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성경 눅1:30~38

제목 또 한 번의 성탄에

매년 이맘 때면 이곳 비엔나에는 성탄시장이 열립니다.

시청 앞에도 있고 쉔부룬에도 있지요. 여러분은 가 보셨나요?

저는 아직 안 가봤는데, 성탄절이 돌아오기 전에 한 번쯤은 가 보려고 합니다.

어른들이야 이제는 안 그렇겠지만 젊은이들은 아직도 성탄 시즌이 오면 괜히 설레는 게 있지요?

이때가 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는데,‘러브 액추얼리’라는 영화입니다. 다들 보셨지요?

휴 그랜트, 리암 니슨, 키이라 나이틀리 등등 영국의 내로라 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영화인데 여러 가지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요.

결국 큰 틀은 뭐냐?

성탄 때 만큼은 진실해야 하고, 그 진실을 전제로 한다면 용서 받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고백만큼은 받아주고, 실수한 사랑도 용서해 줍니다.

이런 것을 비롯해서 성탄 시즌에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분위기가 온 세상을 덮지요.

인터넷이 발달한 후로는 급격히 줄었지만 우리가 보내고 받는 성탄카드에도 그런 분위기는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것 저런 것 다 통틀어서 모든 매체가 성탄 때 전하고 싶은 메씨지는 딱 하나입니다.

‘축하한다’는 겁니다.

우리 역시 매년 성탄절이 돌아오면 축하 예배를 드리고, 하루 전날에는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면서 그 동안 우리가 닦았던 재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대를 주후 1세기 첫 번째 성탄 때로 돌리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집니다.

현대의 들뜨고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그때의 세상은 혼돈과 분열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다지 평화롭지도 거룩하지도 못한 황량한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이들이 이 대강절 넉 주 기간에 반드시 거쳐가야 할 것은 주후 1세기의 첫 번 째 크리스마스입니다.

한 번쯤은 진지하게 당시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인류에 저지른 죄를 잊지 않기 위해서 괴롭고 아프지만 일년에 몇 차례고 자기들이 저지른 행태를 보고 또 봅니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또 다시는 똑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역시 한 주 정도는 암울한 주후 1세기의 첫 성탄 때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의 이면을 봄으로써 그 뜻은 더 확실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신경 써서 담아야 할 메씨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냥 들으시고 이해 하시고 공감만 하셔도 충분합니다.

두서 없이 말씀 드리는 상황설명이 2/3이고 나머지가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이 될 겁니다.

혹 그런 가운데도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는 성령의 손길이 있다면 그것을 꼭 붙잡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부부 가운데는 지금도 한 쪽은 유대교인이고, 한 쪽은 기독교인인 경우가 꽤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 살다가도 서로 가장 심한 논쟁을 벌일 때가 언젠가 하니 성탄 절기라고 합니다.

유대교 절기 중에는 우리 기독교의 ‘대강절’ 즈음에‘하누카’란 절기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유대인들 소수가 엄청난 대군을 물리친 적이 있는데, 밤중에 수많은 불들을 켜 놓고 자신들의 진지에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속여서 적군을 퇴각시겼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먼저 부인이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는군요.

“당신! 하누카 축제 때문에 너무 신경 많이 쓰는 것 아니예요. 설마 당신은 그 전설 같은 얘기를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면 이번엔 남편이 이런 식으로 받아 친답니다.

“오! 그러셔? 그러면 크리스마스는 어떻고? 성관계도 갖지 않고 임신한 어떤 십대 소녀에게 천사가 나타났다는 얘기를 당신은 정말 사실로 믿는단 말이오?“

솔직히 여러분 중에는 처음 복음서를 읽으면서 이 유대교인 남자와 비슷한 의심을 가진 분이 있을 겁니다.

사실 사건의 초자연적인 측면을 믿는 사람들조차 후에 닥쳐올 큰 어려움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나이 든 삼촌은“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눅1:71)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그리고 시므온 선지자도 처녀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고 우울하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크리스마스 광경은 영화든 카드든, 지구라는 별 위에서의 한 삶을 다분히 감상적으로 단순화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그런 그림이나 영상을 막연한 사실로 믿지요.

하지만 말씀 드린 대로 정작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크리스마스 카드 중에는 마리아가, 천사가 이제 너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다 알려주는 모습을 조용하고 얌전하게 두손 모아 받아들이는 그림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천사가 나타나자 정작 마리아는 몹시 놀랍니다.

그리고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즉 천상의 일에 대해 예언하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세상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묻습니다.

“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눅1:34) 그럽니다.

미국 사회는 요즘도 해마다 백만 명의 소녀들이 혼외 임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는 마리아가 처한 어려움 정도야 별 대수롭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결속력이 강한 1세기의 유대 공동체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천사가 전해 준 소식을 믿거나 환영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라는 거지요.

