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브리서 강해 - 개관(1) ♣
지상겅좌 / 권다니엘 박사
어떤 사람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를
유대인을 위한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적인 요소가 가장 많은 마태복음도 유대인을 위한 성경일까요?
성경은 그 시대에 있는 사람들과 교회뿐만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족속들을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히브리'라는 의미로 ‘강을 건너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고,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홍해와 요단강을 건넌 것은 애굽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건너온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말하면 수동적 차원에서
능동적 차원으로 넘어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 홍해를 건너 해방이
되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자유자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란 말은 이와 같이 강을 건너 온 민족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히브리란 말의 영적인 의미는 아담 안의 율법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들의 자유로 건너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되어 가는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완성의 차원에 이르는 패러다임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종이 되도록 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과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거저 얻어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는 길이 없는 곳입니다.
양식이 없고 물이 없는 곳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모르면 아직 광야의 신앙입니다. 은혜만 알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양식을
내 영혼이 섭취하지 못하면 아직도 광야 신앙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가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리라'(요7:38) 하셨는데
만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수의 맛을 보지 못하면 아직도 광야의 신앙입니다.
다만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섭리하는 표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함께 하신다고 믿으므로 그런 표적이 나타나길 기다리는
신앙이 바로 광야 신앙입니다. 이걸 보고 은혜 아래 있는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 진리의 신앙이 뭐냐 하면 가나안 땅 곧 약속의 땅, 자유의 땅에
들어가서 심고 거두는 신앙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열매 맺는 신앙입니다.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급자족이 됩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인 종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두 가지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죄의 속박 속에서 자유를 누려야합니다.
바로 율법과 저주와 사망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둘째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에서만 자유를
얻고는 자신이 전혀 통제가 안 되고 있음을 봅니다.
죄의 속박에서는 자유를 얻었는데 진리안의 자유를 못 얻었어요.
진리안의 자유는 장성한 자의 몫입니다.
저는 운전을 안하지만 운전하는 분들을 보면 가끔 법을 어기는 것을 봅니다.
만약 도로에 차선이 없어지면 아무렇게나 운전을 해도 교통법에 의해서 자유입니다.
아무렇게 다녀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차선을 그냥 두고 내가 도로
교통법을 잘 지킬 수 있는 운전 실력으로 그 법을 지키면 법이 있는 자유자가 됩니다.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결코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사실 그 분이 죽으실 때 그 분만 죽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다 끌어안고 죽으신 겁니다.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사시므로
아담 안에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옮기셨습니다.
참으로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말씀을 통하여 저 쪽에 있던 우리를 이 쪽으로
옮겼다고 하시고,‘너희가 내 말을 믿고 수용하면 그리스도가 이루신
대속의 역사가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의로워 진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말씀이 가까워 내 마음에 있고, 내 입에 있으니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8-9)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믿고 건너온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실 때에 아담 안에 있는 우리를 탈취해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옮겼다는 사실을 이제 말씀을 통하여 알게 하는 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너 갔다는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그 이름을 영접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1:12)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낸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걸 복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 믿음에 의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온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1절이 말씀한‘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는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마라 다시는 율법의 종인
것처럼 살지 마라’는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5장과 6장대로 라면 이제는 죄의 종도 아니요, 사망의 종도 아니요,
마귀의 종도 아니요, 우리는 의와 생명의 종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고 하십니다(롬6:11)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믿어 버리고 계산해 버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그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다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의 종노릇 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종은 수고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종은 행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과정을 보면 종에서 어린아이,
그 다음이 장성한 자들이 됩니다.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긍휼이 적용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탄식과 신음소리를 항상 들으십니다.
우리도 죄의 종노릇 할 때에 그 참상의 신음소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의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셨고,
또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이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는 신음소리를 낼때에
하나님이 들으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때마다 우리는 탄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율법에서 은혜는 어느 순간 뻥하고 열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듣는 순간 단 번에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밤중에 느닷없이 하나님이 나가라 하시고,
모세가 가자고 하니 그들이 앞뒤 잴 것 없이 엉겁결에 나온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은혜에서 진리로 들어가는 것은 반드시 공의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을 좇으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라고 하시는 겁니다.
