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성경 비교연구

해석학적 입장에서 바라본 우리성경 비교연구

- 관형격조사 ‘의’와 존칭어에 사용된 조사를 중심으로-

  윤천석(평택대학교, 칼빈신학대학원 강사).

1. 이글을 쓰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존경하는 분에게 존칭어를 사용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분에게 존칭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 분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기모순이며, 이율배반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성경에 나타난 존칭어 부분에 대한 번역을 연구하면서 신학적인 반성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시대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합니다. ‘유령같은 포스트모더즘’이 우리 시대를 휩쓸면서 발생한 현상은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조류는 다음과 같은 구호로 우리 삶에 침투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억압했던 모든 것을 억압시켜라”는 구호를 삶에서 행하면서 모든 기존질서를 해체하고 기존 질서를 억압시키고 포위시켜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특히 그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번역을 하면서 성경과 신앙을 인식했는지 해석학적 관점에서 성경 -개역한들, 개역개정, 공동번역-을 비교하면서 트로이 목마처럼 우리 의식속에 남아있는 요소들을 반성하고자 함이 이 글을 쓰는 목적입니다.

 

2. 문제제기

우리말 번역에서 존칭어에 대한 연구를 하고, 영문학자로서 살아온 자기삶과 교육에 대한 반성을 하시면서 책을 내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영문학자인 이재오 교수님께서 평생 강의하면서 모은 자료와 내용을 책으로 발행한 것입니다. 여기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보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영한사전 7개를 비교 연구하면서 발견하고 깨달은 내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7개 영한사전 모두가 “I” → “나, 내가”라고 번역되어있지, “제가”라는 존칭어로 번역한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말을 사용하면서 국어사전 보다는 영한 사전을 더 많이 사용하면서 우리말을 배우고 익혔기에 문제라는 것이 이교수님 주장입니다. 최소한 영한사전 권이라도 “I”를 제가라고 번역한 것이 있기를 바랐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책을 쓰게된 동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즈음 천주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라틴어 “mea culpa”를 천주교에서는 1993년 이후 “제 탓이오”라고 존칭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영한 사전에서는 아직도 “내 탓이고”리고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하십니다.

 

이러한 점을 깨달으면서 제가 섬겼던 교회에서 존칭어에 대해서 어떻게 교육을 했고, 어떻게 가르쳤는지에 대하여 철저하고 처절한 반성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글을 써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글을 쓰면서 제 능력이 허락하는한, 제 습관을 교정하면서 모든 부분에서 존칭어를 사용하면서 이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 들음(쉐마)> 에 대한 회개이며 삶과 언어에서 순종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쓴 글들을 다시 정리해서 존칭어를 사용하지 못했던 부분은 모두 고쳐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2.1 이러한 존칭어에 사용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

① 제 자신 30대를 불사른 목회현장인 연희교회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몹시 비가오고 바람부는 어느날이었습니다.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신 징표와 그 흔적 때문에 비가 오는 말이면 몸이 쑤신 그 할머님께 호박죽 한 그릇을 사들고 심방을 했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께서 고백하신 신앙고백이 지금 제 기억속에서, 이 글속에서 새롭게 살아나고(現前化) 있습니다.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잊어버렸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서 지금 여기에서 춤추면서 제 심장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기억과 역사가 만나서 성령님께서 인도하신 은혜로 지금 여기에서 고백되고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할머님께서는 사도신경을 이렇게 고백하고 계셨습니다.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제가> 믿사오며…….” 저는 예배후에 그 할머님께 여쭈었습니다. “할머님, 왜 [내가 믿사오니]라고 하시지 않고 <제가> 믿사오니라고 암송하셨어요” 그 할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이고 저같이 부족한 것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 앞에서 <내가>라고 말해요. 아이고 목사님도 참……목사님 같은 분들은 하나님 사자(使者)이시니까 <내가>라고 해도 되지만, 아이고, 목사님께서는 별것을 다 묻고 그러셔…… ”.

 

그후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사도신경을 “<제가> 믿사오니”라고 암송하면서 통곡을 했고, 설교 시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성도들은 이슬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어린 예배를 드린 기억이 지금 이글을 쓰게된 동기중에 하나입니다.

