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전 13:1-7)
주님의 영성교회 / 설교: 권다니엘 목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 이어 13장에서 ‘더욱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까닭은 나와 타인, 교회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를 받고 공동체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서로 다투고 대립하고 분열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동체에 가장 큰 유익으로 드러나는 은사는 사랑이라고 설파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더욱 큰 은사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➊ 사랑만이 외적 은사를 내적 은사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적 은사는 반드시 내적 은사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은사가 자신을 과시하는 도구가 아닌,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봉사, 혹은 헌신의 도구가 된다고 했습니다. 신유 은사를 받았다면 누군가를 영적 건강인으로 일으켜 세워, 자기 육체의 모든 문제에서 자유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은사를 헌신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❷ 사랑만이 성령님의 열매를 결실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은사와 성령님의 열매는 다른데, 이 둘의 차이는 인격의 변화 여부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인격의 변화 없이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와 관계없이 신유의 은사를 받을 수 있고, 방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열매는 인격의 변화 없이는 맺어지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외적 은사가 내적 은사로 승화된다는 것은 성령님의 열매로 결실되는 것이며, 그것은 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은사가 외적 은사 자체로만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변화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의 변화가 더욱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열매가 복수형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단수형으로 쓴 까닭은 아홉 가지 열매가 각각 다른 열매가 아니라, 첫 번째 열매인 사랑과 이 사랑의 여덟 가지 다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이 오래 참음으로도 드러나고, 평화와 절제 그리고 온유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더욱 큰 은사인 것입니다.
❸ 율법이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의 문자적 의미는 ‘사랑한다’로 그 동사원형은 ‘아가파오’ 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 ‘기뻐하다’
사랑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군가를 생각하기만 해도 마냥 기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름만 떠올라도 불쾌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증오하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당사자를 기쁘게 하고, 기뻤던 것만 생각나게 합니다. 사랑은 마음속에 기쁨을 품고 다니는 것입니다.
ⓑ ‘잘되기를 바란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대학 입시를 앞둔 자녀를 위해 새벽부터 교회 나가 기도하는 부모를 봅니다. 모두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옆집 자식이 삼수를 해도 그 집 자식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내 자식만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면 잘되기를 바랍니다.
ⓒ ‘귀하게 여긴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의 소유를 귀하게 다룹니다. 사랑하면 상대의 생각과 계획을 귀하게 여깁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살아가는 방법과 행하는 일을 귀하게 여깁니다.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인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스필버그는 초등학생이었을 때, 지렁이나 도마뱀을 잡아 와 방에 두곤 하였습니다. 보통 어머니라면 그것들을 다 내다 버리고, 아이를 혼 낼 것입니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어머니는 ‘우리 아이에게는 이런 특성이 있구나’ 하고 아들의 특성을 귀하게 여겨, 지렁이든 도마뱀이든 오히려 병에 넣어 잘 보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면, 지렁이와 도마뱀은 말할 것도 없이 희한한 것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만약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스필버그의 특성을 귀하게 여겨주지 않고 부정해 버렸다면, 독창적인 영화감독 스필버그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본문에서 정의하는 사랑의 소극적 정의에 대해 알아본 후 적극적 정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소극적 정의
➊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소극적 정의의 첫 번째가 ‘시기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사랑을 깨뜨리는 첫 출발점이자 원인이 시기라는 의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시기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훨씬 폭넓어질 수 있습니다. 시기는 그릇된 경쟁의식의 산물이기에 항상 상대적인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귀결되어 고통을 안겨줍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성령님의 은사가 성령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임을 망각하고, 마치 자기 능력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처럼 서로 시기하며 자기 은사가 더 크다고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큰 은사를 받은 것 같은 사람 앞에서는 열등감을 갖고, 반대의 경우에는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그들 간에 사랑이 가능할 리 만무했습니다.