은혜는 심판이 유예되지만 진리는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은 좋아해도 진리의 말씀은 싫어합니다.
마태도, 베드로도, 바울도 좇았으나
부자 청년은 그만 근심하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왜? 자기를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은데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고 말씀합니다.
청함을 받을 때는 그냥 엉겁결에 불려 나옵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들어 갈 땐 반드시 공의가 적용됩니다.
이 공의는 죄인인 나는 반드시 죽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됩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 건너 편에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묶고 있는 육신을 포기하고 주님께 귀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된다고 로마서 2장2절은 말씀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 아래에서 어린아이로 있고 싶어 하고
진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너무 어렵다고 여깁니다.
영원한 자신은 받아들이고 찰나적인 육신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는 원론적인 구원이 있고 개인의 주관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이 작정하실 때 이미 우리 구원이 끝이 났습니다.
원론적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간다는 뜻입니다.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점진적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아들로 택하시기로 이미 예정하신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아래 죄의 종으로 있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 가운데 왔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내 말이 너희 가운데 거하면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공의가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바로 공의와 사랑의 양면입니다. 죄는 심판이 되고 난 다음
구원이 일어나기 때문에 한편은 공의이며 다른 한편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반드시 심판을 동원합니다.
반드시 심판될 것은 심판된 다음 거기에서 구원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할 때도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행2:38)
함과 같이 공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죄인 된 육체가 세례로 말미암아 심판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몸이 세례 곧 죽음에 잠긴 다음 다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에 잠겨야 합니다.
잠긴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하고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야만 성령을 선물로 주시리니 하십니다.
반드시 구원은 심판을 동반합니다.
우리의 영과 육이 함께 구원받는다는 법은 결코 없어요.
우리의 영이 먼저 구원을 받고 우리의 육신이 영의 명령을
좇을 때에 범사까지 형통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로마서 8장 10절 말씀을 보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이라” 일단 몸은 심판아래 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의로 인하여 영원히 산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성령의 보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1장 13-14절은
“우리가 듣고 믿어 성령으로 인 쳤느니라.”
이것이 바로 생명 있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나의 옛 사람은 주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히브리서의 내용을 개관해 보면
☆ 1장은 “아들과 천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천사와 아들은 신분과 역할이 분명히 다릅니다.
☆ 2장은 “아들과 형제의 문제”입니다. 목회 서신과 교회 서신에는
청함을 받은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허다한 무리가 따랐습니다.
항상 주님은 그들에게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온지라.
입을 열어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자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니라(마5:1-3)
허다한 무리가 따랐지만 예수님이 산위에 앉으시니 그 앞에 제자들만 나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서 병도 고치고,
소경이 눈을 뜨게 하고, 귀가 들리도록 고쳐 주셨지만
그들에게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잘 보세요.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중에 하나는 나를 팔자니라 하시니
요한이 내니이까? 묻습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찍어 주는 자니라.
그 당시 성찬식은 저녁식사입니다.
식사가 될 만큼 주어야 하는데 유다에겐 한 쪽만 주십니다.
이미 자기 몸을 상징하는 성찬식에서부터 가룟 유다를 제외 시켜 버린 겁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은 가롯 유다가 나가고
난 다음 열한 제자에게만 말씀하셨어요.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는데
그 아들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이 아들의 음성을 듣고 그 아들을 모신 믿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에 들어와서 아들과 천사의 관계, 그리고 아들과 형제들의 관계
또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로만 보느냐
아니면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형제라 보느냐?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함께하기 때문에 그 분이 나의 복이다.
그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는다고 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들은 바 복음의 한계 때문입니다.
회개도 종의 회개와 아들의 회개가 다릅니다.
잘못하면 분명 아들임에 불구하고 집안에 있는 맏아들처럼 삽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지만 자기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준적 없는데 창기와 더불어 아버지
재산을 다 팔아먹은 저 망나니를 위해 살진 소가 웬일입니까?
