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대백과 사전 <1> 가난

 

설교종합자료백과

 

 

 

 

 

 

 

 

 

 

 

 

 

발간사

 

 

설교는 목회자가 목회자인 한에는 끊임없이 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목회자는 그 짐을 회피할 수 없으며 그 짐을 지고 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설교는 또한 목회자에게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대변하는 권리는 목회자에게만 위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목회자에 대한 설교의 이중적 관계구조는 목회자의 삶 전체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회자=설교자라는 등식으로 이해할 때는 이러한 목회자의 삶의 구조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모든 목회자는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능력있는 설교를 통해 죄의 사슬에 얽매인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요 동시에 꿈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들은 끊임없는 기도와 설교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본 연구회는 목회자의 짐을 함께 지고 가고자 기독교목회자료연구회를 3년 전에 발족시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목회자료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컴퓨터를 활용, 분석과 분류 및 수집에 힘써 왔으며 이제 그 결실중의 하나인 SEP 說敎綜合資料百科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결실을 맺게 된 것은 많은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기도가 뒷받침되었습니다. 특히 이 책이 나오기까지 본 연구회의 연구원들의 노고는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좋은 목회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귀중한 소명으로 알고 조금도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목회자님들의 기도와 보상을 바라지 않는 귀중한 자료들의 공여에도 큰 빚을 졌습니다. 거친 원고가 책으로 나오기까지 조판, 교정, 편집, 제작에 힘써준 많은 분들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결실을 맺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1. 8.

 

기독교목회자료연구회

추천하는 글

 

 

김균진(연세대학교 교수)

 

'기독교목회자료연구소'가 출판하는 「說敎練合資料百科(SEP)」는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를 위하여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종합자료집입니다. 이 책은 먼저 설교제목이 될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을 설정하고 이 개념과 관련되는 성서의 본문들을 소개합니다. 예를 들어 '검소'라는 제목을 설정한 다음 이 제목과 관련된 성서의 구절들을 소개합니다. 그 다음 이 제목과 관계된 본문의 희랍어, 히브리어 단어를 설명하고 이 제목에 대한 몇 가지 예화를 제시합니다. 나아가서 설교자들이 이 제목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격언, 금언, 유명한 인물들을 어록, 시, 묘사에서 소개합니다. 끝으로 이 제목을 다루는 몇 편의 요약설교를 수록합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설교자료들이 이 책에서 종합적으로 소개되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이 책 한 권으로 쉽게 설교를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적인 노선에 있어서 이 책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온건한 노선을 취하고 있으며 저속한 예화나 금언은 일체 피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유명한 인물들의 생활에서 나오는 실제 이야기들과 금언들은 이 책의 품위를 높여 주는 동시에 이것을 사용하는 설교의 품위를 높일 것입니다. 간결하고 정성어린 편집은 이 책의 사용을 한층 더 편리하게 해 줄 것입니다.

추천하는 글

 

 

박근원(한신대 교수)

 

「說敎綜合資料百科(SEP)」의 출판을 환영합니다. 비슷한 설교자료들이 많이 있는데 이번 '기독교목회자료연구소'에서 편집 출간하는 이 자료는 그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 매우 특성있는 자료입니다

왜냐하면 외국의 자료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실정에 맞게 조정 편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총체적인 설교자료집'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주제에 따라 분류했고 거기에 중요한 원어 해설까지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1,500여 개의 예화를 주제별로 정리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를 포함한 문학적인 자료들도 곁들여 있습니다. '요약 설교'의 모음도 자료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說敎綜合資料百科」는 설교자료의 '백화점'에 비길 수 있습니다. 인근 '구멍가게'나 마을의 '슈퍼'에서 쉽사리 구할 수 없는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료를 구해다가 설교요리를 하는 것은 설교자의 재량에 따라 다릅니다. 같은 자료를 가지고 요리를 해도 각기 그 맛이 다른 것입니다. 요리사마다의 요리방법이 다르고 거기에 쏟는 정성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된장찌개의 맛이 다르듯이 여기 제공된 설교 자료로써 만들어진 설교요리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설교자들은 '라면 봉지'와 같은 설교자료를 찾습니다. 거기에 물을 부어서 몇 분만 끓이면 되니까요. 그러나 여기 제공하는 「說敎綜合資料百科」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교를 위한 참신한 '원자료(original source)'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기도와 정성으로 설교를 만들어 선포한다면 정말 신선감과 영감이 감도는 강대에로의 회생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說敎綜合資料百科」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추천하는 글

 

 

박봉배(목원대학장)

 

개신교복음주의는 말씀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Barth의 말대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바르게 전하며 바르게 순종하느냐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전통 때문에 개신교 예배에서 설교를 중요시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러나 그런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씀의 선포인 설교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바로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옳게 설교하고 있느냐하는 것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과제 입니다. 설교는 해 왔지만 어떤 것이 참된 설교인지 또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아직은 우리에게 철저히 교육되어 있지 못한 것 같습니다.

 

더구나 내용의 그 구성에 있어서 보다 신중한 연구와 검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위해서는 설교자료집이 많이 출판이 되어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 설교집은 많이 출판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 양심상 남의 것을 그대로 옮길 수는 없기 때문에 간접적인 도움밖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은혜되는 것은 설교자료집을 자료로 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설교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 하나를 바르게 그리고 은혜롭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기도와 독서와 성서연구를 해야 하느냐는 것은 우리 모두 피부로 경험한 사실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이번 출판된 「說敎綜合資料百科」는 모든 설교자들에게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메마르고 진리의 말씀이 골목으로 밀려나고 평화의 말씀이 등한시되기 쉬운 이때에 참된 말씀을 회복하는 일에 이 책이 공헌하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추천하는 글

 

 

유광웅(아세아연합신학대학 교수)

 

설교에 있어 내용이 되는 복음의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나 그 진리를 담아 전해 주는 그릇은 다양하고, 시대와 상황과 사람들의 영적 상태에 따라 변해 갑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적당하고 아름다운 그릇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사역의 선진들과 계속적인 교류 속에 있어야 함과 아울러, 동시대의 동역자들과도 밀접한 교제를 유지해 나가야만 합니다. 목사가 선진들과의 대화를 잃게 될 때 그의 신학적 사고와 설교는 언어, 개념에 있어 가난해지며 비전과 척도 설정에 있어 궁색하게 됩니다. 이때 그는 쉽사리 소위 '시대 정신' 속에 휘말려 들어 방향 없이 표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가 동시대 사역 자들의 소리를 듣지 못할 때는 자기에게 요구되는 영적 진단을 내리지 못하며 성경 속에서 늘 달리, '새롭게 들려오는 말씀'을 듣지 못하는 위험에 빠집니다. 신학적, 목회적 작업은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때 설교가 한 개인의 소리가 아니고 교회로부터의 교회를 향한, 나아가 세상을 향한 '산 소리'가 됩니다.

금번 '기독교목회자료연구소'가 편찬한 「說敎綜合資料百科 (SEP)」는 목회자들을 그 고독함으로부터 이끌어내어 다양한 선진들과 동시대 사역 자들과의 역동적 교류 속에 이끌어 들여 좋은 동행자가 될 것입니다.

추천하는 글

 

 

하해룡(벧엘교회 목사)

 

일반적으로 목회(牧會)라고 하면 설교심방 등을 중심한 교회 내의 제반 활동을 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제 1 우선순위는 역시 설교인 것입니다. 특별히 개신 교회의 목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어떤 이는 "목회는 곧 설교다"라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설교를 통하여 교육까지도 다 포괄할 수 있다는 지론이기도 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목회에 있어서 설교의 중요성은 사족을 달 필요가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설교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은혜로운 설교 한 편을 작성하여 선포한다는 것은 해가 갈수록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마 한 가지 일에 10년 이상 종사하면 능숙한 전문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연륜이 더할수록 두렵기만 합니다. 더욱이 한 교회 강단에서 오랜 세월 봉사하다가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금번 기독교목회자료연구소에서 「說敎綜슴資料百科(SEP)」를 출간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사전형식의 체제이지만 설교주제 또는 제목선택의 힌트가 많고 짧은 시간에 방대한 원어의 뜻까지 터득할 수 있도록 편집된 이 기획은 바쁜 현대인 목회자를 위한 좋은 참고자료가 되리라고 봅니다. 이 책을 통하여 구성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한 예화들까지 참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목회자나 신학도, 장로, 권사, 구역장 심지어는 평신도에게까지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부언하는 것은 설교준비에 있어서 흥미와 영력있는 깊은 연구에로의 자극을 주는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추천하는 바입니다.

추천하는 글

 

 

황성규(한신대 교수)

 

칼 바르트가 한손에 성경을, 또 다른 손에 신문을 들고 읽으라고 권유한 말은 너무도 당연하고 또 유명한 말입니다.

설교자는 해석자입니다. 그는 성경과 설교청중 사이에 있습니다. 성경은 수천 년 전에 또한 역사적, 문화적, 지역적,‥‥으로 전혀 생소한 환경에서 생겨났고 설교청중은 21세기를 내다보는 기술공학이 고도로 발달된 첨단과학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기도와 명상은 물론이지만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성경과 설교청중 사이의 간격을 가능한 한 좁히는 책무를 갖습니다. 사실 성경의 본래의 뜻(原意)을 오늘의 산 말씀으로 재생시키려면 설교자의 심오하고도 적절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설교청중의 지적 수준, 신앙생활의 다양성, 문제의식과 사고경향 등을 고려하면서 성경의 원의를 굴곡없이 권하는 데는 다양한 설교자료 사용이 필요할 것입니다.

 

「說敎綜合資脚潑祥街SEP)」는 이같은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문으로 성경사전, 예화집, 명언집, 설교집 등을 살피던 수고를 덜어주도록 기획되었습니다. 시대착오적 자료나 반성서적 자료는 제외되었고 특히 설교자를 게으르게 하는 모방자료집성이 아니라 창의적 설교작성을 하도록 구성된 점이 주목됩니다.

「說敎綜合資料百科」에 걸맞게 본서는 한 편의 설교를 위해서 주제에 관련된 성경구절을 제시하고 중요한 낱말의 해석을 제시합니다. 설교에는 너무 많은 예화 사용이 경계된 일이지만, 본서에는 다양한 예화가 한 주제를 위해서 열거되고 있으며 주제와 관련된 동서의 명언과 시들이 소개되어 참신한 맛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본서는 4,000여 편의 설교요약이 수록되어 있어서, 이를 토대로 한 창의력 설교구성을 크게 도와줄 것입니다. 목회자들에게 소중한 양서로 생각되어 추천하는 바입니다.

가 난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가난함의 표현

(1) 빈핍함

(사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2) 빈궁함

(시112:9)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으니

(3) 부족함

(삿18:10)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느니라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고전8:8) 우리가 먹 지 아니 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계3:17)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4) 곤궁하고 빈한함

(신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5) 기근

(창47:20) 애굽 사람이 기근에 몰려서 각기 전지를 팖이라

(6) 곤고함

(욥36: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2. 가난해 지는 원인

(1) 하나님의 뜻

(삼상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2) 수고하지 않음

(엡4:28) 도적질하는 자는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3) 게으름

(잠6:10-11)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4) 연락을 좋아함

(잠21:17)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5) 방탕을 좇음

(잠28:19)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6) 술 취함과 탐식함

(잠23:21)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 질 것이요

(7) 잠자기를 좋아함

(잠20:13)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8) 인색함

(잠11:24)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9) 훈계를 저버림

(잠13:18)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3. 가난이 가져오는 결과

(1) 하나님을 부인하고 도적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함

(잠30:8-9)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2) 패망함

(잠10:15)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3) 고생함

(고후11:27)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4) 자족하기를 배우게 됨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4. 가난을 이기려면?

(1) 말씀을 듣고 행함

(신15:4-5) 네가 만일 네 ‥‥말씀만 듣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2) 부지런함

(잠13:23)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하므로 양식이 많아지거늘

 

5. 영적인 가난

(1) 하나님의 백성의 가난

(사14:32) 그의 백성의 곤고한 자들이 그 안에서 피난하리라 할 것이니라

(2) 마음. 심령의 가난

(사66:2)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난 자 그 사람을 내가 권고하려니와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3) 가난하나 부요함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4) 말씀을 듣지 못한 가난

(암8:11-12) ‥‥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5) 부요한 가난

(계3:17)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6.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1) 구원하심

(시82:4) 가난한 자와 궁핍 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2)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

(시107:9)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3) 지위를 일으키심

(삼상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4) 도와주심

(시10:14)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5) 기도를 멸시치 않으심

(시102:1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

(6) 믿음에 부요케 하심

(약2:5)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7. 성도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

(1) 기쁨으로 연보함

(고후8:2)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2) 성실히 행함

(잠19:1)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3) 지혜로움

(전4:13)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4) 삶의 자세

(마6: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마19: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빌3: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8. 성도가 가난한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1) 불쌍히 여김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2) 구제함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고후9:9)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3) 미워하지 않음

(잠14:20)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4) 공평하게 송사함

(출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5)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음

(마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6) 원수라도 먹이고 마시우게 함

(롬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9.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

(1) 선행을 갚아주심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나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2) 복 받음

(잠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3) 큰 상을 받음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4) 하늘에서 보화를 받음

(마19: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5) 하늘에 보물이 싸임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6) 형통함

(렘22: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7) 평안함

(단4:27)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면 왕의 평안함이

관련원어풀이

1. rsej; 하세 -르

(1) 결여되다, 부족하다.

(창18:28, 잠31:11)

(2) 모자라다, 적다.

(창8:3, 왕상7:14)

(3) 결정을 당하다.

(시23:1)

(4) 결핍케 하다, 부족하게 하다.

(시8:6)

(5) (마흐쏘-르):가난, 궁핍.

 

2. vr'y: 야-라쉬

(1) 소유물을 빼앗다, 몰아내다.

(신2:12)

(2) 소유하다, 잡다.

(왕상21:16)

(3) 가난하게 되다, 결핍되다.

(4) 상속을 받다, 물려 받다.

(창21:10, 민27:11)

 

3. &Wm 모-크

가난하다, 부족하다, 가난하게 되다.

(레25:25, 35, 39, 47)

 

4. vWr 루-쉬

(1) 부족하다, 결핍을 당하다.

(시34:11)

(2) 가난한 체하다.

(잠13:7)

 

5. ]lD" 달

낮은, 비천한, 약한, 초라한.

 

6. @Kes]m 미스켄

(1) 가난한, 비참한.

(전4:13, 시9:13)

(2) 온유한, 겸손한, 참는.

(민12:3)

(3) 부드러운, 온화한.

(슥9:9)

 

7. ;ynI[; 아-니-

(1) 괴로움을 당하는, 곤고한.

(2) 겸손한, 부드러운, 온화한.

 

8. ptwcov" 프토-코스

형 ptwceuvw

명 ptwceiva 원래 "완전히 놀라다, 움츠리다에서" 유래

(1) 몸을 구부리는, 남의 도움을 받고 사는, 구걸하는.

(눅14:13, 21, 16:20)

(2) 가난한, 비천한.

(마19:21, 막10:21)

(3) 성취할 힘이 없는.

(갈4:9)

 

9. penticrov" 페니크로스 형

(양식을 위해 일하다) 빈곤한, 가난한.

(눅21:2)

설교예화자료

가난한 자의 고귀한 재산

 

사람들은 흔히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가난에 대해 많은 절망과 번뇌를 느끼며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여 !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학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세상을 움직여 온 세기의 위대한 위인들 중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미천하고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여 역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가난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재산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일에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굳센 용기와 어떤 일이라도 솔선해서 수행할 수 있는 힘, 이웃을 돌볼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씨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가난함과 곤고함이 아니라 물질적 풍요로 인해 정신이 황폐화된, 영혼이 가난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에머슨의 "빈곤은 가난하다고 느끼는 데 존재한다. "는 말처럼 진정한 가난은 자신이 빈곤하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한 척하여도 아무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 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는 것처럼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재물은 따뜻한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재산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가장 고귀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삶의 지표로 삼아 영혼이 풍요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빈곤의 삶을 감사한 생

 

성 프랜시스는 부유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을 모르는 생활을 했으나 그러한 프랜시스의 눈을 열어준 것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프랜시스를 이기심의 동굴에서 끌어내어 빛난 태양을 맞이하게 한 이들이었습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은 물론 대개 육신적으로 가난하기만한 이들이었고 약하고 더러웠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고 역경에서 강해질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참다운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프랜시스는 자신은 집이나 명예 따위를 가지지 않고 가난과 결혼해서 평생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서약을 지켰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가난해지고 그 가난의 의미를 터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절대적인 빈곤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프랜시스의 삶은 항상 감사와 자연에 대한 기쁨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가진 셈이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행복했고 그의 마지막 편지는 그의 주위에 있던 귀부인에게 보내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옷에 기울 회색 천 조각을 좀 보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도 많고 존경하는 이도 많았었지만 죽을 때가 가까울 즈음 그의 거처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인간으로서 가난한 존재이며 이를 초월한 인간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힘으로 살아야 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마흔네 살에 그는 삶과 자연을 찬양하며 가난한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품안에 깊이 안식했습니다.

 

 

한 화가의 묘비명

 

오더스 G. 프래트는 그가 예술가이자 조각가로서 받았던 대우에 대해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괴로움과 분노를 그의 묘비명에 새겼습니다. 이곳 그린우드 묘지의 프래트와 그의 어머니 무덤 위에 서 있는 묘비명은 많은 관광객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프래트는 76세에 죽었고 그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여, 나는 법과 명성이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부했던시대에 살았었다. 그때는 돈과 유행이 지식을 지녔고 재능은 우리 정부에 의해 후원되는 자유 예술 학교의 부족으로 없어졌다. 그러던 것이 자연이 그것을 보여주는 대로 그리는 나와 함께 부패한 화법을 일으키는 그런 환경이었다. "

인간이 돈과 물질의 노예가 되어 정신이 황폐화되고 이제 고통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난 부유한 충은 영적 가난함에 봉착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과 복음

 

절대 빈곤의 인구가 가장 많은 5개 국가는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입니다. 절대 빈곤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5개 국가는 방글라데시,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하이더와 파푸아뉴기니입니다. 또한 아프카니스탄, 말리, 모잠비크, 앙골라, 시에라리온 5개국은 다섯 살 이하 유아 사망률이 최고인 나라들입니다.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이 24개 국가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상 오늘날 비그리스도인이 가장 많은 10개 국가-중국, 인도, 소련, 인도네시아, 일본,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베트남, 나이지리아, 태국 중 8개 국가가 심각한 빈곤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나라들, 그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두고 중점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지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과 같이 되셨기에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를 섬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오늘날 가난한 자는 누구이며 필사적으로 복음을 요청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말입니다.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여기 가난한 삶을 나누는 두 선교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선 이원휘 선교사는 케냐에서 침술하는 의료소를 열고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동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침술로 선교를 하고 어린이들을 위하여 조그마한 유치원을 만들고 빈민촌에 온종일 버려진 아이들에게 글과 노래와 춤을 가르쳐 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곳 주민들과 한 동네에서 어울려 살면서 아프리카의 가난과 질병, 배고픔과 외로움을 같이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받으며 사랑의 선교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 속에 들어가 삶을 같이 해주는 것은 곧 그 가난한 이웃을 높여 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이 있는 데로 와서 그 학생이 깨달아 알 때까지, 또 배울 때까지 있어 주는 것은 곧 그 학생을 높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이 우리의 높여줌이 되듯이 사회와 가정에서 부유하게 누릴 수 있는 이들이 먼저 가난한 이웃이 있는 곳으로 가고, 더불어 살면 가난한 이웃이 부유해지고 높아지고 인간의 존중을 받는 것이 됩니다.

주는 물질의 분량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러한 삶에는 크게 값을 치러야 합니다. 봉사하고 치유하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줄 수 있는 것을 감사하는 것만으로 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가난하게 되어 그들 속에 삶, 사랑, 사람으로 함께 해야합니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는 교회

 

오늘날 한국 교회를 돌아보건대 교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미흡함을 보게 됩니다. 교회 헌금의 거의가 교회의 자체 유지를 위해 쓰여지고 교회 밖에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동족을 위해 사용되는 몫이 너무나 적습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겠지만 몇 년 전 서울시내의 어느 교회는 메년 2억에 가까운 교회 예산 안에서 자체 유지를 위해 사용한 것 외에 교회 밖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한 것은 76,500원이었다고 합니다. 어찌해서 76,500원이 나왔느냐 하면 100원짜리 동전을 바꾸어 사찰 집사님께 맡겨 두었다가 구걸오는 거지들에게 한번에 200개씩 준 것의 일년 합계가 그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회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서을 강남의 어느 교회는 전예산의 60%에 가까운 예산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실 교회라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긴 역사를 거치면서 가난과 수난 속에 백성들의 탄식과 한숨이 사무쳐왔습니다. 백성들의 가난과 한숨, 눈물과 탄식이 변하여 찬양과 감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벌거숭이 세이가이

 

세이가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화가는 일생 동안 지독히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전재산은 한 벌의 옷과 한 켤레의 신발 그리고 붓과 물감, 종이 등이었습니다.

하루는 제자가 그를 찾아왔지만 그는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단벌의 옷을 빨았기 때문에 벌거벗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 계십니까? 저 진장이옵니다. " 이에 세이가이는 목소리를 속여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외출 중이십니다. "

그러나 선생의 형편을 잘 아는 진장은 계속 버티었습니다.

"선생님, 빨래가 다 말랐습니다. 외출 안하셔도 되겠습니다. " 그제서야 새이가이는

"그럼 옷을 갖고 들어오게."라고 대답했습니다.

 

 

가난이라는 병

 

유대인의 일화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환자들이 의사를 찾아와서 치료를 받고 처방을 받아갔습니다. 이 의사는 매우 유능하다고 전국에 소문이 나서 환자들이 전국 도처에서 몰려들었고 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은 거의 모든 사람이 완치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색다른 병으로 고생하는 한 환자가 의사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 병으로 평생을 고생하고 있으니 제발 고쳐 주십시오. 선생님은 유능하여 어떤 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어디 아픈 곳을 봅시다. "하고 의사가 진맥을 하려 하자 이 환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제 병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병은 가난이라는 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의사는 씁쓸하게 대답했습니다.

"가난이란 병은 누구도 고칠 수 없습니다. "

 

 

가난과의 싸움은 복음 정신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 6월 6∼13 일 두 번째로 멕시코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과달루페의 성모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에 멕시코시티의 근교의 찰코 계곡에 사는 60만명의 빈민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최우선의 선택은 교회의 중심에 계속 자리잡아야 합니다.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가난과의 투쟁이 분파적이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투쟁이 아니라 복음과 연대의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5월 7 일 오후 산후안데로스가고스에 가서 약 50 만 명의 젊은이들과 더불어 야외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교황은 젊은이들에게 "눈을들어 주위를 보십시오. 수많은 형제들이 어둠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더욱 정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난과의 복음 정신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가난함 속에서 느끼는 부

 

크리소스톰, 그는 귀족의 아들이었습니다. 4C 중엽 안디옥에서 태어나 당시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있었습니다. 그가 살던 도시는 사치가 극에 달한 곳이었으나 그의 삶은 오히려 금욕적이고 청빈했습니다.

그가 받은 최고의 교육과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설교자로서의 극진한 대우에도 그의 삶은 너무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적은 양의 음식을 지어 먹었고 맨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잤습니다. 그 자신의 소유는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나 물질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명예와 권세가 있었으나 그것에 사로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소유를 남들에게 주었고 또 자유로워 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남모르는 하늘의 기쁨이 있었고 그는 자유인이었습니다.

 

 

점심을 굶고 다니는 초등학생 수

 

전국의 480 만여 명의 초등학생 중 0.17%에 해당하는 8,155명의 학생들이 매일 점심을 굶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기막힌 사실은 문교부가 국정감사에 대비하여 각 시도교위를 통해 조사한 결과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가정 형편상 도시락을 가져 올 수 없는 어린이들입니다.

서울이 2,025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충남으로 1,407명이며, 광주 841명, 경기 804명, 강원 702명, 부산 667명, 전남 499명, 경북 464명, 경남 308명, 인천 130명, 충북 129명, 전북 72명, 제주 67명, 대구 40명 등입니다.

이들 숫자는 각 초등학교 담임교사들이 파악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높다고 믿을 수 있지만, 열등감이나 자존심 때문에 점심 굶는사실을 숨기는 어린이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숫자는 더 늘어 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 3천불 시대에 이른 우리 사회에 아직도 점심 굶는 어린이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너무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1년에 15억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어록·시·묘사

 

가난하다는 말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L.A. 세네카)

 

진실로 가난하다 함은 정신도 돈도 가지고 있지 못한 인간을 말함이다.

(B. 슈데르나우)

 

가난은 가난하다는 느낌으로 되어 있다.

(R.W. 에머슨/ 사회와 고독)

 

가난한 자는 언제나 미래에 보상받는다. 당장 보상을 받는 건 부자뿐이다.

(C.V. 게오르규/ 마호메트의 생애)

재물에 얽매여 있지 않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있거나 하나님께 매여 있다.

(A.J. 헤셸)

 

가난이 살며시 집 안에 들어오면 거짓 우정은 부랴부랴 창 밖으로 도망간다.

(F.M. 뮐러/ 시집)

 

가난한 것이 비극이 아니라 가난한 것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비극이다.

(윤오영/ 처빈란)

 

 

가난이 범죄의 어머니라고 하면 정신적 결함은 그 아버지이다.

(J. 라 브뤼예르/인간에 관하여)

 

보라! 신이 만드신 이 샘 물가에서 얻은 한 모금의 물과, 자비심 있는 사람에게서 얻은 한 조각의 빵과 그리고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천정(天井)으로 삼은 이 잠자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그것의 즐거움을‥‥‥

(성 프란시스)

 

사람이 가끔 재물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판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군가?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배고픔이 아니라 배고픔에서 나오는 잔인함이다.

(A.J. 혜셀)

 

사람이 가난한 것은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속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유물에 완전히 매달려 있을 때에 가난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줄 수 없을 때에 가난한 것이다.

(요한바오로 2세)

 

괴로움이 없는 가난함은 비참한 부유보다 오히려 낫다.

(메난드로스/ 단편)

 

식자(識者)들 사이에 편만한,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들의 문명이 아파하는 가장 고약한 정신적인 질병이다.

(A. J. 헤셸)

 

지겹다 가난이여 ! 살아계실 때에는 봉양을 못했는데 돌아가서는 예(禮)를 베풀 수가 없구나.

(단궁)

 

할아버지 20년 새경의 손매 묻은 집 문서를 쥐고/서울로 갔던 아버지의 소식은/ 영등포 어디에선가/ 신문보급소 한다는 소식만/‥‥저녁 밥상을 물리면/ 아버지 대신 허탈한/ 공복이 찾아오곤 했다.

(이용범/ 녹지 않는 강)

 

몇 권의 시집에 짜디짠 조선 간장이 스며들었다. /‥‥/ 우리는 미련과 희망을/ 서둘러 팥죽속에 넣고/ 한 그릇씩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용범/ 503호 · 1)

 

우리 가난한 자들은 당신의 길을 가오니/ 빈궁과 수치와 십자가를 향한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 만찬에서 돌아와/ 성직자를 군고기와 다과에 초대합니다.

(헤세/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

 

그는 돼지먹이 콩을 헤칠 정도로/ 굶주림을 느끼는 영혼의 아픔을 잘 알고 계셨다. / 때문에 찢긴 살과 그 사이에서 떨어지는 피를/ 산 빵과 산 피로서 우리에게 주셨다.

(클라크/ 생명의 빵)

 

그리스도/ 나와 함께 계시다고 생각하기는 쉬우나/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희미하게라도 느끼기까지의 머나먼 길이여 !

(야기 쥬우기치/ 가난한 자의 노래)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깨끗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가난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하마슬드/ 당신의 것)

 

나는 그들이 가는 곳에 따라갔다/ 거기는 허름한 오막살이었는데/ 비와 바람을 막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내가 계속해서 찾던 왕 그리스도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다.

(로웰/ 왕좌는 가난한 자와 더불어)

 

그는 영양이 부족한 삶을 원망치 않고/ 다만 나날이 걸식을 했을 뿐

(윤형근/ 열명길)

 

등교길 밥상 위에/ 멀건 보리죽 한 대접/허기진 숟갈에/ 바람결 일렁이는 보리밭 물결//‥‥ 낮달을 어깨에 걸고/ 돌아서는 소녀의 손엔/ 삐비 한 웅큼/ 4월은 잔인하게 고개를 넘는다.

(나영자/ 보릿고개)

 

가난이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헛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서정주/ 무등을 보며)

 

이제 저재 하면서/ 버둥거리며 지탱하는/ 곤고한 삶의/ 가불인생

(조영희/ 가불타령)

 

서로 잡아 먹는 세상에/ 동정심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 라는 / 굶주린 자들의 기도에/ 대답하실 분은 오직 하느님 뿐.// 오늘도 -없다,한 주일 내내-/우리 밥상 위의 밥은 어제와 같지 않다/ 서러운 밥 한덩이/ 가난한 사람들의 저주가 서리어 있는 밥 한덩이/ 밥이 맛과 선함을 회복하는 것은/ 오직 저 굶주린 피조물들, 저 소년들과 개들에게 이 밥이 나누어질 때뿐.

(레오나르도 보프/ 주의 기도)

 

송곳 세울 땅도 없이 끝까지 깨끗하여/도자(道者)의 깨끗한 가난은 진실로 진여(眞如)에 합하네./ 아마 선생은 가난의 즐거움을 얻었는가 하나니./소나무의 바람과 강물의 달을 집으로 삼았도다.

(기화/ 함허화상어록)

 

강원도 횡성 골짜기/ 아내를 산에 보내고// 혼자서 먹을 수 없던/ 이 보리밥 위로/ 아내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내의 눈물 속에 엘리사가 서 있었다.

(이동녘/ 횡성목회)

 

있고 없음을 넘어선 곳에/ 있는 것/ 그것은 無다//산다는 것은 이 無를 얻기 위해/가진 것을 버리는/ 생의 연습이다.

(하오주/ 無)

 

기도보다/ 사람을/ 더욱 부요하게 하는/ 열쇠는 없노라.

(임춘남/ 성경)

 

가난한 잎새에/ 별을 받으며

(이성선/ 풀잎사람)

 

고급 아파트에 살고 싶은 마음 버리기/ 산이나 부동산이나 동산이나 / 부페식당에서/배 두드리며 먹고 싶은 마음도 버리기/가락국수나/ 라면보다 더욱 가난한 마음만 찾아보기/ 심령이 가난한 자/ 찾고 또 찾아보기/아침 저녁마다/문득문득 솟아나는/모든 욕심 다 버리기/ 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가난 뿐이므로/ 끝내/ 가난도 모두 버리기/ 그리고 나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천국 찾아보기/오로지 그대가 베푸는 그 천국 찾아보기

(양왕용/ 버리기 · 2)

 

가구려 고추를 집채만큼 쌓아두고/ 너 마지기 시름을 쌓아두고/ 햇콩이랑 녹두랑 팥이랑/ 보리쌀 몇 말을 가난처럼 벌여놓은 할머니/ 할머니 곁에 눈뜬 강아지도/ 쪼그려 앉은 한 웅큼 헛살/ 산다는 것이 눈물나게 아름다워서/ 정말 보기에 좋아라.

(강연수/ 빈손으로)

 

투기꾼들의 발굽에 짓밟힌 거리/ 찌든 사람들은 조각땅을 던지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네

(윤형근/ 꽃내를 떠난 뒤)

 

달이 저물어 알량한 월급 몇푼 받아 쥐면/유달산 밑 자취방에서 집 없는 친구들과 오징어를 찢고/ 라면을 나누다 보니 형제보다 더 단단해졌다던가/ 땟국이 흐르는 옷에 흐트러진 머리가/ 서울에게는 몽땅 저버린 것 같은데/ 친구야 너는 서울을 거뜬히 이기고 있구나.

(박몽구/ 남쪽바다 친구)

 

이 선생네 코딱지만한 튀김가게 불빛이 그리워진다.

(박몽구/ 운암리 고갯길)

 

내 밥상은 늘 가난하다/ 창살들 뒤틀리고/ 얼룩진 창호지에/ 구멍들도 보인다/ 그 틈새/고맙게도 아침 햇살들/ 솔바람 따라 들어/ 다투어 자리한다.

(김봉렬/ 아침 · 1)

 

가난한 화가여 ! / 그대가 그린 그림을 보면/ 초가 지붕 위로 떠가는/ 종달새 울음까지도/ 왜 이리 서러운가.

(김재흔/ 가난한 화가)

 

지난밤/ 우리네 남루한 허물을 벗기우고/ 새로이 심장에 내리꽂히는/ 새벽 기도여/ 가장 싱싱한 빛살의 칼끝이다.

(허형만/ 새벽 기도)

 

비울 줄 모르고/ 채우기에 만 허둥거렸습니다/ 남보다 앞서서/ 수북히 쌓아 놓았습니다/그 부패하여 냄새나는 떡 덩어리를/ 은택의 향기로 알고/ 이웃을 불러들여 자랑했습니다.

(김상길/ 그릇)

 

허물어진 서까래 내려앉은 구들장 막힌 우물은 얼마나 목쉰 나날들이었을까요.?

(강남옥/ 다시, 원동에서)

 

일곱 색깔의 사람들이/ 여덟 색깔의 말을 뒤집는/ 시장바닥의 목마름을/ 다리밑의 어둠을/ 시인아, 꺼이 꺼이 울어주렴.

(박명자/ 대신 울어주기)

 

아이들 입벌리는 가난이 두려워.

(임수생/ 시집 한 권 반쯤 내는 거야)

 

나보다 어린 것/ 나보다 주린 것/ 병들어 서러운 것들의 허기와 목마름.

(전동균/ 과녁)

 

오래된 양말처럼 걸핏하면 빵구가 났던/참으로 남루했던 그의 생애를/ 또한 그들은 알고 있었다/ 구정물보다 더 흐리고 탁했던 그의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그대로 그들이 밟아왔던 일생인 것을.

(이재무/ 그믐밤)

 

타는 듯한/ 목마름조차 풀지 못하는 포도 잘 구운 빵으로도/ 채울 길 없는 허기

(이영옥/ 우물가의 여인)

 

외로운 실향민/ 돌아갈래야 돌아갈/ 따뜻한 고향이 없는 사람들은/ 당신의 정다운 미소에서/포근한 마음의 고향을 찾네.

(임춘남/ 부활꽃)

 

때로/전도서의 바람이/마음의 뜨락을 스치면서/ 시간의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푼푼이 모은/ 욕심의 촛불마저 꺼버린다.

(김상길/ 바람시초)

 

만성리로 가는 길은/ 가난한 노을 몇 점이/필요이상으로 문드러진/ 황토뿐입니다// 그 벌건 밭머리마다/ 한 생을 쪼다 버린 서러운/ 할머니의 호밋날이 날을 꺾고/ 질긴 흙더미속에 진저릴 칩니다.

(김남곤/ 두 손 모두어 보면)

 

우리 가난한 이웃집 돌담으로/ 슬픔이야 사랑이야 휘감아/ 정으로 뻗어 갔으면 하네.

(석용원/ 돌담)

 

은전 몇 닢 구걸하던 치욕의 도시/뼈 속에 파고드는 겨울바람 앞에서/ 살갗 찢기는 아픔참아가며/ 이운 꽃처럼 버려질 묘비만 닦았지.

(엄창섭/ 기도 · 23)

 

영혼이 가난한 자는/ 각고(刻苦)의 시간 땅에 묻는다/ 찬란한 미소로/ 손 잡아주는 주(主)

(엄창섭/ 기도 · 24)

 

가난과 정박으로/ 율례를 떠나려는 자여/ 유황으로 불타는 바람 피해서/ 낮게만 낮게만 숨어 오려느냐?

(허소라/ 두 개의 디딤돌)

 

베풀 것도 받을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날엔// 그윽한 목숨 하나로/ 피어 푸른 뜰이어라.

(김민정/ 서울 ll)

 

굶주린 창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고기만두가 들어 있는 스프의 논리일 뿐이네/ 괴팅겐의 소시지를 곁들인/ 불고기의 논증일 뿐이네/ 이 과격한 무리들에게는/ 키케로 이해의 모든 웅변가보다도/ 미라보와 같은 웅변가보다도/ 버터에 끓여 말이 없어진 건대구가 기분을 돋궈 준다네.

(하이네/ 유랑의 쥐)

 

어찌할꺼나 사람아. 죄라면 애오라지/ 조선 흙으로 조선의 꿈을 빚어/ 맨살로 지켜온 그 도타운 가난뿐,//꿈에도 볼 수 없는 군왕은 먼 데 있고/ 생존이사 쪼그라진 옹기 그릇 그늘로/ 기어들다 기어들다 끝내 사라질지라도,

(정동주/ 신무가-수난)

 

싸구려 시장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찌들고 지친자들의 가벼운 꿈과 양심이라도 내다가 널 것// ‥‥눈이 내리는 포근한 날에는 때없이 땅으로 꺼져 들어갈 것 같은 배부른 자의 작은입을 널 것.

(김경호/ 일기에 따른 빨래줄의 경고)

 

아내는 쌀 꾸느라 점심이 늦으니/ 긴 긴 해에 무엇으로 주린 창자를 채울고/ 금년 농사는 작년과 비슷하여/ 이 봄이 다 가도록 이슬비만 내리니,

(임제/ 田家怨)

 

쇠못보다 더 아프게 두드린/ 내 가난을 용서 빌면서/ 나는 또 한차례의 질긴 겨울을 용케 넘어왔다.

(김현숙/ 제일)

 

우리는 미련과 희망을/ 서둘러 팥죽속에 넣고/ 한 그릇씩 허기진 배를 채웠다.

(이용범/ 503호 · 1)

 

날이 새면서/ 아버지의 쓰린 속 삭혀 주던 쐬주 만큼이나 독한 추위와 함께/ 차압딱지가 구석구석 나붙었다/ 신미년 씁쓸한 바람타고 시집오실 매 해오신 할머니의/ 황달처럼 누렇게 바랜 농장에 어머니의/ 자꾸 헛도는 가슴앓이 재봉틀에/ 할아버지의 뻣시디 뻣신 손목에도/ 누이의 두 볼에 흐르는 차가운 눈물에도.

(이용범/ 녹지 않는 강)

 

가난은 무성하게 자라나거라/ 돌아가도 그대 만날 수 없고/ 이미 남들만 사는 땅/어느 한녘에 어떤 모습/ 어떤 빛으로 남아 있을까 그대여/ 허연 머리칼 날리며/ 억새꽃 피던 동산엔 아파트 즐비하고/ 도체비꽃 쓸쓸하던 골목길 이미 사라졌으니.

(문충성/ 고향)

 

하늘이야 차마/ 가난을 가르쳤으랴만도/ 굶주리는 어린애를 품에 안은 어머니에게/가난은, 모성의 벌입니다.

(김남조/ 모상)

 

우리들의 뒤로는 훌훌히 버리고 뜬 푸른 산이 있었고, 가난한 이들의 집과 황량해진 논밭이 조을고 있었다.

(구석봉/ 백년 후에 부르고 싶은 노래)

 

금빛 은빛 무늬 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 어스름의/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 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노니,

(예이츠/ 하늘의 융단)

 

우리는 지금 잠들기 전/ 덧없이 보낸 하루를 생각한다. /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은 가난하지 않고,/ 세계는 지금 거칠게 자라도,/책은 그들의 머리를 양떼와 같이 먼 내일의/ 언덕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김현승/ 책)

 

눈물도 많으면/ 바위까지 뚫는데/ 가난한 나는/ 눈물도 사랑도 너무 적었을까.

(김남조/ 虛)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키재기를 하고/ 칡넝쿨 둘둘말아 건을 쓰고/ 외양간 박꽃은 소복을 한 채/ 거미는 하루해를 태우며 박을 친다. // 맨드라미 하나가 여름을 부수고/ 중천에 해뜨고 달지는 하루/ 새소리만 고요를 뜯는구나// 산수화 한폭 그려놓고/ 주인은/ 시린 어둠을 이고 어디로 떠났을까?

(김유권/ 빈농)

 

한 십년 살다보면 가난도 길이 들어/ 열두나 다랑이가 줄이 죽죽 금이 가도/ 당신이 웃는동안은 청산 위에 달이 뜬다.

(이우종/ 산처일기)

 

일용한 양식으로도/ 작은 괴로움이 있거든//조용히 꿇어 앉아/ 주기도문을 읽어 보자.//이슬과 빛으로/ 몸을 다스리는/ 오월의 꽃나무가 되리라.

(박근영/ 오월에의 편지)

 

가난한 자마다 은방울꽃으로 피어나/ 우리나라 온 들녘을 덮게 하시고

(정호승/ 새벽편지)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하늘의 별로서 슬픔을 노래하며/ 어디에서나 간절히 슬퍼할 수 있고/ 어디에서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슬픔의 가난한 나그네가 되소서./ 슬픔처럼 가난한 것 없을지라도/ 가장 먼저 미래의 귀를 세우고/ 별을 보며 밤새도록 떠돌며 가소서/ 떠돌면서 슬픔을 노래하며 가소서/ 별 속에서 별을 보는 나그네 되어/꿈속에서 꿈을 보는 나그네 되어/ 오늘밤 어느 집 담벼락에 홀로 기대 보소서.

(정호승/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헤어진 차마 보고 가난을 슬퍼할 때/ 어데선지 그 얼굴은 가만히 나타나/ 깨어진 창틈으로 속삭입니다/ '너는 조선의 딸이 아니냐'고.

(모윤숙/ 조선의 딸)

 

얼마나 잘 될까./ 날로 헐벗어가던 가난,/사사껀껀 틀어져만 가던 일/ 난마처럼 뒤얽히던 생각

(황명걸/ 신초가)

 

기웃한 창공을 꿰뚫기엔/ 너무도 가난한 애기의 꿈을 욱어/오월이 푸르른 나무 그늘에/ 어머니! 당신을 부릅니다.

(석용원/ 오월, 수목, 어머니)

 

내 사촌누나는/ 포탄보다 가난으로 쓰러졌다/ 가난이 전쟁보다 무서운 때/ 우리는 뒷산에 올라가/ 원추리를 꺽으며 허리를 달랬다. // 어려서 식민지가 무엇인지는 몰랐어도/가난을 부끄러워하던 사촌누나랑/ 산에서 칡뿌리로 목을 축일 때/ 그때부터 원추리는/누나의 혼이었다.

(이생진/ 원추리 꽃)

 

내 오늘도 그대를 위해/ 창 밖에 등불 하나 내어 걸었습니다/내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마음 하나 창 밖에 걸어두었습니다/밤이 오고 바람이 불고/드디어 눈이 내릴 때까지/내 그대를 기다리다 못해/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 내린 들길을 홀로 걷다가/ 문득 별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호승/ 가난한 사람에게)

 

잘나서 못살라는 까닭없듯/못나서 가난하라는 이유라도 있나,

(김구용/ 송 · 75)

 

 

설 교 노 트

 

기갈한 심령들

요12:20-30

 

서론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헬라사람 몇이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인 빌립에게 와서 하는 말이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 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으신 예수는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가까웠다"고 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헬라인들은 지성인의 대표였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그들의 찬란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서는 영적 기갈즉,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에 유대 예루살렘에 올라왔으며 예수를 보고자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기갈은 단순히 예수 당시에만 있었던 현상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를 뵙고자 하나이다"하는 이 음성이 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음성을 듣는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몇 가지 길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곧 생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알고 믿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곧 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어떤 방면의 재능을 받았든지 우리 그리스도를 그 재능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받은 은사는 무엇인가? 그 은사를 찾아서 복음 전도에 바쳐야 합니다.

 

2. 인격과 성품과 생활을 통한 전도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생활을 통하여 주님을 보여주도록 힘쓸 의무가 있습니다. 마음의 등잔 속에 믿음의 불이 켜져 있으면 빛은 자연히 발할 것입니다. 산 믿음에는 향기가 나타납니다. 우리 생활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도록 살아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참된 신앙인들로서 그리스도를 무언 중에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생활의 높은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3. 죽음을 통해서 전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옛날 스데반과 같이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예수를 보여줄 수 있도록 되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가 순교할 때에 그 얼굴이 천사같이 변하였고 그를 돌로 치는 이들을 위해 용서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의 회개 뒤에는 이와 같은 스데반의 죽음을 통한 간증이 숨어있는 줄 생각합니다.

 

결론

우리는 다 언젠가는 한번 이 세상을 떠납니다. 항상 우리가 삶을 통하여서도 주님을 남에 게 보여주어야 하겠지만 특별히 노인들은 죽음을 통해서도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재능으로, 또한 우리의 인격과 성품과 생활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참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주님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영적 기갈에 허덕이는 이들을 주께로 인도합시다.

 

 

가난도 축복

대하12:1-8

 

서론

가난은 마치 큰 저주가 되고 큰 불행의 원인이 되며 또 인생 성패에 있어서 실패의 척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복되다고 말하고 축복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은 부끄러움도 수치스러움도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가난도 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제일의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11:2을 읽어 보면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옥에 갇혀 있으므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위하여 오신 구세주이신지 아닌지에 대하여 좀더 확실히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구세주의 하신 일 중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자신이 사람되셔서 이 땅에 오신 사명 중에 큰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가난한 사람일수록 겸손하기 쉽고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가난도 축복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가진 것이 많으면 없는 자보다 쉽게 교만해 집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없는 사람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못가진 자를 구박하게 됩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은 무식한 사람을 조롱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의 본능에 가깝게 인간들은 자기 도취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에 보면 "가난한 자"란 말의 옆에 작은 1자가 써 있습니다. 그1자는 밑에 주를 보라는 뜻인데 밑의 주1에는 "겸비한 자"란 말로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겸비한 자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여러 군데서 가난한 자와 겸비한 자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는 쉽게 겸비하기에 그는 하나님과 가까울 수가 있습니다.

가난을 통하여 겸허와 겸손을 배울 수 있고 체득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더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축복받을 수 있는 겸손을 배우고 겸허함을 체득하는 한 가난은 큰 축복인 것입니다.

 

3. 가진 것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재물이나 권력 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보다 그것에 더 의지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더 쉽게 하나님 의지를 결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은 축복일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에게 때로 가난을 주심은 이런 의미가 있으니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에 머무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부지런하고 근검 절약하고 힘써 가난을 이겨야 합니다. 또 부한 것이 죄란 말도 아닙니다. 아무리 부하더라도 주님을 사모하는 중심만은 언제나 가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도 축복이 될 수 있음을 알아 모든 것 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발견하며 감사합시다.

 

 

갈 것 없다

마14:13-21

 

서론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르다가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고 제안하니 예수께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빈곤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굶주림이 없는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기아와 빈곤에서 해방되는 길은 경제 문제라기보다 사랑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배고픔을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제자들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이 떡이란 보리떡이고, 물고기란 작은 고기 두 마리이지만 이는 사랑의 결정체이므로 이로써 많은 사람의 배고픔을 해결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다" 했으며,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란 사랑의 화신이 아닙니까?

 

2. 축 복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은 예수님은 떡과 고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어 무리로 배부르게 먹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과 고기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기아와 빈곤에서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밭을 개간하고 씨를 뿌려도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혜택이 흡족하지 않고서 어찌 풍년이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왕하 4:38-44에 보면 흉년에 엘리사의 제자들도 채소를 끓여 먹다 중독이 되는 때에 한 사람이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20개와 채소 얼마를 엘리사에 드리매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사환의 말이 백 명에게 부족하겠다 하나 하나님이 부족하지 않으리라 하더니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3. 남은 떡 열두 바구니

축복 후에 제자에게 떡을 주매 제자들은 무리들을 50명씩, 100명씩 앉힌 후에 골고루 분배했습니다. 분배를 공평히 하니 불평이 없고, 불평 없는 무리는 먹고 남은 것을 가져가지 않으니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도 축복받은 사람이 일을 바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받기 위해 50명씩, 100명씩을 짝지어 앉히고 제자들은 나눠주고 무리는 받았습니다.

예수에게 맡은 책임을 제자들은 잘 감당했습니다. 떡 광주리를 들고 다니면서 잘 분배했습니다. 나라에 비하여 말하면 국민에게 대임받은 관리나 군인이 모두 제 직분을 잘 해야 하고 분배받은 무리도 불평 없이 가져가지 않은 것처럼 백성도 자기 일을 잘 해야 합니다.

 

결론

교회에 영적 기갈이 없이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 있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려면 책임 맡은 목사, 장로, 집사가 잘 해야 합니다.

목사가 목사의 일을 하고 장로와 집사가 각기 맡은 일에 충실하면 영적 기갈에서 해방되어 은혜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인이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어디를 가도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갈 것 없다 ! "고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바치고 노력하고 수고하고 신의 축복을 받으면 인간 도처에 옥토가 있고 은혜있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목마른 삶을 해결하는 비결

눅19:1-10

 

서론

여리고 성은 역사가들에 의하면 B.C. 8천 년경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 성에 세무서장직을 맡았던 삭개오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부정한 재물을 많이 축적한 자였으나 여전히 불행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여리고 성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나 자기 집으로 모신 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삭개오가 목마른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1. 그는 목마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며 세금을 징수하는 세리상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여리고 성에 있는 세관 같은 곳은 세 곳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곳의 세리장이면 지위도 높고 권세도 있으며 재물도 많이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물질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소외감과 고독감, 그리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삶의 갈증과 불만족 속에서 살았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영혼의 갈증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예수님에대한 소식과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죄의문제를 해결하는 예수님, 질병의 문제와 삶의 공허를 채워줄 수 있는 예수님으로 믿어져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 세상은 메말라가고 있으며 갈증을 느끼듯이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삶의 만족, 기쁨, 소망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삭개오와 같은 존재의 삶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공허하며 만족을 얻지 못하고 쉽게 권태를 느껴 버립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8)"고 했으며 "너희가 목마르거든 내게로오라 내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리라(요7:37-38)"고 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구원을 얻었으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동시에 해결받았습니다.

 

2. 삶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 지방을 지나가 신다는 말을 듣고 뛰어나갔으나 예수를 만나기에는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첫째, 그가 키가 너무나 작았습니다. 누가 12장1절 말씀처럼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기에 그 인파를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외적 장애인 군중이 너무나 많이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2절에처럼 용신할 틈이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이 너무나 먼거리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삭개오는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갔으나 갈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만나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체면도, 지위도, 명예도, 권력도 생각치 아니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비상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뽕나무에 올라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력을 다하지 아니하면 올라가지 못합니다.

 

3. 예수를 만나고 난 삭개오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상한 각오로 수직적으로 뽕나무 위로 올라 간 삭개오를 향하여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러져 자기의 허물을 고백하였습니다. 이제는 유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내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뉘 것을 토색했으면 4배로 갚겠나이다"하고 결단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마디의 책망도 없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난 다음에 삭개오는 소유의 개념이 달라졌고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결론

삭개오는 예수를 만나 삶의 갈증을 풀었으며 아울러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생관이 바뀌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구원의 축복을 받게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변화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보장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자의 복음

눅2:1-12

 

서론

"주의 성령이 내게 임 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서를 읽으시며 자기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회당 예배시에는 귀빈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는 이날따라 사람이 많이 모였지만 수님만이 귀빈으로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성전 예배 때는 율법과 예언서의 한 부분을 낭독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1-2절의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이 성경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며 메시아의 사역과 기능을 가리킨 구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그 분 자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1. 가난한 자에게 복음(기쁜소식)을 전하러 오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영적 결핍을 깨닫지 않으면 하나님을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통해서만 복음은 전파됩니다. 오늘도 이 우주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들만이 그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2. 마음 상한 자를 고쳐 주십니다.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는 빠져 있는데 원문에는 있습니다. 재난을 당하거나 비참한 환경에서나 죄 때문에 상심한 사람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에 대해서 낙심하고 절망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3.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회고하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죄와 사탄에게 포로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영적으로 분석하면, 감옥에 있는 죄수의 상이요, 정복자에게 끌려간 전쟁 포로의 상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자유는 마치 갇혀 있는 자들에게 감옥을 열어주는 자유요, 전쟁 포로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자유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4.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시는 분입니다.

여기에 '눈먼 자'란 육체적, 정신적으로 눈먼 자들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눈은 가졌으나 천국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 눈먼 자들을 보게 하심은 토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햇빛을 보게 되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육과 영에 아울러 참다운 빛을 주시는 분입니다.

 

5.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함이라 "하신 분입니다.

유대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간 때로부터 50년째 되는 해를 '희년(Jubilee)'이라고 하는데 희년은 종을 놓아주며 전당 잡은 것을 돌려주는 해, 다시 말하면 빚진 것을 탕감해 주는 해입니다.

이 희년을 은혜의 해라고 하는데 구약 시대에는 희년이 50년에 한번 주기로 오지만 예수님의 년대로는 매년이 은혜의 해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해마다 사면을 허락하시고 비참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매일매일 기쁨과 평화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다섯 가지 사역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데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궁극적으로 실현하는 기관임을 믿고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의 복

마5:1-3

 

서론

산상 수훈이라 칭하는 성경의 이 부분은 예수님의 교훈 중 중요한 것을 질서있게 배열한 것으로서 주옥의 문자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아무런 사색적인 냄새도 없으며 방편주의나 편의주의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가르칠 때에 언제나 앉아서 가르쳤습니다. 정식으로 교훈할 때는 앉아서 했습니다. 그러므로 "산에 올라가 앉으심(5:1) "은

(1) 그 교훈이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교훈입니다.

(2) 정신적 교훈입니다.

(3) 가장 본질적인 교훈입니다.

또 "입을 열어 가르쳤다(5:2)"는

① 공적으로는 헬라말에서는 엄숙하고 장엄하며 권위 있는 말을 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중대한 발표가 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② 개인적으로는 한 개인이 자기의 마음을 열고 정성을 다 쏟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에 오른손과 같이 함께 일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자기의 마음과 뜻을 열어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에게 도덕, 지식, 학술, 지혜 등이 풍부하게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걸인과 같이 자랑할 것이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로부터 때때로 필요한 마음의 양식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말씀드림으로 우리 모두가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가난'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가난(프토코이 ; ptokio)'은 절대적인 극빈으로 '걸인'을 의미하는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만의 반대로 겸손을 의미하는 것이며, 절대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하염없이 작은 인간 존재의 겸허한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풍성함에 겸손히 손을 내밀고 자비와 사랑과 은총을 구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걸인입니다. 영적 걸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2. '복'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복(마카리오; makarioi)'이라는 단어는 특히 신에 대하여 기술할 때 쓰는글자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복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복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최상의 행복(happiness)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외부의 세력이 건드릴 수 없는 내적 기쁨과 행복을 뜻합니다. 세상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하며 믿을 수 없으나 성도의 행복은 건드릴 수 없고 침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고 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축복과 넘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고 하였으며, 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고 하였습니다.

 

3.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이들이 상급으로 받을 내용은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장래 천국을 보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모든 영역을 상급으로 주십니다. 지극히 가난한 걸인에게 부요한 왕자로서의 호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론

비록 가난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힘들고 어려움이지만 그런 가난을 이길 힘이 우리 주님께는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시는데 상급으로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다 이러한 축복을 상급으로 받는 가난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

마5:3

 

서론

성역 초기에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백성들의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주님을 따르던 군중들은 주로 육신의 병고침을 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질병에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저들의 병을 고쳐 주셨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문제로서 일차적인 문제는 영혼의 병을 고쳐주시며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가난한 영이란 자기의 생의 원리를 스스로 가지지 않는 자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가진 생명 원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격적 활동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의 인격의 반사입니다.

자신의 생의 원리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아의식이 없는 무인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패한 자기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바르지 못한 생의 원리를 포기하고 완전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생의 원리에 스스로 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복종시키기를 기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영이 가난한 자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신적, 물질적 재산은 모두 자기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재산을 많이 가졌다고 고것이 자기 자신의 것으로 알고 자신의 육을 살찌게 하기 위하여서만 활용한다면 그것은 영이 가난한 자의 생활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가 비록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마치 한 푼도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생활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의 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법을 하나님 앞에서 지킬 때 그것이 인간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다(신6:25) "

예수님 당시에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율법의 조문을 사람들 앞에서 지킴으로 스스로 의를 가졌다고 자처했고 나가서 자신의 행위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이런 심령을 살피시고 저들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23:5-36).

 

4.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축복을 받음으로써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기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이 시행되는 영역과 백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은 말로만 외친 것이 아니라 실권을 가진 영역으로 질병과 사탄의 세력과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심으로써 지상에 천국을 실현하셨습니다.

교회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모인 처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지상의 천국인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현실에서 모든 것을 가지면서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자처럼 생활하는 자입니다.

자기에게 속한 것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을 때 현재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 있어서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을 믿고 이에 따라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지상의 것을 다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나의 심령 속에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장차 올 세계에서도 천국을 결코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심령 이 가난해져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나도 천국을 소유하고 다른 사람에게 천국을 증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의 부족

눅18:18-23

 

서론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찾아왔습니다. 부자, 가난한 자, 소경, 벙어리, 문둥병자, 귀신들린자들 뿐 아니라 율법사, 바리새인, 사두개인, 재산가, 도덕자, 장로 등 각 분야에서 가지각색의 사람이 다 찾아왔습니다. 이 중에는 한 청년도 있었는데 그는 법관이었고 지위로, 지식으로, 재산이나 도덕으로 보아 최고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왜 찾아왔으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 청년의 불만족

이 청년은 지위가 법관이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또 재산도 많고 지식도 많았지만 거기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계명은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이로 보아 그는 상당한 도덕가였음을 또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청년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높은 지위와 명예와 영광, 그리고 재산이나 도덕만으로는 이 세상에서 잠깐 만족을 줄 뿐입니다.

인생의 참된 만족은 물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현세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솔로몬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라고 하였습니다. 물질로는 심령에 도저히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만약 만족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그 만족 이상의 고통과 불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만족하지 못할 것을 구하여 만족을 채우려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냉수를 마시면 배고픔을 면치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을 썩은 세상의 물질적 만족이 풍족히 해 주지는 못합니다.

 

2. 인간의 요구는 무엇인가?

그 청년은 예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요구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현재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습니다. 영생이 하나님께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청년은 육신이 죽지 않고 영생하기를 구원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 것입니다.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공도이니 누구나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나뉘는 것으로 육신은 땅에 있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서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3.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영생을 얻기를 예수님께 원할 때 "네가 계명을 아나니 그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그 계명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는 것은 사람을 해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네가 회개하고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 청년이 예수의 말을 듣고 근심하고 돌아갔으니 그것은 자기 재산이 너무 많았고 그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더 귀중하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결론

"밭이나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네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사랑입니다. 나의 것을 다 주어서 내가 가난하여 질지 라도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따른다면 결코 가난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가 정

성 경 활 용

1.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가정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 가정의 사랑

(1) 부부의 사랑

(창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잠5:19) ‥‥너는 그 몸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아8:7)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엡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지니

(골3: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 어머니의 사랑

(창21:16) 가로되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출2:3)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삼상2:19) 그 어미가 매면제를 드리러‥‥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

(왕상3:26)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마15:22)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3) 아버지의 사랑

(창37:35)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삼하12: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눅15:20) 아직도 상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3. 부부의 의무

(1) 남편의 의무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신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여 보내지 말 것이요‥‥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전11:3)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2) 아내의 의무

(에1:20) 귀천을 무로하고 모든 부녀가 그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엡5:22) 아내들이여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골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벧전3:1)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고전7:10)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고전11:7-9)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맡을 것이니

(딤전3:ll)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딛2: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잠14:1)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4. 부모의 의무

(1) 자녀를 교육시키고 양육함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 말씀을 강조할 것이며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후12:14)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딤전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도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2) 자녀를 징계함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잠19:13) 네가 네 아들에게 소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고

(잠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 리라

(3) 자녀로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게 함

(신4:9)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신31:13)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5. 자녀에 대한 일반적 고찰

(1)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상급

(창33:5)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시113:9)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 도다

(시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2) 자녀의 의무

(시34:11)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라

(잠10:1)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잠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전12:1) 너는 청년의 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막7: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엡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딤전5:4)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21:18)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3) 축복된 약속

(신5:16)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8: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막10:14)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은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

(엡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6. 가정 불화의 원인

(1) 미워함

(창27:41)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2) 무자식

(창30: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삼상1:6-7) 여호와께서 그를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3) 형제의 시기와 여인의 다툼

(창37: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잠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4) 미련하고 순종치 않는 자식

(잠19:13)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재앙이요

(신21:10)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5) 탐욕

(잠15:27) 이를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6) 게으름

(전10:18) 게으른즉 서까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즉 집이 새느니라

 

7. 파괴의 원인

(1) 간음

(출20:14) 간음하지 말지니라

(레20:10) 곧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마19:9)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고전6:9)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2) 일부다처

(신17: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 되게 말 것이며

(딛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3) 이혼

(눅16:18)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다 무릇 버리운 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관련원어풀이

1. .hj;P;v]mi 미쉬파하-

(1) 가족, 즉 친척들의 집단.

(2) 상징적으로(사람들의) 계급, (동물의)종류, (물건의) 부류.

(3) 연류된 의미로, 종족, 백선

 

2. tyIB' 바-이트

(1) 천막, 장막(옮길 수 있는 집).

(창27:15, 시5:8)

(2) 궁전, 큰 저택,

(삼하11:2, 9, 에1:9)

(3) 성전(하나님의 집), 우상의전,

(삼상5:2, 5, 사37:38)

 

3. oivkei'o" 오이케이오스

가정의, (명사)친척, 식구의.

(갈6:10)

 

4. oi+'ko" 오이코스

거주, 일가족, 집안, 집식구

(눅1:23, 행7:10)

설교예화자료

부모의 양육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얘들아, 너회들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내 말에 순종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크리스찬인 부모라면 자식을 양육할 때 성경을 중심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제는 많은 원인들이 있으나 부모가 자녀들을 성경 말씀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탈선하고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 또한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니 오늘날 한국에서도 청소년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확대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황금 만능주의식의 생활 태도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가치관의 실종 속에서 술, 담배 심지어는 마약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역이 되고 주춧돌이 될 우리의 자녀가 신앙의 부재 속에서 방황하게 된 현실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녀들을 끊임 없이 훈계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부모의 끊임없는 교훈은 자녀들의 삶을 올바른 지표로 서게 하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들이 자녀들에게 하는 훈계가 작은 씨앗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도들의 생활이 거듭나야 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녀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할지라도 부모들의 생활이 자녀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면 절대로 우리의 자녀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과 끊임없는 기도, 그리고 진실한 훈계로서 우리의 자녀들을 참다운 주님의 아들, 딸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어려움을 이긴 자녀들

 

나환자라는 선고를 받고 깊은 절망감에 묻혀 결국 나환자들이 모여서 사는 어느 정착촌으로 격리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절망감에서 주님을 알게 되어 저주스럽던 질병을 오히려 감사할 정도로 신앙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상당한 세월과 더불어 그 고통스런 질병은 치유가 되었지만 그 외흔은 남아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제약과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느즈막하게 되었을 때 부인을 맞이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외혼을 가진 그들 부부 사이에서 아무런 흠이 없는 예쁜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름다운 자녀들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함을 드렸습니다. 아이들은 점점 건강하게 자라났고 초등학교에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도 잘하고 주일학교에도 성실하게 다녀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부모들은 힘든 일도 마다 않고 자녀들을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가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도 사춘기에 접어들어 환경에 민감해지기 시작했고 주변의 여러 여건들이 아이들을 자극시켰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번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 집이지요. 오늘 모범 학생들의 부모님을 초대하기로 했으니 지금 곧 와 주세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되지도 않는 구실을 붙여 갈 수 없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쩌면 자기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가 이전에 겪었던 고통보다 더 큰 어려움을 이겨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날 오후 늦게 아무렇지도 않는 모습으로 들어 온 아이에게 학교에서 아무 일 없었느냐고 넌즈시 물어봤습니다. 아이의 대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연한 대답과 함께 의연한 모습이었습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아픔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가슴 메이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당 기간의 갈등을 지나 이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감사와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우리들의 가정의 바탕은 돈 ·권력 ·명예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탕이 흔들리면 모두 산산조각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백성의 가정은 그런 것들을 바탕으로 삼거나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에서 우리의 가정을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

 

미국의 유명한 여성 고위관리의 남편이 자살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아내가 고위관리가 되기 전에는 같은 대학의 교수로 서로 끔찍이 사랑하며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둘은 서로의 생활과 생각을 존중해 주고 평등한 생활을 유지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고위관리가 되고 나서는 늘 워싱톤에 살다시피 하므로 거의 아내의 얼굴조차도 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아름다웠던 가정 생활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남편은 이제 자신의 삶의 기쁨과 지표마저도 잃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사회적 지위의 명성으로도 아무런 기쁨을 맛보지 못한 남편은 결국 자살을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편 자살 소동으로 가정 생활이 파탄에 이르자 아내는 단호히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고 가정을 택하여 실종되었던 가정의 행복과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현명하고도 사리 깊은 판단은 자신의 명성이냐 가정의 행복이냐의 갈림길에서 소중한 선택을 하였던 것입니다. 가정은 이 세상의 어느 곳보다도 따뜻하고 좋은 곳입니다.

아내는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파탄지경에서 가정을 되찾고, 부부간의 사랑을 되찾은 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은 오로지 가족 성원간의 사랑에 기초할 때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어느 마을에 큰 부자와 가난한 농부가 살았는데, 부자는 자녀가 하나도 없고 농부는 칠남매나 두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가 농부에게 제안하기를 "자네 아들 하나를 양자로 주면 집과 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농부 부부는 기쁨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칠남매가 침실에서 잠들었을 때 부자에게 보낼 아들을 선택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부부가 첫번 침대에 이르렀을 때 부인이 "그 애는 안되요. 아직 젖먹이인데."하고 소리 쳤습니다. 둘째번 침대 에 왔을 때 소년이 눈물자국도 지워지지 않은 채 잠꼬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이 애는 우리 곁에 있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번 병든 아이의 침대에 이르렀을 때 그 애는 자기들의 간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네번째 침대에는 해맑은 웃음을 띤 얼굴로 잠든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항상 명랑한 얼굴로 가정에 웃음을 주는 애라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다섯번째 침대에는 예쁜 딸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엄마를 꼭 닮은 이 딸을 아빠는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외동딸을 부자에게 보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섯번째 침대는 이 집의 장남의 침대였습니다. 딱 벌어진 믿음직스러운 체격의 청년이 코를 골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생각하기를 이 애의 도움이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장남도 보낼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딱 한 아이밖에 없었습니다. 맨 마지막에 남은 녀석은 아주 농땡이여서 그 집의 문제아였습니다. 남편은 이 아이밖에 보낼 아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그 애는 정말 보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늘 기도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부자의 집에는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없으니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부자에게 양자로 보낼 아이가 없다는 사자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부부는 손을 마주잡고 가정이 곤란할지라도 서로가 더욱 노력하여 자녀들을 훌륭하게 부양해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고양이 밥그릇과 효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이가 점점 많이 들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해서 음식을 자꾸 흘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며느리와 아들이 보기가 답답해서 "미안하지만, 할아버지는 딴 곳에서 잡수세요."하고 딴 상에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미동도 어려운 할아버지가 그릇을 들고서 먹으려고 하니 그릇을 떨어뜨려서 자꾸 깨뜨립니다. 이런 일이 있으니 며느리는 화가 나서 어디 안 깨지는 그릇이 없나 살피다 주방 옆에 있는 고양이 밥그릇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그릇에 밥을 담아서 할아버지를 드렸습니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주방 옆에 앉아서 그 고양이 밥그릇에 갖다 주는 것을 조금씩 드시고 지냅니다.

시간이 흐른 후 아이들과 며느리가 거리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너댓 살 먹은 아들이 나무를 갖다 놓고는 칼로 부지런히 가운데를 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이놈아, 너 뭐 하는거니?" 그러자 아들은

"나무그릇을 만들려고."라고 대답합니다.

"그릇을 만들어서 뭐하려고 그러니."하고 다시 묻자 "아버지가 이 다음에 늙으시면 밥담아 드리려구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이 다음에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파괴되는 가정

 

마가렛미는 "민족성이 난폭해지거나 부드러워 지는 것은 감정에 달려 있다. "고 그의 조사 보고서에서 밝혔습니다.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는 그의 아버지가 술망난이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신경질적으로 자식들을 구타하였습니다. 그는 가정 불화속에서 반항심을 가지고 성장하여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고 미치광이와 같은 지배욕으로 세계를 피로 물들였습니다.

헬렌 라잇은 조사보고서에서 정신병자 중 7세 이전에 부모를 잃은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미국 중년 부부의 이혼율은 1974년에 31만 5천 명으로 10년 전의 그것에 비해 두 배가 넘고 별거중인 사람까지 합해 4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혼 문제 상담가인 그레타 라아드씨는 현대 사회 구조 하에서 이혼율은 어쩔 수 없이 증가하지만 이혼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를 두고 후손들의 가족 구조에까지 영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중년층의 이혼율은 3배로 늘어날 것이며 45세 이상된 부부의 절반이 이혼할 것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렇듯 파괴된 가정 환경으로 인해 철저한 인간성 상실과 황폐화된 정서를 가진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며 궁극적 목표가 되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새로움을 찾는 가정

 

인간은 누구나가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좋아합니다. 가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새로운 가정을 꾸미기 위해서는 부모들이 솔선해서 노력해야 가정은 참다운 안식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신혼 부부들이 결혼한 지 채 일년도 못되어 이혼을 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는 서로의 정에 이끌려 결혼은 했지만 이제 가정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지혜롭게 생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정은 영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가정에 성령이 충만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면 사랑과 희락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또한 가정은 정신적으로 늘 발전해야 합니다. 늘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교환하며 부부가 정신적, 정서적 보조를 같이 해야 더욱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귀가 시간이 자꾸만 늦어지자 부인이 고민을 하다가 환경을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집안의 환경을 바꾸어서 집에 벽난로를 만들어 장작에 불을 지펴 놓고 의자를 놓아 집안 분위기를 새롭게 꾸몄습니다. 아내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남편은 집에 일찍 들어와 벽난로 앞에서 책을 읽으며 가족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성실한 남편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항상 가정을 새롭게 찾기 위해 작은 것부터 새로운 것으로 창조, 변화시킬 때 결코 시들지 않는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들

 

안나 크로스(Anna Kross)라는 치안 판사가 재판정에서 고집이 센 한 소년을 설득해 보려고 그의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그 소년은 한 번 유리창에 병을 던진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잖아 보이는 소년의 어머니가 피고석에 나타나자마자 그녀는 경찰에 체포당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아들보다 더 심한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의 어머니는 병을 깨뜨려서 이웃집 여인의 목을 찔렀다고 해서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병으로 목을 찔린 여인은 심한 상처를 입고 2주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이런 일을 저지르게 된것은 이웃집 여인과 술집에 들어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사소한 시비 끝에 맥주병을 테이블에 쳐서 깨드린 뒤, 뾰족한 끝으로 일을 저질렀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상점 유리창을 돌을 던져 깨뜨렸다고 해서 아들을 도저히 꾸짖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의 글은 뉴욕에서 급송되어 온 유나이티드 프레스(United Press)의 한 기사 내용입니다. 부모의 잘못된 행실이 자식을 어떻게 파탄지경으로 몰고 갔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본래의 신분 그대로 오시지 않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함께 느끼고 함께 고통당하고 함께 아파했기에 인류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졌듯이, 자녀교육 역시 그들의 마음이 되어 그들의 문제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느끼며 고통당하는 마음이 없이는 세대 차이가 나는 부모의 역할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화목한 가정

 

어느 동네에 두 집이 이웃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집은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대가족이었고 한 집은 젊은 부부만 사는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가족을 이룬 가정은 항상 화목하여 웃음꽃이 피었는데 부부만 사는 가정은 항상 부부싸움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두 부부는 이웃집의 화목한 모습을 보고 크나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는 둘만 사는데도 매일 싸워야 하고 이웃집은 여럿이 함께 모여 사는데 저토록 화목한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젊은 부부는 술 한 병을 사들고 이웃집에 찾아갔습니다. 같이 술을 나누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당신네 가족은 대가족이신데도 웃음이 떠날 줄 모르고 우리는 둘이 사는데도 매일 싸움만 하는데 댁이 이렇게 화목하게 사는 비결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이웃집 주인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이 양보할 줄 알고 무슨 일이든지 자기탓으로 돌리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되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실수로 물을 엎질렀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내 부주의로 물을 엎질러 미안하다고 하며 용서를 청했지요, 그랬더니 내 아내는 '아니예요, 제 잘못입니다. '하며 오히려 물그릇을 그곳에 놓아 두었으니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며 오히려 나에게 용서를 청했습니다. 이렇듯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탓이라고 하니 싸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젊은 부부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서로의 잘못을 뉘우쳐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의 화목은 상호간의 양보 속에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 때 꽃피게 될 것입니다.

 

 

내 쉴 곳은

 

198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알제리아에서 죽었습니다.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후에 미국 정부는 군함을 알제리아에 보내어 그 시민의 유해를 본국에 모셔오도록 결정했습니다. 군함이 알제리아에서 유해를 싣고 도착하는 그 시간에 뉴욕에는 유해를 영접하러 나온 군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유해가 운반되어질 때 군악대가 연주하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조기가 나부끼는 시가지를 뚫고 대통령과 고위관리들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대통령과 고위관리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장지로 향한 이 유해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그는 전쟁터에서 크나큰 공을 세운 용감한 장군도 아니었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사랑을 한몸에 받는단 말입니까? 세기의 영웅도 아니고 그렇다고 엄청난 명예와 지위를 가지지도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해하는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이 사람은 단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많은 사람이 애창하는 노래인 '흠, 스위트 흠'의 작사자인 존 하워드펜인이었습니다.

가정의 포근함과 소중함을 잘 표현한 이 노래는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기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세우신 유일한 기구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곳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맛볼 수 있는 작은 천국인 것입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어록·시·묘사

 

가정이 고통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을 때에는 가정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가장 훌륭한 모델이고 가족은 가장 훌륭한 형태의 인간 관계임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A. J. 헤셸)

 

어느 새나 자기의 둥우리를 가장 좋아한다.

(콕트그래브/ 불영사전)

 

사람은 가정에 있을 때 그 본연의 선량함에 언제나, 가장 가깝고, 가정을 떠났을 때 멀어진다.

(J.G. 흘랜드/ 금박지)

 

집을 방문해 보지 않고서는 사람을 알기 쉽지 않다. 집은 사람의 성격을 드러낸다.

(R.W. 에머슨/ 영국인의 기질)

 

가정, 우정, 대화는 케케묵은 것이 되었다. "내 가정이 내 성(城)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내 차(車)가 내 성이다"라고 말한다.

(A. J. 헤셸)

 

가정의 단란이 지상에 있어서의 가장 빛나는 기쁨이다. 그리고 자녀를 보는 즐거움은 사람의 가장 성스러운 즐거움이다.

(J.H. 페스탈로치)

 

모성애 없는 가정은 동토(凍土)나 같다. 부성애 없는 가정은 반란 소굴이다.

(오선백/ 단상)

 

가정이란 남성과 여성이 단순히 함께 사는 곳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져 있는 곳이다. 그 들이 함께 합쳐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 즉 영육이 합쳐서 두 개체가 아닌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그것이 결혼의 양심이며 가정의 정체이다.

(유주현/ 현대의 양처)

 

인간애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인간의 감화는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J. 메이시/ 여성에 관해서)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요, 그것을 채굴하는 곳이 아니다. 얻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요, 주기 위해 이루어진 가정만이 행복한 가정이다.

(內村鑑三)

 

가정은 애정 집단이다.

(오종식/ 어머니의 자리)

 

대리석의 방바닥과 금을 박은 담벽이 가정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어느 집이든지 사랑이 깃들이고 우정이 손님이 되는 그런 집은 행복된 가정이다.

(A. 반 다이크)

 

모든 행복한 가정은 가족 서로가 닮아 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어느 사람이나 모두 따로따로 놀고 불행하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집이란 네가 그곳에 가야만 할 때 너를 맞아들여 주는 곳이다.

(R.L. 프로스트/ 고용인의 죽음)

 

가족은 그날 그날의 삶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해 주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오화섭/ 성실한 만남)

 

하늘의 별이 되지 못하거든 차라리 가정의 등불이 되어라.

(G. 엘리엇)

 

아무리 마음이 폐가(廢家)같을 망정/ 거기,/그리움의 등 하나 불 밝히면/ 궁전보다도 화려해진다.

(김대규/ 반전)

 

집이 가정이 되려면 많은 생활이 그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A. 게스트/ 가정)

 

설령 우리의 몸은 가정을 떠날지 모르나 우리의 마음은 떠나지 않는다.

(0.W. 홈스/ 천당에서 느끼는 그리운 내 집)

 

본래 가족이 줄 수 있어야 할 근본적인 만족을 가족이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불행이며 불만의 뿌리 깊은 원인의 하나이다.

(B.A.W. 러셀/ 행복의 정복)

 

우리 집에 경사나도/ 이웃들의 슬픔 생각하여/ 그들과 같이 운지 않고 슬퍼하기/‥‥이웃과 더불어 슬퍼하기.

(양왕용/ 버 리 기 · 3)

 

한편 아파트 거실을 휘저으며/ 나불대며 씩씩거리는 손주놈도/돋보기를 걸치고 베갯 모 수를 놓는 아내도/ 앞 행길을 제각기의 모습으로 오가는 이웃도/ 새삼 사랑스럽고 미쁘고 소중하다. // 오오, 곳간의 재물과는 비할 바 없는/ 신령하고 무한량한 소유!/ 정녕,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것이 모두 다 내 것이로구나.

(구상/ 신령한 소유)

 

싱싱한 바다의 소리들이/ 집 안 가득/ 별빛으로 빛나고

(김용길/ 제주바다)

 

마님은 곗나들이 아이들은 밤샘과외/터엉 빈 맨션 아파트 소주잔이나 기울이다/ 터지는/울화통 하나가/ 병나팔을 불어댄다.

(성권영/ 서울 낮달 · 16)

 

귀밀밭을 에돌아 언덕에 올라서니/ 반가워라 시골집 수수한 시골집/ 지붕에는 빨간 고추 처마밑엔 마늘 타래- / 아늑한 시골집은 고향처럼 정답네.

(이상각/ 시골집)

 

집에 있거라 집에. 내 마음이여 쉬어라./ 집에 정주하는 마음이 가장 행복하다. / 정처없이 헤매는 자/ 문제도 많거니와 걱정도 많다. / 집에 있는 것이 제일이다.

(H.W. 롱펠로우/ 노래)

 

아픔과 미움이 지워지고/ 의심과 불안이 다 가시고/ 구석구석 어둠도 말끔히 닦아낸/ 화평과 사랑이 가득 넘치는 보금자리여.

(최호림/ 도배 · 2)

 

"주님 ! 이 집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오니 빨리 오셔서/ 주인이 되어 주시고 이 집의 집세는/ 주님께 바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허소라/ 집짓기)

 

다시 태어난 기쁨으로/ 아침마다/ 눈을 뜬다/ 어제를 벗어버린 웃는 얼굴로/ 아내의 손을 잡으면/ 환하게 울려오는/ 축복의 햇살/훨씬 예뻐진 어린 것들을/은혜의 열매인 듯/안아본다//‥‥ 이 새삼스런 고마움을 /글세, 돈으로야 살 수 있을까.

(유승우/ 날마다 거듭나는)

 

엄마, 아빠, 남두/ 할머니/ 우리 네 식구//‥‥// 사이사이 보이지는 않는/ 모습으로 끼어앉으시어/ 사이사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끼어 앉으시어// 아침에도 저녁에도/사랑의 꽃으로/피 어나시는 주님//‥‥ 사랑의 우리 네 식구/ 주인되시는 손님.

(안혜초/ 주인되시는 손님)

 

오,/ 기저귀도 펄렁이고/ 깃발도 휘날리는/ 가정주의적인 혁명가여.

(김대규/ 바람)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면서/ 겨우 내 식구들한테만이라도/ 작은 사랑이었으면

(이탄/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일과에서 돌아오면 아내와 아이들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심장에 박히는/ 그리하여 삼백육십오일 나의 발걸음은 지쳐 있다

(공석하/ 서운산. 1)

 

파도의 집/나의 흥분된 혈기여/녹색의 넋/ 나의 동년의 요람이여.

(김성휘/ 바다)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모든 싸움이 자취를 감추고 사랑이 싹트는 곳이요, 큰 자가 작아지고 작은 자가 커지는 곳이다. 가정은 안심하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으며,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랑을 받는 곳이다.

(웨브)

 

 

설 교 노 트

 

성도의 가정

시128:1-6

 

서론

태초에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어 주셨고(창2:18-25), 예수님께서는 이적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요2:1-11). 그리고 사도들은 가정의 법도와 유기적 기능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고전7:1-7, 엡5:22-33,벧전3:1-7). 즉, 가정은 독재적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니요, 가장을 머리로 하는 유기적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은 성도가 가정적으로 축복받을 것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1. 우주의 축도입니다.

우주의 축도는 지구이고, 지구의 축도는 대륙이고, 대륙의 축도는 국가이고, 국가의 축도는 가정 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우주의 축도입니다. 즉 가정은 우주의 기능(창1:1-31)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부모는 대지와 같고 자녀들은 초목과 같습니다. 사랑과 화목의 꽃이 피고(부부의 사랑), 새들의 노래(자녀들의 우애와 효심)가 있는 심히 아름다운 (창1:31) 작은 우주입니다.

 

2. 축복의 근원입니다.

인간의 모든 축복은 가정에서 시발이 됩니다.

(1) 가정에서 부모를 잘 공경하면 장수와 물질의 복을 받습니다(출20:12, 신5:16, 엡6:2).

(2) 가정에서 형제와 화목하면 기름진 복을 받습니다(시133:1-3).

(3) 가정에서 부부가 화합하면 아름다운 복을 받습니다.

(4) 가정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후손의 강성함과 부요와 재물의 복을 받습니다(시112:1-10).

 

3. 교육의 도장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시128:1)"는 가정을 교육의 도장으로 삼는 자를 말합니다. 고대 히브리인의 교육은

① 가정 교육, ② 회당 교육, ③ 랍비 교육의 3단계 교육이었습니다.

인생에서 최초로 만나는 사람은 부모이고, 특히 어머니는 일 대 일의 개인교사이기도 합 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느낄 바를 느끼고(feeling), 알 바를 알고(knowing), 그리고 행할 바를 행하도록(doing)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제1차원적 교육의 도장입니다. 히브리 민족이 세계에서 강한 민족이 된 원인과 배경은 바로 성경을 교과과정으로 삼은 교육의 힘이었습니다.

 

4.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128:5)"라고 하였습니다. 시온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즉, 가정 제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제단을 경유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제단에 성공하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제단에 실패하면 세상에서도 실패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전을 통하여 복을 내려 주십니다

 

결론

아름답고 화목한 가정을 이룩하여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래로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복(永福)을 가져오게 합시다.

 

 

아브라함 가정의 불상사

창16:1-6

 

서론

우리는 과거 신앙인들의 가정에서 발생되었던 불상사를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의 가정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불상사를 사전에 방비하여 가정의 안정과 평화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 가정의 불상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불상사의 원인

아브라함 가정에서 발생한 불상사의 원인을 세 방면에서 찾아보면

(1) 하나님의 허락 없이 자기 뜻대로 애굽으로 내려간 데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이 세상으로 상징합니다. 애굽과 같은 세상은 우상 중심의 세상을 상징하기도 하고, 물질 중심의 세상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치하고 음란한 죄악 세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 동화되면 돈 중심, 향락 중심, 사치와 방탕에 빠지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인위적 방법으로 처세한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이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또 아브라함과 사라의 참지 못하는 조급성과 자기들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보다 낫다는 간교한 생각과 교만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위적 방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방법을 저버리게 됩니다.

(3) 하갈의 인격과 인권을 유린한 것이 세 번째 원인입니다.

인간의 인격과 인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위와 인권은 평등이요, 일남 일녀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성격상이요, 하나님의 제정하신 원리인 것입니다.

 

2. 불상사의 내용

이 세 가지 원인에서 발생한 불상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순수하던 가정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사라는 하갈을 질투하고 하갈은 사라를 멸시하였습니다. 또한 사랑스럽던 가정에 증오가 발생하였습니다. 평화롭던 가정에 불화와 분열이 초래되었습니다.

사라와 하갈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증오는 마침내 평화를 파괴하고 불안과 고통과 비극을 가져오고야 말았습니다. 이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세 사람 모두에게 있습니다.

(2)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라의 말을 더 중요시하여 신앙의 조상과 가장으로서 경건한 지위를 저버린 데 있습니다.

(3) 사라는 하갈을 첩으로 취하게 한 장본인으로서 하나님의 방법보다 인간의 방법을 채택한 데 있습니다. 하갈은 자기 순결과 인권을 바로 주장하지 못하고 몸을 내어준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말을 들은 데 있고, 하나님의 방법을 버리고 인간의 방법을 택한 데 있고, 하나님의 축복보다 인간의 일시적 낙을 택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결론

이 불상사를 바로 수습하고 회복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 위 치로 돌아가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회개입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인본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이같이 돌이킨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게서는 이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을 받음입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기쁨과 웃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는 다시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 훈련

잠4:10-15

 

서론

종교는 가정 생활과 관련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기초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종교적인 분위기속에서 가족들의 마음속에 배어들게 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불행을 당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1. 정신적 훈련

가정에서 부모의 책임은 중요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스승이요, 지도가요, 사표(師表)입니다. 부모의 생활이 자녀들에게 곧 반사됩니다.

종교와 도덕의 선생으로서 부모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고, 취침 전에 함께 기도하고 식탁에서 감사의 기도와 가정 예배 같은 신앙행위의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상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정들은 위대한 자기 훈련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이 그랬고 한나의 가정이나 디모데의 가정이 모두 정신적 훈련으로 얻은 축복이었습니다. 우리 가정의 정신적 힘은 그리스도의 다스림 밑에 두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는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안가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비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선이나 악 둘 중 하나로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외형적인 행위보다 먼저 정신적이요,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그 마음에서 우러나는 광채가 있어야 하며 그 생활 전체가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2. 생활의 훈련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는 생활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방법으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정의 생활을 위해 몇 가지 구체적인 것을 말하려 합니다. 식사 때 감사 기도는 가정 생활에 좋은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음식물에 축복을 내리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막8:6, 마14:19, 눅24:30)"

식사 때 드리는 축복 기도는 신앙의 명확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모든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먹고 마시는 물질은 사람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해 두셨다가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 에서 식탁에 둘러 앉아서 진정한 감사로 하나님이 계속 도와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가장은 하나님이 인간에 주신 축복입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이나 가정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축복이 감소된 사람입니다. 그런 고로 가정 생활은 하나님을 중심한 예배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더불어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함으로써 가정의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사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결론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교회와 가정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가정은 전도의 중심이요, 봉사의 실험이요, 예배의 제단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물질 중심에서 정신 중심, 신앙 중심으로 개조될 때에야 참된 행복이 있으며 즐거운 스위트 홈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부모의 책임은 보다 더 중요합니다.

 

 

행복한 가정을 창조하는 신앙

엡6:1-4

 

서론

우리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존재하는 날까지 기독교는 존재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정치, 경제, 에너지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쳐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가정 문제입니다.

부부간의 문제, 부모와 자식간의 문제, 형제간의 문제가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에게 뿐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이며,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이 우리 기독교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가정을 신앙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성경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서로 존중히 여기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서로의 인격을 존경하고, 부모와 자식간에도 서로 존중하는 가정에 행복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에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2. 규모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에 종말이 될 때에 모든 사람이 규모 없이 행할 것을 염려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만을 규범으로 삼아 양육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지배하는 가정,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질서 있는 가정을 이루어 나갈 때에 우리는 믿음 안에서 행복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3. 의사가 소통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뜻이 통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족끼리의 벽을 헐고, 뜻이 통하고 대화가통해야 되겠습니다. 가정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며 뜻을 나눌 때에 모든 피곤이 풀리고 새창조의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신앙으로 성장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자랍니다. 자녀들이 자라는 것처럼 우리 가정의 신앙도 자라야 됩니다. '성장하는 가정(growing family)' 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지적으로, 교양적으로, 모든 면에서 우리 가정은 자라야 됩니다. 이만했으면 됐다고 정지해 버리는 가정은 행복을 창조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적인 신앙을 가지고 좋은 점을 본뜨며 성장해야 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 존중히 여기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규모있는 가정, 질서있는 가정이 될 때에 행복은 찾아옵니다.

단절된 생활 가운데 서로 뜻이 통하고, 대화가 통하는 가정이 될 때에 우리의 행복은 창조됩니다. 신앙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가정이 될 때에 행복이 찾아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욥의 가정

욥1:1-5

 

서론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신앙의 가정이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입니다.

우스 땅의 욥은 순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자녀와 재산이 많았습니다. 욥은 자녀들과 화목하였지만 그들이 범죄할까봐 두려워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는 신앙의 가정이었습니다.

욥의 가정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형제 화목한 가정

욥의 자녀는 7남 3녀로 각각 자기들의 집을 소유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음식을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누이들까지 모인 것은 그들이 얼마나 화목하게 지내는가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복을 받으려면 형제 화목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 화목을 말할 때 아론, 모세, 미리암의 삼 형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론과 모세가 부르심을 받아 한목적, 한뜻이 되어 삼 형제가 힘을 합해 동족의 해방 운동의 기수들이 되었습니다.

형제가 화목하면 가정이 잘 되고 나라가 복을 받습니다.

 

2.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가정

자녀들이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본 아버지 욥은 기쁘기도 하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부지 중에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생길까봐 욥은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릴 만큼 욥은 가정을 신앙적으로 지도하려고 힘썼습니다. 욥은 자녀들의 물질적 축복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범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는 귀한 부모입니다. 물질이 있다고 기도를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자녀가 범죄하지 않도록 힘써 기도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3. 역경 중에도 신앙을 지키는 가정

욥의 가정에는 재난이 계속해서 닥쳐왔습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던 날 자녀들을 잃었고 또한 재산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자녀와 재산을 잃어버린 욥은 큰 고민 중에서 땅에 엎드려 얼굴이 먼지에 묻었으나 그 입에는 기도 소리요, 그 마음에는 어리석은 원망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고통과 놀라움 밖에 없었으나 욥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굳게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자랑했고 욥도 하나님의 자랑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더욱 비참한 고통 속으로 빠져 들어갔는데 그의 전신이 악창으로 뒤덮이게 된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이렇게 비참한 상태에 빠져있는 욥에게 한층 더 괴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러한 재난이 죄 값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욥이 받는 고통을 볼 수 없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빨리 죽는 것이 천천히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욥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러한 무서운 고통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에게 주신 은총을 기억하였고 그 은총을 기억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결론

사람들은 평안할 때 감사합니다. 가정이 축복을 받을 때 예배드리며 찬송합니다. 그러나 역경이나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역경 중에도 신앙을 굳게 지킨 욥의 가정에 소유는 갑절을 주었고, 욥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또 그의 자녀들도 다시 들려주셨습니다. 욥은 장수하였고 사대손까지 보면서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 가정입니까? 아니면 물질을 중심으로 사는 가정입니까? 우리의 가정은 정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즐거운 가정

벧전3:1-7

 

서론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정이 다 주안에서 즐겁고 행복하며 만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부가 즐거우면 자녀들도 즐겁고 가정이 즐거우면 온 집안이 즐거워집니다.

그러면 즐거운 가정이란 어떤 가정입니까?

 

1. 아내들은 순복함으로 단장을 하라고 했습니다(5절).

본문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면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치 않는 남편이 아내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고 했으며, 둘째는 순복은 마음의 숨은 단장이라고 했으며, 셋째는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라 하며, 옛날에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주'라고 칭하며 복종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가정도 참된 사회관처럼 생명이 존중되어야 하고, 인권이 인정되어야 하며, 자유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2. 남편들은 아내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고 귀히 여기라 했습니다.

본문 7절에 보면, 첫째는 아내와 동거하라고 했으며, 둘째는 연약한 그릇으로 알며, 셋째는 귀히 여기라고 했으며, 넷째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남편들이 귀히 여긴다는 생활의 증거는 가정에서부터 지극히 작은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도우며, 참예하고 협조하는 데 있습니다.

 

3. 온 가족이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는 "마음을 같이 하여"라는 말씀이 많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데는 용납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4. 혀를 금하며 없는 중에도 절제해야 합니다.

한 집안에서 보는 대로 말하고, 있는 대로 쓰면 그 집안은 즐거움은 고사하고 분쟁만 있을 뿐입니다. 가족끼리 말조심 못하는 사람은 나가서는 더합니다. 본문에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행동에는 매사에 절제가 있습니다.

말과 탐욕과 시간과 정욕과 먹는 것과 보는 것을 절제합시다.

 

5. 감사하며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세상에는 감사의 조건이 많으나 나를 위한 3대 희생자가 있음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첫째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져주신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감사요,

둘째는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요,

셋째는 우리의 부부끼리의 희생에 대한 감사입니다.

 

결론

즐거운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용납하고 절제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가정인 것을 기억하시고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이러한 즐거운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 안에서의 공경

엡6:1-4,출20:12

 

서론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경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십계명의 제 5계명은 매우 적절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가정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공경'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모사하는 데 쓰이는 말입니다.

 

1.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

이 계명은 본래가 부모들이 결혼한 자녀들과 함께 살던 때에 성인 남성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공경과 존경과 경외는 부모들에게 드리도록 되어 있는 말입니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는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딤후3:2)", "자녀들은 그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옳기 때문입니다(엡6:1) "

 

2. 부모들에게 주시는 말씀

부모는 공경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두 가지 선택이 에베소서 6장 4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는 노엽게도 할 수 있고 자상하게 양육할 수도 있습니다.

엄하고 부정적이고 억압적인 군림과 인내하고 긍정적이고 부드럽고 그리스도를 닮은 참여 사이의 선택인 것입니다. 훈육과 권면의 행위, 옳음을 향한 징계, 격려에 의해서 교육을 묘사하는 적극적인 속성입니다. 무관심함으로 자녀를 방치해 둔 부모는 엘리의 경우처럼 비극적인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의 기를 죽이기보다는 "그들을 양육하고" 우리의 지배권보다는 그들의 성숙을 책임지라고 도전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3.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관계

공경할 만한 가정 관계의 기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부모들은 '주님의' 자녀를 기르라고 권고를 받습니다. 자녀들은 주 안에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녀는 주 안에서 처신해야 하며 주님의 도우심으로 주께서 저들에게 주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보이는 것과 동일한 반응-회개, 고백, 용서, 사랑-이 가정에서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여러분의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가정을 통하여 주님의 일을 나타내시며 주께서 가정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모든 크리스찬 가정은 물질 위주의 생활에서 떠나고, 인위적인 관계에서 떠나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관계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론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장 의미있게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가정 안에서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예수 안에서 그 가장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책임은 모든 가족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연결의 띠로 삼을 때 가정은 지상 최고의 낙원이 될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골3:18-25

 

서론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첫 번째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1. 약속한 사랑이 변하지 않는 가정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하나님께는 예배하고, 부모님에게는 효도를, 형제끼리는 화목을, 남편에게는 순종을, 아내에게는 애정을, 자녀에게는 교양과 덕을 주는 가정을 꾸며야 합니다.

모든 단체를 관리하고 유지하려면 반드시 법과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정만은 법과 규칙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관리가 되고 유지되는 곳입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이 사회에서 가장 불행스러운 집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정은 약속한 사랑이 변하지 않도록 서로서로 협조하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2. 머리가 있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1) 우선 부모를 머리로 모셔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 고 하였습니다.

(2) 부부는 한 몸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에게나 아내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거나, 처가나 시집의 약점을 들추거나,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자꾸 찌르거나, 대중 앞에서 상대방의 인격을 깎으면 그 가정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큰 집에 사느니 차라리 움막에 혼자 사는 것이 낫다(잠21:9)"고 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부부는 언제나 약속한 사랑으로 불붙어야 합니다.

(3) 자녀는 지체 중의 지체입니다.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겸손을 가르쳐야 합니다. 시편 127편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 주신 자식의 기업은 꼭 복된 기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대화가 있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잠27:14-15)" 했으니 행복한 가정은 큰 소리 치는 가정이 아니라 부부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대화가 오고가는 가정입니다. 어디나 대화가 있으면 이해가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4.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가정이 행복합니다.

가정은 위로의 처소요, 소생케 하는 병원이요, 안식처요, 사랑의 요양소요, 지상의 낙원이어야 합니다.

가정은 우리에게 세 가지 면에서 안식을 주는 곳입니다. 마음의 평안, 정신적인 안정, 육체적인 피로회복 등입니다.

 

결론

행복한 가정은 약속한 사랑이 변하지 않으며, 머리가 있는 가정이고, 대화가 있는 가정이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가정이고, 온 가족이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 가정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이란 무엇인가

창1:18-31

 

서론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이며 교회와 함께 하나님에서 직접 세우신 신적 기관입니다.

가정이란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어버이와 자녀들이 한데 모여 의식주를 같이 하는 집단입니다. 가정은 부모를 중심으로 부부와 자녀들이 한 지체가 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기쁘거나 슬프거나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 운명체입니다

그러면 가정이란 어떤 곳입니까?

 

1. 가정은 심히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아담을 지으신 후에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창2:1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창조하셨고, 그 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보금자리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정이 되도록 늘 기도하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2. 가정은 서로 도와주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위해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단순히 생활에 필요한 것을 그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인격관계는 물론, 가정이란 곳에서 가족 구성원 전체의 교제를 통해 인격의 성숙과 보완을 해주는 곳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이 서로 도와주고, 세워주고, 이해하여 주고, 용서해주는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여 인내와 성실함으로 가정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서로의 본질적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이 서로 서로 도와주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연합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가정은 미래의 꿈을 키우는 곳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1:28)"는 멸령은 단지 자녀를 생각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땅의 문화, 땅의 역사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은 내일의 역사를 개척할 주인공이 될 자녀 양육과 미래 교회의 일꾼을 키우는 엄청난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금만능이라는 사상 때문에 교육까지도 썩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한데 얽혀 사는 곳이기 때문에 돈보다 사랑이, 법보다 정이 더 작용하게 됩니다. 그렇게 미래의 꿈을 키우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정 생활은 역사를 계승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행위이며 사건인 것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이 사회도 건강해지고, 가정이 밝아야 이 사회도 밝아지는 것이며, 가정이 하나될 때 이 사회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부터 미래의 꿈을 담고 성장한다면 이 사회는 진전하고 꿈이 가득찬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건강하고 밝고 하나될 때 우리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가정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면 서로 사랑하고, 함께 일하고, 서로 도와주며 자기 위치에서 영적으로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들이 다 되어 건강한 가정을 꽃피워야 하겠습니다

 

 

의좋은 가정

룻1:6-18

 

서론

본문 말씀은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고부간에 갈등이 없어야 하고 여성들의 마음이 화합될 때 가정의 분위기가 한층 더 차원 높은 삶의 터전이 된다는 것을 룻과 나오미를 통하여 교훈으로 우리에게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나오미는 룻과 오르바를 사랑하였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마음속에는 며느리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며느리들을 후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 것입니다.

또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친자식같이 여겼습니다. 자기의 자식들이 죽어서 두 며느리가 과부가 되었을 때에 며느리들이 혼자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갈 길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의 영육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2. 룻은 절개가 곧은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남편도 죽고 시아버지도 돌아가셨으므로 늙은 시모와 살아갈 길이 막연했습니다. 홀로 남은 시모를 버리고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기 남편의 어머니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모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룻은 눈에 보이는 썩어질 것과 탄식 소리를 듣기 마련인 세상의 유혹에 귀기울이지 않고하늘의 세계를 바라본 정절이 단정한 미모의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내적 믿음이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룻은 시모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함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룻은 아들 하나 얻지 못하고 남편이 죽었으니 대가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당시 풍속은 남자가 없으면 소유지도 관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룻에게는 하나의 비장한 각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죽은 남편 말론의 후사를 잇고 하나님의 축복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3. 다윗의 조상이 됨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여 보아스로 하여급 감동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면서도 이방신을 떠나 여러 가지 앞에 보이는 장애물을 바라보면서도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자의 모범과 그녀의 곧은 절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결론

의로운 가정은 여 성의 화목과 단결,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작용합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또 룻의 앞길을 위하여 당시 풍습대로 남편의 제일 가까운 친척을 룻의 남편으로 정하지 않고 며느리 룻을 사랑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 보아스를 정해 놓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룻 역시 굳은 절개로 시모와 죽은 남편의 기업을 지키기 위해서 시어머니의 말에 무조건 순종한 며느리입니다.

그들은 의좋은 가정을 이루어 모범을 보였습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도 그들의 생애를 큰 거울로 삼아 의좋고 행복한 생활을 이루는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제단 중심의 가정

시84:1-6

 

서론

가정은 그 나라의 심장부와 같습니다. 가정들이 파괴되면 나라도 파괴되고 온 세계도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가정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으로 복된 가정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가정이 제단 중심의 생활 즉,교회 중심, 예배 중심의 생활을 할 때 그 가정 전체가 영적인 구심점을 찾아서 하나님 안에서 일치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단 중심의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1. 주일을 성수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다운 믿음의 가정이 되려면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엿새 동안은열심히 일하고 돈도 벌고 공부도 해야 되지만 주일이 되면 온 가정이 교회로 찾아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마땅한 본분으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날입니다. 주일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가정이나 국가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가정, 목숨 걸고 사수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가정이 되어야 원만한 가정, 참으로 복된 가정이 될 것입니다.

 

2. 교회를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가 없이 우리가 구원 받는 길을 택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산 것이 교회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를 통하여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한 가정은 복된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가정을 사랑하고 축복하십니다. 교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성경 읽고 기도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이며 성경 읽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식구가 둘러 앉아서 찬송 한 장 부르고, 차례대로 매일 한 식구씩 기도하고, 성경을 한 장씩 윤독하고 주님 가르친 기도로 마치면 됩니다.

가정 예배는 하나의 전통으로 계속하여 드리도록 하십니다.

 

4. 사랑이 실현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공의와 진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채찍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자녀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또 대화하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부모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의 책임을 다하면서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부모의 권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자녀들의 육신 생활과 정신 생활을 보장해 주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영, 혼, 육, 이 세 방면을 다 사랑하고 지도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물론 자녀들의 영적인 지도, 신앙을 잘 키워주는 것입니다.

간 증

성 경 활 용

1. 간증하신 분들

(1) 그리스도

(요3:11)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2) 성령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으로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3) 선지자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자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 사도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1) 세례 요한

(요1:7-8)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여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2) 그리스도 자신의 증거

(요5:26)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3) 선지자

(행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자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3. 성도가 간증할 내용들

(1) 하나님의 구원

(히2:3)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2) 주의 이름

(시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3)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

(시71:16)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 하겠나이다

(4) 주의 크신 기사

(시71:17)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5) 그리스도의 부활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새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6) 그리스도가 재판장 되심

(행10:42)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7)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행20:24)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8) 진리

(요삼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해한다 하니

 

4. 간증(증거)에 대한 성도의 태도

(1) 밤 낮으로 해야 한다

(사62: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2) 속히 증거해야 한다.

(말3:5)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3) 자기가 본 것을 다 전한다.

(계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4) 두려워하지 말고 말한다.

(행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

하지 말고 말하라.

(5) 부득불 전해야 한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6)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한다.

(벧전3:15)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7) 주 안에서 증거하라.

(엡4:17)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8)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전한다.

(행20:24)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관련원어풀이

1. t/a 오-트

(1) 표적, 표시.

(창1:14, 출12:13)

(2) 군기.

(민2:2)

(3) 지나간 어떤 것의 표.

(출13:9, 사55:13)

(4) 미래의 어떤 것의 표, 징조, 표적.

(사8:18)

(5) 자체가 보여질 수 없는 어떤 일의 표시, 표적.

(창1:14, 출31:13)

(6) 표, 증명, 논거.

(신4:34, 욥21:29)

 

2. @/Ra; 아-론-

(1) 법궤, 큰 상자, 돈궤.

(왕하12:10, 11)

(2) 미이라를 담는 관.

(창50:26)

(3) 증거궤, 언약궤.

(출25:22, 신31:9)

 

3. dW[ 우-드

(1) 뒤로 돌리다, 돌이키다, 반복하다, 되풀이 해서 말하다, 증언하다, 권고하다.

(애2:13)

(2) 둘러싸다.

(시119:61)

(3) 증인으로 취하다, ∼을 증인으로 부르다. 소환하다.

(신4:26, 사8:2)

(4) 입증하다, 증명하다.

(왕상21:10, 암3:13)

(5) 선포하다, 보여지다.

(출21:29)

(6) 회복하다, 굳게 하다.

(시146:9, 147:6)

(7) 바르게 세우다.

(시20:9)

 

4. d[e 에-드

(1) 증인.

(잠19:5, 9)

(2) 증거, 증명한 것.

(출20:16, 신5:17)

(3) 왕, 지도자, 지휘관.

(사55:4)

 

5. hd:[e 에-다-

(1) 증명한 것.

(창31:52)

(2) 증거.

(창21:30)

(3) 교훈, 격언.

(시119:22, 24)

 

6. ejndeivknumi 엔데이크누마이

(1) 나타내다, 보여주다.

(롬9:17, 히6:10)

(2) 외적 증거를 제시하다.

(롬2:15)

(3) 공개적으로 죄를 짓다, 사람에게 어떤 포부를 나타내 보이다

(딤후4:14)

 

7. ejpideivknumi 에피데크루마이

(1) 나타내다, 모이다, 지적해 내다.

(마22:19, 행9:39)

(2) 입증하다, 나타내 보이다, 알게 하다.

(행18:28, 히6:17)

설교예화자료

예수를 버릴 수 없어

 

금란 감리교회 시무하시는 김홍도 목사님의 간증 가운데 이런 간증을 읽을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의 가친께서 공무원으로 재직 당시 평안남도 양덕에 근무하셨습니다. 위로 딸 둘을 낳아 기르다가 죽고 세 번째 김 목사님의 형제(김선도 목사)를 낳아 다섯살쯤 되던 해였습니다. 그 동리는 산골이라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고 그 소를 잡기 위하여 얼마씩 마을 사람들에게 걷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모친에게도 내라고 하여서 그분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낼 수 없소."라고 거절하니 모두 큰일 났다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해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우상 숭배요, 사신 숭배이므로 김 목사 어머님께서는 단연코 거절해 버렸습니다. 며칠 후에 그 귀여운 아들이 갑자기 앓기 시작하는데 하루 밤 사이에 열이 40도로 오르고 눈을 뒤집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산신령께 제사를 드리지 않아 산신령이 노하여 그러는 것이니 이제라도 경을 읽고 굿해야 산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도를 잘하던 어린 아들이 정신없이 헛소리를 하면서 "엄마. 박옥순 데려다가 경 읽어 줘."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이때 예수를 버리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버리느냐 하는 막다른 길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 보시라고 하면서 당신 고집부리다가 자식 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의사도 왔다가 급성 폐렴인데 시간이 늦었다고 말합니다.

이때 김 목사님 아버님은 손발이 차갑게 되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아들을 내려보며 "선도야, 너 죽을테면 죽어라.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할 수 없지. 너를 잃을지언정 나는 예수를 버릴 수 없다. "라고 말한 후 원산에 올라가 찬 바위를 안고 간절히 "하나님,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들을 잃을지언정 믿음을 잃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에 마을 한 노인이 이야기한 것인데 무슨 풀잎을 끓는 물 속에 넣어 그 물로 찜질을 하라고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얼른 내려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찜질을 30분쯤 계속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린 아들이 재치기를 하며 얼굴에 혈색이 돌고 한 시간도 안되어 일어나 밥과 과일을 먹는 것이 아닌가? 온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김선도 어머님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삶의 변화

 

"나는 동남아 일대의 공군 지휘관으로 실재적인 의미에서 권력과 명예의 상좌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어느 날 나는 자만감에 들떠서 전쟁 법칙을 다소 어겨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지요.나는 대통령의 금지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북 베트남의 경계를 넘어서 폭격을 가했습니다. 결국 나는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조종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전쟁 수행 규칙을 범하였다 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버팀리 중령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말을 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현장에서 나는 지금껏 쌓아 왔던 경력마저 상실하게 되었지오.그때 나는 아들이 나에게 여러 번 설명해 주려고 하였던 하나님의 사랑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거리 전화로 아들을 불러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에 관해 좀더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지오. 그때부터 나의 삶이 차차 변하여 갔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삶에 대한 나의 사고가 근본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처럼 참담했던 순간에 중령은 삶의 진정한 문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처럼 무서운 증언자도 없으며 두려운 고발자도 없다.

(폴리비오스/ 역사)

 

한 사람의 목격은 열 사람의 증언보다도 가치가 있다.

(M. J. 브루투스)

 

필연성에 의해 태어나고 과학에 의해 정당화된 나는 모든 실험적 증거의 한계를 넘어선다.

(J. 틴들/ 과학단편)

 

밀크 속에서 송어를 발견할 때처럼 어떤 우연한 증거는 매우 강력하다.

(H.D. 소로/ 일기)

 

증거는 풍문보다 낫다.

(영국 속담)

 

나는 조롱도 논쟁도 하지 않는다/단지 증언하고 기다릴 뿐이다.

(W. 휘트먼/ 풀잎)

 

여기에 뜻이 있어/ 진작 눈을 맡아 가셔/칠칠한 어둠으로 두르셨다며/ 환한 웃음 가득히 담으신다// 그래도 광명 아래 열세살/두루 세상 구경하고/ 갖가지 색동 이슬에 묻힌/ 무지개 실카지 보고/ 주 모습 미리 기억케 하셨으니/ 감사하다신다.

(정벽봉/ 간증)

 

말씀의 씨를 받은/ 형제여/ 이제는/ 우리 일어나서/ 뿌리러 나갈 차례다/ 땅끝까지//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거든 형제여/ 조금도 망설이지 말 일이다/ 그분의 때가 쏜살같이 오리니// 얼어붙은 2월의 강판처럼/ 여기 이렇게 저기 저렇게/ 얼어붙어 널려 있는/심령들을 본다면// 활활 타는/ 불의 혀로/ 눈부신 황금 열쇠로/ 어서 달려가서/ 저 심령의 문을 열고/ 뜨겁게 들어서거라

(김지향/ 형제여 일어나서)

 

아/ 내 작은 입으로 영원히 마르지 않을/노래의 샘을 파리라/ 빛나고 거룩한 그분의 영광을/ 사랑과 자비를 찬미하고 빛내려고/ 나는 오늘 온 영의 힘을 부어/ 노래의 강을 빛는다.

(김지향/ 내 작은 입으로)

 

 

설 교 노 트

 

귀신들렸던 자의 증거함

막5:15-20

 

서론

본문은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기사 다음에 나오는 내용으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주님께서 고치신 사건입니다.

이 내용은 공관복음이 한결같이 취급한 문제이지만 본서에서 가장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1. 더러운 귀신을 좇으심

주님께서는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 자를 성하게 해 주신 것이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라사인들은 마땅히 예수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대접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지경에서 떠나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확인하면서도 돼지의 떼죽음 같은 물질적 손실이 또 발생할까 염려가 되어서 떠나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거라사인들이 받은 은혜는 놀라운 것이었으나 여간한 물질적 손해에 질겁을 한 저들은 은혜를 배신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 가셔서 은혜로운 설교를 하실 때에도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배척하여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산 낭떠러지 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는 흉내를꾸미기도 하였습니다(눅4:30). 이렇게 주신 은혜를 배신하는 각박한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2. 주님의 은혜를 간증함

거라사인들은 주님을 배척하였으나 귀신들렸던 사람은 밝은 정신으로 돌아오니 너무 기쁘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곁에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주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가를 데가볼리 온 지방에 크게 전파하였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말씀을 증거한 자들은 많습니다.

진정한 은혜를 깨닫고 사모하는 사마리아 수가 성 사람들은 회개한 여자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주께서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며 말씀을 증거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게 하셨습니다(요4:39-40).

베드로는 주께 은혜를 받고 너무나 황송하여 감당할 수 없는 심정으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심의 배척이 아니라 오히려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사모하며, 주께서 내 속에 계시기를 간구하며, 더욱 그 은혜로 인하여 감사하며, 주님께 대하여 증거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게 입은 은혜에 대하여는 감사하며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줄 수 없는 더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크신 은혜를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보답할 줄 모르며 배신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그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간증하여 주님을 믿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소경된 자가 아는 것

요9:2

 

서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시므로 그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소경된 것은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며 이론만 따졌꼬,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였다고 문제시하며 소경되었던 사람이나 그의 부모를 억압하여서 이 사실을 부인하게 하려고 하였지만 헛수고였습니다.

 

1. 소경되었던 자의 알지 못하는 것

바리새 인들은 무슨 방법으로든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고 하였으며, 또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일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닐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쟁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경되었던 자의 부모와 당사자에게 이 사실을 부인시키려는 목적으로 따져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 17절에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되었던 자에게 질문을 하면서 거기에 전제 조건으로 자기네들은 예수가 죄인인 줄로 안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동의시키려는 악랄한 수단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되었던 자는 예수님의 죄인 여부를 논하는 신학 문제는 알지 못한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일을 솔직하게 모른다고 하였고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소경되었던 자가 다시 보게 된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모를 불러다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20-21절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소경된 자의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무서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 소경된 자가 아는 것

바리새인들은 소경이었던 자를 두번째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경된 자는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25절).

그 소경된 자는 이제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은 비로소 보이는 만상에 신비감을 느끼며 황홀하였고, 그의 가슴은 감사와 감격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신이 보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사실을 제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의 비겁한 태도와는 판이한 태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은 옳은 자세입니다. 자신이 주님께 받은 은혜를 간증한 소경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결론

그 소경되었던 자는 '한 가지'에 집중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할 때 완전한 신앙 고백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그 은혜대로 더하거나 감하는 것이 없이 알고 있는 그대로를 모든 사람에게 증거해야 되겠습니다.

 

 

사랑의 간증

아8:1-14

 

서론

아가서는 사랑의 노래로 알려진 책입니다. 인간의 엄숙하고 순결한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의 결론으로 8장에서 사랑의 간증이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1. 신랑, 신부의 사랑 회고(8:1-5)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다면‥‥‥‥한 말은 술람미 여인의 말인데 그는 명예의 대왕 솔로몬이 수넴의 비천한 가정에서 함께 자란 형제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그는 아낌없이 신랑에게 사랑을 쏟았으나 사실 계급적인 간격이 거침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사랑의 교제를 원하고, 동거 동락하며 아무 거침이 없이 살기를 원하고 바랐지만, 두 사람 사이의 격차가 이를 허락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서로 만나 입맞추며 즐기기를 바라왔으며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고 아쉬워하는 것입니다.

"향기로운 석류즙을 마시며 너는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포옹했으리라"는 사랑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2. 사랑의 간증(8:6-13)

이것은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증하는 노래입니다. 기독교는 간증의 종교입니다. 그것은 생명 체험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감격에서 우러나옵니다. 자원적이며 폭발적인 감격의 간증인 것입니다.

(1) 도장은 사랑의 불변을 상징합니다

술람미 여인의 소원으로 도장과 같이 요가하게 간수하면 한번 인장을 친 즉 영원히 그 약속을 어길 수 없는고로 그 효과는 영원히 불변한 것입니다. 이는 사랑의 불면함을 소원하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 간증인 것입니다.

(2) 사람의 승리(6-7절)

①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강함이 곧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펄경 승리를 가져올 것입니다.

② 투기는 음부같이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투기는 자기의 사랑의 대상을 다른 사람이 침범할 때에 가지는 자기 권리 옹호를 위한 투쟁상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③ 여호와의 불같이 일어납니다.

이 불은 여호와께로 왔으니 끌 자가 없습니다.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4:24).

④ 많은 물로 끄지 못합니다.

이는 성도의 마음에 불길처럼 타오르는 하나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생명보다 귀한 사랑입니다(7절).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고 하였으니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보다 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4) 사랑의 간증을 누구에게 했습니까?

① 형제들에게 하였습니다(8-12절).

술람미를 위하여 근심하는 형제들에게 간증하는 내용입니다. 그 형제들은 작은 누이요, 아직 유방도 발달되지 않은 어린 소녀라는 것입니다.

② 수절하여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성벽에 속한 망대같이 순결을 자신있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③ 동무들에게 하였습니다(13절).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므나"라고 했습니다. 이는 신랑이 신부에게 한 말로써 신랑에게는 신부의 노래를 듣는 것이 곧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동무들에게도 사랑의 간증을 들려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결론

단절된 사랑에 대한 회복을 기대하며 신부는 14절에 "빨리 달리라"고 노래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심정인 것입니다. 사랑의 간증은 우리의 노래요, 우리의 신앙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을 대망하며 애틋한 사랑의 노래를 불러야 하겠습니다.

 

 

바울의 간증

딤전1:12-17

 

서론

바울에게 골수에 사무친 생각이 두 가지 있다면 그 하나는 "나의 나질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전15:10)"일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는 것일 겁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사상에서 나온 것이며 본문은 바울의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1. 바울은 죄에 대한 고백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과거의 뼈아픈 실패담이나 상처를 기억하기조차 싫어합니다. 가능하다면 기억에서 사라져 영원히 묻혀버리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서슴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13절)"라고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회심 전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은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니(행9:1)"에서 증거해 줍니다.

왜 바울은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내놓기에 주저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기쁨으로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 놓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자기는 낮아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높아지기 때문이요, 나 자신의 부족과 치부를 드러냄으로 바울이 전도하고 사역한 그 열매들이 주님의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주님이 부족한 자신에게 오셔서 역사하였다는 것은 그 길을 마련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늘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죄를 고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을 낮추고 자신이 보잘것없는 죄인임을 늘 깨닫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 바울은 하나님의 인내를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과거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귀히 쓰이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훼방하던 사울이 복음 전도자 바울이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인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했을 때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으시고 그를 부르시고 사용하신데 대해 감사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그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맡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는 고 백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로 충성된 전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깨달은 바울이기에 그는 더욱 충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를 감독에 가두고 매를 친 옥사장에게까지 그는 인내하며 사랑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사랑의 열정으로 평생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 앞에 면류관을 바라보는 성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은 자기의 옛 모습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 때문에 그는 죽도록 충성하여 영광을 오직 주께 돌리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옛모습은 회개 이전의 바울의 모습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성도가 불려지고, 은혜 가운데 생명을 부지하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로 인한 은혜의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의 죽도록 충성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겠다는 고백이 우리 가운데에서도 있기를 바랍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간증

행26:1-32

 

서론

바울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행21:40-22:1에서 군중들에게 설교의 형식으로 간증을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다시 한 사람의 피의자로서 변명의 형식으로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같은 증거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핍박자였던 자신을 복음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몇 번이고 기회 있을 매마다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1.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함(26:1-23)

(1) 자라온 배경에 대한 회고(1-8절)

바울은 말할 기회만 주어지면 간증을 하였는데 자기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였습니다. 지금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말할 기회를 얻은 바울은 또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합니다. 송사에 대한 변명도 유태인의 율법과 풍속을 잘 아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말하기가 매우 좋은 것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은 어려서부터 바리새인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왔고, 또 그렇게 자라온 줄로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심문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기 때문인데 자기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저희들은 믿지 못하는 데서 이런 적대 관계가 생긴 것임을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2) 회개와 헌신(9-18절)

바울의 간증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를 만나 회개한 일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행9:3 -9와 22:4-10은 변명의 반복이며 특히 여기서는 이방인의 사도가 된 데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할 사명은

①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기게 하고

②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서 돌아가게 하고

③ 죄 사함을 믿어 기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3) 회개 후에 활동(19-23절)

바울은 여기에서 결론적으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위시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선전함으로 내가 수난을 당하나이다"라고 변명을 하였습니다.

 

2. 예수에게 미친 바울(26:24-32)

바울이 열심으로 간증을 하며 소송에 대한 변명하는 말을 듣도 있던 베스도가 소리 지르기를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학문이 많은 것과 변명하는 말의 조리로 보아 무식한 자가 아닌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해보다 더 맑은 빛을 보고 하늘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말을 보통 사람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므로 바울이 미쳤다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 밖의 사람은 신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무지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아 구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듣거나 보게 될 때 미 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된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베스도의 불신앙이 그를 미친 자로 본 것입니다.

바울이 미쳤다면 그는 정신 이상이 아니라 예수에 미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에 미치지 않으면 그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에 미쳤기 때문에 심문관에게 담대히 예수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당신들(베스도, 아그립바)과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도 바울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니 과연 그는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결론

바울의 간증은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일을 내게 행하였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는 간증할 내용이 있습니다. 간증은 효과있는 전도의 한 방법이며 또한 자신의 신앙을 더욱 굳게 해 줍니다. 예수에 미쳐 기회 있을 때마다 간증하는 바울을 본받아 우리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널리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감 사

성 경 활 용

1. 감사에 대한 명령들

(1) 하나님이 구원하심에 대해

(시118:1)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시95:1-2)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2) 하나님의 행하신 기이한 일에 대해

(시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시107:15)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시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3) 감사제를 드릴 것

(시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시107:22)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며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4) 하나님의 선,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에 대해

(시106:1) 할렐루야 여호와를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07:1-2)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시118:1)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 형통케 하심에 대해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6) 하나님의 깊이 참으심에 대해

(롬2:4)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깊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7) 감사의 말을 하라

(엡5:4) 누추함과 어리석음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8) 범사에 감사할 것을 명함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9) 기도함에

(빌4:6)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10)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심에 감사를 명함

(골1:12)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하노라

(11)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하기를 명함

(골2:7)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12)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기를

(골4:2)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13)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감사할 것을 명함

(딤전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노고와 감사를 하되

 

2.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나?

(1) 하나님

(시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시142: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고후9:11)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 다

(딤후1:3)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2) 예수 그리스도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3) 사람에게

(롬16:4)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3. 감사 드리는 목적

(1) 사역 자들을 위하여

(고후1:ll)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니

(2) 모든 사람을 위하여

(딤전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4. 무엇을 감사해야 하나?

(1) 주의 권능과 다스림을

(계11:17)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

(2)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3) 죄에서 구원하심을

(롬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4) 죽음에 대해 승리에 대해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하나님의 일을 알게 하심을

(단2:23) 우리가 주께 구한 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6) 그리스도 안에서 이김 주심을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 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7) 믿음이 온세상에 전파됨을

(롬1:8)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세상에 전파됨이로다

(8) 은혜주심을

(고전1:4)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빌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9) 양식 주심을

(롬14:6-7)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하나님에 감사함이요

(딤전4:3-4)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시136: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주의 이름이 가까움으로

(시75:1)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11) 은사를 인하여

(고후9: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2) 범사에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5. 감사의 방법과 표현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롬1: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골3:17)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히13: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3) 사적으로

(단6:10)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4) 공적으로

(시35:18)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5) 찬송시로

(시95: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6) 감사제로

(레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시56: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시107:22)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7) 찬송으로

(삼하22:50)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시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이다

(엡5:19-20)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히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8) 기도와 간구로

(빌4:6)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골4:2)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9) 연보로

(고후9:ll-12)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10) 온 마음으로

(시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골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6. 언제 감사 드리나?

(1) 복음이 전파될 때

(마11:25)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롬1:8)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2) 주님을 뵈올 때

(눅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3) 핍박받을 때

(단6:10) …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4) 살아있을 때

(시6:5)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5) 범사에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6) 일이 완성될 때

(느12:31)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관련원어풀이

1. hd:y: 야-다-

본래의 뜻은 "던지다"이다.

(1) 찬양하다, 축하하다.

(대하30:2)

(2) 감사드리다, 찬양하다, 칭송하다.

(3) 감사를 드리다. 찬양하다.

(창29:35)

(4) 감사제, 감사를 드리는 사람의 모임, 의식적인 예배의 노래에서 감사

 

2. &r'B; 베라크

축하하다, 칭송하다.

 

3. eujcaristiva 유카리스티아

(1) 감사, 감사를 드림, 감사한 마음.

(행24:3)

(2)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즐거움이 역력한 대화, 감사의 표시.

(엡5:4)

 

4. ajnqomologevomai 안도몰로게오마이

(1) 같은 일을 서로 말하다, 칭송하다.

(눅2:38)

(2) 찬양하다, 축하하다, 적당한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5. ejxomologevw 엑소몰로게오

(1) 같은 일들을 말하다, 완전히 고백하다, 감사를 드리다, 칭송하다.

(마11:25)

(2) 인정하다, 승락하다.

(빌2:11)

 

6. cavria 카리스

(1) 원래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주는 것, 우아, 매력, 사랑스러움, 친절히 대함, 호의, 애교, 친절, 은혜.

(2) 윗 사람이 낮은 하인에게 베푸는 친절, 특히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 편지 서문이나 끝에 은혜로 돌릴 것, 은혜에 해당한 것, 은혜의 선물, (은혜나 봉사에 대한)감사, ∼에게 감사함(받는 사람 입장에서) 감사, 존경, 경의를 표함.

 

7. ajxavristo" 아카리스토스

감사치 않는, 은혜를 모르는.

(눅6:35, 딤후3:2)

설교예화자료

감사

 

시인 김현승님의 '감사'라는 시입니다.

 

감사는 곧 믿음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모른다.

 

감사는 반드시 얻은 후에 하지 않는다. 감사는 잃었을 때에도 한다. 감사하는 마음은 잃지않았기 때문이다.

 

감사는 곧 사랑이다.

 

감사할 줄 모르면 이 뜻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받는 것만이 아닌 사랑은 오히려 드리고 바친다.

 

몸에 지니인 가장 소중한 것으로 과부는 과부의 엽전 한 푼으로 부자는 부자의 많은 보석으로

 

그리고 나는 나의 서툴고 무딘 눌변의 시로…·.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분명히 새보다 귀한, 들풀보다 아름다운 주님의 자녀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감사할 조건이며 기쁨인 것을 이제야 확실히 알았습니다. 주신 축복과 은혜를 감사, 진정 감사드립니다.

"할레루야 아멘"

 

 

환난 속에서의 감사

 

안동시에서 서쪽으로 약 27km쯤 가면 기산이라는 아담한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펼쳐있고, 그 앞으로는 낙 동강이 흐릅니다. 이 마을에 김복재 집사님이 살고 있습니다. 억수로 퍼부은 비로 갑자기 많아진 싯뻘건 강물은 미친 듯이 기산동에 넘쳐왔습니다. 집이고, 들이고, 온 마을은 삽 시간에 물바다로 변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제방이 터지면서 물이 올랐기 때문에 아무도 미리 피난하지 못했습니다. 졸졸 물소리에 밤이 되어 집사님은 허겁지겁 식구들을 이끌고 간신히 피난하여 목숨을 겨우 건졌습니다.

깊이 잠든 어떤 사람들은 방으로 물이 들어오자 지붕 위로 피해 올라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헬리콥터의 구조을 받기도 했습니다. 수해로 말미암아 집사님은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재 도구는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밭에 심은 곡식들은 상류에서 떠 내려온 흙에 다 묻혀 버렸습니다.

기르던 가축들은 거의 다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그토록 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기쁜 모습으로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험한 홍수 속에서도 온 천하보다 더 귀한 목숨을 건졌다는 것, 홍수로 인하여 흙이 내려와 낮고 메마른 땅을 돋우고 기름지게 했다는 것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위로를 얻었습니다.

 

 

의의 종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 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

오래 전에 콩고 선교회에 속했던 선교사가 장래의 선교사를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선교사 필휴'라는 안내서가 있었습니다. 그 안내서의 내용 가운데, 몸 바쳐 주님의 종으로 헌신할 것을 신앙 고백한 신자에게 세례를 주는 과정에서, '그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주님과 염소고기를 먹었으므로 나는 이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세례를 주노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염소고기 먹기'라는 말의 본래의 뜻을 모르고서는 그 안내서의 내용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옛부터 내려오는 관습에서 어떤 노예가 그 주인에게 너무 심하게 학대를 받을 때 그 학대를 못이겨서 도망을 쳐서 다른 주인집에 들어가서, 그 새주인에게 보호를 요청하면, 새주인이 그 노예의 요구를 들어주는 표로써 염소를 잡아가지고 그 주인과 노예가 함께 염소고기를 먹는다고 합니다.

'일단 염소고기 먹는 의식'이 끝나면 그 노예의 이전 주인은 그 노예를 소유하거나 사역시키는 권리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 주인이 그 노예를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면 그 새주인이, "그 노예는 당신의 것이 아니고 내 것이 되었소. 왜냐하면 그 노예가 스스로 나에게 와서 내 염소고기를 먹었기 때문이요 ! "하면, 그 노예의 옛 주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우리는 다 죄의 쇠사슬에서 벗어나서 예수께로 와서 염소고기를 먹었으므로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서 인물의 감사

 

첫째 요나의 감사입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는 다시스로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비 뽑기로 푸른 바다에 던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련에 부딪쳤습니다. 물에 빠진 요나가 고기에게 먹힘을 받아서 결과 고기 뱃 속에서 살아나오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어떤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까? "이렇게나마 잠시라도 살아있을 줄 알았더라면 가사 예물을 드렸더라면 좋은 것을 가져온 것이 없사오니 입술로라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둘째는 하박국의 감사입니다.

하박국이 집에 들어와보니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려서 난감하여 하늘을 바라보니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므로 하박국은 세상을 다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쓸어버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역경 중에 감사이었습니다. 그 결과 재기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셋째는 옥중의 바울의 감사입니다.

바울은 구라파 마게도냐 성의 두아디라 전도 여행에서 귀신들린 점치는 여자를 만나 귀신을 내어보냄으로 돈 벌지 못함에 급급한 여인의 주인의 고발에 의해서 옷을 찢김을 당하고 사십 여대의 매를 맞고 손에는 고리를 채우고, 발에는 착고를 채우고 사형수를 가두는 깊은 옥에서 한밤 중에 찬송을 부르는 눈물겨운 감사가 지진을 일으켜 착고는 풀리고 쇠고랑은 끊어지고, 간수는 회개를 하고, 옥문은 열리고, 법관들은 구라파 어머니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발족케 하는 기사를 일으켰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역경 중의 감사는 위대한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성경 말씀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뻐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 즐거워하는 마음,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은 전혀 생각지 못하거나 무시해 버리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모든 마음 가운데서 으뜸가고 제일 첫자리를 차지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간밤을 무사히 지내고 생명이 존재해 있는 새아침을 맞을 수있는 고마움을 잊기 쉽습니다. 옷을 입고 아침밥을 먹을 수 있는 고마움을 잊기 쉽습니다. 이토록 작은 일, 일상 생활면에서부터 모두가 감사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잊기 쉬운 것입니다.

버스를 탔을 때 우리는 흐뭇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자주 보게 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올라타면 금방 자리를 양보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모습입니까? 프랑스의 철학자인 루소는 "감사는 마땅히 지불받아야 할 의무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대할 권리는 가질 수 없는 의무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마운 친절을 받았을 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쯤은 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성경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우리의 주변에는 오로지 감사할 일 뿐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누구나 그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한 일들을 새삼스럽게 발견해야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충만해 있는 감사의 일들을‥‥‥

 

 

선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의 뜻을 따르며 그의 자비에 감사하고 겸손히 그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간구함은 모든 국가의 의무입니다.

또 한편 의회의 상하 양원들이 그들의 연합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요구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미합중국 국민들에게 공식적인 감사절과 기도절을 제정해 그들이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그 감사절과 기도절을 지키게 하고 특히, 그들에게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평화로운 정부를 지키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우리를 영원까지 지켜 주시도록 예배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감사절의 유래

 

한 여류 작가인 사라 헤일이라고 불리우는 인내심이 강하고 하고자 하는 일은 집요하게 파헤치는 여인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미국에서 감사절은 지금처럼 경축되지 않는 절기에 불 과했을 것입니다. 첫번째 감사절은, 1621년 이주민인 선조들이 새로운 세상에서의 겨울을 감사하기 위해 경축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합중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감사절을 폐지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후로는 감사절은 몇 몇 주에서만 지켜졌고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어 그들의 생각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1828년 Cooeys Lady's Book 이란 잡지의 편집장이었고 「메어리는 어린 양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시의 작가인 헤일 여사가 최초로 감사절의 복구를 위한캠페인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의 모든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띄웠고 그들로부터 약속을 얻어냈습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녀는 좌절하기도 하였으며, 그 일은 이제 전혀 불가능하다는 말도 들었고 또한 그러한 일은 그녀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책망과 핀잔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1863년 링컨 대통령이 북부와 남부가 "감사절 날에 적과 싸움을 그만 두자."는 그녀의 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11월의 네 번째 목요일을 공식적인 '국가적 감사절'로 선언하였습니다. 이 날은 1941년 미국 의회에서 정식으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감사하고 즐길 수 있는 감사절은 헤일 여사의 노력과 헌신으로 인해 더욱 더 경축적인 날이 되었습니다. 실로 헤일의 인내있는 투쟁은 감사절마다 다시 한 번 기억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감사절 선포문

 

메사추세츠 주 지사 브래드포드는 순례자들이 플라이마우드에 정착한 지 3년 후에 다음과 같이 첫 감사절을 선포했습니다. 감사절에서 선포한 밑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금년에 우리에게 옥수수와 강남콩과, 완두콩과 과일 및 정원 채소를 풍성히 내려 주셨고 또한 사냥감이 풍부한 살림과 날고기와 조개가 있는 바다를 주셨도다. 또한 야만족의 밥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고, 혹사병과 각종 질병에서도 우리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서 그 분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해 주셨도다.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의 행정관인 나는 그대들 순례자들 모두, 즉 그대들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그대들의 회합처에 모이고 거기서 그대들의 목사님에게서 말씀을 들으며, 이 모든 축복을 인하여 그대들의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을 선포하노라."

- 월리엄 브래드포오드

 

 

어머니의 미덕

 

인도에서 추수 감사절에 있던 일입니다. 한 여성도가 아주 많은 양의 쌀을 가지고 와서 교회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 교회의 순회 목사는 이 부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몹시도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지라 무슨 특별한 일이라도 있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여인은 대답했습니다. "제 아들이 몹시도 몸이 아팠을 때 제 아들을 낫게 해 주면 하나님께 아주 큰 선물을 드리겠다고 전 약속했었죠." 이에 목사는 물었습니다. "아, 그러면 아들이 회복되었나요?" 이 과부는 잠시 동안 머뭇거리더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지난 주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애는 지금 하나님 품에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저로선 이를 감사하는 것이랍니다. "

아들의 죽음 앞에서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가장 위대한 미덕일 것입니다.

 

 

농부 예찬

 

가을이 한창 무르익고 있습니다. 빨간 능금알처림 익어가고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아니한 자에겐 거두어 들일 가을이 있을 턱도 없으련만 뿌린 이나 뿌리지 못한 이도 모두들 기쁨에 겨워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므로 엎어지게 되는 그 수많은 내일의 열매야말로 대자연의 승리와 섭리란 하늘의 뜻입니다. 이 풍요스러운 가을, 추수라는 작품을 도출해 낸 우리 농민들에게 뜨거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무릇 모든 생물은 먹어야 그 존재가 가능한 것이고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50억이 넘는 우리 인류는 지구라는 한정된 땅덩어리에서 무엇을 얼마나 만들어 먹고 살 것입니까? 사실 쌀보다 더 큰 무기가 있습니까? 미 항공우주국에서 달나라로 향한 로케트의 조종을 지휘하고 있는 과학자의 지혜가 놀랍고, 또 그 수고를 고마워 하면서도 한 톨의 낱알을 뿌리고 가꾸는 농부들에게 더 뜨거운 고마움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 농부들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생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말도, 공휴일도 없이 새벽별을 머리에 이고 들로 나갔다가 저녁 달그림자를 밟고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 농민들에게 하늘의 뜻으로 이룩된 오늘의 풍요스러운 추수를 다시 한 번 뜨거운 마음으로 고마워 합시다.

 

 

숨쉬듯 하는 감사의 생활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가진 것 중의 아주 작은 일부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무슨 큰 자랑거리나 되는 줄로 착각합니다. 바로 그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 하면서 혼자 좋아라 합니다.

그러나 들떠 있는 마음을 거두고 깊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는데‥‥‥‥ 그것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전재산이나 바친 것처럼 흥분하는 우리의 경거망동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럽고 자족했던 마음이 가증스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오시어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도 겸손히 골고다를 향해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가시던 주님,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지혜를 주옵소서, 용기를 주옵소서.

주여 ! 매일 물을 마시고 밥을 먹듯 당신의 은혜를 마시며 매일 숨 쉬듯 당신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소서 !

 

 

빛을 발하려 하지 않는 선행

 

죽음의 공포에서 헤엄치는 자신의 아이들을 살려낸 한 이름 모를 사람의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알바레쯔 여사는 그의 10살 난 아들 로이 알바레쯔 2세(Roy Alvarezll)가 목요일에 길 치리스트(Gilchrist) 근처의 롤오버 패스(Rol- lover Pass)에서 거센 파도에 휩쓸려 죽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걸어나간 그 소년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영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자 한 보이 스카웃이 달려나가 로이를 붙잡고 그의 머리를 물 위로 유지하 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스카웃 대원은 그 자신도 익사할 위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밀려오는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당신이 로이를 그 보이 스카웃 대원으로부터 받았고 그는 지칠대로 지쳐 해변을 향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신이 로이를 붙잡고 있었을 때 역조가 밀려와 당신을 들쑥날쑥한 바다 밑의 암석으로 밀쳐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로이를 신경이 날카로운 그의 어머니와 전율하는 아버지에게 돌려 보냈는데 로이는 휴스턴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당신을 보았을 때 당신은 해변을 따라 절뚝거리며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금요일 알바레쯔 여사는 침착했습니다. 그녀는 휴스턴 크로니클(Chronicle)에 전화했고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는 다쳤고 우리는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께서 우리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그에게 좀 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감사의 말을 그에게 전해 주십시오. 나에게 내 아들을 다시 돌려 보내주어 정말로 감사하다고요."

 

 

감사는 믿음의 척도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나서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 형제가 공산당원에게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의 장례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목사님을 위로하기 위해서 정성을 다합니다. 그러나 그때 손 목사님은 장례식에 나와서 여덟 가지로 감사를 했습니다. 한 집안에 순교자 하나만 나도 강사한 일인데 우리 집안에 둘이 생겼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구약에 보면 맏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는데 나는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종자라고 했는데 이 어린 것들의 피가 앞으로 교회의 종자가 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가상한가 등등 그는 여덟 가지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1:8)"

 

 

무고한 일을 당한 사람의 감사

 

루이 14세의 장례식이 끝난 뒤, 그의 정치 행적을 비판하는 팜플렛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는 「나는 보았다」라는 작은 시집이 있었는데 그 끝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나는 이런 악을 보았다. 아직 20세도 되지 않았는데‥‥‥‥ 이 불온스러운 시는 볼테르가 그 시를 지었을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그는 바스러유로 송치되어 그곳에서 1년 남짓이나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 후, 「나는 보았다」의 진짜 작가가 자수함으로써 볼테르는 비로소 혐의가 풀려 석방되었습니다. 볼테르가 출옥한 다음 날, 오르레망 공은 그를 불러들여 위로했는데 그때, 볼테르는 태연하게 하는 말이 "전하께서는 우리가 먹을 양식을 걱정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오니, 주택까지는 염려하시지 말라 전해주시오."라고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생활

 

수많은 홀리데이 인(Holiday Inn) 모텔들과 예후 보양소의 건축자인 월리스 죤슨(Wallace Johnson)이 말했습니다.

"내가 40살이었을 때, 나는 제재소에서 일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장이 내게 말했습니다. '너는 해고 되었다. ' 나는 낙담하여서 마치 세상이 내 위에서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불황기였고, 내 아내와 나는 내가 벌고 있었던 적은 돈이나마 그것이 몹시 필요했습니다.

내가 집에 갔을 때 나는 내 아내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습니다. 그녀는 '당신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 라고 묻더군요. 나는 대답했죠. 5 년이 지나자 나는 수백만 달러의 부자가 되었죠. 이제, 그때 나를 해고한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 일이 있었을 때, 나는 내가 왜 해고 되었는지 알지 못했죠.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를 선택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습니다. "

언제나 범사에 감사하고,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감사하는 아름다운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감사의 고백을 항상 자신의 기도로 삼는 사람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참으로 감사는 우리의 생명을 충만케 하는 묘약입니다. 여러분 ! 생명의 풍요로움을 위해 감사하십시오. 주님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알려지지 않는 선행

 

일리노이 주 이반스턴(Evanston)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은 여러 해 동안 그곳의 학생들 중에서 인명 구조 선원으로 자원할 사람을 공모해서 유명해졌습니다. 1860년 9월 8일 승객들로 가득찬 증기선인 레이디 엘진(Lady Elgin)호가 미시간호 해변에서 침몰하였습니다. 해변가로 모여든 학생들 중 E.W.스펜서(E.W. Spencer)는 카레트 성서 대학(Garrett Biblical Institute)에 다니는 학생인데 그는 한 잔해에 매달려 있던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곧 그의 코트를 벗어 던지고 험한 파도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여 그녀를 안전하게 구조하였습니다.

젊은 스펜서는 그날 16번이나 그 사나운 파도에 용감히 맞서 17명의 사람을 구조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칠 대로 지쳐 헛소리를 하며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스펜서는 얼마 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그날의 지나친 과로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건강을 해쳐 희망했던 성직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는 81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알려지자 한 신문에서는 구조된 이들 열일곱 명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그에게 감사하러 오지 않았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감사의 바구니

 

인간들의 기도를 모으려고 지구로 보내진 두 천사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한 천사는 그의 바구니에 사람들의 소원 기도를 가득 채우려 했습니다. 다른 천사는 그 바구니에 인간들의 감사하는 기도를 모으려 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되돌아왔습니다.

한 천사는 바구니가 넘칠 정도로 인간들의 수많은 소원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감사를 담아 오겠다는 천사의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고 그 천사는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인간들이 감사하는 소리를 천사가 열심히 찾았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아주 드물게 들렸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는 동안 감사함을 잊지 말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감사하는 마음이란 마음에 새겨 둔 기억을 말한다.

(J.B. 마슈)

 

감사하는 행위, 그것은 벽에다 던지는 공처럼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신을 평화롭게 한다.

(이어령)

 

이 세상에서 가장 상쾌한 과실은 감사다.

(메난드로스/ 단편)

 

사람은 고맙다는 말만 가지고 은혜를 갚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같은 은혜를 베풂으로써 갚아진다.

(A. 모로)

 

자연히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럽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A. 해밀턴)

 

대개 사람들의 감사의 마음은 좀더 큰 은혜를 얻고자 하는 은근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F. 라 로슈푸코/ 잠언과 고찰)

 

은혜를 몰라주는 것도 괴롭지만 거기에 버금가는 것은 감사의 말을 지겹게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H.W 비처/ 플리미스 설교집)

 

감사는 갚아야 할 의무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기대할 권리는 없다.

(J.J. 루소)

 

감사한 마음으로 받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수확이 있다

(W. 블레이크)

 

감사하는 마음은 금방 노쇠해 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

 

감사는 위대한 교양의 결실이다. 그대는 야비한 사람에게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S. 존슨)

 

그래도 광명 아래 열세살/두루 세상 구경하고/ 갖가지 색동 이슬에 묻힌/ 무지개 실카지 보고/ 주 모습 미리 기억케 하셨으니 감사하다신다.

(정벽봉/ 간증)

 

감사는 상대방에게 바치는 깨끗하고 향내나는 감정의 열매이다.

(김말봉/ 푸른 날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높은 이자로 빌려주는 것과 같다.

(영국 속담)

 

감사는 과거에게 주어지는 덕행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살찌게 하는 덕행이다.

(영국 속담)

 

달빛 지르밟는 소리 들려도/ 뉜줄 알고 정겹게 속살대는 논물// 달빛에 어른거리는 손길 보아도/ 그 맘 알고 고맙다 인사하는 벼포기.

(허흥식/ 달빛 속의 그림자)

 

준 것은 적고/ 받은 것은 많았다/ 세상이여// 감사하는 마음보다/ 원망하는 마음만 컸다/ 세상이여.

(허영자/ 빚진 세상)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길 잃은 어린 양/ 순간/ 은총이듯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 편안해지는 마음// 구름걷힌 발길이/ 달빛 속에 간다/ 감사와 용서의 달꽃이 되어‥‥‥‥

(윤강도/ 달밤)

 

예수를 생각하고 나는/ 나의 가난함도 슬프지 않고/ 남의 부유함도 부럽지 않나니/예수를 생각하고 나는/오직 감사한 마음이 넘칠 따름이라.

(내촌감삼/ 예수를 생각하고)

 

자비와 동정과 평화와 사랑에게/ 우리들 모두 슬플 때면 기도하고,/ 이와 같은 즐거운 덕에게/ 우리들 모두 감사를 돌려라.

(W. 블레이크/ 하나님의 모습)

 

 

설 교 노 트

 

감사의 제사

시50:22-23

 

서론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불만과 불평 때문에 마음속에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인에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고결한 품성을 지닌 사람일수록 모든 조건 즉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을 줄 믿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확실히 한층 더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가 됩니다.

 

1. 감사는 최고의 미덕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했던 일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고 고마움을 느껴 사례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조건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조건으로 생각하며, 감사의 조건으로 보며, 감사의 조건으로 느끼며, 감사의 조건으로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만사에 어떤 경우에든지 감사할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그 마음을 드리는 것은 복 있는 마음이라 하겠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겐 감사할 조건들이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환란 중에서도 감사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감사의 생활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으나 감사할 줄 모르다가 등창병을 얻어 살지 못하리라는 선고를 받고 비참한 자리에 들어갔던 일을 기억합시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찢기움을 당합니다. 가정의 평화가 찢기우고 사업 번영이 찢기우고 건강이 찢기워집니다.

 

2. 감사는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보답의 표시입니다.

감사가 없는 자는 은혜까지도 소멸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감사의 마음, 감사의 제사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은혜를 저버려도 큰 수치와 잘못이 되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곧 큰 죄악입니다. 고결한 품성을 지닌 사람일수록 모든 조건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줄 믿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확실히 한층 더 아름답고 고귀한 존재가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문등이 중 한 사람이 와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서 감사하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를 찾으시며 감사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더 큰 것으로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감사 조건을 더욱 풍성하게 하여 주십니다.

 

3. 감사는 여유있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이 말은 물질적 여유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의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의 감사를 한번 기억하고 생각해 봅시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10남매의 귀한자녀를 슬하에 두었으며 많은 재산과 노비를 거느린 "부귀다남"으로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받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 또 생일잔치를 즐기는 순간 대풍으로 사랑하는 자녀 10남매가 순식간에 압사당하는 끔찍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설상 가상으로 욥 자신도 머리끝부터 악창이 나서 깨어진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또한 슬픔과 기쁨을 같이 나누며 위로해 주어야 할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욥의 아내마저도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살 수 있겠소."하며 갖은 핍박과 힐난으로 욥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언행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욥은 원망하지 않고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가며 내게 주신 이도 여호와시며 내게서 취하신 분도 여호와이시오니 찬송을 받으소서"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역경 중에서도 감사를 잃지 아니한 음에게 배로 보상하여 주셨습니다.

 

4. 감사의 제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인생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부모의 마음이 가장 흐뭇하고 기쁜 때는 그 자녀들이 부모의 은공을 알고 감사할 때입니다.

