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손
(요 13:1-17)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요 13:3)
오늘은 '복된 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옛날 어느 왕자가 신부감을 구하는데 특별히 손이 예쁜 아가씨를 찾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왕자가 말을 타고 지나다가 어느 아가씨가 자기 집 말의 발굽에 가시가 박힌 것을 뽑아 주느라고 손이 밟히고 상해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저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복된 손은 어떤 손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1. 봉사하는 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이 가까왔을 때,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물을 대야에 떠다가 친히 제자들의 발을 하나 하나 씻겨 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의 선생이 되고 주가 되지 않느냐 그렇지만 내가 섬기는 마음으로 너희의 발을 씻겨준 것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봉사하는 손, 남을 섬기며 도와주는 손은 복된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이야말로 봉사의 모범을 보여 주신 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손으로 문등이를 깨끗케 해주시고,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나아가서 그손이 못박혀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그 손으로 이렇게 봉사하면 복이 있으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봉사하는 손은 복된 손입니다. 자기도 복을 받고 남도 복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막 10:45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섬기러 왔고, 뿐만 아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까지 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섬김을 받았느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겸손히 남을 섬기며 살았느냐를 귀중히 보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천국이란 곳을보니까, 많은 사랑들이 진수성찬으로 가득한 식탁을 가운데 놓고 앉았는데 전부 손을 구부릴 수 없는 뻗정 손이라 스스로 집어 먹지 못하므로 '에라, 당신이나 많이 잡수시오' 하면서 상대방의 입에다 서로 떠넣어 주더랍니다. 그래서 아무 불편없이 잘먹고 얼굴에 기름기가 돌도록 잘 살더랍니다. 그러나 지옥이라는 곳은 천국과 음식상도 똑같고 사람들이 뻗정 손 된 것도 똑같은데 이 사람들은 먹질 못해서 바싹 말라 가지고 안타까와 하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맸더니 뻗정 손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자기만 먹으려고 하니 아무도 먹을 수가 없더랍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가정 생활에서나 사회 생활에서 서로 남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천국과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똑같은 환경에서도 서로 이기심을 가지고 자기만 유익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지옥과 같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빌 2:3,4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12에도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특별히 손을 펴서 물질로 봉사하는 손은 복된 손입니다. 신 15:11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다"고 말씀하셨고, 신 15:7,8절에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 15:10).
하나님께 드리는 손이 크고 도와주는 데 손이 큰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봉사하는 손은 참으로 복된 손입니다.
2. 부지런한 손입니다
잠 10:4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부지런한 손이 복된 손입니다.
어떤 사람이 떡보따리를 등에 지고 가면서도 하도 게을러서 그것을 꺼내 먹지 못하고 배고픈 것을 참고 가는데, 마침 저만치서 갓을 삐딱하게 쓰고 갓끈도 안매고 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보시오, 내 등에 떡이 있는데 내가 귀찮아서 꺼내지 못하고 있으니 좀 꺼내서 나눠 먹읍시다' 하고 말했더니, 그사람 말이 '여보시오, 나도 갓끈이 풀어져서 벗겨질려고 해도 귀찮아서 삐딱한 채 그대로 가는데 당신 떡이나 꺼내주게 됐소?'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그대로 가더랍니다.
성공한 사람은 남달리 부지런한 데가 있습니다. 잠 6:9-11에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궁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공부도 누가 잘하는가 하면, 남달리 부지런한 학생이 잘 합니다. 천재가 따로 없습니다. 머리 좋은 것만 가지고는 국민학교 때까지는 앞서갈 수 있지만 차츰 학년이 높아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별로 머리가 좋지 않아도 부지런한 학생이 앞서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학생이 놀 때 부지런히 공부하고 다른 학생이 TV보고 있을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남들이 눈물 흘릴 때 웃으며 기뻐할 날이 옵니다. 신앙 생활도 부지런한 사람이 잘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밤예배도 못나오고 새벽기도도 못합니다. 남보다 더 부지런해야 집안 일도 다하면서 주의 일에 시간과 몸을 바칠 수가 있습니다. 롬 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불신자보다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묻어 두었다가 가져온 종을 주인이 책망할 때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26-30)고 했습니다. 게으름은 별로 문제삼을 만한 죄가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기대하면서도 게으르면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달라고 해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잠 26:14,15에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르느니라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와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손이 부지런한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성공도 할 수가 있습니다.