 

② 총신신학대학원 입학해서, 처음배운 것이 유대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그분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도 사용할 수 없기에, 대신 <아도나이>라고 사용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감격해서 울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신학하는 보람과 기쁨과 긍지를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이 생생했던 기억, 감격이 목회현장에서 춤추기를 바라며 배운대로 목회 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이글을 쓰고 있습니다.

 

③ 평택대학교에서 “기독교 알기”라는 과목을 강의하면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저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책을 매주일 1장(chapter)씩 읽고 레포트를 써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레포트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神)님께서>”라는 낯설은 용어가 그 레포트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학생은 <기독교 신님께서>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나요? 교회에 다니나요?”

라는 질문에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교회는 다니지 않아요. 무종교 이구요, 하지만 <기독교 신님께서> 라고 존칭어를 쓰는 것이 위대한 종교를 만드신분에 대해서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래서 썼는데요.” 저는 그 소리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한 제가 부끄러웠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④ 지난 2005년 5월 6일 금요일 “KBS 책을 말한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안 철수씨가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들러주었습니다. 자기는 살아오면서 늘 존칭어/존대어를 주로 사용한다고 하면서 들려준 내용이었습니다. 안 철수씨가 중학교 시절, 어느날 비가 너무 많이와서 어머님께서 택시를 태워서 학교에 보내준 적이 있었답니다. 택시를 태워 주면서 안철수씨 어머님께서는 안 철수씨에게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택시 기사님께서 “일하시는 아주머님이세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안 철수씨가 “아니요, 저희 어머님이신데요”라고 말하자 택시 운전기사가 “네?… 아이고 정말 참으로 훌륭하신 어머님을 두셨네요. 자식에게까지 저렇게 존대말을 쓰시는 어머님 장말 잘 모시세요. 요세 세상에 학생 어머님처럼 자식에게 존대말 쓰는 어머님 없답니다.” 그후 안 철수씨는 진정으로 인간을 존경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머님으로부터 배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2.2. 역사에서 실제적으로 <존칭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성경번역을 한 경우.

 

선교사님중에 존 로스(J. Ross)선교사님께서 번역한 성경 번역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이 번역한 한글 성경에서는 존칭어 부분을 염두에 두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한칸씩 띄어서 다른 성경본문들과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로스 선교사님께서 번역한 그 당시 성경에는 띄어쓰기가 없었으나 이런 부분에서만 띄어쓰기를 했기에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예를들면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압라함의자손빗의후예 ○예수키스토의족보라압라함이이아삭…”라는 식으로 계속연결해서 글을 쓰다가 <예수님>이라는 이름앞에서는 ‘한칸을 띄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러한 번역에 대한 경우는 다음 학술회의에서도 비슷한 사례로 등장을 합니다. 지난 2004, 8월 12-14일까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제 1회 번역과 이종문화상호연구 세계학술회의( Ist Conferance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ranslation & interculture Studies” 가 열렸는데 그 주제는 “번역과 정체성 형성(Transltion and Construction of Identity)”이였습니다. 그 내용중에 Panel 19의 발표자인 Sameh Fekry Hanna(University of Manchester, UK & Academy of Arts, Egypt)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동양인은 항상 그 자신의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평가한다(The Orient is there always as a measure of otherness).” 그러므로 타인이 윗분일 경우는 존칭어를 꼭 사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Robert Neather(City University of Hong Kong)교수님은 중국인들이 영국왕을 번역할 때 존경의 표시로(respest feeling) 영국 왕의 이름을 쓸 때는 3칸을 띄고 기록했다는 이야기도 하셨읍니다. 즉 King of EnglandⓞⓞⓞGeojious라는 형식입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대영제국을 “The Kindom of England”로 사용한 것에 대해서 중국을 “Middle Kingdom” 이라고 번역했다는 예를 들면서 번역과 정체성 문제를 언급 했습니다.

 

2.3. 존칭어에 대한 성경번역 부분.

