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르트의성경해석학
Ⅰ. 들어가는 말
19 세기 하르낙(A.v.Harnack, 1851-1930)과 헤르만 (J.W.Herrmann, 1846-1922)에 의해서 주도된 자유주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성서 만으로(sola scrpitura)” 라는 표어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재 수립하고, “말씀의 신학”을 전개한 칼 바르트(K. Barth, 1886-1968)의 신학을 우리는 소위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특징 짓고 있다. 몰트만 (J.Moltmann) 역시 바르트의 초창기 “변증법적 신학”을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특징 짓고 있다. 바르트의 초창기 신학에 대한 이러한 解釋은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말에 起因한 것이다: “애초부터 삶에 대한 우리의 긍정(Ja)은 그 안에 신의 부정(Nein)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 부정(Nein)은 반제(Antithesis)로서 일어나며, 그러나 그것은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종합에 대한 명제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 저 부정(Nein)은 마지막에 다다르는 최고의 진리가 아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물음에 대답을 주는 부름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신학적 특징을 “성서의 재 발견” 혹은 하나님 “말씀의 신학”으로 특징 지어 해석할 수 있다면, 바르트의 기독론적 변증법은 어떠한 신학 방법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분석한다.
Ⅱ. 칼 바르트(K.Barth)의 기독론적 변증법
소위 20 세기 “변증법적 신학운동”은 1920-1930 사이에 바르트, 고가르텐, 불트만, 부루너, 메르쯔에 의해서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발간된 ?Zwischen den Zeiten?를 중심으로한 일종의 신학운동을 뜻한다. 특히 1919 년 바르트가 탐바허(Tambacher)에서 행한 강연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이란 논문 속에 “명제”, “반 명제” 그리고 “종합명제”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이 다분히 변증법적이다1). 이 강연은 로마서 강해 제 1 판 (1919)과 제 2 판 (1922) 사이에 행하여진 것으로서 로마서 제 2 판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A. 세속적 부정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그리스도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을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변증법적 종합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人”이란 말로 그리스도와 사회의 변증적 종합명제를 제시한다. “그리스도人이란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사람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 사역의 超歷史的 혹은 救援論的 普遍性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in uns)”이란 의미를 “우리 위 (uber uns)”, “우리의 배후(hinter uns)” 그리고 “우리를 넘어(jenseits uns)”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을 피조물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혹은 초월적 結合 내지 綜合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바르트는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기독론적으로 극복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Gottes Menschwerdung)”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운동이다. “위로부터 아래로”의 운동, 곧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간 되심”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놓인 담을 넘어오는 하나의 “수직선적 (die senkrechte Linie)” 운동은,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곧 “인간적인 것”의 기독론적 극복을 뜻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수직선적” 운동 속에서 “전적 타자 (Das gnaz Andere)”로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 때에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us) 새로운 피조물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되는 과정은 어떠한 변증법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수직선적인 운동”, 즉 “하나님의 인간 되심”을 소위 명제 (Thesis), 반명제 (Antithesis), 그리고 종합명제(Synthesis)란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서 설명한다. 그런데 바르트의 변증법적 전개에는 “동시성(Gleichzeitigkeit)”의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서 자신의 義를 세우는 것을 동시적으로 본다. 이러한 동시성을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의: 역자주) 긍정적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의도했던 부정이다. 반면에 하나님 위에 근거한 것이 아닌 모든 긍정적인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시적이며, 역설적인 진술은 명제에 대한 반명제 그리고 그 반명제와 명제의 종합으로서의 종합명제라는 식의 발전적 혹은 헤겔적 변증법을 뜻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오히려 종합명제에서 반명제를 본다. 그리고 명제를 반명제의 前提가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 속에 있는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갈등을 극복해야 하는 종합명제의 전제로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독특한 변증법을 설명한다: “근원적인 것은 종합명제(Synthesis)이다, 이 종합명제로부터 반명제(Antithesis)가 나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또한 종합명제로부터 명제(Thesis)자체가 나온다.” 이를 다시 바꾸어서 다음과 같이 얘기 한다: “단지 명제로부터 참된 반명제가 나올 수 있다. 참된 반명제란 근원적으로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반명제를 뜻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변증법 도식을 구원사적으로 보충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자가 될 수 있고, 구원자이시기에 동시에 종말의 심판주가 될수 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종합으로서의 종말론을 시간의(역사의) 끝에서 보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의 갈등이 극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 사건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역사의 참된 시작도 창조로부터 보지 않고, 역사의 종합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본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역설적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바르트에 의하면, 쌍방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에 의하면 “종합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명제 속에서 의도되었던 종합 명제는 반 명제 속에서 단지 찾아졌고”, 밝히 드러났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종말은 이미 창조에서 계획된 것이고, 그것은 반명제에 대한 극복 속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바르트는 새로운 종말론을 정립한다: “최후의 것, 終末 (εσχατον), 곧 종합은 다음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마지막에 이르는 연속(Fortsetzung), 그 결과(Folge) 결론(Konsequenz)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잠정적인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잠정적인 것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근원적인 의미을 갖고, 그 잠정적인 것을 움직이는 힘이다.” 이 말은 終末이 이 歷史의 연속이나, 역사적 결과 혹은 끝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종합명제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혀 다른 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의 백성이 되고, 전적으로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즉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 것이다(고전 15:53). 바르트에 의하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조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목적되었던 것이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은 먼저번 하늘과 땅이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파괴되어서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서 계획되어지고 목적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탈 세상적으로 이 세상을 부인함으로서 소유 것이 아니라, 창조의 목적이며, 이 역사의 歸港地를 희망함으로서 소유하는 것이다. B.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에 대한 역설적-동시적 해석 바르트는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예리한 분리를 전제하였던 것과 같이, 그의 논문: “성서적 질문과 통찰과 전망(Biblische Fragen, Einsichten und Ausblick, 1920)” 에서도 성서가 제공해 주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 지식, 역사적 의미, 그리고 삶의 가치를 철저히 二分하여 대립시킨다.