3. 기도하는 손입니다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야기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앨버트 둘러라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로서 특히 '기도하는 손'이 그의 유명한 작품입니다. 둘러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친구와 함께 도시로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공부는 교대로 하자. 내가 먼저 일을 해서 돈을 벌테니까 네가 먼저 공부를 해라'라고 친구가 제안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어느 식당에 취직을 해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둘러는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해서 그의 그림 이 잘 팔리게까지 되었습니다. 수년 후 어느날, 그림을 판 돈을 가지고 친구가 있는 식당으로 기뻐하며 달려왔습니다. 그때 그 친구는 식당 부엌에 앉아 둘러를 위해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거칠어져서 이제는 그림을 그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둘러는 꼭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하여 주세요'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둘러가 자기를 위해 일을 많이 해서 굵은 마디가 생기고 주름진 손을 가지고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보고, 이처럼 고귀하고 거룩한 손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린 것이 그 유명한 '기도하는 손'입니다.
기도하는 손은 거룩한 손이요, 복된 손입니다. 더욱이 둘러의 친구처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은 더욱 고귀하고 복된 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아말렉인과 싸울 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면 원수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종일 붙들고 모세가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더니 결국 승리하여 그곳 이름을 "여호와닛시"라고 했습니다(출 17장).
성경에는 손들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 28:2에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말씀했으며, 시 77:2에 "나의 환난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말씀한 것에서 밤중에 손을 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 140:6에도 "주를 향하려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길을 가면서도 할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일하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고 눈 뜨고도 하나님과 영교할 수가 있습니다. 소리없이 묵상으로 할 수 있고, 소리를 크게 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 다급한 기도, 뜨거운 기도를 드리고 싶을 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면 참으로 능력있는 기도,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시 3:4;시 77:1;시 142:1; 눅 22:44; 행 4:24).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흐르는 땀이 피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눅 22:44). 예수님도 위기에 처해서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셨는데 우리 인간이 편안하게 적당 적당히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성령의 불을 받거나 능력과 은사를 받을 때는 목이 쉬도록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몸부림치면서 팔이 떨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손을 들고 기도할 때 그 같은 은혜와 능력을 받는 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두 손을 든다는 것은 회개하며 하나님께 항복한다는 뜻이요, 은혜를 사모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손은 복된 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손은 투전하고 술마시고 담배나 피우고 음란한 죄 짓고 남을 구타하는 데 쓰는 손이 되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봉사하는 손, 부지런한 손, 기도하는 손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복된 발이 되리
(롬 10:13-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오늘은 '복된 발'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의 손기정 선수가 제11회 올림픽 경기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낸 마라톤 경기는 다음과 같은 유래에서 생겨났습니다. 주전 490년경, 페르샤(Persia)의 다리오 왕이 많은 군대를 보내 그리스의 아테네(Athene)를 침략해 왔을 때, 그리스의 명장 미르티 아데스가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대전투의 장소가 아테네의 동쪽에 있는 마라톤(Marathon)이란 곳입니다. 이때 승전의 기쁜 소식을 빨리 시민에게 전하기 위해 페이디피데스라는 병사가 약 40km나 되는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가서 '우리는 이겼노라'고 외치고 그 자리에 쓰러져 숨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승전했던 장소의 이름을 따서 마라톤 경기라고 하며 그 거리를 약 40km로 정한 것입니다.
아테네 군대의 승전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100리 길을 단숨에 달려가 전해 준 페이디피데스 병사의 발이 당시 아테네 시민들에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 발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이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발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복된 발이란 어떤 발을 말할까요?
1. 복음의 기쁜 보식을 전하는 발입니다
롬 10:13-15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진리의 발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발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데도,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구원받지 않으면 원자탄보다 수 만배 아니 수 억배 고통스러운 지옥의 형벌을 당한다고 전하는데도, 사람들은 농담으로 여기고 코웃음이나 치며 '정말 지옥 이라는 데가 있을라구'하면서 회개하지 않고 믿지를 않습니다.