약혼한 여자가 임신할 경우, 율법은 당시에도 그것을 돌로 쳐죽여 마땅한 간음으로 규정했습니다.

요셉은 또 어땠습니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관대한 사람이라 마리아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파혼절차를 밟으려고 했지요.

아마 천사가 요셉의 생각을 수정해주지 않았다면 그는 처음에 마음 먹은 대로 결행했을 겁니다.

당황한 마리아는 자신이 당한 일을 이해해 줄 만한 사람에게로 허둥지둥 달려가지요.

엘리사벳이었는데요.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나타나서 예언을 한 후, 정말 기적적으로 회임한 여자였습니다. (이 엘리사벳이 누구지요? 세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이종 형제쯤 됐던 겁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 모든 일을 믿어주고, 더불어 기쁨을 나누지요.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 후의 말씀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두 여자의 처지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엘리사벳은 기적적으로 소생된 태로 인해서 온 마을 사람들로부터 축하의 말을 듣지요.

하지만 마리아는 수치를 당할까 봐 두려워서 기적을 숨겨야만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세례 요한이 출생하지요?

산파들이 몇 사람씩 동원되고, 친척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온 동네는 전통에 따라 노래를 부르며 또 하나의 유대인 남자의 출생을 축하하지요.

그로부터 여섯 달 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서 예수가 탄생합니다.

어땠지요?

산파도, 친척들도, 마을 사람들의 축하노래도 없었습니다.

아마 유대인의 여느 가장 같았으면 로마 관할 관청으로 가서 호적등록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드는 거예요.

왜 요셉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굳이 베들레헴으로 간 걸까?

아무리 황제의 명령대로 호적을 해야만 한다 그래도, 마리아쯤 되면 양해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든 생각인데, 출산 날까지 고향에 있었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됐을까요?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고향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요셉의 베들레헴 행은 혹 마리아를 배려했던 처사가 아닐까요?

상황 전체를 놓고 보시지요.

시골 구석에 살던 두 십대 남녀의 반응여하에 따라서 인류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물론 산아제한을 할 수 없었던 때라 아이는 어떻게든 낳아야 됐겠지요?

하지만 그 아기가 단순 사생아가 되느냐, 구세주가 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에게 달려있는 겁니다.

태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발길질을 할 때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하고 간 말들을 수도 없이 곱씹었을 겁니다.

또 요셉은 어땠을까요?

점점 불러가는 마리아의 배를 마을 사람들은 과연 고운 시선으로 바라봤을까요?

그걸 보는 요셉은 수치심으로 낯이 뜨거워지지 않았겠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천사와 만난 그 사건이 정녕 꿈은 아니었나?”숱하게 번민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상하게 예수님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습니다.

그래도 만약 계셨다면 그 분들은 또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마리아와 요셉이 둘 다 십대 어간에 있었을 테니까 분명히 부모님들이 계셨을 겁니다.

그 분들도 오늘날 원치 않게 임신한 십대들의 부모처럼 그렇게 반응했을까요?

자녀들의 그 창피스런 실수로 격분하고 한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상종도 안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그렇게 지내다가 막상 손주가 태어나니까, 그 새털같이 보드라운 볼을 비비면서 그 동안 쌓였던 앙금을 털어버렸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손주를 당연히 한 집안 식구로 받아들였을까요?

하여간 아홉 달 동안 어색한 변명은 계속 됐을 겁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추문을 화제 삼아 입방아들을 쪘을 겁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견뎠을 텐데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초입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 기사가 아주 자세히 나옵니다.

그 와중에 좋은 일도 있었지요.

목자들이 찾아와서 찬양하고 동방박사들도 왕을 알아보고 귀한 예물을 들고 와서는 경배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잠깐 동안의 시간이 지나가자 베들레헴 부근엔, 현대의 홀로코스트 정도는 아니지만 그 부모들에겐 그보다 더한 것으로 느꼈을 재앙이 일어납니다.

헤롯이란 정신병자 왕 때문에 아기들이 다 학살되지요

예수님의 부모들은, 멀리 이집트 땅으로 피난을 가야만 됐습니다.

그 심경이 어땠을까요?

마리아는 단 며칠이라도 산후 조리라는 걸 해 봤을까요?

아기 예수님은 또 어땠을까요?

빈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출산되고 출산 후엔 누울 곳이 없어서 말 먹이통에 들어간 것까지야 참을 수 있지만, 낳자마자 장거리 여행을 해야 되는 그 운명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비행기라도 있었다면, 기차나 장거리 버스라도 있었다면, 그것도 아니라면 변변한 말이라도 한 필 있었다면 그 처량한 마음은 그래도 덜 했을 겁니다.

