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쓴뿌리 치유란 무엇인가?
히브리서 12:15절은 말씀한다. “너희는 서로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 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여기에서 쓴뿌리는 독초와 쑥의 뿌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명기 29장 18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생겨서...” 독초와 쑥의 뿌리는 건강한 자연생태계를 파괴한다. 농장에 곡식이 잘 자라야 하는데 독초와 쑥이 생겨나면 그 농장은 곡식이 잘 자랄 수 없다. 이 쓴뿌리는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빠르게 번식해서 농장 전체를 쉽게 망가뜨린다. 신명기 29장 18절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민족의 신을 섬기게 되면 독초와 쑥의 뿌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독초와 쑥의 쓴뿌리가 농장을 망가뜨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쓴뿌리가 생겨서 깊이 뿌리를 내리면 그 사람과 가까이에 있는 주변 사람의 전 인격과 삶을 망가뜨린다.
독초로 번역된 히브리어 <로쉬>는 역본에 따라 <소태같이 쓴 열매를 맺는 나무>•<독과 쓴 것을 내는 나무>•<양귀비>•<독당근> 등으로 읽히고 있으며 확실히 어떤 것이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나흐>는 광야에 자생하는 쓴맛을 내는 식물을 일컬으며 보통 다북쑥, 쓴 쑥 등으로 번역된다. 독초는 거짓되고 악한 교훈을 상징하며 쑥은 죄 때문에 겪게 되는 인간의 고통과 환난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여기서 두 식물의 뿌리는 악한 교훈, 즉 우상숭배를 주장하며 회개할 줄을 모르는 자들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있다.
쓴뿌리가 뿌리를 내리면 잘 뽑혀지지 않고 농장을 급속도로 파괴시킨다. 여기에서 농장은 집단적으로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하고 개인적으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을 상징한다. 히브리서 12장 15절은 식물의 쓴뿌리를 인간의 마음에 적용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쓴뿌리는 거절(rejection)당한 경험이 반항(rebellion)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거나 실망(disappointment)이 분개(resentment)로 자라도록 버려두거나 쌓여진 상처(hurts)가 깊은 원한(grudges)으로 자라면서 생겨난다.1) 쓴뿌리가 인간에게 생겨나면 그 쓴뿌리로 고통을 받은 인간은 그가 속한 공동체인 교회나 가정과 일터에 악한 영향력을 준다. 그 악한 영향력은 교회나 가정에 속한 다른 구성원들에게 계속해서 약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한다.2)
누가 쓴뿌리를 가지고 있는가? 쓴뿌리를 가진 인물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장자권과 축복권을 속임수로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에서는 야곱에게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명의 아들을 낳아주었지만 남편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는 남편에게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구덩이에 빠졌다가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형들에게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술 취해서 벌거벗고 누워있는 자신을 놀렸던 아들 함에 대해서 아버지 노아는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모압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린 나오미는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입다의 신중치 못한 맹세로 처녀의 몸으로 재물로 바쳐져야 하는 입다의 딸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삿11:29-40). 왕이며 장인이었던 사울에게 10년 이상을 쫓겨 다녔던 다윗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정략적인 결혼의 희생물이 되어 다윗의 아내였다고 발디엘의 아내가 되었고 후에 다시 다윗의 아내로 되어 남편을 저주했던 미갈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원인도 모른 체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고난을 당했고 자신의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세 친구로부터 정죄를 당했던 욥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다. 원수의 나라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서 복음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가는 요나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쓴뿌리를 가지고 있다.
지방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지만 전도사 신분으로 교회를 잘 섬겼던 현지 목회자들은 정규신학교육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게 될 새로운 전입교역자들에게 쓴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전입교역자들은 헌신하는 심령으로 낙후된 지역에 왔지만 현지 목회자들에게는 이들은 자신들의 목회지를 위협하는 경쟁자였다.
후임 사역지 없이 부득불 교회를 사임해야 했던 교역자들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을 애지중지 키웠지만 나중에는 그 자녀들에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늙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쓴뿌리를 가지고 있다. 한창 부모님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할 때에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부모님에 대해 자녀들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다. 대기업의 횡포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는 중소기업 사업주들은 쓴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쓴뿌리를 모두가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쓴뿌리의 정도의 차이일 것이다. 성경에서 살펴본 성경인물이나 우리 주변 사람들 모두가 쓴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쓴뿌리가 치유되어서 건강한 신앙인격의 사람이 된다. 그런데 종종 생겨난 쓴뿌리가 치유되지 못하고 쓴뿌리가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려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이 완전히 망가져 버려 회복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쓴뿌리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을 디모데후서 3장에 제시된 말세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정황은 건강한 인격을 갖추진 못한 죄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들의 삶의 유형에서 쓴뿌리가 생겨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얀네와 암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딤후3:1-8).
이 말씀에 근거해서 쓴뿌리를 만드는 사람의 유형을 9가지로 분석해 보았다.
① 자기를 사랑함(2절), 자랑함(2절), 쾌락을 사랑함(4절): 자기중심주의자(Egoist)
② 감사하지 아니함(2절), 무정함(3절), 원통함을 풀지 않음(3절): 희생자(Victim)
③ 교만함(2절), 배신함(4절): 투쟁가(Fighter)
④ 비방(2절),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5절): 완벽주의자(Perfectionist)
⑤ 돈을 사랑함(2절),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음(3절), 모함함(3절): 이용자(User)
⑥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림(6절), 조급함(4절): 유약한자(Chameleon)3)
⑦ 부모거역(2절), 마음이 부패(8절), 믿음을 버림(8절): 회피주의자(Escape artist)
⑧ 자만함(4절), 사나움(3절): 권력추구자(Power Controller)
⑨ 거룩하지 아니함(2절), 절제하지 못함(3절): 충동주의자(Truck-Driver)
이러한 분석은 겹치는 영역이 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거역함은 효를 피한다는 입장에서 회피주의자이지만 자기만을 이익을 추구한다는 입장에서는 자기중심주의자이다. 모함함은 나봇을 모함해서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세벨이나 아합왕처럼 이용자의 범주에 넣었지만 투쟁가나 권력추구자의 영역에도 넣을 수가 있다.
이러한 9가지 유형의 인간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기중심주의자는 자아에만 집착한다. 희생자는 실패한 과거에 집착한다. 투쟁가는 승리에만 집착한다. 완벽주의자는 완벽한 일의 수행을 위한 완전주의 신화에만 집착한다. 이용자는 자신의 탐욕에만 집착한다. 유약한자는 인정받는 것에만 집착한다. 회피주의자는 자신의 안일과 편리에만 집착한다. 충동주의자는 자신의 충동적인 욕구에만 집착한다.
여기에서 집착은 성공을 향한 건강한 추구와는 구분된다. 훌륭한 인격과 일의 성공을 위한 건강한 추구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쓴뿌리를 만드는 9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집착은 사람이나 일에 대한 편향된 사랑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집착하면 불안하고 조급해지고 그 일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분노하고 안정감을 상실한다. 이러한 분노는 개인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저주의 감정이나 거친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난다.
작은 뿌리가 큰 나무를 이루는 것처럼 작은 쓴뿌리(bitterness)가 한 개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면 그가 속한 공동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비추며 관계를 파괴하기 시작한다. 쓴뿌리의 역할(결과)은 무엇인가? 히12:5절에 근거해서 살펴보자.
첫째, 쓴뿌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게 못하게 한다.
쓴뿌리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하고 이미 은혜가 임했던 사람도 은혜로부터 멀어진다. 쓴뿌리를 가진 사람의 마음은 마태복음 13장의 길가 밭이나, 돌짝밭이나 가시떨기밭처럼 참 생명인 말씀의 씨앗이 뿌려져도 자라지 못한다.
둘째, 쓴뿌리는 자신을 괴롭힌다.
쓴뿌리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향한 미움과 분노와 용서하지 못함과 열등감속에서 고통을 겪으며 불면의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내면의 고통은 건강한 정서생활을 방해하며 신경계통에도 악영향을 끼쳐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쓴뿌리의 영향으로 인해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은 쓴뿌리를 소유한 본인이다.
셋째, 쓴뿌리는 다른 사람을 괴롭힌다.
쓴뿌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분노, 미움,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이 가족이라면 쓴뿌리로 가득 찬 사람의 가족들이 고통을 겪는다. 이들은 특별한 이유없이 주변 사람에게 공격의 화살을 쏘아대기 때문에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은 쓴뿌리의 소유자와는 거리를 두고자 한다.4)
넷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쓴뿌리가 있다.
부모의 눈에는 착한 아이인 자녀들이 사소한 일로 서로에게 쓴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친 행동을 할 때에 부모들은 놀란다. 그러나 이러한 쓴뿌리는 자녀, 배우자, 부모, 친구 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
다섯째, 쓴뿌리는 사람의 소화기관에 산(소화액)을 분출시켜 속이 쓰리게 한다.
마음의 쓴뿌리는 육체에 영향을 주어서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소화기관에 화학물질인 소화액을 흘려보내서 위나 담즙, 창자 등에 고통을 주어 소화장애를 일으키고 동시에 순환계통에도 영향을 준다. 마음의 쓴뿌리는 육체의 질병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9가지 유형의 쓴맛을 내는 사람 중에 어디에 해당되는가? 어느 특정한 유형의 사람에 해당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성향들을 조금씩 나눠가질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쓴뿌리를 만드는 9가지 유형의 사람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다.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주의자 성향을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자기중심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권력추구자의 성향이 될 수도 있다.
쓴뿌리를 만드는 이러한 9가지 유형의 사람들도 어느 면에서는 건강한 추구도 할 수 있고 그들의 인격과 가치관 속에는 훌륭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이들 9가지 유형사람들을 전체적인 면에서 고려해서 쓴뿌리로 생겨나는 특성과 독성을 조명하고 그들을 건강한 인격체로 만들어가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쓴뿌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9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한 쓴뿌리 사람의 출현을 디모데후서 3장 1-8절까지의 말씀에 근거해서 22가지 잘못된 인간의 태도•습관• 행동•가치관의 결과로 제시했다. 이러한 인간의 태도, 습관, 행동, 가치관은 적극적인 면에서 인간의 탐욕과 교만에서 나오며 소극적인 면에서는 인간의 보호본능이나 방어기제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근원을 살펴보면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죄에서 나온다. 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과 죄를 갈라디아서 5:19-21절에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나온 육체의 일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을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취함, 방탕함> 등의 15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육체의 일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갈라디아서 6장 16-18절은 그 해답을 제시한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쓴뿌리를 만들어내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과 죄는 육체의 소욕을 따른 결과이기에 성령의 따라 행하면 타락한 인간의 마음과 죄가 치유되고 회복된다. 이 육체의 일은 성령을 거슬러서 생겨난 일이기 때문에 쓴맛을 만드는 쓴뿌리의 치유는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성령에 순종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에 가능하다.
그러면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삶을 사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고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영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쓴뿌리를 만드는 9가지 유형의 사람을 다음과 같이 변화시킨다.
① 사랑은 자기중심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② 희락은 희생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③ 화평은 투쟁가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④ 인내는 완전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⑤ 자비는 조종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⑥ 양선은 유약한 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⑦ 충성은 회피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⑧ 온유는 권력추구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⑨ 절제는 충동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이러한 치유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자기중심주의자의 치유를 예를 들어보자. 내가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내 안에 있는 자기중심주의자의 쓴뿌리가 치유된다. 이러한 사랑의 열매는 전염성이 있어서 내가 맺은 사랑의 열매를 보고서 내 주변 사람들 안에 있는 자기중심주의자의 쓴뿌리가 치유된다. 그러면 희생자의 치유는 어떠한가? 억울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탄하는 희생자의 쓴뿌리는 주변에서 자신보다 더 억울한 희생자가 감사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 안에 있는 희생자의 쓴뿌리가 치유된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감사를 경험할 때에 희생자의 쓴뿌리가 치유된다.
내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면 내 안에 있는 쓴뿌리와 나의 영향을 받는 주변 사람들의 쓴뿌리도 치유되어간다. 그 결과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쓴뿌리도 치유되어간다. 그러면 내가 속한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는 쓴뿌리가 제거되어 단맛으로 풍성한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것이다. 성령이 지배하는 성품은 가장 아름답다.
쓴 뿌리 치유 1
사랑은 자기중심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1. 누가 자기중심주의자(에고이스트)인가?
에고이스트는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내가 모든 것이다”(I am everything)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있다.
1) 성경속의 에고이스트
사무엘하 13장에 암논이라는 에고이스트가 등장한다. 그는 다윗왕의 장자였다. 암논은 배다른 누이동생인 압살롬의 동생 다말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탐욕(Lust)이었다. 탐욕의 사람은 한 여성과 육체적인 관계를 통하여 정욕을 채우고자 한다. 암논은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을 통해서 다말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반강제적으로 정조를 빼앗긴 다말은 이복오빠인 암논에게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다말과 성관계를 맺은 암논은 곧 다말이 싫어졌다. 그래서 암논은 다말을 부하들을 시켜서 쫓아낸다. 다말은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입고 있는 채색옷을 찢어버리고 머리에 손을 얹고 나갔다. 엄청난 쓴뿌리가 다말에게 생겼다. 이 사건을 알게 된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은 이복형인 암논을 죽여서 복수한다. 다윗 가정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된다. 한 여인의 생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암논은 철저한 에고이스트이다.
또 다른 에고이스트가 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자신의 뜻과 맞지를 않았다. 그래서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간다. 그러나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고 바다에 던져진 후에 그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물고기 배속에서 3일을 지내다가 육지로 나오게 된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한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자 요나는 멸망당해야 될 사람이 구원을 받으니까 화가 났다.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요나는 심히 분노했다(요나 4:1). 이 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의 교훈을 통해서 요나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서 요나로 하여금 햇빛을 가리게 했는데 그 박넝쿨을 벌레가 먹게 된다. 시들은 박넝쿨로 그늘이 없어져 요나가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권면하신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11)
2) 우리 주변의 에고이스트
어떤 아버지가 자신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는 아들에게 “너는 바보다. 천치다. 과연 네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말이 그 아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까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런 사람이 에고이스트이다. 아버지한테서 이런 말을 듣고 성장한 아들은 아버지를 볼 때마다 속이 뒤틀리고 쓴맛이 생겨난다. 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아들도 또 다른 에고이스트가 된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인고” 라고 하는 에스겔서 18장 2절의 말씀처럼 에고이스트 부모는 또 다른 에고이스트 자녀를 배출한다. 아버지가 먹은 에고이스트의 신맛이 아들의 입안을 채워서 그 신맛의 영향으로 그 아들은 또 다른 에고이스트가 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1643-1715)는 “짐이 곧 국가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철저한 에고이스트이다. 루이 14세는 절대 군왕으로 군림했지만 백성들의 마음에 분노의 쓴뿌리를 만들었고 그 쓴뿌리에서 독한 기운이 흘러나게 했다. 그 쓴뿌리의 독한 기운은 자라서 민중의 집단적인 분노로 폭발된 프랑스혁명(1789)의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바로 권력과 부를 손에 쥔 에고이스트들을 향한 민중들의 분노에서 출발했다.
우리 자신이 에고이스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인간은 에고이스트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암논처럼 극단적인 에고이스트는 아닐 수 있지만 요나처럼 에고이스트의 요소는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내리쬐는 햇빛을 차단해주는 박넝쿨을 니느웨사람의 전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요나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2. 에고이스트의 특성
첫째, 에고이스트는 모든 일이 자기와 관계되고 자기 주도로 되어야 한다.
어떤 일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할 때 에고이스트는 그 일에 자신의 의견이 들어가고 자기 이름이 드러나야 한다. 자기에게 편리하게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
어떤 일은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지만 에고이스트는 자기가 그 일을 해야 한다. 찬송인도도 남이 더 잘 할 수 있지만 에고이스트는 자기가 찬송인도를 해야 한다. 에고이스트의 성향을 가진 교회지도자는 신앙수양회에서 은혜를 받는 것도 다른 사람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증거하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5)
어떤 형제가 간증을 했다. 아내에게 사랑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아내의 발을 씻어 줄 기회가 있었다. 아내의 발을 다 씻은 후에 마지막으로 찬물로 한 번 헹구려고 했다. 아내는 찬물 헹굼을 원하지 않았지만 남편은 고집했다. 이 때 그 아내는 말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해서 발을 씻겨 주기를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데로 하셔야지요.” 그 형제는 아내의 말을 듣고서 사랑의 실천도 자기 위주가 아니라 상대방의 위주로 해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둘째로 에고이스트는 관계적기생물이 된다.
지금은 한국인의 위생상태가 좋아져서 사람들의 몸속에 기생충이 많지가 않다. 그런데 필자가 어렸을 때는 기생충이 참 많았다. 그 당시 초등학교 학생들은 여름철과 가을철에 두 번씩 기생충보균 검사도 받고 기생충 약도 복용했다. 학생들이 대변을 채취해서 학교에 가져오면 교실 안이 대변냄새로 가득 차는 진풍경을 연출해 내곤 했다. 기생충은 사람이 영양실조로 죽건 말건 그 사람의 몸 안에 있는 영양분을 빼앗아 먹는다. 에고이스트들은 남이야 죽건 말건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기생충과 같다. 성범죄자, 마약중개상, 악덕사체업자, 무기거래상, 인신매매자, 윤락알선업자 등이 모두 이런 에고이스트들이다.
관계적인 기생물인 에고이스트들 중에서 최근에 문제가 되는 성범죄자들은 성범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사람이다. 위에서 소개된 암논은 다말의 인생을 망쳤고 결국 자신과 자신에게 복수했던 압살롬의 생애도 망쳐버렸다. 강간이 이처럼 피해자들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손상을 끼치는데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강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에 더 폭력적이 되고 비정상적으로 된다. 강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에고이스트들은 소위 ‘강간신화’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 내용은 “여성들이 돌발적인 행동을 통해 강간을 부추긴다. 건강한 여성은 원하기만 하면 강간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여성들은 빈번하게 강간에 대해서 거짓 고발을 한다.” 등이다. 이러한 강간신화는 강간의 피해자들을 비난하도록 부추기며 강간의 가해자들에게는 면죄부를 준다.6) 이러한 에고이스트들은 강간 같은 성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상대방이 원해서 강간을 했다거나 강간을 행하는 동안에 상대방이 만족을 표시했다는 등의 파렴치한 말을 한다.
셋째, 에고이스트는 건전한 자기희생을 할 수가 없다.
이들은 손해 보는 일은 못한다. 기독교정신의 핵심은 건전한 자기희생이다. 에고이스트들은 자기희생을 거부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을 찾아다닌다. 에고이스트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운다. 이런 사람이 결혼생활을 하면 돕는 배필이 되지 못하고 바라는 배필로만 살아간다. 이들은 배우자의 필요를 채우려 하지 않고 자신의 필요만을 배우자가 채워주기를 원한다. 또한 이들은 배우자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3. 에고이스트가 만드는 독성
첫째, 에고이스트들은 깊이 있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갖지 못한다.
인간관계는 깊이 있고 지속적인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과는 깊이 있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갖지 못한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깊이 있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이 관계는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관계이다. 요나단은 신뢰의 표시로 다윗에게 자신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어 버린다(삼상18:4). 그 당시 이러한 요나단의 행동은 왕권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왕의 자리보다는 다윗과의 우정이 더 귀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다윗을 죽이려는 아버지 사울왕의 의도를 확인했을 때에 그가 도망하도록 길을 열어준다. 요나단은 사울왕이 친구인 다윗을 저주했을 때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다. 이처럼 요나단과 아름다운 우정관계를 지속했던 다윗은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슬픈 노래를 짓는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이 후에 다윗은 요나단의 절뚝발이 아들 므비보셋을 돌보아준다. 그들의 우정이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보다는 먼저 상대방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우정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까지 지속된다.
