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본문 : 렘-07-01-
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8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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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예레미야서는 설교하기도 읽기도 적용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시대에 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 존 하네만(John Hanneman)은 예레미야서를 읽어야 될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종으로 40년간 울면서 사역을 했듯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결코 놀러 다니는 것처럼 편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과 희생, 헌신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예레미야의 생애는 결혼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며 구덩이에 갇히고 매를 맞는 등 고통을 당했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그의 삶의 영향력은 영원대대로 미치고 있다 즉, 진리의 영향력은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7장은 예레미야가 성전 문 앞에서 설교했기 때문에 성전설교(Temple Sermon)라고 불리 웁니다. 본문 2절 전반에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를 두 번 했습니다. 예레미야 7장과 26장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예레미야 26장 1절에 언제 이 설교를 했는지 그 시기가 나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 초에 여호와께로서 이 말씀이 임하니라’고 기록된대로 주전 609년 요시야왕 사후 그 아들 여호야김이 왕의 즉위 초에 성전에서 예레미야가 한 설교입니다.
요시야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종교개혁을 행하고 성전을 수리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책을 발견했는데 그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요시야는 이 책을 읽다 유다에 임한 재앙과 모든 재앙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것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도 회개하고 개혁하며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우상을 파괴하고 성전을 수리하며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39살의 나이에 애굽과의 전쟁에서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죽임당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가 죽고 난후 그 아들 여호야김은 왕이 되자 아버지가 파괴했던 우상을 다시 세웠습니다. 이처럼 악한 왕이 세워지자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백성들은 피상적으로 요시야왕을 따라 종교개혁을 하다 다시 여호야김을 따라 우상숭배로 돌아섰습니다. 우상을 좋아하는 죄악이 도진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위기, 악화되는 영적전환기에 예레미야가 설교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부지런히 연구하고 배워서 알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 말씀을 전하라고 부탁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신탁(oracle)입니다. 신탁으로 받은 예레미야 7장, 성전 설교의 주제는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행위의 문제입니다.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는 어떤 것이며 그 위험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구원의 확신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생활-이것을 종교적 위선(Religious Hypocrisy)이라 하는데 종교적 위선은 어떤 위험이 있는가, 겉으로는 종교적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믿음인 구원받을 만한 믿음(Saving Faith)이 없는 경우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종교적인 위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무려 40번이나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를 통해 구원받는 참된 믿음이 없는 종교 즉, 종교적 위선에 대한 다섯 가지 명제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종교적 위선은 “최고의 장소”에서도 존재한다.
예레미야가 설교한 곳은 성전 문 앞입니다. 그리고 설교대상은 2절 중반에 보니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성전 안으로 여호와께 경배하러 들어가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신탁을 주신 예레미야입니다. 이처럼 설교자가 훌륭하고 장소도 거룩하며 모인 사람들도 목적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단히 종교적이긴 하되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보다 약간 늦게 혹은 동일한 시대에 예언활동을 했던 에스겔 선지자가 있습니다. 그는 에스겔서 8장에서 유다백성의 지도자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한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투기의 우상과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을 그려놓고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하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께 경배한다고 성전에 들어가서 우상인 동방 태양을 숭배했습니다. 더더구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좋은 교파의 좋은 교회에서 최고 설교자의 최고 메시지와 좋은 찬양을 듣고 좋은 목적을 가지고 예배드린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믿어야 되는 것이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믿어야 되는 것이며 이 믿음이 요동치 않는 확고한 믿음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을 가지고 있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구원받는 믿음은 성경에 택자의 믿음(the Faith of the Elect)이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들이 갖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지 좋은 장소에 앉아 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각자가 나는 구원받는 믿음이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해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종교적 위선은 “거짓된 확신”에 기초한다.
20세기 말에 한국교회에서 많이 등장했던 구원의 확신(Assurance of Salvation)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어떤 세뇌교육이나 짧은 교육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거짓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이단자들이 많이 사용하던 방법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되지만 예수 믿지 않고 믿음이 참되지 않은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종교적인 위선자들은 소위 성전 신학(Temple Theology)이라 불리우는 거짓된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시온산 곧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서있는 한 예루살렘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학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고 외쳤습니다. 세 번 반복한 것은 미신적인 주문을 외운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을 주술로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유다 백성들은 이런 성전신학, 거짓된 신학을 성경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단자들도 그들이 믿는 거짓된 신학이 성경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되고 왜곡시켜 문맥에 맞지 않게 성경을 인용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성경말씀을 왜곡하여 시험했습니다.
시편 132편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합니다. 시편 132편 13절로 15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에이 성은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곳에 영원히 쉬신다, 이 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에서 성전신학, 거짓된 신학이 나왔습니다.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본질을 오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와 전통에서도 거짓된 신학의 근거를 찾았을 것입니다.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두 번 침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성전이 있다고 해도 너희가 죄를 지으면 예루살렘은 망한다고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증거해도 유다백성들은 거짓을 믿은 겁니다.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성전의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성전 자체를 믿은 겁니다. 성전만 있으면 우리는 안전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전을 두신 하나님의 본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죄인이 성전에 올 때는 제물을 갖고 와서 “내가 죄를 지었으므로 이 제물이 대신 죽습니다.”라고 하면 제사장은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고 피를 번제단에 뿌립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다 번제단 위에 불로 태웁니다. 그러면 죄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아야 됩니다. ‘저 제물은 내가 죽어야 될 자리에서 대신 피 흘리고 죽은 것이다.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 죄인인데 나대신 저 짐승이 피 흘리고 죽는다. 저 짐승은 메시아를 상징한다. 나는 메시아의 속죄가 필요한 죄인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속죄 제물이 되실 메시아를 믿어야 됩니다. 성전은 그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참된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거짓된 신학을 통해 또한 거짓된 확신을 가졌습니다. 예레미야 7장 10절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거짓된 신학을 가지고 성전 안에만 들어오면 구원 받았다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나이다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그 믿음의 가치를 결정해 줍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주먹을 믿겠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자기 주먹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은행 잔고를 믿겠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대상은 재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믿음의 대상으로 해야 됩니까? 우릴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성부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요또한 우리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시는 성령님만이 믿음의 대상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요 이런 믿음만이구원받는 믿음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은 부처를, 어떤 분은 마호메트를, 어떤 분은 공자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믿음은 사죄와 칭의와 구원과 부활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바른 대상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종교적 위선은 “거짓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거짓된 믿음, 종교적인 위선은 삶이 거짓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본문 8절로 10절 전반에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밖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우상숭배하는 등 못된 짓들을 다 하면서 성전에 들어와서는 구원받았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9절은 십계명 위반의 목록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처럼 멸시하면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전을 도적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건 율법주의요 잘못된 신학입니다. 그렇다고 십계명을 무시하고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마음의 심비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새겨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으로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멸시하고 어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가짜 확신입니다. 십계명을 100% 다 지킬 수 있는 분은 역사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다 지키질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버리거나 일부러 어기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들은 십계명을 마음 심비에 새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며 또 살다 어긴 경우에는 회개하여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십계명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십계명의 숫자와 핵심글자 하나씩을 합쳐 일신, 이상, 삼망, 사안, 오부, 육살, 칠간, 팔도, 구거, 십탐이라고 십계명을 외웠습니다. 제일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제이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삼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사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제오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육은, 살인하지 말지니라. 제칠은, 간음하지 말지니라. 제팔은, 도덕질하지 말지니라. 제구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십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십계명을 다 외우진 못한 채 때로는 헷갈려도 옳은 법으로 마음 심비에 기록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그 법을 따라 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2장 3절로 4절에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언을 많이 하고 기적을 행하고 부흥회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음성을 듣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7장과 예레미야 7장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동일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속 심비에 새기고 그 법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겼을 때는 회개하고 돌이켜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종교적 위선은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고 만다.
종교적 위선은 하나님 앞에 다 폭로되고 노출되고 맙니다. 죄를 짓고도 감출 수 있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본문 11절에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위선자들이 성전 밖에서 행하는 것과 성전 안에서 행하는 것을 모두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일수도 있고 남을 속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벌거벗은 자처럼 모든 위선과 불법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내가 불법을 많이 행했으니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며 예수님께 죄를 토하고 회개하며 돌이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종교적 위선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
본문 12절로 14절에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실로는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동편에 있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점령하고 열 두지파에게 땅을 분배하기 전에 이 실로에다 성막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만 같이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생각하는 언약궤 신학이라는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4장을 보게 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에벤에셀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투를 아벡 전투라고 부르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지게 되니 언약궤를 가져와 앞에 세우고 전쟁에 나가 싸웠음에도 언약궤는 뺐기고 그만 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서 죽고 제사장 엘리는 나이 90이 넘어 의자에 앉아 있다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또한 엘리의 둘째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는데 영광이 떠났다 하고 이름을 이가봇이라 지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으로 인해 이런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는 갈비라고 하는 가슴고기와 뒷다리입니다. 갈비는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흔든 가슴 즉, 갈비를 들어서 하나님께 흔든 다음 삶아 먹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요제(搖題)라고 합니다. 가슴고기는 요제로 먼저 여호와께 드리고 그 다음에 삶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다리 고기는 무거우니까 그래도 하나님께 들었다가 놓고만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제(擧題)라고 합니다. 식사할 때 어른이 계시면 그래도 어른이 한 숟가락 드신 다음에 먹습니다. 이렇게 갈비와 뒷다리 고기를 먹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사람들이 화목제를 드린 후 고기를 삶을 때 갈고리로 고기를 찍어 나오는 대로 먹은 아주 불량한 자식들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성전에서 시종드는 여자들을 건드렸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네 아들들이 지금 나를 업신여기고 있다. 네 아들 관리를 잘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는 훈계치 않고 아이들을 망쳐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진노를 부은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도 뺐기고 두 자식이 다 죽고 아버지도 죽는 비참한 결과를 낳고 그 이후 실로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 전혀 중요한 장소가 되지 못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에서 종교적인 위선을 행하는 예루살렘도 이처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결론
거짓된 신학에 근거한 거짓된 확신 그리고 그에 따른 거짓된 삶 이것이 종교적인 위선의 3대 특징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문제요, 21세기 현대 기독교의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된 신학과 거짓된 확신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도 믿는 건지 안믿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첫째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속지 말라(Do not be deceived)는 것입니다. 본문 4절 후반에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거짓말이 횡행합니다. 사회에도 거짓말이 많고 교과서에도 원숭이가 진화되어서 인간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계에도 거짓말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목사라고 무조건 따라다니지 마십시오. 오로지 진실은 성경 66권 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66권을 믿고, 자기가 소속된 교회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며 전도하고 선교해서 열매를 맺고 선한 성도들끼리 서로 교제하면서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둘째는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Amend your ways and actions)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너희 길과 행동의 잘못된 것을 고쳐라 혹은 개혁하라(Reform)는 말씀입니다. 가는 길이 잘못됐으면 돌아와야 됩니다. 그 길을 계속가면 더 잘못되는 겁니다. 가는 길이 잘못됐으면 고쳐라.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잘못됐으면 바로 잡아라. 비뚤어진 것은 고치고 잘못된 것은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고쳐야 됩니까? 바른 신앙과 바른 확신과 바른 삶과 바른 행동, 이런 방향으로 고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계시다가 여러분 삶 가운데 ‘내가 비뚤어진 것이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법에 비뚤어졌다. 십계명을 봐도 이것은 비뚤어졌다. 잘못됐다.’고 하면 계속 비뚤어진 데로 가지 마시고 바르게 고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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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본문 : 렘-08-01-
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복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 이 악한 족속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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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어제 주일 예배를 드린 거 같은데 또 주일이 왔습니다. 모세도 시편 90편 10절 후반에서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상반기를 보내고 하반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될 질문이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What have I done)?’ 즉,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행하였던고?’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며 생각해 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청년이든 학생이든 신자든 불신자든 가리지 않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나의 행한 것은 무엇이었던고?’ 스스로 물어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와 관련해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죄와 악에 관련해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물어야 한다.
‘지나간 세월 동안 내가 범한 죄악은 무엇이었던고?’ 자문을 해봐야 합니다. 스스로 물어보고 답해야 스스로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라고 말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듣고 찾고 보고자 해도 볼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뉘우침과 회개가 조금도 없는 유다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두 가지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본문 4절에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넘어지면 일어나지 않겠느냐? 사람이 집을 나갔으면 돌아오지 않겠느냐? 그런데 유다백성들은 넘어져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 같고, 집을 나가고도 들어오지 않는 사람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돌에 걸려,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유리에 부딪쳐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지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런 현상인데 일어나질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길에서 넘어졌을 때 어른이 일으켜 줄때까지 안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다백성들은 넘어지고도 안 일어난다는 겁니다. 또 사람이 집을 나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순리인데 유다백성은 집을 나가서 다시 안 돌아오는 사람 같다는 겁니다. 청소년이 집을 나가 안 들어오면 가출 청소년이라 부르고 어른이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오면 노숙자라고 부릅니다. 유다백성들이 꼭 가출 청소년, 노숙자처럼 됐다는 말입니다.
본문 7절에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학과 산비둘기라고 하는 반구와 제비 그리고 두루미와 같은 새들은 때가 되면 날아갔다 때가 되면 날아오는 철새입니다. 이런 철새들도 때가되면 날아갈 줄을 알고 때가 되면 날아 올 줄을 압니다. 이처럼 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오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철새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죄악은 스스로 묻고 돌이켜야 됩니다. 그리하지 않고 계속가면 반드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돼 있습니다. 죄나 악이나 거짓은 반드시 패망합니다. 공산주의와 같은 거짓 사상이 이길 수 없습니다. 김정일이 왜 체제를 열지(open) 못합니까? 체제를 열면 속인 것이 드러나 체제가 무너지므로 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을 굶어 죽게 하면서도 전쟁무기만 있으면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거짓말을 해서 우리의 동족들을 속이고 굶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은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에 붙어있는 사람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진실이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고 진실 가운데 서야됩니다. 본문 1절로 2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 방백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거민의 뼈를 그 묘실에서 끌어내어 그들의 사랑하며 섬기며 순복하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 쬐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한 성전의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한쪽에서는 동방 태양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될 성전에서 해와 달과 별을 섬겼다는 겁니다. 해를 섬기는 나라들은 국기에 해를, 달을 섬기는 나라들은 국기에 달을, 그리고 별을 섬기는 나라들은 국기에 별을 그렸습니다. 이처럼 해와 달과 별을 섬깁니다. 그런데 해와 달과 별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뼈도 무덤에 묻히지 못하고 그 뼈가 파내어져 길거리 위에 내동댕이쳐지고 그들이 섬기고 사랑하고 구하고 그토록 숭배했던 해와 달과 별이 그들에게 빛을 쬐고 열을 가해서 뼈가 분토가 되고 가루가 돼 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1절에 뼈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외적이 쳐들어와서 어느 나라를 점령하면 무덤을 다 파헤칩니다. 특별히 왕과 높은 사람 그리고 부자의 무덤을 파헤칩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가지고 있던 금, 은, 보석과 함께 묻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군대가 쳐들어오면 무덤을 파헤쳐 나오는 보석은 다 가져가고 거기 묻힌 아무 쓸모없는 사람의 뼈는 내동댕이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고 해와 달과 별을 섬기던 사람들은 그 뼈가 분토에도 묻히지 못하고 내동댕이쳐져 가루가 되고 분토처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역전입니다.
본문 3절에 ‘이 악한 족속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는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들은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우상숭배를 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그렇게 원하냐며 우상숭배하는 나라로 옮겨 버리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결과가 어떤지 그곳에서 마음껏 우상숭배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우상숭배를 해봤더니 결과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람은 뭔가를 배우는데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몸으로 체험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한 불 못에 처하게 된다고 듣고도 그렇게 된 후에야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말씀으로 들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으로 체험해서 진리를 알려고 하면 그 대가가 너무 큽니다. 지옥이 뜨겁다는 걸 몸으로 체험하려면 지옥에 가서 영영히 고통을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려면 우상숭배하는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우상숭배를 해보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났다는 고통을 겪고 나서야 하나님 말씀이 과연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 유다백성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은 본문 6절 후반에서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가장 많이 쓰인 짐승은 단연코 말입니다. 소나 양을 타고 다니며 전쟁을 하진 않습니다. 물론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한니발은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는 단연코 말이 주로 쓰입니다. 왜냐하면 말은 앞에 총이 있든지 칼이 있든지, 죽든지 살든지 그냥 앞으로 달리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로 전장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는 길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죽는 길로, 옳은 길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른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면서도 돌이키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나는 내 길을 가겠습니다. 목사님, 무슨 얘기를 하시더라도 그건 목사님 생각이지 내 생각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완고한 사람은 전장의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난 6개월을 되돌아보며 죄와 악이 있으면 ‘내가 행한 일은 무엇이었던고? 내가 무슨 죄악을 범하였던고?’를 자성하며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 죄악의 길을 계속가게 되면 손해와 수치와 패배와 멸망이 오고 결국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말씀이 사실이구나하고 체험으로 배우려 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내가 무엇을 행하였던고? 내가 무슨 짓을 하였던고? 부끄럽도다’ 하면서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키셔서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주시는 하반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 영혼과 관련해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물어야 한다.
사람은 육신도 있지만 영혼도 있는 존재입니다. 육신도 잘 관리해야 건강해지지만 영혼도 잘 관리해야 건강해지는 겁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온 천하를 다 얻었다 해도 자기 영혼을 해롭게 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영혼도 먹어야 합니다.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영혼은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신문이나 TV나 뉴스는 영혼의 양식은 안됩니다. 주일 낮 설교 한 편만 듣고 주일저녁예배와 주중예배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주일 저녁예배와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에도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도 매일 밥을 먹듯이 말씀도 매일 먹어야 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여러분 영혼에 얼마나 먹이셨는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영혼도 호흡해야 합니다. 영혼의 호흡은 기도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나의 기도생활은 어떠했던고? 지난 6개월 동안 기도와 관련해서 나는 얼마나 시간을 드렸던고?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이던고?’ 이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를 구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기도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도바울이 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 9장 11절에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실 때 도박하는 중이라던가, 술 마시는 중이라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으실 때에 ‘저는 기도하는 중이라’는 말을 들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세상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것은 기도하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 오순절 성령을 받았고 기도함으로 외적인 핍박과 내적인 부패를 이겨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해도 전혀 응답을 못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영혼이 숨을 쉬고 영혼이 살아가는 것이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6개월을 되돌아보며 내가 입술을 다물고 기도하지 아니했구나하는 분은 다시 기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영혼도 휴식해야 합니다. 영혼의 휴식은 좋은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구역에 속해 구역식구들과도 교제를 나눠야 됩니다. 구역식구들과 같이 식사도 하시고 등산도 같이 가시며 교제를 나눠야 됩니다. 나는 나홀로 믿고 나홀로 살고 나홀로 가리라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은 다 한 피를 받아 한 몸을 이룬 한 형제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교제를 통해서 안식을 얻고 힘을 얻기 원하십니다. 온 천하의 재물과 권세를 얻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지내다가 자기 영혼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못주고 영혼이 병들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데 재물과 권세를 꼭 붙들고 이것이 날 살리리라며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시는 분을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을 때 못 가지고 가는 것을 왜 그렇게 붙들고 계신지 알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다 얻었다해도 영혼이 병들고 영혼을 해치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개월이 지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나는 지난 세월동안 내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였던고? 내 영혼을 무엇으로 먹였던고? 내 영혼은 호흡을 제대로 했던고? 내 영혼은 휴식을 제대로 했던고?’ 생각하고 다시 조용히 성경책을 펼치시고 성경과 가까워지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입술을 열어 일을 시작할 때 기도하고 끝날 때 기도하고 하루 종일, 일마다 기도하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교회와 관련해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물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으로 끝이 아닙니다. 구원해 주신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라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전반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인데 하나님이 작품을 만드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는 말입니다.
