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종합자료백과
목 사
성 경 활 용
1. 목사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
(1) 일꾼
(마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2)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
(살전3: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3) 의의 일꾼
(고후11:15)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4)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고전4: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바로 여길지어다
(5) 복음의 일꾼
(골1:23)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6) 말씀의 목격자
(눅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7) 새 언약의 일꾼
(고후3:6) 저가 또 우리로 새언약의 일꾼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8) 교회 일꾼
(골1:25)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9) 하나님의 종
(딛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10) 전도인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11) 하나님의 사람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이 이것을 피하고
(12) 하나님의 봉사자
(사61:6)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라 할 것이며
(13)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고후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14)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자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5) 군사된 자
(빌2:25)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16) 주의 종
(딤후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17) 사역자
(고전3:5)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2. 목사의 자격과 인격
(1)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대하29:11) 내 아들들아 이제는 게으르지 말라
(2) 권능을 받아야 한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3)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4) 구별되어야 한다.
(민16:9)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5) 인내해야 한다.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고후12: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6) 다투지 말고 온유해야 한다.
(딤후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7) 은해 속에서 강해야 한다.
(딤후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 강하고
(8) 거룩해야 한다.
(요17: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9) 본이 되어야 한다.
(살후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10) 종이 되어야 한다.
(고후4:5)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11) 지혜가 있어야 한다.
(잠11:30)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마10:.16)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2)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해야 한다.
(딛3: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13) 구원을 받아야 한다.
(대하6:41) 원컨대 주의 제사장으로 구원을 입게 하시고
(14)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
(요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15) 충성 있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
(마24: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고전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16) 항상 힘써야 한다.
(딤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17) 편견이 없어야 한다.
(딤전5:11)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18) 수고해야 한다.
(고후15:58)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19) 확신이 있어야 한다.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0)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벧전5:2)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21)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
(딤후3:15)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22) 순종해야 한다.
(사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23) 술을 멀리하고 구타하지 말아야 한다.
(딛1:7)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3. 목사의 소명
(1)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부르신다.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고
4. 목사의 임무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이다.
(눅24:2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행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행22:15)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2) 전도하는 일이다.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
(행11:20)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롬16: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 세권부터 감취었다가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빌1: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하나님 나라를 전파
(눅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행20:25)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말씀을 전파
(마10: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여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은 집 위에서 전파하라
(행15:23)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롬10:8)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복음을 전파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롬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고전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⑤ 하나님의 뜻을 전함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⑥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전파
(고전4:5)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⑦ 우리 조상에게 주신 약속을 전파
(행13: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 가르치는 일이다.
① 여호와의 말씀을 가르친다.
(렘26:2) ‥‥여호와의 집 에 와서 경배하는 자에게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고하되 한 말도 감하지 말라
여호와 경외함을 가르친다.
(왕하17:28)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여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
(마28:19-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생명의 말씀을 가르친다.
(행5:20-21)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분별을 가르친다.
(겔44:23)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다
율례와 법도를 가르친다.
(출18:20)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스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행16:4) 여러 성으로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섬기는 것을 가르친다.
(마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인자의 온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4) 영원을 구하는 일이다
(요4:35-35)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5)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한다.
(행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6) 양떼를 먹여야 하는 일이다.
(렘3:15) 내가 또 내 마음을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요21:15)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벧전5:2-4)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7)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빌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살전1:2-4)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살전2:8)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8)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9) 권면하는 일이다.
(고후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사58:1) 크게 외치고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 죄를 고하라
(10)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딤전6:17-18)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 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11) 성도를 위로하는 일이다.
(사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12) 책망하는 일이다.
(딛1: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엄히 꾸찢으라
(13)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이다.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5. 목사에게 약속된 축복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
(렘1:19)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2) 영원한 영광을 받음
(단12:3)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벧전5:4)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3) 기쁨으로 단을 거둠
(시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4)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게 된다.
(눅24:49)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 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5) 원수를 제어하는 권세를 받는다.
(눅10:19)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관련원어풀이
1. poimhvn 포이멘-
(1) 양이나 가축을 돌보는 사람, 목자.
(마9:36, 요10:2)
(2) 감독자, 다스리는 사람.
(요10:16, 히13:20)
(3) 기독자 모임의 감독자, 연장자.
(엡4:11)
설교예화자료
목사의 의무
독일의 슈름갈트 시를 방문한 어느 목사가 당시 독일 교회의 유명한 지도자로 활약하는 요한 브렌츠(Johann Brenz, 1499∼1570)의 설교를 들으려고 그의 교회로 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교회에는 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브렌츠 목사는 예정한 순서대로 예배를 진행하고 열심히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손님 목사는 브렌츠에게 가서 저윽이 놀란 표정으로 연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브렌츠는 젊은 목사를 데리고 어느 생가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샘의 특징을 말해 보시오?"
젊은 목사는 퐁퐁 솟아서 철철 넘쳐 흐르는 샘물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을 뿐 얼른 대답을못했습니다.
그러자 브렌츠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 샘물의 특색은 계속 솟아나 오는 데에 있지 않습니까? 물을 마시러 오는 사람이 적거나 많거나 언제든지 변함없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자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평신도가 요구하는 목사의 자질은?
미국과 캐나다의 교인들이 그들의 목사에게서 바라는 자질은 어떤 것입니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서 미국과 캐나다 신학교 연합회에서 50만 달러 이상을 들여 3년간의연구 계획을 후원하였습니다. 조사 시드는 재정의 대부분은 릴리 앤도우먼트(Lilly En-dowment)가 부담했으며, 미네아폴리스의 청소년 연구 센터에서 조사를 담당했습니다. 47개 지역의 5천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하였고, 나중에는 인정된 기준과 범주 내에서 다른 사람들 3천2백 명이 더 추가 조사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겸손(환호가 없더라도 기꺼이 봉사하는 것), 정직(개인적인 성실, 어떤 절충없이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신용있는 언질의 능력),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보이는 것이 중요시되는 자질이었고, 특별한 목회 방법은 네번째 순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가장 비판을 받은 특성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친밀감을 억제하면서 비판적이고 고압적이며 무감각한 태도로 교인들을 멀리하는 반면에 이기적인 동기에는 영합하는 것, 부정한 성관계이거나 흥분적이고 충격적이며 실족케하는 그러한 행위들에 빠지는 것, 직무의 요구 및 압력에 맞닥뜨렸을 때 무감각한 것 등이었습니다.
이 분석은 목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 계획을 감독했던 데이비드 슬러는 말했습니다.
목사의 부인
목사의 생활에 대하여 매우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와 함께 울고, 웃고, 기도하는 사람은 바로 목사 부인입니다. 그녀는 목사의 설교의 가장 큰 약점과 위대한 힘을 알고 있습니다. 목사의 부인은 목사의 근엄한 음성으로 설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목사가 격해서 분노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자기의 남편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녀는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목사의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남편인 목사가 성도들 앞에서 말씀의 권능으로 말하며 성도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목사의 어려운 일을 마음속 깊이 느낍니다. 그녀는 방문 뒤에서도 목사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 목사와 함께 울 사람은 누구이고 같이 웃을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그 사람은 목사 부인인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성직자는 항상 군중 편이요, 개인과는 반대된다.
(H. 킹즈밀/ 매듀 아놀드전)
나쁜 성직자들은 마귀를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인다.
(T. 풀러/ 금언집)
옛날에는 목사 성찬배와 황금 같은 성직자가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목재성직자와 황금성찬배가 있다.
(J. 주얼 주교/ 여왕 폐하 앞에서의 설교집)
그등의 구걸하는 짓이 허위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성직자 족속이 있다. <*F. 템플 대사교,전도 사절 회합에서 한 말)
(G.L. 가우어 경/ 인내의 해)
때때로 만찬에 초대를 받고 그것을 결코 거절하지 않는 목사는 곧 경멸의 대상이 된다.
(성 제롬/ 서간집)
성직자들은 극단적으로는 보통 사람들과 같다. 그래서 성복이나 백의를 입었다고 해서 더 훌륭해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는다.
(체스터필드 경/ 서간집)
거만한 목사보다 더 우스꽝스럽고, 더 치사한 동물은 우주 안에는 없다.
(H. 필딩/ 어멜리아)
목사란, 미워하기보다는 욕하기가 더 쉬운, 보다 미묘한 동물 중의 으뜸가는 꼴이다.
(니체/ 도덕 계보학)
탈교자들은 말한다. "내가 행하는 대로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하시오"라고.
(J. 셀든/ 茶話 . 설교)
주교 앞의 요리접시 금이 간 쓰디 쓴 접시/ 철의 파편과 재와 눈물로 가득 찬 접시,/ 신음소리와 허물어진 벽부스러기로 가득 찬 접시/주교 앞의 요리 접시 아르메리아의 피묻은 접시
(네루다/ 아르메리아)
위대한 설교는 사람이 그 설교자를 숭배하도록 이끈다. 훌륭한 전도는 사람들이 구세주를 찬미하도록 이끈다.
(C.G. 피니/ 자서전)
탈교자는 완전 무결하게 살아야 하고, 자기가 가르친 대로 진실하게 해야 한다.
(J. 오들레이/ 시집)
나는 금방 알아보았다 아른트, 얀 신부를--/ 시대에 뒤떨어진 영웅들이/ 무덤에서 다시 나와/ 황제를 위해 싸우는 것을// ‥‥나는 보았다 음흉한 족속들/ 외교관과 성직자들이/로마법의 늙은 시신(侍臣)들이/ 공동의 신전에서 일하는 것을
(하이네)
매수된 성직자들의 라틴어를 한 자 한 자/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보면/그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의 소위 정의의 저울을 끌어내고/ 그 분동(分銅)이 가짜라는 것을 폭로하면/ 고용된 밀고자들이 그들에게 보고한다.
(브레히트/ 쫓겨난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검은 성직자들을 태운 악당들은/ 하늘에서 내려와 아이들을 살해했 다.
(네루다/ 그 이유를 말해 주자)
목사는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이를테면 이렇게 설교하면서/ 치마를 걷어 올리거든 고쟁이까지 벗어줘라/ 그러나 무슨 희망을 가져야 하나/ 살아 날뛰는 것은 사냥개 뿐이고/ 살아 설치는 것은 총잡이 뿐이고/ 세상이 온통 도살장이 되어 버린 이 땅에서
(김남주/ 희망에 대하여 ' I)
1988/ 강원도 횡성 골짜기/슬레이트 지붕 춥다// 오만 원 사례비/ 딸 아이 공납금 주고// 더덕더덕 갈라진 손으로/ 약초 캐러 올라가던 날// 아내는 보리밥 한 명이/ 구들막에 묻어놓았다// 이제/ 마지막 남은 기름 한 병/ 보리밥 한 덩이// 우리의 엘리사는/ 어디로 갔는가// 총회장 투표에도/ 들려오지 않았고//불의 사자 온 곳에도/ 보이질 않았다.
(이동녘/ 횡성목회)
나는/ 섬소년// 바닷가에 서면/ 가진 것 없어도// 목사님은 우리들을/ 꿈나무라 부른다.
(류순화/ 선유도 아이들 · 5)
약관 스물넷에 집사가 됐었노라고/ 누렇게 색바랜 임명장을 꺼내/ 보여 주셨을 때/ 전도사가 뭔지도 모르고/ 팔푼이 전사 노릇하느라고/ 덤벙거렸던 내가 부끄럽더이다.
(서덕석/ 김 집사님)
이 희생 의식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오! 신비로운 사제여, 명주와 같은 몸에다/ 화환을 장식하고 하늘을 우러러 우는 송아지를/ 어떤 초록빛 제단으로 데리고 가는가.
(키츠/ 그리스 옛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자백하라 연보궤 각하, 교황이 너를 보낸 것은/ 그를 부하게 하고, 우리를 가난하게 하려함인가./ 수금된 돈이 모두 라테란에 수합되면/ 그는 다시금 간악한 길을 선택하리라./모든 교구가 이 궤를 다시 채울 때까지/ 이번에는 독일의 분열을 구실로 삼는 것이다. /이 돈은 성지 회복을 위해서는 한 푼도 안쓰인다. / 그 큰 액수를 신부가 지불할 리 없는 일이다. / 연보궤 각하, 너는 화를 자초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 독일 국민 중 어리석은 남녀를 색출하기 위하여.
(발터/ 로마의 연보궤 · II)
가톨릭 축구팀이 중요한 원정 경기에 가는 길이었다. 기차에 함께 탄 기자가 코치를 찾아 회견하다가 주고받은 한 대목:// "승리를 위해 기도할 신부도 수행한다니 그럴듯하군요.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 "그러지요.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공격수 신부를 소개할까요, 아니면 방어수 신부를 만나보시겠습니까?"
(앤소니 드 멜로/ 공격 기도와 방어 기도)
설 교 노 트
목회자의 삼대 각오
고후6:1-10, 딤전1:12-16
서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실 때에는 학식이나 구변이나 재능이나 사람의 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에 겸손과 순종 여하를 보시고 쓰시며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공출로 말미암아 받은 사도 직책을 소중히 여기고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노력 활동하며 따라서 동역자라고도 할 만한 고린도에게 자기와 같이 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회자들이 가져야 하는 삼대 각오는 무엇입니까?
1. 성직에 대한 충성을 각오할 것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 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2-16)"고 하심은 바울이 자기 성직에 대하여 감사와 충성을 결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성직에 귀중성을 몰각한 사람이 어떻게 충성과 감심으로 봉사할 수 있으며 충성과 감심으로 봉사하지 않는 목사가 있는 교회가 어떻게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충성이 얼마나 필요한 것과 위업에서 없어서 안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의 성공과 주님의 신임이 충성에 있는 동시에 교회의 진리 수호와 발전은 사람의 힘이나 학식이나 재능이나 지혜에 있지 않고 오직 충성에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충성하고, 하나님의 교회에 충성하고, 자기 구원에 충성해야 합니다. 이렇게 충성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천국과 생명의 면류관이 상급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2. 많이 참고 견딜 것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기원되었고 신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가는 자들입니다.그리고 천국 가는 길에는 많은 환란과 역경이 산과 같이 쌓여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에게도그러한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에 사명을 띠고 복음 전선에서 마귀와 죄와 세상과 불의로 더불어 대립하여 싸움으로 일삼는 주의 종들에게 중첩중첩함은 명약관화(明若觀火)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참고 견딜 각오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각오는 인내를 확고 부동케 하고 인내는 각오를 수행케 하기 때문입니다.
견디는 것에 헬라원어 '휘포모네'는 고난을 지구적으로 견디는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고난을 무릅쓰고 전투해 나감을 가르칩니다.
크리소스톰은 인내의 덕을 모든 것에 근저(根底)로 말하기를 "인내는 선에 뿌리요, 경건의 어머니요, 부패할 줄 모르는 실과요, 탈취하지 못할 견고한 성이요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항구며 모든 미덕의 여왕이고 모든 의행(義行)에 기초로 전시에 평화요, 풍랑 중에서의 평온하고 소요(騷疑) 중에서 안정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참고 견디는 것은 참 행복이 됩니다.
3. 의의 병기로 좌우할 것
고후6'7하에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수(右手)에는 공격무기, 좌수(左手)에는 방어용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 의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하여 악마의 궤휼과 계획을 무너뜨리고 율법에 의한 의를 파괴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고후10:4)"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들은 의의 병기를 가지고 마귀와 죄악과 대결하는 그리스도의 정병들입니다.
인류의 최대 강적은 죄악입니다. 죄악 때문에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축출되고 저주를 받고 타락되고 지옥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세력은 원자탄보다 무섭고 사자보다 더 사납습니다.
옛날 선지자 사도 신앙의 선배들이 왜 피흘리며 핍박을 당하다가 죽었습니까? 곧 죄를 지적하며 죄를 책망하고 죄와 싸우다가 귀중한 생명을 잃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목회자들이 죄를 공격하지도 않고 십자가를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교역자들이 사람들에게 죄를 가르쳐 주고 회개를 명하는 것은 인간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결론
목회자가 가질 삼대 각오는 성직에 대한 충성과 많이 참고 견디는 것과 의의 병기로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 삼대 각오를 가지고 앞으로의 목회를 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같이 하여 주셔서 그리스도의 정병이 될 것입니다.
귀히 쓰는 그릇
딤후2:20-26
서론
본문에 있는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도를 기구에 비하여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중에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이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큰 집 중에서도 큰 집입니다. 그러므로 그릇으로 말하더라도 귀한 그릇과 보통 그릇과 천한 그릇이 있을 것이요, 큰 그릇과 작은 그릇도 있는 것입니다.
귀히 쓰는 그릇은 가치 고하에 있지 않고 정결하고 흠이 없고 깨끗하여야 귀히 쓰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교회에서 귀히 쓰는 그릇은 어떤 그릇입니까?
1. 정결한 그릇(사람)입니다.
정결한 사람(그릇)이란 의복을 깨끗하고 값비싼 고급 양복이나 양장을 하고 값비싼 반지를 끼고 머리를 잘 꾸민 사람이 아니라, 사상과 말과 행동과 마음과 예의 범절이 결백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귀중히 쓰는 그릇은 그릇에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부정하면 귀히 쓸 수 없습니다.
성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하고 충성된 사람을 원하십니다. 사람이 본래 정결한 재료만 아니라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결케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본래 불결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 결한 그릇이 된 후에야 귀하게 사용하였고 중세기 인물중에 성 프랜시스나 어거스틴도 우리나라 김익두 목사님도 본래는 불량자로 불결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개한 후에야 하나님이 귀히 쓰는 능력자들이 되고 위대한 그릇이 되었단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목사님들은 정 결하고 주인의 사용에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매사에 성실과 정직, 근면, 자애, 충성과 동정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며, 싸늘한 관청과 이도(吏道)에 부패하고, 분열하고 있는 정당, 종교, 사회단체, 각층에 분산 침투하여 절망과 흑암 속에,희망과 삶의 길을 찾는 겨레들에게 일루(一鏤)의 희망의 길 인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교회 목사님과 임직자들은 충성해야 되는데 충성은 자율과 타율의 합성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군인은 죽든지 살든지 나라를 위하여 자기를 위해 희생시켜야 하고, 경기자는 최선을 다하여 대회 법칙을 따라 활동하고, 농부는 밤낮 수고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의 일꾼도 부지런히 일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군인, 운동 선수, 농부, 교회의 일꾼은 다같이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2. 흠없는 그릇이라야 귀히 쓰게 됩니다.
본문 22절에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귀하게 쓰는 인물은 어떠한 인물입니까?
첫째로 무흠한 그릇, 무흠한 인물 즉 단점이 없는 사람이라야 귀히 쓰는 인물이 됩니다. 말에 무흠해야 되고,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금전 문제에 깨끗하며, 이 성문제에 무흠한 자라야 하나님의 교회에서 귀히 쓰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의를 중히 여기고, 신앙 중심으로 살며 사랑과 화평을 자기 생활에 원칙으로 삼는 자라야 귀중히 쓰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사용에 편리한 그릇을 귀중히 쓰십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수중에 편리한 그릇이 되도록 오늘의 목사님과 임직자 여러분은 분투하시길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바늘 한 개도 용도에 편리하여야 귀히 쓰게 되며 아무리 값비싼 금은기명이라도 용도에 불합당하고 불편하면 귀히 쓰는 것은 고사하고 천대와 멸시를 면치 못합니다. 렘48:10에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울 왕과 한 달란트 맡은 종과 구약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보십시오. 이들은 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불편한 그릇이므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각자가 맡은 직분을 잘하여 교회에서 귀히 쓰는 인물들이 되기 바랍니다. 교회 성직자들의 근면과 충성은 교회 부흥 발전에 직결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
귀히 쓰임을 받는 목사가 되고자 하면 정결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흠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추수 때 요구되는 일꾼
마9:35-38
서론
주님께서는 탄식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의 밭은 추수꾼의 낫을 기다리고 있고 추수의 주인되신 주님이 오실 때 된 오늘 요구되는 일꾼들은 어떠한 일꾼일까요? 또 하나님의 구원의 오묘한 도를 맡은 교회의 요구되는 인물은 어떠한가요? 오직 충성과 사명에 대한 충직한 결심과 주를 위한 생사불고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제부터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요구되는 일꾼이 어떠한 일꾼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충성된 일꾼입니다.
우리는 충성이 얼마나 필요한 것과 위대한 업적에서 없어서는 안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에 성공과 주님의 신임은 무엇보다도 충성에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진리 수호와 교회 발전은 사람의 힘이나 학식이나 재능이나 말에 있지 않고 오직 지극한 충성에만 있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충성 뿐입니다. 충성없는 학식, 충성 없는 사람의 힘, 충성 없는 구변, 재능, 돈은 필요치 않습니다. 도리어 교만해질 뿐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합니까?
(1)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그 뜻의 중심은 하나님께 드리고 말씀대로 살라는 뜻이 됩니다. 자식이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신자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충성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죽고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죽고 신자가 교회를 위하여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2) 자기 구원에 대하여 충성하는 자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충성하지 못하면 남의 영혼을 위하여 충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로서는 더욱 자기 구원의 충실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자기의 구원을 위해 다 많은 기도와 성경 연구, 전도, 수양, 덕을 쌓아야 합니다.
(3) 교회에 충성하는 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목사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서 일하는 감독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2. 교회가 요구하는 일꾼은 사명을 위하여 살고 죽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도, 즉 십자가의 도는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세우신 인류 구속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를 전함에는 무엇보다도 충직하고 사명을 위하여 살고 사명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있는 인물을 우리 교회서는 요구합니다. 죽기를 무서워 떠는 사람은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합니다.
나단 선지는 다윗 왕이 자기 부하 우리아의 처 밧세바의 정조를 빼앗고 죄를 감추려고 충성된 우리야를 일부러 위험한 곳에 보내어 죽게 한 그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적, 책망하였고, 다니엘도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께서 달아보니 부족하다고 죄를 지적하여 주었고, 세례 요한도 그 동생 빌립의 아내를 빼앗은 고로 자기 생명을 내어 헤롯 왕에게 잘못을 지적하였고, 사무엘 선지자도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아말렉 사람을 전멸하고 그 곳 물건을 취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은즉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17-23)"라고 사울의 실수를 지적하였습니다. 많은 선지자들과 주님의 제자들은 진실히 자기의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진명(盡命)에 결심으로써 자기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3. 교회가 요구하는 인물은 주를 존귀케 함에 있어서 만인의 본이 되는 인물입니다.
빌1:20-21에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고, 또 고전2:2에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은 정당한 일이요, 주의 제자 즉 신자들이 자기의 살고 죽는 것을 불구하고 자기의 몸과 생명과 물질 전부를 주께 바쳐서 주를 존귀케 하는 것은 만인의 본이 되는 생활입니다. 그런고로 고금을 통하여 주의 충복(忠儀)들은 사도들을계승하여 목숨을 기쁨으로 바쳤습니다.
결론
오늘 할 일 많은 이때에 우리 교회가 요구하는 인물도 이상에서 말한 충성된 일꾼 즉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을 일꾼과 주를 존귀케함에 만인의 본이 되는 일꾼들인 것입니다.
올바른 목회 자세
행20:17-21
서론
목사가 목회를 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올바른 자세를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올바른 목회 자세는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신도와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7-18절에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게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장로들을 오라고 하여 자기의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에 잘한 점을 기탄없이 말하였습니다. 과연 그 교육자에 그 성도들이라고 할만 합니다. 이것은 한쪽만 훌륭해 가지고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정경이요, 양쪽이 똑같이 훌륭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목사는 신도들이 잘못한 일에 대하여는 꾸중하여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또 신도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말해 주는 목사에 대하여 기뻐하며 따르려 하는 그런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목사와 신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도의 잘못을 그냥 묵인하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니요, 목사가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라고 할 때에 거기에 반발하여 대든다면 그 목사와 신도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서로간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할 수 있고, 그것을 서로 인정한다면 그 사이는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2. 목사의 기본 자세는 무엇입니까?
본문 19절에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하였습니다.
(1) 목사의 기본 자세는 첫째로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종은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종이 교만하다면 아무 쓸모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는 처음과 나중이 똑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웅덩이에 물이 고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은혜는 낮은 곳 즉 겸손한 곳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겸손한 목사를 볼 때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눈물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목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뭇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안타까워 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진정한 긍휼의 눈물인 것입니다.
(3) 참고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죽이려고 달려드는 유대인들을 용서하면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 사도 바울입니다. 목사는 잘 참아야 합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자신을 대적하는 무리들이더라도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감싸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유익한 것은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 20-21절에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 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구원에 유익한 것은 어디서나 거리낌없이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참 모습입니다. 목사들은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적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지금까지 목회자의 바른 자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올바른 목회 자세는 성도와 마음속의 말을 다 할 수 있어야 하며, 목회자가 겸손함과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참고 주를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유익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꺼림없이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해 깨끗하라
행20:33-35
서론
오늘의 시대는 참으로 많은 목사가 배출되고 있어서 기독교에는 많은 일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만 많다고 하여서 다 하나님의 올바른 일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목사가 되는 것은 참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물질에 대한애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갖는 것으로 목사 역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 물질때문에 넘어지고, 실패하게 되며, 범죄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상고하며 어떻게 해야 물질에 대해 깨끗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지방에서 3년 동안 목회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은 자리에서 자기에게 일정의 탐심도 없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문 33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갖는 물질에 대한 애착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실패하는 원인 중에서 이것이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큽니다. 출발을 잘한 목사가 물질면에서 풍부함을 누리게 될 때에는 그만 긴장이 풀려서 사치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는 축재에까지 이르러 그것을 의지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하여 탐심을 가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목사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 지나니 곧 사랑으로 침륜과 멸망게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은 사람을 패망시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습니다. 이렇듯 물질을 추구하는 자는 믿음에서 떠나게 되어 물질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탐심을 버리고 물질에 대해 깨끗한 생활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야 할 것입니다.
2.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장 8절(하반절)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주님의 명령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 주께 받지 않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생명까지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 재능, 물질, 건강 등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거저 받은 것입니다.
백 번을 죽어도 마땅한 우리를 살리시고, 먹이시고, 입혀 주시는 은혜를 생각할 때에 우리에게 감사 할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표현은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우리의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도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말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특히 목사된 자들은 주님 앞에 깨끗한 양심으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자신은 물질만 의지한다면 그는 결국 패망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에 대하여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바르게 섬기는 자세
눅17:5-10
서론
이 시대에는 참으로 많은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경건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자세를 잘 모르는 분들도 간혹 계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의 자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소자 하나라도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소자 하나라도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은 곧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이사야서 42장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노래에서도 여호와의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 진리도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갈대는 애처로움의 표현입니다. 도움이 없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갈대와 같은 소자는 어린 아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신앙이 어리고 자주 넘어지고,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종인 교역자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말씀대로 살려면 지금 자기들의 믿음으로는 도저히 다 순종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라고 간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것이 6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이 말씀의 뜻은, 너희에게 이미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의지하여 행동에 옮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이 강하다거나 또는 약하다는 말은, 믿음 자체가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의지하여 얼마나 확신하며, 순종하고 행동하며 사는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흔히 말하기를 믿음이 없어서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리라고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일의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3.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7절 이하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일한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들 중에 누가 종을 두어 일을 시켰다고 하자.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이 일꾼들이 피곤하다고 하여 주인이 종을 식탁에 앉게 하고 음식을 준비하여 그 종에게 수고하였으니 먼저 앉아서 먹으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리어 주인이 식사를 다할 때까지 수종들고 주인이 다 먹은 후에 먹어야 한다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10절은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것은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교역자들은 믿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맺게 됩니다. 영광을 차지할 것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고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일하여 좋은 결실을 맺었다면 그 영광을 우리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역자들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려서 승리하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에스라의 결심
스7:1-10
서론
본문 10절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 70년의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동족들과 함께 민족의 신앙 부흥 운동과 나아가서는 사회 정화 및 정신적인 혁명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한 지도자가 된 요소와 비결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에스라의 인물
에스라는 아론의 혈통과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혈통에서 태어났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민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하시고 성별하시고 축복하사 하나님의 성업을 수종들게 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에스라 자신도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별하시고, 축복하신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먼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6절에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상은 정치학이나, 경제학이나, 교육학 박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라는 점에 주목할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고, 바로 깨달아 실천하는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실천하는 인물이라야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왕과 상통하는 인물입니다.
본문 6절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자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았다"는 말씀은 왕에게 신임을 받고 왕이 사랑하고 인정하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신앙이 있어야 하고, 사람에게도 신용이 있고 진실하게 자기 책임을 성실히 감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던 에스라의 지도자상이라고 하였습니다.
2. 에스라와 결심
사람에게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 결심이 인생의 목표와 저력이 되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결심은 세 가지 였습니다(본문10절 참고).
(1) 율법을 연구하려는 결심이라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이 율법을 연구하려는 결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율법 자체가(시19:7-10) 영혼을 소생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슬픈 자에게 기쁨을 주고, 영안을 밝혀 불의한 죄인을 정 결케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연구할 때 심령이 새로워지고, 부흥을 받습니다.
(2) 율법을 준행하려는 결심이라고 했습니다.
일반 학문은 아는 데서 머무는 수가 있으나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은 아는 데로 실천해야 되는 말씀입니다(계1:3참고). 율법 준행은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하는 길이며, 나아가서 축복받은 첩경이기도 합니다.
(3) 율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인 율법과 복음은, 나 혼자만 알고 준행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지상 명령인 동시에 마귀의 권세를 파멸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가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의 원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여기 에스라의 결심은, 신앙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고,도덕 재무장을 하여, 사회 정화와 국가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상을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생의 바른 결심이실천 되는 거기에 위대한 지도자로 형성되어 갑니다. 지금도 성도를 지도하는 목사는
(1)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2) 그 말씀을 준행하면서
(3) 그 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법궤를 메고 가는 소
삼상6:10-16
서론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만이 멜 수 있는 하나님의 신성한 법궤를 사람도 아닌 소가 메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소는 이스라엘의 소도 아니고 불레셋의 소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인생들이 범죄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를 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범죄한 인생은 동물만도 못하다는 선지자들의 교훈이요, 경고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특히 법궤는 교회를 상징하고, 소는 교회를 봉사하는 교역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법궤를 메고 가는 자세
(1) 먼저 불레셋 지경을 떠났습니다.
여기 법궤를 멘 소가 불레셋 땅을 떠나 이스라엘로 향했다는 것은 방금 재앙이 내리고 있는 흑암한 범죄와 형벌의 영역을 떠난 광명한 축복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멘 하나님의 사람들은 방향 감각이 예민하여 방향 설정을 바로하고, 떠나야 할 범죄와 형벌의 영역을 떠나야만 합니다.
(2) 수레를 메고 떠났습니다.
법궤를 운반하기 위해서 멘 이 멍에는 불레셋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을 해결해 주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멘 멍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메고 가는 주님의 멍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멍에라고 생각합니다.
(3) 송아지를 떼어놓고 떠났습니다.
이는 신성한 법궤를 운반하는데 지장이 되고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정리한 자세입니다. 오늘도 법궤를 메고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역상 지장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세속적인 요소들은 정리한 후 바로 메고 가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눅14:33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법궤를 멘 사람들은 떠나야 할 영역을 떠나 주님의 멍에를 메고 버려야 할 사리사욕이나 인정 사정이나 혈기, 교만, 정욕을 버리고 바른 방향을 향해 떠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2. 법궤를 메고 가는 방법
신성한 법궤를 메고 가는 두 소의 취한 방법은 주목할만 합니다.
(1) 바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암소가 벳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아니하고 바른길로 직행했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법제를 메고 주의 일하는 사람들은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우물쭈물 어그러지게 하지도 말고 왜곡되게 하지도 말고 정당하게 바로해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2) 울면서 갔다고 하였습니다.
12절에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소가 울었다는 말은 짐도 무겁고 송아지 생각도 나고 죽음도 각오하고 울었을 것이 라고 추리가 됩니다. 멍에를 메고 가는 소도 울면서 갔다고 하면 법궤를 메고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울음이 있다는 결론입니다. 주님도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면서 가셨습니다.
(3)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갔습니다.
12절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다"고 하였습니다. 법궤를 멘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물욕이나 인정이나 인권이나 파벌 사상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공명 정대하게 일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결론
교역자들은 법궤를 메고 가는 두 암소와 같이 오직 목적지만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좌우로 치우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 두 암소는 목적지에 이르자 하나님께 번제물로 희생이 되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제단에 기쁘게 바치는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당할 수 없는 증인
행6:8-15
서론
초대 교회가 일곱 사람을 택하여 집사로 세웠는데, 그들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하여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덕망이 높은 인재들이었습니다.
이 집사 가운데는 스데반과 같이 유력한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교회에 봉사하고 구제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또 일선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많은 교역자들은 스데반과 같이 담대하게 증거하여 믿지 않는 자들이 그야말로 당해 낼 수 없는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증언을 당해 내지 못하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구약 성서에 근거하여 신앙인들의 역사적인 사실을 그대로 증언하였습니다. 또한 복음의 사실을 그대로 증언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힘있게 증거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진실하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힘이 있기 때문에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은 제아무리 수가 많고 강하다 할지라도 진리를 당해낼 수가 없고 위선은 제아무리 찬란하고 위대하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 '지동설'을 주장했던 순교자 갈릴레오의 증언이나 '이신득의'를 주장한 개혁자 루터의 증언은 진리이기 때문에 힘이 있어서 저들이 당해 내지 못하였습니다.
2. 성경의 진리를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의 증언은 어떤 인간의 철학이나 문학을 증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언하였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증언하되 자기의 생각이나 주견대로 증언한 것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가감 없이 증거했다는 말입니다. 요사이는 말씀의 증인들 가운데 이 순수성과 진실성을 상실하고 자기 마음대로 증거하는 거짓 증인들도 없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암8:11에 "주 여호와께서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말과 학설은 풍년이 들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흉년이라는 말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진실하게 증언하였으므로 저들이 당해 내지를 못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여 사람의 거짓된 수억 마디 말보다 힘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아무도 당해내지를 못한다고 하였습니다(히4:12)
3. 죽음을 각오한 순교적인 증언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증언은 타락된 증인들과 같이 자기 인기나 독점하고 명성이나 드러내어 높아지고 환영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책임성 있게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영광 받으시도록 강하고 담대하게 증언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됩니다. 증인이란 본래 법정 용어로서 진실해야 되고 공의로워야 되고 책임성이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책임지고 진실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을 각오하고 증거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결론
이와 같이 반기독자들이 스데반의 증언을 당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하고, 성결의 진리를 증언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 증거는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해서 증거할 때에 아무도 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스데반과 같은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소명자의 자세
출3:1-12
서론
성서 학자들은 출애굽기 3장을 모세의 소명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일생을 3기로 나누어 그의 삶을 볼 수 있는데 제 1기는 애굽에서 40년간 공주의 아들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였던 시기입니다. 제 2기는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목자로서 시련의 생활을 했던 시기이고, 제 3기는 광야에서 40년간 자기 동족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다가 12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 시기입니다.
소명자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소명자의 개념
소명자라는 말은 이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또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세 가지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5절에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소명자는 먼저 자신을 성결케 해야 됩니다.
(2)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헌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10절에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인간의 사역 또는 이 세상 사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새역사 창조의 주인공이 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 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새역사를 창조해 나가셨습니다. 그 내용은 애굽은 징벌하시고 가나안 7족속을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새종교 및 신앙의 역사를 창조해 가시도록 하셨습니다.
2. 소명받은 환경
역사적으로 소명 자들이 하나님에게 부름받기까지의 그 환경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여기 모세의 경우 그 부름받은 환경은 주목할만 합니다.
(1) 소명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소명의 시기가. 있습니다. 여기 모세는 80세에 부름을 받았으니 인생 3분의 2에 이른 노경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80년 동안 훈련을 받고 40년 일하다가 가신 인물입니다.
(2) 소명의 장소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호렙산상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산이야말로 모세에게는 일평생 잊을 수 없는 유서깊은 산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산은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이되어지고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어진 산이기도 합니다.
(3) 소명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목적은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고 구원하여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소명자의 취할 자세
소명자들이 취해야 하는 태도나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1)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인간의 관념이나 행동이나 방법을 포기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는 핑계도, 이유도 조건도 없어야 합니다.
(3) 맡겨진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맡은 자에게서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4:2).
결론
소명자는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합니까?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붙들려야 하며, 자기의 주관과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맡겨진 사명에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사명자의 실패
삿16:22-30
서론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의 마지막은 너무나 애처러운 인상을 줍니다. 이것은 삼손에게만 마지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다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께 사명을 받을 자이었으나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사명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삼손의 실패를 보고 깨달아서 사명받은 자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실패의 내용
삼손의 수태와 출생은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천사까지 동원되어 매우 신비하고 경건하게 출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의 말로는 너무나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란 시작보다 나중이 더 좋아야 하는데, 출발만큼 말로가 훌륭하지 못했으니 실패인 것입니다.
또 능력만큼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힘을 자기 감정의 분풀이로 사용하였습니다.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 별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능과 능력을 가지고 공을 세우지 못한 것은 실패입니다.
기대만큼 보답하지 못했으니 실패입니다. 삼손에 대한 국가, 국민의 기대는 참으로 크고 바람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에 비해서 그가 보답한 일이란 너무나 빈약했습니다. 기생집이나 찾아 다니고 마침내 머리를 잘리우고 눈알마저 뽑히운 채 원수들의 노리개가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실망적입니다.
2. 실패의 세 가지 이유
(1) 소명 의식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또는 이스라엘 사사로 소명을 받았으나, 이 소명 의식이 희박하여 자신을 사사로 세우시고, 힘을 주신 그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2) 소명자로서 할 일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삼손은 사사로서 국가, 민족을 위해 일하지 아니하고, 자기 안일과 향락에만 도취하여 살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봉사할 시기와 자리를 모두 자기 쾌락 도모에 이용해 버린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3)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였습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었는데, 그것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생집에 드나들면서 그 신비와 하나님과의 약속을 들고 그 약속을 모두 파괴해 버린 것이 실패의 원인인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자로서 반성할 것은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소명 의식을 망각하고 산 적은 없는지 소명자로서 할 일을 다 했는지, 소명자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로 지켰는지 생각해 봅시다.
결론
실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머리를 깍이우고 힘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눈알을 뽑히고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원수들과 함께 최후를 마친 것입니다.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모든 생활은 경건하여야 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실수나 실패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적인 청지기상
벧전4:7-11
서론
성경에는 구약 시대부터 청지기의 제도가 있었고, 따라서 청지기라는 명칭을 사용해왔습니다. 신약에도 청지기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주인의 사업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어떠한 직책을 맡아 봉사하든지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청지기들입니다.
청지기는 정직해야 되고, 사욕이 없어야 되고 내 것처럼 아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상적인 청지기상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원망하지 않고 봉사하는 청지기
본문 9절에 "원망없이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봉사할 때에 얼굴을 찌푸리지 말고 환한 얼굴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1) 원망이란 무엇입니까?
주경학적인 측면에서 불만을 토하는 것이요, 불평을 드러내는 것이요,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잘못한 일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며, 남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며, 지도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질서를 파괴하는가 하면 평화를 말살하고 나아가서는 모든 일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2) 원망을 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본래 성격상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원망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마는 보편적으로 그 이유를 들어보면 어려운 일을 당하였을 때 원망하고, 자기 요구와 주장이 관철되지 아니하였을 때 원망을 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섭리를 미처 이해하지 못하였을 때 원망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과 집단이 출애굽 당시에 고라당이라고 하였습니다.
(3) 원망 없이 봉사하는 이상적인 청지기상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인내심이 강한 청지기요, 나의 뜻과 주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순종심이 강한 청지기요, 영적 안목이 밝아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이 강한 청지기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봉사하는 청지기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랑의 생각이나 방법이나 기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봉사해야 됩니다.
이 점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6절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받은 대로 봉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책대로 봉사하는 뜻이고, 분수를넘지 말고 봉사하라는 뜻이며, 조화를 이루어가면서 봉사하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직책은 몸에 붙은 지체와 독립성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주신 목적은 교회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봉사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건설하고 성장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는 청지기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1절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열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함부로 남용해서 아니되고, 사사로이 사용을 해도 아니되고, 어떤 사람들에게 이용이나 오용이 되어도 아니된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을 하되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봉사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으로 봉사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얼마만큼 말씀에 순종하느냐가 문제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봉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내가 얼마나 큰일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봉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봉사합니다. 내가 얼마나 큰 업적을 생산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 중심에서 성실하게 봉사했느냐가 문제입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볼 이상적인 청지기상은 원망없이 봉사하고, 하나님께 은혜받아 봉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봉사하는 청지기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이상적인 종으로서 쓰임을 받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상적인 교역자와 성도
행8:26-40
서론
유명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지상에 있는 모든 생물들은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발전해 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요, 생존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도 이 원리에 의해서 존재하고 발전해 나간다고 봅니다. 국가에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있는 반면에 이상적인 국민이 있어야 이상적인 국가로 형성, 발전되어 나아갈 것입니다.
교회도 이상적인 교회가 되려면 이상적인 사역자가 있어야 하고 반면에 이상적인 교인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1. 이상적인 사역자 빌립
여기 빌립은 이상적인 사역자상 3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지시만 따라 사역하였습니다.
26절에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니 그 길은 광야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자기의 생각도 의지도 주관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가사 지방은 블레셋 영토로서 그 길에서 어떤 환난과 박해가 있을지도 모르는 광야를 따라 순종한 사역자입니다(행20:23).
(2) 예수 그리스도만 가르치고 증거했습니다.
35절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구스내시에게 입을 열어 석가나 공자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가르치고 증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을 증거하면서 예수님만 드러내고 자랑하고 높이면서 자기는 결코 드러내어 소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상적인 사역자는 자기를 드러내어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3) 내시에게 세례를 주어 참 신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여기 구스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세례의 뜻이 밝히는 것과 같이 그가 죄사함을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상적인 사역자는 성전을 크게 건축하고 큰일을 벌이기에 앞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바로 전하여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2. 이상적인 교인 구스내시
구스내시에게서도 이상적인 교인상 3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예배를 존중히 여긴 교인입니다.
27절에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라고 하였습니다. 국가 공직에 바쁜 사람이 7천리 길이나 되는 예루살렘까지 찾아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간다는 것은 이 예배가 얼마나 가치있고 귀중한 것임을 인식하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2) 성경을 알기 원하는 겸손한 교인입니다.
31절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알기 원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사랑한 증거이며 따라서 신령한 은혜를 갈망하여 원거리상 여행 중에도 성경을 읽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본받을 만한 신앙생활이라고 봅니다.
(3) 예수님을 위해 헌신 봉사하려는 교인입니다.
36절에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먼저 세례받기 원했다는 사실은 그가 먼저 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께 헌신하고 예수님의 사역에 봉사하고자 하는 중심이 있었던 증거라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자기 나라에 교회를 설립하고 봉사했다고 합니다.
결론
이상적인 교회는 이상적 인 교역자와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빌립과 같이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수를 바로 증거하고 구도자에게 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는가 하면, 구스내시와 같이, 예배와 말씀과 교회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소명받은 자의 생활과 행복
마16:10, 18:10
서론
이 세상에는 행복도 많고 행복을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에 행복이란 금전이 많아서 행복하고, 지위가 높아서 행복하고, 지식이 많아 행복하고, 건강하고 자손이 많아 행복하고, 사업이 번창하여 행복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 즉, 복음의 사자로 피소(被召)되어 세움을 받는 그 일보다 더 행복되고 고귀한 일은 없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람이 자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자기 스스로 택하여 되는 것도 아니요, 많은 수양과 연구와 또 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뜻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지 아니하면 결코 피소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피소자에게 있어서 명심해야 할 행동 원리 몇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1. 피소와 분리의 생활
누가복음 14장 26절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먼저 분리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말은 분리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소명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특수한 민족으로서 선발하시기 위하여 우상 도시인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심으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명과 분리는 성경적 진리의 순서인 동시에 아브라함의 축복 생활에 열쇠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서를 따라서 고향과 친척을 떠나고 조카 롯을 떠나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고 아들 이삭까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으로 일로 매진하였던 것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을 것
마16:24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버리는 것은 곤란이요, 고통입니다. 주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세상도 환영치 아니하고, 골육친척(骨肉親戚)도 반대하고, 그리스도를 증오하는 세인들은 역시 그들을 증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하나님께 피소됨을 원치 아니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주님께 강제로 사로 잡혀서 주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정박하다가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예수께 사로 잡혀서 예수의 종이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잡혀서 결박을 당하고 채찍으로 몰아쳐서 부득이 그리스도에게 자기 자신을 빼앗겨서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말하고 가고 오고 순종하였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피소(被蘿)라고 합니다.
이 '피소'란 것은 내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외적으로 그 행동에도 자유가 없이 그리스도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소를 받을 때에 모세도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라고 하였고, 예레미야도 피소될 때에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라고 사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면 할 수 없이 주님의 종됨을 피하지 못합니다. 피하면 큰 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주의 종으로 피소된 자가 설 장소는 주님의 눈 앞입니다.
목사를 가리켜서 주의 일꾼 혹은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본래 종은 자기 주인의 얼굴 앞에 가까이 있어서 그 주인의 손을 주목하고 그 낯빛을 바라보며 그 명령에 언제나 대기하고 있어야 됨과 같이 우리 주님의 일꾼된 우리는 주님앞에서 주님의 명령을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18:10에 보면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주의 일꾼된 우리는 언제나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전(目前)에 살고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濫在)의식이 한 순간이라도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꿰뚫어 보시는 거룩하신 눈 앞에서 산다는 의식이 생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 서게 될 때에는 비겁해지고 능력이 쇠퇴하게 되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약화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눈밖에는 우리의 눈 앞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담대하게 살게 됩니다. 엘리야가 생살지권을 가진 아합 왕 앞에 섰지만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섰다"고 말함과 같이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은 담대하여 안중무인(眼中無人)이 되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께 소명 받아 일꾼된 목사들은 일생을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충성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과 분리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개가
딤후:6-8
서론
본문은 바울 사도가 순교의 최후를 각오하고 과거 일생을 회고하면서 승리의 개가를 부른 것입니다. 6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불원에 닥쳐올 순교의 죽음을 각오하고 피를 제단에 뿌리는 관제의 희생의 제물처럼 말한 것입니다.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무엇입니까?
1. 복음 전도의 선한 싸움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반대하는 자들에게 복음 전파는 신령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전9:16에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하여 바울은 전도자로 종처럼 부득불 할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하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3:17-19)"고 하였습니다.
2. 신앙을 위하여 악전 고투하였습니다.
요16:33에 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를 따르는 신자에게 환난이 있기 때문에 생긴 명사입니다. 환난, 곤란, 시련 이것들은 인간 세상에 어째서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 만사가 사람의 마음먹은 대로 되고 평안과 기쁨만이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세상에서 삶을 누려가는 동안 기쁨보다 고난과 걱정과 대적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와 목회자들에게는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와 목사들은 싸움에 대상이 죄악이요, 마귀요, 세상의 불의요, 불신앙과 미신 유혹 등등 싸움의 대상은 많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 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고 하였습니다.
3. 교회를 방해하는 악과 싸움
갈라디아서 1장 9-10절에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한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교회를 위하여 전투적인 각오로 한 말씀입니다.
그가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싸운 것은 바울의 삼회 순회 전도를 보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생을 교회를 위하여 몸바쳐 봉사하신 모든 목사님들도 바울 사도와 같이 교회를 위하여 땀과 피나는 눈물과 근심과 노력이 있는 것을 공인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할 만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한 국가의 국가 원수가 되어 국론을 바로 잡고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요, 또 하나의 장군이 되어 삼군을 호령하여 적군을 물리치고 국가를 평정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며, 학문을 공부 연구하여 청년들의 사상을 바로 지도하는 학자 생활도 보람있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세상이 못하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과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주고 위안을 주며 소망을 주는 교회에 유력한 일꾼이 되는 것은 사람으로 할 일이지만 신자로서는 더욱 할 일입니다.
결론
모든 교회의 목사님들의 선한 싸움의 노력으로 인하여 교회들이 질과 양으로 더욱 공고해지고 더욱 왕성해질 것입니다.
더욱 복음 전도의 선한 싸움을 싸우시고, 신앙을 위하여 악전 고투하시며, 교회를 방해하는 악과 싸우는 목사님들이 되셔야 하겠습니다.
목 자
성 경 활 용
1. 목자의 증류
(1) 선한 목자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2) 영혼의 목자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3)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
(렘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4) 못된 목자
(슥11:17)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5) 몰각한 목자
(사56:ll)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6) 삯꾼 목자
(요10: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2. 선한 목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1) 거 났다.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2)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요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 잃어버린 양을 찾는다.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
(4) 양들과 친밀하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이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렘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3. 선한 목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
(행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2)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다.
(행11:23)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4. 거짓 목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1) 자기 양떼를 버린다.
(슥11:17) 화 있을진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2) 위험이 닥치면 양을 버리고 도망간다.
(요10:12)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3)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사56:11)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자들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4)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않는다.
(렘10:21)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5) 자기만 먹고 양은 먹지 않는다.
(겔34:8)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의 무리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유1: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6)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아니한다.
(겔34:6)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7) 잠자는 자다.
(나3:18)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8) 양 무리를 멸하고 흩는 자다.
(렘23:1)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5. 거짓 목자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인정이 없다.
(렘50:6)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로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2)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사56:11)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3) 서로 다툰다.
(창13:7)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6. 거짓 목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1) 포도원을 훼파하고 분깃을 유린하고 황무케 함
(렘12: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2) 화가 임하게 된다.
(겔34:2)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아니하냐
(3) 하나님께서 싫어하셔서 끊으신다.
(슥11:8) 한 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4) 하나님께서 대적하신다.
(겔34: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7. 목자의 임무
(1) 양떼를 보호하는 것이다.
(시78:52) 자기 백성을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눅2:8)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2) 양을 쉬게 해 준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아1:7)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3) 숫자를 화인한다.
(레27:32)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4) 양과 염소를 분별한다.
(마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5) 가축에게 규칙적으로 물을 먹여야 한다.
(창29: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출2:16)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6) 망대를 세운다.
(마4:8)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7) 잃은 양을 찾는다.
(눅15:5)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8) 우리를 짓는다.
(민32:16) 우리가 이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삼상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8. 목자로서의 그리스도
(1) 성도를 보호하신다.
(살후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벧전1:5)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2) 성도는 그리스도의 양이다.
양은 목자에게 감사해야 한다.
(시79:13)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다.
(마10:6)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③ 양을 오른편에 둔다.
(마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④ 양의 이름을 불러 인도하다.
(요10:3)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을 먹이신다.
(사40:11)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⑥ 양을 구원하신다.
(슥9: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⑦ 흉악한 이리에게서 보호하다.
(행20: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 니하며
⑧ 양떼 같이 지도하신다.
(시78:52) 자기 백성을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관련원어풀이
1. dqenO 노-케-드
목자.
(왕하3:4, 암1:1)
2. rq/B 보-케-르
목자
(암7:14)
3. h[;r; 라-아
(1) 먹이다, 방목하다, ∼을 돌보다.
(창37:13, 민14:33)
(2) 양육하다, 먹이다.
(호9:2)
(3) 먹다.
(사5:17, 11:7)
(4) 방목하다, 풀을 뜯다.
(욥20:26, 미5:5)
(5)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잠13:20, 28:7)
4. y[iro 로-이-
(1) 목자의, 목자에 속한.
(사38:12)
(2) 목자, 목동.
(슥11:17)
5. poimhvn 포이멘-
(1) 양이나 가축을 돌보는 사람, 목자.
(마9:36, 눅2:8)
(2) 감독자, 다스리는 사람.
(요10:26, 히13:20)
(3) 기독자 모임(교회)의 감독자, 연장자.
(엡4:11)
6. poimaivnw 포이마이노-
(1) 먹이다, 양떼를 돌보다, 양을 지키다.
(눅17:7, 고전9:7)
(2) (비유적인 뜻으로)다스리다, 통치하다.
(마2:6, 계2:27)
(3) 양식을 공급하다, 보호하다, 양육하다.
(유12, 계7:17)
설교예화자료
눈보라 속으로 잘못 가르쳐 준 이야기
미국 동부에 혹심한 눈보라가 몰아쳐서 기차가 앞으로 나가기가 정점 힘들어졌습니다.
승객 중에 아기를 가진 한 여인이 있었는데 다른 기차역에 잘못 내리지 않기 위해서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한 신사가 그 여인이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길을 잘 압니다. 내리실 곳이 오면 알려드리지요." 기차는 예정된 코스대로 나아갔고, 그 여인이 내리려는 바로 전 정거장에 멈춰섰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십시오.부인." 하고 신사가 말해 주었습니다.
기차는 계속 달리 기 시작했고 이삼 분 후에 다시 멈췄습니다.
"이제 내리실 차례입니다. 부인, 어서 내리십시오." 하고 신사가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아기를 안고 신사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차장이 그 여인이 내리려고 했던 정거장 이름을 말했습니다.
"그 정거장은 지나지 않았소?" 하고 신사가 차장에서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엔진에 고장이 생겨서 수리하는 동안 잠간 섰었습니다. " 하고 차장이 대답했습니다.
"아뿔사," 하고 신사는 팔했습니다. "기차가 역 사이에 멈췄을 때 내가 그 여인을 폭풍 속에 내려주고 말았구나!" 후에 사람들이 아기를 안고 있는 그 여 인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잘못 인도하여 준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비극적인 결말을 낳는지에 대한 교훈입니다. 하물며 영혼을 잘못 인도한다면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 것이겠습니까?
나는 내 자신의 일을 듣기 원하는가?
어제 저녁 나는 선반에서 책을 꺼내어 겉장에 씌어진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설교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일요일에 두 번 교회에 가는가?"
아주 연로하신 나의 이전의 목사님이 이 말을 쓰셨을 때 나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설교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하였으며 내가 그에게 대학 친구인 앤드류 블랙우드가 쓴 「연설을 위한 준비」라는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손에서 책을 가져 가서 무엇이라고 쓰셨습니다. 나는 그분이 쓴 것을 읽고 무척 놀랐습니다. 그날 이후 설교를 하러 갈 때면 나는 그 질문을 가끔 해보곤 합니다. 그것은 나의 성직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리빙스턴의 선택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자로서 아프리카에 파견된 선교사 리빙스턴이 탐험을 계속하던 어느 날의 일이었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 마을의 추장과 토인들이 창과 칼을 들고 리빙스턴 일행의 앞을 막아 서면서 통행료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리빙스턴은 병에 걸려서 고열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곳을 통과하려 면 사람이나 창이나 소를 내라! 그러면 통과시켜 주겠다. "
그들이 사람을 요구하는 것은 리빙스턴의 부하들을 노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자기의 부하라고는 하지만 생사를 같이한 일행 중의 어느 토인을 내놓을 수가 없어서 밀림 속에서는 마치 생명처럼 여기는 소 한 마리를 내놓았습니다.
부하 중의 한 사람이 리빙스턴이 적에게서 협박받는 것을 보다 못하여 창을 들고 나섰습니다.
"나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이처럼 협박받는 것을 참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좋겠다."고 외치며 창을 손에 쥐고 적에게 돌격하려 하였습니다.
리빙스턴은 그것을 말리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너희들 중의 누구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다. 너희들의 생명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소 전체를 잃어도 좋다. 너희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데 필요한 때가 아니고는 함부로 싸워서는 안 된다. "
리빙스턴의 부하들은 리빙스턴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존경하고 갖은 신뢰를 다 바쳤으며 리빙스턴은 또한 부하를 사랑하되 마치 자식을 사랑하듯 그 생명을 아껴주었다는 것입니다.
리빙스턴은 부하들과의 그러한 인화에 힘입어 탐험과 사명의 놀라운 역사를 수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목동은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꿈을 친다.
(이어령)
목동이란 것이 없었다면 서양의 동화는 반 이상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목동이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은 양떼를 몰며 항상 그 눈이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바라다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동화 자체가 아니겠는가.
(이어령)
자기 자신의 충고에 복종하는 사람은 훌륭한 목자입니다.
(W.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별 다른 소문도 없었다. / 순찰을 도는 로마 병정들은/ 여전히 여유만만하고/ 양떼를 물고/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목동들은/ 무표정했다.
(서덕석/ 갈릴리 일기)
풀 깔린 넓은 들에 피리 불고 노닐다가/저물면 돌아와서 보리밥 배 불리고/ 도롱이 벗지도 않은 채 달빛 아래 잠든다.
(여암/ 목동)
아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 떨어질 염려가 없고/ 겸허한 사람은 교만을 두려워할 필요가없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리니.// 나는 내가 소유한 것,/그것이 적든 많든 그것으로 만족한다. / 주여, 나는 언제나 만족을 갈망하나니/ 당신은 항상 그것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존 번연/ 목자의 노래)
물안개가 번져오는 밤바다에 섰다/ 초혼의 몸짓은 사라지고/ 눈을 덮어오는 파도는/ 길잃은 양떼들이/ 목자없이 싸우는 피울음소리
(배명식/ 경포대에서)
목동이 돌아오네 돌아들 오네/ 도롱이와 삿갓을 어깨에 메고/ 먹을 것도 아울러 지고 있구료/ 서른 가지 털빛의 많은 소들은/ 제물로 쓰이기 부족이 없네
(시경)
녹초장제상(緣草長堤上)에 도기황독(倒騎黃犢) 저 목동아/ 세상 시비사(是非事)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아해 단적(短笛)만 불면서 소이부답(笑而不答)
(무명씨)
바람결 고삐 풀어 방목하는 신의 목장/ 어둠살 베어먹는 조각달 앞세우고/ 새벽은 홀로 오는가,/ 두 손 모은 사람곁에
(강호연/ 밤의 창가에서)
저기 저 산마루에 나는 천 번이나 머물러 서서/손에 든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아래쪽 골짝을 내려다 본다. // 풀 뜯는 양을 따르면/ 개가 양의 무리를 지켜 준다. / 꿈꾸는 듯한 마음으로 나도 모르게/ 나는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 한즉 목장엔 그득하니/ 곱디고운 꽃들이 피어 있다. //누구에게 주려는 생각도 없이/ 나는 꽃들을 꺾어 본다.
(J.W. 괴테/ 양치는 목동의 탄식)
목장의 샘물을 맑게 걸러서 나가련다. / 잠시 머물러 나뭇잎만 쓸어 주리라/ ‥‥내 오래 가지 않으려니- 너도 오려무나.// 어리디 어린 송아지 몰고 나가련다/ 새끼 송아지 어미 소 곁에 서면/ 혀로 할을 때마다/ 비틀거리는 그 모습/ 내 멀리 가지 않으려니- 너도 오려무나.
(R.L. 프로스트/ 목장)
황금의 날들은 흘러가 버렸네./ 저녁의 밤색 푸르른 빛이여./ 목동의 연한 피리 소리도 죽었네./ 저녁의 푸른 색 밤빛이여./ 황금의 날들은 흘러가 버렸네.
(G. 벤/ 원탑)
새벽이 오기 전에/ 풀밭 위의 목자들은/ 제각기 흩어져 소박하게 잡담하고 있었다. // 그때 그들은 목신이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몸소 내려오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아마 단순한 그들의 마음으로 열심히 생각한 것은/ 고작 그들의 사랑과 양떼뿐이었으리라.
(밀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남구만)
그 옛날 베들레헴의 착한 양치기들은/ 고통과 곤욕을 참고 견뎌낸 보람으로/ 한밤중 하늘 천사들의 노래를 들었고/ 복된 소식을 접할 수 있었거늘
(박화목/ 다시 아기의 탄생을 찾아서)
양떼구름의 우리에 부드러운 짚을 넣는다/노을 붉은 털을 반짝이며/ 그리운 노래를 부르는 양떼구름.// 오늘은 얼마나 먼 길/ 부드러운 목초를 찾아/ 굳어 진 발굽, 내려다본다. /늘 기다림의 그림 속에서/ 쓰러진 노을의 뒷모습./ 그 뒤의 구름 산맥에서 들리는/ 방울소리.// 구경 많아 먼 눈 파는/ 내 영혼의 목동을 만난다. / 하늘 저편 지나가는 양떼구름,/오늘밤 누울 자리를 위해/ 방을 소리는 쉬지 않고/ 언제까지 걸어야 하나?/ 그냥 따르고 있다.
(서정윤/ 목동)
설 교 노 트
잃어버린 양떼로다
렘50:6
서론
본문을 보면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작은 산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라면 당연히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고의적으로 곁길로 가게 하였으므로 잃어버린 양떼가 된 것입니다.
1. 하나님과 선민과의 관계
하나님은 목자시요, 이스라엘 민족들은 양이라고 한 관계성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원리에서 교훈하시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선민들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는 가장 은혜스러운 관계를 스스로 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참 목자가 아닌 이방우상을 숭배하여 돌아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고 가장 슬퍼하시는 일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목자는 어디까지나 양을 위하여 마음 하나뿐인데, 양 자신이 목자를 버렸으니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선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였고, 언제나하나님을 떠나 다른 길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배은의 자세인것입니다.
2. 잃어버린 양의 비유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 일백 마리를 키우는 목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한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양을 찾은 후에 즐거워서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과 더불어 즐거워하였다고 했습니 다.
여기서 그 양이 잃어버림을 당하였던 원인을 살펴보면 목자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양의 책임이 더 큰 것입니다. 즉, 목자를 신임하고 따라야 하는데 신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서 좋은 꼴이 있는 곳에 가서 마음대로 먹고 놀아보겠다는 나쁜 생각을 하고서는 혼자 몰래 이탈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양의 소행은 참으로 나쁜 것이고 길을 잃어버리는 불행은 양 스스로가 택한 셈이 됩니다.
3. 곁길로 가는 양떼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습니다. 목자가 자기 이름을 부를 때 목자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양떼를 곁길로 가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당시 목자격인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바른 지도를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가 곁길로 가고 있으니 양떼들도 자연히 곁길로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를 만나지 못한 양떼들은 결국 불행하게 되어 들짐승을 만나 그들의 밥이 되거나 죽음을 당하게 되니 그 목자 때문에 귀중한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의 책임이 무엇입니까? 자기 양을 잘 돌보아서 길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들 자신이 양떼를 돌보지 않고 다른 데 한 눈을 팔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 론
우리 하나님은 참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활동하는 목자들 중에는 그릇된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신령한 목자,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따라가야 축복된 생활이 영위될 것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요10:27
서론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는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그때는 겨울이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절기는 성전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모독된 후 성전과 제단이 다시 회복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을 에워싸고 질문하여 그를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하였으나 주님께서는 그 질문에 답하신 후 성경 본문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 선한 목자와 양
(1) 그들에 대한 묘사
성경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인류를 두 부류로 나누십니다. 즉 양과 염소입니다. 신자들은 언제나 선한 유익한 것에 비유되고 불신자는 언제나 나쁜 것으로 설명됩니다. 양은 일반적으로 함께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떼(flock)라고 말합니다. 양은 작은 동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작게 보이고 또 그들 자신의 눈에도 훨씬 작게 보이기 때문에 양이라고 불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 가장 해를 끼치지 않으며 조용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쉽게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바로 양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백성은 양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말이나 개를 밖으로 내쫓아 보십시오. 그들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찾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양은 이곳 저곳을 헤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양은 너무도 쉽게 우리에게 벗어나 길을 찾아 헤맵니다. 선한 목자에게서 눈을 떼어버렸기때문에 양들은 이 초원, 저 초원, 이 바위 턱, 저 바위 턱을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피조물입니다. 그들은 털로 우리 옷을 지어 입으며, 양에게는 인간에게 유익하게 쓰이지 않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양의 성격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손으로 힘써 일하여 궁핍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그들의 소유권
신자들은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소유권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내 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 된 자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양"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와 아들 사이에 이루신 언약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주어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라는 값진 희생으로써 자기 양떼를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한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것이 되었으며 시간 세계 속에서도, 실제적인 구속에 의해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양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날에 자기 자신을 그분께 자발적로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특별히 이 양들에 대해 그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선한 목자가 자기 양에게 주는 확신
(1) 그는 자기 양을 아십니다.
즉 그는 그들의 수를 아시며, 그들의 이름을 아시고, 또 그를 위해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린 바 된다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그를 다시 내려보내사 그를 데려오도록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양을 아십니다. 그는 그들의 수와 이름을 아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하여 특별하게 알고 계시며 또 그들을 특별하게 돌보십니다. 그는 세상에 오직 한 마리의 양만 있는 것처럼 그들을 세심히 돌보십니다. 그는 그의 성도들을 아십니다. 그는 그들의 모든 슬픔과 시련과 시험에 대해 잘 아시며, 그들의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또한 그는 그들의 내적인 부패를 아십니다. 그는 또 그들의 모든 방황을 아시므로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2) 그는 자기 양을 지키십니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붙드시므로, 아무도 그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떼가 빼앗김을 당하는 것은 항상 있는 일입니다. 마귀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 이 모두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아 내려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이 이 세 가지 예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내려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이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 낼 수 있도록 돕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양을 사랑이 넘치는 그의 보호 아래 맡길 수 있습니다.
결론
만일 성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양떼 가운데 속한 일이 없었다면 온전히 선한 목자께 자신의 영혼을 이끌도록 맡기십시오.
그러면 이미 그의 안에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목사이신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
요10:25-29
서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 비유하신 말씀은 구원사적 진리를 가르치는 말씀으로, 구약 예언의 성취이며 여러 곳에 언급되어져 있고(겔34장,시23편, 렘23장) 본 요한복음 10장에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의 예수님이신지 우리는 잘 살펴보고 본을 받아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1.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0장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플랫폼에 나가기 전에 개찰구를 통과해야 되고,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트랩을 통과해야만 되는 것처럼, 천국에 들어가려면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유일한 문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오직 하나뿐(Onlyway)입니다(행4:12). 이 문이야말로 신자의 활동을 형통케 하는 문입니다.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철학자들이 인생의 문을 철학쪽으로 내려하고, 과학자들은 과학 만능이 인생의 통로인 줄로 착각하며,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가 인생의 문인양 선전을 하지만, 모두 아닙니다.
신학자들 중에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의 '자율주의'의 문을 주장하고, 위기 신학자들이 내세로 들어가는 문을 그림자처럼 생각하고 세상으로 문을 열어놓고 있으나, 결국 세상 사람을 만들어 놓고 말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문으로 믿는 초자연적인 신학만이 양을 살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을 통과하되 다른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며, 삯꾼 목자와 비교하고 계십니다.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삯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함으로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양을 해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10:11-13). 그러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죽음은 빼앗긴 죽음도 아니요, 빼앗은 죽음도 아니며, 오직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생명을 내어놓고 희생물로 주신 죽음인 것입니다(요10:18).
그러기에 우리의 버림받은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는 그의 죽음으로써만 구원이 가능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참 구주로, 참 목자로 믿으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3. 영생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
본문 28-29절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며, 이 영생은 영원히 멸망치 않을 것이라 하셨고, 또 이 영생이 주님의 손에 있음으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의 불변성과 안전성을 말씀하심입니다. 양된 우리는 약하고 우리의 주변에는 이리떼들이 넘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이미 받은 영생도 우리의 힘으로는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은 어디까지나 선물이며(엡2:8), 이 선물은 받은 것으로만 안전할 수가 없으며, 지켜주심이 있을 때에만 안전이 가능한 것입니다(딤후1:12). 우리가 받은 영생도 그의 손에 있음으로 만유보다 크신 그의 손에서 우리의 영생을 빼앗을 자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주님은 참으로 선한 목자로 양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그분은 양의 문이 되시며,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십니다. 그리고 영생을 선물로 주실 뿐 아니라 또 그 영생을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목자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양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목자와 양
겔34:20-31
서론
여기 선지자 에스겔이 언급한, 목장은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목자들은 이스라엘 국가 민족의 지도자를 상징하고 목장의 양들은 이스라엘 일반 백성들을 상징한 교훈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 차원에서 교훈을 찾는다고 하면, 여기의 목장은 지상 교회를 상징하고, 목자는 교회 지도자들을 상징하고, 양무리는 일반 교우들을 상징한 교훈입니다. 이와 같이 이상 세 가지 실존은 유기적 생명체로서의 불가 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양무리에게 목장이란 없어서는 아니 될 생명의 안식처요, 보금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일반 동물들은 아무데서나 살아갈 수 있지마는 이 온유하고 연약한 양들은 목장이라고 하는 특수한 환경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명을 보존해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자신들의 생명 유지와 보존을 위해서는 오직 목장과 목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 목장인 교회와 영적 목자이신 교역자들은 없어서는 안될 유일한 보호처요, 보호자입니다.
1. 하나님께 합당한 목자
(1)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목자의 기본 자세는 목자로서의 자격이 갖추어지고 그 성품과 인격과 교양과 실력을 구비한 목자입니다. 그리고 목자로서의 책임 의식이 강한 목자입니다. 자기의 책임과 사명감이 투철해야 합니다. 그리고 직책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목자입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목자의 사역은 양들을 바른 진리와 신앙의 노선으로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양들을 어떤 환경에서라도 책임지고 보호하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양들을 바로 양육하여 살찌고 기름지게 하여 생산적인 양이 되게 하는 것이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양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물가로 인도하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목자는 양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에 나타난 문제를 고찰해 보면, 연약해진 양들을 강하게 하고, 병든 양들을 치료해 주고, 상한 양들을 싸매어 주고 쫓긴 양들을 돌아오게 하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붙들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든 목자가, 본문 23절에 다윗이라고 했고, 요10:11에 예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를 지도하는 목자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선한 목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양
본문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양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불미한 양들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양들의
기본 자세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 그 성품이 온유한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 성품이 겸손한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그 성품이 성실한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여 목자에게 잘 순종하고 따라가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양은 목장을 소중히 여기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목장의 귀중성을 인식하고 아이고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목장을 떠나지 아니하고 그목장을 자기의 안식처와 보금자리로 알아서 잘 봉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그 목장에서 공급하여 주는 생명이 꼴과 생수를 공급받아 힘을 얻어 강해진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양은 자기의 목자를 소중히 여기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목자를 중심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 목자의 음성을 따라 잘 순종하고 복종하는 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는 그 목자가 공급해 주는 생명의 꼴과 생수를 공급받아 생산적인 양이 되어 젖과 털을 공급하여 그 목장을 윤택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사적 측면에서, 한 목장인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양들은, 성품상 온유 겸손하여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화목하여 하나가 되어서, 목장과 목자를 아끼고 귀중히 여깁니다. 또한 목장 주인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목자이신 지도자들을 위로하며, 생산적인 양이 되어 그 목장을 여유있고 윤택하게 합니다.
결론
우리는 이 시대에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선한 목자가 되어서 양들을 바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양들이 되어 우리의 목장인 교회를 생산적인 교회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
겔34:1-31
서론
본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비유하고, 왕들과 지도자들은 악한 목자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기적으로 양에게 무관심하였기 때문에 양들은 야수,즉 이방인에게 먹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목자들을 벌하시고 양무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잃은 양을 찾으시고 상한 자를 돌아보시며 양육하십니다. 그리고 참 목자와 거짓 목자를 분간하십니다.
1. 악한 목자를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양에게 그리고 지도자들을 목자에 비유하셨습니다. 목자되는 지도자들은 국민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 목자들은 이 고귀한 본분을 떠나서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에 만 고개를 돌려 따라가고 양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 적군들에게 침략을 받아 그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짜 목자들과 충성하지 않는 목자들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요한복음 10장에서 삯꾼 목자로 비유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양은 목자를 따라서 좌우되는데 목자가 게으르거나 또는 자기 책임을 완수하지 않는다면 양만 희생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목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하게 되므로 돌이켜서 자신의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선한 목자
본문 11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라고 하신 말씀은하나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실 것을 고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 중에서 지도자를 택하시는 것보다 그가 친히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바벨론에서 본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예언하시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실은, 흩어진 양무리들을 모으시며, 좋은 꼴로 잘 먹이며, 좋은우리에 쉬게 하며 잃어버린 자, 쫓긴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돌보며, 살진 자와 강한 자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3. 양과 양 사이를 심판하십니다.
양과 양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양민들을 비유하는데 특히 숫양과 숫염소는 남들을 압제하는 멸망자들을 비유하는 것으로 그들은 살진 자와 강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파리하고 약한 양, 즉 평민 계급을 압제하고 착취하여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가 되사 그들을 먹이실 때에는 동포간에 약육강식하는 불의의 행동은 제거되고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시면 그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입니다.
결론
"내가 한 목자를 그들에게 세워‥‥‥‥라는 것은 이상적 목자, 다윗을 말하는데, 이 다윗은 메시아가 되실 예수님의 상징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세계 각국에 흩어진 양무리를 모으시고 그 무리 중에서도 악한 양을 제거하시고 한 무리를 만든 후에 이상적 목자를 세우시고 그 목자는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냇물가로 양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상적 목장의 축복 상태는, 땅에 화평이 있고, 비가 순조로워서 풍년이 되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123:1
서론
인간의 본능 중에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이 있는 이 소유욕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무엇을소유함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불평이 생기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없으신 분께로 가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여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부족함도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족함이 없으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1. 모든 것이 풍성하신 목자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는 것은 양을 키우는 책임을 먼저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 목자는 모든 것이 풍부하십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양에게 필요한 것을 다 구비하고 계시며,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공급해 주실 수 있는 풍부한 소유자이십니다.
우선 양떼가 먹고 마셔야 하는 푸른 초장의 꼴과 잔잔한 시내의 물은 양에게 필요 불가결의 2대 요소가 되며, 누워서 쉴 만한 안식처와 걸어나가야 할 길을 소유하시고 관리하시는 풍성하신 목자이시니 우리는 아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시편 23편 1-3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족함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알고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양에게 주시고자 하는 목자이십니다.
목자 중에도 욕심만 있는 목자는 사실은 양의 탈을 쓴 이리로 오히려 양을 해치려는 자이나, 선한 목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는 선한 목자이니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시는데 하물며소유한 것이 풍부하니 양에게 되도록 많이 주고자 하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심 같이 자기 목숨까지 주시려는 선한 목자께서 어찌 꼴과 물과 안식처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양들의 생명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육성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는 우리에게 계속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목자이시지 우리의 것을 탈취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3. 실제로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한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므로 양 자신은 어느 면에서든지 부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면에 풍족하기 때문에 언제나 만족합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부담스러운 염려나 근심, 걱정도 없고, 불안한 마음도 가지지 않습니다. 만사가 형통하고 매사에 풍성하여 그 마음이 날마다 즐겁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필요하고 넉넉하게 주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양은 행복에 도취되었으며, 참으로 사는 보람을 느끼고 양으로서 선한 목자 밑에서 자라고 있는 자기 자신을 무척 행복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모든 것을 소유하셔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목자 밑에서 부족함이 없이 행복하게 자라는 양의 모습을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의 생활로 비유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정 대부호이신 목자,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항상 기쁨으로 하나님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면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낳았다
고전4:14-15
서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영적으로 낳았으므로 그들의 아버지 격이 됩니다. 바울이 교회에 대하여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표시한 것은 여러 번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3절에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하였습니다.
또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절에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모뿐 아니라 목자, 스승으로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1. 목자로서의 바울
참된 목자는 그 양떼와 자기와의 사이에 아무런 간격을 두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로 말미암아 있는 것입니다. 목자의 인도에 따라서 먹으며, 안식하며, 자라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떼를 자녀같이 대할 수 있음은 양떼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물론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는 마땅히 주님의 피로 사신 양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양떼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시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감히 우리 인간들이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사랑인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몸소 체험하였기에 자신의 양떼들을 돌보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하신 것입니다.
2. 스승으로서의 바울
바울은 솔직하게 그 양떼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권면하여 그들을 바른 회개를 할 수 있도록 하려고 노심 초사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여 그들을 부끄럽게 하므로 지도자의 자세를 권위있게 나타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잘 선도하여 바로 깨닫고 스스로 회개하게 하려는 스승으로서의 아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스승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스승은 과연 몇 명이나 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스승된 자들은 그저 어떤 단편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그 삶 자체를 본받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3. 아비로서의 바울
본문 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일한 아버지입니다.
스승은 일만 명이라도 있을 수 있고 많은 스승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나 아비는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는 여러 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의 분쟁이 심한 교회였으나 그 교회를 설립한 분도 바울이요, 그 교인들을 영적으로 출생시킨 분도 역시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길러왔던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되어 곁길로 나갈 때 제일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하며 바로 잡아주고자 한 사람도 역시 바울이었습니다.
결론
바울의 이 같은 권면과 교훈은 자기 자랑이나 자세가 아니요, 대우를 받으려는 뜻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고린도 교인들이 믿고 순종하려는 아비같은 마음에서, 목자와 같은 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모와 같은, 목자와 같은 심정으로 잘 돌봐 주어야 하겠습니다.
목자의 두 막대기
슥11:7
서론
본문에 보니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새"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막대기의 의미가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 두 막대기
다윗의 목자시로서 유명한 시편 23편 4절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봉장을 말하는 것으로 "막대기"는 그 끝에 구부러진 갈구리가있어서 위험한 곳으로 빠져들어가는 양의 목을 걸어 당겨서 그 위험을 면하게 하는데 용이합니다. 그리고 또한 가늘고 길어서 양떼들을 채찍질하여 몰이하는 작용을 주로 합니다.
즉 구출용과 보호용, 지휘용과 격려용으로 요긴히 쓰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아무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서 막대기로 구해주시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알려주시며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안식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는 은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막대기 둘 중에서 하나는 은총이라고 하여, 목자와 양의 관계인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은혜의 관계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대등적 입장이 절대로 아니고 종속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굴종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은총을 베풀어서 혜택을 주고, 사랑을 베푸시려는 아량에서 자진하여 기쁘신 뜻대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런 값없이 기쁜 마음으로 자진하여 주시는 것이 은혜이니 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가장 귀중한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말고 항상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양들은 언제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목자의 은혜로운 음성에 기뻐하며 따라가는 양떼로서 살아야 합니다.
3. 하나는 연락이라고 했습니다.
연락이라는 것은 유대인과 같은 유대인 사이에 형제적 연합을 배양하려는 사역을 상징합니다. 한 피 받아 한 동족인 유대인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동족 상잔으로 남북이 분열되어 원수아닌 원수, 외국인 아닌 외국인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막대기는 연락이라고 하여 연합 운동을 일으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둘로 나누인 것을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17-19절에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겼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에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목자가 막대기 둘로 양을 구출하고 선도하는 것이 목자의 임무이고 책임입니다. 목자는 사랑으로 자기의 양떼를 보살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 백성을 끝까지 목양하여 온전케 하시려고 지금도 노력하시고활동하십니다.
내 양의 목자가 되리라
겔34:15-16
서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시편 23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만고의 명작시로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윗이 자기 경험에서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양의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1.평안히 쉬게 하십니다.
본문 15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있게 할지라"고 하였습니다. 즉 양들로 평안히 쉬게 해 주시는 목자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또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시편에 말씀하셨으니 싱그러운 푸른 초장에서 마음놓고 꼴을 뜯어먹으며, 아무 거리낌없이 이리저리 뒹굴면서 쉴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양에게 이보다 더 좋은 휴식처와 안식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2. 잃어버린 양을 찾으십니다.
누가복음 15장 4-5절에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로 잃은 양을 찾는 비유입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결은 우리 안에 있는 양, 즉 잃어버리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더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간절함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잃은 양을 위한 목자의 근심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 목자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잃은 자를 찾으십니다.
3. 고쳐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쫓긴 자를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로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라고 하셨으니 목자는 상하고 병든 양을 고쳐 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 12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로서 양되는 우리들의 영혼의 병을 고쳐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힘쓰십니다.
의사는 병자의 병을 바로 진단하여야 옳은 치료를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심령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도 친히 치료하십니다.
4. 잘못된 양도 다스리십니다.
본장 20-21절에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살진 양은 교만하고 불순종하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남을 해롭게 합니다. 그러므로 나쁜 양을 잘 다루어야 하는데 권징의 원리는 멸하는 것과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멸하고 영혼은 먹여 살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점하여 행하는 것이 귀한 목자의 사명입니다.
목자는 자기 양떼 가운데서도 좋은 양과 나쁜 양을 가려내어 잘 다스립니다.
우리 목자되신 주님께서도 자기의 양떼 가운데서 나쁜 양을 가려내시고 잘 지도하시며 다스리십니다.
결론
여호와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참목자이십니다. 잘 쉬게 해 주시고, 잃은 양을 찾으시며 찾으신 다음에는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병든 양을 고쳐 주시고, 나쁜 양은 바로잡는 진실하신 목자이십니다.
이러한 목자에게 속해 있는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이 그에게 바쳐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자
요10:1-18
서론
본문 말씀은 목자와 양의 비유로서 우리의 진정한 선한 목자되시는 구주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두시고 한 말씀이십니다. 선한 목자의 자격을 가지신 예수님은 겸손과 희생으로 잃은 양을 찾아오셔서 앞서 가시면서 음성으로 양의 이름을 부르시사 인도하셨습니다(요10:1-6). 또 선한 목자의 직분으로 오신 예수님은 목장 입구의 진리와 중생과 영생의 문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장에서 구원과 공급과 생명을 주셨습니다(요10:7-10). 나아가서는 선하신 목자 예수님은 삯꾼 목자와 같이 자기를 위해 일하다 양을 늑탈하고 흩트는 목자가 아니라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고 유모와 같이 사랑하시는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1. 모든 인생은 다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세상은 진실로 길 찾기 힘든 황무지입니다. 참으로 악마가 부르짖는 사막 같은 세상에서인간은 고생합니다. 그래서 목자없는 양은 고생하여 지치고 찢겼습니다. 가시덤불과 낭떠러지, 그리고 악한 이리들에게 이리저리 찢기워서 말할 수 없이 방황하며 고생합니다.
목자없는 양은 유리 하고 흩어지고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어디 가야 좋을지 방향도 목적도 못 찾습니다.
양이 이렇게 고생하고 유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양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몸도 마음도 약합니다. 그리고 무지하여 어디를 가야할지 판단을 못합니다. 양은 무력하여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거나 자기가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하고, 목자가 인도해야 하며 또 목자가 먹이를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 밑에 있는 양은 항상 행복하지만 악한 목자 밑에 있는 양은 불행과 굶주림이 따라오고 위험과 죽음이 기다리는 법 입니 다. 오늘 양과 같은 우리 인생은 이미 길을 잃고 광야를 헤메며 상하고 찢긴 자들이었으나(벧전2:25), 그 중에서 특별히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시는 구주 예수님께 돌아와 오늘의 기쁨을 얻은 것을 찬송해야 하겠습니다.
2. 선한 목자되시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1) 주님께서는 악한 목자 즉 삯을 위하여 일하는 거짓 목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겔34:7-14참조).
거짓 목자는 이기적이며 자기 중심이어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기 위해 일하고, 자기희생으로 일하지 아니하고 자기 장식을 위하여 일하며, 표면적으로 신성하나, 내면적으로는 이기심과 세욕적 목적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없고 항상 무엇이나 미움과 시기 질투에 찾고 양떼에 대하여는 무관심합니다. 그것은 인간애에는 희생으로만 나타나고 진정한 사랑은 전투적이며 무사적 행동으로 순화되는 법인데 이 숭고하고 순정적인 사랑이 상실되었으니 만사가 야비하고 무가치하고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짓 목자는 자기 책임인 잃은 양에 대하여 안타깝게 찾는 힘씀이 없습니다. 지금도 광야길, 벼랑길, 낭떠러지에서 길잃고 헤매며 쓰러져 신음하는 양 같은 인생들의 부르짖는 영혼들의 소리(벧전2:25, 눅15:4, 사53:6, 겔34:6)에는 냉정하고 무관심하며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아 세상에 오셨습니다(눅19:10).
냉담하고 무관심한 황야 같은 세상에 잃은 양을 찾아오셨고 이유 없이 오만한 인생들에게 찾아오셨고 오늘 황량한 죄악으로 어두워지고 무감각해진 문등이 같은 인간의 심연을 향해 찾아오시사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파해주셨습니다(사61:1-3, 눅4:14-44).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오만과 냉담, 완고하여 무관심한 심령들, 배반과 반역의 인간들의 죽은 영혼에 자신이 대신 죄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사 생명의 피를 쏟아 부으시고 거룩하고 겸손하신 사랑의 피를 부어 풍성한 생명을 공급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힘입어 오늘도 새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3.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바로 따라가야 겠습니다.
(1) 진정한 교회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경청하며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그 말씀 진리만을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여 영혼 구원을 위하여 전심 전력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시대적 조류에 초연히 서서 진리를 파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경청하는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죄와 불의를 뉘우쳐 회개함으로 개개인의 심령이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른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를 택하고 내가 그 교회를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들어 목자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신앙적 지도를 받아야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바르게 따를 수 있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적 지도는 오직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요16:13 -14). 진정한 헌신적 교역자의 영적 지도는 내 영혼이 주님께로 향하는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바른 교역자를 찾아 영적 지도를 받음에 있어서 먼저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요일4:1). 진정한 하나님의 종은 먼저 자신 신앙 인격에서 항상 구원의 기쁨이 있어야 하며 언제나 진리의 말씀만을 전하는 자라야 하며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양떼들인 성도의 안전을 기해야 참 하나님의 종이라 하겠습니다(빌3:1-3).
결론
모든 인생은 다 양과 같이 어리석은 존재들이므로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목 적
성 경 활 용
1. 목적하는 자의 의지
(1) 자기의 의지
(행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눅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 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2) 하나님의 의지
(엡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엡3:ll)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2.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낸 목적
(1) 대상-성도들
(롬16:25)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 시기-창세 전
(요17:24)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3. 하나님의 은혜 주심의 목적
(엡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약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4. 목적의 이유
(1) 목적이 있어서
(수22:24)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2) 화평한 목적
(왕상2:13)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3) 악한 목적
(시64:5)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4) 경계의 목적
(딤전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5) 모든 목적을 이루기 위함
(전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관련원어풀이
1. tevlo" 텔로스
(1) 끝, 결말, 어떤 일이 미치는 한계, 정지.
(눅1:33, 고전10:11)
(2) 결국, 마침내.
(마10:22, 눅18:5)(3)
(3) 끝까지.
(고전1:8, 히6:11)
(4) 망하다.
(막3:26)
(5) 끝, 계속이나 연속의 마지막.
(계l:8, 21:6)
(6) 어떤 일의 마쳐진 것, 마침, 결과, 마지막
제비, 운명, 숙명.
(마26:58, 히6:8)
(7) 모든 일이 관련된 결말, 목표, 목적.
(딤전1:5)
(8) 세금, 관세.
(마17:25, 고전10:11)
설교예화자료
예수는 삶의 진정한 가치
빅톨 후랑켈 부부가 나치 독일에 체포되어 각기 다른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짐승같은 취급을 받고 수없이 죽어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하루 세 끼의 밥을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짐승 취급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 "삶에는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면 인생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가치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디에서 자기 삶의 가치를 찾아야 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것에서도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었으나 단 한 가지 아내를 다시 만나 그동안 못다한 사랑을 해주는 데서 가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포로 수용소에서 살아 나가 아내를 만나 사람의 즐거움을 안겨주어야겠다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목적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숱한 괴로움과 슬픔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곧장 아내를 찾아보았으나, 그의 아내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이미 죽고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던 그는, 오직 아내를 다시 만나 사랑하겠다는 생각을 삶의 목적으로 살았다가 그 후 영원한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 때문에
나는 5년 동안의 초년 기간과 41년간의 목회 기간을 거친 나이든 복사로서 젊은 동역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나는 첫번째 목회 시절 때 비평을 듣는게 두려워서 떠났습니다. 나중에서야 그것은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조직에서 한 사람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지속적으로 계속될 때,그것은 사람들에게 문제 의식을 갖게 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모두들 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마음속에 개구리 농장'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 농부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작은 연못을 팔기 위해 그것을 "개구리 농장"으로 선전했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좋은 황소 개구리들로 가득찼다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어떤 유망한 구매자가 나타났는데, 그는 농부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어느 따뜻한 저녁 늦게 연못으로 가보았습니다. 역시 연못 속에서 들려오는 개구리들의 울음 소리는 훌륭했습니다. 구매자는 흡족해하면서 농부와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구매자는 개구리를 잡아 시장에 팔기 위해 연못의 물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연못의 물이 다 빠졌을 때, 그 훌륭한 개구리들의 합창 소리는 한 마리의 늙은 황소 개구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무척 놀랐습니다.
깨끗한 채로 들어온 비둘기
내가 어느 날 오하이오 주의 마실론에 살았을 매 한 친구가 나를 그의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65마리의 비둘기를 키우고 있었고 그들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여 주었습니다. "이 새를 보게, 이 새는 세인트루이스에서 마실론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날았다네."
"한 번도 쉬지 않고? 자네는 매우 바보군. 자네는 새와 함께 있지 않았네. 그런데 어떻게그것을 알 수 있는가? "라고 나는 물었습니다.
"아, 이 친구 롤로프(Roloff)야, 아는 방법이 있지, 이 새는 깨끗한 채로 돌아왔네."
"무엇이라고? 깨끗한 채로 돌아왔다니? "
"이 새가 돌아왔을 때 밭에는 옥수수 찌꺼기도 진흙도 없었다네, 뿐만 아니라 쉬느라 어디에 앉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네. 이 새는 깨끗했지. 하루 종일 날은 거야, 이 새가 생각한 것은 단지 한 가지였지. '나는 집에 가야 한다. 나를 기다리며 뒤뜰에 서있는 누군가가 있다. '라고."
버논(Vernon)은 계속 말하였습니다. "이 친구 롤로프야, 나는 비둘기가 집에 돌아올 때마다 기쁨을 느낀다네. 나는 뒤뜰에 서서 시계를 바라보고 하늘을 쳐다본다네. 나는 이 새가 어떤 길로 다른 새들을 이끌고 올지를 안다네. 하늘을 보면 피곤에 지친 날개들이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지. 곧 이 새는 땅에 내려서고 나는 이것을 새집에 집어넣는다네. 그리고 이 새에게 많은 모이와 물을 준다네."
어록·시·묘사
목적없이 행동하지 말라. 처세의 훌륭하고 놀라운 원칙은 명령하는 것 이외의 행위를 하지 말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그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고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기보다도오히려 그것을 억제하려 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J.S. 밀)
인류의 목적은 휴식이 아니고, 지적 도덕적 완성이다.
(르낭/ 과학의 미래)
목적이 없이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 목적이 있더라도 그것이 낮은 것이라면 역시 위태롭다. 왜냐하면 목적이 희미하거나 있어도 낮은 것은 죄악에 가까이 서 있기 때문이다.
(J. 워너메이커)
목적이 멀면 멀수록 더욱더 앞으로 나아감이 필요하다. 성급히 굴지 말라. 그러나 쉬지 말아라.
(G. 마치니)
생활의 목적은 자기완성에 있고, 그리고 불사의 영(靈)의 완성은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다.
(L. N. 톨스토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생의 큰 목적은 지식이 아니고 행동이다.
(A.L. 헉슬리/ 기술교육)
사람은 적어도 인생관으로부터의 일생의 진로를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모든 행동을 자기의 정한 바 일생의 진로에 어긋나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이 값있고 보람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목적이 광명 정대한 양심상으로부터 전환되지 않는 한에는 모든 것을 불고(不顧)하고, 다시 말하자면 최귀(最貴)한 생명을 도(睹)하여 그 앞에 횡재(橫在)한 마(魔)와 적을 퇴치하여가면서 예정한 목적지로 돌진하는 것이 사람다운 일이다.
(한용운/ 조선청년에게)
용도의 목적을 잃은 낡은 물건들은 다시 순수한 원소(元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아무 일이나 처음에는 어렵다는 속담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일지는 모르지만, 보다 일반적로는 아무 일이나 처음에는 쉽다. 최후의 단계에 오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렵고, 이것을 오르는 인간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J.W.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일관하여 변하지 않는 목적을 갖는다는 것만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많은 경우 행복한 인생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의 하나이다. 그리고 일관하여 변하지 않는 목적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주로 일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B.A.W. 러셀/ 행복론)
목적은 반드시 달성되기 위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표준점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J. 주베르/ 팡세)
전체적 파멸을 회피한다는 목표는, 모든 다른 목표에 우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A. 아인슈타인/ 만년에 생각한다)
항상 바람직한 목적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한, 최후에는 반드시 구함을 받는다.
(J.W. 괴테/ 파우스트)
밤새도록 가도 문 못 들기. < *힘껏 하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함을 이름>
(한국 속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오랜 인내를 하는 것보다도 눈부신 노력을 하는 편이 아주 쉽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강남 천자(江南天子)를 바라야 제 고을 좌수(座首)나 돌아온다.
(권상노/ 향상하는 길)
사람은 어떤 목적을 가짐으로써만 이 스스로 크게 된다
(J.C.F 실러/ 바렌슈타인의 진영)
그대 무엇이든 목적을 잊지만 않으면 잘못 또한 없으리라.
(경외서)
「‥‥우린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 가야하며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어디를 우리가 간단 말이냐?」「난 몰라. 그러나 어쨌든 우린 가야 한단 말이야.」
(J. 케루액/ 노상에서)
지금 어떤 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지점은 다 숭고한 목표에 통할수 있는 출발점인 것이다. 당신이 서 있는 그 환경은 당신의 출발점인 것을 알라. 마음이 견주는 것이 높으면 누구나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그 사람이 진실로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독자적인 아름다움 일 뿐 아니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 아름다움을 비춰주게 된다.
(J. F. 밀레)
서천에 경 가지러 가는 사람은 가고 장가들 사람은 장가 든다 < *서로 같은 목적으로 같이 동행하다가도 드디어 변하여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여 버림>
(한국 속담)
고결한 목적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에서 사람들은 말 못할 잔인한 행위를 해 왔습니다.<*1963년 12월 5일, 워싱턴에서의 연설>
(J. W. 풀브라이트)
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게도/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 목적위의 목적이다.
(김현승/ 고독한 이유)
아내없는 처가집 가나 마나. <*목적하는 것이 없는 데는 갈 필요가 없다는 뜻>
(한국 속담)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만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지름길이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설 교 노 트
위엣 것을 찾음
골3:1-4
서론
본문 1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에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랫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는 성도가 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사람이란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냐에 따라서 그의 사상이나 인격, 윤리, 그리고 운명도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엣 것에 목적을 두고 그것을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위엣 것을 찾으라는 의미
우리가 공통적으로 찾아야 할 위엣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의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신령한 은총과 축복과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영원히 변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영원히 의로운 것이요, 영원히 거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랫 것인 이 땅의 인생도 변하고, 인간의 역사나 문화도 변하지마는 예수 그리스도는 변하지 아니하십니다(히13:8).
아랫 것인 이 땅의 인생이나 역사는 불의할지라도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아랫 것인 이 땅의 인생이나 역사는 유한하고 시시하고 추악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영원히 깨끗하고 순결하신 분이십니다. 이리하여 하늘나라 보좌에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영광이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였으니 찾는다는 뜻은 사모한다는 뜻이요, 요구한다는 뜻이요, 취하려 한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2. 위옛 것을 찾는 이유
우리가 아랫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위엣 것을 찾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중생한 성도는 이 세상의 것으로는 만족하지도 못하고 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위엣 것은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는 것 중에 가장고귀하고 가치있고 보배로운 것은 아래에 있지 않고 전 하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것은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하늘의 것을 찾아 매일 달음질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분부와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우리 성도들에게 아랫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시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성도들은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3. 위엣 것을 찾는 비결
우리 성도들이 위엣 것을 어떻게 찾는지 그 비결과 방법을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골3:2-3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생각한다"는 헬라어 낱말은 '피로네오' 라고 하는데 그뜻은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곳으로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방향을 하늘나라로 돌려놓아야 하고, 육신의 생각보다 성령의 생각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바울은 롬8:5-8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각은 사는 것이요, 하나님과 친근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위엣 것을 찾는 방법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골3:3).
결론
이와잘지 위엣 것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 성도는 가장 고상하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예수의 초림 의의와 목적
요1:1-14
서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신 역사적인 사건은 어떤 훌륭한 사람 하나가 출생되었다는 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들을 위시하여 정치가, 문인, 예술가들이 출생하여 인간 문화사에 큰 유업과 유산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은 이러한 사람들의 출생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첫째로 혈통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인간의 부정 모혈에 의하여 출생하였으나 예수님은 성신의 권능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셨고, 둘째로 양상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이 세상에 출생하였다가 이 세상에 안장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가 하늘나라로 가셨고, 셋째로 목적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을 위해 살다가 죽었으나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탄생하신 점이 다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탄생인 동시에 신비 중 신비요, 기적 중 최대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1. 예수 초림의 의의
예수님의 초림은 다른 말로, 예수 탄생 혹은 '도성인신'이라고도 합니다. 그 의미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3절에 그 본성을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으로 "태초"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 존재의 영원성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둘째는 지위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존재했다고 하였으니 이는 참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역적으로 이 말씀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하였으니 기능적으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 자체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친히 강림하신 의의는 무엇입니까? 성경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1) 하나님의 참 사랑을 인간 세상에 실현하시는 사랑의 극치라고 하였습니다(요3:16).
(2)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 세상에 성취시키는 새 역사라고 하였습니다(창3:15).
(3)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구원 계획의 실천인 것입니다(마1:21).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의는 위대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 인간들에게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주시는 것입니다.
2. 예수 초림의 목적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는 목적은
(1) 인간 세상의 시기와 질투와 증오를 없이 하시고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2) 인간 세상의 분요와 불화와 분쟁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3) 인간 세상의 거짓과 의식과 위선을 종식시키고 참과 진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4) 인간 세상의 부정과 불의와 죄악을 종식시키고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5) 인간 세상에 불안과 비애와 고통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위안과 평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6) 이 세상에서 사탄과 사망의 권세를 파멸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의 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사역을 인간 역사 속에 실천하시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의도와 목적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 보여 찾아오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고 ② 하나님을 찾아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들과 동거 동재하시기 위해서이고 ③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속하사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소유케 하시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
이를 위해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떠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 예수님은 최대의 고난이요, 희생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바로 경배하고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
요19:17-22
서론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처형한 십자가 형틀에 의 미가 있는 것이 아니 라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의 진정한 종교로서의 기능과 생명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깊은 진리와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역사적 의미
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극한 처형을 받아 죽으셨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나라의 가장 극한 처형은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법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은 죄수 아닌 죄수로서 가장 극한 형벌을 받아 죽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죽음으로 죽으셨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에 로마인들은 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해 죽는 죽음을 가장 참혹하게 생각하며 제일 무서워했고 심지어는 말하기조차 꺼려했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참혹하게 죽으셨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죽으셨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인들은 비천한 노예들이나 흉악한 중법자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을 하였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러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치욕적 인 죽음으로 죽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꺼려했고, 헬라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어리석게 여기었고, 로마인들은 이 십자가에 대해서 멸시하고 천대해왔습니다.
2.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와 목적
어찌하여 거룩하신 예수님 이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고, 어리석게 멸시하고 천대하는 그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그 이유와 목적을 잠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일반역사가들과 성서학자들의 견해는 첫째, 유대인의 종교를 비판하고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해 죽으셨다고도 하고 둘째, 유대인들을 로마 식민지 학정밑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혁명을 일으켰다가 그만 실패하여 죽으셨다고도 하고 셋째, 종교적인 차원에서 마귀와 더불어 싸우시다가 마귀에게 패배당해 죽으셨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견해나 주장은 비성경적인 잘못된 궤변이라 하겠습니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역사 속에 성취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요6:38-40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뜻은 보내신 독생자를 믿어 영생을 얻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이유는 마귀의 권세를 파멸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53:4이하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삼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결론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나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바로 지는 길은,
(1) 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아가는 길이고,
(2) 악한 마귀의 권세를 파멸하는 길이요,
(3) 나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길이 됩니다.
신앙의 행진
히10:32-39
서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앞으로 전진할 뿐이지 후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시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소원이며 명령이기 때문이요, 우리 신앙인들의 본분인 동시에 영원히 사는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 신앙 행진의 의미와 방법
신앙이 살아 있는 신자는 그의 신앙생활을 보면 언제나 발전하고 향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생명을 상실한 신자의 생활은 후퇴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행진이라는 것은 부패한 세상에 속화되지 아니하는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생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에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 세상을 위주해서 이 세상 형편을 따라 세상 방법으로 속되게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 인격과 생활이 접점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3-24절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귀의 유혹과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던 옛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를 혁신하여 새롭게 살아가는 양상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 인격과 생활이 힘있게 발전하고 향상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장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과 같을 것이요 달음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상에 있어서 주일성수도 못하던 자가 주일 성수할 수 있고, 전도 못하던 자도 전도할 수 있으며 십일조 못 받치던 자도 십 일조를 바칠 수 있는 힘 있고 활발한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2. 신앙 행진의 이유와 목적
여기 히브리 기자는 우리 신앙 행진의 이유와 목적을 몇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총과 상급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히10:36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2) 신앙인의 본분인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히10:38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 우리 신앙인들의 구원 완성을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9절에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앞서 가신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상급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구원 완성을 위해 "모든 고난을 참고 견디어 왔고(히10:32)," "모든 사람에게 조롱과 핍박을 감수해 왔고(히10:33)", "이 세상 산업을 빼앗기고 투옥 당함도 사양치 아니했다(히10:34)"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앙의 후퇴를 경계해야 합니다.
결론
신앙과 구원의 길에서 낙오자가 되는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이요, 이 세상에 속화된 상태요, 신앙상 회의와 방종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앙의 행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 줄을 끊어 버리고,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힘찬 행진을 해야 합니다.
소원 성취의 비결
요14:12-18
서론
사람은 누구에게나 다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 성취를 위해서 사람은 활동하고 노력합니다. 그 소원이라는 의미는 우리 인간들의 욕망, 희망, 이상이라고도 하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목적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소원 성취는 우리 인간들의 이상 실현인 동시에 목적 달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공이요, 행복이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 성취의 비결에 대해서 예수님의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위력과 권위를 믿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을 바로 인식하고 깊이 믿게 하려는 의도라고 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1)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마1:21).
이 예수님의 이름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행4:12). 예수는 죄를 사유해 주시는 이름이요,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이름입니다
(2) 인생의 문제와 요구를 성취시키는 위력이 있습니다(행3:6-7).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문제와 욕구를 해결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은과 금의 위력보다 위대하고, 앉은뱅이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한 말씀은 예수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후에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나 얻을 수 있고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소원 성취와 만사형통의 비결입니다. 그 실증으로 솔로몬은 지혜를 얻었고, 한나는 아들을 낳았고, 엘리야는 비가 내리게 했습니다.
2.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주님이 사랑하고 주님이 나타나 무엇이나 주시고 무엇이나 가능케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람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능력의 주님과 함께 하시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빌4:13).
또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나타내신다고 했습니다(요15:21). 이것이 소원 성취의 비결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의 원조를 받는 비결입니다. 계3:10은 "내가 나의 인내와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케하리라"고 하였습니다.
(1)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2)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의 모든 일을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의 계명은 우리의 생활의 기초요, 지침입니다
결론
우리는 소원대로 성취되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또는 무슨 일에나 성공이 없다고 실망하고 불평하기에 앞서 내가 얼마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는가를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참으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었는가 반성해 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거짓말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원 성취의 비결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길이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니 기도하면서 말씀을 지키어 소원 성취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 길이 신앙인의 바른 길입니다.
출교의 목적과 특성
고전5:11
서론
사도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는 초창기에 성도의 숫자가 많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해 유명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났을 때에는 심각한 무질서와 타락이 성도들간에 만연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너무나 가증스러운 죄에 빠지는 것을 보고 바울이 책망하였습니다.
1. 출교의 특징
출교는 유형 교회의 교인으로서 어떤 불미스러운 사유로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되는 징계로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형벌입니다.
출교에는 고통스런 징계가 따른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2:6에서 그것을 벌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출교당한 고린도 교인에 대하여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출교는 두려운 고통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정해 놓으신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 출교는 지금까지 누렸던 여러 가지 혜택을박탈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회에서 내쫓는 것으로 표현합니다(요삼10). 출교시키는 징계는 하나님 백성의 특권을 누리는 데서 제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고전5:5에 사단에게 내어 줘 버린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출교가 얼마나 단호한 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단에게 내어 준다는 의미는 사단의 영역으로 내어 쫓아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어떠한 교제도 나눌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출교의 형벌이 가해질 때 우리는 그 벌의 집행자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벌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서 행해지며 성경의 명령에 의해서 내려집니다. 그러므로 출교의 벌이 임할 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셔서 직접 집행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2. 출교의 대상자
중대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주변의 성도들을 시험에 들게 하므로 정당한 규율하에 죄를 고백하게 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 바로 이 출교의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교인도 출교의 대상자에 들어가는데 그들은 언제나 불순종의 삶을 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행, 우상 숭배, 술취함, 탐람, 후욕, 토색과 같이 중대한 죄를 범 한 사람들을 엄히 책망하도록 했습니다. 롬16:17에서는 분쟁을 일으키고 거 치 게 하는 자를, 살후3:14 에서는 "이 편지에 한 말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를 교회가 출교시켜야 한다고 명하고 있습니다.
3. 출교의 목적
(1) 교회의 순결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입니다.
출교의 의도나 목적의 하나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 의식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고전5:6에서도 이 목적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중대한 죄인을 묵인해 둘 때 교회나 예배 의식이 더럽혀지며 성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빛이 발하지 못하여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다른 성도를 죄악에서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출교의 대상인 족인을 책망하지 않으면 다른 성도들도 동일한 죄를 짓도록 유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책망은 더욱 어려운 영역이 되고 맙니다. 이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에서는 응당한 형벌을 가하도록 되풀이 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신13:11).
(3) 그들 스스로 변화되어 그 영혼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처음에는 죄의 형벌로서 온유한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출교라는 가혹한 징계로 그들의 조리를 깨닫게 하고 수치와 모욕을 알게 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제명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사실인가를 깨닫게 해야 합니다.
결론
본문에 기록된 징계는 성경에서 말한 엄격한 규율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들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율들을 순전히 지킨다면 우린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무관심
성 경 활 용
1. 선한 무관심
(1) 칭찬에 대해
(갈1:10)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물질에 대해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2. 악한 무관심
(1) 잃어버린 양심에 대해
(마27:4)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관련원어풀이
1. jv'q; 카-솨흐
(1) 단단하다, 어렵다, 마음을 강퍅케 하다.
(사63:17)
(2) 거칠게 취급하다, 여기다.
(욥39:16).
2. lm'j; 하-말
동정하다, 측은한 마음을 가지다, 나누어 주다()와 함께 "무정"의 뜻.
(욥6:10)
3. a[storgo" 아스토르고스
천성적인(본능적으로), 사랑이 결핍된, 친족에게 사랑이 없는.
(롬1:31, 딤후3:3)
설교예화자료
일년 동안의 기다림
어느 날 한 여인이 찰머스 박사를 찾아와 말하였습니다. "박사님, 거는 우리 아이를 구세주에게로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수차례에 걸쳐서 얘기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박사는 그녀가 지혜가 부족한 것이라 생각하고 "제가 직접 당신 딸과 얘기해 보겠어요. 그러면 아마 뭔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하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녀의 딸을 만나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신은 오랫동안 영원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괴로움을 받아왔지요? 만일 내가 당신 어머니께 당신은 앞으로 1년 동안 그 문제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거라고 얘기한다면,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
그 스코트랜드 아가씨는 잠시 머뭇거린 후에 "저, 저는 그 문제를 일 년씩이나 연기하는 것은 안전한 생각이라고 생각지는 않아요, 뭔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그 전에 제가 죽을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그래요." 박사는 곧 말하였습니다. "6개월 동안만이라고 한번 생각해봐요."
그러나 그 딸은 그것도 안전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석달은 어때요?"잠시 생각을 한 후에 그 딸은 입을 열었습니다. "모든 것을 연기시키는 것 자체가 안전하지 못한 것 같아요."
마침내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잠시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리 가라, 얘야 !
포터 박사가 문서 위조죄로 재판정에 섰던 어느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판사였던 포터 박사는 그 젊은이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유명 한 법조계 의 권위자였고, 그 아버지가 쓴 '신용법(The Law of Trusts)'은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입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느냐? " 하고 물었습니다. "네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그 죄수는 대답했습니다. "기억하고 말고요, 제가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충고를 받으러 가면 아버지는 신용법에 대해서 쓰고 계시던 책에서 눈을 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리 가라, 얘야, 나는 바쁘다. ' 아버지께서는 책을 다 쓰셨고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 위대한 법률가는 아버지로서의 위치를 망각하였기에 이와 같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태만과 무관심의 죄
현대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이외의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의 실존주의 문학가였던 까뮈도 그의 소설 「전락」에서 현대인의 무관심을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소설에 보면 주인공 클라망스는 어느날 세느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느강 다리 위에서 난간에 기대어 슬피 울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여자가 슬픔과 고민으로 곧 강물에 뛰어들려 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그녀를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뒤에 일어날 여러 가지 귀찮은 일이 생각나서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가 다리를 다 건넜을 때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놀라며 모여드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습니다. 그는 더 빨리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그 사건을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한참 뒤 어느 날부터 그는 드디어 전락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강물 속에서 들려오는 웃음 소리 때문에-
물론 이것은 소설의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서 클라망스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아주 쉽습니다. 단순히 귀찮아서 또는 나중에 일을 생각하니까 골치가 아파서라는 이유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나쳐버리는 일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것은 태만이요, 무관심입니다. 그것이 우리 현대인의 생활을 그렇게도 삭막하게 만들어 가는 병원체입니다.
아무것도 안한 죄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로베레장군」이란 영화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즉, 그 영화에서는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레지스탕스, 곧 저항 운동자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저항 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 온 사람이 끼여있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때문에 그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항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혔으니까 처형당하는 것이 마땅할는지 몰라도, 자기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 온 사람이며 저항 운동과는 관계도 없는 사람이고 또 자기자신은 저항 운동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외칩니다. 그는 자신이 너무 억울하게 처형당한다고 생각하여 큰 목소리로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며 저항 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입니까? "
이때 한 저항 운동자가 조용히 대답하기를,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안했다는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 되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고 말했습니다.
문을 닫아 버린 여인
시카고의 백만 장자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집안의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될 외동딸이었는데 심한 병에 걸려, 어느 의사도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로렌스 박사가 오늘날 소위 "무혈(無血)수술(bloodless sur-gery)"이란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그 딸의 수술을 맡아서 아주 건강하게 살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의사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졌고, 그는 곧 미국 병원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미국에 가서도 자기의 기술을 미국에 있는 병원 의사들에게 널리 가르쳐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자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물론 그가 직접 수술을 담당하여 고쳐 준 사람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불과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그에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반갑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느 작은 도시에 갔을 때, 로렌스 박사는 좀 조용히 쉬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몇 사람의 수행원과 안내원이 그를 꼭 따라다니며 그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했었는데, 그날은 그저 혼자서만 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후에 아무 말도 없이 혼자 몰래 빠져나와 그 도시의 주택지를 홀로 산보하였습니다.
한동안 걸었을 때,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고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런 날씨의 변덕이었습니다. 비를 피할 곳을 찾던 로렌스 박사는 할 수 없이 가까운 집의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잠깐이나마 비를 피해 신세를 지고 가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한 여인이 나왔을 때, 그는 잠깐 들어가 쉬다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무슨 일로 인해선지 기분이 상해 있던 그 여인은 퉁명한 소리로, 당돌하게 "다른 곳에나 가보세요. 우리 집에는 그렇지 않아도 골치아픈 일로 머리가 아프니까요!" 하면서 두말없이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로렌스 박사는 할 수 없이 그 집 문밖 처마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갑자기 없어져 버린 그를 찾아 헤매던 수행원들이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그를 발견하여 다시 호텔로 데려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무정하게 문을 닫아 버렸던 여인은 신문을 펼쳐보다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신문 1면에서 그 유명한 로렌스 박사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렇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의 딸이 시카고 백만 장자의 딸과 똑같은 병으로 지금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그 로렌스 박사를 만나보길 원했던가?
그 여인은 곧 편지를 호텔로 보내 로렌스 박사에게 정중히 사과하면서, 자기 집에 와주셔서 자기 딸을 살려 주십사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이미 하나님께서 로렌스 박사를 그녀의 집으로 보내주셨을 때, 그의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유해 가스 경보의 무시
델라웨어 주의 윌밍톤에 살고 있는 헨리 넬슨은 2차 대전 당시 참전했던 노병입니다.
그는 육군 화학전 부서에서 교관으로 복무했었는데도, 강변 공영 주택 개발 사업 감독관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하이드로겐 시아나이트 가스로 그을려 있었는데, 그는 문의 방책을 부수고는 두 장의 모포를 두르고 들어갔습니다.
그의 이웃들은 그가 그 경고판과 방책을 치워 버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 사업 분부로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넬슨은 두 장의 모포를 안고 거실 바닥에 쭉 뻗은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경고판과 감독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또한 군대에서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어디에?
뉴욕에서는 저격범의 총에 맞은 한 우체부가 현관 밖으로 쫓겨났는데 그가 피를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클라호마 시에서는 한 여자가 보도에서 예기치 않게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방관자들은 외면했고, 택시 운전사 한 사람이 보았지만 급히 가버렸고, 가까운 호텔에서는 담요 한 장도 거절했습니다.
오하이오 주, 데이톤에서는 한 여자가 차를 몰고 마이애미 강으로 뛰어드는 것을 12명의사람이 보았습니다. 그녀가 차 지붕 위에 올라와서 자신은 수영을 못한다고 소리치는 것을 그들은 무관심하게 지켜 볼 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아 결국 그녀는 익사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으므로 시카고 선 타임즈 도서관은 '무관심'으로 명명된 특별한 파일(pile)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사랑의 비극은 무관심이다.
(W.S. 몸/ 흔들리는 하나의 나뭇잎)
뉘 집에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아나.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뜻>
(한국 속담)
무관심은 증오보다 더 무섭고, 칼을 들고 정면으로 쳐들어오는 적보다 더 무섭다. 우리가 직면하는 적 가운데 최악의 적이 무관심인데, 오늘 우리는 그 적과 정면으로 마주서고 있는 것이다.
(강원용/ 무관심의 세대)
머슴살이 삼년에 주인 성 묻는다. <*너무 무심해 응당 알아야 할 것도 모르고 지낸다는 말>
(한국 속담)
당신의 무관심은 옆구리에 찔린 가시와도 같아요- 어느 쪽으로 몸을 두든 그것은 아픕니다.
(R. 타고르/ 비노디니)
우리들의 인류에 대한 최대의 죄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무관심한 것이다. 그것은 비인간성의 정수(精籠)다.
(G.B. 쇼/ 악마의 제자)
관가 돼지 배 앓는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는 뜻>
(한국 속담)
남의 집 소경은 쓸어나 보는데 우리 집 소경은 쓸어도 못 본다. <*남들은 제 집 사정을 애써 짐작하고 알려 하는데 자기 집 사람은 도무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어떻게 되어가는지 걱정도 없으며 돕지도 않는다는 뜻)
(한국 속담)
가로 지나 세로 지나.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말>
(한국 속담)
남의 사돈이야 가거나 말거나. <*자기에게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어 상관할 필요가 없음>
(한국 속담)
인간이란 남의 일에 대한 생각이나 남에 대한 비평에는 무관심한 것을 나는 지금 알고 있다. 그들은 아침이나 낮이나 밤중의 열두 시까지, 끊임 없이 자기 일만을 생각하고 있다. 남이 죽었다는 뉴스보다도 그들은 천 배나 만 배로 그들 자신의 가벼운 두통에 대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다.
(D. 카네기)
하늘을 앞에 두고는 믿는가 부정하든가 해야 한다/ 나도 실제로 그것을 생각하나니, 고뇌하는 혼은/ 어느 길에 교대로 몸을 내던지지만/ 무관심한 인간은 무신론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만일 하루라도 의심을 품는다면 더 이상 잠자지 않을 것이다.
(뮈세/ 신을 향한 희망)
사내의 허영은 반응을 바라지 않는 터이라/ 여자의 무관심을 도리어 반기는 것이다.
(T.S. 엘리엇/ 배화교)
간나히 가는 길을 사나이 에돌 듯이/사나이 네는 길을 계집이 치돌 듯이/제 남진 제 계집 아니어든 이름 묻지 말으려.
(정 철/ 송강가사)
한 사내가 못박혀/ 숨은 헐떡이며/ 신음 속에서 죽어가도/ 어느 누구도 동정하지 않는다/욕설과 조롱과/ 비웃음의 고함소리가/ 고통을 더해 줄지언정/ 위로와 연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무관심과 허탈함과/ 비참한 패배의 죽음일 뿐.
(서덕석/ 광주 · 십자가 · 1)
위대한 제국의 법이나/ 날으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 총독의 친 한으로도 정죄하지 못한 사나이를 십자가 형틀로 휘몰아 간 것은 무엇인가.// 죽여라, 죽여라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던 군중들이 아니라/ 눈감고 귀막고 입다물은/ 우리들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던가// 진실로 향한/ 우리들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 그의 손목에 놓인 못은/ 더 깊이 박혀 들어가고/ 마침내 우리가 침묵할 때/그는 조용히 죽어가지 않았던가/ 오늘도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서덕석/ 소리가 이긴지라)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나아가셨을 때에/사람들은 그를 나무에다 매달고/ 두 손과 두 발로 커다란 못을 박고/ 제각기 갈보리라는 이름의 십자가를 만들었다. / 사람들은 그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그래서 깊은 상처에서는 빨간 피가 방울져 흘렀다. / 그것은 사람의 육체가 하찮게 다루어지는/ 야만스럽고 잔인스러운 시대였다. // 예수님이 버밍검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저 그 옆을 지나쳐 갔다. /그들은 예수의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게 하고/ 그가 소문없이 죽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예전보다 순하게 되어// 그에게 고통 주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예수를 혼자 세워 두고/ 그들은 그저 말없이 거리를 지나가 버렸다. // 그런데도 예수님은 큰 소리로 외치셨다. /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겨울날의 비는 싸느다랗게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고/ 그의 몸뚱이는 뼈가 쑤실 만큼 차게 젖어 있었다. / 무리는 집으로 돌아가버려 거리에는 누구 하나 없었다. / 그리하여 예수는 벽을 향해서 웅크리며/다시금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
(케네디/ 무관심)
우리들의 패배가 증명/ 하는 것은 다만 하나 우리들이 너무/ 소수라는 것이다. / 속물근성에 반대하여 싸우는 사람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기대한다 방관자들에게/ 적어도 부끄러워할줄이나 알라고.
(브레히트/ 객관적인 사람들에 대해서)
설 교 노 트
부자의 무관심
눅16:19-31
서론
이 말씀을 얼핏보면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는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는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잘 살면서도 꼭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못한 무관심의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죄에는 적극적인 죄가 있고, 소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 책망과 저주를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부자는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면서 꼭 관심을 가졌어야 할 것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무엇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까?
1. 거지 나사로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자기는 좋은 집에서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산해 진미를 먹으며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면서도 자기집 대문간에서 먹다 버린 쓰레기를 뒤져 먹으며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이 거지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습니다.
자기 집 대문간에서 날마다 얻어먹는 이 거지는 자기가 돌봐줘야 했었는데도 무심하게 보아 넘겼고 그가 헌데를 앓으며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으며 고통과 고민을 당하는데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고 무관심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하나 잘먹고 잘살면 되었지 다른 사랑의 불행에 대해서는 아랑곳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나 하나 편안하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무관심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꼭 돌봐줘야 할 고통스러워하는 자, 병든 자에 대해서 부모님께 대하여 무관하고 형제에 대해서 교회일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죽어서 그 부자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 받들려 천국에 가서 복락을 누리는 신세가 되어서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부자와 같이 무관심한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 사후 세계에 대해서 무관심하였습니다.
이 부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고 풀잎의 이슬 같은 이 세상만 알았지 사후의 세계인 내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성경에 인간의 생명을 아침 안개와 같다고 했고 풀잎의 이슬과 같다고 했고 속히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100년을 산다고 해도 내세 영생에 비하면 바다에 물 한 방울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 한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림자와 같은 세상만 알고 육신 사는 것만 알았지 내세 영생이 있음을 몰랐습니다.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후에야 내가 알게 무엇이냐 하고 날마다 적어질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고 살았지 영혼이 영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사후의 문제 즉 내세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에 떨어져 슬피 울며 고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론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영생은 병 행하는 것입니다(요1:12, 5:24, 6:47, 14:1-3, 6).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10:10)"고 했습니다. 이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고 천국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깨달아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관심의 죄
눅16:19-24
서론
본문에 나타난 부자는 살인죄나 간음죄나 그밖에 다른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과 고민을 받으며 자기 집 대문에서 얻어 먹던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방울만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이 부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자신의 영혼 문제나 사후 문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관심의 죄를 얼마나 짓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부모님께 대하여, 자녀에 대하여,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교회와 교인에 대하여 좀더 관심을 가져준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살기 좋은 환경으로 변하겠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무관심은 무서운 죄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관심을 나타내야 하겠습니까?
1.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 집 대문에서 헌데를 핥으며 얻어 먹고 있는 거지의 입장을 한번도 바꿔놓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의 세계에서 입장이 바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시도 깨어 있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이제는 편히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신 줄로 압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온 여인의 입장도 예수님은 이해하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죄를 범한 자가 있어도 그 사람을 정죄하기에 앞서 "오죽했으면 그가 그런 죄를 지었을까."하고 그의 입장과 환경을 바꿔 놓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올케는 시누이를, 시누이는 올케를, 교인은 목사를, 목사는 교인을, 모두모두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2.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져주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상대방이 잘못한 것, 혹은 나만이 아는 그의 비밀의 죄를 기억하려들지 않고 잊어버려 주는 것은 그에게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만일 당신이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거나 남이 알아서는 안될 실수를 했을 때 그 사람이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잊어버려 준다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겠습니까?
이사야 43장 18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내편에서 잘한 것이 있거나 남에게 은혜 입힌 것이 있어도 그것을 오래 염두에 두지 않고 잊어버려주는 것이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요, 진정한 관심인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잊어버려 줄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주는 것입니다.
관심의 표현은 뭐니뭐니 해도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불한당을 만나 곤경에 처한 사람을 레위인과 제사장은 무관심하게 지나가버렸지만 사마리아인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다 주고 여관 비용을 물어주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관심은 주는 것입니다. 적은 것이라도 정성만 있으면 됩니다. 물질이 없으면 눈물로 줄 수 있고 기도라도 해 줄 수 있습니다.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주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교회도 관심있는 교인들이 모일 때 부흥도 발전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아무쪼록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부모님께 대하여 자녀나 남편 아내에 대하여 또 이웃에 대하여, 교인과 교회에 대하여 무엇인가 무관심한 것이 없는가 살펴보시고 작은 것 하나라도 좀더 관심을 가져주고 진정한 사랑을 베푸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반응없는 세대
마11:16-24
서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정의하여 혹은 원자 시대라고도 하고 혹은 우주 시대라고도 하나 이 시대를 좀더 예리하게 관찰하고 비판하는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상 무정부 시대요, 허무주의 시대요, 반응없는 감각이 없는 시대라고도 합니다. 반응이 없다는 낱말에 대하여 우리나라 말 표준 사전에 밝힌 것을 보면 불러도 대답이 없고 흔들어도 동하지 아니하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이 시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는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하고 우리가 애 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예수님께 대하여 반응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1. 무관심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께 대하여 관심이 없었으므로 반응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무관심은 우리 기독교의 무서운 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돈버는 것에 더 관심이 많고 이 세상 사업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주님께 대하여는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보다 더 주님께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2. 자만과 독선이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예수님께 대하여 반응이 없었던 둘째 원인은 바로 자만과 독선이라고 합니다. 이 자만과 독선은 자기완성 사상인 것이 가장 무서운 사상입니다. 이 자기완성사상은 성경에 경고한 바와 같이 스스로 속이는 사상입니다. 이는 죄인이면서 죄인인 줄을 모르고, 연착한 인생이면서도 자기 연약을 모르고 패배자이면서 패배자인 줄을 모르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이 독선주의 사상은, 주관주의를 산출하게 되고 주관주의는 개인주의를 산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사회나 교회는 이러한 자만과 독선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반응이 없어져 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독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거부하게 됩니다. 이는 자기만이 제일 잘났고, 자기의 주장만이 제일 정당하고 자기의 생활만이 제일 의롭다는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독선주의를 제일 미워하는 것입니다.
3. 인생의 양심 마비라고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도 반응이 없었던 셋째 원인은 그 시대는 양심이마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양심이란 교육 철학자 루소의 말과 같이 인생의 등불이요, 안내자인 1동시에 톨스토이의 말대로, 엄한 법관인 동시에 통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잠4:23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딤전1:19에 "양심을 버리는 것은 마치 파선한 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사고 방법도 잘못되었고 언어 행동도 궤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은 할 일도 없거니와 못할 일도 없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복음을 들어도 감화 감동이 없으며, 변화가 없으며, 새로워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긍정을 하고 신앙 양심이 살 수 있을 때 자극도 충동도 반응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부정하고 양심이 마비된 세대는 심판을 받아 음부에 떨어지리라고 경고했습니다(마11:20-24).
은총에 대한 무관심
사26:10
서론
본문에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은총을 입은 자가 하나님께 대하여 무감각하며 아무 반응도 없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1. 은총에 대한 무관심
은총을 받은 자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주변에서 그를 보호하시고, 능력의 손으로 그를 보살펴 주시며, 인도하시고, 셀 수 없는 은총, 바다의 모래 같은 은총을 그에게 쏟아 부어주시지만, 그러한 모든 하나님의 친절은 수포가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이 모든 은총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를 배우지 아니하고 계속 악행하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또 죄의식도 없고 매사에 배은 망덕할 뿐입니다.
악인은 아무리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도 그 은총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에 은총을 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 선행에 대한 무감각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의 주변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성도들도 많이 있고,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충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많은 애를 쓰고, 온갖 수고와 희생을 감수하며 사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도 많이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썩어지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녹여서 부패를 방지하고, 어두운 세상 자신을 녹여 빛을 비추며 생활하는 것은 기독 신자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이러한 자는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고 그러한 것조차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완악한 마음은 주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하여 전혀 돌아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아무런 괴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한 생활만을 할 뿐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라고 한 것입니다.
3. 위엄에도 무의미함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위엄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계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인내와 관심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한 자들은 욥기 37장22절에 "북방에서는 금빛이 나오나니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고 하심 같이 자연의 위대한 창조와 섭리를 보지만, 이런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볼 수 있지만, 저들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위엄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며, 놀라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엄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의미 없이 지나치니 그들의 마음은 돌같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에게 똑같이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입은 자라도 택함이 없는 악인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은총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행에도 무감각하며, 하나님의 위엄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시83:1
서론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렇게 같은 뜻의 말을 세 번씩이나 중복한 것은 그만큼 강조를 두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계시며,잠잠히,고요히 계십니까? 그 뜻을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이때는 원수 국가들이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기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대적자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그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충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침묵만을 지키고 계셨으니 이것은 무관심하신 것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침묵과 잠잠함과 고요함으로 일관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 대하여 무관심을 나타내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특별 시도인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최상의 표현이 되는 인내심을 길러주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보일지라도, 절대 무관심으로 일관하시고 계시는 것같이 보여도 거기에는 깊은 뜻이 계심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무관심은 최대의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침묵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시며, 그 약속하신 일은 언제나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위기를 맞이하고 있으니 그 약속은 지켜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하신 말씀 중 단 한 마디도 그냥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심을 제한하시는 일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도움을 잠시 늦추도록 결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온전히 조화되어서 기다려야할 때는 기다리게 하십니다. 무관심으로 침묵하시며 제한하시는 것은 결코 거절이 아닌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뜻은 발휘되어서 역사하십니다. 결단코 침묵만 하실 수 없으신 분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계속하여 무관심으로 일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의도를 바로 알고 잠잠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만사를 예정하사 그 뜻대로 시행하시되 때를 따라서 하십니다.
인간들은 참으로 무지합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그 깊으신 뜻을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만날 때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공포에 떨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하여 침묵하시고 무관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어려울 때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어려울 때라고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처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어려운 일을 이겨나가야 하겠습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깨뜨리기 위하여 애절하게 기도하고 간곡히 호소하여 그 침묵을 깨시고 역사하시기를 바라야 하겠습니다.
무 식
성 경 활 용
1. 무식의 뜻
(1) 배우지 못함
(벧후3:16)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2) 어리석음
(벧전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3) 은혜를 알지 못함
(고전14:16) 네가 영으로 축복한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2. 무식한 자의 삶
(1) 말씀을 경시함
(사29:12)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2) 우상을 섬김
(렘10:14)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3) 억지로 풀려함
(벧후3:16)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3. 무식한 자의 결과
(1) 은혜를 알지 못함
(고전14:16) 내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하리요
(2) 미혹됨
(히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있음이니라
(3) 변론을 벌임
(딤후2: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관련원어풀이
1. tl,W,a 이웰레트
(1) 어리석음.
(잠5:23, 13:16)
(2) 불경건.
(시38:6)
2. r['B' 바아르
(1) 우둔함, 어리석은, 무지몽매한.
(시49:11, 잠12:1)
3. @yBi 빈-
원래의 의미는 "구별하다, 분간하다, 숙고하다, 이해하다"이다.
(1) 인식하다.
(욥9:11, 느13:7)
(2) 마음을 돌리다, 주의를 기울이다.
(신32:29, 단11:30)
(3) 이해하다, 깨닫다.
(삼상3:8, 사6:9)
(4) 깨달아 알다, 이해하다.
(욥18:2, 호4:14)
(5) 자신의 현명함을 보이다.
(시119:100)
4. [d'y: 야-다
(1) 알다, 인식하다, ∼을 알아채고 있다.
(창19:33, 사6:9)
(2) 알게되다, 발견하다.
(창9:24, 느3:10)
(3) ∼알다, 친숙해지다, 통달하다.
(신9:24, 민14:131)
(4) 미리알다, 예견하다, 기대하다.
(욥9:5)
5. ls,K; 카-살
살이 붙다, 살지다, 견고하다, 무기력하다, 나른하다, 어리석다.
(렘10:8)
6. lysiK] 케실 -
바보, 어리석은 자.
(시49:11, 잠14:8)
7. ajgnoevw 아그노에오
(1) 알지 못하다, 무식하다.
(롬10:3)
(2) 이해하지 못하다.
(막9:32, 눅9:45)
(3) 잘못하다, 실수로 범죄하다.
(히5:2)
8. ajgnwsiva 아그노-시아
무지, 무식, 영적 통찰력의 결여.
(고전15:34, 벧전2:15)
9. ajmaqhv" 아마데-스
배우지 못한, 무식한, 버릇없는.
(벧후3:16)
10. ajpaivdeuto" 아파이듀토스
가르침을 받지 못한, 무식한, 어리석은, 무익한.
(딤후2:23)
11. ijdiwvth" 이디오-테-스
원래의 의미는 "개인생활을 하는 자, 사적인 사람(통치자의 반대 개념으로의)"이다.
(1) 보통 사람, 문외한.
(행4:13, 고후11:6)
(2) 특별한 지식이나 은사를 가진 사람과 반대되는 평범한 사람.
(고전14:16, 23)
설교예화자료
지극히 과소 평가되었던 그림
한번은 YMCA의 간사가 자신이 소장했던 그림의 작가를 미쳐 깨닫지 못해서 굉장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집에 걸만한 곳이 없다면서 벽걸이용 그림 찬장을 건네 받았던 그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받았던 그림을 50달러에 팔려고 사람들에게 내어 놓았으나 사람들은 가격이 비싸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25달러만 내도 그 그림을 팔겠다고 다시 제시하였으나 여전히 그들은 그림에 비해 가격에 비싸다며 사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그가 죽음으로써 유언 집행인들이 그의 유산들을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림을 메어 그림 시장에 내놓았는데 거기서 그 그림이 어느 대가의 작품이란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25달러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었던 그림의 가격이 무려 3만5천 달러로 매겨졌고 얼마 후에는 5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5만 달러짜리 그림이 25달러짜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수난극(Passion Play)"의 수난
한 생기 발랄한 작은 숙녀가 여행사에서 유럽 여행에 관해 묻고 있었습니다. 여행사 직원이 이번 특별 여행 중에는 오버람머가우에서의 그리스도 수난극(Passion Play)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자, 그녀는 꼿꼿이 서서 미끄러지듯이 대답했습니다. "난 이제 그 따위 음란한 작품들에 지쳐 버렸어요. 그리고 정말로 난 당신한테 놀랐어요." 그리고는 성을 내면서 뛰쳐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무지
희랍인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자인 카이혼이 신전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 하고 신에게 물었더니, "그런 사람은 없다. "는 대답을 얻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는 대단히 놀랐습니다.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신은 자기를 제일 지혜 많은 사람이 라고 하였으니 구체 적으로 알아볼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소트라테스는 그 이튿날부터 아테네에 있는 모든 학자와 정치가와 예술가를 방문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소크라테스와 같이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들은 지혜있는 체만 하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도 자기와 비슷한데 신이 자기에게 특히 지혜가 제일 많다고 한 뜻은 자기는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이유로써 칭찬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수로 82년이나
조지 E. 로빈슨은 실수로 12년간이나 오하이오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석방되었습니다. 처음, 그는 그의 범죄에 대한 형벌로 최고 2년을 선고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에 실수가 발생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에 보내어진 범죄에 대하여 질문받고는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형량은 최고가 단지 일년이나 이년이기 때문에 즉각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나는 12년이나 되는 황금기를 어두운 감옥에서 잃어버렸고 지금은 53살의 늙은이가 되어버렸습니다. "
어록·시·묘사
무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단 사람마다 내용이 다를 뿐이다.
(W. 로저스)
무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때로는 세속적인 지식의 가장 필요한 부분이다.
(체스터필드 경/ 서간집)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가장 많이는 모르나, 최선을 아는 것이 지력의 최상이다.
(워드/ 모어전)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무지"는 헌신의 어머니다.
(R. 버튼/ 우울의 해부)
모르는 것이 복이 되는 경우에는, 아는 것은 어리석다.
(T. 그레이/ 이튼 대학을 위한 송시)
사람은 어디서나 채워질 수 있는 어느 정도 지적 무지를 가져야 한다.
(C.F. 케터링/ 70세 생일날에)
모르는 것이 부처. <*어설피 조금 아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더 낫다는 말>
(한국 속담)
무식하다는 것은 나쁜 지혜를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무식은 착각보다 낫다. 그릇된 것을 믿는 것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
(T. 제퍼슨)
아는 것이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다.
(G. 허버트/ 명궁)
아는 체하는 것보다는 무식한 편이 낫다.
(N. 부알로/ 서간시)
소 발자국에 괴인 물에서 헤엄치는 한 치의 장구벌레는 천하에 넓은 사해(四海)가 있다는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과실의 씨 속을 기고 있는 바늘 끝 같은 벌레는 세계는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 막막한 바다를 설명해 주고 우주가 얼마나 넓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도 반드시 거짓말이라고 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포박자)
스스로 무지 속에 머물러 있기를 택하는 자는, 무지가 낳은 온갖 죄인이다.
(S. 존슨/ W. 드루몬드씨에게 보낸 편지)
무지는 감탄의 어머니이다.
(G. 채프먼/ 미망인의 눈물)
모르는 것이면 뭐든지 훌륭하게 보인다.
(C. 타키투스/ 아그리콜라전)
열매없는 이삭은 고개를 높이 치켜든다.
(G.C. 리히텐베르크/ 잠언)
우리가 바르게 보면, 우리의 고통이 보이니,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무지에서 우리의 안약이 흘러나온다. 현명한 자만이 비참하다.
(M. 프라이어/ 몬터규 각하에게)
무지의 비극은, 무지의 만족이다.
(R. 퀼렌/ 편집인 협회에서)
무지란 불합리의 영토이다.
(J.A. 프루드/ 대명제에 관한 단견)
적게 아는 사람들은,보통 말을 많이 하고, 많이 아는 사람들은 말을 적게 한다.
(J. 루소/ 에밀, 교육론)
무지는 몰염치의 어머니이다.
(C.H. 스퍼전/ 농부 존)
무지와 독단은 제휴한다.
(유대교 법전)
무지는 독수리의 날개와 올빼미의 눈을 가지고 있다.
(G. 허버트/ 명궁)
아작스가 "무지는 고통없는 사악(邪惡)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나는 먼지와 함께 지내는 명랑한 얼굴들을 생각해서, 무지는 먼지라고 생각해야겠다.
(G. 엘리어트/ 길필 씨의 사랑이야기)
눈먼 말 워낭소리 따라간다. <*무식한 사람이 남의 말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
(한국 속담)
내가 알고 있는 정신병은 주지뿐이다 ‥‥이는 치명적인 악이요, 인생을 어둡게 하고, 이성을 교란하며, 진실을 두루 혼란시킨다.
(B. 존슨/ 탐구)
빈 가방은 똑바로 설 수 없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무식한 도깨비가 부작(符作)을 모른다. <*사람이 무식하여 제게 가장 중요한 것도 모르고 그로 인하여 크게 실수를 하게 된다는 말>
(한국 속담)
무지 이외에 노예신세는 없다.
(R.G. 잉거솔/남자, 여자 및 어린이의 자유)
무식과 미신은 서로 밀접한, 어떤 면으로는 등식적(等式的)인 연관성을 가진다.
(J. F. 쿠퍼)
무지의 진정한 특징은, 허영과 자만과 교만이다.
(S. 버틀러/ 잡상)
남의 명언을 비는 것, 이것이 무식한 자의 지혜다.
(바스크족 속담)
기역자 왼 다리도 못 그린다. <*아주 무식하다는 뜻>
(한국 속담)
어둠 속에서는 선택이 없다.
(해어 형제/ 진리의 추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모든 것에 자신이 있다.
(C. H. 스퍼전/ 농부 존)
빈곤은 많은 뿌리가 있지만, 그 원근은 무지이다.
(L.B. 존슨/ 의회에 보낸 메시지)
무식인인 체하는 사람은 자기의 지능 이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J.B. 매듀즈/ 경구)
무식은 신의 저주이며 지식은 하늘에 이르는 날개다.
(W. 셰익스피어/ 헨리 6세)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 무지한 자의 병이다.
(A. B. 올커트/ 다화)
소경의 나라에서는 소경이 왕이다.
(D. 에라스무스/ 아다지아)
무식하면 기막힌 일도 눈에 띄지 않는다.
(메난드로스/ 단편)
무식이 지혜의 결여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지혜가 천재의 증명이 되지도 않는다.
(L.C. 보브나르그/ 성찰과 잠언)
썰물 때 나는 적었다/모래 위에 시 한 줄을/그리고 그 구절을 내 온 마음/ 그리고 온 영혼에 불어 넣었다/ 밀물 때 나는 돌아왔다/내가 적어둔 것을 읽어보려고/ 그리고 바닷가 모래 위에서 내 무지함을 보았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내 증언은 무지한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며,현명한 사람의 증언은 내게 확신을 준다. 그러나 지혜와 무지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있는 사람의 경우는 내가 그를 납득시킬 수도 없고 그가 나를 납득시킬 수도 없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무지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무지의 뿌리가 내 영혼 속에도 박혀있음을 느낀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무지한 사람들이 육신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오 마음이여,꽃은 사라져도 씨앗은 남는다고 대답하라./이것이 하느님의 법이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그 젊은 제자는 대단한 천재였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학자들이 그의 조언을 들으러 왔고/ 그의 학식에 감탄했다. // 통치자가 조언자를 찾고 있던 차에 스승에게 와서/ 말했다. / "그 젊은이가 사람들의 말대로 그처럼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스승의 대답은 엉뚱했다. / "솔직히 말해서/ 그 친구는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 대니/ 도대체 언제 뭘 알 겨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엔소니 드 멜로/ 무지)
파이처럼 말쑥하고/ 오물처럼 무식하고/ 원숭이처럼 에로틱하고
(K. 샤피로/ 시인)
네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만 한다. / 지금 나는 모래밭에서 일하는 왕벌을 보고 왔다. 왕벌처럼 되어야 한다. / 오오 신경질적인 병든 내 마음이여 순해져라./ 하나님이 가르쳐 준 대로 맡겨진 내 의무를 다해야 한다. / 나는 자신만만했었다. 그것이 내 생활을 그르치게 하고 말았다. / 나는 다른 사람하고는 다르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 하지만 하나님,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낙원 깊숙한 곳에서/ 아담과 이브가 출현한 이래로 인간이 발견해온 말들을/ 나는 그저 옮겨 베끼기만 한 사실을 말입니다. / 하나님, 나는 가장 하찮은 돌멩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 그렇습니다. 풀은 고요히 숨쉬고, 사랑이 충만하여 흔들거리는 사과나무는/ 가지도 무겁게 열매 맺어 땅에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 나는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니 내 마음속의/나 자신을 천재라 생각하는 이 마음을 제 거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찮은 사람입니다. / 흐릿하게 때로 포플러 나무 위의 연분홍색 새둥지가 흔들리기도 하고/ 상처진 발을 질질 끌면서 거지가 하얀 길을/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그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 원하나니 나를 쓸모없게 하는 이 마음을 제거해 주십
시오.
(프랜시스 잠/ 무지를 고백하기 위한 기도)
설 교 노 트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함
시53:4
서론
사람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범죄자는 결국 따지고 보면 무지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지한 자는 어떠한 자들이고 무지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무신론자는 최대의 무지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 사실은 제일 먼저 알아야 하고, 누구나 다 알아야 하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최대의 관계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또 그 중에 내재하시되 세상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피조되었는데 범죄 이후에 무지에 빠져서 하나님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고 무신론을 외치는 자는 최대의 무지자인 것입니다.
2. 영생에 무지하면 멸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는 목적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살려고 하는 근본 목적은 누구나 다 한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참으로 사는 생활, 영이 사는 생활, 영원히 사는 생활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들은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살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을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옵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므로 그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요14:6).
요한복음 6장 66-69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은 다 떠나가고 다시 따르지 아니 하였으나 베드로는 주님을 끝까지 따랐으니 이는 영생을 바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3. 범죄자는 무지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야 할 인간들이 조상들의 범죄로 인하여 무지하여 진 것처럼, 모든 범죄자들도 결국 무지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없다고 하고 가장 귀한 영생도 알지 못하여 찾지 않습니다. 아니 범죄하게 된 그 자체가 벌써 그 사람의 심령의 무지로 온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부패하고 가증한 악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죄악을 행하고 있으니 곧 무지한 사람인 것입니다.
결론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무식자들은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말하며, 영생들 알지 못하여 멸망에 이르게 되며,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죄악을 행하여 무지한 자가 되지 말고 오직 경건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생활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무지한 자들
시94:8
서론
본문에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올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무지를 들춰내면서 영적문제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분별력과 능력이 충분하게 활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근원적인 원인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합니다.
1. 신앙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영적인 무지
(1) 인간의 그릇된 망상은 영적 무지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본래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능히 창조주의 실재하심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된 생활을 합니다.
(2) 진리에 역행하는 행위로 영적 무지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반(反)하는 거짓된 것을 좇으며 자신의 귀한 것들을 우상의 제물로 바치기도 합니다. 또한 추상의 섬김에 있어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고통스런 의식을 행하는 인내를 보이기도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불합리한 생각과 원리에 따라 살다가 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복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 그릇된 것인가 하는 의심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마호메트 교도들은 마호메트가 그들에게 약속한 낙원으로 인도함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자신의 능력과 미혹됨에 이끌려 자신을 치유하거나 구원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교도의 유혹이나 그릇된 신앙의 오류에 빠져 그들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경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2. 언제 영적 무지가 드러나 보입니까?
(1) 세상에 쉽게 속아서 생활할 때 영적 무지가 나타납니다.
인간은 세상이 주는 유익과 쾌락, 명예에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는 줄 압니다. 그들은 하늘의 영광에 관심이 없으며 지옥의 멸망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어리석은 자로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2) 분명하고 명백한 진리에 비춰볼 때 우리의 영적 무지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대한 무서운 죄의 대가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인간들은 자신의 의에 대한 자만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3) 사단의 기만과 미혹에 빠져 생활할 때 영적 무지가 나타납니다.
인간은 하찮은 육체적 욕망과 일시적인 만족감에 눈이 어두워 사단의 유혹에 빠져 서로 다투고 비방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삽니다.
(4)믿음의 생활을 소홀히 할 때 영적 무지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좀더 나은 삶을 위하여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이며 보잘것없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순간적인 삶보다 영원한 삶이 얼마나 중요하며 영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3. 영적으로 깨우친 인간의 상태
(1) 인간은 좀더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에게 주신 중요한 기능은 깨닫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구별되이 만드시어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무지에 대해 깨우쳐 주시지 않는다면 아마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2)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능력과 이성이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다면 우리가 스스로 한계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영혼의 갈급함을 늘 느끼면서 자신의 영혼을 채워 줄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대로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죄인들을 기억하셔서 영광의 구세주를 보내주신 것은 그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에 빛으로 왔나니(요12:46)"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빛으로 보내진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자신의 명철이나 능력을 의지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지함을 깨닫고 분별력 있고 무한한 능력을 지닌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고 했습니다.
네가 아느냐
욥37:15
서론
욥기 37장 15-17절 사이에 보면 "네가 아느냐"라는 말이 계속하여 세 번 나옵니다. 이것은 엘리후가 욥에게 한 말입니다.
14절에 "욥이여 이것은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무지한 존재이면서도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이지적 존재이면서도 무지하다는 말입니다.
1. 이지적인 존재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인간을 맨 나중에 만드시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은 물론 영성을 주입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무엇이든지 깨달아 알 수 있는 이지성을 주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 즉 동물들에게는 주시지 않은 이지성을 인간에게만 특별히 주셨습니다.
고등 동물들에게서 약간의 이지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의 기술적인 훈련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 동물 자체가 알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이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신 이를 알지 못하고 배반합니다.
2. 무지한 존재
인간은 자신에게 이지를 주신 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지성이 둔하고 어두워져서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2장 6절에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라고 하여 무지한 백성들이 자기를 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을 할지 못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45편 10절에 "저가 보리로다 지혜있는 자도 죽고 우둔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정 인간은 우매 무지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3. 마땅히 알아야 할 존재
이사야 1장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며 이사야가 한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 10절에 보며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향하여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바로 알아서 공경해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니 소나 나귀만도 못하다고 탄식한 것이며,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할 니고데모가 무지한 소리를 하다가 책망받은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오묘한 일의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고 엘리후가 "네가 아느냐"라고 세 번씩이나 탓하였으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론
잠언 26장 3절에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고 하였으니 말에 채찍을 더하고 나귀에게 자갈을 먹이고 무지하고 미련한 사람에게는 등에 막대기가 더해져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이 존귀한 것같이 보이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특별 창조작인 우리 인간은 이성을 발휘하여 바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며, 자신과 이웃을 바로 아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식이 없는 제사장
호4:6
서론
본절은 앞서에 계속하여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죄악을 지적하였는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지식이 없는 백성이나 제사장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다는 말은 무식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지식보다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 제사장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지식"이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다아트'라고 하는데, 정관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지식"이라고 번역하게 됩니다. "그 지식"은 보통 지식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곧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잠언 1장 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식 중에 최고의 지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 백성도 아니고 지도자 격이되는 제사장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그 백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도자가 백성을 잘 지도하는 법을 알아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평안히 지낼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지도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왕좌왕한다면 그 나라는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그 제사장 아래 있는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우상을 섬기고 파멸의 길로 걷게 되는 것입니다.