성 프렌시스는 「태양의 노래」라는 글을 써 "해를 위해 감사하고, 달을 위해 감사하고, 별을 위해 감사하고, 산천 초목을 위해 감사하고, 부모 형제 위해 감사하고, 천지 만물을 위해 감사하라." 고 한 끝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했습니다. 예수의 공로로서 죄사함을 받은 하늘의 사람에게는 죽음까지도 감사의 노래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5. 감사의 제사는 구원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어둡고 침울하며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남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언제나 명랑하고 밝은 표정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생활은 그 자신이 행복할 뿐 아니라 그의 가정도 행복합니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부흥되고 발전합니다.

 

결론

감사를 모르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하여 항상 무엇에 쫓기는 심정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불행하지만, 반면 언제 어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은 매사에 복이 옵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항상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불평하는 곳에는 불평할 일만 생기고 원망하는 곳엔 원망할 일밖에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실패한 자리에서도 감사하는 자에게 성공의 축복이 옵니다. 병중에서도 감사하는 자에게 는 건강의 축복이 옵니다. 죽음 앞에서 감사하는 자에게 생명의 축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감사, 감사, 감사의 생활을 합시다.

 

 

깊은 감사

시50:14-15, 22-23

 

서론

참된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죄악에서 구원받은 은혜, 과거 무서운 고난과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 오늘날까지 사고와 재난과 불행이 많은 생활 가운데서도 지켜주신 은혜,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이 시간에 죄 짓는 장소에 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예배드릴 수 있는 특권과 은혜 등 셀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깊은 감사의 생활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타인이 받은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것이 깊은 감사입니다.

고전1: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아닌 타인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도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의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는 농담이 있듯이 남이 잘되고 축복받으면 시기와 질투가 앞서 감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타인이 받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그가 얼마나 깊은 은혜의 사람인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여 ! 우리의 이웃과 형제가 나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을 때 질투하며 불안해하는 대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희생이 동반된 감사입니다.

본문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리라 "는 말씀이 있는데 제사(Sacitice)란 원래 희생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깊은 감사는 받은 은혜에 대해서 희생을 바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비싼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몸에 부어 드렸습니다. 이 나드 향유는 남자가 일년 동안 노동해서 벌어도 다 못벌 정도로 비싼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것을 아낌없이 희생하여 예수님의 몸에 부어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려면 희생이 없이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감사를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깊은 감사입니다.

 

3.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행같이 보이는 일들이 더 큰 축복일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부귀 명성 ·안일 이것만 계속되는 것이 더 큰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밀알을 생각해 봅시다. 산 채로 땅에 던져져서 질식할 것 같은 땅 밑에 덮여 겉으로 보기에는 무자비한 것 같은 운명을 지닌 채 매장이 된 그 밀알이 마침내는 그 최고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매장과 죽음과 고통은 고난이 아니라 새생명으로 탄생하는 진통입니다.

한 알의 밀이 이러한 고난과 진통이 없다면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는 이런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과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가 있지만 이것은 도리어 새생명으로 탄생하게 하고 더 우리를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과 역경이 올 때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결론

참된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자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감사하고 희생이 동반된 감사, 역경 중에 하는 감사가 깊은 감사입니다. 깊은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더 축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시103:1-6

 

서론

다윗은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하면 첫째,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바로 깨달아 알아야 되고 둘째,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고 셋째,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고마운 줄을 알아야 감사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감사에서 출발하여 감사로 진행하고 감사로서 막을 내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감사할 이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본문에는 세 가지 은혜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1. 모든 죄악을 사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절에 "저가 네 모든 죄를 사하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신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라고 한 뜻입니다. "옥에도 티가 있다. "는 말과 같이 위대한 성군 다윗에게도 죄가 있었습니다. 이는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동침한 음행죄라고 하였고 다음은 부하인 우리아 장군을 죽이도록 한 살인죄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러한 천일공노할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어진 동기는 첫째, 신앙생활의 해이와 방종이고 둘째, 그의 안일과 쾌락 추구이고 셋째, 그의 교만과 권리 남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아니한 데 있다고 합니다. 어찌 다윗만 죄인이겠습니까? 성경에 롬3:10에 "의인이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으니 인생은 너와 나를 물론하고 모두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범죄의 결과는

(1) 정신적인 고통과 번민을 초래하고,

(2) 육신적인 고통과 비극을 초래하고,

(3) 무서운 죽음과 멸망에 직면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참 속에서도 해방을 받고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여생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범한 죄로 인하여 영육간에 비참한 지경에서 방황하다가 죄사함을 받고, 참된 안식과 평강과 영생의 은혜를 받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본문 8절, 10절, 1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2. 모든 병을 고쳐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절에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침범해오는 모든 질병을 물리치시고 건강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질병에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1) 육신의 질병이요,

(2) 정신적인 질병이요,

(3) 영혼의 질병입니다.

육신의 질병은 우리 몸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해 오고, 정신적인 질병은 우리 마음의 안정과 평강을 위협해 오고, 영혼의 질병은 우리 영혼의 기쁨과 영생을 위협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서운 질병은 현대 고도로 발전된 의학으로도 아니되고, 심리학이나 교육학으로도 치료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만병의 의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을 삼대 질병에서 해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의 육신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 영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인생의 기본적인 평안과 행복을 누리게 하신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모든 질병에서 해방 받아 건강한 삶을 영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3. 생명의 파멸에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4절에 "네 모든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우리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셨다"는 말씀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1) 위기에서 우리 생명이 보호를 받았고

(2) 현재 이 세상에 생명이 연장되어지고

(3) 장차 사망과 지옥의 영역에서 영생과 천국의 영역으로 옮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현재 이 부조리하고 변태무쌍한 세상에서 우리 주변에 발생되고 있는 무시무시한 대형 교통 사고를 위시하여, 화재 사건 등 무서운 불상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명을 보호하여 주시고, 생명을 연장 지속하게 하시고, 나아가서는 천국에서 영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덤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우리들의 감사의 방법은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생명 다 바쳐서 감사해야 되고, 이와 같이 감사하는 결과 하나님은 계속하여

(1)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 주시고

(2)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3) 독수리같이 우리 삶을 새롭게 하여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사

신26:1-11

 

서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또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며 농사도 짓게 되었습니다. 이때 처음 농사를 지어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소산물의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1. 애굽에서 인도하심을 감사했습니다.

본문 6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여 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참했던 과거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하던 것을 더듬어 기억하고 현재의 자유와 평화,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농작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죄에서 값없이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죄의 종으로 살았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자유함을 얻었으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2. 가나안에서 살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본문 9절에서 10절에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만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고통스럽던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마음껏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마음껏 농사 짓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에 얼마나 감사를 드리면서 사는지 한번 생각 해봐야 할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터전을 허락해 주셔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이웃과 함께 감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주시고 가나안 땅에 살면서 풍요로운 삶을 허락해 주신 기쁨을 하나님께만 감사하지 않고 이 감사를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본문 1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희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이웃과도 함께 그 은혜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구약뿐 아니고 신약에서도 명백하게 요구되고 있는 계명입니다. 구약에서는 흩어져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더욱 더 부하게 된다고 했습니다(잠11:24-25). 신약에서도 이웃에게 주라고 하십니다(눅3:11,18:22). 특히, 예수님은 모든 구약의 계명을 압축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결론지어 말씀하셨습니다(마22:37-40). 또한 사도 바울도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행20:35). 주는 것은 장래에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딤6:17-19). 히브리서 기자는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히13:16).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이웃과 더불어 그 은혜를 나누는 일에 인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며 감사했습니다. 그들이 감사한 내용은 먼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며 둘째는,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어 풍요로운 삶을 주신 깃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감사의 제목을 자신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이웃과 함께 그 감사함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들도 죄악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도들과 이웃과 감사를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감사 내용

시65:1-13

 

서론

시편 65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한 감사의 시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감사하는 내용을 통하여 감사의 진정한 본뜻을 알고 우리의 감사 개념을 다시 한 번 정립해야겠습니다.

 

1.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했습니다(1-5).

본 시편은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1절)"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이는 받은 바 은혜에 감격하여 주를 찬송하고 싶어 긴장하고 고대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 받은 바 은혜, 찬송하고 싶은 간절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는 5절의 "구원의 하나님이여"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주님이 구원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감격해 찬송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또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는 중에 '기도를 들으시는 주'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했으니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귀한 자나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하면 들어 주십니다. 기도 응답은 구원의 한 표증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다윗은 사죄의 은총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3절에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는 말은 죄감에 강한 토로입니다. 곧 통회 자복하는 상태입니다. 자복한 죄를 하나님은 사해 주시며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렘31:34, 요일1:9).

다윗은 또 주의 뜰과 집 곧 성전의 아름다움에 참여케 해 주심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구원받은 성도의 집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그 곳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귀한 것입니다(시84:10). 구원 받은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아름다운 집입니다.

오늘 우리의 감사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구원 곧 기도의 응답, 사죄의 은총이며, 새성전의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2. 이 땅에 주신 평안을 감사했습니다(6-8).

다윗은 하나님의 전능의 위대함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권능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주의 능력으로 온 우주를 섭리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다의 파도와 열방의 모든 움직임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 십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 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함께 하심으로 평안을 주셨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8절에 "주께서 아침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을 즐거워 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루하루가 즐거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땅에 평안을 주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도 다윗의 감사와 유사합니다. 이 땅에 평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3. 풍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9-13).

본문 9절에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인간의 지혜가 뛰어나고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지 않으시면 곡식의 싹이 나거나 자랄 수 없습니다.

다윗은 풍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11절에 "은택으로 관을 씌우시고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온 천지에 주의 기름이 떨어지게 하셔서 자연이 주님을 찬양하며 기뻐한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은택을 베풀어 주셨기에 모두가 즐거워하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이 땅에 평안을 주시고 풍요롭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위대한 은총을 감사

딤전1:12-17

 

서론

현대는 불평과 원망의 시대라고 정의할 만큼 감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각박한 시대로 전락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디에 가나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삶의 양상을 찾아볼 수 있으니 그 하나는 감사하는 사람의 삶이요, 다른 하나는 불평하는 사람으로 비애와 고통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삶의 양상 속에서 우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바울은 두 가지 은총을 감사했습니다.

 

1. 괴수 죄인이 영생의 은총을 받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1) 바울은 먼저 자기 자신이 괴수 죄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 괴수 죄인이라는 말은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는 말이고 또는 죄를 제일 많이 범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범죄는 인간을 상대로 한 윤리적 범죄가 아니고 하나님에게 범한 종교적 죄악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을 훼방했고 폭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서 멸망받을 죄인이 용서와 영생을 얻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2) 바울은 영생의 은총을 받은 내용을 간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 대신에 긍휼을 입고 하나님의 저주 대신에 용서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형벌 대신 참으심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 얻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요,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죄를 용서받고 영생 얻은 은총을 감사합시다.

 

2. 직책을 맡겨주신 은총을 감사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에게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1) 이 직분은 사도의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기록하는 직분이요, 죄인들을 복음으로 구원하는 직분이요, 나아가서는 지상에다 교회를 창설하고 발전케 하는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직분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직분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시고 상급을 주실 자에게 맡기시는 직책입니다. 이러한 직분을 맡게 된 은총을 감사하였습니다.

(2) 이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은총에 대해서도 감사했습니다.

이 감당할 수 있는 은총의 내용은 충성할 수 있는 은사라고 했습니다. 충성되이 여기었다는 말은 충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고 충성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믿음이 넘치도록 하여 이 믿음으로 직분을 감당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사랑이 넘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뜨거운 사랑으로 자기 맡은 직분을 감당하도록 한 은총에 대해서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나에게 어떠한 직분을 맡기셨든지 날 사랑하고 귀중히 보시고 직분을 맡기시되 감당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3. 감사 생활의 양상과 결과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를 많은 사람 중에 택하시고 성별하여 귀중한 직책을 맡겨주신 은총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1) 그의 생활 양상을 다음과 같이 전개해 나갔습니다.

먼저 자기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바울이 주님에게 헌신한 생활입니다. 바울은 그의 몸과 시간과 재물 전체를 바쳐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사람은 바울과 같이 몸도 마음도 생명까지 바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법입니다.

(2) 그의 감사 생활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위로와 평강을 누리며 나아가서는 위대한 은사와 축복을 받으며 그 생활이 향기로워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면서 모범이 되는 법입니다.

 

결론

우리들도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에 감사하면서 빛나게 사는 성도가 됩시다.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8

 

서론

범사에 감사한다는 말은 역경과 순경, 슬픈 일이나 기쁜 일,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보게 됩니다. 먼저 원망과 불평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신을 이루신다는 말씀을 확신하며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감사의 제목이 없는 자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감사의 제목은 무엇이며 왜 감사해야 하는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고전1:4).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고, 세상 풍속을 좇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들을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2) 그리고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시23:1).

또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에 뛰어나신 분이며,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분이며,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3)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현세뿐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이 있고 천국의 소망이 있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살전5:18).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초점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맞추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면 찌르는 가시도 주시며, 사자굴도 주시며, 억울하고 비참한 환경을 만나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존재들이 아니라 지금 계속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환경이 우리를 완성하는 길임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3.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1) 기도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빌4:6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하였습니다.

(2) 찬양함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3) 예물을 드리므로 감사를 드립니다.

빈손으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신도들이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예물을 잘 드리지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예물을 드리지 않습니다.

(4) 또한 우리의 전생활이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감사의 제물이 되어져야 합니다.

 

결론

여러분 삶의 초점은 어디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항상 주님을 첫째로 모시려는 마음이 있다면 주께서 환경과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우리를 다듬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인해 저절로 범사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여호와를 섬기자

시100:1-5, 행17:24-25

 

서론

감사라는 것은 누구에게서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그 고마움에 대한 사례를 드리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은혜, 사회의 은혜, 국가의 은혜를 입고 서로 상부 상조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은혜를 감사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곧 신앙이요, 감사의 고백이 곧 찬송과 기도이며, 감사의 행동이 곧 예배이며, 감사의 생활이 곧 구원받은 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몇 가지 커다란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자이시니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으심을 받은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본문에 "지으시고"란 말은 그 택한 백성에게 이른 두 차례의 지으심을 가리킵니다. 곧 1차 창조와 2차 창조입니다.

1차 창조는 창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제 2차 창조는 우리를 구속하여 새 인간으로 창조해 주신 창조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중 창조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보배로운 존재로 삼은 것이니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마음으로 감사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입으로 찬송하여 하나님이 주신 이 몸으로 봉사하여야 마땅합니다.

 

2. 그 백성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존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자율자도 아니며, 자신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높은 자 곧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있습니다(롬14:8).

이사야 43장 1절에 "너는 내 것이라" 하였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뿐만 아니라, 신천 신지에서 영원히 "저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들과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3.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행17:25).

하나님께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주셨으며, 순간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공기로 호흡할 수 있게 하셨으며, 또한 만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독생자까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롬8:32).

 

4. 감사를 넘치게 하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수많은 은혜를 받았지만, 은혜 속에 묻혀서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1) 감사하는 말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열 문둥이가 다 깨끗함을 받았으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2) 감사의 예물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잠3:9-10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하셨고 출23:19에는 "너희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예물을 넘치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창고가 가득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여호와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1) 우리는 그의 지으심을 받은 자이니

(2) 우리는 그의 것이니

(3)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 가진 모든 것은 주의 것이니 온 몸과 온 재산을 드려 감사함으로 여호와를 섬김시 다.

 

 

감사 생활의 가치

엡5:15-21

 

서론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라(엡5:20)" 우리 인간 생활은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다음은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긍정적인 인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원망도, 감사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목석같은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허락 하신 생존기간 불평을 하면서 살아가는 부정적인 인생보다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긍정적인 삶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아니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 생활의 가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 감사 생활의 가능성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평하면서 살기보다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들의 감사 생활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뜻을 이해해야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7절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주의 뜻"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행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선택을 받았고 다음 죄사함을 받았고 다음 구원을 받아 천국 시민으로서의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주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아는 성도는 감사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감사' 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우카리스티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깊이 생각한다' 또는 '깊이 깨닫는다'라는 뜻입니다. 이성 없는 동물에게는 생각도 깨달음도 있을 수 없지마는, 이성 가진 우리 사람에게는 생각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에 사람이 생각도 없고 깨닫는 바도 없다면 비이성적인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49:2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깊이 깨달아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감사 생활의 존귀성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진정한 감사생활은 고상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바로 알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 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원망 중에 사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는 허망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롬1:21).

(2)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살아가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3) 인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은 은혜를 보답하는 생활인 동시에 우리들의 본문과 의무를 다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 생활의 가치는 첫째,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고 영광 돌리는 생활이요 둘째,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사는 생활이요 셋째,인생의 의무를 다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3. 감사 생활의 실제성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선민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린 실제 형편을 살펴보면

(1) 신령한 노래와 찬송을 드리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7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라"고 하였습니다. 히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으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여 살아보려고 힘을 쓰게 됩니다.

(3) 하나님께 헌신하여 충성을 다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시간도 노력도 물질도 하나님께 바쳐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결론

이와 같이 감사 생활의 결과는

(1) 마음의 기쁨과 생활에 평강을 누리게 되고

(2) 물심 양면으로 축복을 받아 윤택하여지고

(3) 하늘나라의 상급을 후하게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감사하는 종교

시145:1-10

 

서론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특성은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혹은 십자가의 종교라고도 하고, 부활의 종교라고도 하고, 생명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또는 말씀의 종교라고도 하고, 은혜의 종교라고도 하고, 감사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여기 '감사' 라는 어원은, 옛날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맨처음 사용한 용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 기독교는 지구촌에 사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종교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종교' 라는 제목에 먼저 감사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고, 다음 감사하는 생활의 양상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감사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항상 기억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시103:2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은택은 시103:3에 밝힌 바와 같이

① 죄사함을 받은 은혜이고

② 모든 병을 고침받은 은혜이고

③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받은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시13:3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소원을 만족하게 하여 주시고, 날마다 새롭게 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2) 욕심을 버리고 자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약1:14-15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욕심은 세 가지 결과를 초래하는데 먼저 시험에 빠지게 하고, 다음은 죄를 생산하게 하고, 셋째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욕심을 버리고 자족한 생활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빌4:11-12).

(3)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욥기15:25에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라"고하였으니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배반하는 사람으로서 절대 감사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진정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하여 자기의 처지를 바로 깨달아, 현재의 자기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 은혜가 족한 줄로 알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 생활이가능한 것입니다.

 

2. 감사 생활의 양상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주님을 높이고 송축하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145:1) " 여기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생활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생활이고, 다음 "주의 이름을 송축하는" 생활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찬송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2) 주님의 능한 행사를 칭송하며 선포하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45:4-7에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주의 행사를 칭송한다는 말씀은 주님의 위대한 행사에 대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삶을 의미하고 또한 주님의 행사를 선포한다는 말은 주님이 은혜 주신 놀라운 사건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간증도 하고 증거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3) 주님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시145:10에 "주의 지으신 모든 것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가 주를 송축하리이다" 여기 "감사하면서 송축한다"는 말씀은 주님께 헌신과 충성을 다짐한다는 말입니다.

진정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의 생활은

① 몸과 마음을 드리게 됩니다.

② 시간과 노력을 드리게 됩니다.

③ 내게 주신 재물을 드리게 됩니다. 현하 전 세계의 기독교의 웅장하고 위대한 역사적인 유물과 유산들은 모두 성도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바친 재물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이와 같이 감사 생활의 결과는 우리 마음과 생활에 위안과 평화가 넘치게 되고 우리 마음과 생활에 발전과 향상이 있게 되고 우리 마음과 생활에 여유와 풍요를 체험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평생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

골3:12-17

 

서론

성경책은 세계 어느 문헌보다도 감사하라는 말이 제일 많이 기록된 책입니다. 무시로 감사를 느끼면서 사는 사람은 마음이 맑고 밝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에 감사할 때 은혜 받고 축복도 받습니다. 구약에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라" 했습니다. 모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용솟음칠 때 감사가 나옵니다. 불안과 불평으로 악한 마음이 가득차 있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지상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것들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는 다음 세 가지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1. 단순한 것들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사전에 '단순한 것'이란 '평범한' '꾸미지 않은'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 혹은 허식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한 것들이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 혹은 우리가 익숙해져 버린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것은 밥과 같이 가장 뚜렷해 보이는 것들입니다.

 

2. 고난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은 두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도처에 있어서 언제 어느 때고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생애를 역력히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그의 생애는 고난의 생애였고 환난의 생애였고 고통의 생애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쁨이 있을 것 같지 아니하고 감사가 넘칠 것 같지를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말하기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를 자신의 생활 신조로 삼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늘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매맞고 정처가 없는 생애를 지녔습니다.

그러한 여러 역경 속에서도 바울은 믿음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환난 속에서, 잿더미 위에서, 고난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육체적인 고통 가운데에서 참을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 눈물어린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3. 감사하는 것이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감사는 축복을 받아내리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사랑을 입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만을 향한 믿음이 되어질 때 우리의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이 되고 또 감사는 그 믿음이 주께로부터 인한 믿음을 힘입게 됩니다.

바울은 없는 중에 감사했고 어려운 중에 감사했습니다. 자기 몸에 가시가 있을 때도 감사했고 옥 중에 있을 때도 감사했습니다. 옥에 갇히어 있으며서도 옥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너무도 뜨겁게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매일을 감사의 생활로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

시103:1-14

 

서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서가 아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나의 죄악을 용서해 주신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셨다"고 했고,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에게서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를 내 생활과 육신에서 찾으려고 하면 우리는 근본적인 감사를 잃어버리게 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잘 되는 자리에서 뿐 아니라 환난과 역경의 자리에서도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잘 되는 자리에서는 이방인도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난의 자리에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은 내 형편이 어떠하든지 내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다 사함 받아 깨끗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 앞에 죽을 죄를 용서받아 구원 얻은 이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우리 하나님은 의로운 일을 행하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참으로 어두운 시대로 우리는 거의 질식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마저도 이제 불의에 둔감해져서 불의에 동화되어 가고, 불의 앞에 체념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 판단과 행위가 절대로 의로우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불의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렸지만 우리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다른 감사보다 우리 하나님이 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앞에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3.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크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고 했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심령이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자기 이익 앞에는 사상이나 이념도 없고 나라도 없으며 심지어는 부모 형제까지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익이 제일이 되어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오늘의 우리들에겐 이익을 떠난 순수한 사랑, 자신에게 손해가 생겨도 사랑을 우선으로 앞세우는 우직하고 순박한 사랑이 너무나도 아쉬운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릴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받아 주십니다. 참으로 감사하신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사랑에 목이 마른 탕자와 같은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이요, 내 아버지요, 그 사랑이 오늘 내게 임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일은 바로 내가 죄악에서 용서받아 구원 얻은 사실이요, 우리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란 사실이요, 우리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감사 행위

요12:1-8, 막14:3-9

 

서론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즐겨 찾아가시던 동네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베다니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한 주일 전쯤해서 예수님께서 이베다니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문둥이였던 시몬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아주 값이 비싼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 앞에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하늘의 신령한 말씀을 듣고 너무 감사하였고, 또 자기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게 된 은혜에 감격하여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1. 타산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인데 300데 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라고 했으니 근 일년이나 벌어야 되는 값입니다. 일년 동안을 벌어야 되는 막대한 돈을 아까움 없이 부어버렸다는 것은 계산을 초월한 감사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이와 같은 희생적인 감사 행위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리스도께 지극한 감사의 표시를 한 마리아는 금 ·은 ·보물에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 너무 타산적이면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 축복을 받을 만한 감사는 타산과 계산을 초월한 감사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2. 겸손한 감사입니다.

그렇게 비싼 옥합을 깨트려서 붓는 정도이면 자랑을 할 만한데 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엎드려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렸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겸손한 행위입니까? 참으로 귀한 것을 바치면서도 겸손한 행위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칭찬도 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하고 무엇을 드릴 때는 겸손한 마음으로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드리면서도 복을 못받는 것은 겸손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언 11장 2절에 보면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교만해지면 자연히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는 모든 사람 앞에 더욱 존귀와 칭찬을 받고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3. 최선을 다한 감사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있는 힘과 정성을 다 기울여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향유는 너무 귀하고 비싸기 때문에 마치 요사이 '타부'향수나 '샤넬'향수처럼 조금씩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조금씩 부어 드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옥합을 아예 깨트려서 부어 드렸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이 많든 적든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그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치는 것을 보고 비록 엽전 두 푼을 바쳤지만 그 모든 사람보다 제일 많이 바쳤다고 했습니다.

정성이 없는 사람은 신앙도 없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정성이 있느냐에 따라서 믿음도 비례합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나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

시92:1-15

 

서론

성경에는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사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만사에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을 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음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후자가 될지언정 전자가 되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모든 일에 형통할 때는 감사하고 실패할 때는 원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통할 때는 물론 실패할 때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 순경에서도 감사하지마는 역경 중에서도 감사해야겠습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시인의 신앙 사상이나 생활 양상은 순경에서보다 역경 중에서 감사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4절에 "주의 행사"라는 낱말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여기 "주의 행사"라는 낱말은 히브리 원문에 두 가지로 표현이 되었는데 첫째는 '포알'이라고 기록하였고, 다음은 '마아세'라는 낱말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델리취 교수는 '포알'이라는 낱말은 일반 역사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사를 가리키고, 다음 '마아세'라는 낱말은 선민을 위한 새일을 창조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였다는 말은 순경에서도 감사하였지마는 역경에서도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1) 과거 순경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중하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사하게 되고

(2) 현재 하나님을 찾아 더욱 깊이 의지하고 믿게 정을 감사하고

(3) 미래에 받을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역경 속에서도 불평이나 원망하는 성도가 되지 말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2.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하지마는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사상은 과거에 범죄하여 하나님께 버림당하였던 죄인들이 현재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1) 마귀의 종들이 예수에 믿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진 것을 감사해야 되고

(2) 마귀의 종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되고

(3) 우리의 지체가 의의 병기가 되어 시간도 노력도 정성도 심지어는 생명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바쳐서 헌신하게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의 삶의 보람이 있고 의의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①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을 무겁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②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역겹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③ 우리는 하늘나라를 위해서 나의 시간과 물질과 몸을 바치는 일에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는 결단코 헛되지 아니하실 줄 믿습니다(고전15:58). 이와 같이 헌신에 대한 감사 생활은 섞임이 없는 순수한 감사요, 능동적인 감사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흐뭇한 감사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감사하는 성도는 순경에서도 감사하지마는 역경에서도 감사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것에 더욱 감사합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하나님은 계속 은혜를 주십니다.

(1) 승리의 은혜를 주십니다(10절).

(2) 번성의 은혜를 주십니다(12절).

(3) 하나님의 집에서 빛나게 살아가게 합니다(13-14절).

 

 

진정한 감사

행16:19-34

 

서론

진정한 감사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 은혜는 무엇이며 은혜의 단계는 어떠한가? 나는 어느 정도의 은혜의 깊은 단계에 들어가 있는가를 재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단계는 이상을 느끼는 단계이며, 쇠잔했던 심령이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다시 소생하는 은혜이며, 잘못된 믿음, 잘못된 길, 잘못된 봉사,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깨닫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또 해결 받을 수 없는 문제를 해결 받는 은혜의 단계이며, 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자기의 삶을 맡기어 순종하는 것이 은혜의 단계입니다. 또 예수와 교회가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 단계에 들어섰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감사는 어떤감사입니까?

 

1. 역경과 가난 가운데도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지경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귀신을 쫓아내어 주다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빌립보 감옥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정치범들만 가두어두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도를 드리고찬송을 불렀다고 했습니다(행16:25). 이것이 죽음 속에서 생명 걸고 드린 기도요, 죽음 직전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찬송이었습니다. 누가 감히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찬송을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이 진정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깊은 밤의 감사가 진정한 감사요, 역경 가운데 드리는 감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감사요, 환경을 초월한 감사가 또한 진정한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확신하는 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진정한 감사는 기적을 불러 일으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빌림보에서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나 좌절하지 않고 깊은 밤중께 소리높여 감사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옥토가 흔들리고 매였던 착고가 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역경 가운데서도 진정한 감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모든 죄수들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은 담대하게 기도하고 당당하게 찬송했습니다. 밤중에 지옥의 어두움이 전율을 느낄만큼 그들은 능력있는 기도와 능력있는 찬송을 했습니다. 이때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구원을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옥을 지키는 옥사장에게도 생명이 살아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된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한 사람의 신앙인이 절망하지 아니하고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3. 구원받은 사람은 감사할 수밖에 없고 헌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만나 새사람 된 사도 바울은 80평생 주만 모시고, 주를 위해 몸바쳐 전생애를 살았습니다. 예수 만난 사람은 다 헌신하고 감사하며 새로운 삶으로 변혁되어 집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마다 변화가 있고 새로운 삶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내가 믿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원하신다면 내 삶의 전부를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이 우리들의 마음에 가득하기만 하면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진정한 감사가 있을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환경이 달라지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진정한 감사는 역경 가운데에서도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기적을 불러일으키며, 충성 ·봉사 · 헌신하게 되며, 축복을 더 받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악을 추방하며 막혔던 길이 뚫리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사의 원리

살전5:16-22

 

서론

우리들은 감사절의 유래를 역사적인 입장에서 두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민족사에서 찾아볼 수 있고, 다음은 퓨리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들의 감사의 원리는 세 가지 인데,

(1) 생존에 대한 감사

(2) 신앙에 대한 감사

(3) 추수 및 양식 공급에 대한 감사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도 새삼 감사할 원리를 찾는다면,이 세 가지에 근거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려야만 되겠습니다.

 

1. 감사의 원리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8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1) 여기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은

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감사 생활을 요청하신다는 말씀입니다.

② 하나님은 우리들의 감사 생활을 기뻐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③ 하나님은 우리들의 감사 생활을 기쁘시게 흠향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기쁘신 뜻을 따라 열납하시는 감사 생활을 힘있게 이끌어 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감사 생활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 거역하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감사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①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감사 생활을 할 수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감사 생활이란 불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②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앙적 또는 도의적인 입장에서 의리가 있는 사람은 감사 생활을 하고 의리가 결합된 사람은 감사 생활이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③ 인생의 본분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생활이 가능하지마는 인생의 본분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사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요, 봉사의 사람이요, 생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2.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 범사에 감사하라는 뜻은

① 일상 생활에 대해 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낮과 밤이 있고, 해와 구름이 있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② 순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안정되고 사업에도 성공하여, 발전과 번성의 기회도 있지마는,

③ 역경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생활의 선구자 욥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순종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였거니와 역경 중에도 감사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2) 이와 같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① 인생이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갈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② 이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실 수도 있고, 취하실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만족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③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궁극적으로 유익하게 하심을 확신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롬8:28 참조)

 

결론

본문 18절을 통하여 감사의 원리를 살펴보았는데 이는 범사에 감사하여야 할 것이며,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원리를 삶에 잘 적용하여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4:2-6

 

서론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감사하게 만드십니다. 기도에 깨어있어야 하듯이 감사함에도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에 감사해야 겠습니까?

 

1. 감사치 않는 것은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22에서 죄의 명목을 들어나가다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감사치 않음은 죄입니다.

(1) 감사치 않는 것은 약탈 행위와 같습니다.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하지 않으므로 인해 상대방의 가슴에서 기쁨과 행복을 약탈해 가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이가 다같이 고침을 받았으나, 아흡 명은 감사치 않은 마음을 가질 때에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했고 그 마음속에 기쁨을 약탈해 가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감사치 않는 것은 남의 마음에서 기쁨과 행복을 약탈해 가는 행위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잔인한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감사치 않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감사치 않는 행위는 인색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생활만을 영위하기 위하여 인색한 사람은 그의 영혼이 얼마가지 못해 시들고 마는 것입니다.

(3) 감사치 않는 생활은 은혜와 축복을 중단시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것을 만족하게 가지지 못했다 하더라도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깊이 믿고 생각한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제일 큰 은혜를 주신 것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3. 우리는 보편적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것이라고 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의 생명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것, 태양이나 비, 이슬이 모든 것을 항상 내려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살아 움직이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특별한 은총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지나간 일년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원치 않게 생명을 잃어버리고 재난과 위험 속에서 눈물 짓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를 특별히 보호해 주셔서 질병이나 어떤 재난도 다 막아 주시고 구원해 주심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고 하면 더욱 더 감사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비단 개인이나 가정의 생활에 내려주신 은총만에 감사할 것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내려주신 은혜를 생각해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5. 우리는 역경 중에라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것 같으나 그 가운데서 감사할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특별히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라도 감사하게 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기적은 또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섭리를 이해하려 들 때 분명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느리라"라는 말씀과 같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기 억울하게 붙들려 매를 맞고 피를 흘리면서 손발에 쇠고랑을 차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계시면 나를 왜 이렇게 고통당하게 하실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거기서 기쁨으로 찬송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채워졌던 쇠고랑이 끊어지고,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결론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왜 감사해야 하며 무엇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지를 항상 생각하며 늘 감사하는 생활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감사하는 삶은 더 많은감사를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거 짓

성 경 활 용

1. 거짓된 것들의 종류

(1) 거짓 행위

(출23:7) 거짓 일을 멀리하며

(시101: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시119:104)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2) 거짓 예언

(렘14: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렘2:10)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며

(3) 거짓 피난처

(사28:15) ‥‥우리는 거짓으로 우리 피난처를 삼았고 허위 아래 우리를 숨겼음이라

(4) 거짓 환상

(겔13:8)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5) 거짓 복술

(겔22:28)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위하여 회를 칠하고 스스로 허탄한 이상을 보며 거짓 복술을 행하며

(6) 거짓 열매

(호10:13) 너희는 악을 밭같아 죄를 거두고 거짓 열매를 먹었나니

(7) 거짓 꿈

(슥10:2)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8) 거짓 기적

(살후2:9)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9) 거짓된 것을 믿음

(살후2:11)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0) 거짓된 말

(시120:3) 너 궤사한 혀여 무엇으로 네게 주며

(잠25:14)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미6:12) 그 거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궤사하도다

(11) 거짓 경고

(애2:14)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12) 거짓 형제

(고후11:26)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갈2: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13) 거짓 맹세

(호10:4)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마5:33)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며

(14) 거짓 그리스도

(마24:5-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막13:21)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 거짓을 말하게 되는 원인

(1) 두려움과 놀람 때문

(사57:11)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2) 곁길로 나갔기 때문

(시58:3)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3) 거짓 중인이기 때문

(잠14:5)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으니라

(4) 자랑하기 위해

(눅18:11) 바리새인은 서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5) 정욕대로 행하기 위해

(롬1:24-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6) 의식하기 때문

(딤전4:2) 자기 양심에 화인 맞아서 의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7)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기 때문

(갈6:3) 만일 누가 차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8) 탐심 때문

(요8:44)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9)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

(요8:1) 참조

(10) 귀신의 가르침을 좇음으로

(딤전4:1)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11) 교만 때문

(시119:68)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12)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정치 않기 때문

(사59:12-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여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말하니

 

3. 거짓을 말하는 자의 최후

(1) 망함

(시5:6) 거짓말 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잠19:9)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라

(잠21:28) 거짓 증인은 패망하려니와

(2) 혀가 베임

(시12: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잠10:31)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3) 죽음

(행5:4-5)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4) 벌 받음

(잠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5)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함

(시101: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여 거짓말 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6) 하나님의 미움을 받음

(잠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7) 하나님과 사이를 냄

(사59:2-3)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8) 천국에 못감

(계21:27)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9) 유황불 못에 들어감

(계21:8)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4. 거짓에서 떠나려면

(1) 진리를 순종해야

(벧전1:1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2) 옛 사람과 행위를 벗어버려야

(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관련원어풀이

1. bz"K; 카-자브

(1) 거짓말하다, 속이다.

(욥6:28, 시78:36)

(2) 거짓을 비난하다.

(욥24:25)

(3) 거짓말, 속이는 것, 허위, 미혹.

(시4:3, 잠6:19, 겔13:6)

 

2. lb<h< 헤벨

(1) 숨, 숨을 쉼, 미풍.

(시39:6)

(2) 허무하고 공허한 것.

(렘10:3, 8)

(3) 허무하게, 공허하게, 헛되이.

(욥9:29, 사30:7)

(4) 헛된 우상들.

(시3l:6)

(5) 내 쉬는 숨, 증기, 안개, 어두움.

(전6:4)

 

3. vj;K, 카하쉬

거짓, 사기, 속임, 결핍, 모자람.

(사30:9)

 

4. vj'K; 케하쉬

원래는 "거짓말하다"의 뜻이다.

(1) 거짓됨, 거짓말, 실패하다, 부족하다. 모자라다, 낭비하다.

(시109:24)

(2) 부정하다, 거절하다.

(창18:15)

(3) 속이다, 실패하다.

(호9:2)

(4) ~체 하다, 위장하다, 아첨하다.

(시18:45)

 

5. l['m' 마알

배반, 불신, 악용, 죄, 거짓.

(욥21:34)

 

6. hm;r[mi 미르마

거짓, 속임수.

(창7:35)

 

7. hY:m]r] 레미야

(1) 손을 내리거나 늦춤, 나태, 게으름.

(잠12:24)

(2) 속임, 사기.

(시78:57)

(3) 속이는 혀.

(시120:2,3)

 

8. aw]v; 솨-우

(1) 악, 사악, 범죄.

(사5:18)

(2) 재난, 파멸.

(사30:28)

(3) 거짓, 허위.

(시12:3)

(4) 거짓 보고, 소식

(출23:1)

(5) 공백, 허무.

(시31:7)

 

9. rq,v, 쉐케르

(1) 거짓, 허위.

(출5:9)

(2) 거짓 증거.

(신19:18)

 

10. hm;r]T; 타르미-트

속임, 교활, 간교.

(렘8:5)

 

11. yeu'do" 프슈- 도스

(1) 거짓.

(요8:44, 엡4:25)

(2) 외곡함, 거짓, 종교.

(롬1:25)

(3) 음모.

(계121:27)

 

12. yeudavdelfo" 프슈다델포스

거짓 형제, 기독자인 체하는 사람.

(고후11:26, 갈2:4)

 

13. yeudhv" 프슈데-스

거짓된, 속이는, 거짓말하는.

(행6:13)

 

14. ajnupovkrito" 아누포크리토스

거짓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의, 진실한.

(롬12:9, 고후6:6, 밴전2:22, 딤후1:5)

 

15. ajyeudhv" 아프슈데-스

거짓이 없는, 속이지 않는, 진실한.

(딛1:2)

 

16. ejpivorko" 에피오르코스

맹세를 어기는, 서약을 깨뜨린.

(딤전1:10)

설교예화자료

두 얼굴

 

인간의 거짓된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진실되지 못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매우 이상한 조각이 영국 요크셔에 있는 립스톤 홀(Ribston Hall)의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통 '두 얼굴의 집사'라고 불리웁니다. 한쪽 면에는 미소와 정중한 얼굴이지만 다른 쪽은 단지 오만과 무례를 나타낸 얼굴입니다.

이것은 한때 이 집에서 일하던 집사를 묘사한 것이라 합니다. 하루는 이 집 여주인의 지시에 미소와 아부를 하면서도 곧바로 여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여주인에게 혀를 내밀며 정반대의 거만한 몸짓을 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집사에게 창피를 주고또 다른 하인들이 그 두 얼굴의 집사를 흉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 자리에 조각을 만들어 세우라고 명하였다고 합니다.

 

 

동물 농장에서 일어난 일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인간 사회 !

여기 동물 농장에서 일어나는 동물들의 위선은 오늘 우리들의 얘기같이 씁쓸합니다.

서부 펜실베니아 농장에서 자란 한 친구가 어떻게 하여서 아주 똑똑한 개가 양을 죽이는광기에 사로잡히는가를 얘기해 주었습니다. 양을 죽이는 일은 항상 밤에 일어나고 양을 죽인 개는 다른 개들과 함께 가서 만일 가능하다면 그 죄를 딴 개들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양을 죽이는 광기가 다른 개에게 나타나면 그 개는 낮 동안에는 집이나 헛간 근처에서 보통 때와는 달리 착하고 친근한 체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위선에 맞서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한꺼풀 벗은 진실된 모습으로 설 때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20달러짜리 위조 지페

미네소타 주의 파크 래피즈(Park Rapids)에 있는 한 식당에 어떤 부랑자가 들어와서 집 주인에게 공짜 음식을 부탁했습니다. 그 부랑자가 매우 배고파하고 남루했기 때문에 식당 주인은 마지 못해 "무엇을 먹겠나? "라고 물었습니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그 부랑자는 최고급 요리를 시켜 먹었습니다.

그 건달은 식당을 떠나면서 주인에게 담배까지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성냥을 주머니에서 꺼냈는데 공교롭게 주머니에서 20달러짜리 지폐가 함께 나왔습니다.

"이건 뭐지?" 주인은 소리쳤습니다.

"20달러나 가지고 있으면서 공짜 음식을 먹어?" 그리고는 그 은행 수표를 움켜 쥐었습니다.

"그러나 공짜로 주기로 했잖소."라고 그 건달은 항의했습니다.

"자네에겐 안되겠어. 나는 20달러 중에 35센트를 가져야 겠어."

"제발 부탁이오. 그냥 돌려주시오. 나는 당신이 그러질 않길 바라오."

"시끄러 ! "라고 소리치고는 그는 20달러를 넣고 19달러 65센트를 거슬러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불행한 끝은 그 식당 주인이 그 돈을 가지고 은행에 갔을 때입니다. 그 돈은위조 지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자의 상자

 

1792년 영국의 한 마을에, 자신은 그리스도의 아내이며 두번째 메시아(Messiahs)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죠안나 사우쓰코트(Joa-ana Southcott)로, 어떤 가정의 하녀로 있다가 정신 이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시로 죠안나는 런던(London)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아주 유명해졌으며, 사우쓰코티안(Southcottians)이라 불리는 무지한 10만 명의 추종자들을 길러 냈습니다. 그 작은 종파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앞뒤가 맞지 않는 운문으로 씌어진 예언서와 구원을 보장한다는 증명서를 팔아서 큰 돈을 벌었습니다. 오랫동안 질문을 회피해 오다가, 결국 1814년 10월 19일에 자기가 거룩한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0주 후에 그녀는 뇌신경증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한 의문의 상자를 인류에게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세계적 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내용물들이 필요하게 될 때까지는 열어선 안된다는 요구를 덧붙였었습니다. 1928년 상자가 열렸을 때 거기에는 주사위통, 소설책, 퍼즐, 복권, 여자의 취침용 모자와 한 자루의 권총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난은 거짓말을 잉태한다(?)

 

-부제:슈만의 청년기에 얽힌 눈물겨운 사연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슈만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슈만은 그 당시 별로 유명하지않았던 독일의 역사 소설가 벌리라트 알력시스오와 함께 라인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때마침 독일 황제의 대관식이 행해지는 프랑크폴트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가진 돈은 업었으나 마음만은 부유하게 가졌습니다. 값싼 호텔에서 하루를 유한 그들은 길거리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길을 걷던 슈만은 갑자기 피아노가 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곧 그 마을에서 가장 큰 악기점에 들어갔습니다. 슈만은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영국의 어느 젊은 귀족의 심부름으로 피아노를 사러온 가정교사입니다. " 슈만은 그곳에서 피아노를 구경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시간 동안 피아노를 실컷 쳤습니다. 그리고 슈만은 악기점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 후 악기점을 유유히 나왔습니다.

"저 그럼 이틀 후에 그랜드 피아노를 사러다시 오겠습니다. "

악기점 주인은 며칠이 지나도록 슈만을 기다렸으나 단지 피아노를 치고 싶은 열정만으로 거짓말을 한 가난한 작곡가 슈만이 그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습니다.

 

 

저도 못봤습니다

 

-부제:장님이 해를 보았다고?

 

영국의 소설가 아놀드 베네트가 그의 소설「늙은 아내의 이야기」 중에서 공개 사형을 교묘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에, 실제 그것을 목격하였을 것이라고 논평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프랑크 해리스는 그것에 반대하면서 말했습니다.

"실제 사형 집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베네트는 실제로 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

그는 어떤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하면서 아기자기한 필치로 사형 집행의 실황을 그렸습니다. 그 글을 읽고 베네트는 해리스에게 편지를 냈습니다.

"사실 나는 목격하지 못하였오. 내가 그 소설을 쓰기 전에 당신의 기술을 보지 못한 것을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 그러자 해리스의 답장이 걸작이었습니다.

"사실은 소생도 사형 집행 광경을 본 일은 없었습니다. "

장님이 해를 보았다고 우기는 것처럼 웃긴 일이지 않은가?

 

 

엉터리 예언을 거부한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는 대단히 풍자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시절 런던에 파트릿지라는 예언자가 살고 있어서고 다음 일어날 갖가지 사건을 예언하여 달력을 만들어 발행하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맞지도 않는 예언자의 사건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수선스럽게 떠들기만 하였습니다. 스위프트는 이 엉터리 예언자를 한번 골려 주려고 다음해 1월에 「올해의 예고」라는 제목으로 조그만 출판물을 '빅카 스타프'라는 이름으로 냈습니다.

그해에 그는 "올해 3월 29일 밤 11시에 달력 제작자인 파트릿지가 열병에 걸려 사망한다 "라는 예고를 게재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3월 30일이 되자 파트릿지의 죽음을 자세히 쓴 글을 공개하였습니다. 이 소문이 런던에 퍼지자 사람들은 파트릿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저술자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제명하였습니다. 놀란 것은 바로 당사자인 파트릿지였습니다. 그는 당황해서 달력을 발행하여 "빅카 스타프라는 악인이 예언한 그날, 나는 엄연히 생존하고 있었다. "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을 보고 런던 시내의 곳곳에서 조소가 일어나고 그후부터 엉터리 예언은 런던에서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사필귀정

 

조그만 마을에 사는 빵을 만드는 사람이 이웃 농장 주인에게 버터를 사오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버터의 무게가 처음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며칠 분의 버터를 모아 저울에 올려 놓고 무게를 달아보았습니다. 역시 버터는 처음과는 다르게 점점 그 무게가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빵 제조업자는 농장 주인을 고발하였습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농장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울이 집에 있겠죠? ","없습니다"라고 농장 주인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무게를 알고 버터를 파십니까?", "그건 간단합니다. 저 빵집 주인이 내게서 버터를 사가기 시작한 날로부터 그 빵을 사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사람이 가져오는 1파운드짜리 빵을 가지고 저울을 삼아 버터를 팔았습니다. 버터의 무게가 틀리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빵의 무게를 틀리게 한 저 빵집 주인 탓일겁니다. "

이를 보고 '사필귀정'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속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속임을 당해도 자신의 결백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와 거짓말

 

보안관 한 사람이 어느 날 미국 텍사스 주의 어느 불법 도박장을 덮치면서 소리쳤습니다.

"모두 꼼짝하지 말고 손들어 ! "

그랬더니 세 사람이 깜짝 놀라 두 손을 번쩍 쳐들었습니다. 잠시 주위를 살펴본 그 보안관이 자기 눈을 의심하였습니다. 노름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름아닌 천주교 신부, 개신교 목사, 그리고 유대교 랍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안관이 세 사람의 성직자를 향해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고 난 뒤, 맨 먼저 가까이 앉아 있던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여기서 포커 노름판을 벌였습니까?"

그 목사님이 자기가 속한 교단의 명예와 자신이 봉직하고 있는 교회에 줄 충격을 생각하니 도무지 자신이 없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결단코 노름을 하지 않았습니다 ! "

보안관이 두번째로 유대교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사회의 지도자이신 랍비께서는 노름을 하였다는 사실을 시인하시겠지요? "

그 랍비도 자신에게 돌아올 그 엄청난 비난을 생각하고 거짓말로 대답했습니다.

"보안관님, 저도 포커 노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

실망한 보안관이 마지막으로 천주교 신부님을 향해 물어보는 태도가 이번에는 꼭 시인을 받아내야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신부님만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랬더니 이 신부님이 보안관을 응시하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안관님, 보안관님은 도대체 혼자서 노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어록·시·묘사

 

때로 진리는 잿빛이고 속임수는 총천연색으로 눈부시다.

(A.J. 헤셸)

 

거짓말은 다른 사람의 승락없이 속이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A.J. 헤셸)

 

미움에는 아첨의 사탕을 바르고 탐욕에는 거짓의 껍데기를 씌워서 서로 속이고 의심하고 넘겨짚고 살아가는 것

(이광수/ 인사)

 

말이란 모든 무거운 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가벼운 자에게 있어서는 말이란 모두 거짓이 아니겠는가. 노래불러라, 이제 그만 이야기하라고.

(F.W. 니체/ 일곱 개의 날인)

 

말은 거짓스럽고 간계로 가득할 수 있으나, 한숨은 마음의 자연스런 언어이다.

(T. 새드월/ 프쉬케)

 

말의 악행을 버리고 말의 선행을 거두어라.

(법구경)

 

한 사람보다는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 더 쉽다.

(헤로도토스)

 

타인에 대한 거짓은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만큼 중대한 것도 아니며 또한 유해한 것도 아니다. 타인에 대한 거짓은 흔히 즉흥적일 수도 있고 혹은 일종의 허영심의 만족에 불과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은 항상 진리에 대한 배반이며, 인생의 요구에 대한 배반인 것이다.

(L.N. 톨스토이)

 

허위의 입장에서 가장 심한 것은 그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H.F. 아미엘/ 일기)

 

인간은 진실에 대해서는 얼음처럼 차고 거짓에 대해서는 불과 같다.

(J. 라 퐁텐/ 우화)

 

거짓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변장된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G.G. 바이런/ 돈 후안)

 

거짓은 천성의 악덕이 아니라 이성의 걸작이다.

(L.C. 보브나르그/ 성찰과 잠언)

 

모든 악덕 중에서 허위와 불성실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받는 것만큼 그 사람에게 치욕감을 주는 것은 없다.

(F. 베이컨/ 수필집)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지위가 높아지기는 어렵다.

(우간다 속담)

 

거짓말쟁이는 맹세가 헤프다.

(p. 코르네유/ 거짓말쟁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중매쟁이가 못된다.

(유대 속담)

 

영국에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 죄 있는 거짓말을 까만 거짓말이라고 한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오색이 영롱한 무지개 빛 거짓말이다.

(피천득/ 이야기)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가 있지만 그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호메로스)

 

죄악은 많은 연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짓말은 그 모두에게 맞는 손잡이다.

(0.W. 홈스/ 아침 식탁의 독재자)

 

진실을 말할 용기 없는 자들이 거짓말을 한다.

(J. 밀러/ 아이 나)

 

하나의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의 거짓말을 필요로 한다.

(M. 루터/ 저작집)

 

거짓말쟁이를 속이는 자는 하늘이 고마워한다.

(스페인 속담)

 

대부분의 거짓말은 장난으로 시작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까지를 속이게끔 발전한다.

(이어령)

 

거짓말은 꽃은 피우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스페인 속담)

 

위선과 경건을 꾸미는 행위는 노골적인 범죄보다 더 구역질나는 짓들이다.

(A. J. 헤셸)

 

우리는 일시적인 편의와 순간적인 성공을 위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체 말하는 때가 있다. 이것이 이른바 거짓말이다.

(백낙준/ 성실)

 

거짓말은 갓 말했을 때가 그 절정기이다.

(T.M. 플라우투스/ 유령의 집)

 

인간이란 항상 타인에게 기만당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물론 타인의 거짓말보다는 자기의 거짓말을 더 잘 믿는다.

(F.M.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왜 불쾌한 비웃음에 악수를 했는가,/ 왜 거짓말과 거짓 포옹을 믿었는가.

(레르몬토프/ 시인의 죽음)

 

사기꾼, 투기꾼, 정상배, 모리배,/ 이 잡동사니 날 벌레들아.// 오직 돈과 욕정과 권세만이/ 삶의 가치인 양 호도되는 세상에/ 사람들은 모두 어딜가고/ 예절도 염치도 없는 짐승들만 들끓는 세상에,

(박종해/ 행복 II)

 

한 번 속고 깜백이/ 두 번 속고 깜백이/또랑 건너 쥐새끼(동무를 거짓 불러 속임)

(공주지방 민요)

 

저기 황새 간다/ 어데/ 오 우리 큰 개 눈 떴다/ 저기 뱁새 간다/어데/오 우리 강아지 눈 떴다(동무를 속인 뒤의 조롱)

(영주지방 민요)

 

이거 뉘 쪽/ 내 쪽/ 뉘 하래비 코 쪽(먹을 것을 주는 체하며)

(연기지방 민요)

 

매수된 성직자들의 라틴어를 한 자 한 자/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보면/ 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소위 정의의 저울을 끌어내고 그 분동(分銅)이 가짜라는 것을 폭로하면/고용된 밀고자들이 그들에게 보고한다.

(브레히트/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추켜올려진답니다/그런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호위를 필요로 한답니다. 그러나 그런 호위는/ 어디에도 없답니다.

(브래히트/ 그런데 당신의 나라에서는?)

 

고운 당신 앞에/ 내 영혼의 등불을 밝혀/거짓 속에 소박한 진실로써/궤휼 속에 순결한 지혜로써/ 죄 속에 참된 바름으로/ 사망을 뚫고 영생으로.

(이연자/ 내 영혼이 등불이 되어)

 

악한 자들은 자랑스럽게, 그 유례 없는/ 거짓을 자랑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함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뿐

(라신-하나님의 사랑을 기리며)

 

그는 불안해 하였다/자신의 허위에 대하여/ 존재에 비껴 떠도는 그의 쓸쓸한/ 언어에 대하여/목숨의 끝에 가서 만날/ 최후의 공허한 얼굴에 대하여/그는 괴로워 하였다.

(이성선/ 단독자)

 

약삭빠르게 교활하게/ 거짓말만 꾸며대니/지금이야 믿는다만/ 언젠간 너도 당하리.

(시경)

 

양심은/ 오히려 떨고/ 비양심은/ 되려 걱정않는 세상//과연 정의는 어느 선수의 묘기(妙技)에 맡길까

(윤종혁/ 운천)

 

의심했던 도마/부인했던 베드로/ 눈물 고개 지나는데/ 외식하는 서기관/ 너도 이젠 옷 벗어야지

(김윤택/ 부흥사경회)

 

아니오, 난 모르오/ 그 따위 사람과 난 상관이 없소/ 오늘도 여전히/ 별 부서지는 새벽은/ 앞에 다가서고/ 막을 수 없는 닭 울음소리

(황국명/ 새벽)

 

내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때묻은 나의 시어로는/ 어쩔 수가 없다. / 거짓된 나의 고백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

(김성영/ 님사)

 

여러 해 동안 나는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했더니라/ ‥‥그러나 그 뒤쫓는 걸음 서둘지 않고/ ‥‥발자욱 소리 들린다- 아니, 발자욱 보다/애절한 그 목소리 들린다-/ '나를 속이는 너를 모두가 속인다'

(톰슨/ 하늘의 사냥개)

 

진실로/ 패역한 세대를 아파하는/ 한 방울의 피 눈물일지라도/ 바람에 날리는 겨일 수는 없다니....

(김원태/ 바람 속에서)

 

이제, 귓전에만 맴도는 구호이거나/ 웃지도 울지도 못할 거짓 시늉일랑은/ 강물에 띄워 보내고 거듭남의 새 삶이러라.

(정철/ 금남로 주변 · 1)

 

정부의 소리에는/ 그림자처럼/ 거짓말이 따라 다닌다/ 지배자는 큰 소리로 외치고/ 민중들은 속삭인다.

(브레히트/ 독일전쟁 안내)

 

곱게 꾸며진/맵시를 내도/가난하고 고독해질 것 같아.// 마음을 털어버리려는/ 달갑잖은 허울은/추악하고 후줄근해 입지 않을래.

(윤재철/ 비둘기)

 

까닭없는 그리스도인들의 피로 적신 통곡과 탄식, 공포와 질곡, 저주와 중오의 초토 위에/ 또다시 위선의 황금성을 쌓은 네로여

(박찬중/ 페트로나우스의 편지)

 

어떠한 허위도 그것 때문에 또다시 다른 허위를 날조하는 일 없이는 주장할 수 없다.

(G.E. 레싱)

 

감또개로 팰까/ 돌산 오르는 비지땀/ 등으로 저 탑을 쌓듯

(정복선/ 밤에)

 

 

설 교 노 트

 

하나님의 나쁜 평판

창3:1-10

 

서론

여러분은 거짓말에 속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했으리라고 추정되는 어떤 일에 대해서 주위에 떠돌아다니는 헛소문의 고통을 아십니까? 아직 이런 현상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언젠가는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의 표적일 수도 있습니다.

 

1. 마귀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사탄이 하와를 집중 공격하였지만 실제의 표적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싸우는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뱀은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없게 금하셨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뱀이 하나님께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시험하였을 때도 그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렇게 사탄은 간교한 것입니다. 하와가 사탄의 말을 바로잡아 주었을 때도 계속해서 사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격의 대상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하와의 적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신적인 창조자의 본질이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2. 잠시 죄악을 누림

죄는 언제나 가장 매력적인 모양을 하고 접근합니다. 하와가 나무를 쳐다보니 그 열매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하와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설수 있을 것이라는 개인적 성취감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와는 그 유혹에 못이겨 실과를 따먹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남편인 아담에게까지도 따다가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실과를 따먹기 전에는 두려움이 생겼지만 사탄의 유혹을 받고 따먹은 후에는 오히려 마음이 담대져서 그 열매의 맛이 달콤하게만 느쪄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고 남편까지도 하나님을 반역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옳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서 에덴동산에서 축출당였습니다.

그들은 마귀가 하나님께 대하여 한 거짓말을 믿었고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나쁜 평판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영적 죽음뿐 아니라 육적 죽음까지 주셨다고 하여도 아무도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보복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불순종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아무도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없었던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시도록 하셨습니다(요1:1-14).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함(요3:16) "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에 대한 마귀의 거짓말을 더 이상 믿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은총과 변함없는 사랑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오늘도 그 손길은 여전합니다.

오늘 여러분께서는 마귀가 하나님을 거짓으로 증거하는 나쁜 평판에 등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개인적 구주로 영접한다면 구원을 받으실 것입니다.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사이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체면을 버리자

삼하6:16-23

 

서론

여기서 체면을 버리라는 것은 그저 인간의 체면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체면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에 다윗은 여호와의 법궤를 오랫동안 빼았겼다가 다시 가져오게 될 때에 너무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습니다. 왕으로서의 체면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영광된 일이라면 체면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면에서 체면을 버려야 합니까?

 

1. 은혜를 받는 데 체면을 버립시다.

열심히 매달리고 부르짖고 하는 사람이 성령 충만을 받고 능력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체면을 차리고 겉치레만 하는 사람은 결코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체면을 생각했으면 그는 구원도 축복도 못 받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멸시하였으므로 소외된 고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나를 멸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뽕나무 위를 올라갔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으므로 좋은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아이들처럼 뽕나무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체면도 다 버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러한 삭개오를 예수님은 꿰뚫어 보시고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리라"고 하시고 그 집을 다 구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체면만 생각하여 교만해져서는 안 됩니다.

 

2.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에도 지난 일에 대해선 체면을 버립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한번도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실수를 했다고, 부끄러운 일을 당했다고 고민하고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실수와 실패가 가득한 곳입니다. 실수하였다면, 그리고 실패하였다면 그것을 회개하고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의 피로 씻음 받은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실수와 허물과 죄를 자복하면 다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의 피로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3절에 보면 "염소와 황소의 피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긍휼하심을 믿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게 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주의 일에 봉사할 때 체면을 버립시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나가서 장사를 하여 그 받은 돈의 배를 이익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하다가 실패하면 돈도 다 잃어버리고 주인한테 혼날지도 모르니 어떻게 하지?"하고 궁리 끝에 그 한 달란트를 땅 속 깊이 파고 묻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주인이 와서 회개할 때 배로 남긴 두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였고, 땅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며 내쫓았습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에 대하여 체면을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신실하게 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에나, 주님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데 있어서, 받은 재능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 그냥 묻어 둔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땅 속 깊이 묻어 두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님께서 꾸짖으며 내쫓을 것입니다.

 

결론

마리아가 자신에게 있어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릴 때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풍습은 긴 머리털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체면을 버리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는 데있어서도 체면을 버리고 열심으로 구해야 합니다. 또한 실수하고 실패했을지라도 주님 앞에 겸손히 회개하고 지난 일에 대해서는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체면을 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거짓의 끝

사5:18-23

 

서론

인간은 항상 어떤 원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즉, 인간에게는 삶의 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본문은 이것을 "끈"이라고 했습니다. 끈은 무엇을 매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 끈이 있다는 것은 일정한 속박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거짓의 끈"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반으로 하고 사는 원리가 거짓된 것치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짓의 끈이 의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상대적 가치를 주장하는 것.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20절)"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가치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언제나 가치를 변동시킬 수 있는 자들입니다. 어제는 신앙이 좋다가도 오늘은 배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유일한 가치는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자신들에게 화가 됨을 알아야만 합니다. 가를 유다는 이러한 삶의 원리를 따랐지만 그 결과는 파멸이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진리는 결코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항상 진리이며 우리 임의대로 변형되지 않습니다. 변형을 시도하는 이에 게는 "화 있을전저"라고 말씀하십니다.

 

2. 외식하는 것.

의인인척 하며 언제나 죄를 사랑하는 삶의 원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8)"고 주님께서 힐책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삶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므로 그분 앞에서는 거짓의 끈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빚기에 유력한 그들"처럼 죄를 사랑하고 있음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벌거벗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2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신들이 가장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항상 기도하고 금식하며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였고 큰 거리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거짓된 사람에게 보이려는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3. 거짓 판결을 하는 것.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거짓의 끈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옳은 증거, 옳은 판단을 하는 척하면서도 자신에게 바쳐지는 뇌물 때문에 거짓 증거를 하고 거짓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23절)"라고 하였습니다 이들도 결국 하나님의 화를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린 거짓판단으로 인하여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삶의 원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하여서 어제의 신앙을 배반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 그대로이며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식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거짓된 생활을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참되고 정직한 판단을 하고 증거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생활이 되지 못하면 거짓의 끈이 우리를 묶을 것입니다. 만일 거짓의 끈이 우리를 묶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과감하게 잘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가라지 비유가 주는 교훈

마13:24-42

 

서론

교회와 사탄의 싸움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어진 것을 압니다.

본문에는 천국 운동이 마귀의 역사로 도전을 받는 비유가 있습니다. 밭에 좋은 씨가 뿌려진 다음 악한 자가 와서 뿌려진 좋은 씨위에 가라지를 덧뿌렸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라지가 자라서 나중에는 좋은 씨의 곡식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가라지를 뽑지 말고 심판 때까지 그대로 두어라 가라지를 쁩으려다가 좋은 곡식까지 뽑히면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가라지 비유에서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가라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38절 이하에 말씀하시기를,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고 중생한 성도들은 좋은 씨를 받는 것과 비유되고 이 악한 씨를 받아서 중생하지 않고 교회를 해치는 무리는 가라지에 비유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괴롭히고 있는 잘못된 이단 사상, 자유주의 사상, 공산주의 앞잡이, 이것들은 처음에 기독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단들은 "우리가 이단"이라고 처음에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 옵니다. 침투합니다. 그래서 양떼들의 신앙의 뿌리를 뽑으려고 합니다. 가라지 같은 이단은 양떼들의 심령을 타락시키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교리적 탈선, 이질적 신학사상들입니다.

 

2.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사탄이 교회 안에서 하는 역사를 잠정적으로 허락하

사실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땅 위에 남아 있는 주의 몸된 교회는 계속해서 이 사탄의 도전을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결단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악의 기원을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왜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어려운 도전, 곧 겉으로 오는 박해와 안으로 침투해 오는 이단을 허락하시는지 그 이유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러한 연단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러한 어려움을 통해서 교회가 성숙해 가도록 성인 신앙을 갖도록 더욱 더 신앙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이 가라지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참 곡식이 섭취해야 할 자양을 받아 먹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 성장, 말씀으로 자라나려고 하는 것을 막는 일이 사탄의 운동인 것입니다. 어떻게 역사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어떠한 인간적인 특수한 신비 체험을 더욱 더 믿게 해서 말씀을 불신케하여 그 말씀의 권위를 낮춘다면 그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4. 이 비유가 주는 교훈은 궁극적 심판이 있다는 진리입니다.

아무리 사탄의 역사가 집요하고 알 수 없다고 하여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가라지는 뽑아서 불에 던지우고 알곡은 거두어서 창고에 들일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지상의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 지상교회는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라지가 뿌려졌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는 가라지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가라지를 다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열심으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지상 교회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저 포도밭의 작은 여우

아2:15-17

 

서론

아가서는 2970년 전에 씌어진 시입니다.

오늘과 같이 살벌하고 공해와 소음과 데모에 시달리고 있는 도시인들은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평화의 동산, 행복의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고 평화스러운 동산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꽃이 한창 피어 있는 포도밭을 짓밟는 새끼 여우떼"입니다. 작은 여우라는 것은 악한 세력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작은 여우는 가장 교활하게 영적 포도원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며 파괴하는 상징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 메마른 땅 위에 하나님께서 심으신 신령한 포도원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을 포도 나무라고 하였고(시80:8-19) 포도원이라고도 하였으며(사5:1-7) 신약 요한복음 15장 1절에는 "내가 참포도 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했고 마태복음 21장 28절에서는 "두 아들에게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교회를 포도원으로 신구약 성서는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령한 열매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은 보기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포도원은 열매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잎이 아무리 무성하고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저주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그렇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위해 교회는 존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인자와 사랑과 봉사생활을 하면서 정의를 이 땅 위에 실현코자 실천하는 일이 거룩한 생활이요, 열매 맺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쓸모없는 쭉정이를 매달아 놓고 열매 인 척하는 가식적 행동은 곧 작은 여우떼의 행동입니다.

 

3.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때때로 해로운 영향으로 인하여 침해를 받기도 합니다.

신령한 교회에도 포도원의 원수들과 같이 악한 세력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꽃과 나무를 해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무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교회 속에 들어오는 원수, 작은 여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릇된 이단 사설, 분열주의, 이중인격, 물욕, 위선 등입니다. 부패와 부도덕과 무질서, 허무 맹랑, 몰상식, 사치함 등의 타락과 부정, 부패상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부패하고 황폐해질 때 사회는 더욱 어지러워지고 국가는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교회를 해치는 것은 사정없이 뽑아버려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우는 이웃을 속이는 데 능수 능란합니다. 이 여우과 같은 사기꾼은 자기만 속이는 데 능수 능란한 것뿐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는 데에도 명수입니다. 그 여우가 곧 누구입니까? 나의 꽃밭에서 양을 치며 선들바람 불고 땅거미 지는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포도밭을 짓밟고 있는 이 작은 여우를 몰아냅시다. 그리고 우리 주님과 함께 꽃밭에서 양을 치며 포도 나무를 잘 가꾸어 축복받는 생활을 어러분 모두가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위선을 경계하라

마6:1-3

 

서론

모든 죄 중에 예수님이 무엇보다도 가장 미워한 죄가 바로 이 위선입니다. 그러나 강도나 창녀라도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하게 나오면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이중 인격자 즉 위선자는 하나님이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위선자가 되지 않습니까?

 

1. 항상 솔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지었어도 또 성도의 신분으로서 지어서는 안될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하게 회개하며 나을 때 용서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위선이 없어야 합니다. 죄가 많고 적고 간에 죄와 거짓은 언제나 쌍둥이처럼 붙어다닙니다. 죄가 있는 곳엔 반드시 위선과 거짓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요(요8:44),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요4:17).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한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진실합시다. 사람들 앞에 진실하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내 양심 앞에 늘 진실을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파손한 뼈와 같아서 신앙생활에 파국이 오고 맙니다.

남이 보는 행동이나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만이 아니 라 은밀한 생각까지도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하고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2. 절제해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에 순종하려면 절제해야만 합니다. 절제할 수 있어야 위선자가 되지 않습니다.

죄악의 충동과 어떤 본능의 욕구가 일어날 때 절제할 수 없다면 하나님 앞과 내 양심 앞에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은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절제할 수 있는 힘은 성령께 의지할 때 성령의 힘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3.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진실하려고 하고 절제하려고 했지마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범죄했을 때에는 범한 죄에 대하여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자와 위선자의 차이점은 바로 죄가 있고 없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범한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위선자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에 대해서 애통이 없습니다. 최대한 사람의 눈에 걸리지 않으면 되는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우리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보면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통회하는 것 뿐 아니라 그 죄를 미워하며 돌아서야 되겠습니다.

 

4.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죄를 회개했는데도 정죄 의식이 들며 불안하면 마귀가 갖다 주는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평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양심의 평안과 담대함을 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했습니다. 이 "모든 불의" 거기에는 포함되지 않은 죄가 없습니다. 어떠한 죄라도 솔직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며, 자복할 때 우리 주 예수의 피로 다 씻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

우리는 늘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늘 우리는 양심 앞에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정직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어떠한 본능이나 감정의 충동에 억제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성령께 의지해서 절제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한 죄에 대해서는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회개하고 자복한 뒤에 예수의 피를 의지해야 됩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위선자가 되지 않습니다.

 

 

속이지 말라

갈6:7

 

서론

세상에 거짓이 들어오게 된 원인은 아담이 범죄한 후였습니다. 뱀이 하와를 속이고 하와는 아담을 속였습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된 핑계를 대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그는 형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거짓을 심는 자는 결국 그 자신의거짓으로 인해 거짓의 열매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1.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전3:18).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부족함과 허물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가장 똑똑하고 가장 현명하며 지혜로운 사람인 줄 압니다. 즉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자기를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가장 미련한 자인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참 지혜자는 주님뿐이심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남을 속이지 말라(창27:12).

창세기에 보면 이삭의 둘째 아들인 야곱은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았고 아버지인 이삭을 속여서 장자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가로했습니다

그렇게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그의 생애 동안 자신이 한 거짓말에 대한 보응을 받았습니다. 형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여 있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하면서 그는 외삼촌에게 열 번이나 속아야 하는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은 결국 자신도 역시 남에게 속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행5:3 -4, 갈6:7).

하나님을 속이려는 자는 자기를 속이려는 자나 남을 속이려는 자보다도 훨씬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소유를 판 돈의 절반은 감추고 반만 사도들 앞에 내놓다가 사도들 앞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갈6:7). 하나님을 속이려는 자는 거기에 대한 보응을 곧 받을 것입니다(행5:3 -4).

 

결론

거짓의 혀는 순간 뿐입니다(잠12:19). 순간의 욕심때문에 거짓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속여서도 안되고, 남을 속여서도 안 되고 더구나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거짓은 결국 자신에게 거짓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속고 속이는 자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건 강

성 경 활 용

1. 건강해 지려면

(1) 지혜의 말씀을 얻음

(잠4:22) 그것을 얻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2) 속 사람을 능력으로

(엡3:16)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건강하게 하옵시며

(3) 예수님으로

(막5:34)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니라

(4) 주님의 능력으로

(엡6:10)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건강하여지고

(5) 기도로

(시39:13)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6) 깨어 믿음에 굳게 서면 건강해진다.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7) 악을 떠나면 건강해진다.

(잠3:7-8)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2. 먹을 것과 먹지 말 것의 율법

(1) 짐승의 찢긴 고기나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라.

(레22:8)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신14:21)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2)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레7:27)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겨지리라

(레19:26)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3) 먹을 수 있는 짐승들

(신14:6) 무릇 짐승 중에 굽이 갈라져 쪽발도 되고 새김질도 하는 것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라

(4) 먹을 수 있는 물고기

(레11:9) 강과 바다와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5) 먹을 수 있는 새들

(신14:20) 무릇 정한 새는 너희가 먹을지니라

 

3. 건강한 자에 대해

(1) 의원이 쓸데없음

(마9: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2) 아버지가 기뻐함

(눅15:27)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관련원어풀이

1. aPer]m' 마르페

(1) 고침, 치료.

(대하21:18)

(2) 원기 회복.

(잠4:22)

 

2. ijscuvw 이스쿠오-

(1) 강하다, (몸이)건강하다, 튼튼하다, 건장하다.

(마9:12, 막2:17)

(2) 힘을 가지다, 위력을 발휘하다.

(행19:16, 20)

(3) 유용하다.

(갈5:6, 히9:17)

(4) 쓸모가 있다.

(마5:13)

(5) 할 수 있다.

(마8:28, 막5:4)

 

3. uJgihv" 후기에-스

(1) 건강한, 몸이 성한.

(마15:31)

(2) 건전한, 싱싱한, 상치 않은.

(딛2:8)

 

4. uJgiaivnw 후기아이노

(1) 건강하다. 건전하다, 육체적 건강,

(마8:13, 눅5:31)

(2) 기독교 교훈의 건전함.

(딤전1:10, 딛1:9)

설교예화자료

크리스찬과 건강

 

얼마전 일간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쏟는 분야가 무엇인가를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건강이 단연 제일 큰 관심사로 나타났는데 20∼30년 전만 해도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비중이 컸던 것에 비하여 그 동안 상당한 의식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주남선 목사가 임종시에 남긴 말은 대단히 값진 진리의 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휴식하는 것이 주의 일인 줄 알지 못했다. " 아무리 믿음이 투철하고 오직 예수를 위하는 일심으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건강을 학대하면 병으로 쓰러지든지 단명하는 불행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직 바꾸지 않고 계시는 자연 질서 입니다.

로버트 맥체인은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을 하면서 의미 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전파할 메시지와 타고 다닐 말을 주셨다. 그러나 나는 말을 너무 혹사하여 죽을 지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 메시지를 전할 수가 없게 되었다. " 그가 평소에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건강 자세는 은혜와 책임 중 어느 한편이라도 등한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풍성한 수확이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눈물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책임이 없이는 누릴 수 없는 축복인 것입니다. 은혜와 책임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균형을 이를 때 영육간의 건강을 유지하는 닻과 밧줄의 구실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분노와 웃음

 

일노일노(一怒一老)요, 일소일소(一笑一少)라.

옛부터 전해 오는 말에 한번 노하면 한번 늙어지고,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훌륭하고도 운치와 재치가 넘치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좌우명처럼 여겨서 벽에다 크게 써붙이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주 노하면 늙어지고, 드디어 '홧병'까지 생겨 죽는다는 경고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예로부터 "생명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는 사람은 피로도 느끼지 않으며, 눈물을 흘릴 일도 없다. 그리고 고칠 일도 없고, 후회할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노자도 "인간이 고통을 피하고, 이 자연 법칙에 순응하면 병도 없어지고, 장수할 수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욕망이 너무 많아서 자기의 현재 모습에 항상 불만족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건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기는 일에서 불만의 요소를 발견하는 것보다 만족할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야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

 

 

용맹스러운 병사

 

매우 고통스러운 병을 앓아 금시라도 목숨이 넘어갈 듯한, 안티고누스(Antigonus) 부하였던 병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든 출정에 있어서 그는 가장 격렬한 전투에 항상 앞장을 서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병으로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기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장군 안티고누스는 그 사람의 용기에 너무 감동하여 유명한 의사에게 보내 그의 병을 낫게 해주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 용감한 병사는 선두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험을 찾는 대신 그것을 피했고 전장에서 그의 목숨을 거는 대신 그의 목숨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의 시련이 그를 잘 싸우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건강과 평안은 그의 병사로서의 유용함을 파괴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짐을 덜거나 어떤 병에서 고침을 받거나 혹은 어떤 근심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정신적이고 내재적인 힘과 영향에서는 지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되찾고 난 후 다시 건강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지고 방만한 생활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건강을 소중히 보존하고, 병이 치유된 희랍 병사처럼 소심한 병사가 아니라 세상의 악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용맹스러운 병사가 됩시다.

 

 

주님의 처방

 

어떤 전도사가 개척지에서 매우 중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슬픔이 더하였던 것은 그녀에게 돈이 도착하지 않아서 자신이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날마다 오트밀과 깡통에 든 우유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 전도사는 점차 회복이 되었으며 꾸준히 30일 동안 오트밀 음식을 먹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돈을 받게 되었고 다른 것들도 얻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픈 동안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봐주지 않았다는 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휴가 때가 되자 그녀의 큰 시련에 대하여 말을 하였습니다. 한 의사가 그녀의 병의 증상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는 어떤 소화 불량이 있었다는 것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에게 돈이 도착했었더라면 당신은 오늘 나에게 여기서 말할 수 없었을거요. 우리가 그 병을 위하여 항상 처방하는 음식이 바로 30일간의 오트밀 식사랍니다. "

 

 

만병의 원인인 과식

 

병에 걸리면 식욕이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동물도 상처를 입거나 아플 때는 먹지를 않습니다. 이른바 '단식'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하여 약이나 수술 등의 치료를 받지 않고도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연이 부여해준 유일무이하고도 뛰어난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이용하여, 옛부터 단식은 질병 치료나 건강 증진에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대 그리이스의 역사가 혜로도투스는 "이집트인의 건강과 젊음의 근원은 한달에 사흘씩 하는 단식과 관장, 구토에 의한 위장 세정에 있다."고 서술했습니다. 또 그리이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단식을 하면 두뇌가 명석해진다. '고 생각해서 자주 정기적인 단식을 했다고전해집니다.

그리고 이슬람교 · 힌두교 · 유태교 · 그리스도교 등 세계 각지의 종교에서도 심신의기능을 고조시키기 위한 단식이 하나의 의식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질병의 거의 대부분은, 과식에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섭취하는 음식물은 배설이 대단히 어려운 것들입니다. 소화 흡수가 지나치게 잘되기 때문에 생기는 변비, 이것이야말로 만병의 원인인 셈입니다.

 

 

요리책

 

이상구 박사가 주장하는 식생활 비법이 본격 요리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일체의 인스턴트 식품을 배제하고 신선한 자연 식품만을 재료로 쓰고 있습니다. 식품은 전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해졌지만 범람하는 가공 식품으로 인한 식품 공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요즘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방 섭취를 줄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기름대신 물로 볶고, 화학조미료 사용을 피하며 짜거나 자극적이지 않도록 조리하고, 야채 삶은 물을 국에 넣는 등의 방법으로 영양소의 허실이 없도록 조리하는 이상구 박사 댁 특유의 조리 비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균형 있는 식사, 규칙 적인 운동, 사랑, 믿음, 절제가 이루어내는 3박자 건강 관리론을 곁들여 소개하고 있어 건강 때문에 식생활을 개선하려는 사람에게는 더욱 믿음직한 가이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건강

 

세계보건기구(W.H.0.)에서 내린 건강에 대한 정의를 보면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 없는상태가 아니라, 신체적 ·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과 조화를 이룬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짓눌림이 없는 평화스러움과 고통 없이 잘 기능하는 안녕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내 · 외적인 잘의 안녕 상태(Well-being)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건강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산 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전체적인 삶에서 안녕과 조화를 이룬 온전한 상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 안에서 능력있고 강한 삶을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강하도록 도와주는 발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말씀의 젖을 마시고 오염 되지 않은 기도의 공기를 마심으로 은혜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운데서 점점 자라나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제한, 장애, 불구, 기형에 구애됨이 없이 새로운 차원에서 건강한 삶을 누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매일매일 영의 음식을 섭취하고 호흡하며, 활동해야 하겠습니다.

 

 

식품 오염

 

식품은 인간의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안전하고 영양가 높은 식품은 건강을 유지하는 데 기본이 됩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생활 환경이 복잡해지며 오염이 가중되어 가고, 특히 생산되는 모든 식품 원료에 과거에 없던 인체에 해로운 유해물질이 첨가되면서 식품의 안전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단 한 사람의 협박 편지로 전국민을 공포속으로 몰아 넣었던 '독극물 위협사건'을 보더라도 식품의 안전성이 국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르는게 약이다. "라는 말이 위로가 되겠지만, 우리는 매일 알게 모르게 어느 정도 독이있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것이 먹자마자 심한 증상을 일으키고 심지어 죽음까지 몰고 온다면 우리는 두려워서 대단히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량씩 장기적으로 섭취하여 만성 중독을 나타내는 것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문명을 만들고 달까지 정복했다고 교만해 하지만, 실상은 환경을 파괴시키고 생태계의 변화를 일으킴으로 식품의 외적 환경은 날로 악화될 조짐입니다. '과학만능'을 부르짖지만, 과학의 한계를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문명의 발전 배후에 심각해 가는 식품 오염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웃음과 건강

 

과학자들이 웃음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 결과 많은 것들이 발견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웃음은 인간의 신체에 있는 모든 중요한 기관에 실제적으로 깊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웃음은 긴장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신체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에 활력을 불어넣어 줍니다. 힘들고 침울한 기분이 들더라도, 억지로라도 자신의 얼굴에 웃음을 띠울 수 있다면 우리 몸에 매우 좋은 영향을 줄 것입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웃으면 건강해진다는 말은 이제 의학적으로도 선명하게 밝혀진 사실인 것입니다.

 

 

치유의 힘

 

양서류 동물들은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도 있고 또 육지에 오르면 보통 짐승들같이 다리로 걸어다닐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인간도 비유컨대 마치 양서류와 같아서 우리의 삶도 양쪽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의 묘미는 영혼과 육신이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않고 그 배분의 비율이 어떻든간에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혼은 육신을 그리고 육신은 영혼을 서로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며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서로가 협조해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 무엇이 앞장서 나가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쪽은 뒤에 물러나 있을 따름입니다. 이 양쪽이 서로 잘 협조가 된다면 경우와 상황에 따라 앞장서기를 교대하면서 살아나가는 데 생기는 문제도 해결하고 자신의 참된 건강도 누릴 수 있습니다.

불행한 것은 영혼과 육신이 대립하고 또 서로가 상대를 부정하는 경우입니다. 육신을 앞장세우다 못해 전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무시하고, 전혀 영혼에 대한 관심 없이도 일생을 뜻있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도 많고, 또 반대로 현실 원칙이나 육체를 무시하고 영혼의 근원만을 추구하는 불균형의 상태도 우리가 흔히 보는 현상입니다. 한 가지흥미있는 사실은 인간이 한쪽만을 보고 거기에 완전히 매혹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안이만을 찾는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즈음 별의별 사교나 광신의 집단이 나도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심리적 경향 때문입니다.

인간의 건강에 대한 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질병이나 불건전한 상태가 회복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치유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치유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위대한 힘입니다.

 

 

건강하게 삽시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8.15해방, 그리고 6.25를 겪은 193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30여년 동안 온국민이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면서 영양 부족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 유아 사망률이 세계에서 으뜸이었고, 살아남은 어린이들의 성장 발육도 좋지 못하여 폐결핵을 비롯한 각종 전염병에 걸리는 예가 흔했습니다. 어른 또한 기력과 체력이 약해서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고, 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평균 수명은 40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사회적인 여건이 크게 개선되면서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식생활도 많이 좋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아직도 영양섭취가 부족한 저소득층이나 빈곤층이 상당히 있는 반면 일부 고소득층에서는 영양섭취가 지나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 자신의 식사를 잘 살펴보면 영양섭취가 고르지 못하여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영양섭취가 부족한 경우는 물론 영양섭취가 지나치거나 불균형을 이루는 것도 건강을 해치고 질병에 걸리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구미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서 1982년도 국민영양조사 결과 에너지(열량) 섭취 상태를 보면 적정량을 취하고 있는 사람은 전체 국민의 16%에 불과하고 좀 부족한 사람이 15%, 많이 부족한 사람이 10%정도인 반면 좀 지나친 사람이 30%이고 많이 지나친 사람이 29%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들의 영양섭취 상태가 대체로 적정수준이지만 모자라는 계층도 상당히 있고 지나친 사람은 전체의 5~8.5%라는 보고가 나온 바 있는데, 선진국의 경우에 비추어보면 비적정 수준의 비율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망 원인을 살펴보면 1950∼60년대에는 잘 먹지 못해서 폐결핵, 폐렴 등의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으뜸을 차지했는데 1970-80년대에는 암이나 뇌혈관질환(뇌졸증)으로 사망한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심장병, 고혈압, 암 등의 성인병이 으뜸이 될 것으로 의사들은 예측하고 있는데 이들 질병은 우리 식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최근 의료보험 관리공단에서 발표한 자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79년 대비 84년에 총 진료건수가 6.34배 늘어났는데 고혈압성질환 진료건수는 7.98배, 당뇨병 진료건수는 무려 11.03배로 늘어나 성인병의 급격한 증가를 보여줍니다.

 

 

어록·시·묘사

 

건강은 참으로 귀중한 것이다. 이 것은 실로, 사람들이 그 추구를 위하여 시간 뿐 아니라 땅이나 노력이나 재보까지도, 아니 생명까지도 소비할 값어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다.

(몽테뉴/ 수상록)

 

건강은 신체의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에디부인/ 과학과 건강)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신체에 머문다.

(유베날리스/ 세계문화사 로마편)

 

건강은 제일의 부다.

(R.W. 에머슨/ 인생의 방법)

 

건강한 몸은 정신의 사랑방이며, 병든 몸은 감옥이다.

(F. 베이컨/ 학문의 진보)

 

병은 천 가지나 있으나 건강은 한 가지밖에 없다.

(S. F. 베르뇌)

 

건강의 유지는 우리들의 의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생리학적 도덕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E. 스펜서)

 

진단에 의하면 감기는 실로 일장의 희극이 아님은 물론이요, 반대로 그것은 모든 만회할 수 없는 비극의 서막을 의미한다.

(김진섭/ 생활인의 철학)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것이 자본이지만, 그러나 영원토록 변함없는 자본은 자신의 건강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지만, 건강한 사람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 본이며 가장 확실하고 안심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자본을 가지는 것이다.

(송건호/ 가장 확실한 자본)

 

건강에는 자유가 있다. 건강은 모든 자유 중 제일가는 것이다.

(H.F. 아미엘/ 일기)

 

과대한 요양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병이다.

(F. 라 로슈푸코)

 

건강은 노동으로부터 생기며 만족은 건강으로부터 생긴다.

(W. 피트)

 

부와 수면과 건강은 한 번 잃었다가 되찾을 때 잘 알 수 있다.

(장 파울/ 꽃, 과실, 가시)

 

배우지 못한 가장 무식한 사람도 병약한 지식인보다 행복하다.

(T. 제퍼슨/ 문서집)

 

건강한 몸을 가진 자가 아니고는 조국에 충실한 자가 되기 어렵다. 좋은 아버지, 좋은 아들, 좋은 형제, 좋은 이웃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J.H. 페스탈로치)

 

즐거움과 절제와 충분한 수면은 의사와의 인연의 문을 닫는다.

(H.W. 롱펠로우/ 잘 듣는 약)

 

건강은 이를 데 없이 값이 비싸고 잃기 쉬운 보배이나 그 관리 상태는 한없이 초라하다.

(쇼보 드 보센)

 

병은 신체의 장애이지만, 마음에 두지 않는 한 의지의 장애는 아니다.

(에픽테토스/ 제안)

 

병은 정신적 행복의 한 형식이다. 병은 우리들의 욕망, 우리들의 불안에 확실한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A. 모루아/ 사랑의 풍토)

 

야단스러운 양생(養生) 덕분으로 겨우 자기의 건강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해낼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F.라 로슈푸코/ 도덕적 반성)

 

병은 따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한 부분으로서 생명과 같이 사는 것이다. 생명이 강하면 병은 약하고 생명이 약하면 병은 강한 것 이것이 싸움이다.

(김광섭/ 병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우리는 누구나 어떤 면에선 병들어 있는 것일세. 병의 증세를 찾지 못했을 때 그것을 건강이라고 부를 따름이지. 건강이란 상대적인 말에 불과하거든.

(T.S. 엘리엇/ 가족의 재회)

 

넋의 병은 신체의 그것보다도 위험하고 무섭다.

(M.T. 키케로)

 

사슴피 산돼지 노루 너구리 오소리 뜸부기/ 좋다는 건 지렁이 굼벵이 구데기도 다 잡아 먹고/ 중풍도/ 중증에 걸려/ 비실대는 서울 낮달// 체력은 국력이다 올림픽은 비전이다/ 죠깅 등산 에어로빅 릴리리 쿵쿵 뛰고 솟고/ 손톱 밑/ 가시만 들어도/ 벌벌 떠는 서울 낮 달

(성권영/ 서울 낮달 · 13)

 

분에 옮긴 제비꽃은/사흘째 몸살인데/ 이 한 장의 천연색 사진에서 사라진/ 그 저녁을 어디로 찾아가나

(박제천/ 그 저녁의 제비꽃)

 

벌들이 모여들어 꿀을 뽑아 내지만/ 그것은 비린 액체액에 불과할 뿐/놈은 이 때만 되면 꼭이 학질을 앓아 눕고 만다. //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몸살로/ 마파람이 불어 올 때마다/ 입술이 타는 갈증으로 떤다.

(조병기/ 밤 꽃)

 

진물이 나고/ 부스럼 헌데가 많던 애들,/ 열이 많고 골치가 아프고/ 고뿔을 앓던 애들./그런 모든 병 앓이들에사/ 당신은 풍성하시다.

(김남웅/ 은혜)

 

퍼마셔도 이내 목타는/ 야곱의 우물밖에 모르는 허물 많은 여인이

(임성숙/ 우물가의 여인)

 

고요로워라/ 병상의 고통도/ 그대가 몸을 기울여/ 내려다보고 있으면// 고통도 슬픔도 죽음까지도/ 그대가 지켜주고 있으면/ 고요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워라.

(김혜숙/ 병상을 지키는 간호원에게)

 

대학병원 내과 병동/ 어둡고 긴 복도를 걸으면/ 저승까지 울리는/ 무겁고 음산한 발자국소리/ 내 가슴 밟고 오는 내 발자욱 소리/ 쿵쿵 울린다/ 무덤에서 살아나온 죽어가는 소리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빠져 나온다.

(홍윤숙/ 대학병원 내과병동)

 

물과 땅의 모든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빛은/ 새 봄의 혈액을/ 한없이 자아올리시는/ 설일(雲日)의/ 주님.

(김남조/ 겨울 그리스도)

 

에바다 하시니/ 벙어리도 말을 하고/ 귀머거리도 말을 듣는다. // 하늘도 열리고. 땅도 열리니/ 셀 수 있나 보라/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알.

(최규철/ 에바다)

 

오, 그대여/ 이젠 일어설 힘조차 없으니/속히 오셔서 옷자락만이라도 드리워 주시면/제 병이 낫겠나이다//그대를 향하여 치솟는/내 영혼의 갈망이/ 영원히 영원히/ 어쩔 수 없는 불치병이 되었나이다.

(유선곤/ 분수)

 

누가 이 아침/ 내 목구멍 속에 덫을 놓았는가/ 차마 뱉을 수 없는/ 이 시대의 껄껄한 가래침 한 점//온 육신의 무게를 중심에 받친/생존의 한치 칼날이/ 겨울의 마지막 통증을/잘라내고 있다.

(이광수/ 태절조)

 

아픔보다/ 사람을/ 더 잘 여무게 하는 바람은 없노라.

(임춘남/ 성경)

 

방안 공기 속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이/무거운 눈꺼풀을/ 깊은 수면 안에서 닫히게 한다.

(이영옥/ 홀로된 밤)

 

우리는 병을 닦고/ 깨끗이 잊고 싶어,/ 다림질한 하늘가에 꽃 한송이 몰래/ 던져주고 싶어,

(최명희/ 그리운 시대에서 · 1)

 

오늘도/ 내 열 손가락에 되살아/ 지혈되지 않는/ 당신의 보혈이 물들었습니다.

(김성자/ 봉선화)

 

그 병도 죄 짐이런가/ 뼛속들어 우는 잠

(진복회/ G단조)

 

슬픔은 슬픔에게 던져/ 주어라/ 헤아리지 말고/ 해를 바라보며 탄식하지/ 말고‥‥ 터지는 아픔은/ 두고두고 아껴쓰지 말고 아픔에게 던져 주어라.

(박서원/ 슬픔은 슬픔에게)

 

은순이는 잠을 자면서도/ 눈을 뜨고/ 잠을 자면서도/ 평소보다 더 큰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박서원/ 악몽)

 

여보, 그처럼 우리들의 모든 강물도 흐르게 하여/ 소금 바다에서 만나 조금쯤은 깨끗해지고/ 건강한 힘을 얻어서/ 우리들 마음속의 물고기와 물풀들/ 자라게 할 수는 없을는지요.

(나태주/ 비단강을 따라서)

 

싣달타는 슬픔이란 어떤 것임을 생각해/꿈이나 늙고 병들어 죽는데 골똘했다/드디어 참됨이 무엇인가를 터득했느니/ "이는 모든 사람에게 생긴다"/ 불행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수사이/ 아시아의 빛)

 

쟁쟁한 햇살 속에 찾아 간/ 고요하고 시린 물맛이나/ 화려한 광고 위에 얹혀/ 예고도 없이 목젖에 닿는 음료수 맛도 / 활동사진처럼 돌아가다 낮잠을 청하면/ 아무도 모르게 만나게 되던 아가의 얼굴

(정계화/ 입덧)

 

애당초/ 타고난 그리운 숨결하나/ 찬이슬 선혈로/ 알알이 맺히어/ 폭폭한 가슴 터뜨리는/ 각혈, 각혈

(박영남/ 석류)

 

그대가 훌훌/ 버리고 간 길목에/ 이승의 하루는/ 몸살처럼 무겁게/ 주렁주렁 덤으로 맺히는/ 목숨

(박영남/ 10월 나무)

 

씻어도 씻기어지지 않는 환상/ 고통은 절정을 이루라/ 가끔씩은 명상 속에서/ 새로이 태어나는 나의 육체에게도/ 퍼렇게 퍼렇게/독은 퍼져 죽어가거라

(박서원/ 학대증)

 

몸살끼가 있는 날/ 시름시름 안개병을 앓는다. // 그만그만한 증상으로/ 그만그만하게 앓아야 하는/ 낯익은 아픔/ 살앓이// 과로에 익숙한 육신/ 살아있는 날들의 확인이/ 적당한 무게로 얹혀오는/ 지병// 미열이 아까워/ 아스피린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권천학/ 살앓이 · 4)

 

온종일/ 꽃나무에 물을 주다가/ 두통을 앓다가/ 잠을 깨다가//꿈을 꾸다가/ 가위에 눌려 허덕이다가,

(권천학/ 살앓이 · 2)

 

높지도 낮지도 않는 기억이/ 작열하는 의식으로/ 피부에 달라붙어/ 피부는 슬픔을 감추는 신비

(박서원/ 병 · 1)

 

누가 수런 댔다/ 몹쓸 병에 시달리다 죽었단다/ 문병 온 사람들의 얘기다// 이승과 저승/참 얼마 안되나? // 허락받은 순서로/ 질천한 죽음 그 아래/ 한칸 저쪽의 방으로 가 본다.

(류재봉/ 중환자실에서)

 

산과 같이/ 굴뚝 뒤에서 매운 기침이나 하며/ 달려가기만 하는 강물을/ 놓아 보내는 일이다.

(김현숙/ 살아가며)

 

눈돌린 곳마다/ 이상한 향기가 퍼지고/ 배에는 생수가 솟는다// 봄내 앓던 병도/ 어디로 가고/ 몸은 구름 위에/ 떠있다.

(이성교/ 하늘 가는 길)

 

철근과 나사로 조립된 도시들은 다시 병이 도지고

(이성선/ 저녁 안부)

 

현대의 나병은 의약으로 쉽게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편견과 차별의 골짜기로부터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도/ "그 사람은 깨끗하다"고/ 레위기에서 문둥병이 나은 사람에게 증명하듯이/소리높이/ 아아 소리높이,

(토우 가즈코/ 문둥병자를 고치심)

 

목을 조였다 등을 밟았다/ 신경성 세포 종양이 훅 터져/ 흘러 내리는/ 어디에서/ 느릿느릿 꽃이 피었다/구급 사이렌에 실려 꽃이 피었다.

(엄승화/ 봄날)

 

예순에서 다섯 모자란 나이에/ 간경화를 앓고 있는 아부지는/ 누가 보기에도 시한부 인생임에 틀림없는데 아직도 일 욕심엔 장정에 지지 않는다.

(이재무/ 아부지)

 

대사관에는 무도회가 열리고/ 거기선 바보스럽고/ 병든 늙은이들이/ 세계를 나눠 먹고 있네.

(르노/ 아이들은 죽어가네)

 

이별에 닮은 손들 젖은 창 앞을/ 덮을 뻔 튀어오르는 토사물 다시/ 두 눈 가리니

(이상희/ 구토)

 

새벽 대중 목욕탕에서/코피를 쏟다가/ -모로 누워 볼까/사카무니 열반 드시던 자세/아무도 깔아주지 않던 내 생의/ 주단을 스스로 펴고/ 흠뼉 젖으면서/ 오, 빈혈만 아니라면

(이상희/ 쉬고 있는 권투사)

 

여자는 그 순간 고뇌의 어두움에서/ 기쁨의 빛 속에 놓이게 되었다/ 손장난이 아니었다/모두가 강한 힘으로 이루어진 사실로서/ 공기조차 팽팽하게 퍼져 있었다.

(토우 가즈코/ 혈루증의 여인)

 

내 눈 속의 공포를/ 좀 크게 그려주세요/송곳니를 번쩍이며/ 저는 지금 가야 해요/빈혈이거든요/ 몹시 어지럽거든요

(이상희/ 드라큐라)

 

누구를 기다리나 눈먼 거지 바디매오/ 어둠이 드리운 여리고 성문 가에/ 무리들이 몰려온다, 그 떠드는 소리-/ "나사렛의 예수다 ! "/ 폐부를 찌르는 듯 크나큰 외침 소리,/"예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롱펠로우/ 소경 바디매오)

 

내 침상이 무덤이 되고 내 집에/ 어둠이 짙어진다 한들 어떻겠습니까?/ 내 건강한 날이 사라지고 죽은 자들 가운데 내가 끼어 누워 있다 한들 어떻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지금은 비록 시들어 버린 꽃이지만/ 당신의 위대한 힘에 의하여/ 다시 싹이 돋아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릭/ 병상에서 하나님께)

 

분에 옮긴 제비꽃은/ 사흘째 몸살인데

(박제천/ 그 저녁의 제비꽃)

 

막차를 타고 선운사에 가보면 모두 다 알게 되지요 남의 상처도 내것처럼 아프고 별스러운데 다 슬프고 서러워 밤새도록 불면의 베개에 이마를 파묻을 때 그것이 바로 삶의 방식이 아니겠느냐고 아득히 물어오는 동백꽃이 있다는 것을

(전연옥/ 단운사)

 

한번씩/ 허물벗는 몸살에/ 물 속 깊숙이 웅얼진 상처 꺼내/ 하얗게 번진 피를 뿌리며/ 새 살을 끌어올릴 때마다/‥‥ 썩은 것 도려내/ 신선한 가슴으로 다시 태어나/ 언제나 시퍼렇게 살아 있었음을

(김성식/ 여름 · 항해일지 - 솔로몬 해역을 지나며 -)

 

설매화 잠깬 향기에/ 가슴앓이 발병한다.

(정원만/ 춘매)

 

할머니의 황달은 밥상에서 식어가는/ 청국장 위에 뜬 배춧잎처럼/ 누렇게 변해갔다.

(이용범/ 녹지 않는 강)

 

속앓이가 피워낸/ 여린 귀에 매달린 나./ 네게로 건네는 사연만이 빗금 위에 흥건하다.

(박경용/ 애가-침묵)

 

우리들이 보면/ 너희는 다 도둑놈이고,/ 너희들이 보기에/우리들은 다 정신병자다. // 그 중간에/ 국민이 있다.

(김대규/ 중도파 선언)

 

오늘 아픔은/ 잠으로 달래며/ 배를 타고 가듯이/ 꿈을 꾸고 가듯이/ 그렇게/ 세상을/밀고 가련다.

(신재연/ 수련)

 

달빛 창을 적셔/ 밤을 앓던 꿈자리에// 소쩍새 피빛 울음/ 어둠을 사루는데//‥‥ 남몰래/앓아온 정이/ 안으로만 타는가.

(최철훈/ 동백)

 

중금속이 든/ 수돗물만/ 안먹으면/ 굴절각/안경을 안써도 되는데// 살갗마다/ 반점이 번져/ 금붕어 씨는/ 속이 편치 않단다.

(최시병/ 어항 점묘)

 

소록도 가는 길에 때 아닌 찬비 뿌려/ 가슴에 맺힌 슬픔 더 아련히 쓰리네//‥‥ 걸음마다 피 맺히어 발가락이 미어지어/ 발에 채이는 가랑잎도 피빛으로 피빛으로 물드는구나.

(박화목/ 소록도)

 

아픔마다 몸을 주는 감초더라.

(김광회/ 상평통보전)

 

강나루엔/ 언제부턴 가 떠나지 못하고/ 잠겨있는 거룻배 한 척/실어증에 걸려/온 길을 되걷고 있는/두 사람의 생각 속엔/독버섯의 화려함만/ 익어간다.

(유화은/ 강마을 저녁)

 

각성의 반딧불들이/한 시대의 어둠속에서/ 빈혈로 점멸하듯이/ 이 낡은 회랑을 밤고 가는/ 일상의 명료한 보행.

(이해령/ 지하도에서)

 

우리가 진정 사랑할 것은/ 우리 심장에 새겨둔 진실의 검/ 내버려야 할 것은/ 우리가 진정 내버릴 것은/우리 가슴에 곪아버린 죄의 파편

(이승록/ 목포)

 

헝클어진 날줄과 씨줄의/ 밤의 비단끈을 찾아 헤매는/ 육신의 혼령은/ 어느덧 불면의 객 기에 현혹당하고 있다/ 위(胃) 한 쪽이 쓸려나가는/ 굉음의 파도는/ 이윽고 무서운 짐승으로 변하여/ 밤의 얼굴로 등장한다.

(신재연/ 불면)

 

3월의 봄은/ 1 · 2월 꽁꽁 언 땅속에서/ 태어난 미숙한 인큐베이터 속의 아기

(김종운/ 잃어버린 봄)

 

아파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이기를 바랍니다.

(유병우/ 기도)

 

천차가 천치임을/그는 모르나/ 천치가 천차 아님을/ 그는 안다. // 천치를 외면한/ 세상은 온통 북새통/ 이를 지켜보며/ 천차는 웃고 있다.

(하오주/천차의 노래)

 

사과조각만한 위와/낡은 수세미 같은 폐로/마른 기침을 토하고/ 식은 땀을 씻었다 그는/양코에 엉킨 숨을 한없이/ 잡아두고 싶어서/갈채받는 씨름 선수처럼/ 다시 살고 싶었기 때문에/그래서 성경을 저주하고/ 다시 살 수 있다면/ 마귀야 날 좀더 숨쉬게/ 해다오 했을까 그는.

(이승록/ 임종)

 

머쓱케 만들던/ 봄비 가라앉는 종합병원/응급실의 숨가쁨‥‥

(이승록/ 마담자매)

 

횐사발 가득 담긴/ 쓰디 쓴 한약 같은/ 인생살이

(이영옥/ 인생)

 

벼랑에 서서/ 토양이 부족하여 가난하셔 도/결코 비굴하지 아니하시고/ 약 한 줌 제대로쓰지 않아/ 벌레들 함부로 기어들어도/ 결코 병으로 쓰러지지 아니하시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이름/ 부활꽃 진달래여 !

(임춘남/ 부활꽃)

 

스물세살 꽃나이에/ 교통사고를 만났던 아내는/ 살려달라 비명치는 그 어느 외진 골목길에서/ 부러진 다리 세 번 들이받아// 살려달라 비명치던 아내를/그 기사님 살려 달라고‥‥// 아내도 운전사도 모두가 불행한 사람들이었지/ 모두가 나라법에 치인 사람들

(이동녘/ 그믐밤 노래)

 

약이 되고 싶었습니다/ 산삼 녹용은 아니지만/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 내신/ 그런 약이고 싶었습니다// 소떼를 살찌우는/ 목초이고 싶었습니다.

(안광성/ 안타까움)

 

우리가 시방 헤어지는 것은/ 어느날 훌훌히 병든 육체를 벗고/ 가없는 세월을 살 영원을보듬고/ 지구를 떠나는 연습입니까?

(배명식/ 우리가 시방 헤어지는 것은)

 

당신이 살라시면 삽니다/ 피투성이 되어/ 당신 앞에/ 하염없이 아픔을 호소하면서/ 내 이제까지 왔다가 또 가는 길에/ 피투성이라도 살라시니 삽니다.

(이연자/ 피투성이라도)

 

상처 구석구석에/ 님을 그리는/ 그리움 투성이가/ 오직/ 너를 지탱하는 힘이구나// 끝내는/ 네 몸을 기름으로 짜내어/ 열 손가락 마다/등불 밝혀 들고/님이 오시길 헤아리는 여인이여.

(유선곤/ 봉숭아)

 

구슬피 울어 제끼는 노래만이/ 가슴속의 응어리를 녹이겠구나.

(유선곤/ 편지)

 

받은 상처 아픈 마음을 씻어주는/사랑의 봄비이고 싶다.

(정일홍/ 나는 봄비이고 싶다)

 

보라의 라일락 가지에서 문득 만났다. / 주름살 하나 더 느신 하나님

(김선영/ 라일락 나무)

 

세상 문을 열고/ 말씀의 그분이 오셔서/ 찔림을 받으실 매/ 나를 둘러싼 허물의 성이 무너졌지만/ 영적 장님이었던 나는 알지 못했다/ 어둔 계곡에서 방황하는 무리나/ 눈을 뜨고도 잠만 자는 이는/ 채찍에 맞은 그분의 피로/ 아픔의 고통이 사라졌음을 알지 못한다.

(김지향/ 내 작은 입으로)

 

하필이면/ 꿈을 키우는/ 사람들이/ 저녁이면은 억울한 헛기침을 토하나

(박근영/ 오월의 기도)

 

항시 열오른 이마에/도타운 손 얹으신 님은/ 창천 높은 곳에서/ 낮은 나를 내려다 보시어요.// 가슴 앓는/내 병상의 밤을 밝히시어/ 뿌려 놓으신 섬섬한 눈물은/ 새벽 못가에서 날아오르는/ 금빛 햇살이어요.

(엄창섭/ 기도 · IV)

 

깊은 밤, 병상의 창백한 신음이/ 목숨의 불꽃 사를 때

(엄창섭/ 기도 · IV)

 

풀잎의 혼은,/ 그 안에서 실눈으로 내다보며/ 기도하고 싶은 열기를/ 가는 손목으로 진작합니다.

(유경환/ 풀잎의 심층부에서)

 

깊이 잠든 나의 믿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유안진/ 부활송)

 

꽃잎지면/ 사는 것도 내것은 아닌데/ 허리통증 아릿히/ 부끄럽게도 또 하루 추스리며/때 없이 일어나는/ 그리움, 애터진 세월의 속살을 캐고 있다.

(정희수/ 안개낀 아침은)

 

내 사랑니 사이/ 마음 갈던 냉기 시리어/사각이는 댓잎 소리도 스산하다.

(정희수/ 겨울그리기)

 

한낮의 시간은 가고/ 남은 날은 절름발이로 간다.

(예종숙/ 돈주의 그날)

 

음악을 들으며/한 잔의 각설차를 마실 때/언제나 그대 온기 가슴에 적시듯/ 밀물져 오는 그리움 앓네 .

(정희수/ 그대 다가오고 있음에)

 

 

설 교 노 트

 

강건한 신앙

고전16:13-14

 

서론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본문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건하고 완전하며 귀한 신앙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강건한 신앙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라는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잘 알고 깊이 알아야 할 지적인 요소인 신앙의 경성을말합니다.

신앙인이 강건하려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들어 있으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고 신랑이 오신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시46:10) "고 하셨습니다.

당신을 알게 하시려고 말씀을 주셨고,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계시를 우리는 깨어서 잘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체험적 확신하는 신앙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지식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으로는 완전한 자였습니다. 모든 학문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적 신앙이 바울을 만든 것입니디.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모든 학문을 배운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차 있었고 두려운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자로서의 기상이 충천하였던 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호렙산 가시떨기에 불 붙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체험을 한 신앙인으로서 남자다운 강건함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왔노라(눅12'49) "고 하시며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모든 사도들이 체험이 있은 후에야 강하고 담대한 증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의지적인 실천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 인간들의 저주받을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자신의 생명을 죽이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불신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합니까? 내 가족, 내 형제, 내 자녀, 내 자신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심오한 진리를 외치는 자라도 울리는 징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여 강건한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결론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뜨겁게 받아 체험하고 확신하며 손으로 하는 사랑의 실천이 나타날 때 지·정·의가 합일된 참 믿음이 가능한 것이며 강건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건강한 몸과 정신 그리고 믿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참 일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할 때에 강해짐

고후12:1-11

 

서론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을 겪고 깊은 기도의 생활 끝에 발견한 영적 체험이며 깊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바울 자신은 몸에 찌르는 가시, 즉 어떤 고질적인 병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나 그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하시는 말씀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약함과 부족함을 느낄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고 있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약할 때에 강해질 수 있습니까?

 

1. 약할 때 겸손해지므로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 수 없고, 교만한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의 가시로 찔러서 우리로 하여금 연약함을 알게 하고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2. 약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므로

자기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지 않습니다. 연약함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때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많이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지라도 끊임없이 자기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 항상 축복 가운데 거하는 비결입니다.

 

3. 연약할 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은 기도라고 하는 통로를 통해서 오는 법인데 기도는 연약함과 무능함을 절감할 때 힘 있게 하게 됩니다.

또 연약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남을 도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연약함을 발견하여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즉, 육신의 고통으로 영혼의 뼈대에 철근을 넣어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도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장 23절에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고 했습니다. 연약함과 절망함을 느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결론

인간의 비극은 약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을 때까지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은 다 자기의 약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요하게 되고 존귀한 자리에 처한다고 해서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모르는 사람은 머지않아 비참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늘 강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면 연약함을 느끼고 겸손하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갈렙의 강건함

수14:10

 

서론

갈렙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로서 여호수아와 같이 일을 충성스럽게 용감하게 감당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평생을 하나님께 대한 충성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는 가나안 입국 후에도 자신의 나이가 지금 85세이지만 건강하기 때문에 출입이나 전쟁에도 나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말입니다.

 

1. 갈렙의 헌신적 활동

일찍이 갈렙은 모세의 명령에 가나안 땅 정탐꾼의 한사람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하였습니다.

정탐의 결과 열 지파 대표들의 절망적인 보고로 인하여 온 군중이 아론과 모세를 원망하며 흥분하여 아우성을 칠 때에도 갈렙은 여호수아와 더불어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담대하게 진입할 것을 말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위험까지 다달았어도 용감하게 그 임무를 감당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같은 갈렙의 행동은 옳은 말을 하여서 이스라엘 자기 민족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갈렙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 겸손과 순종의 사람 갈렙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가나안 정탐 결과를 희망적으로 보고하여 오히려 다수인 10명의 보고를 물리치고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를 여호수아에게 맡겼는데 여호수아는 갈렙과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친구가 상관이 되었으니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법도 한데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순종하고 협력하였으니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경우 마땅히 선의의 경쟁을 하든지 아니면 시기나 질투심이 생겨서 제대로 협조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갈렙은 자기의 이기심을 버리고 오히려 잘 보필하였습니다. 참으로 겸손한 자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이러한 건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갈렙의 겸손한 마음을 높이 사서 부하라기보다는 그냥 친구로서 우정을 돈독히 하였습니다.

 

3. 하나님 축복에 대한 합당한 요구

갈렙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심으로 85년간의 건강한 생활을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85세의 나이지만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면 전쟁에 나가 적을 물리치겠다고 하였습니다.

또 험악한 산악 지대를 마다하지 않고 기업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기업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건강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같이 하심으로 승리를 얻었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성취되었으며 믿음으로 기업지를 얻어 남은 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결론

갈렙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움직였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할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함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건강의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충성스럽게 헌신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려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건강함을 허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함

마13:14-16

 

서론

주님께서 제자들과-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만났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 궁금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원인보다는 이 맹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려는 가에 대해 관심을 두셨습니다.

주님은 건강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는 바로 육체는 건강하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소경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건강하면서 불구자인 모습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원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로 말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더욱 쉽게 알도록 비유를 쓰지만 완악한 사람에게는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듣기는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경우는 듣는 귀는 있으나 깨닫는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남의 이야기를 듣고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입만 있을 뿐이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귀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분쟁과 투쟁이 극심한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보다 더 듣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양심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양심의 소리보다 더 듣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이 말은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2.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아야 할 것을 못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보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첫 설교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자기 속에서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 속에 주님의 말씀이 계심을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자기들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후에 그들은 담대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결론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겉으로는 건강하지만 속으로는 장애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는 건강하지만 영적으로는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못보는 것은 아닙니까? 듣고 깨닫는 귀와 보고 분별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인이 됩니다.

 

 

나를 고치셨나이다

시30:2

 

서론

본문 말씀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라고 하였으며, 시6:2에도 "여호와여 내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고침받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건강은 자기 자신이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모습 또한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1 . 고쳐주신다는 뜻

"고치신다"고 한 말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병든 것을 치료하는 뜻이 있고, 비뚤어진 것을 바로 잡는다는 뜻이 있으며, 부서지고 망가진 상태를 개조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육체가 병들어 상한 것을 치료하여서 정상화시킴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신상태가 탈선되어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뜻이요, 따라서 물체가 파괴되어 못쓰게 된 것을 수리한다는 뜻입니다. 병든 상태, 탈선된 정신상태, 그리고 파괴된 물체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다 고침을 받아야 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상태에 있습니까? 어느 상태에 있든지간에 고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2. 고쳐주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 이니라"고 하심은 애굽인의 무서운 재앙 때문에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위하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특히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병의 의사가 되어주시고 인간의 모든 질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고치지 못하는 질병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며 감당하십니다. 그러므로 병에 걸려 고생을 당하게 하시는 것도, 병 가운데서 부르짖을 매 고쳐주시는 것도 다 하나님의 주관적인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무엇을 고쳐주십니까?

첫째로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받은 벌 중에 질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병을 앓고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병이지만 하나님은 이런 질병의 고통을 제하시고 건강과 안식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둘째로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육체적으로 앓는 질병은 적당한 휴식과 약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지만 정신의 질병과 마음의 그릇된 생각의 결과로 당하는 범죄 상태는 더 중한 질병인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죄를 짓게 되면 고칠 수도 없으며 더욱 더 깊이 죄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써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만이 고치실 수 있는 질병입니다.

 

결론

인간의 병 가운데 육체의 질병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신의 질병은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우선 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죄악의 근처에는 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육체의 질병은 중요시 하면서도 그릇된 마음의 생각이나 정신 상태는 소홀히 하여 쾌락을 즐기며 죄 가운데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전도서 3장 3절에 "천하 범사가 때가 있나니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다"고 하였으니 건강할 때 주님께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건 축

성 경 활 용

1. 건축물의 종류

(1) 집

(창33: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신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2) 성읍

(수24:13)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3) 성전

(왕상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4) 문을 건축함

(대하27:3)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5) 회당을 건축

(눅7:s)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함

(유1:20)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2. 성전 건축의 의미

(1)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는 것이다.

(삼하7: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2) 여호와에서 영원히 거하시는 곳이다.

(대하6:2)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3. 성전 건축의 자세

(1) 힘써서 건축함

(대상28:10)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소의 전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2)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알고 건축함

(대상29:16)주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고 미리 저축한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

(3) 건축하는 데 방해자가 있음을 생각함

(스4:4)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4. 성전 건축의 이유

(1) 여호와의 명령이므로

(대상22:ll)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며

(대하36:23)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2) 여호와께서 택하심으로

(대상28:10)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소의 전을 건축케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5. 건축 방법

(1) 지붕에 난간을 만듦

(신22:8) 네가 새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2) 재료를 갖추어 건축함

(왕상5:18) 그 돌을 다듬고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니라

(3) 여호와의 말씀대로 건축함

(대상22:11)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며

(4) 지대를 견고히 쌓아야 함

(스6:3)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5) 서로 도와야 함

(스5:2)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6. 성전 건축에 참여할 수 있는 자

(1) 계명과 율례를 지키는 자

(대상29:19) 주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일을 행하게 하시고 내가 위하여 예비한 것으로 전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을 믿는 자

(대하2:5)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보다 크심이라

 

7. 건축 후에 해야 할 일

(1) 낙성식을 해야 함

(신20:5) 새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으냐

(2) 번제를 드림

(대하 2:4)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관련원어풀이

1. hn:B; 베나-

세우다, 건축하다.

(단4:27)

 

2. hn:B; 바-나-

(1) 짓다. 세우다, (집, 도시, 성전)을 세우다.

(스4:2)

(2) 제단을 세우다.

(창8:20)

(3) 회복하다. 재건하다.

(수6:26)

 

3. @WK 쿤

원래 뜻은 "곧게 서다, 존재하다"이다.

(1) 두다, 세우다.

(시9:8)

(2) 견고케 하다, 유지하다.

(시7:10)

(3) 기초를 두다, 설립하다.

(시107:36, 잠3:19)

(4) 자신을 준비하다.

(시59:5)

 

4. dm'[; 아-마드

(1) 서다.

(창24:30)

(2) 머물다, 견디다, 지속하다.

(출18:23, 시33:11)

(3) 일어서다, 일어나다.

(대상20:4)

(4) 견고히 서게 하다, 세우다.

(왕상15:4)

 

(5) 조용히 서 있다.

(대하18:34)

 

5. oijkodomevw 오이코도메오

(1) 집을 세우다, 건축하다.

(눅11:48)

(2) 건축자.

(마21:42)

(3) 재건하다, 고치다, 수선하다.

(마23:29)

(4) 지혜, 사랑, 은혜, 거룩 등이 성장되기를 촉진하다.

(행20:32, 고전8:2)

(5) 힘이나 용기를 주다.

(고전8:10)

 

6. ejpoikodomevw 에포이코도메오

원래는 " ∼위에 건축되다, 견고한 기초를 두다"의 뜻을 지님.

~위에 세우다.

(고전3:10, 엡2:20)

 

7. oijkodomhv 오이코도메-

원래는 "건축, 건설"의 뜻.

(1) 건축하다.

(마24:1, 막13:1)

(2) 건축물, 구조물.

(고전3:9, 엡2:21)

(3) 진보, 건덕.

(롬14:19, 고전14:3)

 

8. oijkodomo" 오이코도모스

건축자.

(행4:11)

 

9. ajrcitevktwn 아르키테크톤

건축가, 목수.

(고전3:10)

설교예화자료

벽돌 속에 담긴 헌신

 

존 와나메이커는 1837년 7월 11일 미국 필라델피아 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그날그날 겨우 끼니를 연명하며 지내는 벽돌 운반 인부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한 달도 못 되어 월사금을 낼 수 없어서 퇴학을 당할 정도로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운 가정이었습니다.

그후부터는 아버지가 일하는 공사장에서 운반하는 리어카의 뒤를 밀어 주는 고된 일을 하면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독학을 하다보니 자는 시간은 겨우 네 시간, 다섯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존에게 유일한 소망은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존은 교회에 나가기를 좋아했습니다.

존이 다니는 교회는 조그맣고 어려운 교회였는데 어느 날 목사님은 교회 건축을 위해 온 성도들이 힘을 합쳐서 기도해야 한다고 강단에서 설교를 하십니다. 이를 들은 존은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고 마음에 울려 퍼져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이 없어 교회 건축에 아무것도 바칠 형편이 못되지만, 주여, 바칠 수 있게 하여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소년 존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뒤뜰에 있는 벽돌을 손수 리어카에 실어 새벽 일찍 교회를 향해 리어카를 끌고 갑니다. 추운 겨울날 열 살 먹은 어린 소년이 가져온 벽돌 리어카를 보고 목사님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감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은 설교하면서 존의 갸륵한 일을 소개했고 온 교인들은 자신의 인색함을 통회하여 눈물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즉석에서 건축 헌금을 작정한 대로 바쳐 애초에 설계한 교회를 짓고도 남게 되었습니다.

그 후 존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크게 성공하여 세제에서 첫째로 꼽는 백화점의 경영주가 되었고, 미국 10대 부호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까지 바쳐 세우리다

 

박금출 씨의 「실화사전에 주의 전을 건축하기 위해 자신의 음조가 바치려고 했던 아름다운 신앙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북 삼례 성결 교회 문형일 집사는 예배당을 짓다가 완공을 못 본 채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전을 채 완공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에게 욕을 받는 것을 마음 아파하던 어느 날 전주 예수 병원에서 사람의 눈을 사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문 집사님은 뛸 듯이 기뻐하며 자기 눈을 팔러 전주 예수 병원을 찾았습니다.

문 집사님의 사연을 들은 병원장은 교회건축을 위해 눈을 팔겠다는 말에 감동을 받아 집사님의 눈을 뽑지 않고, 오히려 병원에서 헌금을 해 주었고 교단에 알려서 미국 신문에까지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를 본 미국의 한 갑부가 헌금을 해서 문 집사님은 교회 건축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록·시·묘사

 

건축은 사회 전체의 변동에 따라서 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A. 스미드슨 부처)

 

훌륭한 건축물에서 받은 인상이란 그 건물이 어떤 하나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건축은 무엇인가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고, 무엇인가를 찬미한다. 그러니 아무것도 찬미하지 않는 건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훌륭한 건축가와 그렇지 못한 건축가는 오늘날 어떻게 구별지어지는가? 평범한 건축가는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만 훌륭한 건축가는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음악이나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언어와 흡사한 현상. 다시 말해서 치밀하게 생각된 불규칙성은 예컨대 고딕 건물에서 찾을 수 있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건축은 생활의 방법이다.

(F.L. 라이트)

 

건축가의 운명은 가장 짖궂은 것이다. 한 번도 살아보지도 못할 건물을 낳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자주 그의 모든 영혼, 그의 모든 마음, 그의 모든 정열을 쏟아 놓는가!

(J.W. 괴테)

 

건축술은 응고한(얼어버린) 음악이다.

(F. 셀링/ 예술철학강의)

 

건축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꿈과 사랑을 시간과 공간 속에 정성들여 녹여 붓는 작업이다.

(김중업/ 공간에 자화상을 새기듯이)

 

백인의 건축은 한 건물에 출입구 하나만을 내놓고 사위(四圍)는 벽으로써 외부 자연과 완전히 차단하였다. 창은 채광과 통풍구로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자연과의 사이를 넓히고, 자연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럴 필요가 없을 때에도 즐겨 층(層) 집을 짓는다. 우리의 건축은 건물이 서 있는 바닥은 1, 2단의 층계로 된 토방으로서 마당과 연결되고 지붕은 용머리의 양쪽과 추녀 끝이 살짝 올라간 부드러운 곡선으로 하늘과 연결된다. 지붕과 토방 사이에 있는 방은 툇마루와 큰 방문들로 외부 자연과 직접 통하여 건물은 그대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한옥은 집이 적어도 적은 줄 모르고, 방이 좁아도 좁은 것을 느끼지 않는다.

(오지호/ 구라파 회화의 황혼)

 

문화에 대한 일반적 통념에 의하면 미국식 빌딩은 미비적인 것이며. 그것은 어디까지나실용적 기능주의적인 산물이지 예술적, 문화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조연현/ 미국은 정말 이해되고 있는가)

 

예술 중에서도 일반 민중의 이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건축이다. 건축은 그 시대의 생활 이상이 실지로 형상을 갖고 나온 것이다. 한 민족이 어떤 환경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자료로 삼아 어떻게 자기를 나타내느냐 하는 것이 건축이다. 불교사원은 곧 불교요, 고딕건축은 곧 중세의 기독교 신앙이다. 우리의 건축도 우리의 초상이 아닐 수 없다.

(함석헌/ 생활에서 나타난 고민하는 모습)

 

훌륭한 집을 나쁜 땅에 세우는 자는 스스로 감옥에 맡기는 자다.

(F. 베이컨/ 수필집)

 

만능 설계가의 일이라는 것은 필요한 예술적 부재(部材), 창조력을 가지고 완전한 하나의 물건으로 합하는 것이다.

(K. 박스만)

 

건축가는 삶의 공간을 설계하는 예술가이다.

(김중업/ 집은 예술이다)

 

집을 짓는 것은 살기 위해서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F. 베이컨/ 수필집)

 

사람은 집을 짓는다. 짓고 나니 그에겐 자기를 부리는 주인이 생겼고, 평생의 일이 생겼다. 죽을 때까지 집을 꾸미고 가구를 마련해야 하고 집을 지켜야 하고, 남에게 보여주어야 하고, 보수를 해야 한다.

(R.W. 에머슨)

 

 

설 교 노 트

 

성전의 재건

학1:1-15

 

서론

예루살렘 성전은 셋이 있었는데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과 헤롯의 성전입니다. 이 것은 다 각각 성전을 지은 사람을 따라 불리운 이름들입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둘째 성전, 즉 스룹바벨의 성전입니다.

 

1. 성전의 재건

왜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게 되었는가 하면, 솔로몬의 성전이 갈대아 병사들의 발화로 인하여 다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세속화하여 우상을 섬기는 생활을 하여 하나님이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바벨론은 주전 639년에 멸망을 당하여서 유대의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주전 537년에 성전을 건축하였는데 그 비용을 고레스는 국고에서 충당시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좋은 재목과 그 근방에 있는 종족들에게 명해서 나라에 바칠 세금 중의 얼마를 성전을 짓는 비용으로 쓰도록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뒤따랐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활이 자유롭고 풍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2. 성전 공사의 중지

그런데 성전 건축 공사가 부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같은 마음, 같은 힘이 되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만일 백성들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모았더라면 그래서 성전을 건축하였다면 하나님의 축복도 풍성하게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 건축을 시작해 놓고 모두 자기의 집을 수리하는 데 주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아무렇게나 두고 자신들의 집을 수리하고 장식하는 데만 바빴던 것입니다. 또 이런 가운데 이방인들의 방해가 생긴 것입니다. 고레스 왕이 죽고 아닥사스다 왕이 즉위했는데 이방 사람들이 새 왕에게 고소를 낸 것입니다.

자기의 집 수리에 열중하고 성전 건축에 힘쓰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방해가 있고, 정치의 세력도 압력을 가하고 하나님의 축복도 정지되었습니다. 또 성전 재건이 정지되자 정부의 원조도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를 통해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성전을 다시 짓게 하셨고 그들은 거기에 순종하였습니다.

 

3. 성전 공사의 완공

아닥사스다 왕이 죽고 다리오 왕이 즉위하자 이방인들은 또 고소를 하였지만 다리오 왕은 적극적으로 성전 건축을 도와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에는 화가 오히려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정부의 원조가 시작되었고 결국 다리오 왕 6년에 성전 공사가 완공된 것입니다.

 

결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어느 한 사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일이었고 특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한 자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자기 집부터 수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뢰하고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이 축복으로 변함을 본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내 일보다 하나님의 일에 더 주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생의 집을 짓는 성도

고후5:1-10

 

서론

인류의 역사는 집을 짓는 역사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 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 있어서까지 인간에게 집을 지어 주자는 운동이며 인간에게 참된 집을 설계해 주려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서 땅 위에 세운 집이 있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집의 어느 한가지를 지어야 하고 또 짓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집을 짓기 위한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1. 집터를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영적 집터가 있고 또 집이 세워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당터, 불교터,유교터, 사이비 종교터로 추리 사회에 꽉 들어차 있어 빈 공간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집을 지으려면 이 터를 헐고 정리해야만 지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복음 전도 초창기부터 이 터위에 세워진 집을 헐다가 회생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터를 닦아야 할 의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 집터를 잘 선택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집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인간의 영적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란 "기름을 부었다"는 말인데 옛날에는 왕에게 기름을 부어 왕권을 주어 백성을 처리하게 하였고,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 권자로 삼아 당신의 뜻을 전파하게 하였고,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 제사장권을 주어 백성의 죄를 속죄케 하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왕의 왕이되신 왕권이 되시고, 제사장 중의 대제사장이 되셨고, 선지자 중에 대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죄악의 시궁창에 있는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터를 닦은 다음에 집을 짓기 위한 재료를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를 굴곡 없이 반석같이 단단히 닦아 놓고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2. 재료를 마련해야 합니다.

재료는 고린도전서 3장 10절 이하를 보면 금 ·은 보석이 있고 짚, 나무, 풀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세에 그 공력을 타타낼 때 불로 나타낸다 하였으니, 불에 견딜 수 있는 재료라야 할 것입니다.

금 ·은 ·보석은 값이 높고 짓는 데도 수고가 많으나 불에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금과은과 보석은 불변하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고 나무, 짚, 풀은 변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육적 재료라고 할 수 있는데, 금과 은과 보석은 영적 재료인 것입니다. 꽃은 피었다 지고 잎은 시들지만 우리의 신앙의 재료는 변함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재료를 마련하였을 때 건축자는 설계대로 건축하되 예수를 주초로 삼고 밑에서부터 순서대로 쌓아 올려서 짓고 난 다음 집주인되신 예수께서 이 집에 내주하셔서 만국을 통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지금 성도들은 땅에서 믿음으로 감사하고 충성하는 일 장차 우리가 거처할 영생의 집이 지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해결해 주셨으니 우리도 구원받은 기쁨으로 주님의 분부하신 말씀대로 죄악 세상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자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시기를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을 쌓아라

겔22:30

 

서론

성을 쌓는 목적은 외적을 방어함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적이 두 가지 있습니다. 잠언 25장 28절에 보면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음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을 쌓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마음에 성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의 마음에 성을 쌓아야 합니까?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가지 적이 있는데 하나는 속에 있는 적이요, 다른 하나는 밖에 있는 적입니다. 내적은 근본적으로 축출을 하면 되지만 외적은 방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은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재욕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침략하는 제일 큰 적은 금전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범죄를 살펴보면 금전에 관계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 황금의 적이 오면 사람의 윤리와 도의심은 다 어두워지며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색욕입니다.

이것 역시 사람이 타락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삼손이나 다윗이나 솔로몬도 다 이 색욕에 의해 범죄하였던 것입니다.

(3) 허영입니다.

모든 사람은 좋은 의복을 입고 칭찬받는 것을 기뻐하며 명예가 나타나는 것을 원하여 알지 못하는 것도 아는 체합니다.

위에 기술한 적은 성결한 사람에게도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는 성은 '자제'라는 성입니다. 성결한 사람은 이 자제의 성을 더욱 견고하게 쌓고 지킵니다.

 

2. 불성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불로 쌓은 성은 돌로 쌓은 성보다 완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키시되 돌성으로 아니하시고 불성으로 하심과 같이 오늘 교회를 지키시되 성령의 불로 지키십니다.

이 불성은 죄악을 방지합니다. 죄가 교회안에 들어오면 교회는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 마귀를 방지합니다. 마치 포도원에 작은 여우가 들어와서 동산을 헐고 꽃을 따는 것과 같이 악령은 교회 내부에 교회의 조직과 제도와 신성을 파괴하려고 운동하니 이 마귀를 방지하려면 불성 곧 성령의 부흥의 불이 필요합니다. 또 속화를 방지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것을 모방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려 하고 세상의 칭찬과 명예를 받으려는 중에서 속화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성을 쌓아서 막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성의 무너진 곳에 서서

구원의 성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여 옵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가 들어오는 성 무너진 곳에 서서 중보가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인지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도자를 찾으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려고 한 소돔 성에서 기도할 때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등을 멸하지 않으신다는 응답을 받았는데 이것은 무너진 곳에 서서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은 것입니다(창18:26-33).

 

결론

성을 쌓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적을 먼저 내어 쫓아야 외부에 있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을 견고하게 쌓아서 적을 방비합시다.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적은 물리치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적은 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의 무너진 곳에 서서 죄로 멸망당할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서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막으며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고요한 중에 건축함

왕상6:7

 

서론

성전 건축이건 일반 건축이건 건축하는 동안은 조용한 것을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성전 건축 중에 가장 특이한 점은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다"고 한 말씀입니다. 거대한 성전을 건축하는데 그 건축 현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며 새삼 주위의 환경을 돌아보게 합니다.

 

1. 미리 준비하는 정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건축에 있어서 기본적인 자재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그리고 돌들이며 또 내부 장식에 있어서 귀중한 금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내용은 바로 이 돌들입니다. 이 전을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다듬어지고 그 치석한 것을 운반하여 건축하였습니다.

그 돌을 뜨는 곳에서 각기 필요한 부분에 맞게 돌을 다듬고 가공하여 운반해서 구축하였으니 성전 안에서는 돌 다듬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돌이 어디서 생산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지질학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본토가 거의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멜산을 위시한 여러 산에서 석재가 생산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참으로 귀한 것은 미리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2. 고요한 중에 건축한 성전입니다.

성전 건축 현장에서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연장을 사용하는 소리가 일체 들리지 않는 고요한 공사 진행입니다.

이는 깨끗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전 건축에 필수 조건입니다. 집을 짓는데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이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데 그만큼 세심한 주의를 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다시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 건축처럼 그렇게 고요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소란스러움과 연장 소리, 그리고 주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발이 주의 몸된 성전을 성전으로써 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건축하고 있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솔로몬 왕은 주도 면밀하게 하나님의 전을 건축함에 있어서 준비 과정에서부터 기도하며 세심한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3. 협력하는 정신입니다.

아무리 몇 사람이 조심하며 성전 안에서 연장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를 하였어도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무리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후에 지은 스룹바벨의 성전은 그 안에서도 못마땅해 하였고, 밖에서도 방해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성전 건축은 안과 밖이 다 협력을 하여서 아무런 불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렵고도 귀한 일입니다.

우리도 역시 그러한 협력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것에 세심하게 주의를 하여서 서로서로 협력하면 성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결론

고요한 중에 성전 공사가 진행된 것은 영적으로 성전의 비유인 그리스도의 고요한 생애의 역사와, 성전으로 비유한 신자들의 참된 신앙생활이 고요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일은 정성을 다하는 준비에 의하여 행하며 그리고 고요한 중에 진행하며 협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건축자

고전 3:10-17

 

서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가리켜 건축하는 자들로 비유(마7:1)하신 것처럼 본문에 의하면 사도 바울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영적인 건축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 사랑들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 위에 영적인 집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다음에 공력 심판을 하시는데 우리가 평생 동안 지은 영적인 집을 불에 태워 보십니다. 이매 나무나 풀 같은 가연성 재료로 집을 지은 것은 불에 타서 얼어지므로 아무런 상급을 얻지 못하지만 구원만은 얻으며, 금 ·은 ·보석같은 견고한 불연성 재료로 지은 집은 불에 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은 물론이고 하나님 앞에서 많은 상급을 얻습니다.

 

1. 상급 심판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을 두 번 심판하시는데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으로서 공적에 대한 상급 심판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불신자가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받는 멸망의 심판입니다.

상급 심판의 때는 천년 왕국 시대가 이루어지기 전 성도들의 휴거와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있습니다. 그 장소는 하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받는 근거는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므로 우리의 행위가 언제나 성실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건축의 터-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터 위에 믿음으로 우리는 건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상급이야 받든 못 받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마음속에 믿는 신앙이 있어서 예수의 피로 죄사함받은 사람은 적어도 구원은 받습니다.

우리가 영생받고 구원받는 것은 행위가 아닙니다. 상급은 행위에 의하지만 구원은 오로지 믿음에서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은혜'라는 것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고 '믿음'이라는 것도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영생이나 구원은 하나님께서 무조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받았어도 구원받은 자답게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바르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자를 끝까지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축복과 상급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야 받습니다.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간구함으로 받습니다. 성경은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기록합니다

 

3. 건축 재료

예수님의 터 위에 집을 세우면 구원은 받으나 집을 지은 재료에 따라 상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 ·은 ·보석같이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지은 사람은 공력 심판 때 그 행한 대로 상급을 받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은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미하고, 보석은 성령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간구와 기도로서 깊이 묻힌 것을 파내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금과 은, 보석은 영적인 것을 의미하고 풀이나 나무는 육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높이고 우리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것,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만을 간직하는 길이고 금 ·은 ·보석으로 영의 집을 짓는 길입니다.

 

결론

상급 심판을 받기 위한 건축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주님의 심판과 부활의 날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건축 재료를 삼아 영의 집을 지어야 하는데 금, 은과 같은 재료는 모든것을 영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우리 모두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말씀 다시 한 번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 터와 두 건축자

마7:24-27, 눅6:47-49

 

서론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주님은 반석 위에 짓는 집과 모래 위에 짓는 집을 대조하여 교훈을주십니다. 산상보혼의 교훈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같고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와 같은 고난이 닥쳐오면 전자는 요지부동하나, 후자는 집이 무너짐같이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1. 두 가지 터

누구나 집을 새로 건축할 때에는 먼저 기초공사를 합니다. 기초공사를 잘해야만 집을 튼튼히 잘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건축 대지가 천연적인 반석이 아니면 땅을 깊이 파고 큰 돌들과 잔자갈과 모래와 물과 시멘트로 혼합을 하여 큰 반석터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지으면 집이 튼튼하여 비가 내리고 참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게 되어도 요지부동케 합니다.

인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터를 닦고 하나님의 교훈을 행하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며 공력을 들어 튼튼한 집을 세우는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의 육신의 욕망에 따라 불신앙의 생활로 동분서주하며 세상 형편대로 사는 사람은 집을 짓는데 모래 위에 터를 만들고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힐 때 쉽게 무너지는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2. 우리가 짓는 집은 튼튼한 집입니까? 쉽게 무너지는 집입니까?

이 세상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는데 어떤 건물은 반석터 위에 많은 금전과 많은 공력을 아끼지 아니하고 튼튼히 짓는 집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의 집은 터도 반석터가 아니요, 건축재료도 값싼 것으로 공력을 들이지 아니하고 쉽게 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래터 위에 나무나 풀이나 질으로써 되는 대로 지어 놓은 초가집입니다. 이런 집은 모두 쉽게 무너지는 집입니다.

 

3. 우리 성도들은 튼튼한 집을 짓는 자입니다.

(1) 반석터는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고전10:4).

(2) 집을 짓는 건축재료로 재료 여섯 가지를 열거했는데 곧 금과 은과 보석과 나무와 풀과짚입니다(고전3:12) .

처음 세 가지는 튼튼한 건축재료요, 나중 세 가지는 변변치 아니한 건축재료입니다. 금, 은, 보석은 진리와 사랑과 신앙과 진실과 의와 인내와 자비와 온유과 화평과 같은 것이요,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은 것은 허위와 증오와 사곡과 게으름과 시기와 교만과 투기 등과 같은 재료입니다.

(3) 집을 건축하는 데는 공력이 필요합니다.

집을 세우는 데는 비록 반석 위에 닦은 터가 있고 금, 은, 보석의 재료가 있다고 하더라도사람의 공력이 없이는 좋은 집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터를 닦는데, 돌을 놓는데, 기둥을 세우는데, 문틀을 놓는데, 유리를 한장 끼우는데, 무엇에나 공력이 필요하고 무엇에든지 제자리를 바로 찾고 모양도 보기 좋게 해야 좋은 집이 됩니다.

 

결론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반석 위에 짓는 집을 교훈으로 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반석의 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 기초는 바로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말씀을 듣고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바로 이런 자가 지혜로운 건축가인 것입니다.

 

 

성전을 귀중히 여기고 사랑할 이유

왕상9:3, 요2:13-17

 

서론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성도들로서 구원의 유일한 기관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건축하고 사랑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식을 하는 교회와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하는 신자의 본분을 유감없이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1. 성전의 유래

성전의 유래는 솔로몬 성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예배당을 주의 집이라, 하나님의 성전이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집으로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성전 안에 영영히 계실 것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2. 성전을 사랑할 이유

(1) 하나님의 성전 안에는 교회의 중심이 되는 법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고로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솔로몬 성전 대정에는 번제단이 있고 또 세수통이 있고, 성소 내에는 떡상과 등대와 향단이 있고,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법궤 내에는 십계명을 새긴 돌비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있습니다. 번제단과 세수통과 향단에 대하여는 생략하고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의 참 뜻을 말씀드립니다.

법궤는 구약 교리의 중심이요, 예수의 성체의 그림자 또 예수의 신약 교회의 표상입니다. 법궤는 예수의 교회가 되는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법궤 안에 십계명을 새긴 돌비가 들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첫번 받은 돌비는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친히 글자를 새기었으니 이것은 인간의 방법대로 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신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 첫번 돌비가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입니다. 우상의 죄로 인하여 깨어진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 인생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습니다다(출32:15-29).

둘째로 만든 돌비는 모세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십계명은 하나님이 써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통하여 전도함과 하나님이 친히 이르시는 말씀을 통하여 설립된 교회의 모형입니다. 법궤 내에는 이스라엘 종교의 근본인 십계명이 있습니다(출34:1-9).그리고 신약교회의 그림자인 돌비를 넣은 법궤는 예수의 몸된 교회를 상징합니다.

고로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두 돌비에 새긴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키기로 하나님과 맹세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 복을 주시기로 언약하셨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의 직권을 의미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권능을 신임하라는 뜻이요,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사십 년간에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먹고 산 것을 기념하라는 뜻이요, 그리고 법궤 위에 속죄소가 있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은혜에 보좌가 되심을 약속하셨습니다(시8:1, 히4:16). 땅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은 성전입니다. 법궤 위에서 대제사장의 속죄를 받으시던 하나님은 성전에 임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의 경배를 받으시니 성전은 속죄소요, 언약궤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사랑하지 않고 오용하면 죄가 됩니다.

(2) 주의 성전은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집은 그 사람의 소유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신자가 하나님의 교회나 하나님께 경배하는 데 사용하는 성전을 사랑함은 곧 주님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성전과 주님의 교회에 대하여 무관심함은 하나님을 귀중히 생각지 않는 증거입니다.

(3) 성전을 사랑할 이유는 성전은 만민구원의 도피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악 중에서 고민하며 신음하는 사람과 마음속에 크나큰 고통에서 우는 사람과 인생의 방향을 잃고 헤매는 모든 불운한 사람의 위로와 해결의 음성을 듣는 곳이 교회요, 또 하나님의 시은소인 성전입니다. 세상은 험하고 사람은 모두 약하고 또 이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분투하기에 너무도 피곤하여 기진맥진하여 있습니다. 이러한 괴로움과 눈물과 한숨과 걱정 근심을 가진 신자들이 하소연 하는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주님께서 성전을 더럽히고 사랑할 줄 모르는 무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 의 집인 성전은 문자 그대로 거룩하고 정결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검 소

성 경 활 용

1. 검소란?

(1) 식량을 준비함

(창41:54) 일곱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2) 남음도 부족함도 없음

(출16:18)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2. 참된 검소

(잠11:24, 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3. 예수의 본

(요6: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4. 그릇된 검소

(학1: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여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여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마26:8-9)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은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겠도다 하거늘

 

5. 검소와 거리가 먼 것들

(1) 술

(잠23:35)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

 

(2) 진찬과 진미

(잠23:1-3) 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단1:11-16) ‥‥이러므로 감독하는 자가 그들에게 분정된 진미와 마실 포도주를 제하고 채식을 주니라

(3) 제어되지 않은 마음

(잠25:28)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음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6. 검소하지 않을 때 얻는 것들

(1) 도둑질

(수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2) 체력이 약해짐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를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3) 육체를 더럽힘

(나3:4) 이제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4) 영적 부패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관련원어풀이

1. &c'j; 하-사크

(1) 억제하다, 삼가하다.

(창20:6, 삼하18:16, 사58:1)

(2) 보존하다, 안전하게 지키다.

(욥33:18, 시78:50)

(3) 물러나다, 물리치다.

(창39:9)

(4) (사물을)절약하다, 아끼다.

(잠13:24, 21:26)

(5) (사람을)아끼다, 절약하다.

(왕하5:20, 사14:6)

 

2. lm'j; 하-말

(1) 동정심을 가지다, 긍휼히 여기다.

(출2:6, 삼상23:21)

(2) 나눠주다, 용서하다.

(삼상15:3, 사9:18)

(3) 절약하다. 아껴쓰다.

(삼하12:4, 겔50:14, 겔36:21)

 

3. feivdomai 페이도마이

나눠주다, 긍휼을 베풀다, 아껴쓰다, 절약하다.

(행20:29, 롬8:32, 11:21, 고전7:28, 고후1:23)

설교예화자료

검소한 생활의 귀감

 

-부제:조만식 선생의 오산 학교 교장 시절

 

민족의 귀감이신 조만식 선생은 그 사상뿐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도 많은 이들의 귀감이셨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검소한 생활은 일반 사람들이 흉내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는 무명 두루마기의 고름을 절약하느라고 단추를 달고, 모자도 대를 이어 쓸 수 있도록 말총으로 튼튼히 만들어서 썼습니다. 오산 학교 교장 시절에는 어느 졸업식이나 입학식에도 그는 모우닝 코우트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졸업식날 남강 이승훈은 선생의 초라한 모습을 내빈들에게 보이기가 거북하여 "평상시에는 괜찮으나 졸업식 때에 만은 제발 예복을 입으십시오." 하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은 고집을 끝내 꺾지 않고 "없는 것을 어떻게 입겠소. 교장 노릇을 못하면 못했지 예복을 입지 못하겠소." 하였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막 졸업한 그의 아들이 항상 신고 싶어 했던 구두를 아버지 몰래 한 켤레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아차리고 아들에게구두를 가져오라 하더니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면서 아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는 용서할 수 없다. "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몸소 실천을 통해 보이셨던 검소한 생활이 이제까지도 소비 생활에 찌든 우리에게 절제된 생활의 귀감을 보여주신 일화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검소의 표본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었으며, 새사람이 되었으면 그의 생활 양식도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생활 양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교훈은 빌립보서 4장 10-1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자족하는 비결이 곧 성경적인 생활 양식의 기초가 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그 당시 헬라인들의 이상이었으며, 그 이상이 기독교적인 배경에서는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검소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지혜를 의미하며 성령의 열매의 하나인 절제이기도 합니다.

지구가 좁아져 지구촌이 되어버린 현대에서는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생활 자세가 요구됩니다. 사랑과 검소의 표본인 초대 교회의 참다운 공동체를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이 가르치는 삶의 원리(초대교회의 사랑과 검소)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 우리의 생활의 무절제함을 과감히 떨어버리고 예수가 보이신 삶의 실천을 따라삽시다.

 

 

청빈과 검약의 신앙인들( I )

 

5C 초에 살았던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므로 이곳의 대주교는 교황보다는 권세가 당당했습니다. 황제로부터 특별 지원을 받는 이 자리는 모두 호화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주교로 취임하는 날부터 사택에 있는 모든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단지 예배할 때 입을 예복 한벌 외에 그는 거적같은 옷을 걸치고 맨땅 위에서 잤습니다. 그는 세상의 것에 얽매이기 싫어 자유를 얻기 위해서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사의 걸출한 인물들은 거의 모두 이러한 예를 따랐습니다. 제롬은 예루살렘 광야에서 30년간 움막에서 살며 공부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은 가난을 자신의 신부로 삼고 사랑했습니다. 버나드는 수많은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싫어해 매일 설교하는 것 외에 식사일이나 설겆이를 같이 했습니다. 귀족 출신이었지만 가축의 똥을 치우고 자기 신발을손수 기워서 신었습니다.