찬송가 185장은 여러분들의 간증이 얽힌 찬송가 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화가였던 슈테른베르크(Shternberg)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군중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리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하여 이렇게 해 주었는데 너는 나는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하는 글이 씌어져 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헤버겔(Frances R. Havergal)이라는 여자가 독일에 유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독일에서 슈테른베르크의 그리스도 그림을 보고 그 밑에 씌어져 있는 글씨를 보다가 감동을 받아 찬송가 185장을 작시한 것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너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이것이 바로 헤버겔의 첫 번째 찬송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해야 됩니다. 헌신된 한 명이 헌신되지 않은 천 명보다 강한 겁니다. 헌신이란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위해 어떻게 일할 수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게 예수를 위해 일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잃어버린 영혼 구원을 위해서 교회는 올해 ‘1+3’의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분들이 전도하십니다. ‘교회는 이처럼 전도 목표를 세우고 전도하는데 나는 무엇을 행하였던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후반기에는 전도 집회도 열려고 합니다. 전도 집회를 열 때에 ‘1+3’ 즉, 한 분이 세 분 전도하는 이것을 꼭 마음에 두시고 세 명을 점찍었다 전도 집회 때 다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선교를 위해 애쓸 때에 여러분은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선교사님들은 목숨을 걸고 선교합니다. 선교지에서 교회를 금방 부흥시키지 못해도 선교지에 가있다는 것만으로 참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선교 목표는 중국입니다. 중국에 교회를 많이 세우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중국에 최소한 열 교회 이상 세우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15억이 넘는 수많은 중국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중국에 교회를 하나 세우는 것이 태평양에 돌 하나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교회를 세워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선교를 했을 때 여러분은 무슨 일을 행하셨습니까? 교회가 무너진 곳을 수축할 때에 여러분은 무슨 헌신을 하셨습니까? 저는 목회자들 모임에서 어느 미국 선교사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지방회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으로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방회 목사님들이 그 선교사님께 “당신은 지방회 선교사님인데 왜 십일조를 지방회에 내지 않고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님이 “내가 밥 먹는 곳에 밥값 내는데 잘못됐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밥값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선교사님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한 것은 십일조는 자신이 출석하고 말씀을 듣는 교회에 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내야 될 헌금과 십일조를 자기 몫으로 하는 것도 좋지 않거니와 또 자기가 여기저기 인심 쓰고 나눠주는 것도 좋은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 그리스도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속된 교회에 십일조를 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이 가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십일조를 내기 싫다는 분은 내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대가가 큽니다. 나중에 큰 손해를 보고 큰 대가를 치뤘구나 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재물이 가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갑니다. 자기 교회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바치는 사람은 자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본문 6절 전반에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무관심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입술의 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듣고 싶어 하는 우리 입술의 말씀은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하며 반성하고 통회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한 것을 행한 것, 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은 것, 이 두 가지를 생각하고 반성하며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하며 죄를 기억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잊어버리십니다. 우리가 기억하면 하나님은 잊어버리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가 무슨 죄가 있느나며 자기 죄를 잊어버리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다 끄집어내시며 그 죄에 대해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상반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나의 행한 죄악은 무엇인고? 나는 나의 영혼을 위해서 무엇을 행하였던고? 나는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였던고?’ 이 세 가지를 생각하며 2008년 하반기를 맞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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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토기장이와 질그릇
본문 : 렘-18-01-
(렘 18:1~6)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토기장이와 질그릇"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토기장이와 질그릇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토기장이로 성도를 질그릇으로 비유하시고 계십니다.
<본론>
1. 좋은 흙을 찾는 토기장이
첫째로, 토기장이가 좋은 토기를 만들려면 좋은 흙을 찾아야 합니다.
아무 흙이나 가지고 토기를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 흙이나 사용하지 않고 백토, 청자토, 분정토, 옹기토, 고령토 등 특별한 흙을 선택해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걸어가다가 그냥 흙을 확 파가지고서 그릇 만들지 않아요. 좋은 흙이라야 좋은 토기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질의 도자기를 만들려면 백토도 청자토도 분정토도 옹기토도 아닌 고령토를 가지고서 그릇을 만들면 제일 좋은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토기장이이기 때문에 우리를 천국인으로 만들 때 아무나 길거리 가는 사람 붙잡고 "너 천국인 되라. 너도 내 백성 되어라. 너에게도 천국주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선택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토기장이인데 천국 그릇을 만드는데 선택하지 않고 아무 흙이나 취하지 않습니다. 아무 사람이나 취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이 선택해서 우리로 믿게 해주시고 구원받는 것이지 혈통을 통해서 사람의 뜻을 통해서 구원 받는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셔서 여러분 성령을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믿도록 마음 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을 입어야 구원을 받지 마음대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택해야 그 흙이 그릇이 되지 하나님께서 택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0절로 13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리브가의 뱃속에 쌍둥이가 들었는데 그들이 아직 태어나서 선한 일이나 악한 일도 하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사 야곱을 에서보다 사랑한다고 말씀하셨고 에서가 야곱을 섬기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으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왜 이렇게 합니까? 저렇게 합니까?" 간섭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에 속한 것입니다.
로마서 9장 21절로 24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보십시오. 진흙 한 덩어리로 좋은 그릇도 하나님 만들고 천한 그릇도 하나님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를 이런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항변할 권한이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똑 같은 진흙으로 하나는 옹기를 만들고 하나는 밥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그것은 토기장이가 결정할 문제지 진흙이 항변할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하나님은 토기장이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택해서 그릇으로 만들되 천한 그릇도 만들 수 있고 귀한 그릇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6절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예정을 해서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 나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만세 전에 여러분을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하신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잘하고 못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를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요, 하나님의 권능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깜짝 놀라게 감사합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택해 주셨는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주셨는지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셔서 그렇게 했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미리 아시는 고로 여러분을 미리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해 주었으므로 나 같은 사람 누가 알꼬? 내 일어서고 앉음을 누가 알며, 내 슬픔과 고통을 누가 알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사정을 알고 계시되 여러분 머리털 숫자까지 다 헤아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에 하나님이 깊이 관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조차도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 우면 예수의 생명 또한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고통조차도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섭리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의 일생을 모두 다 계획해 놓으시고 프로그램을 짜 놓으시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사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로 12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일하시는 하나님이 그 계획을 따라서 여러분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사랑하고 귀중하게 여기고 돌보시고 도와주기 위해서 예정을 하시고 계획을 하시고 택하셔서 불러 주신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하나님이 오다가다 우리를 붙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 뜻대로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서 우리가 예정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 계획이 있어서 여러분을 대한민국에서 택하시고 예정을 해서 하나님 자녀가 되어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미하는 영광의 무리들이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속에 우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가장 좋은 흙인 고령토를 택하면 그 고령토를 가지고 그릇을 만듭니다.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흙을 고령토라고 하는데 고령토란 이름은 중국에 있는 카오링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러 종류의 광물이 포함되어 있고 그 양도 많아서 노란 색을 띠기도 합니다. 그래서 토기장이는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먼저 진흙을 깨끗이 씻습니다. 경기도 이천 도자기 공장에 가보면 진흙을 파가지고 와서 물에 씻어서 그 안에 포함된 나뭇잎, 풀 뿌리, 모래나 돌멩이, 광물 등을 걸러냅니다. 그리고 반죽을 만들어서 방망이로 두드립니다. 마치 인절미 치듯이 두들겨서 완전히 깨뜨려 가루로 만듭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녹로에 얹어서 원하는 그릇을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고령토로써 그릇 만드는 것을 본 것처럼
2. 흙을 준비하는 토기장이
둘째로, 흙을 준비하는 토기장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흙을 깨끗이 씻지 않고는 토기를 못 만들어요. 왜냐하면 흙을 자연 그대로 방치해 놓으면 나무가 떨어지고 잎사귀가 떨어지고 짐승이 죽어서 썩은 고기가 들어있고 뼈다귀가 들어있고 돌이 들어있고 온갖 광물질이 들어있어 그대로는 아무리 좋은 고령토라도 좋은 그릇 못 만들어요. 먼저 씻어내야 되는 것입니다. 썩은 짐승의 고기를 씻어내고 뼈다귀를 씻어내고 광물질을 씻어내고 썩은 나무 잎사귀를 씻어내고 정결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정결하게 만들지 않고는 여러분 아무리 좋은 고령토라도 좋은 그릇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택함을 받아 나오면 성격이 고약하고 어떤 사람은 술주정뱅이 담배 중독된 사람, 아편 중독된 사람도 있고, 음란하고 방탕하고 세속적이고 온갖 공갈과 협박을 치는 더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도 있고, 온갖 더러운 것이 많은 그대로 하늘나라의 그릇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씻어야 돼요. 무엇으로 씻습니까?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를 씻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피는 놀라운 표백제인 것입니다. 예수님 피 앞에서 인간의 모든 죄는 말끔히 씻어지는 것입니다. 음란과 방탕 죄도 씻어지고, 협박과 공갈죄도 씻어지고 미움과 원한의 죄도 씻어지고 모든 죄악이 예수님의 보혈 앞에 나오면 양털같이 흰 눈같이 씻어지는 것입니다. 보혈은 위대한 기적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몸 찢고 흘리신 피기 때문에 그 보혈이 효과가 있으면 능력이 있어서 그리스도의 보혈이 씻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허물투성이인 우리 진흙이 예수님의 피로써 깨끗하게 되면은 이제는 그 흙을 보들보들하게 만들어야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흙을 씻긴 씻어도 흙이 여기 뭉치고 저기 뭉치고 고약한 성격들이 뭉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성잘 내는 사람, 성급한 사람, 거짓말 역시 잘하는 사람, 도적질도 하는 사람, 뭉친 것이 이곳 저곳에 있는데 그것 깨뜨려야 돼요. 믿는 자를 회개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보혈을 의지하여 예수 믿고 난 다음 성령이 와서 우리로 하여금 매를 때리더라도 회개를 시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가 그렇게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를 깨뜨리고 낮추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 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장 11절에 보면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깨끗하게 된 사람을 하나님이 징계 하여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진흙을 몽둥이로 때려서 보들보들한 찰떡처럼 만드는 것처럼 인절미 찍듯이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우리를 믿고 순종하고 하나님께 따라오는 좋은 그릇으로 만들기 위해서 보들보들한 성격을 만드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손에 녹진 녹진해야 그것으로 그릇을 만들지 뻣뻣한 흙으로는 그릇 못 만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녹진녹진하게 순종하고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얼마나 고집투성이고 뻣뻣했습니까? 교회는 왔다 갔다 했어도 예수님 보혈을 믿어 용서를 받고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러나 아주 굳은 소나무 같고 완고한 바위덩어리 같아서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이모로 징계하시고 조모로 깨뜨리시고 이모로 가르치시고 조모로 돌보아 주셔서 얼마나 우리가 변화되어 많이 부드러워지고 녹진녹진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이것이 자기도 자기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렇게 성격이 달라질 수가 있느냐.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녹진녹진 해져야 하나님 손에 얹혀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4절로 15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깨어지고 변화 받아 세상을 버리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진흙을 택하셔서 우리 모든 더러운 것을 예수님의 보혈로 씻으시고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깨뜨려서 녹진녹진하고 부드럽게 만드시고 난 다음에
3. 녹로에 얹어 그릇을 만드심
셋째로, 녹로에 얹어 그릇을 만듭니다.
부드러워진 흙을 녹로에 넣어서 발로 밟으면 녹로가 돌아가면 손으로 이렇게 그릇을 만들지 않습니까? 토기장이의 뜻대로 만드는 그릇을 우리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녹로에 얹어서 여러분과 나를 이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대로 만들 때 주의 종들도 다 같은 주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람을 주의 종으로 만들겠다. 그래서 부르면 주의 종도 여러 가지 종류의 주의 종의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나 주의 종은 될 수 없습니다. 자식들 낳아서 머리 좋은 자식은 서울대학 보내어 법관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 다음 머리가 좋은 아이는 공과대학 보내서 기술자 만들어야 되겠다. 그 다음 머리가 좋은 아이는 외교간을 보내서 외교간이 되게 해야 되겠다. 제일 머리 나쁘고 골치 아픈 아이는 신학교 보내서 목사 만들어야 되겠다. 그것이 과거에 우리 교회 부모들이 하던 일인 것입니다. 쓸모없는 자식들은 다 신학교 보내서 주의 종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결국에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만들지도 아니한 주의 종들이 가짜가 되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를 자기의 이익을 얻는 일터로 삼아서 교인들을 탈취하고 양을 잡아먹는 목자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이 택하신 그릇 중에서 가장 좋은 그릇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지 아니하면 주의 종이 되지 못해요. 아, 그 사람 찬송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는데 주의 종 감이다. 그것은 자기 생각이지 하나님이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얼토 당토 않은 것을 하나님이 택하시면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섣불리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 사람 주의 종 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잘못된 사상이요,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야 주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택해야 주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들어가서 공부하고 주의 종의 사명을 받더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토기를 만들 때 화병도 있고, 밥그릇도 있고, 국그릇도 있고 심지어는 요강도 있고 온갖 그릇이 다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요. 어떤 그릇이 되었든 하나님이 필요한대로 만들었으니까 그만하면 된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면 내가 어떤 그릇이 되어도 감사하고 만족할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가대 보면 참 찬란하게 바이올린을 타고, 나팔을 불고, 피리를 불고, 사람들 보기에 눈에 띄게 좋은 직위를 가지고서 음악을 연주했지만 그 구석에 요만한 삼각형 하나 가지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모든 연주에 한번 땡 치고 마는 것입니다. 저것도 음악이라고 하느냐? 그러나 음악 전체를 봐서 땡 하는 그 소리 하나 없으면 음악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땡 하는 것이 필요하니까 그 전공하는 사람이 늘 땡 만 연구하는 것입니다. 땡… 하늘나라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좋은 그릇도 있고, 천한 그릇도 있고, 화려한 그릇도 있고, 화려하지 않은 그릇도 있어야 하늘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도 똑 같은 종이 아니요, 각각 다른 주의 종으로 하나님께서 녹로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1절로 12절에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보십시오. 다 똑같은 주의 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가 되고, 어떤 사람은 선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가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성도를 온전케 섬기는 사람이 된다. 항상 저는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떠한 주의 종이냐?" 저는 하나님께 목사로 부르고, 복음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돌보고 부흥사가 되어서 한국과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받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목사의 사명만 받았고, 어떠한 사람은 부흥사의 사명만 받았고, 어떠한 사람은 교사의 사명을 받았고, 어떠한 사람은 사도의 사명을 받았고, 자기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자기의 부르심에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은 안하고 남의 일만 쳐다보고 남의 일을 흉내를 내고 남만 따라가려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이 아주 부흥강사로써 사람들을 휘어잡고 울리고 웃기는 부흥강사를 한다고 부흥강사의 사명이 없는 사람이 목회 그만두고 부흥회 들어가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에게 그것을 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 않고 흉내를 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사를 절대로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종도 하나님께서 녹로에 얹어서 만드신 그릇대로 충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주의 종이 안되고 평신도 나는 어떠한 사람이냐?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녹로에 앉아서 하나님이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드는데요.
로마서 12장 5절로 8절 우리 다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평신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다같이 평신도 교회에 나온다고 똑같다고 생각하면 잘못인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릇을 따로따로 만들어서 하늘나라를 섬기도록 만들어 주는 것인데 평신도 중에 어떠한 사람은 예언하는 능력을 주어서 잘 가르치게 만들어 주시고 어떠한 분은 구역장, 지역장으로써 잘 섬기게 만들어 주시고 어떠한 사람은 잘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서 교회학교 들어가서 잘 가르치게 하기도 하시고 어떠한 사람은 위로하는 자로써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통해서 열심히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보아 주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있고 구제하는 은사가 있어서 있는 것 없는 것을 다해서 구제하는 일을 하고 남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평신도 중에서도 지역장, 구역장들 다스리는 자가 되고 혹은 실업인회 회장, 부인회 회장, 남선교회 회장, 권사회 회장 다스리는 자리에 하나님이 직분을 주시기도 하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은 남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일으키는 이러한 은사를 주시고 자기 각자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그릇으로 만드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뭘 제일 하고 싶고 무엇을 제일 잘 하느냐. 그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릇을 만들어 주었으면 그 그릇을 그 분야를 제일하기를 좋아하고 그 분야를 잘하는 사람을 택해서 그 그릇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방을 잘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심방하게 하는 그릇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사람이 다스리는 일을 하겠다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격에 맞지 않아서 그릇의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손에서 여러분 우리가 그릇으로 다 만들어지는데 사람들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사도 노릇 안 하려고 선지자가 선지자 노릇 안 하려고 목사와 교사가 목사와 교사 노릇하지 아니하고 나는 이 직분이 싫다. 하나님 뜻에 반역하고 반대합니다. 평신도가 하나님 사명을 받았는데 "나는 지역장 싫다. 구역장 싫다. 나는 봉사 싫다. 나는 섬기는 일 싫다. 나는 가르치는 일 싫다." 하나님께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다가 그릇이 손에서 부스러지면 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으로써 다른 그릇으로 만드는데 처음보다 못된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그릇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손에서 부스러지면 그것을 주워 모아다가 그보다 못한 그릇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18장 3절로 4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면 못된 그릇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역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이 그 그릇을 다른 그릇으로 만들어서 더 못된 그릇으로써 섬기게 만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고 순종하고 충성해야지 그것을 싫어하면 하나님이 버리지는 않으시되 더 못한 그릇으로 만들어서라도 사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도 반역하고 정 안되면 내버리는 것입니다. 토기장이에 가면 그릇 무더기에 깨어진 토기가 잔뜩 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그릇 만들다가 깨어지매 또 천한 그릇을 만들어도 그것도 또 안되고 깨어지면 나중에 그릇 무더기에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8장 9절로 10절에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정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저항하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서 그를 내버리는 것입니다. 좀처럼 내버림을 당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그러나 전혀 내버리는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열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정 하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하고 나중에 그리스도를 은 30냥에 팔아먹는 비극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내버려서 목매어 죽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릇이 안되기 위해서는 충성하고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4. 무늬를 그려서 불가마에 구우심
넷째로, 그릇을 하나님 만들어서 그대로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무늬를 그리고 불가마에서 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이 되면은 하나님께서 그릇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특별한 소질을 주시고 성령의 불로 구우시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더라도 목사가 특별히 잘할 수 있도록 주님 소질을 주시고, 부흥사가 되면 특별히 부흥사로써 잘할 수 있도록 소질을 주시고 평신도는 평신도에게 특별한 소질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그릇에다가 아름다운 화초를 그려 넣고 새를 그려 넣고 그림을 그려 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7절로 11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느니라"
특별한 소질을 주시고 성령의 불로 구우시는데 그 소질이 바로 그릇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그림과 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목사라도 목사가 예언의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방언 통역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고, 목사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소질을 주십니다. 부흥사도 그렇구요. 평신도들도 여러분, 특별한 소질을 주셔서 여러분이 아름답게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하나님이 소질을 주셨느냐. 성령으로 어떻게 나에게 인생에 그림을 그려 주셨는지 우리가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같은 한 성령이 역사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준 사람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능력을 행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예언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영을 분별하고 또 다른 사람은 각종 방언을 많고 또 다른 사람은 방언을 통역하고 이렇게 하는 은사가 각각 다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의 직분을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소질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어야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 향기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온 천하만국에 다니면서 부흥사로써 복음을 전했지만 항상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하나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난 다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면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이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생에 하나님이 그림을 그려 넣어 주신 것입니다. 신유의 은사라는 소질을 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인데 다 부흥사면 병을 고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부흥사는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영혼을 구원하면서 예언을 하는 역사가 있어서 예언을 해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격려를 주고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베푸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다같이 예수 믿어도 성령께서 내게 어떠한 은사를 주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령이 나타나면 유익하게 함이라. 내게도 신앙이 유익되고 나의 곁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은사를 활성화 하고 잘 사용하면 크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은사를 받아서 은사를 자기 개인용으로 사용하고 교만해져서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많지만 은사를 받아서 겸허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면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고 전도하는 곳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므로 사람들이 "야~ 하나님이 말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나시는구나!" 감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토기장이는 그릇에 무늬를 그리고 난 다음에 그 그릇을 가마에 넣어서 굽습니다. 여러분 굽는다는 것은 성령의 불로 구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이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은혜를 받아 깨어지고 변화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지만 결국에 완성품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불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하는 것처럼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충만 받기 위해서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은 성령의 불을 주어서 우리가 완성된 그릇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릇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받지 않고는 아직 완성된 그릇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구나 사도들에게 말하기를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에베소에 열 두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힘이 없고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와서 안수하매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열 두 사람 쯤 되고 난 다음에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나서 전 소아시아가 복음화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사용하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녹로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고 무늬를 그려 넣었을지라도 불가마에 넣어서 구워야 그릇이 되지 불가마에 넣어서 굽지 아니하면 아직은 미완성품이 되어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운 그릇은 그 다음 사람을 섬기기 위한 상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는 성령의 불을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로 21절을 우리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이 집은 큰 집입니다. 하나님이 큰집에 하나님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귀하게 쓰는 그릇도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도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깨어지고 순종하여 부들부들하고 녹진녹진한 찰흙이 되어서 녹로에 올라가서 좋은 그릇으로 하나님 손에 의해서 만들어 지고 아름다운 성령의 무늬가 그려지고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아 구워지면은 귀히 쓰는 그릇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않고 반역하고 거역하면 녹로 에서 몇 분이나 깨뜨려서 더 낮은 단계의 그릇으로 더 낮은 그릇으로 만들어서 나중에는 그림도 아무렇게나 그려 넣고 난 다음에 불에 되게 구워서 쓰는 그릇은 저 노동자들이 노동장에서 현장에서 쓰는 질그릇이나 밥그릇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그릇으로 만들어서 사용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요. 하나님이 그릇으로 사용해 주신 사람은 모두다 천국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나는 사실 말이지 천당 문지기만 만들어줘도 감지덕지입니다. 천당에 좋은 자리는 그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요, 내 마음의 소원은 천당에 턱걸이를 하고 들어가서 문지기라도 되면 이 땅에 사는 것보다 억천만 배로 좋을 테니까요.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영광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예수를 잘 믿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천국에 들어가는 그릇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손위에서 만들어져 가는 그릇이요 또는 이미 만들어져서 사용되는 그릇입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는 그릇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을 그릇으로 만들어 사용하시고 계속해서 여러분에게 영광을 퍼부어 주시는데 우리가 믿고 순종하고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우리 그릇을 귀하게 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 부엌에 있던 그릇을 마루에 대청마루에 갖다 놓고 쓰고 대청마루에 갖다 놓고 쓰던 그릇을 안방에 갖다 쓰고 안방에 갖다 놓은 그릇을 머리맡에 갖다 놓고 쓰는 것입니다. 똑 같은 그릇이라도 위치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그릇이라도 여러분, 저 부엌에만 있는 그릇은 별로 큰 대접을 받지 못하지 않습니까? 대청마루에 갖다 놓으면 사람들의 손에 귀하게 쓰이고 안방에 갖다 놓고 머리맡에 갖다 놓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릇마다 사용하는 처소가 다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믿고 순종하고 따르면 하나님이 귀히 쓰는 곳에 갖다 그 그릇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 받고 영광 받고 축복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고개 숙여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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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본문 : 롬-04-17-
