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 설교 세미나

 

2012년 추수감사절을 위한

절기설교세미나

 

 

 

 

 

 

 

총회목회대학원

 

 

 

 

2010년 추수감사절을 위한 절기설교 세미나

 

 

교단 목회대학원 주최로 교단 내 전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절기설교 세미나를 아래와 같이 개최 하게 되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절기설교 자료를 필요로 하는 현장 목회자들에게 오순절적인 설교에 대한 신학적이며 실천적인 풍성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 교재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들과 추수감사절 설교예문, 추수 감사절 찬송해설 ,추수감사절 요약설교 등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 아 래 >

 

1. 일시 ; 2010년11월1일(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2. 장소 ; 양평동 목회대학원 강당

3. 회비 ; 10,000원 (교재 대 및 점심 포함)

4. 강사 및 일정표

 

* 등록 (10:00-10:30)

* 제1강 (10:30-11:00) 추수감사절 찬송해설 및 찬송 부르기 (배진기 목사)

 

* 제2강 (11:00-12:20) 설교준비의 기본 (김인찬 목사)

 

* 점심 (12:20-13:00) 점심

 

* 제3강 (13:00-14:20) 오순절적인 추수감사절 설교 (김순환 박사)

 

* 제4강 (14:30-15:30) 나의 추수감사절 설교 (표순호 목사)

 

* 제5강 (15:40-16:30) 추수감사절 요약설교 (배진기 목사)

 

- 목 차 -

 

1.추수감사절----------------------------------------------1

 

2.찬송가 해설---------------------------------------------3

 

3.설 교 ----(성명 가,나,다,순)--------------------------------6

 

하나님께 감사하라(안동성곡교회 / 강태진 목사) ----------------------6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라(총회목회대학원 학감 / 김경규 목사) ----------10

 

 

내가 꿈꾸고 있나요?(열방의빛 순복음교회 /김 기영 목사) -------------------15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청주 중앙 순복음교회 / 김상용 목사) ------------17

 

구하기 전에 먼저 감사를(서울신학대학교 교수 /김순환 박사)--------------21

 

감사할 내용(아가페 순복음 교회 / 김은철 목사)-----------------------------24

 

 

감사표현은 더 큰 감사를 낳는다.(청신교회 / 김인찬 목사) -----------------26

 

하나님 앞에 감사뿐인 인생(로고스 제일 교회 / 박찬수 목사)-----------------30

 

나의 감사 마일리지 카드는?(남원 중앙 순복음교회 /서정복 목사) ------------34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라(순복음 밝은 빛 교회 / 양요한 목사)--------------37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순복음 본 교회 / 오규섭 목사) -----------------41

 

십자가의 결실, 자유와 평안의 열매(신천안교회 오승욱 목사)-------------45

 

은혜를 감사하는 자의 축복(아름다운 빌립보 교회 /이수형 목사) -----------50

 

감사의 방법(전주 순복음 교회 / 임종달 목사) ----------------------------54

 

추수 감사절의 기원과 그 신앙적 함의(기하성 신학대학원 교수 / 장광용 목사)--56

 

감사하는 신앙(제주순복음교회 / 표순호 목사) -----------------------------61

 

4.추수감사절 요약 설교 (총회목회대학원 원장 / 배진기 목사) ---------------65

1.추수감사절

 

1) 감사의 어의

구약 히브리어로 '감사'는 <toda>인데 '감사한다'라는 <yada>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써 '손을 펴는 것', '공헌', '공경' 특별히 '신앙고백' 의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이다.

 

2) 성경에서의 기원

구약에서 추수감사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4:3-4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 두 형제의 제사로부터 시작된다. 가인과 아벨은 아버지 아담으로부터 독립한 후 자기들의 수확을 한 처음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가인의 감사는 일반적인 감사였다고 보여 진다. 아벨의 감사는 신앙고백이 담긴 감사였다. 그는 아담에게 배운 대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피의 제사를 드렸다. 이 첫 번째 추수감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이후에 나타나는 제사들은 추수감사와 연결 지어 해석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말한다면 노아의 제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감사였지 추수감사는 아니었다. 족장들의 제사도 마찬가지이다. 출애굽이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거기에 더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몇 가지 율법을 주실 때에 가사의 절기와 제사에 대한 규례를 직접 주셨다. 출애굽기 23:14에서 "너는 매년 삼가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말씀대로 절기를 지켰다. 하나님이 명하신 절기와 제사들은 추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3) 추수감사절의 유래

 

(1) 구약에서의 감사절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3대 명절을 지켰는데,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그것이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추수의 절기들과 시기가 맞았다. 그중 오순절은 맥추감사로 초실절이며, 장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하여 가을 추수를 한 후 곡식을 저장하기 전에 지키는 감사절이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들은 모두 추수감사와 연관이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영적인 알곡을 거두어들이는 영적 추수인 것이다. 장막절을 지키는 규례가 민수기28:26-30에 기록되어 있는바 오순절은 첫 열매를 드리지만 장막절에는 희생제물을 드리도록 지시되었다.(민수기29:12-39)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고난을 기념하는 동시에 장차 이루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역의 예표도 된다. 결국 추수감사와 하나님의 구원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임을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의 감사절

예수님 당시에도 구약시대에 지켜오던 명절들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든 것을 볼 수 있다. 이 구약의 절기들을 예수님은 구원과 연관 시켜서 말씀 하셨다. 그래서 언제나 절기 때에는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모습을 나타내셨으며 그중에 요한복음7장의 모습은 매우 강력한 인상을 주고 있다. 유월절이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기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면 오순절은 우리 주님 예수의 첫 열매됨을 상징한다. 오순절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교회형성의 예표가 되며, 초막절은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과 평화를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3) 미국의 추수감사절

 

① 청교도(puritan)들의 추수감사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영국 국교의 수장이었던 영국의 메리 여왕은 잔학하고 혹독한 방법으로 개혁운동을 하는 신교도들을 죽이고 핍박했다. 고난 속에서 지내던 영국의 신교도들은 1602년부터 신앙의 자유와 참 믿음을 위해 조직화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1607년에는 공식적으로 신교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여 법을 집행했다. 많은 신교도들은 처형과 추방을 당했고 대부분의 신교도들은 폴란드 등 인접국으로 망명했다.

이러한 고난을 겪으며 세월이 흐른뒤 이들은 '브르웨이트'라는 지도자를 따라서 180톤짜리 작은 배 '메이 플라워(May flower)'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신천지를 향하게 되었다. 63일간 3,400마일을 항해한 후 북미에 도착한 인원은 남자 78, 여자 48, 총 126명이었다.

메사추세츠 플리머스 항구에 닿자 이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청교도들이 도착한 때는 늦가을이었고 곧 겨울이 닥쳐왔다. 월동을 위해 집을 짓고 생활의 터전을 닦아야 하는 격무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기가 나빠서 한주일의 반 밖에는 일을 할 수가 없었으며, 악조건과 싸우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패병과 기아와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다. 그 결과 반 이상이 추위와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낙담하지 않고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의지했다. 1621년 3월 하순경 사모셀드라는 추장과 스구완도라는 인디언이 방문했다. 이들 인디안과 화친을 맺고 인디언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배웠고, 이들은 옥수수를 심고 고기를 잡으며, 열심히 일을 해 1621년 10월에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되었다. 이 축복을 감사하기 위해 인디언을 초청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3일간 축제를 벌였다. 자기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위, 오리, 옥수수 등을 나누면서 같이 즐기며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 것이 감사절의 시작이었다.

 

② 최초의 감사절 선포문

매사추세츠 주 지사 브레드포드(Bradford)는 순례자들이 플리머스에 정착하지 3년 후에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금년에 우리에게 옥수수와 밀과 강낭콩과 과일과 채소를 풍성히 내려주셨고, 또한 사냥감이 풍성한 날고기와 조개가 있는 바다를 주셨도다. 또한 우리를 야만족의 밥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고, 흑사병과 각종질병에서도 목숨을 지켜주셨으며, 또 우리에게 양심을 따라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해 주셨도다.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의 행정관인 나는 그대들 순례자들 모두, 즉 그대들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그대들의 화합 처에 모이고, 모이되 그대들의 언덕에서 오전 9시와 12시 사이에 우리 주님 나신 후 1623년, 곧 그대들의 순례자 일행이 그대들의 터전에 상륙한지 제3년의 11월29일 목요일에 거기서 그대들의 목사님에게 말씀을 들으며, 이 모든 축복을 인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을 선포하노라."

 

③ 미국의 추수감사절 제정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톤이 1780년에 감사절을 지키도록 공식적으로 공포했으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중단되고 몇 개주에서 독자적으로 지키게 되었다.

1840년대에《Godey's Lady's Book》 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는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지킬 것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63년 9월 28일에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링컨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4일 후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공포하였다. 그 전 까지만 해도 감사일이나 기도 일에 대한 대통령의 선포는 연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추수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1863년 이후로 모든 대통령들은 링컨의 전례를 따랐으며 행정부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941년까지 추수감사절의 날짜는 대통령의 연례적인 선포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1941년에 미국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④ 한국의 추수감사절

한국 교회에서 감사절을 지키기는 1904년부터이다. 제 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교파 선교부와 협의하여 그 날짜를 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정하여 장로교 단독으로라도 지키기로 하였다. 그 후 1914년 각 교파선교부의 회의를 거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제 3주일 후 3일(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모아 총회 전도국에 보내 전도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그 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오늘에 이른다.

2.찬송가 해설

587장 감사하는 성도여 (306장)

[추수 때에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마 13:30)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경으로 농산물의 추수에 인간 영혼의 추수를 비유하여 만든 추수감사절 절기 찬송으로 영국 런던 태생의 시인이며 목사인 헨리 알포드(H. Alford;1810~1871)가 1844년에 만들었다.

찬송곡은 25장 ‘면류관 벗어서’를 만든 성 윈저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영국의 죠지 죤 엘비(G. J. Elvey;1816~1893)가 1858년 만들었다.

찬송가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1절에서는 추운 겨울 오기 전 먹을 걱정 없이 일용할 양식으로 가득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주의 전에 모여서 기쁨으로 찬양하자는 내용이 담겨있다. 2절과 3절에서는 밭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로 농부가 땀 흘려 밭에 씨앗을 뿌렸는데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되었음을 말하며 추수 때가 되어 농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알곡은 창고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던져 태워 버릴 때 우리는 지옥 불덩이에 들어가 고통당하는 부자의 모습이 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 아버지 품에 안겨 영원한 쉼과 평안을 얻은 거지 나사로처럼 이 땅에서 비록 힘들고 어렵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늘나라에 가서는 우리 모두 알곡 되어 천국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주의 백성 되게 하소서라는 간절함의 고백이 담겨있다. 마지막 4절에서는 농사꾼이 추수 때를 기쁨으로 기다리듯 우리도 죄와 슬픔과 고통이 없고 기쁨과 웃음과 감사 찬양만이 있는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가운데 살아가는 참 성도 되게 해달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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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307장)

[공중의 새를 보라 ...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마 6:26)

 

 

마태복음 6장 26~29절 말씀을 운율시 형태로 재구성하여 곡을 붙인 감사절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근심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방인처럼 염려하며 살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시면서 삶의 우선권을 주님께 둘 것을 명령하는 찬송이다.

작사자는 미상(통일찬송가)에서 민로아(F.S.Miller;1894~1966)로 되어있다. 민로아 목사의 본명은 프레드릭 S. 밀러(Frederick S. Miller)다. 1892년에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민로아라는 한국 이름으로,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책임자가 되어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안창호 등 많은 인재를 길러내어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1895년 연동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잠-감 연합의 찬송가 제정을 위한 [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노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가 설립하였거나 시무한 교회로는 충북 청주신대교회, 청원북일의, 묵방리교회, 북일화죽리교회(1921), 송파교회(1922)등이 있다. 그는 1936년 정년은퇴 후 필리핀 중국을 여행하고 청주로 다시 돌아왔으며 1937년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에 온 가족이 안장되었다. 그가 번역한 수많은 찬송들은 100년 동안 거의 수정 없이 애창되고 있으며 21세기 새찬송가에는 5편이 기록되어 있다. 찬송곡은 미상이며 에멜라(Emmelar)가 전래곡을 편곡하였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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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9장 넓은 들에 익은 곡식 (308장)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 9:37)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는 마태복음 9장 35-38절의 말씀을 배경으로 작시한 589장 “넓은 들에 익은 곡식”은 추수감사절 예배 때 가장 많이 불리는 찬송으로 겉보기에는 단순히 무르익은 곡식에 대한 감사 찬양 같으나 실제로는 현 시대를 영적 추수기로 보고 신자들로 하여금 기회 지나가기 전에 영적추수(구령사업)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찬송이다.

작사자 존 O. 톰프슨(J.O.Tompson;1982~1818)과 작곡가 J.B.O. 클렘(Clemm,19C) 이 두 사람 모두다 무명의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589장 “넓은 들에 익은 곡식”이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는 것은 그만큼 가사와 찬송곡이 마치 농부가를 부르는 농부들의 모습처럼 우리에게 어깨춤의 여흥과 믿음의 결단을 자연스럽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본다. 더욱이 넓은 들, 익은 곡식, 황금물결, 향기진동, 일꾼, 먼동, 황혼, 천국창고, 잔치자리 등 아름다운 상징어가 많이 사용되어 우리에게 농촌의 정감을 물씬 풍기게 해주는 찬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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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장 논밭에 오곡백과 (309장)

[추수하는 즐거움과] (사 9:3)

 

 

이사야 9장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의 말씀을 배경으로 가을 들녘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이 같은 오곡백과의 수확의 기쁨을 거둘 수 있도록 단비를 내려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수확을 위해 수고한 농부의 겸손과 부지런함을 본받아 우리들도 첫 수확을 위해 수고한 농부의 겸손과 부지런함을 본받아 우리들도 첫 수확의 소산과 물질을 드려 감사하자는 권면이 담겨진 감사절 찬송이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최대의 선물이 구원의 은총임을 잊지 말고 겸손히 무릎 꿇어 우리의 몸과 마음까지 드리는 감사절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작사자는 아일랜드 태생으로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 후 목사가 된 존 사무엘 비릴 몬셀(J.S.B.Monsell;1811-1875)이 만들었다. 몬셀은 영국 국교회 성직자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하고, 1834년에 목사가 되었다. 코노르(Connor), 로만(Roaman)등의 교구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영국으로 건너가 에그햄(Egham), 슈리(Surrey), 성니콜라스(St. Nicholas), 길드포드(Guildford) 교구목사가 되어 1875년까지 32년 동안 목회를 하였다. 그는 교회보수공사를 살펴보다가 떨어진 돌에 맞아 순직하였다. 약 300여 편의 찬송가와 11권의 시집을 낸 찬송가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아름다운 시상과 영감 넘치는 설교를 통하여 성도들을 은혜 가운데로 인도했으며 모범적인 가정생활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찬송곡조는 요한네스 슈토일라인(Johannes Sterulein, 1546~1613)이 1575년에 작곡한 세속적인 노래 ‘Mit Liebbin ich unfangen'의 곡조로 처음 쓰였다. 1581년 뉘른베르크에서 출판된 독일 찬송가 ’다윗의 수금에 맞춘 찬송‘에서 마틴 뵘(Martin Bohm, 1557~1622)이 작사한 가사 ’Wie Lieblich Ist Der Maien'에 이 곡조를 입힘으로써 만들어졌다.

작곡자 요한네스 슈토일라인은 1546년 독일의 수말칼덴(Schmalkalde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스파 스토일라인(Caspar Steurlein)은 슈말칼덴의 루터교 최초 목사였다. 법학을 전공한 그는 1850년 경, 슈말칼덴과 마이닝겐(Meiningen)의 중간에 있는 바숭겐(Wasungen) 교경에는 마이닝겐의 시장이 되었다. 법관으로 일하면서 많은 시를 쓴 그에게 루돌프 황제는 (영국의 계관시인과 같이)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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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장 저 밭에 농부 나가 (310장)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약 5:7)

 

 

‘저 밭에 농부 나가 씨 뿌려 놓은 후’의 찬송은 독일의 추수감사제의 축제 때 즐겨 부르던 농부가로서 독일의 마티아 클라우디우스‘(M. Claudiusi 1740-1815)가 1782년에 만든 감사절 찬송이다. 그는 독일의 한 시골 작은 교회의 목사 아들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품고 방황하던 중 괴테와 같은 합리주의 철학자들을 만나 자신의 전공이었던 신학을 내 던져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가 출세가도를 향해 달렸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클라우디우스는 프랑크푸르트의 북쪽에 있는 헷세 탐슈타트 영지의 농산부 농정국장까지 올라가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세상 남부럽지 않게 살던 중 그에게 갑자기 어두움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먼저 그의 아우가 폐병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고 뒤이어 자신도 폐출혈 병으로 피를 토하기 시작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아픈 육체를 끌어안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그 누구 보다 더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고통과 아픔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보면서 그동안 하나님의 곁을 멀리 떠나 자기 멋대로 살아왔던 날들을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즉시 농정국장의 일을 포기하고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로 작정하고 다시금 주님과의 첫사랑을 간구하며 매어달린 결과 그의 중병은 점차 나아지더니 완전하게 회복되었고 그리고 건강을 되찾은 클라우디우스는 마지막 남은 생애를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죽도록 헌신하며 살기로 작정하고 이 찬송을 만들었다.

찬송곡은 독일 뤼네브르크 태생의 저명한 음악가로 많은 성가와 민요 노래집 등을 냈고 각종 악기의 음악을 작곡한 요한 아브라함 페테르 슐츠(J.A.P Schulz;1747-1800)가 1800년 만들었다. 슐츠는 독일에서 제빵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네베르크의 라타인슐렌린으로 이사하여 교사생활을 하면서, 폴란드 국왕의 딸 사피하의 반주자로 있었다. 후에 그는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첫 오페라는 1785년에 작곡한 클라시사(Clarissa)였다. 1786년 그는 베를린~프랑스 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1786년에는 라인스부르크교향악단의 악장이 되었다. 2년 후에는 코펜하겐 교향악단의 악장이 되어 18년 동안 있었는데, 건강이 나빠져서 사임하고 코펜하겐 음악박물관 자료정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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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장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311장)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행 14:17)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라는 회화적 묘사를 통하여 풍성한 추수의 축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는 감사절 찬송이다. 특히 4절은 1-3절의 내용의 내용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부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작사자가 1-3절에서 추수 광경을 노래한 것은 결국 신자의 영적인 추수(4절)를 말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4절에서 보듯이 아직도 이 땅에는 복음의 씨가 뿌려지지 아니한 영적 황무지가 많다. 이에 신자들은 그 땅을 말씀으로 파종하고 돌봄과 양육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작사자 임옥인(1915~1995) 권사는 함경북도 길주 태생으로 함흥의 영생여자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 교사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창덕여고 교사와 건국대학교 가정대 학장과 YMCA 회장을 역임하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특별히 작사자 임옥인 권사의 별명은 ‘기적의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받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치료의 손길로 말미암아 살아났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일곱 살 때 복막염을 앓았고 폐결핵, 척추 카리에스, 신장염, 맹장염, 치질, 뇌졸중 등의 숱한 대 수술을 받았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그러한 중에서도 임옥인 권사는 많은 찬송시를 남겼는데 오늘의 찬송시는 사도행전 14장 17절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는 말씀을 배경으로 1967년 개편찬송가 편찬 시 찬송가위원회로부터 위탁을 받아 만든 것이다.

찬송곡은 서울 출생, 평양요한학교, 중앙신학교, 동경국제고등음악학교, 크리스천 신학교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음악대학과 졸단 대학에서 수학한 후 국내 여러 대학에서 음악교수로, 또 서울 영락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한국찬송가 위원회 음악전문위원으로 개편찬송가를 편집한 박재훈(1922~) 교수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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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3장 아름다운 하늘과 (312장)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 104:24)

 

작사자는 영국태생의 교수이며 찬송작가, 캠브리지 퀸즈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고전문학 교수가 되었으나 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찬송가 수집과 시작에 몰두한 폴리오트 샌포드 피어포인트(P.S.Pierpoint;1835-1917)가 1864년 작시하였다.