이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책을 읽으니 아주 우스운 내용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눅15장의 탕자 이야길 다 꺼내고 이 탕자가 돌아왔을 때
누가 제일 싫어했겠느냐? 물었답니다. 여러분은 누구라 생각합니까?
맏아들? 아니요 살진 송아지랍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맏아들이 자기 동생이 돌아온 것이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풍습으로 기업을 다 탕진한 사람은 집에서
쫓겨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복을 날라다 주는 분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사를 몽땅 다 가져와서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는 복된 자라고 여기느냐? 이 신앙의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간접 목적이냐 직접 목적이냐? 하는 관점의 차이가 매우 큽니다.
하나님께 ‘내게 복을 주옵소서. 은혜를 주옵소서.
사랑을 주옵소서. 긍휼을 주옵소서’ 하느냐 아니면
다윗처럼 ‘나는 당신만을 원합니다. 당신만이 생명이며 능력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느냐 하는 간격은 매우 큽니다.
하나님이 직접 목적인 사람은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가 아직도 복을 나눠주고 생명을 갖다 주는 사도로만
보는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기도가 ‘주여 내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일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만유입니다.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종의 회개는 늘 쫓겨날까 두려워하며 언제나 십자가로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보혈로 나를 구해주시고, 날도와 주세요, 주여 나를 붙잡아 주시고 용서하시고...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아들의 회개는 언제나 아버지께 돌아만 가면 됩니다.
♪♪나 이제 돌아갑니다. ♪♪
종의 회개와 아들의 회개는 이렇게 다릅니다.
또 종의 양식이 다르고 아들의 양식이 다릅니다.
종은 쥐엄나무 열매도 제대로 못 먹어요. 아들은 아버지 집의 양식을 먹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로 인해 사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며 살아야 합니다(요6:57)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은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느냐 아니냐를 체크해 보려면 내가 무얼 먹고 사는가를 보면 압니다.
그걸 보면 내가 하늘의 사람인가 땅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의 회개는 내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잘못이란 것을 깨닫고
언제나 양식이 있는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사자로만 보느냐
아니면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장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고 있는가 하는 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하나님의 상속자라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 하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져 구원이 온전해지면
우리가 말하면 그대로 통합니다. 왕권을 상속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의 상속입니다(창1:27)
사람들이 가장 크게 속상해 하는 것은
모든 일이 내 의지대로 안 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돈도 마음대로 안 되고, 자식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건강도 마음대로 안 되고...
딱 통하는 곳은 술집 밖에 없다(단, 돈만 있으면)
이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 받으면 우리의 의지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 지니라.
이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지옥이 뭡니까?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곳입니다.
부자가 그랬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뭐든지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감옥 생활입니다.
이 때는 회개하고 말씀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서 인내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뜻이 내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내게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상황과 사정을 탈출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시범을 보였습니다.
나귀를 끌고 와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 번도 부리지 아니해서
길들여지지 아니한 나귀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타시면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깨닫는 영적 원리는 한번도 예수를 듣지 못 한 사람도 데려 와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누가 끌고 오라고 하느냐고 묻거든 그냥 주인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끌고 오라 하시니 그 말씀이 그대로 통합니다.
주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대로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기도는 뭘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주님과 합일이 되어 주님의 뜻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확신이 오면 그대로 명해 버리십시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일괄처리 됐습니다.
병도 죄 아래 있을 때의 것입니다. 죄와 병 사이에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이 끝났으면 병도 끝나야 합니다.
물론 흔적은 있습니다. 신유도 두 가지입니다.
처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는 기적으로 신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의 병 고침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깨달을 때부터 서서히 치료가 됩니다. 이것이 참 기도입니다.
병 고쳐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병이 나하고 멀리 떨어졌다
상관없는 것이라고 명하십시오. 이 명령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면 그대로 통합니다.
<강의 끝>
유나이티드 신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