(롬4:17)
<서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동물과 인간의 특별히 다른 점은 동물들은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현재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마음에 꿈꾸며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동물은 창조적인 능력이 없지만 사람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본론>
1. 일반상식으로 사는 삶
동물적으로 일반상식만 가지고 감각적으로 사는 사람은 체험해 보고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체험해 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봐야만 있지 눈으로 안본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마치자 어떤 젊은이가 나와서 목사님에게 대들었습니다. "목사님, 천국 봤습니까? 지옥 가봤어요? 나는 아직까지도 천국도 못보고 지옥도 못 보았으니 천국이 어디 있으며 지옥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이 난처해 있으니까 한 신사가 검은 안경을 끼고 옆에 와서 하는 말이 "여보시오. 내 말 좀 들으십시오.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해와 달과 별들이 있지요." "어떻게 압니까?" "보이니까요." 그러면 "이 건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어떻게 압니까?" "눈에 보이니까." "당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요? 내가 여기 있지요." "어떻게 압니까?" "내가 나 스스로 만질 수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신사 하는 말이 "여보시오. 나는 해와 달과 별들이 안보이니까 없소. 건물도 내 눈에 안보이니까 없소. 당신이 내 눈에 안 보이니까 당신도 없소." 안경을 딱 벗는데 보니까 "장님이요.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단 말이요. 덤벼들려면 덤벼드세요. 이 사람이 두 손을 바짝 들었습니다. 안보이면 없다면 나에게는 천지가 없는 것 아니요. 당신 그런 말 하지 마시오. 나는 눈에 안보여도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이 건물이 있는 것을 알고 당신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을 내가 안단 말이요. 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요." 그 말에 청년이 머쓱해서 떠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나 이 세상에 좁은 편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상식으로 사는 사람은 봐야만 믿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직접 들어봐야 믿지 안 들어보면 안 믿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앉아있는 이 공간에 수없는 라디오파와 텔레비파가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지요. 그러나 끊임없이 라디오 방송은 이 파가 지나가고 있고 텔리비 파장이 지나가고 있고 전화파장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계만 조절하면 다 귀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귀에 안 들린다고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원시시대 사람인 것입니다. 귀에 안 들려도 라디오파, 무전파, 텔레비파, 핸드폰전파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진동하고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냄새 맡아야 알지 냄새 안 맡으면 없는 것이다.' 냄새가 안 나는 것도 이 세상에 많잖아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잘 맡지만 후각이 상실된 사람은 냄새를 못 맡아요. 그리고 냄새 못 맡는다고 음식이 없나요? 못 맡아도 음식은 있지요. 접촉해서 느껴 보아야만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안 만져 봤는데 어떻게 아느냐." 안 만져 봐도 이 세상 우주만물이 우리가 있는 것을 아는 것은 다 우리가 만져볼 수 없습니다. 해를 어떻게 만져 봅니까? 달을 어떻게 만져 봅니까? 별들을 어떻게 만져 봅니까? 그래도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우리 일반상식으로 생각하듯이 눈으로 봐야 알고 귀로 들어야 믿고 냄새 맡아봐야 알고 접촉해서 느껴봐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단히 낮은 정도의 삶을 사는 동물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2. 창조적인 삶
창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없는데 눈에는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학생 시절에 굉장히 저의 마음속에 감동을 늘 느끼고 산 것은 저는 아직까지 신학교 학생으로 교회를 가지지도 못하고 부흥회를 열어 보지도 못했지만 제가 목회하는 교회와 내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수많은 병자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장님이 보고 귀멍어리가 들을 것을 마음속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집회 장소에 몰려 올 것을 늘 생각했었습니다. 그때는 인간적으로 그렇게 할 처지에 못되는 가난한 신학생이었는데 마음속에 생각은 굉장히 부요했습니다. 그렇게 늘 생각하고 살았어요.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도 내 생각에는 큰 교회와 수백, 수만,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이는 집회를 인도한다는 것을 늘 마음속에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지나고 보면 그 생각한 것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장차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밑천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생각을 해야 하나님이 그 생각을 담아 준다는 것입니다. 생각의 그릇이 없으면 아무것도 담지 못합니다. 생각이 잘못된 생각을 하면 잘못된 것이 생겨나고 잘된 생각을 하면 잘된 것이 생겨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꿈꾸는 사람이 창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꿈꾼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아롤리드 목사님이라고 세계적인 부흥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대전에 가서 집회를 하는데 그때 여관에 우리가 같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여관에서 밥을 먹으면서 그 아롤리드 목사님이 저를 넌지시 바라봐요. 나는 아직 신학생이었고 그는 세계적인 유명한 부흥사였는데 안경너머 이렇게 저를 보더니만 나를 보고 "조학생, 성경 기억하냐?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고 하는데 나는 늙은이니까 꿈은 요사이 잘 꿔. 그런데 간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장차 자네가 서서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여오는 것을 내가 보았어. 그리고 자네가 목회하는 교회가 굉장히 큰 교회에 목회하는 것을 보았어." 그런데 아롤리드 목사님하고 저하고 존허스톤 목사님하고 같이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끝마치고 난 다음 나오면서 존허스톤 목사님이 나를 한쪽으로 끌어내면서 "저 영감 미쳤어. 노망한 소리한다. 지금 신학생인 너를 보고 무슨 세계적인 교회를 목회하고 구름떼같이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부흥회 참석한다는 말을 하느냐? 나이를 늙으면 저렇게 노망 걸린 말을 한단다." 그렇게 말을 해요. 그러나 나는 그 말에 굉장히 반발심이 생겼습니다. 아롤리드 목사님이 하는 말이 내 맘에 콱 들어와서 그 시간부터 그 말이 내 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결코 내가 목회하는 교회는 구름떼 같은 성도들이 모여오며 집회하는 곳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올 꿈을 아롤리드 목사님이 심어주신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에 마음속에 꿈을 심었으나 현실은 전혀 꿈과 달랐습니다. 현실은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삭막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가 심어준 꿈을 계속 가지고 있을 때 오늘날 돌아보면 그 꿈이 다 이루어지고 가는 곳마다 구름 떼 같은 성도들이 모여왔고 큰 교회를 목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음에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꿈을 심어 주십시오. 남편에게도 아내에게도 꿈을 심어 주십시오. 꿈이 언제나 싹이 떠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꿈도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꿈은 우리가 꾸고 채우기는 주님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입을 좁게 열면 아무것도 안돼요. 입을 크게 열어야 돼요. 입이 좁은 사람은 숟가락을 적은 숟가락으로 먹으니까 많이 밥이 못 들어 가지요. 입이 큰 사람은 큰 숟가락으로 집어넣으니까 많이 먹을 수 있지요. 한참 한 그릇에 밥을 나눠 먹을 때는 입이 큰 사람이 많이 먹어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가 같이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 앞에 꿈을 크게 가진 사람은 큰 복을 받아도 꿈을 주먹만 하게 가지면 조그맣게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꿈꾸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믿음이라는 것은 믿을 수 있고 안 믿을 수 있습니다. '아이고 나는 믿음이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늘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들에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질 것이라"고 우리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에서 하트에 겨자씨 세알을 넣은 것을 지금 밖에서 나눠주고 있는 것입니다. 만원씩만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에 헌금하면 겨자씨가 담긴 하트 모양의 저 아름다운 것을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저는 저 겨자씨 들은 하트 모양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와서 자꾸 나보고 믿음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목회를 50년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만 하려면 마귀가 '너는 믿음이 없다. 네 믿음 가지고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러면 저것을 딱 내놓고 '봐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기는데 여기에 겨자씨 세알이 있어도 눈에 잘 안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이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물러가라!' 그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습니다. 있는 것만 믿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어야지요. 내 눈에 없는 천당을 있는 것같이 믿어야지요. 내 눈에 안 보이는 지옥을 있는 것같이 믿어야지요. 내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이 같이 계신 것을 믿어야지요. 내 눈에 안 보이는 성령이 내 속에 와 계신 것을 믿어야지요. 우리가 마음속에 믿음을 사용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이 분량대로 주셨는데 모두다 겨자씨 보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다 겨자씨 보다 큰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대문에서 교회가 좁아서 여의도로 나오려고 할 때 우리 성도들이 모아놓은 현금이 100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서대문에 이 교회를 짓는데 10억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사이 돈으로 계산하면 1,000억도 넘습니다. 그런데 10억이 더 필요한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데 단돈 100만원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100만원 플러스 예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돈 100만원만 들고 여의도로 나온다면 어림도 없지요. 그러나 100만원 보태기 예수님이니까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 교회에 처음 시작할 때 기공식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기공식을 하려고 모였는데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습니다. 그 때 내 마음에 스산한 생각이 났습니다. '내 인생이 이 비바람 치는 인생을 걸어가야 되겠구나.' 돈 100만원 가지고 건축업자는 우리가 돈이 많은 줄 알고 시작했는데 기공식을 하면서도 돈이 없는 것입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돈에 쫓기는 나의 일생이 눈에 환하게 보여 진 것입니다. 비바람이 분다. 내 인생에 비바람이 불겠구나. 그러나 제가 한 가지 마음에 믿음이 있었던 것은 100만원 밖에 없지만 그러나 100만원 옆에 예수님이 서 계신다. 예수님이 100만원을 가지고 사용하시면 1억도 되고, 1,000만원도 되고, 1,000억도 될 수 있으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에 담대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하고 담대하고 믿음을 가지고 시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면 여러분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되지요. 빌립이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남자만 5천명, 부녀자 수만 명이 있는데 먹을 것을 주라고 하니까 빌립은 기겁을 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서는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돈이 필요한데 그 돈이 없으니 먹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먹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야에 그 많은 배고픈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계산에 넣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예수님을 계산에 넣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기름 값이 올라가서 물가가 다 뛰었지요. 장바구니가 가벼워지지요. 천 원 짜리 가지고는 과자 하나도 살수 없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곤두박질치고 중소기업들이 무너지고 굉장히 어려운 시련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처할까요? 환난을 당하고 고통이 다가올 때 우리 장바구니가 가벼워지고 지갑이 가벼워질 때 어떻게 할까요? 그 안에 예수님이 같이 계신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시편 23편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왜 안 무서워요? 무섭지요.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도 같이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때 일수록 기도하고 예수님만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역사를 예수님은 지금도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믿는 믿음이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져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환경은 두려워 어려워져도 예수님은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여러분,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루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하루가 여러분, 아침이 되고 점점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밤이 되지 않습니까?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지요. 그렇지요? 자신이 없는가보다. 말하는 것 보니까.. 하루가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가 일하고 저녁에 쉬잖아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창세기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되더라. 하나님은 계산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되더라. 사람은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된다. 이유가 뭐냐. 저녁이란 어둡지 않습니까? 어둠에서 시작해도 하나님은 밝은 것을 끝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밝은 것으로 시작해서 어둔 것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은 어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밝은 것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따라와도 어둠이 다가오면 하나님은 아침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이 되는데도 '아이고 어둠이 올 것이다. 절망이다. 죽음이 다가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우리 인생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다가와도 하나님이 계시면 저녁이 오면 아침이 오는 것입니다. 아침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7일 동안에 내내 하나님은 저녁에 오고 아침이 오니 첫째 날이라.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니 둘째 날이다. 저녁이 오고 아침이 오니 셋째 날이라. 내내 저녁이 오면은 아침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이 오니 저녁이 온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예수 믿는 사람은 저녁이 오거든 아침이 오는 기대를 하고 긍정적인 희망을 갖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창조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도 긍정적인 말을 하는데도 똑같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아이고 못살아.' 하는 말하고 '아이고 잘살아.' 하는 말하고 필요한 에너지는 똑같은 것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에너지를 쓸 바에야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입술의 말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고 갈 길을 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14장 28절 말씀을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 귀에 무슨 말씀이 들리게 합니까? "못산다." "그대로 해주마." "병든다." "그대로 해주마." "망한다." "그대로 해주마." "잘산다." "그대로 해주마." "건강하다." "그대로 해주마." "승리한다." "그대로 해주마." "잘된다." "그대로 해주마." 성경에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내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조심해야 돼요. 입의 말로 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이 그까짓 말 한마디 했는데 무슨 효과가 있느냐.' 여러분, 말이 그렇게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은 내가 듣고 이웃이 듣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듣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에 조심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라는 것은 항상 죽는다고 하지 말고 산다고 말하고 없다고 말하지 말고 있다고 말하고 망한다고 말하지 않고 승리한다고 말하고 물러간다고 말하지 말고 앞으로 나간다고 말하고 두렵다고 말하지 말고 평안하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해서 하나님이 그대로 실천하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란 감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있는 것으로 믿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감각을 통해서 체험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다 감각을 통해서 체험해야 믿는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도무지 체험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은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어린아이 보십시오. 아직 말도 배우기 전에 부모들이 가정예배 보면 가정예배 와서 기도하라 하면 손 딱 잡고서 눈 감고 있습니다. 그것 왜 그렇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지만 마음속에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라면 손을 잡고서 눈을 감고 중얼 거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준 것입니다. 원숭이 새끼가 기도하는 것 보았습니까? 강아지가 기도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럴 마음이 없어요. 아예 하나님이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안 만들어 줬어요.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한다.
보는 감각으로만 살지 않고 우리는 마음에 믿음으로 산다. 마음이 있다는 것 놀라운 일 아닙니까? 마음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살지 감각으로만 살고 마음을 버리고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안보고 믿어야 복을 받지 보고 믿으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보지 않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신앙생활이 우리가 참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감각을 초월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성경을 보면 골치가 아파요. 제가 예수 안 믿는 무당 할머니에게 성경을 갖다 주니까 하루 만에 도로 가지고 왔어요. 그것 왜 가져왔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못 읽겠다고 합니다. 무당에게는 잔소리로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진리의 영원한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성경이 온전히 보배 덩어리인 것입니다. 황금과 같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모략과 재능이 들어있어 그 말씀대로 살면은 영혼도 살고 마음도 살고 육체도 살고 생활도 성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현실 그대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말씀이 배후에서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이라도 재료가 없으면 음식을 못 만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재료인 말씀을 가지고 있는 이상은 말씀을 읽고 말씀을 통하여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안 보이는 세계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도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겨요. 나는 2부, 3부 이영훈 목사 설교를 텔레비로써 사무실에서 듣고 있으면 내 마음속에 보혈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무척 생겼던 것입니다. 항상 제가 설교했던 말씀인 것입니다. 또 이영훈 목사가 내 제자이기 때문에 나보다 더 설교를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세월이 흘러가면 더 잘하게 되겠지요. 그런데도 이영훈 목사님이 보혈에 대한 설교를 하는 것이 내 마음속에 찡하고 닿아지면서 마음에 보혈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보혈에 대한 은혜가 생기고 눈물이 마음에 핑 돌더라구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누가 설교해도 조용기가 하든 이영훈 목사가 하던 여러분이 설교하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하면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감각을 초월해서 믿을 때 우리에게 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면 언제나 감격적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러분 우리보다 훨씬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갈대아우르에서 태어나서 그는 초등학교도 못 다닌 사람인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인 것입니다. 요사이 초등학생보다 훨씬 지식이 없지요. 그리고 생활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위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탁월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한 그를 보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여러분, 가나안 땅이 무슨 장난입니까? 갈대아우르에서 가나안 까지 얼마나 먼곳에 긴 세월을 가야 되는데 내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말 한마디에 하나님 음성을 듣고 그는 보따리 싸서 아내 데리고 갈디아우르를 떠난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로 2절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 한마디에 그는 절대로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알아야 믿고 순종했다면 믿고 순종할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아요? 못 알아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바라보라고 해서 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본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왔었을 때 조카 롯은 그를 떠나고 나이는 많은 아브라함이 외롭게 객지에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이 하루 그를 불러 서서 높은 언덕으로 올라오라고 하시고 난 다음 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은 바라보았습니다. 동서남북을 쭉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기를 네 눈에 보이는 이 땅을 내가 네게 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는 땅을 주겠다. 안 보이는 땅을 주겠다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네 눈에 보이는 땅을 네게 주겠다.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여러분 그러므로 바라봄의 법칙이란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잘못된 것을 바라보면 잘못된 것을 상속을 받게 되고 잘된 것을 바라보면 잘된 것을 상속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을 위해서 놋뱀을 만들어 높이 달아서 놋뱀을 바라보라 했던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고 병 고침을 받는다고 믿은 사람들은 다 고침을 받았지만 바라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은 것입니다.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치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다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우리에게 위대한 생명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라도 매일같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은 나를 바라보십시오. 영혼도 못되고 범사도 망하고 병들고 박살난 나를 생각하고 바라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바라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5장 5절에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85세 노인을 바깥 어두운데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85세가 되어 자식이 없어 무자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밤중에 나와서 별들을 바라보고 헤아려라.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인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인생의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눈 가지고 뭘 바라봅니까? 마음으로 무엇을 바라봅니까? 잘못된 것을 바라보면 잘못되고 잘된 것을 바라보면 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바라볼 바에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셀프 이미지가 어떤 것입니까? 자화상이 어떤 것입니까? 망한 자화상입니까? 가난한 자화상입니까? 실패한 자화상입니까? 내 자화상은 성공하고 승리하고 축복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자화상을 가지고 바라보면 또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닮은 자는 아브라함과 같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믿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로 22절 다 소리 내어 읽으십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중에 믿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턱도 없는 소리다. 어림도 없다는 그런 가운데도 아브라함은 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이 배짱 좋은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 돼요. 아브라함은 간을 배밖에 내놓고 믿었어요. 망하면 망하리다. 죽으면 죽으리다. 그는 그런 믿음으로 믿었으니 오늘날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발견한다면 큰 역사를 베푸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약아서 아브라함처럼 무턱대고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입으로 말을 했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하나님이 이름을 고쳐 주셨을 때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이라고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라. 이제 자기 이름을 아브라함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이름을 바꿔서 입으로써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5절로 16절에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사라라는 말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어린 아기가 없는 자기 아내를 보고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부르게 한 것입니다. 말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건방지다고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허풍쟁이라고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긍정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중에 가나안 땅을 다 선물로 받았으며 자식 이삭을 얻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거기에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4. 신앙생활의 갈등
그러면 우리가 이런 것을 바라볼 때 우리 신앙생활에 자연적으로 갈등이 생깁니다. 우리가 영혼이 육체 속에 사니까 영혼 따로 놀고 육체가 따로 놀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마음 따로 놀고 몸 따로 놀잖아요. 그러면 굉장히 갈등이 있잖아요. 한 가정에도 남편 따로 놀고 아내 따로 놀면 가정에 분쟁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가 된다는 것이 힘들지요. 육의 눈과 영의 눈이 있어서 육의 눈이 보고 안돼, 없어. 큰일이야. 영의 눈은 하나님을 믿으니 괜찮아.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해. 그러면 내속에 육의 눈과 영의 눈이 서로 보고 싸우는 것입니다. 육의 눈은 영을 보고 '너 잘못 봤다.' 영의 눈은 육의 눈을 보고 '네가 잘못 봤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인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받아들이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읽을 때 아멘, 할렐루야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몸에 육의 눈이 있고 영의 눈이 있으니 갈등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신앙에 늘 갈등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또 마음에 있어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은 영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영의 생각은 육의 생각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5절로 7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런데 세상에 내 한 몸에 육이 있으니 육의 생각이 따로 있고 영이 있으니 영의 생각이 따로 있어 이것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생각을 따라갈지 몰라서 갈팡질팡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적인 생활인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육신의 감각과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은 하나님 말씀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감각은 내가 아직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현재 어렵고 생활이 어려운데 성경 말씀은 십일조와 헌물을 들여 하나님 창고에 양식이 있게 하고 하나님이 쌓을 곳이 없도록 붓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육신의 감각과 영적인 생각, 말씀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이러므로 여러분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지체 속에는 다른 법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서로 투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의 말과 육의 말이 또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혀가 새치 혀지만 육신의 말을 할 때가 있고 영의 말을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말을 하면 우리가 듣는 사람에게 낙심을 주고 우리도 낙심하게 되고 영의 말을 하면 격려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8절로 10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한입에서 찬송도 나오고 저주도 나오고 긍정적인 말도 나오고 부정적인 말도 나오고 이긴다고 하기도 하고 진다고도 말하고 산다고 하고 죽는다고도 말하고 이 새치 혀가 온갖 장난을 다 하니까 우리 마음에 괴로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갈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이 갈등에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갈등이 없다고 하는 사람 없어요. 다 있어요. 여러분 50년 목회한 저의 마음도 어떤 일을 당할 때마다 언제나 육의 사람, 영의 사람, 육의 눈, 영의 눈, 육의 생각, 영의 생각이 들어와서 씨름을 하고 갈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이겨내면 신령한 생활과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승리하는 신앙생활
우리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을 버리고 영의 생각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육의 생각이 어떻게 부정적인 말을 하더라도 영의 생각을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훈련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영의 생각은 말씀을 따라서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것이 되었으므로 새로운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따라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따라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을 생각해야 되고 거룩하고 의롭게 된 것을 생각해야 되고 치료받는 것을 생각해야 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것을 생각해야 되고 영생복락을 얻은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은 자화상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강제로라도 영적인 생각을 하도록 결심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겠다고 하면은 성령이 우리를 도와 줘서 생각이 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꿈이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행해요.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언제나 크고 적은 꿈을 품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꿈, 남편에 대한 꿈, 아내에 대한 꿈, 자식에 대한 꿈, 나라에 대한 꿈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나라가 혼돈하고 무질서하고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한민국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좋은 꿈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에 계시고 1,200만 성도가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신다. 하나님은 악을 변하여 선이 되게 하시고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종국에는 잘될 것이다. 좋아진다는 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꿈을 저도 가지고 여러분도 꿈을 그렇게 가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이라는 말이 바로 꿈인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그 꿈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나쁜 꿈을 갖지 말고 좋은 꿈을 항상 마음에 가지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인 것입니다.