2. 지식을 버리면 자신도 버림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네가"라고 한 말은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이스라엘 나라를 살펴보면 여로보암의 지도하에서 불법한 제사장들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하게 하였고, 하나님이 정하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 중에서 제사장을 삼았던 것입니다(왕상12:26-3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나라가 제사장 나라가 됨을 방지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네가 "지식"을 버리고 "나도 너를 버린다"는 교훈을 해주신 것입니다.
3. 율법을 잊은 제사장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말은 또다시 위에서 언급한 "지식"이 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율법은 실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인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5-16절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손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린 무식한 제사장이라면 하나님께도 그 자녀를 잊어버리시므로 화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을 모르는 제사장이 무엇을 하겠으며,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는 천국 문을 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서 무식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작은 우매
전10:1
서론
본문을 보면 "죽은 파리가 향기름으로 악취가 나게 하는 것같이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 뜻은 악은 적은 것이라도 인류에게 큰 해를 끼친다는 사상입니다.
1.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짐
고린도전서 5장 6절에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대개 누룩은 나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패륜적인 행위, 즉 음행 사건은 죄가 적은 것 같으나, 그대로 방치해 두면점점 파급되어 온 교회가 부도덕에 감염될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빵을 반죽할 때 누룩을 넣으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이렇게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은 작은 사소한 일이 크게 되어 전체를 다 감염시키는 것이므로 항상 주의해야 되는 것입니다.
2. 작은 범죄가 큰 피해를 줌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에 견고한 성 여리고를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무 피해도 없이 손도 대지 않고 무너뜨려서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공격 대상인 아이성은 조그만 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아간이라는 단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 중에서 몇 가지를 욕심을 내어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비밀히 감추었던 것입니다.
그 죄 값은 너무 큰 것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패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범죄는 작은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결국 아간은 아골 골짜기에 끌려가서 돌에 맞아 죽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죽은 것이 아니라 아간의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전부 같이 몰살당하였으니 그 가족 전체가 다 값을 치루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초대 교회 당시에 범죄를 하여서 그 부부의 영혼이 파멸당하고 말았습니다.
3. 적은 우매가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함
솔로몬은 지혜의 교훈을 적극적으로 역설하면서 적은 우매가 오히려 지혜와 존귀로 패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집권자들이 적은 무지로 인하여 강권적인 독재 정치를 하다가 실권하는 일이 있으며, 지식가들도 적은 우매로 인하여 잠간의 판단이 흐려져서 회복할 수 없는 수치와 실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자들은 적은 우매로 인하여 많은 재물을 손해볼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생들이 아주 적은 우매로 인하여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경우까지 있으니 적은 것이라도, 자신의 아주 적은 무지라도 경홀히 여기지 말고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무식함이 무엇인지 항상 생각하며 바른 지식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하여 하나님 앞에 무지함으로 범죄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어서 사단으로 우리 심령의 작은 틈을 이용하여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미
성 경 활 용
1. 미의 유형
(1) 아름답고 묘함
(렘6:2) 아름답고 묘한 딸 시온을 내가 멸절하리니
(2)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
(렘11:16)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3) 아름다운 양떼
(렘13: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이디 있느뇨
(4) 아름다운 백향목
(렘22:7) 그들이 각기 손에 병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5) 아름다운 암송아지
(렘46:20) 애굽은 심히 아름다운 암송아지라도 북에서부터 멸망이 이르렀고
(6) 아름다운 잎사귀와 열매
(단4:21)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7) 아름다운 소식
(나1: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위에 있도다
(8) 아름다운 땅
(말3:12) 너희 땅이 아름다워 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9) 아름다운 얼굴
(단1:15)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10) 아름다운 눈
(아5:12)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2. 세속적인 미
(1) 악인의 아름다움
(시49:14)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
(2) 색
(잠6:25) 네 마음에 그 아름다운 색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흘리지 말라
(3) 탐욕자의 말
(잠23:8)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
(4) 주상
(호10:1)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5) 여인의 아름다움
(잠31: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6) 꾸민 외모
(벧전3: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7) 겉으로 보이는 미
(마23:27)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3. 영적인 미
(1) 하나님
(시27:4)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2) 하나님의 사역
(사12: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할지어다
(3) 주의 이름
(시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4) 하나님의 영광
(사35:2)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5) 여호와의 전
(스7:27)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6)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롬10:15)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7) 언약 중보의 직분
(히8:6)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4. 성도의 미
(1) 하나님께 찬송함
(시147: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2)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
(시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3)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림
(전5:18)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4) 형제로 거리끼게 아니함
(롬14:21)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 함이 아름다우니라
(5) 슬픔을 참음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6) 고난을 참음
(벧전2:20)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7) 선한 일을 힘씀
(딛3:8)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5. 미의 비유
(1) 시기에 적절한 말
(잠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2) 지식의 보배로 채워진 방
(잠24:4)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3) 친구의 충성된 권고
(잠27: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4) 신부의 사랑
(아4: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5) 지혜
(전7:11)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6) 덕
(벧전2:9)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관련원어풀이
1. d/h 호-드
(1) 위엄, 숭고.
(욥40:10, 시21:6)
(2) 광채, 신선, 아름다움.
(단10:3, 호14:6)
2. bl,j, 헬-렙
(1) 살진, 비만.
(레13:3)
(2) 가장 최상의 것, 탁월함.
(신32:14)
3. dm'j; 하-마드
(1) 바라다, 열망하다.
(출20:17, 미2:2)
(2)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시68:17, 사1:19)
(3) 바람직한, 기분 좋은, 유쾌한.
(창2:9, 3:6)
(4) 귀중한, 중요한.
(시19:11)
4. dm;j]m' 마흐마-드
(1) 바람, 소원의 대상, 기쁨.
(왕상20:6, 사64:10)
(2) 은혜, 아름다움.
(아5:16)
(3) 귀중한 것.
(대하36:19, 욜4:5)
5. dm,j, 헤-메드
(1) 아름다움, 준수함.
(사27:2, 암5:11)
(2) 바람, 유감.
(대하21:20)
(3) 바람직한 것, 기쁨.
(삼상9:20, 단11:37)
(4) 유쾌함, 탁월성.
(렘3:19)
(5) 소원, 바람.
(학2:7)
6. @je 헨-
(1) 은혜, 호의, 선의.
(창6:8,출3:21)
(2) 우아함, 얌전, 고상.
(잠22:11, 전10:12)
(3) 간원, 기도.
(슥12:10)
7. $p,je 헤-페츠
(1) 기쁨, 즐거움.
(삼상15:22)
(2) 바람, 소원.
(욥31:16)
(3) 귀중한 것.
(잠3:15)
(4) 추구, 열심, 일, 사건.
(욥21:21, 전3:1)
8. b/f 토-브
(1) 좋다, 선하다.
(신5:30)
(2) 아름답다, 즐겁다.
(민24:5, 아4:10)
(3) 유쾌하다, 행복하다.
(삼상25:36)
(4) 아름답게 만들다, 장식하다.
(호10:1)
(5) 기분 좋게 하다.
(전11:9)
9. bd'y: 야-토브
(1) 선하다, 좋다.
(나3:8)
(2) 즐겁다, 기쁘다.
(삿19:16)
(3) 선을 행하다, 좋게 하다.
(창32:10)
(4) 행복하게 만들다.
(삿19:22)
(5) 적합하다, 알맞다.
(출30:7)
10. hp;y: 야-파
(1) 아름답다.
(아4:10, 겔16:13)
(2) 아름답게 하다.
(렘10:4)
(3) 자신을 꾸미다.
(렘4:30)
(4) 매우 아름답다
(시45:3)
11. ypiy? 예피
(1) 광채, 밝음.
(시50:2, 사33:17)
(2) 아름다움, 탁월, 우아.
(시45:12, 사3:24)
12. hw<an: 나-웨
(1) 어울리는, 조화를 이루는.
(시33:1, 잠17:10)
(2) 아름다운.
(아1:5, 6:4)
13. ![en: 나-엠
유쾌하다, 즐겁다, 사랑스럽다.
(삼하1:26)
14. !['nO 노-암
(1) 즐거움.
(잠3:17)
(2) 아름다움, 밝음.
(출33:19)(3)
(3) 은혜, 우아.
(시9O:17)
15. ybix] 체비-
(1) 광채, 영광.
(사4:2)
(2) 아름다운 땅.
(단11:16)
16. rp'v; 솨-파르
할퀴다, 긁다, 빛나다, 아름답다, 기쁘게 하다.
(시16:6)
17. rp,v, 쉐페르
아름다움, 우아.
(창49:21)
18. eujprevpeia 유프레페이아
은혜, 아름다움.
(약1:11)
19. eujschmosuvnh 유스케모수네-
모양이 우아한, 얌전, 어울림, 단정, 예의.
(고전12:23)
20. uJperochv 후페로케
(1) 높은 곳, 돌출, 탁월.
(고전2:1)
(2) 뛰어난 자리, 권위.
(딤전2:2)
21. cavria 카리스
(1) 우아, 매력, 사랑스러운, 친절히 대함.
(눅4:22, 골4:6)
(2) 호의, 친절, 은혜.
(눅2:52)
(3) 은혜나 봉사에 대한 감사.
(롬6:17)
22. kalov" 칼로스
원래의 의미는 "아름다운, 건전한"이다.
(1) 저명한, 칭찬할 만한, 아름다운.
(눅21:5)
(2) 좋은, 유용한, 결점이 없는, 귀중한.
(마13:48)
(3) 유쾌하다, 유익하다.
(마17:4, 고전7:26)
23. lamprov" 람프로스
(1) 밝은, 찬란한.
(계22:16)
(2) 투명한, 맑은.
(계22:1)
(3) 화려한.
(눅23:11)
(4) 현란한, 우아한, 값비싼.
(약2:2, 계18:14)
24. diavforo" 디아프로스
(1) 다른, 거꾸로 된, 다른 종류의.
(롬12:6, 히9:10)
(2) 탁월한, 우수한.
(히1:4, 8:6)
25. ajstei'o" 아스테이오스
(1) 교육을 잘 받은, 예의 바른, 품위 있는 아름다운.
(히11:22)
(2) 우아한, 만족한.
(행7:20)
설교예화자료
가장 아름다운 손
한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손을 가진 처녀와 결혼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왕공들과 대관들은 제각기 부원군(府院君)이 되려고, 딸의 손이 곱게 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손으로 해야 할 일은 도무지 시키지 않았고 예쁘게 가꾸게만 하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아름다운 소녀가 무엇 때문인지 아파서 어쩔 줄 모르고 애쓰는 불쌍한 말을 보았습니다. 말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듯 소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소녀는 보드랍고 흠없는 자기의 고운 손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고운 마음씨는 고운 손을 생각치 않고 발버둥치는 말을 조사한 다음, 다리에서 큰 가시를 빼어 주었습니다. 그러느라고 소녀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고 여기저기 긁혀서 가실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왕자는 짝을 고르는 데, 이 소녀 의 손을 보고 그리고 이 소녀가 했던 이야기를 들은 후 두말없이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제일 고운 손은 봉사와 희생의 흔적이 있는 손입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화장하는 고운 손에 비한다면 남을 도와 주느라고 더러워진 거친 손이 얼마나 더 귀하고 아름답습니까.
아름답게 여겨지는 커다란 입술
"아프리카에 있는 사라스 진제스(SarasDjinges)부족만큼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특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한 여행사가 말했습니다.
이 중앙 아시아의 여인들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충격적인 습관일 것입니다. 이 부족 사람들은 입술을 크게 하기 위해서 나무로 된 원판을 입술에 끼워 넣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랫 입술을 12인치짜리 비누를 끼워넣을 수 있을 만큼 넓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입술을 크게 하였기 때문에 음식을 씹어 먹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거의 죽을 먹으면서 살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꼭 필요한 말만하게 되는데 그것도 침을 튀기면서 말을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소녀가 4살쯤 되었을 때 장차 남편이 될 사람이 칼로 각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중간에 구멍을 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작은 나무 막대기를 끼워넣고, 점점 막대기의 크기를 늘려 가면서 입술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만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미인은 피부두께 만하다.
미국 속담 가운데 '뷰티 이즈 스킨(Beauty is skin deep)' 즉, 아름다운 미인이란 피부 두께만큼 깊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얼굴이 아름답다, 얼굴이 예쁘다는 것은 그저 그 가죽만큼 아름답다는 말이요, 가죽 베껴 놓으면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외적 아름다움은 유한하다는 뜻입니다.
참다운 아름다움은 피부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손
미국의 가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온 가족이 노부모의 집에 모였습니다. 온 가족이 즐겁게 놀던 중 한 딸이 매니큐어를 바른 자기의 손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질세라 딸들이 자기의 손을 자랑하였습니다. 서로 자기의 손이 가장 아름답다고 자랑이 한창일 때 늙으신 아버지께서 "너희들은 모두 자기의 손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니 누구의 손이 제일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구나, 투표로 결정 해 보자꾸나." 하셨습니다. 그러자 딸들은 일제히 "네, 좋아요." 하면서 소리질렀습니다.
이때 모두 한 사람씩 일어나 자기의 손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자, 이 제끝났으니 투표를 하자꾸나."라고 말씀하시자 막둥이가 일어나 "아니요, 아직 어머니께서 안하셨어요. 어머니도 손을 보여주세요."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얘들아, 내 손이야 어디 늙어서 쭈글쭈글하고 흉해 가지고 너희들의 손하고 비교나 할 수 있겠니? 그만 두자꾸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자꾸만 자녀들은 졸라했습니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자기의 거칠고 쭈글거리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보기도 흥한 손이었으며 사실 자녀들의 매끄럽고 고운 손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록·시·묘사
미는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H.A. 켈러/ 유고시집)
아름다움은 값이나 희귀성 혹은 시대와는 무관하다.
(J.C. 데이너/ 도서관)
아름다움은, 겉치레가 필요치 않고, 꾸미지 않았을 때가 가장 아름답게 꾸며진 것이다.
(F. 톰슨/ 계절 . 가을)
지혜는 과거의 발췌지만 미는 미래의 약속이다.
(0.W. 홈스/ 아침 식탁의 교수)
미란 예술가가 자기의 마음의 상처 한복판에서, 세계의 혼돈으로부터 만들어 내는, 놀랍고도 신기한 것이다.
(W.S. 몸/ 달러 6펜스)
미는 사랑의 자식이다.
(H.H. 엘리스/ 새로운 정신)
우아함은 미의 자연의 옷이다. 예술에 있어서 우아함이 없는 것은 껍집을 벗긴 인체 표본과 같은 것이다.
(J. 주베르/ 팡세)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아름다움이란, 그것이 그 사람의 성질과 완전히 일치되었을 때, 그리고 당사자가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 그 진가를 나타내는 법이다.
(스탕달/ 적과 흑)
진정한 아름다움은 지혜와 똑같이 매우 간단하고 누구나 알기 쉬운 것이다.
(M/ 고리키)
미와 성(聖)은 하나이며 동질의 것이다. 성스러운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성스럽기 때문이다.
(C.V. 게오르규/ 25시에서 영원의 시간으로)
미는 도달점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그리고 사물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그것이 진실일 때 뿐이고 진실 이외에 미는 없다. 그리고 또한 진실이란 완전한 조화를 뜻한다.
(F. A. R. 로댕)
아름다움이란 육체의 미덕이다. 미덕이 마음의 아름다움인 것처럼.
(R.W. 에머슨/ 지성인의 역사)
강한 인간만이 사랑을 알고 있다. 사랑만이 미를 파악한다. 미만이 예술을 형상화한다.
(R.W. 바그너/ 예술과 혁명)
여자의 참다운 아름다움이 가지는 힘에는 지상의 아무것도 대항하지 못한다.
(N. 주베르/ 팡세)
미는 자연이 여자에게 준 최초의 선물이다.
(J. F. 밀레)
미의 특권같이 큰 것은 없다. 미는 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까지 감동시키고야 만다.
(이효석/ 화춘의장)
개성적인 아름다움은 다른 어떤 소개장보다도 더 훌륭한 추천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람은 시적인 미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하학적인 미나 의학적인 미도 이야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기하학의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과 그것이 증명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또 의학의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과 그것이 치유에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시의 목적인 쾌감은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B. 파스칼/ 팡세)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
(J. 키츠)
진리는 현명한 자에게 있고, 미는 참된 마음에 있다.
(J. C. F. 실러/ 돈 카를로스)
모든 아름다운 것 속에는 무엇인지 모를 균형의 기묘함이 있다.
(F. 베이컨/ 미에 관한 논문)
우리는 아름다운 물건으로 집을 장식하기에 앞서 먼저 담을 발가벗기고 우리의 생활을 발가벗겨서 아름다운 가정과 아름다운 생활로 토대를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취미는 가옥도 가정도 없는 야외에서 가장 잘 함양되는 것이다.
(H. D. 소로/ 월든)
미란 무엇인가. 열렬하고도 서글픈 것, 무엇인가 어렴풋하여 추측에 내맡기는 것.
(C.P. 보들레르/ 내밀의 일기)
사랑이 생겨나기까지 미는 간판으로서 필요하다.
(스탕달/ 연애론)
아름다움은 예술에 있어서 가장 유용하지만, 최고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가장 도움이 된다. 그것은 마음을 고양(高楊)시키기 때문이다.
(주베르/ 명상록)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이다.
(E. G. E. L.B. 리턴/ 그것으로써 그는 무엇을 하는가)
미는 잘 익은 과일이며, 그것은 썩기 쉽고 오래 갈 수 없다.
(F. 베이컨/ 수상록)
미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안목에 달려 있다.
(L. 윌리스/ 인도의 왕자)
미인은 얼굴에 혼수감(지참금)을 가지고 다닌다.
(중세 격언)
미는 쉽게 눈에 뜨인다. 그것을 민중은 경멸하는 것이다.
(J. 콕토)
미는 (미의) 포로가 된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만의 칭찬 속에서나 유효하다.
(J. 밀턴/ 복낙원)
아름다움은 헛되고 믿지못할 행운일 뿐, 갑자기 사라지는 빛나는 광채, 봉오리 지자 이내 시드는 꽃, 곧 깨지는 덧없는 유리병, 순식간에 잃고, 사라지며, 깨지고, 시드는, 못 믿을 행운이요, 광채요, 유리병이요, 꽃이다.
(W. 셰익스피어/ 정렬의 순례자)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피천득/ 비원)
미란 말없는 사기다.
(테오프라스토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두 개의 날을 갖고있다. 그 하나는 웃음이고 하나는 괴로움이다. 마음을 산산조각내는.
(V. 울프/ 자기만의 방)
마음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육체의 아름다움은 동물들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
아름다움 속에는 양쪽 극단이 하나로 되고 온갖 모순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F.M. 도스토예프스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우아함이 결여된 미는 미끼가 없는 낚시바늘과 같다. 표정이 없는 미는 사람을 피곤케 만든다.
(R.W. 에머슨/ 인생의 방법)
미는 결정적이고 운명적이고 따라서 때때로 비극적이다.
(이효석/ 화춘의장)
미는 우리들을 절망하게 한다. 그것은 순간의, 그러나 우리가 내내 잡아 늘리어 놓고 싶어하는 순간의 영원이다.
(A. 카뮈/ 비망록)
미는 한 문명의 척도이다. 그러나 유일한 척도는 아니고 하나의 척도이다.
(W. 스티븐스/ 아다지아)
오직 미! 실용적인 것과 미적인 것은 대립되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미적인 것은 흔히 실용적이 못되는 것이다.
(조지훈/ 영원과 고독을 위한 단상)
계절이 바뀌면 꽃은 다시 새롭게 피지만, 시들은 아름다움은 두번째 봄이 없다.
(A. 필립스/ 목가)
"아름다운 처녀여, 너의 재산이 무엇이냐?" "나의 얼굴이 재산입니다. "
(미상/ 옛 자장가)
그대는 이 걸 보고 느끼겠지요./ 아름다움은/머지않아 모두 시들고/ 꽃과 같이 순간에 죽이리라고.
(삐에르 드 롱사르/내가 만든 꽃다발)
내 아침상 위에/빵이 한 덩이/물 한 잔.// 가난으로도/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신 주여/
(김현승/ 아침 식사)
눈물지는 모든 것이 이리 아름다울까요/ 슬프게 모여 사는 뜨거운 가슴들이/ 이리도 아름다울까요.
(김희수/ 누님)
가지에 내려앉는 괴조같이 얇은 모슬린 옷에다 분을 처바르고 단발을 한 날씬한 미인들이 광장에 펄덕이는 것이었다.
(D.H. 로렌스/ 날개 돋친 뱀)
괴로운 이와 상처받은 이는 말한다. 「미란 친절하고 자비로운 것,/ 마치 자기만이 지닌 큰 축복이 약간은 부끄러운 젊은 어머니처럼 미는 우리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 그런가 하면 열정적인 이는 말한다. / 「아니, 미란 힘차고 무서운 것,/ 마치 폭풍우처럼 미는 우리 발 밑의 땅을 흔들고 머리 위의 하늘을 흔든다. 」// 지치고 피곤한 이는 말한다. 「미란 부드러운 속삭임, 미는 우리들의 영혼 속에서만말하지./ 마치 그림자가 두려워 떠는 가느다란 빛처럼 미의 목소리는 우리들의 침묵에 따르며.」/ 하지만 불안한 이는 말한다. 「우린 산속에서 미의 절규를 들었네./ 그리고 그와 함께말굽 소리, 날개 치는 소리, 또한 사자의 포효도」// 밤이 또면 도시의 순라꾼은 말한다.「미는 새벽빛과 더불어 동녘에서 떠오르리라.」/ 그리고 대낮이 되면 노동자와 나그네들은 말한다. 「우린 아름다움이 황혼의 창으로부터 대지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는 걸 보았네.」/ 겨울이면 눈 속에 갇힌 이는 말한다.「봄이 오면 미는 언덕 위로 뛰어오리라.」//또 여름볕 아래서 곡식단을 베는 이는 말한다.「우린 미가 낙엽과 함께 춤추는 걸 보았지.그 머리카락 사이로 눈발 휘날리는 것도.」//이 모두는 그대들이 미에 대해 말하는 것,/하지만 그대들, 실은 미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루지 못한 욕구에 대해 말한 것일 뿐,/ 그런데 미는 욕구가 아니라 다만 황홀한 기쁨./ 그것은 갈증에 타는 입술도 아니고 구걸하기 위하여 내민 빈손도 아니다. /오히려 불타는 가슴이며 매혹된 영혼이다. /그것은 그대들이 보았던 영상도 아니고, 그대들이 들었던 노래도 아니다. /오히려 두 눈을 감을지라도 보이는 영상이며 두 귀를 닫을지라도 들리는 노래이다. / 그것은 주름진 나무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도 아니며, 날카로운 발톱에 매달린 날개도 아니다. / 오히려 언제나 꽃 피어 있는 정원이며 언제나 날아 다니는 천사의 무리.// 올펠레즈의 시민들이여, 미란 거룩한 제 얼굴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 버린 삶의 모습이다. / 하지만 그대들은 삶이면서 또한 베일. 미는 홀로 거울 속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이다. 하지만 그대들은 영원이면서 또한 거울인 것을.
(K. 지브란/ 예언자)
거기에는/ 매그너스 마더 교회의 벽이 화려한 이오니아풍의/ 흰빛과 황금빛의 더할나위 없는 미를 지니고 있다.
(엘리어트/ 황무지)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김현승/ 가을은 눈의 계절)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이 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
나무는 가을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숲속의 오솔길은 말랐다.
(예이츠/ 쿨호의 백조)
아-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 줄 것이냐,/ 저 첫사랑의 날을/ 아-누가 그 아름다운 때를 돌려줄 것이냐,/ 저 사랑스러운 때를.
(괴테/ 첫사랑)
헬렌이여,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겐/ 그 옛날 니케아의 돛배 같소이다. / 향기로운 바다 위로 살며시/ 지치고 고달픈 나그네를/ 고향의 바닷가로 실어다 준
(포우/ 헬렌에게)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그리고 맑고 예쁘고 깨끗하여라/ 너를 보고 있으면 슬픔은/나의 가슴속까지 스며드누나.
(하이네/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이)
그대 모습// 운명보담 아름답고/ 크고 밝아라
(조지훈/ 사모)
이쯤에서 그만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박목월/ 난)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보배 두 가지는 아름다움과 진실이 라 그 아름다움은 사랑으로가득 찬 마음속에서 찾을 수 있고, 진실은 땀흘려 일하는 사람의 손에서 볼 수 있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갈망에 빠진 사람의 가슴속에 담긴 아름다운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단순한 눈길에 담긴 것보다 훨씬 고귀하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다시 찾아온 죽음의 시대에/ 진정 그리운 것은 아름다운 것인가
(정호승/ 천지호텔 창가에 서서)
기적의 순간/ 순간적인 영상처럼/ 그대는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순결한 아름다움으로.
(푸시킨/ 안나 케른에게)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치훈/ 승무)
"아름다운 것은 진리요,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이것이 인간 세상에서 인간이 알고있는 전부요, 알아야 할 전부다.
(키츠/ 그리스 옛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
눈부시도록 희어서/ 슬픈 빛/ 흰빛은 순결해서 아름답고/ 아름다운 건 조금은 슬픈거라지
(박용주/ 흰빛)
내게 말하라 어느 나라 들판에/ 로마의 미녀 플로라는 있는가/ 아르키 피아데스와 또한 타이스는/ 그 아름다움에서 한 핏줄의 자매니라.
(비용/ 옛 미인들을 노래하는 발라드)
그것은,/ 열두 줄 가야금에/ 멋이 맺힌/ 미학의 가락.
(이기반/ 부채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한용운/ 떠날 때의 님의 얼굴)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 사람의 얼굴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한용운/ 님의 얼굴)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도종환/ 오월편지)
이제는 지는 꽃이 아름답구나/ 언제나 너는 오지 않고 가고/ 눈물도 없는 강가에 서면/이제는 지는 꽃도 눈부시구나.
(서덕석/ 가을꽃)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삶은 기도이어라
(이성선/ 기도)
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
(김시천/ 아이들을 위한 기도)
당신의 손 끝에서 아름다운 생각을 줍는 우리는
(한분순/ 기원)
그때 너의 오늘 얼굴은 녹청색에 묻힌 채 영원의 검은 아름다움을 지녔었다.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그대 얼굴 아름다움)
저무는 날 해어스름/ 박명의 아름다움을 안다/ 안개 너머 벙그는/ 별들을 안다/ 사랑하기 전엔/ 몰랐던 빛들.
(김남조/ 사랑초서 · 20)
설 교 노 트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
대상4:39-40
서론
"저희가 그 양을 위하여 목장을 구하고자 하여 골짜기 동편 그돌 지경에 이르러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이 광활하고 안정하니"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목축업을 위주한 유목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장은 그들의 생활과 역사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1. 그들 지경
시므온 자손들이 양떼를 위하여 목장을 구하고자 다니다가 골짜기 동편 그돌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아주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돌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수아 15장 58절에 언급된 것으로 헤브론 북쪽 11Km 지점에 소재하며 길벳 예둘에 해당되는 곳으로 말합니다.
둘째는 조금 더 서남쪽으로 위치한 지점인 브엘세바와 가사 사이에 있으며 함의 후손 모우님 사람들을 쳐서 진멸하고 그곳에서 거점을 삼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곳은 그랄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목양하기에 아주 적합한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이 있었으니 유목민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었습니다.
2. 목장으로서의 적임지
이 지방의 지리적 조건을 살펴본다면 대개가 메마른 사막지대요, 또 광야입니다. 그리고 기후도 건조하여 도무지 비가 오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그 지방이 목축에 그렇게 적임지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특히 골짜기 동편 그돌 지경만은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돌 지경은 이렇게 목장의 적지였으며, 그 땅이 광활하고 안정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위 환경의 분위기도 매우 안정되어 있고, 넓은 지대인 것이 많은 양무리를 뛰어 다니며 꼴을 먹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은 지역이 협착하고, 양떼는 많아서 서로 충돌하여 자주 다투게 되므로 할 수 없이 아브라함과 롯은 헤어지는 선의의 이별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목장은 아름다워야 하고, 기름진 땅으로 양들이 먹기에 좋은 꼴도 많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넓어야 할 것은 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3. 목장 쟁탈전
어느 시대든지, 어느 곳에서나 생존 경쟁이 극심하여 언제나 서로 다투는 일로 역사는 가득 차 있습니다.
현시대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조금더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다툽니다.
구약 시대 역시 그러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과의 관계도 그렇고, 아삭과 블레셋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마찰이 있었으며(창26:12-25), 여 호수아가 인솔하여 가나안에 입국한 후에도 목장 문제는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두 지파 반이 요단강 동편에 머물게 된 것도 역시 목장이 좋았기 때문에 우선 점령하고 싶었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아름답고 기름진 목장, 광활하고 안정된 목장은 양을 치는 데도 크게 도움을 주고, 목자들에게는 참으로 큰 위안과 보람을 줍니다.
우리의 거주지나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도 이렇게 아름다운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숨쉬므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곳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산
겔31:8-9
서론
성경에는 종종 사람을 나무로 비유하는 일이 있습니다(삿9:7-15). 예수님께서도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도 있고(마21:18-21), 자신과 제자들을 포도나무와 그 가지로 비유해서 교훈하신 바도 있었고(요15장),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찍어서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3:10).
1.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
본문 9절에 "내가 그 가지로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투기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8절에 "하나님이 동산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우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아무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심은 다 뜻깊은 말씀들입니다. 창1:'11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또 창세기 2장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하였습니다.그리고 창세기 2장 16절에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라고 하여서 에덴동산에 나무들이 각종 나무, 모든 나무, 에덴 나무 등등으로 소개되었으니 에덴동산은 울창한 숲을 이루었을 것이고,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을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곧 하나님의 동산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하나님의 동산을 하나님께서는 아낌없이 인간에게 주셨지만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배반하다가 다시 빼앗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동산에서 사는 자들은 그 마음이 역시 아름다워야 하는 것인데 인간이 어리석으므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하나님 동산의 백향목
"백향목(栢香木)"하면 우리는 으레히 레바논의 백향목을 연상하게 됩니다.
물론 에덴동산에는 각종 나무가 있었으며 백향목도 있었습니다.
그 후 사람이나 식물들이 번성하게 될 때에 각기 그 적응성에 의하여 사람들은 거주지가제정되어졌고, 식물들은 성장지가 구분되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향목'하면 레바논산을 연상하게 되고, '레바논 산'하면 백향목을 피차 연상할 만큼 레바논 산의 백향목은 유명해졌습니다. 더구나 그 백향목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솔로몬의 왕궁을 건축하는 데에 주재료가 되었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귀하게 쓰인 재료였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얼마나 번창하였기에 레바논의 백향목 같은 나무들로 비유될 정도입니까? 하나님 동산의 백향목이 다 부러워할 정도요, 투기할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하나님의 장중에서 흥망성쇠가 이루어지는 한낱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이방 국가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사 잘 되어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이방국가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보다 더 흥하고 부유하며 큰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6-27절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하였습니다.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시135:3
서론
본문에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여호와의 품성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선하시다고 할 것이며 그 선하심은 결국 아름다운 것이니 이는 그 이름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왜 아름다운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이름 속에 내포된 아름다움
이름이란 흔히 그 개인의 속성이나 인격을 표현하고 상징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소개된 이름들은 분명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그 개인의 개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아름다움은 그 이름이 모두 진실되고 정결하며 친절하고 은혜로우며 현명하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아름다운 것 중의 가장 아름다우신 자로 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만족과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나 그의 행위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하심 그 자체와 하나님의 존재가 그의 이름 안에서 상징되고 있는 바로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름다운 이름의 확인
우리가 어떤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용하려할 때에는 우리의 이름을 써서 조인하게 되면 그 사람과 앞으로의 모든 관계는 확실하게 보증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도 그러하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을 보증하는 것이요, 주 안에서의 절대적인 믿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에 대하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하나하나 체험하는 중에 그의 이름이 아름다움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조금도 의심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이 절대적인 신뢰심으로 믿게 되기 때문에 이 사실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추호라도 부족함이 없으시며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호리라도 틀림이 없으셔서 정확 무오하시기 때문이요, 그의 이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3. 우리의 그 이름에 대한 자세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하시며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우리가 모독하고 배반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죄악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어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은 우리의 믿음을 보증해 주실 것입니다.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그를 든든히 의지하며 나간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찬양하는 생활을 쉬지 말고 해야 하겠습니다.
결론
주님의 이름은 참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모두 진실되고 정결하며 친절하고 은혜로우며 현명하므로 더욱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찬란한 별보다 더욱 아름답고 들의 백합화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의 영화보다 더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름을 영원히 찬양합시다!
미 신
성 경 활 용
1. 미신에 대한 일반적 고찰
(1) 헛된 것
(삼상12: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왕상18:29)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2) 타파할 것
(출23:24)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사2: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3) 무익한 것이다.
(사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4) 화복을 주지 못함
(렘10:5)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
(5) 무법한 것이다.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6)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7) 망령되고 허탄한 것
(렘14:15) 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들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사41:29)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 뿐이니라
(8) 말하지 못함
(고전12:2)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9) 거짓 스승이다.
(합2:18)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2. 우상의 종류
(1) 몰렉
(레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과 통과케 말아서
(2) 밀곰
(왕상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3) 몰록
(행7: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4) 바알
(민22:41) 아침에 발락이 발람과 함께하고 그를 인도하여 바알의 산당에 오르매
(왕상22:53) 바알을 섬겨 숭배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기를
(렘19:5)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를 불살라 드렸나니
(5) 바알브릿
(삿9:4)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6) 바알세붑
(왕하1:16) 네가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7) 바알세불
(마10:25)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늘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막3:23)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8) 아스다롯
(삿2: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왕상11: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9) 아세라
(출34: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0) 벨
(렘50:2)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렘51:44) 내 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 삼킨 것을 그 입에서 끌어내리니
(11) 그모스
(삿11:24)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얻게 한 땅을 네가 얻지 않겠느냐
(렘48:46) 모압이여 네게 화 있도다 그모스 백성이 망하였도다
(12) 금송아지
(시106:19) 저희가 호렙에서 송아지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숭배하며
(대하13:8)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도다
(13) 므로닥
(렘50:2)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14) 느보
(사46:1) 벨은 엎드러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
(15) 느후스단
(왕하18:4)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이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16) 일월성신
(왕하17:16)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17) 숙곳브놋, 네르갈, 아시마
(왕하17: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18) 니스록
(왕하19:37)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이고
(19) 닙하스, 다르닥
(왕하17: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20) 다곤
(삼상5:2)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3. 우상으로 무엇으로 만드나?
(1) 금과 은
(출32: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 오매
(시135:15)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이 수공물이라
(2) 도금
(사40: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3) 철
(단5:23) 보지도 들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 ·목석으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4) 나무, 돌
(신 29: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왕하19:18)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4. 제사의 형태
(1) 번제를 드림
(출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적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2) 전제를 붓고 예물을 드림
(사57:6) 너희가 전제와 예물을 그것들에게 드리니 내가 어찌 이를 용인하겠느냐
(렘19:13)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3) 전제의 술을 마심
(신32:38) 전제의 술을 마시던 것들로 일어나서 너희를 돕게 하라
(4) 분향함
(왕상12:33)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를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5) 우상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기도함
(사44: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6) 만든 신들을 찬양함
(단5:4) 무리가 술을 마시고는 그 금 · 은 · 동 · 철 · 목석으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
(7) 자신을 상해함
(왕상18:28)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5.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1)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지 말라.
(출20:4)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레19:4) 너희는 헛 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아라
(2) 우상과 우상 숭배자들과 언약하지 말라.
(출23:32)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3)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라.
(행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4) 우상을 훼파하고 주상을 타파하라.
(출23:24)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5) 이방 신상을 버리라.
(창35:2)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6) 땅에서 머루르지 못하게 하라.
(출23:33)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로 네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7) 절하지 말라.
(출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신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8)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라.
(겔14:6)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6. 우상 숭배자의 최후
(1) 하나님이 돌이키심
(행7: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2) 하나님의 분노가 쏟아짐
(겔36: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3) 우상이 올무가 됨
(시106:36)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4) 칼 ·기근 ·온역으로 망함
(겔6:11) 이스라엘 족속이 모든 가증한 악을 행하므로 필경 칼과 기근과 온역에 망하되
(5) 멸망당함
(신8:19)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6) 저주 받음
(신11:28)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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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a: 아-웬
(1) 텅빈, 공허, 헛되고 공허한 것.
(삼상15:23, 사41:29)
(2) 우상들의 집.
(호4:15, 10:5)
(3) 우상의 골짜기.
(암1:5)
(4) 거짓, 사기, 사악, 불법.
(민23:27)
(5) 불법을 행하는 자들.
(욥31:3)
(6) 역경, 재난, 불행.
(시55:4, 합3:7)
(7) 슬픔
(호9:4)
2. !ylylia> 엘릴 -림
우상.
(레26:1, 사2:8)
3. !y lWLGI: 길루-림-
(1) 우상.
(레26:30, 신29:16)
(2) 우상들을 좇다.
(왕상21:26)
4. tyKic]m' 마스키-트
(1) 형태, 자태.
(레26:1, 겔8:12)
(2) 상상, 의견.
(시73:7, 잠8:11)
5. &s'n: 너-세크
(1) 제주, 신주.
(창35:14, 렘7:18)
(2) 빚은 형상.
(사41:29, 48:5)
6. lm,s, 세-멜
(1) 형태, 자태, 초상.
(신4:16)
(2) 조각된 우상.
(대하33:7)
7. bx;[; 아-참
우상의 형상.
(삼상31:. 9, 호4:17)
8. ls,p, 페셀
(1) 새긴 형상.
(출20:4)
(2) 빚은 형상.
(사40:19)
9. ryxi 치-르
(1) 우상.
(사45:16)
(2) 형상, 자태.
(시49:15)
(3) 문의 돌쩌귀.
(잠26:14)
(4) 임신한 여자의 고통, 신음.
(삼상4:19)
(5) 전달자.
(잠13:17)
10. !l,x, 체렘
(1) 그림자, 그늘,
(시39:7, 73:20)
(2) 형상, 닳은.
(창1:27)
(3) 형상, 우상.
(왕하11:18)
11. !ypir;T] 테라-핌
드라빔.
(창31:19, 삼상19:13)
12. eijdwlei'on 에이돌-레이온
우상의 전, 이방인의 성전.
(고전8:10)
13. ei[dwlon 에이돌-론
(1) 환상, 형상, 이방인의 형상
(행7:41, 계9:20)
(2) 거짓신, 이방신.
(행15:20, 롬2:22)
14. eijo'wlolavtreiva 에이돌롤라트레이아
우상 숭배.
(고전5:10, 계21:8)
15. eijkwvn 에이콘-
(1) 형상, 자태, 닮음, 초음
(마22:20, 눅20:24)
(2) 형태, 모습, 모양.
(롬1:23, 히10:1)
16. kateivdwlo" 카테이돌로스
우상이 가득한.
(행17:16)
설교예화자료
악령의 두 가지 믿음
위크리프(Wycliffe) 출판사에서 발행한 1975년 9-10월호 번역물은 페루와 브라질 국경 아마존 강 양쪽에 살고 있는 티쿠나 인디언(vicuna Indian)의 어려운 언어를 옮겨 놓은 것입니다.
티쿠나 사람들은 두 가지 형태의 악령을 믿고 있는데, 예루(Yeureu)라는 악령은 경찰복장에 머리는 개의 머리이며 그들은 보는 사람마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느고조(Ngozo)라고 불리우는 악령은 큰 키에 보는 사람마다 입맞춤을 하며 먼 숲속에서 살면서 무당의 명령에 복종합니다. 이러한 악령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보이지 않는 화살을 쏘아대는 것 외에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의 무당들은 화살을 빼내고 그 상처난 부위를 입으로 빨아냄으로써 그 악령들의 공격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신적인 징표
어떤 징표가 특별한 사건을 미리 알려준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널리 믿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코가 가려운 것은 어떤 새로운 것을 뜻하며, 고양이가 귀를 씻는 것은 손님이온다는 것이고, 개가 풀을 먹는 것은 비가 올 것을 뜻하고, 카드에서 스페이드의 용사와 여왕은 죽음을 의미하고, 마루에 칼이 박히는 것은 재난, 귀에서 윙 소리가 나는 것은 나쁜 소식, 아니면 구설수에 오를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새의 울음소리 역시 그에 따른 의미가 있습니다. 올빼미의 울음은 죽음을, 뻐꾸기의 소리는 소원이 이루어짐을, 청색 딱따구리의 울음은 비가 올 것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또한 지붕 위의 갈가마귀는 불운을 알리고, 떼새의 죽음은 이별을 뜻하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과 같이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행운의 징조와 불운의 징조
다음의 징조는 행운의 표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 편자, 독버섯, 새끼 돼지, 네 잎 클로버, 무당 벌레, 물망초, 방안의 거미줄, 크리스마스의 겨우살이 가지,주옥 등등 그 밖에 이런속담도 있습니다. "핀을 보고 그것을 박아 놓으면 종일 재수가 있다. 오래된 것, 새 것, 빌려온 것, 푸른 것은 신부에게 행운을 가져온다. " 등.
불운의 징조로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 노파가 갈 길을 먼저 지나친다, 악수할 때 팔이 엇갈린다, 정원에서 푸른 가지가 탄다, 결혼 반지를 잃는다, 찻잔 받침에 스푼이 두 개 놓인 것, 빈 요람이 흔들리는 것, 스페이드의 나이프와 포크를 엇갈리는 것, 스페이드의 에이스, 진주줄, 결혼식날 장례행렬을 보는 것도 불길하고, 집안에서 우산펴는 것, 배 위에서 목사님을 만나는 것 등등.
믿음의 부족
수천 년간 부적을 지니는 습관이 내려왔습니다. 원주민들이 호랑이의 이빨을 다는 것은 짐승의 힘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행운을 위해 문에 말 편자를 달아 놓습니다. 시계줄에 행운의 부적을 달기도 합니다. 스위스에서는 남자가 눈에 병이 감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 조그만 금귀걸이를 답니다. 운전기사는 차안에 마스코트를 겁니다. 반면에 조종사들은 개나 고양이 같이 작은 동물을 싣고 다니기도 합니다. 병사들은 편지를 품고 다니는데 이것이 총알 받이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부족한 데서 오는 약한 짓입니다.
어록·시·묘사
질병과 슬픔은 왔다가도 가지만, 미신에 사로잡힌 영혼은 평안이 없다.
(R. 버튼/ 우울의 해부)
미신은 신의 치욕이다
(F. 베이컨/ 수필집 ;미신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악명 높은 것(미신)을 타파하라.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볼테르/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
미신은 자존심을 좇으며 마치 부친에게 하듯 그에게 복종한다.
(M. E. 몽테뉴/ 수상록)
늙은 농사꾼 마나님은 그림 형상이나 순박한 메달이나 묵주를 통해서야 자기의 신과 만나는 것이다.
(A.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신이 아닌 것을 신이라고 믿는 일이다.
(테렌티우스)
사람들은 상상력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미신에 흘리게 된다.
(G. 산타야나/ 소수필집)
미신 속에서 자라온 우리가, 설사 미신임을 인식하더라도, 미신은 우리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잃지 않는다. 즉, 자기의 쇠사슬(미신에의)을 조롱하는자 모두가 자유롭지는 않다.
(G.E. 레싱/ 현자 나탄)
신앙은 문을 닫지 않으련 미신이 되어 창으로 들어온다. 신들을 내쫓으면 유령이 들어온다.
(F.E. 가이벨/ 시)
미신은 신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에서 이루어지고, 종교는 신들에 대한 경건한 숭배에서 이루어진다.
(M. T. 키케로)
미신은 온 세상을 불길 속에 싸이게 하고,철학은 그 불길을 끈다.
(볼테르/ 철학적 사전)
미신은 미천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다.
(주베르/ 명상록)
조상 아닌 귀신에게 제사지냄은 덕을 보려 아첨함이며, 정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공자/ 논어)
미신과 종교는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나 마찬가지다.
(F. 베이컨/ 학문의 진보)
신앙과 미신은 다르다. 신앙심이 견고한 나머지 미신을 믿게까지 된다면 그것은 신앙을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B. 파스칼)
미신은 나약한 마음의 소유자의 종교이다.
(E. 버크/ 프랑스 혁명의 회고)
사람은 모두 눈먼 측면- 즉, 미신을 갖는다. 나는 비밀히, 애정은 눈먼 측면이 좋아하는 옷이라는 눈먼 측면의 주장을 들었다.
(C. 램/ 엘리아의 수필)
미신의 우두머리는 민중이다. 모든 미신에 있어서는 현자들이 우자들을 따른다. 그리고 정상적인 경우와는 반대로, 먼저 실행이 있고, 뒤에 이론이 이것에 맞추어진다.
(F. 베이컨/ 수상록)
신앙을 던져 버린 곳에 미신은 만연한 것이다.
(F. 뤼케르트/ 시)
미신은 공포와 연약함과 무지의 산물이다.
(프리드리히 대왕)
미신은 지성과는 조화되지 않게 자라난 건설적인 종교라고 정의될 수 있다.
(J. 틴들/ 과학의 편린)
신앙의 형식과 미신의 형식이 어느 민족이나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동일하다는 것은 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J. W. 괴테)
미신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더 낫다.
(B. 존슨/ 나의 시신에의 만가)
미국을 위협하는 유일한 적은 국내의 적들이며, 이것들은 무지, 미신 그리고 무능이다.
(E. 허버드/ 속물)
미신은 능력적인 거대한 전진적 성격의 유산이지만, 불신앙은 약자의, 비겁자의 후퇴하고 속박된 무리들의 소유물이다.
(J.W. 괴테/ 색채학)
미신은 인생의 시다.
(괴테/ 산문 금언집)
가장 성질이 나쁜 미신은, 자기의 미신을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것이다.
(G.E. 레싱/ 현자 나탄)
미신의 주인은 대중이다. 모든 미신에서는 현자가 우자(愚者)를 따른다.
(F. 베이컨/ 수필집)
미신은 신이 없는 종교요, 믿음 깊은 불신앙이다.
(J. 홀/ 미신적인 것에 대하여)
미신은 하찮은 일에까지도 신을 들먹거린다.
(T. 리비우스/ 로마 건국사)
미신은 폭군에게 공포를 주고, 압제에 참여하여, 원조를 주고, 정복자를 신으로 하고,인민을 노예로 했다.
(A. 포프/ 인간론)
미신은 저속한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종교다.
(J. 주베르/ 팡세)
가장 야만스런 미신의 하나는, 인간이 신앙없이 살 수 있다는 독단에 대한 현대의 이른바 학자의 대다수의 미신이다.
(L.N. 톨스토이/ 독서의 수레바퀴)
무지와 미신은 항상 밀접할 뿐더러, 수학적일 만큼 상호 관련이 있다.
(J.F. 쿠퍼/ 잭 타이어)
대중을 위안시키는 가장 큰 미신은, 위선이 성공에의 왕도라는 것이다.
(R.G. 잉거솔/ 연설)
미신, 그것은 모든 마음의 평화를 독살하고 파괴한다.
(키케로/ 한계론)
미신을 품고 있으면 결국 불행한 구렁텅이에 빠지기 쉽다.
(H. 발자크)
두 거대한 동체없는 돌로 만든 다리가/ 사막에 서 있다. 그 옆에 모래 위에는/ 부서진 얼굴이 반쯤 묻힌 채 누워 있는데/‥‥ 그 대좌위에는 이런 말이 보였다. / 내 이름은 오지맨디어스, 왕 중의 왕!/ 내 업적을 보라, 전능한 자여, 그리고 절망하라.
(P.B. 셸리/ 이집트의 오지맨디어스)
점을 치고 무당을 불러도/ 티가 없는 정화수/제사날의 핏자국은 겨르지 않더라.
(김광회/ 상평통보전)
내 핏줄 속 가장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어야겠네./ 번개와 천등으로 물살진 폭풍의 피부를 가진 조상을,/ 감추어 두어야겠네, 내 짐승스런 수호자를/ 저 스캔들의 강둑을 허물지 말아야지/ 나 스스로와 저 거창한 행복의 종족으로부터 나의 헐벗은 긍지를 지켜주며/ 변함없는 신의를 요구하는 것,/ 토템은 나의 변치않는 피.
(레오폴드 셰다르 셍고르/ 토템)
설화석고(雲花石膏)와도 같은/ 신들은/ 하얀 고래들처럼 늘어져 있었다/보리이삭처럼 도금된 신들/ 탄생의 죄를 똘똘 감고 있는 뱀의 신들/‥‥ 그들 전지전능한 신들은/ 우리에게 천국을 강요하고/ 고문과 권총으로/ 신앙심을 매수하기도 하고/ 피를 태우기도 했다/자기들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이 잔인무도한 신들은/ 그리고 그곳 랑군에서도 모든 것이 똑같았다/ 지상은 온통 천국에 이르는/ 천국의 상품으로 악취를 뿜어내고 있었다.
(네루다/ 동방의 종교)
유명한 천리안(千理限) 소소스트리스 부인은/ 심한 감기에 걸렸는데 도/ 사악한 트럼프 한 벌로 점을 치는/ 유럽 제일의 여자 점장이로 알려져 있다. "자" 하고 말했다. / 여기 당신 카드가 있어요,/ 익사한 페니키아 선원이예요,/ 보셔요, /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어요./ 이 건 벨라돈나, 암석의 부인,/ 전기(轉機)를 연출하는 비극의 여자지요./이건 세 막대기를 가진 남자, 그리고 이건 수레바퀴, 이건 애꾸눈의 상인, 그리고 아무것도 안 그려진/ 이 카드는 이 상인이 등 뒤에 짊어진/물건인데, 나는 못 보게 되어 있어요./그 교살된 남자를 못 찾겠네요./ 익사할 점괘니 조심하세요.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이 보여요./정말 감사해요,/ 혹시 에귀튼 부인을 만나시거든 내가 직접 그 분의 천궁도를 가져간다고 말해 주세요/요즘은 무척 조심 않으면 안돼요.
(T.S. 엘리어트/ 황무지-매장)
해마다 정월이면 안택(安宅)을 했다/ 징소리 굿소리로 집안은 들뜨고/ 방마다 할머니들은/ 긴 담뱃대를 물고는/ 귀신들린 무당 이야기로 숙연했다. 고모들과 동네 아낙들은 바쁘고/ 꼬깔모자 쓴 무당은/ 마당 이쪽 저 쪽에서 귀신을 쫓았다/ 기억의 저편에서 되살아난/ 징 장구 소리에 소지 올리는/ 젊은 무당/ 무용을 한다던 젊은 무당은/ 눈을 푸르게 뜨고/ 귀신들린 몸짓으로/ 그렇게/ 춤을 추고 있었다.
(서상연/ 안택)
영동일대, 바다 가까운 마을에서 산 아래 마을까지/ 갯바람 속에서 높새 속에서 씨를 남기고 시드는/ 싯누른 잡초들을 향해 니는 이때껏/ 곡조의 노래를 뿌렸더노/ 사람의 혼백을 달랬더노/ 살다 못 볼 것 다 보았겠네그랴// ‥‥석출아, 인간의 마을 어디를 가도/ 피 맺힌 한없는 사람은 없능기라/ 한판 굿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 죄업(罪業)의 나날/ 불러주면 어데라도, 허기 달래며 달려간 거리는 만리냐
(이승하/ 설화를 찾아서-남무 김석출에게)
추억도 절반, 희망도 절반이어/ 4월은 언제나 어설프지만,/ 먼 북녘에까지 해동(解凍)의 기적이 울리이면/ 또다시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 달은 어딘가 미신의 달‥‥‥‥
(김현승/ 4월)
동구 밖 장승이/ 날마다 웃고 서 있는/ 서낭당 고개, 돌무덤 앞에서/ 어머님은 손을 비벼/ 그리도 잘 되라고 빌어주던/ 정화수 그릇에 뜬 하늘도 보인다.
(김재흔/ 내 안의 풍경)
우리네 혼(魂)불을 켜/ 천심으로 뛰운 거지/ 돌아가는 신명이야/ 소지(燒紙) 올린 불티라지// 무동(舞童)선 강동치마에/ 흔들려온 청사초롱-// 각시춤 탈춤하며/ 살풀이 굿판 벌여놓고// 신바람 난 난장판에 자지러진 풍각장이// 우리들 빛무리 같은/ 노래와 춤 가락인거-// 북 치고 장구 치면 징소리도 따라 울지/ 한마당 넘쳐나는 사물놀이 목청 너머/ 열두 줄 상모돌이 끝에 한세상이 돌고 돈다. // 덩덕끼, 덩덜꾸야!/ 어질머리 도질레라// 풍류마당 열두 마당/ 액막이로 비는 영복(迎福) // 모닥불 타는 열기 속에/ 이글대는 중판이다//광대놀음 사자놀이 온갖 잡패 앞세우고/ 피리소리 꽹과리며 장단 맞춘 저걸 보소/오르는 신열(身熱)은 타고/ 영계(靈界) 밖을 넘나든다.
(이은방/ 한마당 굿판)
어머니는 뒷산 정화수로/ 머리감아 수자리 간 형/ 무사만 빌었습니다. / 그날 어머니는/ 북두칠성이 붉은 빛이라고/ 지성 모자람 있더라도/ 아들 보살펴 달라고/ 두 손 마디마디 빌고 빌었습니다.
(김 석/ 다시 유월에)
이리봐도 말도많고/ 세상만사 탈도많아/ 날고뛰는 손오공도/ 부처님 손바닥안에/ 깨춤추며 까불더니/ 두손바닥 금간운명/ 못고치니 낭패로다// 일년 열두달 바람 부는날/삼백 예순날 구름 낀날/ 시시때때로 눈비 오는날/ 어김없이 잎지는날/ 이리가도 막힌 출세길/ 저리가도 훤한 고생길/ 어이할꼬 어이할꼬// 에라에라 모르겠다/ 이판국에 고쳐보세/ 팔자한번 고쳐보세/ 우로보니 수명장수/ 좌로보니 부귀영화/ 옳커니 장땡이구나/ 뒤집힌 손금으로// 두손재배 팔자타령/ 얼싸좋아 춤을추리./ 덩기덩꿍 춤을 추리
(강정화/ 무녀의 춤 · 26)
달을 향하여/ 이제 사람들은 절을 하지 않는다// 계수나무 옥토끼 대실/ 거기 찍힌 사람의 발자욱과/ 정복의 깃발을 찾는다.
(허영자/ 달밤)
아빠가 강 건너 강 건너/ 의용군에 끌려가/돌아오지 않는 밤마다/동구 밖 바람소리 쌓이고/ 빈 수저만 잠이 듭니다. / 아가야 울지마/ 아빠 온다 아빠 온다. // 엄니가 재 넘어 재 넘어/ 품팔이 가면/ 아가는 누나 등에 업혀/눈물방울 뿌리며 보채다. /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가야 울지마/ 엄니 온다 엄니 온다. // 울지마 아가야 울지마/ 아빠도 오시고/ 엄니도 오시면/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서/ 덩더쿵 덩더쿵/ 통일호 비행기 타고/ 백두산 호랑이 춤추는 데로 가자구.
(홍희표/ 썬김굿(18))
그 대개가 출생과 사망에 관한 속신적인 것들이었다. 산모가 난산으로 고통을 느낄 때 남편이 지붕에 올라가 멍에를 메고 끄는 시늉을 하면 순산을 한다든가, 임신을 못하거나 유산이 계속될 때는 쇠똥을 불에 태워 아랫배에 댄다든가, 소 발통 간것을 만병 통치약처럼 물에 타먹는다든가 하는 것들이었고, 사망 관계에 있어서도 임종시에는 소 갈비뼈를 베게함으로써 시체가 썩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든가, 죽은 뒤 머리맡에다 소오줌을 뿌리면 시체가 가벼워 져서 극락에 올라가기가 수월해진다는 것 등이었다.
(황순원/ 일월)
나는 덩달아 춤추지 않는다 나는 우상 따위에게 향료를 피우지 않는다/ 그놈 겉보기에는 금인 것 같지만 속은 모래이다.
(하이네/ 크리스찬 S에게 보내는 벽화풍의 소네트)
무료하다 하다못해 던져 본 돌팔매가/ 바다란 바다에서 잔물결로 갔다오고/ 칠성단 정화수에서 달빛을 쪼개고
(장순하/ 앵두나무는)
브올신과 바알신은/ 두 번 부서졌던 팔레스틴의 신과 더불어/ 어둠침침한 자기네 신전을 저버린다. / 뿔이 달린 신 이스다롯/ 하늘의 여왕이요 어머니인 그녀는/ 이제 성스러운 촛불조차 없이 앉아 있나니/ 리비아의 하몬신은 그의 뿔을 뒤로 빼고/ 페니키아 처녀들은 담무즈를 헛되이 애통한다. // 성난 몰록신은 도망가 버리고/ 깜장하게 불타는 그의 우상들만 남겨 놓았도다. / 저들은 징을 울리고/ 청동 화로 주위에 음침한 춤을 추면서/ 그 공포의 왕을 헛되이 부르도다. / 이시스신과 오루스신이며 개의 신 아누비스가/나일 강의 짐승신들을 서둘러 재촉한다. // 멤피스의 숲과 풀밭에서 큰 웃음 소리를 내면서/ 마른 풀들을 마구 짓밟으며 돌아다니던/ 오시리스신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 그의 성스러운 궤 속에서 그는 쉴 수도 없고/ 오직 깊고 깊은 지옥만 그의 장막이 되니/ 검은 옷을 입은 마술사들이 탬버린으로 헛되이/ 음침하게 노래하며 그에게 예배하던 궤를 나른다. // 그는 유대 땅으로부터 뻗는/ 두려워하던 아기의 손길을 느낀다. /베들레헴의 빛이 그의 거무스름한눈을 멀게 하고/주위의 잡신들도 더 이상은 머물려하지 않으며/ 거대한 나이폰은 뱀의 쪼아리를 틀지 않는다. / 우리의 아기는 강보에 싸여/ 그 저주받은 무리들을 다스리어/ 그의 참된 거룩함을 보여준다. // 잠자리에 든 태양이 붉은 구름의 장막을 치고/ 동쪽 바다를 베개 삼을 때/ 창백한 .그림자들 떼지어 지옥으로 몰려간다. / 차꼬를 찬 유령들은 제각기 무덤으로 미끄러지고/ 노란 자락을 단 요정들은/ 굽이진 요정의 미로를 떠나/ 밤의 마차 뒤를 따라 날아간다.
(밀턴/ 그리스도 탄생의 아침에)
돼지머리 앉히 젯상 옆에는/ 색색의 종이꽃이 어지럽고/ 목욕제계 소복단장하신 어머니의 그림자가/ 촛불 속에 흔들리는데// 남색쾌자 큰 무당의 절은 수없이 이어져/옥황상제님께 빌고 일월성신께 절하고/ 많고많은 신령님께 빌고 또 빌고//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한라산/ 전라도라 지리산 광주에 무등산 영암땅 월출산/ 목포 유달산 나주 금성산 광야에 백운산/모든 명산에 계신 신령님들아/ 오늘 이 제물 받으시고/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궁주 살려주소/ 청춘에 홀로되어 험한 풍파 겪으면서/ 자식으로 낙을 삼고 알리설리 살아가는 이 궁주가/ 원귀씌여 시름시름 앓으니 영험하신 신령님아/ 불쌍타 여기시고/ 이 집 문 밖 알짱대는 눈 먼 잡귀 모두 물리시고/ 및은 듯이 낫게 하소 및은 듯이 낫게하소// 극락정토 못가고 구천을 떠도는/ 밀양박씨 혼령님아/ 원통해서 못갔는가 한이 맺혀 못갔는가/ 어린 자손 두고가기 차마 발길 떨어지지 않든가/ 오늘 정성들여 제 올리니/인자는 한도 풀고 원도 풀고/ 사무친 것 모두 풀고 편안히 가시게/ 부디 극락으로 가서 두 자손 잘되기만/ 밤낮으로 축수하소// 꽹과리소리 장구소리 한데 어울려 요란하고/ 큰 무당 손에 들린 푸른 댓가지 떨리며/신들린 무당의 사설만이 구슬프네.
(박용주/ 굿하는 날)
질긴 사슬을 풀어/ 한 조각 한을 띄우는/무녀의 살풀이 끝에
(정춘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동구 밖 장승이/ 날마다 웃고 서 있는 서낭당 고개, 돌무덤 앞에서/ 어머님은 손을 비벼/ 그리고 잘 되라고 빌어주던/ 정화수 그릇에 뜬 하늘도 보인다.
(김재흔/ 내 안의 풍경)
어느 제자가 하루는 부처, 예수, 마호메트 등이 동시대인들로부터 반역자와 이단자로 낙인 찍혔던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 스승은 말했다. / "천 명의 진지한 사람들이 그가 진리를 모독했다고 고발하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이 진리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다. "
(앤소니 드 멜로/ 박해)
설 교 노 트
자기의 신상들을 만듦
왕하17:29-33
서론
본문 29절에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산당에 두뇌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음에서 그렇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호와를 경외할 것을 가르쳤으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민족이 만든 신상들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는 숙곳브놋은 "소녀들의 오두막집"이라는 뜻이 있으며, 암탉의 형상입니다. 이것는 바벨론의 신 말둑(Mar-auk)의 배우자인 사르파니투(Sarpanitu)이며, 사마리아에는 말둑 신전이 있었습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어휘를 취하는 것이니 소녀들을 위한 오두막집은 성스러운 매춘을 하기 위하여 지어진 숙소라고 할 수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면 매음하는 창녀굴인 것입니다.
2.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습니다.
굿은 바빌로니아에 있던 고대 도시인데 '구다'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뜻은 '네르갈신의 자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네르갈(Nergal)은 굿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입니다. 이 신은 수탉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성읍의 주'라는 뜻입니다. 이 신은 전쟁, 수렵, 역병, 명부(冥府)를 지키는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3. 하맛 사람들은 아시아를 만들었습니다.
하맛은 시리아 중부의 도시로 헬몬 북방, 다메섹 북쪽, 오른테스 강변의 도시로(수13:5) '요해'의 뜻이 있습니다.
이들이 만든 아시마(Ashima)는 숫염소의 형상으로 여신입니다. 이것은 야웨의 배우여 신으로서 삼은 듯 보이는데 일종의 혼합종교의 양상을 보여준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4.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습니다.
아와는 앗수르군에게 점령된 성읍입니다(왕하17:24). 이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이라는 신을 만들었는데, 닙하스(Nibhaz)는 개의 형상이고, 다르닥(Tartak)은 나귀의 형상입니다. 이것은 바빌로니아 · 탈무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시리아의 여신으로 간주합니다.
5. 스발와임 사람들은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을 만들었습니다.
스발와임은 북 수리아의 성읍으로 하맛과 다메섹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왕하18:34, 19:13).
아드람멜렉(Adrammelech)은 공작 또는 노새의 형상이고, 아남멜렉은 꿩의 형상입니다.
이 두 가지는 어린이를 불살라 제사하여야 했습니다.
결론
우상은 곧 사람들이 만들어 놓고 섬기는 물건들로 사람보다도 못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섬김은 정말 우습고, 미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우상의 형상들은 하나같이 암탉 수탉, 숫염소, 개 , 나귀, 꿩, 공작, 노새로 인간이 사육하거나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짐승들을 신의 모습으로 만들어놓고 심지어는 자기의 자녀까지 불살라서 제사해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지고 그런 일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온 결과인 것입니다.
다른 신들을 좇게 함
왕상11:4-8
서론
솔로몬 왕은 이방 여자들을 많이 처첩으로 거느려서 음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가 많아 늙게 되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서 다른 신들, 즉 왕비들 고향의 신들을 섬기게 권하였으므로 솔로몬 왕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여 가증한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도 나타나셔서 이 일에 대하여 다른 신들을 좇지 말라고 하셨으니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이방 신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섬긴 이방 우상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 시돈인의 여신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함께 북쪽 뵈니게의 수도인데, 이들이 섬기는 우상은 아스다롯 여신입니다. 이 신은 동물화 식물에게 생명을 부여한다고 하여 풍양의 신이요, 다산의 신이요, 성애의 신이요, 또는 쾌락의 여신입니다. 이것은 남신 바알과 같이 쌍벽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사시에는 성(性)의 해방이라는 아주 부도덕한 일이 성행했습니다.
2. 암몬인의 신 밀곰
암몬인은 밀곰을 국가신으로 섬겼는데 이것은 '왕'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멜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신을 의미합니다.
스바냐 1장 5절에 보면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 성신에게 경배하는 자와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와"라고 하였습니다.
밀곰 신의 이름은 '멜렉', '몰록' 그리고 '말감' 이라고도 합니다.
그 머리에서 벗겨진 왕관이 금 1달란트의 무게가 나가는 것으로 보아(삼하12:30) 거대한 크기의 인간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황소의 머리를 한, 사람의 형상으로 되었는데, 앞으로 뻗친 두 팔은 희생물로 정해진 아이들을 받을 준비를 갖춘 자세입니다.
금속으로 만들었는데, 그 속에서 타는 불로 인하여 바쳐진 아이가 타서 죽으며 그 밑의 함정에 빠지게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밀곰에게 바쳐지는 제물도 다른 짐승이 아닌 인간의 아이이니 참으로 잔인하고 가증스러운 우상이 아닐 수 없으며, 그 자식을 바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 우상과 같이 금속으로 되어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3. 모압의 가증한 신 그모스
민수기 21장 29절에 "모압아 네가 화를 당하였도다 그모스의 백성아 네가 멸망하였도다"라고 하여 모압 족속은 그모스의 백성이라고 불리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압 족속들도 그모스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아이들을 번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예배의 일부로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3장 27절에 보면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렵게 되자 자기를 이어서왕이 될 자기의 맏아들을 성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우상은 아주 잔인한 우상이며, 또 그토록 잔인한 제사 행위가 놀라울 뿐입니다.
결론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써,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많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믿음의 사람을 배우자로 택하여야 합니다. 육체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영혼의 안전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부숴진 다곤
삼상5:4
서론
다곤이란 블레셋 사람들이 주로 섬기는 우상의 이름입니다.
우상이란 본래 신이라는 이름을 붙일 가치도 없는 무가치하고 한심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몸뚱이만 남았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모습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다곤이란 어떤 우상입니까?
어원학상으로 보면 다곤이란 이름은 '슬픔의 물고기'라고 하는데 이는 다곤의 모양이 인두어신(人頭漁身)으로 하체가 물고기이고, 머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그 모양으로 연유된 것 같습니다.
또 라스 샤므라에게 발견된 신화적 문서에는 바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는 초목신으로 나타나며, 바알은 다곤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셈어 보통 명사로는 다곤이라는 말이 '곡식'으로 나타나서 '곡물의 신' 또는 '날씨의 신' , '폭풍우의 신' 등의 뜻이 있는데, 이 모든 이름을 연결시켜서 볼 때 농업을 주관하는 신으로 섬김을 받은 듯 합니다.
이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지는 것인데, 어리석은 우상에게 농업의 풍요로움을 맡기니 참으로 미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다곤의 신전 소재지
다곤의 신전이 있는 곳은 우가리트,아스돗(삼상5'1-7), 가사(삿16:23), 벧산(대상10:10) 등지에 있었는데 본문은 아스돗에 있는 다곤 신전입니다.
신전은 종교 의식이 행하지는 제단이 있는 넓은 안뜰에 자리잡고 있으며 제단에 계단이 2개 있고 제단 너머로 성소가 있고 그 뒤쪽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오른쪽을 향하면 계단이 계속 이어진 단위에 우상이 놓여 있는데 앞에서 말한 대로 그 모습이 윗부분은 사람 모양이고 아랫 부분은 물고기 모양이었습니다. 인어의 모습이나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3. 몸둥이만 남은 다른
블레셋 군대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다가 다곤의 신당 안 다곤의 곁에 두었습니다.
그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본즉 다곤이 법궤 옆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에도 역시 다곤이 엎드러져 있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서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무능하고 허황된 신입니까?
그런 신이 어떻게 인간에게 복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는 어떤 신이라도 무가치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아니 어떤 것도 신이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헛된 것을 만들고 그것을 무서워하며, 거기에 절하고 복주기를 바라며 자기를 보호해 주기를 바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목이 부러진 다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 무능한 것을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신 앞에 거꾸러진 우상 다곤입니다.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석으로 만든 신들
신28:36
서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하사하신 십계명 중에 가장 근본되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신명기 5장에 8-9절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1. 목석으로 만든 신들
다른 신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말하는 것이니 곧 우상이요, 미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신들의 형상은 목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먼저 나무로 만든 신 가운데 대표되는 것이 '아세라 목상' 입니다. 아세라 목상은 아모리사람, 또는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여신이며, 보통 나무 기둥에 새겨져서 예배 처소에 세워집니다.
그리고 돌로 만든 신 중에 대표되는 것이 바알신입니다. 바알신은 셈 민족의 최고 신이며, 돌로 조각하여 세웠는데, 아세라 목상과 함께 산당에 세웠으니 바알은 남성 신이요, 아세라는 여성신입니다.
이방 우상 중에 바알과 아세라가 가장 대표적인 우상일 것입니다.
2. 사람이 만든 신의 무가치성
적어도 신이라고 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삼으려면 사람보다는 능력과 지혜가 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이라고(행17:29) 하였으니얼마나 한심스러운 존재입니까?
시편 115편 4-7절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소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신으로서 아무 힘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인 것입니다.
3. 참된 신은 누구입니까?
사람이 신을 섬기는 것은 인간 본능의 종교심입니다. 이것은 그를 섬김으로써 내가 유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혜택을 베풀지 못하거나 축복을 할 수 없는 무가치하고 무자격한 존재를 신이라고 예배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축복을 주지 못하는 우상은 아무리 정성으로 섬겨도 모두 헛된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 믿을 만한 신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참 신은 누구십니까?
참 신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요, 만사를 통치하시는 주재자시요, 만복의 근원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결 론
우리를 만물을 다스리도록 정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한 인간은 이제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한 그것들에 의해 지배를 받고자 하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것, 죽어있는 것을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무나 돌은 그저 인간의 손에 의하여 쓰임을 받거나, 버림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고 믿어 축복을 얻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수공물
시115:4
서론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은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 발생물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들이 가공해 놓은 일종의 제조품, 즉 물건인 것입니다.
이런 가증한 것에게 절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1. 우상은 은과 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겨야 하는 신은 참 신 여호와 하나님뿐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다 신이 아닙니다. 그저 위대하고 장엄하게 보이는 자연 현상일 뿐이며,사람들이 자기의 손으로 깎아 만든 우상인 것입니다. 그 우상의 재료도 다양하여 흙으로 빚거나, 나무로 깎아 만든 것도 있고, 돌로 다듬어 조각한 것도 있습니다. 조금 더 귀중하게 만든 것들은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물의 가공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불교에서 섬기는 부처 같은 것은 돌을 깎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그 위에 금도장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이 될 수 없으며, 그저 인간들의 노리개감인 것입니다.
2. 우상의 허무성
우상은 어떠한 존재입니까? 사람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1)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합니다.
(2)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3)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4)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합니다.
(5)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합니다.
(6)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합니다.
완전히 허수아비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들의 생활에 거치는 존재이며,손해를 끼치는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자들은 그 자신이 우상 이상으로 미련한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자기만도 못한 존재인데 어떻게 그 신이 아닌 것에게 복 주기를 바라며 기대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기에 절하며 복 주기를 기대하니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들인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3. 참 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은 연약한 존재인고로 어디까지나 자신을 도와주고 유익하게 해 줄 큰 능력의 소유자를 갈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심입니다. 사람들이 참으로 공경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사람의 눈에 나타나 보이시지는 않지만, 그래서 그 존재를 확인하기 힘든것 같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천지를 살피시고(시113:6),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십니다(롬8:27). 우상은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그리고 천지 구석구석을 다 보시는 놀라우신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리고 들으시는 귀를 가지고 계셔서 성도들의 간구를 언제나 들으실 수 있으십니다(시6:9). 그리고 창세기 8장 21절에는 향기를 흠향하신다고 하셨으니 곧 냄새를 맡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늘이나, 땅에나, 모든 인간에 게 직접 말씀하십니다(사1:2). 이러한 하나님이 참된 신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경배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결론
인간은 마땅히 어떠한 신을 섬기도록 되어 있는데, 그 신은 헛된 신이 아닌 참 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헛된 우상은 물질의 하나일뿐이며, 그것을 통하여 사단이 힘을 발휘하니 우리는 미신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
출22:18
서론
종교에는 도덕 이하의 것과 도덕과 같은 양상의 것과 도덕 이상의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는데 하나님을 참신으로 섬기는 기독교 이외에는 거의 다 도덕 이하의 것이기 때문에 사실 종교라고 하기도 모순이 있다고 봅니다. 본장에서는 재산의 손해 배상과 도덕상 및 종교상의 여러 가지 율례를 언급하는 가운데 특히 "무당을 살려두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무당은 혹세무민(惑世讓民)하는 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롭게 잘난 체 하여도 역시 제한을 받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일에 만능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무당이라는 직업을 가지는 자는 대개 자신이 무식하고 천박하기 때문에 그런 직업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당은 어떤 신통력이 특수해서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 하며, 남이 못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미혹하여 거짓으로 속여서 꾀이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또 이러한 직업을 통하여 어떤 묘한 권리를 행사하고 돈을 버는 일까지 감행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같이 과학이 발달하여 하나님을 멀리하는 시대에도 무당들은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계실 뿐인데도 사람들은 신이 내렸다고 떠쓰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미혹되어 그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구약 당시나 지금 이 시대나 무당들은 한결같이 돈을 벌고자 합니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당을 살려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무당도 하나의 인간인데 살려두지 말라고까지 엄한 명령이 내려졌다면 그 또한 얼마나 저주스러운 존재인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영적으로 볼 때에 이런 자들을 도저히 살려 둘 존재 가치가 없었기 때문에 무당을 살려 두지 말라고 하는 율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2. 무당은 하나님을 대항합니다.
신명기 18장 10-12절에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이나 진언 자나 신접 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애굽 왕 바로도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술객과 박사와 박수 무당들을 총동원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한 것을 성경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가장 악하고 무서운 만행인 것입니다.
무당이 어떻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신이 들렸다고 떠드는데, 그것은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붙잡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결론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든지 무당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기만하는 자요,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자입니다.
이렇듯 인간에게 해만 끼치는 무당이니 살려 두지 말라고 엄한 율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버려야 한다
호8:5
서론
본장에서는 세 가지 동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절에 독수리로 침략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을 비유하였다고 합니다.
5절에 송아지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들어 섬긴 우상입니다.
9절에 들 나귀로 불순중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본문 5절에 송아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출32:1-6)
모세가 출애굽 도중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이에 산 밑에서 초조하게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은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아론에게 모여 가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존재인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듣고서도 백성들이 요구한다고 하여 자신이 책임지고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송아지를 만든 것은 애굽에서 배운 것으로, 애굽인들은 숫소는 '오시리스' 신에게바치고, 암소는 '이스'라는 신에게 바쳤습니다.
아론은 대제사장의 입 장에서 가장 창피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여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2.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왕상12:25 -33)
북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사모하여 유대로 갈 것을 염려하고, 또 그곳을 향하는 사모심을 염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벧엘과 단 두 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워놓고 말하기를 "너희는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아닌 보통 사람 중에서 제사장을 임의로 택하여 세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열왕기 상하권을 보면, 우상 숭배에 악한 왕을 설명할 때마다 "여로보암 같이 악을 행하여"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여로보암은 악한 일을 행한 왕의 표본이 되었으니 부끄러운 이름으로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3. 금송아지는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운 송아지 우상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하는 하나의 자위 행위라고 할 수 있으니 그나마도 아무런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송아지는 인간이 만든 우리에서 키워서 밭을 잘게 하는 등 인간을 위하여 소용되는 짐승일 뿐입니다. 이러한 송아지의 형상을 금으로 만들었다고 하여서 신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송아지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인데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미련한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마땅히 가증히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이스라엘의 금송아지는 깨어져야 합니다.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도,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도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해낸 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곳에서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을 버리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상,즉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과감히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는 자는 벌할 것이라
렘46:25
서론
본문에 보니 "나 만군의 여호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니 보라 내가 노의 아몬과 바로아 애굽과 애굽신들과 왕들 곧 바로아 및 그를 의지하는 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벌을 받을 대상은 누구이며, 그들이 의지하는 신들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처벌 대상은 누구입니까?
"노의 아몬"이란 말에서 '노'는 알렉산드리아 도시를 의미하고, '아몬'은 무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의 무리가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알렉산드리아가 애굽을 대표할만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집중해서 사는 자들은 정치적 권력자들과, 경제적 재벌가들과 지식적 교만자들이며 또 도시를 배경으로 이득을 보거나 범죄하는 자들이 모여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장점을 자랑하며, 헛된 미신과 우상 신들을 의지하고 사니 미련한 자들이요, 처벌받을 대상자들입니다.
그때 뿐 아니라 현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범죄는 거의 다 도시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미신을 따르는 자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정치가들, 경제가들, 학자들이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사업이 잘 될지 궁금하며 미신을 좇고 있으니 그들도 역시 처벌 대상이 될 것입니다.
2. 의지하는 신들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의지하는 신들은 '바로'와 '왕들', 즉 왕족들을 말합니다. 바로 왕은 애굽 왕의 통용 칭호이며,그의 세력을 빙자하여 권세를 부리는 혈통적 관계자, 법으로 연결된 자들입니다. 인간을 신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신입니다 특히 고대 종교 중 신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멤피스의 '프타(Ptah)', 제 1홍수 지역의 '크눔(Klmum)',페이율의 악어신 '소백(So-bek)'과 같은 지방신이 있습니다.
(2) 천신 '누트(Nut)',지신 '겝(Geb)',태양신 '레(Re)', 창조전 혼돈을 주관했던 여덟 신들과 같은 우주신입니다.
(3) 진리와 정의의 여신 '마아트(Ma'at)', 가사 ·출산의 신 '베스(Bes)', 전쟁과 질병의 여신 '세코베트(Seknmet)'와 같은 신들입니다.
뿐만 아니랴,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들어가 살던 시대에는 미신적 신들이 많습니다. 나일강, 개구리, 이 등등 모든 것을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열 재앙으로 이런 것을 치신 것도 그들의 미신 사상의 허무한 것을 경고하시며 교훈하신 것입니다.
3. 그들이 받을 벌이란 무엇입니까?
26절에 "내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붙이리라"고 하신 그대로입니다.
베벨론을 들어서 치실 일은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해 놓으신 일인데, 쓸데없이 바로와 그들의 우상들을 의지하려고 하니 벌받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결론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미련한 일이며, 신이 아닌 것을 가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도 한심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의지할 신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뿐이십니다.
헛된 미신을 버리고 참 하나님만 믿으십시다.
벧세메스의 주상
렘43:13
서론
본문에 기록 그대로 소개하면 "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주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집을 불사르라 하셨다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면세메스의 주상이란 무엇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벧세메스의 위치
(1) 여호수아 15장 10절에 "바알라에서부터 서편으로 돌이켜 세일산에 이르러 여아림 산 곧 그살론 곁 북편에 이르고 또 벧세메스로 내려가서 딤나로 지나고"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살론과 딤나 사이 유다 북쪽 국경선에 있는 성읍이요, 텔, 엘, 루메일레와 같은 곳으로 예루살렘 서쪽 38km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2) 잇사갈 지파에 속한 요단 강가의 한 성읍(수19:22)으로 갈릴리 바다 서쪽에 소재합니다.
(3) 납달리에게 할당된 가나안인의 도시(수19:39)로 두로의 남동쪽에 소재하였습니다.
본문의 벧세메스는 애굽 가이로 동북쪽 약 8km지점에 소재한다고 합니다.
2. 벧세메스의 뜻
"벧세메스"라는 말은 헬라어로 '태양신'이요, 애굽어로는 '온'인데 번역하면 '일광(日光)' 이란 뜻입니다.
이 전각은 매우 큰 전각으로써 제사장들이 12,000명이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애굽에 간 요셉이 일찍이 이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취한 일이 있습니다(창41:45). 그 전에는 부속 대학교가 있었는데 외국 청년들이 와서 유학을 하였으며, 전설에 의하면 모세도이 학교에 와서 배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벧세메스는 태양의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곳에 세워진 주상
이곳은 애굽 이름으로 '온(on)', '헬리오 폴리스'라고 합니다. 카이로 북동쪽 약 8km지점에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태양신 '라(Ra)'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19장 18절에 보면 "그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인데 그중 하나는 장망성이라 칭하리"고 하였습니다.
이 '장망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태양성' 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태양신을 숭배하는 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히애로폴리스(Hie-ropolis)성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만들어진 우상은 큰 돌 한 개로 만들었는데, 높이가 19m이며, 그 넓이의 지경이 3m이며, 사면으로 문자를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수천 년 전 유물로 파멸되었습니다
누구에게 파괴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을 받아 점령되고 파괴되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애굽 왕이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
벧세메스는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우상입니다. 아무리 돌이 크다고 하여도 그것은 광물질일 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든 우상이 아무리 크고, 역사가 있고, 유명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고 하여도 어린아이처럼 연약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우상을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곧 깨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가득 차야할 것입니다.
우상의 방안 어두운 곳
겔8:12
서론
에스겔은 그 당시의 장로들이 비밀히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일반 세상에서 알려지지 않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저들 위선자들은 비열한 속임수로 그들의 죄악을 악화시켰습니다.
어떻게 알려지지 않은 우상을 섬겼으며, 그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모든 사람들 마음의 우상 방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과거 수년간의 더럽고 누추한 광경이 보여질 뿐만 아니라 찌그러지고 깨어져서 못쓸 것들의 추잡한 모습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또는 괴상 망칙한 양상들의 꿈틀거리는 자태도 보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영이 있기도 합니다. 음모, 소원, 좋아하는 공상, 가장 즐기는 생각들인 것입니다.
보통 돌이나 나무나 금속이나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을 우상이라고 하며,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 동물, 그리고 심지어는 곤충, 물고기까지도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증한 우상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들 마음의 우상 방인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은밀하게 혼자서만 즐기며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비밀히 숭배하였다고 했으니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친구처럼 환영하고, 어떤 것들 앞에는 굴복하여 경배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마음이 우상 방을 설치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우상의 방에서 행하는 어두운 행위들
우상의 방안 어두운 곳에서 행하여지는 것들은 육체의 더러운 욕망과 불의한 사상과 물질적인 탐욕과 도둑질, 증오, 투기, 살인에까지 이릅니다. 극작가 세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위험한 공상은 그들의 본질에 있는 독이다. 그것은 처음에 거의 싫어하지만, 그러나 생명에 임한 작은 행동으로 인해 유황광처럼 불탄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상상이 외적 행위를 물들게 한 것입니다. 결국 마음에서 살인을 생각하면, 그것은 살인하는 행위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생각은 그 사람을 좌우하게 되므로 그것은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어두운 곳을 살피십니다.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지 못하시며 비밀에 묻혀질 줄 알고 어두운곳에서 은밀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의 그 최고 비밀의 사상의 근저까지 내려다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우리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비밀의 방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행위로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마음의 죄까지 모두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시편 51편 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시니 어디서나 하나님의 눈을 피하지 못합니다.
결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효과적인 구원은 우상의 방을 깨끗이 청소하는 작업입니다. 마음을 더럽히는 온갖 악질적인 요소와 누추한 사상과 저급한 생각들이 결국 나 자신을 망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바알브라심
대상14:11-12
서론
본문에 "이에 무리가 바알부라심으로 올라갔더니 다윗이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하나님은 물을 흩음 같이 내 손으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함으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내침자 블레셋을 르바임 골짜기에서 쳐서 대적을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1. 르바임 골짜기가 바알브라심으로 변하였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처음으로 블레셋 군대가 침입하였습니다. 그들은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넓은 골짜기, 혹은 오목한 평야인데, 유다와 베냐민 지파 기업지의 공동 경계선을 뜻하는 것입니다(수15:8, 18:16).
이곳 북편에는 유명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블레셋군은 패전을 하였고, 승전한 다윗은 이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으로 고쳤습니다.
오늘날은 이곳을 라스 앤 나디르(Rasen-Nadir)부근의 세이크 베드르(Sheikh Bedr)로 추정됩니다.
2. 버림을 받은 우상
본문 12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상을 그곳에 버렸으므로 다 이 명하여 불사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신이라고 하면 적어도 사람들보다 권능이 있고 지혜가 있어인간의 욕구를 채워주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가치가 그 얼마나 허무한 것입니까? 또 얼마나 무력합니까? 그리고 무가치합니까?
섬기는 인간들이 필요할 때는 만들어서 온갖 정성을 기울여 섬기다가 필요하지 않거나 가치를 발휘하지 못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내버리기도 하니 그 우상이 무슨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노리개에 불과한 것입니다. 실컷 만들어서 가지고 놀다가 싫증나서 내버리는 그런 무가치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버림을 받는 우상 따위를 섬겨서 무엇을 얻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헛된 신은 우리에게 헛된 망상과 기대만을 하게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3. 바알브라심은 바알을 파한다는 뜻입니다.
"바알브라심"이라는 이름은 '바알을 파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알신은 가나안 본토인들이 섬기던 신들 중에 상위에 속하는 신입니다. 이것은 태양을 상징하는 남신입니다. 아스다롯은 아세라 목상으로 여신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은 병립되는 양대 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우상은 풍요와 다산을 주관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알을 파하였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파괴되는 바알은 얼마나 한심한 신입니까? 아니 돌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신과 아세라신의 신지자들을 850명을 상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결하여 그들을 패하게 하여 진멸한 일이 있었습니다(왕상18:40).
결론
"바알브라심이라고 칭하리니"라고 하여 그 우상의 무가치함과 허구성을 폭로하여 파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헛된 것을 좇지 말고 오직 참 신이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 움
성 경 활 용
1. 미움의 뜻
(1) 마음에 싫어함
(잠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잠25: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2) 살인하는 것을 말함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3) 바르지 못한 행위
(계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4) 덜 사랑하고 경히 여김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는 저를 사랑하거나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2. 미움이 생기는 이유
(1) 원망 때문에
(신1: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 변한 마음 때문에
(삼하13:15)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3) 거만 때문에
(잠24:9)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
(4) 불의 하거나 정직하기 때문에
(잠29: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정직한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5) 아비의 편애 때문에
(창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6) 온전하기 때문에
(잠29:10)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7) 악한 계교를 죄하기 때문에
(잠14:17)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8) 가난 때문에
(잠19:7)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
(9) 원수이므로
(시139:22)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10) 악한 행위 때문에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11) 시험에 빠짐으로
(마24:10)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3. 세상은 무엇(누구)을 미워하나?
(1) 하나님
(신7: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시68:1)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2) 그리스도
(요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3) 성도
(시109: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마24:9)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4) 지혜
(잠8:36)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5) 지식
(잠1: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6) 의인
(시34: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7) 선
(미3: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8) 책망하는 자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4.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미워 하시나?
(1) 패역한 자
(잠3: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2) 모든 악
(호9:15) 저희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서 저희를 미워하였노라
(3) 속이는 저울
(잠11:1) 속이는 저울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4) 마음의 패려한 자
(잠11:20) 마음이 패려한 자는 여호와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5) 거짓 입술
(잠12:22)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6) 행악자
(시5:5)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7) 마음이 교만한 자
(잠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 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8)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것
(눅16:15)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9) 우상 숭배
(신16:22)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10) 거짓 맹세
(슥8:17)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잎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11) 학대와 이혼
(말2: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5. 성도는 무엇을 미워해야 하나?
(1) 악
(잠16:12)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2) 행악자의 집회
(시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 하리이다
(3)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
(시31:6)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4) 악
(잠8:13) 여호아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 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롬12: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5) 거짓말
(잠13: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데 이르느니라
(6) 두 마음을 품는 자
(시119:113) 내가 두 마음을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7) 탐욕
(잠28:16)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
(8) 바르지 못한 행위
(계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9) 가증한 것
(신7: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
6. 미움이 초래하는 결과는
(1) 살인함
(민35: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2) 다툼을 일으킴
(잠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3) 언사가 불평
(창37: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4) 수치를 당함
(시129: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5) 어둠 가운데 거함
(요일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6)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함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7.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자의 결과
(1)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김
(겔23:29) 그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네게 행하여 네 모든 수고한 것을 빼앗고 너를 벌거벗겨 적신으로 두어서
(2) 목자가 끊김
(슥11:8)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3) 자손 삼 사대까지 죄를 갚음
(출20:5)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4) 당장에 보응 받음
(신7:10)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5) 일어나지 못하게 됨
(신33:11)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관련원어풀이
1. anEc] 사-네
(1) 미워하다, 증오하다.
(신22:13, 시11:5)
(2) 미워하는 자, 적군.
(시35:19, 38:20)
(3) 미움을 받다.
(잠14:17)
(4) 미워하는 자, 원수, 적군.
(시18:41, 55:13)
2. an:v] 세네-
미워하는 자, 원수.
(단4:16)
3. b[;T' 타-압
(1) 싫어하다, 증오하다.
(신7:26, 시5:7)
(2) 미움받게 하다. 두렵게 하다.
(사49:7)
(3) 질시하게 하다.
(겔16:25)
(4) 증오를 받다, 경시하다.
(대상21:6)
4. hb'[e/T 토-에-바
미워함, 가증.
(출8:26)
5. va'B: 바-아쉬
(1) 악취를 풍기다, 나쁜 냄새를 내다.
(출7:18, 8:10)
(2) 악취를 풍기게 되다. 미워하게 되다.
(삼상13:4)
(3) 미워하게 하다, 증오하다.
(창34:30, 출5:21)
6. lj'B; 바-할
(1) 싫어하다.
(슥11:8)
(2) 탐내는, 욕심이 많은.
(잠20:21)
7. $a'n: 나-아츠
(1) 싫어하다, ~에서 돌아서다, 멸시와 비웃음으로 거절하다.
(신32:19, 애2:6)
(2) 거절하다, 경시하다.
(시10:3, 사60:14)
(3) 하찮게 여기는.
(사52:5)
8. ra'n: 나-아르
미워하다, 질시하다, 무가치한 것으로 거절하다.
(시89:40, 애2:7)
9. fWq 쿠-트
지치다,싫증나다, 멸시당하다.
(시95:10, 겔16:47)
10. $Wq 쿠-츠
(1) 싫증나다, 질시하다.
(레20:23, 민21:5)
(2) 두려워하다.
(출1:12, 민22:3)
11. !f'c; 사-탐
덫을 놓다, 뒤쫓다, 난폭하게 행동하다.
(창27:41, 욥61:9)
12. bdeluvssomaiv 브델루소마이
미워하다, 멸시하다, 가증시하다.
(계21:8)
13. bdevlugma 브델루그마
(1) 더러운 것, 가증스러운 물건.
(눅16:15, 계17:4)
(2) 몹시 미운 것, 불결한 것.
(마24:15, 막13:14)
14. ajpostugevw 아포스투게오-
미워함으로 피하다, 몹시 싫어하다
(롬12:9)
15. qeostughv" 데오스투게-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롬1:30)
16. misevw 미세오-
(1) 미워하다, 악의를 가지고 대하다.
(마5:43, 10:22)
(2) 질시하다, 증오하다.
(요3:20, 롬7:15)
(3) 사랑없이 대하다.
(마6:24, 눅14:26)
설교예화자료
현미경과 망원경
어떤 사람은 '시기'는 현미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 같은 것도 보통 눈으로 보면 밝지마는 현미경으로 맑은 물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더러운 벌레도 많고 그 외에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시기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좋은 사람이라도 여러 가지 결점이 많이 나타나는 말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망원경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방금 저 사람이 좀 부족한 것이 있지마는 이 앞에는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사람은 멀리서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사랑으로 본다고 하면 내가 다른 이웃도 사랑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을 가져오는 미움
미국의 어떤 부인이 갑자기 자기 얼굴과 목에 뾰로지(부스럼이)가 돋아나서 너무나 보기 흥하기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친한 친구도 방문하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백방으로 탐문하여 알려진 병원과 의사를 찾아갔으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하루는 고명한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나서도 그 뾰로지의 발진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그녀와 마주 앉아서 상담하는 가운데서 그녀가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이웃에 사는 젊은 부인이라는 것과 그것이 뾰로지 발진의 원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 앞에서 치를 떨면서 뾰로지로 고생하는 부인은 "여우같은 그년 보기 싫어서 내가 죽든지 그 여우 같은 년을 죽이든지 하기 전에는 마음속에 맺힌 것이 풀리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전문적 지식을 가진 그 의사는 그녀의 분노와 함께 그녀의 안색이 급격히 변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녀에게 처방을 써 주며 의사는 "내가 당신의 불가사의한 뾰로지 발진의 원인을 이제야 찾았소! 당신은 이웃의 그 부인을 마음속으로 너무 미워하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기 때문에 발진이 생긴 것이오! 당신의 마음을 깨끗이 갈아 앉히면 이 뾰로지는 곧 사라지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이웃에 사는 부인을 만나서 과거에 서로 미워하던 것을 털어놓고 화해하시오!"
그녀는 여우같이 미워하던 이웃의 부인과 모든 것을 털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의사에게 보일 때 발진은 많이 가라앉았고 그 후 뾰로지가 다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맞아 들어갔습니다. 우리들도 이것을 깨닫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꿀벌의 기도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이꽃 저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모으는 꿀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땀흘려 모은 꿀들을 모두인간들에게 빼앗기자 꿀벌들은 그만 화가 났습니다.
"고생해서 모은 꿀을 모두 인간에게 빼앗기니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군!"
"그러게나 말야, 벌통에 꿀이 가득해지면 잊지 않고 빼앗아 가니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신령님께 빌어서 인간들을 혼내줄 수 있는 무서운 힘을 달라고해야지."
"맞아, 그렇게 하자.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래서 꿀벌들은 신령님께 빌었습니다
"신령님, 저희들에게 독이 있는 침을 주세요. 그 침으로 인간들을 찔러 다시는 꿀을 빼앗아 가지 않도록 하고 싶어요."
모든 벌들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신령님은 꿀벌들의 기도를 듣자 그들의 억울함이 이해가 되었으나 너무 악한 마음이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꿀벌들에게 독이 있는 침을 주면서 그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너희들의 소원대로 침을 주겠다. 하지만 그 침으로 인간들을 찌르면 너희들도 죽게 될 것이다. "
그 후부터 꿀벌은 한 번 침을 쏘면 자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사자와 세 마리의 소
풀을 먹을 때나 물을 먹으러 갈 때나 항상 함께 다니는 사이좋은 세 마리의 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숲 속에 사는 사자가 이 소들을 잡아먹으려고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세 마리가 항상 함께 행동했으므로 좀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저 것들을 한 마리씩 잡아먹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을 몰래 숨어서 보며 사자는 생각했습니다
"옳지, 그게 좋겠군!"
마침내 사자는 꾀를 내어 어슬렁어슬렁 풀밭으로 갔습니다.
사자는 가장 가에 있는 소에게로 가서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습니다.
"쉬잇! 사실 이건 비밀인데 네 친구 둘이 며칠 전 너의 흉을 보았단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하도 딱해서 말해 주는 거야."
"뭐라구요, 그게 정말이예요?"
사자의 말을 들은 소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저희들에게 온 정성을 다했는데‥‥‥‥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는 친구들을 믿지 말아야 해.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을 알면 네 친구들이 화를 낼테니 난 그만 가야겠어."
어리석은 소는 그날부터 친구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자는 다음날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다른 소에게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 소 역시 마음이 상해 두 친구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토록 다정했던 세 마리의 소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따로따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불쌍한 녀석들, 드디어 내 꾀에 걸려들었구나!'
사자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소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한 마리씩 차례로 잡아먹었습니다.
어록·시·묘사
미워할 것은 인간이 지닌 어리석은 조건뿐이다. 인간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인간 심리의독소, 남을 억압하려는 포악성, 착취하려는 비정, 남보다 뛰어나다는 교만, 스스로 나서려는 값싼 영웅주의적 참견, 남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무엄, 그러한 것들이다.
(선우휘/ 불꽃)
빈대 미워 집에 불 놓는다. <*큰 손해를 볼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제게 매우 마땅치 않은 것을 없애기 위해 어떤 일도 한다는 뜻>
(한국 속담)
실망과 미움은 오뉴월 소나기처럼 변덕스럽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동주/ 애정의 관리)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 <*자꾸 미워만하기 시작하면 고와야 할 것까지도 미워진다는 말>
(한국 속담)
인간 서로의 미움이란 미움이 미움을 낳는 악순환밖엔 가져오지 않는다.
(선우휘/ 불꽃)
중이 미우면 가사도 밉다. <*그 사람이 밉다보니 그에게 딸린 것까지 다 밉게만 보인다는 말>
(한국 속담)
죄악과 사악함을 미워하라. 그러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러한 것을 잘 이해하라.
(w. 사로얀/ 인생의 가장 즐거운 시기)
내가 그를 미워해도 되는 것은 미워한다고 그가 괴로워하거나 불행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도 나를 미워하며 이 미움으로 말미암은 어떤 기쁨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 가 그를 미워함으로 그가 혹 불행해진다면 나는 더 미워할 수 없을 것이며 도리어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김원구/ 예술적 팡세 조무)
까마귀 열 두 소리에 하나도 좋지 않다<*미운 사람이 하는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밉다는 말>
(한국 속담)
개 꼬라지 미워서 낙지 산다 <*개가 뼈다귀 먹는 꼴이 미워서 뼈없는 낙지를 산다 함이니, 자기가 미워하는 자에게 어떻게든지 그 자가 좋아 할 일은 하지 않는다는 뜻>
(한국 속담)
지나친 사랑은 미움으로 변하기 쉽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사람은 미움으로 많은 것은 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에 의하여 더욱 많은 것을 하게 된다.
(W.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눈총을 맞는다. <*미움을 받는다는 뜻>
(한국 속담)
못난 색시 달밤에 삿갓 쓰고 나선다. <미운 사람이 점점 더 보기 싫은 짓만 한다는말>
(한국 속담)
견디고 서로 도운 사람들이/ 이제 와서 미움 때문에 반목을 한다.
(N. 폰파이분/ 크라삼 빙)
미움이란 말 속에 실흔 아픔/ 미움이란 말 속에 하잔한 뉘침/ 그러나 그 말삼 씹히고 씹힐 때/ 한 거풀 넘치여 흐르는 눈물.
(김영랑/ 사행소곡)
안으로 열망하는/ 잔잔한 언어/ 그대의 맑고 빛나는 암시다/ 견디기 어려운 따뜻한 미움이여
(예종숙/ 숨결)
관광객이 안내원에게:// "당신네 고장은 과연 자랑할 만한 곳이군요. 특별히 이 고장에는 교회들이 매우 많다는 점이 인상적이네요. 확실히 이 고장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나 봅니다그려."// 안내원이 쓴웃음 지으며:// "글쎄요, 주님을 사랑하는지 모르지만, 서로들 미워하는 것만은 아무튼 분명한 사실이지요." // "누가 이교도냐? "는 물음에 대한 어느 소녀의 대답이 연상된다:// "이교도란 종교를 놓고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요."
(앤소니 드 멜로/ 종교인들의 미움)
주여, 비를 내려주소서/ 미운 자가 미워지는 비 아니라/ 미워지지 않는 비
(하현식/ 비를 기다리며)
주여, 긴 이빨을 드러내고 내일 검은 육체와 흥정할 외교관들에 대한 증오,/ 이 마지막 증오를 나는 아직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레오폴드 새다르 셍고르/ 눈내리는 파리)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 만일 온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만일 온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 만일 온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행복)
설 교 노 트
형이 아우를 죽임
창4:8
서론
창세기 4장 1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부모에게서 한 혈통으로 난 형제가 바로 가인과 아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둘은 그렇지 못하였으니 형이 아우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1. 살인하는 것은 중죄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죄보다도 살인죄가 제일 무섭고 악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죄는 보상할 수 있지만, 살인하는 죄만은 결코 보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죄 값으로 열 번 아니 백 번을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일단 죽은 사람의 생명은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하여서 다시 살리려고 하여도 희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세상 법으로도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명도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자멸의 길을 걷게 될 뿐입니다.
2. 형이 아우를 죽임은 더 큰 중죄입니다.
형제간이란 참으로 친한 사이여야 합니다. 한 어머니의 태중에서 자라서 한 어머니의 품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한 집에서 같이 자랐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형제간에 잘 알고 친숙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우는 형을 따르고, 형은 아우를 보살피며 자라났을 것입니다
사실은 부모보다도, 그리고 처자보다도 더 가깝고 친한 사이가 곧 형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이 형한테 맞아 죽었습니다. 형은 아우를 때려 죽였습니다. 역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인류 역사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것입니다.
형 가인은 아우 아벨을 죽인 죄로 무서운 심판을 받음은 물론 후대 역사상 오는 세대의 후손들에게 인류 사상 최초의 살인자로서 저주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3.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죄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산상 보훈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부문에서(마5:21-26),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라가"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히브리 말의 가장 저주스러운 욕설입니다. 또 미련한 놈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한마디로 한다면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확대되고 가중되어 결국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
아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열납되었으나 가인이 자기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니 그것으로 인하여 아우에 대한 시기와 질투와 미움에서 결국 살인까지 하는데 이르렀습니다. 미움은 참으로 큰 죄입니다.
모든 형제를 사랑하고 내게 무슨 허물이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를 심히 미워하니
삼하13:15
서론
사람의 감정에는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희· 노 · 애 · 락 · 애 ·오·욕(喜怒哀樂愛惡欲)입니다. 그중에서 오(惡)는 곧 증오이니 몹시 미워하는 감정입니다.
미움은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1. 암논이 다말을 심히 연애하였습니다.
암논은 다윗의 장남이니 혜브론에서 이스라엘 여인에 의해 얻은 아들인데 그 이름의 뜻은 "성실"이나 그 뜻과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그는 이복 여동생인 다말의 아름다운 용모에 매혹되어 저를 심히 연애하였으나 다말은 처녀이었기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홧병이 나서 눕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왕자의 특권을 가졌어도 아무나 함부로 연애하거나 취하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또 아무리 취할 수 있는 상대라도 남녀 관계는 둘이 같이 호응을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며, 일방적인 연애는 결국 사고를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2. 암논이 다말을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암논의 심화병을 눈치챈 친구 요나답의 간교한 계책을 이용하여 거짓 병든 체 하여서 부왕 다윗을 속이고 부왕의 힘을 빌어 이복동생 다말을 자기 침실까지 유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암논은 강제로 다말을 붙잡고 "누이야 와서 나와 동침하자"라고 하였으나 다말이 완강히거부하매 완력으로 그를 욕보여 억지로 동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완전히 돌변하여 "암논이 다말을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기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암논은 다말을 강제로 자기 방에서 내쫓고 문빗장을 잠구었습니다. 얼마나 야만스럽고 포악한 짓입니까? 아무리 사람의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다고 하여도 그렇게까지 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심히 연애하다가 연애하던 것보다 더 심히 미워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변하여 미움이 된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여자를 자기 마음대로 한기 위하여 연애하는 감정이 생긴 것인데, 자기의 욕구를 채우고 나니 그런 감정은 다 사라지고 이제는 별 볼일 없다는 것입니다.
함으로 암논의 인간성이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3. 미워하는 자는 미움을 받습니다.
욕을 당한 공주 다막은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갔으면"라고 하였습니다.
다말에게는 압살롬이라는 오빠가 있었습니다. 그 압살롬이 이 사실을 알고 매우 화가 나서 암논을 미워하여 시비간에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갈다가 2년쯤 지나 암논이 방심하게 될 때에 압살롬이 양털 깎는 마당으로 초청하여 끝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결국 미움이 미움을 낳게 되고, 그 미움이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항상 남을 미워하며 살다가 간다면 너무나 불쌍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결론
남을 미워하는 자는 결국 자신도 미움을 받아 죽는데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살인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마5:25).
우리는 남은 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 음
성 경 활 용
1. 믿음이란?
(1)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 바라는 것들의 실상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3) 그리스도인의 방패
(엡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4) 믿고 구하는 것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5) 하나님의 선물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6) 말씀하신 그대로 만든 것
(행27: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 믿음에 대한 일반적 설명
(1) 율법의 행위가 아님
(갈2:16)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 믿음으로 행함
(고후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눈에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3) 행함으로 온전케 됨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4) 의로 여김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빌3: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5) 순종하는 것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고후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6) 깨끗한 양심
(딤전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3. 누구(무엇)를 믿어야 하나?
(1) 하나님
(막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요20:31)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3) 복음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후9:13) 이 격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4) 하나님의 약속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5) 하나님의 나라
(행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6) 주의 계명
(시119:66)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7) 말씀
(시106: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4. 믿지 말아야 할 것
(1) 거짓말
(렘7: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살후2: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것을 믿게 하심은
(2) 자기의 힘
(창27: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3) 사람
(렘17:5)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4) 자기 의
(겔33:13)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5) 거짓 그리스도
(마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6) 온갖 말
(잠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7) 허망한 것
(욥15:31)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8)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영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9) 자기 마음
(잠28: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5. 왜 믿음이 필요한가?
(1) 심판을 받지 않음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2) 죄사함을 받음
(행10:43)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3) 구원을 얻음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4) 마음이 깨끗이 됨
(행15: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5) 영생을 얻음
(요6: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6) 하나님의 자녀가 됨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7)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8) 기업을 얻음
(행26:18)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9) 의로워 짐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빌3:9)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기쁨과 평강이 충만케 됨
(롬15:13) 소망의 하나님 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11)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음
(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12) 나라를 이기며 의를 행하고 약속을 받음
(히11: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13)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음
(엡1:13)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순종케 됨
(롬1:5)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15) 행함이 있음
(약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내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6. 믿음에 대한 권고
(1) 믿음으로 구하라.
(약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취하라
(3)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
(유1:20)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4) 믿은 도리를 굳게 잡으라.
(히10: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5) 믿은 자에게 본이 되라.
(딤전4:12)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6) 믿음에 굳게 서서 강건하여라.
(고전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7)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하라.
(막9:24)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8) 믿음에 거하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9) 믿음으로 알아라.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10) 믿음에 풍성하라.
(고후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11)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라.
(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관련원어풀이
1. @m'a; 아-만
원래의 의미는 "받치다, 머물다, 지속하다, 공급하다"이다.
(1) 손으로 양육하다, 아이를 나르다.
(민11:12, 애4:5)
(2) 견고하다, 굳건하다, 신실한 사람들.
(시12:2, 31:34)
(3) 기초하다, 안정되다.
(삼상2:35, 사7:9)
(4)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 확실하다, 기대다.
(민12:7, 사8:27)
(5) 확실하다, 틀림없다.
(호5:9, 시19:8)
(6) 믿다, 신앙하다.
(사7:9, 잠14:15)
2. af'B; 바-타흐
(1) 믿다, 확신하다.
(사12:2)
(2) 신임하다, 기대다.
(왕하18:22, 시4:6)
(3) 신임하다, 두려움이 없다, 안전하다.
(잠28:1, 욥11:18)
(4) 믿게하다, 확신케 하다, 믿도록 설득하다.
(사36:15)
3. peivqw 페이도-
(1) 설득하다, 말로 믿게 하다, 확신케 하다.
(행18:23)
(2) 친구로 삼다, 호의를 얻다, 화해시키다.
(마28:14)
(3) 설복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다.
(눅16:31, 행17:4)
(4) 믿음을 가지다.
(히6:9)
(5) 청종하다, 순종하다.
(행5:36)
(6) 신임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다.
(롬2:19, 히2:13)
4. pepoivqhsi" 페포이데-시스
확신, 신념, 신임.
(고후1:15, 엡3:12)
5. pistov" 피스토스
(1) 믿을만한, 충성스러운, 신뢰할 만한, 믿음이나 신임을 불러일으키는.
(마25:21, 눅12:42)
(2) 믿음이나 신임을 가진.
(요20:27)
(3) 신자, 믿는 사람 기독자.
(행12:3, 딤전4:3)
6. pivsti" 피스티스
(1) 믿음, 신뢰, 신실성, 신빙성.
(마23:23, 딤후4:7)
(2) 경건한 약속, 맹세.
(딤전5:2)
(3) 증거, 담보, 보증.
(행17:31)
(4) 신임, 신앙, 확신.
(막11:22, 살전1:8)
(5) 신앙이나 믿음의 내용, 교리.
(롬1:5, 갈1:23)
7. uJpovstasi" 흐포스타시스
(1) 밑에 둠, 밑에 둔 것, 기초, 견고한 기초를 가진 것.
(히1:3)
(2) 마음의 견고함, 용기, 확신, 확증.
(고후9:4, 히3:14)
8. ojligovpistiva 올리고피스티아
인격적 신뢰의 부족, 신앙의 결핍, 부족한 믿음
(마17:20)
설교예화자료
"랍비" 아키바
아키바는 탈무드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랍비입니다. 그는 유태의 민족적인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는 양치기로서 큰 부자집에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집 딸과 사랑하게 되어,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딸은 내쫓기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그는 학교에 가지 못했으므로 읽고 쓰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부디 공부를 해 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가 십삼 년간 학교에서 배우고, 돌아왔을 때 그는 당대의 가장 우수한 학자로서의 명망을 얻어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탈무드의 최초의 편집자가 되었는데, 그는 의학, 천문학을 공부하고 많은 외국어를 말할 수 있었으며 여러 사람들로부터 몇 번씩이나 유태인의 사절로 선출되어 로마에 갔었습니다. 기원 후 132년 유태인이 로마의 지배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그 정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이 반란이 진압되자, 로마인은 누구라도 학문을 하는 유태인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태인은 그들의 전통적인 책을 공부함으로써 참다운 유태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랍비 아키바는 다음과 같은 여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여우가 시냇가를 걷고 있는데, 물고기가 서둘러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고,
"왜 그렇게 서둘러 헤엄쳐 다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물고기는
"우리들을 붙잡으러 올 그물이 무서워서 그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그렇다면 이리로 나오려므나! 언덕에 올라오면 내가 지켜 줄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습니다. 물고기는 "여우님! 당신은 대단히 머리가 좋다고 말하고들 있지만, 실은 왜 그렇게 바보인가요?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들이 늘 살아왔던 물 속에서조차 이렇게 무서워하고 있는데, 언덕에 올라가면 어떤 해를 입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유태인에게 학문은 물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에서 떠나서 언덕에 올라가면 죽어 버립니다. 유태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 아키바는 말했습니다. 로마인에게 잡힌 아키바는 투옥되어, 마침내 로마에 호송되어 처형키로 확정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인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가 너무 편한 것 같아서 불에 달군 인두를온몸에 지져 태워 죽이기로 했습니다. 처형되는 날, 유태인의 지도자라고 해서 로마의 사령관이 현장에 입회했습니다. 때마침 아침기도가 시작되려는 시간이었습니다. 랍비는 새빨갛게 달군 인두가 몸에 닿자, 아침 기도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로마의 사령관은 놀란 눈으로 물었습니다.
"이렇게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기도하는가? "라고 묻자 랍비는 대답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음을 당할 때에도 기도할 수 있는 자신에게서, 참으로 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라고 조용히 대답하고 랍비의 생명의 등불은 서서히 꺼져갔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일본 오오사카에서 성회를 인도할 때 병고침의 은혜를 체험한 한 어머니가 젖먹이를 업고 감명 깊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아기는 신장염에 걸려 병원에서도 사형 선고를 내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아기는 눈을뜨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 부었으며, 젖도 먹지 않았고, 목욕을 시키려고 물 속에 넣으면 까무러쳤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도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했고, 자신이 보기에도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기를 업고 내가(조용기) 인도하는 성회에 참석하였는데, 설교가 끝난 후 병자를 위한 기도 시간에 "이 시간에 신장염에 걸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어린아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라고 내가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장염에 걸린 아기의 어머니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께 계속 감사하며 찬미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아기가 깨끗하게 나았다는 꿈과 환상을 가졌던 것입니다. 내가 그 아기를 보았을 때도 두 눈은 샛별같이 빛났으며 얼굴에서는 병색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한 달 전에 신장염을 앓았던 아기라면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고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아기의 어머니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의 환경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말씀 위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생명을 얻은 믿음
"죽도록 충성하라,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동구라파 어느 나라에 공산군이 침공해 왔을 때 교인들이 예수 믿기를 부정하면 살려주고, 믿기를 고집하면 잡아다 죽이는 숙청 선풍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의 예배 도중에 공산군들이 트럭을 교회 정문에 대놓고, 다른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산군 장교가 들어와서 추상 같은 호령을 내렸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부인하고 정문으로 나가면 살려주고, 예수 믿기를 고집하고 이 예배당에 남아 있는 자는 죽인다! 내가 열을 세는 동안에 스스로 각자의 갈 길을 결정하라!" 공산군 장교가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에 교인들은 두 패로 갈라섰습니다. 예수 믿기를 부정하는 자들은 정문 밖으로 다 나가버렸습니다. 그 장교가 교회 정문 밖에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교회문을 안으로 잠가 놓고 하는 말은 교회 안에 남은 교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참으로 예수님께 충성된 신자들이요, 나도 믿는 사람입니다. 정문으로 나간 자들은 모두 트럭에 실려 가서 학살당합니다.
자! 여러분은 뒷문으로 빠져 나가서 도망가시오!" 하고는 남은 교인들이 뒷문으로 다 빠져 나간 뒤에 그 장교는 정문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단지 두 종교
캘리포니아 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종종 다음과 같은 말과 방해를받았습니다.
"여기 좀 보십시오. 선생님, 이 나라에는 수백 가지의 종교가 있습니다. 각 종파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우리같이 보잘 것 없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진실로 진리가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보통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수백 개의 종교라고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나는 단지 두 가지 종교에 대해서 들었을 뿐인데."
"그러세요? 그러나 당신도 확실히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텐데요? "
"전혀요, 선생님. 나는 그 커다란 두 줄기의 종파를 구성하는 의견들에는 상당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결국 단지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행함으로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되어진 어떤 것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느냐, 아니면 다른 것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있다면 당신에게는 나의 메시지가 필요치 않을 것이고, 만약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나의 메시지를 당연히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
기도를 믿은 술집의 주인
술집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작은 마을에서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버젓이 중심지에 나이트클럽 하나가 들어서면서부터 그것이 그 지역의 교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자, 한 교회의 교인들 중 몇몇이 철야 기도회를 주도하여 하나님께 그 죄악의 소굴을 불살라 주십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그 선술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완전히 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에 교인들이 드렸던 기도의 내용을 알게 된 술집 주인은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하여 그들을 고소했습니다. 술집 주인의 변호사는 그들의 기도가 그 재난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편 그 교인들도 변호사를 채용하여 그 고소에 맞섰습니다. 많은 심사를 거친 후 판사가 선언했습니다. "이 법정의 견해는 이렇소. 죄가 어느 쪽에 있든, 술집의 주인은 정말로 기도를 믿는 자들 중의 하나인 반면, 교회의 신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오!"
사랑의 편지
어느 곳에 젊은 남자와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서, 남자는아가씨에게 자기는 일생 동안 성실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얼마 동안은 그들 두 사람은 모든 것이 순조로워서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남자는 그녀를 남기고 나그네길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오랜 세월 동안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그녀를 가련하게 여겼고, 그녀를 시기하는 자들은 "그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 그가 남몰래 일생 동안 그녀에게 맹세했던 편지를 꺼내어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습니다.
편지는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녀의 힘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연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그 동안의 괴로움을 그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괴로웠는데 어떻게 정절을 지킬 수 있었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이스라엘과 똑같은 몸입니다. "라고 말하며 웃었습니다.
*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있을 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들을 비웃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립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주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현인들을 바보 취급했습니다. 유태인들은 학교나 예배소 안에서만 이스라엘을 지켜 왔습니다. 유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맹세를 계속 읽어내려 왔고 사람들은 그 속에 있는 거룩한 약속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녀도 그의 맹세의 편지를 읽음으로써 그를 믿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시험
신앙심이 있는 흑인이 백인집의 하인으로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사냥을 좋아하여 늘 흑인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사냥을 가면서 주인이 흑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늘 시험을 당하였다고 하느냐? 나는 애수를 믿지 않아도 아무 시험이 없는데." 흑인이 대답하기를
"주인이시여, 노하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지금 저기에 있는 꿩을 쏘아 한 마리는 즉사하고 한 마리는 한쪽 다리가 맞아 살겠다고 절름발이가 되어 달아난다면, 주인께서는 어느 것을 먼저 가서 잡으시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주인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물론 산 놈을 따라가 잡을 것이 아니냐?" 했습니다. 그때 흑인은
"옳습니다. 주인은 이미 이 영이 죽었으니 마귀가 잡으려고 시험할 필요가 없고, 저는 지금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니까 마귀가 잡으려고 별별 시험을 다 할겁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
사업에 크게 성공한 실업가 한 사람이 신경 쇠약으로 곧 쓰러기지 직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신병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잠깐 동안 환자와 상담한 의사는
"선생님께서는 시골로 여 행을 하셔서 모든 사업과 사회적 활동의 압박에서 풀려나시면 곧 회복이 되실겁니다. "고 말했습니다. 실업가가
"그렇지만 저는 언제나 시골에 산 것과 같습니다. 저희 집은 크고 넓으며 수 마일의 정원에는 수목들이 울창하고 목초들이 넓게 깔려 있고 신선한 공기가 뒤덮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의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다면 선생님은 휴가가 필요합니다. 며칠 동안 시간과 스케줄과 약속들을 깡그리 잊는 안정할 수 있는 휴가 말입니다. " 하였습니다.
"저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편안한 것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매년마다 많은 휴가를 가질 수도 있구요."
"어떻습니까? 좀 변화있는 다른 일을 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를 테면 극장에라도 가신다든가."
"의사 선생님, 물론 극장에도 가보았지만 오히려 병이 더 생길 지경입니다. "
의사는 더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보세요, 선생님." 의사는 절망적으로 얘기했습니다.
"선생님은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필요한 것은 영혼의 휴식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
늑대와 양치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양치기 소년이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늘에는 흰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에이, 심심해. 뭔가 신나는 일 없을까? '
풀피리 부는 일도 싫증이 나고 따분해진 소년은 문득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을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늑대가요. 도와주세요!"
깜짝 놀란 마을 사람들은 늑대를 잡으려고 각기 몽둥이를 들고 달려나왔습니다.
"양들은 다치지 않았니 ! "
"늑대가 어디 있니 ! "
마을 사람들은 걱정하며 물었습니다.
"하하하, 늑대라니요? 제가 심심해서 장난을 쳤을 뿐이예요."
양치기 소년은 깔깔깔 웃으며 말했습니다.
"휴우, 다행이구나."
"늑대가 나오지 않았다구?"
마을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났습니다.
다시 또 심심해진 양치기 소년은 이번에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늑대가 나왔어요. 양들을 모두 잡아가려고 해요! "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달려나와 늑대를 잡으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어디야, 어디 ! "
"늑대가 어디 있니."
몽둥이를 든 채 야단들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양치기 소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하하, 거짓말이예요. 제가 또 장난을 쳤어요."
"저런 못된 녀석 ! "
"두 번씩이나 어른들을 놀리다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화를 내며 돌아갔습니다.
며칠이 흘렀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굶주린 늑대들은 양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습니다.
다급해진 양치기 소년은 목이 터지도록 마을을 향해 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늑대가 나타났어요. 어서 도와주세요. 양들이 모두 다치고 있어요."
"저녀석이 또 거짓말을 하는구나 ! "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과 행위
미국에 불론댕이라는 줄타기 명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줄 위에서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담대한 묘기로서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의 제일 뛰어난 묘기는 나이애가라 폭포위에 매어놓은 줄을 걸어서 타고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실수라도 있게 되면 아차하는 순간에 폭포로 떨어져 죽고 마는 위험천만한 곡예였습니다.
그가 하루는 나이애가라 폭포 위에서 위험한 곡예를 끝냈을 때, 열열한 박수를 보내고 있는 관객 중 한 소년에게 가까이 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너는 내 어깨 위에 사람 하나를 얹어놓고 갈 수 있으리라고 믿느냐? "그 소년은 이때 큰 소리로
"물론 불론댕 씨, 당신이야말로 하실 수 있지요."라고 확신에 찬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불론댕은 그 소년에게 자기의 어깨 위에 올라서 주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겁이 번쩍난 표정을 지으며 도망쳐버렸습니다.
링컨의 기도시간
아브라함 링컨은 독실한 신자여서 전쟁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불리한 전황이나 어려운 문제들을 늘 기도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는 매일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고요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기도할 때는 언제나 막사 문에는 흰 손수건을 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참모들은 링컨의 기도시간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긴급한 일이 생겼을지라도, 흰 손수건이 내걸려 있으면 절대로 막사의 문을 열고 링컨을 면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링컨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바쁜 중에도 기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더욱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매일 시간을 정해서 잠깐씩이라도 간단없이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기도 위의 스펄전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우리를 테이블에 둘러앉게 한 후, 성경을 한 구절씩 읽어 주시고, 그 성경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던 일요일 저녁의 일들을 내가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있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기도시간으로 이어졌는데, 그때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처지를 깨닫기까지, 그리고 주님을 찾게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 다음에는 어머니의 기도로 끝을 맺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중 몇 마디 말씀은 아마도우리의 머리카락이 회색이 될 때까지도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
어려움 속에서의 부르짖음
갑자기 집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들려왔습니다. 그들은 그래시부인의 침실로 뛰어갔고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그래시 부인은 거의 실신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꿈을 꾸면서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부르면서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자 그녀는 두려움과 위험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위험과 불행의 감정이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녀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아침이 돼서야 그녀는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녀의 보습에서는 불안의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영혼은 평화로 가득 찼고 그제야 그녀는 곧바로 깊은 잠에 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집 식구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 일찍 식탁에서 주인집 내외는 그날 조간신문에 인쇄된 큰 머릿 글자를 통해 "타이탄 호의 난파" 소식을 읽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 대형 여객선도 바닷속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주인집 내외는 서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래시 부인의 지난 밤 악몽을 기억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래시 대령이 바로 그 타이탄 호에 타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어떻게 그녀에게 알려 줄 것인지? 결국 그들이 그 소식을 그녀에게 말해주었을 때,그들은 의외로 그녀가 침착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밤의 공포는 잊은 채 그녀는 완전히 평온한 마음 자세로 주인집 내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내 남편은 괜찮을 거예요. 나는 내 마음 가운데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어떻게 그래시 대령이 무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구조선은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에게 먼저 할당되었습니다.
그래시 대령은 먼저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구조선에다 태워 보낸 후 객선 맨 위 갑판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배의 마지막을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머지않아 배가 침몰할 것을 알고 있었고, 죽음이 임박한 것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그는 가능한 한 멀리 다이빙하여 배와 함께 침몰하지 않도록, 그래서 최후까지 살기 위해 죽음과 싸워보려고 결심했습니다.
나이먹은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고공 다이빙이었습니다. 그가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는 가능한 한 깊이 그리고 멀리 잠수했습니다. 그의 심장이 터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는 숨을 참아냈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난 이 기도의 부르짖음이 그의 아내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전달되었습니다.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가 수면으로 다시 솟아올라 심호흡을 하고 났을 때, 그는 가까운 곳에 큰 나무상자 하나가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기에 몸을 의지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희미한 불빛 가운데서 작은 뗏목을 만났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 반쯤 물에 잠겨 있는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끌어올렸습니다. 며칠을 파도 위에서 시달린 끝에 드디어 그 뗏목이 구조되었습니다.
구조의 소식은 그래시 부인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그녀가 기도했던 대로 그녀의 남편은 살아서 그녀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기도가 아내에게 전달되었고,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루스 앤더슨이란 여인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연히 내가 읽게 된 「크리스찬리더스」란 잡지를 통해 그가 기고한 소박한 기도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기도문을 통해서 나는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를, 어떤 신앙, 어떤 인품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그가 기고(寄稿)했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기도문과 함께 루스 앤더슨이란 여인을-.
주여, 때때로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먹을 것이 많습니다. 주여,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별로 없거나 전혀 없어서-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여, 당신은 내게 좋은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자녀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하는 가족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 전혀 없습니다.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내게 따뜻한 가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여, 난 당신이 나의 구주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많은 것을 받은 사람에 게 많은 것이 요구될 것입니다. "
오, 주님, 당신이 주신 축복을 당신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 ! 이제 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세기에 걸쳐 내려온 기도문
1,500년 된 기도문이 아직도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따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도움을 줍니다. 그것은 '성 패트릭의 가슴판'이라고 불리는 기도문인데 여기 일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늘 나와 동행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나의 앞에 계시고 뒤에도 계시며, 내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는 내 아래, 내 위에 계시며, 내 왼편과 오른편에 계시고, 성채와 마차 의자 그리고, 키 곁에도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계시고, 나에 대해 말을 하는 모든 인의 입술 가운데 계시며, 나를 지켜보는 모든 눈동자와 나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귀 가운데 계십니다. "
신앙과 방해물
옛날 중국의 황제 한 분이 궁전 정원에 해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제의 시계는 정원에 세워져 있는 동안 결코 실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황제는 시간을 알고 싶어서 심부름하는 소년을 정원에 보내 시계를 보고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 소년이 돌아와서는 "폐하, 시계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라고 보고했습니다. 황제는 "어림없는 소리, 다시 가서 시계를 한 번 더 보고 오너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정원에 다시 갔다와서는 "해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똑같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황제는 몇 백 년 만에 해시계가 실수를 범하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몸소 무슨 일이 났는가 보려고 정원에 나갔습니다. 그는 소년에게 시계를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은 시계판으로 다가가서는 "보세요, 조금도 움직이지 않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황제는 "아아, 너 참 미련하구나. 너는 네 그림자가 해시계 위에 생기게 서 있지 않느냐. 해시계와 태양 사이에는 아무것도 있어서는 안된다. 너의 몸을 방해가 되지 않게 치워라. 그러면 모든 것이 바로 될 것이다.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어록·시·묘사
권위를 주장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권위에 대한 신뢰는 종교의 쇠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에머슨/ 수필집)
현대에서 의혹은 신앙에 면역되었으며, 신앙은 의혹에서 스스로를 분열시켰다.
(G. 바하니언/ 신의 죽음)
사람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데모스테네스/ 제 3의 오란토스 연설)
눈에 보인다고 모든 것을 믿지 말라.
(M.T.키케로/ 복점론)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다 위험하다.
(파이드로드/ 우화)
인생이 있는 한 뭔가를 믿어야만 하는 가혹한 필요성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어느 특정된 믿음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G. 산타야나/ 회의론)
건전한 판단은 지성의 승리이고 믿음은 마음의 승리이다.
(J. 숄/ 미국의 역사)
사람이 강한 신앙을 가지면, 회의론의 사치에 빠질 수 있다.
(F.W. 니체/ 우상의 황혼)
각자의 믿음은, 그 자신의 눈에는 정당하다.
(쿠퍼/ 희망)
인생에서 -우리가 저울로 무게를 잴 수도 없고 도가니에 넣고 시험해 볼 수도 없는 하나의 감동적인 힘-그 믿음보다 경이(驚異)스러운 것은 없다.
(W. 오슬러 경, H. 쿠싱/ W. 오슬러 경전)
강한 믿음은 강한 사람을 이기고, 약자를 보다 강하게 만든다.
(W. 배저트/ 물리학과 정치학)
신앙은 모든 일의 뿌리다. 아무것도 맺지 못하는 뿌리는 죽은 뿌리다.
(T. 윌슨 주교/ 경건과 자비의 금언집)
인간은 믿도록 태어났다. 나무가 과일을 맺듯이 인간은 믿음을 지닌다.
(에머슨/ 처세론 ; 숭배)
신앙이 산을 움직일 수 있으면, 불신은 자기 실존을 부인할 수 있다. 신앙을 그런 무력에는 무력하다.
(A. 베버른/ 현악 4중주단의 6개 소지품)
나에게 가장 고귀한 사랑의 믿음을 주소서. 이것이 나의 기도이옵니다. 죽음으로써 산다 는 믿음, 징으로써 이긴다는 믿음, 연약해 보이는 아름다움 속에 강한 힘이 감추어져 있다는 믿음, 해를 입고도 원수 같기를 싫어하여 겪는 고통의 존엄한 가치에 대한 믿음을 주옵소서.
(M.K. 간디/ 편지)
「나는 여태껏 신을 믿어 본 적이 없다. 」 이 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진심으로 그분을 믿은 적이 없다. 」라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소유 양식에 있어서의 믿음이란, 확신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 감히 스스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서 인생에 대한 답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지주(支柱)이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어떠한 쇠사슬도, 어떠한 외부의 힘도 인간이 마음으로 하여금 믿게 하거나 안 믿게 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다.
(T. 칼라일/ 영웅과 영웅숭배)
사람을 믿지 않으면 속아도 속은 것이 옳다는 얘기가 된다.
(F. 라 로슈푸코/ 잠언과 고찰)
무지가 과오보다는 낫다. 그릇된 것을 믿는 자보다는 아무것도 믿지 아니하는 자가 진리에 가깝다.
(T. 제퍼슨/ 작품집)
신앙을 굳게 만드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인생이다.
(J. 잉겔로우/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목사의 편지)
신(信)이라는 것은 임금의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에게서 보존되고 백성은 믿음에서 보존되옵니다.
(정몽주 / 포은집)
믿음은 증거없는 확신이다. 믿음은 감성이다. 희망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본능이 다. 모든외부의 가르침에 앞서기 때문이다
(아미엘/ 일기)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M.D. 우나무노/ 기독교인의 고뇌)
내가 혐오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앙심 없는 박식가(搏識家)요, 또 하나는 헌신하는 바보이다.
(에머슨/ 처세론)
인간의 이성이, 증거를 제공하는 곳에서는 신앙은 무색해진다.
(성 그레고리/ 설교집)
신앙이란? 네가 보지 못하는 것. 소망이란? 굉장한 것. 자비란? 아주 희귀한 것.
(미상/ 칸타브리인의 풍자집)
신앙은 최후적으로 관련된 상태이다.
(P. 틸리히/ 신앙의 역동성)
위세도 당당하게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
(H.W. 롱펠로/ 배의 건조)
진실로 충실한 개를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결코 깨져 본 적이 없는 믿음은 없다.
(K.Z. 로렌쯔/ 솔로몬왕의 반지)
죽은 자가 어떻게 소생하는가는 나의 믿음의 의문이 아니다. 가능성 만 믿는 것은, 믿음이아니라 단순한 철학이다.
(T. 브라운 경/ 의사의 종교)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쉽게 믿는다.
(C. 타키투스/ 역사)
인간은 신앙으로써 사나운 물결을 건너가며, 끈기로써 바다를 건너가고, 꾸준함으로써 괴로움을 초월하며, 지혜로써 전혀 때가 묻지 않을 수 있느니라.
(슛타-니파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을 수 친다면 타인의 마음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신심은 가난한 자들 가운데에만 있다.
(T. 랜돌프/시신(詩信) 속에서 즐기는 만족)
신앙이란, 있음직하지 않은 일의 발생을 불합리하게 믿는 것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H.L. 멘컨/ 편견)
의심하는 것보다 믿는 것이 쉽다.
(E.D. 마틴/ 자유교육이 뜻하는 것)
미래의 성에 대한 신앙을 이성의 욕망이다.
(W.S. 랜더/ 상상의 대화)
신을 믿는 마음은 권위(權威나 관습이나 법률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한결같이 일치한 의견에서 생긴다.
(키케로/ 신의 본성)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A. 아우구스티누스/ 잠언)
믿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곧 이성과 습관과 영감이다.
(B. 파스칼/ 팡세)
신앙은 이성보다 더 고상한 능력이다.
(P.J. 베일리/ 축제)
주체는 객체 사이의 신앙의 관계는 모든 경우마다 독특하다. 수백 명이 믿어도,각자는 자기 혼자 믿어야 한다.
(W.H. 오든/ 염색공의 손)
그러나 하느님 저에게 진리를 분별하는 눈을 주시옵소서. 영원히 옳은 것을 볼 줄 아는 시각, 자비와 부드러운 연민의 정으로 가득찬 마음, 어둠을 밝혀주는 사나이다운 믿음을 주시옵소서.
(T. 파커/ 더 높고 좋은 것)
알기 못하는 것만큼 굳게 믿어지는 것도 없다.
(M.E. 몽테뉴/ 수상록)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L. 톨스토이/ 참회록)
믿음이란 큰 뜻을 이루어 보려는 마음이 깃들여 있는 사랑이다.
(W.E. 채닝/ 노트북)
훌륭한 신앙은 정의의 기초다.
(키케로/ 의무론)
신앙은, 믿는 것이 이성의 힘을 초월하는 때를 믿는 데 존재한다.
(볼테르/ 백과사전에 대한 문제)
신앙은 영혼의 시인을 받아들이는 데 존재하고, 불신망은 그것을 부인하는 데 존재한다.
(R.W. 에머슨/ 대표적 인물:몽테뉴)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죽음도, 그 자신의 죽음인 한은, 어떤 성질의 두려움도 갖지 않게 된다.
(H.G. 웰즈/ 시초와 마지막)
왜소한 마음에는 믿어야 할 큰 것은 보이지 않고 그러한 믿지 못할 것만 눈에 띈다.
(0.W. 홈스/ 아침 식탁의 교수)
완전한 믿음은 공포를 절대적으로 벗어나게 한다.
(G. 먹도늘드/ 기비 경)
믿지 않다가 속으나 믿다가 속으나 속기는 마찬가지면 믿다가 속는 편이 더 인격적이 아니냐. 비정하지 않으냐.
(변영로/ 도막 생각)
사랑은 고결한 마음을 이어주는 수문이요, 신앙은 사랑의 샘을 닫는 마개이다.
(R. 그린/ 알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신앙과, 찬양과, 동정으로 산다.
(에머슨/ 강의와 전기 연구)
우리가 애써 얻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신앙은 없다.
(H. 엘리스/ 생명의 춤)
믿음보다/ 사람을/ 더욱 든든히 서게 하는/ 반석은 없노라
(임춘남/ 성경)
가을바람 속에서/ 믿음조차 흔들릴 때,/마음 서글프고 괴로워/ 들길을 방황하는데,/ 어쩌자고 꽃들은 피어나/ 재잘대는가
(신규호/ 탄식-가을 바람 속에서)
님을 믿을 것가 못 믿을 손님이시라/ 믿어온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어라/ 믿기야 어려우랴마는 아니 믿고 어이리.
(이연구)
믿음은 죽고 싶도록 영생하는 외로움.
(유태환/ 산에서)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별을 향해 눈을 쳐드는 것/ 의혹에 대해 희망하고, 지혜에 대해서는 알고/ 현기증, 나는 깊음에 몸을 침잠시키고/ 지켜 주고 보고해 주는 한 분에게 눈을 뜨는 것.// 믿는다는 것은 나의 생명과 행동 아래 지옥을 느끼는 것-/ 어둠의 지옥, 빛의 지옥/환희의 깊음,전율의 늪-/그리고 일상의 나날을/ 주일날 회당에서와 같이 걸어가는 것.
(요르겐센/ 믿는다는 것은)
믿음이란 밤에 그저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것만은 아니다. / 믿음이란 그저 어두움을 지나서/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 믿음이란 있을 수 있는 영광을/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 믿음이란 죄로 가득한 기쁨을/ 그저 미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 믿음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며/ 어떤 상황 아래서도/ 봉사할 수 있는 힘이다.
(키서/ 믿음)
나는 그리스도가 쓰신 가시관을 보지 못했고,/ 그 몸에 남은 상처를 만져보지 못했으며,/ 무덤 문을 막았던 바위도 내 눈으로 못 보았고, / 그리스토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부짖는 사 람들을/ 위로하지도 못하였다. //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 빈 무덤을 본 일은 한 번도 없지만서도./ 오늘 이 날도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느니,/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하나의 그림자를/내 마음의 창문을 통해 보았었기에.
(에드워즈/ 믿음)
진실로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믿음인 것을
(정두리/ 사순절입니다. 랍비시여)
삶의 뒤안길에서/ 얼굴을 붉히고 물고 물리는/ 험한 세월을 살아도/ 내일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피어나리라// 목마른 4월/ 저리도록 애타는 가슴에/ 어김없이 찾아와/ 약속의 땅을 꽃피우는/ 믿음의 꽃이여!
(임춘남/ 부활꽃)
헝클어지지 않고/ 억척스럽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서로와 서로는/ 솜털같은 관계//사랑의 눈으로,/사랑의 손으로/사랑으로 발맞추어/ 믿음의 표정을 쌓는 날들// 믿음으로 만나서/ 나눔으로 하나되며/ 꾸겨진 세상을 위로하고/ 헝클어진 자유를 부끄러워하고/진실잃은 웃음을 벗는 날들// 아침 하늘같은 머리로/ 향기로운 소망을 소리하며/ 보고싶은 날 기억하고픈 이름으로/ 하나되리 믿음의 표정되어‥‥
(김영렬/ 믿음의 표정으로)
하나님의 굳센 아들, 영원하신 사랑이여,/우리는 당신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당신을 품에 품어/증거할 수 없는 곳에 믿음을 가지나이다.
(테니슨/ 인 메모리엄)
별이 떨어지면 별이 아니듯이/ 바위도 깨어지면 바위가 아니지요/ 믿음은 하나입니다/말씀도 하나입니다.
(신규호/ 수인의 독백 · 2-춘향이 사랑처럼)
믿음이란 마음속에 있는 지식이다. 결코 증명 할 수 없는.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믿음은 경험보다도 훨씬 더 빨리 진실을 움켜쥘 수 있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믿음이 많은 사람들은 가벼운 날개를 달고/ 하늘나라로 사라져 가는데,
(김현승/ 병)
이제, 어둠이 모여들어 우리의 모든 계획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콘라드 힐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름다운 꽃잎들이/ 절박한 소식처럼/ 떨어지거든,// 오늘만큼이나 소중했던/ 어제의 분신임을 깨달으며,// 아쉬웁지만/ 스스럼없이/ 또 살아가는/ 꽃나무의 믿음을 배우자
(박근영/ 오월에의 편지)
내 마음에/ 흩어진 믿음 돌을 모아서/ 네모지고 반듯한/ 제단을 쌓으리라/ 옛날의 족장들이/ 믿음으로 쌓은 제단/ 나도 쌓고 기도하면 주가 복을 주시리
(홍안의/ 내가 쌓는 제단)
믿음을 얻으려고/ 이제껏 구했으나/내 영에 의심의 구름/ 말갛게 차지 않네/ 오 길되신 주 예수여/ 긍휼히 여기소서/ 나에게/ 그 귀한 믿음/ 언제나 넘치려나
(홍안의/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
두 번은 부끄러워/ 이제는 그냥 돌아서지 않게/ 정한 믿음을/ 그리고 무엇인가/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알뜰함을 주십시오.
(최호림/ 문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때/ 눈이 먼저 본 찬송가를/ 베개 옆에 놓고/ 별을 만난다/ 믿음의 흙이 되는 날까지.
(이탄/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가져도/ 태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네.
(홍안의/ 지금 구하라)
피라밋의 무게로 짓누르는 지배자들의 억압을 밀어 올리고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이런 걸 믿음이라고 하는 걸까요? 믿음이라는 말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이런 초인적인 용기와 힘으로 떨치고 일어나지 않는 믿음은 감정의 유희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아쉬운 대로 참을 수 있는 장식품이지요.
(문익환/ 히브리 민중사)
설 교 노 트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마21:21
서론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참 믿음을 찾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우라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믿음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주 예수는 믿음에 관하여 많은 교훈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두려워 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염려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논하느냐? "라고 하신 주님은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면서 항상 언급하신 말씀에 보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소자야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느니라",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로 믿느냐? "라고 하셨습니다.믿음 없는 제자들에게는 책망하시고 믿는 자들에게는 온갖 은혜를 베푸신 주님은 사람이 가진 믿음을 세밀히 관찰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믿음을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산을 옮길 만한 믿음
산을 옮기는 것은 표적입니다. 사실 믿음은 산뿐 아니라 증거가 명확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산이 옮기워진 것과 같이 표적이 따릅니다. 그러한 믿음이 유대인에게는 없었고 제자들에게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의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이라는 의인의 증거를 남겼고, 제물도 하나님이 증거하셨습니다.
에녹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남겼습니다. 믿음은 심증이 아니라 물증의 자취가 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의 생애가 바로 믿음의 증거를 남겨야 합니다. 막연하게 그 사람은 "믿음으로 살았던것 같다. "가 아니라 "그는 믿음으로 살았는데 그 증거가 이것이다. "라고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일이나 산을 옮기는 일도 다 표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3. 능력 있는 믿음의 삶
주님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기도를 함께 강조하고 계십니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능력있는 믿음은 기도의 신비를 동반합니다.
여기서 믿음의 조상이 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관찰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로마서 4장 17-22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격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먼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아무것도 없는 데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자신과 자기 아내의 태가 죽은 것을 알고도 하나님이 주신 아들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결론
믿음은 측정인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음은 관념입니다. 이론의 수준이 아닙니다. 곧 삶입니다. 믿음의 근거로서의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순종할 때에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
마13:31∼32
서론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서 가장 작은 씨지만 그것을 땅에 심으면 점점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정도의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을 요구하셨는데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1.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겨자씨는 보기엔 보잘 것 없지만 그 속에 무궁한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이야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 허물과 죄로 영이 하나님과 단절되므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것은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내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롬8:9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죽어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2. 자라나는 믿음입니다.
생명이 있다고 하면 자라야 되는 것처럼 믿음이 있는 자도 신앙이 성장해야 됩니다. 막4:31-32에 겨자씨가 땅에 묻혀 싹이 나서 자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육신이 자라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성장이 있어야 하며 어느 하나가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면 영적인 기형아든지 육적인 기형아가 될 것입니다. 기형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라야 되는데 육체는 영양분을 잘 공급하면 자라지만, 영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야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3. 남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막4:32에 "겨자씨가 싹이 나서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새들이 깃들일 수 있다는 것은 새들에게 유익을 준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무를 심는 것은 그 심는 목적이 있습니다. 재목으로 사람에게 필요를-따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나에게만 유익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유익이 되는 덕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쓸모있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쓸모없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더 생각하지 않으시고 버리실 것입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도끼에 찍혀 베임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으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결론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자라나서 유익하게 되는 나무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생명력이 있어서 자라나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바른 신앙
요20:31
서론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에는 그 말을 하는 사람과 목적이 즉 믿는 대상이 생략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가질 때, 두 가지 요소가 확실해야 합니다. 하나는 누구 혹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대상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태도입니다. 두 가지가 바로 될 때에만 참된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따른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문 말씀에서처럼 각 사람의 삶과 죽음, 생명에 관한 인생 최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1. 신앙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요한은 이것에 대한 증거를 요한복음에 가득 채웠는데, 거기에는 예수님 자신의 주장과 다른 사람들의 증거로 되어 있습니다.
(1) 예수님 자신의 증거로 육신은 사람이셨지만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그(그리스도)로라(요4:26)",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나를 믿으라(요14:1)",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10:9)"라고 말했으며, 심지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까지 주장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나가다가 언뜻 비친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에게 아주 분명히 재차 밝히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주장한 것과 아울러 그는 많은 이적(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여러 병자를 고치심,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을 행하셔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더욱 분명히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2)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이들은 많습니다(세례요한,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 병고침 받았던 이들, 부활을 본 이들, 특히 도마).
그중에서 요한 사도는 이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무리도 있었으나 그들의 반대가 소용이 없었습니다(요5:18).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증거와 다수의 확실한 증거 자들을 통해 믿음의 유일하신 대상을 알게 됩니다.
2. 신앙 대상이 옳바르다 해도 내가 믿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믿게 하기 위하여 기록했다고 했는데 그래도 내가 믿음으로 화합치 않으면 나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 포함된 뜻이 무엇인지 알고서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뜻없이 믿음을 고백하게 되면 그 또한 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결정 속에는 나의 전생애와 모든 것을 주님께 기꺼이 바치고 예수님을 나의 주 하나님으로 모시는 일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 대상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 신앙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신앙을 가지고 태도를 분명히 하여 확신을 통한 생명과 풍성한 생활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3:1-4
서론
예수께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지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1. 믿음이 약하다는 의미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용서의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용서를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까? 이러한 용서를 실천하며 살려고 하면 지금 이 믿음을 가지고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주님에게 믿음을 더욱 주시라고 부탁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약하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것에 대한 결단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는데, 이것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지 못할 때 믿음이 약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을 의미하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약해서, 그 말씀을 믿고 결단하는 힘이 부족한 것을 말합니다.
2. 믿음이 강해지는 방법
"믿음 더욱 주소서"하고 제자들이 간청할 때 주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이라는 말씀은 가정법이 아니라, 재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시는 말씀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은 믿음의 가장 작은 상태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믿음을 너희들이 이미 가지고 있으니 이제 이 믿음을 의지하고 명령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것은 그 신앙을 사용치 않는 것이요,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그 믿음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씨 속에는 나무가 숨겨져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씨입니다. 그 속에 위대한 신앙의 결과를 일으킬 씨 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믿음만 바라보지 말고, 그 믿음의 능력으로 주님을 믿고 결단하고 행동할 때, 그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 대한 지식과 신뢰와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알지 못하고 이를 믿을 수 없는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그 지식을 확신하고 신뢰하는 단계에서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믿음을 위해 서서 담대히 실천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3. 행동하는 믿음만이 강합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적이 뒤에 쫓아오고 이스라엘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홍해를 향하여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홍해를 향하여 손을 내밀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손을 내밀 수 있게 되기까지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 믿음 위에 용기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믿음이 없어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지 못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고 말씀에 순종합시다. 그리하면 주님은 당신의 믿음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결론
우리도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믿음은 예수께 대한 지식과 신뢰와 믿음의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행동으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의 신앙
수24:15
서론
이 말은 여호수아의 결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대해 가장 감동적이고도 사랑이 깊은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들을 구원해 내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리기 위해 가장 강력한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그들 자신과 가족들을 헌신하기로 하였습니다.