인간이 되기로 작정했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아주 혹독한 규칙들을 적용하셨습니다.

“꼭 그렇게 하셔야만 됐나?”

이게 예수님의 탄생기사 전체를 대하고 난 후의 저의 소감입니다.

매년 성탄 시즌이 되면 우리가 접하는 현상은 이제 너무나 낯익지요?

캐롤로 노래되고, 성극을 통해서 얘기되고, 각종 카드로 묘사되고…

이런 것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그 현상 배후의 메씨지는 간과하기 쉬운 게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기간에 우리는 한 번쯤 자문해 봐야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통해 내가 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여러분 중에는 분명히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텐데, 지난 삼 년 동안 저의 성탄절 설교는 같았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로 지금 제기한 것에 대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기 때문에 잘라서 한 두 가지씩 말씀 드렸다 뿐이지, 성탄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될 메씨지는 언제나 같습니다.

그 중에 오늘 두 가지를 다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들으셨던 분이라도 또 다시 새기셨으면 합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신화에서든 전설에서든 많은 신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거기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상에 오시되, 급한 회오리바람이나 삼킬 듯한 불의 세력처럼 그렇게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만물을 만드신 그 분께서는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습니다.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으로 오신 것이지요.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분열을 계속해서 마침내는 불안에 떠는 십대 소녀의 태중에서 커져갈 난세포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온 우주를 호령하시던 하나님이셨고, 세상의 모든 군대와 제국을 장기판에 말 다루듯 하시던 하나님이셨는데요.

그런 분이 이 땅에 내려 오실 때는 말도 못하고, 딱딱한 음식을 못 먹으며, 대 소변도 못 가리고, 어느 십대 소녀의 품을 유일한 피난처로 삼고, 그 소녀에게서 음식과 사랑을 공급받아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왜 꼭 그래야만 했을까요?

여러분은 가끔 이 세상의 고관대작이 사람들 앞에 납시는 방식을 보셨을 겁니다.

어떤 모습이던가요?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웅장한 팡파르에 맞춰서, 온갖 치장을 하고 호사스런 의복을 걸치고 등장합니다.

오래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미국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여왕의 행차에 수반되는‘의전품’ 목록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행사마다 두 벌씩 준비한 의전용 의상이 있었고, 방문 중 누가 죽었을 경우를 대비한 상복들, 그리고 19리터들이 혈장액, 그리고 변기깔개 등등을 포함해서 그런 짐 가방 무게만 1,800 kg 나 됐습니다.

여왕이 잠깐 외국에 방문하는 것도 한 번 행차에 26억원이란 돈이 우습게 소비된 겁니다.

그런데 그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지상방문은 어땠습니까?

한 짐승의 거처에서 수행원도 없이, 말먹이통 말고는 탄생한 왕을 누일 곳조차 없는 비천한 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목격자들은 아마 인간보다는 짐승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당나귀가 그 왕의 탄생에 보조를 맞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늘은 천사들로 인해서 잠깐 광채를 발했지만 과연 누가 그 광경을 봤을까요?

다른 사람의 양떼나 대신 쳐 주던 고용인들, 제 이름자 하나도 쓸 줄 모르던 천출들 아니었습니까?

이방인들과 똑같은 인간들로 분류되어서 성전 바깥뜰 외에는 더 들어올 수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처음으로 보이셨던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상방문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끝없이 낮아지라는 겁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낮아지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겸손이란 겁니다.

인간은 조그마한 것 하나라도 해 내면 그게 자기가 한 줄 알고 금방 우쭐댑니다.

여러분!

뭔가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마다 반드시 말먹이 통에 누워있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겸손이 여러분의 성품 그 자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 분께 배우는 것은 친근함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신 배려라는 겁니다.

사실 어떤 종교라도 자기 신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걸 보면 만만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힌두교도들은 신에게 접근하는 방식으로 신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도하지요.

불교도들은 일, 이백 배도 부족해서 일천 배 절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대다수의 종교적 전통에서 여러분은 뭘 느끼십니까?

아마도 그것은 두려움일 것입니다.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라는 겁니다.

구약의 유대인들 역시 신에 대한 예배 하면 두려움을 연상했습니다.

모세의 불붙은 떨기나무, 이사야의 뜨거운 숯, 에스겔의 환상 등등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불에 타 죽거나 야곱처럼 반신불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 어린이들은 접근하기만 하면 누구나 죽는 거룩한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배웠습니다.

언약궤를 잘못 만지면 누구든 죽었고,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살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이 말구유의 아기라는 놀라운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사지를 옹송그린 채 누워있는 신생아에게 무서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무엇을 말하고자 하신 걸까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되 이제는 결코 두려움이 개입되지 않는 방식을 찾아내신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 중에 수족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저술가가 자기 경험을 책에 쓴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렇게 잘 비유했을까 감탄했었습니다.