경쟁의식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나쁜 것은 그릇된 경쟁입니다. 그릇된 경쟁은, 그 경쟁을 열등감과 우월감의 발로로 삼기 때문에 항상 시기가 따릅니다. 그러나 경쟁의식에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서로의 진보를 위해 경쟁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 축하와 격려를 나눈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❷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하다’는 그리스어 ‘페류오마이’ 는 허풍선을 뜻하는 ‘페르페로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자랑은 과장하는 것입니다. 자랑은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해 주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자기 우월성을 과시하거나 반대로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행위를 계속 과장하게 됩니다. 내가 나의 행위를 자랑하고 과장하는 한, 나와 관련된 사람들은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과의 사랑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시기하면 반드시 자랑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다’는 그리스어 ‘휘시오오’는 ‘부풀리다’라는 의미입니다. 자랑은 자신의 행위를 과장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과장이 계속되다 보면 아예 자기 자신을 부풀리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실제의 자기보다 자신을 훨씬 높고 큰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실제 자기 자리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자신을 앉히는 것입니다. 그 부풀려진 허상의 자리에 앉아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는 것인데, 교만의 자리에 앉으면 상대가 자기에게 맞춰 주어야 합니다. 그 상태에서 사랑은 불가능합니다.
❹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하다’라는 그리스어 ‘아스케모네오’ 는 상대방에게 돌아가야 할 존경과 명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마땅히 상대를 칭찬해야 할 때 칭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그 일을 해낸 것은 자신의 도움 때문이고, 상대가 높은 자리에 오른 것도 자신이 밀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존경과 명예를 인정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수고한 사람에게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해야 할 상대에게는 “정말 감사합니다.” 하고 존경과 명예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❺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자기 것만 집요하게 구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은 그 누구도 안중에 없고, 자기만 기분 좋고 배부르면 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랑은 그 반대입니다.
❻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여기서 ‘성’은 ‘발작적인 분노’를 의미합니다. 자기 것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것이 해를 입는다고 여겨지면 발작적으로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발작적으로 분노를 발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뿐 아니라 타인에게 스스로 날카로운 흉기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해치고 타인도 해치게 됩니다. 술집에서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가 흉기로 상대를 죽였다는 기사를 접하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발작하여 스스로 흉기가 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화를 한 번도 내지 않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엡 4:26-27)
성경은 우리가 화를 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흉기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아침에 화를 내었는데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 분노에 사로 잡혀 있다면, 그것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한 번이라도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돌아보았다면, 적어도 잠자리에 들 때까지 분노의 노예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화를 내어도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그럴 때 분노의 영이 내 안에서 집을 짓게 됩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 곁에 과연 누가 함께 있고 싶어 할까요?
❼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기뻐하다’ 라는 뜻의 그리스어 ‘카이로’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 를 의미합니다.
불의를 저지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불의를 저지르면 저지를수록 자기에게 더 유익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저질러 죽음과도 같은 손해를 보게 된다면, 아무도 불의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불의를 통해 더 큰 유익을 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반드시 셈하실 것입니다. 사랑은 모두를 생각하는 힘이기에, 설령 자기에게 유익해 보인다 해도 불의를 기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소극적 정의는 그 전개되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시기하면 자랑하게 되어 있고, 자랑하면 자기를 높이 올려 교만하게 되어있습니다. 교만하면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존중과 명예를 부정하고, 결국 자기 것만 요구하는 독선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것이 부정당할 때 발작적으로 반응합니다. 그 사람은 공동선을 해치는 악한 길에 누구보다 밝은 사람이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라면 불의를 저지르고도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 위한 관건은 시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시기에서 시작됩니다. ‘시기한다’ 라는 그리스어 동사 ‘젤로오’ 는 ‘젤로스’ 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젤로스’ 는 '열심', '열정' 을 뜻합니다. 매사에 열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시기하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열정이 없는 사람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열심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교회 일이나 무슨 일에 열심을 낼 때, 이 열심과 열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누구를 위한 열심인지, 나의 열심인지, 하나님의 열심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사도 바울은 자신의 열심으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기에 자기 열심으로 일하면 일할수록 누군가를 해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열심은 언제나 생명과 사랑의 열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겸손한 도구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사랑과 생명의 역사를 열심히 이루어 가십니다.