이들은 재물과 하나님이 겸해서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청빈과 검약의 신앙인들(II)

 

위대한 성자 프랜시스는 평생 단벌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청빈과 검약은 그의 수도회의 첫째 규율이었습니다. 물론 그 자체가 옳아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 외의 것을 거절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집착은 지나친 청빈을 유도하였고 누가 옷이나 돈을 주어도 거절하였습니다 죽는 순간에 프랜시스가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은 빨리 자기가 입은 옷을 벗겨서 주님 앞에 벌거벗은 완전한 거지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유언장을 읽어보면 그의 청빈, 검소한 삶이 가슴을 잔잔히 울려 줍니다. 그는 자기 아내와 자식들에게 전재산을 남겨주었습니다. "내가 사서 지금까지 참으로 유용하게 된 휠스도르프의 자그마한 땅, 둘째로 주거지로 낸 사람 볼프의 명의로 산 브루노의 집, 셋째, 유리법과 지환들, 목걸이들, 선물들, 금과 은 등 약 1천 굴델의 가치가 나가는 것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진 빚을 갚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루터와 비슷한 시대의 칼빈은 청빈과 검소를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친 장본인이었습니다.

칼빈은 아내가 먼저 죽었으므로 남겨줄 대상도 없었지만 그가 살던 집도 시에서 빌려준 것이었으므로 아무 유산도 없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간 인물들이 청빈했지만 그 자체를 사랑하거나 억지로 그렇게 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사랑했고 그로부터 모든 물질은 자신과 사명을 위해 마음껏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종으로 삼아 부리었고, 물질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그 결과 더욱 위대한 영적 재산을 남겼던 것입니다.

 

 

검소는 만들어지는 것

 

자동차의 왕인 헨리포드는 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고장난 시계나, 모형기관차 등을 손수 수선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후 에디슨 회사에 들어가 기계부의 감독으로 종사하던 중 마침내 자동차를 발명하여 세계 제일의 부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의 집은 그가 어렸을적 태어나 살던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제일의 부호가 된 후의 헨리포드 생활은 변한 것 없이 매우 검소했습니다. 그의 생활 방식은 "제 손으로 장작을 패라. 그러면 이중으로 따뜻해진다." 였습니다. 검소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검소한 생활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은 바로 검소한 생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어리석은 자가 허비한 일 실링의 돈은 착한 사람 손에 들어가기가 쉽다.

(B. 프랭클린)

 

불우한 사람에게 언제나 25센트를 베풀어 주는 사람이 1센트를 갖고 아껴도 멋있게 보인다.

(W. 메이슨/ 일전을 아끼다)

 

사치의 반대가 절 검이지만 그 구분은 모호하다. 절검이 지나치면 생활이 원시로 되돌아가기가 쉽고 혹은 또 인색하다는 비방조차 따르기 쉽다.

(한고근/ 욕망과 욕심)

 

무릇 정사의 밝고 공평함이 다 검박에서 비롯하며, 검박하면 풍속이 다 후할지니, 하늘이 어찌 안도우며 국운(國運)이 어찌 안길리요

(최자)

 

사치하는 자는 부자가 되어도 부족하다. 어찌 검소한 자의 가난이나마 여유있음만 하리오.

(채근담)

 

검소한 생활‥‥ 그것은 어릴 때부터 익혀야 할 일의 하나다.

(이원수/ 섬 아이의 일기)

 

검소는 수입의 미덕이다.

(팔만대장경)

 

소 같이 벌어서 쥐 같이 먹어라.

(한국 속담)

 

사치라는 것은 무엇이든 필요 이상으로 과람(過濫)하게 생활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 증상은 이를테면 전염병과도 같아서 이것이 유행하면 방지할 특효약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전염병에는 건망증이 그 온상을 이루고 과시증같은 증상이 따르는 위에 폐풍(弊風)이 병발하여 그 증상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래서 사치병 환자는 일종의 정신병 환자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고근/ 욕망과 욕심)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재물을 절약해 쓰는 데에 있고 절약하는 근본은 검소한 데에 있다. 검소해야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해야 백성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소하게 하는 것은 목민관 된 자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정약용/ 목민심서)

 

우리들은 생산을 너무나도 중시하고 소비를 너무나도 경시한다.

(B. 러셀/ 태정에의 찬가)

 

부정으로 얻는 것은 헛되게 소비되고 그 소유자 역시 타락한다.

(M.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전쟁은 소비가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동시에 절제는 허영이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J.M. 케인즈)

 

이익을 올리는 것이 악덕이란 것은 사회주의적인 사고방식이지만, 나는 손실을 초래하는 것이야말로 악덕이라고 생각한다.

(W. 처칠)

 

버는 것보다 소비를 어떻게 적게 하는가를 안다면 너는 화금석을 가졌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현명한 소비란 현명한 생산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이다. 돈을 모으는 사람 20인 가운데 그것을 잘 쓸 줄 아는 사람은 한 사람이 있을까 말까 하다.

(J. 러스킨/ 뒤에 온 이 사람에게도)

 

오로지 이윤과 팽창에만 근거하여 생산을 결정하는 대기업의 주주나 경영자의 권리를 우리가 철저하게 제어할 수 있을 때에만 건전한 소비가 가능해진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현대의 소비자들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자기를 확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한다=내가 가지고 있는 것+내가 소비하는 것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우리 경제가 지탱해 나갈 수 있는 한계점은 우리가 어느 만큼 스스로를 규제하고 매사에대비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경제력이 동시에 필요한 국방력과 기타의 모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는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욕망을 억제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자원이 있습니다.

(B.M. 버룩/나의 관점)

 

쓰고 자유로워 져라, 그러나 낭비는 하지 말아라.

(J. 레이)

 

잘 벌고 잘 쓰는 사람에겐 회계 장부가 필요없다.

(G. 허버트)

 

우리 경제는 절대로 연방 준비 은행제도나 재무성이나 국회나 백악관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의 4천 3백만 세대의 1억 7천 4백만 명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이 나라의 경제를 움직인다. 우리의 경제는 생산과 가득(稼得)과 저축과 투자와 소비에 대해 내려지는 국민의 매일 매일의 수백만 건의 결심과 결정의 결과이다.

(D. D. 아이젠아워)

 

선비로서 편안한 처소를 그리워하면 선비될 수 없느니라.

(논어, 憲問篇)

 

사회 일도 잘하지/ 집안일도 잘하지/ 한푼도 아껴쓰며/ 백 가지를 빈틈 없이 돌보지/ 당신의 더운 정 집안에 넘치지.

(이상각/ 아내)

 

- 사돈님 ! 거 수도꼭지 눌러놓으시유

(허흥식/ 약수를 마시며)

 

햇빛이 방을 데우고/ 밤으로는 달빛이 지붕을 은근히 추켜 세웁니다.

(김현숙/ 시인의 외딴집)

 

문질러 응어리를 풀어내던/ 지어미의 매듭진 손들도 쉬고

(김현숙/ 놋그룻과 더불어)

 

할아버지 시퍼런 낫끝으로/ 근근히 깎은 몽당연필 건네시며‥‥ //참대가지 꼭 끼워 주시며/ 자 이러면 며칠 더 쓰것제.

(김현지/ 연필)

 

사랑하는 아내가-자신의 옷을/ 고쳐서 아이에게 입힌다/ 아이가 싫단다/ 아내가 말하길/ 나도 어머니의 옷을 입고 자랐단다/ 일년이 지나/ 아이는 키도 몸도 많이 자랐다/ 고쳐 지은 옷은 아이 몸에 맞지 않고/움직일 수도 없다/ 아내가 말하기를- 좀 늘려주마.

(메이신/ 엄마의 옷)

 

꽃가루나 찍어먹고/ 이슬이나 빨아먹고/그렇게 살았으면//햇빛이나 목에 감고/ 달빛이나 두르고/ 그렇게 살았으면

(허영자/ 시인의 생계)

 

동대문 시장과 남대문 시장을/ 다 뒤졌다/ 비슷한 것 하날 겨우 찾았다/ 모양을 보지 않았다/ 튼튼하면 그만이었다.

(정진규/ 가죽가방)

 

술 한잔 소금 한입에도 맘껏 취해 본단다. 그간 놈 돈이 무어냐 돈이란게 무어야 돈이란게 다 무어야

(박의상/ 노동 · 2-만선가)

 

가불타령에/ 무거운 발길을 띄우며/ 향기 있는 꽃은 가시나무에 핀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가난한 일력을 지운다.

(조영희/ 가불타령)

 

내 집이 초려삼간 세사(世事)는 바이없네/ 차(茶) 달이는 돌탕관과 고기 잡는 낚대 하나/됫 뫼에 절로 난 고사리 긔 뿐인가 하노라.

(미상)

 

오늘의 그대의 생일, 보석도 아니고 금목걸이도 아닌 꽃 한 다발 샀을 뿐인데 내 마음 왜 이렇게 따스해 지는 것일까. 그것은 배부른 자들의 심심풀이 유희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먼먼 시선으로만 바라보던 꽃을 산다는 행위, 꽃을 가꾸고 보살핀다는 행위, 그래, 그건 사치가 아니었구나.

(문창신/ 장미꽃 한 다발)

 

하나님, 내 아내가 될 사람은 검소하고 정다우며 나의 좋은 친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F. 잠/ 14편의 기도 노래 -검소한 아내를 얻기 위한 기도)

 

실을 감는 아내의 하이만 손놀림은/ 청아의 소박

(김우영/ 실 감는 아내)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가 호화로워서/ 더 호화롭게 하는 척 포장된 깡통들아

(이상개/ 깡통에게)

 

시냇가 오막살이/ 한가히 살매/ 달 밝고 바람 맑아/ 흥겹구나/ 손이라곤 오는 이 없고/산새들만 지저귀는데/ 대숲 아래 상 옮겨 놓고/ 누워서 글을 읽네

(길재/ 야은집)

 

큰 집은 죽음을 부르게 하고 작은 집은 복을 부른다.

(미상)

 

비난의 신인 모머스는 미네르바 여신이 만든 집이 '보기 싫은 이웃 사람들을 피할 수 있도록 이동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고 힐난했다고 한다.

(H.D. 소로/ 월든)

 

그대 손은 신령한 악기/ 그저 거기 있을 뿐인 이유로 홀이 되고/ 의미의 옷마저 벗은 채 흐르는 물과 태양의 아들로 감관 뜨거운 불길이/ 그대 손끝에서 만나 빚어지는 일들이란/ 고요를 형상화한 불멸의 음악입니다.

(정동주/ 신무가-고요했던 날들)

 

화창한 날/몸이 달아 핏줄 핑핑 돌리면서 비바람 안 가리고/ 겨울부터 봄까지/ 터를 넓힌다/ 설계도의 한 모서릴 문으로 열고/ 꿀틀대며/ 날며 뛰며/톱으로 절단기 곡괭이 이빨 또는 흙손 용접기로도/ 엄청나고 매끄러워 하루살이 한 마리도 없는 완토를 헐고있는 저들은/ 살기 위해/ 오늘을 헐고 있다.

(성혜련/ 아침 20)

 

담틀을 차곡차곡 세워 올리고/ 흙이기는 괭이 소리 울리는구나/ 거센 바람 궂은 비 이로써 막고/ 나는 새, 들쥐들을 이로 피하리/ 군자가 사는 집 높고도 크네.

(시경)

 

잔디로 지붕 이은 두어 간 집이/ 그윽하고 외져서 먼지가 없네/ 낮이 기니 글보기 게을러지고/ 바람 맑으니 자주 이마를 드러낸다오/푸른 산은 때 없이 문에 들어오고/밝은 달은 밤이면 이웃이 되네/ 우연히 이곳에서 쉬게된 거리/ 세상을 마다는 내 아니로세.

(정도전/ 삼봉집)

 

산수간(山水間)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향암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윤선도/ 고산유고)

 

그대 시름 포개보면/ 묵시의 탑이 되리

(강호연/ 석장생)

 

내가 만일 까치라면/ 내가 진정 까치라면/ 칠월칠석 아니어도 견우직녀 만나라고/ 날마다 휠훨 날아 오작교 놓을 것을//내가 한일 까치라면/ 내가 진정 까치라면/ 차라리 잔별 밭에 잔별로 굳어/ 은하수를 메우고 행복할 것을// 아, 내가 만일 까치라면/ 내가 진정 까치라면/ 견우 직녀 단란히 살아갈 집에/ 주춧돌로 굳어서 행복할 것을‥‥‥

(박 화/ 내가 만일 까치라면‥‥)

 

탑은/ 왜 그냥/ 서고만 있노? // 죽어서도/ 휘지 않는 넋이기에/ 묻힌 뼈 그대로가/ 일어선거지 ! ‥‥‥

(김철/ 연사탑)

 

사랑이 사랑다운 사랑이라면/ 서로 믿는 주춧돌이 되어야지요/모래터에 기와집을 지어 놓고서/ 그대는 내것이다 하지 말아요//‥‥‥ 사랑이 사랑다운 사랑이라면/ 흥정이 오고가서 어찌 되나요/ 젊으나 늙으나 오직 한 마음/ 행복의 금자탑을 쌓아 보세요.

(이상각/ 사랑)

 

빌어온 이론으로 곧 쓰러질 집을 짓느니/해질녘 찾아온 제자들과 소주를 앞에 놓으면/비로소 세상이 바로 보였다고

(박몽구/ 운암리 고갯길)

 

어느 사이 산 밑 솔밭마저 밀어내고/ 들어선 차량들이 붐비는 아스팔트 대로에서/ 밀려나는 실향민

(김연식/ 창가에서)

 

저 건너 큰 기와집 위태히도 기울었네/ 저 집 사람들은 아는다 모르는다/ 어디 가 긴나무 얻어 괴어 두면 좋을다.

(송계연월翁)

 

검은 새떼가 그림자를 떨어뜨렸어/ 포크레인이 앞산을 퍼먹으며

(이상희/ 데이지 화분에 얼굴을 묻고)

 

집은 어이하여 되었는가 대장(大匠)의 공(功)이로다/ 나무는 어이하여 곧은다 고조줄을 좇았노라/ 이 집의 이 뜻을 알면 만수무강하리라.

(윤선도/ 고산유고)

 

시냇가 헌집 한 채 뚝배기 같구나/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혀 부엌은 차디차고/ 뚫어진 벽 틈으로 별빛이 비쳐드네

(정약용/ 奉旨蘿蒙到積城村舍作)

 

그 집은 마치 누가 인사할지 안할지도 모르면서, 무안스럽게 기다리고 있는 옛날 친했던 사람처럼 그 곳에 서 있었다.

(E. 케스트너/ 파비안)

 

거리의 가장 외곽에 있는 변두리의 집들이 캄캄한 극장 안에서 성냥불이 타고 있듯이 전등불로 시골의 벌판을 비춰주고 있었다.

(M.A. 아스투리아스/ 대통령 각하)

 

산을 끊거나/ 강을 끊거나/ 바다를 끊고서 그 황량함에/ 황량함을 더하는 민첩한 기초 행위자들/ 그리고/ 밀려오는 빌딩들/ 거리들/ 공간 공간 공간/ 그것들을 만들고 나면/ 사람들은 수없이 몰려오고 있다.

(최영/ 철근 4)

 

우리 가족들은 지난 여름 내내 집을 지었다/ 틈만 나면 반칙을 일삼는 일꾼들을 달래며/귀지가를 부르며 열심히 집을 지었다.

(허소라/ 집짓기)

 

오막살이 행랑채에/ 처음으로 머문 하늘/ 어눌한 흙을 부벼/ 보슬보슬 만든 말들/ 말해도 공허해져서/ 소리없이 스미누나.

(구영주/ 봄비)

 

인도네시아에서 실려 왔나/브르네이나 말레이 반도,/또는 어느 남쪽 나라쯤에서 실려왔나// 연안부두 원목 하치장에 쌓이는/ 토막난 원시림들/ 깎이고 깎여 혼수감 가구로 쓰이든/ 동양제일의 국회 의사당 의사봉으로 쓰이든/ 시골 화장실의 휴지 조각으로 쓰이든

(최성병/ 원목들)

 

아파트보다는 그래도 두발로 땅짚고 서서/하늘 쳐다보는 내 집이 좋지/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그래도 때되면 채송화 봉숭화도 꽂을 수 있는/ 단독주택이 좋지/ 통속같은 아파트는싫습니다/ 통속같은 방에서 자고 통속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와/ 통속같은 지하철을 통해/ 통속같은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는/온통 통속에 들어있는 하루/통, 통, 통자 인생이여

(장용철/ 補宇人生)

 

홍수도 거품을 물고/ 서슬을 갈기며 덮쳤다가/ 제방뚝, 너의 돌가슴에/ 허리 꺾어졌다//대자연에 대항해 나선/ 인간의 의지로 쌓여진/쌓여서 굳어진 언제는/ 이 땅 지켜 영원한 빗장 질렀다.

(박장길/ 제방쪽)

 

산을 이고, 나는/ 강을 건넌다. // 칡뿌리로 하여/ 기둥을 세우고// 토담집을/ 한칸 짓는다// 마음이 아주/ 탁 빈 사람// 이, 집에 와서/백년 천년을 살으리라.

(김해성/ 選詠 · 20)

 

외로운 자에게만 더 잘 보이는/ 문설주 뒤에 계신 주의 그림자

(허소라/ 두 개의 디딤돌)

 

옛 이야기처럼/ 땅속으로 길이 났다/ 굉음과 함께/ 철길 위를 달린다.

(리태극/ 지하철에서)

 

내 사랑이/ 저 빛나는/ 눈과 같은 것이라면/ 외로운 밤/ 홀로 쌓아올리는/ 소망의 탑

(허영자/ 눈과 같은 것이라면)

 

큰 손 마님 나가신다. / 이것저것들 물렀거라/ 오늘은 팔학군 아파트 투기바람 부채질하고/ 내일은 증시 밑바닥 갈쿠리로 훑어가리

(성권영/ 서울 낮달 · 14)

 

그대 처마밑/ 등지 틀며 헐며// 등지 틀고 허는/ 반복의 반복/ 종내 그짓/ 그짓만 하다가마지막 만나지는/ 한 가지(枝) 지푸라기 같은 말씀의 빛

(김성자/ 그 사랑은 멀다 하지만)

 

오 ! 새벽 이여 나는 말한다/ 이 땅에 궁전을 세우리니 너는 저 하늘을 거울같이 닦아주렴

(이상각/ 새벽)

 

나는 내 청춘시절 위에 서서/ 오늘을 남길 설계도를 그린다.

(임효원/ 초록)

 

집이 벽돌로 되어 있듯이 인간의 삶은 요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벽돌을 쌓아 놓은 것이 곧 집이 아니듯, 요구들을 채우는 것이 곧 삶은 아니다.

(A.J. 헤셀/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가장 웅장한 건물, 가장 아부라함 성전이나 세상 영화의 기념관도 그것이 고통받는 노예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졌거나 부정한 수단과 사기 행위로 지어진 것이라면, 경건한 자에게는 불쾌감만 줄 뿐이다.

(A.J. 헤셸/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인간의 모든 행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경건함이라고 하는 이 발판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쉴 사이 없이 그의 삶, 그의 가정, 하느님을 바라는 희망을 쌓아 올리거나 허물어뜨리거나 한다.

(A.J. 헤셸/ 어둠 속에 갇힌 불꽃)

 

나는 남기고 가겠소/ ‥‥나의 집에 감돌고 있었던/ 청순한 사랑 속에/ 병든 사람들이 몸을 눕히고/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나의 테이블에 앉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나의 침대에서 잠들 수 있도록// 형제여 이것이 나의 집이오/ 자 안으로 들어오시오/ 해변의 초목과 별과 같은 돌집으로/ 나는 가난과 싸우면서/ 이 집을 지었다고

(네루다/ 유언 · 1)

 

너희 영혼은/ 어디에 집을 짓겠으며/ 내 사랑은 어떻게 풀겠느냐/ 나의 만백성아

(김남조/ 가시관과 보혈)

 

나는 내 청춘 시절 위에 서서/오늘을 남길 설계도를 그린다.

(임효원/ 초록)

 

몇 푼의 돈과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 그 바다 위로/쓰레기와흙더미/ 쏟아져 내린다// 아, 막히는/ 숨길//‥‥넓어진 국토

(박서혜/ 매몰된 어부)

 

내 살과 피는 한데 모여/ 집을 이루고/ 집 속에 내 마음이 들어가 산다//내 살과 피가/ 하나하나 흩어져/ 우주의 먼지 속으로 떠날 때/ 내 집은 부서지고// 내 마음도 멀리/ 형형한 불꽃이 되어 떠난다.

(김규화/ 나의 몸)

 

중년이 지난 이제부터 뜰을 배치하련다/이 굉장한 산의 경치를 잘라서 돌아와/ 나뭇가지나 잎나무의 기예(技藝)나 살피고/ 기암괴석을 늘어놓은 뜰을 만들까/ 방으로 돌아와 잠잠히 창가에 앉아/ 산수나 벗삼고 떨어져 있는 천지나 끌어 들이자

(장향화/ 뜰의 배치)

 

 

설 교 노 트

 

절제의 필요

롬14:19-21

 

서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은 다 정한 것이지만 식물로 인하여 검소하지 못한 생활을 하거나 절제를 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면 안됩니다.

그래서 절제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1.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고기를 먹여 줄 것을 약속하고 메추리 떼를 몰아다가 실컷 먹게 하였으나 그들의 죄를 벌하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모두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었지만 먹기를 탐하였으므로 이런 징계를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탐심은 물리쳐야 합니다. 먹는 것에서부터 절제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절제가 없는 욕심은 자신을 망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교훈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으로서 거룩하지 않은 불로 제사드리려다가 벌을 받아 죽었는데 그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는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르므엘 왕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금주한 왕입니다 자신이 마시고 싶어도 절제할 수 있다면 절제해야 합니다. 특히 왕이 술을 좋아하면 나라를 망칠 뿐 아니라 자신까지 병으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 술을 마시다가 나라를 망쳤고 알렉산더 대왕이 술로 인하여 병사하였습니다.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로 앗수르에 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술로 인하여 교만하였고, 술로 인하여 성과 골짜지가 망하고 왕관을 잃은 것입니다. 이사야 28장 7절에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길음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 실수하나니"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술을 마심에 있어서 절제하는 생활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절제할 수 있으면 생활은 저절로 검소하고 근면한 생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무엇이든지 형제로 거리끼게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조금만 잘 대해주면 아무렇게나 행동하고 상대방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서로서로 존경하는 마음이 있고, 절제하는 마음이 있으면 형제를 어려운 곤경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절제해야 합니다. 즉, 말이나 감정의 표현 등 상대방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지금까지 절제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지나치게욕심을 부려서 절제하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다 비극의 끝을 당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심에 있어서도 절제하여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형제에게 무엇이든지 거리끼는 일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내 생활의 낭비로 인한,상처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없도록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업

잠22:29

 

서론

그리스도인들이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들이 많음을 우리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역시 의식주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사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 사업에 대한 성경의 기원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말, 양, 소떼를 받고 식물을 주는 물물 교환을 하였고, 느헤미야 당시에도 상품을 팔고 샀는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팔았으며 솔로몬은 백향목 재목을 받고 밀과 앓은 기름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 앞에서 비둘기를 팔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구약 시대에는 거의 물물 교환이 성행하였던 것 같고, 신약 시대에서는 화폐로 물건을 사는 제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업하는 것은 쉬운 알이 아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관리하지 못하는 근무 태만도 염려되는 일이며 수고한 일에 대하여 대가가 적을까봐 걱정하기도 하고 자신이 다하였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또 안식이 없는 삶이 될까봐 염려합니다.

 

2. 사업하는 자의 자세

그러면 사업하는 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합니까? 근실해야 합니다.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며 마음의 풍족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충성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 주인이 직접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대리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상에서 많은 인물들 즉,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충성을 다하였고 여호야다의 일꾼들은 성실히 일하였으며 모세 역시 장래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일했습니다. 맡은 자들은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또한 정직해야 합니다. 재판이나 도량형에 공평하게 행하고 저울추도 되도록 공정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면해야 합니다. 이것은 사업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또 성실해야 하며 검소해야 합니다. 아무리 충성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해도 검소하지 못하면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부지런히 일하였으니 흥청망청 쓰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부지런히, 성실하게 일한 대가가 크니 검소하게 꼭 써야 할 곳에만 사용해서 풍요한 생활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3. 누구에게서 배울 것인가?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서 그 지혜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잠6:6). 개미는 더운 여름에 쉬지 않고 먹이를 장만합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을 잘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하였지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바울 역시 전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지만 장막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사업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업가들에 대하여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 버릴까봐 염려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사업은 우선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업은 흥할 수가 없습니다. 또 내가 벌었으니 나만 쓰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절약하고 절약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는데 쓰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써야 할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

고후7:10

 

서론

인간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후회해야 하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인생의 성공적 생활은 부귀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회할 것 없는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후회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후회없는 삶을 만드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1. 진실은 후회없는 삶을 만들어 줍니다.

인생에 있어서 많은 후회가 진실하지 못한 생활의 열매에 속합니다. 진실하지 못한 삶은반드시 후회할 날이 오고 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는 없으나 반드시 진실해야 할 이유는 있다."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인생은 마치 회계 장부를 정리하는 것과 같아서 숫자가 한자라도 틀려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보시는 진실의 저울에서 어긋나면 그 인생은 버림받고 말 것이며 그때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생활에 있어서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검소한 생활이 후회없는 삶을 가져다 줍니다.

인생의 수많은 후회 중에 하나가 시간을 낭비하는 태만에서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달란트를 묻어 둔 종을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검소해지려면 먼저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결국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고 해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됩니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많다고 해서 낭비를 해서는 안됩니다. 사치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으면 그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주님의 일에 전력해야 합니다. 즉, 교회에서의 봉사, 전도, 심방 등에 시간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많이 있다면 아끼고 아껴서 자신을 위해서 낭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합니다. 이것이 검소하고 근면한 생활이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길입니다. 잠언 19장 15절에 보면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인내하는 삶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줍니다.

이삭의 첫째 아들인 에서는 그릇과 장자권을 바꾸어서 동생 야곱에게 모든 장자의 축복권을 빼앗겨서 후회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순간적인 고통이나 감정, 정욕을 참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검을 빼는 베드로에게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인내하는 자는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결론

지나간 삶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남은 날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진실한 삶으로 엮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근면하고 검소한 삶으로 엮어나가야 하겠습니다. 인내하는 삶으로 수놓아 아름다운 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실이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받은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풍요한 삶의 비결

신28:1-4

 

서론

동서 고금을 물론하고 사람들은 누구나 다 미래에 더 잘 살기를 원하고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좀 못 살았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도 없으며 거거에 남보다 더 잘 살았다고 해서 교만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여기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자기 민족들에게 풍요한 삶의 비결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축복을 받아 풍요롭게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1. 풍요한 삶의 의미

모세는 자기가 민족들에게 풍요한 삶의 의미를 몇 가지로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민들은 첫째로 영적으로 신앙의 풍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시아 7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인 측면에서 신앙이 가난하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먼저 신앙이 풍요해야 됩니다.

둘째로 경제적으로 물질도 풍요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돈이나 물질 자체가 악하거나, 이 물질을 추구하고 소유함이 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민들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 풍요하게 사는 삶을 하나님은 원하시고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2. 풍성한 삶의 비결

우리 기독 신자들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풍요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 근면이 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검소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노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절약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저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물질적인 측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모세가 증거한 신망적인 차원에서 몇 가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진정 풍요한 삶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마음으로 깨달아지는 것이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 소화시키는 것이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선민의 의무를 바로 이행하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선민으로서의 의무를 바로 이 행하면 영 적으로나 육적으로나 풍요해지지만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가난해진다는 교훈입니다.

선민의 의무 이행은 첫째, 나 자신의 성결이요 둘째, 하나님께 헌신이요 셋째, 모든 본분과 직책을 위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생활에 있어서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허영과 낭비가 심하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결론

모세가 제시한 풍요한 삶을 사는 비결은 물론 하나님의 축복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축복입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도 잘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살려면 많은 면에서 절제하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신앙의 정조를 지키고, 선민으로서 의무를 바로 이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근면하고 검소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모은 것을 아끼며 나보다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는 나누어주는 생활, 그것이 바로 풍요한 삶을 사는 비결일 것입니다.

 

 

규모있는 생활

살후3:1-18

 

서론

그리스도인들은 일생을 직무에 충실하고 또한 근면해야 할 것을 명합니다. 입으로는 신앙을 말하고 은혜를 증거하면서도 그 직무에 충실치 않는 자는 주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기본적으로 보장하시고 계시나 신자들은 하나님께 구하여 얻어야 하는 인간의 노력과 수고가 수행되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셨습니다.

규모있는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자작 자급 정신입니다.

범죄한 시조 아담이 비록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받았어도 수고하면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여 식생활은 보장해 주셨습니다.

게으르거나 불신함으로 자기의 먹을 것도 마련하지 못한다면 그는 너무도 무능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노력에 의하여 자작자급하는 기본생활을 확립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가는 일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믿는다고 해서 육신의 일을 게을리해서는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2. 정상적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고 해서 일도 하지 않고 무위 도식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너무 지나친 열광적 신자들의 탈선 행위를 엄히 훈계한 것입니다.

그런 재림에 대한 그릇된 사상 때문에 다 된 세상에서 사업을 해서 무엇하며 직장과 가정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식으로 살다보니 정상적 생활에서 벗어나 남의 신세를 지게된 자들이 계속하여 나왔습니다.

태만이나 도식은 죄입니다.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은 근면하고 성실하고 충실하며 검소해야 합니다.

육신적 사업에 치우쳐 신령한 일을 등한시하거나 신령한 일에 대한 열중으로 육신의 일을 전혀 무관심하게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이것 역시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으로 자기 맞은 바 일을 다해서 검소한 생활로써 본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의 행동을 본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자격으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여러 번 순행하면서도 자기의 의식문제 때문에 형제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친절히 장막을 제조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그것은 스스로 자신의 잎을 것과 먹을 것을 일해서 얻으려는 근면한 정신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것 즉, 기도는 하고 다니지만 광신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육의 것도 돌보는 정상적인 생활을 보여주는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교인들이 자진하여 헌금을 보내거나 바울을 대접하는 일은 있었어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일로 인하여 교인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염려거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노력하지 아니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남이 애써서 번 돈으로 붙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가야 할 길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향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염려를 하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 그것은 일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또 각자 정상적 생활을 해서 규모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바울과 같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균형있는 생활로 검소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겸 손

성 경 활 용

1. 어느 때 겸손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손 아래 섰을 때

(벧전5: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매 너희를 높이시리라

(2) 만났을 때

(고후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3) 무슨 일이든 행할 때

(행20:18-19)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2. 왜 겸손해야 하나?

(1) 하나님께서 요구하심

(마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2) 예수님의 본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21:5)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3) 은혜를 주심

(잠3:34)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벧전5:5) 하나님 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4) 부름에 합당해야 함

(엡4:2) 부름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5) 높여주심

(벧전5:6)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3. 겸손하지 않은 자는?

(1) 더욱 범죄한다.

(대하33:23)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비치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

(2)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

(대하36:12)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

 

4. 겸손해 질려면?

(1)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한다.

(대하7:14)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2) 마음을 낯추어야 한다.

(잠16:19)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3) 규례를 지켜야 한다.

(습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비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5. 겸손을 명함

(1)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것

(마6:8)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2) 겸손의 옷을 입을 것

(골3:12)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6. 겸손한 자가 받을 복

(1) 소원을 들어 주심

(시10:17)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2) 구원을 얻음

(욥22:29)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니라

(시149: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3) 주께서 높여주심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약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4) 먹고 배부를 것임

(시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5) 하나님께서 붙드심

(시 147: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를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6) 영예를 얻음

(잠29:23)마음이 결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7) 존귀하게 됨

(잠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8) 은혜를 얻음

(잠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9) 지혜가 있음

(잠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관련원어풀이

1. wn:[; 아-나-우

(1) 고용받는, 비천한.

(시9:13, 10:12)

(2) 온화한, 경건한, 고상한.

(민12:3)

(3) 괴롬받는, 곤고한, 초라한, (하나님의) 고상함, 온화, 낮은 마음, 단정, 아담.

(잠15:33)

(4) 겸손, 관대.

(잠18:36)

 

2. [n"x; 차-나

(1) 낮다, 복종하다, 겸손하다.

(잠11:2)

(2) 얌전하게 행동하다, 겸손하게 행동하다.

(미6:8)

 

3. jv 솨흐

(1) 억압당한, 눌려진, 풀이 죽은.

(욥22:29)

(2) 내던져 진.

 

4. lp;v; 쉬-팔

(마음이나 영이) 겸손한, 내던짐을 당한.

 

5. tapeinovw 타페이노오-

(1) 억누르다, 억압하다, 낮추다, 겸손하다.

(마18:4, 눅14:11)

(2) 낮게하다, 굴복시키다, 지위를 떨어뜨리다.

(마23:12, 눅14:11)

(3) (산, 언덕을) 낮게하다, 평평하게 하다.

(눅3:5)

 

6. tapeinofrosuvnh 타페이노프로수네

(1) 마음의 낮음, 겸손한 마음을 가짐, 겸비.

(2) 겸손한 마음을 가진, 겸비스러운.

(벧전3:8)

 

7. prau?" 프라우스

온화한, 얌전한, 자비심이 있는.

 

8. tapeinov" 타페이노스

원래 "땅에서 높은 곳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의 뜻.

(1) 낮은, 낮게, 초라한.

(눅1:52, 고후7:6)

(2) 겸손한, 겸비한.

(마11:29, 약4:6)

(3) 비굴한, 비천한.

(고후10:1)

설교예화자료

나의 나 된 것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인간은 누구나 다 제 잘난 맛으로 산다고 합니다. 이는 누구나 자존심을 갖고 사는 인생이란 뜻일 것입니다. 이런 자존심을 갖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물질이 부족하고 부귀와 명예가 떨어진다 해도 꿋꿋이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자존심은 어느 정도 우리를 버티게 하는 큰 바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존심이 나의 참된 가치를 깨닫고 떳떳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좋은 점도 있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심으로 바뀌고 고집과 완고로 변해버릴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마도 자존심과 자만심이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를 잡아들이는 데 쓰임을 받았지만, 자신에게 직접 나타나신 주님을 뵈온 후에 이제는 겸손해져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부르게 되고 자기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지만 자기가 아니요,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사도 바울의 간증과 같이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힐 수 있을 것인지, 다시 한 번 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나 됐다고 믿고 간증할 수 있는 자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것이고 남은 여생은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기를 잘 지키면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이 사회에 빛을 발하고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밀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고요함이 다. 그것은 기대하는 것도 없고, 내게 일어난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고 내게 해로운 일들을 느끼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을때와 내가 비난받고 힐책받을 때의 편안함이며,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이 어려울 때 내가 문을 닫고 들어가 혼자 나의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어느 깊은 침묵의 바다와 같은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안에 축복받은 보금자리를 갖는 것이다. 」

- 엔드류 머레이 -

 

 

칠장이 학장

 

작은 신학교의 이야기입니다. 그 학교의 학문적인 수준은 매우 놀랄만 했으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부자가 학교를 찾아와 벽에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백발의 한 남자에게 학장실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 백발의 남자는 학교 안의 한 건물을 가리키면서 정오쯤 돼야 거기에 학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방문객이 그 시간에 맞춰 학장실을 방문했더니 비록 의상은 다르지만 조금 전에 운동장에서 페인트 칠을 하면서 자신과 말을 나눈 바로 그 사람이 문을 열었습니다 방문객은 초대를 받아들여 칠장이 학장과 점심을 하며 대학의 필요한 것들에 대해 묻고 작은 헌금을 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방문이 지난 이틀 후 5만 달러에 해당하는 수표가 담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대학 학장의 지위에도 거만하지 않고 작업복을 입고 작은 일이라도 성실히 하는 한 인간의 겸손한 모습은 부자의 돈 주머니의 끈을 풀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성자가 된다는 것

 

옛날 어떤 곳에 성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경건하고 덕망스러워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까지도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 그러자 성자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천사들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인간의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한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 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성자는 대답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 천사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예, 한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

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믿음

 

"내가 이 우주에 대한 진리, 우주의 진리에 대한 나의 지식이란 저 바닷가에서 자갈돌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보다 너 적거나, 혹 비슷할 것이다."고 뉴우턴은 말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는 겸손합니다.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의 뿌리요, 어머니요, 기초이다. " 또한 교부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첫째는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다." 겸손은 모든 생활의 뿌리가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늙은 신학자의 이야기는 우리의 자만심을 깨뜨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지식이 너무 적어서 성경을 그저 그대로 읽었다. 그러다가 대학과 신학교에 가서 철학을 배우고 비 종교학을 배우고 성경비판 서적을 배우게 될 때 지식이 너무 많아져서 성경을 그대로 못 믿었다.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내 지식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아서 이제는 그저 성경 그대로를 믿는다."

 

 

겸허한 마음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기는 좋아하되 듣기는 싫어합니다. 자기 주장을 내 세우는 데는 열을 올리면서도 남의 의견을 듣는 데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사정과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보면 인간다운 훈훈함과 친근감을 느낍니다.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흥미와 열심을 가지고 들어주시는 선배 목사님을 대할 때는 훈훈한 애정을 느끼며 마음으로부터의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신학적인 입장은 전혀 다르면서도 때때로 전화를 걸고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모 교수의 모습에서 훈훈한 인간미를 느낍니다.

학생들의 소리에는 귀를 막아 버리고 배우기만 하라고 호통치는 권위주의적인 교수는 학생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고 결국 학생들의 불신과 배척을 받게 됩니다. 교인들의 사정에는 아랑곳없고 일방적으로 강단에서 설교만 하는 목사는 교인들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결과를 빚고 맙니다. 아내의 사정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남편, 남편의 사정을 들어주지 못하는 아내는 불만과 불편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그 가정을 불행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설득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하는 겸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 사마리아인의 열린 마음이요,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 그의 사정과 소원에 귀를 기울이던 깨어진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범죄의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된 한 여인의 호소와 죽은 아들의 시체를 메고 무덤을 향해 통곡하며 걸어가던 한 과부의 울음 소리에 귀기울이며 불쌍히 여기시던 주님의 마음입니다.

 

 

너와 나는 하나

 

옛날 러시아에 니콜라이라는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애로운 선정으로 백성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평민복으로 갈아 입고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는 중에 어느 두 갈래길 앞에서 지나가던 군인 하나를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군인이 황제인지도 모르고 어찌나 거만한 자세로 대답을 하는지 황제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당신의 계급은 어떻게 되지요?" 물었더니 이 군인은 산이 나서 배를 내어 밀면서 "자네가 한번 맞춰 보겠나?" 그때 황제는 겸손하게 군인을 향하여 "상사이신가요?" "아니, 그 윌쎄." "그러면 소위이십니까?" "아니, 그 위야." "그러면 대위입니까?" 그 때에야 이 군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래 내가 대위야." 하면서 더욱 배를 내밀었습니다. 그때서야 황제는 "네? 대위세요?" 하면서 돌아서려고 하자 "아니 자네도 군급이 있나보지?" "네 대위님이 한번 맞춰보세요?" "그러면 자네 일병인가?" "아니 그 월세." "그러면 중위인가? " "아닙니다. " 이때 대위는 피우던 담배를 뽑아 던져 버리고 경례를 붙이면서 "그럼 소령이십니까?" "아니, 그 위요." "아이고, 중령이십니까?" "그보다 썩 위요." "아니 그러면 대장 각하십니까?" "아니, 그 위요." "아니, 그러면 원수이십니까?" "아니, 그 위요." 원수보다 위라면 니콜라이 황제뿐이니 "폐하여 !" 하면서 부들부들 떨 때 니콜라이 황제는 그를 일으키면서 "일어나라 ! 너나 나나 한가지야 ! 우리 위에 하나님이 보고 계셔."하고 말했습니다. 겸허한 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갈멜산의 소나기」 中-

 

 

겸손한 성직자

 

노예 상인이었다가 설교자이며 기독교 시인이 된 존 뉴튼(John Newton)의 임종 때 젊은 목사가 그를 방문해서 하나님의 포도원의 훌륭한 일꾼을 잃게 됐다고 깊은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그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대답하기를 "맞소, 내가 먼저 가지만 당신도 곧 올 것이오, 당신이 오면 우리들의 우정으로 당신은 분명 나를 찾을 것인데 내가 어디에 있게 될는지 미리 말해 두겠소 ! 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구원하신 도둑의 발 아래 앉아 있을 것이오 ! " 위대한 그도 바울처럼, 놀랄 만한 축복으로 구원 받은 큰 도둑의 부류에 자신이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겸손은 모든 사람이 설교하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않고,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하나의 미덕이다. 주인은 그의 하인에게, 속인은 성직에게, 그리고 성직자는 겸손이란 좋은 교훈이라고 생각한다(J. 셀든)."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한 유서 깊은 교회는 문이 매우 작고 들어가는 입구가 낮아 이 곳을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고개를 낮게 숙여야만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주의 전에 들어갈 때 갖추어야 할 성도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겸손의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가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주의 전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겸손의 의미를 표현할 유익한 이야기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벤자민 프랭클린이 이웃집에 갔었는데 그의 방문이 끝난 후 그 이웃 사람이 집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나가는 길엔 천장보다 낮은 대들보 하나가 중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이 "머리를 숙이세요 ! " 하고 외쳤지만 너무 늦어서 프랭클린은 그만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이웃 사람이 프랭클린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젊은이 자네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머리를 자주 숙이면 숙일수록 그만큼 부딪치는 일이 없을걸세." 이 말이 프랭클린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자만심이 그의 심중에 떠오를 때에는 항상 말을 기억하고 머리를 숙일 것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과대평가는 죄(? )

 

전한의 손보가 문관 시험에 급제하여 지방 관리가 되었던 때입니다. 상사인 장충은 그의재간과 학문을 인정해서 자기 자식의 가정교사가 되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손보는 아무래도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의 결점을 들추어 말하고는 자기가 얻었던 관직마저 사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얼마 있다가 다시 관직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충은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하여 가까운 사람을 보내 사유를 물었습니다. "자네는 장충씨가 모처럼 집까지 마련하였는 데도 스스로의 결점을 말하고 그 자리를 사임하지 않았나? 그래서 그것은 자네의 결벽증에서 온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랬더니 손보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지금 내가 복직한 직위는 속된 직업 중에 속된 직업입니다. 그것을 기꺼이 맡은 제가 어떠한 인간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시겠죠. 이러한 저에게 장충씨는 자제분의 공부를 시켜 달라고 저에게 편리한 주택까지 준비하시려하였으니 제가 어찌 그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저를 과대평가하시면 안됩니다." 진정으로 익은 벼는 이렇게 머리를 숙이는 법입니다. 손보의 이 일화는 외형적 자만심에 빠져 자신을 과대평가하길 좋아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겨줍니다.

 

 

겸허

 

주(周)나라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성왕이 즉위하였습니다. 무왕의 동생 주공은 노나라 영주의 지위를 사양하고, 성왕의 보좌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나라에는 자신의 아들 백금을 봉하였습니다. 백금이 임지로 떠날 때 주공은 백금에게 이러한 교훈을 하였습니다.

"나는 문창의 아들이요, 무왕의 동생이며, 현재 왕 성왕에게는 숙부가 되는 사람이므로 나의 지위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찾아오면 이를테면 얼굴을 씻고 있다가도 머리카락을 쥔 채 몇 번이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식사 중이라도 몇 번이고 입 속의 음식물을 뱉으면서 그 사람을 맞이한다. 그 까닭은 그만한 사람들을 언제나 측근에 두고 싶은 일념때문이다. "

이러한 현명한 자에게 어찌 사람들이 안 모이겠으며 현자라 아니하겠는가?

 

 

헌신의 뿌리는 겸손

 

전에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병원을 처음으로 지을 때 손수 일을 하면서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 옆엔 흑인 청년이 하나 그저 서 있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저 서 있을 것이 아니라 나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이 흑인이 "나는 그런 일 안합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인데 그런 일은 안합니다. 일은 공부 안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하는 말이 "나도 학생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합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학식에 따라 하는 일이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박사 학위가 몇 개씩이나 있었던 슈바이처 박사는 어떻게 그 오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헌신적인 선교 생활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배운게 없어 선가요? 아닙니다.

여러분 !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도리어 열매 없는 가라지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열매 맺은 만큼 고개를 숙여 헌신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됩시다.

 

 

구라도스돈과 마부

 

영국의 대 정치가인 구라도스돈은 높은 학벌과 지위로 그 이름이 높아졌습니다. 그는 타고난 달변으로서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유명해졌습니다. 그가 영국 내각 수반으로 있을 때 그를 태워가지고 다니던 마부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바쁜 틈을 쪼개어 마부에게 문병을 가고 그의 병의 차도를 수시로 알아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가 정부의 중대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의논하던 때에 마부가 임종을 맞게 되었다는 급보가 왔습니다. 그는 하던 일을 제치고 마부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바쁜 중에도 마부의 곁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의 임종을 지켜 주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늙은 마부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늙은 마부의 임종을 지킨 정치가의 모습이 겸손하다 못해 겸외스럽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어록·시·묘사

 

겸손은 미덕 중에서도 가장 터득하기 힘이 든다. 자기 자신을 높이 생각하려는 욕망만큼여간해서 가라앉지 않는 것은 없다.

(T.S. 엘리엇)

 

참다운 겸손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

(A. 테니슨/ 성배)

 

유순과 겸손에서 모든 덕은 생기고 자아를 역설하는 데서 모든 죄는 발생한다.

(A. 테니슨)

 

겸손하기만 한다면 모든 존재가 그대에게 스승이 된다. 하지만 만일 겸손하지 못한다면, 부다(Buddha)가 곁에 있더라도 그에게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

(B.S. 라즈니시/ 마음으로 가는 길)

 

겸손은 의상보다 먼저 존재했고, 의상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의상이 태어났을 때 겸손은 죽었다. 가시적 겸손이 태어났을 때 진실한 겸손은 죽은 것이다.

(마크트웨인)

 

칭찬 받았을 때가 아니고, 꾸지람을 들었을 때에 겸양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겸손한 자이다.

(장 파울/ 인간에 관한 기상관측)

 

겸손한 사람은 모든 사감으로부터 호감을 산다.

(L.N. 톨스토이)

 

겸손은 거만의 해독제이다.

(볼테르/ 철학사전)

 

겸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늘 타인만을 비난한다. 그는 다만 타인의 과오만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자신의 욕정이나 죄과는 점점 커져가게 마련이다.

(L.N. 톨스토이)

 

겸손은 청년을 장식한다.

(그리르바)

 

부자의 겸손은 빈자의 벗이 된다.

(팔만대장경)

 

한 수사학자로서 웅변술의 제1법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발음이라고 대답했다. 또 제2, 제3의 법칙을 물었을 때에도 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이와 같이 만일 누가 기독교의 법칙에 관하여 제1, 제2, 제3의 법칙을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A. 아우구스티누스)

 

겸손이란 사람이 자기를 알려고 생각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최초의 자연스런 감정이다.

(W.E. 채닝)

 

겸양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굴욕은 지옥의 문을 연다.

(A. 지드)

 

겸손은 사람의 칭찬을 싫어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더욱 완곡하게 칭찬받기를 바라는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F. 라 로슈푸코/ 도덕과 반성)

 

지나치게 겸손한 사람을 진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특히 자기가 자기를 비꼬는 것 같은 태도를 신용해서는 안된다. 그 배후에는 대개 허영심과 명예심의 강렬한 비수가 감추어져 있다.

(C. 힐티/ 행복론)

 

교만의 망토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겸손함이 있다.

(실버)

 

겸양하라 ! 진실로 겸양하라! 왜냐하면 그대는 아직 위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겸양함은 자기완성의 토대이다.

(L.N. 톨스토이)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를 높이는 일인데도 사람은 이 이치를 모른다.

(윤태림/ 便命意識과 哲學의 先行要件)

 

남의 입장에서 남을 생각해 보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란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비뚤어진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인격의 척도로 남을 잰다‥‥ 겸손은 비굴로 오해되고 강직은 무례로 곡해된다.

(김태길/ 웃는 갈대)

 

겉뿐의 겸허는 가장 번거롭게 꾸민 허영이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인생은 겸양이란 긴 교훈이다.

(p. 발레리)

 

겸손은 힘에 바탕을 두고, 거만은 무력에 바탕을 둔다.

(F. 니체)

 

겸양한 사나이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결코 말하지 않는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공작새는 자기의 발 밑을 돌아볼 때는 깃털을 접는다.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편지지 위에/ 꼬부랑글씨/ 점점 누워 버리는/ 하나님‥‥‥//글자 배우는/꼬맹이처럼/서툴은 내 기도 한 줄// 마음은 뜀박질인데/ 입술새로 나오는 기도는 더듬더듬 말 더듬이

(이영옥/ 기도)

 

어두운 교회당을 밝히는/ 등불이고 싶었습니다/ 그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이고 싶었습니다. //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그래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무엇/ 그런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안광성/ 안타까움)

 

세상에서 밀려난/ 조그만 것들/ 가녀린 것들/ 부드러운 것들은/ 모두 별이 되었다. //겸손하고/ 고요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염치를 차리고/ 나보다 남을 사랑하는 마음

(허영자/ 별)

 

젖어 얼룩진 거울 앞/ 닦아내면 더욱 부끄러운 이 노릇/ 오늘은 무릎으로라도 기어/당신 자리로 나아가는 시작이어라.

(김명지/ 향을 사르며)

 

그분이 홀로/ 뺨을 맞고 서 있다/ 겸허한 모습/ 그의 맑은 눈빛이/ 내 무의식을 깨웠고/나는 막막하게/ 하늘을 본다.

(류순화/ 성 금요일 이후)

 

나는 티끌, 아니면 진흙/ 불면 날아가고 허물어 버리면 무너지나/주께서 영광을 위해 빚어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배명식/ 기도)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갈 때/겸손하라고 외치는/ 땅을 바라보며/ 긍정이란/ 덕과 같은 것이라고/ 믿어 보지만/ 우산 위에서는/ 연신/ 천둥소리/ 끊이지 않는다.

(신재연/ 암송)

 

그분이 홀로/ 뺨을 맞고 서 있다/ 겸허한 모습/ 그의 맑은 눈빛이/ 내 무의식을 깨웠고/나는 막막하게/ 하늘을 본다.

(류순화/ 성 금요일 이후)

 

 

설 교 노 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

요13:12-30

 

서론

예수님께서는 잡혀가시기 전날 밤에 손수 대야에 물을 떠 놓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겼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것이며 영문을 몰라서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순종을 시험하신 후에 설명해 주셨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죄를 씻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오직 하나뿐인 아들로서 우리 인류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왜 나의 발을 씻기느냐고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죄를 대속해 주신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 또한 확실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의미를 확실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2. 겸손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의 선생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종처럼,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라다녔지만 서로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누가 더 크냐에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었습니다(막10:35-4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누가 더 잘나고,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똑똑하고 하는 그런 것들로 인하여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가득찬 곳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겸손과 사랑을 실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3.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서로 너희도 발을 씻기라고 권면하십니다. 진실로 천국은 겸손한 자의 것입니다. 겸손한 자만이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택한 자들에게만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가룟유다의 배반을 말씀해 주십니다. 가를 유다는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겉으로만 예수님을 따랐을 뿐이지 속으로는 예수님을 팔아 넘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할 줄 아시면서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사도로서의 권위가 손상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키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론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나를 떠받들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나의 발을씻어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상전의 자리에 앉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그렇게 제자들에게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겸손한 자기를 낮추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행하신 대로, 본을 보여주신 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참으로 주님은 겸손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형제간에 이런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알지도 못하며 또 섬긴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 형제, 이웃,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서로의 발을 씻기며 낮아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겸손하라

마23:12

 

서론

주님께서 주신 본문의 교훈은 위대한 인물이 되려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낮아지는 마음을 가지고 종의 입장에서 봉사하는 자, 즉 겸손한 인격자가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버림받지 아니하고 귀히 되고 크게 쓰심을 받는 자가 되려면 참으로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식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를 아는 지식을 구비하였다고 할지라도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면 제일 무식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많은 세상의 지식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바로 보고 자각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그때가 바로 겸손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그때에 참 은혜를 받게 빅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만 잘났다고 생각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의 부족을 바로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의 부족한 점은 하나도 모르면서 자기의 재능, 잘난 점만 생각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고 교만입니다.

 

2.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교만한 것이니 이것은 사탄에게서 받은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지위를 바라지 말고 낮은 데 처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높아진 것을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낮아짐을 불평하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사도 바울의 생활을 우리도 해야 하겠습니다.

 

3. 자기를 숨기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높이 나타내고자 하며 위대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잘된 일은 다 자기에게 돌리고 실패는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의 위대하심을 힘써 증거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할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의 겸손을 배워서 자기를 숨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뒤에 숨기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4. 타인을 자기보다 높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심은 큰 죄악이요, 자기를 실패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고 약하고 무력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하며 지극히 적은 자라고 진실로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결론

인간이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가 잘난 줄로 아는 이 교만은 그 심중에 마귀의 씨가 뿌려진 까닭이니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서 중심이 성결하면 겸손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올바른 삶의 비결인 자기 겸손

약4:5-10

 

서론

교만은 우리 안에 온갖 악을 유발시키고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종류의 유혹에 기회를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및 우리의 동료 인간들과의 잘못된 관계의 원인이라면,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당면한 의무는 자기를 낮추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골3:5). 베드로의 표현을 빌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도록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만 합니다(벧전5:6).

 

1. 자기를 낮추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의무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모든 때에 그리스도인이 이행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육적 욕망이 지배력을 획득했을 때, 영달의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인간을 부당하게 높이는 견해들이 만연할 때, 인간의 자만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 공공연한 가르침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 무가치하고 위험한 감정들을 특별히 자극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리스도인이 이행해야 하는 특별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낮추어야 하는 이 의무를 꺼리고 혹 인정한다고 해도 이행하지 못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이 점에서는 매우 연약한데 그 이유는 자기가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지키게 하는 것이 그들이 주라고 부르는 이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2. 자기를 낮추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우리가 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자기를 낮추는 것에 포함될 수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럼으로써 자기를 낮추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시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우리 의지에 대한 엄한 지배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삶에 대한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르도록 강력하게 강제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에는 하나님과의 교제 및 영혼의 수련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적인 이익과 관계되는 일들을 단호히 제한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외적이고 육적인 도움들을 얻는 것도 자기를 낮추는 것에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3. 자기를 낮추는 것은 큰 적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보다 어떤 독자적이고 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악한 영의 성향을 어떻게 보던지 간에 악한 자아는 활동적인 것으로, 그리고 맞서 싸워야 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늘 자기를 강화시키고 있는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고자 하는 자는 "정사와 권세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4. 자기를 낮추는 것은 의존할 수 있는 큰 조력자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만함으로써 자기를 높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낮춤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를 그의 은혜의 능력 안에 있게 하도록 해주십니다.

자기를 낮춤으로써 즉, 겸손해짐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자기를 낮추는 일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충성하면 야고보의 표현처럼 우리는 영적 간음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큰 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정복한 사랑은 아무것도, 어떤 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겸손한 생활, 즉 자기를 낮추는 생활을 하여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

빌2:5

 

서론

본문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본래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지만 그 동일한 위치를 포기하고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의 미덕을 나타내셨다는 내용입니다.

 

1. 그리스도의 겸손

그리스도의 겸손은 하나님과 같은 신적 권위에서 인간과 같은 노예의 신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고, 우주의 최고 통치자의 역할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천한 자의 역할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겸손은 자기 부정이고 자기 비하입니다. 바울은 이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은 절대자나 인간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응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의 원시림 속에서 의사의 일생을 보낸 것은 명령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겸손을 따라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겸비의 지경에까지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 교만과 우월감과 욕망을 억제하고 죽이는 영속적인 내적투쟁을 뜻하는 것입니다.

 

2. 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천한 사람의 모습을 취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죄인된 인간,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 절망한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과 용기와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일시적인 위선이나 선전 효과를 노리는 것이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으로 내려오셔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삶의 동반자가 되시며 우리와의 대화와 지상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가르치시고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각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비천한 우리를 도우시려고,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그는 비천하게 되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겸손한 지경까지 내려갈 때, 그리고 삶의 바닥에서 헤매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창조적이고 사랑스런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의 혁명적인 힘입니다.

 

3.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극적인 행동을 찬양함

그리스도의 겸비는 하나님 에 의하여 높임을 받고, 그리스도의 종의 역할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역할로 바뀌어집니다. 하나님도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겸손을 귀하게 여기시고, 모든 이름 위에 최고의 것을 주시고, 모든 권세를 맡겨 그를 주님으로 인정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하였던 까닭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의마음은 철저히 비었기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셨기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지 못할 때 교만하게 되고, 교만하면 자기를 절대 화하게 되며, 자기 절대화는 자기를 우상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이 될 때 그 인간은 이미 자기를 잃어버린 존재요, 분열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결론

지금 우리 각 사람의 형편은 어떤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리고 비천한 동료 인간들과 하나가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시련과 고통, 그리고 자기 희생 다음에 오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왕국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고, 겸손을 잃고 교만으로 인해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는 사회를 구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간직하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예수님의 겸손

요6:22-40

 

서론

성 어거스틴이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첫째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한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께서 겸손하셨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신 말씀도 있지만 지금은 본문에 의하여 예수님의 겸손함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늘로부터 내려 오신 겸손

하늘에서 내려 오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상으로 쫓김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있지만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된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얼마나 겸손하십니까? 또 세상에 오신 후에도 누구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시지 않았고 어떤 지위를 획득코자 하여 힘으로나 금력으로나 무력으로나 싸운 일이 한번도 없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왕으로 세우려 함을 알고 혼자서 산으로 피하셨던 분입니다.

진실로 예수의 겸손하신 모습은 세상의 어떤 성인과 위인의 겸손에 비할 수 없는 겸손의사표가 되는 동시에 구세주에 이르기까지 겸손하셨습니다.

 

2. 하나님의 뜻만 행하려 하신 겸손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내려오신 것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신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도 당신의 뜻을 행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복종코자 하신 것이 예수의 겸손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모든 일을 경영함에 있어서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심인 동시에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노예 해방을 위해 전쟁을 하였던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자신이 그 전쟁을 이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서 승리하였다고 했습니다. 링컨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킨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계셨고 그 명령에 복종하였기 때문에 승리하였으니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셨고 또 "내 아버지의 뜻을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뜻은 예수로 말미암아 예정하신 자를 다 구원하심이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를 영원히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자기의 생각과 뜻을 포기하고 살던지 죽던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예수의 주신 은혜의 힘을 입어 신앙생활을 진실히 하여 영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불신자의 회개와 성도의 완전한 구원을 위하여 지금도 겸손히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배워서 품고 주안에서 겸손히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겸손

빌2:1-11

 

서론

예수님은 지상 생활 33년 동안에 인생들에게 참된 겸손이 무엇인가를 생활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겸손이야말로 참된 겸손입니다.

세상에서의 겸손을 살펴보면 역시 겸손은 교양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아름다운 미덕입니 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땅 위에 오시어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겸손은 사람으로서 최대의 겸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그 겸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 복종하는 겸손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인생이 보이지 않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바른 겸손으로 살아가야 됨을 보여주십니다.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생활 태도를 보여주라고 주님은 그의 겸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이 왜 남에게 얻으려 할 때 겸손해야만 되는가 하는 이유는 인생이 하나님 앞에 취하여야 하는 태도가 겸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 복종한 생활이 겸손한 생활입니다. 거기에 평화가 있고 진리의 질서가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낮아지는 겸손의 세계입니다.

 

2. 사람을 섬기는 겸손

예수님의 겸손은 사람을 섬기는 겸손입니다. 높은 위치의 사람이 낮은 자리의 사람을 섬기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잡혀가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섬김을 받는 자의 태도가 아니고 섬기는 자의 태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인기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이득을 위하여, 아니면 교양이 쌓여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은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희생의 겸손입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국가와 사회는 평화가 있고 발전이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3. 천국을 보여주실 겸손

예수님의 겸손은 천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남을 위해 회생하고 남을 섬기고 남을 나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이 나라는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겸손을 통하여 천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인생이 겸손하면 하나님이 높여 주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생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만 똑똑하고 영웅처럼 나타나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 겸손의 덕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결론

예수님의 겸손은 인생에게 참된 겸손의 의미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을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생활은 겸손의 생활입니다. 물론 사람을 위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믿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천국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겸손한 세계는 평화가 있고 질서가 있으며 은혜가 풍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생활을 우리 모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요3:22

 

서론

성경을 읽어 보면 겸손히 주님을 섬긴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세례 요한 만큼 겸손히 주를 섬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온분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외 쳤습니다.

세례 요한의 덕망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세례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고 사양하며 거절을 했지만 예수에게 허락하라고 부탁하시니 그 말씀에 순종하여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후 세례 요한에게로 가던 사람들이 예수께로 모이기 시작하자 요한의 제자들은 분개하였지만 요한은 침착하게 제자들을 타일렀습니다.

 

1.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나 세례 요한에게 각각 일정한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능력의 차이로 성공하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다 하늘이 내리신 선물의 결과이니 원망과 질투는 다 그릇된 태도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경우에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경거망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신이 가졌던 덕망이 예수께로 옮겨간 것을 보고 질투하거나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을 잘 안 사람입니다. 자기 분수를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겸손히 주를 섬긴 분이었습니다.

 

2. 세례 요한은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

자는 너희니라 "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의 분수만 안 사람이 아니고 자기의 사명이 무엇임을 분명히 안 분이었습니다. 나의 설 자리를 알고 나의 할 구실을 바로 아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일생 동안 몸바쳐 일할 수 있는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특별히 세례 요한은 예수와 자기와의 관계를 똑바로 알았습니다. 예수는 누구이시고 자기는 그 앞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 하고 물었을 때 "아니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분명히 외쳤습니다.

 

3.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 나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29절의 신부는 메시아 왕국의 백성이고, 신랑은 그리스도요,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친구는 세례 요한입니다. 신랑의 음성은 혼인 잔치에서 기뻐하는 신랑의 환호성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니 신부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질투나 시기를 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에게로 사람들이 다 몰려가 세례를 받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 기쁨이 넘쳐 흐른다고 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은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는 십자가를 지더라도 하나님의 뜻만이 성취되면 나는 죽더라도 주님만 섬기겠다는 정신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14장 8절에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고 한 말씀은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취해야 될 삶의 태도라고 봅니다.

 

결론

겸손, 사랑, 봉사가 있는 곳에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강퍅한 이 사회는 변해 살 맛이있는 낙원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누가복음 7장 28절에 보면 주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고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 주님께 칭찬받는 삶,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가장 작은 자

눅9:46-48, 막10:35-45

 

서론

주님의 열두 제자가 제각기 큰 체하며 또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주님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먼저 주님의 말씀대로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장 작은 종이 되어서 희생적 봉사를 완전히 하자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자로서 어떠한 직책을 하는 작은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1. 겨자가루입니다.

오늘날은 수면 상태요, 형식적 인습만을 가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겨자가루를 불어 넣어서 꿈을 깨게 할 필요가 급합니다.

거의 죽게 된 병자에게 먼저 캠플주사를 놓아서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약과 음식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좌우에 있는 물질 문명과 향락에 마취되어 있는 이 사회에 우리는 자신이 겨자가루와 같은 자극제가 되고 또한 예수의 정의의 불이 되어 태워야 하겠습니다. 의분의 생활, 분투하는 용사가 되어 세상에 불을 더 질러오신 주님을 따라 실행하며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2. 누룩가루입니다.

누룩은 속으로부터 발효 작용을 일으키는 직능을 가져야 합니다. 이 발효제를 쌀가루나 밀가루에 섞어서 속으로부터 잘 변화하게 하여 술이나 빵이 되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이라는 발효제를 각 사람의 마음속에 넣어서 관본적으로 성화시키고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정의의 표현인 실행이 있어야 합니다. 참 사랑으로 심령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뿐이니 우리는 사랑이라는 누룩가루의 직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3. 소금가루입니다.

입에 단 설탕은 몸을 해롭게 하지만 짠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좋게 합니다. 잠을 깨고 사랑으로 성화한 인간들을 영원히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는 소금이 더 필요합니다. 영적으로도 소금의 역할이 없으면 영생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자들을 일컬어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아무리 싱싱한 생선이라 할지라도 소금을 뿌려 놓지 않으면 금방 썩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소금을 뿌려 놓은 생선은 부패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잘났다고 떠들어대도 주님을 알지 못하므로 그들의 심령은 부패하게 됩니다. 이때에 우리 신자들이 그들의 심령에 소금, 즉 복음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된 신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결론

겨자가루나 누룩가루나 소금이나 이 세 가지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고 성화하고 영원케 하기 위하여 희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보이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작은 가루와 같이 부서 져서 사람 사이에 혼합하고 희생되는 제물이 되어 목숨까지 버려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시려고 오신 주님을 따라 봉사하면 하나님께서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다하며 말씀에 의지하여 몸을 바치고 하나님을 믿으며 주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가장 작은 자, 즉 겸손한 자가 되어서 충실한 종으로서 힘껏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가장 작은 자로서 희생을 하도록 충성합시다.

 

 

낮은 곳에 은혜

눅14:7-14

 

서론

예수님은 오늘의 본문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치시고, "누구든지 나를 위해서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교 윤리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랴"고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발 높이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리를 굽혀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자세는 낮춰져야 합니다.

 

1. 예수님은 보고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잔치에 청함을 받은 율법사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몰려 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따라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종 일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었을 때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고 겸손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 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 " 고백하였고, 주의 눈은 불꽃 같으시며(계1),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나 그 눈은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고(시11:4), 그는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시33:15)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늘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2. 낮은 자리는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운 자리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오는 교훈은 사람들은 잔치집에 들어올 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들어와서 요행스럽게도 분에 넘치는 높은 자리를 차지했으나 나중에는 '평가 절하'되어 영광스러운 자리가 도리어 부끄러운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같은 낮은 자리에 입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자원해서 낮은 자리에 앉게 되면 마음이 편하고 그 자리가 자랑스러운 자리가 되겠지만, 남이 명령하고 강권해서 낮은 자리에 앉았다고 하면 그곳은 결코 부끄러운 자리가 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을 때 그것이 겸손한 자리가 되고 그렇게 될 때 칭찬받고 인정받는 기쁨의 자리요, 겸손한 자리가 됩니다. 남의 강압에 못이겨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낮은 자리를 택하고 자기 스스로가 말석을 택하게 될 때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3. 낮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겸손하여 낮아지면 반대로 천국에서 높아지고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기를 아는 것, 즉 자기를 발견하는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자기를 숨기는 것이며,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을 자기보다 높여주는 것이며, 참된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충만히 임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스스로 큰 자는 울지 못합니다. 찬양의 노래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나 사람앞에 작은 자, 겸손한 자만이 노래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 낮은 자,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 ! '낮은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낮은 자리를 택합시다. 작은 자 되고 겸손한 자가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삽니다.

 

 

겸손한 자 모세

 

출4:1-7

 

서 론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민족의 지도자요, 율법의 전달자이며 40년 동안 해방된 민족을 이끈자요, 그는 성경의 저자요, 동시에 군인이며 정치가였습니다.

모세의 일생의 1기와 2기의 삶은 성공같으나 실패의 삶이었습니다. 실패만 거듭하던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확고한 신앙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일생은 호렙산에서 집약되어집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제3기의 삶은 한 마디로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면 겸손한 자인 모세의 삶을 살펴보겠습니다.

 

1.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누구이관대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될 수 있습니까? (출3:11)"라고 하였습니

모세는 레위 지파로서 히브리 사회에서는 자랑할 만한 조건이었으며, 또한 바로왕의 양자로서 왕권 계승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에 모세는 그런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자랑과 그 자신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모세는 자기를 바라보니 자신이 너무도 초라했고 자기의 문벌, 학벌, 체력, 모든 것들이 너무나 무능력하고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모세는 과연 위대한 인물이요, 영웅 중에 영웅이며 모든 면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내가 누구관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나이 80세에 자기 자신을 바로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자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2.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분명히 알았으면 이제 나를 부르신 이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스스로 계시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자요, 만물을 있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말이요,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운명을 쥐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로 깨달아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아무리 하나님이 나를 불러 소명을 맡겼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네게 나

아니하셨다 할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모세에게는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줄 알고 난 다음에 그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또한 인격적인 구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고 그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의 일을 맡겼다는 사실이 계속 확인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모세와 구체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이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였고 그의 손에 문둥병이 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신 지팡이는 기도입니다. 이 지팡이를 부지런히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풍요한 물질과 높은 지식과 과학 문명이 극도로 발달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허무와 좌절과 불안과 초조가 뒤따를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겸손하여졌습니다. 겸손한 모세를 다시 일으켜 사역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 알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으며 하나님과의 구체적이고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능력을 주시어 역사하게 하셨습니다.

모세와 같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겸손하게 쓰임받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경 건

성 경 활 용

1. 경건의 성격

(1) 비밀이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2)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3) 헛된 것도 있다.

(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의 헛것이라

 

2. 성도가 경건해야 될 이유

(1) 하나님께서 택하셨으므로

(시4: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2)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으므로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3) 둠밈과 우림을 얻기 위하여

(신33:8) 레위에 대하여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4) 정죄함을 받지 않으려고

(유1:15) 뭇사람을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3. 성도에게 주어진 경건에 관한 명령들

(1) 경건을 좇으라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2)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3) 경건하라.

(딛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4) 경건으로 하나님을 섬겨라.

(히12:28)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4. 경건에 이르는 길

(1) 기도로

(딤전 2:1-2)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노고와 감사를 하되‥‥ 이는 우리가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2)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림으로

(딤후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3) 교훈에 착념함으로

(딤전6: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5. 경건한 자가 하는 일들

(1) 봉사함

(행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2) 구제함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3)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

(요9:31)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4)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림

(눅2:25)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5) 하나님의 낱을 사모함

(벧후3:11-12)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6. 경건의 유익

(1) 범사에 유익함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2) 시험에서 건져짐

(벧후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3) 멸망에서 구원받음

(벧후3:7)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4) 온 집으로 하나님의 경외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7. 경건에서 떠난 자의 태도

(1) 핍박함

(행13:50)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2)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한

(딤전6:5)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3) 경건의 능력을 부인함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같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8. 경건치 않은 자의 결과

(1) 하나님이 진노하심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2) 설 자리가 없음

(벧전4: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오

 

9.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그리스도가 하신일

(1) 경건치 않은 자를 돌이키심

(롬11:26)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심

(롬5:6)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관련원어풀이

1. dysij; 하-시-드

(1) 친절한, 탁월한.

(시12:2, 18:26)

(2)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은혜스러운.

(시145:17)

(3) (하나님을 향해) 경건한.

(시4:4, 시3O:5)

 

2. eujsevbeia 유-세베이아

(1) 경건, 헌신.

(행3:12, 딤전2:2)

(2) 종교.

(딤전3:16)

(3) 존경하는,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는.

(행10:2, 7)

(4) 경건하게, 종교적으로

(딤후3:12, 딛2:12)

 

3. sevbw 세보-

예배하다, 경외하다. 숭배하다, 공경하다.

(마15:9, 막7:7)

 

4. eujlabhv" 유라베-스

원래의 뜻은 "좋은 것을 붙잡은"이다.

(1) 조심하는, 신중한, 경외심이 많은, 경건한.

(눅2:25, 행2:5)

(2) 옳은 것에 역행되는 일을 경건한 두려움으로 피하는, 경건과 인간애의 모든 의무를 완수하는.

 

5. qrhskeiva 드레-스 케이아

(1) 종교적인 예배.

(골2:18)

경건의 외적인, 의식적인 봉사, 외형, 실제적인 경건.

(약1:26, 27)

(2) 하나님의 외적인 봉사를 열심있게, 부지런하게 수행하는 사람.

 

6. qeosevbeia 데오세베이아

하나님께 예배함, 하나님을 공경함, 경건.

(딤전2:10)

 

7. semnov" 셈노스

(1) 존경할 가치 있는, 숭고한.

(딤전3:8, 8:11, 딛2:2)

(2) 존귀한, 존엄한.

(벧전4:8)

 

8. ajsebevw 아세베오-

불경건하다, 불성실한 생활을 하다

(벧후2:6)

설교예화자료

물처럼 경건하게

 

1.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자기를 내세우지 아니하며 자기를 우월하다고 뽐내지 않는다.

 

2. 물은 가기 싫어하는 비속한 데까지 즐겨가면서도 또한 산의 꼭대기까지 안가는 곳이 없고 자신을 낯

오히려 높아진다.

 

3. 안가는 곳이 없이 다 가면서도 만물과 다투지 않는다. 바위가 있으면 점잖게 쓱 비껴갈 뿐이다.

 

4. 물은 가는 곳마다 만물을 이롭게 한다.

 

5. 물은 만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면서도 부여한 대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이 되어가도록 해

권위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6. 만물이 되도록 하여 주면서도 거기에 기대하거나 의뢰치 않는다.

 

7.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자체를 초탈해 버

리므로 그 속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히려 영원하다.

 

8. 물은 높은 것은 깎아 내리고 낮은 것은 메우는 평형작용을 하여 만물에 평등을 초래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물에 대한 그의 심오한 사상은 물처럼 맑고 심오하게, 그리고 순수 경건의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경건 훈련

 

신자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이 세상에 몸소 고난을 겪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리스도의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통한 경건 훈련입니다.

경건의 훈련은 평안하고 안일할 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핍박과 고난의 현실 속에서더 빛납니다.

교회사 초기의 콘스탄티노플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A.D. 347∼407)은 방탕한 여인 황후 유도기아(Eudoxia)에게 죽임을 당해 가면서도 경건치 못한 그녀의 생활을 질책했고, 밀란의 감독 암브로우스(Ambrous)는 데오도시우스(Theodocius)황제가 데살로니가 사람을 7천명이나 학살한 혐의로, 그가 교회에 들어오려는 것을 문전에서 막았다고 합니다.

현대 한국 교회는 이런 핍박과 고난의 때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의 경건의 모습이아쉽습니다. 물량 주의와 열광 주의에 침전되어 경건의 모습을 잃은 까닭에 교회는 사회로부터 질시를 받고 있습니다. 구원의 주체로서 교회가 바로 서고자 하면 잃어버린 경건의 모습을 빨리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경건 훈련

 

자녀라고 말할 때 그 범위는 갓난애로부터 결혼해서 집을 떠날 때까지의 기간인데,3동안에는 부모의 권위 아래서 양육받도록 명령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 게 순종하라(골3:20)"는 이 한마디 속에 자녀에 대한 명령이 요약됩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경건을 가정에서 배웠습니다. 이것을 십자가 위에서 실행하여 완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가게에 가서 일하는 것과 가족들의 생활을 돕는 일, 이것이 그의 사명을 위한 기본 교육과 준비가 되었고 맏아들로서 그의 누이와 형제들과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효도와 가정에 대한 책임을 훈련한 경건의 연습입니다.

이 순종하라는 명령 속에는 비록 부모가 그릇되더라도,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 것이 옳으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깊은 조화와 순응의 의식세계에 참여함으로서 가능하게 됩니다. 복종하라는 명령 속에서 자녀의 축복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고 또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질서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순응하게 하기 위한 단계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는 이 순종을 통해서 어리석음과 자유분방의 길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으로서 경건을 훈련받고,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베브리 라헤이(cleverly Lahaye)는 자녀들의 불순종의 여섯 가지 이유를 들고 있는데, 첫째는 주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육신의 죄를 짓도록 허용하여 왔으며, 셋째는 부모의 훈련이 결핍된 채 살아왔고, 부모의 묵인으로 훈련과 가르침의 부족 때문에 불순종하고, 넷째는 복종심이 개발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지켜보고, 딸은 어머니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을 지켜보고 관찰함으로 순복을 배우는데 이것이 개발되지 못했다는 이유입니다. 다섯째는 부모 사랑의 결핍이 이유인데, 사랑을 얻는 가장 빠른 방법인 불순종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로는 권위를 존경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준 명령의 실행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13 ·14세기의 영성

13세 기에는 탁발승단(Mendicant Friars)이 생기면서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 도미니코회(Dominicans), 깔멜회(Carmelites), 어거스틴회(Augustins) 등이 등장했습니다. 탁발 승단을 걸식수도단이라고 번역하는데 종교적으로 깊은 뜻을 나타내 주지 못하며 이에 비하여 탁발은 겸손, 순종의 훈련 등의 영성훈련으로서의 의미를 표현해 줍니다.

프란치스코회는 정 적 이고 도미 니코회는 관조적입니다. 아시스의 프란시스(Fransis ofAssisi, 1181∼1226)는 "사랑, 평화, 자유, 청빈" 이 네 가지를 정신적으로 한 "작은 형제단"을 이끈 반면, 도미니코(Dominie, 1173-1221)는 최고 가치로서 가난을 명령했으며 자신이 또한 거지로서 "설 교수도회(Prea-china Order)"를 이끌었습니다. 설교는 겉치레였으며 그들은 영적 지시를 위한 훈련에 집중하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도미니코 수도사는 토마스 아퀴나스로서 그의 명상은 이성이었습니다.

14세기는 13세기보다 더 어둡고 염세적이나 엑크하르트(Hoister Eckhart, 1260-1327)는 극도로 관조적이며 그의 지적인 경향은 아퀴나스, 어거스틴, 디오니시우스였습니다. 그는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적 신학을 확신했으며, 하나님은 말할 수 와는 초본질적 지식이므로, 하나님을 알기 체해서는 미지의 어두움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방 교회의 영성으로서 비잔틴 영성은 수도원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두 개의 중요한 수도원 중에서 캐더린 수도원은 엄격하고 카리스마적 이었고, 콘스탄티노플 수도원은 활동적이고 수용적 이었습니다. 이 두 수도원의 긴장이 비잔틴 수도원 영성을 가장 창조적인 것의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맹구우목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존귀한 것인가를 깨우치는 옛 이야기 중에 '맹구우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 황해 바다 깊은 물 속에 수백 년 나이 먹은 늙은 거북이 한 마리가 살았습니다. 너무 나이가 많아 눈이 안보이는 거북이라 해서 '맹구'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눈먼 거북이에게 평생 소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해변에 한번 올라가 육지를 거닐어 보는 것인데, 토생원이라도 한번 만나보면 더 여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눈이 안보이니 동서남북 방향을 알 수 없고, 늙어 힘이 없으니 육지까지 헤엄쳐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압록강에서 벌목한 원목 큰 나무등치가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떠내려갈 때, 시간 차이가 안나도록 잘 맞추어 물 위로 솟구쳐 오르면 요행히도 나무둥치를 만나 그 위에 올라타고 육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한 뼘의 오차로 흘러가는 나무둥치를 놓치면 또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가 백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간발의 차이로 나무둥치를 놓친 지 천 년만에 육지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사이처럼 무감동과 무관심의 시대에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하고 집중시켜야 할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생에 대한 잃어버린 감격을, 삶에 대한 감수성을,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놀라운 경이감을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영성훈련은 그곳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점잖다는 것

 

경건이란 것은 속인들 생각으로는 '점잖다'는 낱말로 통합니다. '젊지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젊지 않다는 것은 늙었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처럼 주먹질도 하지 않고, 뛰지도 않고, 까불지도 않고,무게가 있고,엄숙하고, 어른답고 말하자면 그런 축에 드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중세기 기독교에서는 '경건'을 사노(生活)라고 애썼습니다. 그때에는 육정이나 세속생 활을 불경건으로 여기고 금욕과 탈속을 경건으로 상정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사원(寺院) 불교 비슷한 삶을 경건으로 정의했습니다. 의복도 승복을 입고 노동을 신앙의 수련 과정으로 삼았습니다. 그 근행(勤行)에 성공하면 석굴 속의 성자기둥 위의 성자 등으로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경건파」의 유래

 

기독교 역사에는 경건주의(Pietism)란 신앙운동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17세기 말에 독일의 루터교에서 일어나 18세 기까지 활발히 전개되었던 신앙운동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리와 신조의 지나친 강조에 반대하여 성서를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외적인 행동보다는 내적인 신앙을 중요시하며 성직자들의 권위보다는 개인적 양심의 판단을 옳게 여길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렇듯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파악하고 발전한 종교개혁운동은 17세기에 이르러서 본래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즉, 루터교는 신조와 교리를 절대하시면서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지 않으며 심오한 종교적 경험과 숭고한 생활을 등한히 하고,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도덕적 및 신앙적 생활을 돌보지 않고 교권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니 결국 신도들은 모두 신앙의 길을 잃고 방황하며 미신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루터교의 타락상을 개탄한 나머지 프랑크푸르트의 목사이었던 필립 J.스페너가 자기 교회안의 유지들로 소위 건신단(建信國)을 조직하였습니다. '경건파'란 말은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조롱하는 뜻으로 사용한 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영흔의 봄

 

만물이 생동합니다. 생명의 위대함과 존엄함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봄입니다. 온누리에 생명이 있는 실존이면 모두 기침을 하며 깨어나 봄을 봄되게 합니다.

아무러나, 수억겁의 세월이 흐른다해도, 봄을 기다리는 우리네 마음만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죽은 듯이 버텨온 앙상한 간지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만은 변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 일정이니 개헌이니, 박종철 고문사건, 복지원사건 등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떨리게 했지만 어디에선가 오는 봄을 막지는 못합니다.

한 시인은 봄이 광증난 자에게 맞아 죽었나 보라고, 오다가 발병이 낫는가 보라고 사람들이 수군대고 걱정하는 사이에 벌써 아무개네 울타리 곁에, 어느 개울가에 와 있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봄은 와 있는 것입니다. 이미 72년 전에 이 땅의 봄은 지축을 흔드는 만세소리에 실려 찾아왔던 것입니다. 암울했던 일제하의 겨울 속에서 봄은 그렇게 문을 활짝 열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봄은 과연 어떤 것일까? 박이 터져라고 싸우는 헤게모니 쟁탈전의 결과로 올 것인가? 제도상의 변혁이 가져다 줄 선물일 것인가? 남을 섬겨야 할 종의 자리에 있어야 할 자가 주인인양 섬김을 받으려고 착각하는 아류와 구조가 마땅히 깨어진다면 봄이 되는 것일까? 그래야 따뜻한 남쪽 나라, 봄이 와있는 나라가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들도봄을 초대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이 땅에 봄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인간을 내부적으로 연결시켜 주고, 이웃과 이웃의 아픔과 기쁨을 서로 맞물려 줄 '참 인간 회복의 훈풍'이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불어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진지하게 교회는 갱신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 영혼의 훈풍은 위로부터 불어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코끼리와 조련사

 

수피(Sufi)라고 불리는 모슬렘 신비주의자들은 이런 경고성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만약 코끼리를 수용하기엔 집이 작은 사람이 코끼리 조련사와 친한 친구 관계를 맺으려면 그 전에 숙고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 조련사는 자신만 혼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도 데려오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집을 당신 친구의 친구들과 나눠 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도 내주하시는 손님으로서 결코 혼자 찾아오시는 법은 없습니다. 코끼리가 조련사와 더불어 대접을 받듯이, 그분은 자신과 더불어 영접되고 혜택을 받아야만 '소자'들과 더불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영성은 총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초청은 단지 작은 '종교적 한구석' 또는 '영적인 나'라고 부르는 삶의 단편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과 인격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설 교 노 트

 

참 경건

약1:26-27

 

서론

야고보는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은 헛된 경건이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더러움이 없는 생활은 참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참 경건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생활이요, 즐거운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경건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예배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은혜와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제 우리에게 날마다 빛으로 인도하시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내 전체 생활이 이제 그리스도에게로 나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고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참으로 경건해지려면 내 심령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받아들이고 내 믿음이 주님을 향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곧 예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모두 삶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입는 삶의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여 참으로 경건한 생활이 되도록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사랑의 실천을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이 종교적 의식 또는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라는 교훈은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남을 구제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참으로 경건한 일입니다. 나 하나만 알고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경건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고넬료는 구제를 많이 하여서 그 구제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욥바에 살던 다비다라는 여제자의 구제는 자신의 생명을 다시 살리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구제를 함에 있어서도 자랑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조용히 돕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란 한마디로 주는 것입니다. 공로도, 선행도,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처럼 이웃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3. 자기를 지키는 생활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 참 경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세상과 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많은 유혹으로부터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악하고 어지러운 세상이기 때문에 한발자국만 잘못 디디면 곧 차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향한 열정과 사랑이 없으면 자기를 지키기가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참 경건이란 세상의 한가운데에 살면서도 자기를 지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의 생활에서 그 자신을 흠없이 보존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경건해지기 위하여는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배를 떠나 경건을 찾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로 주위의 어려운 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또 자신을 지켜 세속적인 것을 떠나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참 경건된 삶을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유익인 경건

딤전6:6-8

 

서론

그리스도인은 모두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을 할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복인 유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하였지만 경건은 최고의 유익을 줍니다. 경건은 만족시키는 실체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유익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이 왜 최고의 유익이 되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경건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의 공급을 보증해 주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8절에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부족한 것들은 극히 적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보다 더 우리에게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 하는 자들은 생계가 보장됩니다. 이사야 33장 16절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이지 아니하리라"고 하였고, 시편 37편 3절에서는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자는 우주를 섭리하시는 분의 특별한 배려를 받게 됩니다.

 

2. 경건은 지족의 정신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1) 경건은 이익의 큰 수단입니다.

탐욕적인 추구에 있어서 불만족을 조장시키는 이익의 수단이 아니라 경건이 영혼에 부여해 주는 현재적이며 영원한 이익입니다. 경건은 그로 인해 야기되는 지족의 마음이 동반될 때 이익입니다.

(2) 지족은 경건의 결과입니다.

지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지족은 영적 부요함을 얻도록 가르쳐 줍니다. 또한 탐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경건은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런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들을 초월할 수있게 해줍니다.

 

3. 경건과 함께 오는 만족은 세상의 소유와는 무관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올 때 아무런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경건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 왔으며 어떻게 세상을 떠날 것인지 알게 해줍니다.

우리는 소유에 마음을 집착시키지 말고 모든 것을 주신 분과 결산을 해야 하는 청지기로서 그 소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진 것이 적다면 그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소유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으니 인간의 재물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업에 소망을 두고 경건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영적 이익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진정한 부입니다. 그러므로 영 적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또한 지족은 경건의 특별한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경견한 사람은 금생과 내생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경건함에 이르기까지 연습하여 최고의 유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가정

행10:1-6

 

서론

로마 군인인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여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가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을 살펴 보면서 어떻게 경건한 가정이 되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온 집이 함께 믿는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아내에게 성실하고 착한 남편이었고, 자녀에게는 좋은 아버지이었으며 부하에게는 인자한 주인으로서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온 집안이 함께 믿는 가정이었으므로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아무리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잘 믿는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다른 가족이 믿지 않으면 그 가정은 화목해질 수가 없고 또 따라서 믿는 사람이 경건 생활을 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안에서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일지라도 가장이 신앙이 없으면 화목해지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겠지만 그들의 영혼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도 믿고 아내도 믿고 자녀도 믿는 가정은 참 평안과 화목이 있을뿐 아니라 경건한 가정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기도하는 가정입니다.

경건의 열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은 경건한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신자들뿐 아니라 신자들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은 하루에 세 번 즉 아침, 낮, 저녁에 기도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군인인 고넬료는 근무에 분주하였지만 이 규례대로 기도하다가 천사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군인으로서 항상 상관의 명령에 움직여야 하는데 하루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했다는 것은 정말 신앙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했기 때문에 고넬료는 천사의 환상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분명히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그의 경건한 생활과 쉬임없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까지 움직인 것이고 베드로를 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며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된 것입니다.

기도는 신앙의 호흡입니다. 사람이 호흡을 멈추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처럼 기도를 멈추면 경건한 삶을 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이웃을 구제하는 가정입니다.

백성을 학대하는 로마 관리도 있고 이웃을 착취하는 로마 군인도 있지만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으니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의 하나가 전도 다음에 구제로 중대한 일입니다. 마음에 있는 신앙은 전도와 구제문 밖에 나타나는데 이웃을, 그것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도와주는 일에 인색해서는 경건한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사랑이 바로 구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넬료는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겸손히 지킨 경건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이방인으로서 고넬료는 참으로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고 경건생활에 힘써서 항상 기도하고 이웃을 도와주기에 힘쓰는 고넬료의 가정은 참으로 경건하고 복된 가정입니다.

 

 

바울의 경건

행16:19-34, 딤전4:8

 

서론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경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의 올바른 자세와 행동' 그것을 경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생각하면서 생각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는 것이 경건한 생활이라고 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가장 훌륭한 경건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을 받은 후에 이와 같은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무엇입니까?

 

1.역경 중에도 마음의 정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아 온 몸에 멍이 들고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그 입에서 우렁찬 찬미가 나왔습니다. 이러한 찬송이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역경 속에서 바울이 마음의 평강을 잃지 않고 기도와 찬송을 했다고 하는 것은 위대한 경건의 생활인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우리 중심의 평강을 잃지 않고 찬송과 기도가 나을 때 이것이 진정한 경건입니다.

"주께서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나를 어찌하리오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니라" 했습니다.

 

2. 역경 중에 진실했습니다.

바울은 옥문이 다 열리고 쇠고랑이 다 풀어졌으나 몰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또 자기를 죽도록 때리고 가두고 지키던 옥사장이 바울이 도망간 것으로 오해하고 자살하려 할 때 그것을 말렸습니다. 참으로 진실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해도 진실을 지켜야 참으로 경건한 신자인 것입니다.

 

3. 역경 중에서 충성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에서도 전도했습니다. 간수가 와서 선생님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말할 때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서 한 영혼이라도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려고 애썼습니다.

충성하기 어려운 때 충성하는 것이 참 충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목숨을 내거는 모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참된 경건의 생활은 어디에서 옵니까? 체험적인 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적인 죽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중생의 확신을 가지고 영생과 내세관이 확실해야 합니다. 영생의 믿음이 없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으면 참된 경건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 중에서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외쳤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뚜렷한 내세관이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경건의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영적 생활을 위하여

갈 5:16-26

 

서론

사람에게는 육체와 영혼이 있으며 교회에도 제도와 영성이 있습니다. 전자가 형식과 외양에 불과하다면 후자는 내용이며 본질입니다. 이것은 하나이면서 별개이므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과정에서 항상 영육의 갈등을 겪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한 그때를 기점으로 하여 옛사람과 새사람으로 구분될 뿐이므로 그때부터 그의 생활 총체가 신앙생활이요, 영적 생활인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성도의 영적 생활을 더욱 기름지고 살찌고 풍요롭게 하자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영적 생활의 의미

영적 생활이란 신앙생활의 다른 표현으로 신앙생활을 보다 단순화시키고 내면화시키며 집중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사회성보다 개인의 영성 훈련과 강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몰입하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바로 신령한 생활이요, 경건한 생활입니다.

신령한 생활이란 성령으로 사는 생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적 정과 욕심이나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은 자세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생활이란 믿음에 덕성을 함양해 나가는 삶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이란 신과 하나되는 즉, 하나님과 합일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영적 생활의 표준

성도가 영적 생활을 잘 하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푯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여기서 우리들 영적 생활의 이상적 기준은 성삼위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성도의 생각과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신의 성품을 표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지고자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해지고자 해야 합니다.

(2) 예수의 형상을 표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형상을 이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우리 가 주님을 닮으려면 먼저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겸손을'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겸손이야말로 주님의 성품이요, 천국민의 성품입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교훈은 사랑입니다. 성령 충만을 표준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므로(고전6:19), 성령이 충만한즉 은해와 권능도 충만하며(행6:8), 육체의 소욕을 제압하고 기쁨과 감사와 신뢰와 복종의 생활을 하게 합니다.

 

3. 영적 생활의 방법

(1) 명상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명상이란 세속적 잡념을 일체 떨구고 오직 성삼위 하나님만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영적생활을 하는 데는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에 전념하는 명상 생활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2) 극기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극기란 자기의 욕망과 이기심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경대로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합니다.

(3) 봉사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자기 움을 회생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구제와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결론

현대를 사는 우리 성도는 산만하기 쉬운 생환 패턴을 바로 잡아 성삼위 하나님의 세계에 나를 합일시키는 영적인 생활에 전심을 쏟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마7:7),오직 성령(슥4:6),오직 말씀(벧전1:25), 오직 믿음(롬1:17), 오직 은혜(고전15:10)의 정신으로 매진하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한 생활, 경건한 생활을 위하여 신의 성품, 예수 형상, 성령 충만을 표준하되 말씀과기도로 명상 생활, 절제와 인내로 극기 생활, 감사와 찬송으로 감격 생활, 구제와 선교로 봉사 생활에 전념함으로 우리 성도의 영적생활이 더욱 기름지고 살찌고 풍성하고 윤택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경건한 삶이 주는 기쁨

잠3:17

 

서론

성경 가운데 특히 잠언을 보면 진정한 신앙과 경건함을 가리켜 '지혜'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지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잠언 중 본문 말씀은 참된 경건은 그 안에 참된 즐거움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1. 경건한 삶은 즐거운 것입니다.

그 즐거움은 거짓된 것이 아닌 참된 것입니다. 육적인 자들은 마치 세상의 즐거움 가운데 큰 만족이 있는 것처럼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즐거움입니다.

경건한 삶에서 누리는 즐거움은 가장된 것이 아닌 확고하며 내용 있는 즐거움이며 주님의 자녀된 사람들만 누리는 것입니다. 또 그 즐거움은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즐거움은 본질상 신령하며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줍니다.

그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이 아닌 영원한 것입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은 시들어 사라져 버리는 것이지만 경건한 삶에서 오는 즐거움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즐거움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2. 경건한 삶의 즐거움에 대한 증거

참된 경건의 본질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대상과 우리와 그 대상 사이의 중재자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진실된 경건은 범사에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을 가지며 하나님과 항상 신령한 대화를 나누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경건함의 위로는 값 주고 산 바 되었으며 약속되어지고 예비되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희생을 값으로 지불하고 평강과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그 특권은 보장된 것이며 신자들에게는 성령께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심을 증거하십니다.

경건한 삶은 이성적으로도 합당한 것이며 우리의 진정한 이익에도 부합되는 것이므로 즐거운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는 연습에는 위로와 유익과 즐거움인 있습니다.

그 즐거움은 고통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3. 경건한 삶이 즐거운 것임을 변증

하나님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멍에는 무겁고 그 짐은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온갖 즐거움을 끊고 고통을 감수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즐거워하지 못하여 그들 자신의 영적 상태가 의심과 두려움에 싸여있음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죄는 신자들을 어둠 속으로 넣고 눈을 가려 빛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대한 해결책은 회개하는 것이고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가 넘칠 것이므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부정하고 영적인 즐거움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경건한 삶을 살면 살수록 즐거움도 커집니다. 경건함과 즐거움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마음을 정하여 지혜의 길, 즉 경건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은 즐거운길입니다.

 

 

성도의 경건 생활

골3:7-14

 

서론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이란 외적인 태도 또는 권위있는 모습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을 말합니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경건 생활은 어떠한 생활입니까?

 

1. 경건한 자의 생활

(1) 그것은 위엣 것을 찾는 생활입니다.

위엣 것은 영원한 것, 하나님의 권세와 보좌와 거룩입니다. 아무리 낙심되어도 원망을 들을 일이 있어도 위엣 것을 찾을 때 하늘의 위로와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2)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위엣 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늘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향한 산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3) 땅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땅의 것은 육적인 것, 물질적인 것이며 유한합니다. 땅의 것을 버릴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그 생명이 고귀했기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소망을 두었고 그 처소로 덧입기를 소망하였습니다.

 

2. 경건한 자의 형제 생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은 모두 한 지체와 형제이므로 너는 너, 나는 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스구디아인도 형제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형제들을 뜻이 있어서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남을 인정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현재의 위치와 환경에 대한 교만을 버리고 포용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관용을 베푸는 것이고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3. 경건한 자의 가정 생활

육적인 가정 생활은 세상에 사는 동안만 있으나 영적인 가정 생활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가정 생활은 하나의 지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연락하고 서로를 위로해 주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 경건한 자의 영적 생활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영이 힘을 얻어 건강해야 합니다. 영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생활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우상에게 절하라고 해도 절하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사자굴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가정예배를 통해서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고넬료는 성실하게 가정예배를 드렸고 그것으로 인하여 온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생활속에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지 않는 자는 진정한 경건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결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경건한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경건한 자의 형제 생활과 가정 생활 그리고 영적 생활은 어떠한 것인가 살펴보았 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위엣 것을 찾으며, 위엣 것을 생각하며, 땅의 것을 버리고 형제를 대할 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자녀이므로 관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관계, 자녀관계, 부자관계, 주종관계까지 지체 의식을 가지고 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영적생활로 기도하고 감사하며 전도하고 가정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자로서의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경건함을 가지라

전12:1-7

 

서론

전도자는 아무런 실제적 결과도 없는 사변을 떠나 보다 나은 소망을 품고 실제적 문제들로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솔로몬은 그의 젊은 친구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경건함을 가지라고 간곡히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젊은이들에게 경건하라고 권하는지에 대한 동기와 근거를 제시하였습니다.

 

1. 경건은 합당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건이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창조자에 대한 기억으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모든 의무를 다 포괄하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 모든 의무의 요약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합당한 섬김은 오직 그가 가지고 있는 관계들에 근거해서 옳은 일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의 경건이 도리에 맞고 합당하며 유일한 행동방침이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적이고 평생을 통한 섬김을 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의무 영역과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시간을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데 바쳐야 합니다.

종교적 삶의 참되고 완전한 본보기,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삶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 전체를 그의 아버지 일에 바쳤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끊임 없는 사랑과 감사를 받으실 권리가 있으시며 우리를 통해 영화롭게 되실 권리가 있습니다.

 

2.경건은 노년의 슬픔들을 경감시킵니다.

젊을 때는 즐거움을 강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삶의 보다 복잡한 해악들 즉, 슬픔에 찬 후회, 상실과 실패에 대한 의식, 세상에 대한 불만족이 아직은 먼 미래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아무 즐거움도 없는 '곤고한 날'이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년에 대한 묘사는 일반적인 것으로서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노년은 즐거움을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즐길 수가 없고 내면에 슬픔을 경감시켜 줄 위로들을 갖고 있지 못한 세속적인 사람의 노년입니다. 노년에는 감각 기관들이 쇠퇴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능력이 쇠퇴하며, 성취하는 능력이 쇠퇴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위로들이 없으면 노년의 상태는 심히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건은 인간을 호색과 악덕의 형벌로부터 구원함으로써 노년의 육체적 상태들 가운데 어떤 것들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의 경건은 노년의 슬픔들을 경감시키고 어떠한 재난도 제거할 수 없는 가슴속의 기쁨을 증대시킵니다.

 

3.경건은 영혼으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 앞에 서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모든 인간 영혼의 운명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무리 무서워도 인간의 영혼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평안한 마음으로 그의 창조자 앞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청년의 때 자신의 창조자를 기억한 사람은 노년에 이르러 "주여 !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의 경건은 우리의 창조자를 대하는 가장 품위있는 태도이고, 가장 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제사이며 삶의 슬픔과 마지막 시련의 무서움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비책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경건한 생활을 하여 영혼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경건함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건의 연습

딤전4:7-8

 

서론

"경건"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진정한 종교 생활을 가리킵니다. 곧 영혼의 훈련과 교양을 쌓는 것으로 정신상의 유익은 물론이요, 신체상으로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이며 경건은 범사에 유익한 것입니다.

 

1.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육체의 연습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운동 경기에서의 신체 단련을 위한 활동을 말하는데 기본적인 체조나 특수한 체육 대회를 위한 개인 혹은 단체적인 연습은 무척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쉬지않고 꾸준히 연습하면 신체의 발달도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며 개인전이나 혹은 단체전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금욕 생활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종교 관계의 금욕 생활을 뜻합니다. 음식물에대한 절제와 혼인 문제에 대한 제재 등 금욕적 연습으로도 유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속적인 유익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체의 연습을 많이 하여도 아무리 철저히 해도 그것은 깨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신화'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신앙을 해롭게 합니다. 특히 나이 어린 사람이나 생각이 얕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미신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은 오랜 옛날의 역사를 잘 모르니까 그럴듯한 이야기로 꾸며서 사실처럼 퍼뜨립니다. 우리나라 단군 신화도 그렇습니다. 곰이 여자가 된다는 말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믿음이 약한 자들은 심오한 진리의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고 딱딱한 교훈들은 더욱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에 약간 재미있는 신화를 믿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의 내용이나 진리를 해설함에 있어서 신화와 같이 허탄하고 망령되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경건을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3.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믿어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지만 내세에 들어가서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범사에 유익한 것입니다.

열심으로 오랫동안 연습을 계속하려 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 연습의 결과는 축복이니 계속해서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육체의 연습도 약간의 유익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할 수 있는 경건 생활은 무엇에든지 유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시일에 끝나는 일이 아니고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위한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허탄한 신화를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이해하기 어렵고 힘든 교훈일지라도 마음에 새기고 새기며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면서 주님의 교훈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성도 모두가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철저히 하셔서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어머니

잠31:28

 

서론

본문의 말씀은 경건한 여인에게 마땅히 돌려야 할 찬사의 일부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 예배하는 자들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상주시는 하나님께서 덕있은 여자에게 약속하셔서 보장해 주신 보상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1. 경건한 어머니의 성품

(1) 경건한 어머니는 지혜롭고 인애합니다.

그녀는 입을 열어 지혜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자녀들은 마음에 새겼다가 나중에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또 그녀는 진실로 인애하여 자녀들을 보살펴 주지만 자녀들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은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입술에 항상 율법을 지니고 그 율법의 명령에 순종하는 어머니는 자녀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부지런해서 가족들이 관련된 모든 일을 보살피며 집안일을 보살피면서 게을리 얻은 양식은 먹지 않습니다. 이런 어머니는 그 부지런함과 사려깊음으로 인해서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녀는 덕이 있습니다.

덕이라는 것은 열심과 담대함을 말하는 것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생명력이 있고 즐거움을 누리며, 열정을 품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3) 경건합니다.

매사에 그녀는 양심과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에 따라 행동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져야 하며, 그의 권위를 깨닫고 그의 뜻과 섭리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2. 자녀들의 의무

경건한 어머니를 모신 자녀들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1)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려서 생활능력이 없을 때 우리 어머니들은 자애롭게 보살펴 주셨고 우리가 아파서 신음할 때는 어머니는 더 큰 고통으로 신음하셨습니다. 또 육체적인 은혜뿐 아니라 영적 성장도 어머니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은혜는 곱절이 되며 값진 것입니다.

(2) 어머니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이 자녀들로 하여금 계속 믿음의 길을 걷게 하였고 그들 영혼의 구원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 은혜로 우리가 받은 축복으로 인하여 감사드려야 합니다.

(3) 어머니의 선한 제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주신 것들로, 그들이 마음에서 누리는 고요함과 평안함으로, 그리고 장차 천국에 가서 누릴 더 좋은 축복들을 바라봄으로, 복스러운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된 자들은 어머니들이 보인 모범을 따르고 그들이 자녀들에게 준 교훈이 더 잘 이해되고 강화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들의 진지한 경건성은 이 세상에서도 찬양과 존귀를 받을 뿐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결론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경건한 어머니들과 동일한 기쁨을 누릴 소망이 있으므로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건하게 열심을 품고 그 경주를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들은 참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경 제

성 경 활 용

1. 돈의 이름들

(1) 달란트

(마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님을 데려오매

(마25: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2) 므나

(눅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3) 데나리온

(마20: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마22: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4) 앗사리온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5) 고드란트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 지라

(6) 렙돈

(막12:42) 참조

(7) 스타테르(세겔)

(마17: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 돈의 용도

(1) 매매하는 데 사용함

(창31: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2) 배상하는 데 사용함

(출21: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지니라

(레27:15)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3) 성전 수리에 사용함

(대하24:5) 이스라엘 무리에게 해마다 너희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 하지 아니한지라

(4) 인건비 지불

(스3: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5) 납세함에 사용함

(느5:4)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6) 향품 구입

(사43: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7) 연보하는 데 사용함

(막12:41) 예수께서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을 넣는 것을 보실쌔

(8) 식량 구입을 위해 사용함

(신2: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3. 돈이 악으로 사용되어지는 예들

(1) 착복함

(창31:15)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2) 강제 징수함

(왕하15:20)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3) 변리로 대금하는 것

(시 15:5) 변리를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4) 뇌물로 사용

(시15:5) 참조

(5) 감추어 두는 것

(마25: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6)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려는 것

(행8: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4. 돈의 능력

(1) 보호

(전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2) 범사에 응용

(전1:19)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

(3) 시민권을 얻음

(행22:28)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4) 스승을 죽임

(막14:11) 저희가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5. 돈이 필요하지 않는 일들

(1) 속량

(사5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 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2) 여호와의 포도주와 젖을 돈 없이도 사는 일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3) 복음 전도

(눅9:3)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6.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

(1) 일만 악의 근원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2) 다툼이 일어남

(삿5:19)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 왕이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3) 양심을 팔게 됨

(마28: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마27: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리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성전을 더럽힘

(요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나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5) 돈이면 다 되는 줄 앎

(행8:20-23)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나

(6) 도적이 됨

(요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나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 해로운 정욕에 떨어짐

(딤전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7. 돈을 사랑하는 자의 결과

(1)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됨

(딤전6:10) 참조

(2) 많은 근심으로 찔림을 당함

(딤전6:10) 참조

(3) 망함

(행8: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관련원어풀이

1. #s,K, 케세프

(1) 은.

(창23:15)

(2) 돈.

(창23:13, 신23:20)

(3) 돈으로 얻은 것.

(출21:21)

 

2. hs,k]mi 미케사

(1) 수.

(출12:4)

(2) 가격.

(레27:3)

 

3. ajrguvrion 아르구리온

(1) 은.

(행3:6, 벧전1:18)

(2) 돈.

(마25:18, 행8:20)

(3) 은전, 은조각.

 

4. jfilavrguro" 아필라구로스

돈을 사랑하지 않는, 탐심이 없는, 자유로운, 인색하지 않은.

(딤전3:3, 히 13:5)

 

5. kevrma 케르마

잔돈, 동전.

(요2:15)

 

6. kefavlaion 케팔라이온

(1) 주요한 점, 중요한 것.

(히8:1)

(2) 자본, 총계, 합계.

(행22:28)

 

7. filarguriva 필라르구리아

금전을 사랑함, 돈만을 좋아함, 돈의 노예가 됨, 인색.

(딤전6:10)

 

8. calkov" 칼코스

(1) 구리, 청동.

(계18:12)

(2) 구리로 만든 악기, 꽹과리.

(고전13:1)

(3) 동전.

(마10:9)

(4) 일반적인 돈.

(막6:8, 12:41)

 

9. crh'ma 크레-마

(1)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 가격.

(행4:37)

(2) 부귀, 재물.

(막10:23, 24)

(3) 돈.

(행8:18, 24:26)

설교예화자료

금줄 세 개와 150만불

 

노바스코티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오크섬이 있는데 이곳에는 1795년부터 많은 사람들이 매장된 보물을 매우 열심히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수색의 중심부는 직경 12피트의 구덩이인데, 일명 '돈구덩이'라는 희망적인 말로 사람들에 불리운 곳이었습니다. 돈구덩이를 파내려 가면서 보물 사냥꾼들은 10피트 입방체의 나무로 된 연단들을 발굴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돈구덩이의 바닥까지 파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덩이를 팠던 해적들이 수로터널을 파놓아서 수면 아래에 있는 바닥에 도달하려고 했으나 모두 헛수고였습니다. 수많은 보물 사냥꾼들은 그 바닥에 있다고 믿어지는 보물을 발견하려는 헛된 노력에 150만불을 써버렸습니다. 그동안 발견된 옛보물은 단지 세 개의 금줄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스러운 돈구덩이의 바닥에 어떤 보물이 있을까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령 키드 선장의 금, 블랙비어드의 보물, 스페인 사람들이 훔친 잉카의 귀중한 보물들, 프랑스 혁명 기간에 도난당한 프랑스의 보석 왕관 등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세 개의 금줄을 발견한 후에도 보물에 대한 헛된 꿈을 버리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러한 작업을 하려고 써 버린 150만불의 헛된 노력을 보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돈의 이야기

 

레이 O. 존스가 말하는 돈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돈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할까요? "당신은 나를 손에 쥐고는 나를 당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얼마나 쉽게 당신을 지배하는가 보시겠습니까? 나를 얻기 위해서 당신은 죽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 하려고 합니다. 나는 비처럼 무한히 값지며 물처럼 본질적입니다. 내가 없다면 사람도 기관들도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위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욕망이라는 낙인 없이는 무익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보내지 않으면 아무데도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이상한 친구들과 사귑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은 남의 인격을 무시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그리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성자들의 예배에 자라나는 마음을 위 한 교육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굶어가는 육신을 위한 음식 마련에도 사용됩니다. 나의 힘은 지대합니다. 내가 당신의 노예라기보다 당신이 나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나를 조심스럽고 현명하게 다루십시오".

이 얼마나 경악스러운 이야기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 돈으로는 무엇이든 하려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 현명하게 돈을 사용하고 돈을 지배할 수 있게 될까요?

 

 

돈에 얽힌 두 가지 이야기

 

· 첫번째 이야기

유타 주립대학(Utah Strate University)에서 미술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히로채파(Hiro Chatpar)는 최근 그의 아내 모나를 위해서 200개의 일불짜리 지폐로 옷을 만들었습니다. 모나는 좀 특이한 이 지폐 옷에 만족하였고, 기자 앞에서 이 멋진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였습니다.

. 두번째 이야기

어떤 사람이 길을 잃은 차에 한 사람을 만나 안내를 부탁하는데 보니 벙어리로, 손으로 의사표시를 하며 돈을 주면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사람은 그 벙어리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니, 그 벙어리는 즉시 입으로 말을 하여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왜 돈을 받지 않으면 벙어리 행세를 합니까?"그 길을 잃은 사람이 물었습니다.

"요즘은 말을 하는 것은 오로지 돈, 돈뿐이기 때문입니다. "

 

 

금과 금맥

 

클론디케에 있는 금을 찾는 이야기들 중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금과 금맥을 찾아 클론디케라는 지방 깊숙이 들어가 있던 답사단 일행인 한 광부의 조그만 오두막집에 도달하였는데, 그곳은 겉으로 보기에는 황량하고 무덤처럼 으시시하게도 조용한 곳이었습니다.

이에 아랑곳없이 오두막집에 들어가자, 그들은 두 사람의 해골과 엄청난 양의 금을 발견하였습니다. 금과 금맥을 찾겠다는 단 하나의 일념과, 금을 얻었다는 환희와 기쁨에 그들은 지금 그들이 있는 북쪽지방에서는 겨울이 일찍 다가온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갈수록 더욱 더 많은 양의 금이 발견되었습니다. 금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중 어느 날 아침, 그들이 눈을 떠보니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리고 며칠 동안이나 사납게 휘몰아친 폭풍으로 교신은 두절되고, 이제 그들은 살아 돌아갈 방법과 구조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얼마간의 식량은 곧 바닥을 드러냈고, 결국 그들은 쏟아지고 넘치는 금더미 속에서 죽었습니다. !

무엇이 그들을 죽게 하였습니까? 그들의 어리석음, 금에 대한 탐욕스러운 욕망 ! 그것이었습니다.

 

 

경제성장과 범죄

 

최근 우리나라에서 번번히 벌어지는 온갖 범죄는 외형적인 경제성장과 속도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발표한 올해의 예상 국민 소득은 4천 달러가 넘습니다. 동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몇백 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한국이 경제적으로 중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적 성장과 도덕이나 사회기강의 타락이 정비례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을런지 의문입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미국의 인구는 2억이 넘습니다. 믿을만한 통계에 따르면 약 7천2 백만 명의 미국인이 적어도 한 번은 불법적으로 마약을 사용한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12세 이상의 인구의 37%에 해당하는 비율입니다.

우리나라도 전국에서 강도, 폭력 사건이 하루에 8백75건 꼴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면서도 사회의 어두운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명실 상부하게 '진정 한 경제발전'을 이루기위해 그만큼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우리가되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재원 염출

 

윌리암 2세는 영국을 통일시킨 윌리암 1세의 아들로서 부왕의 왕업을 계승했습니다. 그는 백성의 위안과 평안보다는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하여 어떤 잔인한 일이라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노르만디 전쟁 때문에 국고를 탕진하고 난 윌리암 2세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재원 염출을 위해서 기상천외한 묘책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 묘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왕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징집토록하여 영불해협에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 군사들이 정작 군함에 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십실링만 지불하면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군사 전원이 돈을 지불하고 귀향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윌리암 2세는 십만 파운드의 거금을 문제없이 거두었던 것입니다.

정말 기상천외한 묘책이 아닙니까? 윌리암 2세가 이러한 묘책을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역사에 남는 현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토벤의 하루

 

베토벤이 하루는 한 시내를 산책하고 있을 때 문득 악상이 떠올라 오선지를 꺼내서 즉시처마 밑으로 가서 벤치인 줄 알고 의자에 앉아 열심히 작곡을 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작곡을 하여 마친 후 그곳을 나오려는데 앞치마를 두른 소녀가 "선생님, 셈을 해 주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베토벤은 자신이 식당에 들어와 작곡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토벤이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먹지도 않았지 않니? " 하자

"제가 주문을 했었고, 식당에 들어오셨으니 셈을 하셔야지요."라고 대꾸했습니다.

"아, 그랬었니? " 하고 은화 동전을 한웅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소녀는 당황 했습니다.

"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냄새만 맡았으니 너도 돈 소리만 들으렴." 하고 베토벤은 돈을 도로 호주머니에 넣고 유유히 거리로 나가버렸습니다.

 

 

운전사의 마음

 

윈스턴 처칠경이 세계를 향해서 방송을 하려고 웨스트 앤드에서 택시를 불러 세우고 BBC(대영제국 방송협회)까지 가자고 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

"아니 어째서? "

"보통 때면 좋습니다만 아저씨, 한 시간 후면 윈스턴 처칠경의 '방송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꼭 들으려고 그럽니다. "

처칠은 그 말에 기분이 썩 좋아져서 1파 운드의 돈을 집어 주었다. 운전수 양반, 그 지폐를 얼핏 보너니

"타세요, 아저씨 ! 처칠인지 개떡인지 돈 부터 벌고 봐야겠오."

 

유명인들의 돈에 대한 언급

 

· 남이 부러워하기에는 너무 적고, 남이 멸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도의 재산만을 나에게 달라.

- A. 카울리 -

· 불의로 취한 재물은 끓는 물에 뿌려지는 눈과 같고 뜻밖에 얻어진 천지는 물살에 밀리는 모래와 같다. 교활한 꾀로 생활하는 방법을 삼는다면, 그것은 흡사 아침에 피는 구름, 저녁에 지는 꽃과 같은 것이다.

- 명심보감 -

· 재산이 흔들리면 그와 함께 친구도 동요하기 시작한다. 재산이 친구를 얻어 주니까.

- 플라우투스 -

· 나눠 갖지 않는 재산은 재산이 아니다.

- F. d. 로하스 -

· 사회계약의 기초는 재산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첫째 조건은, 모든 사람은 자기 소유의 재산을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 -

· 누가 제일 높은 상급을 받느냐 하면 재물이 많은 부자나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이 아니라 일을 많이 해서 손에 굳은 살이 박힌 사람이다.

- 톨스토이 -

· 인간의 계급은 빈부의 차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자와 놀고먹는 자로 나누어진다.

- 생시몽 -

 

 

돈을 잘 관리한 성서 인물들

 

· 여호수아- 이 사람은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을 믿으라고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던 한 지도자를 섬겼습니다. 후에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 백성들이 풍요롭게 살도록 이끌었습니다. 번영이 신앙에 새로운 위기를 가져오게 되자 그는 오직 주만 섬기고 돈을 섬기지 말자고 경고했습니다.

· 베드로- 이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가 갖고 있는 것을 사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나쁜 마음을 알고 그 사람의 악한 동기를 심히 꾸짖었습니다.

· 바울- 이 사람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은 액수의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런 돈에서 한푼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안과 자유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만족하며 사느냐에 달려있음을 알았

습니다.

· 삭개오- 이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 자신의 사업 방법 때문에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비록 막대한 돈을 지불해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어록·시·묘사

 

불황의 유일한 원인은 호황이다.

(J.C. 쥐글라르)

 

자본주의의 고유한 폐해(廢害)는 행복의 불공평한 분배이며, 사회주의의 고유한 장점은 불행의 공평한 분배이다.

(W.S. 처칠)

 

사람들이 생활하고 또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의 교류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즉 매매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근로에 의해서 살아온 것이다.

(J. 러스킨)

 

만족해 하는 물건은 반은 팔린 것과 같다.

(G. 허버트/ 명궁)

 

생산자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면 그것을 곡선 그래프로 그린다. 그들은 대중에서 어떠어떠한 것을 사라고 말하고 싶으면 그것을 곡선으로 말한다.

(M. 맥루한/ 기계신부)

 

금리 생활자의 막대한 자금의 축적은 큰 암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자금을 산업투자에 전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J.M.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손해는 티끌에 쓰고 이익은 대리석에 쓰라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비용은 발전의 아버지요, 보상은 발전의 어머니이다.

(J.G. 홀런드/ 솔직한 이야기)

 

오늘날 모든 여자아이들의 미래의 직업은 숙련된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D. 리즈먼/ 외로운 군중)

 

경제는 불필요한 지출을 피하는 학문이며, 또한 우리들의 재산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기술이다.

(세네카/ 은혜론)

 

열과 중력(動), 분자운동과 원자분해 -이런 것들은 우리 경제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사고의 힘, 감정,본능 그리고 욕망의 힘도 그에 포함된다.

(L.A. 헉슬리/ 어머니)

 

경제적 발전의 여부는 무엇보다 첫째로 그 나라의 두뇌형성률에 달려 있다. 즉 상상력과 비전을 지니고 있으며 충분한 지식이 있고 이론적, 분석적 사고방식에 숙달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출할 수 있는 비율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P.F. 드러커/ 현대의 경영)

 

경제적 발전에 있어 최대의 자원은 인간이다.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이지 자본이나 원료가 아니다. 미개발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일, 즉 정확한 판단력을 동원해서 책임있는 결정을 내리는 유능한 사람들을 적절하게 조직화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P.F. 드러커/ 변모하는 산업사회)

 

사람이 어떤 물건에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값은 그것이 찾는 것일 때다.

(W.G. 베넘/ 격언집)

 

인간은 결코 수단이 되거나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용되지 않는 사회의 최고의 자리로 복귀되어야 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은 종식되어야 하며, 경제는 인간의 발전을 위한 하인이 되어야 한다. 자본은 노동에 봉사해야 하고 물질은 생명을 위해 봉사하여야 한다.

(E. 프롬/ 건전한 사회)

 

요즘 정한 날에 대 재벌들이 삼킨/ 부동산(13조 8천억원) 땅만 1억 2천만평 어쩌구/ 신문기사를 읽다 남사당 맥이/ 끊긴다는 유랑생활 60년 청조끼 입은/ 서럽디 서러운 대부 얼굴 보니/그래 횡설 수설 몇 마디 하는 참인데

(김영태/ 요지경- 꼭두각시 놀이)

 

단순히 전쟁이 없다고 하여 평화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경기 후퇴가 아니라고 해서 경제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J.F. 케네디)

 

병든 인간들의 희생 위에서만 건강한 경제가 가능한 현재의 상황을 종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여 건강한 사람을 위한 건강한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삶의 내용으로서의 경제는 치명적인 질병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무한한 성장은 이 유한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봄에는 내 사랑의 집값 엄청 올라/내 사랑 사글세 집에서/ 변두리로 변두리로 쫓겨나고//봄에는/내 진실의 洙價 엄청 내려/내 진실몰락하고

(김여정/ 봄에는 시가 안 되는 까닭)

 

우리 동네 제비는 강남에 가지 않는다/ 다른 동네 제비들은 가을이 되기도 전에/ 남루한계절을 벗어 던지고/ 봄부터 준비한 여비를 챙겨 강남으로 줄행랑을 치는데/ 우리 동네 제비는/‥‥ 굴 속에 숨어 도둑질로 재산만 불리고/ 겨우내 살만 쪄 하늘을 나는 기능마저 상실하고도/ 재산만 많으면 최고라고 큰소리쳐대는/ 우리 동네 제비의 마음은 모를 일이여/ 참으로 모를 일이여.

(김윤완/ 모를 일)

 

선하품 터져 나온 매연속 건비듬 치며/그 색은 양치물 물고 광란자만 웃더냐/ 황금알 낳는 투기심도 여행자를 밟고 간다.

(이은방/ 서울거리-'87 특파원 보고)

 

-말해 줘/ 모든 범죄는 욕망의 소산인가를, / 왜 직장이란/ 한없이 순종스러우며/조장된 의식의 주입만을/끝없이 확대 재생산하는가를

(윤성근/ 길 3)

 

사람도 원유사람/ 시컴은 사람이 제일이 다/ 흑인이 계속 헤비급 왕자이다/ 금처럼 반짝였던 사람들/ 무대뒤로 사라졌다/ 사람이 많은 강 하구는/ 언제나 구정물이 일어난다/ 항구에는 원유가 들어온다.

(배인환/ 구정물)

 

할아버지 20년 새경의 손때 묻은 집문서를 쥐고/ 서울로 갔던 아버지의 소식은/ 영등포 어디에선가/ 신문 보급소를 한다는 소식만/ 마파람에 날리는 비닐조각처럼 어지러이/ 어머니의 가슴에 엉켜 왔다

(이용범/ 녹지 않는 강)

 

사람들은 모두 고기 한 점 얻으려고 사는 것이 아닐까/ 비만형의 한 사내가 이빨을 부시며/ 등심집을 나오는 시장 앞/ 몇 십년이 지나도록 바꿔지 않는 푸줏간 주인/ 왕성한 팔뚝을 걷고 손님을 기다릴 때/ 남루한 아주머니 하루 종일 자판을 벌려 놓고 앉아/ 돼지고기 한 근의 생계/ 돼지고기 한 근의 삶/ 돌아가며 꼬깃꼬깃 접은 돈 펼쳐/ 기름이 없는 걸로 주세요/ 그러면 푸줏간 주인 그 빛나는 칼을 들어/ 질기고 질긴 세상 한 점/ 싹뚝 잘라주며/ 붉은 잇몸을 드러내고 웃는다.

(권태웅/ 정육점)

 

산 설고 물 설은』 타관천리에/ 몸이 팔려 울며 가던/누님의 그 얼굴이 서럽게/서럽게 얼어 있는 산굽이길

(임효원/ 산굽이길)

 

땅을 나누고/ 년을 나누고/ 무엇이나 쪼개어 가지는/ 이 흠진 세상을/ 무심히 세상을/ 무심히 보는 일이나// 뺏고 빼앗기고/ 할퀴고 긁히고/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도/ 끝내 그에게로 가서 눕는/ 사는 일의 분별, 이 깨달음도

(김현숙/ 살아가며)

 

닭모이 쫓는 칼 도마소리는/ 치부의 길을/아내가 달리는 발구름입니다. // 진붉은 닭볏은/ 치부의 길에/ 안해가 쳐든 깃발입니다.

(임효원/ 잠자는 아내)

 

오늘은/ 그래, 큰 맘 먹고 오늘은/ 바다로 장을 보러 간다//‥‥ 한껏 바닷물을 퍼올린/투명한 비닐 봉지 하나에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열기와 탱수도 거두어 들이고/아이들에겐 맵사리 고동도 한 보시기/사다 주기로 한다.

(나영자/ 어시장에서)

 

담겨,/ 봄바람/ 매콤한 내음.// 어느 산밭 황토 이랑 틈서리/ 겨울잠/ 털고 일어서// 눈속헤쳐 고갤 들다// 들키어/ 뽑힌 채 여기,/ 팔려 저자 나왔느뇨?

(정소파/ 낡은 꽃바구니와 달래)

 

놋그릇 두어 점/ 선반의 촛불 아래 빛나던 때와/ 공물로 쫓기던 회한들/ 지금은 다 비어버린 침묵/ 낮고 그윽하다.

(김현숙/ 놋그릇과 더불어)

 

농성 136일째/ 생존권 보장하라 위장폐업 철회하라/ 수지가 맞지 않아 문 닫아 버린// 광주시 풍향등 우리 데이타 회사 앞/ 잿빛으로 펄럭이는 구호들이// 슬퍼라.

(강인한/ 남과 북)

 

석유파동을 겪고/ 다락같이 오른 기름값 때문에/ 추위에 오들오들 떨기만한 우리/ 코 크고 눈썹만 길어도 석유 부자라고/ 부럽기만 했다.

(성기조/ 바레인 공항에서)

 

노사분규가 한참/ 신문지상을 오르내릴 때/ 일당 2140원으로 살 수 없다고/ 소리 치는 우리/ 순진한 젊음의 소리를 들을 때/ 한 시간 노동비/ 7140이 적다고 불평하던/ 내가 부끄러워/‥‥ 내 점심시간의 메뉴/ 1000원 짜리가/ 부끄러워/ 커피 한 잔/ 1800원을 주던/ 나의 거드름이 부끄러워/ 원고지 1매에 3000여원의 거금을/ 일당 2140원이 내는 세금으로 보조받는/ 나의 손이 부끄러워/ GNP 3000달러에 들어섰다는/ 신문 보도가/ 부끄러워.

(공석하/ 瑞雲山 · 3)

 

큰 손 마님 나가신다 이것저것들 물렀거라/ 오늘은 팔학군 아파트 투기 바람 부채질하고/내일은 증시 밑바닥 갈쿠리로 훑어가리// 마님 위세 기가 질려 입도 달싹 못하고서/ 하릴없는 복덕방에 장기 꼰이나 두고 있는/ 뼈마저 녹아 허물어진/ 달아 달아 조선달아.

(기춘랑/ 서울 낮달 · 14)

 

까만 정강으로/ 거실에서/ 파이프 담배 즐기고// 유치찬란한/ 야회복의 사모님들이/함께 희희덕 거려주고// 금붕어 씨는/유리집 속에서/ 철저하게/ 자본주의자가 되어 간다.

(최시병/ 어항 點描)

 

사유재산! 소유권 ! / 아 도적질할 권리! 사기칠 권리!/ 이런 엉터리같고 한심스런 책략은/ 인간이 아니고는 고안해 내지 못할 것이다.

(하이네/ 아타트를 · 10)

 

사랑이 사랑다운 사랑이라면/ 흥정이 오고 가서 어찌 되나요/ 젊으나 늙으나 오직 한마음/ 행복의 금자탑을 쌓아 보세요.

(이상각/ 사랑)

 

노년 비둘기/ 한 마리 가/ 고가도로 교각에다 소굴을 떠억 장만하더니// 참말로 비둘기장같은/ 방 여러 개 만들어/ 세입자들을 많이 받아/ 잘 먹고 잘 지낸다.

(최시병/ 늙은 비둘기)

 

금년에는 빵값이 비싸다/ 하지만 최고의 아첨은/ 무료란다 한 푼도 들지 않는/ 주인의 개라도 추켜세워 주고 배 터지게 먹어라

(하이네/ 룸펜 근성)

 

그들은 손에 넣은 토지를/ 새롭게 '빠나나 공화국'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잠자고 있는 사자들 위에서/ 또는 제 조국의 위대함과 자유와 깃발을 쟁취하면서/ 편안하게 잠들 수 없는 영웅들 위에서/ 그들은 휘황찬란한 희극을 상연했다/ 그들은 기업 정신을 부채질하여/ 독재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탐욕스럽게 이윤추구를 사주하여/ 파리 떼들의 왕국을 수립하였다.

(네루다/ 연합 청과물 회사)

 

선하(船荷) 주인 민에르 반 케이크가/ 선실에 앉아 계산하고 있다/ 화물의 총액과/확실한 이익금을 계산해 보고 있다// "고무는 좋고 후추도 괜찮고/ 300자루에 300통이라 사금도 있고 상아도 있고- 그러나 더 귀중한 것은 검은 상품이다// 600개의 깜둥이를 헐값으로/ 세네갈 강에서 입수했는데/ 근육이 단단하고 다리도 튼튼한 것이/ 영락없이 최고급 철로 만든 주물 같거든.

(하이네/ 노예선)

 

 

설 교 노 트

 

바로 써야 한다

막16:29-30

 

서론

아무리 성경을 읽어보아도 돈 버는 방법은 그저 부지런히 정직하게라는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써야 하는 이야기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돈을 쓰되 바로 써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돈을 바로 쓰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 주를 위해 버린 자는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전토나 가족을 버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대가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현세에서 100배나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이나 물질 중에서 선교와 주의 복음을 위해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의 재산을 풍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자기의 재물에 집착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이 집착하는 모든 재물이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업에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바로 물질을 사용하면 우리에게 백 배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이웃을 위해 써야 합니다.

신명기 14장 29절에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 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구제의 물질을 쓰면 범사에 축복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구제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신자들 가운데는 구제를 하는 신자보다 안하는 신자가 더욱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먹을 것 다 먹고 입을 것 다 입고 쓸 것 다 산고 나서 남는 것이 있다면 구제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만약 남는 돈으로 구제하려면 평생에 단 한 번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생활을 절약하고 불필요한 지출은 과감히 없애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수입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창고에 들여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입이 많은 사람은 아까워서 십일조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수입 중 반드시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면 창고에 쌓을 곳이 모자라도록 채워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물질을 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자에게 넘치는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론

나의 재산이나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소유를 바르게 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의 것이 아닌데 내 소용대로 막 쓰는 것은 주인의 요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찬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물질을 바로 써야하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쓴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주인의 것을 바로 사용하여 축복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14장 29절의 말씀대로 수입의 십일조를 내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경제관

딤전6:17-18

 

서론

모든 물질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재산을 모아서 물질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를 시편 24편 1절에 "땅과 바다와 거기에 있는 충만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의 경제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재능을 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질을 얻는 재능이나 시간, 건강, 기회는 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돈이나 대가를 받고 주신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저 받아서 우리가 물질을 얻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잘나서 그러한 재능이 있고 물질을 가졌다고 생각하여 교만해 집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물질을 사용하는 경제인들은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물질을 얻을 수 있는 재능을 주심에 대해서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우리의 본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무엇하나 가지지 않고 맨 몸으로 나왔습니다. 옷을 입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욥을 보면 그가 아주 부한 자이었지만 그 집이 사탄의 시험으로 인하여막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녀들까지 다 잃게 되었지만 그는 조금도 연연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인생은 적신으로 왔고 적신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도 말한 것과 같이 오늘 우리에게 입고 먹을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므로 선한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인생들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므로 자신과 가족들만 치부하고 맙니다. 그래서 호의호식하며 좋은 집으로 늘려갑니다. 옆집에 가난한 이웃이 굶주리고 있음을 눈여겨 보지 못합니다.

돈이 있다고 인색해집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로 자기 혼자만 잘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다시 거두실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우리의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가난하여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에 부요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것이며 이 땅위의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빈손으로 왔다가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신 것으로 물질을 얻어서 선한 일에 사용하고 다시 빈 손으로 가야 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신앙인은 재물과 하나님을 경하여 섬길 수 가 없습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해야 하는데 언제나 하나님이 첫 번째이시며 두 번째도 하나님이십니다.

재물은 우선 순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선한 청지기처럼 관리하여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경제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돈

딤전6:3-10

 

서론

이 세상의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줄로 생각하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이 돈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방편으로 보고, 이 세상에서의 처세의 방편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돈에 대하여 너무 사랑하거나 탐하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바른 금전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1. 돈의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돈은 선하지도 아니하고, 악하지도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돈에 대해서 선하게 보는 사람도 있거니와 반면으로 악하게 보는 사람도 있으나 돈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돈은 사랑의 대상도 아니고 미움의 대상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돈 자체가 우리 인생들의 애정의 대상이 되어 사랑도 해야 하고, 미워도 해야 되는 사랑과 미움의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돈을 숭배하거나 멸시해서도 아니된다고 하였습니다. 돈은 인생의 숭배의 대상으로나 천대의 대상으로 취급해도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돈을 신앙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방편으로 알고 돈을 믿음으로 지배 할지언정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돈의 위력과 영향은 어떻습니까?

돈은 신비한 힘을 지니고 위대한 기능을 발휘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케도 하고 불행을 행복하게도 하고 찬란한 문명을 창조해 나아가도록 하는 저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황금만능을 외치고 있습니다.

돈은 굶주린 자를 배부르게 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의복을 제공하며 집이 없는 자에게는주택을 줍니다. 의 ·식 ·주의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병든 자를 치료하게 해주고 무식한 자가 교육을 받도록 해주며 실망하고 낙심해 있는 자에게 어떤 기대감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돈이 우리 인생을 절망의 경지에 이르게도 하고, 불행의 경지에 이르게도 하고, 비참한 사망의 경지에 이르게도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3. 돈의 사용방법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기독신자로서 금전에 대한 자세와 사용방법을 지시해 주었습니다.

돈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려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돈에다가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참된 소망은 돈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론

그리스도인은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하셨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돈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지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비참하게 살지 말고 돈의 주인이 되어서 선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계 명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계명에 대한 설명

(1) 신실함

(시119:86)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119:138)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

(2) 광대함

(시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3) 등불 ·빛 . 생명의 길

(잠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다.

(4) 거룩하며 의롭고 선함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5) 무거운 것이 아님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2. 예수님이 주신 계명에 대한 설명

(1)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2) 순종의 의무가 있음

(마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랑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3) 순종에 대한 약속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20)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4) 영생

(요12: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3. 계명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

(1) 질병이 없음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여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하나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2) 천대까지 은혜를 베품

(신5:10)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3) 나라가 견고케 됨

(대상28:7) 저가 만일 나의 계명과 규례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날과 같이 하면 내가 그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하셨느니라

(4) 복이 있음

(시112:1) 할렐루야 여호와는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 약속있는 첫 계명

(엡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5. 십계명

(1) 계명수여

(출24: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2) 제 1계명

(신5:7) 나 외에는 위하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3) 제 2계명

(신5:8-9)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4) 제 3계명

(신5:11)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5) 제 4계명

(신5:12)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6) 제 5계명

(신5:16)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7) 제 6계명

(신5:17) 살인하지 말라

(8) 제 7계명

(신5:18) 간음하지도 말지니라

(9) 제 8계명

(신5:19) 도적질 하지도 말지니라

(10) 제 9계명

(신5:20)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

(11) 제 10계명

(신5:21)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6. 큰 계명

(마22:36-40)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7. 새계명

(요13:34)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관련원어풀이

1. hw:x; 차-와

(1) 구성하다, 제정하다, 지적하다.

(삼상13:14, 느5:14)

(2) 맡기다, 명령하다.

(창26:11, 출1:22, 겔35:8)

 

2. hw:x]mi 미츠와-

명령, 교훈, 가르침, 훈계.

(신6:1, 25, 왕하18:36)

 

3. tr,m,v]mi 미슈메레트

준수되는 것, 율법, 법칙.

(대하13:11)

 

4. ejpitaghv 에피타게-

세금의 부과, 최고의 시적 권위에 의해 명령되어진 것, (율법의)명령, 지시.

(고전7:25)

 

5. ejntolhv 엔톨레-

명령, 훈령, 권고, (도덕적인)명령, 금지, 법령, 교훈, 위임된 사명.

(1) (사람에 대해) 공무적인 법령.

(요11:57)

높으신 분을 가진 타인의 명령에 대해.

(눅15:29, 행17:15, 골4:10)

(2) (신적 권위에 대해) 구약 율법의 계명.

(눅23:56)

모든 법규의 총괄로서 나타낼 때.

(마5:19, 막10:19, 눅18:20)

단순한 계명에 대해

(마22:36, 막10:5, 롬13:9, 엡2:15 등)

보편적인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고전7:19, 요일3:22 계12:17)

(3)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요10:18, 12:49)

(4) 천사의 명령.

(5) 모든 기독교 종교를 ejntolhv로 여기는 경우.

(딤전6:14, 벧전2:21, 3:2)

설교예화자료

다섯 개의 의미

 

· 항복은, 당신은 원하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 승리는, 마지막 목표의 길을 건너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향해 반대편과 싸워 나가는 것이 승리입니다.

· 신뢰란,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두운 골짜기라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 사랑이란, 남들이 줄 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들이 주지 않을 때 주는 것입니다.

· 믿음은 남들에게 넘쳐 흐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남들을 향하여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설 교 노 트

 

도적질하지 말라

출20:15

 

서론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선포하신 십계명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계시를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서 십계명에서 보이신 계시는 최고의 것입니다.

 

1. 도적질의 의미

흔히 일컫는 도적질이란 말은 남의 소유를 상대방의 아무 동의나 허락없이 은밀히 가져가는 행위를 말합니다.

마5:21과 22, 27, 28을 살펴보면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죄나 그와 동일한 부류의 모든 죄를 금하도록 명령되었음에도 이런 명령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소유를 부당하게 탈취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이웃의 소유에 대해 마음속에 악한 탐심을 갖고 있는 것까지도 도적질에 포함됨을 알아야 합니다.

 

2. 도적질의 유형

사람들은 이웃과 약속을 하거나 사업을 하게 될 때 상호간에 계약이 형성됨으로 인해 서로 보증된 권리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계약을 이행치 않게 되면 그것은 이웃의 소유를 사취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편의나 단순한 심경 변화로 인해 그 약속을 파기할 때도 이웃의 소유를 탈취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이웃에 대한 빛을 갚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빛을 갚으므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초래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웃의 소유를 불의하게 탈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소유를 빼앗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이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일을 불의하게 태만히 하거나 또는 자신의 게으름으로 초래된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거래상 이웃의 무지나 실수, 소홀함을 악용하여 이들을 취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이익은 기만과 침묵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실제의 판매 가격보다 더 많은 가격을 받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 폭력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이웃을 굴복시킴으로 그들의 소유를 탈취하기도 합니다.

 

3. 도적질에 대한 반성

(1) 이웃의 소유를 탈취한 사람은 빚을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의 소유를 탈취하고 자신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소유가 아니면 이웃의 동의나 허락없이 탈취하거나 처분해서는 안됩니다.

(2) 이웃의 소유를 탈취한 사람은 상대방에 대해 그에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 깊은 호의를 갖고 일을 해주며 베푸는 것은 순수한 사랑의 표시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법을 빌미로 이웃의 소유를 은밀히 가져간다면 그것은 분명한 절도행위로 봐야 합니다.

 

결론

첫째, 이웃의 소유를 부당하게 침범하거나 탈취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든 금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롬12:7에 기록된 사도의 충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이웃으로부터 사취한 물건은 지금 곧 변환해 줄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진실로 당신이 반환해야 할 책임을 면제해 준다면 당신은 그 짐에서 벗어나야 될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시118:24

 

서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20:8). 이 날은 구별되어 복주시기로 약속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의 하나로 그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켰고,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막1:21), 병을 고치셨습니다. 또 사도들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행17:2).

 

1.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

하나님은 엿새 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이레되는 날에 쉬셨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 삶이 끝나고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는 날 영원한 안식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종되었을 때 자유케 하신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복주셔서 하나님의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복받는 일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주의 날이며, 주의 날은 구별된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함을 입은 백성들의 구속된 은혜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주의 날을 거룩히 구별하여 지켜야 합니다.

 

2.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선 주님을 위한 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던 모든 일을 제쳐 놓고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이레째 되는 안식일은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 공부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과 떨어져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일해야 하는 동안에도 성경을 읽고 기독교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이 날만큼은 더욱 경건해야 합니다. 또한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품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안식일을 지키는 자의 결과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복을 받게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데 영원한 이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을 가리켜 장막 인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다가 언젠가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의 장막 곧 주의 성산에 오르게 됩니다. 주의 성산에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복된 곳입니다.

주의 성산에 거할 자는 여호와를 섬기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여호와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자입니다. 또 여호와의 집에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주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속죄를 받습니다.

 

결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안식일을 잘 지켜서 거룩하게 되고 속죄를 받으며, 기쁨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신자된 우리가 당연히 지켜야 할 계명인 것입니다.

이 계명을 잘 지켜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새계명

요13:34-35

 

서론

현대 사회는 부정 부패와 이성간의 불륜과 이웃간의 불신 그리고 또 물질직인 타락 등 모든 죄악의 회오리 바람이 거칠게 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체하는 새로운 윤리관을 확립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사랑을 말씀하시고 사랑을 가르치시고,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의 실천 방법은 무엇입니까?

 

1 .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현대를 가리켜서 인간 부재의 시대라고 개탄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의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말이며 또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인간의 참된 말인 '인정미'를 잃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기계 문명 시대에서 기계는 인간생활에 편의를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은 없어졌고 오직 노력과 대가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인정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받는 것이 없어도 줄 수 있는 사랑의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받은 것이 없으셨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2. 사랑의 희생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문명의 상아탑은 그 동기를 달리 할 뿐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희생에는 강요된 희생이 있고 자발적인 희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희생과 사랑의 실증입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강요된 희생의 도가니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을 향하여 이 희생적인 사랑과 구원의 손길을 뻗쳐야 하겠습니다.

 

3. 사랑은 정의보다 강합니다.

무죄하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되셨지만 한마디의 변명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앞길에는 두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정의의 편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정의를 택하시고 자신의 무죄를 변명하셨다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살리는 정의보다도 인류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주님께 한없는 욕을 돌리고 채찍으로 무수히 치게 했으며 십자가와 죽음을 차례로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결론

정의의 절정인 재판정에는 심판이 있어도 사랑의 절정인 신방에는 싸움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실증인 십자가 밑에는 싸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만이 인간미를 잃어버린 비정한 오늘의 사회와 타락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계명을 우리 성도들은 힘껏 지켜 행하여야겠습니다, 사랑을 주고, 희생하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새계명

요13:31-35

 

서론

본문에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회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새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1. 이 사랑의 계명은 주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실천적 시범으로 주셨습니다(13:1-20).

주님은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제자들의 장래의 상태 등을 다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도록 시범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받고 있는 제자들, 그리고 땅위에서 마지막으로 주님과 함께 성만찬을 갖는 제자들이지만 여전히 그들 중에는 서로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과(눅22:24) 정욕으로 주님을 팔고자 하는 배신의 마음(눅22:6)과 자아 만족에 차 있어서 고집하는(요13:37) 마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 인생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인생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사랑의 새계명을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라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 귀한 사랑의 계명을 받았으니 형제의 마음을 씻어 주며 형제를 위하여 봉사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불의한 것을 제거하시고 거룩하신 사랑의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심령에 민망하여 탄식하신 말씀이 있습니다(21절). 그것은 오랜 동안 사랑해온 너희 중에, 오랫 동안 자신의 성품을 밝혀준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뜻이 있다고 봅니다. 이미 다 아신다는 뜻이요, 이제도 긍휼이 여기신다는 뜻이요, 아직도 인내하신다는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한없으신 탄식으로(롬8:26-27) 불의한 자를 위하여 인내하시며 성령으로 권고하시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제자 가룟 유다는 참으로 외형으로 열심과 지혜가 있었고 재치와 사리가 분명한 인물이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가를 유다는 사실상 진리의 복음을 안들었고 은혜를 거역하고 항상 의심하고 항상 실망에 찼으며 마침내 생명의 주님을 배반하고 원수에게 팔았습니다.

반역과 배신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보는데 복음 진리의 말씀을 통한 은혜를 받지 않으며 항상 사랑과 은총을 의심하며, 실망과 좌절감의 종이 되다가 결국 배반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불의를 제거하십니다. 불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아니십니다.

 

3. 사랑의 계명은 주님께서 명령으로 주신 새계명이십니다.

이제 주님을 중심한 제자들은 사랑과 복종으로 마음이 통일됐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기도할 수 있는 분위기와 은혜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진정한 주님의 명령은 임하시는 법입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구약 레위기 19장 18절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적, 외형적인 자기 표준의 엄격한 율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새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는 실로 중심석이요, 자기 희생이 따른 온유하시며 간절하신 명령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의 은혜와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결론

우리는 사랑의 새계명을 주님께로부터 명령받았습니다. 주님 이 주신 새계명, 곧 '사랑'은그리스도 교회의 진정한 표식입니다. 진정한 교회가 있는 곳에 이 사랑이 심볼이 되어 불타야 합니다. 진실하게 생명의 말씀을 순종하며 은혜를 받아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어 그의 충만하신 사랑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불법한 소망

출5:21

 

서론

여섯 번째, 일곱 번째 및 여덟 번째 계명은 행동으로 이웃을 해치는 것을 금지하고, 아홉 번째 계명은 말로 이웃을 해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열 번째 계명은 생각으로 이웃을 해치는 것을 감지합니다. 어떠한 인간의 눈으로도 탐내는 마음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 열 번째 계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이 계명이 위반되는 양상

그것은 삶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몫에 대해서 불만을 가짐으로써 생깁니다 이 불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불평과 푸념과 반감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우리의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슬퍼하거나 질투함으로써 생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이웃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마음이 강해지므로 이웃의 것을 탐내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 속하는 것들을 갖고 싶어하는 부당한 소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이 계명이 위반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과 소유물을 지나치게 탐내는 것은 이 계명에 의해 죄로 낙인 찍힙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위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이 계명에 대한 위반을 낳는 정신

21절에 "탐내지도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깊은 영성과 거룩함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죄를 외적인 행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장 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죄를 그 근원 및 최초의 단계들에서 바라봅니다. 인간의 법이 다루는 영역은 행위이나 하나님의 법이 다루는 영역은 마음, 즉 행동의 근원이 되는 생각입니다. 생각과 소망이 행동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악한 현세욕이 모든 죄, 특히 사람들이 그 동료들에 대해 범하는 죄의 뿌리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3. 이 정신을 바로 잡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1) 세속적 선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충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현재의 소유물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감사할 줄 모릅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도와주시는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직 이것만이 탐심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염려와 탐욕에 대한 치료제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하나님을 우리의 차지가 되게 합니다. 이 마지막 계명은 앞선 모든 계명들의 정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복음의 모든 가르침들에 대한 공정하고 일관된 견해들을 위한 기초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계명은 마음의 소망들에까지 미치는 , 즉 삶의 가시적 행동들은 물론 마음의 가장 미묘한 움직임들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을 나타내 보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통치자의 눈 아래 있다는 것을, 즉 영적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결론

이 계명은 우리의 생각과 소망이 세밀하게 감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을 면밀히 살피며, 우리로 하나님의 편재를 느끼게 합니다. 또 이 계명이 복음의 가르침들에 대한 공정하고 일관된 견해들을 위한 기초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이 계명의 중요성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열 번째 계명에 위반되는 일이 없도록 삼가 조심하여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의 삼대 명령과 허락

요14:1-30

 

서론

본문 33절에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올 수 없다고 말할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근심이 마음에 가득한 중에 주께서 허락이 있는 삼대 명령을 하셨습니다.

 

1. "믿으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세상의 최대 권위를 가지신 왕이 되시면 유대의 국권을 회복하고, 따라서 자기네들이 얻을 영광이 크리라고 소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수포로 돌아가게 되므로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배하신 분이십니다. 일체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 이 예수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안 것과 같이 지금 교인 중에도 예수를 그저 성인의 한 사람으로만 아는 자들도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하나님과 일체이신 줄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구하라 "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영원히 같이 있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성령이 강림하셔서 구하는 자와 같이 계십니다.

신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성령의 도구가 되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기를 구하여서 그 성령을 받아 주가 시키는 사역에 종사해야 할것입니다.

 

3. "지키라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주신 새계명은 곧 사랑이 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종교는 사랑의 결정입니다. 만일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기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주신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사랑하신다는 것과 주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가리우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결론

믿고, 구하고, 지키는 자에게 허락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평안은 참 평안이니 이 평안을 누리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

요이1:1-13

 

서론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연대는 주 후 90년 경으로 에베소에서 기록하였습니다.