이근미 씨가 최근 출간한 「플러스 1퍼센트(+1%)로 승부하라」는 책을 요사이 제가 재밌게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전 세계 사회 각계 각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전 세계 커피 전문점 매출 1위를 달리는 스타벅스의 회장 하워드 슐츠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한 기업을 세우고자 한다면 위대한 꿈을 가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작은 꿈을 꾼다면 작은 것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꿈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작은 꿈 대신에 큰 꿈을 꾸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세계 66개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리더십 매니지먼트 인터내셔널 (LMI)의 창립한 폴 마이어는 "당신이 간절히 바라고 마음속에 바라고 꿈을 꾸고 깊이 믿고 행동하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꿈을 꾸고 믿음을 가지고 행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입을 넓게 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크고 위대한 꿈과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살아야지 감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느낌으로 살거나 감각으로 살거나 환경을 바라보고 요동하면 안 되고 내 마음에 믿었으면 줄기차게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번 믿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어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긍정적인 말을 하고 살아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언 18장 21절)
죽고 사는 권세가 혀에 달렸다. 여러분 우리가 말을 늘 하고 살지만 말에 대한 힘은 너무나 등한시 하고 사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일이 혀에 달렸다고 말하니 이것 보통일이 아닌 것이 아닌 것입니까? 긍정적인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이 얼마나 큰 힘이 있는가를 연구한 여러 실험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연구가 에마토 마사루는 말 한마디의 효력을 '밥'을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유리병에다가 새로 밥을 지어서 한 유리병에는 새로 지은 밥을 넣고 겉에다 '감사합니다'라는 라벨을 붙였습니다. 다른 유리병에는 그 밥을 넣고 뭐라고 했냐면 '망할 자식'이라는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초등학생 두 사람에게 매일 아침 매일 점심, 매일 저녁에 이 유리병을 바라보고 한 병을 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고 한 병은 "망할 자식, 망할 자식" 그렇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 결과는 '감사합니다'고 자꾸 말을 불러준 그 병의 쌀은 아주 멋진 누룩이 되어서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데 망할 자식이라고 한 그 병에 있는 밥은 썩어 가지고 고약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잔뜩 피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한 달 만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밥은 발효가 되어 향기로운 누룩 냄새가 나고 '망할 자식'이라는 말을 들은 밥은 형편없이 부패해서 검은색으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말의 힘은 이처럼 엄청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을 보고 "이 망할 놈의 자식아 이 못난 놈의 자식아, 이 죽일 놈의 자식아" 그러면 썩어서 부패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늘 생각나는 것은 초등학교 때 내 아랫집에 있는 어머니의 말입니다. 내 친구를 보고 말만하면 "이 혀 빠질 놈아, 이 빌어먹을 놈아, 이 범 물고 갈 놈아." 그렇게 욕을 해요. 그러니 그 애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망해서 죽었습니다. 자식을 보고 왜 그런 말을 합니까? 그때 화가 난다고 그런 말을 하겠지만 그 말이 얼마나 효과를 발생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말에 있는 것입니다. 한 달 만에 똑같은 밥이 하나는 향기로운 누룩이 되고 하나는 썩어 냄새가 나는 고약한 밥이 되는 것처럼 말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싸움 할 때도 남편보고 독한 욕하지 마세요. 남편이 잘못되면 여러분 자신이 잘못 되는 것 아닙니까? 밉더라도 자꾸 좋은 말 해주세요. 부인에게도 좋은 말, 남편에게도 좋은 말, 자식에게도 좋은 말을 해주십시오. 말이 나가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말이 나가서 창조적인 권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잠18:20~21)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팔자소관을 말하지 말고 오늘부터 말에 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훌륭한 신앙을 건설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육은 삼차원의 감각적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사차원 이상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육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삶과 영혼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틀린 것입니다. 육은 삼차원의 세계에서 지배를 당하고 살기 때문에 창조적인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영은 사차원의 세계를 통해서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므로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기적을 행하는 역사를 하나님을 통해서 베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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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고백 신앙
본문 : 롬-10-09-
로마서 10:9~13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우리 사람만이 자기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있는 모든 생각을 말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물론 동물들도 자기표현의 소리를 발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 표현의 불과한 것이지 사람 같은 언어를 가지고 마음을 교환하지는 않습니다.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해 주는데 그 첫째가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다고 했고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갖는 유일한 수단이 우리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열심히 드리고 있는데 내 마음 속에 있는 많은 생각을 하나님 앞에 말해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고 있는데 말에다 감정을 섞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언어입니다. 제가 지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언어로써 여러분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말 한마디를 잘하면 천 냥의 빚을 갚는다는 속담도 있고 말 한마디를 잘못하여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말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이 이만큼 중요합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특별히 고백 신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말하란 말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하면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이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입으로 말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가 결혼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 손들어보세요. 한분도 안계시죠? 구원은 그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주 확실한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입으로 분명하게 시인할 수 있는 사건인데 이 대답이 분명치 않으면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항상 분명치 아니한 그런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에는 “네 입으로 말하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란 것을 내 입의 언어로 말을 하면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그런 고백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자신의 마음을 체크해볼 수 있는 그런 순서가 여러 가지로 나왔는데 제가 말씀드릴 테니 자기 마음을 한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하는 슬픈 고백을 가져본 일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이 모든 죄를 다 씻어주셨다는 사죄의 은혜에 대해서 믿는가? 마지막 심판의 날에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영생을 얻게 될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고 당신은 믿고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가? 사도신경이 자신의 마음에 조금도 의심 없이 고백되어지는가? 하나님은 나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는가? 기도를 드릴 때 이것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간절한 느낌이 있는가?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내림을 체험하는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의 길로 인도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때 인간관계에 원수가 생길 때가 있는데 그를 위해서 기도해본 일이 있는가? 나의 모든 소유는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어느 때 주님께 모두를 드릴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내가 어떤 고난의 경우, 어떤 상황을 만나도 예수 믿는다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가? 예수를 믿는 기쁨이 이 세상에서 얻는 어떤 기쁨보다도 귀하다는 체험을 한 적이 있는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가? 내가 승리하고 성취한 모든 부분은 내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가?” 그렇게 믿으시면 “아멘”하십시오.
우리 목사들은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지금 병원에서 하루, 이틀 아니면 한 시간, 두 시간 후에 세상 떠나실 그런 분들을 열심히 찾아갑니다. 사실 병원에서는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도 싫어합니다. ‘목사들은 날마다 와서 저런 일을 하냐?’ 그러나 목사들은 심각합니다. 그 사람이 그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어서 건강이 회복되는 것보다도 더 급한 일이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느냐 못 받느냐?” 그래서 그 사경을 헤매는 어려운 인생의 고난스런 그런 장면 앞에서도 목사들은 말을 합니다. “예수 믿으십니까? 당신의 죄는 사함 받았다고 믿으십시오. 죽으면 천국 간다고 믿으십시오. 대답하십시오. 지금이라도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시겠습니까?”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세례주고 구원의 확신을 줍니다. 그 작업이 쉬운 작업도 아니고 또 그 병원에서 반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요청이 있을 때 우리 목회자들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는 그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로 고백하는 신앙은 기독교에서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을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말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이 있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판명이 됩니다. 우리 신경조직 가운데는 중추신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사람의 모든 생각을 몸 전체에 전달하는 사역을 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신경조직이 일을 합니다. “아! 피곤하다!” 말을 하면 신경조직은 어떻게 되느냐? “주인께서 피곤하다 하신다. 모두 다 피곤할 준비를 하라!” 그래서 금방 사람이 다운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 기분 좋다!” 라고 말하면 “주인이 기분 좋단다. 모두 기분 좋은 준비를 하라!” 받쳐줍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우리 몸이 나를 도와주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내가 새벽기도를 꼭 가야 되겠다.” 그러면 신경조직은 “내일 아침에 주인이 새벽 4시에 일어나야 된단다. 긴장하고 준비하라.” 그래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새벽에 가봐야 알지.” 그러면 “새벽까지 가봐야 안단다. 기다려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대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베스트셀러 “뇌내혁명” 그의 책이 제일 많이 팔렸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 그리고 말하는 대로 된다.” “헌금내기 아깝다.” 그러면 “모든 돈을 감춰라.” 말하는 대로 됩니다. 한국에 왜 그렇게 망하는 사람이 많은가? 엄마, 아빠가 자식들 보고 “망할 자식”이라고 하도 욕을 많이 해서 이 아이는 나는 언젠가는 망할 것이라는 그 신경조직이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축복하는 말이 성경에 그렇게 많은 겁니다. 여러분, 캘리포니아 로버트슐러 목사는 “생각의 가능성(Possibility Thinking)” 이 단어 하나 가지고 미국에서 제일 큰 목회를 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된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느냐? 말하는 대로 된다. 네 입술로 네 환경에 고난을 불러오지 말 것이며 나의 입술로 형제에게 실망을 주지 말지어다.” 성경에 보세요. 축복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대로 다 되었습니다. 야곱이 12아들을 놓고 “너는 이렇게 되어라. 너는 이렇게 되어라.” 다 축복해주잖아요? 그대로 됐잖아요? 또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했잖아요? 사실 야곱은 인간성이 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축복이 그대로 그에게 이루어졌잖아요?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니 그대로 되었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남을 향하여 축복의 말을 하라 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 주의 종들이 축복해 준 것은 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셨잖아요?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네가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렇게 약속했잖아요? 반대도 있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할 것이니” 말하는 대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일을 안 합니다. 안됩니다. 여러분이 한번 주변에서 살펴보십시오. 항상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고 부정적 말을 하는 사람 중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은 항상 해를 끼치지 유익한 어떤 사건이 중심에 서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그렇게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그렇게 축복하는 말, 또 내가 축복을 받는 말 이런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네가 생각하고 입으로 말한 대로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그런 일에 인색한가? 입으로 인정하는 일에 인색한가?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불신앙의 상황을 미리 염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집사님인데 ‘집사라고 말했다가 혹시 내가 죄 짓게 되면 그때 더 하나님께 영광을 가릴 것이 아닌가?’ 미래의 나쁜 상황을 미리 걱정함으로써 부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안 하는 그런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저 같은 목사는 어디 가서든지 목사의 신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내가 목사라고 말했다가 실수하면 더 욕먹을 것 아닌가?’ 미래의 나쁜 상황을 미리 염려함으로 ‘그러면 목사라고 말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하면 그 목사는 금방 어떤 시험에 빠집니다. 왜? 마음이 이미 그쪽으로 열려져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간다니까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교회 집사님이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수고하고 그러는데 예수 안 믿는 친구들도 많이 있잖아요? 어쩌다가 파티가 벌어져서 신나게 노는데 ‘내가 교회 집사인 것을 감춰야 되겠다.’ 그러며 예수 안 믿는 척하고 그런 행동을 하면 그 사람은 끝없는 시험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입으로 내 신앙을 어떻게 시인하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되어 집니다. 우리 갈보리교회에서 목회자들이 “로만칼라를 입고 다니자. 너무 티 나게 그렇게 하지 말고 그래도 공적으로 우리 교인들 앞에 나갈 때는 이렇게 입고 목회를 하자.”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목사인줄 알잖아요? 어쩌다 이러고 은행에 갈 때도 있습니다. “목사님, 오셨습니까?” “네, 목사도 돈이 필요합니다.” 음식점에 들어가도 “어머! 목사님 오셨어요?” 이런 복장으로 미국 사람이나 서구 사람 만나면 틀림없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Hi! Father!” 꼭 말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그게 손해 본 겁니까? 내가 만날 수 있는 얘기하지 못한 모든 고난이나 시험을 미리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아주 분명하게, 오늘 본문에 보세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주를 시인하고 발표하는 사람은 부끄러울 것 같지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감추는 사람은 오히려 부끄러운 시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갈보리교회에서 집사되고 청지기된 것을 부끄러우면 하지 마세요. 나도 부끄럽습니다. 하나님은 더 부끄러우십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교회에서 집사라고 하는 것을, 나는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것을 공적으로 내가 항상 발표하면, 그것을 숨기지 않으면 내가 만날 수 있는 많은 곤란하고 괴로운 사건을 미리 막아주는 그런 힘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시편을 열어보세요. “너희는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고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표하라.” 그런 뜻입니다. 찬송가에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하겠다.” 이러한 크리스천의 고백이 당신의 언어 가운데 존재하는가? 우리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가 있을 때 빨리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당신도 예수 믿으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에 베드로가 어떤 일을 당합니까? 울면서 통곡했다고 그랬습니다. 왜 멀쩡한 남자가 울면서 통곡합니까? 사람들 앞에서 주를 부인하고 나서 받은 시험입니다. “네가 예수와 함께 다니는 것 내가 봤어!” “무슨 소리야? 나 그 사람 몰라!” 세 번이나 부인했다가 추악해진 자신의 영적 모습을 보고 나가서 통곡하며 울지 않았습니까? 만일 그때 베드로가 “그렇다. 내가 예수의 제자다. 우리 예수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고난을 당해야 되느냐? 예수가 행한 일은 메시아적 사역이었다. 나는 그를 따르는 제자다. 어쩔래?” 나서 봐요. 하나님이 기뻐서 베드로에게 더 큰 힘을 주셨을 겁니다. 모른다고 발뺌하고 부인하니까 통곡하며 우는 시험에 금방 빠져버렸잖아요?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비겁하거나 존경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신분을 될 수 있는 대로 감추는 사람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은 간첩이나 사기꾼입니다. 하나님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데요? 만약 그것이 부끄러우면 직분 다 내어놓으세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우리 아버지야! 우리 어머니야!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얼마나 헌신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시는지 몰라! 우리 엄마는 어머니 중에 어머니다.” 이런 말을 할 때 어떠세요? 기분이 좋아서 그 자녀를 위해서 뭐든지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겁니다. 그런데 객관성 평가를 볼 때 아버지가 사회적 위치도 그렇고 어머니가 그렇게 잘나지도 못하고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면 “야! 저분 너의 아버지냐?” “아니야, 우리 아버지 아니야.” 그랬을 때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으로 시인하라.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라.” 그러신 겁니다. “목사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목사 그만 두라! 집사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 그만 두라!” 어쩌다가 우리 청년들이 군대 간다고 기도 받으러 옵니다. “그래, 너는 이제 거룩한 일에 몸을 바치는 시간을 맞이했다. 그런데 기도하고 군대 나가서 할 일이 있다. 처음부터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밝혀라. 그리고 행동해라. 절대 손해 안날 것이다. 예수 안 믿는 척 하지 말라. 동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예배드리러 가야 된다고 확실히 밝히고 주일날이면 예배 참석하고 당당하게 나가라. 다른 사람들 다 기도하고 밥 먹지 않아도 절대적으로 밥 먹을 때 기도하라. 그러면 너는 존경받을 것이다.”
저는 경험이 있습니다. 대학원 야간 다녔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대학원이 한참 야간 붐이 불어서 옛날 학창 시절이 생각나는 기업인들이 많이 와서 공부했었잖아요? 저도 그때 전도사하면서 야간 대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동기들이 모여서 자기소개를 하자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와대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큰 인물이 우리 반이 되었구나!’ 어떤 사람은 사회적 위치가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네, 저는 양주군에 있는 퇴계원 교회라고 있는데 그곳 전도사입니다.” “그러시군요.” 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쨍쨍한 사람들이 학창시절이 그리워서 다시 와서 공부를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공부를 마치고 저녁 먹으러 갑니다. 굉장하고 요란한데 가서 저녁 먹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나한테도 와서 “전도사님, 우리와 같이 가야지요. 동기이신데….” “그래요. 같이 가요.” 나한테 그럽니다. “전도사님, 기도를 해주셔야지요.” “그래요. 기도 하지요.” 그런데 요란하게 놀고 그런단 말입니다. 난 전도사라고 처음부터 밝혔으니 그러며 지나갔습니다. 졸업할 때 쯤 됐는데 나한테 5~6명이 일대일 식사 대접하면서 “전도사님, 존경합니다. 내가 아무개 교회 집사입니다.” ‘집사가 그렇게 요란했구나!’ 또 어떤 사람은 “전도사님, 그 교회를 아십니까?” “아, 그럼요.” “내가 거기 집사입니다.” 모두 집사님들입니다. 그런데 집사라고 말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나한테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쩌다 자기 부인들 아프고 병원에 입원하면 자기 목사님들 다 계신데 나에게 “전도사님, 어렵지만 와서 기도 좀 해줘요. 전도사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 같아.” 그러면서 졸업할 때 쯤 다 나에게 와서 자기가 집사라고 밝히는데 그동안 공적으로는 한 번도 이야기 안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 어느 식사 자리에서 “이 나쁜 집사들아, 집사면 처음부터 집사라고 말해야지 요란하게 놀고 나서 맨 나중에 나한테 그렇게 고해성사하면 되냐? 이제부터는 어디 가서 처음부터 집사라고 밝혀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 길로 가게 인도하실 것이다.” 내가 대학원 시절에 그런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순교자를 존경합니다. 왜 존경합니까? 나는 예수 믿는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너는 죽는다.” “괜찮습니다. 이게 주를 시인하는 거요.”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럽거나 집사된 것이 감춰야 할 사건이라면 그만 두세요. 가장 거룩한 일을 우리가 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될 것을 하면서….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힘을 주어서 2000년 역사에 그 사람보다 더 크게 쓰임 받은 사람 없습니다. 말하는 대로 됩니다. 생각하는 대로 됩니다.
저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발간하는 책자가 많이 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다 읽어 봅니다. 책에 “부끄러운 간증”이라고 누가 글을 썼는데 집사님이 썼습니다. 자기는 사업을 많이 하는 집사인데 이 거래처에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과 늘 유흥업소에 많이 가야되는 괴로운 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교제를 하고 그랬는데 어느 날 그날도 가서 술을 마시며 유흥업소에서 아가씨들과 재미나게 놀고 헤어지는데 자기 옆에 있던 아가씨가 “아저씨, 이것 하나 드릴게요.” “이게 뭐냐?” “예수 믿으세요.” 전도지였습니다. “응?” “제가 좀 가정이 가난해서 할 수 없이 유흥업소에서 일을 해요. 저는 예수 믿는데요, 아저씨도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가세요. 아저씨, 혹시 교회 나가세요?” “응? 으응….” 받아가지고 집에 와서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 아가씨는 나에게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지를 주었는데 나는 왜 그에게 집사라는 말을 안했는가? 집사가 부끄러운 것인가? 아! 오늘 죄 지었다. 부끄럽다.’ 그런 글이에요. 어느 상황, 어디에서나 “나는 예수 믿습니다. 주님의 제자 되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세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나는 목사가 되었어! 나는 교회 집사요! 나는 교회에서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요.” 어디 가서나 말할 수 있는 힘을 가지라는 겁니다. “왜 가장 거룩한 일을 하면서 부끄러워하느냐?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할 것이다.” 여러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너희들 입으로 시인하라. 구원에 이르도록 너희 자신이 말하라. 고백 신앙을 가르치는 성경구절을 저희들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자녀의 이 삶을 자랑스럽게 어떤 상황, 어디에서나 발표하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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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소망중에 즐거워하라
본문 : 롬-12-11-
성 경 구 문 로마서 12:11~13
본문을 보면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 상호간에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라,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환난 중에 참으라, 기도에 항상 힘쓰라,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보장해주시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구의 보장을 받고 사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보증인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분에 대한 인정이 달라지고,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한평생 사는 동안 이 세상의 어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장해주시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장 19절을 보면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소망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고, 천국까지 안전하게 이끌어주시는 소망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7절을 보면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들은 고난 중에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이 있으면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로와 소망을 주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방사람들에게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
둘째, 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을 가진 자들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사람들의 군중심리와 유행을 따라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살아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절대로 죽은 물고기가 물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살을 헤치고 올라갑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게 될 때 적조현상이 없어지고, 산소가 공급되어서 바다가 다시 활성화되고, 시들었던 고기도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풍랑이 없으면 잔잔한 것 같아도 오히려 적조현상으로 인하여 해초도 죽어가고 고기도 죽어갑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산 소망이 없는 사람은 조그마한 어려움이 와도 주저앉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산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소리가 없고, 듣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살아있는 성도는 찬송소리, 기도소리,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소리가 있고, 열심히 주의 일을 하는 봉사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라고 말씀했습니다. ‘산 소망’이란 그리스도 재림 후 이루어질 천국, 즉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불 같은 고난, 용광로 같은 시련의 한복판에 살아가야 하면서도 내적 기쁨과 신앙의 확신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산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골 1:5) 여기서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때 성도들이 받게 될 영광과 특권을 의미합니다. 특히 ‘쌓아두다’라는 말은 동전 따위를 수건에 싸 ‘저장하거나 보관하다’라는 말로 영광에 대한 소망은 하늘에 보물처럼 보존되고 때가 차면 그것을 성도들이 누리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의 대가를 얻지 못해도, 그 수고는 헛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 세상에서 맡은 바 사명을 능히 감당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늘에 소망을 두는 것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갖는 것을 반대로 생각합니다. 즉 하늘에 소망을 두었기에 현실을 부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도 쉽게 좌절하고 낙망합니다. 하늘에 소망이 있기에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려움과 역경 앞에 무력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진 생명마저도 스스로 끊을 만큼 무력하기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은 어려움과 좌절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망은 어려움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 인간적으로 죽고 싶을 때라도 살 희망을 주는 소망입니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덕을 추구하는 삶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좇는 외형적인 가치인 돈, 학력, 외모, 명예, 권력 등을 소유하지 못해도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 소망입니다.
