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1강의 / 개혁주의 신학

교회론

개혁주의 신학

제 1강의

-본인들이 지니고 있는 교회관을 말해보시오.
-기성 교회의 문제점을 말해보시오.
-기성교회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당신의 잣대는 무엇입니까?

0. 서론
1. 교의학에서 교회론의 장소

교의학 내지 조직신학에서는 어떤 한 주제의 위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위치에 따라 그 사람의 신학사상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삼위일체를 교의학의 앞 부분이 신론에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맨 슐라이에르막허나 에벌링처럼 맨 뒤에 두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저자들의 특별한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교회론은 교의학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는 그 교의학의 형태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신학사를 보면 교의학은 그 동안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① 더러는 사도신경의 구조 형태로,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나열함, 이를테면 요한 칼빈이나 독일의 개혁파 신학자인 오토 베버, 이런 경우 교회론은 주로 성령론에서 다룬다. 칼빈의 경우 “창조-타락-구원-회복”의 특을 유지한다.
② 더러는 저자가 중요하게 주제를 중심으로 나열함, 이를테면 알브레히트 리츨은 “칭의와 화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신학을 열거했다. 이런 경우는 저자가 강조하는 내용에 따라 다양하다.
③ 또 어떤 이들은 “창조-타락-구원-회복”의 틀에 의해 조직신학을 열거한다. 신약신학자로서 교의학을 쓴 Adolf Schlatter는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Das christliche Dogma. 그의 경우 교회론은 회복의 단계에서 다룬다.
④ 그 다음은 철학적인 틀로 형성한 교의학의 구조이다. 신론-인간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 대부분의 교의학은 주로 이런 틀을 사용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틀에 근거하여 교회론을 다룬다.
교회론은 개인의 구원을 전제한다. 개인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것이 구원론이라면 구원론 다음에 공동체인 교회에 다루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2. 교회론과 인간의 실존문제

기독교는 절대적인 종교일까? 이런 질문은 2000년 교회역사 가운데 계속 반복해서 제기되어 왔다. 모든 변증가들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이것을 변증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종교 다원주의 운동이 매우 팽배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변증할 수 있을까? 단순히 이데올로기식 방법으로 기독교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별 어려움이 없이 자기 고집을 관철시킬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결국 이원론의 오류에 빠져 결국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기독교를 외면하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선교적 사명을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그 구원론의 구조가 다른 일반종교의 구원론과 구별된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말은 옳은 것이다: 다른 일반종교는 밑에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을 향해 매진하려고 하지만(von unten her)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이 위에서 내려오셔서 인간을 죄악의 구렁터기로부터 끄집어 내는데 있다.(von oben her).
우리는 다시 기독교회라는 공동체가 일반종교의 단체와 그 구조면에서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름을 지적함을 통해 기독교회의 독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 강의에서 단순히 기독교의 독특성을 변증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의 복되고 풍성함을 인식시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일깨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이렇게 할 때 부수적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은 드러날 것이다.
교회란 도대체 무엇일까? 만일 기독교인이 이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교회생활을 한다면 일반 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차이점 인식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소위 종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우 많은 소위 한국 교인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자연인들이 자연종교를 신봉하는 식으로 교회를 드나들고 있다. 교인들이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면 교회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말세에는 모이기가 쉽지 않다. 쾌락시설이 그것을 방해하고 매스컴을 통한 예배실황방송은 모이기를 방해하여 현대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나와서 성도간의 神靈한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만든다. 칼빈은 자기의 교회론을 논한 기독교 강요 제 4권 1장에서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진정한 교회: 우리는 이 교회와 연합되어야 한다’ 1절에서 ‘교회의 필요성’부터 말하고 시작한다.
심지어 교회가 가르쳐야 할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분명한 지식을 지니지도 못한 채 막연하게 교회에 다니고 있다. 이것은 자연인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적 차원의 공허함을 매우기 위한 천박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중세교회가 침체된 것이 성경진리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다면 교회의 참된 개혁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교리사를 보면 비록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 동안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하여서는 이미 많이 논쟁이 되어 왔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논쟁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 이권중심으로 우후죽순식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다시 문을 닫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바른 교회관을 수립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겨진다.
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는 것은 이신칭의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의 상태 속으로 들어와서 세례를 받고 성찬식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는 사건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어떤 교의학은 구원 끝 부분에 성례전을 다루고, 어떤 이는 교회의 은혜의 수단으로서 이 성례전을 다루기 때문에 교회론의 끝 부분에 다룬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를 따른다.

