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설교

"부활절 두번째 주일 21편 설교"|주일낮설교
새생명축복 | 조회 83 |추천 0 |2012.04.13. 00:16 http://cafe.daum.net/SermonSchool/HmtY/379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곤경가운데서 건지시고

그리고 모든 상처를 고치시고 싸매시고 치료하여 주십니다.

새봄을 맞아 치료받은 우리가 새로운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흑암을 뚫고

새생명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한다면

이 세상은 그리스도로 더욱더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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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주 2012. 4. 15

부활절 두 번째 주일

● 성서정과 시 133; 행 4:32-35; 요일 1:1-22; 요 20:19-31

예배로 부름 Call to Worship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

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11: 25-26, 4:24)

예배 기원 Invocation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주님, 부활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아침에 저희들을 예배의 자리로 초청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여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받아 주옵소서. 하늘 문을 여시고 신령한 은혜를 내리사 사모

하는 우리 모두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옵소서.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여, 우

리에게 산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Hymns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79장)(구40장) / 하나님의 독생자 (171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304장)(구404장) / 주 믿는 형제들 (221장)(구52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445장)(구502장)

성시 교독 Responsive Readings | 시편 133

인도자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회 중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인도자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

깃까지 내림 같고

회 중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다같이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고백의 기도 Prayer of Confession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주님께 은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저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합니

다. 그동안 저희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왔으나 그 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잘나고, 내가 능력이 많아 성공한 듯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멀리하

고 내 고집대로 행하다가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교만하게 행동하다가 형제와 이웃에게

외면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외면하고 지내다가 죄의 종으로 전락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참 마음으로

회개하며 돌아왔사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

다. 아멘.

사함의 확신 Assurance of Forgiveness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

리로다(시 34:22)

오늘의 주제

우리 주님이 다시 사셨으니

석의적 접근

시편의 말씀 시 133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말씀은 지혜시로서 성전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찬양시이다. 이것은 성전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의 기

쁨과 감격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이 시편의 중심 주제는 전반에 잘 나타나 있다.

함께 연합하여 형제애를 나누고 있는 그룹은 아마도 이스라엘 지파의 형제들이

순례길을 걸어가는 긴 여정에 한마음이 되었던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3

절 전반부에서 사용되는 이미지는 마치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강림한 다음 유무

상통하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여기에서는 두 개

의 메타포에 의해서 연결되는데, 1절의 사실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려주는 내용

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두 가지 방식으로 상호 나눔과 연합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

는데, 먼저는 풍요로움의 메타포이다. 그것은 ‘보배로운 기름’이라는 용어를 통해

서 제시되는데, 공동체는 지금 풍요와 기쁨을 맛보면서 경축하고 있다. 기름은 유

대 공동체에서 희귀하고 값비싼 물품이었다. 그것은 빛이나 열과 같이 생명에 있

어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축제의 기간에는 그것이 낭비가 되듯이 많이 사

용하였다. 두 번째, 공동체의 연합을 상징하는 것은 산의 이슬과 같았다. 이것은

건조한 땅에서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상호 보완적으로 풍성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산의 이슬이 내려 생

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면서 그것이 확대되게 해 준다. 오늘의 시편 본문은 부

활을 통해서 허락하신 생명에 대한 감격과 희열, 그리고 그것의 확대를 가늠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사도행전의 말씀 행 4:32-35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제자들과 교회에 새로운 관점을 갖게 하였으며, 그 생활

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어서 새로

운 이해를 갖게 하는데, 이것은 개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에 새로

운 국면을 가져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새롭게 세워진 교회는 자신의 소

유물을 통용하는 믿음의 공동체로 우뚝 세워진다. 그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자신의 소유를 함께 나누면서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

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 사

건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생생한 임재를 온전히 드러낸다(3:1-4:4). 그 사

건으로 위협을 받으면서 다시 풀려났을 때, 23~30절에서는 한마음이 되어 찬양

하고 감사를 올려 드린다.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

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31절).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고 증언하게 된다. 성령의 충만함은 그들의 기도대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게 해 주었으며(29절), 오늘 본문에 이르

러서는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서로 물건을 통용하는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다. 그렇게 하나된 공동체는 단순한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던 것이 아

니라, 공동체 밖으로 향하면서 계속적으로 부활의 증언자로 나서게 된다.

