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학개론
한국 교회는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최근 그 성장률이 둔화되더니 급기야 정체 현상을 낳게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으나 본 글에서는 무엇보다도 설교의 사역이 진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원인과 대책 수립에 그 목적을 두었다.
Ⅰ. 한국 설교 현장과 위기 요소들
우리의 교회에 설교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 지금껏 목사님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의 대언 또는 증거로 믿고 따라왔던 회중들로부터 ‘설교자의 설교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묻는 질문들이 속출하고 있다.
선포되는 말씀 앞에 가슴을 치며 애통하면서 새로운 결단과 순종을 보이던 모습들이 이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옛날의 이야기로 변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오늘의 설교는 대개 싫증이 나고 지루하고 들을 만한 말씀이 결여되어 있다’고 서슴없이 말을 한다.
왜 우리의 설교가 새로운 현실과 맞부딪히게 하는 데 무력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하는데 부정적이며 결단과 변화를 가져오는 데 깊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설교만은 아직 살아서 생명력을 지닌 설교’라는 교만의 우산 밑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회중들은 그 앞에서 설교를 들을 귀를 막아 버리는 현실이 발생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설교자들과 회중들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설교의 위기적 현상이 도래되고 있는지를 공동으로 찾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위기의 진단과 원인을 발굴하기 위해 몇 가지 문제점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설교의 횟수 - 한국 교회 설교자들은 일주일에 최소한 3편이상의 설교를 해야 한다. 1년이면 156회 그리고 10년이면 1,560편의 설교를 작성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이것은 설교의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사실임에 틀림없다.
2. 설교의 복사 - 설교집의 출판이 하나의 경쟁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했다’는 자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설교를 기록화시켜 교인들에게 다시 읽히도록 하는 목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부작용을 본다. 첫째는, 철저한 말씀의 종이 되겠다고 교문을 나선 졸업생들로부터 들어온 고민 섞은 보고이다. ‘어느 목사님은 설교집을 오려서 그대로 들고 강단에 올라서십니다’. 둘째는, 자신이 펴낸 자신의 설교를 교인들이 읽고 난후 교인들로부터 ‘목사님은 지난번 했던 설교들을 계속 재탕을 하십니다’하면서 새로운 실망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3. 설교의 준비 - 한국 교회 목회자들은 심방을 비롯하여 각종 의식과 회의 등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기에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 외에 다음의 10개항을 설교의 위기적 요소의 핵심들로 더 들어볼 수 있다.
1) 오늘의 설교는 본문 말씀을 떠난 설교가 너무 범람하고 있다. 설교자는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본문의 지배자로서 자신이 만든 말에 본문을 사용하는 현상이다.
2) 오늘의 설교는 말씀의 현장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하나의 독백적 설교로서 끝을 맺는다.
3) 복음의 메세지가 변화되어 물량 주의와 기복 사상에 중심을 둔 설교로 전락되고 있다.
4) 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삶, 그리고 인격과 너무나 심한 거리감이 있다.
5) 오늘의 설교는 설교자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회중에 의해 끌려가는 형태이다.
6) 바른 성서 해석과 신학적 이해가 없는 설교 즉 신학이 없는 설교가 난무하고 있다.
7) 설교는 설교자의 목회적 수단의 방편이 되어 그릇된 전위 의식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8) 예언자적 선포가 수반되지 못하는 지극히 안일적이고 도피적인 설교들이다.
9) 설교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교육적 훈련의 부족이 너무 심하다.
10) 자신의 설교에 대한 착각적 과신이 너무 심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어느 것 하나 사실적이 아닌 것이 없다. 우리의 강단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는 것은 모든 설교자들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위와 같은 위기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보다 근본적인 생각을 갖게 한다.
