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절)
예수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대장정의 시작입니다. 천국에 초청이 된 상태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께서 목숨의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세상에서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은 타고난 육신의 목숨을 사용해도 무방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혈과 육은 입장도 못할 뿐 아니라 쓸모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목숨을 바꾸는 것이 더 절박합니다. 이를 두고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정착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에 대한 빚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것이 육신의 공로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육신의 생명이 매우 거추장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자신을 부인하는 싸움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죽는 순교보다 산 순교가 더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는 모습과 삶이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며(창1장) 우리의 기업이며 상속입니다. 주의 나타나심으로 인한 갚으심입니다(마16:27) 설교자는 설교 중에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족을 느끼는 게 정상입니다. 이를 두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표현합니다만 사실은 육신의 생명의 표현이냐 그리스도의 생명의 표현이냐 하는 싸움입니다.
목숨보다 질긴 것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몸은 죄로 인해 죽은 목숨이나 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목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십자가가 됩니다. 생명의 전환 시프트키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기독교의 한계는 아직 여기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육신의 생명에 필요한 도구들만 잔뜩 긁어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수도사와 같이 금욕주의로 자신을 부인하고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끙끙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겨자씨처럼 다가와 자신 안에 꿈틀대는 느낌을 받았으면 자신의 목숨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세요.
성령의 감동이나 감화를 크게 받은 초기엔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세히 듣고,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께 가신 그 길을 파악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의 효력이 자신 안에 나타나는 체험을 먼저 하세요. 성령의 내주와 역사하심을 맛보는 겁니다. 거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목숨을 표현하는 게 추하고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이때부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의 십자가가 되어 늘 지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처음엔 성공확률이 매우 낮지만 경건의 연습을 통해 날이 갈수록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나타나고 밖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표출되어 갑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