1. 가정 신앙과 관련된 가장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1) 그의 책임의 특성
모든 가정의 가장은 다음의 세 가지 능력을 수행할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즉 가장은 가르치는 선지자로서, 함께 기도하는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가족들을 다스리고 지도하며 부양하는 왕으로서의 능력을 수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그의 책임의 중요성
어떤 가정의 가장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그들은 적어도 자기 가정 내에서 이러한 임무들을 수행하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말에 따라 만일 가장이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딤전5:8). 그러기에 자기 가족의 영적인 부를 외면하면 가장 큰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3) 가장의 책임을 다한 자들
가장의 이 특별한 의무를 소홀히 한 자들에 있어서는 그들이 자신의 태만함을 아무리 변명하려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욥1:5). 뿐만 아니라 선한 여호수아는 자신과 자신의 집의 영적인 부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또한하나님을 경외하던 고넬료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행10:2).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욥이나 여호수아,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와 같은 영혼을 지녔다면 그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2. 가정 신앙의 본질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는 말씀은 우리를 축복하신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르신 교훈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명령이기도 합니다.
가정 내에서 기도하는 일은 매우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지만, 이 의무는 성경을 읽은 것만큼이나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기도를 드리기 위한 훌륭한 준비가 됩니다.
모든 가정의 가장들은 온 집안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훈련시켜야 하며 주님의 훈육 방법과 권고에 따라 그들을 부양하도록 해야 합니다
3. 가정 신앙의 동기
(1) 하나님께 대한 감사
첫번째 동기는 가정의 가장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당신의 가족보다는 당신에게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함은 말할 것도 없으며,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당신의 사랑하는 모든 가족들이 그분을 섬기고 그분께 의지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 가족들에 대한 사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녀들을 굉장히 아끼고 그들의 신체적 욕구들을 만족시켜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자기 자녀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는 소홀하기가 쉽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을 다정하게 대하는 것만으로 가장의 책임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3) 자기 유익
이 점은 다른 점들보다도 더욱 중요합니다. 만일 당신이 겨자씨만한 신앙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가정의 신앙을 장려해 나가는 일이 당신 자신의 영속적인 부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현세에서의 부를 촉진시키게 되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4) 주님에 대한 두려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경건한 결심을 하도록 만드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가 곧 이르게 될 것을 상기합시다. 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엄숙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결론
이제까지 말한 가정 신앙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나마 인식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 하오리니(수24:16, 21)"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당신 마음속에는 항상 그런
생각이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지금 권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가정의 가장들은 그들 자신의 영혼의 중요성과 그들 영혼을 위해 치루어진 그리스도의 보혈과 그 무한한 속죄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신앙
막10:51-52
서론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면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 "두루 다니며 선행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위해 사역하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같은 사람이 두 가지 면에서 자비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예를 바디매오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1. 그의 필요
(1)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그의 경우는 지극히 가련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나타낼 때에 소경 아버지의 소경 아들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바디매오에게는 들을 수 있는 것만도 너무나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는 호기심에 이끌리어 그 소리의 출처에 대해 알아보고자 나왔던 것입니다.
(2) 그는 거지였습니다.
바디매오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거지로서 빌어먹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나은 벌이를 위해 큰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성문 가까이에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에 자리잡고 거지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2. 그의 부르짖음
(1) 그것은 믿음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육체는 눈이 닫혀 있었지만 마음의 눈은 어느 정도나마 열려 있어 볼 수 있었으므로 그는 예수님을 따른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마음의 눈을 가진 셈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란 소리를 듣자마자 크게 소리쳤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서 소경들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시력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2)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인정하는 외침이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예수님을 세상에 온 메시아로, 주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관과 영원한 왕국을 베풀어주신 분으로,오래 전에 예언된(사35장)분으로,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분으로 믿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3) 그것은 자비를 구하는 외침이었습니다.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말은 한 영혼이 하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고백할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소망과 신뢰를 갖고, 가련하고 마음이 아픈 환자의 말로 "예수, 다윗의 자손이시여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3. 그의 부르짖음이 갖는 효과
(1) 예수님께서는 들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소경 거지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그리스도는 많은 군중들과 뜻을 같이하여 그가 잠잠하도록 꾸짖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머물러 섰다"고 말합니다. 비록 여행 중이었고 급히 서둘러야 했지만 가끔 멈춰서서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지에게 자비롭고 친절함을 베푸시기 위함이며, 또한 바디매오를 꾸짖는 사람들의 잘못된 열정을 지적해서 올바로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 주께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그분 자신의 자비와 권세가 그 소경에게까지 확대되어 그를 고쳤음을 더 잘 보여주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바디매오는 자신의 시력을 회복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으며, 바디매오는 "선생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련한 소경 거지의 눈에 빛이 들어가도록 명령하시고 빛이 있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즉시 기적이 일어났으며 바디매오는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결론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놀라운 기적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은 모세의 노래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모세는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이니까"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 오십시오. 당신이 지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지라도 그는 당신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안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주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그가 당신을 만나러 오고 계심을 깨닫도록 하십시오.
신앙 향상의 원리
사40:27-31
서론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타락에 대하여 지적하면서 신앙 향상의 원리를 강조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 면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타락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원망하거나, 불신임한 결과는 번민과 고통과 절망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심령들을 향하여 신앙의 향상과 부흥의 원리 세 가지를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1.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1절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린다. "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명철과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이시요, 연약하고 무능한 인생들에게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내용은 피곤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고, 실망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시고, 곤비한 자에게 향상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2. 새 힘을 얻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1절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이 향상하려고 하면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1) 새 힘을 얻어야 할 이유는, 새 힘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하고, 새 힘은 무엇이나 승리하게 하며, 새 힘은 우리의 삶을 존재케 하고 향상하게 하고 결시케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2) 힘에도 여러 가지 힘이 있다고 하면, 완력도 있고, 금력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여기의 새 힘은 인간적인 힘이나 세속적인 물질의 힘이 아니고 신령한 하나님의 힘을 가리킵니다. 이 힘은 사도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권능입니다.
이 새 힘을 얻으면 변하여 새로워지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에게 승리하여 힘있게 독수리같이 올라가리라고 하였습니다.
3. 올라가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31절에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독수리는 어떤 새입니까?
(1) 독수리는 순결한 새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를 먹지 아니 한다고 합니다. 이는 신앙이 향상하는 성도의 생활은 이 세상 부패한 것에서 성별되어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2) 독수리는 가장 높이 나는 새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독수리는 높이 올라가서 멀리 또는 넓게 바라본다고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높은 신앙의 이상을 가지고 저멀리 천성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것을 시시하게 내려다보면서 살아가는 고상한 신앙생활을 가리킵니다.
(3) 독수리는 새 중에 제일 힘이 세고 강한 새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산 중의 왕은 사자이고 공중의 왕은 독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모든 새들을 정복하는 새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정복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신앙이 올라간다는 의미는
① 세상에 속화되지 아니하고 성별하게 사는 삶이요,
②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가지고 천성을 향해 전진하는 삶이요,
③ 성령의 권능을 받아 세상을 정복하는 승리적인 삶입니다.
결론
우리는 신앙 향상의 세 가지 원리를 찾아보았습니다.
(1) 여호와를 앙망해야 되고
(2) 새 힘을 얻어야 되고
(3) 위로 올라가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자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만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타락과 향상
마26:69-75
서론
신앙생활이란 누구에게나 굴곡이 있는 법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에게도 굴곡이 있었고 노아에게도 굴곡이 있었고 아브라함에게도 굴곡이 있었습니다.
신앙 향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길이라면, 신앙 타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범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신앙의 굴곡이 있었으며 그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였다가 다시 회개하고 헌신한 인물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고찰해 보려고 합니다.
1. 신앙 타락과 원인
기독 신자라면 누구나 고의적으로 신앙의 길에서 타락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베드로의 신앙은 한때 크게 향상이 되어 예수님께 극구 칭찬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찌하여 타락을 하였습니까?
(1) 예수님의 말씀과 충고를 무시하였습니다(마26:34-35).
첫째, 베드로의 약점과 실수를 지적해 주었으나 이를 긍정하지 아니하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는 자기가 자신을 과도히 신뢰한 증거입니다. 자신의 단점보다는 자신의 장점만을 믿은 잘못입니다. 둘째, 자신의 완전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되지도 못하고 다 된줄 아는 스스로 속이는 행동이었습니다. 셋째, 자고하고 교만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가 주님의 말씀과 충고를 무시하게 했습니다.
(2) 기도하지 않았습니다(마26:40-42).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기도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까지 올라갔으나 기도하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육신이 연약해서 못하였고, 육신이 피곤해서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히 졸려서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 누구나 다 연약한 까닭에 기도해야 되고, 피곤하므로 기도해야 되고, 잠이 오니까 기도해야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함이 신앙 타락의 두번째 원인입니다.
(3) 자신의 혈육적 방법으로 행동하였습니다(마26:51-52).
베드로는 혈기와 폭력으로 적을 물리치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혈기나 폭력적인 방법은금물입니다.
이는 아직도 자신에게 패배당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다음은 십자가를 저버린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따르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검을 가지는 자들은 다 검으로 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주님 말씀을 무시하고 기도하지 아니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행동한 베드로는 마침내 주를 멀리 따라가다가 배신하고 만 것입니다.
2. 신앙 향상의 비결
여기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하였다가 다시 회개한 비결은 첫째,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회개한 것입니다. 그 소리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나팔 소리였습니다. 모든 죄악을 회개하라는 나팔 소리였습니다.
둘째, 주님 얼굴을 바라봄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마음에 뜨거운 감화와 감동을 받게 하였습니다.
셋째, 범죄한 자리를 떠나 통곡하였습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던 그 자리를 탈출해 나왔습니다.
결론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신앙이 향상되고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타락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기도하여 우리의 신앙이 향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긍정적인 신앙
빌4:10-20
서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환경에든지 적응해 나갈 수 있는 신앙을 고백한 말씀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급변하는 현실에서 올바른 신앙생활과 처세를 위해서는 우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신앙과 기능을 소유함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환경에 바로 적응하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도태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적응해야 합니까?
1. 순경에 적응할 수 있는 비결
인생은 현실에서 성공할 때에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패할 때에 슬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순경에 처하기도 하고 혹은 역경에 처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순경에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전7:14과 약5:13에 보면 기뻐하고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1) 인간의 욕심을 제거하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순경에서 자족할 줄 모르는 것은 인간의 욕심때문이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깨닫고 겸손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성공한 줄 알고 교만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면 속히 그 성공이 실패로 변하기도 쉽다고 하였습니다. 사울 왕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순경에서는 욕심과 교만과 불신앙의 요소를 제거하고 자족과 겸손과 신앙으로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2. 역경에 적응하는 비결
인간의 역사는 수레바퀴와 같이 돌고 돌아 자연 환경도, 사회 환경도 변화되면서 우리의순경이 변하여 역경에 처할 때도 없지 아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적응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전7:13).
신앙의 안목으로 모든 일을 합동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바라보면서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롬8:28).
(2) 자신의 행한 일을 깊이 살피고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욥과 같이 인생은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욥1:21).
(3) 현실에서라도 영원한 내세를 사모하고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현실은 유한한 것이요, 잠시 보이다가 없어지는 것이지만 내세는 무한한 것이요, 영원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신앙인의 역경은 신앙의 연단을 위해서라고 하였고, 보다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한 섭리라고 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경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순경에서 자족하고 겸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역경에서 하나님과 자신과 내세를 생각하면서 신앙으로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유익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인정받은 신앙
마8:5-13
서론
성경과 교회사에 나타난 많은 신앙인들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은 신앙이요, 다음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신앙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아벨과 다윗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었지만 가인과 사울 같은 인물은 오히려 하나님을 후회하게 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백부장의 신앙은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고 크게 칭찬을 받았으니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그 믿음의 성격을 잠시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1. 그 인물은 어떠하였습니까?
그가 어떠한 인물이기에 이와 같이 위대한 신앙을 소유하고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까? 주목할 만합니다.
(1) 그는 이방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민족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했습니다. 엡2:11-12에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관념을 세 가지로 분석하였는데
무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할례가 선택과 성별과 헌신의 뜻이 있다고 하면 무할례당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하고 헌신할 수 없는 비천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과 축복과 천국 밖에 있다는 말로, 구원얻을 수 없는 비참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소망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귀의 자녀로서 절망적인 존재요, 멸망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 그는 백부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계급에 대할 칭호로써 백 명을 거느리는 지휘관입니다.
보통 군인은 그 성품이 거칠고, 무자비하며, 거만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이방인으로서 또는 군인으로서 예수님께 인정받을 신앙을 소유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였으니(엡2:8)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신앙의 선물을 받아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2. 인정받은 신앙의 내용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앙의 세계와는 도무지 상관없는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께 그 믿음이 인정되고 칭찬을 받아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대개 그 믿음이 어떠한 믿음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존귀하게 여기는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8절에 "주여 내 집에 들어옴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라고 하신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권위와 예수님의 존귀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비천과 연약과 무능을 고백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는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8절에 "말씀만 하옵소서 그리하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한 것은 이는 주님의 말씀의 능력과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의 절대성을 믿는 신앙으로써 이 말씀이 자기 자신의 생활의 지침과 방향을 설정하고 이 말씀으로 운명을 같이 하려는 신앙입니다.
(3)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한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9절에 "명령만 하시면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은 주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만유의 주님으로 믿고, 우주 만물이나 자신은 그 주권하에서 모든 일들이 실현되고, 성취되고, 결정되어 간다는 사실을 믿은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예수님에게 처음 발견되고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결론
이와 같이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은 신앙의 결과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감에 대하여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고 많은 사람들의 길잡이가 됐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예수를 믿은 신자가 되어진 이상 예수님에게 인정을 받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절대적인 신성을 믿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절대적인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3) 예수님 의 절대 적 인 권세를 믿어야 합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바르고 깊이 믿어서 예수님의 인정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를 아는 지식
벧후3:18
서론
이 세상에 무엇이나 생명있는 것은 자라나게 마련입니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성장이 없다면 그 자체가 벌써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이란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영적으로 생명체이기 때문에 자라나는 것입니다.
1. 믿음이 늙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장이 없는 것 같은 것도 실상은 그 소모되는 것만큼 늘 보충하는 성장은 있습니다. 성장이 없다면 그 믿음은 벌써 늙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유다서 1장 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 하였습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하였으니 새 은혜라고 하는 것도 우리가 받은 옛 은혜나 옛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한 번만 주면 영원히 효과 있으며 닳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에서 늘 새맛을 보고 항상 감사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수천 년간 들었어도 항상 새로우며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받은 은혜와 믿음이 늙어지지 않았는가 살펴야 합니다 늙어졌으면 새로워지는 갱신 운동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새로운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30-31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03편 5절에는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새로워지는 법입니다. 산 사람의 피부는 늘 신진 대사하는 것입니다. 곧 사람은 변하지 않으나 옷은 변합니다.
우리는 꼭 같은 십자가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늘 새맛을 보고 새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믿음이 살아 있는 성도는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을 수천 번 들어도 매일 새로워지는 것이니 이는 믿음이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또 살았으니까 자라납니다. 자라나면 자연히 꽃피고 결실한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믿음이 자라지 않는 자는 언제나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꾸리는 믿음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열심히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결론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하고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하여 주님께 칭찬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서신을 쓰고 마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버릴 줄 아는 믿음
히11:24-26
서론
믿음 생활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 결단은 버리는 것을 뜻하는데 인간이 자기의 것을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자기의 것을 버리고 산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별로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바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가 버린 것은 순탄하게 얻은 것도 아니요, 죽음의 경지에서 벗어난 뒤에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얻은 것을 버리므로 그에게는 죽음이 닥쳐왔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믿음을 위해서 버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무엇을 버리고 살았습니까?
1. 믿음을 위해서 지위를 버렸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중에서 40년간 학문을 연마하고 끝내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궁중에서 몇째 안가는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높은 지위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애굽인이 천대하는 이스라엘 편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편하게 살려면 지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세상의 지위가 믿음보다 절대로 값어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도들에게도 명예와 지위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하지만 이것이 신앙의 방해가 될 때는 버릴 수 있는 신앙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애굽 궁중의 지위를 버린 모세의 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2. 믿음을 위해서 쾌락을 버렸습니다.
본문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세상의 쾌락을 믿음을 위해서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좋은 것을 버리고 고통을 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숙여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끝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지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고 세상의 쾌락을 단호히 거절하고 옥에 갇히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세상의 쾌락이 넘실대는 오늘,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쾌락을 버린 모세의 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3. 믿음을 위해서 보화를 버렸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력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돈보다 더 가치있는 재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만이 재물이 아니라 지식, 기술, 건강, 권세도 재물인 것을 알아야 하고 이보다 더 좋은 재물은 신용이고 그보다도 더 귀한 재산인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황금만능주의로 많은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은 불행하게도 교회에까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치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세상 재물인 아닌 영원한 재물인 믿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결론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물과 배를 던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돈이 절대인 줄 아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재물보다 더 귀한 믿음을 소유한 모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세는 믿음을 위해서 세상의 지위도 쾌락도 보화도 버렸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살고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신앙인 줄 압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모세의 신앙을 본받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바벨탑 신앙
창11:1-9
서론
인간은 혼자서는 못삽니다.
첫째로 하나님 없이 못살고, 둘째로 이웃 없이는 못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산 에덴을 떠난 인간은 시날 평지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흩어지지 말고 하나로 뭉쳐 살자고 이웃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바벨탑을 쌓은 동기입니다. 바벨탑은 인간이 만든 에덴동산입니다.
1. 시날땅의 종교
2절에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인간들은 시날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시날은 -하나님의 문, 하나님의 땅이란 뜻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땅을 떠나 다른 하나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시날땅의 하나님은 에덴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인간의 중간 타락이 생겼습니다. 처음은 첫 시조 아담이 에덴에서 타락하고, 중간은 중시조 노아의 자손이 시날에서 행한 타락입니다.
깨뜨렸습니다. 즉 "무지개" 언약을 깨뜨리고 바벨탑을 쌓고 홍수를 막고 구원의 길을 찾았습니다. 여기서 시날의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에덴에서 지혜의 열매를 따먹은 인간은 시날에서 지혜의 탑을 세웠습니다. 이것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삼았습니다.
2. 바벨 교회를 세움
3절에 "벽돌을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돌대신 벽돌을 굽자"는 뜻은 돌보다 벽돌이 모양이 있고 진흙보다 역청이 더욱 더 잘 붙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에덴 교회를 떠나 바벨 교회를 세웠습니다. "돌"은 반석되신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다니엘은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린다"고 하였습니다(단2:34). 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은 반석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 틈에 숨어라(출33:21) 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은 떡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은 생수인데 이 생수는 반석에서 터져 나왔습니다(민20:11).
그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돌대신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이 벽돌로 구원의 탑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홍수에서 구원될, 생명의 도피성, 구원의 방주를 짓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벨 교회입니다.
3. 바벨탑의 심판
인간은 구원을 위해 바벨도성을 건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하여 안전과 행복을 도모했습니다. 이것이 바벨 문명입니다.
문명은 분명한 인본주의입니다. 문명은 지적이요, 세상적이지 영적이요, 하늘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은 있어도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복종하려는 것은 아니다 라고 내촌 감삼 선생님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심판하셨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을 더욱 타락케 했고 인간을 더욱 멸망케 했습니다.
(1) 가나안 족속이 세운 성- 크고 높아서 하늘에 닿을 정도(신1:28)
(2) 느브갓네살이 세운 도성-나의 능력, 나의 권세, 나의 위엄,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하였습니다(단4:30).
(3) 말세에 음녀가 세운 큰 성-(계18장)
이런 것들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를 구원하는 길은 하나님의 의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주신 정의에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공의입니다. 이 십자가의 구속 아니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잠14:34)"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사60:12)"고 하였습니다.
결론
인간의 구원은 인류가 쌓은 문명이 아닙니다. 사람이 쌓아올린 바벨탑은 인간에게 멸망을 주고 무덤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도성, 거룩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도, 권세도, 과학도, 지식을 높이 쌓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 의뢰하고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히11:8-10
서론
히브리서 기자는 앞장 끝부분에서 배교하지 않는 최상의 예방책으로 믿음의 은혜와 믿음의 생활을 추천하였습니다. 이제 이 장에서는 탁월한 은혜로까지 그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기자는 다른 어느 장로보다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취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의 근거(8절)
(1) 하나님의 부르심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 부르심은 아브라함을 자기 아버지 집의 우상숭배로부터 개종하게 한 능력 있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으므로 신앙과 복종의 규칙에 대한 충분한 근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악한 사람들도 택하여 가장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반드시 우리가 당신 앞에 나가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오십니다. 죄인들이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런 부르심은 죄와 죄 많은 무리에게서 그를 떠나게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
① 약속의 실체: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을 그가 장차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에 관한 관찰: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유산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그들을 어린아이와 같이 하시고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유산을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상속을 받기 위해서 잠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분명히 적절한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모의 믿음은 종종 자손들에게 축복이 됩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의 연단(7, 8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즐거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야말로 그를 인도하는 최선의 길이며 또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그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믿고 복종했습니다.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은 하나님께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죄악으로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과 순종으로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험은 무엇보다도 큽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험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는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의도적으로 포기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 아브라함의 믿음의 버팀목
(1) 천국에 대한 소망
천국은 질서있게 건설되고 방어력이 든든한, 잘 구비된 사회입니다. 또한 토대가 견고한 도시입니다 하나님의 변함 없는 목적과 전능하신 능력, 주 예수의 공로와 중재, 영원한 언약에 대한 약속들을 기반으로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고안하여 만드신 도시입니다.
아브라함은 천국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러한 나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천국을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기다린 만큼 천국에 대한 기대로 그는 여정 중에 겪게 되는 모든 시험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은 모든 불편함을 끈질기게 참아내도록 도와주었으며 천국에 대한 그의 모든 의무를성실하게 이행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2)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①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화실히 믿었습니다. 고는 스스로 깨달아 자기의 모든 의심을 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아들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자기 아들을 바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능히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 그렇게 하실거라고 믿었습니다.
4. 믿음에 대한 보상
그의 아들은 아브라함을 떠나 하나님께로 갔으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주셨습니다. 평안과 위로를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했던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에 대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돌려받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아들을 죽은 것으로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돌려받은 것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결론
복음이 구약 성경을 끝맺어 완성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신약 시대 성도들이 믿음의 구약시대 성도들의 믿음보다 훨씬 더 완전하리라고 기대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
갈2:20
서론
본문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친히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과 부활을 믿는 우리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 자신의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야 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육의 사람, 죄의 사람, 옛 사람은 다 십자가에 목박아 죽이듯이 없애고 변하며 새 사람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생활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나 육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 새생활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2.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입니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니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죽어져서 없다는 실정 입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은 오직 내 안에 들어와 역사하시고 나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대행자 노릇을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말하고 행하는 만사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근신하고 조심성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언행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주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박는 죄가 되기 쉽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생활을 연출하는 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나서고, 내가 영광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떠나시고 말 것입니다.
3.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는 찬송가 가사와 같이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 3서 1장 2절에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신 삼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며,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내 생명도 그에게 속해 있다는 이 귀중한 진리로 나는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사는 생활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마15:28
서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최북방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자기 딸의 흉악한 귀신들린 것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녀의 소원대로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소원이 성취된 것은 무엇보다 그 여자의 믿음이 컸기 때문인 줄 생각됩니다.
그 여인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습니까?
1. 무시를 당해도 참는 믿음입니다.
그 여인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소리 지르며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 하셨으니 완전히 무시해 버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감정의 동물이요, 더구나 여성들에게서 더욱 그런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무시를 당해도 단념하거나 낙심하여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더욱 간절히 계속 요청하며 간구하였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은 직접적으로 무시를 당하였지만 그것을 참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크게 요구됩니다. 성도들은 주님 외에는 구주가 없음을 확신하고 다른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무시하여도 낙심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셔야 하겠습니다.
2. 거절을 당해도 참는 믿음입니다.
그 여인의 간청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와서 대신 요청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보내소서"라고 한 것은 어떻게 하시든지 적당히 처리해서 보냅시다 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 하였노라"고 보기좋게 거절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태도는 너무나 냉정하신 태도였습니다. 그래도 가나안 여자는 또 참고 다시 예수님께 절하며 "저를 도우소서"라고 애절하게 간청 하였습니다. 이렇게 참기 어려운데서 참는 것이 큰 믿음인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기까지 낙심치 않고 계속 간청하였습니다.
3. 멸시를 당해도 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세번째로 아주 지독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시어 이스라엘은 자녀이지만 가나안인 은 개라고 멸시를 하셨습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며 그 멸시까지 참았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소원이 성취되게 되었습니다. 과연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계속하여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다 이루어 주십니다.
결론
우리의 믿음도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무시를 당해도 참고, 거절을 당해도 참으며, 멸시를 당해도 참는 믿음입니다. 그 여인은 어떤 경우를 당하여도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참고 견뎠습니다. 소원 성취가 되는 믿음은 참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신앙
롬4:17-25
서론
성경상에 나타난 신앙인들의 역사를 고찰해 보면 하나님께 합격한 신앙이 별로 많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 합격한 신앙의 성격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신앙이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이요, 하나님이 만족해 하시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본받아야 할 신앙입니다. 여기 기독교의 "의신득구"의 교리와 신학을 확립시켜 놓은 사도 바울은 그 표본으로써 아브라함의 신앙을 소개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떠한 신앙입니까?
1.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은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자녀 생산의 소망이 없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리츠만은 "바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절망적인 것이며 불가능한 상태이고, "바랐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의 가능성을 희망하고 믿었다는 의미라고 밝혔습니다.
신앙이란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의 신앙은 없는 중에서 있게 하심을 믿은 창조적 신앙입니다.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심을 믿는 신앙이며, 절망 속에서 낙심치 아니하는 소망적인 신앙입니다.
2. 역경에서도 약하여 지지 아니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그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 했습니다. 사람이란 보통 환경이 좋을 때는 그 믿음이 좋은 것 같으나 환경이 악화되면 그만 믿음이 약하여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한 믿음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 다 맡기고 더욱 담대하게 밀고 나가는 신앙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신앙은 약하여질 줄 모르는 신앙이 라고 하였으니, 하나님께 힘을 얻어 강해진 신앙이며, 그 믿음이 장성한 장부의 신앙입니다. 우리도 기도하여 능력을 받고 말씀으로 장성하여 장부가 되고, 성령의 은사로 고차원적인 신앙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은 신앙입니다.
약속이란 우리들에게 소망과 환희와 의욕을 갖고 살아가게 합니다. 이 약속은 서로의 신앙으로만 성립되고, 보증이 되고, 실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어느 한편에서라도 의심을 품게 되면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약속의 대상은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의심치 아니하고 믿었습니다. 사람이란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고, 연약하고 무능한 까닭에 믿을 수 없고, 거짓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우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고, 전능하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절대 믿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의심치 아니했다"는 말은 원문의 뜻을 고찰해 보면, 서로의 금이 생기지 아니하고, 서로의 사이에 불순물이 개입되지 아니하고, 공간이 생기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온전한 신앙입니다. 순수했던 신앙입니다. 알찬 신앙으로 하나님과 일치된 신앙이었습니다.
결론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에게 무엇이나 순종하였고,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갔고, 하나님에게 무엇이나 드리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인정하여 주십니다.
그 결과, 의로 여겨 준비했던 축복을 주시기로 하고, 모든 사람의 본을 보며 그 신앙을 배우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믿음
요14:1
서론
환난날에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 위하여 여기 기록된 말씀을 우리가 날마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무익한 말씀이 되고 말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을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도 믿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1. 믿음의 대상들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아버지의 독생자이신, 그래서 아버지와 똑같은 본성을 지니신 분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과 아버지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영원한 정신이신 하나님과 영원한 말씀이요,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므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존재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께 대하여는 전에 우리가 죄로 말이암아 던져져 있던 비참한 상태에서 회복된 것과 우리의 복지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변호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길이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2. 믿음의 행동들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그를 알게 하시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적 여호와로서 믿는 자들은 그에게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드려야 하며 충성의 맹세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위엄을 믿는다면 그의 임재하심에 떨며 그를 불쾌하게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더 나아가 그런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일을 더욱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을 표현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모두 그의 뜻을 행하는 법을 배우고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도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의 기질과 우리 삶의 방향이 그 뜻에 일치하도록 해야합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함과 같이 우리는 그렇게 믿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는 신성의 두려운 것 뿐만 아니라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모든 완벽 함들이 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며 또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도 기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도하시고 후원하시며, 힘 주시고 동정하실 것을 믿고 그에게 의지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도 그렇게 하시리라 믿으며 그분께 우리의 소망을 둡시다.
3.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아버지와 한 분이신 그리스도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나아갑니다. 아들이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인 자로 계시하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믿는 자마다 그분도 믿을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위탁하시고 보내시고 증거하신 그리스도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던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눅10:16, 마3:17, 요5:30)
(3)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도 ale음으로써 그를 존귀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빌2:11).
(4) 하나님께서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들이 증거한 그리스도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으며 모세가 정한 제도의 모든 의식들도 그를 상징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오신 것임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들 중의 하나입니다.
결론
학식이 풍부하고 신앙적 이었던 한 사람이 자신의 금언으로 삼았던 말씀 곧 "그리스도 밖에 없다. "는 말씀을 경건하게 사랑하도록 합시다.
신앙생활의 원천
시116:1-4
서론
우리의 신앙생활은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는 생활이며, 우리 인간 생활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서 신앙생활을 빼버리면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상실하고 비이성적인 동물 이하로 떨어져 버리는 비천한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의 원천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본문 12절에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의 동기와 원천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만나 깊이 교제하며 바로 공경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자연 은총과 특수 은총으로 구분하는 데,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은 특수은총입니다.
이 특수 은총의 내용을 시인은 세 가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사도 바울은 롬3: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욕심과 근심과 슬픔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사도 바울은 빌4:4-7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육적 근심과 고통과 비애에서 해방하사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행동과 생활을 실족치 않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시인은 주께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탄한 행로에서 행동하고 승리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평강과 생활의 승리의 은총이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이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2. 신자들의 감사입니다.
여기 시인은 자신이 받은 바 은혜를 보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 생활이 신앙생활의 원천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감사 생활과 직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바로 깨달아 아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시103:2에 하나님의 은택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깨달아 기억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원천이 되어진다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행위가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시인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면서 하나님께 그의 몸도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서원한 것을 수행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시인은 15절에 "나의 서원한 것을 같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서원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 무엇이나 드리겠다는 서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보답하고 서원한 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감사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결론
우리 신앙생활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우리들의 감사 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바로 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소원이요, 요구인 것입니다.
(2) 우리 성도들의 본분이요, 의무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정비된 신앙생활
벧후1:1-11
서론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깊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한마디로 우리신앙생활을 정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정비된 신앙생활은 그 결과가 하나님을 기쁘고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고, 자기 자신의 축복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비되지 못한 신앙생활은 마귀에게 유린당하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자기 자신에게도 별 유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욕을 돌리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정비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말씀은 신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이 범죄하여 상실하였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보이는 외모의 형상이 아니고, 보이지 아니하는 내적 본성이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 우리의 성품도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닳아 우리의 성품도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닮아 간다는 말입니다.
(2) 인간이 범죄하여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회복한 다른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인간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고
② 하나님을 대적하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 속에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한 정비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하나님과 깊이 교제를 하게 되고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2. 신앙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정비되어 있는지 아니한지 그 신앙의 열매로 보아서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본문 5-7절에 신앙의 일곱 가지 열매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있는 정비된 신앙생활은 조화를 이룬 신앙생활이며, 무장된 신앙생활이며, 완전 유비된 원만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7대 열매는 무엇입니까?
(1) 신앙에 덕이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덕"이라는 낱말은 신앙생활에 원기를 도와주는 작용이라고 합니다.
(2) 신앙에 지식을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성경 지식, 또는 영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3) 신앙에 절제를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이 절제는 나 자신의 관리를 바로 하라는 의미입니다.
(4) 신앙에 인내를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인내는 시험과 환난과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해 나아가는 원동력을 의미합니다.
(5) 신앙에 경건을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별된 생각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6) 신앙에 형제 우애를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필리아"의 사랑 즉 사회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7) 신앙에 사랑을 갖추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적 고차원적 사랑을 의미합니다.
결론
이와 같이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정비하여야 할 이유는 우리의 택하심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이고, 우리가 실족치 않기 위해서이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선한 일을 사모하는 열정
딛2:ll-14, 빌2:12-16
서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선한 일을 수행하는 열심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열정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셨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동참하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이웃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선한 일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1. 그리스도 믿는 행함이 있는 믿음
야고보서 2장 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을 실천하라는 서신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확증시켜 줄 수 있는 많은 시련과 권면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의 기자는 우리에게 선한 행실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도 하늘나라의 모범 시민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5:16).
2. 하나님을 닮아가는 행함이 있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선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우리 인간들에게 선행을 베푸시고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원하시는 일을 수행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요9:4).
우리가 선한 일을 사모하며 즐겨 선행을 하게 되면 우리의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서 본성이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을 닮아가는 행함이 있는 믿음
예수님께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선행을 베푸신 지칠 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병든 자들에게 의원이 되어 주셨고 무지한 자에게 선생이 되어 주셨으며, 보지 못하는 자를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자를 듣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열정으로 사역을 수행하셨습니다.
4. 성령에 응답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
성령은 매우 중요한 일들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서 오순절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 온 성령은 세상에 머무르면서 먼저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가 선하게 살고 선한 일을 수행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선한 일을 사모하는 열정을 갖도록 인도합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에 관한 그의 확신을 절정으로 피력하였습니다(엡2:10). 우리는 우리 주님 안에서 선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려는 열정을 품으셨듯이 우리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는 열정을 마음에 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고 선한 일에 열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축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신앙
눅18:14
서론
주님께서 설교하신 대부분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분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에게는 복음을 설교하셨으나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는 화를 내시며 비난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비유 속에는 그러한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우리 주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1. 비유 속에 나오는 두 사람
그들은 각기 다른 명성이 있었습니다.
(1) 바리세인은 존경받는 위선자였습니다.
바리새 인들은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잘 지키며, 유대교 의례와 예식들을 지키는 일에 열심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로부터 높은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그들인지라 만일 두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들 중 하나는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말해왔습니다.
(2) 세리는 미움받는 죄인이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를 위한 세금을 걷어들이며 부정을 행하여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개 평판이 나빴으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출교당한 사람을 마땅한 세리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의 친구이며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그분을 세리들과 함께 비난받아 마땅한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공적 예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였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약에서도 주의 이름으로 인간의 희생과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는 그것과 모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과 사도들은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우리에게 성전에서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2. 비유 속의 두 기도자
(1) 바리새인의 기도
바리새인은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위하여 갔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 자신의 공적만을 늘어놓았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중에는 그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나 그의 내적인 신앙을 말해줄 만한 어떤 언급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세리의 기도
그의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말과 행동과 사고에 있어 죄인인 나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소서. 내 몸이 죄를 짓고,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을 하였으며, 이 죄인 속에는 영적인 건강함과 선한 생각이 들어 있지 안나이다. 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의 상처와 흠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죄의 상처가 곪아가고 있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과 자신의 경건치 못함을 슬퍼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양심에 대한 가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악한 마음만을 책망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3. 두 가지 결과
(1) 두 사람과 관련하여 보겠습니다.
바리새인은 의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낙담하여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비난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죄인인 세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오히려 의로운 자였습니다.
(2) 교훈적 측면
자기 자신을 믿고 자신 속에 안주하거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스스로 그리스도의 의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선한 사람들이나 천사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시기에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영원토록 지옥에서 마귀와 함께 살도록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은혜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자는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그의 모든 죄로부터 값없이 의롭게 될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강으로부터 거룩한 기쁨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의 행동은 당신을 영원토록 의롭게 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높아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도록 그분을 높아지게 하셨으며 그분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한 군주일 뿐만 아니라 구세주로 높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도 그분이 구세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룻의 신앙적 결단
룻 1:16
서론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을 데리고 모압을 지나 이스라엘 땅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오르바와 룻은 신앙인 중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오르바는 신앙을 고백하고 나서 세상으로 되돌아간 사람을 대표하며, 룻은 진실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1. 룻의 신앙적 결단
(1) 변함없는 마음
나오미는 두 자부에게 모압으로 돌아갈 것을 강권합니다. 나오미의 곁을 떠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오르바와 룻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크게 상심을 하였으며 결국 오르바는 모압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룻의 믿음은 큰 시험에 빠지게 되었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룻1:14). 본문에 계속 이어지는 구절에서 룻은 확고한 그녀의 결단력을 보여줍니다.
(2) 룻의 결단의 위대함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결단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은총때문입니다. 룻은 즉각적으로 영적인 축복을 받았고 천국의 영원한 상급뿐만 아니라, 보아스의 가문에서 풍성하고 번창된 물질적인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의 자손을 통해서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2. 룻의 결단의 결과
(1) 죄에서 구원되었습니다.
룻은 죄의 사악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켰기 때문에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룻은 죄의 장막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들과 의로운 땅에서 즐거이 살게 되었습니다.
(2) 옛사람들에게서 구별되었습니다.
옛사람으로부터의 구별됨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절실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전에는 사단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으나 이제는 정반대의 변화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3. 신앙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은 영화로우신 분이 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존귀와 함께 하며 그 이름이 이 땅 위에 충만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충만한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지켜 보호하시고 그들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별되며 축복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① 그들은 거듭났고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거듭나게 하시며 자기의 형상으로 인치시며 자기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우수하며(잠12:26), 땅 위에 존귀한 자들입니다(시16:3).
② 그들은 사죄의 은총을 받아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녀 된 모든 특권을 주심으로 그들은 평안에 거하며 멸망의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사단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킬 수가 없습니다.
(3)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 또한 자기 백성에게만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① 참 하나님과 우상:세상 사람들은 온갖 것들을 자기의 신으로 선택하여 믿고 있지만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이 아닌 어떠한 신으로부터도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참 행복의 제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② 성도와 죄인: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계14:4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또 다른 부류는 그리스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자들입니다. 후자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비참한 멸망을 당할 부류임을 알아야 합니다.
4. 신앙적 결단의 중요성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입니다. 우리는 정욕을 피하고 죄를 거 절해야만 합니다. 모든악한 행실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고 모든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욕은 너무나 거세게 우리를 유혹하고 죄는 항상 우리들 가까이에 널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끊어버리려면 심한 고통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세상적인 것을 버려 합니다(눅14:33).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의 영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온전하고 예비된 성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거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기 위해서는 신앙에 근거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오르바와 룻이 했던 것과 같은 신앙적인 결단을 요구하시는 데, 그때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헌신적이며 충실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결 론
모두가 하늘의 상급을 받을 때에 홀로 버려진다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제 우리에게는 신앙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올바른 결단을 하여 오르바와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룻과 같이 모든 절망과 반대를 무릅쓰고 승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택하기로 결단하라
왕상18:21
서론
본문은 엘리야가 그의 첫 회합 장소에서 모든 백성을 향해 부르짖은 내용과 이에 대한 백성들의 침묵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들의 망설임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확신이 없습니다.
(1) 기독교 진리에 대해 의심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회심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니면 인간들이 꾸며낸 것인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진리의 말씀에 대해 많은 의심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 유무에 대해 늘 의심을 합니다. 그들은 항상 많은 의심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2)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마음의 결단과 신앙으로 사는 삶에 대해 주저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기 전에 언젠가는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이 영원 무궁한 것처럼 착각하여 좀처럼 결단을 하지 않고 꾸물거립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문제보다 세상적인 위안과 일에 더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열심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아마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자가 당착에 빠져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한 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선택의 길은 두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세상이냐 아니면 천국이냐라는 선택의 문제인 것입니다.
2. 왜 인간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결단이 요구됩니까?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영적인 문제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문제에 대한 분명한 태도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성과 결단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결단의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결단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자신의 삶을 선택함에 있어, 방임된 자유를 갖는 것보다 자신의 유익한 삶을 위해 더 나은 기회를 포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해야 할 대상이 극히 한정되어 있고, 결단에 필요한 모든 여건이 인간에게 갖추어졌기 때문이며, 결단이 지체되면 우리의 유익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지체한다는 것은 곧 사단의 요구에 이끌려가는 것이며 현재의 삶이란 매우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선택의 기회가 얼마나 빨리 사라져 가는지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 기회는 우리의 생존 기간보다 결코 오래 가지 않으며 숨을 거둘 때 그 기회도 함께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결단의 순간을 나중에 해야지 하면서, 결정을 해야만하는 순간에도 당혹감과 위기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미 때가 지나가 버렸음을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진정한 행복과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천국과 지옥 중에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물음에 지체말고 지금 곧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결단을 하도록 간곡히 당부하는 바입니다.
신앙 성장의 원리
고전3:1-9
서론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우리 기독 신자들의 영적 성장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을 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신앙 인격과 생활은 성장되어 진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이 은혜는 많이 받았다고 자부하지만 그들의 신앙생활은 아직도 유치하므로 어른답게 성장해야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 인격과 생활은 계속 성장해야 된다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1. 신앙 성장의 의미에 의하여
본문의 말씀을 의지하여 신앙 성장의 세 가지 의미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육체의 성장이 아니라 영혼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더니, 니고데모가 한참 생각하다가 하는 말이 "사람은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 모태에 들어갔다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차원과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차원이 달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거듭남을 말씀하셨으라 니고데모는 육신의 거듭남을 생각하고 하신 말입니다. 그런고로 신앙 성장은 영혼 성장을 의미합니다.
(2) 육신의 생활 범주에서 영적 생활 범주로 옮겨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성장하면 어린아이의 생활 범주에서 벗어나 어른의 생활 벌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이 우리 영혼이 성장하게 되면 어린아이 같은 육신의 생활 범주에서 영적 생활 범주로 옮겨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육신의 것과 세상의 것을 추구하였으나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추구하여 육적 생활보다 영적 생활을 더욱 추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3) 피동적인 신앙생활에서 능동적인 신앙생활로 향상됨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것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입니다. 밥도 먹여 주어야 먹고, 옷도 입혀주어야 입고, 잠자리도 펴 주어야 하고, 대소변도 부모가 갈아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이 모든 생활을 자기 자신이 능동적으로 하게 됩니다.
신앙도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 이와 같이 피동적인 신앙생활이 능동적인 신앙생활로 향상되어지는 것입니다.
2. 신앙 성장의 비결
본문을 중심하여 신앙 성장의 비결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받아들여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벧전2:2에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2) 영적 운동을 해야 성장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9:24). 신앙생활은 운동장에서 운동 경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각 지회 회원으로 참가하여 신앙 운동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3) 영적 질병을 제거해야 성장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의 병이 들면 신앙생활이 질식되기 쉽습니다. 설교할 때 조는 병, 헌금할 때 인색한 병, 교회 붕사의 게으른 병, 기탄, 혈기, 교만, 불평, 질투, 거짓, 모든 영적 질병을 제거해야 됩니다.
결론
우리의 신앙 성장은 나 자신도 축복을 받거니와, 교회가 성장이 되고 하나님께도 기쁘시게 하여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기념할 믿음
막14:3-9
서론
본문 9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성역 말기에 베다니 문등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한 옥합을 가지고 와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 영원히 기념할 만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견해 차이로 논란도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의 견해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인 동시에, 값진 보배를 낭비하는 행동으로 보고 비난도 하고 책망도 하였으나, 예수님의 견해는 아주 잘한 일이요, 그가 힘을 다하여 주님의 장사를 예비한 일이라 영원히 기념할 만한 일이라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도 알 수 없고 이름도 알 수 없는 무명의 여성도의 신앙이 영원히 기념할 만한 믿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1. 영원히 기념할 믿음의 개념
한 여성도가 주님을 믿고 섬긴 그 믿음이 왜 영원히 기념할 믿음이라고 하였습니까?
(1) 예수님의 마음에 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2) 예수님께 인정받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 믿음 자체가 온전했다는 말입니다.
(3)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하나님께 칭찬받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영원히 기념할 믿음의 형태
무명의 여성도가 예수님에 값진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서 부어드린 그 신앙의 형태는 참으로 배우고 본받아 실천할 만한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1) 예수님께 무엇이나 바치려는 신앙입니다.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가장 귀한보배라도 드리려는 마음을 가진 믿음입니다.
(2)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을 감수하려는 신앙입니다. 무명 여성도는 예수님에게 값진 향유를 부어드린 사건으로 인하여 심지어 제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이러한 핍박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참고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3) 예수님만 기쁘시고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안일하고,평안하고, 행복을 누리려는 자기 중심의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희생이 되더라도 예수님만 높이고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여 드리려는 신앙으로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리었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나 바칠 수 있고 무엇이나 감수할 수 있고 무엇이나 다 실천 실행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3. 영원히 기념할 믿음의 본질
여기 무명의 여성도가 예수님에게 자기의 가장 값진 향유를 부어드릴 수 있었던 그 믿음의 본질적 뿌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은 자기 소유 중 제일 귀하다는 신앙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 무명의 여성도가 자기 소유 중에는 "나드"향유가 제일 귀한 보배일지도 모릅니다. 그 가치는 300데나리온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기 소유 중 제아무리 귀한 보배일지라도 예수님만큼 귀하지 아니하다는 신앙으로 그것을 깨어 예수님에게 부어 드리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제일 귀하게 여긴 신앙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 무명의 여성도가 그 값진 향유의 용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나머지 예수님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제일 귀중히 여겨 이를 깨뜨려 예수님에게 부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나 예수님을 사용하는 것 이상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제일 귀하게 여긴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많은 일 중에 예수님의 구속 사업, 오늘 교회가 전개해 나아가는 선교 사업이나 구령 사업 이상 더 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아낌없이 바쳐 드리었습니다.
결론
이 무명 여성도의 신앙은 기념할 만한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사람은
(1)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주님만 위해 살아갑니다.
(3)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주님께만 영광 돌립니다.
박 해
성 경 활 용
1. 박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인간의 죄의 본성으로
(갈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이제도 그러하도다
(2)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요16:2-3)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3) 십자가를 전하므로
(갈5:11)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4) 하나님을 위한 생활을 하므로
(마13: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5) 잘못된 열심으로
(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2. 박해하는 방법
(1) 파쇄하며 곤고케 한다.
(시94:5)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2)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간다.
(약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3) 서로 잡아 준다.
(마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4) 조롱한다.
(시119:51)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 하였나이다
(5) 비방한다.
(시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6) 욕한다.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7) 출회를 당한다.
(요12:42)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8) 미워한다.
(요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9) 위협한다.
(행4:17) 이것이 인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10) 채찍질한다.
(행5: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11) 결박한다.
(행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2) 죽인다.
(눅21: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3. 박해당하는 성도가 취할 태도
(1)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
(벧전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3) 오래 참을 것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4)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피할 것
(마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4. 박해자에 대한 성도의 태도
(1) 기도해 줄 것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정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 축복해 줄 것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관련원어풀이
1. hn:[; 아-나
(1) 억압하다, 눌리다, 고통을 주다, 괴롭히다.
(창15, 13, 출1:11, 민24:24, 신26:6, 삿16:19, 왕상11:39, 시35:13, 사58:3,5)
(2) 괴로움을 당하다.
(레23:29, 사58:10)
(3) 억눌림을 받다, 고통을 받다.
(창29:32)
2. rr'x; 차-라르
(1) 누르다, 억압하다, 핍박하다, 적대하는 태도로 대하다.
(시129:1,2)
(2) 누르다, 고통을 주다, 괴롭히다.
(렘10:18)
(3) 고통, 괴로움, 핍박, 박해.
(욥7:11)
3. qWx 추-크
억누르다, 괴릅히다, 고생시키다, 박해하다.
(사29:2)
4. diwvkw 디오-코-
(1) 도망가게 하다, 내몰다.
(마23:34)
(2)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붙잡으려고 빨리 달려가다, 뒤쫓다, 밀려들다.
(행26:11, 계12:13)
(3) 괴롭히다, 방해하다, 박해하다.
(마5:10, 갈1:13)
(4) 학대받다, 어떤 일 때문에 정박을 당하다
(갈6:12)
(5) 쫓아가다, 뒤쫓다.
(눅17:23)
(6) 열심히 추구하다, 애타게 갈망하다.
(롬9:30, 히24:14)
5. diwvkth" 디오크테스
핍박자, 박해자.
(딤전1:13)
설교예화자료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
보너 주교 앞에서 이단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버나드 길핀이 재판을 받기 위해 런던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격언은 '모든 것이 최선을 위한 것이다. '였습니다. 여행 중에 길핀의 다리가 부러졌는데, 어떤 사람이 경멸하는 투로 농담을 건넸습니다. "이것도 최선을 위한 것입니까? ", "나는 아직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곧 증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다시 그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매리 여왕이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화형을 당하러 런던에 가는 대신 의기 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인도의 영웅 간디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외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불 속으로 뛰어든다면, 몇 사람이 반드시 나와 같이 행동할 것이다. "
남보다 앞장서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희생의 은총입니다.
우리들도 자신이 먼저 희생적인 각오를 가지고 십자가를 질 때에 모든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후지네츠의 순교
1415년 교황은 요하네스 후스 폰 후지네츠를 무신론자적 행위에 순교의 이단자로 인정하고 재판에 붙여 피를 흘리지 않는 사형, 즉 화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형장은 시의 성곽 밖 레인 가까이의 정원 사이에 있었습니다. 형장에 끌려나왔을 때 후스 폰 후지네츠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형 집행자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도록 명령했을 때 후스 폰 후지네츠는 똑바로 일어 서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무섭고 수치스런 죽음을 나는 당신의 전도를 위해서 견딥니다. "사형 집행자들은 후스 폰 후지네츠를 발가벗겨 두 손을 뒤의 말뚝에 비끄러 메었습니다. 후스 폰 후지네츠의 두 발은 걸상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의 둘레에 장작과 짚단이 쌓였습니다. 장작더미는 후스 폰 후지네츠의 턱까지 닿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수 폰 포펜게임이 후스 폰 후지네츠에게 사교를 버림으로써 목숨을 건지도록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아니다. " 하고 후스 폰 후지네츠는 말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죄가 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 사형 집행인들은 장작터미에 불을 질렀습니다.
후스 폰 후지네츠는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화염이 바 람을 타고 높이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후스 폰 후지네츠는 얼마 뒤 잠잠해졌습니다.
오직 예수
1555년 7월 1일, 존 브래드포드는 화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에 속한 예배당 목사였고, 당시대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가 뉴게이트 화형 장으로 갈 때 그에게 말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서런던에서 뉴게이트에 이르는, 죽음을 향해 가는 도상에서도 그는 외쳤습니다. "예수, 예수, 오직 예수."
카타콤
기독교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교회에 있는 약 600마일의 두더지 굴같은 지하동굴에 피신해서 살았습니다.
약 300년의 박해 기간 동안, 10세대의 크리스찬들이 카타콤에 묻혔습니다. 아무도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고고학자들은 175만 내지 400만 명의 크리스찬들이 그 어두운 굴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카타콤의 벽에 가장 흔하게 새겨진 것은 물고기 기호이며, 또한 수많은 성경 말씀도 새겨져 있는데, 그 중 그들의 믿음을 가장 잘나타낸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이지 아니하시리라."
어록·시·묘사
시간은 오늘날 피압박자의 편에 있다. 시간은 압박자를 반대한다. 진실은 오늘날 피압박자측에 있다. 진실은 압박하는 자를 반대한다. 그 밖에 어느 것도 필요치 않다.
(맬컴 엑스/ 맬컴 엑스는 말한다)
너희가 우리를 베어버릴수록 우리는 더욱더 잘 자란다. 그 씨는 기독교인의 피다.
(테르툴리아누스/ 금언집)
박해는, 박해받는 자를 명예 속으로 끌어들이고 천당으로 밀어 올린다.
(W. 쿠퍼/ 과업)
이 세상 풍습은 죽은 성인은 찬양하고,살아있는 성인은 박해한다.
(N. 하우/ 설교)
종교적 박해는 종교를 심는 서투르고 똑바르지 않은 방법이다.
(T. 브라운 경/ 의사의 종교)
폭풍은, 참나무가 뿌리를 더욱 깊게 박도록 한다.
(G. 허버트/ 명궁)
지혜가 악인을 짓누르는 것을 제외한 모든 압박은 죄악이다.
(W. 쿠퍼/ 과업)
세상은 강압이나, 경찰관의 곤봉으로 더 나아지지 않는다.
(W. J. 게이너/ 서간과 연설집)
강압당할 수 있는 자는 죽는 방법을 모른다.
(세네카/ 분노한 헤르쿨레스)
한 도시, 로마를 송두리째 불태우고/ 미친 야수떼의 혓바닥 같은 불길을/ 까닭없는 그 리스도인들의 피로 적신/ 통곡과 탄식, 공포와 질곡, 저주와 증오의 초토 위에/ 또 다시 위선의 황금성을 쌓은 네로여
(박찬중/ 페트로니우스의 편지)
피압박자의 가장 큰 위안은, 아마 그들 자신이 그들의 폭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J. 그린/ 에드린 메서러트)
아아 거 기서부터도 그 예언자의 깨끗한 피가 흘러 내리고/ 기울어진 하늘에는 거룩한 향유와 더불어 뿜어 나오는 티없는 피의 환상
(이찌미루 아키다/ 밤의 노래)
"만일 우리가 가난한 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만일 우리가 부자들의 부와 권력자들의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온갖 거짓된 행복들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철저한 마음의 가난을 실천에 옮긴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면,/ 만일 우리가 차별을 두지 않고 자비를 행하고/ 끝없이 용서와 화해를 추구한다면,/ 만일 우리가 자신의 안팎에 있는/ 우상들과 투쟁을 한다면,/ 만일 우리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마태오와 루가의 다른 모든 요구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 그 대가란 박해, 각종 박해이며,/ 인간들과 불의하고 죄많은 인간 사회의 이권에) 대항하여 나름대로 투신하고 몸바쳐야 하는/ 예수의 제자로서는/ 마땅히 그것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S. 갈릴레아/ 진복선언)
진리의 길 위에 서 있다면 박해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고 억압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소크라테스는 독이 든 잔을 마실 때도 웃음을 띠었고, 스테파노는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리는 양심을 부정하고 배신할 때 진실로 죽음을 맞이한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설 교 노 트
성숙한 신자상
마27:57-61
서론
성숙한 신자상을 본문에서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동생들을 비롯하여 사랑하는 제자들과, 환영하고 따르던 많는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는 시대에도,아리마대 요셉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빌라도에게 고백하고 ②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해다가 자기의 새 무덤에 안장할 수 있었던 훌륭한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그의 신분에 대하여 밝히기를 그는 부자요, 착한 사람이요, 의인이요, 공의회 의원이요, 예수님의 제자요,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분과 지위에 있으면서도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주목할만 합니다.
1. 박해 시대에서 예수의 제자임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본문 57절에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요셉이라 하는 사람의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가 예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 "아리마대 요셉 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믿음이 유치하고 비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이 이제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그 무서운 환난과 박해 시대에 대적들과 원수 앞에서 증거한 것은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감수하고, 죽음을 각오한 순교적 성숙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2. 박해 시대에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해 온 신앙입니다.
본문 58절에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해 왔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체는 반역자로 몰리어 죽은 시체이고 십자가에서 가시관을 쓰고 손과 발에 못을 박히고 허리를 창에 상하게 피투성이가 되어진 시체입니다. 이는 아무나 인수해 올 수 없는 시체입니다. 예수님와 봉사는 아무나 인수해 올 수 없는 시체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무리들에게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그 수고와 봉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숙한 믿음으로 이 귀한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성숙한 신앙은
(1)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 믿음이요
(2)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인식한 믿음이요
(3) 모든 사람이 할 수 없는 봉사를 감수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3. 박해 시대에서 예수님께 자기 새 무덤을 제공한 신앙입니다.
본문 60절에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대한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사건입니다. 사53:9에"예수님의 시체가 부자의 무덤에 장사되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런고로 성숙한 신자는
(1)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신앙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기분이나 내 유익을 위해서 내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위해서 어떠한 고난과 희생이라도 감수하는 신앙입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와 봉사에 결단코 인색하지를 아니하고 남이 꺼려하고 포기하는 그 봉사를 감수해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3) 자기 중심이나 세상 중심에서 살지 아니하고, 주님 중심, 천국 중심에서 사는 신앙입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 행위는, 너무나 고상하고 위대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당시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리고 물러가는 그 무시무시한 환난과 박해의 시대에도 아리마대 요셉은, 암야의 기라성처럼 나타나, 예수님을 위하여 너무나 멋있는 생활을 하였고 봉사를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같이 본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결론
신약 시대에 위대한 신앙인으로서의 성숙한 신자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발휘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환난 시대에
(1) 예수님의 신자 노릇 바로 하고
(2) 예수님을 바로 봉사하고
(3)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성숙한 신자되시길 바랍니다.
간역자들의 독촉함
출5:13
서론
본장 중에는 간역자들과 패장들이란 이름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받고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같이 강제 노동을 시키는 감독자와 십장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어떠한 명령을 받았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 노동을 시킨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모세의 청원은 혹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광야에 보내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고 하니 가기를 허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함을 보고 이미 강제로 노동을 시키고 있었는데 모세의 말을 들은 후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더욱 곧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벽돌구이 공사를 중단시키고 지연시키려는 음모라고 단정하여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더욱 지독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 명령은 "이제는 재료를 제공하지 않으니 스스로 재료를 장만하여 벽돌을 만들라"고 하는 무리한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재료를 다 주면서 만들라고 했으나 모세의 청원으로 인하여 이제는 재료도 주지 않고 그 전에 만들던 만큼의 벽돌을 만들라는 것이니 참으로 큰 혹사였던 것입니다.
2. 가중되는 책임적인 강제 노동
지금까기는 벽돌 소용의 짚을 주었는데 이제는 그들 스스로 주어다가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벽돌의 수효는 여지껏 만든 것과 똑같은 수효대로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온 땅에 흩어져 곡초 구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하였습니다. 간역자들은 계속 이스라엘 백성을 독촉하여 짚이 있을 때와 같이 당일의 일은 당일에 마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소위 책임량을 책임진 시간 내에 완수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패장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일을 감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성난 반발을 더욱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돌이켜 모세를 원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3. 사명 길에는 고생과 장애가 따릅니다.
모세는 백성을 구하려고 하였는데 오히려 백성을 고생만 더 하게 만든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일찍이 네 번이나 거절하였으나 종내 사양하지 못하여 겨우 사명 길에 나선 모세에게 이스라엘 패장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원망하여 책임을 모세에게 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잘하려고 앞장서는 사명자에게는 박해가 따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박해를 참고 견딜줄 알아야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보게 되며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고 그 책임을 다 지라고 하였을 때 다른 변명을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돌아와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만이 의혹과 실망의 구름과 안개를 제해버리고 사면초가 중에서도 하늘의 광명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 응답을 6장 1절에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이 계획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한때는 모세를 원망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결과를 보아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박해함
눅22:1
서론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꼬 연구하니 이는 저희가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를 박해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만은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1.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의무
대제사장은 모든 제사장들의 대표자로서 종교적 최고 지도자입니다. 그는 사두개인 중에 선출하였고, 유대 나라 국회격인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는 제사의 최고 책임자이며, 가장 성스러운 직분의 소유자입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베끼고 연구하는 학자들로서 바리새인에 속합니다. 이들이 공회의 두 정당이었습니다. 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반대되는 정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일 방책을 연구하는 데는 서로 일치하는 보조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제사를 관장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거룩한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네 본연의 임무는 망각하고 오히려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리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바로 연구하지 못하고, 바로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죽이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2. 저들의 연구 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대제사장이 연구를 한다면 제사를 드리는 제물에 대하여서나 제사드리는 방식이나 제사장들의 마음 자세, 제사를 바라는 국민들의 회개운동 등 마땅히 해야 할 연구 과제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다 제쳐놓고 예수를 무슨 방책으로 죽일까만 연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서기관들도 성경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여 많은 국민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순종하여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선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다 그만두고 무슨 할 일이 없어서 예수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만 연구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저들도 백성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1장 37-38절에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많은 국민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예수님을 좋아했고 열심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좀처럼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였습니다. 유대 교권자들은 권력과 음모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연구하고 있는 반면에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한 번이라도 더 듣기 위해서 가사를 제쳐놓고, 사업을 전폐하고 찾아다니며 따랐던 것입니다.
결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만 한 조건이 있습니까? 죽여야 할 명분이 섭니까?
예수님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미 각오하였으나 죽이려고 연구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박해를 받아도 당당하게 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당하는 핍박
딤후3:12
서론
그리스도 예수께서 기꺼이 종의 형상을 입으시고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게 될 온갖 고난과 핍박에 대해 미리 경고해 주셨습니다.
1.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이요, 거듭난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하나이듯 산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역동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어린 양이 인도하는 대로 따릅니다.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알며 그에 순종합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면서 날마다 그와 동행합니다.
2. 경건한 자들이 받을 핍박의 종류
(1) 마음속에서 하는 핍박
바리새인들은 우리 주님을 체포하기 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고 핍박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로부터 미움받을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마음속의 증오는 다른 모든 종류의 핍박의 근원이 되며 그 정도는 저마다 다르더라도 회심치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증오를 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특정한 형태의 핍박을 가하지 않았다 해도 이미 핍박을 가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2) 말을 통한 핍박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독한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보실 때 악한 말은 고도의 핍박인 것입니다.
(3) 행동을 통한 핍박
악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주위 동료로부터 고립시키기도 하고, 교회에서 비난을 사도록 하며, 대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위협하거나 금지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간섭하거나, 법정으로 소환하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가하거나,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3. 핍박을 받게 되는 이유
(1) 주님께서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의를 위하여 핍박받지 않는다면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을 아셨으며, 또한 우리가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어떤 결과가 닥칠 것인지도 아셨기에 미리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2) 주님예서 그것을 체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 계셨던 하나님의아들보다 더 악독한 핍박을 받은 사람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를 철저히 증오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았고, 회당에서 축출당했으며, 백성들을 기만하는 자로 낙인 찍혔고, 가이사에게 반기를 든 사람으로 몰렸으며, 침뱉음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3) 죄인들은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을 닮은 사람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들은 회심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들과 정반대의 행위로 자신들의 삶이 악함을 드러내주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품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을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합니다.
(4) 성도에게는 핍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에 얽매인다면 우리는 오직 위로부터 내려오는 영광만을 구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핍박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보존할 수도 없고, 그 많은 기독교 교리들을 실천할 수도 없으며, 선으로 악을 이길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생명보다 더 사랑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결론
사람마다 핍박을 받은 정도는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은 공적인 면에서나 사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의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핍박만 받는다고 해서 참된 기독교인인 것은 아님니다. 왜냐하면 종종 많은 사람들은 의를 위해서가 아닌 그외의 이유로 고통을 받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경건하게 살고자 해서 핍박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본문 말씀을 경종으로 삼아 마음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사람의 복
마5:10-12
서론
이 축복의 말씀은 영적 차원에서 신앙의 최고의 봉우리인 동시에 축복의 최고 봉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마지막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신앙의 최고의 수준에 올라간 사람이요, 주 안에서 자기를 완성한 사람이요, 온전한 신자로서의 자격을 구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령 신앙의 수준이 낮거나 자신의 신앙의 인격이 미완성 상태에 있거나 온전한 신자로서의 자격을 구비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의를 위해서 핍박을 감수하는 사람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상급과 영광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1. 의를 위해 핍박받는 의미
이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로운 사람이 그 의 때문에 정박을 받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또 의로운 사람이 그 의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의미라고 하며, 그 의를 주장하면서 불의를 지적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의미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독 신자가 세상에서 핍박받는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1) 이 세상은 불의하여 예수님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신자는 자연히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이 세상에서 택함을 받아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핍박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3) 이 세상을 부정하고 하늘나라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핍박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2.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는 내용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 신자들이 핍박을 받은 내용을 보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숙청의 대상이 되었으며, 옥중에 투옥되어 악형을 당하기도 하였고, 짐승에게 찢기우고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핍박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향한 충성과 신앙의 정조를 파수하기 위해서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핍박을 어디서 받았는고 하니 먼저는 자기 가정에서 핍박을 받았고 다음은 저들의 사회적인 집단에서 핍박을 받았고 다음은 국가적으로 가혹한 핍박을 받아 많은 순교자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3. 핍박을 감수한 자의 축복
여기 핍박을 감수한 사람의 축복은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께 받을 상급과 영광이 크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보상 때문에 핍박을 감수하기보다는 주님이 날 위해서 핍박을 받았으니 나도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아야 하고, 주님이 핍박을 받으면서 따라 오라고 했으니 핍박을 받아야 하고, 주님 앞에 훗날 부끄럽지 않게 서야 되겠으니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핍박을 받은 사람에게 약속한 축복의 내용은
(1) 우리가 장차 가야 할 세계를 바로 지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가신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2) 우리의 신분과 지위를 따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시민이 아니요, 하늘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3) 우리의 삶의 참된 소망과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장차 천국에서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결론
이 세상 환난과 핍박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정화시켜주는 방편입니다. 예수님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 의지하게 합니다. 세상줄을 끊고 천국으로 직행하게 하십니다.
반 성
성 경 활 용
1. 반성하는 이유
(1) 바른 길로 가기 인해
(시4:4)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2)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
(시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애3:40)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3) 자기의 소위를 살피기 위해
(학1:7)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 볼지니라
(4) 성만찬에 참여키 위해
(고전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5) 판단을 받지 않기 위해
(고전11: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6) 믿음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
(고후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7) 자기의 짐을 지기 위해
(갈6:4-5)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2. 어떻게 반성해야 하나?
(1)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욥13:23)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시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령하소서
(2) 예수를 좇으므로
(요3:21)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하시니라
(3)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함으로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3. 자기를 반성한 자들
(1) 욥
(욥13:23)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2) 다윗
(시19: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139: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관련원어풀이
1. hk;n: 나-카-
꿰뚫다, 관통하다
(삼하24:10)
2. auvnoijda 쉬노이다
의식하다, 깨닫다
(고전4:4)
설교예화자료
"어머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
1차 대전 중 어느 영국 가정의 미망인 어머니에 관한 것입니다. 그녀의 외아들이 플랑드르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다섯 아들을 가진 그녀의 이웃은 화를 면한 반면,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비통함은 더욱 컸습니다. 그녀는 계속하여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진정할 줄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10분간 보게 해주겠소. 어느 시기에 그가 돌아오기를 원하오? 당신의 가슴 위에서 정답게 칭얼대는 아기로서, 주먹이 통통하고, 당신의 발치에서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는 걸음마하는 아기로, 혹은 학교를 시작하는 어린이나 학교를 막 끝낸 청년으로, 혹은 빛나는 구리 단추가 달린 용감스런 새 제복을 입고 격전지로 떠나는 설은 군인으로? 어느 때를 원하시오? "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원하지만 그런 경우들은 아닙니다. 한 번은 내가 아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아들이 졸라도 완고하게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적이 있는데, 그때의 아들이 돌아왔으면 합니다. 아들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엄마가 미워, 엄마가 이제는 싫어, 엄마랑 같이 안있을래.' 그리고는 정원으로 나가버렸습니다. 화가 가라앉자, 그는 때묻고 눈물로 얼룩진,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작은 손을 내밀며 떨리는 입술로 말하였습니다. '엄마, 미안해요. 내가 나빴어요, 더이상 말썽부리지 않을께요. 엄마를 사랑해요. 다시 한 번 안아주세요.' 이 때의 아들을 내게로 돌려주세요. 그래서 흐느껴우는 동안 나에게 꼭 안겨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세요. 그때가 가장 사랑스러웠을 때입니다. "
철거 작업대
나는 도심지에서 일꾼들이 빌딩을 헐어 내리는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자, 당겨! 영차!" 하는 외침에 맞춰 그들은 기둥을 흔들었고, 곧 한쪽 벽이 무너졌습니다. 나는 거기서 있는 철거대 감독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집을 짓는다면, 저 사람들은 당신에게 고용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능숙한가요? "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자들뿐입니다. "라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또 "능숙한 숙련공이 1년이 걸려야 지을 수 있는 건물을 우리는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히 허물 수 있습니다 "라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과연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이 두 역할 중 어떤 것에 해당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나는 나의 인생을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며, 나의 모든 행동에 대해서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해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방황하며 철거대의 노동자들이 하는 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어록·시·묘사
각 개인은, 타인 속에 자기를 비추는 거울을 갖고 있다.
(A. 쇼펜하워/ 행복을 위한 금언)
과실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과실을 회개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말라
(J. J. 루소)
거울로써 모양을 비추는 셈이고, 옛일로써 지금을 아는 셈이다.
(삼국지)
자기를 반성하는 이는 닥치는 일마다 이로운 약석(藥石)을 이루거니와 남을 허물하는 이는 생각을 움직일 때마다 스스로를 해하는 창과 칼이 된다. 앞의 것은 선행의 길을 열고 뒤의 것은 악사(惡事)의 관원이 되나니 이 두 가지 사이가 하늘과 땅 사이다.
(채근담)
자기 반성을 엄중히 하고 다른 사람 책함을 경하게 하면 남의 원망이 멀어진다.
(논어)
반성하는 자는 새로운 각오가 있는 것이요, 자책하는 자는 향상의 노력이 있는 것이다.
(한용운/ 님께서 침묵하지 아니하시면)
사람들에게 항상 잘못을 인정시키지는 않더라도 잘못을 후회하도록은 만들어야 한다.
(F. 라 로슈푸코/ 두드빌 회상록)
당신이 만약 불행하거나 또는 불행의 의식이 있다면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당신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의 도덕관이나 윤리관이 어떠한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그날그날의 생활습관이 어떠한 것인가 살펴보라! 아마도 틀림없이 불행의 중요한 원인이 그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B.A.W. 러셀)
많은 사람들은 잘못을 피하기보다는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미덕이라 한다.
(G. C. 리히텐베르크)
도의에서 벗어나는 것과, 학문을 게을리하는 것과, 정 의를 듣고도 실행 치 못하는 것과, 착하지 아니함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항시 내 두려워하는 것이다.
(논어)
사람을 사랑하되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거든 나의 사랑에 부족함이 없는가를 살펴보라. 사람을 다스리되 그가 다스림을 받지 않거든 나의 교도에 잘못이 없는가를 살펴보라. 사람을 존경하여 보답이 없거든 나의 존경에 모자람이 없는가를 살펴보라. 행하여 얻음이 없으면, 모든 것에 대한 나 자신을 반성하라. 내가 올바를진대 천하는 모두 나에게 돌아온다.
(맹자)
다툼과 반성은 형제 자매지간이다.
(세르비아 속담)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싸움을 시작한 자만이 가치있는 인간이다.
(E. B. 브라우닝)
남의 잘못을 보지 말고, 행하고 행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지 말고, 오직 항상 자기를 돌보아 법도에 맞나 안 맞나를 살펴보라.
(法句經)
우리는 매일매일 수염을 깎아야 하듯, 그 마음도 매일 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번 소재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방 안이 깨끗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도 한 번 반성하고 좋은 뜻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늘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제 가진 뜻을 오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를 떠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어제의 좋은 뜻은 마음 속에 새기며 되씹어야 한다.
(M. 루터)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은 3개조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 첫째로 타인을 위하여 일을 보아주었을 때 진심을 가지고 대했는가, 둘째로 친구와 교제했을 때 불신의 언행을 하지않았는가, 셋째로 선생(공자)으로부터 배운 것을 잘 배워서 익혔는가.
(증자)
당신이 훌륭한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훌륭한 사람의 덕을 자기 자신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해 보라. 그리고 나쁜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 나쁜 사람이 지은 죄가 자기에게도 있지 않은가 돌아보라.
(M. 세르반테스)
언제나 깊이 반성하면 할수록 새로운 감탄과 승경의 염으로써 마음을 가득 차게 하는 것이 둘 있으니, 하나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이요, 또 하나는 나의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I. 칸트/ 실천이성비판)
전쟁이 머물고/ 평온한 지평에서/ 모두의 단편적인 기억이/ 비둘기의 날개처럼 솟아나는 틈을 타서/ 우리는 내성(內省)과 회한에의 여행을 떠났다.
(박인환/ 세 사람의 가족)
눈부신 하늘 있어/ 찬 이슬 취에 핀 들국화마냥/ 내 마음 나날이 여위어 향그럽나니/ 아, 뉘우침 없는 슬픔이여‥‥‥
(이인석/ 사랑)
밤마다 네 하루를 검토하라./ 그것이 하느님 뜻에 합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를/ 행위와 성실이란 점에서 기뻐했을 만한 일이었는지 어떤지를/ 불안과 회한에 의한 기력없는 짓이 었는지 아닌지를 / 네 사랑하는 자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라./ 증오와 부정을 조용히 고백하라./ 모든 악한 것을 중심에서 부끄러워하고/어떤 그림자도 침상에 가져 가는 일 없이/ 모든 근심을 마음에서 제거해 버리고/영혼이 오래 안연하도륵 하라.
(H. 헤세/ 밤마다)
당신이 계실 때에 알뜰한 사랑을 못하였습니다. / 사랑보다 믿음이 많고 즐거움보다 조심이 더하였습니다. / 게다가 나의 성격이 냉담하고, 더구나 가난에 쫓겨서 병들어 누운 당신에게 도리어 소활(疎闊)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당신이 가신 뒤에 떠난 관심보다 뉘우치는 눈물이 많습니다.
(한용운/ 후회)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이 한 목숨으로/ 가는 길‥‥//내 마음이/ 사정없이 먼저 달려간 길‥‥/ 내 뼈아픈 회한과 과오의 나날들이/ 드문드문 소통처럼 있는 길‥‥‥‥‥
(장석주/ 길 · 2)
두려움과 뉘우침을 잃지 않도록/ 나의 이마 위에 항상/ 싸늘하고 엄한 그 빛을 던져주십 시오
(김춘수/ 별)
그 분이 돌아가실 때/ 외로웠다고 한다. / 그 며칠 전에라도/ 찾아뵈어야 하는 것을/슬쩍 빼먹었다. /그것이 마음에 걸려/ 괴로울 때가 많다. / 그러나 그분은/ 늘 너그러운 모습으로 용서만 하시니/ 나는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갈 데가 없는 것이다.
(김규동/ 참회)
지금 골목과 골목들은/ 깊은 회한에 잠기고,/눈들은,신앙을 위하여 다시 한 번 아름답고 고요하게 실명되어 간다/ 산에서 진다는 하아얀 장미의 얼굴과 같이‥‥‥
(김현승/ 밤안개 속에서)
설 교 노 트
중책을 맡은 사람
삼상26:1-12
서론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나라에 제 1차로 중책을 맡았던 사람은 사울 왕과 아브넬 장군이고 제 2차로 중책을 맡은 사람은 다윗 왕과 아비새 장군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위와 같은 중책을 맡아가지고 대관절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살펴봅시다. 사람이란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하고 또한 훗날의 역사가들의 심판은 물론 하나님의 심판도 받아야 합니다. 예컨데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나온 일 년 동안도 여러 가지 직책을 맡겨 일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는가 그 여부에 관해서도 반성해 보아야겠습니다.
1. 먼저 사울 왕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울 왕은 그 누구보다도 중책을 맡은 사람입니다.
(1) 중책의 내용:이스라엘 나라의 제 1대 임금이 되었다는 점 온 국민이 갈망하고 기대하는 임금이 되었다는 점 특별히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임금의 책임이란 매우 무거운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 · 재산을 보호하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국가 민족을 공정히 다스려 번영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2) 중책을 맡고 무엇을 하였습니까? 그는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00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피는 들판에서 잠자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성실한 국민이요, 충성스러운 신하 다원을 죽이려고 한 것은 권력 남용입니다. 군력의 낭비입니다. 시간과 물질의 낭비입니다. 동시에 사울의 실정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 택하여 왕되게 하시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2. 아브넬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브넬 장군은 그 당시 임금의 호위는 물론 군대 총사령관이었습니다.
(1) 아브넬 장군의 중책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국방장관으로 국방의 총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군대를 통솔 ·지휘할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임금의 생명과 몸은 물론 국민의 생명 ·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중책을 지고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2) 아브넬 장군의 불충을 살펴보면 경비 상태가 엉망이었습니다. 온 군대와 함께 잠들어 있었습니다. 자기 안일에만 도취돼 있었습니다.
(3) 임금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과 물병을 적군이 가져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불충하였을까요? 자기 책임의 중대성을 망각하면서도 또 공적 중책보다 자기 개인의 안일을 도모함에서이고 필요없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기우리고 피곤해서 잠을 자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찬들에게 파수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진리가 무방비 상태에서 창과 병을 적의 손에 약탈당하지나 아니했는가 살펴봅시다. 우리 신앙이 잠들어 있고 방종되어 있고 피곤한 나머지 쓰러져 있지나 아니합니까? 우리는 잠자고 안일을 도로하여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고 피곤해지지나 아니 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결론
우리는 사울과 아브넬과 같이 중책을 맡고 불충한 자가 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돌아보아반성하여 다윗과 아비새 같이 중책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회고와 전망
전7:11-14
서론
인생의 회고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보면, "인생이 지나온 일을 돌아본다"는 뜻과 "인생이 지내온 삶을 반성하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또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가를 돌아보면서 반성해 보자는 말입니다.
1. 나의 삶에 대해서 회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죄악과 죽음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고해 같은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이 어떻게보존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생명보존에 대해서 회고해 봅시다.
본문 12절에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는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보존의 방편은 돈과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신학자들은 전자는 육체의 생명보존의 방편이 되고, 후자는 영적 생명보존의 방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빵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므로 우리 생명보존의 방편의 순서와 가치관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2) 생활 양식을 회고해 봅시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습니까? 물질 위주로 이 세상을 위해 살았습니까? 예수 중심으로 하늘나라의 것을 위주로 살았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돈이냐? 예수냐? 하는 기로에 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먼저 예수를 중심으로 살고 그 다음에 정당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을 반성해 보고 올바른 좌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앞으로의 남은 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사업에 관하여 회고하여 보아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두 가지 사업에 착수하고 있는데 하나는 육신을 위한 세상 사업이고, 다음은영혼을 위한 영적 하늘나라의 사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업들은 어떻게 영위되었습니까? 그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는 성공이요, 다음은 실패라고 하겠습니다. 본문 13-14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1) 먼저 나에게 형통을 주신 일에 대해 회고해 보십시다. 이 형통이란 성경 학자들의 말에의하면 1 성공한 날이고, 2 평안한 날이요, 3 영광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지난 날에 형통하게 하신 하나님에게 진정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나의 욕심 때문이고 교만때문이요 배은하는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욕심도 교만도 배은의 요소도 제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되십시다.
(2) 곤고한 날에 대하여 회고하여 오십시다. 이 곤고한 날이란 실패의 날이고, 재난의
날이요 불행의 날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곤고한 날을 맞이하면 탄식하고 원망하고 낙심하기가 쉬우나 이런 때는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연단을 가져오고 신앙생활의 정화를 가져오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위로와 축복을 받게 하는 방편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나의 생활과 사업의 형통과 곤고를 체험해 왔다고 하면 이 모두 신앙의 범주 속에서 바로 해결하고 하나님께 전체 삶을 맡기고 예수 중심에서 새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신앙 중심에서 새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고요한 반성
시 6:1-10
서론
여기 시편 제 6편은 다윗의 시라고 밝히었고,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현악 스미닛은 낮은 음성이라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본시의 내용을 깊이 읽어보면 다윗 왕은 환자 중에 자신을 깊이 반성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본문 6절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눈물이 다윗의 반성과 회개의 눈물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이성을 가진 실존으로써 항상 자신을 반성할 줄 알아야 된다고 합니다. 반성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자기 자신을 전하게 하고 ③ 자기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비결이라고 하였습니다.
1. 반성의 개념과 의미
이 반성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과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자신에 대한 정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검사가 피고인을 조사하고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자신의 죄와 병을 알아보는 행위라고 합니다.
(2) 자신에 대한 정리라고도 합니다. 이는 목수가 재목을 다듬고, 차 정비사가 차를 정비하듯이 자신의 불안전하고, 고장난 부분을 갈아치우는 행위라고 합니다.
(3) 나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라고 합니다. 나 자신을 바로 찾아내는 행위가 반성이라고 합니다. 여기 다윗 왕과 같이 우리는 깊이 반성하여 나 자신을 바로 조사하고 정리하여 잃어버린 나 자신을 재발견해야 겠습니다.
2. 반성의 척도
무엇에 기준하여 나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지 그 척도와 방편이 무엇인지를 잠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선지자의 교훈과 경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의 교훈과 경고를 듣고 반성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통해서 반성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반성의 기준과 척도입니다.
(3) 환난과 역경을 통해서 반성한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을 통해서 깊이 반성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전도자들의 교훈과 성경과 환난을 통해서 반성하십시다.
3. 반성의 시기
여기 다윗이 반성한 시기는 밤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밤은 반성의 시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밤은 매일 맞이하는 자연계의 밤을 의미합니다마는 영적인 차원에서 반성할 수 있는 인생의 밤은
(1) 고난과 역경의 밤이라고 합니다. 뜻하지 아니했던 기환질고가 일어나고 사업상 실패로 말미암아, 고독과 가난이 엄습해 오는 환난의 밤을 맞이할 때 반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2) 질병의 밤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인생이 건강을 상실하고 병원 침상에서 신음할 때 이는 반성의 시기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합니다.
(3) 노쇠와 죽음의 밤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인생이란 나이 많아 늙어지고 인생의 모든 낙을 다 잃어버리고, 죽음의 밤을 하루하루 가까이 찾아올 때 깊이 반성하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다윗은 이러한 시기에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인생의 밤을 맞이한 이들이 계십니까? 이는 반성의 시기인 줄로 아시고 깊이 반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인생의 반성의 결과는 첫째,자신을 새사람 되게 하고, 둘째, 자신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셋째,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길이라고 하지마는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여 기 다윗의 경우는
(1)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회복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고
(2) 원수들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고
(3) 환난과 사망의 평지에서라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깊이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자아 성찰
시139:23-24
서론
시편 기자는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자신을 살피고 시험하사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지 보시고 자리를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 자아 성찰의 내용
(1) 자신이 죄의 상태에 있지 않은가 살펴봐야 합니다.
인간은 죄의 권세와 지배 아래 태어나 죄에 팔리운 바 되었기 때문에 거듭나지 못한 모든사람들은 죄악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거듭난 후 죄가 얼마나 소멸되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처한 영적 상태를 정확히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2)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지 않나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정욕적인 것을 구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소홀히 하고 있지 않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생활해야 합니다. 행할 바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과 행동원리로 태만하게 죄에 이끌린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그로 인하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저지르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를 항상 자문해 봐야 합니다.
2. 자아 성찰을 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께서 그것을 분명하게 요구하십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내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며 믿음과 순종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죄의 요소로 가득 차 있어 너무 쉽게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지못하는 사이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죄가 우리 마음속에 침투해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죄의 유혹을 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즉, 유혹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활한 대적인 사단이 우리를 미혹시키려고 온갖 간계와 술책을 동원하여 항상 기회를 살피고 있는 것입니다(고후11:2-3, 벧전5:8).
우리가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는 이유는 어둡고 속이는 죄의 속성 때문이며, 사단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성도를 미혹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습관으로 죄에 대한 지각(知覺)을 잃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인간은습관적으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집니다. 나쁜 습관은 사람의 마음을 미혹시켜 죄를 짓게하며 결국 지대한 해를 끼치게 합니다.
또한 타인의 모습을 본받아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남들의 죄된 행동을 아무 평가와 의심없이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분별없는 모습에 심한 문책을 던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멀리하고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됨을 알면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게으름을 피웁니다.
결 론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범하였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 자기를 살피고 돌아보아서 어떠한 모양의 죄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아 반성
갈6:1-5
서론
사도 바울은 본문 4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실존으로써 자기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때 부끄럽지 아니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1. 자기 반성의 의의
자기 반성이란 자기 일을 살피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심사하듯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심사하라는 말입니다. 혹 잘못이 없는지 또는 범죄한 일은 없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자기를 바로 심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분석해 보라는 의미가 일습니다. 어떤 주석가 말대로 제련소에서 순금을 가려내듯이 나에게서 참과 거짓을, 의와 불의를 가려내라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시험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는 말입니다.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본문 1절에서 3절에 보면 세 가지를 살피라고 했습니다.
(1) 나는 범죄한 일이 없는가 살피라고 했습니다(1절).
(2) 나의 짐, 즉 책임을 바로 감당했는가 살피라고 하였습니다(2절).
(3) 나 스스로 속이지나 아니했는가 살피라고 했습니다(3절). 나도 죄가 있으면서 없는 척 하고, 내 책임도 바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충성하는 척하고, 되지도 못하고 다 된 척한다는 모든 것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2. 자기 반성의 필요성
자기 자신을 반성할 필요는 많은 유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나 자신의 재발견을 위해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망각했거나 혹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을 향하여 너 자신을 알라고 하신 명제는 매우 유명합니다. 고로, 반성은 자기 자신을 바로 찾아가지는 유익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애가 3장 40절에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깊은 반성은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거리가 단축되는 비결입니다. 여기 인생의 안위가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3) 영생의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 반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반성이란 자기 심사를 분석 함이요, 시험함이라고 하였듯이 자기의 잘못을 찾아 뉘우치고 개선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길이 바로 사는 길이요, 영생의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란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씨앗을 심지 말고 성령의 씨앗을 심어 영생을 거두는 자가 됩시다 여기 성서는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바로 찾아 만나 은총을 입으라고 했고, 나아가서는 죽음의 길에서 도리켜 바른 삶의 길을 찾아 영생을 얻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첩경이 바로 자기 반성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결론
사람은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반성에는
(1)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반성할 기회를 바로 포착해서 반성의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2) 반성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척도입니다.
(3) 반성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게 마련입니다. 반성하는 사람은 새로워지고 축복을 받는다고하였습니다.
자기 정리
창35:1-8
서론
우리는 야곱을 말할 때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 부지런한 사람, 눈치빠른 사람, 약삭빠른 사람, 간교한 사람, 붙잡기를 좋아하는 사람 등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을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와서 장자권을 붙잡고, 축복을 붙잡고, 부인과 재물을 많이 붙잡아 금의 환향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인의 추격과 형에서와의 대면에 따른 모든 위험도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서 무사히 해결받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쌓았던 공적은 무너져 내려앉았습니다. 사랑하던 고명딸 디나가 세겜 사람에게 붙잡혀 강간을 당했고, 자식들이 세겜 백성을 무수히 죽였으므로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나그네길을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실패하여 넘어진 야곱이 자기 식구들을 불러 놓고 준비시킨 것이 있습니다.
1. 이방신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드라빔을 도적질하여 가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우상을 지니면 하나님에게 멀어지게 됩니다.
열왕기하 17장 33절에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신을 성기면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게 되며(사29:23) 탐심을(골3:5) 지녔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것으로 탐내게 됩니다(요5:44). 이제 야곱은 자기 중심으로 살았던 모든 자기 우상을 버리고 이방인의 풍습을 정리하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2.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불결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지 못하였습니다. 간교한 마음과 속임수와 불신앙으로 차 있었습니다. 그의 몸은 불결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외면하였습니다. 서원을 갚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러한 자기를 반성하고 정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기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전의 더러운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안됩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여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3.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입었던 의복은 노동복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외식의 옷입니다. 이제 그 의복을 바꾸어 입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에게 올라가기 위한 예복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결하고 깨끗한 새 사람의 옷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기를 반성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외식의 옷을 입고 있다면,정결한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는 지금 이방신을 내 몸에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도 모르게 내 중심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크게 여기는 것은 없습니까? 그러한 것이 없는지 반성하고, 있다면 그것을 과감히 버려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5:8).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 지 아니하는 사람이 주의 성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시24:3). 부지런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형통하게 됩니다(욥8:5).
세상 죄로 더러워진 의복을 지금 다 벗어서 주의 보혈로 빨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자성
고후13:1-10
서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을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제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하신 말씀은 전체 기독 신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반성하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반성해야 될 이유는 불건전한 신앙생활을 정돈하여 질서있고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고, 거만한 신앙생활을 정돈해서 겸비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이고, 인본적인 신앙생활을 정돈해서 신본주의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이제 신앙인의 자성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 내 자신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살펴보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는가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엡2:8). 이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증거는
(1)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어지는 것이고
(2)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알고 믿어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16:16 참조).
이러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세상을 이기고 주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딤후4:7-8 참조).
2. 자기 믿음의 성격을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의 성격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본질은 동일하지마는 생활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1) 인간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람은 신앙생활도 적극적으로 하지만 소극적인 사람은 그 생활이 소극적입니다.
(2) 인간의 지식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지성인들은 대개 의지적이지마는 지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대개 감정적입니다.
(3) 인간의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부요한 사람들은 열심이 적어도 가난한 사람의 신앙은 간절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공통적인 신앙의 성격은 죄를 미워하고 끊어버립니다. 육신의 것보다 영적요소를 더 귀중히 여깁니다. 이세상 일보다 천국사업을 위해서 더욱 충성합니다.
3. 나의 현재 신앙상태는 어떠한가를 살펴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1) 성경은 우리 신앙생활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자)라고 하였습니다.
(2) 성경은 우리 신앙생활을 측정할 수 있는 저울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인본적인 신앙이냐, 신본적인 신앙이냐, 세속적인 신앙이냐, 보수적인 신앙이냐, 이론적인 신앙이냐, 실천적인 신앙이냐, 바르냐, 그르냐, 반성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주님의 감시하에서 살아갑니다. 주님과 의논하고 처리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만 기쁘시게 살아갑니다.
방 탕
성 경 활 용
1. 방탕한 일의 일반적 성격
(1) 육체의 일
(갈5:19, 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나
(2) 이방인의 뜻을 쫓음
(엡4:17-19)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벧전4:3-4)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 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3) 어두움의 일
(롬13:12-13)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4)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아니함
(신21:20) 우리의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자라 하거늘
(5) 불량아들의 일
(삿9:4) 바알브릿 묘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호색하는 것
(벧후2: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2. 방탕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술을 즐기고 탐식한다.
(잠23:20-21)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취하고 탐색하는 자는 가난하여 질 것이요
(2) 게으르며 헛된 노래를 부른다.
(암6:4-7)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3)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엡4:19) 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4)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닌다.
(사3:16)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며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5) 재산을 허비한다.
(눅15:13)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더니
(6) 염치를 모른다.
(삼하6:20)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7) 마음이 둔하여 진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8) 지혜가 없다.
(잠12:11)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9) 식욕이 차지 않는다.
(전6:7)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10) 욕심을 부린다.
(민11:32) 백성이 일어나 종이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잠23:21)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 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헤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
3. 왜 방탕해 지는가?
(1) 탐욕이 가득하여
(마23:25)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 술 취했기 때문에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4. 방탕한 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1) 심판의 덫이 임한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2)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갈5:21) 시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3)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신21:20-21)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4) 몸을 드리내어 망신을 당한다.
(삼하6:20)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5) 지혜가 없다.
(잠12:11)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6) 궁핍함이 많다.
(잠28:19)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관련원어풀이
1. ll'z: 잘-랄
(1) 흔들다, 떨게 하다, 쏟아버리다, 낭비하다, 낭비하는 사람, 방탕자.
(신21:20, 잠23:20)
(2) 비열하다, 무가치하다, 사악하다.
(렘15:19, 아1:11)
(3) 저하시키다, 멸시한다.
(1:8)
2. qyre 레-크
(1) 빈, 공허한.
(삿7:16, 사29:8)
(2) 빈, 허무한.
(신32:47)
(3) 빈, 헌약한, 가난한.
(느5:13)
3. ajkrasiva 아크라시아
자제력이 없음, 무절제, 방종.
(마23:25, 고전7:5)
4. ajsevlgeia 아셀게이아
(1) 무절제, 방종, 방탕, 음탕, 방자.
(롬13:13, 갈5:19)
(2) 거만, 오만불손, 난폭한 행동.
(막7:22, 벧후2:2)
5. ajswtiva 아소-티아
방탕, 난봉, 방종, 타락.
(엡5:18, 딛1:6)
6. kraipavlh 크라이팔레-
요취, 술취함, 비틀거림, 방탕.
(눅21:34)
7. kw'mo" 코-모스
원래의 의미는 "즐거운 행렬, 환락, 술잔치" 술 마시고 흥청거림, 과도한 연락
(롬13:13, 갈5:21)
설교예화자료
꿀 묻은 파리
어떤 집 창고에 있던 꿀 항아리가 깨지자 꿀냄새를 말은 동네 파리들이 몰려들어 그 집 창고로 모였습니다.
"얘들아, 저 집에서 아주 달콤한 꿀냄새가 난다. 우리 저곳으로 가자."
잔뜩 몰려온 파리들은 모두가 바닥에 쏟아진 꿀에 앉아 맛있게 꿀을 핥아 먹었습니다.
꿀이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파리들은 떠날 줄 모르고 배가 터지도록 잔뜩 먹었습니다.
"아, 잘 먹었습니다. "
"정말 재수 좋은 날이야"
배가 부른 파리들은 다시 날아오르려고 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날개가 모두 꿀에 붙었잖아."
"나도, 발도 짝 달라붙었어."
온 몸에 꿀이 묻어 파리들은 날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 어떻게 해! 꿀에 눈이 어두워 죽게 되는 줄도 몰랐습니다. "
파리들은 몸부림 쳤지만 끝내 꿀에 묻혀 죽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알렉산더 대왕은 16세에 마케도니아의 통치자가 되었고, 18세에 전승장군이 되었으며, 2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33세 때에 술로 인해 죽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에 알려진 세계를 모두 정복하였지만 막상 그 자신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살펴보자.
알렉산더는 바벨론에서 20명을 초청해서 이틀간 대주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헤라클레스의 컵을 가져오게 했는데, 그 컵은 엄청난 양이 들어가는 거대한 컵이었습니다. 그 컵을 술로 가득 채우게 한 후, 그는 그것을 몽땅 마셔버렸습니다. 그의 친구인 프로테아스를 위해 건배하면서‥‥‥ 그런 다음 그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축배하면서 그 컵의 술을 다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바닥에 거꾸러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열병에 걸리게 되었고 며칠 후에 죽었습니다.
지옥의 향연
로크 음악 축제의 혁명주의자들이 1970년 노동절 주말에 미국 중서부의 중심지에 모여들었습니다. 2만에서 2만5천 명 가량이 캔사스 피츠버그 근처의 밀밭 평원에 왔습니다. 그들은 로크 음악 축제라고 선전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기이하고 생일날 입는 옷 같은 것을 입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축제는 결국은 음탕한 섹스와 마약 중독 환자들의 방탕한 유흥의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순진한 청년의 집단이 아니라, 차라리 사회의 최악의 분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고질적인 혁명주의자들이 있어 미국 국기가 더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불결한 주위를 걸어다니며 뒹굴고 있었습니다. 마약의 판매와 사용은 대대적인 것이었습니다. 중서부의 역사상 최대의 마리화나 파티였으며, 섹스의 향연이었습니다.
40명의 젊은이가 흉기를 감추고 다니거나, 약물과 술을 소지하거나, 취한 채 운전을 하였다 하여 체포되었습니다. 누드의 과시가 있었고,근처 시내에서 남녀가 누드로 수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공중 위생 시설도 없고, 후생 규제도 따르지 않으니 그 장소가 어떠 하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 캔사스 주지사였으며, 대통령 후보자였던 알프 랜던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를 축제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들에게 붙여줄 다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지옥의 향연' 이라고."
가정주부 창녀들
위니펙의 괜찮은 수준의 많은 창녀들은 대부분 가계 예산을 돕고 있는 도시 주변의 가정주부들이라고 한 사회학 교수가 말하였습니다. 위니펙 대학의 사회학과 과장인 윌리암 모리슨 교수는 수입을 위하여 몸을 파는 가정주부를 상대로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교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가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50명 이상의 창녀와 인터뷰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의 남편이 아내가 무얼하는지 알고 있지만, 가족을 부양할 더 많은 돈을 가져오기 때문에 모른 척 한다고 몇 사람은 말했습니다. 그 여인들과 그들의 고객은 중산층 사람들입니다. 그 가정주부 창녀들은 사실상 자기들이 사회에 붕사하고 있다고 믿는다. 캐나다에서 매춘 행위가 불법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모리슨 씨는 딸하고 있습니다. 그는 창녀에게 "과거에 낙인찍힌 것보다 더 좋은 이름"을 줄 책을 쓰고 있습니다.
어록·시·묘사
방탕이란, 아마 무한에 직면했을 때의 절망적인 행동일 것이다.
(공쿠르 형제/ 일기)
덕을 좋아하는 방탕을 피하여 항상 스스로 마음을 보호하라. 이것이 코끼리가 진창에서 벗어나듯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법구경)
방탕은 찰나의 즐거움과 영원한 후회를 가져 온다.
(팔만대장경)
오입쟁이 헌 갓 쓰고 똥 누기는 예사라.<*방탕한 오입쟁이라 그가 무례한 언행을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
(한국 속담)
바탕이 성실한 사람은 항상 편안하고 이를 보지만, 방탕하고 사나운 자는 언제나 위태롭고 해를 입는다.
(순자)
방탕자-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나 열심히 그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걸 추월해 버린 인간이다.
(A.G. 비어스/ 악마의 사전)
제한받지 않는 모든 욕구의 만족, 그것은 인생 처세의 가장 유혹적인 방법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은 조심보다 향락을 앞세움으로써 곧 스스로의 처벌을 초래함을 의미한다.
(S. 프로이트/ 문명과 문명의 불만)
진탕 마시고 떠드는 것도 정당한 분노의 안개를 통해 보면 특히 매혹적으로 보인다
(M. 머거리지/ 맬컴 머거리지의 최대)
탕아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산물이니까 하는 수없는 일이겠죠. 돈은 아버지가 얼마든지 벌어들이니까 나는 돈을 쓰는 것이 직업일밖에
(정비석/ 장미의 계절)
모든 방종은 자멸의 첫걸음이다. 그것은 기둥 밑을 흐르고 있는 눈에 안 띄는 물이다. 그 물은 조만간 기둥 밑의 주춧돌을 씻어서 무너뜨리고야 만다.
(W. 블레이크)
마음 잡아 개장사라. < *개장사는 오래 두고 할 장사가 아니므로 방탕하던 사람의 일시적인 안정 상태를 두고 이르는 말>
(한국 속담)
얼레 실 풀었다. <*탕자가 파산하기 시작하였다는 말>
(한국 속담)
인생의 항로에는 때때로 금지되어 있지만 허용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너무나 애틋한 쾌락과 이를 쫓으려는 너무나 흐뭇한 권유가 있다.
(A. 지드)
방종이란 일종의 마취기능을 가지며, 고통 받는 사람들은 항상 이 마취제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시몬 베유/ 노동일기)
삶은 악이 아니지만 방종하게 사는 것은 악이다.
(디오게네스)
혈기 왕성한 관능과 방종은 지쳐 빠진 육체를 노령으로 쫓는다.
(M.T. 키케로)
그대는 살쾡이를 보지 못하였는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먹이를 노리고 있는 살쾡이를, 그러나 살쾡이는 동서로 마구 뛰고 아래 위로 마구 탈선하는 것은 인간이다.
(R. 번즈/ 성인 군자에게 보내는 연설)
즐거움이 아니라 즐겁지 않다는 것이 방종의 어머니다.
(니체/ 금언과 사상집)
멋에 치어 중 서방질한다. <*자기 몸을 망치면서도 흥에 이기지 못해 방탕에 빠짐을 말함>
(한국 속담)
옛부터 음탕한 사람의 생각에는 안방에서의 비밀한 일은 세상에 아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 방탕하여 반성하지 않는 것이다.
(박팽년/ 쌍청당기)
환락의 밤이 새면 비애의 아침이 온다.
(영국 속담)
인색한 아버지에 방탕한 자식
(영국 속담)
난봉 자식이 마음 잡아야 사흘이다. < *본성이 그른 사람은 아무리 마음을 바로 잡는 대야 오래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
(한국 속담)
방탕이란 무엇인가? 육욕적 쾌락의 에고이스틱한 추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에고이즘이다.
(H.F. 아미엘/ 일기)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다.
(롱펠로우/ 인생찬가)
장안 동쪽에 있는 오릉에서 노는 소년들은 은 안장을 진 흰말을 타고 봄철을 보낸다. 지는 꽃을 다 밟고 놀았으니 다음에는 어디가서 놀까 보냐. 웃으면서 외국 여자있는 술집으로 들어가더라.
(이 백/ 소년행)
너 언제 날 묻으려나, 더러운 팔 가진 방탕아/ 그의 매력있는 적수인, 오오 죽음아 너 어느 날/구린 방탕의 밀뜨나무에다 네 흑사삼(黑系杉) 접붙이러 오려느냐?
(C.P. 보들레르/ 의초로운 자매)
여기에 또다시, 낯익은 여러 곳,/ 내 선조들의 무익하고 공허한 생활이/ 술판과 무의미한 오만과/ 더러운 방탕과 비열한 포학 사이에서 흘렀던 곳
(네끄라소프/ 고향)
방탕은 미친 사람 또는 천재의 것이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잠재울 수 있는 환락하여/ 병든 관능이여/ 기러기처럼 검은 피를 토하며/ 불길한 입가에 술을 적시고/ 아하 나는 어찌 세월의 항구항구를 그대로 지내왔드뇨?
(오장환/ 선부의 노래 · 2)
설 교 노 트
방탕한 아들을 기다림
눅15:11-24
서론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유명 한 비유가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목자가잃은 양을 찾는 비유입니다. 둘째는,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입니다. 셋째는, 아버지가 집을 떠나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만나는 비유입니다. 여기 세번째 비유는 탕자로 비유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는 사건도 중요하지마는 이 탕자 같은 죄인을 기다리다가 용서하시고 용납해 주시는 그 아버지의 애정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도 위대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더 위대합니다.
본문을 살피면서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방탕하게 지내는 아들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게 됩니다.
그 마음은 어떠한 마음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이 성공하기를 바라십니다. 나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분은 오직 부모님뿐이라고 합니다. 형제간에 시기와 질투가 있고, 사촌간에는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시기도 질투도 없이 진심으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성공하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천국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2.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기 성경 본문 중에,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버지를 배신하고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배신할 수 있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배신하고 집을 나간 아들이라도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심정이라고 하였습니다.
(2) 모든 가산을 탕진한 불량한 아들이라도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착한 아들이나, 못난 아들이 다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못난 죄인들일지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3) 들로 나가 돼지치는 목부가 되어 다 죽게된 아들이 회심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그러면 이와 같이 참고 기다리시는 심정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같이 살면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여 주고 싶어서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심정입니다.
3. 죄를 용서하고 사랑하여 주시는 심정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맞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 그 남루하고 더러운 아들일지라도,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의 사랑은, 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죄인들일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다가, 우리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사1:18의 말씀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눈보다 더 희고 양털보다 더 희게 씻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의복 입혀주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신을 신기시고, 송아지를 잡아다 잔치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제와 영원히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났던 길에서 돌아서십시다.
(2) 범죄하던 자리와 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십시다.
(3) 영원히 죽게된 자리에서 떨쳐버리고 일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 귀하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신앙인의 각성
롬13:11-14
서론
기독교 역사상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이신 사도 바울 선생께서는 당시 로마에 있는 기독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각성을 촉구하셨습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히브리 시인도 시49:20에 "사람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라고 하여 인간의 가치나 존귀성을 깨닫는 데 두었던 것입니다. 또한 파스칼도 "인생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정의하여 인간의 가치나 특이성을 생각하는 데 두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들은 인생을 이와 같이 깨달을 수 있기에 비이성적인 동물보다 귀중하고 생각할 수 있기에 일반 물체보다 귀중하다는 말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신앙인은 교훈으로 받아야 할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1. 신앙의 잠을 자고 있음을 각성해야 합니다.
본문 11절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는 말씀에 충동을 받고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게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신앙인의 잠이 든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잠(왕상15:9)"이 있고, "배 밑층에서는 요나의 잠(욘1:5)"이 있고, "감옥에서는 베드로의 잠(행12:6)"이 있습니다.
물론 다 잠을 잔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나 신앙의 잠이 위험하고 무섭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잠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자의 잠이요, 자신의 안일과 쾌락에 도취된 잠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잠에서 깨어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2. 어두운 옷을 입고 있는 사람임을 각성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의복은 인간의 최초 문명의 산물로써,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에 무화과나무잎으로 처음 만들어 입었습니다. 자고이래로 인간이 옷을 입는 의도와 목적은 네 가지라고 하는데
(1) 자신의 생명과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고
(2)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해서이고
(3) 정당한 사람으로 행동하기 위해서이고
(4) 자신을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여기 어두움의 옷은 캄캄한 밤에나 입을 수 있는지 모르나 낮에는 입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계19:8에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는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셨으니, 의복이 인간의 행실이라고 하면, 어두운 옷은 어두운 행실이요, 빛난 옷은 밝은 행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무화과나무의 옷을 벗겨버리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하셨습니다. 창3:21에 이 어두운 옷은 인위 적인 옷이요, 범죄의 옷이요, 마귀의 옷입니다. 이런 옷은, 생명을 보호하거나 수치를 가리우거나 정당한 사람이 되거나 아름답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광명한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고 주님을 대망해야 되겠습니다.
3. 방탕한 사람임을 각성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방탕한 삶에 대하여 다섯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1) 술 취하는 일
(2) 음람한 일
(3) 호색하는 일
(4) 쟁투하는 일
(5) 시기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보면, 자신은 방탕아중에 방탕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경학자들은 이 방탕한 사람에 대하여 지적하기를 삶의 목표와 방향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윤리와 도덕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사회악을 창조해 나아가는 죄의 도구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방탕하는 사람이 자기자신을 바로 깨달아 인식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회개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로 설정하고
착하고 의로운 행동원리를 채택하여
사회에 죄악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없어서는 아니될 횃불이 되었습니다.
결론
신앙인이 각성해야 될 이유
(1)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워 오기 때문입니다.
(3) 이는 주의 재림이 임박해진고로, 신앙의 잠에서 깨어 일어나, 광명한 갑옷을 입고 단정한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많은 날 동안
호3:3-4
서론
많은 날 동안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여러 날 동안이니 상당한 시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본장에서는 "많은 날 동안"이라는 말이 두 번 나타납니다.
3절에서는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라"고 하였고, 4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이 지내리라"고 하였으니 이 두 절의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쫓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고 하였노라"고 3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호세아가 그 아내 고멜을 깊은 윤락의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오랫동안 조용히 지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 여자에게 부탁하기를 "다른 남자를 다시 쫓지 말라"고 하며 그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여자를 홀로 두고 부부관계를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를 근심시킨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군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각 나라에 분산되어 살면서 결국 우상도 섬기지 않고 또 하나님을 창되게 섬기지도 않고 오랜 세월 동안 살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이 예언이 후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때가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즉,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2. "많은 날 동안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날 동안 왕(王)과 군(君)도, 제사도, 에봇도, 드라빔도 다 없는 실정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책임자들이 없으니 불안과 공포의 때요, 종교적으로 제사장이 없어서 제사하는 행위를 주관하는 자가 없으니 공허한 세대입니다. 백성들이 사는 일에 대하여 개인적인 고립 상태에서 살 수 없는 처지이므로 정치적인 테두리도 필요하고 종교적인 덮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정치적 · 종교적 원리 밑에서 살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비록 악한 정치라도 필요할 때가 있고, 타락된 종교라도 우리에게 역리적인 교훈을 주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많은 날 동안 왕도 군도 없었으며 제사도, 에봇도, 드라빔도 없는 실정이었으니 얼마나 공허하고 불안한 실정이었습니까?
이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요, 많은 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결론
하나님을 떠난 생활은 이미 지나간 때로 족합니다.
방탕한 생활은 계속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서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버 릇
성 경 활 용
1. 버릇의 종류
(1) 선을 행하는 버릇
(행10:38)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음이라
(2) 악을 행하는 버릇
(렘13:23)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3) 동물적 본능적 버릇
(벧후2:22)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2. 성도가 버려야 할 버릇은 무엇인가?
(1) 악에 익숙한 버릇이다.
(렘13:. 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미2:1) 침상에서 악을 죄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2)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는 버릇이다.
(렘22:21)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3) 모이기를 폐하는 버릇이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4) 우상에 대한 버릇이다.
(고전8:. 7)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3. 못된 버릇 버리지 않는 자의 결과
(1) 양심이 악해지고 더러워진다
(고전8:7)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2) 해산의 고통같은 고통이 임한다.
(렘22:23)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4. 성도가 가져야 하는 버릇
(1) 예배드리는 것이다.
(삼상2: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을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행16:. 13) 안식일에 우리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2) 안식일을 지키는 것
(눅4: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 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3) 기도하는 것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관련원어풀이
1. &r,D, 데렠
(1) 길, 도로.
(출13:7, 신1:19)
(2) 길, 방법, 진로, 삶 혹은 행동의 방식.
(삼상18:14, 사8:11)
(3)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 종교.
(시139:24, 렘18:15)
(4) 경험한 것, 운명.
(욥3:23, 사10:24)
2. fP;v]mi 미쉬패트
(1) 심판.
(레19:15, 신1:17)
(2) 옮음, 공의, 공평한 것, 정당한 것, 합법적인 것.
(신16:19, 잠16:11)
(3) 법률, 법칙.
(출21:1, 레18:4)
(4) 태도, 습관.
(왕하11:14, 17:33)
(5) 모양, 종류, 계획.
(삿13:12)
3. e[qo" 에토스
(1) 습관, 버릇.
(눅2:42, 22 , 39)
(2) 법, 관례.
(눅1:9, 행6:14)
4. sunhvqeia 수네데이아
(1) 우정, 친분, 친밀, 교분, 습관, 풍속, 익숙
(고전8:7)
(2) 습관, 풍속, 관례.
(요18:39, 고전11:16)
설교예화자료
거지로부터 얻은 교훈
스페인에 알폰소 12세라 불리워지는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궁전의 시동들이 하나님께 식사 기도를 하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책망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왕은 시동 모두를 향연에 초대하였습니다. 식탁은 모든 산해진미로 가득 차 있었으며 소년들은 매우 맛있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식사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향연 중에 더럽고 누추한 옷을 입은 거지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왕의 식탁에 앉아 맘껏 음식을 먹고 마셨습니다. 처음에 시동들은 경악했으며 왕이 곧 그를 쫓아내도록 명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알폰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끝낸 거지는 감사의 말 한 마디도 없이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그러자 소년들은 더이상 침묵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야비하고 천한 사람인가!"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들을 조용히 하도록 명하며, 뚜렷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말하였습니다.
"소년들이여, 너희들은 거지보다 더 뻔뻔스럽고 대담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너희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주신 음식을 먹으면서 그에게 은총을 바라거나 감사를 표현하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두 마리의 앵무새 이야기
서로 가까이 살고 있었던 두 마리 앵무새가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찬송가를 부르는 버릇 있는 반면에 다른 한 마리는 맹세하는 버릇에 길들여 있었습니다. 맹세하는 버릇이 있는 앵무새를 가진 주인은 찬송가를 부르는 앵무새의 버릇을 닮기를 바라며 서로 같이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두 마리 모두 맹세하는 버릇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옷이 날개인가
언젠가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서 새로 채용된 한 접객주 임이 한창 열을 올려 열심히 청소를 시키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 한가운데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깨끗한 고급 벤치에 인상도 그리 안 좋고 옷차림도 지저분한 한 늙은 남자가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걸 보았습니다. 그 접객주임은 이런 훌륭한 고급 호텔의 분위기가 행여나 저런 누추한 사람의 모습 때문에 깨어질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며시 그 사람 뒤로 돌아가서
"여보십시오.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즉시 이곳을 떠나 주십시오."라고 씌여진 쪽지를 넘겨주고는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그 접객주임에게 다음과 같은 쪽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여보시오, 미안하지만 남의 귀에 소문나지 않게 오늘 즉시 이 호텔에서 나가 주십시오.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 백"
깜짝 놀란 이 접객주임이 그 남루한 옷차림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하고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이 호텔의 경영주 스티너스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큰 회사를 12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이 호텔은 그냥 부업삼아 경영하고 있던 굴지의 대재벌이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했던 이 접객주임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호텔에서 해고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버릇 고치기
상가폴의 젊은 사업가 한사람이 별로 좋지 않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침출근길에 술집 앞에서 발을 멈추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술을 많이 마신다거나 추태를 부린다는 것이 아니라, 술집 앞을 지나면서 술을 마시는 기분을 느끼고 출근해야만 일이 잘되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지미'에게 "빠이빠이, 아빠는 회사에 간다. "하며 손을 흔들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날도 역시 손가방을 들고 그 술집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뒤를 돌아다보니 지미가 몇 발자욱 뒤에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아빠의 발자욱만 밟으면서 뒤따라왔던 것입니다. 이때 지미는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 아빠 발자욱만 밟고 왔어요."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 젊은 사업가는 그 고약한 버릇을 딱 끊었습니다.
세 황금문
데이란 사람이 쓴 「세 황금문」이란 글에 보면, 인간의 언어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말하기 전애 세 황금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들이다. 첫째 문은 "그것은 참말이냐?" 그리고 둘째 문은 "그것은 필요한 말이냐? " 네 마음속에서 참된 대답을 하라. 마지막이고도 가장 좁은 문은 "그것은 친절한 말이냐? " 그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말고 크게 외쳐라.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4:25). 이것은 「세 황금문」 중의 첫번째 관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도리어 덕을 세우는 데 소용이 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4:29). 결국 이 것은 「세 황금문」의 둘째와 셋째 관문에 해당된다고 생각됩니다.
세 자매
옛날에 세 딸을 가진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딸은 세 사람 다 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딸들은 제각기 하나씩 결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게으름뱅이고, 한 사람은 훔치는 버릇이 있었으며, 한 사람은 험담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어느 사나이가 자기에게는 세 사람의 아들이 있으므로, 그 딸들을 자기 아들의 신부로 줄 수 없느냐고 말했습니다.
딸의 부친이 그 아이들에게는 이러이러한 결점이 있다고 하자 시아버지 될 사람은 그것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주의시키겠다고 말했습니다.
신부를 맞아들이는 쪽의 부친은 게으름뱅이의 딸을 위해서는 많은 하인을 고용했습니다. 훔치는 버릇이 있는 딸을 위해서는 큰 창고의 열쇠를 주어 무엇이든지 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세 사람째의 험담 잘하는 딸에게는 아침 일찍 그 딸을 깨워서 오늘은 남을 헐뜯을 일이 없는가를 매일 아침마다 물었습니다.
어느 날 딸의 부친이 딸들의 결혼 생활이 잘되어 가는가 어떤가를 보러 갔습니다. 맨 위의 딸은, 나는 내가 좋아할 만큼 게으름을 피울 수 있어서 아주 즐겁다고 했습니다. 둘째 딸은, 나는 물건을 갖고 싶을 때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셋째 딸은,내 시아버지가 내게 남녀 관계를 따지기 때문에 견딜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부친은 세번째 딸의 말만은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 그녀는 시아버지까지 헐뜯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는 아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소년은 학교에서 장난삼아 짝의 연필을 훔쳤습니다. 그 애기를 들은 어머니는,
"호호호, 귀여운 내 새끼 ! " 하고 야단은 커녕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며칠 후 소년은 또 예쁜 장갑을 훔쳐 왔습니다.
이번에도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난이 귀엽다는 듯이,
"오냐, 귀여운 내 새끼 ! "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것을 본 소년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었고 마침내소년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버릇이 되었습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남의 물건을 훔치곤 하였는데, 어느 날 결국 도둑질을 하다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몹시 슬퍼하며 감옥에 갇힌 아들을 면회하러 왔습니다.
"애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
어머니는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어머니 탓이에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울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처음으로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 어머니는 저를 안아 주며 귀여워하셨어요. 그리고 그 다음 번에도 그러셨구요. 그때 어머니가 저를 따끔하게 야단만 치셨더라도‥‥‥‥
아들과 어머니는 서로 손을 붙들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가난뱅이
옛날에는 가난뱅이었던 벼락부자가 있었습니다. 랍비 히레르는 그에게 한 마리의 말과 마부를 주었습니다. 어느 날 마부가 어딜 가고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벼락부자는 자신이 3일이나 말을 끌고 걸어갔습니다.
어록·시·묘사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다.
(몽테뉴/ 수상록)
습관은 천성보다 더 강하다.
(루푸스/ 알렉산드리 여왕의 위업)
습관은 오래 계속된 실천이며, 결국에는 그 사람 자신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쿠스 윤리학)
습관은 잔인성도 없고 마술도 없는, 우리의 제 1 의 천성을 알 수 없도록 방해하는 제 2 의 천성이다.
(M. 프루스트/ 지난 일의 회상)
우리는 모두, 다소나마 '습관의 동물' 이다.
(체스터필드 경/ 서간집)
습관은 이성보다 강하다.
(G. 산타야나/ 시와 종교의 해설)
습관은 성격으로 변한다.
(오비디우스/ 여걸)
습관은 성격을 형성하며, 성격은 운명이다.
(J. 케인즈)
사람은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지며, 습관은 그의 간호원이다.
(실러/ 발렌시타인의 죽음)
습관이 된 것은, 말하자면, 천성의 일부가 된다. 습관이야말로 천성과도 같은 것이니, '빈번'과 '항상'과의 차이는 크지 않은 바, 천성은 함상의 개념에 속하고, 습관은 빈번의 개념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으로 하여 성품이 서로 멀어지는도다.
(공자/ 논어)
대체로, 우리는 우리 의 의견을 물려닫는다. 우리는 습관과, 정신적인 관습의 상속자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복장 양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난 곳에 따른다.
(R.G.잉거솔/ 내가 왜 불가지론자인가?)
습관은 하느님 자신의 시정이며, 행복을 대리한다.
(A. 푸시킨/ 에프게니 오네긴)
버릇은‥‥ 사회의 거대한 속도 조정기이며, 가장 귀중한 보존자이다. 그것만이 우리 모두를 법령의 테두리 안에 묶어주는 것이다.
(W. 제임즈/ 심리학원론)
든 버릇 난 버릇. <*후천적 습성이 선천적 성격처럼 되어 버림을 뜻함>
(한국 속담)
낙수물은 떨어지던 데 또 떨어진다. <*한 번 버릇 들어 버리면 고치기 힘든다는 말>
(한국 속담)
버릇은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볍지만 멀지 않아 밧줄처럼 튼튼해진다.
(탈무드)
미친 사람이나 보통 사람이나 간에 이상한 버릇이 있다.
(프랑스 속담)
일상 생활을 위해서는, 한 온스의 습관이 한 파운드의 지성의 가치를 지닌다.
(T.B. 리드, 로빈스/ 리드전)
노력을 중단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 그것은 습관을 잃는다. 습관은, 버리기는 쉽지만 다시 들이기는 어렵다.
(V. 위고/ 레 미제라블)
일단 몸에 붙은 악습은, 깨어지기는 할지라도 고쳐지지 않는다.
(쿠인틸리아누스/ 변론술 교정)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천성적으로 게으르다. 아무것도 인간을 다그치지 않으면, 인간은 생각도 하기 힘들고, 자동인형처럼 습관으로만 행동할 것이다.
(아인슈타인/ 나의 최근 몇 해 이전)
못은 다른 못에 의해 빼어지고, 습관은 습관에 의해 제압된다.
(D. 에라스무스/ 여명)
젊은이 망령은 몽둥이로 고친다. <*젊은이가 망령된 짓을 하는 것은 철이 없어 그러는 것이니 매로 고쳐야 한다는 말>
(한국 속담)
남산골 생원이 망하여도 걸음 걷는 보수는 남는다. <*남산골 샌님이 망하여 아무것도 남은 게 없으나 그 특이한 걸음걸이만은 남는다는 말이니, 사람의 습벽이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
(한국 속담)
버릇은 버릇이다. 누구에게나 그것은 창문 밖으로 내던질 것이 못된다. 한 발짝씩 계단을구슬려 가면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 얼간이 윌슨의 캘린더)
자기가 하고 싶은 버릇만을 키운다면 거기에 정복되고 말 것이다.
(E.G. 허버드/ 펠리시테 사람)
버릇을 고쳐 주는 것은 상반되는 버릇이다.
(에픽테토스)
길들일 수 없는 것만큼 야만적인 사람은 없다.
(호메로스/ 서간시)
버릇에만 맡긴다면 방탕하기 쉽다. 그러므로 버릇도 버려야 할 것이 있으며, 호기심도 따라야 할 것이 있다.
(이병기/ 유행과 습관)
병은 고치지만 버릇은 못 고친다.
(일본 속담)
색시 그루는 다홍치마 적에 앉혀야 한다.<*아내의 버릇을 잡으려면 새색시 적에 잡아야 한다는 뜻>
(한국 속담)
성장기에 버릇을 고쳐 주는 긴요한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불쾌한 인간들이 되고 말것이다.
(J. C. 페니)
습관이 든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시작하는 것이다.
(M.D. 우나무노/ 인생의 비극적 의미)
들어서 죽 쑨 놈은 나가도 죽 쑨다. < *집에서 하던 버릇은 집을 나서도 버리지 못한다는 뜻>
(한국 속담)
습관은 정당한 모습을 만든다. 진보에는 습관보다 더 큰 적이 없다.
(J. 마르티/ 호세 마르티 선집)
최악의 횡포는 버릇의 횡포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격언집)
행복에서 습관으로 발전은, 죽음의 가장 훌륭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J. 코르타자르/ 승리자)
버릇이란 동물적인 의지의 결정이 자연발생적인 움직임으로 둔갑하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의사에 의한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인간의 으뜸가는 기능이 모든 상황이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에서 제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드러냄이다.
(0.W. 흠스/ 아침 식탁의 독재자)
시내가 강이 되고, 강이 흘러 바다를 이루듯이, 나쁜 습관은 보이지 않는 사이에 착착 쌓인다.
(오비디우스/ 변형담)
늘 마시는 자는 맛을 모르고, 늘 지꺼리는 자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M. 프라이어/ 스칼리게리아나 섬을 통과하며)
나쁜 버릇은 빨리 자란다.
(플라우투스/ 상일)
습관은, 무분별한 민중을 지배한다.
(워즈워즈/ 성직의 소네트집)
배운 도둑질 같다. <*버릇이 되어 버리면 안하려야 안 할 수 없다는 뜻>
(한국 속담)
하나 새악시는 문득 무엇이 생각킬 때문/ 붉은 산호 목걸이도 벗어 던지고/ 아무도 달랠 수 없이 울어버리는 버릇이 있단다.
(노천명/ 슬픈 그림)
나는 이렇게 문 앞에 써 놓았네/ "당신의 습관을 밖에 벗어 두세요,/ 제 집에 들어오시기 전에"/ 그러자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스승은 어떤 말이든 적절한 상황에 사용하면/ 나쁠게 없다고 주장했다. 제자 중 하나가 욕을 잘하는 버릇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스승은 말했다. / "기도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적 평온을 불경한 욕지거리를 함으로써 얻게 되는 법이지."
(앤소니 드 멜로/ 영적 평온)
한 제자가 자기는 험담을 되풀이하여 지껄이는 나쁜 버릇이 있다고 고백했다. // 스승이 짓꿎게 말하기를/ "되풀이하는 거야 그리 나쁠 게 없지, 거기다 뭘 보태지만 않는다면."
(앤소니 드 멜로/ 험담)
창을 사랑하는 것은 태양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눈부시지 않아 좋다. //‥‥/ 창을 맑고 깨끗이 지킴으로/ 눈들을 착하게 뜨는 버릇을 기르고
(김현승/ 창)
하소연하며 한숨을 지으며/ 세상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여!/ 말을 나쁘지 않도록 좋이 꾸밈은/ 닳아진 이 세상의 버릇이라고, 오오 그대들!/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김소월/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나는 곤죽이고/ 나는 쫓겨났다/ 내가 살던 곳의 변방으로 밀려나/ 미어질 듯 막막한 가슴이다// ‥‥나는 내 방에서의 버릇대로 자꾸 손을 뻗어/ 목마른 새벽 흉내를 한다.
(성춘복/ 낯설지 않은 이곳은)
그 소녀는 참새처럼/ 소리를 내며/ 골목길을 재롱재롱/ 걸어오는 버릇이 있네./그럴 때마다/ 나의 창문은/ 재빠르게 감전이 되어/ 심장처럼 떨리기만 하네.
(다께나까 이꾸/ 심장처럼 빨갛게)
과오에 어머니가 있다면 그것은 버릇일 것이다.
(자마크샤리/ 황금 목걸이)
수염을 깎는 비누거품같이/ 창들이나 헤어진 벽 위에 발려 있던 저녁 안개들‥‥/ 밤이 깊어 갈수록/ 뱃고동 소리처럼 뿌옇게 사면으로 퍼진다. // 이러한 밤에는/ 종점 부근이나 어디서 서성거리던 나의 버릇,/ 이러한 밤에 서울에 나리면,/ 곧 아내에게 편지를 쓰던 나의 버릇,
(김현승/ 밤안개 속에서)
친구나 손님, 친척들 물러갔을 때/ 안에 아직 그대가 있을 듯하여/ 급히 그대 찾아 들어가 보면/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것/그것은 그대의 버릇이었소.
(하아디/ 인사도 없이)
가구(佳句) 탐하는 버릇/ 내게 있어서// 말이 남을 못 놀래면/ 죽어도 안 멎더니// 늙으매 흥 내키면/ 시라 끄적일 뿐,// 봄이 와도 화조 대해/ 시름마저 깊이 안 해‥‥‥
(두보/ 강상에서)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 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노천명/ 자화상)
간지러운 습관의/ 가지랭이 벌리고/ 봄도 마음도 질펀히 내어 맡긴다.
(박영남/ 은혜의 긴 밤)
그는 조그만한 가옥 중개업자의 서기, 작달막한 녀석으로/ 당돌하게 사람을 노려보는 버릇이 있다.
(엘리오트/ 황무지-불의 설교)
나는 차를 앞에 놓고/고즈넉한 저녁에 호올로 마신다. / 내가 좋아하는 차를 마신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사실일 뿐./ 차의 짙은 향기와는 관계없이/ 이 것은 물과 같이 담담한 사실일 뿐이다. // 누구의 시킴을 받아/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손으로 들국화를 어여삐 가꾼 것도 아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이와 같이 스스로 달갑고 가장 즐거울 뿐,/ 이것은 다만 사실이며 또 관습이다. / 나의 고즈넉한 관습이다. // 물에게 물은 물일 뿐./ 소금물일 뿐,/ 앞으로 남은 십년을 더 살든지 죽든지/나에게도 나는 나일뿐,// 이제는 차를 마시는 나일 뿐./ 이 짙은 향기와는 관계도 없이 차를 마시는 사실과 관습은/ 내가 아는 내게 대한 모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도 된다.
(김현승/ 사실과 관습 -고독이후)
종려수 가지로 당신의 길을 쓸듯이/ 자면서 깨어 있는 습관을 깨우쳐 주었듯이
(한분순/ 기원)
푸른 옷을 입은 여수(女囚)는/요새 와서/창 밖을 내다보는 버릇이 부쩍 심해졌다.
(노천명/ 철창의 봄)
변변치 못한 화를 받던 날/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고독을 사랑하는 버릇을 지었습니다.
(노천명/ 고독)
습관이나 충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모든 격언은 습관으로 체화되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먼발치 저만치서/눈여겨 살펴 보니/사람 찾는 버릇에/ 엄마는 늙는댄다
(김남조/ 아가야 우리도)
한눈 팔던 그 버릇이 불혹까지 옮겨와서/ 철맞아 가꾸는 꿈동산은 푸르른데
(진복희/ 불혹의 봄)
그의 사진은 이 맑고 넓은 아침에서/ 또 하나의 나의 팔이 될 수 없는 비참이요/ 행길에 얼어붙은 유리창들같이/ 시계의 열두시 같이/ 재차는 다시 보지 않을 편력의 역사‥‥//나는 모든 사람을 피하여/ 그의 얼굴을 숨어 보는 버릇이 있소.
(김수영/ 아버지의 사진)
아! 그해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홍사용/ 나는 왕이로소이다)
설 교 노 트
버리고 받으라
약1:21
서론
본문 말씀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섬긴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취사선택(取拾選擇)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가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버리고 받는 새 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1. "버리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본문 말씀에서 '더러운 악'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육체적인 모든 기질인 거짓, 교만, 망령된 생각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넘치는 악'이란 하나님을 향한 반감, 불신 같은 것들이 밖으로까지 노출되어 나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악한 성향들은 억제하거나 경계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멀리 내어버리라고 합니다(엡4:22). 물론 우리들이 나쁜 생활 습관들을 버리려고하나 잘 실천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습관을 버릴 수 있는 비결을 몇 가지 찾아보면
(1)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확신입니다(빌3:12).
(2) 준비하는 일입니다.
(3) 출발하는 일입니다.
(4) 꾸준하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5) 만족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우리의 나쁜 습관들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 있습니다.
(1) 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버릇
(2) 쉽게 손을 떼어버리는 습관
(3) 과거에도 해봤는데 어렵더라, 안되더라 하며 다시 하려는 의욕을 잃어버리는 버릇들이 그것입니다.
2.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버리는 것과 받는 것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나쁜 것으로 채워지고 있음도 큰 문제지만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음도 큰 문제입니다 집을 비웠으면 빨리 주인을 맞아야 합니다 빈 집의 위험이 바로 그것입니다(마12:44).
나쁜 것을 버리는 소극적인 것에서 멈추지 말고, 좋은 것을 받는 적극적인 신앙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율법은 '하지 말라'이지만 복음은 더 나아가서 '하라'입니다. 지나온 어제가 잘못되었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을 값있게 붙들고 다가올 내일을 위해 좋은 것을 받아야 합니다.
고후 6:2에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어제의 근심이나 내일에 대한 염려로 오늘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라틴어에 "Carpe Drem"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결론
우리는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쉽게 단념하지 말고 나쁜 버릇을 버리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적극적으로 받는 버릇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려고 하는데, 받을 자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좋은 것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 어디나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습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새로워지는 삶
엡4:22-24
서론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설계를 해보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 새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새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1.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본문 22-23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물들었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과거의 세상 생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1) 욕심을 버려야 됩니다.
본문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옛 사람은 무분별하게도 욕심에 따라 정욕대로 지내온 육신에 속한 나의 모습입니다. 탐욕은 사람을 소경으로 만든다는 영국의 속담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욕심이 넘어뜨리려고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욕심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몰아 넣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단호히 배격하고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2) 구습을 버려야 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인격을 망가뜨리고 종내는 파멸의 운명을 맞게 합니다. 신앙생활이 시작되면 믿기 전의 옛 습관은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나쁜 습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전에 모이기를 싫어하는 습관이며(히10:25), 다른 하나는 일하기를 싫어하는 습관(살후3:6-14)입니다. 이러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2. 심령이 새로워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심령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심령 부흥을 말합니다.
심령이 새로워지려면 무엇으로 됩니까?
(1) 말씀으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심령과 교회를 새롭게 씻어주고 거듭나게 하는 물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엡5:26에 "이는 곧 물로 씻어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벧전1:23에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마다 여러분의 심령은 자꾸 새로워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으로 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베드로를 변화시킨 것도 성령의 역사였고 사울을 세계적인 선교사 바울로 변화시킨 것도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죄악의 도성은 무너지고 인간의 몹쓸 바벨탑은 파괴되어 집니다. 그리고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 떼를 살렸듯이 심령을 살리는 영적 회복 운동이 이루어지게 되어 심령이 새롭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3. 새 사람을 입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었습니 다(창1:27).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창2:17)을 불순종하여 범죄(창3:1-6)했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진리, 거룩함, 지혜)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의 모습은 새 사람이 아니라 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을 입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즉 하나님의 잃어버렸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1) 예수를 본받아야 됩니다.
본문에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모델로 하여 본받으라는 것"이라고 렌스키(Lenski)는 해석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의 모델로 삼고 본받도록 힘쓰는 새 생활을 입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빌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날마다 예수의 인격을 닮아가는 생활이 곧 새 사람을 입는 비결인 것입니다.
(2) 주 안에 거해야 됩니다(요15:1-8).
주님을 떠난 삶은 곧 탕자의 삶입니다(눅15). 그러나 주 안에 거하는 삶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된 삶입니다(요15:5), 주 안에 거하는 삶은 주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삶을 말씀합니다.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므로(창5:22) 하나님이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말세에 주님이 재림하실 때 휴거 당하여 하늘로 들려 올라갈 사람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 안에 거할 사람일 것입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항상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새 삶은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옛날의 나쁜 습관을 다 버리고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심령을 새롭게 하며 주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벌
성 경 활 용
1. 벌의 여러 증류
(1) 재앙
(렘44:29) 내가 이곳에서 너희를 벌할 표징이 이것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리라 한말이 단정코 성립될 것을 그것으로 알게 하리라
(2) 함정과 올무
(램48:44) 두려움에서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겠고 함정에서 나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내가 모압의 벌 받은 해로 임하게 할것임이니라
(3) 부자간에 잡아 먹는다.
(겔5:10) 너의 중에서 아비가 아들을 먹고 아들이 그 아비를 먹으리라 내가 벌을 네게 내리고 너의 중에 남은 자를 다 사망에 흩으리라
(4) 이방인에게 수용과 조롱을 당한다.
(겔5:15) 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 있은 이방인에게 네가 수욕과 조롱을 당하고
(5) 네 가지 벌이 임한다.
(렘15:3)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6) 불로 집을 사른다.
(겔16:41) 불로 너의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7) 모든 기억을 멸절함
(사26:14)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그 모든 기억을 멸절하셨음이니이다
(8) 영영히 황무케 함
(렘25:12)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9)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심
(마10:28)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 하나님께는 대상
(1) 악인
(렘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잠11:21)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할 것이나
(2) 교만한 자
(잠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21:11)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는 경성하겠고
(3) 거짓 증인, 거짓말하는 자
(잠19:9)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는 망할 것이니
(4) 날랜 뱀
(사27:1)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5) 말씀을 안 듣는 자
(신18: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6) 강포와 궤휼로 집을 채운 자
(습1:9) 그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7) 불복종자
(고후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8) 성도를 삼키는 자
(렘2:3) 그 때에 이스라엘은 나 여호와의 성물 곧 나의 소산 중 처음 열배가 되었나니 그를 삼키는 자면 다 벌을 받아 재앙을 만났으리라
(9) 가증한 일을 행하는 자
(겔5:9) 네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겔5:9)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10) 죄를 범해도 부끄러워 할줄 모르는 자
(겔8:12) 그들이 가중한 일은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1) 음행자
(겔16:41) 불로 너의 집을 사르고 여러 여인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내가 너로 곧 음행을 그치게 하리니
(12) 성도를 근심케 하는 자
(고후2:5-6)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
4. 하나님께 벌받는 원인
(1) 거짓 것이 미혹되기 때문에
(벧후2:15-16)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랑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 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2) 음행과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렘5:7-9) 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3)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백성을 미혹하게하기 때문에
(렘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봉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4) 송사를 불공평하게 판결하기 때문에
(렘5:28-29) 살찌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5) 가증한 일을 행하기 때문에
(렘6:15) 그들이 가중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6) 거짓된 위선으로 행하기 때문에
(렘9:8-9)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유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7) 어그러진 길을 사랑한다.
(렘14: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5.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방법
(1) 행위대로
(렘23:34) 또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선지자에게나 제사장에게나 백성에게는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에 벌하리라 하셨다 하라
(2) 범죄한 시일에 따라
(호12:14) 엘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3) 타국인의 손에 붙여서
(겔11:9) 너희는 그 성읍 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붙여 너희에게 벌을 내리시니
6.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한도
(1) 전무 후무하게
(겔5:9) 네 모든 가중한 일로 인하여 내가 전무 후무하게 네게 내릴지라
(2) 여호와를 알 때까지
(겔25:11)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 죄보다 경하게
(욥11:6)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4) 회생 못하게
(사26:14) 그들은 죽었은 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멸하사
7. 성적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
(1) 간음하는 자는 죽인다.
(레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22:22-24)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여자를 둘 다 죽여
(2) 근친 삼간하는 자는 죽인다.
(레20:11-14)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3) 남색하는 자들을 멸망시킨다.
(창19:5) 롯이 부르고 그에 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레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4) 남의 약혼녀를 강간한 경우 남자만 죽인
다.
(신22:25)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거든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5) 수간하는 자는 죽인다.
(출22:19)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8. 육적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
(1)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다.
(고전5: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2) 살인하는 자는 죽인다.
(창9:5-6)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3)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는 죽인다.
(출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 가지고
(4) 하나님의 보냄 받은 자를 핍박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마23:35-3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며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5) 유괴범은 죽인다.
(출21:16)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9. 종교적인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
(1) 인신 제사를 드리는 자는 죽인다.
(레20:2-5)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2) 무당은 죽인다.
(출22:18)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3) 우상 숭배자를 죽인다.
(출22: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4) 거짓 예언 또는 거짓 교훈을 가리키는 자는 죽인다.
(신13:1- l0) 참조
(5) 안식일을 모독한 자는 죽인다.
(출35:2)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관련원어풀이
1. ha:F;j' 하타-트
(1) 죄.
(출28:9, 사6:27)
(2) 소제물, 속죄제.
(레16:18, 23)
(3) 형벌, 재난, 불운.
(잠10:16, 사40:2)
2. fP;v]mi 미쉬파-트
심판.
(레19:15, 신1:17)
(2) 잘못, 범죄.
(렘15:9, 겔7:23)
(3) 옳음, 공의, 공평한 것.
(신16:19)
3. @/[; 아-온-
원래의 의미는 "뒤틀어진 성질, 사악, 타락"이다.
(1) 타락된 행동, 죄.
(창4:13)
(2) 죄의 형벌.
(사5:18)
(3) 재난, 처참.
(시31:11)
4. vn"[; 아-나쉬
(1) 벌금을 과하다.
(대하36:3, 잠17:26)
(2) 벌금을 내다.
(출21:22)
(3) 형벌되다.
(잠22:3)
5. dq'P; 파카-드
원래의 의미는 "치다. 때리다"이다.
(1) 탐색하다, 조사하다.
(욥7:18, 시17:3)
(2) 두다, 위임하다, 위탁하다.
(대하36:23)
(3) 형벌되 다.
(민16:29)
(4) 조사하다, 소집하다, 계수하다.
(사13:4)
6. hD;quP] 케쿠다-
(1) 소집, 점호, 열거.
(대상23:11)
(2) 돌봄, 감독.
(욥10:12)
(3) 직분, 감시.
(민4:16)
(4) 형벌.
(겔9:1)
7. hj;ke/T 토-케-하
비난, 견책, 형벌.
(사37:3, 호5:9)
8. !v'a: 아-솸
(1) 의무를 불이행하다, 범죄하다.
(레4:13, 렘50:7)
(2) 합당한 형벌을 받다. 죄를 의식하다.
(시34:22, 렘2:3)
(3) 파괴되다, 황폐함을 당하다.
(겔6:6)
(4) 형벌을 가하다.
(시5:11)
9. vr'D; 다-라쉬
(1) 발로 짓밟다, 항상 출입하다.
(대하1:. 5, 암5:5)
(2) 찾다.
(레10:16)
(3) ∼에 관해 묻다, 상담하다.
(창25:22)
(4) 형벌하다, 보복하다.
(시10;4, 창9:5)
10. !q'n: 나-캄
(1) 갚다, 복수하다, 보복하다.
(레19:18)
(2) 자신을 갚다.
(삿15:7)
(3) 보복을 당하다.
(창4:15)
11. ejkdikevw 엑디케오-
원래의 의미는 "의와 공의를 실행하다"이다.
(1) 형벌하다, ∼에 대해 복수하다.
(고후10:6, 계6:10)
(2) 의를 행하다, 원수를 갚다.
(눅18:5)
12. ejkdivkhsi" 엑디케-시스
만족, 복수, 형벌, 보복하는 공의.
(눅21:22, 행7:24)
13. ejpitimiva 에피티미아
형벌, 징벌.
(고후2:6)
14. kolavzw 콜라조-
원래의 의미는 "단축하다, 강요하다, 다듬다"이다. 징벌하다, 형벌하다.
(행4:21, 벧후2:9)
설교예화자료
어리석은 양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을 본 늑대들은 어떻게 하면 저 양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하며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떼 주변에는 사냥개들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좀처럼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
머리를 맞대고 늑대들은 의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한 늑대가 좋은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우리들 중 대표 하나가 양떼를 꾀어보는 것이 좋겠어."
그리하여 마침내 늑대의 대표가 사냥개의 눈을 피해 양떼에게 접근했습니다.
"양들아, 사실 우리들은 저희들을 참 귀여워한단다. 그래서 너희들과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언제나 저 사나운 사냥개가 떡 버티고 있어서 좀처럼 가까이 올 수가 없단다. "
"정말 그렇군요."
어리석은 양들은 늑대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사냥개들이 잠들었을 때 우리에게 살짝 알려주렴. 다시는 우리 사이를 방해하지않도록 꽁꽁 묶어놓을 테니까!"
양들은 늑대의 말에 찬성하여 그날 밤 모두 잠든 척하다가 마침내 사냥개들이 잠이 들자그 사실을 늑대들에게 알렸습니다.
늑대들은 잠자는 사냥개들을 덥쳐 잡아먹은 후 양들도 모두 차례차례 잡아먹었습니다.
말과 멧돼지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말과 지저분한 멧돼지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멧돼지야, 좀 깨끗하게 지낼 수 없겠니? 정말 지저분해서 살 수 없구나."
말은 언제나 멧돼지를 나무라며 깨끗이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뭐가 어때서 그래. 마음만 편하면 그만이지."
그때마다 멧돼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멧돼지는 풀밭에서도 한 곳에서만 풀을 뜯는 것이 아니고 이곳저곳 다니며 풀을 뜯고 마구 짓밟고 더렵혔습니다. 골짜기의 물을 마실 때도 첨벙거리며 물을 흐려 놓았습니다.
깨끗한 걸 좋아하는 말은 마침내 멧돼지를 골탕먹이기로 하였습니다. 말은 사냥꾼을 찾아가서 의논했습니다.
"좋아.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지, 그대신 너는 자갈을 물고 나를 태워줘야 한다. "
"좋아요. 그건 어렵지 않아요."
그리하여 사냥꾼은 말을 타고 멧돼지를 쫓아가서 창으로 멧돼지를 찔렀습니다.
그러자 멧돼지는 죽으면서
"이 비겁한 말아. 나는 너로 인해 죽지만 너는 영원히 사냥꾼의 노예가 될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멧돼지의 말대로 사냥꾼은 말을 마굿간으로 끌고 가서 고삐를 매고 마음대로 부려먹었습니다.
죄와 벌
마리아가 아주 영리한 여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완전한 범죄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녀는 보험회사의 보험금을 착복하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녀는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조가 없는 더러운 의사인 어거스트 엉거 박사와 장의사 일을 보고 있는 한 친구를 공범자로 끌어들였습니다.
뉴욕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겨 놓고 그녀는 집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시카고에 와서 다른 이름으로 하숙에 들었습니다.
그녀의 하숙집에는 계속 그녀를 방문하는 남자가 두 사람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브라운으로, 그녀는 그를 자기의 약혼자라고 주인에겐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스밀리인데, 그는 그녀의 하수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시카고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생명보험에 가입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계약서에는 가짜 약혼자인 브라운과 엉거 박사를 보험금 수혜자로 지명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스멀리가 이 계약서의 보증인으로 서명되었습니다.
계약이 확정 되자 마리아는 그녀의 계획대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마리아는 하숙집 주인에게 몸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의사인 엉거 박사에게 사람을 보내 약을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계획대로 의사는 약간의 약을 보내왔습니다. 사실 그 약은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일종의 특수 강력 수면제였습니다.
나중에 집주인의 연락을 받고 의사가 왕진을 와서 의식을 잃어버린 그녀를 진찰하고는, 그녀가 이미 죽었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의사는 사망증명서에 서명을 했고 장의사에 통보하여 장례식을 치르게 했습니다. 곧 장의사 사람이 나타났고 그녀의 하수인도 나타나 마리아를 영구차로 실어갔습니다.
일단 영구차에 실린 다음에 엉거 박사는 다시 마리아에게 주사를 놓았고 마리아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떴습니다. 마치 죽은 자가 부활하듯이.-
그리고 마리아 대신에 임자 없는 한 시체를 화장하여 장례를 치뤄버렸습니다. 거의 완전한 범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엉거 박사와 브라운은 마리아를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둔 채 막대한 생명보험금을 신청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엄청난 거액을 나누어 갖게 되었고, 마리아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영리함에 만족하고 있었고 만사가 계획대로 성공한 것을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축하하면서 친구가 보내준 샴펜을 마신 마리아는 보험회사 이상으로 자기 계획의 희생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공범자가 그녀를 배반한 것입니다. 그녀가 마신 샴펜에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마리아는 정말로 진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범죄행위가 발각되어 살인자가 처형되긴 했으나 그것이 무덤 속에 눕게 된 마리아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악마와 악수했고, 이미 죄의 씨앗을 뿌려 놓았고, 그 열매를 자신이 거둔 것입니다.
벌금의 규칙
어떤 유태인의 회사에서 유태인 사원을 고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회사의 공금을 갖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유태인 사장은 노하며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회사의 간부가 내게로 와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라고 의논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돈을 갖고 도망쳤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만약 그가 정말 갖고도망쳤다고 하여도 경찰에 고발하면 형무소에 들어갈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유태인이 취할방법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감옥에 들어가면 회사는 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유태의 법률로서는 누군가가 돈을 훔쳤다고 하면 그 사람은 감옥에 가지 않고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를 찾아내서 감옥에 넣기보다는 먼저 돈을 돌려주게 하여, 그것에 덧붙여 벌금을 내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돈을 갖고 도망친 유태인 사원을 찾아내어 이 이야기를 하자, 자기에게는 돈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경찰에 가지 않고 내방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기보다는 일을 하며, 일한 것 중에서 분할지불로 되돌리기로 합의가 되어, 내가 재판장이 되어, 그는 횡령한 돈을 일해서 갚음과 동시에 벌금을 내게 물게 하도록 결정하여 그 벌금은 자선 자금에 보태기로 하였습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예컨대 A라는 사람이 백만 원을 훔쳤을 경우,랍비의 재판에 걸려서 유죄가 되고, 벌금을 가해서 백십만원을 갚으라는 판결이 내렸다고 하면 그 사람이 그 백십만 원을 갚은 후에는 그에게는 전혀 전과(前科)가 없게 되고, 결백한 사람과 똑같이 됩니다. 횡령당한 쪽에서 그 사람을 돈을 횡령한 놈이라고 말한다면, 욕을 한 쪽이 나쁘게 됩니다.