본서의 중요한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행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1. 책하심을 입은 성도들입니다(1:1-3).

1절 상반절에 보면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부녀란 교회를 묘사하는 말이며, 그의 자녀란 성도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성경대로 순종하되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성도들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은 사랑을 받는 성도들입니다. 본서 1절(하)-2절(상)까지 보면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쁜 아니 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를 인함이 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축복받는 성도들입니다. 속죄와 구원과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서로 사랑하는 자입니다(1:4-6).

4-6절에 "너희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말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고 교훈하신 말씀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주님의 명령이신 것입니다. 사랑을 빼고 주님을 생각할 수 없듯이 사랑을 빼고 교회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지 않는 자는 서로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국은 서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가 서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3. 성별된 신자입니다(1:7-11).

7-8절에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고 하신 말씀과 같이 미혹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이단자에게 성별된 성도들이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교훈 안에 거하는 자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훈에 지나쳐 행동하는 자에게 성별된 성도들이 진리에 행하는 것입니다.

10-11절에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교훈을 버린 자에게서 성별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공적인 원수를 스승으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주의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이므로 계명대로 진리에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성별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여 기쁨을 충만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가능성

신30:11-14

 

서론

오늘날에도 계명을 지켜야 하며 과연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합니다. 대개의 경우는 "계명은 지켜야 한다."는데 동의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윤리 체계를 가진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지금은 계명 상실의 시대입니다.

본문 12:13에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 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누가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행하게 할꼬"라고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를 고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계명을 하늘이나 먼 바다와 같은 곳에 있어서 행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돌리고 있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켜야 하지만 지키기에 너무나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변명을 찾는 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불가능성을 이해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계명의 상실은 곧 신앙의 상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계명은 쉽다고 하였습니다.

14절에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행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계명은 우리와 관계없는 이상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가능'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성경은 우리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성은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계명을 주신 데서 연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죄성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 이행의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와 죄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3. 불가능한 가능성은 무엇입니까?

죄인에게는 계명을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므로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진정한 '불가능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명의 요구를 이를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계명 수행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의 계명은 주님 안에 거룩함으로 수행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는 승리하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지금 육신에 져서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불가능한 것으로 말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은혜에 거하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고 그분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불가능한 가능성'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새계명

요13:34-35

 

서론

마지막 만찬에 주님의 제자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려는 계획으로 앉아 있었으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계획을 지적하시고 속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주님께서 주신 떡을 받아들고 나갔습니다.

유다가 나간 뒤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영광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배반의 모욕과 슬픔 속에서도 사랑을 권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참된 의미를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이 사랑은 새계명입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받은 구약의 모든 계명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새계명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고 원수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시라고 하시며 일체의 보복을 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을 알았고, 사랑을 실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어디까지나 율법적인 사랑이었기에 새 계명으로서의 사랑의 새로운 표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새계명으로서의 사랑의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배반한 제자 유다에게까지도 자기의 살을 떼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되고, 새삶을 얻게 되며, 진정한 삶의 용기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주님의 새계명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이 사랑은 제자된 표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신자라고 합니다. 신자를 표시하는 것은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교회에 출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외적인 것을 제자나 신자가 된 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준은 아주 다른 데 있습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제자의 기준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를 알아보시는 유일한 표는 새계명인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인자가 오실 때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일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쪽의 양은 자기가 감히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를 알아보셨습니다. 반대로 왼편의 염소는 주님이 자기를 알아보시리라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모르신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가 서로 만나서 알아볼 수 있는 표는 사랑이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뿐 아니라 세상 사람이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알아보는 표를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주님을 위해서나 세상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

사랑은 무엇입니까? 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없어도 그저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양보하고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은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가치없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유다까지도 사랑하시던 주님이십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의 계명을 지켜 행해야 하겠습니다.

계 시

성 경 활 용

1. 계시의 일반적 의미

(1) 비밀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였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갈1:12)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3) 하나님의 말씀

(욥1:1) 오바다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나1:1)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4) 율법

(잠29:18)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2. 계시를 주시는 분

(1) 하나님

(행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2) 예수님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후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3) 성령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3.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까닭

(1) 하나님의 뜻을 보이심

(암7: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서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렘38:21) 그러나 만일 항복하기를 거절하시면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말씀대로 되리이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나타냄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3) 비밀의 경륜을 알게 함

(엡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함

(마11:27)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5) 백성이 방자히 행하지 않게 함

(잠29:18)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6)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함

(갈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7) 믿는 자에게 영생을 있음을 알게 함

(요일5:13)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4.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계시하는 방법

(1) 그리스도를 통하여

(갈1:12)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2) 성령을 통하여

(엡1:17)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3) 선지자를 통하여

(벧전1:12)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단10:1)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이상을 깨달으니라

(4) 믿음을 통하여

(마11:25) 이 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5. 거짓 계시가 나오는 곳

(1) 인간의 마음

(램23:16)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겔13:17)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 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2) 귀신의 영들

(왕상22: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죄이겠나이다

 

6. 계시의 나타남

(1) 계시된 진리에 대해 사용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엡3: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2) 그리스도의 재림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벧전1:7)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관련원어풀이

1. @/zj; 하-존

(1) 신적인 계시.

(삼상3:1, 잠29:18)

(2) 신적인 환상.

(단1:17)

(3) 신적인 명령.

(사1:1)

 

2. tWzj; 하-주-트

(1) 자태, 모양.

(단8:5)

(2) 환상.

(사21:2)

(3) 계시, 율법, 언약.

(사28:18)

 

3. hl;G: 니글라

계시되었다.

(단10:1)

 

4. ajpokavluyi" 아포칼룹피스

(1) 계시, 벗김, 드러냄, 진리의 계시.

(눅2:32, 롬16:25, 딤전6:14)

(2) 환상을 통한 특별 계시.

(고후12:7, 갈1:12)

(3) 말세에 속한 비밀 계시의 종말론적 의미.

(롬8:19, 고전1:7)

 

5. ajpokaluvptw 아포칼룹토-

(1) 덮개나 씌운 것을 제거하거나 벗기다. 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이다, (비밀을)나타내다, 나타내어 알리다.

(고전14:6, 갈1:12, 엡1:17, 계1:1)

(2) 계시자는 그리스도.

(마11:27, 눅10:22)

설교예화자료

우리의 무지개되신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께서 세례를 받는 모습은, 고대 세계에 무지개가 주었던 위안 대신으로, 복음안에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무지개는 물기머금은 대기에 햇살이 비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더 이상 인간에게 내리지 않으리라는 화해의 표시(창9:13)로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무지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레4:3). 장엄하게 하늘 위 구름에 계시지 아니하고 종과 같이 아래에 서있는 요단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시는 그를 보시오. 또한 한때 세상을 멸망시키는 수단이었으나 이제 구원의 수단으로 제공된 물을, 그가 성화시 하시는 모습을 보시오. 물 속에 무지개와 같은 자세로 서있는 그를 보시오.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와 맺으신 확신한 언약, 즉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안에서 사라졌다는 것과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상속자이심을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요1:29, 엡2:14, 벧전3:21).

 

 

X- Mas와 주님의 새생명

 

'하나님 자신의 성자가 인자가 되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들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크리소스톰).' 크리스마스의 의의는 크리스마스, X-Mas란 문자 중에 상징적으로 내포되어 있습니다. X는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 M은 '마니훼스트' 즉 현현하다, A는 '아가페' 즉 사랑, S는 '소테리아' 즉 구원을 각각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죄인인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큰 사랑으로써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X는 그리스도의 이름, 기름부음을 받은 구주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어서는 오시려고 하는 메시아, 신약에 있어서는 때가 차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신 성령에 의하여 잉태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시면 서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재위 자기 겸허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다만 한마디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M은 마니훼스트, 현현(顯現)하다, 현시하다의 뜻입니다. 그것은 선재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예언에 응하여 때가 차매 동정녀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 성육신하여 현현하신 것을 가리킴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마태, 누가적 처녀 탄생과 요한, 바울적 성육신은 이자선일적(二者選一的)인 것이 아니라 이자통일적(二者統一約) 진리인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의 현현, 성육신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사람의 역사 중에 진입하여 이를 구원하려 하신 사실적 이름인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란 무엇이냐? "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입니다.

A는 아가페, 즉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의 진리를 상징하는 문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주권적, 선행적, 섭리적, 구원적입니다. 크리스마스의 비밀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 죄인을 사랑하여 거룩한 성자를 주시고, 자신을 계시하시고,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구원의 대업을 완수하심에 있습니다.

S란 소테리아, 즉 구속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인류의 구원에는 거룩한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의 희생이 필요하였습니다. 갈보리를 예상하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갈보리는 다시 부활절을 예견합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쁨의 저쪽에는 더욱 큰 기쁨 중에 지양됩니다. 성탄절은 큰 신적 희극의 발단이요, 그것은 수난의 큰 신적 비극을 통하여 부활절의 큰 신적 희극 중에 완성을 봅니다. 이것만이 죄에 빠진 인류를 구하여 새생명을 주시려는 하나 님의 경륜의 비밀인 것입니다.

 

 

에바다

 

그리스도의 "에바다"라는 외침은 역사 속에서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가 탄식하시며 "에바다" 하시자, 교회의 다툼이 복음서 기자의 눈에 드러났습니다. 그가 탄식하며 "에바다" 하시자, 갈릴레오와 커플러의 입은 우주의 놀라운 구조를 말하였습니다. 또한 그가 탄식하시며 "에바다" 하시자, 묻혀 있던 기념비들이 과거의 기록을 드러내고 더 높은 진리에 빛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가 "에바다"말씀하시자, 캑스턴(Caxton:영국 최초의 인쇄업자)은 세상에 새로운 힘을 전해 주었습니다. 지식이 먼지로 뒤덮인 묘지에서 걸어 나와 모든 고을과 가정에 풍부한 지식을 가져다 주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역사의 신비가 풀렸습니다. 또한 과학은 고상한 색채로 반쯤 가려진 자연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또한 유럽의 입이 열렸습니다. 하지만 "에바다"라고 말할 때 탄식과 같이 섞여 나왔을 것입니다. 오직 진리나 거룩함만이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주어진 초오서(Chaucer)의 훌륭한 영어나, 스펜서(Sponsor)의 순수한 노래, 단테의 마음 설레는 환상, 타소(Tasso:이탈리아 시인)의 기사 이야기, 또는 밀턴의 장중하고 방대한 시구들만은 아니었습니다. 더러운 물결이 맑고 밝은 시냇물과 섞여 흘러 지식의 물줄기를 흐려 놓습니다. 보카치오가 말하는 구원받지 못할 죄악, 스캐론(Scarron)이 말하는 방탕함, 당꾸르(Dancourt:프랑스 배우이자 극작가)가 말하는 어리석은 호색, 그리고 스턴(Sterne)이 말하는 이보다 더 좋지 못한 이야기들 따위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인쇄물이 과거에는 국가들의 목소리가 되었는데, 이제 통제에서 풀려나게 되자 이 황금의 기회가 잘못 사용되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탄식소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들린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를 거두어 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기적은 아낌없이 베풀어졌습니다. 그것이 남용 될지 모른다는 이유로 특권이 힘이나 권리와 재능의 자유로운 행사를 거부하는 것을 권리가 시키는 바가 아닌 순간순간의 편리함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 수반되는 악에는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길잡이가 되는 선물을 선사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바다"입니다.

그가 "열리라"고 말씀하시자 입이 열리고 귀도 트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하는 재능을 주셨듯이 의로움과 용서와 사랑의 즐겁고 영혼을 밝게 하는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또한 주셔서, 우리의 열린 입을 즐거움으로 가득차게 하시고 오랫동안 닫혀있던 입에 새로운 찬양의 노래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때가 왔다.

 

때가 왔다. 내 영혼아./ 이미 때가 왔다. /네 존재와 목적, 그리고/ 너 자신을 알려거든 일을 시작하여라./ 네가 어디서 왔고 네 안식처가 어디에 있는지/ 인생이란 우리가 살고있는 바로 이런 것인지/아니면 더 나은 삶을 기대해야 하는지.// 내 영혼아, 일을 시작하여라./ 삶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그 신비를 찾아라./ 세상이 있기 전에 존재하던 것을/ 너에게 있어 세상은 무엇인가를/ 하나님은 어떻게 우주를 다스리시는가를/ 왜 이곳에는 정지가/ 저곳에는 움직임이 있는가를/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와 관련 있는 모든 것은/ 생명의 흐름에로 이끌려가고 있다. /내 영혼아, 일을 시작하여라./ 주님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라./ 어제까지 내 자랑거리던 것이/ 오늘은 내 수모거리가 되었다. / 생명과 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내 정신을 비추어 그릇된 것을 멀리 하소서./ 힘들다고 단념하지 말아라./ 내 영혼아, 일을 시작하여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구세군의 창설자 부스대장의 딸 미리암 부스는 미인이요,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장래가 촉망되는 여인이었습니다. 미리암이 구세군의 일을 시작 할 때에 그녀는 크게 성공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통하여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여 미리암은 중병에 걸려 죽을 위기까지 갔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미 리 암의 친구가 미리암의 병상을 방문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능력있는 여인이 병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몹시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러나 미리암은 그녀의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아는 것은 더욱 위대한 일입니다. "

미리암은 바쁘게 뛰어 다니는 동안 일에 눌려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뜻을 병상의 고독 가운데서 깨달아 알게 된 것을 오히려 더 크게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아는 것은 더 위대한 일입니다.

미리암이 날마다 기도했지만,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조용히 앉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시간을 갖지 못하다가, 병상의 고독 가운데서 참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발견하여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재구성했듯이 말입니다.

 

 

회의의 시대

 

어느 날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한 지도자였습니다. 인격에 있어서나 지성에 있어서 모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72인의 저명한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권위자였으며 종교법규의 해석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교훈을 익숙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니고네모의 영혼깊이 자리잡고 있던 신앙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니고네모가 지금까지 사랑하며 지켜오던 전통을 송두리째 부정해 버리는 그러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거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중생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던 니고데모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고 의심을 던졌습니다. 그는 회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회의의 시대에 우리는 순수한 신앙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오, 생명의 근원이신 자신에게 어린아이처럼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 링컨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받아 들여라.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는 믿음으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너는 보다 훌륭한 인간으로 살다가 보다 더 훌륭한 인간으로 죽게 될 것이다. "

 

 

예수의 변신

 

톨스토이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제화공이 있는대 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했습니다. 어느 날 꿈 속에 예수님이 나타나, 내일 네 집으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음식을 차려 놓고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한 번은 거지가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영감이 오고, 저녁 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구들방 할아버지는 불쌍하게 생각하여 예수님을 위해 준비했던 음식을 그들에게 먹였습니다.

그날 밤 꿈 속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가서 세 번 다 잘 대접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니라."

 

 

설 교 노 트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

겔43:1-6

 

서론

본문은 에스겔이 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으로서 그의 권능과 잔비를 온 세상에 펼치시는 중심지로서 그의 새로운 성소를 취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영과의 계시는 어떠한 계시입니까?

 

1. 매우 특징적인 계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시냇물의 속삭이는 듯한 부드러움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또 인간의 마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천둥 소리와 같은 큰 음성으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음성으로서 강하게 모든 사람들의 귀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으며 그 무엇에도 방해 받지 않습니다.

또한 광휘적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의 영화로운 성품의 계시입니다. 그리고 압도적인 위엄의 계시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놀라운 위엄에 압도되어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의 전능하신 사역들을 능가하며 그의 놀라운 위엄은 그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불완전함과 죄됨을 깨닫고 겸허하게 그의 영광 앞에 부복하게 합니다.

 

2. 그의 성전을 거룩케 하는 영광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옛 성막(출40:34)과 솔로몬의 성전(왕상8:10)에도 이와 같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제2성전에는 이러한 가시적인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 영광은 오직 미래의 완전한 성전에서만이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은 과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옛 영광은 아무런 생명도 없고 움직이지 못하는 그룹들 사이의 속죄소를 덮고 있던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새성전에서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신자들의 영혼 안에, 그리고 완전해진 교회 안에 계신 하나님의 명확한 임재는 그의 가장 거룩한 영광의 명시입니다. 이 새로운 성전치 영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을 결코 떠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계시였습니다.

그 계시는 그것을 보고 이해하려면 영적인 도움이 있어야 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이상을 보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실체들이 성령을 통하여 드러내 보여질 때 비로소 그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고전2:9,10,14). 성령께서는 인간의 영혼을 지극히 높이 들어올려 주시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화로운 이상을 계시해 주십니다.

또 성령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영적인 자에게는 열려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굳게 닫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전에서 경건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들을 설명해 주시고 해석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론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모든 사역들 가운데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광은 항상 적절한 때와 장소에 나타나며 매우 위엄있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 장엄함으로 인간의 영혼을 압도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영혼들을 풍족히 만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교훈

욥33:14-18

 

서론

계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형태들은 모두 그 상황에 적절한 것이며 그 속에서 교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인치듯 교훈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 꿈과 이상으로 교훈하심

꿈이라는 것은 사람이 잠든 상태에서 시각이나 청각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피곤으로나 평소에 깊이 생각했던 것이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것을 잠재 의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꿈은 생활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꾸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신 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꿈을 잘 꾼 사람은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도 꿈을 꾸어서 미래에 자신들의 형제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을 미리 알았고 그 꿈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줌으로써 실현되었던 것입니다.

 

2. 사람의 귀를 여시고 교훈하심

본문 말씀을 다시 보면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이 무관히 여기면 하나님은 다시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도장을 찍듯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교훈하시니 사람이 감히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묵살해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계시하시는 내용이 중요하고 비밀한 것이기 때문에 누설되지 않도록 주시는 자의 귀만 여시고 개별적으로 주입하십니다.

"인친다"는 말은 도장을 찍는다는 뜻이니 한번 치면 취소하지도 변경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실한 보장을 약속한 인맞은 자의 수는 14만 4천 명으로 성경상의 최대 수의 상징입니다.

 

3. 인치심은 사람의 영혼을 멸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서입니다.

17-18절에 "이는 사람으로 그 뫼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인치시며 교훈하시는 것의 목적이 됩니다.

인치시는 이유가 사람으로 그 뫼를 버리게 하고 교만을 막으시며 생명이 칼에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결론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으니 그것만큼 확실한 사실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말할 때 인치듯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받은 자 이외에는 알 자가 없고, 받은 자는 또 인쳤기 때문에 부인하거나 묵살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어도 하나님께서는 교훈하실 일이 있으시면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나타내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아 확실히 구원받은 성도로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네 생물의 형상

겔1:10

 

서론

에스겔 선지가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있을 때 여호와의 계시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때에 본 것은 네 생물의 형상이었는데 본문에 나온 네 생물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천사들로서 그 얼굴 모양을 사면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네 생물의 모습은 각기 나름대로의 신령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1. 앞모습은 사람의 얼굴입니다.

앞모습이 사람의 얼굴인 것은 하나님을 봉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일로서 이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신분의 대표입니다. 사람은 만물을 정복할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참 사람이 되려면 만물을 초월하여 그것들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편의 모습은 사자의 얼굴입니다.

사자는 육지에 있는 모든 동물 중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자를 이길 동물은 하나도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자는 승리의 상징으로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창49:8-9). 이 승리는 죄와 악에 대한 영적 승리입니다. 사자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서 도망가지 않을 동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도 사자와 같이 죄악과 싸워서 승리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 좌편의 모습은 소의 얼굴입니다.

소는 그 성품이 유순하여 순종을 잘하는 동물이며 부지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후에는 희생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소처럼 온유한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서12장 11절에도 있듯이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주님을 섬겨서 자기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다가 죽음이 닥쳐와도 죽기를 사양하지 않는 순교 정신이 필요합니다.

 

4. 뒷모습은 독수리의 얼굴입니다.

독수리는 하늘을 나는 날짐승 중에 제일 강한 새 중의 새입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나르고 자신의 둥우리도 높은 곳에 짓습니다. 시편 103편 5절에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도다"라고 하였고, 이사야 40장 31절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강하게 날개를 치는 것과 같은 새힘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는 영력이 날로날로 새로 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봉사하는 천사를 네 생물로 비유해서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을 상징하여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네 권인데 각각 별명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사람의 복음이라 하고, 마가복음을 사자복음, 누가복음을 소복음이라 하며, 요한복음을 독수리복음으로도 말합니다. 각기 뜻이 다르지만 이 네 가지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모습인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사자같이 죄악을 용감하게 물리치셨으며, 소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희생시키겼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날마다 새힘을 얻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바로 받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노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창 6:5-12

 

서론

우리는 노아를 홍수에서 승리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전에 노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악한 마음을 가지고 악한 것만 나타내고 악한 것만 경영하던 시대에 노아만은 여호와께 큰 은혜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어떻게 해서 악한 세대에 큰 은혜를 입었을까요? 그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노아는 생명의 메시아를 붙들고 삶으로 승리했다고 합니다.

노아는 항상 과거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을 때엔 생활이 부요하였고 승승장구하였으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환난과 고통과 형벌을 면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악을 경영하는 곳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깨끗이 옳고 착하게 산 사람입니다.

노아는 장차 오실 생명의 메시아를 사모하고 흠모하면서 믿었기에 일백이십 년간 자신이 소유한 모든 시간과 정력과 물질과 환경과 사건과 생명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투자하였던 것입니다.

 

2. 노아는 자기에게 맡겨진 큰 사명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 기약 없이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한마디의 이유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은 어떤 목적이나 이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과 정력과 물질과 수고와 피땀을 흘리는 것만을 요구하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 시대는 악하고 쾌락만을 추구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권세를 누리는 데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주를 짓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맡겨진 부담이 많은 줄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 이유없이 잘 감당하고있는가를 면밀히 심사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노아는 미래적 영감을 받아 먼 장래를 바라보면서 살아갔습니다.

아무리 노아일지라도 장래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일백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궂은 날이나 맑은 날이나 개의치 아니하고 방주를 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배가 산 꼭대기에까지 물이 넘쳐서 떠다닐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노아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간구하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맡긴 바 일에 부지런하였으며 그 일이 힘드는 줄을 몰랐습니다.

노아는 분명 미래적 영감을 통해서 세상의 부귀 영화를 분토와 같이 여기고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에 전심 전력을 다해 승리한 것입니다.

 

결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 하여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힘든 일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또한 그가 미래적 영감의 인도를 힘있게 그대로 순종함과 같이 우리도 미래적 영감의 인도를 받아 내 일생 전부를 투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우리 교회와 백성을 구원하는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출19:7-24

 

서론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을 받으라는 부르심과 주어진 방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1. 하나님은 계시하실 때 인간의 참석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결같은 방법으로 처음에는 부름이 있으며 그 다음에 계시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권위있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진리였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확신과 그 진리의 중요성 등이 그에게 권위를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뚜렷하게 말하였는데 어떤 선포를 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그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그것을 명백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정확한 의사 전달을 하였고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에 완전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모세의 말은 그 백성들에게 바람직한 결과와 확신을 갖도록 하는 데 있어서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중재였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계시하는데 인간 편에서 준비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오심을 선포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매체들을 통하여 즉,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섭리, 말씀 등을 통하여 선포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개인적 성결로 준비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성결해야 하며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성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계서는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할 시간을 정해 놓으셨는데 그때는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나 선택하지 않은 시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계시는 상황에 적절한 방식으로 행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애굽에서 살았기에 우상과 접하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타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상황에 맞는 방법으로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빛나는 구름 속에서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많은 경우들에서 즉, 의심과 역경과 억압 속에서 그렇게 계시하십니다. 또 그의 권능과 두려움과 함께 계시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런 나타나심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 계시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바로 깨닫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복종하고 그 부르심 뒤에 따르는 공적 계시를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를 하실 매 주시는 대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준비가 완전하도록 확인하신 후에야 계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요일3:1-12

 

서론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세 번 나타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나타나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속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왜 나타나셨는지 차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땅 베들레헴의 말 구유에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로 자라시다가 갈보리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상으로 인간 세계에 나타나신 이유는 우리 죄를 없애 주시려는 의도에서입니다.

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 곧 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 계명인 도둑질, 살인, 간음 등 수없는 죄를 범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무서운 죄를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 멸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무슨 죄를 범하였던지 간에 다 사함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만인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신 돌아가신 까닭에 우리 죄가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마귀의 역사를 열하시기 위해서 나타나셨습니다.

마귀는 태초부터 사람의 마음속에 죄의 씨를 뿌려놓는 역사를 해왔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이 마귀의 세력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지히 박멸시킬 수 없습니다. 지혜로도 할 수 없으며 힘이나 수양이나 도덕으로도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모두 마귀의 세력에 눌려 멸망할 것이므로 예수께서 이 악한 마귀의 역사를 멸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마귀의 모든 역사를 별하려고 나타나신 예수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고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우리를 영화시키시려고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육적으로는 다른 믿지 않는 자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재림하실 때는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장래 영화의 소망은 우리의 절정적 은혜인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행복은 여기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주께서 임하실 때는 완전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영화시키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회개하고 중생하며 성결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를 영화시키시려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정조가 있어야 예수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궤휼에 미혹되어 깨끗한 마음과 정결한 정조가 없으면 도저히 주님을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도말시켜 주시고 사탄의 역사를 멸하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사탄의 역사에서 건져 주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주님 맞을 준비를 위하여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의 심령이 정결해 지도록 힘써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삼하 7:8

 

서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뜻을 전달하시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는데 직접 당사자에게 말씀하신 예로서는 사무엘을 들 수 있으며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 많은 신앙의 인물들에게 직접 하셨습니다. 그러나 직접 하시지 않으시는 경우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원에게 하신 말씀으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1. 말씀하시게 된 동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다윗 왕의 통치시대 중 태평 시대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자기로 하여금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심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에게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 거하는 데 하나님을 모신 언약궤가 휘장 안에 있으니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을 모실 정식 성전을 지어야 하겠다는 뜻을 나타냈습니다.

 

2. 하나님의 지시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고 하셨는데 그 내용인즉 "너는 나를 위하여 성전을 지을 염려를 안해도 좋다 내가 언제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않았느냐고 말한 적이 있느냐 내가 너를 목장에서 취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았고 네 대적을 다 물리쳤고 네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리라 "고 하시면서 이 뜻을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고 나단 선지에게 지시하셨습니다.

나단은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여 전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뺌이 없이 전달하여야 합니다.

 

3. 다윗의 소원의 성취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소원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잠시 연기하신 것이니 다윗의 몸에서 난 자식을 계승시켜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니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리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솔로몬 때에 성전 건축이 성취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이 말씀에 감격하여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이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주의 말씀을 인하여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라고 하면서 기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후에 지을 성전에 대비하여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내 종이라고 부르시면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무척 사랑하였는데 그것은 다윗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다윗의 위인됨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으로 인하여 범죄하였을 때도 그는 겸손히 무릎을 끓어 자기의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으므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대에 성전 짓는 일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아들 솔로몬 시대에 건축하게 하심을 다윗에게 계시로 보여 주셨고 다윗은 이 일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장래 일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1:1-3

 

서론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혼란해진 암흑시대에 직면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신 성경을 통해서 바른 신앙과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하나님의 이상을 기록한 글입니다. 이 책은 우리 신자들에게 많은 위로를 주며 소망을 주고 영적 생명을 공급해주는 우리 신자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시록은 예언의 책이며, 심판의 책이며, 소망의 책이기도 합니다. 이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 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계시라는 뜻입니다.

이 계시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었습니까? 계시의 근원은 하나님이신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받으셔서 천사에게 주셨습니다. 천사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일반 성도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계시는 이렇게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계시는 세상의 종말에 관한 미래의 사건을 알게 하시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만이 알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취될 계시

이 계시는 인류 역사상 성취될 계시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성취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성취하실 일에 절대적 확실성을 가리키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실현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급속히 성취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기간이 짧은 것이 아니라 성취하시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실 때 급속히 진행해 나가신다는 뜻입니다.

 

3. 축복의 계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는 우리를 괴롭히거나 저주하여 못살게 하는 계시가 아니라 무한한 위로와 은총과 축복을 주시는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을 어떠한 자가 받는 것입니까?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로서 계시록을 귀하게 여기고 바로 알려고 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예언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깨닫고 알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으로 이 사람은 믿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세상 끝날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이 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우리의 신앙생활을 정리하고 바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과 힘과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계시의 말씀을 잘 읽고, 잘 듣고, 잘 지켜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삶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것들이 무엇이니까

슥6:4

 

서론

선지자가 눈을 들어 볼 때 두 놋산 사이에 네 종류의 마병 거리 모습이 등장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자신에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기를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이 물음은 바로 우리의 물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계시의 신비성

계시라는 말은 원어로 "아포칼룹시스"인데 "칼룹토(숨은 것, 감추인 것)"과 "아포(드러난다)"란 뜻의 복합어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비밀로 간직되어 오던 사실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드러내는 것", "씌웠던 것을 벗기는 것", "나타내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리석고 나약하고 무식한 인간들에게 그 뜻을 가르치시는 방편으로 계시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보통 평범하게 이해하며 깨닫기 쉬운 사물을 보여 주시면서 교훈하시는 것이 계시인 것입니다.

 

2. 무엇이냐고 물어야 할 인간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하여 무엇을 배워 지식을 쌓고, 깨닫고,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살아갑니다. 또 사람은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알고자 하여 묻는 자세는 매우 당연한 것이요, 발전적 자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시를 묻지 않고는 스스로 알기에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겸손히 묻는 자에게 대답해 주시려고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3. 계시의 참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오묘하고 능력 있는 사역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들을 보이는 것처럼 확실하게 믿을 때 하나님은 세상에서 특별한 사물들을 들어서 그의 보이지 않는 오묘한 일들을 비유로 보여 주십니다.

본문에서는 "네 종류의 마병거"의 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 마병거는 그때의 세상에서는 가장 무서운 전투력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게 무서운 전투력을 가진 마병거의 힘보다 훨씬 크시며 뛰어나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스가랴서에서는 이렇게 이상을 보여 주는 계시가 모두 8차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려 주시려는 계시의 한 방편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무지한 자들이므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쉽게 알도록 해주시기 위하여 계시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 편에서는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열성을 갖고 계시의 말씀을 상고해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에게 임한 계시

겔 1-10

 

서론

여호와의 종교는 계시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유대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갈 때에 함께 간 포로민 중의 한 사람인데 그발 강가에서 동포가 당한 어려운 때와 종교계의 부패함을 인하여 기도할 때에 여호와의 손이 임하시고 성령의 계시가 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시는 무엇입니까?

 

1. 에스겔이 받은 사명에 대하여 격려하시는 계시입니다.

에스겔은 자기의 지식으로 정치적 배경도 없고 경제적 여유도 없는 민족이므로 다시 소망이 없다고 절망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뼈만 있는 해골들을 다시 살리셔서 부흥할 수 있는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또 용기를 잃고 있을 때 용기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 계시는 전도의 묘방을 발견하지 못하여 번민 중에 있는 전도자로 전도의 묘방을 지시하는 계시로 에스겔은 전도가 정치적 배경과 경제적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소망과 예언의 말씀이 아니면 부흥이 되지 않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전도자의 대상을 계시하심

대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대외적입니다.

대외적으로 본 대상은 힌놈 골짜기입니다. 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에 있는 산인데 이곳은 악마의 세력이 평창한 곳입니다.

힌놈 골짜기는 성 중에서 버린 더러운 물건과 폐물들을 쌓아 놓고 불사르는 곳이므로 불이 계속하여 붙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곳을 지옥의 부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곳에서는 몰록신에게 아들을 불살라 바치는 잔인한 일을 도덕적 행사로 알고 하는 곳이니 참으로 있어서는 안될 골짜기인 것입니다.

현사회는 사랑의 심중에 더러운 것을 태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불은 늘 붙고 있으니 이 지상에서 고초를 받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어찌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 대내적입니다.

대내적으로 본 대상은 해골들입니다. 현대는 해골적이니 전도는 비교인들에게만 전도하는 것보다 먼저 대내적으로 이미 하나님을 영접한 교인들에게 소망과 예언을 주어서, 다시 말하면 경건한 도리와 진리를 가르쳐서 질적 부흥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해골에 생명이 없는 것 같이 현대교회는 생명이신 예수를 중심하지 않습니다. 해골에 호흡이 없는 것같이 현대 교회는 신앙의 호흡인 기도가 없습니다. 해골에 살이 없는 것같이 현대 교회는 메말라서 윤택한 사랑이 없습니다. 또 해골의 뼈가 흩어져 있는 것같이 현대 교회는 단합심이 부족합니다. 해골이 먼지와 흙 속에 묻혀 있는 것같이 현대 교회는 세속화하여 세속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현대교회는 사탄과 악령들에게 농락을 받는 때가 많습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 민족과 교계가 이상에 말한 바 에스겔 선지자가 계시로 본 바와 같은 환경과 입장에 서 있으니 이 민족과 해골 같은 교회를 어찌하면 부흥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방책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전도자 에스겔 선지에게 하나님이 밝히 계시하신 대로 그 무기는 소망과 예언이니 즉 기도와 성경의 진리 그대로 전하는 데 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데 기도와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고 난

성 경 활 용

1. 하나님의 섭리하심

(1) 하나님께로 나옴

(왕하6:33)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암3:6)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2) 하나님께서 분배하심

(욥11:10)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하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3) 하나님께 양을 정하심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4) 하나님께서 기간을 정하심

(민14:33)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렙29:10)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너희를 권고하고 나는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5) 하나님의 본심이 아님

(애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6)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출생함

(욥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2. 죄와 고난과의 관계

(1) 죄가 고난을 낳음

(욥4:8) 네가 보건대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2) 죄는 고난으로 벌받음

(사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3) 고난 후 말씀을 지킴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3. 성도의 고난

(1) 성도에게는 고난이 있음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2) 고난에 참예함

(빌4:14)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3) 환란 중 요동하지 않음

(살전3:3)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4) 일시적 고난임

(시30:5)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벧전1:6)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5) 의인은 고난이 많음

(시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도다

(6) 고난으로 율례를 배움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7) 기쁨과 위로로 끝남

(시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박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8)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고난을 줌

(시119:75)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을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4. 고난 받을 때 성도들이 해야 할 일들

(1) 여호아를 찬송함

(시13: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2) 그리스도를 본받음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3) 선지자들을 본받음

(약5: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4) 인내함

(롬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살후1:4)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벧전2:20)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5)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않음

(욥5:17)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정책을 업신 여기지 말지니라

(잠3: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6) 고난을 인정함

(느9:33)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애3:39)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7) 여호와께 돌아가야 함

(시116: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8) 기도함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 고난의 종류

(1) 자손이 괴로움을 당함

(창15:13)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2) 감독들의 학대

(출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신26: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3) 의인을 박해 받음

(암5: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4) 의를 위한 고난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요15:20)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5) 세상에서 받는 고난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6. 고난이 생기는 이유

(1) 여호와께 범죄함으로

(습1: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2) 그릇 행함으로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3) 회개하지 않음

(계2:22)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란 가운데 던지고

(4) 고난을 위해 태어남

(욥5: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5) 우상 숭배

(삿10:1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7. 고난을 주시는 이유

(1) 시험을 위해

(시66: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신8:2)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삿2:22)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 기도하게 하심

(삿4:3) 이십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렘2:27)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3) 회개를 위해

(신4:30)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시78:34) 하나님 이 저희를 죽이실 때에 저희가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4) 율법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5) 복음 전파를 위해

(딤후2:9) 내가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6) 영광을 받기 위해

(고후4:17)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롬8:17)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관련원어풀이

1. hn:[; 아-나-

(1) 고통당하다. 억눌림을 받다, 눌리다.

(시119:67)

(2) 눌림을 당하다, 괴로움을 받다.

(시119:71, 사53:4).

(3) 괴로움을 받다, 쓰라림을 당하다.

(시119:107, 애3:1)

(4) 고통, 비참.

 

2. @w<a: 아-웬

(1) 불운, 재난.

(욥5:7, 시55:4, 잠22:8)

(2) 텅빔, 공허, 헛되고 공허한 것.

(삼상15:23, 사41:29)

(3) 거짓, 사기, 사악, 불법.

(민23:21, 욥36:21)

(4) 불법을 행하는 자들.

(욥31:3)

(5) 슬픔.

(호9:4)

(6) 나의 슬픔의 아들.

(창35:18)

 

3. ylij? 호리

(1) 병, 아픔.

(신7:15,사1:5)

(2) 고통, 슬픔.

(전5:16, 렘10:19)

(3) 악, 재난.

(전6:2)

 

4. hS;m' 마싸 -

(1)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시험하는)재난, 시련.

(욥9:23)

(2) 뿌리는 자, 모으는 자.

(왕하11:6)

 

5. lm;[; 아-말-

(1) 피로함, 지친 것, 괴롭힘.

(창41:51, 신26:7)

(2) 무거움, 지치게 하는 노동.

(시73:16, 전1:3)

(3) 노동의 열매.

(시105:1, 전2:19)

(4) 죄, 사악함.

(민23:21,사10:1)

 

6. rrxo 차-라르

(1) 고통을 당하게 하다, 괴롭히다, 화나게 하다.

(습1:7)

(2) rx <차-르>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

(왕하12:11)

누르다, 밀어 붙이다.

(신20:12)

(3) hr;x; <차-라-> 여자 원수, 대적, 적수.

(삼상1:6)

고통, 괴로움.

(시71:20, 사46:7)

 

7. zg<ro 로-게즈

(1) 동요, 흔란.

(욥17:26, 사14:3)

(2) 소란, 격노.

(사37:2, 39:24)

(3) 성냄, 분냄.

(합 3:2)

 

8. ha;l;T] 텔라-아-

악함, 수고, 노동, 지쳐버림, 피곤, 고민, 성냄.

(출18:8, 민20:14)

 

9. [r' 라

불행한, 운이 나쁜, 사악한.

(시34:19, 렘48:16, 슥1:15)

 

10. pavscw 파스코-

(1) 감각적인 경험을 가지거나 맛보다, 영향을 받다. (좋은 의미에서) 좋은 경험을 가지다, (나쁜 의미에서)악한 것을 겪다, 괴로움을 받다, 악에게 예속되거나 그것으로 고통당하다.

(마6:21, 17:12, 막8:31, 9:12, 눅9:22, 빌1:29, 살전2:14, 딤후1:12,히 2:18, 벧전2:21, 23, 계2:10)

(2) pavqhgov" (파데토스)

고통을 당하거나 당한 것, 고난, 악운, 불행.

(롬8:18, 빌3:10)

 

11. kakopavqeia 카코파데이아

고통의 상태, 고난, 괴로움, (악으로)고통 당함, 고통에서 견딤.

(약5:10)

 

12. basanivzw 바사니죠-

(1) 시금석으로 시험하다, 고통을 주어 시험하다, 고통을 주다, 괴롭히다.

(마14:24, 계14:10)

(2) 시험과 고통을 참다.

(딤후2:23)

(3) 괴로움을 당하다, 낙심되다.

(약5:1)

 

13. ejnoclevw 에노클레오

(1) 괴롭히다, 화나게 하다.

(눅6:18)

(2) 고통을 받게 하다, 성가시게 하다.

(히12:15)

 

14. propavscw 프로파스코-

미리 고난을 당하다. 전에 경험하다. (앞서 또는 이전에)고통을 받다.

(살전2:2)

 

15. sugkakopaqevw 숭카코파데오

∼ 함께 고난을 받다.

(딤후1:8, 2:3)

 

16. sugkakoucevsmai 숭카쿠케오마이

함께 고통을 받다, 학대를 당하다.

(히11:25)

 

17. paqhtov" 파데토스

느낄 수 있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고생할.

(행26:23)

 

18. talaipwriva 탈라이포리아

수고, 곤란, 재난, 비참, 고통.

(롬3:16, 약5:1)

 

19. sumpavscw 숨파스코-

함께 고난을 당하거나 겪다.

(롬8:17)

 

20. qlivyi" 드립시스

누름, 압착, 압박, 고난.

(골1:24)

설교예화자료

고난의 삶을 자청(?)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아는 많은 사람들 중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수하고 지금까지 우리의 기억에 남아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가까운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는 자신의 좋은 환경과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터전을 거부하고 스스로 빈민굴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한없는 고통을 당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또한 독일의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는 유복한 환경과 높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아프리카에 들어가 토인들을 돌보면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멍청한 짓이라고 비난할지 모르나 그것은 주님을 좇기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짊어진 아름다운 고난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예수를 좇기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용기있는 신앙 ! 이것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첫사랑을 지키려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난을 피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말고 그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고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고난의 십자가는 축복의 십자가로 바뀌고 우리의 신앙은 더욱더 강하여 지는 것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며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 25)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덴마아크는 1864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함으로 남부의 기름진 실레스비히와 홀수타인 두 주를 잃었습니다. 또한 그 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국내 경제는 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패전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은 덴마아크를 존망의 위기까지 몰고 갔습니다. 전쟁에서 패전하여 돌아온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을 퍼마시고 길거리에서 술주정을 하며, 여자들은 생계 유지를 위해 외국인에게 몸을 팔기도 했습니다. 덴마아크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패전, 전비 부담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배상, 국토의 손실, 덴마아크가 이런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 역경에 도전할 것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룬트비히 목사였습니다. 그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란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라는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는 농민 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인 자원을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그러한 역경을 극복할 힘을 얻었습니다.

 

 

생명의 방패(?)가 된 안경

 

최근에 나는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전 대통령인 테오도르루우즈벨트(Theodore Roosevelt)를 암살자의 총알로부터 어떻게 보호하여 주셨는지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대통령은 매우 근시 였고, 그래서 그는 항상 두 벌의 안경을 지니고 다녔는데 하나는 가까운 곳의 것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멀리 있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대대적인 정치 캠페인 동안 그가 밀워키(Milwaukee)시에서 연설하고 있었을 때쉬렌트라고 하는 남자가 그를 쏘았습니다. 루우즈벨트는 다쳤지만, 그의 연설을 끝마치겠다고 고집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그의 상처를 검사했을 때, 그는 대통령의 조끼 주머니 속에 있었던 강철 안경집이 총알을 그의 심장으로부터 빗겨 나가게 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 정말 놀랍군 ! " 대통령은 조심스럽게 그 구부러진 안경집과 함께 그 안의 부서진 것들을 조사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두 벌의 안경을 갖고 다니는 것, 특히 그 쇠로 된 케이스에 담은 두껍고 무거운 안경은 귀찮은 것이라고 해 왔는데 오늘 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구하려고 그것을 사용하셨구나."

 

50살의 세르반테스

소설, 우화, 시를 백편이나 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인 용병으로 유럽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그의 군대가 전쟁에 지게 되어 그는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했습니다. 이제 그는 먹는 것이나 주위의 간섭없이 글을 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끝내고 그것을 그의 동료 투옥자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또 다른 한 장을 끝내고 이 것 또한 그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는 그 책을 다 끝마치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돈키호테(Don Quixote)」였고, 그 작가의 이름은 세르반테스였습니다. 그는 그때 50살이었습니다.

고난의 삶이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도 기쁨을 찾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이 될 것입니다. 삶은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기쁨의 연속이니·.

 

 

고난과 축복

 

몇 년 전에 고기잡이 배들이 뉴잉글랜드의 동부 연안에 있는 한 작은 어항으로부터 출어하였습니다. 오후에 그들은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그 어선들 중 단 한 척의 배도 항구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들의 부인들, 어머니, 아이들, 그리고 애인들은 해변을 오르내리면서 손을 모아 하나님께 그들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상황에 공포는 더하여, 한 오두막이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모두 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집을 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었을 때 기쁘게도 모든 어선들이 연안에 있는 항구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망의 얼굴을 한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집이 불타버린 남자의 아내였습니다. 육지로 올라 와서 그의 남편을 맞이했을 때 그녀는 울며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는 망했어요. 우리 집과 그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어요." 그러나 남자가 말하였습니다. "그 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모든 어선들을 항구로 무사히 인도한 것은 우리의 불타는 오두막에서 나오는 불빛이었다오 ! "

 

 

고난 속에서 피어난 기적의 꽃

 

세계 2차 대전 때에 불란서가 독일 나찌스 군대에게 패해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나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 불가능해서 영국으로 건너오기 위해 해협으로 도망갈 때에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하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태연히 있었습니다. 그때에 영국 왕 조오지 6세가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전 국민이 그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상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독일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 한 대도 뜰 수가 없었고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국 편에는 도버 해협이 어떻게 잔잔하고 고요한 지 거울같이 맑아서 수많은 배가 29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일 후에 영국 군대를 비롯해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 놀라운 기적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의지하며 기도한 사람들의 믿음의 결과입니다. 깨어 기도하십시오. 어떤 고난도 기적으로 변할 것입니다.

 

 

누사덕의 지혜

 

당나라 칙천무후는 중종, 예종을 다 제쳐놓고 정치를 마음대로 주름 잡는 세도가였습니다. 자기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압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유능한 사람을 잘 써서 나라 일을 제대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누사덕이란 사람도 유능한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누사덕은 사람됨이 부드럽고 너그러워서 다른 사람이 무례하게 대들어도 탓하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누사덕의 아우가 대주 자사가 되어 가게 되었을 때 누사덕은 아우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모두 출세하여 경사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그만큼 남들의 시기도 있을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시기를 모면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고 걱정했습니다.

그 아우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설사 어떤 사람이 나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고 해도 탓하지 않고 내 손으로 닦겠습니다. 만사를 그와 같이 하자면 형님의 걱정을 끼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네 얼굴에 침을 뱉을 때에는 그 사람이 화가 났을 때이다. 그런데 네가 네 손으로 그 침을 닦으면 상대방은 점점 더 화가 날 것이 틀림없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버려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는 것이니까. 그럴 때는 웃으면서 침을 그대로 받는 거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고난을 웃음으로 이기는 지혜를 배웁시다. 분노를 삭일 때 앞에 닥친 어떤 고난도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어떻게 단련되야 합니까?

 

고난은 우리에게 닥쳤을 당시 크나큰 마음의 상심이 되지만 이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해주는, 세상 세파에 밀려다니지 않도록 도와주는 힘이 됩니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됩니까? 수많은 풀무질과 망치질로 강하여 지는 것입니다. 고난을 수용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아픔은 우리를 강한 신앙인으로 서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아비시니아의 전도사였던 램비(Lambie)박사는 아프리카에서 물살이 빠르고 다리가 없는 시내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을 건널 때 발이 휩쓸려 가거나 물 아래로 깊이 잠기고 바위에 던져지게 죄어 부딪쳐 죽게 되는 위험이 따릅니다. 램비 박사는 원주민들에게서 이 물을 건너는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그것은 무거운 돌을 등에 지고 물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 돌의 무게는 그의 발을 시내의 바닥에 단단하게 유지해 주어서 그는 휩쓸려 가지 않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램비 박사는 이것을 응용하였습니다. 위험스러운 물을 건너는 동안 적은 항상 우리를 넘어뜨리려하고 우리에게 돌진하여 생명을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는 짊어질 바닥짐이 필요한데 그것은 무거운 짐이 되긴 하지만 우리가 넘어져 휩쓸려 가지 않도록 해줍니다.

 

 

고난 속에 발견한 주의 섭리

 

-웨즐리의 순교여행시절 -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즐리는 수없이 닥치는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줄 아는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웨즐리가 어느 날 마차로 바퀴자국이 가득 찬 좁은 길을 따라 선교 여행을 하고 있던 중에 마차가 진흙 속에 처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마을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이 도와서 마차를 움직이려 하는 동안 한 기독교인이 마침 그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웨즐리는 잠시 그와 말을 주고 받았고 이 기독교인이 매우 빈궁한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농사꾼인데 농사가 흉작이어서 집세를 낼만한 돈도 없고, 당장 자식들과 길거리에 쫓겨나게 되었음을 절망스럽게 호소했습니다. 이에 웨즐리는 "당신이 얼마나 빚을 졌나요? 나는 우리가 그것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주님은 분명 내가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그 남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에게 돌아서서 외쳤습니다. "자, 나는 이제 우리의 마차가 왜 진흙에 갇히게 되었는지 알았다. 우리의 멈춘 걸음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을 돕도록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신 것이다. "

자신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서 바라보고 실천하는 웨즐리의 믿음은 참다운 이웃사랑의 표본입니다.

 

 

고통의 가치

 

주전 500년경 희랍의 비극 극작가 에스키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 " 독일의 시인 쉴러도 비슷한 의미로 "행복한 사람은 고통을 배워야 한다. "고 쓴 일이 있습니다. 분명 인간생활에 있어서 고통은 여러 가지 뜻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알기 쉬운 것도 아니고, 얻기 쉬운 지혜도 아닙니다. 약 100년 전에 레치탐이라는 사람이 의학에 대해서 쓸 때에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고통의 모든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참으로 위대한 일일 것이다. "라고 결론을 낸 것입니다.

인간 생활의 수수께끼 같은 일은 사람은 항상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상태이지만 동시에 고통없이는 살 수 없고 생의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약 1500년전 성 어거스틴은 이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깊이 다룬 일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놀랍게도 고통이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잘못된 상태를 깨닫기 위한 중요한 표시가 된다는 의미로의 선물입니다. 예를 들어 몸에 다친데나 병든 부분이 있다면 아프게 느껴져야만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아픔이 없는 병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몸의 고통보다 마음의 아픔이 더 견디어내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죽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죽음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영적인 죽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이것은 과연 생의 의미를 발견하기에 빼놓을 수 없다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

 

4세기에, 수많은 고행주의자들이 유혹을 물리치고자 은자와도 같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육신적인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고행들 중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극단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성 아셉시마스(Ascepsimas)는 온몸을 수많은 사슬로 묶어서 손과 발로 엉금엉금 기어다녔습니다. 수도승인 베사리온(Besarion)은 그의 육체가 편안히 잠을 자는 것마저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40년 동안 그는 누워서 잠을 자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카리우스(Ma-carius) 2세는 늪 속에 발가벗고 6개월 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 후에, 그의 몸은 모기에게 너무 많이 물려서 마치 나병환자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성 마론(Maron)은 속이 빈 나무 줄기 속에서 11년 동안 생활하였습니다. 다른 고행 자들도 동굴이나 야수의 굴, 물이 말라 버린 우물, 심지어는 무덤에서 살기도 하였습니다.

불결함, 악취, 벌레들, 그리고 구더기로 인해 고통받는 것조차도 정신적으로 유익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곧 육체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교인

 

24명의 미 의원들은 이집트에서 10명의 크리스찬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체포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집트 대사관에 유감의 뜻이 담긴 서신을 발송했습니다. 미의원들은 이 서신에서 "투옥된 크리스찬을 즉각 석방하고 종교나 신앙에 근거한 차별행위나 인신공격을 즉각 중지할 것."을 공식으로 요구했습니다.

투옥된 크리스찬들 중 6명은 1970년대에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온 사람들이고, 나머지 4명은 이집트에서 있는 C.C.C훈련에 참석했다가 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온 사람들입니다.

「연합통신」은 국민적 연합을 '현저하게 해칠 정도로' 기독교, 회교, 유대교를 모욕하는 사람에게 최고 5년의 징역과 750불의 벌금형에 처한다는 1972년에 제정된 법에 이들이 저촉되어 투옥되었다고 믿을만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 크리스찬들은 실제로는 이 법이 기독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회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지 못하게 하는 데 변칙 적용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제사면위」 간부 칼린 윈델(Carline Win-dall)의 말은 이집트 당국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양심수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인권과 정치적 권력에 관한 국제협약'은 모든 사람에겐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강령을 선포했으며, 이집트 당국은 1982년 1월19일 이를 정식으로 인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당국은 이 강령을 인준한다고 해놓고 스스로 이를 어기고 있습니다. "

현재 미국 전체에 산재한 인권단체들은 미국인들에게 근처에 있는 이집트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 투옥된 이집트 크리스찬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근세시대의 명성

 

근대의 영성은 초대, 중세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동시에 영성의 폭이 한층 광범위해졌습니다 국가적인 문화와 전통의 특징인 나타나고, 영성생활의 대중화, 개인현상과 또한 훈련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내놓게됩니다. 성서연구를 영성훈련에 중요한 방편으로 응용하게 되면서 성경의 말씀을 시적으로 표현하게도 됩니다. 스페인의 영성가로서는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와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 십자가의 성 요한(StJhon of the Cross) 등이 대표적입니다.

스페인의 영성은 매우 추상적이며 또한 금욕적이었습니다. 로욜라는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노예와 주인관계이며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명을 다하는 기사(knight)로서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영성의 표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절대적 순명(acatamie-nth)이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상상적이며 관조적입니다.

르네상스에 영향을 받은 이태리의 영성은 보다 실용주의적이며 실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내적인 심성을 명상하는 데 전심을 쏟으면서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프랑스의 영성은 프란시스 데 살레스(Fran-tis De Sales)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경건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나게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도 영혼을 위한 한 가지 길을 제공함으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Salesian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간단한 명상 방법을 가르쳤는데, 영적 꽃다발(Spiritual Nosegay)이란 특색 있는 표식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꽃다발인데 그 당시 남녀들이 외출할 때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안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Jean-Jacaues Olier는 그리스도에게로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성찬예식과 거룩한 마음의 헌신과 로사리오(Rosary)의 기도를 요구했는데 로사리오의 기도는 내적 신학을 중심으로 단순성과 반복성을 띤 미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영성은 의식에 뿌리를 박은 매일의 예배를 드리는 일과 특히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독일의 영성은 독일적 신비주의의 전통을 갖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중세 기의 마지막 인물로서 칼빈처럼 합리주의적 인문주의가 아닌 독일 수도승의 전통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엑크하르트와 테일러에 심취해 있었는데 루터의 오직 믿음을 통한 은총의 구원이라는 개인적인 구원의 경험도 독일의 디오니시우스적인 신비주의적 전통에 기초해 있는 것입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중세에 있었던 개인의 실존적 차원의 영성이 지양되는 반면에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현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개인전도와 신비적, 미래지향적인 윌리암 로(William Law)의 영성에 비교하여 존 웨슬레(John Wesley)의 영성에는 보다 사회복음적인 봉사와 현세적인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어록·시·묘사

 

고난이 크면 클수록 영광은 크다.

(M.T. 키케로)

 

고난은 대체로 미래의 행복을 의미하고 그것을 준비해 주는 것이므로 나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고난을 당했을 때에는 희망을 품고, 반대로 너무나 큰 행복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C. 힐티/ 新書簡)

 

자기 고난은 참아야 하고 남의 고통은 돌봐주어야 한다.

(채근담)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은 아는 것도 또한 많다.

(호메로스)

 

고난을 당했을 때가 사람의 진가를 증명하는 기회다.

(에픽테토스)

 

막다른 곤경에 처했을 때 말 곧 언어로써는 그 곤경에 대처할 수 없다. 차라리 노래가 보다 쉽게 곤경과 부딪칠 수 있게 한다.

(A. J. 헤셸)

 

고난만이 올바른 의미에서 사람을 겸손하게 한다.

(C. 힐티/ 행복론)

 

인간의 고통은 하느님의 진실을 나눌 수 없어서 생기는 것이며 하느님의 진실을 나눌 수 없는 것이 곧 인간의 고통이다.

(A. J. 헤셸)

 

욥이 왜 무고한 자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를 묻는 동안 예언자들은 언제 고통이 끝나는가를 물었다.

(A. J. 헤셸)

 

굽은 선들 속에다 하느님은 직선을 긋는다.

(A.J. 헤셸)

 

어두운 밤에 새벽을 확신하는 것, 저주를 축복으로, 고뇌를 노래로 바꾸는 힘을 확신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A.J. 헤셸)

 

경건한 사람은 삶의 시련과 고통의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이것들이 모두 삶의 전체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삶이나 남의 삶 속에 있는아픔과 고통과 역경, 악을 민감하게 알아낸다. 그러나 그에게는 슬픔을 딛고 일어설 내면의힘이 있다.

(A.J. 헤셸)

 

돈 있는 자는 자진하여 돈의 노예가 될 뿐이다. 사람의 가치는 물론 진리를 척도로 하지만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보다는 그 진리를 찾기 위해서 맛본 고난에 의하여 개량되어야 한다.

(T. 카알라일)

 

고난이 곧 불행이 아니다. 고난을 극복할 의지를 잃은 것이 불행이다.

(윤오영/ 생활과 행복)

 

즐거움은 때때로 찾아오는 손님이지만 괴로움은 무턱대고 우리에게 늘어 붙는다.

(J. 키츠/ 엔디미온)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겪은 다음에 복을 이룬 이는 그 복이 비로소 오래 가며, 의문과믿음을 함께 살펴본 다음에 지식을 얻는 이는 그 지식이 비로소 참된 법이다.

(채근담)

 

정중(靜中)의 정은 진정(眞靜)이 아니다. 시끄러운 곳에서 조용함을 얻음으로써 겨우 성천(性天)의 진경이라고 할 수 있다. 즐거워 할 곳에서 즐거움은 진락(眞樂)이 아니다. 괴로운 가운데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겨우 심체(心體)의 진기(眞機)를 본다.

(채근담)

 

초년 고생은 말년낙(末年樂)의 근본이니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

(이광수/ 인생의 향기)

 

추녀 끝에 걸어 놓은 풍경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야 비로소 그윽한 소리가 난다. 인생도 평온 무사하기만 하다면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게 된다. 곤란한 일이 있음으로 해서 즐거움도 알게 된다.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괴로운 일이 있다. 이같이 희로애락이 오고 가고 뒤엉키어 심금에 닿아서 그윽한 인생의 교향악은 연주되는 것이다.

(H.W. 롱펠로)

 

더 깊은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괴로움을 겪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O.F.0.W. 와일드/ 옥중기)

 

사람은 몸이 아파서 자살하는 일은 별로 없다. 절망을 일으키는 것은 그 대개가 정신의 고통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린이의 경우에 동정하지만, 그러나 정말로 동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우리들 어른들의 경우이다. 우리들의 가장 큰 재난은 우리들 자신 속에서 나온 것이다.

(J.J. 루소/ 에밀)

 

우리가 시방 헤어지는 것은/ 받은 사랑과 나누어 줄 사랑을 생각하며/ 죄를 벗고 고난을 벗는 환희의 순간에 또 다시 만나는 연습입니까?

(배명식/ 우리가 시방 헤어지는 것은)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구상/ 그 분이 홀로서 가듯)

 

시인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웃음과 눈물의 사이 길에서/ 고뇌와 모대김을 끼니로 때 우면서/ 참 삶의 원형을 그려보며.

(김성휘/ 시인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놀라운 변화여라! 살아계신 강한 손이 너를 붙드셨느니라/ 너는 무력함과 고독 속에서 자신의 행위의 끝장을 맞이한다/하지만 너는 숨쉬고 고요하며 또한 확실하게/ 강한 그 손속에 너의 의를 부탁하고 스스로 기뻐하며 마음 만족해 한다/ 잠시 동안 자유에 닿아 축복을 얻어, 그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자유의 성취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느니라.

(본회퍼/ 놀라운 변화 -고난-)

 

번뇌도 가난함도 거짓된 화폐에 지나지 않고/ 빛나는 다섯 군데의 상처가 하늘에 통하면/ 빛의 물결은 주님을 맞이하여 하늘로 운반하리라.

(미젤리/ 골고다)

 

고통이/ 얼마나 조용한 것인가를/ 호수를 본 사람은 알리라// 참으로 고통이 얼마나 크나큰 참음인가를 호수를 본 사람은 알리라.

(허영자/ 호수)

 

영혼이 가난한 자는/ 각고의 시간 땅에 묻는다/ 찬란한 미소로/ 손잡아 주는 주,/ 긴 그림자 하나 떨고 있다.

(엄창섭/ 기도 · 24)

 

모든 이의 가슴에 흐르는/ 좌절의 고통을 씻어주기 위하여/ 누군가 놓고 간 유한킴벌리 티슈를/ 보면서/ 야훼님.

(고정희/ 눈물 티슈)

 

고난보다/ 사람을/ 더욱 쓸만하게 하는/채찍은 없노라.

(임춘남/ 성경)

 

어둔 계곡에서 방황하는 무리나/ 눈을 뜨고도 잠만 자는 이는/ 채찍에 맞은 그분의 피로/ 아픔의 고통이 사라졌음을 알지 못한다.

(김지향/ 내 작은 입으로)

 

그 옛날 베들레헴의 착한 양치기들은/ 고통과 곤욕을 참고 견뎌낸 보람으로/ 한 밤 중 하늘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고/ 복된 소식을 접할 수 있었거늘// 하나, 우리에겐 너무너무/슬픈 일만이 닥쳐 오는구나/ 눈물이 마르도록 목이 쉰 기도를/ 외쳐도 또 외쳐도.

(박화목/ 다시 아기의 탄생을 찾아서)

 

고뇌는 마음을 흔들고,/ 비통은 정신을 죄인다/ 그리하여 망각의 잔을/ 마시고, 구원을 얻는다

(프루덴티우스/ 잠들기 전에)

 

예순 세 해/ 골목마다 보이는 걸음걸음/힘겹게 절룩이며 어깨 늘이신 고난/ 얼룩진 생애가 그대로 닫혔습니다.

(나영자/ 아버지 · 1)

 

너희가 모두 죄인이로되/ 고통을 모르는 자는 멀리 있고/ 고통을 아는 이는/ 내 둘레에 머무는구나/ 나는 피와 꿀을 따르어/ 너희의 목마름을 일일이 고치노니/ 가장 오래 애통하던 사람도/ 예와선 울음을 그치는도다.

(김남조/ 가시관과 보혈)

 

사람의 피가/ 검게 고뇌로 삭은 후/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깨칩니다.

(김남조/ 待臨)

 

내 손바닥엔/ 아직까지 못자국이 없네.// 우리들의 발바닥엔/ 이제껏 못자국이 없네.// 가시에 찔려/ 미간으로 흐르는 피/그런 피를 흘려본 일이 있는가.

(황금찬/ 고통)

 

욥이 잿더미에 앉아서/ 온 피부를 헌 부스럼을/ 기와조각으로 긁는 뜻은-/‥‥ 자학이 아니다/ 몸부림도 아니다/ 사탄의 손자국으로 생긴/ 더러운 피고름을/ 거룩하게 흘리는/하나의 창조다-

(오병수/ 古瓦 · III)

 

오너라/ 크낙한 파도/ 부딪쳐 흘러가면/ 너는 물거품/ 나는 전신 씻기워/ 검은 때 밀리워/ 거 기 섰고/ 오너라/ 또 오너라/ 날뛰는 파도/ 부딪쳐 깨어져/ 살갗 많아져도/ 물빛 같은/ 노래 같은/ 영혼 남으리.

(허영자/ 고통에게)

 

그대 심판하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빌라도여,/ 정의와 피가 엎질러질 것을/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그대의 등에 날아와 박힐/ 비난의 화살을 두려워하는가//땅의 군주여/ 내 갈 길은 바쁘고/ 오직 하나의 길이니

(서덕석/ 나 여기 섰으니)

 

올해도/ 주님을 죽어주실까/ 성(聖) 금요일,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고// 살아서/ 살은 채로/실날같은 긴 보혈/ 흘려주실까// 올해도 주님은 절망해 주실까/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이해 나를 버리시옵니까고/ 아아 더 훨씬 절망 이상이다/ 목숨을 번제하는 사랑으로서만이/ 오직 이길 수 있는/ 슬픔

(김남조/ 망부활)

 

새벽 닭이 울기 전/ 베드로,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 망치들고 못들고 가시관/ 쫓아오는 함성/ 떠오르는 약속 별똥처럼 쓰러지고/ 보이느니 목숨 뿐/오죽했던 기도인데 사랑인데/ 채 마르지 않은 이슬로 구르려나/ 발목 울리는 갈릴리 마을 종소리/ 침묵으로 걷어내고/ 오직, 흘려대는 땀 한사발// 꼬끼요 꼬끼요/ 닭 울어나고/ 눈물의 강을 건너는 베드로/ 못이야 망치야 가시관 강가에 버려두고/ 예수 음성 들으며 통곡의 노를 젖는다. / 아우성치는 로마병정/ 눈물찍는 가롯유다/ 그 건너 마음은 어디/ -그 건너 하늘은 어디-/ 강나루에 안개꽃 무성하다.

(김윤택/ 닭울음 소리)

 

나는 당신을 위하여/ 깊은 슬픔에 잠기면서도/ 등에 십자가를 졌습니다. // 그러나 그 슬픔의 날카로움도/ 부끄러움도 또한 패배감도/내 알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주여, 낙심하지 마십시오.//그 무거운 짐이 어떠한 것이든/ 용기를 내어 갈보리 산 위까지/ 십자가를 운반하여 주십시오.

(사보나롤라/ 수난절)

 

상하기 쉬운 가슴/ 다독이며 살아갑니다. /슬픔 먼저 오고/ 기쁨 늦게 오는 것도/ 견디기어련 시련입니다.

(한병운/ 시간)

 

옷은 제비뽑아 나눴으되/ 머리의 가시관이 남았더니라/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신포도와 초를 먹이고/ 창으로 찔러/ 피와 물이 흐를 때도/ 가시관이 내 살에 박혔더니라.//나를 무덤에 옮겨/ 향유 바르고/ 베를 감아뉘인 다음/ 돌문을 닫았을 때/ 빛 한 줄기가/가락지처럼 감싸는/ 가시관이 있었노라.// 가시마다 보혈이 맺혔었노라/ 그로부터 오늘까지/ 내 사랑은 가시 만을 쓰노라.// 너희가 모두 죄인이로되/ 고통을 모르는 자는 멀리 있고/고통을 아는 이는/ 내 둘레에 머무는구나/나는 피와 꿀을 따르어/ 너희의 목마름을 일일이 고치노니/ 가장 오래 애통하던 사람도/예 와선 울음을 그치는도다. // 육체는 피곤해도 영혼은 자유에 살며/ 구경온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으면서/ 스승 예수는 갈보리로 괴롭게 올라갔다. // 걸음마다 사냥개처럼 기뻐하는 우리의 조롱을 받으며/ 흐릿한 눈은 우리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 우리는 그의 부드러운 손을 몹시도 저주했다 - / 그리고 그것은 1,900년 전 옛날의 일이었다. // 하지만 1,900년 뒤에도 그 치욕은/ 아직 이어져 우리는 그 손실을 보상하지 못했으며/ 범해진 신앙이 그 손실을 아직도 그의 이름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아아, 어느 날에나 사랑의 기력이 강해질 것인가? / 말하라 아아 신이여, 말하라 아아 신이여, 언제까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괴롭힐 것인가!

(E.A. 로빈슨/ 갈보리)

 

겟세마네,/ 겟세마네의 밤은 깊고/ 사방이 잠든/ 고요속에/ 한 사람이 홀로 깨어/ 비느니/"·.·어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제자들 지쳐 잠들고/ 하늘의 말없음 속에/ 홀로/ 외로운 예수

(서덕석/ 겟세마네의 밤)

 

이 병원에서는/ 어두움에서 밝아지는 새벽을 보는 것 같이/ 사람의 한 생애가/ 그렇게 잠깐씩 어두웠다 밝았다 합니다/ ‥‥랍비시여,/ 이럴 때 제게 오십시오/ 그런 다음에도/ 계획하신 것 통째로 헐어놓진 마십시오/ 한 움큼될지 말지 한 목숨을/ 아끼우며 사는 법 일러주셨으니/이 세상 것 모두 소중한 연줄임을/혼자서 터득하렵니다/ 사순절입니다. 랍비시여/ 다시 태어나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가 새벽입니다.

(정두리/ 사순절입니다, 랍비시여-병원에서)

 

우리 주님이 여기서 상대한 것은 메두사거나/ 스틴파르의 학이거나 히드라거나 뱀이 아니었다. / 그 괴로움과 그 눈물 아버지 하나님이 주저하고, 정령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오직 혼자 여기 이르렀다. //‥‥번뇌도 가난함도 거짓된 화폐에 지나지 않고/빛나는 다섯 군데의 상처가 하늘에 통하면 빛의 물결은 주님을 맞이하여 하늘로 운반되리라.

(미젤리/ 골고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병졸과 민중의례가 그 거룩한 얼굴에/뻔뻔스럽게 모욕을 가하고 있다. / 죄없는 천사들조차 두려워하여/마주 보지 못하는 그 얼굴에./포도주가 취기를 재촉하듯이/ 능욕의 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그 증오는 고조된다. / 잔혹한 기쁨이 죄를 부추켜/ 그것은 최고조에 달한다. // 제단 앞의 희생자와도 같이/ 속세의 재판관 앞에 잔혹스러운/ 유대인들이 끌고 왔다. / 그 말없는 죄인은 누구였던가/ 교만한 로마 사람들도 알지 못했다. / 로마의 권세에 우쭐하여/ 죄없는 피로써 비 겁하게도/ 자신의 안전을 매수하려 하였다.

(만조니/ 수난)

 

무수한 말들과/ 고함소리 속에서 묻어나고/최루탄 가스에 쿨럭이면서/ 구로행 전철역이나/ 삼선동 골목길에서 옷깃을 스치며/ 석간신문의 1단짜리 기사로/ 우리와 함께 살고있구나/ 살아 가는구나.// 낮게 낮으막하게/흐린 하늘이 내려앉고/ 문 여닫는 소리에 신경쓰이는 날/ 알게 되리라/ 긴수염, 흐트러진 머리칼 날리며/ 쓸쓸한 웃음 머금은/ 그가 옆에 와 섰음을.

(서덕석/ 재의 수요일)

 

 

그날 밤/겟세마네 동산의 공기는 무거웠다.// 그 분이 내 안에서/ 깨어 고민하고 있다/겨울 나무처럼 쓸쓸하고/ 대지처럼 정직한/그는 슬픈 목소리로/ 내 잠을 깨웠지만/ 나는 조금씩 줄이면서/ 잠을 청했다. // 그날 밤 가야바의 뜰은 추웠다. // 그분이 홀로/ 뺨을 맞고서있다/ 겸허한 모습/ 그의 맑은 눈빛이/ 내 무의식을 깨웠고/ 나는 막막하게/ 하늘을 본다.

(류순화/ 성금요일 이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배반 당하고/ 다시 한 번 못박혀/ 높다란 첨탑 위에서/붉은 피 흘리는불쌍한 사람아,/ ‥‥기적도 사라지고 능력도 떠나/ 속절없이 부는 바람에/ 머리칼만 휘날리니/ 남은 자 하나 없구나.// 여윈 몸을 가렸던 한 벌 겉옷도/제비 뽑혀 빼앗기고/끝내 이름마저 싸구려로 팔려/ 길거리에서 발 끝에 채이는구나/ 전자 계산기를 두드리는/ 오늘의 '유다'는/ 몸 값에다 팁으로 이름값을 챙겨/두둑해진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회심의 미소를 흘리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채/ 잊혀져/주검조차 버려진/ 불쌍한 사람아.

(서덕석/ 십자가에 매달린 채 잊혀진 예수 아래서)

 

 

설 교 노 트

 

예수의 고난

벧전2:18-25

 

서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업으시고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의 일생은 고난으로 시작하여 고난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인생에 아름다운 고난과 수치스러운 고난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바로 아름다운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1. 애매히 받은 고난입니다.

애매한 고난이란 말은 받지 않아도 되는 고난이며 억울한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해당되지 아니하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이유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고난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고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참고 받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고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 신자들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으로 애매한 고난이라도 참고 나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욕을 돌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억울한 고난을 참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여 주실 것입니다.

 

2. 선행을 위해 받은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선을 위해서 받으신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죄로 인하여 받는 고난과 선행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 두가지가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받는 고난은 악행의 결과로 자기 자신으로 인한 고난이며 수치스럽고 욕된 고난입니다. 그러나 선행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은 선행의 결과로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받는 고난으로 매우 아름다웁고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자신의 안일과 유익과 행복을 추구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에 당하신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받으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고난인 것입니다.

 

3.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본문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 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나를 위해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받으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며 흠도 없으신 정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난은 우리 인간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받으신 고난이며,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한 고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예수님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신 사건은 우리들의 허물과 죄와 상한 상처를 싸매여 치료하시고 하늘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들도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본받아 그 고난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 감사한 가치가 있는 그리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고상하면서도 귀중한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공의로 갚아주시는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아니 나 자신을 위해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깊은 감사와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리고 헌신하며 나를 희생하면서 하나님께 진심에 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심

신8:2

 

서론

큰 길은 광야 같은 거친 땅을 잘 고르고 다듬어 정리하여 사람들이 왕래하기 편리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광야의 길이라고 지목하여 말했습니다. 왜 광야의 길이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험난한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1. 시내 광야는 험난한 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노정에서 지나간 광야가 여럿 있었습니다. 수르 광야, 신 광야, 바란 광야, 시내 광야 등인데 이것을 총망라하여 대표로 부르는 이름은 시내 광야입니다. 다시 한마디로 말하면 시내 광야는 험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험한 길, 시련의 길, 고난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까? 평탄한 길이 없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은 다 이 고난의 광야 길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3년간이나 아라비아에서 수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평탄한 길이 없어서 이 고난의 길인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2.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이 길을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를 40년간이나 걸었는데 가나안까지의 길이 그렇게 멀었던 것은 아닙니다. 곧바로 걸어간다면 출애굽한 홍해에서부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의 노정은 길게 잡아도 40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40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40년이나 걸려서 들어간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여러 가지로 불평하고 원망하여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여호와께 여러 가지로 감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다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목이 마르다고 하며 애굽에서 나오게 한 것을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낮추어서 보시고 그들을 시험하셔서 그 마음이 어떠하며 자신의 명령을 지키는지를 아시기 위해서 그들을 40년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3. 광야의 길을 걸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축복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이 너무도 쉽고 평탄하였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이었던 것은 선민들을 연단시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 살만한 백성을 만드시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탈락된 자들은 다 원망하다가 광야에서 죽었고 험한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 즉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단련된 자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협착한 길,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원망하지 입고 순종하는 길이 험한 길을 평탄하게 가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 게 고난을 주셔서 그 길이 어렵게 만드시는데 이것은 고난을 통하여 연단시키신 후에 구속하시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이고난의 길을 외면하지 말고 순종함으로 걸어갑시다.

 

 

십자가의 길

마16:21-28

 

서론

이 세상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일이 있고, 되어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심과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그런데 주님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닌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1.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헐벗고 고난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심지어는 생명까지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에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외롭고 쓸쓸하신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은 정말 주님을 위해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2. 진리를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정입니다. 정이 없는 세상은 삭막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정보다 더 귀한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춰주는 등불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인간의 정으로서 제자된 자가 스승의 고통을 참을 수가 없어서 말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를 따라갈 때 자신이 밭을 갈던 기구와 소 두겨리를 불살라서 제물로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뒤를 돌아다 보아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정에 끌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보다 고통스럽겠지만 진리를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쟁기를 들고 뒤돌아 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3.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아니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내가 나 아니면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나는 죽어야 하고 내 안에 주님께서 거하셔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무가치한 것을 버리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가치있는 것을 붙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바로 무가치한 것을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자들은 이 생명을 주님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부패된 인생으로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귀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고난의 길일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게 순종하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사53:6

 

서론

예수님을 미워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린 것을 보고 그것을 대속의 은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죄인으로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주께서는 형벌을 받으셨으나 어떤 죄가 있어서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셔서, 그리고 우리들에게 유익하도록 받으신 것입니다.

 

1. 인간은 범죄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범죄하여서 하나님을 떠나기는 쉽지만 인간 자신의 힘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무능한 존재이며 죄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는 무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 자기를 쾌락을 추구하여 죄를 범한 것입니다. 참으로 악한 모습입니다. 또 우리 인간들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겼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였으며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을 소유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약속된 분이십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고난과는 달라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가운데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로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전가시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내 죄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여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속죄의 제물이 되어 우리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셨습니다.

 

3.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혼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의 구속의 공로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믿는 자에게만 효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무겁고 많을지라도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 사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결론

우리는 범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범죄는 불의하기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그리스도께로 전가시키셨고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그 일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는 기꺼이 우리가 진 빚에 대한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고 완성시키셨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불의에서 의로움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고난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들이 영광을 돌려야 할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27:46

 

서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원수에게 잡혀서 심문을 여러 번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이 말의 의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아버지라고 성부 하나님을 불렀으나 지금 십자가상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사적인 관계에서 공적인 관계로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순간에 사실상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지시고 계심으로 버림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뿐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속사의 초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성자 예수께서 고초를 당하시고 계셨지만 그 고난에서 끌어 올리시지 않으시고 묵묵히 구속사업을 완수하도록 버려두신 것입니다.

 

2.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예수님의 이 고난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형벌의 일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난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셔서 잘 감당하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고 반복하여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신다는 절대적인 신뢰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 권한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충성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모습입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내보내는데 그 뜻에 순종하며 충성하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음의 자리에 남을 대신하여 나가서 죽으라고 하겠습니까? 결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서로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더 큰 사랑으로 용납하신 것입니다.

 

3.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서 버림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독감을 느끼게 합니다. 자기를 돌보시고 살리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신데 그런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또한 절망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아버지가 되시므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지해야 할 곳은 아버지이신 하나님 뿐이시므로 예수님은 더욱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불순종하므로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 그런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우리가 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을 대신 받게 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죄악에서 건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 뿐이십니다.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는 다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항상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속하시려고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주님께 우리는 감사드려야 하며 예수님의 구원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여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의 종 예수

사53:4-6

 

서론

본문에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속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당하실 일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오셔서 참으로 인간으로 견디기 어려운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고난으로 시작된 그런 인생으로 예수님을 고난의 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고난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참지 못할 어려운 시련이며 절대자를 찾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육체적 고난을 먼저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후 피와 땀과 물과 진액까지 다 쏟으면서 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또 다음에 심령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심령의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 아프고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습니다. 삼년간이나 데리고 다니시던 제자에게 배반당하시고 제자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졌으며 가장 사랑하시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그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으므로 영광으로 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고 예수님의 정신은 온 세계에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등장하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제자들도 많았고 군중들도 병고침을 받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서 따라다녔습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서 행하시는 기사와 이적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붙잡혀가시니 다 예수님을 외면하였고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인간들만 예수님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하나님께 절규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다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고난을 홀로 감당해야 하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은 버림받지만 만민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돌보시지 않을지라도 며칠 후면 다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요, 화목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왕이 되거나 부유하게 잘 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만민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으나 그 죽음은 이별이 아니라 참된 만남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헐리게 된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서 오셨습니다. 육체적, 심적 고통을 많이 당하시고 인간과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게 되었으며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멸망당할 것을 막아주시고 영생의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감사하면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영접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

사53:1-12

 

서론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20년에 메시아의 고난에 관해 예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받으신 고난은 합당한 것이었습니까?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죄없으신 분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나 행동으로 볼 때에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죄를 지은 후에 자신이 잘못하여 받는 벌이라던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떤 후회도 없고 어떤 대가도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신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하므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하였습니다.

 

2. 오해를 받으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여 죽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전인류, 즉 장로와 제사장, 그리고 일반 대중과 심지어는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까지 예수님이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누구에게 오해를 받으면 그 오해를 푸느라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시고 계시는 오해를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 오해로 인하여 죽음까지 당하시게 되었는 데도 말입니다.

 

3. 저항하지 않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털하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한 마디의 저항도 없이 그저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무죄라면 그것을 변증하실 수 있을터인데도 그저 묵묵히 그 고난을 다 당하신 것입니다.

 

4. 우리 죄를 대속하신 고난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으며 형벌을 받아야 될 존재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주께서 대신 지신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받은 고난은 더 귀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바로 내 자신을 대신하는 고난으로 이해할 때 참으로 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주께서 찔림을 당하시고 상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하는 생을 살았습니까? 우리는 무슨 노력을 하였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받는 고난

딤후3:12

 

서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실 때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게될 고난과 핍박에 대해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본문의 저자인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일을 본받아 디모데에게 그가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부딪히게 될 어려움들에 대하여 경고하여 주었습니다.

신자들이 당하는 핍박은 무엇입니까?

 

1. 우선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것을 말하며 산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면서 날마다 그와 동행합니다.

 

2. 어떤 핍박을 받습니까?

우선 마음속에서 하는 핍박을 들 수 있습니다. 마음속의 증오는 다른 모든 종류의 핍박의 근원이 되며 그 정도는 저마다 다르더라도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이지만 경건한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이러한 증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하는 핍박은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통한 핍박은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악한 말을 가한다고 할지라도 별로 해가 될 것이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악한 말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핍박입니다.

악인들은 신사들을 주위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위협하여 금지시키기도 하며, 감옥에 가두거나 억울한 누명을 씌워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직접 나타나는 행동으로 하는 핍박인 것입니다.

 

3. 왜 핍박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지 않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면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직접 고난을 체험하신 분입니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고난 속에 이어진 생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던 참신자들이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순교를 당한 자, 돌에 맞은 자, 옥에 갇힌 자 등 무수한 신자들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핍박이 필요한데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더 돈독히 연단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음으로써 은혜를 보존하게 퇴고, 우리는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는 이유 중의 또 하나는 악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여서 신자들을 더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위선이 드러날까봐 겁내어 신자를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신자들이 다 어려운 고난을 당하지는 않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고난은 다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받는다고 다 참 신자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경건하게 살고자 하여서 핍박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참 모습을,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신자가 받는 고난을 기도하며 이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와 고난

시38:1-22

 

서론

우리는 보통 우리에게 고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이 세상에 두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이 성도된 자들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고난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1. 위로와 기쁨의 원천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의롭고 선한 자들이 고난받는 일이 있는데 그 고난 끝에는 평안과 기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은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있는 기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과 평안은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기쁨은 성도가 올바로 환난을 당한 후에 임하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후에야 구속을 완성하시게 되었고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 생명까지 희생되는 자리에서도 기쁨으로 감사의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2. 고난은 동정심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은 다 고난의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은 다 순교하였고 그후 종교사를 보더라도 신실한 일꾼들은 하나같이 다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난을 받은 자들은 타인을 향한 동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이끄는 힘 있는 영적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신이 영적으로 풍부한 삶을 살게 되고 다른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동정심은 고난을 통하여 얻어지는 유익인 것입니다.

 

3. 고난은 소망의 원천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 보면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되고 구원의 확실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주 안에서 가질 수 있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체험하므로 앞으로 닥쳐올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경험 한 적이없기 때문이고,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 것이며 죽음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체험한 성도들은 죽음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쁨으로 맞이합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고난은 무조건 힘든 것이라고 여기며 될 수 있으면 고난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 신자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유익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 게 고난을 주시지만 이기지 못할 고난은 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서 몇 가지 유익을 얻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며, 남을 향한 구령의 동정심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지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얻는 유익에 대해서 감사하며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기쁨으로 당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심

요19:17

 

서론

유대 총독 빌라도는 될 수 있으면 양심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의 주장으로 주님께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형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메고 사형장으로 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사형수이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사형이 집행되는 장소로 가셨습니다.

 

1 . 해골 즉, 골고다에 가셨습니다.

사형이 집행된 장소는 작은 산으로 골고다 또는 갈보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뜻은 둘 다 '해골'입니다. 이곳은 본래부터 사형장으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뜻을 찾을 수 있는데 그곳은 사형장이었으므로 자연히 해골이 많이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언덕의 모양이 위는 미끈하고 중간에 구멍이 두 개 있어서 마치 해골과 비슷한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런 이름으로 불려진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이곳에 가신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사형을 받게 되셨으니 참으로 무섭고 악한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골고다의 위치, 즉 사형장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 위치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루살렘 성을 중심으로 북서쪽인데 현재는 성 안에 있는 곳으로 그 위에 성문교회라는 기념 교회가 서 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헤레나가 A. D. 336년에 세웠다고 하며 이곳은 카톨릭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현재 예루살렘 성 북서쪽으로 400m떨어져 있고 다메섹 문 가까이 감람산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왼편으로 해골같이 된 언덕이 있는데 황금 갈보리라고도 부르며 예레미야 동굴이 있습니다. 이곳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3.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았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되 가장 잔인하고 모욕적인 처형을 하기 위하여 살인한 강도 두 사람을 같이 못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못박은 자들은 로마 관인들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도록 주장한 것은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족에게 배반을 당하신 것이니 이것은 마음에 받는 또 하나의 고난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우는 사람은 중죄인으로서 양 손과 양 발에 못을 박습니다. 그 고통은 굉장한 것이며 금방 죽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까지 쓰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도 한 2∼3일은 생명이 붙어있기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피와 물이 다 쏟아진 후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육체적 고난을 다 당하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운명하신 후에도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현대의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형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은 악과 어두움이 득세하는 시대입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도 역시 그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동족인 예수님을 못 박히게 한 유대인은 그 예수로 인하여 후에 구원을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당하신 혹독한 형벌을 생각할 때마다 길은 참회를 해야 하며 주님의 사역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께서 지신 십자가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우리의 멸망도 주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

마27:32-34

 

서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살이 찢기는 고통을 견디어 내셔야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로마군인들이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시고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무엇이며 왜 주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쓸개 탄 포도주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쓸개를 탄 포도주(몰약을 탄 포도주)는 마취제로서 사형의 고통을 제거해 주기 위해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형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은 인류의 죄를 감당하시는 주님이기에 그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시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인류의 죄값을 위해 고통 속에서 죽음으로 대속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값은 사하여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인류의 구원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여기에 있으므로 그분이 그 고통을 감당하고자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인류 중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 고통을 견디어 내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속 사역을 완성하셔야 하셨기에 고통을 자청하셨던 것입니다. 이 어찌 놀라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 상 위에서 고통 당하시며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2. 복음의 순수성을 보여 줍니다.

사55:1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복음을 젖과포도주로 비유하였습니다. 또한 성 만찬에서도 포도주를 예수께서 흘리시는 피, 즉 보혈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주님께서 귀한 생명을 주시는 복음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주에다 쓸개를 타서 쓴 포도주를 만들어준 데에는, 그 속에 숨겨진 놀라운 사건이 있는데 신32:32-33에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동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사탄)이 "선악과를 먹어도 괜찮다. "는 말엔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고 불신을 심어 주는 독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게 말씀(성경)자체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순수한 복음을 세상의 것과 혼합하는 신학 사상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까? 믿음이 세상과 타협된 상태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경은 교회가 거룩하여 세상과 구별되이 그 순수성을 잃지 않고 지켜 나가야 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 교회를 세워야만 가능합니다.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고 교회의 각각의 일원들에게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될 때에 교회는 생명력을 지니게 됩니다.

 

결론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참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시면서 그것을 잠시라도 잊게 해 줄 수 있는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한 것으로 예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긍휼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자세는 말씀 위에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교회를 변질시키지 않고 그 순수성과 거룩함을 계속 유지시켜 나갈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요16:31-32

 

서론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이기신 승리이며, 또한 우리를 담대케 하시기 위하여 이기신 승리입니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같은 승리를 주시기 위한 승리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기신 것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을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예수께서 로마의 속국 상태 아래 놓여 있는 조국을 해방시킬 자로 알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기대하며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그들은 실망하였고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저주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것은 하나님의 지혜 였습니다(고전1:18-25). 이 방법으로 하나님은 어떤 조직이나 어떠한 체제나, 사상이나, 힘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골2:15에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을 소멸하심으로써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주님께서는 동일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2.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이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2:13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의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나니(롬3:23)"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죄의 결과는 사망이고(롬6:23) 영원한 죽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히9:27).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위하여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먼저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축복을 위한 수단으로 율법을 주셨고, 죄를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주셨으며, 생명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주셨습니다. 갈3:24에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오히려 이 율법에 얽매여서 그 아래에 갇힌 바 되고 또 율법에 매인 바 되어 버림으로써 율법이 인간의 생명과 참된 자유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것으로 바꿔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으며, 율법을 온전히 이루시는 참된 승리자가 되심으로서 인간을 대적하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거스르는 모든 얽어매는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토의 십자가는 바로 율법에 얽매인 인간을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며, 패배했던 인간에게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사와 권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국가와 권력의 정사와 권세가 아니라, 사탄의 정사와 권세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떤 인간에 의하여 형성된 정부나 권력구조에 대항하여 싸우신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악의 세력에 대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승리하신 것입니다(엡6:10-13).

사도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이 씨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악의 세력, 사탄의 세력, 죄의 권세를 이기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 안에서 진리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자가 되어 믿음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곧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해야 할 것인데,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피의 종교

히9:11-22

 

서론

교회력에 의하여 이 주일을 종려주일(thePalm Sunday)이라고 합니다. 이 종려주일은 "주여!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는 신학적인 뜻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종려주일 이후 부활주일까지 한 주간을 수난주간(the Passion Week) 혹은 거룩한 주간(theHoly Week), 위대한 주간(the Great Week)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 주간에 인류 역사상 단 한번 뿐인 가장 위대한 인류 속죄의 대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완성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복음일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피가 우리에게 무엇을 해 줍니까?

 

1.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줍니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영원한 속죄는 영원한 속량, 영원한 해방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피로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고 우리 죄인을 사심으로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6:20에 "너희는 너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피는 허물로 죽어 있는(엡2:1-5) 우리 인간을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속량 받을 수 없는 우리의 온갖 죄악을 십자가의 피로써 영원히 속죄하여 주신 그 크신 사랑을 이 고난 주간을 통하여 체험하여야 하겠습니다.

 

2.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했습니다. 여기 "죽은 행실"은 헬라어 '아포 네크론 엘곤'으로 '믿지 않던 때에 온갖 더러운 행실'을 의미하며 "깨끗케 하다"는 헬라어'카다리조'로 '순결하게 한다' 즉 '표백시킨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 육체만 저주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영원한 저주까지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죽은 행실의 결과는 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이와 같이 영원한 사망을 가져오는 온갖 더러운 죄의 죽은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요일 1:7) "고 했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이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라(벧전1:18)"고 했습니다.

 

3.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를 가지고 제사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직접 섬기게 해주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마27:51). 이것은 이 세 가지 짐승의 피로 제사장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섬기던 하나님을 모든 사람이 직접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로 바꾸어 놓으신 산 표징인 것입니다.

여기 "섬기게"라는 헬라어 '에이스 토 라트류에인'은 '그 섬김을 위하여', '그 예배를 향하여' 라는 말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예배하고 섬기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에이스'가 앞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영원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는 우리가 결코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가 예배하며 섬기는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가 담력을 얻었나니(히10:19) "라고 했습니다.

 

결론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다시 한 번 뜨겁게 만나는 감동과 체험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여 주십니다.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 보좌앞에 직접 나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주십니다.

 

 

예루살헴으로 올라가는 길

막10:32-45

 

서론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수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하여서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길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1.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16:2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다음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제사장,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니 그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시는 앞길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단을 좇는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에도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영생의 길이 있는가 하면 사단이 원하는 멸망의 길입니다.

롬12:2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이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마16:21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 하였고 본문 10:33-34에서도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은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원수들에게 잡히시어 온갖 고난과 능욕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도 법정에서의 천대와 가시 면류관과 채찍에 맞을 것을 아셨던 것이지만 이 길을 걸으셨습니다.

벧전4:13-14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도 욕을 당했으니 나도 욕을 당하겠네 하는 각오와 심정으로 남은 여생을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이 길은 십자가에서 죽는 길입니다.

십자가 처형이란 원래 원시 야만시대의 유물로서 지중해 동쪽 아마도 앗수르에서 시작되어 애굽, 시리아 등지에서 사용되고 그후 로마가 이를 받아들여 반역자, 살인 강도 등의 극악한 죄인을 처단하는 사용법으로 삼았던 것같습니다. 그 종류도 여러 가지로 X형의 안드레 십자가, T형의 안토니 십자가, 그리고 十형의 라틴 십자가 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아마도 세번째의 +형인 듯합니다. 금요일 아침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등에 지시고 예루살렘 부녀자들의 흐느끼는 호곡 소리를 등 뒤로 들으시며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당도하신 예수님은 이윽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물과 피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길만이 인류를 죄에서 대속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막10:45에 예수님 자신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듯이 그는 실로 십자가의 상에서 인류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4. 이 길은 부활과 영광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본문 막10:34 하반절에 보면 "저는 3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분명히 부활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원수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서 최대 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께서는 부활로서 최상의 승리와 영광을 누리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2:9-11에서 예수님의 승리와 영광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승리를 바라보며 죽음 뒤에 숨은 생명, 죄 뒤에 숨은 의, 무지 뒤에 숨은 지혜, 고난 뒤에 숨은 영광, 음부 뒤에 숨은 낙원을 믿는 까닭에 우리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지고 주님의 자취를 따라 예루살렘 길을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수난 주간에 일들

마27:45-54

 

서론

유언이란 순간적으로 생각하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자기 의식이나 자체 의식에서 벗어나 무의식의 의식으로 말하게 되므로 가장 진실하게 말을 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유언은 그 사람의 생의 목표이고 그 사람의 가장 귀한 진실이기도 합니다.

요19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이 나옵니다. "다 이루었다 "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씀입니까?

이는 승전가요, 성공을 노래한 환호이기도 합니다. 무슨 슬픔이나 미련이나 유감이 없는 말씀이며 만족감과 승리감에 찬 노래입니다.

또한 2천 년전 이 땅에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소망과 기적을 사모하는 자에게 기적과 병고침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요, 사망의 권세를 깨뜨려 생명의 부활로 영생의 소망을 확증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2천 년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날의 전후의 사건을 상고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주 일

주일엔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셨는데 이때에 군중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 나뭇가지를 들고 나와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그들 심정은 천심이 깃들어 있지만 4,5일도 못되어 그들은 악한 선지자의 선동을 받아 천심을 상실해 버리고 자기들의 구주를 정죄하고 살해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호산나:지금 구원해 주소서 라는 뜻

다윗의 자손이란: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불러내는 말

 

2. 월요일

월요일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가셨으나 그곳엔 마치 시장과 같은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순수해야 될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하여 오직 인간의 탐욕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채찍을 들어 장사하는 자들을 밖으로 쫓아내시며 "내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어 버렸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3. 화요일

화요일엔 예수님께서 문둥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는 예수님 머리위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바쳐 예수님을 위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일임을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4. 수요일

수요일엔 예수님 께서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일어 나셔서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닦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생님이시며 스스로 섬기는 종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의 기쁨과 겸손의 표본을 보여 교훈하신 날입니다.

 

5. 목요일

목요일엔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상에 제자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따라 주시고 메어 주시며 나를 기념하라고 분부하신 날입니다. 그것이 교회 성찬 예식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6. 금요일

금요일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무리가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아 고통을 당하게 한 후 허리에 창을 찔러 물과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위대한 목적을 가지시고 그 아픔을 십자가에서 겪으며 "다 이루었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운명하신 날입니다.

 

7. 토요일

토요일엔 예수님께서 지상 33년을 마치시고 무덤에서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새벽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결론

이 수난절을 맞아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주님의 고난과 부활의 소망에 넘쳐 영적 삶의 풍성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하랴

마27:21-26

 

서론

"내가 어떻게 하랴 "는 예수를 재판하던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물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고난 주간에 이 말씀을 상고하신 까닭은 이와 같은 고민이 빌라도 한 사람의 고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현대인이 겪는 고민이기 때문입니다.

 

1. "십자가"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잘못해서 고통을 겪는다면 이는 분명히 징계이지 십자가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어디까지나 선택적인 것이어서 자기 자신이 자청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외면할 수도 있으며 짊어질 수도 있는 양자 택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이 십자가는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나 빌라도처럼 선택의 기로에 서서 갈등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이 스스로 자청하여 십자가를 지기를 바라십니다.

 

2. 아무에게도 묻지 말고 십자가를 집시다.

"내가 어떻게 하랴" 하고 묻는 것은 그 자체가 심리적으로 십 자가를 벗어보려고 하는 의도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에 아내 사라에게나 종들에게 묻고 나서 행동에 옮긴 것은 아니었습니다(창22). 또 사도 바울이 회심한 후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에는 사람들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정의의 십자가를 바로 지려고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말고 말없이 묵묵히 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벧세메스 길로 가던 두 마리 암소처럼(삼상6:12) 말입니다.

눅9:23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자신이 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십자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알고 집시다.

만일 누가 무엇을 바라면서 십자가를 지려고 한다면 질 수도 없거니와 설령 진다고 해도그것은 위선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정의의 편에 서서 십자가를 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명예와 재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갖고서도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고난의 길이며 외로운 길입니다.

무엇인가 얻으려 한다면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인 자기를 버려야 된다는 것은 진리인 것입니다(빌3:8).

 

4. 십자가의 길이 최상의 선택입니다.

빌라도는 당장 잃어버리는 것만 생각하고 두려워하여 잃어버림으로써 다시 얻는 참 좋은 것을 영원히 빼앗긴다고 하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최상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버리고, 자기 안정의 진지를 구축하려는 어리석은 함정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에서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보기에 좋고, 잘 될 것 같으나 불신앙의 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선택자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절대적으로 다릅니다. 또한 그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생명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결론

이제 고난 주간에 우리들은, 십자가의 무거운 짐을 자신의 책임으로 짊어지고 가신 주님에게서 십자가를 선택하는 삶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고통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이 아니라 십자가를 벗고 가는 고통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 Imitation of Christs에서 "십자가를끌지 말고 바싹 지고 가라. 그리하면 필경 그 십자가가 너를 져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십자가를 최상의 선택으로 알고 아무에게도 묻지 말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지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27:45-46

 

서론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생애는 갈보리에 이르도록 고난의 발자국들이었으나 특히 '가상칠언'은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의 심적 고통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 속에 내포된 진리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1. 이 말씀은 버림받은 고난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제 6시로부터 제 9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시간은 가장 밝은 시간이어야 하나 해는 빛을 잃고 땅은 진동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어두움은 암8:8의 예언의 성취도 되겠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가장 아픈 순간이었습니다. 시편22편은 그리스도 죽음의 계획이라고 하는데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1절)",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16절) "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아픔이었습니까?

인생이 가장 아프고 괴로울 때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돌아서서 외면할 때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를 받지 못하시니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예수님의 절규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외면을 당하지 않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2. 이 부르짖음은 속죄를 위한 대속의 고난임을 증거해 줍니다

예수님은 티끌만한 죄도 없으십니다. 마27:24에 빌라도는 그 죄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인류의 죄값으로 그리스도는 대속을 치르신 것입니다. 인류가 받아야 할 영원한 사망을 대신 십자가의 고난으로 치루시는 것입니다.

히10:10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 최선을 다해 갚으려 해도 갚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감사만을 올릴 뿐인 것입니다.

 

3. 이 음성은 구원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진 것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첫사람 아담을 통하여 너희가 망하게 되었지만 둘째 아담을 통하여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로마서 5장에 말씀했고 히9:15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 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공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제부터 이루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이전에 십자가를 바라다보며 믿었던 사랑이나 십자가 후에 그를 바라보며 믿었던 사랑이나 십자가 위에 그를 바라보며 믿는 사람들의 구원을 완성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생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요, 영생을 주셨기에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그 결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여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짐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장벽이 없어졌다는 뜻이며 의식이 부너지고 직접적인 은사로 복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된 모든 은사와 속죄, 구원과 축복을 받을길이 열린 것임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눅23:13-25

 

서론

예수님은 구원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습니다. 이후로 한 주간을 고난 주간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빌라도 총독의 재판정에서 되어진 내용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면서도 무리들의 아우성에 몰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소리지른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란 말은 깊이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1. 이 소리는 의리를 저버린 소리입니다.

소리를 지른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역사하실 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심지어는 고침을 받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날에는 은혜를 깨닫고 그를 왕으로 모시겠다고 소리 지르던 사람들이요(요6:15), 며칠 전만해도 예수님이 타고 들어오시는 나귀 위에 겉옷을 죄고 길바닥에까지 옷을 펴고 종려 나뭇가지를 꺾어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눅19:37-38)고 환호하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지난날에 입었던 은혜도 축복도 저버리고 오늘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지조도 없고 의리도 없는 상황주의 자들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앙,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님만을 위하는 그 신앙, 바로 살아보겠다는 그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세상의 윤리나 도덕 이 땅에 떨어져버린 세상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의리를 지키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일은 나의 일이요, 우리들의 일인데 거기에서 외면하고 관망만 한다는 것은 의리가 없는 일입니다. 함께 울고 웃고 함께 헌신하며 함께 봉사하며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는 뜨거운 진실된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들의 소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으로 알았다면 어떻게 그런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 34절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하셨을 때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 관원들까지도 "당신이 참된 하나님이시거든 내려 와서 증거를 보여달라"고 조롱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는 죄" 이보다 더 큰 죄는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많이 보고도 믿지 못하는 군중들은 어리석게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오셨고 그 권능으로 역사하였으며 또 그 권능으로 심판까지도 하실 분인 것을 알지 못해서 그처럼 죄를 범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역사하신다고 믿습니까? 두려워하고 경외하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은 전능자시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습니까?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붙드시는 하나님으로 믿습니까? 이후에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왕으로 믿습니까?

그때에 뛰어나가 기쁨으로 영접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은 오늘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실의에 빠져 우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시며 나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시고 못하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철저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세상에서 담대히 살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절대주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나의 구주로 모시고 늘 살아나갈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 독

성 경 활 용

1. 홀로 있는 고독

(1) 야곱이 홀로 기도함

(창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 예레미야가 홀로 증거함

(렘15: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홰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3) 바울이 홀로 있음

(딤후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2. 고독한 자를 도움

(1) 하나님의 돌보심

(시68:6)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내사 형통케 하시니느라

(2) 사람은 고독한 자를 도움

(잠31:8) 너는 벙어리와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관련원어풀이

1. dyjiy] 야히-드

(1) 단지, 오직, 독생자.

(창22:2, 12)

(2) 외로운, 곤고한.

(시25:16, 시68:7)

(3) 유일한 사람.

(시22:21, 시35:17)

 

2. dd:B; 바-다-드

(1) 분리, 분리적으로.

(레13:46)

(2) 외롭게, 홀로.

(신32:12, 사27:10)

 

3. l/kv] 쉐콜-

(1) 빼앗음, 잃게 함.

(사47:8-9)

(2) 결핍, 핍절.

(시35:12)

 

4. !mev; 솨멤-

(1) 놀라다, 경악하다, 놀라게 되다.

(왕상11:8, 대하7:21, 욥18:20, 렘4:

9, 겔3:15)

(2) 황폐되다, 폐허가 되다.

(겔33:28)

(3) 황폐시키다.

(겔36:3)

(4) 황폐된 곳, 파멸.

(사61:4, 단9:18)

(5) 당황케 되다, 실망케 되다.

(시143:4, 사59:16)

(6) 자신을 황폐케 하다. 파괴하다.

(전7:16)

 

5. ak;l]je 헤- 레- 카

매우 비참한.

(시10:8, 14)

 

6. monovw 모노-

홀로 남기다, 홀로 남겨지다, 버리다.

(딤전5:5)

설교예화자료

폐소 공포증과 사랑

 

· 첫번째 이야기

고 사무엘 슈메이커 박사는 '우주적 폐소공포증'이란 표현을 쓴 일이 있습니다. 폐소공포증이란 폐쇄된 장소에서 느끼는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감을 말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질환에 걸린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느니 차라리 여러 층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어디 갇혀 있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 두번째 이야기

정신병 치료학자로서 환자를 치료해 온 레오나드 카머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만이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며 그렇지 않다면 그는 죽고 말 것이다. 전화 한통으로 우울에 빠진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간호는 돈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은 그렇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말디의 고독

 

1908년의 어느 날 저녁, 한 수척하고 슬픈 얼굴을 한 남자가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제임스 해밀턴(James Hamilton)박사의 사무실로 찾아왔습니다. 박사는 그 방문객의 우울한 모습에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디 아프시오? "

"그래요, 박사님. 대단한 병에 걸렸습니다. "

"무슨 병인데요? "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공포때문에 질렸습니다. 사는 것이 지긋지긋해졌습니다. 어디서나 행복과 즐거움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박사님이 도와주시지 못한다면 저는 죽어버릴 것입니다."

"그런 것은 대단한 병이 아니오. 당신의 생활로부터 한번 벗어나는 것이 좋겠소. 당신에겐 웃음이 필요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이 필요하단 말이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

"오늘밤 서커스에 가셔서 그리말디(Grima-ldi)라는 광대를 보시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사람입니다. 그가 당신을 치료해 줄 것이오."

슬픔의 경련이 그 불쌍한 사람의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박사님, 농담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리말디요 ! "

그리말디는 어디서도 자신의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독이라는 무덤

 

자아 상실한 미칠 듯한 고독감에 많은 현대인들이 병들어 가는 시대에 전화 박스 안에서 권총 자살을 한 젊은 아버지에 관한 매우 슬픈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리라는 사람이 시카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기자에게 그가 자신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봉투를 보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자와 경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젊은 사람은 머리에 총알을 맞고 전화 박스 안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의 주머니에서 어린애가 그린 색이 바래고 낡은 그림을 찾아냈습니다. 거기에는 "이것을 내 코트 주머니에 꼭 넣어 주시오. 이것과 함께 묻히고 싶소."라고 써 있고 그 그림은 어린애다운 필체로 서명되어 있었습니다. 그 어린 여자 아이는 다섯 달 전에 화재로 죽은 금발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제임스 리는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딸의 장례식에 와서 딸이 만족스러운 의식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의 딸 셜리의 어머니가 딸 아이가 두 살 때 죽었으므로 장례식에 참석할 가족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딸을 잃은 리는 슬픔에 몸둘 바를 모르고 외로움과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자초한 것입니다.

 

 

고독의 원인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자 현대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카뮈는 그의 작품 「페스트」에서 하나님도 얼고 희망도 없는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모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인간의 고독에 초점을 맞추어 페스트가 만연된 도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비참한 인간의 고독을 그리고 있습니다. 카뮈는 인간의 고독의 원초는 서로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극도의 고독 속에서 결국 아무도 이웃의 도움을 바랄 수 없이 각자가 혼자서 근심을 해야만 했었다."고 말하면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서도 서로의 절실한 감정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인간의 뼈저린 고독, 그 슬픈 외로움은 자신의 감정과 언어가 상대방 그 누구에게도 통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고독감

 

구르트라크만은 "V.S. 뉴스 앤드 월드 레포트"의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유스럽고 부유한 서방 국가에서도, 전체주의이면서 가난한 동양 국가에서도 반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젊은이의 반항의 목적은 다릅니다. 그러나 반항하는 동기의 공통적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독감입니다. 이 외로움은 완전히 수립된 외적 형식의 압도적인 힘이나 집단 사회의 상태에는 아랑곳없습니다. 미국과 소련, 독일과 폴란드, 이탈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영국과 스페인 등의 나라와 같이 아주 잘못된 사회 조직에서 폭발한 것은 엄밀히 말하면 도시의 위기입니다. 이런 위기는 터무니없으며 추상적인 예술로 기대되어 왔습니다. 고독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하여 억압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

 

 

고행을 자처한 고독한 삶

 

아그네스 드 로시에르(Agnes de Rookier)는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의 외동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용모와 고운 마음씨로 주위 사골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1403년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그녀는 모든 재산을 혼자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은 즉시 그 지역에 사는 모든 멋쟁이 젊은이들에게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그 당시의 말로 '은둔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 작은 독방을 지어서 그곳에서 그녀의 남은 생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10월 5일, 드디어 불과 몇 평방 미터에 불과한 독방이 성 오퍼륜 교회 내에 완성되었습니다. 아그네스는 그녀의 마지막 거처로 들어갔습니다.

파리의 주교는 목사님들을 대동하고 그 모인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노틀담의 대포 소리와 함께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그 독방의 입구로 다가가서 성수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가엾은 소녀가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자, 석수들에게 그 입구를 막으라고 명하였습니다. 입구는 완전히 막혀버리고, 작은 구멍만이 하나 남겨졌습니다. 이 구멍을 통해서 아그네스는 그 교회의 예배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들여보내 주는 음식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이 살아있는 무덤에 들어갔을 때는 불과 18세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8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렇듯 고행을 자처한 고독한 삶이 그녀에게 무엇을 남겨 주었을까요?

 

 

절대 고독

 

릴케는 하늘과 대지를 오르내리는 고독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노래한 일이 있습니다.

"고독은 비와 같은 것 해질녘을 향하여 바다에서 오른다. 고독은 아주 먼 들판에서 하늘에 올라 언제나 거기에 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처음으로 거리 위에 내린다. "

그러나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앙상한 고독을 보고, 하루가 저무는 석양을 보고, 떠나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며 외로움에 젖는 감정은 한낱 감상적인 고독이며 오히려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고독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고독 가운데는 결코 취미나 감상으로만 느낄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고독이 있으니 바로 '절대 고독'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병상에서 신음하는 환자나 옥에 갇힌 수인들의 부자유를 보고 고독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환자 스스로가 불치의 병임을 알고 있을 때, 그리고 이미 사형이 선고된 수인이 되었을 때는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독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인생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의 희망이 상실된 절망, 거기에 절대고독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 고독은 오직 나밖에 없다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대신할 수 없는 감정입니다. 인간의 이 처절한 고독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대지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는 바로 주인공이 야간 비행을 하다가 항로를 상실한다는 절망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상의 항로를 벗어나 마침내 멀리 우주 공간에 표류하는 하나의 유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가족도 친지도, 지상의 어느 것과도 차단된 허무의 공간에서 외로운 별처럼 고립무원의 단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지상에서 벗어난 자유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을 벗어나 철저한 단독자로서의 자유란 처절한 고독의 자유입니다. 그는 이 제 영원히 지구로 귀환할 수 없는 자유의 절망에서 그래도 아침이면 따뜻한 커피를 주고받던 지상의 식탁을 회상하며 점점 멀리 사라지는 것입니다.

고독의 철학자 니체가 한 말 중 "나의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갈가마귀만 앉아 있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인생의 앙상한 나뭇가지란 모든 욕망이나 꿈의 화려한 잎들이 떨어진 실존의 인생, 바로 고독의 인생인 것입니다.

이러한 고독의 실존을 확인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결단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고독은 패배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고 재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구나‥‥‥‥ 위의 말은 31년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어느 수도승의 장례식을 치른 후 동료 수도승이 고백한 말입니다.

돌아가신 분은 엘리아 수사입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원래 침묵과 고독을 유지하며 철저하게 공동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고 싶어하는 수도승에게는 공동체와 떨어진 곳에서 혼자 조용히 기도하면서 수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배려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도승을 '은수자' 라고 부릅니다.

엘리아 수사는 다른 수도승보다 고독을 더 사랑하였기에 원장의 허락을 받아 본 수도원에서 조금 떨어진 산중턱에 혼자 집을 짓고 더 깊은 침묵과 고독을 즐기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는 이 지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하나님의 사람' 이었습니다.

 

 

현대인의 고독

 

오늘의 현대인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분리 된 땅에서만 살아가는 추방당한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안식도, 안정도, 뿌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월리암 포크너는「8월의 빛」 속에서 쫓겨다니는 혼혈아 죠크리스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마치 어떤 도시도 그의 것이 아니며, 어떤 거리나 담장 한뼘의 대지도 그의 가정이 아닌 것처럼 불안정한 점이 있다. "

이것은 오늘날 조각난 세계 속의 소외된 인간들의 적절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 셸리는 현대 도시의 고독한 군상과 그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옥은 런던과 꼭 닮은 도시이다. 인구 많고 연기나는 도시 ‥‥‥ (Peter Bell The Third)."

루이스 멈포드가 「도시의 문화」의 한 장인(지옥의 개요)에서 말했듯이 지옥에서는 공동사회란 있을 수 없고, 사려깊은 우정과 개인 관계도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 쟝 폴 샤르트르는 단막극 「출구는 없다」에서 유일한 남성 갸르생을 통해 "지옥이란 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어트는 「칵테일 파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지옥이란 자신이다. 지옥은 고독한 것이며, 타인들은 단순히 영상에 불과하다. 그 곳에서 도망칠 곳도, 도망쳐 나을 곳도 없다. 인간은 항시 고독하다. "

인간 존재의 비극은 바로 진정한 생존을 잃고 낯선 땅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프카는 「성(城)」이란 소설에서 "이곳에서는 누구도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 나타난 대로 오늘날 인간은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소외의 아픔과 인간의 비극적 통곡을 돌이켜 우리의 부정 행위와 죄악을 인식하고 깊이 반성하고 각자 갱생하는 날이 올 때 멈춰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동반자

 

겨울밤은 깊습니다. 기나긴 겨울밤은 고독하고 춥고, 배고픔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누가 겨울을 만들었을까요? 차라리 그들에겐 더운 여름이 더 나을텐데요. 새벽에, 온세상이 얼어붙은 즈음 리어카를 끌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50대의 아저씨, 그 즈음 독서실에서 졸린 눈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수험생들, 가족들 벌어먹이기 위해 달리는 택시운전사, 산다는 것이 고통으로만 느껴질 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씁니다. 결코 그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없음을 또한 이야기하려 합니다.

만일 그것이 영원이라면 분명 그것은 조물주의 잘못입니다. 평생 가난에 허덕이다 죽어서까지 묻힐 한평의 땅도 할애받지 못한 가엾은 노인, 어떤 논리로도 설명하기 힘든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가면 따스한 봄이 오듯, 어차피 산다는 것도 지나고 보면 웃을 수 있는 여유와 죽고 싶으리만큼 서글픈 순간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은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하나뿐인 나의 존재를 거부하기보다는 인정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죽는 순간까지 성실하자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길이 보이지 않듯 우리 모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그네처럼 살고 있지만, 그래도 쉴 간이역은 있을 것입니다.

 

 

김현승 시인의 삶

 

공수래, 공수거 인간의 삶이란 것이 어차피 혼자라고 했던가?

플라타너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너는 네게 드리워진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길에 올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제,

 

너는 나와 함께 그길을 걸었다.

 

김현승 시인은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절대고독의 나그네로 살다 갔습니다. 조선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며, 나머지 시간을 자신의 사색과 시의 창작을 위해 살며, 침묵 속에서도 시를 통해 확실한 인생의 발자취를 남기면서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룩한 자세를 흐트러 뜨리지 않는 위대한 예술가이자, 나그네였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사회는 너무도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에 사로잡혀 자신의 실체를 잃어버린 채 허깨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질이 전부인 양 인간의 본성을 망각하고 각자의 안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삶의 자세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영원히 인간의 마음속에 교훈이 될 수 있는 삶의 본보기를 배워야 합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는 말에서처럼,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이지만 결코 외롭지 않는 삶의 의미있는 자취를 쌓아야 하겠습니다.

누구든 겉으로 과시하려는 삭막한 현실 사회에서 진실로 나그네임을 주저않고 묵묵히 자신과 타인을 위해 목소리 죽이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록·시·묘사

 

고립은 가장 나쁠 수 있는 충고자이다.

(우나무노/ 문명은 공공심이다)

 

인간의 고독감은, 생의 공포일 뿐이다.

(E. 오닐/ 조소받은 레저러스)

 

늙었다는 가장 확실한 징후는 고독이다.

(L.M. 올컷)

 

정신에 있어서의 고독은 신체에 있어서의 절제와 같다.

(L.C. 보브나르그)

 

고독은 지혜의 최선의 유모다.

(M.슈티르너/ 유일자와 그 소유)

 

고독은 악마의 놀이터이다

(V. 나보코프/ 희미한 불꽃)

 

산다는 것은 깊은 고독 속에 있는 것이다.

(F. 헤벨/ 시집)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잘못 알고 마치 그렇게 고독하지 않은 듯이 행동한다. 그것이 전부다.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다 자란 영혼의 보모는 고독이다.

(로우얼/ 콜룸부스)

 

고독하게 살라. 이는 말하기는 쉽고 실제로 해보면 극히 어렵다.

(F. 뤼케르트)

 

사회가 인간의 성격에 대하여 유익한 것처럼 고독은 상상력에 대하여 유익한 것이다.

(J.R. 로얼/ 나의 장서 중에서)

 

인간은 사회 속에서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것은 다만 고독에 있어서 뿐이다.

(J.W. 괴테)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란 고독하고 다만 혼자서 사는 자다.

(H. 입센/ 민중의 적)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이 없는 군중 속을 헤치고 갈 때 만큼 심하게 고독을 느낄 때는 없다.

(J.W. 괴테/ 이탈리아 기행)

 

고독은 산에 있지 않고, 거리에 있다. 한 사람의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인간의 사이에 있는 것이다.

(미키 키요시/ 인생론)

 

고독이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죽어버린 것들이 사는 무덤이다.

(H. 레니에)

 

고독-방문하기엔 좋은 장소지만, 체재하기엔 쓸쓸한 장소다.

(G. B. 쇼)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이다. 어떤 심한 공포도 모두 함께 있다면 견딜 수 있지만 고독은 죽음과 같다.

(C.V. 게오르규/ 제2의 찬스)

 

마음이란 때로 삶의 장터에서 들려오는 고독한 목소리다.

(A. J. 헤셸)

 

자신의 순결을 구하려는 자에게 이 세상의 소란한 거짓말과 기만적인 눈초리로부터 스스로 몸을 빼는 것 말고 무슨 다른 수가 있겠는가? 군중과 대중 의견에 접근하는 것은 창의성의 죽음을 뜻한다.

(A. J. 헤셸)

 

사랑할 것은 고독이다 고독만큼 교제하기 쉬운 친구는 없다.

(H.D. 소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헌데 아직 고독이 부족하다 생각하고 더 한층 고독을 알게 하기 위해 반려를 준 것이다.

(p. 발레리)

 

고귀한 사상을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p. 시드니)

 

이상적인 인간은 최대의 침묵과 고독 속에서 최강의 활동력을 찾아내는 인물이며, 최강의 활동력 속에서 사막의 침묵과 고독을 찾아내는 인물이다.

(비베카난다/ 칼마요가)

 

남편이라는 것은 결혼에 있어서는 고독한 것이며, 아버지는 노년에 있어서 고독하며, 친구는 우정에 있어서 고독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자기가 고른 사람으로부터 선택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A. 피/ 雷同派)

 

당신이 만약 고독을 무서워한다면 결혼해서는 안된다.

(A. 체홉)

 

지나치게 오랜 기간 동안 홀로 지내는 사람은 끝내는 병이 나는 법이다.

(J.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

 

한 사람의 독일 시민으로서 나치즘의 원리에 아무리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가 고독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과 독일 국가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는 것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한다.

(E.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고독 그것만이 자기 모독에서 자기를 가장 잘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이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외로움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은 그와 비례해서 정신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깊은 고독을 모른다.

(김형석/ 인생은 반드시 외로운 것만은 아니다)

 

나는 집에 세 개의 의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요, 둘째 것은 우정을, 셋째 것은 교제를 위한 것이다.

(H. 도로우/ 윌든 숲속의 생활)

 

자기 혼자만의 권리- 가장 포괄적인 권리이며 문명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권리이다.

(L.D. 브랜다이스)

 

하느님과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독이란 해가 된다. 고독은 영혼의 역량을 강하게 하지만 또한 활동대상을 그에게서 모조리 빼앗아 간다. 역량을 받은 사람은 그 힘을 동포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F. 샤토브리앙/ 르네)

 

젊은이들의 고독은 한낱 감상주의로 끝나는데 비해서 철학자들의 고독은 승화되고 심화하여 孤高의 세계에 도달한다.

(안병욱/ 행복의 미학)

 

현대인들은 고독을 점점 고통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생기고 있다. 그리고 고독을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된 지식인이 될 요건들을 상실해 가고 있다.

(송건호/ 독서와 인생)

 

내면에의 탐험을 하자면 으레 거기에 따르는 기술이 필요하며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야 한다. 그 손의 이름은 고독이기도 하고 절망이기도 하다. 그 손은 어떤 때는 따뜻하기도 하나 얼음장처럼 차가울 때가 더 많다.

(김광섭/ 거울 속의 별빛)

 

어느 정도의 고독을 애호함은 편안한 정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또 진실한 행복을 위해서도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C. 힐티)

 

고독을 사랑하는 성격은 확실히 건전치 못하다. 하기는 우리가 사람과 너무나 접촉하는 결과로서 오히려 고통을 느끼는 까닭에 아마 오늘날에는 그런 성격도 관대하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나 고독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람을 제멋대로 하기 쉽고, 세상과 떨어지게 하고 선을 행함에 있어서 게으르게 한다.

(C. 힐티)

 

사람들은 고독을 견디어 낼 수 없기에 자아를 상실하는 길을 택한다.

(E.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신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잡아먹는 사람이다.

(베이컨/ 수필집)

 

세속 속에 살고, 세속의 의견에 좇아서 생활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필독한 삶에 있어서 자기 자신만의 의견에 따라 생활하는 것도 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군중과 더불어지내며, 유쾌하게 고독의 독립을 지키는 것은 다만 위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R.W. 에머슨)

 

고독 이것은 인생이 참아 오고 배운 말이다. 이것은 거기 우리들의 넋이 걸어가고 마음속깊은 신앙 이외의 일체가 전복된 정적이다.

(S. 서순)

 

우리들은 혼자서 세상 속을 걷고 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 같은 친구들은 꿈이며 우화이다.

(R.W. 에머슨/ 수필집)

 

인간의 영혼은 고독하며 이 고독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종교의 선구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오는 강렬한 감정만이 이 고독을 이겨낼 수 있을 뿐이다. 어떠한 인간의 감정도 이 종교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지 않을 때에는 유해한 것이며,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무용한 것이다.

(B. 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대화)

 

들뜬 마음의 강도-서로 미칠 정도가 되는 강도가 사람들의 사랑의 증거가 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서로 사랑하기 전에 얼마나 고독했던가의 정도를 입증할 뿐이다.

(E. 프롬/ 사랑의 기술)

 

고독, 그것은 영혼의 창조자이다.

(E. 디킨슨)

 

그렇지만/ 삼복에도 손발이 시린/ 고독한 내 영혼은/ 어느 추녀 아래 신을 벗지요.

(유안진/ 저녁 기도)

 

나를 지탱하는 것은 한 가닥 고독인 줄 알았는데// 허나 고독도 허무로 돌아갈 땐/ 한 순간 우수수 무너지던 상념의 편린들/ 어디를 가나 그것뿐이었네. 아무것도 없었네.

(김영옥/ 방황)

 

빌딩 옥상에서 내려다보면/그것은/고독의 무언도(無言島)/ 별,

(김정우/ 산 일번지)

 

상처로 점철된 양심의 고뇌를 안고/ 은빛 찬란한 고독의 사막으로/ 날아가는 여심아-

(유선곤/ 편지)

 

꽃으로 피려거든/ 이 바람을 견딜 것이라 한다/ 겨울을 지나며/ 고독은 더욱 견고해지고/ 뿌리로, 알몸으로/ 바람 속에 서는 것 배운다.

(허영자/ 꽃샘바람)

 

고독은 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다로부터 저녁 노을을 향해 떠오릅니다/ 멀고 먼 쓸쓸한 들로부터/ 언제나 그것을 지닌 하늘로 갑니다/ 그리고 그 하늘로부터 먼저 도시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사이 진 시간을 비로 내립니다/ 아침이 와, 모든 길거리가 방향을 바꿀 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제각기 실망하여 슬픔에 잠길 때,/서로 미워하는 사람과 사람이/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잘 수밖에 없을 때에,// 그때 고독은 강줄기와 함께 흘러갑니다‥‥

(릴케/ 고독)

 

추억도/고독도/삶의 땅에 떨어진 한 알의 진주

(예종숙/ 숨결)

 

그대 나의 거룩한 고독이여/ 그대는 풍만하고 깨끗하고 광대하여,/ 흡사 눈 뜨고 있는 뜰과 같다. / 그대 나의 거룩한 고독이여/ 그 앞에서 가지가지의 소망이 기다리고 있는/황금의 문을 닫아 두도록 하라.

(릴케/ 시 8편-그대 나의 거룩한 고독이여)

 

거기서/ 나는/ 옷을 벗는다// 모든 황혼이 다시는/ 나를 물들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끝나면서/ 나의 처음까지를 알게 된다.

(김현승/ 고독의 끝)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무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가을의 기도)

 

촛농처럼 녹아내려/사르라질 목숨의 터에 // 고독은 안으로 접자/ 허무로나 키우자.

(김민정/ 그리움)

 

천호대교 마파람을/ 베어문 등불 너머// 세월은 물살을 타고/ 인간사는 너울지고/ 어지럼 감기는 통로엔/ 고독보다 깊은 고요.

(김민정/ 서울 · II)

 

자네는 모두를 깨우기 위해 죽은 것이다. 자네는 몇 천 몇 만의 사람들을 위해/오직 한 톨의 고독하고 선량한 흙덩이가 되어 온 땅을 적시기 위해 죽은 것이다.

(나오와라드 폼파이붕/ 크라삼 빙)

 

타마링드의 그늘 아래서/ 나는 내 고독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 보았다/ 정처 없이 바람과같다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마하파트라/ 6월)

 

그리움 내리지 말고/ 사랑도 풀어 내리지 말고/ 산같은 고독이야 여기 있는 것이니

(송희철/ 지리산에서 · 85)

 

이 산중에는/ 돌덩이 같이 무거운 고독과 시린 바람

(송희철/ 지리산에서 · 35)

 

눈 내리는 새벽에/ 홀로 산길 걷는다// 비로소 여는 세계/ 돌아보면 자취 없고// 선구자 시린 고독이/ 저렇던가 싶어라.

(장순하/ 눈길에서 - '길'시리즈 · 14)

 

이 산 중에는/ 돌덩이 같이 무거운 고독과/시린 바람/ 골짜구니를 긁어내리는/ 겨울 물소리뿐이지만

(송희철/ 지리산에서 · 35)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P. 엘뤼아르/ 자유)

 

구름에 갇혀 불 탈 때/ 파도에 갇혀 불 탈 때/‥‥ 물새가 불 탈 때/ 노을에 대한 추측은얼마 동안의 고독이었다.

(이추림/ 노을)

 

햇빛과 바람의 조각조각을/뜨거운 열망으로 건지는/ 신비로운 바다/ 그대와 나 사이//지나간 세월 동안/ 비린내 감도는/ 내 곁에 다가와/ 슬픔이나/ 눈물이나/ 고독에 패인 가슴을 아물리지만

(조구자/ 바다)

 

찌르는 듯 하늘을 향해/ 최후의 아픔을 견디며/ 어둠 속에서 홀로 우뚝 선/ 성자의 모습/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그런 후/ 그는 두려움을 버렸다/ 부정적인 평가에도 귀를 열고/처음으로 흔들리지 않는/ 홀로가 되었다.

(이성선/ 단독자)

 

외로움이란/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서로 등을 기대고 울고 있는 것이다.

(이형기/ 그대)

 

고독은 욕되지 않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묻는다. // 들어보라./ 저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

(유치환/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비둘기가 그 짝의 이름을 외우다/ 쓰러져간/ 고독한 강가에// 늙은 눈먼 청동말 하나/ 먼 노을을 향해 떨면서 울음 운다.

(박두진/ 고독의 강)

 

내/ 하나의 생존자로 태어나서 여기 누워 있나니/ 한 간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의 파동도 있어/ 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단한 고기와도 같다.

(김광섭/ 고독)

 

눈을 뜨고 현실로 호송되면/ 언제나 독방에서 만나는 것은/ 씁쓸한 고독의 찬 얼굴/외면하고 말하지 않는 내외처럼/ 다정한 사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돌아누워/ 눈을 감는다

(박남수/ 독방)

 

간단한 차림으로/ 계단을 밟고 산책길에 나선다/‥‥ 오늘 같은 밤에는/고독이 어울려서좋다/ 오늘 같은 밤에는/ 어제도 내일도 보이지 않아 좋다.

(장수철/ 오늘 같은 밤에는)

 

훨훨 나는 저 꾀꼬리/암수 같이 노니는데/ 외롭다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가리.

(유리왕/ 황조가)

 

죽음이라는 보루를 멀리서 내려다보며 한 오라기의 나뭇잎 섬유질과도 같이 고독을 타게 될 때, 그때 그 고독을 잡고 고독과 함께 있게 되면 고독은 한없이 살뜰한 친구이며 격려와 가르침을 주는 선배이며 결전장으로 달려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 주는 것이다.

(손소희/ 내 영혼의 갈증)

 

고독은 정 직하다/ 고독은 신을 만들지 않고,/ 고독은 무한의 누룩으로/부풀지 않는다//고독은 자유다. / 고독은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 고독은 군중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김현승/ 고독한 이유)

 

나는 대체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 내가 누구이든지 간에/ 아아 하나님, 당신께서 나를 아시나이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이제 나 다신 너 없이 살기를 원치 않으마/ 진실로 모든 잘못은/ 너를 돌려놓고 살려던 데서 빚어졌거니/ 네 이름은 고독,/ 내 오랜 날의 뉘우침이/ 네 앞에 와서 머무노니

(김남조/ 고독)

 

껍질을 다 벗길 수도 없이/단단하게 마른/횐얼굴.//‥‥‥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에도/ 다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악기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김현승/ 견고한 고독)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노천명/ 6월의 언덕)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길든 건 다섯 살 때부터다.

(서정주/ 다섯 살 때)

 

나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책을 덮게 한/ 최후의 지혜여,/ 인간은 고독하다!// ‥‥너의 이름은/ 가장 겸손한 최후의 수습자.

(김현승/ 인간은 고독하다)

 

신도 없는 한 세상/ 믿음도 떠나,/ 내 고독을 순금처럼 지니고 살아 왔기에/ 흙 속에 묻힌 뒤에도 그 뒤에도/ 내 고독은 또한 순금처럼 썩지 않으련가.

(김현승/ 고독의 순금)

 

여기 한 고독한 생애가 있다/‥‥ 그에게는 세상의 위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가 내어 놓을 수 있는 이력서는 단지 한 몸뿐.

(작자미상/ 한 고독한 생애)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김광선/ 시인)

 

구원의 요람을 찾아 헤매는 꿈의 외로움이여/ ‥‥ 영점의 고독은 찢어진 가슴에 낙엽처럼 쌓인다.

(함윤수/ 수선화)

 

 

설 교 노 트

 

고독한 생활

왕상17:1-24

 

서론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인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인 도합 팔백오십인과 대결하여 여호와의 제단에 불이 내리게해서 엘리야를 영웅적인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등장시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4).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큰 은혜와 축복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외롭고 고적한 말라가는 그릿 시냇가에 숨게 하시는 섭리가 있어야 빛나는 영광의 날도 오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릿 시냇가에 숨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한적하고 외로운 곳에 있는 것입니다.

이곳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고독한 장소입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곳이며 하나님과만 교제하는 곳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는 이런 남모르게 고독한 숨겨지는 생활이 반드시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햇빛과 같이 빛나게 하시는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그릿 시냇가를 찾지 않으면 우리를 이렇게 고독한 장소에 데려다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이 생활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2.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쓰시고 우리 성도들에게 축복하시기 전에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만큼 더 높여 주시고 복을 담아주십니다.

엘리야는 그릿 시냇가에서 바싹 말라 들어가는 시냇물을 마시면서 기약도 없이 욕심많은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를 얻어먹고 있을 때, 자기의 비참하고 가련하고 무능하고 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꼼짝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갈 바를 알려 주십니다. 먼저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릿 시냇가의 물이 다 말라도 하나님께서는 또 더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나 인간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대신에 세상의 다른 것을 더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들을 다 빼앗아 버리시고 홀로 남겨두실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도록 엘리야를 보내신 하나님은 시냇물이 다 마르자 가난한 사렙다 과부의 집으로 가게 하셔서 그곳에서 또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독함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아지고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나 지혜나 건강까지도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나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나빠서 세상의 모든 것으로 따돌림을 받아 외롭고 실망될 때 이것이 낮아지는 생활이며, 연단의 기회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고독

마26:36-46

 

서론

우리 모두가 날마다 순간마다 절감하는 '외로움', '고독'이라는 게 있습니다. 침범할 수 없는 삶의 독립 ! 바로 그것은 모든 사람을 궁극적으로 외롭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고독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 고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한한 고독 때문에 하루하루를 불안과 자기 저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이 고독의 소재와 정체는 무엇입니까?

 

1. 아담과 하와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였습니다. '하나'였을 때에 '고독'이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나였던 아담과 하와 사이에 처음부터 가로 놓여 있었던 또 다른 신비가 있었음을 말합니다.

비록 하와를 통해 아담이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하나됨을 찬양했으면서도, 그들은 결국 따로따로의 존재였습니다. 서로를 보고,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그들은 서로 속의 침범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을 때도 따로따로 따 먹었던 것입니다. 하나였던 아담과 하와였지만 그 하나 속에는 건널 수 없는 독립된 삶, 서로 침범할 수 없는 분리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여자의 창조는 아담을 보필했지만 홀로인 아담에게 또 다른 홀로인 하와가 첨가된 것 뿐입니다. 여기에 깊은 고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인간의 고독의 정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2. 어느 때 고독을 느끼게 됩니까?

우리가 고독을 더 절감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게 된다든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고독하게 됩니다. 분리는 소외를 낳고 소외는 고독을 낳습니다. 그러나 고독은 분리나 이별에서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수많은 군중 속에 있을 때도 그 속에서 갑자기 나 혼자뿐이라는 궁극적인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심한 고독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뼈저리는 고독의 순간은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 "라는 삶의 숙연한 현실과 운명 앞에오는 순간입니다. 죽음에서 도피할 사람도, 죽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 우리 모두는 외로이 서 있는 고독자들입니다.

그러나 더 큰 고독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졌을 때입니다.

 

3. 예수의 고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의 고독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헤어져야 하는, 다가올 내일의 죽음을 앞둔 데서 오는, 그리고 제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배신에서 오는 고독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의 고독 ! 그것은 모든 인간 고독 중의 고독이었습니다. 바로 이 모습에서 인간 고독의 가장 비참한 순간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고독한 몸과 마음을 자연 속에 맡기려고 합니다. 또 세상의 쾌락에 빠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고독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독을 해결하신 분이 계신데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고독의 집약이었던 예수의 고독이 거룩한 고독으로 승화되었습니다.

 

결론

거룩한 고독 ! 그것은 기도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말없이 나의 영혼을 내어놓는 바로 그 순간 ! 비로소 그 순간에 나의 모든 고독은 새로운 해결을 받습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겟세마네의 이 기도가 십자가의 고독에서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이어진 거룩한 고독의 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내어 놓는 기도만이 고독을 극복하는 해결인 것입니다.

 

 

고독한 신앙인

욥2:7-10

 

서론

이 세상에서 신앙인의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기독교 신자는 이리무리들 가운데 있는 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1 . 고독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많은 재물, 자녀, 그리고 건강마저 떠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친한 친구들도 사랑했던 아내마저도 등을 돌렸습니다.

고독은 삶의 대열에서 이탈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독을 싫어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과 같이 있긴 싶어하고, 삶의 대열에서도 활기차게 전진하기를 원합니다. 특히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도 강합니다.

고독이라는 것은 슬픈 것이며, 외로운 것이며 절망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독을 떠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산다는 것 그 자체가 이 고독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2. 고독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욥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물로 칭찬하셨으며 경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으나 사탄의 질투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의 생활은 순전하고 정진하며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결한 삶을 산 많은신앙인은 고독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 가족으로부터 배척받았고, 노아는 하나님 명령으로 방주를 짓다가 사람들에게 배척당했습니다. 엘리야는 불의한 시대에 참 하나님을 증거하려다가 숨어 지내게 되었으니 다 고독한 생활을 한 분들입니다.

욥은 경건하게 살았으므로 사탄이 시기하여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자 고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고독하고 외로워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3. 고독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고독을 통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를 보면 유익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을 바로 알았습니다. 욥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인생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는 고독한 실존임을 깨달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떠나갈 때, 하나님만은 같이 하심을 깨달았습니다. 물질도, 인간도, 자신의 건강도 의지하거나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참된 가치는 이 세상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

욥은 이 고독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과 축복을 받았으며 인생의 가치와 의의를 찾았습니다.

우리도 욥과 같이 바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고독의 길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고독한 생활

사51:1-3, 고후6:1-10

 

서론

인생은 이 세상에 올 때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의 품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어느 누구도 대담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구약과 신약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인 아브라함과 신약의 위대한 인물인 바울의 고독한 생활을 통해서 고들이 얻은 승리의 삶을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이 위대한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혼자였을 때 하나님께서 사랑의 섭리로서 크신 계획을 가지고 그를 무조건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창조주이시며 높은 권위를 가진 실제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최대의 경배를 드리고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과 지시를 들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이 선하심을 갖고 복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큰 고난은 자기의 간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떠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독감이 그를 억압하였을 것입니다. 또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였을 때 아내인 사라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만 아파하며 아들을 잃어야 한다는 고독감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에도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은 어떤 생애를 살았습니까?

바울은 최고의 가문, 최고의 지식, 세상의 명예,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 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후 그 이전의 것은 다 버리고 오로지 혼자의 몸이 됩니다.

빌립보서 3장 8-9절에 보면 "모든 것을 해고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홀로 되었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그의 고독은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해결된 것입니다.

 

3. 그들이 받은 축복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향과 친척과 모든 것을 버린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하는 축복을 받았고, 물질의 축복을 받으며 그의 자손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영적인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며 신약 시대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순교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결론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혈혈 단신이 되어야 합니다. 즉 죄된 세상과 결별하고 경건한 생활, 고독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 어떠한 고난도 기쁨과 감사로 감수해야 하며 우리의 시간, 재능, 생명까지도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함과 믿음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건강, 물질, 후손의 축복을 자자손손 대대로 주십니다. 영원한 천국인 신천 신지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에 여러분의 이름이 아름답게 빛날 것이며 축복의 면류관, 영화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홀로 있어서

단10:8-9

 

서론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홀로 태어나며 떠날 때 역시 홀로 떠나는 존재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은 고독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원래 고독은 창조 때부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의 사람들은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단체에 소속되어 서로가 서로를 매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분별한 사회일수록 홀로 있어서 주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1. 홀로 있을 때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오를 때 아무도 함께 오르지 못하게 하여 다른 인간의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이처럼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절실하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벽에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기도하시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위대함을 보게 되고 숨겨진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홀로 있을 때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고독이 변하여 축복이 될 것입니다.

 

2. 흘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갈라진 후 하나님을 만났고 야곱은 양복강가에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홀로 있을 때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여호수아도 홀로 있을 때 여리고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습니다. 엘리야도 호렙산 굴에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홀로 있었지만 결코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오히려 많은 축복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홀로 있을 때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 절망적이라면 홀로 실존하는 인간은 희망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홀로 있는 위치가 어디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와서 우상을 섬기라는 명령을 받고도 결코 굴하지 않고 홀로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었습니다. 그때 요나는 홀로 있었습니다. 홀로 있어도 은총의 역사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가운데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기의 모습은 홀로 있을 때, 곧 고독할 때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은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 더 솔직해지고 더욱 자아를 발견하게 되며 연약한 스스로를 돌아보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러러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병상에서, 절망 가운데서, 혹은 배신을 당하였을 때, 누명을 썼을 때 고독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 백

성 경 활 용

1. 고백의 정의

(1) 시인함

(마10: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레5:5)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범과하였노라고 자백하고

(2) 인정함

(행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2. 고백의 필요성

(1) 구원을 위해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2) 영적 연합의 증거를 위해

(요일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3. 고백의 내용

(1) 그리스도의 성육신

(요일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2) 그리스도의 주되심

(빌2:ll)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4. 고백한 자들

(1) 배에 있던 제자들

(마14:33) 배에 있은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2) 베드로의 고백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3) 나다나엘의 고백

(요1:49)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4) 도마의 고백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5) 마르다의 고백

(요11:27)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6) 바울의 고백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5. 고백에 장애가 되는 것

(1)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

(요7:13)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를 말하는 자가 없더라

(2) 출회를 당할까봐

(요12:42)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6. 위선적 고백

(1) 입으로만 하는 고백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의 고백

(요일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7. 고백을 부인하면 주님도 부인하심

(1) 아버지 앞에서 부인하심

(마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눅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관련원어풀이

1. oJmologevw 호몰로게오-

원래는 "동의하다, 같은 일을 말하다"의 뜻이다.

(1) 승인하다, 인정하다, 거절하지 않다, 약속하다, 확언하다.

(마14. 7, 행7:17)

(2) 부인하지 않다, 고백하다, 선포하다, 인정하다.

(행24:14, 히11:13)

(3) 고백하다, 공언하다, 표명하다.

(마7:23, 요9:22)

(4) 찬양하다, 칭송하다.

(히13:15)

 

2. oJmologiva 호몰로기아

고백

(히3:1, 고후9:13)

설교예화자료

나의 고백

 

나의 고백은 온갖 미사 여구보다는 눈물속의 절실한 깨달음으로 드려지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께 순종하겠다는 고백 이 눈물 속의 깨달음으로 드려질 때 가장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 속의 고백에서 가슴속의 경건으로 나의 소망이 가득찰 때 나는 당신께 진실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는 형용사의 고백에서 투박한 진실의 고백으로 변화되길 기대합니다. 나의 믿음은 온갖 표현들이 갖추인 모든 감사의 고백을 지킬 수 있는 확신이게 하소서.

 

 

니코스의 고백

 

「희랍의 죠르바」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그리이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들이최근에 이르러 크리스찬 독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비롯한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영혼과 육체의 치열한 갈등과 투쟁을 다루면서 궁극적인 구원의 갈망을 테마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찬은 갈등과 투쟁 속에서 겁을 먹고 움츠러들거나 체념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 자신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끊임없이 의로운 투쟁을 계속하며 그 가열찬 투쟁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 땅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이 밟아나가야 하는 모든 단계들을 밟아나갔다. 그의 고통이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처럼 가장 깊은 뜻에서 인간적인, 예수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뇌하고 싸워나간다. 예수 또한 그러하다 바로 그 점이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

오직 예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평화를 그가 간과한 사실은 아쉽지만 예수를 따라 이 땅에서의 투쟁에 담대하게 맞서야 함을 일깨운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이지만 오직 변함이 없는 것이 있다면 우리 주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의 찬송 작시자 심프슨 박사는 캐나다계 미국인입니다. 그는 1865년에 캐나다 토론토(Toronto)의 녹스(Knox) 대학을 졸업하고 동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1874년에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 시내 여러 장로 교회에서 목회를 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기후가 따뜻한 곳을 찾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뉴욕 시가의 여러 집단 가운데에서 일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당시 일류급 교회였던 뉴욕 교회의 초청을 수락했었습니다. 그런데 뉴욕 빈민가에 임시 거류하고 있던 이태리인들의 집단촌에 가서 복음을 전할 기회가 생겨 무려 100여 명이나 되는 결신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뉴욕 교회에 그대로 안주하여 목회를 할 것인가? 아니면 소외당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펼쳐야 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서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는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기도 가운데 그는 자신의 병약했던 육체의 회복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 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었으며, 기적적인 고침이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을 스치는 찬송시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절절한 고백의 말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지나고 변할지라도 그는 불변하시다. 허물많고 의심많은 인간을 용서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 그분은 한결같으신 분이구나."

 

 

한 음악가의 고백

 

크리스찬 록 음악가 발레리 바리노프는 2년 반에 걸친 소련 노동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습니다.

바리노프와 그의 동료 음악가는 소련 국경을 불법으로 넘으려했다는 죄목으로 1984년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노동 수용소 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형기를 채우며 바리노프는 여러 번 심장병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 그는 "나의 육신은 약하지만 나는 지극히 만족한 상태에 있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음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바리노프는 수용소 내에서 복음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6개월 동안 독방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수용소의 많은 사람들이 저의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 온 것이 제겐 오히려 잘된 일인치도 모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석방된 바리노프는 소련 당국에 서방이민 신청을 하고 허락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소련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민을 가고자 한다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기 전, 그는 예수님의 재림을 내용으로 하는 「나팔소리」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였습니다.

 

 

어록·시·묘사

 

고백된 과오는 그 사람의 새로운 미덕이 된다.

(J.S. 노울즈/ 사랑의 추적)

 

나는 미 지의 사실을 '모른다' 라고 고백함을 수치로 삼지 않는다.

(M.T. 키케로)

 

용기 있는 고백은 힐책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모욕의 총구를 비키게 한다

(몽테뉴/ 수상록)

 

고백은 회개의 첫 단계이다.

(E. 게이튼/ 돈 키호테의 즐거운 주석)

 

과오에 대한고백은 무죄 다음 가는 일이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금언집)

 

사랑을 한 후의 최대의 행복은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A. 지드/ 일기)

 

고백이 과오를 치료하는 약이 되소서.

(키케로/ 옥타비우스에게)

 

가장 현명 한 것은, 자기를 자기의 고백하는 상대로 삼는 일이다.

(스탕달/ 연애론)

 

정열은 고백에 의하여 고양되며, 또한 고백에 의하여 진정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무엇을 고백하며 무엇을 숨겨 두느냐 하는 그 중용과 절도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J. 괴 테)

 

마음속에 있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허영을 위해서, 지껄이고 싶어서, 남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 비밀을 교환하고 싶어서이다.

(F. 라 로슈푸코/ 도덕적 반성)

 

 

인간이 갖는 최고의 순간은 그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면서 그의 생애의 모든 죄악을 고백할 때인 것이다.

(O. 와일드/ 옥중기)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남들과 자기 자신에게 감추는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잘못을 완전히 깨닫고 그것들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진실한 사람이다.

(라 로슈푸코/ 격언집)

 

고백된 죄의 반은 용서된다.

(영국 격언)

 

마음에 오점이 남는 것보다는 얼굴에 수치스러움이 떠오르는 쪽이 낫다.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용기의 다음 가는 훌륭한 일은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하는 일이다.

(C.A. 엘베시우스)

 

솔직한 고백은 마음을 즐겁게 한다.

(영국 격언)

 

어제의 잘못을 고백하면 너는 오늘 현명한 것을 표시하는 것이 된다.

(영국 격언)

 

참회냐 고백이냐 말없는 긍지냐/ 주름 많은 얼굴에 보조개를 팔 제/ 사색의 냉각점에 불을 지피며/아, 석양이 물결 위에 낙조를 끓인다.

(김철/ 생을 마칠 때)

 

나 있음 그대로 팔벌려 안아 주심,/ 이제/ 죽음 저 너머서도/당신 포옹의 따스함/나는 느낄 수 있어/ 향기로, 향기로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허영자/ 부활절 새벽)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리도록 너를 내 가슴에 맡겨 주지 않으므로/ 나는 사랑의 소재를 잃고/아아 하루가 천 년 같이 너를 기다려 배회하노라.

(문성원/ 아가페 고백)

 

한없는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나는 당신의 찬가를 별로 부르지 않습니다. / 당신으로부터작시와 작곡의 재능을 받았는데/ 당신의 종이어야 할 내가 어찌 이리 뻔뻔스러울까요.

(발터/ 자기 고백)

 

말없이 굴러 떨어지는 눈물/눈물이 진실한 고백인 줄

(김파/ 고백)

 

저를 외면한 사람/ 제 등을 두드려간 사람/ 제가 긁는 사람/ 뺨을 친 사람이며/ 그런 찬바람의 천만 갈래/ 삭이지 못한 제 육신이 펄럭입니다// 나/ 다 용납하진 못하였습니다/ 용서를 얻었으나/ 다 허용 받지는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앙금도 풀어놓으니/ 천지 뒤덮을 눈발/ 내 겨울을 허락하소서.