첫째, 우리의 초기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던 설교자로서의 정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물론 지금도 많은 설교자들은 순수한 말씀의 전달을 위하여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에 이르는 설교자들이 자신의 전체를 던져 하나님이 오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찾아 들으려는 뜨거운 열심을 내놓지 않는다. 오히려 남의 설교집을 뒤적거리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아 강단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음성의 기교를 부리는 것을 습관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말씀과 자신이 화신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이러한 비극적 현상은 설교의 상실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사연이 될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설교에서는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설교자가 너무나 튀어나 보이는 기현상이 발생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1960년대까지도 좀처럼 들을 수 없던 종결어들이 난발되면서 더욱 이러한 실태는 뚜렷해지고 있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흔히들 쓰고 있는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바랍니다’ 의 주어는 설교자 자신들이지 결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니다. 일인칭 단수를 생략해도 의사가 거리낌없이 통하는 우리 한글의 모순이 가져온 하나의 혼돈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끊임없이 문장마다 등장되고 그 설교자의 말에 소리 높여 ‘아멘’으로 응답하는 모순을 우리는 무수히 보고 있다.
셋째, 이상과 같은 결과는 자연적으로 강단을 인언(人言)의 장으로 만들게 되고 거기서 설교자는 부담없이 자신의 경험담이나 끝없이 엮어지는 예화의 진열장으로 설교 사역을 탈선시키는 슬픈 현상을 보게 된다. Clyde Reid는 최근의 나타난 설교 비평을 종합해서 7가지로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설교자들에게 있다.
② 오늘날의 설교는 대개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③ 오늘의 설교는 대부분 듣는 사람의 형편과 무관한 것이다.
④ 요즈음 설교는 과감한 설교가 못된다는 것이다.
⑤ 오늘의 설교는 상호 전달이 안된다.
⑥ 오늘날의 설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⑦ 이제까지 설교가 너무 강조되어 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주로 설교자에게만 국한시킨 진단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못지 않게 오늘의 회중들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이유로서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예언적 설교의 현장에는 교인들이 모이지 않고 ‘축복의 성회’ ‘신유의 성회’ ‘은사의 성회’라는 간판이 달린 곳에 성도들의 발길이 무수히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실례로 들 수 있다. 오늘의 성도들이 내게 주신 은총 앞에 무엇을 보답하며 그 영광을 어떻게 돌려야 할 지에 대한 관심보다 무슨 복을 더 받아 어떻게 더 잘사느냐에 더 많은 정력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중들의 기복 위주의 취향에 따라 주지 않는 설교자는 외면 당하고 떠나 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회중들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설교 현장을 위기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인 설교는 너무도 딱딱하여 듣기를 거부하는 양상을 나타내는가 하면 죄를 지적하면서 바른 길을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자 앞에는 나타나기조차 하지 않는 매정스러운 인상을 본다. 설교에 대한 신학적 훈련을 받고서 강단에 서 있는 말씀의 종을 자기 고용인처럼 비판하면서 오히려 설교의 선생 역할을 서슴없이 감당해 가는 오늘의 회중들을 비롯하여,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삶의 현장을 더욱 삭막하게 해 가는 무책임한 성도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Ⅱ. 평신도의 설교 의식 구조
한국 개신교의 평신도들이 설교자를 어떻게 이해하며 그들의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의 종합적인 평가는 아직도 설교 사역자와 회중과의 관계가 건실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되어진 사실은 오늘의 평신도들이 과거처럼 설교에 대하여 무비판적이거나 맹종의 자세를 벗어나 설교자가 회중들의 반응을 소중히 여기면서 수준 있는 설교를 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음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설교자를 선택받은 인간으로 ‘하나님 말씀의 사자’임을 절대수가 인정을 하면서 설교자의 모범인 인격과 설교가 일치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살아간 설교자들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설교한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견해에 80.2% 가 응답함으로써 설교자가 아직도 이 땅에서 대단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 다음으로 설교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구별된 복장(가운)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나타났으며(57.1%), 설교자의 음성이 설교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90.4%), 설교자의 용어는 가능하면 청중의 언어 수준에 유의해 주기를 요구하고 있다.