvii(MPL 54. 625f., 632, 634, 1203; tr. NPNF 2 ser. XII. 7f., 10f., 109ff.). 서한 ix. 1에서 레오는 임명식을 일정한 날, 특히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에 거행해야 하고 의식에는 안수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서한 x. 6에서 그는 부활절 임명식 관습을 말한다. 참조. Gratian, Decretum I. lxii. 9(Freidberg I. 234; MPL 187. 325).

1836) 참조, 본 장의 주 33.

1837) 부집사 요한에게 보낸 그레고리의 서한(Letter III. 30; MPL 77. 627 f. MGH Epistolae 1. 188; tr. NPNF 2 ser. XII. ii. 129f.). 참조. 캄파니아 부접사 베드로에게 보낸 캄푸아의 감독에 관한 서한(Letters III. 35, MPL 77. 631f.; MGH Epistolae I. 190; tr. NPNF 2 ser.. XII ii. 131); 나폴리에 있는 성직자 회의가 "전체를 대표하도록" 2, 3명을 파견하는 동시에, 대표들은 감독 선거 문제를 나폴리 귀족들과 협의하도록 하였다.

1838) 교황 니콜라스 2세가 1049년에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회를 창설했다.(Mansi XIX. 915; tr. O. J. Thatcher and E. H. McNeal, Source Book for Medieval History p. 129:p. 127 편집자의 요약을 보라); Gratian, Decretum I. xxiii. 1(MPL 187, 128; Friedberg I. 77).

1839)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iv. 30(MPG 67. 543 f.; tr. NPNF 2 ser. II. 113f.).

1840) Gregory I. Letters I. 5:"황제 폐하께서 원숭이에게 사자가 되라고 명령하셨다"("fieri simiam leonam jussit")(MGH Epistolae I. 6; MPL 77. 450; tr. NPNF 2 ser. XII. ii. 76).

1841) 참조. Gratian, Decretum I. lxiii. 18. 1. 2(MPL 187. 333f., 327-330f.; Friedberg I. 234ff.).

1842) 희랍어는 cerotonivan과 ceiroqesivan이다. 참조. IV. iii. 15, 주 14. and sec. 15, 주 48.

1843) 카르타고 회의(397년)의 canon xxxix는 감독의 성별에 감독 세 사람이 참석할 것을 요구한다(Mansi III. 886). 첨조. Second Council of Nicaea(787) canon iii(Mansi XIII. 784; tr. NPNF 2 ser. XIV. 557); Council of Nicaea(325) canons ix. xix(Mansi II. 671. 678; text and translation, Fulton, Index canonum, pp. 122f., 126f., 132f.; tr. with notes NPNF 2 ser. XIV. 23 f., 40).

1844) Cyprian, Letters 1xvii. 3, 5(CSEL 3. ii. 787 ff.; tr. ANF V. 370f.). 이 서한에서 카푸리안은 로마감독을(교황 스테파누스 1세) "우리들의 동료 스테파누스"라고 부른다(5절).

1845) Gratian. Decretum I lxiv. 1f.f.(MPL 187. 313; Friedberg 1. 247).

1846) Leo I, Letters x. 5(MPL 54. 633; tr. NPNF 2 ser XII. i. 10; F(34. 43); Gregory I, Letters III. 14; IV. 39; IX. 81. 185; XIII. 17; III. 30f.(MPL 77. 315f., 713f.<no. 76>, 1010, 1269f., 627; MGH Epistolae I. 173. 276; II. 97, 177, 384; I. 188f.; tr.<except III. 14 and IX 81> NPNF 2 ser. XII. ii. 129f., 160; XIII. 21).

1847) 참조. Cyprian, Letters 1xvii. 5(CSEL 3. ii. 339; tr. ANF. V. 300).

1848) Statuta antiqua canons iii, iv(Mansi III. 951); Apostolic Constitutions viii. 16(MOG I. 1114; tr. ANF VII. 491f.); Gratian, Decretum I. xxiii. 8. 11(MPL 187, 133f.; Friedberg I. 82 f.).

1849) Jerome, Letters clvi. 1(CSEL 56. 310; tr. LCC V. 386); Jerome, commentary on Titus ch. 1(MPL 26. 562); Apostolic Constitutions viii. 16, 18(MPG 1, 1123; tr. ANF VII. 492-494).

1850) 성직자들의 죄악과 폐단에 대한 칼빈의 맹렬한 비난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이런 비난은 루터보다 백년 이상 앞서서 이미 잘 알려졌었고, 위클리프와 후스 뿐만 아니라 니임(Niem)의 Dietrich, 베젤(Wesel)의 John, George Gascoyne, Dionysius the Carthusian, Savonarola 등도 이를 표명했다. 바오로 3세의 개혁 사업 초기에 추기경 여섯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Consilum de emendanda ecclesia(1537)라는 보고서를 제출하고 개탄할 악폐의 만연을 솔직하게 시인했다(Kidd, Documents, pp. 307-318; Mirbt, Quellen zur Geschichtedes Papsttums, no. 427; summary in Kidd, The Counter Reformation, pp. 12-15, 42, 48). 이 문서는 독일에서 발표되었고(1538년), J. Sleidan의 De statu religionic et reipublicae, Carolo Quinto Caesare, libri commentarium xxvi(1555) 제12권에 수록되었다(Latin edition of 1631, pp. 171-184; English edition, 1560, fo. 15 b-158 a). Sleidan은 칼빈의 친구였으며, 1534-1541년에 평신도로서 스트라스부르크의 프랑스인 교회에서 봉사했다. 칼빈은 여기서 먼저 합당한 소명과 선거가 없다는 점을 환기시킴으로써 공격을 시작한다. Consilium에 결거된 26종의 악폐 중에서 여덟가지가 성직자 임명에 관한 것이었다. 참조, LCC XIV. 32-60(Wyclif, On the Pastoral Office); G. G. Coulton, Ten Medieval Studies pp. 122-165, viii:"Priests and People Before the Reformation."

1851) Leo I. Letters clxvii, answer to question 1(MPL 54. 1203; tr. NPNF 2 ser. XII. i. 110).

1852) Cyprian, Letters 1xvii. 4; 1v. 8; lix. 6; xxxviii(CSEL 3. ii. 738, 629, 673, 579ff.; tr. ANF V. 370f., 329 <1i. 8>, 341 <1iv. 6>, 311f. <xxxii>).

1853) 참조. IV. iv. 11 및 거기에 있는 주들.

1854) 참조. IV. iv. 12.

1855) 제 3차 라태란 회의(1179년)의 법규 1과 3에는 엄격한 규칙과 벌칙이 제정되었다.(Mansi XXII. 217ff.; tr. H. Schroeder, Disciplinary Canons of the General Councils, pp. 214-217).

1856) 주교의 홀장(笏杖)을 수여하는 권리를 암시하며, 이것은 임명권을 포함한다. 865년경부터 중세기와 유럽에서 이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하기 시작했다. 참조, J. T. McNeill, "The Feudalization of the Church", Environmental Factors in Christian History, edited by J. T. McNeill, M. Spinka, and H. R. Willoughby, pp. 196ff. 칼빈은 대성당 참사회 의원들이 선거한 것은 일반 신자들이 선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군주들의 간섭이 없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간섭이 수치였던 것은 물론이다.

1857) Third Lateran Councill(1179) canon i(Mansi XXII. 218; tr. Schroeder. op. cit., p. 215).

1858) Council of Chalcedon(451) canon vi(Mansi VII. 362; J. Fulton, Index canonum pp. 178f.; tr. Schroeder, op. cit., p. 95). Schroeder 의논평; "이 규정은 직분이 없는 임명, 즉, 상당한 생활비를 보장하지 않는 임명을 금지했다." 바로 이 "직분"과 경제적 "생활비"를 연결시키는 것을 칼빈은 다음 문장들에 반대한다. 참조. Gratian, Decretum I. 1xx. 2; "Nemo ordinandus est absolute"(MPL 187. 355; Friedberg I. 257).

1859) Decretals of Gregory IX, III. v. 16(Friedberg II. 469).

10a)1860)"Asses", as의 복수, as는 가치가 작은 로마 동전.

1861) 참조. IV. iv. 3-5;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Geneva(1541)(CR X. i. 17-25; tr. LCC XXII. 59-66).

1862) 로마의 Pontifical(주교 의식서)에서 주교가 "이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봅니까?"라고 묻고 부주교(archdeacon)가 "인간의 연약함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는 나는 그들이 합당하다고 보며 또 그렇게 증거합니다"라고 대답한다(M. Andrieu, Le Pontifical Romain au moyen age II. 337. 342).

1863) 케레스에 관한 참조:Horace, Odes III. ii. 26-28(LCL edition, pp. 176f.). 참조. sec. 9, below. See also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art, "Beneficium."

1864) "성직 수여"(collation)는 주교나 교황이 성직록을 수여하는 것을 말하며 그들에게 수여권이 있다고 했다. Avignon시대(1309-1377)와 그 이후에, 교황들은 이 수여권을 점점 더 주장하게 되었다.

1865) 참조:사도행전 8:20-21에 대한 주해에 있는 성직 매매에 대한 칼빈의 신중한 논의; Council of Chalcedon(451) canon ii(Mansi VII. 373; Fulton, Index canonum, pp. 174f.; tr. with notes, NPNF 2 ser. XVI. 268f.); Gregory I. Letters IX. 218(MGH Epistolae II. 206f.).

1866) "Principum donativa", 보통 승리한 후에 병사들에게 주는 상여금.

1867) 칼빈 자신도 12살 되던 1521년 5월 19일에 노용(Noyon)에서 성직록을 받았고 1543년 5월 4일에 사임했다.

1868) 이런 예는 많이 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18세인 그의 아우 로스 공작을 St. Andrews의 대주교로 임명하고 곧 뒤에 재산이 많은 대수도원 두 곳을 성직록에 추가했다. 그 대주교가 죽자(1504년) 왕은 아홉 살인 그의 사생자 Alexander stuart를 그 자리에 즉위시켰다. 칼빈을 파리에서 가르친 스코틀랜드 사람 John Major는 스코틀랜드 주교들이 자기 교구에 살지 않고 사치하는 것을 비난했다. 참조. C. J. Maxie, King James IV of Scotland pp. 158 ff. 교황 레오 10세는 13세에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W. Roscoe, Life of Leo X(4th edition, 1846), p. 12; G. B. Picotti La Jeunesse de L on X chs. ii. iii. pp. 41-134. 참조: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1537년)의 첫째 부패(Kidd, Documents, p. 310; Mirbt, Quellen, no. 427(4th edition, p. 268).

1869) 참조. 본장 11절. 종교 회의들이 거듭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543년 이 글을 썼을 때에 성직자들이 겸직을 하고, 임직에 부임하지 않는 관습은 오랫동안 만연한 것이었다. 참조.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1537), 일곱째 부패(Kidd, Documents, p. 312).

1870) Gregory I. Letters IV. 11(MGH Epistolae I. 244; MPL 77. 680; tr. NPNF 2 ser. XII. ii. 149); Gratian, Decrerum II. xvi. 1. 38(MPL 187. 1003; Friedberg I. 771).

1871) Gratian, Decretum II. xvi. 1. 22. 25(MPL 187. 997ff.; Friedberg I. 766).

1872) Epiphnius가 예루살렘의 요하네게 보낸 편지를 희랍어에서 제롬이 번역하고 인용한 것, Letters 1 i. 1(CSEL 54. 396; tr. NPNE 2 ser. VI. 83).

1873) Pseudo­Basil, Monastic Constitutions ix(MPG 31. 1370).

1874) 참조. 본장 6절의 주 14.

1875) "Dignitate"; Catholic Encyclopdia, art "Dignitary"를 보라.

1876) IV. xviii. 3, 7.

1877) 참조, IV. 3. 메츠(Metz)의 Chrodegang이 760년 경에 조직한 참사회와 같이 이전 참사회 의원들은 교회의 권징과 교육을 개혁하려고 했다.

1878) 참조. 본항 7절의 주 10.

1879) Gregory I. Homilies on the Gospels I. hom. xvii. 3, 4, 8, 14(MPL 76. 1139ff., 1146).

1880) Bernard, On the Morals Duties of Bishops ii. 4-iii. 8; vii. 25, 27-29(MPL 182, 813-817, 825-828).

1881) 참조:A. Pighius, Hierarchiae ecclesiasticae assertio(Cologne, 1538), Passim; Clichtove, Antilutherus II. ii. fo. 65a-67b. Clichtove 는 I. v, fo. 8b-11a에서 Pseudo­Dionysius, The Celestial Hierarchy and Ecclesiastical Hierarchy를 진본이라고 하는 전통적 견해를 옹호한다. 아레오바고의 디오누시우스(행17:34)가 기록한 것으로 오랫동안 믿어온 이 큰 영향을 준 책은 500년 경에 쓴 것이다. 참조. LCC XIII. 33-37; I. xiv. 4. 주 14.

1882) 참조. Lombard, Sentences IV. xxiv. 8(MPL 192. 903).

1883) 참조. IV. v. 5; IV. xix. 32.

1884) 참조. IV. iv. 7, 주 20.

1885) Cassiodorus, Historia tripartita IX. 30(MPL 69. 1145), from Sozomen, Ecclesiastical Hiltory vii. 25(tr. NPNF 2 ser. II. 394).

1886) Ambrose, Letters ix. 2(MPL 16. 940; tr. LCC<letter x. 2>v. 185. "주교의 영광인 빈곤").

1887) 참조. IV. iv. 8, and notes appended.

1888) Status antiqua canons xiv. xv(Mansi III. 952). 참조. IV. iv. 2. 주5.

1889) 참조. sec. 17, above, 주 36.

1890) Jerome, Letters 1ii. 5, 6(MPL 22. 531; CSEL 54. 422-425; tr. NPNF 2 ser. VI. 91f.; LCC V. 319-322).

1891) 칼빈은 이 문제를 Acts of the Council of Trent with Antidote(1547)의 서문(CR VII. 365 이하) 및 기타 여러 곳에서 논의하였다.

1892) Thomas de Vio Caietanus, De divina institutione pontificatus Romani pontifici(1521), 제 2장에 "너는 베드로라"(마 16:18) 에 대한 해석이 있다. Cochlaeus, Philippicae quatuor(1534) IV. 35; Latomus, Adversus M. Bucerum…altra defensio(1544)(CC 8. 73, 154 이하).

1893) Eck, De primatu Petri(1520) II. xxvii. fo. 30 a.

1894) cf. IV. xx. 8. 중세 교회는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지"라고 생각했다. G. H. T. Kimble, Geography in the Middle Ages, p. 186:"세계 지도에서 예루살렘이 차지한 중심 위치." La Terre Sainte(1664)의 저자 Eug ne Roger도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Kimble, op. cit., pp. 89ff., 주 5.

1895) 레오 1세는 교황의 권위에 대한 강경한 편지, 서한 x, 1(MPL 54. 630; tr. NPNF 2 ser. XII. i. 9)에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는 일이 위탁되었다."고 말한다. cf. 레오의 Sermons 1xiii. 6(MPL 54. 356 f.; tr. NPNF 2 ser. XII. i. 177) 에는 "주로 베드로에게"라는 말이 있다. cf. Cochlaeus, De authoritate ecclesiae et scripture(1542) I. iii. fo. B 3a. 바티칸 회의(1870년)의 결정에 의하면 요한복음 21:15-17에서 목자장의 재판관이 "시몬 베드로에게만" 수여되었다(Schaff, Creeds II. 259). cf. Profession of Faith of the Council of Trent(1564) X(Schaff ff, Creeds II. 209).

1896) III. iv. 20.

1897) IV. xi. 1-2.

1898) 이 문장 번역의 원본은 VG이다. IV. xi. 1. 주 2를 보라. 열쇠의 권한(마 16:18-19)에 대한 다양한 언급들이 스콜라 신학에서 나타났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열쇠의 권한은 베드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퍼지도록 마련된 것이었고(Gontra gentes iv. 72), 미사를 집례 하는 권한과 같이(Summa Theol. III. Suppl. xvii. 2, 주1), 공인된 사제라면 누구든지 행사할 수 있다고 한다(Quodlibeta xix. 30). 그러나 Caietan은 이 구절의 해석을 로마 교황에게만 국한하였다. De divina institutione pontificatus Romani Pontificis(1521) V(CC 10. 35ff.). 이 마태복음 16:19은 바티칸 회의 결정(1870), First Dogmatic Constitution, ch. i, ch. iv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Schaff, Creeds II. 259, 268).

1899) Leo I, Sermons iv. 3(MPL 54. 151); Eck, De Primatu Petri(1520) I. 3; I. 14; I. 33(fo. 4b. 21a, 52b); De Castro, Adversus haereses XII(1543, fo. 180 D).

1900) Cyprian, 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 iv(CSEL 3 i. 212; tr. LCC V. 126).

1901) Augustine, John's Gospel I. 12; xi. 5; cxxiv. 5(MPL 35. 1762 f., 1478. 1973f.; tr. NPNF VII. 282, 78). 마지막 언급은 cxviii. 4(MPL 35. 1949; tr. NPNF VII. 405)및 그의 Sermons ccxcv. 2(MPL 38. 1349)에도 있다.

1902) 참조:본장 7절.

1903) "quia"를 "quasi"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 있는 말과 아울러 다음을 참조하라. Augustien, John's Gospel cxxiv, 5:"Petra enim erat Christus: super quod fundamentum ipse aedificatus est Petrus"(MPL 35. 1975; tr. NPNF VII. 450):Sermons 1xxiv. 1. 1(MPL 38. 479; tr. LF Sermons I. 215; ccxliv. 1; cclxx. 2(MPL 38. 1148. 1239); ccxcv. 1. 1:"Unus pro multis dedit responsun…Christus petra, Petrus populus Christianus"(MPL 38. 1348f.). 이 구절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상의 변동에 관해서는 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III. 306ff를 보라. ch. Luther, The Papacy at Rome; Am Answer to the Celerated Romanist at Leipzig(Werke WA VI. 306, 311; tr. Works of Martin Luther I. 369. 373).

1904) cf. Luther, Resolutio Lutheriana super propositione sua decima tertia de potestate papae(1519)(Werke WA II. 189ff., 248f., 716); Von dem Papsttum zu Rom(Werke WA VI. 309ff.); De ministerio(1523)(Werke WA XII. 179f.; tr.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40. 26ff.).

1905) 베드로의 지상권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O. Cullmann, Petrus, J nger­ Apostel­M rtyrer; tr. F. Filson, Peter; Disciple­Apostle­Martyr Part I, ch. 3; Part II, ch. 1.

1906) Oujc ajgaqojn polucoiranivh; Homer, Iliad II. 204(LCL edition, I, 64f.). 벌과 두루미에 대해서는 Seneca, On Clemency I. xix. 2(LCL Moral Essays I. 410f.)를 참조하라.

1907) Lucan, Pharsalia I. 92 f.(LCL Lucan, Civil War, pp. 8f.).

1908) Eck, De primatu Petri I. xiv. fo. 21a.

1909) cf. 본장 1절 주2.

1910) Clichtove, Antilutherus II. ii, fo. 65 ab. 이 문장은 VG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그들이 하늘과 땅의 성직 계급 제도를 비교한 것은 경솔하다. 왜냐하면 하늘의 성직 계급제도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말만을 알며 또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1911) Fisher, Assertionis Lutheranae confutatio, pp. 422f.

1912) Pseudo­lsidorian Decretals, 안디옥 감독에게 보낸 교황 마르켈루스의 편지. 마르켈루스는 안디옥 감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님의 '너는 베드로라'는 말씀을 받은 사람은 전체 교회의 머리이다. 왜냐하면, 그의 교구는 원래 너희 마음 속에 있었으나 주의 명령에 따라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관장하는 로마로 옮겨졌기 때문이다."(Decretales Pseudo­Isidorianae et Capitula Angilramni, ed. P. Hinschius, p. 223). cf. Gratian, Decretum II. xxiv. 1. 15(MPL 187. 1270; Friedberg I. 970).

1913) 유스티니아누스 법전(Justinian Pandects) ix. A(ed. I. Baron, p. 33)에 의한 논거.

1914) 본항 16을 보라.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의 canon iii은 "콘스탄티노플이 새 로마"라는 근거하에 콘스탄티노플 감독에서 "로마 감독 다음가는 영예"를 부여하였다. 칼케돈 회의(451년)의 canon xxviii은 이 결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 로마 시는 수도였으므로 교부들이 그곳의 감독에게 특권을 부여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Fulton, Index canonum, pp. 190f.; tr. Ayer, Source Book, pp. 354, 521). 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의 canon iii과 칼케돈의 canon xxviii을 부정했다. cf. H. Schroeder, Disciplinary Canons, pp. 65ff., 125ff., and IV. vii. 15, 주 36.

1915) Gregory I. Letters VII. 37(MGH Epistolae) I. 485; MPL 77. 899; tr. NPNF(Letter 40) 2 ser. XII. ii. 229); Liber Pontificalis, ed. L. M. O. Duchesne, I. 118:tr. L. R. Loomis, The Book of the Popes, p. 4.

1916) O. Cullmann, Peter:Disciple­Apostle­Martyr, 독일어판, pp. 37f., 82ff.:영어판, pp. 113, 231f. Cullmann은 베드로의 로마 체재를 매우 단기간이라고 생각한다.

1917) 제 1세기의 로마 감독들의 연대와 순서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창립하고 감독직을 리누스(Linus)에게 맡겼으며, 그의 뒤를 아나클레투스(Anacletus)가 있고, 클레멘스가 그 뒤를 이었다고 말한다. Against Heresies III. iii. 3(MPG 7. 848; tr. Ayer, Source Book, p. 113).

1918) Augustine, Letters xxxvi. 21(MPL 33. 145f.; tr. FC 12. 156). 1559년판에 인용된 "Epist. 2 ad Januar"는 잘못이다. 사도행전 8:5-24의 마술사 시몬은 보다 후에 사람들 깃타(Gitta)의 시몬과 혼동되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베드로와 논쟁하고 엄청난 기적을 행하며 극단적인 영지주의적 교리를 말했다.

1919) 민족적 특이성이 강요의 다른 곳에서는 안식되지 않는다. 이 앞에 있는 문장들은 어거스틴의 말이다. Letters xliii. 7; ccix. 8, 9(MPL 33. 163, 955f.; tr. FC 12. 187).

1920) Jerome, Letters cxxv. 15(CSEL 56. 133; tr. NPNF 2 ser. III. 249). "Nepotian"은 수도사를 의미하는 "Rusticus"가 되어야 한다.

1921) Cyprian, On the Unity of the Catholic Church iii, v, vi(CSEL 3. i. 212, 214; tr. LCC V. 125-128).

1922) Council of Nicaea(325) Canon vi(Mansi II. 670f.; Fulton, Index canonum, pp. 124f; tr. Schroeder, Disciplinary Canons, pp. 29ff.). "율리우스"는 잘못이다. 교황은 실베스터 1세(314-335)였다. E. Giles, Documents Illustrating Papal Authority, A. D. 96-454은 본장의 논의에 관련된 많은 문서들을 위해 참조될 수 있다.

1923) 소조멘(Sozomen)은 로마 대표의 앞에, 예루살렘과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감독들을 나열하고 있다. Ecclesiastical History i, 17;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I. 1(MPL 69. 920f.; tr. NPNF 2 ser. II. 253). 칼빈의 주장은 로마 카톨릭 학자의 말로 설명된다­밀티아데스 이후 실베스터의 긴 임기는 "당세기의 가장 공허한" 기간이었다. "황제의 뜻에 따라 또 교황이 무력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권위에 있었다. 그의 대표들은 314년의 아를(Arles)과 그 후의 니케아 회의들에 출석하기는 했으나 결정적인 역할 뿐 아니라 주목할 만한 일조차 하지 못했다." J. R. Palanque, et al., The Church in the Christian Roman Empire; tr. E. C. Messenger, p. 30.

1924)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 회의를 주재했다는 칼빈의 생각은 잘못이다. 유일하게 알려진 의장은 코르도바의 감독 호시우스였는데 이 사람의 이름이 결정서 서명자들의 맨 앞에 있다(Mansi II. 692).

1925) 이것은 에베소에서 431년에 열린 제3차 회의에 대한 언급이다(Mansi IV. 12. 79ff.; cf. NPNF 2 ser. XIV. 193, 223, 227).

1926) 449년의 에베소 "강도회의"(Mansi VI. 587; Ayer, Source Book, p. 511; B. J. Kidd,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o 461 III. 285-310). 레오 1세가 이 회의의 서한 2통을 보냈으나 의장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가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서한들은 여기서 특히 흥미있는 문서다. Leo I, Letters xxviii(the so­ called Tome of Leo); xxiii(MPL 54, 755-782, 797-800:tr. NPNF 2 ser. II. 38-43, 46f.; XIV. 254; cr. Ayer, Source Book, pp. 515f.).

1927) 레오의 대표들은 에베소 종교 회의(449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출석했으나 결정에 "강경하게 항의"했고, 그 중 한 사람이었던 집사 힐라리는 강제 서명을 피하려고 도망해 버렸다. Leo I, Letters xliii, xliv(MPL 54, 821-832; tr. NPNF 2 ser. XIV. 52-54).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한 유티케스는 혼란한 종교회의에서는 무죄로 결정되었으나 451년의 칼케돈 회의에서 그의 견해가 정죄되었다.

1928) Leo Ⅰ, Letters xcviii. 1; ciii; cvi. 3; 1xxxix(MPL 54. 951f., 988, 1005, 921; tr. NPNF 2 ser. XII. i. 72, 78; letter ciii not in NPNF or FC; letter lxxxix tr. in FC 34. 162f.; evi tr. in FC 34. 182-188).

1929) 여기서 말하는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553년에 열렸고, 거기에서 교황 비길리우스는 압력을 받아 단성론자들에게 양보했다. Mansi IX, 181, 367, 655; MPL 69, 67f., 143, 147; tr. Ayer, Source Book, pp. 544, 547ff. 아퀠레이아 회의(381)에는 "스페인과 로마만이 불참하였다." H. Burn­Murdoch, The Development of the Papacy, p. 184. 이 회의와 암브로시우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의 서한을 보라. Letters 1 i(MPL 16. 1209-1241; tr. NPNF 2 ser. X. 450-453; FC 26 <as no. 3> 20-26). 이 서한은 아퀠레이아에서 썼다. 참조:B. J. Kidd,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II. 361ff.

1930) Cyprian, Letters 1xviii. 1; xliv. 1; xlv. 1; x1vii; x1viii. 1; lxxii. 1xxv. 3, 17, 25(CSEL 3. ii. 724, 597, 599, 605f., 777, 817, 821, 826; tr. ANF [letters are 1vi. 1; x1. 1; x1ii. 1; x1xxlv. 1; lxxl. 3; liv. 3, 17, 25] V. 367f., 321, 319f. 322, 379, 390, 394, 396).