벌금은 대체로 20% 이상인데, 이것은 엄중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무엇을 훔쳤는가 하는 것도 관계되며 그것을 써서 돈을 벌었다든가, 밤에 훔쳤는가, 낮에 훔쳤는가, 아침에 훔쳤는가,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경우가 달라집니다
탈무드에서는 말(馬)를 훔쳤을 때에는 벌금이 매우 많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써서 돈을 벌 수가 있으며, 도둑맞은 쪽은 아주 곤란을 받기 때문입니다. 현대라면, 이에 해당되는 것은 트럭이겠지만 이 경우는 400% 가량의 벌금을 물게 합니다. 일반적으로 당나귀쪽이 말보다 벌금이 적다. 말쪽이 온순하고 훔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훔친 사람의 입장도 감안됩니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20% 정도로 적은 벌금이 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벌금이나 돈을 물지 않거나 금리를 지불하지 않거나 하면, 관청에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악의 경우는 감옥에 넣게 되는데 근본적으로 감옥에 넣어서는 문제나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유태인 사고법입니다.
진퇴양난
옛날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깊은 산속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잠시 산속에서 쉬고 나서 지팡이를 찾다가 뭔가 손에 물컹한 것을 쥐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깜짝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지팡이가 아니라 호랑이 꼬리였습니다. 호랑이는 낮잠을 잘 자다가 선비가 꼬리를 건드리는 바람에 잠이 깨어 하품을 늘어지게 하였습니다. 순간 선비는 놀라 꼬리를 두 손으로 꽉 쥐었습니다. 그제야 호랑이는 선비가 있는 줄 알고 덤비려 했습니다. 그러나 꼬리가 빠지지 않아 으르렁거릴 뿐 덤빌 수가 없었습니다.
선비는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더욱 꼬리를 있는 힘으로 다해 잡았습니다. 이때 선비의 몸에서 땀이 비오듯 했습니다. 이럴 때 누가 도와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아무리 사람을 불러도 아무도 주위에는 없었습니다. 한참 뒤에 삿갓 쓴 스님 한 분이 걸어왔습니다. 선비는 소리를 지르며 빨리 불러댔습니다. 스님은 무슨 영문인 줄도 모르고 급히 다가왔습니다. 이때 선비가 "여보시오 스님, 여기있는 이 지팡이로 호랑이를 좀 잡아주시오."라고 말하자 스님은 "옛부터 불자는 살생을 하지 않는 법이오." 하였습니다.
선비는 더욱 몸이 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럼 여기 와서 이것을 잠간만 잡고 계시오. 내가 호랑이를 잡겠소."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그것도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비심이 있는 스님은 하도 선비가 애원하는 바람에 선비 대신 꼬리를 잡고 있기로 하였습니다. 이때야 마음이 놓였는지 선비는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봇짐을 둘러매고 그냥 떠나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여보시오 젊은이, 그러면 처음 약속과는 다르지 않소, 빨리 호랑이를 잡으시오." 하고 외쳤습니다. 상황은 역전되어 오히려 스님이 이제는 몸이 달았습니다. 그때 선비는 자기를 웃기던 스님 말이 생각나서 "스님 저도 짐승들을 함부로 죽이기가 싫습니다. "라고 말하며 선비는 총총 걸음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제자의 판결
한 꼬마가 어렸을 때, 그의 여 선생님은 오후 늦게까지 수업중에 이야기한 꼬마들을 교실에 남게 하여 "나는 수업중에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라는 말을 50번씩 흑판에 쓰게 하였습니다.
많은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그 꼬마들 중에 한 사람인 판사가 되어 법정에 들어섰습니다. 그때 그 판사는 놀랐습니다. 과속차량 운전으로 어렸을 때의 여 선생님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도는 간단했습니다. 10달러의 벌금형에 "나는 속도 제한을 넘지 말아야 합니다. "라는 글귀를 100번씩 쓰고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올바르게 사랑하는 자는 올바르게 벌을 준다
(중세 라틴 격언)
인간은 일반적으로 악이 가져오는 처벌보다는 오히려 악 자체의 더러움으로 인하여 자연히 악을 피하기가 쉽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논리학)
사랑할 줄 아는 자는 벌할 줄도 안다.
(프랑스 속담)
가혹한 매는 산 것을 전율시키고, 연약한 매는 경멸을 받고, 적당하게 매를 다루는 자는 존경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현명한 견식을 갖고 사용하는 매는 백성에게 성법 · 실리 ·애욕을 향수시키기 때문이다.
(K. 카우틸랴/ 실리론)
나의 최고의 목적은 제때에 범죄에 알맞는 처벌을 하는 것이다.
(W.S. 길버트/ 미카도)
서당 아이들은 초달(楚淺)에 매여 산다. <*벌이 업해야 비로소 질서가 잡힌다는 뜻>
(한국 속담)
아무리 악하고 미워서 견딜 수 없는 적이라해도 죽음 이상의 벌을 주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아무리 독하고 악한 사람이라 해도 죽음 이상의 벌을 받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는 이름이다.
(장용학/ 요한 시집)
천벌은 늦게라도 반드시 찾아온다.
(노자)
벌을 받아 재판소에서 벌금을 물었거든 휘파람을 불며 물러나오너라.
(유태 격언)
몽둥이 세 개 맞아 담 안 뛰어넘을 놈 없다.<*사람은 누구나 매 맞는.것을 참지 못하며 급해지면 뛰는 법이라는 뜻>
(한국 속담)
이 넓은 세상에 악한이 숨을 자리는 없다. 죄를 지어 보라. 이 세상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 것이다.
(R. W 에머슨/ 수필집)
죄는 천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 < * 남의 죄의 벌을 억울하게 받음을 이름>
(한국 속담)
그들은 걸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희망을 갖도록 운명의 벌을 받은 사람들의 그 체념한 표정을 하고서‥‥‥
(C.P.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일로서 조금도 단죄되지 않은 일이 훨씬 많이 있다. 신은 실로 이상한 존재이며, 악과 반역과 함께 선과 자비도 벌을 주는 것이므로, 나는 이, 사람이 하는 악뿐만 아니라 선도 동시에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0.F.0.W. 와일드/ 옥중기)
처벌에 의해서 얻어질 수 있는 광범한 효과는 공로의 증가와 교활한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하는 것이다.
(F.W. 니체/ 도덕의 계보)
뺨을 맞아도 은가락지 긴 손에 맞는 것이 좋다. < * 이왕 꾸지람을 듣거나 벌을 받게 된때에는 이름 있고 지체 높은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낫다는 말>
(한국 속담)
또 죄인은 채찍질하려 하는 자로 하여금 죄지은 자의 영혼도 살펴보게 하라.
그대들 중의 누군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하려 한다면, 그리하여 악의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로 하여금 그 나무의 뿌리를 살펴보게 하라.
그러면 그는 진실로 선과 악의 뿌리, 열매맺는 것과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K. 지브란/ 예언자)
과오에서보다 그것을 벌 주는 속에 더 많은 쾌감을 느끼며 나는 즐거이 나의 육체를 벌하였었다.
(A. 지드/ 지상의 양식)
뺨 맞을 놈이 여기 때려라 저기 때려라 한다. <*벌을 받을 처지에 있으면서 가만히 있지는 않고 도리어 큰소리 친다는 뜻>
(한국 속담)
죄와 벌은 같은 줄기에서 자라난다. 벌이란 향락의 꽃이 그 속에 숨기고 있었던 것을 모르는 사이에 익어 버린 과일이다.
(R.W. 에머슨/ 수필집)
하늘이 못 주신/ 사람 하나를/ 하늘 눈 감기고 탐내 죄/ 사랑은 이 천벌
(김남조/ 사랑초서 · 44)
삶의 백 가지 간난을 견딘다 해도/ 못내 이것만은 두려워했음이라/ 눈 멀듯 보고 지운 마음/ 신의 보태심 없는 그리움의/ 벌이여/ 이 타는 듯한 갈망.
(김남조/ 후조)
평생에 그 하나/ 쓴 안댄 죄를/ 죄 지으려면 그대와 나눠야지/ 마른 날 불벼락의/ 모진 천벌도 그대하고 나눠야지
(김남조/ 사랑초서 · 34)
감싸고 감산/ 백옥의 가슴에는/ 하늘도 못다 헤일/ 정한이랴/ 천형이랴
(김남조/ 곤전도에 부쳐)
그 전날 누군지/ 핏줄기 더운 탓이라던/ 그 말 한마디는/ 백년 형벌을 내다보았음인가
(김남조/ 百葯)
벌하지 마시옵소서/ 진실로 그들을 벌하지 마시옵소서/ 당신 앞에 내가 잘못한 일에 비하면/ 그들 내 앞에서 잘못했음이/ 너무도 적사옵니다/ 주 그리스도 내 넋의 아버지시이여// 어찌 온전키를 바라리까마는/ 산처럼 높아진 잘못 또 잘못이었사오매 핍박과 치욕과 좁혀진 천지가 모두 나를 인하여 죄됨인 줄 아옵나이다.
(김남조/ 죄)
이 병원에서는/ 오래 사는 것이 벌일 때도 있습니다/ 벌로 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정두리/ 사순절입니다, 랍비시여)
반만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 간 이건 그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이더라도
(김남조/ 목숨)
하느님은 알고 있겠지/ 마음까지 검지 않은 형벌로/평생을 울고 있는/ '놋'땅의 백성을/하느님은 알고 있겠지
(황금찬/ 깊은 강-흑인 영가)
설 교 노 트
지옥을 형벌
마25:46
서론
본문 말씀을 통하여 지옥의 형벌에 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두 가지 견해를 지적하며 그 오류들을 바로 잡기를 원합니다. 즉, 영원한 사망이란 단순히 전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형벌 또한 우리가 겪는 단순한 불행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싶습니다.
1. 악인에게 영원한 형벌을 내리심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과 모순되지 않음
(1) 하나님의 성품과 영원한 형벌
인간의 사악한 죄는 형벌의 절대적인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비교해 볼 때 죄에 따른 형벌은 정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악인에 대해 인내를 하시지 않고 형벌을 처하게 한다고 해서 그의 자비로운 속성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닙니다.
(2) 하나님의 성품은 악인에 대해 영원한 형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죄를 싫어하십니다. 죄란 사악한 것이며 가증스런 증오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모양의 죄라도 미워하시며 증오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증오심을 명백히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죄에 대한 끝없는 증오심이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내리십니다.
2. 악인이 받을 형벌에는 끝이 없음
(1) 영원한 형벌이 란 절대적 영원을 의미하는 것이지 단순히 오랜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세상적인 것들이 종말에 처함과 동시에 악인들은 형벌을 받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이 받는 형벌은 단순한 영원이 아니라 세세토록 끝이 없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계 14:11).
성경은 악인의 형벌과 함께 의인이 누릴 영원한 은총과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인의 형벌에 대하여 끝이 없다고 가르칩니다(막9:48).
(2) 영원한 형벌은 하나님이 선포하신 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진리만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진리 아닌 것을 선포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이 경고하신 바를 이루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모순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신 바를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불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순이 없으며 단지 인간들에게 잘못된 견해가 있을 뿐입니다.
3. 악인이 받을 영원한 형벌을 통하여 우리가 얻는 교훈
(1) 하나님은 악인의 형벌을 통해 자신의 손상된 권위를 회복하십니다.
아무리 죄인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고 비웃을지라도 하나님을 악인의 형벌을 통해 진실을 입증하고 명예를 회복하십니다.
(2)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더욱 영광되게 하십니다.
악인이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반면에 하나님은 세상의 의로운 통치자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악인의 형벌을 통해 그의 심판의 의로움이 얼마나 완전하고 치밀하며, 두려운 것인가를 보이시며,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보이실 것입니다.
(3) 성도들에게는 악인과 달리 하나님의 은총이 영화롭게 나타납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깨닫게 되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4) 지옥의 고통을 보게 될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함을 깨닫게 됩니다.
악인이 당하는 지옥의 고통을 통해서 성도들은 자신의 행복이 얼마나 귀중하며 놀라운 가치가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에 대해 깨달음이 없이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끌려가게 될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합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라고 당부하며 우리를 구원하실 분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길 것을 권고하고 싶습니다.
돌로 쳐 죽일 죄
신22:23-24
서론
구약 율법 시대에 시행된 제도는 대단히 엄격하였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엄한 법을 선포하신 것은 그들로 범죄치 않고 바른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시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1. 돌로 쳐 죽일 죄
범죄자를 처형하는 제도가 많은 가운데 사형집행법 중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한 범과자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한 남자나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17:2-5).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성소를 더럽히고 그 자식을 몰렉에게 바친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레20:2-5).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여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고 하였습니다(레20:27).
안식일을 범한 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민15:36).
자식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21:21).
창기노릇한 딸과 통간한 남녀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22'21).
그리고 하나님의 앞에 드릴 노략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자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수7:25).
이외에도 많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것에 해당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돌로 쳐서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께 그 벌을 받게 되는 것이므로 언제나 정결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2. 극형에 처하는 이유
왜 그러한 극형에 처하는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통간하면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남자는 남의 아내(약혼녀)를 범할 간음자이요, 처녀는 침묵으로 승낙을 하였으니 화간(和姦)한 죄입니다.
그때 사회에서는 성도덕이 이렇게 엄중히 다스려졌습니다. 그때 이방 세계, 특히 가나안 땅은 성도적이 극도로 문란하였습니다(레26:10). 그러므로 이같이 엄격한 처벌제도를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들이 악한 이방 풍속에 동화되지 않도록 하시려는 보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죄악이든지 그 사회를 멸망케 할만큼 부패를 드러낸다면 그런 죄악은 극형으로 처단해야 그 사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이 극도로 음란하였기 때문에 지금 멸망을 받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여 다르게 취급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선민이라고 하여 그 잘못을 묵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엄하게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그 죄에 대한 처벌을 공평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론
우리의 죄를 따져 본다면 어쩌면 우리 역시 그러한 극형을 받기에 마땅한 자들일 지도 모릅니다 돌로 쳐 죽이는 극형이 선포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움으로 지키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창자가 땅에 흐르니라
삼하20:10
서론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을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창자가 흘러 나와서 죽은 자가 셋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당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아마사의 경우
아마사는 "무거운 짐"이라는 이름 뜻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과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산 셈입니다. 그는 이스마엘 사람 에델과 다윗의 자매 아비갈과 아들(대상2:17)로 요압의 사촌 동생입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하였을 때,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장노릇을 하였습니다. 그후 압살롬이 죽어서 다윗에서 사면되어 그 군장이 다시 되었습니다(삼상19:13). 그러나 요압에게 시기를 사서 피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압은 아마사를 죽이기 위해 평화를 가장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은 평안하뇨" 하며 인사를 하는 척하며 그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며 요압이 칼로 아마사의 배를 찔러 그 창자가 흘러나와 죽었습니다.
아마사는 다윗을 반역한 죄의 대가를 받은 것입니다.
2. 여호람의 경우
유다의 제 5 대 왕으로 여호사밧의 아들이요 후계자입니다. 그의 아내는 아합 왕의 딸이었는데, 그 아내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처럼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가 그 형제와 방백들을 많이 죽인 것도 아내의 사촉에 의하여서 한 일입니다.
그는 바알우상까지 도입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여호람은 여호와의 형벌에 의하여 악질적인 내장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은 능히 고치지 못하는 병으로 인하여 그 창자가 빠져나와 죽었습니다. 역대하 21장 20절에 "여호람이 삼십 이세에 즉위하여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저를 다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엘리야 선지자의 경고적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3. 가룟 유다의 경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룟출신으로(남방 유다지방) 다른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그 출신을 앞에두어 가룟 유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 사이에서 회계직을 맡았으나 부정행위를 하였습니다(요12:6).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릴 때 낭비하는 것이라고 탓하면서 구제를 주장한 것도 부정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요12:4-5).
그는 나중에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30개에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수난을 보고 후회하여 그 은을 돌려주려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절망 중에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마27:3-5). 사도행전 1장 18절에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고 하였습니다. 가룟 유다 역시 창자가 흘러나와 죽은 것입니다.
결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범한 죄의 값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만은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창자가 흘러나와 죽은 세 사람은 다 죄값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들의 죽은 모습은 다른 죽음보다 가장 비참한 모습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를 죽임
왕상2:25
서론
본문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저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그의 형 되는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습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죽인 것은 아닙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하수인으로 보내어 죽인 것입니다.
어찌하여서 동생이 형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왕된 야심을 노출시켰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학깃입니다(삼하3:4, 대상3:1-2).
그는 왕이 될 야심이 특출하였습니다. 사실 그가 다윗 왕권의 계승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부왕은 노쇠하였고, 암본, 압살롬, 길르아비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아도니야는 그때로 말하면 나이가 제일 많은 왕자였던 것입니다(2:22).
열왕기상 1장 5-6절을 보면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배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다윗도 그가 왕이 되려는 것을 막은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왕이 아직 생존하여 있을 때는 스스로 왕위를 노리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것입니다.
2. 아비삭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별세하기 전에 이미 솔로몬에게 왕위 계승을 선포하였습니다(1:28-31). 그리고 얼마 후에 다윗이 별세하여 정식으로 왕위에 솔로몬이 올랐습니다(12절).
일이 이쯤 되었으면 실각한 아도니야는 근신하는 태도로 조용히 처신해야 하는데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를 통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자기에게 달라고 왕에게 간청해 주기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수넴 여자 아비삭은 누구입니까? 다윗 왕이 노년에 수종들어 모셨던 아름다운 젊은 처녀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왕을 모신 여자이므로 자기에게는 서모의 위치에 있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미색을 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솔로몬의 진노를 받아 죽게되었습니다.
3. 아도니야의 죽음의 의의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 그 주위에서 가장 위험스러운 존재는 아도니야였습니다. 그는 나이로 보아 자기보다 위인 형이요, 또 부왕 생존시부터 왕위에 대한 야심을 너무 노출시키다가 오히려 실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적을 없애려고 아도니야를 죽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위을 견고히 하시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어 나가는 과정입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하매 저가 나가서 시므이를 쳐서 죽게 한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고 하였습니다(2:46). 이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초기부터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계속해 왔기 때문입니다(삼상9:16-17, 10:1).
결론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귀히 여기는 자는 더욱더 그 위치를 견고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는 처단하셔서 벌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위치가 더욱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음
왕하14:3-6
서론
로마서 6장 23절 상반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원칙은 만고불변의 헌법이요, 만인 공동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느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율법입니다.
1. 아마사의 보복
유다 왕 아마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택하였어도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음으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것이 많은 아마샤도 정치를 어느 정도 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아마샤는 나라가 견고하게 되자 그는 자기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보복하여 처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친을 위한 복수는 어느 정도 효도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의 보응, 즉 죄에 대한 벌은 어디까지나 각자 자기가 범한 죄에 대한 삯을 자기 자신이물어야 하는 원리를 말합니다.
남의 죄를 대신하여 내가 벌받을 수도 없고, 내 죄로 인하여 남을 벌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나 자녀간의 관계라도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는 부모가 지고 자녀의 죄는 자녀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단코 자기의 죄를 남에게 전가할 수도 없거니와 또 누가 대신 받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처사이십니다.
사람이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로 인하여 대신 죽으실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죽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은 지금도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3. 그는 모세의 율법대로 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신명기 24장 16절에 "아비는 그 자녀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그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이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것이니라"고 하였으므로 아마샤가 부친의 보복을 할 때에도 그 부친을 죽인 신복들은 죽였어도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에는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출20:5).
개인에 대한 보복적인 죄벌은 당사자에게 국한되지만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결과는 그 자손에게까지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죄도 범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한 죄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에서부터 멀리 떨어지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악인이 장차 받을 형벌
겔22:14
서론
13절에 "너의 불의를 행하여 이를 얻은 일과 네 가운데 피 흘린 일을 인하여 내가 손뼉을쳤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심히 진노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이 장차 받을 형벌에 대하여 경고하십니다.
1.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죄인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1) 하나님은 죄인들을 징벌하심으로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십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하여 거역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짓는 모든 죄악을 잊지 않으시고 모두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인간의 죄악된 모습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영화로운 권세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대적들에게 자신의 권세와 권위를 감추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상된 권위를 그의 무한한 권세로 확증해 보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경멸하는 죄인들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사람과 천사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찬양받기에 합당한가를 선포하십니다.
(3)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죄인을 반드시 굴복시키십니다.
죄인들의 행동은 겸손을 모르고 오만과 가증으로 치장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고답적인 자세가 바로 죄악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죄인들의 오만하고 뻔뻔스런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산산조각이 되어 버립니다.
2.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고 그의 놀라운 권능의 힘이 살아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틀림없이 그의 심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멸시하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은 성경 곳곳에서 밝혀 보여지고 있습니다(신7:10, 32:41, 출34:5, 나1:13).
하나님은 무서운 징벌로 악인들에게 경고하시지만 죄인들은 다만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헛되고 어리석은 자긍심에 빠져있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예정된 형벌에서 자신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당할 수 없습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할 힘이 없으며 그들을 억압하실 하나님의 권능에 저항할 능력이나 세력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결코 하나님께 울부짖어도 하나님을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죄인들은 중보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결코 도망칠 수 없으며 지옥의 영원한 흑암 사슬에 매여 있게 될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죄인들이 극에 달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안식처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구원을 바랄 수가 없습니다.
4. 회개치 않는 죄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견뎌낼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재난을 만나면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만났을 때 적어도 그 재난에서 자신을 구제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정신을 무장하고 가능한 한 그 재난을 참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죄인들은 지옥의 고통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힘은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론
죄인들이 장차 받을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구제할 수도 없고, 또한 견딜 수도 없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영원한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죄인들의 영혼은 소멸되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참혹한 고통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 반드시 임하게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국의 조롱거리
겔22:4
서론
성도가 범죄하고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면 결국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조롱이란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이니 이웃이 알아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만국인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국이 알도록 된 죄는 무엇이기에 조롱거리가 되었습니까?
1. 만국이 알도록 된 죄
본문에 "네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년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죄는 밖으로 나타나는 공개된 죄와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인들의 죄는 선지자, 제사장, 방백, 일반 백성들 할 것 없이 모조리 범죄하였던 것입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실입니다. 공개된 일이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국의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이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큰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에도 또 다른 깊은 뜻이 계시니 그렇게 되어야 이방의 다른 민족들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두렵게 생각하여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조금도 착오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벌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죄를 범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서 조롱거리가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불신자보다 낮아지는 죄벌
하나님을 공경하는 신자들은 맡은 바 은혜를 감사하고 보답하여 순종하며 살아야 할터인데 범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으면 그 결과는 하나님께 벌받아 더욱 낮아지고 맙니다. 어디까지 낮아지겠습니까? 불신자들의 위치보다 더 낮아집니다.
불신자는 불신자인고로 범죄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범죄하여서는 안 되는 위치에서 범죄하니 낮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에서는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세상의 소금과 빛의 책임이 있음을 말합니다. 소금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소금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짠맛을 내서 음식을 조절하고 부패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에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소금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버림을 당하여 밟히게 되는 것과 같이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성도라도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믿음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서 불신자의 박해를 받으면 이는떳떳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범죄하므로 불신자의 조롱거리가 되면 하나님 앞에 더욱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결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애굽에 가서 노예가 되었고, 왕을 구하므로 허락하여 왕국시대가 이루워졌으나 또 역시 범죄하여 이방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방 유다는 바벨론에게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각기 포로가 되어 70년간 고생하였으니 만국의 조롱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변 심
성 경 활 용
1. 변심에 관한 성경에서의 표현
(1) 여호와를 떠남
(왕상11:9)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2) 굽은 길로 치우침
(시125: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하시리로다
(3)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침
(갈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세상으로 돌아감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5) 사단에게 돌아감
(딤전5: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2. 변심을 하게 되는 이유들
(1) 서로 다툼
(출17:2)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여호와를 시험하느냐
(2) 교만한 마음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
(3) 욕심이 발함
(시106: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4) 물질에 대한 사랑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5) 환난과 핍박
(마13:21)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3. 변심자가 얻게 되는 결과
(1) 여호와께서 버리신다.
(민14:43)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2) 행악자와 함께 다니게 된다.
(시125: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3) 자기 행위대로 보응을 받는다.
(잠14:14)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4) 토지의 소산이 없어진다.
(렘8: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5) 하나님께서 손을 펴서 별하신다.
(렘15: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음으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6)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관련원어풀이
1. dr'm; 마라드
반대하다, 배역하다, 항거하다.
(창14:. 4, 왕하18:7)
2. hr;m; 마라흐
(1) 항거하다, 배반하다, 불순종하다.
(신21:18, 시78:8)
(2) 항거하다, 반대하다.
(욥17:2)
설교예화자료
자기의 함정에 빠진 여우
당나귀와 여우가 서로 친구가 되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돕고 실기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어느 날,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산의 모퉁이를 돌아서려는데 길 한가운데 신 사자가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앗, 사자다. "
"큰일이구나, 이거 어쩌면 좋을까!"
당나귀와 여우는 도망도 못 가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낸 여우는 재빨리 사자에게 다가가.
"사자님, 저를 살려 주신다면 저 당나귀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여우는 당나귀를 죄어 근처에 있는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사자님, 이제 저는 가도 되겠죠? 당나귀는 함정 안에 가두었으니 도망가지 못할 터니까요."
여우가 돌아서려고 하자 사자가 여우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못 간다. 당나귀는 도망갈 염려가 없으니 나는 너부터 잡아먹겠다. " 하며 사자는 여우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약속
아름다운 아가씨가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잠간 혼자서 산책을 하고 있는 사이에 길을 잃어버려서 우물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목이 말랐으므로,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올라가지 못해서, 사람 살리라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때마침 한 젊은 청년이 지나가다가 그녀를 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을 맹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젊은 청년은 먼 여행 길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어,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서 서로 성실을 계속 지키도록 약속했습니다. 그녀와 그는 결혼할 수 있는 날까지 언제까지라고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약혼을 했는데, 누구에겐가 증인을 부탁하자고 그가 말했을 때 때마침 족제비가 지나가면서 저 건너 숲 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녀는
"지금의 족제비와 우리 두 사람 옆에 있는 우물이 증인이예요."라고 말하여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몇 년인가 지나서도 아가씨는 계속 정절(貞節)을 지켜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 청년은 먼 나그네길에서 딴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놀다 지쳐서 풀 위에서 잠들어 있을 때, 족제비가 잠들고 있는 아이의 목을 물어뜯어 아이가 죽어 버렸습니다. 양친은 매우 슬퍼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또 한 아이가 태어나, 두 사람은 다시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내 아이가 조금 크게 자라서 바깥을 걸어다닐 수 있게 되자, 우물가에 오게 되었습니다. 우물물 속에 비친 여러 가지 그림자를 재미있게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 아이는 우물에 떨어져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부친은 옛날 아가씨와 맹세했던 약속이 생각나고, 그때의 증인이 족제비와 우물이었다는 것도 생각해 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이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아가씨가 있는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아가씨는 계속 혼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잔혹한 아내
동독에 사는 곡예사 호스트 클레인이 삼엄한 긴장 속의 경계선을 기어서 18개월 전 서베를린으로 대탈주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면서 동베를린으로 돌아오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호스트 클레인은 동베를린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즉시로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노역을 해야 한다고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를 유혹하여 사로잡히게 한 그의 아내는 그와 이혼을 해버리고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히만도 진실한 신자였을까?
죽음에 처했을 때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수께끼를 남기고 갔습니다. 6백만의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으로 기소된 56세의 전 나찌장교였던 그는, 14년 된 신생 이스라엘 국가에서 처음으로 교수형을 받은 인물이었습니다.
텔 아비브 근교의 랍레 감옥에서 아이히만의 형집행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향해 그는 외쳤습니다. "독일이여 영원하라.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전쟁과 내 조국의 깃발의 법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
그가 죽기 몇 주일 전, 예루살렘에 있는 복음교회를 담임하는 위니펙의 윌리엄 훌 목사가 아이히만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에 "여러분, 얼마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왔고 이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 하고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믿음을 재확신하면서, 나찌에 몸담은 동안 교회를 떠났던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변덕스런 군중과 포시온
역사 속에 잊혀진 사람으로 포시온이라는 그리스의 군인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출전하여 마세돈의 필립을 무찌르고 비잔티움에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군중들은 포시온을 환영하기 위하여 아테네의 거리에 몰려들었습니다. 포시온의 측근들은 그가 군중들의 기분을 맞추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포시온이 말했습니다. "저들은 내가 교수대에 오를 때에도 저처럼 좋아할 것입니다. " 그 후로 포시온은 자신에게 어떠한 명예가 주어져도 군중에 대한 경멸의 태도를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포시온은 그의 논지를 들고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포시온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자마자 우뢰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환호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포시온은 그의 측근들을 돌아보며 "내가 그매 괜한 말을 했나보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빗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그에게 독약을 먹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포시온의 비참한 최후를 애도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를 추모하는 포시온상을 세웠습니다.
어록·시·묘사
변심과 정열의 유일한 차이점은 변심이 정열보다 약간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 뿐이다.
(0.F.0.W.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진실한 사랑을 배반당하는 것이 천 년의 화형보다 더 고통스럽다.
(J. 헤이/ 여자의 사랑)
남자가 맹세하면 여자는 배반하는 것이다.
(W. 셰익스피어/ 심벨린)
여자의 마음은 4월의 일기처럼 변하기 쉬운 것이다.
(서양 격언)
여자가 배반할 때의 최초의 징조는 그 남편에 대하여 옛날과 같은 예의 바름과 주의 깊음을 되돌리는 데에 있다.
(알랭/ 행복어록)
인간은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허영심이 강하고 변심을 잘하고 불안한 주제이다. <*그리스도가 성찬에 내재한다는 설에 대한 그의 의견을 질문받고 한 대답>
(M. E. 몽테뉴/ 수상록)
배반당하는 자는 배반으로 인해서 상처를 입게 되지만, 배반하는 자는 한층 더 비참한 상태에 놓여지게 마련이다.
(W. 셰익스피어/ 심벨린)
변덕이 죽 끓듯 한다. <*몹시 심하게 변덕을 부린다는 말>
(한국 속담)
사물에는 여러 가지 성질이 있다. 그리고 마음속엔 여러 가지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마음에 나타나는 것이란 단순한 것이 도무지 없고,또 마음도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결코 단순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동일한 사물에 대하여 울기도 웃기도 하게 되는 것이다.
(B. 파스칼/ 팡세)
설사 친구가 당신을 배반했다손 치더라도 당신은 그 친구의 욕을 해서는 못쓴다. 오랜 동안의 우정이 무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J. M. 싱)
우리는 남에게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변덕스럽다.
(M. E. 몽테뉴/ 수상록)
자기의 자유를 잃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배반하고 신의 명령에도 배반한 인간이다.
(G. 마치니)
인간의 변덕에는 강박성, 혹은 남의 설(說)은 다 받아들이는 정신의 허약성에서 오는 것도 있다. 그런데 하나, 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일이 싫어지는 데서 오는 변덕이 있는 것이다.
(F. 라 로슈푸코/ 잠언)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마음이다.
(소포클레스/ 아이스)
사람은 배반하기를 좋아하면서 배반자를 증오한다.
(아우구스투스)
변하지 않는 친구를 구하려거든 무덤으로 가라.
(러시아 속담)
가시리 가시리잇고 나는/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세라/ 위 증즐가 태평성대// 셜온 님 보내옵노니 나는/ 가시는 듯 도셔 오쇼셔 나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
(가시리)
만약 당신이 배신당하면/ 더욱 성실함을 보여주어라/ 괴로움이 심하거든/ 거문고를 타라.
(H. 하이네)
마음 변한 애인의 입술에 눈물의 키스를//드리나니/ 값없이 드리나니// 돌리소서/ 망설이지 말고 돌릴 등/ 되돌리소서.
(나태주/ 기도 · 2)
내 미묘한 입은 배반하여‥‥ 물 위에 사상의 꽃을 그리고.
(P. 발레리/ 나르시스 단장)
친구에게 배신당해 마음이 아플 때/ 저는 당신께 기도로 부르짖었습니다. / 공의를 기대하며 당신께 손을 내밀었습니다. / 그러나 당신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 친구에게 배신당해 마음이 아플 때/ 저는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 사랑하고 용서하려고 기도했습니다. / 그러자 당신은 다가와서 제 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헬렌 A. 스트릭랜드/ 심령의 변화)
아 신성한 청년의 패기/ 어쩌면 그것이 그렇게도 빨리 순화되어 버렸는가/그리고 너는 완전히 열기가 식어/ 천상의 신과 화해해 버렸나//‥‥ 아 너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던 것이다. / 저 슬레겔과 하라와 버크의 것을/ 어제까지만 해도 영웅이었던 인간이/ 오늘 갑자기 배신자가 되어 있구나.
(하이네/ 변절자에게)
굳은 언약 깊던 의(誼)로 홀연변개(忽然變改) 무슨 일고/ 조화로운 저 마음을 어리석어 믿었고야/ 두어라 전공(前功)이 가석(可惜)이 나 홀로 어이.
(河順)
앞 남산 바위 틈에/ 언약초를 심었더니/ 피는 꽃이 무슨 꽃고/ 이별초가 만발했네
(공주지방민요)
어제까지만 해도 사랑어린 목소리로/ "잊지 말아요" 속삭이던 사람/ 오늘은 벌써 불어예는 바람뿐.
(아흐마또바/ 이별)
그대 굳은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에/ 나는 다른 이들과 사귀었노라.
(W.B. 예이츠/ 굳은 언약)
이 쓸쓸한 땅에서/ 울지 않게 해 주십시오.// 쓰거운 쓸개 입에 물고서/ 배반자를/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날이 높아가는 하늘처럼/ 맑은 물처럼/ 소슬한 기운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허영자/ 가을기도)
사랑스런 여인이 남자에게 몸을 맡기고/그가 배반했음을 때 늦게야 알았을 때/ 무슨 주문있어 그의 우울 달래주고/무슨 재간있어 그의 죄를 씻어줄까.// 그의 죄를 가리고 뭇사람의 눈으로부터/ 그의 수치 가릴 단 하나의 재간은/ 배반한 남자에게 뉘우침 주고/ 그의 가슴 아프게 후벼줄 단 하나의 재간은-죽는 것 뿐.
(골드스미드/ 노래)
소녀는 울고 있었다. / 우는 것이 당연하였다. / 무정한 님의 모습을 너무 오래 볼 수 없었다// 소녀는 너무나 어린 나이에 버림받았다/ 버림받을 나이조차 있을 것 같지 않게 버림받았다// 배신한 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에/ 울고 있는 소녀를/ 달님이 발견하고/ 햇님이 버리고 갔다. // 언제나 정염에 정염을 낳게 하고/ 기억에 기억을 낳게 하고/고통에 고통을 낳게 하면서/ 소녀를 버리고 갔다.
(L. 공고라/ 단시)
퀴퀴한 해풍에 날리는/ 갑자생의 옛 기억/소금비에 저버린/ 벚꽃,/ 변절한 양심
(이승록/ 목포)
설 교 노 트
요나의 변심
욘1:1-3
서론
여기 요나가 마음을 돌이킨 것은 우리들 전체로 보아도 타당할 것입니다.
요나는 환상적 인물이나 가상적 인물이 아니라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출생지는 유대 스불론 지방에 위치한 갓헤벨이고, 그의 부친은 아밋대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 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이방 나라의 선지자가되었다고 합니다.
요나는 이성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 마음이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요나가 변심한 내용
(1)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산중에서 만난 호랑이나, 거리에서 만난 채권자는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낮은 피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영역을 탈출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만 계시고 이방 세계는 안계시는 줄 알고서 이스라엘을 떠나다시스로 도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증거하기를 하나님은 이 우주상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역 아닌 곳이 없다고 전제하고 하나님을 피할 공간이나 장소는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사명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분부하신 사명을 포기하고 도피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명 포기는 세 가지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거부죄요, 하나님의 맡기신 직분과 직책 거부죄요, 선지자로서의 본분과 의무 불이행 죄가 됩니다.
이와 같이 요나가 하나님의 낮을 피하고, 그 영역을 탈출하여, 사명을 포기하고 도망간 근본 원인은 요나의 위선과 교만이요, 주관적인 안일 추구요, 과격한 적개심 등입니다.
2. 요나가 변심한 결과
(1) 큰 풍랑을 초래했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풍랑은 요나의 길을 막고, 요나를 체포하여 요나의 착각을 시정하여 주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요나는 풍랑 속에서도 배밑에서 잠을 자고 있었으니 이는 큰 잘못입니다. 이는 자기 안일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요. 나아가서는 선한 일에 비 협조하는 부덕한 자요, 철면피한 자로 타락된 증거입니다.
(2) 깊은 바다 속에 던지워졌습니다.
요나는 마침내 바다 속에 던지워지고야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도피할 수도 없고, 그 영역을 탈출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사명을 포기할 수도 없다는 증거요. 실물 교훈입니다. 요나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많은 물질을 손해케 하고, 많은 노력과 시간을 낭비케 하고, 마침내 깊은 바다에 던지워졌습니다.
(3) 큰 물고기 밥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물 속에 던지워지면서 큰 물고기 밥이 되어졌습니다. 이 물고기는 하나님의 예비해 놓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증거요, 재등용하려는 증거요. 요나로 헌신케 하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고기 배 속에서 자기의 변심을 깨닫고 재훈련을 받았고 충성을 다짐하게 되어 마침내 살아나와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요나 한 사람의 착각은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많은 손해를 가져왔으나 요나 한 사람의 회개와 헌신은 많은 사람의 유익을 가져왔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여 영광을 돌리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착각을 시정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신자의 바른 생활태도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1-5
서론
모세는 주전 1,300년경 애굽 동북 멤퍼스 근처의 비천한 히브리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버지는 레위 지파의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요게벳이었습니다. 그는 아론과 미리암의 동생이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 손에서 자라나게 되었고, 바로의 궁중에서 40년 동안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으며,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영적인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가 80세 되던 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첫번째 말씀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풍습은 거룩한 곳, 특히 하나님의 전에서는 신을 벗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 우리들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면서 그 뜻이 무엇인지,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서 돌아서라는 뜻입니다.
발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지혜와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만든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 12절에 보면 모세가40세 때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춘 사실이 기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입니다. 자기 힘으로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하다가 살인을 하게 되어서 쫓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수단과 방법을 신을 벗어 던지듯이 벗어버리고, 맨발로 서듯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마음이 변하여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으로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노예의 태도를 취하여야 합니다.
존경과 복종을 표시하는 행위로써 노예와 같이 상대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위반하지 않는 것의 표시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남의 위에 서기를 좋아하고, 존경받기를 좋아하며, 명령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낮은 단계에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먼저 주를 모시고 노예의 태도로써 쓰여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일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이실 것이며, 주의 자녀임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3.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신은 땅을 더디고 다녀서 더러워진 것이니, 그것은 모세의 모든 행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신을 벗듯이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골3:9). 그리고 우리의 행한 바를 전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만 돌이킨다고 하여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다 하나님 앞에 고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일꾼으로 쓰임을 받기 전에 모세는 먼저 그의 발에서 신을 벗어야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버리는 것이고, 노예의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며,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의 발에서 신을 벗어 던져 버린 후에야 위대한 새 역사를 이룩할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망케 말라
사5:1-7
서론
이사야 선지는 포도원 노래를 중심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실망케 한 내용을 지적하였습니다.
본문 7절에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는 사람은 유다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성을 다해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좋은 열매를 맺기를 바랐지만 들포도를 맺으므로 실망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실망케 한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배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만큼 보답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반함으로 실망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신 내용은, "기름진 산에다가 땅을 파고 돌을 제하여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애굽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복지로 이주시켰다는 말입니다.
이 은혜를 세 가지로 분석합니다.
(1)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은혜입니다.
이는 만백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와 백성으로 성별을 받은 은혜입니다.
(2) 사망에서 구속함을 받은 은혜입니다.
조상들로부터 유전되어 나오는 원죄와 자범죄로 죽음에 이르게 된 사망의 영역에서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3) 천국에서의 영생함을 받은 은혜입니다.
지옥의 영역에서 천국으로 이주하여 영생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귀한 은혜를 감사하지 아니하고 저들의 교만과 욕심과 향락을 따라 살면서 변심하여 배은망덕의 길을 감으로 하나님을 실망케 했습니다.
2. 하나님의 크신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좋은 포도를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기대에 어긋났다는 뜻입니다. 여기 들포도는 히브리어 원문에 "뻬우쉼"이라고 하는데 그 열매는 작고, 맛은 시고, 냄새는 좋지 못한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기대에 어긋남으로 하나님을 실망케 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만큼 보답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직책과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민으로써의 본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주님을 기만하는 위선이고, 주님의 요구에 불응함이요, 자신의 본분과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공경할 의무와,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와 하나님의 성업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 마음을 바꾸어 의무를 저버림으로 하나님을 실망케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범죄함으로 실망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이기적인 탐람죄를 범하였고, 사치하며 방탕한 죄를 범했고, 정의를 짓밟고 부정 부패한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실망케 하였습니다.
결론
선민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며, 말씀따라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하나님 의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하면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병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병의 여러 종류들
(1) 염병
(신28:21) 여호와께 네 몸에 염병이 들게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2) 폐병과 열병
(레26:16)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3) 종기와 치질
(신28:27) 여호와께서 애굽의 종기와 치질과 괴혈병과 개창으로 너를 치시리니
(4) 괴혈병
(레21:20) 곱사등이나 난장이가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5) 정신병
(신28:28) 여호와께서 또 너를 미침과 눈과 경심증으로 치시리니
(6) 악창
(욥2: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나게 한지라
(7) 질병
(시28: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8) 온역
(왕상8:27)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9) 중풍
(마8.6)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행9: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
(10) 혈루증
(마9: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11) 고창병
(눅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12) 창질
(딤후2: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13) 이질
(행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었거늘
(14) 문둥병
(민12:10)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2. 병이 생기는 이유
(1) 하나님께서 발하게 하심으로
(레14:34)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에 너희가 이른 때에 내가 너희 기업의 땅에서 어느 집에 문둥병 색점을 발하게 하거든
(2) 범죄하므로
(시107: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3) 죄의 징계로
(왕하15:5)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4) 하나님의 섭리로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5) 물질을 탐하므로
(왕하5:27)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
(6)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
(요11: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7) 사단의 시험으로
(욥2: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나게 한지라
(8) 세속적 근심으로
(전5:17) 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9) 술로
(호7:5) 우리 왕의 날에 방백들이 술의 뜨거움을 인하여 병이 나며
(10) 영적 환상으로
(단8:27) 나다니엘이 혼절하여 수일을 앓다가 일어나서 왕의 일을 보았느니라
(11) 사랑하므로
(아2: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 므로 병이 났음이라
3. 병을 고치는 방법
(1) 하나님께서 고쳐주심
(출23:25)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2) 선지자를 통하여
(왕상17: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3) 예수님께서 고쳐주심
(마8:14-15)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으로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4) 하나님의 긍휼로
(빌2: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5) 믿음으로
(마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6) 장로들의 믿음이 기도로
(약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7) 의원에게
(마9: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 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8) 약으로
(사38:21)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 하였었고
4. 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1) 여호와를 섬김으로
(출23:25)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관련원어풀이
1. hl;j; 할-라
원래의 의미는 "문지르다"이다.
(1) 갈아지다, 매끄럽다, 힘이 마멸되다, 허약하다.
(삿16:7, 사57:10)
(2) 병들다.
(창48:1)
(3) 고통당하다.
(잠23:35)
(4) 아프다, 병들다.
(단8:27)
2. ylij? 홀리
(1) 병, 아픔.
(신7:15,사1:5)
(2) 고통, 슬픔.
(전5:16)
(3) 악, 재난.
(전6:27)
3. hl;j]m' 마헬라
아픔, 질병.
(대상7:18)
4. !y alh}T' 타할루임
병.
(대하21:19, 시103:3)
5. ajsqenevw 아스데네오-
(1) 약하다, 무능하다, 병들다.
(마25:39, 눅7:10)
(2) 경제적으로 모자라다, 가난하다.
(행20:35)
6. ajsqenhv" 아스데네-스
원래의 의미는 "힘이 없는, 약한, 연약한"이다.
(마26:41, 막14:38)
(1) 무력한, 속수무책인.
(갈4:9)
(2) 약한, 미약한.
(고후10:10)
(3) 고통하다.
(고전4:10)
7. mavstix 마스티크
(1) 회초리, 채잭,
(행22:24, 히11:36)
(2) 고통, 괴로움, 질병.
(막3:10, 눅7:21)
8. novso" 노소스
병, 병기.
(마4:23, 행19:12)
9. nvoshma 노세-마
병, 질고.
(요5:4)
10. e[cw 엑코-
(1) 가지다, 죽다, 소유하다.
(히8:3, 계1:6)
(2) 질병이나 병고를 가지다.
(막5:15)
11. kavmnw 캄노-
원래의 의미는 "노력 때문에 피곤하다, 지칠 때까지 일하다"이다.
(1) 피곤해지다, 지치다. 진력하다.
(히12:3, 계2:3)
(3) 병들다, 수고하다.
(약5:15)
12. a[rjrJwsto" 알로-스토스
힘 없는, 약한, 병든.
(마14:14, 고전11:30)
설교예화자료
귀를 창조한 믿음
남미의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날 한 자매님이 품에 아기를 안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귀가 없는 아기였습니다. 그 자매는 제게 아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기를 안고 아름다운 귀가 생긴 것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까 아기의 귀가 있어야 할 부분에 빨간 혹이 생겨났습니다. 저는 그 아기를 다시 안고 또 한 번 간절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혹이 마치 부채가 펼쳐지듯 확 펼쳐져 예쁜 귀가 생겨났습니다. "
어머니의 기도와 확신
어린 아이가 맹장염으로 수술을 했는데, 맹장을 떼낸 곳의 뒤쪽에 혹이 달려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것이 암의 일종일 수도 있다면서 다시 수술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의 어머니는 하나님께서 그 혹은 떼내어 주실 것을 믿고 교회에 나와서 먼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예배 도중에 나에게 성령을 통하여 계시를 주셨습니다. 설교 후 병자를 위한 기도 시간에 '내일 병원에 가서 수술하려는 사람 중 뱃속에 혹이 난 사람이 오늘 밤에 고침을 받았습니다'라는 나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어머니는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믿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다음날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까 그 혹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어머니가 하나님께서 그 혹을 없애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쳐 주신다"는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믿음이 그러한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자기 상실의 병
자신을 내세우려고 노력하면서도 쉽게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이솝 우화에 보면 「돼지 새끼들의 소풍」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12마리의 돼지 새끼들이 소풍을 가다가 내(川)를 건너게 되었는데, 서로 떨어져서 잃어버리게 될까봐염려를 하여 건너가서 모여 서로 숫자를 세어보니 11마리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큰형이 세어보아도, 둘째가 세어보아도 분명히 11마리뿐이어서, 그 돼지 새끼 12마리는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느라고 꿀꿀거리며 헤맨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자기에 대한 관심의 결여입니다.
우리는 왜 11마리였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미련한 돼지 새끼가 그만 자기는 셈에 넣지 않고 다른 돼지만 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기는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좀 우스꽝스럽고 허황된 것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이솝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려는 진리는 실로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란 곧 우리 생활 가운데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기에 대한 관심의 결여, 자기 상실의 병을 깨우치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의 이야기를 보아도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장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스승에게 나아와 말하기를, "선생님, 제가 오늘 정말 이상한 사람을 다 보았습니다. 글쎄 이사를 가는데 하찮은 세간을 마차에 다 싣고 가면서도 자기 마누라는 잃어비린 채 그냥 갑디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 놀라려니 했던 스승 장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더 이상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글쎄 이사를 가는데 짐이란 짐, 가족이란 가족은 다 데리고 가면서도 막상 자기를 빠뜨려 놓고 가는 사람이 있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장자의 생각이나 이솝의 생각이 다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인간의 자기 상실증을 한탄한 것이며 그것을 비판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아닌가?
치료는 초기에
옛날에 신의라고 하는 유명한 의원이 제환공을 보고 "당신의 피부에 지금 병이 났으니 곧 치료하시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환공은 듣지 않았습니다. 다시 며칠 후 의원이 또 와서말했습니다. "당신의 병이 지금 혈액으로 들어갔으니 곧바로 치료하시오." 그래도 그가 듣지 않으므로 다시 며칠 후에 와서 경고하였습니다. "지금 당신의 병이 이장에 들어있으니 당장 치료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할 것이오." 그러나 제환공은 이번에도 듣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에 또다시 신의라는 의원은 와서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가려 했습니다. 제환공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으니 의원이 대답하기를 "이제는 당신의 병이 골수에 박혔으니 도저히 고칠 수가 없소."라고 대답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제환공은 결국 며칠 후 그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콩고 선교사로 갔다가 간암에 걸려서 사형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목사님이 병고침을 받은 일이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병으로 인하여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내를 시켜 침대를 양지쪽으로 옮겨 놓도록 하고, 따뜻한 햇빛을 받으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선교사로 나가서 일할 정도였으므로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목사님이 읽은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 24절이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심이라" 말씀을 읽던 목사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셨다는 말씀이 너무나 강사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읽어나갔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성령님의 음성이 목사님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인간의 질병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강당하기 위해 빌라도의 뜰에서 무자비한 로마의 군인들에게 등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채찍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대신해서 질병의 형벌을 청산했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것을 믿느냐? "
성령님의 이 음성을 듣자마자 목사님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으로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즉시 부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활기찬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보시오,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내게 말씀하셨소, 나는 이제 간암 환자가 아니오,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정상인이오, 정상인이 드러누워 있을 수만 없지 않소. 이제 나는 새로운 힘을 입어 일어나 활동해야겠소."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님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하나도 의심없이 받아들였으며 긍정적인 마음의 바탕위에서 나았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기적을 기대했기 때문에 곧 그대로 되어 전보다 더 열심히 활동하며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완전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였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병은 이른바 인간필멸(人間必滅)의 마음의 경험이다. 병은 신체에 나타난 공포다.
(에디 부인/ 과학과 건강)
야단스러운 양생(養生) 덕분으로 겨우 자기의 건강을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해 낼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 것이다.
(F. 라 로슈푸코/도덕적 반성)
질병은 천 가지도 넘지만 건강은 단 하나 뿐이다.
(베르네/ 희곡편)
인생은 병이요, 세계는 병원이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들의 의사인 것이다.
(H. 하이네)
병이 양식이다. < * 병들어 누워 있으면 오래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며, 먹지 않으므로 양식이 그만큼 남는다는 뜻>
(한국 속담)
병은 불쾌의 세금이다.
(한국 속담)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밭을 갈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파서 갈아 준다. 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견디는 사람은 보다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된다.
(C. 힐티/ 신서간)
병은 모든 사람의 주인이다. <*사람의 자유는 병에 지배당한다는 뜻>
(영국 속담)
병은 죽음을 준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병은 죽음에 대한 수련인데, 그 수련의 첫 단계는자기 자신에 대한 마음 약한 연민의 감정이다. 사람이란 송두리째 죽어 버리게 마련이라는 확신을 기피하려는 인간의 그 엄청난 노력을 병은 도와준다.
(A. 카뮈/ 제밀라의 바람)
사람은 병을 마음으로 느끼지만 건강은 마음으로 느끼지 못한다.
(영국 속담)
사람은 병을 조기에 알아서 양의에게 일찍 치료를 받으면 병을 고치고 몸을 살릴 수가 있다.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질병이 많다는 것이며, 의사가 꺼리는 것은 치료법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병에는 여섯 가지의 불치가 있다. 그 여섯 가지 중 교만해서 도리를 무시하는 것이 불치의 제 1이다. 몸을 가볍게 여기고, 재물을 중히 여기는 것이 불치의 제 2이다. 의식이 타당하지 못한 것이 불치의 제 3이다. 음양이 오장에서 합병하고 기운이 불안정한 것이 불치의 제4이다. 형용까지 쇠약하여 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치의 제 5이다. 무당, 박수의 말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불치의 제 6이 된다. 이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매우 치료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기열전)
인류에는 세 가지 큰 적이 있다. 즉, 그것은 열병과 기근과 전쟁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가장 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열병이다.
(W. 오슬러)
사람이 태연하게 죽어 가느냐, 혹은 맥 없이 죽어 가느냐 하는 것은 죽음의 원인이 된 병에 달려있다.
(L. C. 보브나르그)
병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의 우정을 잴 수 있게 하며 병이야말로 건강의 가치와 쾌락을 알게 하여 위생과 보건에 기여할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A. 프랑스)
무병이 장자(長者). < * 병을 앓으면 비용이 많이 드니 앓지 않고 사는 것이 곧 부자로 사는 것이라는 뜻>
(한국 속담)
"풍토에 따라 해소병이 있고,풍토에 따라 각기병이 있다. 우리나라로 보면 평안도 · 황해도는 해소병이 많고, 충청도 ·전라도는 각기병이 많은데,사람들은 귀신이 있다 하여 빌고 있으니 진실로 그러한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귀신이 아니라 곧 땅이 행하는 병이다"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땅은 물(物)을 성장케 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어찌하여 독기를 준단 말인가."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대개 풍기(風氣)는 무심한 것이나 이상한 수토(水土)를 만나면 저절로 장독(毒)이 되는데 사람이 만약 마음이 제 몸을 지키지 못하고 부딪치면 자연병이 되고 범하면 혹 죽는 수도 있는 것이지 땅이 어찌 사람을 해할 마음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학질병을 보고는 염제(炎帝)의 아들이 들어서 그리한다 하는데 이것은 귀신인가"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것은 귀신이 아니다. 한열(寒熱)이 고르지 못하여 오장(五諦)이 감상(感傷)되면 이 병이 생긴다. "
(남효온/ 추강집)
병든 사람이란 정상적인 사람보다도 자기의 넋에 보다 가까이 가는 사람이다.
(M. 프루스트/ 즐거움과 나날)
익은 불에 덴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겐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인가 뇌신경인가 어디에 고열의 전기가 통한 듯했다. 일 찰나도 견딜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김동리/ 인간동의)
병은 말을 타고 오나 갈 때는 걸어간다.
(영국 격언)
한 번도 병에 걸려 보지 않았던 사람이 먼저 죽는다. <*늘 건강해서 병을 앓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한 번 병에 걸리면 쉽게 죽는 법이다.>
(영국 속담)
어린애 병은 누에의 잠자는 것 같으니 잠자는 족족 발육의 한 단계를 오르는 도다. 젊은이 병은 청결법 시행과 같으니 북더기 담은 몸은 이 때문에 청신한 맛이 나며 건왕(健王) 한 기운이 돌아 활력이 일단(一段) 충실하며, 의사(意思)가 일층 발랄하게 되는도다. 병이 달려드는 모양은 방상씨(方相氏)같이 흉악하지마는 다녀간 자취는 그다지 괴악하고 버릴 것만 아니니 병이란 말을 듣고 놀라기만 할 것도 아니요, 겁부터 생길 것 아니요, 애만 쓸 것 아니도다. 묵은 북더기를 쓸어 내고 새 활기 얻으려 하는 생리상 개혁 운동인 병은 무서워하는 밖에 진시 다녀갔으면 할 이유조차 없다 할 수 없도다.
(최남선/ 병우 생각)
내가 죽어 내 머리 위에 밝은 사월이/ 비에 젖은 머릿단을 풀어헤칠 때/ 쓰린 가슴 안고 당신이 내 위에 엎드린다 해도/ 나는 상관치 않겠어요.// 나는 평화로울 거예요./ 내리는 비에 가지가 휘는/ 잎이 무성한 나무처럼/ 그리고 지금의 당신보다 더 침묵하고 냉담할 거예요.
(티이스데일/ 상관치 않겠어요)
오늘은 가뭄이 들어/ 온 산이 절반쯤 병이 났는지/ 가는 곳마다 절반쯤 썩는 냄새가 난다/ 병든 산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가뭄의 병으로 서로 입씨름만 한다/ 산도 남자도/병을 씻어낼 물 한방을 나지 않는다.
(김지향/ 가뭄타는 바람)
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을 나는 모든 것을 내 혼자 병들어 본다. 병도 나에게는 한 개의 향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육사/ 청란몽)
병이여 너야말로/ 생각과 같이 자라는/꿈의 현실이니 밤이오니/ 새로이 동화하라
(고은/ 병실연가)
피눈물 나는 눈먼 여인은 별로 말이 없고/ 제 병 얘기도 아니 한다.
(M. 자코브/눈먼 여인)
새끼줄로 칭칭 감겨진 낯선 나무들이/ 엉거주춤 벌서듯 있다/ 등걸마다 링게르를 꽂고서/사람으로 치면 정형외과 병동 같은 풍경
(이근호/ 우상강 지나서)
내 수금과 비올이 버드나무 위에/ 걸려 있다 한들 어떻겠습니까?/내 침상이 무덤이 되고 내 집에/ 어둠이 짙어진다 한들 어떻겠습니까?/ 내 건강한 날이 사라지고 죽은 자들 가운데/ 내가 끼어 누워있다 한들 어떻겠습니까? / 그렇더라도 지금은 비록 시들어 버린 꽃이지만/ 당신의 위대한 힘에 의하여/ 다시 싹이 돋아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헤릭/ 병상에서 하나님께)
앓는 몸이 차츰차츰 회복해 가는 것처럼 신기한 일은 없다. //내 오래 의식하여 본 일 없는 그 인체의 균형과 안정의 자리로 내 몸이 지금 서서히 잡히어 가는 겨울// 눈물겨운듯‥‥/ 산이며 들이며 먼 마을들이 그 본래의 시력과 명암의 자리로 훤히 다가오며 밝아가 는 이 조용한 일정(日程).
(한성기/ 병후)
믿음이 많은 사람들은 가벼운 날개를 달고/하늘나라로 사라져 가는데,// 저녁 나절의 구름들은/ 저 지평선의 가느다란 허리를/ 꿈많은 손으로 안아 주는데,// 나는 문을 닫고/시들시들 나의 병을 앓는다. // 나의 창가에서 까맣게 번지는/ 부드러운 꽃잎의 가장자리여,/네 서느럽고 맑은 이슬과 팥은 손도/ 나를 짚는 이마 위에선 힘을 잃는다!// 나의 병이네 부드러운 살갗에 한 번 스며들면/ 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의 보석들도/ 그 아름다운 눈빛을 잃은 수밖에,/ 바람에 실려 네 품안으로 가던/ 꿈의 쪽지도 청동과 같이 녹슬어 무거운 공중에 걸리고 만다. // 꽃들의 주둥이가/ 젖줄을 빠는 기름진 흙의 나라에서/ 순금의 무게가 백년가약으로/ 가슴 깊이 그 머리를 파묻는 흙의 향기에서/ 내 목숨의 가시덤불은 시들시들 마른다!// 어둠을 기다려/ 박쥐빛 날개로 내 사랑의 메마른 둘레를/ 한 바퀴돌고서는, 다시 돌아와 내 안의 문을 닫고/시름시름 나의 병을 나 혼자 앓는다.
(김현승/ 병)
삭정이 도장지야 단숨에 잘라낸다/ 한 하늘 받든 채로 도모한 생의 경영/ 종기를 수술하듯이/ 오욕부터 도려낸다.
(강호연/ 가지 치듯)
오월이면/ 온화한 햇볕 하나만으로도/ 이민살이 외로운 마음에는 물망초/ 온 몸을 쑤시는 몸살처럼/ 물망초꽃 핍니다.
(김문희/ 오월의 햇볕)
나는 온몸은 그러한 광야 그러한 어둠 그러한/ 목마름이어라!/ 그 밖에 다른 애린이나 슬기로운 휴지들은// 나의 건강을 좀먹는/이제는/ 병 (病)들이어라!
(김현승/ 건강체)
보리 모개가 익어갈 때/노랑 쐐기벌레 몸에서는/ 생피냄새가 흐른다. // 벌들이 모여들어 꿀을 뽑아내지만/ 그것은 비린 체액에 불과할 뿐/ 놈은 이때만 되면 꼭 학질을 앓아 눕고만다. //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몸살로/ 마파람이 불어 을 때마다/ 입술이 타는 갈증으로 떤다.
(조병기/ 밤꽃)
우리가 제작한 판토마임 속에/ 학도병으로 이끌려 가는 별들이/그리워, 못 견디게 처마 밑으로 숨기우는/ 대목을 철저히 잊어버린다 해도/ 우리는 병(病)을 닦고/ 깨끗이 잊고 싶어,/ 다림질한 하늘가에 꽃 한송이 몰래/ 던져주고 싶어,
(최명희/ 그리운 시대에서 · 1)
얼마 전/ 고향의 고가를 처분하면서부터/ 시름시름 앓아 왔다// 내 마음의 가장자리에서/ 보라빛깔의 아픔이 번져와/ 나를 더욱 앓게 하고,/ 그것은 시나브로 나를 때리고 갔다.
(허유/ 설)
그래 진실로 나를 사랑하려거든/ 거짓과 속임수와 위선으로 가득 찬/ 그대 병든 가슴을 죽도록 미워할 것
(서덕석/ 사랑법)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도종환/ 접시꽃 당신)
하늘 땅이 벌레벌레 학질은 앓을 때.
(지 / 이리처럼)
마지막 불꽃도 꺼졌다/ 다만 관절염의 통증만이/ 다시 올 폭풍을 예고하고 있을 뿐.
(렌리 피터스/ 불의 사그러졌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갖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과도를 통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밀려가는 철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도종환/ 섬)
소나기같이 온/ 현기증에/ 이마를 짚고 서면.
(김남조/ 하일)
말은 가지 끝의 잎새/ 생각만이 병으로 깊어져/ 묵언의/ 밑밭 되고.
(김남조/ 허)
창 밖은 사뭇 휘몰아치는 눈발/ 벗은 나뭇가지들/ 찬 바람 속에 흐느끼며/ 거친 등걸 밑에 무수히 금긋는/ 아픔을 앓는 밤이옵기에
(김남조/ 장미를 피우듯)
피가 잉잉거리던 병은 이제는 다 낳았습니다.
(서정주/ 사소의 두번째 편지 단편)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설 교 노 트
깨끗함을 받은 사람
왕하 5:14
서론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추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전에 그로 하여금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문둥병에 걸린 나아만이 깨끗하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발병의 원인
이 문둥병은 우리 인간의 살을 썩게 하고, 뼈가 부서져 죽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러한 질병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성경적인 입장에서 그 원인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미리암의 경우(민12:1-10)
미리암은 모세를 원망하다가 문둥병에 걸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지도자에 대하여 원망한다는 것은, 그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요, 그의 사역을 불평하고 비방하는 행위요, 그 권위를 대항하고 항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도 사람이므로 실수도 하고, 범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처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2) 웃시야의 경우(대하26:16-19)
웃시야는 교만하여 제사장의 일을 월권하다가 문둥병이 발생하였다고 했습니다. 교만은 지위를 이탈하게 되고, 권리를 남용하게 되고, 타인의 주권과 권리를 침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왕은 왕으로서의 책임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제사장의 직책을 침해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게하시의 경우(왕하5:20-27)
물질에 대한 탐심이 문둥병을 발생케 하였습니다. 인간의 탐심은 스승을 속이는 죄가 되었고, 나아만을 속이는 죄가 되었으며,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과 위선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원망과 교만과 탐심이 발병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2. 깨끗함을 받는 비결
나아만의 절망적인 문둥병이 어떻게 해서 깨끗함을 받았습니까?
(1) 히브리 하녀의 권면을 겸손히 받아 순종하였습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남의 권면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남의 충고를 감수하게 되고, 남을 존경하여 그의 지도와 교훈을 받아 실천하게 됩니다. 나아만이 그러했습니다.
(2)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신뢰하고 찾아갔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이 있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아니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아니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슬퍼하지 아니하고 절망적인 비극에 직면해도 칠전팔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신을 쳐서 정복한 일입니다. 여기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을 한 사실은 자기 자신을 쳐서 정복하고 죽이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혈기와 정욕과 교만과 고집과 탐심과 체면까지 모두 요단강 물에 수장하는 행위라고 풀이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에 의해서 깨끗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은 나아만 장군과 같이 신인전에서 겸손히 순종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에게 베풀어져서 큰 기적을 발생시키신다는 말씀이올시다.
결론
문둥병에서 깨끗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를 찾아가서 은혜를 보답하였습니다(왕하5:15). 하나님께 제사드리며 영광을 돌리었습니다(왕하5:13).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여 충성을 다짐했습니다(왕하5:18). 이것이 하나님께 은혜받은 사람의 올바른 생활이라고 하면 우리들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병들어 죽게 된고로
대하32:24
서론
성군 히스기야의 역사를 상고하면 하나님 앞에서나 백성들 앞에서 선정을 함으로 축복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축복된 역사 중에서도 말년의 역사가 유감스럽습니다.
1. 선한 사람도 병들어 죽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다윗도 별세시에 말하기를 열왕기상 2장 2절에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생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선악을 물론하고 빈부를 가리지않고 한 번은 죽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도 병들기도 하며, 착하고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인간의 몸으로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제 아무리 선정을 베푼 왕이라고 하여도 병도 날 수 있고 죽기도 할 것이니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특수한 존재의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도 병이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자가 무슨 병이 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은 병이 날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하여 죽을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2. 왕도 병들어 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사람은 바로 왕입니다. 심지어는 국민들의 생명을 주관하여서 죽일 수 있는 권력자가 곧 왕이기도 합니다. 물론 무고히 죽일 수는 없지만, 남의 생명을 살리고 죽일 수까지 있다는 왕도 자신의 병드는 것은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닥치는 죽음 또한 피할 수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왕 외에 어떤 위대한 존재의 인물이라도 도저히 병마와 사망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학식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영웅열사라 하더라도 자신에게 병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으며, 자신에게 죽음이 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을 어찌 미약한 우리 인간들이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3. 병들어 죽게 된 자의 한 일
히스기야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을 때 한 일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내용이 열광기하 20장에 기록되었는데, 병들어 죽고 살지 못할 지경에서 히스기야가 낮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더니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 네가 3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15년에 더할 것이라"고 하신 기사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 있으며, 그가 부르시기도 하시고, 다시 연장시키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인공되시는 조물주 하나님을 절대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결론
사람은 병든 것이나 건강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칭찬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업을 관철한 사람들
막2:1-12
서론
성경 본문의 내용은 중풍병에 걸린 환자 하나가 건강한 네 사람의 원조를 받아 만병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을 찾아가서 병고침을 받고 구원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하기에 세 복음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취급한 것으로 봅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 예수님을 시기하는 서기관들의 입장에서는 몹시 불쾌하게 여겼으나 많은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였습니다. 어떤 의학박사의 말과 같이 신체에 병균을 보유하지 않은 인생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거니와 인생은 정신적인 면에나 윤리적인 면에도 병균을 보유한 환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병균이 마침내 인생의 건강과 생명을 상실케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영육간에 병들어 죽게 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막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 게라야 쓸데있나니 내가 온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1. 환자를 예수님께로 메고 왔습니다.
여기 네 사람은 환자를 메고 이름난 약방이나 의원을 찾아가지 않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들이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중풍병에 걸려 죽게 된 인생은 예수님을 찾아가서 세 가지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첫째는, 신체의 질병문제를 해결하고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둘째로, 윤리적인 죄문제를 해결하고 죄사함을 받고 인격을 회복하였습니다. 셋째로, 영육간에 사망문제를 해결하고 구원과 영생을 회복하였습니다.
2. 환자를 지붕 위로 운반하여 구멍을 뚫고 달아 내렸습니다.
이것은 초비상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관찰할 때 어드맨 박사의 말과 같이 "우리들이 병들어 죽게된 인생을예수에게로 인도하려고 하면, 재래적인 관습이나 방법을 초월하여 효과적인 방법을 채택해야 된다"고 한 것처럼 초비상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1) 인간의 장벽을 초월하는 적극적 방법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여 기 네 사람은 많은 사람의 장벽을 초월하여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보고나 사람 중심의 신앙의 차원에서 예수 중심의 신앙 차원으로 향상해야 됩니다.
(2) 물질의 장벽을 초월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이는 가옥 한 채의 가치보다는 인간 생명 하나의 가치가 더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마16:26에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중하다고 하였습니다. 돈벌이 위해서 예수님을 버리거나, 물질 때문에 신앙을 포기해서는 아니됩니다.
(3) 인간의 지위와 체면을 초월하는 비상한 방법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에 신앙의 사람은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 인간의 생명 구출을 위해서 자신들의 지위도 체면도 초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론
이 네 사람은 엄숙한 성업을 관철하기 위해,
(1) 합심협력하였습니다.
(2) 수고와 고난을 감수하였습니다.
(3) 예수 중심 신앙으로 관철하였습니다.
병든 인생이 치료받고 사는 길은 예수 찾아 만나는 길입니다.
우리 신앙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합심협력해야 되고 다음은 어떠한 고난도 감수해야 되고 끝으로 실망하지 말아야 됩니다.
건강할지어다
막5:34
서론
혈루증에 걸려 12년간이나 앓고 있었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믿고 그렇게 하였더니 혈루 근원이 곧 마르고 병이 나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로부터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는 놀라우신 축복을 받았습니다.
1. 병이 생기는 원인
이 여인은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이 저주스럽고 수치스러운 혈루증을 12년간이나 않았습니까? 이 병은 부정한 병으로 율법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레15:19-30).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 갔다고 하였으니 이상스럽고 특이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개 사람이 병들어 앓게 되는 원인이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신28:56), 마귀에게로부터(욥2:6-7), 죄로 말미암아(롬5:1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요11:30), 그리고 육신의 피로로 인한 것(빌2:25-30) 등 입니다.
현대는 의학이 많이 발달하여서 병을 잘 고치는 것 같지만, 더욱 이상하고 고치기 힘든 병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병은 언제나 우리의 주위에 맴돌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만병의 의사이십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만민의 생명을 지배하시고 주관하십니다.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물론 죽은 사람까지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심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물주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병자이든지 고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중병자나 장기 환자, 괴질병과 같은 난치병도 주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의 권능과 사랑을 믿으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낳게 하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에게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병자는 누구나 포로 신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자유는 물론 정신적으로 우울하고 근심과 걱정에 눌려 사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병마의 포로가 되어 불안과 공포에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병에서 놓여 건강이 회복될 때 그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니 얼마나 자유스러워지는 것입니까?
그 여인은 12년간이나 고생하였습니다 우리는 사실 한 달만 병으로 앓아도 그 병이 지긋지긋하여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12년간이나 앓으면서 재산을 그 치료에 다 허비하였으나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 병 남는 것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소원이었고, 주님의 겉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비로소 그 병에 해방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우리도 무슨 병에 걸렸든지 그 정도가 어떠하든지 언제나 주님을 믿고, 주님께 간구하여 그 여인과 같이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되어 기쁨으로 사는 생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요11:4
서론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 누이들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병을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고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도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랑하는 자가 병 들었나이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예수님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 들었나이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라도 병드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협된 신자들 가운데는 예수 믿는 사람은 병드는 일도 없고 아프지도 않기 때문에 늘 건강하게 살 것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다른 신자가 병들고 아프면 무슨 특수한 죄 값으로나 재앙으로 인하여 오는 환난이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나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병에 걸리기도 하는 것이며 그 병으로 인하여 죽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도 앓기도 하고 병으로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2.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나사로의 누이들의 호소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병들면 육체가 고통스럽고 아플뿐만 아니라 마음이 불안하고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죽을 병이 아니니 우선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의 머리털까지도세시는 하나님의 예정이 손에 달려 있으므로 겁낼 것도 없고 불안스러울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니 다 맡기고 살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장수하려고 하여도 생명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고, 아무리 병들어서 죽을 것 같은 위협과 불안이 닥친다고 하여도 생명의 한도까지 차기 전에는 결단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의 생을 유지할 것이니 우선 안심하라는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베뢰아에 계셨는데, 나사로의 급보를 연락받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일부러 그 일을 더 유하시다가 늦게야 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장사지낸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썩은 냄새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큰 소리로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나왔습니다. 물론 연락을 받으신 그때에 급히 오셔서 앓고 있는 나사로를 고치셨어도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나,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송장을 다시 살렸으니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인생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계신 권능의 주님이심을 우리는 의심없이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병들거나, 건강하거나, 죽으나, 사나 아무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 것 뿐입니다.
죽을 병을 위하여
민19:14-22
서론
사람이 죽는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의 원인이 되는 것은 질병에의한 것입니다. 병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죽을 병(왕하13:14),깨달을 병, 영광의 병(요11:4)이 있습니다. 그 중에 문제가 되는 것은 죄로 인한 병입니다. 아담이 지은 죄 때문에 모든 인류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한 죄의 병에 걸린 자를 위한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의사가 곧 하나님이십니다.
1. 진찰해보니 모두 중환자입니다.
본문 14-16절에 "장막에서 사람이 죽을 때의 법은 이러하니 무릇 그 장막에 들어가는 자와 무릇 그 장막에 있는 자가 칠일 동안 부정할 것이며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시체를 만지지 않아도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을 병에 걸린 중환자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정하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문둥병자보다도 더러운 죄인들이며, 살지 못할 중환자들입니다.
그 치료는 생명이 되시는 예수를 믿는 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 전염을 막아야 합니다.
본문 17-19절에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취하여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한 자가 우슬초를 취하여 그 물을 찍어서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그 정한 자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그를 정결케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정결케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죽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방법은 예수의 영생수로 씻어내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정결한 예수께서 죽음의 전염병을 몰아내야 합니다(고전15, 53-56). 그를 믿은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은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요11:25-26). 그래서 죽음의 전염병을 예방하는 길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 뿐입니다.
3. 영원한 치료가 필요합니다.
본문 20-22절에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끓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이는 그들의 영영한 율례니라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린 자는 그 옷을 빨 것이며 정결케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부정한 자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치료함을 받는 방법은 회개밖에 없습니다. 회개치 아니하면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만 하면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최선의 치료방법입니다. 치료하지 아니하면 계속 썩어지고 타인에게까지도 전염 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죽을 병을 위하여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문 밖에서 속죄 양으로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도 중한 병자(죄인) 아닌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그 병이 더욱 퍼지지 못하게 하며 치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고침을 받아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문둥병과 같은 죄
레13:1-8
서론
병 중에서 문둥병이 가장 무서운 병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 병은 초기에는속에 잠복하여 있지만 차츰 그 증세가 외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야 되고 나아가서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으므로 격리되어 외롭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것이 문둥병인 것입니다. 죄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를 보면 더럽다고 침을 뱉지만 그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보고 침을 뱉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1. 발병은 속에서부터 생깁니다.
본문 3절에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질병의 원인이 몸 안의 부패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문둥병은 자신도 모르게 발병하므로 밖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고생을 하다가 차츰 외부로 나타나서 육체를 썩어가게 하는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병입니까? 이와 같이 죄도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병균은 피부로도 들어오고, 머리로도 들어오며 이마나 의복을 통해서도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도 지체를 통하여 들어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7장 23절에 말하기를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골3:5). 그리고 그는 또 말하기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고 하였습니다.
2. 증세는 부정한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 것이라 이는 문둥병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은 속히 온 몸으로 퍼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증상은 더러운 것입니다. 병 걸리기 전에는 깨끗하던 몸이 문둥병에 걸리고 보니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이 썩고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빠지고 뼈마디가 물러 나는 참혹한 병이며 더럽고 무서운 병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 앞에 가기를 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도 아주 더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스스로가 나는 부정한 자입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고 죄인은 스스로 나는 더러운 죄인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문둥병 자체가 부정하고 죄 자체가 부정한 것입니다.
3. 결과는 격리되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46절에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한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자는 자신 스스로가 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한 것을 시인하고 타인의 접근을 막아야 하며 또 타인과 접근하지 아니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족과 이별을 해야 하고 동리 사람들과도 이별을 해야합니다. 심하면 동리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없다고 문둥병 걸린 사람을 강제 추방시키는 어쩔 수 없는 피치 못할 비정 아닌 비정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질이 나쁜 사람은 영원히 사회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격리하는 수단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결론
문둥병은 불행을 몰고 옵니다. 부정함을 초래하고 심판을 초래하며 함께 살 수 없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병에 걸린 자는 정결함을 받아서 깨끗이 고침받아 나아만 장군처럼 건강이 회복되어 옛날의 명예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문둥병이 나았으면
레14:1-9
서론
문둥병이 무서운 병이라는 것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병 이든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섬기면 병을 제하여 주신다고 하였습니다(출23:25-26). 그러므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둥병이 나은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1. 제사장의 인정을 받아야 됩니다.
본문 2-3절에 "문둥 환자의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에 나가서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문둥병 환처가 나았으면"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문둥병이 나았는지 아니면 아직도 병을 앓고 있는지 정확한 진찰을 통해서 확인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 병도 고침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예물을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병고침을 받은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예물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병을 고쳐주겠다고 돈부터 요구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죄사함 받은 사실을 먼저 알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순서인 것입니다. 즉,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116:12)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난 후에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시51:1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죄사함 받은 것을 확인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2. 주의 은혜를 잊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 4-7절에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명하여 정한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 잡게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지며"라고 하였습니다. 구속함을 받아 구원의 즐거움에 참예한 자는 감사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백향목은 영생을 상징하고 질그릇은 구원받은 성도를 상징하며 홍색실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권을 상징하며 우슬초는 죄에서 정결케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시51:7). 그리고 흐르는 물은 생명을 상징하고 물과 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요19:34). 그리고 산 새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즐거움 속에서 감사와 찬송과 소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 문둥이를 고쳐주시고 그 중에 감사하는 한 사람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감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섭섭함을 나타내셨습니다.
3.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본문 8-9절에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칠일을 거할 것이요 칠일만에 그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이 낫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은 간단한 절차를 거쳐서 주와 같이 영원한 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영생 복락을 누리며 깔게 되는 것입니다. 구속받지 못한 백성들은 천국의 아름다움을 알지도 못하고 영생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문둥병과 같은 더러운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가야 마땅할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히 살 수 있게 됨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보 호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보호
(1) 지혜와 돈이 사람을
(전7: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전함이니라
(잠4:6)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2) 인자와 진리가 왕을
(잠20:28)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3) 명철이 성도를
(잠2: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4) 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잠13:6) 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케 하느니라
2. 보호하는 주체
(1) 하나님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게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2) 그리스도
(딤후1:12)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3) 성령
(요14:16) 내가 어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4) 성도들
(롬16: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3.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하시는 대상
(1) 예루살렘
(왕하19: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사31:5)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2) 주를 바라는 자
(시25: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3) 성실한 자
(시31:23)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시145:20)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별하시리로다
(5) 하나님 앞에 거하는 자
(시61:7)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6)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신33:12)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7) 주께로 피하는 자
(시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외치며
(8) 성도
(시37:28)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사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라
(9) 하나님을 의탁하는 자
(습3:12)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10) 나그네
(시146:9) 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고
(11) 그리스도를 믿는 자
(유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12) 공평과 성도의 길
(잠2:8)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4. 무엇으로부터 보호하시는가?
(1) 악한 자에게서
(살후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2) 시험에서
(고전10:13)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가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3) 재앙에서
(시57:1)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5.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방법
(1) 새가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사31:5)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2) 날이 맞도록
(신33:12)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맞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3) 사면으로
(대하32:22)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거민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과 모든 적국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사 사면으로 보호하시매
(4) 정직과 성실로
(시25: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5) 인자와 진리로
(시40: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6) 손을 잡아
(사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7) 사자를 보내어
(출23: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7) 능력으로
(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배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9) 항상
(시40:11)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관련원어풀이
1. rm'v; 솨-마르
(1) 보호하다, 보존하다, 안전하게 지키다.
(수24:17, 삼상26:15, 16, 30:23)
(2) 보호케 하다.
(시37:28, 호23:13)
2. lx'n: 나-찰
(1) 벗기다, 치워버리다.
(대하20:25)
(2) 위험에서 채가다, 보존하다.
(겔14:14)
(3) 끌어내다, 갈아놓다.
(삼하14:6)
(4) 치워없애다, 빼앗다.
(창31:9, 삼하20:6)
(5) 채어가다, 구해내다.
(창32:12, 미5:5)
3. rx'n: 나-차르
(1) 보살피다, 주시하다, 지키다.
(욥27:18, 시141:3)
(2) 방어하다, 보호하다.
(신32:10, 사49:6)
(3) 지키다, 준수하다.
(신33:9, 시105:45)
(4) 살피다, 주목하다.
(욥7:20)
4. lxe 첼
(1) 그늘.
(삿9:36, 욥17:7)
(2) 지붕, 방어, 보호.
(시17:8, 사16:3)
5. &k's; 사-카크
(1) 짜다, 엮다. 울타리를 만들다
(욥139:13)
(2) 보호하다, 위를 덮다.
(욥40:22, 140:8)
(3) 덮다, 가리다, 숨기다.
(출25:20, 왕상8:7)
(4) 덮다, 보호하다.
(삿3:24, 시5:12)
6. prostavti" 프로스테티스
여자 보호인, 여자 후원자.
(롬16:2)
7. ajmuvnvw 아무노-
피하다, 막다, 돕다, 방어하다.
(행7:24)
8. sunthrevw 순테-레오
(1) 보호하다, 방어하다.
(막6:20)
(2) 구원을 받다, 보존되다.
(마9:17, 눅5:38)
(3) 마음에 간직하다, 쌓아두다.
(눅2:19)
9. frouorevw 프루오레오
(1) 감시하다, 보호하다.
(고후11:32)
(2) 감금하다, 구속하다.
(갈3:23)
(3) 보호하다.
(빌4:7, 벧전1:5)
10. fulavssw 푸라쏘-
(1) 감시하다, 망보다, 지키다, 수호하다.
(눅2:8)
(2) 주시하다, 파수를 보다.
(눅8:29, 행12:4)
(3) 안전히 머물도록 돌보다, 보호하다, 방어하다.
(눅11:21, 딤후1:12)
(4) 피하다, 삼가다, 도망하다.
(눅12:15, 행21:25)
설교예화자료
시련 속의 동행자
어떤 사람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험난하고 힘들었던 여정이나 가파른 고갯길에는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고, 평지와 낮은 구릉의 평탄한 길에는 마치 나란히 걷기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낮은 구릉과 평지에는 당신께서 저와 동행하여 주시고, 거칠고 험난한 길에서는 저 혼자 걷게 버려 두셨는지 말입니다. "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자네가 만약 편안한 길에서도 나를 필요로 했다면 아마 그 길의 발자국도 하나뿐이었을것이네, 그러나 자네는 힘들고 험난한 길에서만 나를 찾았고,그때마다 나는 자네를 업어서 날랐다네. 그러고 험난한 길이 끝나면 자네는 날 멀리 했네, 그래서 그때는 나는 자네 곁에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네."
하나님께서 홍콩에서 도와주실 것이다.
월터 스원슨(Walter Swanson)은 그의 책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에서 로버트 달러(Robert Doller)의 생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한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 선장이 홍콩의 큰 호텔 복도에서, 영국인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동양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잠깐 방에 들어가서 당신의 계획을 말해 주시지 않겠소? " "미안합니다. " 그 선장은 말했습니다. "저는 알콜 성분이 든 음료는 절대 마시지 않거든요." 그러자 그 혈색 좋은 영국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동양과의 무역을 하겠다면서, 그래 스카치나 소다를 마시지 않겠다는 거요? " "네,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상대방을 술집에 데려가지도 않고, 흥정이 잘 될 것이라고 믿소? "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오! 하나님이 당신을 도와주시길!"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 "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수년 후, 로버트 달러는 그의 명의로 된 10층짜리 빌딩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 빌딩은 샌프란시스코 만 근처에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그의 화물선 밖에서 짐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세계 도처에서 온 것들이었습니다. 술로 인한 함정을 피하였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주님의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소책자들이 총알을 막았습니다.
두 명의 젊은 강도들이 22구경 연발 권총을 이 곳 침례교 목사인 로스 오웬즈에게 두 번발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직자는 조그만한 손상도 입지 않았습니다. 후에 "나는 쓰러져서 죽었구나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대신 그 젊은이들은 오웬즈에게서 1달러 27센트를 강탈해 갔습니다.
경찰이 그 장소로 달려왔을 때 그들은 오웬의 옷에서 구멍 한 군데를 발견했지만 피는 묻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 목사는 품안에서 복음서 책자 한 묶음을 꺼냈고 비로소 그 책 묶음이 총알을 막아주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목사님의 몸 속에 박혔어야 할 그 총알은 그의 셔츠 주머니 안쪽에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야, 그리고 나는 역시 저 두 젊은이들도 그것을 기적으로 믿었을 거라고 확신해."라고 오웬즈는 말했습니다.
어록·시·묘사
이제사 알았습니다/ 머리 위 높이/ 마음속 깊이/ 항상 당신이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해치려는 무리가/ 사방에서 육박해 올 때에도/ 두렵지 않은 까닭을 알았습니다/ 당신 곁으로 가는 순간까지/ 보살펴 주십시오.
(장수철/ 기도)
그대 덕분에 나는 악당들의 적이 되고/ 분노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벽이 되었다.
(네루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우리의 이파리를 적이지 않게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지키소서/ 야훼, 우리 하나님/ 태풍이 몰아쳐도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불이 번져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 우리의 햇살을 전과 같이 함께 하게 하시고/ 우리의 새들도 처음처럼 돌려보내 주소서/ 짓밟는 자에게 생명이 귀함을 일깨워 주시고/ 낫질하는 자의 낫은 녹슬게 하소서/ 야훼, 우리 하나님/ 우리의 땅은 더욱 기름지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버러지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뿌리는 더욱 뻗게 하시며/ 우리의 하늘은 더욱 푸르게 하소서.
(허형만/ 풀잎이 하나님에게)
거친 이승의 바람 속에서/ 죽음같이 진한 사랑으로/ 보호해 주십시오
(이연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
이웃의 잠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는 당신
(다비드 디옵/ 도전)
설 교 노 트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46:11
서론
본 시편 중에서 1절과 7절과 11절에 걸쳐 처음과 중간과 나중에 한 결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늘 보호하시며, 어려운 일을 우리가 당할 때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주셔서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1. 이 세상 피난처는 불안합니다.
이 현실 세상은 인간이 꾸려나가기 때문에 매우 불안하고 나아가서 공포에 떨고 있는 실정입니다.
민족적으로 양단된 국토, 국제적으로는 사상적 대립, 핵무기의 확산, 경제적인 공황, 경치는 천재지변 등은 인간의 힘으로 막거나 없애거나 할 수 없는 무서운 현실을 나타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제나름대로 피난처를 만들어 놓고 무서운 재난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면 핵무기의 폭발에 대비하여 지하대피설을 마련하지만 그 자체가 얼마나 안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견고하게 피난처를 지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피난처가 되지 못하며, 계속하여 보호해 주지 못하는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불안정한 세계에서 피난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말로 사랑으로 보호하시며 안전하게 도우시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신령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하나님만이 우리의 신령한 피난처가 되시니 우리는 그에게 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까?
(1) 병든자의 피난처이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은 만병의 의사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못고치는 질병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병든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2) 가난한 자의 피난처이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자와 동등시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가난을 통하여 멸시나 천대를 받을 때에 위로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리고 있을 때에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보호해 주시는 피난처이십니다.
(3) 외로운 자의 피난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를 환과고독(裏寡孤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디로 가서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들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피해야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4) 쫓기는 자의 피난처이십니다.
정신적으로 쫓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쫓기는 자도 있으며 정치적으로 발 붙일 수 없어서 망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피난처도 역시 하나님의 품안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5) 범죄자의 피난처이십니다.
범죄자는 어디로 도망가서 법망을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지상에서 범죄자가 숨어서 적발되지 않을 안전한 피난처는 없습니다. 오직 죄를 대속해 주시는 구주 예수께 피해야 해결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범죄자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신령한 피난처이십니다.
결론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보호자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피난처가 아니라 나의, 그리고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니 우리는 하나님께로 피해야 하겠습니다.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121:3
서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지키십니까?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성도들을 지키실 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입 니다.
이 말씀은 저들이 오랜 포로생활 중에서 체험한 생생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1. 항상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일찍이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 때 십 황무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밤 자기를 추격중인 사울 왕의 진중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울 왕과 아브넬 대장, 그리고 삼천 군졸이 다 잠들어 있었고, 왕을 지키는 자는 하나도 없음을 보게되었습니다(삼상26장).
다윗은 그런 것을 보고 자기는 졸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켜 주심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된 후에 대낮에 졸고 자다가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졸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더욱 필요하였고 그 은혜가 더욱 고맙게 감사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난 죄악의 자식이 병들었을 때 금식하며 자지 않고 밤을 새워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또 다윗은 졸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위험한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사전에 보호하시고 또 빠졌을 때 화가 미치지 않도록 재난 중에서도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늘 우리를 위험한 곳에서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항상 호소를 들으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언제 어디서 부르짖든 간에 그 호소를 들어주십니다.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이스라엘 민족들은 유브라데 강변에서 멀리 시온을 바라보며 통곡하였고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매일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자기 방의 창문을 열어 놓고 동족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위하여 간구하였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하였던지 사자굴에 던져지는 위협을 받으면서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호소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교훈을 하신 예수님께서도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고 하시면서(눅18:1-18)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도 밤에도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밤에 부르짖는 택한 백성들의 호소를 다 들으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졸지도 주무시 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도들의 간구를 언제나 듣고 허락하십니다.
결론
졸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쉬지 아니하시고 계속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쉬실 수도 없고 중단 당하시지도 아니하시며 항상 일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계속하여 끊임없이 위험에서부터 보호하시며, 재난을 피하게 해주십니다.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창31:24
서론
야곱이 고향과 부모를 떠나 타향살이를 시작한지 어언간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을 것이나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축복도 누렸습니다.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엇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부자가 되어 귀향하는 야곱
20년간 처가살이 끝에 이제는 처자와 우양이 상당한 수에 이르러 제법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장인 라반의 태도가 심상치 않으므로 더 이상 오래 체류하다가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야곱은 단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곧 귀향을 서둘러서 처자와 권속을 거느리고 많은 짐승을 이끌고 수다한 소유물을 휴대하고 떠나면서 자기의 장인인 라반에게는 고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습니다.
그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 즉 집안의 작은 우상까지 도적질해 가지고 도망하여 강을 건너 길르앗 산 밑에까지 와서 장막을 치고 쉬게 되었습니다.
왜 야곱이 이처럼 슬며시 장인의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현몽하심
야곱의 비밀스런 탈출을 3일 후에야 늦게 알게 된 라반은 분노가 충천하여 그 형제들을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에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두 가지로 해석이 되는데, 하나는 라반이 야곱에게 여러 차례 속여서 그품삯을 변경하였기 때문에 책망할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특별히 보호하시고 같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현몽이 없었다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을 것은 분명한 일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야곱
야곱은 고향을 떠나오다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닥다리 계시를 받고 서원하기를 창세기 28장 20-22절에 "하나님 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 서원 그대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것입니다.
결론
라반은 야곱을 만나서 말하기를 "내가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에서 함께 하시는 야곱을 감히 누가 해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신 말씀과 같이 주의 품에 있는 우리를 마귀도 상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알로 도망함
사15:5
서론
본문에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귀인들은 소알과 애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르호나임 길에서 패망을 부르짖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피난처를 찾아 헤매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소알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소알은 어떤 곳입니까?
"소알"의 이름 뜻은 "작은"이라는 것입니다. 소알은 사해 남쪽, 그리고 모압의 동편에 위 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계곡에 있는 성읍들 가운데 하나인데, 동방의 네 왕들의 공격을 받고 주변의 다른네 왕과 더불어 싯딤 골짜기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소알은 계곡에 있는 다른 성음들처럼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리는 여호와의 유황과 불"에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2. 롯이 피하여 간 곳
창세기 19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죄악이 관영된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로 진멸받을 때, 의로운 롯과 그 가족(두 딸)들이 멀리 산에까지 도망갈 수 없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로부터 '작은 성'으로 도피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사실이 있습니다(창19:18-23).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이 "소알"입니다.
그러나 롯은 사실은 그의 아내가 이미 소금기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창19:26) 소알 땅에 거하는 것도 두려워하였습니다. 롯의 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등성의 멸망할 때 뒤를 돌아다보면 안된다고 이미 경고하였는데 그 경고를 어기고 뒤를 돌아다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된 것입니다.
롯은 그래서 그의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두 딸은 자기들의 대가 끊길까봐서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하루는 큰 딸이 동침하고, 다음 날은 둘째 딸이 동침하였습니다.
롯이 큰 딸과 더불어 동침하여 낳은 아들은 "모압"이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은 "벤암미"로 낳아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19:30-38).
3. 소알은 피난지입니다.
본문에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도 모압의 멸망을 생각할 때에 마음의 아픔을 견딜 수 없어서 부르짖어 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혼이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심 같이 그의 종들도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잠언 24장 17절에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려 질 때에 마음에기뻐하지 말라"고 하여 원수가 망하는 것까지도 성도는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여 기에 모압의 귀인, 즉 상류계급들을 소알로 피난하도록 예언하였습니다. 소알과 연결된 '에글랏 슬리시야'는 3년된 황소라는 뜻으로 사실상 별다른 지명이 아니라 소알의 설명어입니다. 3년된 황소는 젊은 황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힘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피난지가 될만 합니다.
사람을 보호해 주는 곳이 힘이 없다면, 그곳은 피난지가 될 수 없습니다.
결론
루힛은 높은 지방으로 비탈길로 오름은 피난길이요, 호로나임은 '구멍들'이라는 뜻으로, 굴들이 많아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도 마음의 안식은 없으니 다만, 주님 품이 완전한 피난처가 되시며, 주님만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능력의 반석
사17:10
서론
여기서 '반석'이라는 것은, 우선 견고하여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 세계에서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병기와 기병, 거대한 병사, 말 또는 돈을 '힘의 반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권력과 위인들을 보호자 또는 구원자로 삼아 반석처럼 생각하지만 다 헛된 것입니다.
그러면 능력의 반석이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능력의 반석은어떤 반석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확고 불변의 반석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지식도 세월이 지나면 변합니다. 사람도 아이로 있다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됩니다. 또 사람들은 죽기도 하고 끝나기도 합니다. 왕이든, 신하든, 때가 이르면 죽고, 다른 사람이 왕이 되고 신하가 됩니다. 많은 군사들도 전멸하거나 몰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또는 이 군사들이 때로는 떼를 지어 폭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돈이나 재산이라는 것도 있다가 없기도 하고, 없다가 있기도 하며, 피해를 입는 대상물이 되기도 하고, 약탈당할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든 명예나 지식, 인물도 결국 사라지거나 빼앗기거나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없어지지도 않고, 빼앗기지도 않으며, 변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확고 불변하신 분은 영원하신 하나님뿐이시므로 그 분은 확고 불변한 반석으로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2. 확고 부동의 반석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견고하고 튼튼한 도성을 바라보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인용하신 말씀 중에 반석과 모래를 대비한 건축의 기초를 교훈하였습니다.
반석이야말로 비가 쏟아지든지, 바람이 몹시 불든지, 창수가 나서 부딪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 부동한 자세로 있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완전체로서 확고 부동하신 반석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또는 어떠한 세력이라도 와서 부딪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이시므로 세상의 그 어떤 거대한 세력으로도 넘어뜨리거나 파괴하거나 할 수 없는 확고 부동한 반석이십니다.
3. 보호하시는 반석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위로하여 주시고,'구원하실 뿐 아니라 보살펴주시 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곤비한 땅에 끝 바위 그늘 같으신 분이십니다. 위험이 닥치거나 뜨거운 한낮 햇빛이 작열할 때, 폭풍우가 사정없이 휘몰아칠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며 보호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얼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겠다고 궁극적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어와 보호가 되실 뿐 아니라, 우리들의 인생광야 생활에서 따라야 될 반석이 되십니다. 우리의 참된 보호자는 기쁨의 근원되시는 만세 반석 하나님뿐이십니다.
결론
능력의 반석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과연 우리가 든든히 믿을 수 있는 대상이시며,우리의 영원한 보호자가 되십니다.
백발이 되기까지 보호함
사46:4
서론
본문에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이들어 백발이 되어도 계속하여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백발이 되기까지 보호하심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백발이 되는 때
사람이 세상에 출생하고 성장하여 늙어지면 백발이 되는 것은 인생의 생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을 백발이 되기까지 돌보시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그 자식이 성장하면 그 부모가 먼저 백발이 되어 끝나버리고 말기 때문에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자식이 백발이 되더라도 끝까지 보살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만 우리 인생을 백발이 되기까지 돌보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백발이 되는 때는 모든 것이 다 끝나는 때입니다.
백발이 되면 그 몸의 기운이 쇠하여 집니다. 눈도 잘 안보이게 되고 손과 발의 놀림이 둔하여 집니다. 기억력도 떨어지며 모든 일에 대하여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보호하십니다.
2. 백발이 된다는 것은 장수의 축복입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장수의 복을 최대의 축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장수의 축복을 가장 귀하게 평가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약속있는 첫 계명이요, 장수의 복을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생의 끝은 백발시절이니 그때까지 보호하시고 축복해 주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어버이의 사랑은 자신이 먼저 죽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3. 백발이 되기까지 보살피십니다.
장수가 귀한 것이 아니라 장수하는 기간에 하나님께서 항상 끊임없이 품어 주시는 일이 더욱 귀한 것입니다.
"품는다"는 말은 어머니가 갓난아기를 그 품에 품고 보호하며, 젖을 먹이고, 알뜰히 키워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된 신자들을 언제나 만족하게 젖을 먹고 자라며 누구든지 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어머니는 영아기에만 품에 안아 키우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아기와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거쳐 장년기를 지나 노년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이 계속적므로 그의 품에서 보살피십니다.
결론
여호와는 시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시고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어디 있든지 변하지 않으시는 사랑으로 보호하시며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거할 것입니다.
석 달을 있으리라
대상13:14
서론
본문에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입니다. 이 석 달이라는 기한은 어느 정도의 한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석 달 동안 머무른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석 달을 숨겨졌던 모세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날로 번성하여 강성해지자 이에 겁을 먹은 바로 왕이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가정에서 여자 아이를 낳으면 그대로 기르고,사내 아이를 낳으면 하수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때 레위 족속 중에 아무람이라는 사람의 가정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 동안 숨겨 길렀습니다(출2:2).
그 아이가 나중에 모세로 이름되어진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의 학정에서 구출하여 애굽을 떠나도록 인도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그 부모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석 달 동안 숨겨 놓고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숨겨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일 강변에 역청으로 만든 상자에 넣어 내어 놓았다가 바로의 딸 공주에게 구출되어 공주의 아들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그는 강에서 죽을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궤를 석 달간 모신 오벧에돔
법궤 영입에 실패한 다윗은 당분간 가드 사람인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를 모실 수 있도록 하여 석 달을 지냈습니다.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가드는 레위인의 거주지였으므로(수21:24-25) 그가 레위인임은 분명 한 사실입니다. 그가 레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를 모실 수 있는 자격이 그에게 충분하였습니다.
법궤를 모실 수 없는 무자격자들이 법궤를 건드리고 만지며 집에 두고 하는 까닭에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격있는 자가 절차를 발아 경건하게 모실 때에는 오히려 축복하셨습니다.
오벧에돔과 그 권속들은 법궤를 신령하게 잘 모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고 하였습니다.
3. 엘리사벳 집에 석 달 머무른 마리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였을 때 천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친족인 엘리사벳이 늙었는데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 집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석달을 있었습니다(눅1:56). 그간에 엘리사벳의 환영하는 천사와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가 나왔습니다.
마리아는 석 달 동안 엘리사벳의 집에 머무르면서 엘리사벳을 통하여 신앙을 더욱 길렀으며, 잉태한 여자로서의 교양도 쌓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석 달쯤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석 달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기간입니다. 모세의 경우나 오벧에돔의 경우나 마리아의 경우가 다 그러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는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복 수
성 경 활 용
1. 복수에 대한 일반적 고찰
(1) 복수를 갚지 말라.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잠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2) 복수는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신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시94:1)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3)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한다.
(롬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서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4) 복수의 날을 정하심
(사34:8)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렘46:10) 그날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는 보수일이라
(5) 대적에게 복수하신다.
(시32:43)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2. 하나님의 복수를 받는 자
(1) 하나님께 복수하려는 자
(욜3:4) 너희가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에게 돌리리니
(2) 멸망시키는 자
(렘51:56)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인함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적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3) 악인
(시58:10)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4) 여호와를 거스리는자
(나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5) 주를 청종치 않는 나라
(미5:15) 내가 또 진노와 분한으로 청종치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 하셨느니라
3. 사람에게서 복수를 받지 않는 방법
(1) 사랑을 베푼다.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2) 복을 빌어 준다.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3) 하나님의 진노에 맡긴다.
(히10:30) 원수 갚는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관련원어풀이
1. !q'n: 나-캄
(1) 갚다, 복수하다, 보복하다.
(레19:18, 시99:8)
(2) 언약을 갚는 칼.
(레26:25)
(3) 자신을 갚다.
(삿15:7, 겔25:15)
(4) 보복을 당하다.
(창4:15, 출21:21)
(5) 자신을 갚다.
(렘5:9)
(6) 복수를 바라는
(시8:3)
2. rk;c; 사-카-르
(1) 빌리다. 고용하다.
(겔29:18-19)
(2) 보답, 보응.
(창29:15)
3. !l'v; 솰-람
(1) 보상을 받다.
(잠11:31)
(2) 보상하다, 값을 지불하다.
(신7:10, 32:41, 룻2:12, 욥21:31, 34:11, 잠13:21)
4. hr;WmT] 테무-라
교환, 보상, 보응.
(욥15:31)
5. ajpodivdwmi 아포디도-미
넘겨주다, 보복하다
(롬2:6)
6. ajntimisqiva 안티미스디아
보상, 보복, 응보.
(롬11:9)
설교예화자료
'출어이자 반어이자'
전에 어떤 사람이 무고한 자기 아내를 다만 공부를 못했다는 이유로 내좇아 버리고, 알뜰히 공부한 여자를 새 아내로 맞아 왔습니다. 세월이 지나갑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돈있던 것도 다 없어 졌습니다. 병까지 났습니다. 그런 때에 그 알뜰하게 맞아 왔던 그 아내가 남편도 버리고, 아이도 버리고, 다른 데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천대하면 자기가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 자기 가슴이 아플 때가 옵니다. 남을 속이면 내가 속임을 당합니다. '남잡이 제잡이'라고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출어이자 반어이자 (出於爾者 反於爾者)'라고, 네게서 나온 것이 네게로 도로 돌아간다고 하는 옛 사람의 말이 그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개구리와 쥐
물에 사는 개구리와 땅에 사는 쥐간 서로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쥐는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항상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서 놀곤 했습니다.
땅 위에 나온 개구리는 펄쩍펄쩍 뛰기는 했어도 쥐만큼 빨리 달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화가 난 개구리는 쥐를 골탕먹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개구리가 말했습니다.
"쥐야, 너는 참 빠르구나. 나는 물 속에서는 빠르지만 땅 위에서는 너만큼 빠르지 못하니, 땅 위에 있을 때는 우리 둘의 발을 한쪽씩 끈으로 묶이기로 하자."
"그래, 그것 참 재미있겠구나!"
이렇게 하여 개구리와 쥐는 발을 한쪽씩 끈으로 묶게 되었습니다.
발을 묶은 개구리는,
"아 덥다! 목욕이나 해야겠다. " 하며 연못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안돼! 난 헤엄을 못 친단 말야."
쥐가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걱정 마. 내가 있잖아!"
개구리는 심술궂게 웃으며 연못 속으로 첨병 뛰어들었다.
"아, 안돼! 안돼!"
안타깝게 소리치던 쥐는 별수없이 개구리와 함께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헤엄을 못 치는 쥐는 물을 잔뜩 마시고 허우적거리다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쪽 발이 개구리와 묶여져 있었기 때문에 쥐는 죽어서도 물 위에 떠서 개구리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하늘을 날던 솔개가 연못에 빠진 쥐를 발견했습니다.
"저런 멍청한 쥐새끼! 어쩌다 연못에 빠져 죽었을까? 아뭍든 배가 고픈데 잘됐어!"
솔개는 잽싸게 내려와 물 위에 떠있는 쥐를 채어 올렸습니다. 그러자 한쪽 발이 쥐와 연결되어 있던 개구리도 공중으로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
개구리는 울며 소리쳤으나 솔개는 더욱 높이 날아갈 뿐이었습니다.
꾀 많은 여우
숲속의 임금인 사자가 앓아 누워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찾아와 문안을 드렸습니다.
"사자님, 어서 건강을 회복하셔서 건강한 모습으로 저희들을 다스려 주셔야지요."
"네, 그렇지요. 사자님!"
"얼마나 고통스러우신지요 사자님 !"
찾아온 동물들은 저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아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가장 아부가 심한 여우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상히 여긴 사과가 기운 없는 소리로 물었습니다.
"왜 여우는 보이지 않느냐? "
그러자 여우의 외에 가장 골탕을 많이 먹은 늑대가 기회를 놓칠세라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습니다.
"사자님, 여우는 아마 오지 않을 것입니다. "
"아니, 왜 오지 않는단 말이냐?"
"사실 그 녀석은 사자님이 병이 난 것을 알고 기뻐하고 있을 것입니다. "
"뭣이라고? "
늑대의 말을 들은 사자는 너무나 분해서 이빨을 득득 갈았습니다.
늑대는 더욱 신이 나서 덧붙였습니다.
"그 녀석은 지금쯤 코를 골며 낮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그런데 바로 그때 도착한 여우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
"늑대란 놈, 어디 두고 보자."
여우는 바삐 뛰어온 듯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들어왔습니다.
"사자님 많이 편찮으십니까? "
여우가 아양을 떨자 지금까지 늑대의 말을 듣고 화가 잔뜩 나 있던 사자는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네 이놈, 여우야! 천하의 간사한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여우는 더욱 아양을 떨며,
"사자님 제가 늦어서 화가 나셨군요. 하지만 제가 늦은 것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자님의 병을 고치는 방법을 알아오느라 늦은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렸다? "
"그럼요. 누구 앞이라고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화가 났던 사자는 마음이 풀렸다.
"허허, 그래, 그렇다면 그 방법을 알아 왔느냐? "
그러자 여우는 늑대를 슬쩍 곁눈질하더니 사자에게 바짝 다가가서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실은, 사자님의 병에는 늑대의 간이 최고라 하옵니다. "
이렇게 해서 늑대는 그자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독수리와 여우
여우가 길을 가다가 독수리를 만났습니다.
"여우님, 안녕하세요? "
"아, 독수리님이군요.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
"알을 낳을 때가 되어 마땅한 장소를 찾고 있는 중이예요."
"그래요? 나도 마침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적당한 곳을 찾는 중인데 잘 되었네요."
"그럼, 우리 함께 좋은 장소를 찾아봅시다. "
여우와 독수리는 함께 좋은 장소를 찾다가 큰 나무가 서 있는 곳에 이르러 독수리가 말했습니다.
"여기가 어떻겠어요? 여우님은 이 나무 아래에 집을 만들고 나는 나무 위에 둥지를 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네, 좋은 생각입니다. 덤불이 제법 무성하니 안심하고 집을 꾸밀 수가 있겠군요."
"자, 그럼 줬어요. 우리 서로 의지하고 지냅시다. "
"물론이죠. 독수리님이 위에서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니 무척 든든하군요."
독수리와 여우는 흐뭇한 마음으로 서로 각자 집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가 알을 낳고 여우가 새끼를 낳아 둘은 서로 친해졌습니다.
"여우님, 드디어 우리 아기가 알에서 깨어났습니다. "
"참 기쁘시겠습니다. 이제 우리 아기도 제법 귀여워 졌습니다. "
이렇게 서로 친하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우가 먹이를 구하러 나간 사이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먹이를 하나도 구하지 못한 독수리가 둥지로 돌아왔을 때 배가 고픈 새끼들이 애처롭게 울고 있었습니다.
"어쩌나, 아무것도 먹일 게 없으니!"
새끼들을 달래던 독수리는 무심코 나무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여우의 새끼들이 밖으로 나와서 햇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지 뭐! 우리 아기들을 더 이상 굶길 수 없으니 저 녀석들이라도 잡아다 먹여야겠다. "
독수리는 새끼 여우들을 발톱으로 채어다 자기 새끼들에게 먹였습니다.
저녁이 되자 여우가 먹이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집안을 아무리 찾아도 새끼들이 보이지 않자,
"이상한 일이군 아직 길도 잘 모르는 녀석들이니 멀리 갔을 리도 없을 텐데‥‥‥‥
하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독수리에게 물었습니다.
독수리는 시치미를 딱 파고,
"그, 글쎄요. 혹시 뱀이 물어간 것은 아닐까요? "
여우는 몹시 초조하여 급히 새끼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무 위에서 새끼 독수리들의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엄마, 너무 배가 불러요."
"새끼 여우는 정말 맛있어요."
그 말을 들은 여우는 그만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 못된 독수리야, 네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귀한 줄 알아야지! 너도 언젠가는반드시 이런 아픔을 당할 날이 있을 것이다. "
여우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복수할 날을 기다렸습니다. 며칠 후 독수리는 먹이를 구하러 들판에 나갔다가 사람들이 산에서 어린 양을 제단에 불태우며 제사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먹이를 구하기 힘든 판에 마침 잘되었다. "
독수리는 잽싸게 달려들어 불타는 어린 양의 창자를 훔쳐 왔습니다.
그런데 창자에 남아 있던 불씨가 독수리의 둥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런!"
독수리는 불을 끄려고 날개를 퍼덕였지만 불씨는 더 빨리 둥지에 옮겨 붙었습니다. 마른나뭇가지로 지은 독수리의 둥지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아직 날개가 없는 독수리 새끼들은 꼼짝도 못하고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여우는 나무 밑에서 잘 익는 새끼 독수리가 떨어지는 것을 맛있게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공자와 돌 던지는 사람
언젠가 공자가 언덕에서 산책을 했습니다. 그때 그가 제자 트제리에게 물을 떠오도록 보냈습니다. 그런데 물을 뜨러간 트제리는 산속에 시냇가에서 호랑이에 의해 맹공격을 당했습니다. 심한 격투 끝에 그는 꼬리를 움켜 잡음으로써 호랑이를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물을 떠 돌아왔을 때 그는 전리품으로 꼬리를 감추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자랑하고 싶었으나 먼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지체 높은 사람은 호랑이를 어떻게 죽입니까?" 스승은 "지체 높은 사람은 머리를 겨냥하여 호랑이를 죽인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묻기를,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보통 사람은 귀를 잡음으로 호랑이를 죽인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묻기를 "비천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하자 스승은 "비천한 사람은 꼬리를 잡음으로써 호랑이를 죽인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트제리는 낯을 붉히면서, 돌아서서 호랑이 꼬리를 버렸습니다. 그는 공자에게 원통해하면서 이런 이유를 댔습니다.
"스승은 시냇가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를 산속에서 물을 떠오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내가 죽는 것을 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공자를 맞히려고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는 물었습니다. "지체가 높은 사람은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 스승이 대답하기를, "그는 붓으로써 죽인다. "라고 하자 다시 그가 묻기를
"보통 사람은 어떻게 사람을 죽입니까? "
스승이 답하기를 "그는 혀를 가지고 인간을 죽인다. "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기를, "비천한 사람은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입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그는 돌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돌아서서 아주 부끄러워하며 돌을 버렸습니다. 마침내 그의 마음은 스승의 진리로 설득되었습니다.
여우와 두루미
숲속에 통나무로 오두막을 짓고 사는 여우가 하루는 강가에 사는 두루미를 초대했습니다.
"두루미님, 제가 맛있는 음식들을 장만했으니 오셔서 배불리 잡수세요."
"어머, 너무 고마워요."
두루미는 여우를 따라갔습니다.
여우는 납작한 접시에 맛있는 국을 담아서 두루미에게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두루미는 부리가 뾰족해서 납작한 그릇에 담긴 국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우는 정신없이 국을 먹으며,
"두루미님 맛이 없으세요? 나는 맛있어 죽겠는데, 냠냠!"
하며 두루미의 접시에 담긴 국도 홀짝홀짝 다 먹어치웠습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냄새만 맡는 두루미는 약이 올라 좋은 뫼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여우님 다음 번에는 제가 초대를 하겠어요. 제게 아주 맛있는 음식이 있거든요."
며칠 후 여우는 갈대로 지어 만든 두루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두루미는 목이 좁고 긴 병에다 맛있는 고기국을 가득 넣어 여우에게 주었습니다.
여우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병 속의 국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맛있어라!"
두루미는 긴 주둥이로 병 속에 고기국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여우님은 고기국이 싫으신가봐! 그럼 제가 대신 먹겠어요"
두루미는 군침을 삼키는 여우를 힐끗 보고는 여우의 병 속에 담긴 국까지 모두 먹었습니다.
복수와 증오
"솥을 빌려 달라"고 어떤 사나이가 말했습니다. 상대는 "싫다"고 거절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반대로 그 거절한 사나이가, "말을 빌려 달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네가 솥을 빌려주지 않았는데, 내가 왜 말을 빌려줘!"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복수입니다.
처음 사나이는 말을 빌려주었는데, 빌려줄 때에, "너는 솥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너에게 말을 빌려주겠다. "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증오입니다.
밀밭과 여우
누렇게 밀이 익은 밀밭을 항상 자랑스럽게 바라보던 농부가 어느 날 밀밭에 나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 밀밭을 마구 헤짚고 다녀 밀밭이 엉망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내 밀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어?"
농부는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맞아, 이건 틀림없이 그놈의 여우 짓일거야.'
농부는 생각하였습니다.
전에도 몇 번인가 밭갈이 하고 있을 때에 여우가 곁눈질을 하며 지나가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붙잡히기만 하면 그냥‥‥‥‥
농부는 잔뜩 벼르며 한쪽에 숨어 여우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마침내 농부는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야, 이놈. 거지 서지 못해!"
농부가 소리치며 달려갔습니다.
농부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여우를 붙잡고, "네가 이 밀밭을 엉망으로 만든 것을 다 알고있다. "
하며 여우의 꼬리에 불을 붙였습니다.
"앗, 뜨거!"
꼬리에 불이 불은 여우는 뜨거워서 어쩔줄을 모르면서 밀밭으로 들어가 뒹굴었습니다.
여우의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불길은 밀밭에 옮겨 붙었고 익을 대로 익어서 말라 있던 밀밭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어어‥‥ 내 밀밭‥‥‥‥
농부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이미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록·시·묘사
복수는 개인의 일이며, 벌은 신의 일이다. 사회는 양자의 중간에 있다. 징벌은 사회보다 이상의 것이며, 복수는 사회보다 이하의 것이다.
(V.M. 위고/ 사형수 최후의 날)
복수는 비열한 인간의 희열이다.
(유베날리스/ 풍자시집)
복수는 일종의 야만적 정의이다. 인간의 성질이 그쪽으로 기울수록, 법은 그것을 더욱 많이 제거해야 한다.
(F. 베이컨/ 수필집)
복수는 항상 작고, 약하디 약하고, 불쌍히 여겨야 할 마음의 기쁨이다.
(J. 주베르/ 팡세)
복수의 신은 은밀하게 행동한다.
(장 파울/ 꽃 · 과실 · 가시)
뿌리깊은 복수는 침묵의 딸이다.
(V. 알피에리/ 파지의 음모)
복수하는 방법을 터득하려면 인내하는 방법부터 터득해야 한다.
(볼테르/ 메로프)
복수하고 싶을 때에는 모욕만으로 끝내라.
(코란)
「복수의 폭력」은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을 마술적으로 원상복귀시키려는 비합리적인 기능을 갖는다.
(E. 프롬/ 인간의 마음)
원한이란 열등의식의 발산이다.
(J. 오르테가 이 가세트/ 키호테의 명상)
복수란, 식혀서 먹어야 할 요리이다.
(영국 격언)
복수는, 인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파에드루스/ 우화집)
용서, 그것은 가장 좋은 방법의 복수다.
(독일 속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행위는 피해에 대한 복수를 경멸하는 것이다.
(E. 캐어리 여사/ 마리아인의 비극)
인(仁)을 베풀고 덕(德)을 폄은 곧 대대의 영광을 가져옴이요, 질투하는 마음을 품고, 원한을 보복함은 자손에까지 환난을 끼쳐줌이다.
(명심보감)
복수의 쾌감은 일시적이지만, 용서로 얻어지는 기쁨은 영원하다.
(스페인 속담)
복수란 비용은 많이 들고, 반면 성과는 극히 작은 것이다.
(미상)
복수는 가장 돈이 많이 들고 시간을 요하는 것이다. 모든 정책 중에 응보(應報)의 박해는 가장 악성적인 것이다. <*1948년 10월 28일下院에서>
(W. L S. 처칠)
모욕에 대해 복수하는 것은 적과 다를 바가 없고, 모욕을 용서하는 것은 적을 이기는 것이 된다.
(영국 격언)
결행하지 않은 복수보다 더 영예로운 복수없다
(스페인 격언)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속에는 복수심이 깃들일 수 없다.
(중국 격언)
우정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아무리 달콤하다 해도, 폭군에 대한 복수는 무엇보다도 가장달콤하다.
(T. 무어/ 현명한 복수)
가장 고귀한 복수는 관용이다.
(H. 본/ 격언의 핸드북)
개를 죽인다고 물린 자리가 낫지 않는다.
(A. 링컨)
복수가 달콤하다는 것은, 인간의 입 속에 있는 마귀와 같은 말이다.
(미상/ 인간의 全責務)
복수는 꿀보다도 감미롭다.
(호메로스/ 일리아드)
복수란, 익을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할 달콤한 과일이다.
(E. 가보리오/ 113列)
복수를 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고의로 자기의 상처를 그대로 두어 둔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 상처는 완전히 아물 것이다.
(F. 베이컨)
복수란 비인간적인 말이다.
(세네카/ 분노론)
복수하고 죽는 편이 수치심을 안고 사는 것보다 낫다.
(아라비아 속담)
백 살이라도 복수심은 유치(乳齒)인 채로 있다.
(이탈리아 격언)
복수는 또 하나의 복수로, 잘못은 또 하나의 잘못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다. 이들은 거듭될수록 서로 더 치열해질 뿐이다.
(초서/ 멜리베즈)
복수는 호의보다 더 정확한 회계과장이다.
(C.C. 콜튼/ 라콘)
미련한 놈의 가슴의 고드름은 안 녹는다. < *둔 하고 못난 사람이 한 번 앙심을 먹으면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두고두고 앙갚음을 한다는 말>
(한국 속담)
복수는, 그 자신의 사형집행인이 된다.
(J. 포드/ 찢어진 마음)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
(A. 콩트/ 실증철학주의)
남의 눈을 하나 찌르면 자기 눈도 하나 찔린다
(함무라비 법전)
정신병리학적으로 보아 중태인 사람의 경우에는 복수가 그의 삶의 지배적인 목적이 된다. 왜냐하면 복수할 일이 없으면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고 자각 및 동 일감조차도 무너질듯한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E. 프롬/ 인간의 마음)
적에게 복수를 하면 새로운 복수를 불러일으킨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격언집)
복수, 그것은 처음에는 달겠지만, 멀지 않아 보복이 올 때는 쓰다.
(밀턴/ 실락원)
여자의 보복은 3층 배(三層倍).
(일본 속담)
누가 한 눈을 찌르면 그의 눈도 하나 찔러주면 된다는 것은 잘못이다. 죄를 범한 자는 자기가 준 고통 이상으로 고생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적을 미워하고 복수하려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며, 마음을 가라앉혀 원수를 갚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여자의 보복은 끝이 없다. 복수는 달다- 특히 여자에겐.
(바이런/ 돈 주안)
복수와 사랑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잔인하다
(F.W. 니체/ 선악의 초월)
눈을 내리기를 기다리며/ 산을 바라본다//‥‥하늘이 무너지기를 기다리며/눈길을 걷는다// 나에게는 아직도/ 복수의 길이 남아 있다// 밤이 되자/ 별들도 술이 취했다.
(정호승/ 기다림)
왜 그런 엉뚱한 복수를 하시려는 거예요. 하느님이 아끼시는 한 인간의 영혼에 상처를 입힐 권리는 도현씨에겐 없으셔요. 복수란 오직 악마에게 대해서만 허락되는 최후 수단이에요. 순진하고 무력한 한 여자를 유린하는게 어째서 명분있는 복수예요?
(손창섭/ 낙서족)
나는 이곳을 떠나리/ 아름다운 복수를 찬미하면서/ 이제는 두 번 다시 어떠한 손길도/그대의 한 줌의 뼈를 탐내어/ 이 남모르는 깊숙한 곳에 내려오지 못하리.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죽음의 소네트)
시뻘건 드센 팔 가진 미쳐 난 복수가/사자(死者)들의 피와 눈물 넘실대는 큰 통으로/이 텅 빈 암흑 속에 아무리 퍼부은들 헛수고
(C.P. 보들레르/증오의 통)
어쩔까 내가 밤에 와서/ 당신 옆구리에 창을 찔러/ 죽은 자들의 원수를 갚으면/ 당신이 만난 적이 없는 자들/ 자기의 상처를 숨기고 있는 자들/ 자신에 관한 아무런 기념비도 없는 자들/ 당신이 오직 당신의 잔치에서만 기억한 자들./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 / 매일매일 우리는 불을 지폈다. / 분노의 불꽃을 퍼뜨리는 불을/ 당신의 도시 사방에,/ 우리의 복수의 폭발을 증언하는/ 재의 기념 비로 남을/ 당신의 아들 모두에게
(마지시 쿠네네/ 복수)
설 교 노 트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
나1:2
서론
여호와의 성품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바로 풀어야 은혜가 되는 것이며, 잘못하면 큰 오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잘 살펴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투기하시는 하나님
(1) 투기의 뜻
"투기(妬忌)"라는 말은 '질투'라는 말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 용어의 의미는 '곁눈질하다' '증오심을 품다' '나쁜마음을 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커느아"라고 하는데, 좋은 의미로는 '열정' 또는 '질투'를 뜻하는 이 말은, 하나님과 선한 사람에게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나쁜 의미로는 '시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시기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잘 되었을 경우에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2)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에 대한 관심을 뜻할 경우에는 온당하다고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자신의 영광과 존귀한 이름을 위하며 질투하시는 모습으로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합당한 상과 영광이 보존되고 자기에게 합당한 예배를 받으시기를 강력하게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거나 그것을 경배하면 거기에 대해 질투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보복하시는 하나님
(1) 보복의 의의
보복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다시 주다', '빚을 갚다'라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는 보상하시고, 악인에게는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보복의 원리는 소위 동해복수법으로 피해자는 의도적으로 범죄자에게 같은 방법으로 갚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21장 23-25절에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2) 보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장면에서, 에덴동산에서와 아담과 이브와 뱀의 저주 등(창3:14-19), 특히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운데서 고라의 모반과 그 결과로써의 형벌 등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보복"이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면서 공정한 심판 행위를 뜻합니다. 이방법은 그 원수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시며, 또는 참다못하여 필경은 공의롭게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본문에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투기나 보복은 오직 거룩한 섭리를 위하여 공의롭게 처리하시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바벨론에 대한 보복
렘51:1-64
서론
예레미야서 50장부터 계속하여 바벨론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에서는 바벨론을 금머리(단2:38)로 비유하였는데 본문 7절에서는 "금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금잔은 하나님의 심판을 담은 잔입니다.
1. 바벨론 멸망의 예언의 반복(1-14절)
본문은 바벨론이 멸망하리라는 경고가 섭섭하고 무서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나는 예언이기 때문에 괴로운 일입니다.
"멸망시키는 자", "타국인"은 바사왕 고레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키질한다"는 말은 숙청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권고하십니다. 바벨론은 멸망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메대는 무기를 예비할 것이요, 바벨론은 아무리 방비하여도 무익할 뿐더러 그 악이 한정이 있어서 찼고, 메대군이 황충이 같이 밀려온다고 하였습니다.
2. 바벨론의 패망(15-40절)
15-19절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우상의 무능을 보여주시는데 하나님은 창조자이시오 지배자이십니다. 우상은 공인들이 조작한 것이므로 생명이 없는 헛된 것입니다.
20-24절에서는 하나님의 철퇴로 사용하던 바벨론이 지금은 그들이 시온에서 행한 바 잔악한 죄악을 보복하기 위하여 멸망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바벨론은 초토화하리니 영원히 황폐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7-32절에서는 메데를 중심한 북방 연합군이 황충이떼같이 밀려올 것이요 바벨론 군대들은 무력하여 적을 대항하지 못하므로 결국은 함락되어 황폐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3-4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한 보복을 하십니다.
첫째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바 잔학한 행위와 선민에 대한 학대를 설명합니다.
둘째는 이상의 죄를 인하여 선민의 호소를 듣고 그들을 심판하되 적을 사자로 비유하고 바벨론 인민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들은 실로 자기들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공의로운 심판이신 것입니다.
3. 레벨론 우상 처벌(41-53절)
"벨"은 바벨론의 국신입니다. 바벨론에는 각종 우상이 가득한 곳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시날 평지에 금 우상을 세운 것도 이 벨 신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고 합니다(단 3:1). 그들은 바벨론의 번영을 벨 신에게 돌리고 호국신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벨 신도 메대군의 철퇴를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삼대 벌 중에는 이 벨 신을 숭배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바벨론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의 죄는 무섭고 큰 벌을 받게 되는 것이며, 우상 숭배의 죄는 선민은 물론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 숭배도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엄벌하십니다.
결론
바벨론이 신명에 의하여 파멸되었습니다. 바벨론 성벽은 그 규모가 웅대하고 화려하며, 사방에 25개의 철문이 있으니 도합 100개입니다. 그리고 250개의 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금성철벽의 대성벽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원수를 갚으라
민31:1-3
서론
본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 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3절에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곳의 성구는 분명히 복수를 권장하신 뜻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과연 원수를 갚아야 합니까?
1. 원수는 갚아야 하는 것입니까?
본서와 같은 율법서인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44절에 보면 산상보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대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계속하여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특히 미디안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십니다.
왜 미디안에게 원수를 갚으라고 하셨습니까?
2. "미디안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이웃 이방 나라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미디안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인을 유혹하는 일에 모압 여자들이 참가하였지만(민25:1-2), 그들은 미디안인의 교사(敎唆)를 받아 그렇게 한 것이었으며 그들 자의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고로 미디안인만이 형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발람이 발락의 배격을 받은 후에 모압으로 안가고 미디안으로 가서 그가 미디안인을 교사한 결과로(16:) 이스라엘인을 유혹하여 음탕한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또 미디안인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압인보다 더 밝은 지식과 특권을가졌을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였기 때문에 미디안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십니다.
선민을 유혹하여 범죄케 한 미디안은 결국 이스라엘의 원수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에 원수를 갚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범하였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 원수를 갚는 일은 하나님의 특권적인 일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원수는 하나님께서 갚으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복수를 하려고 나설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는 곧 마귀의 침범입니다. 신자가 원수 갚을 일은 죄악의 유혹을갚는 것입니다.
죄는 마땅히 진멸해야 합니다.
피의 보수자
수20:3
서론
사람이 많이 섞여서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일어나는 실수와 사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계획적이나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도 생겨지는 예가 있는데 '살인'의 경우에도 고의가 아니지만 과실치사한 경우에 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곧 도피성 제도였습니다.
그러면 피의 보수자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보수는 정당한 일입니다.
'보수(報讐), 또는 복수(復讐)'는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세계에 있어서 계속하여 있어진 일이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한 처사로 여겨져 왔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살펴보면 출애굽기 21장 23-25절에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피해입은 그대로 보복하는 것의 정당성을 역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잃으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생명을 해친 살인자에 대한 복수는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은 것이 바로 인간의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귀한 생명을 잃게 되었으니 그 형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분명한 일인 것입니다.
2. 보수한 역사적 실례들
성경에는 자기 식구가 당한 일에 대하여 보복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은 디나라고 합니다. 그 딸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였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 오빠들, 즉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에게 할례받을 것을 조건으로 통혼하자고 거짓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례받고 나서 고통 중에 있는 하몰과 세겜 일파를 도륙하여 복수한 사실이 있습니다(창34:1-31).
또 다른 예로,한 레위인의 첩이 기브아에서 악한 건달들에게 윤간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여기에 흥분한 레위인은 그 죽은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보내어서 보복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냐민 토벌전이 벌어져서 사만 명이나 죽은 사실이 있습니다(삿19:-20).
참으로 창피스러운 수치거리이며, 잔인한 보복전이었습니다.
3. 피의 보수자
비록 고의가 아니었는데 살인하였다고 할지라도 죽은 자의 가족이나 친척이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나서며 또 다시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피의 보수자' 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분노로 보수하는 것은 죄악인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때라도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정당하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사람은 참으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사람의 실수를 복수로 갚는다면, 그것은 더 큰 죄가되는 것입니다.
복수는 끝없는 복수를 연출시킵니다. 그러므로 복수하려는 마음보다는 관용과 이해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함정을 파는 자
잠26:27
서론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고 하신 본문 중심의 뜻은 무엇입니까?
남을 망하게 하는 일을 하였으나, 그 일로 인하여 결국은 자신이 망한다는 교훈입니다. 자승자박이라는 말과 같이, 자기 포승에 자기가 매인다는 말입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어떠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1 .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함정, 즉 웅덩이는 그 자체가 속이는 시설입니다. 깊은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짚이나 풀을 얹고 흙을 덮어서 위장한 시설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도 상대방을 속이는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거짓이나 사기술은 일시적으로는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진상이 드러나면 결국 손해를보는 쪽은 함정을 판 자신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나쁜 계획으로 남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자신이 웅덩이에 빠지고 그 그물에 걸려 벗어나지 못하게 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꾀이는 유혹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상대를 꾀어서 자기의 목적에 말려들도록 유혹하는 것이 일입니다.
유혹이라는 것은 본래 마귀가 인류의 조상을 유혹한데서 비롯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혹하는 자는 사단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방을 피어 그를 희생시키고 파멸에 이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시야가 좁은 협잡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귀와 그 추종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구덩이가 있는데, 그 곳에 자신에 빠져 들어갈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속담 그대로 남을 잡으려다가 결국 자기가 잡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를 살펴보면, 소위 교권을 장악했다는 바리새교인 정통파, 제사장들, 유사와 장로, 서기관 기타 종교적 지도계급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여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여러 가지 면으로 중상하고 모해하며 괴롭혔습니다 결국에는 그들의 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까지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를 배척한 저들의 성읍과 그 무리들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놓이지 못할 정도로 다 멸망당하였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대적하는 무리들은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자신들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결론
이 원리는 죄가 죄의 인과응보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들로 그들이 장차 당할 고통의 자리를 결코피할 수 없도록 하십니다.
남을 해하는 자는 결국 자기도 해함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칠 배나 갚으소서
시79:12
서론
시편 기자는 자기의 대 적자들을 하나님께 고발하면서 주를 훼방하는 자들은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 배나 갚아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칠 배라고 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 였을까요?
1. "칠"이라는 수의 뜻
이스라엘 민족들은 '7'이라는 숫자를 매우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집트인이나 아랍 계통의 여러 나라에서도 매우 뜻깊게 사용하여 온 숫자가 바로 이 '7'이라는 숫자인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천문학자들이 달의 변화를 연구하다가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1주를 7일간으로 구분하여서 오랜 역사 동안 사용하여 오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서 보면 중요한 축제와 종교의식은 7일간의 제사가 진행된 것이 유월절 이하 여러 명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전의 비품, 장치들도 모두 7과 관련시켜서 제조하였습니다. 그밖의 신앙생활상 여러가지 부분에서 7을 사용하였습니다.
2. 칠 배의 뜻
성경에는 '칠 배'라는 표기가 많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 18절, 21절, 28절에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책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서 3장 19절에는 "평일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하였고, 창세기 4장 15절에는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잠언 6장 31절에는 "도적질하다가 들키면 칠 배나 갚아야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30장 26절에는 "햇빛은 칠 배나 되어" 등등으로 "칠 배"라고 한 것은 숫자적으로 '일곱'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수를 표시한 것이요, 가장 원만하고 많은 것을 나타낼 때 흔히 사용한 것입니다.
3. "칠 배나 갚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중에 나타난 대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무리를 칠 배나 훼방하여 갚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흘림 당한 보수를 저들이 받되 칠 배나 더한 훼방을 받을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보복적인 언사는 시편 중에서 특히 저주시(咀呪詩)에 많이 있습니다. 보복이란 인간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뚜렷한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복수는 그 자체를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복을 하되칠 배나 해 줄 것을 원하고 바랐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죄악을 섬멸하는데 있어서 완전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뜻이요, 끝까지 철저하게 처리할 것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봅니다.
결론
우리도 죄를 섬멸하는데 있어서 시편 기자와 같이 아주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다.
죄악을 그대로 두거나 미지근한 태도로 넘긴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를 멸망시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도 "칠 배나 갚으소서"라는 간구로 악의 완전한 진멸을 하나님께 요구해야 하겠습니다.
복 음
성 경 활 용
1. 복음에 대한 일반적 고찰
(1) 복음은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롬1:2) 이 복음을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2) 복음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
(요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3) 사람의 뜻에 따라 된 것이 아님
(갈1:ll)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4) 율법과 대조됨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5) 성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
(롬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2. 복음에 대한 성격의 정의
(1) 예수이다.
(행8: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2) 하나님의 은혜이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3) 십자가의 도이다.
(고전1:17)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4)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딤후2: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3. 복음을 설명하는 표현들
(1) 천국 복음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3)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고후4:4)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4) 평안의 복음
(엡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5)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딤전1:11) 이 교훈을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6) 그리스도의 비밀
(앱6:19)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7) 복음의 비밀
(엡6:19)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8) 십자가의 도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9) 구원의 복음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10) 그리스도의 복음
(고전9:12) 우리가 이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함이로라
(갈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11) 하나님의 복음
(롬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12) 은혜의 경륜
(엡3: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13) 기쁜 소식
(사41:27)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14) 좋은 소식
(사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15) 경건에 관한 교훈
(딤전6: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16) 영원한 복음
(계14:6)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17) 아름다운 소식
(사16:1)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4. 복음 전파의 범위
(1) 모든 민족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2) 죽은 자
(벧전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3) 가난한 자
(마11:5)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4) 다른 동네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5) 이방인
(갈2: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6) 온 천하 만민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5. 복음이 전파되야 할 당위성
(1) 예수님의 명령이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2) 때가 찼다.
(막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3)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어야 한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4) 제자로 삼기 위해
(행14: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5)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6)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행14:15)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함이라
6. 복음 전파자가 지녀야 할 의식
(1) 택정함을 입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부르심을 받았다.
(행16:10)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3) 세우심을 받았다.
(빌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4) 보내심을 받았다.
(눅4:43)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5) 수께 사 을 받았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7. 복음이 미치는 곳에 나타나는 현상
(1)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2) 영광의 광채가 빛난다.
(고후4:4)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3) 진리를 지킨다.
(갈2: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4) 교제하게 한다.
(빌1: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5) 눈을 뜨게 한다.
(행26:18)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6) 죄의 용서가 있다.
(마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8. 복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
(1) 복음에 참예하고자 해야 함
(고전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2)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함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3) 복음을 위해 수고함
(빌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4) 복음에 힘쓰는 자를 도울 것
(빌4:3)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5) 듣고 믿을 것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6) 복종할 것
(고후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7) 견고해질 것
(롬16:26)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관련원어풀이
1. eujaggelivzw 유앙겔리조-
(1) 복된 소식을 가져오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다.
(계10:7, 14:6)
(2) ~을 ~에게 전하다.
(눅4:43, 엡2:17)
(3) ∼을 전하다.
(눅8:1, 행8:4)
(4) ~에게 복음을 전하다.
(롬1:15, 고전15:2)
(5) 전파하다, 복음을 전하다.
(눅9:6, 행14:7)
2. eujaggevlion 유앙겔리온
(1) 좋은 소식, 복되고 기쁜 소식.
(마4:23, 막1:14)
(2) 예수 그리스도 말씀과 행동, 죽음.
(막1:1)
설교예화자료
천당을 보여준 전도사
어느 전도사 한 분이 부산 영도다리 위에서 집안 웃어른을 만났습니다 인사를 여쭌 후 "할아버지,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라고 전도를 했더니 "그래 천당을 보여주면 믿지!"라고 가볍게 받아 넘기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할 말이 없이 가만히 서 있었더니 개선 장군처럼 유유히 걸어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링'위에서 첫 라운드에 '다운'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뒤들아가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큰소리로 불러 발걸음을 멈추게 한 뒤 "천당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손을 꼭 잡고 다리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할아버지는 놀란 표정으로 "어데 가노? "라고 물었습니다. "따라오시면 알게 될 겁니다!"하고 옷을 입은 채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람이 와이라노?" 하고 몸부림을 쳤지만 젊은이를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할아버지! 나는 죽으면 예수를 믿었으니 천당가지마는 할아버지는 안믿었으니 죽으면 지옥갑니다. 거기 가면 확실히 천당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같이 죽읍시다!"하고 힘차게 잡아당겼더니, 할아버지는 질겁을 하고는 "이 사람아, 알았다. 믿을께!"라고 항복을 하더란 것입니다.
시체가 일어나다
존 성(John Song)은 1920년 화학 박사 학위를 얻으려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는 훌륭히 학업을 마쳤습니다. 좋은 직업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름도 있었습니다. 격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은 뒤 그는 하나님의 부름에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관 속에 들어 있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존 성은 죽었다-스스로는 죽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산 것이다!" 그러자 시체가 일어서는 듯이 보였습니다. 천사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죽은 것이나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 있는 것이니!" 그는 영향력 있는 복음의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15년간 그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불타는 빛"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복음 전도자로 칭송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신앙은 인생의 힘이다.
(L.N. 톨스토이/ 고백)
숙명과 같고 운명과도 같다. 신앙은 생명의 나무, 그 자체요, 필연이요, 그 열매는 머리 위에 열려 있다.
(D.H. 로렌스/ 날개 돋친 뱀)
우주 현상과 인간 행동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나를 신에게 더욱 가까이 이끌어 가고 나를 겸손하게 하며, 나로 하여금 신을 더욱 쉽게 대면하게 해 주는 살아 있는 신앙이다
(M.K. 간디/ 하리잔)
신앙을 갖는 인간은 집단에 있어서의 권력자보다도 이해로 모이는 오합(烏合)의 아흔 아홉 사람보다도 강하다.
(J. 밀)
마음이 반짝이고 소박한 사람은 신과 자연을 믿는 법이다.
(H. W. 롱펠로)
신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죽음보다 죄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신 앙을 가지고 있다.
(L.C. 보브나르그/ 성찰과 잠언)
사변(思辨)이 끝나는 바로 거기에 비로소 신앙이 시작된다.
(S.A 키르케고르/ 공포와 전률)
17세기의 신학자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의식이나 형식보다 기독교인의 생활이 더 귀중함을 역설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 알의 산 신앙이 한 파운드의 역사의 지식보다 낫고, 한 방울의 사랑이 과학의 힘보다 나은 것이다. "
17세기 루터파 신학자인 헤르만 프랑케는 23세부터 인생 문제에 대한 의의를 깨달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나의 죄를 세어 보았다. 그러나 후에 불신앙 또한, 거짓 신앙으로 오늘날까지 내가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
(D. L. 무다)
이 세상에는 종교즉인 믿음 이외에 본질적인 것이라곤 없다. 그 믿음을 버리지 말 것이며, 이미 버렸거든 다시 찾도록 하라. <* 철학가이기도 한 그는 격동하는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기에 일생을 보냈다. 그 혼란기의 처세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손수 체험한 그는 임종에서 이와 같은 그의 철학 신조를 피력했다. >
(P. P. 루아예콜라르)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도다. 나는 그 문을 통과하고 있다 나를 다시 부르진 말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달콤하다. 드와이트 ! 아 이런(그의 죽은 손자)들의 얼굴이 보이는구나 ! <*미국의 저명한 이 복음 전도사는 죽음의 잠자리에서 듣는 이 없는 일장의 전도 연설을 했다.>
(D. L. 무디)
일어나라/ 일어나라// 귀 있어도 귀먹은/불쌍한 이들아/ 가슴에 종을 달고/ 어서 일어나라// 너와 나를/ 당신 집으로 부르시는/그분의 소리// 눈 있어도/ 앞못보는 이들이/반쯤 죽어 있던/ 제 영혼과 만나도록/ 제 이웃과 만나도록// 바람을 가르며/ 외치는 소리// 사람에게 실연당한/ 하나님 소리
(이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고 순수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매력을 느낀다. 현대의 많은 문학 작품들은 그런 종류의 것들이 매우 많으며, 그들 중 몇몇은 매우 흥미릅다. 나사렛의 한 서민 목수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면서 살고, 두려움을 모르는 혁명가가 되어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웅변조로 비난하며, 진리를 위해 죽어간 순교자로서 시리아의 무덤에 묻혀 있다. 이러한 종류의 문학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이런 것이 교회에서 들은 그리스도보다 더 나를 사로 잡는가?"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만일 당신이 음악을 알고 위대한 고전 음악가의 작품, 예를 들어 헨델의 오라토리오 같은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하자. 아마도 당신은 그것을 몇몇 가닥의 곡조로만 기억하는 편이 훨씬 용이할 것이다. 또한 전체적인 연주보다 몇 개의 분리된 합창곡들이 더 직접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분적인 곡들은 비록 매력적이라 해도 헨델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간 예수만을 그린 이런 작품들도 일부는 진실성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위대한 주님의 생애에서 추출한 단편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비록 이해하기 쉽고 감동적이라 해도 그리스도 자체는 아니다. 얼핏 보면, 이런 식으로 예수를 하나의 위대한 인간으로 보는 것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더 많은 모순과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당신은 그가 하나의 이상적인 인간이라고말할 것이다. 만일 이처럼 그가 우리와 같은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죄도역시 고백했어야 했을 것이며, 그가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준다고 했을 때 그는 엄청난 신성 모독죄를 범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있다. "고 말하면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는 미친 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했으면서도, 그에게 오는 죄인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줄 수 없었다면, 그는 우리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 될 것이다.
(제임스 스코커)
설 교 노 트
전하는 자가 필요함은
신5:22-27
서론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는 중보자를 통하지 아니하시고 직접 말씀하시고 대화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범죄하고부터는 중보자, 즉 선지자를 통하여 아담과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 선지자 모세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적인 역할을 하여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인간과 원수되었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구속을 위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도자의 필요성은 절대적입니다.
1. 주의 종은 먼저 듣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에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라고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이 먼저 듣고 알아야 복음을 전하기로 되어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복음 전하는 자를 통하여 구속 사업을 하십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먼저 주의 종들에게 비밀을 알려주시고 그 다음에 주의 종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를 세워서 그들로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시고 신약 시대에는 사도들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현재는 선지자들이 기록하고 사도들이 기록한 말씀으로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의 필요성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특별히 그의 종들을 불러서 사명을 주시고 그들에게 먼저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셔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는 자가 필요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을 불러 먼저 그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2. 주의 종을 통하여 전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에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을 주의 종들을 통하여 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불러서 주의 종을 삼아주심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고 하였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할 주의 종을 특별히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함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일을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며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3-17)"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3. 들어야 행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7절에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예언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1:3)"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먼저 배우고 난 후에 실천에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는데 빌립이 말하기를 읽은 것을 깨닫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하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없이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행8:26-35). 이는 주의 복음을 먼저 받고 깨달은 사람의 전함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가르치는 종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전하는 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론
구속을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필요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리고 즐거움으로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나팔을 불 날이니라
민29:1
서론
본문에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일일에 성회를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명절들이 있는데 유월절, 장막절, 칠칠절(오순절)의 3대 명절을 위시하여 속죄절, 수전절, 부림절과 더불어 나팔절이 있습니다.
1. 나팔을 불어라
나팔은 양의 뿔(수6:4)이나 은(민10:2)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나팔은 언제 사용되었습니까?
행진을 지시하는데 사용했고(민10:2-6), 회중을 소집하는데(민10:2), 군대를 소집하는데(삿3:27), 왕위를 선포할 때(왕하9:13,11:14), 위험을 경고할 때(겔33:2-6) 사용하였고, 성막 비품(민10:2), 예배용품(대하5:12-13)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에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하여 나팔 소리를 부활시키는 신의 능력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선포(시89:15, 호8:1)와 말일의 심판(계8:2, 13)으로도 비유하여 가르친 바 있습니다.
특히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 보면 여호수아 6장 20절에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나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고 하였습니다.
또 미디안 군대를 격퇴시킬 때도 사사기7장 22절에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흘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때와 미디안 군대를 격퇴시킬 때 나팔 소리로 하나님의 이적이 나타났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나팔을 불 날이라고 한 내용은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성회로 모이는 날을 알리기 위하여 나팔을 불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나팔을 부는 일은 축복을 주시려는 일입니다.
2. 나팔을 불 날이라
민수기 10장 10절에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고 하여 나팔부는 절기를 여러 번 지적하였는데 매 월삭마다 나팔을 불었습니다.
레위기 23장 2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니산월이니 정월입니다. 양력으로는 4월에 해당되는 날입니다. 1일은 새해 첫날이니 기념 나팔을 불기 때문에 원단절(元旦節)이라고도 합니다.
이때에는 특별히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합니다. 이날에는 다른 월삭일과 달리 나팔을 일출로부터 일몰까지 계속하여 불었습니다.
이날은 기념하는 날이요, 성회로 모이는 날이요, 안식하는 날이요, 제사하는 날입니다. 육신의 일은 쉬고 신령한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결론
나팔을 부는 소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선포이시기도 합니다. 부는 자는 힘있게 불어야 할 것이며, 듣는 자는 정신차리고 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알려야 하고 퍼져 나가야 하나니 하나님은 만민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복음의 나팔을 크게 불어서 온 세상 만민이 나팔 소리를 다 듣게 해야 하겠습니다.
해산의 수고
갈4:19
서론
바울 자신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해산하여 출생한 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산모로서의 수고를 감당하였음을 간증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해산의 수고란 어떤 수고입니까?
1. 해산의 수고는 최대의 수고
육신을 소유한 인간들에게는 여러 가지 수고가 있습니다. 일찍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범죄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남자는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해야 했는데 특히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창세기 3장 16절에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선포하신 이후 모든 여자들에게는 잉태의 고통과 해산의 수고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런고로 해산의 수고처럼 큰 고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이 세상에 소개하는 엄숙한 순간이요, 자신의 살과 피를 쪼개어 나누는 아픔이기 때문에 큰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산의 경험이 없는 여자나 남자들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고요, 고통인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런 고통을 당하며 해산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을 해산한 바울
바울은 일찍이 복음을 전할 때 갈라디아 교인들을 해산한 장본인이 자신인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런면서 그들을 해산할 때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얻어진 귀한 교인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복음의 산모인 바울의 말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 이단자인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뫼임을 받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에 미혹되어서 나가므로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만류도 하고 엄히 책망도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책망하는 것은 자식이 잘못된 길로 나갈 때에 더욱 책망하게 됩니다.