넷째, 영생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따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이어받을 공동 상속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다 할지라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영생의 소망이 있는 자는 죽음에도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불신자는 죽음이 곧 멸망의 시작이요, 형벌의 시작이며, 지옥의 고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는 순간이 바로 영생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는 영생의 소망을 주신 것을 감사하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보장해주시는 소망, 산 소망, 하늘에 쌓아 둔 소망,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답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항상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2:11~13]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
제목 : 그 사람을 본받고 싶은 그
본문 :롬 15;1-7.
딸이 시집가기 전에 대화입니다.
<아빠! 나는 남자를 못 사귀니까 아빠가 실랑감 구해줘!>
<어떤 남자 찾아줄가?>
<아빠같은 남자 말고.>
충격이었습니다.
미국에서 국민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가운데 가장 본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이 존 디 록펠러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록페러가 어떤 사람인가 찾아 보았습니다.
우선 록펠러 일화부터 하나 소개합니다.
사탕가게 주인이 어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사탕을 한 주먹 가져 가거라.> 어린아이가 말했습니다.
<아저씨가 집어 주세요.> 주인은 욕심없는 아이를 칭찬하면서 한 주먹 사탕을 집어 주었습니다. 아저씨는 너무나 기특하여 그 아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욕심이 나지 않았니?>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내 손보다 아저씨 손이 더 커서 그랬어.>
이 아이가 미국 사람들이 가장 본받고 싶다는 세계 최고 부자가 된 존 디 록펠러입니다.
아버지는 허풍쟁이 약장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약을 팔았기에 늘 집을 비웠습니다. 집안은 항상 가난하였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다가 돈이 없어 중퇴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취직하여 가정을 맡아야 했습니다. 16살 9월 16일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 9월 16일을 <직장의 날>이라고 하여서 집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습니다.
록펠러의 특징이 있습니다.
(1)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어렵게 취직하여 일하게 된 것이 기뻐서 새벽에 출근하여 밤 늦게까지 죽도록 충성하였습니다.
(2)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0세가 되었을 때 첫 자기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자들이 몰려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생필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밀가루, 돼지고기, 콩등을 가공하여 팔았습니다. 장사가 잘 되어야 돈을 벌기 시작하였습니다.
(3)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번 돈을 작은 유전을 사들였습니다. 열심히 하였습니다. 유전이 잘 되었습니다. 33살이 되었을 때 그는 100만 장자가 되었습니다. 1904년 미국 석유의 91%를 그가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43세에 미국 최고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최대 부자 빌 게이츠 재산의 3배에 달하였습니다.
(4)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53세 병들었습니다. 의사는 1년을 넘기지 못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병원에서 수술비가 없어 죽어가는 사람의 수술비를 대주었습니다. 그가 살아나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관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죽게 되면 내 재산을 누가 가질 것이다. 죽은 후 누구에게 빼앗기지 말고 살았을 때 나누어 주자.> 번 돈을 자기가 쓰기 보다 남에게 나누어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주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병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벌어서 자기는 쓰지 않고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5) 검소한 사람입니다.
존 디 록펠러가 아들과 호텔에 들었습니다. 아들은 전망좋고 최고 호화로운 방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존 디 록펠러는 가장 싼 방을 찾았습니다.
<아들처럼 좋은 방을 사용하지 왜 그렇습니까?> 호텔 종업원이 물었습니다. 록펠러가 말했습니다.
<그 아들은 부자 아버지를 두었고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두었지요.>
(6) 창조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창조적인 생각을 하였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데 적을 곳이 없으면 옷 소매에 메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는 늘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로부터 최고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검소와 최선을 다하는 두 가지입니다. 어머니는 늘 말해주었습니다.
‘낭비는 재난을 부른다’
어머니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록펠러를 제일 본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누구를 제일 본받아야 할가요?
우리가 본 본받아야 할 분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입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인지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약점을 담당하고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
예수님은 약점을 담당하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받은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담당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짊어지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저주를 담당하러 오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얼마 전 TV에서 처참한 부부가 고발되었습니다. 남편은 58세로 중풍으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해골이었습니다. 아내는 53세였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중풍 걸렸다고 저렇게 몸이 마르나요?> 아내가 독기서린 눈동자로, 한맺힌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풍에 걸리기 전에 나를 걸핏하면 때렸어요. 그래서 중풍 걸린 후 설탕물만 먹였어요. 달다고 잘 받아 마셨어요.>
세상사람들은 약점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점을 담당하시는 분이십니다.
2. 이웃을 기쁘게 하고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1-2)
예수님을 본받는 다는 구체적인 삶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이웃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시려고 사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자체부터 고난의 삶을 자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남을 위하여 사시겠다고 작정하신 분이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되>
미국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성탄절입니다. 한 반에 아이들이 10명인 초등학교가 있습니다. 반마다 선생님이 성탄절 선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같으면 똑같은 선물을 똑같이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차별당하는 아픔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지 못 합니다. 비교의식이 강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다향한 민족이 사는 나라이기에 선물도 다양합니다.
똑똑한 아이가 받은 선물을 받고 보니 멍청한 아이가 받은 선물과 바꾸고 싶어졌습니다. 똑똑한 아이라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우리 내기하자. 그리고 내가 지면 이 선물을 네게 주고, 내가 이기면 바꾸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기가 이길 내기를 제안하였습니다. 멍청한 아이는 따라 하다가 졌습니다. 바꾸었습니다. 똑똑한 아이는 흐믓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 반에서는 반대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멍청한 아이가 선물을 받고 보니 똑똑한 아이가 가진 선물이 더 좋아 보여 부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똑똑한 아이가 그런 심정을 알았습니다. 똑똑한 아이가 멍청한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내기해서 바꾸기로 하자.>
멍청한 아이는 좋아서 동의하였습니다. 내기에서 똑똑한 아이는 일부러 져주었습니다. 바꾸었습니다. 멍청한 아이는 자기가 이겨서 바꾸었다도 좋아 하였습니다. 똑똑한 아이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여 놓고 행복을 느낍니다.
나도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나를 목사로 만들어 놓으시고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목사중에 목사>라고 하시며 자랑하며 다니십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오셔서 설교하시는 것이 최대로 기쁘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설교하시고 나면 우리 장로님들은 우리 아버지라고 다른 목사님들 설교하시는 것보다 두 배를 드렸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들 교회에서는 설교하시고 강사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하세요.> 아버지는 헌금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용돈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헌금하는 것은 좋아하시지만 내가 대신 드리는 것을 아시고는 별로 좋아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니까 당당히 받으세요.> 이제는 그렇게 하니까 부담감없이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설교시키고 교회 돈을 쓰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내가 은밀히 헌금을 드립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되>
이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기네스 북은 세계 진기록만 기록한 책입니다. 세계에서 자동차를 제일 많이 판 사람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죠 지라드입니다. 그의 수첩에는 자동차를 산 사람 명단 13,000명이 있습니다.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객들에게 편지를 쓰고 나서 꼭 끝에 쓴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I like you)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3. 하나님께 영광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갇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5-7)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사야는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그렇기에 우리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더니>(롬 3;23)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지난 달 중국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 6월인데도 달걀만한 우박이 쏟아져 공항 나무 꽃들을 다 망가뜨렸습니다. 그 순간 바로 중국 사천성 지진이 일어나 10만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도착하자 말자 소식을 들었습니다. 온 중국이 날리였습니다.
히로시마 원자탄 250개를 동시에 던진 위력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원자탄을 다 모아야 하나님이 30초 하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 이야기입니다.
걸리버가 여행을 하다가 소인국에 들어갔습니다. 개미만한 인간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불이 났습니다. 개미들은 조알같은 양동이에 물을 날라 불이 난 곳에 부었습니다. 그러나 불은 더 활기차게 타올랐습니다. 걸리버가 물을 한 모금 입에 담고 불었습니다. 집도 떠내려 가고 소인들 수 백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소인국 신문에 이렇게 대서특필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다.>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됩니다.
불과 40년 전만 하여도 미국은 흑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버스로 흑인석과 백인석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흑인들이 들어가지 못 하는 직장, 흑인들은 금지된 식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흑인이 백악관 주인이 될 일보 직전입니다. 그가 백악관에 들어가면 이름을 바꿀지도 모릅니다.
<흑악관>
하나님이 뒤엎으면 순식간에 뒤엎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매 주 기록을 갱신시켜 주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시다가 한번 뒤집어 주시면 순식간에 10,000성도 교회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밖에 10,000명을 구원하였으니 안에 10,000 명을 주리라.>
하나님이 제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과천 서울 랜드에 성막 세워질 줄 누가 알았습니까? 7월 12일에 성막 오픈 예배가 있습니다. 나에게 구상을 의뢰하였습니다. 아내와 둘이 구상하러 갔더니 60평에 디자인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습니다.
<60평은 작다라고 그래요.>
나는 서울 랜드에 성막에 세워지는 것만도 감격스러워서 좋아하고 있는 데 더 크게 세우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60 평 가지고는 구상이 되지 않습니다. 100평은 되어야 합니다.>
책임자가 곤란한 듯이 말했습니다.
<회의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고위층들이 모두 우리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나와 한 시간 대담을 하고 100평을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성막이 지난 주간 서울랜드로 떠났습니다. 내년 2월까지 빌려 주었습니다.
나는 7월 2일 한국 전 신문, 라디오, TV 기자들과 기자 회견을 할 것입니다.
7월 7일 미국에 들어가서 동북부 감리교 목회자 부부 쎄미나를 인도하고 11일 귀국하여 12일에 오픈 예배를 주관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면 살면 예수님을 본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록펠러를 본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세 세 단어에 주목하십시요.
1. 약점을 담당하고
2. 이웃을 기쁘게 하고
3. 하나님께 영광을
===========================================================================================
제목 : 나라가 임하옵시며
본문 : (마 6:9~13)
1.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주의를 집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눅4:43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읽은 주기도문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도제목임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가 이토록 소중합니까? 주기도문은 주님이 친히 가르쳐주실 만큼 기도의 본질이요, 신앙인의 목표가 되는 정금같은 기도문인데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간구하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2.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좋은 소식, good news, 복음(福音)이기 때문입니다.
1) 왜 하나님 나라가 복음입니까?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인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바,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산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에 합격하고 입학을 앞둔 때였습니다. 겨울이었는데, 광나루 역앞에서 마을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합격은 하였는데 등록금은 없고, 대구 촌놈이라 서울생활이 낯설고 막막하고, 무엇보다 ‘이제 목회 어떻게 하나’ 하는 영적인 부담감이 어깨를 꽉 누르고 있었습니다. 배도 고프고요.. 그런데 그 때 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찬송 하나가 울려 나왔습니다. 통합찬송가 541장입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예루살렘 새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주가 내게 부탁하신 모든 사역 마친 후 예비하신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빛난 하늘 그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 눈물이 철철 흐르는데, 지나 가는 사람들은 힐끗 힐끗 쳐다보고.. 쳐다보든지 말든지. 중요한 것은 눈에는 눈물인데 마음에는 한량없는 기쁨이 있더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눈에는 미쳤나 하지요. 조용필의 노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지요 ‘아 웃고있지만 눈물이 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아 울고 있지만 기뻐죽겠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평지에서 전하셨다 해서 평지수훈이라고 전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눅6:20-2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주린 자도 복이 있다. 이제 우는 자도 복이 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해도 복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주님의 이 말씀은 아멘입니다. “가난하냐 슬퍼하지 마라, 아프냐 울지마라, 배고프냐, 죽고 싶으냐, 사람들이 너를 소외시키느냐 그래도 힘을 내라 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에게 주지 않느냐. 세상 나라는 갖지 못해도 하나님의 나라가를 너희들의 것이 아니냐. ”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서 하나님의 얼굴 빛, 그 은혜의 빛을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희락입니다. 위로부터 유쾌하게 하시는 기쁨입니다. 이것을 구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구해야 괴로운 세상에서 기쁘게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면 삶이 참 행복해집니다. 도(道) 통한 사람 같이 됩니다. 삶의 일체의 비결을 알고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노라’ 담대하게 외칠수 있는 초인이 됩니다. 사도바울의 말이지요 빌4:12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삶의 모습입니다. 달인의 경지.
우리가 참 믿음의 사람이라고 존경하는 선조들의 삶이 다 이러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만, 믿음의 사람들로 거명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등 모든 분들의 삶에 대하여 히브리기자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분들의 현실은 참 볼품없었다는 것입니다. 눈물과 피땀 투성이, 도무지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히11:36이하의 말씀에 의하면 이 분들의 삶은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당한 그런 처참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삶이 천사도 흠모할 만큼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어지는 말씀, 히11:14절 이하,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한 성,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하셨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늘 소망하며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 나라가 그들 삶의 궁극적인 소망의 닻이 되어서 노도 풍랑이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좌초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달려간 결과! 하늘의 별과 같은 찬란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하고 체험하였던 그 하나님의 나라, 제게도 맛보게 하신바 그 눈물 가운데 내 영혼에 새기어 주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의 빛 때문에 지금까지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들 뿐입니까?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그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3.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신 두 번째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만 제대로 된 보람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가치관은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정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영적인 가치가 아니라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는 육체적 well-being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돈이 신이고 권력이 하늘이라’ 사람을 속이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 강화도 모녀 살해사건을 보면서 참 이 세상 가치관을 다시 한번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웃 아주머니 아니었습니까?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졸지에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된 어린 것들 데리고 농사지으며 살아가는데 그 부인을 죽였습니다. 그 딸도 죽였습니다. 남편 잃고 슬피 우는 장례식도 가까이에서 봤을 텐데, 인간 이하의 일을 저질렀습니다. 무엇 때문에! 보험금이 탐이 나서, 나이트 가서 진탕하게 마시고 놀고 즐기고 싶어서... 그 그릇된 가치관 때문이 아닙니까? 이것은 도덕성 상실이라는 말 정도로는 설명이 안됩니다. 영혼의 부재입니다. 영혼이 죽어있는 것입니다.]
4세기 기독교수도승 작가인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에 대하여 서술한 바 있습니다. 이분에 의하며, 그 세가지 영역은 탐욕적인 영역, 감정적인 정신적인 영역인데, 이 각 세 영역에 다시 세 가지 악습을 연결시켰습니다. 탐욕적인 영역에는 음식, 섹스, 소유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안에 더 많이 집어 넣어야 만족하는 욕망입니다. 감정적인 영역은 슬픔, 화, 그리고 아케디아(권태,나태함)입니다. 이것은 제어할 수 없는 공격성으로 나타납니다. 이 공격성이 때로 힘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하면 절망과 괴로움이 되어 자신을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 어둠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은 명예욕, 질투심, 그리고 오만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자만이라 했습니다. 자만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신을 높이 올려놓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비천한 모습임을 확인하는 순간, 그 위치에너지를 분노로 표출하고, 절망하거나 좌절하게 됩니다. 어둠의 권세에 빠져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내면세계입니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요? 이 세상 가치관 대로 살아가면 필경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그 죽음의 길입니다.
이러한 육체의 생각은 노도 풍랑과 같습니다. 우는 두루 삼킬자를 사자의 울음소리같이 온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따라가면 그 생은 파멸과 불행입니다. 이 파멸을 피하고 제대로 되고 가치있는 삶을 사는 비결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기도하는 삶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내 심령 깊은 곳에 하나님이 거하시므로 세상 그 어떤 어둠의 세력도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공간, 지성소가 형성되고 또 굳게 설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내면의 지성소는 에바그리우스가 제시한 아홉 가지 악습이 자리잡지 못하는 절대공간입니다. 안세름 그륀은 이 내면의 공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일상적인 문제들이 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쉴 수 있는데, 이곳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들을 사람들의 권력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초자아로부터, 죄의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나의 모든 행동이 상대화되며 나를 지배하는 절대적 권력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만이 있는 내면의 공간,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보람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릇된 가치관에 사로잡히면 개인 뿐만 아니라 한 나라도 패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최근 금강산 관광객 총격사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사나움입니다. 사납습니다.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무력시위 아닙니까? 수틀리면 지금까지 호의도 아랑곳없이 하루 아침에 이빨을 드러내는 야수성과 무정함아닙니까? 또 일본 정부에 의해 자행된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교과서 왜곡의 도발행위는 무엇을 말합니까? 36년동안 이름 뺏아가고 말뺏아가고 동녀들 성 노리개로, 국가의 기반인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짓밟고 망가뜨린 그 일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반성은 커녕 군국주의의 망령을 되살려서 그 기만과 사기행위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이제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거짓된 역사관을 심어주어서 자기들과 같은 거짓말쟁이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주려하는 실로 패역한 위정자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최고의 가치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거저 경제대국이면 되고 군사대국이면 되고....이것은 잘 먹고 잘 살면되고, 권력있으면 되고 하는 개인적 가치관이 집단화된 모습아닙니까?
하나님 나라를 모르면 사람 이하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지 않으면 세상 나라의 야수성과 야만성을 사기꾼 행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거저 이 사회를 개탄할 것이 아니라, 매번 분개하면서 그냥 억울해 하거나 저 나라를 저주만 할 것이 아니라 절박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이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알게 하소서. 주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4.
*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구하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나의 내면에 절대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도, 이 현실 사회와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의 역사에 있습니다. 그 근거는 10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말씀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헬라어 표현은 단순과거수동태입니다. 이것은 신적수동태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문법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이념이 대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킬 수 없습니다. 나의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슬픔 많은 이 세상도 하나님 나라로 화하도다” 무엇입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노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정자의 각성과 지혜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그릇일 뿐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에 불과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하십니다.
누가 저 북녘땅에 복음이 전하여지고, 저들 닫혀지고 완악한 마음문을 열수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누가 저 거짓되고 위선된 위정자들, 일본의 후한무치한 정치인들로부터 그 백성들을 바른 역사인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갈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의 역사입니다. K.Barth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영만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나라의 근사치에 조차 다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이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는 것은 육을 입고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누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본문은 그것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통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말씀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서 땅은 바클레이에 의하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의 결단을 뜻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 현실로서의 땅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그 뜻이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자신을 내어드리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진다는 것입니다.
[순종에 대하여 윌리엄 바클레이는 세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첫째는 패배적 순종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지적 순종입니다. ‘나는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마지막 세 번째는 즐거운 순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데서 오는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하나님의 지혜의 완전함과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함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모든 경우에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더욱 즐거운 순종이 필요합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그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을 능가하는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고 그 뜻은 언제나 그 은혜와 그 사랑안에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시편23편 말씀과 유비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 내가 부족함이 없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정의, 평화, 기쁨을 최우선의 가치로 알고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이 배고프고 두렵고 죽겠다 싶을 만큼 곤고한 삶이라 해도, 이 가치관대로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실 것이다. 영원히 하나님의 집 그 나라에 거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 분의 뜻은 언제나 은총과 사랑의 뜻이라는 것을 믿고 신뢰하는 자, 그에게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시고, 그를 통하여 이 땅 어두운 모든 곳에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야 말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인 줄 알고, 그 나라를 반드시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는 성도들 되시기 소원합니다.
그래서 항상 나의 삶이 어떤 배고프고 서글픈 현실이라 해도 신령한 기쁨을 힘입어 살아가며 내가 속한 가정과 이 사회와 나라와 북한과 일본, 그리고 지구촌 온 누리에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 넘쳐나는 신정통치, 하나님의 유토피아가 실현되고 회복되는 놀라운 일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증언하고 이를 실천하는 복 있는 성도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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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늘은 회복의 십자가를 질 때
본문 : 마8:5-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본문을 보면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으로 군사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로마군 사단급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병졸 100여명을 인솔하는 지휘관으로 오늘로 말하면 대대장급입니다. 이 백부장이 하루는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와서 “내 하인 한명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 하인을 고쳐 주십시오.”하고 탄원을 하였습니다. 당시 하인은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인격도 인권도 기대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하인이 중풍에 걸려 누워있습니다. 회복이 불능입니다. 주인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때 주인 백부장이 예수께 직접 쫒아와 “내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없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장 가자, 내가 고쳐주마”하고 흔쾌하게 승낙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니까 예수님도 마음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우리 집까지 가시는 것은 너무 죄송한 일이니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지리라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또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어지간하면 예수님을 모시고 가서 자기 집도 자랑하고 종이 많음도 과시하고 자기의 권세를 과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생하며 가실 것까지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백부장의 말에는 두 가지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 가서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안수하지 않아도 낫을 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산으로 기도원으로 안수 받으러 몰려다니는 신자들에게 아주 좋은 교훈을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 절대 능력이 있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지 않고 고치신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4장46절에 기록된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치신 경우이고 두 번째는 본문에 나와 있는 백부장의 경우입니다. 백부장은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고쳐질 줄 믿었습니다. 참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놀랍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10)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많이 천국에 갈 것”(11)이지만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12)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택함 받은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은 대로 되라”(13)고 보내셨는데 그 하인이 곧 나았다고 했습니다. 여기 본문이 말씀하는 의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 고발”
이 본문의 의도는 먼저 된 유대인들의 믿음 없음을 고발하려는 말씀입니다. 즉 “이 이방인인 군인의 믿음이 얼마나 깊고 철저하고 투철 하냐, 그런데 왜 먼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느냐“하고 탄식하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참 분노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늘 100점을 맞아 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는 늘 60점을 맞아옵니다. 그러고도 대견한 것처럼 시험지를 들고 오면서 큰 소리로 “나 60점이나 맞았다”고 떠들며 옵니다. 그때 어머니는 참 속이 상할 것입니다. 이웃집 애는 늘 100점을 맞아오는데 왜 우리 애는 60점만 맞아오는가 속상해서 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 마음도 그랬을 것입니다. 저 이방인 군인도 저런 믿음이 있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저런 믿음 있는 사람이 없는가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는 교훈을 따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왜 내 백성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느냐“(렘 35:14)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에, 벳새다에,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도했을 때 듣지 않고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때 경고하시기를 “이 모든 권능과 기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눈물로 회개하였을 것”(마 11:20-24)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 두로와 시돈은 바알숭배 중심지로 예부터 이방문물의 중심을 이루던 곳입니다. 본문은 이 이방인도 저렇게 믿음이 좋은데 왜 내 백성들은 이렇게 무지하고 믿음도 없고 고집스러우냐는 말씀입니다.