하나님 인식과 다른 세속적 지식의 예리한 분리 때문에 하나님 인식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도 하나님의 인식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능력하고 또 무능력한 상태로 자라났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성서해석에 있어서 루터의 “성서에 의한 성서 해석(scriptura sacra sui ipsius interpres)\"을 수용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을,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지식의 전제로 본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하나님 인식”을 세속적 모든 인식의 전제로 봄으로서, 그는 “하나님 인식”과 “우리들의 지식”을 “긍정”과 “부정”의 대립 상태로 본다: “그렇게 우리는 긍정(Ja)과 부정(Nein), 그리고 부정과 긍정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는 말씀의 위기 속에, 그 위기의 당혹함에, 우리 자신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의 부정과 신적인 긍정은, 바르트에게서, 영원한 분리로 끝나지 않는다. 바르트는 세속적 부정 속에는 하나님의 긍정이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봄으로서 부정과 긍정의 대립 및 갈등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택으로 극복한다: “선택사상이란 곤경에서 나온 것 이외는 다른 어떠한 말도, 성서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말해야만 했던 것에 관하여 언급될 수 없고, 들여질 수도 없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선택 그 사건 이외는 부정과 긍정의 철저한 분리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선택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인식”과 세속적 지식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에 의해서 쓰여진 성서가 어떻게 모든 세속적 지식 내지는 인식을 초월한 하나님 인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르트도 성서가 하나의 종교적 문서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서의 증언은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문서와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분(totaliter aliter)”이신 예수에 대한 통찰이 성서에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 없는 다른 문서들과 성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서는 세상적 문서들과 내용상 전혀 다른 타자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떻게 인간적인 통찰이 “전적으로 다른 분”에 대한 통찰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이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을 통찰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점에 있어서도 바르트는 변증법적 사고를 되풀이 한다. 즉 “하나님 인식”이 모든 다른 인식의 전제가 되듯이. 성서는 모든 종교적 증언의 전제이다. 더 나아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모든 사건의 전제이며, 동시에 종합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 통치(Gottesherrschaft)”의 시작이고, 시간이 종식된 “영원(Ewigkeit)”이고, “새로운 세계(die neue Welt)”이다, 이 종합에 대한 통찰이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성서의 증언도 철저히 “변증법적”이다. 그의 말을 빌어서 말하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거리로부터(von daher)”,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바르트가 본 성서의 통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의 부정적인 요소들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하나님의 긍정이라는 점에서 성서의 증언도 다분히 변증법적이라고 그는 확정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논리 전개는 우선 먼저 성서의 특성, 즉 인간의 종교적 문서와 하나님에 대한 통찰을, 분리시키고, 그 다음 분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사건에 대한 증언이라는 하나의 사실로 종합함으로서 양자의 분리를 극복하여 성서의 독특성을 증언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전개 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 혹은 사건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 역설적이면서 동시적으로 - 부정을 긍정으로 그리고 긍정을 부정으로 - 해석하는 방법이다. C. 종합 명제에 뿌리를 둔 명제와 반 명제 바르트는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Das Wort Gottes als Aufgabe der Theologie)” 에서 우선 먼저 3 가지 문장으로서 강연 제목과 관계되는 명제를 설명한다: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는 양자, 즉 우리의 당위와 우리의 무능(할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우선 바르트는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명제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란 존재는 처음부터 존재 문제을 갖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얘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 한다”는 과제는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가능성과 불가능성”, “생명과 죽음”, “영원과 시간”이라는 질적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곤궁에 빠진 문제로 남게 된다고 바르트는 강조한다. 그러나 “해야 한다”는 과제와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적인 질적 차이 속에 內在해 있는 이러한 변증법적 대립(dialektische Konstration)이 극복 될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사건”의 발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건”은 인간 편에서 일어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바르트의 첫 번째 명제는 두 번째 명제, 곧: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바로 인간 자체이기에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명제로 넘어가게 된다.