바울도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여서 해산하는 고통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얻게 되었는데 그들이 잘못된 길, 그릇된 길로 나갔기 때문에 책망을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함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거쳐서 출생된 갈라디아 교인들이 곁길로 나가고, 이단을 따르며 지난날의 수고가 다 헛일로 돌아간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겠다고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본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여 자기네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고 싶은 실정이었던 그 축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들을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겪어서 신앙적인 개조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충고입니다.
결론
우리는 누구를 통하여든 복음을 받아서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누군가가 다시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복음을 잘 간직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잘 지키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복음을 여는 자들
고후:1-6
서론
본문 3-5절에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에서 자기의 뜻과 마음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일들을 사람이 감추지 못합니다. 특히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1. 복음의 일꾼들은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의 일꾼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적대하는 우리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한 일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이었습니다. 등잔의 역할은 빛을 드러내는 일이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이나 교회의 그럴듯한 어떤 것도 복음 자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2. 복음의 일꾼은 복음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리우는 헛된 가르침이나 부패된 삶, 개개인의 욕심 등은 과감히 청산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선포는 선포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지 그 어떤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1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생계의 수단도,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수단도 아닙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심을 나타내는 수단도 아니고 복음은 순수하게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 외의 어떤 시도도 버려야 합니다.
3. 복음은 만민에게 열어져야 합니다.
복음을 여는 자들은 만민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고 하였습니다.
인종이나 국가, 계급의 구별 없이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죄 인이 기 때문입니다. "아직 부족해서" , "입술이 둔해서"라는 변명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고 또 주님을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막13:11).
결론
우리는 복음을 세상에 열어젖히는 열쇠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의 열쇠가 사용되지 않아 녹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또 다른 열쇠로 복음을 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금하는 사람이 없더라
행28:31
서론
바울은 그의 마지막 옥중 생활 중에서 써보낸 디모데후서 2장 9절에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고 증거한 것처럼 전도자는 가두어 놓고 매어 놓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맬 수도 없고 가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자유스러운 말씀이요, 종교인 것입니다.
1. 금지당해 온 복음
사도행전의 첫머리에 나타난 대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은 베드로와사도들이 복음을 열심히 증거할 때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무리하게 이를 탄압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8-20절에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여도 말씀은 오히려 더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증거하였습니다.
2. 금할 수 없는 복음
계속하여 복음은 각처에 전파되었고 이에 따라 각처에서 복음 전파를 방해하며 금지하는 무리들도 계속 생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무리가 믿고 나왔기 때문에 그 세도에 위압되어 금지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놀라운 기사와 표적으로 인하여 감히 반대자들이 금지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핍박하던 자가 오히려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으므로 금지하지 못하는 경우들도 생겼습니다.
복음 진리는 탄력성이 있어서 압박하여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반발적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에 금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로막는 자도, 핍박하는 자도 다 복음을금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3. 옥중서신을 기록함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2년간 있었습니다. 이때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전파하며 가르친 일" 이외에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 4개 서신을 기록한 일입니다.
그는 비록 완전한 자유의 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쓴 서신은 날개를 펴고 각지에날아가서 복음이 더욱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몸은 옥에 가두었지만, 바울의 사상은 가두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전하는 복음도 감금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스럽게 복음은 전파되어 나갔습니다.
결론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순교의 때를 기점으로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신안의 자유가 선포되고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렇듯 복음은 사람으로서는 그 아무도 금할 수 없으며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은 염병이라
행24:5
서론
더둘로 변사가 바울을 욕하면서 한 말 가운데 "이 사람은 염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염병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무섭게 유행하였던 페스트 같은 전염병을 말합니다. 페스트는 다른 말로 하면 흑사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울을 욕하느라고 그러한 말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너무 고약하고 지독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적절한 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염병은 무서운 세력으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페스트 같은 염병이 발생하게 되면 매우 무서운 세력으로 삽시간에 멀리까지 전염되고 파장되며 확장됩니다.
잠깐 동안에 온 동네를 휩쓸고 많은 사람이 감염되어 고생하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바울의 복음전도가 짧은 세월에 멀리 전파된 것을 악평하는 뜻으로 이 사람은 염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을 출발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휩쓸었고 멀리 땅끝, 즉 로마까지 전도하려고 애쓰던 전도자였습니다. 과연 염병과 같은 세력으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2. 염병에 걸리면 결국 죽게 됩니다.
염병에 걸리면 무섭게 앓다가 결국에는 죽게 됩니다. 물론 염병을 앓던 사람 중에서 다시살아나는 사람도 있지만 사망률이 대단히 높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설사 아주 죽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병으로 인한 고생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타격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것은 염병이라고 억지로 욕을 하였으나 신령한 뜻으로 생각한다면 과연 그 말이 맞는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은 다 죽어야 합니다. 그전에 살았던 육신의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죄악의 사람, 정욕의 사람은 일단 죽습니다. 죽어야 새사람으로 회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염병을 앓고 나면 면역성이 강하여집니다.
염병은 걸려서 앓게 되는 그 자체는 심히 불행하지만 잘 치료를 받고 나아서 회생되면 다시는 그런 병에 걸리지 않는 면역성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무서운 염병이 또다시 유행해도 일단 한 번 앓았던 자는 피할 수 있는 특수한 원리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받아서 믿음에 굳건히 섰다면 다시는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잘 자라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복음을 받아서 죄에 대한 면역성이 강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시 죄악이 유혹하여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바울은 염병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보다는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곧 염병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들의 핍박하는 일들을 괴롭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 잘 감당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
막1:1
서론
마가복음은 서론이 없는 복음서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의 출생 때부터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본서는 다른 마태, 누가, 요한복음과 비교해 보면 벌써 본론에 들어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기인 4복음서 중에서 본서가 제일 먼저 저술되었다고 하는데 문장이 간결하고 전체 내용이 가장 작은 것이 특색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천사에게 하였고(욥1:6, 2:1), 왕에게 (삼하7:14), 방백에 게(시82:6),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출4:22) 적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마5:45).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 신자를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명칭은 가장 존엄한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독생자(요3:16)라고까지 하셨으니 그의 메시아성을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복음서에서 언제나 증언자의 입을 통하여 불리운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탄생하실 아들을 "예수"라고 이름을 지으시고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고 천사가 증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에 해당하며(요1:41),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니 구약 시대에 왕과 제사장파 기름 부어 세웠는고로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직분을 완성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이 이름이 가장 적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공적 칭호인데,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기록되었습니다.
3. 복음이 시작이라
'복음'이라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소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오심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그 자체를 복음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의 예언과 같이 세례 요한이 나타났고, 그가 소개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시작이 되셨습니다. 또 복음을 비로소 공개적으로 전파하시기 시작하신다는 뜻입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배달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셔서 사흘 후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 말씀을 전해야 하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사실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왕궁에 가서 고하자
왕하7:9
서론
일찍이 사마리아 성을 점유하였던 아람 군대가 주의 역사로 인하여 다 도망하였습니다.
문둥이 네 사람이 아람 군대에 가서 구걸하고자 갔다가 아람 군대가 다 도망하였으므로 그 포기한 물품들을 절취하다가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쁜 소식을 왕궁에 고하려고 갔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어떠한 소식입니까?
1.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네 사람의 문둥이는 매우 굶주린 상태에 있었으므로 결사적으로 아람 진지에라도 가서 구걸하려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람 군대가 다 도망질하였으므로 그들의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그 버리고 간 물건들을 가지고 가서 감추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소위가 선한 것이 아님을 자인하고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라고 하며 달려갔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언제나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해야 할 자에게 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궁에 가서 고한 것입니다.
복음도 역시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 그 벌이 전하지 않는 자에게 미칠 것이니, 우리도 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아람 군대가 도망한 소식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이란 침략한 적군의 총퇴각입니다. 아람 군대는 주께서 물리처신 것입니다. 그 사실인즉 아람 군대로 하여금 병거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왕이 이웃 나라의 원정병을 값을 주고 사서 연합군을 조직하여 습격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겁을 집어먹고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한 것입니다. 군 장비와 말과, 노새까지 다 버리고 도망질하였습니다. 혼비백산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잃을까봐 질겁을 하고 도망친 것입니다.
네 사람의 문둥이는 이렇게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이 놀라운 사실을 왕궁에 가서 고하자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여러 가지 죄의 요소가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어려움도 당하게 되고, 슬픔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주께서 다 아시고 계시며, 물리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3. 많은 군수품을 버리고 간 소식입니다.
아람 군대는 도망질을 하면서 얼마나 황급하였던지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쳤습니다.
문둥이들이 장막에 들어가 먹고 마시고 금과 은과 의복을 가지고 갔다고 하였으니 많은 물품도 포기하고 그대로 도망간 것입니다.
그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근으로 인하여 물가가 상승하여서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물자를 노획한 것은 전혀 싸우지 않고도 크게 승리하여 많이 얻은 것이니 "이 아름다운 소식을 왕궁에 가서 고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결론
기쁜 소식이나 아름다운 소식이라면 우선 왕궁에 고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온 백성이 같이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소식도 지체하지 말고 우리가 전해야 합니다. 멸망의 지경에서 헤매고 있는 이 백성에게 전하여 큰 기쁨을 얻도록 해야겠습니다.
최초의 복음
창3:1-24
서론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은 늘 봄날처럼 화사하였으며 행복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탄의 뫼임에 빠져 범죄하던 그 순간 에덴동산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 숨어 버리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실락원이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범죄한 인간의 모습과 범죄한 인간에게 복음을 선포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1. 범죄한 인간의 모습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 육신의 눈이 밝아졌습니다(7절).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만들었습니다. 즉, 영적인 눈은 어두워지고, 육신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수치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영적인 존재에게 범죄한 존재로 전락하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죄의 소욕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2)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습니다(8절).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위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을 말합니다.
(3) 두려움이 생겼습니다(10절).
그들은 범죄한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이 생겨서 숨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12-13절).
범죄한 인간은 마땅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뉘우치기는커녕 하나님께, 혹은 하와에게 그리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야비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2. 복음의 구속의 씨를 약속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들짐승보다 뱀을 가장 저주하셨습니다. 본문 14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원수 사탄을 저주하셨습니다. 본문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너'는 사탄을 말하는 것이고,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상하게 한다'라는 말은 치명적으로 죽이고 완전한 승리를 한다는 뜻이며,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은 생명과는 무관한 피 흘리는 희생을 통해서. 사탄의 권세를 멸하시고 모든 택한 백성들을 구속하시겠다는 최초의 복음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주로 인하여 있음을 깨닫고,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복음을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열심히 전하는 증인들이 되어서 복음 전파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복음 전파의 사명
눅10:1-11
서론
본문은 전도자 파송에 관한 내용입니다. 참으로 전도는 우리 주님의 가장 큰 명령입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택하여서 보내신 70인의 전도자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1. 전도자 파송
예수님께서는 70인의 새로운 일꾼을 택하사 전도자로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둘씩 짝을 지어서 각 동네와 각처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할 곳이 많은데 참 일꾼으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전쟁터 같은 곳에 너희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보내신 자에게는 능력주시므로 주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2. "평안을 기원하라"고 했습니다.
전도자는 의식주의 장애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들의 무기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대나 주머니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누구에게나 평안을 기원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십니다. 이 평안은 주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가 받을 것입니다. 그 평안을 누구나 다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학식이나 지식이나 물질을 의지하면 안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되시는 주님만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불쌍한 사람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세상에 오셨으니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사 우리를 그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나라는 세례 요한이 전파하였고, 예수님께서도 친히 전파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요, 천국 복음이십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에서 이것을 빼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말하기를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복 종
성 경 활 용
1. 하나님께서 명한 인간간의 복종
(1) 종이 주인에게
(창16: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 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벧전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2) 백성은 치리자나 권세 잡은 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창41: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딛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3) 성도는 피차 복종해야 한다.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4)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딛2: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5) 자녀들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딤전3: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6) 인도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7) 젊은 자들은 장로에게 복종하라.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2. 영적으로 복종해야 할 대상
(1) 영의 아버지께 복종해야 한다.
(히12:9)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 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2) 예수의 복음에 복종해야 한다.
(고후9:13)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살후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 벌을 주시리니
(3)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엡5:24)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4) 예수께서도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빌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5)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신27: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6) 무리가 도에 복종한다.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7)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엡1:22)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3. 복종시켜야 하는 것
(1) 자기 자신의 몸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2) 원수
(시66:3) 주의 큰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3) 이방인
(시18:44) 저희가 내 풍성을 들은 즉시로 내게 순복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 대적
(신33:29)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4. 성도가 복종해야 할 대상
(1) 그리스도
(고후10:5) 모든 이론을 파하여 하나님 아닌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2) 하나님
(민32:22)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
(3) 하나님의 말씀
(신27:10)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4) 인도자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5) 하나님의 의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6) 수고하는 자에게
(고전16:16) 이 같은 자들과 또 함에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관련원어풀이
1. [n"K; 카-나
(1) 낮게 하다, 숙이게 하다.
(삼하8:1, 욥40:12)
(2) 낮게 되다, 예속되다.
(삿3:30, 삼상7:13)
(3) 자신을 복종하다, 자신을 복종적으로 처신하다.
(왕상21:29, 대하12:7)
2. vj'K; 카-하슈
(1) 가장하다, 아첨하다.
(대상22:18)
(2) 가장하다. 아첨하다.
(시66:3, 81:15)
3. vb'K; 카-바-쉬
(1) 발로 짓밟다, 내리 누르다.
(슥9:15)
(2) 정복하다, 억누르다, 낮추다.
(창1:28, 민32:22)
(3) 강요하다, 강탈하다
(에7:8)
(4) 복종시키다.
(삼하8:11)
(5) 정복되다, 억압당하다.
(수18:1)
(6) 강요당하다.
(느5:5)
4. [m'v; 솨-마
[,m'v; 솨-메아
(1) 듣다, 경청하다, 유의하다.
(창23:8, 왕상12:15)
(2) 듣고 응답하다
(창16:11, 시10:17)
(3) 순종하다. 주의하다.
(출24:7, 삿2:20)
(4) 들은 것을 이해하다.
(잠21:28)
(5) 순종하다.
(시18:45)
(6) 듣게 하다, 부르다.
(삼상15:4, 23:8)
(7) 부르다, 소환하다.
(왕상I5:22, 렘50:29)
5. rb'D; 다-바르
(1) 다스리다, 따르다, 좇아가다, 말하다, 서술하다.
(출6:29)
(2) 말해지다.
(시87:3, 아8:8)
(3) 함께 말하다.
(겔33, 30, 말3:16)
(4) 억누르다, 약화시키다.
(시18:48, 47:4)
6. qv'n: 나-솨크
(1) 결합하다, 배열하다, 순서대로 놓다.
(창41:40)
(2) 자신을 무장하다.
(대하17:17, 시78:9)
(3) 입을 맞추다.
(창27:26, 삼하15:5)
7. db'[; 아-바드
(1) 일하다, 수고하다, 노동하다.
(창2:15, 신28:39)
(2) 예배하다, 숭배하다.
(출3:12, 사19:23)
(3) ~에게 노동이나 고역을 부과하다, 시키다.
(출1:14, 레25:39)
(4) 섬기게 하다, 속방하다.
(렘17:4, 겔29:18)
8. uJpakouvw 휘파쿠오-
(1) 말을 듣다, 청종하다, 순종하다, 따르다, 복종하다.
(롬6:16, 살후1:8)
(2) 열다, 대답하다
(행12:13)
9. uJpakohv 휘파코에-
(1) 청종, 순종.
(롬5:19, 벧전1:14)
(2) 공손, 온순, 유화.
(롬16:19, 고후7:15)
(3) 복종, 항복.
(롬1:5, 히5:8)
10. uJpotavssw 휘포타쏘-
(1) 복종시키다, 종속시키다.
(롬8:20, 히2:8)
(2) 예속되다, 종속되다.
(롬8;20, 고전15:28)
(3) 자신을 복종하다, 예속당하다.
(룩2:51, 골3:18)
11. doulagwgevw 둘라고-게오-
(1) 노예로 삼다, 종을 삼다, 예속시키다.
(고전9:27)
12. ei[kw 에이코-
굴복하다, 복종하다.
(갈2:5)
13. peivqw 페이도-
(1) 설득하다, 말로 믿게 하다, 확신케 하다.
(행18:23, 19:26)
(2) 친구로 삼다, 호의를 얻다, 안정시키다.
(마28:14, 갈1:10)
(3) 설복당하다, 확신을 가지다, 믿다.
(눅16:31, 행17:4)
(4) 청종하다, 순종하다, 따라가다.
(행5:36, 히13:17)
설교예화자료
월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비결
J.윌버 채프먼이 런던에 있을 때 부스 장군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부스 장군은 80이 넘은 고령이었습니다. 채프먼 박사는 이 노장군이 지나간 재판과투쟁, 승리 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경건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이 미국의 복음주의자는 성공의 비결이 있으시면 가르쳐 주십사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이윽고 눈물이 그의 뺨에 흘러 내렸소.그는 말씀하시기를 '그래, 내 비결을 말해주지. 바로 하나님이오. 나보다 두뇌가 우수한 사람도 많았고 기회가 좋았던 사람도 있었겠지. 그러나 내 가슴에 런던의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오던 날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들을 어찌 구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던 날부터 나는 결심했지, 하나님께서 윌리엄 부스를 모두 가지시게 될 것이라고 말이오. 오늘날 구세군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모두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모든 사람, 의지력, 그리고 내 삶의 모든 영향력을 가지신 때문이오.' 라고 했소."
채프먼 박사는 이 만남에서 다음의 교훈을 얻었다고 한다. "인간의 위대한 힘이란 그의 복종과 헌신에 달렸습니다. "
나폴레옹의 불가능한 이야기
나폴레옹은 가끔 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어떤 지방을 방문하던 도중에 한 팔이 잘려졌지만 제대로 군복을 입은 한 늙은 군인을 만났습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은 레종 드뇌에르 훈장을 자랑해 보였습니다. "그대는 어느 곳에서 팔을 잃게 되었나?" 하고 나폴레옹이 물었습니다. "아우스데를리쯔에서입니다. " 그리고 "자네는 무엇으로 레종 드뇌에르 훈장을 받게 되었나?"
"네, 각하. 그것은 장식을 하기 위한 조그마한 토큰에 지나지 않습니다. "
"자네는 나라를 위하여 두 팔을 바치진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군." 하고 황제는 말하였습니다.
"그랬다면 나에게 주어진 상은 무엇이었을까요?" 하고 외팔이 사나이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랬다면 나는 자네에게 레종 드뇌에르 훈장을 두 배로 주었겠지."하고 나폴레옹이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자랑스러운 늙은 전사는 그의 칼을 뽑아 즉시 그의 다른 팔을 잘라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몇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것의 진정한 의미를 잊어버리고 사람들의 평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습니다.
복종의 초청
레오나르드 우드가 프랑스 왕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왕은 그가 대단히 마음에 들어 다음날 저녁에 그를 다시 초대했습니다. 다음날 레오나르드는 왕의 초청에 답하기 위해 궁전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왕은 놀라면서, "아니 레오나르드 경, 나는 당신이 이곳에 올 줄은 기대도 못했는데 어찌된 일이요? "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각하, 저를 오늘 밤 이곳에 초대하지 않으셨나요?" 놀란 레오나르드 경은 반문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나의 초청을 응답을 하지 않았잖소? "
그때 레오나르드 우드는 그의 생애 중 가장 의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왕의 초청은 대답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히 가야 하는 복종의 초청이라고 봅니다. "
불순종한 새끼꿩의 결과
어미 꿩이 새끼들에게 늘 이런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땅 위에서 먹이를 찾아 먹을 때, 입으로는 먹이를 먹되 귀를 열어서 내 음성이 들리는지 주의를 기울여라. 내가 망을 보고 있다가 너희를 해치려는 짐승이 나타나면 크게 소리를 칠테니 내 소리가 들리면 지체말고 나무 위로 날아오너라, 너무 멀리가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테니 멀리가지 마라."
그래서 꿩 새끼들은 엄마와 그리 멀진 않은 곳에서 먹이를 찾으면서 입으로는 먹이를 먹고 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마리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렸습니다. 꿩 새끼 한 마리는 맛있는 먹이를 먹는데 팔려서 형제들과 떨어져 멀리 갔습니다.
꿩 새끼들이 한창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여우 한 마리가 꿩 새끼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새끼들이 위험하게 된 것을 본 엄마 꿩이 소리를 지르자, 새끼 정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위험이 다가온 줄을 알고 일제히 나무 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엄마 꿩과 멀리 떨어져 있던 꿩 새끼는 위험을 알려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만 여우에게 잡혀 먹혔습니다.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되지 못할 것이라(신28:62)"
사랑받은 기쁨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고쳐 주심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표명하십니다. 나는 오랫동안 얼굴에 물혹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면도하다가 몇 번이나 베어 피를 흘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물혹은 아무리 베어도 없어지지 않고 또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려 "하나님! 이 물혹을 없애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후 나는 나도 모르게 물혹이 없어진 것을 체험하고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하며 감격해 한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천마디 말보다 한 번 뜨거운 체험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절감하게 됩니다. 나아가서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의 넘치는 사랑을 체험하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뼈 속까지 느끼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 마음속인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태풍의 진로를 바꾼 대북 시장
몇 년 전 여름에 심히 태풍으로 인해 전 대북시에 물을 공급하는 댐이 무너졌습니다. 때문에 대만의 대북시에는 식수가 한 방울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댐을 임시로 막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워낙 중대한 일인지라 시장이 직접 닷새 동안 공사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공사를 진두 지휘했습니다. 겨우 임시로 막아 물이 점점 채워지는데, 기상대에서 대만 크기의 두 배에 달하는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는 예보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밤낮없이 공사를 해 온 댐 공사는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절망에 빠져서 천막 안에 꿇어 엎드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직 댐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는데, 지난번보다 더 큰 태풍이 불어온다면 이 댐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면 전 대북 시민이 물을 먹을 수 없게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시장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중에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 신문 기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네가 기도하여 대만을 향해 오고 있는 태풍의 방향을 바뀌게 하겠다고 선언하면 그대로 이루어주리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시장은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목사도 아닌데 신문 기자 앞에서 기도하여 태풍의 진로를 바뀌게 하겠다고 하면 틀림없이 미쳤다고 말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더 큰 태풍이 불어온다는 기상예보를 들은 기자들이 "일주일째 수도물도 나오지 않는데,다시 또 태풍이 불어온답니다. 시장님은 어떻게 대책을 세우고 계십니까?" 하고 질문하자, 시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를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대북을 향해 불어오고 있는 태풍의 진로를 바꾸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태풍이 대북으로 불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므로 안심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기자들은 배를 움켜쥐고 웃으면서 "기상대에서 태풍이 불어온다고 분명히 예보했는데, 시장님의 기도로 태풍의 진로를 바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시장이 다시 "여러분, 나하고 내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태풍이 대북으로 불어오면 이 자리에 참석한 분 모두에게 내가 각 50불씩 드리겠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태풍은 절대 불어오지 않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신문 기자들은 이 기사를 대서특필했고, 시장은 시간이 지나 태풍이 대만 가까이에 이르자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태풍의 진로가 저의 기도로 바뀐다고 선언하여 전 시민이 주시하고 있는데, 태풍이 점점 대만으로 가까이 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나님, 저의 입장을 한번 바꾸어 생각해 보시고 역사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태풍이 대만 바로 가까이 와서는 진로를 싹 바꾸었습니다. 이렇듯 순종하려면 자기의 명예를 걸어야 하는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북 시장처럼 자신의 지위와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어록·시·묘사
만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려고 하면, 먼저 너 자신을 이성에 복종시켜라.
(L.A. 세네카/ 서간집)
인간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은 순종 속에 포함되어 있다.
(J.S. 밀/ 자유론)
명령하기 전에 복종하기를 배우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 솔론전)
남의 말 다 들으면 목에 칼 벗을 날이 없다. <*남의 말을 너무 곧이듣고, 또 그대로 순종만 하면 낭패보는 일이 많다는 뜻>
(한국 속담)
복종만이 고독과 불안을 회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또 다른 방법, 즉 생산적이며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발적인 관계」이다. 이것은 개성을 배제해 버림이 없이 개인을 외부 세계와 결부시키는 방법이다.
(E.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여자는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주권을 쥘 것을 잘 판별하고 있다.
(L. C.A.뮈세/장난으로 사랑을 하지 말라)
나는 사랑에의 눈먼 복종이 때로는 폭군의 채찍에 강요된 복종보다 더 해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폭군의 노예에게는 희망이 있지만 사랑의 노예에게는 희망이 없는 법이다. 사랑은 약꿀 사람을 강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며,사랑이 믿음 없는 사람으로부터 복종을 끌어낼 때, 그것은 폭력으로 변하게 된다.
(M.K. 간디/ 영 인디아)
지배하기 전에 복종하는 것을 배워라.
(솔론)
습복(伏)된 자는 반발하게 마련이고 감복된 자는 상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유주현/ 현대의 양처)
복종의 미덕은 옛날에는 무리없이 강요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낡은 인습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것이다.
(B.A.W. 러셀/ 행복의 철학)
복종은 반항보다도 도리어 강하다. 복종은 덤벼드는 폭력을 부끄럽게 만든다.
(R. M. 릴케)
복종이란 이미 순간적인 굴종은 아닐 것이다.
(시몬 베유/ 노동일기)
사람은 「운명」의 화살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감수(甘受)가 유일한 방패이다.
(사디/ 장미원)
억지로 명령에 굴복하는 것은 복종이 아니다.
(P. 코르네유/ 셀도리우스)
복종만이 명령권을 준다.
(에머슨/ 강연과 스케치)
현인은 예로써 정치를 하여 사람들은 허리를 굽혀 복종한다. 성인은 덕으로써 정치를 하여 이에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즐겨 복종한다. 허리를 굽혀 복종하는 것은 처음엔 잘 되어 가지만 꼭 끝까지 잘 되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즐겨 복종하는 것은 처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끝까지 잘 될 수 있는 것이다.
(삼략)
저항은 충분히, 복종은 작게, 또다시 무조건으로 복종한다면 금시에 완전히 노예가 되고 만다.
(W. 휘트먼/ 북미합중국에게)
말은 자유, 행위는 침묵, 복종은 맹목이다.
(J.C.F. 실러/ 발렌슈타인)
절에 간 색시. <*남의 명령대로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한국 속담)
누구를 불문하고 적어도 인간인 이상 딴 사람에게 복종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가 무엇이 라든 자기 자신의 구김살없는 이지(理知)만큼 신성한 것이 있겠는가‥‥‥ 내가 범하는 과실이야말로 모두 자기의 입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에서 사물을 보려고 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R. W. 에머슨)
어떤 신성지상(神聖至上)의 권력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을 복종하게 한다.
(R. 버튼/ 우울의 해부)
상대를 이쪽에서 복종시키는 것보다도 이쪽에서 눈치 보아 잘하는 편이 때로 지름길이며 유익하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복종은 성공의 어머니요, 안전의 아내다
(아에스킬루스/ 테베를 반대한 7인)
순종은 모든 문의 열쇠다.
(G. 먹도늘드/ 로시 후작)
여울로 소금 섬을 끌래도 끌지. < *사람이나 섬기는 사람의 명령을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뜻>
(한국 속담)
귀인에 대해서 나는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B.L. B. 퐁트넬)
명령에 승복하는 것보다는 남의 부탁에 승복하라.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격언집)
소를 모는 데 있어서 몽둥이에 거역하는 소는 위험한 길을 걷게 된다.
(핀다로스/ 뷰티아 祝勝歌)
군대란 씩씩하고 인내력이 셀 뿐만 아니라 잘 복종하고 인화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참으로 복종할 줄 아는 자는 명령하는 자에 못지않은 정도로 고상한 정과 철학적 깊이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구부러지는 것은 부러지는 것보다 낫다.
(영국 속담)
나는 사랑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 그것은?/ 복종입니다. / 그러면 맹목적인 사랑이지요. 그래요./ 바로 고대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게 하고 싶습니다.
(R. 롤랑)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 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복종)
그리고 억센 시간엔/ 복종과 힘을 연결하는 너/ 선과 악의 그 너머/ 야광에 비치는 가슴을 가져 오렴
(A. E. M. 노아유/ 사랑)
아마 나는 복종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점쟁이 말에/아마도 내 마음의 근심에/그 피를 꿈꾸면서, 그 술을 지르면서
(P. 발레리/ 잃어버린 술)
영혼의 가장 고귀한 차원은 정신이 저항하는 대상에 대해서까지도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의 최저 차원은 영혼이 순응하는 대상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이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게 해야지/ 굽이치는 것은 굽이치는 대로/ 멀리 비껴가는 것은 비껴가는 대로/ 소용돌이 치다 휘돌아가면 또한 그대로/ 맞아가고 잊혀가고 앗아가는 것이면/모두 그대로 흘러가게 해야지/ 날아가고 숨어가고 서둘러 가고/ 돌아가는 건 돌아가는 대로/ 떠나가는 것이면 그런대로/ 놓아주고 풀어줘야지/ 제 목숨 부지하는 날로/ 어쩌다. 얻은 아픔 지병이 되어 쇠잔해 다하더라도/ 가로막는다든지, 거슬러 올리는 일은 / 원한이요, 삭힘이 아니지/ 두고두고 서로가 환이지 / 안팎이 피멍으로 터지도록 부어올라/ 대대를 이어 태질하는 일이지/ 사위어가고 시들어가는 건 그대로/ 착각의 비늘 벗어버리고/ 가게 해야지, 흘러흘러 가게 해야지/ 장승으로 버티어 서 있으면/ 그대로 삭아 고운 흙이 되든지/ 날벼락을 맞아 스러지든지/ 거기 그대로 남아 잠깐 머무르게 하고/ 끝끝내 매잡아두고 싶은 무엇이라도/ 시방은 고이 가려, 가려내어/ 돌아가게 버려줘야지/ 흘러가게 해줘야지.
(최은하/ 順命)
설 교 노 트
참 제자의 자격
마10:34-42
서론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 10장을 제자 소명장이라고 정의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사 각 성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제자로서의 구비해야 할 무장을 비롯하여, 제자로서의 지녀야 할 기본 자세와 제자로서의 지녀야 할 비상한 각오와 결론적으로 참 제자될 수 있는 자격론에 대해서 지시하여 주셨습니다. 그 자격의 기준은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합당한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성경 본문은 우리들에게 세 가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4-36절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전적 복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는 사탄을 정복하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먼저 이 세상은 영적 전쟁이 일어나 두 가지 세계로 분리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전쟁이요,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의 세계로 분리되면서 우리 인간들은 그중 양자택일해야 할 입장과 운명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10:34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주러왔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검'은 옛날 군왕 장사들이 휘둘렀던 무력적인 검이 아니고 성령의 검, 진리의 검, 말씀의 검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검을 가지고,
(1) 전에 사탄에 따라 살던 나 자신의 불의와 죄악을 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복종시 켜야 하고
(2) 사탄을 따라 살던 내 가정도 쳐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하고
(3) 사탄을 따라가는 이 불의하고 악한 세상도 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을 시켜야 참 제자가 될 수 인다고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이제는 예수님이 가라 하면 가야 하고, 드리라고 하면 무엇이나 다 바쳐야 하고, 하라 하면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참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2. 예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마10:37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교훈은,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지 말고, 가정을 저버리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사랑이 집중되어 있는 대상이 가정이므로, 가정을 신성시하고 귀중히 여기면서 이를 실례를 들어 사랑의 대상과 순서와 방법론에 대하여 교훈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나 자녀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가정을 사랑하기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기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참 제자의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마10:38-39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합당치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씀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복음 전파와 사명 수행을 위해서 환난과 핍박을 감수해 나아가는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은 먼저 가정에서도 핍박을 받고, 사회에 나가 친구들에게도 핍박을 받고, 때로는 국가적으로도 핍박을 받는 경우고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1)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2) 하나님의 성업과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젓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3) 하나님의 성호와 영광을 위해서 바르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천대와 멸시와 억울함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이 십자가를 져야할 이유는 예수님도 지고 가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셨고, 십자가 후에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아니하면 사탄의 제자가 된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복종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군병
수8:18-23
서론
사람들은 이 세상을 전장으로 보고, 인생을 투사라고 합니다.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누구나 다 싸우고 있는 군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은 십자가의 정병으로서 악령 마귀와 싸우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생존경쟁과 또한 신령한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복병전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복병이란 무엇입니까?
1. 자기를 숨기는 군병입니다.
이것은 적이 무서워서 공포심에 위축된 자세가 아니라 적을 공격하고 진멸하기 위한 자세로서 우선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하는 자세요, 나아가서는 집중사격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는 자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은 십자가의 정병이요, 복병입니다.
나 자신을 숨기는 군병이 되어지는 것은 두 길이 있습니다.
(1) 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고 자랑하기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적에게 잘 발견되고, 집중사격의 대상이 되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가리우고 숨기는 자세이기 때문에 적에게 잘 발견되지도 아니하고 사격의 대상도 되지 아니하는 안전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들과 교부들도 신자의 첫째, 둘째, 셋째, 미덕은 오직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기도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릎꿇기를 싫어합니다. 이는 저자세요, 또한 투항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저자세를 취해야 되고, 투항을 하고, 항복을 해야 됩니다. 기도 생활은 나 자신을 낮추는 생활이요, 나 자신을 깊이 숨기는 생활이요, 나 자신을 쳐서 부수는 생활입니다.
2. 제일선에 매복한 군병입니다.
본문 13절에 "이와 같이 성읍 북편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편에는 복병이 있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전쟁마당에서 제일선에 서기는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여기 신앙의 복병이 제일선에 매복했다는 말씀은
(1)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군병들입니다. 이는 조국과 민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여 적을 정복해 버리려는 각오가 서 있는 군병입니다.
(2) 자신의 의무와 사명을 바로 수행하려고 하는 군병입니다. 군병은 적과 싸워야하고, 이 적을 정복해 버리고 승리해야 되는 것입니다.
(3) 결사적인 각오를 지닌 군병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순국하고자 하는 엄숙한 정신을 지닌 군병입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떤 회생의 대가라도 지불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의무와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더구나 순교적인 정신자세로 적과 더불어 싸워 나아가야 합니다.
3. 주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군영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복병들은 총사령관인 여호수아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전진하라면 전진하고, 공격하라면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 지시와 명령대로만 행동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의 복병들은
(1) 주님의 지시와 명령을 고요히 기다려야 됩니다. 내 생각 내 뜻 모두 보류해 놓고 주님 지시와 명령을 따라 행동해야 됩니다.
(2) 주님의 지시와 명령대로 행동해야 됩니다. 내 주관도 내 방법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의 말씀과 그 뜻대로만 살아가고 행동해야 됩니다
(3) 주님의 지시와 명령대로 생활하고 사역을 해야 됩니다. 내 철학자도 내 경험도 모두 묵살해 버리고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명하든지 그 명령따라 괴로워도, 즐거워도 주님의 뜻만 따라 살고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뜻대로 살고 일하는 이 자체가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신앙의 복병을
(1) 자기를 숨기고
(2) 제일선에 매복하여
(3) 주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 살아가고 행동하고 공격하는 군병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순교적인 각오를 가지고, 주님의 뜻대로만 사는 신자 되십시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요21:3
서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여러 번 여러 곳에서나타내 보이셨는데 본문은 일곱번째 나타남이라고 봅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일곱 제자,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또 다른 제자인 안드레와 마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 시몬 베드로는 본래 어부였습니다.
베드로의 직업은 원래가 갈릴리 바다에서 일하던 어부였습니다.
마태복음 4장 18-19절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은 이들을 사도로 불러서 사람은 낚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경험과 틀리는 명령을 예수님께서 하셨을 때도 순종하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은 경험이 있습니다(눅5:3-5).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입니다.
베드로는 벌써 부활하신 주님을 몇 차례나 만나본 부활의 체험자입니다.
누가복음 2장 34절에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 지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5장 5절에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 게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주님께셔 부활하신 날 오후였습니다.
그날 밤에 열 제자에게 나타나셨고(20:19-25),일주일 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실 때(20:26-29) 베드로는 그 자리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적어도 세 차례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체험자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간증해야 할 베드로임에도 불구하고'"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연약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3.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는 베드로의 말에 그 친구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라고유도되어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밤이 맞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날 아침 예수님이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 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없나이다"라는 맥빠진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명령에 따라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그물을 들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결국은 물고기도 베드로가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게 하셨습니다.
결론
예수님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베드로가 본래의 직업인 어부로 되돌아갔지만, 그는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떠나서 살면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우리는 성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부르심에 대한 복종
사6:8
서론
구약 시대의 모든 선지자들 가운데서 이사야가 가장 두렵고 엄한 소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의 은총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사야의 부름받기 이전 상태를 들이켜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의 죄악된 상태에 대한 수치심과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들이신 것 때문에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이처럼 예비되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믿고 당신의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1. 이사야의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의논
비록 하나님은 사람들과 의논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며, 자신과의 의논도 필요없는 분이지만 때로는 그의 지혜가 엄숙한 의논을 통해 나타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행하시는 바가 영원한 논의의 결과임을 보여주십니다.
(1) 의논하시는 분
의논하시는 분은, 이사야가 1절에서 보좌에 앉아 높이 들이우신 모습을 봤던 바로 그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모세에게나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처럼 하나님께서는 환상 가운데에 그의 영광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한분이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한 분이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며, 또한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좀더 분명하게 설명하자면, 사6:9-10에 나타난 표현들은 요12:40의 아들이라는 말과 행28:25-26의 성령이라는 말, 이 두 가지에 다 적용됩니다.
(2) 하나님의 의논
"내가 누구를 보내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것이야말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달하도록 위임받은 메시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정말 누구를 보내야 할까를 몰라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실 때, 반드시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갖고 계시거나 혹은 그 사람들을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의논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생각을 알리고자 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기가 무척 힘든 일이며, 아무나 하나님을 위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가 보내신 자들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한 이사야의 수락
이사야가 수행해야 할 사명은 매우 우울한 것이었으나 그는 그 사명에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1) 그의 준비성
이사야는 반대함 없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원 해서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지 결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일에서처럼 그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은 기꺼이 자청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그의 사역을 돕는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며 그의 하시는 일이 영광스러운 것임을 알기 때문에,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유스럽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의 결심
하나님의 사명을 기꺼이 받아드린 이사야는 더 나아가서 그 결심을 굳게 합니다. 그는 결코 머뭇거리거나 방황하지 않고 그 사명을 즉각 수행하려고 합니다. 그의 말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어떠한 어려움도 맞부딪치며 그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굳게 부여잡고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항상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이와 같은 태도로 하나님의 사역에 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확고하게 뒷바침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께 자신을 바침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던 것은 "주여 나를 당신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쓰셔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소서, 나는 명령할 수가 없고, 다만 언제나 복종할 뿐이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가서 기꺼이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겠나이다. 주여, 나는 당신의 종이오니 전적으로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로 말미암아, 그리고 나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는 뜻입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성공하려 든다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더러 와서 그를 위해 일하라고 부르실 때, 당신이 기꺼이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그를 찾을 때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16:9
서론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은 사라이며,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그 이름은하갈이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수하에 있으니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교훈을 본문은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1. 여호와의 사자가 나라나신 이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생산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하여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급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조급한 마음에서 그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첩으로 주어서 그에게서라도 자녀를 얻을까 하여서 남편을 권면하였습니다. 그 남편, 즉 아브라함도 이를 응락하여 아브라함이 하갈과 동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하갈이 결국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잉태하게 된 종 하갈은 오히려 자기의 여주인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라도 인간인지라 시기와 질투심과 아울러 경계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충동하여 그의 허락을 받고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학대를 받은 하갈은 도망하여서 광야의 샘 곁, 곧 숲 길 샘물 곁에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셔서 권면하였습니다.
"너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는 것이 그 권면의 내용이었습니다.
2. 종은 복종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분명히 사라는 하갈의 여주인이었습니다. 하갈 자신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대답하는 말 중에 "나는 나의 여주인 사라를 피하여 도망하였나이다"라고 자신의 소속을 피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여호와의 사자도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였습니다.
하갈은 어디까지나 여종입니다. 여종이라는 말은 본장에서만도 여러 번 있습니다(1,2,3,5,6,8절). 여호와의 사자도 그를 처음 만나서 부르기를 "사라의 여종 하갈아"라고 하셨으니 그가 어디까지나 여종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또 여주인을 그가 멸시한 것도 자신이 잉태하였으므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할 줄로 너무 조급히 여주인을 멸시한 잘못이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주인 사라는 본래 좋은 뜻으로 여종을 자기 남편에게 첩으로 자진하여 추천하였는데, 하갈이 주인인 사라에게 배은망덕하였으니 잘못은 하갈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자행자지하던 하갈도 하나님의 사자의 명령적인 권면을 물리치지 못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된 자로서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의 자리에 올라서려고 한다면, 그 종에서는 무서운 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종된 자의 임무인 것입니다.
결론
하갈은 천사의 말대로 순종하여 여주인에게 돌아가 복종하고 살았습니다. 순종이나 복종은 굴욕적인 것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는 선한 일이요, 또 결과적으로 자기 이익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고 살 때 주의 품에서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본 성
성 경 활 용
1. 본성의 묘사
(1) 순리대로 추구함
(롬1:26)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 양심이 증거가 됨
(롬2: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고전11:4)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3) 하나님을 알지 못함
(갈4:8)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2. 중생하지 못한 자의 본성
(1) 진노의 대상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악의 근원
(약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3) 멸망을 당함
(벧후2:12)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관련원어풀이
1. fuvsi" 푸시스
(1) 자연적 상태, 자연, 본성, 규칙적인 자연 질서.
(고전11:14, 4:8)
(2) 탄생, 출신, 육체적 기원.
(롬2:27, 갈2:15)
(3) 타고난 상태.
(엡2:3)
(4) 자연적 존재, 자연의 산물, 피조물
(약3:7, 벧후1:4)
2. morfhv 모르페-
모양, 본질적인 상태, 고정되고 변화되지 않는 실질.
(빌2:6)
설교예화자료
어리석은 농부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며칠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논밭도 물에 잡기고 집마다 물이 차 살 수 없게 되자 농부는 기르던 가축들을 이끌고 늙은 산의 동굴로 피했습니다.
며칠 동안은 가지고 온 곡식으로 그럭저럭 견뎠으나 곧 양식도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습니다.
"이러다간 굵어 죽겠어. 우선 아무거라도 잡아먹어야지."
농부는 염소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양고기도 다 떨어졌지만 비는 여전히 계속 내렸습니다.
"안되겠어. 굶어 죽느니 차라리 소라도 잡아 먹어야지!"
농부는 마침내 자기에게 없어서는 안될 밭을 가는 소까지 잡아먹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얼마 동안 음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
농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소고기를 혼자만 먹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개들은,
"얘들아, 저 인정머리 없는 주인 옆에 있다가는 우리도 멀지않아 잡아먹히겠다. "
"맞아. 빨리 여기를 떠나자." 하며 모두들 비오는 동굴 밖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손
인간은 태어날 때에는 손을 쥐고 있으나,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태어날 때에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며 죽을 때에는 모두 뒤에 남은 사람에게 주어서, 아무것도 갖고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막에 대한 두려움
탐정 소설 작가인 얼리 스텐리 가드너는 자신이 금을 찾을 사막을 사랑했던 어느 탐광자를 등장인물로 설정했습니다. 탐광자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막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홀로 남겨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당신이 만일 어떤 사람을 사막 한가운데 내려놓고 그를 떠나 일주일 만에 돌아와 보면 그가 미처버린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다.
한 남자가 발목을 삐어서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계속 가기를 원했으나, 그 일행은 많은 음식과 함께 그를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3, 4일 동안은 조용히 있었으나 그후 거의 반쯤 미쳐서 세상에 나타났는데 그의 발목은 온통 피투성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막에서 또 다시 10분을 지체하느니 차라리 그의 다리 전부를 잃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서 그들의 창조주하고만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어록·시·묘사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서로 비슷하나, 그 습관에 있어서는 서로 소원(疏遠)하다.
(논어)
개 꼬리 3년 묻어도 황모(黃毛)되지 않는다.
(한국 속담)
인간의 본성은 선이다.
(맹자)
사람의 본성은‥‥‥ 그 본성에 따르면 양보하지 않고 양보하면 본성에 거슬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명백하며 선은 후천적인 소위(所爲)다.
(순자)
사람의 본성은 일정하지 않고, 물과 같다. 동쪽으로 터뜨리면 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뜨리면 물은 서쪽으로 흐른다.
(순자)
소나무의 성질은 소나무로서 좋아야 하고, 버드나무는 버드나무로서 좋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태어난 본바탕을 살려야만 소나무는 성장하게 되고 대(竹)는 똑바로 펴지고 버드나무는 날씬하게 되는 법이다.
(미상)
개고기는 언제나 제 맛이다. < *제가 타고난 성미는 어느 때나 속이기 어렵다는 뜻>
(한국 속담)
까만색 둘이 흰 색을 만들지 못한다.
(H.G. 보운/ 격언집)
흙담은 부숴졌을 때가 서 있을 때보다 오히려 본질적이고, 얼음은 녹았을 때가 얼었을 때보다 더욱 본질적이다. 저마다 본성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회남자)
쐐기풀과 함께 섞여 있어도 월귤나무는 월귤나무이다.
(탈무드)
게가 똑바로 걷도록 가르칠 수는 없다.
(아리스토파네스/ 평화)
노닥노닥해도 비단일세. <*그 본바탕이 좋은 것은 아무리 낡고 헐어도 그 볼품을 지니고 있다는 말>
(한국 속담)
난쟁이가 산꼭대기에 선다 해서 키가 커지지는 않는다. 거인이 우물 속에서 서도 자기 키는 그대로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의 서한집)
원숭이는 비록 금가락지를 낀다 해도 원숭이다.
(J. 레이/ 영국 격언집)
백마는 매일 목욕하지 않는데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정칠을 하지 않건만 검다. 흑백이나 선악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논할 것도 되지 못한다.
(노자)
명주실로 만들어진 목매는 밧줄도 역시 목매는 밧줄이다.
(C. 시버/ 수수께끼 속의 사랑)
말은 발굽으로 서리나 눈을 발고, 털로 바람과 추위를 막으며,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다리를 들어 뛰어다니나니, 이것이 말의 본성이다. 비록 고대광실이 있을지라도 말에게는 소용이 없다.
(장자)
인간은 그 좁은 본성 속에 사랑과 미움이란 이중의 감정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낮과 같이 밤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J.W. 괴테/ 타소)
나는 나의 가족보다 모국을 사랑한다. 나는 모국보다 인간의 본성을 사랑한다.
(F.S. 페늘롱/ 텔레마크)
행복이나 조화 · 사랑 · 자유 등을 추구하는 욕구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다.
(E. 프롬/ 건전한 사회)
교육이란 자연의 성, 즉 천성(天性)에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국가 또는 사회를 위한 것을 목표로 하고 국민이라든가 공민에게 베푸는 교육은 사람의 본성을 다치게 하는 것이다.
(J.J. 루소/ 에밀)
인간의 본성은 신축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긴급성이 요구될 때에는 정상적이고 건전한 한계를 훨씬 넘어서 특수한 방향으로 강요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역작용이 반드시 뒤따르고, 그 결과로 생기는 환멸은 도덕적 퇴폐라는 황량한 결과만 남기게 되는 것이다.
(M. K. 간디)
궁한 뒤에 행세를 본다. <*어렵게 된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참다운 행실을 알 수 있으며 그 기개도 엿볼 수 있다는 말>
(한국 속담)
객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진흙 담에는 덧칠할 수 없다.
(논어)
우리들은 타인에게 자기의 본성을 예감케 하고 자기는 타인의 본성을 예감하는 이상의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빛을 간직하도록 노력하는 일이며, 이 노력을 사람들은 서로가 느끼고 사람마다 빛을 간직하면 반드시 밖으로 새어나가리라.
(A. 슈바이처)
진정한 진성(眞性)이 상실되었으므로, 모든 것이 그(인간)의 본성이 된다. 말하자면 마치 진실한 선(善)이 상실되었으므로, 모든 것이 그의 아름다운 선으로 되는 것과도 같다.
(B. 파스칼/ 팡세)
원래 인간의 측은한 마음과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란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두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은 것처럼 구체적으로 분명한 것은 아니다.
(장기물/ 중국철학사)
"성덕을 지니기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 한 여행자가 물었다. / "당신의 마음을 따르시오." 스승이 말했다. / 여행자는 그 말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떠나기 전에 스승은 그에게 속삭였다. / "당신 마음을 따르려면, 당신은 건장한 체질이 필요할 겁니다. "
(앤소니 드 멜로/ 본성)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가한다/ 대처럼 꺾어질망정 구리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자신을 괴롭힌다.
(노천명/ 자화상)
양려(梁麗)라는 메는 성을 부술 수는 있으나 쥐구멍을 막을 수는 없으니, 이는 기구의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준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으나 쥐를 잡는 데는 고양이나 족제비만 못하니, 이는 사물에 따라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이라면 벼룩을 잡고 털끝도 볼 수 있으나, 낮에 나오면 눈을 뜨고도 산조차 보지 못한다. 이는 사물에 따라 그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자)
님이 얼음이면 나는 불./ 뜨거운 내 사랑에도 그대 얼음 녹지 않네./ 어찌된 까닭일까,/더워지는 내 사랑에/ 그대 얼음 더욱 굳어짐은. / 끓는 듯 뜨거운 내 사랑이/ 심장마저 얼게하는 그대 얼음에 식지 않고/ 더욱더 끓어올라 불길 더욱 높아짐은./ 만물을 녹일 불이 얼음 더욱 얼게 하고/ 뼈까지 얼리는 아픔/ 타는 불의 기름 되니/또다시 있으랴, 이보다 이상한 일./ 사랑은 무슨 힘이기에 천성마저 바꾸는고.
(스펜더/ 님은 얼음)
설 교 노 트
인생과 게임
고전9:24-27
서론
게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민족은 엄격한 생활 때문에 그리이스, 로마, 이집트인에 비하여 게임이 비교적 적었습니다.
게임의 시발은 인간의 협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과 생리적 욕구에 충족하려는 수단인 것입니다. 이제 그 게임도 세상의 변천과 함께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드디어 세계적인 인류의 축제와 승화된 것입니다.
이제 게임이 가지는 바 의의와 가치를 간추려 열거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하겠습니다.
1. 진리를 희구하는 인간 본성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참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결코 거짓되게 창조하셨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게임은 전의와 진정의 최고봉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딤후2:5)"라고 하였습니다.
2. 선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노력입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의 본성은 선하였습니다. 게임은 타락 이후에 악해져만 가는(창6:5) 인간들을 선으로 되돌려 보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5-27)"고 하였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악에서 지지말고 이겨서 선함을 추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아름다움을 열망하는 인간 본심의 노력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실 때 아름다운 곳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후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1:12, 18,21, 31). 이렇게 최초의 인간들은 아름다운 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나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그 아름다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낙원을 상실한 인간들의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의 달램과, 되돌아서려는 노력입니다. 아름다운 고향에서 옛 동무와 함께 우애를 나누자는 것입니다.
결론
참으로 인간에게 있어 게임은 진 · 선 · 미의 조화이며 우호와 평화를 촉진하는 한마당 축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 ·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또 남녀귀천을 불문하고 게임은 만민 공통의 애호물이었습니다. 모쪼록 모든 게임을 통하여 평화와 사랑이 깃든 아름다운 지구촌이 이룩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시25:8
서론
성경 소요리문답 중에 제 4문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데 대한 답이 "하나님은 신이신데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죽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간추려 말하면 선하시고 정직한 하나님이십니다.
1. 선하신 여호와
여기에 "선하시고"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토브"이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돌아보시는 자비와 큰 사랑을 가리킵니다.
죄인은 버림을 받는 것이 원칙인데,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선하심으로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해 주시려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2. 정직하신 하나님
"정직하시니"의 히브리 원어는 "야솨르"이니 "올바름"을 의미하는데 이는 죄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사랑에 근거를 둡니다.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라고 하였는데 이 "도"라는 말씀은 하나님 뜻에 합치하는 도덕적 의미에서의 바른 길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정직은 정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직하시고 거짓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정직하심이 대표적이십니다.
3. 선과 정직의 합치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것만큼 죄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정직하시니만큼 그 죄인은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하심에 정직을 점하시며 공의로우심에 자비하심을 함께 가지십니다. 그는 선하셔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하실 때에도 최후로 의인 열 사람만이라도 거기 있으면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선하심)과 의(정직하심)를 겸하십니다.
결국 사랑이 없는 의는 죽은 의요, 의가 없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이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와 이즈러져도 불완전한 것입니다. 양자 합치에서 완전을 기하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의 성품이 여러 가지 있으나 그중에서 "선하심과 정직하심"이 가장 대표적이요, 근본적이요, 이 두 성품의 합치는 결국 하나님의 성품의 바른 표현이 됩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1
서론
본 시는 레위인들이 매일 성전 봉사시에 사용하였으며 특히 매 절 끝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찬양하였는데 각 절 상반부는 레위인들이 부르고 하반부는 일반 군중이 응답식으로 불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6)"
1. 영원함이니 진실하시다.
매 절 끝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반복하였는데 그 한 마디라도 헛된 말이 없습니다 필요없는 말이라면 왜 이렇게 지루하게 반복하였습니까? 이 시편을 읽는 사람들이 무관심하지 않는 이상 일부분도 헛된 것이 없으니 이야말로 말씀 중에 일언반구도 버릴 것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말씀의 진실성을 강조하여 그 인자하심을 영원토록 감사해야 합니다.
2. 영원함이니 불변하십니다.
진실은 곧 진리를 말함이니 하나님이 진리이시요(시31:5), 예수님이 진리리시요(요14:6), 성령님이 진리이시요(요14:7),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십니다(요17:7).
진리의 특성은 유일한 것이요, 완전한 것이요, 불변한 것들입니다. 특히 말씀이 이랬다 저랬다 변한다면 누가 감히 그 말씀을 믿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는 말씀은 창조의 처음 시작으로부터 인간 체험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것은 그 뜻이 대대로 통하여 지속하여 왔고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있으매 인류의 종말이 오는 날까지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3. 영원함이니 믿어웁다고 하였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한 것은 진실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므로 안심하고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의심해 볼 여지가 전혀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긍휼히 여겨 오셨으며 그의 동정은 그의 능력으로 구원하도록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시편 136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감사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고 감사할 일이야 허다하지만 특히 그의 인자하심의 영원성은 마땅히 감사하면서 영원토록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
요4:21-24
서론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어떠합니까?
1.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에 대한 속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만물은 변합니다. 그러나 형태를 갖추지 않은 영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시102:27, 삼상15:29).
(2)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끝이 없이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시간적 관념에서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3) 하나님은 편재하십니다.
공간적 관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공간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공간을 초월하시며 동시에 공간의 모든 지점에 편재하십니다. 즉, 공간의 모든 부분에 그의 전존재가 충만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재라고 부릅니다(렘23:23-24).
2.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을 인격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의식적 존재이며 자기 결정적 존재임을 뜻합니다.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지 · 정 ·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계십니다.
지(知)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시고(출3:7, 시139:4, 엡1:9-10, 벧전1:2, 요일3:20), 정(情)이 있기 때문에 한탄하시고(창6:6), 진노하시고(왕상11:9), 사랑하시고(계3:19), 미워하십니다(잠6:16). 또한 의(意)가 있기 때문에 구원하시고(창50:20), 창조하시고(요1:3), 주관하시고(시104:28-29), 감찰하시고(시11:4), 용서하시고(요일1:9), 보상하시고(딤후4:8), 심판하시는 것입니다(왕상8:32).
더 나아가 인격을 갖는다는 것은 도덕성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에 도덕성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선하시고,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공의로우십니다.
또한 인격체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격체만이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셨으므로 인간과 대화할 수 있으시고, 인간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격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기도는 헛것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찬송도, 경배도, 헌금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실로 질문과 응답은 인격안에서만 가능합니다.
3.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모든 창조물과 구별되고 또한 완전하시기에 모든 창조물에게 영광을 받으십니다(신32:4, 시18:30).
그러면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사6:3, 사57:15) 어떤 불완전한 불의와 죄악도 그 앞에서용납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전지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시147:4, 사46:10) 모든 것을 아십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원까지도 완전히 아십니다.
(3)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욥42:2, 시33:6, 마19:26)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만물을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주관하십니다. 그는 마음에 품은 바 계획을 완전히 이루십니다.
결론
하나님의 본성은 영이시며, 인격이시며, 완전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날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봉 사
성 경 활 용
1.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는 대상
(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시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
(시101:6)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3)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자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4) 중생한 자
(롬7:6)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5) 열심을 품은 자
(롬12:11)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6) 겸손한 자
(행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7) 사랑이 있는 자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2. 봉사의 영역
(1) 성전
(출30: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민1:50) 그들은 그 장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장막 사면에 진을 칠지며
(민4:12) 또 성소에서 봉사하는데 쓰는 모든 기명을 취하여
(2) 하나님
(행21: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에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3) 그리스도의 몸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3. 봉사의 바른 자세
(1)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2) 하나님의 성령으로
(빌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사랑하고
(3) 선한 청지기같이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4. 봉사자가 받을 복
(1)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심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2) 하나님과 사람 앞에 칭찬 받음
(롬14:18)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랑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3)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옴을 세우려 하심이라
(4) 유업의 상을 받음
(골3: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관련원어풀이
1. db'[; 아-바드
(1) 일하다, 수고하다, 노동하다.
(창2:15, 겔48:18)
(2) 봉사하다,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다.
(창27:40, 삼상4:9)
(3) 봉사하도록 시키다, 고역을 시키다.
(대하34:33)
(4) 봉사하도록 시킴을 받다, 섬기도록 시킴을 받다.
(출20:5, 신5:9)
2. tr'v; 솨-라트
(1) 개인적으로 봉사하다.
(창39:4, 민8:26)
(2) 섬기다, 봉사하다.
(출28:35, 왕상23:6)
(3) 하나님을 섬기다.
(삼상2:11, 사56:6)
(4) 봉사자, 종.
(수1:1, 스8:17)
3. diakonevw 디아코네오-
(1) 섬기다, 시중들다, 직무를 수행하다.
(요12:26, 행19:22)
(2) 식사 시중을 들다.
(마4:11, 막1:31)
(3) 음식이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다, 돕다.
(마25:44, 히5:10)
(4) 마련하다, 보살피다.
(행6:2)
(5) 집사일을 보다.
(딤전3:10, 벧전4:11)
(6) 돌보다, 유의하다, 간호하다.
(고후3:3, 벧전1:12)
4. diakoniva 디아코니아
(1) 섬김, 봉사.
(딤후4:11, 히1:14)
(2) 모세의 직무.
(고후3:7)
(3) 사도의 직무.
(행1:17, 롬9:·13)
(4) 봉사, 섬기는 일.
(행6:4, 고후11:8)
(5) 집사의 직분.
(롬12:7)
(6) 준비하는 일.
(눅10:40)
5. latreuvw 라트류오
(1) 종이 되다, 섬기다.
(행27:23)
(2) 예배를 드리다.
(마4:10, 눅1:74)
6. leitourgiva 레이투르기아
(1) 성스러운 봉사, 목회.
(눅1:23, 빌2:17)
(2) 친절한 봉사, 도움, 구조.
(고후9:12, 빌2:30)
설교예화자료
생명 있는 바다
유태인은 온 세계의 민족 중에서 가장 자선을 중요시하는 민족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어떤 유태인은 자선 행위를 행하라고 권하든가, 또 타인에게 권유받지 않으면, 자선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에 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요르단(요단) 강 가까이에 두 개의 큰 호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해(死海)'이고, 또 하나는 히브리어로 '살아 있는 바다' 라고 불리우는 호수입니다. '사해'는 딴 곳에서 물이 들어오지만 아무데도 나가지 않습니다. 한편 '살아있는 바다'쪽은 물이 들어오는 대신에, 물이 나갑니다.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사해'이며, 돈이 들어오는 한편 나가지 않습니다. 자선을 하는 자는 '살아 있는 바다'이며, 물이 들어와서 다시 나갑니다.
우리들은 '살아있는 바다'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 남편을 섬김
한 여인이 전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5시에 그녀가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고, 정각 6시에 식사를 대령하도록 했습니다. 언제나 남편은 자신을 위해 대령해 있도록 하였고, 그가 요구하는 시간에 언제나 정확히 대령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남편의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관된 것으로써 너무나 비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죽었습니다.
몇 년 후에, 그녀는 다시 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이었습니다. 어느 날 낡은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 그녀는 그 남편이 그녀를 복종시키기 위해 만들어 두었던 엄격한 규칙들이 적혀있는 종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펴보았습니다. '5시에 일어날 것. 6시 정각에 식사를 가져올 것.' 계속 반복해서 그녀는 그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 종이쪽지를 다 읽고 난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현재 남편의 모든 요구도 그녀가 전부 들어주고 있지만, 그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요구를 들어주고 있다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가 주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는 그를 위한 봉사가 그리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
은비녀
어느 해 추운 겨울, 월요일, 새벽 농촌 교회. 마악 새벽 기도를 마친 김 전도사는 학교갈준비를 하느라 주섬주섬 책가방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엌쪽에서 달그락달그닥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누가 있을 턱이 없는데 달그닥거리든 소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김전도사는 부엌으로 난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늙수그레한 박 집사님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더구나 소고기국에 계란부침을 하며 푸짐한 아침상을‥‥‥‥
"아니! 집사님, 집사님 가정 사정을 제가 잘 알고 있는데 이건 어찌된 일입니까?"
김 전도사의 말에 박 집사님은 고개를 들고 싱긋 웃기만 합니다.
김 전도사는 더욱 의아해 하며 박 집사님의 표정을 살핍니다.
항시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쪽을 찌고 다니던 박 집사님이 그날따라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머리에 두른 수건 뒤에 삐죽나온 비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박 집사님이 시집을 올 때 해 낀 은비녀였습니다. 그래서 박 집사님은 그것을 애지중지하며 아끼고 귀히 여겨왔던 것입니다.
상을 다 차려 들고 방에 들어오는 박 집사님을 향해 김 전도사는 정색을 하고 물었습니다.
"박 집사님! 그토록 아끼던 비녀를 어찌하셨습니까? "
어느새 박 집사님은 손을 머리 뒤로 올리시며 얼굴을 붉히곤,
"네!"
그리고는 어물어물 집에 있다고 변명을 하십니다.
김 전도사는 다구쳐 물었습니다.
"집사님! 주의 종을 속이려고 하면 안됩니다. "
박 집사님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전도사님이 하도 고생하시는 것을 보초 안타까워하던 중 지난 장날 장에 가서 채권 사는 고물장수에게 팔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 전도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가슴에 가득 번져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울먹울먹 한 소리로,
"집사님! 누가 여기 이런 대접 받으려 한다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말도 채 맺지 못하는 김 전도사를 향해 박 집사님은 차 시간 늦는다며 수저 들기를 재촉하십니다.
어느 여인의 유언장
보기에도 약해 보이는 한 늙은 부인이 비에 온몸을 적신 채 피곤한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뉴욕의 한 극장 앞에서부터 길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행렬의 앞부분에서 비를 맞으며 극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손에는 샌드위치가 들어있는 봉지를 들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음료수 병이 들려있었습니다. 그녀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그렇게 서 있었고 끝내는 극장 문이 열리기도 전에 갑자기 앞으로 쓰러져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극장 문 앞에 나와 있던 극장 지배인이 그 여인을 안아서 곧장 극장 안의 위생실로옮겼습니다. 금방 달려온 의사와 간호원이 그녀를 보살폈고, 그녀는 곧 의식을 되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대앉은 이 여인의 옆에는 푸른 눈을 가진 극장 지배인이 있었고 그는 친절히 아주 친절하게 친부모를 모시듯 잘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드셨으면 제가 택시로 댁까지 모셔드릴까요? "
"집에 데려다 주시겠다고요? 저는 영화를 보기 위해 여기에 와서 줄곧 기다렸단 말입니다. 도대체 언제쯤 상영합니까? 내가 줄을 잊어버려서 들어갈 수 없단 말입니까?"
그 부인은 계속 영화를 보고야 돌아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실례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남편되시는 분은 살아계십니까?"
"아닙니다. 그는 죽었어요. 내 아들도 죽었고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영화에 재미를 붙이고 사는 거랍니다. 아직 제가 섰던 줄이 그대로 있으면 나를 내 자리로 데려다주십시오."
"아닙니다. 부인,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가 좋은 특석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마음대로 영화를 즐기십시오."
"난 항상 영화를 두 번씩 보는데 이번에도 두 번 볼 수 있을까요? "
"얼마든지 보고싶은 대로 마음껏 보십시오. 이 특석은 어느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
이렇게 해서 극장 지배인과 이 늙은 부인의 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영화가 상영될 때마다 이 늙은 부인은 샌드위치 봉지를 들고 극장을 찾아왔고, 극장 지배인은 언제나 반갑게 그녀를 특별석으로, 이제는 그 부인을 위한 개인 지정석이 되어 버린 자리로 안내해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지역 경찰서에는, 3층으로 된 벽돌집에 혼자 살고 있는 여인이 여러 날 동안 출입하는 것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는 이웃 사람들의 보고가 접수되었습니다. 경찰들이 현관 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한참 후 경찰은 문을 부수고 들어가 집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침실은 안으로 잠겨져 있었습니다. 침실에서는 아주 연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경찰은 침실 문을 열려고 애를 썼으나 너무나 문이 견고하게 잠겨 있어 부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밖으로 통한 비상 계단을 통해 침실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들어갔을 때 그 부인은 중풍과 독감으로 인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밤 그 부인은 병원에서 운명했습니다.
이 부인의 침실에선 유언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유언장 끝에는 에드나 엘리오트라고 그 부인의 서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재산의 일부를 여러 자선 단체에 기증하도록 유언되어 있었는데, 그 유언장에는 극장 지배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항목도 있었습니다.
"나는 내 은행 예금액 중 백만 불을 그에게 넘겨주고자 합니다. 그는 내게 극장 안의 특석과 특전을 부여하여 주어 내 마지막 생애를 더욱 즐거웁고 유쾌하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친절하고 예의바른 행동으로 커다란 몫을 담당했으면서도 내 게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한 것이 없었습니다. " 그 극장 지배인은 어디에 있었던가? 경찰은 이 지배인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이웃 도시에 있는 한 병원에서 비품 수급을 맡은 관리인으로 많지 않은 월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백만 불은 그날로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돈을 나눠 주기 좋아하는 사람
조지 피바디는 금세기에 있어서 가장 돈이 많은 상인이었습니다. 그는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선 재물이 아까운 줄 몰랐고, 런던에 모범 임대 가옥을 짓는 데에도 2백만 달러가 넘는 돈을 희사했습니다. 아마 그의 생애 동안 기부한 금액을 추정해 보면 9백만 달러가 넘을 것입니다.
한 번은 발티모어의 한 저녁 식사 모임에 조지 피바디와 존 홉킨즈가 참석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피바디 씨, 당신은 돈을 버는 것과 기부하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기분좋은 일이라고생각하십니까? "
"음‥‥‥‥ 피바디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돈 버는 걸 좋아합니다. 돈 버는 건 아주 기쁜 일이니까요. 처음 돈을 기부하려고 생각했을 땐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내게 있어선 사실 그걸 생각하면 전 우울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좀 생각을 해보고 우선 조그마한 규모로 한 번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런던에 임대 가옥을 지었던 것입니다. 진짜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건물이 완공되고 나서, 가난한 사람들이 깨끗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을 돌아보고 나니 기분이 전혀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더 돈을 썼고 그 보람은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돈을 버는 보람만큼 좋은 일에 돈을 쓰는 보람이 크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어록·시·묘사
예술의 가치와 과학의 가치는 만인의 이익에 대한 사욕이 없는 봉사에 있다.
(J. 러스킨)
하나를 베풀면 만 배를 얻는다.
(김대성)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임금을 받지 못한다.
(영국 격언)
최고의 도덕이란 끊임없이 남을 위한 봉사,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 일하는 것이다.
(M.K. 간디/ 윤리적 종교)
개인은 제 민족을 위해서 일함으로써 인류와 하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한다.
(주요한/ 도산 안창호)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봉사함으로써 나는 세계에 대하여 뜻있고 목적있는 행동을 다하 는 것이다.
(A. 슈바이처/ 나는 생애와 사상)
생애의 외경(畏敬)의 윤리는 자기 주위의 모든 인간과 인생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으로서 봉사하라고 요구한다.
(A. 슈바이처)
인간의 생명은 상호 부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봉사할 능력이 남아 있 다면 슬픔도 고통도 불행도 비탄도 생을 끊을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가진 바 쓸모가 모두 없어지고 인제 어차피 죽을 길밖에는 도리가 없다고 확신하게 되면 느리고 무서운 죽음보다 빠르고 안이한 죽음을 택하는 것도 인간의 권리 중에서 가장 소박한 것이다.
(C. P.S. 길맨)
꿀벌이 다른 동물보다 존경되는 것은 부지런하기 때문이 아니고 다른 자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
(R. M. 크리소스톰/ 詩話)
물질을 사랑하면서도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그 물건에 아름다움을 입히는 것은 위대한 봉사적 행위이다. 모든 물건에 사랑의 옷을 입힐 수 있는 마음을 가지라! 그 물건이 가진 아름다움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진실한 생활이며, 이 세상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길이다. 아름다움과 사랑을 줄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R. 타고르)
봉사는 봉사하고 있는 친구에게서 기대될 수는 없다. 나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자유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알리스/ 경구집)
그는 봉사한다/ 늪과 사막 사이를 건너도록,/ 그는 봉사한다!// 다리는 서 있다/ 그 모든 돌과 강철이 뒤섞여,/ 다리는 서 있다// 하지만 나사들이 풀리고 있다/ 그리고 푸른색이어야하는 강철은/ 바짝 다가가 잡아보면// 갈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봉사를 위해, 물과 모래 이상의/ 노래들,// 오조토에서/ 그리하여 그들은 가면을 숭배한다,/ 비록 제 철을 만났지만‥‥// 가면들!/ 오, 가면을 벗어버려라! 그리고 그 뒤에는?/ 어떤 바람이! 어떤 지푸라기가!
(존 페퍼 클라크/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각하)
나는 석탄입니다요!/ 당신은 땅에서 나를 잔인하게 뜯어내고/ 나는 당신의 광맥이 됩니다요, 나으리/ 나는 석탄입니다요!/ 당신은 내게 불을 붙입니다요, 나으리/화력 좋은 연료로 영원히 당신에게 봉사하도록,/ 하지만 안됩니다요, 영원토록은, 나으리.
(호세 크라베이리냐/ 흑인의 절규)
봉사하는 성도들의/ 부지런한 손길은/ 믿음에서 자라나는/ 향기로운 열매라
(홍안의/ 성도의 열매)
"제자 어떻게 세상을 도와야 할까요?"/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스승은 말했다. /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이해해야 할까요? "/ "거기서 돌아섬으로써."/ "그러면 어떻게 제가 인류에 봉사해야 할까요?"/ "너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
(앤소니 드 멜로/ 물러섬)
고꾸라진 허릿새로 피맺힌 아픔/ 태양은 고도를 잃어 휘청이고/ 수종들던 여인들 목이 메이네
(김영옥/ 눈물의 골고다)
최고의 정치 표어는 자유가 아니다. 평등도 아니요 동포주의(同胞主義)도 아니다. 또, 공동일치(共同一致)도 아니다. 다만 봉사이다.
(미상)
한 사람이 못을 박으면 딴사람은 그 못에 모자를 건다.
(영국 격언)
스승은 은둔보다 행동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항상 '깨친' 행동을 주장했다. // 제자들은 '깨침'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했다. / 그게 '올바른 지향' 이란 뜻인가?// "천만에." 스승은 말했다. / "원숭이가 물고기를 물구덩이 무덤에서 구해주겠다고 강에서 건져 올릴 때, 그가 얼마나 올바른 지향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라."
(앤소니 드 멜로/ 봉사)
봉사하는 성도들의/ 부지런한 손길은/ 믿음에서 자라나는/ 향기로운 열매라.
(홍안의/ 성도의 열매)
인삼가게에 들어서니 할머니 생각이 난다/ 내가 허물어지는 편리한 인스턴트 식품 같은 눈물/ 농심라면 한 끼를 끓여 주시려던 그 하오의 애틋함/ 이제 사랑하여야 할 시간이 모두 지나갔으므로 그러나.
(정웅규/ 즐거운 연애 · 2-할머니 생각)
설 교 노 트
성소에 봉사할 때의 주의할 점
민4:15-20
서론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어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레위인들도 하나님의 성소에서 일을 할 때는 아무렇게나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어떤 장소적 개념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개념에서 교회 안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출입하는 태도라든지 예배드리는 태도 및 성물을 취급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 자기 생각대로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본문 19절에 "그들이 지성물에 접근할 때에 그 생명을 보존하고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너희는 이같이 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이 들어가서 각 사람에게 그 할 일과 멜 것을 지휘할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질서 있는 봉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적 지도자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수 없는 주의 일이라고 해도 질서를 지키면서 봉사를 해야 칭찬과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를 통해서 그의 비밀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2. 성물을 경하게 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물을 대할 때에 경건성을 잃을까 미리 경고하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죽는 이도 있었음을 기억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지역을 침범하면 죽는다는 경고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출19:12). 제단을 경시할 때는 죽는 것입니다(출28:43). 여하간 성소에서 봉사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습니다(잠9:10).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2:11)" 하였고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까(시76:7)"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겸손하게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3. 성물을 함부로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행진할 때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성소와 모든 기구 덮기를 필하거든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하였습니다. 이는 성소의 성물을 우상시하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성소의 성물은 그것에 대한 신적 인준과 하나님의 임재 및 그 거룩한 성품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비로소 신령한 권위와 가치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물을 우상시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정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하고 그것을 취급할 때에 조심성있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는 자기 기분이나 자기 생각대로 하지 말고 성물을 경하게나 함부로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웃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법궤에 손을 대다가 죽고 말았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왕 교회에서 봉사하려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대로 하심이 좋은 것입니다.
종의 도
마20:17-28
서론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는 다릅니다. 세상의 원리는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남을 섬기는 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본문을 통하여서 종의 도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요구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입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그 어머니는 원하였던 것입니다. 섬기는 자보다 섬김을 받는 자리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중심의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무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줄로 잘못알았고 주님의 계획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려는 주님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예비한 자에게 주시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이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최고가 되고자 하는 자는 주님의 참 마음을 제대로 모르는 자인 것입니다.
1. 다른 제자들의 분노
야고보와 요한을 제외한 열 제자는 이 말을 듣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들보다 더 높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증거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요한 형제의 마음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모두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윗자리에 앉기를 원한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알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마음에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원리는 서로 다툼이 일어나게 하고 불화의 자리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제자들의 상태는 주님이 가르치신 표준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목적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상태로는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원리로 천국의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국의 일은 천국의 원리로 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의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주관자들은 백성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권세를 부립니다. 세상의 원리는 지배적입니다. 이기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지배자만 행복하고 피지배자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원리는 어떠합니까?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먼저 남을 섬깁니다. 남의 종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희생합니다. 남을 자기보다 먼저 위하고 살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는 태도는 주님을 아직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라면 주님의 낮아지신 모습에서 종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기독신자의 봉사
롬12:3-13
서론
우리 기독교의 지상 사명은 모든 인류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구원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귀중하고 성스러운 사명을 수행해 나아가는 우리 교회나, 기독 신자들의 사명은 한마디로 말해서 봉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기 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역설한 사도 바울은 다음에 이어서 우리 기독신자들의 윤리와 바른 봉사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는 우리 기독신자들의 본분이요, 또한 의무라고 하였습니다.
1. 봉사의 의의
성경 사전이나 국어 대사전을 참고해 보면, 봉사의 뜻을 몇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1) 남에게 주는 것이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나 남에게 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주겠습니까? 베드로는 행3:6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과 그 복음을 누구에게나 먼저 주어야 하겠습니다.
(2) 남을 섬기는 것이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것이 봉사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겨야 합니까? 윗사람은 물론 아랫사람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막10:45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는 봉사의 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3) 남을 도와주는 것이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도와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그런고로 봉사는 강한 자나 부요한 자나 높은 자를 위한 도움이라기보다 몸이 연약하고 가난하고 불우한 자를 도와주는 일이 봉사인 것입니다. 막2:17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2. 봉사의 이유
우리들이 교회를 봉사해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주님의 요청인 동시에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피흘려 세우신 교회를 봉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2) 기독 신자들의 본분이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교회에 봉사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3)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으나,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은 교회 봉사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58).
(4) 장차 영장의 면류관을 받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일에 바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장차 나타나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벧전5:4).
3. 봉사의 자세
봉사에는 봉사자의 자세와 방법과 목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성경에 가르치는 봉사의 자세와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1) 은밀한 봉사가 있는 반면에 나팔부는 봉사도 있습니다.
(2) 기쁨과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봉사가 있는 반면에 억지로 하는 봉사도 있습니다.
(3) 생산적인 봉사가 있는 반면에 비생산적인 봉사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 신자의 봉사는 은밀하고 기뻐하는 생산적인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봉사할 수 있는 은혜를 받아야 바른 봉사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누구에게나 봉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직책을 맡겨 주신 것은 계급장이 아니고 봉사의 분량입니다.
봉사는 은혜의 영역에 따라 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의 분량과 영역에 따라 봉사해야 합니다.
봉사는 열심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롬12:11에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의 일을 연기하거나 중단하거나 무질서하게 하지 말고 열정과 성의와 힘을 다하여 바르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결론
봉사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차가운 사회를 따뜻하게 하며, 어두운 사회를 밝고 명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너져가는 사회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진정한 봉사자
막15:21-32
서론
여기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어준 봉사를 한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는 시몬이 져다 주기에 앞서 예수님의 동생이나 제자들이 져다 주어야 할 것이나 시몬이 대신지어 주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를 져다 준 봉사가 주님을 위해서입니까? 억지로 지고 갔다는 것을 보아 자의가 아니고 타의요, 자원이 아니라 강제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레네 시몬의 봉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타고난 운명적인 봉사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나 봉사할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른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진정한 봉사의 대상
우리들이 봉사의 대상을 바로 찾아서 봉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면서 넘어지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현하 우리 기독 신자의 공통적인 봉사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 점에 대하여 성서적인 측면에서 세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교회는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주님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지상에 세워진 교회를 봉사하는 것이 주님을 봉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물리적인 웅장한 건물이 아니고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영적인 공동체라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의 집단을 위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2) 주님을 믿는 소자 하나에게 행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작은소자의 생명 하나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을 믿는 소자들을 찾아서 물심양면으로 봉사해야 되겠습니다.
(3) 교회 울타리 밖에도 구원받음을 택한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봉사하는 것이 곧 주님을 봉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우한 우리의 이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와 신자들을 찾아 바로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2. 진정한 봉사의 자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봉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할 수 있는 자세와 기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구레네 시몬의 경우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수 있었던 그 자세와 기능을 잠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 가까이 따라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던 주님의 제자들은 모두 배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주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사람은 십자가를 질 수 없고 오직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사람만이 십자가를 바로 지고 주님을 바로 봉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대한 사랑이 불타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애석한 표정으로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병정들이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라고 하였던 모양입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가 주님을 바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가지고 갈 수 있는 힘있는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주님을 가까이 따르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힘이 없으면 봉사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영적인 신앙의 힘이 있어야 주님을 바로 봉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진정한 봉사를 위하여 먼저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는 성도가 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가 되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신령한 힘을 얻어 힘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이와 같이 진정으로 봉사하면 나 자신이 큰 은혜와 축복을 체험하게 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 이 되어 좋은 영향을 주게 되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봉사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진정한 봉사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고상한 신앙과 봉사
눅23:50-56
서론
우리들은 성경과 교회사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의 고상한 신앙과 봉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 50-56절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고상한 신앙과 봉사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과 봉사는 먼저 예수님의 마음에 들었던 고상한 신앙과 봉사인 동시에 교회에도 덕을 끼치게 되고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나중이 더욱 아름답고 고상한 신앙이요, 용사라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기독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봉사하는 행위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준엄한 요청인 바 성도들의 당위적인 본분이요, 의무이기도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성도들의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는 사역이기도 합니다.
1. 아리마대 요셉의 고상한 신앙
아리마대 요샙의 인격과 신분을 살펴보면, 그는 돈이 많은 부자이고,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며,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믿되 아주 고상하게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신앙의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1) 나에게 돈을 많이 주어 부자가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니 이 물질로 주님을 바로 봉사하겠다는 신앙입니다.
(2) 나에게 권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니 높은 지위에 있을 때에 주님을 바로 봉사하겠다는 신앙입니다.
(3) 내가 착한 사람이 된 것도 주님의 축복이니 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로 봉사하겠다는 신앙입니다.
(4) 이 세상의 부귀 영화는 안개나 구름같이 사라져 버리는 유한한 것이니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추구하였던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다까지 찾아가서 빌라도에게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고 고백한 것은 환난의 시기에 순교를 각오한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아리마대 요셉의 신앙은 고상하고 훌륭하였습니다.
2. 아리마대 요셉의 고상한 봉사
여기 성경에서는 아리마대 요셉의 봉사에 대하여 몇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합세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첫째, 시체를 인수해 왔다고 하였습니다. 둘쩨,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의 시체를 깨끗이 씻어 주었습니다. 셋째, 그 시체에다가 향수를 바르고 세마포에 싸서 자기의 새 무덤에 안장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리마대 요셉의 봉사는
(1)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과 죽음을 각오한 봉사입니다.
그 당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만 하여도 핍박과 박해를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생들도 또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몸을 도사리고 있던 때에 아리마대 요셉이 나타나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시체를 인수하다가 안장한 봉사는 참으로 고상하고 훌륭한 봉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이 가장 궁지에 몰려 비참해졌을 때 최선을 다한 봉사입니다.
예수님이 존경과 대접을 받을 때에는 봉사하기 쉬우나 예수님이 가장 궁지와 비극에 처하였을 때 하는 봉사는 참으로 고상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치 있고 고상한 봉사라는 말입니다.
(3) 예수님을 위하여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친 합당한 봉사입니다.
그 내용은 시체를 인수하다가, 그 피묻은 시체를 깨끗이 씻고 향수를 바르고 세마포로 싸서 자기 새 무덤에 안장을 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을 위해서 물질과, 시간과, 노력과, 정성과, 생명을 모두 기울인 봉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 봉사는 사53:9에 "부자의 새 무덤에 장사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한 봉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봉사에 대하여 세 가지로 결론을 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봉사요, 둘째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봉사요, 셋째는 자기의 전부를 바친 봉사라고 하겠습니다.
결론
아리마대 요셉의 봉사의 결과에 대하여
(1) 주님을 기쁘고 영화릅게 하였습니다.
(2)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와 모범이 되었습니다.
(3)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온 성도들에게 칭찬과 존경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는 참으로 가치있는 봉사로서 헛되지 아니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값진 봉사
마26:6-13
서론
우리 사람은 이 세상에 일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봉사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봉사할 자리와 시간을 바로 찾아야 하고 봉사할 일거리를 바로 붙들고 값진 봉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우리 기독 신자 입장에서는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고 하면, 우리들은 어떠한 봉사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를 해야 합니다.
본문에 무명의 여성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값진 봉사를 하여주님께 칭찬받았습니다.
1. 값진 봉사의 의미
봉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섬기는 일을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2)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에 대해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4) 구약의 선민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일을 봉사라 하였습니다.
(5)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일을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6) 구약 시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는 모든 일들을 가리켜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봉사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이고,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남에게 주는 일이고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남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값진 봉사에 대해서 무명의 여성도를 통해서 알아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꼭 들었던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꼭 들도록 봉사해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②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봉사를 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하게 하여 드린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만족할 수 있는 봉사를 해야 되겠습니다.
2. 값진 봉사의 방법
값진 봉사를 하려면 봉사자의 믿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여기 무명의 여성도는 자기 소유 중에서 제일 귀한 것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명이나, 자기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소유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 자세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되 먼저 나의 모든 것을 정성모아 드리고, 다음은 기회를 잘 포착하여 인색함이나 아낌없이 주님께 바치는 봉사가 귀중합니다.
3. 값진 봉사의 내용
값진 봉사의 내용은 나드 한 옥합을 깨어 주님께 부어드린 봉사입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 중에는 제일 귀한 것을 드리었습니다. 드리되 어떤 이유나 조건이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드리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명 여성도의 고차원적인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 받으려는 신앙이 아니고 그 무엇이나 바치려는 신앙입니다. 이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그 은혜를 보답하려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2)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님의 유익을 추구한 신앙입니다. 이는 구속하여 주신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보겠다는 신앙입니다.
(3) 자기 자신이 평안하고 행복을 누리려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님의 평안을 나아가서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신앙입니다.
그 내용은 그가 지니고 있던 값진 향유를 주님께 부어 드리게 됐고, 나아가서는 그 목적이 주님의 장사를 위한 일이고, 다음은 자기 자신은 이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마치 능욕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에게 받기에 앞서 바쳐 드리고, 나의 유익만이 아니라 주님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평안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값진 봉사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값진 봉사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요청이요, 분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분이요, 의무이며, 이 봉사는 보람있고 가치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직한 봉사
막14:1-11
서론
여기 봉사라는 말은 비이성적인 동물에게서는 적용되지 아니하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동물이요, 일하는 동물이요, 봉사하는 동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통 인생관은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하거니와 좀더 발전한 인생관의 사람은 일하기 위해서 먹고 봉사하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의 인생관은 고전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봉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봉사 중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람직한 봉사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봉사도 있다는 본문의 사실에 주목해야겠습니다.
1. 바람직한 봉사의 의의
(1) 성경에서 봉사하는 말의 의미를 세 가지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남을 섬기는 것이 봉사요, 무엇을 드리는 것이 봉사요, 남을 도와주는 일이 봉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하셨고, 남에게 무엇을 받으려고 오시지 아니하시고 목숨을 주시려고 오셨고, 남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봉사의 모범이 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본받은 바람직한 봉사의 내용은 예수님의 마음에 꼭 들은 봉사요, 예수님에게칭찬을 받은 봉사요, 예수님을 위로하고 만족하게 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2. 바람직한 봉사의 방법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봉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 은밀한 봉사(마6:4)는 자기를 나타내지도 아니하고 보상을 바라보지 않고 자원하는 봉사입니다.
(2) 충성스러운 봉사(고전4:2)는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겸손하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3) 희생적인 봉사(계2:10)는 자기의 유익을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는 봉사입니다.
이러한 봉사는 마음의 자세가 밝아야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무명 여성도의 봉사자로서의 마음 자세는 예수님을 제일 귀한 분으로 알고 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가 존재하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 줄 알고 봉사하였습니다.
3. 바람직한 봉사의 내용
성경을 보면 옥합을 부어 드리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1) 제일 귀중한 것을 드린 것입니다.
(2) 인색함 없이 기쁜 마음으로 드린 것이었습니다.
(3) 어떤 조건 없이 드린 봉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 드리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①봉사는 주님에게 받으려고 함이 아니라 바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② 봉사는 내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만족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③ 봉사는 나의 평안을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 자신들은 이 무명의 성도를 본받아 주님에게 받으려고 하기 앞서 드리고 기쁘게 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결론
우리는 봉사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분부이기 때문에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의 본분이요, 의무이기 때문에 봉사해야 합니다.
이러한 봉사를 통해서 사회는 발전하고, 교회는 빛을 발휘하고, 가정에는 아름다운 끝이 핍니다.
봉사의 모델
요13:1-11
서론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 사랑의 종교이지만 봉사의 종교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나 실제 사역이 봉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고,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속죄의 제물로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봉사하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까지 씻겨 주셨습니다.
1. 봉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봉사라는 낱말은 신구약 성경에 여러 곳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 원전에는 '아바트'라는 동사로 기록되었고, 신약 원전에는 '디아코네오'라는 동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일을 한다는 뜻이요, 직분을 수행한다는 뜻이요, 섬기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진정한 봉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다음은 하나님께 맡은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행위가 봉사라고 합니다.
(2) 진정한 봉사는 그 동기가 순수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자기는 숨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고, 둘째, 어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하는 봉사가 진정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고 봉사의 방법도 정당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이 하나님 의 성스러운 일을 봉사하되, 예수님처럼 동기도 순수해야 되지마는 방법도 정당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정성을 다해 성의 있게 봉사하고,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붕사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2. 봉사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봉사의 성격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기회를 바로 포착한 봉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할 수 없는 죽음의 밤이 오기 전에 봉사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봉사할 수 있는 기회에 힘써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열두 제자 중 그 누구도 하지 않는 봉사를 예수님이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사람이란 대개 쉬운 일은 잘하지만 어려운 일은 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봉사입니다.
(3)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 봉사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봉사는 이 세상 먼지에 더러워진 발을 씻어 깨끗하게한 봉사입니다. 이러한 봉사는 겸손하여 남을 아끼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가능한 봉사입니다.
3. 봉사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본문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주님을 본받아 봉사하려고 하면, 주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남을 섬기고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남을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주님의 분부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 구속받은 성도들의 본분이며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3) 인생의 가장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본받아 진정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늘의 사회와 교회가 건설되고, 발전을 하고, 훌륭한 유산을 생산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진정한 봉사에 의하여 구속함을 받았고, 깨끗함을 받았고, 새로워졌습니다.
결론
인생은 어차피 한 세상 살다가 가게 됩니다. 이왕이면 진정한 봉사자가 되어 오늘의 교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위대한 유산물을 많이 생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 세상에 빛을 남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집에 섰는 종
시134:1
서론
본문에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그 집에 섰는 종들은 누구를 뜻하는 것입니까?
1. 집의 정의
집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19장 3절에 "천사가 소돔성 안에 롯의 집에 들어가니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일반적 인 주택을 말하는 것입니 다. 즉, 사람이 사는 주거용 주택입니다.
누가복음 1장 27절에는 "다윗의 집에 요셉이라고 하는 자가 있으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혈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2절에 "내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으니‥‥‥‥라고 하였는데, 내 아버지집이란 천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삼지 말라"고 한 것 등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소개된 "여호와의 집"도 성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집의 정의
여호와의 집이란 '여호와께서 계신 집'이라는 뜻에서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성전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을 때에나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그 곳에 임재하시면서 그것을 알리시기 위하여 영광 중에 구름으로 임재한 것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2) 여호와께 경배하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하는 일은 오직 여호와께 제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대면하는 일이란 결국 그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기도하고 또 그 계시를 받으며 경배하여 영광을 돌리는 일들입니다. 거룩하신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일만이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3. 그 집에서 봉사하는 종들
"종"이라고 하면 세상에서는 가장 비천하고 낮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집에 섰는 종은 사람의 종이나 심부름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여호와의 종이므로 오히려 영광스럽고 귀한 직분입니다.
사람을 위하여 하는 봉사란 아무리 잘 하였어도 결국 헛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위하는 일일 때에는 그 자체가 거룩한 일이요, 귀중한 일이요, 큰 상급이 따르는 복된 일인 것입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헛된 것을 좇아다니며 그것을 위하여 봉사하지 말고 살아계신 참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까? 자기의 위치를 살펴서 보람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 보람된 생활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
요13:12
서론
최후 만찬회석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세족의 교훈입니다.
주도 되시고 선생도 되신 분이 종도 되며 제자도 되는 제자들의 발을 묵묵히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1. 겸손의 태도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교훈을 평소부터 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저마다 교만한 생각이 들어서 나이 어린 요한이 할 것인가, 아니면 무명적 존재인 다대오가 할 것인가 하며 서로 발 씻는 일을 미루며 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양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며, 열두 제자의 스승이시면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겸손의 태도를 보여주므로 무언 중에 교훈하셨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자기의 발을 내놓고 씻어 달라고는 하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서 내가 씻겨 주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겸손하신 태도를 본받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요13:1).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마음속에서 불타오르므로 견딜 수 없어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 주신 후에 다시 다짐하시는 뜻으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34)"고 또다시 타르시듯 교훈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단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인을위하여서, 만인을 사랑하시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는 그런 사랑이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고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3. 봉사의 정신을 보여주십니다.
만찬회석상에서 발을 씻는 역할은 제자들이 의례히 스승의 발을 씻고, 종이 주인의 발을 씻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제자들은 당연히 해야 할 책임들을 저마다 눈치를 보면서 남에게 핑계하며 서로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청한 것 같이 너희도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하셨습니다.
결론
세계의 교육사를 살펴보아도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가르치신 분은 안계십니다.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참 봉사의 정신을 바로 깨닫고 위대하신 선생 예수님을 본받아서 올바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 부
성 경 활 용
1. 하나님께서 정하심
(1) (창1:27, 28)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
(1) 존경해야 한다.
(에1: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무른하고 모든 부녀가 그 남편을 존경하리 이다
(골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2) 사랑해야 한다.
(딛2: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3) 순복해야 한다.
(벧전3: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3.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
(1) 신뢰해야 한다.
(잠31: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정절치 아니하겠으며
(2) 의무를 다해야 한다.
(고전7: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3) 사랑해야 한다.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4) 화합해야 한다.
(고전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그 아내를 버리지 말라
관련원어풀이
1. vyai 이쉬-
(1) 남자, 사람.
(창4:1, 삼상1:11)
(2) 남편.
(창3:6,룻1:11)
(3) 사내다운 마음, 용기.
(왕상2:2, 삼상4:9)
2. l['B' 바-알
(1) 주, 주인, 소유자.
(출21:28, 삿19:22)
(2) 남편.
(출21:22, 삼하11:26)
(3) 어떤 것을 가진 자, 주인.
(창14:13, 느6:18)
3. !y c;n: 나-쉼
여자, 아내, 여성.
(창4:19, 룻1:4)
4. gunhv 구네-
(1) 나이든 여자, 처녀, 부인, 과부.
(마9:20, 롬7:2)
(2) 아내.
(마5:31, 계2:20)
5. e[cw 에코-
(1) 가지다, 쥐다, 소유하다.
(히8:3, 계1:16)
(2) 여자를 아내로 가지다, 사용하다.
(마14:4, 고전5:1)
설교예화자료
큐리 부처
큐리 부처가 라듐을 발견하여 공표하고 순수한 라듐을 만들어 내기까지에는 4년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연구기간 동안 마리 큐리는 남편과 함께 비 가 새는 험한 창고 같은 실험실에서 연구를 계속했으나, 그녀의 일은 연구소에서만의 일이 아니고 식사 준비, 빨래하는 일, 아이 키우는 일 등 가정 주부로서 하는 일이 쌓여 있었습니다.
과학자이며 주부임을 자각하고 있던 마리는 바쁜 일상 생활에서도 힘들어하거나 귀찮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편 피엘 큐리의 애정이 그녀의 바쁜 생활을 지탱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실은 마리가 자기 언니에게 쓴 편지 속에 쓰여 있습니다. "나는 남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좋은 남편이 있어 행복합니다. 정말 이렇게 좋은 남편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늘에서 내려주신 복입니다. 함께 살아갈수록 우리들의 애정은 두터워지고 있습니다. "
부부애
어떤 곳에 가세는 빈한하나 의좋게 사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후 남편이 뜻밖에 중한 병으로 앓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품팔이와 삯바느질로 생활하며 약을 사다 치료하고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생활은 점점 빈한해져 치료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최후에 할 수 없이 병든 남편을 버리고 달아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죽이나 쑤어서 한 번 더 대접하리라 생각하고는 쌀자루를 털어 한 줌의 쌀을 모아 우물가로 가서 쌀을 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때 장자 뱀이 와서 떨어진 쌀알을 물어가고 또와서 물어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여러 번 다리 아래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을-자세히 보니 한 장자뱀이 꼬리가 못에 찔리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쌀을 물어다가 먹이는구나.' 하고 부인은 생각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못에 찔린 놈은 수놈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저런 미물도 부부애를 지키어 자기 남편을 위하여 저렇게 정성껏 공양하는 데 내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하며 자기의 불의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남편을 지성으로 치료하였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병은 점점 나아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그 부부는 여생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완벽한 부인을 만들려 했던 남편
이 얘기는, 예상을 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지만 한 이혼 재판소에서 나왔습니다. 자칭 이상적인 짝을 창조한 사람은 심리학자이며 정신분석학자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52세로 완벽한 결혼의 상대자인 부인보다 서른 살 위였습니다.
한 LA법정에서 심리학자인 네글리 박사는 어떻게 그 젊은 여자의 마음과 생각을 완벽한 부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했는데, 일단 결혼반지가 끼어지자 정신분석학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 과학자가 말하기를 완벽한 부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여인은 집안 청소도 하지 않았다고 하며 또한 그가 자주 아기를 돌봐야 했다고 합니다. 부인 또한 정신분석학 박사는 남편으로 부족하며, 1년에 만 달러씩 벌면서 자기에게는 용돈을 하루에 단지 25센트밖에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을 분석하는 심리학자와 그가 창조한 완벽한 부인 사이의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그의 설명으로는 그가 결혼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실수를 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정신을 분석하는 일을 잊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알콜 중독자 남편
에드나라는 여인은 포올이라는 청년과 깊은 사랑에 빠져 드디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건강할 때나 약할 때나 좋을 때나 슬플 때나 서로 사랑하겠다고 제단 앞에서 서약했습니다.
결흔 후 약 1년 동안 그들은 행복한 생활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나는 남편의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은 저녁 식사하러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자정이 훨씬 지난 후, 그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욱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포올은 술에 만취한 채 계단을 기어오르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수년 동안 포올은 주기적으로 알콜 중독에 빠져 왔었습니다. 그래서 캐나다의 어느 병원에 1년 동안 입원해 있기도 했었으며, 의사는 포올이 알콜 중독에 걸렸다고 확인하기도 했었습니다. 에드나와 결혼할 당시 포올은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공수표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에드나는 남편을 믿었습니다. 특히 남편이 술을 끊겠다고 다시 약속하고 아내의 권유에 따라 알콜 중독에서 헤어나온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열성을 보일 때, 에드나는 남편을 믿고 격려했습니다.
이렇게 술에서 해방되어 갈 때쯤 포올은 월남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술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에드나의 마음속에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군대 생활의 긴장과 지루함 때문에 그가 다시 술을 입에 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2년 후 남편은 다시 아내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의 눈에는 생기가 있었고, 남편은 아내에게 군대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술을 입에 댄 적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남편은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남편은 전화를 걸어 직장에서 할 일이 많아 집에 늦게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알려왔습니다. 그는 시내에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에드나의 마음은 결혼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밤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남편은 같은 음성으로 전화를 걸었고 몸을 가누지도 못한 채 기어들어오지 않았던가?
에드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깊어갈수록 시계만 자꾸 쳐다보았습니다. 드디어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에 문 밖에서 발자욱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편의 발자욱은 규칙적이지 못했었습니다. 남편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손마저 허공을 휘저으며 들어왔고, 아내를 향하여 "여보, 걱정마, 괜찮을 거야!"를 연발했습니다. 포올은 현관을 넘어서자 긴 쇼파에 몸을 던져 누웠고 숨을 헐떡거리다가 의식을 잃은 듯 말이 없었습니다.
에드나는 침실에 달려들어와 문을 닫은 채 한밤을 꼬박 울음으로 지새웠습니다. 희망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상태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방에서 나와 남편이 잠들어 있는 소파로 다가갔습니다. 남편은 창백한 얼굴이었고 전혀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번엔 의심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포올은 죽어 있었습니다.
달려온 의사는 "심장마비였습니다. 아마도 너무 과중한 일에 지쳐버린 것 같습니다. "라고말했습니다. 시체 해부 결과 그의 몸에서는 알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기도
1912년 4월 14일 밤, 볼티모어의 어떤 신문 편집실에서 여러 사람들이 밤 늦게 일을 하고자정이 지나서 막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야간 편집장이 사내(社內) 방송을 통해 "퇴근 중지! 그리고 인쇄 중지! 대형 여객선이 바다 위에서 빙산과 충돌했다. "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타이탄」호의 비극은 그해의 뉴우스 중 첫손을 꼽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극과 관련해서 수많은 일화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남편과 함께 죽기 위해서 구조선에 옮겨타기를 거부한 어떤 부인이 있었는가 하면 용기를 갖고 죽음을, 맞이한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도 전해 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일화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치발드 그래시 대령의 이야기였습니다.
대령의 부인은 마침 남편과 함께 그 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뉴욕에 있는 친구의 집에 머물면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건 당일인 일요일 저녁 늦게 그래시 부인은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책을 손에 든 채 잠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집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들려왔고 그들이 방에 들어섰을 때 그래시 부인은 거의 실신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위험과 불행의 감정이 너무나도 강력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그녀를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아침 「타이탄 호의 난파」 소식이 크게 보도 되었고 그 배에는 그래시 대령도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시 부인의 주별 사람들은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시 부인은 전날 밤의 공포는 잊은 채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내 남편은 괜찮을 거예요."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래시 대령이 무사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구조선은 몇 개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여인들과 어린애들에게 먼저 할당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령은 여자와 아이들을 구조선에 태워 보낸 후 갑판으로 올라가 사력을 다해 죽음과 싸워보려고 결심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에게는 너무 힘든 고공 다이빙이었고 그가 다시 수면으로 올라 심호흡을 하고 났을 때, 큰 나무 상자 하나가 떠있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의지하다 작은 뗏목을 만났습니다. 며칠을 파도 위에서 시달린 끝에 드디어 그 뗏목이 구조되었습니다.
구조의 소식은 그래시 부인에게도 전달되었습니다. 그녀가 기도했던 대로 그녀의 남편은 살아서 그녀에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원하는 아내
어느 샐러리맨에게 미모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용모에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미모의 여배우를 닳기 위해서 남편 몰래 정형 외과에 가서 코를 수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언젠가 "당신은 그 코만 고치면 틀림없이 모 여배우야."라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물론 미모의 여배우와 꼭같은 용모를 가질 수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계산 착오였습니다.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은 아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벌컥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당신의 코가 그게 뭐요, 나는 영화 배우 같은 여자는 원하지 않아요, 보고 싶으면 영화관에 가면 되지 않아요? "
남편이 원하는 아내는 참다운 아내, 아내다운 아내였습니다. 그 부부는 아내의 이 같은 무분별한 허영으로 가정의 파국을 가져올 정도로 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부부의 인연
덴마크의 칼슨 선장은 1811년 스무 살에 결혼하였으나, 바다에서 나고 바다에서 자란 그는 바다의 생활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배타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권해도 듣지 않으므로 그는 부득이 이혼하고, "언제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애정 깊은 말을 남기고 고국을 떠났습니다. 그날로부터 9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오고 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건강했던 칼슨 전부인에게 그전 남편이 살아 있으며 고향에 돌아오리라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1903년 아게 칼슨은 과연 고향에 돌아와 92년 동안 보지 못했던 전처를 찾았습니다. 부인은 운웃과 깊은 애정으로 그를 맞았습니다. 칼슨은 헤어진 아내가 자기를 생각하고 92년 동안을 독수 공방했다는 사실을 알자 무릎을 꿇고 다시 인연을 맺자고 빌었습니다. 그리하여 뒤엎힌 물을 다시 그릇에 담아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었고, 금슬이 젊은이 못지 않았으며 첫 번째 결혼으로부터 계산하여 백 년째 되는 결혼 기념일에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 해에 두 사람은 함께 사이좋게도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어록·시·묘사
부부란 두 개의 반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다.
(V. 고호)
별다른 개성을 가진 남녀가 결합하여 한 개의 인격이 된다는 데는 거기에 벌써 협동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부부간의 협동이란 1+1=2가 아니라, 1+1=1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의 개성은 반만 남게 되는 것이다. 반은 죽이고, 반만 살리는 것이다. 반을 죽인다는 것은 희생이요, 반을 살린다는 것은 사랑이다. 희생의 정신과 애정, 이 두 가지가 없이 부부생활이 불가능한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이 원리는 부모 자식간에도 적용되고 형제 자매간에도 성립된다. 이것을 가족 구성의 원리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희승/ 현대인강좌 인간과 윤리)
많은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즉 돈 ·사회적 지위 ·가정 ·자식 등을 함께 소유하는 것에 안주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사랑을 기초로 하여 시작된 결혼이 다정한 소유로서 두 이기주의가 하나로 뭉쳐진 종합, 즉 가정이라는 조합으로 변형된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귀머거리 남편과 눈먼 아내는 가장 행복한 부부
(덴마크 속담)
부부간의 협조는 가야금과 피리의 합주와 같다.
(중국 속담)
부부가 있는 뒤에 부자(父子)가 있고 부자가 있은 뒤에 군신 상하가 있어서 예의란 것을가질 수 있는 것이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으로 국가의 다스리고 어지러운 것이 관계되지 않음이 없다.
(이제현/ 익제난고)
집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난로보다 부부간의 이해이다.
(마다가스카르)
어느 부부나 적어도 한 쪽은 바보다.
(H. 필딩/ 아멜리아)
너희들 둘은 한 손 속의 두 손가락이다. 죽을 때까지 떨어져서는 안 된다.
(F. 모리아크/ 테레즈 데케루)
부부의 사랑은 주름살 속에 산다.
(J. 스토바이오스/ 앤솔로지)
남편이 그러면 아내도 그렇다. (그 남편에 그 아내)
(A. 테니슨/ 록슬리 홀)
아내는 밭이고 남편은 종자다. 밭을 소유하지 않고 남의 밭에 씨 뿌리는 자는 그 밭의 소유자에게 이(利)를 줄 뿐만 아니라 자기는 아무런 수확조차 못 얻는다.
(마누법전)
부부를 붙들어 매는 끈이 오래 계속되려면, 그 끈이 탄력성이 있는 고무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A.F. 프레보/ 낙천가용 소사전)
굼드렁 타령인가. < *부부가 늘 같이 다니고 떨어지지 않음을 비유>
(한국 속담)
부부란, 그것을 구성하는 두 사람의 인간 중에서 낮은 쪽의 수준으로써 생활하는 것이다.
(A. 모루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같이 하는 부부들의 모양을 볼 것 같으면, 그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시간의 깊이는 부부생활의 시간의 깊이와 정비례한다.
(A. 모루아)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프랑스 속담)
비슷한 혈통,비슷한 재산, 비슷한 나이, 이것은 가장 좋은 배필이다.
(독일 속담)
곯아도 젓국이 좋고 늙어도 영감이 좋다.<*사람은 아무리 늙어도 자기 배우자가 가장 좋다는 뜻>
(한국 속담)
베갯머리 송사. < *부부가 같이 밤을 지내는 동안 그 아내가 남편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하여 남편의 마음을 제 뜻대로 움직이려 함을 이르는 말>
(한국 속담)
친구란 어떤 어리석은 말도 흉허물없이 말할 수 있는 사이 다. 이런 사이에서 우리는 흔히 나와 그의 약간은 동떨어진 이미지를 의식하며 거기에 장단을 맞춘다. 결혼생활도 대부분 그러한 친분으로 시작이 된다. 그러나 단 세 시간을 함께 겪고 생애의 벗이 되는 사람이있는가 하면 30년을 내리 겉으로만 서로 알고 지내는 부부도 있다.
(J.R. 먹도널드/ 밝은 오렌지색의 壽衣)
부부라는 사회에서는 일에 따라 각자가 상대를 돕고, 혹은 상대를 지배한다. 따라서 부부는 대등하지만 또한 다르다. 그들은 다르므로 대등한 것이다.
(알랭/ 인간어록)
아내를 선택하고, 칼을 사는 데에 있어 서는, 다른 사람은 믿지 말아야 한다.
(G. 허버트/ 명궁)
아내는 눈으로 택하지 말고 귀로 선택하라.
(러시아 속담)
아내가 없는 남자는 몸체가 없는 머리이고, 남편이 없는 여자는 머리가 없는 몸체이다.
(장 파울/ 꽃 ·果實 · 가시)
같은 식구가 되어 잘 이해하고 아주 긴 세월을 함께 살아오며 한결같이 동고동락(同苦同樂)해 왔을 때에는 사람이란 으레 깊은 감정, 다시 말하면 내면적이고, 무의식적이고, 다른 어느 것과도 비슷한 데가 없는 것으로 맺어져 있음을 느끼는 법이 아니겠어요? 바로 이것이 부부생활이란 것을 성립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R. 마르탱 뒤 가르/ 아프리카의 비화)
남편은 아내의 표정으로, 아내는 남편의 와이셔츠로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세르비아)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집안에 암사자를 기르고, 슬픔의 둥우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J. 테일러/ 설교집)
남자에게 일생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좋은 아내를 선택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나쁜 아내를 선택하는 것이다.
(J. 헤이우드/ 격언집)
아내가 없는 남자는 고삐 없는 말이요, 남편이 없는 여자는 키 없는 배다.
(이탈리아 속담)
아내는 남편을 사랑할수록 그의 결점을 바르게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수록 그녀의 단점을 늘인다.
(중국 속담)
교처(巧妻)는 항상 졸부와 함께 잔다. <* 현명한 여자는 때로 시원찮은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뜻>
(오잡교)
부부는 서로 매력을 잃어서는 아니 된다.
(피천득/ 시집가는 친구의 딸에게)
남편은 항상 머리가 되고, 아내는 남편의 모자.
(덴마크 속담)
양처를 갖는 자는 장수한다.
(프랑스 속담)
너희가 양처를 가지면 행복자가 되고 악처를 가지면 철학자가 된다.
(소크라테스)
선량한 남편은 선량한 아내를 만든다.
(R. 버턴/ 우울의 해부학)
처는 그 집의 열쇠이다.
(T. 풀러/ 잠언집)
남편은 약속 어음의 일종이며, 아내는 그를 만족시키는 데 지친다.
(0.F 0.W, 와일드/ 대수롭지 않은 여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고 악마가 부부를 만든다.
(프랑스 속담)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한몸이 되어야 하지만 문제는 어느 쪽으로 한몸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
(H.L. 멩컨/ 인용어사전)
남편에게 재지(才智)가 있고 처에게 인내력이 있음은 가내 안전의 기초이다.
(영국 속담)
부부가 싸움을 하는 것은, 서로 말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사람에 대하여 시간을 없애는 한 가지 방법인 것이다.
(H.M. 몽테를랑/ 젊은 아씨들)
결혼에서 누가 고통을 주는 자가 되고 누가 고통을 받는 자가 될 것인가 경쟁하는 것을 보면 끔찍해집니다. 대개 2∼3년이면 그 문제가 정해지고 그것이 정해진 후에는 하나는 행복을, 하나는 덕을 갖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고통을 주는 자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결혼 생활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희생자는 더 나쁜 사태를 두려워해서 처참한 동의를 미소로 표시합니다.
(B.A.W. 러셀/ 사랑이 있는 기나긴 대화)
남자는 말 붙일 때에만 봄이고, 부부가 되어버리면 이미 겨울이다. 여자는 딸로 있을 때는5월 꽃필 때 같지만, 남편을 맞으면 대번에 하는 짓이 달라진다.
(W. 셰익스피어/ 당신 뜻대로)
애정이 없는 결혼은 비극이다. 그러나 전혀 애정이 없는 결혼보다 더욱 나쁜 결혼이 있다. 그것은 애정은 있으나 한쪽만이 있을 때, 정절은 있으나 한쪽만이 있을 때, 그리고 부부의 감정에 있어 한쪽만이 짓밟힘을 당할 때이다.
(0.F.0.W. 와일드/ 이상적인 남편)
어느 만큼 교활한 사람들은 지배할 생각으로 바보를 아내로 선택하지만, 그들은 항상 패배한다.
(S. 존슨, 보즈웰/ 존슨전)
부부 사이를 심판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뿐이다.
(러시아 속담)
부부 싸움은 팔꿈치를 부딪히는 것과 같다. 아프긴 하지만 곧 낫는다.
(영국 속담)
부부 사이라는 것은 너무 내내 함께 있으면 도리어 냉각되어지는 것이다.
(M. E. .몽테뉴/ 수상록)
배필에게 욕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L. 아리오스토/ 광란의 오를란도)
설교가 없는 교회나 다툼이 없는 부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체코 속담)
여자는 다른 일에는 마음이 약하여 전쟁에는 겁내고 칼날을 보고는 노랗게 질리는 정도다. 그러나 부부 사이의 진실이 짓밟히면 그처럼 잔학하고도 비정한 마음이 되는 것은 없다.
(에우리피데스/ 메데아)
신이 인간을 만드셨다. 그런데 고독함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더욱 고독을 느끼게 하기 위하여 반려(伴侶)를 만들어 주셨다.
(P. 발레리/ 있는 그대로)
남편이 불이고 아내가 악마 부스러기라면 악마는 쉽사리 모두를 불태운다
(T. 풀러/ 금언집)
부부 싸움은 개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일된 속담)
어진 아내는 마음을 기쁘게 하고 예쁜 아내는 눈을 즐겁게 한다.
(팔만대장경)
부부 싸움은 가난이 씨를 뿌린다.
(일본 속담)
인생의 고난은 신혼여행과 동시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때 서로가 거의 잘 모르는 두 사람이 부부라는 이중의 고독 속으로 별안간 내동댕이쳐지는 것입니다.
(A. 모루아/ 행복한 결혼)
3주 간 서로 연구하고, 3개월 간 사랑하고, 3년 간 싸움을 하고, 30년 간은 참고 견딘다. 그리고 자식들이 또 이와 같은 짓을 시작한다.
(H.A. 텐/ 도마 그란돌쥬의 생활과 의견)
남편에게는 영지(英智), 아내에게는 온화함.
(G. 허버트/ 지혜의 투망)
선량한 남편은 선량한 아내를 만든다.
(R. 버턴/ 우울의 해부학)
연애를 할 때는 농노, 결혼을 하면 영주
(G.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남편은 두레박, 아내는 항아리
(한국 속담)
남편이란 벼개에 댄지 2분 후에 만원버스처럼 코를 고는 남자이다.
(0. 내시/ 결혼단시)
남편이란 모든 시간을 바쳐야 하는 직업이다.
(E.A. 베네트/ 명예)
가장 조용한 남편은 가장 사나운 아내를 만든다.
(디즈레일리/ 문학적 호기심)
최상의 남자보다 나쁜 남편은 없다.
(W. 세익스피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남편이 결점이 있다는 것을 아내는 신께 감사하라, 결점이 없는 남편은 위험한 감시자다.
(헬리팩스 경)
처를 다를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참으로 불쌍하다.
(G. 코울먼/ 질투심 많은 아내)
남편을 즐겁게 여겨라. 그러나 그를 완전히 알고 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
(L.B. 존슨 부인/ 민주당의 아내들, 선거유세에 나서다)
남편을 주인으로 섬기되, 배신자처럼 경계하라.
(몽테뉴/ 수상록)
남편에 대한 슬픔은 팔꿈치 속의 아픔과 같이 매섭고 짧다.
(T. 풀러/ 격언집)
여자가 재혼하는 것은 첫번째 남편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며 남자가 재혼하는 것은 첫부인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0.F.0.W.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덕망 있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써 남편을 지배한다.
(푸블릴리우스 시후스/ 잠언집)
황제도 아내의 눈에는 남편에 지나지 않는다.
(바이런/ 돈 주앙)
남편이란 능숙해질 뿐이지 나아지는 일이 없다.
(H.L. 멩컨/ 멩컨 명문집)
때때로 멋있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매일 재치있게 되기가 더 어렵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남편보다는 연인이 되는 것이 쉽다.
(발자크/ 결혼생리학)
참을성있는 남편을 가진 여자도 아마 자기 몫의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E.V. 쿠크/ 참작서)
여자는 남편과 결혼하는 것이지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활한 처는 자기 남편을 자기 행주치마고 만든다.
(J. 레이/ 영국 격언집)
집에서 바가지 긁는 여자 밑에서 단련된 남자들이 밖에서도 가장 추종적이고 회유적인 경향을 띤다.
(W. 어빙/ 스케치 북)
달 밝은 밤이 흐린 낮만 못하다.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흐린 낮만 못하듯 자식이 아무리 효도를 해도 좋지 못한 남편만 못하다는 뜻>
(한국 속담)
남편과 젓가락은 강할수록 좋다.
(일본 속담)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서정주/ 무등을 보며)
부부는 베개 위에서 부스럭거린다. /‥‥/ 남편은 검은 머릴/ 아내의 포근한 팔과 가슴패기에 묻고‥‥‥
(M. 루카서/ 천공무한)
결혼은 촛불꽃 앞에서 맹세한 평생고락/시집이 무어/ 설워 눈물을 흘리는다/ 아내는 그 지아비를 따라가야 하나니
(高陽村女-시집가는 딸에게)
남아의 하올 일이 위국충량(爲國忠良), 위국성효(爲國誠孝)/ 화형제(和兄第), 락처자(樂妻子), 붕우유신(朋友有信)하온 후에/ 이밖에 빈부영욕은 내분(分)대로 하리라
(미상)
낙양에다 저택을 사고/ 한단에서 시비를 샀었지요/ 낭군이 용마를 타시니/ 출입에 빛이 났었지요.
(장 적/ 離婦)
"아이그머니나 꽃도 좋아라./ 그것 나 조끔만 가져 봤으면"// 꽃에게론 듯 사람에게론 듯/ 또 공중에게론 듯// 말 위에 갸우뚱 여인네의 하는 말을 // 남편은 숙맥인 양 듣기만 하고
(서정주/ 노인헌화가)
한몸 둘에 나눠 부부를 만드시니/ 있을 제 함께 늙고 죽으면 한데 간다/ 어디서 망녕의 것이 눈흘기려 하느뇨.
(정 철/ 송강가사:훈민가)
남으로 생긴 것이 부부같이 중할런가/ 사람의 백복이 부부에 갖췄으니/ 이리 중한 사이에 아니 화(和)코 어찌하리.
(박인로/ 오륜가 부부유별)
부부를 중(重)타 한들 정(情)만 중케 가질 건가/ 예별(禮別)없이 거처하며 공경없이 좋을소냐/ 일생에 경대여빈(敬待如寶)을 기결(冀缺)같이 하오리라. < *冀缺:중국 춘추 때 진(晋)나라 사람 각결(缺)로서 아내를 지극히 경대했다 함)
(박인노/ 오륜가 부부유별)
부부 있은 후에 부자 형제 삼겼으니/ 부부 곳 아니면 오륜(五倫)이 갖을소냐/ 이 중에 생민(生民)이 비롯하니 부부 크다 하노라.
(박인로/ 오륜가 부부유별)
부부 삼길 적에 하 중(重)케 삼겼으니/ 부창부수(夫唱婦隨)하여 일가천지화(一家天地和)하리라/ 날마다 거안제미(擧案齋眉)를 맹광(孟光)같게 하여라.
(박인로/ 오륜가 부부유별)
시부모의 꾸지람을 웃음으로 받고/ 남편의 잔소리를 사랑으로 알며/ 때로는 애들과 분풀이를 하였습니다/ 덧없는 생애의 가마목을 감돌며.// 맑은 호수같이 깊은 생각에 잡기기도/ 봄날의 잔잔한 바람같이 설레이기도/ 때로는 해비로 때로는 그늘로/ 집안 일 바깥일에 손발이 텄습니다. // 평생을 걸어오는 오르막 길에서/ 한 세대를 머리 위에 이고 가는 하얀 여인/ 검은 머리 파파 희도록 살자고 다짐한/ 오, 나의 결백한 영혼의 동상이여.
(김성휘/ 아내)
가을이 오니 늙은 아내도 분명 귀뚜리다. 미울 것도 고울 것도 없는 사람. 그날이 그날 같고 그날이 그날 같은 세월을 나와 더불어 쌓아온 사십 성로(星露). 이제는 손때가 올라 질그릇 같은 사람.
(정완영/ 秋無題)
사람 내실 적에 부부 같게 삼겼으니/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 부부같이 중할소냐/ 백년을 아적 삼아 여고슬금(如鼓瑟琴)하렸노라.
(박인로/ 오륜가 부부유별)
저편에 은발 할머니/ 할아범 옆구릴 쿡쿡 찌르며/ 꽃처럼 웃고 있는 니스는 수채화
(조남두/ 코트 다 쥐르의 수채화)
인생, 부인의 몸으로 태어나지 말라, 백 년의 고락이 타인에게 말미암음이니
(백거이/ 太行路)
오오 아내여, 나의 사랑!/ 하늘이 무어준 짝이라고/ 믿고 살음이 마땅치 아니한가./ 아직 다시 그러랴, 안 그러랴?/ 이상하고 별납은 사람의 맘,/ 저 몰라라, 참인지, 거짓인지?/ 정분으로 얽은 딴 두 몸이라면./ 서로 어그점 인들 또 있으랴/ 한평생이라도 반백년/못사는 이 인생에!/ 연분의 긴 실이 그 무엇이랴? / 나는 말하려 노라, 아무러나,/ 죽어서도 한 곳에 묻히더라.
(김소월/ 부부)
군신(君巨)은 대의(大義)있고 부자(父子)는 지친(至親)이며/ 장유유서(長幼有序)에 형제들고 붕우유신(朋友有信)에 사생(師生) 드네/ 아마도 부부인륜(夫婦人倫)은 오륜지본(五倫之本)이라 어찌 무별(無別)하올소냐.
(황윤석/ 頭齋遺)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가 내게 주는 모든 불행을/ 내 몸과 집이 깃든 농장의 바아처럼/ 거치른 잿빛의 모든 나날을.
(드니즈 잘레/ 부부생활)
어느새 늙어 버린 누님 같은 아내여/ 쇠갈퀴 손을 잡고 세월이 원통해 눈을 감으면// 살포시 찾아오는 그대는 아직 신부(新婦)고녀/ 금슬(琴瑟)은 구구 비둘기
(이동주/ 婚)
부부라 하온 것이 남으로 되어 있어/ 여고슬금(如鼓瑟琴)하며 긔 아니 즐거우냐/ 그렇고 공경(恭敬)곳 아니면 즉동금수(卽同禽獸)하리라.
(김상용/ 오륜가 夫婦之歌)
십 년 동안 시집살이/ 여자 행실 잘못 없는데,/ 박명하군요, 자식낳지 못하면/ 쫓겨난다는 옛날의 법.
(장적/ 離婦)
슬픔은 사프랑이 되어 피고/ 낮에 뜬 반달 속에 추상된 인고(忍苦)// 세월의 저편에 남기고 온 세월은/토혈(吐血)처럼 숨가쁘기만 했는데// 아직도 꽃이 없는 당신의 계절은/ 무지개 저편에서 서성대고 있다.
(조봉제/ 아내의 초상)
성냥개비처럼 가느다란 손목의 내 아내/ 마음의 우연과 주사위의 그 손가락/ 자른 건초같은 손가락 지닌 내 아내
(A. 브르통/ 자유결합)
열넷에 당신 아내 되었지만/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했지요/ 고개를 숙여 바람벽만 보며,/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못했지요.// 열다섯에 비로소 환한 얼굴 되어/ 평생을 함께 살자는 소망이 굳었어요./ 언제나 미생(尾生)의 믿음이 있었거니,/ 어찌 망부석의 전설을 알았겠어요?
(이 백/ 長干行)
아내의 얼굴에 그늘이 지면/ 아이들 얼굴에도 그늘이 짙다// ‥‥온 집안의 아늑한 후 더운 바람/ 아내의 얼굴에서 불어오더라.
(박 화/ 아내의 얼굴)
문패 호주는 내 이름이나/ 진짜 주인은 당신이 아니겠소/ 「천사」인 당신은 말 그대로/뭐라 하면 좋을가/ 그렇지, 우리집 「내무대신」이거든.
(이상각/ 아내)
두 무릎에 실타래 끼고/ 제 얼굴처럼 둥굴둥굴 감은/ 저 돌면서 풀리는 / 실토리가 다 풀리면// 이내 내일의 아내 정성이/ 나를 꼭 싸안을 것이니/ 벌써 따뜻해지는 마음입니다// 이제 같이 사노라면/ 서로의 마음에 매듭질 때 있겠지만/그 매듭도 나를 위해 질테리니/게실처럼 스리슬슬 풀렵니다//한 뼘, 두 뼘‥‥재여보며/ 상기된 얼굴에 방긋 피어나는/아, 빨깐 웃음꽃!/ 마음에 안고 가렵니다/ 인생의 먼-먼 길을
(박장길/ 빨간 웃음꽃)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만나게 하는 칠석날/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묻고 돌아오네/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홋날 바람 되어/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내 남아 밭갈고 씨뿌리고 땀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도종환/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지아비의 피 묻은 늑골에서/ 백년해로의 지어미를 빛으셨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너와 나의/ 옛 사연이나 아니였을까
(김남조/ 너에게)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은 / 삼천 사발의 냉숫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서정주/ 내 아내)
지전(紙錢)이 불고/ 공기가 줄어서/ 숨이 가부들이/ 출근하시고 나서/ 뭉클한 것이 가슴에서/ 올라 오더니/ 목이 메었어요 슬퍼마세요/ 관(縮) 속에서 잠깐 머물다가/ 불꽃 속으로 뛰어들겠어요 / 조상군들 사이에서/ 개 잠들어/ 그리시던 여인을/ 만나신 것을/ 부끄러워 마세요. 어머니 여읜/ 아들과 딸자식이/ 미움처럼 눈물처럼/ 앞을 가릴텐데/ 새 세상 보실텐데/ 들먹이는 가슴이/ 거짓은 아니지만/ 시방 울지 마세요/ 박봉에 3일장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일 아침 먼동이 튼들/ 제가 또한 누구를 위하여/ 유황불을 받어요/ 햇살을 받어요/ 타는 저녁 놀을/ 긴 베개 삼아 비고/ 뭉실뭉실 보돔고/ 도란도란 얘기하다/ 깨날 날까지/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이승에서도 원자탄 그늘처럼/ 미안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는데 / 저승에 가도 어떻게 되겠지요/ 저에게는 아니/ 이미 이승이 저승입니다.
(송 욱/ 서방님께)
소파는 너로 해서 서늘하고/ 방 너로 해서 명랑하다/ 나의 날은 기쁨으로 해서 길구나/너의 침대에서 일어난 아침// 사과의 반쪽은 너요 반쪽은 나/ 우리들의 밤 우리들의 집 우리들의 가정은 하나/ 행복은 하나의 잔디 내가 밟은 곳에서 끝난다/ 고독 그것은 네가 떠난 길에서 온다.
(오크타이 리파트/ 아내에게)
내 갱생의 등불인 아내 추임(秋姙)에게 - 하루해가 끝나면/ 다시 돌아드는 남루한 마음 앞에/조심된 손길이/ 지켜서 밝혀 놓는 램프/ 유리는 매끈하여 아랫배 볼룩한 볼류움/시원한 석유에 심지를 담그고/ 기쁜 듯 타오르는 하얀 불빛!/ -쪼이고 있노라면/ 서렸던 어둠이/ 한켜 한켜 시름없는 듯 걷히고 간다. //아내여 바지런히 밥그릇 섬기는/그대 눈동자 속에도 등불이 영롱하거니/ 키작은 그대는 오늘도/ 생활의 어려움을 말하지 않았다. / 얼빠진 내가/ 길 잃고 먼 거리에 서서 저물 때/저무는 그 하늘에/ 호호 그대는 입김을 모았는가/ 입김은 얼어서 뽀얗게 엉기던가/ 닦고 또 닦아서 티없는 등피!//세월은 덧없이 간다 하지만/ 우리들의 보람은 덧없다 말라/ 굶주려 그대는 구걸하지 않았고/ 배불러 나는/ 지나가는 동포를 넘보지 않았다/ 배불러 나는/지나가는 동포를 넘보지 않았다/ 램프의 마음은 맑아서 스스럽다/ 거리에/ 동짓달 바람은 바늘같이 싸늘하나/ 우리들의 밤은/ 조용히 호동그라니 타는 램프!
(유정/ 램프의 시 · 5)
어머니는 오늘도 겨울산에 올라/ 북으로 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북으로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온몸에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대관령 눈보라에 황태가 되어/북녁 하늘 바라보다 온몸이 뜯기나니
(정호승/ 북한산 명태에게)
설 교 노 트
부부의 윤리
엡5:22-33
서론
바울은 행위가 축복을 좌우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이 부분에서 기독교의 가정 윤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윤리는 본문과 골로새서(3:18-19)와 베드로전서(3:1-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본문을 쓰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아침 기도시에 세 가지를 감사드렸는데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선민으로 태어난 것과, 노예가 아닌 자유민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여자는 물건이요, 아무런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전적으로 남편의 소유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때에 바울의 본문과 같은 선언은 유대의 전통에 대한 일종의 혁명적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1. 아내의 윤리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는 복종과 경외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종은 어떠한 복종이어야 합니까?
(1) 진실된 복종이어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5:22)"고 하였습니다. "주께 하듯 하라"고 함은 진실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늘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일의 일단으로 알고 하는 것입니다.
(2) 유기적 복종이어야 합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5:23)"고 하였습니다.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여야 할 이유는 남편이 그의 머리 곧 주장하는 자(창3:16)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하는 원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장하시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3) 범사에 복종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5:24) "고 하였습니다.
2. 남편의 윤리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가질 바 태도는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1) 희생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5:25)" 남편은 아내를 노예나 하인처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2) 거룩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5:26-27)"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결과로 교회가 거룩하여 지는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희생하는 생활이 있으므로 아내의 영적 생환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3) 돌보아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5:28-29)" 이기주의에서 이타적 사랑으로 아내에게 대하여야 합니다.
3. 공통 윤리
부부는 떨어질 수 없는 한몸으로서의 상호 의존적 실체로서 역할을 다하여야 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5:31-33)"고 하였습니다.
결론
부부가 화합해야 행복의 길이 열리고 가정이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된 자들은 부부간의 예의와 윤리를 잘 지켜서 주 안에서 길이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잠5:18
서론
본문이 교훈하는 간음죄를 범 하지 않으려면 남자의 입장에서 젊어서 취한 자기 아내만을최고로 즐거워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이것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남편된 자가 자기 아내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1. 자기 아내를 최고시해야 합니다.
부부 생활에 있어서 원만을 기하고 신앙으로 살려고 하면 남편된 자는 누구나 '자기 아내가 최고다. '라고 생각하며 살면 됩니다. 사실 많은 여자들 중에서 자기 아내가 최고가 된다고 보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외모의 아름다움만 보기 때문입니다. 인물과 교양과 건강과 덕성과 혈통, 가문, 지식, 성품 등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모두 다 완비된 아내가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믿는 사람은 그 신앙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아내가 최고다. '하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된 자들이 자기 남편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최고로 보는데 아내는 자기 남편을 깔보고 업신여긴다면 행복한 부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 니다.
2. 이방 종교에서는 이혼이 가능합니다.
유교에서 공자의 교훈을 살펴보면,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조건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1)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경우
(2) 자식이 없을 경우
(3) 음란한 경우
(4) 시기하는 경우
(5) 악한 질병이 있는 경우
(6) 말이 많은 경우
(7) 도적질하는 경우 등입니다.
위의 사실을 살펴보면 유교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경우, 즉 자식이 없거나, 음란하거나, 병이 있거나, 도적질하거나, 불순종하는 경우 등은 다 눈에 보이는 증거이지만 시기하거나 말이 많은 경우는 다른 사람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얼마든지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혼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마땅한 조건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3. 아내에게 불만을 품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내에게 불만이 있으면, 자기의 아내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잘못입니다(말2:14).
그것은 자기가 친히 자기 아내를 선택하였다는 생각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지배하려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간에 서로 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내된 자는 남편에게 불만을 품지 말아야 하며, 남편된 자는 자기 아내에 대하여 불만을 품지 말고 만족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부부 생활의 기본적인 것이며, 축복받을 방법입니다.
결론
"젊어서 취한 아내"라는 말은 순진한 마음을 소유하고 아름다움을 최고로도 지닌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람을 항상 연모하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창기는 그 외모는 아름다울 수 있으나 마음이 더럽고 악독합니다.
젊어서 취한 아내는 모든 면에 있어서 아름다운 자신의 분신임을 믿어야 합니다.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마19:6
서론
예수님의 결혼관은 매우 신성하고 이상적이십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으로 부부가 되면 이제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부는 어떠한 생활을 합니까?
1. 침식을 같이합니다.
한 몸은 당연히 침식을 같이해야 합니다. 따로 먹고 따로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친구끼리는 같이 먹을 수 있어도, 가족끼리는 함께 먹을 수 있어도, 한 자리에서 동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부는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잠자리에서 같이 누워서 잡니다. 즉 동식동침은 부부만이 하는 일입니다. 부부가 아닌 자들이 동식동침을 하는 것은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같이 고생하고 즐거워 합니다.
한 몸은 같이 고생하고 같이 즐거워해야 합니다. 남편이 고생하는데 아내만이 즐거울 수도 없고, 아내의 즐거움이 남편에게 불쾌감을 줄 까닭이 없습니다.
부부는 언제나 고락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생이라도 부부가 같이하면 그 고생이 낙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또 즐거움을 혼자 누리는 것보다 같이 누리면 즐거움이 배로 증가하지만, 고생도 같이 누리면 절반으로 감해집니다.
3. 같은 길을 같이 걸어갑니다.
같은 길을 같이 걸어가는 것이 동도동행(同途同行)입니다.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화합된 마음이어야 동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져서 복종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잠언 22장 24절-25절에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 행위를 본받아서 네 영혼을 올무에 빠칠까 두려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같은 길을 같이 걸어가는 것은 비록 그 길이 좁고 험한 길이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4. 욕도 영광도 함께 합니다.
남편에게 훌륭한 일로 인하여 영광이 나타날 때에 아내에게도 영광이 될 것이요, 아내에게 부정이 있어서 욕이될 때에 남편도 같이 부끄러워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5. 같이 살고 죽는 것입니다.
한 몸이란 생사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비록 부부라고 할지라도 실제 몸은 둘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이 죽고 한 몸이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됩니다. 한 몸이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그러나 같이 죽는다는 것은 남은 한 사람이 자살한다는 이치가 아닙니다. 같이 죽었다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같이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부부란 이렇게 모든 일에서 있어서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 한 마음, 한 믿음, 한 생명입니다.
자기 목을 내어 놓음
롬16:4
서론
바울이 로마서를 끝맺음하면서 최후로 인사하는 문안 중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아마도 바울이 전도 도중 어떤 위험한 고비에서 이들 부부가 대신 죽음을 각오한 도움으로 살아난 역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부는 어떠한 부부입니까?
1. 다정 다애한 신앙 부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매우 다정하면서 신앙 있는 부부였습니다.
성경상에 그들의 이름이 소개된 곳이 여섯 번 있었는데, 언제나 꼭같이 가지런히 부부의이름이 기록되었습니다. 그중에도 부인인 브라스가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이 네 번이요(행18:18, 롬16:3, 딤후4:19), 남편인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은 두 번입니다(행18:2, 고전16:19). 이로 미루어 보아서 부인 브리스가가 성경 지식이나 신앙의 열심도 더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많은 부부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다정하게 살고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모른 채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참 하나님을 모신 가운데 가정을 이끌어 나간다면 많은 신앙의 부부들이 탄생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신앙 안에서 다정 다애한 부부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전도 사업에 헌신한 부부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 와서 살게 되었을 때 바울이 그곳에 전도차 온 것을 영접하여 자기집에 모시고 숙식의 편의와 전도에 크게 협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장막 만드는 업이 같은 인연도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여러 날을 유하다가 배를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때 이들 부부도 동반하여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후 얼마 동안 같이 전도하였는지는 상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전도로서의 동역자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크리스찬 부부들도 전도 사업에 헌신해야 합니다. 나만, 우리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해야 하고 그 일을 직접 못한다면, 일을 하는 사역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3. 희생적 봉사자인 부부
본문에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떠한 고비에 있을 때 대신 고역을 치르며 희생적인 죽음을 각오로 봉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全이 데살로니가 전도시에 바울을 돕던 야손과 그 형제가 큰 곤욕을 치른 일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위험한 때에 대신 목숨을 내준'형제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자기들의 귀중한 목숨을 내어 놓았으니 위대한 사랑과 신앙의 헌신입니다.
결론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감찰하시다가 이들 부부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가상히 여기시고 목숨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도 주의 복음을 전하는 발길을 도와주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 정
성 경 활 용
1. 일반적인 고찰
(1) 자기의 이익을 위한 계략을 꾸민다.
(잠20:14) 사는 자가 물건이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
(사32:7) 궤휼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베풀어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렘22: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호12:7) 저는 상고여늘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2) 꾸고도 갚지 않는다.
(시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3) 도적과 연합한다.
(시50:18) 도적을 본즉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
(4) 품꾼에게 삯을 주지 않는다.
(약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2. 부정에 대한 형벌 규정
(1) 하나님께서 꾸짖으심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2) 부정직한 것을 금지하심
(레19:13)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시62:10)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관련원어풀이
1. [v'r, 레솨-
(1) 사악, 불의.
(시5:5, 미6:11)
(2) 거짓, 사기.
(욥34:26, 잠8:7)
설교예화자료
죄의 임계점
폐나 심장, 또는 머리에 관련하여서 저질러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한 줄에 베인 구슬처럼 신경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경계의 과로 또는 몸이 회복되면 병도 누그러들고, 자연법칙에 의거하여 발병하기 전의 상태로 또는 그것에 근사한 상태로 되돌려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계점을 넘어서 만일 계속해서 자연법칙을 어기고 과도한 상태를 지속하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기능을 절대로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계점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몸의 각 부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어록·시·묘사
부정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고, 정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해로울 것이 없다.
(H. 조지/ 토지의 문제)
부정에 직면하여 침묵을 지키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 상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할수록 한층 간단하게 선동가의 역할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H. J. 라스키)
나쁜 명령인 것을 알면서 그것을 할 수 없이 받은 사람들은, 나쁜 명령의 감수(甘受)를 권하는 것이 된다. 부정의 존재를 앞에 하고 침묵하는 사람들은, 부정의 공범자와 같다.
(H. J. 라스키/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자유)
죄를 범하는 자는 자기에 대해서 범하는 것이다. 부정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는 의미에 있어서 자기의 부정에 대한 희생자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부정을 행하는 본인조차 부정을 미워하고 있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격언집)
부정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는 것보다 부정을 범하는 쪽이 훨씬 불행하다.
(소크라테스)
사람을 속이고 이득을 보는 것보다는 손해를 보는 쪽이 더 낫다. 왜냐하면 이득을 보아도 끝내 한탄하는 신세가 되지만 손해의 한탄은 한 번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키온)
부정은 신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부정을 다 들추면 지구는 독액으로 가득한다.
(D.A. 바크리/ 시집)
부정을 비난하는 사람이란, 자기가 부정을 행할 것을 겁내고 비난하는 데에 있지 않고, 부정을 뒤집어쓸 것을 겁내어 비난하는 것이다.
(플라톤/ 공화국)
법은 성자를 위해서 제정된다. 더구나 그것도 그가 부정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부정을 자기가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서 있다.
(에피쿠로스/ 단편)
사람이 부정을 비난하는 것은 그것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고, 자기가 그 해를입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F. 라 로슈푸코/ 도덕적 반성)
부정으로 얻은 것은 절대 오래가지 못한다.
(F. 비용/ 유언집)
부당한 이득을 얻지 말라, 그것은 손해와 꼭 같은 것이다.
(혜시오도스)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부는 무(無)로 돌아가는 법이다.
(영국 속담)
악마의 밀가루는 다 겨로 된다.
(이탈리아 속담)
부정으로 얻은 것은 널리 나누어 가질 수 없다
(프랑스 속담)
부정한 욕심과 부정한 음모- 이것은 그 사람의 좋은 총명과 지혜를 망쳐 버린다.
(이광수/ 端宗哀吏)
고위층의 부정은 가장 큰 죄악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부정한 것이 부정한 방법으로 없어지는 것보다는, 부정이 행해져 있는 편이 오히려 났다.
(J.W. 괴테/ 격언과 반성)
도덕적으로 부정한 것치고 정치 적으로 바른 것은 없다.
(D. 오코넬)
부정과 살인자와 강도가 남아 있는 사회‥‥‥
(김수영/ 기도)
부정이 번식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A. 스미스)
만약 내가 죄없이 죽임을 당한다면 정의를 무시하고 나를 죽인 사람들에게 그 행위의 치욕이 입혀질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이 치욕일 것 같으면 정의에 배치되는 행위가 치욕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들이 나의 정의를 알지도 못하고 나에게 정의를 밝힐 수 없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무슨 치욕이 될 것인가. 나는 옛적 사람 가운데 부정을 가한 자와 당한 자는 후세 사람들에게 절대로 똑같은 이름이 남겨져 있지 않음을 본다. 나도 역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가령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나는 나를 죽인 사람들이 받은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판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크세노폰/ 소크라테스 회고)
모든 사회의 부정에는 틀림없이 구제책이 있다. 그러나 그 구제책이란 부정의 폐지뿐이다.
(H. 조지/ 사회문제)
가슴속의 사소한 부정은 술로 씻을 수 있으나, 천하의 부정은 검이 아니고서는 제거할 수 없다.
(임어당/ 생활의 발견:자연의 즐거움)
그대는 부정을 용납치 아니하리라./ 그대에게 지금 단 하나의 혼란은 이 부정이다.
(P. 엘뤼아르/ 용기)
살며시 나는 부정의 외견(外見)을 벗어 버려야 하겠다. 흔히 그들의/ 영의 순수한 움직임을 애오라지 방해하는 외견을.
(R.M. 릴케/ 第一悲歌)
부정의 이득은 화근이 된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레)
황금의 죄는 납의 벌을 가져온다.
(러시아 속담)
부정과 싸우는 사람들이/ 상처입은 그 얼굴을 드러낼 때/ 안전한 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초조감은 크다/ 아 벗들이여 당신들 안전한 사람들이여/ 뭣 때문에 그런 적의를? 우리들이/ 당신들의 적이란 말인가 부정을 적으로 삼고 있는 우리가? /부정에 항거하는 투사가 패배해도/ 부정이 옳은 것은 아니잖는가?
(브레히트/ 객관적인 사람들에 대하여)
결코 고개숙일 수 없는 불의에 대한/ 그대의 저항은 옳았습니다// ·.그대는 좌절당했지만/패배하지 않았고/ 그대는 피흘리며 쓰러졌지만/ 죽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서덕석/ 5월을 꿈꾸는 그대에게)
자유로운 돔으로/ 불의를 눈감아 주기보다는/ 갇혀서 오히려 더 큰 거짓을 폭로하고/온 몸으로 진실을 말하는/ 용기있는 사람을 아십니까?
(서덕석/ 갇혀서 오히려 진실을 말하는)
왜 정의로운 자는 십자가의 짐을 짊어지고/가련하게도 피투성의 다리를 끌고 가는데/악한 녀석은 승리를 뽐내며/ 당당하게 도 말위에서 째려보고 있는가// 이 죄는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우리들의 주는 전지전능하지 않단 말인가/ 아니면 주 자신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단 말인가/ 아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냐
(하이네/ 신성한 우화를)
설 교 노 트
공정하게 재판하라
레19:11-16
서론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공정한 것을 좋아하시며 부정한 것은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진실은 좋아하지만 거짓은 싫어하십니다.
진실은 빈부귀천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공정하게 재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불의하게 재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부정한 재판이 아닌 공정한 재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 가난하다고 편들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가난과 재판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다스릴 때는 인정과 사정을 봐줘서는 안됩니다. 만약 인정에 끌리거나 사정을 봐준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 때문에 부정당한 판결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리는 데는 법 적용의 형평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법으로 다스릴 때는 가난과 전혀 관계짓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2. 세력 있는 자라고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본문 15절에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처신을 달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자는 무시하고 강자에게 아부하는 못된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 앞에서 법이 맥을 추지 못하는 한심한 일도 없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법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과(뇌물) 권력 앞에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릇되게 불공평하게 재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력있다고 두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공정하게 재판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에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 며" 하였습니다. 법을 적용할 때는 빈부귀천 남녀노소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게 재판을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재판관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뇌물은 재판관의 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하간 하나님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판관의 생명은 공정에 있는 것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고 불공정하게 하여서 사람의 원성을 사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 호소가 상달되어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사람을 편론하면 죄를 짓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정하게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 앞에서도 존경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18:19-30
서론
성도는 주의 피를 값주고 산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6:18-20). 그래서 깨끗하게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정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다른 사람의 아내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너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여 그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내와 동침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더럽히는 생활이요, 부정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일이 탄로가 나면 죽음의 벌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 제 7계명에도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충실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아내와 동침하지 아니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와 신성의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질서를 파괴하면 이와 같은 자들은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신22:22).
2. 남자끼리 교합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2절에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하였습니다. 이는 순리를 벗어난 패륜적인 성교가 죄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이방인들 중에서 행하여지는 더러운 행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를 가리켜서 계간(남색)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짝지워 주신 남녀간의 아름다운 결합의 원리에 대한 역행이며 순리를 파괴하는 변태적인 더러운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들에게 무서운 벌을 주시고 반드시 죽고자 하였습니다(레20:13).
3. 짐승과 교합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가 된 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섭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하였습니다. 즉, 수간하는 것을 말합니다.이는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규례입니다. 그런데도 예나 지금이나 짐승과 교합하는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고대 애 굽에서는 여자들이 숫염소와 교합하고 로마에서는 여자들이 개와 교합하였으며 근대에 와서는 애굽의 남자들이 악어의 암컷과 교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들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레20:15-16). 수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뒤섞어 혼란하게 하는 짐승과 같은 행위이고 더러운 행위인 것입니다.
결론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짓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인간들이 짐승들과 같이 더러운 행동을 예사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있을 뿐입니다.
공평한 저울
겔45:10
서론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정당한 도량형의 시행을 명령한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저울을 속이고, 되를 속이는 부정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정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무슨 일이든지 정당하기를 원하십니다.
1. 불공평한 도량형 시행
시대의 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한 정치라는 것은 집권자들이 사복을 채우기 위한 자만정책입니다. 매관 매직 행위와 경제적으로 부정한 도량형 시행인 것입니다. 이런 부정 행위의 유행은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파급되기 때문에 결국은 온 나라의 경제적인 파탄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1장 1절에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모스 8장5절에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라고 하였습니다. 내 물건을 팔 때에는 작은 에바로 팔고, 남의 물건을 살 때는 큰 세겔로 사들이니 이것은 이중적인 속임수로써 큰 폭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2. 공평한 저울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도량형의 정확한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공의와 공평에 대한 강조를 비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백성이 도량형을 가지고 남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 정부의 모든 행정이 공의로운 실행에서 생기는 결과입니다.
공평한 저울, 공평한 에바, 공평한 밧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특히 "에바"는 바구니라는 뜻으로, 바구니에 넣는 양이 단위의 이름으로 되었는데 에바는 고체의 양을 재는 한 단위입니다.
