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3강 / 교회의 정치 구조

III. 교회의 정치 구조

왜 인간 사회는 정치를 필요로할까? 한 마디로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국가는 인간 사회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부여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 한 순간이라도 법질서가 없어지는 경우 그 혼란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다. 인간에게는 질서와 안전이 없으면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할 수 없다.
정치의 본질은 ⑴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대립 ․분쟁은 조정되고 통일적인 질서가 유지되게 하는 데 있다. 국가라고 하는 공동생활의 틀 속에서 단순히 개개인의 풍습이나 도덕 등의 자율적인 규범만으로 유지되지 않는 질서를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법과 그 밖의 방법을 동원하여 유지시키는 작용을 정치라고 보는 견해이다. 말하자면 정치란 공동체가 질서를 유지하여 사람들이 자기 자신읠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작용인 것이다.
⑵ 이에 반하여 정치는 국가만으로 한정되는 인간활동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생활의 제(諸)형태, 이를테면 회사 ․노동조합 ․교회 ․학교 ․가정 등 어디에서나 발생되는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의견의 차이를 조정해 나가는 통제의 작용도 모두 포함한다는 견해가 있다. 미국 정치학자들의 대부분은 이 관계를 거번먼트(government)라 하여 국가는 공적인 거번먼트인 데 대하여 그 밖의 것은 사적인 거번먼트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왜 정치가 필요할까? 거기에도 인간의 연역함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교인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 교회 공동체를 효과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새로운 직분을 설명했음을 보여준다.
“(행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행 6:2)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행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행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행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행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교회정치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고전 14:33)이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이 규모있게 그리고 그의 뜻에 따라 펼쳐지는 것을 원하신다(고전 14:40). 신약성경에 있어서 ‘평화’는 단순히 불화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ThWB II, 409ff.) ‘건강한 상태’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정상적인 피조물의 상태를 의미한다(엡 2:14이하). 따라서 교회가 선사 받은 이 평화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교회의 질서 또는 규정은 구원시대의 특징과 더불어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왕권이 교회에 집행되기 위해 인간적인 도구들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가시적 교회의 조직체제이다. 교회의 행정체제(regimen ecclesiasticum)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직분(ministerium ecclesia- sticum)이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직접 구원을 베풀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교회의 직분자들의 말씀 선포 사역을 통해 개인이 언약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을 기뻐하셨다.(H. Heppe, engl. 672). Rissen은 “교회에는 공적인 직분자들이 있고 또 그들을 부르시는 일이 필요한가?” 라고 묻고 “그렇다 공상주의와 열광주의 자들 때문에 필요하다”고 했다(XVI, 19,1). 이런 직분자들을 통해 형성된 정치체제는 반드시 똑같지 않다.
교회의 정치 형태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모두 일치한다.
-1) 루이스 벌코프는 6가지 교회 정치제도를 소개한 다음 개혁파 교회의 직분에 대해 상론한다. ① 퀘이커파와 다비파의 견해, ② 에라스투스주의 제도, ③ 감독제도, ④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제도, ⑤ 회중파 교회, ⑥ 국가교회 제도
-2) 밀라드 J. 에릭슨은 교회 정치의 형태를 4 가지로 구분했다. ① 감독제도 ② 장로제도 ③ 회중제도 ④ 무정치
-3) James Leo Garrett, ST II(584ff.) Garrett는 4 가지 정치형태를 말한다. ① 교황제도 마 16:18-19에 근거. ② 감독제도 ③ 장로제도 ④ 회중제도
-4) Wolfhart Pannenberg, Systematische Theologie Bd. 3. 판넨베르크는 교회의 정치 형태에 대해서는 열거하지 않고 교회에 정치가 있어야 될 이유는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몇 가지의 교회정치체제가 있다.
⑴ 교회무정부주의: 퀘이커교도와 다아바이트교도(또는 Darbysten). 이들은 모든 교회 정치 체제를 부인한다. 그 이유는 외적인 교회 정치체제는 교회를 타락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집단의 특징을 더 연구해 보자.
Darby, John Nelson(1800-82): 이레란드 귀족출신, 법을 공부한 다음 신학을 공부하고 영국 성공회에서 목사로 일함. 그 당시 교회 풍토에 만족하지 못하여 국가 교회로부터 나와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듦(1828). Irving의 종말론 사상에 영향을 받음. 그리고 플리머트 형제단과 연관되어 그 지도자가 됨. 그는 여행을 많이 했음.
이들은 조직적인 국가 교회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 새로운 조직 체제가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특별한 조직도 없이 어떤 장소에 모였다. 이들은 세상과 야합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 불가시적인 교회는 가시적인 공동체에서 볼 수 없다고 여기고 성만찬에서 볼 수 있다고 여김. 이는 형제들의 눈에 믿음이 순결함과 행위와 가르침의 순결함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문제점: 소규모의 교회집단은 가능하나 큰 교회로 발전할 수 없다. 교회의 단일성과 카톨릭성이 약화된다. 거룩성이 비정상적으로 강조되어 결국 완전주의 내지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
⑵ 에라스티안 정치체제: Erastus(1524-1583)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 그는 독일의 의사로서 교회 정치에 많이 관여한 사람이다. 그는 개혁파의 교회치리에 대항하여 국교적 기독교회를 주장함. 이들은 교회를 하나의 사회구조로 보고 그 존재와 형태를 국가가 정하게 한다. 교회의 직분들은 단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며 어떤 다스리는 권한도 없다. 교회를 다스리고 치리하는 권한을 국가에 둔다. 영국 국교, 스코트랜드, 독일 루터교에서 볼수 있다.
교회의 단일성과 카톨릭성은 잘 보존되나 국가의 간섭을 지나치게 받는 경우 사도성은 물론 거룩성도 무너질 수 있다.
⑶ 감독 정치체제: 이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정치를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계급에 위임하셨다고 보고 그들의 독립성을 주장함. 여기서는 평신도들이 결코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 초기에 채책한 것임. 영국에서는 에라스티안과 결합되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만인 제사장직분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⑷ 로마카톨릭 정치체제: 이것은 감독 정치체제가 보다 더 논리화 된 것임. 이들은 사도들의 후계자 뿐 아니라 수제자인 베드로의 후계자로 보고 교회는 절대적이고 무흠한 교황의 단일체제 아래에 있다.
-이 정치체제의 문제점을 더 조사해 보라. 정치적으로 매우 세밀하게 간섭을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자발성이 사라진다. 또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정치 싸움이 일어날 수 있다.
⑸ 회중 정치체제: 이것은 독립정치체제라고도 불리운다. 이들에 의하면 개 교회는 다른 모든 체제로부터 독립된 것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은 위임을 받은 교회 임원들에게 달려 있고 직분자들은 지역교회의 단순한 기능에 불과하다.
-이런 교회는 대외적으로
⑹ 민족적 교회 체제: 교회는 자발적으로 민족적인 차원에서 형성되고 개교회는 민족교회의 하부조직으로 보는 체제. 그 고유의 권한은 민족적인 기관에 있고 이 기관이 교회 체체에 대한 사법권을 가진다. 이것은 장로교에 반대된다. 장로교에서는 그 사법권은 장로법원에 있다. 이 체제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자기 행정의 원리와 직접적인 책임성을 무시한다. 이런 체제는 전체주의 국가에 어울린다. 이북의 봉수 교회나 히틀러 체제하의 독일의 민족교회가 그러했다. (Deutsche Christenheit)