둘째, 에고이스트들은 인생이란 렌즈를 비뚤게 바라본다.
이들은 부정적인 눈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늘 사람들을 의심한다. 스스로가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늘 시기하면서 남이 잘되는 것을 봐주지 못한다. 과대망상증을 가지고 살면서 자기가 최고인줄 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에고이스트는 대체적으로 교만하다.
이러한 에고이스트의 대표적인 예는 아비가일의 남편인 나발이다(삼상25:2-13). 그는 광야에서 쫓겨 다니는 다윗의 일행이 힘든 생활을 하면서 나발에게 식량을 요청할 때에 거절한다. 그는 다윗의 일행의 보호를 받았으면서 다윗의 일행을 주인을 배반해서 도망친 도적떼로 여기면서 저주한다. 나발은 혼자서 호의호식하면서 굶주린 이웃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의 일행이 복수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부인인 아비가일에게 듣고서 겁에 질려 죽고 말았다. 에고이스트는 나발처럼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자만하면서 주변의 힘든 사람들에게 교만을 떨면서 무시하고 비난하면서 저주하기도 한다.
셋째, 에고이스트들은 비현실적인 굴레에 매여 산다.
사람은 땅위에 발을 디디고 살아야 건강하다. 그러나 에고이스트들은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착각하면서 살게 된다. 그들은 자기가 항상 높임을 받는 꿈을 갖고 산다. 자신이 모든 일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요즈음에 쉽게 발견하는 왕자병이나 공주병에 걸린 사람들도 에고이스트들이다. 이들이 실제적으로 왕자가 공주가 아니지만 왕자나 공주처럼 대접받지 못했을 때 그들은 분노하며 억울해한다.
4. 사랑은 자기중심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7-8)
1) 사랑이란?
사랑은 다른 사람의 최고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4장 4절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일만을 돌아보는 것이 에고이스트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경, 죄인, 문둥병자를 돌보면서 자신의 생을 사셨다.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에로스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이다. 에로스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과 목표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한다. 에로스의 사랑은 ‘무엇 때문에’에 사랑하는 것이다. 얼굴이 예쁘기 때문에 사랑한다. 돈이 많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얼굴이 예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 돈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에로스의 밑바탕에는 사랑을 하는 주체의 끊임없는 자기만족과 자기실현의 갈망이 들어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을 소유하고 탐닉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가페는 사람을 욕망의 대상이나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이 어렵고 힘들 때 함께 있어주며 고통을 당할 때에 같이 동참한다.7)
에고이스트는 전형적으로 에로스의 사랑에만 집착해 있다. 물론 에로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인간이 추구하는 예술과 위대한 사상을 향한 집념, 더 높은 명예를 향한 욕망의 달성은 에로스의 사랑을 추구한 결과로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시켜왔다. 그러나 에고이스트를 치유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 아가페의 사랑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8)
첫째, 사랑은 동사다. 사랑은 머리와 생각 속의 개념인 명사도 아니고 단순히 지금의 상태를 말해주는 움직이지 않는 형용사도 아닌 구체적으로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는 동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몸의 언어’인 것이다. 그래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랑은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이 있으며 살아 움직이는 동사이다.
둘째, 사랑은 현재형이다. 고린도전서 13장 4-7절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동사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이 말의 의미는 지금 사랑해야 하는데 어제 한 것으로 만족하고 자랑하고 있으면 사랑이 아니며 오늘은 못하지만 내일부터는 잘 할 것이라고 다짐만 반복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다. 사랑은 지금, 현재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다.
2) 에고이스트의 치유
첫째, 에고이스트가 참사랑의 실천자를 만난다면 치유가 일어난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2장 20절에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언급하면서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고 말한다. 그는 디모데가 빌립보 교인들을 진실히 생각할 자라고 소개한다. 디모데는 바울사도의 언급처럼 빌립보교인들을 진실하게 사랑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 2장 26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서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빌립보 2장 30절에서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고 말한다. 바울사도가 보기에는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간절히 생각하고 위해서 기도하며 이들을 대신해서 옥중에 있는 바울 사도를 돌보며 사랑을 베풀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에고이스트들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같이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 감화를 받으면 그들에게 치유가 일어난다. 그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에서 다른 사람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사랑은 놀라운 전염성이 있다. 에고이스트라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의 사랑 속에 잠기게 될 때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주의 병도 온전한 치유함을 받을 수가 있다.
필자가 경남 함양군의 지리산지역에서 개척교회를 섬길 때의 일이다. 산간지역 외딴 마을에 사는 부인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밤 10시 정도였는데 자기 남편이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몇 청년교우들을 깨워서 3km 거리의 험한 산길을 올라갔다. 들것에 싣고 내려와서 함양읍내의 병원에 입원시켰다. 일을 마치고 나니 새벽 3시였다. 지금도 필자의 눈에는 그 당시 헌신했던 몇몇 청년들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들은 건전한 자기희생을 했던 신실한 젊은이들이었다. 이 청년들의 헌신하는 모습은 오지에 목회하는 헌신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평하면서 교만에 빠졌던 필자의 에고이스트적인 요소를 교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둘째, 에고이스트가 참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쓴뿌리가 치유된다.
오산학교를 세웠던 민족지도자 남강 이승훈은 젊은 애국자 도산 안창호의 나라사랑에 대한 강연을 들으면서 자기 위주의 삶을 정리하고 애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 사랑만이 가치가 있다는 신념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이들이 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되면 그들의 인생은 변한다. 남강 이승훈의 변화도 진정한 사랑은 자기 사랑이 아니고 애국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의 삶은 교육을 통해 애국하는 삶으로 변화된다.
진정한 사랑은 일들이 다른 사람이 중심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되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에고이스트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가 큰 사람인가를 놓고 경쟁했고 누가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경쟁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3년간의 공동생활을 하면서 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은 섬김의 생활이며 썩어지는 희생의 생활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현장교육은 제자들로 하여금 참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 이러한 제자들의 깨달음은 그들 속에 있는 에고이스트의 쓴뿌리를 치유하게 되었다.
셋째,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안전한 관계를 맺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의 안전한 관계를 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속임을 당하고 상처를 입으면서 안전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귐이 깊어지면 이 사람도 과거의 그 사람처럼 자신을 배반하고 상처를 주고 떠나지 않을까 염려한다. 에고이스트들은 경험상으로 다른 사람과의 안전한 관계의 경험이 많지가 않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서로가 속임을 당하고 속이는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에고이스트가 진정한 사랑의 실천자를 만나면 그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안전한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사랑의 실천은 안전한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소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장발장과 신부와의 만남의 의미도 안전한 관계를 의미한다.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로부터 저녁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받았지만 은쟁반을 훔쳐서 도망갔고 나중에 경찰에게 붙잡혀왔다. 그런데 미리엘신부는 은쟁반은 자신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하면서 장발장을 용서한다. 이 때 장발장은 미리엘 신부로부터 안전한 관계의 사랑의 진면목을 경험한다. 이후에 장발장의 삶은 바뀐다. 이와 같이 에고이스트들이 안전한 관계를 경험하면 그들의 쓴뿌리가 치유된다.
3) 모자람을 채우시는 예수님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그것은 안전한 관계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한 13:1). 에고이스트들도 사랑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곧 바닥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처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들의 인격과 성품이 바뀐다. 예수님의 넉넉한 인격과 마음을 본받게 된다. 결국 에고이스트의 치유는 진정으로 사랑을 베푸는 사람을 만나야만 가능한데 그들은 사랑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관계를 제공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가? 에덴의 동산은 두로 도는 화염검으로 가리워져 버렸고 넘치던 동산에는 엉겅퀴가 솟아나고 아름답고 좋은 열매는 땀 흘리는 수고와 해산하는 수고로 변해 버렸다. 욕망의 잡초가 솟아나고 수치와 두려움, 책임 전가와 도피가 새로운 인간의 성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저주와 고난, 미움과 불안이 이웃되고 ‘모자람’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바뀌어졌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에고이스트가 되어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고자 하며 자신만의 명성만을 드높이고자 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저주의 세상, 모자람의 자리에 오셔서 축복과 풍성함으로 채우시고 계신다. 예수님은 어디든지 모자람과 고난과 저주와 죄악이 있는 곳에 오셔서 그곳에 넘치는 포도주의 기적을 베푸신다.9)
쓴 뿌리 2
기쁨은 희생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1. 희생자란 누구인가
나는 억울하게 손해만 보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희생자라고 하는데 이들은 <구제(구원)가 모든 것이다: Relief is everything>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살아간다.
1) 성경속의 희생자
희생자의 삶을 산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결혼관계의 희생을 이야기한다. 잘못된 결혼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 살아왔고 앞으로도 고통가운데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람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구약성경의 소선지자 호세아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1:2). 율법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을 받은 호세아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바알 신을 따르는 타락한 모습을 보고 호세아에게 창녀와 결혼하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호세아는 당황스러웠지만 매음굴로 가서 창녀인 고멜과 결혼을 한다. 호세아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창녀 고멜도 선지자 호세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호세아를 아는 사람들은 율법을 어기면서 창녀와 결혼하는 선지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결혼은 긴 고난을 예고한 것이었다. 얼마 후 자녀들이 태어났다. 첫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이었다. 그 뒤에 딸을 낳았는데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이름을 짓고 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고멜이 딸을 낳은 후 아들을 하나 더 낳았는데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지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호세아도 막내아들이 자신의 아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고멜의 음탕한 행동을 아는 호세아는 자신의 막내아들을 낳았다는 고멜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로암미’는 그의 씨앗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에 번민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섬기면서 점점 하나님을 떠났던 것처럼 고멜도 호세아의 호의를 멀리했고 타락한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부정한 아내의 외도를 알고도 침묵했고 불행했던 자녀들을 보면서 불평하지 않았던 호세아, 그는 억울한 희생자였다. 그런데 그는 침묵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순종했다. 그는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렸다. 그의 상처의 고통이 깊어질수록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했다. 호세아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메시지를 전했다.10)
2) 우리 주변의 희생자
한 젊은이가 청운의 꿈을 안고 장교로 군 입대를 했고 얼마 안 되어 베트남 파병을 자원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생애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만난다. 그는 베트남 현지 양민학살을 했다는 죄목으로 십몇 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사람은 철저한 희생자의 삶을 살았다. 소위 계급장을 단 소대장 시절에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몰렸는데 너무나 억울했다. 소위 계급의 소대장은 작전명령권자가 아니기에 명령을 받아서 작전을 수행하지만 조직적으로 양민학살을 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 당시 한국군은 작전 수행 시에 월남 민간인에게 피해를 줄 때가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월남전은 전선이 일정하지 않은 게릴라전이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민간인과 군인이 구별되지 않을 때가 부지기수였다. 그렇지만 한국군이 작전 수행 시에 월남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보고가 확인되었고 누군가가 이 일에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이 때 이 젊은 장교는 양민학살의 책임자로 몰렸고 재판과정을 거치면서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청춘을 감옥에서 보냈다.
이 젊은이는 너무나 억울했다. 자신에게 든든한 돈과 배경이 있었다면 이러한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출옥하게 되면 복수할 것을 결심하면서 어려운 감옥생활을 견디었다. 복수심에 불탄 이 사람의 얼굴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증오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 사람은 마음 문을 두드리는 전도자들의 간절한 권면을 처음에는 외면했지만 차차 마음 문이 열리고 예수를 영접했다. 이 후에 그는 신학공부를 하고 목양자의 삶을 살고 있다. 억울한 희생자가 축복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희생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어떤 자매는 공부를 잘못했던 오빠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보냈고 공부를 잘했던 자신은 여상을 보냈기에 자신이 희생자라고 했다. 그녀는 혜택을 받은 오빠와 남녀차별을 했던 부모에 대해서 쓴뿌리가 있었다.
2. 희생자의 특성
위의 예처럼 외상(外傷)적 사건에 의해 “희생자가 된다는 것(victimization)은 우리가 가정한 세계의 근본적인 전제들 하나하나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평상시 기능할 수 있는 안정성(stability)은 파괴된다.”11) 사람들은 자신만은 희생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에 만족하면서 스트레스와 불안을 덜어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가 품었던 가정은 믿을 수 없는 환상이었음이 드러난다.
자노프-불만(R. Janoff-Bulman)은 인간은 보편적으로 세 가지 가정을 기반으로 생활한다고 설명했다. 그 세 가지 가정은 ① 개인적으로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 ② 세계는 의미있고 이해될 수 있다는 지각 ③ 자신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는 견해이다.12)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적인 삶에서 이러한 가정들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희생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 희생자의 삶의 특징은 무엇인가? 네 가지 정도로 희생자의 삶의 특징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자신이 희생자가 되는 것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손해보고 고생하며 억울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여인은 가난한 가정에 시집을 왔는데 남편은 무능력하고 알코올 중독자여서 자녀들의 양육과 가정 경제는 자신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이 여인은 가정을 위해 자신은 희생자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만약 그 때에 그 남자와 결혼하고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행복했을 텐데. 이 남자와 결혼했기에 나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둘째, 희생자들은 자신이 희생했던 자신의 과거에 묶여있다.
이들이 희생했던 과거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 이들은 과거에 희생했기에 현재도 희생할 수밖에 없고 미래도 희생자로서 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많지만 주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과거 생각은 후회되거나 화가 나거나 아쉽거나 억울한 일에 대한 것이다. 물론 좋은 추억은 때로 우리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줄 때가 많다. 그런데 희생자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쾌하고 불안한 과거의 생각에만 집중하는 일종의 강박신경증의 증세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힘들었던 과거생활에만 계속해서 매달려 있으면 현실의 생활은 의미가 없어지고 더욱 짜증스러울 때가 많이 있다. 현재에 주어지는 모든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시간이 값있고 가치가 있다.
셋째, 희생자들은 자신의 인생이 속았고 이용만 당했다고 생각한다.
야곱은 창세기 31장 6절과 7절에서 자신의 두 아내에게 말한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번역하였느니라.” 야곱은 두 아내에게 자신은 장인으로부터 속임만을 당했던 희생자라고 말한다. 실제적으로 야곱은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넌 뒤에 외삼촌집에서 거부가 되었지만 희생당했던 측면만을 강조했다.
넷째, 희생자들은 현재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막연한 미래만을 공상한다.
희생자들은 억울한 과거에 의해서 현재가 왔기 때문에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현재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그 미래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내심으로 과거가 불행했던 것처럼 현재도 불행하고 미래도 불행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혹시나 하는 기대이면서 그 미래는 대부분이 공상에 그치고 만다. 건강한 현재가 결국 건강한 미래도 만들 수 있다. 희생자들은 불안하고 걱정되는 미래로 마음을 집중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정신치료자들은 정신병은 과거와 미래에 사는 것이고 정신건강은 현재에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3. 희생자가 만드는 독성
첫째 희생자는 부정적이며 침체되어 있으며 불평만 한다.
희생자는 모든 일에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면을 보지를 못해서 쓴맛이 생겨난다. 열 가지 사건을 대할 때에도 아홉 가지의 긍정적인 사건을 보지 못하고 한 가지 부정적인 사건만을 집중해서 본다. 희생자는 매사에 침체되어 있고 자신감을 상실한 체 열등감 속에 머문다. 그들은 용기를 갖고 어떤 일을 추진하거나 도전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 불평만 한다. 그들의 불평의 대상은 배우자일 수도 있고 자녀들일 수도 있고 부모님이나 교회의 목회자일 수도 있다.
둘째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자신은 희생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들은 종종 게으른 생활을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만약 자신의 문제에 무관심하면 그들에게 불평하고 사랑이 없다고 비난한다. 희생자들은 게으르고 소극적인 경우가 많으며 그들은 자신은 일을 하나 마나 라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마지못해 한다.
셋째 희생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성취에 대해서 분노한다.
나는 희생당하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다 빼앗기고 남아있는 것이 없는데 그들에게 무엇인가 남아 있으며 일이 잘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잘되는 사람에 대해서 분노하고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넷째 희생자들은 소외되고 시기심이 더 많아진다.
희생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건전한 교제를 나누는 것을 싫어한다. 스스로가 자신을 소외시키면서 성취하는 사람들을 더욱 시기한다. 사람들은 창조 시부터 관계 가운데 살게 되어 있는데 소외와 시기심 가운데 사는 희생자들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다섯째 희생자라는 생각이 더 강화되고 영속화된다.
룻기를 보면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1:13) 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고향인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환영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하게 괴롭게 하셨음이라(룻1:20)”고 이야기한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자신은 희생자라는 생각이 더 강화되고 굳어졌다. 그래서 함께 하겠다는 며느리 룻의 다짐이 있었고 환영해주는 고향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더욱 굳어진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잘못된 생각은 바꿔져야 하는데 희생자들은 자신이 희생자라는 잘못된 생각을 더욱 고착화시킨다. 그들은 삶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희생자라는 정체성 가운데 머물기를 원한다. 자신의 인생은 희생자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게이린(W. Gaylin)은 “사람들의 행복과 안전의 보장은 사랑, 돈, 사회적 지위, 권력에의 의존하는 만큼 그 상실에 위협감을 느낄 수 있다. 그 의존이 압도적으로 지나칠 때 상실을 경험하면 절망한 채 생존을 포기한다. 바로 그 절망이 우울증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람은 무력하고 무능한 채로 삶의 투쟁을 포기한다”라고 말했다.13)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제도에서 행복과 안전의 보장을 의미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상실한 나오미는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가 없고 희생자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아무런 대체수단이 없기에 희생자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고착되었다. 그러나 룻기는 나오미의 희생자로서 고착된 사고와 삶이 며느리 룻의 신앙과 헌신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도래로 변화되는 여정을 보여준다.
4. 희락은 희생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하신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렘29:11).
1) 희락이란?
기쁨은 희생자라는 피해의식을 치유한다. 성령의 두 번째 열매가 희락, 즉 기쁨이다. 기쁨은 감사로 살아가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과 17절은 말씀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감사로 살면 기쁨이 있고 기쁨은 희생자라는 피해의식을 치유한다. 감사로 살아가는 사람은 희생자라는 고착된 생각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진정한 기쁨은 외면에서 생겨나거나 외피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뿌리로부터 솟아난다. 기쁨이 내면에서 흘러나올 때 사람들의 얼굴이 빛나게 되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생긴다.14) 어떤 면에서 주님은 우리 안에 있는 완악함 때문에 슬픔과 어려움을 통해서 기쁨의 역사를 베풀어주시기도 한다. 그래서 기쁨이란 슬픔이라는 자궁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이다. 때가 이르면 주님은 우리에게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은 기쁨의 열매를 허락해 주실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경우에는 시대적 환경과 자신의 처지를 보면 모든 것이 문제투성이로 보이고 마음이 슬펐다. 그런데 그는 슬픔 속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그의 기쁨은 슬픔을 통과한 기쁨이며 고통을 통과한 기쁨이다(합3:1-18).
희생자는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희생자의 밑바탕에는 슬픔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제는 슬픔을 몰아내고 그곳에 기쁨을 채워야 한다. 젖소에 음악을 들려주면 젖이 잘 나온다. 여기에서 젖소를 희생자에 비유할 수 있고 음악을 기쁨에 비유할 수 있다. 풍성한 젖은 치유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젖소가 힘들게 우유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한 희생자가 된다. 그런데 젖소가 음악을 들으면서 기쁨을 회복하면 그 기쁨은 젖소의 희생자라는 억울한 생각을 없애주고 다시금 기쁨을 회복해서 건강한 몸으로 좋은 우유를 생산하게 된다.
2) 희생자의 쓴뿌리 치유
첫째, 예수님은 치유를 위해 미래에서 현재의 우리에게로 다가오신다.