찬송곡은 독일 뷔르템베르크 출신으로 로마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고향 스투트가르트(Stuttgart)로 가서 교회음악 학교를 세우고 4부합창을 일반화했다. 이렇듯 평생을 오르간 연주자, 지휘자로 봉사하며 교회 찬송가 만들기에 헌신한 독일 태생의 콘라드 코헤르(C. Kocher;1786-1872)가 1838년 작곡하였다.

아름다운 하늘과 푸른 산 울창한 숲, 하늘의 빛나는 달과 별,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친구, 그리고 밝은 눈과 귀를 주시어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묘한 세상을 감상할 수 있도록 은혜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할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어 인류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날마다 주님께 감사 찬양하는 주의 백성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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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장 감사하세 찬양하세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04:1)

 

감사절 찬송으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풍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주를 믿는 자들아 하나님께 소리 높여 감사하세”라며 1996년에 박정아(1940~)가 작시하고 경희대학교교육대학원 음악교육을 전공하고 광주교육대학교 김은석(1932~) 교수가 1996년 작곡하였다.

특별히 매 1절과 3절 첫 소절과 마지막 소절에 “감사하세 찬양하세”,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세”를 통해 풍물놀이와 꽹과리를 치며 조상신에 경배하는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으려는 작시자의 강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

3.설 교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편 103 : 1~22

(안동성곡교회 / 강태진 목사)

 

우리가 살아가면서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으악새가 새라고 우기며 그 새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울더냐? “으악”하고 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고복수 씨가 노래한 짝사랑이라는 노랫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짝사랑'의 '으악새'는 새(鳥)가 아니고 이 억새풀(草)의 전라도 방언이라고 합니다. 억새가 가을바람에 서걱대는 소리를 '으악새 슬피우니' 하므로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착각은 애교가 있지만 우리에게 심각한 착각이 있습니다. 인생은 내 인생이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언젠가는 나의 모든 것을 다 반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도 가정도 직장도 사업도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 인생은 자신의 운이나 능력이나 실력이나 노력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극히 작은 부분임을 깨닫게 될 날이 반드시 옵니다.

 

농사를 짓는 것이 농부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자연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탄저병으로 고추농사를 망친 것을 보았습니다. 자연의 도움이란 창조주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시19:1-6)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감사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감사해야 하며 어려운 일은 어려운 대로 감사해야 합니다. 병약하다고 빨리 죽는 것이 아닙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넉넉하다고 꼭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넉넉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러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러나 인생은 미련하여 감사를 잊고 삽니다. 추수감사절은 항상 감사하고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1년의 감사를 드리는 특별한 절기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감사는 제사로 드려져야 합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마음이 재물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물질이 재물입니다. 추수한 오곡백과로 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예물은 한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곡식으로 비유합니다. 잘 익은 곡식은 창고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 창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과 같은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됩니다. 무엇이 알곡입니까? 자녀를 길러도 알곡 같은 자녀가 있습니다. 부모를 바로 알고 부모님을 잘 섬기고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생명을 주시고 인생이 이 세상에 살도록 모든 것을 다 주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인생이 알곡입니다. 이런 인생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알곡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나가서 이 복음의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일군이었습니다. “(롬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복음을 전하는 일)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예수 믿게 하는 것)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이 가장 귀한 제물입니다.

 

본문에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1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감사란 감사할 내용과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송축한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대해 좋게 말하다. 하나님을 더욱 높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나게 크신 일을 행하신 분이시니 그것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건강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3절)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하나님은 인간을 늘 치료해 주십니다. 우리 몸에는 하루에 암 세포가 50개가 생긴다고 합니다. 흰 피톨이 그 세포를 다 죽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스스로 치료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의사가 뼈를 붙이거나 상처가 아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스스로 해 냅니다. 의사는 단지 그것을 도울 뿐입니다. 음식이 약의 기능을 가집니다. 또 새로운 의술이나 약을 개발하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십니다. 때로는 기도로 기적적으로 치료해 주시기도 합니다.

 

2. 파멸에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4절)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파멸이란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생명의 위기를 수없이 넘었습니다. 6.25전쟁 때, 교통사고로, 물놀이로, 군 생활에서, 직장생활에서, 길가다가 이런 저런 죽음의 위기가 있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꼭 필요한 것을 언제나 공급해 주십니다.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삶에 만족을 주십니다. 만족 중 최고의 만족이 먹는 만족입니다. 수많은 오곡과 백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그 하나를 못 만듭니다. 그러므로 포도한 알을 먹으면서 달콤새콤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냥 와삭 와삭 맛있다 하고 먹으면 안 됩니다.

 

4. 날마다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5절)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날마다 새로운 회복을 주십니다. 마음을 회복시켜 주시고 육체의 기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회복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수면을 취하고 나면 몸의 기력이 회복됩니다.

 

5. 정의와 공의를 베푸십니다.

(6절)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우리의 억울함을 아시고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때가 되면 반드시 보응해 주십니다. "(출34:7)....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한이 맺힌 가슴을 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께 다 맡깁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6. 말씀의 은혜를 주십니다.

(7절)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 최대의 정보이며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 문제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도 완벽한 해결책입니다.

 

7,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2절-4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최고의 은혜가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먼저 기록한 이유가 이것이 사람들은 정욕을 쫓아서 죄 짓고 짐승처럼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막9:43-49)”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혜중의 최고의 은혜가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죄란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지었기에 스스로가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히틀러가 총애한 신복 중에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사람은 제2차 대전 때 독일이 승리하도록 독일의 모든 공장을 100% 가동시킨 천재적 공학자입니다. 전쟁이 끝나 전범 재판을 받자 다른 전범들은 자신의 죄를 부인했지만 유일하게 슈페르만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20년 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그 마음을 담은 여러 권의 책을 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ABC 방송 기자가 그에게 묻기를 “슈페르 씨, 당신이 초창에 쓴 책을 보면, 나의 죄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도 없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 있던데요.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나요?” 슈페르가 아주 슬픈 기색을 띠며 말하기를 “나는 20년 형을 다 치루고 석방이 된 자유인이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범한 죄는 절대 용서 받을 수가 없고, 용서 받아서도 안 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2차 대전 때, 희생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가 형기를 마친 후에 처절하리만큼 참회의 길을 찾았지만 죄책감에서 자유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인터뷰를 끝낸 몇 일후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왜 스스로 자기 죄에서 빠져 나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죄에서 자유합니다. 그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알기 때문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라."(히9:22) 하나님은 이미 사죄의 원칙을 확고하게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죄인의 피가 아닌 의인의 피여야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만 합니다.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죄가 티끌만큼도 죄가 있으면 절대로 천국은 못갑니다. 그런데 그 많은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표현이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즉 다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죄는 하도 많아서 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기억 못해도 그 죄까지도 다 용서하십니다. “나는 죄가 없다.”고 큰소리를 치는 젊은이에게 랍비(유대인 지도자)가 말했습니다. “큰 돌을 하나 주워오게” “다시 그 자리에 갖다놓게” 제대로 제대로 갖다 놓았습니다. 이번에는 “잔 돌을 많이 주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돌을 본래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하니 가져온 곳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십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소중합니다.

 

“용서 받을 자격이 없는데, 축복 받을 자격이 없는 데, 천국 갈 자격이 없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으니 은혜로 거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은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직까지 예수 안 믿고도 멀쩡한 살아온 이유가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시려고 오래 참아 주셨습니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오래 오래 기다리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어느 누구도 절대로 지옥을 가서는 안 됩니다.

 

독신으로 사시는 분을 보면 정말 정신력이 대단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꿈이 결혼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꿈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독신으로 삽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로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누릴 영광이 있습니다. 죽음을 넘어서서 누릴 그 찬란한 천국의 영광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꿈입니다.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감사하라

신16:9‐17

(총회목회대학원 학감 / 김경규 목사)

 

서점가에 가 보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을 사보지 않았습니다. 요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무엇을 위하여 목숨을 겁니까? 아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하여 목숨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서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던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의 Puritan 즉,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원래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 반대하는 분리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1593년에 영국은 ‘비밀집회 법’을 제정 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16세 이상 된 자로서 성공회에 참석하지 않거나 분리주의자들의 비밀집회에 참석하고 3개월 이내에 다시 국교인 성공회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영국에서 추방되고, 추방된 그들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면, 교수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법 때문에 성공회에 반대하는 “분리주의자들”이 신앙의 자유가 더 많이 보장돼 있는 네덜란드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정착지 네덜란드에서 또 다른 문제점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저들의 자녀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세속적인 신앙에 영향을 받게 되는 문제였습니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신앙의 특징들을 다음 세대에 잃어버리게 될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된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신앙의 자유는 있었지만, 성적인 방종과 가정의 가치가 무시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이 결혼 전에 아이를 낳았고, 결혼하면, 그 아이는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그런 일이 그 나라에서는 정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혼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유롭고 오히려 이혼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기는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America 신대륙의 “버지니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모험을 감행하지 않겠다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신대륙 버지니아로 갈 사람들을 추가로 모집하게 됩니다. 여기에 추가로 영입 된 사람들은 네덜란드로 이민 가서 살던 청교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 살면서 성공회에 속한 신자이지만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America 신대륙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 것은 1620년 7월 이었습니다.

네덜란드에 살던 Puritan 들은 ‘스피드웰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런던에 있던 성공회 신자들을 ‘메이플라워호’를 타게 되었습니다. 8월 중순 경에 ‘사우샘프턴’을 떠난 그들은 ‘스피드웰호’가 물이 새는 바람에 모두 ‘메이플라워호’에 옮겨 탔습니다. 그들은 9월이 돼서야 다시 항해 길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모두 242명 이었습니다. 그 항해 길은 몹시 힘들고 험난 했습니다. 꼬박 두 달에 걸친 향해 도중 선원 네 명과 승객이 한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들이 희망봉에 도착한 때는 11월 중순 이었는데 겨울의 문턱에 와 있었습니다. 식량은 부족하고 환경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이었습니다. 항해사의 실수로 목적지인 ‘버지니아’로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200마일 북쪽의 ‘희망봉’에 도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첫해 겨울은 저들에게 너무나도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결혼한 남자 41명 가운데 19명 이었고, 결혼한 여자 18명 중 겨우 4명뿐이었습니다.” 가족 중에 절반 이상이 추위와 풍토병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도착하자 얼마 만에 죽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살다가 한해 겨울에 가족 중에 절반 이상이 죽어 버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상실의 아픔을 딛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서서 땅을 개간하고 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습니다. 가을이 되어 저들은 얼마만한 추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소득의 일부를 예물로 가지고 나와 추수할 수 있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추수 감사절의 유래입니다.

추수 감사절은 청교도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대 절기”를 지키라고 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3대 절기 중 하나는 유월절입니다. 다른 하나는 칠칠절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양이 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 시킨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하라는 절기 입니다 (신5:15).즉,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칠칠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리 추수를 마치고 보리 수확을 잘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고, 그것을 “맥추 감사절”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칠칠절이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셔서 7주, 즉 49일 다음 날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예표 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절기는 오늘날 “성령 강림절”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함께 신16:10‐11절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 할 지니라 ” (신16:10~11).

 

그 다음은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밀농사를 다 마치고 난 다음에 한 주간 동안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경축하는 절기 입니다. 이 초막절이 바로 오늘날 추수 감사절의 유래가 된 절기입니다. 15절에 보면 “초막절”을 지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16:15절을 함께 살펴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 지니라” 무엇 때문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미래에 복 주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대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추수를 마쳤으면 추수하게 할 수 있도록 여태껏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시고, 바람도 주시고, 자라게 해주시고, 그리고 해충도 막아 주시는 등 지금까지 복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고 해야 할 터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금껏 복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앞으로 미래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고 하고 계시잖아요? 그거 참 이상한 일입니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이중적인 계시라고 합니다.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먼저 ‘복 주실 것을 인하여’란 말씀은 영적인 축복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13:30에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사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을 성도를 알곡으로, 거짓으로 예수를 믿은 자들을 쭉정이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을 곡식을 쌓아 놓는 곳간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농작물을 수확하여 곳간에 들인 것을 경축하는 초막절, 즉 수장절은 성도들이 장차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에서 Glorification, 즉 영화를 맛보게 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복이기 때문에 “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 지니라”고 미래적인 복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God will bless you)

 

이 말씀의 숨은 뜻은 무엇입니까? ‘장차 하늘나라에서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열매 맺은 만큼, 추수한 것만큼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이 손으로 한 수고 만큼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저와 여러분의 기쁨은 충만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구약시대에 유대 백성들은 이 계시의 의미를 뚜렷이 안 되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 때 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시고 주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오신 이후의 신약 백성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열려진 계시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마16:27). 그러므로 저와 여러 분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5: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열매는 이 마지막 때에 영혼의 추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을 추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 추수한 것만큼 영생천국에서 영원한 복(상)을 주시겠다는 미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손으로 한 모든 것, 이것은 봉사를 말합니다. 헌신을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이것이 지금 당장에는 헛수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때란 이 땅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지금 이때가 영원한 때를 위한 상급을 준비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2‐23)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명 감당하는 일에 진력해왔습니다. 이제는 천국에 가서 주님 품에서 좀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사는 날 동안의 수고한 만큼만 영원한 상급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이 땅에 남아서 헌신하고픈 생각 또한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 생각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던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을 때에만 섬기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많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크고 영원한 상급을 받는 저와 여러 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면 그 때에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영원히 맛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복 주실 것을 인하여’란 이 말씀은 육적인 축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죽어서 천국 가서만 복을 주시겠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구절을 앞서의 해석처럼 영적으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지금까지 아직 복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모든 수확을 축복해 주실 것이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도 복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복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장차 복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은 당장 수확할 것이 별로 없어도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소망 중에 바라보고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새는 한 쪽 날개로 하늘 창공을 날 수 없습니다. 두 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영적인 복과 아울러 육적인 복도 겸하여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떡(육적인 복)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떡 없이 말씀(영적인 복)으로만 살 수도 없습니다. 영육간의 복을 다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현실이 어떠하든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 하라

영국에 가면 ‘히야신스’라는 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꽃은 좀 특별한 특징이 있는데, 이 꽃은 그냥은 결코 피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히야신스’라는 꽃이 피기 위해서는 몇 주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라고 나서야 꽃이 핀다고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인생의 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밤과 어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밤에는 불을 밝힙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밤과 어두움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히야신스 식물이 꽃을 피우기 위해 몇 주간의 어둠이 필요하듯이 우리 인간에게도 여러 가지 모양의 밤과 어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확할 것이 거의 없는 흉년을 허락하시기도 하십니다. 그 흉악한 흉년과 어두운 밤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시키십니다. 꽃이 되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형통한 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려운 고통의 때에도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감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아무런 문제도 없고 풍파도 없고 인생의 밤도 없을 줄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제자들에게도 광풍은 몰아쳤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일 정도의 어둠이 몰려온 것입니다.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가자”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에게 환난과 폭풍이 닥쳐 온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그 배에 함께 타고 계십니다. 즉, 주님이 지금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광풍이 대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믿는 자에게 환난과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통을 겪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형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의 심긴 나무처럼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라”라고 성경은 말씀 합니다 (시1:3).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창공을 날게 하게하기 위해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게 하기위해 때때로 우리가 말씀 중에 거할지라도 시련과 풍파와 흉년의 밤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했던 청교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들에게 식구의 반 이상이 죽어 나가고 먹을 것이 없고 혹독한 추위와 무서운 질병과 같은 시련과 역경이 찾아왔습니다. 환경은 너무나도 척박합니다.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인생의 밤을 만나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수확한 것은 보잘 것이 없었지만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때마침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로하시고자 천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인 인디언들의 손에는 칠면조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저들은 함께 칠면조를 구워먹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저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소득의 일부를 자원하는 예물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며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 믿은 것입니다 (신16:15). 환경적으로는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지만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즐거워 한 것입니다.

 

흑암 속에서 히야신스 꽃이 피어나듯이 저와 여러분 삶의 어둠 속에서 인생의 위대한 꽃을 피우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사45:3,7).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좋은 것을 때때로 시련과 역경, 흉년의 밤이라는 보자기에 싸서 주실 때가 많습니다. 성경에 위대한 삶의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던 욥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7년간의 흉년에서 사람들을 구출해낸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왕이 된 다윗도 인생의 밤을 만나 더욱 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민족적인 죽음의 목전에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 닥쳐오는 어두운 밤과 흉년의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바랄 수 없는 중에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롬4:1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믿고 결국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합니다 (롬8:28).

 

하나님을 바랄 뿐만 아니라 내게 남아 잇는 것을 바라보고 가능성을 생각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항상 남아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그것을 바라보고 가능성을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항상 없어진 것, 내게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없는 것을 생각하고 불가능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원망불평하고 불행해집니다. 그러면안됩니다. 닫힌 문, 잃어버린 것, 떠나버린 것에 초점을 맞추면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우리가 가진 것,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출4:2).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왕상17:11). 저와 여러분의 생각에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것 같은데도 주님께서 복을 주시면 상황은 문제는 달라집니다.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마른 지팡이로 기적을 창출하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오병이어로 수많은 군중을 먹이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것들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잇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의 열악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현재 내게 찾아온 어두움과 흉년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이 없고 미미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하며 즐거워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은 자신들이 없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들이 지금 가진 것을 바라보고 “우리는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거라고는 고작 보잘 것 없는 오합지졸의 군대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고 외쳤습니다. 자기들이 가진 모잘 것 없는 것에 플러스 하나님을 하니까 저들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그것에 하나님을 플라스 해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자본입니다. 자유로운 신앙을 꿈꾸며 긴 여정과 척박한 땅과의 싸움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이제 남은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청교도들을 기억하십시오. 이젠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도 저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믿고 나왔습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나아왔습니다.

어떤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 자살을 생각하다가 캐더린 쿨만에게 찾아왔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제게 남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캐더린 여사가 물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믿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캐더린 여사는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당신은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그 사업가는 나가서 자기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자라는 생각을 품고 열심히 살다가 마침내 사업에 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사업가는 나중에 사업에 크게 성공한 다음에 캐더린을 찾아와 감사를 표했다고 합니다.

 

두 병사가 사막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 수통에 물이 반씩 남아 있었습니다. 한 병사는 이미 물을 반이나 먹어버린 것을 생각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병사는 아직도 불이 반 수통이나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게 아직 남아 있는 것 그것을 생각하고 가능성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도전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은 침로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오랜 만에 한국에 나왔습니다. 여러 친구들과 만나기도 하고 전화로 통화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들의 공통적인 이야기가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제 인생 다 살았다”는 것입니다. “벌써 인생 50을 살았는데 이제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이미 없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나간 50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제게 남아 있는 50년을 바라보고 갈렙과 같은 원대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지나간 인생을 계수하지 마십시오. 대신 남아 있는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아름답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이한 저희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네게 없는 것을 바라보지 말고 지금 네게 남아 있는 것을 바라보고 새롭게 시작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장차 복 주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감사하며 즐거워하라”

 

함께 본문을 다시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 지니라” (신16:15).

 

이미 내게서 떠난 것, 내게서 사라진 것, 내가 갖지 못한 것에서 눈을 떼십시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 한 미래를 꿈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 우리 손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적은 것을 인하여 장차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래고 긴긴 밤 동안 어두움을 지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히야신스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도 우리가 어둔 밤을 지내고 나면 아름답고 영롱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꽃을 피우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꿈꾸고 있나요?

