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고후3:7-9절)
교회의 직분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는 여러 가지 신앙의 규칙을 정해 전시를 해 놓고 그걸 사람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삶을 바로 잡으려 하고, 심지어 그래프까지 그려놓고 채점을 하는 쪽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가르치기만 하면 변화가 된다는 현대교육이론과 맞물려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람의 호응을 받습니다. 귀에 속속 들어옵니다. 아주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런 직분자는 정죄에 정죄를 배달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결국 사망이 따라오고 멸망의 길입니다. 아주 어린 신자들에게는 하나하나 챙겨 주다가 좀 나아지면 제발 그리스도인답게, 집사답게, 장로답게, 목사답게 살자고 호소를 합니다. 맞지요 맞고말고요. 근데 그게 안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육학에서 나온 심리학이나 상담학이 한참이나 민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부류가 다 정죄와 사망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람의 외모만 그럴 듯하게 분칠을 하는 직분입니다. 말로는 은혜로 구원 운운하지만 그 꼬리를 자세히 보면 율법조문의 직분이며 정죄의 직분입니다. 그 이유가 사람에게 죄와 사망의 두려움을 줘서 다른 무엇을 갖다 바치든가 행위로 갚아 거기서 탈출하도록 유도를 하잖아요? 화목제물이니 일천 번제니 하는 게 밑바닥엔 다 그런 의식이 깔려 있잖아요? 이런 사람은 가르침(teaching)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대언의 영에 의한 선포(preaching)가 아닙니다. 잘 가르치는 선생일 뿐입니다.
말로는 은혜라는 울타리 안으로 초청하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아주 엄한 사감 선생님 같은 풍모를 띕니다. 이런 사람은 교단이나 각종 기관의 장이 되고 싶어 하고 또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며 목사라는 직분을 굉장히 영광스럽게 꾸밉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와 생명을 성도들에게 안겨주진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의의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성도들에게 형이상학의 영적인 공간에 대해 끊임없이 설파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으로 거듭남 그리고 죄 사함과 영생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줄기차게 강조를 합니다. 강력한 어조로 선포를 합니다. 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피層품?확증된 하나님의 언약이니까요.
진리의 성령을 가졌기에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서 나를 따르라고 고함을 내지릅니다. 이런 직분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금과옥조로 삼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배달해야 하고, 사람들의 심령에 의를 심어야 하고 생명의 말씀을 새겨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모세보다 훨씬 영광스럽지만 사람들에게는 때론 매우 귀찮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일어나고 평강이 전파되고 천국의 기쁨의 잔치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가 그를 통해 표현됩니다(롬8:21) 아직 어렴풋하며 희미하게 들리십니까? 바리새인의 누룩과 구약에 대한 수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세요(고후3:14) 그 분과 그 분에 대해서 듣고 또 들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