일본은 돈 많이 벌고 잘사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았습니다. 온 나라의 구석 구석까지 음란한 것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처처에 도박장이 즐비하고 경찰도 검찰도 정부도 손 못대는 깡패들이 세도를 부리는 등, 참으로 몸서리치는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천리를 달려가며 보아도 교회의 십자가는 한 두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귀신을 섬기는데 800만개나 되는 귀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들 일본 사람들이 회개치 않으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떨어진 원자탄의 심판보다 몇 천배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디 일본 뿐이겠습니까? 원자탄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히 9:27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받고 영원히 천국의 복락을 누릴 것이요, 전도하는 말을 헛되이 농담으로 들으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유황불 못에 던지워져서 영원히 죽지도 않고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발은 멸망해 가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며 전도하는 자의 발입니다. 전도자의 발은 올림픽에서 금메달로 우리 나라에 영광을 안겨준 손기정 선수의 발이나 차범근 선수의 발보다 몇 천배 귀하고 복된 발입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는 우리가 전도하지 않음으로 인해 원자탄보다 더 무서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들어가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잠 24:11,12에 보면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 대로 보응하시리라"고 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발이 없어서 멸망해 가는 영혼이 그 얼마인지 모릅니다. '가라, 그렇지 않으면 보내라'(Go, or send!)라는 말대로 내가 전도하거나 아니면 전도자를 보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위로부터 들려오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과 '어서 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호소하는 뭇 영혼들의 간절한 소리와 지옥에 떨어져서 '나는 어차피 이곳에 왔지만 내 형제 자매에게 전도하여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는 절박한 부탁의 소리를 듣고, 빨리 빨리 복음을 전하고 전도해야 되겠습니다.
전도하는 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 이보다 더 귀하고 복된 발은 없습니다.
2. 성전을 가까이 하는 발입니다
전 5:1에 보면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 합니다. 곧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말씀을 듣는 자의 발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의 발은 복된 발입니다.
또한 사 58:13,14에서는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들어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발을 삼가서 안식일에, 주일에 사사로운 길로 가지 않고, 오락을 구하여 가지도 않고, 성일을 존귀히 여겨 성전으로 나아오는 자의 발이 복된 발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단이 지금까지 사람을 타락시키고 멸망시킨 공작 가운데 가장 크게 성공한 것 중의 하나가 주일에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발을 붙잡아 맨 것이라고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발을 붙잡아 교회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대신 세속으로 향하게 합니다. 마귀는 예배 시간에 손님이 찾아오게 해서 교회에 못나가게 합니다. 바쁜 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교회에 못나가도록 우리의 발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이런 유혹과 시험을 걷어차고 교회로 나오는 자의 발은 복된 발입니다. 또 어떤 믿지 않는 남편은 '여보, 오늘만 내 말 듣고 교회에 안나가면 다음 주일부터 당신 따라 교회에 나갈께' 하고 유혹합니다. 이에 그럴듯 해서 주일을 범하면 그 다음 주일에는 '오늘, 나 다른 곳에 약속이 있는데 거기에 가야해' 하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 말에 '오늘부터는 교회에 함께 가기로 하였으니 함께 출석하자'고 권하면 '지난 주일에는 내 말을 듣더니 오늘은 딴소리 하네'하고 적반하장격으로 나옵니다. 여러분의 발이 이러한 마귀의 간구한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이 사람들을 교회에 못나가게 하고 노동자의 수익을 올리려고 크리스찬들과 달리 8일에 한번 쉬자고 한 결과, 오히려 30%나 작업의 능률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크리스찬들보다 노동자들을 더 많이 쉬게 한다고, 5일만 일하고 6일에 한번 쉬게 했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어 다시 7일에 한번 쉬게 했다고 합니다. 엿새동안 일하고 하루 쉬게 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이며 인간을 위해 복주시려고 정하신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개척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고 황금을 찾으려고 말과 수레를 타고 모여들었는데 더 빨리 더 멀리 가기 위해 그들은 주일도 없이 달려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청교도들만은 주일이 되면 그 날 하루를 온전히 휴식하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일도 없이 쉬지 않고 간 사람들은 말이 병나든지 사람이 병들든지 해서 제대로 가지 못했는데, 주일을 지키며 달려간 청교도들은 빨리 가고 먼저 가서 오히려 쉬지 않고 달렸던 이들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주일이면 반드시 교회로 향하는 발은 복된 발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가르침이나 쾌락과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성전을 가까이 하는 발이 복됩니다.