시편 126:1-6

(열방의빛 순복음교회 /김 기영 목사)

 

1620년 11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미국 북동부 플리머스(Plymouth) 해안에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100여명의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인 미국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도착한 그해에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절반가량이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50명 정도가 인디언들에게 옥수수 농사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부터 아주 작은 규모로 추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추수한 첫 곡식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월리엄 브레드포드(William Bradford)는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3일 동안 하나님께 감사의 축제를 드리자는 이 제안이 추수 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까지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우리나라의 추석처럼 성대하게 지켜지고 있습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도했던 추수감사 정신이 바로 미국 개척의 정신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탱큐(Thank you~!) 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이겨낸 자들만의 특권입니다. 우리도 탱큐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바벨론 포로의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고백이 들어 있는 찬양이 시편 126편입니다.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을 되돌아 본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추수 감사절의 의미는 시편 126편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26편을 통해서 2010년 추수 감사절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감사는 하나님의 기적이다.

감사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감사하기로 작정하면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감사는 훈련을 통한 습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쉽게 원망과 불평하는 말들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보든지 부정적으로 보며 상대방의 단점을 지적하고 일이 안 되는 쪽을 생각하기를 쉽게 합니다. 한번 눈을 감고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나는 어떤가?

본문 2절에서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감사가 저절로 나왔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도와주심으로 50여명의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3일 간의 축제를 드렸습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과 고통을 이겨낸 50여명의 청교도들에게 감사는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절). 뭇 나라들 즉 이방 민족들조차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보았다(2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 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내가 먼저 감사하는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감사하는 마음을 전염시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감사할 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온갖 서러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았을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비록 현재는 이방 땅이지만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도와주심을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대서양을 건너는 청교도들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므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인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남이 무시하거나 간과해 버리는 것 속에서 존귀한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감사는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다.

오늘 본문에 “포로를 돌린다”(4절)를 히브리어 표현으로 옮기면 ‘운명을 바꾼다’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바싹 마른 남방 시내 바닥이 우기에 물로 가득 차게 되듯이, 갑자기 닥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4절: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현실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운명을 바꾸도록 만듭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는 선택을 해야 했던 청교도들에게 현실은 이겨내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바다를 건너면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넌 청교도들에게 신대륙의 추위와 굶주림은 파멸의 운명을 거부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믿음은 고난이라는 아픔을 통하여 성숙하게 만듭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절). 100여명 중에서 50여명만이 살아남은 대서양 횡단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을 보낸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인디언에게 배운 옥수수 농사를 위해 들 로 나갔습니다. 아마도 살아남은 청교도 50여명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을 이겨내는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 청교도들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고통과 고난을 이겨내라고 침묵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알 때도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참담한 교통사고를 일어나도록 하시며, 또 일자리를 잃는 위기에 처하게 하는 것일까요?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암을 허락하시며 어린 아이에게 죽음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고난 중에서나 형통한 가운데서나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그야 말로 우리가 원하는 환경이든 원하지 않는 환경이든 우리는 모든 경우를 감사의 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게 감사를 하면 우리의 인생이 변하게 됩니다. 포로에서 귀환하는 인생이 될 것이고 추위와 죽음의 고통과 굶주림에서 새로운 풍요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5절). 고통의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러 나갈 때에는 이런 추수의 기쁨을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버렸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6절).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대서양을 건너 온 청교도들의 인생은 감사함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감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육체적인 면에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고”(행 17:25), 영적으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도다(엡 2:1)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결론

하나님은 좋은 환경을 먼저 만들어 주면서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음을 의미하며 우리의 인생이 바꾸어 버렸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좋지 못한 환경에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나쁜 환경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지혜와 사랑이 무궁하신 하나님께서 절대주권 가운데 그 나쁜 것들을 취해 선을 이루실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 126:1).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

로마서 11:33~36

(청주 중앙 순복음교회 / 김상용 목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3-36)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먹을 양식 뿐 아니라 생명을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절기를 지키는 날입니다. 바로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함께 예물을 드려 우리의 감사를 나타내는 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세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그것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유월절과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두는 맥추절, 그리고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한 수장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 절기에 빈 손으로 하나님 앞에 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처럼 명령하시는 분이 뉘시기에 우리가 그 명령을 따라 절기를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그분이 바로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주님으로부터 진행되고, 주님으로 끝을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것을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감사가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영광 돌리는 감사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만물의 주인이 되실까요?

 

1.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1)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이사야 44장 24절에 보면,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17장 24-25절에는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고 하였으며, 시편 74편 16-17절에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시편 95편 6-7절에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95:6-7)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 되시고,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굽혀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는 어떤 것일까요? 아직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를 모두 관찰할 수 없지만, 미국 NASA에서는 허블 망원경을 고도 559km에 띄워놓고 96-97분마다 우주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는 광대한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무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띠모양으로 수천 억 개의 별이 모여 있는 집단인 은하들이 있는데,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나선은하인 안드로메다 은하는 약 250만 광년 거리에 있고, 멕시코 모자인 솜브레로처럼 생겼다고 솜브레로은하라고 이름 지어진 은하는 약 2,930만 광년 거리에 있으며 막대나선은하는 6천만 광년, 여러 은하군으로 보이는 스테판의 5중주 은하들은 약 2억 8천만 광년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는 이처럼 엄청난 은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스와 먼지 등으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성간 물질인 성운이 있습니다. 전갈자리 은하계 내에 있는 나비모양의 나비성운은 약 4천 광년, 지금도 별이 생성되고 있는 성운인 용골성운은 약 7,500 광년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은하보다는 작은 규모이면서 수백 개에서 수십 만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들의 집단인 ‘오메가 성단’이 있습니다. 천만 개의 별이 선명하게 빛나는 거대 구성 성단으로, 중심부에는 10만 개의 별이 모여 있고, 거리는 약 1만 6천 광년이며, 연령은 100억에서 120억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우주 안에 태양계가 있는데, 이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행성들을 말합니다. 그중에서 지구는 태양에서 수성, 금성 다음인 세 번째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주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태양의 겉 표면 온도는 약 5천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지구가 수성 자리에 있으면 모든 것이 불타 버리며, 만약 지구가 화성 자리에 있으면 모든 것이 얼어버린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지구를 얼마나 적당한 거리에 놓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약 1억 5천만 km 인데, 지구의 지름이 1cm라고 하면 태양의 지름은 109m로 지구의 109배가 되며, 부피는 약 130만 배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지구가 큰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에 비하면 먼지 한 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생명체가 있는 곳은 우리가 사는 지구가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매일 70억의 인구가 숨을 쉬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38:4-7)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것을 깨닫고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사40:13), 즉 “누가 여호와의 신을 측정할 수 있는가? 광대한 우주를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작고 작은 지구를 만드시고 그 가운데서 미물보다 못한 인간들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계신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으랴?”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 즉, 하나님의 선생이 되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모사로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가르쳤는가?”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욥41:11)라는 질문으로, 이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 대가로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물주시고, 생명을 주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 대가로 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께 먼저 드려서 주님이 그것을 받으신 후에 우주를 만들고, 땅을 만들고, 식물을 만들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물을 지으셨고 만유의 근원이 되시며 만물의 조성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운행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와 질서, 운행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깨닫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시고 계시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만유의 주인 되시며, 만복의 근원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지구의 위치, 사계절, 일용할 양식,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아주 알맞게 배치하심으로 육신적으로 우리는 구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햇빛, 공기, 물, 땅, 공중, 바다, 땅 위, 식물, 동물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 값으로 주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시키심으로 영적으로도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공급과 예비하심을 우리가 깨닫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그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감사드리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

첫째,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만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우리 주인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록펠러는 3대 기적을 이룬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가난했지만 가장 부유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그의 재단 재산이 약 30억 달러(한화로 약 3조원)라고 합니다. 또한 역사상 제일 많은 돈을 남에게 준 것인데, 일생 동안 각 방면에서 7억 5천만 달러, 약 9천억 원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장수의 축복인데, 그는 98세까지 살았고,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고 깨끗하게 하나님께 갔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기적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이유는 십일조를 매우 철저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라고 하셨고, 에베소서 1장 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이지 않는 주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교회를 사랑치 않는 것은 주인 되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포항 구계 교회에 김상태라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횟집을 운영하면서 정치망이라는 큰 그물을 바다에 쳐서 고기를 잡아 사는 어부였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도 안 잡히고, 횟집도 안 되어서 4억 6천 만원 빚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용왕님께 제사 지내라고 했지만, 그 말을 뿌리치고 목사님을 모시고 동해안 바닷가에 꿇어앉아 안수기도를 받으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구계 교회는 오래 되어서 지붕에서 물이 새고 할머니, 할아버지만 있어서 젊은이라고는 집사님뿐이었습니다. 교회는 새로 지을 재정 형편이 안 되어 그 집사님은 하나님께 교회 건축하도록 축복해 달라고, 빚 4억 6천만원을 갚게 해주시면 교회 짓겠다고 하였습니다.

그후 2000년 12월 25일 새벽에 그 집사님의 그물에 방어 2,500 마리가 걸렸습니다. 그것은 한 마리당 10kg-15kg이고 길이는 120cm였는데, 이것을 경매하여 4억 5천만원을 벌었고, 그 다음에는 2,500 마리가 또 걸려서 나왔는데, 1억 6천만원을 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십일조 5천 6백만원을 주님께 드리고 빚을 갚고 나니 딱 맞아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른 사람의 그물에는 고기가 걸리지 않았는데, 유독 그 집사님 그물에만 그렇게 많은 물고기가 걸린 것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두려움이 들면서 빚을 모두 갚자마자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횟집을 담보로 잡아 융자를 받아 교회를 건축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잠언 8장 17절에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시편 50편 23절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감사하고 살아야 하지만, 추수감사절기는 특별한 감사를 종합해서 드리는 것으로 이런 감사는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신다는 의미요,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간다는데 대한 감사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데 나중에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을 하나님께서 다시 돌려주실 것입니다.

옛날 소작인들은 땅 주인과 농사지은 것을 반씩 나눠 가졌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의 예물은 너무나 미미한 것입니다. 땅의 주인에게 추수한 것에서 감사로 제물을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요, 이 세상을 올바로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며,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고 했듯이, 우리도 주님께 예물을 드리며 “주여,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구하기 전에 먼저 감사를

빌립보서 4:4-7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김순환 박사)

 

서론

사람의 일생을 80까지 산다고 했을 때 그 중에서 잠자는 데 사용하는 시간은 무려 25~6년, 식사하는 데 드는 시간도 5~6년, 기다리는데 보내는 시간도 5년, 잡담하는 데 보내는 시간도 최소한 5~6년을 잡아야 되고 출퇴근 시간, 텔레비전과 신문을 보는 데 바치는 시간 등을 합산하면 10년 정도에다 기타 다른 시간까지 다 합치면 정작, 깨어서 값지고 쓸모 있는 일을 위해서 바치는 시간은 80년의 3분의 1도 채 안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보면 짧은 인생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결실의 계절 가을, 특별히 추수 감사의 절기를 맞아서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값지게 보내었는지 돌아보면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 은혜 받으시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I. 주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라.

 

요즘 의사 선생님들이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꼭 빼놓지 않고 당부하는 말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꼭 잘못된 음식이나, 나쁜 환경이나, 위험한 사고 같은, 외적인 것에 의해서만 사람이 건강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무서운 병도 이기고 건강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으로 그것을 잘 이기지 못하면 건강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요즘에는 “웃을 일이 없어도 먼저 웃어라. 그러면 신체에 긍정적 반응이 뒤따라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웃음치료를 통해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찾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얘기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인간은 세상의 환경에 대해서 그냥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환경을 움직여 긍정적으로 바꾸는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는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가운데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쓴 편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1:12-14) 바울에게는 매우 힘겹고 위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오히려 놀라운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으로, 불안하고 미래도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오히려 빌립보 교회를 향해 분열(4:2)과, 유대주의자들의 위협(3:20)과, 무 율법주의자들의 위험(3:18)에 대해 대처하고 단합과 일치를 이루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1:27; 4:2) 그리고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기쁨의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그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어느 누구도 근심과 염려와 고통을 피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 그것들을 이겨내기 위해 마음을 잘 다스리고,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나름의 방법도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 안에 있는 풍요한 행복의 질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현실에 치어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생의 도전 앞에서 그것을 능히 극복하게 하고 뛰어넘게 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주안에서’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일에 두고 말씀을 따라 살며 성령의 권능을 입어 주님의 인도와 도우심 속에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라고 고백할 만큼 주와 하나 되어, 주안에 사는 자였기에 그의 사역 속의 수많은 시련들을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바로 세상을 이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런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15:5-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주 안에 사는 삶은 비록 화려하거나 넉넉한 것이 없더라도 또 자랑할 게 별로 없는 것 같아도 결코 실패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속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성공의 삶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 있는 사람은 잠시 있다 안개처럼 사라질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요, 그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이기 때문이며, 또 세상에서도 그것을 미리 맛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14:27) 또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요6:35) 세상의 어떤 성공과 자랑도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안과 생명수 같은 기쁨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고통, 절망, 허무감으로 목마릅니다. 하지만 주 안에 있을 때 그칠 줄 모르고 솟아나는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기쁨만이 영원한 것이며, 영속적인 것이며, 깊은 것입니다. ‘주 안에’ 있는 이 기쁨을 더욱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II.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라.

 

오늘의 말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6)라는 당부는 근심스러운 형편 가운데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하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대부분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라 하여도 꼭 좋은 일만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일도 섞여 있게 마련입니다. 또 안 좋은 일처럼 보이는 사건 속에서도 반드시 우리의 영혼에는 약이 되고 덕이 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순례자와 같은 삶임을 아는 사람은, 어떤 일을 표면만 보지 않고 그 속에 숨겨진 더 깊은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대 위에서 그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성숙한 신앙인은 당장의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에만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일 속에서도 숨겨진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어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는 말씀에서 ‘감사함으로’는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자면 ‘with a thankful heart’입니다. 어떤 일을 대하든지 감사하는 마음의 바탕을 가지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일에 감사 의식을 가지고 대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을 대하거나, 어떤 일을 대할 때에 긍정적인 시각과 태도로 대처할 때에 우리는 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우며, 회의적이거나, 비관적일 때 세상은 모두 다 우리의 적이 되어 비협조적이 되거나 우리를 더욱 곤경에 빠뜨리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로 우리의 마음의 모드를 바꿀 때 엉킨 실타래와 같은 세상사나 인간관계는 순조롭게 변하고 우리와 세상 사이에는 순기능이 발생하고, 선순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리들 스스로가 초래한 화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바꾸어 복이 되게 하시는, 이른바 전화위복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감사의 위대한 힘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더 한층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며 더 풍요한 인생의 결실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감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감사 태도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합3:17-18) 그의 감사의 이유는 그 어떤 재물이나 건강이나 확보된 지위가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 백성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에 참여한 것으로도 충분한 감사의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감사는 무엇입니까? 내게 타당하고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만 나오는 감사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하여도 그 영원한 생명이 진정으로 가장 귀하기에 감사하는 자세, 그런 감사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III. 감사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

 

한 어린 아들이 어머니 무릎에 앉아 밤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잘 자게 해주세요.”라는 말과 자기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후 짤막하게 동요를 불렀습니다. 의아했지만 어머니는 잠시 기다렸다가 침대에 누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왜 기도를 하고 나서 동요를 불렀니?” 그러자 아이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하나님께서 너무도 슬픈 일에 대해서만 많이 들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을 좀 즐겁게 해드리려고 부른 거예요.”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축복과 삶의 즐거움을 감사하기보다는 걱정거리, 마음 상한 일, 실망한 일,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아뢸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을 먼저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루시엔 디스(Lucien Deiss)라는 신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축복기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먼저 감사를 드리지 전에는 어떤 것도 요청할 수 없으며, 먼저 손을 들어 찬미하기 전에는 손을 펴 구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으로부터 형식주의에 빠져 외식한다고 질책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사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훌륭한 기도의 정신을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살고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였던 것이지요. 만일 그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도 그렇게 기도의 형식처럼 감사를 실천했더라면 주님의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태도가 감사의 마음인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오늘 말씀에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6)라는 말씀을 잊지 않습니다. 아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자기 혼자 모든 일을 다 처리하려 하고, 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는 범사에 하나님께 아뢰고, 도움을 청하고, 그의 뜻을 살피며 살라는 것입니다. 아뢰는 것은 믿음이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삶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일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를 인정하고 그에게 맡기는 삶이 될 때 우리는 모든 일에 조바심이나 불안을 이기고 평안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시작됨도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셨기에 된 것이요, 우리의 생명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애 일거수일투족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가지고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결론

 

우리 삶의 모든 축복과 결실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내가 어떤 노력과 지혜를 기울여서...” 된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우리가 비록 최선을 다해 꽃과 식물에 물을 주었더라도 정작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향한 감사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실 때에 내가 그 복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지탱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로지 감사함으로만 아뢰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에게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마음의 평강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치 우리의 마음 밭에 유기질 비료요, 제초제와 같습니다. 때에 맞추어서 부지런히 비료를 주고 잡초가 생기지 않도록 제초제를 뿌려줘야 합니다. 영적인 전투와 같은 우리의 삶에서 호시탐탐 우리의 영혼에 절망과, 낙담과, 우울함의 가라지를 심으려고 하는 사단의 공격을 꺾기 위하여 우리의 영혼 밭에 꾸준히 제초제를 뿌릴 뿐만 아니라 감사의 비료를 뿌려서 가라지는 자라지 못하게 하고 알곡은 잘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로 하나님께 아뢸 때 우리의 심령 골수까지도 다 헤아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가장 아름다운 길을 예비하시고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우리 모든 신자들을 무대 위의 배우라고 보고 하나님을 그 연극을 관람하시는 관객에 비유한 바가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우리 모두의 삶에는 기쁜 일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패와 좌절이 있고, 슬프고 괴롭고 답답한 일들로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인생이란 연극무대에서 여러분의 배역이 어렵다 해서 포기하거나 내 팽개치지 않고 눈물과 고통을 삼키면서도 잘 감당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관객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연극에 대한 평가는 그 연극이 끝난 뒤에 관객의 박수 속에 나타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한 요즈음, 그리고 한 해의 후반이 깊어진 요즈음, 우리 인생의 드라마 가운데 2010년이라는 한 막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부디 마지막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박수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리며 은총 가득한 추수감사절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할 내용

시편 100:1‐5

(아가페 순복음 교회 / 김은철 목사)

서언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 년 동안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매년 가을에 우리에게 풍성한 곡식과 과일과 채소를 주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에 열매 맺는 은혜를 주셔서 특별히 감사주일 정하여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칼 힐티는 그의 행복 론에서 행복의 첫째 조건을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도 감사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감사하는 내용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본문에서도 시편 기자는 감사의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시 100:1‐5).

 

시편 기자가 감사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1. 그는 여호와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구원의 하나님을 감사했습니다. 여호와란 의미는 구원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모세에게 야웨로 계시해주시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셨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모든 환난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나라를 살려준 대가로 사울 왕에게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또한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적진 블레셋에 숨어 있다가 살아남기 위해 적장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체 했습니다. 매우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나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고달픈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간악한 무리들이 그를 헐뜯고 모함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모든 환난과 나쁜 일을 당한 것도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시 52:9)라고 고백했습니다.

얼마 전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의 저자 레나 마리아가 내한 공연을 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양손이 없었고, 한쪽 발도 짧았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발로 글을 쓰고, 발로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고, 십자수도 놓았습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수영과 운전도 하게 되었고 장애인 올림픽에서 상도 받았습니다. 특히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아름다운 찬양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녀는 자기를 장애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다르게 사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천사의 표정을 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진정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희망을 노래해야 하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은 크게 영광 받으시고, 큰 복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2. 그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감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돌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므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생활은 결코 편한 생활은 아닙니다. 그러나 광야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광야 같은 생활을 사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어려움 때문에 우리가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편하고, 일이 잘 풀리고, 자녀가 잘 나가면 잘 믿을 것 같지만 더 못 믿게 됩니다. 대개 망하는 사람을 보면 환난 때문에 망하기보다 잘 되는 것 때문에 망합니다.