나의 앞에 계시는 예수님은 나를 향해 오신다. 모든 시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온다. 이 시간의 변화의 언저리에 예수님이 계신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슬픔 대신에 기쁨을 주시며 죽음대신에 생명을 주셨고 절망대신에 소망을 주셨다. 예수가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슬픔이 아닌 기쁨이 있다. 현실의 슬픔도 예수님을 향해 가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쁨으로 변화된다. 바울사도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간다고 고백했다(빌3:12-14). 그 푯대가 미래에서 현재의 우리에게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이다.
둘째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소망이 희생자를 치유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와의 세 차례의 전쟁에 지고 포로가 되어서 강제노동을 하면서 이국땅에서 비참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의 영화로웠던 시온을 기억하면서 수금을 타면서 울었다. 이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다. 현재 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만 희생자가 아니라 장차 평안과 소망을 확증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비록 원수의 나라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동행은 계속되기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렘29:1-14).
셋째 희생자가 치유받기 위해서는 기쁨의 근원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가에는 많은 병자들과 소경들,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그 당시의 사회의 희생자들이다. 억울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은 38년 동안 누워서 지내야 하는 중풍병자였다. 그는 희생자들 중에서 가장 큰 희생자였다. 물이 동할 때 연못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 때 예수님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질병을 치유한다.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고 거리를 활보하는 그 환자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다.
3) 기쁨의 사람들
사람들이 보기에는 희생자처럼 보이는 사람인데 전혀 희생자로 살지 않았던 위대한 성경의 인물이 여호수아와 함께 12명의 가나안 정탐꾼 중의 하나였던 갈렙이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고 그는 제 2인자로 만족해야 했다. 가나안 땅이 거의 정복되고 지파들 마다 땅을 분배받았는데 자신이 속한 유다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다고 여호수아에게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희생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건강하니까 여호수아가 허락만 하면 산지의 적들을 내보내고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여호수아의 협력자로서 귀한 일을 감당했던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지 결코 희생자가 아니었다.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rer 1471∼1528)15)라는 독일 화가의 “기도하는 손”이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관계되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어느 독일의 시골에서 그림을 잘 그리고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간직한 두 소년이 살고 있었다. 이 두 소년은 서로 가까운 친구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면 자신들의 꿈을 실천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두 소년은 약간의 여비를 준비해서 화가가 되려고 도시로 나온다. 도시에서 열심히 그림 공부를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준비한 돈은 곧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일을 하게 된다. 두 소년은 서로 일하다 보면 그림공부는 영영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한 친구가 먼저 공부하고 다른 친구는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를 결정했다. 두 소년은 서로를 향해서 먼저 공부하도록 설득하다가 결국은 뒤러가 먼저 그림공부를 하기로 했다.
뒤러는 친구가 보내주는 돈으로 그림공부를 했다. 거의 10년 정도가 지나서 뒤러는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되었고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뒤러는 그림 판돈을 가지고 친구를 찾아간다. 지금까지 친구가 고생했으니 자신의 그림을 판돈으로 친구가 공부하는 것을 기대하고 기쁨으로 친구가 일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저녁 늦은 시간이어서 손님들은 없고 친구 혼자서 식당의 뒷정리를 한 다음 앉아서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내 친구 뒤러가 이제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습니다. 저도 한 때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이제는 식당일을 하느라고 손이 너무나 무디어져서 화가가 될 수 없어요. 그러나 내 친구 뒤러가 유명한 화가가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뒤러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 영광 받아 주세요.”
식당으로 친구를 찾아간 뒤러는 친구의 기도하는 음성을 들었고 작은 촛불을 통해서 비쳐진 친구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특별히 기도하는 친구의 손이 너무나 고귀하게 보였다. 뒤러는 기도하는 친구의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그 기도하는 손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 그림이 곧 뒤러의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 되었다. 분명히 뒤러의 친구는 뒤러가 화가가 되도록 희생했다. 그러나 그는 그 희생을 억울하거나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희생을 감사했다.
순교자들은 가장 큰 희생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한다. 그들의 죽음은 거룩한 희생이다. 순교자들은 자신을 억울한 희생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승리자라고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예수님을 흥하게 하기위하여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 일이 나를 실패로 이끌고 고난과 좌절로 이끌지라도 거기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16) 바로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인 희생자들이다.
쓴 뿌리 치유 3
화평은 투쟁가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1. 투쟁가란 누구인가
쓴 맛을 만드는 사람 중에 ‘투쟁가’가 있다. 투쟁가는 말한다. <승리는 모든 것이다: Winning is everything>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있다. 이들은 승리하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 승리하는 일에 인생의 전부를 건다.
1) 성경속의 투쟁가들
야곱은 형 에서와 투쟁하면서 형으로부터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는다.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 가서도 재산 때문에 투쟁한다. 야곱의 아내인 레아와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투쟁하는데 그것은 아기 많이 낳기 경쟁이다.
자매들끼리의 관계는 아름다운 관계인데 아기를 많이 낳아서 남편의 사랑을 독식하겠다는 투쟁가적인 태도를 가진 레아와 라헬, 이 두 자매의 관계는 삭막해졌다. 이들의 남편과의 잠자리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치열했다. 언니 레아가 아들 넷을 낳았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던 라헬은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30:1).
투쟁했는데 목적을 이루지 못하니까 라헬은 사랑하는 언니를 시기했고 심지어 남편에게 극단적인 말인 죽어버리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고 하게 된다. 나중에는 라헬은 자신의 종 빌하를 남편 야곱의 첩으로 주면서까지 아들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동생 라헬처럼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는 네 번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유다라고 한다(창29:35). 유다의 이름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아들을 낳아 남편의 사랑을 확보하겠다는 투쟁가의 의지를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레아의 아름다운 다짐을 보여준다. 영광은 포기와 함께 주어지는 것이지 투쟁과 함께 주어지지 않는다.
2) 우리 주변의 투쟁가들
시각 장애자인 안요한 목사의 부친은 안재삼 목사이다. 이 목회자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시골교회를 섬기면서 많은 아픔을 겪었다. 자녀들이 많아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고 때때로 섬기는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안요한은 어린 시절에 아버님이 어렵게 목회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이러한 목회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재삼 목사는 아들을 목사로 키우기 위해서 이름도 요한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아들 안요한은 목회자의 길을 가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반항적이었다. 그는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 보도록 교회 담벼락에다가 자신의 이름을 빗대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안요한 복음 1장 1절)이라고 적어놓곤 했다. 이러한 아들 안요한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큰 아픔이 되었다.
인생을 출세해서 성공해야 하는 전쟁터로 생각한 안요한은 대학을 졸업하고 미8군 계통에서 군무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그 직장에서 그는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미국유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실명을 하게 되었다. 부인조차도 눈 먼 남편을 두고 두 딸을 데리고 떠나버린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포기하고자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한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여기에서 그는 한 구두닦이 소년을 만나서 그의 호의로 그가 방을 얻어 살고 있는 달동네 집으로 갔다. 이 구두닦이 소년은 중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교복을 걸어놓고 있었고 중학교 교과서를 준비해 놓았다. 그의 꿈은 중학교에 다니는 것이었다. 이 때 안요한은 구두닦이 소년과 만남을 통해서 인생의 색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그는 어둠의 골짜기에서 육신의 눈이 멀어서 고통스러웠지만 영안이 열려지면서 주님을 만난다.
승리자가 되기 위한 투쟁의 삶을 포기했을 때 안요한의 마음속에 주님의 참 평안이 생겨났다. 자신의 상처받은 과거는 투쟁을 통해서 안요한으로 하여금 인생을 승리하도록 부추겼지만 실명으로 육안이 망가졌을 때 한 구두닦이 소년과의 만남은 투쟁대신에 평화를 그에게 주었다. 이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였다.
2. 투쟁가들의 특성
첫째, 투쟁가들은 인생을 승리해야 하는 전쟁터로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는 투쟁가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인생을 승리해야 하는 전쟁터로 생각하면서 생존경쟁에서 이기려고 한다. 생존경쟁의 장은 일종의 전쟁터이다.
성공한 인터넷 기업의 경영자인 조나단 페이션트는 그의 운전기사인 찰리에게 자기 부모님께 교훈으로 받아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쪽지내용을 전해준다. 그 내용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빠른 가젤은 사자보다 더 빨리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사자는 또한 가젤을 앞지르지 못하면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가젤도 달리고 사자도 매일 아침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달린다는 이야기다.17) 달리기 경쟁을 하는 가젤과 사자는 투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성공한 사업가인 조나단이 찰리에게 사자와 가젤의 달리기 경쟁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찰리가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다. 조나단이 부모님에게서 배운 교훈은 승리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나단은 이 교훈을 찰리에게 전해주어 찰리도 그런 자세로 삶을 살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둘째, 투쟁가들은 사람들을 승리자와 실패자로 나눈다.
투쟁가들은 사람들을 승리자와 실패자로 나누면서 승리자에게만 가치 있는 삶이 주어지고 실패자에게는 가치 있는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승리자도 실패자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만이 있을 뿐이다.
셋째, 투쟁가들은 늘 피곤하고 지쳐있고 조급하다.
물론 그들이 투쟁해서 승리했을 때는 겉으로는 힘이 있고 여유가 있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들 대부분은 곤고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승리자의 삶이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내 행복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불행해 질 때가 있다. 투쟁가들은 소위 실패자들의 불행해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시인 도종환은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18)
내가 최고의 자리에 올라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빛 아래서 월계관을 쓰고 서 있는 시간에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패배의 그늘에 던져진 채 인생이 끝나버리는 사람이 있다. 내가 모차르트처럼 일찍이 최고의 찬사와 화려한 조명을 받을 때에 나로 인해 살리에르처럼 독을 품고 원한이 쌓여가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의도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나로 인해 비롯된 시기와 원망의 독화살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오는 날이 있다. 내게 황금의 훈장을 가져다주었던 교향곡들이 진혼곡, 레퀴엠이 되어 나를 쓰러뜨리는 날이 있다. 승리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넷째, 투쟁가들은 내면세계보다는 외적세계에 집중해서 살아간다.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투쟁가들은 내면세계를 희생해서라도 불균형하게 외적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유혹을 받게 된다. 그들은 더 많은 프로그램, 더 많은 모임들, 더 좋은 학력, 더 많은 대인관계, 더 많은 사업에 집중해서 나중에는 본인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에 짓눌리게 된다. 그 결과로 때로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내면세계는 피로, 환멸감, 패배감 등으로 가득 채워진다.19)
3. 투쟁가들이 만드는 독성
첫째, 투쟁가들은 이해관계와 기능적으로만 사람들을 대한다.
그래서 순수한 인간관계가 불가능하다. 이익이 안 되면 언제든지 인간관계를 포기할 수 있다. 순수한 인격적인 만남이 불가능하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이해관계나 기능적인 관계가 아니다. 부모와 자녀관계는 혈연관계이며 친밀감이 그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투쟁적인 부모들은 성적이 좋지 않은 자녀들에게 더 이상 친밀감을 보이지 않고 자녀가 성적을 올리지 않는 자녀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한다. 교사와 학생 사이도 성적향상에만 집중하며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둘째, 투쟁가들은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소외와 분리시킨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서슴지 않고 소외시키거나 분리시킨다. 공산주의자들은 대표적인 투쟁가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몰면서 인민재판을 통해서 살해하기도 한다. 투쟁가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승리에 도움이 되면 수용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승리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거절하고 무시한다.
셋째, 투쟁가들에게 승리는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투쟁가들은 승리를 위해서 인간관계나 교우관계, 가족관계를 희생할 수 있다. 이 때 관계는 죽는다. 영화 <벤허>에서 로마의 장교가 된 벤허의 친구인 마살라는 예루살렘의 로마주둔군의 고위 장교로 부임해서 임무를 수행을 잘 할 수 있도록 그 지방의 유력자인 벤허의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로마군을 침략군으로 생각하는 벤허는 친구 마살라의 요청을 거절한다. 마살라는 자신의 성공적인 임무수행에 협조하지 않은 옛 친구인 벤허를 노예로 끌려가게 한다. 마살라에게 승리, 즉 출세하는 것이 친구관계보다 더 중요했다. 벤허는 좋은 친구를 로마사람들이 망쳤다고 절규한다. 투쟁가들은 이처럼 승리를 위해서 관계를 파괴하면서 까지 많은 고통을 만들어 낸다.
넷째, 사회는 승리자에게 돈과 권력으로 보상해준다.
우리는 주변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대한민국의 최근의 역사 가운데 몇 번의 군사 쿠데타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반대편을 죽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성공하면 돈과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주먹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의 보스에게 충성하려고 한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보스에게 충성하면 돈과 힘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세계 여러 곳에 미인선발대회가 있다. 참가자들은 여기에서 우승하면 돈과 명예가 주어진다. 우리 주변에는 미인대회에 입상하기 위해서 처절한 몸부림을 하는 여성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탁월한 미모를 갖기 위해 지나치게 성형수술을 해서 얼굴과 몸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4. 화평은 투쟁가들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12:14-15).
1) 화평이란?
투쟁가들을 치유하는 성령님의 세 번째 열매가 화평이다. 화평은 갈등의 해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투쟁가들은 가는 곳마다 갈등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투쟁가의 마음속에 혹은 투쟁가들 사이에 화평이 만들어지면 갈등은 해결된다.
투쟁가는 계속 싸워야 하지만 화평은 더 이상 싸움하는 것을 포기한다. 이들은 무엇인가 얻고 성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고 소유한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그런데 화평이 임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싸우는 것을 포기한다.
화평은 전쟁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불화나 갈등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화평이란 문제를 대면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그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리겠다는 뜻이다. 또한 화평은 하나님의 꿈이고 하나님의 비전이다. 바로 이 땅에 난무하는 근심과 걱정, 미움과 적대심, 그리고 분노와 폭력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방법이다.20)
일생을 투쟁가로 살았던 투쟁가였던 야곱이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창43:14). 투쟁가는 지금까지는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움켜쥐었던 손을 펴게 된다. 야곱은 생애 초기에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과 축복권을 움켜쥐었다. 그 후에는 아내 라헬을 움켜쥐었고 한 때는 재산인 짐승 떼를 움켜쥐었다. 그는 아내 라헬이 죽은 다음에는 라헬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요셉이 죽고 베냐민만 남았는데 이제는 필요한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베냐민도 포기해야 했었다.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베냐민을 포기할 때에 비로소 야곱에게 화평이 임했다.
2) 화평의 치유
첫째, 화평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게 한다.
화평의 삶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삶, 즉 자족하는 삶이다. 바울사도는 몸에 있는 가시로 인해서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몸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절하게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여기에서 눈에 가시가 제거되지 않았지만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몸에 가시가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라”(고후12:10). 바울사도는 가시가 있는 자신의 육체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 그의 내면에는 평화가 없었다. 그는 가시가 있는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화평을 받아들였을 때 가시가 있는 그의 육체를 받아들인다. 비록 자신에게 여전히 가시가 있지만 주님의 화평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둘째, 화평의 삶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 투쟁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은혜로 사는 자이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인간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그 결과가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란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투쟁가가 되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득보다 실이 많다.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화평한 자가 되는 것은 그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다.
셋째, 화평케 하는 자는 투쟁가들에게 평안한 안식처가 된다.
투쟁가들에게 모든 사람은 경쟁자로 보인다. 그들은 경쟁에 질까 염려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불안하다. 왜냐하면 그와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투쟁가들도 상대방이 투쟁가가 아니라 화평을 만드는 평화주의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안심한다.
학교는 치열한 경쟁사회이다. 특히 선생님이 잘 한 아이들만 칭찬을 해주면 경쟁에서 지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은 어두운 잿빛이고 불행하다. 그런데 한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아이에게 최고의 칭찬을 했을 때에 그 아이에게 새로운 감동의 시대가 열릴 수 있다. 이 때 아이는 학교라는 경쟁사회에서 평안함을 누리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간다. 그 선생님은 바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경쟁에 멍들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에게 좋은 치유자이다.
한 소년은 1학년의 미술시간에 로어선생님에게 자신이 그린 자주색 인디언 천막이 사실적이지 않다고 지적을 받는다. 선생님은 이 소년에게 사실적이지 않은 그림을 다른 아이들 것과 함께 교실 벽에 걸어줄 수 없다고 했다. 그 후 실망한 그는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는데 2학년 때에 만났던 바르타 선생님은 달랐다.21)
2학년 때 바르타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아무 거나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라” 무엇을 그리든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난 아무 것도 그리지 못한 채 백지만 책상 위에 달랑 얹어 놓고 있었다. 선생님이 교실을 한 바퀴 돌아 내 자리까지 왔을 때, 나는 심장이 콩콩 뛰었다. 바르타 선생님은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들판에 온통 하얀 눈이 내렸구나. 정말 멋진 그림이야!”
넷째, 화평의 사람은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화평의 사람은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누구나 포기는 어렵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17절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복수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화평의 사람은 복수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도 포기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종들이 땅과 우물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다가 갈등이 생겼다. 그 때 아브라함은 롯을 불러 서로 싸우지 말고 헤어지자고 말한다. 이 일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롯에게 먼저 목초지를 선택하도록 했다. 이 때 롯은 물이 많고 풍요로운 곳을 선택했는데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었다. 아브라함처럼 화평의 사람은 갈등이 생겼을 때에 이익을 포기하는 미덕을 보여준다(창13:1-13).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말은 성경구절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자신의 이익도 포기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화해할 줄 알고, 함께 갈 줄 아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분노는 우리를 억압하고 옭아맨다. 화목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분노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22)
다섯째, 화평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다.
호웨(Howe)는 회고하기(reminiscing)와 기억하기(remembering)의 차이점을 설명했다.23) 회고하기는 과거를 무비판적으로 상기하는 것으로 절망과 반복된 자기 패배적 노력의 해로운 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기는 현실의 관점에서 과거에 대한 실제적이며 비판적인 반성이고 그리고 과거와 계속된 치유의 관계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 기억하기는 성만찬기도에서 하나님의 수많은 자비를 회상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희망과 가능성을 주는 과거의 의미있고 치유하는 관계의 따뜻함 속에서 일종의 ‘은혜를 입는 행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전하고 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미래의 은혜를 입는 행위이다.
투쟁가였던 야곱은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다. 그의 과거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그의 가족 모두가 미래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행위이다. 이러한 그의 신앙관은 가족의 위기를 해결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환난 날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곱의 확고한 신앙고백은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응집시켜 그 환난을 유연하게 극복하게 하며 고통을 당한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신앙의 본질이었다.
3) 화평의 사람들
이삭은 열심히 샘을 팠지만 그 샘들을 세 번씩이나 모두 빼앗긴다. 열심히 샘을 팠다고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네 번째 팠던 르호봇 샘물은 빼앗기지 않았다. 이때에 이삭의 대가족과 대치상태에 있었던 아비멜렉이 와서 화친을 하자고 제의한다. 그들은 제의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창26:28). 주변 사람들은 족장 이삭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형통케 되는 것을 보았다. 계속해서 그들은 이삭의 샘물을 빼앗았는데 이삭은 샘을 팔 때마다 물이 넉넉하게 나왔고 넉넉한 수확을 하는 이삭의 형통함을 보았다. 이삭의 형통은 은혜의 결과이지 투쟁의 결과는 아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에게 둘려 싸여있었다. 그들은 검과 몽치를 준비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다. 이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서 실패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칼을 가지고 병정 중의 하나였던 말고의 귀를 잘라 버린다. 이 때 예수님은 다시 말고의 귀를 붙여주면서 말씀하셨다.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 (마26:52). 이 말의 의미는 비록 억울하지만 무력을 사용해서 승리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화평의 사람으로 남아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투쟁가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교훈을 따르지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승리자가 되기를 원한다.