1931) Jerome, Letters cx1vi. 1, 2(CSEL 56. 310f.; tr. LCC V. 386f.): "Si authoritas quaeritur orbis maior est urbe." 칼빈은 제롬의 문장의 순서를 바꿨으나 뜻은 바꾸지 않았다. 교황들보다 회의들의 권위를 지지하기 위하여 파리의 요한은 그 문장을 변형된 형태로 사용하였다. "Et quod orbis maior est urbe et papa, concilium maius est papa solo," De papali et regia potestate(1302)(M. Goldast, Monarchia seu Romani imperii II. 339). cf. McNeil, "The Emergence of Conciliarism," in E. N. Anderson and J. L. Cate, Medieval and Bibliographical Essays in Honor of James Westphal Thompson, p. 294, 주 63. cf. Luther. "거룩한 교회는 로마에 매여 있지 않고, 세계 만큼 광범위하다." Answer to the Celebrated Romanist at Leipzig(Werke WA VI 300; tr. Works of Martin Luther I. 361).

1932) cf. IV. vii. 17, 21f. 칼빈은 본질의 처음 부분의 근거로 그레고리 1세와 레오1세의 서한들을 이용하였다. Gregory I, Letters V. 37, 41, 44, 45(MGH Epistolae I. 322, 327, 332, 341, 344; MPL [v. 20, 21, 43, 18, 18가 반복적으로 사용됨] 77. 745, 749, 771, 740, 743; tr. NPNF 2 ser. XII. ii. 170, 171, 179, 166, 169); VII. 24, 30(MGH Epistolae I. 469, 477f.; MPL [nos. 27, 33] 77, 883, 891; tr. NPNF 2 ser. XII. ii. 222, 225f.); IX. 156(MGH Epistolae II. 157(MPL [no. 148] 77. 1004; not in NPNF or FC 34).(아타나시우스에 대한 두 번째 언급에서 라틴 원문에 "Alexandrino"라고 오기했으나 Antioceno가 옳다<OS V. 107>).

1933) IV. xi. 10-15.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교황에 의해 제기된 재판권이라는 현대의 학설은 Dom J. Chapman, Studies in the Early Papacy, chs. V. viii에서 볼 수 있다.

1934) cf. B. J. Kidd,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II. 298ff.

1935) 제2차 밀레비스(카르타고 부근)종교 회의(416년)였다고 함, Smits(II. 276) canon xxii(Mansi IV. 332; Hefele­Leclercq II. i. 125); Gratian, Decretum II. ii. 6. 35(MPL 187. 633; Friedberg I. 479; tr. NPNF 2 ser. XIV [canon xxviii] 456 [canon cxxv]. 502).

1936) 이것들은 앞으로 제1, 제4, 제2, 제3의 순서로 다루어진다.

1937) Gregory I. Letters III. 29(MGH Epistolae I. 186f.; MPL 77. 627; tr. NPNF 2 ser. XII. ii. 129). 후에 그레고리는 "미사의 성레전에서 입을 팔리움(pallium)"을 콘스탄틴에게 보냈다.

1938)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V. xxiv. 11ff.(GCS 9. 494f.; tr. NPNF 2 ser. I. 243f.).

1939) Cyprian, Letters 1xviii; 1xxiv. 1, 3, 4, 7, 8(CSEL 3. ii 746. 799, 801f., 805; tr. ANF [letters 1xvi and 1xxiii. respectively] V. 368, 386ff.). 서한 1xxiv. 8(1xxiii. 8)에서 카프리안은 교황 스테판을 "이단자들의 친구요 그리스도인들의 원수"라고 부른다.

1940) 유세비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총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Life of Constantine III. vi(GCS 7. 79; tr. NPNF 2 ser. I. 521). 참조:황제에게 보낸 레오1세의 서한 cliv. 3 "총회를 이탈리아에서 개최하도록 명령하시기를 모든 감독들이 폐하에게 간청하나이다."(MPL 54. 829; tr. NPNF 2 ser. XII. i. 54; FC 34. 125).

1941)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ii. 8, 15, in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V. 9(MPL 69. 960. 964; tr. NPNF 2 ser. II. 38, 42).

1942) 5절의 주 12와 14를 보라. 레오 1세는 Letters X. 2에서 비엔나 지방의 감독들이 상소문제에서 "관례"를 준수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MPL 54. 630; tr. NPNF 2 ser. XII. i. 9; FC 34. 38). 중세기의 갈리아운동, 특히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때에(1296경­1303) 프랑스 정부와 감독들이 교황의 권위에 대항한 것을 칼빈이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1943) 제2차 밀레비스 종교 회의 결정 xxii. 5항 주 14를 보라(Mansi IV. 332f.). 아프리카 회의(419년)가 보니파키우스 1세에게 보낸 서한을 보라(Mansi III. 830ff.). 사르디카 종교회의(344년)의 결정 3조와 5조는 로마에 있는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요 동료 감독인 율리우스에게" 상소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 결정들은 교황 조시무스(417-418)와 레오1세(440-461)가 니케아 에큐메니칼 회의의 결정으로 제시했다. cf. H. Burn­ Murdoch, The Development of the Papacy, pp. 258-263; NPNF 2 ser. XIV. 423; Hefele­Leclercq II. i. 763f., 769f. 교황의 주장을 거부하는 편지는 424년에 아프리카 회의가 교황 코일레스티누스 1세에게 보냈다(Mansi IV. 515f.).

1944) 라틴 원문에서는 괄호 안에 "Haec habentur I volum conc."라는 말이 있다. 칼빈이 "회의록 제1권"이라고 한 것은 프란체스코 수도사 Peter Crabbe가 J. Merlin의 저서를 개정 편집한 Concilia amnia…ab apostolorum temporibus in hunc usque diem…2 vols. Cologne, 1538 임이 틀림없다(한 부<部>가 미국 국회도서관에 있다). 위조 교령들이 I. 13-213을 차지했다. 여기서 언급된 구절은 I. fo. 571에 있다. Cf. P. Hinschius, Decretales Psdeudo­Isidorianae, p. 703.

1945) Gratian, Decretum II. ii. 6. 35; 그라티안의 주가 붙어 있다:"Nisi forte Romanam sedem appellaverint."(MPL 187, 633; Friedberg I. 479).

1946) Augustine, De unico baptismo xvi. 28(MPL 43. 610f.); Breviculus collationis cum Donatistis III. xii. 24(MPL 43. 637); Letters x1iii. 2, 4; 1xxxviii. 3; cv. 2, 8;liii. 2, 5(MPL 33. 161, 303, 399, 198; tr. FC 12. 184. 186; FC 18. 24, 201f.; FC 12. 247 ff.). 이 상소는 아틀레스 감독이라기 보다는 아틀레스 회의에 한 것이다.

1947) 도나투스 분파 운동의 시작과 아틀레스 회의(314년)에 대해서는 Burn­Murdoch, Development of the Papacy, pp. 194ff.; Palanque, et al., The Church in the Christian Roman Empire, pp. 30-33; W. H. C. Frend, The Donatist Church ch. xi, pp. 141-159를 보라. Palanque는 아틀레스 회의를 "교황제도 말살의 현저한 예"라고 부른다(P.30). Melchiades(또는 Miltiades)는 310-314년의 로마 교황이었다.

1948) 9세기에 나타난 위작(僞作) 이시도루스 교령집(본장 9절 주 23을 보라)에서 초기 교황들이 교령이라고 한 것이 그라티안 교령집에서는 진작으로 인정되었다. 아나클레투스(79-91경)의 Epistle iii에 대한 참조: Decretum I. xxii. 2(MPL 187. 124; Friedberg I. 74); Hinschius, Decretales Pseudo­Isidorianae, p. 83. Erasmus와 George Cassander와 기타 학자들이 위작이라고 했는데도 Eck와(De Primatu Petri contra Ludderum<1526>) 예수 회원 Francisco Torres는(Magdeburg Centuries에 대항해서, 1572) 변호했다. 위그노파 학자 D. Blondel(1620)이 Tores에게 보낸 철저한 논박이 끝냈지만, "Febronius," Nicholas con Hontheim은 그의 저서 De statu ecclesiae(1763)에서 이 위조 문서들을 근거로 한 권리 주장을 버리라고 권고할 필요를 느꼈다. Cf. T. G. Jalland, The Church and the Papacy, pp. 376ff., 469f. "연기를 판다"는 조롱하는 표현은 Plautus가 사용했다. Mostellaria IV. ii. 10(LCL Plautus III. 380f.). IV. xvi. 11을 보라.

1949) Leo I. Letters xiv. 1; x. 9; xv. 17; xiv. 2; xiii. 1(MPL 54. 668, 636, 692, 672, 664; tr. NPNF 2 ser. XII. i. 16, 12, 25, 17; FC 34. 58f., 46f.)에 근거함. FC 34의 편집자 E. Hunt는 서한 xv(MPL 54. 692)를 위작으로 본다(P. 67).

1950) Gregory I. Letters III. 29; II. 52; IX. 27(MGH Epistolae I. 187, 156; II. 60f.; MPL 77. 627, 588<II. 47>, 996<IX. 59>; 처음 둘은(NPNF 2 ser. XII. ii. 129. 115)에 번역되었다.

1951) Gregory I. Letters II. 1; I. 16; I. 5; I. 7; I. 25(MGH Epistolae I. 153, 17, 5, 9, 38; MPL 77. 596<II. 52>, 462f., 448, 453, 479 <I. 36>).

1952) 본장 4절을 보라.

1953) Gratian, Decretum I. 1xxx. 1, 2, from Pseudo­Isidore(MPL 187. 383f.; Friedberg I. 279f.). See also Hinschius, op. cit., pp. 39. 185.

1954) Council of Turin(401) canon i(Mansi III. 880; Hefele­Leclercq II. i. 133f.).

1955) Innocent I. Letters xxiv. 1(MPL 20. 547f.).

1956)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v. 8, in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X. 13(MPL 69. 1129; tr. NPNF 2 ser. II. 121; see(MPL 187. 124f; Friedberg I. 75). from Council of Constantinople(381) canon iii(Mansi III. 559; tr. NPNF 2 ser. XIV. 178). Cf. H. Schroeder, Disciplinary Canons, pp. 65ff.

1957) IV. vi. 13 주 24를 보라. 칼케돈 회의(451)의 canon xxviii에 대한 레오의 항의에 대해서는; Leo I. Letters civ. 2-4; cv. 4(MPL 54. 993, 995, 1000; tr. FC 34. 179ff.; NPNF 2 ser. XII. I. 287-290, notes and "Excursus on the History"); cf. Schroeder, p. cit., pp. 126f를 보라.

1958)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단식자 요한이 588년 "세계 총대감독"(Ecumenical Patriatch)을 자칭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이 칭호를 국가의 공문서에 사용한 일이 있었지만, 그레고리1세는 요한의 행동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본장 4항 주 11)에 인용된 그레고리의 Letters V. 37, 39, 41, 44, 45와 알렉산드리아의 율로기우스에게 보낸 편지 VIII. xxix을 보라(MGH Epistoale II. 31; MPL<VIII. 30> 77, 933). 이 논쟁의 전반에 대해서는; F. H. Dudden, Gregory the Great; His Place in History and Thought II. 201-237; E. Casper, Geschichte des Papsttums II. 452-456를 참조하라.

1959) 칼빈은 본항에서 두 세기에 걸친 교회사를 논평한다. 칼빈은 분명히 Pepin과 교황 Zachary와의 협정(751년)에서(cf. O. J. Thatcher and E. McNeal, Source. Book of Medieval History, pp. 102ff.) 교황의 계속적 권력의 한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Cf. G. Kr ger, Das Papsttum:Seine Idee und ihre Tr ger, 2d edition, ch 4. "Der Pakt mit den Franken", esp. pp. 35ff.(이 책의 제 1판이 영역되었다:The papacy:The Idea and Its Exponents). 파리 문고에 대한 칼빈의 언급은 그의 친구인 존 슬레이단(John Sleidan, 1506-1556)이 제공한 정보일 것이다. 슬레이단은 역사가였고 다년간 파리에서 살았다. 그의 저서 De quatuor summis imperiis 는 1559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많은 독자를 얻었고 칼빈도 물론 사용했다고 짐작되는 것은 Bartholomew Platyna(Platina)의 De vita christi et omnium pontificum(1479년)이다. 이 책은 읽기는 좋으나 믿기는 어려우며, 전체적으로 교황들에게 유리하게 썼지만 당시의 폐습에 대해서는 가시 돋친 말을 했다(tr. Lives of the Popes, London, 1605). 플라티나는 자카리아스를 칭찬하며, 그레고리 7세를 찬양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현명하고 공정하며 인자하다"고 하지만 파울루스 2세(1471년에 사망)에 대해서는 욕설만 한다. 바르트와 니이젤(OS V. 120) 또 칼빈이 Robert Barnes의 Vitae Romnorum pontificum을 사용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IV. xi. 13 주 23)을 보라.

1960) Bernard, De consideratione I. iv. 5; IV. ii. 4, 5; IV. iv. 77; III. ii. 6-12; III. iv. 14(MPL 182, 732, 740f., 774f., 780, 761-764, 766; tr. G. Lewis, Bernard on Consiedration, pp. 20, 32, 84, 109, 101f., 75-82, 85).

1961) IV. xi. 8-14.

1962) Gratian, Decretum I. xii. 2; xxii. 2; II. xxiv. 1. 15(MPL 187, 62, 118f., 1270; Friedberg I. 27, 73, 970).

1963) 칼빈은 교황의 권위를 묘사하는 이 전형적인 어구들을 그라티안의 Decretum에서 이용한다. OS V. 122f.에 참조할 만한 것들이 많이 적혀 있다. 그라티안은 최후의 말을 위작 교서에서 인용했다. 그레고리 7세와 13세기 교황들이 이런 말을 무수히 했다. Cf. Mirbt, Quellen zur Geschichte des Papsttums, nos, 250, 255, 271f., 299f., 309; Thatcher and McNeal, Source Book, pp. 142, 144, 156, 208, 214, 219ff., 311-357; E. Emerton, The Correspondence of Gregory VII. pp. 124, 126, 151f., 163, 166-175. 플라티나는 그레고리 7세가(베드로에게, 따라서 교황에게) 한 말을 인용하면서(영어판, p. 214) 찬의를 표명했다. "당신은 또 지상에서 제국과 왕국과 공국들을…그리고 모든 사람의 재산을 주실 수도, 취하실 수도 있습니다"(Emerton, p. 52).

1964)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으로 된 위작 서한에 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라티안의 착각이었고 칼빈도 그대로 썼다. Gratian, Decretum II. ix. 3, 12, 이것의 출처는 Pseudo­Isidore, Epistola Athanasii, ch. 4(MPL 187. 798; Friedberg I. 610; Hinschius, Decretales Pseudo-Isidorianae, p. 480).

1965) 교황 무오설에 대한 강경한 주장이 Dictatus Papae에 있다. 이것은 보통 Hildebrand가 만든 문서라고 하지만 그의 사망(1085) 몇 해 후에 작성된 듯하다. 거기에 있는 명제의 일례: "로마 교회는 오류를 범한 일이 없고 앞으로도 성경의 증언에 따라(눅 22:31이하 참조) 영원히 오류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Gregory VII, Registrum II. 55a, no. 22; MGH Epistolae selectae, ed. E. Caspar(1923), II. 207; tr. O. J. Thatcher and E. McNeal, Source Book for Medieval History, p. 138). 이 절과 다음 절의 자료들은 OS V. 124f 에 상세히 명기되었다. 교황들의 권위 문제에 대해서는 LCC XIV. 28, 115-126을 보라. IV. xi. 13도 보라.

1966) Sententiae episcoporum de haereticis baptizandis, Council of Carthage under Cypriam(256); CSEL 3. i. 436; Council of Carthage(397) canon xxvi(Mansi III. 884); Augustine, On Baptism III. iii. 5(MPL 43. 141f.; tr. NPNF IV. 437). 이 절의 처음 문장들은 칼빈이 "preterition"(역언법)을 가장 교묘하게 사용한 일례다. 이것은 말하지 않노라고 하면서 간단히 암시하는 수사법이다.

1967) Gregory I. Letters V. 54(MGH Epistolae I. 340; MPL<v. 18> 77. 739; tr. NPNF 2 ser. XII. ii. 16ff.):Letters VIII. 29(MGH Epistolae II. 31; MPL<VIII. 30> 77. 933; tr. NPNF 2 ser. XII. ii. 241).

1968) Gregory I. Letters I. 5, 7, 25, 24(MGH Epistolae I. 5f., 9, 38, 35; MPL<nos. of last two, I. 27; I. 25, respectively>77. 448, 455, 480, 476; tr. NPNF 2 ser. XII. ii. 75, 77 85).

1969) "Labyrinthus." I. v. 12, 주 36 참조.

1970) 본장 18절 주 39 참조.

1971) 이 적절한 비교에는 칼빈의 정치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IV. xi. 5; IV. xx. 8 참조.

1972) IV. iii. 6-8.

1973) Leo X(1513-1521), Clement VII(1523-1534), Paul III(1534-1549)를 말한다. 칼빈은 이 문장을 1543년에 썼다.

1974) IV. ii. 12, 주 16 참조.

1975) Eusebius, Ecclesiastical History III. v. 3(GCS 9. i. 196; MPG 20. 223; tr. NPNF 2 ser. I. 138).

1976) "In illo…magisterio." VG판에 "en cette boutique.", 즉, "상점" 또는 "매매하는곳"이라 되어있다.

1977) 율리우스 2세(1503-1513). 본장 23절 주 51을 참조하라.

1978) 1537년에 Erasmus는 Bologna의 Augustinus Steuchus Eugubinus(On Behalf of the Christian Religion Against the Lutterans(1530)의 저자)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독일에 훼방하기를 서슴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자들을 엄중한 처벌로 시정된다. 그러나 나는 로마에서 이 귀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대한 가증한 훼방으로 광분하여 떠드는 것을 들었고,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들었으나, 그것에 대한 처벌이 없었다."(H. M. Allen and H. W. Garrod, Opus epistolarum Des. Erasmi Roterodami IX. p. 218). Beverige, Institutes II. 385, 주 1)을 보라. 그 후에(1547) Steuchus는 "콘스탄틴의 헌서"가 가짜임을 폭로한 Valla의 주장에 답변하려고 시도했다.

1979) Jean Gerson, Sermon on the Feast of Easter(Opera Gersoni, ed. L. E. Du Pin, III. 1205). 참조, Calvin, Psychopannychia, Preface(CR V. 171; tr. Calvin, Tracts I. 415); Brieve instruction contre les erreurs de la secte commune des Anabaptistes(CR VII. 127).

1980) 칼빈은 비록 신랄하긴 하지만 부패한 교황들의 타락상을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그 가장 추악한 면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알렉산더 6세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1981) Gregory I. Letters I. 15, 77, 79; II. 12, 37; III. 13, 14(MGH Epistolae I. 16, 97ff., 110, 133, 172f.; MPL 77. 461, note e; 531, 533, note 7; 575; 614f.; tr. [2d. 4th, and 5th only] NPNF 2 ser. XII. ii. 99f., 103, 111).

1982) Augustine, Letters 1xxxii. 4. 33(MPL 33. 290);(SEL 34. ii. 385; tr. FC 12. 418).

1983) Council of Carthage(418)(Mansi; III. 699); 참조, 본장 9절 주 22)를 보라.

1984) Gregory, Letters V. 57a, 58, 62, 63; VI. 7(MGH Epistolae I. 365, 369, 377, 379, 386; MPL 77, 790, 793, 799; tr. NPNF 2 ser. XII. ii. [3d. and last citations only]. 187. 191).

1985) IV. xi. 1에서 재판권은 교회의 권한의 세 번째 중요 부분이라고 한다.

1986) IV. x에서 입법권은 교회 권한의 두 번째 부분으로 다루어진다. 교회의 권한에 대한 개신교 사상에 대해, 19세기 스코틀랜드 독립교회 입장에서 광범위하게 연구한 J.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Edinburgh, 1868), Vol. I은 아직도 유익하다. Vol. I 의 Part II의 제목은 "Power of the Church"(I. 187-275)이며, Part III, Division I은 교리(potestas dolmatikhv)에 관한 교회의 권한을 논한다(I. 276-334). Fr. Turretin은 교회의 권한에 대한 전형적인 개신교 정의를 제시한다. potestas, dogmatikh, diatactichv와 diakritikhv, 즉, 믿음을 선포하는 교회 권한의 입법권, 징계행사권한:Institutio theologiae elenchticae(Genera, 1680-1683과 이후 판들), Part III, Book XVIII, qu. xxix. 참조, the United Church of Canada, Statement Concerning Ordination to the Ministry, pp. 46-50.

2a)1987)VG "Dieu", 라틴어판에는 동사만 있다.

1988) 참조, I. vi. 2.

1989) 칼빈은 시편 인용시 그 저자로 인정되는 다윗을 "예언자"라고 칭하는 습성이 있다.

1990) 참조, II. xi. 4-6, 11, 14.

1991) 참조, H. Quistorp, Calvin's Doctrine of the Last Things, pp. 158ff., 177ff.

1992) "Verba quodammodo dictante Christi Spiritu." 그러나 여기 있는 부사 "quodammodo"는 의식적으로 의미를 제한하며 엄격한 축자 영감설을 배제한다. 여기서도 한 마디 한마디의 말보다도 그 말들이 의미하는 교훈을 의미하며 칼빈의 주장이 문자적 무오성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993) IV. iii. 5-8.

1994) "Certi et authentici Spiritus sancti amanuenses."이 어귀를 근거로 칼빈이 축자 영감설을 주장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다른 데서는 이런 견해를 분명하게 지지한 일이 없으며, 그는 그의 관심이 표현 방식에 있지 않고 교훈에 있다는 것을 곧 바로 밝히고 있다. 여기 있는 말은 "새로운 교리"에 대해서 경고하는 서론적인 발언이다. 참조, L. Goumaz, La Doctrine du sault d'apres les commentaires de Jean Calvinvin sur le Nouveau testament, pp. 110-117; H. Clavier, Etudes sur le Clavinisme, 26, 81f.; E. A. Dowey, the Kmoulde of God in Calvin's Theology pp. 90ff., W.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31-36; J. K. S. Reid, The Authority of Scripture, pp. 44, 53ff.; J. T. McNeill, "The Significance of the Word of God for Calvin", Church History XXVIII(1959), 140-145.

1995) 참조, IV. ix, 1, 주1, 올바르게 구성된 교회의 회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견해는 열성적인 회의론자들 사이에서도 극히 희귀하다. J. C. L. Gieseler, A Text-Book of Church History, tr. H. B. Smith, III. 322, note 6에 인용된 구절들을 보라. Marsilius of Padua, The Defender of Peace 의 편집자 A. Gewirth는 Marsilius 도 이런 견해를 가졌다고 하나(I. 357) 그가 지적한 본문(II. xix. 2-4)은 다소 모호한 인상을 준다. Marsilius가 총회의에 성령이 임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말하는 "infallible deduction"은 회의가 명백하게 성경에서 끌어내지 않은 연역을 의미하는 것 같다.(op. cit., II. 274 f.). 여기서 역설하는 것은 교황들보다 회의들이 우월하다는 것이다. 절대 무오성을 주장하지 않으면서 이 우월성의 입장을 선언한 것이 콘스탄스 회의가 1415년 4월 6일에 발표한 저 유명한 교령 Sacrosancts다. 그 교령은 1432년 2월 15일에 바겔 회의가 재확인했다. 그러나 Niem의 Dietrich는(1410년) 총회의의 결정은 "변할수 없다"고 까지 말했다(LCC XIV. 160). 참조, A. C. Flick, The Decline of the Medievel Church I. 375; II. 5, 49f., 53. 회의의 권위에 대해서는 B. Tierney의 예리한 연구서인 Foundatins of the Conciliar Theory, esp. ch. ii, "Pope and General Council"을 참고하라. 16세기에 Silvester Prierias는 그의 저서 Dialogue on Papal Power(1517)에서(교황이 소집한) 회의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Kidd, Documents, p. 31). J. Clichtove 는 "De conciliorum generalium indeviabilitate"("총회의들의 무오성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총회의의 무오성은 교황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과 성령의 임재와 그리스도와 약속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Compendium…Veritatum…contra erroneas Lutheranorum assertiones(1529), of. 126. Eck 도 같은 생각을 한다(Enchiridion, ch. I); 참조, IV. ix. 1; IV. ix. 11, 주 17. J. Latomus는 "교회의 최고 권위는 회의들에 있다"고 말한다:Adversus M. Bucerum…altera plenaque defensio(1545).

1996) Cochlaeus, De authoritate ecclesiae…(1524) I. vi. fo. D la.

1997) Clichtove, op. cit., loc. cit., and Antilutherus I. x. fo. 22b; I. xiv. fo. 31a; Eck, Enchiridion, ch. 1. "Advocate" here is in Calvin's text "Paracletum".

1998) 진정한 가견적 교회는 매일 더욱 거룩해진다는 칼빈의 생각이 여기서 신중하게 표명되어 과거의 분파들이 주장한 완전주의와 대조된다. 참조, Augustine, Against the Letters of Parmenianus III. iii(MPL 43. 95ff.; CSEL 51. 121).

1999) cf. IV. I. 10; IV. ii. 1.

2000) Chchlaeus, De authoritate ecclesiae(1524) I. v, fo. C 1b; I. vi, fo. C 3b; De cassro, Adversus haereses I(1543, fo. 8B-10G).

2001) Pseudo-Chrysostom, Sermo de sancto Spiritu x(MPG 52. 824).

2002) Cochlaeus, op. cit., I. iv. fo. B 4a; I. viii. fo. E 2a; Eck, Enchiridion(1535), fo. 21 ab.

2003) Augustine, John's Gospel xcvi. 2(MPL 35. 1874; tr. NPNF VII. 372).

2004) Clichtove, Antilutherus I. xi, fo. 23a; Cochlaeus, De authoritate ecclesiae I. iii, fo. B4a, I. V, fo. C2b.

2005) Eck, Enchiridion(1533), ch. ii. fo. 7ab.

2006) IV. xvi.

2007) Cochlaeus, De authoritate ecclesiae I. iv. fo. B 4a.

2008) 참조. I. xiii. 5.

2009) "Nativum Scripturae sensum simpliciter enarrant." 칼빈은 성경에 대해 솔직한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면 성경에 없는 말이 필요할 경우도 있다. 참조, II. v. 19. note 39.

24a)2010)"Sensum numinis", VG "la volunte de Dieu."

2011) Theodoret, Ecclesiatical History i. 7, ed. T. Gaisford, p. 40;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I. 5(MPL 69, 925; tr. NPNF 2 ser. III. 44ff.). 아타나시우스는 안디옥감독 유스타티우스의 설교와 니케이 회의(325년)에서의 논쟁을 묘사한 자기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동일 본질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성경을 근거로 한 권리를 사용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Person"(위격)이란 말에 대한 칼빈의 옹호에 대해서는 I. xiii. 3을 보라.

2012)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Loc. cit.

2013) 칼빈은 많은 인용문을 들어 고대 회의들에 대한 존경과 "말씀의 표준과 일치하는 범위 내에서" 회의들의 교리적 결정에 순종하라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참조, Reply to Sadoleto(CR V. 415; tr. LCC XXII. 225); McNeill, Unitive Protestantism, ch. iii. sec. 4. "The Conciliarism of Calvin."

2014) 본장 9절을 보라. 교회 회의들에 대한 칼빈의 자료에 대해서는 IV. vii 9, 주 23을 참조하라.