"밧"은 액체의 양을 재는 단위로 이것은 약 23ℓ가량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울과 에바와 밧을 제대로 사용해야지 사람의 눈을 속여서 부정한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3. 공평한 정치
정치의 바른 정의는 곧 공평입니다. 집권자가 공평하게 권세를 사용하면 만민이 다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관이 공평하게 재판하면 원망하는 자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민심이 태평하고, 경제계에서 공평을 위주로 하면 피차 부흥 발전하여 큰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저울을 쓰지 않을 때에 개인적으로는 일시적으로 남을 속여서 부유하게 될 수는 있으나 불의한 재물로 피해를 본 사람은 또 그대로 손해인 것입니다. 결국 모두 다 피해자만 생겨서 결국은 파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이 가져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정치는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기본이 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잘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지금도 부정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정당한 방법으로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정함은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신이시요, 만사를 공평하게 처리하시는 진실을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부 채
성 경 활 용
1. 빚의 종류
(1) 재정상의 빚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 도덕적인 빚
(몬1:19)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3) 영적인 빚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2. 빚의 상징
(1) 죄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2) 삯
(롬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3) 복음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3. 빚을 진 결과
(1) 종으로 팔림
(레25:39)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2) 법의 보호를 박탈당함
(삼상22:2)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관련원어풀이
1. hw:l; 라-와
빌리다, 부채로 받다.
(느5:4, 잡22:7)
2. av;n: 나-솨
(1) 밀리다, 빌려주다.
(삼상22:2)
(2) 부채, 빚.
(느10:31, 잠22:26)
3. ycin] 네쉬-
빚.
(왕하4:7)
4. ojfeivlw 오페일로-
빚을 지다. ∼할 의무가 있다, 채무 관계를 가지다.
(마18:28,30,34, 눅11:4, 롬13:8,15:27)
(2) 빚을 진 자, 의무를 가진 자, 허물이 있는 사람, 빚진 것.
(마6:12, 18:24, 눅13:4, 롬1:14, 4:4, 8:12, 15:27)
5. prosofeivlw\ 프로소페일로
더 빚을 지다.
(몬1:19)
6. crewfeilevth" 크레오페일레테-스
빚진 자.
(눅7:41, 16:5)
7. davneion 다네이온
부채.
설교예화자료
죤 프랭클린 (John Franklin)의 마지막 여행
죤 프랭클린 경은 영국 해군에서 흥미진진한 모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세계의 곳곳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트라팔가(Trafalgar) 해전에서 훌륭한 해군 사관으로서 "영국은 모든 사람들이 그의 직무를 다 하기를 바란다. "라는 내용의 전문을 띄웠습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고 성경을 읽으며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1845년에 그는 북해를 가로질러 가는 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사고를 만나 난파되고 말았습니다. 바닷가에서 발견이 된 파편 조각들은 넓은 바다에서 배가 난파하였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절이 줄 그어져 있는 죤 플랭클린 경의 성경에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9-10) "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는 페이지도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사43:1-2)"
빚을 갚은 로스차일드 설립자
로스차일드 하우스(Rothschild House)의 옛 설립자 중 한 사람이 젊은 시절에 사업을 시작하려고 친구로부터 돈을 조금 빌었습니다. 친구는 지불보장도 없이 그가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빌려 주었습니다. 돈을 빌린 젊은이는 독일로 가서 오랜 기간을 보냈습니다.반세기를 보내는 동안 그의 가문과 회사는 세계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옛 은인은 그가 한때 알았던 그 늙은이였는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스차일드 하우스는 그 은인이 늙고 병들게 되고, 재산마저 잃은 데다가 식구들이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 은인은 프랑크푸르트의 로스차일드 하우스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중대한 상담이 있으니 은행으로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은행가의 개인 사무실로 찾아갔는데 그는 거의 생각도 못했던 환대를 받은 것입니다.
옛 친구를 만난 그 위대한 은행가는 그의 책상으로 가서 약 10만 달러에 이르는 큰 액수의 수표를 발행하여 옛 친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50년간 내 은행에 신탁한 주식의 배당금을 지불하네."
그 친구는 놀라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럴 권리도 없고 그런 선물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은행가는 "이건 선물이 아니고 자네가 준 돈에 대한 실질적인 이익일 뿐이네. 나는 그걸 여러 번 굴렸고 이제 이 정도의 이자가 쌓이게 된 걸세."라고 말했습니다.
가게 문을 닫은 불쌍한 존
미주리 주의 세달리아에 사는 한 불경기의 희생자가 자신의 담배가게 유리창에 다음과 같이 써 붙였습니다.
"존은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제공했던 서비스가 필요하시면 아래의 써 있는 장소를 찾아가십시오. 우표는 우체국에, 무료 얼음물은 바로 옆 소다수 가게에, 전화는 호텔에, 도로 안내는 상공회의소에, 철도 안내는 정류장에, 잡지는 약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 보내기는 시청 잔디밭에서 하십시오. 불쌍한 존."
어록·시·묘사
빚은 최악의 빈곤이다.
(T. 풀러/ 금언집)
빚을 지는 것은 단 한 번 번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격언)
적은 빚은 탄환이다. 어디든지 서슴없이 날아오니 피하기가 힘들다. 큰 빚은 포탄이다. 소리는 무지하게 크지만 위험성은 극히 적다.
(S. 존슨)
수레를 비는 자는 이것을 함부로 굴리고 옷을 비는 자는 이것을 찢는다.
(戰國策)
꾸고 빌리고는 원한의 씨뿌리기,
(일본 속담)
누구에도 빚을 지지 아니한 자는 세상을 떳떳이 본다.
(롱펠로우/ 시골 대장장이)
빚과 거짓말은 대체로 함께 뒤범벅 된다.
(라블레/ 전집)
인류의 종족은 두 개의 다른 인종, 즉 돈을 비는 인간과 돈을 빌려 주는 인간으로 구성된다.
(D. 램/ 엘리아 수필집)
채무는 자유로운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메난드로스)
돈을 꾸어도 안 되고, 꾸어 주어도 안 된다. 빌려 주면 돈도 잃고 벗도 잃는다. 꾸면 절약하는 것이 바보짓같이 여겨진다.
(W. 셰익스피어/ 햄릿)
돈을 빌고 빌려 주는 것도 의존하는 가정 생활에는 자유도 없지만 아름다움도 없다.
(H. 입센/ 인형의 집)
두 번째의 악덕은 거짓말하는 것이지만 그 첫 번째는 빚지는 일이다.
(B. 프랭클린/ 부로 가는 길)
명망있는 사람에게 빚은 비참한 속박이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금언집)
빚은 어리석음과 범죄를 다산하는 어머니다.
(B. 디즈레일리/ 헬리에타 사원)
아침에 빚을 지고 일어나는 것보다 저녁을 굶은 채 침대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이란 태고적부터 있어 온, 헤어나기 어려운 혼탕 구렁인데, 고대 로마 사람들은 자기들의 화폐를 놋쇠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남의 놋쇠에 의해서 살고 죽고 묻히고 한다. 갚겠다 갚겠다고 언제나 약속을 하고, 내일이면 갚겠다고 약속을 해놓고서는 갚지 못한 채 오늘 죽어 버린다. 또는 법망에 걸려들지 않을 정도의 별별 수단을 다해서 남의 환심과 애고를 찾고 있다.
(H.D. 소로/ 월든)
빚 물어 달라는 자식 낳지도 말했다. <*자식을 낳아서 기르는 것만도 큰 일인데 그 위에 빚까지 물어 달라 하는 것은 큰 불효일 뿐 아니라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지도 못할 자라는 뜻>
(한국 속담)
남의 돈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 있다.
(러시아 속담)
빚을 얻으러 가는 자는 슬픔을 얻으러 간다.
(T. 터서/ 좋은 남편이 되는 100요점)
빌려 준 사람이 빌어 쓴 사람보다 기억이 좋다.
(미국 속담)
부채가 없는 가난은 왕자보다 낫다.
(영국 속담)
대부와 채무는 근심과 초조를 낳는다.
(W.G. 베넘/ 격언집)
저당은, 가장 양지바른 곳에 그늘을 던진다.
(R.G. 잉거솔/ 일리노이 주의 농업)
빚은 가난의 첫아기다.
(니그리치아 속담)
결국, 우리 국가의 빛은 국민이 국민에게 갚아야 할 내부적 빚이다. 우리의 자녀가 그에 대한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 그 이자를 지불할 젓이다.
(F. D. 루즈벨트)
가난한 친척들의 부채를 갚을 필요가 없었던들 나는 예술을 창조하느라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돈을 갚을 때는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내리듯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듯싶어서 당연한 어떤 쾌감을 느낀다.
(M.E.몽테뉴/ 수상록)
이웃으로부터는 되로 되어 받고 갚을 때는 같은 되로 기분 좋게 돌려 줘라
(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빚을 갚는 것은 짜증스럽지만 후하게 베풀어 주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R.W. 에머슨/ 수필집)
꿀 때의 보살 얼굴, 갚을 때는 마귀 얼굴.
(일본 얼굴)
빌리는 데는 재빠르면서 갚을 때는 느린 자들은 신용이 전연 없고, 결코 즐겁게 살 수 없다.
(T. 터서/ 좋은 남편이 되는 500가지)
꾼 돈을 갚는 자는 신용을 배로 한다.
(유태 격언)
지불이 끝나도 빚을 다 갚은 것은 아니다.
(프랑스 속담)
부부가 서로에게 진 빚은 계산을 불허한다. 그것은 무한한 채무로서 오직 영원을 통해서만 갚을 수 있다.
(J. W. 괴테)
빚을 갚는 것은 수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품의 문제다.
(L. L. P. 스미스)
적에게 돈을 꿔 주면 그를 이기게 되고, 친구에게 꿔주면 그를 잃게 된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사람은 보통 돈을 비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친구를 잃는 것이 아니고, 돈을 비는 것으로써 쉽게 친구를 잃는다.
(A. 쇼펜하워/ 행복을 위한 금언)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여러 곳에 빚 많이 졌음을 비유하는 말>
(한국 속담)
고슴도치 외 걸머지듯. <*남에게 진 빚이 많음을 이름>
(한국 속담)
빚을 갚는 데는 두 가지 방법 뿐이다. 하나는 보다 부지런해서 수입을 늘이는 것이고, 또하나는 보다 검소해서 支出을 절약하는 것이다.
(칼라일/ 과거와 현재)
십 년 묵은 환자(還子)라도 지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오랜 빛이라도 갚아 주면 그만이라는 말>
(한국 속담)
근면은 부채를 정리하고 신망은 부채를 더하게 한다.
(미상)
돌려 주는 법을 모르면 돈을 빌지 말라.
(G.E. 싱/ 민나 폰 빌헬름)
채권자는 미신이 많은 족속들이다. 날짜나 시간을 몹시 따진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어떠한 차용금도 입구는 넓으나 출구는 좁다.
(유대 격언)
주라. 그리하면 설사 돈은 잃더라도 벗은 잃지 않을 것이며, 빌려 주라. 그러면 설사 돈은 받는다 해도 벗은 잃을 것이다.
(벌워 리튼/ 캑스턴 판본집)
돈을 꿔 주는 것은 허공에 내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꿔 준 돈을 회수한 것은 거저 얻은 거나 마찬가지다.
(중국 속담)
잃어도 무방한 돈만 꾸어 주라.
(G. 허버트/ 명궁)
채권자는 잔혹한 주인보다도 나쁘다. 주인은 몸을 박탈할 뿐이지만, 채권자는 체면을 파괴하고 위신을 파멸시킨다.
(V.M. 위고/ 레 미제라블)
우정의 청순한 감정은 감미롭고 튼튼하고 충실하며 지속적인 것이어서 생애를 두고 계속이 된다. 단 돈 꿔 달라는 말을 듣지 않는 한에 있어서이다.
(마크 트웨인/ 얼간이 윌슨의 캘린더)
꿔 쓰면 꿔 쓴 만큼 이득, 빌려주면 빌려준 만큼 손해.
(일본 속담)
적은 돈을 꿔 주면 채무자를, 큰 돈을 꿔 주면 적을 만들게 된다.
(라벨리우스/ 몸짓놀이 연극)
빚쟁이는 빚진 사람보다 기억력이 좋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때로 신세를 지지 않을 만큼 부자도 없고, 때로 꾸어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다.
(라블레/ 全集)
모두 빚진 돔이올시다/ 결말을 짓지 못한 빚 진 몸.
(민재식/ 未宗咸失題)
이제는 이 자리에서 진실을 경작하여 그 빚을 갚고자 합니다. / 착하고 충성된 농부가 되겠습니다. / 감히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애원합니다.
(김상길/ 이제 이 자리에서)
준 것은 적고/ 받은 것은 많았다. / 세상이여// 감사하는 마음보다/ 원망하는 마음만 컸다/ 세상이여// 모든 잘못은/ 네 탓이라 핑계했다. 세상이여// 혼자서만 깨끗한 체/ 더럽다 욕해 온/ 빚진 세상이여.
(허영자/ 빚진 세상)
한때 화려했던 전성기를 지니고/ 걸치적거리며 몰려드는/ 빚장이들 등쌀에도 태연했던 그가/ 무엇인가에 떠밀려/ 경황없이 서두른다.
(서덕석/ 재의 수요일)
식사를 끝낸 뒤 심심풀이로 헌 가방을 열어 그 속에 든 물건을 뒤적거린다. 그러자 우리 집에서 돈을 꾸어 쓴 사람들아 쓴 수십 장 수백 장의 차용증서 뭉텅이가 나왔다. 빚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도저히 돈을 받아 낼 가망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나는 몰래 그것들을 둘둘말아 불에 태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연기가 깨끗이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김성탄)
모두들 기다리고 있었다. / 드디어 그가 죽던 날/ 하늘과 땅의 온갖 귀신들이 모여들었다/ 아무런 유산도 남기지 않은 그에게/ 무슨 빚이라도 받을 게 있었던지
(윤형근/ 열명길)
비료값, 농약값, 기계값, 품값, 씨앗값은/ 우라지게 빚내어 쏟아 부었어도/ 수매 나락 값은 쇠문도 오르지 않고
(서덕석/ 가을걷이 타령)
어제의 장부를 다시 들여다보라. 그러면 사람들과 삶에 대해 아직도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그늘에 빚지지 않고/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김현승/ 견고한 고독)
오 주여 저의 이 모든 사랑들이// 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기도 올리면서/ 언제나 옆에 느껴지는 아버지시여‥‥ 기필코 당신의// 빚 갚을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박남철/ 감사기도)
어디로 가는가 달라는/ 살진 땅에서 오히려 부황 뜬 얼굴/ 누런 바탕의 아시아로 간다/황금으로 오히려 가난한 대륙/ 검은 태양의 아프리카로 간다/ 빚에 눌린 빈사의 항구/ 바나나 공화국 라틴 아메리카로 간다/ 왜 그리로 가는가 달라는
(김남주/ 달라 · 1)
없는 놈은 농자금도 못 타쓴다더냐/ 있는 놈만 솔솔 빼주기냐/ 조합장 멱살을 거머쥐고/면상을 후려치던 아우야
(김남주/ 아우를 위하여)
닭울음소리 그쳐/ 베드로, 예루살렘을 걷는다/ 약속된 빛일진대/ 약속된 목숨일진대/하늘보며/ 묵묵히 손에 쥔 십자가/ 서러운 사연 청첩한 골목을 돌면/ 꿈 속의 그 나라
(김윤택/ 닭울음소리)
나의 친구 무쑨다여/ 그대에게 나는 내 생명을 빚지고 있다/ 압제자의 포옹에서/ 나를 구해준/ 바로 그 사랑, 바로 그 헌신에//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그대의 힘에.
(아고스티뇨 네토/ 나의 친구 무쑨다)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네 ! 그 빛은 그렇게도 크건만/ 엄청난 그 짐을 당신은 어찌하려오./ 어떻게 그 길을 벗어나려오./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다고- 그러나 그것을 갚아야만 한다. /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보라./ "진실로 너희는 갚을 곳이 아무것도 없도다. / 모든 것을 내가 담당하여 왔도다. / 내가 그 모두를 지불하였노라."//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 맞다.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도다 ! / 예수님께서 그 모든 빚을 깨끗이 청산하셨으니 그의 피 흘리신 손으로 덮으셨도다 ! / 당신은 이 제 자유와 죄사함과 사랑을 받은 자로다. /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보라.// "진실로 너희는 아무것도 갚을 것이 없도다. / 빚은 다 갚아졌고, 그 빚진 자는 자유롭도다. / 이제 내가 너희에게 묻노라. 나를 사랑하느냐? "
(작자 미상/ 갚을 것이 아무것도 없네)
완전한 죄를 주께서 이루셨나이다/ 당신 백성이 빚진 것은 무엇이나/ 가장 작은 것까지도 다 갚으셨나이다.
(작자 미상/ 완전한 속죄)
설 교 노 트
복음에 빚진 자
롬1:14-17
서론
바울 사도는 자기가 복음의 빛을 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만 할 말이 아니라 누구나 다 해야 할 말입니다.
왜 복음의 빚을 진 자입니까?
1.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연대 책임 있는 실존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도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다 같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사귐에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도 지음받은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과 같이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혼자 있다면 사람의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첫째로는 하나님을 공경함이고, 둘째로는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2. 복음은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공동 소유입니다.
누구든지 공동 소유의 재물을 혼자 차지하려고 한다면 그는 도둑입니다. 복음은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세계 만민에게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이 복음은 세상에서 주신 것임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은 야만인이나 문명인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악한 사람들 가운데도 아무런 차별없이 찾아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많음을 탄식해야 합니다 이로 인하여서 낙심하거나 죄 많은 사람들을 내버려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온유하게 죄인들을 권고하며 사랑하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3.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줄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은혜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말씀하시길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지도 오라 할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멸망받을 사람을 구원하는 생명수인데, 그것이 없으면 사람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전하는 자는 자기도 거저 받은 것 같이 남들에게도 거저 전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빚진 자가 빚을 갚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저 받고도 남들에게 주지 않으면 그 큰 은혜를 모르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보수를 받고 비로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이 빚을 갚아야 합니다. 이빚을 갚는 비결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빚진 복음을 갚는 것이 됩니다.
부 패
성 경 활 용
1. 부패의 여러 유형
(1) 죽은 육신의 부패
(창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 것이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전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곳으로 가거니와
(행13: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2) 도덕적 부패
(창6: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 었더라
(3) 종교적 부패
(출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4) 사회적 부패
(시82:2)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전3: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2. 사람이 부패케 되는 이유
(1) 마음 때문에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후3:8)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2) 행위로 인하여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겔16:47) 네 가 그들의 행위대로만 행치 아니하며 그 가증한 대로만 행치 아니하고 그것을 적게 여겨서 네 모든 행위가 그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3) 사람을 인하여
(욥15:16)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 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4) 어리석음으로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5) 욕심으로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6) 시기를 인하여
(잠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적음이니라
(7) 육체를 위함으로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3. 부패를 일소하는 방법
(1) 우상 숭배를 버린다.
(신4:25)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2) 말씀과 경건에 힘써야 한다.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3) 선한 일에 본을 보여야 한다.
(딛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4)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아야 한다.
(고후11:3)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부패에서의 구원
(1) 그리스도가 구원하신다.
(행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 약속에 의해 구원하신다.
(롬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3) 천국에서 완전하게 구원하신다.
(고전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관련원어풀이
1. jl'a; 알-라흐
타락하다, 비 열하다.
(욥15:16, 시14:3)
2. vn"'a: 아-나슈-
아프다, 병들다.
(삼하12:15)
3. tj'v; 솨-하트
(1) 파괴시키다, 파멸시키다.
(창6:17, 암1:11)
(2) 사악하게 행동하다
(출32:7, 신9:12)
(3) 파괴시키다.
(왕하18:25, 렘36:29)
(4) 타락되다, 부패되다.
(잠25:26, 말1:14)
(5) 썩다, 타락하다.
(잠25:26, 말1:14)
(6) 황폐되다.
(출8:20)
4. fqeivrw 프데이로-
(1) 못쓰게 하다, 파멸하다.
(고전3:17, 고후7:2)
(2) 타락하다, 적다.
(고전15:33, 고후11:3)
5. diafqeivrw 디아프데이로
(1) 못쓰게 만들다, 타락시키다.
(딤전6:5, 계11:18)
(2) 파괴하다, 멸망시키다, 낭비(소모)하다.
(눅12:33, 고후4:16)
(3) 죽이다.
(계11:18)
6. katafqeivrw 카타프데이로
(1) 파괴하다, 망하게 하다.
(벧후2:12)
(2) 타락하다, 적다.
(딤후3:8)
7. ejkstrevfw 엨스트레포-
완전히 변화하다, 전도하다, 곡해되다.
(딛3:11)
설교예화자료
바람둥이 남편을 치료하는 충격 요법
어느 바람둥이 남편을 전기 충격 요법으로 치료함으로써, 그의 바람둥이 기질을 고쳤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치료를 한 것은 런던 병원의 두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그들은 후에 이 치료 효과를 영국 의학 전문지인 펄스(Pu-lse)에 보고하였습니다.
그 정신과 의사들은 그 바람등이 남편에게 칼라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사진들은 그의 아내와 정부의 것으로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캄캄한 방에서 스크린에 나타나도록 하였습니다. 6일간 계속해서 매일 30분씩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의 정부의 사진이 나타날 때면, 바람둥이 남편의 팔목에 70볼트와 전기 충격이 가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내의 사진이 스크린에 나타날 때는, 녹음테이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즉 그가 이웃에 사는 여인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그가 얼마나 그녀와 자기의 결혼생활에 고통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말했던 것입니다. 그 바람둥이 남편은 10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끊임없이 부정을 저질러 왔기 때문에 이러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사람이 관직에 눈독을 들이면, 언제나 행위에 부패가 시작된다.
(T. 제퍼슨/ T. 코욱스에의 서한)
썩은 백합꽃은 잡초보다도 더 악취를 풍긴다.
(W. 셰익스피어/ 소네트)
생선이 부패한 것은 그 썩은 냄새로 알 수 있고 인간이 부패한 것은 호화로운 생활의 향수 냄새로 알 수 있다.
(이어령)
부패는 반드시 일어나는 합헌적 자유의 증상이다.
(E. 기번/ 로마 제국의 쇄망)
일반적으로 부패하는 국민 사이에서 자유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E. 버크/ 서한집)
인간의 생(生)만 나가면 썩어 버린다. 생이란 그저 방부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러면 생이라는 방부제가 나가 버렸을 때 내 영혼에 몰려들어 춤추고 노래부를 구더기는 무엇인가.
(장용학/ 현대의 野)
부패는 생명의 적이다.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 그것이 인생의 전생활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어령/ 차 한 잔의 사상)
아직도 살아 있는 사회의 부패의 으뜸가는 징조는 목적이 수단를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G. 베르나노스/ G. 베르나노스의 최후 수필집)
인간을 부패하게 하는 세균은 권력과 돈과 그리고 명성이다.
(이어령)
부패의 영향은, 그 자체가 해마다 모든 낭비와 모든 혼란의 근원이 되며, 우리들에게 수백만 원의 빚보다도 더욱 무거운 짐이 되며, 우리의 군대로부터는 힘을, 우리의 의회로부터는 지혜를, 우리 헌법의 가장 존엄한 부분으로부터는 모든 권위와 신용을 빼앗아 간다.
(E. 버크/ 경제개혁에 관한 연설)
부패는, 끝없이 긴 가지가 있어 사방으로 뻗고 있는 나무와 같다.
(브몬트와 플레처/ 정직한 자의 운명)
열매가 빨리 익으면 빨리 썩는다.
(영국 속담)
확대는 복잡을 의미하고, 복잡은 부패를 의미한다.
(C.N. 파킨슨/ 파킨슨의 법칙)
썩은 고기에 벌레 난다. <*좋지 못한 원인이 있게 되면 반드시 그 결과로 좋지 않은 일이나 사고가 생긴다는 뜻>
(한국 속담)
권력은 부패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J. E. E. D. 액튼)
나의 신조로는 공금의 낭비는, 하나님에게 반항하는 죄와 같다.
(블랙번의 몰리 자작/ 회고록)
공금은 마치 신성한 약수와 같다. 모두가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잡는다.
(이탈리아 격언)
부패는 힘을 소멸하는 최강장제(最强莊劑)다. 안에서 구긴 것이 밖에서 펴지지 않는다.
(백낙준/ 힘)
석은 새끼를 잡아당기다간 끊어지지. <* 몸이 극도로 쇠약한 사람에게 고된 일을 시키다가 죽이고 만다는 뜻>
(한국 속담)
금동이 아름다운 술은 천 백성의 피요, 옥소반 아름다운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다.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따라 높다.
(열녀춘향수절가)
설 교 노 트
인간 공해
마15:7-20
서론
성경을 보면, 우리 인생은 본래 하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 실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신학적으로 어떤 외형적인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어휘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자비롭고, 영화롭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영화로운 실존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들에게 대해서 욥은 지적하기를 욥25:5-6에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와 같은 인생이랴"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거룩하게 지음 받은 인생들이 동물 이하인 구더기와 같이 더러운 인간으로 오염된 원인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인간을 오염시키는 원인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오염시키는 원인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두 가지 착각을 시정하여 주셨습니다.
(1)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으면 더러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주님은 아무리 손을 깨끗하게 씻어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깨끗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2)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어기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고 부패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리 인간이 제정해 놓은 유전이나 규례를 잘 지켜도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면 점점 부패하여 악취가 나게 될 것입니다.
2. 인간을 부패시키는 요소
예수님은 사람을 부패시키는 요소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산출되는 요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여섯 가지로 밝히셨습니다.
(1) 악한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악한 생각은 마귀의 영향과 지배를 받은 정신 상태인데 하나님께 도전하는 무신론 사상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 사상과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자율주의 사상입니다.
(2) 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증오의 산물이요, 시기와 질투의 산물이요, 잔인과 포악의 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모든 행위들입니다.
(3)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간음이나 음행은 예수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거나, 정당한 성관계에서 이탈하거나 자신의 정조를 파괴하는 비정상적인 성행위는 모두 간음죄라고 하였습니다.
(4) 도적질이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은 쉽게 표현하면, 불로소득 하라고 하는 행위나, 비합법적으로 치부하는 행위나, 남의 것을 허락없이 자기 소유로 만드는 행위를 말합니다.
(5) 거짓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거짓말은 무관거설이요, 남을 속이는 말이요, 비진리를 주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였습니다.
(6) 훼방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훼방은 원망하는 말이나 험구나 험담이나 욕설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교회나 교역자에 대해서 모독하는 민사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이 모든 것이 마음의 산물이라면, 마귀와 죄로 오염되고 부패된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 마귀를 추방하고 부패된 죄악의 요소들을 깨끗히 치우는 비결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소금의 중요성
마5:13
서론
소금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조미료입니다. 소금은 자연물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가장 넓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소금으로 더위 에 쉬는 음식물을 방지하는 동시에 제물로 사용하였습니다(레2:13). 이 위에 언약의 표시(민18:19), 해독제(왕하2:21) 로, 갓난 아이에게 뿌렸습니다(겔16:4).
소금의 일반적인 역할은 방부제, 조미료, 정결제, 의료제, 비료, 제물 등을 들 수 있습
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패를 막아야 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 의무가 있기 때문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 소금의 귀중성
고대 유대의 격언을 보면 소금 한 자루는 한 사람의 생명처럼 귀하다고 하였습니다. 언약의 표시로, 해독제로 귀중히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소금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하고, 소금은 신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태양과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급으로 소금을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나 지금이나 소금은 귀중한 것입니다.
2. 소금의 특성
소금의 특성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반적인 특성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소금은 가장 일반적인 방부제입니다.
소금은 물건들이 변질해서 부패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플루타크는 말하기를 "소금은 시체에 불어넣어 주는 새로운 영혼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하여 부패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막아 성자로 만드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류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막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2) 소금은 소독제와 치료제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소금을 소독제와 치료제로 사용하였습니다.
현세대의 특성 중의 하나는 도덕의 저하입니다. 이러한 때에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곧 너희는 정직의 표준이 되라는 것이며, 노동에 있어 근면의 표준이 되라, 사회에 있어 양심의 표준이 되라, 생활에 있어 도덕의 표준이 되라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소금이 들어갔을 때 순결하고 결백하여졌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남편을 다섯 가진 여인은 소금이 들어갔을 때 정(淨)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3) 소금의 가장 분명한 특성은 맛을 내는 조미료입니다.
소금의 가장 분명한 특성은 맛을 내는 조미료이므로 소금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음식은 무미 건조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생에게 맛을 줍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생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인생에게 기쁨을 줍니다. 이러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3. 소금의 가치성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밝힐 뿐이니라(마5:13)"는 구절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궁이는 밖에 있어 아궁이에서 열을 보존하기 위해 벽돌 밑에 두껍게 깝니다. 그러다가 무력해지면 버리고 새소금으로 교체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배교자가 돌아오면 그를 회당 문에 눕히고 회중은 그를 넘어가는 풍습이 있는데, 그때 그 배교자는 "소금의 맛을 잃은 나를 밟고 넘어 가시오."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누구든지 맛을 잃으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무용지물은 멸망을 초래하고 버림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소금이 자기 임무를 다하려면 자기는 물에 녹아서 형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녹으면 맛을내고 녹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 희생으로 이웃에 대하여 귀중한 보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희생으로 세상을 치료하고 맛을 내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고후11:3
서론
인류의 조상 이브가 뱀을 통한 사단의 간계로 유혹을 받아 범죄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 같이 오늘도 성도들이 유혹을 받아 영적 신랑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떠나 신앙의 진실성과 정결성을 잃고 부패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부패하지 않도록 조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진실하지 못한가 살펴야 합니다.
뱀의 뫼임을 받아서 이브가 죄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사모하고 순종해야 할 인간이 진실하지 못하여서 마귀의 꾀임에 빠져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진실"이라는 말은 원어의 뜻을 살펴보면 "단순"을 의미합니다. 이 단순성은 정혼한 처녀와 같은 교회가 일편단심으로 신랑되신 그리스도만 위하여 살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을 더 좋아하여 생각하거나 육신이 판을 치는 세상을 그리워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약해진다면 이것은 벌써 약혼자로서의 자격이 상실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약혼자 되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내 신앙이 진실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참된 것인가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는 데 힘써야 합니다.
2. 깨끗하지 못한가 살펴야 합니다.
진실함이라는 것은 정신 문제인 마음의 자세요, 깨끗함이 라는 것은 진실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 즉,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품어야 깨끗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란한 생각이나 미워하는 사상이나 탐하는 마음이 결과로 나타날 때에 음행을 범하게 되고 살인을 하게 되고 도적질까지로 번지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애당초 진실한 자세를 가지면 이런 불륜의 길을 걷지 않고 범죄하는 자리에 이르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는 깨끗한 생활을 함으로서 신랑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고, 신랑의 명예를 영광스럽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이란 곧 부패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부패란 결국 썩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니 더러운 것이요,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이 부패된 마음, 썩는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결론
정결한 처녀로 인정되어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선택된 우리 성도가 진실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여 부패해진다면 그것은 자기도 손해요, 그리스도께서도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패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서 정결을 보존함으로 신부의 품위를 유지하고 신랑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항상 즐겁게 해 드리는 사랑스러운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절)
성 경 활 용
1. 성경에서 나타내는 부활의 뜻
(1) 다시 살아남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고전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2) 죽은 자를 일으킴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3)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4)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됨
(빌3:21)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5) 무덤에서 나옴
(마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2. 부활에 대한 일반적 서술
(1)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행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수 없었음이라
(고전6:14) 하나님 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2) 예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부활하셨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3) 부활은 성도들의 산 소망이다.
(벧전1: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사도들의 증거이다.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행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5)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이 있다.
(요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3. 부활의 종류
(1) 그리스도의 부활
(막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2) 성도의 영적인 부활
(골2:12) 죽은 가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3) 성도의 육체적 부활
(요11: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4) 의인과 악인의 부활
(행24: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4. 성도의 부활체의 특징
(1) 썩지 않는다.
(고전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2) 영광스럽다.
(고전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3) 신령한 몸이다.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심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 변화한다.
(고전15: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 천사와 같다.
(마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6) 사망에게 매여 있지 않다.
(행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5.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일반적 서술
(1)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이다.
(행13:'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2) 그리스도께서 미리 알리셨다.
(막9:9)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기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3) 사도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행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3: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4)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 것이니 마지막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5)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전도와 믿음은 헛된 것이 된다.
(고전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
6.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증거들
(1) 빈 무덤
(눅24:3)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2) 천사의 증거
(마28:5-6)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3) 제자들이 증인이 됨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4) 보고 만질 수도 있음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5) 여러 증인들이 있음
(행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7. 부활하신 목적
(1)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눅24:44)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2)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고전15: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3)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4)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롬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하여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6)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관련원어풀이
1. ajnavstasi" 아나스타시스
(1) 위로 오름, 올라감.
(눅2:34)
(2)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남, 부활.
(행1:22, 빌3:10)
2. a jxanavstasi" 악사나스타시스
위로 올라감, 이동, 제거, 떠남, 부활.
(빌3:11)
3. e[gersi" 에게르시스
부활, 소생.
(마27:53)
설교예화자료
무덤 밖의 한 그루 나무
영국의 킹스 크로스 역(King's Cross Sta-tion)에서 조금 떨어진 트윈(Tewin) 묘지에 있는 한 무덤 주위에는 커다란 4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나무는 그 지역 주민들의 대단한 관심거리로 떠올랐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고 있는 무덤은 안느 그림스톤(Anne Grimston) 부인의 것이었습니다.
그 나무는 여인의 불신앙에 대한 기념비인지 아니면 우연에 의해 단지 거기서 자라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안느 그림스톤 부인은 사후의 삶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녀가 궁전 같은 그녀의 집에서 죽어갈 때 그녀의 친구에게 말했었습니다. "나는 분명히 육신이 나무가 되어 다시 살아날거야."
그녀는 대리석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 무덤은 커다란 대리석판으로 덮였고 철제 울타리로 둘러 쌓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 대리석판이 약간 움직여진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에 약간의 사이가 벌어지자 그 사이로 조그만 나무가 자라났습니다.
그 나무는 돌을 기울여 가며, 대리석을 부수어 가면서 계속 자랐습니다. 안느 그림스톤 부인의 무덤에 있는 나무는 이제 영국에서 가장 큰 나무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무가 자라게 된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요? 아마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녀의 도전을 받아들이셨을 것입니다.
달걀
옛부터 달걀은 복(福)이나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달걀은 죽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계속되고 있으며, 마치 겨울의 뒤에 숨어 있는 봄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교 사람들은 봄의 시작에 달걀을 서로 주고 받았으며, 중세에 와서는 사순절 기간 중에 달걀을 먹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은 부활 주일에서야 달걀을 나누어 먹는 관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습에서 색 달걀의 유래가 생겼습니다.
닭이 없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착하고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마을에 로자린느라는 귀부인이 남편이 십자군에 나가 싸우고 있는 중에 재산을 다 빼앗기고 피난해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로자린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로자린느는 닭이 없는 마을에 닭을 번식시켜 마을 사람들의 친절에 보답하였습니다. 어느 부활절 날 마을 어린이들에게 무엇인가 선물할 궁리를 하던 로자린느는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서, "저 숲에 가서 한 사람이 하나씩 나무 뿌리 밑에다 이끼로 새둥지를 만들어 놓고 자기 것을 잘 기억해 두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로자린느는 어린이들 몰래 미리 준비해 두었던 달걀을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새둥지에다 하나씩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새둥지에 가 보세요, 선물이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와아"하며 숲속으로 달려갔습니다. 색 달걀을 발견한 어린이들은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어린이들은 색달걀에 쓰여진 글씨를 부모님에게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읍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 외롭게 사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로자린느 집안의 가훈이었습니다.
로자린느는 병든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청년에게 요기나 하라고 색 달걀을 주었습니다. 청년은 그 달걀 몇 개를 가지고 가다가 쓰러져 있는 군인에게 주었습니다. 달걀을 본 군인은 거기 써 있는 글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자기가 찾고 있는 아내가 만든 달걀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군인은 달걀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빼앗겼던 집도 다시 찾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부터 로자린느 가정에서는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색 달걀을 만들어서 마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부활절 색 달걀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삶
어떤 나라에 임금님이 한 대신의 장례식에 사람들을 소집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사회자의지시에 따라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 대신의 관을 들여다보는 순서를 마련하였습니다. 줄을 지어 들어가는 대신들과 유지들은 대관절 어떤 대신이 누워있는가 하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 관 속을 유심히 드려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관 속을 들여다본 사람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관 속에는 자신들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 관 속에는 거울이 있어서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비쳤던 것입니다. 관 속을 들여다본 순서가 끝나자 임금님은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본 관 속에는 거울이 들어 있어서 각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나도 언젠가는 저 관 속에 들어가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저 관 속에 들어가 있어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새로 시작하니까 새롭고 깨끗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부패와 부조리는 새로 사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 번 죽은 후의 삶이니까요."
부활의 신비
인도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야외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끼어들었습니다. "우리 이슬람교도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한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선교사는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우리 교도들은 메디나에 가게 되면 관이 있는데 그 안에는 모하멧트 시신이 있어서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그러나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 하였습니다 이때 선교사가 "고맙습니다. 당신이 하신 말씀은 정말 옳으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말씀이야말로 무한한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무덤이 빈 것은 우리가 믿는 주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니까요."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어록·시·묘사
인생은 죽음과 부활의 연속이다.
(R. 롤랑/ 장 크리스토프에의 결별)
신이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것은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자각시키기 위함이다.
(H. 헤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는 성자들이 앞서간 길을 따르겠다. 남몰래 묻어 줄 것을 약속해달라. 아무도 나 있는 곳을 모르게‥‥ 나는 나의 구세주 곁에 썩지 않고 있다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내 옷들을 다른 성직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아다나시우스 사교에게는 양털 옷을, 너는 내 두법의(頭法衣)를 차지해라.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는 안토니가 간다고 작별 인사를 골고루 전해다오.
(S. 안토니/ 유언)
모든 이별은 죽음에 예상하고 모든 재결합은 부활을 기대한다.
(A. 쇼펜하워/ 염세주의 연구)
인간의 영혼이나 육체는 결코 완전히 전멸되지는 않는다. 악한 자는 다시 일어나 처벌을받을 것이며 선한 자는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A.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의 신조)
그대의 정신이 피로 이루어진/ 부활과 생명이여.
(D. 개스코인/ 이 사람을 보라)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구 상/ 그분이 홀로서 가듯)
지난 겨울/ 얼어죽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 저 하찮은 초목들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죽음도 물리치신/ 부활의 증거되신 예수님//깊이 잠든 나의 믿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살아나고 실습니다. //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이슬 젖은 풀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 해마다 기적의/ 증거되고 싶습니다. .
(유안진/ 부활송)
우리의 부활을 증거하여/ 무덤 위에 필/알알의 목숨의 꽃씨.
(구상/ 초토의 시)
2천여 년 전의 그 옛날/ 예수를 묻었던 돌은 굴러 버렸습니다. /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그 리스도는 부활하셨고/ 그를 경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 있는/ 슬픔과 우울함을/ 산산히 부셔 버리고 말았습니다. / 그날과 그 때가 이제는 기억에서 희미해졌으나/ 오직 하나의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하여 강하게 우리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 그의 사랑은 온 세계의 희망이며 빛인 것입니다. / 그리고 부활주일의 새벽 빛이 하늘 가득 퍼질 때/ 우리들도 또한 그와 더불어/ 영으로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가 비록 죽어 지하에 묻히더라도/ 부활이라고 하는 확실한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 만일 오늘 자기 마음에 돌을 올려 놓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우러러보십시오. 그렇게 할진대/ 그 돌은 굴러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브레이클/ 부활의 메시지)
살은 살에다 소리를 지르고, 또 뼈는 뼈에다 대고 고함을 친다. / 나는 이 생명 속으로 절명한다.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나는.// 그것은 신을 부활시킨 그의 고통이었던가?
(D. 뢰스케/ 죽어가는 사람들)
엠마오는 11킬로/ 예루살렘의 이야기가 뻗쳐 나간/ 피곤과 절망의 길이 11킬로/‥‥/나사렛 예수/ 십자가상의 초췌한 희생/ 사흘 만에 형상을 갖춘 신화/ 아니, 신화에서 역사 속에 뿌리내리는/이 두려운 실상을 아느냐? // 이야기 속의 부활/ 엠마오 도상의 11킬로/ 떡을 들어 축사하시는/그 목소리 그 얼굴의/ 광채 현란한 이야기./ 불화로를 엎은 가슴/ 두 분화구의 얼굴이 깜빡 켜질 때/ 그 순간의 부활// 방황을 살라 먹고/ 실의와 불안을 살라먹고/ 피곤과 낙심에 빛의 샘이 묻히던/ 허무의 검은 등지가 깨히고/ 활짝활짝 눈을 뜨는/ 이 감격!// 피가 되살아났다. / 가슴이 되살아났다. / 11킬로의 활로가 열렸다. / 도상의 고독이 눈을 떴다.
(전재동/ 도상의 부활)
새벽을 헤치며/ 향품을 안고 달려 간/ 막달라 마리아//슬픔에 잠긴/ 절망에서//주님을 뵈옵고/ 그 발 앞에 꿇어 앉은/ 숨가쁜 기쁨//갈리리로 가서/ 전하라 하신/ 말씀 듣자옵고//목숨 다한/ 사랑이었기에/ 만남의 은총과/평안을 선물로 받았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이 한 사실// 손 닿을 수 있는 곳과/발 딛는 곳마다/ 불을 지피리
(배정희/ 4월의 이야기)
주여, 봄이 이 세상에 찾아와/ 틀림이란 틀림은 모조리/ 그 속에 당신의 크신 사랑이라는 포도주를/ 넘칠 듯이 가득히 담고 있습니다. / 주여, 내 마음의 그릇도 사용해 주소서.//꽃이 당신의 위대하신 날의 영광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서 피는 것 같이/ 백합화와 같이 깨끗하고 그와 같이 흰/ 영혼을 내 가슴에 주어/ 주여, 나로 부활하게 하소서.// 내게서 어두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해 주소서./생명과 빛이 당신의 무덤을 깨뜨렸나이다. /의심의 마음이 더 이상 내 가슴을 누르지 못하고/ 누를 힘이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주여, 내게 가르쳐 주소서.// 주여, 당신께서 언제나 4월이요 꽃이며/ 푸른 풀임을 내게 보여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부드러운 봄날의 산들바람이 찾아들 때/ 나는 당신이 지나가시는 발자취를 알게 됩니다.
(타운/ 부활절)
문을/ 열어 주십시오// 너무도 가혹하게 사무쳐 오던/ 고난에 멍든 세월을/ 다시는 기억치 않으렵니다. // 죽음보다 갑갑하고 어둡던 시간/ 당신의 부재(不在)로 하여/ 아픔이 피와 같던 시간을 탄식하며/ 무덤 밖에서 절절히/목메어 울었었거니//굳게 닫힌 무덤의 문/ 훌훌히 죽음의 옷 벗으시고/ 이렇게 찬란히/ 빛 속으로 살아 오셨습니다. // 아아 스승이여/ 슬프던 노래를 땅 속에 묻고/ 승리의 흰 깃발 흔들며// 매양 떨리던 가슴으로/ 다시 살은/나의 기쁨// 당신의 부활로/ 해맑게 트인 영광의 새벽// 내 부끄러운 길을/ 빛부신 사랑으로 씻어 주신 님/ 이제는 결코 놓치지 않으렵니다. // 내 목숨/ 길이/ 당신 보며 살으리니// 유일한 나의 삶은/ 사랑하는 것/죽는 것// 주여/ 오십시오/ 열어 주십시오
(이해인/ 부활의 아침-막달레나의 노래)
내 마음은 종으로 가득하다/내 마음은 새로 가득하다!/ 호수 거울에 아주 가까이 있는 별이/ 떨고 있는 모습을 나는 보고 있다. // 내 마음은 교회로 가득하다/ 내 마음은 꽃으로 가득하다!/ 어린이들은 눈물도 잊고/ 산들바람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내 마음은 천사들로 가득한다. / 내 마음은 비약으로 가득하다!/ 운명이 은밀한 창고의 희망에 따라/ 일하고 있는 것이 들려 온다. // 내 마음은 환희로 가득하다/ 내 마음은 신(補)으로 기득하다!/ 사랑이여, 내 눈에 가리개를 하고/ 네 길로 데려가 주지 않으려는가!
(메릴/ 부활주일의 노래)
예수는 말씀하셨다/ "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부활의 몸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비전을- 미래상을-생각하면서/ 들에 핀 부활의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에 미쯔오/ 부활)
눈보라 살을 에는 죽음의 세월 밀어내고/해마다 거듭나는 눈부신 기쁨과 사랑이여!//‥‥/ 메마른 가슴 가슴마다/ 해빙(解氷)의 새 봄/ 한 아름 듬뿍 안겨주는/ 당신의 아름다운 이름/ 부활꽃 진달래여!//‥‥/ 썩히는 어둠의 세력/ 제아무리 강하여도/ 당신은 뿌리로 끈질긴 뿌리로 사시기에/ 포화(砲火)에 뭉개지고/ 군화(軍靴)에 짓밟혀도/ 죽은 듯 죽지 아니하시는/ 부활제의 꽃이어라.// 벼랑에 서서/토양이 부족하여 가난하셔도/ 결코 비굴하지아니 하시고/ 약한 줌 제대로 쓰지 않아/ 벌렌들 함부로 기어들어도/ 결코 병으로 쓰러지지 아니 하시는/ 당신의 자랑스런 이름/부활꽃 진달래여!// 이슬을 머금고 사시는/당신의 고고(孤高)함 마냥/ 의(義)를 위하여 살다가/ 불꽃으로 타오르는 당신의 빛깔마냥/진리를 위하여 죽어간/순교자의 하얀 십자가 곁에/ 한껏 피어오르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부활꽃 진달래여 !// 부활의 날 신선한 아침에/영원을 향하여 실바람에 실려/ 황홀한 나래 퍼득이는 당신은/ 정녕 겨례의 부활꽃이어라
(임춘남/ 부활꽃)
너의 원수를 네가 용서할 때,/ 굶주린 사람을 먹여 줄 때,/ 네가 어느 약자를 옹호할 때,/ 너는 부활을 믿는거야./ 네 가 용기를 내어 결혼을 할 때,/ 태어나는 자녀를 받아들일 때,/네 집을 장만할 때,/ 너는 부활을 믿는거야//아침에 기분좋게 잠을 깰 때,/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노래를 흥얼거릴 때,/ 유쾌한 마음으로 일터에 나갈 때,/ 너는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 부활을 믿는다 함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너의 형으로 생각하고/ 나를 너 의 누이로 생각한다는 뜻이야. / 고리고 마음이 내킨다면,/ 너의 어머니로.
(까를로 까레또/ 복되도다. 믿으신 분)
예수께서 죽었다!/ 그때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 그와 더불어 망하고 말았다. /희망은 무덤 속에서 그의 옆에 누웠고/ 사람은 해골처럼 싸느다랗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들모두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죽었다. //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그때 희망이, 생명이, 빛이/그와 더불어 살아났다.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죽음이/ 어젯밤에 죽었느니라"고./ 이리하여 기쁨과 진리와 온갖 덕들이/ 그의 부활과 더불어 다시 살아났다.
(미상/ 희망)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이, 잠자고있던 봄이,/ 아름답고 힘차게 소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의심은 확실한 믿음으로 바뀌고,/절망은 사랑과 노래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프라이스/ 부활절의 기쁨)
당신은 다시 오셨습니다. / 그 날 밤의 하늘은 한 송이 꽃으로 피고/ 동, 서 , 남, 북,/당신이 오시는 길엔 비둘기 메가 구름같이 날고 있었습니다. // 바위는 굴러 제 자리에 없고/ 석관의 두껑은 열려져 비었는데/ 누가 뿌리는 가루 가루 꽃가루/ 무덤 속에 가득한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내 마음에 차는 승리의 기쁨//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여인은 머리를 풀어 발밑에 깔고/ 슬펐던 사람들은 웃음으로/ 이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처음 있는 일.// 주여 당신은 다시 한 번 오십시오./일구육삼 년의 이 땅에/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공포는 가고,/ 당신이 오시면 하늘이 오고.
(황금찬/ 부활의 노래)
하지만 겁이 나서 죽었다면 겁으로 하여 그는 다시 부활한다.
(J. 쉬페르비엘/ 거울)
항아리를 깨뜨려 나드의 기름을 흘려라,/ 엉거주춤하여 값을 따질 때가 아니다. / 진주를,담백석을, 홍옥을 가져오라,/ 가난한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한탄하지 말아라,/ 남김없이 그리스도에게 부을지어다. / 오늘은 부활절--기쁜 날이 아닌가.//‥‥/그대들은 향기로운 포도주를 저장하고 있느니,/ 하늘의 기쁨을 위해 그것을 내어 놓아라./ 지금은 부활절 아침이 아닌가.// 하늘로부터 기쁨을 모아 들일지어다,/ 대지로부터는 가르침을 배워 들일지어다,/ 하늘을 향해 꽃송이는 그 봉오리를 열고,/봄날의 기쁨을 바라보고 있다. /대지는 겨울날의 옷을 벗어 버리고,/ 부활절을 기다리며 몸을 꾸미고 있다. // 회색 옷을 벗어버리고 아름다운 옷을 갈아입어라,/ 슬픔의 옷을 벗고 향기로움을,/헝클어진 머리를 빗어 화환으로 장식하고,/ 슬픔에 젖어 무거운 발걸음 대신 생기 있게 날뛰어라./ 마음을 한껏 열어 크낙한 기쁨을/ 이 부활절에 맞아들일지어다. // 차고 넘친 무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신 곳을 찾을지어다. / 하나님의 식탁을 가득하게 채울지어다. / 신과 가락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찬미와 삼위 일체 기도와 노래를 뒤섞어 부를지어다. / 오늘 이 날부터 영혼으로 하여금 길이 길이/ 아침마다 부활을 맞이하게 할지어다.
(홉킨즈/ 부활절)
우리들 속에 부활하시고, 우리의 어둠의 새벽이 되시고, 진홍색 불타는 새벽이 되소서.
(홉킨즈/ 도이칠란드호의 난파)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등에 지고/골고다 골짜기에/ 진달래 꽃물 들이며/ 아프게 아프게/ 형틀에 매여/ 어둠이 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정용채/ 크리스마스)
그 사랑 앞에서는/ 죽음도 뜻을 잃어버리고// 그 그리움으로 인하여/ 봉인된 석문을 깨뜨릴 수 있었으니,// 이에/ 불안한 어둠이 걷히고/ 새 날의 아침 해가 환히 솟아올 무렵// 정결한 손에 향유호(香油壹) 받쳐 들고/조용한 걸음으로 무덤을 찾았을 제//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그대와 나와 또 온 인류를 위한/ 크낙한 사적이 일어났음을 알지니‥‥// 시름과 근심과 곤고와/ 없는 자의 설움과/ 모든 것을 잃은 비탄을/ 무덤 속에 장사 지내고/ 우리들도 변모된 새 형체로/ 다시 태어날 그 날의 기약을/ 허락받았음이어!// 할렐루야‥‥/ 산새들도 부리 모아/ 화창히 지줄이고‥‥// 그 사랑 그 그리움으로 하여/ 능히 죽음을 물리칠 수 있었으니.
(박화목/ 부활)
또 눈을 장작거리고 손들을 잡고/ 또 가는 길 오는 길을 잘 모른 채/ 부활한 사람들이 도시로 사라져 가 버릴 때에‥‥‥‥
(C.P. 페기/ 이브)
아무도 아무도/ 들리지 않았도다/ 인적이 끊어진 험한 골짜기// 주검이여, 오 주검이여/ ‥‥깊은 이 골짝.// 나무잎은 떨어지고 풀잎은 말라/ 새들도 들리지 아니 했도다/오 주검이여 오, 주검이여/ 깊은 이 골짝// 잔잔하고 맑도다/ 고요한 아침// 향기론 바람이 일어나고/ 골짜기의 적막을 깨뜨리는 새 소리/ 오, 광명한 새벽// 풀잎에 이슬이요,/ 꽃은 피어나/ 흐르는 시냇물이 노래 부르니/오 광명한 새벽!// 잔잔하고 맑도다/ 승리의 아침//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시여// 길이길이 주와 함께/ 다시 살리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임인수)
목숨도 사랑도 어느 가지 끝에서 머무는/이파리도/ 그리고/ 눈 속에 떨구어 둔 몇 방울의 고운 핏빛이/ 피어 올리는/ 꽃이라든가/꽃을 위하여/ 어리석은 사월의 땅이며 근지러운 몸뚱아리/ 지금은 못 견디게 부러운, 그리운 것의/ 자습 시간이다. // 어느 해 봄이던가 가을이던가/ 혹은 장미 잎의 가시와 포도덩굴의 어려운/ 기교학에서// 사흘째/ 또는/일주일.// 알맞게 째이는 날‥‥// 상심의 갈빗대.// 찍힌 꽃심지.// 1950년 「코리아」의 봄맞이처럼이나/ 언제나 벅차게 언제까지나/꽃은/ 에덴의 동산에서 피고 질 것이라면//꽃을 태우는 전쟁이나/ 봄을 타는 사랑이나//처음으로 알몸으로 만나는/ 너와 나나/ 너와 나의/과수원을 짓든가/ 양을 치든가// 달을 배(季)든/ 알을 품든/ 개미집에 웅크리든//그러면 4월의/ 엽액이며 가장귀에/그리움을 배우는 볼우물, 눈웃음, 발돋움의/ 참말이지 너와 나의/ 아까운 목숨, 아까운 사랑이 이제금 다시/ 피어나는 것뿐이다.
(김광림/ 부활의 장)
오, 기묘하도다.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 오, 헤아릴 길 없는 주의 사랑,/종을 구원하시려 아들을 넘겨 주신 사랑,/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및은 죄,/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부활찬송)
4월엔/ 십자가 새 형틀을 짜고/ 물오른 가시의 가시관을 엮는다. / 그러면/ 신이와 못 박히신다//‥‥/4월엔/ 십자가 새 형틀을 짜고/ 죽으러 오시는 주님을 기다린다//부활의 너무 밝은 새벽/ 그 먼저/ 사흘 낮 사흘 밤을 넘쳐/ 내 품에 안겨주실/ 절망의 하느님을/ 기다린다.
(김남조/ 망부활)
그 아침, 그 부활의 아침 햇살/ 열린 무덤을 물들이는 부드러운 빛/ 그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고요해라./ 밤과 죽음의 어둡고 무거움이 절망으로 화하여/ 슬픔의 마음을 억누르고 있을 때/ 매맑은 아침에 새의 소리 들리며/ 나뭇가지에 아침해 찬란히 빛나도다. / 온 세상 모두 그 오심을 기뻐하던 그 날의/ 나신 곳 거기는 백합화 꽃 피는 동산/ 부활의 아침을 다시 맞이하게 될 때/ 오랫동안 목말랐던 입술은/ 생명의 음식과 생수를 마음껏 먹고,/ 상처진 가슴은 두려움이 제거되고/ 위로를 얻게 될지며,/ 세상과 싸우며 상한 사람들은/ 크나큰 안식을 차지하게 되리라./ 그 생명과 그 빛과 그 구원에 의해/ 하늘로부터 평화가 임하리니/ 부활의 아침의 크나큰 기쁨이며.
(먼슨/ 부활)
누가 이 땅을 / 부활의 땅이라 하던가요/ 죽었던 것이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라면/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 부활을 증명한 예수님 말고는/ 무엇이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났던가요// 봄이 되어 초목이 다시 사는 건/ 새로 잎이 나는 것뿐 부활은 아니니까요/ 지난 가을/ 낙엽지고 풀잎이 시들었을때도/ 나무와 풀뿌리마저 죽은 것은 아니지요/ 새 잎을 준비하기 위한 조용한 기다림을/ 뿌리까지 죽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사월은 죽었던 것들이 다시 사는 부활의 계절이라는데/ 진실로 이 땅에 부활한 것은 무엇인가요/ 죽어간 사람은 다시 오지 않고/ 떨어진 나무 잎새도 썩어 흙이 되었을 뿐/무엇이 다시 살아 우리 앞에 왔던가요// 오늘의 기쁨이/ 어제의 이 슬픔보다 더 진한데/ 다시 살아오는 날들이 우리에게도 있었나요// 누가 이 땅을 부활의 땅이라 하던가요
(박용주/ 누가 이 땅을)
당신의 죽음 옆에 나의 구원이 있었다/ 당신은 빗소리 바람 소리로 늘 살아났다/ 어떤 때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넘치는 물가를 건너오고/ 어떤 때는 구름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밤에는 별빛으로 가느다랗게 떠서 살아오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길잃은 고양이 한 마리 나타나/ 발치에 앉아 언 볼을 부비기도 했다/당신의 육신은 젖은 땅 낮은 곳에 누워 있지만/ 당신의 영혼은 수천 수만 개의 모습으로 내게 왔다/ 어느 밤엔 십자가 앞에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당신은 내 나머지 삶의 속죄양임을 나는 안다/내 나머지 삶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 오직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을/ 던지고 간 것임을 나는 늦게사 안다/울음을 우는 딸아이의 눈동자 속에도 당신은 있고/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 속에도 당신은 항상 있었다/ 쏟아지는 눈발처럼 당신은 무수히 내게 내렸다.
(도종환/ 당신의 부활)
생명의 최고의 영광 속에 계시는 주여, 그날/ 주는 죽음과 죄에 당신의 승리를 빛내셨다/ 그러시고 지옥의 세력을 파괴시켜/ 잡은 자의 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승리로 이끄시었다/ 사랑하시는 주여, 이 기쁨이 넘치는 날은/ 기쁨으로 시작하여, 우리는 주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인정하나이다/ 죄에서 씻기어 깨끗해지고, 당신의 사랑의 피로/ 영원한 행복 속에 살게 하소서.
(에드몬드 스펜서/ 부활제)
내 비록 고통 끝에 죽는다 해도/죽음조차 당신과 하나임을 믿습니다. / 죽음 끝에 생명으로 태어남을 믿습니다/ 부활과 기적을 믿습니다.
(신규호/ 수인(囚人)의 독백 · 2- 춘향이 사랑처럼)
솟아나는 고운피 흘리며/ 지쳐 쓰러진 그 돌밭길/ 평화의 맑은 종 울려/ 눈부신 사랑의 꽃 피어난다. // 살점 저미는 갈대채찍에/ 찢긴 홍포자락은/ 깃발인 양 나부끼는데,/ 거룩한 산성의 여인/ 절망의 늪가에서 목 놓아 운다. / 가시관 쓰신 님의 창백한 얼굴/ 고통의 눈물로 살아나는/ 처절한 아픔.// 황금의 나래를 접는 태양/ 생명의 숨결 꺼져가는 온 땅엔/ 칠흑의 적막,/ 형틀에 꽃 이기듯 못 박는 소리는/ 갈잎 많으며 바람 속 떨며 온다. / 날 푸른 창에 찔린 상처에서/ 한 줄기 피의 샘 솟아나는데//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떨리는 내 영혼 조심스레 눈 뜨면/ 참혹한 님의 형상뿐.// 주 달린 십자가/ 철철 쏟아주신 은혜의 꽃비/ 쓸개 탄 포도주로 입술 적셔도/끝없이 타는 무한의 목마름./잎 피는 소리 귀 기울이면/ '다 이루었도다'/ 그날의 음성 물살져 온다. // 오 골고다 저주받은 죽음의 산상/ 놀람의 일순간/ 성소휘장 찢어져 바위 터지고/ 돌무덤은 환히 열린다. / 복된 부활의 새 아침/ 천군도 찬양하는 저 천궁(天弓)의 원광(圓光)/ 십자가의 빛난 영광,/ 목숨의 빛으로 오시어// 찬송받을 창조의 내 주는/ 온 우주 다스리는/ 영원한 만왕의 왕.
(엄창섭/ 부활송 · 1)
밤이면 곱게 자고/ 아침엔 밝게 재고// 한밤 누려 온 안식은/ 새날 새힘으로 불끈 솟아// 날마다/ 내딛는 그 운율/ 우렁차게 흐른다. // 아늑한 밤 꽃꿈 엮고/ 새빛 낳는 우리 영혼// 저 높은 곳 우러러/ 떨며 쏟는 기도 강물// 세차게/ 가는 그 자리/ 그분 음성 꽃핀다. // 잠은 잠이 아닌 삶으로/ 부활 연습 발맞추어// 드디어 잡은 깃발/ 하늘나라 펄럭일 때// 넘치는/ 가슴 기쁨이/ 단풍으로 활활 탄다.
(오동춘/ 부활연습)
님의 창에 찔림은/ 우리의 허물탓이요./ 고통의 십자가 지심은/ 나의 죄 인함이다. / 채찍에 살갗 찢겨 흐르는/ 붉은 피의 강./ 가시관 쓰고 온갖 치욕 당해도/ 하나님 어린 양은 하늘 영광 버렸네.//눈부신 부활의 복된 새 아침/ 역전의 용사 돌아오는가.// 개선의 저 북소리 나팔소리 들어라./돛끝엔 펄럭이는 승리의 깃발/ 격정의 환호성은 돌무덤을 허물고/ 창조의 새날은 생명의 빛 뿌리어/ 영광 중에 만군의 주 오시네.// 님이 뿌려 준 방울방울 그 보혈은/ 갈증에 탄 내 영혼 촉촉히 적시는데// 부활의 큰 기쁨/ 하늘 끝 날아오른다.
(엄창섭/ 부활송 · 2)
내 너를 찾아왔다. 유나/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새벽 닭이 울 때마다 보고 싶었다/ 내 부르는 소리 귓가에 들리더냐./ 유나, 이것이 몇 만 시간 만이냐. 그날 꽃상여 산 넘어서 간 다음, 내 눈동자 속에는 빈 하늘만 남더니,/ 매만져 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더니,/ ‥‥강물은 또 몇 천린지, 한 번 가선 소식없던 그 어려운 주소에서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 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그들의 눈망을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유나! 유나! 유나! 너 언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
(서정주/ 부활)
동해 창망하라.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은
잠자라./ 우리 동해 기슭의 몇 군데에/ 서로 부서지면서 모인 게껍질들아/ 지난 밤에는 흰 구름의 울음을 울더니/ 오늘 아침 해돋이 붉은 햇빛으로/ 저마다 뼈 속의 살과/ 두어 개의 눈을 얻어서,/ 모든 외로운 거품을 보내고/ 동해 기슭을 일제히 기어 나가라./ 게들아 게들아 기어 나가라./그리하여 동해 깊은 바다 밑바닥에 들어가서/ 가장 무거운 암초들을 물어뜯어라./ 또한 그리하여 아픈 바다는/ 빛나는 아픔의 물결, 진노하는 물결과/ 서로 조각조각 사랑하는 물결로 물결쳐라,/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들도 깨어나서/ 모든 뼈에 살이 쌓이고/ 떠난 넋들아 몸에 돌아오라. / 가을에 어린 것들과 늙은 것이 돌아가듯이 돌아오라./ 동해 기슭 삼척 주문진 낙산사에 널린 오징어들아/ 다시 눈부신 물오징어로 헤엄쳐서/너희들의 자유와 슬기의 관능으로/ 울릉도 독도 근해 해즈음의 햇빛을 받아라./ 이 나라의 죽은 것들아/ 죽어서 길없는 무주 고혼들아./ 저마다 가엾게 살아나서/동해 기슭의 달밤의 모래알들도 사랑하고/ 너희들은 백의 민족 인산인해의 춤으로 춤추어라./ 동해 창망하라, 북과 쇠북아 울어라
(고은/ 부활)
설 교 노 트
예수의 부활의 실증과 그 의미
눅24:1-12
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학적 측면에서 예수가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하며, 참 의인이시며, 참 메시야이심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중심하여 예수님의 빈 무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 무엇이며 종교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을 입증해 줍니다.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은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어떤 부활의 환상도 아니고, 또는 정신적인 부활도 아니고, 또는 윤리적인 부활도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몸이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유일의 희망이요, 삶의 의욕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주님을 믿는 기독 신자들도 죽을지라도 그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이히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의(예수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니(요5:28-29)"라고 하셨습니다.
2. 예수의 부활은 생명의 승리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이 최후 종말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인간의 지혜로도 해결할 수 없고, 인간의 도의로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두렵고, 슬프며, 허무하고 절망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죽음의 권세에 도전하여 승리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 성역 당시에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백부장 아이로의 딸도, 죽은지 나흘 지난 나사로도 친히 살려 주셨고, 자신도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정의의 승리를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오신 사건은, 이 세상에 제아무리 불의와 죄악이 판을 치고 있을지라도 마침내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응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죄에 대하여 우리나라 말 사전에는 양심을 속이는 것이 죄요, 법을 어기는 것이 죄요, 덕의를 어기는 것이 죄요, 다른 사람에게 내어 놓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이 죄의 성격은 전염성도 있고, 고착성도 있고, 독성도 있어 마침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악독한 죄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승리하는 것 같아도 마침내는 정의의 세력이 승리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증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검은 구름이 잠시 태양을 가리울 수 있을지 몰라도 영원히 가리울 수 없는 것처럼 생명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가리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기독 신자들의 최후의 승리를 입증해 줍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1) 육신의 부활을 입증해 줍니다.
(2) 생명의 승리를 입증해 줍니다.
(3) 정의의 승리를 입증해 줍니다.
마침내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가 완전 패배를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입증해 주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
요21:1-14
서론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그들의 생활과 사역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들과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1.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장소
사랑하는 제자들이 부활자신 주님을 만난 장소는 "디베랴 바다"입니다. 이 디베랴 바다는 이스라엘 문화와 산업의 발상지로서 유서가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역 당시 이 바다를 중심하여 복음을 전파하면서 이 바다에서 어부들을 불러 제자를 삼으시고, 선택한 제자들의 신앙훈련을 시키면서 훈련받은 제자들을 복음 전선에 파송하기도 하였습니 다. 예수님은 성역 말기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이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셔서 실의에 깊이 잠긴 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확신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이 디베랴 바다는, 부활하신 주님의 최후의 사역 현장으로 실망한 제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바다요, 의심에 잠긴 제자들에게 확신을 안겨준 바다요, 실패한 제자들에게 성공을 체험시켜 사명의 길로 힘차게 전진하게 한 바다입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
본문 2절 이하에 밝힌 대로 예수님의 일곱 제자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하여 도마와 나다나엘과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와 빌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북방 갈릴리 사람들이고, 그들의 생업은 고기잡는 어부들이고, 저들의 생활 양식과 운명이 거의 동일한 사람들이, 주님에게 부름받아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부름받고 생활의 방편인 배와 그물을 바다에 내어두고, 심지어 가정까지도 뒤에 둔 채 주님을 따라 복음 전하는 일에 깊이 헌신하였던 제자들입니다. 이리하여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이고, 주님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던 사람들이고, 주님의 복음사업에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이 다시 디베랴 바다로 나아가 내어버렸던 그물을 배에다가 주어 싣고, 흩어진 선구를 정리하여 고기잡이에 착수하였으나 밤새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완전 실패자들입니다. 이처럼 실의와 허탈감에 깊이 잠겨 불안 속에 방황하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셨습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결과
본문에 기록된 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결과 영적으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신앙이 속화되고 타락한 제자들이 다시 힘을 얻어 부흥하게 된 원인을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 일곱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결과 근심이 사라지고, 기쁨을 회복하였고,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을 갖게 되었고, 실망이 사라지고, 소망을 회복하였고, 실패의 자리에서 성공의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지녔던 원망이 깨끗이 사라지고 뜨거운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2)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본문 5-6절에 밝힌 대로 사랑하는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순종함으로 심령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일곱 제자들은 자신들의 슬기와 기능과 방법을 동원하여 밤새 그물을 내려보았으나 한 마리 고기도 잡지 못했을 때, 주님이 나타나사 배 오른편으로 그물에 내려잡으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결과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하였습니다.
(3)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의에 잠겨 밤새도록 고기잡이에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떡과 고기를 준비해 놓고,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 중에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우리 신앙이 힘을 얻어 부흥하는 비결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축복
요20:19-29
서론
부활이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음 앞에 정복당하고 말지만 예수님은 죽고 망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을 믿은 우리도 무서운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1. 인류의 죽음은 언제 시작되었습니까?
아담이 범죄한 이후부터 인류에게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다 죽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했습니다.
2.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요한일서 3장 5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습니다. 또한 사망을 없이 하려고 오셨으며, 새로운 살 길을 열어 놓으시려고 오셨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죽으신 구속의 진리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십자가를 붙들고 죄를 회개하면 용서함 받고 죄사함을 받는 종교입니다.
3. 기독교는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부활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참으로 애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요, 근거이고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신앙은 벌써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예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고, 증거하는 종교인 것이고, 또한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선교의 중심 메시지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4.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첫째는 과거의 부활을 믿는 것이고, 둘째는 현재의 부활을 믿어야 하고, 셋째는 미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과거의 부활, 현재의 부활, 미래의 부활은 분명히 기독교의 진수이며, 핵심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실망하고 통곡한 제자들이 예수의 빈 무덤을 보고, 살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고 새로운 용기와 기쁨에 복받쳐서 다시 사신 예수를 증거하려고 거리로 달려 나갔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최대의 기쁜 날입니다. 우리의 죄와 사망과 고통과 눈물을 거두신 날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신 날입니다. 이 기쁜 날을 기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죽음을 각오하고 순교적 신앙으로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부활의 기쁨과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빈 무덤의 증거
요20:11-18
서론
부활이라는 말은 "아나시스타스"라는 헬라어로서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얼었던 엄동설한에 새로운 계절과 더불어 겨울에 죽었던 풀 뿌리에서 새싹이 돋는 것과 같이 죽은 시체가 생명을 얻고 다시 산 것입니다. 그 사실을 빈 무덤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1. 빈 무덤은 신앙의 기초
신앙인은 구원받은 백성이요, 구원받은 백성은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어야 합니다.
빈 무덤은 교리가 아니며 신조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원받은 신앙의 기초요, 그리스도의 영이 내게 임하시는 삶의 증거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과거의 사실로 믿을 뿐만 아니라 현재 나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살아나셨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할 바가 아닙니다. 베다니에사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는데 예수께서 무덤에 가셔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실 때 죽었던 나사로가 세마포를 동인 채 일어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생명의 역사요, 우리 신앙의 기초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실의와'절망에서 소생시키는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요, 빈 무덤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2. 빈 무덤은 구원을 입증합니다.
부활절은 영어로 "Easter", 독어로 "Oster"인데 "동방"이란 뜻이며 동방은 빛을 뜻합니다. 십자가를 어둠이라 한다면 부활은 광명을 뜻하는 것이며,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지낸 것을 흑암이라 한다면 예수님의 살아나심은 빛을 밝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에드워드 브라운이 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은 자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요, 보증"이라 했습니다. 빈 무덤은
첫째, 육신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부활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육신적인 제한과 질고에서 초월한 신령한 몸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둘째, 믿는 자에게 장차의 부활을 말합니다.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며 인간은 죽음으로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은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고 말씀 하셨으니 여러분도 영생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빈 무덤은 교회의 탄생입니다.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면 그것은 곧 지상의 교회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또 무덤이 비어있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골고다의 죽음이 종교요, 죽음으로 끝나는 무력한 생명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고 존재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 없었다면 허위는 진리를, 증오심과 미움은 사랑을, 죽음은 생명을, 영원히 무덤 속에 장사지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죽음의 극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무덤 속에 누워 있으면서 자신을 찾아 참배하는 사람들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생활에 우리의 가정의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에서가 아니 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시작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난 제자들은 초대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교회의 기반인 것입니다. 부활의 터 위에 기독교가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비어있는 무덤에서 찾아야 합니다. 비어있는 무덤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된 교회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삶의 내용을 전해주는 부활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결론
빈 무덤은 신앙의 기초입니다. 구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빈 무덤은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얻는 역사임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앞에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하시기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 따르는 표적
요20:19-23
서론
오늘 역사적인 부활절을 맞아 본문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 따르는 표적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달리신 뒤에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핍박하던 그 박해의 여파가 모든 제자들에게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눈을 피하려고 한곳에 모여 문을 닫고 있었는데 이때에 주님은 닫힌 문을 열지도 아니하시고 저희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 제자들이 모인 이곳에 나타나셔서 부활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부활의 의미를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심령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부활로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젊은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내려가던 걸음을 돌이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이유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이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 부활입니다.
2. 생활의 부활입니다.
심령이 부활된 자는 생활이 부활되는데 성경에 주님을 위해 일하다가 복을 받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배를 빌려 드리고 엄청난 고기를 잡는 기적을 보았고(눅5:6), 조그만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로 오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으며(요6:9),사렙다 과부가 엘리야를 대접하여 기근 동안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바로 붙은 자들이 받는 생활의 축복입니다.
3. 육체의 부활입니다.
고전 15:20-23에 바울 사도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자가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의 소식을 듣고도 직접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 중에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복이 있는 신앙은 바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신앙입니다
(1) 벽이 변하여 문이 집니다.
부활의 주님이 벽으로 오신 것은 제자들이 실의, 낙담, 좌절에 빠져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처한 어떠한 문제든지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면 주님이 벽으로 오신 것처럼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2)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두려워 겁을 내며 문을 닫아 걸고 있는 제자들을 찾으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공포 가운데 쌓인 저희들의 심령에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께서는 그들의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기쁨과 평강으로 인도하셨습니다.
(3) 사명을 맡기십니다.
본문에 보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4) 끝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사명을 감당케 하시기 위하여 저들에게 성령을 넣어 주셨고, 또한 사죄의 권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론
우리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죽어도 살고, 쏟아도 다시 받고, 기울어져도 다시 세우며, 병들어도 다시 사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자에게는 벽이 변하여 문이 되고, 마음속에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며, 받은 사명을 감당할 때에 후한 대가를 채워주시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이 부활 주일을 맞아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을 믿는 자의 복
요20:26-31
서론
보고나서 믿는 것은 과학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히11:1).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손으로 못자국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만져보지 않고는 그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나타나서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너는 나를 마져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입니다.
우리에게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하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죄에서 해방 될 수 없을 것입니다(고전15:17).
1. 부활한 몸은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심장이 칼에 찔려도 죽지 않는 몸이 되었습니다(요20:27). 그리고 문을 닫은 방에 문을 열지 않고도 돌아가는 몸이 되었습니다(요20:19). 그러나 영은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몸이나 알아볼 수 없게도 알아볼 수 있게도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요20:14, 눅24:31). 썩은 몸으로 죽고 썩지 아니할 몸으로 살며, 노인이나 불구자로 죽고 건강한 젊은 몸으로 삽니다(고전15:42).
2. 부활을 믿는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겁쟁이가 담력자로 변하여 부활 증거를 위해 달게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스데반, 베드로).
아무리 심한 박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결사 각오로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20장 24절에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공갈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는 강신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두려워 말고 용감하게 전도하면 큰 성과가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3. 부활을 믿는 자는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합니다(요14:12).
(1) 베드로는 하루에 3,000명이 돌아와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행2:41).
(2) 그림자로 병이 낫게 하는 일도 하였습니다(행5:15).
(3) 손수건을 병자에게 얹었는데 병이 나을 수 있었습니다(행19:12).
죽을까 두려워서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던 베드로가 부활을 믿은 후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는데 자진했다고 합니다.
결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자신도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고전15:23).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는 자는 만사에 용감합니다. 결사 각오로 용진하는 자는 승리뿐이지 패배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가는 불 속에도 사자굴 속에도 두려움이 없이 들어갑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할 말은 하고(스데반 같이) 모판 선교사 같이 살기 위해 도망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마28:1-10
서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이제는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빈 무덤이였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말하기를 "주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이 소식을 알고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의 나팔을 불게 되었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만나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초석입니다.
1. 누가 누구를 부활시켰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떠하신 분이 십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 십니다. 날 때부터 원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죄를 지어 본 일이 없으십니다.
롬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롬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죄없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있었다면 죽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이 세상은 죄로 황폐해 졌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죄 없으신 예수님이 무덤에서 색고 만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 무너지고 맙니다. 누가 살렸습니까?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11:25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속에 생명이 있느냐 다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학 사상에 의해 부활을 불신하는 사두개인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래 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생활에 미친 관계
예수님의 부활은 무가치한 생활에 부정이요, 가치있는 생활의 긍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치있게 지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므로 무가치한 존재로 떨어졌습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데, 아담은 이것을 어겼습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살려고 하였기에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 2의 아담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활 목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범죄한 후에 인간은 자기 향락 중심의 생활이었으나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나 중심의 소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대아를 위해, 즉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2000년 전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실제로 내 심령 속에 부활의 체험도 되어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하던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변화된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초석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무너지면 우리의 믿음도 전도도 헛것입니다. 비평주의자는 부활을 부인하거나 혹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은 바탕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켰습니다.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은 아들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로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영생의 길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에 부활의 새 생명을 얻었으니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옛 사람은 죽고 예수와 함께 새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눅24:13-35
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의미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서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하여 엠마오로 내려갔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되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을 했고 예수님의 제자도 그렇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고난을 겪어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죽음으로 생각하여 이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실 인간은 이 죽음 때문에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역사 속에 오시어 하나님의 사람의 제물로서 죽임을 당하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약하고 무능한 것처럼 침묵 속에서 각가지 수치와 모독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죄에 매임을 당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참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 즉 죄의 종이 되는 것을 말함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을 구원하시는 계획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므로 십자가의 쓴 맛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세상을 구속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인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2. 그 다음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고 그 곳에서 성령을 받아 복음을 증거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의 승리의 표준이며 영원한 삶의 새 언약이며 우리들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고 모시고 동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실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선배 성도들과 주의 종들이 이 부활의 체험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살았고 또한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있으며 많은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셔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성령의 뜨거움을 느끼고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승리의 영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회의 기독교인은 담대한 부활의 정신으로 봉사자의 사명을 다하며 또 새로운 생활을 보여주며, 새로운 사회 기풍을 창조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
눅24:36-43
서론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에 하늘나라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육적인 데 소망을 둔 채 주님이 왕으로 입성하시면 장관의 자리를 탐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은 악당의 무리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어 돌아가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공포에 싸여 어찌할 줄 모르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저들에게는 낙심이나 공포심은 일시에 물러가고 마음속에 하늘나라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많은 말씀의 교훈을 하셨지만 하나로 묶어서 표현을 한다고 하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 마디입니다.
(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도 죄악에 눌린 심령들에게 평강을 주기 위함입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포로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 자유와 소망과 평강을 주기위함입니다.
(3)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심도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4) 성령을 보내심도 평강을 주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평강이란 근심에 싸여있지 않는 것입니다.
평강은 마음에, 영혼에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어떻게 평강을 주십니까?
우리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므로 평강을 주십니다. 평강은 죄악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므로 평강을 주십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죄의 종이 되어 멸망으로 끌려가는 자에게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소망을 주시므로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송장과 같습니다. 이 땅에 살 때에 담대하게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이 땅을 떠날 때에 영생 복락을 주시면서 영원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신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므로 평강을 주십니다. 인간은 문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문제를 이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1) 지금까지 지은 죄를 깨끗이 청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욕심에 따라 살던 죄를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2) 예수님과 의논하면서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 나라와 그 의의를 구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결론
이 세상의 것보다 하늘나라의 것을 먼저 생각하고,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고, 나의 것보다 주님의 것을 먼저 생각하는 하늘나라 시민의 자격을 갖추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평강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십시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요20:19-29
서론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의 대속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대속도 중요하지만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고, 또 그 부활은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예수님의 예언이 있습니다. 마12:40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3일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듯이 내가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9:31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2:19에 "이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내가 일으키리라"고 했습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죽음의 권세를 무찌르고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인류 역사에 다시 없는 사기꾼이 될 것이고, 그의 많은 가르침의 교훈은 땅에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광중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셔서 많은 사람에게 보이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 이상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2. 예수님과 부활의 참된 의미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것은 죄가 없으신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사탄의 권세를 정복한 승리자가 되십니다. 빛이 어둠을 물리치듯이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것과 같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승리 생활이 계속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신 것은 우리들에게 진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을 때 진리의 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미래에 다시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럼이 없이 설 수 있는 경건의 생활을 계속하게 됩니다.
결론
(1)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고 했습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순종하며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부탁을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어 증거인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자, 세상을 이기는 역사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요20:11-23
서론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소망을 확실히 증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신 자는 이 땅에서 승리자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던 일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것은 많은 이적을보았기 때문입니다.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이시고, 문둥병 환자와 소경과 각종 병자를 고치신 일,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도 잔잔하라는 말씀에 머리를 숙인 일입니다.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이 어찌하여 악당들에게 죽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만민의 죄를 담당하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유대 나라에서 자칭 애국자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왕 그리고 유다가 결탁을 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2. 다시 사신 예수님
예수님의 일생은 주는 생활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떠나서는 땅 한 평이 없어서 아리마대 요셉의무덤을 3일 동안 빌렸습니다. 이 무덤 문에는 인봉을 하였고 무장한 군인들이 무덤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장례를 치른 지 3일 만에 하늘에서는 영광의 천사들이 내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영광의 몸을 입은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뜻
주님의 부활로 선이 악을 이기셨습니다. "빛이 어둠을 물리쳤습니다. 진리가 거짓을 밟았습니다. 생명으로 사망을 삼켜 버렸다는 개선가입니다. "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옛 사람과 똑같으나 속 사람은 중생하여 새로워졌습니다. 죽음과 근심의 포로로 살던 우리가 믿음과 소망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광의 소망은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는 데 있고, 그 곳에 참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여,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앞에 감사로 주를 영접하십시다. 진실로 회개하여 참된 신자의 생활을 하여 봅니다. 주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고 영접합시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것 받아 쓰라"고 주시는 면류관을 받아 쓰는 영광의 기쁨을 가져 봅시다.
결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순종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시고 이것을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함을 주시고 영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사는 소망의 생활을 합시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 심령에 천국을 이루고 장차 재림하여 영원한 세계의 삶을 누리는 복된 소망을 붙잡기 바랍니다.
부활의 종교
고전15:20-28
서론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립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와 사망과 지옥의 문제를 담당하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20). 이 부활은 이 세상의 허위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죄에 대한 의의 승리요,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요,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선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거짓과 죄와 사망의 역사를 뒤엎고 진리와 의와 생명의 새 역사의 장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한 부활의 종교는 어떤 것입니까?
1.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형성된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많은 종교를 창설해 놓은 피조물 가운데, 그 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인류에 부활과 영생을 약속하고 보증해 주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어떻게 살아나셨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성경)의 성취로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완성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들에게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1) 인생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2) 인생의 육신과 영혼이 구원받게 된 사실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3) 인생은 영원 불멸의 실존으로 영생할 수 있다는 진리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2.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부활하게 하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까지도 부활하게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1) 우리 기독 신자들의 부활의 소망을 견고케 해 주셨습니다.
(2) 우리 기독 신자들의 부활의 신앙의 기초가 되어졌습니다.
(3) 우리 기독 신자들의 영생의 기업이 되어 주셨습니다(벧전1:3-4).
이 실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이 부활은 정신적인 부활이나 윤리적인 부활이 아니라 육체적인 부활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정신적인 부활이나 윤리적인 부활이 아니라 육신적인 부활을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과 물질을 바쳐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 세상 불의와 죄악과 마귀와 목숨을 바쳐서 싸워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원동력은 바로 이 부활 신앙 뿐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공포가 사라지고 평강을 누리 게 되며,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을 소유하며 실패의 자리에서 성공하게 됩니다.
부활주와 동행자
눅24:13-35
서론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대혁명 사건으로, 불의에 대한 정의 의 승리요, 사망에 대한생명의 승리요,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여기 본문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동행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글로바요, 전설에 의하면, 본서를 기록한 누가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을 드높이 찬양하면서도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현대 교인들은 없는지 모릅니다. 마28:20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증거입니다.
1.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 학자들은 세 가지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하늘의 영광과 같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2)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 16절에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이 가리워진 것은 슬픔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3) 선지자의 예언을 믿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25절에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두 제자는 슬픔 속에서 동행했고, 실의와 실망 속에서 동행했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동행하였다고 했습니다.
2. 부활의 주님과 동행한 내용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한 내용과 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찾아와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저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주님은 친히 저들을 찾아서 동행하여 주신 사건을 눈시울과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랑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주님을 버리고 나혼자 가도 주님은 결단코 꺼지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찾아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2) 성경 말씀을 들려 주심으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32절에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고 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말씀은 마음의 감동과 충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닫는 순간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동행하는 시간이 됩니다.
(3)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심으로 눈이 밝아져 동행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떡과 포도즙인데 이는 예수님의 살이요, 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찬식에 참석하여 그 생명과 성즙을 받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한 의미요,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의 보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도 전해주시고 떡도 떼어 주심으로 부활의 주님을 바로 인식하고 동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결론
부활주와 동행한 결과는 슬픔의 길에서 돌이켜 환희의 길을 가게 되었고, 실망의 길에서돌이켜 희망의 길을 가게 되었고, 불안과 공포의 길에서 돌이켜 평강과 영생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고전15:50-58
서론
사도 바울의 증언과 같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첫째, 사망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들의 부활이요 둘째, 죄악을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우리들의 승리요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천국이 바로 우리들의 이러한 확고 부동한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중심으로 기뻐하고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에 관해서 잠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는 역사로만 반복이 되어왔습니다. 인류들은 죽음에 대해서는 무력했고 속수 무책으로 사망이란 인류의 최대의 강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금이래 이 사망을 정복하고 승리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망이란 인생의 최대 비극이요, 최대의 인생들은 사망에 대해서는 항거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연기할 수도 없는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사망의 권세 앞에 신음하는 인생들의 최대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요11:25)"고 하시면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 내시고 주님께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사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의 부활이요, 예수의 생명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승리는 바로 우리의 승리인 것입니다.
2. 죄악에 대한 정의의 승리입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곧 한 사람도 없다"할 만큼 인생은 죄의 세력에 오염되었고,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은 죄에 오염되지 않고 의롭게 살았고 정의로 죄악을 승리하신 승리자입니다. 요일3:5에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나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찌하여 범죄자로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이는 거짓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불의한 로마의 권력자들에게 일시 패배를 당하는 나약자로서의 처형을 당하였으나 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죄악을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지 결코 실패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일시에 거짓이 참을 이기고 악이 선을 이기고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같아도 최후 승리는 정의라는 진리를 그리스도의 부활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허위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악에 대한 선의 승리요, 불의에대한 정의의 승리를 입증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이 불의하고 악한 세대와 싸워 승리할 자가 누구입니까? 요일5:4-5에 "대저 하나님제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우리 기독 신자들은 이 부활의 신앙으로 불의하고 악한 세상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1) 유대 율법 종교에 대한 복음의 승리요
(2)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잡은 마귀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요
(3) 지옥에 대한 천국의 승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마15:12-19
서론
역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성경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교리인 동시에 역사적인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역사를 혁명해 놓은 위대한 사건으로서 신비 중에 신비요, 기적 중에 기적이요,승리 중에 승리를 선포해주신 의미 심장한 사건입니다.
1. 반대자의 설을 알아봅시다.
이 역사적인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부인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기절설을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아주 죽으신 것이 아니라,기절 상태에 있다가다시 소생된 것이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해 갔다고 합니다. 이는 성경에도 밝힌 대로 제자들이 와서 도적해 갔다고 하면서 제자들이 거짓 선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3) 아리마대 요셉의 이거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요셉이 자기 무덤에 안장했으나 나중에는 시체를 옮겨 놓고 부활하였다고 거짓 선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기타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환상설도 있고, 강령설도 있고, 착각설도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모두 잘못된 학설이며 주장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우주적인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이 우주적인 승리를 확증한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비진리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확증하는 것이며,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를 확증하는 것이고, 인생의 강적인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인생에게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생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주었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을 소유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의 죽음 앞에서 울던 제자들이 기쁨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변하여 평강을 소유하였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있던 제자들이 평강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에서 새 힘과 소망을 소유하였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새 힘과 소망을 소유했습니다. 회의와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을 소유하였습니다. 의심하던 도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고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와 중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정신적인 부활이거나, 윤리적인 부활이거나 사회적인 부활이 아니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실제 부활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여기 사도 바울이 역설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기독교의 기초와 중심이 되었습니다.
(1) 우리 기독교의 복음 전도의 기초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전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2) 우리 기독교의 산 신앙의 기초와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을지라도 다시 부활한다는 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3) 우리 기독교의 소망의 기초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부활이없다고 하면 전도와 신앙과 기초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죽을지라도 다시 사는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하여 거짓과 불의와 사망의 권세잡은 마귀와 싸워 진리와 정의와 생명적 승리와 영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의 부활
요12:9-11
서론
나사로의 부활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신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심을 확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부활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에 놀라운 충격을 던져 주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도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하였으니 나사로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오늘도 우리 기독 신자 한사람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바라면서 본문의 내용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나사로의 부활은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셨습니다.
본문 9절에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일반 민중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먼저는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도 만나보고 다음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도 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찾아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깊은 의미와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 기독신자인 나 한 사람이 예수를 바로 믿어 거듭난 삶을 바로 살아갈 때, 많은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구원을 얻게할 수 있다고 하면, 다음 우리 기독 신자 나 한 사람이 신자답지 않게 바로 살지 못하게 될 때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길에 장애물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자신들은 신앙생활을 바르고 힘있게 영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민족 복음화의 기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대적들에게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그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만 충격을 준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서기관에게까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시험하고 핍박하던 소위 예수님의 대적이요, 원수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기독 신자 한 사람이 예수를 바로 믿고 신앙생활을 힘있게 할 때에 모든민중들의 여론과 인기를 예수님께 집중시키게 되고, 나아가서는 대적들에게 일대 타격을 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으로 우리 기독 신자가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예수님의 대적들을 이롭게 하고 예수님에게 욕을 돌림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발전에도 큰 장애물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3. 나사로의 부활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였습니다.
본문 11절에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사로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난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나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을 죽이게 할 수도 있고 나 한 사람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믿어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결론
지금도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다시 살아 많은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1) 우리의 대적인 사탄 권세를 파멸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2) 많은사람의 생명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하사 구원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인 것을 풀자
요11:39-46
서론
본문을 통하여 동인 것이 풀리고 죽은 것이 살아나는 은혜와 부활의 계절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동인 것'은 과거와 현재 속에 죽은 우리, 현재와 미래 속에 묶여 있는 우리, 미래의 영원속에 해방될 우리에 대한 것입니다.
1. 과거와 현재 속에 죽은 우리
본문 17-22절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병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을 아신 것입니다.
오늘도 인간은 죽어가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인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도 인간이기에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쓰여졌습니다. 엡2:1의 말씀처럼 우리는 과거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 요11:39에서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것처럼 죄악으로 죽어서 썩은 냄새를 풍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역시 과거에는 죽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는 현재에도 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와 현대 속에서 죽은 것이 오늘 인간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나 40절에서 예수께서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신 것처럼 주님을 믿었을 때에 죽음의 사슬에 매여있던 우리가 풀려가서 살아나게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와 현재 속에 죽은 우리를 풀어 주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현재와 미래 속에 묶여 있는 우리
오늘 본문인 요11:43-44에 보면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살아났습니다. 참으로 그가 살아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동인 것을 풀어 줘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기는 살았는데 수족이 묶인 채 살아 있는 사람이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거듭났으나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무엇엔가 동여매여 있기에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지만 몸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자들이 주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으면서 아직도 뭔가 묶여서 영적으로 중풍병자요, 앉은뱅이요, 소아마비로 지내는 분이 있다면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능력과 성령의 권능으로 완전히 풀려져서 온몸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충성하는 성도가 되시를 바랍니다.
3. 미래의 영원 속에 해방된 우리
우리가 한 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으면 다시는 마귀가 사망의 사슬로 우리를 묶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미래의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내일 일을 염려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건만 아직도 과거의 죄를 기억하며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성도들을 볼 때에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에서 정죄하지 않는 죄를 우리가 스스로 정죄하고 그것 때문에 충만한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마귀가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우리가 죄의 사슬에서 풀렸으면 영원히 풀림 받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이제 여러분을 묶고 있는 정신적인 속박에서 풀어지시길 바랍니다. 육체적인 질병에 묶여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으로 풀어지는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가정 의 어려운 문제, 경제적인 문제, 자녀들의 문제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모두 풀리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온 몸으로 걷고 뛰면서 주를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사로를 다니게 하라
요11:38-44
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전삶에서 궁극적인 목적이며 또한 최대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 최대의 이적은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5:35-43),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7:11-16),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요11:39-44) 등을 살리셨습니다. 이 중에 가장 큰 사건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입니다. 무덤속의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 속에는 특별한 교훈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부활'을 보여주는 계시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바로 우리 성도들의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었고 무덤 속에 장사 지냈습니다. 이 죽음의 무덤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무덤들을 옮기라고 명하시고 무덤 속의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시자 죽은 나사로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 그 얼굴은 수건에 싸인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은 다시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살아 나오긴 했으나 활동할 수없이 묶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나사로(성도)에게 주는 큰 교훈과 뜻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인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2:1-5)"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사망의 무덤에서 살아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묶이운 것을 풀지 못한 채 묶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얼굴의 수건을 벗어야 합니다
수건이 우리의 얼굴을 꽁꽁 매여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복음)을 바로 말(전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 소경이 되게 하고 귀머거리가 되게 하고 벙어리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마13:14-16, 계1:3)고 하셨습니다. 우리 얼굴의 수건을 벗지 않고는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이 수건은 무엇입니까?
(1) 내 의를 사랑하는 율법(행위)입니다(고후3:14, 눅18:9-14).
(2) 세상 물질입니다(민22장, 행5:1-11, 마6:19-24).
(3) 세상 쾌락입니다(창19장).
(4) 위선입니다. 이러한 수건을 어떻기 벗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언제든지 주께 돌아가면 이 수건이 벗어지느니라(고후3:16)"고 했습니다. 예수 앞에 바로 서면 됩니다.
2. 수족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수족이 묶여 있으면 일(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뿐이지 행동이 따르지 아니합니다. 일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약2:26). 우리 수족을 묶은 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히12:1-2). 그리고 세상 정욕입니다(요일2:15-17). 또한 게으름입니다(잠6:9, 렘48:10). 이 끈을 풀어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히4:1, 요8:32).
3. 수의를 벗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수의는 죽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입니다. 죽은 사람이 옷을 입고서는 산 사람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엡4:22-24, 골3:8, 롬13:12). 우리 성도가 입어야 할 옷은 '수의'가 아니라 부활한 성도가 입는 '세마포'입니다(계19:6).
결론
우리는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야 하겠습니다.
부활 주일을 맞이해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바로 성도들의 부활 사건으로 체험하는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
고전10:50-58
서론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1. 죽고난 후에 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없어서 잡혀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억울하게 죽으시고 싸움에서 패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죽으신 후에 3일 만에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살아나셨습니다. 기독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1)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고전15:42).
(2)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가 됩니다(고전15:53).
(3) 천한 몸이 영광의 몸으로 변화가 됩니다(빌3:20-21).
이 모든 변화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의 변화가 가능케 된것입니다.
2.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장례를 치르셨습니다.
세상에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주장과 사상으로 사람의 존엄성을 무참하게 밟아 버리는 사람, 자기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약자의 등가죽을 벗기는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모퉁이에서는 나만 사는 것이 사는 길이 아니고 서로서로 돕는 가운데서 또한 자기의 책임을 다함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는 양심적인 인간이 있습니다. 내가 비록 고생이 되고 피곤하여도 하나님에서는 영광되기 위하여 선을 심고 사랑의 눈물로 거름을 주고 다른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 장을 흘리는 충성된 노력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나라와 교회의 보배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너희를 위하여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결론
변화된 사람을 어떠한 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윗사람을 잘 섬기고 아랫사람을 잘 키우는 생활이 되고, 복음을 전하는 선한 청지기의 생활을 하십시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생명으로 변화를 받아 예수님과 일생을 동행합시다. 후손들에 복의 기관을 물려 주면서 살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 받으며, 면류관을 받아 쓰는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에 참여했는가
고전15:20-28
서론
다른 종교는 자기들 교주의 무덤을 자랑하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부활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은 고전15:4에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과거 2000년 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장차 미래에 이루어질 부활입니다.
현재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 영생의 체험을 받는 신령한 부활입니다.
1. 2000년 전 과거에 있었던 부활에 관해
나는 죽을지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따르겠다고 호언 장담했던 베드로도 비자 앞에서 3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낙심하고 비겁했던 베드로가 예루살렘 거리에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닐았고 친히 교훈도 받았고 손을 만져 보았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한 사람을 찾으라 하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변하여 주님 부활한 날을 주일로 지킵니다. 그러나 창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활입니다. 창조는 인간을 위한 것이요, 인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있기 때문에 주님의 날이 매우 중요합니다.
2. 장차 예수님 재림시 부활에 관하여
각각 자기의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는 자요,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공중에 구름 타고 재림하실 때에는 믿고 죽는 사람들이 부활하여 주님을 영접하여 공중 혼인 잔치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변화하심과 같이 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복락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부활할 것이며 살아서 영접하는 자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 주심을 영접할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도 부활하여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3. 현재에 처해 있는 신자들의 심령의 부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현재에도 활동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의 정욕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송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고 기도의 호흡이 있어야 하고 생명의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어야 합니다.
우리 영이 부활하여야 영생에 기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부활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의 부활과 현재 내가 믿어 심령에 이루어지는 부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여 이루어질 영광의 부활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부활은 오직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믿고 영광의 부활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자
요20:1-18
서론
예수님은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벽은 어떤 의의가 있습니까?
어두운 가정에 광명한 빛을 주기 위하여, 어둡던 심령에 광명한 새벽을 주기 위하여, 암혹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새벽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없고 무덤 문은 열렸습니다. 마리아는 그 무덤에 엎드려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약자의 눈물이 아니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강자의 눈물입니다. 마리아가 울면서 있을 때에 예수께서 여자여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동산지기로 알고 주여 만일 당신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 갔거든 저에게 알려주세요, 제가 가져 가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성경에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고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야 이렇게 불러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주님 이신 줄 알고 만지려고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죽음 저편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까?
1. 버림받은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당하는 괴로움을 친히 체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만 버림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버림받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합니다. 인간적인 사랑보다 종교적인 사랑이 더욱 강한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보다 더욱 강한 사랑으로 사람을 정복하였고 사랑을 받은 신자는 생명을 내걸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절에 보면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가져왔다고 하였으니 주님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한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로마병정들이 지키고 있는 무서운 곳을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모험적인 용감한 신앙입니다. 우리들은 생명을 찾아가는 길에 용감해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예수님 없는 죄악된 길을 찾아가는 데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죄악된 길에는 무디어야 하며 생명의 길로는 빨라야 할 것입니다. 죄악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함께 살 수는 없고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나 자신의 신앙 속에서 부활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어떤 이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여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죄는 누구를 통해서 왔느냐 하면 롬1:12에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오고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왔나니 한 여자로 인하여 모든 인류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왜 죽느냐면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 죄는 하와가 먼저 범한 것입니다.죄가 여자로 말미암아 들어와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도 여자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제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기 전에 먼저 영으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먼저 영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결론
부활의 주님은 생명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비참한 여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오실 때 짓밟힌 생명이 고귀한 생명으로, 비관받던 우리가 존경으로 바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영접합시다.
예수님의 부활과 기독교
에2:1-10
서론
초대 교회의 전도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것으로 부활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진리 그대로,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중심이요, 예수님은 부활하시므로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 부활은 기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교육시키고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제자들은 크게 실망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실망과 낙담과 슬픔에 잠긴 일과 두려워하였던 환경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사망을 박차고 예수님 이 부활하시므로 모든 근심이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여 성령을 받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기독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2. 기독교는 부활의 중심이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고 하면 그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주겠습니까? 구원론이 성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교회가 설립됐습니다. 복음의 중심 내용이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울은 바울로 변하여 예수님 부활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 내용이 부활인 것입니다.
3. 기독교는 사람의 심령을 부활시킵니다.
본래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 다음입니다. 하나님, 인간, 마귀 순서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하므로 둘째 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자리가 회복되었습니다. 범죄한 우리들은 완전히 죽은 자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에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들도 엡2:5에 다시 살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곧 심령의 부활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생합니다.
장차 예수님 오실 때에는 영과 육이 부활하여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마지막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홀연히 부활 변화하여 색을 것이 썩지 않은 것으로 입겠고 죽은 것이 죽지 않은 것으로 입을 것이니 이것이 곧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우리에게 영생을 갖다 줍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므로 저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를 탄생케 하고 우리의 복음의 중심이 되는 교리가 되고 믿는 성도들을 영생케 하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믿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부활을 증거하며 모든 사람을 구원받는 길로 인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결론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부활의 종교 기독교는 우리 심령을 부활시킵니다. 지금 부활의 심령을 가질 뿐 아니라 마지막에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죽어도 영원히 사는 복된 소망이 있으니 어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새 아침
막16:1-7
서론
부활의 역사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 중심은 죽음이 아니라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고 우리 성도들도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살아가는데 죽어도 살게 되는 새 생명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는 생명이 없고 소망도 없으며, 부활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안식일을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를 중심해서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향을 준비해 가지고 아침 일찍이 예수님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무덤 문을 어떻게 열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면서 걸어갔습니다. 이 무덤은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인데 돌문으로 인봉하여 놓았으며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 보니 무덤문은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1.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유대의 관원이요, 의로운 공회의원이었습니다(막15:43). 그리고 부자이고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니고데모와 협력하여 자기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내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
무덤의 돌이 굴러 남으로 증거가 되었는데 마리아와 살로메가 가 보니 무덤 문이 이미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증거가 있습니다. 천사는 "산 자를 어떻게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장하였던 수건과 베게가 개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친히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 예루살렘에서 마리아에게(막16:9)
(2) 길에서 여인들에게(마28:9)
(3) 길에서 베드로에게(눅24:24)
(4)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막16:12)
(5) 예루살렘 다락방에 있는 10제자에게(눅24:39)
(6) 예루살렘에서 11제자에게(요27:26)
(7) 갈릴리 해변에서 7제자에게(요21:1)
(8) 갈릴리 산에서 11제자에게(마28:16)
(9) 갈릴리에서 500여 형제에게(고전15:7)
(10) 알괘오의 아들 야고보에게(고전15:7)
(11) 감람산에서 11사도들에게(막16:19)
승천하신 후에 스데반, 바울, 사도 요한에게 밧모 섬에서 똑똑하게 나타나 증거가 되었습니다.
결론
무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전인류의 소망의 문, 문제 해결의 문, 새로운 희망의 문이 열려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2000년 전에 죽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은혜를 받고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고 광명한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여 빛된 예수님과 함께 빛된 생활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내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부활하신 주님을 내 심령 왕좌에 모시고 새로운 신앙의 인격자로 생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부활의 의의
고전15:14-20
서론
본문 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 이라고 하였고 또한 1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체험, 곧 심령 깊은 곳에 부활하시는 주님을 만나는체험이 반드시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가지는 것인가를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봄으로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비진리에 대한 진리의 승리
"진리가 무엇이냐(요18:38)"고 묻던 빌라도의 질문과도 같이 많은 사람들이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요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것 같이 예수님이야말로 진리 그 자체로서 진리를 말씀하셨고 진리를 행 하셨으며 진리의 길로만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싫어하고 미워 하며 방해하는 비진리의 세력이 연합하여 마침내 진리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매장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진리는 영원히 비진리 앞에 무릎을 꿇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방향을 상실하고 맹목적으로 굴러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진리는 마침내 승리한다고 하는 확증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부활의 주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세세 무궁토록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
예수님은 그의 산상 보훈 가운데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가르쳐 주셨고, 또 그렇게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예수님은 평생을 정의의 편에 서서 의로운 자세로 꿋꿋이 살아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의의 편에 서 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위하여 마침내 당신의 정치적 세력과 결탁해서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의는 땅 속에 매장되고 불의는 승리하여서 그들은 의기 양양하여 승리의 축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난 주일 아침 무덤은 열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니 의가 언제까지나 패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언제나 최후의 승리는 정의의 편에 있음을 입증한 사건으로 정의를 위해 일하고 싸우는 자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가장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3. 미움에 대한 사랑의 궁극적인 승리
그리스도는 이를테면 인격화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 눌린 자와 학대받고 천대받는자, 버림받은 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을 친히 고치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고, 먹여 주시고 어떤 때는 그들과 함께 울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안식일을 안 지키고 세리와 창기의 친구라고 그리고 성전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라고 하여 고발을 당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수들의 시기와 미움은 참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결국은 사랑이 미움을 대하여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4.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
요11:25-26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처구니 없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음부와 무덤과 죽음의 권세가 생명의 근원되는 그를 영원히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죽은 지 사흘되는 날 아침, 무덤은 열리고 우리 주님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시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동시에 교회 부흥의 활력소이기도 합니다. 초대 교인들의 굽힐 줄 모르는 용기와 열심은 이 그리스도께 대한 부활 신앙에 연유했던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괄호 안에 넣고 그리스도교는 존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제외하고서는 성서를 바로 이해할 수도 없고 오해할 수도 없습니다.
결론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교회도, 신자도, 선교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비진리에 대한 진리의 승리를 의미하고,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를 의미하고,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의미하며,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와 정의의 편에 사랑으로 일괄하여, 부활과 승리에 새 아침을 바라보면서 지칠줄 모르는 전진을 거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아멘.
생명의 승리
고전15:50-58
서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고 실패에서 승리를 거둔 기쁨이기에 더욱 진지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과 메어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상에서의 그의 죽음이 죄인을 구속하는 위대한 힘이라든가 승리의 죽음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죽음이었고 억울한 죽음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야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위대한 속량과 사랑의 힘이며 죄를 이기신 능력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그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도 아무도 그의 참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로 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사죄의 능력이라고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하나님의 숭고한 섭리와 계시와 진리의 확인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는 죄의 힘이 일시적으로 승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패배를 맛보았으나 부활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 확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노래하는 우리 주님의 부활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승리가 무엇을 이기었으며 또 우리 원수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겼다는 것인가를 여기서 생각하기로 합시다.
1. 예수의 부활은 죄를 이기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의 죄악의 힘에 의하여 선이 패배를 당한 것이지만 그것이 또한 죄악을 이기는 비결인 동시에 그 승리를 부활이 확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는 사랑의 용서로 죄악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모두 이러한 죄악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은 죄를 정죄하거나 심판할 사람도 없거니와 인간에게 정죄를 달갑게 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사죄의 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써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니 죄에 대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2. 예수의 부활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죄를 이기신 그가 죄의 값인 사망을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됩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서 새 생명을 얻는 부활의 승리를원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기를 하나님이 그를 죽음 가운데서 일으켜서 다시 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시고 자기가 마실 쓴 잔을 마시고 무덤 속에까지 들어갔으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는 우리도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운명에서 생명으로 변한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생애도 비참하겠지만 사명이 없는 죽음은 더 비참한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자연적인 제한성을 이기는 길은 이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패배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명의 완수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음의 승리입니다.
3. 예수의 부활은 세상을 이겼습니다.
2000년 전 세상이나 오늘의 세상이나 그 본질이나 역사적인 현상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시대에도 제자가 스승을 팔아먹었으며, 위험할 때는 스승도 친구도 동지도 저버리고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세상이며, 악이 선을 억누르고, 거짓이 참을 비웃으며, 부패한 종교가 새로운 참된 종교를 배척하는 세상입니다. 또한 정권과 관원을 잡은 자들이 행패를 부려서 무죄한 사람을 죽이 며, 종교가 정권에 아부하고 불의와 짝하며 그릇된 재판이 승리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오늘의 세상과 동일하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세상과 인간에게 복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세상을 극복하는 것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을 구하며 무의미한 생애에서 허덕이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보내심을 받았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세상과 그 역사는 무의미한 것이거나 도덕적 혼돈의 것이 아닌 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과 역사 속에서 살다가 억울하게 죽으심으로 바로 그 역사 그 세상 앞에서 다시 부활하여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과 그 역사의 가상적인 허무성과 무의미성을 반증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권세와 폭력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즉, 역사는 악마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권모 술수는 마침내 패배한다는 것입니다. 눈물로 뿌려도 기쁨으로 거둘 수 있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도 장차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부활은 죄에서 승리하셨으며 죽음을 이기시고 세상을 승리하신 생명의 승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
마28:5
서론
우리는 가끔 믿을 만한 사람 하나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실제로 보았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뜻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 두려움을 극복케 하는 격려
무덤에 가까이 가 보니 무서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여인들이 무덤에서 천사들을 본 것은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놀라서 죽은 사람처럼 되었지만(4절), 여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온에 거하는 죄인들이야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지만(사33:14),충성스러운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의 딸들이 놀라며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벧전3:6). 안심할 이유는 "너희는 내가 전하는 소식을 두려워 말라 너희는 이미 너희 주께서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의 부활이 너희에게는 위로가 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너희가 예수를 찾는 것과 그의 친구된 것을 내가 아노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부활의 확인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를 보여줄 수 없어도 장차 그를 뵙게 될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시면 당신이 구속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하십시오.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면 그가 계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시체가 도난당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부활하셨음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활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다름 아닌 그 자신이 곧 진리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에 따르는 책임
(1) 부활의 소식을 전파해야 합니다.
이 소식은 제자들에게 전해져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더 깊이 살피게 했고, 그들을 일깨워무지함에서 깨어나 새로운 소망을 불러일으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찾게 했고 그들에게 나타나실 주님을 맞게 했습니다.
(2) 부활의 소식을 전할 증인들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택함 받은 사람들로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 받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약한 자들을 들어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며(고전1:27), 질그릇에 도 보배를 담으시고(고후4:7), 더 약한 그릇도 들어 쓰십니다(벧후3:7).
여인들이 부활을 증거했던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영광이요, 십자가와 무덤까지 따르며 주님을 사랑했던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주님을 저버린 데 대한 꾸짖음이었습니다.
(3) 즉시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들은 즉시 가서 이 일을 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도 서둘러야 합니까? 그 이유는 제자들은 지금 극도의 슬픔에 짓눌려 있어서 한시 바삐 진심 어린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죄의 용서를 위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을 때에도, 위로의 소식을 가진 천사가 급히 서둘러 내려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단9:27).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이며, 고난받는 형제들에게 선을 행하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결론
마태복음 26, 27장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암흑의 권세에 공격을 당하여 그 앞에 쓰러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암흑의 권세가 이기는 듯하였으나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평화의 왕께서는 정복자로서, 아니 그 이상으로서 무덤을 헤치고 나오셨습니다.
그는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권능
빌3:10
서론
본문의 상황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대교적인 교사들을 조심하라고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혹시 그가 편견이나 무지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이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을 참예함을 알려 하여"라고 말했을 때, 그는 자기의 회심이 진정한 것이었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1. 그리스도 부활의 사실
(1) 거짓에 속지 않기 위해 주의할 것
그리스도는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에 묻히셨기 때문에, 누군가 밑으로 땅을 파고 들어가그의 시신을 꺼내갔다는 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무덤은 사람을 매장한 적이 없었던 곳이므로, 만약 그 곳에서 누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입니다. 게다가 그 무덤은 봉인을 한 채, 입구에 바위를 굴려 막아 놓았고 그의 친구들이 아닌 공공연하게 그를 반대하던 원수들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2) 부활 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 후에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을 때 나타나셨는가 하면, 제자 둘이서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나타나시기도 했고,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 나아가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기도 했으며, 500여 성도들이 동시에 보는 앞에 나타나시기도 하여, 온갖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활이 참된 것임을 입증했습니다.
2. 그리스도 부활의 필연성
(1)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종종 그가 참된 메시아임을 드러내주는 가장 확고한 증거로서 부활을 언급했습니다(마12:39-40). 그는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성전이란 그의 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무덤에 계셨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음의 권세로부터 놓여 났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하나님을 만족시켜 우리의 구속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음을 착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우리 몸의 부활을 확증하기 위해
우리 몸의 부활을 확증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만 합니다. 이방인들은 육신의 부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이유로 그를 조롱하며, 말장이라고 혹은 이상한 교리를 전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행17:18). 또 유대인들은 대부분 몸의 부활을 믿고 있었으나 사두개인들은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모든 논쟁들을 종식시켜 버렸습니다.
3. 그리스도 부활의 권능의 중요성
(1) 부활의 능력에 대한 설명
부활의 능력은 우리를 죄로 죽은 데서 의의 생명으로 옮겨주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참된 거룩함을 줍니다. 만약 바울이 그의 죽은 심령 안에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의 육신의 부활은 바울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의 하나는 우리를 대표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성령에 적용시켜 우리 심령이 전적으로 변화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2) 신자들의 삶에서 부활의 능력이 가져오는 결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빛과 어두움, 천국과 지옥을 화해시킬 수만 있다면, 자아와 세상에 대해 죽지 않고서도 부활의 능력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세상에 속한 영과 하나님의 영 사이에는 첨예한 모순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한쪽과 벗하면 다른 쪽과는 원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
기독교 신앙은 참으로 심오하고 풍부하며 탁월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도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이나 쓰레기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와 그의 부활의 능력을 알기를 열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비록 이 세상에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국에 거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마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의 영웅들처럼,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어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요20:11-18
서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를 분명히 보았고 만났습니다. '엊그제 예수의 시체를 지켜보았던 그녀였습니다. 너무 슬퍼서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었는데 그 눈으로 오늘은 예수의 사심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시체를 썩지 않게 하는 향유를 손에 들고 무덤에 갔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서 살아 있는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1. 마리아를 부르시는 예수
마리아는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살아계신 예수님이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가 안보일 때 그녀는 울면서 예수의 시체를 찾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영안은 아직 뜨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리아의 등 뒤에서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예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놀라운 사실을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예수가 나타났을 때에야 그들은 비로소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예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직접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안 믿겠다고 의심하며 떠들어대다가 예수를 직접 만난 후에야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직접 만나야지만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고 의심하지는 않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부활신앙이 교회 공동체를 일으켰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무서워 떨던 제자들과 신도들은 예수를 만난 이후에 부활 신앙으로 전혀 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도 그 부활 신앙은 계속 번져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어 초대 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여 다 죽이려고 쫓아다녔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 그의 삶은 백 팔십 도로 변하였습니다. 그래서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예수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살아계심을 똑똑히 보고 믿을 때 기독교 신앙은 가능한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인 바 이것에 의하여 교회가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3. 부활 신앙은 산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부활 신앙의 초점은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서 살아 움직이는 힘에 있습니다. 죽으면 천당 간다는 보장으로써 부활의 신앙을 갖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소극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오늘을 바꾸어 놓는 힘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질고, 가난, 그리고 고통속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정의를 위해 싸우는 힘을 갖습니다. 어떤 죽음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뒤를 따라 꿋꿋하게 서서 진리를 외치며 실천하면서 살아갑니다.
결론
우리는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생은 변화하게 됩니다. 소극적인 삶, 불의한 삶에서 담대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 예수를 전해야 하겠습니다.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공포에 떨며 사는 초췌한 인간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힘차게 전합시다.
두 제자
눅24:28-35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의 부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여전히 죄가운데 있는 불쌍한 존재로 우리는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슬퍼하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동행하면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죽음만 생각함
엠마오는 예루살렘 서쪽으로 약 17마일 떨어져 있는 작은 촌입니다. 걸어서는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해가 진 황혼녘에 실망에 가득 찬 두 제자는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동료 제자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나온 듯합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꿈도 소망도 없이 절망과 슬픔에 차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무참히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평소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가르치셨던 말쯤은 기억조차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삼년 동안이나 가깝게 따라 다니던 제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기뻐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죽으심만으로 슬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께서 동행하심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들 가까이로 오셔서 나란히 걸으셨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제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소망을 가지고 따라다녔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된 것과 또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가보았으나 시신을 보지 못하고 천사가 나타나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알려주더라는 것과 그래서 그들의 동료들이 무덤에 가 보았더니 과연 그 여자들의 말처럼 시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리석도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느냐"고 하시면서, 성경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두 제자들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마음을 뜨겁게 해 주고 위로와 확신을 가지게 해 주었습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과 식사함
제자들은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어느덧 엠마오까지 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붙들고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으니 함께 묵어 가자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두 제자는 저녁 식탁에 앉았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축사하시고 두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줄 때에, 그제야 비로소 눈이 밝아지며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두 제자는 그날 밤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전하려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의 부활은 단지 이천 년 전 옛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오늘도 보여지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확실히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과 한 몸이 되었으니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
요20:1-10, 26-29
서론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하여 사실의 여부를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체험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생활인 것을 말해 줍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한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마리아와 도마와 베드로의 체험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입니다.
1. 마리아는 직관적인 순정의 사람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가장 먼저 뵈옵고 최초의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사귀에 들려 온갖 문제 있는 인생을 살던 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활의 대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놀랄 정도를 변화된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므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신에라도 기름을 발라드리려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는데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할지어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마2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부활의 첫 소식을 전하게 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인생 패배의 자리에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가 이제는 새 생명인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2. 도마는 사색적인 회의파였습니다.
도마는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확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에서 특이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현대 지식인들처럼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도마는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가 다락방에 나타나셨던 첫 부활절 저녁 예배에 불참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뵙고 감격에 넘쳤는데, 도마는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다. "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 저녁 예배에는 도마도 참석하였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큰 확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도마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불신앙은 부활 후 감사하여 모인 첫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는 데서 왔습니다.
기독교인의 총자본은 부활의 확신입니다. 도마는 이 자본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힘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서 이 확신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확신'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믿는 자'가 됩시다.
3. 베드로는 감정적인 행동파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반신 반의로 허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여러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호반에 나가 밤에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힘썼지만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고 피로와 불만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아갈 때 육지에 낯익은 음성으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시는 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대로 하였더니 큰 고기 153마리가 잡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문득 3년 전 처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있었던 일과 같은 경험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달려나가 보니 부활하신 예수께서 조반까지 준비해 놓으시고 영접하여 주십니다. 조반이 끝나자 예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며 세 번 반복하여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치라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친히 베드로를 찾아 다시 불러 세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때부터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대로마 제국을 복음화하는 기적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결론
부활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자리에 처해 있는지를 아시며, 붙들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마리아나 도마나 베드로가 다 각기 다른 삶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확신을 주시며 주님의 자녀로 서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널리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부 흥
성 경 활 용
1. 부흥을 위한 조건
(1) 겸비함으로
(대하7:14)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2) 상한 마음으로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 회개함으로
(고후7:10) 하나님 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2. 종교적 부흥
(합3:2)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3. 영적 부흥의 실례
(1) 오순절과 오순절 이후
(행4:4)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넜더라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행12:24)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 바울이 안디옥에 갔을 때
(행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관련원어풀이
1. hy:j; 카-야-흐
(1) 숨쉬다, 살다.
(창5:3, 11:11)
(2) 안전을 지속하다, 생존하다.
(창12:13, 렘38:17)
(3) 다시 살다, 부활하다.
(왕상17:22, 겔37:5)
(4) 건강을 회복하다, 고침을 받다, 생기가 있다.
(창20:7, 삿15:19)
(5) 번성케 하다.
(시119:37)
(6) 살아있다, 살려두다.
(창7:3, 시41:3)
(7) 소생하다, 생명을 회복하다, 원기를 되찾다, 수선하다.
(삼상2:6, 대하11:8)
(8) 살려두다, 생명을 주다.
(창19:19, 수6:25)
설교예화자료
대성황의 덕분
「세 사람의 친구」의 첫 공연이 끝난 며칠 후, 보오마르세 는 가수 쏘넬이 아르누우 앞에서 새 오페라단이 근간 공연하게 될 「소오아스를」을 무작정 깍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극장이야 더할 나위 없이 그만이지요. 그렇다고 귀양의 「소오아스를」까지도 성공하리라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 "천만예요. 댁에서 공연해 주신 「세 사람의 친구」 덕분에 반드시 관객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요." 「휘가로」가 공연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아르누우 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쩐지 길게 가지 못할 작품 같은 데요." 그녀는 다소곳이대답했습니다. "글쎄요. 그럴 거예요. 실패할 것 같기도 해요. 길어야 40회쯤이나 공연될까요?" 40회의 속연이란 당시로서는 크게 성공인 편이었습니다. 보오마르세 연극이 대호평이었으므로 「휘가로」를 본뜬 복장, 악세사리 등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한 사람이 자기집 개를 휘가로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이를 보고 보오마르세가 말했습니다. "휘가로? 다시 없는 개 이름이군요." 보오마르세 는 「휘가로의 결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내 연극보다 더 허술한 데가 있어요. 그건 곧 예상외로 대성황이라는 그 점일 거예요."
죽으면 열매를 맺는다
명치 34년의 봄, 고베 시의 고베 구락부에서 대전도 집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강사의 하나인 죤 데 휘레스트 박사(1845-1910)는 '희생심'이라는 제목으로 유창한 일본말로 강연하였습니다. 데 훼레스트 박사는 미국조합 교회의 선교사로서 1874년에 와서 오사까, 쎈다이,그 밖의 여러 곳에서 활약하여 많은 사람을 신앙에 인도하였으나 그 일본어의 유창함에는 놀랄 만하였습니다.
박사는 일본인이 희생심이 풍부한 국민이요, 사꾸라 쇼고로, 요시다 쇼잉 그 밖에 많은 인사가 여하히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을 역설하고 다시 이어 말하였습니다. "나의 벗의 한 사람으로 미국의 어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회에 나가 훌륭한 지위에 나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고 헌신하여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건너가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지난 32년의 북청 사변으로 전운이 심각하며 급박하게 되자 사랑하는 처자를 미국에 송환시키고 다만 혼자 남아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점점 사태가 악화하여 생명의 위험을 느끼게 되었으므로 아내에게 유언장을 기록하였습니다. '나는 오늘까지 하나님과 중국인을 위하여 일해 왔지만 언제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알 수 없소. 만일 그렇게 될 때에는 우리의 아이들을 교육시켜 성장했을 때에 선교사로서 중국에 보내어 이 아비가 완성할 수 없었던 중국인 전도에 종사하도록 주선해 주오.'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만 그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폭도에 의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 데 훼레스트 박사는 이 숭고한 희생심을 생생하게 말한 다음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명치 7년 이래 30년간 이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로 오해를 받아 곤란을 느낀 일도 많았습니다 오늘에는 문명도 진보되어 이제는 서양인을 죽이거나 박해하는 그런 일은 없어졌습니다. 가령 금후 어떠한 곤란이 오더라도 나는 일본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참 마음으로 일하다가 이 나라의 흙이 될 결심입니다. "
박사의 심히 능숙한 일본말 설교는 청중을 온전히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희생심이 풍부한 일본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애를 감득할 수 있을 턱이 없는 까닭을 분명케 하였습니다. 넘치는 열성으로 역설해 오고 역설해 갔을 때 만당의 청중 중에는 감격하여 흐느껴 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5,6백 명의 청중 중에 불교 청년 승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박사의 말은 그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자기가 속한 불문의 교리와 비교하여 생각하노라고 그는 귀가 후 그날 밤을 전전반측하며 잠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확연히 깨닫는 바 있어서 성경을 샀고 옛 생명에서 '새생명'으로 접붙임이 되어 그후 몇 달 후에는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청년 승려야말로 후의 이색적 목사 이마이가와 씨였습니다. 뿐 아니라 그대에 회심의 쾌저에 의하여 다시 그리스도교에 인도된 자 심히 많이 있었습니다.
데 휘레스트 박사는 그때의 말과 같이 평생을 일본에 바쳐 일본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은 심히 컸습니다. 천황 폐하 영양을 위시하여 이마이 목사,그 밖에 많은 헌신자 회심자가 속출하였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피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플랫폼을 떠난 의장
언젠가 나는 생키 씨와 함께 집회를 가졌는데, 거기에는 능력이 임하시지 않아 허공을 치며 일주일 동안 헛수고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하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회개하지 않은 영을 가꾸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러자,내 옆에 앉아 있던 위원회의 의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청중들이 보는 앞에서 나가버렸습니다. 바로 맞추었습니다. 그 화살이 의장의 심령에 꽂혀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누군가와의 갈등 때문에 여섯 달간이나 고민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내 게로 와서는 "저는 당신을 여기에 오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 접견실은 만원 사례였습니다. 그 의장은 내가 알고 있는 사역 자 중 가장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고, 그 이후로 그는 크리스찬 집회나 예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더 하시리나
A. 내쉬라는 남자분이 신시내티에서 옷장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꾸려 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황금률(黃金律)의 내쉬"라고 불림을 받았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 그 몫을 돌려 드렸으며 죽기 전에 자신의 회사를 고용인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으뜸으로 섬기는 일이야말로 모든 기독교인의 사업에 큰 보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웨일즈의 부흥 운동
세상 사람들은 이번 세기 초에 조그마한 웨일즈 지방을 불길같이 휩쓴 대부흥 운동의 인상을 아직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강렬했던 영적 각성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 신앙 훈련 모임이 한 작은 마을에서 진행중에 있었고, 이때 한 어리고 겁많은 소녀가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감동하여서 단지 다음의 짧은 말밖에는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아, 나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해요!" 그리고 그녀는 앉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성스러운 목표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열망하는 듯한 증거를 사용하시었습니다. 영적인 불길이 마치 오순절 다락방에서와 같이 그 젊은이들의 모임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곧 이 불길은 교회로 퍼져나갔고, 그 작은 마을을 가득 채웠으며,온 웨일즈 지방을 휩쓸어 버린 것입니다. 전 세계는 곧이어 이 크나큰 영향력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세상은 결코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변할 것이나 시들지 않을 것이다. 무엇 하나 태어난 것은 없으니 아무것도 죽지 않을 것이요, 모든 것은 변하리라.
(A. 테니슨/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만물이 세상에 살고 있음은 마치 달리는 말과 같다. 움직여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순간도 멈추어 있는 때가 없다.
(장자)
모든 새로운 계절은 과거의 잔존물에서 성장한다. 그것이 변화의 본질이며, 변화의 기본율이다.
(H. 볼런드/ 계절의 해시계)
생명은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떨어져 나간 영혼은 삶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모든 것이 이 이름 아래에 떨어진다. 태양은 신의 어두운 환영에 불과하고, 빛은 신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T. 브라운/ 시루스의 정원)
어느 날 북경의 거리에서 어떤 늙은 시골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노인은 낡고 해묵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원래는 푸른 색이었지만 이젠 푸른 빛깔을 찾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 낡은 옷의 뒤로 커다란 연푸른 빛깔의 새 조각들이 기워져 있었습니다. 이 소박한 시골 농부의 옷을 보고 나는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너무나 우스꽝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왜 웃었던 것일까요? 새 베 조각은 아주 좋았습니다. 크고 새것이었으며 깨끗했고 옷 전체를 앞뒤로 덮고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왜 웃었던 걸까요? 그 까닭은 원래의 옷과 새 베 조각이 서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옷은 낡고 해어졌는데 새 베 조각은 깨끗하고 푸른 색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너무나 차이가 있어 도무지 조화를 이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 누더기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시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마음 가운데 모신 자가 아니라 기독교를 그저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시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고 날마다 기도하고 성찬식을 참여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순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한 부분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의 삶가운데 이 모든 것 이 낡은 옷에 대한 새 조각과 같은 것들이 아닌지요? 여러분은 혹시 기워입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마음속에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입술에만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옛것들이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지셨습니까?
(빌리 그레함)
여러 해 전, 내가 아직 목사로서 설교단에 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목사로 있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부흥회의 집회는 일요일 아침에 시작되었지만 수요일 밤까지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수요일 밤에 모인 사람이 나와 그리스도를 고백하였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을 나는 은밀히 대했습니다.
다음날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한 여인이 나를 찾아와 나를 신랄하게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을 때는 통성 기도하는 좌석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이나 울면서 기도했었습니다. "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마음 먹기까지에는 일주일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데는 일주일이나 걸릴 필요가 없습니다.
(로버트 슐러)
설 교 노 트
심령 부흥의 비결
눅24:30-35
서론
성경 본문에 게시된 심령 부흥의 길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돌이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여기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양상은 오늘 신앙이 타락하여 저 세상으로 나아가는 서글픈 신자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확신을 상실하고 의심에 싸여 내려갑니다. 환희를 상실하고 슬픔에 싸여 내려갑니다. 여기 엠마오가 부패한 세상을 상징한다면 예루살렘은 신성 한 교회를 상징하고, 엠마오가 불의한 죄악의 영역이라면 예루살렘은 진리와 의의 영역을 의미하며, 엠마오가 사탄이 지배하는 사망의 세계라면 예루살렘은 주님이 통하시는 성별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1. 심령 타락의 원인
심령 타락의 원인을 여기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등지고 엠마오로 내려가게 된 동기를 찾아봄으로써 몇 가지 밝혀 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이 죽으심에 대하여 실망을 하였습니다(19-21절).
저들은 예수님을 참 메시아로 알고, 모든 대적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줄 알았으나,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심에 대하여, 저들의 기대와 소망이 완전히 좌절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실패로 보고서 착각한 불신앙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였습니다(21-24절).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주님께 직접 들은 바도 있거니와, 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에게도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만나보지 못한 데서, 회의와 의심을 사고 실망하였습니다. 이는 부활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3) 성경 예언에 대한 불신앙입니다(25절).
본문 25절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러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과(시14:1), 성경 예언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눅28:25),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마7:25) 미련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불신앙이, 교회를 등지고 세상으로 죄를 다 범하게 됩니다.
2. 심령 부흥의 비결
심령 부흥의 비결을 여기 두 제자가 엠마오의 길에서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 원인을 찾아봄으로 몇 가지 밝혀 보려고 합니다.
여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잃어버렸던 신앙과 기쁨과 소망을 다시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말씀과 은혜와 축복이 풍성한 동산입니다.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데 있었습니다.
여기 실망 속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주님이 찾아가서 만나주신 것은, 주님의 긍휼과 사랑의 실현입니다. 주님은 저들을 찾아가 동행하시면서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주님을 만남이요, 말씀을 들음입니다.
(2) 성경의 말씀을 바로 받아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저들에게 성경 말씀을 소개하고 들려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 들을 때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는 마음의 감들과 자극과 충격을 받아 깨달아지고, 결심이 생기고, 각오가 서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바로 인식하고 믿는 데 있습니다.
저들은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며 대화하면서 미쳐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를 못했습니다. 이것이 형식적인 신자의 양상이기도 합니다. 이는 신령한 안목이 어두워 서라고 하였으니 영적 안목이 밝아져서 주님을 바로 인식하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결론
심령 부흥의 길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것이범죄하고 죽는 길이라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두 제자는, 심령의 새힘을 얻어서, 120문도와 같이 기도하다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 주님의 증인이 되어 복음 전파와 교회 건설의 역군이 되었습니다.
교회 부흥의 원리
행16:6-15
서론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은 부흥해야지 쇠하져서는 안됩니다.
교회 부흥에는 몇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서 그 원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교회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교회의 부흥 원리가 성령의 역사에 있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합니다. 본문6-7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 전파를 만류하시고 바울과 전도단 일행을 유럽으로 이동하도록 하신 역사적인 의미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고 합니다.
창세기 9장 27절에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성경 학자들은 복음이 서방 백인종에게 전파되어 저들이 복음으로 축복을 받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보고 있습니다.
(2) 선교 운동을 활발하고 힘있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인종적인 면에서 유럽의 게르만족이 활동적이며 적극적이라 저들이 복음화되어 교회가 창설되어지는 것은 교회 부흥은 물론 세계 복음화의 지름길이라고 생각됩니다.
(3) 로마가 세계적인 중심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어 복음을 전하도록 역사하셨다는 말입니다.
2. 교회 부흥은 충성된 전도자의 역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상 교회들이 활발하고 힘있게 발전하고 부흥하던 이면에는 반드시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의 능력있는 활동이 수반되어 왔습니다. 여기 빌립 교회의 부흥 원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교회 부흥을 위한 충성되고 능력있는 전도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성령에게 붙들려서 사역하는 전도자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선생은 일거수 일투족을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으로 붙들려서 활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힘써 기도 많이 하는 전도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11-13절에 바울과 전도단 일행은 기도할 처소를 찾아 힘써 기도했다고 박히고 있습니다(행6:4).
(3) 애원하는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전도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9절에 "환상 중에 도와 달라고 애원하는 영혼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가정이 복음화 되어 빌립보 교회가 창설되고 부흥이 되었습니다.
3. 교회 부흥은 복음을 받는 독실한 교우들의 봉사에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그 이면에는 독실한 교우들이 복음을 바로 받아 봉사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 루디아에게 몇 가지 찾아보면
(1)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간절히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살전2:13). 이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서 힘을 쓰게 합니다.
(2) 하나님의 종들을 영접하여 후대했다고하였습니다. 마10:40에 "주의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힘써 봉사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라고 하였으니 주님을 봉사하는 성입니다.
결론
이 세 가지 원리에서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 빌립보 지방의 복음 전파에 박차를 가했고, 사탄의 권세가 파멸이 되었고, 옥사장마저 회개하고 복음의 위력을 과시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
행11:19-26
서론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중해 세계와 시리아 내륙, 그리고 동방 국가들간의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문화적 ·상업적 접촉점으로서 안디옥이 가지고 있던 이런 특징은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방식 중 먼저 한 도시에 부흥을 일으켜 그 부흥의 불길을 사방에 번지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부흥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부흥의 동기
(1)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인하여 부흥하게 되었습니다(19절).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던 무명의 성도들이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게 됨에 따라 복음 역시 사방으로 퍼져서 전파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아닐 수없습니다. 성도들이 주축이 되어 사도들에 의하여 복음이 전파되던 것이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무명의 그리스도인 모두가 흩어진 전도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박해는 부흥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2) 희생의 뒷받침이 교회 부흥의 동기였습니다.
19절에 스데반의 일은 그의 희생적 전도와 봉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도자의 희생적 봉사와 성도들의 숨은 봉사가 교회 부흥의 절대적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던 것이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죽음을 면하게 된 것, 감사하여 죽을 각오한 희생적 봉사와 전도가 교회를 부흥케 한 것입니다.
빌리보서 1장 12절 이하에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박해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바울의 희생적 봉사와 전도가 많은 사람이 겁없이 전도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부흥의 내용
(1) 주 예수가 전파되었습니다(20절).
19절에는 도를 전했다고 했습니다. 즉 복음의 말씀이 전하여 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 앉은뱅이된 사람이 미문이라는 성 전문에서 구걸을 하다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크게 놀란 백성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을 때에 베드로가 모인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영이 역사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비극은 남의 업적까지 내가 한 것처럼 선전하려는 위선적 공로 의식이 문제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 야만이 마땅합니다.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부활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2)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21절).
성령이 말씀 전하는 자들을 붙들어 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과 함께 성령의 역사가병행하여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고 바울이 말씀하셨듯이 주님의 사랑에 붙들려 그가 잡아 끄는 대로 끌려 갈 수밖에 없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시는 말씀의 감동은 거역할래야 할 수 없는 순종하는 기쁨으로 할 수밖에 없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23) 보편적 복음이 전파됐습니다(20절).
유태인에게 뿐 아니라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 등 여러 도시와 안드옥에서는 헬라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됐습니다.
지방색, 민족색을 초월했으며 유대주의적인 편견도 극복됐습니다. 이로부터 안디옥 교회가 설립되고 선교를 위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결론
부흥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21절).
(2) 예루살렘 교회까지 이런 부흥의 소문이 들렸습니다(22절).
(3) 권하고 가르치는 교육이 실시됐습니다(23,26절).
(4)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행2:37-47
서론
예수를 믿는 성도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의 부흥을 원할 것입니다. 부흥의 성경적 역사를 찾아본다면 창세기 4장 26절에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한 것이 시작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오순절 이후에 크게 부흥한 요인이 몇 가지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1. 회개 운동이 있습니다.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로" 하나님이 말씀을 들을 때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며, 마음속 깊이 충격적인 찔림이 있어야 하고, 또 돌이키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중의 부흥의 역사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많은 부흥 운동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한 것, 겸손하지 못했던 과거의 죄를 아파하면서 재를 무릅쓰고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에스라의 집회가 그러했고 니느웨의 부흥이 그러했습니다. 참된 부흥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영혼들의 하나님과의 화목 운동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많아 질 때에 교회는 자연히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란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욥22:21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은 회개밖에 없습니다. 심령이 살고 가정이 잘 되고 사업이 진흥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국가가 복을 받으려면 먼저 회개 운동이 일어나야 될 줄 믿습니다.
2.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부흥의 요인 중에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뜨거운 기도입니다. "전혀 힘썼다"는 말은 기도에 힘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의 기도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특성은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선교의 역사는 바로 기도의 역사로 시작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개인도 기도하고, 모이면 기도하고, 교회에서도 기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대로 모일 때 마다 성령의 세례를 부어주셔서 거룩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3. 성도의 교통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고 하였습니다. 슬픔과 기쁨, 사랑과 은혜를 같이 나누는 성도들의 동고동락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서로 사랑하고 교제할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통하고 역사하게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회에는 덕이 되고 은혜가 돼서 믿는 사람이 더하여 가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는 종적인 관계를 철저히 세울 줄 알면서 횡적인 관계는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의 교제를 권장하고 있는 데 적극 참여하여야 합니다.
4.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전에 모인 그들은 떡을 떼었는데, 떡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몸을 생각하면서 한 일로 오늘날 말씀을 전해주는 설교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시비나 원망은 그림자도 없고 오히려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거기에서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서로 사랑하게 됐고 날마다 감사가 충만하여 하나님 을 찬미하니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믿는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더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교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참 교회의 부흥을 원하십니까? 오늘 우리들은 자신의 잘못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 교제하여 성도가 서로 교통하면서 하나님 앞에 모이기를 힘쓰며 말씀을 통해 새 힘을 얻고 서로 사랑할 때 좋은 소문이 나며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평강 교회로 구름떼 같은 무리가 몰려들 줄 믿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하나님의 일의 부흥
합3:2
서론
선지자 하박국은 임박한 패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멸망할 그의 동포들을 위하여 애도하였으며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제거하거나 경각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1. 열망된 축복들
하나님의 일의 부흥과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일의 부흥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당했고 하나님의 뜻은 낮아졌습니다. 민족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요구되었고 교회에는 새로운 은총이 필요했습니다. 부흥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생명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연약하고 쇠퇴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죽음과 형식과 회심치 않음이 있습니다.
돌들과 흙은 시온에서의 쇠퇴의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 민족에게 세속성과 불충성이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은총의 수단들이 무시되었고 대중들은 하나님이 없이 살았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
① "나타내시옵소서" 세상 안에서 당신의 능력과 섭리를 나타내시옵소서. 교회로 하여금 당신의 긍휼과 은총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목적을 추측하게 하소서. 숨겨지고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두지 마소서. 당신의 일을 완성하심으로 당신을 영화롭게 하소서.
은총을 당신의 백성에게 특별하게 보이소서. 자비는 우리의 불행과 관련됩니다. 죄는 우리에게 진로를 가져오고 자비를 막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에 자비가 있습니다. 죄인은 두려워함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를 기억하시고 그에게 자비를 보이십니다.
2. 축복이 요구되는 때
"이 수년 내에"라는 말은 강조하는 의미에서 두 번 반복됩니다. 그는 수년의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까지가 오랜 기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행해져야 할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 미래가 어떠한 것이든 간에 하나님은 형벌을 연기하시며, 현재 참회와 기도를 위 한 여지를 남기십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별은 빛날 수 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구원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죄악 가운데서도 적이 거꾸러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사랑을 베푸실 때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종들이 그 부요함을 기뻐하고 그 티끌을 사랑할 때입니다(시102:13, 14). 교회의 시련의 날들은 정해진 때를 넘어서는 한순간도 연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위안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맞이하게 될 그 수년 동안을 위해서도 기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119:132) "
3. 축복이 확보되는 방법
사람은 많은 계획들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기관들과 집단들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개선시킬 한 가지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한 가지 계획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은 원리를 세우십니다. 부흥 설교가들이나 부흥 집회들이 필요할 수도 있으나 그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의 일" 새롭고 특이한 방법들을 찾는 대신에 교회는 이왕에 가지고 있는 것을 성실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36:37)"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이기심이라는 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나의 가족,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설교는 오순절의 베드로의 설교와도 같이 자는 사람들을 일깨우며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것은 담대하고 진지하였으며, 그 목적을 향하여 있었고 자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성직자들과 사람들이 먼저 부흥되어야 하며,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85:6)"
부흥하는 믿음
행2:1-4
서론
교회는 만인의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셨고(미16:18)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엡5:23).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사신 교회(행20:28)인 동시에, 곧 하나님이 교회(고전11:22)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특별히 충만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성령의 충만
사도행전은 교회의 부흥록입니다. 또 교회행전도 되고, 성령행전도 됩니다. 곧 성령은 교회 부흥의 열쇠요, 동력이며, 혈맥이고, 바탕입니다. 교회의 시작도 성령이고, 교회의 역사도 성령입니다. 성령은 교회 부흥의 알파와 오메가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는 성령의 충만(행2:4)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진리입니다(요14:17). 그러므로 진리의 충만을 뜻합니다. 또 성령은 권능입니다(행1:8). 그러므로 권능의 충만을 뜻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불입니다(행2:3). 그러므로 열심(롬12:11)의 충만을 뜻합니다.
본래 '성령의 충만(엡5:18)'은 심령의 골방 구석마다 성령으로 넘치게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충만'은 심령의 공백이 없는 상태요, 넘칠 만큼 꽉 차 있는 상태입니다. 비유하면 그릇에 물이 넘실넘실한 경우입니다. 여기에 몇 가지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1) 소리가 없이 묵직합니다.
빈 수레는 요란합니다.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습니다(고전13:1). 빈 깡통도 시끄럽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과 같습니다(유12장). 그러나 짐으로 채우고 물로 채우면 수레도 깡통도 소리가 없이 묵직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에겐 잡음이 없습니다.
(2) 다른 것이 못 들어갑니다.
꽉찬 그릇에는 다른 것이 더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물리학의 공식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심령에도 다른 잡념이 못 들어갑니다. 정욕도 못 들어가고, 탐욕도 사단도 못 들어갑니다. 오직 그 속은 성령의 열매로 충만할 뿐입니다(갈5:22-23).
(3) 흔들면 밖으로 넘칩니다.
물이 충만한 그릇을 흔들면 밖으로 넘쳐서 흐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크리스찬들에게는 감사가 생활로 넘칩니다. 움직일 때마다 기쁨이 넘치고, 봉사와 구제와 전도가 넘칩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은 권능이기 때문입니다(행1:8).
2. 사랑의 충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4:8).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하여는 달팽이의 촉수보다도 부드럽고 예민하십니다. 물론 그의 사랑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아량입니다. 그러나 죄를 결코 간과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엔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롬12:9). 따라서 거짓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것은 곧 망상입니다.
사랑은 경건합니다. 아름답습니다. 또 사랑은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행동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음입니다. 미움이 지옥이라면 사랑은 천국입니다. 또 미움이 파토스(Pathos)와 카오스(Khaos)라면 사랑은 로고스(Logos)와 코스모스(Cosmos)입니다. 실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아8:6). 그러기에 사랑은 끊임없는 수태의 가능성을 지닌 처녀성입니다. 밀알처럼 결실을 기약하는 간단없는 창조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넘치는 사랑(고후2:4)이 있어야 합니다. 또 거짓이 없는 사랑(고후6:6)으로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3. 말씀의 충만
성경의 필자(Writer)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저자(Auther)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는 지팡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철학적 이성을 능가하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활하길 원하십니까? 기도하십시다. 또 전도하십시다. 그리고 말씀으로 충만하십시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고, 전도는 영혼의 운동이며, 말씀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들은 항상 삼각 함수의 관계를 갖습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사랑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여 기 솔로몬의 시(시72:19)를 읽으십시다.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심령 부흥의 비결
행2:37-38
서론
부흥이란 죽었던 심령을 다시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육신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심령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의 교통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문제가 있게 마련입니다. "살았다는 말이 있으나 사실 상은 영이 죽고 악령이 지배되어 있습니다(계3:1)."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영을 내 중심에 모시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이여! 이제부터는 교회에 부흥을 일으키려면 우선 여러분의 심정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여러분들의 마음에 모셔 드리고 이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1. 회개하여
이 말씀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무조건 회개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회개할 수 있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어야 회개가 됩니다. 예수님도 진리의 빛을 거하여 "회개하라"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막1:5).
회개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1) 방향 전환입니다.
악령은 포로 속에서 180도로 돌아서고 해방을 받는 영혼의 구원의 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임하여 그리스도를 모시고 계시게 하여야 합니다. 이는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2) 이 진리의 말씀을 깨달았을 때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여야 합니다(막1:5, 행19:18).
또는 과실상에 자복하는 것입니다. "자복하고 행한 일을 고하라(행19:18)" 자기의 지은 죄를 고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면 심령을 살리십니다.
(3)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임할 적에 그냥 무관심하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자연히 싫어하게 됩니다.
싫어지게 될 뿐 아니라 다시 죄를 지을 생각이 없어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두운 가운데서 불을 켰으면 어두움은 물러가고 빛은 그대로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를 다시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지중에 과실상이 있습니다. 고후6:17에 "너희는 저이에게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마라"고 했습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 진리를 깨닫고 은혜 받았으면 그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아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4) "회개는 합당한 열매로 맺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회개는 과거에 죄를 청산해야 합니다(눅19:8). 물론 앞으로 죄를 짓지 않아야 하지마는 남하고 원한 맺은 것이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이것을 그냥 품고 있으면 하나님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습니다(마5:23 -26). 또한 땅에서도 풀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풀 수 없습니다. 물질에 대해 남에게 손해 끼친 것이 있으면 청산해 주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남의 토색한 것을 4배로 갚아주고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구제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연접하여 하나님의 영을 모시고 그 가정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1) 태초에 함께 계셨던 하나님 그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요1:1-2, 창1:1-2, 출3:14). 예수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 알려진 이름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에 살아계신 당시의 예수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가 바로 하나님이신 자체가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리스도"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주께 받은 기름부음이라(요일서 2:27)"고 하셨습니다.
"기름부으신 하나님이시라(고후1:21)" 그리스도는
① 제사장이라(히3:1, 2:17, 4:14).
② 선지자라(사61:1, 행4:27-31, 시105 15),
왕으로 되신 자(시45:7).
이상의 세 가지를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3) "이름으로…" 의 이름이라는 뜻은 본질의 이름을 알고 발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이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문장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혹 여호와의 이름으로‥‥애수의 이름으로‥‥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많이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기에 무엇이 나와야 될 것이 아닙니까? 본질적인 이름은 능력이 나와야 됩니다.