-기타 사항은 장로교 헌법책을 참고할 것.
⑺ 장로 정치체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장로교 정치체제는 미국 연방정부의 형태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한다. 장로교의 특징과 미국 연방정부와의 사이에 그 차이점을 말해 보자. 원래 장로교회에는 연방회(총회)가 없다. 가장 중요한 모임은 노회이다.
원칙적으로 개교회들은 노회를 이루고 이 노회들이 1년에 한번씩 모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교회 문제를 논의하고 의결한다. 그러나 의장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그 임무가 정지된다. 우리 나라는 중앙집권제와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이런 정치형태들은 교회 내에 임명된 직분들을 통해 그 기능을 발휘한다. 우선 교회의 은사 측면에서 직분을 살펴보자.

1. 교회의 직분

교회 내에는 여러 가지 직분이 있다. 바울은 두 군데서 이 직분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우선 그 내용을 개괄적으로 알아보고 상론한다. 먼저 고전 12:4-11이 보여주는 은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1co 12:4) Now there are varieties of gifts, but the same Spirit; (1co 12:5) and there are varieties of service, but the same Lord; (1co 12:6) and there are varieties of working, but it is the same God who inspires them all in every one. (1co 12:7) To each is given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for the common good.
(1co 12:8) To one is given through the Spirit the utterance of wisdom, and to another the utterance of knowledge according to the same Spirit, (1co 12:9) to another faith by the same Spirit, to another gifts of healing by the one Spirit, (1co 12:10) to another the working of miracles, to another prophecy, to another the ability to distinguish between spirits, to another various kinds of tongues,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1co 12:11) All these are inspired by one and the same Spirit, who apportions to each one individually as he wills.