“백부장의 전인적 믿음 보여줌”
이 백부장은 이방인이고 군인이고 백부장입니다. 당시로서는 얼마든지 거드름을 떨고 교만하고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이 전인적 인격과 신앙을 갖춘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 “내 종이 중풍 병에 걸려 누워있으니 고쳐 주소서”하고 청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 집으로 가자”고 하니까 “말씀만 하소서, 그러면 낫을 줄 믿습니다”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감탄하십니다. 그때 감탄하신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백부장의 모습에서 감탄하십니다. 여기 백부장은 자기의 하인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당시 하인은 주인의 재산입니다. 가치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와서 고쳐 달라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감동받을 일입니다. 또 백부장의 믿음에서 감탄하십니다. “여기서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감탄을 받으신 것입니다. 또 백부장의 겸손한 모습에서 감탄을 받으십니다. 지배자가 한낱 하인의 건강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와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일은 종합적 인격 즉 전인적 인격의 신앙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백부장은 진정으로 양질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 백부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믿는 사람들 중에도 상당한 이기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인격이 미성숙한 신앙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 유익을, 자존심을, 체면을 따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세계에도 있을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문제들 하나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나누이고 찢기고 반목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마태가 여기서 이 백부장의 모습을 장황하게 열거하고 있는 이유는 오늘 현대인들에게 전인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기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 백부장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전인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
이 일은 단순한 인격이나 믿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를 지는 용기의 삶이 필요함을 메시지로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매사 불화하고 갈등하고 다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불화와 갈등과 다툼이 해결되는 곳에 가 보면 누군가 용기 있게 십자가를 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하인 중풍병자가 마침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 하인 중풍병자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중풍병자 하인이 고침 받은 것은 순전히 주인 백부장의 믿음과 용기와 수고 때문입니다. 이런 수고와 용기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는 곳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화해가 이루어지며 회복이 일어납니다. 여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오늘 이 시대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거기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앙의 삶은 회복의 삶입니다. 예수께서 가신 곳 마다 회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목마른 사람들이 해갈하게 되었습니다. 눈먼 자들이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앉은뱅이들이 회복되어 일어났습니다. 멸망 받을 사람들이 천국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회복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회복의 사역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회복되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이 세상은 다 어그러지고 뒤틀리고 찢어지고 불화되고 있습니다. 가정들이 다 뒤틀리고 찢어지고 있습니다. 관계들이, 신앙들이, 감정들이 다 뒤틀리고 찢어지고 상해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는 한 우리의 삶에 천국도 조화도 행복도 회복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화해자로 회복자로 나서라고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이 시대의 화해자이고 회복 자들입니다. 그 일을 하려면 거기에 십자가를 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백부장처럼 자신이 직접 예수를 찾아가는 용기와 노력과 수고와 진지한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어려운 짐입니다. 십자가는 용기가 있어야 질 수 있고 수고가 있어야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나에게 이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내 주변에서 회복이 일어나고 화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십자가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십자가를 회피하면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내가 회피한다고 섭리를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다른 사람이 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영광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게 하십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의가 이루어져서 그 시대를 향한 메시지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 종은 영원히 고침 받지 못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께 찾아가는 수고 때문에 고침을 받고 그 하인은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백부장이 십자가를 짐으로 한 사람의 인격이 회복되고 삶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지난 아프칸 사건 때 20여명이 인질로 잡혔습니다. 온 나라가 걱정하고 비난하고 왜 그곳에 갔느냐 하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그때 기독교 지도자들 모여 의논하면서 “기독교가 무너진다”며 우려하고 걱정하며 방안을 강구하였습니다. 그 때 우리 중 누군가가 가서 대신 인질로 잡히고 저들을 풀려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하고 말했습니다. 참 좋은 방안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가자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서 인질로 잡혀 있을 것입니까. 제안은 좋았는데 누가 그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그런데 놀란 것은 서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분위기에 나 자신도 떠밀려 가야할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면서 속마음으로 “내가 가야 한다면 가야지“ 하고 다짐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 자신이라도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가서 십자가를 지면 많은 사람들이 풀려난다면 갈 수 밖에 없지 않느냐 하고 자신에게 다짐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랬더니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더니 하는 말이 “왜 하필 당신이냐” 고 물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큰 십자가는 물론이고 오늘은 작은 십자가도 서로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자기의 부모 모시는 일도 하기 싫어합니다. 자식이 몇이 있는데도 서로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노부모들이 거리를 헤매다 죽거나 노인 요양시설로 보내어지거나 노숙자로 살아가고 있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교회건축도 십자가를 지는 일일 수 있습니다. 당장 헌금해야 하고 고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오늘은 그렇게 좋던 것, 중요하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덜 중요한 것 때문에 이 난리를 떨고 있고 돈 몇 푼 때문에 자기가 다니는 직장의 건물을 부수고 불 지르고 자기를 낳은 부모를 모른 체 내다 버리고 형제간에 돈 때문에 원수가 되고 아이들은 어른을 구별하지 못하고 버릇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 십자가를 지려고 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가정들이, 관계들이, 도리가 없어지고 온갖 불화와 갈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저는 어느 가정 때문에 한참동안 마음에 천국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62세 된 아버지가 간암 말기로 빨리 간을 이식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한 지경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중 누군가가 간을 내 놓아야 아버지가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 내 간을 내 놓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누가 내 놓아야 하겠습니까. 그런 경우가 발생하면 오늘은 다 회피합니다. 서로 안하려고 합니다. 한 아들이 용기 있게 하려고 하면 며느리가 한사코 반대합니다. 어떤 며느리는 간을 떼어주려고 하자 차라리 이혼하고 하라고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누가 십자가를 져야하겠습니까. 누가 내 간을 떼서 아버지에게 주어야 합니까. 그 일은 어쩌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서로 회피합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의 생명은 자꾸만 꺼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죽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그 가정은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회복이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참 건강한 가정이었습니다. 지난주 새벽기도 때에 그 부인 권사가 찾아와 어쩌면 좋으냐고 와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주일 예배드리고 온 가족이 모여서 의논하던 중 한바탕 싸워 난리를 피웠다고 합니다. 왜 싸움이 일어났는가 하면 서로 자기의 간을 떼어 내겠다고 싸운 것입니다. 부인은 내가 부인이니까 내가 해야 한다고 하고 큰 아들은 내가 장남인데 내가 해야 한다고 나섰고 작은 아들은 자기도 할 권리가 있다고 했고 며느리는 자기 남편이 해야 한다고 서로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인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목회하면서 이런 일들만 있다면 얼마나 재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일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기적을 주시려고 이러시는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완전히 회복된 가정입니다. 아주 건강한 가정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 같지만 오늘 이 시대는 이 일이 가장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은 서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백부장에게는 하인이 병을 고친다고 해도 아무 이익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진급하는데, 출세하는데 아무런 유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 찾아가 하인을 고쳐달라고 애원을 해서 고침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 본문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뜻이 상실된 시대입니다. 진정한 헌신과 수고와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원망과 불평만 있는 세상입니다. 오늘 이런 일을 회복하려면 누군가 십자가를 질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조그만 십자가를 지면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도 내가 십자가를 지는 용기만 있으면 다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회복의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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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의 멍에를 메고
본문말씀 : 마태복음 11:25~30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11:25-30
정신의학전문의 대니얼 고틀립 박사는 어린 시절 학습장애로 어렵게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암에 걸렸습니다. 비록 완쾌는 되었지만 고통스러운 투병생활로 부부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틀립은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되어 전동 휠체어를 의지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고틀립은 자신의 이러한 모습에 좌절했고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며 떠났습니다. 그 후 떠난 아내가 사망하고, 유일하게 의지하던 누이와 부모님이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고틀립에게는 둘째 딸이 낳은 손자 샘이 있었습니다. 샘을 너무도 사랑했으며 휠체어에 기어 앉은 샘을 한없이 바라보며 샘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4개월 밖에 안 된 샘에게 ‘자폐아’라는 판정이 내려집니다. 너무도 절망적인 상황이 된 것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상황이 되면 ‘떠나라’고 말합니다. 훌훌 벗어버리고 며칠 씩, 혹은 몇 주를 떠나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보면 여전히 무거운 짐과 멍에가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자포자기하고, 또다시 절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죽음만이 모든 고통과 멍에를 벗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고틀립 박사는 자폐아로서 힘든 인생을 살아갈 손자 샘을 위해 편지글, 즉,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남겼는데, 그 중에 눈을 뗄 수 없는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난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터널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외치며 출구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 다가와 나와 함께 어둠 속에 앉아 있어줄 사람, 우리 모두에겐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샘! 상처를 입으면 널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거라. 널 비난하지도, 섣불리 충고하지도 않는, 네 아픔을 함께 해줄 사람 곁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두운 터널에 있을 때, “멍청하게 왜 그러고 있니, 빨리 나와”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말은 참 쉽지요. 하지만 터널 속에 그러고 있고 싶어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결혼 후 8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몸이 약해 3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7살 때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시댁의 비난과 남편의 냉담함이 심해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혼 후 교인들에게서 오는 냉담함에 놀랐고 특히 주위 사람들의 충고는 가시로 와 닿았답니다. 그분은 “그 당시 가장 필요했던 것은 충고가 아니라 나를 이해해 주고 그저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틀립 박사가 샘에게 이야기 해준 그대로입니다.
어두운 터널 속 상황에서는 우리에게 충고해 줄 사람이 아닌, 나와 진정으로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섣부른 충고도, 비난도 하지 않고, 내 아픔을 함께 하면서 그저 말없이 나의 그 어두운 터널로 내려와 있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고틀립 박사가 샘에게 하는 마지막 충고는 그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분이 이미 계십니다. 우리가 찾아가지 않아도, 손만 내밀면 만질 수 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떠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짐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멀리 도망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그대로 지고 예수님께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로 가기만 하면 모든 짐을 벗기고 참된 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절). 듣기만 해도 힘과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그 무거운 짐들에 짓눌러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25~26절 말씀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당시 율법 안에 있어 나름대로 구원의 길을 알고 있고, 이런 일에는 자신만만하다고 스스로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로 생각하고 있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처럼 내가 할 수 있고,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선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은 듣습니다. 또한 이에 응답하면 짐을 벗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짐을 내려놓기 전에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나의 지혜와 나의 경험과 나의 고집과 나의 자존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실은 그게 나의 가장 큰 짐입니다. 지게 위의 짐을 내리는 것보다 지게 자체를 벗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걸 내려놓지 않고서 인생의 짐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어깨에 큰 배낭을 메고 아빠를 바라보며 “아빠”하고 부르면 아무리 무심한 아빠라도 그 배낭을 벗겨주어 어느새 그 배낭은 아빠의 어깨에 있게 되지요. “아빠”라는 말 속에는 ‘전적으로 나를 책임져 줄 거야’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제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가 보면 똑같습니다. 어려운 살림, 무심한 남편, 공부 못하는 자식,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면 그 순간 피곤한 몸과 영혼이 위로받고 격려 받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가고, 집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세상의 수많은 짐들로 인해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쌓여만 갑니다. 짐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이 짐을 어찌해야할 지 몰라 당황하게 되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식의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29절 말씀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서 쉼을 얻는다는 뜻의 ‘유리스코’라는 단어는 ‘찾다, 발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 마음이 쉼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초청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가면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이것이 28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29절에는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고 나서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면 우리 마음이 안식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발견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다른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 오면 우리는 또 쓰러지게 됩니다. 이 쉼을 어떻게 발견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29절 중반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놓치기 때문에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주님께로 가면 모든 멍에를 다 벗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 즉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지지 않고 가야 참 안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가는 것이 참 안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는 원래 소들이 밭을 갈 때 사용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멍에를 안 매우는 소들이 있긴 있습니다. 그 소는 잡아먹기 위해 키우는 비육우입니다. 비육우는 멍에를 매게 하지 않습니다. 멍에를 메면 살이 안 쪄서 잡아먹기가 나쁩니다. 멍에를 메지 않는 소는 밭을 갈지 못합니다. 밭을 갈아야 거기에 곡식이 나고, 야채가 납니다.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멍에를 메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걱정, 근심, 어려운 상황,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멍에가 있고, 그 멍에를 메고 인생의 밭을 갈아엎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멍에를 벗고 싶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멍에를 메고 있는데, 그 고삐를 누가 잡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쾌락이 고삐를 잡으면 쾌락의 밭을 갈고 쾌락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생명을 낳긴 낳는데 죽은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의 고삐를 잡고 있으면 욕심의 밭을 가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결국 나의 인생 밭에 사망의 열매들이 맺히게 되겠지요. 원망이 나의 고삐를 잡으면 원망의 열매들이 내 인생의 밭에 주렁주렁 맺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고삐를 잡고 계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은혜의 열매를 맺는 밭을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무엇일까요?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30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현재 내가 지고 있는 멍에보다 크기도 작고, 플라스틱처럼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무게도 적게 나가는 그런 멍에가 아닙니다. 사실 이 멍에는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멍에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도 무거운 것입니다. 너무도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십자가의 고생 때문에 그 멍에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을 핏방울 같이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그 안에서 깃털처럼 가벼운 자유를 누리셨습니다. 멍에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배우고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발견하면 그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던 멍에가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벼워질 수 있습니까? 비결은 우리가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해 보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 앞에서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말하고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겨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기까지 나를 섬기신 주님처럼 최선을 다해 섬겨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온 힘을 다해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심장이 터져버린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내 가슴도 사랑으로 터져버리도록 사랑해 보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배운다는 것은 주님의 삶을 묵상하고 주님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지고 있는 멍에가 무겁지 않게 느껴집니다. 가족의 짐, 사업의 짐, 관계의 짐, 환경의 짐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나는 기쁨으로 그 멍에를 메고, 감사함으로 짐을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참된 안식을 인생에서 꼭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께 배우지도 않고, 배운 것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짐만 벗겨달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요청이고, 기복적인 신앙입니다. 그저 먹으려는 습관을 이제 포기하십시오. 그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 힘들지 않습니까? 순종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며 살면 사실 너무 힘듭니다. 그렇게 힘들 때 뒤를 한번 돌아보세요. 그러면 거기에는 사랑 자체이시고, 참된 안식이신 우리 주님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여전히 서계실 것입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여러분, 잔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피 묻은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발견하고 주님의 그 사랑을 믿으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나의 멍에도 사랑의 피를 흘리며 나와 함께 메고 가고 계심을 눈으로 목격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금까지 흘린 모든 눈물보다 훨씬 더 많은 피 흘려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으세요. 그 사랑에 내 몸을 던지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워서 나에게 주어진 멍에를 가볍게 메고 기뻐하며 찬양하며 걸어가는 복된 인생길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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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배 밖으로 나아오라
본문 : 마 14:22-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
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교회생활을 오래하면 자신도 모르게 언어와 사고와 생활과 습관이 훈련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 오래하면 “할렐루야, 주여, 아멘, 주님의 뜻”이라는 말이 쉽게 나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대화의 용어들만 들어 보아도 그 사람이 크리스천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말 한필을 훈련했습니다. 훈련받은 그 말은 잘 달리는 준마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이웃집 사람이 보고 그 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싸게 사려고 흠을 잡으며 한번 타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타 보라고 했습니다. 출발할 때는 “주님”하고 멈출 때는 “아멘” 하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람이 말을 타고 “주님“하니까 잘 달렸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한참 신나게 달리다 앞을 보니까 갑자기 낭떠러지가 보였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 “워워” 해도 그냥 달렸습니다. “스톱, 멈춰”해도 그냥 달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멘”하니까 그 말이 가까스로 섰습니다. 그리고 앞을 보니까 한발만 더 나아갔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순간 온몸에 땀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한숨을 내 쉬면서 말했습니다. “오 주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해서 전열을 정비하고 그동안 집중적으로 이론교육을 마치셨습니다. 이제 14장에 들어와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실제로 훈련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먼저 고향에 가서 전도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먼저 큰 은혜를 주시려고 고향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환영이 아니고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나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본문 바로 직전에서 예수님은 벳세다 광야에서 5병 2어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예수님에게서 감추어진 신성을 알고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사람들을 해산시키시려 제자들을 배에 태워 게네사렛 호수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홀로 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십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현장교육을 시키십니다.
그때 바다에 광풍이 불어 제자들이 사나워진 풍랑과 싸우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때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 오셨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그때가 밤 사경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밤을 사경으로 나눕니다. 1경은 오후 6시부터 9까지를 말합니다. 2경은 밤 9시부터 12까지고, 3경은 밤 12시부터 새벽 3시까지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하는 4경은 새벽 3시 이후를 말합니다. 그 새벽시간에 누군가 물위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것이 유령인줄 알고 놀라 무서워 할 때 주님께서 “내니 무서워하지 말라”하고 안심시키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가 “나를 물위로 걸어가게 하소서”하고 말하자 주님은 “내려오라”하고 그를 부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몇 가지 의도를 내 보이십니다.
모험 하라
베드로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물론 곧 물에 빠졌지만 주님은 그에게 뛰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모험의 길을 훈련하신 것입니다. 아이는 언제나 붙들고 다닐 수만은 없습니다. 넘어져도 홀로 걷는 연습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도 때로 이런 모험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기적이 일어난 곳을 보면 대부분 이 같은 모험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중풍병자가 사람들에게 들려져 예수께 찾아가 보았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다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진퇴양란이었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그냥 집으로 돌아 왔으면 그는 영원히 치유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붕을 뚫고 내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치유함을 받습니다. 이 지붕을 뚫는 모험이 기적을 불러왔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먼 곳에 격리되어 살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성내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은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각오로 성내로 들어와 예수께 찾아가 고쳐달라고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그때 비로소 고침을 받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더라면 더 이상 기적도 치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우여곡절 끝에 입신을 해서 왕의 총애를 받습니다. 그때부터 뭇 사람들의 시샘을 받습니다. 그는 매일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적어도 예전에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기도하면 함정에 빠집니다. 그냥 함정이 아니고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래도 다니엘은 하던 그대로 기도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면 하나님이 건져주실 줄 믿고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건져주지 않아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여전히 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행동은 죽기를 각오한 대단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사자굴속에 던져졌고 하나님이 그를 건져주시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모험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궁의 법도를 무시하고 왕에게 나아갑니다. 그때 자신도 살고 민족도 살고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주저주저 하고 나 혼자만 안전하려고 했더라면 결국 자신도 망하고 민족도 망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그런 용기를 발휘하고 모험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번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험을 감행할 때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간 것도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의 상상을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모험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지금 배 안에 있습니다. 그곳은 안전한 곳입니다. 평안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평안은 있지만 그냥 있으면 기적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에게는 이 배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위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면 주님은 때로 우리를 이끌어 내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중병의 길을 가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때가 밖으로 나아갈 때입니다. 실패로 시련의 길을 가게도 하십니다. 불화로 갈등의 길을 걷게도 합니다. 얼핏 보면 재수 없어서 그런 일들이 내게 주어진 것 같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나로 하여금 밖으로 나오게 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모험의 삶을 살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길을 순종하고 걷고 보면 신앙의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모험의 길을 걷게도 됩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모험의 신앙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체험하고 새롭게 만나고 새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행동 하라
신앙이 오래되면 때로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신앙으로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가 오래되면 이론 신앙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 신앙은 대부분이 물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눈물도 없고 감격도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5장부터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이론교육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14장에 와서 현장교육을 하십니다. 현장교육을 하려면 배에서 출렁대는 바다로 뛰어내려야 합니다. 내려오면 때로 빠지기도 하고 물을 먹기도 하지만 그래도 뛰어내려야 합니다. 유능한 수영선수가 되려면 물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론교육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임상교육 시대입니다. 현장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동하고 합니다. 잘 되는 회사는 사무실을 벗어나 밖으로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이제는 이론 중심학과는 인기가 없습니다. 사회에서 별로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임상 경험을 중시하고 현장과 실제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그동안 이론 신앙을 중심으로 평안히 배안에서 신앙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40년 만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론 신앙에서 행동하는 신앙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안에서 배 밖으로 나아가는 신앙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안전한 배에서 뛰어내리면 위험이 있고 모험이 필요하고 물을 먹어야 하듯이 교회를 건축하려면 우선 헌금을 해야 합니다. 갑자기 지출을 경험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아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평안히 신앙생활 하다가 어느 날 기도원에 가야 하는 것도 바다로 뛰어 내리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기도원에 가 보지 않은 분들은 기도원에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경험이 없어서 우선 겁부터 납니다. 그래서 가지 말자고 반대부터 합니다. 그런데 한번 가 본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오히려 재미도 있습니다. 철야기도회도 금방 지나갑니다. 금식기도도 하고 보면 상쾌합니다. 맛이 있습니다. 몸이 가볍습니다. 그래서 또 하고 싶어집니다. 바다로 뛰어내리는 모험도 하고 나면 용기가 생깁니다. 담력이 생깁니다. 또 내리고 싶어집니다. 겁도 없어집니다. 베드로도 뛰어내리기 전에는 상당히 망설였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뛰어내렸습니다. 물에 빠지기는 했지만 큰 경험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수제자가 된 이유도 그런 모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그 행동은 다음에 또 자연스럽게 그런 모험을 감행하고 용기를 발휘해서 또 행동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이 부활하신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잡이 하던 밤중에 주님이 바다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누군가 “주님이시다”라고 외칠 때 베드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즉시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요 21:7). 왜냐하면 한번 경험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는 배 안에 앉아있던 신앙에서 배 밖으로 뛰어 나가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베드로를 밖으로 나아가게 하신 이유입니다. 신앙생활은 이론 생활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장교육과 훈련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어떤 환경에 처해도 역할을 다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안을 보라
사람은 안에만 있으면 안전의식에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그리고 시야나 생각이나 의식이 좁아집니다. 그래서 때로 밖으로 나아가고 나가서 밖도 보고 안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나가면 밖의 넓은 세상이 실감나게 보입니다. 또 안을 들여다보면 구태의연한 것이 보이고 작고 좁은 것이 눈에 보입니다. 옛날 고향에서 자랄 때 동네 앞에 흐르던 시냇가가 얼마나 넓고 깊었습니까. 뒷동산이 얼마나 크고 높았으며 옛날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얼마나 크고 넓었습니까. 그런데 오늘 다시 가서 보면 얼마나 좁고 얕고 작은지 모릅니다. 밖에 나가서 넓은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안목을 가지고 안을 들여다보니 실상이 보인 것입니다.