3. 죄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발입니다
다윗은 시편 첫 편에서, 복있는 사람을 말할 때 그 발로 악인의 죄를 좇아 가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는 사람이 복있 있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악한 길에 들어서지 않고 죄악된 길로 가지 않는 그 발은 복된 발입니다. 시 119:101에 보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발을 금하여 악한 길로 가지 않는 발이야말로 복된 발입니다. 렘 14:10에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않는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벌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내 버리라 두 발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발만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잠 5:3-5에 보면,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지마는 나중에는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롭기 때문에 음녀, 창녀의 뒤를 따라가는 자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잠 7:21,22을 보면 음녀의 꾀며 홀리는 말을 따라가는 청년의 발걸음은 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같고,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집에 가면서 하는 말이, 친구의 권면을 뿌리칠 수가 없어 따라가니 술은 안먹고 안주나 좀 먹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꼭 한 잔만 한다는 것이, 일배 일배 또 일배하다가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투전은 다시 안 하겠다. 친구따라 투전판에 가서 개평이나 좀 얻어가지고 오겠다 하다가 집문서, 땅문서 다 잡히고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람은 안피우지만 심심해서 춤이나 좀 배운다고 하다가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죄를 따라가지도 않고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죄악에 빠졌다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도 복된 발걸음이지만 아예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발이 더욱 복된 발입니다.
전도하는 발, 성전을 가까이 하는 발,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발은 복된 발입니다. 아무쪼록 전도하여 성전을 가까이 하고 죄악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떨어지지 아니하는 사랑 (고전 13:8-10)
성경에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의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기초는 사랑이요, 인간의 생활의 모든 표현이 마땅히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 사람들을 만드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타락하여 마귀의 종이 되자 미움이 인간 속에 들어오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은 미움에 의해서 처참하게 일그러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은 일그러진 사랑이라도 인간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존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이성간의 사랑인 에로소 사랑이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이성간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결혼도 하게 되고, 가정도 이루게 되고, 자녀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친구간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정이 있고 평화로운 사회, 국가, 세계가 이루워지는 것입니다.
필레오라는 친구간의 우정적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에 평화는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또 그 외에 스톨케라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때문에 부모들이 헌신해서 어린 자녀들을 기르고 교육시켜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배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후손이 있고, 인류의 생존이 있고, 이 지구상에 계속해서 역사가 진전되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우리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 불구하고 우리 인생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없으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겠습니까?
1.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현대는 과거 어느 때보다 외국어에 대한 필요가 절실할 때입니다. 이제는 온 지구가 한 촌락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세계화 속에서 여러 공통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영어는 세계 만국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영어를 하지 않고는 세계인으로서 살아갈 없을 정도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계 여러나라 말이 통용이 되어 천사처럼 말을 자유자재로 표현하여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감화시키고 설득시키는 그런 힘이 있다고 할찌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의 동기로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 자체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만국어를 말하고 아무리 천사와 같은 훌륭한 말을 해도 그 사람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와서는 예언하는 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세계 역사가 변화되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계도 내일을 예견할 수 있어야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경제계도 내일을 예견할 수 있어야 세계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내일을 바라보는 미래학이란 오늘날 세계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정치, 경제, 군사, 사회적으로 다가올 세계를 환하게 다 알고 있다고 할찌라도 그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굉장한 마음의 신념이 있어서 산을 옮길만한 그런 믿음으로 거창한 일을 합니다. 빌딩을 세우고 나라를 세우고 사업을 일으키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그러한 큰 일을 한다고 할찌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향하여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넌 필요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일체의 삶의 행동이 근본적인 동기인 사랑에서 시작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무효로 생각하고 전혀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며, 이 우주의 원리이며,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이 의미를 잃게 되며 사랑이 없으면 점점 더 파괴적인 인간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사랑이 꽃피고 열매를 맺어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 줄 때 우리의 삶은 건강하고 보람있고 기쁨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피곤하게 뛰어 다니지만 저들이 사랑을 갖지 못하였기에 피곤에 찌들어 그들의 삶은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면 아무리 뛰어도 피곤치 아니하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활기에 넘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는 모두 고아와 같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고아들이 사랑을 알지 못한채 파괴적인 성격을 간직하게 되는 것처럼 사랑을 모르는 현대인들은 결국 폭력적이고 스스로를 파멸의 구덩이에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병든 세계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가페 사랑 밖에 없습니다. 사랑만이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입니다. 사랑만이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을 간직하므로 여러분의 삶을 건강하게 하십시요. 그리고 그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십시요. 그러면 오늘 우리 사회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과 소망을 증거하는 길은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말로만이 아닌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추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사랑의 풍성함을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그 사랑이 필요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랑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란 말속에는 [관심을 갖는다]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보람있는 삶을 살수 있습니다.