 

어려움이 전혀 없기를 원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더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어려움도 예상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은 더 안 찾아오고, 어려움이 찾아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돈과 권력과 지위와 건강이 있어야 행복합니까? 자기의 사람됨은 저 밑바닥에 있고, 자기 영혼은 병들었는데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추한 모습으로 건강하게 살기보다 건강은 약해도 아름답게 사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건강, 내 생명, 내 가는 길을 지켜 주셔야 우리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외적도 있고, 내적도 있고, 힘든 상황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도하고, 그래야 우리가 바로 살고, 우리가 겸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시황처럼 별난 것을 먹고, 유별나게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잘 믿어야 참 행복과 위로부터 주시는 무한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어려움이 없는 삶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이 와도 감사하며 이겨내는 믿음의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에도 하나님을 믿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축복을 얻기를 바랍니다.

 

3. 그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 임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요 우리는 그의 양이라는 믿음에 입각한 감사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고백은 시편 23편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는 그의 양에게 좋은 음식을 줄 책임이 있습니다. 양의 복지는 전적으로 목자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또한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양을 돌볼 책임이 전적으로 목자에게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목자가 돌보는 양은 감사할 뿐입니다. 양이 할 일은 단지 목자를 졸졸 따라가는 것 뿐입니다. 목자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 “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칼로스는 ‘착하다, 아름답다, 매력적이다, 사랑스럽다, 참되다, 모든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처럼 거짓 목자가 아닌 참 목자요, 나쁜 목자가 아닌 좋은 목자요, 평범한 목자가 아닌 매력이 넘치는 목자요, 무능한 목자가 아닌 모든 능력과 자질을 두루 갖춘 유능한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이 선한 목자란, 많은 선한 목자들 중 하나인 선한목자가 아니신, 오직 유일무이하신, 오직 단 한분뿐이신 바로 그 선한 목자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선하시고 온유하시며 오직 한분뿐인 선한 목자의 뒤를 따르는 양떼입니다.

 

결언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이거나 선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교만에서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한 것은 큰 죄악인 것입니다. 영국의 트렌치 감독은 “모든 은혜 중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큰 은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가 감사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는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바울은 어둡고 습기가 많고 추운 감옥에 갇혔어도 감사하며 찬양할 때 옥문이 여리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고합니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에도, 어느 환경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에디슨은 귀가 들리지 않았어도, 밀턴은 눈이 보이 않았어도, 감사로 운명을 극복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운명 속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그의 기르시는 양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표현은 더 큰 감사를 낳는다.

누가복음 17 : 11 ~ 25

(청신교회 / 김인찬 목사)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좋은 일도 있을 수 있고, 어려운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길을 걷다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 기쁜 일도 있을 수 있고, 어려운 일도 있을 수 있는데, 항상 활력 있게 살 수 있을까요?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계곡과 계곡을 이어주는 줄다리를 건너야만 했습니다. 그 다리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밧줄도 삭아서 곧 끊어질 것 같고, 또한 나무 밑판도 오래되어 썩어서 줄다리 중간 중간에 떨어져나갔습니다. 그 나무다리를 건너가야 되는데, 고민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몇 걸음 내 딛는데 나무 밑판이 삐거덕 거리면서 떨어져나갈 것 같고, 밧줄도 흔들리면서 금방 떨어질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분이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이 다리를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신다면, 저의 재산 반을 드리겠습니다. 다행인지, 응답인지 조심스럽게 걷다보니 오래된 줄 다리 거의 절반을 건너왔습니다. 보기에는 금방 끊어질 것 같은 다리도 건널만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괜히 겁먹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자기의 재산 반을 드린다고 말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까 말한 것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 안전하게 건너가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 반의반만 드릴게요? 했습니다. 그래도 아무 일이 없어요. 조심조심 걸어서 약 2/3 정도 무사하게 건너게 되었어요. 남은 1/3도 약간 남았지만 다리는 안전하게 잘 걸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제가 반의반을 드린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까운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아까 기도한 것 없었던 일로 할게요. 하고 한발자국을 내딛었더니 갑자기 나무 밑판이 우르르 떨어지고, 양 손으로 잡았던 줄이 흔들리면서 끊어질 것 같았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말을 했데요. 어떤 말을 했을 것 같아요. “하나님 제가 농담도 못하나요?” 제가 약속한 것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길을 걷다보면 길을 걷다보면 들판에 꽃들이 피어있는, 양쪽 숲이 우거져 큰 고목들이 나뭇가지를 서로 닿아서 꼭 터널처럼 되어 있어서, 그 길을 걷다보면 가슴 속까지 시원하고, 머리가 맑아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한 낮에 뙤양 볕에 혼자서 산등성이를 힘없게 걸어가야만 하는 어려운 때도 있고, 또한 사방이 막혀 있고, 미래의 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때가 절망의 밤, 낙망의 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절망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문둥병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을 나병이라고 하고,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노르웨이 의사가 이 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에 한센병이라고도 하지요. 이 병은 신경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1) 자신의 육체적인 병---- 한센병은 주로 청년기에 전염된다. 호흡기와 직접적인 접촉으로 전염된다고만 알려져 있다. 증세가 나타나는 것은 2∼8년,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빨간 점이나 푸른 반점이 평평하게 혹은 약간 튀어나오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전라도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한하운의 시가 있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자신의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하여서 낙심하거나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병이 장기적으로 될 때에 낙심하게 되거나 절망하게 됩니다.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팔을 가진 한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 신체적인 불구를 가진 부모들, 오랫동안 병에 이 학교에서 조롱을 받습니다. 한 미망인은 남편이 자살을 한 그날을 고통 속에 잊지 못합니다. 반항적인 아들 때문에 그 부모가 괴로워합니다. 치매에 걸려 남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를 둔 남편이 정성껏 돌봅니다.

 

2) 관계가 깨졌을 때: 중풍 병에 걸리면 일단은 가족들에게서 격리가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 중에서 살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들은 외로이 움막이나 동굴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멀어지고 깨져서 함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쉽게 낙망이 되고, 절망이 됩니다. 우리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거나. 혹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 버림을 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귀중한 존재로 여김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낙망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외도를 하는 남편 때문에 한 여인의 마음이 찢어집니다.

3) 미래에 대해서 절망할 수 있습니다. 치유될 수 없는 이 병, 앞으로도 영원히 이러한 병이 계속된다는 것이 절망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앞으로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절망하게 됩니다. 이 상황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어려운 상황이 계속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앞으로 이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의아심이 드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이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밤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듯이 고통의 밤, 낙심의 밤, 절망의 밤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옵니다.

오늘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신앙인인 아닌 사마리아인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에게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걸린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 IMF가 왔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 다 오는 것입니다. 질병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걸립니다. 교통사고는 불신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사업의 어려움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오는 것입니다. 10은 땅의 충만한 숫자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질병과 경제적인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절망의 세계에서 힘 있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절망을 넘어서 소망으로 갈수가 있겠습니까?

16절에 보니까 이 한센씨 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사례합니다. 이 사람이 원래 다혈질이라서 무조건적으로 예수님께 와서 감사하다고 말로 표현 했습니까? 아니지요? 15절에 보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첫째, 감사를 표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15절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18절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하셨습니다. 감사를 표현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을 높여 드릴 때 그것이 찬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어떻게 표현하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둘째. 그 뿐만 아니라 감사를 표현하면, 관계가 더욱 좋아집니다.

16절에 보면 예수의 발 아애 엎드리어 사례하니 사마리아인이라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예수님과 사마리아인과 관계가 매우 좋아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감사의 표현은 인간관계를 좋게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 감사를 표현할 때 앞으로 더 좋은 일이 생깁니다.

19절에 보니까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영적인 구원만을 가리키는 만이 아니라, 생활의 구원까지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라 그리고 너에게 구원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디로 가라는 것입니까?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어린이에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청년후에 걸리는 병이기 때문에 그는 장년이었을 것입니다. 병만 나으면 그의 인생이 완전히 회복이 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필요한 것이 많아요. 일도 해야 될 거여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직장도 있어야 할 것이에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것에 대하여 구원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는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감사의 표현을 했는데 자신의 남은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길을 인도하여 주시겠다고 하니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천국 가는 날까지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고 하니 얼마나 감격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상황 중에서 어떻게 하면 감사를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I. 기도의 응답은 과정이다.

A. 기대하는 믿음이다.--- 10문둥병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머물고 있는 한 촌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가까이에 갈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문둥병 때문이었다. 그들은 최대한도로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 있는 만큼 갔다. 왜냐하면 문둥병은 감염을 통하여 전해지기 때문에 가까이 한 사람도 부정해지고, 또한 그 사람이 앉았던 의자, 집까지도 다 허물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네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최대한도로 가까이 가서 즉 그들이 소리를 질렀다. “예수 선생이여 긍휼이 여기소서.”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님을 단지 선생이라고 불렀다. 긍휼을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긍휼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이다. 즉 받을 만한 처지가 안 된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즉 어떤 학생이 숙제를 내야 되는데 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숙제를 반 밖에 없다. 반밖에 하지 않았지만 장례식을 치르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여 점수를 90점 이상을 주었다고 하면 이것이 긍휼이다. 가장 긍휼이 많은 사람은 누구이겠습니다. 자녀를 향한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보다 더 긍휼이 많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본적도 없습니다. 이름을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닙니다. 친인척관계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긍휼이시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축복하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 베풀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응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낙심이 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주님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응답이 필요합니다. 기도응답을 받으면 [시103: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라고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응답을 즉답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이 되어야 하나님의 역사로 생각을 합니다. 이런 즉답도 있지만, 기도 응답은 과정입니다. 한번으로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응답이 되어는 과정 속에서 온전한 응답 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응답은 한번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여 한번만 기도를 합니다. 아니올시다. 저는 기도는 구체적으로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는 벽돌을 하나하나 쌓는 것 같은 과정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가 아픕니다. 건강을 되찾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건강을 되찾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좋은 의사 만나서 정확하게 진단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원을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수술을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 처방이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은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도수첩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기도수첩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항상 감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수첩을 갖고 있지 않고, 있으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배가 아픈데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의사가 정확하게 진단을 하니 수술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수술을 하게 되었느냐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수술을 한 후에는 약을 먹어야합니다 라고 하면 왜 약을 먹어야 되느냐고 원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즉답도 있지만, 하나하나 돌을 쌓는 것처럼 과정입니다. 그래서 기도수첩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왜냐하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커지게 되면서, 어려운 중에서도 새힘을 얻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B.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를 했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기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10명의 문둥이는 그들의 소원이 낫는 것입니다. 그들이 외쳤을 때 예수님께서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를 하면 반응을 보이시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시시한 기도라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이 나의 응답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0명의 문둥이는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제사장은 문둥병에 대해서 진단하고, 나은 것에 대해서 선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둥병에서 치료를 받으면 이들이 백성들 가운데서 살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양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면 제사장은 그들의 몸을 샅샅이 조사를 합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으면, 어린양의 피를 손으로 양 귓불에다 묻힙니다. 양손 엄지손가락 끝에 바릅니다. 양발 엄지발가락에 묻힙니다. 즉 온몸이 깨끗해졌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아직 고름이 흘러내립니다. 그들의 몸은 아직도 상처가 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붉은 반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움푹 들어간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에게 간다구요. 만약 상처 난 몸으로, 고름이 흘러나오는 몸으로, 붉은 반점이 있는 몸으로 갔다가는 성전에도 가기 전에 백성들로부터 동네가까이에 온다고 돌로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네사람들을 피해서 성전에 갔다고 해도 성전에 지키던 군사들에게 몰매를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시한 기도도 응답하시나요? 응답을 하십니다. 응답을 안 ?시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욕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벗어나는 것이 욕심입니다. 도둑놈이 밤에 나가면서 오늘도 일을 잘 하고 돌아오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들어주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는 좋은데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욕심입니다.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절망가운데서 (놔라는

이러한 의심을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합심기도입니다. 합심기도는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여기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혼자였다라고 하면 가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0사람이었기 때문에 쉽게 믿음의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혼자만 하지 말고,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구역에서도 분명히 기도제목이 있는데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기도제목을 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되도록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합심중보기도가 좋습니다. 목자들도 혼자 기도하기 보다는 초원에 있는 목자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C. 감사를 표현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10명의 예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하였고, 또한 기대하는 마음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곧바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약 3000KM나 됩니다. 중간에 가다가 나음을 입었다고 하면 그래도 1500KM입니다. 그 중 한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한 것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갈 때에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말하기를 촛불에 감사하면, 호롱불을 주시고, 호롱불에 감사를 하면 달빛을 주고, 달빛에 감사를 하면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찬양은 더욱 큰 감사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하는 사람이 될수 있습니까?

첫째로 감사를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인이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것은 은혜는 은혜로 알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까? 그렇다고 감사를 표현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자신의 장점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고의 단계라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의 최고의 단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최고의 단계는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 문둥병환자는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것만큼 최대한도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다른 것은 몰라도 목소리 하나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2절에 “큰 소리”로, 15절에 ‘큰 소리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감사를 표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뿐인 인생

시편 65:1-13

(로고스 제일 교회 / 박찬수 목사)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풍성한 은혜를 찬양하는 감사의 시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특별 은총에 대한 감사(1-8)와 일반 은총에 대한 감사(9-13)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이 말씀은 시편 저자인 다윗의 하나님께 대한 마음 자세를 말해줍니다.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라는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어서 주의 전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설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여 전날의 서원한 것을 갚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인생들에게 베푸신 특별 은총과 일반 은총을 생각할 때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서는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고자 하는 이유를 2-13에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사입니다.

 

2절에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가리켜 ‘기도를 들으시는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이 때문에 모든 육체가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모든 육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출신 성분이나, 국적이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민족의 주가 아니고 만민의 주이시기 때문에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주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주 주님께 나아와 간구한다고 해서 귀찮게 여기시거나 꾸짖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끈질긴 과부와 같이 자주 주님께 나아와 강청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시고 그의 기도에 깊이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 하나님의 속성을 안 야고보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3)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주님께 나아가 모든 문제를 고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큰 특권입니다. 비신자들은 평소에는 자신의 의지와 성실을 믿고 큰 소리치며 믿는 자들을 조롱하고 업신여기지만, 막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면 도움을 구할 대상을 부지런히 찾습니다. 점장이를 찾아가기도 하고 고목나무나 산신령에게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100일 기도도 해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빌어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목나무의 속이 왜 비어있는 줄을 아십니까? 이는 무지한 사람들이 고목나무에게 무엇을 해결해 달라고 밤낮으로 와서 비는데 고목나무는 해결해 줄 능력이 없어서 고민 고민하다가 속이 다 썩어서 비게 되었다는 우수개소리도 입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의 뜻대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언약에 신실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요일5:14).

 

다윗은 기도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매사에 주님께 기도함으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기도를 들으시는 주’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은 하나님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죄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3절에 보니까 특별 은총 중에서도 사죄의 은혜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가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다’는 말씀은 죄의 세력에 압도당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들은‘죄는 즐길만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함부로 죄를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말씀하신바와 같이 만약에 저와 여러분들이 죄를 범하면 죄가 저와 여러분들을 삼켜서 죄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요8:34). 죄는 천하장사나 영웅호걸이라도 넘어뜨리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에는 반드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잠시 죄의 쾌락은 누릴 수는 있으나 쾌락은 잠시 뿐 그 후에는 무서운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쾌락은 순간이요 고통은 지속적이고 영원합니다. 처음에 별것 아닌 것 같은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결국 죄의 삯인 사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롬6:23a; 약1:15) 다윗은 죄의 세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다윗은 백전노장으로서 가는 곳마다 원수를 무찌르고 승리했습니다. 그는 무적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정욕의 죄 앞에서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의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방에 보내어 죽게 했습니다. 당시 전제군주 시대의 왕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었지만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은 무서운 양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시편 32:3,4절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죄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고 우리의 인생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무서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죄는 상대적이고 도덕적인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절대적이고 영적인 개념으로 파악되어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에 저와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정욕의 죄를 범했다고 했을 경우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사면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실 때만이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깨닫고 그 죄로 인해 슬퍼하고 진실 되게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요일1:9). 다윗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시32:1).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하나님께 수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죄 짐에 짓눌려 고통당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진실 되게 죄를 고백하며 사죄의 은혜를 간구하였을 때 정죄치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셨습니다. 이 죄사함의 은총은 여러 가지 감사 제목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 제목입니다. 그럴 때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으로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셋째, 주님과의 교제에 대한 감사입니다.

4절에 다윗의 세 번째 감사 제목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 있는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면 죽게 됩니다. 반드시 사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다. 세상에서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대통령과 가까이 하면서 교제하는 것도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호흡이 코에 붙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대통령과의 교제도 영광스럽게 생각하거든, 하물며 천지만물과 인간을 지으시고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시는 대 주재이신 만주의 주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되겠습니까? 또한 사람들과의 교제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찌라도 오랫동안 교제하면 나중에는 싫증이 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교제하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 속고 속이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사람과의 교제는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의 피곤한 영혼을 소생시키고 참 평안함과 안식과 쉼을 줍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11:28). 하나님과의 교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내면에 잔잔한 평화와 영혼의 기쁨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먹고 마시는 1차원적인 육신의 기쁨이 있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누리는 정신적인 기쁨이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누릴 수 있는 영혼의 기쁨이 있습니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육신의 기쁨과 정신적인 기쁨을 충만히 누린다고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으면 무엇인가 빈 것 같이 마음이 허전하고 참 만족이 없게 되어 있습니다(전3:11).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 영혼의 기쁨을 누릴 때만이 진정으로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영혼의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3) 하나님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얻는 축복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매일 말씀을 먹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대화인 기도를 통하여 이러한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 구원에 대한 감사입니다.

(5-8)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으며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의지할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 두 가지 방법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때에 그분의 의를 좇아 아주 공의롭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 구원하실 때에 어린 양을 온전히 희생하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출12:1-14).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실 때에도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분이 세우신 의로 구원하셨습니다. 로마서 3:25절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이 하나님은 그의 크신 능력으로 구원하십니다. 엄위하신 일이란 경이로운 일,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강한 바로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는 데는 그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시므로 그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흘리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신 것은 너무나 크고 엄청난 일이어서 일생동안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우리가 질병에서 구원받거나 화재나 교통사고와 같은 위험으로부터 구원받을 때 참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와 질병과 사망권세로부터 구원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값진 희생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그 은혜는 무한해서 그 은혜를 생각하면 감격하여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가 무엇이관대 이처럼 말할 수 없이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는지요.”6-8절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엄위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말하고, 7절 말씀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신 능력의 역사를 말합니다. 이로 인해 세상 모든 사람이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게 됩니다(8).

다섯째, 풍성한 열매에 대한 감사입니다(9-13)

우리는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특별 은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특별 은총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만 주시는 영적 축복입니다. 다윗은 이제 일반 은총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일반 은총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내리우십니다(마5:45).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추수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실로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9절을 봅시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지혜로 섬세하게 만물의 상황을 살피시고 창조하신 것들의 부족함을 보충하시고 번영케 하십니다.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땅의 열매를 맺어 인간으로 하여금 그 열매를 먹고 살 수 있도록 돌보십니다. 땅에 씨를 심으면 성장할 수 있는 영양분을 주시고 태양 에너지와 비를 주심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씨를 심고 밭을 매고 열심히 일하여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비만 내리시지 않으셔도 가뭄으로 말미암아 추수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감사해야 됩니다. 공부를 잘하여 좋은 성적이 나온 것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요, 사업이 잘되어 재물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이렇게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고 때를 따라서 이것 저것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다윗은 주님의 풍성한 은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年事)에 관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혔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10-13) 다윗은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1년 농사를 넘치도록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고백은 바로 저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지난 1년을 돌이켜 볼 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 커서 무어라 감사해야할 지 모릅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죄인을 들어 충성 되이 여겨 하나님의 역사를 이뤄나가시는 것을 보면서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와 저희 성도들을 이 백성을 세계 만백성의 목자요 영적인 아버지요 제사장 나라로 계속해서 귀하게 써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 앞에 감사뿐인 인생/시65:1-13

 

요3:3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시편 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 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의 감사 마일리지 카드는?