복음서의 말씀 요 20:19-31

금주 복음서의 말씀은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께서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

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하

시고 그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있었고,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찾아오셨으며, 그곳에서 교회는 시작된

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아주 다양했다. 예수님께서

내미시는 손과 옆구리를 보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하면서 기뻐하였다

고 전한다(20절). 반면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믿지 못하

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전체 내러

티브는 예수님 주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이기를 원하셨고, 20, 25, 27절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제자들, 도마, 그리고 복음

서의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일에 그분은 결코 수

동적 자세를 취하지 않으신다. 찾아오시고, 보여주고, 확인시켜 주시고, 또 평화를

선언해 주신다. 19~23절은 도마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맞

춘다. 그리고 20장에 제시되는 내러티브는 함께 연결되면서 도마가 한 고백, “나

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함께 고백하도록 초대한다. 그리고 부활과 관련하여

오고 가는 세대의 사람들에게 보는 것과 믿는 것의 관계성을 천명하신다. 나중에

이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될 사람들은 동일한 증거를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제 보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차원으로

나갈 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설교를 위한 조명

시편과 복음서의 말씀(시 133; 요 20:19-31)으로 설교 작성:

귀납적 설교

제목 : 어찌 그리도 아름다울까

I.

2011년 7월, 강화도 해병대 2사단의 총기사고는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왕따문

화 때문에 발생한 사고였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있던 문화가 어떻게 군

부대에까지 전염되어 군기와 전우애로 세워지는 대한민국의 최정예 부대에서 그

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안타까움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사고로 인해 생떼와

같은 아들들이 죽어간 것도 안타깝고, 그렇게 자기 동료를 죽이고 자기 인생도 파

괴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본질과 현상」 2011년 가을호에서 편집자인 현길언 교수는 이렇게 썼다. “한국

사회는 왕따문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 특정군부대에서만 일어난 하나의 특수한

사례만이 아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주변 곳곳에 은밀하게 숨어서

개인의 생활과 의식을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집단에 소속

되어 생활하는 사람이면 이 올가미를 피하기 위해 마음을 쓰며 살아간다. 이 사슬

에 한번 걸리기만 하면 벗어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고초를 당해야 한다. 그래도

벗어나지 못하면 건전한 삶의 의욕을 잃고 심지어 자기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왕따문화는 인간성과 관계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극히 비인간적이고 잘못된 문

화이다. 이것은 철부지 초등학생들이 모인 곳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마다 어김없이 따라다니는 현상이다. 심지어는 구성원끼리 친화력이 요구되는

친척, 친구, 동창, 정당, 동일 전문직 사회, 심지어는 교회나 종교 집단에서도 존재

한다. 개인주의화된 시대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해지고 있어 생활의 한 전

략처럼 그 영향력이 파급되고 있다. 사람들은 누가 따돌림을 당할 때에 그를 도와

주려 하기보다는, 따돌림을 당하는 그를 보면서 자신은 거기에서 벗어났다는 안

도감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한 사람이 허물어지는 것을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여기에 더하여 따돌리는 세력에 가담하여 특정 대상을 괴롭히면서 어떤 우월감

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왕따문화는 철없는 아이들 세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오이다.

이것은 심지어는 상층부를 이루는 사회에도 존재한다. 모두가 관행이라는 불법

을 즐기면서 누리는데, 누가 그것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 다르게 살려고 할 때 그

어려운 선택과 도덕적 결단을 부러워하기는커녕 은근히 질시하면서 음험하게 공

격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렇게 관행의 부도덕을 먹고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에

게는 매우 귀찮은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는 왕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언젠

가는 자기의 부도덕함을 공격해 올 적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단순히 싫어하

거나 미워하는 수준을 넘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지능적으로 공격

하여 견디지 못하도록 만든다. 뜻을 세우고 정직하게 살아가려고 하던 사람은 결

국 현실과 타협하든가, 아니면 투항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듯이 살아가든

지, 아니면 증오를 품고 그 집단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중에 용기와 신념이 있는

몇 사람만 그런 잘못된 문화 속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들

은 왕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기 선택에 대한 최대의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며, 그들에게는 언젠가는 관행으로 여겨지는 불법이 사라

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확신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감당하

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조직의 문화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행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수행해야 할 업

무와 크게 상관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예컨대 어느 날 검사들이 모인 한 회식 자

리에서는 검사사회의 관행이 된 폭탄주를 돌리고 있었다. 그때 한 새내기 검사가

“저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라고 그 고급사회의 관행을

거부했다. 그 자리에 있던 선배 검사들이나 상관들은 그의 당돌한 무례를 참을 수

없었으나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그 거절을 받아 주었다. 그런데 그 무례한 새내기

검사는 왕따당하지 않고 나중에 검찰 총수가 되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폭탄주를 거부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가 그 관행을 용감히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폭탄주가 결코 검찰 자체의 본래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쁜 관행을 거부한 것에 대

해서 오만하지 않았고, 분위기를 흔들어 놓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동

료와 상사를 대했으며, 더 성실하게, 공정하게, 열정적으로 자기의 일을 수행하였

다. 그에게 왕따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용기와 확신, 일에 대한 성실함과 열

정,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겸손 등이 왕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준다.