사랑과 사랑의 결핍의 차이는, 전자는 정성을 다하지만 후자는 대강대강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 때문에 지는 짐은 가볍지만 사랑이 없이 지는 짐은 매우 무겁습니다. 사랑은 날짜와 시간이 없으며 사랑을 하면 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인생은 사랑으로 살 때 즐겁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분명히 있고 이로 인하여 삶의 무한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매우 중요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듯이 전세계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습니다.
美는 눈으로 보는 아름다움입니다善은 마음으로 보는 아름다움입니다眞은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입니다
眞理를 아는 자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기도
(사 38:1-6)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 년을 더하고(사 38:5)
이월을 맞이한 지도 벌써 일 주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육간에 강건하며 평안한 생활을 하시는지요? 아무쪼록 추운 날씨 속에 건강 잃지 않도록 유의하시고 무엇보다 영적으로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례의 위기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십니까?
국군 중앙 교회의 교인인 윤항중 장군 내외분의 간증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는 중령 진급도 못하고 옷을 벗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소령이었을 때 어느 장교가 진급을 못해서 자살을 하고 부인은 머리를 깍고 중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유인즉, 동급 장교가 허위로 포상 받았다는 기록을 해서 꼭 진급해야 될 그사람이 진급을 못하고 자살했기 때문에, 전부 재조사를 하는 가운데 윤 장군 기록 카드에 허위 표창 기록이 되어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없는데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 꼼짝 못하고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 두 분은 먼저 그동안 기도생활 잘못한 것과 십일조 생활 제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3일 금식 기도를 하면서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때 밤을 세우며 군인들이 기록하는 가운데 어느 상사가 42호 표창 받을 것을 이 윤 소령 기록카드에 42호를 46호로 잘못 기록하면서 허위 기록처럼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그것도 몇년 전의 문서를 소각해 버리기 바로 직전에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간곡히 기도하면서 서원하기를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100명을 전도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기가 참 어렵더랍니다. 그래서 그 육군 대학에 1년 있는 동안 새로 입교하는 군인들 아파트에 먼저 찾아가 청소를 해놓고 짐을 날라다 주니까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할 때에 한 가지 요청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가자고 하니까 다 들어 주더랍니다. 그래서 100명 전도를 목표했는데 108명이나 전도해서 '전도왕'이라는 표창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응답으로 중요한 자리에 보직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직 기도 응답과 하나님의 기적으로 장군이 되었으므로 하나임의 영광과 더 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장군 내외입니다.
또 그때 같은 교인이면서 제게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신, 예비역 장군이며 국방부 기획실장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계신 권영해 집사님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그분이 미군 감축 문제로 미국방부 대표 위원들과 회담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편의 충분한 설명을 듣기도 전에 저쪽 편에서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찬 회담 때는 단 몇분 밖에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날 밤에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 '나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금식을 하기 때문에 내일 조찬 회담에는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자, 태도가 엄숙해지더니 그날 밤 설명하는 말을 다 듣고 다음날 미국 대표들도 한국 대표가 금식 기도까지 하면서 회담에 임한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엄숙한 태도로 한국측 말을 다 들어 주면서 자기들 주장대로 하지 못하고 원만히 회담을 끝냈답니다. 집에서는 그 권 장군 사모님이 그 회담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키가 커보이는 마귀들이 설치는 것을 보고 금식하면서 마귀를 물리치는 기도를 했더니 다 물러가고 마음이 편안해 지더랍니다. 그런 간증을 들으면서 한국에 믿음 좋은 고급 장교들이 많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동시에 기도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죤 프리벨은 말하기를 '인간의 극한 상황이 하나님께는 좋은 기회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의지하게 되고 극한 상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되어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해 주시고 전혀 불가능했던 일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살지 못하리라'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자포자기 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결과 그는 15년이나 생명을 더 연장받고 당시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앗수르 군대까지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가 불가능한 위기의 상황을 변화시켜 축복의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사가 달린 위기 상황도 극복해낸 히스기야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드린 기도였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는 것은 오직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람에게서 얼굴을 돌이키되 그 능력 많은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를 향한 것도 아니고, 어느 의술을 바라본 것도 아니고, 아픈 부위를 바라본 것도 아니고, 어느 징후에 신경을 쓴 것도 아니라,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극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쳐다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고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고 우연히 해결되거나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환경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도 얼굴을 벽으로 향한 사람이 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다가 절하며 춤추는 가증한 모습을 보시고 이 백성을 다 진멸해 버리고 모세 한 사람을 가지고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실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다 도말해 버릴 바에는 차라리 내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면서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백성의 죄와 실패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론의 실수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금송아지에서도, 백성의 죄에서도, 아론의 실수에서도 얼굴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만 얼굴을 향하고 간곡히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내고 그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했습니다. 