2015) ex ore Domini("주의 입에서"<받은 말씀>, 말 2:7)을 가르칠 목사의 의무를 여기서는 "pactum"("언약" 또는 "계약")이라고 부른다.

2016) Eck. Enchiridion, ch. ii(1533 ed., fo. 7b).

2017) 예레미야 40장의 인용은 잘못이다. Cadier는 에레미야 44장일 것으로 생각한다; Istitution IV. 159; 그러나 예레미야 10:21, 22:22, 25:34-36 도 참조하라.

2018) "Episcopos." 참조, IV. iii, note 8, Comm. Acts 20:28; "바울은 이 칭호로 모든 장로들(prebuteros)을 의미한다."

2019) Augustine, Against Maximin the Arian II. xiv. 3(MPL 42. 772). 아리미눔 회의(359년)는 트라키아의 니케아에서 아리우스파와 토론 후에 소위 "시대에 뒤진 신조"(Dated Creed)에서 아리안 논쟁의 형상을 시도 하였다.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ii. 16(MPG 82. 1049; tr. Ayer, Source Book, pp. 318f.). "아들은 아버지와 같다"는 모호한 표현을 아타나시우스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2020) 칼빈은 이 네 회의를 성경에 충실한 것으로 완전히 인정한다. 영국 교회의 Jewel과 Hooker같은 저술가들은 네 회의에 특별한 권위를 인정했다. 칼빈이 이 구절을 쓴 것은 1543년으로 Bullinger의 Decades(1550)보다 앞섰다. 이 저서의 뒤에 네 개의 종교 회의에 대한 말이 있고 그 중요 결정들과 그것을 지지하는 교부 문서들을 소개했다. Decades는 영국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대감독 Whitgift 주재하에 모인 1586년 회의에서 성직자의 필수 참고서로 지정한 후에 그러했다. Jewel은 Bullinger의 제자였다.

2021) 이 문장을 쓴 것은 1543년이다. 칼빈은 Peter Crabbe의 Concilia omnia에 있는 주어진 자료들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루터도 그의 독일어 논문 On the Councils and Churches에서 이용했다. 칼빈은 루터의 이 강력한 비평의 내용도 알았을 것이다. 루터의 글은 칼빈이 Strasbourg 에 있을 때에 나왔다(1539년).(Werke WA L. 509-653; tr. Work of Martin Luther V. 131-300).

2022) 여기서 언급한 우상숭배에 관한 회의는 황제 레오 III세가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V세가 소집했다.(754년). 이레네 여왕이 소집한 제2차 니케아 회의(787년)에서 형상은 다시 인정을 받았다.(Mansi XIII. 215, 377-400); tr. NPNF 2 ser. XIV. 572 f.; Ayer, Source Book, pp. 694-697; H. 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 130). 이 세대에 대해서는 E. J. Martin, A History of the Iconoclastic Controversy가 참조가 될 것이다. 특히 pp. 45, 89-105를 보라. 참조, I. xi 14, note 27.

2023) Augustine, Psalms, Ps. 113. ii 5(MPL 37. 1484; tr. LF Psalms <Ps. 115> V. 287f.).

2024) Epiphanius, Letter to John of Jerusalem(394) in Jerome, Letters Ii. 9(CSEL 54. 411; tr. NPNF 2 ser. VI. 89); Augustine, Psalms, Ps. 113 ii. 3-6(MPL 37:1483f.; tr. LF Psalms <Ps. 114> V. 90f.).

2025) I. xi. 14-16.

2026) 참조, IV. vii. 1, note 5; IV. vii. 2.

2027) 데오도레트는 콘스탄티누스가 감독들의 상호 고발문서들을 한 꾸러미 받았으며 그는 인봉해 두었다가 태워버렸다고 말한다. Ecclesiastical History I. 11(ed. T. Gaisford, pp. 60f.; MPG<ch. x> 82. 937f.; GCS 19. 47; tr. NPNF<letter x> 2 ser. III. 48f.).

2028) Leo I. Letters civ. 2-4, cvi(MPL 54. 993ff.; tr. FC 34. 178ff., 182-188).

2029) Eck, Enchiridion, ch. ii(1533 edition, fo. 9ab)에 어거스틴을 인용했다:지방 회의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그것은 총회의에 의해 시정된다.

2030) "나는 회의에서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폐단을 종식시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것을 조장한다.":Gregory of Nazianzus, Letters cxxx(MPG 37. 228) 참조, Athanasius, On the Councils I. 1-3(MPG 26. 681-688; tr. NPNF 2 ser. IV. 451-467f.); B. J. Kidd, History of the Church to 461 II. 27, 293, 304.

2031) Clichtove, Antilutherus(1525), fo. 236.

2032) 콘스탄티노플 회의(381년)(Mansi III. 557ff.; tr. NPNF 2 ser. XIV. 172f). 이 회의 당시 준(準) 아리우스파였던 마케도니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고, 부동일 본질론(不同一本質論, 즉, 아버지와 아들은 "같지 않다"는 주장)의 대표자 유노미우스는 감독직에 있지 않았다.

2033) 에베소 종교 회의(449년)를 레오 1세는 "강도회의"(Iatocinium)라고 불렀다. IV. vii. 1, 주 5와 6을 보라. 이 회의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루스의 지도하에 이단자 유티케스를 인정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플라비안은 구타를 당하고 그 상처로 인하여 얼마 후에 죽었다. 칼빈은 "교회가 거의 없다"고 하면서, 이 소란했던 회의를 한 증거로 삼아 모든 회의의 성경해석을 믿을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Peter Crabbe의 Concilia omnia I. 403ff.를 사용하였다. IV. vii. 9, 주 23을 보라. See Mansi VI. 587 ff.; Hefele-Leclercq II. i. 584-621. Ayer, Source Book pp. 511ff., and Bettenson, Documents, pp. 68ff.,에도 관계 자료가 있다.

2034) 칼빈이 여기서 반대하는 입법의 대부분은 J. Clichtove는 그의 노작(勞作) Compendium veritatum ad fidem pertinentium contra erroneas Lutheranorum assertioners(Paris, 1529)에 의해 옹호되었다. Clichtove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떤 일들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교회가 확고하게 견지해야 한다(5장). 교회는 입법권이 있으며 그 법을 어기는 것은 죽을 죄가 된다(6장). 교회는 성경에 규정이 없는 일에 대해서 교회원들은 구속(拘束)할 권리가 있다(7장). 이런 일에 포함되는 것은 단식과 음식(8장), 사제의 독신제(9장), 수도원의 맹세(10장), 한가지로만 집행하는 성만찬(11장)이다. 교령들과 교회 법을 인용하면서 Clichtove는 교직자의 재산, 7성사, 하급성직자들, 미사 고해, 연옥, 성자숭배, 성자의 유물, 형상들도 옹호한다. 칼빈은 여기서와 다음 10:12장에서 이 책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2035) Council of Constance, session 13(1415). "Definition of Communion in one kind<Sub una specie>."(Mansi XXVII. 727).

2036) Council of Elvira(ca. 305) canon xxxiii(Mansi II. ll; tr. Ayer, Source Book, p. 415); Pope Siricius, Letter to Himerius(385), ch. vii(MPL 13. 1138; tr. Ayer, Source Book, pp. 415f.); Frist Lateran Council(1123) canons iii and xxi(Mansi XXI. 282; tr. Schroeder, Disciplinary Decrees of the General Councils, pp. 180, 192f.).

2037) I. vii; I. viii. 9.

2038)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i. 8(ed. T. Gaisford, p. 46; tr. <ch. vii> NPNF 2 ser. III. 45). 여기 아타나시우스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에서의 토론을 묘사하면서 아리우스파가 요한복음 10:30에 대답하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2039) Jerome, Preface to the Books of Samuel and Malanchi(MPL 28. 596ff.); Cochlaeus, De authoritate ecclesiae et scipturae I. ix. fo. E 4b; II. i. fo. H 4a; II. ii. fo, J 1a.

2040) 참조. IV. viii. 1, note 2.

2041) III. iv. 17f.

2042) Clichtove, Antilutherus(1525) I. x. fo. 22a; Compendium veritatum, ch. vi; 참조, IV. ix. 14, 주 22.

2043) 본절의 위에서

2044) III. xix. 7-9.

2045) Clichtove. Antilutherus(1525) I. xv. fo. 31ab.

2046) Eck, Enchiridion(1533), ch. vii. fo. 40b.

2047) "Conscientiae forum.":아퀴나스가 자주 사용한 말이다. 예컨대 Summa Theol II II ae. Ixxxix. 7, obj. 3; III. xix. 15, 주 23. IV. x. 3-5(1550)에 있는 양심에 관한 칼빈의 예리한 논의는 III. xix. 1(1559); 4(1536); 14-16(여러시기에) 에 있는 구절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2048) "Proximo capite." 이것은 1543년판과 1553년판에서 그대로 옮겨 온 말이다. 거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장이(현재는 III. xix) "인간의 전통에 관하여"라는 장의(현재의 IV. x. 에 있는 자료를 포함) 바로 앞에 있었다.

2049) 여기서 "개념", "지성", "오성", "안다", "지식"으로 번역된 라틴어는 각각 "notitia", "mens", "intelligentia", "scire", "scientia"다.

2050) Quintilian, Institutes of Oratory V. xi. 41(LCL Quintilian II. 294f.). Cf. III. xix. 15. note 23.

11a)2051)"interrogationem", 프랑스어판에는 response, 베드로전서 3:21에는 이 구절에 대한 주해에서(CR LV. 269) 칼빈은 이 말을 examen 이라고 번역했으나 "Primum interrogatio hic vice responsionis vel testimonii capitur"("interrogation"은 여기서 응답 또는 증언으로 해석한다)고 설명한다. Vg에는 "interrogatio"; KJV에는 "answer"; RSV 에는 "appeal to God for a clear conscience"라고 번역되었다. 참조,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tr. From W. Bauer's Greek-German Lexicon by W. F. Arndt and F. W. Arndt and F. W. Gingrich, S. V. ejperwvthma; The Interpreter's Bible XII. 134. 여기서는 이 후자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2052) 본 절의 첫 문장.

2053) 로마서 13장과 본장 3절 처음에 있는 말을 가리킨다.

2054) 본장 8절을 보라.

2055) II. viii. 5.

2056) Eck, Enchiridion(1533), ch. vii. fo. 40b.

2057) IV. v. 5-11.

2058) 참조. IV. ix. 14, 주22.

2059) 참조, 본장 6절, 교회법(본장 8, 9, 14절)에 관한 참고서:Clichtove Antilutherus(1525) I. xiii; I. xxix, fo. 21b-22b, 60b-62b; Eck, Enchiridion(1535), ch. xii. fo. 406ff.; Catholic Encyclopedia, art. 교회법을 배척하는 칼빈이 예외를 인정한 데 대해서는 본장 29절과 30절을 보라.

2060) "evqeloqrhsceiva""

2061) "Nomothetas." 칼빈은 "입법자"라는 듯의 희랍어를 그대로 옮겼다. 야고보서 5:12를 보라. 여기서는 각국 통치자들이 신교도를 박해하는 칙령을 반포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언급하는 벌들은 기독교 강요 서두의 "왕께 드리는 헌사"에 있는 것과 같기(1과 2의 처음) 때문이다.

2062) 참조, "왕께 드리는 헌사", loc. cit.; 특히 "사형선고", "일천 번의 화형", "나의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가려고" 등의 말에 주의하라.

2063) 참조. II. viii. 33f.; IV. xix. 26; Erasmus, Enchiridion, Fifth Rule(LCC XIV. 340, 주2).

2064) 칼빈도 다른 개혁자들과 같이 청년 시대에 알게 된 구식 예배에 환멸을 느꼈다.

2065) Augustine, Letters lv. 19. 35(MPL 33. 321; tr. FC 12. 290f.). "축일 8일간"은 "octave", 즉, 교회가 정한 8일간의 행사를 의미한다. 프랑스어 판에는 "세례 8일간"이라고 했다.

2066) IV. xii. 22-27.

2067) Augustine, Letters liv. 1. 1(MPL 33. 200; tr. FC 12. 252).

2068) 참조, I. ix. 3, 주 3; IV. xiv. 20. 주47.

2069) 참조, Comm. Acts. 8:21; On the M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passim(CR VI. 453-530; tr. Calvin, Tracts I. 140-183; LCC XXII. 184-216).

2070) Sec. 1. above.

2071) Clichtove, Antilutherus(1525) I. x, fo. 22b. 회원들을 논한 많은 저술가들이 사도행전 15장을 근거로 회원들의 권위를 비슷하게 논했다. 예를 들면 LCC XIV. 178f. 에 있는 John Major를 보라.

2072) IV. ii. 4.

2073) IV. i. 3-6; Reply to Sadoleto에, 개혁과 목사들이 "교회를 찬양한다"고 평신도가 즈언하는 구절이 있다(CR V. 412; tr. LCC XXII. 252).

2074) Clichtove, Antituthures(1525) I. iv; I. vi; fo. 5(Pseudo­Dionysius를 루터 공격용으로 인용); I. x, fo. 9, 12b, 21b.

2075) IV. viii. 8, 13, 14.

2076) "Nec nare sciunt, nec literas"; plato, Lawa III. 689D.

2077) "cacoxhliva"

2078) Augustine, Letters liv. 1. 1(MPL 33. 200; tr. FC 12. 252f.). 참조. Vincent of Lrins, Commonitorium ii. 3(tr. LCC IX. 38).

2079) Platyna는 Forged Decretals 와 Gratian을 따라 알렉산더 1세(109-116)에를린다(영어판<1685>, p. 16). 참조, Hinschius, Decretales Pseudo-Isidorianae, p. 99(Alexander 1세의 제1서간, 9장); Gratian, Decretum III. ii. 20(Friedberg I. 1358; MPL 187. 1739).

2080) Augustine, Letters Iv. 18. 33(MPL 33. 320; tr. FC 12. 289).

2081) 참조, IV. x. 17, 주 31.

2082) 참조, I. V. 13.

2083) Clichtove, Antiluthuerus I. xi, fo. 23b.

2084) Augustine, John's Gospel x1vi. 5, 6(MPL 35. 1730; tr. NPNF VIII. 257f.). 마지막 말들은 1553년에 추가되었음.

2085) 참조, IV. xx. 2.

2086) IV. x. 1, above.

2087) 이 절에는 공중 예배는 단순하며 예법에 합당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는 칼빈의 근본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2088) 참조, III. xx. 16, 주 27. 칼빈은 그의 Sermons on Jacob and Esau ix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의식을 기뻐하시지(S'amusera) 않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늘로 향하여 모자를 벗는다"(CR LIX. 140f.).

2089) 참조, Sec. 8, 주 19.

2090) 칼빈은 인간의 전통과 하나님의 승인을 이유로, 기도할 때에 무릎을 꿇는 것을 열렬히 지지하지만 결국은 기도의 자세 문제(유사한 다른 문제들과 함께)를 교회의 유익(ecclesiae utilitas)과 사랑의 판단에 맡긴다. 이런 부차적인 문제에서 취할 분별력 있는 자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31절에서 여자들의 머리를 덮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고려할 점은 관습과 인정과 중용의 길이라고 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F. Wendel 은 칼빈이 "원시 교회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Wendel, Calvin, pp. 229f.).

2091) Sec. 29.

2092) "Quod diximus to; prevpon" 참조, secs. 28, 29, above.

2093) 본 장의 이 마지막 구절은 칼빈의 특질을 나타낸다. 그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aedificatio ecclesiae)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외적인 권징 문제로 교회간에 우월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는 여기서 루터파와 개혁파와의 관계가 개선될 가능성을 생각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참조, W. Nijenhuis, Calvinus Oecumenicus, pp. 131-194. 프랑스의 개혁과 교회들은 루터파의 성찬 참가를 허락하기로 Charenton 종교 회의에서(1631년) 특별히 결정했다; J. Aymon, Tous les Synodes nationaux des glises rformes de France II. 501; McNeill, Unitive Protestantism, p. 269; Heppe RD, p. 669.

2094) 교회적 징계에서 해당되는 교회 권한의 셋째 부분인 재판권, 즉, potestas의 중요성에 주의하라. 참조, IV. viii. 1, 주2; J. Bannerman, The Church of Christ I. 277f.; Niesel, The Theology of Cavin, pp. 197ff.; Wendel, Calvin, pp. 46ff., 56, 226-234; J. Courvoisier, "La Sense de la discipline sous la Genve de Calvin" in Hommage Karl Barth.

2095) 참조. III. iv. 14, 15; IV. vi. 4, 주8. 개혁자들이 말씀의 권위와 연결시킨 열쇠의 권한은 개혁기 논쟁의 중요 쟁점이 되었다. 여기서 칼빈이 공격하는 주장은 John Fisher 주교가 말한 것이다. Fisher는 그의 저서 Confutatio, p. 244에서 "Petro claves committuntur ceolorum"이라고 말했다. 참조. Faber, Opus adversus nova quaedam…dogmata Martini Lutheri(Leipzig, 1528) G gg 1­GG 2 and passim; A. Pighius, Hierarchiae ecclesiasticae assertio(Cologne, 1536), fo. 94E-95D.

2096) 이것은 건전한 성경 해석에 대한 칼빈의 기술중의 하나이다. 참조, 갈라디아서 4:22 주석: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이것을 우리는 단호하게 고려해야 한다." II. v. 19, 주 39; III. iv. 4, 주8.

2097) 참조. IV. viii. 8, 주 7; IV. viii. 9, 주9:성경이 하나님에 의해 저술되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교훈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뜻이다.

2098)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i; xvii. 2; xxv. 2; J. Faber, Malleus in haeresim Lutheranorum(Cologne, 1524). fo. 80bf.

2099) 이것은 분명히 쯔빙글리와 블링거의 견해를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에 교회를 치리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이고 권위적인 역할을 부여하였다. 참조. W. Khler, Das Zrcher Ehegericht und seine Auswirkung; R. Staehelin, Huldreich Zwingli sein Leben und Wirken II. 144. 여기에는 쯔빙글리의 영향하에 종교 회의가 국가에 파문권을 부여하였다는 말이 있다. R. Ley는 Kirchenzucht bei Zwingli, pp. 99-105에서 징계권에 대한 정부의 관할을 쯔빙글리가 정당화 했음을 보여준다. 볼링거는 행정관들이 종교를 감독하는 기능을 강조하는 반면에 성례전에 있어서는 그들을 제외시켰다. Decades II. vii(The Parker Society, Bullinger U. 323ff., 329)

2100) 참조, 본장 sec. 4와 IV. xii. 7.

2101) Ambrose, Sermon Against Auxentius …on Yielding the Milan Basilica xxxvi(MPL 16. 1018; tr. NPNF 2 ser. X. 436); 참조, IV. xii. 7.

2102) 칼빈이 일인에 의한 정치보다 다수인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다는 것은 IV. iii. 15에 나온다. 참조. IV. iv. 10, 11과 특히 IV. xx. 8.

2103) 주 9를 보라. "장로회"(consessus Seniorum)는 징계를 행사하는 당회나 조직을 가리킨다.

2104) Cyprian, Letters xvi. 2; xvii. 2; xiv. 4(CSEL 3. ii. 518, 522, 512; tr. ANF <letters ix. v, and xi. respectively> V. 290, 283, 292). 처음 편지에서 키프리안은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라는 말을 사용한다.

2105) 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의 구별에 대해서는 IV. iv. 1; IV. xi, 1에서 언급했다. Ecclesiastical Ordinances(1541)(CR X. i. 18. 22; tr. LCC XXII. 60, 63)을 보라. 이 문제는 Westminster Assembly에서 토의되었고, 다수파였던 장로파에 대해 에라스투스주의자들과 독립파가 반대했다(1644년). 이 회의에서 채택된 장로교회 치리 형태(The Form of Presbyterial Church­Government)는 말씀 선포자들의 외에 "장로라고 보통 칭하는 교회 치리자들"을 인정했다. 회중 교회의 배경과 발전에 영향을 준 다스리는 장로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보라. H. M. Dexter, The Congregationalism of the Last Three Hundred Years, pp. 238, 260ff., 276, 314, 398f., 424ff.

2106) Ambrosiaster, Commentary on I Timothy 5:1(MPL 17. 475f.).

2107) "Officiales." "official" 혹은 "vicer­general"이라고 불리우며, 12세기부터 교구 재판권을 맡은 주교의 대리자였다. 참조. Catholic Encyclopedia, art. "Vicer­General."

2108) 본장 5절에서, "ius gladii", 즉, 칼을 사용하여 벌을 주는 권리와 교회 징계에서 행사되는 영적 권한을 구별했다. 그러나 교황에게 칼의 권한이 있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한 것은 이노센트 3세와 그 이후의 교황들이었다. 참조. Innocent III, Regestas VII. 212(MPL 215. 527); Innocent IV. "Potestas gladii apud ecclesiam est implicata"; Mirbt, Quellen zur Geschichte des papsttums, 제 5 참, p. 198; Boniface VIII, "The temporal sword is in the power of Peter"; Unam sanctam(1302)(Mirbt, op. cit., p. 210; tr. O. J. Thatcher and E. McNeal, Source Book for Medieval History, p. 315.

2109) 참조, sec. 5, above; IV. xx. 10.

2110) Ambrose, Letters xx. 23, 19(MPL 16. 1001, 999).

2111)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살펴 보려면, J. P. Whitney, Reformation Essays V. "The Growth of Papal Jurisdiction Before Nicholas I", pp. 130-168, and W. Hobhouse, The Church and the World in Idea and History, lecture 5, "The Pope and the Empire", pp. 167-215가 유익한 참고가 될 것이다. 참조. Luther, Why the Books of the Pope and His Followers Were Burned(Werke WA VII. 161-182; tr. B. Woolf, Reformation Writings of Martin Luther), pp. 76-88.

2112) Augustine, Psamls, Ps. 118. xxiv(MPL 37. 1570; tr. LF<Ps. 119; 115> Psalms V. 418.

2113) Bernard, Oo Consideration I. vi. 7; II. vi. 9-11;(MPL 182, 736, 747f.; tr. G. Lewis, Bernard on Consideration, pp. 24, 45ff.).

2114) 본장 8절 주 15를 보라. the Council of Arles(1234년?)에 대한 언급은 착오이다. 참조, Os V. 207, 주5.

2115) Gregory I. Letters I. 5; IV. 20; III. 61; V. 36, 39(MGH Epistolae I. 6, 254, 221, 318, 329; MPL 77. 449, 698 <III. 65>, 662, 766 <V. 40>, 750 <V.21>, tr. NPNF 2 ser. XII. ii. 75f., 150f., 141, 176, 173.)

2116) 콘스탄틴의 헌서(Donatio, 또는 Constitutum, Constantini)는 교황 바오로 1세(757-767) 당시 교회 법원에서 만든 위조 문서인 것 같다. 콘스탄틴 대제가 교황 실베스터 1세에게 보낸 헌서의 형식을 취한 것인데, 이 헌서에 의해서 형식을 취한 것인데, 이 헌서에 의해서 교황은(유대, 희랍, 아시아, 트라키아, 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등) 광범한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 이것은 실지로 피핀의 헌서(754년)를 거짓 역사 문서로 정당화한 것이다. 피핀의 헌서에 의해서 롬바르드족에게서 빼앗은 땅, 곧 이탈리아를 횡단하며 22개 도시를 포함한 지역이 교황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콘스탄틴 헌서가 위작인 것은 Reginald Pecock와 Cusa의 Nicolas에 의해 폭로되고 Lorenzo Valla에 의해 풍부하고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제시되었다(1440년). C. B. Coleman, The Treatise of Lorenzo Valla on the Donation of Constantine(text and translation)., pp. 5-7, 10-19를 보라. Valla는 이 문서의 "상스러운" 용어를 조롱하며, 후대의 어휘사용을 근거로 이것이 후대에 작성되었다고 주장했다. Valla의 저서 Ulrich von Hutten 판(1520년)은 Luther의 설득력 있는 소책자 Einer aus den hohen Artikeln des p pstlichen Glaubens, genannt Donatio Constantini Werke WA L. 69-89의 토대가 되었다. 칼빈의 친구 Sleidan은 그의 저서 De quatuor summis imperiis(1559), p. 147; tr. A Brief Chronycle of the Principall Empires, Babylon, Persia, Grecia, and Rome…(1525), fo. C. 2a-3a, N 4a와 Augustinus Steuchus Eugubinus, Contra Laurentium Vallam in falsadonatione Constantini(Lyon, 1547)이었다. 참조, IV. vii. 27, 주 57; W. Ullmann, The Growth of Papal Government in the Middle Ages, pp. 62-65. 74-86.

2117) 황제 헨리 4세(1056-1106).

2118) 힐데브란드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Platyna의 경탄과는 완전히 다르고, Barnes, op. cit., p. 8a-S 3b와 Sleidan, The Four Empires(라틴문, p. 262; 영문, fo. 79b ff.)와 일치한다.

2119) Gregory I. Letters V. 57a(MGH Epistolae I. 364.

2120)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I. xx; IV. viii(ed. T. Gaisford, pp. 91. 310; MPG <I. xix> 82, 962-966, 1139f.; GCS 19. 69; tr. NPNF <I. xix> 2 ser III. 56, 113.

2121) Ambrose, Letters xxi. 2, 4, 17(MPL 16. 1003f., 1006; tr. NPNF 2 ser. x. 422ff.).

2122) Ambrose, Sermon Against Auxentius on Surrendering the Basilicas, chs. i, ii, iii, xxxiii(MPL 16. 1007f., 1017; tr. NPNF 2 ser. X. 430, 435).

2123) Gregory I. Letters IV. 20(MGH Epistolae I. 254; MPL 77. 689; tr. NPNF 2 ser. XII. 2).

2124) Gregory I. Letters I. 43; V. 37, 39, 45(MGH Epistolae I. 69, 320ff., 327, 344; MPL 77. 689, 503, 744ff., 749, 719f. <V. 19>; tr. <in part> NPNF 2 ser. XII. 2. 150f., 169).

2125) 참조, IV. xi. 1, 주2; IV. xi. 5-6. 열쇠의 권한은 재판권의 한 부분인 권징과 파문과 관계가 있다.

2126) "Clericos" 참조, IV. iv. 9; "나는 그들에게 더 적절한 이름이 붙여지기를 원한다."

2127) 참조, 본장 22절.

2128) 역에 사용된 비유들에 유의하라. "힘줄"(IV. xx. 14 참조), "굴레", "아버지의 매." 권징에 의해서 교회는 단결되며, 개인은 제재를 받고 필요한 때에 "자비의 권징을 받는다." 참조, K. Barth,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tr. Thomson, p.78.

2129) 권징의 절차는 성경에 있는 것이며 교회는 장로회(consessus Seniorum)를 통하여 행동한다. 참조, IV. xi. 6; p. 1217, 주10.

2130) 본장 6절 참조.

2131) 각각 "Delicta", "scelera", "flagitia"에 해당된다.