두 번째 명제가 극복될 수 있는 길은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사건”의 발생이다. 이 “새로운 사건”을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으로 특징짓는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바로 말씀의 화육사건, 즉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Deus dixit)”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에서 두 명제의 갈등은 기독론적으로, 즉 “말씀의 성육신”,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으로 극복되어진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변증법적 갈등이 “하나님의 화육사건”으로 극복될수 있을까? 바르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된체 머물어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은 단순히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는: 역자 주)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또한 무엇인가 다른 존재가 되실수 있는 분이다.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이다” 또한 바르트는 하나님을 主-客의 構造(Subjekt-Objekt Schema)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식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즉 인간은 주체로서 객체인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상에 있는 독특하고 고유한 인간 존재(das partikulare Eigensein des Menschen in Wege)”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객체성 속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충만함을 갖고 인간이 되시는 곳에서, ... 자신을 긍정(Ja)로서 우리의 부정(Nein) 속으로 들어오시는 곳에서, 그 곳에서 만이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되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간되심”의 사건이 전제된 곳에서만이, 역설적 해석이 - 부정이 긍정으로, 긍정이 부정으로 -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루터의 칭의론(Rechtfertigungslehre: justificatio impii (불경건한 자를 의로 인정함)이 가능하다고, 그는 역설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은 이제 역설적 종합에 이른다. 즉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해야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모순이 “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변증법적 도식은 바르트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논문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명제와 반 명제가 종합명제에서 나오는 “주-객 일치 변증법” 즉 “Durch-durch”의 변증법이라고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Ⅲ. 끝맺는 말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였던 “성서만으로”는 20 세기 개신교 신학자 가운데 가장 유명하였던 칼 바르트의 (1886-1968) “변증법적 신학”에 의해서 다시금 회복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바르트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자신의 신학적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바르트가 근세기에 이루어 놓은 신학적 전환 속에, 변증법적 성서 해석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를 “인간적인 문서”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서를 그 내용상 福音과 律法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이를 다시 화육된 말씀인 그리스도로 결합한다. 이러한 신학 방법을 그의 논문에 따라서 설명하면: 바르트는 우선 먼저 “사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통일을 보고, 그 다음 이 사회 속에서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분리하고, 다시금 이 갈등이 기독론적으로 극복 된 것을 기술한다. 더욱이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해야한다”와 “할 수 없다”의 갈등을 극복하는 종합명제가 된다.
2) 바르트는 변증법적 展開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봄으로서의 자신들이 제시하는 종합명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론적 변증법을 전개하고 있다. 즉 基督論的 - 화육된 말씀(하나님의 인간되심)으로 - 綜合을 그들 신학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해결점으로 삼는다. 이를 바르트 자신의 변증법적 용어를 빌어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명제의 힘과 반명제의 힘은 근원적이고,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태동하고 있는 종합명제의 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변증법에서는 헤겔식 변증법이 거부된다.
3)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바르트는 언제든지 神 中心,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中心의 극복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론적 갈등 극복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르트의 변증법은 전체성 속에서 하나를, 그리고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보는 통전적 변증법으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양자는 기독론적 갈등 극복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 긍정과 부정, 세상적인 것과 신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종말론적인 것 - 역설적으로 해석한다. 바꾸어 말해서 부정 속에서 긍정을 보고, 긍정 속에서 부정을 본다, 그리고 이 둘이 상존해 있는 현실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한다.
자료출처 : 송창학
칼 바르트의 신학과 해석학
I. 지난(2004) 4월 26일 연세대 연합신학원에서 한국 조직신학 회의 모임이 있었다. 비록 적은 수가 모였으나 진지한 논의가 있던 뜻 깊은 자리였다. 그곳에서 두분의 발제가 있었는데 전선용 교수의 \"바르트 신학의 발전 과정에 관한 연구\" 와 박재순 박사의 \"민중 구원과 의인론\"이 발표되었다. 발제에 대한 논평과 각기의 논문에 대한 질문이 제기 되는 가운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해석학에 대하여 간단한 논고가 있었다.
이 해석학에 관한 논의 중 본 저자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 하게 되었고 당시 충분하게 그 질문이 이해되지 못했던 것 같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같아 제삼 그 질문의 참뜻을 분명히 하여 그 논의의 중요성과 의미를 새롭게 조명코자 한다. 질문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개념 사용에 대한 反問에서 시작되었다.
본 저자가 당시 제기했던 질문은 바르트의 신학을 해명하는데 있어 解釋學이라는 개념을 적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김재준 교수는 해석학의 어원을 상기시킴으로 본 저자의 질문을 답변하고자 하였다. 즉 \"헤르메노이에인\"이 란 처음부터 \"신들의 말을 인간의 말로 옮겨오는 행위\" 이며 그것은 해석학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차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이해 행위에만 그치지 않고 언어의 신적 깊이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며 더더욱 바르트에게 있어 교회의 선포의 언어가 신학 안에서 책임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신학 본래의 취지와 더불어 신학 함에 있어 인간들이 사용하고 또한 그 계시 사태로부터 사용되는 말이 천상의 독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이해되는 말이라면 결국 해석학이라는 과정을 떠나서는 그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며 해석학의 이념과 학문적 방법을 통해서 바르트 신학의 깊이가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강조하였다. 과연 해석학이란 틀을 벗어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적으로 사유할 수 없는 것일까?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적 봉사라고 한다면 신학 활동이 인간의 말로 이뤄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공헌하게 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권능은 어떤 범주에서 언어화 될 수 있을까? 