(1) 본문에 나오는 은사는 초자연적인 은사(카리스마타)이다. 이것은 교회가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온 것임을 나타내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은 이런 은사를 보고 기독교가 자연종교와 다름을 알게 된다.
(2) 본문에 나타난 은사는 교회의 전통적인 특성을 계속적으로 지니도록 받추어주는 받침대 역할을 한다.
(3) 이 다양한 은사는 교회의 다양성을 보여주어 지체 의식을 가지게 한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본문의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양하게 이 은사들과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1) 4절에는 ‘성령 하나님’이 다양한 은사를 분배함을 보여주고 있다.
(2) 5절은 ‘主’께서 교회에 다양한 봉사직분을 나누어줌을 보여준다.
(3) 6절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양한 役事을 나누어줌을 보여준다.
이 세분의 함께 참여하는 사역이 없이는 교회에 조화있는 성령의 은사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설령 ‘성령’께서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해도 ‘主’께서 그 은사를 받을 직분자들을 관리하지 않으면 무질서하게 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일으키시는 사역이 없이는 이 은사가 이 봉사자들에게 아무런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의 존재에 삼위일체가 역사함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구절에는 성부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구약의 엘로힘이 아버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Karl Rahner: Schriften zur Theologie, Benziger Verlag, Einsiedeln Zürich Köln 1992, Bd. 1, 6.Aufl., 91쪽 이하

7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을 주도록 은사의 나타남이 주어진다고 말한다음 각각의 은사를 말한다. 여기 “유익하다”는 말은 ‘공동을 위해 이바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은사를 교회라는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힌두교나 불교의 영향권에 있는 동양은 지체의식 또는 연대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는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도 팽배하다. 교회 내에 개인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것은 복음이 한국에 들어와서 이 사고방식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칭의론에서는 물론 교회론에서 실패했디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고전 12장에 나타난 여러 은사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해 보자.
① 지혜의 말씀: 지혜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삶의 실제적인 현장에서 마땅이 할 일을 꿰뚫어 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른길과 해결 열쇠를 발견하는 능력을 말한다. 지혜의 말씀이란 이런 지혜를 제공해주는 도구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매사에 사사건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나 살피며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은 이런 은사를 받았다. 이 은사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로 되는 관건을 발견하는 것이다.
② 지식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런 은사를 받으면 하나님의 섭리를 잘 알게 된다. 이것은 주로 목회자나 신학자나 그리고 교회의 선생 등등이 받는다. 가르치는 은사와 연결되어 있다.
③ 믿음의 은사: 이것은 우리가 구원얻는데 필요한 그런 은사와는 구별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고 그 신실하심을 의지하는 은사이다.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다른 사람은 다 실망하는데 이런 사람은 결코 불안해 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이런 사람은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 파도와 같은 요동이 있어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에게는 기도의 능력이 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이 이 역경속에서도 반드시 나타나고야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뻐한다.
④ 신유의 은사: 이것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한번 이것을 받으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이 있을 때마다 이것이 다시 나타난다는 말이다.
⑤ 이적의 은사: 이것도 역시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위의 두 가지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이 계속해서 이런 능력을 행하는 경우 교만해질 위험도 있고 마치 神적인 존재가 되어 결국 그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보유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약점은 자기에게 이 세상 사람을 놀랠만한 능력이 있는 경우 교만해 진다는데 있다.
⑥ 예언의 은사: 이것은 미래의 일을 점치듯이 말하는 은사라기 보다는 예언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므로써 미래를 대비시키는 교역자의 은사이다.
⑦ 영분별하는 은사: 성령의 사역이 있는가 하면 마귀의 사역도 있다. 이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사단에게 이용당할 뿐더러 영적으로 기형아가 될 수 있다.
⑧ 방언과 방언 통역 은사
바울은 여기서 성령께서 이 은사를 통일적으로 관할함을 강조하며 교회의 조화를 가르친다.