창세기 37:18-28

(남원 중앙 순복음교회 /서정복 목사)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몇 십 수 앞을 내다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은 바둑에 눈이 완전히 뜨인 것입니다. 또한 탁월한 상담가들은 상담자의 마음을 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자 마음속에 숨어있는, 진짜 마음을 보면서 상담자를 대하는 겁니다. 그런 분들은 사람의 마음에 눈이 완전히 뜨인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에 있어서 겉에 드러난 것만 바라보면, 미숙한 겁니다. 그 속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바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바르게 대처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감사를 느끼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곧 감사의 눈이 뜨이는 문제입니다.

 

본문 창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요셉을 선택하셔서, 요셉에게 큰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가나안땅에서 살고 있던 소년을, 이집트의 총리로 만드신 겁니다. 이는 우리나라 지리산 촌구석에서 살고 있는 소년을, 미국의 국무총리로 만드신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솔직히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도, 그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큰 복을 요셉에게 내리신 것입니다. 이 일은 요셉뿐만 아니라, 요셉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데는,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선 이집트로 가야하는 일이었습니다. 지리산에서 살고 있는 소년이 미국의 국무총리가 되려면, 우선 미국으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당시에는 요셉이 이집트로 갈 마음이 조금도 없었을 겁니다. 아니, 요셉이 상인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간다는 것은, 엄청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건 귀한 은총의 사건이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 요셉이 이집트로 갈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일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한마디로 요셉에게 벌어졌던, 그 모든 일들이 감사의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지나치게 편애한 일입니다.

야곱의 지나친 편애는, 요셉에게도 좋은 일이 되지 못합니다.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했다고 합니다. 편애로 말미암아 요셉은, 좋지 않은 습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형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미움이 이집트로 가게 되는 첫 번째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잘못된 일이지만, 자세히 눈을 떠보면 아버지의 편애가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둘째, 두 차례에 걸쳐 꿈을 꾼 일입니다.

요셉은 형들과 부모님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것을 예언하는 꿈을 꿉니다. 물론 이 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꿈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더 나아가 시기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깊어진 미움과 시기가 이집트로 가게 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세히 눈을 떠보면 꿈을 꾼 것이, 나쁜 일인 것 같지만,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형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게 됨)

 

셋째, 야곱이 형들에게 요셉을 보낸 일입니다.

이는 야곱의 신중치 못한 처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요셉을 형들에게 보내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이집트로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역시 자세히 눈을 떠보면 아버지의 신중치 못한 행동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넷째, 세겜에서 어떤 사람을 만난 일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찾아 세겜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형들은 거기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헤매고 있는 요셉에게, 누구를 찾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 사람은 형들이 세겜에 있을 때 그 곁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형들이 세겜을 떠나며, "도단으로 가자"고 한 말을 들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을 전해줍니다. 마침내 요셉은 도단으로 가서 형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요셉은 형들을 만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돌아갔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세히 눈을 떠보면 어떤 사람을 절묘하게 만난 것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다섯째, 맏형인 르우벤의 역할입니다.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보자마자 죽여 버릴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요셉이 밉기는 했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냥 구덩이에 던져버리자고 제안합니다. 르우벤 때문에 죽음을 모면한 겁니다. 그러니까 자세히 눈을 떠보면 르우벤의 역할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여섯째, 이집트로 가는 상인입니다.

요셉이 구덩이 빠져 있는데, 마침 그 곁을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상인들이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형들은 요셉을 그냥 구덩이 둔 채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그리고 요셉은 구덩이에서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 역시 자세히 눈을 떠보면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의 등장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일곱째, 유다의 역할입니다.

이집트로 가는 상인을 보자, 유다는 상인들에게 팔아넘기자고 제안합니다. 유다의 이런 제안이 없었다면, 상인들이 지나간다 하더라도, 요셉을 그냥 구덩이 속에 방치했을 겁니다. 이것 역시 자세히 눈을 떠보면 유다의 역할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일곱 가지 감사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셉에게는 엄청난 고통의 사건이었던 이집트로 팔려간 사건이, 사실은 자세히 눈을 떠보니,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는 이 엄청난 고통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게 옆에서 도와준 모든 일들이, 불행한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사랑하는 남편이, 예전에 사랑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 때 내 남편을 버리고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 내 남편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내 남편이 그 때 버림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내가 내 남편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자세히 눈을 떠보니, 그 때 내 남편을 버리고, 남편에게 상처를 입혀준 사람도, 내게는 감사한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자신이, 내 남편을 만나 사랑할 수 있게끔, 내 남편에게 영향을 미쳤던, 모든 요소들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세히 눈을 떠서 보면 우리 주변에 온통 감사할 일이 널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씩 찾아보면, 수 백, 수 천 개의 감사할 일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말까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무려 3,000가지나 감사할 일을 찾아내어, 평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불평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늘 우울한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내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눈이 조금만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쌍꺼풀이 졌으면 좋았을 텐데, 코가 조금만 오뚝했으면 좋았을 텐데, 얼굴이 조금만 갸름했으면 좋았을 텐데, 손가락이 조금만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등 정말 끝없이 많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우울한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반대로 세상을 감사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대체로 편안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게 불평할 것도 무궁무진하고, 내게 감사할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감사거리는 별로 찾아내지 않습니다. 불평할 것을 많이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물을 둘로 구분하여 봅니다.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나쁜 일은 없다고 보는 겁니다. 세상에는 좋은 일만 있다고 보는 겁니다. 다만 그 좋음의 농도에서 차이가 날 뿐이라는 거죠. 좋음의 농도가 아주 좋은 일, 농도가 보통인 일, 농도가 아주 낮은 일 등으로 구분하는 겁니다.좋음의 농도가 많이 낮은 일일뿐, 나쁜 일은 없는 겁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온통 좋은 사람만 있습니다. 다만 그 좋음의 농도가 낮은 사람은 있어도,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고, 좋은 일만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일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감사의 눈을 뜨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우리는 제한된(한정된) 기쁨으로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일이 발생해야만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활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이 떠지면, 우리는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나온 과거의 모든 일에서 감사를 느낄 수 있으니까, 이런 생활이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어느 해 독일 전역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몹시 어려움을 겪을 때, 비교적 넉넉하게 사는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노부부는 배고픈 아이들 에게 빵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빵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바구니에는 빵이 있단다. 한 사람이 한 개씩만 가져가거라."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서로 큰 빵을 가지겠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빵 하나를 움켜쥐고는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빵을 다 가져간 뒤에, 남은 빵을 가지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크레첸이라는 소녀는 언제나 작은 빵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노부부는 그런 크레첸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레첸은 노부부가 준 빵을 쪼개다가, 은화 여섯 닢을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란 크레첸은 할아버지에게 은화를 돌려주려고 헐떡이며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이 은화는 감사할 줄 아는 착한 아이에게 주려고, 제일 작은 빵을 만들 때 넣은 거란다. 크레첸, 네게 주는 선물이다."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배가 고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모두 빵 하나씩을 받았습니다. 거기까지는 모두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크레첸은 달랐습니다. 그것은 감사를 볼 수 있는 눈을 크레첸이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 똑같이 빵 하나를 받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감사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있지 않았습니다.

 

감사란 이렇게 주관적 성격을 지니는 것입니다. 감사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있어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눈이 뜨여있는 사람은, 크레첸과 같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없어서 감사를 못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눈이 감겨 있어서, 감사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내게 일어나는 밝은 일도, 그리고 어둔 일도, 모두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밝은 일도, 어둔 일도, 모두 내게 감사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것 중에 마일리지 서비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용카드, 주유소, 휴대전화요금, 심지어 화장품가게나 슈퍼마켓에서도 물건을 사면 그 점수가 누적이 되어, 나중에 상품을 주는 누적보상제도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가정주부들은 이러한 마일리지카드 하나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누적되면 될수록 좋은 것이 있고, 누적되면 될수록 손해를 보는 것이 있습니다. 스트레스나 과로, 편견, 나쁜 습관, 과도한 소비는, 누적되면 될수록 손해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누적되면 될 수록 좋은 것이 있습니다. 많이 웃으면 다른 사람의 머리속에 좋은 인상이 누적이 됩니다.많이 걸으면 건강이 누적이 됩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마음에 교양과 지식이 누적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킬 때마다 신용이 누적이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누적이 됩니다. 그런데 마일리지의 특징은 처음 몇 번으로는 별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주 사용하여, 점수가 누적이 되면, 특별선물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감사의 마일리지 카드에는 얼마만큼의 포인트가 적립이 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큼, 감사가 누적이 되어 있습니까? 감사가 누적이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감사의 마일리지가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나는 감사함으로 고난의 쓴잔을 받겠습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신앙을 지키겠습니다. 내 뜻대로, 내 바람대로,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드릴 수 있는, 차원 높은 감사로 감사의 마일리지를 높여가는 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은 불평의 시각으로 삶을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감사의 시각으로 삶을 보시겠습니까? 우리 모두 감사의 눈이 떠져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감사를 발견하여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라

신명기 16:1:-17

(순복음 밝은 빛 교회 / 양요한 목사)

감사(Thank)는 생각(Think)으로부터 온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상황에 처해도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좀 우스운 얘기지만 대머리도 감사할 일이 여섯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1.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감사할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앞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얻어먹는 사람(거지)이 없답니다. 대머리의 모습으로 도와 달라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보았습니다.

4. 엘리사도 대머리였습니다. 목회자들 중에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습니다. 엘리사 후손이라 그렇습니다.

5. 물자를 절약할 수 있답니다. 비누 샴푸 물을 상당히 절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을 편하게 해드린답니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마 10:30). 대머리는 머리숱이 적어 셀 것이 거의 없으니 주님을 얼마나 편안하게 해드리는 일입니까?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다음 주일은 2009년을 정리하며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얼마나 귀한 날입니까? 한 해의 삶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결실하여 열매를 드릴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우리는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런데 문제는 감사가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여전히 삶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점점 더 고난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운 걸음을 걸어야 하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들을 만나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찾아와야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여전히 앞이 캄캄하고 길이 막혀 풀리지 않아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를 의심하며 힘들어하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기가 너무 힘듭니다. 감사의 마음이 일어나기 보다는 짜증스런 마음이 자꾸 앞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감사하라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면 좋을까요?

첫째, 고난 중에라도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헌트 선교사가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41년 10월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감방 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던 중 갑자기 어떤 소리가 저절로 나오더니 이어서 곡조가 떠올라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만왕의 왕이시니 각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족속들 주를 찬양할지어다. 땅을 권세와 의로 다스리시며 파도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나니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네 감사하는 일을 기쁨으로 이루라."

 

그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것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외투주머니 속에서 중국 동전이 하나 남아 있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동전을 쥐고 힘껏 눌러 회벽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감방 안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얼마나 잘 써졌는지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쓰고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식별하기는 곤란했지만 알아 볼 수는 있었고 곡조도 기억이 났습니다.

잠시 후 간수가 작은 창구를 통하여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벽에 쓴 것이 무엇이냐?" 라고 의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바로 앞에서는 겨우 읽을 수 있었지만 비스듬히 보이는 문에서는 창에 비치는 빛에 반사되어 뚜렷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감사와 기쁨을 간수에게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간수는 이상한 듯 감방을 휘둘러보며 "이런 감방 안에서 도대체 누가 감사할 수 있을까?" 라며 그의 동전을 압수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걸어 잠그는 간수의 얼굴은 매우 부드러운 표정이었습니다.

헌트 선교사의 감사할 수 없는 곳에서도 감사하는 모습에 간수는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솔맨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아내는 임신 중 이었습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시다.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둘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솔멘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3개월 후 죽었을까요?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이분은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해서 수백만 장이나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3개월이 어딥니까 ? 하루가 어딥니까 ? 한 달란트가 어디냐하는거죠. 모름지기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할 조건을 보기 보다는 인생의 무거운 짐과 문제만을 바라보며 한탄합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훨씬 더 감사할 풍성한 이유들이 발견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풍요하기에 하는 감사가 아닙니다. 문제가 없고 형통한 복을 누리기에 하는 감사도 아닙니다. 궁핍한 가운데 모진 고난의 풍파를 만나 힘겨운 삶을 지내는 가운데 하나님으로 인하여 드릴 수 있는 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감사의 축제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범사에” 라는 것은 모든 일에 좋은 일만이 아니라 나쁜 일 가운데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기쁠 때만이 아니라 슬픈 일이 있을 때에라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을 ‘습관들의 묶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을 부르는 습관들이 뭉친 결과요, 실패한 사람은 실패를 부르는 습관들이 뭉친 결과라는 뜻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그럴만한 습관이 있고 병약한 사람은 역시 그럴만한 습관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습관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평의 습관으로 사는 인생들이 되지 말고 감사의 습관들로 뭉쳐진 인생으로 사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감사의 습관이 여러분의 인생을 더욱 새롭게 하며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눔이 있는 감사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14절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

 

수장절을 지키는 정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과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특히 약한 이웃들과 소외된 이웃들과의 나눔을 실천하는 감사축제로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절의 정신입니다.

입춘인 2월 4일, 서대문구에 위치한 독립문 소공원에서 이색 환갑잔치가 있었습니다.

하객은 불우노인 400여명이 몰려 성황이었지만, 정작 축하의 인사를 받아야 할 주인공은 오전 한 때 잠시 얼굴을 내밀고는 기자들을 피해서 지방으로 떠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는 환갑을 맞은 김정숙씨가 자식들에게 "어려운 노인들에게 따뜻한 식사 한끼 대접하는게 뜻 깊은 환갑"이라고 제안해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당초 김씨의 자식들 4남매는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 중인 둘째와 막내까지 귀국시켜 섭섭하지 않게 잔치상을 차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김씨가 "이 어려운 시대에 잔치가 왠말이냐?"며 완강하게 사양하는 바람에 잔치를 치를 비용으로 노인들이 좋아하는 육개장과 인절미 등을 준비, 불우노인들을 초대했습니다.

장소를 독립문으로 잡은 것은 설 연휴 때도 이곳에서만은 빠짐없이 무료 점심이 제공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였습니다. 이 김정숙씨의 이야기는 잔치를 나눔으로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되었던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처음 수확을 하고 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을 때 그들은 지역의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를 즐겼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감사절의 정신은 나눔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며 해오는 것이 있습니다.

제단에 꾸민 과일과 쌀들을 지역에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그 기쁨을 함께 소외된 이웃들에게 전하려는 것입니다. 작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올해는 더욱 풍성한 나눔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제단에 많은 쌀들을 장식하고 모두 이웃들과 나누었으면 합니다.

 

또한 내년에는 더 많은 나눔으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드리는 절기헌금의 십분의 일을 이웃들과 나누는 잔치를 준비하면 어떨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감사의 축제를 함께 즐기면 그 축제가 바로 천국의 잔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눔의 일들을 더욱 많이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는 헌신이 있는 감사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17절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값진 헌신이 담겨있는 감사축제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은 더 없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힘대로’ 라는 말씀은 적당히 드리는 헌신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 헌신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부자가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집에서 기르는 모든 동물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려 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동물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대찬성입니다

 

주인이 거위를 보며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거위요리가 좋겠어. 거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습니다. 주인님, 저는 큰 알을 낳아주잖아요. 저 암탉을 잡으시지요.

암탉이 손을 저었습니다. 저는 아침을 알려줍니다. 양을 잡으시지요.

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습니다. 저는 따뜻한 털을 제공한답니다. 말고기는 어떤가요?

말이 소를 가리켰습니다. 주인님이 여행가실 때 누가 태워줍니까. 암소고기가 최고지요

이번에는 소가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처럼 열심히 농사를 지어주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동물들은 잔치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희생은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잔치와 축제는 좋습니다. 그러나 헌신은 인색합니다. 축제가 기쁨으로 가득할 수 있는 것은 헌신함으로 준비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 주일 예배는 감사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감사의 축제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헌신된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헌신하여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헌신이 나눔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감사의 축제를 준비합시다. 다음 주일 추수 감사절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고 예배하는 감사의 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준비할까요?

고난 중에라도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고난과 문제 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눔으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감사의 진정한 정신은 나눔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을 이웃들과 나눔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감사의 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헌신으로 감사의 축제를 준비해야 합니다. 나의 헌신이 아름다운 축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축제에 할수만 있다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을 인도하여 함께 축제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다음주일은 그 동안 기도해왔던 전도대상자들도 교회로 초대하여 함께 감사의 절기를 풍성하게 만들면 좋겠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감사의 축제를 준비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로 예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신명기 8 : 7절~18절

(순복음 본 교회 / 오규섭 목사)

 