일찍이 Ebeling은 자신의 해석학적 신학의 이론의 정립을 시도하는 가운데 Barth의 말씀의 신학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이해되어야 할 해석학적 과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Ebeling은 만일 언어에 대한 일반적 고찰과 그 것으로부터 얻은 이해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적용하여 전개한다면 - 물론 에벨링이 이 작업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 이는 Barth의 신학이 해석학적 과정을 무시한 자기 모순 속에서 점차 해체되어 가는 중임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비록 에벨링이 이같은 직접적인 방법으로 바르트의 신학을 비판하기를 피하고 있지만 에벨링의 신학적 해석학은 이해의 문제를 바르트가 곡해하였다는 것으로 더욱이 그 이해에 대한 오해는 신학의 본래적 사명인 \"하나님 사태가 언어로 전달되어 오는 중심적 현상을\" 바르트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것이라고 강조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적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라고 결론을 짓게 한다. 왜냐하면 에벨링이 지적한바 대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처한 보편적 해석학적 지평 위에서 검증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즉 에벨링이 목표로 하는 그 검증이란 단순한 이해(개념의 파악이란 의미에서)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화 되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언어가 현실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는 변화의 상황을 내포하며 신앙의 언어는 바로 이 언어에 의한 사건으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에벨링이 강조하는 바는 이 변화와 변혁이 일반 언어의 가능성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에벨링에게는 이 참된 언어 이해와 그 실현은 신학적 이해에서 가능할 뿐이다. 기실 에벨링의 이같은 견해에 꼭 동조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바르트에게서 현대의 철학적 해석학의 사유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이 해석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신학임을 말한다면, 그리고 그를 통하여 바르트의 신학이 현대적이거나 혹은 책임적인 신학이라는 것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유감스럽게도 바르트가 그의 신학을 충분히 전개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비록 현대 해석학의 거장 Gadamer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에서 현대 해석학의 선언적 의미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를 해석학의 범주로 묶어 둔다는 것은 나는 새를 새장 속에 넣어 두는 遇를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바르트가 신학의 방법론적 해명을 충실히 다루지 안았음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그의 신학의 특징이 마치 그 방법적 특성에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편으로 바르트 신학의 한계를 보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유익하고 정당한 것일 것이다. 어떤 신학도 완전성을 주장할 수 없는 나그네의 신학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 해석학적 해명이 오늘날 누리고 있는 그 全能性을 아무런 비판 없이 인정하여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반복해서 에벨링이 해석학이란 단지 형식적인 면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내용과 연관된 학문임을 주장하는 것은 바르트 신학에 대한 일종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르트를 해석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바르트가 시작한 새로운 그 무엇인가를 다시 덮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해볼 만 하다. 이와 연관해서 본 저자는 만일 바르트에게서 그 어떤 해석학적 과정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 성령론적 해석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말씀의 신학\" 으로서 바르트 신학의 다른 이름이리라고 생각한다.
성령론적 해석학, 그것은 무엇인가? 성령론적 해석학이란 말 자체는 그 해석학 속에서 이뤄질 해석의 과정을 다시 한 번 성령에 의한 변증법 적인 내적 긴장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지 않는가? 해석학의 이념이 해석의 과정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곳에서 이해가 아닌 여전히 우리의 이해밖에 있는 신의 계시의 문제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진술로써 신의 계시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방법론적으로 이해한다기보다는 그 진술을 통하여 규범적으로 현실을 해명하고 그 현실을 재구성을 해내게 하는 성령의 역사를 \"진리\" 라고 진술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진술은 신앙의 명료화로써 그 진술을 가능케 하는 성령에 대한, 성령에 의한 진술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자기를 명료하게 드러낸 존재나 언어의 자기 드러냄이 아니라 계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기 은폐로서 주어지는 신 인식의 최초의 시작이며 완전성인 것이다. 따라서 해석학적 해명을 신학 본래의 지평으로써 피안과 차안의 공동의 장의 해명이라기 보다는 그 해석의 장 자체가 신 앞에서 (Coram Deo) 본래의 위기 속으로 불려 드려지는 단초가 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해석학적 과정은 이해의 시작이 아니라 단지 이해의 결과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반성은 구성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구체적인 대관계(對關係)를 형성하고 있지 않는가? 바르트가 주장하는 신 인식과 신앙의 현실이란 바로 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대관계라는 불가해성의 역리(Paradox)의 언어의 모습을 넘어서 모순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신 인식의 근원에 대한 언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불가 해적인 것이 이해되는 역리의 언어 과정이 해석학적 노력과 유관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인 하나님의 진리가 어떻게 인간들에 의해 이해된 언어의 사건으로 변화 될 수 있는가? 언어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하나님의 현실에서 획득되고 있다면 이 언어의 본성은 무엇인가? 본 저자의 이러한 물음은 해석학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고찰로써 순전히 형식적인 개념으로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다는 것조차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학적 시도로서 바르트 신학의 해명이 무의미하다고 함도 아니다. 저자의 물음의 원의 도는 해석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바르트의 신학의 본래적인 의도가 해석학의 이념을 넘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리라는 기대와 함께 제기된 것이다.
II. 이러한 의도를 충실하게 다루기 위해 바르트 신학 내에서 해석학적 적용이 가능한 몇 가지 개념과 사유 방식에 대하여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르트의 신학이 가지는 내적 구성과 그 신학적 원리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해석학이 어떤 것인지 그 존재 근거와 그 범위를 정확히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즉, 바르트 신학이 해석학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다른 파라디그마가 필요하다는 요청은 바르트의 신학뿐만이 아닌 해석학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도 생각되어져야 한다. 이와 연관해서 우리가 먼저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은 아직 진행 중인 그리고 언어와 관계해서 현대의 가장 중심에 놓여 있는 해석학의 한계를 정하고 그 이념을 전체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해석학의 이념 자체가 중세기나 근대 정통 주의 시대의 해석학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거기에 더하여서 해석학의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한계성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해석학적 철학의 원의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하나의 독립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본론에서는 해석학의 철학적 특성들이 각 개별 존재자들을 그 존재자들의 은폐성으로부터 드러내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아포판시스(apophansis)의 존재의 성격 과 연관되어 있음을 주목하면서 현대 해석학에서 이해된 구체적인 내용을 Otto Poeggler가 해석학적 철학의 세 가지 특징(동시에 과제)을 규정하는 데에서 찾고자 한다. 즉, 해석학적 이해가 제기하는 구체적인 해결 과제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문제시된다 : 첫째로, 어떻게 한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가? 타자로써 자기에서 다가온 그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가?