(55.4%) 그 외에도 설교의 원고화를 요구하면서 자연스런 제스처와 함께 역동적인 설교의 전달을 절대수(78.8%)가 바라고 있다. 특별히 이들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에 민감해 주기를 바라는 응답이 예상외로 높은 점(78.9%)은 지금까지의 일방통행의 설교 형태에 대한 강한 불만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설교 사역의 장에 깊이 뿌리를 내린 기복 사상에 대한 응답은 아직도 응답자의 27.8%만이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낼 뿐 절대 수가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성도들이 아직도 기복적 종교심에 젖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박에 설교자의 예화 사용의 문제에 대해서는 ‘면’ 이하의 지역과 교육 수준이 낮은 응답자를 제외하고는 적절한 예화를 가끔씩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음에 오늘의 설교자들이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주의 깊게 보아 온 설교의 주격에 대한 질문에 77.3%의 응답자들이 설교자가 설교 분장의 주어로 등장하기를 거부하면서 설교 문장의 주어는 성삼위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Calian교수는 그의 명저 「Today's Pastor in Tomorrow's World」에서 미래지향적인 목사에게 바라는 평신도의 기대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즉 목사는
1) 확고한 믿음과 사명에 분명하고 설득력을 가져야 하며
2) 명설교자로서 의미 깊은 예배를 인도해야 하고
3) 목양에 대한 소명자로서의 확신을 소유해야 하고
4) 개인과 단체가 필요로 하는 사연들에 민감해야 하고
5) 교인들의 믿음과 성장을 위한 깊은 관심과 기술의 개발에 헌신적이어야 하고
6) 따뜻한 인간애와 뜨거운 영혼의 힘을 소유한 능력자가 되어야 하고
7) 회중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여야 하며
8) 조직의 기술과 어려움의 해결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자들은 위와 같은 회중들의 설교에 대한 의식과 기대를 잘 수용하여 설교 사역에 활용하여야 하겠다. 다만 회중들도 오늘의 설교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소한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① 먼저 능동적인 참여 의식의 발로이다. ‘설교를 들어주는 존재’로서 앉아 있는 방관자의 자세 속에서는 결코 말씀과 자신과의 만남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② 이러한 능력적 참여는 말씀과의 만남을 이룩시켜 달라는 기도와 함께 믿음의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③ 설교를 듣는데 방해가 되는 선정적 사건들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최대한 해방시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④ 설교자가 비록 복음의 선포에 미숙한 면이 많더라도 경멸하는 태도보다는 격려의 손길을 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힘을 북돋아 주면서 성장하는 설교자가 되도록 친절한 참여가 가장 아쉬운 현실이다.
⑤ 구수한 대화에 고개를 들고 말씀의 전개에는 고개를 숙이는 태도를 삼가야 할 것이다.
⑥ 회중들은 언제나 지나친 흥분을 삼가고 차분한 마음속에서 그 말씀과 자신을 계속 연관시키는 경청을 해야 할 것이다.
⑦ 회중들은 설교자의 시간을 최대한 설교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며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⑧ 끝으로 오늘의 한국 교회는 너무 많은 설교를 주문하고 있다. 되도록 깊고 진지한 메시지를 듣도록 하는 자세와 협조가 있어야 한다.
Ⅲ. 이상적 설교 사역을 위한 제언
다니엘 바우만은 그의 책 「현대 설교학 입문」에서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 요소를 소명, 건강, 훈련, 인정, 겸손, 그리고 용감성을 들고 있다. 이 모두가 설교자가 그 몸에 언제나 간수하고 다녀야 할 기본 수칙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우리는 몇 가지 사항을 첨부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설교자 자신에 대한 재인식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바른 메세지를 기대할 수 없다. 부름 받은 존재로서의 쉬임없는 확인과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의 자기 분수를 아는 설교자이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과 인간의 호소를 듣는 귀와 경험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도록 해주는 사역자이기에 그는 하나님과 회중들을 모두 섬겨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간성의 회복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한국적 상황은 설교자의 인격적 비중을 크게 생각하는 실정이다.
넷째는, 연속적 훈련의 필요성이다.
그 외에도 시대를 보는 역사의식과 현실적 사회의 관심, 커뮤니케이션의 표현력과 기술, 예언자적 상상력과 분별력, 설교의 독창성과 창조적, 그리고 교회 음악을 포함한 예술 전반의 이해 감각등 허다한 과제들이 오늘의 설교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오늘도 사역자는 쉬임없는 책임 의식과 자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이상적인 설교 사역을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진정한 설교는 언제 어디서나 위탁받은 메시지와 자신의 전체가 완전히 얽혀진 화신적 설교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럴 때만이 설교의 상실은 중단되고 임종의 단계에 다다른 설교의 강단은 새로운 회복을 가져올 수 있다.