수녀원에 잔소리가 심한 늙은 수녀가 있었습니다. 그 곳의 한 젊은 수녀는 늙은 수녀의 방에서 신나게 잔소리를 듣고 나오면 늘상 문을 쾅! 닫고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저 늙은 수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방밖에 있던 앵무새가 이 젊은 수녀의 말을 배워서 문이 콰앙! 하고 닫히기만 하면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저 늙은 수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난처해진 젊은 수녀는 다음부터는 문소리가 나지 않게 살살 닫았지만 바람에 문이 쾅! 닫히기만 해도 앵무새는 큰소리로 외쳐대는 것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젊은 수녀는 신부를 찾아 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젊은 신부는 싱긋 웃더니, “거 참 고민되시겠군요.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사제관에서 기르는 앵무새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앵무새를 함께 길러 보세요. 짝이 생기면 그 말을 잊을지 혹시 압니까?” 그래서 한 새장에 새 두 마리를 넣고 길렀습니다. 물론 문을 살살 닫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실수로 문을 콰앙! 닫고 아차! 하는 순간, 얄미운 앵무새가 잊지도 않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저 늙은 수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자 신부가 준 앵무새가 하는 말,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공자는 자신이 싫어하는 인간상이 있는데 첫째, 타인의 실패를 기뻐하는 자이며, 둘째, 윗사람을 헐뜯는 자 곧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뒤에서는 욕하는 자, 셋째, 용기는 있으나 예의가 없는 자, 넷째,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 곧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햇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싫어하는 자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위에 말한 첫 번째 예화는 우리가 어떤 기도를 늘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예화는 감사가 없는 사람에 대한 예화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를 어떠한 마음으로 해야 할까요? 우리는 올 한 해에도 주님께서 풍성함으로 인도하심에 진정한 감사, 참된 감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게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일에는 감사할 줄 압니다. 그런데 일상에 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지난 한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나의 생명도 나의 시간도 나의건강, 아내와 남편, 가족들 모두 하나님께서 곁에 있게 하셔서 있는 것이지 어느 날 훌쩍 데리고 가버리시면 더 이상 내 곁에 없습니다. 감사절을 준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구원 섭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여 드릴 때 이렇게 말합니다. 역대상 29장 14절에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름답고 복된 땅을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8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아름다운 땅을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복된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고비사막에서 모래바람이 일어나면 우리나라에 황사가 밀어닥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한 사막을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가 얼마나 축복의 땅에 살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봄에는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알록달록 꽃이 핍니다. 여름에는 산과 들이 푸르게 짙은 녹음으로 물들어 갑니다. 가을에는 만산홍엽 알록달록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젖이 흐른다는 것은 양이나 염소, 젖소가 풀을 먹습니다. 목동이 젖을 짜면 쭈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꿀이 흐른다는 것은 나뭇가지에 꽃이 피어 그 사이를 꿀벌이 꿀을 물어다 나릅니다. 벌집에 꿀이 가득하여서 주르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식량우산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식량우산은 사람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70,80년대 지금의 러시아, 동구라파 공산세계가 무너진 것도 어떻게 보면 식량우산으로 경제가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 하나님의 자연의 은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노예는 겉모양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신세는 말이나 소나 다를 바가 없는 신세입니다. 단지 말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몸이 다쳐도 그냥 끙끙 앓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정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그냥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출애굽기 3장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음소리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과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마귀와 사탄에 얽매어서 쩔쩔매고 살아갑니다. 혹시나 자기가 섬기는 신이 노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름진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세계 3대륙을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지나가는 길목에 자리 잡게 하였습니다. 공기, 물, 햇빛 그 외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단지 몇 분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 가운데 자연 은총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3,3,3의 은혜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 존재합니다. 자세히 보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곡 필요한 것,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일수록 부드럽고 많다는 사실입니다. 지구상에 흙이 많지만 흙보다 물이 더 부드럽고 많습니다. 물보다 더 많고 부드러운 것이 공기입니다. 처음 3은 30일을 말합니다. 흙에서 나는 과일이나 채소나 곡식을 30일 이상 먹지 않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흙보다 많고 부드럽고 소중한 것이 물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3은 3일입니다. 물은 우리가 알다시피 3일을 마시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지막 3은 3분입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할지라도 공기를 3분 동안 들이마시지 않으면 죽고 맙니다. 이 자연의 은혜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내리시는 은혜입니다. 요즈음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 하였습니다. 파괴된 자연은 부메랑이 되어 사람이 오히려 죽게 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감사절을 앞두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감사는 은혜를 찾아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본문 신명기 8장 11절~14절에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야훼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야훼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야훼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즐거운 일이 많을수록 몰두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이 술술 잘 풀립니다. 그러면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하나님을 더 잘 잊기가 쉽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영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처럼 보이는 다른 것을 바라보다가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절을 지키라고 부탁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한 해 동안 살면서 바쁘고 분주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감사의 제단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하루에 몇 번 씩이라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합니다. 범사는 보통 일상의 평범한 일을 말합니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일도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도 세밀하게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전철을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거장에서 노인 한 분이 타시는 것입니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 분이 ‘고맙습니다.’ 한마디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 가는 것입니다. 감사를 할 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저사람 참 불쌍하게 산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경계하시는 것은 ‘네 하나님 야훼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 23장 40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버들을 취하여 야훼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뭇잎은 에너지를 공급하는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늘의 태양 에너지를 변화시키셔서 과일과 채소 곡식으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나뭇가지이고 나뭇잎입니다. 벼농사가 잘되는 것은 벼 잎사귀가 얼마나 푸르고 튼튼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과일 나무의 잎사귀가 파릇파릇하고 힘이 있으면 그 해 가을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잎사귀가 약하거나 누렇게 뜨면 과일이 비실비실 약하고 알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실질적인 축복의 통로가 나뭇가지와 나뭇잎입니다. 그것을 손에 붙잡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맨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베푸신 은혜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소홀하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개 1장 6절에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나에게 부족함이 많아도 택하여 주셨습니다. 내게 모자라는 것이 있어도 세워주셨습니다. 세상에 일을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리저리 따지고 보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나를 세워주심이 은혜입니다. 필립얀시는 ‘은혜란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쓰임을 받는 행복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짐이었습니다.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토지의 소산이 그냥 저절로 거두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곡식 한 알, 사과, 배, 감을 손에 쥐기 위해서는 봄부터 여름 폭풍이 지나도록 애쓰고 수고해야 합니다. 대부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것, 모자라고 부족한 것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감사는 큰 것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감사의 고백을 하다가 보면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부족함이 많아도 세워주심이 은혜입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심이 은혜입니다. 세상에 일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 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리저리 따지고 보면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나를 세워주심이 은혜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 염려가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26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의 생활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목욕탕에 가면 큰 은혜가 되는 문구가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평안 할 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필요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조건을 찾으십시오. 마음을 열고 감사의 조건을 찾기 시작하면 무궁무진하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염려가 생기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어려움의 환경에 처해 있어도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은혜요,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에 코리 텐 뭄은 자기와 여동생 베스티가 나찌로부터 유대인이 도망하는 것을 도와준 이유로 체포되었던 경험이 적혀있다.

코리와 베스티는 우선 라벤스브루크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들이 수백명의 죄수를 수용하는 마루 침대가 즐비한 막사에 밀어 넣어졌을 때, 그들은 그곳의 불결함과 악취와 비참한 모습으로 인해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비위가 상하고 구토증이 나서 더러운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그곳에는 벼룩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코리는 울먹이는 소리로 “베스티,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라고 말하며 불평했다. 베스티는 “하나님께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셨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성경이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복음을 들을 사람이 그곳에 많다는 사실로 인해 감사하기 시작했다. 또 베스티는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했다. 그러나 코리는 “그건 너무해. 하나님도 내가 벼룩에 대해서도 감사하게 만드실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베스티는 거듭 말했다. ”하나님은 어떤 환경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라고 하셨어. 즐거운 환경에서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야. 벼룩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환경의 일부분이야.“ 코리는 그때의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때 우리는 침대 옆에 서서 벼룩에 대해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베스터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자매는 그들이 다른 죄수들과 기도하고, 상담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감시원의 저지를 받지 않은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감시원은 벼룩 때문에 막사 안에 들어오기를 꺼렸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 다 주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염려하다.’는 헬라어로 ‘메림나오’인데 마음이 나누어진다는 뜻입니다. 염려가 생기는 것은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나가야 할 사람이 마음이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신뢰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100% 맡기는 것입니다. 어떤 큰 문제가 있으면 어른들은 염려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잠만 잘 잡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100% 믿고 맡겼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공중의 새보다 너희가 더 귀하다고 말씀합니다. 공중의 새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공중의 새보다 더 귀하게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큰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권고하신다는 것은 돌보아 주심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상황은 어렵습니다.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걱정거리가 있어도 걱정이 안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질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염려하는 체질에서 잘 맡기는 체질로 바뀌어야 합니다. 감사의 제단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아름다운 자연의 은총과 특별 은총에 대한 응답입니다. 감사의 제단은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다스리시고 섭리하심을 기억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감사의 제단을 쌓은 자에게는 염려의 먹구름이 사라지고 감사의 은총의 햇살이 비쳐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표현할 때가지 사랑이 아니며 복은 감사할 때까지 복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풍성한 은혜는 감사의 고백에서 내 것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이 빈 손 들고 왔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예비해주신 자연을 선물로 받아서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한 영원한 구원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고백이 끊이지 않는 가정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장과 사업이 감사의 열매들로 가득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이 땅에서 생애를 다하는 날까지 주신 복과 주실 복을 기억하면서 기대하면서 복된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풍성한 은혜, 넘치는 감사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십자가의 결실, 자유와 평안의 열매

로마서 8:31-39

(신천안교회 오승욱 목사)

 

2차 대전 때 독일군 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 중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 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수용소에 끌려가 독일 병사 앞에 알몸으로 섰습니다. 그 병사는 그가 차고 있는 시계를 보고 그것도 풀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조금 있더니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뽑아 놓으라고 했습니다. 한평생 끼고 있던 결혼반지도 뽑아서 주었습니다. 그 순간 번개 같은 생각이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이놈들아, 나에게서 너희들이 빼앗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나에게 아직 남아 있다.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내 마음 속에 있는 자유라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내가 지금 너희를 사랑할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고, 그리고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내 마음의 평화는 내가 내 주지 않는 한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나만의 자유, 이것은 영원히 내 것이다.’ 라고 마음에서 외치고 외쳤다는 겁니다.

 

결코 빼앗을 수 없고 빼앗길 수 없는 것, 그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지고 온 이 많은 땅의 소산물은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삶을 위해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다 없어지고, 썩어질 것이 아닙니까? 이런 물질이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 몸의 건강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그 심령 깊은 곳에 있는 자유함, 이것은 절대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강제로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어 줌으로 빼앗기는 겁니다. 내가 내어주지만 않으면 결코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시 하지 않으면 그 문제는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나를 괴롭혀도 내가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저가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나는 저를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결실, 구원을 통한 자유와 평안, 이것이 분명 내 것이라면 이 땅에서 나를 넘어뜨릴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현대인들은 이전의 귄위주의 사회에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정치적, 경제적, 혹은 가정의 여러 가지 권위주의에서 눌려 살았는데 여기서부터 해방 되어야겠다고, 또는 해방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난에 쪼들리는 사람은 돈 벌었으니까, 맨 밑에 있던 사람이 이제 높아졌으니까, 이제는 ‘자유다’ 이렇게 스스로 외쳐보는데, 그들의 결실이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 결실이 아니라면 그들은 속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유를 말하지만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권위에 어느 사이 노예가 되어 버렸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권위의 노예입니다. 자기 개인이라는 것이 없고, 또 자기 개인의 자유라는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그냥 끌려가며 사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라고 하는 존재의식을 처절하리만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기를 찾았다고, 이제 권위에서 벗어났다고, 나는 이제 자유라고 외치는 순간 자기가 자기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그들은 세상 나무 밑에서 썩어질 열매로 자유를 채우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걸 모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대로, 돈이 없다가 돈이 생긴다고 그것이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내 소유가 적다가 많아졌다고 해서 그게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그저 이 억압에서 잠시 풀려나 다른 억압 아래 처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 억압에서 풀려났다고 내가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첫째, 사람들은 어떤 이익을 통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익이라고 하는 것, 거기에 노예가 됩니다. 나 개인이 없을 때는 그저 끌려가며 살면 되었지만, 나를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가부터 이제 내가 내 것을 챙겨야 됩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익’이라고 하는 것에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익을 더 올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얼마를 더 가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숫자를 불려볼 수 있을까, 거기에 온 몸과 마음을 던지거든요. 이제 생각할 여유도, 겨를도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선한 양심에 따라갈 만한 여유도 잃어버립니다. 거기에서 더 심해지면 이제 뭐를 해서라도 이익을 얻으면 내가 원하는 완전한 자유가 올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데 인생의 문제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생기는 순간, 자신은 더 심각한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소위 말해서 ‘이익’의 노예가 되고, ‘시장성’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신을 비교하게 됩니다. 이보다 저게 더 좋고, 저보다 이게 더 좋고, 저 사람이 나보다 더 낫고, 내가 저 사람보다 조금 낫고....상대적인 부, 상대적인 빈곤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빠지면 예수님도 몰라볼 정도로 정신이 없어지는 겁니다.

 

또 생각해 볼 것은,

 

둘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나, 그래서 거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삽니다. 나를 보고 저 사람들이 내 나이에 비해서 젊었다고 하나, 늙었다고 하나, 나를 뭐라고 할까, 오직 거기에 마음을 몰두합니다.

 

얼마 전에, 몇 년 만에 만난 어느 목사님이 반갑게 악수하고 난 다음에 대뜸 그럽니다.

‘아이고, 이제 오 목사님도 나이들어 보이네요’

그래서 속으로 ‘이 양반 인사할 줄 모르네. 당신은 나보다 더 늙었수’ 그랬어요.

하지만 겉으로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세월이 가니까 자연스러운 거 아닙니까?’라고 대답은 했지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나, 이거 신경 쓰는 거 사실 그만해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까 성형수술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과의 자살률의 차이가 크다고 합니다. 성형수술을 한 번 한 사람은 안 한 사람에 비해서 자살률이 3배나 높다고 그래요. 왜 그럴까...이해가 갑니까?

 

아예 손을 안 댄 사람은 자기 얼굴에 대해서 그렇거니 하고 살아요. 그러나 한 번 손대기 시작한 사람은 그때부터 신경을 쓰는 겁니다. 내가 이거 잘했나 못했나, 남들이 보고 뭐라고 할까?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주책없이 ‘에이, 내가 보기에는 옛날이 더 나은 것 같아’ 그래버리면 그때부터는 속상해서 못살아요. 그렇다고 이제 원상복귀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자살을 해버린다는 거지요.우리 성도님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얘기겠지만 그렇다는 겁니다. 정말 비참한 ‘다른 사람의 판단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요새 보니까 여론 때문에 사람들 참 많이 신경을 씁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판단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그들이 갖다 주는 세상의 결과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결실, 그 은혜의 결실로 인하여 구원받았고, 자유와 평안이 내 삶에 넘치게 된 이 기가막힌 사실 하나만 갖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볼 것은,

 

셋째,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십자가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뭡니까? 참 자유는 내면세계에 있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자유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건 신앙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자유할 때, 이보다 더 귀한 자유는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봅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여기에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바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이 아닙니까?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무서워하며 삽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본문 32절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결실이 된 자로서 참 자유인이 된 자의 간증이 오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미 모든 것은 다 주셨다는 말씀이지요. 이미 주셨다면 우리는 이제 믿음으로 받아야지요. 그러므로 받은 자의 마음이 바로 자유하는 마음이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절대적 풍요의식, 바로 그것이 추수감사절에 가져야 할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요, 거기에서 자유가 나오는 겁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당연히 주시는 것입니다.

 

안 주실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직 눈으로 보기에 많고 적음만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인데, 사실 주인이 종들에게 주었던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는 똑 같이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받은 것으로 충성을 다하면 모든 종들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남긴 이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충성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자녀들을 키웁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신감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주실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용서하실 것이다....자신만만한 겁니다.

‘내가 필요한 것이 다 거기에 있으니까 이미 나는 다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십자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나는 다 받았다.’ 굉장히 중요한 신앙의 핵심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의 속박입니다. 죄를 지은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죄를 다시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의식이 나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고, 즐겁게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제는 감기만 걸려도 죄로 벌을 받은 것 같고, 자신이 좀 사는 것이 어려워지기만 해도 내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만 같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최고의 자유는 죄사함을 받은 자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죄책’으로부터, ‘불행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인이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전에는 ‘이 어려움은 내 죄 때문에 온 것인지 몰라’...그러면서 한숨을 쉬던 사람이, ‘이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더 나은 삶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그렇게 생각이 변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인’과, 그리고 ‘억압을 받는 자’와의 차이점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자, 로마서 8장에서 강조하는 것이 있는데, 좀 전에 읽은 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양자,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자의 영을 받고, 양자의 특권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특권, 이것이 바로 자유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은사를 주십니다. 여러분은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그 자녀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은 다 은사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며 받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건, 좀 싫은 일이건, 이제 여러분은 죄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은사적인 입장, 즉 선물의 의미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의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하는 일은 다 그를 위해 하는 일입니다. 그저 이런 말도 하고, 저런 말고 하고, 또 혹은 잔소리를 한다 합시다. 혹은 때로는 매를 친다고 합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은사입니다. 내게 주신 선물입니다. 은사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자유인의 의식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에 이 자유의 열매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나를 심판하리요, 누가 나를 비판하리요’ 우리 성도들에게도 이런 간증이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괴롭게 하겠느냐! 누가 나를 절망하게 하겠느냐! 누가 나를 우울하게 하겠느냐! 누가 나를 슬프게 하겠느냐!...이 세상에는 없다는 겁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고, 누가 나를 심판하고, 누가 나를 비판하리요. 이것이 자유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불행의식과, 비판의식과, 열등의식에 빠져 삽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얘기가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입니다.

 

이것이 내게 왜 있느냐?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저것이 내게 왜 있느냐?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실패도 사랑이요, 질병도 사랑이요, 이러이러한 모든 일도 다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은 더욱 큰 사랑입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라는 유명한 신앙인이 임종 전에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한 평생 내가 기도했습니다만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 내 소원대로 되었더라면 나는 아주 망가질 뻔 했습니다. 내 소원대로 안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그게 모두 선물이었어요.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소원대로 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절대 안 되죠. 어찌 보면 이대로, 지금 내가 처한 이대로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작품이요 최고의 선물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을 통해 거두어야 할 자유인의 의식입니다.

 

그래서 37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내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복된 나’를 약속해 주셨으니 내가 오늘 이런 일, 저런 일로 마음을 빼앗긴 채 절망하고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최종 종착지는 이미 결정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나는 이제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은 ‘사명’이라는 말을 자주 쓸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명의식을 갖고 있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사명’이라는 이미지를 아주 무겁게 갖고 있습니다. 사명을 얘기할 때는 대부분 한숨을 쉽니다.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지만, ‘사명’은 지금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이미지의 사명은 적어도 아닐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넉넉하게 이기는 것, 첫째는 사랑이요, 둘째는 용서요, 셋째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요, 넷째는 십자가를 통해 다 받은 자의 풍요의식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 내가 살아가야할 의무, 그래서 그 삶을 통해서 내가 그 사랑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입술로서가 아니라 나의 자유인의 삶을 통해서 내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들입니다. 생애 최고의 용서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에 이제 넉넉히 이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오직 자유인만이, 자유인의 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그것이 자유인입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 창조적인 생각, 옳고 반듯한 생각이 결핍됩니다. 왜곡되고, 구부러져서 끊임없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서도 자신을 괴롭게 할 뿐입니다.

 

괴로운 사람은 마음의 여유도 없어집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십자가로 구원받은 백성이기에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라는 은사를 이미 여러분은 받았기에 가능합니다.

 

여러분, 자유의 뿌리는 사랑이며 용서입니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자유인입니다. 용서를 받을 줄 아는 자도 분명 자유인입니다. 누가 나를 용서할 때 그 용서를 받을 줄 아는 것도 용서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랑의 뿌리는 용서에 있고, 용서받은 감격에 자유가 솟아납니다. 여러분,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순수함’ ‘도덕적인 자유함’ 또 ‘용서’ ‘구원’ ‘탕감’ 이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갖는 마음가짐’..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자유가 아닌 겁니다.

 

우리 고3 아이들이 엊그제 수능시험을 치렀습니다. 그 아이들 중에는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유홍가로 직행하는 아이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이제 나도 어른이니까 이제부터 나도 자유다’....자유라고 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방종입니다. 방종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명심합시다. 자유, 해방, 이것은 방종의 동기가 아니라 ‘사명’입니다. 사명을 버리는 순간 자유도 함께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자유는 무질서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그 십자가 안에 감추어진 엄청난 자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받아들이면서, 용서 받은 자의 감격, 엄청난 사랑을 받은 자의 자유함이 있을 때에 비로소 나도 자유 할 뿐만 아니라, 또 다시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는 능력이 그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를 진심을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자유를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압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자유’를 선포하도록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사역을 상징적으로 그에게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그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사야 61장 1절을 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러분은 이미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억눌리고 억압되어진 것에서 이미 자유를 선고받았고, 놓임을 명령받았습니다. 오늘 이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 땅의 소산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안의 열매를 마음껏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은 자유케 된 하나님 자녀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감사하는 자의 축복

열왕기상 3:1-15절

 

(아름다운 빌립보 교회 /이수형 목사)

 

 

여러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물질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지식으로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분으로 삽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feel로 사는 것을 봅니다. 그런가 하면 고집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기로 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복수심으로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가지각색입니다.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 것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현실 상황을 훌쩍 넘어서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여러분, 작은 일이던 큰일이던 성도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인한 솔로몬의 감사

 

오늘 본문은 잘 아는 대로 솔로몬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일천번제를 드리고 은혜위에 더하는 큰 축복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이 당시 나이가 20세 미만이 아니였나 추측 해 봅니다. 그런 소년의 나이에 일천 마리의 소를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번제(Burnt sacrifice)란 소나 양을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서 향을 흠향하시는 제사입니다. 온전히 헌신한다는 뜻으로 드립니다.

보통 한 마리를 드리며 특별한 경우에 13마리까지 드린 일이 있어도 100마리도 드린 일이 없는데 솔로몬이 일천 마리를 잡아서 제사로 드린 것은 엄청난 제사인 것입니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가장 귀한 것과 물질을 하나님께 많이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또한 솔로몬은 왕위에 올랐으니 얼마나 바쁜 일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사랑하여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고,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3:4)」

「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 하더라 (왕상 3:3)」부왕 다윗의 강대한 나라를 어린 나이에 이어받아 왕이 되었으니 성실한 솔로몬으로서 하나님께 통치의 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공식적인 기도, 일천번제로 나타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3절에 분향했다고 합니다. 분향은 계8:3절에 성도의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하고 꿈에 나타나 말씀해 주셨고 지혜를 달라할 때 지혜 뿐 아니라 부귀, 영화, 장수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제단을 쌓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솔로몬의 아름다운 믿음의 행위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은 응답과 함께 복을 주셨습니다

1) 솔로몬 같은 지혜, 총명한 사람이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3:12)」

2)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평생에 어떤 왕도 솔로몬 같은 부를 누리고 영광 누릴 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3:13) 」

3) 장수의 복을 주셨습니다.