I. 교회의 원천

A B C D
☆☆☆ ◐◐◐ ○○○ ■■■
☆☆☆→→→ ◐◐◐→→→→→→ ○○○→→→→ ■■■
☆☆☆ ◐◐◐ ○○○ ■■■
↓ ↗ 완전회복
↓ ↗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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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F G

A: 하나님의 경륜, B: 만물창조, C: 그리스도 만들기, D: 교회 만들기,
E: 만물이 허무한데 타락, F: 허무상태(사망의 상태)에 있는 인간을 끄집어 올림, G: 자연의 구원, H: 인간은 사망의 상태(허무)에서 구원을 받아 성령이 지배하는 상태속으로 들어감.

조직신학의 교회론 부분은 다른 토포스(τοπος)보다. 정통주의 신학은 조직신학을 배열할 때 일정한 순서에 따라 그렇게 했다. 그 내용은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순서로 되어 있다. 교회론은 뒷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교회론은 창세 이전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내용부터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교의학은 교회론을 시작할 때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대한 내용부터 언급된다. 교회에 대한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에배소서는 교회의 기원을 말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언급한다. 바울은 구원사역에 있어서 이 삼위일체의 역할을 말하므로써 구원경륜을 나열하고 있다. 이 삼위일체의 구원경륜은 한 마디로 ‘교회 만들기’에 대한 계획서와 같은 것이다.(주. 콜부뤼게는 구약 성경 내용을 ‘그리스도 만들기’로 보고 있다.). 우리는 이 구원경륜의 윤곽을 알기 위해 엡 1:3-15 부분을 주석할 필요가 있다.

1. 성부 하나님(3-6절)

엡 1:3-6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이 부분의 주어(하나님)는 매우 강조되어 있다. 거기에 보면 주어의 명칭의 종류를 달리하면서 반복적으로 나온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주신 자’(우리말 번역과 비교해 볼 것). 그리고 그 주된 동사는 ‘선택하사’이고 ‘예정하사’는 본동사에 예속된 분사형이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우주 만물이 생기기 전에 그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되기 위함이다. 그는 자기의 뜻의 기뻐하심 따라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양아들로 정하셨다. ................ 이는 ........ 찬양하기 위해서이다.”
이 구절은 구원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우리의 눈길을 아득히 먼 옛날로 향하게 한다. 성부의 사역의 핵심은 자기 백성을 선택하고 예정하는 것이었다. 왜? 그 옛날에,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인간을 선택하신 것은 교회라는 유기체를 만들기 위해 선택하신 것이다.(바빙크: Magnalia Dei 영역판 515쪽). 예정론에 대한 것은 구원론이나 신론에서 깊이 있게 다룬다.

2. 성자 하나님(7-12절)

이 구절은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경윤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실현하셨음을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제물로 드려 그것을 실현했다. 7-10절은 한 문장이다.
여기 본 주어는 “우리”이고 부분장의 주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먼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 곧 죄사함을 받았음을 강조한 다음 그리스도가 어떻게 구원 사역을 하셨음을 보여준다.
직역하면: “그는 그의 은혜의 풍성을 모든 지혜와 총명을 통해 우리 속에 넘치게 부으셨다. 자기 뜻의 비밀을 자기 속에 있었던 기뻐하심에 따라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 이는 때의 찬 경윤을 따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3가지 사역을 볼 수 있다. (1) 구원자, (2) 계시자, (3) 총괄 갱신자(통일 되게 하는 자), 바로 이런 사역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하나님의 소유)이 되었다. 이 구절에 우리는 항상 수동의 위치에 놓여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사역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3. 성령 하나님(13-14절)