다윗도 얼굴을 벽으로 향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이 자리를 비우고 없는 동안 시글락은 아말렉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성은 불타고 모든 부녀자들이 잡혀가는 큰 사 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다윗과 그와 함께 갔던 백성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높여 울고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다윗은 그 위급한 상황을 보지 않고 분노하여 자신을 치려는 그 백성을 보지 않고 오직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에봇을 입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고 힘을 얻어 아말렉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아온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얼굴을 돌이켜야 합니다. 인간에게서 얼굴을 돌이켜야 합니다. 오직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만 얼굴을 향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어느날 그의 개혁의 동지 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방문을 했습니다. 그 상황을 보면 절망적이지만 루터는 모든 것에서 얼굴을 돌이켜 벽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당신은 이 기도를 꼭 들으시고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면 제가 앞으로 하나님을 신뢰 할 수 없게 됩니다' 하고 참으로 담대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거의 죽어가던 그 동지가 살았습니다. 루터는 후에 '필립(Philip)이 건강해졌습니다. 그는 거의 죽은 것만 같았으나 나는 믿고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났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루터도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y)는 '변론하는 기도(Argumentative prayer)는 최선의 기도 방법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 43:25,26에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큰 위기 앞에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역경과 시련 앞에서, 더이상 손쓸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께로 얼굴을 향하여 그분되 변론해야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의문의 해답과 문제의 해결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기를 당할 때 벽으로 곧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이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진실과 전심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히스기야가 죄가 없었다거나 허물이 없었다거나 완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 38:3에서 히스기야가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자기가 완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진실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외식으로나 형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렘 29:12에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가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시고 전심으로 부르짖으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이같은 사실을 확실히 믿는 성도라면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여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거나 기도하되 무성의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보시며 우리 기도에 귀기울이시는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전심으로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며 그의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한편 예수님도 육신으로 계실 때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히 5:7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서 응답받았거늘 우리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시시하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시며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마 11:12에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침노하는 것과 같은 강력한 기도, 곧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위기 상황이 물러가고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며,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우리 삶 속 깊이 개입하시는 것을 생생히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 소망을 가진 자 」
성경: 요일 3:1-10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3:9).
지금 읽은 성경 말씀 가운데 2,3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심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 소망은 우리에게서 불안을 제거해준다. 다른 것은 모르지마는 우리가 주와 같이 될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명심할 것이 있는데, 주님이 나타나실 때 주님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자는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심의 달을 맞이하여 더욱 자신을 깨끗케 하는 일에 힘써나가야 한다. 이 시간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소망을 가진 자」가 지켜야 할 몇 가지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육신이 깨끗하도록 힘써야 한다.
마 26:41에 보면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고 했는데, 베드로는 죽기까지 함께 하겠다고 고백하는 열정을 가졌지만 육신이 피곤했기 때문에 그날 밤 예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었다. 우리들은 자신을 수련하지 않으면 약한 육신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육신을 깨끗하게 보존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요, 또한 우리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는 사람들인데 우리의 육신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특히 주안에 있는 젊은이들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언제나 자신의 몸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요셉처럼 분명해야 한다. 요셉은 그 주인 보디발 장군의 아내를 애써 피하고 밖으로부터의 유혹을 이기고 자기 안으로부터 일어 나오는 정욕을 이긴 것이다 (창 39:10). 그러므로 우리도 육신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늘 기도로 무장하기 바란다.
둘째, 명예가 깨끗하도록 힘써야 한다.