(정복선/ 겨울 고해)

 

생애의 막끝에/ 값지게 찍은/ 나의 결백한 종지부 ! /백설 위에 떨기떨기/돋친 망울은/ 성실한 나의 고백

(김철/ 진달래)

오오, 님이시여/ 그렇게 날 사랑하신 님이시여/ 남이 내게 가르치신 사랑법으로/ 나 님을 위해 노래할 수 있으리까.// 다만 노래를 대신하는 침묵이며/ 다만 고백을 대신하는 눈물이며/ 다만 헌신을 대신하는 향유이오니‥‥‥

(김성영/ 미리암의 노래)

 

 

설 교 노 트

 

신앙과 고백의 뜻

마16:16-18, 행8:37

 

서론

신앙 고백이라는 말은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신조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신앙 고백이란 말은 성문화된 신조를 고백하는 그 행위를 말하는 것이나 고백은 근본적으로 교회의 고백이고, 그것은 성문화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이 두 말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교회가 현저히 신학적이 되어 오면서 교회 자체의 존재 입장을 명시하기 위하여 다시 이 신조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1. 신앙 고백이 있게 되는 이유

신앙 고백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대해서만 고백하는 절대적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 고백의 행위가 아무런 외부의 자극이 없이 혼자 있는 경우에서도 이 신앙을 확고하게 가지기 위하여 부단히 스스로 다짐하고 격려하여서 올바르고 정확한 신앙을 지켜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또 반면에 복잡한 외부 사람과 접촉할 경우에 역시 우리의 믿는 바를 주장하고 간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신앙의 내용을 솔직하고 명확하게 표현해야 합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환경과 혼란한 사조 속에서 우리의 입장을 밝히고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는 정확하고 분명한 신앙 고백이 요청됩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내용은 성경이라고 우리는 선언합니다.

 

2. 신앙 고백의 뜻

이 신앙 고백의 뜻은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생생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나의 이 충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신앙을 고백하는 동시에 생명을 걸고 고수하는 신앙 내용입니다. 교회의 신조는 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신앙자가 전심 전력으로 고백하는 그들의 생명을 걸고 지키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개인의 신앙 고백이기 전에 교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속한 사람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이 산 신앙을 가지게 하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교회를 통해 이 신앙을 보전하고 간증하게 하셨습니다.

나의 신앙 고백은 교회의 것이고, 나 개인은 교회에 참가해서 전심으로 그 고백에 화답하고 충성으로 신앙자에게 지워주신 사명을 수 행할 것입니다.

(3) 이 신앙 고백은 성신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신의 역사이십니다.

(4) 이 신앙 고백은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신앙 고백의 최종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고 그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시의 기록인 성경입니다. 신조는 이 성경에 기초를 두어 성경의 내용을 단적으로 제시해 놓은 것입니다. 또한 신조가 성경의 내용이며 복음의 중심적인 까닭에 이것이 형식적 의문이 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산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신앙 고백은 교회의 신앙 고백인 동시에 그 최종적 기초가 성경이라는 것을 생각하였으며 또 이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고 나 자신의 신앙 결단이란 것은 하나님 계시의 은혜에 대한 응답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신조를 고백함으로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단 교리에 대하여는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며, 외부의 공격에 대하여는 교회 신앙을 규정해서 복음주의에 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백의 완료

요20:24-29

 

서론

의심이 많았던 예수의 제자 도마는 낙담의 기분을 거치고 난 후 "나는 믿고 싶습니다."하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믿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직접 만나뵙고 부활의 증거를 확실히 본 후에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1. 고백이 끝날 때는 반응이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교제를 떠났습니다. 그는 다른 신자들의 교제, 부활의 증언, 그리스도의 임재, 다른 사람들의 격려와 희망 등을 다 놓쳐버렸는데 그 이유는 도마가 신자들의 교제 속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제를 벗어나면 신앙의 힘과 격려를 얻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불신앙에 대해 책임을 질수 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불리함을 초래할 때에는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비추시는 빛을 스스로 볼 수 없도록 그림자를 드리울 때 그 책임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 질 수 있습니다. 도마는 자기의 짐을 지고 자기의 상처를 홀로 돌보려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임재가 가장 필요한 때에 그것을 놓쳤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에 빛이 있는 곳으로 왔었다면 빛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고백이 끝나면 책망이 뒤따릅니다.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못자국을 만져 보라고 하신 후에 "믿음 없는 자가 되지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현실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때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려 하느냐면 그것은 때때로 습관, 도덕, 삶의 형식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우리는 사실의 증거에 문을 닫고 있을 때 책망을 받게 됩니다. 도마는 인간의 오관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사실의 모든 증거에 문을 닫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책망의 자리를 바로 잡으려면 우리안에 믿음을 가져서 그 믿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고백이 끝나면 인식이 생깁니다.

도마는 부활의 증거를 요구했고 예수님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인식할 때 사실이 보여집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삶의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보자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그의 고백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예수님을 보는 순간 주를 하나님으로서뿐 아니라 그의 삶의 주로서도 고백하는 완전한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구하시는 고백은 예수가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완전한 고백입니다. 이 속에서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신학적 고백이 들어있고, 그가 생명의 주시라는 개인적 고백도 들어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도마가 처음에는 단순히 그냥 스승으로서 예수를 대하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증거를 요구하였으나 그가 주님을 직접 만나뵙고 주께서 보여주신 증거를 본 후는 자신이 따르던 스승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의심하지 말고 바로 예수님을 인식하십시다. 그리고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합시다.

 

 

적극적인 고백의 힘

롬10:6-10

 

서론

우리가 하는 말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믿는 바를 입으로시인하고 고백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축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란 우리 의 고백하고 시인하는 말보다 더 좋아질 수 없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고 믿음을 실현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입으로 창조적인 말, 적극적인 고백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1. 고백의 위대한 힘

우리가 죄에서 사유함을 얻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이 엄청난 축복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고백함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랑의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마음에 믿고 시인하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질병과 고통을 주려고 노리고 있지만 우리가 용감하게 병에 대항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말씀을 믿고 고침받은 것을 고백할 때 건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하는 말씀을 믿고 고백하면서 병마를 대적할 때 질병에서 고침받게 합니다.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고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도 이 고백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사탄은 아무런 힘이 없는 패배한 원수라는 것을 끊임없이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2. 우리가 고백할 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하는 말과 고백이 부정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즉, 잘못된 고백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선천적 유전을 고백하는 대신에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영적 유산으로마귀 앞에서 고백하고 내 귀에 들리도록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냄새 맡은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신 것을 그대로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병도 재앙도 패망도 우리집에 들어올 수 없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이 올 때는 더 큰 축복을 주시는 예고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십시오. 마침내 마귀는 도망가고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로 고백하기에 앞서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말씀으로 채우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할 때 또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우리 마음에 먼저 적극적인 좋은 영상을 그려야 합니다. 마음에 그리며 고백해야 합니다.

건강한 모습, 축복받는 모습, 사업이 번창하는 모습을 그리며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결론

우리의 짧은 혀가 고백하는 내용에 의해서 화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이 세상의 것을 보고 그것을 고백하기보다는 하늘의 산 소망에 대해서 더 많이 고백해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불평스러운 말보다는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나의 구주가 되심을 입으로 고백하고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음으로 시인하고 고백하는 말 속에는 위대한 창조의 능력이 들어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승리자의 고백

딤후:1-8

 

서론

본문의 말씀 중에 7-8절은 바울 사도의 승리의 고백이라고 합니다. 이 고백을 성경학자들은 말하기를 바울의 고백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거나 또는 자신의 훌륭한 생활과 업적을 기념해 주었으면 하는 고백이 아니라 고달픈 싸움이 막을 내리게 되어 기쁨에서 또는 동역자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서 또는 우리 신자에게 승리를 고무시키기 위한 간증이요, 고백인 것이라고 합니다.

 

1 .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은 어떠한 싸움입니까? 그것은 깨끗한 싸움이라는 뜻이요, 정당한 싸움이라는 뜻이요, 아름다운 싸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의 대상은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육체의 정욕과 혈기와 교만과 더불어 싸웠고 율법주의, 즉 유대교의 형식주의, 외식주의 독선주의와 더불어 싸웠으며,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과 마귀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하였고, 십자가로 무장하였으며, 주께서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싸웠습니다. 이 성령의 권능은 죄악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이며, 우리 신자는 주의 군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병된 자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의 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달려갈 길을 다 갔다고 했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는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는데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은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것은 정당한 길, 즉 좁은 생명의 길로 달려갔다는 말입니다.

경주를 하는 사람이 정해진 코스에서 이탈하여 지름길이나 다른 코스로 갔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올바르게 경주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말은 바른 진리와 신앙 노선에서 이탈되지 않고 바른 길로 계속해서 갔다는 뜻입니다.

똑바로 달려가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경주를 하는 데는 반드시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 목적지를 푯대로 정하고 달려가야 하듯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정하고 그 방향으로만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인간적 사욕, 감정 등 얽매이기 쉬운 죄는 다 잊어버리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달려갔습니다

또한 목숨을 초개같이 여겼습니다. 단 하나뿐인 생명이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앞만보며 달려갔던 것입니다.

 

결론

인생은 누구나 다 선한 싸움, 즉 깨끗하고, 정당하고, 아름다운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달려갈 길을 다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바로 지켜야 하고, 구원을 완성해야 하며, 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하되 바울 사도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하여 구원을 주시는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려갈 때에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낙오되지 않고 죽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달려간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 결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참 신자가 될 것입니다.

 

 

네가 복이 있도다

막16:13-20

 

서론

베드로의 생애는 신약에서 가장 교훈적이고 신앙적이며, 영적 용기를 주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 것은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가복이 있도다"하고 칭찬하였습니다. 왜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까?

 

1.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와 누가복음에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로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인자란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예수의 지상 생활을 총결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를 어떻게 보는 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고 지칭하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질문이십니다. 그러므로 인자가 누구냐는 질문은 모든 인류가 대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였고 주님께 "네게 복이 있다"는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이 알게 하신 축복이요, 계시요, 영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신앙 고백

베드로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신앙 고백이 있은 다음에 주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첫째요, 기본적인 깃이며, 사도신경의 요점 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알고 고백할 때 비로소 신앙이 성립됩니다. 살아계신 이는 영원 지존자라는 말입니다. 과거 역사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현재에도 신자의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3.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교회를 네 위에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음부"는 선악간에 죽은 자가 가는 곳입니다. 음부의 권세란 죽음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깨트려졌으므로 신자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대항하고 그리스도와 대항하는 모든 악과 어두움의 권세가 아무리 힘을 합해서 대항하려 해도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결론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참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많은 핍박과 시련을 당하였지만 승리하였습니다. 권세가 바뀌고, 나라가 변하면 그때마다 교회와 신자는 어려움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나 승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도 빛을 가리는 악과 사탄의 공격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입니다

갈2:20

 

서론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유월절 만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유월절과 좀 다른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시고 축사하신 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니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주시면서도 역시 "이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찢기시고 쏟아주신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떡과 잔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 속에는 모든 죄인의 죽음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의 죄인됨이 함께 들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죽으심은 죄악된 나의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6장3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씀처럼 그의 죽으심 속에는 죄인된 우리의 죽음도 합쳐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이 성찬의 첫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한 죽음이었으므로 우리의 죄된 모습이 함께 십자가에 달린 것임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즉, 죄악된 나는 죽었다라는 선포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안에 죄된 나를 볼 수 있고 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는 고백적 행위로 살과 피에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임을 깨닫고 확인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죄된 나는 이 미 죽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인이 되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하는 것이 옛사람인 죄악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4장 7-8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살을 또 먹고 또 마시게 되므로 점점 그리스도화 되어가는 나임을 시인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성만찬에 참여하여야 하겠습니다.

 

3.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나 아닌 그리스도가 사셔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육신을 가진 인간인지라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고백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기 위하여 힘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은 나와 주님이라는 일 대 일의 대면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와 그리스도와의 대면없는 신앙은 생명력이 없는 신앙입니다.

 

결론

주님께서 베푸신 떡과 잔에 참여하는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합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죄된 나는 죽었다는 고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시며, 내가 육체 가운데 나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것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신앙 고백

롬10:10

 

서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해서 마음으로만 믿으면 되는 줄로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입으로 마음의 믿는 바를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지 않으면 완전한 신앙을 가질 수도 없고, 구원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믿는 바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1.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직 신자도 아니고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혼자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불완전한 신앙이요, 구원받을 수 없는 신앙입니다. 자신이 잘 믿거나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 앞에서 표명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만 믿고 사람 앞에서 감추는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서 언제인가는 타락하거나 실패하고 맙니다.

신자들이 사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랑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세상과 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서 못하기도 합니다. 또 사람이 무서워서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고백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고백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2. 모든 일은 믿고 말한 대로 됩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복받을 말을 하면 우리 생애 전체가 긍정적이며 복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말을 하면 그 사람의 생애는 비참하게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만 듣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생애에서 하는 모든 말을듣고 계시다가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는 역경 중에서도 감사하며 믿음의 말을 자꾸하면 나중에라도 우리의 앞길은 평탄하게 될 것입니다.

 

3.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하는 생활 가운데서 작은 죄라도 하나님께 자백하여 사함을 받아야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예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여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신선하고 건강한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며 내 입으로 자백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잘못을 깨닫고 시인하여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적은 죄라도 숨겨두지 말고, 정당화하려 하지 말고 겸손히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항상 긍정적 인 말을 하며, 죄를 매 일 자백하여 축복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솔직한 고백

시32:1-11

 

서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를 암몬족과의 전쟁에 내보내고 이미 그 전에 정을 통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데려다가 자신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었으며 백성들 사이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널리 소문이 펴져 나갔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신의를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백성의 원성은 나날이 고조되어만 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를 다윗에게 보내어서 다윗의 잘못을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어떠한 자세로 그 책망의 말씀을 받아 들였습니까?

 

1 .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무척 괴로워하였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 강렬한 본능 중의 하나가 자기 보호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이 노출되는 경우 세 가지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죄를 숨기거나, 변명을 하여 책임을 회피하거나, 합리화 또는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잘못이 지적되었을 때 "하나님의 손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도다. 내 뼈가 쇠하여지고 내 진액이 여름 가뭄의 마름같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하며 무척 괴로워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중심에 통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2.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범한 후에 단순히 잘못하였다는 느낌이나 고민으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이 지적되었을 때 왕으로서의 체면을 다 뒤로 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 범죄하였다"고 시인하며 온전히 회개하였습니 다.

회개란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진실한 회개운동이 우리 신자 사이에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3. 다윗은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 더 큰 기쁨을 소유하였습니다.

죄는 솔직하게 고백되어질 때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쁨과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께서 내 죄를 사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시면서까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고자 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목동으로서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하였고 경건한 신앙인이었지만 그도 역시 나약한 인간이므로 범죄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다윗은 하나님 앞에 큰 죄악을 범하였지만 자신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였기에 하나님께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진실하게 우리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16:3-20

 

서론

본문의 말씀은 빌립보의 가인사랴 읍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 고백입니다. "시몬"이라는 그의 초기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궁금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1.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는 이제 그의 사역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거의 3년 동안의 설교와 그리고 치유의 사역을 펼친 이후에 모든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여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다양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이라도 하고, 엘리야나 예레미야라고도 하였고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대답을 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표정을 바꾸고 정색을 하시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세상의 영웅들과 같이 생각합니다. 절대자, 권능자, 성서에 나오는 영웅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인 생명의 사랑을 재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2. 오직 하나님께서 말하도록 도우십니다.

성미가 급하고 직선적이었던 베드로의 대답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이 대답을 가능케 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통찰력을 주셨고 그런 말을 하도록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에 대해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의 대변인으로 그의 가시적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신분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

 

3. 우리는 주를 누구라고 합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단순한 예언자나 선지자가 아닙니다. 예수 자신이 인류 안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단지 한 사람의 전도자로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것은 각자가 결정할 문제인 것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자기 자신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어떻게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아직도 주께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담대하고 분명하게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 사명을 완수하신 분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아무도 그 사명을 완수하실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생명의 구주이시며 우리의 참 빛이십니다. 주께서 지금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베드로와 같이 참 신앙의 고백을 주님께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죄의 자복

잠28:13

 

서론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와 허물이 있는지 늘 살펴야 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욥기 13장 13절에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1. 자복의 필요성

죄의 짐을 벗어버려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직을 배우기 위해서 입니다. 위대한 신앙인일수록 죄인의 의식은 더 강하였습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지를 자복함으로써 자신을 낮추어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숨은 죄를 찾아내어 고백함으로써 정직하며 겸손해지고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2. 자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자복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자기 자신의 양심도 알고, 아무리 속이려고 하여도 다른 사람이 알기 때문에 그것은 어리석습니다.

숨겨진 죄는 소리를 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몰래 끌어온 양과 소가 사무엘 앞에서 소리를 내었으므로 그 죄가 폭로되었습니다. 또 죄는 번식합니다. 이 죄는 한번 지으면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보려다가 자꾸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버립니다. 안식을 주지 않습니다. 위로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늘 불안하고 무엇을 쫓기듯이 생활하게 되어 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빠지게 합니다.

죄를 자복하지 않으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려면 죄를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자복하는 방법

어떻게 죄를 자복해야 합니까? 자신이 지은 죄목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복해야 합니다. 모든 범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자복할 때는 중심으로 자복해야 합니다. 입술만의 형식적 자복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복이 아닙니다. 또 명백히 자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핑계를 대지 말고 자복해야 합니다. 자기 죄를 반성하지 않고 여러 가지 구실을 내세워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진실한 자복이 아닌 것입니다. 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복하고 부끄럽더라도 그것을 생각하지 말고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죄사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평안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자복할 때에 검은 구름이 걷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큰 감화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심령에 광명과 평화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부홍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2절에 "…과연 너희 열심히 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공 포

성 경 활 용

1. 일반적 고찰

(1) 하나님의 역사로 인한 공포

(창35: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삿7:22)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은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왕하7:6)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2. 이스라엘인의 공포

(1) 홍해 앞에서

(출14:10)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본 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러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2) 블레셋 사람 앞에서

(삼상4: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3. 이방인들의 공포

(1) 애굽인의 공포

(출14:35)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2) 블레셋 사람들의 공포

(삼상14:22)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의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관련원어풀이

1. hT;jim] 메히타 -

원래는 "깨뜨림"의 뜻이다.

(1) 파괴, 파멸.

(시89:41, 잠10:14)

(2) 공포, 두려움.

(잠10:15, 사54:14)

설교예화자료

공포심이라 불리는 죽음의 병

 

예전에 스페인 왕 가운데 페르디난도 5세가 있었습니다. 이 왕은 어떤 점 쟁이로부터 "왕께서는 '마드리칼'이라고 하는 곳에 가시면 안됩니다. 그 '마드리칼'에서 왕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 "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은 왕은 '마드리칼'에 왕의 별궁이 있음에도 무서움과 공포심 때문에 21년 동안 한 번도 거기를 못 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서바나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느 조그만 촌락에서 하룻밤을 유하다 그만 병이 났습니다. 왕은 이 촌락이 어떤 지방이냐고 물어봤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이곳은 '마드갈레' 지방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자신이 그토록 무서워하던 '마드리칼'에 온 줄 알고 (사실은 서로 비슷한 이름일 뿐이었지만) 며칠 안되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공포심때문에 죽은 소심한 왕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공포심은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할 때 죽음을 몰고 올 수도 있는 해로운 마음입니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비결

 

미국의 카네기라는 사람이 쓴 저서에 나오는 공포심을 없애는 비결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책에 기록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해보면 기록한 것 중 대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공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남아 있는 공포심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록해 보도록 하십시오.

셋째로 그중에 어떤 것을 먼저 할 것인가를 정하십시오.

넷째로 먼저 하기로 한 그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신이 계획한 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어떠한 공포심도 대체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공포심을 없애는 가장 큰 비결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할 때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과 공포는 봄눈 녹듯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압니까?

 

요한 웨즐리는 그가 젊었을 때, 큰 은혜를 받기 전에 미국에 전도하러 갔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고 돌아가는 뱃길에 대서양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아주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큰 공포에 싸였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니까, 그 가운데 모라비아 교회에서 이 곳에 전도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선교사가 몇 사람 있는데 이 사람들만은 아주 태연합니다. 그래서 요한 웨즐리가 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당신네들은 이런 가운데서도 무섭지 않습니까?" 그때에 그중 하나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환경을 당하든지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 " 그러면서 그 청년이 웨즐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압니까?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영접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계셔서 성령과 힘과 능력을 주십니까? 그리스도에게는 공포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적 공포에서 해방되는 길

 

미합중국 대통령이 타는 50만 달러의 자동차는 그 가격에 걸맞게 어떤 대규모의 총탄 세례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링컨 대통령의 리무진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선 전투기 조종석용 덮개와 2톤 남짓한 중무장, 30구경 총탄이나 화염병 세례를 막을 수 있게 설계된 가리개와 공군 전투기에 사용되는 유리와 플라스틱보다 더 두꺼운 창유리와 플라스틱기포 지붕, 그리고 특별히 고안된 4개의 타이머, 각 타이어 속에는 단단한 고무로 둘러댄 강철 원판이 있어서 4개의 타이어가 모두 펑크가 나도 한 시간에 50마일의 최고 속도로 달릴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굉장한 리무진 안에서 있으면 암살,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좋은 기계가 인간의 외적인 공격을 막아 주어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줄지라도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공포심은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온갖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21:26)"

 

 

죽음에 대한 공포

 

프러시아의 한 공장의 주인이 었던 알프레드 크룹(Alfred Krupp)씨는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닥쳐올 죽음을 매우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광적인 공포심은 자기 앞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룹씨의 공장에 있는 직원들은 행여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다 해고나 당해 쫓겨나지 않을까 하며 절대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크룹씨의 친척 한 사람이 크룹씨 부부를 방문했을 때 그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본 크룹씨는 공포에 질려서 집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그후에 아내가 크룹씨의 그날 행동을 나무라자 크룹씨는 아내를 내버리고 다시는 같이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크룹씨는 나이가 들어서 죽을 때가 다가온 것을 알자 의사에게 자신의 목숨을 10년 연장해 주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물론 어느 의사도 크룹씨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듯 죽음에 대해 무서워하고 그 때문에 자신의 아내도 버렸고 크룹씨도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암살을 무서워한 왕

 

터키에는 1876년 왕위에 오른 후, 1909년 폐위되어 추방당한 압둘 하미드 2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왕이었습니다.

하미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일디즈 궁에서 살았습니다. 왕은 이 궁을 삼엄하게 경비를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외부인이 왕을 접견할 수 있는 방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방문자는 방 한가운데 혼자 앉아서 왕을 접견했습니다. 그 방의 발코니에는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정교하게 만든 창살막이가 있었는데, 왕은 그 뒤에서 말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불안에 떤 왕은 방문자가 갑자기 권총을 빼어 들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서 마구 쏘아 대지나 않을까 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을 했습니다.

압둘 하미드 2세의 거실에는 경보 장치와 비밀문이 있었고 거실 구석구석마다 거울을 세워 두었습니다. 또한 창가에 서 있을 때나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칼이나 총탄이 날아올까 염려해서 자신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인형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허망한 인간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암살에 대한 공포는 이미 왕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처가들의 공포(? )

 

-공처가에 관한 유머

 

열 명의 공처가들이 마누라들의 독살스러운 바가지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기들끼리 조직을만들었습니다. 첫 모임에서 그들은 담배 파이프와 포도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미 남편들의 낌새를 눈치챈 열 명의 부인들이 갑자기 그 현장을 덮쳤습니다. 그러자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아홉명의 남편은 곧바로 옆문을 통해서 잽싸게 달아났고 단 한 명만이 자진해서 사태 수습을 위해 남아 있었습니다. 부인들은 자신들의 일방적인 승리에 안도의 미소만을 띠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자 도망쳤던 아홉 명의 남편들은 도망치지 않고 사태 수습을 위해 남아 있는 용감한 한 남자가 자기들 모임의 회장감으로 적격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그를 추대하기 위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그는 이미 놀라서 죽어 있었습니다.

 

 

은행 강도와 영화

 

만일 당신이 자동차를 몰고 운전을 할 때 갑자기 기관총을 든 어떤 사람이 은행에서 뛰어 나온다면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실제로 얼라인 안드로인(Erline Android)이란 여인은 이를 보자 잽싸게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운전하는 차는 그만 중심을 잃어 뒤를 따르던 차들이 연쇄 충돌을 일으켰고 경찰의 발표는 이 사고로 아홉 명이 부상을 당했다 합니다. 그러나 안드로인 양이 보았던 기관총을 둘러멘 강도들은 영화 배우들이었고, 당시 그들은 은행을 터는 장면을 막 연출해 내고 있었다고 하여, 경찰에서의 안드로인 양의 정상은 참작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영화를 촬영하는 헐리우드의 페넬로우프 프로덕션사(Penelope Production)의 대변인이 말하기를, 그 총은 장전되어 있지 않았고, 그녀가 본 은행은 진짜가 아닌 한 점포 앞에 설치한 무대 장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경찰 당국은 몇 명의 배우와 5명의 보행자가 부상을 당했고, 방향을 잃은 안드로인 양의 차가 다른 두 대의 차와 충돌하는 바람에 그 다른 두 대의 차가 다시 세 사람을 더 부상시켰다고 밝혔습니다.

 

 

전쟁과 공포

 

광 섬의 한 동굴에 쇼키 요코이(Shiochi Yo-koi)라는 일본군이 살았습니다. 요코이는 전세가 바뀔 무렵인 1944년 이곳으로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쇼키 요코이가 정글 동굴 속에서 28년간이나 숨어서 살아온 것은 자신이 적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요코이는 주로 밤에만 나와 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지내면서 요코이는 개구리나 쥐, 달팽이, 새우, 밤, 망고 등을 먹고 살아왔습니다. 옷은 나무 껍질로 삼베처럼 천을 만들어서 바지와 자켓을 해 입었습니다.

요코이는 괌 섬에 뿌린 삐라를 보고서야 전쟁이 끝난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숨어 있는 곳에서 나가게 되면 처형당하고 말 것이라고 막연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던 중 사냥꾼 두 명이 그를 발견하였습니다. 사냥꾼들은 요코이에게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코이는 동굴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새 옷을 입고 음식을 먹으면서 쇼키 요코이는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전쟁과 핵 공포에 대한 기독교적인 이해를 정리한 책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로버트 던컨 칼버가 쓴 「펑화론자-반전론과 핵무장 해제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이 책에서, 위니폐그 신학교의 교수인 로버트 칼버는 전쟁이 단순히 부도덕한 국제갈등과는 구별된다고 생각하지만 "전쟁이란 분명 히 사회악이며" 동시에 "대부분의 전쟁은 양편 모두에게 불필요한 것이고, 불법으로 자행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칼버는 성서 자체가 결코 전쟁을 도덕적 악으로만 이해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지옥 또한 악이다. 그러나 지옥이 도덕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논증할 수 없다. 지옥, 감옥, 형사 법원, 전쟁 따위는 악이 존재하는 자리에는 필연적 이다. " 칼버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일부 기독교인들은 정당 방위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반전주의자들로서, 전쟁과 모든 전쟁 준비는 악이므로 저지되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보수 정종분리주의가 사라지면서 개방정책에 근거한 적극적 국제 반전론이 대두되어 왔습니다.

칼버와 같은 기독교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반전론'에서부터 '의로운 전쟁'설로까지 피력했습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는 철저한 반전론자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나치가 전쟁 자체보다는 평화, 자유, 정의, 기독교에 더 큰 위협을 주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어떤 전쟁은 정당하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임종에 앞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전론자들은 사람들이 만일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모든 이상 심리, 때로는 끔찍하고 현실적인 정치적 명령이 필요없게 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말하는 '만일'이 인류 역사의 가장 원칙적인 문제를 구걸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

칼버 교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명확한 해답을 제공해 주려 하고 있습니다.

 

 

어록·시·묘사

 

공포는 신앙을 낳고 의심은 철학을 낳는다.

(장자)

 

공포는 언제나 실제보다 무서운 것이다.

(유달영/ 절도범 P)

 

멀리 있으면 공포를 느끼지만, 가까이 올수록 그렇지 않다.

(J. 라 퐁텐/ 우화)

 

공포는 항상 무지에서 발생한다.

(R.W. 에머슨/ 미국의 학자)

 

위험은 공포심을 가져오고, 공포심은 더 큰 위험을 가져온다.

(R. 백스터)

 

희망과 불안은 신뢰와 의혹을 교대로 가져 온다.

(오비디우스/ 여걸)

 

매일매일 공포를 극복해 나가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R.W. 에머슨)

 

어린 아이는 우뢰에 겁을 먹고, 심약한 자는 협박에 떤다.

(데메트리우스)

 

불안이 없는 자는 곧 의로워질 수 있다.

(B. 존슨/ 카틸리라)

 

공포는 큰 눈을 가지고 있다.

(M.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공포는 사람을 무분별하게 만든다. 겁에 질리면 도움이 될 만한 것도 무서워하게 된다.

(Q. 쿠르티우스 루푸스/ 알렉산더 대왕 원정기)

 

납에게 공포감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공포감에 싸이지 않을 수 없다.

(에피쿠로스)

 

온순이 아니라, 공포가 악한 자를 속박한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금언집)

 

만일 사람이 공포를 가진다면 그가 모르는 죽음이 아니고 그가 알고 있는 삶일 것이다. 그는 동물적 및 이성적 존재이다. 죽음의 공포란 감정은 인생의 내적 모순의 의식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령에 대한 공포가 두뇌의 병적 상태에 있는 의식에 불과함과 마찬가지로.

(L.N. 톨스토이)

 

인생에는 두려운 일이 적어도 두 가지 있다. 그 하나는 공포심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려운 것을 모를 정도로 교만해지는 것이다.

(J.W. 괴테)

 

상념으로서의 우리들의 공포는 공포에 대한 공포다.

(알랭/ 인간어록)

 

인간의 마음에 오는 최초의 공포는 신에게서 버림받는 일이다

(F.뮐러/ 독일인의 사랑)

 

죽음의 공포는 죽음 그 자체보다 무섭다.

(푸블릴리우스/ 금언집)

 

공포는 잔학의 어머니이다.

(몽테뉴/ 수상록)

 

숲을 두려워하는 자는 등지에서 새를 잡지 못한다.

(J. 릴리/ 새로운 신조)

 

공포는 협박 ·탄압 ·박해의 상황하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때로는 용기를 뺏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정의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른바 공포의 장벽을 이겨 나갈수 있는 사람들은 특별히 고귀한 존재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두려움은 마음의 무신론이다.

(R. 타고르)

 

목숨이 있는 자는 모두 괴로움을 두려워한다. 목숨이 있는 자는 모두 죽음을 두려워한다.

(석가모니)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만큼 우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눈에 값어치 있는 사람으로 비치지 않으면 어찌할까 하는 공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가 소외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R.L. 프로스트)

 

식은 죽 먹고 냉방에 앉았다. <*공연히 덜덜 떨고 있는 사람을 가리킴>

(한국 속담)

 

겁 많은 개는 물지 않고 짖는다.

(루푸스)

 

인간의 본질은 괴로움이며, 자기 숙명에 대한 의식이다. 그 결과 모든 공포, 죽음의 공포까지 거기에서 생겨난다.

(A. 말로)

 

공포는 미신의 주요 원천이며 잔인성의 주요 원천 중의 하나이다.

(B. 러셀/ 인기없는 수필집)

 

열등한 인간의 변함없는 한 가지 정서는 공포심 즉 미지, 복잡, 불가해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절실히 원하는 것은 안전이다.

(H.L. 멘컨/ 편견)

 

희망과 공포와는 서로 메어 놓을 수 없다. 희망이 없는 공포도 없지만, 공포가 없는 희망도 없다.

(라 로슈푸코/ 도덕적 반성)

 

공포는 용기의 아버지이고 안전의 어머니이다.

(H. 트위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공포 그 자체이다.

(F. 루스벨트)

 

지금 큰 공포가 우리에게 닥쳐오고 있다/한 사람의 공포가 아니다. 여러 사람의 공포가/삶과 죽음만을 따로 보았을 때의 그 삶과 죽음과 같은 공포.

(T.S. 엘리엇/ 대성당의 살인)

 

공포는 아마/ 강인한 육체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고원/ 자정을 향하여)

 

증오의 아이들이 죽어가네/ 우리 곁에서 아니면 더 먼 곳에서/ 공포의 아이들이 죽어가네/ 가슴엔 탄환을 맞고서.

(르노/ 아이들은 죽어가네)

 

그와 같은 밤이면 가끔 나를 엄습해오는 것이 있었다/ 지루함과 공포가(두려움을 모르는 자는 저능아뿐이다)/지루함이나 공포를 좇아버리기 위해 나는 읊조리곤 했다/ 풍자시의 대담한 리듬을 소리내어.

(하이네/ 결사적인 보초병)

 

이 밤엔/ 파도도 이성을 잃는다/폭풍우는 휘몰아 치고/나무는 바람에게 호되게 맞는다/풀잎은 혼수 상태다// 공포는 몸을 찌르고/ 무서움이 이불 위에 덮쳐 내릴 때/ 나직하게 들려오는/ 그 분의 목소리/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니….

(이영옥/ 홀로 된 밤)

 

몇 포기의 희귀 식물을/채집해 왔다/밤새 신열이 났다/ 며칠 후 들쳐보니/ 반 이상 변색이 된 채/파랗게 질려 있었다/어떤 종류의 공포였던가/ 아직도 남아 있는 표정.

(이장희/ 식물채집)

 

 

설 교 노 트

 

아낙 자손으로 인한 공포

신9:2

 

서론

아낙 자손은 팔레스타인에 거하던 이스라엘 시대 이전의 거주민 중의 한 족속입니다. 원래 "아낙"이 라는 이름의 뜻은 "목 또는 목걸이의 족속"이라는 총칭적 의미였지만 점차 한 종족을 나타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낙 자손으로 인하여 공포에 떨었으니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앙하였던 까닭이며 인간의 외모를 더 높이 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민족들이 공포에 떨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낙 자손은 어떤 족속입니까?

우선 아낙 자손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아낙 자손은 키가 장대한 민족인데 그들의 거대한 체구는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은 고대 가나안 본토에 우거하던 여러 종족 중에 가장 장대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 보면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네피림의 후손이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 사이에 생겨난 종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창6:4). 이들이 거주한 지역은 주로 가나안 땅 남쪽, 특히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살던 헤브론 지방에 거주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아낙 족속은 원래 넓은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았으니 가사, 가드, 아스돗 지방에도 살았다고 합니다.

 

2. 장대하였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본토에 정탐 갔던 대표들이 보고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음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라고 민수기 13장 28절에 말하였고 또 신명기 2장 21절에 보면 "그 백성은 강하고 많고 아낙 족속과 같이 키가 크나‥‥‥‥라고 하였습니다. 또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고 하였으니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장대한 족속입니다.

옛부터 혼혈종은 체구도 장대하면서 성격도 거칠기 쉽고 호전적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아들들의 신앙인 즉, 셋의 후손들과 사람의 딸들은 불신앙인 즉, 가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혼 혈종으로 네피림이라고 불렀습니다.

 

3. 이스라엘 민족은 왜 공포에 떨었습니까?

아낙 자손이 사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갔던 대표들이 아낙 사람들을 보니 체구가 장대하고 성격이 거칠고 자신들과 비교하여 보니 자신들이 너무나 작고 심지어 메뚜기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외모로 비교해 볼 때 자신들이 너무 형편없는 모습이므로 공포에 떤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나약한 불신앙, 불순종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면 이미 그곳은 이스라엘 민족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정탐을 하러 가는 일 자체가 벌써 믿음이 부족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은 그러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정탐을 하였기 때문에 아낙 자손의 외모를 보고 겁에 질려 그곳은 자기들이 가야 할 곳이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오로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다 보아야 하는 것이지 아래로 사람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비록 아낙 자손들이 체구가 장대하고 혈기왕성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싸움에서 이길 것 같지만 모든 싸움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를 보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 신자에게는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그보다 더 강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10:26

 

서론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면서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시면서 내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1. 주인의 고난보다는 가벼우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생도 되시고 주인도 되십니다. 우리는 제자와 종입니다. 선생이 당한 일을 제자가 어찌 회피하며 주인이 당한 일을 종이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주리시고 목마르시고 가난하시고 쫓겨 다니시며,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우리가 어찌 편히 앉아서 배부르게 먹고 편히 자고 세상의 쾌락을 따르며 살아가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온갖 수고와 회생하며 죽음이라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임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고난은 선생이신, 주인되신 예수님의 고난보다 가벼운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고 계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2. 정의는 반드시 나타날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비밀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은것은 곧 찾을 수 있습니다.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이 광명한 곳에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밝은 등불은 마루 밑에 두어도 다 알 수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 속에서 새어나가듯이 비밀스럽게 한 말이나 일일지라도 곧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실은 반드시 사실 그대로 드러날 것이므로 자신이 정의로 우면 떳떳하게 있으면 됩니다.

복음을 골방에서 배웠어도 오늘날 복음 전파의 소리가 천하를 진동하니 두려워 말고 담대히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정의는 반드시 온 천하에 드러나리니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재난이나 원수나 전쟁같은 일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염려되고 근심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보호하시고 책임을 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안전한 방패가 되시며 보호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고 했습니다. 환난 · 곤고 · 핍박 · 기근 · 적신 · 위험 ·칼 등이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것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절대 안심, 절대 보장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두려운 일을 당하였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당하신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더구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주가 나를 시인하여 주실 것이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미움을 받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공포로부터의 해방

마11:25-30

 

서론

이 세상에서 현재 살아가고있는 인생들에게 있어서 그가 처해있는 환경이나 혹은 개성, 신분, 직책에 따라서 각각 지니고 있는 문제는 다를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면에서 공통적인문제 즉, 경제 문제,애정 문제,사망문제 등은 같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인생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가져다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세상에 근심, 걱정, 불안, 고통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불안과 공포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해방받은 길을 모색해 보려고 합니다.

 

1. 공포의 원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인생이 불안과 공포에 위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현대인들은 몇 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질병과 식량 문제, 그리고 전쟁 문제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암 공포증에 걸려 있으며, 식량 부족으로 인하여 기근과 아사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또 세계 3차대전 폭발 직전에 직면하여 현대인은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이것의 근본적인 문제는 현대 문명의 무능성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불신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나라가 나라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죄책 문제를 들고 있는데 죄를 범한 사람의 심리 상태는 언제나 부끄럽고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현대인은 누구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공포에서 해방받는 길

공포에서 해방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고대의 인류들은 이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불과 도구와 성곽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중세기에서는 황금과 지식과 권력을 추구하였고 현대의 인간은 공포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거나 마약을 복용하기도 하며 쾌락에 빠져서 공포를 잊으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각 나라는 핵무기를 자꾸 만들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공포감과 불안감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더 궁극적으로 인생은 신을 추구하여 신앙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종교를 형성하였으나 여 전히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성경이 제시하는 해결책

인간들이 별의별 수단과 방법으로 공포에서 탈출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공포 가운데서 헤매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오라는 것은 예수님을 가까이 하라는 뜻이요, 예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배우라는 말씀은 본받으라는 뜻과 동화되거나 일치되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예수님의 사업에 헌신하라는 뜻이요,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하라는 뜻입니다.

 

결론

모든 인생은 다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받아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인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와 배우고 그 멍에를 메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공포

출11:5

 

서론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계속 애굽인을 징계하셨으나 애굽인들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는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왜 그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1. 가장 무서운 재앙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은 자연계나 가축들을 쳐서 죽게 하였던 것이므로 사람의 생명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재앙은 처음 난 것 즉, 장자를 치는 일이고 생명을 빼앗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아주 무서운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 즉, 물질이나 자연계나 건물 같은 것은 잃었다가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고 파괴된 것은 다시 회복시키면 되지만 사람의 생명은 한 번 잃으면 도저히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는 무서운 재앙인 것입니다.

 

2. 모든 처음 난 것이 죽을 것입니다.

애굽 가운데서 처음 난 것은 왕인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첫 아들까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다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계급으로 구별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는 평등한 것입니다. 왕의 자식이나 종의 자식이나 심지어 가축의 새끼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일단 죽고나면 썩게 되고 그래서 뼈만 남을 것이고 결국은 원래의 상태인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난 것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산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 자손은 무사함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개라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에 애굽 전국에서는 큰 곡성이 있었습니다.

비로소 이스라엘은 큰 공포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은 어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건지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돌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여 악한 길, 어두운 길, 위험한 길에서 보호하여 자녀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보호함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자녀들을 두려움과 공포에서 건지시고 해방시키십니다.

 

결론

애굽 사람들은 장자를 우상시하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것을 경계하고자기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보내도록 이렇게 무서운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자식을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내심 가졌던 공포에서 해방되었으나 애굽 사람들에게는 더 큰 공포로 다가온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원수의 두려움

시64:1

 

서론

범죄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닥치는 두려움은 항상 있습니다. 특히 원수들로 인하여 오는 두려움은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은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원수는 왜 생기며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일까요? 특히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마귀라는 원수가 시종일관 쫓아 다니고 있습니다.

 

1. 원수의 두려움

원수에 대한 두려움은 왜 생기는 것입니까? 그냥 단순히 겁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원수들이 해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과연 생명은 이 세상의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잃으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원래 상태로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귀한 보배인데 이것을 빼앗으려는 원수가 있기 때문에 두렵고 공포에 떠는 것입니다. 원수는 내 자신이 악하지 않아도 생기는 것이며 나 자신이 범죄한 일이 없어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원수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니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의 보존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하고 간구하며 부탁을 드려야 합니다.

 

2. 행악자의 비밀한 죄

악한 사람에게는 사람을 해하는 간교한 꾀가 많습니다. 성도들은 자기 힘으로는 그런 악인의 간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밀히 행하는 뫼이기 때문에 더구나 알수 없이 숨겨져 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의인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것은 성도에게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서로 권모 술수로 사람을 속이고 위협하는 일이 많으며 특히 정치계에도 비밀한 꾀를 가지고 작당하여 음모하는 일이 허다하고 경제계에서도 비밀한 꾀를 가지고 자기의 치부만을 도모합니다-

더구나 의인들이 사는 세계에 행악자가 비밀한 꾀를 가지고 의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일이 있으므로 의인들은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보호하시므로 숨겨 주십니다. 악인들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건져 주시는 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 죄 짓는 자의 요란

"요란"이란 말의 원어 뜻은 '군중'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무지한 군중의 폭동을 당하였는데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왕으로서 군중에게 일시적으로 오해를 받거나 미움을 받아도 견디기 어려운데 군중의 폭동으로 인하여 왕위를 빼앗기고 쫓기는 신세까지 되었으니 그 두려운 마음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요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속히 요란하게 떠드는 무리에게서 벗어나 조용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이 세상은 참으로 공포의 세계입니다. 매일매일 보도되는 뉴스는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심지어는 우리의 이웃까지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원수의 두려움과 행악자의 비밀한 꾀, 죄 짓는 자의 요란함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관 리

성 경 활 용

1. 국가 행정가의 종류

(1) 관리

(삼상8:15)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2) 관원장

(창40:21)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리고

(3) 내시

(왕상22:9)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이르되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로 속히 오게 하라 하니라

(4) 관원

(단3:2) 느부갓네살 왕이 보내어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재판관과 재무관과 모사와 법률사와 각 도 모든 관원을

(5) 신하

(창37:36)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2. 구약 시대의 관리

(1) 애굽 황 바로의 관리

(창41:34)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국중에 여러 관리를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2) 솔로몬 왕의 관리

(왕상5:16) 이 외에 그 역사를 동독하는 관리가 삼천 삼백인이라 저희가 일하는 백성을 거느렸더라

(3) 유다 왕 요시야의 관리

(대하34:13) 어떤 레위 사람은 서기와 관리와 문지기가 되었더라

(4) 아하수에로 왕의 관리

(에1:8)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하여 각 사람에게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3. 신약 시대의 관리

(눅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요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4. 관리의 선택과 임명

(1) 백성이 선택

(신1:13)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2) 상관이 임명

(스7:25)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5. 관리의 주의할 일

(1)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

(시2:2)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2) 서로 침

(렘51:46) 경내에는 강포함이 있어 관원끼리 서로 치리라

 

6. 관리들의 부패함

(느5:15)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막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마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 주니라

관련원어풀이

1. bx'n: 나-찹

(1) 놓다, 두다, 놓이다, 놓여지다

(창28:12, 삼상22:9, 룻2:5)

(2) 자신을 두다, 준비되다.

(출7:15, 17:9)

(3) 견고히 서다, 서게 하다, 세우다, 고정시키다.

(창37:7, 신3:28, 시74:17)

(4) 관리, 감독.

(왕상4:5, 9:23)

 

2. syrIs; 사-리-스

(1) 고자, 환관.

(사56:3, 단1:3)

(2) 궁정대신, 장관.

(삼상8:15, 왕상22:9)

 

3. dyqiP; 파-리-드

(1) 관리자, 감독, 공공 관리.

(창41:34, 느11:22)

(2) 군대에서의 관리자, 감독.

(왕하25:19)

 

4. h[;r; 라-아-

(1) 먹이다, 방목하다, 돌보다.

(창37:13, 민14:33, 욥20:26, 미5

:5)

(2) 목자.

(창13:7)

(3) 친구가 되다, 자신을 결합시키다.

(삿14:20)

(4) 진리를 추구하다.

(시37:3)

 

5. br" 랍-

(1) 많은 날들, 오랜 시간.

(창21:34)

(2) 많은, 큰, 위대한, 넓은.

(창7:11, 왕상10:2, 시19:11)

(3) 능력있는,

(시48:3, 사63:1)

(4) 전능자.

(욥35:9, 사53:12)

(5) 나이 많은, 늙은이.

(창25:23, 욥32:9)

(6) 위대한 사람, 지도자.

(왕하25:8, 단1:3)

 

6. rfevo 솨타르

쓰다, 기록하다, 서기관, 행정장관, 지사.

(출5:6-19, 신16:18)

 

7. @/zr;P] 페라-존-

공의, 규칙, 통치, 감독.

(삿5:5, 7)

 

8. @yxiq; 카-친-

(1) 재판장, 심판관.

(사1:10, 미3:9)

(2) 군대의 지도자, 사령관.

(수10:24, 삿11:6)

(3) 왕, 군주.

(잠6:7, 25:15)

 

9. @z"r; 라 - 잔

무겁다, 우두머리, 왕.

(삿5:3, 시2:2)

 

10. a[rcwn 아르콘-

(1) 통치자, 주, 왕,

(마20:25, 행4:26)

(2) 관리, 관원.

(롬13:3, 딛1:9)

(3) 대제사장.

(행23:5)

(4) 회당 일을 보는 사람.

(마9:18, 눅8:41)

(5) 산헤드린 회원.

(눅18:18, 요3:1)

(6) 재판관.

(눅12:58)

(7) 이방의 관리.

(눅12:58)

 

11. pravktwr 프라크토-르

원래의 뜻은 "나라의 세금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옥리, 법정의 사람, 집행관.

(눅12:58)

 

12. uJphrevth" 후페레테스

원래의 뜻은 "하급의 배 젓는 사람, 뱃꾼" 이다.

(1) 시중드는 사람, 하인, 고관의 시중꾼, 관리.

(마5:25)

(2) 산헤드린 일꾼, 사무원.

(마26:58)

(3) 회당의 종, 사환.

(눅4:20)

(4) 어떤 일의 조력자, 종.

(눅1:2, 요18:36)

설교예화자료

「목민심서」 중 공직자 윤리 I

 

공사에 여가가 있거든 반드시 정신을 모아 고요히 생각하며 백성을 편안히 할 방책을 헤아려내어 지성으로 잘 되기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장구성이 진동의 판관이 되자, 정사에 열성껏 마음을 다하니 다른 사람이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벽에다 크게 써 붙이기를 "내 한 몸이 구차히 하루라도 한가하면, 백성은 끝없는 괴로움을 당한다. " 하였습니다.

「치현결(治絲訣)~에 이르기를 "벼슬살이의 요체는 두려워할 외(畏)한 자뿐이니, 의를 두려워하고 법을 두려워하며 상관을 두려워하고 마음에 언제나 두려움을 간직하면 혹시라도 방자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니, 이로써 가히 허물을 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였습니다.

여씨(呂氏)의 「동몽훈(童蒙訓)」에 말하기를 "임금 섬기기를 나의 아버지 섬기듯 하고, 아전 대하기를 나의 노복처럼 하며, 백성 섬기기를 나의 처자처럼 하며, 공무 처리하기를 집안일처럼 돌보아야만 능히 내 마음을 다한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미진한 일이 있다면 이는 다 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매양 한 가지 일을 접할 때마다 선례만 좇아서 시행할 것이 아니요, 반드시 법도의 범위 안에서 편의 변통할 것을 생각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고 이롭게 하기를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목민심서」 중 공직자 윤리 ll

 

청렴은 수령의 본무인데 모든 선의 원천이며 모든 덕의 근본이다.

청렴하지 않고 능히 수령 노릇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우리 조선에 청백리(淸白吏)로 뽑힌 자가 통틀어 110명인데, 태조 이후에 45명, 중종 이후에 37명, 인조 이후에 28명이었다. 경종 이후로는 드디어 이렇게 뽑는 것조차 끊어지고,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은 더욱 곤궁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400년 동안에 속대 입조자(束帶立朝者)가 거의 천 명 이나 만 명 인데, 그중에서 청백리로 뽑힌 자가 겨우 이 수에 그쳤으니 역시 사대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상산록(象山鑛)消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렴에는 세 등급이 있다. 최상의 것은 봉급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먹고 남는 것도 역시 가지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 한 필의 말로 시원스럽게 가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에 말하는 염리(廉吏)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봉급 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고 바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으며, 먹고 남은 것은 집으로 보내는 것이니, 이것이 중고(中古)의 소위 염리라는 것이다. 최하의 것은 무릇 이미 규례가 서 있는 것은 비록 명분이 바르지 않더라도 먹지만, 규례가 서있지 않은 것은 죄를 먼저 짓지 않으며, 향임(鄕注)의 자리를 팔지 않으며, 재감(災減)을 훔쳐 먹거나 곡식을 번롱하지 않으며, 송사(訟事) ·옥사(獄事)를 팔아먹지 않으며, 조세를 더 부과하여 나머지를 착복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염리라는 것이다. 모든 악을 갖추어 있는 자가 오늘날 도도한 대세를 이루고 있다. 능히 최상을 하는 젓이 진실로 좋지만 능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오히려 그 다음 것을 해도 좋다. 소위 최하에 해당하는 경우, 옛날에는 반드시 팽형(烹刑)을 다했을 것이다. 대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의 종으로서

 

개인 차원의 사사로운 일이 아닌 공공의 일을 맡아 하는 모든 사랑을 공무원이라 합니다. 학교의 교장, 교감, 선생님들이나 각종 종교 단체의 성직자, 정부 기관의 직원, 국회의원, 대통령 등은 모두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이 모두 공무원입니다 이들은 국민들이 낸 세금을 가지고, 국민들을 위한 일을 합니다. 국민들을 위한 일이란 곧 국민들이 편안히 잘 살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체 국민 중에서 공무원의 숫자는 1989년 말 기준으로 79만 393명입니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국민 전체의 1.9%에 지나지 않는 공무원들의 손으로 다루어지는 돈의 양은 나라 전체 돈의 반 이상이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공무원들은 출세한 사람에 속합니다.

이러한 공무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첫째, 공인임을 잊지 말고 처신해야 합니다.

둘째, 언제나 겸허한 자세로 솔직하게 국민을 대해야 합니다.

공직 사회의 부정 부패는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공직 생활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보통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십자가의 정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청백리의 표상 잠롱 !

 

불교 국가인 태국에 청백리의 표상 잠롱시장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무소속으로 방콕시장에 출마하여 초대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사람입니다. 당시 선거 운동에 들인 돈은 등록비 5천바트(1천바트는 약 30만원), 전단값 1천바트 등 불과 6천바트 (약 180만원)였습니다.

85년 시장 당선 후에만 네 차례나 사글세집을 전전한 그는 올해 초 그동안 기거해온 피복공장 폐품창고에서 쫓겨나 친구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가 시장으로서 받는 월급 2만 4천바트와 판공비격인 수당 2만바트는 지급되는 즉시 경리 직원이 온라인으로 자선단체로 보냅니다. 잠롱 시장의 생활비는 그의 군연금 1만 3천바트와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충당됩니다.

잠롱 시장이 본래부터 타고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도 야심에 찬 사관생도로 집과 자동차를 사기 위해 여념이 없던 청년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름다운 아내와 큰 집이 생기자 그 생활 속에서 자꾸 불안해지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다시 마음에 평안이 가득차게 되었다 합니다.

끊임없이 솟구쳐 오는 내적 욕구와 싸우며 청렴과 솔선수범의 생활을 지켜나가는 그의 모습이야말로 우리나라 공직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모범상입니다.

 

 

민의를 대변하는 관리

 

박봉이나마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며 지극히 작은 일이나 큰 일에 충실한 공무원이적잖음은 든든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모든 국민의 일인 공무(公務)를 누구의 일도 아닌 공무(空務)로 여겨 관료끼리 감싸가며 조직 ·예산을 늘리고 정치인의 눈치만 살피는 행태 또한 여전하니 이건 바로 고쳐야 할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 맡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충실성과 국민을 두려워하고 행동을 삼감입니다. 모름지기 공무원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국민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진실하게 온 마음을 기울여 맡은 일을 하고 공평무사하게 일처리함이 본분인 것입니다.

"민정을 살피는 눈과 민원을 듣는 귀가 막히지 않으며 민의를 대변하는 혀가 더듬거리지 아니하리라(이사야 32:3-4) "

 

 

한 모범 공무원의 활동기

 

내가 공무원에 첫 발을 디딘 때는 1966년 7월, 햇수로 20년이 넘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는 말이 있듯이 두 번이나 강산이 변하였으니 그리 짧지만도 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뒤돌아 보니 "아하‥‥‥ ! "'하는 순간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시 공직 생활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괜찮을 것 같다. '는 그저 막연한 기대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사회과, 시민과, 총무과, 위민실, 시정과 등 주로 주민복지와 직접 관련이 많은 부서에서만 근무하다 보니, 햇병아리 시절의 솜털을 벗고 이제야 '나는 누구이며, 누구를 위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제 나는 시민이 나를 꼭 필요로 하고, 공직사회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존재라고 확신하며 혼신의 힘으로 오늘을 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남들은 내 돈 들여 남을 들지만 나는 월급을 타면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부서에 근무하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있겠습니까?

 

 

어록·시·묘사

 

재직기간이 짧은 관리는 위해를 저지르기 쉽지 않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그는 폭점을 낳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관리는 국민에 의해서 작성된 법을 시행하는 국민의 공복(公健)이며 대리인이다.

(S.G. 클리블랜드)

 

벼슬에 임하는 법도는 오직 세 가지가 있으니, 청렴과 신중과 근면이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몸가질 바를 알리라.

(명심보감)

 

그는 관리이면서 신사가 되었는데, 그것은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J.R. 키플링)

 

관직을 다스림에는 공평 이상의 것이 없고 재물에 임함에는 청렴 이상의 것이 없다.

(명심보감)

 

벼슬자리는 마땅히 너무 높지 말 것이니 나무 높으면 위태하며, 능한 일은 마땅히 있는 힘을 다 쓰지 말 것이니 다 쓰면 쇠퇴하며, 행실은 마땅히 너무 고상하지 말 것이니 너무 고상하면 비방이 일어나고 욕이 온다.

(채근담)

 

사람이 공공의 신탁을 떠맡았을 때는, 자신을 공공의 재산으로 생각해야 한다.

(T. 제퍼슨)

 

국민에게서 자기의 공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관리는 결코 행정부의 유순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W.H. 해리슨)

 

후진국의 관리와 오뉴월의 생 선은 상하기가 쉽다. 다만 관리가 적으면 돈이 생기고 생선이 적으면 구더기가 우글거린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어령)

 

공공심을 더럽히는 자는 國庫로부터 도둑질하는 자들과 똑같이 악하다.

(A. 스티븐슨)

 

관직에 있는 이를 위하여 두 마디 말이 있으니 가로되 「오직 공정하면 명지(明智)가 생기고, 오직 청렴하면 위엄이 생긴다. 」 함이 그것이요, 집에 있는 이를 위하여 두 마디 말이 있으니 「오직 너그러우면 불평이 없으며, 오직 검소하면 모자람이 없다. 」 함이 그것이다.

(채근담)

 

예전 학자는 벼슬을 구한 적이 없으며, 학문이 성취되면 웃사람이 들어 썼으니, 대개 벼슬이라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이/ 율곡집)

 

벼슬이란 것은 갑자기 올라가다간 떨어지기 쉬우며, 임금의 총애가 지나치게 높다간 그 총애가 도리어 쇠퇴하기 쉬운 법이다.

(정약용/ 記)

 

일단 살아 있는 인간이 하나의 숫자로 격하되면 관료주의자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비례할 만큼의 지독한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대상물에 대하여 아무런 인간적인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사디스트보다는 덜 포악하지만 더욱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은 양심과 의무 사이에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관료주의적 방법은 첫째, 인간을 물건처럼 다루고, 둘째 수량화와 통제를 보다 쉽고 값싸게 하기 위해서 이 물건을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관료주의적 방법은 통계자료에 의하여 지배된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관료주의에서 흔히 나타나는 주요한 징후는 능률적인 것과 효율적인 것을 착각하는 일이다. 예를 들자면 우체국의 업무를 그 발달의 속도와 비용의 면에서 평가하지 않고 취급우편물의 수량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P.F. 드러커/ 변모하는 산업사회)

 

벼슬은 높이고 뜻은 낮추어라.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하여야 함을 의미함>

(한국 격언)

 

최고의 지위에는 최소의 행동의 자유가 있다.

(살루스티우스)

 

벼슬하기 전에 일산(日率) 준비.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도 모르면서 다 된 것처럼 서두르고 준비함을 뜻함>

(한국 격언)

 

지위가 높은 자는 삼중의 하인이다. 임금이나 나라의 종이요, 명성의 종이요, 일의 종이다.

(베이컨)

 

대개 가장 훌륭한 선비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긴다. 그 다음의 평범한 선비는 쉽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난다. 가장 하급의 선비는 나아가는 것을 쉽게 하고 물러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안자)

 

지식은 이에 미치더라도 능히 이를 지킬 어짐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비록 지위를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이를 잃게 될 것이다.

(공자/ 논어)

 

국민과 군주 사이에서 금강석으로 만든 벽처럼 서 있는 것이 장관의 의무이다.

(W.E. 글래드스토운)

 

자기의 지위가 자신보다 낮다고 생각하는 자는 확실히 자기 지위보다 낮게 될 것이다.

(핼리팩스 경/ 작품집)

 

전쟁하는 나라에는 세금도 많은데/ 절실한 책임은 관리에게 지워지니,/ 관리는 고을에 임하여/ 다투어 법과 처벌을 시행하게 된다/세금 바치 기 근심되지 않을까만,/ 세금 거두기 또한 비참하구나.

(원결/ 春陵行)

 

초췌한 가운데 마흔을 바라보는데/ 이, 벼룩을 겁낼 살도 없단다/ 애야, 제발 아비 흥내내어/ 글 공부로 과거 볼 생각은 말아라.//양저가 전했다는 사마법(司馬法)이면,/ 장량이 배웠다는 황석술(黃石術)이면,/ 임금님의 스승도 될 수가 있단다/ 다른 자질구레한 것은 몰라도 된단다// ‥‥애야, 하루 바삐 크게 자라서,/ 새끼를 찾아 범의 굴로 들어가라/ 마땅히 만호(萬戶) 벼슬을 할 것이지/ 하나의 경전만 지키고 있지 말아라.

(이상은/ 誘兒詩)

 

자기 구역의 잰 체하는 사람들에게/ 하도 설교를 잘해서/ 결국에는 소 상인들, 연관공들이 그를/ 그 지역 국회의원으로 뽑아주었다오/ 하지만 말솜씨 좋은 조조는/ 비루한 사람들의 대표 일을/ 너무나도 잘 했으므로/사람들은 그를 엘리제 궁에(가도록)/뽑아주었소.// 민중 선동자 조조./ 잘 믿는 자들의 대통령/ 그는 당신에게 술을 사 준다오/ 세금 받은 돈으로.

(르노/ 민중 선동자 조조)

 

커다란 명성을 얻거나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본래의 자기 모습을 잃지 않는 자는 보기 드물다.

(임어당/ 생활의 발견)

 

나는 보았다 음흉한 족속들/ 외교관과 성직자들이/ 로마법의 늙은 시신들이 공동의 신전에서 일하는 것을.

(하이네/ 3월 이후의 미헬)

 

고향으로 가는 길을 더듬으면서/ 이 지방 출신 국회의원이 준/ 달력에 표시된 날을 손꼽아 보면서

(이용범/ 이리역)

 

바야흐로 봄이라 혼자 호미를 메고/ 해질녘에는 또한 밭에 물을 댄다/ 고을의 관리, 내 온 것 알고/ 불러다가 군고 치는 연습을 시킨다.

(두보/ 無家別)

 

오랑캐가 가을을 틈타 침입하니/‥‥ 달은 활 그림자 따라 움직이고/ 서리는 칼에 스쳐 꽃잎처럼 흩어진다/ 옥문관(玉門關)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젊은 부인은 탄식하지 말아라.

(이 백/ 塞不曲)

 

내 본래 맹저 들판의 고기잡이 나뭇꾼,/ 한평생을 스스로 한가롭고 멋지게 지내며/ 이따금 풀밭 진펄에서 마구 노래 불렀거니/ 어찌 벼슬아치가 되어 풍진에 끌려 들었을까?// 작은 고을이라 할 일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관청의 온갖 일은 모두 규정이 있는 법/ 상관을 마중하다 보면 마음이 괴롭고/ 백성을 채찍하다 보면 가슴이 쓰리다. // 집으로 돌아와 처자에게 하소연하니/ 온 집안이 떠나가라 웃으며 세상은 그렇단다.

(고적/ 封丘絲)

 

이곳에서는 경찰서장이나 말단 관리의 호주머니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 대통령의 호주머니만큼은 크지 않았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골수까지 빨고 있었다/ 불쌍한 공화국이여 그대는/ 비델라 도적 떼들에게 채찍으로 매를 두들겨 맞고/ 순경들한테 뺨을 얻어

맞고

(네루다/ 도망자 · 5)

 

민초들을 대변해/ 탐관오리들을 꾸짖고/가려운 데를 긁어준다/ 시체말로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김영태/ 요지경 -꼭두각시 놀이-)

 

소리없이 밤에 논물보는 기술원 젊은이/소문없이 커가는 달빛 속의 그림자여 !

(허흥식/ 달빛 속의 그림자)

 

주(州)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있다/총독의 저택은 겨우살이로 장식되었고/ 문간에선 횃불이 연기를 피우고 있다/ 골목길에 사람들 밀려들고 장난치며/ 떠들어 댄다. 얼근히 취한, 게으른,/ 더럽고, 거치른 사람떼 저택의 뒷마당에/ 군집하고 있다.

(브로드스키 -애노 도미니-주님의 해-)

 

밤바람이 하늘의 창에서 쌩쌩 불어온다/다락방의 침대에는 누워 있다/ 바싹 여윈 창백한 얼굴들/ 가련한 두 연인들이//‥‥ 다음날 아침 경찰이 왔다/훌륭한 검시의(檢麗醫)를 대동하고/ 검시의는 두 사람이/ 죽어 있음을 확인했다. // ‥‥검시의는 의견을 첨부했다/ 엄동설한이 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포로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영양을 충분하게 섭취해야 한다.

(하이네/ 눈물의 계곡)

 

눈 앞의 벼슬 길이 다 흥모(鴻毛)로구나. 천상의 인정을 부질없이 귀찮게 하네. 조의(朝衣)를 벗어 던지고 동쪽으로 간다. 청운이 드높은 저 백운(白雲)만 못하여라.

(조하)

 

습한 곳은 싹이 트나 높은 데는 말라붙어/온 들이 망가졌네 촌전(村前)인들 다르랴//여위고 약한 몸 억지로 김을 매니/ 한낮이라 구슬땀이 밭으로 흐르네/ 아무리 애를 써도 잘되 기는 어림없어/ 천이랑의 수확이 한 솥도 못되는데/ 관청의 세금은 독촉이 성화라/ 문전엔 세리가 호랑이같이 으르렁대네.

(임제/ 田家怨)

 

하찮은 관리는 목우인(木偶人)같이 떠내려 가고/고향의 논밭은 황무지처럼 거칠어졌다.

(이상은/ 매미)

 

누가 말했던가, 농가는 즐겁다고?/ 봄의 세금을 가을에도 못채우는데!/ 촌의 아전은 나의 문을 두드려,/ 낮과 밤으로 몹시도 들볶아댄다//‥‥ 고을의 공문은 이제 더욱 엄하니/ 늙은 아전은 채찍을 들고/ 어린이와 늙은이도 잡아들 인다/ 다만 남긴 것은 절름발이, 장님뿐.

(매요신/ 田家語)

 

상복을 입은 오세그의 과부들이/국회앞으로 몰려 갔네/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 주세요 여러분/ 배고파 죽게 된 이 아이들을"/ 그러자 국회의 나으리들은 일장 연설을 했다/ "이렇게 하지"라고 국회의 나으리들은 말했네/ "오세그의 과부들에게 연설이나 해드리지"

(브레히트/오세그의 과부들을 위 한 발라드· 4)

 

 

설 교 노 트

 

칭찬받는 청지기

눅16:1-13

 

서론

본문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소개하는 청지기는 자기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 주인에게 이익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가 나중에는 오히려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됩니다.

이 칭찬을 받은 청지기는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겠습니다.

 

1 .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지혜있는 청지기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인이 맡겨주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였는데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청지기에게 여지껏 보던 일을 계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지기는 그 말에 걱정을 하다가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깨닫고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빛을 감하여 주었습니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한 일을 지혜있게 하였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가끔 착각하는 때가 있습니다. 세상의 일을 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믿음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은 꼭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통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기도함으로 신령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디모데에게 "주께서 범사에 너에게 총명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2. 충성된 사람입니다.

본문에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작은 것보다 큰 것을 더 바라고 좋아합니다. 물론 큰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큰 것만 바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히 쌓아나가면 큰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것을 성실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고, 작은 것일지라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이 칭찬받는 청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3. 관용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그 청지기는 자신의 것도 아니지만 높은 이율로 주인에게 빛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빚을 정직하게 되돌려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서 채무자들은 자신들의 빚을 감하여 준 청지기에게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이 청지기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평판도 좋게 하였으므로 주인과 채무자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을 지혜롭고 성실하며 충성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칭찬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쫓겨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주인은 일을 지혜롭게 처리한 청지기를 칭찬하기를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하여 주인에게 칭찬받는 청지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정치인

왕상3:4-15

 

서론

세계 역사상 가장 지혜롭고 훌륭한 군왕이요, 정치가를 뽑으라면 우리는 단연 솔로몬을 들 것입니다. 그는 과거나 현재를 통하여 보아도 가장 지혜로운 정치인이었으며 이 지상에서 최대의 번영과 부귀 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어떤 정치를 하였기에 지혜로운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곧 기브온에 가서 일천 번 제를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일천 번 제를 드리려면 일천 마리의 양을 잡아야 하는 것이므로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아서 하나님께 향한 그의 뜨거운 신앙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낌이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성전을 지을 때는 7년이나 걸렸고, 그 성전을 짓는데 모든 물질을 바쳤고 정성을 드렸습니다.

정치를 잘 하려면 우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가 그리 많지 않으며 국가의 일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권세를 위해서 사는 경우가 더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백성 중심의 정치를 하였습니다.

정치가는 백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 제를 드리고 잠을 잘 때 하나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셔서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자신의 명예나 권세나 장래의 부귀 영화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백성을 잘 판단하여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이 요구는 매우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정치인이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 정치인은 차라리 없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정치인은 자신보다도 백성을 생각하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런 면에서 백성 중심의 정치를 하였으니 참으로 지혜로운 정치인인 것입니다.

 

3.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정치를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있는 동안 그의 명성과 부와 번영은 절정에 달하여 이스라엘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세계 각처에서 왕들과 정치가들이 그 지혜를 배우기 위하여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솔로몬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점점 강성하여졌고 또 세계에서도 당당한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솔로몬이 자신의 명예를 탐하거나 부귀를 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개인보다는 국가를 더 생각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권위를 높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솔로몬의 정치는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입니다.

이러한 정치는 단시일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헌신과 노력 이 있어야 합니다.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처음으로 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린 일이었습니다. 그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또 그는 백성들에게 공의로운 왕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필요와 요구를 들을 줄 알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권위를 높여서 많은 정치가들이 그에게로 와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솔로몬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서 이 나라에도 솔로몬 시대와 같은 국가와 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

딛1:7

 

서론

청지기라는 말은 주인의 소유를 관리하는 사람, 집을 지키는 사람, 재산을 맡은 사람, 감독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여러 종들이 있는데 그중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대표자요, 관할자라는 뜻입니다.

넓은 의미로 우리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입니다.

 

1. 성경에 나타난 청지기

(1) 집안 살림을 관리하는 자를 말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 총무로 있으면서 그 집안 살림을 맡아 하였습니다.

(2)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품꾼 감독자가 있습니다. 품꾼 감독자도 역시 청지기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러"라고 했습니다.

(3) 갈라디아서 4장 2절에 보면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어‥‥‥‥라고 했습니다.

(4) 감독도 청지기라고 할 수 있는데 목사, 장로에 해당되는 직분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신자들도 포함하여 청지기로 성경은 나타내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청지기

일반적으로 말하는 청지기라고 하면 개인의 집, 특히 부잣집에 있는 많은 종들 가운데 대표자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하면 교회의 직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직원이라는 것은 직분 맡은 자로 목사나 전도사를 말하는 것일수도 있으며, 아니면 장로나 집사 등까지도 포함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 맡은 자들은 다 하나님의 교회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일꾼들이므로 다 하나님의 청기기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사랑의 집에서 일하는 청지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 된 자들은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책망할 것이 없는 청지기

청지기의 직분은 귀한 것이며 영광된 일을 하는 것이므로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맡은 바 직무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충성하는 자가 곧 훌륭한 일꾼이요, 귀한 청지기인 것입니다.

주인이 맡긴 일을 잘 감당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을 것이지만 악하고 게으른 청지기는 맡긴 임무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여 있다가 갑자기 주인이 돌아오면 그 잘못한 것이 드러나게 되어서 내쫓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게으르고 악한 청지기가 되어 주님께 책망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 직분을 맡게 된 것을 감사하며 영광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 증거를 위해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청지기된 자로서 우리의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올바른 지도자

잠10:13-16

 

서론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분열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행동의 모순, 가정에서의 불화, 직장과 단체에서의 갈등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분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되려는 움직임은 그저 미미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올바른 지도자, 지혜있는 지도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업을 잘 지도할 수 있는 자가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지도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지도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지도자는 일단 올바른 지도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고 일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도자를 귀히 쓰실 것이며 축복하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상대로 정성껏 일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성과가 반드시 있게 하실 것입니다.

 

2. 수용하는 마음

올바른 지도자는 어떤 불만, 불평이나 원망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모욕까지도 참아야만 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수용하는 것이 바른 지도자상입니다.

사람들이 지도자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한다고 해서 거기에 대항해서 같이 나선다면 그 지도자는 영원히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지도자에게는 그런 불평과 원망을 수용하는 넓은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3. 용서할 줄 아는 마음

지도자는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모든 허물을 다 용서하신 것 같이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다 덮어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할 줄 모르면 자신 또한 허물이 생겼을 때 용서를 받지 못합니다.

다윗 왕은 자신을 모욕하며 저주한 시므이를 처벌하지 않고 여호와를 바라보고 참았습니다. 언제나 남의 잘못을 용서할 줄 아는 자가 올바른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4. 지혜로운 마음

모든 일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에게는 더욱 지혜가 필요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요셉은 애굽의 국무 총리로서 흉년을 지혜있게 잘 처리해 나갔습니다. 지도자의 지혜는 한 나라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나라들까지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럿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는 인간 관계를 좋게 하는 것이 또한 지혜로운 자세인 것입니다.

 

결론

올바른 지도자가 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대강대강 일을 해나가는 지도자가 많은 이 시대는 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도하는 자가 올바르게 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지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남의 불만을 잘 수용할 줄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관대히 용서해주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슬기롭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직분 맡은 자들은 다 이러한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정성껏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기제하십니다.

 

 

하나님의 청지기

딛1:5-9

 

서론

본문의 말씀은 바울 선생이 젊은 사역자 디도를 그레데 지방에 머물게 하였는데, 첫째 이유는 그레데 교회의 부족한 일들을 바로 시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고, 둘째는 각 교회에 하나님의 청지기들을 세우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성을 확보하고 조직하여 확장시켜야 한다는 깊은 교훈이 함축된 것이라고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청지기를 등용하되 그 자격을 심사숙고해서 임명하도록 하였습니다.

 

1 . 청지기란?

청지기라는 의미는 "주인의 재산과 사업을 맡아 관리하는 직책"입니다. 이 말을 현대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주인의 비서나 지배 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청지기란 하나님께서 등용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사업을 맡아 관리하는 하나님의 비서인 동시에 하나님 사업의 지배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비서가 아닙니다. 지배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재벌 회사의 비서라고 하면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재벌 회사의 비서보다 아니 회장보다 더 귀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확실한 긍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2. 청지기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성경에는 여러 청지기들에 대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선한 청지기, 악한 청지기, 의로운 청지기,불의한 청지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청지기들의 자세는 어떤 자세이어야 합니까? 우선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청지기는 오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 것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또 주인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청지기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주어야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진실해야 하며, 주인에게 충성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3. 청지기의 봉사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원망없이 행동하고 봉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망이란 모든 일에 불평과 불만을 일삼으며 다른 사람을 중상 모략하고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또 잘못된 일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다 전가시킵니다.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는데 있어서 원망이 있다는 것은 그가 선한 청지기 즉 관리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없이 봉사하는 청지기는 자기의 책 임을 다하고, 힘들어도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 방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대로 하나님의 방법과 뜻대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교회 사업을 하는 것이 내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결론

지금까지 하나님의 청지기는 어떤 자세로 봉사해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하나님의 사업을 잘 감당하여 관리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일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다 하나님의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사업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광복(-절)

성 경 활 용

1. 유대 민족의 해방

(1) 출애굽

(출12:40-4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년이라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2) 바벨론에서의 해방

(대하36:23) 바사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대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스1:3) 이스라엘의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2. 노비 해방

(1) 히브리 종은 풀어 줌

(출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2) 희년에 노비 해방

(레25:54) 그가 이같이 속이지 못하면 희년에 이르러 그와 그 자녀가 자유하리니

(3) 시드기야의 노비 해방

(렘34:10) 이 연약에 참가한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 하고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 함을 듣고 순복하여 놓았더니

 

3. 영적인 해방

(1) 하나님에서 행하심

(시146:7)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2) 죄에서 해방

(롬6:18, 22)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니라 그러나 이제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얻었으니

(3) 사망의 법에서 해방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경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 그리스도의 피로 해방시킴

(계1:5)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5)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시킴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적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관련원어풀이

1. @t'n: 나-타르

떨쳐버리다, 풀어주다.

(시146:7)

 

2. jt'P; 파 - 타흐

풀다, 해방시키다.

(시102:20)

 

3. jl'v; 솰-라흐

내버려두다, 내보내다, 해방되다.

(렘40:1)

 

4. yvip]j; 후프솨

자유 .

(레19:244)

 

5. ejleuqerovw 엘류데로오-

자유롭게 해주다, 해방시키다, 놓아주다.

(롬6:18,22,8:2,21)

 

6. luvw 루오-

풀다, 석방하다.

설교예화자료 -

루시 모자원

 

중부 지방을 지키는 도시 대전의 중심가에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는 하얀색 건물의 교회가 있고 그 주위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산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동산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나무와 숲이 자연의 정겨움을 느끼게 하고 옆에 서 있는 몇 개 동의 양옥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루시 모자원, 어머니와 자녀로 구성된 가정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루시 모자원은 6 ·25 직후인 지난 1954년, 현재는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미국인 선교사 루시 여사가 전쟁 미망인 가족을 모아 함께 사는 터전을 마련해준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의 2대 원장은 엄기선 씨입니다. 그는 크리스찬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우리 국토를 온통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6 ·25는 엄기선 원장 가족에게도 큰 어려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나라 잃은 슬픔을 뼈저리게 경험한 엄 원장은 모자원 아이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이 나라사랑입니다.

그들이 비록 지금은 힘겹게 살고 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살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의식

 

역사란 단순히 과거에 흘러 간 이야기 거리가 아닙니다. 역사란 분명히 "과거와 현재와의 끝없는 대화"이며, "참된 의미의 역사는 모두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들은 '이산 가족 찾기 운동'에서도 6 ·25는 지나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수십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얼마나 적절하고도 생생한 현대사인가를 통감한 바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 학자 콜링우드(R. G. Coiling-woof)도 말하기를, 후세의 역사가는 그 사실 ·사건을 사상의 과정을 통하여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를 마음속에서 '재연'시켜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일본 교과서의 왜곡 사건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마당에서, 일제의 쓰라렸던 교훈을 되새기며 민족 정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성금으로 건립하고 있는 독립기념관의 부속품과 부속 건물에 일본 제품을 들여다가 쓰고 있다는 보도가 크게 나붙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일본을 극복하고 세계에 한국을 소개할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란 선전 영화마저 일본인이 촬영하여 일본에 서 현상까지 하였다고도 합니다. 그래 서 독립 기념 관이 마치 '일제 상품전시장'과도 같은 느낌마저 주고 있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 건립의 기본 정신인 극일의 민족적 여망과 민족적 자존심을 무색케 하고 있는 처사입니다.

우리들이 구축해 가고 있는 땀방울 어린 현대화 작업에 민족적 정신과 역사 의식이 빠져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일제에 항거한 순교자

 

대표적으로 일제에 반대하고 신사 참배에 반대자였던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금강산 수양관에서 목사들의 수양회가 열렸는데 주목사가 강사로 초청되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목사는 구약 성서의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등 예언자들을 죽 열거하면서 "우리는 지금 비상 시국에 돌입해 있습니다. 지도자인 목사들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일개 형사 나부랭이가 찾아왔다고 해서 부들부들 떨 필요없습니다."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당장에 형사가 강단으로 올라가 멱살을 붙들고 경찰서로 연행해 갔다고 합니다.

또한 주남선 목사같은 경우 일찍이 3 ·1 운동 독립 만세 사건으로 1년간 대구에서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후에 신학을 하셔서 뒤늦게 목사가 되어 신사 참배를 반대했다고 또 옥고를 치뤘습니다. 그 후에도 6 ·25동란 때 교인들을 다 피신시키고 혼자서 교회를 지키다 영창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아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8월의 찬양

하늘도 푸르고 우리의 마음도 푸르러집니다. 가없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집니다. 8월은 아마 그런 계절인가 봅니다. 이 계절에 우리 민족은 숱한 분노와 억울함에서 자유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 얼마나 참고 견디며 기다렸던 자유함이었겠습니까? 그때 우린 벅찬 감격을 안고 모두 다 울었었습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국권을 잃고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가장 뼈아픈 슬픔일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그 화려한 문화의 도시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그들에게 노래를 청하고,그들을 황폐케 한 자들이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해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 할 때, 그발강가 버드나무에 그들의 수금을 걸어놓고 비통에 잠겨 애가를 불렀습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 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 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

이렇게 혹독한 맹약을 하면서까지 그들은 버려진 시온에 집착했고, 가슴으로 것속으로 시온을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지난날 우리의 선열들도 그러했었습니다. 만주에서, 상해에서, 수만리 이국에서, 또 이 땅어느 곳곳에서 괭이들고 울었고, 호미들고 흙을 단지 면서도 울었습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목소리는 차라리 찢는 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라를 잃고 고통당하며 덧없이 떠돌던 일들은 한두 기억이 아닙니다. 이제 하루 빨리 이 땅에서 증오와 독선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주의 주장도 남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쳐대는 일은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상, 전인류를 하나로 묶어주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만나고 이해하고 이어지는 방법만이 오직 하나 구원의 길입니다. 그리스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리스도가 충만된 문화와 삶을 이루어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악을 막아야 합니다.그리하여 이 찬란한 8월을 자유케 하는 계절이 되게 합시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끼

1945년 8월 나는 나가사끼 의과 대학 1학년에 재학중이었습니다. 그날 8월 9일, 평상시와 같이 맑고 무덥고 아름다운 여름철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가려고 하숙집을 오전 8시에 나섰습니다. 내가 기거하던 그 하숙집은 원폭이 폭발한 지점에서 2.4Km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나는 평상시 전차를 타고 통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탈선사고가 일어나서 당분간 전차가 운행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몸도 좋지 않아 등교를 단념하고 일단 하숙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나에게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오전11시, 나는 내 방에서 친구 한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B29가 상공을 통과하는 폭음이 들렸습니다. 그로부터 2∼3분도 채 안 되어서 갑자기 주위가 황색으로 밝아지면서, 강력한 폭풍이 순간적으로 불어 왔습니다.

우리들은 깜짝 놀라서 마치 꿈속을 헤매듯이 계단을 내려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변소에 있었습니다. 곧바로 새롭게 정신을 가다듬고 두려움에 횝싸인 채 엉금엉금 변소밖으로 나가 보니, 천정에는 구멍이 커다랗게 뚫려있고 유리창은 전부 깨져서 흩어져 있었습니다. 언제 유리 파편에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르게 내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집 밖에 나가 보니 푸른 하늘은 시커멓게 변하였고 흑색비가 후두둑 떨어졌습니다. 또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축대는 붕괴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나는 걸어서 우라까미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저께까지 보아온 우라까미의 모습은 이미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겨우 학교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 온 몸이 까맣게 탄 시체를 보았는데 그 팔과 다리에는 하얀 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길가에는 배가 잔뜩 부푼 채 죽어 있는 말도 있었습니다. 대학 병원은 그 뼈대만 남았고, 의학부 건물은 목조 건물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나의 학우들은 이 목조 건물 내에서 생리학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살아 남은 몇몇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학우들은 몸을 움직일 기운조차 없어 보였고, 그 중 몇 안되는 강인한 사람도 비틀거리며 운동장을 겨우 기어가는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말을 걸어 보았더니 그들은 자신이 살아 남았음을 안도하는 의미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슬프게도 살아남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들조차도 몇 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두 죽어갔습니다. 그때 나를 바라보며 얘기하던 그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본 그 끔찍한 광경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곳은 통증을 호소하는 소리, 작게 흐느끼는 소리 등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또 공통된 암울한 기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지옥의 풍경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고향으로 내려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나가사끼를 떠났습니다. 내가 탄 열차에는 포대로 몸을 감싼 많은 피폭자가 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허무하게 죽어 간 친구들의 부모님이 슬퍼하시던 모습을 생각합니다. 내가 본 이 엄청난 두려움과 비참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정말 이와 같이 무서운 핵무기는 결코 두 번 다시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인류가 이러한 무서운 핵무기를 모두 없애 버릴 때에만 비참하게 죽어간 친구들의 혼이 비로소 영원히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피폭 당시 의과 대학생이었던 일본인 학생의 증언입니다.

 

1945년 8월

"1945년 8월 6일 아침 9시쯤 되었을거야. 징용으로 끌려간 히로시마 근교의 군수품 공장에서 일을 시작하려고 자동차 시운전을 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잠시 쉬려고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는데 하늘에서 번갯불이 번쩍하는 거야. 그리곤 갑자기 몸이 후끈하더니 옷과 머리카락이 다 타버렸어, 그리고 나서 '꽝'하는 굉음과 함께 건물 조각들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지. 나는 즉시 정신을 잃었어. 정말 순식간이었지."

서초구 양재동에 살고 있는 권억상(69세)할아버지, 그는 일본에서 겪었던 원폭 투하 때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당시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앓아 온 그는 지금도 위장병, 척추, 기관지염이 겹쳐 온 몸이 마른 장작처럼 야위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조국에 돌아와서 낳은 딸 셋이 피폭의 영향인지 모두 건강이 좋지 못한 점 입니다(막내딸은 정신박약자). 결국 세 딸도 이제는 시집을 가고 지하실 셋방에는 아직도 살아계신 어머님(96세, 권순)과 병색이 완연한 부인(61세), 이렇게 셋이서 집을 지키고 있는 형편입니다.

유일한 생계 수단이라면 한 달에 한 번씩 동사무소에서 나오는 구호 양곡 세 말과 생활비 2만원이 전부, "작년까지는 그래도 적십자 병원에서 약을 타다 먹었는데, 올해부터는 보건소로 가게 됐어. 일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우리는 완전히 찬밥 대접이지 뭐,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몸이 짜릿짜릿하게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아 조금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몸이 너무 아프니까, 그저 한 시간이라도 빨리 죽는 게 소원이야."

한국인 원폭 피해자의 애절한 사연입니다. 이번 광복절에는 우리 역사의 희생자인 그분들과 함께 민족의 정을 나누어야겠습니다.

 

 

집합심성(集合心性)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최대의 기쁨이었던 민족사적인 사건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인들의 36년 동안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이 해방은 거저 주어진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애국 지사들의 국내외서의 희생적인 활동과 전민족적인 고난의 인내가 바탕이 되어 이루어졌던 역사적인 기적의 산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민족적 고난속에서의 울부짖는 기도와 노력에 응답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후 어언 반세기를 지나 제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발전을 하려고 안간힘을 다하였지만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특별히 민주주의 발전을 원하는 백성들의 뜻에 부응하는 그런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시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조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또는 상처입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슬그머니 주어진 민주화의 물결이 아니고 너무나 엄청난 대가를 치룬 전겨례의 응답이요, 하나님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온 겨례가 마음을 합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기수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감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생을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한 G. 르페브르가 지적한 것처럼 "지도자를 지도자답게 만드는 것은 지도자의 명령이나 호소가 집합심성(集合心性:국민의 뜻)과 일치할 때에 비로소 민중은 그의 말을 듣게 된다. "는 것입니다. 이 집합심성이 지도자에게 참된 권위를 부여해 주며 지도자답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도자는 백성이 백성에 의하여 백성을 위하여 옹립되어야 한다는 이 진리를 터득해야 바른 정치 철학이 있는 정치 행위나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약속의 땅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광활한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광야, 이것은 불확실한 장(場)이었습니다. 끊임없는 회의와 두려움을 쏟아내는 곳, 이런 마음은 보이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염원할 때 파생되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런지 모릅니다.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확실의 그림자는 드리워졌습니다. 이것은 조만간 두려움과 원망으로 구체화되었고, 이런 그들의 마음은 '황금 송아지'로 주형되었습니다. 불확실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인자-모세-가 사라졌을 때, 그들 사이에 '공포(panic)'가 생겼고, 이것이 황금 송아지로 바뀐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쳐다보고 얻은 두려움과 좌절감 속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우리의 떨림이 민주화 성취를 위한 의지의 약함과 지레 좌절을 생각하는 약한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좌절에 대한 두려움은 곧 좌절을 전제한 것이고, 또 우리의 믿음 없음과 연약함, 비겁함을 폭로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내포된 기대입니다.

환경의 돌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기대가 아니라 실현으로 영글 수 있는 기대입니다. 또 우리의 기대는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기대는 믿음이 기대의 주요 동인이 될 때만이 가능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12인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인이 '입성불능'을 통보한 것은 그들의 기대가 믿음이 만들어낸 기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록·시·묘사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표를 향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가장 높은 정치적목표이다.

(액튼 경/ 자유의 역사와 기타 수필집)

 

자유의 나무는 이따금 매국자와 압제자의 피로 신선함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자연의 비료이다.

(T. 제퍼슨)

 

모든 피압박 국민은, 그들이 할 수 있을 때는 언제나 일어나 그들의 속박을 깨뜨릴 권한이 있다.

(H. 클레이)

 

자유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진 정치 권력이다.

(T. 호브즈 메인/ 대중정치)

 

당신들이 독립국가로 남으려면, 공공의 안전을 위해 결속하라.

(나폴레옹)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이념은 상응하는 권력 없이는 주장할 수 없는 독립이란 사상으로부터 나온다

(L. 랑케/ 프로이센사)

 

독립은 선전만으로 될 수 없고 허장성세만으로 될 수 없다. 독립의 가장 근본적 요소는 각성한 민중이다.

(서재필)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요」 할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 백범일지)

 

자기 자신의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보다 완전하게 우주 속에 확대되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봉사와 아이디어와 행동으로 나라 세우기에 참여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R. 타고르)

 

국가가 강하려면 국민 각자가 강해야 한다.

(손은성/ 투쟁의 語義)

 

자고로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백성이 믿어 주지 않으면 국가는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논어)

 

강물만 건너면 기름진 땅인데/ 여직도 우리는 강가에 있다// 씨 뿌릴 수 없는 언 땅 떠나/하고한 날을 빈 들에서 헤맸다//‥‥ 돌아보면 상기도 검은 기억들이/ 공해를 꿰뚫고 심장에 와 박힌다//‥‥ 강물만 건너면 씨 뿌릴 수 있어/우리는 좀더 살 것 같구나// 살 것 같은 고마움에 강가에서/우리는 좀더 살 것 같구나.

(석용원/ 출애굽抄)

 

잘 가거라 일본아/고달픈 옷자락에/눈물을 씻으며/ 물러가서 흉몽을 안고/ 심연에 누우라/ 고요히 잠자거라/ 자장가는/ 우리의 행진곡으로 하여 주리라//‥‥ 이 해방된 감격/ 이 공통된 환희가/오늘 자유의 기원이 되야/조국을 향하여 바치는/ 한덩어리 열이 되고 힘이 된다면/ 누가 우리의 길을 막으랴// 아 조선의 의지와 지혜와 생명/ 영원토록 생동하라, 도약하라, 비약하라/ 대우주의 창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지고한 가슴속에 정열을 가다듬어/ 무한한 미래에 계속된/ 20세기의 파동 많은 산맥/ 높은 봉우리 위에/ 영원한 자유와 독립의 탑을 세우라.

(김광섭/ 속박과 해방)

 

봉우리에 올라서면 바다가 보이리라/찬란히 트이는 아침이사 오리라// 가시밭 독사닥 찔리는 길에,/ 골마다 울어예는 굶주린 짐승‥‥ // 서로 잡은 따사한 손이 갈려도/ 벗이여! 우린 서로 부르며 가자./ 서로 갈려 올라 가도 봉우린 하나,/ 피흘린 자욱마다 꽃이 피리라.

(박두진/ 새벽 바람에)

 

국가의 안전보장은 국가의 부보다 더 중요하다.

(W. 듀런트)

 

국토는 그 비옥함에 비례해서 경작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에 비례해서 경작된다.

(C.S.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말과 글자와 돈- 이 세 가지는 독립국가임을 상징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정연섭/ 국제공항의 간판)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나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 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人善)을 머리로 드리받아 울리오리다. / 두개골은 째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육조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나 죽은 뒤/ 이 나라 땅이 식민의 너울을 벗었거든/ 내 무덤가에 와서 놀아라/ 새떼처럼하얗게 아이들 데리고 와/ 웃으며 손뼉치며 놀아라// 나 죽은 뒤/ 아직도 이 나라 땅이/식민의 너울로 그늘져 흐리거든/ 내 무덤가에는 오지 말아라/ 돌아가 피흘리며 싸워라/나 죽은 뒤/ 아무 곳에나 잘 자라는 앉은뱅이 민들레로 돋아/ 타는 마음으로 이 땅을 지켜보다/꽃 다하면 풀씨로 산천 떠돌며 보리라/ 너희와 너희의 아이들이 진달래처럼/ 환하게 살고/ 살아 지켜야 할 이 땅에서/ 너희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보리라.

(도종환/ 앉은뱅이 민들레)

 

빛은 옮는다/ 쇠사슬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아이들의 미소를 향하여.

(P. 엘뤼아르/ 평화의 얼굴)

 

독립이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라. 그 제단이 하늘에까지 이르게 하라.

(J. 홉킨슨/ 콜롬비아 만세)

 

육신이 지배하는 땅엔 멸망이 오지만/ 그리움이 빛은 나라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동주/ 神舞鑛- 흙이 전하는 말)

 

 

설 교 노 트

 

해방과 자유

요8:31-36

 

서론

일제 36년 동안의 쇠사슬에서 해방과 자유를 찾았습니다.

해방과 자유라는 단어는 참으로 그리운 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케 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는 곧 말씀이시며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디에서 얻은 해방과 자유입니까?

 

1. 가난에서 얻는 해방과 자유입니다.

해방이 되면 자유는 동시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보면 해방 전의 가난과 해방후의 가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알면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 해방된 가난을 심령의 가난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해방된 가난을 체감할 때 그리스도로 인하여 얻은 부요함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물질이 풍부해서 가난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가난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죄로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와 더 친숙해지고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시면 우리를 죄의 포로에서 영원히 해방시켜 주십니다. 아니 이미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풀려났으니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죄에서 놓임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 죄에서 해방되어 얻은 자유와 기쁨을 나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해주어서 그들도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3. 사망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습니다.

죽음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공포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사망을 두려워하며 가까이 오는 것을 거절하려 합니다. 이것은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인간의 사망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는 사망에서 해방됩니다.

죽음이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부활되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망을 이기게 하시고 죽음에서 해방시켜서 자유를 주십니다.

 

결론

우리 조국의 자유를 찾은 광복절은 참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소망을 안겨 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삶의 자유를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자유도 누려야 합니다.

우리 가난이 예수를 만남으로 해방되고, 죄에서 해방되며, 죽음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을 주님의 말씀으로 풍성하게 해주셨고 우리의 죄를 주님의 몸으로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얻게 해 주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광복의 기쁨

시126:1-6

 

서론

인간에게 있어서 해방과 자유에 대한 소원처럼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36년간 자유를 잃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조국을 잃었고 인권도 잃었으며 우리의 말과 글, 생존권까지 짓밟혀 버렸던 것입니다.

자유가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자유를 빼앗겼던 사람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430년간을 애굽의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1.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의 430년간의 종살이는 분열과 분쟁에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삭과 이스마엘로 인하여 분쟁이 있었고, 이삭의 가정과 야곱의 가정도 역시 그 자녀들간에 분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열한 번째 동생인 요셉을 애굽으로 팔았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 애굽에는 식량이 많았으므로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국무 총리가 되었을 때는 그들이 평안하게 보냈으나 요셉이 죽은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왕이 즉위하면서 애굽인에게 학대를 받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도 살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비슷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당파로 인한내분 때문에 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국력을 배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쟁은 서로의 분열을 초래하므로 단결하는 힘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침입을 막을 수가 없었고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 종살이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어떤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바로 왕의 앞에 서게 하여 애굽이 10가지 재앙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여 비로소 해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연합군의 힘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가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인 것입니다.

 

3. 우리의 자세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 삶의 자세를 뒤돌아 보고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백성이 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그 뜻을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결론

우리 민족은 자유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그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고 잘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열이 되면 안됩니다. 오직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이 분열되고 가족이 분열되면 결국 자유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방종으로 삼는 생활은 망하는 생활입니다. 자유를 남용하지 말고 공의가 세워지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정직과 성실로 일하고 믿음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이루어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광복절이 주는 교훈

눅4:16-20

 

서론

우리나라는 당파 싸움으로 분열되어서 일본에게 점령을 당하였어도 대항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단결력이 아주 강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기란 그야말로 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많은 해방 기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이방 민족에게 침입되어 억압받는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게 되는 내용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해방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광복절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해방입니다.

우리 민족은 36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일본의 박해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계속 많은 사람들이 대항해서 싸웠지만 우리민족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의 감격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의 설움과 고생으로 살았던 국민들은 광복의 기쁨으로 인하여 거리로 나와 춤을 추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참으로 자유를 얻은 감격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해방은 우리의 심령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죄악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심령의 해방을 받았지만 아직도 죄악에서 해방받지 못한 신자들이 있다면 주님을 영접하여 진정한 자유 생활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2. 통일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길이 그만큼 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서 통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로 인한것이었습니다. 통일을 하려면 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한쪽에는 금송아지를 섬겼던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나라 역시 아직도 하나님보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많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통일되려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부정 부패가 없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경건입니다.

우리 민족이 바로 서려면 경건해져야 합니다. 옛 습관은 다 없애야 합니다. 허영심, 남의위에 서고자하는 교만심,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 남을 미워하는 시기심 등을 다 벗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한일 합방되었던 것은 그때 관리들의 부정 부패와 서로 시기하며 다투고 중상 모략하느라고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심령의 경건 생활에 주력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여 주시는 하나님은 그 속에 크신 뜻이 있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내 신 하나님은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를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광복절을 맞이하여 그때 당시의 감격을 되새겨보고 있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주님을 위하여 우리도 희생의 각오로써 복음을 전파하는 생활을 하여 아직도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그리스도를 만나게 도와주어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자유를 얻으라

고후3:12-18

 

서론

광복 기념 주일을 맞아 자유를 얻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기본권입니다. 그런데 이 기본권을 빼앗는 자들 때문에 자유를 잃고 억압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사람의 욕심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정치적인 자유도 얻어야 하지만 근본적인 심령의 자유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1. 자유는 억압하는 세력과 대항해서 이겨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과 싸우려면 힘이

합니다. 힘을 분산시키지 말고 한곳으로 모으고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영적 싸움입니다. 죄와 대항해서 싸워야 하고, 자신과 싸워야 하고,사탄과도 싸워야 하고, 이 세상의 것들과도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령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고생하는 까닭은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성도들은 언제나 이러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움에서 승리하는데 필요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상고하며,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미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안에 있으면 죄에 대하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항상 승리하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완전히 이기신 것입니다.

또 사탄의 시험도 잘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성역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 충만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빨리 배우는 습성이 있습니다. 생각이 잘못되면 범죄하게 되고 범죄하면 죄가 영혼을 속박하기 때문에 자유를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아무리 억압하는 세력과 대항해서 이긴다고 하여도 성령 충만하지 못하면 겉으로는 승리라고 할 수 있어도 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과 싸워서 이기려고 한다면, 그래서 자유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면 안됩니다. 성령으로 살면 그 사람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금지할 법이 없으므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원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자유라고 하여 방종한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을 기르고, 주님을 모시고 살면서 성령 충만하여 참 자유를 얻어야 하겠습니다.기독교는 해방의 종교, 자유를 주는 종교입니다. 우리 신자는 다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유월절과 광복절

출12:40-42

 

서론

1910년에 일본이 강제로 한일 합방을 선언하여 우리나라는 국권을 박탈당하고 36년 동안 압박과 설움 속에서 살다가 1945년 8월15일에 해방과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430년 동안 바로 왕의 압제속에서 출애굽을 한 유월절 사건은 우리 광복절이 지닌 의미와 비슷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유월절과 광복절의 내용을 대조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쓰라림의 회상입니다.

출애굽기 12장 8절에 보면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 가면서 유월절을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무교병은 고난의 떡으로 애굽 관원의 채찍과 진흙 이기기, 짐지기 등의 쓰라림을 회상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광복절은 일제하에서의 많은 박해가 떠오릅니다. 징용으로 끌려간 많은 장정들, 창씨 개명, 국어 사용 금지 등 말로 다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생긴 노부모와 고아들의 굶주림도 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간 자들도 많이 있었고 또 교회가 받는 핍박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난이었습니다.

이러한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부모잃은 설움과 자녀 잃은 설움으로 한이 생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쓰라린 기억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기억들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만다면 우리는 다시 그런 수모들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기억들이 점차 퇴색해가고 있습니다 국민 소득이 조금 높아졌다고 해서 향락과 사치를 일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과거의 쓰라림을 회상하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울어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2. 피값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은 애굽인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은 다 죽는다는 재앙이었는데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래서 재앙을 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 밑에서 신음할 때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일어났고, 그들은 일제의 총칼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러한 분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 그들의 피는 헛된 것이 아니라 조국의 해방을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의 죄를 다 사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죄에서 해방하신 것입니다

애국 지사의 피는 그 나라만을 위한 것이나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 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피값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론

자유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자유와 영적 자유를 위하여 싸우시며 피흘리신 애국 지사들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다시는 쓰라림의 회상을 하는 일이 없도록 경건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 만

성 경 활 용

1. 교만의 근원

(1) 악한 생각

(막7:21-22)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라 교만과 광패니

(2)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복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2. 사람이 교만에 빠지게 하는 것들

(1) 마음이 높아지고 뜻이 강퍅하여

(단5:20)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2) 술을 즐기며 궤휼하여

(합2:5)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3) 죄악을 행함으로

(시94:4) 저희가 지껄이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

(4) 주의 법을 좇지 않음으로

(시119:85)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3. 신체에 비유된 교만의 종류

(1) 교만한 입

(시17:10)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2) 교만한 눈

(시18: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3) 교만한 권세

(겔30:6) 애굽을 붙들어 주는 자도 엎드러질 것이요 애굽의 교만한 권세도 낮아지리라

(4) 교만한 자의 발

(시36:11)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5) 교만한 마음

(시131:1)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합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4. 교만을 만드는 원인

(1) 높이 빼어남

(겔31:10) 그의 키가 높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빼어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2) 화려한 장식

(겔7:20)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3) 배부름

(호13:6)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4) 지식

(고전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5. 교만한 자에 대한 묘사

(1) 악을 행함

(대하26:16)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2) 전능자를 배반함

(욥15:25)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3) 성도를 침

(시56: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4) 멸시함

(시123:4)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5) 견책받기를 싫어함

(잠15:12) 거 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6) 다툼을 일으킴

(잠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7) 사치 함

(사3:16)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면

(8) 자금함

(대하25:19) 네가 에돔 사람을 쳤다 하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자긍하는도다

(9) 조롱함

(시119:51)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 하였나이다

(10) 스스로 속게 함

(렘49:16)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6. 교만이 가져다 주는 것들

(1) 그치게 됨

(겔7:24) 극히 악한 이방인으로 이르러 그 집들을 점령하게 하고 악한 자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2) 낮아짐

(사2: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3) 교만한 권세가 그침

(겔30:18) 내가 애굽 멍에를 꺾으며 그 교만한 권세를 그 가운데서 그치게 할 때에

(4) 하나님께서 누르심

(사25:11) 여호와께서 그 교만과 그 손의 교활을 누르실 것이라

(5)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심

(잠15:25)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6) 교만한 자에게 엄중히 같으심

(시31:23)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7) 교만한 자를 미워하심

(잠8:13)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8) 교만한 자를 물리치심

(약4:6) 하나님 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9) 기도의 응답이 없음

(욥35:12)그들이 악인의 교만을 인하여 거기서 부르짖으나 응락하는 자가 없음은

(10) 패망함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11) 넘어지나 일으킬 자가 없음

(램50:32) 교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겠고 그를 일으킬 자가 없을 것이며

(12) 썩는 띠와 같이 됨

(렘13:9)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7. 교만을 막는 방법

(1) 하나님의 교훈으로

(욥33:16-17)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관련원어풀이

1. Hb'G: 까-바흐

(1) (나무, 하늘, 사람이) 높거나 크다, 높여지다, 올려지다.

(겔19:11, 시103:1)

(2) (마음이) 거만하다, 교만하다.

(사3:16, 렘13:15)

(3) 높다, 존귀하다, 고상하다.

(욥36:7, 사52:13)

(4) (좋은 의미로) 용기를 얻다.

(대하26:16, 시31:1)

(5) 그의 문을 보다 높게 만드는 사람.

(잠17:19)

(6) 높은 곳에 사는 사람.

(시113:5)

 

2. hw:GE 께아-

교만, 오만 불손, 잘난 체 함, 뻔뻔스러움.

(욥22:29, 시31:18, 59:12, 잠8:13, 사9:9)

 

3. Hb'GO 꼬바-흐

(1) 높이, 높음.

(삼상17:4, 욥22:12)

(2) 위엄, 탁월, 장엄.

(렘40:10)

(3) 거만, 오만.

(대하26:16, 렘48:29)

(4) 건방짐.

(시10:4)

 

4. rb'G; 까-바르

(1) 강하다, 강하게 하다, 전능하다, 확증시키다.

(삼하1:23, 욥21:7, 전10:10, 슥10:6,단9:27)

(2) 자신의 힘을 나타내다, 강요하다, 이기다, 정복하다.

(창7:18, 삼상2:9, 시12:5)

(3) 거만하다, 무례하다.

(욥36:9)

 

5. dWz 주-드

(1) 난폭하다, 사악하다, 무례하다, 거만하다.

(출18:11, 렘50:29)

(2) 맹렬하게 행동하다, 사악한 행동을 하다.

(3) 교만하다. 오만 불손하다.

(단5:20)

 

6. !Wr 룸-

(1) 자신을 들어올리다, 일어나다. 오르다.

(창7:17, 출16:20)

(2) 마음이 높아지다, 교만하다.

(신8:14, 잠30:13)

(3) 자신이 능력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다.

(시13:3, 57:6)

(4) 거만한, 자만스러운,

(욥21:22)

(5) 교만스런 눈들.

(시18:28)

(6) 기르다, 양육하다.

(사1:2, 23:4)

 

7. bh'r; 라-하브

(1) 난폭하게 행동하다, 격노하다, 맹렬하다.

(사3:5)

(2) 억압하다, 강요하다.

(잠6:3)

(3) 떨다, 두렵게 하다.

(사60:5)

(4) 맹렬케 하다, 용기를 북돋우다.

(시138:3)

 

8. Hb'GO 야-나-

무례한(자), 거만하다.

(잠16:18)

 

9. ac;n: 나 - 사 -

(1) 들어올리다, 취하다, 받다, 증가시키다.

(창7:17, 렘4:6)

(2) 맹세하다.

(출6:8, 겔20:6)

(3) 자신의 용모를 들어올리다.

(창4:7, 욥11:15)

(4) 바라다, 소원하다.

(신24:15, 시25:1)

(5) 견디다, 당하다.

(욥21:3, 시55:13)

(6) 속죄하다, 용서하다.

(레10:17, 욥7:21)

(7) 취하다, 받다. 붙잡다.

(창27:3, 45:19)

(8) 돕다, 도움을 주다.

(에9:3,스1:4)

(9) 거만하다, 교만하다.

(잠30:32, 겔17:14)

 

10. hl;[; 아-팔

원래의 뜻은 "부풀어 오르다. 무기력하다. 물러서다"이다.

거만하다, 교만하게 생각하다

(합2:47, 민14:44)

 

11. lwOdG: 야-히-르

높은, 교만한, 부풀어 오른

(삼상2:3, 시75:5)

 

12. qt;[; 아-타-크

대담한, 뻔뻔스러운, 무례한.

(삼상2:3, 시31:19)

 

13. @n:a}v' 솨아난-

(1) 오만, 교만.

(왕하19:28, 사57:29)

(2) 편안히 사는, 부주의한, 교만한.

(시123:4, 사32:9)

(3) 조용한, 잠잠한.

(사33:20)

 

14. Jperpersomai 페르페류오마이

(허영심을 많이 갖고) 자신을 자만자나 허풍선이로 나타내 보이다. 자신을 뽐내거나 자랑하다.

(롬1:30, 딤후3:2)

 

15. tufovw 투포-

원래는 "연기를 올리다, 안개에 휩싸이다"의 뜻이다.

(1) 교만하게 하다, 무례하게 하다, 잘난 체 뽐내다, 자만심을 가지다.

(딤후3:6)

(2) 우둔해지다(교만과 자만으로), 어두워지다.

(딤전6:4, 딤후3:4)

 

16. fusiovw 푸시오-

불다,부풀어 오르다, 잘난 체 하다,교만해지다, 팽창하다.

(고전8:1, 4:18, 골2:18)

 

17. uJperhvfania 휘페레-파니아.

(1) 눈에 잘 뜨임, 잘난 체 함, 거만, 자랑.

(막7:22)

(2) 눈에 더 잘 뜨이게 함, 자신을 타인보다 높이 나타내 보이는, 저명한, 두드러진, 거만한, 자랑하는.

(눅1:51, 롬1:30, 약4:6, 벧전5:6)

설교예화자료

송도 계원

 

세조 때의 일등 공신 한명회가 나이 40이 되어서 비로소 송도 경덕궁직이 되었을 무렵, 송도에 있던 관료들은 대개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명절 날 모두가 만월대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면서, 우리는 서울 사람들로서 벼슬길을 따라 이곳에 와 있으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끼리 계를 모아 오래도록 우의를 지속하자고 했습니다. 이때 한명회가 그 계원이 되려고 무척 애썼으나 경덕궁직 한명회쯤은 문제로 삼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이 바뀌어 한명회가 세조를 도와 단종을 내쫓고 일등 공신이 되니, 그의 세력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이것을 본 옛날 송도 계원들은 한명회를 계원으로 받아들였더라면 그의 덕을 볼 것인데 일시의 좁은 생각으로 그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그의 옆에도 가지 못하는 것을 매우 후회했습니다.

그후부터 눈앞의 권세만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박한 자를 가리켜 '송도 계원'이라고 했습니다.

 

 

안뻐꾹의 유래

 

황해도 중천에 안서방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이한 술법을 배우기 위해서 산속에 들어가 도사를 찾아 축지법, 변신법 등등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출타한 동안에 도사가 비장하고 있는 술서를 찾아내어 보니, 변신법이 적혀 있었습니다 안서방이 교만한 마음으로 그대로 해보니 변신이 되어 짐승도 되고 새도 되었습니다.

그는 도통하였으니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귀가하는 즉시로 변신술을 행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이마와 가슴에 부(符)를 붙이고 뻐꾹새가 되어 정면 유목에 올라 앉았다가 그의 처가 물길러 나옴을 보고 뻐꾹 뻐꾹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그 처가 보고 "여보 어찌된 일이요? " 하고 묻자 안서방은 "여보, 내가 뻐꾹이로 보이지 않소?"하였습니다. 이때 처는 "여보 미쳤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안서방을 안뻐꾹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요사이 남보다 기도를 좀더 했다고 해서 예수나 성자를 자처하며 기이한 거짓 예언을 부끄럼없이 하는 교만한 자를 가리킵니다.

 

 

사랑과 평화

 

인간은 힘이 커지면 세력을 만들어 정의를 말살하고 종국에는 진리를 등지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더더욱 종교 싸움은 무엇보다 치열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그러했고, 에서와 야곱이 그러했으며 이스마엘과 이삭이 그러했습니다. 언제나 육으로 난 자는 영으로 난 자를 핍박하여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쉬지 않고 돌면서 정의의 편에서 진실을 기록해 왔습니다.

자칫 진리는 수적으로 판단되기 쉬운 법이니 교회는 시대적인 사명을 스스로 자각하고, 어떤 수량의 물결 앞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만고 불변하여 사랑과 평화로 일관하는 진리는 항상 살아 있는 능력의 무기입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추수기에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선한 주의 청지기로서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가끔 기도도 없이 전도의 문턱에 앉아 정죄와 비방을 일삼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 정의의 사자가 되어 하늘 꼭대기에 올라선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고라신아, 고라신아, 네가 하늘 꼭대기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고 경책하셨습니다. 함부로 심판자의 자리에 선다면 예수님은 어느 자리 에 계셔야 하겠습니까? 그릇된 정죄와 비방은 결국은 자신을 욕되게 할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민족 우월감

 

아프리카의 하렌 파크라는 혹인 부족이 하나 있는데 이 사람들은 혹인 가운데도 키도 작고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이긴 하나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자기네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지음을 받았고 일등되는 종족이라고 자랑한다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참 주제파악을 못하는 웃긴 종족이라 생각하겠지만 세계 민족이 다 이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계 인류의 일치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계 인류는 한 조상 아담의 후손으로 실상은 한 종족입니다. 기후와 환경에 따라서 얼굴의 모습과 피부와 키가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지만 실상 다 한 혈통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면 어떤 민족이나 소위 민족적 우월감,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삽니다. 이것은 백인만이 아닙니다. 황인도 그러하고 흑인도 그러합니다.

 

 

마차꾼의 연주

 

독일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주변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바하는 어느 때 몇 주일간 매우 귀찮게 구는 한 외국인 음악가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습니다. 이 외국인 음악가는 평범한 음악가이면서 자신이 무슨 대단한 존재나 죄는 것처럼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거장인 바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형편없는 작곡과 피아노 연주로 몇 시간이고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하 유파 사람들의 연주를 지독한 혹평을 하였습니다. 어느 때인가 바하의 수제자인 쿠라우제의 연주를 혹평하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 정도의 연주라면 우리나라에서 어린애도 합니다. " 바하는 언젠가 이 허풍선이를 한번 혼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파이프 올겐의 연주가 요한 루트비히 쿠레프스가 바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하의 친구이기도 하고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바하의 계획은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이 음악가에게 마차꾼의 복장을 하고 외국인이 또다시 연주를 시작할 때 들어오도록 계획을 짜놓았습니다. 쿠레프스는 외국인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쿠레프스는 시치미를 떼고 외국인 앞에서 피아노 소나타를 익숙하게 연주했습니다. 여기서 말 않은 외국인은 아무말도 못했습니다.

바하는 외국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차꾼이 라도 보통 이 정도는 하지오."

그 이후 그 허풍쟁이 음악가는 바하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100:9

 

하루는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의 집에 한 저명한 출판사에서 작가가 권장하고 싶은 문학 작품을 백권만 선정해 달라는 청탁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이러한 편지의 내용에 그는 이런 내용으로 답장을 띄웠습니다.

'귀사에서 보낸 편지를 잘 보았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백권의 책을 선정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까지 낸 책은 아홉권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오"

끝도 없는 이런 오만은 키워서도 아니 되고, 욕심을 따를 수도 없으며, 뜻을 채울 수도 없고, 즐거움이 최고에 이를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록·시·묘사

 

오만함과 우아함은 같은 장소에 살지 않는다.

(T. 풀러/ 금언집)

 

탐욕스러운 자는 재산이 쌓이지 않으면 근심하며, 교만한 사람은 권세가 늘어나지 않으면 슬퍼한다.

(장자)

 

교만은 탈을 쓴 자만심이다.

(T. 풀러/ 금언집)

 

거만은, 우리들의 비참이나 오류의 한복판에 있어서도 지극히 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들을 붙들고 있다. 우리들은 남의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즐겨 생명까지도 버린다.

(B. 파스칼/ 팡세)

 

뻐기는 인간은, 현명한 자에게 경멸되고, 바보에게는 감탄되고, 기생적 인간에게 받들어지고, 그들 자신의 거만심의 노예가 된다.

(F. 베이컨/ 수필집)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은 파만하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버티는 자가 적지 않다.

(J.W, 괴테/ 격언과 반성)

 

요즈음 세상 사람들은 하급관리에라도 임명되면 교만해지고, 대부가 되면 수레 위에서 춤을 추며, 정승이 되면 숙부 이름까지 부르려든다.

(장자)

 

교만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 대한 경멸이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거만한 여자는 자존심으로부터 질투로 옮긴다.

(스탕달/ 랑젤 공작)

 

거만 불손한 성격에 있어서는, 자기에 대한 분노와 남에 대한 격노와는 종이 한 장의 차이다.

(스탕달/ 적과 흑)

 

거만은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보다도 비싸게 먹힌다.

(T. 제퍼슨)

 

사람의 성품 중에 가장 뿌리 깊은 것은 교만이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나 겸손할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데, 이것도 하나의 교만이다. 자기가 겸손을 의식하는 동안에는 아직 교만의 뿌리가 남아 있는 증거이다.

(B. 프랭클린)

 

사치하면 교만하기 쉽고 검약하면 고루하기 쉽다. 교만한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논어 述而篇)

 

교만한 자가 둘 모이면 당나귀 머리 하나조차도 잘 조정하지 못한다.

(프랑스 격언)

 

오만은 키워서는 안되고, 욕심은 따를 수가 없으며, 뜻은 채울 수 없고, 즐거움은 최고에이르러선 안된다.

(예기)

 

부자의 오만보다는 이미 없어진 행운을 참는 편이 더 낫다.

(팔라다스/ 그리이스 詞華集)

 

하는 일이 잘되고 못됨에 따라 오만해지고, 겸손해진다.

(테렌티우스/ 헤키라)

 

반지빠르기는 제일이라. < * 되지 못한 것이 교만스러워서 가장 얄밉다는 뜻>

(한국 속담)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 <*사람답지 못한 자가 교만하고 까다롭게 군다는 뜻>

(한국 속담)

 

대신 댁 송아지 백정 무서운 줄 모른다. <*제가 의지하는 주인의 세력을 믿고 안하무인격인 거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함>

(한국 속담)

 

노루꼬리가 길면 얼마나 길까. <*작은 재주를 지나치게 믿는 사람을 비꼬아 이른 말>

(한국 속담)

 

하루를 늘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사람들은/ 서로의 오만한 고집과 자존심을 씹히고 씹다가/ 만원버스 고개를 불쑥불쑥 내밀며 내려

(권대웅/ 정육점)

 

사람들아/ 잿빛 바람만 몰고 다니는/ 사람들아/ 행여 교만하지 말라/ 해마다 오월이 오면/ 잠시 눈감고 바라볼/ 순연한 고개 하나 거기 있나니.

(이상국/ 5월이 오면)

 

자기 몸을 가눌 수 없게 된 왕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을 하였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왕의 악담에/ 고관들은 손뼉치며 환호를 한다.

(하이네/ 벨사살 왕)

 

단 하나의 눈짓으로 인간에게/ 뿌리박힌 욕심을 물리치나니/ 거만함의 자식인 여러 악덕들/ 그 두려운 무리 또한 물리치도다.

(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리며)

 

분노와 교만과 자랑 같은 것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슬퍼하기.

(양왕용/ 버리기 · 3)

 

그는 괴로워하였다/ 저 경멸의 눈에 대하여도/ 오만의 입에 대하여도.

(이성선/ 단독자)

 

정념의/ 화신인 양/ 불꽃되어 활활 탄다//뙤악볕/ 맞겨루는/ 너 칸나의 붉은 의지,/ 아무도/ 꺾지 못하는/ 오만스런 자태여.

(김수자/ 오만)

 

지상과 제단 위에 계시는 하나님,/ 굽어보사 저희의 외침을 들으소서./ 이 땅의 지배자들이 비틀거리고/ 백성들은 방황하다 죽어갑니다. / 황금의 벽이 저희 위에 무너져 내리고/ 경멸의 칼이 저희를 갈라놓습니다. /당신의 천둥번개는 남겨 두시고/ 저희의 교만을 거두어 가소서.

(G.K 체스터톤/ 우리의 교만을 거두어 가소서)

 

 

설 교 노 트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를 치리라

삼하5:6

 

서론

다윗 왕과 그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인 여부스 사람을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부스 사람들은 아주 교만한 언사로 다윗에게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는 사람입니다. 이런 다윗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1. 소경과 절뚝발이의 의의

소경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요, 절룩발이는 다리가 성하지 못하므로 정상적으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불구자를 연결시켜 말한 곳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3절에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와 소경들을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소경과 절뚝발이는 불구자의, 대표로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구자가 다윗과 같이 용맹한 장수를 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교만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2. 소경과 절뚝발이도 너를 물리치 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때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멸시하여 한 말입니다. 곧 소경과 절뚝발이 같은 불구자들도 다윗을 막아낼 수 있다는 말이니 얼마나 교만한 입장에서 대적자를 멸시하는 말입니까?

여부스인들이 그렇게 오만한 태도로 말을 한 것은 예루살렘이 그 위치가 높은 지대에 있었고 그 주위는 깊은 골짜기들로 되어 있었으므로 난공 불락의 요새지로 믿고 이렇게 풍자적으로 교만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 부스인들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되는 곳일지라도 뒤에 계신 하나님께서 도우시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 앞의 일만 보고 급히 판단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 마음의 교만으로 인하여 결국은 실패나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3.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다윗은 이런 조롱과 멸시의 말을 들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시온성을 빼앗았으므로 이는 다윗성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여부스 사람들의 교만한 말을 풍자한 것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이 이런 불구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이 한 말을 거꾸로 빗대서 다시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한 말은 여부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고 다시 들어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결론

사람들은 남의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하여서 언제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교만한 언사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남을 함부로 조롱하며 멸시하면 결국 그 결과는 자신들이 멸시와 조롱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있는 자리가 안전한 자리라고 하여 방심하게 되고 상대방을 향하여 교만한 자세로 대하게 되면 결국 스스로가 파멸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움

삼상15:12

 

서론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처음에 왕위에 오를 때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으나 갈수록 그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의 명령까지도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사울은 갈멜에다가 자신을 위한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사울의 교만심은 점점 더 높아만 갔던 것입니다.

 

1. 기념비를 세운 것은 바람직합니까?

기념비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을 들에 새겨 오랜 후대에까지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는 것입니다.

어떤 훌륭한 인물이 인류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였거나, 국가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였거나 전쟁에서 혁혁한 결과를 가져왔을 때 그것을 후세에까지 길이 전하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이 그 일을 주선하여 기념비를 세워주어야 바람직한 일이고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으로서 자신이 스스로 기념비를 그것도 자기를 위하여 세웠으니 왕으로서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몰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는 일이며 또 비판하는 자가 생길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이 어찌 바람직한 일이 되겠습니까?

 

2. 기념할 만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기념비에 기록한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배경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며 남녀 노소와 우양 등 가축을 다 죽이라고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인 아각은 사로참고 양과 소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과 기름진 것은 남기고 남은 것만 다 진멸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칼을 뽑으셨는데도 사울은 어리석게도 그것을 모르고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범죄한 것을 기념한 것이 되었습니다.

 

3.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울이 갈멜에다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은 사무엘은 사울을 쫓아가서 우양을 숨긴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우양을 가져온 것이라고 하며 거짓말까지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책망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느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이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스스로 교만하여 져서 기념비를 세웠으며 자기를 위하여 좋은 것을 다 숨겨두었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기념비를 세운 결과로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받은 책망은 곧 하나님께 받은 책망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계속하여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당연한 징계인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일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늘 명심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무들이 왕을 세움

삿9:8

 

서론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이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여 형제 70인을 다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은 왕이 되었는데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이 그 위기에 스스로 숨었으므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에 가서 세정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이 한 일을 비유로 네 가지 나무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1. 왕위를 거절한 세 나무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고대로부터 귀함을 받는 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무들이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 같은데도 이 나무들은 한사코 왕이 되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그것을 버릴 수 없다고 하였고, 무화과나무는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버릴 수 없다고 하였으며,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술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며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왕 되기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열매로 만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네들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으며 자기들이 가진 본래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만족하였습니다

사람마다 하늘에서 주신 직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왕위보다 더욱 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직분은 다 뜻이 계신 것이며 그 뜻대로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왕이 되라는 유혹도 단호히 거절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감사함으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왕 되기를 바라는 교만한 가시나무

창세기에 보면 가시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가시나무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불만과 괴로움만 주는 귀찮은 존재입니다.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가서 "우리들의 왕이 되라"고 하니 가시나무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좋아서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의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고 교만하게 말하였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마귀는 옳은 것은 싫어하고 거짓된 것, 남의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참으로 미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 안에서도 가시나무와 같은 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저 직분만 탐내고 제대로 봉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높은 자리는 다른 사람이 진실하게 권할 때도 겸손하게 사양하는 것이 지혜롭고 덕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존경받는 위치에 올려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분수에 지나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감투를 탐하는 것은 가시나무와 같이 교만한 마음이요, 미련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들이므로 더 높고 더 낮음이 있을 수 없는 다 동일한 자들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교만심을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교만으로 인하여 진노하실 것입니다.

 

 

문둥이가 된 왕

왕하15:5

 

서론

유다 왕 아마사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었을 때는 16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가 문둥이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정말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왕의 이름

먼저 왕의 이름을 살펴보면 열왕기에서는 그 이름이 "아사랴"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뜻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 "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에는 "웃시야"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 뜻은 "여호와가 내 힘이라."는 뜻입니다.

왜 한 사람의 이름이 이렇게 둘로 다르게 기록되었는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 사람이 두 이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두 이름의 주인공의 행적이 너무 흡사하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 보아야 확실할 것입니다. 열왕기서와 역대기를 기록한 기자들이 각각 다른 이름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2. 왕이 문둥이가 됨

존귀한 나라의 왕으로서 부러울 것이 없던 왕이 가장 비참한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아사라 왕은 자기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 또 매우 선정을 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역대하 26장 16절에는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서 분향하려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아사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하셔서 강성하게 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텐데 오히려 교만하여 져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하나님의 제사장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이 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성전 향단에 불을 붙이는 일인데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아무리 왕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라는 이름을 앞세워서 신성을 침범하였으니 참으로 무서운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사라 왕이 문둥이가 되게 하셨고 성전에서 몰아내셨습니다.

 

3.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함

문둥이는 병이 있는 동안은 항상 부정하기 때문에 혼자서 살아야 하고 집 밖에서 살도록레위기에 보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라도 왕궁에서 살 수가 없었으므로 성밖에서 별궁에 갇혀서 죽는 날까지 문둥이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교만이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만으로 인하여 자신을 멸망시킨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교만하여 져서 저주를 받은 범죄자의 표본이 된 아사랴 왕을 보았습니다.

교만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최대의 적입니다.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사라 왕은 자기가 강성하게 되자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성전향단에 불 붙이는 일을 월권하여 자신이 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분수를 잘 지켜서 아사라 왕과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교만이 오면 실패도 온다

잠11:2

 

서론

인간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가 교만죄입니다. 인간의 시조인 아담도 교만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으며 성경에는 교만으로 패망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천사도 교만해져서 타락하여 사탄이 되었고, 사울 왕도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교만은 왜 옵니까?

 

1. 명예욕으로 인해서 옵니다.

교만은 언제나 명예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명예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곧 교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길 마태복음 20장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만으로 가득찬 사람들은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여 자신을 높은 자리에 올려 놓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낮은 자리에 처하려 한다면 높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인데도 자신이 교만으로 인하여 높아지려고 하니까 반대로 낮은 자리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비판합니다. 결국은 자신의 교만으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풍부함으로 인해서 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실력이 좋아서 자신이 부자가 된 줄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해져서 이 세상에서는 재물 이외에 다른 것은 다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재물을 벌기가 무척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지키기는 더욱 어렵고 바로 쓰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부한 물질을 주시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하나님의 사업에 봉사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물질이 풍부해지면 나만 잘 살고, 잘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자들 앞에서는 권위가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이 것은 다 교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거두어 가시면 그만입니다. 아니 재물은 그냥 두실지라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밭에 소출이 많다고 기뻐하며 교만해지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부르시면 그 많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로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은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권력으로 옵니다.

로마서에 보면 모든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권세자들을 축복 하셨으나 도리어 그 축복을 배반하고 교만해진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처음에는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신이 드려서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그 인생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게 됩니다. 또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라가 융성해지자 교만해져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성전 향단에 불 붙이는 일을 자신이 왕이라고 하여서 월권하여 자신이 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문둥병이 발하여 평생을 갇혀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모든 권력자는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해지면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결론

교만은 명예나 부함이나 권력 이외에도 힘이나 지식이나 재능 등 무엇으로든지 올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무슨 장점이 있든지 간에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도로 찾아가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 인생은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

약4:8

 

서론

야고보 사도는 두 마음을 품는 신자들에 대하여 매우 섭섭히 생각하여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마음을 품으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하였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아무리 경건하게 보일지라도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하였으며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마음에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 속에 계시를 원하시는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간음한 여인같이 세상 편에 서 있습니까?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모시면 하나님께서 더욱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지만 세상과 짝하여 욕심을 따라 살면 마귀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우리를 피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와 같이 계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고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세상 일을 생각하고 계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마음, 마귀와 벗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오직 한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교만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날 것이고,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 교만한 마음과 겸손한 자

주 앞에 자기를 완전히 낮추고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곧 겸손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박식하고 명예와 권력이 있고 재물이 많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만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시고 미워하시는 것이 바로이 교만입니다. 잘난 자들의 교만도 미워하시는데 못난 자들이 가장 큰 체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즐기는 그런 교만은 더욱 미워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가장 겸손한 자세로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고서는 겉으로는 겸손한 척 가장하는 교역자나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 외식하는 자이며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언제나 물리치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으니 우리 신자들은 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한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하나님과 다른 것을 병행하여 섬기면 그것도 역시 교만한 것이며 두 마음을 품은 자가 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나 가족이나 권력 등, 그런 것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가장 낮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귀하게, 기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한마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하겠습니다.

 

 

서기관들을 삼가라

막12:39-40

 

서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체 하고 다니지만 그들의 속은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고 권위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이란 유대인 사회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로서 이것을 가르치는 임무가 있었고, 랍비 또는 율법사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까?

 

1. 이들은 허영심에 도취된 자들입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녔는데 이는 그들의 허영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긴 옷은 예식 때 입는 옷으로 풍채를 더하고 위세를 가장하기 위하여 입는 옷인데 그들은 평상시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들의 풍채를 좋게 보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긴 옷에 차는 경문을 넘게 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실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며 다닌 것이니 참으로 교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허영은 다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실제의 실력은 아닙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실력이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2. 존경을 받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존경이라는 것은 자신이 받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행실을 보고 감동하여 높여주면 그것이 바로 존경받는 것인데 서기관들은 스스로 존경을 받고자 하였으니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시장이란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는 곳이며경제적으로도 활발한 거래가 있는 곳입니다. 이 시장은 어떤 특정인만 있는 곳이 아니라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서기관들은 존대를 받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존대를 받으려 하면 오히려 멸시를 받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3. 탐욕으로 가득찬 자들입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그들은 원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나 사회적으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탐욕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언제나 높은 자리만을 탐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말석으로 쫓겨나면 부끄러운 일이며 말석에 앉아 있다가 상석으로 앉으라고 권하면 영광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낮은 자리에 처하기를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서기관들은 허영과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찬 자들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하며 가난한 과부의 재산을 다 강탈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지만 오히려 그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는 몰인정한 행위를 한 자들입니다.

주께서는 그런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교훈하셨습니다. 남에게 존경받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윗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겸손함으로 나에게 있는 허물과 약점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보이십시오. 그것이 교만함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

 

서론

우리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조언도 해주고 잘못된 것도 바로 잡아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잘못 판단하여서 스스로 자랑하며 교만해지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가 스스로 살피고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1.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태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우리 스스로가 괜찮다고 하면서 과찬하는 교만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앙이 차지도 덥지도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역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상태는 아닌지오. 어떤 사람은 자만하면서 무슨 일이라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이 덤비다가 막상 일을 맡기면 제대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조그마한 시험만 닥쳐도 금방 쓰러질 듯 보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굳건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갈대와 같이 어리석은 생각이나 교만한 마음으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지 말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 변함없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을 확증하려면 우리의 죄를 벗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짝한 죄, 물질을 탐낸 죄, 남보다 내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 교만죄 등 모든 죄를 벗어 버려야만 자신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죄가 바로 교만한 죄입니다. 그것은 물질을 사랑하는 것 같이 뚜렷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닌 듯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을 싫어하십니다. 히브리 기자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교만한 죄까지 다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3.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야 우리 신앙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죄의 근원도 뿌리뽑게 되는 것입니다. 잘 알 수 없는 교만죄까지도 다 소멸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는 불과 같이 능력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들어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신자는 평소에는 활발하고 힘이 있어 보이다가도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는 활자도 없고 자신도 없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비겁자를 용기있는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결론

우리는 자신을 확증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경건되고 겸손합니까?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상태가 어떠한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의 죄를 다 벗어 버리고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교만함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살피려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지를 살피면 됩니다. 불과 같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교만과 악과 죄를 제거하고 온유와 겸손함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어 자신을 확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자고와 오만과 자긍과 거만

렘48:29

 

서론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한 교만 곧 그 자고와 오만과 자금과 그 마음의 거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만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고와 오만과 자급과 거만은 무엇입니까?

 

1. 자고(自高)

"자고"라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높아지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오히려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높여주는 것도 좋지만,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주시는 것이 최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있어서 그것을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하였는데 주의 응답은 그로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찌르는 가시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위대한 신앙의 인물도 자고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시기 위해서 찌르는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2. 오만(傲慢)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자를 규명하였는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건방진 자세를 가리켜서 오만 불손하다고 합니다. 겸손하지 않은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3절에는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만한 자세를 갖지 말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남을 대해야 하겠습니다.

 

3. 자긍(自羚)

"자긍"이라는 말은 스스로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자랑한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며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금함도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만이 지나쳐서 자긍하다가는 자기와 남까지 망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4. 거만(懼慢)

거만도 교만과 같은 말입니다. 잠언 1장22절에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한다"고 하였고, 이사야 2장 12절에는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는 결국 거만한 자들입니다.

 

결론

자고와 오만과 자금과 거만은 모두 교만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대할 때 건방진 자세로 대하며, 자신의 한 일을 스스로 자랑하며,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 다 교만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합니까? 스스로 낮아지며, 하나님과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한 자세로 임하며,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감추며 오직 하나님만을 나타내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교만한 자의 멸망

잠16:18

 

서론

성경에는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한 자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기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자들이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웃시야 왕의 멸망

웃시야 왕은 유다의 왕으로서 자기 부친 아마사의 행위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이기게 되었고 각국에서는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는 성을 쌓아서 국방을 튼튼하게 하였고 농업정책이 흥왕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점점 흥왕하고 자신의 이름이 널리 떨치게 되자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행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으며 대제사장 아사랴의 충고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웃시야 왕을 치셔서 문둥병이 생기게 하셨고 웃시야 왕은 그 문둥병으로 인하여 왕궁에서 쫓겨나고 별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제사장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만 하였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권력을 앞세워 교만하게 굴다가 벌을 받아 멸망한 것입니다.

 

2. 느부갓네살의 멸망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두 번째 왕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세임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높아진 것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왕위가 폐하였고 영광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소처럼 풀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3. 헤롯 왕의 멸망

헤롯 아그립바는 대 헤롯의 손자입니다. 그는 야고보를 죽인 왕이었는데, 사도 야고보를 죽일 때는 참으신 하나님이시지만 헤롯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받았던 것입니다. 그가 시들과 두로 사람들 앞에서 교만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가로 채다가 주께서 치심으로 충이 먹어서 죽었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그저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들을 큰 권세와 영광의 자리에 올려 놓으시고 그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인간들에게 무조건 영광을 돌리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위엄도 주시고 큰 권세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영광도 주셨건만 그 은혜에 대해서는 조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은해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명령을 거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단호히 처벌하십니다. 다윗 같은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과 축복을 자기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들렸기에 그의 위가 견고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함으로 멸망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받는 영광을 모두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교 사

성 경 활 용

1. 교사

(1) 하나님께서 교사를 세우심

(고전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2) 바울이 복음의 교사로 세움을 입음

(딤후1:11)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3) 교회에 교사가 있었음

(행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관련원어풀이

1. $Wl 루-츠

원래는 "더듬거리다"의 뜻이다.

(1) 야만적이거나 이방적인 말을 하다, 조롱하다, 비웃다.

(잠9:12)

비웃는 자, 조롱 자.

(시1:1,잠9:7)

(2) 번역하다, 통역하다, 번역자, 통역.

(대하32:21, 사43:27)

(3) 조종하다, 비웃다.

(시119:51, 잠14:9)

(4) 어리석게 행동하다, 거만하게 행동하다, 조롱하다.

(사28:22)

 

2. didavskalo" 디다스칼로스

(1)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의무를 가르치는 사람, 가르치기에 합당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롬2:20, 히5:12)

(2) 유대교의 선생.

(눅2:46)

(3) 큰 능력으로 군중들을 이끄는 사람(세례 요한, 예수).

(눅3:12, 요1:38)

(4) 예수님 스스로 사용하심.

(마23:8)

(5) 사도.

(딤전2:7, 딤후1:11)

(6) 기독자.

(행13:1, 고전12:28)

설교예화자료

선생님, 우리 선생님

 

· 첫번째 이야기

위대한 생물 학자인 토마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가 강의를 끝내고는 내가 분명히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예, 당신이 저와 칠판사이에 서 계셨다는 점만 빼구요." "그래요? 나는 분명히 하려고 최선을 다했소. 그러나 내가 투명 인간이 될 수는 없지 않소?"

· 두번째 이야기

하워드 헨드릭스(Howard Hendricks)박사는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교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헨드릭스는 그 교수댁을 지날 때가 많았는데 밤이고 이른 아침이고 그 분은 책에 몰두하셨습니다. 헨드릭스가 하루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박사님, 어떻게 항상 공부를 하실 수가 있습니까? 멈추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

교수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학생들이 고인 웅덩이에서가 아니라 흐르는 시내에서 물을 마시게 해주고 싶다네."

 

 

한 교육자의 소망

 

- 부제 . 페스탈로치의 생애 I

 

평생을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가 죽은 위대한 교육자 페스탈로치의 사후에 그의 헌신적 삶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를 기리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동상 설립 사업이 추진되었고 드디어 동상이 완성되어 제막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완성된 동상의 모습은 페스탈로치가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이를 내려다보고 그 어린이는 위대한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는 자세였습니다. 동상은 뛰어난 솜씨로 조각을 해서 고인을 퍽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인의 절친한 친구들은 이 훌륭한 동상이 교육자의 소망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은 아직 달성되지 못한 목표인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표현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상은 다른 모습으로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무릎을 꿇은 어린이가 스승의 얼굴이 아니라 그 너머 먼 곳을 바라보는 형상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로써 페스탈로치의 진정한 소망이 동상에 표현된 것입니다.

 

 

페스탈로치 선생 II

 

평생을 어린이와 가난한 이들의 친구로서 선생님으로서 삶을 영위하다 간 살아있는 교사들의 상징인 페스탈로치 선생의 묘비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846년 1월 12일에 세워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교훈과 감동을 전해주는 페스탈로치 선생의 생애를 묘비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1746년 1월 12일 취리히에서 태어나 1827년 2월 17일 부르크에서 숨진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여기에 잠자다. 노이호프에서는 가난한 자의 구호자, 리인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는 주민에게 가르친 사람, 슈탄스에서는 고아의 아버지, 부르크돌프와 뮌헨부후제에서는 초등 학교의 창시자, 이벨돈에서는 인류의 교육자, 인간 ! 그리스도교 ! 시민 ! 모든 것을 남을 위해서 바치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그 이름에 은혜가 있기를 ! "

결코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르고 묵묵히 인간사랑을 실천했던 페스탈로치 선생의 거룩한 삶을 따르는 많은 교육자들이 생겨날수록 우리의 자녀들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훈장 선생님과 공자님

 

- 부제 ' 이조 시대 해학가 정수동의 글방 시절

 

이조 시대 해학가 정수동의 어렸을 적의 일화입니다. 정수동이 어려서 글방에 다닐 때 하루는 글을 배우는 도중 졸다가 훈장 선생님에게 메를 맞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훈장 선생님이 조는 것을 본 정수동은 선생님께 "선생님, 선생님은 왜 졸아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훈장 선생님은 "난조는 게 아니라 나이가 먹어서 모든 것을 잘 잊어버리지. 그래서 내 혼만 살짝 빠져나가 공자님한테 모르는 것을 물어보러 가는 것이란다. 그게 아마 너희들 눈에는 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겠지."라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수동이가 졸자 훈장 선생님은 또 존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수동이가 말하기를 "전 조는 게 아니에요, 저도 선생님처럼 공자님한테 다녀왔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훈장 선생님은 수동이가 깜찍하고 당돌한 놈이라고 생각하여 "그래 공자님은 만나 보았느냐? "고 물었습니다. 이때 수동이가 "그럼요."라고 하자, 훈장 선생님은 "공자님께 무슨 말을 물어보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에 정수동은 "훈장 선생님이 전에 오셨느냐고 공자님께 물었더니 한 번도 오신 적이 없다고 하시던데요."라고 익살스럽게 대답하였습니다.

 

 

교육자의 참된 사랑

 

운현 초등 학교의 선생님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린이들을 가르칠까 귀를 기울여 봅시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아이들을 획일적인 잣대로 등수를 매기는 방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어떤 아이는 국어를 잘하고 어떤 아이는 셈이 빠르고 또 어떤 아이는 음악에 큰 흥미를 느끼는 등 다르거든요. 그리니까 이 학생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구나 하는 평가가 더 필요하지오." (4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박수일 선생님의 말)

"교사의 자질 중 가장 필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아동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겠지오.그래서 저는 면접 볼 때 그 교사가 얼마나 아동을 사랑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가지를 물어봅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심지어 "집에 강아지 키웁니까? 동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런 질문도해요.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 써서 교사들을 채용했습니다(운현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말)."

"제가 바람직한 교육을 행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보람이 큽니다. 자부심도 있구요. 하지만 힘들기도 그만큼 힘들어요. 외국의 예가 있다고 하기는 하나 우리의 교육 현실에서는 처음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날들이에요. 학습지도 기존의 것을 사용하지 않고 창조력을 키을 수 있는 새로운 내용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한 장 한 장이 다 많은 생각과 노력을 요구하지오. 학생이 30명뿐이라 편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30명이라도 한 사람 한 사람 다 접촉하고 신경써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벅찬 것 같아요(1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김명희 선생님의 말)."

 

 

어린이와 함께하는 교사

 

널뛰기 풍속이 자취를 감추어가는 데 아쉬움을 크게 느낀 국민 학교 교사가 10여년의 고심 끝에 새로운 널뛰기 기구를 고안해 냈으니 화제가 될 수 밖에‥‥‥‥

서울 동작구 사당2동에 있는 이영자(李英子 · 52) 지정춘(池貞春 · 52) 교사가 그 장본인입니다. 그녀들은 그동안 연구 개발했던 널뛰기 기구를 작년 12월에 있었던 제19회 전국교육자료전시회에 「다목적 민속 널뛰기운동 지도자료」로 출품해 체육교육 분야에서 1등급을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널뛰기 장면의 그림과 함께 그 내용이 소개되고 있는데 실제 장면을 전연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의 종이 교육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오. 특히, 재가 어렸을 때 널뛰기를 즐겨했던 추억을 되살려 이것을 도시 아동들에게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혜를 짜기 시작한 것입니다. "

새로운 널뛰기 틀을 고안해 낸 동기에 대한 지 교사의 말입니다. 두 교사는 이 같은 널뛰기가 적어도 전국 각 초등 학교에만이라도 보급돼 체력향상과 협동정신을 함양시키는 기본 요인이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교사의 할 일

 

우리의 삶에서 '안과 밖'은 따로 놀지 않는 법입니다. '안'에 있는 생각이 행동이나 얼굴표정으로 나타나고, '밖'의 행동 거지가 마음안에 깊이 박히는 법입니다. 마음 씀씀이가 아름다우면 얼굴 또한 밝게 피어나고, 겸허한 행위가 순수한 마음을 심어주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면, 이 세상도 올바르게 굴러가고 자연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차면 세상의 정의는 무너지고 평화가 깨어집니다. 이 구조는 뒤집어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그 신앙은 아름다운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상을 바라볼 때 이미 끝장났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이 세상을 위해서 우리 교사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삼락

 

일본의 여교사가 주인공인 「인간의 벽」이란 소설책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두 명의 교사를 비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 교사는 학생들을 앞에서 이끌어 가는 유형이고, 한 교사는학생들 옆에서 같이 걸어가는 유형입니다. 주인공은 후자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교사가 없더라도 학생들은 전과 다름없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초점을 교사가 아니라 학생에게 맞춘 관점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주고 받는, 함께하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인생삼락' 에서 "천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제 삼락으로 든 것은 단순히 가르치는 기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성장으로 인하여 스승 자신도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어록·시·묘사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다.

(J. 주베르/ 명상록)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있게 하기를 배웠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남을 가르치는 데는, 가르치는 체해서는 안 된다. 남이 모르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던 것처럼 말을 꺼내지 않으면 안된다.

(A. 포프/ 비평에 대하여)

 

학생에게 배울 의욕을 고양시키지 않고 교육시키려는 교사는 차가운 쇠를 두드리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H. 만)

 

주는 자는 가르치고 받아들이는 자는 배운다.

(에머슨/ 수필집)

 

우리를 신뢰하는 자가 우리를 교육한다.

(G. 엘리어트/ 다니엘 데론다)

 

가르치기 좋아하는 자가 잘 배운다.

(이소크라테스/ 도에모니쿠스에게)

 

독창적인 표현과 지식의 기쁨을 환기시키는 것이 교사의 최고의 기술이다.

(A. 아인슈타인)

 

나 이외는 모두 스승이다.

(요시카와 에이지)

 

교육의 비결은 학생을 존중하는 데에 있다.

(에머슨/ 강연과 자전적 소묘)

 

스승의 엄격은 아버지의 관대보다 훨씬 유용하다.

(사디/ 장미원)

 

사실을 암기만 해서 얻은 지식만 가지고 있는 이는 남의 스승될 자격이 없느니라.

(논어)

 

세상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폐단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는 것이다.

(맹자)

 

온갖 폭군 중에서 작은 폭군이 가장 잔혹한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온갖 작은 폭군 중에서 학교의 폭군이 제일 높은 놈이다.

(J.H. 페스탈로치/ 어머니와 아들)

 

자연은 재사(才士)의 스승이요, 천재는 자연의 스승이다.

(J.G. 홀런드/ 친밀 대상에의 솔직한 대화)

 

유일하고 참된 교육자는 스스로를 교육한 사람이다

(베네트/ 문화와 자유)

 

경서를 가르치는 스승은 만나기 쉽고, 사람을 인도하는 스승은 만나기 어렵다.

(하마광/ 자치통감)

 

옛날의 학자는 반드시 스승이 있었다 스승이라 하는 것은 도를 전하고 업(業)을 주고 의혹을 푸는 소이(所以)다.

(한유/ 師談)

 

안으로 훌륭한 부형 (父兄)이 없고, 밖으로 엄한 사우(師友)가 없이 능히 성수(成遼)한 사람은 드물다.

(명심보감)

 

스승은 영원히 영향을 준다. 스승은 자기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는 말한 바의 효과를 충분히 거둘 수가 없다.

(H.B. 애덤스)

 

창조적인 표현과 지식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깨닫게 하는 것이 교사의 으뜸가는 기술이다.

(A. 아인슈타인)

 

업힌 자식에게 배운다.

(한국 속담)

 

선생님 놓아주신/ 징검돌 건너뛰던/ 내 어린 시절을/ 눈 앞에 보노기

(김창석/ 징검돌)

 

그날 불란서 사람인 교장 선생이/ 습기 냄새나는 교장실로 나를 불러/ 크리스트가 적힌 카드를 주면서 말했다/ 선생님의 말쌈은 하느님의 말쌈이오/ 잘 알아들었습니까./ 그런 소리 알 턱이 없다. / 나는 도망치 고만 싶었다. / 교장 선생의 눈이며 코에는/모혈관(毛血管)이 가득했다.

(전손일/ 오전의 햇살)

 

높은 자리 분에게 아부를 하고/ 가난한 나의 학력을 부끄러워 하며/ 비굴한 웃음을 팔고 난 어느 날/ 아이들의 앞에선/ 나의 전신은 떨리고 있다/ 너희들이 부르짖는/ 민주화가/ 너희들이 부르짖는 목소리가/ 순수하고/ 너희들의 눈동자가 순수한 만큼/ 나의 가슴은 부끄러움으로 떨리고 있다.

(공석하/ 서운산 · 2)

 

이 유리창을 닦으며/ 모르는 사이에 하늘을 닦던 아이들 중에/ 먼 바다에 배타고 고기잡으러 간 아이는,/소작 얻은 황토밭에서 배추 뽑고 있는 아이는,/ 이리역 화약 폭발사고 때 하늘로 떠난 아이는,/ 그때 살아 남아 교문 앞을 손수레 끌고 바삐 지나는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감옥에 간 아이는, 귀금속 공장에서 하얗게 밤새는 재작년의 아이는,/추억의 동창회가 열려도 돌아올 줄 모르고//그 옛날 총각 선생님 머리 위에는/ 눈이 내렸다/ 그 옛날에 졸업한 아이가 출세하는 동안/ 해진 출석부를 끼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그러면 봄은 또 멀지 않으리라 믿으면서.