유대 랍비 한 사람이 어린 학생들에게 “너의 일생동안 추구해야 할 위대한 가치목록을 만들라”고 숙제를 내었다. 한 학생이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가치 목록 제1번으로 ‘명예’를 그 다음에 ‘부’를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건강’을 덧붙였다. 이 학생이 제출한 목록을 살펴본 랍비는 고개를 흔들면서 “이것으로는 안 돼! 너는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를 빠뜨렸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모두 얻는다고 해도 아무 쓸모가 없어. 네 심령 저 밑바닥에서부터 고요히 흘러넘치는 샬롬(shalom)이 없다고 하면 돈도, 명예도, 건강도 빈껍데기가 되고 말거야!”라고 말했다.24)
쓴뿌리 치유 4
인내는 완전주의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완전주의자들은 늘 <완전은 모든 것이다: Perfection is everything>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산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도 이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다. 그들은 여기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괴롭히면서 늘 정서적으로나 영적으로 불만족과 고통 가운데 살게 된다.
1. 누가 완전주의자인가?
바나바와 바울은 신실한 주님의 종으로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로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선교사였다. 바울사도는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하기 전 바나바와 심각한 의견충돌이 있었다. 1차 선교여행 중에 도중하차했던 마가를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에 동참시키자는 입장이었지만 바울사도는 마가의 동행을 수용할 수 없었다. 바나바와 바울은 결국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서로 헤어져서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바나바사도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바울사도는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지역으로 각각 2차 선교여행을 출발했다(행15:36-41).
완벽한 헌신을 요구했던 바울사도는 1차 선교여행에서 마가의 실수를 용납할 수가 없었기에 그러한 마가를 2차 선교여행에 동행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에게 새롭게 헌신할 수 기회를 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사도는 율법의 완전성을 신뢰했던 율법주의자였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은혜의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바울사도 속에 있는 완벽을 요구하는 율법의 정신이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가가 새롭게 헌신을 결단했지만 그를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깊은 은혜를 새롭게 경험하면서 마가를 용납하고 좋은 동역자로서 함께 사역을 하게 된다(골4:10). 그가 거절했고 바나바가 수용했던 마가는 후에 초대교회의 훌륭한 지도자로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알렉산드리아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바울사도는 순교하기 전에 기록했던 디모데후서를 보면 꼭 마지막으로 마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딤후4:11).
고등학교 시절에 종종 방문했던 친구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가까운 친구들이 함께 모여서 식사도 하고 공부도 했었다. 어느 여름날 나는 마당 한 가운데 있는 수돗가에서 집에서 늘 하던 대로 대야에 발을 담그고 발을 씻었다. 세면대야에 발을 담그면서 씻을까 말까를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냥 담그며 씻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친구 어머니가 내가 하는 일을 못마땅한 듯이 화난 태도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하면서도 불쾌했다.
상당히 당황해하는 나를 보면서 친구는 자신의 어머니를 이해하도록 부탁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자기들의 세면대야를 사용하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대야에 발까지 넣었으니 그 어머니가 노려보는 것은 당연했다. 친구는 자신의 어머니가 지나친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길거리에서 파는 엿은 비닐봉지로 쌓여있지 않으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사먹지 말도록 자녀들에게 엄명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이 친구는 다른 사람들, 특히 영적인 권위자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면을 발견하면 견디지를 못해서 교회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어떤 목회자도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가끔은 이 친구가 염려가 된다. 진정 이 친구가 원하는 완벽한 목회자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겨났을까? 청결 면에서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어머니의 영향력이 아들에게 미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더러운 발이 우리 집 세면대야에 넣어져서 깨끗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어머니였다면 그 아들에게 좋은 영향력이 물려졌을 것이다.
2. 완전주의자의 특성
완전주의자의 특성을 단편적으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완전주의자의 증상을 가진 사람들을 가정이나 교회나 어떤 공동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씨맨즈(David A. Seamands)는 완전주의자들의 특성을 의무감, 의기소침, 근심, 율법주의 분노, 부인 등으로 제시했다.25) 본 연구에서는 완전주의자들의 특성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완전주의자들은 완전주의 신화를 추구한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절에 유대인들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이들은 완전주의 신화를 추구하면서 최선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 그들은 어떤 제물을 드리기를 원했으며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절에 유대백성들은 천천(백만)의 양과 만만(일억)의 소 같은 것을 잡아서 수적으로 최고의 제사를 드리려고 했었다. 또한 질적으로 최고의 제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그것은 가장 맛이 좋은 일 년 된 수송아지와 가장 귀한 맏아들로 드린 제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로 드린 많은 물량의 제물도 양질의 제물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겸손한 자세로 의를 추구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원했다.
둘째, 완전주의자는 자신과 주변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람들은 일을 수행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최선을 다하지만 늘 실수하고 허물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완전주의자들은 견디지 못한다. 이들은 스스로가 문제를 만들어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 짐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때 가상적인 죄책감을 가지고 그들의 양심에 고통을 경험한다. 또한 완전주의자는 근거도 없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태가 괜찮다고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26)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은 인간관계를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표시하면서 주인이 손님을 대할 때에 적대감을 가지고 대할 수도 있고 환대하는 마음으로 대할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주인은 부모님, 교사, 성직자, 의사, 상담자이고 손님은 자녀, 학생, 성도, 환자, 내담자이다. 그런데 주인이 생각의 가난을 실천하면 손님을 환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생각의 가난이란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완전주의자들은 남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비록 하찮아 보이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해주면 우리는 적대감의 사람이 아니라 환대의 사람이 된다.27)
셋째, 완전주의자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완벽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물론 사람들은 완전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수도자들이나 영성가들은 완덕(完德)을 목표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완전케 되는 것은 좋은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자들은 완덕(完德)을 지향하면서 노력하는 기독교인들과는 다르다. 완벽주의자는 기독교의 완전함과 성결함, 성화, 그리고 성령충만한 삶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완벽주의자들은 영적으로 바리새인이 되고 정서적으로는 신경쇠약자가 된다.28) 완전하지 못한 자신을 정죄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쓴다. 완전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늘 불만족이며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날까 봐 불안해한다. 완전주의자는 완전에 이르지 못한 자신과 가족이나 공동체 구성원들과 심지어 하나님께 조차도 불만과 짜증을 보일 때가 많다.
3. 완전주의자가 만드는 독성
첫째, 완전주의자들은 심각하고 처리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긴장을 풀면서 살아야 한다. 특히 현대인들은 많은 스트레스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계속 쌓여지는 스트레스는 정신건강이나 육체 건강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져온다. 완전주의자들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이들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분주하게 하지만 늘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짜증 섞인 불평을 듣는다. 완전주의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감독해야 하며 완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해서 불평이나 어떤 충고를 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완전주의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고통 가운데 살아간다.
어떤 가정의 사모는 남편이 꼭 해야만 하는 기도시간을 정해놓았는데 남편은 안타깝게도 그 기도시간을 채우지를 못했다. 그렇게 되니 이 사모는 식사시간에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는데 자녀들이 기도할 때 아빠 목사가 충분한 기도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한 중보기도를 강요했다. 이 목사는 아내의 선한 의도를 이해하지만 식사기도시간은 고역이었다. 기도시간의 양적 완벽을 요구했던 사모님은 행복한 가족아침식사 시간을 고통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후에 사모님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 사모님은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완벽주의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에 남편 목사님이 헌신적인 간호를 해서 남편의 사랑 앞에 완고한 사모님의 완전주의가 무너졌다.
둘째, 완전주의자들은 성공과 실패의 사이클에서 산다.
완전주의자는 자신의 일이 완전했는가와 그렇지 않았는가를 따지면서 산다. 나의 일이 완벽했으면 성공이지만 완벽하지 못하면 실패다. 이들은 성공했으면 교만하고 실패했으면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 늘 일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를 따지면서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하다. 늘 성공하기 위해서 긴장해 있으면 심신은 지칠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의 영, 혼, 육은 여유와 안식을 요구한다. 늘 하나님과 자신이 세운 높은 기대치를 채워서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피곤하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러한 높은 기대치를 우리에게 거의 요구하지 않으신다.
셋째, 완전주의자들은 모든 인간관계에 독을 뿌려 놓아 살얼음을 걷게 한다.
완전주의자들은 늘 정죄하고 감독하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주변에 독을 뿌려놓아 주변 사람들은 마치 살얼음 위를 걷듯이 걸어간다. 사람들은 살얼음위로 걸어갈 때는 깨어질지 모른다는 염려가운데 늘 긴장한다. 그 살얼음이 깨어지면 사람들은 물에 빠져서 옷을 흠뻑 적시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물에 빠져 죽는 경우도 있다. 완전주의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 이러한 긴장의 연속이다.
4. 완전주의자의 치유
1) 인내란?
성령의 네 번째 열매가 인내인데 인내가 완전주의자를 치유할 수 있다. 인내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받는 열매이다. 진정한 인내를 행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이 땅과 하늘에서 가장 오래 참으시는 분은 누구인가? 그 분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출34:6)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라고 고백하고 있다. 성령은 성도들의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성도들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은 오랫동안 탄식하면서 성도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의 기도를 드린다(롬8:26).
이와 같이 인내는 인간의 품성이 아니기에 우리가 인내를 인간의 품성으로 알며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들은 쉽게 화를 내고 분노하며 불평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품성인 인내가 우리들의 품성이 되면 그 인내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준다.
2) 인내의 치유
첫째, 인내는 하나님의 시간계획과 섭리에 나의 시간계획과 뜻을 맞추는 것이다.
나의 시간계획과 뜻을 고집하면 인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시간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계획과 뜻과 맞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에 맞추는 것이 인내이다. 사람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관계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그 때까지 꼭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라고 완벽한 최후통첩을 보낼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최후통첩이 하나님의 것과 상충되면 자신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인내이다.
둘째,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완전주의자들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기다릴 수 있어야만 완전주의자들의 병이 치유가 된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방탕한 아들을 아버지가 기다렸다. 그 아버지가 완전주의자라면 아들을 기다릴 수가 없었지만 그는 기다렸고 아들은 변화되어서 돌아왔다. 그런데 큰 아들은 오랫동안 아버지의 집에서 수고하고 땀을 흘렸지만 동생 탕자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귀한 재산을 창기와 더불어 날려버렸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던 동생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 큰 아들의 생애는 불행하다.
우리가 인내하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은 금방 피어나지는 않고 때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야곱 같은 경우에 아름다운 인격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해서 그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져서 꽃 몽우리도 맺지 못하는 불행한 경우도 많이 발견한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에게 현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젠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름답게 새겨지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인내하는 마음이다.
셋째, 인내는 몸과 마음에 여유를 주면서 쉬게 한다.
완전주의자들은 쉴 줄을 모른다. 때로는 몸이 쉬는 경우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쉬지 못하고 분주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완전주의자가 인내할 수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쉼을 얻게 된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라도 당신의 뜻이면 되게 하신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원해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잠시만이라도 사람들을 기다리는 연습을 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옮기면 행복하다. 작자는 알 수는 없지만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에 실린 <3초의 여유>글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닫기’를 누르기 전
3초만을 기다려 보세요.
정말 누군가 급하게 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출발신호가 떨어져 앞차가 서 있어도 경적을 울리지 알고
3초만 기다려 주세요.
그 사람은 인생의 중요한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내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가 있으면 3초만 서서 기다려요.
그 사람 아내가 정말 아플지도 모르니까요.
친구와 헤어질 때 그의 뒷모습을 3초만 보고 있어 주세요.
혹시 그 친구가 가다가 뒤돌아 봤을 때 웃어 줄 수 있도록.
길을 가다가 아니면 뉴스에서 불행을 맞은 사람을 보면
잠시 눈을 감고 3초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언젠가 그들이 나를 위해 기꺼이 그리할 것이니까요.
정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는 때라도
3초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세요.
기다림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시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욕심 많고 이기적이고 허물 많은 나였고, 거친 인격을 가지고 있던 나를 주님은 기다렸다. 주님은 당신의 시간에 우리 안에 생겨날 아름다움을 예상하시면서 기다리셨다.
넷째, 인내의 사람은 선(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을 보다 스스로 더 의롭다고 자부한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율법을 알고 잘 지켰기 때문에 율법을 잘 모르고 지키지 않는 저 창녀들이나 세리보다 더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인간의 첫 번째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했을까? 선과 악을 알았을 때에 그들에게는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들이 선악을 알기 전에 아담은 아내인 하와에게 “당신의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창2:23) 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지혜를 얻어 눈이 밝아졌지만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추궁했을 때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고 말했다. 나는 선한데 악한 저 여자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했다. 그 여자는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주신 여자라는 것이다. 선악을 알고 나서 선을 추구했는데 결국 아담은 하와를 정죄했고 심지어 하나님도 정죄를 했다.
율법의 선함을 추구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 결국 상대적으로 선하다는 생각은 교만으로 가는 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다. 인내의 사람은 선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3) 인내의 사람들
인생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누워있는 사람, 기어 다니는 사람, 걸음마를 하는 사람, 걸어 다니는 사람, 뛰어 다니는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은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 걸어 다니는 사람 입장에서는 걸음마를 하는 사람이 못마땅하다. 걸음마 하는 사람이 불안전하고 부족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땅 위에 걸음마를 하지 않고 바로 걷는 사람은 없다.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질 때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고 박수쳐 주었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다. 예수님도 우리 부모와 같은 분이시다.
실제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주님 앞에서 걸음마를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주님 앞에서 걸음을 제대로 걸어가는 사람이 몇 사람이 될까? 주님 앞에 내 걸음걸이가 온전하다고 주장할만한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수제자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래쪽에서 기도하게 하시고 본인은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다. 그곳에 가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까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 하시면서 격려해 주셨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스승은 급박한 상황에서 처절한 기도의 단을 쌓고 있는데 잠을 자는 제자들은 자격미달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다려 주었다. 이 후에 제자들은 초대교회를 섬기면서 순교한다.
이제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완전주의자가 요구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자.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고 그 품안에서 쉬게 하시는 그 분 안에서 쉼을 얻자.
인생에서 여유를 갖는 것, 넉넉한 마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 예로부터 선비들이 좋아하던 사군자(四君子)가 있는데 바로 ‘매(梅), 난(蘭), 국(菊), 죽(竹)’이다. 사군자는 기다림과 오래 참음을 대표하는 나무와 꽃이다. 시대와 사람들의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선비들이 가졌던 전통을 되새기는 것도 소중하다.29)
매화는 매섭고 추운 겨울을 지내고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이다. 난초도 우리에게 기다림을 가르쳐준다. 새 잎이 나오고 꽃망울이 생기고 꽃이 필 때까지 우리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때로 춘란은 3년, 한란은 7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꽃눈이 나와도 그것이 필 때까지는 다시 수십 일, 수백 일을 기다려야 만개한 꽃을 볼 수 있다. 국화도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처럼 기다리는 모습 뒤에야 활짝 핀 국화를 볼 수 있다. 대나무는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속에서 죽순만 나오고 자라질 않는다. 그러나 5년째가 되면 무럭무럭 자라나서 한순간에 20미터 이상으로 커지게 된다. 이처럼 대나무 역시 기다림의 나무이다. 그리스도인들도 사군자처럼 꽃을 피우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
쓴뿌리 치유 5
자비는 이용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이용자는 <성취가 모든 것이다: Achievement is everything> 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있다. 우리는 나의 성취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조종했던 조종자(Manipulator)의 경험이나 그들을 이용했던 이용자(User)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조종자나 이용자를 모두 이용자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1. 이용자는 누구인가?
열왕기상 21장은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장면을 소개한다. 이들은 거짓 증인 두 명을 내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그를 죽여 버린다. 그리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는다. 아합과 이세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의 목숨까지 빼앗는 이용자였다. 이들은 나봇에게 엄청난 쓴맛을 주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기업을 지키려는 그의 생명까지 빼앗는다.
가롯 유다는 스승인 예수님을 밀고하고 은 삼십 냥을 받았지만 의로운 사람을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원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고서 그들을 찾아가 자신이 무죄한 사람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죄를 범했다는 것을 실토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에게 네가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니까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고 하면서 그를 외면했다. 이 때 유다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해서 스승을 배반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대한 증오심을 품고서 자살해버린다. 유다는 이렇게 이용자들에게 이용당해서 스승을 배반하고 비극적인 생애를 자살로 종결짓고 말았다(마27:3-10).
우리 자신은 이용자가 아닌가? 이 문제에 자유로운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그 실수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이용자들이다. 시험 볼 때 주변 사람에게 정답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대표적인 이용자이다. 지하철이나 육교 위에서 아주 불쌍하게 보이도록 해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이용자라고 말할 수 있다.
가정 안에서 부부끼리 서로 이용자가 될 수 있다. 배우자의 인격과 삶을 무시한 채 자기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배우자의 맹목적인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이용했던 사람들도 이용자이다. 어떤 공동체도 이용자가 될 수 있다. 고등학교 운영자들이 일류대학에 합격자를 많이 내려고 학생들의 개성이나 관심을 외면한 채 특정학교를 지원하도록 강요하면 이 학교도 이용자이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학생의 장래보다는 학교 자체의 이름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교회공동체도 이용자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 교인들의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어렵게 하면서 교회봉사를 강요하면 교회도 이용자가 된다. 많은 이단종교 집단들은 철저한 이용자들이다. 어떤 형제는 자기 부인이 사이비 종교집단에 들어갔는데 그 교주가 충성을 강조하면서 부인의 종교 활동을 제한하는 남편과 이혼하도록 강요한다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이단 종교집단은 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추종자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해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추구에만 몰입되어있는 철저한 이용자들이다.
군사독재시절에 악명이 높았던 고문경찰들도 이용자들의 희생물이었다. 그들은 독재정권이 권력유지 차원에서 반대파들을 괴멸시키기 위한 악랄한 고문기술자로 이용되었다. 소위 제비족들은 돈 많은 부인들을 꼬여서 그들의 돈도 빼앗고 몸도 빼앗고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그들을 차버리는데 이들 제비족도 이용자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때에 “가미가제”라는 일본군 특수부대가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적군인 미국 배를 공격하는 임무를 띄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에 실은 폭탄으로 자폭해서 그 적군의 군함을 파괴시키는 일을 했다. 이들이 타고 가는 비행기의 연료는 그 배에까지 가는 것만이 주어졌다. 이들은 천황폐하만세라고 외치면서 전투기를 타고 죽음의 길로 내몰려졌다. 일본군대는 이들 젊은이들을 애국심이라는 것으로 그들을 철저하게 이용해먹었다.
이용자들은 이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용자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유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눈에 뜨이는 사람도 있지만 눈에 뜨이지 않게 수고와 희생의 땀을 흘렸던 사람들이 많다.
2. 이용자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첫째, 이용자들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은 나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다른 사람의 인격과 생명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이용자들은 이용가치가 있는 인간관계만을 지속하고자 한다.
이들은 이용가치가 없고 유익이 되지 않은 인간관계는 언제든지 끊으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안오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안오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정승의 벼슬을 가진 사람은 이용가치가 있으니까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안을 한다. 그러나 정승이 죽으면 더 이상 그 정승은 이용가치가 없기에 문안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용자들이다.
셋째, 이용자들은 일 중심이고 목표 중심이며 성취 지향적이다.
이들은 일을 위해서 사람을 희생시키고자 한다.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사람의 생명은 중요하지가 않다. 이 수용소의 관리자들은 수용된 사람들을 강제노동 시키면서 이용해먹고 노동가치가 없으면 죽게 내버려둔다. 본인의 의사와는 다르게 선수에게 마약을 먹이고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나라의 명예를 높이려는 나라도 있다. 이들 나라도 역시 이용자들이다.
넷째, 이용자들은 성취를 위해서 사람들의 인격, 윤리, 관계, 건강, 평판 등을 모두 희생시킨다.