성령의 은사를 생각할 때는 이 은사와 봉사직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조화있게 강조 되어야 한다.
-은사만 강조하는 경우 지체의식이 없어진다. 또 쉬이 개인주의적이 된다. 은사는 마치 알맹이와 같아서 그 외형이 없으면 밖에서 들어오는 사상에 따라 재빨리 다른 형체로 둔갑한다. 따라서 그 외형인 봉사직이 강조되어야 한다.
-봉사직만 강조되고 은사와 하나님의 능력이 무시되면 껍데기만 남는다. 봉사직분들은 조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조직체만 강조하면 이 세상의 어떤 공동체와 구별되지 않는다. 즉 예수의 생명력이 없어진다. 로마 카톨릭은 그 좋은 예가 된다.
-하나님의 능력만 강조되고 개인의 봉사직이 무시되면 교회의 다양성이 사라진다. 막연하게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면 만사 오케이라고 하는 경우 소위 능력을 받았다는 지도자를 중심으로하는 우상이 등장하게 된다. 나아가 영웅주의로 나간다. 여기에는 기독교의 문화적 활동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위에 열거된 여러가지 은사들이 교회 내에 조화있게 역사하기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은사인 사랑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 사랑에 대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고전 13장을 분석함이 좋을 것이다. 고전 13:1-13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 ⑴ 사랑과 삶의 의미 (1-3절), ⑵ 사랑의 정의 (4-7절), ⑶ 사랑의 영원성 (8-13절)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무척 많이 듣고 경험하며 산다. 대중 가요의 대부분이 사랑을 테에마로 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영화의 주제 역시 남여간의 사랑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본문이 말하는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본문이 말하는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헤쎄드”라는 히브리어에 대한 해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이 “헤쎄드”는 인간의 언어로는 간단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은 열 석절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아가는 중간 단계로 그의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A). 사랑과 삶의 의미
바울은 참사랑의 삶과 통상적인 인간의 삶 곧 이 세상의 삶을 비교하므로써 사랑의 의미를 부각시킨다.
(1) 1절은 내 몸 밖으로(外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 있어도, 즉 신적인 현상이 있어도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없으면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것의 전형적인 예는 外飾하는 바리새인이다. 체면문화가 자아낸 의식구조 속에 사는 한국인은 알맹이보다 외적으로 나타나는 은사를 중요시 여기기 쉽다. 이런데서는 알맹이를 지니는 실속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보다는 밖으로 나타나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에 치중할 위험이 있다. 이중적인 교인 생활이 형성되는 것은 이와 관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2절은 內면적으로 어떤 능력을 지니어도, 이를테면 예언, 모든 비밀을 투시함, 지식, 믿음 등을 지니어 소위 슈퍼맨처럼 되어 신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아도(용한 무당처럼)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즉, 단순히 초자연적인 은사만으로 인생의 의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3) 3절은 사랑이라는 알맹이가 없이, 재산을 내어주고 몸을 불사르는 값싼 휴마니즘만으로도 유익이 안된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므로써 이 세상 사람들은 공허하게, 아무것도 아닌, 유익이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을 나타낸다.

(B). 사랑의 정의
히브리정신은 헬라 사람들처럼 사랑을 “ A는 .....이다”라고 정의 하지 않는다. 그 동작을 묘사하므로써 그 의미를 드러낸다. 4-7절은 (ㄱ)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면서(오래참고, 온유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모든 것을 덮어주며...) 사랑을 정의하고, (ㄴ) 다른 한편으로는 “.... .... .....하지 않으며”라고 말하여 “육의 체제”에 대항하는 표현을 씀으로써 사랑을 정의 한다. 투기, 자랑, 나발을 붊, 자기 추구...등등은 분명히 “육의 상태”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랑은 이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랑은 적극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며 소극적인 측면에서는 영적인 전투를 한다는 말이다. 이 “육의 상태”에서 나온 것들이 다 제어될 때 율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이 율법을 이룬다는 말은 바로 이 말이다. 또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존재의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총합체이다. 놀라운 것은 사랑 속에 믿음, 소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7절)

(C). 사랑의 영원성
바울은 8절 이하에서 사랑은 영원히 있으며 이 사랑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미완성에서 완성에로 성장하는데 동반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중간에 이 알맹이를 장식했던 다른 은사들은 다 폐함을 말하고 있다. 다른 은사들은 이 사랑을 이루는데 필요한 중간 매개에 불과한 것이다.
또 부분적으로 알고, 어린아이 같으며,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한 인식등은 완전한데로 나아가지 않으면 사랑을 실현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날 완전한 것이 올 것이고, 영적인 어른으로서 말하고 생각하며 논리를 펼 것이다. 완전한 인식 곧 내가 하나님에 의해 안 바 되고 내가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이를 위해 영적인 성장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 오래 다녔으나 여전히 어린 아이 같이 말하고, 생각하며, 잘 삐진다면 부끄러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의의를 규명한다고 하겠다. 사랑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로부터 발산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항상 같이 간다. 교회 내에 여러 가지 은사가 있어도 이 사랑이 없으면 인생의 마지막에 껍데기나 공허한 소리, 아무 것도 아님(허무주의), 유익한 것이 없을 것이다.