(안도현/ 이리 중학교)

 

아아, 나는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그리고 심지어는 신학까지도/ 열성을 다하여 속속들이 연구했다. / 그런데 가련한 바보인 나는/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다. / 그렇다고 예전보다 조금도/ 더 현명해진 것은 없구나./ 더구나 석사니 박사니 하면서/ 그럭저럭 10년이란 세월을/ 학생들의 코를 쥐고 아래 위로/ 가로 세로 이리저리 흔들고 있지만/ 우리들은 도무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구나.

(J.W. 괴테/ 파우스트)

 

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숲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갔다/ 내가 아는 모든 걸 나무들에게 얘 기하려고/ 시간에 관한 것/ 탄생에 관한 것/ 인간의 말에 관한 것 등등/불길처럼 나무들은 손가락을 펴/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나는 원문은 물론/ 주석까지도 다 알고 있어서/ 말도 정확하고/ 오류도 하나 없고 해서/ 모두 다 알아주리라 믿었다// 단지 한 그루의 나무가 서러운 듯/ 어찌하여 내가 한 번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느냐고 묻기까지는.

(C.F.바우티스타/ 교육자)

 

사람농사를 짓는 친구야/ 편하고 풍족한 삶을 찾아 모두 떠나는 날/ 담요 한 장 반질반질 빛나는 눈 하나 들고 가/ 금덩이를 곁에 두고 객지로 가 찾지 말라고/ 허리 휘도록 일한 만큼 제대로 대가를 받는 법을 귀뜸한 다던가.

(박몽구/ 남쪽 바다 친구)

 

오십이 넘도록 책과 강의에 파묻힐 줄 밖에 몰랐던 이 선생은/ 광주의 봄이 꺾이자 마자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 가더니/ 마침내 사랑하는 제자들과 작별인사도 못하고/ 학교를 쫓겨나와 다시는 힘없는 글은 팔지 않으리라 다짐하고/전세돈을 빼어 운암리 고개 밑에서 튀김장사를 시작했었지.

(박몽구/ 운암리 고갯길)

 

날려 보내기 위해 새들을 키웁니다. /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당신께서 저희를 사랑하듯/ 저희가 아이들을 사랑하듯/ 아이들이 저희를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아이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거짓없이 가르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아이들이 있음으로 해서 저희가 있을 수 있듯/ 저희가 있음으로 해서/ 아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주십시오.

(도종환/ 스승의 기도)

 

선생님, 삶은 추상화일 수 없고 어느 아름다움도 사람의 일과 떨어져 있는 것은 없습니다. 외곬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삶의 방울일 때 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십오년 가까이 못 뵈온 선생님을 오늘 화랑에서 그림으로만 뵈옵고 물러갑니다.

(도종환/ 화랑에서)

 

봄이 오면서 자주 목을 앓았다/ 하루쯤 쉬어야 겠다며 지어주는/ 가루약을 맹물로 털어넣고/ 어지러움증 속에서 수업을 했다. /오전 네 시간은 미국 문화와 인디언 멸망을 얘기했고/ 오후에는 신식민 정책을 이기고/ 우리가 살아남아야 할 게 아니냐고 목울대를 세웠다/ 여덟 시간의 수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목보다 종아리가 더 땡겼다/ ‥‥쇳소리가 날 때면 몇 번씩 마른 기침으로 말을 끊었다/ 그러나 선생님, 나라에선 왜 가만히 있나요/ 아이 하나가 물어올 전/ 목이 가래서만은 아닌데도 얼버무리고 말었다.

(도종환/ 목감기)

 

실은 아우도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는/ 열아홉 네 절망의 아픈 꽃그늘을/선생님이라고 어찌 다 안다 하겠니/오늘도 네 동생 정태를 가르치고 교실문을 나서며/ 어둠 속에서도 눈을 떠라 가난과 고통이/ 너의 끈질긴 핏줄을 시험하고 있다. 일어서거라.

(도종환/ 답장을 쓰며)

 

스승의 길이 어렵다 하는데/ 그 어려운 길을/ 참 스승으로 사시고자 애쓰시는 마음이/ 존경으로 전해져/ 저희에게도 스승이 계셨음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가르침 주시는 우리의 옛 역사보다/ 새로이 역사를 만들어 갈 우리에게/ 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조용히 보여주시니 /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 뜨거움이/ 역사의 숨결속에/ 고동치는 맥박으로 다시 살겠지요.

(박용주/ 김선생님께)

 

저는/ 거짓말만 가르쳐 왔습니다. / 월급 봉투가 무서워서/ 아니, 월급 봉투가 필요해서/ 주님, 저는 거짓말만 가르쳐 왔습니다. //의인 열 사람이 없어 멸망했음을 알면서도/저는 의 인을 가르치지 못하였습니다. / 타락한 제도 교육의 도구나 만들며/ 4지 선다지 정답이나 골라 주며/ 출세하여 잘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 판검사 사장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3백 점짜리는 법대 상대 가라 이르고/250점 이하에겐 국문과 철학과 가라고 지도했습니다. / 남을 위하여 몸을 바친 안중근 의사를 가르치지 못하고/ 이완용이나 송병준이를 만들었습니다. // 주님께서 가라사대/ 내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왔음이 아니라/ 검과 불을 주러 왔노라 했음을 기억하면서도/ 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주지 못했습니다. // 진실을 가르치지 못한 혀,/싸움의 의미를 가르치지 못한 양심,/ 볼 것은 안 보고/ 딴 것만 보고 온 나의 눈,/ 할 말은 안 하고 딴 말만 하여 온 나의 입,/ 나는 당신에 편에 서지 못하고/ 나는 악의 편에 서서 가르쳤습니다. // 당신의 이름을 팔며 당신을 속였습니다. / 주여, 저를벌하소서./ 진실을 보지 못한 저의 눈을 지지소서./ 양심을 설하지 못한 저의 입을 찢으소서./ 정의를 지키지 못한 저의 팔다리를 찍어 내소서./ 주여, 새삼 당신의 엄한 꾸중으로 저의 마음을 씻어 주소서.//‥‥/양심을 팔아 먹는 빵이 바로 지옥임을 일깨워 주소서, 주여!/ 진실을 팔아 얻은 돈이 바로 내 두 눈을 지지고/ 내 혀를 잘라 낼 무서운 형벌임을 알게 하소서, 주여!/ 오늘의 교단이 바로 당신이 매달린 십자가이고/ 바로 이 자리가 내가 죽을 골고다임을 알게 하소서, 주여!

(문병란/ 무명교사의 기도)

 

주여, 저로 하여금 교사의 길을 가게 하여 주심을 감사하옵니다. /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일 가운데서,/ 교사의 임무를 택하는 지혜를 주심에 대하여 감사하옵니다. // 언제나 햇빛없는 그늘에서 묵묵히 어린이의 존귀한 영(靈)을 기르는 역사(役事)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옵니다. //‥‥/주여, 저로 하여금 어린이에게 군림하는 폭군이 되지 않게 하시고, 자라나는 생명을 돌보아주는 어진 원정이 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맡고 있는 교실이 사랑과 이해의 향기로 가득차게 하여 주시고, 이로부터 채찍과 꾸짖음의 공포를 영원히 추방하여 주시옵소서. 모른다고 꾸짖는 대신에 동정으로 일깨워 주고, 뒤떨어진다고 억지로 잡아끄는 대신에 따뜻한 손으로 제걸음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길을 잘못 간다고 책벌(責罰)을 주시기에 앞서 관용으로써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저항한다고 응징하기에 앞서 애정으로써 뉘우칠 기회를 주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여, 저로 하여금 혹사자(酪使者)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언제나 봉사자(奉仕者)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로 하여금 젊은이의 천부적 가능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와 풍토를 마련해 주는 협조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억압이나 위협으로 자라 오르려는 싹을 짓밟는 포학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로 하여금 모든 어린이를 언제나 신성한 인격으로 대하게 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그들이 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생활과 세계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성인의 축소판도 아니며, 그의 완상물(境賞物)도 아니고, 저의 명령에 맹종하여야 하는 꼭두각시도 아님을 항상 기억하고 있게 하여 주옵소서!//‥‥/주여,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어 이 십자가를 능히 질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저를 도우시어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스승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천석/교사의 기도)

 

그대는 알고 있었다. 형제애를 능가하는 교사는 없다는 것을/ 그 무렵 그대가 가르쳐주었던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라져간 우리들 조상들의 위대함만도 아니고/ 정말이지 그대가 걸었던 운명이 옳았다는 것이다.

(네루다/ 라파엘 알베르띠에게)

 

 

설 교 노 트

 

이상적인 교사상

행13:1-3

 

서론

교사란 모든 학술과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이요, 윤리와 도덕을 지도하는 사람이요, 인격과 생활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과 백성을 지도하는 사람, 교회를 세우고 성장을 지켜 나가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상적인 교사상은 어떠한 것입니까?

 

1.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자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운 교사인 것입니다. 자기 의사로나 다른 사람들이 추천한 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교사입니다. 하나님 이 선택하셨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며, 많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구별하셨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이상적인 교사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신앙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신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택함을 받은 교사는 어떻게 자신의 일에 임해야 하겠습니까? 사도행전 20장 24절에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 헌신하는 교사입니다.

본문에 "주를 섬겨 금식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금식 기도는 어떠한 때 하였는가 하면 자신의 죄를 깨달아 통회 자복하면서 하였고, 큰 환난을 만나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에 하였고, 자신의 사명이 중대함을 인식하였을 때 금식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깨끗이 헌신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갈망하는 엄숙한 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깨끗이 헌신하는 교사상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먼저 쳐서 하나님께 복종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만 복종한다고 하였습니다. 고전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사용이 되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롬6:13에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교사입니다.

이상적인 교사는 영혼을 아끼고 사랑하는 교사입니다.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면 교사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어린 생명들을 귀중히 생각하고, 그 영혼을 사랑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교사이어야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교사로 택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하시지도 않았는데 인간의 뜻으로 교사로 자칭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 구원을 위한 애타는 갈망이 없습니다.

한 생명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귀한 영혼임을 깨닫고 헌신하며 아끼고 사랑하는 교사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세우신 교사입니다.

 

 

교사의 자격

요3:1-6

 

서론

본문에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사로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하늘의 진리를 많이 나타내시면서 교훈하셨기에 선생님이라고 불리 우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교사가 되는 자격은 무엇입니까?

 

1. 중생한 자이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 학자인 로이 주크는 교사들이 중생해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교육의 목적면에서 반드시 교사는 중생해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기독교 본질이 중생한 교사를 요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교육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신 신령한 교사들을 통해 신령하게 감동된 성경의 말씀을 전달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거듭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사들이 자신들의 생활로 학생들을 감화시 켜야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과정이 신령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중생된 자들만이 이 사역에 종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실력을 가지려면 충분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주일 학교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성경에 능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대로 말해주면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학생들이 알 수 있도록 성경을 많이 공부하여 학생들의 수준에 맞추어 풀어서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상식이 필요합니다. 이 상식이 없으면 성경은 어려운 것이 되고 가르치기도 역시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교사는 언제나 충분한 준비를 통하여 실력을 갖추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영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는 기도를 열심히 하여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학생들을 영적으로 바로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세상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므로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가르치기가 불가능해집니다.

무엇보다도 교사는 기도를 열심히 하여 기도의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과 그들의 교육을 위해서, 교사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결론

교사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거룩한 직분입니다. 이 교사직을 소홀히 하여서도 안되고 세속의 교사와 같이 단순직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주께서 우리 교사들에게 맡겨주신 한 영혼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깊은 관심과 기도가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사 자신이 먼저 숙달하여 준비를 충분히 하여서 실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경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상식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는 교사는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교사가 충만하지 않으면 학생들을 바로 지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사들은 기도하면서 가르치는 일에 전심 전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르치는 자

고전13:1-13

 

서론

본문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사된 자들은 사랑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르침은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1. 최상의 은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은사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나 방언의 은사나 신유의 은사 등 여러 가지 은사가 있으나 사랑만큼 귀한 은사는 다시 없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있어서 사랑이 없다면 거짓 그리스도인이요,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은 황홀한 입신의 경지나, 지적인 사고나 종교적 능력에 의한 행위나 금욕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은사들이 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은사가 다 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만큼 사랑은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은사인 것입니다.

 

2. 행하는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의 고귀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의 실제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음과 온유함의 두 가지 긍정적인 성격에서 시작합니다. 오래 참음과 온유함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입니다. 이 성품으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나 자랑이나 교만이나 무례함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투기하지 않으며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교만한 마음이나 무례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교만하거나 자랑하거나 무례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있는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나에게 어려운 시련이 오면 견딥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지 않고 바라며 믿습니다.

 

3. 영원한 은사입니다.

예언이나 방언 같은 다른 은사들은 일시적인 목적이 있고, 부분적 지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 지속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은사는 영적으로 유아기 단계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은사는 갈수록 확실하며 계속될 것입니다. 본문의 13절에 보면 "그런즉 믿음 · 소망 · 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고 했습니다.

크리스찬이 가지는 가장 귀한 은사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어린 심령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결론

교사는 사랑으로써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믿음으로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사들에게 사랑의 은사가 충만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지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린 심령들을 오래 참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처럼 그런 사랑으로 가르치고 보살피며, 그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귀한 교사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힘을 얻어야 한다

사40:27-31

 

서론

사람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힘을 주시며 일을 하도록 격려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에는 다 힘이 필요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사된 자들은 무슨 힘을 얻어야 합니까?

 

1. 지식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된 자는 많이 알아야 하되 정확히 알고 깊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진리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면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을 위해서 교사는 지식을 많이 쌓아야 하고 그래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 중에 최고의 지식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임을 깨닫고 그 지식을 쌓기 위해서 계속해서 연구하며 자신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2. 도덕적인 힘을 얻어야 합니다.

아무리 지식이 뛰어나고 힘이 세어도 도덕이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몸이 좀 약하고 지식이 좀 약해도 도덕적으로 완전한 경지에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도덕적인 정신의 결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된 자들은 도덕적 힘을 얻어야 합니다. 덕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덕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도덕의 힘을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영적 힘을 얻어야 합니다.

이 영적 힘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에게만 허락하시는 힘입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힘입니다. 이 힘을 얻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사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도 하늘의 이치를 깨달을 수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알고 직사함을 받는 이치를 아는 것입니다.

이 힘을 얻으려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를 사모하는 자는 여호와를 앙망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의 능력을 알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결론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일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바르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가치있고 중요한 일입니다. 교사들은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향상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악 어둠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교사된 자들은 지식의 힘을 얻고, 도덕적 힘을 얻고, 영적인 힘을 얻어서 좋은 열매를 맺는 교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사의 올바른 자세

빌2:1-11

 

서론

교사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사된 자는 다툼이나 허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만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반 신자들에게도 다 해당되는 말이지만 특히 교사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교사는 그리스도에게서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봉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봉사란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만 돌보는 것은 이기주의이며 주님께서는 그런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사된 자들에게는 이 봉사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 이외의 사람을 잘 돌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곧 봉사하는 것입니다. 서로 봉사하는 곳에는 발전이 있고 건설이 있으나 자기만 아는 폐쇄된 곳은 결국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사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상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똑같은 가르침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만 봉사한다고 해서 잘 한다고는 할수 없습니다. 자신의 일도 역시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사된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이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그는 본래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취하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승으로서 12제자의 발을 씻겨 주시는 최대의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영광을 얻으려는 마음은 교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자의 생명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데 있습니다.

교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사된 자들은 자기를 나타내는 것을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나타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없이 낮아지는 마음을 교사들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3.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의 겸손은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복종에는 희생이 뒤따릅니다. 희생에 이르지 않는 복종은 거짓된 복종입니다.

자신의 물질을 희생해야 하고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치는 데 희생하고 하나님께 희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생명을 희생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교사된 자들도 이런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께서도 교사로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심오한 진리의 말씀을 알아 듣기 쉽게 비유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사된 자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권위를 내세우시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어려운 전문 용어를 사용하시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잘못 가르치시지도 않았습니다.

교사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나만 알고 있는 것을 더욱 쉽게 이해가 되도록 풀어서 가르치는 봉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인간에게 봉사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자기의 모든 것을 회생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교사된 자들도 겸손한 마음,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쓰임받는 인생

마20:1-7

 

서론

본문에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는 이 말은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외침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할 기회를 놓친 자의 부끄러움이며, 사람을 잘못 만난 자의 어리석음이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자의 안타까운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쓰임 받고자 하는 인간의 참된 욕망이 묵살되고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젊은 신앙인들이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1. 주 뜻대로 일하는 자를 쓰십니다.

주인의 뜻은 포도원을 경작하는 일꾼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셨던 것을 압니다.

시37:17-19에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환난의 때요, 기근의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여호와께서 붙들고 부끄럽지 않게 하고 풍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사된 자들은 주님의 뜻대로 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교사를 원하시며 기뻐하십니다.

 

2. 사명에 충성된 자를 쓰십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사명에 충성된 자를 목메이게 부르고 계십니다. 죽도록 충성할 신실한 자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 시대를 감당할 믿음의 젊은이를, 믿음의 교사를 부르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 낙심, 범죄했을지라도 쓰고자 부르십니다. 사6:8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교사된 자들은 자기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성하지 못한 자는 교사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3. 여호와께 맡기는 자를 쓰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쓰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재물과 재능과 생명까지라도 다 헌신하기를 원하시며 기제하십니다.

어떠한 것을 맡기라고 하십니까?

(1) 우리의 행사를 맡겨야 합니다.

잠16.3에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으니, 우리의 어려운 일을 맡기고 복잡한 일,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맡겨야 합니다.

(2) 염려를 맡겨야 합니다.

벧전5:7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신앙을 병들게 하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합니다.

교사된 자들이 마음에 이러한 염려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가 없습니다. 염려 때문에 낙심하게 되고, 근심하게 됩니다. 이런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권고하신다고 하였으니 교사들은 그저 열심히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3) 짐을 맡겨야 합니다.

시55:22에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가난과 질병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죄와 우리의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과 가난을 다 주님께 맡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일하기를 원하여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면 참으로 비참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쓰신다고 했습니다. 주의 뜻대로 일하는 자와, 사명에 충성된 자, 그리고 여호와께 맡기는 자를 쓰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우리 모두 교사된 자로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 제

성 경 활 용

I. 하나님,그리스도,성령의 교제

1. 하나님과의 교제

(1)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2) 그리스도를 영접

(요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 그리스도와의 교제

(요일1 . 3) 우리의 사권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 성령과의 교제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빌2:1)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4. 하나님과 교제한 사람들

(1) 에녹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 노아

(창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3) 아브라함

(창12:7)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4) 모세

(출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II . 성도의 교제

1. 성도의 교제에 대한 이유

(1) 연합하여 하나가 됨

(시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암3:3)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요17:21)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 하나님의 명령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골3:16)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히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약5:16)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2. 교제의 대상들

(1) 아버지와 아들과 그리스도인

(요일1:3)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2)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고전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3) 사도와 성도들

(행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3. 교제의 내용

(1)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난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2) 복음

(빌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III. 악한 교제

1. 악한 교제의 유혹

(잠16:29)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고전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행실을 더럽히나니

 

2. 악한 교제에 대할 경고

(잠2:19)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잠23:6)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지어다

(잠29:24) 도적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3. 악한 교제를 금하는 이유

(1) 악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출23: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2) 아비를 욕되게 하기 때문에

(잠28:7)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3) 입술에 지식이 없기 때문에

(잠14:7)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4) 교훈을 거스리며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

(롬16:17)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지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5) 규모없이 행하기 때문에

(살후3:6) 규모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6)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에

(딤후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7) 귀신과 교제하기 때문에

(고전10:20)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4. 악한 교제의 결과

(1) 하나님이 진노하심이 임함

(대하19:2)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2) 해를 받음

(잠13:20)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3) 올무에 빠짐

(신12:30)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관련원어풀이

1. rb'j; 하-바르

원래는 "함께 묶다"의 뜻이다.

(1) 연결시키다, 결합하다, 모으다.

(창14:3, 출26:3)

(2) 우상과 연합한.

(호4:17)

(3) 줄로 표시되다, 얼룩지다, 연결하다.

(출26:6)

(4) 관계를 맺다, 동맹을 맺다.

(대하30:26)

(5) 교제하다.

(시94:20)

 

2. koinwniva 코이노니아

(1) (하나의 생활, 행위, 물질을 공유하는 것을 말하며 그것을 소유하고 공동의 의식을 가지며 서로의 관계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교제, 협조, 밀접한 관계.

(행2:42, 고전1:9, 고후6:14)

(2) 관대, 도움, 동정, 애타주의.

(고후9:13, 빌2:1)

(3) 기부금, 교제의 표, 선물.

(롬15:26, 고전10:16)

 

3. kollavw 콜라오

(1) 아교로 붙이거나 달라붙게 하다, 밀착시키다, 붙이다.

(눅10:11)

(2) 연합하다.

(눅15:15, 행5:13)

 

4. koinwnov" 코이노노스

(1) 반려자, 동무, 함께 하는 사람

(마23:30, 눅5:10)

(2) 동참자, 참여자.

(고후1:7, 벧전 5:1)

설교예화자료

성도의 교제, 천당의 교제

 

영국에 '웨인즈 게일'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 존 호셋이라는 좋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매우 작은 곳이라 교회도 자연히 작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큰 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초빙하려는 교섭이 왔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이 제의를 받고 생각 중에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떠나지 마시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일할 기회를 봐서는 큰 교회로 나가야 하겠는데 교인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떠나지 말라고 만류함에 호셋 목사님은 떠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하여 목사님은 그 조그만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일생 동안 그 교회에서 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교회를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지은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그 노래가 우리 찬송가 463장에 있는 노래입니다.

"주 믿는 형제들 연락한 사랑이 천당의 교제같으니 참 좋은 교제일세."

성도의 교제는 천당의 교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천당의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

 

헬라어로 '성도의 교통'이란 말은 '코이노니아 하기온(koinonia hagion)'입니다. 이 말의 뜻은 사람들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교제, 모든 활동과 모든 협력 관계를 나타냅니다. 서로 함께 하고 서로 도움을 주는 의미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성도의 교통은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성도의 교제는 형제애의 실천과 새계명인 사랑의 실천을 위한 유기체를 말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의 교제의 장애물은 교만한 마음과 닫힌 마음과 비판적인 성격과 비교 의식과 용서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다른 성도와의 교제는 내 생각, 내 판단, 내 의사를 고집하면 불가능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부족을 시인할 때 언제나 교제의 길은 열려 있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교제의 실천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 기독교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교제의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독교만큼 교제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온전히 친구가 될 수 있고,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가 참 친구가 되며, 유력한 자와 불우한 자가 간격 없는 친교가 가능한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제의 장애물을 제거합시다. 교제를 시도하며 삽시다. 성도의 생활 속에 기도와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 입력(入力)의 사역이라면 교제와 증거는 출력(出力)의 사역 입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심경을 만족하게 경험해 봅시다.

 

 

참된 사귐

 

격세지감을 느끼듯 한때의 권좌에 있던 사람들이 어둠의 사귐으로 인하여 친구따라 강남가는 식으로 흘러간 어둠의 권세에 휩싸여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귐은 생명을 살리는 사귐이어야지 많은 사람을 사회로부터 매장시키는 사정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한일서에 기록된 것 같이, 빛된 사귐이 아니라 어둠의 돈과 권력에 의한 사정만이 이 땅에 성행하고 있어 주님과의 참된 사귐은 점점 상실해 가는 상황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사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생명과 생명의 사귐은 가능해도 죽음과 생명의 사귐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어두움으로 사귐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맺어지는 사귐은 그 시작이 좋지 못한 것만큼 그 결과도 뻔한 것입니다.

생명의 사귐이어야 하며 기쁨의 사귐이어야 하는 우리네의 사귐이 언제부터 이토록 타락하게 되었는지‥‥ 거짓, 이권적, 파괴의 어두운 사귐이 만연하는 이 시대야말로 타락한 시대의 표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언제는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좋다고 해놓고는 이제는 나는 모른다고, 그들과 상관이 없다고 발뺌들을 하는지 참으로 웃음이 나오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가을 무우청모양 싱싱하고 신선해야 하는 참된 사귐의 맺음이 그리워집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야 할 우리들의 만남과 사귐이.

 

 

사람과의 만남

 

"쑥이 삼밭에 나니 받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곧고,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니 그와 더불어 모두 진흙 속에 있으니 그와 더불어 모두 검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인격적인 만남이 얼마나 중한 것인가를 증자는 쑥과 모래를 예로 들어 우리들에게 실감있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맹자의 모친은 이 원리를 일찍 깨달았기에 사랑하는 자식을 키우면서 '맹모삼천지교'의 교훈을 남긴 것입니다. 실로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생태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사람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베롱의 야생아나 인도에서 발견된 아말라 카말라 사건으로 이미 증명된 지 오랩니다. 따라서 민간의 가치는 그가 누구를 만나서 어떤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느냐가 결정하는 법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 자녀들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이것은 나와 우리 자녀들이 어떠한 인격체와 어떻게 사귀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기독교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런 만남의 관계를 떠나 있으면 그 믿음은 미신적인 것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군자의 사귐

 

子曰, 與善人居면 如人芝蘭之室하야 久而不聞其香이라도 卽與之化矣요,

與不善人居면 如人勳漁之肆하야 久而不聞其臭라도 亦與之化矣니,

舟之祈藏者는 亦하고 漆連所藏者는 黑이라, 是以로 君者는 必愼其所與處者焉이니라,

"착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지초(芝草)와 난초(蘭草)가 있는 방에든 듯하여 오래되어서는 그 향기를 맡지 못하더라도 곧 그와 더불어 감화될 것이요, 착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마치 생선 가게에 든 듯하여 오래 되어서는 그 악취를 맞지 못하더라도 역시 그와 더불어 감염될 것이다. 붉은 물감에 간수된 것은 붉어지는 법이요, 검은 물감에 간수된 것은 검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지낼 이를 삼가야 한다. "라고 공자는 명십보감에서 사람 사귀는데 신중을 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록·시·묘사

 

재지(才知)보다는 신뢰야말로 교제를 믿게 만든다.

(F. 라 초슈푸코/ 도덕적 반성)

 

자기 그림자에 얽매인 인간은 자아와의 기초적 교제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A. 오스틴/ 행복한 비관론자)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콤하기가 감주같다. 군자는 담담하기 때문에 더욱 친해지고 소인은 달콤하기 때문에 쉬 절교된다.

(장자)

 

남과의 교제에 있어서의 절제는 영혼의 평정을 보증한다.

(S. 피에르)

 

나쁜 사람하고의 교제는 좋은 양고기를 망친다.

(G.W. 커티스)

 

권력으로 사귀면 오래가지 못하고, 금전으로 사귀면 친하지 못하다.

(拾遺)

 

술은 초물에 취하고 사람은 훈물에 취한다.

(한국 격언)

 

친구 사귀는데 경솔하지 말라. 한번 사귀어지면 끊지 말라.

(솔론)

 

벗을 사귐엔 서로 그 믿음을 알아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즐거움엔 서로 그 마음에 감동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박지원/ 연암별집)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게 되고, 날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

(명심보감)

 

교제없이 홀로 사는 사람은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니든가 천사이든가 둘 중에 하나다.

(영국 격언)

 

상두 술로 벗 사귄다. < * 남의 술로 제 벗을 대접함을 비꼬는 딸>

(한국 속담)

 

뜻과 행실이 같고 어울리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서로 어울릴 것이나, 뜻과 행실이 같지않으면 대문을 마주하는 사이라도 서로 통하지 않는다

(회남자)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면 마치 안개 속을 자는 것 같아서, 옷이 비록 젖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물기의 배어듦이 있고, 무식한 사람과 함께 가면 마치 뒷간에 앉은 것 같아서 옷이 비록 더럽혀지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그 냄새가 맡아진다.

(공자)

 

함께 놀면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어질지 않기 때문이며, 사귀면서도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재물을 놓고 신용받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나의 신용이 없기 때문이다.

(회자)

 

얼굴 아는 이야 천하에 가득하되, 마음 아는 이는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명심보감)

 

군자는 학문으로써 친구를 모으고, 인으로써 친구를 돕는다.

(회자)

 

달이 뜨면/ 당신과 나 사이의/ 푸른 사귐속에서/ 갈매기랑 함께 노래하옵니다.

(이동녘/ 파도타기)

 

세상은 춥지만은/ 서로 위로하는/ 형제가 있고/ 서로 돕는/ 이웃이 있어 따뜻합니다

(허영자/ 세상은 춥지만은)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갈 길을 얘기한 것./ 우리는 오랜 세월/ 너무 방황만 했다고.//얘기를 나누는 우리들의 마음속을/ 화살처럼 뚫고 지나가는/한 줄기의 빛이 있었다/무슨 빛보다도 밝다// 우리 살아온 길 되돌아 보면/ 끊임 없이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그들과 스친 살결의/ 아스라한 추억들/ 내 가슴의 시내를 따라 흐른다// 그대와 나의 결속을 확인시켜 주는 눈빛과 눈빛/ 손과 손을 맞잡는 것은/ 다소곳이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의/ 미더운 길잡이,// 어떤 절규의 늪에서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주는/ 그대의 들꽃같은 미소와 악수는/ 우리의 역사가 되었다.

(서인숙/ 약속없는 악수)

 

각각의 극단은 같은 위험을 띤다. 빈곤과 마찬가지로 부유도 친구를 떼어 놓을 수 있다.

(A. 카울리/ 대비데이즈)

 

나이가 자기의 배가 되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열살이 위이면 형님처럼 섬기고 다섯 살이 위면 친구로 사귀어도 된다.

(예기)

 

정다워라 베다니/ 마리아의 집이여// 주고 받는 대화며/ 함께 나눈 식사며/ 주님과 마주앉은 날은/ 해가 짧았다.

(안광성/ 베다니)

 

새벽별을 지켜본다//사람들아/ 서로 기댈 어제가 그립구나// 적막한 이 시간/ 깨끗한 돌계단 틈에/ 어쩌다 작은 풀꽃/ 놀라움이 듯//하나의 목숨/ 존재의 빛/ 모든 생의 몸짓/소중하구나.

(김후란/ 존재의 빛)

 

동행은 끝이 마른 풀숲을 헤치면서/ 헛기침을 자주 하는 갑장과/ 가스배출기 같은 욕 친구 그렇게 두 사람이다/ ‥‥서풍과 뜨거운 섬광이.// 그 달 그믐날엔 귀한 손님들을 맞았다.

(인태성/ 잊히지 않는 일들)

 

달빛 기둥 세워놓고 원두막치고/ 풍진묻은 먼지바람 멱감고 들라하며/오가는 이웃/ 이웃을 불러/ 복더위를 식힌다.

(강호연/ 여름 들녘에서)

 

유달산 밑 자취방에서 집 없는 친구들과 오징어를 찢고/ 라면을 나누다 보니 형제보다 더 단단해졌다던가.

(박몽구/ 남쪽바다 친구)

 

울적한 날에는/ 지하철을 탄다// 노란 승차권 하나씩 지닌/ 공모자(共謀子)들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웃이 된다// 외면하면서도/ 속으로 나누는/ 진로가 같은/ 동반자.

(최시병/ 허상)

 

시끄러운 무리 속에서 멀미에 어지럽고/산 중에 고독을 즐기기에 어질지 못합니다/ 이 두사이 아닌 곳에/ 마음 갈아 앉어 살 곳을주옵소서 ‥‥‥

(박용철/ 기원)

 

그대가 내민 손에/ 나의 체온이 흐르고/나의 체온 속에/ 그대의 정이 흐르네 부러진 오리나무 가지여,/ 우리는 몇 개의 낙석에 무너지는 약체가 아니다. / 서로 부추기면서 내려온다/ 비탈길에서 마음마저 무거워지면/ 하산이 낙향 못지않게 어렵게 되겠기에.

(황하수/ 하산)

 

빌어올 이 돈으로 곧 쓰러질 집을 짓느니/ 해질녘 찾아온 제자들과 소주를 앞에 놓으면/비로소 세상이 바로 보였다고.

(박몽구/ 운암리 고갯길)

 

목숨 다한/ 사랑이었기에/ 만남의 은총과/ 평안을 선물로 받았네.

(배정회/ 4월의 이야기)

 

한잔의 커피와/ 한줌의 상념과/ 길 가르는 바람과 나는 벗하여 살았네// 그것이 피마른 나인 줄을 알지 못하고/ 얼룩진 글안의 눈물도/ 그것을 알지는 못하였네// ‥‥분노에 떨기 시작한 커피는 쓰고/ 벗하여 살던 바람의 회리는 매몰찼네.

(김영옥/ 방황)

 

보라. 말 못하는 짐승도 저마다의 몸짓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돌아오고 있다‥‥ 난 지금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 나는 얼마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이동및/ 시편 구십칠편 칠절팔절 묵상)

 

하나님의 자녀들/ 한 자리에 모이니/ 즐거움이 넘치고/ 믿음 더욱 자란다/ 두세 사람 모여도/주가 함께 하시니/성도들의 교제가/향기되어 풍긴다// 부름받은 성도들/ 사랑으로 모이니/ 서로 찾아 볼 때에/ 위로 더욱 넘친다/ 좋은 일도 나누고/ 슬픈 일도 나누니/아름다운 교제가/ 열매되어 익는다// 하늘나라 백성들/ 한 몸 되어 모이니/ 서로 도와 일할 때/ 얼굴들이 빛난다/ 정성으로 살피고/ 겸손하게 섬기니/이런 교제 세상에/ 찾아볼 수 없도다

(홍안의/ 성도의 교제)

 

날마다/ 먹여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두 손 모아서/ 감사케 하소서// 식물에/ 축복하셔서/ 건강케 하시고/ 주님의 말씀 따라서/ 길 가게 하소서// 주 예수/ 주신 사랑을/나누게 하시고/ 성도의 좋은 교제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의/ 식탁 가운데/ 주님이 오셔서/ 하늘의 떡도 내리사/ 영생케 하소서

(홍안의/ 식탁 앞에서)

 

산 속에/ 무리져 핀/ 무명의 들꽃처럼/ 소박한 어울림이 되기를 원하네/ 믿음의/ 이웃정은/ 복스런 교재이니/ 성도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옵소서// 떼어져/ 날아드는/ 숲속의 새들처럼/ 정다운 어울림이 되기를 원하네/사랑의/ 사귀임은/ 향기론 교제이니/ 성도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옵소서// 그 옛날/ 부름받은/ 처음의 교회처럼/ 참 좋은 어울림이 되기를 원하네/ 하나된/ 형제들은/ 거룩한 교제이니/ 성도의 즐거움이 넘치게 하옵소서

(홍안의/ 교회의 사귐)

 

 

설 교 노 트

 

바람직한 대화

요4:1-14

 

서론

주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사마리아에 이르러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물 한 그릇을 청하셨습니다. 이때 여인은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을 함으로써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그 우물물이 신령한 생수로 비약되어 드디어 대화의 결과로 죄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대화는 그리스도인과 불신자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주는 교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게 해주십니까?

 

1. 막혔던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당시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혈통에서 태어난 동일한 민족이었지만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통치를 받으면서 서로의 교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남북 분단이 되었고, 민족적으로 분열이 되었고 종교적으로 대립 상태에 있었습니다.

유대는 다윗의 전통을 이어왔고 선민으로 서의 지조를 지켰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여로보암을 위시한 배신자들이 이룩한 나라로 정조를 저버리고 혼혈이 되었으며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천대하였고 심지어는 개같이 취급하였습니다.

이렇게 꽉 막힌 담이 헐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는 대화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듯 영적인 교제는 인간들이 아무리 높이 쌓은 담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2. 그 대화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이 대화는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대화이지만 종교적인 차원에서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과의 대화였습니다. 이 대화는 인생의 생수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물은 다시 목이 말라도 이 생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라고 하였습니다. 꾸밈이 없는 순수한 대화였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죄많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고 하신 말씀은 먼저 하나님으로서 죄인에게 물을 요청하신 사건이지마는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요청하신 사건은 권위도, 체면도, 지위도 초월하신 솔직하고 순수한 대화입니다.

 

3.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신 대화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죄의 장벽을 헐어 버리고 화해와 화목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 얻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이 죄로 인한 번민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중대한 문제를 이 대화를 통해서 해결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참 구주 메시아를 찾게 되었고,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참 구원을 받았으며 인격과 생활이 변하여 새롭게 된 대화였습니다.

 

결론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 인과의 대화는 참으로 우리 신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교제입니다. 신자들은 불신자들과 교제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다 꺼려하는 사마리아인에게 먼저 입을 열고 말씀하시므로 한 생명을 구원하셨고 그 구원 받은 여인이 또 다른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우리도 바람직한 대화를 통해서 주님의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여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우리 자신들도 구원을 완성해야 하겠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20:33-35

 

서론

사람은 누구나 받기를 좋아하지만 주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서로 교제를 하는데 있어서 받기만 하려고 한다면 그 교제는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심으로 만민에게 영장을 받으셨습니다.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는지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선을 베푼다는 뜻이 있습니다.

남에게 주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성도간에 교제를 하면서 서로 가진 것이 없는 자를 물질적으로 돕는 다든지 나에게도 필요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필요로 하면 아낌없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제함에 있어서 남에게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특히 나오다 약한 자를 돕는 것은 나에게 복이 되는 일입니다.

 

2. 양보하는 것입니다.

양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특히 교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창세기 13장 8-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양보한 아브라함은 큰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양보하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3.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라는 말씀은 곧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잘못을 나에게 했어도 그 잘못들을 다 용서해 주어야 서로를 신뢰하게 됩니다. 교제하는 가운데 생 긴 허물을 감싸주지 못하면 그 교제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는데 자신을 회생자지 하시면서 지극한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의 허물을 용서해 주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슬퍼하실 것입니다. 용서는 주는 것입니다.

 

4. 희생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 자체가 희생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물질을 주는 것은 노동의 희생이 있습니다. 무엇이나 남을 주는 것은 희생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다 희생하면서라도 성도와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도 나의 것을 다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를 통해서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결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기만을 좋아하거나 받기만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든지 다른 사람과 교제를 나눌 때에 선을 베풀고, 양보하며, 허물을 용서하고 희생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교제

행2:37-47

 

서론

신앙생활은 혼자서도 물론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귀면서 하면 훨씬 더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홀로 있는 것보다 여럿이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홀로 기도할 때도 있지만 같이 모여서 기도할 때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혼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1. 신앙생활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처음부터 혼자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성도간에 교제를 하였고 그 교제를 통해서 교회 생활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는 믿음의 형제들을 서로 사랑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항상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주께 돌리며 성도 서로간에 교제를 돈독히 하여 덕을 세웠습니다

우리들도 성도들과 같이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교제입니다.

성도들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물건들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재산이 많은 성도는 그것을 가난한 성도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인색하게 자기의 것만을 고집하거나 남의 것을 탐내는 일이 없이 모두 물건들을 서로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짐으로 화목하고 단결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이해를 초월하는 사랑의 교제였던 것입니다. 물질도 초월했고, 사랑도 초월했습니다. 미움과 다툼이 없는 사랑과 감사의 교제였습니다. 이 교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돈독한 교제가 이루어질 때 성도간에 믿음이 더욱 자라나는 것입니다.

 

3.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며 또한 가정에서는 사랑의 떡을 나누었습니다. 떡을 떼면서 이야기도 나누며 거룩한 뜻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떡을 나누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를 돈독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주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또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고 성도간에 덕을 세워 피차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우애하며, 기도하면서 봉사와 신앙 활동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선을 행하면서 영광은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들은 경건하게 하루하루를 살았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결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한 몸이라는 지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돌보며 서로 나누는 선한 교제를 하였습니다. 이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축도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부르심으로 신자가 된 것은 나 혼자만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성도간에 서로 교제하여 믿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교회 부흥의 힘이 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모여 철저히 주님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교통하였습니다. 우리도 초대 성도들의 선한 교제를 본받아 성도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누구를 만나야 하는가

아3:1-4

 

서론

우리가 사는 인생은 흔히 여행에 비유됩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도 있고 필요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필수적으로 만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1. 나를 만나야 합니다.

나의 참 모습을 만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속에 내가 모르는 큰 적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 전에 먼저 내 모습을 바로 보고 내가 누군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는 시간이 자기 만남의 시간입니다.

바울은 자기 모습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인은 자기의 약점같은 것을 자신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남에게 보이기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만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2.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과의 만남은 무척 다양합니다. 부모로부터 형제, 친척, 친구 등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과 다 원만한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다 정상적인 관계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관계는 법과 사랑의 조화속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법은 표준을 제시하지만 사랑은 법 이상이며, 모든 만남에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나 가족이나 이웃을 만나야 그것이 정상적인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과 정상적인 만남을 이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만남을 이루고 있습니까?

 

3.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며 이웃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그가운데는 반드시 그리스도가 같이 계셔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영생과 성공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저주와 죽음이 뒤따를 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 왕을 만날 수가 없어서 거리를 다녔지만 거리에서도 만날 수 없으므로 파수꾼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어려우면 주님이 어디 계신지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도 만날 수 없으면 파수꾼 즉 선지자를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자들은 다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꼭 만나야 할 분이십니다.

 

결론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는 성공이 있었고,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의만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있어서 여러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 가운데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그 만남은 결국 헛된 만남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왕을 찾아서 거리로 나선 술람미 여인처럼, 거리에서도 찾지 못하고 파수꾼에게 물어보던 그 여인처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

마5:13-16

 

서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소금과 빛은 별로 연결성이 없어 보이지만 둘 다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도가 교제하는 데 있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해야 할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역시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1. 소금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소금은 짠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금이 만약 짠 맛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미 소금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것은 적극적이고 제 맛을 나타내는 인간이 되라는 뜻입니다.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 끝까지 자기의 맛을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이 짠 맛을 내려면 녹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이 사회에서 녹아져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녹아져서 성도간의 불화를 잘 막아주고 세상의 부패되어 가는 곳을 썩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금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의 사명인 것입니다. 자신은 녹아져서 흔적도 없어지지만 그 희생으로 인하여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 사명을 제대로 감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빛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빛은 우리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이 어두움을 밝게 해 주듯이 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어야 합니다.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은 아름다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빛은 인간의 앞길을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목에서 바른 길로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신자들 자체가 빛을 잃고 헤매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과 교제를 하는데 있어서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다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히게 될 것입니다.

빛은 위험을 미리 경고해 줍니다. 도로 공사를 하거나 깊은 웅덩이가 있으면 빨간 불빛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대해 위험 신호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한 경고, 진실한 충고를 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안들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알려주고 또 경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께서 주신 소금과 빛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였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교제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로 가면 바로 잡아주고 불의한 길로 가면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은 사실 그 역할이 영광받는 역할이 아니라 희생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희생시켜서 남을 구원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교 회

성 경 활 용

1. 구약의 명칭

(1) 이스라엘 회중

(출12: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레4: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2) 시온

(시9:ll)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고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사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사62:1)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2. 신약의 명칭

(1) 교회

(마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행7:38)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고전11:18)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엡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3.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여러 묘사들

(1)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시111:1) 내가 정직한 자의 회와 공회 중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 그리스도의 몸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골1: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3) 몸

(롬12:5)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엡5:23)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4)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행20:28)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5)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진리의 기둥

(딤전3:15)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6) 하나님의 교회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갈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7) 하나님의 성전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알지 못하느뇨

(8) 영광스러운 교회

(엡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4. 우주적인 교회

(1) 그리스도의 교회

(마16: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 만물 위의 교리

(엡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3) 하나님의 교회들

(고전11:16)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

(살전2:1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되 었으니

(4) 그리스도의 교회들

(롬16:16)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5) 교회들

(행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 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5. 문제있는 교회

(1) 첫 사랑을 버린 교회

(계2:4)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 부패된 교회

(호4:8) 저의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미3:11)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자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3) 분쟁하는 교리

(고전11:18)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6.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1) 교회의 덕을 세움

(고전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2) 성도가 더 많아짐

(행5: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3) 더럽히는 자에 대한 형벌

(고전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4) 승리를 주심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7. 교회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뜻

(1) 다른 사람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딤전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2) 건전한 교리를 보존하기 위하여

(롬16:17)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딛1:13) 이 증거가 참되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6. 교회 지도자에 대한 성도의 의무

(1) 율법을 구함

(말2:7)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2) 존귀히 여김

(빌2:29)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도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딤전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3) 복종해야 함

(고전16:16) 이 같은 자들아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4)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김

(고전4: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관련원어풀이

1. ejkklhsiva 에클레시아

원래는 "시민들의 집으로부터 어떤 공공적인 장소로 불러낸 모임, 회합"의 뜻이다.

(1) 백성의 모임, 정규적으로 소집된 정치적 단체.

(행19:39)

(2) 이스라엘 사람들의 회합,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

(행7:38, 히2:12)

(3) 회중, 모임.

(행19:32)

(4) 예배를 위한 기독자의 모임.

(고전11:18, 14:19)

(5)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해 부름을 받은 모든 집단, 보편적인 교회.

(마16:18, 고전12:28)

설교예화자료

교회를 다니면 건강해져요

 

타임(Time)지에 실린 교회와 질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 살까지 살면서 술과 검은 담배와 아름다운 여성에 그의 삶을 바쳤으며 결코 교회에 간 적이 없는 그 늙은이를 누구나 알고 있다.

존스 홉킨스 대학(Johns Hopkins School)의 보건학과 공중위생학의 조지 컴스톡(GeorgeW. Comstock) 박사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닌 특별한 예이다. 워싱톤 주의 인구를 대상으로 병과 사회 경제적 요인과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컴스톡 박사팀은 우연에 의한 것이었지만 흥미있는 발견을 하였다. 규칙적으로 교회를 나가고 깨끗한 삶은 사람들의 보건과 위생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장질환, 간경변, 결핵, 목암, 고질적인 기관지염,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와 자살 등이 거의 없다.

가장 중요한 발견은 정규적으로 교회를 나가는 사람은 동맥 경화증세의 심장질환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중 그런 병으로의 사망률은 매주 교회에 나가는 사람 10만명 중 5백명이나,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10만명 중 9백명이다. "

 

 

아인슈타인의 고백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자신이 그전에 생각했던 교회의 부정적 모습이 오류임을 깨닫고 진리편에 서서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교회를 찬사하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자유의 신봉자로서 독일에 혁명이 일어나자 대학이 일어서서 이 자유를 지켜줄까 하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건 쓸데없는생각이었다. 당장에 침묵을 지키고 잠잠케 되고 말았다. 그러자 나는 지난날 자유를 사랑하노라고 그렇게도 큰 소리 치던 논설 위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몇 주일이 못가서 시들고 말았다.

오지 교회만이 진리를 탄압하는 히틀러의 운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과거에 멸시하던 저 교회에 이제 나는 끊임없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 바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천국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중공에 갔다가 그곳엔 고목이 없고 어린 나무만 있는 것에 아주 놀랐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배가 고파서 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기 때문에 나무가 견뎌내지 못하여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권이 잘못 들어서면 그 백성들은 비극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하늘나라 정권이 들어선 지상 천국입니다. 삼위 일체의 하나님,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께서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자녀로서 아버지를 믿고 순종하고 따라갈 때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지고 아버지가 다스리는 권세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높임받아야 할 하나님의 교회

 

1937년 모스크바에서 86세로 작고한 이반 페드로 윗치 파브로프 교수는 세기의 가장 위대한 생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뇌와 뇌가 분비하는 뇌수, 그리고 뇌의 기능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여타의 어떤 학자들보다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소련의 러시아 혁명이전부터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로 인해 유명했었고 그 후에도 소련 정부를 적절한 과학적 통제없이 행해진 실험과 같다고 비판했을 때에도 레닌과 스탈린은 그를 원조하고 그의 연구를 뒷바침해 주었습니다. 그는 많은 연금을 받았고 생리학 연구의 실험에는 무제한의 자금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과학 분야의 독립을 주장했고 독실한 신자였기에 종교 행사에도 이를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자유로이 개방되어야 함을 주장하여 마침내 그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교회당의 그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원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다는 공인을 발표하자, 기독교인들은 더이상 지하 묘소나 개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밝은 태양 아래 우뚝 솟은 대규모의 예배드릴 장소가 필요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동부 해안의 거대한 항구이자 수도인 라벤나(Ravenna)에는 비잔틴 시기에 이루어진 많은 교회당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인 성 아폴리나르 교회당의 벽에 장식된「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예수가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여 주었다는 기적의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내세의 희망적인 약속을 나타내어 마음의 평화를 안겨줍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중세기말의 프랑스 시인 프랑소아 비용이 그의 어머니를 위해 쓴 시를 소개합니다.

 

저는 가난하고 늙은 여인입니다.

아주 무식해서 읽을 수도 없어요.

그들은 저희 마을 교회에 하아프가 울려 퍼지는 천국과 저주받은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을그려서 눈 앞에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는 내게 기쁨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두려움을 줍니다.

 

 

한 교회의 장례식

 

오클라호마의 조그마한 도시에 한 목사가 새로이 부임을 했습니다. 목사는 목회를 시작하는 첫 며칠 동안은 교우들의 집을 찾아 심방도 하고 돌아오는 주일에 자신의 첫 설교를 들으러 오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일이 되니 교회를 찾아 온 교우는 손으로 셀 정도의 아주 적은 숫자였습니다. 그 다음 날 목사는 지방 신문의 광고란에 조그만 광고를 실었습니다. 그 광고의 내용은 자신이 부임한 교회가 죽었으니 담당목사로서 기독교 의식에 따라 엄숙하게 오는 주일 오후 장례식을 치르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광고를 본 읍내 주민들은 신기해하며 장례식에 다 몰려왔습니다. 교회의 강대상앞에는 관 위에 꽃이 놓여 있었고 목사는 의식에 따라 송덕문을 낭송하였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와 차례차례 조의를 표하러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고는 민망한 눈초리로 물러나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관 속에는 정확한 각도에 따라 크나큰 거울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서 각자가 자신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교회 생활

 

교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방관자적 자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모여 여러 사람이함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교회의 중대한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모여 예배만 드리고 헤어지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이 땅에 보내어 교회를 세우신 것은,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되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군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의 군대입니다. 이제 교회는 이 땅에 남아서 세상 질서 속에서 판치는 악한 세력과 싸워 승리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경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군대입니다.

교회의 모든 교인들은 성실히 봉사하고 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가족과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동아리를 이루기도 하고 규모가 큰 교회에는 가족과 닳은 소그룹들이 모여있는 것을 달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족같은 분위기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서로의 관계는 늘 긴장 속에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 싸이기도 합니다.

데오드로 베 델(Theodore 0. Wedel)은 「해석자의 성경」에서 교회는 어떤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터놓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서로 마음을 열고 터놓고 이야기하려면, 또한 시기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없애려면 회개의 공동체, 용서의 공동체를 이뤄야한다‥‥ 흔히 우리는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조그만 방에서 외부와 차단하고 산다. 서로 용서하는 삶을 통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자라가야 한다. "

크리스찬의 공동체는 사람들이 상처받은 부분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길입니다.

 

 

나눔의 공동체

 

최근에 한국일보와 기독교총연합회가 함께 주최하여 '산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쌀을 나눈다는 물질적 차원에서의 뜻보다는 나눔의 삶을 연습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점에 더 큰 뜻이 있습니다.

나눔의 공동체는 곧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나눔의 공동체는 곧 예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세상의 필요를 외면한 채 가난한 자와 나누는 데 신경을 쓰지 못하고 더 가지고 부하려는 데 신경을 썼고 성장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데 정력을 소비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부흥했고 성장했지만 반대로 세상은 더욱 타락했고 더욱 악해 졌습니다.우리는 흔히 왜 일천만의 기독교인 이 있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라는 자문을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비만증에 빠지고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관심과 나눔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나눔의 삶에 적극 참여한다면 이 민족은 순식간에 풍요롭게 사랑이 넘치는 사회로 변화되고 말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빌립보는 동부 마케토니아의 스트리몬(Str-ymon)강과 네스톤스(Nestos) 강 사이 에 있는팡게우스(Pangaeus) 산 동쪽 언덕 위에 자리잡은 요새 도시였습니다. B.C. 167년에 마케토니아가 로마에게 패한 후 빌립보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로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빌립보의 교회는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시 세워졌고 자주 장사 루디아가 첫교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주 물감 장수였는데 이 자주 물감은 어떤 조개에서 한 방울씩 수집해야 하는 아주 고가(高價)의 물감이었고, 따라서 루디아는 부유한 여인으로 상인 귀족이었을 것입니다.

또 여기에서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고 그 주인과 주민들의 송사로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얼마 후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렸지만 도망가지 않음으로 간수를 개종시키기도 했습니다. 바울을 자주 도왔던 빌립보 교회는 대단히 왕성했고, 여신도들의 활동도 매우 컸던 것같습니다.

의사 누가가 이곳 빌립보 출신으로 빌립보의 의학교에서 의술을 배운 듯합니다. 1914∼1938년에 불란서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시장(市場, 행16:19)과 회당이 발굴되었습니다.

 

 

파크 스트리트 교회

 

미구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라고 일컫는 보스톤시 중심에 위치 한 콩그리게이션 계통의 파크 스트리트(Park Street)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미국 독립 이전부터 있던 유서 깊은교회이며 1776년 독립 전쟁 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여서 보스들을 찾는 관광객의 정규 코스에 들어갑니다. 지금 서 있는 교회성전은 적어도 150년 전에 지은 것으로 목조로 지은 성전은 마루가 삐걱거려 예배 중 늦게 들어가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의자도 어떻게나 오래된 것인지 앉아 있기가 불편할 정도입니다. 천명은 앉을 수 있도록 지은 교회는 그 사이 몰려오는 성도들을 수용하느라고 3부예배를 드립니다. 다른 교회에는 노인이 주축을 이루며 일부 예배의 자리도 채우지 못하는 데 반하여 이 교회는 하바드, MIT등 대학의 대학생, 교수 등 젊은 전문인층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보스들 지방의 대표적 교회인 이 파크스트리트 교회는 아직 냉방시설을 하지 않아 여름 기온이 35도 이상을 오르내릴 때면 모두 주보로 부채질을 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자동차는 미국인의 불가결한 생활 수단인데도 주차장은 한 평도 없습니다. 최근에 붙인 조그마한 교육관을 제외하면 교회의 물리적인 시설에 투자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부흥하고 성도가 수천 명되는 대표적 교회에서 시설 투자에 인색하였고, 어떻게 해서 성도들은 이 불편하고 무더운 교회에 대해 불평없이 모여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교회가 수입의 70%를 남에게 주느라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본적인 것들까지 희생하면서 남을 돕는 일에 이렇게 열심인 교회를 보셨습니까?

 

 

텅 빈 교회

 

미국 교회의 대부분은 그 성전이 아름다운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웅장하게 지어졌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성경의 유명한 장면이나 인물을 장식한 유리창들은 앉아서 예배를 보는 성도들에게 감동적 분위기를 자아내주고 있습니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무게있는 연주는 성도의 마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실내의 섬세한 부분까지 차있는 의미있는 조각들은 이런 성전을 건축할 당시 성도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교회는 차지한 자리보다 빈자리가 많고 성도의 대부분은 50대를 넘어선 노인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나마도 여름 휴가철이면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가 없어 여러 인접 교회가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찬란한 예배당 건물은 선조들의 유산으로 남아있지만 신앙적 능력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한국 교회의 일치를 향해

 

지난 5월 28일 개신교 교단의 최대 연합체인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가 창립되었습니다.

보수, 진보의 벽을 허물고 통일된 한 목소리의 일치된 소리로써 모든 교회가 서로 협력한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으며 그동안 한국 교회가 백 년의 역사와 일천만 성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정부 및 사회 문제와 이단에 대처하는 데 일관성있는 통일된 의견의 소리를 내지 못하는 데에 자각하는 의미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방향으로 교권이 찢어지고 사람이 분열되어져 있는 한국 교회에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환영해야 할 일입니다. 이익과 권력 배분의 목소리가 아니라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참 외침을 부르짖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가히 환영할만한 일이며 해야 할 일이 많은 한국 교회에 참으로 기대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속담에 "가을 들판에는 대부인 마나님도 나막 신짝을 들고 나선다."고 합니다. 그만큼 가을 추수는 바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신분이 높고 체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가을에는 나막신을 벗어들고 뛰어다녀야만 합니다. 추수할 가을에 거두지 못하면 긴 겨울을 준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마디의 말이 맞지 않으면 천 마디의 말이 쓸데없다는 말처럼 한국 교회는 이제 힘있는 소리를 내야 할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시대는 황만해져 가고, 영혼은 황폐해져 가는 이 시점에 기총련에 거는 기대는 한층 더 부풀어만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콩나물과 곁뿌리

 

어릴 때 자라던 고향집에서 어머님께서 콩나물을 기르시느라고 애쓰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채전에 다녀 오시겠다고 집을 나가시 면서 날더러 콩나물에 물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콩나물에는 물을 자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엔 그렇게 했는데 한참 책을 읽다가 삼매경에 이르렀던지 콩나물 시루에 물 주는 것을 잊어버린 채 해는 저물고 밭에서 돌아오신 어머님께서 콩나물에 물을 잘 주었느냐고 물으셔서야 '앗차'하고 정신이 들었습니다. 대답이 시원치 않자 어머님은 콩나물 몇 개를 뽑아보시곤 콩나물 끝에 곁뿌리가 생긴 것을 보시면서 물을 잘 안주어서 버렸다고(실패작)하셨습니다.

콩나물은 물만 먹고 자랍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몇 차례씩이나 물을 부어 주어도 콩나물 시루의 밑에 뚫린 구멍으로 물은 모두 새어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물을 주어도 퍼붓다가 옆에 흘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주일 낮과 밤, 수요일, 그리고 금요일 구역 예배, 좀더 나가서 매일매일의 새벽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합니다. 그러나 예외를 빼놓고는 보통 신자들이 그때의 설교 제목이나 성경 본문을 따로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라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가운데 즉, 교회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냥 왔다가는 그냥 돌아가는 것 같은 가운데도 열심히 모이는 자가 신앙적으로 자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성장,그것은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결석하면 콩나물에 물을 거르는 것처럼 곁뿌리가 생깁니다. 교리에 대한 불신과 의심, 그리고 색다른 말로 뫼는 이단 사설에 현혹되어버려 멸망에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열심히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 교회의 성장

 

중국의 교회는 1979년 헌법개정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최근 중국에서 열린 한 심포지움에서 밝혀진 것으로, '중국의 교회'를 주제로 닷새간 열린 이 심포지움에는 중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서방의 교계 지도자 5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중국 기독교 평의회 팀의장은 심포지움에서 1979년 이후 거의 3500여 교회가 새로 문을 열었음을 지적하면서 그 숫자가 하루에 하나 꼴로 새교회가 생겨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또 이 같은 공식적인 교회 이외에도 수십만의 집회소와 가정 교회가 중국 전역에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팀의장은 중국의 개신교도수를 3백만에서 4백만 사이일 것으로 추정하면서 카톨릭교도의 숫자도 이와 비슷하며 회교도는 2천만, 불교도는 천만의 신도를 헤아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중국에서 기독교도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서구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록·시·묘사

 

교회는, 국가의 권위는 무한하며 모든 인간 생활을 통제하고 관념과 신념 내지는 양심의 영역까지도 침해할 수 있다는 그릇된 원리에 입각한 국가 절대주의를 반대한다.

(교황 비오 7세/ 지혜)

 

모든 교회는 자기의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되는 상자에 넣고, 우리가 그처럼 필요한 사랑하는 보통의 돈, 공동의 돈을 나눠 주어야 한다.

(아테나고라스 1세)

 

교회가 없는 것은 위험하다. 보답은 멀고, 믿음과 희망으로써만 활기 있게 되는 종교는 형식적 성찬에 의하여 정기적 예배 참석과 실례(實例)의 건전한 영향에 의하여 고무되고 재감동되지 않으면 점점 마음 밖으로 빠져나갈 것이다.

(S. 존슨/ 시인들의 생애)

 

교회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연결시키는 고리이며, 한편에서는 인간의 개성을 제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을 집단의 한 구성분자로서 하느님을 향하게 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을 혼자서 하느님에게 향하게 하였다.

(E.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교회는 겸양을 가르침과 함께 스스로 겸양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G.S. 쇼/ 세인트 존)

 

교회는 마침내 온갖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비록 이론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새로운 시대의 예수의 대체물이 되었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통히 말하면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죽었다. 그 정통이라는 것은 생명 없는 형식의 껍질이 요, 그 진보적이라는 것은 세속주의다. 이제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지체도 아니요, 세상의 소금도 아니요, 외로운 영혼의 피난처 조차도 되지 못한다. 한 수양소요, 한 문화 기관이다.

(김교신/ 하느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

 

졸음겹게 사회자가 선창하고/졸음겹게 교인들도 제창한다/ 설교단 위에서 고요히/ 목사는 적을 위해 기도한다//그러고나서 설교, 멋진/ 더 할 나위없는 설교,/ 남작 부인은 눈물을 짓는다/ 문장(紋章) 찬란한 의자에 앉아.// 아멘, 축복, 문은 열리고/ 오르간의 소리, 마지막 찬송가,/ 여름의 화려함 속에」 하늘 나는 제비, 춤추는 나비.

(릴리엔크론/ 여름날의 마을 교회)

 

이처럼 그리스도는 공허한 회당 안에 쓰러져 있습니다. / 밤의 새들이 부름소리에 호응하여 끈질기게 날아옵니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의 하염없는 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피를 빠는 박쥐가 날고 있는 이 장소에 잊혀질 채 오직 홀로/ 고민하는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서 두 손을 벌리고/ 두려운 듯이 이제는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키치/ 버려진 교회)

 

시몽,나도 함께 가리라. 해거름 때의 소리는/ 어린이들의 찬송가 소리처럼 우아하고 부드럽다/ 어스럼한 성당 안은 오랜 저택과 비슷하여/ 장미꽃은 엄숙한 향기와 그리운 사랑의 냄새가 난다.

(구르몽/ 성당)

 

언덕 위에 서 있는 교회당의 창유리에 밤 늦게까지 불빛이 댕겨지는 계절이 되었다. 널빤지 사이로 바람이 새어 들고, 때로는 왕 모래 같은 눈싸리기가 불려 들어오는 수도 있었지만 빨갛게 단 화덕과 사람의 훈기와 밝은 전등빛 등으로 하여 예배당 안은 훈훈하고 즐거운 분위기에 차 있었다

(강신재/ 파도)

 

노래를 남기고 모두 가버린 예배당/ 마음 만한 내 하늘을 문지르면/ 가슴에 와 닿아 노래되는 아이들의 하늘만한 마음/ 애들아,/ 믿음도 밟고 저며야 굳어지고/ 사랑도 길러야 자라난다.

(류순화/ 예배당에서)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를 듣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붉은 벽돌의 교회당 창문에 걸린/ 가을의 남은 빛/ 아/ 얼마나 有情한 햇빛이냐

(안광성/ 어떤 有情)

 

어두운 교회당을 밝히는/ 등불이고 싶었습니다. 그 교회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이고 싶었습니다.

(안광성/ 안타까움)

 

그대들 나날의 삶이야말로 그대들의 사원이며 종교인 것.

(K. 칼리 지브란/ 예언자-종교에 대하여)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가/ 이 한 해 모든 이의 불행과 눈물에/ 입맞추는/ 눈물티슈가 될 수는 없을까‥‥‥

(고정희/ 눈물티슈)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감사로/ 이루어진 꽃밭

(이성교/ 성령의 새 바람으로)

 

그런 생각, 저런 생각/ 한참을 가다 보면/시뻘겋게 녹이 슨 양철지붕 하나 푸른 대숲에 가려 보일락 말락/ 성가만 아슴히 들려오고//‥‥ 나도 모르게 두 손 모두어 보면/ 댕강댕강댕강댕강/ 어디선가 깊이 잦아진 종소리가/여울집니다.

(김남곤/ 두 손 모두어 보면)

 

빨간 넥타이를 매고/ 나의 배경에는 눈이 내린다// 예수가 떠나고 없는 마을에도/ 새로운 예수가 자라고/ 나의 빈 집의 둘레를/수염을 기른/ 깊은 목소리로 이를 수 있구나.//빨간 넥타이를 매고/ 검은 장화를 신은 채로/종을 치고 귀를 뚫어서/ 나는 빨리 예수의 바닥에/ 닿아야 한다.

(정대구/ 빨간 넥타이를 매고)

 

찬양하라 그리스도께서 계신 집을/ 참새는 깃들일 곳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올리브나무 가지에 머무나니/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람이여/ 제비도 당신 안에 살고 있도다/ 그들의 '구주'의 회당 안에

(스마트/ 다윗에게 부치는 노래)

 

앉았다가 일어서는/ 그 자리, 자리마다/밀려오는 종소리/ 풍요로운 은혜로/ 가득히 채워진다.

(이기반/ 초록빛 꿈으로)

 

깊은 산골에 흐르는/ 맑은 물 소리와 할께/나와 나의 벗들의 마음은/ 가난합니다/ 주여 여기 함께 하소서.// 밀 방아가 끝나는/ 달뜨는 수요일 밤/ 육송(肉松)으로 다듬은 당신의 단(壇) 앞에/ 기름불을 밝히나이다/ 주여 여기 임하소서.// 여기 산 기슭에/ 잔디는 푸르고/ 새소리도 아름담소이다. / 주여 당신의 장막을 예다 펴 리 이 까/ 나사렛의 주여/ 우리와 함께 여기에 계시옵소서.

(김현승/ 촌(村) 예배당)

 

"가장 좋은 하느님의 마이크는 그리스도요, 가장 좋은 그리스도의 마이크는 교회이며, 교회는 곧 여러분 모두입니다. "

(J. R. 브록맨)

 

마침내 우리는 어떤 지점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촛불이 타오르고/ 황금과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그곳은 세상의 예배당이었다.

(하이네/ 독일 겨울 이야기 · 7)

 

오늘도 두 번씩 걸어서 한강을 건넌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피어난 달맞이꽃을 보며/밤새워 젊음을 괴로워 하고/ 굳게 닫힌 교회당문에 기대어 새우잠 잔다.

(서덕석/ 기적)

 

 

설 교 노 트

 

성장하는 교회

행9:31

 

서론

본문에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크게 성장하였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생명의집단이기 때문에 성장해야 합니다. 만약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병들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정상적으로 지도되고 관리되고 운영이 될 때 반드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장하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1.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입니다.

본문에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라고 했습니다. 이 평안은 외부적인 평안과 내부적인 평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외부적 평안이란 밖에서 오는 시련이나 핍박이 없어서 교회 활동과 발전에 별 지장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와 집회의 자유가 있고 선교의 자유가 보장됩니다.

내부적 평안은 성도들간에 어떤 마찰이나 충돌이 없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평안을 유지하려면 죄를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허물이라도 그냥 덮어두거나 지나쳐 버리면 안됩니다.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본주의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 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보다 인간 위주로 일을 하면 결국 교회는 성장할 수가 없게 됩니다.

 

2.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는 교회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령의 감화와 감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 교회의 원동력이 되어 이끌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는 교회는 계속하여 성장을 하지만 인간의 방법으로 진행하는 교회는 쇠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서 성령을 바라는 것은 일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말씀은 멀리하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바른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하며 말씀을 귀중히 여겨야하며 성령의 은혜를 갈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신자의 수가 더 많아지는 교회입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신자의 수가 점점 많아집니다. 그만큼 복음 전도를 했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신자는 안 늘어도 내적으로 향상되면 된다고 합니다. 내적으로 향상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그만큼 깊이있게 들어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주력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귀중히 생각하셨습니다. 단지 교회 신자의 수만 많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장하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양적 ·질적인 문제가 다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가 더 많아지는 교회는 외적으로 확대해나가며 질적으로 향상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가 성장하려면 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해야 합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소원이시며 주님의 요청이십니다. 그러므로 꼭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발전하고 번영하는 축복을 받는 원인이 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마5:8-14

 

서론

기독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하려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야 함과 동시에 교회에 열심히 나가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장소는 아니지만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도와줍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그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는 신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 잘하려고 하기 전에 교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교회라는 뜻

교회라는 원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카알"이라고 하는데 '집회' 혹은 '회중'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인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 지배자로 믿으면서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일정한 조직체를 가진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기 위한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자는 지체이므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2. 교회는 어떻게 시작됩니까?

베드로에게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건물로 지어진 교회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재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다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담대히 증거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시작된 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구성하는 데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모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믿는 자들이 여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교회는 다락방에서 뜨겁게 번져나가 세계 곳곳에서 부흥하고 있습니다.

 

3.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그 몸된 교회의 머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저 머물러 있는 기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건물만 크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머리요, 교회는 그 몸입니다. 예수의 피, 생명, 정신이 교회에 있어야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주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 도우면서 노력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서로 봉사하며 사랑하는 생명체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과 지식이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의 성장과 지식의 성장 없이 교회는 건전하게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람과 봉사가 성장해야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머리된 그리스도에게 몸된 교회가 연합하여 있어야 합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된 생활을 하며 믿음과 지식이 성장하고 사랑과 봉사가 성장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복음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교회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행4:32-35

 

서론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 즉 지체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 생활을 하는 데는 꼭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와 성도의 교제 생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이제 한 가지씩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배드리는 생활입니다.

교회에는 독특한 예배가 있는데 그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가지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예배의 근본 뜻은 하나님께 겸손히 참회하며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예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인간이나 나무나 돌이나 죽은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회의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신자들이 정한 시간에 하나님 앞에 모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생활을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드리는 행위이며 세상에 이끌려서 믿음이 약해진 심령을 다시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의 순서를 보면 찬양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거나 하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경건하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2. 성도와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여러 성도가 모이므로 교제는 교회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교제라는 말은 서로 나눈다는 뜻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서로 교제할 때에, 받은 은혜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도 서로 나누었습니다. 교제는 예수의 사랑과 진실이 기초가 되어 나와 다른 성도 사이에 교제가 성립되기 때문에 사랑의 교제요, 서로 도와주려는 신앙의 교제인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교회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므로 성도가 교회의 공동 예배에 참석하며 성만찬에 같이 참여해야 합니다. 성도는 교회의 모든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도의 교제를 이루어야 그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3.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교회는 이웃을 위해 봉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 밑에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서로 돕는 생활을 초대교회에서는 행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이웃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합니다. 사회의 빈곤과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이웃을 위하여 행하는 봉사 생활은 하나님과 교제를 우선으로 한 다음 이웃과 교제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 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저 자기 혼자 신앙생활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제대로 신앙생활하기가 힘이 듭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믿음을 견고히 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돈독히 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은혜받은 교회

행2:43-47

 

서론

이 지상에서 완전 무결한 교회를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장 모범 적이고 이상적인 교회를 말한다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일 것입니다.

이 초대 교회는 땅 위에 가장 먼저 설립된 교회로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 무척 많습니다. 그처럼 초대 교회가 훌륭한 교회가 된 것은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은혜받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 개인이건 교회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은 힘써 기도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힘써 기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능력을 공급받아 힘있는 강한 신자가 되어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모두 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예수님의 약속인 성령 세례와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할 때는 합심하며 힘을 다하여 끈기있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응답해 주십니다.

 

2. 은혜받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은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사도행전 2장 2-4절에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감화 감동시키시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뜨겁게 변화시키십니다. 또 진리를 깨닫고 증거하게 하는 성령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도 이런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3. 은혜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신자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이 변화되어 새로워 졌고 비겁하게 도망하고 숨던 사람들이 강하고 담대해졌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신령하게 되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또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게 되었고, 서로 사랑하면서 자기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생활을 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결론

교회가 은혜를 받게 되면 복음 선교 활동이 활발해집니다. 교회가 발전되고 부흥하게 됩니다.

교회 성장은 사람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은혜가 넘치려면 각 신자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열심히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 삶의 내용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교회에 은혜가 임하도록 우리 신자들은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러면 교회가 일치되어 마귀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새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기를 원하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일하는 교회

살후3:6-15

 

서론

일하는 곳에는 성공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왜 열심히 일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일해서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노동은 타락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타락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후에는 노동이 더 힘들어진 것 뿐입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게으름은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땀을 흘려 열심히 일해서 그 대가로 자기 양식을 먹는 것을 정당하다고 하셨습니다. 일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어 도적질하거나 빼앗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개인 개인이 각자 맡은 바 자기 일에 성실하게 일한다면 좋은 사회는 금방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도 모든 교인 한 사람마다 자기의 본분을 다할 때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하는 교회가 됩시다. 충성되이 일하면 주님께서도 칭찬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2. 개혁 교회는 열심히 일하는 교회입니다.

종교 개혁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일은 노예들이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일은 천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무슨 일이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자기가 맡은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맡은 일에 열심히 봉사하여 부지런히 일하니 개혁 교회는 점점 더 왕성하게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들도 열심히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교회는 주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3. 열심히 일하면 생활이 부표해집니다.

부지런히 일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생각도 건전하게 됩니다. 규칙적으로 부지런히 일하면 죄의 유혹을 받는 기회가 훨씬 적어집니다.

좀더 자기를 원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들은 생활이 가난하게 되지만,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 생활이 점점 풍요하게 됩니다. 가난이 쫓겨 갑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점점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자기 맡은 바 일에 적극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결론

우리 교회가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데 그것은 무슨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부지런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하여 주님의 자녀를 양육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며 부지런히 다른 일보다 더 열심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교회주변에 속한 사람들을 돌보고 성도들의 궁핍한 생활을 돌보아 그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헤매이고 있을 때 도와주어야 합니다.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물질로 그들의 생활을 도와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교회가 됩시다.

 

 

모이기를 힘쓰라

히10:25

 

서론

본문 말씀에 "모이기를 패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된 자들은 교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모든 예배와 집회와 모이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왜 모이는 데 힘써야 합니까?

 

1. 건전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교인들은 교회에 모이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회 지도자들의 훈도와 감시를 받게 됩니다. 만약 모이지 않고 개인 행동을 하는 것을 그대로 두면 교인들의 신앙생활은 타락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운동은 교회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인들은 망령된 신화를 좇을 수도 있고 허황된 이야기에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 말씀은 잘못 해석되고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듯 개인 중심의 신앙 운동은 반드시 멀지 않아서 파국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건전한 신앙을 유지하고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무장시키려면 교회 안에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2. 복음 운동이 활발해지므로

전쟁을 함에 있어서 군인들이 합심하여 힘을 합쳐서 전진하면 그 전쟁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이 무섭다고 하여 저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면 결국 적의 손에 붙잡혀 무참히 죽고 말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신자들이 힘을 합하여 기도하면 사탄도 물리칠 수 있고 하나님과 더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탁이신 복음 전파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절 20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합심하여 모인 신자들의 단체인 교회가 영적으로 힘이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모이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3. 자주 모여야 성장하므로

교회에 자주 모여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자들은 결코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말씀이 영적자양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가지 작용을 합니다.

거듭나게 하며(벧전1:23), 성장시키며(벧전2:2), 심령과 행실이 깨끗해지며(요15:3), 거룩하여지며(요17:17) 심판하십니다(요12:48).

우리는 교회에 자주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거듭나며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이 하나님의 교회를 부인하는 사상은 이단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귀한 제단입니다.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교회에서의 모임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건전한 신앙을 유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전승을 건전히 해야 합니다. 또 복음 운동에 주력해야 합니다. 혼자만 믿고, 혼자만 구원받는다면 모이는 것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모여서 기도하고 다른 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써 성장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힘있는 교회

행5:12-16

 

서론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힘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힘이란 세속적인 무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불가항력적인 선령한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첫째,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이요 둘째, 세상을 이기게 하는 신앙의 능력이요 셋째, 마귀의 권세를 정복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능력은 초대 교회만 가지고 있었던 능력이 아니라 말세의 교회들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힘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 입니까?

 

1. 마음을 같이 하여 힘써 모이는 교회입니다.

힘있는 교회의 특징은 마음을 같이 하여 힘써 모이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옳습니다. 마음이 나뉘면 교회는 힘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의 역사와 전통이 오래되고 건물과 시설이 훌륭하여도 모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특별히 본문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여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겼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 사실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힘써 모였습니다. 이같이 힘있는 교회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어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는 죄악을 징계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2.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이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한마음으로 협력하였고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을 징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무엇이나 바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도 그 칭찬을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은 바른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는 화목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서로 아껴주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희생하면서 마침내 힘있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주위의 사람들이 칭찬을 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초대 교회의 모습을 달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하며 서로 사랑으로 아끼고 화목해야 합니다. 또 거짓과 불의와 죄악을 제거하고 순결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와 구원 얻은 교회입니다.

힘있는 교회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 얻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바른 생활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사도들이 열심으로 말씀을 외침에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일반적으로 건강한 자들과 육신의 질병에 사로잡힌 자들과 마귀에게 사로잡혀 신음하던 자들이 다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과 신앙과 성령의 능력을 바로 발휘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결론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힘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힘 있는 교회가 되려면 성도들이합심하고 협력해서 힘써 모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주 앞에 나와 구원 얻도록 힘써 복음을 전파해야 힘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특징

행2:43-47

 

서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사람의 머리에 뜻이 있고, 그 뜻이 몸으로 전달되어 몸을 통해서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이 그의 몸된 교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라는 개념은 교회가 외형적으로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이는 목적이 하나요, 가지는 뜻이 하나요, 믿음의 대상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자들의 생각의 중심이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들이 지향하는 목적과 살아가는 힘과 의지하는 상태와 맹세한 결심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많이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살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서 주시는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교인들은 어디에서든지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2.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므로 그안에는 여러 형태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선자도 있고, 비양심적인 사람도 있고, 경건하지 못한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모이는 사람들이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거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이미 거룩한 상태라면 모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성령의 감화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3.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인종의 차이나 국적의 차이나 신분의 차이가 없이 사람은 누구나 다 교인이 될 수 있으며 기독교의 교리를 모든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것은 지역에 따라서 교회의 본질이 다르고 구조나 기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만 구원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단이 아닌 이상 어느 교파나 교회에도 다 구원은 있는 것입니다.

 

결론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교훈을 직접 배우고 그 명령에 따라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는 신앙과 교리는 사도들이 주님께 배운 것을 가르쳐 주고 전달해 주고 고백한 대로 전승된 것입니다.

교회의 특징은 하나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특징은 교회는 인종이나 국가의 차별없이 동일한 목적을 지닌 보편적인 것입니다. 거룩한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런 특징들을 잘 살펴서 잘못된 것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경건한 신앙생활과 전도 사업을 열심히 하여 하나되는 교회, 거룩한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산 교회와 죽은 교회

계3:1-6

 

서론

이 땅 위에 있는 교회들은 각 특색이 있고 신자들도 장 ·단점이 다 있습니다. 초대 교회중 아시아에 설립된 교회들은 주님께 칭찬을 받거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사데 교회는 책망만 받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비관적 인 경고가 내려졌습니다. 즉, 죽은 교회라는 말인데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산 교회의 모습과 죽은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죽은 교회

(1) 죽은 교회는 활동을 못하는 교회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도 죽으면 활동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신자가 행함이 없다면 그 교회와 신자는 죽어있는 상태와 같은 것입니다.

(2) 생명의 호흡을 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기도는 영적 생명의 호흡인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생명이 끊어진 교회입니다.

(3) 신앙생활이 속화되어 가서 세상과 벗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4) 신앙생활이 병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타락하여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5)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범죄를 하여도 회개하면 살 수 있는데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교회나 신자가 속화되어 병들어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으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2. 산 교회

살아 있는 교회 란 어떤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는 4절에 횐 옷을 입었다고 하였으니 횐 옷은 축복의 옷, 승리의 옷, 순결의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옷을 입는 자들은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자, 의를 힘입은 자,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횐 옷을 입고 살아 있는 교회는 주님과 영적 교제를 맺고 죄를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죄를 대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지켜 나갑니다. 자기의 맡은바 책임과 사명을 잘 감당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죽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길강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러면 구속의 옷, 칭의의 옷, 구원의 옷인 횐 옷을 입어야 합니다.

사데 교회는 죽은 상태라고 하였으니 그러나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있어 횐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죽은 상태이지만 성도 가운데는 죄악에 빠지지 않고 순결한 살아 있는 믿음을 지키는 자가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산 믿음을 가진 살아 있는 신자는 이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살아 있는 교회와 신자는 영적 호흡인 기도를 깊이 하고,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며 경건함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우리 교회는 결코 죽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아서 숨쉬는 교회, 흰 옷을 입은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산 교회, 신자가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임무

행20:7-12

 

서론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구원얻은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세속적 지위나 명예가 필요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거룩해 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임무가 있습니다. 그냥 교회 자체로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교회에게 맡기신 임무는 무엇입니까?

 

1. 말씀의 선포

구약의 예언자와 신약의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의 선포를 맡은 교회는 성경을 통해서 오늘에 필요한 메시지를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말하는 자의 기능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사상이나 의견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들 전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기초로 선포해야 합니다. 이 말씀의 선포는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원어를 사용하거나 전문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님 깨서는 무식한 사람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음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지식이 많은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이 말씀의 선포는 듣는 사람들의 생활에 결단할 수 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결단하지 못한다면 그 말씀은 제대로 선포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동시에 그 말씀이 지니고 있는 진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학습 제도를 세워 신자들에게 복음 진리를 바로 이해하게 하려고 성경학교도 세웠고, 신학 교육도 실시하였습니다. 만약에 성경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신자들이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여 자기들의 마음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진리를 왜곡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육에 등한시하거나 성경 교육이나 신학 교육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신자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3. 성례 집행을 해야 합니다.

초신자가 교회에 입회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예하는데 개신교에서는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를 성례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입니다.

세례는 이때까지 지은 모든 죄를 씻음받는 것을 의미하는 예식으로 반드시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믿어야 합니다.

세례는 외형적 의미로는 신앙의 결단을 신자들 앞에서 공포함으로써 교회에 입회한다는 표시이며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성만찬은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행하신 데로 떡과 포도주는 예수의 몸과 피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성만찬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므로 성 만찬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상하신 몸을 기념하여 떡을, 흘리신 피를 기념하여 포도주를 먹고 마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없어지고 구원받는 것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교회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또한 진리로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교육이 필요하여 주일 학교도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진리로 잘 양육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입니다.

또 교회의 임무 가운데 성례전 집행이 있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고전12:26-31

 

서론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 속에는 두 가지 측면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신비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신비적인 측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몸이 된다(엡1:22-23)"고 말함으로 교회의 신비에 대한 비유를 밝혔습니다. 여기서 신비적이라는 말은 교회가 지니는 진리가 인간성의 영역을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세상에 세워지는 근원은 인간의 초월에 두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개체의 몸인 인간과 연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은 그 신비적이며 초월적인 진리의 구체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죽음과 부활, 그리고 지상에서 승천하게 되었을 때 그의 몸은 교회가 되어 지상에 구체적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상에서 신비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며 신령한 형체로 현현된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의 머리에 뜻이 있고, 그 뜻이 몸으로 전달되어 몸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는 것처럼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이 그의 몸된 교회로 전달되고, 그 전달된 뜻은 몸을 통해서 이룩해야 할 사명이 됩니다. 그 사명은 초월적 신비적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지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연합체로써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거룩하게 성별하고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2. 윤리적인 측면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이 지상의 인간의 갈 길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윤리의 새싹입니다. 이 윤리는 이 지상의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되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횡적인 관계를 맺게 해 주는 것이 됩니다.

교회는 그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되는 동시에 교회의 일원 한 사람 한 사람을 같은 지체로서 연결시켜 서로 사랑케 하는 횡적인 삶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이나 그 지체가 여럿이므로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귀가 눈에게, 눈이 코에게 각각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고전12:14-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여러 지체끼리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해야 할 원리적인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을 돕는 일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이 사명을 교회가 감당치 못하고 지체가 지체를 배척하여 버린다면 교회로서의 존재 의의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로서의 의의를 상실하여 이제는 세상의 빛으로서,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내던져 버리어지듯이 교회도 그 사명을 잃고 그 존재 의의를 저버린다면 하나님도 그 교회를 버리실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교회 본질을 아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떠나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되었는데 이 때문에 생기는 교회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사명을 잘 지켜 나갈 때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 의의를 지닐 것입니다. 이런 교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

엡4:1-32

 

서론

에베소서의 중심 내용은 교회론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사명은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통일성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교회의 사명으로서의 통일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1. 교회의 통일(1-16)

(1) 통일하는 방법(1-3).

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할 것을 말합니다.

②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것을 명합니다.

㉠ 겸손하라:남에게 나를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 온유하라:남의 마음을 잡는 것을 뜻합니다.

㉢ 인내하라:오래 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용납하라:사랑 가운데서 살라는 것입니다.

㉤ 화목하라:성령의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2) 통일의 원리(4-6).

① 몸이 하나이오

② 성령이 하나이요

③ 소망도 하나이요

④ 주도 하나이요

⑤ 믿음도 하나이요

⑥ 세례도 하나이요

⑦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3) 직분에의 사명의 통일(7-13).

① 은혜로운 직분(7-10)

㉠ 각 사람에 게 받을만한 분량대로 주심.

㉡ 당신을 계승시키려고 주심.

㉢ 당신을 모범시키면서 주심.

② 직분의 종류(11)

㉠ 사도

㉡ 선지자

㉢ 복음전하는 자

㉣ 목사

㉤ 교사

③ 직분의 사명(12)

㉠ 성도를 온전케 합니다.

㉡ 봉사의 일을 하게 합니다.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합니다.

④ 사명의 목표(13)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됨.

㉡ 온전한 사람을 이룸

㉢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름.

(4) 사역에의 목적의 통일(14-16)

① 어린아이가 되지 말자.

②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말라.

③ 풍조에 밀려 요동치 말라.

④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라.

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지라.

 

2. 성도의 새사람 생활(17-32)

(1) 소극적인 옛사람을 벗어 버려라(17-19).

① 이방인의 허망심을 버려라.

② 총명의 흐림에서 마음을 굳히지 말라.

③ 방탕에 방임하지 말라.

(2) 적극적으로 새사람을 입으라(20-24).

① 예수를 옳게 배우라.

② 심령을 새롭게 하라.

③ 새사람을 옷 입으라.

(3) 새사람의 한 일(25-32).

① 소극적으로 하지 않을 일.

㉠ 거짓말하지 말라.

㉡ 분내어 품지 말라.

㉢ 마귀가 틈 못타게 하라.

㉣ 도적질하지 말라.

㉤ 더러운 말 하지 말라.

㉥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

㉦ 모든 악한 뜻을 버리라.

②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

㉠ 참된 말을 하라.

㉡ 선한 일을 힘써 하라.

㉢ 빈궁한 자를 구제하라.

㉣ 덕을 세우는 말을 하라.

㉤ 인자와 긍휼을 품으라.

㉥ 서로 용서하라.

 

결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베푼 그 모든 행사를 우리가 알았으니 그것을 본으로 삼아 우리도 마땅히 행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소문낸 교회

살전1:1-10

 

서론

본문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소문을 낸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외형이나 교인 수에 있어서 자랑함이 아니라 교인의 신앙생활이 훌륭하여 좋은 소문을 낸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를 데살로니가 교회를 살펴봄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떠한 교회입니까?

 

1. 신 . 망 ·애를 구비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3절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애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세 가지는 우리 기독신자가 구비해야 될 삼대 요소인 동시에 세 가지 미덕이라고 밝히었습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세 가지를 구비한 교회로서 좋은 소문을 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① 믿음의 역사가 나타났고 ② 사랑의 수고가 나타났고 ③ 소망의 인내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역사가 없는 믿음은 가짜이고, 수고 없는 사랑도 가짜이고, 인내 없는 소망도 가짜입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은 환난을 참고 견딜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세 가지 확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1) 내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신자요

(2)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신자요

(3) 하나님이 항상 기억하여 주시는 신자로 서의 확증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모든 믿는 자에게 모범이 된 교회입니다.

본문 7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에 게 본이 되었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이 되었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각성과 감명을 일으켜 흠모의 대상이 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었던 증거가 무엇입니까?

(1) 환난 중에서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격과 생활을 정화시키고 위로와 기쁨과 힘을 주어 시험과 환난을 승리하게 하십니다.

(2) 사도들의 신앙을 본받아 계승한 데 있습니다. 사도들의 신앙은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서

① 철저히 회개하고 죄를 대적했으며,

② 항상 자기 자신을 정복하고 주님을 따랐으며,

③ 이 세상 것을 초개같이 여기고 십자가를 지고 천성으로 달려갔습니다.

(3) 주님 의 신앙을 본받아 계승한 데 있습니다.

벧전2:21-24에 보여주시는 주님의 모범은

① 죄를 범치 아니하셨고

② 입에 궤사가 없으셨고

③ 욕하지 아니하셨고

④ 위협하지 아니하셨고

⑤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기를 부탁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 신앙입니다. 이는 바른 신앙을 계승하여 실천함으로써 모범이 되어 좋을 소문을 내었던 것입니다.

 

3. 영적 생명이 약동한 교회입니다.

본문 8절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고 하였습니다.

(1) 주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선교 운동은 저들의 모범적인 신앙생활에 있었던 것입니다.

(2) 자신과 교회의 순결과 신성을 파수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우상을 철폐하고 하나님만 독실히 섬기었습니다.

(3)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날마다 전진한 교회입니다.

 

결론

데살로니가 교회가 좋은 소문을 내게 된 것은

(1) 신망애를 구비한 교회가 된 데 있습니다.

(2) 모든 믿는 자에게 모범이 된 데 있습니다.

(3) 영적 생명이 약동하는 교회가 된 데 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도 이와 같은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라

행20:26-35

 

서론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밀레도라는 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교회를 사랑하라"라고 최후의 부탁을 하였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교회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교리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와 교회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진정한 교회

(1)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선택하사 불러내신 생명의 집단입니다.

(2)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피로 구속하사 성별하신 생명의 집단입니다

(3) 진정한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의 기업을 약속 받은 생명의 집단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깊이 가지며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바로 선포하는 기관으로 세워졌습니다. 또한 택한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기관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진정한 교회를 통해서 심령의 위안과 소망과 새힘을 공급받아 이 세상에서 천성을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2. 교회를 사랑할 이유

(1) 하나님 의 간절한 소원인 동시에 요청이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피흘려 세운 교회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2) 구속함을 받은 우리 기독교 본분인 동시에 의무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할의무가 있을 것입니다.

(3) 이 우주상에 제일 소중한 것이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귀중성에 대하여 성경을 고찰해 보면 우주 만물은 말씀으로 창조하였으나 교회는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세우셨고, 이 세상 나라들은 때가 이르면 멸망할 것이로되 교회만은 영원히 보존되고, 이 세상 만물은 모두 소멸되지만 교회만은 영광을 누리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랑해야 됩니다.

 

3. 교회를 사랑하는 내용

(1)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2)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교역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주님이 파송하신 대사인 동시에 주님을 대신하는 사역 자들이요,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3)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믿는 소자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믿는 교우 하나하나는 주님이 사랑하사 이 세상에서 택하시고 피흘려 구속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의 주인공으로 성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 사랑은 위의 세 가지를 사랑해야 됩니다.

 

4.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

(1) 교회를 아끼고 존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내 가정, 내 사업, 내 사회보다 더 사랑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2) 교회를 위해서 진심으로 헌신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시간도 물질도 노력도 인색함 없이 투자하여 바로 봉사하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3) 교회와 더불어 고락과 운명을 같이 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상과 교훈이요, 사도들과 신앙인들의 바른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순결성과 평화와 건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결론

교회는 하나님이 선택하시어 구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교회를 사랑하여야 할 때 교회 안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교회를 아끼고 존중히 여기며 헌신 충성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구 원

성 경 활 용

1. 구원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1) 하나님의 섭리

(시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사12:2)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2) 하나님의 의

(사56:1)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3) 그리스도의 약속

(마1:21)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4) 영혼의 구원

(벧 전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요일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5) 구원이 영원성

(사45: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6) 대상의 광대성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자손임이로다.

 

2. 구원의 근원

(1) 하나님

(시3:8)구원은 여호와에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사46:13)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렘3:23)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요일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 예수 그리스도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딤후2:1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히5: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3. 구원의 원동력

(1) 하나님의 사랑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63: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3) 하나님께 나아가게 함으로

(히7:25)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4) 하나님의 자비로

(딛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5)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딤전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6) 그리스도의 부활로

(롬5:10)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7) 하나님의 능력으로

(롬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8) 하나님의 은혜로

(딛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4. 구원받을 자의 범위

(1) 이스라엘 자손

(사45: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롬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2) 이방인

(사52:10)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마21:31) 세리와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행28:28) 그런즉 하나님이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3) 모든 사람

(눅3: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5. 구원 전의 상태

(1) 죄인

(막2:17) 내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 진노하심에 있음

(롬5:9)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3) 곤고한 백성

(시18:27)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4) 환난 가운데 거함

(창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삼하4:9)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6, 인간 편에서 고찰한 구원의 조건

(1) 회개하여 죄사함 얻음

(마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행2:38)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2) 그리스도를 믿음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3) 입으로 시인함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4) 예수로 인한 정박을 견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5) 좁은 문으로 들어감

(눅13:23-24)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6) 하나님을 찾는 것

(암4: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7) 하나님을 경외

(잠14:27) 여호와는 경외하는 것을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8) 성경을 상고

(딤후3:15)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느니라

(9) 자기를 부인

(막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10) 말씀을 받음

(약1:21) ‥‥능히 너의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7. 하나님 편에서 고찰한 구원계획

(1) 예정

(엡1:4-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2) 비밀

(마13:11)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막4:11)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롬16:25-26)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고전2:7-9)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엡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골1:26-27) 이 비밀을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인데

(3) 그리스도의 성육신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4)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요18: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행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엡1:7-11)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야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히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5) 은혜의 선택

(살후2:13-14)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경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6) 후사

(히1:14) 모든 천사들을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성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는

(7)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

(롬2:6-1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관련원어풀이

1. lx'n: 나-찰

원래는 "끌어내다, 없애다"의 뜻이다.

(1) 치워버리다, 벗기다, 빼앗다.

(대하20:25)

(2) 약탈하다.

(출3:22, 12:36)

(3) 끌어내다, 갈라놓다.

(삼하14:6)

(4) 뽑히다, 위험에서 구함을 받다.

(사20:6, 렘7:10)

(5) 자신을 구원하다, 도망가다.

(신23:16)

 

2. fl'm; 말-라트

원래는 "매끄럽다, 미끄러져 나가다, 도망가다"의 뜻이다.

(1) 구조되다, (자신을)구출하다, 도망가다.

(시22:5, 잠11:21, 28:26, 단12:1)

(2) 도망가게 하다, (위험에서)구출하다, (자신의 생명을)보존하다.

(삼하19:5, 왕상1:12, 욥6:23)

 

3. [v'y: 야-솨-

(1) 광대하다, 충분하다, 풍부하다, 놓아주다. 보존하다, 간직하다, 남겨두다.

(삿2:16, 시7:2)

(2) 구하다, 승리케 하다, 돕다.

(출2:17, 신20:4)

(3) 나 자신의 손이 나를 도왔다.

(삿7:2, 시98:1)

 

4. [v'y< 웨-솨-

(1) 구출, 구원, 도움.

(시12:6, 합3:13)

(2) 나의 도움의 하나님, 나의 구원자

(시18:47, 사17'10)

 

5. $l'j; 할-라츠

(1) 놓임을 받거나 해방되다, 구출함을 받다.

(잠11:8, 9)

(2) 해방시키다, 구출하다.

(삼하22:20, 욥36:15, 시18:19)

 

6. fl'P; 팔-라트

원래는 "미끄러져 나가다, 도망가다"의 뜻이다.

(1) 살짝 가버리다, 도망가다.

(겔7:16)

(2) 몰래 빠져 나가다.

(욥23:7)

(3) 도망가게 하다. 구출하다.

(시17:13, 82:4, 114:10)

 

7. fLeP' 팔레-트

구출, 구조, 구원.

(창45:7, 대하12:7, 시32:7)

 

8. bWv 슈-브

(1) 뒤돌아보다, 돌아서다.

(창37:29, 출4:20)

(2) 자신을 돌이키다.

(대하6:24)

(3) 회복하다, 회복되다, 새로워지다.

(왕상13:6, 겔35:9)

(4) 보상하다, 갚다.

(시94:23, 잠17:13)

(5) 되돌리는, 구조된

(겔38:8)

 

9. hy:j; 하 - 야

(1) 숨쉬다, 살다.

(창5:3, 11:11)

(2) 번창하다. 잘 살다

(신8:1)

(3) 다시 살다, 부활하다.

(왕상17:22, 겔37:5)

(4) 건강을 회복하다, 고침을 받다.

(창20:7)

(5) 살게하다, 생생하게 하다, 생명을 주다.

(창19:32)

(6) 소생하다, 생명을 도로 찾다.

(삼상2:6, 대하11:8, 왕하5:7, 8)

 

10. swthriva 소-테-리아

(1) 구출, 보존, 안전, 구원, 적의 방해에서 구출.

(행7:25,눅1:71)

(2) 육적인 생명의 보존, 안전.

(행27:34, 히11:7)

(3) 모든 참된 기록자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소유물로서 의 子원.

(고후1:6, 빌1:19)

(4) 미래적인 구원.

(롬13:11, 계19:1)

 

11. awvzw 소 - 조 -

(1) 구원하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키다, 위험과 죽음에서 구하다, 자연적인 위험이나 재난에서 보호하거나 구출하는 것, 죽음에서 구함.

(마14:30, 막15:30)

(2) 건강이 회복되다, 몸이 나아지다.

(마9:21, 막5:23)

(3) 지키다, 보존하다, 영원한 죽음에서 구하다, 보존하다.

(요12:47, 고전1:21)

(4) 구원함을 받다.

(마10:22, 막10:26)

 

12. diaswvzw 디아소-조-

(1) 안전하게 살려내다, 구원하다, 무사히 운반하다.

(행23:24)

(2) 치료하다, 건강을 회복하다

(마14:36, 눅7:3)

 

13. ejxairevw 엑카이레오

(1) 집어내다, 뜯어내다.

(마5:29, 18:9)

(2) 구원하다, 놓아주다.

(행7:34, 갈1:4)

(3) 선발하다, 고르다, 선택하다.

(행26:17)

 

14. rJuvomai 흐루오마이

구출하다, 구해내다, 보존하다, 보호하다.

(마6:13, 눅11:4)

 

15. swthvr 소-테-르

(1) (하나님에 대해서) 구원자, 구출자, 보존자.

(눅1:47)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 구원의 창시자.

(딤전1:1, 딛1:3)

(3) 메시아인 그리스도에 대하여.

(눅2:11, 요4:42)

(4) 몸, 즉 교회의 머리, 보존자

(엡5:23)

설교예화자료

오작교와 사다리

 

아마 세 살 어린이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 「견우와 직녀」 그리고 「오작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지로는 도저히 서로의 손을 잡을 수도, 사랑의 행위도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상황에서 까마귀들의 살신으로 견우와 직녀가 만나 한 몸을 이룬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의 근저에는 서로의 사랑의 순결성의 승화된 형태와, 간절한 사랑의 부르짖음의 결과의 형태로 전개되지만 이 둘의 사랑을 연결시켜주는 까마귀의 역할을 방기해서는 절대로 이야기의 구성을 완성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 까마귀는 아니지만 사람이 자신을 사다리로 하여 죽음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리버풀에 있는 선원들의 숙박소에 어느 날 밤 대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가고 온통 자욱한 연기로 아수라가 된 그 숙박소에는 죽음의 공포로 사색이 된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아우성으로 그 처절함은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방차가 와서 사다리를 건물로 향해 치켜세웠으나, 끝까지 닿고자 하는 것은 바람일 뿐, 너무 짧았던 것입니다.

이때 주위에 몰려선 군중 속에서 한 영국 선원이 곧바로 사다리 위로 뛰어 올라가서 사다리의 꼭대기에 버티고 자신의 몸을 사다리처럼 받치고 위의 사람을 향해 외쳤습니다.

"빨리 내 몸을 타고 내려오십시오!"

차례로 사람들이 내려오고 그 선원도 내려왔습니다. 그때 그 선원의 얼굴은 불에 탔고, 머리털은 불에 그을렸고 손에는 물집이 생겼지만 부족한 길이의 사다리를 자신의 몸으로 연결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출했던 것입니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

 

아마 교회에 잘 출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초신자라도 거지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비유를 잘 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물론 이는 2000여년 전의 단지 기록된 비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주변에 수시로 나타나고, 또한 쉽게 접할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이자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한 가난한 인디언과 부유한 백인의 구원 사건이 있습니다. 한 인디언과 백인이 함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죄에 대해 자복하고 회개하여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디언은 주의 말씀을 듣진 즉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기뻐하였으나, 부유한 백인은 그렇지 못하여 얼마 동안 시름에 잠겨 거의 실의 에 빠져 있다가, 얼마 후 그도 마침내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달콤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곧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백인은 인디언을 만나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당신은 어떻게 해서 단번에 평안을 얻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은 다음의 비유를 대신하여 이에 대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오, 형제여 ! 어떤 부유한 왕자가 다가와서 새 코트를 당신에게 주겠다고 제의한다면, 당신은 지금도 왜 잘 입고 있기 때문에 얼마간 망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도 새옷을 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나의 낡은 옷을 보고 그 옷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계속 당신의 의를 고집하며 포기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인디언인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단번에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구원의 조건-형식이 아닌 내용, 겉모습이 아닌 내면

 

물론 세속 도시에서는 때로는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람을 채용할 때 그 사람의 본질이나 내면의 모습보다는 그 사람의 깔끔 단정한 외면이나 형식을 주안점으로 볼 때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도성에서는 그 사람의 형식이 아닌 본질로서 구원의 조건을 들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이를 망각하고 그 사랑의 내적인 신앙의 본질보다는 재물이나 권력 등의 물적 조건으로서의 신앙을 판단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 듯합니다.

나는 처참할 대로 처참해진, 세상 세파에 휩싸일 대로 휩싸여 초라하고 헐벗은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던 한 화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그리고자 한 그림의 모델인 돌아온 탕자를 찾기 위해 정신병원, 빈민굴, 나환자촌은 말할 것 없이 감옥까지 가 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실의에 빠져 깊이 헤매이던 중 아주 적절한 모델을 발견하여, 그 거지에게 자기집에 가서 초상화를 그릴 수 있도록 해 준다면 보상을 적절히 해주겠다고 하여 승낙을 얻어 내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되어, 화가의 집에 모습을 나타낸 거지가 "저와 약속을 하셨었죠."라고 말하며, 그 화가의 화실에 들어서자, 그 화가는 잠시 그 거지를 쳐다본후 "저는 전에 당신을 본 적이 없을 뿐더러 그 어떤 약속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잘못 생각하셨나 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아니 맞습니다. 저는 오늘 10시 여기서 당신을 만나기로 약속했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낀가 오해하시는군요, 저는 오늘 이곳에서 말끔한 신사가 아닌 거지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습니다. "라고 화가가 말하였습니다.

"실은 제가 바로 그 거지예요."

"당신이? "

"네 ."

"아니, 왜, 그동안 어떻게 지냈길래‥‥‥‥

"저 실은 그림 그리기 전에 몸 단장을 해야 할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화가는 "나는 본래의 당신을, 당신의 모습을 원했던 거예요. 자, 이제 당신은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구원의 가치-사는 것이 아닌 값없이 주시는 것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재화로 그 가치를 평가받다 보니 교회에서도 때로는 구원마저도 돈으로 환산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많은 듯합니다.

중세 시대 교회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져 면죄부라는 것까지 판매하였던 것을 보면, 현대 교회의 수십종이 넘는 현금 내역 역시 다시 한 번 반성해봐야 할것 같습니다.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라는 어린이 찬송가를 이제는 대 예배에서 어른들이 다같이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에 자신의 사랑하는, 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 왕의 온실에서 주렁주렁 열린 포도를 얻어가길 간절히 원하는 한 가난하고 가련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5실링짜리 은화 반닢을 가지고 왕의 온실에 있는 포도를 사기 위해 왕의 정원지기를 찾아갔지만 곧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다시 한 번 좀더 많은 돈을 가지고 찾아가 애원을 하였지만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왕의 딸이 성난 정원지기의 목소리와 그 가난하고 가련한 여인의 애절한 울음 소리를 듣고 그 여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이 자신의 자식이 병에 걸렸다는 것과, 그 왕실의 포도를 원하다는 것, 그리고 몇 번이나 없는 돈이지만 들고 와서 그 포도를 사려했으나 실패하고 쫓겨났다는 것 등 이제까지의 모든 사연을 말하자 공주는 "사랑하는 여인이여, 그대가 커다란 실수를 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상인이 아니고 왕인 것입니다. 왕의 임무는 파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값없이 주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나서 그 공주는 많은 포도를 따서 그 여인의 앞치마 속에 듬뿍 넣어주었습니다.

 

 

구원의 도상에 서 있는 인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 음받았다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원죄를 입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믿음으로 그 죄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하게 창조되었다는 아담마저도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인간을 둘러싼죄의 덩어리 속에서 그 인간이 죄를, 죄의 유혹을 극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같습니다.

어느 조용한 시골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한 소녀가 그 시골의 한 교회에 가서 등록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에 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인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주셨다고 믿습니까? " 한 장로님이 묻자, 그 소녀는 확실히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장로님은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소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기 이전에 많은 죄를 지은 사실만을 인정할 뿐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장로님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 죄를 범했고,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죄를 범한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말은 모순이 아닌가요?"

소녀는 잠시 생각한 후에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장로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는 죄를 향해 나갔었고 지금도 가끔 죄를 범하기는 하지만 이제 저는 죄로부터 탈출해 나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끊임없이 기독인의 완성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인 것 같아요."

 

 

촌각을 다투는 구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 우리의 삶과 죽음, 구원이나 멸망 또한 우리의 순간의 결단을 요구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언제인가 기독교계의 한 신문에서 촌각을 다투는 구원의 문제, 죽음의 기로에 선 인간의 문제를 담은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업을 크게 벌여 놓아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는 한 사업가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사무실로 찾아와 "그렇게 사업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미래를 예비하십시오."라고 말하자 사업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젊습니다. 그리고 번창하는 사업의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교회에 갈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귀찮게 하지 마시고 그냥 돌아가십시오."

사업가의 사무실을 찾아간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예수님으로, 그후로도 수차 그 사업가의 사무실을 방문했으나, 그때마다 그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면서 예수님을 쫓아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여전히 분주한 그에게 또 누가 찾아와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때가 다 되었습니다. 이 땅에 머물러 있을 시간이 끝났으므로 당신은 나와 함께 가야 합니다. "

그는 여전히 뒤로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몹시 바빠 당신과 같이 갈 시간이 없습니다. 혼자 가십시오." 그러나 갑자기 목덜미에 얼음장같이 찬 손을 느낀 그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죽음의 사자가 이 세상에서 그를 데려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패와 유리

 

하나님은 인간을 둘러싼 갖가지 사물의 양태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인간 자신의 구원의 확신들을 인간에게 보여주십니다. 또한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흐름이나 심지어는 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에게서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간파해 내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얼마 전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회의에 참석하던 중에 한 여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여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새의 부리로 쪼는 듯한 이상스러운 소리에 놀라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일어났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그 밖에서는 참새가 들어오려고 유리를 쪼고 있었고, 유리창 안에서는 나비가 이리저리 소란스럽게 날고 있었다 합니다. 유리를 보지못한 나비는 곧 잡힐 줄 알았고, 역시 유리를 보지 못한 참새는 금방 나비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척을 둔 나비와 참새, 종이 한 장과 같은 얇은 유리를 사이에 둔 참새와 나비, 이러는 상황하에서도 나비는 수백만 마일이나 떨어진 것처럼 안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비와 참새 사이에는 그 둘의 먹고 먹힘을 막을 수 있는 유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기독교인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사람의 영혼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기독교인은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새와 나비 사이의 유리가 나비에게 방패가 되듯, 우리 인간에겐 방패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죄와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징검다리

 

죽음과 고통과 슬픔과 절망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이라는 담이 막혀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헐면 죽음이 겁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저곳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정이 있었는데, 부부가 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머리가 명성한 터인데다가 잘생긴 미남 미녀이고 자녀도 둘이며, 생활에 여유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아프다 하여 병원에 가보니 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남편이 암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예수님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그들이었기에 젊은 표범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남편이 암에 걸리자 그들은 여름날 뿌리째 뽑아놓은 풀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영위하다가 환경이 열악해지면 기가 죽는게 인간세인데 그들 부부도 예외는 아니였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찾아왔을 때는 기가 있는 대로 죽어 그렇게 힘이 없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몇 번을 심방 갔었는데 그들 부부는 그동안의 잘못 생활한 것과 교만했던 것에 대해철저히 회개하였으나 삶에 대한 애착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펄은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감을 수 없다며 조금만 더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에 주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천국으로 간다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을 회복하고 눈을 감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지옥에 이르는 길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는 사탄의 모습은 우리가 한눈에 익히 분별할 수 있는그리 단순한 모습은 아닙니다. 분명 사탄은 현대 과학의 발전에 따라 다양한 옷을 걸치고 현대 과학의 달콤한 말로 우리를 미혹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너무 현란하고, 너 무나 복잡 미묘하여 웬만한 신앙을 견지하고서는 이 사탄의 정체를 폭로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보아라, 구원의 날이 왔다. "라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기로 결심한 한 목회가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위해 잠시 동안의 명상을 하고, 연구를 하던 중에 그만 깜박 잠이 들게 되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지옥에 들어가 그곳에 떨어진 영혼들이 비밀 회의를 하는 가운데 앉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회의의 주 내용은 어떻게 인간의 영혼을 가져올 수가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 지옥에 떨어진 한 영혼이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내가 지상에 가겠다. 지상에 가서 성서는 모두 꾸며낸 이야기이며 신성한 것도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 " 그러자, 여기저기서 "아니야, 그렇게는 안될거야."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영혼이 말하였습니다. "나를 가게 해다오. 내가 가면 하나님도 없고, 구세주도 없고, 천국도 없으며, 지옥도 없다고 이야기하겠다. " 그러자 또 "안돼, 그렇게는 안돼,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하였습니다.

갑자기 한 영혼이 일어나 현명한 풍모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제가 인간 세계로 가겠습니다.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구세주도 있고 하늘나라도 있으며, 물론 지옥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서두름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내일은 다 이뤄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 그러자 그들은 그를 보냈습니다.

 

 

젊은 부인을 판매합니다.

 

세속 도시와 신성 도시

우리의 삶의 중심을 이 두 도시 중 어디에 내어 맡기느냐 하는 것은 구원과 죄로부터의 탈출의 문제입니다. 이 세속 도시에는 죄와 악마가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다양한 옷을 걸치고 우리의 영혼을 살려고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 도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십니다.

거리의 한 전도사가 런던의 어느 거리에게 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안나라는 여왕의개인 시녀가 호화롭게 꾸며진 마차를 타고 지나다가 그 앞에 멈춰섰고, 주위에 운집한 군중들의 관심이 그녀에게 향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여러분, 이제는 세기적 경매가 있겠습니다. 가장 높은 값을 매기신 분께 저 젊은 부인을 팔겠습니다. 저는 이곳에 경매를 원하는 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과 악마, 그리고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그 전도사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자, 세상이 여. 당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주겠습니까? 부 ·명예 ·그리고 향락? 아닙니다. 그녀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지요. 악마여, 당신은? 지구상의 모든 재산과 부? 천만에, 부란 아침해가 떠오르면 사라지는 밤과도 같은 것‥‥‥‥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걸겠습니까? 주 예수여 ! 나는 그녀에게 영원하고 하나의 오점도 없는 유산을, 이 땅에서는 은총이며, 다가올 세상에서는 영원한 영광을 주겠노라."

"주여, 이 여자를 데려가십시오." 전도사가 외쳤습니다. "당신이 주인이십니다. 지상과 천국이 증인이 되기를‥‥‥ 그리고 전도사는 놀라 당황한 젊은 부인에게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영원히 주 예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안나 부인은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평생을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가치 있게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매우 진귀한 예술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 아들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깊은 상심과 슬픔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몇 주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죽은 부자는 유언으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경매로 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은 아들의 초상화를 첫번째 경매로 붙이라는 단서를 걸어 놓았습니다. 죽은 부자의 진귀한 소장품을 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유언에 따라 소년의 초상화가 제일 먼저 경매에 올려 졌습니다. 그러나 죽은 소년의 초상화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소년을 매우 사랑했던 늙은 혹인 하인이 75센트에 그 그림을 샀습니다. 다른 경매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 초상화는 단번에 팔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경매가 중단되고, 없는 중에도 그림을 살 만큼 죽은 소년을 사랑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주라는 아버지의 유언이 공표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값진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그러한 사랑을 항상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름다운 메모지의 원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하루는 매우 큰 종이를 만드는 공장을 시찰하게 되었습니다. 공장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던 여왕은 넝마실이라고 쓰여진 방에 안내되어졌습니다. 그 방에는 수많은 넝마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여왕은 "어떻게 이런 더러운 넝마들이 희고 깨끗하게 될 수 있는가?" 하고 물자, 공장감독관은 "특수한 화학 처 리 방식으로 우리가 보는 것처럼 하얗게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시찰을 마치고 얼마 후, 빅토리아 여왕은 그녀의 책상 위에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메모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모지 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여기있는 모든 종이들은 여왕님께서 보셨던 더러운 넝마들을 이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약간의 견본을 놓았으니 즐겁게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종이 공장."

구원은 넝마 종이가 아름다운 메모지로 바뀐 것처럼 우리의 죄가 흰 눈보다 깨끗해지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시12:2)"

 

 

기쁜 소식(Good News)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좋은 소식(Good News)을 전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러나 미련한 인간들은 마음의 빗장을 굳게 잠그고 주님께 반항합니다. 이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오하이오 주의 톨레도에 있는 어떤 호텔의 벨 보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피곤하여 잠시 눈을 붙이려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겨우 눈을 붙인 벨 보이는 노크 소리에 신경질을 내며 귀찮게 굴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밖에 있던 변호사들은 계속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를 참다못한 벨 보이가 문을 열었더니 밖에서 끈질기게 기다리던 변호사들은 그가 상속금으로 5천 달러를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Good News)을 전해 주었습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시18:46)"

 

 

성령의 힘

 

도비라는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이혼과 부친의 잦은 결혼으로 불안정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교육도 받지 못해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장하면서 어찌나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던지 차라리 개가 되는게 편하겠다고 생각하여 남의 개집에 들어가 짖어댄 일까지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쌓인 한이 많은 그는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생활을 하던 그는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성령을 받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결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구원받는 것은 어떤 교육의 힘도 남들의 질책도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주님을 구주로 모셔드리자 일시에 변화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 6)"

 

 

길, 진리, 생명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로마가 그 당시 세계 문명의중심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길이 있지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이 말처럼 세계에는 많은 종교와 신(神)이 있지만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올바르게 보이는 길이라도 종국에는 멸망하는 길이 참으로 많습니다.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는 종교로서는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고 말씀하셨듯이 천하 인간에게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은 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전폭적으로 내어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승리의 삶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흑인의 회심

 

미국의 사우스 웨스트 쥬니어 대학에 안젤라 마두마세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하루는 학교에 오니 학교가 온통 떠들썩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학원 소요가 일어나고 있을 때로 남부의 흑인단체들이 닥치는 대로 파괴하며 학교까지 천들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들어온 단체는 블랙판조 즉, 흑표범이라 불리우는 가장 난폭한 단체였습니다.

그 여학생이 강의실로 들어가려 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이 그녀의 팔을 잡고서는, "왜 너는 나를 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들어오느냐?"라고 힐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보고 웃은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사람을 쳐다보고 "내가 당신을 보고 웃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평안과 기쁨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항상 웃는 모습이라고 하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흑인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평안과 기쁨을 갖게 되었지? "라고 질문을하자, 그녀는 이천년 전 세상에 오셔 우리 인간의 모든 죄악과 불의와 절망과 저주를 대신 걸머지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그가 "그러면 나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당신도 이제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기 전 죄를 자백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구원을 얻고 나와 같은 평안을 얻을 수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흑인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흑인은 그 즉시로 동료 흑인들을 모아 학교에서 물러가게 하고, 하루만에 그 단체의 간부 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을 얻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자유 의지냐, 예정론이냐

 

'예정설(칼빈주의)' 과 '자유 의지(웨즐리주의)'에 대해 토론을 벌이던 신학자들의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서로 상반된 의견을 가지고 있던 양자 모임은 논쟁이 가열되어 극단적인 편견을 가지고 날카롭게 대립하는 두 모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와중에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자신의 입장을 정하지 못한 한 신학자가 오랜 망설임 끝에 '예정설'모임으로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가 그쪽으로 향하자,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 "예 ! 저는 저의 자유 의지에 따라 여기에 왔습니다. "고 대답했습니다. "자유 의지에 의해서 여기에 왔다구요? 그렇다면 당신은 다른 그룹에 속해야 할거요."라고 그들이 말하자 이 돌아서서 신학자는 자유 의지의 모임으로 갔습니다.

"언제 저희 모임에 오시기로 결정하셨습니까? " 그들이 묻자, "저는 결정 한 것이 아니고, 이곳에 보내진 것입니다. "고 그가 대답하자, "이곳에 보내졌다고요? 당신이 당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하지 않은 이상, 당신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거듭난 삶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찰스 콜슨이 거듭난 삶을 살게된 이야기를 엮은 책이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워터게이트 사건에 말려 들어갔고, 미국의 고위 관료로서 감옥에 갇혀죄수들과 함께 어떻게 감옥 생활을 보냈는가를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그는 감방에 들어가 보니 어떠한 정책이나 철학, 폭력도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감옥에 있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많은 보수를 주겠다는 여러 가지 제의를 다 뿌리치고 감옥 전도에 생애를 바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란 생각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살아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

 

 

구세주 예수

 

예배가 끝난 후 날카롭게 생긴 한 남자가 목사에게 다가와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 목사님의 설교는 못마땅합니다. 예수는 우리 삶에 모범을 보이신 분으로 묘사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 그러자 목사님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길 "신앙인답게 선하게 살면 되지오."

"그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처럼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죄를 범하지 않고 완전한 삶을 사셨오, 당신도 그러했소? " 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에 당황한 남자는 "물론 저도 때때로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의 주님은 모범자로서가 아니라 구제주이신 예수님이요, 구원은 오직 예수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음 받을 때 역사하십니다. " 하고 목사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호오돈의 구원에 대한 관심

 

나다니엘 호오돈(1804∼1864)는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태어난 순수한 뉴잉글랜드 지방 사람입니다. 그는 대체로 칼빈주의적 전통을 고수하던 자기 조상들의 종교 및 윤리적 생활관을 그의 작품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의 집안이 지닌 특수한 사정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선조인 월리엄 호오돈은 1630년에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추구하여 윈드롭 지사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온 청교도로서, 초기 식민지 개척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제 2대째의 존 호오돈은 17세기말 세일럼을 중심으로 감행되었던 유명한 '마녀 재판'에서 냉정하고 가혹한 판사로서, 19명의 마녀에게 사형을 선고했었습니다. 그의 판결에 의해서 처형된 한 마녀의 남편은 호오돈의 집안 식구들을 자자손손까지 저주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호오돈 일족의 기억 속에 검은 오점을 남겼고, 나다니엘 호오들 자신도 이러한 집안의 역사와 저주로 인해 깊은 심리적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19세기 미국에서는 낙천적 인간관이 창도(唱道)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오돈의 작품 세계에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는 달리 인간의 심령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죄악의 힘과 그 구원에 관한 길은 관심이 집요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 「주홍글씨」는 호오돈의 내면 세계와 구원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 작품입니다.

 

 

어록·시·묘사

 

복병이 숨은 곳은 수도 없이 많으며 구원은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의 가능성은 복병이 숨은 장소의 수만큼은 된다.

(F. 카프카)

 

어떠한 고통의 외침도 한 인간의 고통의 외침보다 크지는 못하다. 어떠한 고통도 한 개인의 고통보다 크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한 인간의 고통은 무한히 큰 고통이며, 그래서 그게 필요한 구원도 무한히 커지는 것이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욕구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T. 아퀴나스/ 박애에 대한 두 가지 교훈)

 

구원의 길은 어디에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이르는 길뿐이다. 거기에만이 하느님이 있고 평화가 있다.

(H. 헤세)

 

구원의 가능성. 이런 말을 쓸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뿐이다. 그러나 그 경우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은 전혀 달라진다. 그러니 누구나 구원의 가능성을 진리로서 인용해서는 안 된다. 구원의 가능성은 이론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혹은 구원의 가능성이 진리일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구원의 가능성」이라는 말에서 언뜻 느껴지는 그러한 의미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구원의 가능성이란 오히려 탄식이고 외침인 것이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태양 아래 온갖 고통에는/ 구원이 있다지만, 그 중에는 없는 것도 있다 하니/ 만일 있다면그것을 찾아보랴./ 만일 없다면 그것을 잊으시라.

(머더구스)

 

당신은 우리에게/ 의지와,/ 신뢰와,/ 구원과, / 진리와/ 정의를 가르친/ 우리들의 영원한 은사

(권용태/ 우리가 당신 안에 있듯이)

 

구원이란 무엇인가/ 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

(정현종/ 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주님의 피의 기도를/ 오늘 우리들이 드리게 하시고/ 사랑으로 구원함을/ 이 작은 지면 위에서 찾게 하여 주시고/진정하고 참됨이 우리 모두의 생명이 되도록 주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황금찬/ 주님의 말씀대로)

 

그러나, 종말은 가고/ 지금은 위대한 탄생일세/ 아니 구세의 진행일세/ 종말은 구원의 시작인 줄을/유다,자네는 정녕 몰랐을 걸세.

(석용원/성탄별곡-친애하는 유다군에게-)

 

그리스도 베들레헴에 태어나심이/ 천수백 번을 헤아리건만/그리스도 네 자신의 마음에 나시지 않으시면/ 그 영혼은 아직 버림받은 채로니라./ 십자가만이 네게 구원을 주리니,/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네 마음에 세워지지 않는다면/ 네 영혼은 영원히 잃어진 것이니라.

(실레시우스/ 네 자신의 마음 안에)

 

지각(地穀) 찢는 불볕에/ 내 영이 이울어 피곤에 지친 때/ 님은 구원의 나래 펴시어/서녘 꽃구름 위에 누이시어요

(엄창섭/ 기도 IV)

 

"구원이란/ 병자가 치유됨을,/ 굶주리는 자가 한 줌의 쌀이나 한 조각 빵을 받음을,/고독한 사람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을 찾음을,/ 수인(囚人)이 감옥으로부터 해방됨을,/좋아하는 이 없는 사람이 이해와 호감을 받음을,/ 억압받고 예속된 사람이 타율적인 처지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함을, 부당하게 취급되는 사람이/ 법과 정의는 관철된다는 체험을,/ 일상 과업의 단조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실적의 강압 없이,/그리고 다가오는 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고향으로부터 추방된 사람이 고향을 되찾음을,/ 전쟁과 폭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절망하고 체념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충고하고 새로운/ 길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남을 의미한다. "

(베르너 뤼크/ 은총-선사된 자유)

 

마른 강바닥의 불볕도/ 올올이 태우며/오로지 순종으로 치닫던/ 한 생애의 역주는/ 닫힌 문 열어줌과/ 억눌려 갖지 못한 자에게/ 구원의 손길 펴는/ 눈물겨운 직업일 뿐.

(엄창섭/ 기도 · 28)

 

 

설 교 노 트

 

노아 가족의 구원

창 7:1-12

 

서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가 악하여서 진노하시고 물로써 심판을 하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홍수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노아 가족만을 구원하셨습니다.

왜 노아의 가족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1.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려고 무척 노력하면서 애썼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노아가 행위로써 의롭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것이지만 그래도 노아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는 깨끗하게 살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의롭게 된 사람답게 생활을 하였고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셨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당하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노아는 의로웠을 뿐 아니라 환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기에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 안에 거하며 살기를 원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도 노아와 함께 해주시면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자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실 때에 방주를 짓는 일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방주를 짓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노아가 불평 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또 모든 짐승들을 한 쌍씩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라고 하실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묻거나 왜 그렇게 하느냐고 따진 적도 없습니다. 그저 순종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믿는 자에게 귀한 것은 순종뿐입니다. 순종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며 노아는 하나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구원하여 주시려고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에 어려워 보이는 시험을 주시 기도 하시고 아주 감당할 수도 없는 시험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통하여 얼마나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가 시험하시고 순종하는 사람인지를 알아 보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지라도 그저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행실을 의롭게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나와 내 가족이 전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의 과정(서정)

겔40:22

 

서론

분문을 보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층계가 일곱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구원받는 서정이 있는데 이 역시 일곱입니다. 이제 구원에 이르는 일곱의 순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르심

딤후1:9에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며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구원시킬 자들을 부르십니다. 이런 소명(鷺命)의 은사는 불가항력 적입니다.

 

2. 거듭남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들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니고데모에게 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새로 거듭 태어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 생명의 원소가 우리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3. 믿음을 가지게 됨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하였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 암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4. 회개하게 하심

회개란 "뉘우친다, 슬퍼한다, 떠난다, 돌아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며 거기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회개를 하도록 시키십니다.

 

5. 의롭다함을 얻음

롬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다함은 얻는다는 말을 '칭의'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의를 우리에게 돌려부치심인데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얻은 것입니다.

 

6. 성화시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자를 거룩하게 하시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쫓아 새로워짐을 얻고 지 ·정 ·의(知 ·精 ·意)의 전인격이 내적으로 변화가 되고 점점 죄에 대하여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능히 살게되는 것입니다.

 

7. 영화롭게 하심

롬8:30에 보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느니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영화의 구원은 신자가 죽을 때에 받는 축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몸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죽게되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모든 죄악으로 타락되었던 제한된 육체로서가 아닌 새롭게 변화된 육체로 부활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면에서 신자의 부활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영광 중에 다시 살아 심판날에 "안다" 하심을 얻어 "무죄하다" 하심과 완전한 복을받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어떤 순서가 있는데 이는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성화시키시며,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를 구원의 서정(순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선물

엡2:8-10

 

서론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은 이 구원을 자랑거리로 삼아 한껏 교만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이란 뜻을 세 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원은 죄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 인이며(롬3:23), 죄악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의원인은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들의 죄 때문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자41들이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서 해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아무리 선한 일을 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갖는다 할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또한 누구도 그 죄를 대신 속량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죄인을 속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악 권세에서 해방받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그 어떤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예수 그리스도의 대 속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노력은 조금도 포함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죄에서의 해방이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은 그들의 어떤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그들을 구속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온전한 계획이며, 그들에겐 은혜로 나타난 것입니다.

 

2. 구원은 장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죄의 상태에서의 구원뿐 아니라 슬픔과 죄에서의 최종적인 해방을 뜻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은 인간 자신이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인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인데, 이 믿음도 인간이 갖추는, 그래서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인간편의 일이기는 하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3. 구원은 현재의 거룩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죄에서의 해방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인 반면에 또한 현재에서는 거룩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2:12-13) "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현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거룩한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즉,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직 신학용어로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은혜의 선물을 받은 인간에게는 구원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어 성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결론

구원이란 말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서 해방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둘째는 장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고, 셋째는 현재의 거룩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조건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에 게 의무가 있다면,이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 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마1:20-21

 

서론

본문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는데 그가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구원이란 무슨 뜻입니까?

 

1. 구원의 뜻

구원이란 말은 헬라어 "소테리아"의 번역어로서 그 뜻은 구약 성경까지 소급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구원은 히브리어로 "여수아"인데 "해방하다. 구출하다, 도와주다, 구속하다, 피신시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원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도울 수 있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신데 그가해방자요, 질병과 좌절과 불행에서 도우시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신약에 사용된 "소테리아"란 병에서 치유되고 원수와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영원한 멸망과 심판으로부터의 구원, 즉 종말론적인 구원까지 적용하였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구원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기독교에서 구원에 대해 말하려면 근본적으로 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문제가 확실하지 못하면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해주는 죄는 불신앙과 이기심입니다. 불신앙이 생기면 불순종도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불신앙이 소극적 의미라면 이기심은 적극적 의미의 죄의 상태입니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과 같아진다. "는 자만심과 이기심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자기 자신의 인격적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파괴된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의 길, 용서의 길을 발견하고 사죄함을 받기 위하여 결단을 요구하는 행위가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나를 위한 사죄의 대속적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사죄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3. 구원은 개인과 사회 구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전통적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밝힌 대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에게 눈뜨임을 선포하고 눌린 자를 놓아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는 말씀 중에는 구원의 의미가 인간 개인뿐 아니라 사회 환경까지도 구원되어야 한다는 폭넓은 이해의 구원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전체성에서 보면 그 의미는 내적 ·정신적 ·구원과 외적 현세적 구원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해방인 것입니다.

 

결론

구원이란 우리의 죄악을 인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적 죽음을 주시므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단절되었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사회의 구원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아서 사회와 역사의 현실 구원에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단계

요14:1-6

 

서론

구원이란 말은 '해방하다', '구속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우리가 죄악 속에서 빠져 헤매이고 있다가 그 죄로부터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은 단순히 주께서 구원하신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단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단계는 무엇입니까?

 

1.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으면 구세주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태초에 창조되어진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여 인격이 파괴되고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모두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아 모두 죄인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도록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깨닫도록 해주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공적이나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면 주님의 죽음도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당한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 각 개인의 죄를 주께서 담당하셨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인간의 영혼은 사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 값인 죽음을 대신하셔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주께서 담당하셨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4. 주님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나 단체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만이 참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나는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구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는 단계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구원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고백해야 하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셨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님을 우리의 구주로 영접하는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깨서는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고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구원을 찾으시는 하나님

창3:8-15

 

서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오히려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아담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였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무서워 나무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에 진노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어떤 분이십니까?

 

1.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범한 아담은 하나님이 무서워서 숨었으나 하나님께서는"아담아 네가 있느냐 (창3:9)"라고 찾으셨으니 죄인을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죄를 책망하시기도 하시지만 잘못한 자식을 사랑으로 감싸듯이 부르시는 음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담과 같이 범죄한 후 자기 몸을 숨기려고 나무 뒤로 숨는 자는 아닙니까? 남에게 전가만 하는 비겁한 신앙인은 아닌지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에 우리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2.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든 뱀은 저주를 받았지만 아담과 하와에게는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류 구속의 허락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범죄한 인간들의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를 고난을 당하게 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때문에 구원을 약속하시고 허락하시고 성취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의 약속을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죄를 가리워 주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을 약속해 주시고 그 죄를 가리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부부를 위하여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그들이 옷을 입게 된 것은자신들의 범죄로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진 몸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어서 그 몸을 가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나뭇잎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허물을 가리워 주시기 위해서 가죽옷을 입히셨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하므로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 속하시는 일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결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결론

자신의 아들을 아끼시지 아니하시고 인간들을 그것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범죄한 자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인들을 찾으시고 그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고 "네가 어디 있느냐? "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고전1:18-25

 

서론

본문에 보면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로 말미암아 얻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은 선행이나 율법에 의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슨 뜻입니까?

 

1. "건진다"는 뜻입니다.

이 건진다는 것은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 땅에서 고역하고 있을 때 애굽 왕은 이스라엘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아들은 죽이고 딸만 키우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지만 그 부모의 마음이 어린 아이가 죽는 것을 원치 않아 상자에다 넣어 물에 띄웠습니다. 이때 바로의 공주가 그 상자를 건져내고 이름을 건졌다는 뜻의 모세로 지었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사는 자리로 옮겨지는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에서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2. "고친다"는 뜻입니다.

병이 난 사람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아야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듯 우리 영적으로 병든 인간들도 의사이신 주님께 고침을 받고 영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다 영적 소경들이요, 귀머거리들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소경된 자라면 주님께서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귀머거리된 자라면 주님께서 듣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고침받아 건강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으나 병든 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 영혼의 건강이 어떠한지 살펴보고 고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3.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생명을 얻어 살아났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원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로 인하여 죽은 사람이 의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을 속이고 이웃의 것을 착취하던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진실해지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던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죽었던 자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생명을 부여받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결론

구원은 어떤 다른 행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어려움 가운데서, 위험한 자리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병든 영혼을 고쳐주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을 주님께 향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생활

고전10:31-33

 

서론

성도들은 구원받은 것을 인하여 확신하는 가운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만을 위하여 감사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더욱 힘써야 합니다. 나도 구원을 받고 다른 사람도 구원을 받으려면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1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바울 사도는 강조하였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활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낮은 곳에 처하든지 높은 권세의 자리에 앉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적인 방법으로 술과 담배를 흑은 약물을 사용하면서 전도를 한다고 나선다든지 교회 봉사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전도나 봉사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생활이 정결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교회 안에서 불필요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불필요한 자는 교회 안에서 쓸모없는 일만 만드는 자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닙니다. 진리를 외면하고 거짓을 좋아합니다. 신약의 후메내오처럼 거짓 교사 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유태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들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불필요하게 거치는 사람이 되면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꼭 필요한사람이 되어 구원을 받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3.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우리의 올바른 생활로 기쁘게 하고 그들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종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를 위한 생활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한 사람이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의 생활은 어떠한 생활입니까? 혹시 나도 구원받지 못하고 남도 구원하지 못하는 그런 신앙생활은 아닌지오.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로 해야 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 거치는 자가 되거나 불필요한 자가 되어 하나님께 버림받는 생활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여 그들이 상처받지 않고 유익을 얻어 구원받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원받는 신앙

엡2:1-10

 

서론

기독교는 구원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구원이란 질병이나 포로나 사형 같은 죽을 자리에서 구출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은 어떤 능력있는 구원자의 힘으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구원을 받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1. 구원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구원은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의 지혜나 바른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않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악마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구해주셨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긍휼의 열매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수고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합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2. 구원하시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내신 방법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을 표를 삼아 구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거나 애굽인이거나 관계없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는가 안발랐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그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3.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회개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주께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구주이심을 알아야 하며 그것을 믿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자야말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론

구원은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처럼 확실한 구원관을 가진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육체는 살아 있으나 영적생명은 죽은 상태에 있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가련한 형편에 처하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인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죄의 자리에서 의의 자리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회개하고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로 오실 때 마음에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구원받은 간수

행16:27-34

 

서론

바울과 실라가 귀신에 잡혀있는 여종을 구원하자 그 종의 주인이 자신의 이익이 끊어진 것에 분개하여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많이 맞은 후에 옥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하는 명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발을 착고에 채웠습니다. 그러던 간수가 뜻밖의 사건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1.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때 출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렸으며 모든 사람을 매고 있던 것이 다 풀어지게 되었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보니 옥문이 다 열려 있으므로 죄인들이 다 도망한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명령을 잘 이행하지 못한 불안감과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간수는 칼을 빼어 스스로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은 피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르면 더 이상의 삶을 자포 자기하고 죽으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현대인들은 아주 작은 일에서도 좌절을 하고 자살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바울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자결하려던 간수는 뜻밖의 일을 당하였습니다. 당연히 도망갔으리라고 생각했던 바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하면서 네 몸을 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하여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서워서 떨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서 바울과 실라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옥에서 나갈 수 있었지만 간수가 자기로 인하여 고통당할 것을 생각하고 옥안에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간수는 그런 바울의 행동에 깊이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3. 간수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간수의 질문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습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모든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온 집이 하나님을 믿은 일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결론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입니다. 특히 절망 가운데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돈이 구원을 주지는 못합니다. 쾌락이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애수 그리스도만이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수와 같이 자신만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구원받도록 해야합니다. 그래서 같이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죽으려던 사람이 이제 새생명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으니 이것이 예수를 믿은 결과입니다.

 

 

롯의 구원

창19:23-29

 

서론

창세기 19장에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소돔성에는 아브라함의 조카롯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의 악이 너무도 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불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원해내고자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의인 50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겠느냐는 아브라함의 간구에 그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인이 10명도 없어서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롯은 구원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구원이었습니다. 왜 부끄러운 구원입니까?

 

1. 자신이 속해 있던 성이 멸망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집이 소돔성 안에 있었는데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이 다 멸망을 당하고 자기와 가족만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롯은 자기가 살던 곳에서 할 일을 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신만 하나님을 잘 믿으면 물론 자신은 구원을 얻게 되지만 다른 사람을 하나님앞으로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롯자신도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간구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자신의 아내까지 멸망당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경고도 무시한 채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소금기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롯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아내마저도 제대로 하나님께 인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불순중하여 멸망을 당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내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 자신만 구원을 얻었다고 떳떳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나 한사람만 구원을 얻으면 무엇이 기쁘겠습니까? 나의 가족, 이웃들이 모두 멸망을 당한다면 그것은 바로 믿는 자들의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복음을 전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3. 롯의 구원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서느냐고 했습니다(벧전4:18).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주시는 은총 속에서 의롭다 함을 얻은 의 인으로서의 구원이니 부끄러운 구원인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자의 편에서는 부끄러운 구원일 뿐입니다.

 

결론

롯은 자신이 처해있는 곳에서 자신이 해야할 일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자신과 그 가족이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였다면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위들조차도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을 정도이니 그 생활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소돔성은 부끄러운 성입니다. 의인이 없었던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롯은 자신의 아내까지 멸망을 당하였으니 그 구원은 더욱 부끄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간구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속에서 롯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의신앙을 돌아보며 우리는 롯과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닌지, 혹 남의 간구로 인하여 받은 구원은 아닌지 내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막10:46-52

 

서론

모든 사람은 세상에 태어난 이상 한번은 다 죽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범죄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에서 해방받는 길은 오직 한 길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입니다. 사도행전 4장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소경 바디매오는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어떤 사람입니가?

 

1. 예수님을 기다린 신앙인입니다.

본문에 보면 디메오의 아들인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께서 지나가시 기를 길가에 앉아서 기다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든 소망은 다 예수께 달려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길가에 앉아서 예수님을 기다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는 먼저 예수를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다음은 노력을 바치고 셋째는 정성과 생명까지도 바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사모하고 대망하는 신앙의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드리고 희생을 감수해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2. 예수님을 자기 문제 해결자로 믿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가 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소리질러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바디매오는 나면서부터 소경이라는 운명을 타고 났으며 또한 가난하여 남에게 구걸해야 하는 거지였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타고난 운명이 있고 여기에 따르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자기 문제의 해결자로 믿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이요, 자기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구주로 믿는 신앙이요, 자기의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여 주실 수 있는 메시아로 믿은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다른 사람이 무시하고 핍박을 해도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주님에 간구하는 신앙입니다.

 

3. 시험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본문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니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었습니다. 소경이고 거지인 주제에 왜 예수님을 부르냐는 뜻으로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바디매오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라고 소리치며 예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믿음으로 인하여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낙심되고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바디매오의 신앙처럼 굽히지 않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라도 예수님 앞에 나가는 신앙인이 되어 문제를 해결받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바디매오의 간절한 호소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이 처해있는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경으로서 생활을 청산하게 되고 모든 것을 밝게 볼 수 있는 광명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을 의존하는 생활에서 이제는 스스로 독립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고, 죽음의 자리에 있었지만 생명의 자리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피

출12:12-14

 

서론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 동시에 피의 종교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고 죄사함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구원을 위한 피의 기사와 피를 대신하는 붐은 빛깔의 기사가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애굽에서 구원한 피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은 양의 피를 집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 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재앙을 계속하여 내리셨는데 계속하여 말을 듣지 않자 열 번째로 장자를 치는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 재앙이 그 집 앞은 그냥 지나가기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인이라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면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설주의 피는 구원의 약속이요, 또한 구원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 피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2. 라합의 집에 맨 붉은 줄(수:2)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여리고를 정탐하라고 보냈는데 여리고 왕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갔습니다. 그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에 있었는데 여리고 왕은 그것을 알고 라합에게 그들을 끌어내라고 기별하였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그들을 안전하게 숨겨 주었고 도망갈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약속하기를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라고 하였습니다. 정탐꾼의 약속을 믿은 라합은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고 외출을 하지 앉았습니다. 온 성이 멸망하는 날이 왔을 때 창에 붉은 줄을 매단 집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붉은 줄은 약속의 줄이요, 믿음의 줄이요, 구원의 줄인 것입니다.

 

3. 예수의 보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피를 홀려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보혈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줄입니다.

인간은 죄악 가운데 빠져서 사탄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피를 십자가 위에서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죄악 가운데서 빠져나왔고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구원하는 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피를 믿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 인간은 누구나 구원을 원합니다. 특히, 어려운 가운데 처해있을 때는 더욱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을 때 그 약속을 믿고 문설주에 피를 바른 사람은 다 구원을 얻었습니다. 라합은 창에 붉은 줄을 매달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정탐꾼의 말을 믿고 그대로 하여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신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심

출3:7-8

 

서론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호렙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구원하시고자 하셨습니까?

 

1. 백성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인에게 당하는 고통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그렇게 고통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 요셉이 애굽의 국무 총리로 있을 때에 흉년으로 인하여 온 야곱의 가족들이었는데 점점 번성하여져서 많은 수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장이 즉위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점점 강성해지자 그것이 두려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노예처럼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구나 모세는 태어날 때 아들이었으므로 아들은 죽이라는 명령으로 인하여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상자에 넣어 물에 띄워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장성하였습니다. 이렇게 아기 낳는 것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을 정도로 혹독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일을 짐승처럼 하며 고통스러워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2.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소리를, 특히 부르짖음을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소원을 다 들어 주십니다.

 

3. 우고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만약 택하신 자들의 근심과 고통을 모르신다면 우리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 알고 계실뿐 아니라 다 해결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루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적당한 때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급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며 그들의 우고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직접 내려오셔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이 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아시고 근심과 어려움도 아십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고통 중에서 구원하시고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구속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엡3:10

 

서론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역에 감추어 두었던 자신의 비밀을 성도들이 깨닫도록 권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 인간들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통하여 훌륭한 계획과 영광된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1. 구속의 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적합한 분이라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구세주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하며 죄인을 대속할 수 있는 죄가 없는 거룩한 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성육신에 관한 결단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나타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비천한 삶을 사셔야 했습니다. 계속되는 시련 중에도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싸워서 승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무한한 권세와 영광을 지닌 분으로서 비천한 인간으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죽음에 이르기까지 낮아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매달렸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최고의 통치자로서, 심판자로서 모든 구원에 관련된 일을 절대적으로 다스린다는 사실에서도 밝히 드러납니다.

 

2. 구속 사역의 결과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 안에 있는 각 속성은 구속 사역의 결과로서 더욱 영화롭게 나타납니다. 그 중에서도 권세와 의로우심, 거룩함, 진실성, 자비로움은 더욱 빛납니다.

구속 사역의 결과 성도가 입은 축복은 평안과 은혜, 행복감 등 다양하며 많습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며 그리스도가 그들의 머리가 되시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사탄을 정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은 죄있는 자들을 깨끗하게 하시고 불의한 자를 의롭게 하시려고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천대를 받음으로 성도가 입은 은혜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소망이 없고 낙망된 것 같으나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수치를 당하므로 그 백성들이 존귀케 되도록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전에는 죄와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가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 변화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귀한 하나님의 은총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죄인된 인간들을 구속하시는 데 있어서 변함없는 당신의 지혜를 세상에 알리시려고 이 땅에 복음을 두루 퍼지게 하셨습니다. 복음은 성도들을 명백히 구별짓는 속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 사역을 거역하거나 멸시한다면 실로 중대한 죄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시며 굳건한 반석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구속의 때

사63:4

 

서론

그리스도를 인하여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해 구속의 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속의 해가다가오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의인에 대한 악인의 횡포도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속의 때"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구속의 해란 무엇입니까?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로 원수들에게 모욕당하고 짓밟혀 산산조각이 난 시온의 자녀들의 송사를 들어주십니다. 또 원수들은 시온의 왕의 자유를 찬탈했고, 여호와의 성직도 부패한 종교인들에 의해 침해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서는 이러한 찬탈 행위에 대항하여 그의 왕관을 지키려고 하십니다.

영혼이 마귀에게 복종하고 있지만 그날이 오면 마귀의 권세에 눌려있던 우리의 마음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구속의 해가 되면 초대 교회의 신앙이 그 능력 가운데서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또 구속의 해가 되면 나라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기독교의 범위가 확산될 것이며 이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고 사탄의 보좌는 그리스도의 보좌로 대치될 것입니다. 또 그날이 오면 우리의 온갖 부패와 허물은 사라질 것입니다. 또 모든 분열은 사라질 것이며 평화 가운데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저 높은 곳으로부터 부어져서 진리가 거짓을 이기게 하고 경건함이 불경건함을, 덕이 부도덕을, 정의가 불의를 이기게 합니다.

 

2. 구속의 해가 온다는 근거

어두움이 우리 눈을 가려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언제나 정의와 심판이 있어서 하나님의 감추인 비밀이 드러나고 하늘이 그의 의로우심을 선포할 때 그것들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포로된 상태에서 구원할 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3. 그날을 맞는 성도의 의무

구속의 해를 맞는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가서도 금식하며 열심으로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또 성도들은 자신을 예비하여 우리의 모든 생각이 사랑과 거룩함에 합당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 깨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내함으로써 구속의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핍박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우리의 구원이 지체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지쳐서는 안됩니다. 구속의 해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에 반드시 을 것입니다.

 

결론

교회의 원수들의 사악함은 이미 도를 넘어섰습니다. 악의 세력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시는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구속의 해가 도래하는 그 영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할지라도우리는 부지런히 우리의 영원한 구속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날을 위해서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딛3:4-5

 

서론

본문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대강령이 밝혀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무엇으로 구원하십니까?

 

1.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서 합니다.

"그"란 하나님을 말합니다. 구원은 성삼위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서 계획되고 출발하였습니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만 가지고는 도저히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구교에서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만 우리 신교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믿는 믿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섭리를 오직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곧 믿음이요, 오직 믿음입니다. 중세기 종교 개혁가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고 외쳤습니다.

 

2. "중생의 씻음으로" 합니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죄 씻음으로 중생하는 데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이란 것은 단순히 물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같이 죽고 주와 함께 사는 새로운 피조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해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천국에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3.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합니다.

구원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도리는 단번에 순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지만 성령으로 새롭게 됨은 일생을 통해 계속되는 도리로 봅니다. 어인 아기가 새상에 태어나는 것이 중생이라면 그 아기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씻음을 받아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크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새롭게 변화되게 하십니다. 불의가운데서 살던 자가 정의 가운데서 살게 되고, 거짓 속에서 살던 자가 새롭게 되어 진리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결론

우리를 구원하시는 역사는 매우 거대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이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성삼위 하나님의 연합적인 역사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을 작정하셨고 언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중생하게 되는데 우리 인간의 죄를 씻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없었다면 죄 씻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새롭게 하여 주심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깊은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살리시는 하나님

겔18:21-24

 

서론

본문 21절에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법을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살 수 있고, 의인이라도 타락하여 죄를 범하면 죽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신 후 말씀하시기를 창세기 1장 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땅 위에 많아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죽이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먹지 않으면 산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범죄한 인간을 징계하시고 죽음으로써 벌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는 것은그들이 자신들의 범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이시라고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 계신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연약하고 유혹에 빠져서 죽을 지경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시고 살 길을 인도하시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2.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범죄한 악인은 그 죄의 값으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행한 모든 죄에서돌이 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며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라도 살게 하시려고 그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 라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살게 될 뿐 아니라 그 범죄한 것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악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복음을 전파하실 때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 "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죄가 없고 흠이 없는 의로운 사람들뿐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인을 살게 하시려고, 살리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었든간에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다 용서하시고 그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강도에게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들은 죄지은 자를 무기형에 처하거나 심지어는 사형에까지 처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까지도 구원해 주시려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만 하면 두 팔 벌려 그들을 낙원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로 돌아갑시다.