둘째로, \"해석학적 순환\"이 보여주듯 전체를 단독 자들에서, 그리고 단독자를 그 단독자가 속한 전체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이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단독자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그 전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 전체성의 한계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이 서로 상호간에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면 이해(Das Verstehen) 와 설명(Das Erklaeren) 이라는 서로 다른 해명 방식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겠는가? 푀글러에 따르면 이 세 가지 문제들은 해석학의 가장 긴요한 문제들이며 이의 답변에 따라 그 해석학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 문제들을 \"개방성\"으로서의 존재이해하에서 통합적으로 다룬다는 사실은 해석학을 단지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숙고라는 한 특정한 과제로 보는 제한된 관점을 넘어서 보다 더 근원적으로 해석학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해석학 본래의 질문인 이해와 연관해서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이해, 즉 내가 이미 전승된 특별한 문화 속에서 존재하고 있으면서 내 안의 타자로서 만나게 되는 여러 낯선 것을 이해하게 되는 현상에 대한 탐구는 그 사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긴장을 인간의 삶의 가장 근원적인 현상인 \"이해\" 라는 삶의 원래적 사건에 대한 방법론적 숙고와 적용을 통해서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근본적으로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만나게 되는 대상들은 해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해석학적 이해의 순간은 다름아니라 해석학적 순환의 형태 속에서만 비로소 그 의미의 완전성에 이르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해석학적 순환의 궁극적 표현은 인간의 삶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는 언제나 삶의 전체성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해의 근원성으로부텨 볼? \"설명\"과 \"이해\"는 기실 그 구분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해의 수단이 어떤 것이건 간에 이미 이해의 수단은 주어져 있다는 것이 해석학적 철학의 근본 전제이다. 현재의 사건이 그 사건에 대한 반성의 원리를 이미 내포하고 있으므로 각 개별적 사건의 참다운 이해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혹은 해석학적 순환의 원리로 주어져 있던 보편적 의미의 반성적 현재화의 구조 속에서만 참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현재화를 포함한 전반적 이해의 모든 문제는 결국 보편적이며 전체적인 의미의 연관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와 연관된 학문인 해석학은 이제 해석학의 일반적인 역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석학이 의미 연관(Sinnzusammenhang) 이라는 이 공통의 지평을 떠나서 생각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해석학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 제기가 있어 왔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는 보다 객관적인 학문성의 질문과 연관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회 철학의 비판과 연관되어 주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아펠의 보다 폭넓은 과학 철학의 이념을 알아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Apel은 그의 논문 에서 해석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비판학을 포괄하는 학문 이론을 세우고자 한다고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한다. \"인식 인간학\" 이라고 명명된 이 학문은 인식의 선험적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비판철학의 사유 단초를 더 확대하여 단지 의식 일반에 대한 객곽적인 조건뿐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적인 물음이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드려질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마치 아인쉬타인이 물리학의 근본 개념들을 재 정의 할 때 그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관찰하게 될 도구의 여러 기술적 요인들을 함께 고려한 데어서 알 듯이 현대에 있어서 자명해진 것은 칸트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자연 과학자들이 자연을 연구할 때에 단순하게 사유의 법칙에 적합한 선험적 기획을 전개하는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기구의 도움을 받아서야 성과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적인 주/객의 단순 구조로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행위에 어떤 의미가 획득되기 위해서는 주관이 매 순간 적극적으로 대상들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주관의 적극적인 참여(Engagement)가 단순히 그 인식하는 주관의 의미 획득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 구성의 간 주관적 관계에도 필수적인 요소로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언어는 이 간주관성과 주관성 모두를 근거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표식(Zeichen)으로서의 언어는 인식인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기관, 기술적 도구와 마찬가지로 인식의 대상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 지향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써 이 표식이 전제되어 그 결과로 인식의 대상이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이 표식 기호인 언어는 단지 인식의 논리적 의식 조건으로만 환원되어서는 안된다. 언어란 오히려 한 개인의 주관적 선험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개인적인 조건을 아펠은 선험적 육체성(Leibapriori)과 의식적 선험성이라고 둘로 나누어서 이해하고 이 두 선험성은 인식에 있어서 상호보완적이지만 구체적인 인식의 형성에서는 양극 적으로 활동한다고 본다. 즉 보다 일차적이며 직접적인 경험의 세계에서는 선험적 육체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행하지만 반성적인 지각에서는 의식적 선험성이 인식의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인식에 있어서 인식의 관심은 인식의 한 주도적 동기로서 이 관심이 각 특수한 인식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술적인 인식의 관심은 근원적으로 현대 물리의 실험의 참여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즉, 현대 과학의 인식의 진보에 있어서는 이 인식의 관심이 현대 물리학의 물음과 그 물음을 기술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상호 연관에서 찾아진다고 할 수 있다. 즉 현대 물리 학자들은 그 관심이 기술적인 조건에 적응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연과학이 방법적으로 인과율의 엄밀성을 추구하는 해명의 길을 걷는다면 이에 반해 정신과학은 보다 실천적이며 이 세계 존재 이해에 참여하는 이해(Verstehen)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상호 보완적이면서 동시에 상호 구분되는 것으로 아펠은 보고 있다. 