2132) 합당치 못한 사람들을 참예시킴으로써 주의 성찬이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려는 생각은 칼빈이 권징을 강조하는 근본 동기가 되었다. 참조, 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pp. 197ff. 이 점은 1537년 1월 13일에 제네바 회의에서 제출한 조항들에 명백하게 언명되었다. 거기서 칼빈은 이런 모독에 대해 엄숙한 경고를 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교회 내에 권징과 출교의 규칙을 정하셨다."(CR X. i. 7-9; LCC XXII. 50). 참조, Calvin, Letter to Somerset(1548년 10월 22일:"권징을 유지시켜 추악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의 만찬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감독과 교구 목사의 의무다"(CR XIII. 76; tr. Calvin, Letters II. 197).

2133) Chrysostom, Homilies on Matthew 1xxxii. 6(MPG 58. 742; tr. NPNF X. 496).

2134) Augustine, Sermons ccxciv. 3. 3(MPL 38. 1337); clxi. 3. 3(MPL 38. 879; tr. LF Sermons II. 801f., 참조, Smits II. 49.

2135) Chrysostom, Commentary on I Cor. 5:5, hom. xv. 2(MPG 61. 123).

2136) 본장 3절의 첫 부분.

2137) Cyprian, Letters 1vii; xvi. 2; xvii. 2; xiv. 4(CSEL 3. ii. 650ff., 518, 522, 512; tr. ANF <nos, 1iii, ix, xi, v, respectively> V. 337f., 290, 292, 283). 이 구절의 마지막에서 키프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감독이 된 이후로 여러분의 조언이나 신자들의 찬성을 얻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2138) 참조, IV. xi. 3-4.

2139) IV. xi. 6.

2140) Council of Ancyra(314) canons ix, xiv, xx, xxiii-xxv(Mansi II. 518-522; tr. with notes, NPNF 2 ser. XIV. 66f., 70, 73-75). Libri poenitentiales에서 장기간 또 종신 참회를 규정한 예가 많다. 예컨대 McNeil and Gamer, Medieval Handbooks of Penance, pp. 280, 291, 302, 304, 339, 358을 보라.

2141) Tertullian, On Modesty xx(CCL II. 1324f.; tr. ANCL XVIII. 114f.).

2142) Cyprian, Letters 1ix. 16(CSEL 3. ii. 686; tr. ANF V. 345).

2143) Chrysostom, homily De non anathematzandis vivis atgue defunctis MPG 48. 943ff.).

2144) Augustine, Letters 1xi. 2; cxxviii. 2; clxxxv. 6. 23; clxxxv. 10. 44(MPL 33. 229, 489, 803, 812; CSEL 34. ii. 223; 44:31; 57:21; tr. FC 12. 302f.<주 7>; 30. 164, 182f.).

2145) Augustine, Against the Letters of Parmenianus II. i. 3. III. i. 1; III. ii. 15; III. i. 2(MPL 43. 51, 82, 94, 83); Cyprian, Letters lix. 16(CSEL 3. ii. 686; tr. ANF<liv. 16> V. 345.)

2146) 참조. IV. i. 13.

2147) Augustine, Against the Letter of Parmenianus III. iii. 17-19; III. i. 1, 3(MPL 43. 93-97, 81-83); 참조, Cyprian, Letters lix(CSEL 3. ii. 686; tr. ANF V. 397-402).

2148) Augustine, op. cit., III. ii. 14(MPL 43. 93).

2149) Augustine, Letters xxii. i. 4. 5(MPL 33. 92; tr. FC 12. 54f.).

2150) Augustine, Against the Letter of Parmenianus III. ii. 15, 16(MPL 43. 94f.).

2151) 이것은 쯔빙글리의 입장을 묘사한 것이며 루터에게서도 발견된다. 참조, Werke WA Tischreden II. no. 1299; tr. LCC XVIII. 88; Zwingli, Commentary of True and False Religion(1525)(CR Zwingli III. 891f.); Liberty Respecting Food in Lent(CT Zwingli I. 8-136; tr. S. M. Jackson,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I. 71-112). Bucer는 "회개 및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에 찬성한다(Ein summarcher Begriff der Christlichen Lehre 1548 [R sum sommaire de la doctrine, ed. F. Wendel], pp. 70ff.).

2152) 본장 15절을 보시오.

2153) 본절에서는 재난의 때에 공적으로 회개하는 금식의 가치를 분명히 인정한다. 참조, 시편 35:14과 고린도전서 7:5 주석, 칼빈은 금식의 근거를 구약에서 찾지만, 구약의 회개 방식을 문자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거부한다.

2154)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사순절 금식을 지지하기 위한 논거의 하나가 되었다(Cabrol, Dictionnaire, art. "Carme").

2155) Augustine, On the Morals of the Manichees II. xiii. 27-28(MPL 32. 1356f.; tr. NPNF IV. 76); Against Faustus the Manichee xxx. 5(MPL 42. 493f.; tr. NPNF IV. 330).

2156) 즉,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참조, Augustine, Sermons ccv, ccvi, ccvii, ccviii, ccix, ccx, ccxi(MPL 38. 1039-1058); Augustine, Letters IV. 15. 28(MPL 33. 217f.; tr. FC 12. 283ff.); Jerome, Commentary on Isaiah xvi con Isa. 58; 3)(MPL 24. 564):Against Jovinian II. xvii(MPL 23. 311; tr. NPNF 2 ser. VI. 401f.). 참조, Cadier, Institution IV. 233, 주4).

2157) "cacoxhliva"

2158) Socratie, Ecclesiastical History v. 22, in Cassiodorus Tripartite History IX. 38(MPL 69. 1155; tr. NPNF 2 ser. II. 131).

2159) Augustine, Letters 1iv. 2. 2-4. 5(MPL 33. 200ff.; tr. FC 12. 253ff.).

2160) Jerome, Against Jovinian II. v-xvii(MPL 23. 290ff.; tr. NPNF 2 ser. VI. 391-402); Letters 1ii. 12(CSEL 54. 435; tr. NPNF 2 ser. VI. 95). 참조, IV. xiii. 9.

2161) Apostolic Canons x1ii-x1iv, xxv, xxvi, xxxvi(본문과 번역문, Fulton, Index canonum pp. 94f., 86f., 90f.).

2162) 제2차 톨레도 회의(527) 교회법 v; 제3차 톨레도 회의(589) 교회법 xviii(Mansi VIII. 787; IX. 997).

2163) 참조, IV. vii. 8, 주 19.

2164) Xenophon, Cyropaedeia VIII. viii. 8(LCL판 II. 442ff.).

2165) 참조, IV. iv. 10, 주 27; IV. ix, 14; IV. xiii. 3, 8.

2166) 디모데전서 4:3 주석 참조(LCC XXIII. 345). 거기서는 이 구절을 그대로 반복했다(1543). 참조, Clichtove, Antilutherus 1. xxi. fo. 43a-46a.

2167) Gratian, Decretum I. xxvi(MPL 187, 149ff.; Friedberg I. 95ff.).

2168) Augustine, On the Good of Marriage xviii. 21(MPL 40. 387; tr. NPNF III. 408). RSV, 디모데전서 3:2; 디도서 1:6; "Married only once."(한 번만 결혼함)이라고 번역했다. 1971년 제 2판은 "the husband of one Wife"(한 아내의 남편)이라고 고쳤다.

2169) Letter of Pope Siricius to Himerius i. 7(MPL 13. 1138ff.; tr. Ayer, Source Book, pp. 415f.).

2170) "ajntivtupoi" 참조, II. xi. 3.

2171) 칼빈이 이 글을 기록할 당시에(1543) 그의 아내는 아직 살아있었다.

2172) Tertulian, Exhortation to Chastity, vii(CCL Tertullianus II. 1024ff.; tr. ANF IV. 54).

2173) 파프누티우스(Paphnutius)는 금욕 생활을 하는 유명한 감독이었으나 니케아 회의(325)에서 독신 생활을 요구하는 제안에는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결혼이 존귀한 것이며 합법적인 동거는 곧 정절을 지키는 것이므로 제안된 규칙은 유해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의견이 우세했다.; Socrates, Ecclestiastical History i. 11; Sozomen, Ecclesiastical History i. 23; Cassiodorus, Historia Tripartita II. 14(MPL 69. 933; tr. NPNF 2 ser. II. 18. 256).

2174) 중세기 문서들에 대한 많은 언급들에 대해서는 OS V. 236f.을 보라. 칼빈은 Pighius와 De Castro와 Latomus 같은 사람들이 성직자 독신제를 강력하게 옹호한 것도 알고 있었다. IV. iv. 10, 주 27과 거기에 인용된 Cabrol, Lea, Leclercq, Coulton 등의 구절을 보라.

2175) Jerome, Against Jovinian I(MPL 23. 221-296; tr. NPNF 2 ser. VI. 346- 386). In Book I, 각처에서, 제롬은 처녀가 유부녀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견해를 공박한다. 그러나 마르키온과 마니교도와 타티안의 견해들을 거부한다.

2176) Pseudo-Chrysostom, Homily on the Finding of the Cross. 이것은 Erasmus가 편집한 Chrysostom(Basel, 1530) II. 130에 들어있는 말이지만,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생략되었다.

2177) III. viii. 4

2178) III. viii. 5.

2179) "ejqeloqrhsceiva"" 참조, 다음 문장에 나오는 "voluntarii omnes cultus"와 제2차 헬베티아 신앙고백 XVI. 5(Schaff, Creeds III. 269; tr. p. 866).

2180) Council of Orange(529) canon xi(Mansi VIII. 714). 이것은 Augustine, City of God XVII. iv. 7(MPL 41. 530; tr. NPNF II. 342)에 기초하였다.

2181) "Sacrifici."

2182) 참조, Bernard, De conversione, ad clericos xx. 36(성직자들의 무절제와 죄악을 통탄하는 장<章>에서):"결혼이라는 대책을 버린 그들은 후에 온갖 죄악에 자신을 내던진다."(in omne deinceps flagitium effluentes)(MPL 182. 854f.; 참조, Beveridge, Institutes II. 475, 주2).

2183) "Oeconomia,"

2184) "Syngraphae."

2185) 참조, II. iv. 1, 3; II. x. I; II. xi. 4; III. iv. 32; III. xvii. 6; III. xxi. 5-7.

2186) 참조, sec. 4. above.

2187) 풍자적인 기질의 소유자인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자들보다 먼저 종교적인 맹세를 비평했다. 그의 Colloquies에 있는 "The Religious Pilgrimage"를 보라. Lambert Grunnius(1515)에게 보낸 유명한 서한에서(Erasmus, Epistolae 477) 그는 직접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서 수도원 맹세에 대하여 논하지 않겠다…이런 종류의 의무는(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다) 신구약 성경의 어느 곳에도 없다"(tr. J. J. Mangan, Life, Character, and Influence of desiderius Erasmus I. 23). 이 서한에는 소년들을 재촉하여 맹세를 하도록 하는 것에 대한 비난이 가득하며, 또한 자신을 스테인(Steyn)수도원에 대한 복종 의무에서 면제해 달라는 탄원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수도원을 훨씬 전에(1492년) 떠났다. 루터도 수도원 맹세를 공격했다. 루터의 Method of Confession(Werke WA VI. 167f.; tr. Works of Martin Luther I. 98-101), Topcs [Themata]on Vows(1521)(Werke WA VIII. 313-366); On Monastis Vows(1521)(Werke WA VIII. 564-669)을 보라. Zwingli, Commentary on True of False Religion xxii. "Vows"(CR Zwingli III. 260-267; tr. Works, ed. S. M. Jackson, III. 260-267). 맹세를 변호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Clichtove, Antilutherus(1545) fo. 133a-215b; Compendium veritatum ad fidem petinentium(Paris, 1529), ch. x, fo. 98 a-526.

2188) 참조, Gregory Nazianzus, Fourth Oration Against Julian 1xxi(MPG 35. 594); Pseudo-Basil, Monastic Constitutions xxv. xxx(MPG 31. 988f., 994); Chrysostom, Against Opponensts of Monastic Life III. 2(MPG 47. 339f.).

2189) "Malus choraules bonus est symphoniacus." Erasmus, Adagia IV. ix. 38(L. 2. 1153).

2190) Augustine, Letters x1viii. 2; 1x. 1(MPL 33. 188. 228; tr. FC 12. 232. 301).

2191) Augustine, 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 xxxi. 67; xxxiii. 70-73(MPL 32. 1328-1341; tr. NPNF IV. 59f.). 칼빈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요약 방법을 여기서도 사용했다. 참조, Smits I. 243 ff.

2192) Augustine, On the Works of Monks xxii. 27(MPL 40. 569; tr. NPNF III. 517).

2193) Augustine, 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 xxxiii. 70-73(MPL 32. 1339-1341; tr. NPNF IV. 59f.).

2194) Aquinas, Summa Theol. II IIae. clxxiv. 3; clxxvi. 1. 수도사들을 교회의 가르치는 덕분에 허락하는 문제로 파리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Aquinas는 이 입장을 변호했다. 참조, Contra impugnantes Dei cultum et religionem(Opuscula omnia IV. 1-195; tr. J. Procter, Apology for the Religious Orders), ch. i; De perfectione vitae spiritualis(Opuscula IV. 196-204; tr. J. Procter, The Religious state), esp. chs. xix, xx.

2195) Apuinas, Summa Theol. I IIae. cviii. 4; II IIae. clxxxiv. 3; cvi; Chrysostom, On Compunction of Heart I. 4(MPG 47. 339f.); Against the Opponents of the Monastic Life III. 14(MPG 47. 372);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 xxx. xxxii(MPL 34. 31; tr. NPNE II. 531).

2196) II. viii. 56f.

2197) 칼빈은 금욕적 명상생활과 활동적 생활을 분리시키는 이중 표본에 반대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많은 신비주의자들도 이 입장을 취했다. 예컨대, Meister Eckhart A Modern Translation, by R. B. Blakney, pp. 127, 238; LCC XIII. 207을 보라.

2198) 여기서 칼빈은 그가 대체로 충실히 따른 주석상의 원칙을 말한다. 문맥과 본래의 의미를 무시하고 성구들을 무분별하게 인용하는 것은 그의 방법과는 동떨어져 있다.

2199) 참조, Ambrose, Concerning Widows xii. 73;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계명이고, '너의 소유를 팔아'라는 것은 권고이다"(MPL 16. 256; tr. NPNF 2 ser. X. 403); Jerome, Commentary on Matthew III. on Matt. 19:21(MPL 26. 137).

2200) Augustine, 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 xxxiii. 73(MPL 32. 1341; tr. NPNF IV. 60).

2201) 그런 종교 단체들에 대해서 분파주의라고 하는 고발은 옛부터 있었다. 위클리프는 칼빈보다 이 점을 더 강조한다. H. B. Workman, John Wyclif II. 93; LCC XIV 32f., 44, 60에 여기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

2202) Augustine, On the Work of Monks xxviii. 36(MPL 40. 575f.; tr. NPNF III. 517); Letters 1xxviii. 9(MPL 33. 272; tr. FC 12. 384).

2203) 이 "격언"의 출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OS V. 253에 언급된 Athenaeus, The Deipnosophists XIV. 625에서 아일랜드 사람들을 교만하고 가혹하다고 묘사한 것이 이 격언을 암시하는지 모르나, 비슷한 말은 없다.

2204) "cacozhlivan" 칼빈이 어거스틴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 예는 극히 적은데, 이것은 그 중의 하나다.

2205) IV. x. 17; VI. xiii. 1.

2206) 참조, III. xv. 6; IV. xiii. 2.

2207) Clichtove, Antilutherus I. xxi, fo. 44b; Propugnaculum ecclesiae adversus Lutheranos II. viii. ff., fo. 75ff.

2208) Cyprian, Letters iv. 2(CSEL 3 ii. 474; tr. ANF [letter 1xi. 2]v. 357.

2209) 이 문장과 본절의 후반은 칼빈이 실제로 독신 생활을 그리스도인의 어떤 소명에 필요한 조건으로 인정한 것을 알려준다. 참조, IV. iv. 10; IV. v. 10; IV. xii. 23.

2210) 참조, IV. xiii 8, 주 11); 루터가 1524년 8월에 세 수녀들에게 보낸 서한(Werke WA. Briefe III. 326-328; tr. LCC XVIII. 270f.). 이 서한에는 그의 소논문 On Monastic Vows(Werke WA VIII. 564-669)가 반영되어 있다. 참조, sec. 8, 주 11).

2211) 가난과 복종의 서약. 이것은 루터의 On Monastic Vows 에 비교적 자세히 논의되어 있다.(Werke WA VII. 641-647).

2212) 본장 2절.

2213) 본장 1절.

2214) Clichtove, Antilutherus(1524) I. xxi, fo. 39b. 루터는 On Monastic Vows에서, 맹세에 매여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적인 자유를 주장하라고 권고했다.(Werkes WA VII. 668).

2215) 본장 17절.

2216) 14장부터 17장까지는 성격적인 성례전에 대한 해석이며, 18장과 19장은 특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미사론과 또한 성사라고 부르는 다섯가지 의식을 논박한다. 칼빈의 성례론을 다룬 광범한 문헌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J. Beckmann, Vom Sacrament bei Calvin; W. F. Dankbaar, De Sacramentsleer van Calvijn;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esp. chs. vi, xi-xviii; A. Lecarf, Etudes Calvinistes, pp. 33-43("L'election et le sacrement"); D. M. Baillie, The Theology of the Sacraments. Pannier's note, Institution III. 199, p. 317에 대한 주 a를 보라.

2217) 칼빈이 쓴 문구의 출처, Augustine, De catechizandis rudibus xxvi. 50(MPL 40. 344; tr. ACW II. 82). 참조, Letters cV. 3. 12(MPL 33. 401; tr. FC 18. 205); Questions on the Haptateuch III. 84(MPL 34. 712). 여기서(1536년판) 사용된 말은 Instrucition in Faith(1537)(OS I. 411; tr. Fuhrmann이 p. 93의 주 223에서 칼빈이 사용한 "표징", "표지", "인", "표"(라틴어의 tessera, 불어의 mereau)등의 용어를 설명한 것을 보라. 이런 말들을 "상징"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며, 칼빈이 성레전에 대해서 상징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참조, IV. xvi. 4, 주 7; G. MacGregor, Corpus Christi, p. 177; Pannier, loc, cit., 주 b; OS V. 306, 주 e. 참조, IV. xv. I. 주 3; IV. xvii. 10, 주 29.

2218) Augustine, Letters cxxxviii. I. 7(MPL 33. 527; tr. FC 20. 40).

2219) 여기 1559년판에 "Homil, 60 ad populum"이라는 주가 있는데, 이것은 Basel에서 출판된 1530년판 크리소스톰 전집 IV. 581에 있는 본문과 관련된다. 그러나 현대판 본문과는 관계가 없다.

2220) Augustine, John's Gospel 1xxx. 3(MPL 35. 1840; tr. NPNF VII. 344). 참조,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 135f. 여기에 인용된 베드로전서 3:21에서 "육신"이란 뜻의 carnis가 불가타역에서 사용된 것 같이 여기서도 사용되었고 savrx라는 헬라어에 해당된다. IV. xvi. 21에서 칼빈은 Corpus, "몸"이라는 말을 썼다.

2221) "sfragivda". 여기서의 논적은 재세례파다.

2222) Leo Jud가 칼빈에게 보낸 편지(1536년 혹은 1537년)(Herminjard, Correspondance VIII. 990; CR XI. 359를 참조하라.

2223) Augustine, John's Gospel, loc. cit.; "tanquam visibile verbum"; Against Faustus xix. 16(MPL 42, 357; tr. NPNF IV. 244). 참조, J. C. McLelland, The Visible Words of God; An Exposition of the Sacramental Theology of Peter Martyr, pp. 129, 138; Gadier, La Doctrine Calviniste de la Sainte Cene, pp. 52f.

2224) "eivkonicw'""; 1536년 판에서는 "eivkovtw""로 되어 있다.

2225) 본장 3절.

2226) "aujentico;n"

2227) Augustine, John's Gospel 1xxx. 3(MPL 35. 1840; tr. NPNF VII. 344).

2228) Zwingli,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 Latin Works of Zwingli III. 761; tr. S. M. Jackson, Latin Works of Zwingli III. 184).

2229) Cicero, Of Old Age VIII. 26(LCL판, pp. 34ff.). Cicero는 Solon 이 "매일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늙었다"고 지적하면서, 자기도 낡아서 희랍 말을 배웠다고 한다.

2230) 그리스도의 진보에 관한 위 문장들은 Bucer의 글에 근거한 것이다. Bucer, Enarrationes in Evangelia(1530), pp. 413, 420, 455, 419. 참조, 본장 11절 "Confess"라는 말에 대해서는 III. iv. 9, 주 19를 보라. K. Barth 는 8절의 나머지 부분의 Caspar Schwenckfeld 에 반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Pannier, Institution III. 205, note b, p. 319).

2231) I. vii. 4를 보라.

2232) III. ii. 3-5장과 본장 7-8절을 보라.

2233) "Interior ille magister." 참조, III. i, 4; "Christus ipse interior magister."; I. vii. 4, 5; I. viii. 13; 본장 17절. 성레전은 성경 말씀과 같이, 성령의 활동이 없이는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2234) "Tesseram." 본장의 주 2를 보라.

2235) "Illo sacramento fidem saum obstringunt Imperatori."

2236) 이것은 Zwingli 의 Comm. on True and False Religion, 15(CR Zwingli III. 758)와 On Baptism(CR Zwingli IV. 218)에 있는 견해를 비평하는 말이다. 칼빈은 1959년 5월 19일에 Andre Zebedee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에서 Zwingli의 성찬론이 "그릇되고 유해하다"고 말했다. 1555년 4월 20일에 Bullin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Zebedee가 이것을 들춰낸 것은 "배신"행위라고 불평하며, 자기는 Zwingli의 사상을 "일반적 의미에서 그릇되다"고 일컫지 않았다고 고백했다.(CR xv. 573; tr. Calvin's Letters, ed. Bonnet, III. 170; IV. 402).

2237) 본장 2절을 보라.

2238) VG에 근거함.

2239) Augustine, Letters xcviii. 10(MPL 33. 364; tr. FC 18. 138); G Biel, Epythoma pariter et Collectorium circa quatuor sententiarum libros IV. dist. i. qu. 3. art. 1; Council of Trent, session 7(1547), canon vi(Schaff, Creeds II. 120).

2240) 본장 16절을 보라.

2241) Augustine, Questions on the Heptateuch III. 84(MPL 34. 713).

2242) Augustine, On Baptism V. xxiv. 34(MPL 43. 193; tr. NPNF IV. 475).

2243) Augustine, John's Gospel xxvi. 11, 12, 15(MPL 40. 344; tr. ACW II. 82).

2244) Augustine, Psalms, Ps. 77. 2(MPL 36, 983f.; tr. NPNF<Ps. 78. 2> VII. 367).

2245) Augustine, John's Gospel xxvi. 11-12(MPL 35, 1611; tr. NPNF VII. 171)

2246) Augustine, op. cit., xxvi. 15(MPL 35. 1614; tr. NPNF VII. 172f.).

2247) Lombard, Sentences IV. i. 5(192. 840).

2248) Augustine, John's Gospel xxvii. 6(MPL 35. 1628; tr. LF IX. 419).

2249) Augustine, John's Gospel xxvi. 11, 12, 15(MPL 35. 1611-1614; tr. NPNF VII. 171ff.); On Christian Doctrine III. ix. 13(MPL 34. 71; tr. NPNF II. 560).

2250) VI. xiii. 6; 본장 5-7절; 본장 18절:인이 새겨진 금속에 관한 언급.

2251) "Ceu vasculis ac plaustris." VG(Cadier); "Comme s'ils en etaient des recipients ou vehicules."

2252) 즉, Zwingli와 Bucer를 가리킨다. 본장 5-8절을 보라.

2253) Questions on the Heptateuch III. 84(MPL 34. 712).

2254) 창세기 9:16 주석을 참조하라. 이 구절은 과학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보여주는 흥미있는 자료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것은 Pliny, Natural History II. ix. 150(LCL Pliny I. 286 f.)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는 무지개를 기적으로 보지 않는 설명이 있다. 참조, Seneca, Natural Questions I. 3(tr. J. Clarke, Physical Science in the Time of Nero, pp. 16-22). 칼빈은 과학자적 사실같은 것을 인정하나, 자연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이런 지식은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D. Bailie, The Theology of the Sacraments, p. 45에 있는 말도 참조하라.

2255) Augustine, Against Faustus the Manichaean xix. 11(MPL 42. 355; tr. NPNF IV. 243).

2256) 칼빈은 여기서 Justin Martyr의 주장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저스틴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언자들의 계시를 모방함으로써 귀신들이 고대 이교도들을 속였다고 주장했다. Apology I. 1x-1xiv(MPL 6. 411-428; tr. LCC I. 281-285).

2257) 본장 1절.

2258) Chrysostom, Opera, ed. Erasmus(Basel, 1530), II. 82. 이 저작은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생략되었다.

2259) IV. iii. 16을 보라.

2260) IV. xix.

2261) 본장 5절.

2262) "Christum Ostendant." 참조, I. ix. 3, 주 3; IV. x. 14. 주 28; 본장 26절:"Chrsti exhibitio."

2263) 참조, IV. xvi. 3, 4.

2264) 참조, II. i. 2.

2265) Augustine, John's Gospel xv. 8; cxx. 2(MP; 35. 1513, 1953; tr. NPNF VII. 101, 434);Psalms, Ps. 40. 10; 126. 7; 138. 2(MPL 36. 461; 37. 1672. 1785; tr. LF Psalsm II. 174; v. 24, 192); Sermons v. 3(MPL 38. 55).

2266) 참조, Lombard, Sentences IV, i, 1(MPL 192, 839); Aquinas, Summa Theol III. 1xii. 6; I. IIae. c i. 2.

2267) Auinas, I. II.ae. c i. 2.

2268) 본장 22절.

2269) Ibid.

2270) IV. xvi. 3-5.

2271) Augustine, Psalms, Ps. 73. Pref. 2(MPL 36. 931; tr. LF<Ps. 74> Psalms III. 493>; Questions on the Heptateuch IV. 33(MPL 34.732); Letters cxxxviii. 1. 8(MPL 33. 528; tr. FC 20. 41). 이것은 라틴어로 "Praenuntiasse 와 annuntiare"인데 말의 기교에 유의하라.

2272) Augustine, Aginst Faustus xix. 14(MPL 42. 35b; tr. NPNF IV. 244).

2273) Augustine, Against Writings of petilianus II. xxxvii. 87(MPL 43. 289).

2274) Augustine, John's Gospel xxvi. 12; x1v. 9(MPL 35. 1612, 1723; tr. NPNF VII. 171f., 252).

2275) Augustine, Psalm, Ps. 77. 2(MPL 36. 983; tr. LF<Ps 78. 2> Psalms IV. 43f.;NPNF VIII. 367).

2276) 참조, I. ix. 3, 주3; IV. x. 14, 주 28; 본장 20장, 주 47).

2277) Augustien, Against Faustus xix. 13(MPL 42. 355; tr. NPNF IV. 244); On Christian Doctrine III. ix. 13(MPL 34. 71; tr. NPNF II. 560; Letters 1iv. 1(MPL 33. 200; tr. FC 12. 252). Augustine 은 최상급("paucissimis" 등)을 사용했고, 칼빈은 비교급을 사용했다.