둘째, 설교자는 오직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류를 통하여 얻어진 말씀을 선포하고, 그 오묘한 말씀의 뜻을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해 주고, 회중들의 삶을 그 말씀으로 지금 여기에서 조명해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셋째 한국 교회 강단은 먼저 설교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훈련을 받을 때가 왔다. 설교는 경험으로만 이룩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경험만 가진 설교자가 모든 신학의 분출구인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해석과 응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고는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설교의 신학과 그 이론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이해를 위한 기회 및 자기 노력의 계속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넷째, 현대는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이다. 따라서 일방통행적이고 권위중시적인 설교의 방법이 오는 세대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먹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설교자는 ‘신들린 자’로서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성서의 말씀과 싸우고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진지성과 씨름해야 한다. 유교 문화권과 함께 절대 명령형을 수반한 지금까지의 일방통행적인 설교의 고집을 버리고 급속히 변화되어 가는 시대 속에 커뮤니케이션이 될 수 있는 논리와 표현을 찾는 연구에 몰두해야만 그 음성이 세상의 소음을 뚫고 들려질 것이다. 생동력 있는 말씀의 흐름과 만남은 우리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원동력이며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교류이다. 이 소중한 원동력이 커뮤니케이션의 상실 속에서는 메세지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교회가 긍정해야 할 것이다.
클라이드 리드는 커뮤니케이션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구조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했다.
첫째로, 설교 지향적인 대중 예배를 소그룹 위주의 예배로 전환시키는 것
둘째로, 설교 위주보다는 춤과 드라마와 침묵을 활용한 다양한 예배의 개발
셋째로, 특정한 설교자의 설교가 아닌 참여자들의 증언 또는 간증의 활용,
넷째로, 교육시키기 위하여 설교보다 소그룹단위의 연구 시도
다섯째는, 때대로 유명한 설교와 훌륭한 음악을 함께 드리는 정중한 의식의 예배 경험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리드의 견해는 현대 정보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는 설교의 사역을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설교는 인간 두뇌의 산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설교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속에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Brooks의 말처럼 설교란 인간 변화를 목표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다. 다만 설교의 커뮤니케이션은 양방 관계이어야 한다는 점과 오늘의 커뮤니케이션은 참여를 통하여 보다 더 진지한 대화와 실천을 가져올 수 있다는 두 가지 원칙만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언어 속에만 머물게 했을 때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못했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 스승이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 대속의 의미를 직시했고, 부활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이 있을 때 영생의 의미를 파악했다. 이처럼 메세지의 행동화, 그리고 진지한 참여는 설교자나 회중들에게 부담을 주지만 역시 필수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상적인 설교 사역을 위한 이상적인 목사의 상을 제시해 봄으로써 본 글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는, 목사라는 성직은 근본적으로 섬김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섬김과 환대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직자는 교주적인 존재는 될 지 모르나 진실된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는 타당하지 않은 존재이다. 성직을 부여받은 광야에 나간 자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 ‘화려한 옷을 입은 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주인들에게 시선을 돌려서는 안된다.
둘째로, 이상적인 목사의 상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의 정체성은 자신의 고향 땅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면서 선명하게 밝힌 바 있으며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목회의 방향을 말씀하신 바 있다. 그 내용은 지금도 오늘의 성직자들이 그대로 수용하고 실천해야 할 과제이다.
셋째로, 이상적인 목회의 상은 자신을 완전히 도구화하는 것이다. 오늘의 목사들이 자신의 전승을 사도들에게 두고 있음은 신학적 이론에서만이 아니라 사역의 내용과 헌신의 차원에서도 정확한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사도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눈여겨보아야 하고 오늘의 목사들도 거기에 준하는 자세를 갖출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을 거기에 준하는 도구로 제공해야 한다. 또 자신의 주인이 쓰시고자 하는 대로 내놓은 주관적인 생명을 포기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이상적인 목회의 상은 순교의 의미를 가슴에 안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오늘의 목사는 최소한 증인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증인은 순교자라는 단어와 일치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증인은 그리스도의 순교자로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여기에 목사가 민감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목회의 성패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를 버리는 사람으로 생활하고 말씀을 전할 때 거기에서 이상적인 목회의 시작이 있게 될 것이다.
21세기가 필요로 하는 성직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김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험준한 산을 올라가는 외롭고 고단한 섬김의 종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