아펠은 먼저 하나의 단일한 기준을 가지고, 인식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단지 별도의 개별 과학으로 예컨대 심리학이나 지식사회학의 문제로 구분하여 다루면서 철학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든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과학 이념을 거부한다. 그들에 따르면 딜타이로부터 유래된 소위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구분에 따른 해명과 이해 사이의 차이에 대한 관심은 단지 세속화된 신학이 학문성을 위장하여 지속적으로 학문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종의 이데올르기인 것이다. 자연과학의 인과율의 해명의 이념 하에서 정신과학의 특성인 이해를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시도도 일종의 이런 신 실증주의자들의 하나의 변환일 뿐이다. Th.Abel의 Interpolation은 이러한 시도의 대표적인 것으로 분명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해란 단지 인과율의 해명의 한 논리적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아벨은 논리적 객관성과 실험에 의한 경험적인 관측을 학문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와 반대로 W.Dray는 역사 과학이 일반적인 법칙을 조명하는데 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이해에 의해 오히려 완전하여 진다는 것을 구체화하였다. 이 두 학자의 입장을 비교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아벨이 이해의 대상인 인간 행위와 이 인간의 행위가 지향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정보들의 전이해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이며 이것이 그의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이는 다름아니라 이 정보들이 후기 비티겐 쉬타인이 밝혀 놓은 바대로 언어 게임이라는 한 특수한 삶의 연관 분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 한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Dray가 비록 자연과학적 방법이 해석학적 방법과 상이하다는 것과 상호간에 보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손 치더라도 아펠은 해석학적 물음이 오히려 자연과학의 현재화와 그 사건의 해명에 공헌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양자가 서로 보완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서로를 배제하고 있는 것의 의미는 어디서 드러나는가? 아펠에 의하면 자연과학의 가능성과 그 진실성을 언어적 조건에서 드러내고 다시 이 질문을 본인의 인식 인간론적 사유에 의해 철저화할 때에야 비로소 두 상이한 학문적 전통이 통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해석학적 관심과 자연과학적 관심 이 양자가 만나게 되는 공통의 자리는 전승이다. 전승과 연관하여 전승된 본문의 중요성과 함께 언어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학이 언어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언어학은 바로 그 본질상 해석학적인 역사 과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언어학이란 시간/공간의 사건을 자기의 의미의 필요 충분조건으로 가지고 있는 각 단어들의 의미의 해석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인식 인간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식의 육적인 선험성이 자연과학에서는 도구 성을 통한 자연에 대한 관여와 연관되어 있다면 해석학적 연관에서는 의미의 간 주관적 발현이 그 의미의 구체적 표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써 해석학의 철학적 근거는 인간의 간 주관적 이해의 차원에서 한 저자에 의해 의도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이해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주제화 할 수 있는 방법적 추상(mothodische Abstraktion)의 길이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의 답변에 달려 있다. 이 물음을 딜타이를 비롯한 19세기의 해석학자들은 긍정적으로 대답하였고 실제로 이 방법론적 물음의 결과 이해가 학문적인 엄밀성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시키는 그 해석학의 이념이 보편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아펠과 가다머는 19세기의 해석학이 자연과학의 방법론적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라고 묻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로부터 시작되고 가다머가 강조한 해석학의 새로운 관점은 이러한 근세 해석학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반문에서 시작된 것으로 바로 우리가 해석의 대상을 통하여 우리의 삶속에서 알게 되는 실제적인 의미의 방법론적이며 점진적인 객관화에 대한 가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어떤 추상적 방법에 의해 확인된 이해가 아닌 실제로 여기서 사용되고 구체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적용적인 이해를 이해의 사건에서 드러내는 것을 본래적 이해로서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번역자와 재판관, 혹은 영화 감독들의 임무에서 보는 것 같이 그들이 대상으로 가졌던 그러나 해석의 과정을 통해 이해된 본문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게 되는 적용 적인 이해의 사건이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펠은 이러한 가다머의 새로운 해석학을 두 가지로 평가하고 있다. 가다머가 역사주의의 객관적인 이상화를 비판 한데에서 그와 동의 하지만, 진리의 문제에 대한 해석학적이며 방법론적인 추상적 접근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가다머가 정신과학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에 그 이해하는 자의 역사성을 포함시킨 것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펠은 과학적인 의미 이해에 있어서 방법론적 추상은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삶의 구체성의 역사적 상황이 과학적인 본문 이해의 과정에서 이미 한 구체적인 개별자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학적 이해의 앞에 놓여 있는 전 반성적인 참여는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이해에는 본문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은 옳은 것이지만 이 시간의 간격에 대한 사유는 가다머가 주장하듯 한 진리의 현재적 적용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쉴라이에르 마허가 강조한 것처럼 과거와 현재의 동시대 화의 방법론적 이상에 의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역사의 이해가 역사의 진리를 대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아펠은 부정적으로 대답하였다. 더 나아가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전근대적인 역사의 연속성이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주어져 있지 않으며 이러한 현실은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 해석학의 범위를 넘는 새로운 관점을 유지해야 할 것은 촉구하고 있다. 