2) 적극적 정의
❶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그리스어 ‘마크로뒤메오’ 는 대항하고 싶지만 힘이 부쳐 체념하는 참음부터, 능히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스스로를 누르는 참음까지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적극적인 사랑의 출발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참지 못하면 끝나고 맙니다. 사랑은 일단 참고 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유난히 잘 참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수록 실제로 잘 참지 못합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많이 참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10초만 참아도 참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은 평소에 잘 참지 못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습니다. 잘 참는 사람은 참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도 참고 있기 때문입니다.
❷ 사랑은 ‘온유합니다’
여기서 ‘온유’란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내가 일단 참으면 그다음에 상대를 보았을 때도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참지 못해 발산할 것을 다 발산해 버렸다면, 그 다음에는 상대를 보는 눈이 경직되게 되어있습니다. 참아야 평상심 속에서 계속 친절할 수 있고, 관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진리 자체를 기뻐하는 차원을 넘어 진리 때문에, 진리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진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무척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이유는 진리를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공부하면 재미있습니다. 진리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진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내가 아는 그 진리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❹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그리스어 ‘스테고’ 는 덮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어로 지붕을 ‘스테게’ 라고 하는데 ‘스테고’ 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지붕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을 덮어 준다는 것은, 내가 그의 허물에 압도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공개하고 이야기 하는 것은, 내 눈에 허물로 보이는 상대의 결점과 약점이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허물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허물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12)
만약 자식의 허물이 보이고 그 허물이 부모를 압도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사람 보기에 허물투성이인 자식이라도 부모에게는 사랑스러운 것은 자식의 허물이 부모를 지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허물을 덮어 주며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❺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이것은 ‘오래 참는다’ 와 그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밑에 머물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랑은 상대의 아래에 거하는 것이며, 그것은 상대방의 입장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상대방 아래에 서면 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의 신을 신고 십 리를 걸어 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면, 평소 이해할 수 없던 그의 언행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 대한 적극적 정의에 일곱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첫 단어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단 참으면 계속 친절할 수 있고, 참으면 진리로 인해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참으면 그의 허물을 덮어 줄 수도 있고, 그를 믿어 줄 수도 있고, 그의 미래에 대해 소망을 잃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면 그의 입장에 서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극적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적극적 사랑은 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눅 7:40-4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사랑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사함을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사랑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적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적게 받았다는 것은, 거꾸로 이야기하면 자신이 그만큼 죄를 덜 지었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이 그만큼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모르기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도 알지 못하는 법입니다.
축구공 그 자체는 별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죽 제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축구공이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면, 축구공이 없이는 위대한 축구선수의 기량을 전혀 보여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호나우두 선수의 신기에 가까운 슛도, 박지성 선수의 뛰어난 기량도 모두 축구공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대한 축구선수의 발 앞에 놓인 축구공은 더 이상 축구공이 아닙니다. 그 축구공은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축구선수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구공으로 인해 열광합니다. 우리는 2002년 당시 축구공의 위력을 실감하였습니다. 온 국민이 붉은 셔츠를 입고 한데 모여, 축구공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일희일비했습니다.
고작 칠팔십년을 살다 한 줌의 재로 끝나 버릴 우리 인생 역시 축구공 그 자체처럼 미미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절대적 가치를 지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는 손과 발이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의 손과 발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손을 통해 우리의 발을 도구 삼아 당신의 거룩하심, 자비로우심, 사랑을 세상에 보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한, 우리의 생은 절대적 의미와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또 우리는 그분의 도우심 속에서 역사의 지평을 뒤흔드는 진짜 크리스천이 될 것이며, 우리의 퇴장은 영원한 등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