이 부분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어 놓은 구원을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시키나를 보여준다. 여기 본 주어는 “너희”인데 바울은 이제 이 서신의 수신자들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주어에 대한 본 동사는 “인침을 받았다”이고 “듣고”, “믿어”는 분사 형태인데 이 세 동사는 성령의 구원 적용사역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1) ‘들음’은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롬 10:17, 행 6:11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듣게 한다. 바울이 안식일에 기도하러 강가로 나갔다가 모여 앉은 자들에게 말씀을 전함. “두아디라 성의 자색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이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구약 성경에서 “듣는다”는 동사는 “순종하다”는 동사와 거의 같이 사용되었다.
(2) 또 순종은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롬 1:5에 보니 믿음의 순종(우리 말 번역: 믿어 순종케 하나니)으로 표현되어 있다. pistis(믿음)은 peithmai(순종하다)에서 파생되어 나왔습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는 사실 믿지 않는 자이다. 성령은 우리로 믿게 하시고 확신시킨다.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을 아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3) 인치심.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목장의 주인이 자기 소유의 말이나 가축에 인을 치는 것과 같다. 그 인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印針을 받으면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선한 의지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선행을 하도록 돕는다.
위의 내용은 구원경륜의 핵심인데 구원역사 가운데 펼쳐지는 것이다. 이 세분의 사역이 결국 교회를 형성하는 데로 수렴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위의 도표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보시기에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인간과 모든 자연은 ‘허무한 데 ’(사망의 상태)로 빠졌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 사망의 상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약속하시고 마침내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했다. 구약성경 전체는 구원자가 어떤 분으로 오실 것인지에 대한 설명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구약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물들은 앞으로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오실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구원경륜을 고난과 순종을 통해 이루시고 이 구원이 인간에게 적용되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 사망의 상태속에 빠져 있던 인간이 거기서 벗어나 주안으로 들어와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II.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명칭과 정의에 대하여

1. 명칭

-a. 에클레시아 εκκλησια
이 단어는 ‘εκ + καλεω’( .....로부터 부르다)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고대 희랍시대에는 원래 “백성의 모임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에는 이 단어는 종교의식적 그리고 제사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주민들이 정치적인 일을 의논하기 위해 불러들인데서 기인할 것이다.
70인 경은 히브리어 콰할(להק)을 εκκλησια로 번역했다. 구약성경은 ‘콰할’과 ‘에다하’(הדע)를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콰할은 ‘코올’(소리)에서 파생되어 나왔다. ‘코올’은 집합하라는 소리를 의미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불러서 하나의 큰 무리를 이룬 데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창 49:6; 민 22:4; 삼하 20:14; 왕상 12:21). 또는 백성들이 실제로 모여 회중집회를 이룰 때 그렇게 표현한다(출 12:6; 민 14:5; 렘 26:17). ‘에다하’는 ‘예아드’(결정하다)에서 파생한 것임. 다라서 ‘에다하’는 결정한 것을 알리면 그것을 듣는 공동체을 의미한다. 에다하는 출애굽기, 민수기, 여호수아서에 많이 나오고 콰할은 역대서, 에스라, 느헤미아에 많이 나온다.
이와 같이 단순히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된 εκκλησια는 여호와의 이름이 거기에 연관됨을 통해(LXX) “여호와의 언약 교회, 하나님의 교회”로 되었다. 즉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계심을 통해 종교의식적 교회로 된 것이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는 이 εκκλησια가 단순히 사람들이 집합한 것(ein aktuales Zusammentreffen) 이 아니고 여호와, 主(큐리오스)를 통해 정해진 무리가 함께 모인 것(Zusammenkommen)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란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개입하므로써 εκκλησια는 약속 아래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교회 곧 거룩한 백성의 실제적인 표현이다.
신약성경에서는 εκκλησια는 Gemeinde와 Kirche로 표현되어 있다. 전자는 모이는 공동체의 주체를 강조하는 그 무엇이고 후자는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나타나고 실현되는 실재이다.(.O. Weber II, 585f.)
요컨대 εκκλησια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망의 상태로부터 불러서 그리스도의 몸에 붙혀진 사람들의 통일체를 의미한다.

우리는 에클레시아로서 교회에 대한 17세기 이후 정통주의 신학자들 발언을 참고로 해서 교회의 정의를 정리해 본다.
-H. Heidegger XXVI,6: “교회란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아 믿는자 곧 하나님이 성령과 말씀을 수단으로 해서 죄의 상태에서 영원한 영광을 위한 은혜의 상태에로 부르신 자들의 집합체 또는 모임이다”
-Mastricht9VII,i,4):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Heidegger XXVI,4: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부르심을 받은(εκκληθεθητες) 사람들의 구별된 모임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εκκλησια라는 말속에는 κλησις 개념이 들어 있다. ‘(행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따라서 교회란 주님이 부르신 자들의 모임이다.
-a Diest (p.405): “사람들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서 가련한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에로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한 머리 곧 예수 그리스도 아래로 모우신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모임이다”.