배안에 있으면 평안하고 안전하기는 합니다. 온실은 따뜻하고 안전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언제까지 배안에서만 있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이제 얼마 있으면 죽으시는데 승천하시는데 언제까지 우리끼리 안전하게 양지에만 있을 수 있습니까. 배 밖으로 나가면 피곤하고 파도가 무섭고 바람으로 물결이 거세게 일어 바다에 깊이 빠질 수 있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사후에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훈련은 쉽고 재미난 것이 없습니다. 모든 훈련에는 매사 모험과 수고와 위험이 뒤따릅니다.
엊그제 TV 프로에 청각장애인 대학생이 무용을 참 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대학생은 음악을 전혀 듣지 못함에도 감으로 듣고 감으로 언어를 익혀 무용을 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기에 청각장애가 있는데도 이렇게 까지 훈련이 되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내가 죽은 후에 혼자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무섭게 훈련시켰다고 했습니다. “엄마”라는 말 한마디 배우는데 수백 번 수천 번 말하도록 연습을 시켰다고 합니다. 할 때까지 어린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고 훈련을 시킨 결과라고 합니다. 그 결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아이가 감으로 듣고 말하고 무용도 하고 대화도 가능한 상태까지 된 것입니다. 그 부모는 주님처럼 아이를 험한 현장으로 내 보낸 것입니다. 바다로 불러낸 것입니다. 처음엔 사정없이 물을 먹였습니다. 그 후 훈련되어 세상을 혼자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은 이제 얼마 있으면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주님이 가신 후 제자들끼리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안타깝지만 배 밖으로 제자들을 불러내셨습니다. 모험하게 하셨고 강해지게 하셨고 그들에게 자신의 신성을 보이시며 훈련하셨습니다. 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언제까지 집안에서 배안에서 안일하게 부모들 곁에 끼고 살아가겠습니까. 나가야 합니다. 거센 바다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나가 싸워야 하고 스스로 헤엄칠 때까지 물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험난한 길을 가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배 밖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 물로 뛰어 들어가는 모험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대단히 사랑이었습니다. 때로 실수도 했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온통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사람입니다. 누군가 “주님이시다” 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다로 뛰어내렸던 사람입니다. 베드로 말고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또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신적 권위를 발견하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배에서 내려오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뛰어내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상상도 못할 일을 베드로는 실행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100% 신뢰한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이런 용기가 발휘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는 이런 신뢰가 나옵니다. 또 하나는 중심입니다. 베드로는 “너도 떠나려느냐” 는 주님의 말씀에 “주님이 여기 계시매 내가 어디로 가리니까”하고 자신의 분명한 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주님을 향한 중심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베드로로 하여금 뿌리 깊은 이런 중심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 중심은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신적인 권위입니다. 이 신적인 권위를 발견하게 되면 이 같은 중심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와 중심을 이루는 생활입니다. 그때 그곳에서 깊은 신앙이 발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내 목숨을 내 맡기는 모험이 발생하고 깊이 있는 신앙의고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주님을 향한 이 중심을 이루는 삶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신앙이 중심을 이룰 때 거기서 무게가 주어지고 헌신이 이루어지고 전폭적인 신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배 안에서도 역사하십니다. 동시에 주님은 배 밖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배 밖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배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언제나 이 용기가 있어야 하고 모험이 있어야 하고 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증명되고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지 말고 대신 길이 없는 곳으로 가라, 그리고 자취를 남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 세상에 그런 발자취를 남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러내셔서 그 길을 가게 하시고 그런 발자취를 남기라고 하십니다. 그 발자취는 신앙의 모험생활에서 주어지고 신앙의 행동에서 주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모습에서 거룩한 신성을 발견하는 안목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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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본문 : 마태복음 16:13~20
1985년 6월 첫 주일에 박조준 목사님과 여러분이 이렇게 갈보리교회를 창립함으로 오늘 23주년이 되었습니다. 그 결정은 참으로 잘하신 거룩한 결정이며 여러분 전 생애에 가장 잘하신 일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교회 창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그 모임을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아무데서나 가능합니다. 우리 집 거실에서 할 수도 있고 공원 잔디밭에 모여서 얼마든지 교회를 할 수가 있고 자동차 안에서도 교회를 할 수 있고 사무실에서도 할 수가 있고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교회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서도 다양한 교회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모래벌판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부르고 노아의 방주도 교회의 개념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루살렘교회,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와 같은 수많은 형태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분명한 결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훌륭한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사역할 사도직 제자를 선택하시고 훈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 사역 가운데 주님의 마음이 가장 흥분하고 기쁘셨던 한 순간이 성경에 나타나는데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중심은 메시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메시야성에 대한 정확한 발표를 하니까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즉시 새로운 선언을 하나 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 창립 선언을 그 자리에서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교회가 세워짐으로 하나님의 구원 진리의 빛을 세계인에게 비춰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피를 주고 교회를 사셨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머리라고 정의했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계시가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지고 있는데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함으로 하나님 말씀 전달의 상대가 교회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 보면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렇게 교회가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교회관의 정립입니다. 교회 없는 신앙생활이란 절대 안 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내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저 같은 목사에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교회를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도움이 됩니다.” 좋다는 기준이 무엇인가?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 신앙생활의 강조점은 개인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기준도 다 다르게 정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정할 때 설교에 강조점을 두어서 말씀이 와 닿는 교회를 선택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그 교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사역 강조점에다 자기 신앙생활의 무게를 둡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는 가까워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야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갈 수 있다며 가까운 교회에 강조점을 두는 그런 교인들도 많습니다. 어떤 교회는 자녀 신앙 교육에 초점을 맞춰서 교회를 정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교회에서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너무 큰 교회가 싫은 사람도 있고 너무 작은 교회도 귀찮아합니다. 이렇게 각자가 다 다릅니다. 얼마 전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니까 그가 다니던 교회는 한 달 사이에 교인이 수천 명이 늘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교회를 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자기 신앙생활의 가치관이 이렇게 하면 좋다고 판단되는 교회에 가셔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평생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대해 불평, 불만을 하면서 끝까지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바꾸지 얼마든지 교회가 있는데도 자기는 그 교회에서 무슨 주인 역할을 해야 되는 것같이 생각하고 그 교회 아니면 안 되는 것같이, 이 교회는 내 의사를 꼭 반영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많이 받게 됩니다. 신발이 안 맞으면 바꿔 신으면 편할 것 아닙니까? 남편이나 아내를 바꾸는 일은 큰일이지만 출석 교회를 바꾸는 것은 나 같은 목회자는 장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 마치고 제일 나중까지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나에게 인사하기 위해 남은 겁니다. 내 앞에 오시더니 연세는 나보다 위인 것 같은데 90도 각도로 정중하게 절을 하면서 내 손을 붙잡고 얼마나 감격해 하시는지 모릅니다. 저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하는 첫마디가 뭐냐 하면 “목사님, 나는 오늘에야 찾았습니다.” ‘6·25동란 때 헤어진 가족이 있었나?’ “내가 이민 온 지 7년 되었습니다. 내 신앙에 도움이 될 만한 교회를 7년 동안 매주일 찾아다녔는데 못 찾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찾았습니다.” 목사는 그럴 때 신납니다. “이야! 그래요?” “목사님, 참 감사하고 오늘 말씀 너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칭찬해주셔서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 안 나옵니다. 알고 보니까 그 분은 유명하신 분입니다. 날마다 교회를 바꾸면서 날마다 그 교회 목사에게 그렇게 말하고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다 압니다. 소문이 나서 우리 목사님들이 모이면 그 사람이 화젯거리입니다. “지난 주일에 어디 갔어? 거기 갔어, 여기 갔어?” 저는 그 사람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일을 하면서 돌아다니면 모르겠는데 가는 교회마다 용기를 주고 떠나잖아요? 아마 이민교회 목사님들이 하도 힘들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돌아다니는 은사를 주셔서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게 칭찬하며 다니는데요. 그 유명하신 분이 제가 목회하는 곳에 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셨는데 반석이란 무엇이냐? 베드로의 고백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를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구원의 메시야로 고백하는 그것이 곧 반석입니다. 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이단이 됩니다. 이단들은 모두 교주권을 인정합니다. 예수 외에 어떤 특정 인물을 그리스도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교회가 급성장한 축복과 동시에 적그리스도를 대량 생산한 나라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한국에서 종교가로 성공하는 것은 이단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이 있다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 감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수천 명씩 움직이면 간단합니다. 뭐 하나 들기만 하면 따라서 막 움직입니다. 비판 없이 몰려다니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종교계에도 그것이 많이 나타나니까 신앙촌, 통일교를 비롯해서 수십 명의 가짜 예수가 놀라운 성장을 하면서 교계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그런 것은 반석이 아닙니다. 교주를 중심하여 모이는 집단입니다. 때가 되면 그런 것은 다 무너져 버립니다. 교회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존재하는 택한 백성의 공동체,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기업으로서 주께서 부탁하신 구원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체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가치관을 설정하는 겁니다. “내가 내 주변에 가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여러 가지 내 주변에 가장 가깝게 이르고 있는 버리지 못하는 그것을 나와 복음을 위해 너희가 버릴 때에 나는 그 사람을 축복하여 이렇게 약속하겠다.” 이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나와 나의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자는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큰 보상을 약속하는 설교를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 비추어서 세상의 역사를 평가해보면 됩니다. 어느 나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모두 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고 교회가 왕성하면서 모두가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역사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한국 역사만 보아도 잘 비교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오면서부터 이 나라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한반도에 신문화 교육 기관이 하나도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들고 들어와서 전도를 하다가 이 나라의 학교가 필요한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 최초로 학교를 세워서 그로부터 우리나라가 이렇게 교육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 한방 외에는 병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이 나라 백성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가? 병원을 세워야 되겠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최초로 병원을 세워주는 것이 기초가 되어 이 나라가 이렇게 의학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교회 성장과 함께 교육이 성장했고 사회가 성장했고 아울러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역사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한 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다 망했습니다. 소련은 왜 없어졌습니까?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이고 제일 강대국이었었는데요. 공산국가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 탄압 정책을 쓰더니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로 새로 태어났고 소련의 지배를 받은 위성국가 15개국이 다 독립했습니다. 그렇게 땅 덩어리가 크고 지하자원이 많은 나라가 빈민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복음이 다시 부활하면서부터 지금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까운 중국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 탄압하고 빈민국가로 전락했다가 그 나라에서 다시 교회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5대 종교 가운데 기독교가 가장 발전하고 있고 지금 중국의 경제 부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누가 반대 이론을 말할 것입니까? 북한은 어떻게 됐습니까? 6·25 동란 이전에 2300개 교회가 있었는데 다 문닫아버리더니, 하나님이 식량의 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5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계 유엔이 인정한 193개국 중에서 경제권 10위권 안에 진입하는 것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서 계속해서 복을 누리고 살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뭡니까? 이것은 영적으로 내다봐야 됩니다. 주님의 약속 “나와 복음을 위하여 버리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한번 그렇게 절대 믿음을 가지고 실천해 보십시오.
가장 가까운 사실적 증거를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발표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갈보리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 사역에 조금은 힘에 지나칠 만큼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선교사가 이달까지 600명이 확정되었고 2010년 12월까지 1000명 선교사 파송 계획이 끝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근심스러운 걱정을 많이 전했습니다. “선교사 10명도 힘든데 1000명을 어떻게 파송하시려고요?” “이필재 목사 허풍쟁이 목사인가?” 그런데 여러분, 주보에 매주일 헌금 통계 내잖아요? 계속해서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 우리 갈보리교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교비 지출 늘이는 것만큼 하나님이 헌금을 더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교 많이 하면서 자체 교회가 더 풍성하여졌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지금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보세요. 교육관이 계속 모자라서 일 년에 교육관을 하나씩 건축해야 됩니다. 제4교육관이 지금 웅장하게 60퍼센트 건축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잔머리 굴리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봐야 됩니다. 제가 잘 쓰는 단어 가운데 이것을 ‘사도적 관찰’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는 TV 전도사 설교가 영향력이 있습니다. 전국의 방영되기 때문입니다. 과격파 전도사들의 설교가 뭔지 아십니까? “앞으로 미국은 로마와 같이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이유가 뭐냐? “이 나라가 청교도 신앙과 세계 선교 주역을 감당할 때 세상에서 가장 짧은 역사에 가장 큰 축복을 이 땅에 내리셨는데 이제 미국이 향락에 도취가 되어 그것을 줄이고 있으니까 미국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니 두고 보라.” 이것입니다.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됩니다. 성경의 약속! 조상이 하나님께 충성하면 수 천대 자손까지 복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인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풍성하십시오. 헌금 드리는 일 인색하지 마십시오. 우주 만물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복음 전파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교회를 위한 일이라면 뜨거운 열정으로 하십시오. 구경꾼 같이 하지 마시고 앞장선다는 믿음으로 하십시오. 절대 손해 안 납니다. 하나님은 거짓말 안하십니다. ‘내 말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생을 예수 믿으면서도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는 겁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우리 역사에 우리 갈보리교회 자체에 그런 하나님의 손길이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왜 그렇게 믿음이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30년을 목회하면서 ‘Pulpit’이라는 신앙잡지 발행으로 미국 교계에 널리 알려진 스피노스 조디아티 목사님이 30년 동안 자기가 경험하고 조사한 내용을 자기가 발행하는 잡지에 늘 발표하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들의 사랑을 받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그 잡지를 보면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라는 제목이 나옵니다.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이 있다.” 아주 쉬운 특징입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날마다 시설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한다. 주차장이 모자랍니다. 교육실이 또 모자랍니다. 그게 살아있는 교회다. 그리고 살아있는 교회는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 아이들이 다치고 유리창이 깨지고 더러는 싸우는 소리가 나고 와글와글하는데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하는 소리는 일꾼이 부족합니다. 성가대 가입하십시오. 교사 지원하십시오. 봉사자로 나서주십시오. 이 광고가 끊임없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이다. 그리고 예산을 항상 초과 지출하기 때문에 은행잔고는 항상 없는 교회이다.” 맞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오늘 헌금해 주셔야 일주일동안 생활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런 말도 나옵니다. 어느 교회 담임 목사가 월급만 올려드린다고 하면 화를 내십니다. “아니, 월급을 올려드린다고 하면 좋아하셔야지 화를 내십니까?” 집사람이 물으니까 대답이 이렇습니다. “수금은 내가 해야 돼! 힘들어.” 그 다음에 “자기 교회 밖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이다. 선교사업, 구제사업, 봉사 사업….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미얀마가 어떻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가 어떻게 되었습니다. 생전 보지도 못한 교회 밖을 향하여 관심을 쓰는 교회! 또한, 모르는 얼굴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나 하나는 점점 외로워지는 교회! 이것이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죽은 교회는 시설이 남아돕니다. 시설이 남아도는 교회를 여러분은 한국에서 못 보셨을 겁니다. 미국 가면 시설 남아도는 교회 천지입니다. 그 좋던 신앙이 문화재가 될 만큼 그렇게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은 건축물들이 남아돕니다. 텅텅 비었습니다. 그것은 죽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문제도 하나 없다는 것입니다. 은행에 잔고는 언제나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꾼이 필요하다는 광고는 전혀 없고 헌금 요청하는 목사의 설교도 없고 새로운 얼굴은 안보이고 언제나 아는 얼굴들만이 서로 마주치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 성경에 교회 본질이 나타났습니다. 그 본질을 지켜 가면 교회는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 복음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교회, 친교와 봉사가 성도의 행복을 주는 교회, 아울러 관료주의나 세속화에 물들지 아니하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가는 교회!
교회가 창립주일을 지키는 의미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초심으로 돌아가자. 창립 당시로 돌아가자.” 두 번째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창립주일을 지키는 겁니다. 갈보리교회는 이제 23살 된 건강한 청년입니다. 무엇이나 가능한 청년기에 들어섰습니다. 이제부터입니다. 우리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서 21세기에 이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우리 갈보리교회 하나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에 복음의 빛을 발할 수 있는 그 계획 속에서 교회는 세워졌고 여러분은 그런 목표의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세계를 향해 진리의 빛을 발하는 교회로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우리는 기원하며 성도들의 삶도 날마다 영적으로 업그레이드되고 풍성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이 23년전 이 땅에 세우신 이 갈보리 공동체를 통해서 모두의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 지나간 23년 동안 갈보리교회를 지켜주시고 오늘날 마침내 세계 선교의 큰 역할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성장시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큰 주님의 쓰임의 사역의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이 교회가 창립하고 지금까지 몸과 마음을 바치고 있는 여기의 모든 아버지가 쓰신 오늘의 사역자들에게 건강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축복의 역사가 약속되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 제목 : 주가 쓰시겠다 하라 본문 : 마-21-01- 성 경 구 문 마태복음 21:1~9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어 새끼와 함께 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3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셔서 입성하시는 참으로 귀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나귀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 이 나귀는 얼마나 축복이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그 나귀에게 임한 영광이 너무나 크고 귀한 것입니다. 주께 쓰임 받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쓰임 받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행복과 불행, 생명과 죽음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신 것은
첫째, 모든 만물이 다 주의 소유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만물의 주인(소유주)이심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라들이 분노하고, 열방들이 훤화하고, 인생들이 각기 제 나름대로 자기 의지를 가지고 동서남북을 띠 띠고 다닐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주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세계 각 나라들이 국경과 한계를 정해서 ‘내 나라, 네 나라’ 하고, 섬 하나를 놓고도 침략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모든 것이 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한계를 지어서 국가 단위를 형성케 하고,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자유와 구원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역사해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부를 때 우리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주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1~2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뿐만 아니라 새와 물고기, 동물, 인간 등 모든 만물을 다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다 도와주실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음성과 건강, 시간, 재산, 지위, 명예, 권세’ 등을 쓰시고자 할 때 마땅히 ‘아멘’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주께서 예언하신 바를 그대로 진행하는 과정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4,5) 예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고자 하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가랴 9장 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경륜이 아닌 것이 없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창세로부터 마지막 종말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그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진행하게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진행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기쁘고 감사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원망 불평하며 짜증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슬픔도, 고난도 하나의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천성을 향해 갈 때 온갖 중상모략 속에서도 그 길을 주의 음성만 생각하면서 가니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좌우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서 갈 수가 없습니다. 주의 길을 똑바로 가면 거기에는 생명과 영광, 소망과 축복, 천국과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타락 이후에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종말의 시대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언하신대로 세상이 진행될 때에 가장 귀한 것은 주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삶의 기쁨이요, 하나님께 보장받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주시고, 축복해주시며, 우리 가운데 역사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언제나 겸손과 화평의 사람이 주께 쓰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귀는 겸손과 화평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막 10:45). 겸손한 사람이 주께 쓰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겸손한 마음은 은혜 받는 그릇이 된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더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또한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 사이에 화평을 이루어주셨습니다(골 1:20). 히브리서 12장 14절을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했고, 마태복음 5장 9절을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주께 쓰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만물이 다 주의 소유임을 믿고 주께서 쓰시고자 할 때 즉시 ‘아멘’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하며, 주께서 예언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고, 언제나 겸손과 화평의 사람이 되어 주께 귀히 쓰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21:1~9]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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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네 사람 있나요
본문 : 막-02-0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1)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2)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3)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4)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5)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6)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7)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또는 심령으로 (8)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9)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0)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1)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12)
<마가복음 2장 1~12절>
<목회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 감사합니다.
지난 주간 세상에 살며 기쁘고 행복한 일,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다양하게 겪으며 살았습니다.
욕심과 더러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깨끗함으로 예배드리기 원합니다.
용서하시고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형편과 사정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며 말씀을 통해 영적인 새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온 나라가 분열과 다툼의 소리가 높습니다.