어떤 회사원이 목적을 가지고 사장 딸과 결혼하려고 옛 애인을 버린다. 사장 딸과 결혼하면 경제적인 부를 누리게 된다. 그에게는 옛 애인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기에 옛 애인을 버렸다는 평판도 그는 무릅쓴다. 그러나 이용자는 자신의 행동으로 옛 애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녀의 입안에 쓴맛을 남기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3. 이용자들이 만드는 독성
첫째, 이용자들은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이용당한 사람들은 속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용당했다는 억울함 속에서 깊은 쓴맛을 지닌 채로 살아간다.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일생을 살면서 철저하게 이용당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아버지 사울왕에게는 정략적인 결혼의 대상으로 이용되었다. 다윗의 아내가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양피 백 개로 산 여자라는 이야기를 듣는 비참한 여인이었다. 다윗이 도망병 신세로 자신을 떠났을 때 그녀는 발디엘이라는 남자의 아내가 되기도 했다. 그 후에 다시 다윗왕의 아내가 되었으나 이용당했다는 뼈아픈 피해의식 속에서 법궤가 예루살렘성에 들어올 때 너무나 기뻐하는 남편 다윗왕을 정죄해서 부부관계가 완전히 망가지는 아픔을 겪었다.
둘째, 이용자들은 자신의 무가치 때문에 이용당하다가 버림을 당했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깊은 증오심을 남긴다.
이용자들은 어떤 사람이 이용가치가 있을 때 이용을 하면서 완전하게 보상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보상을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용가치가 완전히 없어지면 이용자들은 그 이용했던 사람을 미련 없이 버린다. 대부분의 윤락가의 여성들은 젊었을 때는 포주로부터 이용당하면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포주에게 이익창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나이 많아 접대부로서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졌을 때 포주들은 이들 윤락녀들을 버린다. 나이 들어 쫓겨난 접대부들은 포주와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이 사회에 대해서 증오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셋째, 특정인의 성취를 위해서 이용만 당한 사람에게 증오를 남긴다.
1950년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유럽인들에게 노래로써 위로했던 유명한 샹송가수 뤼시앵 뒤발은 예수회 신부였다.30) 그런데 그는 알코올 중독자로서 치유가 되지 않아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가 받은 상처는 자신의 공연수입으로 엄청난 수입을 올려서 수도회의 재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수도회 장상들과 동료신부들은 수입금만 챙겼지 그의 공연에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수도자는 청빈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수도회 간부들은 그에게 자동차를 사주지 않아서 그는 수많은 공연용 악기들을 오토바이로 운반해야 했다. 이러한 수도회의 장상들과 신부들에게 상처를 받았던 그가 자신의 상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는 어린 시절에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아코디언을 샀는데 값을 속여서 팔았던 악기점 주인에게 상처를 받았다. 뤼시앵 뒤발은 어린 시절에 악기점 주인에게 이용당했고 신부가 된 후에는 수도회의 식구들로부터 이용당했다. 그가 겪은 이용당함의 경험은 극복할 수 없는 쓴뿌리가 되어서 심지어 그는 자살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뒤발신부와 같은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하면서 살아간다. 특정인의 성취를 이용만 당하고 아무런 대가가 없을 때에 그들은 이용자들을 향해서 증오심을 품고 살아간다. 물론 뒤발 신부는 후에 자신이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치료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치유의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치게 된다.
넷째, 많은 이용자들이 만드는 독성은 합리화된다.
이용자들이 만든 결과가 어떤 공동체에 유익했다는 결론을 만들기에 이들의 독성을 합리화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소위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논리가 적용된다. 많은 이용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면서 얻은 결과 때문에 공동체를 위한 공로자로 추앙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이용당한 사람들은 억울함과 수치심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용자들도 그들의 양심이 회복되면 그들이 이용했던 사람들에게 준 상처로 고통을 겪는다.
4. 이용자들의 치유
1) 자비란?
자비가 이용자들을 치유한다. 자비는 친절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자비는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이다. 자비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정직하고 깊이 있게 섬기는 것이다. 이용자들이 지금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먹었는데 이제는 그들이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 이용자의 나쁜 심성이 치유된다.
자비는 영어로 ‘kindness'(친절)로 이것은 남에게 넉넉하게 마음을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은 넉넉하지 못해서 누군가가 비난하면 발끈하며 성을 내고 만다. 그러므로 마음이 넉넉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이다.
2) 자비의 치유
첫째, 자비의 사람은 사람과 일 사이에서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일과 사람 사이에 선택을 하라면 사람을 선택한다. 다일공동체의 밥퍼 행사에 봉사 온 어떤 교회의 한 자매는 밥을 타 먹기 위해서 찾아온 노인의 태도가 불손해서 훈계를 하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 자매는 저런 되먹지 못한 사람은 밥을 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그 노인은 얻어먹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데 젊은 사람한테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한다면서 분노하면서 그 자매에게 심한 말까지 했다. 이 때 최일도 목사는 봉사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밥을 나눠주는 일은 밥을 얻어먹는 사람을 사랑하며 존중하며 그들의 인격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봉사의 대상을 존중하지 않으면 봉사는 일종의 자기만족일 뿐이다.
마더 테레사수녀는 <한 번에 한 사람>이라는 사랑의 원칙을 세우고 실천했다. 그녀의 이러한 원칙은 사랑의 실천은 한 개인의 인격의 존중이지 결코 일의 성취를 자랑하는 것이 아님을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씩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둘째, 자비의 사람은 관계와 성취(성공)사이에 자연스럽게 관계를 선택한다.
찬송가 221장(통525장) <주 믿는 형제들>의 작시자인 파우셋(J. Fawcett, 1782) 목사는 영국북부 지방의 작은 시골교회의 목사였다. 이 파우셋 목사를 영국 런던의 큰 교회인 카터스레인 침례교회가 청빙을 했다. 수많은 고민 끝에 청빙에 응한 파우셋 목사는 짐을 싸서 런던으로 출발하려고 교회당 마당에 나왔다. 아쉬워하면서 전송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파우셋 목사는 런던행을 포기하면서 아울러 자신의 발전과 명성도 포기했다. 그 때는 찬송가 221장을 작시했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 다시 만나리“
파우셋목사는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겼던 진정한 목회자였다. 사람과의 관계를 일의 성취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자비의 사람이었다.
셋째, 자비의 사람은 눈높이를 낮추는 사람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에게 찾아오신 방법은 무엇일까? 저 높은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낮은 인간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방법은 한 가지다. 바로 눈높이를 낮추신 것이다.31)
어른들이 자녀들과 대화하고 젊은이들이 어른들과 데이트를 하는 것은 서로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훈련이다. 부모들이 자신의 옛날을 돌이켜 보면서 ‘내가 젊었을 때 가졌던 고민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면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청년들에 해당되는 자녀들이 갖고 있는 고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청년들도 ‘어른이 되면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를 생각하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높이에 맞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친절이고 사랑이며 자비이다. 이것이 넉넉하게 포용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 사이에 계셨다.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떻든지, 재산이 적든 많든, 남자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하셨다. 예수님은 매국노라 손가락질 받던 세리도 찾아가셨고 사람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던 창녀나 문둥병자, 혈루병 걸린 여인도 자녀로 받아주셨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외 없이 예수님의 친절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인간은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한편으로 연약하여 깨지기 쉬운 존재이다. 여기에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이해가 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그래서 나 자신도 중요하고 나의 이웃도 중요하다.
인간은 또한 단단한 금그릇, 은그릇, 쇠그릇이 아니라, 던지면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토기그릇처럼 별 볼일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인간이 한계를 가진 존재이며 두려움이 가득 찬 존재임을 아셨다. 그래서 늘 부드럽고 따뜻하게 인간을 만지신 것이다.
3) 자비의 사람들
룻기는 4장으로 된 짧은 책이지만 이 책이 주는 감동은 무한하다. 여기에는 일의 성취보다는 사람의 인격과 사람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는 두 사람을 소개한다. 그 사람은 룻과 그의 남편이 되는 보아스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마다 보아스같은 사람이 귀하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룻과 보아스의 자비가 아름답다.
젊은 과부 룻에게 시어머니 나오미는 늙고 재산도 없고 실패한 여인이었지만 며느리 룻은 나오미를 따라 나선다. 이것은 룻에게 한 평생의 고난과 궁핍을 의미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룻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룻은 말한다.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기 1:17). 룻은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이방 여인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이 일의 성취보다는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시어머니와 동거동락은 새로 좋은 남편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이 룻이 보아스를 만난다. 보아스도 룻처럼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보아스는 룻에게 말한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룻기 2:11,12).
하나님은 자비를 베푼 자에게 보응해 주신다. 나오미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룻과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보아스를 부부로 맺어주신다. 하나님은 나그네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에게 천사를 대접하게 하신다. 그 나그네는 이제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서 자비를 베푼 자에게 보응한다.
구약신학자인 박동현은 그의 수상집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하여』에서 사람 중심의 삶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꺼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자식, 아내, 교인, 제자는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힘든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나의 어버이요, 배우자요, 목회자요, 스승입니다. 어버이는 자식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남편은 아내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교역자는 교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선생은 제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삶을 키웁니다. 길든 짧든 그 누구와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은 나의 삶을 그와 나누는 것이요, 그의 삶에 내가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여자, 환자들, 거라사인 광인 등 이용할 가치가 없는 사람을 귀하게 여겼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중심이고 관계중심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해하기도 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중심에는 항상 연약하고 불쌍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다.
누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환자를 고쳤고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관계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일을 했다고 비난했다. 안식일 날은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예수님은 환자를 건강케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 10:36,37은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강도는 철저한 이용자이다. 강도 만난 유대인은 이용을 당한 사람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많은 아픔 가운데 있다. 그러나 한 사마리아 상인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준다. 사마리아사람은 자비를 베푼 사람이다. 이 때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자신들의 긴급한 일 때문에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다.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만약 그 때에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은 자비가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자신의 행동을 평가할 사람들이 없었기에 그는 지나쳐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소극적인 이용자들이다. 예수님은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모델을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사마리아인으로 제시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누가 보든 말든 관계가 없다. 그는 강도만난 아주 불행한 사람을 도와주었다.
남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이용당했던 사람이나 이용했던 사람에게 동시에 놀라운 치유가 일어난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이용당했다는 아픔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이용해서 자기들의 유익만을 도모하려는 악한 생각을 버리고 이용자들이 자비로운 마음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하자.
쓴뿌리 치유 6
양선은 유약한 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1. 유약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유약한 사람들은 <인정받는 것이 모든 것이다: Adoption is everything>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있다. 이들을 카멜레온 유형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파충류과에 속하는 카멜레온은 주변 환경에 따라서 색깔과 몸의 형체가 변한다. 카멜레온은 색깔과 몸의 변화는 주변 환경에 동화되어 다른 동물의 눈에 띄지 않아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데 이것이 카멜레온의 생존방법이다. 카멜레온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독특한 개성이나 고유성은 무시하고 생존전략만을 구사한다. 카멜레온 유형같은 사람들인 유약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타협하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1) 성경의 유약한 자
사울왕은 아말렉족속과 전쟁을 시작할 때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전쟁에서 획득한 적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사울왕은 용감하게 싸워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사무엘을 통해 받았던 하나님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순종하지 않는다. 그는 아말렉 왕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했다(삼상17:9).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 선지자의 추궁을 들으면서 사울왕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습니다”(삼상17:21).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던 백성들이 적의 왕을 살려두고 노획한 짐승은 없애지 말고 잡아서 잔치를 하자는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 권력을 가졌고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쳤던 사울왕이 왜 이렇게 판단을 했을까? 사울왕은 처음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초심을 잃어버렸을 때에 백성들에게 잘못 보이면 왕권의 유지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왕이었지만 그는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백성들에게 잘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울왕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명령대신에 백성들의 말을 따랐다.
이러한 사울왕과 비교해서 다윗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던 비참한 시기에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두 번씩이나 갖게 된다. 첫 번째 기회는 사무엘상 24장에서 사울이 용변을 보러 굴에 들어왔는데 다윗의 일행이 그 굴에 있을 때였다. 두 번째 기회는 사무엘상 26장에서 십광야에서 사울왕 일행이 진치고 누워 잠자고 있을 때였다. 이 때 다윗과 함께 있던 부하들은 사울왕을 죽이자고 했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사울왕을 살려 주었다. 다윗은 사울왕의 생명은 여호와 하나님의 몫이라고 했다.
다윗은 부하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인기를 얻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2) 우리 주변의 유약한 자
허준이라는 한의사의 일대기를 소설로 엮은 책이 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그 당시 궁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개한다. 선조대왕 시절에 후궁이 한 명 있었는데 후궁의 한 가지 소망은 왕이 자신의 침소를 많이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후궁은 성적인 매력으로 왕을 끌어 들여야 했기에 성 관계를 할 때 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비상약을 사용한다. 그 비상약은 성 관계에서 특별한 효능을 발휘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의 몸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는다.
한 번 이 약을 사용해서 왕에게 매력적인 여인으로 인정받았던 이 후궁은 약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궁궐의사인 허준의 권고를 듣지 않는다. 왕에게 인정받는 것은 곧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어서 이 후궁의 친인척들은 당당한 세도를 누리게 되었지만 얼마 후에 이 후궁은 삼십대 중반에 요절한다. 왕에게 인정받는 것을 자기 생애의 최대 목표로 삼았고 그것을 지속시키려다가 결국 그 여인은 죽고 말았다.
카멜레온형의 사람들은 이처럼 남에게 인정받으려다가 자신의 생애를 망가뜨리고 만다. 우리 주위에 보면 이런 카멜레온형의 사람들이 참 많다. 인정받기에 굶주려 있고 인정받으려고 하다가 그만 탈진해버리고 원망과 불평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큰 소리를 치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는 자녀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목말라하면서 살아간다. 내 남편에게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을까 내 아내에게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을까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배우자들도 유약한 사람들이다. 유약한 사람들은 나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염려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은 ‘나를 인정해 주세요. 그러면 내가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겠어요.’ 늘 이렇게 외친다.
2. 유약한 사람의 특성
첫째, 유약한 사람들은 타협이 기본적인 생활방식이다.
구약성경 에스더에 보면 왕비 에스더는 왕후로서 적당하게 타협을 하면서 살아간다. 큰 나라의 왕후로서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행복을 누리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의 사촌이면서 양부모역할을 했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 앞에 나아가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유대인을 위한 구명운동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 때에 왕 앞에 유약한 사람이었던 에스더는 왕후의 신분이지만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타협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태도는 비겁한 태도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한다. 마침내 에스더는 자신의 타협적인 태도를 버리고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마음으로 왕 앞에 나아간다(에4:1-17).
유약한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서 진리를 포기하고 타협할 때도 많이 있다. 이들에게는 진리보다는 타협해서 인정받는 것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는 결혼하기 전에는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결혼한 후에 배우자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포기하면서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을 종종 발견한다. 이들은 예수님의 인정보다는 배우자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잘못된 선택을 한 불행한 사람들이다.
둘째로, 유약한 사람들은 칭찬받기 위한 행동이나 아이디어를 얻기에 민감하다.
유약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칭찬에 극도로 민감하다. 특히 힘있는 사람의 인정받는 일에 골몰하다가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스스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도 그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그 사람에게 유리한 거짓증언을 하기도 한다.
셋째, 유약한 사람들은 자기의식이 매우 강하다.
어쩌면 이것은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왜나하면 유약한 사람은 자신의 관심과 이익을 포기하고 영향력있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만을 갈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유약한 사람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영향력있는 사람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유약한 사람의 행동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의 발로이다. 그렇기에 유약한 사람은 자신보다 힘이 더 없고 별 볼일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독재자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넷째, 유약한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려고 한다.
유약한 사람들은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견디지를 못한다. 그런데 실상은 어느 누구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는 없다. 사람들은 어떤 특정인에게 환영받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환영받지 못하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대중적인 연예인들은 인기에 아주 민감하다. 인기가 높다는 것은 많은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의 인기는 항상 일시적이고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에 높은 인기를 구가하다가 인기가 떨어졌을 때를 견디지 못해서 생을 포기하는 연예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요한의 삶은 아름답다. 그도 한 때에 인기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 근처 광야에 살던 그에게 와서 말씀을 들었고 세례를 받았고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그의 인기가 시들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예언자로 각광을 받던 예수님께로 몰려가지 시작했다. 제자들이 떠나가는 위기 가운데서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염려했을 때에 요한은 예수님은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요3:30)고 말했다.
3. 유약한 사람들이 만드는 독성
첫째, 유약한 사람들은 장기간에 걸친 깊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없다.
깊은 인간관계는 서로가 솔직한 모습을 드러낼 때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유약한 사람은 자신의 솔직한 진면목을 드러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싫지만 좋아하는 척하고 거절해야 할 때도 수용하고 이때에도 싫어하는 태도를 안보이려고 거짓 웃음을 짓는다.
깊은 인간관계는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고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할 때 이루어진다. 영향력있는 상급자들도 싫지만 좋은 체 하는 하급자를 좋아하지 않고 솔직한 사람을 좋아한다. 힘들면 힘들다고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는 것이 건강하다.
남녀 간에 이성교제를 하는 경우에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성적인 요구를 해왔을 때에 그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응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수용을 받아야 하는데 성적인 요구를 거절하면 상대방으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의 성적인 요구를 수용하다고 해서 이들의 관계가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기에 자신의 솔직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건강하다.32)
둘째, 유약한 사람들은 지나친 죄의식과 높은 스트레스 가운데 살아간다.
이들은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늘 내 자신이 수용되는 문제 때문에 긴장하면서 살아간다. 때로는 이것 때문에 불면증이나 두통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유약한 사람들은 지나친 죄의식 가운데 살아간다. 이들은 자신이 수용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이혼하는 경우에 유약한 자녀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부모가 이혼했다고 생각한다.
셋째, 유약한 사람들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긴장감속에서 탈진한다.
세상은 우리를 수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늘 우리를 수용만도 하지 않고 거절만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거절과 수용을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면 좋다. 나를 수용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감사하고 자신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거절한 사람도 돌아보는 태도가 꼭 필요하다. 그런데 유약한 사람들은 늘 수용받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견디기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탈진하게 된다. 특히 이들은 거절당할 경우에는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난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분노하는 모습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고 특히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전혀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에게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상황을 만든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한다. 지나친 분노는 이들을 결국 탈진시킨다.
4. 유약한 사람들의 치유
1) 양선이란?
양선(養善)이 유약한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양선은 성령의 여섯 번째 열매이다. 양선은 선량•미덕(goodness) 혹은 자아통합(Self-Integration)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양선은 선량으로 이해할 때에 선은 하나님의 품성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선한 품성을 닮게 하셨다. 이 선은 조용하고 약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강력한 힘이다. 양선을 자아통합이라고 할 때 양선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수용한다.
2) 양선의 치유
첫째, 양선의 사람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본다.
자신 안에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그 면을 보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보려고 한다. 양선은 사랑과 의를 가진 마음 상태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옳고 그런 것을 분명히 가려서 행한다. 예스와 노우를 분명히 한다. 다른 사람이 옳지 않는 것을 강요할 때 분명히 아니라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선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착한 사람이 아니고 인정에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필요한 경우에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에 냉정하고 차게 보일 수도 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유약한 사람들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늘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할 때가 많다. 그런데 양선의 사람은 자신의 인격과 위치를 하찮게 여기거나 가치없게 여기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달란트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시인 도종환은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에서 “모두가 장미일 필요가 없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33)
모든 꽃이 장미일 필요는 없다. 모든 꽃이 장미처럼 되려고 애를 쓰거나 장미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실망해서도 안 된다. 나는 내 빛깔과 향기와 내 모습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나는 장미로 태어나지 않고 코스모스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가녀린 꽃대에 어울리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장점으로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
도종환의 말처럼 누구나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장점으로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달란트비유에서 몇 달란트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다섯 달란트와 나의 한 달란트를 비교해서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나의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서 활용하는 것이 진정 아름답다.