-b. 그리스도의 몸
골로새서를 보면 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몸(소오마)으로 표현되고 에베소서에는 교회가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이 “몸”(σωμα)은 ‘실제로 작용하는 형체’(reale Wirk-Gestalt) ‘실제적으로 통치가 있는 영역’(realer Herrschafts- bereich), ‘실제적으로 구원이 일어나는 영역’(realer Heilsbereich)이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이 “몸”은 “그리스도 안”의 영역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상호간에 ‘교제’(Gemeinschaft)를 이룰 뿐아니라 하나의 ‘통일체’(Einheit)를 이룬다(고전 12:12; 10:17; 롬 12:5; 골 3:15; 엡 2:16; 4:4). 이 통일체는 여러 개체들인(자연인) 부락의 주민들이 모여 부락이라는 통일체를 이루듯이 단순히 함께 모임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이전의 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것을 상실하고(이를테면 육) 새로운 피조물로서 형성된다. 즉 육의 상태를 벗어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가 역사하는 영역속으로 들어감을 통해 이루어진다.(롬 7:4)(O. Weber).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줌을 통해 죽으심으로 자연인의 실존상태를 결말지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 것은 그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의 생명에 참여한다는 약속을 보증하는 것이다(롬 6:1이하; 갈 3:23). 참고서적: R.B. Kuiper, The glorious Body of Christ, London Banner of Truth 1967, 이 창우 역: 누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했는가?)

-c. 그리스도의 補充者
이 용어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23)을 해석해서 붙인 명칭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되려면 몸이 완전해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전해지려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그의 몸에 붙는 자들이 그 수가 차기까지 늘어야 하고 각 지체들이 예수를 닮아 가면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전도를 해야 하고 전도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몸이 없으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하지 못하다. 교회의 명칭중에 이것이 가장 영광스럽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완전해 지려면 그의 아내 하와가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보충자임을 잘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아담과 하와의 결혼 사건을 참고해 본다.

-(Exkurs)-
아담의 결혼(창 2:20-25)
① 독처와 반려자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 아담(사람)이 부속부분의 상태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 내가 그에게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를 만들겠다”
성경은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지적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전 4:9-12). 창 2:18은 우선 인간의 창조되고 존재하는 그 원리에 따라서도 혼자 있는 것이 비정상적임을 보여준다. 아담은 하나의 ‘전체’의 한 부분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가 완전해 지려면 그에게 일치하는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통일교는 이것을 주희의 음양오행설로(+ -) 남녀 관계를 설명하되 둘 사이의 상호보완관계를 설명하나 여기에는 기계론적이고 범신론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요컨대 인간은 남과 여 한쪽만으로는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함을 인식해야 한다.
독신생활은 단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대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인간이 건강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두 인격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상호 교제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Gemeinschaft).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교제의 존재(사회적 존재)이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인간 상호간의 모든 교제의 기본 단위는 남녀 사이의 교제이다. 즉 이 인간교제의 핵심과 중심이 남녀 사이의 교제이다. 남녀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Helmut Frey).
그러면 “배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말 번역에는 “그에게 일치하는”이라는 말이 빠져 있다. 아담의 배필은 아담과 일치하는 존재라야 그의 배필이 된다는 말이다. 짐승은 인간과 일치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 배필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보검 하나를 부러뜨려 한 아들에게 한 토막을, 다른 아들에게 다른 토막을 주고 나중에 만나서 이 둘이 형제임을 증명하려면 두 토막을 맞추었을 때 합치되어야 한다. 부부란 이렇게 맞도록 만나는 것이다.
배필이라는 말은 조력자, 도움, 옆에 있는 자(여편네)의 뜻을 지닌다. “에째르”(배필)라는 단어는 “여호와는 도움이시다”라는 표현에 잘 나타난다(시 121:1; 사 30:5; 호 13:9; 출 18:4; 신 33:7; 시 20:3). 그런데 주의해야 될 것은 이 ‘도움’은 일할 때 일방적으로 돕는다는 도움이나 아이를 낳을 때의 도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엔 보다 더 폭넓은 의미가 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의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도움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배필이라는 말이다. “두 사람이 ……”(전 4:9-10). “(전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4: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인간은 부부 상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도록 창조함을 받았다.
② 한 육체
“(창2: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3-24)
우리말 번역에는 “마침내 또는 이번에는”라는 부사가 빠져 있다. 이것은 그 동안 아담이 자기 배필을 구했는데 하와가 등장함과 더불어 드디어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 “마침내”는 대환영을 나타낸다. 아 기다리던 님이 드디어 나타났구나! “이것은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로다”는 아담의 독백은 아담이 하와가 어디서 왔슴을 인식했다는 말이다. 그의 천재성 또는 탁월성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동시에 이것은 아담의 존재론적 소원은 부분에 불과하던 자기가 補充者를 만나 완전해졌는데 있슴을 보여준다.(교회 + 그리스도).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빛의 심오함은 인격적으로 상호교제하고 존재적으로 서로 보완하는데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H. Frey).
놀라운 것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에게 가서 붙었다는 표현이다. 그래서 한 몸이 되었다. 이것은 모계씨족 사회를 반영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이 자기의 여자가 머무나 사랑스러워 그녀에게 가서 확고한 생명의 교제 속으로 들어갔슴을 뜻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격적인 사건과정이요, 성향이며, 예속됨, 돌입해 들어감(Hingezogen sein)이다. 즉 이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을 나타낸다.
남자는 여자 때문에 자기 부모를 떠나 즉 ‘가장 강력한 혈육적인 끈’(die stärksten leiblichen und seelischen Bande)을 끊어 버리고 그녀를 택한 것이다. 이 ‘한 몸’이라는 단어 속에는 남녀의 상호 당기는 힘이 주어졌슴을 내포하고 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가서 붙었다는 사실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머리, 신랑이 된 것과 일치한다.
그러면 여기 ‘한 몸’(바싸르)은 무엇인가? 이것은 영혼의 반대 개념의 육체(싸륵스)를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실존 전체를 가리킨다. 이것은 ‘영적인 통일체, 가장 광범위한 개인적(인격적) 교제’를 뜻한다.(geistlichen Einheit, allumfassendste pers nliche Gemeinschaft).남녀가 한 몸으로 완전 합치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가 잘되는데 달려있다. (부록에 있는 에배소서 강해 1:23을 참고할 것)