2278) Bonaventura, Commentary on the Sentences IV. dist. ⅰ. part 1. art. unicus. qu. 5(Opera omnia IV. 25; Biel, Epythoma pariter et collectorium circa quatuor sententiarum libros IV. dist. i. qu. 3;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1xxi. 3, 6; Aquinas On the Sentences IV. dist ii. qu. 1. art. 4; Deferrari, Lexicon of Thomas Aquinas, s. vv. "Opus operantis" and "Opus operatum"; Countil of Trent, session 7, Canon vi(Schaff, Creeds II. 120).

2279) 참조,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ch. xiv. pp. 175-183, 칼빈이 본 세례의 다른 의미들에 대하여, O. Cullmann, Baptism in the New Testament, tr. by J. K. S. Reid; K. Barth, The Teaching of the Church Regarding Baptian Sacraments; D. M. Baillie, The Theology of the Sacraments, pp. 37-124; G. Macgregor. Corpus Christi, ch. vii. W. D. Maxwell, John Knox's Genevan Service Book, pp. 105-120.

2280) IV. xiv. 1.

2281) 분명 이것은 Sacramentum에 대한 쯔빙글리의 해석을 가리킬 것이다. 이 말의 고전적인 용법에 근거하여 쯔빙글리는 "입문 의식 또는 서약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True and False Religion, 15(CR Zwingli III. 178; tr. Latin Works of Zwingli, ed. S. M. Jackson III. 180f.). Declaration concerning Original Sin(CR Zwingli V. 392)에서 그는 성레전을 묘(tessera publica)라고 불렀다. 칼빈에 따르면, 이런 견해는 요점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참조, IV. xiv. 13, 주 21; IV. xvi. 4.

2282) Tertullian, On Baptism iii-v(CCL Tertullianus I. 278-282; tr. ANF III. 670ff.); Cyril of F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iii. 5(MPG 33. 431ff., tr. LCC IV. 92f., NPNF 2 ser. VII. 15)터틀리안과 칼빈에 대한 Mac Gregor의 논평을 보라. op. cit., pp. 142f.

2283)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세례의 효력이 없어질 것이 두려워서 세례를 연기하는 관습은 터틀리안이 주장한 것과 같은(On Repentance vii. 12; CCL Tertullianus I. 332; tr. ANF III. 662) 엄격한 회개론에 힘입어 4세기에 아주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Nazianzus의 Gregory(On Holy Baptism, Oratio x1. 11; MPG 36. 371ff.)와 Nyssa의 Gregory(Against Those Who Postpone Baptism; MPG 46. 415-432)는 그것을 열렬히 비난했다. 훨씬 나중에 플로렌스 회의에서 교황 유게니우스 4세의 교서 Exultate Dec(1439) ch. x에 이 악습이 공격 받았다(Mansi XXXI. 1054; Mirbt, Quellen, 4th ed., p. 235).

2284) 참조. IV. xix. 17.

2285) III. iv.

2286) IV. xix. 14-17.

2287) 세례에서 죄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다. Cadier는 이 개념의 "실재론"(Realism)에 대해서 논평한다(Institution IV. 298, 주1). 그러나 멜랑히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Loci communes(1521), de baptismo(ed. Enge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1 II. i. 146f., tr. Hill, p. 245f.).

2288) 본장 2절.

2289) Chrysostom, Homilies on Mathew. Hom x. 1(On Matt. 3. 1-21)(MPG 57. 183. 185; tr. LF XVI. 132f.). 참조, Council of Trent, seventh session, of Baptism, Canon i.(Schaff, Creeds II. 122). 교부들이 "성경의 확실성"을 고수하지 않을 때에 칼빈은 거리낌 없이 그들의 견해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여기 있는 문장들과 본장 8절 과 18절에 나타나 있다.

2290) Augustine, On Baptism, Against the Donatists V. x.12(MPL 43. 183; tr. NPNF IV. 468).

2291) 본장 18절.

2292) Against the Writings of Petilianus the Donatist III xlix. 59; I. vi. f.(MPL 43. 379, 249); Against the Letter of Parmenianus II. xi. 23(MPL 43. 67), 여기서 요한복음 1:33의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2293) 참조. II. xi. 1-3;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ed. Engelland, Melanchthons Werke in Auswahl II. i. 145; tr. Hill. p. 245).

2294) II. i. 8.

2295) 본장 1절.

2296) II. i. 8; III. iii. 10-13.

2297) 참조, III. vi. 5, 주9; III. ix. 4.

2298) 참조, II. ii. 27; III. iii. 11; III. xi. 11; 롬 7:7-25 주석. 칼빈은 바울이 로마서 7:24과 다른 비슷한 구절들에서 중생한 상태에 있는 자기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이 알미니우스가 칼빈에게서 떠난 원인이 된 중요한 논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의 결론으로서 알미니우스는 여기에 묘사된 사람은 중생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율법아래 있다. Works of Arminius, tr. J. Nichols, II. 326).

2299) 즉, 이 구절(롬 7:7-13)보다 먼저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2:12 24에서 언급되었다.

2300) Augustine, Sermons cli. 5; "Ergo semper pugnandum est."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싸워야 한다. 우리의 타고난 저 육욕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없어질 수 없으며, 매일 약화시킬 수는 있어도 소멸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MPL 38. 814 ff. 이 번역문은 LF Sermons II. 13에 있는 것과 다르다).

2301) Luther, Ein Sermon von dem Sakrament der Tauffe 1(Werke WA II. 727).

2302) IV. xvii. 3에 주의 만찬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적극적인 발언이 있다.

2303) 본장 7절.

2304) 여기에 소개된 도나투스파는 어거스틴에 의해 묘사된 바 있다. Psalms, Ps 10. 5(MPL 36. 134; tr. <Ps. 11> LF Psalms I. 96); Letters lxxxix. 5 MPL 33. 311; tr. FC 18. 38). 재세례파(칼빈은 1536년판에서 Catabaptistae라는 말을 사용했다. of. Pannier, Institution III. 236, note b. p. 323)도 "사악한" 사역자들이 집행한 세례를 거부했다. 이 견해를 쯔빙글리는 거듭 공격했다. 예컨대 그의 논문 On Baptism(CR Zwingli IV. 278f.)을 보라. 루터도 자주 공격했다. 예컨대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Werke WA XVIII. 165ff.)와 Letter Concerning Rabaptism(1528)(Werke WA XXVI. 161; tr. Lutter's Works, American Edition, 50. 250f.)을 보라.

2305) 본장 16절.

2306) "cacovzhlon"

2307) 참조, 행 19:1-17 주석.

2308) 사도행전 19:5에 있는 두 번째 세례에 대해서 쯔빙글리는 그것이 "교훈의 세례"였다고 생각한다.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CR Zwingli III. 770f., tr. Latin Works by Zwingli, ed. S. M. Jackson I. 192). 또 On Baptism(LCC XXIV. 135)을 보라.

2309) 칼빈의 주해 방법의 암시된 것에 주목하라.

2310) 마르틴 5세의 교서 Inter cunctas(1418)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것으로 돌려진 주장들을 비난했다.(Mansi XXVII. 1212; Mirbt, Quellen, 제4판 pp. 229f.); Gratian, Decretum III. iv. 70, 53, 61f.(Friedberg I. 1385, 1382f., MPL 187, 1821, 1818).

2311) Gratian, Decretum III. iv. 68(Friedberg I. 1384; MPL 187. 1821); "Quare de Saliva narse et aures tanguntur." 이것은 마가복음 7:34을 근거로 한 Rabanus Maurus, Institutio clericorum I. 27에서 인용한 말이다.

2312) 여기에 묘사된 것과 같이 칼빈의 세례식의 단순성은 그의 저서 La Forme des prieres et chants ecclesiastiques(1539, 1542)(CR VI. 185-192; tr. Calvin, Tracts II. 113-118)에 나타나 있다.

2313) 침례의 관습에서 떠난 고대의 예는 Didache 7에 보인다. 거기에서는 냇물이 없으면 "물을 머리에 세 번 부으라"고 규정했다. LCC I. 174를 보라.

2314) Tertullian, On Baptism xvii.(CCL Tertullianus I. 291; tr. ANF III. 677); Gratian, Decretum III. iv. 21(MPL 187, 1800; Friedberg I. 1384). 교회 초기의 병상 세례에 대해서는, G. W. H. Lampe, The Seal of the Spirit, pp. 178, 242도 보라.

2315) Augustine, Against the Letter of Parmenianus II. xiii. 29(MPL 43. 71). 다음 말들은 1545년 판으로부터 왔다.

2316) Gratian, Decretum III. iv. 20(Friedberg I. 1367; MPL 187. 1800). 이것은 Statuta ecciestiae antiqua, canons x cix, c(Mansi III. 959)에서 왔다.

2317) 칼빈이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유아들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생각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데,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칼빈 자신이 여기서 이런 생각을 오히려 비난한다. 칼빈은 이 오류를 본장 22절에서도 다시 공격한다. IV. xvi. 6, 7, 17, 19, 26, 31도 보라. Augsburg Confession 9조에는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다"고 했으나 칼빈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2318) Tertulian, On Baptism xvii(CCL Tertulianus I. 291; tr. ANF III. 679).

2319) Epiphanius(315-413). Panarion sive arcula adversus haereses x1ii. 4; 1xx ix. 3(GCS 31. 100; 37. 477; MPG 41. 699f., 42. 745f.); Eugtenius IV. bull Exultate D대(1439)(Mansi XXXI. 1055; Mirbt, Quellen, 4th ed., p. 235). J. Westphal, Loci praecipui, de vi. usu, et. dignitate baptismi(Strasbourg, 1556, p. 242).

2320) 이 논법은 칼빈의 논적인 루터파의 J. Westphal에 의해 사용되었다. J. Westphal, op. cit., p. 238.

2321) 이것은 바로 위에서 "세례를 집행하는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만일 여성들이 세례를 준다면 이 두 가지 기능은 "나눠진다."

2322) 본장 20절의 주 36과 39를 보라.

2323) "Afterward…sdemn sign." 1545년 판에서.

2324) 유아세례를 배척하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본장을 세례를 설명한 전장에 대한 "부록"이라고 부르고, 이 부록을 붙이는 이유로서 칼빈은 이 문제에 대한 당시의 논쟁을 든다. 1559년에 첨가한 제31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글이 1539년 판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G. H. Williams, "Studies in the Radical Reformation(1517-1618)", Church History XXVII(1958), 46-69에 재세례파 운동의 기원과 문헌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이 논평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된 점에 대해서는 특히 52면 이하와 60면 이하를 보라. 재세례파의 사상은 LCC XXV에 제시된 본문에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의 285-294면에는 Williams 교수에 의해 준비된 영어 표제로 된 문헌목록도 있다. 참조, IV. xv. 1, 주1에 있는 표제들, 특히 유아세례 반대론으로는 J. Warns, Baptism; Studies in the Origin of Christian Baptism을 참조하라.

2325) 여기서 칼빈이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1527년에 Schleitheim에서 제정한 재세례파 신앙고백의 i 조항이다(라틴문). 이것은 쯔빙글리가 그의 논문 In Catabaptistarum Strophas elenchus(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388; tr. Refutation on the Tricks of the Baptists <Selected Works of Zwingli>, ed. S. M. Jackson, p.(78)에서 반박했다. 이 신앙고백을 독일어 원문에서 번역한 영문이 있다. J.C. Wenger, "The Schleitheim Confession of Faith", Mennonite Quarterly Review. XIX(1945), 243-253. 또, G. F. Gersbberger, ed., The Recovery of the Anabaptist Vision, F. Blanke, "The Anabaptists and the Reformation"(pp. 57-68)과 J. S. Oyer, "The Reformers Oppose the Anabaptist Theology"(pp. 202-218)라는 장들을 보라.

2326) "Symbolum." 칼빈은 성례전에 대해서 "상징"이란 말을 잘 쓰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1539년-1554년 판들에 있는 tessera 대신에 사용했다(OS V. 306, 주 e).

2327) 참조, Zwingli, Refutation of the Tricks of the Baptists; "성례전으로서의 할례가 고대인들을 위해서 가졌던 의미를 세례가 우리를 위해서 가진 의미와 같다"(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366; tr. Selected Works, p.(39). 참조:본장 4절의 마지막 문장; 본장 10절; Augustine, City of God XVI. xxvii(MPL 41. 307; tr. NPNF II. 321); Auqinas, Summa Theol. III. 1xx. 1. 3. 유아세례 지지론은 약속의 언약과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구약 성경에서는 할례가 약속의 언약의 성례전이었다. 신약성경의 교회가 생각한 세례와 할례의 관계를 O. Cullmann이 주도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Baptism in ehe New Testament, ch. iv. pannier 는 Francis Lambert 가 Somme Chrestienne(1529)에서 세례를 할례의 분명한 계승으로 간주한 발언을 인용하였다.(Pannier, Institution III. 321).

2328) "Anagoge." 성경 해석에서 차지하는 신비적 해석(anagogy)의 지위에 대해서는, The Interpreter's Bible I. 121을 보라. 칼빈은 신비적 의미에서 할례를 세례의 예견으로 본다.

2329) "Ad prportionem fidei." 참조, IV. xiii. 3.

2330) "Tessera." 참조, IV. xiv. 1, 주 2와 본장 2절, 주 3).

2331) 이 논점은 쯔빙글리의 논점과 비슷하다(CR Zwingli IV. 330).

2332) 참조, 쯔빙글 리가 Francis Lambert에게 보낸 서한, 1534년 12월 16일(CR Zwingli VIII. 271). 쯔빙글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시지 않았다고 말한다(요 4:2).

2333) "brevfh cai; paidiva," 갓난아이와 어린아이.

2334) 각각 venire와 accedere에 해당된다.

2335) CR Zwingli IV. 300; VIII. 272.

2336) 참조, 본장 1절, 주2.

2337) 이 견해에 대한 초기 증인들은 Irenaeus, Adversus haereses II. xxii. 4, MPG 7. 784 and 주 87; tr. ANF I 391; cf. 주 9); Origen, Commentary에 Romans V. ix(MPG 14. 1047); Cyprian, Letters lxiv. 6(CSEL 3. ii. 721)

2338) 칼빈은 세례가 어린이가 자라서 세례의 의미를 배우게 됨에 따라 그의 종교심에 효과를 나타낸다는 많은 암시를 주었다. 본장 21절을 참조하라.

2339) "Eximia Consolatione." Cadier, Institution IV. 323, 주1은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을 언급한다;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2340) 참조, II. viii. 21, 주31과 본장 15절.

2341) 참조, 본장 6절.

2342) 참조, II. x. 1; II. xi. 3.

2343) "Fumos suos…vendant." 참조, IV. vii. 11, 주 27.

2344) 참조, II. x, xii 창 48:1-4 주석.

2345) 이것은 Melchior Hofmann의 입장이었다. 참조, Bibliotheca Reformatoria Neerlandica, ed. S. Cramer. V. 294.

2346) 본장 3절에서 에베소서 2:12을 인용한 것을 가리킨다.

2347) 참조, 본장 9절, 주17.

2348) Acta des Gesprachs zwischen predicanten unnd Teuffbruederen, of 132.

2349) "a;llhgorei'n."

2350) Augustine, Leters clvii. 14(MPL 33. 680; tr. FC 20. 330); Augustine, Against Faustus the Manichee xvi. 29(MPL 42. 335; tr. NPNF IV. 231f.).

2351) I. xvi. 3에 있는 시편 8:2의 해석을 참조하라.

2352) 이러한 재세례파의 주장(Acta des Gesprachs, of. 137)에 대하여 쯔빙글리도 그의 Refutation of the Baptist Tricks에서 비슷한 대답을 했다(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424; tr. Selected Works of Zwingli, ed. S. M. Jackson, p. 236).

2353) 제 17-23절에 있는 논증은 Balthasar Hubmaier의 논문, On the Christian Baptism of Believers(CR Zwingli IV. 594, 611-615, 624, 주9)에 대한 대답이다. 제새례파가 습관적으로 사용한 재생(再生)이라는 개념은 칼빈의 중생론과 크게 다르다(I. xv. 4; III. iii; IV. xv. 6f.; Comm. John 3:3-7). 참조. LCC XXV, index, s. vv. "Rebirth", "Reborn".

2354) Hubmaier, op. cit.(CR Zwingli IV. 612, 주 2).

2355) Hunmaier, op. cit.(CR Zwingli IV. 594. 주 19).

2356) Hubmaier, op. cit.(CR Zwingli IV. 610, 612).

2357) Hubmaier, op. cit.(CR Zwingli IV. 612).

2358) Hufmann, 본장 12절 주 22에 인용된 바 있음.

2359) Hubmaier, op. cit.(CR Zwingli IV. 611).

2360) 참조, IV. xvi. 1.

2361) Hubmaier, loc. cit.

2362) Ibid.

2363) The Schleitheim Confession, art. i(Zwingli, 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388; tr. J. C. Wenger, Mennonite Quarterly Review. XIX<1945>, 248; tr. Jackson, Select Works of Zwingli, p. 178); Hubmaier, op. cit., pp. 614f.

2364) 이런 해석상의 원칙에 대해서는, IV. xv. 18, 주 31을 참조하라.

2365) "Quod natione erat a;llovfulo""

2366) 1662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채택된 소위 Halfway Covenant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의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허락했는데, 이것은 여기에 나오는 칼빈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2367) Hubmaier op. cit., CR Zwingli IV. 594, 주 19에서.

2368) 칼빈은 1539년판 Institutio의 이 부분에서 요한복음 3:5에 대한 "그릇된 해석들"을 언급하며, 거기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시지 않는다"고 한다(CR I. 986; OS V. 330, note d). 참조, Pannier, Institution III. 274. 위에 있는 "물인 성령" 이라는 갑작스런 문구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3:5에 대한 주석을 보라. 거기서 칼빈은 이 말씀을 세례에 관련시키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물리치고, 물인 "성령"에 대한 은유로서 성령의 깨못케 하는 사역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2369) 참조, IV. xv. 20, 주 36. 칼빈은 쯔빙글리와 같이, 이 견해를 재세례파의 견해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들의 글에는 이와 반대되는 발언들이 많다. 참조, CR Zwingli IV. 624, 주 9; Mntzer에게 보낸 Crebel의 서한(LCC XXV. 81). 그러나 세르베르트스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유아들은 정죄 아래 있다고 주장한다. Restitution of Chridtianity, p. 534, 본장 31절에 인용됨. 구원을 위해서 세례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소르본느파 신학자들을 공격할 때에도 칼빈은 이 문제를 제기했다. Against the Ariticles of the Theologians of Paris, art. 1(CR VII. 7f.). 트렌트회의(session 7. on baptism, canon V)는 구원을 위해서 세례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저주한다.(Schaff, Creeds III. 123).

2370) 참조. 본장 18, 19절.

2371) Conrad Grebel은 그의 Protestation und Schutzschrift(1534)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참조, H. S. Bender, Conrad Grebel, pp. 129, 783ff. 참조, 본장 29절.

2372) 본장 25절의 초반에 요한복음 3:5이 인용된 것을 참조하라.

2373) 참조, 본장 27절.

2374) VG 1541년판은 여기서 사도행전 19:1-7에 대한 해석을 한 구절 삽입했다. Pannier, Institution III. 279f.; OS V. 334. 이것은 IV. xv. 18에서 같은 구절을 논한 것과 일치한다.

2375) Servetus의 저서 On the Errors of the Trinity는 1531년에 출판되었다고 그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R. H. Bainton, Hunted Heretic, p. 217). Restitution of Christianity(1553)에서, 그는 30세가 되기까지 세례를 보류할 것을주장한다(pp. 372, 412f.).

2376) 참조, Zwingli, Refutation of the Baptist Tricks(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432; tr. Selected Works, ed. S. M. Jsckson, p. 173).

2377) Cyprian, On the Lapsed ix. xxv(CSEL 3. i. 243, 255; tr. ACW XXV. 20, 32f.) ;Augustine,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 xx. 27(MPL 44. 124; tr. NPNF V. 25); Letters ccxvii. 5. 16(MPL 33. 984f.; tr. FC 32. 87).

2378) VG는 이러한 수사 의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Ce ne seroit pas humainement fait a nous de donner aux petits enfants du poison au lieu de nourriture." 1541년-1551년 VG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Ce n'est pas raison que presentionsaux enfants leur jugement et leur con demnation en leur administrant."

2379) 위 문장에 나오는 "상징" 대신에 VG 판은 "Signes"를 사용했다. 1559년에 기록된 이 긴 구절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Christianismi restitutio(1553), pp. 564-568에 있는 견해들을 공격한다. 자세한 참조는 OS V. 336-340에 있다. 칼빈은 항상 세르베투스를 재세례파와 연결시켰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세르베투스는 유아세례를 거부했지만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의 대부분과 의견이 매우 달랐다. Bainton은 여기에 널리 적용되는 다른 구절들을 지적한다. Hunted Heretic, pp. 137-142.

2380) 완전성의 개념은 현재의 성취보다 미래의 전진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참조, III. xvii. 15.

2381) "Tesseram adoptionis." 어린이들은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지만 교회원으로 받아들여지며 교회원이라는 표로서 세례를 받는다. 참조, 본장 32절의 마지막 문장.

2382) "Paralogismum." Liddell and Scott, Greek Lexicon, 8th ed., 1135a를 보라.

2383) Hermes Trismegistus(세 배로 위대한 Hermes)는 그리스도인들이 에굽의 문학과 지혜의 신, Thoth에게 붙인 이름이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의해 언급된 연금술서 42권은 이 신이 쓴 것으로 여겨졌다. 이 책들은 분실되었지만 신(新) 플라톤파에 의해 모방된 그들이 중세기에 유행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세르베투스가 Restitutio, p. 567에서 언급한 것을 가리킨다. 세르베투스가 죽은 후에 이 문학의 중세기의 단편인 On the Power and Wisdom of God이 1554년에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Herms Trismegistus에 관한 항목은 Pauly-Wissowa, Realencyclopadie der Classischen Altertumswissenschaft와 Encyclopaedia Britannica에 있다.

2384) 여자 점장이들은 Cumae와 고대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기타 지방에 있던 예언하는 여인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예언과 조언을 구했다. 그들의 예언을 근거로 한 서적들이 기독교 기원 초기에 로마와 이탈리아에 유포되었다.

2385) 본장의 대부분은 강요의 여러이전 판들에 있는 자료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연속적인 논증이 되었다. 구조와 순서면에서 본장은 Short Treatise on the Holy Supper of the Lord(French, 1541, in OS I. 503-530; tr. Calvin, Tracts II. 163-198; Latin, 1546)와는 완전히 독립된 글이지만 실제 내용은 일치한다. 그 사이에(1556-1563) 있엇던 Joachim Westphal과 Tilemann Heshusius)와의 논쟁으로 인해 한층 상세한 논증이 전개되었고 그 일부가 30-34점에 반영되었다. Smits I. 87-95를 보라. 칼빈은 ;'주의 만찬'론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특히 다음의 것들에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A. Barclay, The Protestant Doctrine of the Lord's Supper, pp. 107-293; J. Beckmann, Vom Sacrament bei Calvin; I. Cadier, La Doctrine Calviniste de la Sainte Cene; H. Grass, Die Abendmahlslehre bei Luther und Colvin(Beitrage zur Forderung Christlicher Theologie 2 ser. XL VII; 2d edition); A. M. Hunter, The Teaching of Calvin, pp. 178-190; A. J. Macdonald(ed.), The Evangelical Doctrine of Holy Communion, ch. v; G. MacGregor, Corpus Christi, ch. x; J. D. Benoit, Calvin, directeur d'ames, pp. 204-211; W. Neisel, Calvins Lehre vom Abendmahl. Pannier는 1541년 불어판에 있는 유사한 장(xii)의 배경에 대해서 긴 주를 달았다. Institution IV. 7, note a, on pp. 299ff. 일반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W. Kohler, Zwingli und Luther; Ihr streit uder das Abendmahl, 2 vols; R. Will, Le Culte, etude d'histol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3 vols; D. Stone, A History of the Donctrine of the Eucharist, 2 vols.(extracts from Calvin, II. 50-56)을 보라. 개혁 교회가 20세기에 이룩한 예배 의식면에서 중대한 발전에 대해서는 J. D. Benoit가 Liturgical Renewal; Studies in Catholic and Protestant Developments on the Continent, pp. 29-66에서 해석했다.

2386) IV. xvi. 9, 32에 있는 생각을 요약한 것이다.

2387) 1559년까지 30년 이상이나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있었던 성찬 논쟁을 언급한 것이다.

2388) "Eins communicatione refecti"; 불어판; "repus de sa substance", i. e, "nourris de sa force vivante"(Cadier's note). 그러나 본장 8절 주24에 인용된 1536년판의 어구를 보라(이것은 그 이후의 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칼빈은 communio보다 communio를 더 자주 사용하였다. 이들에 해당하는 프랑스어에 대해 Codi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munier와 Communion에 비해 Communiquer와 Communication은 행위와 의식과 관련된 영적 실제에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Institution IV. 349. note 4. 참조, Cadier, La Doctrine Calviniste de la Sainte Cene, pp. 16f.; J. C. McLelland, The Visible Words of God; And Exposition of the Sacramental Theology of Peter Martyr Vemigli, ch. vi; "The Sacrament of Commuion."

2389) "Mysterium hoc arcanae Christi cum piis unionis natura incomprehensibileest."이 "신비"를 칼빈은 지적 수수께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강조하는 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를 효과적으로 변화시킨다는데 있다. 참조, Wallace, Cavin's Doctrine of the Lord's Supper. pp. 112, 203, 264.

2390) "Arrhis ac tesseris"; cf. IV. xiv. 1. note 2.

2391) "Mystica haec benedictio."

2392) "Mirifica commutatio." 결과로 나타나는 영혼의 변화에 대한 칼빈의 묘사는 신앙의 결과에 대한 루터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Treatise on Christian Liberty(1520)(Werke WA VII. 54f; tr. Works of Martin Lutter II. 318ff.); cf. Luther, Sermon on the Sacrament of the Body of Christ and on the Bortherhoods(Werke WA II. 743ff.;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11-14).

2393) 참조. Instruction in Faith 29(OS I. 413; tr. Fuhrmann, p. 70).

2394) Luther, Little Catechism(1529)(Werke WA XXX. 316; tr. J. Lenker, Luther's Catechetical Writings, p. 31); Sermon on Confession and the Eucharist(Werke WA XV. 494f.).

2395) 본장 1절의 중간.

2396) "In Symbolum datur." 칼빈은 1536년판과 1539년판의 이 대목에서는 signum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IV. xvi. 2, 주 3을 보라.

2397) Luther, Sermon on Confession and the Eucharist(Werke WA XV. 495f.). 참조, D. Stone, op. cit., I. 389, Stone 은 비슷한 구절(Sacrae cononis missae expositio, lect. 1 xxxv AB)에서 Biel을 인용하였다.

2398) 참조, De Castro, Adrersus haereses IV.(1543 ed., of. 90H. 91D). Cadier(Institution IV. 351, note5)에 의하면, 칼빈은 "생명의 떡"에 관한 문제의 구절(6:35-48)을 "성찬식 제정과만 관련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 전체와 그의 위격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399) 참조, J. C. McLelland, The Visible Words of God, p. 145.