둘째, 양선을 가진 사람은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선을 베푼다.
유악한 사람이었을 때는 선을 베풀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면 실망하고 낙담한다. 그러나 유약한 사람이 양선을 가진 사람이 되면 선을 베풀고 좋지 않을 이야기를 듣지만 이 일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셨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매국노로 손가락질당하는 죄인의 집에 간다고 수군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이 사실에 개의치 않으시고 삭개오를 친구로 받아들여 그의 깊은 상처를 치유했고 회복시키셨다.
양선을 가진 사람은 개인적인 모습을 그대로 공적인 석상에서 드러낸다. 자신의 죄책감이나 열등감, 불안 등을 그대로 스스로 인정하며 이것이 드러날 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시인보다는 스스로의 인격을 가치 있게 여긴다.
셋째, 양선의 사람은 자신을 가장하는 왁스를 칠하지 않고 살아간다.
양선의 사람은 가식이 없이 살아가기에 마스크를 쓰고서 배역을 맡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성령님은 우리가 양선을 가지고 선하게 살도록 용기를 준다.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넷째, 양선의 사람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의 모든 단계를 가치 있게 수용한다.
심리발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일생에서 세 번의 위기를 겪는다. 첫 번째 위기는 청소년기에 겪는 정체성의 위기이다. 두 번째는 중년에 겪는 생산성의 위기이다. 중년기에 해야 할 인생의 과업은 일과 사랑인데 중년기의 우울증은 일과 사랑의 실패로 인한 침체에서 기인한 것이다. 마지막 심리발달적 위기는 노년에 찾아온다. 노년에 속한 사랑은 끊임없이 ‘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었는가?’를 묻는데 이것은 삶의 통합성에 대한 질문이다. 노년기에는 삶의 자원과 에너지가 거의 바닥났기에 현재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맞서 삶의 통합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심리학자 하이어(Hyer)는 노년의 스트레스를 극복하기 위하여 “증가된 내면성(increased interiority)” “내적통제력(internal locus of control)” “수동적 지배력(passive mastery)” “회고(reminiscence)” 그리고 “과거를 되돌리려는 자기방향성(self-orientation)”이 요구된다고 했다.34) 그러나 스트레스의 상황에서 이런 능력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양선의 사람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지나온 삶을 조명한다. 그들은 지나온 모든 삶이 가치있다고 믿으며 인생의 모든 단계를 수용한다.
인생을 8단계로 나누면서 각 단계마다 생의 목표가 있다고 한 에릭 에릭슨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는 자아통합(自我統合)을 가져오는 시기라고 했다. 양선을 의미하는 이 자아통합의 의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후회스러운 부분이 있고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의 삶은 불행하다. 자아통합의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롬 8:28)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수용한다.
3) 양선의 사람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에 마하나임에서 바르실래는 다윗왕을 정성스럽게 섬긴다. (삼하17:27-29) 그는 음식과 침상과 필요한 가재도구를 준비해서 다윗왕의 일행이 광야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도왔다. 바르실래의 선행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다윗왕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라 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겼다. 그는 다윗왕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에도 요단강을 함께 건너면서 배웅을 한다. 다윗왕이 바르실래에게 궁궐에 가서 섬기겠다고 하니까 왕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고향에서 남은 생애를 마치려고 한다고 했다.(삼하19:31-39) 다윗왕이 아들로부터 배반당하고 쫓겨 갔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협조하지 않고 저주했지만 양선의 사람인 바르실래는 순수한 마음으로 다윗일행을 돌봐주었다.
바벨론 포로시기에 아닥사스다 왕 밑에서 술맡은 고급관리였던 느헤미야도 양선의 사람이었다. 고국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성이 훼파되는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그 일이 자신과 자신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다. 느헤미야는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그 일이 누구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가 예루살렘총독으로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했을 때에 반대되는 적들의 온갖 방해공작에 타협하지 않고 진리만을 고수하는 양선의 사람이었다. 심지어 원수들이 성벽공사는 바벨론왕에 반역하는 전초 작업이라고 비난했을 때에도 그들의 음모에 맞서서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느2:20) 라고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선언하면서 일을 추진했다.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의 책에 나오는 흑인 노예 톰은 새로 온 주인이었던 리그리에게 가죽 채찍으로 맞았다. 톰은 잔인한 채찍에 시달리면서도 믿음이 변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믿는 하나님 때문이었고 전에 살던 집에서 클로아 아주머니와 그 아이들로부터 받았던 사랑 때문이었다. 채찍은 겉 사람을 쓰러뜨릴 수 있을 뿐이지 속사람은 쓰러뜨릴 수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채찍 때문에 나의 나 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겉 사람은 일시적이지만 속사람은 영원하다.35)
양선의 사람은 쫓기는 사람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부름받은 사람은 사람들의 인기와 인정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밀하게 들려지는 주님의 음성에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부름받은 사람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36) 첫째,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의식한다. 둘째, 부름받은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셋째, 부름받은 사람은 요동치 않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 넷째, 부름받은 사람은 확고한 위탁을 이해한다. 다섯째, 부름받은 사람은 삶 속에 평안과 기쁨이 있다.
토끼가 빨리 달리는 반면 거북이는 오래 사는 특성이 있다. 토끼와 거북이는 각기 다른 가능성, 즉 꿈을 받았다. 토끼는 토끼의 꿈을, 거북이는 거북이의 꿈을 꾸어야 한다. 여러분은 토끼와 같이 빨리 달려서 빨리 죽는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니면 거북이와 같이 느릿느릿 걸으면서 오래 살고 싶은가?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토끼와 같이 빨리 달리면서 거북이와 같이 오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둘을 다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지으심을 부인하는 것이다.37) 우리는 각기 다른 꿈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 양선의 사람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꿈을 간직하면서 그 꿈을 잘 개발하며 ‘나의 나 됨’을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양선의 자신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잘 간직하면서 그것을 열심히 개발하는 사람들이다.
쓴뿌리 치유 7
충성은 회피주의자를 치유한다.
1. 회피주의자들은 누구인가?
회피주의자(도망자)는 <자유가 모든 것이다: Freedom is everything>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구속받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이런 성향의 사람은 스트레스가 없고 최고로 즐거운 일만을 추구한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는 일 중에서 스트레스가 없고 즐겁기만 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 곳에도 없다. 회피주의자는 하던 일에 스트레스가 생기고 즐거움이 사라지면 그 일을 피해버린다.
1) 성경의 회피주의자
구약성경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의 광야생활을 기록한 말씀은 출애굽기 15-17장과 민수기 11-18장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으면서 하나님께 반항하고 지도자였던 모세를 원망한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 막 들어섰을 때에 그들은 아우성친다. “이집트에서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죽이려하느냐? 우리가 이럴 줄 알고 이집트에서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더냐?” (출14:11-12) 이들은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나님께 원망을 늘어놓는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한다.” (출16:3)
이들은 약 1년 정도 여행한 끝에 가데스바네아란 곳에서 도착해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40일 만에 돌아왔다. 돌아온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보고를 했지만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된다. 부정적인 보고를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에 차서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차라리 이집트에서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외쳤다. 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남자들은 적들의 칼에 맞아 죽고 처자들은 잡혀갈 것이라고 하면서 아예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이집트로 돌아가겠다고 일어섰다. (민14:1-4)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경험하면서 전형적인 회피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봄과 은총의 얼굴을 대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보았던 것이다. 같은 사람들이지만 신앙의 사람은 힘든 광야생활 가운데 하나님에게서 참 좋은 아빠의 은총과 돌봄의 얼굴을 보게 되는데 불신앙의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고통의 얼굴만을 보게 된다. 불신앙의 사람은 광야에서 고통만을 주는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린다.38)
2) 우리 주변의 회피주의자
아이를 버려두고 애인(情婦)을 찾아 도망가는 여인들이 있다. 이들의 남편은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도망간 아내를 원망하며 한숨의 세월을 보낸다. 이들이 회피주의자다. 무책임한 남편은 술이나 마약이나 도박 등으로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가면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는 도피주의자들이다.
에맄 번(Erik Burn)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39) 첫째는 부모로서 책임감이 강하다. 둘째는 어른으로서 조절능력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어린아이로서 무책임하고 오락을 좋아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인간에게 골고루 갖춰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어느 한 부분이 강하고 다른 부분은 약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부모의 요소가 많고 어린아이의 요소가 적은 사람은 주로 일만하고 인생을 즐길 줄을 모른다. 이들은 재미없는 인간이 된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요소가 많고 부모의 요소가 적은 사람은 오락을 즐기고 재미있지만 꼭 필요한 일조차 힘이 들면 회피하고 도망가 버린다. 이런 사람들이 회피주의자(혹은 도망자)다.
데오드로 베델(Theodore Wedel)은 오늘날 사명을 망각한 교회를 회피주의자로 묘사한다.40) 그에 의하면 교회는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세워졌지만 그 일이 귀찮고 힘드니까 그 일은 몇몇 사람들에게 맡겨버리고 교회는 사교클럽으로 바뀌었다. 몇몇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을 깨닫고 또 다시 조난당한 사람을 구조하는 교회로서 구조사역을 새롭게 시작하지만 곧 이 교회도 새로운 사교클럽이 되고 만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명목상의 사명감만을 가지고 사교클럽으로 전략해버린 현대교회와 그 교인들은 회피주의자(도망자)다.
역사상 모든 변절자들은 욕과 손가락질을 당한다. 이들은 옳은 일을 하고 정의 편에 서는 일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일을 하다가 곧 중지하고 오히려 악의 편에 붙어 버린다. 일제 말기에 식민주의 통치자들이 악랄하게 우리 민족을 통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변절했다. 심지어는 나이 어린 소녀를 일본 군인들의 성적인 노리개로 삼는 정신대에 참여하도록 연설하면서 다녔던 변절한 소위 친일파 인사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일부는 처음에는 독립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독립운동이 고통이 되었을 때에 조국을 배반한 회피주의자가 되었다.
2. 회피주의자의 특성
첫째, 회피주의자는 일이 쉽고 재미있고 짧은 헌신이 요구되면 한다.
이들은 쉽게 보이던 일이 어려워지면 그 일을 포기하고 재미있어 보이던 일이 재미가 없어지면 그 일을 포기한다. 이들은 그 일이 자신의 긴급한 필요를 채우면 하지만 그 일이 장기간의 헌신을 요구하면 그 일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장기간의 헌신은 힘들고 어렵기 때문이다. 회피주의자는 결혼이 스트레스를 주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연애는 좋아하지만 독신주의를 선호한다. 이들은 설상 결혼을 하더라도 아기를 갖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아기를 기르는 일이 귀찮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둘째, 회피주의자는 하나님의 뜻을 일의 쉬움과 즐거움으로 평가한다.
이들은 일이 어려워지고 의도되었던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고 고통이 증가되면 그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쉽게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결정할 때에 자신에게 임하는 평안을 근거로 해서 평가할 때가 있다. 이때 평안은 쉽고 즐겁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순교자가 순교를 결단했을 때에 마음에 궁극적인 평안함은 있지만 순교가 쉽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회피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쉬움과 즐거움으로 평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킨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의 고난이 빠진 영광만을 의미한다.
셋째, 회피주의자는 광야생활을 견디지를 못하고 도망친다.
인생은 광야생활을 하며 어두운 시련의 골짜기를 지내야 할 때가 있다. 광야는 생의 조건이 결여되어 살기가 살기 힘든 곳이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살아갔던 광야는 황량하고 고통스러운 곳으로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고 물이 없어 타들어가는 곳이다. (신8:15) 이 광야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회피주의자들이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의 광야는 어떤 곳인가? 그곳은 현대인이 즐길 수 있는 음식점이나 슈퍼마켓도 없고 운동장이나 PC방이나 영화관도 없는 재미없는 곳이다. 오늘날의 회피주의자들은 그러한 광야를 만나면 도망치고 다시는 그런 곳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참된 인생은 그러한 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결혼생활, 자녀교육, 부모섬김, 공동체를 위한 헌신 등은 때로는 재미없는 일로서 광야생활 같은 경우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광야를 도망친 사람들의 생활은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내가 통과해야 할 광야를 통과해야 할 때에 참된 행복이 있다.
3. 회피주의자들이 만드는 독성
첫째, 회피주의자는 천박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방향으로 인간관계를 진행시킨다. 부부사이에 어려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부부관계가 온전케 될 수가 없다. 부부가 서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서로 미루면 이들 사이에 건강한 부부관계는 형성되지 못한다. 좋은 관계가 형성되려면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한다.
결혼관계에서 연예단계에서는 낭만적인 사랑을 하게 된다. 이때는 서로가 환상적인 사랑을 하기에 의무나 책임감이 주어지지 않는 교제의 기간이다. 그러나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결혼은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온갖 힘든 일도 해야 하고 자녀 양육의 책임을 감당하며 경제적인 필요를 채워야 한다. 이때의 결혼생활은 자기헌신과 희생이 따른다. 이때의 사랑의 단계는 참 사랑의 단계이다. 그런데 회피주의자는 낭만적인 사랑을 즐길 줄 알지만 참 사랑의 단계는 감당하지를 못한다. 그리고 참 사랑을 해야 할 때도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이러한 필요를 채우지 못하는 배우자에 대해서 분노하며 속았다고 아우성친다. 서로 간에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요구만을 내세울 때에 사람들의 인간관계는 천박한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고 불평과 원망 속에서 관계는 파괴되고 만다.
둘째, 회피주의자는 힘든 일을 만나면 분노하고 분노의 결과로 죄책감을 겪는다. 항상 쉽고 재미있는 일만을 기대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면 분노한다. 그 일을 만들어 낸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그 일이 신앙에 관계되는 일이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분노한다. 그러면서 분노하는 것이 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분노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물과 음식과 환경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때에 지도자인 모세에게 분노했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여정에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난다. 그러면 그 일 때문에 이들은 분노해서 분노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다. 자녀를 키울 때에 자녀 중에서 문제아가 생길 수가 있다. 충고하고 권면해도 말을 듣지 않고 사랑해주었지만 오히려 그 반응은 부정적이다. 이러한 때에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분노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식에게 가졌던 분노 때문에 스스로 죄책감으로 고통을 겪는다.
셋째, 회피주의자는 무책임함으로 주변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회피주의자들은 무책임하다. 한 가정에서 가장으로, 주부로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일을 내팽개쳤을 때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쓴맛을 생기게 한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다. 부인이 유방이 망가진다고 자녀들에게 젖을 주지 않았다. 그 당시는 우유가 요즘처럼 일반화되기 전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녀들의 할머니되는 시어머니가 쌀죽을 끓여서 모유대신에 손자 손녀들에게 먹였다. 모유를 먹지 못하고 쌀죽을 먹었던 자녀들의 건강은 좋지가 않았다. 이 여자는 자녀들에게 젖가슴이 망가진다고 젖을 빨지 못하게 하면서 그 몸을 가지고 다른 정부와 정을 통했다. 결국은 이 부인은 남편과 이혼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너무 외로워 자녀들을 찾았지만 자녀들은 이 어머니에 대해서 냉담하게 대하면서 거절했다.
넷째, 회피주의자는 소외되고 외로움이 쌓인다.
회피주의자들은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어져서 소외되고 외롭다.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회피주의자들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어려운 일을 요구하거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 화가 쌓인다.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해가면서 원하는 좋은 일만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얌체족속이다. 어느 누구가 얌체 족속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가? 물론 처음에 이들에게 친구가 있을 수도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돈이 있을 때는 많은 친구도 있었지만 돈이 떨어졌을 때 더 이상 어느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다.
4. 회피주의자의 치유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1) 충성이란?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회피주의자가 아니라 충성된 일꾼으로 살도록 부르셨다. 성령의 일곱 번째 열매가 충성이다. 충성이 회피주의자를 치유할 수 있다. 충성은 어떠한 압력 아래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큰 힘이다. 충성은 즐거움이 없고 흥미가 사라졌을지라도 장기간의 헌신을 지키려는 능력이다. 환경도, 분위기도, 주변 사람들도, 평판도 좋지 않고 힘이 들지만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헌신한다.
‘충성’이라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이다. 충성스러운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 사람으로 인해 위로를 받게 된다. ‘충성’이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집착’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41) 상대방에게 관심을 쏟아 붓는다는 점에서 충성과 집착이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충성은 집착과 다르다. 왜냐하면 ‘충성’은 상대방을 높이고 귀히 여기기 위해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지는 반면 ‘집착’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지만 항상 자신의 욕망이나 유익에 관련된 것이다.
충성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분명한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그것에 사랑과 열정을 쏟아 붓는 것이다. 충성은 한자로 ‘가운데(중)’자 밑에 ‘마음’ 심(心)이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로 중심에 우리의 마음을 두는 것이다. 하나의 일에 하나의 관계성에 하나의 사람에게 우리의 마음을 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誠)은 ‘말씀 언(言)’자 옆에 ‘이룰 성(成)’자가 더한 것처럼 말씀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말씀이 내 삶에 그대로 나타나는 신실한 모습을 표현한다. 이처럼 충성은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말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2) 충성의 치유
첫째, 충성의 사람은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질문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인 그 일이 쉬운 일인지를 묻는다. 그런데 충성의 사람은 그 일이 쉬운 가를 묻지 않고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묻는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나의 원(쉬운 길)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신 것)대로 하옵소서.” (마26:39) 충성의 사람은 주님의 이 기도를 즐겨한다. 늘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다. 도망자(회피주의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충성스러움을 지킬 것인가? 이때에 겟세마네 기도를 드리면 충성하는 길로 가게 된다. 그런데 이 기도를 드리지 못하면 도망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회피주의자가 충성의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
겟세마네기는 너무나 소중한 기도이다. 순간순간마다 그리고 생의 고비고비마다 충성된 사람은 이 기도를 드린다. 이 기도를 진실하게 드리며 삶의 여정을 살아가는 충성된 사람은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종들이 될 것이다.
둘째, 충성의 사람은 기쁨으로 좁은 문을 들어간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문은 들어가기가 쉽지만 그 문을 멸망의 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좁은 문이 들어가기가 협착하지만 생명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2:24,25절은 말씀하신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셨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광채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곳에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그곳은 영광의 자리였다. 문제가 전혀 없는 평강의 자리였다. 베드로는 그 곳이 너무나 좋아서 집을 세 채 짓고서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그곳에 머물다가 다시 갈릴리로 내려오셨다. 예수님은 쉽고 평안한 곳에서 머물기를 원치 않으셨다. 비록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때로는 배반이 있고 수고의 땀을 요구하는 곳이지만 갈릴리로 가기를 원하셨다. 여기에 주님의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이 있다. 그렇다. 제자들은 자신의 충성을 요구하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마17:1-8)
셋째, 충성의 사람은 즐거움이 없고 흥미가 사라져도 헌신한다.
필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선교활동을 했을 때 잊을 수 없는 것은 그 나라 곳곳에 세워져있는 <여인의 상: Woman Statute>이었다.42) 반쯤 고개를 숙인 여인의 얼굴은 슬픈 모습이었지만 자비로운 모습이었고 무엇인가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안내자는 저 여인의 상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이고 아들을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며 외적의 침략과 기근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면서 굳굳하게 가정과 일터와 공동체를 지켰던 자랑스러운 우크라이나 여인의 모습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연방에서 독립한 국가로서 러시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몽고, 러시아, 독일, 폴란드, 터키와 오스트리아로부터 침략과 수탈을 당했던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국토를 빼앗겼다. 이 나라는 이러한 역사의 아픔을 견디어왔다. 아들과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죽었고 부인과 어머니들은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면서 모진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나 이들은 어려운 시대를 지나면서 그냥 마냥 울기만 한 것은 아니라 열심히 집을 지켰고 농토를 가꾸었다. 이들은 자녀들을 기르면서 조국을 든든히 지켜왔다.