 

 

구원받은 여인

막5:25-34

 

서론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실 때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찾아왔습니다. 그 회당장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간구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3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가실 때 많은 무리도 함께 따랐는데 그 가시는 도중에 사건이 하나 생겼습니다.

 

1. 큰 축복을 받은 여인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가에서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짐으로써 병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병으로 인하여 12년 동안이나 고생하면서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있는 재산을 다 허비하였지만 고침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결과 병에서 고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죄에서 구원을 얻는 큰 축복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겉옷자락을 만졌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사모하고 자신의 병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 여인을 구원한 것입니다.

 

2.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습니다. 자신의 겉옷자락을 만진 여인이 있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했다고 칭찬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사모하는 마음이 강하여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감히 앞에 나와서 고쳐주십사 하지 못하고 뒤에서 겸손히 겉옷에 손을 댄 자기의 죄를 아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이십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스쳐 지나가지 않으시고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찾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십니다(잠16:19). 사모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 겉옷자락에 손을 댄 자가 누구냐? "고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찾으시는 주님 앞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3.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실 때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떨며 주님 앞에 나와서 엎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해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의 역사는 믿음으로 시인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 인하지 않는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궁극적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능력을 시인할 때만 완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론

나약하고 병든 한 여인을 통해서 그녀가 한 일은 작은 일이지만 큰일이었음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뜻에 합한 일이라면 열심으로 그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 작은 일이 우리에게 큰 축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모함으로 주님의 겉옷자락에 손을 댄 여인은 그 일로 인하여 자신의 병을 고치고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축복을 또 시인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인하지 않는다면 그 축복은 다시 거두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심을 시인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구 제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구제에 대한 명령

(1) 구하는 자에게 주라.

(마5: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2)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

(눅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3) 구제하는 것을 좋아하라

(딤전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4) 제손으로 수고하여 구제하라.

(엡4:28)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5) 환난당한 자를 구제하라.

(딤전5:10) 혹은 환난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2. 구제한 자의 받을 복

(1) 궁핍하지 않음

(잠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2) 부하게 됨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3) 복을 받음

(잠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중이

니라

(4) 하늘의 보화를 얻음

(마19:21)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5) 하나님이 기뻐하심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6) 온전해짐

(마19:21)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3. 구제를 거절한 자의 결과

(1) 죄를 얻음

(약4:17)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2) 기도의 응답이 없음

(잠21:13)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3) 저주가 많음

(잠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

 

4. 구제할 때의 주의점

(1) 은밀히 해야 함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2) 능력껏 해야 함

(행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 성실함으로 함

(롬12: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4)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함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

(5) 사랑으로 해야 함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5. 구제할 자

(1) 은혜받은 자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2) 마음이 강퍅하지 않은 자

(신15:7) 어느 성 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3) 경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6. 구제받은 자

(1) 형제들

(행11: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2) 가난한 자

(잠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3) 빈한한 동족

(레25: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행24:17) 여러 해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4) 과부

(행6:1)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7. 구제 물품

(1) 양식

(잠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2) 돈

(롬15:26)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3) 냉수

(마10:42)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8. 구제의 동기

(1) 하나님이 갚아 주심으로

(잠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2)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신15:11) 내가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3) 궁핍하지 않게 되므로

(잠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4) 도로 찾을 것이므로

(전11:1)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5)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관련원어풀이

1. @t'n: 나-탄

(1) (교만으로) 다툼이 일어난다.

(잠13:10)

(2) 주다.

(창25:6, 수15:19)

(3) 손을 주다, ~세력에 넘겨주다, 붙이다, 등을 돌리다, 열매를 주다, 내다.

(레25:19, 시1:3)

(4) 영광이나 힘을 ~에게 들리다.

(시68:35, 렘13:16)

(5) ~을 보관하다, 감금하다.

(신28:67)

(6) 가르치다.

(49:9)

(7) 허락하다, 승낙하다.

(창20:6, 출3:19)

(8) 부가하다, ~탓으로 돌리다.

(대하10:9, 욥1:4)

(9) 주어지다, 받다, 발표되다.

(출5:18, 레28:25)

 

2. hn:T;m' 마타- 나-

(1) 선물.

(창25:6, 출8:38)

(2) 장소 이름.

 

3. rz"P; 파-자르

(1) 흩으다, 뿌리다.

(렘50:17)

(2) 흩으다, 해산시키다.

(시89:11, 렘3:13)

(3) 자유롭게 나눠주다, 크게 주다.

(시112:9, 잠11:24)

(4) 흩어지다.

(에3:8, 시141:7)

 

4. hk;r;B] 베라-카

(1) 축복, 축도, 하나님의 축도, 은혜.

(창27:12, 잠11:11)

(2) 선의 축복.

(잠24:25)

(3) 축복들.

(잠10:6, 28:20)

(4) 선물들, 헌물들.

(창49:25, 시84:7)

(5) 하나님의 은혜로 매우 행복한 사람

(창12:2)

(6) 선물, 은사.

(창33:11, 삼상25:27)

(7) 평화.

(왕하18:31, 사36:16)

(8) 사람이름.

 

5. fl'P; 파-라트

원래는 "매끄럽다, 반들거리다"의 뜻이다.

(1) 살짝 가버리다, 도망가다.

(겔7:16)

(2) 도망가게 하다, 몰래 빠져 나가다.

(욥23:7)

(3) 위험으로부터 구하다.

(시18:3, 40:18)

(4) 태에서 젊은이를 낳다.

(욥21:10)

(5) 구하다, 보존하다.

(사5:29)

 

6. diakoniva 디아코니아

(1) 섬김, 봉사,특히 타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

(딤후4:11, 히1:14)

(2)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전파하는 사람.

(고후3:7)

(3) 사도의 직무에 대하여.

(행1:17, 롬9:13)

(4) 모든 사람의 봉사에 대하여.

(고전12:5, 엡4:12)

(5) 봉사, 섬기는 일.

(행6:4, 고전16:15)

(6) 집사의 직분.

(롬12:7)

 

7. ejlehmosuvnh 엘레에-모수네-

(1) 자비, 긍휼, 구제, 사랑.

(마6:4)

(2) 자비심을 발휘하다, 긍휼을 베풀다.

(마6:1, 3)

(3) 구제, 시물.

(눅11:41, 행3:2)

 

8. ejparkevw 에파르케오-

원래는 "격퇴하다, 피하다"의 뜻이다. 돕다, 안심시키다, 구조하다.

(딤전5:10, 16)

 

9. metadivdwmi 메타디도-미

(1) 한 부분을 주다, 분배하다.

(눅3:ll, 살전2:8)

(2) 나눠주다, 수여하다.

(롬1:11, 엡4:28)

(3) 주는 자.

(롬12:8)

 

10. ywmivzw 포-미조-

(1) 조각을 입에 넣어 주며 먹이다. 보이다, 양육하다.

(롬12:20)

(2) ∼에게 먹이려고 ~을 주다, 먹이를 조금씩 주다.

(고전13:3)

설교예화자료

빌 노렌의 헌신의 삶

 

올 데 갈 데 없는 이 땅의 소년 60여명의 아버지이며, 달동네의 마음씨 좋은 아저씨이기도 한 선교사 빌 노렌(Bill Nolen)씨 !

"난지도, 사당동, 하월곡동 산동네에서 안양 평촌, 성남시, 원당 등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

1973년 주한 미군 장교로 근무하던 그는 거지 소년을 데려다 목욕시켜 준 이후 거지 소년들의 아버지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거리의 아이들이 많았지오. 그들은 학교에 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돈을 주면 전자오락실로 바로 달려가 버립니다. "

"돈을 직접 주지는 않습니다. 돈은 사람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일 수도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

이웃을 모르는 교회, 그리고 이웃을 돕는 일에 인색한 교회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하는 빌 노렌, 그는 구제에 대해서 많은 성경공부를 하는 것보다 바로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덧붙입니다.

 

 

너희도 이들처럼 하라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교회가 구제 기관이 아니다 라는 한마디로 그 책임을 벗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성서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향한 구제의 열심은 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제의 전통 속에서 루터파에서는 경건주의자 '프랑케'가 앞장서서, 그리고 영국에서는 '웨즐리'의 부흥 운동과 더불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운동이 급속히 전개되었는데, 후일 역사가들은, "웨즐리와 그 추종자들은 노동자의 당이라는 공산당보다 더 많이 노동 문제를 해결했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구제의 열심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어떻게 남아 있습니까?

언젠가 일본에서 한국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만들자는 제안에 일본 교포 실업가들 모두가 찬성했던 일이 입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하나같이 서로에게 떠넘기고 모금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우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구제가 많지 않고 이 문제에 대해서도 민감하지 않습니다. 이에 오로지 구제란 실천을 통하여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눅12:33, 34)"

 

 

아름다운 마음

 

프랑스 구제 사라는 단체가 있습니다. 그곳은 빈민을 구제하는 단체입니다. 프랑스 구제사에서 직원이 나와 여기저기 거리를 돌며 극빈자들을 조사하다가 매우 어려워 보이는 노파의 집을 찾아 냈습니다.

그 노파의 집에는 쓸모없어 보이는 가구 두어점이 있을 뿐 무척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역력해 보였습니다. 구제사 직원은 노파의 이름을 물은 후 구호 대상인으로서 장부에 올리려고 하자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묶음의 지폐를 꺼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삯바느질하여 얻은 돈이므로 약소하지만 어쨌든 나의 정성어린 금전입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나보다도 가난하여 고생하는 사랑들이 있을 터이니 이 돈을 구제비에 보태 주십시오.

나는 입에 풀칠은 하고 있으니 구호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거절한 후 자기의 저금조차 꺼내다 구제비로 기부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노파입니다. 굳이 구제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도울 줄 아는 마음과 그에 걸맞는 희생과 실천이 있을 때 사회는 아름다워집니다.

 

 

한 소년의 동전 5센트의 도움

 

훗날 주교가 된 채플레인 맥케이브(Chap-lain McCabe)가 선교를 돕기 위하여 백만 달러를 모금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이 일 때문에 채플레인은 많은 실망과 때로는 심한 좌절감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도 맥빠지게 하는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채플레인은 한 소년이 보내온 편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편지 안에는 심하게 찌그러진 5센트짜리 동전이 들어 있었습니다. 소년의 편지는 글씨가 엉망이었고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존경하는 채플레인 맥케이브 씨에게. 저는 신부님이 선교를 돕기 위하여 모금하는 백만 달러를 곧 모을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도 신부님을 돕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5센트짜리 동전을 보냅니다. 이 돈이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더 필요하시다면 바로 제게 연락해 주세요."

이 편지가 채플레인이 모금 운동을 하는 동안 그에게 가장 큰 용기를 주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 덕택에 채플레인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 소년의 5센트짜리 동전이 몇곱절이 되어 백만 달러가 된 것입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자선냄비

 

해마다 12월이 되면 즐거운 성탄을 예고하는 크리스마스 캐롤과 함께 연말을 알리는 또 다른 소리가 한 해를 정리하는 사람들의 바쁜 마음을 한 번 가다듬어 줍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를 알리는 종소리가 그것입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는 1894년 성탄일 바로 전날 미국 샌프란시스코 가까이에 있는 럭키 연안에서부터 유래됩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캄캄한 겨울밤, 휘몰아치는 폭풍에 파선된 큰 배가 연안에 정박했습니다. 거기에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들이 영하의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단 인근 구세군 회관에 옮겨지기는 했으나 당시 미국은 경제적 불황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실직자, 선원, 부두 노동자들을 한참 구제하고 있었던 구세군은 물자가 떨어져 조난당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지혜로운 구세군 여사관이 조난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이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사관은 음식물도 다 떨어져 쓸모없이 된 국냄비를 거리에 내다 걸고 조난을 당하여 혹독한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돕자고 외치면서 "이 냄비를 끓게 합시다. "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놓았고 이들의 호응과 동정심의 발로는 결국 차가운 냄비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조난자들은 국냄비를 끓게 한 손길들에 의해 구제되었습니다. 이러 한 사실은 그 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는 한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우리 이웃들의 동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이듬해인 1895년 30개의 구세군 영문(교회)에서는 냄비를 거리에 걸고 모금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1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 내려와 세계 각국에서 자선냄비운동이 실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28년 12월 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었던 박준섭(죠셉 바) 정령이 서울 거리에 자선냄비를 설치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박정령은 종을 흔들면서 "불우 이웃을 도웁시다. "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라는 말을외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자선냄비모금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참다운 자선이란 보답에 대한 생각없이 남에게 유용하게 되려는 욕망이다.

(스베덴 보리/ 천계의 신비)

 

자기 시간을 신에게 바치고 자기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뿌리는 사람보다 더 훌륭한 상인은 없다.

(J. 테일러/ 성스런 삶과 죽음)

 

마음이 후한 사람은 충고보다는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법이다.

(L.C. 보브나르그)

 

만물에 대하여 널리 잘 알아도 人道를 알지 못하면 지혜롭다 할 수 없고, 중생을 널리 사랑할지라도 인류애가 없으면 仁이라 할 수 없다.

(회남자)

 

박애는 마음의 덕성이지 손의 덕성이 아니다.

(애디슨)

 

우리들의 지혜가 깊어짐에 따라 한층 관대해진다.

(스탈부인)

 

구제할 것은 없어도 도둑 줄 것은 있다.

(한국 속담)

 

마음이 후하다는 것은 대체로 베풀어주는 데에 패한 허영에 지나지 않다.

(F. 라 로슈푸코)

 

자선을 청하는 사람은 한번 얼굴을 붉히고 자선을 거절하는 사람은 두 번 얼굴을 붉힌다.

(터키 속담)

 

부자는 빵 한 조각을 희사하면 그것으로 천당문이 열리는 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의 양심을 달래기 위하여 베풀어 주는 것이지 가엾게 여겨서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M. 고리키)

 

일시적인 동정이라는 즉흥적인 반응을 넘어서는 것,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법을 배워야만 가능한 것이다.

(피에르 뤼넬)

 

자선은 그것이 회생일 경우에만 자선이다.

(L. 톨스토이/ 독서의 수레바퀴)

 

남에게 선심을 쓰려거든 의뢰받기 전에 주라. 청원을 받고 나서 베푼다면 절반밖에 준 것이 아니다.

(F. 뤼케르트/ 바라몬의 지혜)

 

우리들이 두 마음 없이 주는 것은, 항상 우리들 자신에게 돌아온다.

(W.T. 그렌펠)

 

많이 가진 자는 대개 탐욕하기 쉽고 가진 것이 적은 자는 언제나 나누어 갖는다.

(O. 와일드/ 옥중기)

 

자선은 기도의 자매이다.

(V.M. 위고/ 가을 나무의 잎)

 

사람들은 무슨 착한 일을 할 때면 마치 전능하신 분께 큰 호의나 베푸는 양 생각한다.

(A.J. 헤셸)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나는 젊었거니 돌인들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

(정철/ 송강가사-훈민가)

 

나는/ 단 혼자의 밤 속에 값없는 사랑의 환상을 그린다/ -도둑의 습격받아 죽게 된 유대인에게/ 구원의 손을 뻗친/ 차별당하는 사마리아 사람/ 그 자비로운 이웃의 영혼이/지금도 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음을// 다른 민족의 언어와 마음 사이에 일치를 찾으면서/우리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걷고 있음을

(사와무라 미츠히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울려라 힘찬 종이여, 이 해를 가게 하여라//‥‥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반목을 울려 보내고/ 만민의 구제를 울려 맞으라

(A. 테니슨/ 인 메머리엄-울려라, 힘찬 종이여 -)

 

하느님은 자선을 할 수 있도록 인간의 손을 만들었다.

(아라비아 속담)

 

베품 모르는 인색함은/ 독선의 빗장 굳게 잠그고/ 사마리아인의 선한 눈빛도 메아리로/남을 수 없는 내 불혹의 세월이여

(엄창섭/ 기도 · 23)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가까이 대하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마는 것을 택하는 것은 아닐까.

(피에르 뤼넬/ 하느님의 투사 피에르 신부)

 

내가 만일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준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으리다. / 한 사람 생명의 아픔을 편하게 해준다든가/ 괴로움을 시원하게 해준다거나/ 연약한 새를 도와/ 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한다면/ 나의 사랑은 헛되지 않으리라.

(E.A. 로빈슨)

 

너희들 끊임없이 주는 손이여, / 너희들은 미지의 행복으로 꽃피지 않으면 안된다/ 미묘한 자작나무가 떨리는 것 같이 미묘하게,/ 어떤 리듬의 하느작임이/ 주는 체험에서 그대들 속에 남는다. //손이 고요하게 노력하는 것은/ 가느다란 관절에 의해서이다. / 그리고 그들은 성당의 일을 알고,/ 그 거룩한 흔적에 의하여 모든 민족들 앞에/ 거룩한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릴케/ 시 8편 -너희들 끊임 없이 주는 손이여)

 

실로 그러하니, 주여 비록 나의 손이/ 재산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위하여/ 가장 천한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이 몸을 불사른다 하더라도/ 만일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리며)

 

진정한 단 하나의 선행은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봉사하는 것입니다.

(피에르 뤼넬/ 하느님의 투사 피에르 신부)

 

나는 애써서 저금한 돈에서/ 한 거지에게 얼마를 동냥 주었습니다. / 그는 그 빛나는 황금을 다 쓰고 나서는/ 되풀이하여 오고 또 오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 처음 때와 같이 언제나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면서.// 나는 그리스도를 주었습니다. / 그러자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는 스스로가 드높고 존귀한 존재이며/ 온갖 축복으로써 양육되고/그것으로써 몸에 옷을 입으며/ 그것으로써 머리를 장식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지금은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작자 미상/ 참다운 선물)

 

그러자 이번에는 부자 한 사람이 말했다. 베풂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소서./ 그래 그는 대답했다. / 그대들 가진 것을 베풀 때 그것은 베푸는 건이 아니다. / 진실로 베푼다 함은 그대들 자신을 베푸는 것뿐./‥‥/ 가진 것은 많으나 조금밖에 베풀지 않는 이들- 그런 이들은 알아주기를 바라며 베푸는 이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은밀한 욕망은 그들의 선물마저 불결하게 만들어 버린다. / 허나 가진 것은 조금밖에 없으나 전부를 베푸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삶을 믿는 이들이며, 삶의 자비를 믿는 이들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비지 않는 것을./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이 기쁨이 바로 그들의 보상.// 허나 또 고통으로 베푸는 이들도 있으니, 이 고통이 바로 그들의 세례식./허나 또 베풀되 고통도 모르며, 기쁨도 찾지 않으며 덕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베푸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마치 저 계곡의 상록수가 허공에 향기를 풍기듯 그렇게 베푼다. /그리하여 이런 이의 손길 사이로 신은 말씀하시고, 이들의 눈(眼) 속에서 그분은 대지를 향해 미소짓는 것이다. //요청받을 때 베푸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다. 허나 요청받지 않을 때에도, 다만 이해함으로써 베푸는 것, 그것은 더욱 좋은 일./ 그러므로 마음 넓은 이에겐 받을 이를 찾음이 베풂보다도 더 큰 기쁨인 것을./ 그런데 지금 그대들 움켜 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 가진 것이란 모두 언젠가는 주어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베풂의 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것이 되게 하라.// 그대들은 가끔 말한다. '나는 베풀리라, 그러나 오직 보답 있을 것에만 베풀리라.'/ 하지만 그대들의 과수원의 나무들,목장의 양떼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 그들은 스스로 살기 위하여 베푼다, 서로 나누지 않고 움켜쥠이야말로 멸망하는 길이기에./‥‥ 그런데 그대들은 어떤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가슴을 찢게 하고, 자존심을 벌거벗게 하며. 그리하여 형편없이 된 가치와 찢어진 자존심을 보는 그대들은./ 무엇보다 우선 그대들은, 스스로 베풀 수 있는 자로서, 베풀 수 있는 그릇에 마땅한가를 생각하라./ 실로 삶을 주는 자는 삶, 그것 뿐이다 - 다만 그대들, 스스로 시혜자(施惠者)라고 생각하는 그대들은 그 증인에 불과할 뿐./

(K. 지브란/ 예언자)

 

만일 우리에게 내밀어진 손을,/ 그 손을 우리가 잡지 않는다면/ 혹은 기쁨을 외치지 않고/ 손을 잡아/ 곤경에 처한 이웃으로 하여금/ 그것이 진정하고 유일한 구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면/ ‥‥예수님이 인간들을 위하여 신음하는 동안/ 인간들이 절망하고 저주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동안,/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그를 배반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는 '구원받은 태도'를 가져야 할 때다.

(피에르 뤼넬/ 하느님의 투사 피에르 신부)

 

하루는 어떤 부자가 야곱을 찾아왔다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합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당신의 자유를 책임져주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말했다. 그는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자유를 얻는 것이란 말입니까?" "지갑의 열쇠는 그것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있고, 마음의 열쇠는 그의 지갑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선을 베풀기 전에는 당신은 욕심 속에 갇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벤샤/ 빵장수 야곱)

 

 

설 교 노 트

 

나눠줄지어다

전11:1-8

 

서론

우리의 자선 사업, 회생, 봉사가 현재는 마치 물 위에 식물을 던지는 것과 같이 누가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도 없지만 받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구제하면 나중에는 필연코 좋은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남이 보는 데서 나누어 주는 것은결코 선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보상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보상을 생각하지 말고 봉사를 하라는 뜻입니다. 잠언 11장 25절에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고 했습니다. 또 같은 잠언 19장 17절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남에게 나타내려 하고 보상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행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2. 숨어서 덕을 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시길 그렇게 하는 자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안보는 데서 덕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남을 구제한다면 그들은 이미 자기의 상을 다 받은 것이라고 하셨으니 우리 성도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만 선을 행하여야 우리의 상을 아버지께서 주실 것입니다.

 

3.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절)"는 말씀은 참고 기다리면서 선을 쌓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선을 쌓으면 그 선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다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사람들은 자기가 한 것만큼 거두게 됩니다. 선을 많이 행한 자는 그만큼 많은 상을 하나님께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에게서 어떤 보상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게 있는 대로 우리의 형편에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참 기쁨과 보람을 줄 것이며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전1:1

 

서론

"던지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인색함이 없이 너그러운 행동을 가리킵니다. 이 말은 구제에대한 것으로 물에다 버리듯이 어떤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재산은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선을 베푼다면 그 재산은 정말 가치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1. 구제를 권장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으로 그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하나님은 현실세계에 나타나서 우리의 대접이나 사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영적 존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칭찬받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대접하는 정성으로 사람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나 약한 자에게 물질적으로 구제하는 일은 곧 하나님께 하는 일이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데 있어서 거지에게 동냥을 주듯이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남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2. 구제는 은밀히 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4절에 보면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일반 사람들은 구제할 때에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하지만, 성도들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구제하되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은밀하게 해야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제를 하면서 남에게 나타내고 싶어하고 인정받으려하고 자신들이 한 일을 큰 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3. 선행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성도의 사명을 빛과 소금에 비유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5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추이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행을 우선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을 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똑똑하고 잘 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사랑해야 하지만 특별히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공경하며 사람을 사랑하되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 정신이며 일치된 진리인 것입니다.

 

결론

식물을 물 위에 던지는 일은 헛된 것이나 낭비하는 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 위에 아낌없이 던질 수 있는 것과 같이 구제를 함에 있어서도 아낌없이 정성스럽게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심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선한 일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도우라

신15:1-11

 

서론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도들을 통하여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서 꾸는 일이 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지만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아니하면 어려움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모른 척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21장 13절에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하였습 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합니까?

 

1. 부채를 면제하여 주라고 하십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매 칠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준 채 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안식년마다 면제하는 규례를 만들어 놓으시고 형제에게 돈을 꾸어준 것이 있으면 받지 말고 면제해 주라는 것입니다. 왜 그와 같은 제도를 마련하셨습니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부한 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특히, 믿는 성도에 대해서는 더욱 선을 베풀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꾸어주라고 하십니다.

븐문 7-8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 융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대강령입니다. 땅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돕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와서 꾸어달라고 하시면 그에게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 꾸어주는 일은 흐뭇한 일입니다. 서로 어려울 때 돕고 사는 것은 무척이나 보기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살기가 훨씬 쉬운 것입니다. 만약 서로가 어려운 일이 있는데도 편리를 봐주지 아니한다면 살기가 각박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산 사람은 꾸어주고 살지언정 꾸는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신28:12).

 

3.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10-11절에 보면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 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하였습니다.

잘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께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는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구제하되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지 말고 은밀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돈을 버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선한 사업을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결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제대로 선한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재물은 아무런 가치도없는 것이 됩니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서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불쌍하게 여겨서 빌려간 돈을 면제도 해주고 꾸어도 주며 구제도 하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는 사람이 되자

행3:6

 

서론

인간은 주는 자가 있어야 잘 살 수 있는 것인데,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주시고 예수는 그 제자들을 통하여 주실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저 앉은뱅이에게 주셨고 또 우리들을 통하여 이 민족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저 앉은뱅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서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이 민족에게 은과 금을 주어 구원케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베드로와 요한이 불쌍한 앉은뱅이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구복만을 위하여 구하는 은 ·금을 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이 민족들의 구복을 위하여 의식을 주는 것도 할 바이지마는 그보다 먼저 귀한 영혼의 생명을 죄악 사망에서 구원하여 줄 것을 저 베드로와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죄악으로 물든 우리의 사회는 은 ·금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는 정신적 해이요, 배금 사상만을 팽창시킬 것이며 그들의 심령만 마취시키어 죄악으로 더욱 빠지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병든 심령을 고쳐 줄 것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무엇을 주어서 살게 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구하는 은 · 금을 아니 주고 애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우리도 저들이 은 ·금을 사방에서 구하지 마는 먼저 예수님의 이름 곧 저의 죄를 대신하여 주신 십자가의 예수를 그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 바로 넣어 줘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저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죄악에 빠져 허덕이는 자들을 건질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또한중풍 병자에게도, 38년 된 병자에게도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시는 것입니다. 요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은 성도들이 주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음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바로 주는 것은 그 사람의 형편을 주목하여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모양을 주목하여 보고서 다른 것보다 예수의 이름을주어야 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가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필요한 것을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무엇을 주고자 할 때 그 사람의 형편을 바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자세히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그 죄인된 상태의 모습을 보았던 것인데,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무엇을 먼저 봅니까? 영적인 상태보다는 육적인 모양을 보지 않습니까? 그의 외모를 보지 않습니까? 그의 학벌과 재산과 명예와 권세를 보고 그를 판단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든지 인간들을 보실 때에 그 영혼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유리하며 죄악의 길에서 주리고 목말라 병든 것을 민망히 보시고 친히 보내시는 종들에게 일꾼이 적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어서 가서 일꾼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없는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앉은뱅이입니다.

 

결론

구제를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참된 구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물질이 필요한 자에게 물질을 주어야겠지만 참된 구제는 진정 그가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입니다. 복음으로 구제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구제금을 분배해 준 바울

롬15:25-29

 

서론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일들에 대한 바울의 양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물질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울이 구제금을 어떻게 분배했으며 생각하는가에 대해 살펴봅시다.

 

1. 바울은 대리자에 의해 자선을 행하는 것을 믿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에 감으로써, 불필요한 낭비를 억제함으로써, 마게도니아 성도들의 헌금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거룩한 헌금을 단 한 푼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가는 경비를 손수 부담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선금을 모금하여 봉급 등 그 자선 사업을 운영하는 데 대부분의 돈을 쓰고 실제 자선 금으로는 별로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일은 일종의 목회요, 선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어떤 비굴한 느낌도 갖지 않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2. 바울은 헌금한 사람들의 친절과 도움을 특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케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니라" 여기에 기독교 사랑의 참된 정신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일반적인 원리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것들을 분배받은 사람들은 그들에게 혜택을 베풀어 준 사람들에게 육신적인 것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정치 ·경제 학자들은 생각지도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인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육신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보다 큰 진실과 보다 적은 가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 판단의 변화는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3. 바울은 그의 책임을 신실하게 행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인친다(sealing)' 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본문 전체가 바울의 세심함과 성실함을 보여주고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는 공금을 유용함으로서 의심을 받을 짓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정직해야만 합니다. 옥사들은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 아무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금전적 문제에 소홀히 할 경우 곧 스캔들이 생겨나게 되며, 그는 그것을 제지시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인들은 쉽게 목사를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을 것입니다.

 

4. 바울은 물질적인 축복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축복에 보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에게 축복을 준 다음 너희에게 갈 때에 물질적인 것들에 속하지 않은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 전도자로서 의 그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가 방문할 사람들의 인격을 통해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유익을 줄 수 있으려면 그것은 신실하게 전파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바울은 그가 의도한 대로 로마에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충만한 축복이 축소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들은 인간 일꾼들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재능을 지닌 인간일지라도 인간 도구들에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처분에 맡겨진 모든 재능들을 사용할지라도 우리는 그것들을 부당하게 의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론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물질적인 문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문에 결코 그는 물질적인 것을 무시하지 않고 영적인 원리에 맞추어 해결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의 책임을 신실하게 행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제금을 분배하는 일에 있어서 그의 세심함과 성실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더욱 영적인 축복에 믿음을 갖고 소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재물을 주님의 뜻대로 성실히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주는 자가 되라

눅6:37-38

 

서론

예수님은 용서하는 것과 주는 것을 잇달아서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남에게 최대의 것을 준다는 것은 곧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풍성한 삶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자들의 훈련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주는 자가 되는 특권을 인식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1. 주는 것에 대한 행복에 관해서는 불신앙이 큽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세속적인 개념과 모순됩니다. 타락한 상태의 인간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더 복되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놀라운 가르침을 믿는 데에는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장애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두려움을 갖는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가난과 빈궁을 두려워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가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3) 우리는 행복을 약속해주는 것들을 붙잡는 데서 나타나는 얻고자 하는 본능을 내면에 갖고 있습니다.

(4) 우리는 타고날 때부터 사치와 안락을 좋아하며, 행복을 얻고 갖고 보유하는 것을 통해서 온다고 속아서 믿기가 쉽습니다.

(5) 우리는 물질적 조건으로 성공을 판단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6) 우리는 영원한 차원을 갖는 하늘나라의 시민이 아니고 인간 속물에 그치는 것인 양 행동한다는 점에서 영적으로 안목이 짧습니다.

(7)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현재에 투자하고 영원에 대해서는 망각해 버립니다.

우리는 받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이 너무도 기분이 좋기 때문에 주는 기쁨을 경험하는 가능성을 탐색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3. 우리는 우리가 줄 수 없는 것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주라고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접할 때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즐겨 쓰는성경 구절 중 하나는 베드로가 거지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한 그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계속 나아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라(행3:6) "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부요함과 대조되는 우리의 비교적인 가난에 집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주라든지 혹은 준 것을 받는다든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전체적인 삶의 방법이요, 삶의 철학이요,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암시하시는 것은 우리가 삶의 방식으로서 주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4. 우리는 주는 삶의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결혼 생활에서 만일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넘치게 주려고 한다면 그들은 둘 다 기쁨과행복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 교훈-주는 것-을 따르면 따를수록 삶이 더 풍성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충만한 생활을 원한다면 주는 자가 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심령과 여러분의 주머니를 가득 채워 주시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자가 되도록 결심하셔야 합니다. 인색함, 이기심, 물건을 움켜잡으려는 탐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삶을 풍성하게 채우실 수 없도록 만드는 제한물입니다. 주는 것의 결과로서 생기는 기쁨과 유익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수영과도 같습니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수영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바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되며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됩니다.

국 가

성 경 활 용

1. 통치자에 대하여

(1) 명철하고 지혜가 있어야 함

(창41:33)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치리하게 하시고

(신1:13)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

(2) 공의와 성실로 다스려야 함

(삼하23:3)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의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잠29:14)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3) 통치자에 대한 경고

(신27: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시110:5) 주의 우편에 계신 주에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호5:10) 유다 방백들은 지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같이 부으리라

 

2. 백성에 대하여

(1) 권세자에게 복종하라.

(출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잠14:34)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사54:14) 너는 의로 설 것이며 학대가 네게서 멀어질 것인즉

(3) 백성이 분쟁함

(대하15:6) 이 나라가 저 나라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교차 상한 바 되었나니

(눅21:10)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3. 국가를 위하여 속죄함

(1) 국가를 위해 속죄해야 한다.

(대하29:21)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과 어린 양 일곱과 수염소 일곱을 끌어다가 나라와 성소와 유다를 위하여 속죄 제물을 삼고

(신5:29) 그들이 항상 이 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받기를 원하노라

 

4. 국가 분리의 원인

(1) 홍수 후에 나누어짐

(창10: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2) 하나님께서 나누심

(행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5. 위대한 국가를 이루는 방법

(1) 율법을 통한 지혜와 지식

(신4:6)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2)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

(신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뇨

(3) 규례와 법도를 준행함

(신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4) 의로워야 함

(잠14:34)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6. 국가의 평화

(1) 하나님께 속해야 평화가 임한다.

(욥34:29)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시33:12) 여호와도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2) 평화를 약속하셨다.

(레26: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구나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시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슥1:11) 그들이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3) 하나님께 평화를 주셔야 한다.

(수21:44)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대상23: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평강을 그 백성에게 주시고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하시나니

(사45:7)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관련원어풀이

1. jr;z]a, 에즈라-

천연나무, 토착민.

(출12:19)

 

2. $r,a, 에레츠

(1) 땅.

(창1:1, 2:1,4)

(2) 육지, 물.

(창1:28)

(3) 땅, 나라.

(창21:32, 출13:5)

(4) 땅, 마당.

(창33:3, 욥12:8)

 

3. y/G 고- 이

(1) (이스라엘에 대해) 백성.

(창35:11, 시33:12)

(2) 이스라엘 이외의 국가.

(시9:6,느5:8)

(3) 하나님을 모독하는 백성, 이방인.

(시135:15, 렘31:10)

(4) 동물의 떼, 무리.

(욜1:6, 습2:14)

 

4. hk;l;m]m' 마므라-카

(1) 국가.

(렘18:7, 28:8)

(2) 다스림, 통치, 관할.

(왕상11:11, 삼상28:17)

 

5. hM';au 우마-야

백성, 종족.

(창25:16, 단3:4)

 

6. !aol] 레옴-

(1) 가족, 종족, 국민, 국가.

(창25:23, 시7:8)

(2) 백성 이름.

(창25:3)

 

7. hk;Wlm] 메루-카

(1) 다스림, 통치.

(삼상10:25, 삼하12:26)

(2) 왕좌.

(왕상1:46)

 

8. hl;v;m]m, 메므샤-라

다스림, 통치.

(대상26:6, 단11:3)

 

9. basileiva 바실레이아

(1) 왕권, 왕정, 통치, 규율.

(눅1:33, 요18:36)

(2) 승리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왕권.

(마16:28, 눅23:42)

(3) 메시아 왕권에서의 성도에게 주어진 권세와 위엄.

(계l:6)

(4) 하나님께 속한 왕권과 위엄.

(계12:10)

(5) 왕국, 영토, 왕이 통치하는 지방이나 나라.

(마12:25, 막3:24)

(6) 메시아의 왕국, 통치.

(마4:23, 약2:5)

(7) 다니엘의 메시아관:메시아를 통한 하나님 나라:메시아의 왕국.

(마18:1, 막11:10)

(8) 하늘의 왕국.

(마11:12, 약2:5)

 

10. e[qno" 에드노스

(1) 군중, 무리, 교우, 떼, 동족인 인류.

(행17:26)

(2) 인종, 종족, 국가.

(미24:7, 눅22:25)

(3)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민족, 이방인.

(마4:15, 롬3:29)

(4) 이방인에 있는 기독자들.

(롬11:13, 롬2:12)

 

11. politeiva 폴리테이아

(1) 국적, 시민권.

(행22:28)

(2) 정치, 행정, 공동의 이 익을 도모하는 단체, 국가.

(엡2:12)

 

12. cwvra 코-라

원래는 "두 개의 장소나 경계 사이에 있는 장소"의 뜻이다.

(1) 지방, 지역, 장소.

(마8:28, 행10:39)

(2) 도시에 대조되는 시골, 촌.

(요11:55, 행8:1)

(3) 메마른 육지.

(행27:27)

설교예화자료

이 내 말씀 들어보소

 

우리는 새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다시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들을 갖습니다. 이제껏 정치 권력이 있어야 할 자리와 되어져야 할 꼴을 무시하고 저질러져 온 온갖악한 짓들을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새정권의 출발점에 선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일들을 하느님 말씀에 따라 밝혀 봅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그 소식은 지붕에서 외쳐져야 하니까요.

새정부가 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지지자보다는 반대자가 더 많고 갖가지로 분열된 상황에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무엇보다 정의와 평화,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권력이 행사되어야 합니다. 권력자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볼까요?

안정된 민주 국가의 성립은 통치자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의식을 가진 국민들모두에게 나아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일천만 명에 달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한반도의 구원과 정의 구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어떤 일을 해 왔습니까?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과 정치 권력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지, 성경을 읽으며 깊이 생각해 봅시다.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와 정교 분리

 

우리 헌법에는 해방 후 갑작스럽게 종교의 자유와 정교 분리가 명시되었기 때문에 저 소중한 원칙들이 헌법에 규정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는지 망각하기 쉽습니다.

종교나 신앙은 본래 인간의 지극히 내면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내심의 문제가한 국가의 기본적인 조직과 작용을 제시하는 헌법에까지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요?

본래 신앙이란 인간의 마음의 문제이지만 내심적 문제는 필연적으로 외적 행위로 드러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페가이(Ch. Peguy)는 "종교는 신비주의에서 시작하여 정치에서 끝난다. "라는 적절한 말을 했습니다. 따라서 헌법에 있는 종교의 자유 조항은 정치적 조항의 하나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조항은 국가권력이 신앙이나 신앙에 근거한 행동에 대해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않겠다는 국민과의 약속이자 선언인 것입니다.

 

 

헝가리 정부와 교회

 

헝가리 정부는 최근 교회에 대한 탄압 정책을 지양하고 동반자로서의 우호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헝가리는 지난 20여 년간 경제 정책에서 성공을 거두어 소련 블럭권 국가 가운데 가장 발전적인 국가로 일컬어질 만큼 경제 사회적인 정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서구 선진 사회에서 이미 문제되고 있는 여러사회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되고 세속주의가 세력을 발휘하면서 가정 생활이 파괴되고 이혼율이 매우 높아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알콜 중독자, 마약 상습자, 청소년 비행 등 제반 사회악이 증가 일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가 행정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이러한 사회악의 증가에 당황한 정부는 교회의 도덕적 정화력(淨化力)의 힘을 빌어보고자 교회에 추파를 던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헝가리 정부의 통제 완화에 따라 기독교 저널리즘이 활기를 띠고 있으며 교회 예배는 매주 국영 라디오에 의해 방송되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 시에만 네 군데의 기독교 전문 서점이 있으며 국영 서점에서도 성경과 교회 서적을 공공연히 판매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초등 학교에서 문학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쳐 지고 있는데 교사들이 교실에서 종교적인 신념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헝가리 정부와 바티칸 당국간의 관계도 정상화 되었는데 1천 5십만 헝가리 국민 가운데 약 65퍼센트 가량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로마 카톨릭 신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않은 소규모의 성경 공부 그룹과 기도 모임이 전국적으로 번성하는가 하면 얼마 전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성경에 관한 한 시리즈를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정부 당국과 교회 당국은 최근의 우호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둘 사이에는 해결되지 못한 난제들이 가로놓여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와 교회는 정면 대결에 의한 파국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절충에 의해 점진적인 진보를 기약하는 것이 낫다는데 잠정적인 합의를 본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의 복음화

 

정치 권력은 사회 공동체의 단합을 보장하기 위한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요소인 한, 그 목적은 공동선의 실현이어야 합니다. 정치권력은 개인, 가정, 보조 단체 등의 정당한 자유를 존중하며, 인간의 진정하고 완전한 선, 즉 초자연적 목적까지를 포함한 충족선을 얻기에 필요한 생활 조건을 효과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정치 권력의 활동 분야는 제한되어 있으며 그 제한은 각 국가와 민족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즉, 언제나 정의를 보장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에 간섭하고 그 최종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러나 공동 선 실현에 합께 이바지하는 개인과 중간 단체의 활동 분야와 책임을 빼앗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 문제에 있어서 정치 권력의 간섭 목적은 사회 단체 구성원들을 도우려는 것이지 파괴하거나 흡수해 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사회 질서의 쇄신, 어머니와 교사, 사목 헌장 74, 75, 76). 요한 바오로 6세."

 

 

아합 이야기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데, 그런 말은 무엇이고 누가 누구에게 이렇게 점잖게 꾸짖는가.

기원전 9세기 중엽 북쪽 국가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관계가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라못길르앗이라는 지역을 시리아에게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 남쪽 유다국의 왕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하였습니다. 아합은 이것을 절호의 기회로 보고, 여호사밧에게 이스라엘이 시리아에게 잃은 땅을 회복하는 데 협력하여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야훼께 여쭈어 보자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다 야훼를 섬기고 있었고 야훼의 길을 따를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아합은 이 제의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언자들을 무려 400여 명이나 불러 놓고, 잃어버린 땅을 치러 갈까 아니면 그만둘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많은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이구동성으로 "공격하십시오. 야훼께서 라못길르앗을 임금님 손에 붙이실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합은 여호사밧 앞에서 의기양양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변하는 예언자들이 이의없이 그렇게 대답했으니 하나님도 찬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천상 천하의 만장 일치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 이제는 군(軍)동원과 공격만 남은 셈이다. 날짜만 잡으면 된셈이다. "

그러나 여호사밧은 비판 의식이 강한 지성인 출신이었는지, 아니면 일치 정신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좀더 신중했는지 박수를 안쳤습니다. 이스라엘에 진실한 재야가 있다고 어디서 주워들은 때문일까요, 이구 동성이 왠지 기분 나빠서였을까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을 제거하고 만장 일치를 충분히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의심이 생겨서였을까요. 좀더 확실한 것을 알고 나서야 군대를 동원해서 협력할 수 있다고 믿어서였을까요. 하여튼 여호사밧은 다른 야훼의 예언자는 없느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합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다른 예언자 한 사람이 더 있긴 하다고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을 가치도 없고 신뢰할 수도 없다는 듯, 그에 대한 편견을 옳은 판단같이 털어 놨습니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는 예언자가 있긴 하지만 자기는 우선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하겠다는 일이면 사사 건건 잘 되지 않으리라고 하고, 한 번도 잘 되리라고 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삐딱하고 비정상적이니 불러봤자 답이 뻔한데 불러서 무엇하겠느냐는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왕은 미가야가 반대밖에 모르는 괴짜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번번이 야훼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고백하는 셈입니다.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모험을 감행하면서도 야훼의 확실한 뜻을 찾기는 커녕,오히려 왕의뜻이라면 때도 곳도 구별 않고 박수만 치는 예언자들의 의견만 듣고 일을 벌이려고 하는 아합에게 여호사밧이 충고 겸 질책을 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닙니다. "라고. 듣고 싶은 말만 할 사람만 골라서 듣는다면 왕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참된 야훼의 뜻을 찾고 따르기보다 자기의 뜻을 야훼의 뜻이라고 고집하게 되고, 그런 태도가 어떤 말로를 초래하는지를 아합도 여호사밧도 다 알고 있기때문입니다. 당시 민주니 의회 제도니 하는 것이 알려졌을 리는 없고,여러 사람의 의견이 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졌기에 다수결로 여호사밧을 압도하려던 아합은 자신의 신분에 관해서까지 도전을 받은 셈입니다. 잃은 땅의 회복은 커녕 군대를 동원하는 것까지 어렵게 될 판국이었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같은 왕의 입장으로 여호사밧을 신하같이 다를 수 없으니까, 아합으로서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회색으로 보는 사람이라는 것만 드러나면 자기의 미가야에 대한 인물평도 옳고, 그를 안 부른 것도 꾸짖을 바가 못 되고, 따라서 왕으로서 못할 말을 한것이 아니니까 바른 정치를 하는 왕으로 부각되고, 또 여호사밧과 군대 동원의 협력 체제도 공고히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미가야를 불렀습니다.

사회가 썩기 시작하면 무너지고 끝을 보려 작정해서인지 일은 더 그르쳐갔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람이 박수 부대 예언자들의 사주를 받았는지,아니면 권력자에 대한 아부근성을 천성으로 지녀서 였는지 그에게, 잔소리 말고 다른 예언자들과 같이 만사가 왕의 뜻대로 되리라고 말할 것을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잃은 땅을 회복해야 된다는 조국애가 없다면 적어도 횡재하거나, 또는 자기에 대한 악평을 바꿀 수 있는 기회임을 포착하는 눈치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미가야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야훼께서 나에 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전할 따름이오."라고 쏘아붙이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안한 죄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로베레장군」이란 영화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즉, 그 영화에는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레지스탕트, 곧 저항 운동 자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 온 사람이 끼여 있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때문에 그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혔으니까 처형당하는 것이 마땅할는지 몰라도, 자기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 온, 저항 운동과는 관계도 없는 사람이고 또 자기 자신은 저항 운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억울하게 처형당한다고 생각하여 큰 목소리로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나는 저항 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이때 한 저항 운동자가 조용히 대답하기를,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안했다는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아무일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인상깊은 장면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잘못이고, 그것이 그를 죽게 해도 마땅한 그의 죄과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아무것도 안한 것이 아니라 그 무서운 전쟁터에서 자기 혼자만의 안전을 죄했고, 그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다 했을 것입니다. 다만 남을 위하여, 민족이나 정의를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자기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조국을 사랑한 젊은이들

 

불란서 아르곤느 공동 묘지 쪽을 향해 달리던 기차 뒤쪽에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이 앉아 있었습니다. 눈물을 너무 흘려 눈은 충혈되어 있습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자기의 외아들이 전사하여 매장된 묘지로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구라파를 뚫고, 묘지에 도달했습니다.

이 여인은 드디어 자기 외아들의 묘를 찾았습니다. 어머니는 작은 흰 십자가를 붙들고 울고 또 기도하고, 먼저 간 아들의 명복을 염원했습니다. 준비해 간 꽃을 가지고 아들의 묘에 이편 저편 꽃아 놓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 여인은 자기 아들의 묘옆과 앞뒤에 검은 십자가들이 꽂힌 묘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내 아들이 악마의 군인들인 독일군의 묘와 나란히 있어야 한단 말인가? 분노에 찬 채 서서 수많은 검은 십자가를 보기 시작했을 때, 이 여인은 그 검은 십자가 옆에 수많은 독일 엄마들이 무덤을 붙잡고 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 착각에서 깨어난 이 여인은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동정과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많은 검은 십자가가 이제는 더 이상 원수의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자기나라의 부름을 받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죽어간 애국 청년들이라고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아들의 무덤에서 꽃을 뽑아 그 근처에 있는 독일군 청년들의 무덤에 나누어 꽃아 주었습니다. 기쁨이 솟아올랐습니다. 해는 서산에 지고 있었습니다. 묘비 문을 닫고 그 뒤를 돌아보며, 이 여인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들 모두를 당신의 사랑 안에 지켜 주소서. 당신이 사랑한 젊은이들입니다. 이 세계의 어머니들을 도우사 사랑을 알게 하소서. 여기에 당신의 영웅들이 잠들었습니다. "

 

 

우리들의 세상

 

기독교인의 삶의 터전은 바로 이 세상입니다. 기독교인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무대 가 곧 이 세상이란 뜻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한복판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독일 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발츠 목사가 미국을 방문하던 중, 어느 교회에 들렸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 교회 목사님께서 자기 교회 교인 한 사람을 이 독일 손님에게 소개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 교회 평신도 챔피언입니다. "

무슨 뜻인지 잘 알아 듣지 못한 발츠 목사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때 그 교회 목사님이 자랑스럽게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분은 한 주일 저녁 모두를 교회에서 지내는 분입니다. 월요일에는 청년 집회에, 화요일에는 교회 회의에, 수요일에는 재정부 모임에, 목요일에는 친교 모임에, 금요일엔 장년회 모임에, 그리고 토요일엔 성가 연습에, 그리고 일요일은 주일이니 온종일 교회에서 지내는 분입니다. 이분의 열심과 헌신에 도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을 평신도 챔피언이라고 부릅니다. "

그는 자못 훌륭한 교인을 갖고 있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늘어놓는 자랑에 더욱혼돈에 빠진 이는 독일 교회 손님이었습니다.

"아,그래요? 그러면 이분은 가족이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왜요! 그 분에 게 아이가 셋이나 있는데요."

"그렇다면, 그는 직장이 없습니까? "

"왜요! 사업을 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그는 전혀 다른 사회활동을 하지 않습니까? "

"왜요! 그는 공화당 당원으로 일하오 ."

이때였습니다. 손님으로 왔던 발츠 목사는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나는 이분을 평신도 챔피언이라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분은 앞으로 적어도 이틀 저녁은 가족과 함께 지내고, 하루 저녁은 직장 동료들과 지내고, 또 다른 하루는 정치하는 분들과 지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정말 그렇게 훌륭한 평신도 챔피언이라면, 한 주일 동안에 이틀 정도만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기독교인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가정에서, 그리고 기독교인 정치인을 필요로 하는 정치 세계에서 지내셔야 할 것입니다. "

 

 

어록·시·묘사

 

천하는 국가의 근본이고, 국가는 고을의 근본이고, 고을은 집의 근본이고, 집은 사람의 근본이고, 사람은 몸의 근본이고, 몸은 다스림의 근본이다.

(관자)

 

일국의 진정한 재산은 땀흘려 일하는 부지런한 주민의 수에 있다.

(나폴레옹)

 

국가란 우리의 재산을 나르는 배이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국가의 운명은 청년의 교육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유일의 안정된 국가는, 온갖 국민이 법 앞에 있어서 평등한 국가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치국은 항상 부하고, 난국은 항상 가난하다

(관자)

 

자기 자신의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보다 완전하게 우주 속에 확대되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봉사와 아이디어와 행동으로 나라 세우기에 참여할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

(R. 타고르/ 「모던 레뷰」 誌 중에서)

 

자연이나 국가의 크기는 그에 상응하는 시민정신의 크기와 관대함이 없으면 괴물과 같다.

(W. 휘트먼/ 풀잎)

 

국가주의의 정신은 종족주의 라는 낡은 단지 안에서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술을 만들기 위한 효모이다.

(A.J. 토인비/ 역사의 연구)

 

일국의 힘은 나무의 수액과 같다. 그것은 밑에서부터 솟아 오른다.

(W. 월슨)

 

국가가 강하려면 국민 각자가 강해야 한다.

(손우성/ 투쟁의 어록)

 

말과 글자와 돈-이 세 가지는 독립국가임을 상징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정인섭/ 국제공항의 간판)

 

어떤 변화의 방법이 없는 국가는 보존의 방법도 없다.

(E. 버크/ 프랑스 혁명의 회고)

 

국가가 그 권위에의 비판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는가가, 그 국가가 사회의 충성심을 어느 정도까지 쥐고 있는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다

(H.J. 래스키/ 정치학대강)

 

프랑스는 무드의 나라, 영국의 멋대로의 나라, 스페인은 조상 숭배의 나라, 이탈리아는 빛나는 나라,그리고 도이치는 칭호의 나라다.

(칸호)

 

국토는 그 비옥함에 비례해서 경작되는 것이 아니고 자유에 비례해서 경작된다.

(C.S.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분할된 국가는 어쨌든 불행하다.

(볼테르/ 서한집)

 

사람들은 우정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는 이익으로써만 연결된다.

(R. 호흐후트/ 병사들)

 

사람을 쉽게 쓰기 때문에 정치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정치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국가가 위태롭고 쇠망해 간다.

(이 곡/ 가정집)

 

자고로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백성이 믿어주지 않으면 국가는 일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논어)

 

나라에 의가 지켜지지 않으면 비록 클지라도 반드시 망할 것이요, 사람에게 착한 뜻이 없다면 힘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상하고 말 것이다.

(회남자)

 

한 나라의 청년기에는 군사가 웅성하고, 장년기에는 학문이 융성한다. 그리고 한동안은 이 두 가지가 다 융성하지만 국가가 쇠퇴할 무렵에는 공예와 상업이 번창하게 된다.

(F.베이컨/ 수필집)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맛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한용운/ 군말)

 

지혜와 술수로써 법 어기기를 좋아하고, 때때로 공사에 사사로운 이해 관계를 섞어 처리하며, 금령을 변경하고 명령을 자꾸 바꾸는 나라는 망할 것이다.

(한비자)

 

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일천 년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단 한 씨간도 충분할 수 있다.

(바이런/ 해롤드 경의 순례)

 

물나라 가을 깊어 기러기 울며 날새/ 나라 생각 잠이 안와 애태우는 이 한밤에/ 새벽달 창에 스미어 활과 칼을 부추네.

(이순신/ 난중일기)

 

암담한 11월이었다/ 날은 갈수록 어둑해지고/ 바람은 나뭇잎을 쥐어뜯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독일을 향해 여행하고 있었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나는/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눈에서는 눈물이/금방 떨어질 것 같았다.

(하이네/ 독일 겨울 이야기 · 1)

 

독일의 혼은 해방되어 비상한다/ 가장 높은 창공에까지/ 오, 독일의 혼이여/ 밤의 꿈 속에서/ 그대의 날개는 얼마나 당당하게 펄럭이는가// ‥‥프랑스와 러시아는 육지를 차지하고/ 바다는 영국이 차지하고 그러나/ 우리 독일은 하늘의 꿈나라에서/ 확실하게 지배권을 잡는다.

(하이네/ 독일 겨울 이야기 · 7)

 

마침내 자유에도 싫증이 난/동물공화국에서는/ 오직 한 사람의 절대지배자가/ 자기들을 다스려 주기를 갈망했다.

(하이네/ 당나귀 선거)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그런데 나와서 어디로 가지?/그래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 아무튼 어딘가로 가기는 가겠지?

(브레히트/ 바이마르헌법 제2조)

 

공화국은 사치에 의해서 멸망하고, 독재국은 빈궁에 의해서 멸망한다.

(C.S.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웬일이냐/ 요즘은 눈물이 자주 난다/ 고령의 시인 한 분이 북녘땅 밟았다는 소식에도/ 눈물이 흐르고/ 그 분이 귀국하자마자/ 오랏줄에 묶였다는 소식에는/ 더더욱 눈물이 흐르고/‥눈물보다 진한/ 조국 하나 간직하지 못한 채

(허형만/ 눈물이 자주 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땅, 이 나라는/ 대대손손/ 한 핏줄, 한 언어, 한 피부로 이어온 성스러운 나라/ 지금은 비록/ 이데올로기인지 저데올로기 인지 요사스런 서양 망나니들의 칼춤에/ 어이없이 두 개의 땅덩이로 갈라져 철철철 피흘리는 나라지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아아 전봉준 아저씨와 유관순 누나가/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흙처럼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 우리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부끄럽지 않게 이 땅에 살다간 그 많은 사람들의 맑은 영혼/ 봄이면 진달래꽃, 여름이면 도라지꽃, 가을이면 들국화로/ 들과 산 철철이 피어/ 남아 있는 우리의 가슴 황홀한 빛깔로 물들이는 나라./ 세상엔 치사하게 죄없는 작은나라들의 숨통이나 조르고/ 뒷구멍으로는 고약한 에이즈나 질질 흘리며 인류의 미래를/ 캄캄한 절망으로 밀어넣는 꼴 사나운 나라도 있지만/ 내가 사는 이 나라/ 결국은, 그래그래 결국은, 남쪽 사람 북쪽 사람/ 어기영차 청청한 힘을 합쳐/ 갈라진 땅덩어리 제자리로 붙이고 다시다시/ 대대손손/ 한 핏줄, 한 언어, 한 피부로 이어갈 나라중의 나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나라

(문창갑/ 내가 사는 나라)

 

천황폐하와/ 나라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천황폐하와/ 나라가 없는 나는/ 꿈에 나온/ 조막만한 왜떡 한 쪽에 밤마다/ 혼을 팔고 있었다/ 누구도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다.

(김춘수/ 처용단장 제3부 -메아리 · 14-)

 

내 영혼이 돌아가/ 편히 쉴 그런 자유의 나라로/ 물새가 날듯/ 그냥 날고 싶어요.

(박이도/ 내 영혼이 풀밭에 누워)

 

멀리 조국의 사변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유치환/ 울릉도)

 

오 성스런 민족의 가슴이여, 오 아버지의 땅이여/ 한결같이 침묵하는 어머니는 늘 참아왔고/ 이미 너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방인들은/ 그대 최고의 민족을 가져 모두를 알고 있구나!

(휠더린/ 독일인의 노래)

 

당신이 오시면 미움은 가고 마음은/ 가난하여 비로소 형제를 알고,/ 대한민국은 통일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호산나를 부르고// 주여 다시 한 번 오십시오./ 일구육삼년의 이 땅에‥‥‥

(황금찬/ 부활의 노래)

 

바라노니 고려나라에 태어나서/ 한번이라도 금강산을 보고지고// ‥‥저 철교에다 역부려한 심술처럼/ 간판글씨로 광고해 놓은 「금강산 가던 길」/ 「가는 길」이라 써놓아도 애틋함임을/ 억하심정으로 「가던 길」이라 써야만 했나//우리야 이미 Korea에 태어난 백성 더러/ 못 가는 금강산을 가던 길만 보란다.

(설창수/ 금강산 가던 길)

 

자유가 만발하고/ 누구나 편하게 살아가는/서로가 간섭하지 않는 나라/ 선진한 문명국이 된 탓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이 너무 많구나.

(김재흔/ 입이 열이 있어도)

 

산 나물이나 캐 먹자고 한다. / 진달래꽃이나 따 먹자고 한다. / 쇳물 흐르는 철조망일랑걷어내고/ 서로의 가슴을 겨누던 총일랑 내던지고/ 네 풀밭에서 자란 노루와/ 내 허리에서 키운 조랑말이/ 함께 어울러 뛰놀게 하자한다. 그들로 한반도 구석구석을 발고 지나가/ 새란 새들도 모조리 북으로 남으로 날아/ 서로의 품에 안기게 하자 한다. /서로의 가슴에다 새끼를 치게 하자 한다. // 너는 내게/ 넘치는 천지물을 퍼다주고/ 흘러 넘치는 천지물을 퍼다 주고/ 나는 네게/ 유채꽃을 한 아름 적어다 주라 한다. // 아, 백두가 한라에게/ 한라는 백두에게/ 지어미, 내 사랑이라 한다. /지아비, 내 사랑이라 한다.

(서덕석/ 백두가 한라에게 한라가 백두에게)

 

 

설 교 노 트

 

난국에 처하였을 때 성도의 자세

사6:1-5

 

서론

우리 성도들의 참 가치는 시험과 환난에 직면하게 될 때 그가 취하는 자세와 태도에서 발견된다고 합니다. 나라가 어려운 시경에 처하게 되면 믿음이 적은 자나 불신자들은 무서워서 떱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인은 담대해지며 더욱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국가·민족의 어려움을 어떤 자세로 극복해 나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을 찾아 만났습니다

시50:15에 보면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인에게 환난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부르고 찾아,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구원의 손을 펼쳐 우리를 건져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감사를 돌리며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여기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어떠한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1)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적인 성품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거룩은 죄와 구별되시고, 미워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신성을 보여주신 의미는 레11:44, 벧전1:16에 이른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거룩해야 된다는 깊은 교훈을 보여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존귀와 축복의 무한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엄위하신 하나님으로 또는 영광의 하나님으로 보여주신 의미는 고전10:31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영화롭게 살면서 하나님께 범사에 영광을 돌리어야 된다는 깊은 교훈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주님의 보혈과 성령의 은혜와 말씀만 통해서 가능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깊이 헌신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2. 자기를 발견하여 재정리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본능, 다른 사람에게 불평하면서 불만을 토하려는 본능, 다른 사람에게 원망하면서 몹시 저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성전에서 자기의 정체를 발견하였습니다.

(1) 자신이 범죄한 인생 임을 발견하였습니다.

본래 이사야는 귀족 출신의 애국자이며, 신앙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자신만이 우월하고 깨끗하고 믿음이 있는 줄 알고 교만하기도 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보니 범죄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죄관을 바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신 것은, 죄 사유를 받아야 된다는 깊은 교훈이 있습니다.

(2) 멸망할 인생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사야는, 다른 사람만 범죄하여 화를 당하고 멸망할 줄 알았으나 자기 자신이 바로 그러한 사람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깊이 회개하고 죄 사유함을 받고, 멸망할 인생이 다시 생존하게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바른 신앙관이요, 인생관이요, 사명 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깊이 헌신하여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3) 자신이 수행할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성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인은 난국에 직면할 때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바로 찾아 위기에 직면한 군중들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파해야 됩니다.

 

결론

난국을 맞은 성도의 자세는

(1)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되며,

(2) 나 자신을 발견하여 회개하고 정돈하며,

(3)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여 수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민족과 국가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엘리야의 구국관

왕상18:30-40

 

서론

성경에는 나라와 민족이 위태로워 질 때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 그 난국을 타개하고 그 나라와 민족을 구원한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를 비롯하여 에스더며 기타 여러 사사들의 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해야 하는 이 엄숙한 과제는 첫째 하나님의 지상명령이였고, 둘째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당위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은 아합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국운이 위태로워졌습니다.

 

1. 나라가 위기에 직면한 원인과 내용

이스라엘 나라가 위기에 직면하게 된 원인과 내용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종교적인 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가나안 민족의 토착신인 우상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국가로 깊이 타락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와 형벌을 면치 못할 천인공노할 역사적인 범죄사건인 것입니다.

(2) 정치적인 면

아합 왕은 왕후 이세벨이 섬겼던 "바알" 신을 국신으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섬겨오던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종교 박해, 신앙 탄압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참 종교와 바른 신앙을 탄압하고 박해하였던 어떠한 나라이든지 모두 최후는 심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3) 경제적인 면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게 되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식량의 기근은 물론이고 식수마저도 기갈 상태에 빠졌으니 경제 상태는 파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적인 타락, 정치적인 과오,경제적 파탄은 마침내 이스라엘 국가 민족을 위태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2. 엘리야의 구국책

여기 엘리야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내걸고 일어났습니다. 그의 구국책은

(1) 바알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아 단결하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중의 신앙 상태는 기로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따르자니 아합 왕의 박해가 극심하고 바알을 따르자니 신앙 양심상 죄책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양 사이에서 머뭇거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신적인 분열인 동시에 신앙적인 완충 지대였습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신앙으로 단결하는 이 길만이 난국을 타개하고 사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2) 바알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제단을 수축하는 길이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을 온 이스라엘에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제단 수축 방법에 주목해야 겠습니다. 열두 돌로 수축한 것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신앙입니다. 도랑을 팠는데 이는 성별의 의미입니다. 장작 위에 제물을 놓았는데 이는 자신의 헌신과 희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바른 제단 수축 제사만이 사는 길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의 결사적인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결사적인 기도 운동은 역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고, 하나님을 동원시키며 그의 원조를 통해서 난국을 타개하고 구원받는 유일의 길입니다.

 

결론

이와 같이 종교 혁명, 신앙 혁명의 길이 위태로운 나라를 구출하는 길입니다.

 

 

국가 통치자의 서원

시101:1-8

 

서론

본문은 다윗의 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긍휼과 정의의 기쁜 명상으로 시작하여 왕의 결심을 기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바른 길을 걸어나갈 만한 은혜를 자기에게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1. 인자와 공의를 사모하였습니다(1-2절).

통치자로서의 도덕은 인자와 공의의 겸전을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의 특징입니다. 공의가 없는 인자는 오히려 나약해져서 못쓰고 인자가 없는 공의는 횡포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이 둘은 인간과 신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근본적 원리들입니다.

천상에는 하나님의 인자 뿐이고 지옥에는 심판뿐이로되 지상에서는 인자와 공의가 겸하여 진행되기 때문에 통치자로서는 반드시 사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덕행이 완전해지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하였습니다.

 

2. 자신을 악에서 멀리하였습니다.

통치자는 남을 다스리기 전에 나를 다스려야 하므로 자신이 먼저 선한 모범을 보이지 않고는 남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권세를 잡은 자들은 스스로 높아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해져서 진리를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일이 자신에게 얼씬하지도 못하게 힘쓰겠다고 한 것입니다.

"사특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라고 했는데 사특한 마음은 안과 밖이 다른 생활인 것으로 이것은 곧 위선의 죄입니다. 은밀한 배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굳게 서기를 힘썼고 간신을 물리치는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신하들을 정화하였습니다(5-8절).

(1) 간신들을 물리쳤습니다.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멸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는 곧 은밀한 말로써 허위 악선전하여 남을 해치는 자니 충신들을 모략하고 죽이는 간신배들입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는 백성을 학대하고 고위에만 앉으려고 하다가 결국은 반역할 자입니다.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진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위선자요, 허위자입니다. 다윗은 이런 자들을 물리치겠다고 했습니다.

(2) 충성된 신하는 수종합니다.

명군 현왕이라도 불의한 신하는 적발해서 축출만하고 충성된 신하를 등용하지 못하면 결국 독재에 빠지기 쉽고 국사에 능률을 올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충성된 자는 살펴서 임금을 보필하게 하고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수종들게 일할 때에는 임금도 편하고 국가는 부강해지며 백성들은 큰 덕을 입을 것입니다.

 

결론

국가가 부강해지려면 바른 통치가 있어야 합니다.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언입니다. 아침마다 모든 악인을 별한다고 하니(8절) 이는 공평한 통치입니다. 이로 인하여 온 성이 선정(善凉)됨으로 여호와의 성이 아름답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인자와 공의를 사모하고 악에서 멀리 떠나며 간신은 멀리하고 충신을 등용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통치자에게 주신 교훈인 것입니다.

 

 

위대한 국방력

왕하19:1-7

 

서론

국방력이란 그 나라의 국토와 민족을 보호하며 발전시키는 힘으로서 국가 민족의 생명과 흥망 성쇠를 좌우하는 생명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보이지 않는 국방력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히스기아 왕은 신앙의 안목으로. 보이지 않는 국방력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 원수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림과 그의 군대들이 이 보이지 않는 국방력에 전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보이지 않는 국방력이란 무엇입니까?

 

1. 히스기아의 기도의 힘입니다.

본문1-4절에 히기스야 왕은 185,000명이 나 되는 앗수르 군대의 포위를 당하고 항복하라는 통고를 받은 후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들어가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시어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 185,000명 모두를 전멸하셨던 것입니다. 히스기아 왕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1) 웃을 찢고 베옷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보아 이는 참회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참회의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고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1절).

(2)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움만을 갈망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고 은총을 입을 수 있습니다(3절).

(3) 원수를 물리쳐 주실 줄 확신하고 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대적을 물리치시고 선민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는 이심을 확신하고 하는 기도는 힘이 있고 결국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2. 여호와께서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들을 보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앗수르 군대 185,000명을 치니 그들은 다 전멸되어 송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줍니다.

(1)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고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 이는 하나님의 열심의 실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신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사사시대에 많은 열방의 침입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사를 세워 그때마다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왕을 세우시고 다원과 같은 왕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열심의 실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열심을 내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의 군대가 동원된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의 사자 천군을 동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앗수르 군대의 수가 많고 용감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군대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보호하시는데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의 보호막은 누구도 허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국가를 지키실 때 어느 나라의 군대인들 두려워하겠습니까?

 

결론

오늘날 우리 조국의 국방력은 60만 대군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은 위대한 국방력이 있습니다. 이는,

(1) 우리 성도들의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요,

(2)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3) 하나님의 군대의 동원입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자를 동원하여 조국과 민족의 방패가 되어 무궁한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신자와 국가

롬13:1-7

 

서론

하나님께서 국가를 세우신 것은 통치자나 공직자들의 사리 사욕을 원하여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의를 위하여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 최고 통치자는 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능인으로 사명을 받은 줄 알고 선한 양심과 겸손한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또한 국민들은 합법적인 모든 권세자들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 국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로마서 13장 1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신자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우리에게 주어진 주권 행사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신자가 위정자가 되었을 경우에는 국가의 건전한 법률에 따라 경건과 공의와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일단 선택이 결정된 후에는 그를 하나님이 정하신 통치자로 믿고 순종해야만 합니다.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신앙과 종교가 달라도 합법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양심을 따라 복종해야 합니다.

 

2. 국가에 대한 의무와 국가의 의무

로마서 13장 6-7절에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국민은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는데 납세와 국방과 교육, 그리고 근로의 의무가 있습니다.

이 모든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합니다.

특히 신자는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딤전2:1-2).

국가의 합법적인 권위가 손상되지 않게 신자는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여 순종하며 협조해야 합니다. 국가는 신자의 종교 활동에 간섭해서는 안됩니다. 말씀과 성례 집행과 천국 권세를 취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또 국가는 교회와 교직자들에게 자유를 보장하고 교회의 권징과 성경에 반대되는 법이나 의식들을 정해서는 안됩니다.

 

3.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가에 속해 있는 모든 국민은 나라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나라를 사랑하고 낮은 자리에 있으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국민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누가복음 19장 41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했듯이 성을 보시고 안타까워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특히 더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울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솔직히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합심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므로 그 안에서 질서를 유지해야 합니다. 국가는 국가로서의 의무가 있고 신자는 국민으로서의 의무가 있습니다. 서로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평화는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공공의 유익을 위하여 선행으로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이며 신자가 국가에 복종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관심

에4:10-17

 

서론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문제나 가정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지만 국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는 별로 없습니다.

본문은 유대 백성이 하만의 모함으로 다 학살당하게 되었는데 이 위험을 막기 위해서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에스더와 협상하는 내용입니다. 에스더는 자기 동족을 살리기 위해 죽을 결심을 하고 왕 앞에 나가 자기의 민족을 구해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에 대해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1. 성도들의 국가에 대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후인 에스더 너만이 유대 민족을 구할 사명이 있다. "는 것입니다. 만약 유대 민족이 다 학살당한다면 유대인인 에스더가 비록 왕후라고 해도 온전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을 떠나서 혼자만 산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멸망받아도 나 한사람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남도, 나 자신도 다 멸망케 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은 내 자신만을 위한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항상 이웃과 국 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

에스더는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에스더의 신앙 인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밤낮 3일 동안 시녀와 함께 금식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기도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동족들에게도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합심하여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라고 했는데 규례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아무리 왕후일지라도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 앞에 함부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혹 나간다고 하더라도 왕이 언짢아하면 죽기까지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3일 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왕 앞에 담대히 나갔을 때에 왕의 마음은 부드럽게 되었고 에스더를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5장 3절에 보면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도의 능력은 큰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은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 자신도 열심히 기도했을 뿐 아니라 세 친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기도는 이와 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결론

에스더와 유대 민족의 기도한 결과로 유대인은 살아나게 되었고 그들을 죽이려고 했던 하만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관심은 어느 한 사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받아야 할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이 잘 사는 길

암5:4-13

 

서론

이스라엘의 "아모스"라고 하는 선지자는 자기 민족에게 잘 사는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그는 본래 "드고아"라고 하는 고원 지대에서 양을 치면서 뽕나무를 재배하던 목자였으며 동시에 순수한 농부였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상은 정치 · 경제 ·종교면에 있어서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하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임하여 매우 혼란하고 위태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아모스는 민족의 살 길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는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 원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열거할 수 있지만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으로 구분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내적 원인

하나님을 잊어버린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고 멀리 떠나게 되는 것이며, 이 세상의 물질과 명예나 지위를 지나치게 탐하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사치와 방탕, 그리고 방종과 나태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언제나 스스로를 경계하여야 합니다.

(2) 외적 요인

이 세상의 환경과 마귀의 유혹과 시험이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고 멀리 떠나게 하는 외적 원인이 됩니다.

뱀같이 간교하게 유혹해 오기 때문에 잘 넘어가게 됩니다. 인간의 헛점을 노리고 대드는 것입니다. 또 우는 사자와 같이 위협하고 공갈해 옵니다. 이것은 강력한 정치적인 박해와 법적인 제재입니다. 그리고 광명한 천사와 같이 유혹합니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으로 가장 차원 높은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나가게 합니다. 그 결과, 우리 사상과 행동에 혼란과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찾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해야 됩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우리 심령이 갈급하여 하나님을 사모해야 한다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중심으로 하나님을 재일 귀한 분으로 모시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제일 귀한 분임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면 나의 생명은 헛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결론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찾은 결과 민족적인 신앙 부흥이 일어났고, 민족적인 혁신 운동이 일어났으며 민족적인 총화와 통일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도 하나님을 찾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불의와 죄를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불의와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도 과감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오직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 국가와 민족은 잘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며 우리 인생에서 제일 귀중한 분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국가 민족의 방위력

왕하6:14-23

 

서론

왕하13:14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엘리사를 찾아가서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로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스라엘의 방위력은 막강한 군대나 신무기나 발전된 전술이 아니라 바로 엘리사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왜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방위력으로 말하였습니까?

 

1. 하나님의 불발과 불병거를 동원시켰던 선지자입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밤에 엘리사가 있는 도단을 에워쌌습니다.

그때 엘리사를 수종들던 사환이 겁에 질려서 엘리사에게 이 일을 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므로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역하는 사람의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오늘도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동원하여 적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는 방위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한 성도들의 기도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원동력이 됩니다 민족을 발전시키는 활력소가 되고, 국토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위력이 되는 것입니다.

 

2.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몰아 낸 방위력입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을 포위하며 공격 해 오는 아람 군대를 이스라엘 땅에서 깨끗이 몰아내고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낸 위대한 방위력이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이 어둡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된 자들을 이끌고 사마리아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여 그들의 눈을 열게 해 달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해주셨습니다. 아람 군대가 눈을 떠보니 자신들이 사마리아 가운데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에게 떡과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냈고 그후로 아람 군대는 다시는 이스라엘에 쳐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사의 기도의 위력이었던 것입니다. 이 위력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데서 발생하는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승리하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하나님의 역사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그러한 놀라운 일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방위력이 된 것입니다.

 

결론

엘리사가 이러한 능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며 엘리야에게 영감의 갑절을 구하고 그것을 받기 위해 엘리야를 끝까지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영감보다 갑절을 구한 것은 자신이 영광을 얻기 위해서이거나 엘리야보다 더 똑똑해지려고 하거나 자기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바 사명을 완수하여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해서 우리도 계속하여 기도하며 국가와 민족의 위대한 방위력의 구실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국가에 대한 신자의 자세

롬13:1-7

 

서론

한 나라의 국민된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숭고한 권리와 준엄한 의무를 동시에 지니게 됩니다. 신자들도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국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만일 신자가 국가나, 사회나,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국가적 권위에 대한 기독교인의 기본자세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한 신자의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1. 우리는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10:5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전도 여행을 떠나 보내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먼저 제 나라 사람을 구원함이 급선무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 선생도 롬9'1-3에서 "나는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끌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고 했고, 또 롬10:1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간절한가를 여실히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2. 우리는 나라와 민족 특히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일찍 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범죄하였을 때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1-32) "

선지자 다니엘은 이방땅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중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쪽으로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으며, 에스더는 자기 민족의 운명을 걸고 아하수에로에게 나아갈 때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삼상12:23) 범하지 말고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의 제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 성도들을 조국의 복음화을 위해 힘써 전도해야 합니다.

정신 혁명이 없이 이루어지는 선진화는 마치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이 위태로운 것이며,경제 건설은 반드시 민족의 정신 구조가 개조된 기반 위에 이뤄져야 할 것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교의 복음만이 정신 혁명의 유일한 요소임을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대해 할 일 중의 급선무는 위정자들을 위시하여 서민에게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해서 그들로 하여금 모든 권세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게 하고 그들의 가슴속에 그리스도를 심어주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야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이 개인도 나라도 이 땅에 존재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반항하는 국가와 민족은 망하고 만다는 것이 역사의 엄숙한 교훈인 것입니다. 역사의 주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고, 모든 나라의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관, 올바른 구원관, 올바른 사생관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 전도요,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의 길과 통하는 길인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우리는 국가에 대한 신자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국가 권세에 대해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애국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복음화를 위해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군 인

성 경 활 용

1. 군인의 특징

(1)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딤후2: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2)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마8:9)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3) 고난을 받아야 한다.

(딤후2: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2. 지휘관의 자격

(1) 부하를 사랑할 줄 아는 자이어야 한다.

(마8:6)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2) 하나님을 사랑 경외하는 자이어야 한다.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3) 강포하지 아니한 자이어야 한다.

(눅3: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요를 족한 줄로 알라

 

3. 적군의 특징

(1) 하나님의 원수이다.

(삼하12:14)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약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2) 성도의 원수이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3)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 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영들

(4) 육체의 정욕이다.

(벧전2:11)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4. 적군과 싸우는 방법

(1) 참음으로

(히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2) 힘씀으로

(유3)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 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3) 예언을 따라서

(딤전1:18)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5. 군인의 무장에 필요한 것

(1) 군도

(잠30: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2) 활

(시45:5)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들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3) 투구

(삼상17:5)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4) 갑옷

(삼상17:5) 몸에는 어린 갑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이며

(5) 창

(삼상17:6)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단장을 메었으니

(6) 방패

(삼상17:7) 그 창 자루는 베틀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는 앞서 행하더라

 

6, 군인에게 필요한 것들

(1) 군물

(왕하7:15)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2) 군복

(삼하2:21) 아브넬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좌편으로나 우편으로나 치우쳐서 소년 하나를 잡아 그 군복을 빼앗으라 하되

(3) 무기

(요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군기고

(느3:19) 미스바를 다스리는 자 예수아의 아들 에셀이 한 부분을 중수하여 성 굽이에 있는 군기고 맞은 편까지 이르렀고

(5) 진

(민1:52)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수9: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6) 병거

(창50: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메가 심히 컸더라

(왕상20:21)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도륙하였더라

(7) 군마

(삿5:22) 그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는 땅을 울리도다

(8) 군호

(삿20:38)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상약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미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 하고

관련원어풀이

1. vyai 이-쉬

(1) 남자, 사람.

(창4:1, 삼상1:11)

(2) 남편.

(창3:6, 룻1:11)

(3) 사내다운 마음, 용기.

(왕상2:2, 삼상4:9)

(4) 인간, 사람

(창32:29, 욥9:32)

(5) 친구, 추종자, 군인.

(삼상23:3, 12)

(6) 군인들.

(사21:9)

 

2. hm;j;l]mi 미르하-마-

(1) 싸움, 전투.

(출13:17, 욥39:25)

(2) 전쟁.

(신20:12)

(3) 승리, 전쟁의 행운,

(전9:11)

 

3. !j'l; 라-함

(1) 먹다. 탐식하다, 소모하다.

(시141:4, 잠23:1)

(2) 싸우다, 전쟁을 일으키다, 전투하다.

(시35:1, 56:2)

(3) 싸우다, 전쟁을 일으키다.

(출1:10, 왕상20:25)

(4) ~대항해 싸우다, 포위하다.

(황하16:5, 사7:1)

 

4. ab;x; 차-바-

(1) 군인, 군세.

(민31:27, 삼하8:16)

(2) 군대의 지도자.

(창21:22)

(3) 군인들.

(민31:53)

(4) 싸움, 전투.

(욥7:1, 사40:2)

 

5. hn<j}m' 마하네

(1) 야영 캠프.

(출16:13, 민4:3)

(2) 군대, 무리, 떼.

(창33:8, 50:9)

 

6. qv,n< 눼쉐크

(1) 무기.

(왕상10:25, 겔39:9)

(2) 병기고.

(느3:19)

 

7. stravteuma 스트르튜마

(1) 군대.

(마22:7)

(2) 군세, 부대.

(행23:10)

(3) 호위병, 보호인.

(눅23:11)

 

8. stratiwvth" 스트라티오-테스

(1) 군인, 병사.

(마8:9, 막15:16)

(2) 그리스도의 군병.

(딤후2:3)

 

9. sustratiwvth" 수스트라티오-테-스

동료 군인,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일에서 함께 군인된 자.

(빌2:25, 몬2)

 

10. strateuvw 스트라튜오-

(1) 군대를 모으다, 군대에 복무하다.

(눅3:14, 고전9:7)

(2) 싸움하다, 전투하다.

(약4:1, 벧전2:11)

(3) 영적인 전투, 군대로서의 활동을 하다.

(고후10:3, 딤전1:18)

설교예화자료

이순신 장군의 일기 두 편

 

선조 26년 7월 초9일 맑음

남해가 또 와서 광양, 순천이 벌써 결판났다고 전하므로 광양(어영담), 순천(권준)과 송희립, 김득룡, 정사립들을 내어보냈고 이설은 어제 먼저 보냈다. 이 소식이야말로 뼈속들이 저려서 말을 못하겠다. 우수사와 경상수사와 함께 일을 의논하였다.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티끌 하나 일지 않아 물과 하늘이 한 빛인 속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밤중에 새로 1시쯤에 본명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는데, 그것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 피난민들이 왜적처럼 차리고 광양으로 들어가 여염집들이 분탕하는 것이었다. "고 하니 우선 다행한 생각을 이길 길 없다. 진주 소문도 역시 빈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주 일은 그럴 리가 만무하다. 닭이 벌써 울었다.

· 선조 30년 5월 초5일 맑음

새벽 꿈이 매우 어지러웠다. 아침에 부사가 보러 왔었다. 늦게 충청 우후 원유남이 한산에서 와서 원공(균)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졸들이 모두 다 배반하므로 앞으로 일이 어찌될지 알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이 날은 단오절인데, 천리 밖에 멀리 종군하여 어머님 영연을 멀리 떠나 장례도 못 모시는 무슨 죄로 이런 갚음을 당하는고, 나와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 짝이 없을 것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 난중일기 中 -

 

 

그대 있음에 내가 있소

 

- 부제:현역 중령의 외길 인생

 

지금까지 21년간 군대 생활하면서 군인의 길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항상 바뀌는 젊은이들과 살기 때문에 언제나 머리와 몸, 생각과 행동이 젊은 게 기쁘죠. 이렇게 계속 바뀌는 젊은이와 어울려 사니까 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젊은이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잘 느끼질 못해요. 물론 제가 처음 군생활 시작할 때와 요즘을 비교해 보면 이렇게 달라졌구나 싶죠.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도 좀 달라졌습니다. 근본적으로 창조주는 한 분 뿐인데 각자가 다른 여건에서 그분을 접촉했기 때문에 종교가 달라지지 않았나 싶어, 종교에 대한 편견이나 편파적인 태도를 가급적 삼가하려고 노력합니다. 부하들에게도 제 종교를 밝히지 않고 각자가 자기 종교에 충실하라고 일러주죠. 사실 병사들은 지휘관의 종교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종교를 차별하지 않기 위해서죠. 이와 아울러 세상은 자기 능력대로 사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조화를 잘 이루어야 산다는 생각이 깊어갑니다. 함께 살아가도록 서로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이죠. 누구나 자라난 배경과 문화권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니까요.

결국 군인은 참 좋은 직업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밥벌이를 위해 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애쓰다 보면 자기 밥은 주어지 거든요. 이렇게 보면 그대 있음에 내가 있는 거예요. 국민이 없으면 군인이 필요없고 者인이 없으면 국민이 편할 리 없죠. 그러니까 군인을 무슨 색다른 존재로 보지 말고 따뜻한 마음도 못된 마음도 가진 평범한 사람으로 받아주고, 아무 선입견 없이 서로 믿고 기도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군 사목 관계자와의 대화

 

자신의 일에 책임감을 갖고 훌륭한 선택을 내리는 사리있는 군인이라면 평화와 국토 방위의 수호에 있어서 깨끗한 양심과 용기를 지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본인은 직업군인 뿐만 아니라 일정기간 조국에 봉사하기 위하여 부름받은 군인들에 대해서도 심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그 기간은 하나의 큰 시련과 같은 것입니다. 생활 환경의 변화는 그들이 가진 신앙이나 종교적 실천 행위에 치명적인 고난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신앙으로 살 수 있는 기회도 될 수 있습니다.

세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세례를 주면서도 그들에게 직업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직하차 부정한 행실 없이 직업을 수행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신뢰를 갖고 그분께 다가왔던 백인 대장에게 친절히 대하였습니다. 살레시오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강조하였습니다. "군인들과 부부들에게서 성실한 삶을 빼앗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성실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사도직에 크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또한 여러분의 형제들 가운데에서 복음 전파의 누룩이 되십시오.

(군종사목 관계자들과의 대화, 교종 요한 바오로2세, 1986)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분명 인간 사회에서 전쟁이 뿌리뽑힌 것이 아니다. 전쟁의 위험이 상존하고 충분한 힘과 권한을 가진 국제적 권력이 없는 동안에는, 모든 평화적 타협 방법을 시도해 본 연후라면 각 정부의 정당 방위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국가 원수들과 국정의 책임을 분담하는 사람에게는 이렇듯이 중대한 일을 신중히 처리하며 맡겨진 백성들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조국에 봉사할 목적으로 군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국민들의 안전과 자유를 지켜주는 역군으로 생각할 것이며 이 임무를 바로 수행함으로써 참으로 평화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 79,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3)

 

 

백인 대장의 고백

 

예수 시대의 유다는 로마의 식민지라 로마 군인들이 곳곳에 주둔해 있었어요. 로마군의 주력 부대는 군단이었지만, 유다와 같은 작은 지역에는 현지인들로 편성된 보조 부대를 배치시켰어요. 그렇다고 유다인이 징집되진 않았어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 종교 관습으로 말미암아 병역 면제라는 특혜를 누렸거든요.

유다에 주둔한 로마군의 병력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사마리아인, 그리이스인 등으로 구성된 1기병 대대와 5보병 대대 정도였어요, 하지만 시리아에 10보병대로 편성된 군단이 자리잡고 있어 안보에 큰 문제는 없었어요. 일개 대대는 600명인데 이를 100명씩 나눠 여섯 백인대로 되어 있었어요. 기병대대는 그 중 일개 백인대가 기병이라는 점만 달랐죠. 이 백인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바로 백인 대장(百人隊將)입니다.

예수 시대에 유다 전역에는 약 36명, 예루살렘엔 12명의 백인 대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그들은 평민 출신의 직업 군인으로, 그위로도 많은 상관들이 있긴 했지만 실질적인 훈련 책임과 무기 검사, 전투 지휘 등은 물론 사형 집행도 담당하고 있었어요.

그러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고 겸손되이 말씀드린 백인 대장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되풀이 되고 있어요

"주여,내 안에 주를 모시기 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

 

 

바들의 친구

 

바울은 참으로 자신과 친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군인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 생활을 전투로 보았음은 "정의의 도구" "빛의 같을"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 "가슴에 무장" "투구" "세속의 무기" 등 군대 용어를 쓰고 있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무명 동사를 위한 시

 

열다섯에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여든살이 되어 비로소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오는 길에 고향 사람을 만나 내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집이 자네 집인데 소나무와 잣나무 우거진 무덤만 줄지어 있을 뿐이네.

가보니 들개는 담장새로 넘나들고 꿩은 대들보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앞마당에는 잡곡이 멋대로 우거졌고 낡은 우물 근방에는 들풀이 자라고 있었다.

그 잡곡을 익혀 밥을 짓과 들풀을 뜯어 찌개를 만들었다.

밥과 찌개는 즉시 익었지만 누구에게 이것을 먹으라 해야 할까.

문 밖에 나가 동쪽을 바라보니 그저 눈물만 흘러 내옷을 적셨다.

 

 

어록·시·묘사

 

경찰은 혼자 행동하는 군인이요 군인은 일제히 행동하는 경찰이다.

(H. 스펜서/ 사회학 원리)

 

상관이 부화뇌동하면 부하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독단에 흐르면 많은 부하를 죽이고, 목숨을 아끼면 부하들의 의혹을 산다.

(司馬法)

 

용장(勇將)은 뿌리와 같은 것으로, 거기서부터 가지가 되어 용감한 병졸이 나온다.

(P. 시드니)

 

장수가 되는 도리는 싸움을 좋아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세종대왕/ 海東野言一)

 

장군이 명심해야 할 일이 다섯 가지 있으니, 첫째는 理요, 둘째는 備요, 셋째는 용柔요, 넷째는 戒요, 다섯째는 約이다. 理란 많은 병사 다스리기를 마치 적은 병사 통솔하듯 함이며, 備란 문 밖에 나서면 적을 대하듯 대처함이며, 叢란 적과 싸움에서 살 생각을 품지 않는 용기이며, 戒란 승리하여도 序戰 때의 긴장을 풀지 않음이며, 約이란 법령을 생략하여 간소화함이다.

(오자)

 

 

군인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평화를 더 간절히 기원합니다. 가장 깊은 상처를 입어야 하며 전쟁의 흉터를 지녀야 하는 것은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D. 맥아더)

 

금세기에 들어서기 전, 제가 군에 입대하였을 때, 그것은 저의 소년과 같은 희망과 꿈의 현실이었습니다‥‥저는 아직도 그 당시 막사에서 유행하였던 한 발라드의 후렴을 기억합니다. 그 후렴은 자랑스럽게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저 사라질 뿐이다.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제 저도 그 발라드의 노병처럼 저의 군대생활에 막을 내리고 사라지려 합니다. < *원래 「친절한 말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찬송가였으나 남북전쟁 당시 군대 용으로 개작되어 불리었다.>

(D. 맥아더)

 

평화를 갈망하는 자로 하여금 전쟁을 준비하게 하라.

(베게티우스/ 무적군대)

 

군인은 생명을 수호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사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위에 말한 국가적 ·민족적 융성의 방파제이며, 우주적 생명의 수호의 기사이며, 신의 창조업의 계속의 방조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기의 생명과 나의 생명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과 남의 생명뿐만 아니라 생명 일체에 대한 사랑! 이것이 군인의 무기일 것입니다.

(김태관/ 불꽃을 끄지 말자)

 

군대에는 다섯 가지 칭호가 있다. 첫째는 義兵으로 이는 폭력을 금하고 무질서를 구제하는 군대이며,둘째 强兵이란 병사의 많음을 믿고 공격한 군대이며, 셋째 剛兵이란 분개, 격노때문에 일으킨 군대이며 넷째 暴兵이란 무례, 탐욕의 군대이며 다섯째 逆兵이란 나라가 어지럽고 퇴폐해 있음을 틈타 난을 일으켜 민중을 선동하는 군대이다. 이 다섯 종류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각각의 길이 있으니, 의병에 대해서는 예의 바르게 强兵에 대해서는 제 힘을 누르고 겸손을 표시하고, 剛兵에 대해서는 교묘한 언사로 달래고, 폭병에 대하여는 거짓말로 뫼이고, 역병에 대하여는 권모로써 진압시켜야 한다.

(오자)

 

병사는 그레이하운드처럼 공격하고, 늑대처럼 후퇴하고, 멧돼지처럼 방어해야 한다.

(A. 몽뤼크)

 

야심이 없는 병사는 박차(拍車)를 가지고 있지 않다.

(F. 베이컨/ 수필집)

 

세상에는 두 가지 힘 즉 무력과 정신력 밖에 없다. 무력은 결국 정신력에 항상 패배당한다.

(프레드리크스/ 나폴레옹 어록)

 

군인은 우리들이 회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착오자다.

(G. B. 쇼)

 

무용(武勇) -허영심과 의무감과 도박자의 희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군인 특유의 혼합물.

(A.G. 비어스/ 악마의 사전)

 

무력을 신봉하는 자들은 얼마 간의 자산이 있는 자와 이해관계가 있는 자들일 것이다.

(W. 윈덤)

 

평화시의 병사는 여름철 난로와 같다.

(W. 세실)

 

힘이 주인인 곳에서 정의는 하인이 된다.

(독일 격언)

 

하지만 병정도 시를 쓴다/ 한 발 다가선 죽음을 경계하면서 정렬된/ 생활의 틈 사이 어둠처럼 낮게 숨쉬는 피로와/ 함께 식구들의 잠을 지키느라 날카로워진/ 달빛으로‥‥/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시를 쓴다.

(송용호/ 하지만 병정도 시를 쓴다)

 

초금 소리 없어져 버리고/ 저녁 구름 가라 앉고/ 환한 은하수에 뭇 별들 반짝인다. / 전사(戰士)는 상처받고 온 땅에 쓰러져 있어/ 지친 사람은 깊이 잠들고 부상한 사람은 죽어간다.//‥‥/‥‥귀여운 아이가 자주자주 내 이마에 입맞추고// 젊은 아내는 정이 솟구쳐 혼자서 흐느낀다. /‥‥// 놀라서 좋은 꿈 깨어나니 해는 희미하고/ 꿈속의 일은 까마득히 떠나가고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이 되었구나.

(T. 캠벌)

 

까맣게 아니 마를 풀이 없듯이/ 어느 누구 홀아비 아님이 없다. / 애달프다 우리의 병사들이여/ 사람으로 사람 대접 받지 못하네./들소나 호랑이도 아니건마는/ 저 광야 헤매이는 신세랍니다. 불쌍도 하여라 우리의 군사/아침 저녁 어느 때고 틈조차 없네.

(시경)

 

기계 인형이 시가 행렬을 할 때, 기가 포물선을 그리고 가면, 마이너스 무한대가 슬픈 역사를 배설한다. // 텅 빈 하늘 아래, 나는 소라껍질 나팔을 불며, 피묻은 내 발자국에 절대치를 증명하려 내가 나와 비공식 회견을 한다. // 탄환이 스쳐간 「윈도 글라스」에 영사(映寫)된 인생이 금갔구나. 나를 응시하는 눈초리에 조소도 구름의 자취만 남기고 회의마저 떠나가는 내 가슴에, 차가운 생의 메달만 매어달려, 이 날도 플러스 무한대로 자질한다.

(이경순/ 생명적)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행복이라던가 /원이라던가/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을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 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오 화살 조국의 화살이여 전사여 영령이여

(고은/ 화살)

 

무기는 그 소유자에게도 적이다.

(터어키 격언)

 

어디 군사야 전라도 군사일세/ 몇 천냥 벌었나/ 삼 천냥 벌었네/ 무슨 기꼬 벗나 파란 기꼬 벗네/ 무슨 신 신었나 가죽신 신었네/ 무슨 옷 입었나 베옷 입었레/ 동대문 여디요 여기 저기

(예천지방 민요)

 

어디 군사인가 경상도 군사레/ 몇 천 명 인가 삼천 명이제/ 몇 백 바퀴 돌았나 삼백 바퀴 돌았제/ 무슨 칼을 찼나 장도칼을 찼제/ 무슨 신을 신었나 가죽 신을 신었제/ 동대문이 여디인가 여기레

(이천지방 민요)

 

훌륭하도다. 진(嬅) 장군이여!/ 군사를 이끌고 충성을 다한 사람./ 그대 아니면 우리는 죽었고, 그대 때문에 나라는 살았다.

(두보/ 北征)

 

그이는 씩씩하고 늠름하여/ 나라의 영걸이니라/ 그이는 창을 비껴 들고/ 왕을 위하여 앞장 섰네.

(시경)

 

장군은 갑옷을 밤에도 벗지 않고,/ 한밤에 행군하니 창이 서로 튕긴다/바람은 칼끝처럼 얼굴을 찢는다/ ‥‥되뇜 기병은 말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서/ 백병 전에 감히 가까이 달려들지도 못하겠지/ 우리 군사는 서문에서 개선행진을 기다리리

(잠삼/ 주마천행)

 

벼슬 얻어 한(漢)나라 섬기니 우림랑(羽林郞),/ 처음으로 표기장군 따라 어양(漁陽)에서 싸운다/ 누가 알겠나, 국경으로 향하는 괴로움을! 죽는다 해도 협객의 아름다운 이름은 들으리!

(왕유/ 소년행 2)

 

삼십 년 동안 나는/ 자유를 위한 결사전의 최전선을 충실하게 지켜왔다. / 나는 승리할 가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싸웠다. /‥‥ 보초가 넘어지고 상처가 입을 열고/ 누군가가 쓰러지면 다른 사람이 온다/ 그러나 나는 쓰러지지만 굴복하지는 않는다/ 나의 심장은 파괴되어도 나의 무기는 꺾이지 않는다.

(하이네/ 결사적인 보초병)

 

수레들은 덜컹덜컹, 말들은 히잉히잉./ 병사들은 제각기 활과 살을 허리에 찼다// 부모와 처자가 따라가며 배웅하니,/ 일어나는먼지에 함양(咸陽)다리 안보인다// 옷자락에 매달려 발구르며 길을 막고 통곡하니,/ 통곡하는 소리는 곧장 구름 위에 닿는다//·.. "또한 지난 겨울처럼/ 관서(關西)의 병졸을 쉬게 않는다면,/ 나라에서 세금을 재촉한대도/ 세금을 어디서 내겠습니까? "// "정말, 아들 낳는 것 나쁘고/ 딸 낳는 것 좋음을 알겠습니다. "/ 딸을 낳으면, 하기사 이웃에 시집이나 보내지만/아들을 낳으면 잡초처럼 흙에 묻히고 말지.

(두보/ 兵車)

 

병사들은 사막 땅에 엎드려 사네/ 달은 활 그림자 따라 움직이고/ 서리는 칼에 스쳐 꽃잎처럼 흩어진다.

(이 백/ 索下曲 · 5)

 

烈士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 班超처럼 出征하여 功을 세워야지/ 金滄들고 고향달을 하직하여/ 철마타고 국경으로 떠나노니/ 殺氣 사막에 등등하고/ 음산한 기운이 成樓를 뒤흔드네/ 허리에 찬 白羽의 이 화살로/오랑캐 두목을 쏘아 목을 베련다.

(임 제/ 出家待)

 

상황 보고드리겠습니다. / 어제 비 그치고 모처럼 햇살 온 누리에 따뜻해 전선일대 我, 敵할 것 없이 새소리 물소리 문득 청량하여 밤에는 한층 고향생각으로 쉬 잠들지 못하였습니다.

(전원책/ 상황보고)

 

신록의 산야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두려운 적막이 있다// 전투준비가 한창인/ 야전군 진지// 미녀 초병이/ 건문을 한다// "이름!"/ "생년월일"/노약자들은 전장을 떠나야 한다.

(이상면/ 신곡)

 

날마다 풍문은 국방군 후퇴뿐/ 사촌형과 몇몇 청년들은 행방불명/ 형은 온 몸에 화상입어 후송됐다는/ 풍문에 마을은 울음숲이었습니다. // 중2년 시절 다시 유월에/ 누이와 시외 정거장 지나다/ 두 팔, 두 다리/ 토르소 같은 상이군인 보았습니다. 행방불명 사촌형 생각에/ 그 사람 가까이 가 얼굴 살피다/ 누이가 울면서/ 빌고 빌 때까지/ 함께 있던 군인에게/ 억수(億敎) 발길질에 채 였습니다.

(김석 / 다시 유월에)

 

8개월 졸병 대억이는/ 말뚝 보초, 나는 언제나 그를 초소 밖에 내몰고/ 잠잔다. 그는 별을 본다/ 박 일병님, 꿈을 지켜드리지요./ 그는 초소 수위를 맴돈다. 서성인다/ 바람몰아친다. 발가락이 얼었다. 동동 뛴다. 누가/ 온다. 안 온다. 별빛이 음악소릴 낸다/ 귀가 쓰리다. 이빨이 맞부딪힌다// 동화도 한편 간직 안하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대억이의 노랫마디 하나가/ 내 잠 속으로 흘러들었다/좋은 꿈꾸세요,박 일병님/ 시끄럽다. 임마./인형극을 보여줄까요/ 인형 있으면 태워 불이나 쬐자/ 신의 말을 엿들은/ 새 소리를 들려드릴께요./ 참새구이에 소주 한 병!/ 착한 일만 하다가 길이 늦은 동방박사를/ 아세요. 박사는 커녕 학사주점도 아니다/ 어떻게 이 나날을 / 살아요. 욕설과 푸념이다. / 밤새도록 보초만 섰으면 좋겠어요.// 손들엇!/ 움직이면 쏜다/ 오늘의 암구호는 꿈입니다. / 살자면, 사는 듯이/ 살아야 합니다/ 엄한 추위에 맞선답니다. // 8개월 쫄병 대억이의 / 꿈타령 때문에/ 나는 사는 듯이 잔다. 자는 듯이/ 죽는다. 꿈을 지켜 드릴께요. 동동 구른다. /어떻게 이 세월을 아무런 절망없이 살 수/있단 말이냐. 남녘 하늘에 큰 별 하나가/ 빛나고 있는걸요.

(박덕규/ 꿈꾸는 보초)

 

그이야말로 진리의 병사였다. / 그 분노는 기성의 악을 향해 열렬히 불타올랐고, 이 세상 왕들에게 결전을 도전할 때 그 전투의 노래는, 자기 마음을 해방시켜 준/그리스도의 미소에웃음을 돌리고 있었다.

(T. 클라크/ 전투적 그리스도)

 

또한 내게 적을 보내십시오 한 명 또 한 명/ 투쟁은 힘을 새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G. 팔케/ 기도)

 

오오, 부활제를 앞두고/ 불꽃으로 타오르는 당신은/ 피 끓는 가슴으로 가슴으로/ 조국강산을 지키다가/ 산야를 빨갛게 물들인/ 이름 없는 젊은 병사들의/ 싱싱한 피응어리이어라 // 썩히는 어둠의 세력/ 제 아무리 강하여도/ 당신은 뿌리로 끈질긴 뿌리로 사시기에/포화(砲火)에 뭉개지고/ 군화(軍點)에 짓밟혀도/ 죽은 듯 죽지 아니 하시는/ 부활제의 꽃이어라.

(임춘남/ 부활꽃)

 

주여 나를 포로로 잡아 주소서/ 그러면 나는 자유를 누리옵니다. /내 칼을 던지게 하소서/그러면 나는 정복자가 되옵니다.

(마데슨/ 나를 사로잡으소서)

 

그대들 지금도 날 기억하는가/ 장백산 사십 척 골짝에 누워/ 어랑촌, 백운평 원시림 속 떠돌며/압록강 얼음 위에 은빛 달 뜰 때마다/ 끓어오르는 울음 살 아린 바람더미로/ 되살아나고 되살아나는 내 핏발선 목청/ 그대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시월 삭풍에 우우우 북간도의 겨울은 몰려오는데/ 야영화 달군 돌 위 에 옥수수가루 콩가루/ 짓이겨 지짐하여 허기를 채우고/ 키넘는 활엽으로 등 녹이고 가슴 덮으며/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새워 싸우며/우리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지/ 총대에 내 몸을 칭칭 감아 동여매고/ 장고봉 넘어 치내려온 관동군, 만철수비대/ 수백여구의 뼛속에 박힌 분노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고 지금도 썩어 있는/ 아, 나는 북로 군정서 소년병 최인걸/ 자랑스런 대한독립군의 기관총 사수였다. // 지금도 나는 꼭 한 번만 더 살아나고 싶구나./ 언제고 한 번만 더 살아 일어나서/ 하나 남은 기관총에 다시 허리를 묶고/ 끊임없이 이 땅에 밀려오는 저 적들의 가운데로/ 방아쇠를 당기며 달려가고 싶구나. // 밀림 속에 숨어 아직도 돌격 소리 그치지 않는/ 저 새로운 음모의 한복판을 향해/ 빗발치는 탄알소리로 쏟아지고 싶구나.// 늦가을 달 높이 뜬 삼천리 반도를 오가며/ 그때 부르던 기전사가 다시 부르고 싶구나. (*析戰死歌 . 청산리전투 당시 독립군이 부르던 군가)

(도종환/ 다시 부르는 기전사가)

 

하나님이시여, 저를 떠나지 마소서./ 밤은 어둡고 찬데 내 작은 용기의 불꽃은/사위나이다. // 하나님이시여, 밤이 기오니 저와 함께 하소서./ 그리고 저를 담대하게 하소서./ 죽음이 문 앞에 닥쳤음을 제가 아나이다. /우리의 싸움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제가 알고 있나이다. / 인류의 평화와 형제들의 해방을 위하여/ 보다 다정 한 세상, 보다 맑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 저는 어머니가 낳아주신 아들로/ 단순한 사람일 뿐 그밖의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 그러나 강하고 인자하신 하나님,/ 저로 하여금 그 이하의 것은 되지 않게/ 힘을 주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죽음이 닥쳐올 때/제 얼굴이 겁에 질리지 않게/ 힘을 주옵소서./그러면 제가 쓰러질 때, 정녕 쓰러져야 할 때/ 제 영혼이 혼 속에서 승리하리이다

(제럴드 커시/ 어느 병사의 기도)

 

프랑스로 돌아가는 두 근위병/ 그들은 러시아의 포로였다. / 독일의 병 영에 막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고개를 떨구었다. // 거기에서 슬픈 소문을 듣게 되었나니/ 프랑스는 전쟁에 패배하였고/ 대군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황제께서, 황제께서 잡히셨단다. / 두 사람은 서로힘껏 끌어안으며/ 슬픈 소식에 함께 울었다. // 하나가 말하기를 너무너무 슬퍼지니/ 나의 옛상처가 다시 쑤신다. / 다른 병사 말하기를 끝장난거야,/ 너와 함께 그대로 죽고 싶지만,/ 집에는 처자가 기다리고 있다네./ 나 없으면 그들은 굶어 죽는다네./ 아내와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내게는 그보다 큰 열망이 있나니,/ 처자야 굶주리면 동냥이나 다니라지, / 황제께서, 황제께서 잡혀 가지 않았는가!/ 전우여 내 부탁을 들어 주게나,/ 내가 이제 여기서 죽게 된다면/ 내 시체를 프랑스로 가지고 가서/ 조국의 땅 속에 나를 묻어다오.// 빨강 리본이 달린 십자훈장은/ 내 가슴 위에다 매달아 다오/ 내 손에는 반드시 총을 쥐어주고/ 허리에는 군도를 차게 해다오./ 준비를 갖춘 뒤에 무덤 속에 누워서/ 보초처럼 숨죽이고 귀 기울이리니./ 언젠가 대포소리 천지를 뒤흔들고/ 말굽소리 우렁차게 들려오리라./황제께서 내 위로 말을 달리시며/수많은 창검이 철컥대고 번쩍이면/ 나는 무장하고 무덤에서 다시 나와/ 황제를, 황제를 호위하리라.

(하이네/ 근위병)

 

 

설 교 노 트

 

무명의 용사들

대상11:19

 

서론

다윗은 산성에 있을 전 블레셋 사람의 영채가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하였습니다.

이때 이름도 없는 세 명의 용사들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가지고 다윗에게 가져갔습니다 이 무명의 용사들과 다윗의 자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이 용사들은 충직한 군인이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모시는 상관에게 복종하고 충성한다고 하여도 적군과 싸우면서 까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러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들의 용맹함과 다윗에 대한 충성심은 그 베들레헴까지 갔다오게 하였습니다.

베들레햄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8Km지점에 소재한 성읍으로 다윗의 고향이 기도 하였습니다(삼상17:12). 이 베들레헴 부근의 토지가 매우 비옥하여 농산물이 풍부한 것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샘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 샘물을 생각하고 갈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우물물 마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인 이 용사들은 자신의 상관의 그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서 적진으로 뛰어들어갔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 적진으로 단지 물을 길러 들어간 것은 어리석게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용사들이 자신의 상관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는것을 볼 매에 창으로 감격스러워 보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적진에서 블레셋군과 충돌했으면 상처를 입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용사들, 군인들이 있습니다. 그 군인들은 자기 상관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자기 상관의 사소한 일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던질 만큼 귀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는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일을 우리 생명을 내걸고 할 용기있는 자는 몇이나 되는지 각자 반성하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다윗의 부하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용사들이 자신을 위해서 물을 길어가지고 왔을 때 다윗은 차마 그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용사들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하의 피를 마시는 듯한 이 귀중한 우물물을 다윗은 혼자 마실 수 없었으므로 여호와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즉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다윗이 상관으로서 자신의 부하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자기의 개인 소유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흡족히 여기셨을 것입니다.

 

결론

상관과 부하간의 사랑이 있을 때 그 관계는 더욱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상관은 부하를 사랑하고 아끼며 부하된 자는 상관에게 복종하고 충성하며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귀중한 것은 인간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져야 합니다. 돈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라도 그 물을 가져 온 용사들이 피를 흘리며 가져온 것을 생각하고 다윗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것이 요긴한 것입니다.

 

 

군인에 대한 교훈

신20:1-20

 

서론

전쟁은 인간사에서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전쟁에는 군인이 꼭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전쟁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면 아무리 적군의 병거와 군인의 수가 많을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군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한 자의 숫자가 더욱 많기 때문입니다(왕하6:16-17).

 

1. 군인에 대하여

본문 1-4절은 전쟁에 임하여 제사장이 격려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적과 싸울 때에 상대방의 군대의 세력이 강하다고 비겁해지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 격려한 것은 "마음에 겁내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떨지 말라 놀라지 말라"는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셔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집을 짓고 낙성식을 못한 자와, 포도원을 만들고 과실을 못 딴 자와 약혼하고 결혼하지 못한 자,즉 세상에 대하여 미련이 남아있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미련이 남은 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사기까지 저하시키기 쉽기 때문에 돌려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또 겁쟁이도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들도 다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군인은 용감한 자만이 뽑히는 것입니다. 겁에 떨고 있는 자들과는 같이 전쟁에 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적군들에 대하여

먼저 화친을 제의하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민족 이외의 민족들과는 먼저 화친을 제의하여 이에 호응해 오면 그들을 잘 회유하여 속국으로 삼고 선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자를 무조건 치시는 것이 아니라 일단 그들에게 돌아설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그 기회를 잘 붙잡으면 살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뿐입니다.

좋은 뜻으로 화친을 제의하는데 이를 거부하고 대항한다면 할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전쟁을 하는데 남자는 다 쳐 죽이고 여자들과 어린이들과 육축과 성 중에서 탈취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니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탈취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가나안 족속만은 모두 전멸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원주민들은 우상 숭배자로 심판을 받을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그대로 두면 그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 숭배를 하게 되어 타락하게 될까봐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너무 잔인한 것같지만 공의로우신 심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선택된 백성을 위해 그 터를 정결케 하는 작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군사된 자들은 이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군사가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겁을 내는 자들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감한 자들을 세워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미워하시지만 결코 그들을 그냥 치시지 않으시며 그 적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며 일정한 기간 동안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로서 이 세상의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고 겁내지 말고 용감 무방한군사가 되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악과 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군사

딤후2:3-4

 

서론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의 군사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즉, 크리스찬의 삶은 비유컨대 군생활과 같다는 것입니다. 군인으로서의 삶을 3가지로 본문에 의거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군인의 생활은 고난의 생활입니다.

군인으로 군대에 들어가게 되면 그는 안락하고 평안했던 가정을 떠나 내무반과 연병장, 때로는 험한 산에서 심한 훈련과 공동 생활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게 접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크리스찬에게도 고난의 생활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모든 것이 형통되리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사업도 잘 되고 병도 안 걸리고 만사 형통만 있게 될 줄로 생각하나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알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도의 삶을 오해한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고난이 있습니다.

훈련받은 군인이어야 숙련된 군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경험하고 믿음으로 그 고난을 견디어 내는 것은 신앙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군인들인 이 고난을 자기를 위해 받은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 받습니다. 예수 믿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군사는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이야말로 성도의 신앙을 성숙시켜 주는 한 과정입니다.

또 이것은 예수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2. 군인은 사생활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군인이 되면 자기 생활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관의 명령에 의해 결정되어 지고 움직이게 됩니다. 모든 생활은 공적인 생활로 바뀌게 되고 공동체의 일원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의 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군사도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총사령관인 예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곳에 가라 하면 그곳이 아무리 덥더라도, 몹시 춥더라도, 지극히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예수의 군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군인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적 생활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되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3. 군인은 모집자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군인은 상관과 그의 지휘관을 기쁘게 하기위해서 절대 복종을 해야 합니다. 군대에서는, 불복종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모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우리를 모집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우리 대장 예수께 얼마나 잘 복종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예수님께서 기쁘시게 행동하고 있습니까? 군대에서 상관에 복종하는 그 정신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는 예수님께 기쁨이요, 우리들에게도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신자는 예수님께서 모집한 군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신자를 군인으로 비유한 것은 신자의 삶이 마치 군인의 삶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삶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신자의 삶은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며 예수님은 이러한 삶으로 신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정탐꾼을 파견함

민13:1-32

 

서론

이스라엘 민족이 바란 광야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가나안 땅은 어디입니까?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제 이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하셨습니다.

 

1. 정탐꾼을 파견하였습니다.

각 지파별로 정탐꾼을 선정하였는데 각 지파 중에서 대표로 족장된 사람을 한 명씩 보냈습니다. 족장들을 보낸 이유는 군사 기밀을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물론 있었지만 광범위한 탐사를 해야 하므로 우월한 판단력을 가진 자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들 정탐꾼에게 여러 가지를 지시하였는데 그 땅의 거민의 강약과 많고 적음을 알아보라고 하였고 그 땅이 좋은 땅인지 좋지 않은 땅인지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성읍 진지의 형편과 토지의 후박함과 수목의 유무와 그 땅의 실과를 실물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강하고 담대할 것을 권면한 후에 보냈습니다.

 

2. 가나안 정탐

정탐꾼들이 탐지하러 다닌 곳은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입니다. 신 광야는 가나안 남쪽이요, 하맛은 최북단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그 정탐꾼들은 돌아가는 길에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서 막대기에 꿰어 매고, 또 석류, 무화과들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부탁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며 가나안 땅을 탐지하였다는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3. 엇갈린 정탐 보고

가난안 땅을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온 자들은 보고를 하였는데 두 가지의 엇갈린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적인 보고를 한 정탐꾼은 단 두 사람뿐으로 이들은 신앙을 소유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증거물로 가져 온 과일을 보이고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리고 그 땅 거민은 강대하고 그들이 사는 성읍은 대단히 견고하고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낙 자손들이 주로 살며 아말렉인은 남방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 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한다고 상세히 보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하며 우리가 능히 이길 것이라는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반대로 절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하였으며 그 거민은 신장이 강대하여 그들에게 비하면 자기들은 나약한 메뚜기와도 같다고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적극적 생각에서 나온 보고를 한 것이요, 열 사람은 소극적 생각에서 나온 나약한 보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결론

가나안 땅을 탐지하는 데 있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므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희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 지파 대표들은 가나안 거민의 외모를 보고 두려워하는 불신앙으로 비겁하게 낙망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말을 믿는데 따라서 상황은 달라지며 이스라엘의 생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편에 서겠습니까? 신앙의 자리입니까? 불신앙의 자리입니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신앙하여 바른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기드온의 정병 선택

삿 7:1-8

 

서론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부름을 받아 사역하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7년 동안이나 유린을 당해 오던 수난의 시대입니다. "사사"라는 말은 구원자 혹은 구세주의 뜻인데 당시 사사들의 사명은

(1)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전해주고

(2)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3)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명을 위해서 부름받은 기드온은 "나무를 찍는 사람 혹은 베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드온은 자기의 이름의 뜻대로,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바말의 신상과 우상 종교를 깨끗이 숙청하고 외부적으로는 숙적인 미디안을 정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분부대로 정병을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1. 정병 선택의 기초

하나님께서 두 가지 선발 기준을 지시하셨습니다. 첫째, 두려워 떠는 자 돌려보내고, 강하고 담대한 자를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낙오자가 2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 보내고 강하고 담대한 자"를 선택하라는 그 의도는 두려움은 범죄의 산물입니다. 마14:26를 보면 그런고로 영적 지식을 갖추지 못한 자를 택하지 말고, 영적 신앙 지식을 갖춘 사람을 택하라는 교훈입니다. 둘째, 물을 엎드려 마시는 자 돌려보내고 손으로 떠서 마시는 자를 선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1) 적에 대한 경각심이 해이된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경각심이 높은 사람을 선택하라는 교훈입니다.

(2) 적에 대한 전투심이 해이된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적에 대하여 전투심이 구비된 사람을 선택하라는 교훈입니다.

(3) 충성심이 해이된 사람을 선택하지 말고 충성심이 강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교훈입니다.

 

2. 선발된 정병의 사명

여기 선발된 300명 정병의 사명은 매우 중차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300명만을 선택하도록 하신 그 의도는

(1) 수가 많으면 자기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교만해지기 쉬운데 교만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2) 전쟁의 승패가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3) 전쟁의 승리는 많은 전투 경험이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정병들의 사명은 첫째, 대적 미디안족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창25:1-4에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자손으로서 이스라엘을 침략해 온 민족들이요, 이스라엘의 안녕과 평화를 침해한 민족이요, 이스라엘의 발전과 번영을 파괴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런 적을 정복해 버리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립과 평화와 번영을 회복시키는 사명이기도 합니다. 매우 고상한 사명입니다.

둘째, 자기 조국과 민족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드온의 300명 정병의 제 2사명은 자가 조국과 민족을 적에게서 해방하고 구원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이는 자기 민족의 자유와 진정한 안식과 자기 민족의 진리와 정의를 구현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생명을 부여하는 사명이기도 합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정병 300명을 선택한 것의 근본적인 교훈은 이스라엘에게 참된 그들의 구원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전쟁의 승패가 군인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함께 해야만 승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

성 경 활 용

1. 그리스도의 명칭

(1) 주

(마3:3) 너희는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2) 영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3) 홀

(민24:17) 한 별이 야곱에 게서 나오면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며

(4) 보배로운 산 돌

(벧전2:4)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사도

(히3:1)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6) 온전케 하시는 이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7)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계3:14)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8) 순

(슥6:12)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9) 생명의 떡

(요6:35)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10) 구원의 주

(히2:10)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모퉁이 돌

(엡2:20)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12) 인도자와 명령자

(사55:4)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13)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사9:6)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14) 구원자

(롬11:26)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5) 양의 문

(요10:7)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6) 임마누엘

(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7) 알파와 오메가

(계22:2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18) 하나님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19) 선한 목자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20) 큰 대제사장

(히4:14)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21) 교회의 머리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22) 만유의 후사

(히1:2)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23) 구원의 뿔

(눅1:16)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24) 예수 그리스도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25) 임금

(요1:49)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26) 유대인의 왕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27) 만왕의 왕

(딤전6:15) 하나님의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28) 어린 양

(계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29) 생명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골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0) 영광의 주

(고전2:8)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31) 중보자

(딤전2:5)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32) 메시아

(요1:41) 자기의 형제 시몬은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고

(33) 광명한 새벽별

(계22:16)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34) 나사렛 사람

(마2:23)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니라

(35) 다윗의 자손

(마9:27)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36) 독생자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37) 유월절 양

(고전5:7)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38) 생명의 주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39) 신령한 반석

(고전10:4)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40) 구주

(벧후2:20)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41) 하나님의 아들

(마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요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42) 인자

(요5:27) 또 인간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단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43) 참 빛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44) 참 포도나무

(요15: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45) 길, 진리, 생명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46) 말씀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47) 대언자

(요일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48) 집의 터

(고전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49) 안식일의 주인

(마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50) 어린 양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51) 하늘에서 내려온 자

(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52) 영광의 왕

(시24:7)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53) 양의 큰 목자

(히13: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54)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55) 화목 제물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56) 이스라엘의 영광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57) 우리의 소망

(딤전1:1)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58) 주 예수 그리스도

(행20:21)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 라

 

2. 그리스도의 선재하심

(1) 태초부터 계심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2) 하늘에서 내려오심

(요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 창세 전부터 계심

(요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다

(벧전1: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4) 만물을 창조하심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계4:11)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3. 그리스도의 나심

(1) 이사야가 예언함

(사7:14)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2) 성령으로 잉태됨

(마1:18)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3) 헤롯 왕 시대에 탄생하심

(마2:1)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4)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심

(눅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나사렛 동리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4. 그리스도의 성육신

!I. 예언

(1) 하나님의 아들로

(시2: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2) 여인의 후손으로

(창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 처녀 잉태

(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4) 이새의 아들 다윗의 씨로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II. 성 육신하신 이유

(1) 하나님을 나타내시려고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2) 우리의 죄를 없애시려고

(요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3) 사람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해

(딤전2:5)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4)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5) 마귀의 일을 별하시려고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별하려 하심이라

(6)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7)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요13:31)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8)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마3:15)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I. 유대에서 세례를 주심

(요3:22)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II. 갈릴리에서 전도하심

(1) 하나님의 복음을 비로소 전파하심

(막1:14)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2) 온 갈릴리에서 가르치심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3)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

(마8:14-15)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4)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심

(마8:16)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애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5) 문둥병자를 고치심

(마8: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6)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심

(눅8:1)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III. 그리스도의 사명

(1)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2)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함

(눅4:19)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3)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요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4) 진리에 대하여 증거함

(요18:37)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5) 율법을 완성키 위함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6)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는 것

(롬14:9)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7)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게 하는 것

(요14:13)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8) 복음을 전파하는 것

(마4:23)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막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9) 회개케 하는 것

(눅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행5: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10)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흑암의 백성에게 빛을 비추는 것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은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12) 육신에 죄를 정하는 것

(롬8:3)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으로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13)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는 것

(롬5:6)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갈1:4)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14)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것

(고후5:1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15) 죄를 사하는 것

(행10:43)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은다 하였느니라

(16)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

(히2:14)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별하려 하심이니라

(17) 구원하시는 것

(마1: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8) 신자들에게 본을 보여주는 것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6.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I. 그리스도의 죽으심

(1) 십자가에 못박히심

(마27: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2) 저주받은 죽음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3) 무저항의 죽음

(사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4) 대속의 죽음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II. 무엇을 위해 죽으셨나?

(1)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심

(요1:29)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2) 택하신 자를 위하여 죽으심

(마1: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III. 그리스도가 죽으신 목적

(1)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2)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벧전3:18)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리라

(3) 죄를 사하시려고

(마26: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4)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갈4: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갈1:4)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6)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요6:51)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7)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으기 위하여

(요11:52)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8) 교회를 사시려고

(행20:28)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9)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시려고

(골1:22)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 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10)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두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11) 시험받는 자를 도우시려고

(히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12)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기 위하여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믿은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요3:16)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4)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해

(롬14:9)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5) 대속하기 위하여

(마20:28)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IV. 유대인들이 예수를 왜 죽였나?

(1) 예수가 진리를 말하므로

(요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2) 안식일에 병을 고쳤으므로

(요5:16)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3) 예수님을 시기하여서

(마27: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4) 알지 못하므로

(행3:17)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5) 그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기에

(요10:33)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I. 부활하신 방법

(1) 성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수 없었음이라

(2) 성자의 능력으로

(요2:19)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3) 영으로

(벧전3:18)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II. 부활 후의 그리스도의 사역

(1) 성경에 쓰인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심

(눅24:27)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에게 떼어 줌

(눅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매어 저희에게 주시매

(3) 십자가에 못박힌 흔적을 보여주심

(요20:27)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4)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완악함을 꾸짖음

(막16:14)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 일러라

(5) 제자들에게 복음전파를 명하심

(막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6) 하늘로 올라가심

(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III. 그리스도 부활의 결과

(1) 신자를 의롭다고 하심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2) 구원을 얻는다.

(롬5:10)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3)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됨

(고전15:58)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4) 산 소망을 있게 하신다.

(벧후1: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5)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됨

(롬3:4)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6) 열매를 맺게 됨

(롬7:4)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7)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

(롬1:4)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8)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움

(계20:10)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8. 그리스도의 승천하심

!I. 승천의 사실과 상태

(1) 부활 후 40일 만에 승천하심

(행1:3)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2)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실 때 승천함

(눅24:51)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3)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됨

(행1:9)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4)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심

(딤전3:16) 만궁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5)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6) 권세와 능력을 가지심

(벧전3: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이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II. 승천의 목적

(1)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일하시려고

(히6:20)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리세덱의 반차를 좇차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2)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려고

(롬8:34)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 성령을 보내시려고

(요16:7)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4)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하여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5)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엡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6)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시려고

(엡4:8)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그리스도의 재림하심

!I. 재림의 날에 대한 묘사

(1) 하나님의 날

(벧후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2) 주의 날

(살전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

(고전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코케 하시리라

(4)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벧전1:13)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5) 만유를 회복하실 때

(행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6) 그날

(살후1:10)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II. 재림의 시기

(1)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

(마24:36)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2)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다음에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3) 멸망의 아들이 나타난 후에

(살후2:3)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III. 재림의 목적

(1)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히9:28)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2)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려고

(살후1:10)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3)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전4:5)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4)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요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주리라

(5)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려고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7) 택하신 자를 모으시려고

(마24:31)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IV. 재림의 방법

(1) 구름을 타고 오신다.

(마24:30)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과 오는 것을 보리라

(계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2)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3) 승천하신 그대로 오신다.

(행1:11)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4)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오신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5) 천사들과 함께 오신다.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6) 모든 성도와 함께 오신다.

(살전3:13)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7) 홀연히 오신다.

(막13: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8)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신다.

(마24:44)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9) 밤에 도적같이 오신다.

(살전5:2)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가 자세히 발이라

(계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10) 번개가 번쩍임같이 오신다.

(마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11)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오신다.

(히9:28)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V. 재림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한다.

(딤후4:8)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2)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

(고전1: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딛2:13)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3) 주의 오심을 위해 기도한다.

(계22:20)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4) 주의 오심을 예비해야 한다.

(마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5) 주의 오심을 바라보고 사모해야 한다.

(벧후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6) 인내해야 한다.

(약5: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리라

 

10.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I. 인성의 증거

(1) 인간의 이름이 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2)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심

(빌2:7)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3) 여자에게서 나심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4) 육체로 지니심

(요일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5) 인간의 성장 과정을 지냄

(눅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6) 인간의 본능을 가지심

(마21: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요4:7)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으매 애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마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막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눅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7) 인간의 영과 육과 혼을 지님.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 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8) 인간과 같이 죽으심

(마27:50)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9) 무덤에 장사지냄

(마27:59-60)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II. 인성을 나타내는 명칭들

(1) 사람

(딤전2:5)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2) 인자

(행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3) 여자의 후손

(창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4) 다윗의 자손

(마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니이다

(눅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5) 나사렛 예수

(막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요19: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 되었더라

!III. 그리스도의 겸손함

(1) 종의 형체로 사람과 같이 되심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심

(눅2:51) 애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3) 가난하게 되심

(고후8:9)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4) 종이 되심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 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1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I. 신성의 증거

(1) 하나님께서 증거하심

(요8: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2) 그리스도 세례시에

(막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3) 예수께서 변모 하실 때에

(눅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4) 예수 자신의 증거

(요5:36)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5) 천사가 마리아에게 증거함

(눅1: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6) 사도 요한이 중거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7) 바울이 증거함

(행9: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8) 성경이 증거함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결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9) 도마가 증거함

(요20:3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10) 귀신들이 증거함

(막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II. 신성에 대한 명칭

(1) 임마누엘

(마1:23)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 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 이 우리와함에 계시다 함이라

(2) 알파와 오메가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3) 하나님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4)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딛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5) 거룩하고 의로운 자

(행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6) 만주의 주, 만왕의 왕

(계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7) 기묘자, 묘사

(사9:6)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8) 아버지의 독생자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9) 하나님의 아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10) 인자

(마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1) 영광의 주

(고전2: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12)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

(롬9:5)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13) 하늘에서 나신 주

(고전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14) 아버지와 하나가 되심

(요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15) 만물의 창조자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 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었느니라

(16) 그리스도의 전능하심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7) 그리스도의 전지하심

(골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느니라

(18) 그리스도의 편재하심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19) 그리스도의 영원성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III. 그리스도의 신적 사역은 무엇인가?

(1) 창조하셨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1:10)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2) 보존과 섭리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3) 죄를 사하신다.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행5:31)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4) 심판하신다.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5)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형체로 변하게 하신다.

(빌3:21)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6)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12.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I. 어떠한 마음이신가?

(1) 온유한 마음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 겸손한 마음

(눅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3) 같이하는 마음

(눅22: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4) 기도하는 마음

(눅22:32)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마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5) 순종하는 마음

(히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6)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음

(요8:42) 나는 스스로 은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7) 인간이 알 수 없는 마음

(롬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8) 탄식하시는 마음

(막8:12)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또 적을 구하느냐

(9) 민망히 여기는 마음

(마26:38)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10) 통분히 여기는 마음

(요11: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II. 예수의 마음을 닮는 법

(1) 예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 타인을 자기보다 낫게 여긴다.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3)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 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13. 그리스도께로 오면 무엇을 얻는가?

(1) 병고침을 얻음

(마8:16)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2) 안식을 얻음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3) 영생을 얻음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노니

(롬6:23)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4) 배부름을 얻음

(요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5) 평안을 얻음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6) 기쁨을 얻음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7) 의롭다 하심을 얻음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8) 구원을 얻음

(롬5:10)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9) 정죄를 받지 않음

(롬8:1)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0) 성령을 얻음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11) 말씀을 얻음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12) 거룩하여짐을 얻음

(고전 1: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13) 의로움을 얻음

(갈2:16)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14)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됨

(갈3:28) 너희는 유태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15) 택하심을 얻음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16) 죄사함을 받음

(엡1:7)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7) 기업을 얻음

(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 기업이 되었으니

(18) 하늘에 앉게 됨

(엡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19) 마음과 생각의 지키심을 받음

(빌4:7)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20)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됨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1) 예수의 본을 따르게 됨

(요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22) 풍성함을 얻음

(빌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3) 충만하여 짐

(골2: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24) 영광을 얻게 됨

(살후1:12)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은혜 속에서 강하게 됨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26) 생명의 면류관을 얻음

(약1:12)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4. 그리스도는 어떤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는가?

(1) 성도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마1:21)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2) 유대인의 왕이 되심을 위하여

(요18: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3) 율법을 완전케 하시려고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4) 죄인들을 부르시려고

(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5) 쉼 주시려고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6)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7) 잃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8) 새 언약을 세우시려고

(히9:15) 그는 새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9) 죄를 없게 하시려고

(히9:26)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10)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시려고

(마20:2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1) 불을 땅에 던지시려고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갈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겼으니

(13) 심판하시러

(요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14)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요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5) 세상의 빛이 되시려고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

(16) 영생을 주시려고

(요17:2) 아들에게 주선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7)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려고

(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18)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19) 죄를 위하여 죽으시려고

(고전15:3)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축복

(1) 정죄함이 없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다.

(롬8: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롬8:39)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4) 성도가 한 몸이 되어 지체가 됨

(롬12:5)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5)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6)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고후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7)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갈5: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8)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9)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한다.

(딤후2:10)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히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10) 영생을 주신다.

(요일5: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안에 있는 그것이니

 

16.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I. 일반적 고찰

(1)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분이시다.

(딤전2:5)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12:24) 새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II. 중보자로서의 자격

(1)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히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2) 죄 없으심에도 죄를 담당하심

(히9: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III. 중보의 결과

(1)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음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2) 생명을 얻게 됨

(요20:31)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롬6:23)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3)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됨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골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4)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됨

(롬5: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5) 우리에게 이김을 주심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6) 용서를 받음

(엡4:32)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7) 믿음으로 담대해짐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10:19)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8) 의릅다 하심을 얻음

(고전6: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17. 예수와 성도와의 관계

(1) 목자와 양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시로다

(2) 포도나무와 가지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3) 모퉁이 돌과 산 돌

(행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벧전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4) 머리와 그 지체

(엡4:15)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5) 선생과 제자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6) 신랑과 신부

(계19:7)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관련원어풀이

1. j'yvim; 마-쉬-하

(1) 기름을 바른, 기름 부음을 받은.

(삼하1:21, 단9:25)

(2) 기름 부음 받은 자, 왕, 기름 부음에 의해 하나님에 바쳐진 이스라엘의 왕에게 주어진 영예의 칭호.

(단9:26, 삼상2:10, 삼하1:14, 시2:2)

 

2. hv'm; 마-솨흐

원래는 "문지르다, 쓰다듬다, (~에 대해) 손을 잡아 당기다"의 뜻이다.

(1) (∼으로) 퍼뜨리다, 바르다.

(램22:14)

(2) 기름으로 바르다.

(출29:2, 레2:4)

(3) 임직식이나 취임식에서 성리로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다.

(출28:41, 왕상19:15, 사61:1)

(4) 펼치다, 확장하다, 측정하다.

(레6:13, 민7:10, 대상14:8)

 

3. hj;v]mi 미쉬하-

(1) 기름부음.

(출25:6, 29:7)

(2) 몫, 부분.

(레7:35)

 

4. h[;Wvy] 예수-아

(1) 안전한, 구출된.

(사26:1, 18)

(2) 구출, 도움.

(출14:13)

(3) 부귀, 부요.

(욥30:15)

(4) 승리.

(삼상14:45, 대하20:17)

 

5. !Ihsou'" 예-수-스

히브리어 h[;Wvy] 의 음역이다. 구원하심, 즉 도움은 여호와이다.

(1) 여호수아(모세의 후계자)

(행7:45, 히4:8)

(2) 예수 (엘리에셀의 아들)

(눅3:29)

(3) 예수(그리스도)

(마1:1,21, 2:1등)

(4) 예수(바라바) - Barabba'"

(5) 예수(유스도)

(골4:11, 몬23)

 

6. Cristov" 크리스토스

(1) 메시아

(마2:4, 막8:29 등등)

(2) 메시아는 예수<!Ihsou'">를 가리킴

(마27:22, 행5:42)

(3) 그리스도

(마1:17, 롬1:1)

 

7. crivsma 크리스마

(1) 기름을 바른 것, 고약, 연고.

(2) (신약에서 영적 특권을 받는) 기름부음, 기름을 바름.

(요일2:20, 27)

 

8. crivw 크리오-

기름을 바르다, 기름 붓다.

(눅4:18, 행4:27, 고후1:21, 히1:9)

설교예화자료

예수 그리스도

 

리차드 법브란트는 다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옛날 어떤 왕자가 아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회귀한 새 한마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왕자는 그 새의 이름을 "싱글"이라고 짓고 황금 새장에 넣어 두었습니다. 왕자는 새를 보는 것이 그의 기쁨이요, 새와 함께 지내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싱글이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자는 매우 걱정하면서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싱글이는 "왕자님 ! 나를 이 새장에서 나가도록 해주세요. 이 새장을 나가 살던 숲을 마음껏 날고 싶어요. 자유를 주세요!"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자는 싱글이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도저히 놓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싱글이는 왕자에게 숲에 있는 자기 가족들을 찾아가서 비록 자기가 새장에 갇힌 몸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살아 있다는 소식만이라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왕자는 숲으로 달려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왕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싱글이의 여동생이 땅으로 뚝 떨어졌습니다. 왕자는 오라가 새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그만 죽고 만 것이라로 생각하고 슬픔에 잠겨 궁으로 돌아와 싱글이 에게 그의 여동생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싱글이도 자기 여동생과 똑 같이 기절하더니 새장 바닥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왕자는 가엾은 싱글이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몹시 슬퍼하면서 새장을 열어 싱글이를 꺼내었습니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싱글이는 푸르르 날아가서 창문 밖의 나무 위에 앉더니 왕자에게 말했습니다. "왕자님! 왕자님께서 제게 슬픈 소식이라고 전해준 소식은 실은 저에게 큰 교훈이 되었답니다. 죽은 척함으로써 새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 여동생이 저에게 가르쳐 주었거든요!"

서른 세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죽음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죄에 대하여 죽고, 세상에 대하여 죽고, 수많이 지켜야 할 율법에 대하여 죽으셨습니다.

 

 

장님의 희망

 

육체의 3중고, 즉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인생의 여명을 빛속에서 보낸 헬렌 켈러의 생애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절벽을 지척에 둔 사면초가의 절망 속에서도 그들이 승리할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희망, 즉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서 화니 크로스비(Fa-tony Crosby)를 볼 것인 바, 그는 생후 6주만에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었지만 그 어떤 비관을 표명하거나 슬픔도 갖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우리에게 8천곡 이상의 복음 성가를 작곡해 하나님의 영광을 들려주었습니다.

한번은 한 목사가 그녀에게 가련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동정을 하면서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렇게 흘륭한 재능을 주셨으면서도 앞을 보지 못하도록 하셨는지, 매우 안타깝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애절한 마음의 그 목사님의 질문과는 달리,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만약 제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 한 가지 간구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제가 장님이 되는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목사는 놀라며 그 이유를 물으니, 그녀는 "왜냐하면 제가 하늘나라에 올라갔을 때 제가 처음으로 만날 수 있고, 보게 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일 터이니까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어떤 싸움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곳의 지휘관 한 사람이 자기 부대를 앞에 놓고 어떤 동리의 주민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였습니다. 얼마 후 잔인 무도한 그의 병사들은 아무 방비도 없는 동리에 침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 병사의 일행이 민가에 들어가서 그 식솔들을 죽이는 광경을 몰래 훔쳐보고 도망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 집에서 나올 때 한 사람의 병사는 헝겊에 피를 묻혀 그것을 대문에 딱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에 오는 병사들이 그것을 보고, 그 집에서 벌써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를 알려주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가련한 도망자는 죽을 힘을 내어 도망하여 그 동리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집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친구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숨을 죽여가며 이때까지 본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행할 바를 알았습니다. 곧 뜰안에 있는 염소 한 마리를 죽여 가지고 그 피를 대문 위에 발랐습니다. 대문을 닫자마자 일대의 병사들이 그 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피묻은 대문 앞에 왔을 때, 그들은 감히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이집에는 다른 병사들이 들어와서 칼의 위력을 발휘하고 간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많이 학살을 당하였지만 그 피묻은 대문 안에 있던 사람들은 구원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우리들의 희생이 되셨습니다. 거기에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믿음을 갖고 그 속에 피난처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칼이 내려옴을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과 바위의 형상

 

인간은 태초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길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예수님의 사진 을 갖다 놓고, 성서를 읽으며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 무엇이며, 무엇을 행함이 그리스도를 좆는 행위가 되며,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닳아가는 것일까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호도온(Hawthorne)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훌륭한 과학적 사실, 살아 있는 서술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어떤 국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 정치를 잘하고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왕이 죽은 후에도 죽은 왕과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찾아 왕으로 추대키 위해 그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국민들은 왕의 모습을 절벽에 새겨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신하들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왕의 후계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찾아 다녔지만, 도무지 적합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바위 얼굴 밑에 있는 초라한 오두막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는데, 놀랍게도 그곳에서 절벽 위의 왕과 똑같은 젊은이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순박한 소년은 밤낮으로 자신의 조그만 밭을 갈고 그의 나무를 다듬으면서 용기와 순결과 결단력을 지닌 우아하고 광활한 바위상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동안 그 소년은 그 바위의 위용과 닮아져 갔고, 그 생각도 그와 닮아갔던 것입니다.

 

 

불로초와 그리스도

 

중국의 진시 황제가 죽지 않기 위해서 불로초를 구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으나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구하지 못하고 불귀객이 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죽음이야 말로 남녀 노소,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사신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아니 아주 가까운 장래에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래도 오래 살기를 모두가 원합니다.

일전에 구역 예배를 드리면서 나이 먹는 얘기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팽팽하던 얼굴에 주름이 하나씩 지고 머리는 희끗희끗해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가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죽음의 문제를 실감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한 할머니를 부러워하면서 늙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불로초를 먹어야 늙지도 죽지도 않아요, 불로초는 딴게 아니야, 곧 그리스도지."라고 말하여 모두들 새삼스런 발견이나 한 듯이 탄성을 발하였습니다.

진시 황제를 비롯하여 역사를 살아간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염원하던 죽지 않고 사는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한계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마는 인간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젖

 

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의 어느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고아원의 환경이나 위생시설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원인 규명을 위해 합동 조사반이 구성되었는데도 별다른 원인은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우연히 어떤 학자가 그 고아원과 비슷한 고아원을 발견하여 비교해 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거의 비슷한 환경인데도 한 곳은 유약하고 한 쪽은 건강하게 자라는 원인은 그들의 양육자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수녀들이 사랑으로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의 따뜻한 심장의 고동 소리와 젖가슴의 포근함을 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똑같은 여건임에도 인근 주민들이 돌보는 고아원 아이들이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말끔하고 깨끗한 수녀복이 아니라 젖 냄새나는 엄마품의 따뜻함 때문이었습니다. 심장에서 고동치며 뿜어내는 뜨거운 사랑의 소리를 들어야 인간은 바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웃을 돕고 헌신적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예수없는 희생은 없습니다. 예수의 가슴에서 흘러 나오는 뜨거운 십자가의 젖을 먹지 않고서는 생명이 약동하는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먹어도 먹어도 다함이 없고, 먹을 수록 강한 힘이 솟는 원더우먼 예수의 품에 안기라.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자만이 생명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그리스도

 

아주 오래된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럼에도 생생한 음과 색이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듯한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KBS TV에서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을 번스타인의 지휘로 비엔나 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것을 시청한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운명 교향곡을 지휘하는 번스타인은 천의 얼굴을 가진 마술사였습니다.

베토벤의 작곡 의도를 파악하여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모두가 의미 덩어리였습니다. 표정과 손가락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인생의 희노 애락과 생로 병사의 엄연함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00여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수백명의 청중들이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평화로움을, 때로는 급하고 강한 광풍처럼 밀려오는 아픔과 진한 고통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번스타인은 혼자였으면서도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100여명의 단원들과 그 음악에 동참하고 있는 수백 명의 청중과 TV를 시청하는 사람들까지도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순간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각기 다른 악기로 각기 다른 소리를 내면서도 하나의 음으로 조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위대한 지휘자 예수 그리스도! 그는 정녕 모든 인간을 하나로 만들어 하나의 음을내는 영혼의 지휘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생애와 말씀은 의미와 사랑으로 충만했으며 십자가라는 전무 후무한 위대한 교향곡을 완성하였던 것입니다.

 

 

님

 

만해 한용운 선생의 명시 「님의 침묵」에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은 「님의 침묵」을 썼습니다. 어떤 이는 그를 한국의 타고르라고까지 절찬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한용을 선생의 님은 누구였던가. 어떤 아름다운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사랑하는 조국이요, 그가 앙모한 진리였을 것입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은 크고 높은 님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님을 갖고 사랑합니다. 그 님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고, 그의 생애가 좌우되고 그의 행동이 지배됩니다. 우리가 간절히 추구하는 대상 그것이 우리의 님인 것입니다.

베토벤의 경우 님은 음악이었습니다. 고호의 경우 그림이었고, 로미오의 경우에는 줄리엣이었습니다. 이순신의 경우 나라였고, 성삼문의 경우 임금이었습니다. 돈 쥬앙의 경우 여인이었고, 나폴레옹의 경우 권력이었습니다. 그 님은 돈일 수도 있고, 명성일 수도 있고, 향락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님을 가져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불안과 비극은 님을 잃어버린 것에서 야기되었습니다. 님이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변치않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영원한 행복을 기약하는 님, 그 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스타

 

우리가 우러러 보는 위대한 인물을 영어로 '스타'라고 합니다. 스타는 원래 하늘에 반짝이는 별입니다. 별은 언제나 우리가 쳐다보는 존재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창조적인 천재가 위대한 스타였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도 스타였습니다.

오늘날은 스타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영화 배우나 유행가 가수가 스타의 행세를 하는 바, 이는 대중 사회의 대중 문화가 빚어낸 새로운 스타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세월이 바뀌어도 우리가 높이 우러러 보아야 할 위대한 별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수퍼 스타요, 그분은 역사의 진로를 밝게 비춰주는 인류의 위대한 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20세기 인류 중에서 스타가 누구일까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인도의 성웅 간디라 생각하는 바, 진실과 비폭력의 성자 간디는 매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정하고 이날만은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꼭 이야기를 해야 할 때에는 필답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한주일의 하루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깊은 명상과 골똘한 사색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간디에게서 침묵을 배워야 합니다. 간디의 진실과 비폭력의 정신은 깊은 침쪽의 산물이었던 바, 영원 불변한 인류의 수퍼 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20세기의 스타 중의 스타는 정말 간디가 아닌가 합니다.

 

 

날개

 

오리알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오리알은 부화되어 제각기 형제들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모두 다 비슷한데, 유독 한 마리는 시커멓고 생김새도 딴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리 새끼들은 특별히 다른 오리도 있을거라 생각하면서 서로 어울려 모이도 줍고 헤엄도 쳤습니다. 못생긴 오리 새끼는 어느 날 하늘로부터 자기와 꼭같은 오리가 날아와서 "너는 오리가 아니야. 너는 독수리야. 그러니 날개를 힘껏 저어봐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독수리는 자기는 오리라고 우겨대며 오리들이 노는 곳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기가 너무도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는 갈등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독수리는 그 언젠가 자기에게 말을 건네던 독수리가 하던 말을 기억해냈습니다. "날개를 힘껏 저어봐." 날개를 힘껏 젖는 순간 자기 몸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있는게 아닌가.

비로소 어린 독수리는 자기는 하늘에 속한 자임을 깨닫고 푸르른 창공을 마음껏 휘저으며 활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수리 세계에 합류한 어린 독수리는 새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옛날이 그리워 오리 둥지를 찾아갔으나, 하늘에서 늙은 독수리 말이 들렸습니다. "네가 살던 곳이 그리워서 다시 오리 둥지에 앉아 볼지도 모르지만 그곳에 다시는 살지를 못해. 왜냐하면 너는 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우리 중에서는 하늘을 날면서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독수리들도 많이 있지만 아직도 오리 둥지에서 땅의 것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답답한 독수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날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날개이십니다.

 

 

인(仁)을 가진 이

 

동양 사람들은 다 익은 사람을 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속알이 찬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풍성한 가을, 싱그러운 가을,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한결 여유있게 보입니다. 시골 초가 지붕 넘어서 새빨갛게 잘익은 감알이 그리운 듯 합니다. 높은 하늘을 두고 높은 가지 끝에 터질 듯이 탐스럽게 달린 감알,사람을 비유할 때 그것이 어진 사람이요, 완성된 사람, 된 사람, 개성있는 사람입니다. 단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다 준비된 사람, 사랑이 쏟아질 듯한 사람, 된 사람,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살찌우게 합니다. 남을 위해서 자기를 바치는 살신 성인, 그런 사람이 인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따지는 사람, 무엇이든지 다투는 인격, 무엇이든지 갈라놓고 짓밟고 흔들어 놓고 나 잘살려고 급급해하며, 다른 사람을 우습게 생각하는 낯 두꺼운 인생이 아니라,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조화된 인간을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 높고 넓은 가을은 더욱 예수를 생각나게 합니다. 송두리째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를 잊은 사람, 그 사람이 예수이고 인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맑고 한없이 푸른 풍성한 이때에 시간에 끌려다니지 말고 열두시간을 송두리째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모두를 배부르게 하고 사랑을 쏟아부을 듯한 단물이 가득찬 감알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접점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일수록 첫인상을 좋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상하고 품위있게 보였다해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겉모습에 감춰져 있던 속사람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될 때 기대와는 달리 추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우리는 깊은 실망을 맛보게 됩니다.