II.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왕따당하기 쉬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

나 자기 정체성과 옳은 일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그리고 열정이 있을 때 우리는

이 거대한 죄악의 문화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거대한 나

무토막은 떠내려가지만, 생명을 가진 작은 송사리는 흙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위치와 비슷하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던 초대교회와 그곳의 교인들은 세상

으로부터는 미친 사람으로 여김을 받기도 하고, 다른 길을 가는 사람으로 여겨졌

다. 그들은 위협하면서 그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담대하게 예

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꿈을 꾼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그들은 세상

을 바꾸어 나갈 꿈을 꾸고는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생명을 소

유하였기에 그것으로 세상을 보며, 그 생명의 소식으로 세상을 덮어갔다. 그 소식

이 전해지는 곳에는, 그것을 받아들인 곳에서는 분열과 증오, 미움의 공동체는 사

라지고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위로로 그들

의 가슴을 채웠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의 평화와 위로, 능력으로 채워

갔기에 세상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핍박을 받았으나 이겨 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세상 가운데 새로운 대안공동체를 세워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내침을

받았던 존재들이 부활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대안공동체를 세워가고

있었다.

교회는 오늘도 세상을 향해 대안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세상과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것을 추구하는 곳이다. 세상은 그들과 모습이 다르고, 색깔

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다를 때 불편해 하고 질타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들

의 바른 모습과 맑은 모습에 고개를 숙이며 인정하게 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생명으로 인해 세상을 향해 새로운 대안공동체로 세

움 받은 공동체이다.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질타하는 것은 그러한 모습을 온전히

사회 속에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 세속주의, 맘모니즘에 똑같이 사

로잡혀 갔기 때문에 안티기독교가 생겨나는 것이다. 한국교회 초기에도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고 예수쟁이라고 멸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

만, 목회자들과 믿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은 교회가 당시에

세상을 향해 대안공동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고,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지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대안공동체의 모습

은 사회에는 위협이 되었으나, 세상이 존경하는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계속해서 보여주었던 것도 대안공동체였다. 이집트의 왕권

의식과 허위의식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그곳에 하나님을 섬기는 대안적인

공동체를 제시하였다. 부활은 제자들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들어 주었

다. 두려움과 불안에 떨던 그들을 일으켜 세워 생명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신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대안사회를 힘차게 그들에게 보여준다.

III.

그들이 그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사도행전의 말씀은 알려 준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을 받았던 성령공동체로 힘 있게 세워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함께 모인 공동체였다. 그들의 인생의 주

인은 예수님이었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공동체였다. 그 공동체

는 세상을 흔들어 놓았고, 그곳에 진정한 생명과 평화를 전한다.

왕따를 당해 혼자서 도망을 다녀야 했던 다윗이 그 어려움의 시간, 그 삶의 상황

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내리는 힘을 공급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힘과 능력의 원천임을 늘 고백하였다(시 18:1). 뿐만 아니라 다윗에

게는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다. 꿈과 비전이 같은 사람, 추구하는 것이 같은 사람,

마음이 통하는 사람, 생각이 같은 사람,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그들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생활하고, 함께 행동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다. 아니 혼자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과 함께 그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노

래하고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것은 형제들이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의 집을 향해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해 주실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어떻

게 어루만져 주실까? 오늘은 찬양을 통해 어떻게 내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실까?

함께 손잡고 올라가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서 그런 찬양을 지금 부르고 있다.

이시영 시인은 “좋은 기쁜 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아침부터 까치

한 쌍이 머리 위의 온 하늘을 가르며 찧고 까불고/ 생각느니 내게도 저리 기쁜 날

이 있었던가?” 그렇다. 우리에게도 그런 기쁨이 있는지, 감격이 있는지를 늘 확인

해야 한다. 그러한 감격을 가지고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감격으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감격으로 함께

모였고, 함께 세워 갔으며, 함께 달려나가 세상에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다. 초

대교회를 움직였던 원동력은 기쁨이었고, 감격이었다.