바닷물 수족관을 관리하기란 여간 힘 드는 게 아니랍니다.

질산염 농도와 암모니아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간단한 화학실험실까지 갖추어야 한답니다.

비타민이나 항생제, 설파제 따위를 투입하고 수족관 바닥에서 자랄 효소까지도 충분히 넣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수족관 물 전체를 유리섬유와 숯으로 걸러낸 다음 자외선으로 살균해야 합니다.

그 분의 얘기가 그렇습니다.

수족관의 물고기를 위해 그토록 애를 썼으니 고기들이 최소한 고마워할 것 아니냐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오히려 수족관 근처에 자기가 얼씬거리면 고기들은 잽싸게 조개 껍데기 속으로 숨더라는 거예요.

고기들이 자기에게 느끼는 감정은 딱 하나, 두려움 밖에 없더라는 겁니다.

하루에 세 차례씩 수족관 덮개를 열고 먹이를 뿌려줄 때조차 고기들은 자기 행동이 자기들을 괴롭히는 신호로만 알더라는 것이지요.

해서 자기는 도저히 고기들에게 자기의 진정한 관심을 전달할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뭘까요?

고기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주인은 신이었던 겁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주인은 너무나 컸고, 그 주인의 행동은 이해가 불가능했던 겁니다.

주인이 아무리 자비로운 행동을 한들, 아마 고기들은 그것을 만행으로 여겼을 거예요.

치유의 손길은 마수로 비쳤을 것이고 세심한 배려조차 위협으로 느꼈을 겁니다.

그런 얘기를 써 놓고 그 분의 고백이 이랬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점점 깨닫게 된 게 뭐냐 하면, 고기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자기 자신이 고기가 되는 화육적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정말 자기가 물고기가 돼서 고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고기들에게 자기의 진심을 알릴 길이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너무나 멋있게 설명한 게 아니겠어요?

사실, 인간이 고기가 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기가 된다는 것은 더 말도 안됩니다.

그 둘의 차이는 비교할 차원이 못됩니다.

그럼에도 그 일은 실제 베들레헴에서 벌어졌습니다.

물질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 물질의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마치 화가가 자신이 그린 그림의 한 점이 되듯이, 극작가가 자신이 쓴 대본의 한 등장인물이 되듯이, 하나님은 실제 역사의 각 장마다 배우들을 등장시켜 가면서 이야기를 쓰신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곧 육신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토록 우리와의 거리를 줄이신 하나님께, 이토록 두꺼운 장벽을 깨신 하나님께, 이제는 편안하게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아기에게 나아가는 길은 더 이상 무섭지도 두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깊은 구렁이 놓인 게 아니라 예수라는 가교가 놓여 있습니다.

친근함으로 성육하신 우리 하나님께 나아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성탄절기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갓난 아기로 오신 그 뜻을 되새기신다면 감사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여러분의 일상으로까지 연결시키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서 좀 기다릴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이겨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상황이 좋아지면 좋아지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의외로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이 복 주실 워밍업의 시간임을 믿으시고 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참 감사가 어렵긴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8월에 제 책이 나오자마자 감리교의 저명한 목사님들과 또 멀리 있어서 만날 수 없는 지인들에게 책을 우편으로 보냈는데, 그럭저럭 100권 가까이 됩니다.

공짜로, 더군다나 발송료도 만만치 않더군요.

그런데 지금까지 제게 감사연락을 해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걸 바라고 책을 보낸 건 아니지만 좀 섭섭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그 책이 쓰레기통으로만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이 절기에 감사하시고 그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성탄절 때 좀 준비 하셔서 헌금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그 헌금을 구제하고 이웃과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데 사용해 보십시다.

물질이 부족하다면 시간이라도 드리시기 바랍니다.

지난 몇 년 동안 12월 24일 밤은 정말 즐거운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에이레네, 평화의 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교우들이 공연을 했는데, 올해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적어서 주최하는 청년들이 너무나 힘들어 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시간을 내시고 여러분의 재주를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땀과 시간이 하나님께는 곧 기쁨 그 자체입니다.

바쁠수록 여러분이 내는 시간과 헌신은 값어치 있을 것이고, 주님은 그것을 향기로운 제사로 받으실 겁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탄 절기는 매년 오는 것이고, 우리는 그때마다 들뜬 분위기 이면에 있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기억해야 합니다.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실들을 상기하고,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작아지신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늘 겸손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기에게 느끼는 그 친근한 감정으로 이제 주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두껍고 강해보 이는 장벽은 무너졌습니다.

십자가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오십시오!

또 이 절기에 온 맘 다해 감사하시고, 그 감사를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물질로, 시간으로, 헌신으로 주님께 그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통과한 후에 오는 참답고 개운하고 즐거운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