우크라이나를 선교여행하면서 여러 곳에서 대낮부터 술 취한 모습의 남자들을 보았지만 여인들이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청소하고 농장에서 일을 했다. 그 여인들의 모습 속에서 공원에서 보았던 여인의 상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여인의 상은 슬픈 얼굴이 아니라 인내하면서 최후 승리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모습은 예쁘게 화장한 얼굴은 아니지만 내면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3) 충성의 사람들
순교자들은 신앙의 절개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감옥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면서 가족과 교회와 격리되어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오히려 이 땅에서 고난당하지만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면서 죽어갔다.
치유상담자 부르스 탐슨(Bruce Thompson)이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근처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캄보디아 밀림지역에 있는 병원에서 고립되어 킬링필드로 유명한 공산 크메르 루즈군에 의해서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군가가 그곳에 가서 고립된 의사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부르스 탐슨은 갈까 말까를 망설였지만 결국 가기로 결정하고 아내와 두 아들에게 유언이 될 수 있는 편지를 썼는데 떨어지는 눈물이 편지를 얼룩지게 했다. 천신만고 끝에 고립된 의사를 데리고 나왔는데 그들이 그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의사가 머물었던 곳에 박격포탄이 떨어졌고 폭격을 맞은 그 밀림병원은 폐허가 되었다. 그는 이때가 자신의 믿음이 테스트받는 시간이 되었는데 잘 견디어 내었고 이 힘든 골짜기를 지날 때에 주님은 자신을 돌보아주었다고 했다.43)
충성스러운 사람은 광야를 잘 통과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광야를 어떻게 통과해야할까? 여기에 대해서 송봉모는 세 가지를 제안한다.44)
첫째, 광야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신앙의 학교에 들어와 있다는 자각을 가져야 한다. 야곱의 후손들이 광야에서 자기들의 정체성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성되는 교육을 받았듯이 우리도 광야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양성과정을 밟는다. 광야가 주는 고통과 시련은 한 인간이 자기 발로 서기 위한 그리고 하늘과 진리를 섬기기 위한 교육과정이다.
둘째, 광야는 신앙의 학교이다. 이 신앙의 학교에서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마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 학생처럼 하나님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나에게 좋은 것만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임을 굳게 믿으면서 인내하여야 한다. 나를 양성시키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순종하고 인내해야 한다.
셋째, 그래도 견디기 어려울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겪도록 내버려두는 분이 아니심을 믿어야 한다. 그 분은 우리가 견딜 만큼만 시련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겪는 광야의 시련이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의 시련만큼 모질다고 생각지는 말자.
한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이 고아원에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추악하고 혹이 달린 Mercy를 자기의 딸로 삼아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었다. 그는 보잘것없는 여자 애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밖으로 이끌어 내었다. 하나님은 Mercy 속에도 엄청난 보물을 숨겨두고 있었다. 그 보물은 빛을 보지 못하고 무덤에 묻힐 뻔하였다. 그러나 한 이름없는 믿음의 사람이 그녀에게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할 때에 그 사랑은 마치 불쏘시개같이 Mercy의 심령 속에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에 불을 붙였다.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은 Mercy의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보화를 캐어내는 하나님의 천사였다. 그에게 사랑의 불을 전달받은 Mercy도 이제는 고아원의 여자 감독이 되어 보잘것없고 천하게 보이는 고아들 속에 숨겨진 사랑의 보화를 캐내는 하나님의 천사가 되었다.45) 충성의 사람은 또 다른 충성의 사람을 만들어낸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충성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쓴뿌리 치유 8
온유는 권력추구자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1. 권력추구자는 누구인가?
우리 주위에는 권력을 지향하는 권력추구자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지배하는 것이 모든 것이다: Controling is everything> 라는 표어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람들과 주변 환경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권력은 맛을 만들어 줄뿐이지 진정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획득한 권력은 사람들의 빈 공간을 충분히 채우지 못하고 결국 권력추구자들을 파멸시키기도 한다. 권력추구자는 평범하게 물러나기도 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한다.
1) 성경속의 권력추구자
사사기 9장에 보면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기드온의 첩의 아들이었던 아비멜렉은 자기와 같은 족속인 세겜 족속의 도움으로 왕이 된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이며 자신의 배다른 형제였던 70명을 모두 죽인다. 여기에서 요담만이 가까스레 목숨을 구했다. 이 후에 요담은 아비멜렉이 왕이 되는데 협조했던 세겜 족속의 행동을 나무이야기를 통해서 꾸짖는다.
나무들끼리 왕을 뽑는데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니까 자신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기에 왕이 될 수가 없다고 한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한다. 그런데 가시나무는 왕이 되기를 원했다. 왕이 된 가시나무는 말한다.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지 않으면 불이 나와서 사르리라.”(삿9:15) 가시나무는 왕이 될 자격이 없지만 단지 군림하고 지배하고 싶어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지향했던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게 고통만을 줄뿐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가시나무와 같이 권력을 지향하는 인물들이 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같은 경우도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권력추구자였다. 그런데 그의 권력추구는 교만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는 일이 되어 나중에는 정전이상이 되어 권좌에서 물러나 짐승처럼 행동하면서 유리방황하기도 했다.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인 빌립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 일이 잘못되었다고 헤롯왕을 비난했다. 이 일로 헤롯왕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고 나중에는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의 춤 값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 버린다. 권력추구자 헤롯은 한 신실한 예언자 요한의 생명을 자신의 헛된 욕망에 서 나온 약속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빼앗아 버렸다(마14:1-12).
2) 주변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한 자매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려져 있다. 신앙 안에서 인내하고 남편의 변화를 기대해 보지만 남편은 갈수록 포악해진다. 이 남편은 아내를 종처럼 부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심한 폭력을 행사하면서 아내를 더 못살게 한다. 자매는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가정은 주님의 귀한 선물로 깨어지면 안된다고 확신하면서 계속해서 가정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상황은 더욱 힘들어진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오지만 상담자도 도와줄만한 뚜렷한 방법이 없다. 그 남편에게 뿌리 깊게 잘못 자리 잡은 지배하는 영(controling spirit)은 쉽게 축출되지 못한다. 이렇게 가족 안의 권력지향형의 사람은 가족 구성원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아프리카 적도 근방에 있는 우간다는 매우 가난한 나라이다. 그런데 이 나라가 한 때 유명해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나라 대통령이었던 이디 아민 때문이다. 그는 육군상사출신인데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력을 잡았다. 그는 강압적으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자신은 가장 유능하고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믿었다. 많은 국민들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었다. 자신의 권력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는데 심지어는 그들을 악어농장에 집어넣어 악어의 밥이 되도록 했다. 그는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대했다.
故김수환 추기경의 회고담이다. 故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초청으로 전용열차를 타고 기차여행을 했는데 기차가 경부선 추풍령 역전에 정차하게 되었다. 이때에 심겨진 나무의 위치가 대통령의 구미에 맞지 않아 박대통령은 당장 전화로 그 역장을 불러서 그 나무 위치를 바꾸도록 했다고 한다. 이 때 김수환 추기경은 역구내에 심겨진 나무는 역장의 관할 아래 관리되어야지 그것까지도 대통령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의 눈치만 보게 되면 이 나라 백성들의 자율성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시골 역전에 심겨진 나무조차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위치를 잡기를 원했다. 물론 김추기경의 말은 박정희 대통령의 잘못만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추풍령역장에 대한 박대통령의 지시는 그가 조경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어서 한 시골역전이지만 잘 꾸미고 싶은 마음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물론 박대통령은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초를 놓았던 훌륭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에게 권력추구자의 특별한 모습이 있었고 우리에게도 이러한 독단적인 권력추구자의 모습이 있다.
2. 권력추구자의 특성
첫째, 권력추구자는 사람과 환경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환경이 자신의 지배를 받기를 원한다. 자기 뜻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한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지배하는 영의 요구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지배를 따르지 않을 때는 견디지를 못한다. 심지어는 주변의 환경도 자신의 지배욕을 충족시켜야 한다. 모든 환경이 자신의 구미에 맞게 변화되어야 한다.
둘째, 권력지향형의 사람은 추종자들에게 의존성을 창조한다.
그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면 내가 충분히 보상해주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권력지향형의 사람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붙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충성하면 그 충성의 대가로 물질이나 권력의 자리가 주어진다. 과거 한국의 권위주의 통치시절에는 정치적인 맹주들에게 잘 보이면 적어도 국회의원 한 자리 정도는 쉽게 주어졌다. 그래서 추종자들은 권력추구자에게 최선을 다해서 충성한다. 어떤 사람들은 맹종에 가까울 정도로 충성하기도 한다.
셋째, 권력추구자들은 주변 사람을 조종과 친밀감으로 지배한다.
이들은 간혹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서 강제로 지배하기도 한다. 상당히 많은 권력지향형의 사람들이 친밀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적당한 유머를 즐기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의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권력지향형의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권력의 자리를 확보하고 지속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자신의 권력의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관계를 쉽게 포기한다.
넷째, 권력추구자는 권력을 위해서 가치관이나 가족관계도 무시한다.
당나라의 왕후였던 측천무후는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아들을 죽이기도 하고 자신의 심복들도 죽인다. 세조는 왕의 자리를 위해서 자신의 조카였던 단종 임금을 죽인다.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고 도전하며 심지어는 아버지의 후궁들을 겁탈하기까지 했다.
다섯째, 권력추구자는 현재 소유하는 권력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면서 산다.
권력지향형의 사람이었던 사울왕은 군대장관이었던 다윗이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자 불안해진다. 그래서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10년 이상을 쫓아다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다. 예수님이 탄생시점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베들레헴 근방에 살고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여 버렸다. (마2:16) 그는 왕좌를 위협하는 잠재적인 세력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3. 권력추구자가 만드는 쓴맛
첫째, 권력추구자들이 권력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쓴맛이 감추어진다.
쓴맛이 드러나더라도 애써 부인한다. 심지어 사회는 그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쓴맛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다. 힘에 의해서 권력이 한시적으로 유지될 때 추앙을 받지만 곧 권좌에서 멀어질 때 그 쓴맛은 드러나기 시작한다.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 쓴맛이 드러나고 만다.
둘째, 권력추구자들은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킨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유지에 필요한 경우에는 사람들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용가치가 떨어졌을 때는 이들을 버리고 활용가치가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을 이용한다. 박정희 대통령시대에 정보계통에 책임자로 있던 사람이 권력의 자리에 물러나자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박대통령을 잔인한 독재자로 몰아세우면서 비난했던 적이 있었다. 이 분은 나중에 행방불명이 되어서 아직도 그 종말을 잘 모른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용가치가 없어져서 배반당했다고 분노했다.
셋째, 권력을 획득한 사람은 협조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권력 추구자들은 사람들을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놓는 편 가름하면서 자기 편에 서도록 강요한다. 이들이 권력을 획득했을 때에는 권력의 획득과정에 협조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분노하면서 잔인하게 대한다. 이때에는 평범한 사람들은 설자리가 없어지는데 이런 사회는 불행하다. 그래서 항상 권력추구자들은 사회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면서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놓아서 전쟁터를 방불케 만든다. 심지어는 어떤 사회에서는 긴장감을 고조하기 위해서 전쟁의 소식을 계속해서 들려주면서 공포심을 조장한다. 건강한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권력지향형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며 인간적인 정과 멋도 희미해진다.
4. 권력추구자의 치유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12:3)
1) 온유함이란?
성령의 8번째 열매가 온유함이다. 온유함이 권력 추구자를 치유한다. 온유함은 조용하고 화목한 가운데 나오는 힘이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온유하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온유하다’는 말은 좋은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부정적인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이 온유하다는 것을 ‘나약하다’, ‘미지근하다’, ‘모가 나지 않다’, ‘문제가 있어도 그냥 잘 참아낸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연민이나 열등감에 빠져있는 모습은 온유한 성품에 해당되지 않는다. 비굴함도 온유함과는 거리가 멀다. 겸손함이 온유의 한 모습임에는 분명하지만 비겁함이나 아첨, 또한 나약함이나 나태함, 게으름 역사 온유라고 할 수 없다.
온유함이란 삶을 깊이 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무기력하거나 소심해져서 도망가거나 비전과 꿈도 없이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온유하다는 것은 강인한 용기와 활력을 지니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줄 아는 주도적인 능력이 온유함이다. 그저 마음이 좋고 친절한 것이 온유함이 아니다. 온유함은 더 근본적이고 신앙적인 언어이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힘들고 어렵더라도 낙담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풍부할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사람들을 넉넉하게 포용할 줄 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품성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늘 배움의 자세를 갖는다.
2) 권력추구자의 치유
첫째, 온유함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필요에 민감하다.
권력지향형의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의 감정에도 둔감하며 필요에도 무관심하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감정과 필요에는 어떻겠는가. 그들은 둔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온유함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배우자의 형편과 처지를 돌보게 되며 다른 가족들의 필요에도 민감하고 주변 사람들도 돌아보게 된다.
온유함은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질 줄 아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공간을 마련하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 여유를 가지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둘째, 권력 추구자들이 온유한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면 쓴뿌리가 치유된다.
온유한 자들이 땅을 차지한다(마5:5). 이 말의 뜻은 온유한 자들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권력 추구자가 온유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권력을 추구하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는 잔인한 남편을 온유한 아내가 감화시킨다. 잔인한 남편이 온유한 남편으로 바뀌는 것은 온유한 아내의 영향력이다.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말씀한다. 모세가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온유했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모세가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는 권력추구자였다. 동족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 애굽 사람을 살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광야에서 40년간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만났던 장인 이드로와 부인 십보라는 온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집트 궁궐에서는 권력추구자들 속에 살면서 거친 인격을 소유했다. 그러나 광야의 한적한 빈들판에서 주님을 묵상하면서 주변의 온유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인자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셋째, 온유는 소중한 것을 지키도록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권력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다. 성령님의 열매인 온유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지배하려는 욕구를 포기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늘 권력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권력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다. 가난한 시골 농부에도 순박한 그의 아내도 잔인한 권력추구자가 될 수 있다. 순박한 시골 초등학교에도 힘이 세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조금은 어리석게 보이는 동료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하기도 한다.
권력추구자들에게 온유한 삶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거침을 깨닫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들이 변화될 수 있다. 그들 주위에 온유한 사람들이 모이도록 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그들 안에 온유한 성품을 일으키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 권력추구자들의 광포함이 서서히 변화된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구하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사수하면 다른 것은 넉넉하게 풀어놓을 수 있다. 이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붙잡을 줄 알아야 진정한 온유함이 생겨난다. 이와 반대로 사수해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묵인하고 용인해주면 삶이 무질서해지고 육적 쾌락이 삶을 주도하게 되어 옳고 그런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어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무례함과 무질서만 가득하여 그곳에도 소망이 없다. 맺어야 할 때는 맺고 끊어야 할 때는 끊고 포용해야 할 때는 포용할 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온유함의 모습이다.46)
넷째, 온유는 길들여진 힘을 사용한다.
온유함을 말에 비유한다면 이 말은 주인이 약간만 고삐를 당겨도 명령에 복종하는 잘 훈련되고 길들여진 경주마라고 할 수 있다. 경주마는 평상시에 아주 여유가 있어 걷는 모습이 늠름하다. 심장도 튼튼하고 다리도 근육으로 단련되어 있다. 그 가죽은 아름답게 윤이 나고 엄청난 힘과 활력이 있다. 그렇지만 경주마의 진정한 힘은 재갈에서 나온다. 즉 주인에게 순종하는 힘, 그것이 온유함이다. 온유한 사람은 훈련된 경주마처럼 자기 절제와 자기 통제의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주시는 열매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얻게 되는 은혜의 덕이다.47)
온유하지 않은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자기 정욕대로 사용한다. 권력추구자들은 권력을 자기 정욕대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권력을 사용하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한다. 온유한 사람은 재물도 지식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즐겨하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
온유한 사람은 목회사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교역자들이 직업수준을 초월하는 진정한 섬김을 하기 위해서는 친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치라(요15:13)고 요구하는 예수님의 음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역자들에게 요구되는 <건설적인 약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오랜 훈련으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면에서 대단히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내던지고 자신의 약점을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동력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사람은 극히 적다. 사람은 대개 전문기술이라고 하면 하나의 능력이나 수완으로 여긴다. 그러나 친구의 발을 씻기려고 자기의 겉옷을 벗어야 하는 교역자는 힘없는 인간이며, 그가 훈련을 받는 것은 자기 약점을 두려움 없이 대하고 그 약점을 타인에게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기 위함이다. 사역에 힘은 주는 것은 이 건설적인 약점이다.48)
온유한 목회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목회적인 권한을 건설적인 약점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겸손하게 섬김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력을 받은 것처럼 교만하지 않는다. 그런데 권력추구형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권력을 받은 것처럼 행세할 때도 많이 있다. 권력추구자들이 건설적인 약점을 자랑하는 이러한 온유한 목회자를 만나게 되면 그들은 변화되며 그들의 쓴뿌리는 치유되어 갈 것이다.
3) 온유의 사람들
온유한 사람은 사람들 주변에 소극적으로 맴도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과 함께 하면서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다. 온유함은 위기 가운데서도 생겨나는 힘이다. 약하지 않고 약하게 보일 뿐이다. 예수님은 온유하셨다.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도 육신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요19:26,27)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에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 새끼를 타셨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타는 말을 타고 당당하게 입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섬기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다. 예수님은 마태 11: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배울 것은 그 분의 온유하심이다. 온유함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도 쉼을 가질 수가 없다.
권력추구자였던 빌라도 총독도 그 앞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심문하고 사형언도를 내렸지만 죄가 없는 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마음이 번민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온유한 자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임이요”(마태 5:5) 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3) 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모습은 온유함 그대로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간증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누구든지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면 온유한 성품으로 변화된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가 않다. 잔인하고 이기적인 권력추구자들의 마음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두드리면서 그들에게 영향력을 주기를 원한다. 온유한 사람은 우리들이 가난했던 시절에 끝까지 우리들의 좋은 친구였던 작은 몽당 연필같은 존재이다. 이해인 님의 시 <몽당연필>을 한 번 마음속에 새겨보자.
너무 작아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이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은 깨끗한 소멸을
그 순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한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쓴뿌리 치유 9
절제는 충동적인 사람의 쓴뿌리를 치유한다.
1. 충동적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충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일반적으로 질주하는 유형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나의 길이 전부이다: My way is everything.>이라는 표어를 갖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질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브레이크 없이 마구 달려가는 트럭과 같다. 이들이 운전하는 차는 사람들을 치이기도 하고 다른 자동차를 들이박기도 한다. 이들은 자기 길을 어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가려고 한다.
1) 성경의 충동적인 인물
첫 번째 살인자였던 가인도 질주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동생 아벨을 죽였다. 그는 하나님이 동생 아벨을 편애해서 그의 제사는 열납했고 자신의 제사는 거절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안색이 변하면서 하나님의 편애의 대상이었던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다.
이삭의 쌍둥이 두 아들 중 첫째였던 에서도 충동적인 행동을 한다. 그가 외출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 배가 고팠다. 팥죽을 끓이고 있었던 동생 야곱에게 죽 한 그릇 달라고 부탁했는데 야곱은 그냥 줄 수는 없고 장자권을 넘겨주면 주겠다고 했다. 이때에 그는 장자권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고 쉽게 약속을 해버린다. 나중에 에서는 동생야곱에게 축복권까지 빼앗기고 난 뒤에 처절하게 후회한다. 에서는 충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살았고 그 성향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었다(창25:27-34).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에 그는 겉옷이 벚겨지는 줄도 덩실 덩실 춤을 춘다. 다윗은 법궤의 입성의 기쁨을 가족과 함께 나누고자 집으로 들어왔는데 부인 미갈은 다윗의 행동을 천한 계집종들 앞에서 행한 천박한 행동이라고 비난한다. 미갈의 비난에 화가 난 다윗은 천한 계집종들 앞에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쁨의 춤을 춘 것이라고 강변한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날에 미갈이 퍼부었던 저주는 씻을 수 없는 큰 상처가 되고 말았다. 이 후에 다윗은 부인 미갈과 잠자리를 거부해서 미갈은 혼자 외롭게 지내게 되었다(삼하6:16-23).