2400) 쯔빙글리계 신학자와 루터파 신학자들을 각각 가리킴.

2401) "Gredendo manducari"; 불어판; "en Croyant nous mangeons." 참조, McLelland, op. cit., p. 146. McLelland는 Calvin과 Peter Martyr의 일치점을 강조한다. 그의 Appendix C, pp. 379f도 참조하라. 그 앞의 문장들은 분명히 쯔빙글리와 그가 받아서 편집한(1525년) Cornelius Hendrix Hoen(Honius)의 서한(CR Zwingli IV. 512-518)과 관련이 있다. 쯔빙글 리가 M. Alberus에게 보낸 서한(1524년 11월 16일)과 Comm. on True and False Religion(1525), 18;(CR Zwingli III. 339, 818)을 참조하라. 이 문구들은 요한복음 6:52-57에 대한 해석이다.

2402) Augustine, On Christian Doctrine III. xvi. 24(MPL 34, 74f; tr. NPNF II. 566); John's Gospel xxxi. 9; x1. 2(MPL 35. 1640, 1686; tr. NPNF VII. 191, 225); Sermons cxxxi. 1; 1vii. 7(MPL 38, 729, 389; tr. LF Sermons II. 586f., 84f.).

2403) Chrysostom, Opera(Basel, 1530) IV. 581.

2404) IV. xiii. xiv. 참조, also Comm.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 26; 21-30; Mark 14; 18-26; Luke 22; 15-20.

2405) 이것은 Carlstadt의 견해였다. 그러나 Barth Niel은 칼빈이 그에게서 이 견해를 배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루터파의 비난에 것이라고 본다(OS V. 348. note 6). 그들은 또 Bern 종교회의(1537)의 "Confession of Faith Concerning the Evcharist"(cr IX. 711f.; OS I. 435f.)및 Short Trestise on the Holy Spper(1541)(OS I. 508, CR B. 438f, 1 tr. Calvin, Tracts II. 170f.)을 명백히 긍정하는 발언들을 인용한다.

2406) 본장 17절 주 58을 보라. 또 루터파의 공재된 특징에 대해서는 29절("ubique locorum…absque forma")과 30절을 보라. 칼빈은 Short Treatise on the Holy Supper I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편재한다는 공재설은 "환상일 뿐"이라고 비평한다(OS I. 521; tr. Calvin; Tracts II. 187).

2407) "Infantiae meae modulo." IV. xiv. 6; IV. xvi. 2에 있는 신비와 신비적 교양에 대한 해설을 보라. 칼빈은 성찬의 신비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인다. 자기가 멈추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할 수만 있으면 더욱 높이 올라가라고 권한다. Westphal에게 다변하면서, 칼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땅에 있는 우리에게 그의 살을 먹여 주신다는 것은 "사람이 알아낼 수 없는 신비"(mysterium humanae curiositati impervestigabile)라고 한다(CR. IX. 81; tr. Calvin, Tracts II. 291). 참조, Wallace, Ca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 221; MacGregor, Corpus Christi, pp. 87, 193ff.

2408) 8-10절은 1536년판(OS I. 142)의 본 구절에서 매우 간결하게 표명된 원칙들에 대한 해설이다. 1536년판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한다. "그의 몸의 본체 바로 그것이나 그리스도의 진정한 자연적 몸이 아니라…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유익들이 나타난다" 참조, Pannier, Institution IV. 21. note a. pp. 304f.

2409) Cyril of Alexandria, Exposition of John's Gospel II. viii.(MPG 73. 381f.).

2410) "Arcanum."

2411) 이 문장들은 성찬에서 거리(locoru, distantia)가 있고 분리(locis disiuncta)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활동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성례전적으로 참여하는 신비에 대한 칼빈이 말하는 바를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의 초월적인 숨은 능력(arcana virtus)을 이해할 때 비로서 믿을 수 있는 일이다. 7절 주23번과 IV. xvii. 11을 참조하라. 칼빈이 성찬에서 신비한 능력(virtus)이 작용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의 성찬론은 "Virtualism"이라고 불리운다.

2412) "Accumbunt"; 이 말이 로마 시대의 연회에서 기대어 앉는 자세를 항상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John Brenz 같은 칼빈의 동시대인들도, 성찬을 논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였다(W. Eletr, Mophologie des Luthertums. I. 266에 인용되었다). 35절 주 20을 참조하라.

2413) "Rei nomen signo deferatur." 다음 문장에는 11절서와 같이 signum 대신에 symbolum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VG에는 "signe"이 사용되는데 exterieure와 visible이 각각의 경우에 첨가되었다.

2414) Hoen의 서한(CR Zwingli IV. 513); 5절 주17; Augustine, Sermons cclxxii(MPL 38. 1247); Bucer, Metaphrases et enarrationes in epistolam ad Romonos(1536), p. 152; "regna, quibus aeterna vita significando exhiberur, tum exhibendo significatur"; A. Lang, Der Evangelienkommentar Martin Butzers und die Grundzuge seiner Theologie, pp. 259-265등을 참조하라. Barth와 Neisel은 Herminiard, Correspondance VI. 130-136을 인용하여 본적과 그 이후에 나오는 몇 몇 구절에서 칼빈이 로마서 주석에 쓴 것을 삽입하였다가 Melanchton의 권고로 삭제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OS V. 352, 주 k; 354, 주 h<11절>; 357-358, 주 a-h<3절>; 365, 주 c-g; 366, 주 a<19절>; 390, 주 i <32절>).

2415) Zwingli, Friendly Exegesis, That Is, Exposition of the Eucharist, to Martin Luther(1527)(CR Zwingli V. 588f.).

2416) Ego Berengarius라는 문서는 Berengarius가 자기의 이전 주장을 부정하는 글이었고, 이는 1059년에 로마에서 그에게 강요해서 된 것이며, Humbert 추기경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용어는 극단적이었다. "우리 주의 진정한 몸과 피는…감각적으로, 그리고 성례적으로 만이 아니라 실제로 사제의 손으로 만지며 떼며 신자의 이로 깨울 수 있다."(Mirbt, Quellen, 4th edition, p. 144). 다른 번역과 자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A. J. Macdonald, Berengar and the Reform of Sacramental Doctrine, p. 130을 보라. Y. Brilioth "실제적 임재를 이보다 더 조잡하게 표준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Eucharistic Faith and Practice; Evangelical and Catholic, p. 86). 참조, Gratian, Decretum III. ii. 42(MPL 187. 1750f.; Friedberg I. 1328f.).

2417) Lombard, Sentences IV. xii. 4, 5(MPL 192. 865). 그는 사제가 진정한 몸을 뗀다는데 대해 Ego Berengarius가 사용한 용어에 찬성하지 않는다.

2418) 7절의 주22와 30절을 보라.

2419) Cyrysostom, Opera(Basel, 1530) V. 379에 있는 Sermon on the Holy Spirit를 보라.

2420) Bucer, Metaphrases…in epistolam ad Romanos(1530), fo. 338; Lamg, op. cit., p. 444; "Sic Christum suo spiritu salvificio, iam intra nos habitare."

2421) "더 신중하게", 즉, Ego Berengarius 보다 더 조심스럽게.

2422)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I. 1xxvi. 5. 1.

2423) "Habitudinis", Aquinas가 말한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참조, L. Schultz, Thomas Lexikon; Deferrari, Lexicon, s. v. "Habitudo."

2424) Lombard, Sentences IV. x. 2(MPL 192. 860).

2425) 기본적인 화체설 선언은 제4차 라테라노 회의(1215)에서 채택된 법규 제 1조에 있다(Mansi XXII. 982; Mirbt, Quellen, 4th ed., p. 179; tr. Bettenson,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p. 210).

2426) Ockham도 그렇게 생각했다. The Sacrament of the Alter, ch. V; "Quod substantia panisnon remanet post consecrationem"(The De Sacramento altaris of William Ockham, ed. and tr. T. B. Birch pp. 182-187); On the Sentences IV. qu. 6C, D; Biel, Collectorium on the Sentences IV. xi. 1에 있는 생각은 Aquinas와 다르다. Aquinas, Summa Theol. III. 1xxv. 3(tr. Bettenson, op. cit., pp. 211f).

2427) Tertullian, Against Marcion III. xix. "Panem corpus sui appellans ut et huic iam eum intellegas corporis sui fiquram pani dedisse." 더 많은 인용문들을 참조하려면 OS V. 357f.와 Smits II. 53을 보라.

2428) Cyril of Jerusalem, Catechetical Lectures xxiii. 7(MPG 33. 1097f., 1113f.; tr. NPNF 2 ser. VII. 151f., 154); Ambrose, On the Christian Faith IV. x. 124(MPL 16. 641; tr. NPNF<se. 125> 2 ser. x. 278); John of Damascus, On the Orthodox Faith IV. xiii(MPG 94. 1144 f.; tr. NPNF 2 ser IX. 81-84).

2429) IV. iv. 13에서 그레고리우스 1세 시대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라.

2430) 주 42를 보라.

2431) "Syllabarum aucupiis", 본장 23절에도 반복된다. Cicero는 속이기 잘 하는 변호사를 "Cantor formularum, auceps syllabarum"이라고 부른다:De oratore I. 1v(LCL edition, p. 170). 20절에 있는 "Verborum religio", "verborum reverentia", "literae exactoribus.", 등의 표현들을 참조하라. 이 말들은 표현한 문자적 해석에 대한 칼빈의 경멸을 표시한다.

2432) 본장 4절.

2433) 본장 13절 주40과 16절을 보라.

2434) 본장 14절 주45를 보라.

2435) "catacrhsticw'"."

2436) 관련 구절들에 대한 어거스틴의 해석이 On the Trinity III. x. 20(MPL 42. 880; tr. NPNF III. 64)에 있는데, 이를 참조하라.

2437) 참조, Lectures on Jeremiah, Jer. 11:19(CR XXXVIII. 123f.).

2438) 루터파의 주장. 루터 자신은 명백하게 이렇게 주장하지 않았고 다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편재한다고 가르쳤다. 본장 30절을 보라. 참조, J. Kostlin, The Theology of Luther. tr. C. E. Hay. II. 77ff; W. Elert, Morphologie des Luthertums I. 267 f., H. Grass. Die Adendmahlslehre bei Luther und Calvin, p. 266.

2439) 10절을 보라.

2440) 20-34절; 편재에 대해서는 29절을 보라.

2441) Ockham, Centiloquium 25, 28.

2442) Tertullian, Against Marcion III. viii(Christ's body called a phantasm)(CSEL 47. 388ff.; tr. ANF III. 327f); H. Grass, op. cit., loc. cit.

2443) 29절을 보라.

2444) Aquinas, Summa Theol. III. 1xxxvi. 1, 2.

2445) 11절 주 30을 보라.

2446) 참조, Hunter, The Teaching of Calvin, pp. 178-186; Grass, op. Cit., pp. 195-209.

2447) Aquinas, Summa Theol. III. 1xxxviii. 5.

2448) "Verborum religio." 14절 주 47을 보라.

2449) Bonaventura, On the Sentences IV. viii. par 2. art. 1. qu. 1(Opera omnia IV. 191).

2450) 이 표현 전체는 루터가 쓴 것이 아니라 Willibald Prickheimer가 사용한 것이다. cf. Khler, Zwingli und Luther I. 236; OS V. 368.

2451) 20-34절에서 칼빈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를 가장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루터에게 비평가인 함부르크의 Joachim Westphal의 언쟁적인 저서들이다. 칼빈은 반대한 Westphal의 그들의 목록이 OS V. XI과 Smits I. 95에 있다. 그의 Justa defensio adversus insignia mendacia Joannis a Lasco(Strasbourg. 1557)도 같은 문제를 다룬 것이다. 그와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서는 literalea, 즉, 영의 사람들이라기보다 문자의 사람들이라고 불린다. 14절 주47과 Last Admonition to Westphal:"Uitnam tam literati essent, quam literales appetunt"(CR IX. 198; tr. Calvin. Tract II. 422)을 참조하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Westphal Farrago confusanearum et inter se dissidentium opinionum de coena domini, ex sacramentariorum libris digesta(1552) E 46; 또 그의 Justa defensio 126:"Dixit esse suum corpus." pamem quem dedit…Jussit ergo edere non solum panem sed suum corpus." 이다. 참조, Luther,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 Preface(Werke WA VI. 511;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193).

2452) Westphal. De coena domini confessio(1558) B 8a; Apologia confessionis, pp. 30, 31.

2453) 7절을 보라.

2454) 참조, Comm, Ps. 84. 8.

2455) Westphal, Apologia confessionis, p. 58.

2456) Augustine, Letters xcviii, 9; clxix. 2. 9(MPL 33. 364, 746; tr. FC 18. 137; 30. 18); Against Adimantus xii. 3(MPL 42. 144); Psalms. Ps. 3:1) MPL 36. 73; tr. NPNF VIII. 5).

2457) "HOC EST." 이 문장들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입장은 루터의 많은 발언과 일치한다. Vom Anbeten des Sacraments des heiligen Lecihnams Christi(1523)(Werke WA IX. 343-437)와 E. M. Plass. What Luther Says, nos. 2487-2490에 인용된 구절들을 참조하라. 1550년에 Magdenburg 교회의 목회자들과 직원들이 발표한 The Confessio et apologia C 46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suum verum corpus sub pane edendum, sanguinem bibendum sub vino."

2458) "Verbi substantivi." S. W. Huston의 주와 G. MacCracken의 논평에 근거하여 번역하였다. M. A. Pei and F. Gaynor, A Dictonary of Linguistics. "substantive verb"을 참조하라.

2459) "cainwnivan."

2460) 이는 히브리어의 hs'[ 인데 칼빈은 이를 pesach라고 음역하였다.

2461) "Vetant…ut literati appareant, vel tantillum a litera discedere." 이 재담섞인 말로 칼빈은 14절과 20절에서 취한 입장을 역설한다. 20절 주 68을 보라. 다음 문장에서 그는 문자적 해석에 구애되지 않는 자기의 입장을 예정한다.

2462) Epiphaninus는 창세기 1:26과 칼빈이 여기서 인용한 다른 구절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신인 동형론자들 혹 아우디우스파를 공격했다. Panarion sive arcula adversus octoginta haereses 1xx. 2. 4(GCS 37. 234; MPG 42. 341; cf.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IV. 10(ed. T. Gaisford, p. 316f.; GCS 19. 228; tr. NPNF<sec. ix> 2 ser. II. 114). 참조, I. xiii. 1, note 4. 칼빈이 이런 문자 주의에는 신앙을 파괴하는 위험한 야만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2463) Westphal, De coena domini confessio B 6b-8a; Apologia confessionis, pp. 26, 29-31, 38-43, 58. 참조, also Luther, Vom Abendmahl Christi Bekenntnis(Werke WA XXVI. 298f.; tr. Plass, What Luther Says, no 2492).

2464) 본장 14절 주 47을 보라.

2465) Westphal, Collectanea sententiarum…Augustini…de coena domini(1555) F2 ab, F 56.

2466) "Res toto caeli et terrae spatio dissitas ac remotas, in tanta locorum distantia…uniri." 참조. 28절의 "locorum…distantia procul dissitos"를 보라. 천지간의 관대한 거리를 생각할 때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가 신비라고 하는 느낌을 더욱 더 강렬하게 받는다. 위의 10절 주27을 보라. 또 다르게 강조된 것에 대해서는 III. xx. 40을 참조하라.

2467) 참조, Comm. Ps. 139; 12.

2468) Augustine, Letters clxxxvii. 3. 10(MPL 33. 835f.; tr. FC 30. 228f.).

2469) Westphal, Apologia confessionis, p. 210.

2470) 위의 23절 주 78을 보라.

2471) 위의 17장 주 58과 Augustine, Against Faustus the Manichee XXIV. 1; VII(MPL 42. 473, 115; tr. NPNF IV. 317, 174)을 참조하라.

2472) 참조, Westphal, Apologia confessionis. pp. 8, 191ff.

2473) Westphal, op. cit. pp. 271ff.

2474) Westphal, op. cit. pp. 273f.

2475) Augustine, John's Gospel I, 13(MPL 35. 1763; tr. NPNF VII. 282).

2476) 이 번역은 불어판의 영향을 받았다. "Moyennant que nous croyons qu'il est au ciel. c'est assez." 어거스틴은 분명히 "땅의 몸이 하늘로 들리워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것은 "헛된 호기심"이라고 한다. Augustine, Faith and the Creed vi. 13(MPL 40. 188; tr. LCC VI. 360).

2477) Westphal, Fides Cyrilli de praesentia corporis(1555); Collectomea sententiarum…Augustini(1555); De coena domini confessio(1558) C 46 ff. 등이 SO V. 380에서 이 견해를 지지하는 전거로 인용된다.(Westphal의 논문에 대한 더 자세한 언급을 참조하려면 OS V. 369-395을 보라).

2478) 성찬에 관한 어거스틴의 구절들을 Westphal이 수집한 Collectanea sententiarum…Augustini(1555);와 그의 다른 저서들에서 인용한 어거스틴의 글을 가리킨다.

2479) Tilemann Heshus에 답하여 쓴 Clear Explanation of sound Doctrine Concerning the True Partipation of the Flesh and Blood of Christ in the Lord's Supper(Dilucida explicatio, etc., 1561)에서 칼빈은 성찬에 관한 교부들의 글을 인용한 Oecolampadius, Bullinger, Peter Martyr("이 분은 더 할 일을 남겨 좋지 않았다") 등의 저서를 지지한다.(CR IX. 490; Calvin, Tracts II. 535; LCC XXII. 292).

2480) "Totum esse nostrum." 참조, Introduction, pp. 1vii. ff., above; Smits I. 271. 본절에 인용된 어거스틴의 구절들은 Smits에 의해 II. 54에 열거되었고, OS V. 381-384에도 다소 불완전한 대로 열거되어 있다. City of God XXII. vii(MPL 41. 759; tr. NPNF II. 484); Psalms, PS. 26. ii. 11; vii; 33. i. 10; ii. 2(MPL 36. 205, 528, 306, 308; tr. LF Psalms I. 176; II.<Ps. 47>. 280f; I<Ps. 34>. 250); John's Gospel xiii. 11; 1. 12, 13; xcii. 1; cii. 6 cvi. 2; cvii. 4; tr. NPNF VII. 90, 282, 362, 391, 399, 403; Confessions IX. xiii. 36(MPL 32. 778; tr. LCC VII. 200); Letter xliv. 5, 10; xcviii. 9; 1iv. 6, 8; clxxxvii. 6, 18, 3, 10, 13, 41(MPL 33. 178, 364, 203, 838, 835f., 848; tr. FC 12. 215, 257f.; 18. 137; 30. 234f., 228., 254f.); On the Trinity III. iv. 10; III. x. 19, 20(MPL 42. 873, 880; tr. NPNF III. 59, 63f.). 이 구절들의 대부분은 Westphal의 Bullinger와 Peter Martyr가 인용했다.). 참조, Westphal, Apologia Confessionis. PP. 228f., 237, 250-255.

2481) Servetus, Christianismi restitutio, 17th epistle, p. 620; CR VIII. 681f.; cf. II. xiv. 8.

2482) Tertullian, Against Marcion IV. x1; "Hoc est corpus meum, id est, figura corporis mei. Fiqura autem non fuisse nisi veritatis esset corpus." CCL Tertullanus I. 656; tr. ANF III. 418.).

2483) Tertullian, On the Resurrecton of the Flesh CCL은 제목으로 "carnis" <육의> 대신 "morfuorum"<죽은 자들의>라고 했다.; 참고:CCL Tertullianus II. 921, note 1(1i. 2-3(CSEL 47. 105; CCL Tertullianus II. 994; tr. ANF III. 584).

2484) Bullinger는 당시 새로 발행된 Jacob Andreae의 A Short and Simple Account of the Lord's Supper(독일어로 씌어졌음)가 바울의 환상을 인용하여(fo. 41a)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음을 1557년 5월 16일자 편지로 칼빈에게 알려주었다(CR XVI. 484f.).

2485) 29절에서 비판한 견해들은 주로 Westphal의 것이며, 그의 견해는 Collectanea 와 Apologia confessionis에서 이미 인용한 구절들에 나타나 있다.

2486) 루터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주 편재 개념을 썼다. 참조:위의 16절 주 54); Luther. Against the Heavenly Prophets(werke WA XVIII. 206, 211); Vom Abendmahl Christi Bekenntnis(Werke) WA XXVI 318, 414 f., 428); Plass, Wath Luther Says, 30. 2498.

2487) II. xiv. 4, note 11.

2488) 참조, II. xiv. 5.

2489) "Idiomatum cainwnivan.", 참조; II. xiv. 1, 주 4. 칼빈은 교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이 교리를 배척하지 않는다.

2490) 참조, II. xiii. 4. ad finem.

2491) Lombard, Sentences III. xxii. 3(MPL 192. 804).

2492) Introduction, P. 1xv above과 위의 7절, 주23을 참조하라. H. Boehmer에 의하면, 루터는 "그의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교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해 실지로 체험하고자 하는 내면적 요구를 느꼈다. 쯔빙글리는 이 요구를 전연 이해하지 못했다. 칼빈은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이 요구를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느꼈다." Luther in the Light of Modern Research(tr. E. S. G. Potter.), p. 241.

2493) Augustine, City of God XVI. xxxvii(MPL 41. 516; tr. NPNF II. 32).

2494) Westphal은 알렉산드리아의 시릴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낟고 논했다. Apologia confessionis, p. 142.

2495) "Olim", Berengar(1059년 경)의 세대로부터 화체설을 승인한(canon i) 제4차 라테란 회의(1215년)까지 중세의 논쟁을 가리킨다. 위의 12절 주 32; 14절 주 41을 참조하라.

2496) "Prora et puppis." 키케로는 이것을 "희랍격언"이라고 한다. Letters to His Friends XVI. xxiv. 1(LCL edition, III. 374 f., note f). 이 표현은 III. iv. 20과 IV. xviii. 18에도 나타난다.

2497) Lombard, Sentences IV. viii. 4; IV. ix. 2(MPL 192, 857f.). manducatio impiorum에 대해서는 Grass, op. cit., p. 233; McNeill, Vnitive Protestantism, pp. 156f.; Westphal, Recta fides de coena domini(1533) G 46f.을 참조하라.

2498) 참조, Augustine, John's Gospel vi. 15; 1xii. 1; 1iii. 10(MPL 35. 1432, 1801, 1778; tr. NPNF VII. 44, 312f., 244); On Baptism V. viii. 9(MPL 43. 181; tr. NPNF IV. 466f.); Psalms, Ps. 142. 15(MPL 37. 1854; tr. LF Psalm <Ps. 143> VI. 292).

2499) 33절의 후반은 주로 Westphal, Recta fides de ceona domini G la-H 3a를 상대로 한 것이다.

2500) 본절에 사용한 어거스틴의 글의 출처:John's Gospel xxvi. 11, 12, 15, 18; lix. 1; 1xii. 1; xxvii. 3, 11(MPL 35. 1611, 1612, 1614, 1796, 1801, 1616, 1621; tr. NPNF VII. 171ff., 307f., 312f., 174, 177f.); City of God XXI. xxv(MPL 41. 74; tr. NPNF II. 473); Psalms Ps. 98, 9(MPL 43. 181; tr. NPNF IV. 466f.); Sermons cxii. 5. 5(MPL 38, 645; tr. LF Sermons I. 462); Against Faustus xiii. 16(MPL 42. 291; tr. NPNF IV. 205);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 xxi. 30; II. xxvii. 44(MPL 44. 125f., 177; tr. NPNF V. 26, 62).

2501) 교황 Urban IV는 교서 Transitus(1264)에서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을 제정했다(Mansi XXIII. 1077; Mirbt, Quellen, 4th ed., p. 203); Council of Trent, thirteenth session(1551), ch. v(Schaff, Creeds II. 131).

2502) Aquinas는 성찬에서 떡을 먹으로 "실제적인 동반에 의해서" 몸 전체가(피와 뼈와 신경과 기타) 그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Summa Theol III. 1xxvi. 1, 2.

2503) "Discumbentes." 참조. 위의 10절, 주 28.

2504) 참조; Council of Nicaea(325) canon xx(Mansi II. 678; text and translation in Fulton, Index canonum, pp. 132f.).

2505) "Sursum corda." Cyprian, On the Lord's Prayer xxxi(CSEL 3. i. 289; tr. ANFV 455); Gratian, Decretum III. ⅰ. 70(MPL 187. 1729; Friedberg I. 1313)에 인용되었다. Augustine. Gift of Perseverance xiii. 33(MPL 45. 1013; tr. NPNF V. 538); Sermons cc xxvii(MPL 38. 1100); Psalms, Ps. 132. 13(MPL 37. 1736; tr. NPNF <Ps. 133> VIII. 619f.; LF Psalm VI. 121.

2506) De Castro. Against Heresies I. art. "adoratio"(1543 ed., fo. 26 B.C).

2507) 위의 1-3절.

2508) Pannier는 Institution IV. 299, 307(IV. 7, 38에 대한 주들)에서 Farel, Sommaire xix와, Calvin, Instruction in Faith(1537)에도 비슷한 진술들에 주목한다.

2509) Didache(12사도의 교훈) 9. 4는 고린도전서 10장 17절을 근거로 성찬 기도에 이 비유를 사용했다(LCL Apostolic Fathers I. 322f.). 참조, Augustine, Sermons cd xxii; "Intelligite et gaudete; untas, veritas, peitas, charitas, unus panis…unum corpus multi"(MPL 38. 1247); Lombard, Sentences IV. viii. 4(MPL 192. 857); Oecolampadius, Antisyngramma in his Apologetical(1526), A la. 루터도 Sermon on the Sacrament of the Body of Christ(1519)(Werke WA II. 748; tr. Plass, What Luther Says, no 2524); Ein schone predict, etc:A Beautiful Sermon on the Reception of the Holy Sacrament(Werke, Erlangen edition, XI. 186ff.; tr. J. N. Lenker, Precious and Sacred Writings of Martin Luther XI 231-233) 등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서 서로 친교를 가진다는 루터의 깊은 느낌을 칼빈도 가졌다. VI. xviii. 16, 주31을 참조하라.

2510) Augustine, John's Gospel xxvi. 13(MPL 35. 1613; tr. NPNF VII. 172).

2511) 참조, Luther, Sermon for Maundy Thursday(1524)(Werke WA XV. 497 f.); On Christian Liberty(Werke WA VII. 58;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326); Calvin, Instruction in Faith(OS I. 413); tr. Fuhrmann, p. 71.

2512) 위의 4절.

2513) 교황 Innocent III세가 1209년에 이단자들(Waldensians)의 복귀 조건을 규정하면서 서풍에서의 "의도"의 원칙을 세웠다:Regestae VII. 196(MPL 215. 1511). Catholic Encyclopedia와 Dictionnaire de Theologie Catholique의 "Intention"에 인용된 것들을 참조하라.

2514) Council of Nicaea(325) Canon xiii(Mansi II. 674; Fulton, Index cononum, pp. 128f.). 그레고리우스 1세는 베네딕트가 임종시에 성찬을 받았다고 한다. Life of St. Benedict xxxvii. in Dialogues II.(MPL 66. 202; tr. P. W., Dialogues of St. Gregory(1518). ed. E. C. Gardner, p. 99).