사람을 세워 일꾼으로 삼을 때 구약에서는 기름을 부었다. 그것이 얼마나 풍성

하게 부어졌던지, 본문은 보배로운 기름이 지금 하나님 앞에 쓰임받고 있는 아론

의 머리를 타고 수염으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께 쓰

임 받은 감격, 세움 받은 감격이 그들의 가슴을 타고 흘렀다.

그것은 헐몬 산의 이슬같이 밤마다 조용히 내려 한낮의 더운 광야를 이기게 하

는 원동력이 된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명하셨다고 외치고 있다. “그 얼

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 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

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

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사람은 함께 기대면서 살아간다. 정현종 시인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IV.

이어령 씨가 쓴 「우리문화 박물지」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들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들의 것이다. 칼은 자르고 토막 내는 것이고,

바늘은 꿰매어 결합시키는 것이다. 칼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있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투쟁과 정복을 위해 싸움터인 벌판으로 나간다. 그러나

바늘은 낡은 것을 깁고 새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깊숙한 규방의 내부로 들어온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그렇다. 잘라내는 것이 있고, 상처를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이 있다. 큰 칼로 끔찍

하게 베어진 듯 상처로 얼룩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그것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촘촘하게 이어 쓰라림을 낫게 하는 서로의 작은

관심이요, 사랑이다. ‘바늘로 찌르듯이’가 아닌, ‘바늘로 이어 붙이듯’ 서로에게 다

정하게 말하면 어떨까? 서로 이어가고 싸매가는 그런 작은 위로와 나눔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공동체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오늘 세상은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그 위에 또 생채기를 내는 아픔 속에

서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여정에서 열을 받기도 하고, 힘들어하면서 지내기

도 한다. 대안공동체는 이런 상처를 보듬는 곳이어야 하며, 세상에서 열 받으며

살아온 걸음에 하늘의 은혜로 덮어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성도에게 질문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

는 ‘썰렁해’입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다는 어디일까요?” 성도들이 머

뭇거리자 목사님이 말했다. “그곳은 ‘사랑해’입니다. 항상 따뜻한 바다와 같이 사

랑하는 마음을 가득 안고 살아가면 그곳은 언제나 행복한 자리가 되지요.” 예배

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듣고 싶어

온갖 애교를 부리면서, 목사님과 같은 질문을 했다. “여보, 내가 문제를 낼 테니 한

번 맞혀봐. 세상해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래. 그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어디게?” 남편은 생뚱맞은 질문을 한다는 생각에 시큰둥해 했다. 그러자

아내는 코맹맹이 소리로 힌트를 주면서 말했다. “아앙~ 그럴 때 당신이 내게 해

주고 싶은 말 있잖아! 그걸 생각해 봐!” 그러자 남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

을 지으며 자신 있게 아내에게 대답했다. “열~바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그런 관계는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고, 인간 세상을 행

복하게 해 준다. 오늘도 곳곳에 갈라지고 상한 심령들이 허덕이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 죄악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 세상에서 버림 받고 헤매이고 있는 사람들, 연

결되지 못한 인간 관계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 오늘 그들은 누군가의 손길

을 기다리고 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그 축복을 전하기 위하여 일어서

고 있다. 그들은 손을 잡고 달려가며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려는 아름다운 몸부

림을 하고 있다. 그곳에 공동체가 세워지고, 형제들이 세워진다. 그들은 그 아름

다움에 취하여 떨리는 감격으로 오늘의 삶의 여정을 힘차게 달리고 있다.

미국의 TV 토크 쇼 중에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오프라윈프리 쇼에서 탐

설리반이라는 시각장애를 가진 사업가와 인터뷰를 한 내용이다. 설리반은 절망

과 자괴감에 빠졌던 자기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말은 단 세 단어였다고 고백한다.

어렸을 때 혼자서 놀고 있는 그에게 옆집 아이가 다가와 손을 내밀면서 했던 이야

기가 자기 인생을 새롭게 세워 주었단다. 그것은 단지 세 단어로 구성된 말이었

다. “같이 놀래?”(Want to play?) 그것은 자신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임을 인정해

주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그래서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장영희 교수는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에게 동정을 느끼고…… 손을 뻗

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은 손 내미는 것

부터 시작되고, 함께 손을 잡고 달려가는 공동체를 이룰 때 가능해진다. 예수님께

서 그런 공동체를 회복시키셨고, 제자들은 그 공동체를 힘차게 이루어간다. “형제

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달

리면서 그렇게 찬양하고 있다. 부활 신앙은 그렇게 우리를 함께 달리게 한다. 함

께 손잡게 한다. 거기에 교회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