이런 때 우리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특별히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입술을 열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서,
교회를 떠나서 멀리 가 있는 기둥교회 성도들이 있습니다.
군대에, 객지에, 외국에 나가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병상에 누운 환자도 있습니다.
의사가 손을 떼고 생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영혼도 있습니다.
하나님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이 귀한 시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부족한 종을 붙드셔서
힘 있게, 능력 있게, 은혜롭게 말씀 전하도록
목소리에도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악한 마귀 틈타지 않도록 성령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웃어 보세요. 시작 ~ 잘 안되지요?
갑자기 이유 없이 웃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소리를 내어 의도적으로 웃다보면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웃으면 약 650개의 몸 근육, 80개의 얼굴 근육,
206개의 뼈 … 등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웃기만 해도 운동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답니다.
웃으십시오.
세상사는 게 힘들어서 웃을 일이 없다며 얼굴을 찌푸리면 주름살만 생깁니다.
오늘 종일 ‘미소’에 신경 써 보세요.
기둥교회 장로님들 다 좋은데 웃지 않으세요. 너무 근엄하셔요.
웃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멋지세요.
멋진 미소를 띠며 믿음을 고백하십시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막2:1)
“ …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막2:1)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하여 전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고(마 8:5~13),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막 1:21~28).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과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던 곳이 가버나움입니다.(마 8:16~17)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다시 오셨다는 소문이 퍼지자(1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2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던지 예수님이 머무시던 집의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왔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중풍병자의 침상을 메고 왔다고 했습니다.(눅5:18)
그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궁금해서 찾아온 사람 …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 … 신기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구경 온 사람 …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때문에 커다란 침상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네 사람은 지붕을 뚫어 위에서 침상을 내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집의 지붕은
건포도나 곡식 … 등 음식을 말리는 곳이었고
무더운 여름이면 지붕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단독주택의 옥상이라고 보면 비슷할 것입니다.
① 지붕 위의 삶
② 예수 시대의 전형적인 마을
남의 집 지붕을 뚫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붕을 뜯어내는 사람들에게
‘뭐하는 짓이냐’고 소리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붕에 구멍을 내어 침상을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예수님 앞에 가기만 하면‘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붕을 뚫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성실해야 …
우리는 /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세상 살면서 … 신앙생활 하면서 … 어떻게 사십니까?
보통 사람들은 힘든 일/막히는 일을 만나면 쉽게 포기합니다.
환경이 안 좋다, 여건이 안된다 … 하는 핑계를 찾아냅니다.
어떤 권사님이 손자를 업고 오셔서는
“목사님, 이제 손자를 봐야 하니 교회 일 못하겠습니다.”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 손자가 예쁜 건 사실이지만 우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손자 때문에 하나님의 일 못한다고 핑계 대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왜 겁을 주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손자가 예쁘면 하나님께도 복 받는 자녀로 자라도록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야지,
손자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다고 핑계 대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가도 너무 쉽게 그만둡니다.
‘그만 두겠다’고 ‘잠시 쉬겠다’고 합니다.
세상 삶처럼 신앙생활도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이 무엇입니까?‘성실’은 정성스럽고 참됨을 말합니다.
(誠:정성 성 / 實:열매 실 - 정성스럽고 참됨)
성실한 사람은 환경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성실한 신앙의 사람은 주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잘 지켜갑니다.
다니엘이 대표적인 「성실한 신앙인」입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성실하게 기도했습니다.
다리오왕 이외에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고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6장 10절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고 했습니다.
이런 성실함 때문에
변함없는 믿음 / 흔들림 없는 믿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니엘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는 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단6: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6:28)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만납니까?
어려움 중에도 승리하세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막힌 담이 있습니까?
장애물이 있습니까?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등지면
영원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낙담하여 포기하지 말고 믿음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자신의 삶에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서로 …
오늘 본문 말씀만으로는 환자와 침상을 들었던 네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환자의 가족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환자가 돈이 많아서
돈을 주고 산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아낌없이 도와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족, 이런 친구가 여러분 곁에 있으신지요? 있습니까?
있다면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우리 이런 사람이, 이런 동료가, 이런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신이 남에게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는 남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남이 자기에게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얌체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남의 어려움에는 눈 딱 감고 삽니다.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자기가 어려움을 만나면 관심 없다고/교회가 사랑이 없다고 투덜댑니다.
물론 교회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예수 믿는 사람이 다 친절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지만
대부분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좋은 이웃/좋은 친구 되시고
좋은 이웃/좋은 친구 만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더불어 살기(live together)를 원하십니다.
혼자 잘 사는 것(live alone)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 다른 사람의 기쁨에 동참하고
- 다른 사람의 슬픔에 함께 눈물 흘리며 힘이 되어 주고
- 특별히 빈부귀천을 뛰어 넘어 예수 이름으로 하나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이면 나이도, 직업도, 배움도
잘 살고 못사는 것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 극복해야 합니다.
다 한 맘 될 수 있습니다. 다 한 맘 되어야 합니다. 아멘.
교회마다 여러 조직이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의사들끼리 모이는 ‘의료선교회’가 있고
선생님들이 모이는 ‘교육자선교회’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실업인선교회’가 있습니다.
이렇게 전문인의 모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축구선교회’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등산선교회’
‘골프선교회’,‘기술자 선교회’… 등
목적을 위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의사끼리, 선생님을 선생님끼리 모였다 끝나면 그것은 잘못된 조직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도 어울려 하나 될 수 있어야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사람, 배움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생활도,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모여서 하나 될 수 있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선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어떤 분은 ‘선교회 수준이 안맞아 못가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 마다 아이들 말로 ‘열 받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수준이 맞습니까?
여러분, 하늘나라에 수준이 맞아서
하나님의 자녀 될 자격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삼아 주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사인 저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혼자 목회 할 수 없습니다.
이해해 주고, 덮어 주고, 붙들어 주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고
살 맛 나게 하고 일할 맛나게 해 주는 분들이 계시므로 일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르비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전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군사를 이끌고 아말렉과 싸웁니다.
그 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손을 들고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모세와 함께 산에 올라갔던 아론과 훌은
모세를 도와야 전쟁에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을 준비하여 모세를 앉게 하고
모세 양 옆에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승리할 때까지/해가 지도록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여호수아만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만 손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붙들어 줄 때, 하나가 될 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 할지라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혼자 강단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것 같지만
이 강단 밑에서 저를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모세가 계속 손을 들고 기도할 수 있게 도왔던 아론과 훌 처럼
강단 아래, 가운데가 「모세방」이고
양 옆에「아론방」과 「훌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 예배 때마다 아론과 훌방에 한 분씩 들어가셔서 기도로 돕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대상에 설교하러 올라올 때
한 번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적이 없습니다. 왜 인지 아십니까?
계단에 걸어 올라가다 강단 밑 기도실을 열어봅니다.
두 사람이 들어가 있나 확인합니다.
신발 4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혼자 잘하면 된다’
‘나만 열심히 예배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혼자 잠깐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럿이 힘을 합쳐야 하나님이 더 좋아하십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야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은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속회에 참석하고 선교회, 부서, 팀, 찬양대 … 등의
활동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귀찮습니까? 연락 받는 것을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러기들은 조류연구가들에 의하면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여럿이 날아가야 멀리 갈 수 있다고 합니다.
혼자 나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날면 71%를 더 날 수 있다고 합니다.
혼자 날면 10km밖에 못 가는데 여럿이 같이 날면 17km를 더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는 날아갈 때 ‘V’자 모양으로 무리를 지어 날아갑니다.
왜냐하면 맨 앞에서 나는 기러기가 날개를 펄럭일 때 상승기류를 만든다고 합니다.
한 새가 다른 새의 날개 끝에서 날아가면
앞의 새의 날갯짓으로 만들어지는 상승기류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날 수 있답니다.
그러니 맨 앞에서 나는 기러기가 제일 힘들 것입니다.
기러기는 날아갈 때 조용히 날지 않습니다.
소리소리 지르는데 그 이유가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있어’하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맨 앞에서 나는 기러기한테 “힘내 힘내 ~ ”하며 응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만일 기러기 한 마리가 아프거나 부상으로
함께 여행을 계속하지 못하게 될 경우
반드시 서너 마리의 기러기가 이 낙오자와 더불어 머문다고 합니다.
기러기가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옆에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러기만도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같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여러분과 한 마음이 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어울려 하나 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어울려 하나 되어 살라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사랑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친구를 위하여 지붕을 뜯어낼 만큼의 용기를 가진
멋진 신앙의 동지들을 만나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받았느니라 … 일어나 가라
본문 5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고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병이 들거나 장애를 갖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예로, 요한복음 9장 2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질병이 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중풍병자가 되었다면
저주 받은 죄인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중풍병자는
치료하고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고통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중풍병자는 저주를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죄책감’같은 마음의 병이 먼저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것을 본
서기관들은(율법을 기록하고 해석하여 가르치는 사람들)
속으로 ‘신성모독’이라고 하며 어이없어 했습니다.
여러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속으로라도 ‘그럴 수 있나’라고 생각하는 것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어떻게 자기가, 촌동네 출신이, 목수의 아들이
나이도 어린 것이, 감히 죄를 사해 준다고 하다니 …
그들은 예수를‘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7절에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서기관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8절)
그래서 본문 9절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처럼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사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뛰어 넘어
자기가 판단하고 정죄하고 결론 다 내버린다면 …
예수님 앞의 서기관들처럼 엉터리 결론을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요2:10) 하시고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 ”(요 2:11)
중풍병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위에도 중풍병자처럼 자기 생각으로 자기 몸을 움직여
자기 발로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나오기 위하여
중풍병자를 메고 왔던 네 사람 같은 헌신자가
섬기는 자가/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마음 될 때 …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나는 그런 열정이 있는가’
나는 예수님 앞에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을 데려가기 위하여
남의 집 지붕이라도 뜯어낼 열정이 있는가?
그리고‘내가 아파 누웠다면 나를 위해
남의 집 지붕이라도 뜯어낼 열정을 가진 4명의 친구가 있는가?’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에 보면
한 마음이 될 때, 한 마음이 되어 순종할 때,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
하나님의 능력이/기적이/축복이 … 임했습니다.
- 노아의 가족들이 한 맘 되어 방주를 만들었을 때
대 홍수에도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 다니엘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의 결단을 보일 때 기적을 보았고 살았습니다.
-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 오늘 본문의 네 친구가 한 마음 되어
친구를 위해 헌신하여 친구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 한 마음 된 고넬료의 가정이 구원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여러분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가정도/교회도/나라도 … 한 마음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 된 사람들이 주변에 있기를 바랍니다.
- 전도는 짝을 지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짝을 지을 사람이 있습니까?
- 기도할 때 좌우에서 잡아줄
아론과 훌과 같은 친구가 있습니까?
- 풀무불 같은 곳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거기에 같이 들어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친구가 있습니까?
- 병든 몸을 주님 앞으로 데려갈 네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그런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없다면 이제 찾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친구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한 마음 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서글픈 일입니다.
교회에 자기 혼자 조용히 나와 기도하고 돌아가는 것 물론 괜찮습니다.
그러나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붙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한 마음 되기 위하여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믿음으로 한 마음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 각 부서도 믿음으로 한 마음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목회하는데 부교역자들이 멀리 숨어서
‘담임목사님이 틀렸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라고 한다면
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은 없지만 …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교회 목사님, 장로님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고 나면 그 결정한 것에 따라서
한 마음 되어 일할 수 있어야 교회가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 됨을 깨서는 안됩니다.
네 사람이 환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갈 때 어떻게 했습니까? 발을 맞추었습니다.
지붕에 올라갈 때도 힘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한 마음 된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시고, 일어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한 마음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은혜를, 축복을 허락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믿음으로 하나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나라에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참 ~ 잘 났습니다.
여당이 옳다, 야당이 옳다, 이쪽이 옳다, 저쪽이 옳다 …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 세계가 어렵다고 하는 이때에 한 마음 되어 가기도 어려운데
온 나라에 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만 많으니 어찌하면 좋을까요?
예수 믿는 우리는 말하기 전에
나라와 민족과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시간만큼만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항의하기 전에 기도하세요. 이 나라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네 사람이 필요하지만
우리 교회에도, 이 나라 이 민족도 하나 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범사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허락하시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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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
본문 : 막 3;13-15
내가 쓴 책 <성막으로 성경을 말한다>가 쏘련어로 완역되어 출판되었습니다.
출판 기념 쏘련 목회자 쎄미나가 가라간다에서 있었습니다. 약 1000명 가량이 모였습니다. 대단하였습니다. 통역이 필요하기에 3박 4일간 하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흔적이 남아 있는 성막 쎄미나가 되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은 우리 나라보다 큰 데 인구는 몇 백만에 불과하였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에서 50도까지 내려 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입니다.
그 벌판을 달릴 때 빨리 가려고 혼자 자동차를 몰아 달립니다. 아직 미개발국이라 자동차 생산이 없습니다. 모두 중고차입니다. 만일 빨리 가려고 혼자 가다가 벌판에서 자동차가 고장나면 거의 다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가 겨울마다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늦더라도 뒤에 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같이 가면 사고가 나도 죽을 염려가 없습니다. 멀리 가려면 두 세 대가 모여서 같이 가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썬 다씽 이야기입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어느 날 썬다씽은 전도하기 위허여 험악한 산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 넘어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썬다씽의 발걸음은 사명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때 산 길에서 마침 모르는 이를 만나 친구삼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의지가 되었습니다.
가다보니 한 사람이 눈길을 걷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썬다씽이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업고 가십시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 몸 하나 가기도 힘든 데 이 사람을 업고 가다가는 같이 죽어요.> 그리고 거절하였습니다. 썬다씽은 그가 거절한다고 죽어 가는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 양심에 죽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같이 죽더라도 업고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등에 업었습니다.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온 몸에 진 땀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지쳐서 같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힌 사람은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였습니다. 썬다씽의 몸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다 쉬고, 쉬다가 갔습니다. 드디어 등에 업히지 않고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한 사람이 길거리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치고 보니 빨리 가겠다며 혼자 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얼어 죽어 있어 있었습니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12 명 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12 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지 못 할 줄 아느냐?>
12영은 12만명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천사 군사도 동원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때 배가 없어도 건너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길리 바다를 걸어서 건너녔습니다. 어느 관광객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요금을 물으니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관광객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걸어서 건너셨구나!>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없이도 하시고 싶으신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명 제자를 부르셔서 같이 일하셨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2.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3. 귀신을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12명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같이 일하자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우리끼리 같이 가라고 명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 같이 있어줄 테니 예수님과 같이 일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처음에 제자들은 둘씩 둘씩 짝지어 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후에는 12명 제자들이 모두 한 명씩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멀리 갔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을 염색하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 제목을 다시 외치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주님과 같이 가면 됩니다.
주님같이 가면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습니다.
1.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철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만들면 6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면 1톤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같이 끌면 5톤을 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을 쫓으면 두 사람이 같이 쫓으면 20명을 아니라 1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같이 걸으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들과 같이 일하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빨리 가려 하지 않으시고 멀리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2000년을 달려 왔습니다. 온 세계로 달려 갔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과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그 어느 누구와 같이 가는 것보다 큽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같이 있자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시너지 효과가 큽니다.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아셀트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아셀트 선교사는 생명을 걸고 식인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는 말씀 하나 확실하게 믿고 선교에 임하였습니다.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밤마다 기웃거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창칼을 들고 무서운 눈초리로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곤 하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낮에는 없는 데 밤이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셀트 선교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식인종들이 말했습니다.
<거짓말 마시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두 번 본 것이 아닙니디. 우리가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지요. 그러나 무섭게 지키고 있는 그 때문에 접근하지 못 하고 돌아 갔지요.>
그 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 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같이 가십시오. 나는 설교 하러 강대상에 올라 올 때도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 같이 올라가시지요.>
TV 녹화를 할 때에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어 외칩니다.
<주님 같이 녹화하시지요.> 지금 설교 준비하면서도 외칩니다.
<주님 옆에 같이 계셔 주세요.>
지난 주간 시카코 중북부 목사님 수련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정반대 시차였습니다. 그러나 가서 내리자 말자 첫 시간을 인도하고, 마지막 시간을 빨리 끝내고 비행기륽 탔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4일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주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1분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2. 같이 가면 격려가 됩니다.
홀로 가다가 절망하면 누가 위로하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가다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줍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를 싸매 줍니다.
그렇기에 혼자가지 않고 같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신학교 동창 목사님 중에 한 명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 필리핀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뇨가 심하였던 친구인 데 혼자 가서 갑자기 저혈당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는 이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누가 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죽었습니다.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서 연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한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안 죽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중에 윤 용일이라는 친구가 카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배재 동창회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끈끈한 동문의식으로 늘 서로 도와주며 외국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친구 사업체에 불이 났습니다. 배재인들이 돈을 모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민생활이 끝난 줄로 알았는 데 동창들의 도움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런 동문들 은혜를 갚기 위하여서라도 죽을 힘을 다 하여 일 하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슈퍼를 개업하였는 데 얼마나 잘 되는 지 마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 들렀더니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가지고 가라”라고 시원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면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그리고 격려가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주님의 격려는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정말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구애게 말할 수 없어서 혼자 고민할 때 나는 주님의 사진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을 물끄러미 쳐보 봅니다. 그리고 애절하게 불러 봅니다.
<주님!>
주님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대신 대답합니다.
<오냐!> 나는 또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종 강 문호 가 왔어요.>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면 좋은 데 아무 말 없으십니다. 내 입으로 내가 말합니다.
<그래. 왔구나! 너 무슨 문제로 고통당하는 지 내가 알지.> 그리고 내 입으로 주님이 해답을 막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가 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입술을 주장하여 주십니다. 놀라운 지혜가 나옵니다. 주님의 격려가 나옵니다.
<강 문호야! 내가 세상을 이긴 것같이 너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느니라.>
나는 이 글을 시카코에서 돌아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음성을 얼마나 세밀하게 들었는 지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강 문호야! 내가 네 진심을 알아. 내가 네 중심을 알아. 네가 얼마나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지 알고 있지. 전기 한 등을 얼마나 아끼고, 종이 하나 아끼려고 편지지 이면지까지 사용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갈보리 교회를 만명 교회로 이룰 려고 발버둥치는 네 심정을 내가 알지. 내가 같이 할 거야. 누가 몰라 주는 것같아도 알아 주는 이가 있단다.>
혼자 가면 빨리가요. 그러나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포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 시켰습니다. 세 가지 별명을 불렀습니다.
<촌놈! 가난뱅이, 땅딸보.>나포레옹은 너무나 괴로워서 학교를 포기하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답장은 이런것이었습니다.
<내 아들 나폴레옹아! 비굴해지지 말아라. 좋은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한 적이 없다. 네게 무서운 적이 있다. 바로 허영과 사치다. 가장 귀한 친구는 독서다. 책을 읽거라. 나는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 너를 믿는다. 내가 함께 하마.>
나폴레옹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장군의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지금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에게 외치는 말씀을 나는 확싫히 들었습니다.
<갈보리 성도들아! 용기를 내라. 나와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어떤 문제에도 해답이 있다. 어떤 강에도 다리가 있다. 어떤 쟝글에도 길이 있다. 헤쳐 나가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3. 같이 가면 공격당하지도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같이 가면 격려가 되고 누가 감히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가끔 봅니다.
사슴은 연약합니다.
사슴과 호랑이가 싸우면 백번 싸워도 백번 다 사슴이 이깁니다. 그런데 호랑이 사슴을 잡아 먹으려고 할 때 숲속에 숨어 한 마리를 노립니다. 같이 있는 사슴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같이 있는 사슴에게 대들면 다른 사슴들이 한꺼번에 공격하면 아무리 호랑이라도 도망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마귀들이 공격하지 못 합니다.
큰 구렁이가 병아리를 잡아 먹으려고 따라갑니다. 잡히면 한 입에 들어갑니다. 병아리라 도망치다가 엄마 품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구렁이는 감히 덤벼 들지 못 합니다. 어미 닭은 새끼를 보호하려고 생명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덤빕니다. 무섭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그 어떤 적도 벌벌 떨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떨어지면 사고가 납니다.
주님과 같이 걸어가는 길은 멀리 가는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한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여수행 기차를 탔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였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옆 노인에게 전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문을 연 후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 예수쟁이로구만. 내가 뭐가 답답해서 예수를 믿어>
그래도 전도를 게속하자 노인은 순찰중인 안내원을 불렀습니다.
<이봐요. 내 돈 내고 편히 가려고 일등칸에 탔는 데 이 예수쟁이가 날 보고 자꾸만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하니 더는 못 참겠소. 차비를 물어주든지 이 예수쟁이 입을 막아 주든지 하시오>
창피를 당한 목사님이 얼굴을 숙이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주를 사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미안했소. 소주나 한 잔씩 하며 이야기 하십시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할아버님. 그렇게 술만 좋아하시면 지옥 갑니다>
그러나 노인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흘렀습니다. 얼마 전 호통을 치던 안내원이 목사님께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습니다.
<아까 그 노인을 아시나요?>
<아니요 모르는 분인데 그냥 전도를 했지요?>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술에 취해서 화장실로 갔어요. 승강구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고 하다가 비틀거리더니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십시오. 그러나 멀리 가려면 우리 같이 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려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격려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 났던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네 명이 에레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서 그 속에서 67시간을 갖혀 있었습니다. 4명은 잠바 두 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그래서 꼭 끼어 안고 잠바를 덮고 추위를 견디고 살았습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서로 어울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