미갈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남편 행동을 보니까 천박한 여인들 앞에서 춤추는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왕이 아니라 목동노릇을 하면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가족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는 남편 다윗을 저주하고 말았다. 미갈이 남편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에 남편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더라면 미갈의 생애를 달라질 수도 있다. 이 후에 다윗은 바나바와 간음사건을 갖게 된다. 어떻게 보면 미갈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다윗으로 하여금 밧세바의 벗은 몸에서 육적인 욕망을 증가시켰을 수도 있다.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은 다윗 가문에 씻을 수 없는 비극을 가져왔다. 한 사람의 입술의 절제가 참으로 귀중하다.
지도자가 절제하지 못하면 그 지도자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다.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나눠지면서 분열의 아픔을 겪는다. 그것은 솔로몬의 아들로서 왕이 된 르호보암이 입을 절제하지 못한 결과였다. 솔로몬의 통치 아래서 고생했던 백성들은 새로운 왕이 백성들의 무거운 짐을 줄여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르호보암 왕은 더욱 심한 말로 백성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는 말했다.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왕상 12:14). 이 말을 듣고서 이스라엘의 10지파는 유다를 떠나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옹립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다. 한 왕이 입술을 절제하지 못한 결과는 민족 분단의 아픔이 되었다.
2) 우리 주변의 충동적인 사람들
“남편이 운전대를 잡으면 불안해요. 너무나 거칠게 운전해서 언제 사고를 낼까 모르거든요.” 이런 말을 하는 아내는 한숨을 쉰다. 그렇다고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여인은 남편이 조심해서 운전하도록 조용히 기도한다. 어떤 남편은 한숨을 푹푹 쉰다. “아내는 전혀 경제에 규모가 없어요. 수입을 고려하지 않고 비싼 물건을 사서 나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어요.” 그렇다고 아내의 씀씀이에 대해서 말하면 쥐꼬리만 월급을 받는 주제에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핀잔을 듣기에 아무 말도 못한다고 한다. 소위 이 사람의 부인은 충동적인 구매를 하는 사람이다.
인생살이를 충동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담자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배우자나 가까운 사람들의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충동주의자들은 아무 밭이나 들어가서 농작물을 완전히 망가뜨려 놓는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다. 이들은 충동구매를 하기도 하고 충동적인 선언(宣言)이나 맹세를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 같은 이는 충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제사장의 병졸들을 보고서 화가 나서 그 종의 귀를 베어버린다. 이때 예수님은 떨어진 귀를 부쳐준다(눅22:47-51).
많은 살인 사건이 충동적으로 발생한다.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금 절제했더라면 결코 그 사건이 일어나지를 않는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준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충동적인 살인 사건이 많다. 그들은 술 마시고 홧김에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말한다.
2. 충동적인 사람들의 특성
첫째, 충동적인 사람들은 취향이나 감정을 행동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왜 그렇게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냥 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기분이 나빠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이들은 행동의 결정을 자신의 취향이나 감정에 따라 한다. ‘묻지마’ 살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사람을 살인했는데 왜 했느냐고 물으면 특별한 이유 없이 기분 나빠서 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살인을 행한 자는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떠올랐을 때에 그것을 명령으로 알고 집행한 것이다.
둘째, 충동적인 사람들의 느껴지는 욕구는 즉시 만족 되어야 한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충동적인 사람은 기다릴 줄을 모른다. 어떤 욕구가 생기면 이것이 옳은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를 판단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당장 그 욕구가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금 신중하게 생각했다면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로 비극적인 결과를 미리 방지할 수 있을 텐데 충동적인 사람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어떤 사람이 동상이 걸렸다. 왜 동상이 걸렸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언 손을 갑자기 뜨거운 물에 넣어서 걸렸다고 한다. 언 손을 뜨거운 물에 넣을 때는 언 손을 서서히 녹인 다음에 뜨거운 물에 넣는 것은 상식인데 그런 것을 모르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알고 있었지만 언 손을 녹일 여유가 없었고 뜨거운 물에 넣으면 언 손이 금방 따뜻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손이 얼어있는데 따뜻하게 만들려면 저 곳에 넣으면 되겠지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에 옮겼다.
셋째, 주변 사람들은 충동적인 사람의 욕구를 수용하도록 강요받는다.
충동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가 즉시 충족되지 않으면 화를 내면서 상대방에 대해서 비난하고 때로는 저주를 퍼부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도록 요청한다. 이때에 충동적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하면 충돌이 일어난다. 충동적인 사람에게 사람들은 그렇게 서둘지 말고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한다. 이 말에 대해서 충동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충고하지 말라 내 말을 듣기만 해라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 버려라.”
넷째, 충동적인 사람은 극단적으로 치닫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다.
그들은 말한다, “내가 하는 일이 너를 방해하면 미안하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충동적인 사람도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할 수 없는 아픔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더욱 힘이 든다. 성인이 되고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데도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든다. 가끔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나 차를 몰면서 시내를 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마치 브레이크가 없는 오토바이나 차를 모는 것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상처를 입는다. 물론 본인도 죽거나 심한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일시적인 충족은 이루어지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의 행동으로 고통을 겪게 된다.
다섯째, 이들은 자기 위주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쾌락에 빠진다.
이들 주변 사람들은 충동적인 행동의 결과로 아픔을 겪게 된다. 로마의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 황제는 시를 짓기 위해서 로마를 불태운다. 네로는 시상이 떠오르지를 않아서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면 슬픈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오고 그러면 시상이 떠오를 것 같아서 이 일을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그 일로 인해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충동적인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은 중요하지가 않다.
3. 충동적인 사람들이 만드는 독성
첫째, 충동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불안하다.
그들은 이 충동적인 사람이 무슨 일을 할까 항상 염려하면서 걱정과 근심의 쓴 뿌리 가운데서 살게 된다. 충동적인 사람과 맺는 인간관계는 항상 짧게 끝나게 된다. 결혼생활 중에서 배우자가 충동적으로 살아가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비록 오래 지속되더라도 큰 아픔과 고통가운데 그 관계가 지속된다.
충동적인 사람과 관계된 사람은 충동적인 사람이 혼자 외출을 할 때 마치 고삐가 풀린 소나 말을 들판에 풀어놓은 것 같은 심정이다. 이 고삐 풀린 소나 말은 아무 농장이나 들어가서 곡식을 먹어치우면서 농작물을 망가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충동적인 사람의 행동은 대체적으로 무책임하다.
이들은 주변 사람의 화와 분노를 일으킨다. 이들은 신혼여행을 가서 화가 난다고 엉뚱한 사람과 싸움을 일으켜서 배우자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해야 하는 신혼여행인데 그만 절제하지 못해서 씁쓰레한 추억을 남기는 신혼여행이 되고 만다. 어떤 공동체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함께 있는 사람은 고통을 겪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항상 자기위주의 길을 가니까 무슨 일을 할까 늘 불안하기 때문이다.
단체생활을 해야 하는데 충동적인 행동으로 공동생활을 망쳐 버리는 경우도 있다. 언젠가 몇몇 선교 동역자들과 함께 전남 여수 근처의 낙도 지역에 교회탐방을 간 적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사소한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를 버럭 내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그 탐방은 아름다운 바닷가의 섬들과 주님의 몸 된 여러 교회를 방문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섣부른 충동적인 행동으로 많은 선교탐방 동행자들은 서로가 불편한 가운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셋째, 충동적인 사람은 모든 게임이 끝났을 때는 매우 외롭다.
사람들의 행동에는 열매가 있어야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다. 그런데 충동적인 사람의 행동에는 열매가 없다. 주변 사람들은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의 행동을 구경거리로 구경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들은 되돌아서면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비난과 저주를 퍼붓는다. 충동주의자들은 충동적인 행동을 반복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면 떠나게 되고 이들은 외롭게 혼자 남는다.
네로 황제가 로마를 불태우고 눈물단지에 눈물을 넣었지만 그는 외로웠다. 물론 충동적인 행동을 통해서 어느 정도 만족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쾌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동적인 사람은 또 다른 충동적인 일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면 이 충동적인 일에는 돈도 필요하고 때로는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죄를 짓기도 한다. 계속적인 충동적인 행동은 그런 행동을 했던 사람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아넣게 된다.49)
4. 충동적인 사람의 치유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라.” (고전9:27)
1) 절제란?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로 나타나는 절제가 이 충동적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절제가 무엇인가. 절제는 자신을 조절하는 능력을 말한다. 절제는 예수님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치관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시면 주먹질을 하실까 아니면 참으실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이시면 분노하실까 아니면 온유한 모습으로 대할까 생각하면서 행동한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 옆에서 절제를 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절제를 해야 한다. 절제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제는 바람직한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하다.
절제의 과제를 세 가지로 제시할 수 있다.50) 절제의 첫째 과제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고 잠자야 할 때 잠잘 줄 아는 것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참는 것이 절제이다. 둘째로 절제는 해야 할 일 중에서 ‘우선적인 것’과 ‘차선적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이다. 셋째로 절제는 큰 목표를 위해서 작은 즐거움을 포기하는 능력이다.
2) 절제의 치유
첫째, 절제능력을 갖춘 신앙이 성숙한 신앙이다.
절제하지 못해서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픔을 겪는다. 절제는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절제할 수 없고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절제할 수 없다. 절제는 스스로 해야 한다. 절제가 너무 늦어지면 다시 시작할 수가 없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면 쓰라린 현실의 쓰레기만 남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도 늦지 않다. 다시 일어나 절제를 배우면 된다. 우리가 싸우는 동안 넘어지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한 번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땅에 주저앉는 것이다.
둘째, 꿈을 가진 사람은 절제한다.51)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가진 사람은 절제할 수 있다. 그러나 꿈이 없는 사람은 결코 절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믿음의 꿈을 가져야 한다. 자녀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꿈을 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을 닮아가는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럴 때 자녀들도 절제할 수 있다. 목표가 없다면 인간은 금방 무너지는 존재이다.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간직한 사람들마다 그런 강인한 절제를 배우게 된다.
그런데 충동주의자들은 꿈을 가지고 있지만 찰나적인 만족만을 채우는 꿈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광야에서 있을 때는 범죄하지 않았다. 오히려 쫓겨다니는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대적자 사울왕을 두 번씩이나 살려주면서 살인하지를 않았다. 그 때는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살겠다는 다부진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어 편안했을 때 그는 성적인 충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밧세바를 간음을 했고 이 사실을 은폐하려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의 가장 위험한 곳에 혼자 떨어지게 해서 살인했다. 왕이 된다는 현실적인 꿈을 이루었지만 참된 꿈에서는 멀어져 있던 다윗은 결국 충동주의자처럼 활동하고 말았고 그의 인생에서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셋째, 절제의 사람은 충동적인 사람에게 강력한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한다.
자녀가 아직 어린아이일 때는 충동적인 행동은 매로 다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충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하는 것은 전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반복적인 잔소리는 그 충동적인 사람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분노를 가중시켜서 그 행위를 자주 더 심하게 일으킬 수도 있다.
넷째, 절제의 사람은 주님의 파견받은 자로서 살아간다.
파견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52) 나웬(Henry Nouwen)은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으로부터 파견받아 활동하기 위해서는 ‘비적응성’(非適應性)이 필요하다고 했다. 비적응성이란 사도적 요구가 들어왔을 때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나웬은 사도적 활동이 아무리 하나님 나라 건설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즉시 응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무슨 부탁이든 그 때 즉각적으로 응답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만들어버리고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자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비적응성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적상태는 무질서함과 피곤함으로 가득차게 된다. 따라서 충동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올바른 꿈과 비전이 주어질 때에 온전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난다.
잠언 13장 3절은 말씀한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입을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잠언 기자는 말한다. 우리 주변의 많은 불행한 사건들을 보면 입을 절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입을 절제하는 것이 목숨을 지키는 것처럼 중요하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입을 절제할 수 없어서 목숨을 잃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입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약3:2).
3) 절제의 사람들
성경에 보면 절제가 필요한 사람들로서 교회 감독을 맡은 자(딤전3:2,3), 감독의 아내(딤전3:11), 그리스도인(살전5:6,8), 늙은 남녀(딛2;2-5), 전도인(딤후4:5), 젊은 남녀(딛2:6-8)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절제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지도자들이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이다. 심지어 초등학교를 다니는 6학년 학생은 5학년 학생들에게 지도자가 된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자랄 때 혀를 절제하지 못하고 함부로 말해서 그 아들로부터 아버지 대접도 받지 못하는 불행한 경우를 우리를 종종 본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혀를 절제하지 못하면 엄청난 고통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잠언기자는 잘 준비된 말은 은 쟁반에 금 사과(잠25:11)라고 한 말을 우리가 새겨 들어야한다.
미국 군대에서는 대령에서 스타로 진급하는데 있어서 배가 나오면 어렵다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배가 나온다는 것은 음식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고 몸에 대한 조절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군인사회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지도자가 되는 것인데 지도자가 자신의 몸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절제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도자에게는 꼭 절제능력이 필요하다. 순간적인 혈기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
개신교 교단에서 금주와 금연은 생활철칙으로 지켜진다. 물론 음주와 흡연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주와 금연은 아름다운 신앙인의 덕목에 해당된다.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이 전통 민속촌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면 맛보기로 전통술을 한 잔씩 대접을 했다. 몇몇 분들이 술맛을 한 번 보고 싶어 했다. 음주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전통의 멋을 즐긴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분이 우리는 용납을 할 수 있지만 식당 종업원들은 교회지도자들이 술을 마셨다고 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절제를 시켰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 분이 융통성이 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너무나 귀한 분이었다.
바울사도는 사랑의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절제능력을 갖춘 것을 어른으로 표시하고 성숙한 신앙의 표준으로 이야기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2).
절제의 사람은 선택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다. 선택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시간사용방법의 올바른 기준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설펴보아야 한다. 선택의 중요성에 관해서 루이스(C. S. Lewis)가 매우 실용적인 삶을 미국 여성들에게 들려준 메시지는 가치가 있다.53)
“하나님께서 당신이 꼭 하지 않아도 될 온갖 일들을 하기를 원하신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삶의 정황 속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만 합니다. 술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데도 무절제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각자가 처한 곳에서도 주어진 임무가 아닌 것들을 함으로써 그 처지에서 꼭 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 소홀케 된다면 그것은 상당한 불의를 행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르다뿐만 아니라 마리아에게도 조금 기회를 주십시오.
충동적인 사람이 절제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모습을 경험하게 될 때 성령님은 충동적인 사람의 쓴뿌리를 조금씩 치유하면서 그들을 절제의 아름다운 사람으로 빚어갈 것이다.
1) Bruce Thompson, Walls of My Heart, (MN: Crown Ministries International, 1989), 102-108.
2) 주서택 • 김선화, 『내적치유세미나』(서울: 한국대학생선교회 내적치유상담실, 2001), 9.
3) 유약한 자는 자신의 뚜렷한 주관이 없이 다른 사람이나 주변의 영향력이 큰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것에 적응하려는 태도를 빗대어 주변에 잘 적응하려는 동물인 파충류과에 속하는 카멜레온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카멜레온형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Bruce Thompson, 23-25.
5) 송인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서울: IVP, 1994), 117-8.
6) Susan Roth and Leslie Lebowitz, "The Experience of Sexual Trauma," Journal of Traumatic Stress Vol. 1. No.1 (1988), 84.
7) 김지철, 『영혼을 혁명을 일으키시는 성령』,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6), 100-1.
8) 같은 책, 105-8.
9) 오성춘, 『멍든 가슴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서울: 쿰란출판사, 2001), 41.
10) 김병오, 213-4.
11) R. Janoff-Bulman, "The Aftermath of Victimization: Rebuilding Shattered Assumptions." in Charles R. Figley(ed), Trauma and Its wake, Vol. 1 (New York: Brunner/ Mazel Publishers, 1985), 18.
12) Ibid. 18.
13) Edward Bibring, "The Mechanisms of Depression,'' William Gaylin (ed), The Meaning of Despair (New York: Science House INC, 1968), 390.
14) 김지철, 138-9.
15) 뒤러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로서 독일이 EU에 가입하기 전에 독일화폐에 그려져 있었던 인물이었다.
16) 오성춘, 76.
17) 호아킴 데 포사데 • 엘렌 싱어 지음, 『마시멜로 이야기』, 김경환 역, (서울: 한국경제신문사, 2009), 85-87.
18) 도종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경기: 비전하우스, 2004), 247-9.
19) 고든 맥도날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홍화옥 역 (서울: IVP, 1990), 20-1.
20) 김지철은 화평을 ‘샬롬’이란 표현했다. 김지철의 책 158쪽을 참조하라.
21) 잭 캔필드 • 마크 빅터 한센 편집,『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류시화 역 (서울: 도서출판 이레, 1995), 71-2.
22) 김지철, 171.
23) 재인용. 김병오, 『상처와 슬픔의 치유』, (서울: 도서출판 이레, 2010), 76-77. Cited in Arthur H. Becker, "Judgement and Grace in the Aging Process," Pastoral Psychology, Vol. 27, no, 3. (1979, Spring), 188.
24) 오성춘, 257.
25) 데이비드 A 씨맨즈 • 베스 펀크 지음, 『상한 감정의 치유 워크북』, 김재서 역, (서울: 예찬사, 1995), 153-160.
26) 데이비드 A 씨맨즈 • 베스 펀크 지음, 『상한 감정의 치유 워크북』, 152.
27) 헨리 나우웬, 『영적인 발돋움』, (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4), 122-124.
28) 데이비드 A 씨맨즈 • 베스 펀크 지음, 『상한 감정의 치유 워크북』, 151.
29) 김지철, 『영혼의 혁명을 일으키시는 성령』 176-7.
30) 송봉모, 『상처와 용서』, (서울: 바오로딸, 2003), 36-8.
31) 김지철, 189-90.
32) 리사 맥민, 『성, 거룩한 갈망』, 강선규 역(서울: IVP, 2006), 85-88.
33) 도종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경기: 좋은 생각, 2004), 52-3.
34) Leon A. Hyer & Steven J. Sohnle, Trauma Among Older People (Ann Arbor: Brunner-Routledge, 2001), 45.
35) 고든 맥도날드,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홍화옥 역, (서울: IVP, 1984), 63-4.
36) 위의 책, 65-71.
37) 오성춘, 179-180.
38) 송봉모, 『광야에 선 인간』(서울: 바오로 딸, 2003), 32-41.
39) Howard Clinebell, Basic Types of Pastoral Care & Counseling(TN: Abingdon Press, 1990), 382-7
40) Ibid. 13-14.
41) 김지철, 210-11.
42) 김영근, 『마음치유, 가족치유』(서울: 에스라서원, 2001), 80-1.
43) Bruce Thompson, Walls of My Heart (MN: Crown Ministries International. 1989),
44) 송봉모, 『광야에 선 인간』(서울: 바오로딸, 2003), 91-2.
45) 오성춘, 138-139.
46) 김지철, 226-7.
47) 김지철, 227-8.
48) Henri Nouwen, Creative Ministry, 송인설 역, 『영성의 씨앗』(서울: 그루터기출판사, 2004), 175-6.
49) Bruce Thompson, Walls of My Heart, 129-134.
50) 김지철, 237-239.
51) 김지철, 240.
52) 송봉모, 『본질을 사는 인간』(서울: 바오로딸, 1999), 53-6.
53) C. S. Lewis, Letters to an American Lady (Grands Rapids: Eerdmans, 1975),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