잠 26:1에 보면,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오는 것 같고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고 했듯이, 명예는 파문과 같은 것이요, 한없이 커지지만 끝내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명예가 깨끗해지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등록되어 있는 고귀한 이름이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날마다 불러가며 기도해주시는 영광스러운 이름이며, 주님의 성도와 직결되어있는 성별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말고 깨끗하게 보존해야 한다. 빌 1:20,21에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존귀케하여 우리의 명예를 깨끗하게 하도록 하기 바란다.
셋째, 영혼이 깨끗하도록 힘써야 한다.
벧전 2:11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했는데, 이 구절은 길다고 생각되는 70평생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이므로, 세상일에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정욕을 이겨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영혼이 깨끗하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는 내 영혼이 병들면 그밖에 모든 것이 틀려져버리기 때문이다. 설령 다른 것이 온전하다고 해도 영혼이 병들면 모든 것이 따라서 병들고 마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깨끗이 보존해야 한다. 바울은 살전 5:23에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고 그의 소원을 피력하고 있다. 바울은 먼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영육 간에 흠 없이 보존되고 , 성결한 삶을 살도록 기원했던 것처럼, 새해를 출발하는 우리들의 소원도 바로 이런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할 육신과 그리스도인 된 명예를, 더 나아가서는 영생할 영혼을 금년에도 더럽히지 않도록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의 개선가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축복받는 비결"
생명의 양식 : 살전 5:16-18
먼저 기도합니다.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산 제사 드리므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6-18).
독일의 시인 괴테(Goethe)는 「행복의 비결은 기분 좋은 생활을 꾸며 보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동양의 격언에도 「웃으면 복이 온다」는 소문만복래란 말이 있다. 모두가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하면 복도 받고 행복해진다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성도의 축복의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항상 기뻐하는 생활이다.
항상 기뻐하는 생활은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 준다. 기뻐하는 사람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의 기쁨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기쁨과는 다르다. 세상사람들의 기쁨은 물질적인 욕망의 충족이나 명예, 지위, 권위든 세상 적인 것에서 얻어지는 기쁨이지만 성도의 기쁨은 주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기쁨이다. 다윗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시 35:9) 라고 하였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는 생활이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으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기도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의 중요성에 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는 법은 결코 없다.
에스라는 기도를 보병과 기마병의 무리보다 더 중한 것으로 여겼으며(스 8:21-23), 주님께서도 기도를 침식보다 더 필요한 것으로 여기셨고(마 4:2), 사도들은 항상 설교에 앞서 기도하였다.(행 6:4) 사도 바울도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문에서처럼 「쉬지 말고 기도하라」(17)고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왜 기도를 쉬지 말고 해야 할까요? 기도를 쉬면 시험이 들어 범죄 하게 되고 신앙생활에서 실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의 공격을 받아 신앙 생활에서 실족하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다.
행복과 불행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의 것이다(잠 8:17-19).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하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고 편식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비위에 맞는 것만 골라서 감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고 가르치고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언제 어디서나 감사하라는 말이다.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팔린 요셉처럼 우리도 어떤 경우에 처하든지 언제나 범사에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겠다.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비록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준 사도바울의 권면이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 받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막 10:35-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중요시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어떤 직위를 얻고 존경받을 만한 일을 하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아마 올 한해도 그 중 어떤 것인가를 목표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계획하셨는지도 모르겠군요.
언젠가 한경직 목사님이 신문기자와 인터뷰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려고만 하는데 사실은 먼저 좋은 나무가 되려고 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놓고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박사 학위를 얻었느냐, 사업이 얼마나 번창했느냐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진정 우리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바로 알 때 보다 가치있고 바른 삶을 살 수 있기에, 여기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문제를 놓고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몇 가지 교훈들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 무엇을 했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앞에서 소개드린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대로 먼저 좋은 나무가 되면 따라서 좋은 열매는 많이 맺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많이 따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자랑하려고만 애쓰지 먼저 좋은 나무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되는 것이 먼저이며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위대한 일을 많이 하려고만 하지 먼저 훌륭한 사람이 되려는 마음과 노력은 갖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먼저 되느냐에 중요성을 더 두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크고 위대한 일을 하고 의미있는 선행에 힘쓴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지 못하면 그 모든 일들이 허사가 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도 인격과 사람됨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이 큰 책임을 맡거나 많은 것을 소유했을 때는 오히려 심각한 폐해를 가져옵니다.