「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3:14) 」

 

솔로몬의 이런 응답의 복과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시작 되어졌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솔로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 것 입니다.

기브온에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실 때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6절-9절) 이렇게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게도 그의 아들인 자신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갔고 그 은혜로 나의 백성이 아니라 주의 백성을 섬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 했습니다. 이런 솔로몬의 기도에 하나님은 흡족 해 하셨습니다.「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10절)」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감사는 무엇인가?

 

그렇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에게 가장 큰 감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기에 보면 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왜 감사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으로’라는 말은 ‘때문에’ 라는 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때문에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상황에 들어가든지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예수님, 그 분이 바로 우리의 감사의 이유요 감사의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님만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병에 걸리든, 시험에 떨어지든, 일이 잘 안되든...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 어떤 경우도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저와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고, 나는 살았고, 죄 사함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 다 잃어도 예수님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넘어진 자도 예수님 때문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병든 자도 예수님 때문에 나음 받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까?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자랑하는 것이 나에게 비록 없다 할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송명희씨를 여러분이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 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온 힘을 다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송명희씨가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그는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라고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 저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자랑하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많이 가져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건강해야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돈 많고, 건강하다고 감사하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올 수 있을까요? 누가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감사는 돈 때문이 아니고, 권력 때문에, 건강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감사절을 지키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 은혜에 감사하는 자의 자세

 

미국 의학계를 놀라게 한 원종수 권사의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드리는 생애였기에 많은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했습니다. 레23:40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할 지어다」하였습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초막절은 종교력으로 7월15일부터 한 주간 초막을 지어 거기 머물며 지키는 절기로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동시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영적구원의 자녀임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감사절을 지키는 모두에게는 축복입니다. 무엇보다 감사절기의 기본정신은 ‘드려짐’입니다. 적어도 이 날은 받을 것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게 드려지는 날인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받으려고 사는 것보다는 드려지는 모습에서 나옵니다. 또한 감사절의 정신은 감사로 사는 자로의 헌신입니다. 유대인 어머니 중에 배운 것이 없는 아주 무식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식은 아주 훌륭하게 길렀습니다. 사람들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세 가지 비결은 이렇습니다.

그 첫째가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두 번째로 원망하는 사람과는 놀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불평하는 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파괴적입니다. 세 번째로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하는 생각을 잃었다면 그대는 파멸의 늪을 찾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그 감사는 그대를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감사절기의 정신은 무엇보다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힘든 것 다 압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 마음속에 감사가 다시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왜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가? 나는 왜 구원받은 사람인가? 나는 왜 감사로 사는 사람인가? 솔로몬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고 여러분 모두에게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더욱 큰 응답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감사의 방법

시편 50:23,100:4

(전주 순복음 교회 / 임종달 목사)

몇 해 전 영등포 역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가 달려오는데 플랫 홈에서 차를 기다리던 한 시민이 발을 헛디뎌 철길로 떨어졌습니다. 순간 역무원이 뛰어내려 그를 구했으나 역무원 자신은 달려오던 기차에 치어 두 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이던 그를 찾아간 기자가“구해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문병이라도 다녀갔나요?”하고 묻자 “저는 아직까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역무원으로서 제할 일을 다 했을 뿐입니다.”라며 잔잔한 미소로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서 찐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난 후에 신문기사를 보니깐 “그때 구해준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런 보도였습니다. 참으로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문둥병자 10명을 모두 치료해 주셨는데, 그중 1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뜨겁게 감사하였습니다. 그를 보고 주님께서는 다 고쳐주었는데 나머지 아홉은 어딜 갔느냐? 며 심히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삶속에서 누군가를 성의껏 도왔는데, 감사하다는 반응이 없을 때 섭섭함을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은 있으나 여건이 되질 않아 미쳐 감사의 표현을 하지 못한 채 오해를 받아보신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그동안 주님께 받은 놀라운 은혜에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 것인지? 그 방법에 관해서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성경은“너희가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시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감사는 마음과 행함이 별개가 될 수 없으며, 또한 행동으로 실천해 옮긴다고 해도 그것이 마음에 없는 행동은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내용인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감사를 원하고 계실까요?

가. 죄의 종이던 우리가 죄용서 함 받고 의의 종이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롬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창세 적에 벌써 인간은 타락하여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원죄와 자범죄, 유전 죄 등 수많은 죄는 우리를 불행과 고통 속에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으로 속죄양을 삼으시사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입술로 고백할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정으로 이 시간, 구원받은 그 은혜 하나만으로도 감사가 넘쳐나야합니다. 우리입술에 맺혀있는 불평불만은 다 버리고 감사로 영적인 재무장을 합시다. 감사하는 곳엔 절대 사탄이 틈탈 수 없습니다.

나.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감사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감사로 예배할 때 구원의 은총을 베풀 주시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교회 와서 마지못해 예배하는 태도가 아니라, 감사 감격이 넘쳐나서... 찬송을

불러도 감사, 기도를 드려도 감사, 헌금을 드려도 감사, 말씀을 주심도 감사, 온 예배가 감사로 충만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 (시 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야훼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그 어떤 예물을 드려 예배하는 것보다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곧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실한 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진정한 감사는 마음과 행위가 일치된 감사입니다.

가. 마음으로 부터의 감사는 속사람의 감사입니다. 행위의 감사는 겉 사람의 감사입니다. 인간은 속사람과 겉 사람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속 다르고 겉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를 누가 인정해주겠습니까? 가정은 물론 사회 조직 단체 어디서나 표리부동한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속과 겉이 다른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눅 11: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나. 또한 입으로는 감사하는데 마음에 없는 감사는 진정한 감사가 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다. 그러므로 속사람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라.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정직과 진실과 의와 착함과 선한 양심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엡 5:9-11)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마. 바울처럼 훌륭한 대 사도마저도 자신에게는 선과 악이 항상 같이 있을 뿐 아니라 속사람과 겉 사람이 늘 싸우고 있다는 이 사실을 참으로 괴로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중심에 예수님을 모실 때 감사할 수 있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롬 7:21-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3. 성경에 나타난 감사의 행위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십시다.

가. 실로 감사는 선악을 기준해 볼 때 마음으로부터 선을 쌓아놓으면 입에서 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입술의 열매를 감사로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하나는‘절망’, 하나는‘희망’입니다.“이것밖에 안 돼, 이 것 뿐이야!”라며 절망하는 사람...,“아니야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 희망이 있어!”라며 소망을 갖는 사람...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입니까?

우리 입술로 불평보다는 감사를, 절망보다는 희망을 말하며 살아가십시다.

나. (요 12: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감사는 물질로 표현됩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나드 한 근을 예수님 발에 쏟아서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다. 하나님 나라는 공짜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바치면 반드시 더 풍성하게 돌려주실 뿐 아나라, 모든 쓸 것도 채워 주십니다. (빌 4:18-19)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결론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사를 상실한 자는 인생의 참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는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렵다. 어렵다. 하더라도 먹고 살만하고, 그래도 살아나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풍성한 열매를 주시고, 이 전주 땅에 우리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방주로 삼아주시고, 가정마다 은혜주시고, 각 개인마다 감사할 조건을 다시 한 번 회복시켜 주심에 감사합시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속에 풍성한 감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추수 감사절의 기원과 그 신앙적 함의 

레위기 23:39-44

(기하성 신학대학원 교수 / 장광용 목사)

 

오늘 날의 추수감사절은 구약시대 히브리인들이 지키던 3대 명절(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중에 하나인 초막절 혹은 수장절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에서의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경건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던 청교도들(Puritans 또는 Pilgrim Fathers)이 형식과 의식주의적 신앙의 타성에 빠진 영국 국교회와 그 수장인 제임스(James)왕의 박해가 심해지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인접국가인 네델란드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곳에서 11년 동안을 체류하며 살았으나 너무도 삶이 고달팠고 올바른 신앙으로 자녀 교육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북미 신대륙으로 가기위해 7년 동안 피땀 흘려 번 돈으로 “Speed Well”이란 배 한 척을 샀으나, 장기간의 항해에 적합지 않아 다시 180톤급의 “May Flower”호를 구입하였다. 그들의 항해를 위해 충분한 크기의 선박은 아니었으나, 신앙의 정열에 불탔던 102명의 청교도들은 항해술이 취약했던 시대인 주후 1620년에 신대륙을 향해 화란에서 출항을 단행했다. 그들은 극심한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며 65일 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12월 11일 북 아메리카 Massachusetts 주 동남부의 도시로 New England의 가장 오래된 도시인 Plymouth 항에 상륙했습니다.

 

낯선 이국땅에서 그 해 기나긴 겨울을 지내면서 각종 풍토병, 식량난, 영양실조 등으로 시달리다 그 해 44명이 죽었고, 봄이 되자 토착민인 친절한 인디언들이 곡물을 공급해 주었고, 농사짓는 법을 친히 가르쳐 주어서, 일손 부족으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땀과 눈물의 첫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621년 가을에 칠면조 고기, 곡식, 과일, 채소, 생선을 차려 놓고, 그들의 이웃인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눈물과 감사의 기념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 후 1623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추수 감사절을 주 정부의 공식 절기로 선포했고, 급기야 1789년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Gorge Washington이 국가의 국경일로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 3대 대통령이었던 Thomas Jefferson은 이 절기가 구 왕정시대의 악습이란 이유로 그것을 중단시켰고, 일부 주에서만 비공식적인 절기로 지키게 되었고, 또한 각 주마다 그 기념일도 달랐다. 이렇게 폐지되어온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대중적인 인기 여성잡지, “Godey's Lady's Book”의 편집자였던 Sarah Josepha Hale(1788~1879)입니다. 이 여인은 무려 40년 동안에 걸쳐 Thanksgiving Day에 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는 한편, 정치인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추수 감사절은 미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건립되었음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기념되어야 마땅하다”는 그녀의 줄기찬 캠페인이 수락되어, 제 16대 대통령 Abraham Lincoln 이 1863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연례적 경축일로 선포하였고, 그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중이었으나 이 날 하루 동안만은 휴전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미국의 가장 큰 국경일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서술한 추수 감사절의 유래에 이어 다음으로, 구약 성서에 나타난 이 감사절기의 신앙적 함의를 살펴보면,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이 광야 40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했던 삶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집에서 자지 않고, 나뭇가지나 풀잎으로 엮어 만든 집(Sukah)에서 지내기 때문에, 초막절(Sukoth)이라고도 하고(레23:42-3), 늦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들여 저장하는 시기이므로 수장절이라고도 한다(출23:16). 이스라엘 백성은 해마다 이 명절이 되면 광야에 나가 빈들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간 지낸다. 요즈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집 옆에다가 초막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식사를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리고 전도서를 읽고, 예배를 드린다.

 

  이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 광야를 행진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는 일종의 그늘 역할을 해 줌으로 피난처가 되고, 보호막이 되고, 또한 그 구름 기둥이 앞서 가면서 계속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또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이 가야할 목표와 방향을 알려 제시해 주셨고, 한 밤 중의 추위에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배고팠을 때는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고, 마실 것이 없었을 때는 반석을 깨트려 거기서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초막절에 광야 40년 유랑 생활 동안 하나님이 공급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 초막절에 맞춰서 추수가 다 끝나게 되며, 그들은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하게 된 것을 우선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축제를 거행한다. 이 초막절은 특별히 다음 세 가지 사항에 감사의 초점을 맞춘다.

 

첫째, 가정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절이 오면 집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거기서 가족이 함께 지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43절 말씀이 그 대답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초막을 가족들이 함께 만듭니다. 그리고 초막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온 가족이 초막에서 함께 거주했던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많은 고난과 시련이 있었지만, 그들이 광야의 고통을 이길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가족 때문이었음을 깨닫고, 천막을 가족들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초막은 가족들에 의하여, 가족들을 위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족애의 힘이 사람이 살기에 거의 불가능한 광야의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용기의 원천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소위 핵가족 시대라고 부릅니다. 현대문명의 특징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편리주의가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는 식구들이 많아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그런데, 탈무드에 따르면 “가족들은 새의 날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새는 자신의 날개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날개는 귀찮거나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날개 때문에 오히려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비상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어려울 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 때문에 어려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보다는 가족 때문에 더 큰 사랑과 힘과 용기와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에 짓는 이 초막은 가족들의 보금자리요, 안식을 제공하는 피난처(shelter)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초막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이레 동안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고, 노래를 부르며,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 하고,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3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번제와 소제와 희생제물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드릴지니” 초막절에는 온 이스라엘 백성이 성회로 함께 모였습니다. 또한,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다른 가정의 초막을 방문합니다. 옛날에는 광야에 나가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거할 수 있는 굉장히 큰 천막을 만들어, 거기서 함께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 비단 내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들이 모두 모여, 어려움 많은 광야를 함께 행진하는 공동체의 행진이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나와 너를 포함한 커다란 공동체로서 함께 광야 길을 행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은 내 가족이 내게 크게 위로가 된 것 못지않게, 또한 내 주변에서 같이 하나님께 신앙과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격려와 위로를 더불어 나누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광야의 길을 넉넉히 통과할 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면 바로 믿음의 공동체인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다 사라진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우리가 위로와 격려를 받는 교회가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이겨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교제와 기도를 통하여 받는 위로와 용기를 얻는 교회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무너지고 그 여파로 파생되는 문제들이 파생하겠습니까?

 

  위대한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은 老後에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으며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평소에 특별히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내 조국 독일이 어두워 졌을 때, 그리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었을 때, 내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그리고 내 인생의 석양녘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족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지만, 이에 못 지 않게, 또한 우리의 가족들이 모여 형성된 하나님의 교회를 주신 하나님 앞에 마땅히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는 영원한 소망에 대한 감사입니다. 40절로 42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웨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집을 떠나 이레 동안 초막에서 거주한 것입니다. 요즈음 이스라엘에서 초막절을 지킬 때는 먼 광야나 사막까지 나가지 않고, 자기 집 옆에 작은 초막을 만들어 편리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절을 지킬 때는, 들에 나가 한 주간 동안 야영(camping)을 하였습니다. 일시적이지만 모두가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이 깃들고, 안정을 누리던 집을 잠시 떠나 사는 연습과 훈련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이 지상의 집을 떠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내 영혼이 육체의 집을 떠나고, 우리가 함께 살며 사랑과 행복을 나누던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나서 천성을 향해 가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집이 있습니다(요14:1-7). 그렇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고센 지역을 중심으로 살던 안일한 집을 버리고 광야로 나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광야에 거처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광야에서 살 때, 저 가나안 땅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구한 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소망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아버지 집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1절에서 “만일 우리에게 있는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했는데, 이는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느 날 이 세상을 떠나갈 때 그 영원한 만남, 그 영원한 공생, 그리고 영원한 처소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하고, 이 영원한 이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의 곁을 떠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3에 보면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 할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킬 때, 초막절 바로 직전에 지키는 또 하나의 절기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7대 명절이 있었는데, 여섯 번째 명절이 바로 속죄일입니다. 이 속죄일은 죄를 회개하는 고통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피 흘리는 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속죄일 다음에 초막절이 오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와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억하고 이레 동안 즐거워했습니다(레23:40).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는 속죄 절기를 통해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를 확인 하면서 그 다음 절기인 초막절로 나아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의 기쁨과 감사의 축제는 회개하고 용서 받은 후에야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 땅을 떠나게 하시기 위해 먼저 유월절이라는 의식을 거행하게 하셨습니다.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가 흘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대속키 위해, 속죄 제물인 어린 양이 피 흘려 죽음을 당했고, 그 흘린 어린 양의 피가 문 인방과 설주에 뿌려짐으로 말미암아 그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해방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갔으며, 가나안의 소망을 가지고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신약시대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키 위해 십자가상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친히 우리가 받아야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힘입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광야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으며, 죽음 저 건너편에 있는 영원한 소망을 붙들게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초막절이 있기 전에, 회개하는 속죄의 절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려움도 많지만 주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고, 여전히 내 마음 속에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가 있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고, 감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대도하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년 한 해를 회고해 보며 철따라 우로와 일광을 내려주시고, 계절풍이 일게 해 주셔서, 온 산야에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하신 상천하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불우 이웃과 그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추수 감사의 절기를 지키시길 바라며, 다음 세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성심과 진실로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 만유의 주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복된 계절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합니다: 첫째는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둘째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셋째는 내세의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감사하는 신앙

시편 100:1-5

(제주순복음교회 / 표순호 목사)

 

 

오늘 추수감사절 주일을 맞이하여 3가지 주제를 가지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절의 의미

둘째, 추수감사절 절기 가운데 감사절의 의미

셋째, 시편기자의 감사와 오늘날 감사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말씀드립니다.

 

1. 성경이 말하는 감사절의 의미

 

이스라엘민족에게는 3대 절기가 있습니다.

 

1) 유월절 절기입니다. (출12:27)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할 때 문설주의 짐승의 피를 보고 재앙이 넘어가서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사건으로 구원 받았다는 예표가 됩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은(시16:1-8) 누룩 없는 무교병을 6일 동안 먹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난 받은 400년 동안을 생각하며 지킵니다.

 

2) 칠칠절(맥추절, 오순절, 초실절, 출23:14-17)

칠칠절은 유월절로부터 7주후 50일째 지키는 절기입니다. 추수의 첫 열매를 지키기 위해 드렸던 감사절기입니다.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강림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오순절성령강림사건이라 칭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강림사건은 감사의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성령강림사건으로 교회가 탄생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해 오늘날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칠칠절을 지키는 방법은(신16:9-12)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대로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가족과 함께 여행자, 고아, 과부들과 여호와 앞에 즐거워하면서 애굽의 종 되었을 때를 기억하고 지킵니다.

 

3) 초막절(수장절, 장막절)

유대력으로 7월15일부터 7일 동안 초막을 짓고 거주하면서 지키는 이 절기는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영육간에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추수한 것은 거두고 저장한 후 지키는 절기라하여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초막절은 여기까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입혀주시고, 먹여주시고, 잠잘 곳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방법은(신16:13-16)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주시기에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신16:16,17)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2.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감사절은 항해술이 취약했던 1620년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찾아 극심한 기아와 병고에 시달리면서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102명의 청교도들이 그로부터 1년 후 낯설고 물설은 개척지에서 갖은 풍토병과 각종 생활의 질고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해 농사를 수확한 후 얻은 새 땅에서 첫 결실을 감사하여 드린 감사기념예배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실로 눈물과 감사가 뒤범벅된 감동의 예배를 드렸던 그들이 바로 현재 미국을 탄생시킨 위대한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드렸던 첫 추수감사절의 벅찬 환희는 단순히 한 나라의 건국 일화나 한 해의 추수감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의 존엄성을 그리고 개척정신의 고귀함을 보여주는 산 실례로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진한 감동을 줍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음력8월15일 추석이 이 날에 해당된다고 해서 추석명절을 추수감사절기로 지키는 교회도 있습니다. 또한 나라마다 추수시기가 다르기에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한다는 의미로 드린다면 우리교단 같은 경우 성령강림절날 감사절기를 함께 드리는 의미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 시편기자의 감사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시편100편은 하나님을 찬조자로 선민의 목자로 묘사하여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영원하시기에 찬양과 감사를 드릴 근거가 됩니다.