(4) 세례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롬6:3-4에 "예수와 함께 죽고 매장하여 다시 살아나서 새로 삶을 걷게"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가 요단강의 물에 들어가신 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무덤의 표시요, 물에서 나오신 것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는 표시로써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뜻을 알고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3. "죄 사함을 받으라"
우리는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용서함을 받았느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위와 같이 순서대로 진리를 행하면 용서함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이해하면 내 안에 모셔드리고 하나님의 영을 내 안에 모셔드린 사람이라야 구원 받은 사람이요,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성령을 받으라. 오늘날 성령이란 문제는 신자들이 잘 인식 못해서 너무나도 혼란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의 양식을 바로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신 자체가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신 자체를 내 안에 모셔 드려야 하고 그 신 자체가 내 안에 계셔야 성령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요14:17)" 또는 "진리의 성령입니다(요15:26)", "성령은 진리의 가운데서 인도하는 영입니다(요16:13)", "진리는 거룩한 영이요,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의 성령입니다(요17:17)" 인생이 이 세상에서 성령을 받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증거입니다. 충만함을 받은 증거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23). 성령의 열매는 모두 착함과, 외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엡5:9).
결론
성령은 믿음으로 모셔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신 자체가 계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은 하나님의 신 자체요, 우리의 몸은 성령의 집입니다(고전3:19). 이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사는 것이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항상 평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모신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6, 8:9, 8:16). 이렇게 된 사람이라면 심령의 부흥이요,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도 부흥이 되며, 진리 안에서 순종하면 이것은 성령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선민과 성 민입니다. 위와 같이 본문대로 순서를 발아서 주의 알곡 신자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시다.
교회 부흥의 비결
고후8:1-15, 엡 4:1- 16
서론
사람은 언제나 희망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괴로웁고 어려워도 다음엔 반드시 좋은 일, 행복된 일이 있으리라는 바램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과연 여러분의 희망과 설계는 어떤 것인지요? 부디 소원을 성취하여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교회에는 부흥과 발전이 이룩되고, 각 가정과 개인에게는 큰 은혜와 행복이 더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 각자가 해야할 일들은 무엇인지를 이 시간 본문에 따라서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헌심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불러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집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은 먼저 각자의 진심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란, 곧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마음을 뭉쳐서 주의 제단에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하겠습니다. 성부 · 성자 · 성령도 하나요, 믿음 ·소망 ·사랑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고, 교회 발전의 목표도 하나입니다. 분열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며, 사탄이 역사하는 것이고,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서 하나님에게만 충성을 바쳐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마음만 가지면 용서 못할 것이 없고,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예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 하겠습니다.
2. 헌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은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산입니다. 입으로만의 신앙이나, 마음만의 신앙도 아닌, 몸으로서 하나님과 성도들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부흥에도 입으로만의 헌신이나 봉사가 아니요, 진정으로 산 제사요,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교회에 충성하며, 몸으로 봉사하는 신자만이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산 제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아껴 주시는 복받은 신자요, 열매입니다.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기분파 세상의 바람에 흩날리는 가라지와 쭉정이와 같은 신자가 되지 맙시다. 지옥불에 태워지는 불쌍한 신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3. 헌물과 헌금
우리 생활에서 돈과 물질을 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 · 식 ·주에 부족함이 없으면 되는데, 밑빠진 독과 같이 가져도 가져도 더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유물론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여 인간적인 욕심을 경계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중에 있는, 이방 지대의 개척 교회였던 마게도니아 교회가 오히려 예루살렘과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가난과 환난 중에서도 연보를 하여서 서로 돕는 것을 칭찬하였고, 교회의 부흥은 바로 이 헌금과 헌물에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은혜받은 신앙은 큰 환난이나 시련,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부자들보다도 더 풍성한 연보가 넘치게 하는 기적을 낳게 합니다.
결론
헌금이나 헌물은 자원해서 해야 하며 자기의 능력대로 해야 땁니다. 또한 성도를 섬기는일, 전도, 봉사 교육, 예배, 성도의 교제를 참 마음으로 할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바쳐서 힘대로 자원해야 할 때에 교회는 부흥 발전하게 되므로, 다 같이 총력을 기울여 주의 영광을 위하여 힘쓰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교회 부흥의 비결
빌3:12-16
서론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우리 성도들의 소망이요, 한국 교회의 염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성도들의 염원이요, 한국 교회의 염원인 교회가 부흥될 것입니까? 그리고 참 신앙의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이 원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참 부흥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1. 교회가 부흥되려면 교회의 존재를 밝히는 방향이 결정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 3장 12절에서 그의 존재 의의 차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존재 의미가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뜻을 펴기 위하여 산다고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교회가 부흥되려면 뚜렷한 비젼이 있어야 하고 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꿈을 꾸는 장소요, 이것을 이루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창세기 37장 5절의 요셉은 꿈 때문에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삶도 꿈을 이루기위해 살았던 삶이었습니다. 분명 꿈과 희망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요, 생명이 없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의 꿈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들의 최고의 가치요, 꿈은 선교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을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재능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물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4절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했고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대열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신명기 1장 10-11절의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번성케 하셨으므로 너희가 오늘날 하늘의 별같이 많거니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말씀대로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교회가 부흥되려면 변화를 위한 자기 진단이 있어야 합니다.
알찬 부흥의 열매를 맺기 위해 제거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불신앙의 요소를 제거해야 하고 부정적인 생각, 나태와 게으름을 제거해야 되겠습니다.
유명한 나폴레온 힐(Napoleon Hill)은 창조적인 삶을 살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능력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1) 자기 확신에 대한 믿음
(2) 창조적인 창의력
(3) 생각하는 능력
(4) 식지 않는 열심과 정열
(5) 자기 연단(total training)
(6) 집중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게는 이러한 요소가 있는 것인가? 제거해야 할 잡초와 같은 불신앙과 부정적인 생각은 없는가? 계속적인 자기 진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한 번 세운 우리의 목표가 흔들려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여기에 있으니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 뜻을 이루기를 원하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부흥되는 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그리스도시요, 성령입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했으며 성령이 충만했으며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 성령 충만을 꼭 받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에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고 시편 51편 9-11절의 다윗의 기도에서도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론
참 신앙으로 교회가 부흥되고 힘이 있으려면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자기 존재 의미를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변화를 위한 자기 진단이 있어야 하며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끈질긴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벧엘로 올라갑시다
창35:1-8
서론
본문의 내용은 야곱이 환난을 만나 세겜성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나뵈었던 벧엘로 올라가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는 역사적인 사건은 우리 기독 신자들에게 매우 중대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간격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하신 말씀은 현재 우리 기독신자들을 흑암의 군세인 마귀와 죄악과 사망의 세계에서 광명한 정의와 사랑과 생명의 세계로 옮기게 하신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1. 벧엘로 올라가는 동기
(1)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서 올라갔습니다.
본문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 형 에서의 낮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순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응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세겜성을 떠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의도는 야곱의 가족을 신앙상 부흥과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2) 큰 환난을 도피하기 위해서 벧엘을 올라갔습니다.
본문 34:30에 "야곱이 시무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부라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신앙상 실패로 인하여 수치 감에서도 더 이상 머물 수 없거니와 세겜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어 환난을 도피하기 위하여 벧엘로 올라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3)제단을 쌓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본문 창35:3에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신앙생활이 해이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쌓아야 할 기도의 제단, 헌신의 제단, 봉사의 제단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기 위해서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야곱이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는 길은 범죄의 영역에서 신앙의 영역으로, 환난의 영역에서 안전한 영역으로, 사망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축복의 길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 벧엘로 올라가는 자세
본문 2절에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을 중심하여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이방신상을 버리고 올라갔습니다.
이 우상은 라반의 집에서 훔쳐온 신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주경학적으로 신상을 버렸다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버릴 것은 미련없이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성서적인 측면에서 하나님 대신으로 섬기는 모든 것이 우상이요,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요, 하나님보다 이 세상 물질이나 영화를 더 탐하는 탐심 자체가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2) 자신을 정결케 하고 올라갔습니다.
여기 자기를 정결케 하고 올라갔다는 말씀은 모든 더러워진 몸과 마음을 모두 깨끗이 정리하고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3) 의복을 갈아입고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이 의복은 하란 라반의 집에서 만들어 입은 의복이요, 이 의복을 입고 범죄하였으니 죄에오염된 더러운 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복이란 성서적으로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성도의 의로운 행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의복을 바꾸어 입었다는 것은 범죄하던 행실을 모두 깨끗이 청산하고 의로운 행실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방신상과 귀고리와 낡은 의복을 모두 상수리나무 밑에 매장하고 올라갔다고 하였는데 이 상수리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이와 같이 벧엘로 간 결과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고 하나님의 위엄이 함께 하였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신앙생활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야곱을 본받아 벧엘로 가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분 노
성 경 활 용
1. 분노를 유발시키는 원인들
(1) 속임 때문에
(창27: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2) 부당한 불평으로
(창30: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3) 강간당함으로
(창34:7) 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사람 사람이 근심하고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4) 우상 숭배로
(출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 돌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5) 형제의 질투 때문에
(삼상17:28)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 왔느냐
(눅15: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6) 왕의 시기로
(삼상20:30) 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게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7) 제사장에게 노했으므로
(대하26:19)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8) 불의한 거래로
(느5:6-7) 내가 백 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9) 아내의 불순종으로
(애1:12) 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왕명을 좇아오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 붙는 듯하더라
(10) 푸대접으로
(왕하5: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1) 교만으로
(왕하19:28)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린도다
(12) 신하들의 무능으로
(단2:12)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13) 육체의 정욕으로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2. 하나님의 분노
(1) 이스라엘에게 분노하심
(신29:28)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과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2) 믿는 자에게 분노하심
(욥10: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3) 천사들을 통하여 분노하심
(시78:49) 그 맹렬한 노와 분과 분노와 고난 곧 벌하는 사자들을 저희에게 내려보내셨으며
(4) 원수에게 분노하심
(사66:14)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5) 하나님의 분노를 대항할 수 없음
(나1:6)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3. 분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1) 노하기를 더디함
(잠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잠15: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분한 마음을 오래 품어서는 안됨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4. 분노의 결과
(1) 살인을 계획함
(에2: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하여 모살하려 하거늘
(2) 벌을 받음
(잠19: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관련원어풀이
1. #a' 아페-
(1) 코.
(욥4:9, 40:24)
(2) 분노.
(신32:22, 잠29:22)
(3) 얼굴, 용모.
(창19:1, 42:6)
2. #n"a: 아나페-
코로 숨쉬다, 성나다, 화내게 되다.
(신4:21)
3. !['z: 자-암
(1) 몹시 화를 내다, 진노하다.
(사66:14)
(2) 저주하다.
(민23:7, 미6:10)
(3) 격노하다.
(잠25:23)
4. am;h> 체-마-
갈대아어, 열, 분노.
(단3:13)
5. hm;je 체-마-흐
(1) 더움, 분노.
(창27:44, 사51:17)
(2) 독.
(신32:24, 시58:5)
6. s['K' 카-아스
(1) 화나게 함, 슬픔.
(잠17:25, 전1:18)
(2) 분노.
(신32:19, 스20:28)
(3) 분노들.
(왕하23:26)
7. zg'r; 라-간
(1) 흔들리다, 움직이다, 혼란되다.
(삼하7:10, 사14:9)
(2) 움직이게 하다, 혼란시키다, 불안케 하다.
(삼상28:15, 렘50:34)
(3) 화나게 하다, 초조하게 만들다.
(욥12:6)
(4) 두렵게 하다, 떨게 하다.
(욥9:6, 사14:16)
8. ajganaktevw 아가나크테오
성내다, 어지럽히다, 흥분하다.
(막10:14)
9. ajganavkthsi" 아가나크테-시스
성냄, 분노.
(고후7:11)
10. qumov" 두모-스
(1) 혼, 영, 마음, 열전
(눅4:28, 롬2:8)
(2) 진노, 성냄.
(고후12:20, 계14:10)
11. ojrghv 오르게-
자연적인 성벽, 성격, 격정, 분노, 격노, 진노, 노한 감정, 격동.
(엡4:31, 약1:19)
12. ojrgivzw 오르기조-
화를 내다, 약올리다, 성나다, 격노하다.
(마5:22, 눅14:21)
13. fruavssw 프루아쏘-
콧숨을 내쉬다, 콧방귀를 뀌다, 무례하다, 교만하다.
(행4:25)
설교예화자료
혀
어느 랍비가 자기의 학생을 위해 만찬회를 베풀었습니다. 소의 혀나 양의 혀 요리가 나왔는데, 그 혀 중에는 딱딱한 혀와 부드러운 혀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다투어 부드러운 혀를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랍비는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자기의 혀를 언제나 부드럽게 해 두시오. 딱딱한 혀를 갖고 있는 인간은 사람을 노하게 하거나 불화를 초래합니다. "
총리의 분노
글랏손 총리의 온몸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나라를 위했고 나라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자기가 주장한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총리는 그 이유가 국회 의원들의 무식이 아니라 고의라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여 숲길을 산책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그는 산골짜기에서 나무를 켜고 있는 늙은 부부를 발견했습니다.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톱질을 하고 그 곁에서 할머니는 물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글랏손은 그 한결같은 톱 소리가 가상해 노인을 향해 말을 건냈습니다.
"영감님, 몇 해나 여기에서 일하고 계십니까?"
"애, 한 삼십 년 됩죠."
"아아! 그것 참 놀라운 일이군요. 그런데 그렇게 여러 해나 되어도 싫증이 안납니까? "
"천만에요, 그럴 리가 있소. 나나 마누라나 이렇게 몸이 튼튼하고 생활도 구차하지 않으니 더 바랄 것이 뭐 있겠소."
"아아! 영감님은 정말 행복하시군요."
국회에 불만을 가졌던 글랏손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쉬지 않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톱질을 하고 있는 노인이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편 실로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뜨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 일없이 이렇게 잘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과 글랏손 총리의 덕입죠."
여전히 톱질을 하면서 말하는 노인의 말에 글랏손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의 덕분이란 것은 이해할 수 있느나 어째서 총리 대신의 덕분이라고 합니까? "
"글라손 총리 대신을 아직 뵈온 적은 없으나 매우 훌륭한 분이신 것은, 그가 총리가 되고서 오늘날까지 나라가 평화스럽고 외국의 침범이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소."
글랏손은 또 한 번 놀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성심을 알아주지 않는 데 불평을 가졌던 것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고집과 불평에 결정되었던 자기의 마음이 얄미웠습니다. 지금까지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그 노인으로 하여 깨닫게 되자 분노가 단번에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찢어버린 목사
한 공사장의 십장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그의 사악한 성품으로 인해 인부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부 중의 한 크리스찬이 그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그에게 그런 태도를 시정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십장으로부터 너무나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나는 전에 이 도시에서 제일 큰 교회의 목사였네. 성도들간에 어떤 종류의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네, 나는 그때 너무 화가 나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네. 어느 주일 아침에 나는 설 교단으로 걸어 올라가서는 내 성경책을 갈기갈기 찢어서 그것을 온 회중들에게 뿌렸네, 그 길로 나는 교회를 나와서 다시는 되돌아 가지 않기로 맹세했네. 이 사건이 내가 오늘날 이렇게 악하게 된 이유이네."
홧병
격노한 사람의 눈에 띠는 증세는 붉게 상기된 얼굴, 부풀은 목의 핏줄, 꽉 쥔 주먹, 그리고 이야기할 때 단어의 더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화가 난 사람의 눈에는 핏발이 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화의 구름이 뇌의 시중추에 모이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정신신체의학 연구의 개척자인 윌터 캐논 박사는 이 증상에 대해 자세히 기술합니다.
"호흡이 깊어집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혈압이 올라갑니다. 피가 위와 장기에서 심장, 중추신경계, 근육 등으로 역류합니다. 소화관의 기능이 중지되고 간에 저장되어 있던 당분의 유출, 지라의 수축과 농축된 혈구의 내용물을 방출, 아드레날린이 분비됩니다. "
어록·시·묘사
분노는 스스로를 벌한다.
(T. 풀러/ 금언집)
분노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찢어버릴 먹이를 찾는다.
(G. 엘리어트/ 스페인의 집시)
마음에 불이 일면, 입에서 불꽃이 튄다.
(T. 풀러/ 잠언집)
분노는 짧은 광증이다.
(호라티우스/ 서간집)
분노는 전쟁의 아들이다.
(L. A. 세네카)
분노는 자기에게 기뻐하며, 아첨하는 감정이다.
(L.E. 몽테뉴/ 수상록)
불이 풀무로 훨훨 타오르듯, 분노는 말로 타오르게 된다.
(T. 풀러/ 잠언집)
골 나면 보리 방아 더 잘 찧는다. < *사람이 골이 나면 기운풀이를 하게 되고 더 기가 올라 힘이 세어진다는 뜻>
(한국 속담)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이 적절한 조언을 한 적은 없다.
(메난드로스)
격노는 본심을 빼앗아 간다.
(베르질리우스/ 아이테이스)
한 시간의 냉기가 7년간의 열기를 빨아낸다
(M. 데넘/ 격언집)
인간의 이성 속에 패한 것의 보충을 분노로써 하는 것이다.
(안자)
손이 아무리 무력하더라도, 분노하면 힘이 생긴다.
(오비디우스/ 연애 시집)
분노는 때에 따라 도덕과 용기와의 무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분노는 영원의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분노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불구이다.
(T. 풀러/ 신성이교국)
분노는 곧 속된 것, 부정한 것에 감염되지 않게 하는 묘약과도 같은 것, 사회를 바로잡아 번영하는 길로 이끌어 가 주는 요소의 소임도 하는 것이라고 나는 나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원수/ 슬픔과 분노)
분노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일종의 장절이 될 수 있다. 분노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일분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C. 램과 M. 램/ 분노)
분노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자신의 고결한 욕망의 성취를 방해받아 마음이 움직여질 때 어떤 힘을 나타낸다.
(P. 아레티노/ G. 퀴리니에의 서한)
사랑의 노여움은 새로운 사랑의 계시
(독일 속담)
장미가 가시 속에서 피는 것처럼 연애는 분노 속에 피어서 탄다.
(E.M. 아른트/ 분노와 연애)
어떤 강력한 마술이 여인의 질투심과 고집쟁이의 분노를 달랠 수 있겠는가
(G. 그랜빌/ 미의 발전)
자기 분노의 물결을 막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는, 고삐도 없이 야생마를 타는 셈이다.
(C. 시버/ 사랑의 마지막 계교)
사람이 화가 났을 때 너에 게 하는 말은 결코 잊지 말라.
(H.W. 비처/ 인생 사상집)
분노를 꺾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어서 죽음이 앞을 막을지라도 부수고 나간다.
(플루타르크 영웅전)
격노는 모두에게 무기를 공급한다. 화가 난 사람이 피에 굶주리면, 모든 물건은 그를 위해 흉기로 사용된다.
(클라우디아누스/ 분노의 화살)
분노는 기묘한 용법을 가진 무기다. 다른 모든 무기는 인간이 이를 사용하지만, 분노라는 무기는 반대로 인간을 사용한다
(M.E. 몽테뉴/ 수상록)
노한 감정에 내맡기는 것은 일종의 방종이다.
(R. 타고르)
분노와 우행(愚行)은 나란히 걸으며, 회한이 양자의 뒤꿈치를 밟는다.
(B.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책력)
분개한 사람만큼 거짓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F.W. 니체/ 선악의 초월)
분노는 둔한 사람을 재치있게 만들지만, 그들을 가련하게 만든다.
(F. 베이컨/ 금언집)
노한 자는 입을 열고 눈을 감는다
(영국 속담)
사람들은 보통 슬플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처지를 개탄한다. 그러나 그들은 골이 나면, 변화를 가져온다.
(멜컴 엑스/ 멜컴 엑스는 말한다)
화를 내면서 행하는 자는 폭풍 중에 항구를 떠나는 배와 같다.
(덴마크 속담)
부아 돋은 날 의붓아비 온다. < * 화가 나서 참지 못하고 있는데 가뜩이나 미운 사람이 찾아와 더욱 화를 돋운다는 뜻>
(한국 속담)
불뚝성이 살인 낸다. <*갑자기 불끈하고 성을 내면 좋지 않은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는 뜻>
(한국 속담)
뜬 쇠도 달면 어렵다. <*성질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도 한 번 노하면 무섭다는 뜻>
(한국 속담)
송곳니가 방석니가 된다.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아 송곳니가 닳아 방석 같은 어금니가 된다는 뜻>
(한국 속담)
해로운 것은 숨겨진 분노이다.
(세네카/ 불동심론)
참을성 있는 자의 격노를 조심하라.
(드라이든/ 앱설롬과 아키토펠)
부서지기 쉬운 얼음처럼, 분노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진다.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
남 듣기 싫은 성난 말하지 말라. 남도 그 렇게 네게 대답할 것이다. 악이 가면 화는 돌아오니, 욕설이 가고 오고 매질이 오고간다.
(공자)
천천히 화내는 사람을 조심하라. 내는 데 오래 걸리는 성은 성을 내면 보다 심하고 보다오래 간다.
(F. 휠레스/ 편람)
화를 낼 줄 모르는 것은 바보이고 화를 내지 않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영국 속담)
노하는 것은 굴러 떨어지는 물건과 같아서 그 떨어져 부딪힌 물건 위에서 깨어진다.
(L. A. 세네카)
격노는 다만, 힘들게 그리고 결코 완전치는 않게 지성의 지배하에 놓이며, 따라서 어떤 논증도 허용치 않는다.
(J. 볼드윈/ 원주민의 아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는 것은 무절제와 수양이 부족한 표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기는 어렵다. 어떤 때엔 불가능하기도 하다.
(플루타르쿠스/ 영웅전)
격분도 어느 극에까지 도달하면 인간은 거의 그 격분이 유쾌해져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적 기분으로 점점 더해 가는 쾌감을 즐기면서 아무런 억제도 없이 분노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만다.
(F. M. 도스토예프스키/ 백치)
한때의 분함을 참아라. 백 날의 근심을 면하리라,
(명심보감)
인간의 노여움은 명예심에서 오는 것이다. 명예심은 개인의 의식과 불가분의 것이다. 노여움에 있어서 인간의 무의식적이지만 자기가 개인이라는 것, 독립한 인격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거기에 노여움의 윤리가 숨겨져 있다.
(삼목청)
분노의 가장 좋은 처방은 연기(延期)이다.
(세네카/ 분노론)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나의 분노를 이야기했다. 나의 분노는 사라졌다. 나의 적에게 화가 났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의 분노는 자꾸 더 심해졌다.
(W. 블레이크/ 독있는 나무)
분노로부터 자기를 억제하려면, 타인이 노했을 때 그것을 자세히 관찰해 볼 것이다.
(L.A. 세네카/ 분노에 대하여)
너희가 화낸 날들을 해아려 보라. 나는 매일같이 화를 냈었다. 그러던 것이 이틀 만에, 그다음엔 사흘 만에 화를 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만일 너희가 성냄을 한 달 동안 잊게 되거든그때는 신께 감사의 제물을 올려라.
(에픽테토스)
쟁론할 때 노함을 느끼지 말자. 우리들은 이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함 때문에 다툰다.
(T. 칼라일)
운수 나쁜 분노가 오랜 세월에 의하여 다져진 우정을 깨뜨린다.
(포우프/ 우인전)
무엇인가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 있을 때는 자기를 통제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악에 대하여는 평정한 저항이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C. 힐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분노는 논거 없이 결코 없고, 훌륭한 논거가 있으면 분노가 별로 없다.
(핼리팩스 경/ 전집)
그대는 분노를 터뜨리고, 내 골이 터지도록 빛을 발할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
(S. 베케트/ 희극)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변영로/ 논개)
말은 분노를 고치는 마음의 의사다.
(아이스킬로스/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눈물이 되어/ 못 다 이룬 사연/ 푸념하듯 쏟아 붓는다. / 천둥이 울어 분노인가/ 분노가 올라 천둥가/ 산야를 핥듯이 씻어 내린 눈물/ 나뭇가지엔 몸무새를 한다. / 또다시 대지에 서린 한숨/ 하늘로 오르는 기류인가/ 무변한 하늘에 걸친/ 분노의 입김/ 피 묻은 옷자락.
(김태규/ 구름)
정말 무엇이 그리 필요하였기에/ 기지와 분노가 그리도 잇사이로 쏟아져 나왔는지/ 아무도 아는 이 없으리라.
(A. 테이트/ 포프 씨)
그리움 안으로 모우고/ 서러움 안으로 거두고/ 노여움 안으로 삭히고// 지금은/ 지금은 침묵하자
(허영자/ 휴화산)
얼굴은 분노로 충혈되고 혈맥의 피는 검푸르게 되며/ 눈은 고르고 나의 눈보다 더 흉악한 빛으로 번쩍인다.
(P. N. 오비디우스)
흥분한 여자는 탁한 분수처럼 아름다움을 잃는다.
(W. 셰익스피어/ 말괄량이 길들이기)
빈 손을 들고 무덤으로 간다/ 국화 몇 송이 문득 강가에 내던지고/ 오직 빈 손으로 저녁날 무덤가에 가서/ 마른 풀들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는다/ 분노가 있어야 사랑은 있고/ 희망이 있어야 노래는 있는가
(정호승/ 저녁별)
나는 석탄이고/ 그래서 불타야 한다는 건 당연하므로/ 나의 연소한 힘으로 모든 걸 태워없애야 합니다요./ 나는 석탄입니다요!/ 착취당할 때 불타올라야 하고/ 모욕의 죄로 불타올라야 하고/나의 형제 코울타르처럼 살아서 불타올라야 합니다요,/ 내가 더 이상 당신의 광맥 이 되지 않을 때까지, 나으리./ 나는 석탄,/ 나의 연소하는 힘으로 모든 걸 태워 없애야 합니다요./ 그렇지요!/ 나는 당신의 석탄입니다요, 나으리.
(호세 크라베이리냐/ 흑인의 절규)
간장(肝湯)은 광증(狂症)으로 불타며/ 마치 산정(山頂)이 물러나며 바위가 굴러서 깎아지른 벼랑 밑으로 떨어지듯 그들의 분노는 터진다.
(유베날리스)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는/ 부정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분노가 있다.
(P. 엘뤼아르/ 사랑의 힘에 대하여)
그대 진실로 나를 사랑하려거든/ ‥‥나를 위해서 울지말고/ 땅의 사람들을 위해서 울 것,/ 외로운 자와 함께 외로워하고/ 분노하는 자와 함께 분노할 것.
(서덕석/ 사랑법)
바구니에 가득 담긴/ 시퍼런 분노!
(김희수/ 나물캐기)
그래서 손을 노하면/ 주먹이 된다/ 주먹이 풀리떤/ 손바닥을 맞부비는/ 따가운 기원이 된다.
(박남수/ 손)
음주로 뒤죽박죽이 된 종족의 지도자들 지금/ 적개심은 어디가고 먼 곳으로 유리알처럼/ 응시한다. 그들의 분노의 표현을 풍부히/ 담은 이빨은 재동이 꽉 걸린 바퀴처럼/ 굳어진 미소
(브로드스키/ 애노 도미니-주님의 해)
녹슬고 무디어 진 삶들이 불길 속에서/ 녹을 벗고 어둠을 벗고 무능을 벗고/ 구속을 벗고 농락당한 분노를 지우고/ 능멸당한 기억을 태우고 짓밟힌 세월
(정동주/ 신무가-1 · 서곡)
어떻게 우리는 증오의 세월들을 잊어버리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의 분노는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다. / 저 항구가 가라앉을지는 몰라도‥‥‥
(사마 알카셈/ 준마)
아니면 분노 속의 아름다운 입술의 웃음이런가.
(랭보/ 모음)
노한 숨결/ 한 평 두 홉/ 생무덤을 다리고/ 딩굴어.
(박지수/ 독수-옥수 13)
지금은 황랑한 겨레여/ 거리마다 숨겨둔 형해(形骸)와 남은 터 에/ 쓰러져 우는 세기의/ 가슴에 분노처럼 이르는/ 피 역사함, 지도함, 설계함‥‥‥
(안도섭/ 지도 속의 눈)
밤새도록/ 자결(自決)로 쓰러져 뜻을 남기던/ 얼굴들이,/ 안으로 안으로 노여움만 삭히던/ 마음들이,/ 함께 밀려져서 다른 산을 이룬다
(이성부/ 불도저)
설 교 노 트
이방의 분노와 주님의 진노
계11:18
서론
'노(怒)"라고 하면 고래로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본문에는 분명히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대조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방인들이 나타내는 혈기의 분노
이방인들의 분노는 곧 죄인들의 혈기에 찬 노로서 하나님과 및 그를 믿은 성도들을 대적함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만행입니다.
인간들은 의로운 노는 가지지 못하고 혈기와 감정과 악독에 찬 노로서 하나님의 진리에서 탈선하는 일을 많이 합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12장 16절에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잠언 14장 17절에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잠언 19장 19절에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잠언 27장 3절에 "미련한 자의 분노는 돌보다 무거우니라"
잠언 29장 1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노를 다 드러내어도‥‥‥‥라고 하였습니다.
지혜 문학인 잠언은 여기에 대하여 혈기적 분노가 얼마나 미련하고 헛된 일인가를 경고하면서 노할 일이 있어도 참고 견디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서 조금만 자신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화를 잘 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미련하고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주님께서 발하시는 의로운 진노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공의로우신 신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노는 혈기의 노가 아니라 공의의 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혈기가 아니기 때문에 죄가 아니고 공의와 표현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재앙이나 벌을 내리시는 일로 나타내실 때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활동하실 동안에도 의로운 진노를 발하신 때가 종종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이들을 데리고 오니 제자들이 꾸짖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분히 여기셨습니다(막10:14).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을 책잡는 바리 새 인들을 분히 여 기셨습니다(눅13:10-17). 그리고 성 전을 더럽히는 교권주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노를 발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마21:12-13, 요2:13-22).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인자하신 성품을 누르시고 의로운 노를 발하신 때가 종종 계셨습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은 육신의 혈기와 분노를 극히 삼가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같이 공의의 노를 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혈기의 분노는 나도 망하게 되고, 남도 망하게 되지만, 공의의 노는 남과 나를 유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
렘25:27
서론
본문은 열국이 하나님의 진노로 임하는 잔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나라는 패망할 수밖에 없는 광경을 나타낸 것입니다.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는 것이 무슨 내용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마시라
이것은 여호와의 진노를 쏟아 부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마치 술과 같이 여겨 그 잔을 마시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이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반드시 마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반드시"라고 하는 절대 필수적인 표현을 한 것은 마시고 안 마시고 당사자의 자유 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 마실 수 없는 절대 불가피성이 주어지므로 마시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2. 취하라
술을 일단 한 번 마시면 그 결과적 효능은 취하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술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취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본 정신은 마취되고 술이 작용하는 대로 움직이게 되니옳은 행동이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잠언 23장 29-31절에 보면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참상이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까지는 술취한 자의 추태에 대해서 기록하였습니다. 노아도 술에 취하여 아들에게 저주하였고(창9:20-25), 롯도 술에 취하여 그 딸들을 범하는 죄악을 저지른 것입니다(창19:30-38).
3. 토하라
일단 먹고 마셨던 음식물을 토하는 경우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고 마시면 뱃속에서 순조롭게 소화시킬 수 없으므로 복통을 일으키다가 결국 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더럽고 추할 뿐 아니라 고통까지 뒤따르게 됩니다.
계시록 3장 16절에서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한 음식도 토하여 내친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19장 4절에는 "취하는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린다"고 하였으며, 미련한 자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4. 엎드러지라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고 단언하였으니 이는 칼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칼로 치기 때문에 마시고 취하고 토하며 엎드러진 자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칼에 맞아 쓰러진 자입니다. 완전히 패망하였으니 이젠 아주 작은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의 권위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사양도 못하고 거절하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사곡한 자들
욥36:13
서론
본문에 보면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사곡한 자들이란 어떠한 가를 말하는 것입니까?
1. 마음이 사곡한 자란 누구입니까?
"사곡한 자"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외식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즉 거짓된 자, 혹은 악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중적으로 가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모든 사실을 다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신이신데 어떻게 감히 사기적으로 비뚤어진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악한 자라도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니 사곡한 자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혹시 마음이 사곡한 자가 있다면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결단코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2. 사곡한 자는 분노를 쌓습니다.
"분노를 쌓는다"는 말은 그들이 한 번 죄를 짓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로 죄를 짓고 있어서 그 죄악의 벌이 계속 쌓여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5절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가 쌓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노아 시대의 인간들의 죄가 관영한 결과로 홍수의 심판이 있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쌓여서 결국 유황불의 심판을 받았으니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진노의 잔을 자기가 마시며, 그 진노의 물에 자기가 타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마음을 항상 정결하게 하고 참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강팍하여 졌는지 죽게 되었어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고난의 줄에 걸려서 결박되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퍅한 데로 기울어 져서 하나님의 분노를 더 증가시키고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그들은 젊어서 죽으며 그 생명이 남창과 함께 망하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장수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젊어서 죽는다고 한 것은 결국 자기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젊어서 비명 횡사하리라는 선포인 것입니다.
아직 회개할 기회가 주어진 자는 빨리 회개하여야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저들의 사곡한 자의 머리에 진노의 불을 쏟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진노의 불을 피하도록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집이 황무하리라
렘22:5
서론
본문을 보면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의 순종을 독촉하시면서 더 기다리실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결단을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집"은 어떤 집이며, 어떻게 황무하게 된다는 것인지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집은 무슨 집입니까?
"이 집"이라는 것은 왕이 거하는 왕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다윗의 자손이 대대로 그 위를 이어 왕위에 앉을 것이고,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이 평안하여 백성들이 전쟁을 해도 반드시 승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개선군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4절). 그러니 그 얼마나 장엄한 광경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면 이렇게 큰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집은 일찍이 솔로몬 왕이 화려하게 지은 왕궁입니다. 그 위에 더욱 화려하고 사치를 더하려고 힘을 들였으나 고용자들의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압제하여 강제로 일을 하도록 취역시키고 노임까지 착취하면서 지은 집이었습니다.
13절에 그 내용이 기록되었는데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라고 하였습니다.
2. "황무하게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의 침략군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고 그 성 안에 있는 집들을 모조리 불살랐습니다. 그래서 장안의 크고 거대한 집들이 모두 파괴되고 불타버리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렇게 화려하던 왕궁은 그 파괴된 정도가 무척 심하여 황무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여 지은 집이 계속하여 보존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해석해 볼 때 "이 집"은 왕궁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도 타당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유다의 가장 귀중한 보배요, 백성들의 정신적인 중심처는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왕궁에서의 사치와 향락의 범죄는 부섭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의 속화와 형식, 그리고 이방 우상을 섬김으로써 성전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더욱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성전은 역사상 처음 지은 것이요, 또 가장 화려하고 그 규모가 크게지은 것이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시는데 있어서는 그것을 조금도 애석하게 여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을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고 크게 지었어도 그 속에 있는 성도들이 죄를 범하고 오히려 그 성전 안에서 이방 우상을 섬긴다면 그 성전은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결론
이 집은 죄 값으로 황폐해진 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선민 유대 민족이 그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였으니 황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들을 책망하고 정결케 하는 역사를 행하셨습니다(요2:13-22, 마21:12-17). 오늘날 교회의 성결을 위해 우리들은 순교적 각오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평강이 없도다
렘6:14
서론
마땅히 있어야 할 평강이 없다고 하면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평강"을 가장 중요시하는 축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축복을 빌어주고 또 평강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는 왜 평강이 없다고 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여호와의 분노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지 못함으로 마음이 강퍅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참기 어려운 여호와의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분노하심이 가득하여 참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아이들, 모인 청년들, 지아비와 지어미,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고 경호하신 것of니 이 이상의 불행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2. 모든 것이 약탈되리니 정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살펴보면 집과 전지는 그런대로 남의 소유가 되어도 아까운 마음만 생길 뿐입니다. 그런데 아내까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이러한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貪)한 까닭입니다. 탐람은 곧 탐심인데 이것은 재물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야심에서 남의 것이라도 뻬앗는 행동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재산이 도리어 남에게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벌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묘한 섭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던 것이 오히려 자기 것을 빼앗기게 되었으니 남을 잡으려고 함정을 팠다가 도리어 자신이 판 그 함정에 자기가 빠져서 자기가 잡힌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남의 것을 착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살 것이며, 자신들의 것도 다른 사람에게 다 빼앗기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 거짓을 행함으로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다 거짓을 행하였습니다. 가장 올바른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속였습니다. 그렇지만 평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거짓이 통할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나 제사장은 그 당시 그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고 지도자이며 책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실무망해야 하며 언행에 있어서도 모범자들이어야 할 터인데 자신들이 거짓된 일과 거짓으로 백성들을 무마하려고 백성들의 죄를 바로 지적하여 주지 않고 거짓으로 "평 강하다 평강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뻔뻔스럽게 지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진실하게 죄를 고쳐 바로 잡아주지 않고 선지자의 가면을 쓰고서 거짓만을 행하였기 때문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결론
사람은 누구나 평강을 원하고 있습니다. 평강이 없는 현실을 있다고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게 되므로 오히려 이중으로 평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신32:35
서론
본문 말씀은 사악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지옥에 빠지지 않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의 중요성에 대하여 논하려고 합니다.
1. 죄인들을 지옥에 던져 버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1) 죄인들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악인들을 지옥에 던져버리는 데는 별다른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아무 소용이 없으며 하나님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은 별 어려움이 없이 죄인들을 지옥에 던져 버리십니다.
우리가 땅 위에 기어다니는 곤충을 보고 그것을 밟아 죽이는 데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듯이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합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1) 하나님의 진노는 맹렬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분노와 직접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의 불꽃 가운데 있는 수많은 사람들보다 오히려 세상에 있는 죄인들에 대하여 더욱 진노하십니다.
(2) 하나님의 진노는 발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무덤을 준비하며 화염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불구덩이는뜨겁고 그들을 맞이할 채비가 되어 있어 지금 사납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번쩍이는검은 죄인들의 목덜미에 놓여 있고 지옥의 문은 죄인들을 향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3. 사단은 죄인 등을 유혹하기 위해 계략을 꾸밉니다.
(1) 죄인들은 사단의 지배 아래 놓여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든지 인간들을 엄습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사단의 소유물이고 그 권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인들에 대하여 그의 소유(눅11:21)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 죄인들은 사단과 그의 사자들에게 늘 감시 당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죄인들을 수중에 감아쥐고 늘 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삼키려는 굶주린 사자들처럼 죄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만 모습이 안 보일 뿐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입을 벌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죄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1) 인간은 죽음에 대해 한계를 느낄 때 불안해 합니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뜻밖에 이 세상을 떠나야 하거나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죽음을 이길 만한 것이 보이지 않을 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 죄인들은 생명을 보존하고자 조심하여 갖은 애를 쓰나 평안이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신중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생활을 하며, 주변 사람들이 돌봐주어 도, 그들은 진정 한 순간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지혜로운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전2:16).
5. 하나님은 스스로 죄인들을 지옥에서 구제해야 할 의무가 없으십니다.
(1) 하나님은 거듭난 사람을 제외하고 그 누구에게도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실 약속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약속, 즉 자신의 은혜 가운데 인정하신 진실한 언약을 제외하고는 어떤 영생의 약속이나 영원한 사망에서의 보호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2) 죄인들의 허망한 생각들
죄인들이 아무리 자신들의 열정에 부흥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찾는다 해도 결국 그들이 소원하고 취하는 것들은 고통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그들을 지옥에서 구제할 책임이 전혀 없으십니다.
결론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서 사나운 화염으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옥의 큰 입은 벌려 있고 죄인들에게는 의지할 것이나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거듭나지 못한 모든 영혼들의 비참한 운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렘7:6
서론
스스로 해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신을 섬기므로 결국 이방으로 잡혀갈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해를 스스로 취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해를 취하지 않으려면 다음 세 가지의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약제를 압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방인이란 외국에 살면서 보호받을 데가 아무데도 없는 극히 고독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들을 고아나 과부처럼 불쌍히 여겼습니다.
부모를 잃고 양육할 사람이 없는 고아들과 의지할 곳 없는 과부들은 다 한결같이 외로운자요,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자를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큰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1-22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성경 여러 곳에서 그들을 압제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신24:17, 시94:6, 사1:17).
2.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다는 것은 매우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열왕기하 21장 16절에 보면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 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씀이 24장 4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레미야서 2장 34절에 "또 네 옷단에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음을 인함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로 너를 책망함을 인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의인들을 죽였으므로 무죄한 피를 흘린 죄뿐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리는 중대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3.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중심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중심한 참 종교를 알아서 하나님만 섬기면 땅 위의 어떤 곳에든지 사로잡히지 아니할 것이요, 진정한 참 자유자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이방우상들을 섬기는 것은 종교적인 죄일 뿐 아니라 민족적인 죄로 하나님께서 가장 분노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이방인들의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목상, 밀곰, 그모스 등이며 태양을숭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여하튼 하나님 외에 하나님 대신 섬기는 존재는 다 우상숭배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인 것입니다.
결론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해를 자취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지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분노
요2:13-22
서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소와 양과 비들기를 매매하며 돈을 바꾸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어 쫓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를 사업을 위한 면회장소로 이용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이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또 다시 주님의 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전 안에 용납해서는 안될 것을 용납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별되어야 할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용납하여 매매하는 것은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장사하는 집 또는 강도의 굴혈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그 원인은
(1) 인간의 편리주의가 신성한 종교와 성전을 속화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엄숙한 과제는 인간의 노력과 정성과 희생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의 공리주의가 신성한 종교와 성전을 속화시키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신성한 행위는 인간의 유익과 이익을 초월하며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되고 헌납이 되어야 합니다.
(3) 인간의 자율적인 세속주의가 신성한 종교와 성전을 속화시켰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신앙생활의 기준과 방법은 사람의 이성이나 지식이나 어떤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2. 성전 안에 죽어서 들어와야 할 제물이 살아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소와 양과 비둘기는 성전 안에는 산 채로 들어올 수 없고 죽은 제물로 바쳐져야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죽이지 아니하고 산 채로 들어오게 된 원인은 희생 없는 이기주의 사상이, 신성한 성전의 용도 가치를 전락시키는 행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성전답게 사용되지 아니하고 남용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성한 성전 안에서 행하여서는 아니 될 행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신성한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자초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찬송과 기도와 감사의 예배를 드리면서 은혜를 받는 시온소인데, 오히려 상행위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습니다. 구약의 제물은 동물들이지만 신약의 제물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제물들을 바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성전에 산 채로 용납하였다면 벌써 잡아서 제물로 바쳤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행위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한 것이고,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에 인색하였기 때문이며, 영적 안목이 어두워져서 소경이 된 증거입니다. 이 세상과 돈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과 천국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을 무시하고 성전을 더럽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의 신성을 모독하는 무리들을 주님은 채찍을 들고 내쫓았습니다. 그것은 성전의 신성을 보존하고, 제사의 원리를 확립하고 헌신의 바른 길을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민16:45-50
서론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자신이 택하셔서 자녀로 삼은 자들일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그 뜻에 불순종하면 진로하심으로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서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게 된 특이한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라와 다단, 아비람 등은 하나님의 종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31-33절). 저들은 산 채로 땅에 삼키우고 그와 더불어 분향한 사람들 250명이 여호와의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 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와서 너희들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죽었다고 원망하면서 저들을 쳐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렸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지만, 성경에는 다른 이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다가 진노를 받았고(대하34:25),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여서 진노를 받았으며(레10:1-6), 범죄함으로(수22:20), 우상 숭배를 함으로(왕하23:26), 악한 자를 돕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를 사랑함으로(대하19:2), 말씀을 멸시하여 선지자를 욕함으로(대하36:16), 이방 사람과 결혼함으로(스10:10-14), 하나님을 말로 대적함으로(시78:19-21) 진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롬1:18).
2.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던 백 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염병에 걸리기 시작하였습니다(46절). 얼마나 맹렬한 염병이었는지 일시에 1만4천7백 명이 죽었습니다. 만일 아론과 모세의 중재가 없었다면 모두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는 그 사건의 경중에 따라 비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무서운 것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파멸을 당하였습니다(출15:4,7). 어떤 자들은 유리 방황하게 되었습니다(민32:10-13). 어떤 나라는 가뭄에 시달렸습니다(신11:7). 염병에(민11:33), 전쟁에서 패함에(삼상28:18)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죽음에(시90:9), 포로로 사로잡히게(대하36:16-17)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무서운 것은 심판날에 받을 진노입니다(계6:16-17,14:10).
3.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염병이 시작할 때에 모세는 아론에게 명하여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도록 하였습니다. 속죄란 무엇입니까? 양과 소를 잡아 그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뿌림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속죄했을 때 그렇게 창궐하던 염병이 뚝 그쳤습니다. 구약의 속죄는 신약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대속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보혈을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결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롬5:9, 살전5:9).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이 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 길 아니고도 하나님이 당신의 진노를 돌이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보 기도를 통해서(시106:23), 마음의 교만함과 죄를 뉘우침으로(대하32:26), 또한 한 번 맹세한 맹세를 꼭 지킴으로(수9:19-20) 등입니다.
결론
근본적으로 우리를 현세 뿐만 아니라 저 마지막 심판의 진노를 면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밖에 없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오늘도 불붙듯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배의 피로 구속받는 성도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진리를 땅끝까지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진노케 한 결과
출22:20-24
서론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고 나그네를 압제하며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면 진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그와 같은 자를 죽이고 그들에게 속한 처자들은 과부나 고아가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이 편안히 거하는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죽이십니다.
본문 24절에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나라에서 나그네 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를 학대하고 압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것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 13장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마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 한 이들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외롭고 고달픈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도와는 주지 못할지라도 그들을 학대하고 압제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 그 아내는 과부로 만드십니다.
본문 24절에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진노하게 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죽이시니 당연히 그들의 아내는 과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부가 되면 죽은 자는 고생이 없지만 살아서 생활하는 과부는 너무 고생이 심한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죽은 그가 살아 생전에 과부를 해롭게 하여 과부가 너무 억울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과부를 해롭게 한 자의 영혼을 거두시니 그의 부인은 과부가 되어 많은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부를 괴롭히는 남편이 있으면 아내되는 이들은 그와 같은 짓을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3. 그의 자식은 고아로 만드십니다.
본문 24절에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아를 해롭게 하였으니 그 어찌 자기 자식이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식 귀한 줄 안다면 부모 없이 고아로 자라가는 불쌍한 아이를 도와주지는 못할지라도 해롭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기 자식이 고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식이 고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고아를 도와주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하여 선을 베풀고 자기 후손을 위하여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살고 싶고 처자가 잘되기를 바라거든 선을 베풀고 고아와 과부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고 그에게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고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면 제 처자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분 수
설교예화자료
목걸이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의 '목걸이'라는 소설은 화려한 사교계에서 찬사받기를 원하던 마띨드(Mathilde)라는 젊은 여성의 슬픈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녀는 프랑스 중류 시민의 아내였습니다.
어느 날 마띨드의 남편이 화려한 무도회의 초청장을 갖고 왔습니다. 그녀는 잘 사는 친구로부터 화려한 곳에 달고 갈 만한 좋은 목걸이를 빌렸습니다.
그 아름다운 목걸이는 그날 저녁에 온 많은 귀족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띨드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밤 그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3만 6천 프랑을 꾸어와 아내가 잃어버린 것과 꼭 같은 목걸이를 사왔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10년간 부부는 빌려 온 돈을 갚기 위해서 노예처럼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엄청난 빚을 갚기 위해 그들은 집을 팔고 하인들을 해고했으며 빈민가에서 살았습니다. 두 부부는 직업을 갖고 절망적인 노력을 하며 지냈습니다.
결국 빚이 다 갚아진 후 마띨드는 피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빚을 갚느라 겪었던 비참한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의 친구는 마Elf드가 빌려 간 것은 500프랑밖에 나가지 않는 모조품이라고 했습니다.사치가 낳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날고 싶은 거북
어느 날 바위에 앉아 햇볕을 죄던 거북이가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정말 멋지구나! 나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 수 있었으면‥‥‥‥
독수리가 부러워진 거북은 그날부터 자신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고 마침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 '라는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독수리를 만나게 된 거북은,
'좋아. 독수리에게 사정을 해 보자.' 하고 독수리에게 애원했습니다.
"독수리님, 저도 하늘을 날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
거북의 말을 들은 독수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당신은 날개가 없으니 하늘을 날 수 없어요. 그러니 그런 헛된 꿈을 버리는 게 좋아요."
그러나 거북은 단념하지 않고 더욱 귀찮게 독수리에게 애원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좋아요. 하늘을 날 수 있는 기회라도 주세요."
더 이상 거북의 청을 거절할수 없게 된 독수리는 마침내 허락을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하늘 높이 데리고 올라가서 놓아드릴테니 날아 보세요."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발톱으로 거북의 몸을 잡고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자,이제 여기서 당신을 놓을테니 날아 보세요."
독수리는 공중에서 거북을 놓았습니다.
그러자 거북은 허공에서 몇 번인가 돌면서 내려오다가 마침내 큰 바위 위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우의 자랑
어미 여우가 한 번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나았습니다.
어느 날 여우는 새끼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마침 그 숲에 사자가 새끼를 데리고 산책을 나와 자신의 새끼가 노는 것을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여우는 호들갑스럽게,
"아니, 사자님께서도 산책을 나오셨군요."
"으음, 자네로군."
사자는 자기 새끼에게 정신이 팔려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또,
"저는 자식들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려고 이렇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
하며 데리고 나온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가리켰습니다.
"으음, 그래? 그럼 어서 가 보게."
사자는 여전히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슬그머니 화가 치민 여우는 토라진 소리로,
"사자님, 사자님은 새끼를 겨우 한 마리씩 밖에 못 낳으신다죠?"
그러자 사자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여우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난 여우 새끼가 아닌 사자를 낳는다네. 모든 동물의 왕인 사자를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여우는 금방 기가 죽어 얼른 자기 새끼들을 데리고 멀리 사라졌습니다.
사자를 부러워한 당나귀
사자를 부러워하는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날마다 자신이 숲속의 왕인 사자가 되어 있는 꿈을 꾸며 즐거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도 사자처럼 왕의 대접을 받고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당나귀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어떤 사냥꾼의 집 울타리에 널려 있는 사자 가죽을 보았습니다.
"야, 정말 멋지구나!"
"저걸 쓰고 나가면 모두 내가 사자인 줄 알고 공손히 대접을 하겠지? "'
당나귀는 사냥꾼 집에 몰래 숨어서 사냥꾼이 집을 비우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한참 후에 방에서 나온 사냥꾼이 울타리로 다가갔습니다.
당나귀는 사냥꾼이 사자 가죽을 걷어가려나 싶어 실망하고 있는데, 그는 말리기 위해 그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숲속으로 사냥을 떠났습니다.
당나귀는 재빨리 사자 가죽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리고는 으시대는 동물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갔습니다.
동물들은 당나귀가 다가가자,
"앗, 사자가 나타났다!"
"굉장히 큰 사자다!"
하고 외치며 달아났습니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쓴 당나귀의 모습은 마치 큰 사자가 먹이를 찾아 걷는 것 같았으므로 동물들은 모두 외치며 도망쳤습니다.
너무 기분 좋은 당나귀는,
'정말 사자가 된 기분인걸!'
하고 당나귀는 그만 큰 소리로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히힝 ! 히힝 !"
그러자 나귀의 콧노래를 들은 짐승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얘, 그런데 저건 나귀의 울음소리가 아니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더니 사자 가죽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건 당나귀가 아냐? "
"못된 녀석, 우릴 놀리다니!"
짐승들은 달려들어 당나귀를 때리고 발로 찼습니다.
까마귀와 독수리
따뜻한 햇볕이 내려쪼이는 풀밭에서 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독수리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양들이 모여 있는 풀밭으로 내려와 잽싸게 어린 양 한 마리를 채어 가지고 하늘 높이 날아갔습니다.
"야, 이 못된 독수리야!"
양치기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함을 쳤지만 독수리는 이미 멀리로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풀밭 근처의 나뭇가지 위에서 그 모습을 본 까마귀는,
"야, 굉장히 멋지구나!" 하고 감탄하였습니다.
까마귀는 독수리가 무척 부러웠습니다.
"나도 못할 거야 없지, 어디 그럼 나도 한번 양이나 잡아볼까? "
생각 끝에 자기도 독수리 흉내를 내어 날쎄게 날아가서 양 하나를 잡아오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양들이 노는 풀밭으로 내려가 한 어린 양의 털 속 깊이 발톱을 박고 힘차게 끌어오렸습니다.
그러나 까마귀가 들어을리기에 아기 양은 너무 무거웠습니다. 까마귀는 힘을 내어 날려고 했지만 양은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으윽!"
까마귀는 더욱 힘껏 어린 양의 털을 움켜쥐었습니다 .
그러나 어린 양도 들려지지 않았을뿐더러 양털이 발톱에 감겨서 발톱조차 다시 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 야단났네!"
까마귀는 울상이 되어 몸부림 쳤지만 발톱은 빠질 줄을 몰랐습니다.
당황한 까마귀가 어린 양의 등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있을 때 저쪽에서 양들을 돌보고 있던 양치기가 재빨리 달려와 까마귀를 잡았습니다.
"이런 멍청한 까마귀가 있나!"
양치기는 까마귀를 잡아서 동네 아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얘들아, 이걸 가지고 놀아라."
"이 새의 이름이 뭐죠? "
아이들이 묻자,
"이 새는 독수리 흉내를 내다 이 꼴이 된 어리석은 까마귀란다. "
하고 양치기는 대답하였습니다.
어록·시·묘사
군자는 생각하는 것이 자기의 분수를 넘지 말아야 한다.
(증자)
내일을 위해서 오늘 분수를 지키는 현자의 도리이다. 한 개의 바구니에 달걀 전부를 넣으려는 모험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면 나라의 상하가 다 태평하고,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아내다우면 집만이 다 경사롭다.
(양성지)
인간답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 본성의 진정한 법칙에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분수를 지키고, 우리의 목적을 확고히 갖고, 그리고 자연의 여신을 따른는 것"이라고 루카누스는 말한다.
(M. 아놀드/ 잡필집)
자연에 따라 조화되게 사는 것이 으뜸가는 선이다.
(키케로/ 한계론)
자기 몸에 맞지 않는 욕망에 매달리는 것은, 치수가 안 맞는 남의 의복을 빌어 입고 싶어하는 것과 다를없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노래가 있다. 그대의 노래를 발견할 때 그대는 행복하리라. 자기의 몸과 마음과 딴판인 다른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지 말라. 그것은 불행의 시초이다.
(E. 팔트)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면 떨어진다.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다가는 낭패를 본다는 뜻>
(한국 속담)
개에 호패. <*격에 맞지 않고 지나침을 이름>
(한국 속담)
하늘이 만물을 낳으실 때 제각기 제한된 분수가 있으니 그 누구에게 원망하리오.
(박지원/ 예덕선생전)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위치가 있다.
(호라티우스/ 풍자시집)
남의 뒤에서 말을 타고 가는 자는 길을 안내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T. 풀러/ 금언집)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옷감에 따라서 웃옷을 마른다.
(영국 속담)
구두 수선공에게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 이상을 하게 하지 말라.
(아펠레스 S. 플리니우스/ 자연의 역사)
내 몸이 중이면 중의 행세를 하라. <*신분을 지켜 분에 어긋나지 않게 하라는 뜻>
(한국 속담)
개구리 따위가 황소만큼 커지기를 원한다.
(파이드로스/ 우화)
분수 안에서 사는 자는 도를 행하고, 분수 밖의 것을 탐내는 자는 재물을 모으려 한다. 도를 행하는 자에게는 광명 이 따르고, 재물을 모으려 애쓰는 자는 남의 물건을 빌어 파는 장삿꾼과 같다.
(장자)
분수에 넘친 생각은 한갓 정신만 상하게 할 뿐이이요, 망령된 행동은 도리어 재화만 불러일으킬 따름이다.
(명심보감)
덕이 적으면서 지위가 높고, 지혜가 없으면서 도모하는 것이 크다면, 화를 당하지 않을 이 드물리라.
(명심보감)
옴 오른 양이 시냇가의 상류 수원(水源)에서만 물을 마신다.
(아라비아 속담)
사주에 없는 관을 쓰면 이마가 벗어진다.<*제분에 넘치는 일을 억지로 하면 도리어 해롭다는 뜻>
(한국 속담)
지나치지 않고 알맞게 행동해서 후회하는 일은 없다.
(T. 제퍼슨)
방이 좁거든 좁은 방에 합할 만하게 세간을 놓는거야. 그게 분이란 것이거든. 제 분에 넘는 것을 바라는 것이 탐욕이란 말일세.
(이광수/ 사랑)
말이 뛰고 있는데 바닷게가 그 앞에 나가려 한다.
(덴마크 속담)
분이 아닌 복과 까닭없는 얻음은 조물주의 낚시 미끼 아니면 사람 세상의 함정이다. 이곳에 착안함이 높지 않으면 그 꾀임에 빠지지 않을 자가 적으리라.
(채근담)
아주 작은 것에서 아주 큰 것을 보면 그 전체의 크기를 볼 수 없고, 아주 큰 것에서 아주 작은 것을 보면 분명히 볼 수가 없다.
(장자)
그대는 사마귀를 알지 못하는가? 그 작은 몸으로 수레바퀴를 막으려다 눌려 죽으니, 이는 그 불가능함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 믿기 때문이다. 삼가고 또 삼가라. 힘만 믿고 남을 해치는 자는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음과 다를 바가 없다.
(장자)
순리를 버리고 역리를 따름이 재앙을 부리는 원인이다.
(소학)
미운 질그릇이나/ 임의 불 담은 화로이고 싶어 분수에도 과한/ 옥동자 배고 싶어
(김남조/ 사랑초서 · 88)
나는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일을/ 삶의 근원에까지 추구하고, 분수를 요량하고/ 스 스로의 분수를 허락함에 만족하노라.
(W. B. 예이츠/ 육체와 영혼과의 대화)
한 그루 나무, 한 올의 바람도/ 푼수대로 흔들리게 하시고/ 설혹 잘못 산 생애는/ 되짚어 고쳐 살게 하소서
(임영조/ 봄에의 기원)
옛사람이 일렀으되, 분수를 지키어/ 화복에 마음이 변하지 말라고,/ 다시 일렀으되, 관직을지키어/ 세상에 마음이 동하지 말라고./ 약한 자를 돕는 것만이/ 올바른 나의 본분이다.
(원결/ 춘릉 행)
믿음의 분수를/ 지켜 행하라/ 명철한 사람이 될 것이요
(홍안의/ 성도의 생활)
설 교 노 트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시38:16
서론
다윗은 원수들의 모략과 음모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저희가 내게 대하여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 나를 향하여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의 "망자존대"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1. 망자존대의 뜻
"망자존대(妄自導大)"라고 말의 뜻은 국어사전에 의하면 "종작없이 스스로 잘난 체함"이라고 해석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분수를 바로 알아야 하는데 되지 못하고 된 체하는 자세입니다.
다윗의 아들 반역자 압살롬과 같은 사람이 나 신약의 헤롯이 백성을 효유하는데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라고 과도한 아첨으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스스로 취한 태도입니다(행12:20-23). 그러므로 주의 사자가 쳐서 충이 먹어서 죽었습니다. 망자존대한 자들입니다.
사람 중에서 가장 꼴불견인 자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2. 망자존대해서는 안될 인간
인간은 그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자의 입장에 있으며 하나님의 지배권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신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람 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누구든지 감히 망자존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잘 났다고 할지라도 어찌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자기 처지를 잘 살펴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망자존대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잘난 체 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은 자기 분수를 잘 알아서 교만해지거나 해서는 안됨을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3.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
다윗이 여기에 진술한 "망자존대할까 하였나이다"라고 한 말은 자기가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고 믿고 기도하는 중에 있는데 이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는다면 자기를 해치려는 원수들이 더욱 오만불손하여 기고만장해져서 우쭐해지게 되니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허사라고 하는 것과 같아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원수들이 망자존대하는 꼴을 미워하면서 망자존대하여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말한 것입니다. 이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이고, 다음은 자신을 위하여서도 되는 일인 것입니다.
결론
망자존대함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감히 하나님 앞에 망자존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의 분수를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서 망자존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저 인간된 자는 잠잠하여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삼가라
신2:1-9
서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신앙인으로 겸손하게 만들어서 은혜와 복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탐의 말을 듣고 낙심되어서 가나안에 대한 소망이 희미하게 되고 가나안 정복에 대한 의욕이 떨어져서 갈팡질팡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먼저 신앙인으로 만들어 가나안에 들여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야에서 훈련을 받고 가나안으로 행진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을 몇 가지 알려 주셨습니다. 즉 분수를 지켜서 스스로 삼가하여 조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다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세 일산은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주신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의 기업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하간 다투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값을 주고 사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주신 기업을 빼앗는 것이나 에돔 족속을 침범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의 나라 주권 침해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람이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소유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타인의 소유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남의 소유를 탈취하거나 돈도 주지 아니하고 무례하게 뻬앗아 먹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3. 삼가하여 복을 받아야 합니다.
본문 7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하는 모든 일에 네가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음으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 하였습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인을 해롭게 하고 어떻게 복을 받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육의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복받은 민족답게 삼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삼가 조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타인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여하간 복을 받은 성도들은 싸움질해서도 안되겠고 무례하게 남의 것을 빼앗아도 안되겠으며 삼가하여 타인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모압을 괴롭게도 말고 싸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큰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정립하라
유1:20-23
서론
여기 유다서는 한 장으로 짤막하게 기록되었으나 그 중심 사상이나 교훈의 핵심은 '자기 정립'에다가 두고 있습니다. 유다는 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면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비진리에 대하여 정의로 싸울 수 있는 자기를 정립하라는 말입니다. 나아가서는 거짓 선지자와 이단자들에 대하여 규탄을 하고 바른 신앙과 구원의 노선을 옹호하고 확립해 나아가자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 정립'에 대한 몇 가지 의의를 본문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자기를 건설하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20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 신앙생활에 대하여 건축하는 비유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고전3:10-15, 엡2:20-22, 마7:24-27). 그러면 어떻게 건설해야 합니까?
올바른 기초 위에 건설해야 합니다. 반석위에 건축해야 합니다.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니 예수 그리스도에 신앙의 기초를 건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재료로 건축해야 합니다. 또 올바로 연결해서 건축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중심에서 조화성과 평화성이 함축된 신앙의 사람으로 건설해 가라는 말입니다.
2. 자기를 파수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 21절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건설된 자기 자신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파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영적으로 경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각성하여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2) 영적으로 자신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이는 남을 살피기 앞서 나를 살펴 이 세상 죄악에 감염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3) 영적으로 나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불의한 나 자신을 쳐서 이 기는 것이 자신을 파수하는 길이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우리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의 티를 빼게 하라고 하셨고 자기를 이기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자기를 쳐서 이기노라고 하였습니다.
3. 자기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22절에 "어떤 의심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하였고 23절에 "어떤 자를 불에서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기독신자들의 공통적인 책임과 사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은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적으로 충실하여 강건해야 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책임에 충성을 다해야 됩니다.
결론
우리는 나 자신의 정립을 위해서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설하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여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원에 이르도록 하여야 합니다.
불
성 경 활 용
1. 성경에서 나타난 불의 용도
(1) 음식을 만듬
(출12: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요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2) 난방
(사44:16)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요18:18)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3) 제련
(렘6:29)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4) 감염된 의복을 태움
(레13:52) 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을 불사를지니
(5) 군호
(삿20:38)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과 복병 사이에 상약하기를 성읍에서 큰 연기가 치미는 것으로 군호를 삼자하고
(6) 방화
(삼하14:30) 압살롬이 그 종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놓으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놓았더니
(왕상16:18) 시므리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왕궁 위소에 들어가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었으니
(7) 화형
(렘29:22) 여호와께서 너로 바벨론 왕이 불살라 죽인 시드기야와 아합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8) 제단에
(출29:18) 그 수양의 전부를 단 위에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
(레6:13)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2. 불의 특별한 의미
(1) 하나님의 동행하심
(느9:12)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셨사오며
(시105:39)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2) 하나님께 현현하심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24: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3)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냄
(출9:24) 우박의 내림과 불덩이가 우박에 섞여 내림이 심히 맹렬하니
(4) 하나님께서 제사를 열납하심
(레9:24)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5) 언약의 보증
(창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3. 영원한 불
(1) 지옥 불
(막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유1: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2) 유황불 붙는 못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 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관련원어풀이
1. rWa 우-르
(1) 빛들, 즉 밝은 지방, 동방.
(사24:15)
(2) 계시.
(민27:21, 삼상28:6)
(3) 불의 밝음, 불꽃.
(사50 . 11, 겔5:2)
2. vae 에-쉬
(1) 불, 열, 빛, 하나님의 불, 빛.
(왕상18:38, 욥1:16)
(2) 전쟁, 소멸.
(민21:28, 사26:11)
(3) 파괴, 파멸.
(욥15:34, 22:20)
(4) 태양열.
(욜1:19, 20)
3. #r'c; 사-라트
흡수하다, 돌이키다, 삼켜버리다, 태우다, 소멸하다.
(레4:21, 수11:9)
4. pu'r 푸르-
(1) 불.
(마3:10, 요15:6)
(2) 맹렬한.
(히10:27)
(3) 심히 어려운 시련의 여러 가지 환경을 의미하는 불.
(눅12:49, 고전3:13)
5. purav 푸라-
불, 불 붙는 장작더미.
(눅22:55, 행28:2)
6. puvrino" 푸리노스
불로 된, 불같이 빛나는.
(계9:17)
7. fw'" 포오-스
(1) 빛
(마17:2, 고후4:6)
(2) 하늘의 빛.
(행12:7, 고후11:14)
(3) 등불이나 횃불.
(행16:29)
(4) 빛, 밝음.
(요5:35, 계22:5)
(5) 진리와 그 지식.
(요1:4)
설교예화자료
응원의 용기
인도네시아의 큰 상가가 불이 나자, 모든 종업원들이 신속히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불이 치솟아 빌딩은 불기등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 윗층에서 어린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즉시 소방관은 건물벽에 긴 사다리를 걸치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맨 윗층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밖으로 뿜어 나오는 불길 때문에 도저히 구할 수 없는 절망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소방관이 군중들을 향하여 "자, 우리 박수를 보냅시다. "라고 외쳤습니다. 군중들은 너무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박수를 쳤습니다. 아래쪽으로부터의 그 후원의 박수는 사다리 위에 있는 소방관에게 폭발적인 새힘과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마침내 어린이는 안전하게 구조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사람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불의 찬미자이다.
(C.P. 보들레르/ 내밀의 일기)
인간은 불을 친구로 사귄 동물이다.
(H. 밴 다이크/ 어부의 행운)
사람은 불과 꽉 들어찬 정신이다.
(W. 셰익스피어/ 말괄량이 길들이기)
나에게 자연의 불의 섬광을 달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학문이다.
(R. 번스)
얼음은 산봉우리 말없는 언어요, 불은 별의 침묵의 언어다.
(C. 알켄/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의 부딪침‥‥ 원시인들은 이 부딪침의 원리 속에서 불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간들도 그 원리 속에서 생의 불꽃을 얻는다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불에는 언제나 얼굴이 보인다. 노동자는 밤에 그것을 쳐다보며 하루 동안에 자기의 몸에 붙여 다닌 찌꺼기와 흙냄새로부터 자기의 생각을 순화하는 것이다.
(H.D. 소로/ 월든)
불은 빛을 꿈꾼다.
(김광섭/ 신라 천년의 지평)
빛은 화가 중의 으뜸이다. 아무리 추한 것이라 하더라도 강한 빛을 비추어서 아름답게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에머슨/ 자연론)
약한 불일망정 따뜻하기만 하면 거센 불에 화상을 입는 것보다 낫다.
(영국 속담)
빛이 빛을 구하다가는 빛에 속고 만다.
(W. 셰익스피어/ 사랑하는 헛수고)
밝은 것은 비록 불이지만, 그것을 밝게 하는 것은 설이다.
(이황/ 퇴계집)
여러 가지 것으로부터 단 하나를 만드는 것,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불이다.
(P. 클로텔/ 은혜인 뮤즈)
불꽃이 열매를 맺는다.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영혼 속에서.
(이어령)
불꽃이 태우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암흑의 밤이다.
(이어령)
인생은 순수한 불꽃이며, 우리들은 우리들 속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태양에 의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브라운)
묵은 목초는 불 태우기가 힘들지만, 그 불을 끄기란 더욱 힘들다.
(M. 세르반테스/ 규범소설집)
불과 사람은 이런 점에서 일치한다. 즉, 그들은 다같이 선한 종이기도 하고 다같이 악한 주인이기도 하다.
(F. 그레빌/ 명성 조사)
불꽃이 보이지 않는 난방도 좋지만, 불꽃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덥게 하는 것일까?
(김환기/ 파리 서점)
너의 원수로 해서 난로 불을 뜨접게 지피지 말라. 오히려 그 불이 너 자신을 태우리라.
(W. 셰익스피어)
불은 딱딱하고 무거운 것보다 가볍고 우아한 것을 빨리 태운다.
(G. 보카치오/ 데카메론)
끓는 물에 물을 붓는 것이 아궁이에서 장작을 끌어내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W. 셰익스피어/ 베로나의 신사)
불은 햇빛이며 그것은 무한한 궤도 속에서 다시 태양으로 회귀한다.
(K. 맨스필드/ 생명의 샘에서 흘러 나오는 것)
우리는 누구도 불꽃을 지상에 잡아매 둘 수가 없지 않은가? 불꽃은 울안에 가두어 둘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불꽃을 오래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C.V. 게오르규/ 25시에서 영원의 시간으로)
남의 집 불 구경 않는 군자 없다. < * 아무리 착하고 어진 사람도 남의 불행을 즐긴다는 뜻>
(한국 속담)
꺼진 것같이 보이는 불은 재 밑에서 잠깐 잠자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종종 있다.
(P. 코르네유/ 로더건)
어둠 자체를 안락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바로 빛이다.
(사우디/ 케하마의 저주)
파괴적인 화재의 불꽃은 태양의 밝음을 지니고 있다.
(G. 바슬라르/꿈꿀 권리)
사람들로 하여금 달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불이며,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 물입니다. 사람들은 불과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달리고 얼음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멈추어 섭니다.
(E. 카네티/ 말치 양심)
불이란 사람에게 크게 유익하다. 음식에 불을 때면 굳은 것도 부드러워지고, 온돌에 불 지피면 찬 것은 따뜻해지고, 약물을 달이면 생 것이 익으니, 배고픈 것을 배 부르게 하고, 병든 것을 고칠 수 있으며, 쇠를 녹여 쟁기를 만들고 도끼를 만들며 가마솥을 만들어 백성들이 쓰는 데 이롭게 하고, 칼과 창과 검극(劒戟)을 만들어 군용을 위엄있게 하니, 불의 생김의 신묘하기가 저 같으며, 불의 용도의 유익함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다 중하게 여기지 않는구나.
(정도전/ 삼봉집)
그녀의 손가락에서 인 불꽃은/ 천상의 불꽃을 구하고
(P. 엘뤼아르/ 시)
폭풍도 끄지 못하는 불꽃에서 태어난 불꽃.
(W.B. 예이츠/ 비잔티움)
이 슬픔/ 기름으로 부어/ 불을 켜게 하옵소서
(김남조/ 사랑도 쉬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구 가라신 말씀으로/단풍 한 잎새만한/ 불을 댕겨 주는 이도/ 지금은 없는데// 사위어가는/ 가슴속 새하얀 잿더미는/ 무엇을 불사른/ 무(無)의 형적(形跡)일까
(김남조/ 가을의 노래)
옛날 어느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가르치는데 그 첫머리에 천황씨(天皇氏)는 목덕(木德)으로 왕(王)하고 지황씨(地皇氏)는 화덕(火德)으로 왕하고 그 뒤 여러 임금을 거쳐 몇 백년 뒤에 수인씨(漣人氏)가 마찰하여 불을 내어 사람에게 화식(火食)을 가르쳤다 함을 보고, 어느 학동이, 불은 수인씨가 처음 발명하였는데 지황씨가 화덕으로 왕하였다 함은 거짓말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훈장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 아동에게 「사략」을 가르칠 게 아니고 「춘추(春秋)」를 가르쳐야 한다 하였다. 과연 불은 수인씨가 발명하였는지 누가 발명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일찍부터 불을 써 온 건 사실이었다. 심산 원시림에도 나무와 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서로 마찰되어 불이 나는 일이 있다. 이런 것을 산화(山火)라 한다. 수인씨가 과연 불을 발명했다면 이런 산화 나는 것을 보고 그리 하였을 것이었다. 우리는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덕으로 산다. 그래서 이 오행(五行)을 소중히 아는 바 그중 화덕도 크다. 우리는 생활에 불이 가지가지로 쓰이며, 불에도 가장 귀여운 건화 톳불 · 관솔불 · 등잔불 · 촛불 등이 있다.
(이병기/ 촛불)
불꽃이 툭툭 튀면서 불길을 점점 더 세어졌다. 크고 검은 산들이 다 타 버리고 말 것 같이 봉우리의 불길은 점점 더 커 갔다. "허-그것도 볼 만하네 그려. 옛날에 봉화라고 있었더니 난리 날 때면 동네 동네 전해 가면서 알리던 봉화, 영락없는 봉화 같네그려‥‥‥‥
(박화성/ 한귀)
그리고 불꽃은 당신의 죽음 위로, 그리고/ 나 자신의 목숨 위로, 그리고/ 내 생의 세계 위로 감들아 흐른다.
(R. 재럴/ 편지들을 태운다)
수정빛 바다로 몸을 던졌으니/ 나는 성화(聖火)의 한 오리 불꽃의 존재요.
(S. 게오르게/무아의 시간)
밤이 깊을수록/ 동트는 새벽 가까이 걸어오는/ 소리 들리련만/ 겹겹이 둘러싼 어둠 넘어/ 차가운 벽 버티고 섰으니/ 어찌하리,/이 땅은 우리더러 불이되라 하는구나.//가시덤불 어둠아래/ 눌려있는 자유을 위해,/ 밤늦도록 깨어 기다리고 있을/ 식구들의 소중한 희망을 위해/ 한 밤중에 도둑맞은/ 민주주의를 위해/ 이 땅은 우리더러/ 불이되라 하는구나.//스스로 속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고/ 밤을 새워 밝히다가/한 줌의 재가 될지라도/한 순간/ 그리운 님 모습이라도 비추이는 /불이 되라 하는구나.// 오늘은 어느 한구석에서/ 소리없이 타오르다/ 때가 되면/ 불덩이를 사방에 쏟아 내며/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이 땅은 우리더러/ 불이되라 하는구나.
(서덕석/ 이 땅은 우리더러 불이되라 하는구나)
파랗게 언 유리창에/ 장미를 피우듯/ 고운 촛불을 밝혀 둡시다. // 창 밖은 사뭇 휘몰아치는 눈발/ 벗은 나무 가지들/ 찬 바람 속에 흐느끼며/ 거친 등걸 밑에 무수히 금긋는/아픔은 앓는 밤이옵기에// 막 피아나는 장미빛 등불을 밝혀 두며는/ 저들을 위해 자비스런 축도(祝 禱)/ 우리에겐 소리없는/ 갈채도 되리니
(김남조/ 장미를 피우듯)
제몸을 태워야만 환한/ 촛불같은 것/꿈꾸며 오래오래 불타려 해도/ 줄어드는 밀랍/ 이윽고 불빛이 지워지고/ 재도 하나 안 남기는/ 촛불같은 것
(김남조/ 저무는 날에)
아가는 엄마의 등불입니다./ 아가는 함께 있으면/ 훤히 밝아오는 마음이 있습니다.
(김남조/ 아가에게)
화평한 영혼은/신이 켜 주시는 성총(聖寵)의 등불/그 불빛 당신께 있으라/빌어 주마
(김남조/ 고별 · 1)
여름의 화로는/ 불의 신성(神聖)을 다 담아내고/ 재와 그스름도 씻어/ 오늘은/ 어린이 같은 살결
(김남조/ 가을에 · 2)
고요하지 않으면/ 이 비파소리 아니 들리리/ 바람 자지 않으면/ 이 기름등잔/불도 꺼지리//그 옛사람/ 옛날 인기척으로/ 목욕하고/ 머리 감고/ 이 가락 울려내어/ 옛날의 기도등(祈禱證)/ 불 밝히누나// ‥‥비파소리여/ 비파소리여// 타던 가슴/ 다 태운 후엔/ 편안하여라
(김남조/ 비파소리)
불을 문/ 한 가치 성냥에/ 치마뿐 푸는/ 거푸거푸/ 치마끈 풀어 던지는/ 이/ 단풍(丹楓) 숲
(김남조/ 가을 · 3)
깨져 버리는 야릇한 불꽃이여/ 튼튼한 그 불꽃 다발은 보드라운 물결의 헐벗은 언어에 기울인 귀를 두드린다.
(P. 발레리/ 목욕하는 부인)
나는 불꽃보다 너를 사랑하노라/ 그 무슨 원을 그리며/ 불꽃은 밝게 빛나면서 세계를 경계지어도/ 그 바깥에선 아무것도 그것을 알지는 못하노니
(R.M. 릴케/ 구도생활의 서)
촛불아/나의 어느 사랑노래로도/노래 너머 첩첩 산길 더욱 가는/ 그 사랑으로도/ 나의 삶 전부로도/ 불타고 재도 없는/ 너를/ 못이기겠다.
환하게 환하게/ 내 영혼을 지나가는 이의/ 지나만 가시어도/ 눈물나는 이의/ 바람도 못흔드는/ 주홍(朱紅)옷자락
한 덩이 백랍 / 불 만나 기름되고/ 맑아져 증류수 되었다가/ 다시 엉기어/ 기름되고 백랍되어/ 벗은 몸이 또/ 불붙네.//
옛날의/ 외롭던 사내아이와/ 외릅던 여자아이가/ 외로운 버릇대로 그냥 자라나/외로운 긴 세월 차례로 섬겨/ 이렇도록 늦은 날에/만났습니다. / 촛불 한 자루/ 예 밝히오니/ 조물주신 어른/ 소람(昭覽)하옵소서//
한 번도/ 여자를 안아보지 못한/ 신선(新鮮)한/ 이 서투름을,/ 아아 동정(童貞)의/ 불심지
(김남조/ 촛불 · 1)
호롱불의 불꽃은 담담하거늘, 세간의 오색 가운데 어느 색일지 모른다. 내가 일찍이 그 불꽃이 불 이삭으로부터 올라가서 연기로 사라지기까지를 관찰한 것이 있다. 담벽(淡碧)에서 담백으로 변하거늘 그 사이를 어떻게 분간할지며, 또 담백에서 담적(淡赤)으로 변하거늘, 그 사이를 어떻게 분간할지 며, 또 담적에서 건홍(乾紅)으로 변하다가 다시 건홍에서 흑연(黑煙)으로 변하거늘, 그 사이를 어떻게 분간할건가? 반드시 극미(極微)가 그 중간에 있기로 그것을 분간하면 분별되어질 것이다.
(김성탄/ 서상기평론)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 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너의 삶이 촛불이라면/ 나는 너의 붉은 초가 되고 싶었다.
(정호승/ 어떤 사랑)
이 내 눈동자/보석이 아니옵고 불길이오니/이 몸에 감겨진 요기/ 차라리 불꽃에 던져 태워지이다.
(G. 아폴리네르/ 요회 로렐라이)
참나무가 탈 때,/ 그 불꽃 깨끗하게 튄다. /보석들이 째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 단단한 불꽃들이 튄다. // 참나무가 탈 때,/ 그 남은 재 깨끗하게 고인다. / 참새들의 작은 깃털인 양 따스하게 남은 재,/ 부드럽고 빤질하게 고인다. // 까아만 유리 너머/ 소리없이 눈송이가 나리는 밤./ 호올로 참나무를 태우며/ 물끄러미 한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짧은 목숨의 한 세상,/ 그 헐벗은 불꽃 속에/언제나 단단하고 깨끗하게 타기를 좋아하던,/지금은 마음의 파여 ·풀레스 안에/ 아직도 깨끗하고 따스하게 고여 있는,/ 어리석은 한 사람의 남은 재를 생각한다.
(김현승/ 참나무가 탈 때)
이 길 잃음 속에서 당신은 어느 초라한 등에 불을 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발걸음을 밝히기 위하여?
(C.P. 페기/ 이브)
깨끗한 불길이여,/ 죄를 다시는 저지를 수 없는/ 나의 마른 손이여.// 마음에 깊이 간직한/ 아름다운 보석들을 온종일 태우며,/ 내 영혼이 호올로 남아 사는/ 슬픔을 다 부르지 않을/ 나의 집이여.
(김현승/ 겨울 실내악)
봄날 저녁 로맨틱한 몇 명의 친구들과 술잔들을 나누니 상당히 취기가 돌았다. 술잔을 놓기도 싫고 그렇다고 더 이상 마시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자 내 기분을 알아차린 곁의 동자가 열 두서너 개의 커다란 폭죽을 넣은 광주리를 냉큼 갖다 준다. 나는 술상에서 떠나 마당으로 나가 폭죽을 터뜨린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머리를 자극하여 온 몸이 매우 기분이 좋다. 아아! 이 또한 흐뭇한 일이 아니겠는가,
(김성탄)
참자/ 지금은 참자//‥‥/ 드디어/ 천지개벽의 그날/ 꿈틀거려 치솟는 불기둥/ 끓어넘치는용암// 천만도의 가슴을 여는/ 살아 있는 화산이 되자.
(허영자/ 휴화산)
제사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겄네.
(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
가장 늙은 맹인, 파묻힌 인간이/ 가장 옛날의 횃불에 다시 불을 켤 때에
(C.P. 페기/ 이브)
불은 마치 피묻은 살을 맛있게 잘라 먹는 요마의 혓바닥처럼 날름날름 집 한 채를 삽시간에 먹어 버리었다.
(나도향/ 벙어리 삼룡이)
면도날로/불송이 자르며 운다/잘린 불송이/ 서로 이어 붙는 거/ 한없이/ 놀을난다
몸 비추는/ 불빛일랑 말고/ 마음 비추는 불빛도 말고/너의 영혼/그 옆방의/ 빛 그늘 되고지고
천일(天日)을 보고싶던 이/ 천일을 오지 않은 이/ 창호지에 여린 불빛 적시며/ 등불 설핏 비추면/천일 몇 갑절에도/나는/문 열을래// 잠자려마/ 잠자려마/ 평생에도 잠없는 순금(純金)의 눈시울/ 사랑처럼/ 고단한,/ 아아 죽음에만 눈감는/ 촛불
너만/ 울리진 않아요/ 혼자 노숙(露宿)하겐 결코 못해요/ 촉루(燭淚) 모두 불이 되는/ 너를/ 나 죽은 후라도/ 투명한 내 몸이/ 안아줄 거예요//
둘의 영혼/ 다 열리옵고/ 그 다음은 촛불 같게 하소서/ 고요함과/ 불타는 일만을/ 알게 하소서
(김남조/ 촛불 · ll)
감청(緖毒)의 물빛/ 감추고/ 이처럼 설게 불타고 있음은/ 내가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김남조/ 5월의 연가)
나 정말 착하게 살으리라/ 촛불 하나 함께 두 목숨의 화재(火災)/ 밤이 홍수 마냥 흘러나고
(김남조/ 합원)
봄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저 산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연기 없는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어찌하랴
(김덕령)
불기둥을 올리며 트럭이 불타고 있었다. 밑둥에서 갈라져 올라간 나뭇가지 사이로 기훈이 바라본다. 전투기가 날아 내리고 날아 올라간다. 트럭뿐만 아니라 온 숲 속이 불바다로 변한다. 다리없고, 팔없고, 얼굴없는 부상병이 춤을 춘다. 벌렁벌렁 춤을 춘다. 팽이처럼 팽팽 돌아간다. 주홍의 불길과 초록빛 군복이 어우러져서 한꺼번에 돈다. 금가루가 하늘 가득히 뿌려 진다. 마구 뿌려지고 나무가 쓰러진다. 술 취한 것처럼 자꾸 쓰러진다. 기훈은 전신에 그 금가루가 날아와서 몸이 후꾼후꾼 달아오른다고 생각했다. 날아오른 금가루를 피해 마구 달아난다. 몸부림치며 팔을 비틀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박경리/ 시장과 전장)
영해영덕(寧海寧德) 긴삼가리 진보청송(眞寶靑松)관솔가지/우리 아매 관솔 패고 우리 올배 관솔 놓고
(안동지방 적마가)
그저께 밤에는 맞은편 심산에 산불이 보였다. 백일홍같이 새빨간 불꽃이 어둠 속에 가깝게 솟아 올랐다. 낮부터 타기 시작한 것이 밤에 들어가서 겨우 알려진 것이다. 누에에게 먹히는 뽕잎같이 아물아물 헤어지는 것 같으나 기실을 한자리에서 아롱아롱 타는 것이었다. 아귀의 혀 끝같이 널름거리는 불꽃이 세상에도 아름다웠다. 울 밑의 꽃보다도 비단결보다도 무지개보다도 맨드라미보다도 곱고, 장하다‥‥불은 산등에서 산등으로 들러붙어 골짜기로 타 내려갔다. 화기가 확확 튀어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후끈후끈 무더웠다. 나무 뿌리가 탁탁 튀여 땅이 쨍쨍 울렸다. 민출한 자작나무는 가지가지 불이 피어 올라 한 포기의 산호수같은 불나무로 변하였다.
(이효석/ 산불)
우리는 밤이 아주 캄캄해지기를 기다려 우리 불을 지르기로 하였다‥‥그러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불꽃은 올라간다. 우리는 사막에서 우리의 신호 불이 타오르는 것을 경건히 지켜본다. 우리는 밤중에 우리의 조용한 광선의 메시지가 빛나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나는 이 메시지가 이미 감상적인 호소를 가지고 떠난다지만, 많은 사랑도 가지고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물을 청한다. 그러나 통신하기를 청하기도 하는 것이다. 밤하늘에 다른 불이 하나 켜지거라, 사람들만이 불을 이용한다.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답을 했으면!
(A.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보라. 바다 위에서 타는 불이 하늘을 사른다.
(성찬경/ 태극)
불꽃은/ 무한이며 영원하다.
(R. 로얼/ 에왈드스 씨와 거미)
세 개의 성냥불이/ 하나 하나씩 밤을 켠다네./ 첫 번째는 너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두 번째는 너의/ 눈을 보기 위하여,/ 마지막 것은 너의/ 입을 보기 위하여,/ 그 다음으로 캄캄한 어둠 속에/ 나는 너를 안고/ 그 모두를 기억하기 위하여.
(자끄 프레베르/ 밤의 노래)
현은 가슴속에서 갑자기 우직하고 깨뜨려지는 자기 껍질의 소리를 들었다. 조각을 내고 부서지는 껍질. 그와 함께 거기서 무수한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것은 다음 차원에의 비약을 약속하는 불꽃. 무수한 불꽃. 찬란한 그 섬광, 불타는 생애의 의욕. 전신을 흐르는 생명의 여울.
(선우휘/ 불꽃)
그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 치던 불길
(이영도/ 백록담)
어쩌다 바라보아 주면/ 촛불은 수줍어서 춤추노란다. // 나 그저 눈 감으면/ 추던 춤 멈추고 날 바라보는가 싶어// 그러다가 서로 눈 마주치면/ 너무 부끄러워 나불거리노란다. // 새벽종 소리 지금 너를 조상(弔喪)하는 듯/ 호루룩 녹아 흘러 이제 마지막 퍼지는 너의 눈물.// 너의 임종을 / 뜨거운 내 입김 뿜어 거두누나.// 초저녁 너의 하얀 살결/ 날씬하기 여섯 치하고 서 푼.
(장서언/ 촛불)
불붙어 다한 정열의 잔재.
(오상순/ 해바라기)
갑자기 춤은 불바다가 된다// 눈길은 자기 머리에 불을 붙이고/ 대담한 재주 부려 치마폭/ 단숨에 휘둘러/ 그 불 속에 던진다/ 그 불 속에서 벌거벗은 두 팔이/ 놀란 뱀인 듯 꿈틀거려 소리치며 뻗어 나온다.
(R. M. 릴케/ 스페인무희)
하늘은 펼쳐지고/ 지상은 고요하다. / 나의 영혼 속은/ 고요, 고요하다. / 나를 태우는 불만이 뜨겁다. // 그리고 그대는 온다. / 뜨거운 불길은/ 그대 손 안에서/ 꽃이 된다. / 나의잊지 못할 봄이 된다. / 그때 그대는 속삭인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라게르크 비스트/ 마음의 노래)
바람아/ 자불음의 꽃잎을 흔들지 말아라/ 눈을 뜨면/ 불이 되는 것을/ 불붙는 제 몸의 불이 무서워/물 속에 몸을 담그고/불주머니 발등에 내리어/ 불을 끄고 있다.
(신재연/ 수련)
이 들판을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들불이 되자 하네
(김남주/ 노래)
타버려라. 타버려라. 타버려라./ 화해할 수 없는 반란의 불꽃이여.
(강인한/ 불꽃 · 8)
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붙는 불은/ 가신 님 무덤가에 금잔디.
(김소월/ 금잔디)
이 가슴 맺힌 울분 불꽃 곧 될 양이면/ 일월도 녹을 것이 산악 어이 아니 타라/오늘도 내 맘만 태우며 또 하루를 보냈노라// 임이 가오실 제 명심하란 참을 인(忍)자/ 오늘도 가슴속 치미는 불덩이를 참음의 더운 눈물로 구지껏 사옵니다.
(노천명/ 참음)
그 안에 꽃다운 꿈이 딩굴고/ 뉘 집인가 창이 불빛을 한 입 물었다.
(노천명/ 창변)
창 밖에는/ 바람 한 점 없고/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무료한 마음을 흔들어 대면/ 달과 별과 구름을 불러 모은다.
(김재흔/ 산방일기)
저기 다가오는 불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구상/ 초토의 시 · 8)
저무는 강가의 불빛/ 멀리서 스런대는 등불은/ 누굴 맞을 지점일까.
(최은하/ 우리의 간격)
촛불을 켜면/ 그 촛불 한 자루만한/ 크기의 어두움은 / 조용히 밀려가고/ 그 어두움이 물러간 자리엔/ 광명이 찬다. // ‥‥그의 음성으로/ 마음에 촛불을 켜고/ 하늘을 향하여/ 눈을 뜬다.
(황금찬/ 그의 음성)
구름도 낯선 언덕/ 거리에 서 있던/마지막 여인/ 어쩌면 미켈란젤로의 촛불/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안개를 자리하고 앉으면/ 독백하고 있는/ 장미빛 등잔이/ 이상한 창을 밝히고 있을 뿐
(황금찬/ 이방인 -이현)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 신을 배운/조용한 희생일까//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황금찬/ 촛불)
봄 안개 자욱히 나린/ 밤 거리 가등(街燈)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 마음을 앓는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오로지 먼하늘가로 저기 우리는 응시-/ 혼자 정열의 등불을 달굴 뿐.
(김달진/ 체념)
등(燈)은, 덴마크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서 있고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촛불 한 자루/ 마지막 불을 켜드는 마음/ 나에게/ 살아 있는 의미를 알게 하소서.
(홍윤숙/ 가을의 기도)
내가 뼈 시릴 때/ 왜 하늘로 솟구치며 미소짓는/ 나무를 쓰러뜨리고/ 나무의 속살까지 파헤치며/ 산산히 부서뜨려야 하는걸까.//하늘이 등돌려/ 땅도 얼음장일 때 내 몸도 덩달아 싸늘하게/ 굳어 가는데/ 왜 조각난 나무의 파편들은/ 활활 타오르는 빛으로 살아나/ 나를 감싸는 뜨거운 입김일 수 있는 걸까.
(조미나/ 장작불을 지피면서)
숨은 별자리마다/ 초 심지 불 당기듯/ 차례로 불 밝혀/ 어둔 길 일찍부터 비쳐주련만/ 그 마음 불이라면// 3월이면 진달래산/ 저물녘마다/ 이 가슴엔 산불이 한물 지고.
(유경환/ 3월의 가슴엔 산불이)
불꽃나무의 덤불 속/등지 틀고 있을 황금새/ 네가 불보다 더 많은 날개를 지녔음을
(하재봉/ 몽상의 숲)
몸속을 더듬고 깊고/ 캄캄한 뿌리 밑으로 내려갈 때, 부딪치는/ 뼈마디 빛나는 푸른 등불
(하재봉/ 새의 무덤)
그늘진 곳에서 반딧불만한 등을 켜고 모이는 사람들과/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멎는 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밤/ 하나씩 둘씩 마을의 등불은 이울고/ 뻐꾹새소리만 잠든 마을을 씁니다/ 강 건너 별빛처럼 살아서 가물대는 불을 켜고/ 당신이 이 세상 어딘가를 홀로 비추고 다니리란 생각을 하며/‥‥ 모두들 하나씩 등불을 들고 모여드는/ 그런 밤은 정녕 있을 겁니다.
(도종환/ 저무는 강 등불 곁에서)
시련의 혼불처럼/ 아카시아 되었더니
(강호연/ 숲에서)
어름 깎아 빚은/ 볼록렌즈로/ 불지르면/ 저 가파른 겨울산들,/ 타올라/ 붉은 산 되리
(송재학/ 얼음시 5)
저물녘/ 세상의 아궁이마다 불을 지필/ 가슴의 불씨만 살아 있다.
(정복선/ 산거)
저쪽 가장 높은 횃불에서는/ 나의 고독이/몸을 뻐쳐 훨훨 타오르고 있다// 난파선 속의 사람처럼/ 팔을 휘두르며 훨훨 타오르고 있다.
(파블로 네루다/ 오후의 품에 몸을 기댄 채)
불의 절규로 완성시킨 신비의 태깔/ 그릇그릇 가득 담아내는 경이로움을//알고 싶구나. 불길 뜨거우면/ 뜨거 울수록 깊어져 파란 불꽃의 선(禪)
(정동주/ 신무가-1 · 서곡)
어쩌다 몹쓸 세상 타국에서 살게는 되었어도 곧은 기개는 푸른 불꽃이었네./ ‥‥그릇마다 설움을 삭여 넣었지/ 시퍼런 한탄과 절망 장작불로 피워/사무친 그리움 태워 그릇을 빚
었지
(정동주/ 신무가-6. 다시 불을 다스리며)
의문을 참지 못해 읽던 책을 불살랐다/불타는 충혼을 밝혀 울먹이던 장명등(長明燈)
(원용문/ 매월당 김시습)
어둠을 살라먹은/ 불기둥은/ 나팔을 불어/백성을 모은다/ 행진한다.
(이승록/ 불기둥과 구름기둥)
내 혼의 짧은 심지 바람쌓듯 싸안고/ 타오르는/ 다가오는 불덩어리
(김성자/ 불의 초상)
우물 속에 숨어서/ 속눈 뜨고 웃는 달이/속살에 불이 붙어/ 인동꽃으로 피어/ 건져내는 두레박에서/ 꿈으로 날아간다.
(이명우/ 산골 풍경 · 3)
당신은 이천년 전/ 지순한 불꽃으로/조용히 오셨지만/ 이제는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스밀레라.// ‥‥ 당신은 언제나,」 우리들의 뜨거운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로 켜져 있네
(권용태/ 우리가 당신 안에 있듯이)
당신 속에서 내가,/ 내 속에서 당신이/ 백열하는/ 불꽃/ 천등 번개 지축을 뒤흔들 때/ 불덩어리로 굴러가고/ 억수로 퍼붓는 빗발에 묻혔어도/ 불타는 불타는 돌/ 물과 불이 백(白) 으로/ 가슴속에서 소리친다.
(김정우/ 불타는 돌)
밤에는 촛불을 켜자/ 타오르는 촛불의 기도, / ‥‥보이지 않는 곳/ 들리지 않는 곳을 걸어야 하는/ 촛불의 아픔/ 그 끝에서 피어나는 싱싱한 앙금 한 닢/ 어둠을 향하는 불꽃의 함성/하늘로 올라 올라/ 아픔을 굳어지게 하자.
(김윤택/ 촛불을 켜자)
그 허무한 뿌리의 끝까지 태워버릴/ 불이어야지/ 더이상 가벼워질 살도 없이/ 뼈도 없이 말라가는 싸움으로/ 피투성이 호흡으로일어서는/ 심지가 되어/ 불밝혀야지/ 나는 그대의 불/ 그대의 어둠으로 눈을 뜨는 바람
(이병창/ 갈보리의 노래)
금방울과 같이 호등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꽃밭에 물을 뿌리고 오면/ 수백 개의 촛불로 펄럭이는/ 이 마음의 깃발// ‥‥나도 활활 타버리는/ 불길이면 좋으리// 수많은 불꽃 새로//어두움을 사르고// 누군가/ 목타게/ 나를 부르는 소리// 수백개의 촛불로/ 내가 타고 있네
(이해인/ 촛불)
멀리 그리고 찬란하게/ 조그마한 별 하나 하늘에 빛난다/ 우리들 가슴에 흔들리는 황금빛 등불처럼/우리들을 이 어둠에서 건져줄 깃발처럼
(치트 푸미사크/ 희망의 별빛)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온 생애를 불태워버리듯/ 붉게 붉게 타는 나뭇잎들
(김정숙/ 조락)
밤새껏/ 저리도 차갑게 땋아내리던 달빛/새날 거두어/ 겨드랑 밑에 끼고/ 한없는 불씨로 키운다.
(나영자/ 나무는 겨울과 마주서서)
가는 손 끝으로/ 떨리는 가슴으로/ 장작불 지피듯/ 내게 와 꽂히는 불길
(나영자/ 기다리며)
돈이 되지 못하는 시를 쓰고/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는/지나온 숱한 밤의 너처럼/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채어/ 정신의 촛불을 깜박거린다.
(이지엽/ 오봉을 바라보며)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조금씩 꿈을 깨며 철이 드는/ 삶의 발길이 스쳐온 곳마다/ 존재의 가난의 의미를 밝혀주며/끈질기게 타오르던 코콜불마저 사위어
(김성영/ 어둠의 끝, 빛의 시작)
가슴을 태운 불은 익은 왕감 되었을까./ 모닥불 지피어져 화롯불 되던 가슴./ 타올라 하늘의 구들을 노을 노을 달군 불.
(서대/ 생각 1)
비오는 밤을 별처럼 조용히 수놓는/ 저 수많은 창문의 불빛/ 누가 밝힐 것입니까?
(김광규/ 소야곡 2)
푸른 향연이/ 여인의 머리카락처럼/ 솟아오르는 제단 앞에// 나는 한가락 촛불처럼 앉아/ 머언 날을 또 한번 그려본다.
(황금찬/ 통곡)
설 교 노 트
불타는 가시덤불의 교훈
행3:1-12
서론
야곱의 후손 70여 명이 애굽의 고센 땅에 내려가 4백30여 년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히브리 민족의 인구가 증가되었습니다. 여기에 겁을 낸 애굽의 바로 왕은 갖은 압제와 제재를 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압박과 수모를 당하면서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이나 양무리를 지키던 모세는 갑자기 가시덤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하나님은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가시덤불은 훨훨 타고 있었습니다.
이 같은 귀중한 명령을 하시는 하나님은 왜 불타는 가시덤불 사이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는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인간의 방법으로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은 훨훨 타고 있었으나 가시는 타지 않고, 즉 없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모세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타지 않은 가시덤불은 곧 모세의 실상이었다고 봅니다. 모세의 마음속에 찌르는 증오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40세가 되기까지 바로 왕의 궁중에서 호화롭게 자라났습니다. 이스라엘 동족을 돕는 뜻으로 동족을 해하던 애굽 사람을 죽인 일 때문에 도망쳐 간 곳이 미디안 광야인 것입니다. 바로 왕의 궁중에서 세상 학문을 터득하였습니다. 호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동족을 돕는다는 그 결과는 살인으로 끝나버렸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불타는 가시덤불을 통하여 보여주신 내용은 "네 마음에 가시를 뽑아버리라"는 하나님의 교훈인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 쫓겨온 지 40년, 이제 80세가 된 모세에겐 가시가 무엇인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의지의 마음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실 사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타락한 아담과 이브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계속 불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마음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열정입니다. 이 뜨거움이 결국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땅 애굽에서 인간의 고귀한 인권과 자유 그리고 신앙마저 빼앗긴 저들을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뜨거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불타고 있다는 현실적인 의미와 상징이 곧 불타는 가시덤불인 것입니다.
3. "네 마음에 불을 붙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모세가 호렙 산 기슭에서 불타는 가시덤불을 목격한 그때의 나이는 80세입니다. 양떼를 몰고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서서히 찾아 다니던 열정이 없던 모세에게 "네 마음을 불을 붙이라"는 말 없는 교훈으로서 불은 훨훨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80이 된 모세의 마음에는 점점열기가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부름받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음속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무력한 내가 어떻게 바로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올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한 생각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마음에 불이 탔습니다.
"내가 복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육로를 걸어서 배를 타고 파도를 헤치면서 핍박과 멸시, 천대를 받으며 갇히기도 하셨고 곤장에 맞으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그 마음에 불이 붙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로마 성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기까지 선교의 불이 훨훨 타고 있었습니다.
결론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성령께서 불을 붙여주실 줄 믿습니다. 불타는 가시덤불!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현존임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가시를 뽑아 버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뜨겁게 타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복음 전파와 목회의 실제에 불을 붙이라는 명령입니다. 불타는 가시덤불!
오! 성령이여, 지금 여 기에 오셔서 우리들의 마음에 불을 붙여 주시옵소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왕상18:20-40
서론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불로 임재하셨고, 불로 심판하셨으며, 불로 보호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불과 같이 임하셨고, 예수님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였으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때에 불처럼 뜨거워 지므로 새 힘을 얻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불의 역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은 갈멜산의 엘리야 제단의 불은 어떠한 불인가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참과 거짓을 분리하는 불입니다.
여호와가 참 신인지 바알 신이 참 신인지, 여호와의 선지자가 참 선지자인지 바알 선지자가 참 선지자인지 갈라 놓은 불이었습니다. 즉 진짜와 가짜를 분리하는 불입니다. 오늘날은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가짜 애국자, 가짜 신자 등 가짜가 판을 칩니다. 가짜 목사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을 받으면 가짜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2. 응답의 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를 불로 응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본문 24절에서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오순절날 불로 응답하셔서 모두 성령이 충만케 하셨습니다. 오늘날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능력받기를 갈망하는 성도들에게도 불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3. 소멸하고 정화하는 불입니다.
본문 38절에 초자연적인 여호와의 불이 식물성인 나무와 동물성인 번제물과 광물성인 돌과 흙 그리고 물까지 태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불을 받으면 제물과 같은 인간의 혈기도, 나무와 같은 뻣뻣한 교만도,돌과 같은 완고한 고집도, 흙과 같은 사람의 육성도, 물과 같은 인간의 주의와 사상도 바싹타버리고 주 안에서의 새로운 인격으로 정화되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착하고 신실한 성도가 됩니다.
4. 능력의 불입니다.
엘리야 제단에 하나님의 능력이 불로 임했습니다. 현대 교회에도 불이 있는 교회가 있고불이 없는 교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가슴마다 불이 있어야 능력도 생깁니다.
5. 승리의 불입니다.
갈멜산의 승리와 패배는 활로 판가름났습니다. 불로 말미암아 850명의 적들을 기손강속에 장사 지내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불이 없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불을 받은 베드로는 대제사장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불은 마귀를 이기고 죄악을 이기며 세상을 이깁니다.
결론
천국은 교육과 지식으로 가지 못하고 도덕과 수양으로도 가지 못합니다. 오직 죄악으로 가득찬 인간의 육성이 성령의 능력으로 개조함을 받아야 갑니다. 여러분은 엘리야처럼 성령의 불이 충만하여 참고, 거짓을 가르고, 구하는 것을 응답받으며, 인간 육성을 소멸하고, 성령의 권능을 역사하여 나를 이기고 죄악을 이기어 매사에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불같은 성령의 역사
행2:1-4
서론
성령에 역사는 7가지가 있으니 불 같은 역사, 물 같은 역사, 바람 같은 역사, 기름 같은 역사, 기운 같은 역사, 인간 같은 역사, 비둘기 같은 역사 등 다각의 역사들로서 죄인들을 감화하사 자녀로 구원하십니다.
그중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열기가 있는 것이 불입니다.
열기는 열심을 의미하는 것이니 성령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업에, 복음 운동에, 교회 봉사에 냉냉한 태도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2. 광명한 빛이 있는 것이 불입니다.
성령받은 자는 행동이 광명하여 즉 정직하게, 정정 당당하게, 대의 명분이 서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처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전5:5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움의 세계는 불의의 세계요, 죄악의 세계요, 따라서 악마의 세계입니다. 요일1:5에 "하나님은 빛이시라 털끝만치도 어둠이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말하기를 하나님과 사귀었다 하고 어두운데 행하면 곧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놓지 아니 함이러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은 우리도 빛 가운데에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귀고 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 자식의 구별은 빛가운데 사느냐, 어두움에 속하여 사느냐에 판정되는 것입니다.
3. 향상하는 것이 불입니다.
즉 불은 위로 향하여 피는 것입니다.
참 신자는 화염이 하향하는 법 없이 상승함 같이, 위를 향하여 즉 천성을 향하여 전진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4. 전진력 있는 것이 불입니다.
딤후4-7에 "내가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가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전진은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니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는 박해의 역사이나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 죄악사, 악마의 세계에 진출하여 정복하는 승리의 기록입니다. 그리하여 전 세계에 6대주 5대양 방방 곡곡에 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화력의 능력을 강하게 얻어 아직 이 세상에서 활약하는 악마의 잔도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전진 또 전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5. 변화하게 하는 것이 불입니다.
굳은 쌀이 화력으로 변하여 밥이 되는 것처럼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악인이 변하여 선인이 되고, 추한 사람이 정한 사람이 되고,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되고, 무용한 사람이 유용한 존재로 변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나 성령의 도가니에 녹아질 때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이 일단 역사하시면 마귀의 자식이어서 마귀의 종으로 역사하던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사 하나님 뜻을 땅에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6. 화합하게 하는 것이 불입니다.
쇠와 쇠를 고열로 가열하면 용접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합케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에베소서 2장 18-19절에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두 사람이 한 분 령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그런고로 이제부터는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령들과 같은 나랴 사람이요 또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각종의 성격을 가졌으나 뜨거운 성령의 도가니에서 녹아져서 우리 인간의 악성이 제거된 후 예수님의 모형에 찍혀 질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에 유효하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7. 연소하는 것이 불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 스데반의 순교를 위시하여 대박해가 일어날 때 성신을 받은 성도들은 각처로 피난을 가서도 열심히, 과감히 전도한 결과 사마리아, 수리아, 로마 등지에 대교회들이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불이 붙을 때 치면 칠수록 사방으로 퍼지는 것같이, 교회는 박해를 당하면 당할수록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치겠다(고전9:16)"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다(롬1:14)"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받은 자의 전도에 대한 사명감인 것입니다.
8. 위세가 있는 것이 불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아 크게 역사하자 백성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행5:13). 교회는 사회적으로도 위력이 서야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위력을 세우려면 지식, 지위, 수단,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순수한 신앙생활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받아 겸손하고 진실하며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며 모든 덕을 세우면, 교회를 우러러보고 따라서 함부로 침해치 못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그리하여 크게 발전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상과 같이 불같은 성령을 충만히 받아 열심을 가져 광명한 생활을 삼고 위로 향하여 전진하는 생활을 하고 변화함으로써 화합되어 만방에 연소케 하기 위하여 위세가 있는 교회를 건설하는 복음이 역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의 불꽃
행4:19-20
서론
초대 교회 사도들의 폭발적인 힘에 의한 저들의 용기 있는 증거 활동을 볼 수 있습니다.저들의 놀라운 힘, 저들의 놀라운 용기, 과연 그것은 초자연적 인 폭발력 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이 같은 폭발력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이 타도록 이 같은 폭발력의 소생을 갈급하고 있습니다. 여 기 본문에서 그 원천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대조적인 두 그룹
여기서 대조적인 두 그룹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무리들입니다.그들은 돈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습니다. 정치력이 있고, 군대의 힘이 있고, 그리고 조직력이 있습니다. 집단의 힘이 있습니다. 저들은 무엇이나 저들이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초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로마의 세력을 어느 정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아무도 저들을 얕잡아 볼 수 없었습니다.
둘째의 그룹은 아무것도 없는 그룹입니다. 돈도 없고, 권력도 얼고, 정치력도 없고, 군대도 힘도 없고, 통솔자도 없고, 조직도 없고, 집단의 힘도 없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주목하는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저들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두려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들은 무명 인사들이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다만 가슴속에서 타는 불꽃이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통제하고 억압하고 자유자재로 세력을 휘두르는 힘의 그룹이요, 하나는 외부적인 힘은 하나도 없으나 다만 그들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아 의하여 외부적 억압을 뚫고 치솟아 오는 내적 폭발력의 소유 그룹입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이렇게 두 그룹은 상반이요, 대조적입니다.
2. 대조적 두 힘
여기 대조적인 두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외부에서 인간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사로잡으려는 힘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힘은 내부에서 발동하는 힘으로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외적으로 작용하는 힘은 인간적인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군대는 선의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지만 과거 일본 군국주의 하에서 징병으로 끌려갈 때에는 마음속으로 죽어도 싫은 것을 피할래야 피할 도리가 없어서 억지로 끌려갔습니다. 이것은 강제에 의하여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내적인 힘의 발동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자의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애국 애족 운동이 일어납니다. 3 ·1독립 운동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이에 대하여 자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3. 성령의 힘의 작용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오후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져서 다시 용기를 얻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를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사도들과 초대 일곱 집사들과 그 밖에 성도들이 성령이 충만하게 될 때에 저들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그들을 저지시키려는 강한 세력이 많았습니다. 저들을 묶어 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외적 저지 세력이 저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작용하는 힘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같은 외부적 저지 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용기를 얻어 그것을 뚫고 헤치고 나가 힘 있게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힘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 같은 성령의 강한 능력의 작용입니다.
결론
사도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저들은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잡로잡혔습니다. 즉, 저들 속에서는 영혼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불꽃은 아무도 끌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가로막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대로 연속적으로 타오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타오르는 이 영혼의 불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불꽃이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불타 올라야 하겠습니다. 내 맘속에서부터 내 교회, 우리 한반도, 그리고 전아세아, 전 세계에 불타 올라 내 맘과 전 세계에서 지금도 계속되어야 하겠습니다.
불을 붙이는 자 되라
출3:1-8
서론
호렙 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즉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떨기나무 불꽃이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 모세를 불렀을까요? 왜 이런 현상이 목자인 모세에게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모세에게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영광과 위엄에 대한 매우 고상한 개념을 심어주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미래의 사명에 대해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대에 있어서 불은 신성의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불은 여호와의 위엄과 성결과 능력을 상징하며, 적들에게는 공포와 파괴를 가져오고,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빛과 위로와 구원을 가져올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1. 이런 환상은 일상적 직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신비를 만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가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거의 대분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인 일들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위대한 일에 부름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환상은 소심한 사람이나 불안정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주를 위해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이런 환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장인의 양떼를 치는 지극히 평범한 일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 깊었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민족 구원의 계획을 모세를 통해서 구체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성도들이 선교의 불을 붙이는 자, 봉사의 불을 붙이는 자, 기도의 불을 붙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2. 이런 신비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과 연관됩니다.
본문에 보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신비가 광야의 떨기나무와 관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불붙는 가시떨기나무는 상징이 있습니다.
(1)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합니다.
(2) 광야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상태입니다.
(3)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의 각자의 상태이고 성도는 이 세상 어두운 세력에 의해 교육을 받습니다.
이렇게 생활의 떨기나무는 신비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위대한 비밀이며 들을 귀가 있는 영혼들에게는 자유의 메세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보잘것없는 가시 떨기나무에 불과하더라도 하나님의 불이 나와 같이 하신다면 어떠한 환경이나 어떤 핍박이나 어떤 유혹에도 우리를 비밀에 쌓인 생활로, 신비에 쌓인 생활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가시떨기지만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임할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나는 위대하지도 못하고 큰 인물도 아니며 한낱 주민에 불과하지만 성령의 불이 임해서 하나님이 나를 신비의 도구로 삼으시면 무엇이든지 못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3. 이런 신비한 환상은 철저하게 헌신된 사람이 탐구해야만 합니다.
본문에 보면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1) 세상 속된 것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2) 호기심이 아닌 현실입니다.
모세는 결심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3절에 "내가 돌이켜 가서"라고 작정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명령을 순종하고 헌신하려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응답하고 결심하였습니다.
떨기나무 불꽃이 왜 타지 아니하는가 모세는 그 현상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단순한 지식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들의 의미를 탐구해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격을 갖추는 데 절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불렀습니다. 이 부르시는 그 음성은 관찰하고 문의하는 열렬한 탐구자만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들을 성취하는 데 쓰시는 사람을 특별히 계시로서 자격을 갖추어 주십니다. 지금 모세가 부름받은 그 일은 백절 불구의 영웅적인 정신과 자기 희생 능력들을 필요로 합니다.
결론
그는 애굽의 교만한 왕과 싸워야 하는데 그 능력을 어디서 얻어야 합니까?
이러한 인간 정신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에 의지합니다.
마치 나뭇가지의 생동력과 힘이 뿌리와 관련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도덕적인 정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상들이 없이는 무력합니다. 고로 특별한 계시가 필요한 것입니다.
등불을 켜라
출27:20-21
서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양장으로 덮게 하시며 기름을 준비하여서 등불을 끄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등불과 칼이 빛을 발휘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은 어떻게 어디에 켜야 합니까?
1. 순결한 기름으로 켜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깨끗한 생활로 주의 빛을 교회의 등불로 켜서 세상에 비취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5장 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깨끗한 행실로서 주의 등불을 켜서 세상에 비취게 해야 합니다.
2. 하나님 앞에 켜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에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빛된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양심을 따라 생활하였습니다.
주의 등불은 하나님 앞에서 켜야 하며, 그 등불처럼 성도들은 깨끗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영원토록 켜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막을 만들어 놓고 양장으로 겹겹이 덮어 놓았기 때문에 등불을 켜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등불은 항상 켜놓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규례는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규례라고 하였으니 영원토록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시한을 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만드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사43:7).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말씀하시길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만들어 놓고 양장으로 덮고 그 속에 등불을 켜서 항상 환하게밝혀 놓은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주의 등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불 가 능
성 경 활 용
1. 자연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들
(1) 사람의 피부색을 바꿀 수 없음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2) 염려함으로 키를 크게 하는 것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
(3) 혀를 길들이는 것
(약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것이라
(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는 것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5)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를 동시에 맺음
(마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2. 영적 생활에서 불가능한 것
(1) 하나님께서 악을 묵과하시는 것
(합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2) 하나님께 거짓말하시는 것
(딛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하나님 손에서 성도를 빼앗는 것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4) 하나님께 자신을 부인하시는 것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리라
(5) 하나님께서 불의하게 되는 것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6) 하나님께서 악에게 시험받는 것
(약1:13)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관련원어풀이
1. hl;ylij; 할리라-흐
불가하다.
(창18:25)
설교예화자료
고양이 방울
어떤 집에 쥐와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쥐들은 고양이가 무서워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놈의 고양이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무슨 수를 써야지 이대로 있다간 굶어 죽고 말겠어 ."
"맞아. 우리 모두 모여 무슨 좋은 방법이 없나 회의를 하자."
"그래, 그렇게 하자."
그래서 쥐들은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그다지 마땅한 의견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머리를 짜매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제일 꾀가 많은 쥐가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로 합시다. 그 방울 소리를 듣고 재빨리 몸을 피한다면 우리들이 고양이한테 잡히는 불행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와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
마땅한 의견이 없어 고민하던 쥐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쥐들은 이제 마음놓고 이곳 저곳 설치고 다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점잖은 늙은 쥐가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그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습니까? "
그러자 박수를 치며 기뻐 날뛰던 쥐들은 금방 조용해졌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는 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몹시 배가 고픈 개들이 함께 먹을 것을 찾아 넓은 강가로 나왔습니다.
그때 한 개가 소리쳤습니다.
"야, 저기 먹음직스런 게 있다!"
"어디, 어디에 !"
개들은 모두 소리친 개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저쪽 강 한가운데 서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죽어 떠내려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 맛있겠다!"
"그렇지만 강물이 이렇게 깊은데 어떻게 저 고기를 건져오지?"
개들은 다시 풀이 죽어 떠내려오는 먹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
그때 한 개가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빨리 말해. 그게 뭔데?"
옆에 있던 개들이 재촉했습니다.
"뭐냐면, 이 강물이 줄어들 때까지 우리가 마신 다음에 저 고기를 건져 오면 되잖아."
"좋아, 그렇게 하자."
개들은 고기를 빨리 먹고 싶은 욕심에 입을 크게 벌리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마셔도 강물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개들은 마침내 물을 너무 많이 마셔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 뒤로 자빠진 채 헐떡거리게 되었습니다.
어록·시·묘사
성취가 불가능한 일에 매혹되는 것은 영혼의 질병이다.
(비아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의 비아스)
끝나 버리기 전에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키케로/ 투스쿨라나루스 논총)
자신 없는 가능성보다는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것이 차라리 언제나 더 낫다.
(아리스토텔리스/ 시학)
어려운 것은 즉시 하고, 불가능한 것은 좀 시간이 걸린다.
(미 공군의 슬로건)
일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T. 풀러/ 금언집)
그러나 우리에겐 개연성이 바로 인생의 안내자이다.
(J. 버틀러 주교/ 종교의 유추)
그 불가능이라는 낱말은 행운의 단어는 아니다. 이 말을 자주 입 밖에 내는 자들한테서는바람직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
(칼라일/ 프랑스 혁명)
불가능이란, 내가 결코 말하지 않는 단어다.
(C. 다롤레비유/ 악은 악으로)
근면에 불가능은 없다.
(영국 속담)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 너는 나에게 써 보냈지? 그 말은 프랑스어가 아니다.
(나폴레옹/ 르마르와 장군에게 보낸 편지)
꿈과 사랑에 있어서 불가능이란 없다.
(불가리아 속담)
사랑이 있는 곳에 불가능이 가능이 된다.
(타밀족 속담)
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자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미라보/ 에머슨 수필집)
이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자신부터 그렇게 믿고 착수하는 것은 그것을 자기로부터 못하게 하는 수단이다.
(J. 워너메이커)
네가 숙달하기 어려운 것이라 해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지 말라.그러나 만약 인간에게 가능하고 알맞는 것이라면 너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겁쟁이와 망설이는 자에겐,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스코트/ 로브 로이)
모든 것은 그것이 불가능함이 증명될 때까지는 가능하다. - 그리고 그 불가능성도 지금 현재로만 증명되는 건지 모른다.
(P.S. 벅/ 건너는 다리)
회복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심로해 봐야 치료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될 뿐이다.
(W. 셰익스피어/ 헨리 6세 제1부)
모기 대가리에 골을 내랴. <* 모기의 머릿골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불가능한 일을 하라는 경우에 하는 말>
(한국 속담)
고추나무에 그네를 뛰고 잣 껍질로 배를 만들어 타겠다. <*불가능한 잔꾀를 부리는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
(한국 속담)
금강산 상상봉에 물 밀어 배 띄워 평지되거든. <*전혀 실현될 가망이 없음을 이르는 말>
(한국 속담)
불가능한 것을 시도해야 할 의무는 없다.
(셀서스/ 알레데스 로고스)
불가능한 것은 기대하지 말라.
(T. 풀러/ 신성불경)
간장이 시고 소금이 곰팡난다. <*절대 불가능함을 이름>
(한국 속담)
암돼지 귀로는 결코 공단 지갑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J. 하우얼/ 영국 격언집)
곤 달걀 꼬끼요 울거든. < * 다 썩은 달걀이 병아리로 살아나 자라서 꼬끼요 하고 홰를 치거들이라는 말이니, 도저히 이를 가망이 없는 일에 비유함>
(한국 속담)
비로 바다를 쓴다.
(영국 속담)
사랑하는 것과 현명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F. 베이컨/ 수필집)
감자밭에서 바늘을 찾는다. <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 헛수고한다는 뜻>
(한국 속담)
네모진 구멍에 둥근 마개, 둥근 구멍에 네모진 마개.
(영국 속담)
만일에 젊은이가 사물을 알고 늙은이가 능력을 갖춘다면 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 속담)
어차피 불가능할 것이라면 꿈이라도 찬란하게 꾸자.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설 교 노 트
낙오자의 재기
행3:1-10
서론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낙오자 한 사람을 찾아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앉은뱅이로 태어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왔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달리 보행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고정된 장소에서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받아 생명을 이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정을 받는 장소를 예루살렘 성전 미문이라는 문전으로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장소이기 때문이고, 다음은 성전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은 동정심이 많아서 잘 도와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면서 앉은뱅이로 태어난 비극적인 낙오자가 어떻게 재기하게 되었는지 잠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낙오자가 된 원인
그 원인은 첫째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데 있습니다. 그는 비관 속에서 매일매일 죽지못해 살면서 아무런 삶의 빛로 희망도 의욕도 없이,절망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활동의 자유가 없고, 모든 사람의 멸시의 대상이 되며, 희열을 상실하여 우울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둘째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가난은 불안하게 하고, 피곤한 중에 곤고하게 하며, 춥고 주리고 목마른 생활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배우지 못한 무식입니다. 이처럼 배우지 못한 인생의 살은 항상 위축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게 되며, 의존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활이 제대로 되기가 불가능한 낙오자가 어떻게 재기하게 되었습니까?
2. 낙오자가 재기한 비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인간의 슬기나 기능이나 방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환경에서 그는 어떻게 재기하였습니까?
(1) 그가 성전 미문을 찾아온 데 있습니다.
그가 극장이나, 시장이나, 학교 문을 채택하지 아니하고, 성전을 찾아왔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찾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자기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심정에서였다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동정과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는 어떤 물질적인 동정보다도 정신적인 동정 즉 신앙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2) 위대한 주님의 사도들을 만난 데 있습니다.
그는 성전으로 기도하러 오는 두 사도를 만나 동정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도는 베드로와 요한인데, 주님께 부름받아 3년 동안이나 구령 운동에 헌신했고, 주님의 증인으로서 성령의 권능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물리적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었으나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소유하고 역사하는 위대한 사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재기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도는 외치기를 "나에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하실 매 일어났습니다. 마1:21에 이 이름은 나시기 전에 지은 이름으로서 구원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주시는 위대한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름은 첫째,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고 둘째, 고통하는 자에게 평강을 주시고 셋째, 병든 자를 치료하여 주십니다.
결론
앉은뱅이가 아무전 물리적인 힘이 없이 일어선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큰 믿음을 소유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 만
성 경 활 용
1. 불만하는 사람들
(1) 거짓 선지자들이 불만을 토함
(유1: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2) 요나가 하나님께 불만함
(욘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되
(3) 사울이 다윗에 대해 불만스러워함
(삼상18:8)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4) 하만이 모르드개 보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함
(에5:13)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귈 문에 앉은 것을 ‥‥ 만족하지 아니하도다
관련원어풀이
1. memyivmoiro" 멤프시모이로스
흠을 잡거나 자기 몫에 불평하는 사람, 불만이 있고 투덜거리는 사람.
(유1:16)
설교예화자료
당나귀와 주인들
나무 장사 밑에서 일을 하는 몹시 게으른 당나귀가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하루 종일 높은 산을 오르내리며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게으른 당나귀는 그 일이 귀찮고 힘들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일이 너무도 싫습니다. 그러니 다른 주인을 만나 일하게 하여 주십시오. 이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좋겠습니다. "
하나님이 이 소원을 들어주시기라도 하였는지 며칠 후 당나귀는 도자기 상인에게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야! 이젠 좀 편히 지낼 수 있겠구나."
당나귀는 신이 나서 새로운 주인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실상 도자기 상인의 일은 나무장사의 일보다 더욱 힘든 것이었습니다. 나무보다 훨씬 무거운 도자기를 지고 장이 서는 곳을 찾아 날마다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나귀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다른 주인에게 보내주십시오. 주인은 저에게 먹이도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힘든 일만 시킵니다. 잘못하여 도자기를 깨는 날에는 회초리로 때리곤 합니다. "
얼마 후 당나귀는 또다시 다른 주인에게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인은 가죽 공장을 하는 사람으로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사나운 사람이었습니다.
당나귀는 날마다 나무나 도자기보다 훨씬 무겁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가죽을 운반해야 하였습니다. 또한 조금만 게으름을 피워도 가죽 채찍으로 사정없이 얻어맞아야 했습니다.
당나귀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습니다.
"나는 정말 어리석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 주인을 불평없이 잘 섬겼어야 했는데‥‥그때 부지런히 일했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신세가 되지는 않았겠지, 나는 이제 뼈가 휘어지도록 일을 하다 결국 마지막에는 이 주인의 손에 의해 가죽까지 벗겨지겠구나."
하나님이 아시면 그것으로 족하다
소설가 A. J. 크로닌(A. J. Cromin) 박사가 작은 웨일즈의 광산촌에서 내과 의사로 있을 때, 그는 훌륭한 간호원과 같이 일하였습니다.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간호원 올리븐 데이비스(0liven Davies)는 능력과 인내심과 명랑함을 지니고 지역인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녀의 친구인 그 의사는 그녀의 헌신적인 일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봉급에 항의를 표시하였습니다.
특별히 힘든 일이 끝난 늦은 저녁, 차를 같이 마시며 나는 감히 그녀에게 항의해 보았습니다. 내가 말하였습니다. "간호원, 왜 당신은 보다 많은 급료를 받으려 하지 않소? 그렇게조금 받고 일한다는 것이 이상스럽소." 그녀는 약간 눈썹을 지켜 올렸습니다. 그러나 웃으며말하였습니다. "나는 살아가기에 충분할 만큼 받고 있어요", "아니오, 당신은 적어도 일주일에 1파운드는 더 받아야 해요. 당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하나님은 아실거요." 잠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길은 나를 놀라게 할 진지함과 강렬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하였습니다. "의사 선생님,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나님이 아신다면 그것만이 정말 중요한 것이예요!"
만족을 모르는 인간
콩글렌톤 경은 어느 날 아침 부엌문 앞을 지나다가 요리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아이참, 5파운드만 내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콩글랜드 경은 죽은 사람 소원도 풀어 주는데 이 여자 원을 못 풀어주랴 싶어 그 요리사에게 5파운드 지폐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수다스럽게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경은 부엌을 지나 문 밖에 서서 이 여자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나 보려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요리사는 경의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후회했습니다.
"내가 왜 10파운드란 말을 하지 않았지."
인간의 마음은 마치 언제나 만족을 모르는 말거머리같이 한사코 "좀더! 좀더‥‥‥라고 할 뿐입니다.
어록·시·묘사
불만은 결핍에서 오는 것보다 욕망에서 생기는 일이 많다.
(영국 속담)
불만은 비교에서 비롯된다. 보다 더 좋은 상태가 안 보이면 각자는 자기 것을 좋아하련만.
(J. 노리스/ 위안)
인간의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불만으로 해서, 자기를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B.A.W 러셀)
많은 것을 탐내는 자는 항상 많은 불만을 갖는다. 신이 베푸는 아주 적은 것으로써 충분히 만족하는 자는 행복하다.
(호라티우스/ 칼미나)
족함을 아는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어도 편하고 즐거움이 되지만, 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비록 천당에 있어도 그 뜻에 맞지 않는다.
(불유교경)
모든 악은 각기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악을 또 하나의 다른 악으로 발전한다. 조그마한 불만이 질투로 발전하고, 질투는 또한 남을 해하고 모함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남을 해코자 하니 거짓말을 하게 되고 흥분하여 폭력 행위로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깃드는 하나의 불만을 잘라 없애는 것은 큰 악의 뿌리를 뽑는 것이 된다. 늘 조그마한 불만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B. A.W. 러셀)
사회에 대해서 큰소리로 불평하는 자가, 그 사회의 복지를 위해서 가장 많이 심려하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반적인 잘못이다.
(E. 버크/ 「국가의 현상」에 관한 비평)
증오는 적극적인 불만이며, 질투는 소극적인 불만이다. 따라서 질투가 곧 증오로 변해도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J.W. 괴테/ 격언과 반성)
대개의 인간은 운명에 대하여 과대한 요구를 하기 때문에 불만을 갖게 된다.
(A. 훔볼트)
불만족은 자기 의존의 결핍이며, 의지의 쇠약이다.
(R. W.에머슨/ 수필집)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자들의 불만족한 상태이다.
(T. 브라운 경/ 어느 친구에게)
사람의 불만은 가장 나쁜 악이다.
(G. 허버트/ 명궁)
매일매일 새로운 불만이 생긴다는 것은 결코 성실한 상태가 아니다.
(J.W 괴테/ 격언과 반성)
무릇 내면적인 불만이라는 것은 사람의 감성에서나 혹은 이기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C. 힐티)
불만은 생활에 독을 섞는다. 인종(怨從)은 생활에 시취(誇趣)와 준엄한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
(H. 아미엘)
인간이 만약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느낄진 땐, 전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을지라도 인간은 불행할 것이다.
(L. A. 세네카)
침묵은 만족의 표시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사실 침묵 속엔 온갖 거부와 반항과 불만이 가득하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거의 불평하지 않은 자는 복수를 계획한다.
(드라이든/ 앱설럼과 아티토펠)
선 떡 받듯 한다. <*마음에 흡족하지 않거나 못 마땅해 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
(한국 속담)
식혜 먹은 고양이 상 같다. < *잔뜩 찌푸린 얼굴을 이른 말>
(한국 속담)
왕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신하라면 큰 일을 의논해도 좋을 것이다. 왕이 자기의 속셈을 털어놓으면 이 신하도 왕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왕에게 상소할 자료를 주게 되는 것이다.
(N. 마키아벨리/ 로마 사론)
국민이 불평불만을 멈추면, 국민은 사고를 멈춘다.
(나폴레옹/ 어록)
불만은, 개인이나 국가가 발전하는 첫걸음이다.
(0. 와일드/ 하찮은 여인)
불평처럼 투덜거리는/ 낡은 엔진 위에/ 선물과 화제/ 더러는 맨주먹과 설득을
(민재식/ 불협화음)
대자 한 치 오 푼 키에 두 치가 모자라는/ 불만이 있다.
(노천명/ 자화상)
불만도 만족도/ 넘어선 곳에/ 그는 있다. //기쁨도 슬픔도/ 넘어선 곳에/ 그는 웃고 있다.
(하오주/ 천치의 노래)
왜 나무는 푸르러 눈부신 흰 살을/ 다 찢기고도/ 불평 한마디 없이/ 저리도 온몸에 불당기며/ 아낌없이 타오를 수 있는 걸까.
(조미나/ 장작불을 지피면서)
죽장에 불만 싣고 비바람을 쐬어가며/ 고뇌의 보따리를 등짐처럼 짊어지고/ 떨어진 먹물장삼에 백팔염주 굴려본다.
(원용문/ 매월당 김시습)
본래 높기 때문에 배 부르기는 어려워,/ 공연히 불평불만으로 우느라고 애쓴다.
(이상은/ 매미)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끊임없이 불평하고 있는 제자에게 스승이 말했다. // 네가 바라는 것이 평화라면, 다른 사람을 고치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달라져라./온 세상에 융단을 깔기보다는 슬리퍼를 신고서 네 발을 보호하는 것이 더 쉽다.
(앤소니 드 멜로/ 달라짐)
설 교 노 트
기이한 불만
욘4:1-4
서론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증가하고 그들의 수고가 결실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니느웨는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고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범죄한 그 성음에 베풀어지는 것을 보고 전혀 다른 마음을 갖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죄는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가장 극심한 징계를 당하는 사람들 속에 잠복해 있습니다.
(1) 불만이 많은 사람은 그의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지 않습니다.
(2) 불만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을 반대합니다.
요나의 기이한 불만을 살펴봅시다.
1. 요나는 자신의 고국의 안녕을 인류의 이익보다 우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며 애국자입니다. 그는 니느웨 백성들보다 자신의 백성들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한 나라 이외에 다른 나라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그의 나라를 위협했던 가장 큰 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동일한 생각을 품고 그들의 종파나 신조를 우상화합니다. 요나의 죄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일반적인 죄입니다. 이러한 죄는 세상적인 애국심과 교회의 완고한 신앙 가운데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들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을 거절하면서도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2. 요나는 하나님께서 다른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에 대해서 불평합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요나를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높이 들어 올려졌어도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불만을 품고 불평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 관한 모든 일에 대해서 불평하고 화를 냅니다.
3. 요나는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변명하려고 하는 그가 다시스로 도망간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성급하였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앞지르려고 하였으며,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합리화는 그 얼마나 어리석고 불경한 행위입니까? 왜 우리는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에 있는 악을 버리며 수치스러워해야 합니까?
진정한 회개자는 자기를 감추고 그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더욱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그 무엇도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자비를 베푸시리라는 믿음이 없었더라면, 첫번째 위임에 순종했을 것이라고 요나는 하나님께 말합니다.
인간들이 그들이 올바로 행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망각되어야 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미 징계를 받았던 죄를 상기할 때, 그들은 무지, 교만 및 자기 기만을 드러냅니다.
4. 그는 삶 자체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재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3절) "
이 말은 바울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건한 열망이 아니라, 토라져서 불만에 가득찬 성급한 소원입니다(눅2:29, 고전 5:1-3, 빌1:18-23). 그러나 이러한 성급한 간구 가운데서 요나는 홀로 서 있지 않았습니다. 일에 있어서의 실패, 사랑에 있어서의 절망, 친구들의 간계 및 난처하게 하는 섭리가 하늘을 구름으로 뒤덮고 영혼을 슬픔으로 억압합니다. 모세와 엘리야, 욥과 예레미야는 이러한 열망에 대한 시험이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조차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인간들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 죽음을 위해 기도합니다. 만일 생명이 절실히 귀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열망은 우리의 최고의 애정을 냉담하게 만들고 가장 저급한 관심을 가슴에 간직하게 만듭니다.
결론
하나님의 계획은 요나의 계획보다 더 훌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불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 것에 대한 배은 망덕한 행위입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인자한 마음을 갖게 해야 하며, 그들의 회개를 보고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못들어간 이유
민14:20-38
서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고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이십세 이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왜 그렇게 되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2-23절에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를 멸시한 그들은 절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그의 말씀을 명시하는 것입니다(잠13:13).
하나님의 말씀은 늘 청종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로 약속한 것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였으니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2. 원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27-30절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살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원망은 망할 징조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원망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고전10:10).
항상 원망과 불평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길이 평탄하지 못합니다. 사람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원망하여도 그 죄값을 받을 것인데 하나님께 대하여 그러한 사람의 결과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3. 악평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6-37절에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이 세상이라고 비유한다면 가나안은 천국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가나안에 대하여 악평했으니 천국에 대하여 악평한 것이나 다른 바가 없습니다. 사탄은 천국에 대한 성도들의 소망을 악평으로 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악평에 믿음을 저버려서도 안될 것입니다. 여하간 가나안에 대하여 악평한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결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할 그들이 그의 인도는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원망하며 악평 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즉, 죄악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민14:33)"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
민21:4-9
서론
원망은 감사할 줄 모르고 인격이 수양되지 못한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먹고 마시고 굶주리지 아니 하고 광야에서도 생명을 지켜주셨지만 그들은 감사 대신에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려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원망의 결과는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1. 원망의 동기가 불순하였습니다.
본문 5절에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원망의 내용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가게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여 광야에서 굶어 죽지 아니하도록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서 먹이시는데 그것을 싫어한다고 하면서 원망입니다. 어처구니없는 불평이요, 원망입니다. 그리고 그 원망의 대상자가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였습니다. 이는 배은망덕도 정도 차이입니다. 이와 같은 자들을 어찌 그냥 둘 수 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무서운 징계를 자초한 것입니다.
2. 원망한 결과는 징계 뿐이었습니다.
본문 6절에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하였습니다. 불뱀은 반점이 있으며 한 번 물리면 몸에서 불같은 뜨거운 열이 난다고 해서 불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막에는 그와 같은 불뱀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이 극에 달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뱀이 사람을 물지 않았는데 원망이 정도에 지나치니까 그 뱀이 사람을 물어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뱀이 무엇을 알아서 물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뱀을 시켜서 원망하는 사람들을 벌하신 것뿐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땅이 저주를 받게 하셔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하였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에도 같은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벌하실 매는 자연물을 가지고도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알 것은 원망한 결과는 죽음만 있을 뿐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3. 원망의 무익함을 깨달았습니다.
본문 7-9절에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게 물려서 죽는 것을 보고난 후에 살아남은 자들은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불행 중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회개가 간절하지 못하고 우선 하나님의 진노부터 벗어보자는 속셈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듭 원망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회개는 완전하게 돌아서는 결단성이 있는 것입니다. 여하간 이들은 원망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고 유익이 없음도 깨달았지만 완전히 회개치 아니하여 그 후로도 원망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결론
원망은 사탄의 역사요, 믿음 없는 자들의 전용물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는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모하게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죽는 무서운 징계를 받아 약간 깨닫는 듯 했으나 완전히 깨닫지 못하여 결국 망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한 일을 거울로 삼아 삼가 조심하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고전10:10-11).그리고 원망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자들은 놋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 용서받고 살아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불펑
출16:1-3
서론
여기서 우리는 기쁨에 찬 휴식의 장소인 엘림과 준엄한 율법의 장소인 시내 광야 사이의 매우 중대하고도 흥미로운 여정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이 여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많은 불평과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로 정철되어 있습니다. 본문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불평을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린 이후에 곧바로 불평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성한 물과 70그루의 야자수가 있는 엘림을 떠나자마자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불평을 토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장 풍성한 은총이 주어진 이후에 곧바로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불만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들 지도자들에 의해서도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들의 장로들은 그들과 함께 모세에게 불평을 토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에게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말아야 했었습니다.
가장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들 마저도 때때로 일상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죄에 빠지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저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불만의 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의 불평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에서는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만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우리 불평과 불만에 대하여 때로는 진노의 외침으로, 때로는 동정과 자비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평을 얼마나 자비롭게 참으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은 크게 봉사하고 있는 자들에게 불평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두 종들에게 불평을 토로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두 종들은 바로 얼마 전에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이끌어 내어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그들은 이를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목회자들은 불평을 토로하는 회중들과 종종 다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기쁘고 즐거운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나중에 불평과 불만으로 인하여 슬픔으로 전환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자신의 회심을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여기고 이를 기뻐하지만 그들에게 광야의 어려움들이 닥칠 때,그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준 진실에 대하여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유를 준 자들에 대하여 종종 불평을 토로합니다.
불만을 지닌 사람들은 불평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종종 불평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종종 불평을 토로하며, 마치 그들을 도와주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불행한 분위기 가운데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불평의 대상자들의 약점을 들추어 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불평과 불만을 통하여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참된 친구들을 알지 못합니다.
3. 사람들은 불평함으로써 결코 일어나지 않을 악들을 예기합니다.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3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에서 결국은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을 파멸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시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심할 때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빛 안에서 성도들의 유업을 물려받게 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그들의 죄 가운데 파멸하게끔 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소망'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그들이 시련을 당할 때에 소망을 지녔어차만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영적인 삶에 대하여 소망을 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들에 대하여 불평을 토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결코 닥치지 않을 해악들을 애기하고 있습니다. 불평하는 정신은 그 삶을 가공적인 악들로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것은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운 정원에 무덤을 파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 삶에 수반되는 슬픔을 불평하지 말고, 기쁨을 더 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영적인 삶을 도와주는 자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말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생활을 하여 불평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불 신 자
성 경 활 용
1. 불신자에 대한 일반적인 고찰
(1) 정죄 받는다.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2) 성도와의 교제가 금지되어 있다.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3) 양심이 더럽다.
(딛1:15)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4) 권함을 받지 않는다.
(눅22:67)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5) 영적으로 무지하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6) 열매없는 어둠의 일을 한다
(엡5:11) 너희는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7)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다.
(시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8)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
(요일5:10)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 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2.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1) 영원히 잊지 아니하심
(암8: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2) 그 행위대로 보응하심
(잠24:12) 너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관련원어플이
1. a[pisto" 아-피스토스
(1) 불신실한, 충실치 못한, 믿음이 없는
(눅12:46, 계21:8)
(2) 믿을 수 없는, 믿어지지 않는.
(행26:8)
(3) 믿지 않는, 의심하는.
(요20:27)
설교예화자료
다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의 목회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병고침을 받은 분들이 가장 위험한 때는 병고침을 받고일 년이 조금 지났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셨다는 확신을 잊고 아프고 고통스럽던 과거를 돌아보면, '다시 재발하면 어떻게 할까'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면 반드시 마귀는 그 틈을 타서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 침입합니다. 이러므로우리는 귀신이 쫓겨나간 빈 마음속을 공허하게 비워두지 말고,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악한 귀신이 다시는 범죄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며 생각과 말과 뜻과 행실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립시다.
"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자유'라는 이름의 마을
여러 해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미주리에 마을을 세우고는, 그 이름을 '자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 '자유로운' 나머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조차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인기있는 문학 작품중에는 항상 이러한 자부심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교회, 목사님, 설교자, 하나님, 지옥, 혹은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라는. 그러나 엘더 클라크 브레 이든(El-der Clark Braden)은 포스트 디스패치(PostDispatch) 지에다 이렇게 기고하였습니다. "그 마을에는 지옥과 악마와 다를 바 없는 것들이 존재합니다. 즉, 그곳은 죄악의 소굴이며, 그 호텔들은 갈보집에 불과합니다. 그 마을에서는 미덕이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
이 기사는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브레이든은 명예 훼손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또한, 포스트 디스패치지는 25만 달러의 손해배상 청구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소자측이 모든 증거를 제출한 후 피고측 반증이 나오지 않자, 배심원의 심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심리에서 브레이든은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또한, 손해배상 청구재판도, 원고측이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하에 취하되었습니다.
'자유' 마을은 실패작이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 이사해서 뭔가 이득을 보려고 했던, 진짜 무신론자들까지도 혐오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무신론적인 견해를 도도히 펼쳐 보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또한 그 집단도 무신론적 견해를 고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론 그 자체로서 사회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
"이것 보세요, 하나님‥‥‥‥
"이 것 좀 보세요, 하나님. 그건 이렇습니다. 만일 주일이 다른 어느 때에 온다면 우리는보다 성실하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께서는 고된 일주일의 맨끝 날, 우리가 모두 지쳐 쓰러져 버리는 날을 택하셨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토요일 밤의 바로 다음날이란 말씀이에요. 그런데 토요일 밤은 우리 모두 밖으로 나가서 즐기고 싶은 때란 겁니다. 우리가 집에 돌아오면 한밤중일 때도 종종 있어서 일요일 아침에 일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정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침 신문 읽는 시간이 가장 긴, 바로 그날을 택하셨다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일주일 가운데 가장 성대한 식탁을 마련해야 하는 날이지요. 우리는 교회에 가고 싶어하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적당치 못한 날을 선택해 버리셨단 말이에요."
무신론과 후손들
한 무신론자가 기독교에 대한 경멸을 담은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은 모두 다 비정상인이었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다리 불구로 태어나거나, 흑은 후에 병이 들어서 불구가 되었습니다. 몇 아이들은 저능아였으며, 손자들 중 몇 명도 이런 식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그의 모든 후손들은 다 까다로웠습니다. 그들 모두는 우울증으로 고생하였으며, 모두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그의 한 손녀로부터 들은 것입니다 불신앙과 우상숭배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적된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을 의 미합니다. 그리고 이 사악한 세력들은 그 사람의 생에 손을 뻗쳐서 그 사악한 세력들 자신의 힘을 드러내게 됩니다.
어록·시·묘사
내가 크게 싫어하는 것이 세상에 둘이 있다. 학자로서 신을 믿지 않는 자와, 무지로 미신에 빠져 있는 자, 이것이다.
(마호메트)
무신론은 영혼의 자살이다.
(푸산치)
무신론자는 하느님도 종교도 부정하지 않고, 또한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일조차도 없다.
(J. 라 브뤼예르/ 사람은 가지가지)
밤이 되면 무신론자의 반수가 신을 믿게 된다.
(E.영/ 밤의 수상)
다만 날씨가 좋은 날만은 무신론자가 되는 사람이 있다.
(영국 속담)
무신론자란 오직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뿐이다.
(B.S. 라즈니시/ 마음으로 가는 길)
현상밖에는 볼 수 없다는 무신론도 독신(篤信)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 무신론도 그 순교자의 시를 뿌린 이상 성자의 수확을 거둬야 하고, 날마다 신이 인간으로부터 몸을 숨긴걸 찬양해야 된다.
(0.F.0.W. 와일드/ 옥중기)
무신론자의 용기의 원천은 유물론이다.
(강원용/ 용기의 원천)
1인용 참호에 무신론자는 없다. <*바탄의 야외에서 한 설교>
(E. F. 커밍스)
인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의 무신론은 그 마지막까지 죄어들어 가면 우습게 되고 만다.
(C.K.D. 패모어/ 정서적 예술)
모든 신앙에 있는 특징은, 불신앙을 물리치는 점이다.
(K. 야스퍼스/ 마르크스 비판)
세상에는 신도 얼고 악마도 없다. 만약 신이 있다면 나는 공정하지 못하고 불의(不義) 투성인 대성당에 벼락을 내려 주십사고 기도할 것이요, 만약 악마가 있다면 나는 대성당을 지옥의 화염 속에 빠뜨려 버리라고 기도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신도 없고 또 악마도 없으니 지금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 이 독실한 수사는 어느 한 설교에서 무신론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 이단자는 혀를 잘리고 목을 베인 채 불에 타죽은 것이다.>
(L. 바니니)
세상에는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기를 싫어하면서도 삶을 평개칠 힘조차 없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족속이야말로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R. 마르탱 뒤 가르/ 티보가의 사람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신랄한 논조를 쓴 책은 많이 있습니다. 악마의 존재를 깨끗이 부정한 무신론자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W. 크리스트)
믿는 것은 의심하는 것보다 낫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고서는 깊이 믿을 수가 없다. 회의는 신앙을 위해 필요하다.
(우치무라 칸조오/ 소감십년)
의심은 천한 영혼들의 친구요, 좋은 교제의 독이다.
(T. 페인/ 자유의 나무)
무종교 ‥‥세계 속의 위대한 신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이다.
(A.G. 비어스/ 악마의 사전)
나의 무신론은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우주에 대한 진정한 신념이며 다만 인간들이 자기들의 형상에 따라 그들의 인간적 이해관계의 노예가 되도록 만든 신들을 부정할 뿐이다.
(G. 산타야나/ 영국에서의 독백)
의혹은 불신이 뒤따른다.
(레싱/ 현자 나탄)
믿지 못할 세 가지가 있으니, 눈물짓는 여자, 맹세하는 장사꾼, 기도드리는 주정뱅이다.