서구의 철학적 상황이 해석학적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사회의 진보 방향을 주시해야 한다. 아펠에 의하면 이 비서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통과 현대의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야말로 해석학이 어떤 도전을 받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이 보다 폭넓은 이해의 과정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문화사이의 전승이 처음으로 이해되기 위해 이해의 대상과 이해의 주관 사이의 직접적인 해석학적 연관성이 먼저 주제화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결국 해석학적 주제화에 이르기 까지 인식 주관에 의한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 요구되며 주제화 되는 것이다. 실제로 두 대상 사이의 해석학적 대화의 직접성의 단절은 오히려 보다 더 나은 이해를 위한 방편이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야말로 간 문화적 해석이 문제되는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사고방식인 것이다. 즉 해석학은 단지 번역가로써의 해석학적 기능뿐만이 아니라 심리 치료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과정을 내포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펠은 이해와 해명 사이의 이 변증법적 중개과정을 \"이념 비판(Ideologiekritik)\"으로 부르고자 하며 이는 육적인 표현들에서 정신적인 것을 찾아 나가는 과정으로서 \"자연의 인간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자연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아펠의 이러한 해석학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푀를러는 해석학적 지평에 대한 관점으로 보고자 하였다. 현대 해석학이 가지고 있는 목표 의식이란 다름아니라 이 의미연관에 대한 혁신적 개발을 통한 새로운 의미 창조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전반적인 의미연관에 대한 반문과 그 반문 구조에 통하여 소위 철학적 해석학의 한계를 이념비판학은 물었으며 이는 그 의미연관의 계급 성과 은폐된 정신적 의미 구조를 다시 조명함으로써 새롭게 해석의 길을 확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펠의 이러한 시도는 또한 Halberds와 일치하는 것이다. 해석학에 대한 이러한 시도들은 해석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다시 처리될 수 있으며 푀글러는 다양한 해석학적 철학의 방향성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서 성실하게 답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해석학적 추구는 의미 있는 일이며 신학적으로도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재삼 강조하듯이 신학의 자리는 성서와 선포의 연관성이라는 일차적 본문을 벗어나서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의 참된 주제를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 하나님이 언어화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화의 사건이란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구성하고 있을 어떤 의미연관에 대한 구체적 착념화, 소위 성육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바르트는 이 진지한 신학적 물음을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가? III 間奏曲 바르트가 신학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였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속한다. 더욱이 그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일어난 계시 사건을 통해서 교의학 전체의 주제들을 재해석하고 모든 것들을 주체화할 때 이 기독론적 사건과 연관 시켰다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그의 교의학적 주제들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 계시와 연관되어 있고 그 계시의 의미는 우리에게 신학적 해석학의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계시의 사유에서 이해의 문제는 매우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바르트가 그의 신학적 숙고에서 계시 그 자체를 계시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분하여 제기하고 있으나 존재가 드러나게 될 지평으로서 해석학적 과제인 존재의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려고 한 것과 같이 말이다. 만일 바르트와 하이데거의 시도를 같은 것이라고 인정하고 양자 사이의 아무런 차이를 살피지 않는다면 이는 바르트를 오해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양자 사이의 차이를 다시 한번 주제화 하여 그 차이를 다시 해석학 내지 구조 학적으로 구성화한다는 것 역시 바르트 신학의 의도를 놓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위에서 제기된바 계시 의미를 해석학적 과정으로서 언어화함으로써 신학의 중심부에 세웠다고 믿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적 사유의 본래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그는 해석학적 과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바르트가 강조하는 계시는 절대적 타자의 절대적 자기 계시이다. 거기에는 어떻게 내가 그 타자를 이해하게 되는 가라는 이해의 객관적인 사유가 부차적인 역할을 할뿐이며 성서 본문은 이해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타자 성의 장소이다. 이해하는 내가 이해의 대상과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전체성의 관점이 연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건널 수 없는 무한한 차이에서 나에게 자기의 말함을 통하여 이해하도록 다가오는 자와 말하는 타자를 지적한다.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여기 인간 개인의 탈존이 아닌 하나님의 탈존 그 자체이다. 즉 하나님의 실존이 우리의 사고 속에서 우리의 인식 구조를 타재화의 空洞으로, 울리는 동굴로 등장시키면서 계시한다. 우리의 해석학적 구조는 이 공동의 구조로서 구성되어 있으며 계시의 언어와 그 언어의 해석 사이의 차이는 다시 한번 계시 사건을 되돌아 가리키고 있다. 이 이념은 언어에 의존했건,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 의존했건 간에 이해의 대상과 이해의 과정이 하나로 만나고 있는 공통성과 전체성의 이념에 근거한 해석학적 과정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이 계시 사건이 불가해성만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이 사건은 말을 걸고 있다. 그의 계시 이해가 해석학과는 다른 어떤 다른 파라디그마를 내포하고 있을 뿐이다. 해석학이 바르트의 신학적 관점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왜 인가? 단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말이나 하나님에 대한 사유를 사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대한 말 가운데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하나님과 같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 하나님이 스스로 사유하는 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어떤 길인가? 성서 안에 하나님을 사유하는 길이다. 