삭개오처럼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나이도 들어 주름이 가득하며 하는 일 또한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 같은 집사님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지니기 힘든 능력이 있습니다 외모와 외적 환경들은 보잘것없다해도 주변 사람들은 이분을 존경하며 그분에게서 위로와 힘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외모로 판단했다가도 이내 이분을 따르게 되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번은 3년을 기도해 주던 어떤 이웃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확신과 능력을 갖고 있는 이 삭개오 집사님은 인도한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삭개오 집사님에게는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평온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외적인 조건이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빙고'와 예수

 

'빙고'라 이름하는 사람 그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는 몸으로 형무소에 수감되자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내었습니다.

"나를 잊어 주시오. 4년이란 괴롭고 고생스런 생활을 청산하고 재혼하여 행복하게 살아주오. 절대로 편지를 해서는 안되오."

4년이 흘러 석방이 가까워 오자 빙고는 4년만에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나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우리가 연애 시절에 늘 만나던 큰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메어두시오.노란 손수건이 참나무에 걸려 있으면 집으로 내려갈 것이며, 재혼했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나도 새삶을 찾아 나설 것이오."

연애 시절에 감미로웠던 그 참나무 밑. 그곳이 가까워지자 이 사실을 알게 된 버스 안의승객들까지도 흥분과 초조감에 잠자코 빙고의 얼굴만 살피고 있었습니다. 이제 20마일, 20마일에서 10마일, 10마일에서 2마일, 물을 끼얹은 듯한 버스 안의 정적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마침내 참나무가 있는 곳이 보이자 버스 안은 온통 함성으로 가득찼습니다. 차창 밖에 멀리 보이는 참나무에는 수백개의 노란 손수건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빙고는 눈물을 머금은 채 말없이 조용히 버스를 내렸습니다.

감동적인 이 노란 손수건의 이야기! 이것은 죽었던 예수가 부활하여 배반했던 제자들에 게 나타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라고 하신 말씀과는 족히 비교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찢어 인간을 사랑하신 십자가의 빨간 손수건, 이는 정녕 노란 손수건의 감동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의 사건, 바로 그 감격과 사랑입니다.

 

 

역사 속의 예수

 

예수의 이미지가 역사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책 「역사속의 예수(Jesus Through The Centuries)」가 미국에서 출간되어 관계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자 야로슬라프 페리칸(Jaroslav Pelikan)은 이 책에서 애수가 르네상스 시대에는 '보편적 인간'의 전형으로 '평화와 왕'으로 묘사되었으며 계몽주의시대에는 '상식의 교사'로,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시대에는 '압제로부터의 해방자'로 묘사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일적이 "예수의 생애를 쓰는 일 만큼 쓰는 이의 진정한 자기 의식을 드러내는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각 시대에 따라 창조되는 예수의 이미지는 그 시대의 가치와 감수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특정한 경향을 형성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처럼 예수의 생애를 쓰는 일이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만큼 저자들은 당대의 사회적 세력에 의해 압력을 받아 곤경에 빠지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1863년에 출간된 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는 6만부나 팔렸지만 예수를 믿음과 자유, 덕성과 헌신을 주창한 영혼의 시인, 낭만적 혁명가로 묘사함으로써 급기야 프랑스 대학의 교수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소설 「부활」을 쓴 때문에 레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선고를 받았으며오늘날에도 브라질의 보프 신부는 "오늘날의 카톨릭 교회 제도는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왕국과는 다르다."는 발언을 한 죄로 일년간 침묵을 지키고 근신을 하라는 바티칸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페리칸의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온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이미지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1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세기를 지배했던 지배적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20세기의 예수의 이미지는 '이 세상에 속한 인간'으로서의 이미지입니다.

 

 

어록·시·묘사

 

하느님의 인간적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셨다.

(C.V. 게오르규/ 25시에서 영원의 시간으로)

 

예수는 역사가 우리들에게 제공하는 모든 인격으로서, 가장 생생하기 때문에 가장 비논리 적인 성격이다

(F. 모리아크/ 예수의 생애)

 

예수는 지금은 그의 천국을 사랑하는 자를 많이 갖고 계시지만 십자가를 짊어질 자는 극히 적은 사람뿐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인간의 어떠한 과언도, 어떠한 불충실도, 예수의 복음으로부터 그 속에 함축된 진리를 없앨 수는 없다.

(A. 슈바이처/기독교와 세계의 종교)

 

그리스도는 원래가 시인의 족속에 들어가야 한다. 그의 인간관은 모두가 상상의 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그것으로써 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0.F.0.W. 와일드)

 

매력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는 다만 자기 스스로 아름다운 것을 말할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딴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말을 그에게 걸어 줄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0.F.0.W. 와일드/ 옥중기)

 

나사렛 예수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사물의 물질적 표면 밑으로 뛰어들어가서 정신적 원인을 발견해 내었다.

(M. M. 에디/ 복음의 열쇠를 쥔 과학과 건강)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의무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숱한 남성을 짝사랑한 후에/ 가을 수풀 되어버린 내 머리채/ 흙먼지 날리는 사막 같은 가슴// 그 어디에서 그대는 발견되었는가//내 미처/ 보아도 보지 못하던 눈/ 들어도 듣지 못하던 내 귀/ 그 누가 열어 주어// 아아 한스러운 이 몰골/그대 어찌/ 이제사/내 앞에 뵈였는가// 청년 그리스도/ 나의 자랑이여.

(유안진/ 청년 그리스도께)

 

노래하는 주, 당신의 눈물은 오월의 소나기 같고,당신의 웃음은 흰 바다의 물결. 당신은 아직 웃으려 하지 않는 뼈 속의 골수를 위해 웃어 주셨고, 아직도 바싹 마른 눈을 위해 울어 주셨네, 당신의 음성은 그늘의 사상과 이해의 아버지, 당신의 음성은 저들의 말과 호흡의어머니.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예수여! 예수여! 불행했던 육체의 예수여, 아팠던 현실의 예수여, 우리의 유월은 마치 너와 같다.

(신동문/ 유월)

 

그리스도란 무엇일까/ 픽, 그걸 몰라, 그것은/ 기형 태아야.

(금자광청/ 해저를 헤매는 기독)

 

그리스도란 무엇일까/ 아뭏든 인간의 죄의 그림자야.

(금자광청/ 해저를 헤매는 기독)

 

잠든 우리의 / 영혼을 일깨우고/ 사랑의 잎새로/ 항상 우리를 푸르게 하는/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

(권용태/ 우리가 당신 안에 있듯이)

 

언제 여기에 오셨을까/ 길바닥 여기저기 붉은 피 번져 있네/ 골목마다 피에 젖은 가시관이 널려 있네/ 세종로, 난지도, 법원마당, 대학촌,/ 교도소, 의사당, 교회층계, 달동네/ 그 눈물/ 그 혼자 말씀/ 아파하신 가슴 고동 천둥으로 치네.

(박두진/ 서울에 오신 예수)

 

아아 예수여, 저 올리브의 동산을 상기하시라/ 당신의 산 살에 천한 형리들이 때려박던/ 못 소리를 하늘에서 웃고 듣던 그에게/ 당신은 고지 식하게도 무릎 꿇어 비셨도다.

(C.P. 보들레르/ 성 베드로의 배신)

 

갈릴리의 목수가 다시금/ 사람이 사는 거리로 오고 있습니다. / 모든 나라에, 모든 시대 시대에,/ 그는 '인간'이라는 집을 짓고 있습니다.

(스미드/ 갈릴리의 목수)

 

벌레먹은 저 그리스도, 대포에 맞은 그리스도/ 오그라 붙은 자세의 저 그리스도/ 폭탄의 탐욕에 구멍이 뚫린 저 그리스도/증오에, 공포에 땀 홀리는 저 그리스도/ 자기 자신을 닮은 모습에 열중하는 저 그리스도/ 오오 피조자들이여, 너희들 자신 속에서 보라/ 추잡한 그리스도의 얼굴이 더럽혀지는 것을.

(P. 에마뉘엘/ 聖금요일의 랩소디)

 

그는 왕국을 세우지 않으셨다. 그러나/ 젊은 날부터 왕이셨던 그는 지금도 다스리시느니/진리의 왕국이라 불리는 그 세계를

(린제이/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

 

우리가 섬기는 이는/ 약한 겁장이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이야말로 진리의 병사였다.그 분노는 기성의 악을 향해 열렬히 불타올랐고/ 이 세상 왕들에게 결전을 도전할 때/그 전투의 노래는, 자기 마음을 해방시켜 준/그리스도의 미소에 웃음을 돌리고 있었다.

(클라크/ 전투적 그리스도)

 

오소서, 존귀하신 성령이여/ 임하시어 하늘로부터/ 빛의 화살을 쏘시옵소서/ 오소서, 가난한 자의 아버지/ 오소서, 보수를 주시는분/ 오소서, 세상의 마음을 비추는 분// 선하고 선하신 위로의 손/ 영혼의 어지신 주인/ 즐거운 휴식의 장소/ 번민할 때의 안식처/ 괴로워할 때의 화평/ 비탄할 때의 위로시다.

(랭턴/ 황금성가)

 

당신은 미래입니다/ '영원'의 광야 위에 비치는 위대한 새벽빛입니다. / 때의 '어두운 밤'을 여는 닭소리이십니다/ 맑은 이슬, 아침미사, 아가씨./모르는 사람, 어머니 그리고 죽음입니다// 당신은 여러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정신입니다.

(릴케/ 당신은 미래입니다)

 

당신은/ 오묘한 맛과 뜻으로 오셔서/ 해맑은 물빛으로 녹으시고/내 영혼 속에 방을 방울/영롱한 사랑 심으셨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 오셔서/ 거룩한 음료되어 흘러내리건만/ 당신의 높으신 뜻 감당할 길 없어/ 오호라, 몸부림치는 밤만 쌓여 갑니다.

(임춘남/ 소금 만들던 곳)

 

예수, 조끄만 예수여/ 내가 당신을 높이 치켜 올렸다/ 하지만 만일 갑옷으로 막아 주지 않고 나 그대를 해칠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대 치욕이 지금의 영광과 비겼으리/ 그대는 조롱받는 하나의 태아에 그쳤으리.

(C.P. 보들레르/ 오만의 벌)

 

가장 뚜렷이 엄연한 신/ 예수를 우리는 모독하였다/ 어느/ 고약한 백만장자의/ 식탁에 앉은 식객 모양/ 악마의 졸개 노릇 한답시고.

(C.P. 보들레르/ 자정의 심문)

 

아침에도 저녁에도/ 사랑의 꽃으로/ 피어나시는 주님//‥‥ 사이사이 끼어 앉으시어/ 소근거리시는 사랑의 우리 네 식구/ 주인되시는 손님

(안혜초/ 주인되시는 손님)

 

나를 사랑하느냐는/ 절절한 님의 음성은/ 꽃향내 발고 오는 미풍이어요/ 횐 나리 잎새가벼이 떨며/ 온 밤 적시는 가랑비여요

(엄창섭/ 기도 · N)

 

한 여름 불볕 쏟아내던/ 창천 높은 곳에서/ 강물의 격한 흐름으로/ 풀꽃 적시는 달의 눈물로/ 나리는 은혜의 로고스여.

(엄창섭/ 기도 · 24)

 

물이 왜 물소리를 이루는 줄을/ 바람이 왜 바람의 소리로/ 울려오는 줄을/ 내가 왜 한 잔의 거룩한/ 포도주로/ 살아 있는 떡이어야 하는 줄을/ 알게 해 준 사람

(이병창/ 예수에게)

 

당신은 가시 위에 돋힌/ 진주 이슬이었습니다.

(이성교/ 임의 환상)

 

그리스도는 니그로/ 매맞는 흑인/ 오, 벗겨진 당신의 등어리.//마리아는 그의 어머니/남부의 흑인 어머니/당신의 입은 침묵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 천상의 백인 군주/당신의 사랑을 그에 게.// 입에 피 흘리는/ 가장 성스러운 혼혈아/ 남부의/ 십자가에 매달린/흑인 그리스도.

(휴즈/ 알라마바의 그리스도)

 

망치로/ 밤새도록/ 두드린들// 1mm도 구부러질/ 수 없는 못 하나// 오 그대의 죽음 하나

(김준태/ 예수)

 

그대는 살과 뼈와 피비린 인간의 모습/ 인간됨의 가장 비참한 모습./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 그대는 하늘 그냥 늘 푸른 하늘일 뿐/ 그대 못박힌 손발의 상처에/ 갈수록 아픔이 생생한 살이 돋는 사람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의 힘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우리가 그대의 사랑을 확인할 때/ (그것은 항상 너무 늦었을 때)/ 그대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돌아선 뒷모습.

(김정환 . 「황색예수 ·1 中 · 서시)

 

 

설 교 노 트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자

요17:3

 

서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만이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삶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인성

우리가 예수에 대하여 잘 알려면 그의 인성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또 사람이라 호칭되었습니다. 바울은 딤전2:5에서 디모데에게 우리의 중보자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과 영혼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피곤을 느끼는 본성을 가지셨고(요4:6), 목말라 하셨으며, 육체와 정신적으로 인간이 성장하는 것과 똑같은 성장을 하셨습니다. 또 죽었으며 매장되었고, 그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2.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셨지만 완전한 신이기도 하십니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마1:20).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신약 성서에서는 하나님으로 호칭되기도 하였습니다(요1:1,딛2:13).

 

3. 예수님의 칭호

예수님께는 많은 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로 명명되어졌습니다(요1:41).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비유하셨고(요10:3), 또 "신랑"이라는 칭호로 비유하셨으며(마9:14), "하늘로부터 내린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6:35). 또 자신을 "포도 나무"라고 하셨으며(요15:1),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요8:12). 벧전4:5에는 "심판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묘사되기도 하였습니다(요1:29). 이 밖에도 많은 칭호가 있습니다.

 

4. 예수의 권능과 특권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죄를다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권세가 자신에 게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마28:18). 또한 자신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십니다(요14:6). 그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꿰뚫어 보시는 능력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공경하는 자만이 아들 되신 예수를 높일 수 있습니다(요5:23).

 

5. 예수님이 수행하신 일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들의 심령을 부요하게 해주셨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가장 큰 일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알아야 합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는 신이시며 또한 사람이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도 애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랑되시는 그리스도

사54:5

 

서론

본문은 우리에게 지극히 친밀하고 소중한 한 가지 관계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관계를 넘어서는 밀접하고 소중한 관계를 제시해 줍니다. 그 관계가 바로 남편이라는 말씀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은 원래 유대인들에게 들려 준 말씀이지만 모든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1. 이 관계를 위해 필요한 요건들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행위의 계약으로서의 율법 아래서 율법과 혼인한 상태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고 싶어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성취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옛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이는 우리의 남편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의 날을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광된 임마누엘이 지금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을 인정하면서 그분 자신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본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 웁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믿는 자들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2. 이 관계에 관련되는 여러 의무들

아내된 자는 그 남편을 경외하라고 에베소서 5장 33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된 우리는 남편되신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존경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어떤 형태의 아름다움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깊게 살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듯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분 자신의 피로 믿는 자들을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과 영혼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해야 할 최고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영혼을 추스리고 순결하고 정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3. 이런 관계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의 상태

그런 자들은 율법과 결혼하였습니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육신과 결혼한 상태에 있습니다. 왜 탐욕과 육욕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와 결혼한 상태입니다. 악마는 사람의 생명을 쓰레기처럼 여기며 지독한 고통 속에서 살게 합니다.

 

결론

그리스도는 지혜로우며 거룩하십니다. 그분의 이름과 본질은 바로 사랑이십니다. 그는 전체로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한 존경과 경외심을 잃지 말아야 하겠으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참 좋으신 예수님

요10:11-18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많이 있고 다 좋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만큼 좋지는 못합니다. 다른 좋은 것들은 다 변질되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변하시지 않으십니다.

 

1.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대신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멸망받아야 할 인생이었지만 그 형벌을 면하게 해 주시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만 하여도 너무나 감사한 일인데 하나님 나라를 위업으로 얻게 되었으니 우리 인간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으신 예수님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2. 인격적 사귐과 기도의 응답을 해 주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신의 본질을 받았기 때문에 최초의 인간인 하나님과 사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범죄로 인하여 그 인격적 사귐이 단절되었지만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다시 사귐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귐을 원하십니다. 사귐으로 인한 결과는 과실을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요15:1-3). 그리고 인격적으로 변화가 생깁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면 그 기도에는 꼭 응답을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들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간구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다 시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천국가게 해 주십니다.

어떻게 천국에 가도록 해 주십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가는 길이 되시고 안내자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고 따르면 예수님께서 인도하셔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가 있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어렵겠지만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결론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들을 대신하서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금도 불평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셨습니다. 선한 목자가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고 우리의 간구에 늘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고 그대로 시행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직접 그 길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을 나만 알고 있을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알려서 그들이 참 좋으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좋으신 주님께서 더욱 기뻐하시는 일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자란 무엇인가

히2:6

 

서론

인자(人子)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계시 문학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메시아를 가리켜 사용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인자라는 말이 특히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30회, 마가복음에 14회, 누가복음에 25회, 요한복음에 11회로 총 80회나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양성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셨고, 또 사람의 성품도 소유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사람의 아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자라고 부르면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연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성품을 지니신 증거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셨습니다. 부부가 결합하여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순수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께 굴복하였으며 인간으로서 행하기 어려운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하셨습니다. 또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이며, 그리고 승천하신 사실입니다. 또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들고 따랐다고 하였으며 말씀의 권능과 은혜가 충만하셨습니다.

(2) 그러면 사람의 성품을 지니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공중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신 것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똑같이 여자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욱체를 가지시고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주리시고, 목마르시고, 주무셨고, 근심하시고, 노하시고,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과 욕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또 돌아가셔서 영혼이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함은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을 둘 다 지닌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인간과 같은 생활을 하시고 같은 음식을 먹으시고 감정도 가지셨지만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는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2. 인자의 숨은 뜻

인자라는 말의 뜻은 인간의 대표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찾으신 것은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소리인 것입니다. 또한 멸망받을 인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나을 수가 없으므로 중보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죄값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고난을 받으셔서 그 벌을 없애주셨습니다. 인자라는 말은 인간의 대속자가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라고 하여 인간의 아들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육신의 혈통으로만 나신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시지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대표가 되시며, 중보자가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는 분이 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받으실 영광을 우리 인간에게 돌리시고 그 자신은 오히려 멸시와 고난을 받으신 것을 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 사람에 뛰어나신 분

아5:10

 

서론

본문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신부가 신랑의 우월성을 노래하고 역설하면서 총괄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영적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하여 생각하여 보고 그 영적 교훈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회고도"라고 했습니다.

여기 "희고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희다는 것은 그냥 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눈부시게 희다"라는 뜻입니다. 창백한 것이나 싸늘한 백색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것으로 광채가 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와 성결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신성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광채는 변화산에서 나타났었고(마17:2),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계1:13).

히브리서 7장 26절에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하였습니다.

 

2. "붉어"라고 하였습니다.

"붉다"는 말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는 보혈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붉은 피로써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붉다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 건강한 혈색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간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영원한 멸망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비록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자신은 완전 무죄하신 분이셨습니다. 그가 무죄하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 을 우리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 대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3. "만 사람에 뛰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셔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재림하셔서 만국민을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과연 만인 위에 높이 뛰어나신 승리의 주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기 신랑은 영적 신랑으로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죄하시며 더러움이 없으시며 거룩하신 분으로 성결하십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주신 분으로 우리의 은인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힘입어 그 사랑을 널리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만인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벧전2:7

 

서론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는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예수님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교훈 중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 바가 있습니다(마21:42).

모퉁이의 머릿돌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건축의 기초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집을 건축할 때에 큰 반석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집을 짓습니다. 이렇게 집을 지으면 그 집이 아주 견고하게 건축되는 것입니다. 이 기초 반석을 머릿돌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비가 많이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결코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초를 튼튼히 하지 않으면 아무리 고대 광실이라도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며 생명까지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기초가 되시고 교인들의 신앙의 기초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불변하시며 견고한 기초로서의 조건이 구비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기초로 하여 신앙을 다져나가야 합니다. 모든 교회도 예수님이 기초가 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기초로 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신앙은 금방 무너지는 나약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2. 건축의 표준이 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또한 건축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정방형의 머릿돌을 한편 모퉁이에 놓고 그것을 표준하여 좌로나 우로나 위로 똑바로 벽돌을 쌓는 것입니다. 만약 이 머릿돌이 조금만 비뚤어져도 전체 건물은 균형을 잃고 비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들의 신앙의 표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께 배우며 예수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3. 건축물의 소유자를 표시합니다.

유대인들의 건축을 짓는 풍속을 살펴보면 머릿돌에다가 건물 주인의 이름을 기록하여 그 소유권을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뚜렷하고 확실하게 이름을 새겨 놓았기 때문에 어느 다른 사람이 그 소유를 자기 소유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감히 엿보지도 못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기초가 되시고 소유자가 되십니다. 교회는 어떤 특정인이나 교역자가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또 평신도나 직분 맡은 자가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어떤 개인이 교회를 건축하였을지라도 그것은 결코 개인의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모퉁이 돌은 누구도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돌입니다. 이 돌은 건축의 기초가 되며, 표준이 됩니다. 그리고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려 줍니다. 이 머릿돌이 없다면 견고한 건축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머릿돌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여 튼튼한 신앙을 건축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직무

눅4:16-19

 

서론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맡은 직무가 있습니다. 만약 아무런 일을 맡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도 맡은 직무가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직무는 무엇입니까?

 

1. 예언자의 직분을 가지셨습니다.

예언자라는 말은 미리 되어질 일을 알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가장 큰 역할은 지금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지적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 선포 내용은 항상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신앙적인 책망과 권면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오직 그만 섬기라"고 외칩니다.

둘째로 윤리적 도덕적인 선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구체적인 표현으로 선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역할입니다. 이 같은 구약의 예언자적 사명을 우리 주께서 담당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고 선포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예언자 직분을 보여주신 충분한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십니다.

 

2. 제사장의 직분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언지는 하나님 편에 서서 인간을 향하여 선포하지만 제사장의 역할은 인간들을 대변하여 하나님께 화해의 사역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여러 곳(시110:4, 사53장, 슥6:13)에서 그리스도가 제사장이라는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심을 나타낸 바 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특권을 가졌을 뿐 아니라 백성들의 중재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백성의 대변자로서 제사장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이 인간의 대변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용서를 위하여 일년에 한 번씩 속죄제를 드린 것은 일시적인 제사로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만민을 위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요, 영원한 효력의 제사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피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왕의 직분을 담당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에 의하면 구주는 다윗의 집에서 나오며 위대한 임금으로서 이스라엘과만방을 다스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집에서 구주가 나신다는 말은 인간적으로도 왕의 혈통으로 태어나심이 됩니다. 그는 정의와 평화와 번영을 선포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에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왕의 왕으로 역사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물론 그가 왕으로 계시는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가지시고우주를 통치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결론

그리스도는 교회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언자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왕되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22:42

 

서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 사이에 육체로 거하시고 타락한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하실 때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1. 신성에 대하여

먼저 그리스도의 신성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교회의 반석입니다. 주의 신성에 대한 고백은 하나님의 교회의 단단한 암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고난을 겪으시고 공의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성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 영감을 받은 사도들의 증거를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너무나 열심히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을 선포하였습니다(요1:1). 사도 바울 역시예수께서 하나님의 모습이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모든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골2:9) "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증거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8:58). 그리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라"고 직접 자신의 신성을 증거하셨습니다.

 

2. 인성에 대하여

우리를 만드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1:27).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시고 그 사람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계약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영생을 주시고 순종하지 않을 때는 영원한 죽음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저주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이유는 바로 그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사단이 사람을 상하게 할 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그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저주받은 뱀의 머리를 상처 입히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타락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시고 그의 대속으로 모든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또한 사람의 죄에 대한 보상이 사람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멸망을 막기 위해 영원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율법을 성취하시고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3. 정의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어떤 행위와 관계없이 의롭게 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의 의로움에 의지하여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룬 일 중 어느 하나라도 그리스도의 은혜와 결합되어 있다면 자랑과 같은 행위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결론

자신을 가련하고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저주받은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구원은 커다란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죄와 모든 불결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못박은 그분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요10:27

 

서론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실 때 유대인들은 그를 에워싸고 한 가지 질문을함으로써 예수를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하신 후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선한 목자의 양

그들은 함께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십니다. 양과 염소입니다. 신자들은 언제나 선하고 유익한 것에 비유되고 불신자는 언제나 나쁜 것으로 설명됩니다. 양은 일반적으로 함께 있기를 좋아합니다.

(1) 양은 작은 동물입니다.

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 가장 해를 끼치지 않으며 조용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쉽게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바로 양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이 점에 있어서 양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2) 양은 세상에서 유용한 피조물입니다.

양에게는 인간에게 유익하게 쓰이지 않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3) 양들은 목자에게 주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소유권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택하심을 받아 그의 것이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와 아들 사이에 이루신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주어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라는 값진 희생으로써 자기 양떼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 되었으며 시간 세계 속에서도 실제적인 구속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날에 자기 자신을 그분께 자발적으로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의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특별히 이 양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선한 목자가 자기 양에게 주는 확신

(1) 자기 양을 아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수와 이름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가 위해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아신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린 바 된다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그를 다시 내려 보내사 그를 데려오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에 대하여 특별하게 알고 계시며 또 그들을 특별하게 돌보십니다. 그는 그들의 모든 슬픔과 시련과 시험에 대해 잘 아시며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그는 그들의 내적인 부패를 아십니다.

(2) 그는 자기 양을 지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양을 지키시는 한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즉 그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재하신 다는 사실은 장차의 영광을 확실히 보증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양들을 붙드시므로 아무도 그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의지해야 합니다.

 

결론

위대하신 선한 목자께서 우리의 영혼을 이끄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우리는 방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그리스도 곁에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습

계5:5

 

서론

사도 요한은 앞으로 속히 되어질 일에 대해 환상과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율법책을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탁월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이름에 나타난 탁월함

본문에서 그리스도께 붙여진 명칭들에 '사자'라는 명칭이 있는데 야곱이 그 족속들에 대한 축복과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기의 상징물에서 유대 지파를 사자로 표현한 데 근거하여 붙여진 듯합니다. 또 '어린 양'은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감탄할 만한 영적인 탁월함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탁월한 모습의 조화

인간에게는 없는 탁월함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귀와 겸손으로그리스도는 어느 열왕이나 천사들보다 더욱 존귀하며 누구보다도 스스로 낮아지고 비천해진 겸손을 지니셨습니다. 또 그는 세상의 의로운 심판자이시며 한없이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의 한없는 영광과 겸손의 미덕을 그리스도 외에 어떤 사람에게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위엄은 한이 없지만 반면에 그분은 대단히 놀라운 겸손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께 대하여 놀랍고도 심오한 경외심을 보여주셨고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었고 고통을 받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지니셨고 중보자로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셨지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자긍심을 잃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성품에는 의로움이 있는데 죄를 거절하시고 공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광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나타났습니다.

 

3. 그리스도의 사역에 나타난 그의 탁월한 모습

비천한 출생환경을 보면 겸손을 알 수 있습니다.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존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잉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습은 그가 이 땅에서 사신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유년기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의 외적인 비천함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유순함과 겸손을 보여주신 반면 외식하는 차들을 꾸짖으실 때에는 하나님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 시기까지의 과정에서 당하신 고난과 모욕처럼 더 비참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의 결실이 맺어질 때 그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과 죄인들에 대한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결론

그리스도 안에 그의 탁월한 모습들이 놀랍게 연합되어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구세주로서 그의 충만한 사랑과 전능하심이 그 다양하고 탁월한 모습 가운데 영광스럽게 나타납니다.

 

 

또 그 사람은

사32:1-2

 

서론

2절의 "또 그 사람은‥‥‥‥한 것은 1절에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라"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그 사람은 장차 의로운 왕으로 임할 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분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는 어떠하겠습니까?

 

1. 광풍으로부터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숨결은 폭풍이나 광풍이 몰아쳐 올 때의 모습보다 더 심합니다. 그 진노의 숨결에서 피할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 어느 곳에도 숨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피난처가 있다면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과 불의에 대해 진노하시나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자에게는 그 진노에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슬픔이나 고통을 당할 때에도 피난처를 제공하시며 친히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원수가 위협할 때에도 은밀한 곳에 숨기시고 악인의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는 가장 완전한 피난처는 예수님뿐입니다.

 

2. 유혹으로부터의 은신처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악한 것에서 우리를 숨기실 뿐 아니라 스스로 우리의 은신처가 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가리우셨으며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그의 의로우심은 횐 세마포같고 그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심으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시었습니다(계3:8).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성도들은 온갖 유혹에 시달립니다. 어떤 때는 그 유혹에 미혹되어 죄 중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혹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예수님에게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유혹에서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은신처가 되십니다.

 

3. 생명의 강이십니다.

강물은 기운을 회복시켜 줍니다. 강물은 사막의 생명이 되며, 풍성함이며,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인생의 삭막한 광야의 길에서 신선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신성한 이슬을 부어 주시고, 또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와(요7:37-38) 우리로 하여금 마시우게 하십니다. 이 생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인 것입니다.

 

4. 마른 땅에 큰 바위 그늘입니다.

세상은 광야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광야를 지나가는 나그네인 것입니다. 그러나 뜨거운 햇살이 비추어서 초목은 시들고 땅이 갈라지고 하여도 우리에게는 피할 반석이 있으니 곧 신령한 반석이시니 그 반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10:4). 그 반석 밑에서 우리는 언제나 안식, 혁신, 신선함, 보호함 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고달픈 여행길에서 그 반석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힘과 용기가 생기고 위로가 되며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피곤하여 안식할 곳이 어디입니까? 참으로 인생에서 쉴 곳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가 되십니다.

 

결론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주님께 아뢰기 전에 우리의 고통과 슬픔, 위급함과 암담함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또한 그분은 우리들을 위험에서 피할 길을 주시고 유혹으로부터 피할 길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에게서만 우리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의지하며 바라보는 신앙의 자세가 성도들에게 필요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

요1:12-14

 

서론

본문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심할 것 없는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우리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동정녀 즉 처녀인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인간으로 나셨지만 인간의 유전과 관계없는 출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초자연적 탄생입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부모의 유전을 받아 혈육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로부터 전해져 오는 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히4:15).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지만 죄 없는 인간이셨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성장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키가 자라고 지혜도 자랐습니다. 그리고 신앙도 성숙해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지식과 지혜가 성장을 한 사실을 지적해 주는 구절은 누가복음 2장 46절에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의 감화와 성전에서 받은 가르침과 자신의 성경 공부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통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이 성장하는 데 거쳐야 하는 똑같은 공부와 가르침과 사색 등 인간들이 받는 교육을 받고 성장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셔서 역사 속에 오셔서 한 인간으로 사셨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으로 성장하신 예수에 대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셔서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신 하나님이며 동시에 환전하신 인간이라는 사실이 이해되어져야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의 목적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죄인을 대신할 자는 인간이어야 합니다. 죄인인 인간을 대신하여 구원할 자는 인간 자신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또 인간이라도 죄가 없어야 합니다. 죄 있는 자가 다른 죄인을 대신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죄악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그 사건 자체가 곧 구원의 길이 되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결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곧 고난의 시작인 것입니다. 완전하신 분이 불완전 속에, 영원하신 분이 제한된 시간 속에 오셨다는 그 자체가 고난을 스스로 선택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류에게 최대의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는 다른 모르는 자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요1:1-3

 

서론

예수님을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은 불렀습니다. 물론 요셉은 편의상 있는 아버지이지 참 아버지는 아닙니다. 그 요셉은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또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던 것입니다.

 

1. 사람이신 예수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각 사람이 마음쓰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자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마음을 더 씁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나와 관련이 깊은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는 일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 세상의 사람을 다 생각한다면 아는 사람이란 극소수일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조차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단 한사람은 꼭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관련이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와도 관련되어 있는 아주 특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지금부터 이천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와도 관련이 있음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일이 될 수 있습니까?

 

2.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모든 인류와는 근본이 다른 태초에 계신 분이었으며, 만물이존재하기 전 홀로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또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이 그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도 빠짐없이말씀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이 하나도 지은 것이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만물과 그 속에 포함된 모든 사람의 존재의 근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 존재의 근본과 이유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치신 정도가 아니라 나의 온 전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다 주님과 상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나와 관계가 있는 것 가운데 내가 알지 못하고 지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경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물의 근본이신 예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각 사람의 관계처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사람만은 아닙니다. 그는 모든 존재의 근본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참 인간되심과 참 하나님 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요1:1-5

 

서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 항상 두 가지 기본적인 질문이 따르게 됩니다. 그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언제부터 어떻게 계셨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1. 그리스도는 창조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 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하신 말씀의 형태를 따라 표현한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본질과 모습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 만물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영원하신 분으로 계셨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한 본체이시지만 삼위를 가지신 유일한 신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영원하신 존재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논쟁할 때에 예수님에게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산성과 영원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그 뜻은 이 성, 개념, 정신, 그리고 말씀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유대적 배경, 즉 여호와의 말씀이 라는 어구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말씀은 사실만 말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행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나타나는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헛되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사55:11).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목소리 이상의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이신 능력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계시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분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이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과 공동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주장하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창조의대행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가 궁극적인 창조의 원천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대행가인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는 영원하시며 언제나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역사하시지만 그 역할의 구분은 바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 창조의 역사보다도 먼저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될 때에 하나님과 공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

출12:21-28

 

서론

유월절을 영어로는 "Pass Over" 즉 "뛰어 넘어간다"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심판의 칼이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문에는 들어가지 않고 뛰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집에는 구원이 임하였고 그 피가 없는 집에는 장자가 죽는 심판의 칼이 임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린 양은 무엇을 가리키며 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1. 유월절 어린 양은 그리스도를 예 표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었던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사탄의 권세가 깨어지고 굴복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애굽에 내려셨던 아홉 가지의 재앙은 그 능력이 대단한 것이었음에도 마귀는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를 굴복시키는 힘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튼튼하고 무거운 죄의 사슬로 우리를 묶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능히 그 결박을 풀어버리고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을 위한 양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린 양의 희생의 피 없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없고, 택한 백성도 구원하실 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인간이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시키셔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생의 피 없이는 인간을 사죄할 수도 없고 구원하실 수도 없습니다.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예수님을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한 것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충족시켜 드리는 하나님의 제물입니다. 모든 제물은 하나님을 위하여 바쳐지는 것이며 모든 제사도 여호와를 위하여 드려져야 합니다.

 

3. 유월절 어린 양은 인간을 위한 양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이스라엘 선민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린 양은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바쳐졌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을 위한 제물인 동시에 인간을 위한 구원의 방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하는 동시에 사람도 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하시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들도 위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 땅에 내려 오시게도 하시고 인간을 하나님께로 올라가게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세상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하신 일이 무척 많이 있습니다. 속죄의 죽음과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 일, 사망의 권세를 깨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의 부활을 보장하신 일, 죄값으로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 일 등,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계속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만방에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망의 메시아

마11:1-6

 

서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는 바 그 역사적 배경을 고찰해 보면

(1) 정치적으로 타락하여 의인 세례 요한의 목이 헤로디아의 딸의 춤값으로 잘리우는 시대로 타락되었습니다.

(2) 종교적으로도 타락하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교권 유지를 위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시기하여 배신하게 되었습니다.

(3) 사회적으로도 타락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 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는 무감동 무감각 시대로 전락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인지라, 일반 민중들은 더 이상 살기가 어렵게 되었고 오직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어떤 분이십니까?

 

1. 모든 인생을 구원하여 주시는 메시아입니다.

본문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라고 하였습니다.

(1) 소경을 고쳐 주신 메시아라고 하였습니다.

소경에는 육신의 소경, 글모르는 문맹인 소경, 영적인 소경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눈이 있어도 메시아를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2)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메시아라고 하였습니다.

앉은뱅이도 육신의 앉은뱅이와 영적인 앉은뱅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은혜받으며 걸어가고 있는데 방안에서 신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세상 것을 붙들고 앉아 있는 앉은뱅이도 있습니다.

(3) 문둥이를 고쳐주신 메시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죽지 않고 산 인생의 살이 썩어 들어가고 뼈가 물러 떨어지는 비참한 병입니다. 이 병에 걸리면 부모 처자들과도 본의 아니게 이별을 해야 되는 불쌍한 인생이 됩니다. 역시 육신의 문둥병만 아니라 영적 문둥병도 있어 심령이 죄에 오염돼 부패해 들어가는 불쌍한 인생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들을 병고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입니다.

 

2. 가난한 인생을 구원하여 주시는 메시아입니다.

본문 5절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눅4:18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서글픈 일이냐고 하면 가난하고 배가 고픈 일이고, 무엇이 제일 부끄러운 일이냐고 하면 가난하여 의복없이 헐벗은 일이고, 무엇이 제일 비극적이냐고 하면 가난하여 집없는 사건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가난을 체험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오실 때 왕궁에서 나시지 아니하시고 말의 구유에 탄생하셨고 부유한 집에 태어나시지 아니하시고 가난한 목수집에 태어나셨고 최후에 십자가에서 헐벗고 처형당했으며 묻힐 묘소가 없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빌어서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셨고, 헐벗은 인생들에게 피흘려 세마포 횐 옷을 입혀 주셨으며, 집없는 가난한 인생들에게 하늘나라에 영원한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가난한 인생들을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서 친히 가난해졌다고 하였습니다(고후8:9).

 

3. 범죄한 인생을 구원하여 주시는 메시아입니다.

본문 6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고 마9:13에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그 당시 사회가 죄인시하는

(1) 세리들을 찾아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마태와 삭개오입니다.

(2) 창기를 찾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는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과(요8:1), 남편이다섯이나 되는 사마리아 여인이라고 하였습니다.

(3) 살인 강도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만이 죄인이 아니라 롬3:10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결론

이와 같이 백성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병든 인생들을 치료하시고 가난한 자를 해방하시고죄인들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요청

마11:25-30

 

서론

예수님은 범죄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의 엄숙한 요청에 대해서 기쁨으로 순종하는 이들도 있지만 반면 순종치 않는 자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청은 순종해도 되고 안해도 무방한 요청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반드시 순종하고 실천해야 될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요청에 순종하여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에게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마11:28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 이 초청의 성격을 살펴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범죄한 죄인들을 초청하신 사건이요, 나아가서는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한 초청이라고 하였습니다.

(2) 초청의 대상을 살펴보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나 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사양치 말고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몸에 병들어 고통하는 사람, 돈 없어 가난하여 근심하는 사람, 실패하고 절망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아무나 다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3) 초청의 목적을 살펴보면, 괴로워하는 인생들에게 참 안식을 누리게 하시고 절망한 인생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나아가서는 인생의 궁극적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사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주저하지 말고 나와야 합니다.

 

2.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마16:24에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예수님께로 나온 자들은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 세 가지를 각오하고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1)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를 이기라는 것이요, 자기 극복, 자기 포기의 뜻입니다. 즉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하라는 말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성도들의 본분과 의무를 십자가로 보기도 하고 주님을 위해 당하는 환난과 핍박을 말합니다.

(3)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눅14:33중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행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증인"이 된다는 말씀은 이것이 참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요, 말보다 행동으로 증거하는 사람이요, 순교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이러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권능을 받으면 약한 자가 강해지고 비겁자가 담대해지고, 세속적인 사람이 신령한 사람으로 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여기 예수님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증인이 되라는 의미는

(1) 정치보다 신령한 은사가 선행되어야 하고

(2) 국가보다 개인 중생이 선행되어야 하고

(3) 큰 역사를 이루기보다 복음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는 증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지역을 초월하고 민족을 초월하고 모든 문화권을 초월해서 온 세계 만민이 다같이 받아야 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라고 요청하시고 그후에 따르라고 요청하시며 증인이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요청에 순종함으로 칭찬받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근 신

성 경 활 용

 

1.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한다.

(딤후1:7) 하나님 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오직 능력과 사람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여 네 직무를 다하라

 

2. 왜 근신해야 하는가?

(1)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 다니므로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2)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잠2: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3)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4) 우리가 낮에 속하였음으로

(살전5: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3. 근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1) 권면을 들어야 함

(딛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2)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함

(살전5: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3) 지혜를 통하여

(잠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4) 잠언을 통하여

(잠1:4)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마음의 허리를 동임

(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6) 정신을 차려야 함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7)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 정욕을 버림

(딛2:11-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4. 근신하는 자의 태도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은혜를 바람

(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2)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함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한다

(3) 기도함

(벧전4:7)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4)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임

(살전5:8)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5)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씀

(살전5:8) 참조

(6) 계속 근신할 것

(잠3:21) 내 아들아 완전한 지혜와 근신을 지키고 이것들로 네 눈 앞에서 떠나지 않게 하라

(잠5:2)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

 

5. 근신해야 될 자

(1) 사역자

(딤전3:2-3)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딛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2) 사역자의 아내

(딤전3: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3) 늙은 남자

(딛2: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4) 젊은 남자

(딛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심하게 하되

(5) 젊은 여자

(딛2: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관련원어풀이

1. hM;zIm' 메짐마-

지혜, 신중, 총명, 기인.

(잠1:4, 2:11, 3:21, 5:2)

 

2. nhvfw 네-포

술 취하지 않다, 정신을 차리다, 깨어 있다, 절제하다, 신중하다, 경계하다, 용의주도 하다.

(살전5:6, 8, 딤전4:5, 벧전 1:13)

 

3. swfronismov" 소-프로니스모스

정신을 차리도록 권면함, 자제, 개선, 분별, 자기 훈련, 온건.

(딤후1:7)

 

4. swfronevw 소-프로네오-

(1) 건전한 마음을 가지다, 올바른 마음을 가지다, 제 정신을 가지다.

(고후5:13)

(2) 자제력을 발휘하다, 자신에 대해 적당한 평가를 내리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다, 침착하게 자신을 생각하다.

(롬21:3)

(3) 냉정하게 되다, 자신을 억제하다.

(딛2:6)

 

5. swvfrwn 소-프론

건전한 마음의, 사려깊은, 자신의 욕망이나 충동을 절제하는, 자제하는, 분별력 있는.

(딤전3:2, 딛1:8)

설교예화자료

연못 속의 붕어 두 마리

 

남을 죽이려고 사용했던 칼에 결국은 자기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혼히 있는 일입니다. 이런 소박한 진리를 가르쳐 주는 소박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자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고 있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 두 붕어는 물고 뜯고 했습니다. 그러자 한 마리는 죽어 물 위에 떠오르고, 그 놈의 살은 썩어들어 갔습니다. 그러자 연못의 물도 썩어들어갔습니다. 이긴 줄 알았던 붕어, 영원히 잘 살 줄 알았던 붕어가 썩은 물을 먹게 되자 얼마 후에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모 판단의 결과

 

언젠가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서 새로 채용된 한 접객 주임이 한창 열을 올려 열심히 청소를 시키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 한가운데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깨끗한 고급 벤치에 인상도 그리 안좋고 옷차림도 지저분한 한 늙은 남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접객 주임은 이런 고급 호텔의 분위기가 저런 누추한 사람의 모습 때문에 깨어질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그 사람 뒤로 돌아가서 "여보십시오,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즉시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라고 씌여 진 쪽지를 넘겨주고는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는지 며칠 안되어 그 접객 주임에게 다음과 같은 쪽지가 전달되었습니

다.

"여보시오, 미안하지만 남의 귀에 소문나지 않게 오늘 즉시 이 호텔에서 나가 주십시오,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 백."

쪽지를 받고 깜짝 놀란 이 접객 주임이 그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고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호텔의 경영주 스티너스 씨였습니다. 그는 큰 회사를 12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이 호텔은 그냥 부업으로 삼아 경영하고 있던 굴지의 대재벌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했던 이 접객 주임은 그 호텔에서 해고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누구?

 

한번은 쇼펜하우어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앞에서 오는 어떤 사람과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화를 버럭내면서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앞도 보지 못하고 다니는 거요? "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쇼펜하우어는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글쎄올시다. 나도 방금 그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

나는 누구인가? 나의 친구인가, 아니면 나의 원수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사랑합니다. 친구 이상으로, 그리고 애인 이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의 표본으로 우리는 흔히 희랍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를 듭니다. 미남인 나르키소스는 자기를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호수에 비친 자기의 얼굴에 도취하여침식을 잃고 들여다보다가 마침내는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한번씩은 자기의 외모, 자기의 성질, 자기의 성격 등에 불만을 가져보았고, 자학적인 태도를 가져 보았을 것입니다. 또 모든 위대한 성인들은 다 자기와 싸워 이긴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만족할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자기만의 어떤 요소와 싸워야 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을 거쳐 이기지 않고 위대한 일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따르면서도 배척하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대개 두 개의 자기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올바르게 보고 근신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무소유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 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 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 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입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버리는 사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한번쯤 생각해 볼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이니까.

 

 

어록·시·묘사

 

참고 또 참아라.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참지 않고 경계하지 않으면 작은 일도 크게 벌어진다.

(명심보감)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은 영원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을 깨뜨리면 곧 범죄의 결과로 예속을 면치 못하게 된다.

(J.P. 커런/ 선거권에 관한 연설)

 

현명한 사고보다도 조심스런 행동이 중대하다.

(M.T. 키케로)

 

임박한 일에 무모한 짓이 조심성을 제쳐 놓는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금언집)

 

생각은 항상 전장에 나아간 날같이 하고, 마음은 언제나 다리를 건널 때처럼 지니라.

(명심보감)

 

일천번 재 보고 한번 자르라.

(터어키 격언)

 

짖지 않는 개와 잔잔한 물은 조심하라.

(라틴 격언)

 

항구 안에서도 파선한다.

(쿠인틸리아누스/ 변론술 교정)

 

부단한 주의는 적극적인 정신을 쇠약하게 하고, 우리의 능력을 해치며, 공백을 남긴다.

(C. 처칠/ 호거드에게 보낸 편지)

 

젊은이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노인은 조심으로 가득 차 있다.

(W. 세익스피어/ 정열적인 순례자)

 

마음 깊은 데까지 깨끗하게 하시어/ 속된 생각을 품지 말게 하시고, 또한 음식을 대할 때 근신하게 하여/ 육신에 의한 오만함을 멸하게 하소서.

(작자 미상/ 새벽의 노래)

 

하늘이 높다 하고 발 져겨(발꿈치를 돋우고) 서지 말며/ 땅이 두텁다고 마이 밟지 말을 것이/ 하늘 땅 높고 두터워도 내 조심하리라

(주의식)

 

 

설 교 노 트

 

때를 알고 준비하자

눅22:31-38

 

서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도, 은혜를 받을 때가 있고 구원을 받을 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구원도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고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때를 바로 알고 영적 준비를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성경 본문을 통해서 제자들이 영적으로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어떤 때이고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지 알아봅시다.

 

1. 때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영적 준비를 갖추라는 때는 어떤 때입니까?

(1) 마귀가 발악을 하는 때라고 하였습니다.

눅22:31-34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마귀는 항상 접근하여 시험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는 옛날 아담에게도 시험해 왔고, 예수님에게도 시험을 해 왔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시험해 왔고, 가룟 유다에게도 시험을 해 왔습니다. 말세에는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벧전5:8). 우리는 경성하여 기도하면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때라고 하였습니다.

눅22:37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애수께서 이제는 원수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 때는 가장 불의하고 불법한 때요, 가장 잔인하고 악한 때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때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는 성도들도 미워하고 핍박하는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3) 제자들이 주님을 배반하는 때입니다.

눅22:34에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배반함은 물론이지 마는 주님과 같이 죽기까지 하겠다고 굳게 맹세하였던 제자 베드로까지 주님을 배반하고 배신하는 불신의 때가 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2. 영적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후로 발악을 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하고,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하는 때가 되었으니 영적 준비를 바로 하고 마귀를 어기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 그 내용에 대해 알아봅시다. 분문에는 세 가지를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1) 전대를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눅22:35-36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유일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2) 주머니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주머니는 양식의 주머니로서 그 주머니의 양식을 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양식은 영혼의 양식을 준비하라는 말씀이라면 이 영혼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깊이 읽고, 깨닫고, 이 말씀으로 무장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3) 검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엡5:17에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의 권능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 권능을 소유하려고 하면 겉옷을 팔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겉옷이 무엇입니까? 이는 인간의 욕심과 정욕으로 인해 낡고 더러워진 우리 인간의 윤리와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이 때가 어떤 때인지 알고 영적준비를 하여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신앙으로 무장하고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일을 살피라

갈6:1-5

 

서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교우들에게 권면하기를 "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라(4절)" 하였습니다. 왜 자기를 살펴야 하는지 그 필요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자기를 살피라는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살피라"는 헬라어의 뜻으로는

(1) 자기 자신을 심사하라는 의미입니다. 검사가 피고인을 조사하고 심사하듯이 자기 자신을 예리하게 심사하여 혹 잘못한 일이 없는지, 혹 범죄한 일이 없는지 살피라는 말입니다.

(2)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주석가의 말을 빌리면, 제련소에서 순금을 분석하여 가려 내듯이 나 자신에게서 참과 거짓을, 의와 불의를 가려내고,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라는 의미입니다.

(3) 자기 자신을 시험하라는 의미입니다.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의 신앙 실력을 점검해 보라는 말씀으로써 내 자신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척도가 어느 정도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헌신 봉사의 실력과 척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자기를 살피라고 하였습니까? 본문 1절에서 3절을 보면 세 가지 면에서 자기 자신을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나 자신은 범죄한 일이 없는가를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1절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나 자신의 짐을 바로 지고 가는지를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2절 "·..너희 짐을 서로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 법을 성취하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나 자신을 속이지나 아니했는지를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3절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세 가지를 살피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2. 자기를 살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를 살필 필요성은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자기를 살펴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는 길이 참 사는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1) 나 자신을 살피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인간은 그 지식과 지혜가 많고 철학과 과학의 힘이 스스로 굉장하다고 생각하나 그들은 피조물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티끌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할 때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죄악된 자신을 발전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께 긍휼만을 바라게 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2)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애3:40에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깊이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이 길이 구원의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3) 완전한 인간으로 영생의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살펴 잘못을 가려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살피고, 나 자신에게서 잘 잘못을 가려내고 취사 선택을 바로 하고 온전한 길을 찾아가는 이 길에 영생이 있고 축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반성은 결론적으로 자기 자신을 죄의 영역에서 의의 영역으로 전환시키고, 죽음의 영역으로 생명의 영역으로 전환시키고, 지옥의 영역에서 천국의 영역으로 전환시킨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은 자신의 신앙의 길을 되돌아보며 회개할 것은 회개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일어나 머리를 들라

눅21:10-28

 

서론

현재의 세계는 혼란과 우기가 날마다 증가 해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 인류들은 전쟁의 위협 아래서 신음하고 공포의 시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본문 눅21장은 예수님의 종말론이 기록된 매우 중요한 성경입니다. 본문 20-28절에는 두 가지 종말에 관한 예언이 있습니다. 첫째는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을 받을 종말에 관한 예언이고, 둘째는 전 세계가 멸망을 받을 종말에 관한 예언입니다. 여기에 따라 전 세계 인류들은 불안과 공포의 시대에 직면하여 낙담과 절망의 경지에 빠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기독 신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1.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말씀의 의미는

(1) 잠에서 깨어 나라는 뜻입니다. 이는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2)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이는 시대의 상황을 바로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3)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해이된 신앙생활을 재정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고 "이런 일이 되어지는 것을 보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의 신앙 상태가 해이해지고 나태한 가운데서 깨어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다음 제자들의 신앙 상태가 혼미해진 상태에서 깨어 일어나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이고 제자들의 신앙 상태가 허전해진 가운데서 신앙의 재무장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역사적인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왕상19:5에 하나님께서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깨어 일어나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주경 신학자들은 첫째,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이고 둘째, 불충성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이요 셋째,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어나라는 환경이 바로 이런 환경이 아닙니까?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고로 우리들도 불신앙과 불충성과 실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신앙과 충성과 희망의 산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2. "머리를 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머리를 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1) 근시적인 사람이 되지말고, 원시적인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2) 땅의 것만 보지 말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바울은 골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우리의 삶의 방향과 초점을 천국에다가 두고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점에 대하여 바울은 빌3:14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애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첫째, 유한한 물리적인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향하여 달려갔다는 고백이고 둘째, 비참한 죄악의 세계에서 찬란한 의의 세계를 향하여 달려갔다는 고백이고 셋째, 절망적인 사망의 세계에서 영원한 영생의 세계를 향하여 달려갔다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고백한 사도 바울도 과거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이러한 물리적인 유한한 세계에서, 또는 비 참한 죄악의 세계에서, 또는 절망적인 사망의 세계에서 방황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믿은 후에는 그의 인생관도 새로워졌고 사명관도 새로워졌고 세계관도 새로워져서 삶의 의욕과 용기와 힘을 얻어서 영원한 하늘나라로 전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예수님의 말씀 따라 일어나 머리를 들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세계적으로 종말의 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재에 우리 성도들의 자세는 신앙의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는 자세이어야 합니다. 또한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천국 즉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자아 성찰

시139:23-24

 

서론

시편 기자는 모든 것을 아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고 시험하여 자신에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지 보시고 자기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 자아 성찰의 내용

(1) 자신이 죄의 상태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의 권세와 그 지배 아래 태어나 죄에 팔리운 바 되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죄악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변화되지 못한 모든 죄인은 죄와 사단에 굴복하는 종이며, 그들의 모든 생애는 죄된 삶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거듭난 후 죄가 얼마나 소멸되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처한 영적 상태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지 않나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정욕적인 것을 구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 합니다. 행할 바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과 행동 원리로 태만하게 죄에 이끌린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로 인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저지르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가를 항상 자문해 봐야 합니다.

 

2. 자아 성찰을 해야 하는 이유

(1)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① 양심의 요구:우리들이 지닌 양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헤아리기 위해 최대의 주의를 기울이며 모든 면에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②하나님의 명령 . 하나님께서는 늘 분명하게 요구하십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신4:9, 15, 16, 마26:41, 눅21:35, 36, 엡5:15 참조).

(2)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십니다.

①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그분을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며 의롭고 구별된 삶을 살고,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산다면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②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믿음이 성장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며 믿음과 순종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게 됩니다.

(3) 성도는 죄로 인하여 불행하게 됩니다.

① 죄는 성도에게 해를 끼칩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의 죄를 짓든지 그것은 우리에게 불이익을 줍니다. 죄란 세상 최고의 악덕이므로 우리의 유익을 침해하여 어떤 일이든 최악의 해를 끼칩니다.

② 죄는 하나님을 진노케 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양의 죄를 짓든지 그것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며 우리 영혼을 범죄케 합니다.

③ 죄는 우리의 영혼을 근심케 합니다. 죄는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 버리고 영적 근심과 어두운 슬픔 속에 깊이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길은 고통과 비탄의 길인 것입니다.

(4) 우리는 죄에 쉽게 넘어집니다

① 죄에 약한 인간:우리는 본래 죄에 넘어지기 쉬운 생활을 하며, 아직도 죄의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성도의 죄가 소멸되었다 하나 아직 정욕과 부패성을 가진 죄된 육신의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② 죄의 유혹:우리는 끝없이 죄의 유혹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즉 유혹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고후11:2, 3).

(5) 죄에 대해 감각이 둔해지는 이유

① 어둡고 속이는 죄의 속성 때문입니다.

② 사단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성도를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의 잘못된 습관으로 죄에 대한 지각을 잃기 때문입니다.

④ 우리 자신의 본분을 무시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에 유의하여 어떤 모양의 죄도 범죄치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마음과 생각을 지키라

잠4:20-23

 

서론

세상 자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바꿔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생각을 지켜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1.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범사에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면을 찾아서 살아 나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물을 관찰하며 부정적 평가와 결론을 내버립니다. 이와 같은 삶의 태도가 인생을 낭패케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 가데스바네아에 도달했습니다. 각 지파에서 가장 용맹한 자 12명으로 정탐케 하였고 그들은 40일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보고할 매 이스라엘은 관심과 희망찬 기대를 걸고 그들의 생사에 관한 문제이므로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 중 10명의 보고는 부정적인 말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악평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 기에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하고 우리 자신을 볼 때에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온 백성이 이렇게 부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보고하는 소리를 듣고 난 후에 모두가 기력을 잃고 낙담하여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 그는 우리의 밥이요, 그들은 지도자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은 불신앙의 자세로 부정적으로 그 땅을 보았기 때문에 절망한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거세고 괴로운 길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질병으로 낙담하고 있습니까? 만병의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희망을 잃었습니까? 물질에 자본주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부하게 되는 축복이 있음을 알고 나갑시다.

죽음의 문제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의 역사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됐기 때문입니다.

죽음보다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희망차고 밝은 면을 찾아서 긍정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3. 창조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롬 4:17에 그의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생을 살아가는 중에 어려운 문제 속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을 가졌습니다. 창조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소돔 지방에서 헤어지게 될 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겼습니다. 즉 창조적인 사고방식으로 아브라함이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는 다투지 말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창조적인 사고방식으로 재출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은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고 그분만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긍정적이요, 적극적이며, 창조적입니다. 이는 온전히 그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서 지키실 때에 비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근 심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근심들

(1) 순간적인 근심

(요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2) 큰 근심

(롬9: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3)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7:8-11)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4) 세상 근심

(고후7:10)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5) 악한 왕의 근심

(마14: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6) 훼방으로 인한 근심

(시69:20-21) 훼방이 내 마음에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2. 근심을 가져오게 하는 것들

(1) 죄

(시38:18) 내 죄악을 고하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잠1:27-30) ‥‥너희에 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스10:6)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2) 재앙

(욥2:11-13)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음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3) 우상 숭배

(시16:4) 다른 신에 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4) 고통과 고난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시25:17)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5) 주의 얼굴을 가리우심

(시30: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6) 훼방받음

(시69:20)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7) 궤사한 자

(시119:158)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8) 미련한 아들

(잠10:1)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잠17:21, 25)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아비의 고통이 되느니라

(9) 흉년과 기근

(사16:7) ‥‥길하레셋 건포도 떡을 위하여 그들이 슬퍼하며 심히 근심하리니

(렘14:3)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에 가리우며

(10) 심판과 패망

(사19:10) 애굽의 기둥이 부숴지고 품꾼들이 다 마음에 근심하리라

(애2:5)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겔23:33)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11) 버림당함

(사54:6)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12) 강포로 인한 황무

(겔12:19) ‥‥예루살렘 거민과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이르시기를 그들이 근심하면서 그 식물을 먹으며

(13) 재앙

(미1:12)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14) 재물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15) 눈짓

(잠10:10)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폐망하느니라

(16) 술취함

(잠23:29-35) 참조

(17) 지식

(전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금심을 더하느니라

(18) 많은 일

(눅10:41)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열며하고 근심하나

(19) 먹을 것, 마실 것

(눅12:29)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롬14: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20) 회개치 아니함

(고후12:21)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21) 돈을 사랑함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22) 시험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3. 근심하는 자의 결과

(1) 근심 빛이 있음

(창40:6-7)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

(2) 눈과 혼과 몸이 쇠함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3) 번뇌함

(잠12:25)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사

(4) 편치 못하여 탄식함

(시55:2)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5) 뼈를 마르게 함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을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6) 심령을 상하게 함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7) 눈이 쇠하여짐

(욥17:7)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시6:7)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8) 세상 근심은 사망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함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4. 근심에서 벗어나는 방법

(1) 하나님의 평강이 지킴

(빌4:7)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다

(2) 하나님께 순복함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3) 옳은 일을 생각함

(빌4:8-9)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옳으며‥‥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4) 주를 의뢰함

(시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5) 영적 무기를 사용함

(고후10:4-6)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6) 하나님의 전신 감주를 입음

(엡6:10-18) 참조

(7) 믿음

(마6:25-34) 참조

(마7:7-11) 참조

(마17:20)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8) 성령 안에서 생활함

(갈5:16-26, 롬6:14-23, 롬8:1-13) 참조

(9) 확신을 버리지 않음

(히3:6) ‥‥우리의 소만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10) 염려를 주께 맡김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다

(11) 선한 말을 함

(잠12:25) 근심 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5. 삼위 하나님의 근심

(1) 하나님에서 근심하심

(창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삿10:16)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를 인하여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시95:10)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애1:18)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근심을 볼지어다

(2) 그리스도께서 근심하심

(사53:3-4, 10)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막3: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3) 성령께서 근심하심

(사63:10)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6. 그리스도인의 근심

(1) 기쁨이 되는 근심

(요16:20-21)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 지체를 위한 근심

(빌2:28)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3) 동족을 위한 근심

(롬9: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4) 조국을 위한 근심

(느2:2-3) ‥‥네가 병 이 없거든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5) 세상 사람의 근심과 같지 않음

(살전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6)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함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7) 천국에는 근심이 없음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관련원어풀이

1. hg;a;D] 데아-가-

두려움, 걱정, 놀람.

(잠12:25, 렘49:23)

 

2. hl;j;l]j' 할하-라

수고, 고통.

(겔30:4)

 

3. @/gy: 야곤-

고통, 슬픔.

(창42:38, 시13:3)

 

4. baeK] 케엡-

(1) (몸의) 고통.

(욥2:13, 16:6)

(2) 마음의 슬픔

(사65:14)

 

5. s['K' 카아스

(1) 화나게 함, 슬픔.

(잠17:25,전1:18)

(2) 분노.

(신32:19)

 

6. baok]m' 마크오-브

고통, 수고.

(시38:17, 전1:18)

 

7. tb,X,[' 아체베트

(1) 우상.

(시16:4)

(2) 고통, 괴로움 ;몸에 대해.

(욥9:28)

(3) 마음에 대해.

(시147:3, 잠10:10)

 

8. ryxi 치-르

(1) 우상.

(사45:16)

(2) 형상, 자태.

(시49:15)

(3) 문의 돌쩌귀.

(잠26:14)

(4) 임신한 여자의 고통, 신음.

(삼상4:19, 사13:8)

(5) 전달자.

(잠13:17, 25:13)

 

9. hn:a; 아-나

신음하다, 괴로워하다, 한숨짓다.

(사3:28, 19:8)

 

10. hg;WT 투-가-

슬픔, 비애.

(시119:8, 잠10:1)

 

11. hg:y: 야-가

마음이 슬프다, 아프다, 슬프게 하다, 괴롭히다.

(애3:33)

 

12. lb"a: 아-발-

(1) 슬퍼하다, 애도하다.

(호10:5, 암8:8)

(2) 슬퍼하게 하다, 애도케 하다.

(겔31:15, 애2:8)

(3) 애통자처럼 행동하다, 슬퍼하다.

(창37:34, 삼상15:35)

 

13. va&I 베에-쉬

악하다.

(단6.15)

 

14. ba'D; 다-아브

원래는 "녹이다, 활발치 못하다, 맥이 빠지다"의 의미이다.

(1) 슬픔으로 쇠잔한 눈에 대해.

(시88:10)

(2) 영혼에 대해.

(렘31:25)

(3) 사람 자신에.

(렘31:12)

 

15. hm;h; 하-마

(1) 중얼거리다. 포효하다, 으르렁대다, 신음하다.

(시55:18, 59:7)

(2) 소리를 내다, 웅성거리다, 소란하다.

(왕상18:41, 시46:4)

(3) 움직이다, 동요하다.

(시42:6, 12)

(4) 방황하다, 돌아다니다.

(잠7:11)

 

16. #['z: 자-아프

(1) 화나다, 성나다.

(대하26:19, 잠19:3)

(2) 슬프다, 침울하다, 슬픈.

(창40:6, 7)

 

17. lWj 훌-

(1) 춤추다, 원무하다.

(삿21:21)

(2) 꼬이다, 돌아가다, 퍼부어 지다.

(삼하3:29, 렘23:19)

(3) 자신을 비틀다, 몸부림치다, 고통하다.

(사13:8, 23:4)

(4) 열매를 맺다, 잉태하다.

(사54:1)

(5) 고통을 받다, 괴로워하다.

(애4:4)

 

18. hl;j; 할-라-

원래는 "문지르다"의 뜻이다.

(1) 갈라지다, 미끄럽다, 힘이 마멸되다, 허약하다.

(삿16:7, 사57:10)

(2) 병들다.

(창48:1, 왕상15:23)

(3) 고통당하다.

(잠23:35)

(4) 힘이 소멸되다, 지치다.

(렘12:13)

(5) 아프다, 병들다.

(단8:27)

(6) 병들게 하다, 괴롭히다.

(신29:21)

 

19. ha;K; 카-아

(1) 비난하다, 책망하다, 두려워하다, 연약해 지다, 슬퍼지다, 슬프게 하다, 상심케 하다,괴롭히다.

(겔13:22)

(2) 비난받다, 추방당하다.

(욥30:8)

(3) 낙심되다, 고통받다, 풀이 죽다.

(시109:16, 단16:30)

 

20. !l'K; 칼-람

원래는 "상처를 주다, 해를 입히다"의 뜻이다.

(1) 비난하다, 해하다.

(삼상20:34)

(2) 수치스럽게 대하다, 손상하다.

(삿18:7)

(3) 망신을 주다, 부끄럽게 하다.

(욥11:3)

(4) 손상을 당하다, 상처를 입다.

(삼상25:15)

 

21. $Wq 쿠-츠

(1) 싫증나다, 질시하다.

(레20:23, 민21:5)

(2) 두려워하다.

(출1:12, 민22:3)

(3) 두렵게 하다, 포위하다.

(사7:6)

 

22. [['r: 라-아

(1) 큰 소리를 내다, 깨뜨리다, 박살나다.

(욥34:24)

(2) 악하다, 해롭다, 질투하다, 슬프다.

(신15:9)

(3) 악하게 만들다, 악을 행하다, 악하게 살다.

(창44:5)

 

23. kathvfeia 카테-페이아

수치, 슬픔, 낙담

(약4:9)

 

24. luvph 루페-

(1) 아픔, 고통.

(요16:21, 고후2:1)

(2) 슬픔, 걱정.

(눅22:45, 고후9:7)

(3) 슬픔의 원인, 고민, 고통.

(벧전2:19)

 

25. ojduvnh 오두네-

몸이나 마음의 고통, 슬픔, 번뇌.

(롬9:2, 딤전6:10)

 

26. ajdhmonevw 아데-모네온

약화되거나 풀이 죽다,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차다.

(마26:37, 빌2:26)

 

27. ajporevw 아포레오-

원래는 "방법이 없다"의 뜻이다.

머뭇거리다, 주저하다, 서성거리다, 의심하다, 혼란에 빠지다.

(요13:22, 행25:20)

 

28. lupevw 루페오-

(1) 슬프게 하다, 고통을 주다, 마음을 아프게 하다.

(고후2:2, 5)

(2) 괴롭히다, 성나게 하다.

(엡4:30)

(3) 고통을 느끼다, 마음을 상하다.

(롬14:15)

 

29. merimnavw 메림나오

(1) 근심하다, 염려하다.

(마6:25, 눅12:26)

(2) 돌보다, 관심을 가지다.

(마6:34, 고전7:32)

 

30. metewrivzw 메테오-리조-

원래는 "높이 들어 올리다"의 뜻이다.

마음이 들뜨다, 희망으로 부풀다, 마음을 동요시키다.

(눅12:29)

 

31. ojdunavw 오두나오-

(1) 고통스럽게 하다. 고통을 당하다, 괴로워하다.

(눅16:24)

(2) 자신이 고통하다, 슬퍼하다.

(눅2:48, 행20:38)

 

32. penqevw 펜 데오

(1) 슬퍼하다, 한탄하다.

(고후12:21)

(2) 비탄하다, 애통하다, 근심하다.

(마5:4, 막16:10)

 

33. stenavzw 스테나조-

신음하다, 한숨짓다, 탄식하다.

(막7:34, 롬8:23)

 

34. taravssw 타라쏘

원래는 "뒤흔들다, 움직이다"의 뜻이다.

(요5:4, 7)

 

내적인 동요를 일으키다. 불안케 하다.

(행17:8, 마2:3)

설교예화자료

Examiner

 

세 명의 카톨릭 신부가 신부들에게 적대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당했음이 봄베이의 카톨릭 대 교구에서 발행하는 「Examiners라는 신문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Examiners에 따르면 RSS라 불리는 힌두교 단체가 카톨릭 원주민으로 구성된 마을을 말 그대로 '싹 쓸어 버리기' 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 졌습니다. 동지는 RSS가 카톨릭 원주민의 우물과 음식에 독약을 넣고, 불임을 목적으로 피임약을 '악의적으로'카톨릭 여성들에게 나누어준 사실을 들어 이 단체를 비난했습니다.

「Examiners와 관련을 맺고 있는 세 명의 신부는 종교적 화평을 저해하거나 한 공동체로 하여금 타공동체에 대해 적대감을 갖도록 부추기는 보도를 엄금한 인도법에 저촉, 고발당했습니다. 인도법은 이럴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에더의 일기

 

히틀러의 광기가 몰아넣었던 유대인의 재앙의 불에 대한 가장 충격적이며 호소력 있는 책으로 우리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에더 힐레줌의일기」라는 유사한 책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에더의 일기는 1941년 3월의 두 번째 일요일에 시작되어 1942년 10월 12일까지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것은 1943년 11월 30일 아우슈비츠에서였습니다. 그녀의 당시 나이 27세, 다른 사람과 의사 소통을 한다는 것은 에더에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일기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 엄청난 공포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의미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하더라도, 그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삶이란 의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놀랍게도 에더는 우리에게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승리의 기록을,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고통의 부조리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그러한 힘을 어디서 받았을까. 그 두 해 동안 더욱 친밀해진 하나님으로부터 였습니다. 에더는 명확하게 자신이 증오를 극복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기억하라,우리가 이 세계에 첨가하는 모든 증오의 요소들이 이 세상을 더욱 황량하게 만든다는 점을."

또한 그녀는 인간의 딜레마를 하나님의 탓으로 전가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로부터 비롯한 무분별한 해악에 대해 책임이 없다. "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도피주의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에게 있어 하나님은 존재의 근본이었습니다. 자신의 외부의 상황이 악화될수록, 그녀의 하나님에의 의탁은 더 깊어져갔습니다.

 

 

불만의 겨울

 

김진섭은 그의 수필 「창」에서 "사람은 그 눈이 창이고, 집은 그 창이 눈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S.쯔바이크의 「황혼의 이야기」에 나오는 샛별같이 빛나는 눈과 D.H 로렌스의 「날개 돋힌 뱀」에 나오는 시프라이노의 검고 아름다운 눈이 있는가 하면, 유현종의 소설 「푸른숲이 있는 붉은 강(江)」에 나오는 더글러스 대위의 꼭 우계(兩季)에 접어든 베트남 전장속의 하늘 같은 눈과, J. 스타인벡의 「불만의 겨울」의 여주인공처럼 근심과 걱정에 깃들어 있는 눈도 있습니다.

때로 눈은 썩은 돌 속으로 기괴망칙한 라디움 같은 것을 골라내어 우주의 깊은 뜻을 천명하며 이름을 몰랐던 별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자연에 심취하여 진리와 교훈을 얻기도 합니다.

마음의 창인 눈이 우리들에게 둘 있다고 하여, 그만큼 조건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눈은 인생의 나쁜 부분을 보는 데 쓰여지고, 한 눈은 인생의 좋은 부분을 보는 데 쓰여집니다. 선을 보는 편의 눈을 가리는 나쁜 버릇을 가진 사람은 많지만 악을 보는 편의 눈을 가리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것 보아, 저 멀뚱멀뚱한 눈을. 게다가 거짓말에다, 남을 헐뜯고, 흉보고, 욕하고도 눈물을 흘릴 줄도 모르는 눈을."

아아 우리들 마음의 창이여! 우리들 지난 동안 해 온 일이 무엇이뇨?

 

 

산다는 것

 

어느 대학 교정에서 급히 뛰어가는 학생에게 한 교수가

"왜 그렇게 급히 뛰는가?"고 물었더니

"빨리 가서 공부해야죠 "

"공부해서? "

"학점 얻어 졸업해야죠!"

"졸업해서? "

"취직해야죠!, 돈벌고 결혼도 해야죠!"

"그래서? "

"아들 딸 낳고 잘 살아야죠!"

"그래 가지고? "

"그러다 보면 늙겠지요!"

"그 다음엔? "

"늙으면 죽겠죠!"

"그래 결국 학생은 무엇 때문에 뛰는가 했더니 죽으러 가느라고 뛰고 있군."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날마다 마음을 조이고 뼈가 아프고 이마에 땀이 나도록 뛰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 때문에 일하고 있습니까?

한때 세상엔 영웅이 되어 자기 마을과 이웃, 그리고 발이 미치는 모든 땅을 다 점령하고호령하는 것으로 세상에 태어난 몫을 다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런 영웅이 못되면 그런 영웅을 위해 함께 일하면서 영웅의 영광을 그늘에서라도 누리며 그편이 됐다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하며 살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두 영웅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고 어깨가 으쓱해 지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사람이 짓밟히고 피흘리고 아파했겠습니까?

 

 

어록·시·묘사

 

근심은 고통을 빌려가는 사람들이 지불하는 이자이다.

(G.W. 라이언/ 판결문)

 

가벼운 근심은 말이 많고, 무거운 근심은 말이 적다.

(L.A. 세네카)

 

근심은 우리의 관에다 못 하나를 더 박고, 즐거운 웃음은 못 하나를 빼낸다.

(J. 울커트/ 충고성시)

 

걱정은 생명의 적이다.

(세익스피어/ 12夜)

 

만약 인생이 불행하다면 우리는 그 피로운 짐을 벗어 버리려고 애쓴다. 반대로 만약 인생이 행복하다면 그것을 잃어버릴까 겁을 낸다. 깊이 생각하면 행복이고 불행이고 마음에 부담이 되는 점은 일반이다.

(J. 라 브뤼예르)

 

근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떠한 규칙이나 교훈도 슬픔에서 현자를 구할 수 없고, 아무리 강인해도 슬픔에서 용자를 구할 수 없다.

(G. 크래브/ 도서관)

 

사람은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도 싫증이 나지 않지만,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불과십 리를 걸어도 싫증이 난다. 인생의 행로도 이와 마찬가지다. 늘 명랑하게 유쾌한 마음으로 그대의 인생을 걸어라.

(W. 셰익스피어)

 

근원 벨 칼이 없고 근심 없앨 약이 없다. <*부부간의 금실은 끊을 수 없으며 인간생활에 근심은 언제나 있다는 말>

(한국 속담)

 

마음이 슬픈 사람은 모든 일이 의심스럽고 애인의 애무조차도 수상하게 여겨진다.

(테오프라스토스)

 

대체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심각하게 어지럽힌다.

(J. 케사르/ 갈리아 전기)

 

인간의 우울은 신께 대한 모독이다.

(A. J. 헤셸)

 

기대감에서 즐거움이 더한층 커진다면 걱정거리 역시 그렇다는 것을 기억하라.

(E. 허버드)

 

노인들 눈은 모두 근심으로 밤샘을 하는데, 근심이 있는 곳엔 잠이 없게 마련이다.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는 걱정거리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타격을 주었던가.

(T. 제퍼슨)

 

손뜨개질이나 되는 것처럼 여자들은 걱정 거리를 안고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E.A.G. 글래스고/ 보호된 생활)

 

고뇌 속에서 살아라. 그리고 신앙으로 살아 남아라

(A. J. 혜셀)

 

솔잎이 새파라니까 오뉴월만 여긴다. <* 근심이 쌓이고 우환이 겹쳤는데 그것을 모르고 어떤 작은 일 하나만 되어 가는 걸 보고 좋아한다는 뜻>

(한국 속담)

 

나에겐 걱정거리도 일생 동안에 많았다. 그러나 최악의 것들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J.A. 가필드/ 어느 대화 속에서)

 

사람들은 작은 걱정을 중요시하고 과장하기 때문에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조바심하고 속을 태운다. 귀중한 인생의 시간을 사소한 걱정으로 소모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미상)

 

이미 비상한 즐거움을 취했거든 모름지기 예측할 수 없는 근심에 대비하라.

(명심보감)

 

애착과 고난으로 하여 탐욕이 새상에 뿌리박으면, 칡덩굴이 죽죽 뻗어 나가듯 근심이 밤낮으로 자라난다.

(법구경)

 

이 세상에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근심이란 마귀다! 아무렇지도 않은 날에도 그 마귀는 사람을 괴롭게 하고 혼란 속에 몰아 넣는다. 그러나 그 근심이란 마귀의 힘도 엄숙히 맺어진 마음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밤은 점점 깊어진 것 같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밝은 빛이 빛난다. 내가 생각한 일은 해치우리라. 하인들이여! 그대의 주인의 말을 듣고 이부자리를 박차며 일어나라! 손에 연장을 쥐라! 엄숙한 마음 하나는 천 명의 하인을 가진 주인과 같은 것이다.

(J.W. 괴테/ 파우스트)

 

한 파운드의 걱정이 한 줌의 빛을 못갚는다.

(T. 데커/ 제화공의 휴일)

 

나의 걱정거리는 태양 아래 나의 그림자와 같다. 내가 도망가면 쫓아오고, 내가 쫓아가면도망간다.

(엘리자베드 1세/ 알렌콘의 새 출발)

 

안심하면서 먹는 한 조각의 빵이 근심하면서 같이 먹는 잔치보다 낫다.

(아이소푸스/ 도시의 쥐와 시골의 쥐)

 

깊은 뜻이 없을 때에는 근심도 없고, 큰 일을 생각하고 보면 근심도 많다.

(이광수/ 마의 태자)

 

걱정이 반찬이면 상발이 무너진다. <*쓸데없이 걱정만 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

(한국 속담)

 

수심이 그득한 마음은 넘치려는 술잔처럼 받쳐 있기가 힘이 든다.

(영국 속담)

 

그대는 그 무슨 근심을/ 얼굴로 말하기에 겁이 날까/ 그 무슨 근심이 그렇게/ 부끄러울까 싫을까/ 누구를 만나야 하는 일이거나/ 때로는 내일의/ 자기 자신을 기다려 보아야 잠시란들 편하기 바랄 것가/ 이 시름 어데서 온가 알길 없어 하노라.

(이씨/ 시름)

 

싸움에서는 매처럼 날아올라/ 적을 무찌르니 살보다 빠르다. / 황제께서는 우두커니 바라보시지만/ 세상의 의논은 새로운 근심.

(두보/北征)

 

술아 너는 어이 달고도 쓰돗더니/ 먹으면 취하고 취하면 즐겁고야./ 인간의 번우한 시름을 다 풀어 볼까 하노라.

(미상)

 

술을 취케 먹고 뚜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희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하리라.

(정태화)

 

쓸쓸해 하지도 슬퍼하지도 말고/ 헤어져 서로 근심으로 살지도 말고/ 이 제는/ 모든 것 떨쳐내고/ 시린 물 속에서 맑은 향기로 사는/ 한떨기 수련으로 살아가세요.

(박용주/ 어머니)

 

시름의 기운은 장마비 되고

(매요신/ 團家語)

 

온갖것 잊어두자/ 너와 함께 노닐고져/ 가슴은 덩그렁 / 천만 근심 허공에 떠/ 내가 어디 있는지/ 나를 몰라 더듬다.

(송지영/ 강가에서)

 

아가씨 붉은 소매 하고 많은 눈물들은/ 인파(姻波)지는 해에 고금의 시름일세

(임제)

 

어둠은 아직도 창밖을 지키고/ 내 마음은 무거운 근심에 짓눌려/ 깊이 모를 연못 속에서 자맥질한다.

(심훈/ 밤)

 

양심은/오히려 떨고/비양심은/되려 걱정 않는 세상

(윤종혁/ 雲天)

 

하느님 감사합니다. / 나에게 이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하늘은 넓고 갈 길은 막막한 데/ 이토록 자잘한 근심들이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아침을 시작하며/ 무엇으로 밤을/ 하는 일에도 그렇게 자신이 없을까/‥‥ 아 말없이/ 자기를 버리고 있는 여인이여/ 또 하나 새로운 관심이여.

(박의상/ 화장하는 여인에게)

 

나이는 백 년을 못다 살면서/ 늘 천 세의 근심을 가슴에 품는다.

(미상)

 

생각지 말지어다 백 가지 시름/ 걱정하면 마음만 어두워지리.

(시경)

 

그대로 괴로운 숨지고 이어 가랴 하니/ 좁은 가슴 안에 나날이 돋는 시름/ 회도는 실꾸리같이 감기기만 하여라.// 아아 슬프단 말 차라리 말을 마라/ 물도 아니고 돌도 또한 아닌 몸이/ 웃음을 잊어버리고 눈물마저 모르겠다. // 쌀쌀한 되바람이 이따금 불어온다/실낱만치도 볕은 아니 비쳐 든다/ 찬 구들 외로이 앉아 못내 초조하노라.

(이병기/ 시름)

 

근심도 전염인 것이어서/ 그 때 앓던 병 내게로 오고/ 내가 앓던 병 다시 그대에게로 가

(권대웅/ 제비꽃)

 

군청및 바다는 신의 직물./올을 짜고 푸는 일에 익숙한 손의 즐거움과 근심이 함께 어리어‥‥‥

(이수익/ 바다)

 

봄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렸어요/봄바람이 내 시름 불어가 줄까 하고/ 그러나 봄날은 길기만 해서, 나의 한은 더더우기 끝간 데 모릅니다.

(覆至/ 春思)

 

무심한 언덕/ 감람나무 사이로 어둠 내리고/지친 발걸음에 와 닿는/ 밤 이슬/ 하루의 피곤/ 그날로 족한 근심/ 그리고 제자들의 말없음

(서덕석/ 겟세마네의 밤)

 

마음은 근심으로 얽혀져서/ 빨지 않은 옷과도 같구나.

(시경)

 

그대 시름 포개보면/ 묵시의 탑이 되리

(강호인/ 석장생)

 

이미 가혹한 십자가 위에/ 사람의 아들의 불타는 근심을 외치고/주께서 목숨을 버리고 그 유해는 지금 무덤의 바위 문 속에-

(나가세 기요코/ 밤은 이제 새려 한다 - 매장과 부활 -)

 

시름은 시름 따라 떠나지 아니하니/ 이 마음 마감할 수 있을까요/ 근심이야말로 분명한 행선지/ 삶의 공허 앞에 비석처럼 세워진/확실하고도 고마운 하나씩의 이 정표// 세상은 광막하고 시대는 혼란스러운데/ 나에겐 자잘한 근심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취직걱정 건강걱정 자식걱정에 반찬걱정/ 주택부금 상호부금 월부책값에 세금걱정/ 연탄가스 주의보와 동파된 하수구걱정,/시어머님 생활비와 친정아버지 병원비와/ 이 조그만 근심들이 있어서// 난 우주가 막막하게 팅빈 낯선 것이 아니고/ 쌀독처럼 친숙한 것이며,/ 밑도 끝도 없는 적막강산이 아니라/한없이 체온으로 정든/ 내 헌옷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근심이야말로 정다운 여인숙/ 그것조차 없다면 삶은 정말 매달릴 것이 없는/백골산의 단애와 같아요.// 작고 미소한 근심들이여/ 너는 위대합니다. / 너야말로 나를 삶에 꽉 매달리게 하는/ 지푸라기이며,/ 허무의 양손이 우리 상처의 아가리를/ 끔찍하고도 냉혹하게/ 옆으로 찢어벌려/ 그 속으로 죽음 같은 극약을 부어 넣으려고 할 때/ 넌 작지만 완강한 손끝으로/ 상처의 벌어진 틈을 재빨리 오무려 주는/ 전천후의 자동단추와도 같습니다. // 그리하여 우린 잽싸게 그 깊은 허무속의/ 막막한 무서움을 잊어버리고/ 일심으로 근심으로 집착하면서/ 다시 살 길을 재촉합니다. //25시도 지난 지금/ 우리는 갈 곳도 없는데/하느님 감사합니다. /나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을 주셔서,/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시간을 잊어버리도록/ 더 많고 자잘한 근심들을 주소서,// 길 없는 길을 가기 위하여/ 문 없는 문을 열기 위하여

(김승희/ 근심을 주신 하느님께)

 

두통과 근심 속에서/ 생명은 부지 중에 새어 나간다.

(오든/ 어느날 저녁 외출하여)

 

 

설 교 노 트

 

모세의 탄식

 

신31:24-29

 

1서 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부터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사십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과 같이 생사고락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세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지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를 위하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여호와를 거역할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 27절에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모세가 그들을 지도하여 함께 있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 역하고 하나님께 불순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은 후에 그들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볼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이 죽은 후에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아니할 것 같아서 근심하여 탄식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떠나 악을 행할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 29절에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는 짓을 보니 모세가 죽고 나면 틀림없이 타락할 것을 근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오히려 악을 행하게 되니까 모세는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모가 살아계실 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부모가 죽으면 그 자식은 더욱 타락하여 악을 행할 것이니 그와 같은 자식을 놓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 때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말세에 재앙을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을 보니 그들이 틀림없이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지 않고 항상 불평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는 행위를 보니 그들이 당할 재앙을 보는 것 같이 확실하였기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

모세가 근심하여 탄식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근심을 하거나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래를 위하여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거역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며 악을 행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세에 재앙을 당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이 임종하게 될 때에 자신의 뒤를 이을 솔로몬에게 말하기를 "너는 대장부가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생활을 하여 하나님께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행27:22

 

서론

이 세상은 안심할 수 없는 불안하고 유동적인 세상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마음의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탄식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인 신자에게는 그러한 근심 속에서도 안심하라는 격려가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떠한 상태에서 안심하라고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불안하던 항해

바울 일행이 지중해상을 항해하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배에 있는 짐과 기구까지 다 바다에 던지고 몇 일간이나 해와 별을 보지 못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참으로 불안하고 무서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여러 날을 굶었기 때문에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항해 중에 조난당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러한 두려움과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짐작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조난을 당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안심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배가 이렇게 조난을 당하자 바울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22절에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확신에 찬 선포를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였기 때문에 용기를 얻어서 여러 사람들 가운데 서서 담대하게 "안심하라"는 선포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 중에 있을 때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주님은 위로해 주십니다.

 

3. "안심하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는 "안심하라"는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하나님께 부름받고 송구해 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삿6:23)"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에 보면 믿음으로 병고침을 바라고 온 중풍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했습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물위로 걸어오시던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유령인 줄 알고 놀라니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 하셨습니다.

 

결론

사람들은 많은 근심과 염려를 안고 살고 있습니다. 근심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안심하라고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죽음에 직면해 있을 때, 어려운 가운데 처하여 있을 때,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불안 가운데서 떨고 있을 때, 근심과 걱정 중에 있을 때 안심하라고 우리를 격려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조난을 당하였어도 좌절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으며 "안심하라 "고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전해 준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까지도 다 주께 맡기고 안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벧전5:7

 

서론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염려를 맡겨 버리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으며 싸서 품에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해결할 것과 도저히 해결하지 못할 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빨리 주께 맡겨야 합니다. 마땅히 맡길 것을 맡기지 않으면 공연히 헛수고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 인생은 염려를 걸머졌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염려는 복음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그 염려를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염려는 아무리 많이 하여도 무엇을 바꾸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염려를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 "고 하였으니 문제는 간단하고도 쉽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2. 맡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하며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염려를 해결하는 일은 우리의 지혜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스스로 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염려는 주님께 모두 맡기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믿음입니다.

"맡긴다"라는 말은 위임한다는 뜻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괴로운 짐이라도 해결해 줄 줄 믿고 맡기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근심과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할 것입니다.

 

3. 주께서 권고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에 모든 염려를 맡겨도 되는 이유가 본문 7절 하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권고'라는 말은 흥미와 사랑을 가지고 조심성있게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자는 주님께서 돌보아 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염려를 주께 믿고 맡길 줄 아는 사람에게는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께 모든 염려를 다 맡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께서 맡으시고 우리를 돌보아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맡겨야 하겠습니다.

 

결론

주님께서는 스스로 자원하셔서 염려를 맡기라고 하십니다. 싫어하시는 일을 맡긴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만 주께서 명령하시니 우리는 그저 순종하고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인생들의 괴로운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자진하셔서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내놓는 일을 하라고 하셔도 거기에 순종해야 하는데 우리의 어려운 걱정 거리, 염려, 근심을 다 주께 맡기라고 하시니 우리는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근심

고후7:9-11

 

서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세상의 염려나 근심을 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의 근심은 자기 자신에게도 손해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은 세상적인 근심도 있고, 핍박으로 오는 근심도 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은 어떤 것입니까?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이루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간절합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에 대하여 간절하게 합니다. 이런 근심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근심은 회개하는 행위를 기뻐하십니다.

본문 9절에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에 이르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죄 회개는 큰 근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다원은 죄에 대한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셨다고 하였습니다. 시55:6에는 근심으로 편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의 근심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고백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근심을 합시다. 그러면 내 영혼이나 내 모든 전부가 유익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깊이 근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3.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근심 중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근심은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근심을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의 위로는 참 위로가 되십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위로도 주님의 위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근심은 이 세상의 관심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근심을 해야합니다. 그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이런 근심을 할 때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바로 살기를 원하는 근심과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근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바르게 살기로 결심하고 전도할 것을 결심하며 근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고 회개하는 행위를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근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

출13:17-22

 

서론

많은 사람들이 근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 적어서입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권세있고 나은 자들이 두려워서입니다. 그리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같이 계시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염려하고 좌절하며 낙심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을 앞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1.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인간들은 그저 눈에 보이기에 편안해 보이면 사방도 둘러보지 않고 무작정 그 길로 가려고 합니다. 그 길을 가다가 어려운 지경에 빠지는 것도 생각해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지경에서 벗어나게 인도하십니다. 사람이 보기에 편리한 길은 재앙이 따르는 길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길은 블레셋과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또 길을 인도하심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교육시키고자 하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홍해 앞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육지와 같이 건너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이셨습니다.

 

2. 장막 칠 곳을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인 것입니다. 장막은 안식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가정은 행복합니다. 삭막한 광야길에도 하나님께서 장막칠 수 있는 곳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장막에 머물러 쉬게 해 주시니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백성들만 장막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같이 계셨습니다.

사람이 안식할 곳이 없으면 많은 근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어디에 장막을 치라고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앞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백성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같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뜨거운 태양을 구름기둥으로 가려서 보호하셨고 밤에는 칠흙같이 어두운 곳을 불기둥으로 환하게 밝혀주셔서 보호하셨습니다.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권고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5:7).

사람이 아무리 염려하고 근심하여도 아무것도 크게 하거나 작게 할 수 없으며, 회개도 검게도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없에는 길은 우리의 모든 길을 여호와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서 행하시니 염려하지 말고 모두를 다 주께 맡기면 됩니다.

금 식

성 경 활 용

1. 금식을 명한 성경의 예

(1) 속죄일어 금식할 것을 명함

(민29:7)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2) 금식을 선포

(대하20: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낮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은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3) 금식을 명함

(욜1: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2. 성경에 나타난 금식 종류

(1) 부분적인 금식

(단10:3)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2) 식음을 전폐하는 금식

(스10:6) 저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에4:16)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3) 물만 마시고 음식을 취하지 않는 금식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성도가 금식하는 시기

(1) 위기가 닥쳤을 때

(삼하12: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2) 국가의 지도자를 잃었을 때

(삼하1:12)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을 인하여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느니라

(3) 민족적 회개의 때

(욘3: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4) 친구가 병들었을 때

(시35:13)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네 영혼을 괴롭게하였더니

(5)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느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며

(6) 금식하는 절기를 맞을 때

(행27: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7) 성령께서 시키실 때

(행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8) 주를 섬길 때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 여

(9) 사람이 죽었을 때

(삼상31:13)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4. 금식하는 기간

(1) 수일 동안

(느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2) 밤낮 삼일 동안

(에4:16)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3) 40일 동안

(마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신지라

(4) 이레에 두 번씩

(눅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5. 금식의 목적

(1) 죄의 회개

(삼상7: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2) 기도의 상달

(사58:4)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3) 여호와께 돌아 오려고

(욜2:12)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4) 특별한 능력을 얻기 위해서

(마17:21)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니라

 

6. 금식할 때 함께 할 일들

(1) 기도

(스8: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단9: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눅2:37)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나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2) 회개

(삼상7:6)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

(렘36:6)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 있는 백성의 귀에 낭독하고

(4) 울며 애통함

(에4:3)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감식하며 곡읍하고 부르짖고

(욜2:12)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며

 

7. 금식할 때 피해야 할 일

(1) 오락

(사58:3)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2) 싸움

(사58:4)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3) 금식함을 나타냄

(마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4) 자랑거리로 하지 않음

(눅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8. 진정한 금식

(1) 애통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감

(욜2:12)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2)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감

(욜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3)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어야 함

(사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4) 이웃을 구제함

(사58:7)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5) 은밀한 중에 계시는 아버지께 보여야 함

(마6:18)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9. 정기적으로 금식한 자들

(1) 요한의 제자들

(마9:14)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2) 안나

(눅2:37) 과부된 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3) 바리새인들

(막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4) 바울

(고후11:27)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 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관련원어풀이

1. !/x 촘-

단식, 금식.

(삼하12:16, 애9:31)

 

2. !Wx 춤-

단식하다, 절식하다.

(삿20:26, 슥7:5)

 

3. tw:f] 테웨트

금식 .

(단6:18)

 

4. nhsteiva 네-스테이아

(1) 금식, 음식의 결핍.

(고후6:5, 11:27)

(2) 단식, 종교적인 금식.

(마17:21, 눅2:37)

(3) 유대인의 연례적인 공공 금식.

(행27:9)

 

5. nhsteuvw 네-스튜오-

금식하다, 단식하다.

(마4:2, 6:16)

설교예화자료

나라를 위한 금식 기도

 

모세 오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매해 지키는 연례 행사로서 대속죄일이 있는데(레16:19-34, 민29:7-11), 이 날은 대제사장 이하 모든 백성이 흰 옷 입고 나와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며 금식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자백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금식하였는데, 이는 속죄자의 기본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 금식은 바벨론 포로 시대와 이후의 귀환 시대에도 계속 이어져서 1년에 네 차례씩 즉 4월, 5월, 7월, 10월에 금식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슥8:19).

뭐니뭐니 해도 공적 금식 기도의 대표적인 예로는 미스바 대성회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블레셋 대군의 공격으로부터 풍전 등화의 위기에 몰린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지도로 미스바에서 금식하며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과 어려움이 다가올 때마다 하나님께 매어달리며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국가적인 존폐 위기 속에서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금식하였고(에3:7,4:16), 니느웨 성읍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요나에게서 듣자마자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과 우양의 새끼까지도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통회 자복하며 금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금식 기도

 

기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개인 기도,공중 기도, 중보 기도, 명상 기도, 금식 기도, 특별히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들 당했을 때 금식 기도를 합니다. 그만큼 금식 기도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어떤 중대한 삶의 결단과 연관 가운데서 시작됩니다.

옛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 기도를 하나의 간판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부러 머리를 흐뜨러뜨리고 얼굴 모습을 슬프게 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금식을 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경건과 의를 내세우려고 했던 종교적 위선이 금식 기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금식 기도는 결코 신비한 능력을 창출해내는 요술 방망이가 아닙니다. 금식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새로운 각오와 삶을 살고자 할 때 표현하는 삶의 구체적인 결의의 표현입니다.

금식 기도는 경건의 훈련과 영성 훈련에 크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겸허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에 따라 기도해야 합니다.

 

 

금식(禁食)

 

국어 사전에 의하면 금식이란 "일정한 계율을 지키거나, 흑은 어떠한 결심을 보이기 위하여 얼마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굳이 어려운 말을 쓰지 않더라도 금식이란 한마디로 "신앙적 동기에서 나온 음식의 절제"임을 우리는 압니다. 또한 음식의 절제인 이 금식은 음식으로 말미암아 범죄한 첫사람 아담의 실패를 더욱 기억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상함도, 해함도 없는 에덴에 살게 하시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에게 있어서 금식이었고 아담은 이 금식에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금식 기도는 우리의 죄와 질병, 그리고 삶의 모든 저주에서 자유릅게 하는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일상적인 기도가 폭탄과 같다면 금식 기도는 수만 배의 위력을 가진 핵폭탄과도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기회인 금식 기도의 필요성을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금식을 '나와는 상관없는' 피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나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아무런 문제 거리가 업으니 금식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아무 문제도 없다. "는 생각 자체가 바로 문제입니다. 이런 생각은 교만한 마음이나 자기 통찰력의 부족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요한 새벽에 일어난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그리고 자신과 사회와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기도 제목을 찾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표를 내놔야 할 것입니다.

 

 

금식 기도의 위력

 

미국에서는 70년대 초부터 70여 개의 부인 기도 단체가 미국을 위해 기도하는 운동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5년 전에는 30만 명이 워싱턴에 모여 금식 기도를 했습니다. 휠필드 상원 의원은 미 의회에 회개 금식 기도의 날을 선포하는 입법을 상정했습니다. 미국사의 위기는 기도로 극복해 왔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도 금식 회개 기도의 날을 선포한 일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의 기도, 링컨의 기도, 미합중국 헌법회의 때 벤자민 프랭클린의 기도, 그리고 1 · 2차 세계 대전의 미국 신도들의 기도가 역사의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어록·시·묘사

 

음식을 절제하라. 그러면 당신은 건강하게 될 것이다.

(B. 프랭클린)

 

절제가란 욕망에 중용을 찾은 사람을 일컫는다.

(플라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는 자는 자유로울 수 없다.

(피타고라스)

 

절제와 근로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실된 두 사람의 의사이다.

(J. 루소)

 

자신을 정복한 자는 최대의 정복자이다.

(영국 속담)

 

남의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총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남을 설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사람은 그 이상으로 강한 사람이다.

(노자)

 

혓바닥에는 절제를, 식욕에는 혁대를.

(J. 레이/ 영국 격언집)

 

바위 방석 위에서/ 마흔 날 마흔 밤/ 먹지 않아/ 예수는 굶주렸다/ 조약돌 하나하나는/눈에 빵처럼 보이고/ 창자를 도려내는 듯하다/「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이 빵이 되도록 명하여 보아라」/ 목소리는/ 음혹의 굴레가 되어/ 목에 죄어진다.

(시마자키 미쯔마사/ 광야의 유혹)

 

우리는 언제나 우선 광야 앞에 서게 된다/목마름이라는, 굶주림이라는, 절망이라는 광야/ 그러나 절망이 라는 조망의 그 무한성/ 결국에는 조망의 무한을 견디지 못하여/ 우리는 그것을 막아줄 것을 구한다/ 빵이라든가 힘이라든가 온세계 라고 하는 것 모두는/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공포를 잠시 동안 잊게 해 주는 벽/ 하지만, 우리의 약함이 구하는 그 벽은 신기루의 벽으로서/그 벽 앞에 설 때 우리는 환상의 미로에서 길을 잃고 만다/ "사단아 물러가라"하는 명령으로 벽의 마술을 깨뜨리는 강한 자만이/광야를 건너 진실된 거리에 들어 갈 수 있으리라/ 거리 변두리의 해골이라 일컬어지는 언덕 위에 있는/ 피 흘리는 나무아래 도달할 수 있으리라.

(다카하시 무쯔오/ 광야의 시험)

 

돌짝왕에 앉아 음식을 끊고/ 들짐승과 함께 기거하는 예수/ 낮에는 뜨거운 햇볕에 더운 바람이 불고/ 밤에는 답답스럽기만 한 별의 하늘/ 시초 그 자체인 듯한 느린 시간의 흐름/굶주림은 환상의 빵을 먹게 만들고/ 목마름은 지평선에 물이 흐르게 한다. //물줄기와 동떨어진 이 고지에서는 /풀잎이 가시로 화하여 열매 하나 맺지 않는다/ 익살스럽게도 주위의 돌은 색깔도 모양도 빵과 같고/ "빵이 되게 하여 시장함을 면하라‥‥ 하나님의 아들로 쉬운 일이 아닌가" 악마는 속삭인다/ "가난한 사람과 돌멩이는 끝이 없다‥‥ 그러니 무진장한 식량원"이라고 점차 큰 소리// 하나님의 힘을 남용하면/ 사랑도 천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타산이 되고/ 신앙조차 교환권이 되고 만다/ 육신은 멸망하고 말게 마련인데/ 육체의 한계를 넘은 드높은 것을 목표함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가와다 야스코/ 황야의 시험)

 

주여 때로는 나로 하여금 굶게 하십시오/ 배부르면 둔하고 만사가 근심스럽게 마련입니다.

(G. 팔케/ 기도)

 

이제 나는 죽고/ 누가 밤새도록 나를 기린다/ 단식하고 기도하라 별에 의한/ 나의 탄생이 바람속에 익는다.

(이승훈/ 기도)

 

나는 그대의 소금으로 만든/ 김치를 먹고 산다// 나는 그대의 소금을 넣고 끊인/ 국밥을먹고 산다//나는 그대의 소금으로 만든/주먹밥을 들고 길을 떠난다// 조국의 운명을 만들다가/ 끝끝내 조국의 운명이 되고 만/그대의 길가에// 단식을 끝내고/ 노란 산나리를 한 송이/ 피었다 진다.

(정호승/ 간디에게)

 

 

설 교 노 트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함

스8:21

 

서론

에스라의 인도로 제 2차 포로가 귀환할 때에 그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간절히 기도한 후 출발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신앙적인 처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들 만나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을 만나면금식하면서 더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1. 아하와 강

마하와(Ahava) 강은 어디에 있는 강입니까? 이 아하와 강은 바벨론에 있는 강입니다. 유명한 유프라테스 강은 에덴동산에서 흐르는 4대 강 중의 하나입니다(창2:14). 이 강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바벨론 국가 일대에 펼쳐져 있는 큰 강인데 이 강에는 많은 운하들이 있으며 특히 아하와 강은 이 강 서북편에 소재하며 유프라테스 강 ·본류에서 아화와 지방으로 연결되는 운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아하와 강에서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2. 성경에는 강가에서 이루어진 일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1) 얍복 강가에서 된 일(창32:22-23)

야곱이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양복 강가에서 야곱이 결사적인 기도를 할 때 천사와 거름하여 환도때가 위골되기까지 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축복받았습니다.

(2) 요단 강가에서 된 일(수3:8)

언약궤를 맨 이스라엘 민족들이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요단 강가에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강물을 밝으니 물이 갈라져서 무사히 강을 건너갔습니다.

(3) 바벨론 강가에서(시137:1)

포로들은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놓고 노래를 부르지 못하여 고향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4) 강기데스 강가에서(행16:13)

바울이 빌립보 전도에 임하였을 때 안식일을 당하여 어디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니 이 강이 곧 강기데스 강입니다. 여기에서 기도하던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였습니다.

 

3. 금식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하와 강가에 모아 놓고 금식을 선포한 후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믿음으로 드린 기도의 효과는 크게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어려운 광야여행을 무사히 환향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기도 중에도 금식 기도에 은혜가 충만하며, 금식 기도 중에도 집단적인 대중이 한마음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호소를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들어 주십니다.

아하와 강가에서의 금식 기도는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서 범한 죄를 완전히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고국에 돌아가는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결론

성도들은 무조건 금식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향하여 있는 마음을 보십니다.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으면서 다시 자신들의 고향으로 귀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저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금식 기도를 흡족히 여기시고 그들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금식하며 기도함

느1:4

 

서론

느혜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궁전에서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능문들은 소화되었으며 그곳에 남은 자들은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다 기도로 해결하였습니다.

 

1. 그는 기도로 일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을 믿는다는 이론만을 내세우고 세월의 흐름을 보내며 기다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 그는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겼으니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 주시겠지 하고 안일하게 지내는 운명론자도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평소에도 기도 생활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을 것이나 이제 형제 하나님의 전하는 본국 소식을 듣고서 금식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금식 기도를 한 것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느혜미야와 같이 어려운 소식을 들을 때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기도부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언약을 믿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1장 5절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자여 간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언약만은 변치 않으시며 그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언약은 무엇입니까? 그 언약은 9절에 "만일 내게로 들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언약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만 옳게 지켜 행하면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과 환국이 틀림없을 것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3. 기도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때를 기다리며 수수 방관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있는 할 일을 열심히 실천하면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있어서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경성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금식하는 것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 일이니 결국 목숨을 내어 놓는 결사적인 기도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본국이 훼파된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울면서 금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자신이 이방 왕의 관원으로 있었지만 그는 결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자기 나라가 다 불타고 파괴되었다고 하면 그곳에서 도망나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절대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며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사58:6

 

서론

우리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생길 때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부르짖습니다. 이때의 우리의 마음은 회개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금식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기뻐하시는 금식은 어떤 금식입니까?

 

1. 금식은 어떤 경우에 합니까?

국가적인 재난을 당할 때 금식을 합니다. 국가에 전쟁 때나 전쟁의 위협이 있을 때 금식을 합니다. 슬픔을 당할 때 금식을 합니다. 또 자신이나 국가에 걱정이 있을 때나 위험이 있을 때 그리고 국가적인 회개가 촉구할 때입니다. 에스라가 율법 책을 낭독했을 때 모든 회중이 금식하였습니다(느9:1). 또 국가에 슬픈 소식이 있을 때나 성직자의 임명이 있을 때 금식을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앞서 금식했습니다(행13:2-3),

 

2. 금식에 따르는 것

(1) 금식할 때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금식하는 것은 그저 밥을 굶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2장 37절에 "과부 된 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섬기더니"라고 했습니다.

(2)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회개하였습니다.

(3) 애통해야 합니다.

요엘 2장 12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또 금식을 하되 겸허한 태도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3. 금식할 때 주의 할 일

(1) 금식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금식하는 것을 큰 소리로 알렸습니다. 그러나 마6:17에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금식할 때에 슬픈 기색을 보이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흥하게 하는 것입니다.

(2) 금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금식하면서 오락을 하며,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금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본문 말씀처럼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어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며 벗은 자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금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4. 금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아하와 강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귀환할 때 금식하며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잘 인도하셔서 무사히 귀환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유혹을 물리치게 됩니다. 세상의 것이 아무리 유혹하여도 금식하고 기도하면 그 유혹을 물리치게 됩니다.

 

결론

식욕을 끊고 금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하는 것이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안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식 문제

눅5:33-39

 

서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제자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요한의 제자는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비방에 대하여 금식에 대한 근본 문제를 교훈하셨습니다.

 

1. 금식의 목적

금식하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체로 아주 어려운 문제에 도달하였을 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일이 있거나 불행한 일이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금식하였습니다.

또 사무엘상 7장 6절에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하였으니 공공적인 죄를 참회할 때 금식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금식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사십 일 주야를 금식하였고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을 곧 십계를 그 판돌에 기록하셨다고 출애굽기 34장 2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2. 언제 금식하였습니까?

예루살렘 약탈을 기념하기 위해서 금식하였고, 성전 파괴를 위하여 금식하였으며, 예루살렘 포위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식하였으며, 그다랴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금식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목요일과 시내산에서 내려온 월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구원관은 기도와 구제와 금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하고 싶어서 하거나 어떤 중대한 문제로,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외식적인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 기 위해서 금식을 한 것입니다.

 

3. 금식에 관한 예수님의 답변

애수님께서는 금식에 관하여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유대의 풍속으로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으로 주와 같이 있는 제자들이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는 것이니 그때는 금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베 비유도 말씀하셨는데 새옷에서 찢은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새종교는 구종교인 유대교와 합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새 포도주 비유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가죽 부대는 인간이므로 먼저 인간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교훈이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다 쏟아지게 됩니다.

 

결론

금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권고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금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금식에 대해서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금식할 때에 금식하는 표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얼굴에 화장을 하라고 했습니다. 금식을 함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적인 금식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금식 기도의 유익

대하20:3

 

서론

주님은 자기의 백성들에게 기도뿐만 아니라 금식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권하시는 일에는 언제나 신령한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유익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기도의 힘을 더하여 줍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인간의 영성에 도움도 주고 큰 해도 줍니다. 그러나 금식은 언제나 심령에 유익을 주지 해를 준 일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사람들이 먹고 마실 때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적인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과 방종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은 "배로 하나님을 삼은 자"를 본받지 말고 오직 자주 "금식하는 자를 본받을 것"을 훈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현대 크리스찬인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경고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금식을 하면서 하는 기도는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승리하게 합니다.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금식하는 것을 가장 관습적이고 실제적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큰 위험이 그들 앞에 봉착될 때에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하여서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전 국민이 전멸되려는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그들은 금식과 기도를 통하여하나님께서 같이 하여 주셨고 이방의 적들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 시대에도 주의 백성들은 금식과 기도를 통하여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 중에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승리를 한 구절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십니다.

밧모섬의 요한은 주의 사랑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은 그를 황무한 고도에 버려 두어 굶어 죽도록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금식하는 그의 기도를 변하여 최대의 기쁨이 되게 했으니 가장 큰 비밀을 그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야말로 화가 복이 되는 유익을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도 간절한 금식 기도를 하여 내게 화가 되는 것일지라도 복으로 바꾸는 생활을 해야할 것입니다.

 

결론

금식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금식은 기도하는 데 있어서 힘을 더하여 줍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금식 기도는 승리하게 합니다. 또 화가 복이 되게 합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유익에 참여하기 위하여 주님 및 모든 시대의 성도들과 보조를 같이하여 금식과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익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긍 휼

성 경 활 용

1.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성경의 표현

(1) 무궁하심

(애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2) 크심

(느9:31)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사54: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3) 풍성하심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4) 온전히 불 붙듯함

(호11:8)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5) 영원부터 있었음

(시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6) 많음

(시69:16)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2.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대상

(1) 모든 사람

(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2) 곤고할 때

(시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3)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

(시72: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4) 하나님의 백성

(벧전2:10)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5) 포로된 자

(렘30:18)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6) 고아

(호14:3)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7) 하나님의 종

(시135:14)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 종들을 긍휼히 여기시리로다

(8)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눅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9) 주의 은혜를 구하는 자

(시119:58)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3. 긍휼을 베푸시는 방법

(1) 영원한 자비로

(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2) 인자를 좇아

(시51:1)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3) 은혜로

(사60:10)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긍휼히 여겼은즉

(4) 풍부한 자비로

(애3: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5)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119:58)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6) 일어나셔서

(시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4.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는 곳

(1) 구원에서

(딛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오직 긍휼하심을 좇아

(2)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눅1:72) 우리의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3) 죄를 용서하심에서

(시51:1)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단9:9) 주 우리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히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4) 기도를 들으심에서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방법

(1) 하나님께로 돌아옴

(시55:7)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2) 주의 이름을 사랑함

(시119: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3) 규례를 행해야 함

(갈6:16)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4) 긍휼히 여겨야 함

(마5:7) 긍휼히 여 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감

(히4:16)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6.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경우

(1) 고통스러울 때

(시31:9)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2) 곤고할 때

(시9:13)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3) 수척할 때

(시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4) 외롭고 괴로울 때

(시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5) 멸시를 받을 며

(시123:3)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7. 긍휼을 입은 자의 축복

(1) 복을 받음

(시67:1)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2) 아들을 낳음

(눅1:58)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3) 중생함

(딛3:5)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4) 죄를 속함

(미7:19) 우리를 긍휼히 여 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8. 긍휼하심을 받은 자의 생활

(1) 찬송

(사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롬15:9)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3) 헌신하는 생활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9. 우리가 긍휼히 여길 자

(1) 고아, 과부, 나그네

(슥7:9-10)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정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2) 가난한 자

(시72: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정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3) 다른 신자

(벧전3:8)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4) 원수

(삼상23:21)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5) 의심하는 자

(유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6) 동물

(잠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10. 긍휼을 베푸는 자의 결과

(1) 주의 자비하심을 입음

(삼하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2) 자손이 복을 받음

(시37:26)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3) 생명과 의와 영광을 얻음

(잠21:21) 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의의 영광을 얻느니라

(4) 긍휼히 여김을 받음

(마5:7) 긍휼히 여 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관련원어풀이

1. hl;m]j, 헴라-

자비, 인자, 온순.

(창19:16, 사63:9)

 

2. dseje 헤세드

(1) 바람, 열망, 좋은 의미로 열심, 사랑, 친절, 인자, 긍휼, 자비, 박애.

(창21:23, 삼하10:2)

(2)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경건,경애,신앙심.

(사57:1)

(3)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 호의, 자비.

(시5:8, 36:6)

(4) 나쁜 의미로 시기, 질투, 비난.

(레20:17, 잠14:34)

 

3. !j'r' 라하밈-

(1) 매우 부드러운 애정, 인정, 사랑.

(창43:30, 왕상3:26)

(2) 동정, 자비, 은혜.

(시25:6, 사47:6)

 

4. !jer] 라하민-

자비, 긍휼.

(단2:18)

 

5. sWj 후-스

(1)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슬퍼하다.

(시72:13, 욘4:10)

(2) 나누어 주다, 용서하다.

(느13:22, 렘13:14)

 

6. lm'j; 하-말

(1) 온유하다, 유순하다, 동정심을 가지다, 긍휼히 여기다.

(출2:6, 삼상23:21)

(2) 나눠주다, 용서하다.

(삼상15:3, 사9:18)

(3) 절약하다, 아껴쓰다.

(삼하12:4, 렘50:14)

 

7. @n"'j: 하-난

(1) ~에로 기울이다, 호의를 베풀다, 동정심을 가지다, 긍휼히 여기다.

(출33:19, 잠14:31)

(2) 은혜를 주다, 친절하게 행하다.

(창33:5, 삿21:22)

(3) 마음에 들게 하다, 호의를 보이다.

(잠26:25)

(4) 자비를 베풀다.

(잠14:21)

(5) 동정하다, 애도하다.

(시102:15)

 

8. dQn 누-드

(1) 움직이다, 요동하다.

(왕상14:15)

(2) 방황하다, 돌아다니다.

(창4:1, 렘4:1)

(3) 도망가다.

(시11:1)

(4) 동정하다, 측은히 여기다, 위로하다, 슬퍼하다, 애도하다.

(렘22:10)

(5) 방황케 하다, 추방하다.

(왕하21:8, 시36:12)

(6) 슬퍼하다.

(렘31:18)

 

9. !j'r; 라-함

(1) 사랑하다.

(시18:2)

(2)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동정하다.

(출33:19, 시103:13)

(3)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

 

10. dysij; 하-시-드

(1) 친절한, 탁월한.

(시12:2, 18:26)

(2) 자비스러운, 은혜스러운.

(시145:17, 렘3:12)

(3) 경건한.

(시4:4)

 

11. e[leo" 엘레오스

(1) 자비, 비천한 자나 고통받는 자에 대해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호의나 선의, 자비를 베풀다.

(약2:13)

(2)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온화.

(눅1:54, 72)

(3) (앨레에-몬-) 자비로운, 동

정적인.

(마5:7, 히2:17)

 

12. ejleevw 엘레에오-

(1) 긍휼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동정심을 가지다.

(마18:33, 막10:47)

(2) 자비심을 얻다, 수행하다.

(마5:7, 롬10:30)

 

13. oijktvivrmoJ" 오이크티르모스

동정심을 가지다, 자비심을 베풀다, ~에 대해 긍휼과 호의를 행사하다.

(롬9:15)

 

14. oijktivrmwn 오이크티르몬-

자비스러운, 깊은 동정심을 가지는, 측은히 여기는.

(눅6:36, 약5:11)

 

15. splavgcnon 스플락크논

(1) 내장, 심장, 간장.

(행1:18)

(2) 마음, 마음의 심정.

(고후7:15, 빌2:1)

(3) 사랑, 애정.

(빌1:8, 몬12)

 

16. i{lew" 힐레오스

(1) 속죄하는, 은혜로운, 자비스러운, 온화한.

(히8:12)

(2) 하나님이 당신에게서 이것을 돌이키시길.

(마16:22)

설교예화자료

주님의 은총

 

영화 「컬러퍼플」이 현재 미국에서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엘리스 워커의 소설을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상화시킨 이 영화는 삶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찾아지는 신의 자비와 은총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흑인 처녀 셀리는 열네 살이 되던 해부터 의붓아버지에 의해 능욕당해 두 차례나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의붓아버지는 셀리의 여동생 네티에게 또다시 검은 손길을 뻗치면서 셀리를 귀찮게 여기게 되고 급기야 그녀를 자식이 넷이나 딸린 홀아비에게 떠맡겨 버렸습니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한 남자로부터 다른 남자에게 떠넘겨진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성의 도구로써, 일꾼으로서 취급될 뿐 아무런 인간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학대와 인간적인 수모에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자기 앞의 삶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보람도 없이 그저 '껍데기만의 인간'으로서 삶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그러한 고통스런 삶이 죽음으로 인해 언젠가는 끝이 나고 그 뒤에 영원한 삶의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실상 현실에서의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포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닥치는 운명을 그저 감내할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엄두를 내보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이처럼 '껍데기만의 인간'이었던 그녀가 다시 삶의 의욕을 되찾아 아내이기 이전에 한 인격적 존재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눈뜨게 되는 것은 남편의 정부였던 "셔그"와의 사귐을 통해서입니다. 셀리는 셔그의 도움을 받아 남편의 횡포에 맞서 꿋꿋이 자신을 지켜나가고 자기 앞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갈등을 일으키던 인물들은 마침내 화해를 하고 남편까지도 하나님 앞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데 이는 작가 엘리스 워커가 이 작품으로 퓰리처 상을 받게된 자리에서 밝힌 소감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이루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인생은 왜 아름다운가?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순간에 모든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은 아름답습니다. "

 

 

슬픔의 현장

 

콜롬비아의 화산 폭발로 말미암은 희생자들 가운데 하나인 18개월 된 아기가 있었습니다.재난 구조 반원들은 "알렉시스 아쿠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기의 부모가 화산 폭발로 숨졌을 것으로 추정했었습니다.

25,000명의 사망자를 낸 화산 폭발로 콜롬비아에는 많은 고아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아기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각종 매스컴을 통해 이 아기의 사진이 널리 알려진 뒤 연합 통신에는 이 아기를 입양하겠다는 전화가 엄청나게 걸려왔습니다. 그러나 이 상처입은 아기가 구호 반원에 의해 구조된 지 여섯 주가 지났을 때 아기에게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친모는 10대의 여인으로 이혼녀 였는데 "마리아"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화산 폭발로 인해 아르메르 마을이 진흙탕에 파묻히던 날 다리 부상을 입고 "보고타"의한 병원에 수용, 치료를 받아 왔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우연히 아들의 생존을 확인한 그녀와 아기 알렉시스 군과의 극적인 상봉은 콜롬비아의 비극을 마음 아파하던 전 세계인들에게 조그만 위안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요나답

 

「에쿠우스」, 「신의 아그네스」 등 세계적인 문제작을 발표했으며 요즘 우리에게는 영화「아마데우스」의 원작자로서 낯익게 된 극작가 피터 쉐퍼의 최신작이 현재 영국의 올리버극장에서 상연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화제의 작품은 「요나답」인데 구약의 열왕기하 13장의 내용을 모티브로 하여 근친 상간으로 말미암아 다윗 왕의 궁전에서 일어나는 증오와 갈등, 피비린내 나는 살육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연극은 시종 일관 요나답의 눈을 통해 보여진 사건으로 진행되는데 그는 왕자 암논에게 계책을 알려줘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할 수 있게끔 한 자입니다. 그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서 "암논에게 요나답이라 하는 친구가 있으니 저는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이요 심히 간교한 자라(삼하13:3)"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연극에서 '요나답'은 「아마데우스」에서의 살리에리처럼 다윗 시대의 과거와 오늘날의 현재를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연극에서 암논은 신경증적 기질의 황자로서 이복 동생 다말의 미모에 반해 그녀에게 심한욕정을 느낍니다. 그의 친구 요나답은 왕자라면 인륜 도덕 쯤에 구애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로서 뫼를 내어 암논으로 하여금 다말을 범하게 합니다. 암논은 여러 번 그녀를 범하고 욕정이 식자 저버립니다. 이에 분노한 다말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계교로 속여 그의 영지로 피어 내어 다말의 눈앞에서 무자비하게 죽여 버립니다.

이 연극에서 작가는 압살롬 또한 그의 친누이 다말과 근친 상간의 관계를 맺게끔 하는데 요나답은 그가 꾸며낸 밀교 의식을 통해 압살롬과 다말의 이러한 관계가 신에 의해 운명지어진 것처럼 속입니다.

실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면서도 거짓된 신을 끌어대어 용납될 수 없는 악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요나답"을 통해 작가 피터 쉐퍼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도덕적 타락, 그리고 신과 인간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디오피아의 비극

 

수년간 계속된 가뭄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이디오피아 난민들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같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정치 적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그다지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디오피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창세기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있을 정도입니다. 구스(이디오피아)의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갔을 당시에 이디오피아는 이미 짜임새가 갖추어진 왕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천 년간 이어진 이디오피아 왕국의 역사는 1974년 최후의 황제 하일리에 셀라시에가 실각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고 10여년의 정치적 혼돈을 거쳐 1984년에는 아프리카 최초의 본격적인 공산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디오피아의 공산 정권은 그들의 혁명 성공을 기념하는 뜻으로 200피트나 되는 칼 마르크스 기념비를 건립하고 기념관과 연못, 아치를 세우는 등 백만 달러 이상을 들여 수도 아디스 아바바를 호화스럽게 치장했습니다. 중요한 건물들에는 깃발과 상징물 등으로 장식하고 밤중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무지개 빛깔의 네온으로 환하게 불밝혀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불과 수도에서 몇 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시골에서는 기아로 허덕이는 난민들이 서방 국가들의 원조로 세워진 난민 구호소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민족주의 게릴라들이 정부군과 끊임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앙 정부에 의해서 굶주림은 이들 반란군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기아가 가장 극심한 지역의 80퍼센트가 분쟁 지역인데 공산 정부는 이들 지역에 대한 서방 국가의 식량 원조를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분쟁과 고통이 언제 어떻게 종식될 수 있을 것인지 아직 확실히 가늠할 수는 없습니다.

 

 

화이트 군의 이야기

 

후천성 면역 결핍증에 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미국 사회에 여전히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일명 "에이즈(AIDS)"로 불리는 이 병의 가장 아이러니칼한 측면은 그 이름과는 정반대로, "에이즈"란 우리 말로 도움을 의미하나 다른 이로부터 도움이나 동정을 받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은 이제 미국 사회에서 30대 남성의 사망 원인 중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환자들은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 받은 채로 비참한 고독 가운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병의 전염 경로가 아직 확실히 밝혀져 있지 않고 한번 걸리면 거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미국사회에서는 이 병에 걸린 어린아이의 취학을 놓고 사법 당국과 보건소, 그리고학부모들간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인디아나 코코모 중학교 1년생 라이안 화이트 군에 대한 등교 거부 운동이 그것입니다.

화이트 군은 혈우병을 치료받는 과정에서 오염된 혈액을 수혈하게 되어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는데 그로 인해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통신 수업을 받아왔습니다.

6개월에 걸친 법정 투쟁 끝에 화이트 군은 보건소로부터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서 급우들에게 병을 전염시킬 우려가 없다. "는 진단을 받아내었지만 학부모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겨우 하루밖에 출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학부모들의 제소에 의해 열린 재판에서 학생들에게 병을 옮길 우려가 있으므로 당분간 등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짐으로써 화이트 군의 복교(復校)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코코모 중학교의 많은 학부모들은 만일 화이트 군이 다시 학교에 나오게 된다면 자기네 아이들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킬 것을 심각히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적인 피해보다는 공포심에 의해 더욱 철저히 소외되고 버림받는 에이즈 환자들의 보다 인간적인 삶 혹은 죽음을 위해 도움(에이즈)을 줄 수 있는 길을 먼저 크리스찬부터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의 수통

 

스웨덴과 덴마크가 전쟁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경상을 입은 덴마크군 병사가 지상에 앉아서 수통의 물을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에

"물을 줘! 나는 죽어가고 있어! 한 모금만 마시게 해 줘!"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중상을 입은 적병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좋아! 마실 수 있을만치 마셔! 네가 나보다는 훨씬 물이 먹고 싶은 모양이니까?" 하면서 가까이 다가가서 적병의 입에 수통을 대 주었습니다. 스웨덴 병사는 친절한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팔꿈치로 몸을 일으킨 후 포켓에서 권총을 꺼내기가 바쁘게 덴마크 병사를 향하여 한 방을 쏘았습니다. 한 방은 어깨를 스쳤으나 별로 상처를 입지는 않았습니다.

"몹쓸 놈! 사람의 친절을 원수로 감다니!" 덴마크 병사는 고함을 지르면서 자기 권총을 꺼냈으나 곧 생각을 돌리어 그 병사의 입에 수통을 대어 있는 물을 다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얘기를 들은 국왕은 그를 불러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너를 죽이려고 한 적병을 어찌하여 도와주었느냐? "

"폐하! 저는 중상을 입고 있는 적병을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

이것이 그 병사의 대답이었습니다.

 

 

뽕나무 이야기

 

어느 흑인 소녀가 자기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왜 나는 살이 검어요?" 어떤 소년이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난 왜 난 장이인가요? "

그 질문에 흑인 엄마, 그리고 난쟁이 아빠는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들은 고뇌에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뜨거운 눈물을 말없이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조세회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수도를 고쳐주고 받는 돈으로 연명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달동네에서 수도를 고치다가 건장한 사람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습니다. 그는 우물을 파주며 돈을 버는 청년이었습니다. 여기서 난쟁이는 키가 작고 힘이 없기 때문에 한번 대들어 보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공장 굴뚝을 청소하다가 영원히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한줌의 재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헤어나오기엔 굴뚝이 너무 높았고 그가 벗어나기엔 상대의 힘과 주먹이너무도 세었습니다 이것은 난쟁이로 태어났기에 겪어야 했던 난쟁이만의 영원한 고뇌입니다.

난쟁이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를 볼 수 없었습니다. 117cm의 난쟁이 그가 뽕나무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도 난쟁이 삭개오는 행복한 친구였습니다. 그를 깔보고 업신여기던 무리 앞에서 예수를 독차지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통쾌한 일입니다. 난쟁이 삭개오에겐 뽕나무라도 있었기에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 현대판 난쟁이에겐 그 뽕나무마저도 찾기 힘듭니다.

왜 뽕나무가 없을까?

이천 년전 삭개오가 예수를 독차지하는 모습을 보고 미워했던 그때의 사람들이 뽕나무를 다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난쟁이들은 뽕나무가 없기에, 뽕나무 역을 대신할 그 무엇이 없기에 예수를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난쟁이는 우리의 친구요, 이웃입니다. 키가 작아서, 힘이 없어서, 소외받는 바로 우리 이웃의 이야기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주위를 살펴봅시다. 난쟁이를 발견하는 즉시 그를 목마태워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뽕나무가 되어 줍시다. 그리하여 난쟁이로 태어났기 때문에 겪어야 할 고뇌에서 그들을 건져 예수를 보게 합시다. 예수는 난쟁이에게도, 뽕나무가 되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록·시·묘사

 

현명한 아테네 사람들은 자비를 사랑이 아니라 신성이라고 주장했다.

(R. 헤리크/ 자비)

 

자비라고 하는 것은 강요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용한 비가 땅 위에 떨어져 내리듯 그렇게 쏟아지는 것이다. 그 덕은 이중이다. 그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를 행복하게 한다. 그것은 가장 훌륭한 사람이 행할 때 가장 위대한 것이 된다. 그것은 왕좌에 앉는 왕후에게는 왕관보다도 더욱 어울리는 것이다.

(W. 세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아름다운 자비는 고결의 진정한 상징이다. 자비는 모든 가르침의 종합과 맞먹는다.

(A. 아우구스티누스/ 설교집)

 

자비는 가정 에서부터, 정 의는 이웃에서부터 시작한다.

(디킨즈/ 마틴 처즐위트)

 

사람이 건강을 잃고 친구를 잃고 명예를 잃는다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다 커다란 손실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자비심을 잃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손실이다.

(석가모니)

 

자비심은 다른 생물이 이미 아주 땅 위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진 사람의 마음에 끊임없이 존속해 있다.

(H.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내 부모를 부모로 대접하여 존경하는 마음 이 남의 부모에게까지 미치게 하고, 내 자녀를 자녀로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남의 자녀에게까지 미치게 하면, 천하는 손바닥안의 것을 움직이듯 할 수 있느니라.

(맹자)

 

자비의 작다란 불꽃- 우리는 그것을 없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일세. 살기가 어려울 때 그것은 사람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니 말이야.

(E.M. 레마르크/ 개선문)

 

얼을 떼에도 자비심을 베풀 수 있는 법이야, 자비심은 꼭 금전만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니까.

(B. 멜러머드/ 修理工)

 

다음과 같은 유대의 옛날 격언은 나에게 항상 깊은 감명을 주어왔다. 네가 건강할 때 베푸는 자선은 금이고, 앓을 때 베푸는 것은 은이며, 죽은 뒤에 베푸는 것은 납이다.

(N. 스트라우스/ 유서의 최초의 구절)

 

자비의 문을 여는 것도 힘들지만 닫는 것도 어렵다.

(중국 속담)

 

순수한 자선이라는 은광석은 인간의 선한 특성들의 목록 중에서, 값이 지불되어야 하는 유일한 항목이다.

(R.B. 세리던/ 욕설학교)

 

한푼도 돈이 안 드는 자비는 천하가 무시한다.

(H. 발자크/ 사촌누이 베트)

 

자비가 짚 벙 거지. <* 겉으로는 자비스러운 체하나 사실은 그러하지 못하다는 말>

(중국 속담)

 

반드시 해야 할 일의 경우에는 일치를, 뭔가 의심스러운 일의 경우에는 자유롭게 취사선 택을,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는 자비를 베풀라.

(R. 백스터/ 좌우명)

 

모든 사람은 자기만을 위하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한다.

(J. 헤이우드/ 격언집)

 

하나님은 무게를 달아 분노를 주며, 무게를 달지 않고 자비를 베푼다.

(G. 허버트/ 명궁)

 

자비는 사람의 마음/ 동정은 사람의 얼굴/ 사랑은 거룩한 사람의 모습/ 평화는 사람의 옷과 같다// 때문에 슬플 때에 기도하는/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의 모습인/ 사랑과 자비와 동정과 평화에게 기도하는 것// 이교도도 터키인도 그리고 유대인도/ 모두 다 사람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비와 사랑과 동정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또한 거하시는 것이다.

(블레이크/ 하나님의 모습)

 

군밤 장수의/ 칸델라 빛은 빨락종에 싸여/ 밤바람에/ 꺼질 듯 꺼지지 않는다. // 꺼져가는 등불도/끄지 않는 신의 긍휼/모성의 힘줄이 타고 있다. //‥‥ 별빛에 별을 품고 비탈을 올라가는/ 어머니./ 숨을 몰아 쉰다.

(김정우/ 산 일번지)

 

 

설 교 노 트

 

오히려 소망이 있다

애3:21-23

 

서론

그때의 환경은 고초와 재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쑥과 같이 쓴 것이 있고, 담즙과 같이 고통스러움이 산재했으나 마음에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그 소망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곧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입니다.

 

1.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과 자비

죄인은 누구나 멸망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죄인을 미워하고 저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그 죄인이 착하고 귀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멸망받을 인생이 불쌍하셔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십니다.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세상의 특징은 악한 것입니다. 너무나 악하여서 멸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의 멸망을 긍휼과 자비로서 대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특수한 사랑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 누가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사랑할 자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악하고 가증함을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지 않으시며 돌보시니 그 큰 사랑은 가히 인간인 우리는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죄인이 회개할 때에 그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아들과 함께 만물을 주신 것으로 성립되었습니다(롬8:32).

 

2. 아침마다 새로운 자비

본문 23절에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모든 사건에 관하여 나에게 선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도 결국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침마다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매일 매일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매일매일이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24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전심으로 여호와는 나의 분깃으로 믿는 것이 그의 소망이며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는 자에게 아침마다 자비를 계속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마다 자비를 베푸시되 새로운 자비를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긍휼하심이 날마다 새로움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의 환경이 쑥과 같이 쓴 것이 있고, 담즙과 같이 고통스러움이 많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멸망받아야 할 자리에 있는데도 오히려 그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사랑으로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는데 아침마다 새롭게 베푸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보상 때문에 소망을 가집니다. 기다리는 신앙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쁘고 긴장이 되는 것이므로 지리하거나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고 순종하는 신앙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이요, 고요히 앉아서 따르는 신앙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라

신20:7

 

서론

본문은 전쟁에 임한 자들에 대해서 쓰여진 교훈입니다. 그런데 군인으로 나가 싸워야 할군인들의 형편과 사정 또는 그들의 심리 상태를 보아서 전쟁에 임할 수 있는 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고 뒤에 미련이 있는 자는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낙성식을 못한 자는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못한 자는 그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새 집을 지은 자는 친구들을 환대하고 즐거운 잔치를 베풀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서 주신 축복을 감사하며 즐겁게 지내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미련이 있는 자는 전쟁에 나가도 전투의 성과를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집으로 돌려보내서 푹 쉬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집에 대한 애착심이나 미련이 약화될 정도로 시일이 지나고 군복무에 대한 의무감과 전투에 용기를 낼 수 있는 여건이 생길 때 군인으로 나가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2.포도를 추수하지 못한 자는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많은 자본을 들여서 포도원을 사서 가꾸고 갖은 수고를 다하여 결실할 때가 되었는데 군인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 포도원에 정신을 다 쏟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열매는 자신이 수확하지도 못하고 혹은 전사한다면 애써 가꾼 포도 열매는 다른 사람이 먹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미련을 갖고 있는 자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개인 개인의 생각을 다 아시고 그들의 필요를 다 아셔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관대함을 베푸십니다.

 

3. 결혼하지 못한 자도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여자와 약혼하고 그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취할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또 신명기 24장 5절에는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취하였거든 그를 군대로 내어 보내지 말 것이요 무슨 직무든지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된 동안 집에 한가히 거하여 그 취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약혼만 하였더라도 그 사람이 결혼을 하도록 군 징집을 보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혼이면 적어도 일년간은 군복무가 면제되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전정에서는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혼한 자를 돌려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즐거움까지도 하나님의 크신 은총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결론

현대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강제로 징집당하고 군입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명을 귀중히 생각하시고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다 아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이것은 군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긍휼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긍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깊이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떡

삼상21:4

 

서론

사울을 피해 숨어다니던 다윗은 부하들을 몇 명 데리고 놉 땅으로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시장하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히멜렉은 자신에게는 떡이 없고 거룩한 떡은 있으나 소년 병사들이 성결하다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1. 거룩한 떡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떡이란 제사장이 제단에 드렸던 떡 즉 진설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떡은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구워 매덩이를 에바 십분 이로 하여 여호와의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합 열두 개를 진설하였습니다. 떡을 열두 개를 진설한 것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 양식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떡은 매 안식일마다 새로운 더운 떡으로 교체합니다(레24:8).

 

2. 제사장이 먹는 떡입니다

레위기 24장 9절에 보면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고 했습니다.

이 거룩한 떡은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물질의 떡을 잡수시지는 않으시므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물려낸 후에는 제사를 관장한 대제사장이 이 떡을 먹었습니다.

바울도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 하였습니다(고전8:13).

 

3. 거룩한 목적에 사용한 떡입니다

제단에 드렸던 거룩한 떡은 제사장이 먹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기서는 특별한 예가 생긴 것입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이 피난 중에 주려 죽게 되어 제사장에게 이 사실을 호소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마침 항상 사용하는 떡은 없고 거룩한 떡뿐인데 그들이 성결한지를 물어서 성결함을 조건으로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부정한 자가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것에(레7:19-21)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배고픈 자들에게 인애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고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도 이 일은 정당하게 여기셨습니다(마12:3-7).

 

결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향한 자비와 긍휼을 계속해서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없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베푸는 마음을 더 기뻐하시고 원하십니다.

우리는 법 제도를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법을 제정한 근본 정신을 더욱 중요시 해야 하며 그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을 즐겨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의 복

마5:7

 

서론

본문의 말씀은 산상 보훈 중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로 언급하신 축복입니다.

먼저 남을 긍휼히 여기는 의미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처지에 깊숙이 들어가서 그 사람 입장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생각하면서 같이 느끼는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게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1. 가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의 뜻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은 사랑의 기초가 되는 미덕입니다. 가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입장을 바꾸어 내 처지에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현실적 태도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주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몸바쳐 피흘려 우리를 구속하여 주신 사실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을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가련한 처지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구제 행위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발생되고 실천되어져야 참구제가 되어집니다. 그러나 요사이 국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실시되는 구제는 정치적이거나 전략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주여야 참 구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해야 합니다. 그저 생색이나 내고자 해서 하는 구제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2장 13절에 "이와 같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3. 가련한 처지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봉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잘 믿는다고 해도 남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대강령인 동시에 최고의 윤리입니다.

 

결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을 대할 때 자비한 마음과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련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움직여 도와주게 됩니다. 또 가련한 사람을 대할 때 자비한 귀와 손을 가지게 되어 저들을 봉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련한 사람은 대할 때 자비한 입과 발을 가지게 됩니다. 남을 유익하게 하는 말을 하면서 봉사의 발을 옮기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이를 본받아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우리의 적은 긍휼을 베풀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받고, 우리의 적은 물질로 구제하고 신령한 크신 축복을 받고, 이 세상 것으로 봉사하고 하늘나라의 것으로 보상을 받게 됩니다.

 

 

상하였으나 꺾지 않음

사42:1-4

 

서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며 절박한 자리에 있는가를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 있는 인간을 긍휼로 대하시며 결국은 인간을 회복시키는 자리에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1.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이러한 것들은 손상되고 부서지고 멸망해가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연약함과 절망과 거의 무가치함의 관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한 괌대는 자기 회복의 능력이 없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가장 보잘것없는 빛의 웃음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 평가는 참회하는 상한 심령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 말들은 배신한 인간성을 의미하며 이 구절의 범위는 보다 큰 응용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 것입니다. 그는 이 땅 위에 공의를 베풀 것이며, 섬들이 그의 교훈을 앙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갈대와 등불들은 그의 섭리하심을 거부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묘사는 바로 저주받은 인간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방법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이 구절은 하나님이 갈대를 꺾을 수 업고 등불을 끌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은혜만이 장애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공의를 가져와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의요, 사랑이었으며 또한 영원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진리에 의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자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구속을 베풀기 위해서 저주가 되어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십자가에 의 해서 승리하셨으며 사랑과 진리로 사람들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본문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치리에 관한 간단하지만 놀라운 치리의 원리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확실성

본문은 연약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에 대하여 주님의 온화함과 염려를 표현하시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갈대는 목자의 갈대 즉 그의 악기라고 할 때 갈대가 상하였다는 것은 이제 그것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그것을 꺾어서 버리지 않으시며 곧 그 상함을 회복할 것입니다.

목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의 갈대를 꺾지 않으실 것입니다.

(1) 그는 이전의 갈대의 섬김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2) 그는 소수의 그러한 갈대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3) 그는 갈대가 교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4) 그가 그것을 작정하셔서 그 일에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갈대를 선택하셨고 그 분은 갈대를 소유하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는 계획에 의해서 그 갈대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가를 지불하고 갈대의 상한 자리에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결론

범죄한 인간들은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꺾지 아니할 것입니다. 상한 갈대는 곧 회복될 것이며 이전보다 더욱 유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작정이며 그분의 긍휼하심의 속성때문입니다.

 

 

긍휼의 최후 승리

약2:8-13

 

서론

긍휼은 윤리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바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중의 하나입니다. 즉, 긍휼이란 하나님의 심판에까지 영향을 주는 그런 엄청난 의미를 가진 행위입니다.

출33:19의 말씀에 대한 응답인 롬9:15, 18에 보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 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일방적이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격 있는 자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없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자를 사랑하는 바로 그 절대적 사랑이 긍휼입니다 이것은 수직적이요, 하향적입니다. 이 긍휼에 대해서 몇 가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긍휼을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나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한들 얼마나 의로우며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고 한들 얼마나 드릴 수 있습니까? 본래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떠한 선도 의도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이요,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외침은 오직 긍휼을 의미하며, 오직 긍휼은 오직 은혜요, 오직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개혁 신학 전체에 흐르는 맥락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이 지켜보십니다. 그 중 바리새인은 "내가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이렇게 의로운 일을 했습니다 "라고 기도하며 덧붙이기를 "저기 저 죄인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전혀 긍휼을 구하는 자세가 아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뒤에 멀리 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세리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오직 한마디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리가 바리 새인보다 크게 의롭다 함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비판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부족을 탓하면서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인간됨의 현주소입니다. 본문에서 "심판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언제나 심판받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2. 긍휼을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마9:13에 보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이나 환난이나 출세나 실패나 건강이나 혹은 질병 등 모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치십니다. 긍휼의 의미를 깨닫고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며, 나아가서 긍휼을 베풀 줄 아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긍휼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내가 존재함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므로 끊임없이 그의 긍휼을 구하고 배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엄청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배운 스데반도 자신이 순교할 때 역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여기에 긍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끝까지 배울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3. 긍휼을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는 공출을 베풀기 거절하는 부자의 죄목이 나옵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지 않았기에 긍휼없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할 때의 자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베푸는 은혜,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을 알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긍휼은 단지 불쌍히 여기는 윤리적 차원이 아닌 하나님과 관련될 때 사용됩니다. 성도가긍휼에 대한 자세는

(1) 구하는 자세

(2) 배우는 자세

(3) 베푸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긍휼을 원하심

호6:6

 

서론

종교에는 외적인 면과 내적인 면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도덕적인 삶,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보다는 오히려 제사와 의식적인 형태들을 의존하였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 없이 제사만을 드리거나 광적인 열정과 무자비함으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보다는 자원하는 마음과 자기 회생이 포함되어 있는 "인애"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관련속에서 이 말씀을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요구되고 있는 치유하는 자비를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아무것도 받으려 하시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용서를 구하고 죄를 자백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드리는 제사는 신들에게 바치는 잔치로 간주되었는 바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이르지 않을 것을 세계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50:12)"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그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것을 간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번제로도 하나님은 은총을 살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의 신뢰"가 없으면 어떤 음악도, 분향과 제사도 열납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자를 열납하십니다.

 

2.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제사를 다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없이 드리는 제사만을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게 의식적인 예배와 도덕적인 예배에 올바른 비중을 부여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제사는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며, 하나님에 의해 요구되고 있고 인간에게 있어서토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고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식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이면서 인생의 도덕적인 것들을 소홀히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않되겠습니다. 오직 우리는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만" 합니다(미6:8).

 

3. 자비를 제사로 대치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많은 제사를 드린다 해도 그것이 도덕성의 영원한 원리들은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사를 도덕성의 '산제사'로 대치하기 얼마나 쉽습니까? 성전예배가 경건한 삶보다 존중되며 자비보다 제사가 먼저 드려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첫번째 계명은 두번째 계명과 같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계명을 지킨 것으로 두 번째 계명을 대신할 수는 없으며 대신해서도 안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12:33) "

 

4. 제사와 자비는 항상 결합되어야 합니다.

자비, 명상과 활동, 하늘과 땅이 화해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은 인간들 사이에서 축복을 확산시키는 삶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을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무력해집니다. 양자는 불가분리하며 서로에게 있어서 본질적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는 이러한 결합이 완전하였으며, 이러한 결합은 도덕성의 핵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

 

결론

하나님은 외적인 모양을 취하시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긍휼없는 제사는 의식의란 형태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경고하시면서 제사보다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제사는 제사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자비로 대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무한성과 대상들

시103:6-14

 

서론

시편 기자는 자신에게 베풀어졌던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한 뒤에 계속하여 이스라엘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를 이 구절들에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비의 무한성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성을 진술하기 위해서 세상이 제공하는 가장 큰 범위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처럼 무한합니다. 우리가 하늘보다 더 높고 더 광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가장 높은 사상들을 초월하며 우리의 가장 광범위하고 풍부한 비유들을 능가합니다. 우주의 모든 척도들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진술하기에는 부적당합니다(시36:5, 57:10).

"인자하심 이 풍부하시도다(8절) "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죄들이 가득한 산들 위에도 그의 자비의 홍수가 넘친다. 그의 용서해 주시는 자비를 맛본 모든 세상 사람들, 복음의 소리를 듣고 그의 매력적인 자비에 동참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구원의 자비로 사는 성도들은 그의 구원의 자비에 의해서 보호되며 그의 위로의 자비에 의해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자비를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

 

2.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들

(1) 압박당하는 자들에 대한 그의 옹호에서 나타납니다(6절).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고난들과 결국에는 구원을 주심으로 교회의 승리에 대한 사실을 고찰할 수 있습니다.

(2) 그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그의 관대한 처리에서 나타납니다(10절).

(3) 그의 분노를 오랫동안 지체하시는 데서 나타납니다(8절).

여호와에서는 그의 분노를 격동시키는 죄인들에게조차도 오래 참으십니다.

(4) 일시적인 그의 분노에서 나타납니다(9절).

사57:16에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 죄사함에서 나타납니다(12절).

하나님은 우리의 죄과를 완전하게 사하셨습니다.

(6) 그의 부성애적인 연민에서 나타납니다(13절).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이시며(고후1:3) 천지에 있는 모든 부권의 아버지이십니다.

(7) 그의 부성적인 헤아림에서 나빠납니다(14절).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알고 계시므로 긍휼의 헤아림을 베풀어 주십니다.

(8) 그가 백성들에게 베푸신 계시에서 나타납니다(7절).

이 구절은 출33:13을 참고로 하는 구절인데 거기에서 모세가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자신을 알리셨으며 많은 능한 행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3.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들

땅 위에 사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칩니다.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그는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신다(8, 10절) "

그런데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자비의 대상들로 특별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세 번이나 그의 자비가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베풀어 질 것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그리고 그의 뜻을 알고 기억하여 '행하는 사람'들에게 라는 변함없는 한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언약의 축복은 전혀 양도될 수 없는 권한은 아닙니다. 자녀들의 자녀가 그 언약을 지킴으로써 그 축복들은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와 같이 명명될 수 있는 사람들인가? 우리는 경건하게 '그를 경외하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다양한 현현들 속에서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용서를 베푸는 자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의 은혜를 신뢰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벗기라

슥3:4

 

서론

본문의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라는 것은 그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러운 옷을 왜 벗기라고 하십니까?

 

1. 불에서 꺼내 그슬린 나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그 결과로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70년간이나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곧 불에 던지워졌던 신세들이요, 불에서 꺼낸 것은 멸망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간신히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불에서 건짐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슬린 상태이므로 불타다 남은 보잘것없는 신세였습니다. 그들은 성한 재목이 아니라 반이나 그슬린 상태였고, 불타다 남은 찌꺼기 같았으니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건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의로워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기회를 주셔서 살려보려고 하시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했습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 조각 같은 여호수아가 아직도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더러움은 곧 바벨론 포로 중에서 범한 죄들을 말합니다.

사단은 주장하기를 이방의 바벨론에서 범한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더러운 옷을 벗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용서받는 길을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하시는 보혈의 공로는 그 어떠한 더러운 죄도 다 씻으시는 능력과 효과가 있으므로 더러운 옷은 과감히 벗어 버려야 합니다.

 

3.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옷은 죄를 회개하여 사죄함을 입은 자들이 입는 '의의 옷'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떼 그 부친은 아들의 남루한 옷을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셨습니다(눅15:22). 그리고 품꾼의 하나로 대우받음이 아니라 당당한 아들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1장 10절에 "구원의 옷으로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이 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는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옷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왕의 혼인 잔치에는 예복을 입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께서 입혀 주시는 아름다운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우리가 전에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불에 던지움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비참함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불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3 속에서 나온 우리는 그슬린 나무 조각 같이 더럽고 힘없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우리가 보잘것없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입은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무궁 무진한 사랑과 긍휼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은혜에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