(B. 리치/ 내 부인의 면경)
너무나 잘 믿어 버리는 것보다는 의심이 많은 편이 낫다.
(R.G. 잉거솔/ 인간개조법)
의심하는 것은 확신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
(P. 매신저/ 틀림없는 여자)
적당한 의구심은 현자의 표식이다.
(W. 셰익스피어/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인간의 가장 가치 있는 특징은, 믿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한 분별있는 감각이다.
(에우리피데스/ 헬레나)
내 속에는 신이 없다고/ 그것은 아마 참말일 것이다/ 나에겐 신을 둘 장소가 없다/ 나는 사원이 아니고/ 나 자신이 신이기 때문에.
(村野四郎/ 무신론)
월리엄 제임즈는 '믿으려는 마음'을 가지라고 설교하곤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의심하려는 마음'을 가지라고 부르짖고 싶다.… .'필요한 것은 믿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찾아내려는 소원이다.
(B. 러셀/ 회의적 수필)
회의론자란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해 보는 사람이다.
(생트 뵈브)
의심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도달한다.
(키케로)
회의(懷疑)는 지혜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다.
(G. 아일즈/ 수상록)
신들이 당신을 믿는 신자들에게 채찍을 들었을 때,/ 나는 말했다, 우리 모두가 무신론자가 되자고./ 머리를 숙이면서 아버지는 대답했다/ 욥은 고통과의 대화를 통해/ 미물과 구름의 창조주에게 항상 감사했느니라.
(마흐무드 다르웨시/ 나의 아버지)
설 교 노 트
역시 믿지 아니하리라
막16:13
서론
예수님의 수난도 역사적 대사건이지만 부활하신 사실은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일 뿐 아니라 많은 문제성들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역력한 역사적인 사실들로 드러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여러 번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는 자도 있었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역시 믿지 아니하리라"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1. 믿지 아니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일리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것은 오랜 역사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엄연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유독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수를 믿은 사람만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만고의 의문스러운 문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하셨던 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가지고 사는 인간들은 심지어는 직접 이러한 사실을 예고받은 제자들조차 믿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저 인간의 양식대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분명히 살아나셨습니다.
2. 믿어야 할 터인데도 믿지 아니 했습니다.
본서에 나타난 대로만 보더라도 첫 번으로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와서 이 일을 고하였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9-11절).
그후에 저희 중에 두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나 역시 믿지 아니하였습니다(12-13절).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이 믿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14절).
3.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부족한 제자들이지만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분부하시면서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연 너무나도 믿기 쉬운 현실이었습니다. 완악한 마음과 의심하는 마음이 다 풀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시고,가르쳐 주시고, 권면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으면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 중에도 겉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그 중심에서는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불신자인 것입니다.
도마는 보고서 믿겠다고 하다가 책망을 받았지만 보고서도 아니 믿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함
시14:1
서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어리석은 인간들의 생각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 인간의 초보적인 지식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나,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자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것은 다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계심을 안다고 하면 그는 지혜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모른다면 그는 아직 참 지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학 졸업을 하였거나, 석 박사의 명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모르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음을 받은 인간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를 모른다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2. 하나님이 없다는 마음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인간을 손수 창조하셨습니다. 흙으로 육체를 만들고 거룩한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니 생령이 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되는 인간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없다고 그 마음에 생각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이상할 정도로 변태적인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빛되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등지고 사는 사람은 어두움에 속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없다고까지 단정하였습니다.
3. 무신론자의 불행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무신론을 주장한 개인이나 단체나 무신론 사상을 정치 기반으로 삼은 나라는 다 불행해지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철학자인 니체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기독교의 사랑의 도덕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물학자 다윈의 '적자생존'의 사상을 사회 생활에 활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그 자신이 정신병자가 되어서 비참한 운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어리석은 고집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날 공산주의 정치체계의 국가들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국가는 하나님을잘 섬기는 나라들에 비교하면 점점 쇠멸 상태에 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론
자식의 입장에서 자기를 낳아서 키워주신 부모님이 없다고 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같이 어리석은 자들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나 없다고 하는 자들은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다고 하였는데
신1:21-38
서론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가나안에 대한 소망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라고 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현재보다 천 배나 복을 주시기를 원하고 늘 축복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주시기를 약속하신 것을 믿고 백성들을 그 곳으로 인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대한 호기심과 그 곳 사정을 알고 싶어해서 십이 정탐인을 보내어 그 곳 사정을 살피고 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곳 사정을 살피고 돌아온 그들에게 보고를 받으니 낙관적인 동시에 비관적인 보고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관적인 편에 서서 백성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탐한 바에 의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땅은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태도는 의외로 냉담하고 부정적이었습니다.
1. 올라가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5-27절에 "그 땅의 과실을 손에 가지고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우리에게 희보하여 이르되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별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실제로 현지를 답사한 결과 하나님이 말씀과 다르지 아니하였음에도 백성들은 그 곳에 들어가기를 싫어했습니다.
2. 다른 사람들까지 낙심케 하였습니다.
본문 25-33절에 "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 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 자신들도 불신앙적인 태도를 취하고 타인에게는 낙심케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을 노하게 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본문 34-37절에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좋게 여기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부정적인 면에서 악평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자신들도 망하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망하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복은 그 사람의 언행 여하에 좌우되며 신앙 여하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시민권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하고 항상 그 곳을 바라보고 주님의 재림과 죽음을 고대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을 좋게 여기고 그 곳에 들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만 자
행26:28
서론
본문에는 바울이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기독교로 회심하게 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독이 사도에게 미쳤다고 비난하자, 그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왕에게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는 말로 맞섭니다. 성경 본문은 아그립바의 대답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1) 그는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 두 견해 사이에서주저하는 자입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에서 주춤거리며 하나님과 재물,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서로 조화시키려 합니다. 그는 또 외적인 형식에 너무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은 경멸하면서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는 신적인 생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2) 그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보입니다.
그는 이웃을 대함에 있어서 모든 자에게 매우 공정한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나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자기 사랑이라는 원리에서 나오는 태도입니다. 그는 정직하지 않으면 자신의 명예가 엉망이 되어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 그는 소극적인 선에 의존합니다.
그는 선을 행함에 있어 소극적입니다. 즉,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만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마25:30)"는 말씀과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가 저주를 받고 뿌리까지 말라버렸다는 것, 그것은 나쁜 열매를 맺어서가 아니라 전혀 열매를 맺지 않았던 까닭에서라는 말씀(마21:19)에서 나타납니다.
2.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이유
(1)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이해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말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단지 의무들만을 실행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신적 생명이며 하나님과 영혼의 연합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자는 매우 적습니다.
(2) 인간에 대한 두려움
그처럼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상태에 그치는 두번째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굴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신적 생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나 사람들로부터 특별히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유익한 감동이 점차 사라지도록 내버려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 돈에 대한 사랑
주님께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었으나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기 싫어서 슬픔에 잠긴 채 떠나버렸던 젊은이의 경우가 바로 이 경우였습니다(눅18:23).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주님 이같이 행하는 나를 용서하소서 용서해 주시기를 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4) 성격의 불안정성
성령 안에서 시작한 것처럼 보였으나 잠시 후에는 타락하여 결국은 성격의 불안정함과 변덕으로 인하여 육체로 종국을 맞게 되는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렸던 성직자와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어떤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그 호기심이 충족되자 그것을 내버렸습니다.
3.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행위의 어리석음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일의 어리석음은 그것이 구원에 아무 효과도 미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뻔하다 마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해를 끼치는 피조물 중의 하나입니다.그는 양떼 가운데 있는 이리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경계하라 하신 거짓 선지자들 중의 하나입니다. 즉,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실제보다 더 넓다고 설득하며 "그들 자신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며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시요, 선생이신 그리스도께 대해 우리가 표할 수 있는 가장 큰 배은망덕입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을 사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보배로운 피를 흘려주셨는데 우리는 그 반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에게 온 맘을 드리지 않는다면 어찌 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
우리의 왕이시요, 구세주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든 비열한 행위를 수치로 여깁시다. 하늘에 가기 위해 얼마간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잃어버린 바 되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맘을 드리고 두 견해 사이에서 더 이상 주춤거리지 맙시다. 만일 세상이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섬길 수 있습니다. 쾌락이 하나의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것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면 그분만을 섬기도록 합시다.
불 안
성 경 활 용
1. 불안케하는 요인
(1)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불안함
(시38: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2) 하나님을 생각하고
(시77:3)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셀라)
(3) 내일 일을 알지 못함으로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4) 악을 행함으로
(사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57: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 불안을 극복하는 법
(1) 하나님을 바람으로
(시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2)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
라
(3) 여호와께 맡김으로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치 아니하시리로다
(4) 성령을 의지함으로
(막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5) 기도와 간구로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관련원어풀이
1. hm;h; 하-마-흐
(1) 포효하다, 으르렁 대다, 신음하다, 국국거리다.
(시55:18, 겔7:16)
(2) 소리를 내다, 웅성거리다, 소란하다.
(왕상18:41,시46:4)
(3) 움직이다, 지적 감정이 동요하다.
(시42:6, 렘4:19)
(4) 방황하다, 돌아다니다.
(잠7:11, 9:13)
2. zg'r; 라-가즈
(1) 흔들리다, 움직이다, 혼란되다.
(삼하7:10, 사14:9)
(2) 분노로 움직이다, 성내다.
(잠29:9, 겔16:43)
(3) 슬픔으로 움직이다.
(삼하19:1)
(4) 두려움으로 떨다, 흔들리다.
(신2:25, 시4:5)
(5) 움직이게 하다, 혼란시키다, 불안케 하다.
(삼상28:15, 렘50:34)
(6) 화나게 하다, 초조하게 만들다.
(욥12:6)
(7) 분노로써 행하다, 소란하다.
(사37:28, 29)
설교예화자료
비상 식량 저장
오늘날 미국인들은 미래의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점차로 더 많은 건조 식품이나 냉동식품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일 년 간의 식량을 찬장 안에 저장할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열다섯 달 동안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은 500내지 600달러 가량이 됩니다.
몰몬교도나 다른 종파의 사람들을 제외한 민감한 미국인들은 핵 전쟁이나 공산주의들의 점령, 폭동으로 물과 신선한 식량이 오염될 것을 대비하여 비상 식량을 저장하고 있습니다.
범죄가 없는 1면 기사
몇 년 전, 대도시의 유력 일간지인 「신시내티 포스트」지는 , 크리스마스 정신을 지켜서 "범죄건 없음"이란 표제 아래 범죄와 폭력 사건을 하나도 싣지 않은 1면을 발행했습니다.
편집인들의 설명을 빌자면, 원래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모든 뉴스는 신문 지면에 골고루 할당되기 위해 나누어지는데 그날은 이들 살인, 절도 등의 기사를 뒤 페이지로 미뤘다는 것이었습니다. 범죄는 매일의 인간사의 기록에 있어서 정당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객관성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그들은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마스만큼은 첫 면의 이런 사악하고 선행이 결여된 기사를 사람들은 분명히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고는 이를 게재하지 않기로 합의했던 것입니다. 대신 그들은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커다란 전단 표제를 실음으로써 독자들과 함께 그날을 경축했습니다.
초창기의 정신과 의사가 말했던 "자궁으로 돌아가라."는 첫 명제는 이제 전적으로 가능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고전적인 개념 -원초적 안정성에로의 추구-은, 바로 프랑스의 설계자 클라우드 비딜리가 두껍고 질긴 폴리에스테르 외피로 되어 있고, 직경이 거의 6피트에 이르며, 방음장치가 되어 있어 번잡한세상사의 한가운데에서도 사생황의 비밀을 완벽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격리 구'라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의 머리 속에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괴로운 이 세상에서 은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격리 구라는 장치의 내부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가서는 문을 닫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단할 기초 위에 세워지는 이 구체는 의자를 포함한 커다란 책상 한 세트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내부에는 세 사람의 어른이 앉기에 충분한 주조된 의자와 평평한 바닥, 책상 테이블 겸용의 회전 선반, 2개의 전기 배선, 전화와 TV를 꽃는 잭, 그리고 방음용 벽지로 꾸며져 있습니다. 격리 구의 외부는 하얀 색이지만 방 안은 실내 장식과의 조화를 생각해서 다른 색도 가능합니다. 실내용 모델은 1,600달러의 가격이 나가고, 비바람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실외용 모델은 1,900달러가 됩니다.
사자 입 속에 둥지 틀기
워털루 평원에는 1815년에 영국이 적들에게서 빼앗은 대포들을 녹여 만든 커다란 청동사자상이 있습니다. 그 야수의 입은 크게 벌어져 있고 전장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마지막 본 것은 어느 봄날 점심 때 였는데, 새 한 마리가 사자의 입 속에 둥지를 치고 있었습니다. 잔가지를 엮은 폭신폭신한 잠자리였는데, 겨우 부등깃이 난 제비 새끼가 그 괴물과 같은 금속제의 야수의 입 속에 깃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동의 맹수의 아가리로부터는 새들의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가 평화의 종소리처럼 희미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대담무쌍한 희망의 노래였습니다.
어록·시·묘사
불안이 없는 자는 곧 의(義)로워질 수 있다.
(B. 존슨/ 카틸리라)
인간의 정신을 매혹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즉, 불안이다. 아무런 불안도 없는 정신은 나에게 역정을 일으키게 하며 권태를 준다.
(A. 프랑스/ 에피퀴리의 정원)
불안은 질투 속에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동반자
(필리핀 속담)
상처받은 육체는 가벼운 접촉에도 움추러 들고, 공허한 그림자가 불안한 자를 공포로 가득 채운다.
(오비디우스/ 폰토로부터의 서한집)
너무 큰 행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을 상실할 예감으로 자꾸 불안해지는 모양이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고 또 하지 않으면 안 될 심리적 과업은 '안전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공포나 부당한 두려움없이 불안을 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 프롬/ 건전한 사회)
때로는 고요가 불안한 것이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의 서한집)
불안을 해소하는 데는 대상이 문제되지 않는다.
(윤태림/ 한국적 믿음)
만일 지금 이 시대를 불안의 시대라고 불러서 큰 잘못이 아니라면, 그것은 주로 자아의 상실로 인해 야기되는 불안 때문인 것이다.
(E. 프롬/ 건전한 사회)
만일 인간이 동물이나 천사라고 할 것 같으면 불안에 빠지지 아니할 것이다‥‥인간은 불안을 가지는 자요, 그가 가지는 불안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만큼 그 인간은 위대한 것이다.
(S.A. 키르케고르/ 불안의 칙념)
인생의 즐거움은 삶의 소산이 아니라, 보다 높은 인생에의 비약에 대한 우리들의 불안인것이다. 인생의 괴로움은 삶의 소산이 아니라 그 불안에서 오는 우리들의 자학이다.
(P. 카프카/ 잠언 96)
희망과 불안은 신뢰와 의혹감을 교대로 가져온다.
(오비디우스/ 여걸)
영원을 대했을 때 인간은 불안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S.A. 키르케고르)
불안의 대상은 무(無)다.
(S.A. 키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큰 불안은 미신의 어버이이다. 그러나 분별 있고 잘 교화된 불안은 종교를 낳는다.
(J. 테일러/ 성스러운 생활)
인간은 무한 앞에 섰을 때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B. 파스칼)
불안은 우리의 생명과 생활이 어떤 위협을 당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자기의 존재가 부정되고 흔들리는 것 같은 감정이다.
(안병욱/ 행복의 미학)
불안, 위구(危懼), 낙담은 죽음을 멀리하지 않고 죽음을 가까이 오게 한다.
(J. 라 브뤼예르)
바늘 방석에 앉은 것 같다. <*자리에 그대로 있기가 몹시 불안함을 이름>
(한국 속담)
불안을 탈출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그것을 지닌 채 산다는 것. 그런고로 더욱 삶의 근본 마당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의 탈출구는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향하고 있다.
(이어령/ 전후문학의 새 물결)
때린 놈은 가장자리로 가고 맞은 놈은 가운데로 간다. <*때린 자는 뒷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불안하나 맞은 자는 마음이 편안하다는 뜻>
(한국 속담)
실체는 보이지 않고 그림자만이 보일 때, 그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마치 영상만 있고 실체는 알 수 없는 생의 불안과 마찬가지로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극히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대개 어떤 불안한 느낌 속에서 그날그날을 생활하고 있다. 이 불안한 느낌은 생활의 불안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인 곳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또는 어머니가 외출할 때 우는데, 이것도 불안의 표시이다.
(D. H. 로렌스)
나 정이 넘칠 때 너는 왜/ 불안한 가슴에서 신음하느뇨.
(R. 냐데멜/ 불안한 가슴에서)
그러니까 나의 감각이/ 깨어 있기를/ 이 황금의 미미한 불안에 의해서
(P. 발레리/ 꿀벌)
강아지 메주 멍석 맡긴 것 같다. <*사물이 믿지 못할 사람에게 넘어갔을 때에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서 하는 말>
(한국 속담)
안개 내린 시야에/ 신부의 베에르인가 가늘은 생명의 연속이/ 최후의 송가와/ 불안한 발걸음에 맞추어/ 어데로인가/ 황폐한 토지의 외부로 떠나가는데
(박인환/ 회상의 긴 계곡)
보라!/ 어두운 해면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짐승과 같이 추악한 모습/ 항시 위협을 주는 무거운 불안/그렇다! 오밤중에는 날으는 갈매기도 까마귀처럼 불길하도다.
(오장환/ 해수)
24년 동안의 고립이 무너지고/ 자존심은 걸레였고/ 찬란하게 불안이 나부끼었어/ 불안이 나부끼는 지상
(박서원/ 단 한 번 마주친 눈길)
이미 지어진 이마 위에는 아직 앓아 보지도 않은/온갖 것에의 불안이 깃들여 있을 것이옵니다.
(R.M. 릴케/ 가난과 죽음의 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김수영/ 사랑)
우리는 기묘한 나무를 알고 있다/그 나무는 우리의 고뇌의 바위에 뿌리를 펴고/ 불안한 하늘에 한 밑둥과 두 가지를 벌리고 있다.
(다카하시 무쯔오/ 십자가)
그만두거라, 침침한 정신들이여/ 잠자지 않고 밤새우는 혼 속에 이룩되는 이 불안한 작품을.
(P. 발레리/ 나르시스 단장)
언제나 마음은 불안하고 예조(豫兆)에 차 있다. / 언제나 마음은 불안하고 그러면서도 까닭은 모른다.
(G. 프레이저/ 비가)
담요 자락에 비죽이 비어져 나온 조그마한 실밥이 혹 강철 바늘과 같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위험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심정, 잠옷에 달린 이 조그마한 단추가 혹 나의 머리보다도 크고 무거운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불안한 심정, 그리고 나는 지금 나의 침대에서 떨어지는 빵조각이 유리처럼 밑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 모양으로 부서져서 다시는 어쩔 수가 없게 되어 버릴 것 같은 알지 못할근심 걱정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찢어 버린 편지의 한 조각이 누가 보아서는 안 될 비밀 문서나 되는 듯이 방 어느 구석에 감추어도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한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잠이 들었다가는 난로 알에 놓인 석탄 덩어리를 나도 모르게 삼켜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생기기도 한다. 머리 속에서 어떤 숫 자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내 머리속에 들어앉을 자리가 없이 될 것 같은 불안, 내가 누워 있는 화강암이 회색으로 돌변하지 나 않을까 하는 불안, 그리고 내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 같고, 그러면 사람들이 내 방문 앞에 모여들어 문을 부수고 우르르 밀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도 있고,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해서는 안될 것 같고, 그러면 사람들이 내 방문 앞에 모여들어 문을 부수고 우르르 밀려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도 있고,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말해서는 안 될 것까지도 모조리 이야기해 버린 것 같고,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말했으면 좋을지를 몰라서 한 마디 말도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한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밖의 여러 가지 불안한 심정들‥‥ 걱정 근심들‥‥‥
(R.M. 릴케/ 말테의 수기)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아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박봉우/ 휴전선)
설 교 노 트
사랑과 진리의 호위병
시61
서론
현대를 가리켜 불안의 시대라고 합니다. 걱정과 근심이 많고 긴장되고 불안하고 초조하기 때문에 신경쇠약자와 정신병 환자의 수가 해마다 늘어가고 있습니다.
본문은 멀리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약한 포로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 포로는 사랑과 진실만이 자기의 호위병이 되어 자기를 지켜 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원수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심장이 멎을 듯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 포로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 시편 기자는 사랑과 진실만이 참다운 자기의 호위병이 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현대 사람들은 담을 높이 쌓고 철조망을 두르고 사나운 도사견을 기르고 자동 경보기를 달아 놓고도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 불안의 원인을 우리는 3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계 대전을 두 번이나 치르고 나치당의 유태인 학살을 경험한 인류는 서로가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6 · 25사변을 경험하였는데, 그 일로 남북이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부간에도 백 퍼센트 다 믿는 부부는 없을 것이며, 아무리 다정한 부부일지라도 이혼하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며 평생을 원수처럼 지내는 시대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니 불안한 마음이 더해 가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자연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땅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풍성하고 포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을 대지라고 하였고, 어머니 땅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자연이 분노하면 걷잡을 수 없이 사람을 휩쓸어 갑니다. 지진, 홍수, 태풍, 무서운 전염병 등이 생깁니다.
또한 공해가 심해질수록 환경은 변하게 되어 자연은 더욱 균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환경 오염으로 심각한 가운데 처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자연이 파괴되어 가고 있어서 모든 사람은 이 자연에 대해서 불안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도 믿을 수 없는 믿음을 상실한 세대입니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할 때 이 시편 기자는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기도를 귀담아 들으소서" 여러분도 지금이야말로 기도할 때이며 이 시대야말로 기도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때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많은 호위병을 두고 있지만 오히려 그 호위병에게 죽음을 당한 대통령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시편 46편은 루터의 시라고 할만큼 루터가 좋아한 시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우심이라" 이 불굴의 신앙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라는 찬송가를 만들게 하였고 종교 개혁을 이끌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사랑과 진실로 호위병 삼고 사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심령의 의사 예수
눅5:27-32
서론
철학자 데카르트는 "내가 있는 고로 내게 고통이 있다. "고 했으며, 신학자 키르케고르는 "내가 고통하는 고로 내가 있다. "고 하였는데, 이는 존재는 곧 고통이며, 고통을 의식함은 곧 인생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병은 그 질병을 따라 해당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나, 심령의 병은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께로 나아갈 때에만 그 치료가 가능한 것이니, 이는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가 당신 앞에서 올 때 마음의 쉼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씀하심이며, 내가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키르케고르은 "복음은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하비칵스는 종교의 정의를 "낡은 것을 벗고 새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심령의 병은 불안감에서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심령을 고치시는 예수께 어떤 병을 치료받아야 하겠습니까?
1. 절망의 무서운 병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힘쓰던 인간들은 마침내 자신의 유한성과 제한의 벽에 부딪히게 되자 절망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인간들은 이 절망의 병에 걸려 자포 자기, 슬픔, 타락,고통의 열병에서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으니(행4:11),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자는 새 소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절망이라고 하는 심령의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의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들어가신 곳에는 새 소망의 아침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이 그러했으며(요2장), 예레미야도 낙심속에 중심에 여호와의 자비를 회상할 때 아침마다 새로워진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렘3장). 그리고 바울도 옥중의 절망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하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행16장).
2. 불안의 병을 고침받아야 합니다.
포틸리히는 존재의 불안이라고 하는 명제 아래에서
(1) 죽음의 불안
(2) 죄책감의 불안
(3) 생의 무의미성의 불안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죽음 앞에서 떨며, 남모르는 죄책감에서 불안의 중압감을 감식하며, 의미성을 찾지 못한 방황하는 무의미성의 불안이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불안의 병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부터 기인하여 파생되는 것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요3장), 뽕나무 위에까지 올라갔던 삭개오(눅19장) 같은 사람들이 남 모르게 불안속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참 평안을 주시며,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의 불안을 다스릴 수 있는 실력자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난 자마다 불안의 병에서 치료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3. 불순종과 반역의 병을 치료해야 합니다.
병중에 무서운 또 하나의 병은 불순종과 반역의 병입니다. 이와 같은 병은 인간을 마침내 비인간화시켜, 참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이 여기에서부터 싹트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도 병이 난 사람은 음식 먹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심령적으로도 병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병이며, 그리스도가 그 심령속에 들어올 때에만 이 병은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 마음의 모든 불안함을 절망함을 예수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우리 주님은 육신의 병뿐 아니라 심령의 모든 병까지도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믿어야하겠습니다.
불 행
성 경 활 용
1. 불행의 원인
(1) 죄악으로
(사59:2)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2) 권고 받지 않음으로
(눅19:44)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관련원어풀이
1. @w<a: 아-웬
(1) 텅빔, 공허, 헛되고 공허한 것.
(삼상15:23, 사41:29)
(2) 거짓, 사기, 사악, 불법.
(민23:21, 욥36:21)
(3) 불행, 역경, 재난.
(시55:4, 합3:7)
2. hW:h' 하우와-흐
(1) 욕망, 정욕.
(잠19:13, 욥6:2)
(2) 파멸, 재난, 상해, 파괴, 불행.
(욥6:2, 잠19:13)
3. [r' 라-
(1) 악한, 나쁜.
(창 6:5, 삼상25:3)
(2) 유독한, 해하는.
(창37:33, 왕하4:41)
(3) 시기적인, 악의적인.
(잠23:6, 28:22)
(4) 모습이 악한, 볼품없는,
(창41:3)
(5) 불행한, 불운한.
(사3:11, 렘7:6)
(6) 슬픈, 애처러운.
(창40:7, 잠25:20)
(7) 사악, 나쁨.
(창2:9, 잠28.5)
4. plhghv 플레-게
(1) 때림, 구타, 상처,
(눅10:30, 고후6:5)(2)
(2) 무거운 재난.
(계19:18, 11:6)
설교예화자료
꼬리 없는 여우
평소에 탐스러운 꼬리를 자랑하던 여우가 실수하여 그만 덫에 걸렸습니다.
겨우겨우 목숨을 건져 덫을 빠져 나왔지만 그토록 자신이 자랑하고 다니던 꼬리는 덫에 잘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났으니 천만 다행이지 뭐!"
하고 여우는 자신을 위로했지만 아무래도 꼬리를 잃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하였습니다.
여우는 며칠 동안 바깥 출입도 안하면서 고민하였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토록 잘난 척하고 다니지 말것을,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
근심에 잠겨 있던 여우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옳지, 그렇게 해야지. 그럼 되겠구나!"
여우는 곧바로 친구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얘들아, 이것 좀 보렴. 꼬리가 없으니까 얼마나 가뿐한지 몰라. 뛰어다니기도 편하고 몸매도 훨씬 날씬해 보이지 않니? 너희들도 그 거추장스런 꼬리 따위는 잘라 버려!"
여우는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 여우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꼬리를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 얘들아, 너희들은 어떠니?"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맞아, 나도 그래."
"만일 저녀석이 꼬리를 잘리지 않았다면 그런 허풍을 떨지는 않았겠지!"
"그래, 누가 그런 허풍을 믿고 어리석은 짓을 하겠어!"
꼬리 잘린 여우는 친구들이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자 그만 부끄러워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말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1968년 11월, 그 어느 맑은 아라스타의 오후였습니다. 나는 23살, 아기를 가진 지 5개월!공군 병원에 근무할 시간이 되어 출근을 하던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2시 30분, 나에게는 비통한 운명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학교 통학 버스를 추월한 대형 트럭이 나의 차 앞으로 산더미처럼 달려드는 것이 아닙니까!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어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트럭은 나를 덮쳐 눌렀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는 내 차 옆 유리를 뚫고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저 시체가 움직여! 저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저것"이라는 시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앰뷸런스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공군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뼈는 여러 곳이 부러지고 얼굴은 비참하게 찢어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를 본 의사들은 너무 놀랬는지 얼마 동안은 수술은 커녕 당황한 채 서 있기만 했습니다.
드디어 군의관 소령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정형외과 전문의사였습니다.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진통이 계속되었습니다. 치아가 부러지고 잇몸에 온통 상처를 입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견디어 보시오! 당신만 결심하면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의사가 나간 사이 나는 나의 얼굴을 거울로 보는 순간, "하나님, 이 꼴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데려가 주셔요." 하고 원망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남편이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나의 얼굴을 보는 동안 표현한 슬픔과 고통 속에서 나는 남편마저 잃었다는 생각이들었습니다. 말없이 떠나간 남편! 그후 1년이 넘자 이혼을 제기했습니다. 5개월 된 뱃속의 애기와 남편을 순식간에 잃었던 것입니다.
나는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했습니다.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전에 나는 나의 처참한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
이 비통한 과정을 지켜본 이는 바로 군의관 소령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지옥을 헤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남은 것은 이 주어진 생명을 우리가 가꾸는 일입니다. 2년에서 3년의 기간만 주십시오." '
그후 7년 동안 나는 35번의 정형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지금 거의 완쾌되었습니다. 그 의사는 7년이나 나의 회복에 전념한 셈입니다. 어느 날 그 의사는 나에게 결혼을 신청해 왔습니다.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지금 나는 매일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하필이면 왜 나입니까?"라는 원망스러웠던 물음 앞에 하나님은 나에게 새로운 해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리한 여우
늙고 힘이 없어 날마다 먹이 사냥에 실패하는 사자가 있었습니다 날쌔고 용맹스럽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던 사자가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미소를 떠올렸습니다.
"옳아! 젊은 시절에는 힘으로 먹이를 잡았지만 이제 힘이 없으니 머리로 잡아야지!"
사자는 다음날부터 끙끙 앓는 척하며 굴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사자가 병이 났다는 소문이 들리자 숲속에 많은 동물들이 문병을 왔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문병 온 동물들을 차례차례 잡아먹었습니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괜히 굶주리고 있었네."
사자는 배불리 먹어 만족한 마음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어느 날, 여우가 문병을 왔습니다.
그런데 여우는 굴 속으로 들어오지 않고 굴 밖에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자님, 좀 어떠신지요? "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빌고 있다네."
사자는 금방 죽어가는 소리로 엄살을 떨며 말했습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오래오래 사셔야지요." 하며 여우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대답하자 사자는,
"그런데 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얘길하는가? "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왜냐면요‥‥ 사자님의 굴 속으로 들어간 동물들을 많이 보았지만 나오는 동물은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의 창문
기차의 차창 옆에 한 젊은이가 앉자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 좌석엔나이 많은 한 어른이 앉아 있었습니다. 갑자기 반대편 철로로 급행 열차가 시끄러운 소리를내면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즐거운 마음으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펼쳐지는 전원 풍경을 즐기던 청년의 시야가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옆 좌석에 앉은 노인을 향해 돌아앉으면서 숨가쁜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바로 저거야, 언제나 그렇다니까. 저 기차가 또 나의 시야를 가로막는군!"
"그래, 네가 저 기차 때문에 좀 기분이 상했나보구나."
얼른 젊은이가 그 말을 받아 다시 설명하였습니다.
"제 말 뜻은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틀림없다니까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삼촌께서 서커스 입장표를 사주셨는데, 바로 그날 병이 나서 그걸 보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좀더 나이 먹어서 대학에 진학하고자 할 때 바로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진학을 포기하고 취직하여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먹여살려야만 했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서‥‥‥‥
노인은 얼른 청년의 어깨 위에 손을 얹어 놓으면서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기차가 그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모르겠구나."
청년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제가 눈 앞에 펼쳐진 경치에 매혹되어 있었는데 그만 그놈의 기차가 그 장면을 가로막아 버렸거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란다. 그러나 기차의 반대편에 또 하나의 창문이 있다는 결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자, 저쪽 창문을 봐!"
청년은 노인이 가리키는 통로 저편에 있는 창문을 내다보게 되었고, 그 창문을 통해 푸른하늘과 맑고 잔잔한 호수와 물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요트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로 멋있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자연 풍경이었습니다.
노인은 작은 소리로 그러나 힘있게 청년에게 속삭였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창문으로 내다보느냐에 달려 있지!"
그 노인은 관점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행복이나 불행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그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일을어떻게 바라보느냐, 즉 우리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록·시·묘사
사람에게 세 가지 불행이 있으니, 어린 시절에 놀은 벼슬에 오름이 첫째 불행이요, 부형의 세력을 업고 고관이 됨이 둘째 불행이요, 뛰어난 재주가 있고 문장에 능함이 셋째 불행이다.
(장자)
불행이란 인생의 기괴한 동반자이다.
(H. 제임스/ 어느 부인의 초상화)
인간은 불행의 어떤 한도까지만 참을 수 있다. 그 한도를 넘는 것은 인간을 파멸시키거나 간과하여, 감정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괴테/ 친화력)
살다 보니 이 세상엔 너무나 불행이 많아서 우리는 그만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웃음은 보조개를 만들지 않고 주름살을 만든다.
(0.W. 홈스/ 아침 식탁의 시인)
나에게 말하라면, 이 세상에서 불행은 다음의 세 가지밖에 없다. 겨울에 추운 집에서 지내는 것, 여름에 꼭 끼는 장화를 신고 다니는 것, 그리고 살충제로 죽일 수도 없는 갓난아이의 빽빽거리며 우는 방에 머무르는 일이다.
(I.S. 투르게네프/ 루딘)
인생은 크고 작은 불행으로 가득하다. 그 불행이, 가는 길의 발걸음마다 우리를 내리 밀기 때문에 다른 것이 나타나도 번갈아 주의할 경황이 거의 없다.
(A. 레플러/ 화해)
식욕은 있는데 고기가 없고, 고기는 있는데 식욕이 없으며, 침대에 누워도 쉴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다.
(W. 캠든/ 유고집)
불행은 태반이 인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표적이다.
(M. E. 몽테뉴/ 수상록)
불행한 자들에게는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지나간다.
(소랭/ 블랑세와 기스카르)
불행만 계속되면 사람은 모두 이리가 된다.
(J. A. 스트린드베리)
태양은 서쪽으로 그 모습을 감추지만 불행은 그 모습을 가리는 일이 없다.
(P. J. L. 하이제)
빨리 걸으면 네가 불행과 마주치게 되고, 천천히 걸으면 불행이 너를 붙잡는다.
(러시아 속담)
불행도 신앙과 같이 습성이 될 수 있다.
(C. 그린/ 권력과 영광)
생명의 박탈이 불행하지 않은 까닭을 깨닫는 자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 아무런 불행도 없다.
(M. E. 몽테뉴/ 수상록)
우리는 과거의 불행을 변명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불행을 구제 불능한 것으로 숭인하려고 사는 것도 아니다.
(F. 오즈번/ 지구의 경계)
절망적인 불행이 빠른 치료를 요구할 때, 불신은 비겁이요, 신중은 어리석다.
(S. 존슨/ 이레네)
모든 불행은 미래에의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H.D. 소로/ 겨울)
매우 불행한 사람만이 남을 가엾게 여길 자격이 있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함께 난파하면 불행도 가벼워진다.
(D. 에라스무스/ 격언집)
불행에 굴복하는 일이 없어라. 아니, 그보다도 대담하게, 적극 과감하게 불행에 도전할 일이다.
(베르길리우스/ 아에네이스)
인간이 불행을 모면할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며 학문이 왕의 권세와 결합하여 선으로 악을 이김이라.
(플루타르크 영웅전)
근친사별 같은 불행사가 있을 경우에 사랑은 진정제나 하와이 여행과 같단 말이야. 과부나 고아가 이러한 방법으로 슬픔의 경감을 구한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
(A.L. 헉슬리/ 천재의 여신)
불행이란 여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질 만한 성질의 것이다. 그것이 자기 아닌 다른 여인들에게 일어날 매는 더욱 그렇다
(J.E. 스타인벡/ 불만의 겨울)
불행을 불행으로 끝맺는 사람은 지혜 없는 사랑이다. 불행 앞에 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불행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 불행은 예고 없이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떠한 총명도 미리부터 불행을 막을 길은 없다. 그러나 불행을 밟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할 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불행은 때때로 유익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불행을 자기를 위하여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H. 발자크)
불행하게 되는 비결은 행복한가 않은가를 걱정할 겨를을 가지는 것이다. 그 요법은 일이다.
(B. 쇼/ 부모와 자녀)
불행을 고치는 약은 오직 희망밖에 없다.
(W. 셰익스피어)
불행은 오래 된 우리의 친구였다. 그러나 이 친구가 가진 누더기와 쓰레기 같은 악취에 더 친근할 수는 없다. 불행은 결속된 인간의 용기보다는 훨씬 약한 것이다.
(모윤숙 / 레이즈 여사)
불행이란 이상스러운 것이다. 우리들이 그것에 대하여 말하면, 점점 불행이 더 커진다. 그 원인과 그것이 미치는 범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이, 우리들에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준다.
(L. 베토벤/ 수첩)
황금은 불에 의해 제련이 되고, 사람은 불행의 도가니에서 시련을 받는다.
(테오그니스/ 격언집)
불행도 끝내는 지칠 때가 온다. 바람이 언제까지 같은 강도로 분다고 할 수 없듯이.
(에우리피 데스)
남의 불행을 보는 것은 나의 불행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소포클레스)
불행이 크면 클수록 인생살이도 크다.
(크레비용/ 삼두정치)
어떠한 것이 큰 불행이고, 또 어떤 것이 커다란 행복인가? 본시 행복과 불행은 그 크기가 미리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작은 것도 커지고 큰 것도 작아질 수 있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해 버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을 현미경적으로 확대해서 스스로 큰 고민 속에 빠진다.
(F.라 로슈푸코)
불행에 대한 특효약은 없습니다. 다만 옛날부터의 권태라든지 인내라든지 포기라든지 하는 미덕이 있을 뿐입니다.
(A.L. 헉슬리/ 연애대립법)
불행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들 지금의 행복은 업었을 것이다.
(러시아 속담)
장차 있을지도 모를 불행을 미리 염려하기보다 눈 앞에 닥친 불행을 견디어 나가는 데 정신을 쏟는 편이 낫다. 우리는 모두 남의 불행을 잠자코 보고 있을 수 있으리만큼 마음이 꿋꿋하다.
(F. 라 로슈푸코)
더욱 불행한 인간이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이 생각은 그 밑에서 편히 쉴 지붕이 될 수는없을지 모르지만, 그 밑에서 소나기를 피할 수는 충분히 있는 생각일 것이다.
(베르히)
인생은 학교다. 거기서는 행복보다도 불행 쪽이 보다 좋은 교사다.
(프리체/ 체호프 연구)
불행과 행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데도 찾아오는 일은 없느니라.
(맹자)
행복은 구해서 얻어지는 젓이 아니다. 유쾌하게 살아서 복을 부르는 수밖에 없다. 불행은 피할 수 없다. 타인을 해하려는 마음을 없애고 불행에서 멀어져 가는 수밖에 없다.
(채근담)
온갖 불행이 일어나는 것은 오직 천명일 뿐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천명을 알면 불행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나니, 근심이 마음에 침입하도록 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장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불행하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의 서한집)
매일 밤 매일 아침 태어나 비참하게 되는 자가 있고, 때일 아침 매일 밤 태어나 즐거워지는 자가 있다.
(W. 블레이크/ 결백한 점괘)
불행의 원인은 늘 나 자신이다. 몸이 굽으니 그림자도 굽다. 어찌 그림자 굽은 것을 한탄할 것인가! 나 외에는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료해 줄 사람은 없다. 불행은 내 마음이 만드는 것과 같이 불행도 나 자신이 만들 뿐이요, 또 치료할 수 있을 뿐이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가져라! 그러면 그대의 표정도 평화롭고 화애로워질 것이다.
(B. 파스칼/ 팡세)
사람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결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라 로슈푸코/ 잠언집)
사소한 것들이 인간사의 합계를 이루기 때문에 불행의 절반은 우리의 자만하는 버릇에서 나온다.
(H. 모어/ 분별)
네가 비참하다고 생각지 않는 한 비참한 것은 없다.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인간은 다른 사랑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일은 없지만, 자신의 마음을 주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불행에 빠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불행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 그 경우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불행한 것은 마음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스스로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을 조용히 한데에 모으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행복한 사람이다.
(채근담)
불행은 차라리 나의 가장 가까운 손님이고 우리가 으레 당하고 결코 반항할 수 없는 최후의 벽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용감히 감수하고 때로는 스스로 만들어 당하는 고통도 가능한 것이 세상이다. 전쟁에 있어 배수진이 그것이고 종교에 있어서 고행이 그것이다.
(서경보/ 행복과 불행)
불행한 사람이 동정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에게 동정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S. 듀베/ 풍속에 관한 고찰)
모든 비운 중에서도 가장 큰 불행은 옛날에 행복했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행복이 무엇이며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면 그것이 벌써 불행한 증거이다.
(신일철/ 현대인의 행복론)
행복이란 상(賞)이 아니다. 필연의 귀결이다. 불행은 형벌이 아니다. 일의 결말이다.
(R.G. 잉거솔/ 그리스도교)
행복은 뜻하지 않은 때에 날개를 타고 오고 불행은 목발을 끌며 절름발이로 걸어온다.
(러시아 속담)
행복은 한계도 없고 그 무엇도,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별게 아니더군. 그에 비하면 나의 불행은 보다 중요한 것이야. 특성이 뚜렷하고, 추억도 있고 볼록한 혹을 달고 무게가 있거든.
(H. 미쇼/요동하는 밤)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기의 행복을 구한다면, 원망이 몸으로 돌아와 재앙에 빠지게 된다
(법구경)
인간의 생활에는 불행 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마련이고, 그뿐 아니라, 좀 역설적으로 말하면, 불행은 행복에 속해 있는 것이다.
(C. 힐티/ 행복론)
행복한 순간이야말로 바로 그 옆에 불행이 엎드려 있다. 불행한 순간이야말로 행복이 깃들일 수 있는 하나의 터전이다.
(노자)
어떠한 불행 속에도 행복이 옴츠리고 있다.어디에 좋은 일이 있고 어디에 나쁜 일이 있는지, 우리들이 모를 따름이다.
(C.V. 게오르규/ 제 2의 찬스)
불행한 사람들은 그들의 진정한 불행에 대해서는 언급함이 없이 거의 언제나 거짓 불행에 대해서만 한탄한다. 게다가 그 불행이 뿌리 깊고 지속적일 경우에는 심한 수치심 때문에 탄식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각각의 불행한 조건은 인간들 사이에 침묵의 지대를 조성하며 이 곳에서는 인간 존재가 마치 고도에서처럼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 섬에서 빠져나가는 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시몬 베유/ 노동일기)
사람에게는 행복 이외에, 그것과 똑같은 불행이 늘 필요하다.
(F.M.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죽음이여, 너 때문에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행하다.
(에우리피데스)
항상 우리의 불행은 거리조준의 착오에서 유래하는 것임을 내 자신 잘 앎에서다.
(유치환/ 나는 고독하지 않다)
가까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불행은 어떤 종류의 것일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을 만족시켜 주는 어떤 요소를 다소나마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불행은 전염병이다. 불행한 사람과 병자는 따로 떨어져서 살 필요가 있다. 그 이상 더 병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하여,
(F. M. 도스토예프스키)
사소한 일로 기쁨을 느끼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고, 불행한 자의 고귀한 특권이다
(로테/ 잠언)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불행이란 있을 수 없다. 꾸준히 참고 견디거나 용기를 내어서 쫓아버리거나 한다.
(R. 롤랑)
불행에서 자유롭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다.
(W. 셰퍼 / 토속인의 기도서)
인생의 작은 불행은, 우리들이 큰 불행을 이겨내는 것을 도와준다.
(N.E. 에 바흐/ 잠언집)
불행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언젠가 하느님이 그 사람을 다시 일어나게 하실 것이다.
(터키)
약한 사람은 불행이 닥치면 체념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불행을 딛고 일 어선다.
(W. 어빙/ 스케치북)
사람의 불행은 그 사람의 위대함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B. 파스칼/ 팡세)
불행한 사람들은 또 다른 불행한 사람들에 의해서 위로된다.
(이솝)
불행을 견디지 못하는 것도 불행의 하나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불행은 거짓의/ 옷을 입고 있었네/ 심장의 핏빛의/ 멋진 붉은 색/ 그러나 그의 심장은 잿빛// 우물가에서 고개 숙이고/ 불행은 나에게 사랑을 노래했네/ 그의 목소리는 도르래처럼 삐걱거렸네/ 그래서 나는/ 진실의 옷 입은 채/ 입을 다물고 미소지으며/ 우물 속 깊은 곳에서/ 춤을 추었네/ 같이 웃는 물 위에서/ 달은 불행을 쫓아내며 빛나고 있었네/달은 불행을 비운고 있었네.
(J. 프레베르/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 있다)
우리가 행복을 바라고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사실 불행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불행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민재식/ 불협화음)
예수여! 예수여! 불행했던 육체의 예수여.
(신동문/ 6월)
아아, 서울은 모든 불행의 시작/ 그 처음이 있었던 곳.
(윤성근/ 길 · 1)
누구에게나/ 당신의 봄은 오는 것일까요/ 어느 불행에도 은총의/ 꽃은 피는 것일까요.
(고정희/ 눈물 티슈)
그래도 떠나야 한다/ 이 불행한 땅에 다시 태어나실/ 아기 예수를 찾아서 이 세상 땅 끝까지‥‥‥
(박화목/ 다시 아기의 탄생을 찾아서)
아아, 그 거울을 들여다 보라/ 거기 비친 네 불행을 들여다보라.
(오든/ 어느 날 저녁 외출하여)
사랑하는 순수한 불행이여 비참이여 착각이여./ 결코 그대만은/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 있어주시오.
(박인환/ 밤의 미매장)
수많은 불행한 일들이 너를 기다리느니/시간이여 그들을 위해 빨리 가거라/ 그들의 불행도 시간과 함께 앗아가고/ 행복한 사람일랑 잊어 버려다오//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이 도취의 순간도/ 저 불행의 날처럼 우리로부터 빠르게/ 멀리 날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호수/ 라마르틴)
고통의 기쁨 앞에/ 고통의 마지막 기쁨의 자유 앞에/ 사람들이 모여서 뜯어먹는 빵의 눈물 앞에/ 저희들로 하여금 무릎 꿇게 하소서, / 절망하는 자들의 절망의 바람과/ 불행한 자들의 불행의 노래와/ 사랑이 적은 자들의 용서함의 사랑 앞에/ 마음을 다하여 고요히 엎드리게 하소서/ 시대마다 사랑은 사람을 부르오나/ 저희들의 잔은 넘치지 아니하고/ 괴로워하기 위하여 저희는 기뻐하고/ 기뻐하기 위하여 저희는 또한 괴로워하나니/ 기쁨의 고통 앞에/ 기쁨의 마지막 고통의 자유 앞에/ 또 다시 고요히 엎드리게 하시고/ 불쌍히 여기심 속에서 저희를 용서하소서.
(정호승/ 서울예수)
설 교 노 트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
전7:1
서론
잠언과 전도서는 그 저자가 같은 솔로몬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상이 같은 점이 많습니다.본장은 주로 잠언 형식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대조적으로 교훈한 것은 지혜로운 교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출생하는 날은 불행한 날입니까?
본문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출생하는 날이 무조건 나쁘다는 해석은 절대로 아닙니다. 염세주의 사상은 이러한 해석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일반 세상에서의 상식으로는 출생을 경사요, 사망을 흉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에서도 요한복음 16장 21절에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출생은 불행의 날이 아닙니다.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2. 죽는 날은 불행한 날입니까?
출생하는 자는 이 세상의 죄악 가운데 나서 범죄하게 되는 고생을 하게 되지만, 반면에 죽은 자들, 특히 하나님을 공경하고 죄와 상관이 없이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4장 32절에는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임함이라"고 하여 소망 중에 천국 생활을 동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 불행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특히 성도의 죽음은 오히려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생과 사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믿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에 부응되도록 이 세상의 출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함이요, 죽는 날에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바울과 같이 "의의 면류관을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죽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출생이나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고 죽는 데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나 죽는 것이 결코 불행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불행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에게는 죽음이 생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삼하2:10
서론
사울 왕이 전사한 후 군장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추대하였습니다. 그래서 길르앗, 아술, 이스르엘, 에브라임, 베냐민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스보셋에게도, 사울 왕가에도 불행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왕자 이스보셋
사울 왕의 아들들의 이름은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와 이스보셋입니다. 이스보셋은 사울 왕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길보아산 전투에서 사울 왕과 함께 왕자 셋이 전사하고 이제 넷째 왕자인 이스보셋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스보셋이라는 이름의 뜻은 "부끄러움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에스바알(대상8:33, 9:39)"이고, 그 뜻은 "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스보셋으로 개명되었습니다.
2. 왕 이스보셋
아버지와 형들이 다 전사한 후 홀로 남은 이스보셋을 장판 아브넬이 추대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남쪽 유대 왕으로 추대된 다윗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이북에 보다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애당초 그는 다윗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거기다가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불화는 크게 쇠약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 불화의 원인은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아버지인 사울의 첩을 취한 데서 생긴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아들이 그 처첩을 이어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넬이 그것을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또 왕위까지도 노리는 것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보셋은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그 나라를 다윗에게 팔아 넘기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벨은 다윗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요압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삼하3장).
3. 암살된 이스보셋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화가 나서 노를 발하고 대립 감정도 있었으나 아브넬이 죽자 그는 크게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사무엘하 4장 1절에 보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헤브론에서 죽었다함을 듣고 손맥이 풀렸고 이스라엘이 놀라니라"고 하였습니다.
왕도 나라도 의지하던 기둥을 잃은 것이 되었습니다. 이스보셋은 그 후 얼마 안되서 자신의 두 군장인 바아나와 레갑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무척 자랑스럽게 다윗에게 가져 갔으나 다윗은 이스보셋을 죽인 죄로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파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결론
여기에서 불행한 사울 왕조는 완전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전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사울로부터 아들 4명이 전부 불행하게 최후를 마쳤으니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야곱 가정의 불상사
창34:1-17
서론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한 대로 하지 않고 엉뚱하게 있어서는 안될 장소에 계속 머물고 있다가 가정적으로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외동딸인 디나가 그 땅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일로 인하여 살인이 벌어지고 온통 가정이 어수선하여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1. 그 원인은 세겜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야곱은 아직도 세겜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여자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구경삼아 나들이한 것이 가정 전체의 불행의 도화선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땅 추장이 디나를 강간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상사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원인은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장소에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딸의 호기심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에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원인은 야곱에게 있는 것입니다. 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디나의 지나친 호기심의 결과입니다.디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어두웠습니다. 사람의 호기심은 모험을 시도하는 충동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분별없이 시도하다가 큰 불상사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청소년들이 자라고 있는 우리의 주변 환경은 어떻습니까? 청소년들을 충동하여 죄를 범하게 할 유해 요소가 가득찬 오염된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심어주는 죄를 범하고 가정에 큰 근심을 안겨주는 일들이 비일 비재합니다. 야곱의 가정에도 디나의 당한 일로 가정의 장래는 밝지를 못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덮여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딸이 강간을 당했지만 야곱은 잠잠하고 있었는데 자식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3. 보복할 목적으로 성례를 악용하였습니다.
본문 13-17절에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렵혔음이라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취하며 너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를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종교적인 행사인 할례식을 원수 갚는 데다 악용하는 것은 하나님께 크나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례식이 보복할 목적으로 악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악용하는 일은 없어야 하고 또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야곱이 잘못한 탓으로 그 가정에는 불행한 일들이 나타나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셔서 그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징계하신 것입니다(계3:19).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욜1:22
서론
메뚜기의 재앙으로 인하여 한재와 흉년과 기근의 신벌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애통하고 금식하며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권고한 본장에서 그 결과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희락이 말랐다는 것은 무슨 내용인지 알고보고자 합니다.
1. 희락이 마른 것은 저주의 모양입니다.
인류의 시조들이 살던 곳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에덴"이라는 딸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는 기쁨의 동산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쁨, 즉 희락이 말랐다는 것은 축복 대신에 저주가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저주는 불행을 뜻하고 벌받는 상태이기 때문에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온갖 실과로 먹을 것이 풍성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엘 시대에는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사과나무 등의 실과나무가 다 시들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희락이 있겠습니까?
2. 먹을 식물이 없어서 희락이 말랐습니다.
메뚜기 재앙의 결과로 온갖 곡식과 풀을 메뚜기가 다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보리와 밀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과실나무도 다 갉아 말갛게 벗겨서 죽이니 그 가지가 하얗게 되어 말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원인 때문에 흉년이 들어서 기근 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니 무슨 먹을 것이 제대로 남아 있었겠습니가?
사람에게 있어서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식량 문제의 해결이 제대로되지 않으면 만사가 용기를 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보면 "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다. "라고 하였고 "금강산 구경도 식후에 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한결같이 식생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생활이 완전히 마비되니 희락이 말라져서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제사가 끊어지니 희락이 말랐습니다.
사람은 육신 문제의 식생활만으로 족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이 살아서 활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이 슬퍼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제사를 드리는 데 있어서 성의가 없어서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드릴 제물이 없어서 드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마음 아픈 현실입니까? 희락이 마른다는 말 그대로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릴 제사가 끊어지니 기쁨을 맛볼 수 없고, 심령이 죽으므로 육의 생활은더욱 불행하게 될 뿐만 아니라 비참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죄를 솔직하게 회개하는 심령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아울러 영적 기쁨이 만회되며 불행에서 건짐을 받게 되므로 육의 기쁨도 넘치게 됩니다.
비 교
성 경 활 용
1. 비교할 가치가 있는 것
(1)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람의 왜소함
(사46:12-13)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2) 이방인의 믿음과 유대인의 불신앙
(마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2. 비교할 가치가 없는 것
(1) 신분에 근거를 둠
(민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관련원어풀이
1. diastolhv 디아스톨레-
구별, 차이.
(롬3:22, 고전14:7)
설교예화자료
겁쟁이 토끼
토끼들이 숲속에 모여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약한 동물로 태어났을까요? "
한 토끼가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맞아요. 왜 모두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들인지 ‥‥‥‥
또 한 토끼가 이렇게 푸념을 하자 모두들 한 마디씩 하였습니다.
"호랑이, 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우 새끼들까지 우리만 보면 눈을 번뜩이니 어디 불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요."
"어디 그 뿐이여요? 날짐승들까지 우릴 노리고 있으니, 우린 언제쯤 마음놓고 한 번 살 수 있을까요? "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더욱 슬퍼져 눈물을 흘리는 토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슴 조이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났겠어."
한 토끼가 은음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다른 토끼들도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요, 차라리 죽어 버리면 이런 괴로움도 없을 거예요."
"맞아, 우리 모두 연못에 빠져 죽읍시다. "
그래서 토끼들은 모두 죽을 결심을 하고 연못으로 몰려갔습니다.
토끼들이 갑자기 우르르 물려가자 연못가에서 놀고 있던 개구리들은 깜짝 놀라 연못속으로 풍덩풍덩 몸을 숨겼습니다.
그것을 본 한 토끼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보셨지요? 우의를 보고 놀라 도망치는 동무도 있군요. 죽으려고 오는 힘없는 우리들을 보고 도망친 개구리는 우리보다 더 약한 동물입니다. 그런 개구리도 사는데 우리가 왜 못 살겠습니까? "
토끼들은 밝게 웃으며 고래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숲속으로 돌아갔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려야
공자의 한 마리 말이 어느 농부의 밭곡을 뜯어먹는 것을 농부가 보고는 집에다가 잡아가두었습니다. 공자는 말 잘하는 제자 자공을 보내어 사과하고 말을 보내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노발 대발하며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음에는 마부를 보냈더니 마부가 주먹을 휘두르면서 선생님의 말을 당장 내어주지 않으면 큰 일을 낸다고 을러대자 그제야 말을 보냈습니다. 우매한 자에게는 자공의 응변이 소용없고, 마부의 주먹이 유용합니다. 공자는 이것을 보고 "법은 장소와 사람을 보아서 쓸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과 같이 생각해 봄이 좋을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주홍(朱紅)은 주홍과 비교해야 한다.
(D. 에라스무스/ 격언집)
모든 마음의 기쁨과 모든 만족감은, 남이 자기와 비교해서 자기를 높이 생각하는 것 같은 자기를 가지는 데서 기인한다.
(T. 홉스/ 시민철학요강)
우리들은 자기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는 데 즐거움을 느낀다. 남이 보다 많이 행복하다는 걸 갖고 괴로워할 것 같으면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L.A. 세네카/ 분노에 관하여)
질투는 항상 남과의 비교에서 생기므로, 비교가 없는 곳에는 질투도 없다.
(F. 베이컨/ 수필집)
비교하면 어느 것이나 꼭 같지 않다.
(M.E. 몽테뉴/ 수상록)
자신의 작품과 과거의 대작을 먼저 자기 스스로 비교해 보고, 다음으로 남에게 비교해 받음으로써 어떻게든 자기 작품에다 좋은 평가를 붙여 보려고 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비교는 원래 할 것이 못된다. 과거와 현재는 그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작품과 과거의 작품을 같은 각도에서 비교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가치와 비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나 자신은 그와 같은 과오를 항상 되풀이하고 있다.
(L. 비트겐슈타인/ 반철학적 단장)
사람은 모기와 코끼리를 비교하지는 않는다.
(디오게네스)
비교는, 때로 큰 불평을 초래한다.
(J. 리드게이트/ 보카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늘 남과 비교를 하면서 흑은 경쟁을 하면서 생활해야 한다. 어린애들은 어린애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이 비교 의식 때문에 더욱 산다는 것은 괴롭기만 하다. 아래는 보지 않고 위만보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기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이어령/ 증언하는 캘린더)
둘째 며느리 삼아 보아야 맏며느리 착한 줄 안다. <*비교할 것이 없으면 진가를 알기 어렵다는 말>
(한국 속담)
누구나 어떤 사람에게 비해서는 영웅이요, 현인이다.
(R.W. 에머슨/ 문학과 사회목적)
조밥에도 큰 덩이 작은 덩이가 있다. <*어디에나 크고 작은 구별이 있는 법이라는 뜻>
(한국 속담)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비교의 상대가 되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교의 실체가 그 상대인 다른 어떤 것 자체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지원/ 영처고서)
내 콩이 크니 네 콩이 크니 한다. <*서로 비슷한 것을 가지고 제 것이 낫다고 다투는 것을 보고 이르는 말>
(한국 속담)
참깨가 기니 짧으니 한다. <*비슷한 것 중에서 크고 작음을 가리려 하는 말>
(한국 속담)
백합은 검둥이의 손에 있을 때 가장 희다.
(T. 풀러/ 금언집)
비교되지 않고 좋고 나쁜 것은 없다.
(T. 풀러/ 금언집)
신하의 의향이 임금과 맞으면 신하가 올리는 말이 더욱 충성스럽게 여겨지고 더욱 친애를 받지만, 임금이 꺼리는 신하의 말이면 계책에 맞는다 해도 도리어 의심을 받게 된다. 친어머니는 자식의 머리통 부스럼을 치료하다가 피가 귀 언저리까지 흘러내려도 남들이 보고 자식을 무척 사랑하는구나 여기지만, 만약 계모가 이런 일을 했다고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보고 자식을 미워하는 소행이라고 여긴다. 같은 일을 하지만 관점에 따라 틀리게 여겨지는 것이다.
(회남자)
비교는,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필레몬/ 유명우화집)
그대들은 조심하십시요, 그대들이 우리/ 어디서나 모험을 찾는 우리들을 / 완전한 질서인 그런 사람들과 비교할 때엔.
(G. 아폴리네르/ 아름다운 빨간 머리 애인)
설 교 노 트
인생의 실패와 성공
전7:11-14
서론
본문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영군 솔로몬 왕의 신앙적인 처세 철학으로, 두 가지 깊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라와 민족의 흥망 성쇠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관찰하고 인식하라는 교훈이고, 둘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독자적인 행사에 대하여 신앙으로 긍정하고 순종해야 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1. 인생의 성패의 개념과 기준에 대하여
(1) 실패의 개념이란 무엇입니까? 실패란 국어 사전에 "소정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빗나간 헛일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실패의 결과로 수치와 고통과 비극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신앙인들의 실패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시험에 빠져 패배당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국어 사전에 보면 "소정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성공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어떠한 목표를 세웠으면 매 일매 일을 통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성공이라는 말입니다.
이 성공의 결과로 기쁨과 평안과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최후 승리는 마귀와 싸워 승리한 후 천국의 기업을 누리는 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2. 인생이 성패에 대하여 취할 자세
본문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실패한 날에 취할 태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 곤고한 날은 "재난과 불행과 비극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날을 맞이할 때 보통 사람들은, 낙심하여 탄식하며 슬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탄식하면서 슬퍼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생각하라"는 말씀은 깨달아 인식하라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패와 곤고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거나 그 책임을 전가시키지 말고 나 자신에게서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2) 성공한 날에 취할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 "형통한 날"은 성공하여 기뻐하는 날이요, 행복한 날이요, 영광의 날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날을 맞이할 때 보통 사람들은 교만하고 쾌락하고 방탕하기가 쉬우나 우리 신앙인들은 더욱 겸손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성경에 "형통한 날에 기뻐하라"는 말씀은 첫째, 그 형통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요, 다음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의 나의 성공과 형통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옛날 다윗 왕은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일에 도취되었습니다.
결론
우리들은 이 현실에서 실패할 때 깊이 생각하고, 성공할 때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겠습니다. 우리들의 생사나 화복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중에 있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신앙으로 받아서 실패할 때 회개하고 성공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이름과 실상
계13:1-6
서론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7교회 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7교회 중에는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은 교회도 있지마는 대다수의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여기 사데 교회는 칭찬을 받은 교회가 아니라 책망만을 받은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어떠한 책망을 받았냐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름과 실상이 다른 교회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데 교회를 통하여 두 가지 교회상과 두 가지 신자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그 이름대로 실상 살아 있는 교회와 신자상이요, 다음은 그 이름과 달리 실상은 죽은 교회와 신자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이름과 실상이 다른 신자상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신앙이 죽은 자는 어떠합니까?
(1) 생명의 호흡이 중지됩니다.
호흡이 중지되었다는 말은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대화가 중지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신자로서 유지되어야 할 기도의 호흡이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기도가 중단된 신자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신자와 같은 것입니다.
(2) 활동이 중지됩니다.
우리 육신이 죽으면 체온이 식어지면서 반응이 마비되고 마침내는 모든 기능과 활동이 중지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신앙의 생명이 죽은 신자는 영적 감각이 마비되고 마침내는 영적 기능과 활동이 중단되어 모든 것이 정지되는 것입니다.
(3) 부패하여 무덤으로 내려갑니다.
신앙이 정지된 자는 마귀로 인하여 영적으로 부패하여 사망과 음부의 세계로 내려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2. 이름과 실상이 부합한 신자상
여기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신앙 생명이 살아 있는 신자상에 대하여 본문 4절에 밝히시기를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영적으로 신앙 생명이 살아 있는 신자는 어떠합니까?
(1) 신앙의 결백성을 파수해 간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니라"고 하였습니다. 계19:8에 "흰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라고 하였으니, 이 어지럽고 험한 세상에서라도 신앙의 순수하고 결백한 지조를 지켜 나아가는 신자라는 말입니다.
(2) 신자로서의 본분과 의무를 바로 수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신앙 생명이 살아 있는 신자는 이 세상 불의나 죄악에 감염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 제일주의에서, 신자로서의 모든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실천해 간다는 말입니다. 주일 성수나 예배의 의무는 물론 이거니와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성실하게 드리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주님의 사역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3) 환난과 핍박을 감수한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신앙생활이 살아 있는 신자는 이 세상 어떠한 시험이나 환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백절 불굴한 신앙의 자세로 주를 위해 살다가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순교적 신앙으로 십자가를 바로 지고 갑니다.
결론
이와 같이 이름과 실상이 다른 교회나 신자는 죽은 교회요, 죽은 신자라고 하면, 이름과 실상이 부합된 교회는 산 교회요, 산 신자입니다.
비 판
성 경 활 용
1. 성경에 나타난 비판
(1)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는다.
(마7:1-2)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2)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라.
(롬14:1)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관련원어풀이
1. krivnw 크리노-
(1) 판단하다, 심판하다, 비평하다.
(마7:1, 눅6:37)
(2) 비평, 비판.
(마7:2)
2. diavkrisi" 디아크리시스
구별, 분별, 다툼.
(롬14:1)
설교예화자료
숨겨져야 할 재능
상하이에 있는 선교회에는, 오직 한 가지 재능밖에 없어 고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재능은 무엇이지요? " 그러자 그는 "비판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럼, 내가 당신에게 충고를 하나 하겠습니다. 당신은 그 재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비판이란 것은 다른 재능과 같이 사용될 때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재능이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라면 그 재능은 오히려 땅에 묻혀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까마귀와 제비
어느 농부의 집 마당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뛰어나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까마귀를 쫓았습니다.
"에이, 시끄러워. 어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거라!"
까마귀는 깜짝 놀라 다른 나뭇가지로 옮겨앉았습니다.
그것을 본 제비가 까마귀 곁으로 날아가 앉으며,
"까마귀님, 정말 안됐군요. 왜 사람들은 까마귀님만 보면 저리 야단일까요."
하고 까마귀를 위로하듯 말했으나 사실은 자기 자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비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척 사랑한다고 떠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제 몸매를 보셔요 이렇게 날씬하고 고운 음미는 당신과는 비교도 안될 거예요. 또한 저는 이 몸으로 멀리까지 날아다닐 수도 있답니다. "
말없이 제비의 말을 듣고 있던 까마귀는 가엾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그래, 제비 너는 참 곱고 예쁘게 생겼구나. 하지만 그 작은 몸집으로 그 먼 길을 떠나야하다니‥‥ 너희들은 조금만 날이 추워져도 살지 못하니 정말 가엾구나. 나는 비록 생긴건 못생기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지만 겨울의 추위에는 끄떡없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잖니."
그때까지 자기 자랑만 늘어놓던 제비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여우와 나무꾼
나무꾼이 산속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여우 한 마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아저씨, 저를 좀 숨겨 주세요. 사냥꾼이 쫓아오고 있어요." 하며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나무꾼은 재빨리 여우를 집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나무 때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잠시 후 활을 든 사냥꾼이 달려와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습니다.
"이쪽으로 도망치는 여우 한 마리가 있었는데 못 보았소?"
"글쎈, 못 보았는데요."
나무꾼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집안을 가리켰습니다.
그러나 나무꾼의 손가락을 미처 못 본 사냥꾼은,
"이상한데, 분명 이쪽으로 도망쳤는 데‥‥‥‥
하며 급한 걸음으로 숲길을 달려갔습니다.
사냥꾼이 떠나자 집 안에 숨어 있던 여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나무꾼에게 고맙다는 한 마디의 인사도 없이 사냥꾼이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은혜도 모르는 괘씸한 여우로군!"
하며 나무꾼이 호통을 치자 여우는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흥! 은혜를 모른다구? 당신의 손가락이 어디를 가리켰는지 내가 모를 줄 아세요?"
여우는 코방귀를 뀌고는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경솔한 판단을 내린 곳
영국 시인들이 즐겨 찾는 영국 컴벌랜드 주의 아름다운 그래스미어 호수에는, 경솔한 판단을 내린 곳이 있습니다. 어느 날 워즈워드가 그의 여동생과 코울리지와 함께 호숫가를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슭에서 얼마간 떨어진 배에서 한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추수철이라 건장한 사람들은 모두 들판에 나가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했습니다.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할 때에 여기서 낚시질이나 하며 허송 세월을 보내다니, 이 사람은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하지 않고 너무 빈둥거리고 있구나." 그러나 그들이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갔을 때, 그는 너무 노쇠해서 들에 나가 일을 할 힘도 없기 때문에 그가 지금 하는 것은 그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경솔한 판단이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무례했는지를 알고 충격을 받아 그 곳을 '경솔한 판단을 내린 곳'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나무꾼과 신령님
항상 자신이 최고라고 떠들며 다른 사람을 비웃는 나무꾼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신령님을 떠받들고 신령님께 소원을 비는 것을 볼 때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렸습니다.
"신령님이 뭘 안다고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서 소원을 비는 거야?"
그때마다 사람들은 나무꾼의 입을 막으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무슨 큰 벌을 받으려고 그런 험한 소리를 하는 거요? 제발 좀 진정하시구료."
하며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나무꾼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마다 더 큰 소리로,
"웃기지 마시오. 엉터리 신령을 믿다니, 어리석기는‥‥‥‥
하며 여전히 신령님을 비웃었습니다.
하루는 그 나무꾼이 한 친구를 찾아와,
"오늘은 자네에게 신령님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보여주겠네."
하며 옷 속에 참새 한 마리를 숨겨가지고 친구와 함께 신령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계속 빈정거리면서,
"신령님 제 옷 속에 든 참새가 산 것이겠습니까? 죽은 것이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무꾼은 만약에 신령님이 살아 있다고 대답한다면 참새를 죽여서 보일 것이었고 죽었다고 대답하면 그대로 내어 보일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무꾼의 얼큰한 속을 꿰뚫어 보신 신령님은 노한 소리로 사나이를 꾸짖었습니다.
"죽이고 살리는 것은 네 손에 달린 것이 아니겠느냐! 건방진 녀석, 넌 지금 네가 살아있다고 대답하겠느냐? 죽었다고 하겠느냐?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은 참새 한 마리를 죽이는 일보다 더 간단하다는 걸 모르고 있느냐!" 사나이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죄없는 희생자
그를 좋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수학 교수인 스미스 교수가 인간도 아니라고, 그는 기껏해야 계산기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네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 중의 하나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인정머리 없이 보이고 말도 없는 수학 선생이 어떻게 그렇게도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밀드레드 양을 설득시켜 백년 해로의 길에 들어서게 됐는지는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였습니다. 나이 많이 먹은 사람들은 그래도 스미스 교수가 그렇게 무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가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던 일들을 상기시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오래 전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인간도 아니라고, 즉 날 때부터 괴물 같은 존재라고 말하면서, 그는 상당히 위험한 살인적인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서 언젠가는 자기 아내도 죽이려고 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쟌슨이란 사람은 스미스 교수의 성격이 범죄형이라고 주장하면서 밀드레드 양을 무척 동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쟌슨은 어렸을 때부터 밀드레드 양을 잘 알고 있었고, 한때는 서로 사랑에 빠지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동안 직업상의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온 후 그는 밀드레드가 이미다른 사람(스미스 교수)의 아내가 되어 있는 것과, 또한 몹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쟌슨이 밀드레드 부인을 방문했을 때, 그는 밀드레드 부인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우유가 가득 담긴 유리컵이 들어 있었습니다. 격한 감정 속에서 그리고 옛날의 기억이 되살아나 밀드레드는 쟌슨을 붙잡고 비밀을 털어 놓으며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 좀 보세요. 이 유리컵 속에 작은 유리 조각이 가득 들어 있어요. 남편이 이렇게 내가 마실 우유잔에 유리 조각을 잔뜩 넣어 나를 죽이려고 해요. 이렇게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벌써 세번째예요."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쟌슨은 격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경찰에 신고하여 고발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밀드레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위하여 제발 자기가 말한 것을 그냥 잊어 버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기가 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주의하면 된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미스 교수가 침대 위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의사의 해부 결과 그의 사망 원인은 관상동맥경화증이었습니다. 수년이 지나지 못해서 밀드레드는 쟌슨과 다시 결혼했고,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신혼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쟌슨이 사색이 되어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친구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쟌슨이 그날 보통 때보다 훨씬 일찍 집에 돌아왔는데, 현관 앞에서 그는 안에서 자기 아내 밀드레드가 한 친구에게 말라고 있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 이 우유잔 보이지? 유리컵 안에 있는 이 유리 조각들을 좀 봐! 내 남편이 매일 우유잔에 이렇게 유리 조각을 넣어 나를 죽이려고 해. 이렇게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이 벌써 세번째야‥‥ 아냐, 그러지마. 경찰에 알리면 안돼, 내가 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주의하면 되니까‥‥‥‥
밀드레드는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에 있습니다. 즉, 그녀는 지금 정신병 환자를 위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이상한 환상과 착각에 휩싸여 있는 불치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말없고 무정하다고 알려진, 그리고 범죄형 성격에 살인 기질이 있다고 생각되던 스미스 교수는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너무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머리에 이상이 생겨 죽을 때까지 혼자 그 비밀을 지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는 충고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을 죽인 모함
미국 대통령 잭슨이 출마했을 때 정적들은 잭슨 부인 레셀을 공격하며 "더러운 여자인데대통령 부인이 된다니 안될 일"이라는 팜플렛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레셀은 39년 전의 불행이 오늘 남편의 명예를 해치는 결과가친 것에 큰 충격을 입었습니다.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였으므로 극력 변명하였지만, 커다랗게 간통이라고 신문이 떠들어대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레셀 부인은 투표일 다음 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문의 허위보고가 그녀를 죽인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올바르기보다는 비판하기가 훨씬 쉽다.
(B. 디즈레일리/ 하원에서의 연설)
천재는 미리 정해진 궤도에 따라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 궤도는 모든 비판적 평가에서 이탈되어 있다.
(H. 하이네/ 북해 제3부)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나치게 비판적이면 친구가 없다.
(전한서)
사람들은 너에게 비판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칭찬을 기원할 뿐이다.
(W.S. 몸)
전시에 있어서의 비판은 민주주의의 생명의 근원이다.
(P. 해리스)
남의 심판을 받기 싫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A. 링컨)
비판은 탁월한 인간이 서민에게 지불해야 하는 부담이다.
(J. 스위프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고찰)
비판이란 것이 반드시 호감을 받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하다. 그것은 인체가 고통을 이겨내는 것과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사물의 비 건강적인 상황의 진행에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W. L.S. 처칠)
지나치게 자기 허물을 찾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징후의 하나이다. 어느 정도까지의 자기 비판은 정상이고 건설적이며 자기 개선을 위하여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그것은 우리들의 적극적인 행동력을 마비시키고 만다.
(D. 카네기)
검다 희단 말 없다. <*그 일에 관해서는 무어라고 옳다 그르다거나 좋다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
(한국 속담)
비판은 까마귀를 보지 못하고 비둘기를 덮친다.
(유베날리스/ 풍자시집)
자기가 이웃 사람의 입장에 서지 않는 한 이웃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탈무드)
모든 것을 의문시할 것. 즉, 어떠한 곤란에 당면하더라도 그것을 회피하지 말 것. 부정적인 비판에 의한 엄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는 자신의 의견은 물론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결코 받아들이지 말 것. 오류나 부조리, 혹은 사고의 혼돈이나 무의식적인 태도를 삼갈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단어를 사용하기에 앞서 먼저 단어의 의미를, 한 명제에 대하여 찬의를 표하기에 앞서 우선 그 명제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는 태도를 끝끝내 지킬 것. 이러한 것들은 옛날의 변증가들로부터 우리들이 배우는 교훈이다.
(J.S. 밀)
서부개척시대의 한 가장처럼/ 내 언어의 영토에 개성의 철책을 치고/ 말 잘타는 비평가들의/ 무법자같은 총질이나 막아내야겠다.
(김대규/ 쇄국주의)
자주 비난을 받아 용기를 잃은, 선구자적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 스승은 말했다. "비평가의 말을 귀담아 듣게, 그는 자네 친구들이 자네한테 숨기는 것들을 드러내 주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비평가의 말에 짓눌리지 말게. 일찍이 비평가를 기리는 동상이 선 일은 없네. 동상이란 비평받은 이들을 위한 것이지."
(앤소립 드 멜로/ 반대)
설 교 노 트
비판하지 말라
마7:1-5
서론
성경은 형제에 대한 비판을 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판은 서로에게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고 허물 투성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에 대하여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1.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자신도 비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은 비판을 가져오고작은 비판은 큰 비판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받는 자와 하는 자 모두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 깨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마5:44) 우리는 남을 비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살피듯이 신자는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자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허물을 발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가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나를 쳐서 내 몸을 복종시키고 내 자신을 돌아보아 나의 허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사랑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에게 직접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입니다. 비판은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충고는 기쁨으로 받아드립니다.
사랑이 담긴 권면은 하나님도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3-4절에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가 남을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비판 받기를 싫어합니다. 남을 비판하려면 자신을 돌아보고 살핀 후에 사랑의 권면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도 비판 받지 않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십볼렛이라 하라
삿12:. 6
서론
본문에 보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하면 길로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1. 날카로운 비난의 욕설은 화를 부릅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수고하고 있는 입다 사사를 비난하면서 입다를 중심한 길르앗 사람들을 이리 저리 쫓겨다니는 "도망자"라고 모욕하였습니다. 이것은 입다의 신분을 염두에 두고 멸시하는 말입니다.
입다의 신분은 어떠하였기에 그들이 입다를 멸시하였습니까? 사사기 11장 1-3절에 그의 신분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이에 입다가 그 형제를 피하여 돕 땅에 거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날카로운 비난의 욕설은 분쟁을 일으키고 화를 초래합니다
잠언 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격분한 길르앗 군대들은 요단강 나루턱을 점령하고 그곳을 지나가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2. "십볼렛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길르앗 군대를 두려워하는 에브라임 사람들이 그들의 신분을 숨기고 에브라임이 아닌 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발음을 들어보고 에브라임 사람을 식별하였던 것입니다.
"십볼렛이라 하라"는 것이 시험 문제였습니다. 여기 십볼렛(쉬볼렛)은 "시냇물" 혹은 "곡식 이삭"을 뜻하는 것이며, "씹볼렛"은 "무거운 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그 당시 에브라임 사람들의 발음은 우리나라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어서 발음이 다르듯이 "십볼레"이라고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고만 발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시험을 받게 된 것도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들이 길르앗 사람들, 즉 입다의 군대를 가리켜서 이스라엘 사람답지 못하다고 비방한(4절) 죄로 이제 그들 자신이 이사엘 사람답지 못하게 발음조차 분명하게 하지 못하여서 이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죽음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오묘한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섭리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남잡이가 제잡이"라는 말과 같이 남을 모함하고 멸시하고 깔보다가 스스로 화를 초래하며 부끄러운 죽음을 당한 것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결과요, 미련한 노릇입니다.
결론
시편 9장 16절의 말씀과 같이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승 자박이 된 셈입니다. 공연히 시기와 질투로 비난의 말을 함부로 하다가는 오히려 자신이 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민12:1-16
서론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헐뜯어 말하기를 좋아하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틈만 있으면 남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좋은 결과보다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고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남의 약점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죽고 난 이후에 모세가 재혼한 여인이 이방 여인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는 이유 하나로만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잡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잡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감추고 남의 약점만 잡고 늘어지는 자들이 있고 또 그들이 남을 비방하는데 맨 앞장서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잘못된 추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의 약점을 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가장 저속하고 비열한 짓이 되는 것임을 우리 성도들은 알아야 합니다.
2.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 "그 구tm 여자를 취하였음으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헐뜯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는 인격적으로도 존경받을 일이 못되고 신앙적으로도 덕스러운 일이 못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방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아니하시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 이유는 덮어주는 것은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벧전4:8).
우리가 남을 비판하려면 그 사람의 결점을 들어내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권면하여야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것을 기제하십니다.
3. 벌받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문 9-10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메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문둥병이 들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판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비방하는 것은 벌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사람들은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쉽게 비방합니다.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방하는 자의 길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진노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암은 모세에 대하여 비방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문둥병에 걸리게 되고 만 것입니다.
결론
남의 약점을 잡아 비방의 구실로 삼는 것도 좋지 않고 타인의 약점을 비방하는 것을 당연한 줄로 알아서도 안되며 비방하기를 좋아하다가 하나님의 벌받는 일이 있어서는 더욱 안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종을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롬14:4).
빈 부
성 경 활 용
1. 빈부의 일반적 의미
(1) 세상의 소유를 뜻함
(잠10:15)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2)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나타냄
(잠5:10)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2. 영적 의미
(1) 예수의 가난은 성도를 부요케 함
(고후8:9)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2) 믿음에 부요케 된 성도들
(약2:5)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3. 빈부에 대한 고찰
(1) 근원은 하나님이심
(삼상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2) 견고한 성과 패망
(잠10:15)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패망이니라
(3) 정당한 노력의 대가
(잠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
(잠28:19)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좇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4) 친구의 많고 적음
(잠19:4)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5) 빈한 자는 간관하고 부자는 교만함
(잠18:23)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하느니라
(6) 부는 빈민을 만족케 함
(시132:15)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
관련원어풀이
I. 가난
1. vr'y: 야-라슈
(1) 사람의 소유물을 빼앗다, 빈곤하게 되다, 소유를 잃어버리다.
(잠23:21,30:9)
(2) 내몰다, 탈취하다, 곤궁케하다.
(삼상2:7)
2. &Wm 무-크
억압당하다, 가난해지다, 초라해지다.
(레25:25)
3. r/sj]m' 마흐쏠-
부족, 필요함, 궁핍, 가난.
(잠11:24, 21:7, 22:9)
4. ynI[; 아-니-
온고한, 비천한, 겸손한, 부드러운.
(출22:25, 레19:10, 신24:12, 시35:10, 40:17, 합3:14)
5. ptwcov" 프토-코스
(1) 몸을 구부리는, 구걸하는, 빈곤한, 무기력한, 부족한, 가련한.
(마5:3, 11:5, 막12:42, 눅4:18, 19:8, 요12:5, 6)
(2) 빈곤, 가난, 궁핍, 부족.
(눅21:2, 고후8:2)
II. 부
1. rv'[; 아-솨르
(1) 자신을 부한 체 하다.
(욥15:29)
(2) 세우다.
(왕상22:49, 대하20:36, 37)
(3) 부하게 하다.
(창14:23)
(4) 부하게 되다.
(시49:17, 잠10:4)
2. ryvi[; 아-쉬르
(1) 부한.
(잠10:15, 14:20)
(2) 명예스러운, 고귀한, 고상한.
(전10:6)
3. gc'n: 나-사그
부귀를 얻다, 부하게 되다.
(레25:47)
4. lwOdG: 가-돌
(1) 큰, 위대한.
(민34:6, 창12:2)
(2) 큰 일들.
(욥5:19, 9:10)
5. plou'to" 플로우-토스
(1) 부, 부귀, 풍부.
(마13:22, 눅8:14)
(2) 부함, 풍부.
(롬2:4, 고후8:2)
6. ploutevw 플루테오
풍부하다, 부요하다, 많은 재산을 가지다.
(눅1:53, 계18:15)
7. ploutivzw 플루티조-
부하게 하다, 풍부하게 하다.
(고전1:5, 고후6:10)
설교예화자료
세계적인 부자 할아버지
세계적인 재벌인 폴 게티 할아버지는 꼭 한 번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81번째 생일에 귀한 선물, 곧 다섯 달 동안 이태리 유괴범에서 잡혀 있었던 손자 폴 게티 3세가 풀려나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부유한 기름 왕은 한 번은 그의 모든 재산이 성공적인 결혼과 교환하는 데 모두 쓰여졌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5번이나 시도했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그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주위의 많은 소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혼자로 남았습니다.
81세가 된 폴 게티는 복잡하게 얽혀져 있고 여러 사고와 재난들로 가혹하게 고통받은 가계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백만 장자였지만 그의 재산은 그에게 평화도, 마음의 안정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건강과 사랑도, 좋은 소화력도, 장수도 돈으로 살 수 없다고, 그는 또한 돈은 행복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돈 때문에 최근 그의 손자가 유괴당한 것을 통해 그가 깨달은 바인 것 같았습니다
그의 부인들은 그가 사업에만 몰두해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삶을 공유할 수 없었다고 딸했습니다. 또한 그의 자손들은 그가 약 12억 달러로 평가되는 그의 막대한 재산에서 나오는 이익을 향유하게 하는 대신에 그들에게 억지로 일을 시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남은 것은 금고의 열쇠
영국에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을 줄만 알았지 줄 줄은 도무지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죽음에 임박해 있자 그는 성직자를 청하였습니다. 부탁을 받고 달려온 성직자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손을 잡고 기도를 하려하자 부자는 손을 뿌리쳐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떨며 한 차례 요동을 치더니, 그의 두 손이 축 늘어졌습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켜보고 있던 주위 사람은 이미 생명을 떠나간 부자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랬습니다. 죽은 부자의 축 늘어진 손에는 금고의 열쇠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목숨이 끊어진 후에도 금고 열쇠를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전에는 모든 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열쇠였습니다. 가족들은 만반이 굳어가는 시신의 손에서 열쇠를 빼내어 금고의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곡차곡 채워 진 빳빳한 지폐 뭉치와 함께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빛을 바라고 있지 않겠습니까!
부자의 마음은 죽은 순간까지도 돈에 대한 집착과 미련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 남은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의 금고 열쇠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공인가?
1923넌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자본가들이 시카고의 엣지워터 비치 호텔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재산을 합계해 보면, 미국 국고에 있는 것보다 실제적으로 더 많은 부를 조정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신문과 잡지들은 그들의 성공담을 게재하여 그 나라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본을 따르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27년 후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찰스 슈와브-거대한 독립 철강 회사의 사장. 그는 죽기 5년 전에는 납에게서 빌린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무일푼로 죽었습니다.
(2) 아더 커튼-커다란 밀 투기가. 파산하여 해외에서 죽었습니다.
(3) 리차드 휘트니 -뉴욕 증권 거래소의 사장. 그는 싱싱형무소에서 몇 년 전에 석방되었습니다.
(4) 알버트 펄-대통령 각료의 한 사람으로, 사면되어 형무소에서 나와 집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5) 제시 리버모어-금융가인 윌가에게 가장 강력한 인물. 그는 자살했습니다.
(6) 레온 프래이저-국제 식민 은행의 총재. 그는 자살했습니다.
(7) 이바 크루거- 세계에서 가장 큰 전매기업의 사장. 자살했습니다.
이들 모두는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어느 누구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마모우드의 전시품들
인도를 정복한 최초의 모하메드 교도인 마모우드는 죽음이 가까워지자 그의 모든 값비싼 의상과 금, 은, 그릇들, 진주, 귀중한 보석들을 그의 앞에 전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는 '행복의 궁전'이라 불리는, 구즈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그 전시품들을 만지며 어린 아이와도 같이 울었습니다.
"이 보물들을 얻기 위해 나의 몸과 마음은 수고와 위험과 피곤함을 견디어 왔습니다.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나야만 하다니 ·
어록·시·묘사
마음이 풍요롭지 못하면 부는 추악한 거지에 지나지 않는다.
(R.W. 에머슨/ 수필집)
부의 축적은 최악의 우상 숭배다. 그보다 더 천한 우상은 없다.
(A. 카네기)
부는 분뇨 (糞尿)와 같다. 그것이 축적되어 있을 때에는 악취를 풍기고 뿌려졌을 때에는 흙을 기름지게 한다.
(L. N. 톨스토이)
부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경제적 이익이 진실된 인간사를 방해함이 없도록 언제나 제한과 속박과 경고가 내려진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신분에 알맞은 생활을 위해 필요한 부를 추구하는 일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이상을 추구하면 이는 사업이 아니라 탐욕으로 되며, 그리고 이 탐욕은 결정적인 죄악이 된다.
(E.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세 가지 것으로 사람의 역 량을 엿볼 수 있다. 명령과 부귀와 불행이다
(아라비아 속담)
부귀한 집은 너그럽고 후(厚)하여야 하거늘 도리어 각박함은, 곧 부귀하면서 그 행실을 가난하고 천하게 함이니 어찌 능히 복을 받으리오.
(채근담)
곤자소니에 발 기름이 끼었다. <*부귀를 가지고 크게 뽐내는 사람을 이름>
(한국 속담)
부를 경멸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부자가 될 가망성이 없기 때문이다.
(F. 베이컨 / 학문의 진보)
부를 멸시하는 사람은 꽤 많다. 그러나 부를 나누어 줄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F. 라 로슈푸코)
부라고 생각되는 것도 실은 널리 퍼져 있는 영락(零落)의 지표에 도금한 것에 불과할지도모른다. 혹은 해적이 대상선을 해안으로 유혹해서 약탈한 한줌의 화폐일지도 모른다. 혹은 종군 상인이 영광스럽게 전사한 용사의 가슴에서 벗겨 낸 한 뭉치 남루(襤樓)의 덩어리인지도 모른다. 혹은 시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함께 장사 지낼 도자기공의 전답을 샀던 부정재(不淨財)일지도 모른다.
(J. 러스킨/ 최후까지)
부자가 되는 가장 가까운 길은 富를 경멸하는 데 있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의 서한집)
부자들의 오명(汚名)은 돈으로 가려진다.
(T. 풀러/ 잠언집)
사람은 사랑이 없는 여자를 가지는 것처럼 행복이 없는 부를 가진다.
(A. 리바롤/ 각서 ·사색 · 잠언)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빈자가 연옥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큼 힘들다.
(둘리/ 둘리 씨의 견해)
참된 부는 혼의 속에 부가 있을 따름, 다른 것은 모두 이익보다도 화를 가져온다.
(루키아노스/ 에피그램)
부는 노고에 의하여 얻어지며, 우려에 의하여 보존되고, 그리고 잃어버리면 비탄이 많다.
(스코틀랜드 격언)
부는 집을,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
(대학)
월 가(街) 자본가의 부는 제 1 차 세계대전의 사자(死者) 1000만, 제2차 세계대전의 사자 3000만의 위에 구축된 것이다.
(H. 그로드)
벼락부자의 자만은 참으로 오만하다.
(J. 게이/ 우화집)
재물을 쓰기 두려워하는 자는, 재물을 가지기에 적합치 않다.
(T. 풀러/ 잠언집)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베고 살아도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나니 불의로 얻은 부귀는 나에겐 뜬구름과 같다.
(논어)
인간이 그의 내적인 부를 낳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E. 프롬/ 소유냐 삶이냐)
봄꽃도 한때. < * 부귀영화란 허무한 것이고 한때라는 뜻>
(한국 속담)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라. < *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돈만 있으면 남들이 높이 대하여 준다는 뜻>
(한국 속담)
부는 극악한 사람까지도 가장 높은 신분으로 떠받쳐 올린다.
(에우리피데스)
부자는 튼튼한 위를 가져야 한다.
(W. 휘트먼/ 짧은 기도문)
부가 노동의 집적이라는 말은 진실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노동에만 종사하고, 어떤 사람은 그 집적만을 얻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미상)
남아도는 부는 소유자에게 맡겨 진 성스러운 신탁이며, 그의 생존시 사회를 위해서 쓰이게 되어 있는 것이다.
(A. 카네기)
명주 옷은 사촌까지 덥다.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이 부귀한 몸이 되면 옆 사람에게까지 그 혜택이 돌아오게 된다는 뜻>
(한국 속담)
부하면 어질지 않다.
(털자)
큰 부는 총명과 건강을 방해한다.
(B. 플랭크린)
부가 증가하면 미덕은 곧 줄어든다.
(F.A. 베벨)
부는 쾌락을 멍들게 하고 걱정, 근심의 근원이 된다.
(인도 격언)
많은 사람들은 부를 획득하자마자 여러 가지 악으로부터 도망하지 않고, 보다 더 큰 여러가지 악으로 전향한다.
(에피쿠로스/ 斷片)
훌륭해지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고 머리를 숙이고 아첨하고 속일 것을 결심한 것이다.
(H. 발자크/ 고리오 영감)
부는 온갖 범죄를 감싸는 외투이다.
(메난드로스)
인간은 부와 양식을 동시에 혜택받지 않는다.
(T. 리비우스)
영지(英智)를 가미한 부는 본래의 최상의 선물이다.
(핀다로스)
많이 가진 자가 아니라, 가장 적게 탐내는 사람이 부유하다.
(J. 노드브루크/ 도박)
부자로 죽는 사람은, 죽어서 망신한다.
(A. 카네기/ 부의 복음서)
빈곤이 부자에게는 하나의 불가사의이다. 식사하고 싶은 자가 왜 종을 치지 않는가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W. 배저트/ 문학연구)
가난은 치욕이 아니다. 부란 냉혹한 이익을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자로서 가슴에 검은 돌을 품고 사는 것보다는 그분의 환심을 살 것이다.
(E. 크라이더/ 지붕 밑의 무리들)
만인이 다 바라는 부귀가 비록 한때의 현상이라 하더라도 비천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멸시해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의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의 부를 이루는 과정과 방법이 도덕적인 데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원수/ 젊은이여, 부를 멸시하라)
부와 귀는 사람마다 원하지만 부정으로 얻은 부귀는 누리지 말며, 빈천은 사람마다 싫어하나 도의적인 빈천이면 기피하지 아니할지니라.
(논어)
우리의 부는, 물질은 물론이요 지식도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를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것들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독립적인 획득 수단들을 갖추는 데 있는 것입니다.
(M. K. 간디)
부란 거액의 재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족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다운 부는 이 세상에서 행하는 선이다.
(미상)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참으로 부유하다.
(J. D. L. 베프리/ 일반적인 격언집)
끓는 물이 달걀을 굳게 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부는 없어지는 것이다.
(S. F. 베르뇌)
공명은 낭(狼)을 끼고 부자는 중지원(衆之怨)을/ 단사표음(簞食瓢飮)을 누항(陋巷)에 안분(安分)리니/ 세상에 자황분경(雌黃奔競)을 나는 몰라 하노라.
(김민순)
부귀를 바라지 말라 부귀 간 데 말 많더라/공명(功名)도 바빠 말라 백안(白眼) 모인 곳이러라/ 천작(天爵)을 닦아 두어라 바쳐 쓸데 없으랴.
(무명씨)
유복한 부인은 물건을 왼종일 고르고/ 백화점 소녀는 피곤이 밀린 잡답(雜畓) 속에서도.
(노천명/ 窓邊)
우리들 자신/ 백 인들을 존경해야 하고/ 부자들을 두려워해야 하는 / 무식한 혹인들/ 우리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원주민 거리에 사는 당신의 아들들입니다.
(아고스티뇨 네토/ 이별의 순간에 이별인사)
내가 사랑하는 것을 잊거든 무대에 올려다오/ 내가 천사와 부귀를 얻거든 버려 다오.
(吉本隆明/ 사랑의 노래)
부자를 구슬려 먹는 데는/ 납작한 아첨이 최고란다/ 돈이 란 게 아마 납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납작하게 구슬려 먹는 것이다.
(하이네/ 롬펜 근성)
어떤 현인과 어리석은 부자가 만나 교육과 부에 대해 토론했다. 그들이 헤어졌을 때 서로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현인에게는 쓸데없는 몇 마디 말의 울림이, 그리고 부자에게는 안개 속 같은 몽롱함만이 남았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인간의 가치는 그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에 있지 않고, 그가 창조한 몇 안 되는 것에 있다‥‥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한 부란 이 세상에 없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번영은 두 가지 길을 통해서 온다. 땅을 착취함에 의해 그리고 그 산물들을 분배하는 것에 의해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가난이란 일시적인 결함에 지나지 않지만, 지나친 부는 지속적인 고통을 안겨다 준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가난한 사람은 덕행으로, 부자는 선행으로 이름을 떨쳐라.
(주베르/ 명상록)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고,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쉬운 일이다.
(공자)
법률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며 부자는 법률을 지배한다.
(0. 골드스미스/ 여행자)
물질적인 부와 정신적인 부는 반드시 병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자가 있다
(브라운슈바이크)
명아주 먹는 입, 비름 먹는 창자엔 얼음같이 맑고 구슬처럼 조촐한 사람이 많지만, 비단옷 입고 쌀밥 먹는 사람은 종노릇 시늉도 달게 여긴다. 대저 뜻은 담백함으로써 밝아지고, 節操는 기름지고, 달콤한 맛 때문에 잃어진다.
(채근담)
부(富)는 사치와 방종의 어버이요, 빈곤은 비열과 사악의 어버이이며, 양자(兩者)는 모두 불만의 어버이이다.
(플라톤/ 국가론)
가난한 자가 항상 살코기를 구할 수 없다면, 부자는 살코기를 언제나 소화시킬 수 없다.
(기레스)
부자는 기르고 빈자는 낳는다.
(영국 속담)
자기의 자산 이상으로 소비하는 자는 부자가 아니고 또한 자기의 수입이 지출 이상인 자는 가난한 자가 아니다.
(하리버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분과 가족이 있을 따름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다.
(M. 세르반테스/ 돈 키호테)
서로 반대되는 두 집단, 즉 빈부가 균등하게 될 때 혁명은 화해되며 그들의 간격은 거의 또는 전연 없어지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부자의 병과 가난한 사람의 술은, 먼 데 있어도 들려온다.
(J.G. 헤르더/ 제민족의 노랫소리)
가난한 사람은 부자의 류머티즘일지라도 기꺼이 받으려 할 것이다.
(유베날리스/ 풍자시집)
가난한 사람은 위 때문에 고기를 구하나 부자는 고기 때문에 위를 구한다.
(영국 속담)
부자(富者)와 함께 식사하되 놀이는 빈자와 함께 가라. 빈자들이야말로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L.P. 스미드/ 추상)
부자는 내년 일에 가난한 사람은 오늘 일에 생각이 미친다.
(중국 속담)
고통 없는 빈곤이, 괴로운 부보다 낫다.
(메난드로스/ 단편집)
가난은 안전하나, 부는 위험을 안고 있다.
(파에드루스/ 우화집)
부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겠지만, 빈자는 이미 지옥에서의 刑期에 복무하고 있다.
(A. 체이스/ 전망)
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지는 것보다는, 가난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더 좋다.
(J. 레이/ 영국 격언집)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알고 있지만 부자는 가난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중국 속담)
가난과 부유는 각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렸다. 부만 하더라도 권세와 건강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가지는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과 기쁨에 따라 다르다. 사람들은 각자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다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믿을 수 있어야만 만족이 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믿는 마음이 진실을 줄 뿐이다.
(M. E. 몽테뉴)
부자가 전쟁을 수행할 때 죽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다.
(J. 사르트르/ 악마와 신)
세상은 부자에게는 주고, 빈자에게서는 뺏는다.
(G. 허버트/ 명궁)
가난한 자가 부자를 질투하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겁내는 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의 복음이니 하는 것은 그것과는 아랑곳없다.
(G. 플로베르)
빈곤은 우리들의 욕망을 저해하지만, 또한 그것을 제한한다. 부유는 우리들의 욕구를 늘이 지만, 또한 그것을 채우는 보조도 해준다.
(L.C. 보브나르그/ 성찰과 잠언)
만일 자유사회가 다수의 빈자를 돕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소수의 부자도 구하지 못한다.
(J.F. 케네디/ 취임연설)
다라운 부자가 滑手한 빈자보다 낫다. < * 부자는 인색하더라도 남에게 베푸는 것이 있고 가난한 사람을 무엇이나 잘 쓰는 솜씨라도 워낙 없기 때문에 남에게 주는 바가 없다는 말>
(한국 속담)
배부르고 따뜻하면 음욕을 생각하게 되고, 주리고 추워야 道心이 싹트게 된다.
(명심보감)
부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반드시 빈부간의 투쟁이 있게 마련이다
(J. 애덤스)
가난한 사람에게는 적이 적으면, 돈 많은 사람에게는 친구가 적다.
(유대 격언)
빈부의 최후적 결정자는 그 사람 자신일 따름이요, 주위의 방황하는 제삼자가 아니다.
(김진섭/ 청빈에 대하여)
꿰 많다는 것은 부를 뜻하고, 어지간하다는 것은 가난을 뜻한다. 나는 가족이 어지간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죽을 것이다.
(T.L. 피코크/ 크로체트성)
신의 손 안에서의 가난이, 창고 속에서의 부보다 낫다. 마음이 즐거울 때의 빵 한 조각이, 불행할 때의 부보다 낫다.
(아메네모페/ 아메네모페의 지혜)
일단 인간이 배고픔에 직면하게 되면 부자나 빈자나 모두가 마찬가지다.
(에우리피데스/ 엘렉트라)
부자의 향락은, 가난한 자의 눈물로 얻어진다.
(T. 풀러/ 잠언집)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는 사람들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그들의 배고픔을위로하는가를 보라.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돈이 많은 자는 검약가이며, 가장 가난한 자는 수전노이다.
(S.R.N. 샹포르/ 격언과 반성)
만일 자연에 따라 살아간다면 결코 가난하지 않으리라. 만일 세속의 견해대로 산다면 결코 부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에피쿠루스/ 유고집)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부자와 빈자의 전쟁이다. 그것은 아무리 오래 연기되더라도 반드시 일어나며 더군다나 모든 공포를 몰고 오는 것이다.
(0.A. 브라운슨)
천주의 귀하신 교훈은 파벌과 등급을 없애라 하셨나니/ 밭에서 부지런한 자는/ 누구나 다 땅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 하시며/ 공정함과 망념됨을 잘 분별하시어/ 금율(禁律)을 욕되게 하기 전에/ 신례(新禮)를 세우시니/ 그 축복하심 기리 받으시는 도다// 빈부 귀천 모든 인간/ 좌우가 서로 가깝게 친근하게 화목할지니/ 진실하신 여론(餘論)에 더욱 복종하면/ 반려(班旅)들 모두 다 불리움을 받는도다.
(이 벽/ 성교요지)
"영성(靈性)이 저처럼 세속적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있을까요? " 사업가가 물었다. // "더 가지도록 도와줄 것이오." 스승이 말했다. // "어떻게 말입니까? "// "덜 가지고 싶도록 가르쳐 줌으로써."
(앤소니 드 멜로/ 부)
많이 가진 자는 금방 또/ 더 많이 갖게 될 것이고/ 조금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땡전 한 닢 없이 당신이 빈털털이라면/아 그때는 무덤이나 파는 수밖에/ 이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는 자는/ 뭔가 가지고 있는 놈들 뿐이니까
(하이네/ 세상사)
설 교 노 트
부자와 거지
눅16:19-31
서론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 본문에 나타난 교훈은 재물을 지혜있게 쓰면 하늘나라에 상급이 있으나 재물로써 구제하지 않는 자는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은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분별을 보이신 것입니다. 나사로는믿는 자의 표상이니,그것은."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는 말씀이 나타내고 있습니다(22절). 그리고 부자는 믿지 않는 자의 표상이니, 그것은 그가 얼마나 "호화로이 연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말씀이 증거합니다.
그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1. 지옥에 간 부자
(1)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의 안락만 좋아하였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19절)"라고 하였습니다.
(2) 그는 이웃의 불행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여기 부자가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였다거나 나사로를 핍박하였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그의 죄과는 이와 같이 비참한 나사로에게 무관심하였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무관심은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결정적인 죄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바르게 쓰지 못하고 자신의 사치와 향락에만 사용한 것이 중대한 죄였습니다(20-21절). 그는 이웃의 불행에 대해 방관자였습니다
(3) 그는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그는 음부에 가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쾌락만 사모하였습니다.
본문 24절에 "불러 가로되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기보다도 지옥에서도 나사로를 자기 집의 하인 부리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2.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 나사로
(1) 그는 겸손한 심령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빵덩어리는 감히 생각조차 못하고, 오로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였습니다(21절).
(2) 그는 침묵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견디며,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사람도 허물이 있다고 하지 않고, 고통에도 침묵하였고(21절), 천국에 들어 간 후에 지옥에 들어간 부자의 무리한 청원에도 그는침묵하였습니다(24절). 그는 말없는 성자였습니다.
(3) 그는 부자의 불행에 통쾌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세에 들어간 후 자기와 그 부자의 형편이 변동된 일에 대하여 어떤 통쾌감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자신을 하인처럼 여기며 말해도 그는 거기에 대해 욕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4) 그는 끝까지 모든 일에 인내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참는 생활을 그는 하였습니다. 자신을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함이 없이 꾸준히 인내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결론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지만 그 행위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우리는 깨닫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잠22:2
서론
부자와 가난한 자는 색다른 두 개의 세계에 나뉘어 사는 것 같으나 엄밀하게 따지면 많은공통성을 띠고 같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사건을 보면 빈부가 공존하였으나 둘이 다 죽었습니다. 부자는 불구덩이에,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부자는 재물 때문에 멸망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그의 가난때문에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음으로 그러한 차이가 난 것입니다.
1. 빈부는 고통 중에 섞여서 삽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온갖 고통을 다 겪게 됩니다. 육신으로 병에 시달리는고통이 있고, 풍부한 물질로 인한 고통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심령의 고통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들은 빈부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이 누구에게든지 있는 사실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욥5:7)"고 하였습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에게 재물이 많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마19:22).
2. 빈부는 사망의 길을 같이 갑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사람이 한 번 죽는 일은 정한 이치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죽을 날이 임박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말하였습니다(왕상2:2).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인생들에게 각각 한정되어 있으니 그때를 회피하거나 연기시키거나 거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라고 하여도 절대로 죽음의 때를 자기 마음대로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라고 해서 무고히 죽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의 길은 빈부가 다같이 가는 길입니다.
3. 빈부는 심판 앞에 같이 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지런히 서야 합니다. 여기에서는 빈부가 아무런 차별없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륵 6장 15-17절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서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와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또 13장에 보면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가 다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심판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결론
빈자와 부자는 천국에서도 같이 섞여서 살게 됩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 뿐입니다(마19:24). 결코 못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도 부한 자면 가난한 자를 돌보는 생활을 하여서 부한 자나 가난한 자가 다 주 안에서 하나되는 생활을 하여 날마다 그 신앙이 성장하길 바랍니다.
사 람
성 경 활 용
I. 인간의 창조에 대한 일반적 고찰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됨
(사43:7)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2) 하나님의 창조하심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창5: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창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고전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약3:9)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4) 흙으로 빚어짐
(창2:7) 여호와 하나님 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5) 지성을 부여받음
(창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6) 통치권이 부여됨
(창9: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려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시8: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동물보다 우월함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II. 인간의 본성
1. 죄됨
(1) 육신을 좇는다.
(롬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2) 거짓말을 한다.
(골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3)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롬8:8) 육신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2. 새로워 지는 길
(1) 성령이 내주하심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2) 속 사람의 강건
(엡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3) 새 사람을 입음
(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4) 속 사람이 새롭게 됨
(고후4:16)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III. 인간의 타락
1. 인간이 타락한 원인
(1) 화와가 미혹됨으로
(고후11:3) 뱀이 그 간계로 화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2)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로
(창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2. 인간이 타락한 육적인 결과
(1)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창3:24) 하나님 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더함
(창3:16)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 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3)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 수 있게 됨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4) 사망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3. 인간이 타락한 영적 결과
(1)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남
(엡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2) 죄악 중에 출생함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3) 마음이 악함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4) 죄의 종이 됨
(롬6:17)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5) 범죄로 죽음
(골2:13)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6) 영적 눈이 어두워짐
(엡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7) 사람은 죄악을 씻을 수 없음
(렘2:22)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4. 인간의 구원
(1) 하나님의 사랑이 기초가 됨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 하나님의 은혜임
(딛1: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3)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성취됨
(계1:5)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5.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1) 인간에게 빛을 주심
(요1: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2) 인간의 본성을 아심
(요2:25)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3) 죄 있는 육신의 모양
(롬8:3)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유일한 중보자이심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IV. 인간의 경영
1. 선한 동기의 경영
(1) 악한 자들에게 방해 받음
(스4:4)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2) 성취됨
(왕상5:5)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건 하오니
(잠20:18) 무릇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3) 신중하게 세움
(고후1: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2. 악한 동기의 경영
(1) 하나님이 아심
(렘49: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하솔 거민아 도망하라 멀리 가서 깊은데 거하라 이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너를 칠 모략과 너를 칠 계책을 정하였음이니라
(2) 의인을 해하려고 함
(시140:4) 여호와여 나를 지키사 악인의 손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나를 보전하사 강포한 자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는 나의 걸음을 밀치려 하나이다
(3) 허무함
(행4:25)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3. 인간이 나아가는 길
(1)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길
(민22:32)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2) 험한 길
(잠13: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3)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길
(잠15: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4) 불선한 길
(잠16:29)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불선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5) 어두운 길
(잠2:13)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관련원어풀이
1. v/na> 에노-쉬
(1) 사람.
(시55:14, 욥7:17)
(2) 군중, 백성.
(사8:1)
(3) 악인.
(시66:12)
2. !d;a; 아-담-
(1) 남자, 사람, 인류.
(창1:26, 시68:19)
(2) 어떤 사람, 아무도.
(레1:2, 욥32:21)
(3) 아담.
(창2:7)
(4) 사람의 아들.
(민23:19, 욥16:21)
3. a[nqrwpo" 안드로-포스
(1) 인간, 남자나 여자.
(요16:21)
(2) 성에 대한 남자
(요7:22)
(3) 어떤 사람, 어떤 남자.
(마17:14, 요5:5)
(4) 일반적 사람.
(마10:36, 눅12:36)
(5) 사람, 백성.
(마5:13, 요4:28)
(6) 하나님의 사업에 헌신한 사람, 목자.
(딤전6:11, 벧후1:21)
4. ajnqrwvpino" 안드로-피노스
(1) 인간의, 인간적, 사람에 속하는.
(고전2:4, 약3:7)
(2) 사람에 어울리는.
(롬6:19)
설교예화자료
세 가지 종류의 사람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거미와 같은 사람:남을 죽이고 빼앗아 먹는 사람
둘째, 개미와 같은 사람:빼앗지도 않고 주지도 않는 사람
셋째, 벌과 같은 사람:맛있는 꿀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
누가복음 10장 30-37절에 보면 예수님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세 가지 종류를 말씀했습니다.
첫번째 등장 인물들은 강도입니다. 돈도 빼앗고, 물건도 빼앗고, 목숨도 빼앗는 사람입니다.
두번째 등장 인물은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빼앗지도 않지만, 주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형식적인 종교인입니다.
세번째 등장 인물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아무 조건없이 주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작은 핏덩어리로 빈손으로 왔지만 그 손은 빼앗는 손이 아니라 일하는 손, 기도하는 손, 주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주는 자의 복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
한 고대의 왕이 큰 축제를 열고 기독교인인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가난한 기독교인들이 도착했을 때 왕은 그들을 알현실로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하가 왔을 때는 홀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들의 왕으로서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세계로 가고 있고 이후에 나와 더불어 왕과 왕자가 될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로서 그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가치에 따라 그들을 존경할 것이고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자기의 원수는 자기 자신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한 신비스러운 보자기를 쓴 어떤 형체에 의해 언제나 끊임없이 추격과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돈을 많이 모으자마자, 그 보자기 쓴 형체는 그에게서 이것을 빼앗아갔습니다. 또한 그가 평화와 즐거움에 들어가자마자 이 형체는 그의 마음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어느 때는 그가 배가 고파 앉아서 음식을 먹으려 하면 이 형체는 나타나서 그에게서 음식을 빼앗아가 버렸습니다. 그가 졸음에 못견디어 한잠 자려고 하면 이 형체는 또 나타나서, 그의 마음을 잠들지 못하게 하는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채워 주었습니다. 그가 명성을 얻었을 때에도 이 형체는 나타나서 그 명성을 가져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어떤 위대한 기회의 문 앞에 서서 들어가려고 할 순간에 이 괴물은 나타나서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아 버리고 맙니다.
마침내 그가 결혼식의 제단 앞에 서서 그의 신부의 손을 잡고 신성한 맹세를 하려는 순간에 이 괴물은 또다시 나타나서 그의 손을 쳐들며 반대하기를 "이 결혼은 성립될 수 없다. "하고 고함을 지릅니다. 격분한 나머지 이 사람, 그 반대자요, 원수에 대하여 "도대체 너는 누구냐?" 하고 손을 들어 그 괴물의 얼굴에서 보자기를 벗기고 보니 놀랍게도 그는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온전한 인간이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고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의 여부는 나 자신이 나의 원수임을 인식하고 내가 내 안에 있는 원수를 얼마나 잘 지배하고 이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두 개 항아리
어느 집 찬장에 백자 항아리와 구리 항아리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밖에도 홍수가 나서 집이 물 속에 잠기는 바람에 찬장에 있던 백자 항아리와 구리 항아리는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출렁거리는 사나운 물살에 두 항아리는 부딛질 듯 부딪힐 듯하면서 아래로 정처없이 흘러갔습니다.
"이봐, 너 혼자 먼저 가지 말고 나랑 함께 가자."
구리 항아리가 앞서가는 백자 항아리에게 말했습니다.
"어머! 제말 내 곁으로 오지 마세요. 우리는 멀리 떨어져서 가야 해요. 만약 당신과 내가부딪히면 나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아요."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구리 항아리는 더욱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안돼요!"
백자 항아리는 피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헤엄칠 수가 없었습니다.
물길은 갈수록 더 세어졌고 얼마쯤 가다보니 홍수에 쓰러진 나무가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앞서 가던 백자 항아리가 나무에 걸려 머문거리는 사이 구리 항아리가 잽싸게 다가오더니 백자 항아리와 부딪혔습니다.
"앗!"
두 항아리가 부딪히자 백자 항아리는 순식간에 깨어져 물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악한 사람과 가까이 하면 피해를 보기 쉽다는 뜻입니다.
거룩한 것
이것은 영어에도 없는 개념인데, 인간에게는 동물에서 천사까지의 폭이 있어서, 천사에 가까워짐에 따라 거룩한 것에 가까이 간다는 관념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랍비가 학생에게 묻자, 대부분의 학생은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학생은 항상 기도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여러 생도가 갖가지 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답은 무엇을 먹을 것인가와 네가 어떻게 야다(성)를 행하는가에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학생들은 떠들기 시작하여,
"돼지를 먹지 않는다던가, 어떤 때에 섹스를 하지 않는다든가, 그러한 일이 거룩한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유는 이러합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상태는 누구에게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도 대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기 집에서 무엇을 먹고 있는가는 다른 사람에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집을 방분하거나 또 도시로 갔을 때 유태인이 모두가 지키고 있는 계율을 중히 여긴 식사를 해도, 칩에 돌아가면 다른 것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또 성적인 행위도 남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집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와 성적 행위를 하고 있을 때는, 인간이 동물과 천사 사이의 어디에나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때 자기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 진정 거룩한 것입니다.
어록·시·묘사
사람은 오직 세 가지 종류가 있을 따름이다. 하나는 신을 찾고 그 신께 봉사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신을 찾을 수도 없고 또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혜도 없고 또 행복하지도 않다. 셋째는 신을 찾아낼 능력은 있으나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지혜가 있을지 몰라도 아직 행복하지는 않다.
(B. 파스칼)
사람은 사람의 주인이 아니다.
(에픽테토스)
사람은 태어나서 괴로워하고 고리고 죽는다.
(W.S. 몸/ 인간의 굴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사람은 본시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여서 그 권리나 의무가 동일하다는 말>
(한국 격언)
사람은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M. 하이데거)
살아 있으면서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인생이 셋이 있다. 첫째로 남의 동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둘째로 아내에게 지배되어 살아가고 있는 인간, 셋째로 항상 몸에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
(탈무드)
이 세상에서 사람처럼 흉악한 동물은 없다. 늑대는 서로 잡아먹는 법이 없지만, 사람은 인간을 산 채로 삼켜 버린다.
(V. M. 가르신/ 신호)
사람이라 칭하는 동물은 천연 체구는 심히 연약하나 지혜는 만물에 특월(特越)하며 군거를 좋아하여 동류를 상호(相護)하며 지술(嘗術)로 수예(手藝)를 익혀서 금석 · 초목 ·수화를 치용하여 생활을 강구하매, 각종 맹수 및 기타 수륙 일반 동물을 제압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은 먹고 쓸 수 있는 것은 이용하여, 천하에 제일 강성하는 동물은 사람이라 칭하는 동물이러라.
(주시경/ 조선어문법)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 <*인생의 목적은 좋은 일을 하여 명예로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데 있다는 말>
(한국 속담)
모든 인간은 스스로가 사색하는 세계관에 의하여 성실한 인격을 지녀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A. 슈바이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또 하나는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뮤로스)
사람에게는 에너지를 급격히 소모하는 이도 있고 그와 반대도 있다. 마치 사탕을 빨리 먹어 치우는 아이도 있고 껍질을 천천히 까는 아이도 있듯이.
(J.E. 스타인벡/ 불만의 겨울)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시골로 보내라. <*사람은 널고 간 곳에서 자라야 견문도 넓어지고 출세할 기회도 많다 는 말>
(한국 속담)
사람은 「평범한 사람」과 「비상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평범한 사람은 항상 복종해서 살아야 하므로 법을 범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상한 사람은 특히 비상하기 때문에 모든 죄를 범하고 어떤 법도 범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F.M.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하늘 밑의 벌레. <*사람을 두고 하는 말>
(한국 속담)
사람들은 의식 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의 원칙, 자기의 이상, 즉 참되고 아름답고 선하 다고 생각되는 것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I.S. 투르게네프/ 햄릿과 돈 키호테)
사람은 언뜻 보아 미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과거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A. 쇼펜하워)
희망은 튼튼한 지팡이이며, 인내는 여행의 옷, 이 둘을 갖고 사람은 현세와 무덤을 지나 영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F. 로가우/ 격언시)
세상이 야속하다 말고 세상에서 얼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 세상이 그대를 찾는 사람이되라!
(R. W. 에머슨)
사람이란 대체 묘한 존재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선 묘하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가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살아가는 것이 묘하고, 그러면서도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묘하고, 백인백색으로 얼굴이나 성미가 다 각각 다른 것이 또한 묘하다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인데도 아는 체하는 것이 묘하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건마는 다 뛰려고 하는 것이 묘하다. 제 앞에 죽어 가는 놈이 한없이 많은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저만은 영생불사할 줄 아는 멍텅구리가 곧 사람이요, 남 곯리는 게 저 곯는 거요, 남 잡이가 저 잡인 줄을 말끔히 들여다보면서도, 남 잡고 남 곯려서 저만 살찌겠다는 욕심쟁이가 곧 사람이다. 산속에 있는 열 놈의 도둑은 곧 잡아도 제 마음속에 있는 한 놈의 도둑은 못 잡는 것이 사람이요, 열 길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더니, 십년을 같이 지내도 그런 줄을 몰랐다는 탄식을 발하는 것이 사람이란 것이다.
(이희승/ 묘한 존재)
행복한 사람을 고독하게 한다는 것도 아마 부조리일 것이다. 생각컨대 어떠한 사람이든 자기 혼자서만 모든 선을 소유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것을 그 본성으로 하고 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남을 위하여 살 때에 더 큰 만족을 느낀다.
(H. 헤세/ 게르트루트)
사람 살 곳은 골골이 있다. < * 착한 사람을 도와주는 미풍은 어디든지 있다는 말>
(한국 속담)
내 영혼이 일러 주었네, 나는 난쟁이보다 더 크지 않고 거인보다 더 작지 않음을, 나는 모든 사람이 만들어지던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K. 지브란/ 눈물과 미소)
똥 친 막대기. <*버림받은 사람, 또는 아무짝에도 쓰지 못하게 된 물건을 가리킴>
(한국 속담)
말세인물(末世人物)이라 한들 상고인물(上古人物) 다를런가/ 편방인물(偏邦人物)이라 한들 중국인물(中國人物) 다를런가/ 어즈버 천생인물(天生人物)이라 / 고금중외(古今中外) 분간(分揀) 알게
(황윤석/ 木州雜歌28-27)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애국 애국하자고 난 사람/ 바빠서 바빠서 하자고 난 사람// 돈 돈 돈 하자고 난 사람/ 사랑 사랑 사랑 하자고 난 사람/ 죽겠어 죽겠어 하자고 난 사람// 나는 나무다/ 내 말은 바람이다/ 내 옷은 햇빛이다.
(김광섭/ 사람)
사람이 사람을 그려 생사람이 병들단 말가/사람이 사람이면 설마 사람 죽게 하랴/ 사람이 사람 병들이는 사람은 사람 아닌 사람.
(안민영)
사람이 우거진 사람들 속에/ 사람에 외로운 사람처럼// 슈바이처// 사람 곁을 지나왔다.
(조병화/ 무수한 태양)
자기가 밟는 길과 자기가 기대고 있는 벽 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시야가 좁은 사람이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당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심은/ 무슨 까닭이 있을까// 그것을 바라봄으로/ 기쁘려하심이었으리라.// ‥‥사람은 창조의 의미를 위하여/ 있어야 하고/ 신의 영광을 위하여/ 있어야 하고/ 신앙을 갖기 위하여 있어야 한다.
(황금찬/ 당신의 형상)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악기가 된다/ 천성을 다하여/ 자기의 음색으로/ 푸른 하늘에/ 청청히 울리는/ 악기가 된다.
(황금찬/ 하늘 악기)
아침 이슬에 젖은/ 풀잎 사람이고 싶다//영혼의 맑은 불꽃 다며/ 세상을 비치고 흔들리는// 그렇게 순수하게/ 깨어 살고 싶다//매일 빈 마음으로/ 새벽을 맞아 하늘 향기//홀로 저 어두운 밤을 지키고/홀로 저 짐승들 소리를 듣고// 가난한 잎새에/ 별을 받으며//미명에 더욱 아프게 떨리는 / 풀잎 시인이고 싶다.
(이성선/ 풀잎 사람)
누구 하나 내 이름 불러주는 이 없이/ 저녁은 가버리는데/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의 처량함이란/ 사람 사는 정이 아니라/ 눈시울 뜨거워지는/ ‥‥내일 있을 생활의 몸서리
(박서원/ 누가 나에게)
사색하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고, 귀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메아리치게 하는 동굴과 같다.
(K.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
추위 더위는 자리를 바꾼다/ 사람의 길도 매양 이와 같다// 달관한 사람은 그 요결을 알아/ 마침내 다시 아니 회의한다.
(도연명/ 음주)
색바랜 구호들./ 벽을 가득 메운 기호인간들이/ 벽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귀에다/ 내일의 희망에 대한, 보장된, 신념의,/ 지루한 이야기를 오늘도 쉬임없이 떠들어대고
(최계선/ 수렁 속으로)
더불어 말할 만한 사람과 말하지 않음은 사람을 잃음이요/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 사람과 말함은 말을 잃음이다.
(앤소니 드 멜로/ 종교 박람회)
내 죽으면 서러워할 이/ 참 불과 몇이라도 있을 걸 밑거름 삼아 살고 보면/ 그 사람들은확실히 내마음 꽃밭에 핀 꽃이 아닐 수 없고
(박재삼/ 꽃나무)
사람들이여, 자기를 형성하라./ 스스로의 빛, 땅 위의 길한 징조를 위하여/ 안팎의 근(根), 목숨, 힘을/ 문화 가운데 모두 융합하라.
(S. 판트/ 눈부신 은빛)
사람은 쌀을 먹고 있다/‥‥ 염소는 종이를 먹고 빈대는 피를 빨러 온다. / 사람 중에는 사람을 먹으러 오는 사람과/ 사람을 먹으러 가는 사람도 있다
(山野口摸 / 세상은 갖가지)
당신이 흑인 영가/ 깊은 강을 부를 때/ 흐느끼는 것은 하늘이요, 땅이었느니/ 나는 비로소 사람의/ 음성의 슬픔을/ 가늠할 수 있었노라.
(황금찬/ 슬픈 노래-마리안 앤더슨)
사람이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또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 이것은 장자가 아니라도/생각할 일이다.
(황금찬/ 미지)
"제가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왜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나? " 스승을 말했습니다. / "사람일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고도 남는 큰 성취일세."
(앤소니 드 멜로/ 받아들임)
지금까지 누구하나/ 주님의 몸으로부터/그것을 만져 닳아 없애기 위해/ 누더기 한 조각도 뜯을 수 없었다. /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고/ 더욱 좋아할 수 있는 분이 되었다.
(브라우닝/ 가장 위대한 사람)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박희준/ 하늘 냄새)
바람이 머리에 앉으면/바람 쪽으로 머리가 기울고/ 바람이 가슴에 앉으면/ 바람처럼 파르르 가슴이 부풀고/ 바람이 발등에 앉으면/ 바람따라 바람이 되어 달려가는/ 우리들 연약한 사람이여
(김지향/ 고개를 숙이고)
그것은 사람들의 뜨거운 법칙이다/ 포도 열매로 술을 빚고/ 석탄으론 불을 피우고/입맞춤으로 사람들을 만든다.
(P. 엘뤼아르/ 선한 정의)
"제가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왜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나? " 스승은 말했다/ "사람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하고도 남은 큰 성취일세."
(앤소니 드 멜로/ 받아들임)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김춘수/ 부재)
요순(堯舜)도 우리 사람 우리도 요순 사람/ 저 사람이 이 사람이 한가지 사람이라/우리도한가지 사람이니 한가진가 하노라
(무명씨)
설 교 노 트
그리스도를 찾아온 사람
마19:16-22
서론
어떤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유대지경으로 들어가실 때에 특별히 예수님을 찾아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에 대해서성경에 밝힌 바에 의하면 첫째,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법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유대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돈도 많고 권력도 있고, 훌륭한 종교와 도덕을 지닌 청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온 태도에 대해서 주목할만 합니다. 그 태도를 살펴보면, 첫째, 매우 열정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지극히 겸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너무나 진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왜 그리스도를 찾아왔습니까?
1. 그리스도를 찾아온 목적
본문 16절에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고 한 것을 보면 인생의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1)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찾아 나온 것입니다.
타락하고 불의하고 악한 세대에서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하게 살아보려고 그 비결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2) 진정한 종교와 도덕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주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청년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살인하지 아니했고, 간음하지도 아니 했고, 도적질하지도 아니했고, 거짓 증거하지도 아니 했고, 부모에게 불효하지도 아니했고, 이웃을 미워하지도 아니 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바른 종교와 도덕이 필요한 것입니다.
(3) 인생의 영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찾아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본래 영원 불멸의 실존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망이라는 문제를 안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 사망 문제를 해결하고 영생하는 길은 모든 인생들이 찾고 있는 중 이 청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지시한 문제 해결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찾아 나온 청년에게 세 가지 방법을 지시하여 주었습니다.
(1)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2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말씀은 주님 앞에서 가난해지라는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주 뜻대로 다루어 가라는 뜻입니다.
(2) 가난한 자를 봉사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개인주의를 징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봉사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봉사하는 길과 직결된다고 하였습니다(마25:40).
(3)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본문 21절에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길만이 착한 인생의 길이요, 참 종교와 도덕을 추구하는 길이요, 또한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려고 하면 마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어 착한 사람이 되고, 금생과 내세에 복을 받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면 자기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봉사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십자가를 바로 지고 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결론
그리스도를 찾아 나왔던 청년은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1) 예수님보다 돈을 더 귀중히 여겼고
(2)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 것을 더 귀중히 여겼고
(3) 영원한 것보다 유한한 것을 더 귀중히 여기는 불신앙에서입니다. 이는 가치관의 착각이요, 제물의 노예가 된 증거요, 신앙의 결단력의 결핍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을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
빌4:10-13
서론
빌립보 서신의 주제는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크리스찬들의 삶의 기초와 방향을 제시하여 주신 매우 뜻깊은 교훈이 라고 생각합니다. 제 4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서신 중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이 16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우리 크리스찬들이 예수 안에서 사느냐 예수 밖에서 사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란 무슨 뜻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하여 일체가 됨을 의미하고
(2)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서의 인침 받음을 의미하고
(3)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참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의 삶의 양상은 첫째,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자족한 생활이 가능하고, 둘째, 어떤 형편에라도 적응할 수 있는 생활이 가능하고, 셋째, 어떠한 일이라도 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형편에 자족하는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1절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자족"이 라는 헬라어의 원뜻은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나아가서는 만족한 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 안에서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족한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영혼이 만족하고, 그의 생활이 만족하고, 그의 사역이 만족하다고 하였습니다.
2.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환경에 적응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2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일에 처할 줄 알았다"는 말씀은 어떠한 환경에라도 적응하기로 하거니와 이를 극복하고 정복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령 여기의 비천한 환경이 인생의 곤고와 멸시와 참상을 가리킨다면, 풍부한 환경은 인생의 부요와 존귀와 행복한 환경을 의미합니다. 요사이 신앙이 약한 사람들은 환경에 따라 가난한 자들이 부요해지면 교만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하기도 하고, 부요 하다가 가난해지면 낙심하여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으나, 주 안에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비천한 환경 속에서 낙심치 아니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풍부한 환경 속에서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교회 봉사를 더 잘합니다.
3.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3절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나폴레옹과 같이 불가능이 어디 있느냐? 어리석은 자의 사전에서나 찾아보라고 하였던 인위적인 자고한 의미에서가 아니고, 여기 바울은 능력주시는 주 안에서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신앙의 가능성을 주장하여 겸비한 고백입니다. 이 능력은
(1)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시고
(2)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고
(3) 하나님의 사명에 충성하려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혁명가 크름웰은 빌4:13을 읽다가 힘을 얻어 역경 속에서도 과감히 혁명과업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루터 선생도 칼빈 선생도, 능력을 받아 종교 개혁을 승리로 이끌어갔습니다.
결론
이와 같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환경에서 자족하고, 모든 환경에 적응하고,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안에서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권고하는 사람
사66:1-4
서론
하나님이 권고하신다는 뜻을 하나님이 도와주시며, 보호하시며, 축복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의 영역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권고하여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는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권고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3절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몇 가지로 분석해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겸허한 상태이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마음의 상태이며, 마음이 고독하고 곤고하고 절망적인 상태라고도 표현합니다.
출2:23-25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이와 같은 환경에서 하나님치 권고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2.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입니다.
마5:4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권고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에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애통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봅니다. 실패와 질고와 이별과 사망을 당할 때, 누구나 애통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심령에 통회하는 사람은,
(1) 자기의 지은 죄를 인하여 애통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대표로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직권 남용 죄로 인하여 음란과 살인죄를 범하고, 요를 적시면서 통회했습니다.
(2) 다른 사람의 범죄를 보고도 마음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3) 민족의 범죄를 인해서도 마음에 애통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예례미야 선지자를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권고를 받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 말씀으로 인하여 떠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말씀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직접 혹은 간접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받는 우리의 입장과 태도는, 떠는 자세로 받아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1) 하나님의 말씀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사와 화복을 주장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하면 살고, 버리면 죽습니다 .
(3)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도 있고, 이 말씀을 버리고 자율적으로 사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고 권고하시거나 빈부 귀천을 차별하여 권고하시지 아니하시고,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서 떠는 사람을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권고를 받은 결과는, 고독과 슬픔에서 위로를 얻고, 괴로움과 고통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죄와 사망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 의 권고를 받을 수 있고, 나아가서는 권고를 받는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창3:9-10
서론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과 비극이 기록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죄를 범하고 바른 인간상을 상실하여 하나님을 피해 숨어 있는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새 인간상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꾸밈없는 순수한 인간입니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꾸밀 줄 모르는 순수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자신을 무화과 잎으로 가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가장의 원인은 수치감을 가리기 위해서였고,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으며, 공포감을 해소하고 범죄 전의 인간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음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성과 의지로 제아무리 훌륭한 것으로 꾸민다고 해도 이는 더욱 간사하고 외식하고 위선적인 인간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은 이러한 인간이 아니라 요1:47-48에 나타나는 나다나엘 같은 인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간사와 외식과 위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2.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입니다.
여기 범죄 전 아담은 행위에 책임성이 강한 인간이었으나 범죄 이후에는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전가하고 오히려 핑계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을 해 보는 것입니다
(1)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 회피
(2)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 전가
(3) 자기 행위에 대한 핑계 및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새 인간상은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성이 강한 인간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책임과 인간에 대한 책임과 자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오직 사랑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는 인간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의 계약과 법칙을 위반하였습니다. 그 길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마귀와의 교제이며, 자율적인 행동이요, 이 세상 영광을 탐하는 데 있었다고 하였습니다.그런고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새 인간상은 마귀와의 교제를 끊어 버리고 자아를 부인하고 이 세상의 탐욕을 포기한 후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신앙의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 이 찾으시는 사람은 꾸밈 없는 순수한 인간이며, 자기 행위에 책임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받은 중생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마10:24-33
서론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는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유신론자들과 둘째, 하나님이 없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따라서 하나님은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참 신앙인의 사람들과 하나님을 별로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반신반의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랑 가운데도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로 경외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성경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나아가서는 우리 기독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진정 두려워해야 될 대상이 있는 반면에 두려워해서는 아니될 대상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
(1) 우리 인생들을 엄밀히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0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찰하시되 대단히 세밀하게, 완전하게 감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세밀히 감찰하시고 하나님을 절대로 떠나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우리 인생들을 훗날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2-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인생은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히9:27, 롬14:10).
(3) 우리 인생들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인생에게는 내세가 있고, 내세 중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9. 43∼49에 차라리 불구의 몸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온몸이 성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생활상
그러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알아보겠습니다.
(1)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갑니다.
앞서 가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따라서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갔습니다.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십자가를 지시고 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먼저 하나님의 요청이요 둘째, 신앙의 선배들이 간 길이요 셋째,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입니다(마7:21 참고).
(2) 자기의 신앙 양심에 따라 살아갑니다.
인간의 양심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먼저 단쇠의 화인맞은 양심도 있고(딤전4:2) 둘째, 더러운 양심도 있고(디도1:5) 셋째, 청결한 양심도 있다고 했습니다(딤후1:3). 우리 양심의 기능과 역할을 알아보면 첫째, 인생의 등불이라고도 했고 둘째, 인생의 안내자라고 했고 셋째, 인생의 엄한 법관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3:21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나아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양심을 어기고 못사는 것입니다.
(3)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의 요셉이라는 신앙 청년이었습니다. 우리가 왜 죄를 범하지 않고 살려고 하는가 하면, 먼저 죄의 성질은 고착성과 성장성과 전염성을 지니고 있어서 이 죄악에 접촉이 되면 우리의 인격과 생활에 혼란과 공포와 부패를 초래하여 마침내는 죽음과 지옥의 영역에 침륜되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약하여 죄를 범하였어도 즉시 회개하여 사유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무슨 죄나 다 용서해 주십니다.
결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받는 복은
(1)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2) 만사에 성공을 하고,
(3)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되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으로 수행하십시다.
하나님께 체포된 사람
빌3:10-16
서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혔다는 말씀은
(1) 예수 그리스도에게 택함을 받아
(2) 구속함을 받았고
(3)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별되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성경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점에 대하여 세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고
다메섹에 있는 신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해서이고
바울을 복음의 사도로 등용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은 어떻게 세상을 삽니까?
1.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본문 12절에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생활은 내 마음대로 살지 안니하고 예수님의 뜻이 좋아 살아가고, 내 마음대로 일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분부대로 사역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잘못된 옛 사고 방법과 생활 태도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 교훈을 따라, 올바른 삶의 좌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깊이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2. 이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본문 13절에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이 세상 것을 부정하고 천국의 기업을 추구하여 전진한다는뜻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에 붙잡히기 전에는 세상의 것을 좋아하여 이를 추구했으나, 이제는 세상의 것보다 천국의 것을 더 좋아하여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뒤의 것"을 세상이 허무하고 무가치한 것이라고 하면, 앞에 있는 것은 하늘나라의 참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사람은 이 세상 것보다 하늘나라의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세상의 것을 위해서 범죄하면서 살아가던 삶을 정리하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정결하게 살아가면서 사역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눅9:62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시면서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히10:37에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의 앞으로 전진해야 될 세 가지 이유를 역설하여 주셨습니다.
(1)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니 전진하고
(2) 주님이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전진하고
(3) 침륜에 빠지지 아니하고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전진하라고 하였습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에게 체포된 그리스도의 사람은,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좇아가고, 세상 것을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좇아갑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좇아간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14절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동일하지마는 상급의 차이가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바로 좇아가서 하늘의 상급받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새 시대의 주인공
벧후3:1-13
서론
베드로후서 3장에는 기독교의 종말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현존의 세계는 불에 타서 소멸이 되고 새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형성되리라"고 하였습니다(벧후3:12-13).
성경에 근거한 신앙인들의 세계관은 첫째, 자연 발생설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설을 주장하고 둘째, 자연 윤회설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섭리설을 주장하며 셋째, 영속설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설을 주장하면서 이 낡고 부패한 세계는 예수님이 재림하사 심판하시고 새 세계를 형성하사 우리 기독 신자들로 하여금 주인공이 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주인공이라는 말은 그 사건의 중심 인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하 우리 국가 사회는 새 시대, 새 역사 창조를 위해 새 출발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새 시대의 주인공은 어떠한 인물인가에 대하여 본문에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거룩한 사랑입니다.
본문 11절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뇨 거룩한 행실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거룩한 행실"을 거룩한 인물의 결실이라고 하면 새 시대의 주인공은 거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의한 죄인들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 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2. 경건한 사람입니다.
어떠한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까? 성경 사전에는 세 가지로 설명하였는데 첫째,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자세요 둘째, 육신의 정욕과 욕망을 버린 순수한 자세요 셋째,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봉사하는 자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약1:26에는
(1) 자기 자신을 단속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사람이요
(2) 다음 자기 양심을 속이지 아니하는 사람이요
(3) 불쌍한 자를 동정하고 봉사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기독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든지, 그 무엇을 할 때에 하나님이 보시는 눈 앞에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날이 임하시기를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새 시대의 주인공은 세번째로 본문 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시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기독 신자들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되려고 하면, 높은 비전을 가지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학자는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은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비전을 가진 사람은 그의 삶의 발전과 향상이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창의적이요,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허무한 비전도 없지는 아니합니다. 여기 우리 기독 신자들의 비전인 "하나님의 날"을 사모하는 것은 헛된 비전이 아닙니다. 여기 "하나님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1) 예수 재림의 날입니다. 예수님은 요14:3에 약속하신 대로 다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재림으로 인하여 낡은 시대는 심판을 받고 새 시대가 출현하게 되고 이 새 시대에는 우리 기독 신자들이 주인공이 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 이 불의하고 부패한 세상 나라가 심판을 받아 소멸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3) 새 하늘과 새 땅, 즉 새 시대가 형성되는 새 역사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날을 향해서 쉬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결론
성경을 보면, 새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돈 많고 지식 많고 권력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1)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2)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날을 사모하는 바른 비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시42:1-5
서론
여기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 것은 모든 마음이주를 향한 신앙이요,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이며, 모든 것을 의뢰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찾고 천국만 바라보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신앙입니다.
1.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
여기 시인은 어떠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였습니까? 본문 1절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시인이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는 심정과 태도를 고백한 말씀입니다. 여기 "갈급한 심정으로 찾았다"는 말은 히브리 원문에 "아락"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마음적으로 조용하게 찾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배고픈 어린이가 젖을 사모하며 소리내어 울면서 어머니를 찾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제 시인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는 심정을 정리하면,
(1) 발급한 심정으로 찾았다는 말입니다.
(2) 애타는 심정으로 찾았다는 말입니다
(3) 최선을 다해 찾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서는 못 사는 심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러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전심 향주의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을 사모하는 이유
시인은 왜 하나님을 이렇게 사모하여 찾았습니까? 그 이유를 본문 3-4절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기 때문입니다.
(1) 시인은 원수들의 조롱으로 인한 슬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본문 3절에 무신론자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도를 비웃고 핍박합니다. 우리들은 조롱과 핍박을 받아 슬픈 마음에 위로와 희열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2) 시인은 원수들로 인하여 상한 마음을 치료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본문 4절에 시인은 지도자의 입장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함을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하나님께 나가 치료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 이 라고 하였습니다(출15:26, 호6:1).
(3) 시인은 원수로 인하여 불안과 절망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본문 5절에 당면한 그 불안하고 절망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모하며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을 사모한 결과
여기 시인은 갈급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는
(1)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희열에 넘치는 찬송입니다(찬송 316장).
(2)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받은 감격의 표현입니 다.
(3)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없이는 못사는 시인의 인생관이요, 사명관이기도 합니다.
결론
이와 같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바른 인생관과 사명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1) 하나님처럼 성스럽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2) 신실하게 살려고 합니다.
(3)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딤후2:20-26
서론
역사적으로 하나님께 등용되어 위대한 업적과 유산을 남기고 가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먼저 하나님께 등용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천국에 간다면 참으로 위대한 은혜와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을 들어서 쓰시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본문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 큰 집이 무엇입니까? 여기 큰 집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딤전3:15에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 불러내신 생명의 집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히3:5-6에 "모세는 장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맡은 아들로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는 하나님의 집은 이스라엘 민족 집단인 구약 교회를 가리키고, 다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는 말씀은 신약 교회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그릇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등용하여 쓰시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행9:15에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택한 그릇 가운데는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많은 그릇 가운데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
본문 21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1) 하나님이 쓰시다가 버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배신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사람이고, 자기를 더럽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범하여 자기를 더럽힌다는 말입니다. 죄를 범하여 자기를 더럽히면 하나님은 쓰시다가도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금이나 은그릇이라고 해서 귀하게 쓰시는 것도 아니고, 나무나 질그릇이라고 해서 천히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깨끗하게 한 그릇을 귀하게 쓰신다고 하였습니다.
(2) 죄에 오염된 우리 인간들이 무엇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보혈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엡5:26, 시119:9-11참조).
이 세 가지는 죄로 오염된 우리의 인격과 윤리를 깨끗하게 하는 정화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배신하지 아니하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감격하여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다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이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자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쓰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나 교회를 위해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열심을 품고 충성을 다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일에 잔꾀를 부리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헌신하는 일에 인색하지 아니하고 푸근하게 봉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우리는 먼저 깨끗한 사람이 되고 다음은 의리 있는 사람이 되고 셋째, 겸손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름대로 산 사람
행11:19-26
서 론
사람이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고로 이 세상에는 이름이 없는 무명 인사는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름을 가지되 앞을 다투어 서로 좋은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 심지어는 유명한 작명가까지 찾아가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도 없지 아니합니다. 이와 같이 좋은 이름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그 이름대로 복받아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 본문에는 그 이름대로 산 사람 하나가 있습니다. 그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레위 사람 "바나바"라고 하였습니다. 행4:36을 보면 "바나바"의 본 이름은 "요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개명해서 "바나바"라고 호칭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 이름대로 산 내용을 두 가지 측면에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1. 개인적으로 지닌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주경 신학자들은 바나바의 이름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1) 바나바는 이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살았습니다. 바나바는 본래 전도자가 아니었으나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지상 명령으로 이 복음을 전파해야 이름대로 사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2) 바나바는 약한 사람을 권면하면서 살았습니다. 먼저 권면한 대상은 믿음이 약하여 흔들리고 넘어져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고, 다음 권면의 방법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 붙어 있으라고 하지 아니하고 주님께 굳게 붙어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3) 바나바는 그 이름대로 버림받아 고독한 자을 위로하면서 살았습니다. 위로는 근심하는 자에게 기쁨을, 실망하는 자에게는 희망을, 좌절당한 자에게 힘과 용기를 가지게 하는 일입니다. 본문 25절에 바나바는 두 가지 사람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 하나가 갓 회개한 사울이고 다음은 실패한 마가 요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교회에서 소외되어 고독한 사람들이었으나 바나바에 의해서 재출발했습니다.
2. 공통적으로 지닌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여기 공통된 이름은 26절에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 신자를 비방하기 위해서 부른 이름이었으나, 그 의미상 매우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신자들을 "예수쟁이"라고 비난조로 부르지마는 의미상 또한 적당한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 기 "그리스도인"이라는 낱말의 뜻은 예수님에 게 속했다는 뜻과, 예수를 믿는 자라는 뜻과, 예수만 위해서 봉사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 신자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이름의 뜻대로 살아야 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기 예수님께 속했다는 말은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이 연합되었다는 뜻인데, 우리는 주님을 떠나지 말고, 주 안에 깊이 거해야 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거나 믿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만 믿는다는 뜻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속죄하여 주신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고 예수님의 승천이 나의 승천이고 예수님의 천당이 나의 천당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이름대로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롬14:7-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만 위해서 사는 것이 신자들의 이름대로사는 생활입니다.
결론
예수님께서도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마1:21에 예수의 이름의 뜻은 구원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름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름대로 살아야 합니다.
(1) 신자라는 이름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성도라는 이름대로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3) 천국 시민이라는 이름대로 구별되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위해 주시는 사람
롬8:31-39
서론
본문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며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1.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31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리를 대적할 이가 없다"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우리 기독 신자를 아주 대적할 이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벧전5:8-9에 "근심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였으니 마귀와 그의 졸도들이 우리 기독 신자들을 대적해 온다고 하였습니다. 옛날 이 마귀는 욥을 대적해 왔고 또한 요셉을 대적해 왔고 심지어는 예수님에게도 대적해 왔습니다. 이와 같이 마귀가 대적을 해 와도 결코 패배하지 아니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대적을 물리치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2. 정죄할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33-34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위해 주는 사람은 정죄할 자가 없다고 한 것은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인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를 믿고 속죄함을 받아서 천국 시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여 범죄하도록 하고 다음에 송사하고, 정죄하여 죽음의 경지에 따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몸바치고 피흘려 죄악에서 구속하여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송사하거나 정죄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어찌하던지 우리 기독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서 우리를 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줄에서 끊어지면 우리는 불행해 지고 비참해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환난도 일으키고 곤고하게도 하고, 핍박하기도 하고, 기근을 당하게도 하고, 적신이 되게도 하고, 위험과 칼과 죽음으로 위협하기도 하지마는 예수님의 사랑의 손이 우리를 꽉 붙잡고 계시는고로 결코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요15:9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줄이 불완전할지라도 예수님 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줄은 완전 무결하사 이 사랑의 줄에서 아무것도 끊을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위해 주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대적할 이도 없고 송사할 일도 없고, 사랑의 줄에서 끊을 자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결론
그러면 하나님이 위해 주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이 택하여 주신 사람이요,
(2) 하나님이 구속하여 주신 사람이요,
(3)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요1:47-51
서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리하신 감찰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아니하시고, 마음속을 감찰하십니다. 나다니엘의 순수한 인간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칭찬을 받을 만큼 위선이나 간사함이 없었던 순수한 인간이었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스스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야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내가 자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고, 착하거나 의롭거나 거룩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무조건 택하여 주심으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택하사 참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에는 죄의 종이요, 죽음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았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 구원과 영생을 보장받았다는 의미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온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참 이스라엘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요1:47). 예수님은 택한 자를 불러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마1:21). 예수 앞으로 나오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1)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 받으려고 나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앞으로 나오는 사람은 먼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용서함 받으려고 나옵니다(눅19:1-10).
(2) 예수를 의지하고 믿으려고 나오는 의미도 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의지하고 믿으려고 나옵니다.
(3) 예수님을 배워서 예수님의 사람되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11:28-30에 예수님을 배워서 거룩한 멍에를 메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려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3.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간사하다는 말은 원문에 "돌로스(dovlo")라고 말하는데 "고기를 미끼로 잡는다. "는 뜻입니다. 속인다는 뜻이고 교활하다는 뜻이고, 위선이라는 뜻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본받아 진실한 사람입니다.
여기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순수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참 기독교 신자는 순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외식이나 위선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순결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처녀는 정조를 지켜야 하고, 신자는 신앙의 지조가 있어야 합니다.
결론
참 이스라엘 사람은,
(1) 선택을 받고, (2) 예수님께 나와서,
(3) 간사함이 없이 진실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장차 천국의 주인공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릴 사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