 

모든 물건은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버려진 것이 아니라면 주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도 망망한 바다도 마을마다 해녀들이 일하는 구간이 정해져 있고 마을마다 목장지가 따로 정해져있습니다. 가치가 있고 귀한 것일수록 소유권은 더 확실 합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주인은 바로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이런 주인을 두고 사는 자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은 경제적 여건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직접 자동차를 만드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기술자면 할 수 있습니다. 복잡하고 정교한 물건일수록 많은 수고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천지와 만물은 말 할 것도 없고 인간은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고차원적인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복창) “당신은 이 땅에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이런 자기 정체성을 모르니까 목숨을 스스로 끊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세계에서 1등가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먼저 믿는 우리가 전도해서 영혼 구원하는 일에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주는데 힘써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지은 우리를 자녀요, 친구요, 신부된 아내라고 부르십니다. 인간은 자기를 지어주신 하나님을 인식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며 살 때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약4:13-16에 보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계획과 뜻대로 사는 삶은 어리석은 자의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이 무엇인지 깨닫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감사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마치 내가 신앙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믿는듣한 착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선택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요15: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43:1에서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욥기1:21,22)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의 소유주가 누구인줄 알았기에 모든 것(자녀, 재물, 건강, 아내)을 잃었어도 하나님은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시간, 건강, 재물 이모든 것들의 주인이 하나님이기에

① 안전합니다.

② 빼앗길 염려가 없습니다.

③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기에 나를 가장 잘 아시고 가장 복되게 하시며 영원토록 책임져 주실 분이시기에 감사드립니다.

 

3) 하나님의 백성이요 양 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목자와의 관계는 분과 분의 관계입니다. 서로 떨어져 살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① 양은 목자를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② 양은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목자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③ 목자는 양을 사랑하며 양의 모든 필요를 채워줍니다.

 

이런 삶을 실질적으로 체험했던 다윗은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쉬운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서도 목자되신 하나님이 지켜주시기에 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육 간에 부족함이 없는 자로서 살아가게 되었기에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는 인생의 삶을 살아 갈 수 잇도록 해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여정을 마치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영원히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기대하며 하늘에 소망을 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성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옵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보며 신뢰의 표정을 지을 때 우리 안에 큰 힘이 솟아납니다. 그의 기대와 응원에 부응하기 위해 더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시105:1-4)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감사하는 삶을 사는 인생보다 행복한 인생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1. 나를 지으신 하나님

2. 나를 소유로 삼으신 하나님

3. 나를 양으로 기르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

이 계시기에 우리는 감사 할 것밖에 없습니다.

4.추수감사절 요약 설교

 

감사의 마음을 확정합시다.

로마서 14:5-6

(총회목회대학원 원장 / 배진기 목사)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일 년 동안 수고하여 애쓴 결과로 열매를 거두는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가을의 결실 속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수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추운 겨울을 앞두고 쉼과 안식을 선물 합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에게 가을은 고난을 선물합니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가을의 단풍은 우리에게 다사다난 했던 한 해를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내온 일 년은 붉은 색도 있었고 노란 색도 있었고 갈색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일들이 우리의 삶속에 일어났었습니다. 갖가지 색깔의 나뭇잎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단풍의 물결을 이루듯이 지난 한 해 동안 희노애락의 여러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지만 한데 어우러져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합력선으로 인도해준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 어떠한 정해진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정하여 이 날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각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품고 감사드리기를 확정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항상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확정합시다.

 

1. 지나온 날들을 감사하는 마음을 품도록 확정합시다.

2. 오늘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드리는 마음을 품도록 확정합시다.

3. 기가 막히게 예비된 내일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품도록 확정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감사절로 정한 이 날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감사하는 곧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사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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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 (감사) 시편100:1-5

 

가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더불어서 가을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계절입니다. 가을의 단풍만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질서와 조화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시인 다승 김 현승의 ‘가을의 기도’에 이런 싯귀가 있습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 ”그러나 저는 “가을에는 감사드리게 하소서”라고 기도 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감사일까요 ? 감사하는 사람의 삶 속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은 어떠한 것일까요 ? 저는 감사의 찬양시인 시편100편을 감사라는 영어단어 THANKS의 알파벳을 따라서 묵상해보므로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를 서로 나누고자 합니다.

Thanks/ Trust (신뢰)

감사란 무엇보다 신뢰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뢰가 없는 감사는 형식이요 인사치례일 뿐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신뢰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본문 3절에서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노래합니다.

tHanks/ Hope (소망)

진정한 감사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보다 더 나은 내일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감사는 죽은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 1,2 절을 읽어 봅시다.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히게 예비된 내일을 향하여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신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thAnks/ Addin (확장,강화)

감사는 우리의 모든 것 위에 더해지는 확장 팩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범사에 감사가 플러스 되도록 합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백성들입니다. 4절을 읽어 봅시다. 우리의 삶에 감사를 더하는 것은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항상 대칭 되는 두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주를 위하여’라는 단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를 위하여’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이 주를 위하여 살므로 여러분의 삶에 감사를 addin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thaNks / Note (주목,기록)

Note라는 단어는 주목한다는 의미도 있고 기록하고 메모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감사란 주님을 주목하며 그의 은혜를 마음에 기록하고 메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지어다 “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목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thanKs / Key (열쇠)

감사는 모든 것의 열쇠가 됩니다. 하나님의 전 문에 들어가는 열쇠는 바로 감사임을 오늘 본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감사를 열쇠로 쓰는 방법은 항상 ‘주님 먼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주님 먼저’를 앞세우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인 오늘 만이 아니라 범사에 ‘주님먼저’를 앞세우고 삽시다. 우리가 시간이나 물질이나 우리의 범사의 삶에서 주님의 것을 먼저 계산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감사의 삶입니다.

 

thankS / Source (근원,원천 )

감사는 모든 것의 근원과 원천이 됩니다. 하나님의 근원은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근원입니다. 본문 5절을 읽어 봅시다.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주님을 나의 근원과 원천으로 삼는 비결은 바로 감사입니다.

Trust /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가 그의 지으신 양이요 백성임을 감사합시다.

Hope /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소망하며 그 앞에 나아갑시다.

Addin / 모든 것 위에 감사를 더하므로 그 궁정에 서는 복된 걸음이 됩시다.

Note / 우리 주님을 주목하며 그 은혜를 마음에 새기므로 감사의 백성이 됩시다.

Key / 감사로 열쇠를 삼아 그 문에 들어갑시다.

Source / 감사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우리의 원천으로 삼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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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삶을 삽시다. / 시편105:1-4

 

올해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가을에 많은 것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감사의 명절을 맞아 감사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며 언제나 감사의 삶을 이루어가기 위해 결단하는 절기로 삼읍시다. 우리가 감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 본문을 통해 감사의 교훈을 배우도록 합시다.

 

분수를 깨닫는 겸손함이 감사의 삶을 이루게 해줍니다.

사람이 감사를 모르는 것은 그 분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분수를 깨닫고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헤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드리며 찬양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읽어봅시다.(예화) 가드너 선교사

 

은혜를 아는 지혜의 마음이 감사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은헤를 아는 마음이 지혜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8의 고백과 같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은혜를 아는 마음입니다.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기사로 보이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읽어봅시다.

 

감동을 주는 결단과 실천이 감사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감동 시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성도의 삶을 삽시다. 본문 3절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다면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결단과 실천을 해야 합니다.

어떤 시각장애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려서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잃었지만 아무도 탓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감사와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며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자랑하기 위하여 평생 9천편의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녀의 찬송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믿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녀의 찬송시 가운데 하나를 소개합니다. “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밑 샘 솟는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 그녀가 바로 화니 제이 크로스비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합시다. 하나님을 감동 시키는 결단과 실천의 삶을 삽시다.

 

행복을 느끼며 구하는 기도가 감사의 삶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왜 기도를 합니까 ? 고통이 있거나 문제가 있거나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가지는 감정은 대부분 행복한 감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행복을 느끼며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4절을 읽어봅시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라고 했습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바로 감사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결론을 맺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절기이며 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분수를 아는 겸손함과 은혜를 아는 지혜와 감동을 주는 결단과 실천을 이루며 행복을 느끼며 구하는 기도로 우리의 삶을 더욱 복되게 합시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더욱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기도자들로서 이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거두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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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전문가가 됩시다. / 골로새서 3:12-17

 

전문가는 어느 특정한 분야에 탁월하게 뛰어나 거기에 정통한 사람을 말합니다. 전문가는 직업적인 전문가가 있고 기술적인 전문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직업적인 전문가를 흔히 ‘프로’라고 말합니다. 이는 영어의 ‘프로페셔널’의 약어입니다. 그러나 기술적인 전문가를 가리킬 때는‘테크니컬’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어떤 일을 자신의 주업으로 삼는 직업적인 전문가보다 부업이나 취미로 하지만 기술적인 전문가가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기 자신의 주업이 다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뛰어나야 할 전문가적인 기술이 하나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성도는 감사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적당히 감사해서는 안됩니다. 감사하는 마음만 가져서도 안됩니다. 감사를 잠시 표현 하는 것으로만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기술이 누구보다 뛰어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의 주업 만큼이나 전문적으로 감사 드리는 일에 전문가가 되도록 합시다.

본문 15절에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16절에서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17절에 “주예수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감사의 전문가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감사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합시다.

 

감사 전문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감사를 발견하는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배우고 익히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주목해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문제만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면 불평과 원망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러나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는 습관을 가지면 감사 전문가가 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잘 보라는 것입니다. 무수한 감사의 조건은 보지 않고 금지된 것만을 바라보다가 불평하게 되고 결국은 스스로 불행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던 하와를 기억해야겠습니다. 예) 선글라스와 사마휘

 

감사 전문가가 되려면 감사의 조건을 수집하는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무엇을 모으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볼 때에 마음에 두지 않고 흘려 버리는 것도 있지만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마음에 담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모습이 결정되어 집니다. 어떤 사람은 미움과 원망의 조건을 마음에 두고 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필경 위장병이 걸리거나 울화병이나 우울증이 자리잡게 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감사의 사랑의 조건들을 마음에 두고 간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연히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슨 조건들이 더 많이 수집되어 있습니까 ? 우리의 심령이 감사의 박물관이 되도록 합시다. 가장 작은 것 까지라도 감사하는 심령이 됩시다. 골로새서 2:7에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감사가 넘쳐날 만큼 감사의 조건을 수집하고 삽시다.

오늘 본문 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는 마음은 바로 감사가 담겨진 마음입니다. 주변의 사람이나 환경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수집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마음에 간직하는 감사전문가가 됩시다.

 

감사 전문가가 되려면 감사의 행복을 누리는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어떤 것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소유해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전문가가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그것을 자기만 가지고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기술을 이웃과 함께 나눌 때에 진정 복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감사를 누리며 사는 진정한 감사 전문가가 됩시다.

다윗의 삶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감사를 풍성하게 연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의 삶에 큰 교훈과 감동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의 감사의 시편의 80%가 고난 과 환란 속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표현하며 사십니까 ? 오늘 본문 16절이 바로 감사를 연출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주변의 사람이나 환경 속에서 감사를 표현하고 연출하는 기술을 익히는 감사 전문가가 됩시다.

 

감사 전문가가 되려면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의 전문가로서 무엇보다 시편 50:23의 말씀 처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합니다.

누구나 들을 때에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합니다”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이 말을 제일 좋아하십니다. 진정한 사랑과 감사는 준비되고 잘 꾸며져야 더욱 돋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극적인 프로포즈가 여자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도 잘 꾸며져야 하나님이 열납하십니다. 우리의 감사가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고 하셨습니다. 감사의 제사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모든 언행에서 주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주님을 힘입어 사는 기술을 익히는 감사 전문가가 됩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감사 전문가가 됩시다. 주변의 사람들이나 환경 속에서 감사의 조건들을 발견하는 기술을 익히고 우리의 마음을 감사의 박물관이 되게 합시다. 감사를 연출하는 기술을 익혀서 우리의 삶으로 감사를 표현하며 모든 언행을 주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행하는 감사의 제사가 드려지는 복된 삶을 삽시다. 감사 전문가로서 그리스도의 평강을 누리며 말씀을 풍성하게 간직하고 나누며 삽시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못했던 삼중고의 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의 글귀를 읽어 드립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 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 처럼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벙어리가 될 것 처럼 노래를 불러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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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드리게 하소서 /로마서 14:5-9

 

가을은 두 얼굴을 가진 계절입니다. 하나의 얼굴은 풍요한 결실과 수확에 대한 감사의 얼굴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수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거두게 하십니다. 그래서 가을은 추운 겨울을 앞두고 쉼과 안식을 선물 합니다. 다른 하나의 얼굴은 한숨과 탄식의 얼굴입니다.게으른 사람에게 가을은 고난을 선물합니다. 가을은 추운 겨울을 앞두고 염려와 근심을 선물합니다.

다른 면에서 가을은 또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얼굴은 아름다움의 얼굴입니다.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우리는 가을의 단풍을 보면서 참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번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얼굴은 쓸쓸한 얼굴입니다. 앙상한 나무 가지만 남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황량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처럼 가을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얼굴로 다가옵니다. 저는 두 얼굴을 가진 가을의 중턱에서 오직 한 마음 바로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니 어떠한 정해진 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

추수감사절을 정하여 이 날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각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품고 감사드리기를 확정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불평이나 원망이 자리를 잡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해의 지나온 날들을 감사드립시다.

무엇을 소유했거나 얼마만큼 소유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지나온 한 해의 득과 실을 따지기 전에 한 해를 잘 지내온 것을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드립시다.

오늘 나에게 생명이 있어서 숨쉬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이 감사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현실의 자리를 살피며 항상 나는 내가 행한 것 보다 언제나 분에 넘치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항상 현실의 자리를 감사의 자리로 만드십시요.

 

기가 막히게 예비된 내일을 바라보며 감사드립시다.

우리는 좋으신 아버지의 예비하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내일 우리에게 주어질 생명, 그리고 그 생명과 더불어 주어지는 태양과 공기와 같은 우리의 환경의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2:9의 말씀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주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7을 읽어봅시다. 오늘 본문 6절과 7절을 비교해보면 대칭 되는 두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6절에서 강조하는 ‘주를 위하여’라는 단어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7절의‘자기를 위하여’라는 단어 입니다. 특별한 날을 정하고 특별한 예물을 준비하여 특별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방향이 ‘주를 위하여’인지 아니면 ‘자기를 위하여’인지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본문 8절에 고백된 바울과 같은 고백을 가지고 삽시다.

 

진정한 감사는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사는 것이 어렵습니까 ? 아닙니다. 오늘 본문 9절에 ‘이를 위하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살게 하기 위하여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은‘주님 먼저‘를 앞세우며 사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살기를 결단 한다면 추수 감사절에만이 아니라 범사에 ‘주님먼저’를 앞세우는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먼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감사드리고 현재 내가 이 자리에 있음을 감사드리고 기가막히게 예비된 내일을 바라보며 감사드립시다. 나아가‘주를 위하여’사는가 ‘나를 위하여 사는가’를 점검해봅시다.‘주를 위하여’ 살기위하여 ‘이를 위하여’ 먼저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 주신 주님만을 바라보고‘주님 먼저 ’앞세우고 살기를 결단하므로 주님의 은혜를 아는 진정한 감사가 넘치는 성도로서 한해를 풍성하게 결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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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 시편50:23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 사람마다 행복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러한 사람이 행복 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저는 누구나 다 수긍할 수 있는 답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감사를 느끼는 그 순간 만큼은 결코 우리가 불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우리에게 간절하게 주께서 복을 빌어 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범사에 행복을 느끼며 살라’는 주님의 기원입니다. 감사하는 대상이 범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지 어떤 일에든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 무엇보다 더 많이 , 무엇보다 더 정성껏 감사드려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족장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 바로 단을 쌓는 삶의 모습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특별히 레위기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사와 절기의 명령입니다. 성막과 성전의 가장 큰 의미가 무엇입니까 ? 제사입니다.

시편 곳곳에 보면 항상 감사를 드리며 감사를 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100편은 감사의 시편으로 그 전체가 감사의 노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전5:18이하/빌4:6/골2:7/골3:15-17) 특별히 골로새서3장 15절에서는 “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고 감사를 명령 했습니다. 16절에서는 “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고 감사의 방법을 제시해주었습니다. 17절에서는 “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 감사의 원동력을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곳곳에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감사의 백성이 되어 매일 감사로 살아가는 감사의 백성들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고 감사의 제사자가 e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시다.

 

그렇다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

 

1.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되면 우리의 삶 속에 강한 삶의 의욕이 주어지게 됩니다.

감사의 자세는 내 삶에 강한 생존력을 안겨 줍니다. (예/이삭)

2.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되면 우리의 삶 속에 항상 솟아나는 새 힘이 주어지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소생하는 새 힘이 그 열매로 주어집니다. 모든 것이 다 산산조각나고 절망의 먹구름이 몰려와도 감사를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다시 일어나는 새 힘을 주십니다. (요셉의예)

3.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되면 삶 속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힘이 주어지게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새로운 목표가 주어지게 되고 결단을 내려 전진하게 되기 때문에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는 우리의 성장력이 계속되어지게 합니다. (바울의예)

4.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되면 우리의 삶속에 강력한 성취의 힘이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적극적이 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현상유지로 만족하거나 그 자리에 주저 앉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성도가 자신의 구원에 만족하고 가만히 앉아 았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로버트슐러의 예)

불평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한 마음으로 사리사욕을 좇기 때문에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탐하다가 모든 것을 잃고 남도 망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은 일을 성취하고 남도 이끌어서 성취하는 자리에 세웁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 이번 추수감사절을 지낼 뿐 아니라 계속해서 감사로 제사드리는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강한 삶의 의욕과, 솟아나는 새 힘과, 끊임없이 성장하는 힘과, 강력한 성취의 추진력의 힘을 열매로 받아 한해를 옳은 행위로 결산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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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사 드립시다. / 전도서 7:13-14

 

우리의 삶은 동일한 삶의 굴레 속에서 비슷한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 되어집니다. 아무리 큰 변화가 온다해도 그것은 우리 삶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조로운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때마다 여러가지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며 사 수 있도록 다양성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도서 3:4에는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라고 말하였습니다.

지나온 한해를 정리해볼 때에 우리의 삶의 테두리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단조로운 삶의 테두리 속에서 우리는 또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추수라는 축복의 열매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 해를 심으며 시작하고 거두며 마무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을 명하신 것입니다. 추수감사는 수확에 대한 감사요 거둔 것을 저장함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실절과 수장절을 나누어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감사절기를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한 해를 감사로 마무리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우리 모두 다 이렇게 감사드립시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므로 감사드립시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믿고 감사로 바라보는 것이 범사를 감사로 사는 비결이 됩니다.

본문13절에 “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연이란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범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는 지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므로 감사드립시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하겠으며 하나님이 곧게 하신 것을 누가 굽게 하겠습니까 ? 우리는 삶의 두 얼굴 앞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욥기9:12/ 12:14 /로마서9:15/ 에베소서 1:11)

형통함을 기뻐하므로 감사드립시다.

기뻐하라는 말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으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형통한 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형통하게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경의 형통에 취하여 교만하지 말고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열리게 하십시요.

기뻐하라는 말은 삶의 의욕과 용기를 가지고 내일을 향해 힘차게 도전하는 자세를 갖추라는 말이 됩니다. 형통할 때에 기쁨에 도취되어서 그 자리에만 머무르는 자가 되지 말고 기쁨으로 다가오는 내일을 준비하며 도전하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십시오.

 

곤고한 날에 깊이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므로 감사드립시다.

본문에서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곤고함이 올 때 생각하는 자세를 가지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감사로 한해를 정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먼저 , 곤고한 일들을 통해 자신을 돌이켜 보며 생각하고 회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곤고한 날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하여 주님의 뜻을 찾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의 행하심을 감사함으로 주목하여 보므로 감사드립시다. 범사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맡기는 감사의 마음을 가짐으로 감사를 드립시다. 한해의 형통한 날들을 주신에 대하여는 다시 한번 기뻐하며 감사드립시다. 곤고한 날에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 것을 깨달음으로 감사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