우리들이 먼저 사용할 만하고 축복받을 그릇이 되면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일을 하게 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더 큰 관심과 중요성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얼마나 소유했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큰 권세를 잡았느냐를 중요시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얼마나 가치있게 쓰느냐를 귀중히 보십니다. 그래서 누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버는 돈을 계산하시지 않고 쓰는 돈을 계산하신다'고 했습니다.
수십 억의 재산을 벌었어도 자기와 자기 가족만 위해 썼거나 술먹고 도박하고 방탕한 생활에 다 써버렸다면 차라리 엽전 두푼이라도 값있게 쓴 가난한 과부보다도 훨씬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작은 돈이지만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정성스럽게 바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가장 값있게 보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만 위해 쌓아둘 줄 아는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21)고 했습니다.
수백 억의 재산을 가졌어도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보다 꽁보리 밥에 된장찌게만 먹으면서도 자신의 전부를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도우며 사는사람이 더 가치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과, 물질과, 직업과, 권세를 소유하게 하신 것은 그것으로 우리 자신만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보다 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자는 것이므로 우리가 진정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우리의 소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3.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이 더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섬김을 받는 것에 더 가치가 있는 줄 알지만 실상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남을 섬기는 데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섬기다 못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시려고까지 하시는데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간청하기를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형제가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좌정승, 우정승 다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눈치를 안 다른 제자들은 이 야고보와 요한을 미워하면서 분이 가득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낱 지나가는 말이나 헛된 교훈으로만 아는 이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더 겸손해지고 섬기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에서 중한 직분을 맡으면 세도나 부리고 대접이나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 없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참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높아도 낮은 자같이, 있어도 없는 자같이, 부자라도 가난한 자같이, 벼슬이 있어도 없는 자같이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세상에 권세있고 큰 사람들은 권세를 부리려고만 하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3, 44)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높아지는 비결은 섬기는 것이며 참으로 으뜸이 되는 비결은 종의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우리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때가 되면 높여 주시고 섬김을 받게도 해주시고 존경을 받게도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가장 귀하게 따라야 하는 우리 성도들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삶을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4. 육신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을 수박의 껍질에 비한다면 영혼은 수박의 알맹이 같고, 육신이 식물의 잎과 같다면 영혼은 식물의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육신보다 더 중요하고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고 했습니다.
육신의 건강이 먼저가 아니고, 사업이 잘되는 것이 먼저가 아니며 영혼이 먼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면 육신도 평안하나 육신이 잘된다고 영혼도 잘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은 잠깐 있다가 늙고 시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요 영혼은 지금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도 잘되기를 원하시고 건강하기를 원하시지만 그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영혼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육신의 고통도 허락하시고 사업의 실패도 허락하십니다.
플로리다에 나울린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교회에는 아주 신앙이 돈독한 청년이 있었는데 교회학교 총무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교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의 사업을 위해 자주 축복해 주었고, 축복 받은대로 그의 사업은 자꾸 번성하기 시작해서 십일조를 한 주일에 수백 만원까지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빠서 교회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또 다른 도시에 지점들을 내자 거기서 주말을 보내느라고 교회에 출석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를 찾아가서 '죤, 나는 자네를 걱정하고 있네. 자네는 예배에 계속 불참했어. 자네는 하나님의 일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으며 온전한 십일조도 바치고 있지 않네'라고 충고하자 '목사님 한 주일에 몇 십 만원도 많은데 몇 백만원이나 십일조 하는데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가게들 때문에 교회에 출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때 목사님은 '죤, 우리 기도드립시다' 하고 둘이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주께서 이 형제에게 지나친 번영을 주셔서 지나치게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형제는 당신께 너무 많은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그를 위하사 그의 상점 몇 개는 불태워 주옵시고, 상점 몇 개는 실패하여 문을 닫게 하여 주옵소서. 이 형제로 하여금 그렇게도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해 충성되게 일했던 옛날의 사람으로 되돌아오도록 그의 사업의 얼마를 빼앗아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자 죤은 떨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이곳에서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그는 죄를 완전히 고백했고 목사님도 함께 그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그 전과 같이 충실한 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육신보다 영혼이 잘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로 영혼이 잘 되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이 육신을 위한 것보다 더욱 많고 열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 항상 보다 가치있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