2515) "Confessionem laudis." 참조, III. iv. 9, note 19.

2516) 참조. I. i. 2; I. v. 3, note 11.

2517) 스콜라 사상의 특징은 Alexander of Hales 1245년. Summa theologiae IV. x1vi. memb. 3. art. 2f을 반영한다. 루터는 이것이 부정적인 충고라고 하였다. 예컨대 Sermon for Palm Sunday(152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선생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독약을 주시지 않는다."(Werke WA XV. 496)고 하였다.

2518) 참조, III. iv. 1.

2519) 참조, Luther, op, cit., p. 502f.(tr. in part, Plass, What Luther Says, 30. 2523).

2520) Alexander I. bishop of Rome 107-116. 참조, Platyna, Lives of the Popes tr. W. Benham, I. 21f.

2521) Augustne, Unfinished Treatise Against Julian II. cxx. clxxxi; IV. 1xxvii(MPL 45. 1192f., 1220, 1383); Against the Writings of Petilianus II. xxiii. 53(MPL 43. 277); ON Marriage and Concupiscence II. xviii. 33; II. xxix. 50f.(MPL 44. 455, 465, 467; tr. NPNE V. 296, 303); On the Creed I. 1, 2(MPL 40. 628; tr. NPNF III. 269f.); On the Grace of Christ and on Original Sin II. x1. 45(MPL 44. 408; tr. NPNF V. 253f.).

2522) 아래의 44절과 46절을 참조하라. 칼빈은 이렇게 자주 성찬을 받을 것을 주장한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미사는 자주 집행했지만 떡과 포도주를 받는 사람은 적었다. 스콜라 시대에는 성찬을 한 달에 한 번 받으면 "빈번"하다고 했다. 설교자들은 빈번한 성찬 참여를 말리는 편이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 반대 추세를 일으킨 자들은 얀센파 특히 De la frequente communion(1643)의 저자 Antoine Arnauld였다. 특히 C. Baumgartner et al., Dictionnaire de Spiritualite II. art "Communion frequente" 3 and 4, pp. 1260-1288을 참조하라.

2523) 제네바규정, Ecclesiastical Ordinances(1541)(CR X, i. 7-9; tr. LCC XXII:58-72)을 참조하라.

2524) 이것은 제4차 라테란 회의(1215) canon xxi의 규정이다(Mansi XXII. 1010; tr. H. J. Schroeder, Disciplinary Decress of the General Councils, pp. 259f.).

2525) Pseudo-Isidorian Decretals에서는 이 고대 교회법이 교황 아나크레투스의 것이고 칼릭스투스 1세의 것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Gratian, Decretum III. i. 59(MPL 187. 1726; Friedberg I. 1311; ed Hinschius, Pseudo-Isidorianae, p. 70).

2526) 이 규정들의 원문에 대해서는, Apostolic Canons ix(Fulton, Index canonum, pp. 82f.; Council of Antioch(341) canon ii(Mansi II. 1310; Fulton, op. cit., pp. 233f.; tr. NPNE 2 ser. XIV 108f.); Council fo de

2527) Augustine, John's Gospel xxvi. 15(MPL 35. 1614; tr. NPNF VII. 173); Epistles Liv. 2. 2(MPL 33. 200; tr. FC 12. 253); Chrysostom, Commentary on Ephesians, ch. 1. hom iii. 5(MPG 62. 29f.; tr. NPNF XIII. 63f.).

2528) 제피리누스는 1998년에서 217년까지 재임한 교황이었다. 참조:Platyna, Lives of the Popes, tr. W. Benham, I. 37.

2529) 참조; 위의 44절, 주 41.

2530) "In utramque aurem secrurr dorminant," 이는 직역하면 "두 귀 위에서 잔다" 이다. 이 표현은:Terence가 Heautom Timorumenos II. iii. 101.(LCL Terence I. 150f.); Plautus, Pseudolus I. I. 123(LCL Plautus IV. 160f.)에서 사용한 것이다.

2531) 참조:위의 45절, 주 44(hom. iii. 4).

2532) 참조, Luther, Receiving Both Kinds in the Sacrament(Werke) WA XII. 11-41; tr. A. R. Wentz, Luther's Works, American Edition, 36, 237-267).

2533) Council of Constance, thirteenth session(1415)(Mansi XXVII, 727); Aquinas, Summa Theol. III. 1xxx. 12; III. 1xxvi. 1, 2; cf. sec. 35, note 19, above.

2534) 불어판은 이 어구를 부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en l'ordre de Sacrificateurs qu'ils nomment ordre de Prestrise" 참조, De Castro, Against heresies VI.(1543 ed., fo. 98A-100A); Eck, Enchiridion, ch.x.

2535) IV. xix. 28.

2536) 여기 말한 "역사서"와 "저서"에 대해서는 아래의 주 54와 OS V. 415, 주 a를 보라.

2537) Tertullian, On the Resurrection 8(CCL Tertullian II. 93; tr. ANF III. 551); Theodoret, Ecclesiastical History v. 18(ed. T. Gaisford, p. 434; GCS 19. 309; MPG 82. 1231f.; tr. NPNF<ch. xvii> 2 ser. III. 143); Jerome, Commentary on Zephaniah 3: 1-7; Commentary on Malachi 3:15(MPL 25. 1375, 1651); Chrysostom, Homilies on II. Corinthians, hom. xviii. 3(MPG 61. 527; tr. NPNF XII. 366); Augustine, Sermons xxxi. 1, 2(MPL 38. 193); Sermons cc xvii 5, 16(8)(MPL 33. 984f.; tr. FC 32. 87); liv. 2. 2(MPL 33. 200; tr. FC 12. 253); xxxvi. 10. 24(MPL 33. 147; tr. FC 12. 159).

2538) Gregory I, Homilies on the Gospels II. xxii. 7(MPL 76. 1178); Gregory I, Dialogues IV. lviii(MPL 77. 425; tr. P. W., ed. E. C. Gardner, p. 256).

2539) 참조; Gratian, Decretum III. ii. 12, Gelasius I 세가 Majoricus 감독과 John 감독에게 보낸 말을 인용했다.:"Aut integra sacramenta percipiant, aut ab integris acveantur"(MPL 187. 1756; Friedberg I. 1387); Cyprian, On the Lapsed xxv(CSEL 3. i. 255; tr. ACW XXV. 3).

2540) Aquinas와 Lombard 같은 사람들.

2541) 이런 견해는 Clichtove 같은 16세기 소르본느 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했다. 참조, Clichtove, Propugnaculum(1526) I. xi. fo. 24f., Antilntherus II. xv, fo. 955b; and De Castro, Against Heresies X, art. "missa"(1543 ed., fo. 133ff.).

2542) 이는 로마 교회 미사경본(經本)의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의식 용어이다.

2543) Eck. Enchiridion(1533), fo. 56a. 참조, Augustine, City of God, XVI. xxii;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그때 처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MPL 41. 500; tr. NPNF II. 323).

2544) 참조, Apology of Socrates xxx:"나는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언하는 때인 바로 죽음 직전에 다다랐다."(LCL Plato I. 136f.).

2545) Eck, Enchiridion(1533), fo. 55b, 57a.

2546) Eck, op. cit., fo. 53b-54a; de Castro, Against Heresies X(1543, fo. 133f).

2547) 16절을 보라.

2548) "ajnaivmaton." 참조, De Castro, Against Heresies X(1543 ed., fo. 134 B.C); Gregory of Nazianzus, To Amphilochius(MPG 37. 279-282).

2549) Eck, Enchiridion(1533), fo. 55b-57a.

2550) "Ad Coronidem" 책이나 희곡의 끝에 있는 표를 가리키는 말이다. 참조, Liddell and Scott, Greek-English Lexicon, S. V. "coroniv""

2551) 참조, Farel, Sommaire(1525) xix(dela messe):"미사는 사제와 신자들 사이의 큰 차이를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Pannier, Institution IV. 57, noet a, p. 309). 칼빈은 중세 초에 유행한 개인 미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W. D. Maxwell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pp. 67f.; F. Heiler, The Spirit of Worship, p. 71. 참조, Luther, De abroganda missa privata;(1521)(Werke WA VIII. 411-476; Disputatio contra missam privatam(1536)(Werke WA XXXIV. 134-173)을 보라. 신자들의 참여는 성찬에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인데, 칼빈은 성찬을 본질적으로 한 단체 행동이라고 보았다. D. M. Baillie, The Theology of the Sacraments, pp. 122ff.; R.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pp. 242ff를 참조하라. 칼빈은 이 말을 1536년에 썼고 Edmund Geste(Gheast)는 1548년에 썼고 Edmund Geste(Gheast)는 1548년에 그의 책 Treatise Againste the Prevee mass, in…Furtherance of the Mooste holy Communyon를 저술하였다. 이 흥미있는 책자는 H. G. Dugdaleol The Life and Character of Edmund Geste…the Principal Compiler of the Liturgy of the Church of England 의 "Appendix I"로 제판되었다.(London, 1849). 특히 pp. 134-140을 버라. 제 22차 트렌트 종교회의(1562)는 The Council of Trent, "사제만이 참여하는 미사"를 승인하고 권장하였다.(Schaff, Creeds II. 182).

2552) 참조, Enciclopedia Cattolica, art. "Messa"; Du Cange, Glossarium, s. v. "Missa" 3, 4; A. Souter, Glossary of Later Latin, s. v. "Missa." "미사"라는 말은 예배 끝에 "Missa est"(산회합니다)라는 말로 회중을 돌려 보낸데서 온 것 같다. 복수형을 어거스틴 시대에 학습 교인들의 미사와 그들이 해산한 다음에 집행하는 신자들의 미사를 구별한 데서 처음으로 생긴 것 같다.

2553) IV. xvii.

2554) Augustine, Against Faustus xx. 18(MPL 42, 388f.; tr. NPNF IV. 260f.).

2555) Fulgentius, De fide xix. 60(MPL 65. 699). Fulgentius(533년 사망)은 북부 아프리카의 Ruspe의 감독이었다. 참조:Smits I. 188.

2556) Augustine, Against the Adversaries of the Law and the Prophets I. xviii, 37; xx. 39(MPL 42. 624, 626); Against Faustus xx. 21(MPL 42. 385; tr. NPNF IV. 261f.); Psalms, Ps. 3. 1.(MPL 36. 73; tr. NPNF VIII. 4f.). Letters cxl. 18. 46(MPL 33. 557; tr. FC 20. 96); Against Adimantus xii(MPL 42. 144); On the Trinity IV. xiv. 19(MPL 42. 901; tr. NPNF III. 79).

2557) Chrysostom, Homilies on Hebrews, hom xviii. 3(MPG 63. 131f.); Augustine, Against the Letter of Parmenianus II. viii(MPL 43. 59f.).

2558) Cyril of Jerusalem, Catechetial Lectures xxiii. 10(MPG 33. 1117; tr. NPNF 2 ser. VII. 155, with explanatory note 5); Chrysostom, On the Priesthood III. iv(MPG 48. 642; tr. NPNF IX 46); Homilies on Romans, hom viii 8(MPG 60, 465; tr. NPNF. XI. 394); Homilies on Hebrews hom xvii. 3(MPG 63. 131; tr. in part NPNF XIV. 447); Gregory I, Dialogues IV. 1viii(MPL 77. 425; tr. P. W., ed., E. C. Gardner, p 256).

2559) "Praepostera illa anagoge." 칼빈은 교부들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 신비적 해석을 적용해서 해독을 끼쳤다고 비난하지만, 일반적으로 열렬히 찬성함으로써 이 비판과 균형을 취하도록 주의한다. "왕에게 드리는 선언" 4절과 본장 13절을 보라.

2560) 이것이 개혁 교회의 예배에 대해 갖는 의의에 유의하라. 참조, Maxwell, Outline of Christian Worship, pp. 91, 97, note 2, 149; D. M. Baillie, Theology of the Sacraments, p. 121.

2561) 참조, Calvin, Sermons on Deuteronmy cxli; "그러나 제물은 자유의사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은 모두 제물이라고 부르신다"(CR XXVIII. 209).

2562) 참조, 본장 11절의 주 20; II. xi. 2-5.

2563) 참조, Cadier, Institution IV. 411, notes 7, 8.

2564) "latreutico;n et sebastico;n"

2565) "eujcaristico;n"

2566) "Nummulis aereis."

2567) Plato, Republic II. viii. 365E, 366A(LCL Plato, Republic I. 138f).

2568) 참조, sec. 12. note 21, above; Cadier, Institution IV. 412, note 7.

2569) "eujcaristico;n"

2570) 참조, Baillie, op. cit., 120, 123; IV. xvii. 38.

2571) Sec. 4, above.

2572) RSV도 칼빈의 해석과 같이 "영적 예배"라고 했다.

2573) 참조, I. xiii. 2; I. xvi. 4, note 11; II. ix. 1.

2574) 참조, Bailie, op. cit., p. 120.

2575) 여기서 암시하려고 하는 것은 성찬이 미사에 사로잡힌 것은 헬렌이 납치된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미사를 옹호하려는 자들은 트로이 사람들과 같다.

2576) "Turpes nundinas." 이런 비난은 보통이다. Pannier는 Autoine Marcourt의 Livre des Marchands(1535?)와 관련시킨다. 이것은 로마 교황청에 대한 대담한 풍자였다. 영역으로 The Boke of Marchantes 가 나타났다(뉴욕시립도서관에 필름 사본이 있다.) 참조, Doumergue, Calvin I. 502, note 1; Pannier, Institution IV. 58, note c on p. 309.

2577) IV. xvi. 1.

2578) IV. xv. 19.

2579) Farel의 Sommaire(Sommaire declaration)에 대한 Pannier의 주해와 칼빈은 1536년도판 Institution IV. 73, note a(P. 311)를 보라. 본장의 본문은 몇 개의 문장을 제외하고는 1536년판의 제5장과 같다. 루터는 다섯 가지 비성경적 성례들을 고해, 견진, 혼인, 신뜸, 종부의 순서로 논했다.; Babylonish Captivity(Werke WA VI. 543, 571; tr. Works of Martin Luther II. 245-290). 루터는 칼빈과는 다르게 참회에 2차적인 성사의 지위를 부여한다.

2580) 선배들에게는 상당히 불확실했으나 롬바르드는 일곱 성사의 수와 순서를 결정했다; Sentences IV. ii. 1(MPL 192. 841).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I. 1xv. 1.

2581) Lombard, Sentences IV. i. 1, 2(MPL 192, 839f.);(School of) Hugh of St. Victor, Summa Sententiarum IV. i; On the Sentences I. ix. 3(MPL 176, 117, 320); Bonaventura, On the Sentences IV. dist. 1. part 1. art. unicus. qu. 3(Opera omnia IV. 17); Aquinas, Summa Theol. III. 1xii. 1, 3, 4; III. 1xvi. 1.

2582) Aquinas, Summa Theol III. 1x. 7.

2583) Augustine, John's Gospel 1xxx. 3(MPL 35. 1840; tr. NPNF VII. 349).

2584) Augustine, Letters liv. 1(MPL 33. 200; tr. FC 12. 252); On Christian Doctrine III. ix. 13(MPL 34. 71; tr. NPNF II. 560).

2585) 고대 교회의 관습에 대한 칼빈의 이 추측은 잘못이다. Catholic Encyclopedia와 Dictionnaire de theologie Catholique와 Schaff-Herzog Encyclopedia에 있는 견진례에 대한 항목들을 보라. 거기에는 중세기의 견진성사에 앞서고 그것을 결과한 관습에 대한 언급이 인용되었다. 참조, L. Duchesne, Christian Worship; tr. M. L. McClure, p. 314ff.

2586) "In honorem sacerdotii." "sacerdos"를 "감독"이라고 해석하는데 대해서는 Du Cange, Glossarium, s. v. "Sacerdos"를 참조하라.

2587) Leo I, Letters clxvi 2; clix. 7; clxvii, inquisitio 18(MPL 54. 1194, 1138, 1209; tr. NPNF 2 ser. XII. 1. 108; 103, note 2; 112). 자기의 세례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안수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Jerome, Against the Luciferians viii. ix(MPL 23. 163f.). 루시퍼파(the Luciferians)는 Cagliari의 Lucifer(371년 사망)가 사르디니아에서 세운 조그마한 편파였다. Lucifer는 아티나시우스를 지지했고, 아리우스파에 속했던 사람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2588) Hugh of St. Victor, On the Sacraments II. vii. 4(MPL 176. 461); Gratian, Decretum III. dist. v. 1-9(MPL 187. 1855-1858; Friedberg I. 1413-1415); Lombard, Sentences IV. vii(MPL 192. 856f.); Innocent III, Regertae VII. 3, 196(MPL 215, 285, 1511); Eugenius IV. bull Exultate Deo(1439) xi(Mansi XXXI. 1055; Mirbt, Quellen, 4th ed., p. 235ff.; tr. J. H. Robinson, Readings in European History I. 350).

2589) Augustine, John's Gospel 1xxx. 3(MPL 35, 1840; tr. NPNF VII. 344). 어거스틴은 여기서 첨가한다; "etiam ipsum tanquam visibile verbum." 참조; IV. xiv. 6. 주 8.

2590) Decretals of Gregory IX. I. tit. xv, "De sacra unctions"(Friedberg II. 133)에서 Innocent III세가 사도행전 8:14이하를 인용한다는 말. Eugenius IV, bull Exultate Deo xi: "Secundum apostolum"(Mansi xxxI. 1055; Mirbt, Quellen, 4th ed., p. 236).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논할 때 견진은 언급하지 않았다. Homiles on Acts, hom, xviii. 3(MPL 60. 144; tr. NPNF XI. 114f.).

2591) "cacazhlivan"

2592) 참조, Lombard, Sentence IV. vii. 1(MPL 192, 855).

2593) Eugenius IV는 Exultate Deo, loc, cit에서 "confirmo te chrismate salutis"라는 식문을 사용했다. 그러나 L. Duchesne은 교황 힐라리(461-468)가 사용한 식문을 사용한다; Ipse te linit chrismate Salutis in vitam eternam(Christian Worship, p. 314).

2594) Gratian, Decretum II. v. 2, 3; III. iv. 154(from the synod of Milevis<416> ca non iii)(MPL 187. 1857, 1855; Friedberg I. 143, 1412).

2595) Gratian, Decretum III. v. 1, 6(MPL 187. 1855, 1857f.; Friedberg I. 1413f.).

2596) Gratian, Decretum III. v. 3, loc. cit.

2597) 델피의 신탁에 대한 언급, 거기서 여선지자는 금빛나는 높은 나무 삼각대 위에 앉았다.

2598) 원래 출처는 Lombard, Sentences IV. vii. 2(MPL 192. 855); Augustine, Letters clxxxv. 9. 37(MPL 33. 809; tr. FC 30. 176f.); John's Gospel iv. 11(MPL 35, 1416; tr. LF St. Augustine on John's Gospel I. 56); Psalms 10. 5(MPL 36. 134; tr. LF Psalms I. 96)이다.

2599) Gratian, Decretum I. xcv. 1(MPL 187, 447; Friedberg I. 33). Form Gregory I, Letters IV. 26(MGH Epistolae I. 261; tr. NPNF 2 ser. XII. ii. 153).

2600) Gratian, Decretum III. v. 5(MPL 187, 1857; Friedberg I. 1414).

2601) IV. xviii. 20.

2602) Lombard, Sentences IV. vii. 2(MPL 192. 855).

2603) "Moderatores."

2604) De Castro, Against Hersies IV. art. "Confirmatio"(1543 ed., fo 71E, F)을 참조하라. 본질의 논법은:On Christian Doctrine III. ix. 13(MPL 34. 71); tr. NPNF II. 560); Letters liv. 1(MPL 33. 200; tr. FC 12. 252); On Baptism III. xvi. 21; V. xxiii. 33(MPL 43. 149, 193; tr. NPNF IV. 443, 475)에 있는 어거스틴의 발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2605) Farel, Sommaire xxxix; Calvin, Instruction in Faith and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La maniere d'interroguer les enfans <ca. 1553>(CR VI. 147-160; tr. LCC XXII. 91-139)에 규율이 설명되어 있다. 10세 된 소년에게서 기대하는 성취정도에 유의하라.

2606) 고해에 대한 스콜라적 논의에 대해서는, Lombard, Sentences IV. xiv-xx(MPL 192. 868-899); Gratian, Decretum II. xxxiii. 3(MPL 187. 1519-1644; Friedberg I. 1159-1247); Aquinas, Summa Theol. III. 1xxxiv-1xxxix and Suppl. questions i-xxxiii을 참조하라.

2607) III. iii-v.

2608) 예, Letters lvii. 1, 3(CSEL 3. ii. 650, 652; tr. ANF V. 337).

2609) Council of Carthage(390) canon iv(Mansi III. 693; tr. Hefele, History of the Councils, Engl. ed., II. 390); Council of Orange(441) canon iii(Mansi VI. 437; tr. Hofele, op. ci t., III. 160); Council of carthoge(397) canon xxxi(Mansi III. 885).

2610) Cyprian, Letters xvi. 2(CSEL 3. ii. 518; tr. ANF V. 290).

2611) Gratian, Decretum II. xxvi. 6. 3, Gratian's note(MPL 187. 1556; Friedberg I. 1037).

2612) "Nodum enim in scirpo quaerunt." Plautus. Menaechmi II. i. 247(LCL Plautus II. 390); Terence, Andria V. 4. 38. 941(LCL Terence I. 101f.).

2613) "Exteriorem esse sacramentum duntaxat, interiorem rem et sacramentum."

2614) Lombard, Sentences IV. xxii. 3(MPL 192. 899). Lombard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인용한다.

2615) Augustine, On Diverse Questions xliii(MPL 40. 28).

2616) Augustine, Sermons cclxxii(MPL 38. 1247).

2617) Lombard, Sentences IV. ix 1(MPL 38. 1247).

2618) IV. xvii. 41.

2619) Augustine, On Baptism V. xxiv. 34(MPL 43. 193; tr. NPNF IV. 475); Questions on the Heptateuch III. 84(MPL 34. 712f.); On the Merits and Remission of Sins I. xxi. 30; II. xxvii. 44(MPL 44. 125f., 177; tr. NPNF V. 26. 32). 참조, IV. xiv. 15, note 27.

2620) 이것은 칼빈이 좋아하는 은유다. 참조:II. ii. 21; Comm. John 3: 19-21. 키프리안은 "진리보다 관습을 좋아하거나, 빛을 보면서 어둠을 버리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 Letters lxxv. 19(CSEL 3. ii. 822; tr. NPNF <no. lxxiv> V. 395).

2621) Jerome, Letters lxxxiv. 6:"Secunda post naufragium tabula est, culpam simpliciter confiteri"(MPL 22. 748; CSEL 55. 128); 참조, Lombard, Sentences IV. xiv. 1(MPL 192. 868); Gratian, Decretum II. xxxiii. 3. 72(MPL 187. 1548; Friedberg I. 1179); Cicero's reference to "a plank from a shipwreck." On Duties III. xxiii. 89(LCL edition, pp. 364f.).

2622) Gratian, Decretum II. xv. 1, 3(MPL 187, 971f.; Friedberg I. 746). Fulgentius, De fide ad Petrum xxx. 73(MPL 40. 775).

2623) Lombard, Sentences IV. xxiii. 2(MPL 192. 899);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ix-xxxiii; Eugenius IV. bull Exultate Duo(1439) xiv(citing James 5:14-15)(Mansi XXXI. 1058f.; Mirbt, Quellen, 4th ed., p. 237; tr. Robinson, Readings I. 353); cf. Innocent I. Letters xxv. 8(MPL 20. 559).

2624) Sec. 6, above.

2625) Eugenius IV. op. cit.

2626) Lombard, Sentences IV. xxiii. 1(MPL 192. 899).

2627) "Sacrificulum."

2628) "Sacerdotes"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xi. 3.

50a)2629)"Ferculum." 이교 행렬에서 우상을 얹어서 들고 다니던 들 것.

2630) Aquinas, op. cit., xxix. 6; cf. Innocent I, Letters, loc. cit.; Pontificale Romanum, ed. by the Archbishop of Mechlin, 1934, pp. 752, 767, 769.

2631) Sigebert of Gembloux(d. 1112), Chronographia(MGH Scriptores VI. 305); Innocent I, Letters xxv. 8(MPL 20. 560).

2632) 롬바르드는 문지기, 강경사, 구마사, 시종, 차부제, 부제, 사제 그리고 "주교의 네 계급"을 열거한다. Sentences IV. xxiv. 3-12. De ordinibus ecclesiasticis(MPL 192. 900-905). 참조; Aquinas, Summa Theol. III. Suppl. xxxiv-xl; Eugenius IV. bull Exultate Deo(Mansi XXXI. 1058; Mirbt, Quellen, 4th ed., p. 237; tr. Robinson, Readings I. 352f.).

2633) Lombard, Sentences, loc. cit.

2634) 참조:IV. vi. 10, note 20. 칼빈은 여기서 Hugh of St. Victor의 의견과 paris의 William이 언급된 저술가들의 의견을 인용한다. Hugh는 일곱 성직 계급을 설명했다. De sacramentis II. iii. 5(MPL 176. 423). William은(William of Auvergne 라고도 부른다. 1248년경에 사망) 아홉 계급을 말한 사람들을 언급하며, 자신은 일곱을 주장했다. De septem sacramentis, Operum summa(Paris, 1516) II. 60.

2635) Isidore of Seville(d. 636), Etymologies VII. xii(MPL 82. 290), 이것을 인용한 것:Gratian, Decretum I. xxi 1(MPL 187. 116; Friedberg I 67); Lombard, Sentences IV. xxiv. 1(MPL 192. 900); Gratian, Decretum I. xxiii. 18f.(MPL 187. 136; Friedberg I. 84f.).

2636) "Ceroferarium"; Lombard, Sentences IV. xxiv. 3-9(MPL 192. 900-904).

2637) De Castro, Against Heresies I. xiii(1543 ed., fo. 21ff.).

2638) Gratian, Decretum I. xxi. 1(MPL 187, 116; Friedberg I. 90).

2639) IV. iv. 9.

2640) Gratian, Decretum II. xii. 1. 7(MPL 187, 884; Friedberg I. 678); Lombard, Sentences IV. xxiv. 2(MPL 192. 901).

2641) 참조, Langland, Piers Plowman, "The Vision of Holy Church"; "성직자보다 더 힘들고 배고픈 사람은 없다."

2642) Lombard, Sentences IV. xxiv. 2(MPL 192. 901). 롬바르드는 또 "인자야…날카로운 칼을 취하여"라는 에스겔 5장 1절과 민수기 6:5, 18에 있는 나실인들의 규정을 인용한다.

2643) Gratian, Decretum I. xxiii. 21(MPL 187. 137; Friedberg I. 85).