-d. 진리의 터와 기둥
진리의 기둥: 여기 기둥이라는 말은 특별한 歷史的 배경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에베소에서 기록했는데, 에베소의 큰 영광은 그들이 섬기던 神인 Diana 또는 Artemis의 신전이다.(행 19:18). 이 신전은 세계 7개의 불가사의한 물건 중의 하나이다. 이 신전의 명물 중의 하나는 기둥인데 거기에는 127개의 기둥이 있었다. 그 모든 기둥은 한 王의 선물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기둥들은 더러는 보석으로 장식되었고 또 금으로도 입혀졌다. 말하자면 이 기둥들은 매우 아름다웠다. 이 기둥은 높고 커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란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우뚝 솟아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도 마 5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 산위의 집처럼 누구에게든지 보여진다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예배당 건물이 남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등대로써 그 내용이 남의 눈에 띄게 해야 된다는 말이다.
진리의 터: 이것은 교회가 진리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터로서 적어도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①하나님을 아는 지식(우리를 부르신), ②부르심에 반응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 것.

2. 정의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기독교 교회란 사람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상호간에 봉사하며 세상을 향하여 보내심을 받았슴을 인식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의 기구로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이다. 교회를 형성하는데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나온 요소이다: 모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하나님의 말씀), 다른 하나는 이 부르심에 반응하는 인간편에서의 요소이다: 이 부르심을 실현하는 대답(믿음). 이 두 가지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진리와 실재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인간이 대답함을 통해 교회가 형성되는 것이다.(RGG3 Bd.2, S.1325. G. Gloege: Art. Gemeinde)

-교회 내에는 가라지(독보리)가 있다.
(마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마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마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마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마13: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마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독보리’란 무엇인가? 헬라어 원문에는 가라지(독보리)라는 단어가 모두 복수로 나온다. 독일어로는 Lolch, lästiges Unkraut(비유적으로는 무능한자, 밥벌레, 불량아 등으로 쓰인다)로 번역된다. 모양은 보리와 비슷하나 독을 지닌 것으로 그것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교회 내에는 체질적으로 악질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일을 한다. 그들의 제스츄어가 탁월해서 겉 모양으로는 언듯 분별하기 힘든다. 이들은 자기義 사상에 사로잡혀 있고 외식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경우에 이들은 거짓을 택한다.

(참고내용)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하권 809-829
-밀라드 J. 에릭슨, 복음주의 조직신학 하권, 215-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