성서를 성서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책으로써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이 바르트의 의도가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되는가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그것은 해석학을 모르는 해석학의 반대가 아니라 해석학을 넘어서는 해석학 이후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다. IV 바르트의 신학이 방법론적 의미 탐구에서 해석학과는 경계 선상에서 만나지만 동시에 그 경계선의 저편 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르트의 신학적 해명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철학자이며 훌륭한 신학자인 레비나스의 생각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의 현상학적 시도는 지금까지의 신학적 해석학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그의 노력이 이미 관념적이며 선험적일 수 있다는 의심을 놓치지 않은 채 레비나스의 견해를 들음으로써 바르트 신학의 깊이와 해석학 이후의 신학으로서 말씀의 신학이 갖는 구체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레비나스는 해석학의 의도와 그 한계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일깨워진 사유를 해명하는 두 가지 가능성을 본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 세계의 초월을 사유하는 사유와 이 의식의 현상학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사유이다. 이 세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가장 심오한 내면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사려된 신을 향한 경험의 사유를 해석학은 삶으로서, 그리고 종교적 경험 안에 있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이 해석학은 이 내재적 초월의 극복을 추구하는 사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사유는 지향적 의식에 의해 개명되고 시도된 자기 초월 (Aus-sich-heraus)과는 구분되는 초월인 것이다. 이 상이한 두 가지 사유의 문제란 끊임없는 메타 논리의 무한정의 추론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초월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적 피안에 대한 超越과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는 구체적인 형태적 구조를 가진 志向性사이의 있는 差異의 문제이다. 훗설의 현상학적 지향성은 우리의 의식이 항상 그 무엇에 대한 의식임을 분명히 노출시켰으며 따라서 이 지향적 의식이 갖는 근본적 원리에서 볼 때 존재는 그 자신의 소여성의 존재방식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존재는 인식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 지향적 의식이 갖는 의미는 이 지향성에 대한 주장이 선험적으로 혹은 더 나아가 경험적인 의미에서 한 사태(Sachverhalt)에 대한 언급으로서 관철되는 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주장이 존재와 인식의 상호관계에 대해 전혀 올바르게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지향성을 단지 형상적 진리로서 인식하게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인식 내지 의식과 현실의 실제성의 관계는 존재와 의식이라는 두 상이한 개물의 만남이라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존재와 주관성의 차이가 다름 아니라 자아성(Selbstheit)에 연관되어 있으므로 존재와 의식의 만남을 어떤 심리학적 법칙에 의해 해소시키려는 시도는 이미 불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후설의 현상학적 자의식은 현상(Erscheinen)을 의미하는 존재자의 존재 혹 에네르기를 발현시키는 그 일어남의 사건 안에서 고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존재자의 존재는 탈/속(Ex-position)으로서 먼저 이 존재가 한 구체적 존재자로 자리잡는 형태화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현재\", \"여기\"라는 현재화(따라서 동일화)의 실증성을 의미하며 이로써 근거 지어진 것의 理性性(Rationalitaet)이 가능해진다. 또한 둘째로 탈속으로서의 존재란 존재를 자기 드러남의 현상(Sich-zur-Schauen)에 귀속시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존재란 體現(Emphase) 되는 것이다. 이 체현의 존재는 현재의 본래적 현재화(Ver-gegenwaertigung)속에서 정신적 삶을 전개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만일 사정이 그렇다면 인식의 과정이란 다름아니라 헤겔의 말대로 존재 그 자체의 운동이 아닌가? 라고 되묻고 있다. 이 인식 과정의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활동을 통해 선험적 統覺은 현재를 확정한다: 현재는 현재화(Ver-gegenwaertigung) 안에서 스스로에게로 돌아가서 그 자신을 완성시키며 자신 자신을 그 현재화 안에서 동일화시킨다. 비록 그 현재화는 나자신의 개인적 삶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삶의 내용에서 현재는 사건 내지 현재의 지속으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이 현재화 속에서 전체성에 대한 인식이 일어난다. 인식 작용의 이 특성은 시간 구조상 동시화(Synchronie)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이 동시화는 통시성(Diachronie)보다 더 철저하게 의식 안에 작용하며 의식의 시간으로서 현재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향성은 바로 현재화이다. 훗설이 밝힌 의식 작용의 특성은 다름아니라 이 의식의 현재화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망각의 작용이다. 이 자기 망각을 통해서 의식은 존재가 자기 속에서 나타나도록 현상화(Erscheinenlassen) 하는 것이다. 자기망각속에 드러난 이 침묵의 자기 의식의 지향성은 이제 진리 안에서 존재의 구성(Konstitution)으로 나타나게 된다. 선험적 환원(transzendentale Reduktion)이란 이 침묵의 의식을 언어로 가져오는 노력이며 언어화된 이 지향적 의식을 세계 내의 한 객관적 존재자와 구별하는 방법론적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훗설 현상학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존재를 의식의 관점에서 다루고자 있는 모든 인식론의 피안에 있는 것을 알게된다: 물 자체(An sich)의 개념도 결국 그 개념 자체가 경험되는 의식의 지향적 과정과 분리된 상태라면 역시 하나의 추상(Abstraktion)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훗설의 의식의 지향성이 밝혀 주는 공헌은 대상으로의 초월을 의식이 자기 스스로 사유하면서 갖게 되는 자기의 본성의 깊이와의 연관에서 문제로 삼았다는 데에서 뚜렷해진다. 즉 이 지향성안에서 주어진 사물에로의 초월은 그 초월의 대상에 대해서 거리둠(Entfernung)과 접근(Zugaenglichkeit)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거리둠과 연관해서 의식은 파악(Wahrnehmung, Ergreifen)이며 이 가운데 앎과 지식은 가능해지고 그렇게 세계의 현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향성이란 이 존재를 근거로 하여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지으려는 정신성(Geistigkeit)이다. 그래서 \"존재자와 존재자의 자연스러움(So/Sosein)의 경험은 자명(Evidenz)한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현재와 현재화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 관계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즉 존재의 구체적 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