2644) Augustine, On the Work of Monks xxxi. 39-xxxiii 41(MPL 40. 578. 581; tr. NPNF III. 522-524); Retractations II. xxi(MPL 32. 639). 삭발은 수도사들이 먼저 했고 그 후에 교회 성직자들의 삭발령이 633년 Toledo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canon xli(Mansi X, 630). 삭발의 형태에 대해서는 664년 Whitby 종교 회의에서 켈트계와 로마계 성직자들간에 논쟁이 있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을 대표한 Colman은 앞 부분의 삭발을 주장하고 로마파의 대표 Whlfred는 머리 중앙부를 원형으로 삭발할 것을 주장했다. 후자는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상징한다고 보통 생각했다.

2645) Lombard, Sentences IV. xxiv. 3-9(MPL 192. 901-904); IV. i. 2(MPL 192. 839).

2646) Lombard, Sentences IV. xxiv. 9(MPL 192. 904); Gratian, Decretum I. xxv. 1(MPL 187, 143; Friedberg I. 90).

2647) Secs. 29-31, below.

2648) IV. xviii. 14.

2649) 칼빈은 자주 모든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식을 주장하며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라고 역설한다. 참조, IV. xviii. 16, 17; Comm. I Thess. 4:3과 R. S. Wallace, Calvin on the Christian Life, Part I. ch. iv에 인용된 여러 구절들.

2650) Lombard, Sentences IV. xxiv. 9(MPL 192. 904); Gratian, Decretum I. xxi. Gratian's note preceding part 1(MPL 187. 116; Friedberg I. 67).

2651) Lombard, Sentences IV. xxiv. 10:"Character spiritualis"(MPL 192. 904); Aquinas, Summa Theol, III. lxiii. 6, Suppl. xxv. 2; Engenius IV, bull Exultate Deo(Mansi XXXI. 1054; Mirbt, Quellen, 4th ed., p. 237; tr. Robinson, Readings I. 353f.). 이 교서의 이 부분에 있는 주목할 어구는 "Accipe potestatem offerendi sacrificum"(제물을 드리는 권한을 받으라)와 "Effectus augmentum gratiae"(유익은 은혜의 증대라)이다.

2652) Augustine, John's Gospel 1xxx. 3(MPL 35. 1840; tr. NPNF VII. 344f.).

2653) 칼빈은 1561년에 Gabriel Saconay와의 논쟁에서, 자기는 "항상 기름 냄새를 싫어했다"고 언급했다(CR IX. 448). 참조: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pp. 136f(칼빈 자신의 성직 임명에 대해서). 성직자 임명식에서 도유의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는 William Durandus, The Symbolism of the Churches(ca. 1295) tr. J. M. Neale, 1842), pp. 171-175를 보라.

2654) 참조, IV. iii. 9; IV. iv. 5.

2655) Lombard, Sentences IV. xxiv. 8(MPL 192. 903); Eugenius IV, bull Exultate Deo,(Mansi XXXI. 1058; Mirbt, Quellen, p. 237; tr. Robinson, Readings I. 353f.); Gratian, Decretum I. xxi. 1; I. xxiii. 11; I. xxv. 1, 3(MPL 187, 116, 134, 143; Friedberg I. 67, 83, 90).

2656) Lombard, Sentences IV. xxiv. 7(MPL 192. 902f.).

2657) Sec. 32, above. 참조, IV. v. 15-17.

2658) Lombasrd와 교서 Exultate Deo와 기타 중세기 문헌에서 혼인 성사는 마지막 일곱째이다. Lombard, Sentences IV. 26-42(MPL 908-932); Exultate Dec. sec. xvi(Mansi XXXI. 1058; Mirbt, Quellen, p. 237; tr. Robinson; Readings I. 354). 에베소서 5:32의 라틴역이 "Sacramentum hoc magnum est"로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혼인을 하나의 성사라고 논하는데에 사용되었다:본장 35, 36절을 보라.

2659) 즉, 그레고리우스 7세(재위 1073-1985)의 동시대인이었던 Peter Damiani(Sermons lxix; MPL 144, 902)가 이렇게 생각했다. 교회법 학자 Chartres의 Ivo(1116년 사망)도 혼인을 성사로 인정했다. Ivo. Decretum VIII. ix(MPL 161. 568).

2660) Lombard, Sentences IV. xxvi. 6(MPL 192. 909f.). 참조, note 79, above.

2661) Horace, Satires II. iii. 83(LCL edition. pp. 160f.).

2662) 참조, Cadier, Institution IV. 443, note 5.

2663) 참조, sec. 34. note 79, above; Cadier, Institution IV. 444, note 1.

2664) 본장 34절의 주 79를 보라. 칼빈은 언어학적 근거에서 명쾌하게 논증했다.

2665) Quintilian, Institutes of Oratory IV. ii. 91:"Mendacem memorem esse oportet"(LCL edition, II. 100). 칼빈은 "musthvrion"이 라틴역에서 "sacramentum"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에베소서 1;9, 5:32, 디모데전서 3:16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3:9에서는 "mysterium"으로 되었다.

2666) Gratian, Decretum I. xxviii. 2; I. lxxxii. 3; II. xxvii. 2. 17; II. xxxii. 2. 4(MPL 187. 155, 597f., 1397, 1413f.; Friedberg I. 101, 291f., 1066, 1120f.); Lombard, Sentences IV. xxvi. 6(MPL 40. 377; tr. NPNF III. 401f.).

2667) 롬바르드는 14세 이하의 남자와 12세 이하의 여자의 결혼은 무효라고 생각하고 생각하지만 사춘기 이후에 결합된 남녀는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다(Sentences IV. xxxvi. 4; MPL 192. 931). 7촌 이내의 결혼을 금지하는데 대해서는 Sentences IV. xi.(MPL 192. 937ff.); Gratian, Decretum II. xxxv. 2 and 3. 16, 17, 19(MPL 187. 1671f.; Friedberg I. 1267f.)를 보라.

2668) 이 규정들은 롬바르드의 적서에 나타난다. Sentences IV. xli 1-2; IV. xxxi. 5; IV. xliii(MPL 192. 938f., 918f., 928, 940-942); Gratian, Decretum II. xxxv; II. xxx. 3f.; II. xxxiii. 4, 10(MPL 187. 1163ff., 1519ff., 1647f.; Friedberg I. 1261ff., 1100ff., 1249).

2669) 참조:Introduction XIV, p. lxv; IV. i. 1, 주2. 칼빈의 정치 사상에 대한 연구:J. Bohatec, Calvins Lehre von Staat und Kirche M. E. Chnevi re, La pense Politique de Calvin E. Doumergue, Calvin V. 381-512; H. Baron, Calvins Staatsanschauung und das confessionelle Zeitalter R. W. Carlyle and A. J. Caryle, A History of Medieval Political Theory in West VI. 263-270; R. N. C. Hunt, "Calvin's Theory of the State," Church Quarterly Review VIII(1929), 56-71; F. J. C. Hearnshaw(editor), The Social and Political Ideas of Some Great Thinkers of the Renaissance and Reformation, ch. viii, by W. R. Mathews; P. Mesnard, L'Essor de la Philosophie Politique au sixime sicle en France, pp. 269-295; A. Kuyer, Calvinism lecture iii. pp. 98-142; W. S. Hudson, "Democratic Freedom and Religious Faith in the Reformed Tradition", Church History XV(1946), 177-194; J. T. McNeill, "The Democratic Element in Calvin's Thought", Church History XVIII(1949), 153-171; John|Calvin on God and Political Duty, pp. vi-xxv; W. Mueller, Church and State in Luther and Calvin 다른 도서들을 위해서는 McNeill의 연구서 목록을 보라. "Thirty Years of Calvin Study", Church History XVII(1948), esp. pp. 235-240. R. S. Wallace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및 정치와의 관계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자세히 검토했다.|Calvin's Doctrine of the Christian Life. 특히 part III. chs. iii과 v를 보라.

2670) III. xix. 15:"duplex in homine regimen." 이 제 20장을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장(III. xix)과 연결되어 있다. 자유론은 1536년 판에서 제 6장의 첫 부분을 구성했었고(OS I. 223-280), 그 다음에 교회의 권한에 대한 부분이 있었으며 본 20장의 제목과 내용을(거의 같은 내용을) 가진 부분이 있었다. 그 후의 개정판들에서 원래 6장의 이 부분들이 분리되었으나 IV. xx는 III. xix의 계속이다.

2671) IV. iii-xi.

2672) 분명히 이 문장들은 한 편으로는 재세례파를 또 한편으로는 Machiavelli를 언급한다. Machiavelli의 이탈리어판 군주론(II Principe)은 1553년에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칼빈은 고대의 황제 숭배도 생각했을 수도 있다.

2673) III. xix. 16; IV. x. 3-6.

2674) 참조, II. x. 10-19.

2675) 여기서 재세례파의 정치에 대한 종교적 무관심이 강력하게 비난받고 있다. 참조. 본장(절의 주4). 재세례파의 슐라이트하임(Schleitheim) 신조 7개조 중의 제6조에는, 집권자의 직분은 "육적"이며 그리스도인은 집권자의 칼을 거부해야 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성의 밖에"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III. iii. 21, 주 42; IV. i. 28, 주35도 참고하라. Peter Ridemann은 "그리스도인은 통치자가 되지 않으며 통치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가르쳤다(tr. The Portable Renaissance Reader, ed. J. B. Ross and M. M. Mclaughlin, p. 665). 참조, LCC XXV. 289.

2676) 본장 8절.

2677) "Suum cuique",(각 사람에게 그의 것을). 이 어구는 법적 공정성의 대상을 표시하기 위해서 고대인들이 사용했다. 로마법에서는 특히 소유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참조. III. viii. 3, 주6; 롬 13:7.

2678) 참조, II. vii. 10; Comm. Rom. 13:1-10.

2679) IV. viii. 10.

2680) 참조. Ciero, Laws III. i. 2(LCL 판, pp. 460f.).

2681) Instruction in Faith(1537) 33(OS I. 416f.; tr. Fuhrmann, pp. 76f.) 에 있는 유사한 언급을 보라. Fuhrmann의 주 249도 보라. 이 점에서 Fuhrmann 은 Farel의 Sommaire(1525)와 비슷한 생각을 간략히 표현한 Fr. Lambert의 Somme chrestienne(1529)를 인용하였다(Instruction in Faith, p. 96).

2682) "cubernhvsei"", 신약성경에서는 고린도전서 12:28에만 있는 말이다. 참조.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주해와 Pannier, Institution IV. 202, 주 e(p. 340).

2683) VG; "Geux qui voudroyent que les hommes vesquissent pesle mesle comme rats en paille"; "짚 속의 쥐처럼 인간을 혼란하게 살게 하기를 원하는 자들" 참조. IV. xx. 9:"Sacra historia inter vitia anarchias ponit".

2684) 참조. Zwingli, True and False Religion, 27(CR Zwingli III. 875).

2685) Sec. 4, above.

2686) 다시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 제6항에 대해 언급한다. 참조. 본장2절, 주7; IV. I. 28, 주 35; Calvin, Instruction contre la secte des Anabaptistes(1544)(CR VII. 89); tr. "A Short Instruction for to arme all good Christian People Against the Pestiferous Errours of the Common Sect of the Anabaptists(London, 1549) D 4a ff."

2687) Vel aristocratiam vel temperatum ex ipsa et politia statum". 참조. 바로 아래의 이스라엘의 정치 형태에 대한 묘사, "aristocratiam politiae vicinam"(민주 정치에 가까운 귀족정치):Plato's summary of forms of goverment, The Statesman 291D(LCL Plato III. 124f.); Zwingli, Exposition of the Faith(Zwingli, 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V. 59; tr. LCC XXIV. 266f.); Bohatec, Calvins Lehre von staat und Kirche, pp. 116-164; Chenevire, La Pense politique de Calvin, pp. 181-299.

2688) "Ut tutius sit ac magis tolerabile plures tenere gubernacula". 참조. IV. iii. 15, 주 13, IV. iv. 10-11. 칼빈은 다수인의 정부가 안전하다고 보며, 그런 체제는 상호 협력과 상호 충고와 개인의 자기주장을 억제하는 이점이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제네바에서 칼빈은 "소(小)사회의"(Little Council)가 필요에 따라 매월 또는 3개월에 1회씩 회의를 열게 했다. 서로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을 하고 서로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Cadier는 이 구절을 민주주의 보다는 소수 독재 정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본다(Institution IV. 455, note 7). 그러나 Plures(다수)라는 말을 지배 단체의 인원수가 적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책임을 분담한다는데 중점을 둔다. 참조, NcNeill, Calvin on God and Political Duty, Introduction, pp. xxii f.; Bohatec, Calvins Lehre von Staat und Kirche, pp. 153-157.

2689) 칼빈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전제정치와 무정부 상태에 대립하는 안전하고 질서있는 자유이다. 그는 애굽에 있는 요섭에 대해서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했다(Comm. Gen. 39:2). 사무엘상에 대한 설교에서 자유를 "말할 수 없이 귀한 보배"라고 두 차례 말했다(CR XXIX. 544; XXX. 185). 또 예레미야 38:25-26에 대한 주해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다른 곳에서는 자유를 "생명의 절반 이상"이라고 했다(CR XXIV. 628). 또 그는 바울이 자유를 감소시키지 않으려고 조심했다고 말했다(Comm. I Cor. 10:29).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왕의 지배하에 있는 이웃 백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지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사들을 선택하는 자유를 주셨다고 했다(CR XXVII. 410f.).

2690) "Decuriones":보통은 로마 도시들의 원로 계급 사람들이었다. Encyclopaedia Britannica, art, "Decurio"; The Theodosian Code, XII. i De decurionibus(tr. C. Pharr, pp. 342-371)을 보라. 각종 집권자들과 정부들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에 복종해야 한다. 칼빈은 민중의 저항을 장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장 31절을 보라.

2691) 칼빈이 염두에 둔 것은 마키아벨 리가 아니라 키케로다. Laws II. ii. 7-9(LCL판, pp. 388-415).

2692) 이것은 Thomas More의 생각과 비슷하다. Utopia II. ix. "of the Religions of Utopia"(see Ralph Robinson's translation(1556), ed. I. C. Collins, pp. 125f.). 칼빈은 1518년의 바젤판을(II. 140ff.) 사용 했을지라도 모른다. 칼빈의 여기서의 관심은 "경건"을 지키는 것이다. 본장 32절을 보라.

2693) 참조. J. Stobaeus, Sententiae ex thesauro ex Graecorum delectae(ca. 400-410) xli, De republica(ed. Zurich, 1548, pp. 247ff.; editio princeps. 1536). 참조. Pauly-Wissowa, Realencyclopdie der classischen Altertumswissenschaft. art. "Ioannes stobaios."

2694) Pseudo(?)­Cicero, Letters to brutus I. xv. 5(M. Tullii ciceronis opera, ed. J. C. Oreellius, p. 766).

2695) Valerius Maximus, Facta et dicta memorabilia(Memorable Deeds and Sayings) III. vii. 9(Venice, 1487), p. 74a(tr. R. L'Estrange, 1678, p. 138). 집정관 L. Cassius의 법정을 이른 말이다.

2696) Seneca, On Clemency I. iii. 3(LCL Seneca, Moral Essays I. 365ff.); 참조. Calvin, Comm. Seneca On Clemency I. iii.(CR V. 41). Seneca의 De Clementia와 그것에 대한 젊은 학자 칼빈의 중요한 주해는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었다. I. iii. 3, 주8; IV. vi. 8, 주16; 24, 주 48을 보라). 칼빈의 주해와 그의 영적 발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A. M. Hugo, Calvijn en Seneca를 보라.

2697) Dio Cassius, Nerva, Epitome of Book lxviii 3(LCL Roman History VIII. 360f.).

2698) 11절과 12절은 재세례파의 전쟁 부정론을 비판하고, 내부의 반란이나 외부의 침략에 대해서 통치자들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하는 것을 간단하게 정당화한다. 슐라이트하임 신조의 제4조와 제6조는 이 입장을 부정했다. 참조. IV. i. 28, 주 35(Mennonite Quarterly Review XIX(1945), 251f.). 참조. Balthasar Hubmaier, On the Sword(1527)(tr. H. C. Vedder, Balthasar Hbmeier, pp. 279-310). 집권자와 법과 소송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에 관한 칼빈의 논의는(4-23절), 제세례파의 국가거부론에서 생길 무정부상태를 칼빈이 얼마나 염려했는가를 반영해 준다.

2699) Augustine, Letters cxxxviii. 2. 15; cxxx. 6. 13(MPL 33. 531f., 499; tr. FC 20. 47f.; FC 18. 386); Sermons xiii. 7. 3-xiii. 8. 4(MPL 38. 110f.).

2700) Cicero, On Duties I. xxiii. 79; I. xi. 35(LCL판, pp. 80f., 36f.).

2701) "Ipsum pene esse populi sanguinem". VG는 "거의"라는 말을 생략했다. 참조. A. Biler, La pense 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 p. 385. 본절에서 칼빈은 조세에 대한 기독교 사상을 요약하며 위정자와 국민 상호간의 의무를 밝힌다.

2702) 참조. IV. xii. 1; "규율은 그 힘줄이다." 14-16절에 대해서는 II. vii. 16을 보라.

2703) Cicero, Laws II. iv. and v. 1; III. ii(LCL 판, pp. 378ff., 460f.). 참조. De republica III. xxii.

2704) 본장 16절을 보라. 칼빈은 구약성경에 있는 재판에 관한 율법을 기초로 한 신정 제도에 관한 관념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2705) Aquinas, Summa Theol. I Ilae. xcix. 4; Melanchthon, Loci communes(1521), ed. Encelland, p. 46.

2706) 참조, II. viii. 1, 주5; Pannier, Institution IV. 218, 주 d(p. 343). 자연 법칙에 대한 칼빈의 인식은 로마서 1:21-27 및 로마서 2:14-15 주해에 잘 표현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참고문헌:J. Bohatec, Calvin und das Recht, pp. 3-32; Calvins Lehre von Staat und Kirche, pp. 20-35. 참조. G. Gloede, Thedogia naturalis bei Calvin, pp. 178ff.; M. E. Chenevi re, La Pense politique de Calvin, pp. 46., 66ff.; McNeill, "Natural law in the Thought of Luther." church History X(1941), 212-215; "Natural law in the Teaching of the Reformers." Journal of Religion XXVI(1946), 179-182; John Calvin on God and Political Duty, Introduction, p. xv.

2707) 참조, 본장 14절, 주 36. 본절은 실정법(實定法)이 자연법과 공정성에 입각한 것은 정당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구약성경의 법률에 의존할 필요 없이 모든 민족과 상황에 적합한 형벌을 요구한다.

2708) 본절 이하에서 칼빈은 법적 절차를 잘 알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청년시절에 법률을 연구했던 사실을 반영한다. 참조, Cadier, Isntitution IV. 467.

2709) 참조, the Schleitheim confession, art. vi, found in Zwingli, Opera, ed. Schuler and Sculthess, III. 402-404; tr. S. M. Jackson, Selected Works, pp. 196ff.; tr. W. C. Wenger, Mennonite Quarterly Review XIX. 245.

2710) 참조, the Schleitheim Confession, art. iv, Zwingli, Opera, ed. Schuler and Schulthess III. 395; tr. Jackson, Selected works of Zwingli, pp. 188f.

2711) Augustine, Letters cxxxviii. 2. 12-13(MPL 33. 530; tr. FC 20. 44f.).

2712) Sec. 18, above.

2713) 참조, Cicero, Laws III. ii. 5(LCL edition, pp. 461f.).

2714) 여기있는 베드로전서 2:13-14에 대한 칼빈의 번역은 불어판과 매우 다르며, 그의 베드로전서 주석에 있는 라틴어 본문과도 다르다. 참조, Geneva Bible and KJV.

2715) Xenophon, Cyropaedia VIII. ii. 10(LCL 판, II. 336f.).

2716) Homer, Odyssey ii 234:오딧세우스는 "그의 백성에게 아버지같이 인자하다"(LCL Odyssey 1. 52f.); Seneca는 De Clementia I. xiv. 2(LCL판, pp. 398f.)에서 pater patriae(국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Calvin, Comm. Seneca De clementia I. xiv(CR. V. 106).

2717) Homer, Iliad ii. 243; Agamemnon 은 "그의 국민의 목자"(LCL Iliad I. 68f.)라고 한다; Cicero, Pro Sestio xxx. 65(LCL 판, pp. 122f.). Quintilian, Institutes of Oratory VIII. vi. 17, 18(LCL Quintilian III. 310f.)에는 사건을 변홀함에 있어서 이 진부한 은유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있다.

2718) Zwingli, Auslegen und Gr nde der Schlussreden(1523), art. xliii.(CR Zwingli II. 342ff.). 참조, H. Strohl, "Le Droit la rsistance d'aprs les conceptions protestantes." Revue d'histoire et de philosophie religieuses X(1930). 126-144.

2719) 참조, Catullus xxii. 21:"Sed non videmus manticae quod in tergo est"(LCL Catullus, p. 26); 참조, Horace, Satires II. iii. 298f.(LCL edition, pp. 178f.) 이솝우화에 나오는 두 개의 주머니를 나타낸 것이다. 보이는 한 개에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이 들어있고, 보이지 않는 한 개에는 우리 자신의 허물이 들어 있다고 한다.

2720) 이 점과 관련하여, 칼빈이 나쁜 지배자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내와 기도만을 권했다. 앞의 문장들은 분명히 글을 쓴 당시의(1535년) 프랑스 국내 정세를 반영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개입과 인간의 활동에서 구원의 소망이 강력하게 표현된다.

2721) "Audiant principes, et terreantur" 놀랍고 힘있는 말이다. 그러나 혁명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군주들이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2722) 이 압축된 문장은 그 영향력을 강력하게 입증하기 위한 것인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Doumergue, Calvin V. 500-502를 보라. 그가 칼빈의 서한과 주석에서 수없이 인용한 Calvin pp. 487-494, 499를 참조하라. 쯔빙글리는 논문 "Der Hirt."(목회자)(1524)에서 스파르타에 감독관이 로마에는 호민관이, 독일의 도시에는 길드가 있어 통치자들을 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들을 세워 백성을 지키게 하셨다고 했다(CR Zwingli III. 36). 칼빈은 이 문장이 독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칼빈은 "사사로운 개인들이" 폭군에 저항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 경고를 수행하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을 시인하며 엄숙하게 충고한다. 이런 "백성의 법관"의 역사적 실례로서 스파르타의 감독관, 로마의 호민관 아테네의 지방 장관들을 들고 그 정당성을 덧붙인다. 이 사람들은 모두 매년 있었던 대중투표에 의해서 공직에 선출되었다. 참조, 미가 5:5에 대한 주석, "Hic demum maxime optabilis status populi creari omnibus suffragiis pastores". 세습제에 의한 왕권은 자유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질서가 잘 잡힌 정부는 일반 투표로 수립된 것이다. "Communibus omnium suffragiis"(CR XLIII. 374). "아마"란 현대 국가들의 3계급 제도와 유사점이 있을 듯하다고 칼빈은 말한다. 이 "아마"란 말은 그의 나라 프랑스에 관해서는 자연스럽다. 그가 이 글을 썼을 때에는 이 3계급의 회의가 열리지 않은지 30년이 되었으며 그가 1559년에 반복했을 때까지도 열리지 않았다. 스페인으로부터 노르웨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다른 나라에서는 국민의 대표 기관이나 의회가 있어서, 항상 또 효과적으로(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그 기능을 발휘하여 군주들의 전제 정치나 폭정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그들에게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며 국민의 "무한히 귀한" 자유를 수호하라고 격려하는 것처럼 보인다. 참조, CR. XXIX. 544; XXX. 185; McNeill, "The Democratic Element in Calvin's Thought", Church History XVIII(1949), pp. 162-166 및 거기에 인용된 연구서들. 프랑스에서의 3계급 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것이 위그노들의 정치적 저술의 특징이 되었다. 예컨대 칼빈의 친구 Francis Hotman의 Franco­Gallia(1573; Lord Molesworth, 2d ed., 1721); "Junius Brutus," Defense against Tyrants(1579); 아마도 Hubert Languet 와 Philip du Plessis Mornay의 공저인 듯하다(H. Laskirk 편집한 영어판); Pierre jurieu, Sighs of Enslaved France Aspiring Toward Liberty(1689-1690)등이 있다. 이 구절의 영향을 George Buschanan의 De jure regni opud Scottos(1579);(tr. C. F. Arrowood, The Powers of the Crown in Scotland)에 있는 John Ponet의 극단적인 논문 Shorte Treatise of Power(1556; W. S. Hudson 판을 보라)와 Samuel Rutherfore의 Lex Rex(1644)에서도 볼 수 있다. 참조, p. Mesnard, L'Essor de la philosophie politique au sixime sicle en France, pp. 330-336, 347-359. Johannes Althusius의 무게 있는 저서 Politica methodice digesta(1630)는 칼빈의 주요한 정치 개념들을 전개한다. 특히 P. S. Gerbrandy의 허버드 강연인 National and International Stability:Althusius, Grotius, Van Vollenhoven을 보라. John Knox의 입장은 1564년의 Lethington과의 토론 기사에 잘 나타난 그의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에서 잘 설명되었다. 거기서 Knox는 Magdeburg 신앙고백("Marburg의 변호")을 인용했다. 이 고백은 1550년에 찰스 5세에 반대해서 발표된 것이다. 동시에 Knox의 동료 목사 John Craig는 Bologna의 도미니크 수도사들이 1554년에 교황에 대한 그들의 항거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미니크 문서가 Bologna에서 훌륭하게 변호되는 것을 Graig가 들었는데, 그 문서는 더욱 봉건적인 용어로 국민에 대해서 서약한 약속을 어기는 "통치자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개심하거나 물러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Knox는 Magdeburg 문서를 이용하여, 그의 소책자 On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1558)에서 표명한 비타협적인 저항론을 재확인하였다. 엘리자베드 1세가 즉위한 것은 이 과격한 소책자가 새로 출간된 때였고, 이 책자로 인해 여왕은 제네바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칼빈이 이 일로 인해 당황해 했던 것이 Cecil 에게 보낸 서한에 나타나있다(1559년 겨울). 거기서 칼빈은 그 책자를 부정하고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부인했다(Zurich Letters, 2 ser., pp. 34ff.). 참조, Doumergue, Calvin V. 486-512; H. Strohl, "Le Droit la r sistance," pp. 131ff. 대체로 칼빈은 국민의 혁명운동에 반대하여 조심하지만 때때로 그의 말에 조심성이 부족할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 주해(1561년), 다니엘 6:22에 대한 제30강(講)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상의 군주들이 하나님께 반항할 때에, 그들은 그 권력을 포기했으며 사람으로 인정받을 자격을 상실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하기보다는 전적으로 대항해야 한다(직역하면, "그들의 머리에 침을 뱉아야 한다")(CR XLI. 25).

2723) 참조, II. viii. 38.

2724) 이 문장은 1559년도 판부터 첨가되었는데, "축소된다는 듯이 생각한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칼빈은 다니엘 6:22에 대해 언급하지만 주해에 있는 강력한 문장을 고려하지는 않는다(본장 31절, 주54를 보라). 그러나 불경건한 통치자들의 "불경건한 칙령"에 대해서는 용감한 불복종을 요구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역설하는 훈계, 즉, 그가 반복해서 명령하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인을 "경건"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만왕의 왕에 대한 복종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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