바울은 롬 12:3-13에서 교회의 여러가지 직분을 말하면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말한다. 우선 이 부분을 해석해 본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3-8절; 9-13절. 이 두 부분의 관계는 고린도 전서 12장과 13장을 종합해 놓은 것과 같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의 여러가지 은사와 직분에 대해 말한 다음 그 직분들이 서로 조화되기 위해 사랑의 은사를 말한 것이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와 같다. 바울은 먼저 교회의 직분과 은사에 대해 말한 다음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의 여러 지체들이 조화 있게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D). 교회의 통일성과 다양성
⑴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은혜에 근거하여 너희 가운데 있는 모든 이에게 다음과 같이 곧 ‘마땅이 생각하여야 하는 것 보다 더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대로 나누어준대로 생각해서 근신하는 것(이치에 맞게 사려함)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3절).
교인들이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 반드시 자신의 분수를 생각해야 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함부로 말하고 의견을 내어 놓으면 불화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성숙한 교회란 교인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받들때 깊이 생각한 다음 행동에 옮길줄 아는 자들이 많은 교회를 말한다. 특히 자기의 은사, 분수, 제한성을 고려하면서 말해야 한다.
⑵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그러나 많은 지체들이 동일한 과제를 수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한 몸이다. 그러나 각각 다른 이들의 지체들이다(서로 돕는 지체들이다)”(4-5절).
이 구절은 교회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말한다. 한 몸에 속했다: 통일성, 각자 다른 은사: 다양성.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체의식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다는 것과 각각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해도 서로를 위해서 존재함을 가르쳐 준다. 이것은 기독교가 동양 사상과 매우 다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힌두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아독존 사상은 자연과의 합일은 말하나 인간 상호간의 지체 의식은 모른다. 이 영향권에 살아온 한국 교인들이 가장 극복하기 힘든 점은 바로 이 자기중심 사상이다.
서로 지체 의식이 있으면 도우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 각자는 다른 이들의 지체라고 말하므로써 각 개인이 남을 위해 존재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회 내에는 누가 잘났느냐고 하는 경쟁이 있을 수 없다. 누가 자기의 은사를 어느 만큼 최선을 다해 연마해서 교회의 직분을 수행하는냐가 중요한 것이다. 자기 직분을 잘 수행하면 남을 돕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⑶ 어떤 은사가 있나?
-예언: 이것은 미래에 대한 예언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달하는 자는 듣는이의 믿음을 일깨워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한다. 교회의 목사가 여기에 속한다.
-봉사: 이 은사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숨은 봉사를 잘하여 교회를 조화있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교회가 조용해진다. 집사가 여기에 속한다.
-가르치는 은사: 이것은 복음선포와는 달리 성경의 내용을 조직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지닌자를 의미한다. 이런 자들이 많으면 교회 내에 영적인 문맹인이 적어진다. 교사.
-권면하는 은사: 영적인 침체에 빠진 자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자의 은사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교회는 생기가 돈다. 권사. 권찰.
-단순한 마음으로 나누어주는 은사: 특별히 자기 물질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은사이다. 이것 때문에 사회가 밝아지는 것이다.
-열심 가운데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자: 교회 전체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교인들 상호간에 조화를 이루도록 조정하며, 삶의 모범을 통해 교인들을 인도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主를 위해 자기의 안일을 버릴줄 알아야 하며 섬기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훌륭한 지도자란 아랫 사람을 섬겨서 인도할 줄 아는자를 말한다.
-기쁜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는자: 인간은 변덕이 많아서 남을 도와주다가도 삐뚤어지면 도와주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닮은 자들은 변함없이 긍휼을 베풀수 있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감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 위의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9-13절)
이 부분의 주제는 “사랑은 위선적이 아니다”(우리말 번역: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이다. 그러면 이런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⑴ 사랑은 어느 한 곳에 속에 있다(9절).
惡을 미워하고 善에 붙어 있어야 된다. 다른 말로 사단에 속한 것을 미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중간에 서서 사랑을 한다고 한다면 모순에 부딛치게 된다. 사랑의 실천은 이처럼 善에 속함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 선이란 이 세상 차원에서 말하는 선이 아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근거한 선이다.
⑵ 본문에 나타난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을 나타낸다.
10절의 형제 사랑으로 서로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평가하는 것과 13절의 성도들 상호간에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과 손님대접은 이웃에 대한 관심 곧 수평적 차원의 교훈이다. 11절은 믿음을 나타낸다. 믿음이 있는 경우 주저하지 않는 열심이 생기고, 끓어 오르는 靈으로 主께 봉사할 수 있는 것이다.
12절은 소망, 인내, 기도로 견딤등은 시간적인 차원의 내용이다. 만일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인격의 구조를 말한다면 교회가 조화를 이루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가면 된다.

질문
1. 바람직한 교회 정치 제도에 대해 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