성경번역에서 “하나님이”라고 번역했으면, 끝까지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했어야 논리적으로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부분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하고 어느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라고 번역을 하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 문제도 있고, 사려깊게 번역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라고 번역을 한 부분은 로마서 1:8, 1:19, 1:20, 1:24입니다. 그런데 같은 로마서 1:2절에서는 “하나님”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많은 고려를 해야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개역한글”성경에는 많은 부부분이 “하나님이”라고 번역 되어있다. 이 부분은 다음 2.4.를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2.4. 창세기 1-4장에 나타난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존칭어 비교연구.

이 부분에서는 “여호와” 혹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나오는 어휘마다, 어떻게 존칭어미를 사용했는지를 도표화 해 보았습니다. 아래에 기록한 숫자는 이 호칭이 사요된 절을 의미합니다.

개역한글 : 하나님이

개역개정: 하나님이

공동번역:하느님께서

1, 3, 4, 6, 7, 8, 9, 10, 11, 14, 16, 17 20, 21, 22, 24, 25, 26, 27, 28, 29, 31.

(22회)

1, 3, 4, 6, 7, 8, 9, 10, 11, 14, 16, 17 20, 21, 22, 24, 25, 26, 27, 28, 29, 31.

(22회)

1, 3, 4, 6, 7, 8, 9, 10, 11, 14, 16, 17 20, 21, 22, 24, 25, 26, 27, 28, 29, 31.

(22회)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문장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라는 부분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존칭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라고 번역했지만,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이”라고 1/2 존칭만 하고 있습니다.

 

◆ 창세기 2장

개역한글:하나님이

개역개정: 하나님이

공동번역: 하나님께서

3, 4, 5, 7, 8, 9, 15, 16, 19, 21, 22.(11회)

3, 4, 5, 7, 8, 9, 15, 16, 19, 21, 22.(11회)

3, 4, 5, 7, 8, 9, 15, 16, 19, 21, 22.(11회)

 

여기서도 역시 공동번역은 <하나님께서> 라고 극존칭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은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개역한글:하나님이

개역개정:하나님이

공동번역:하나님이/께서

간접화법으로 번역됨

1: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12, 13, 14, 21, 22, 23.

간접화법으로 번역됨

1: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12, 13, 14, 21, 22, 23.

직접화법으로 번역함

1:“하느님이 너희더러…”

■뱀이 질문한 말이기에 ‘하나님께서’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됨. 그러나 여기에서도 존칭어를 쓰는 것이 더 좋은 번역이라고 여겨집니다.

9: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13, 14, 21, 22,

 

◆창세기 4장:

이 부분에서는 공동번역 4:14절 존칭어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고하되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아뢰되’라는 극존칭어 사용함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4절에서는자기를 낮추어서 상대방을 높이는 존칭표현은 하지 않습니다.

4:13그러자 카인이 야훼께 하소연 하였다.

 

4: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아주 쫓아 내시니, 저는 이제 하느님을 뵙지못하고 세상을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이 부분이야말로 공동번역이 얼마나 존칭어 사용에 대해서 신경을 썼는지를 알수 있는 부분입니다.

 

2.5. 창세기 1-4장에 나타난 존칭어에 대한 종합적 평가와 의견

①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는 ‘하나님’으로만 되어있고, ‘하나님께서’로 라는 극존칭을 사용한 곳이 없지만, 공동번역에는 모두 ‘하나님께서’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③특히 3:13, 4:14절 같은 부분에서는 [내가]라고 말은 → ‘제가’로 바꾸어야 된다고 여겨지며, 이 부분을 공동번역은 ‘제가’로 번역을 한 것에 대해서 고려해야 될 부분으오 여겨집니다.

 

3. 번역에서 ‘의’에 관한 문제제기

우리말 ‘의’는 일본어 < の >에 대한 번역으로서, 이 ‘의’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우리 삶에 잠재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다음 내용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었다고 평가받으시는 이오덕 선생님께서는 일제시대 ‘의’라는 표현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이라는 동요 작곡가인 이원수 선생님도 <나의 살던>은 【내가 살던】이라는 표현이 맞는데 이미 모두가 부르고 있는데 어떻게 고치는가? 라고 고민을 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의”에 대한 번역이 얼마나 우리 삶에 깊이 침투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영어 <of>에 대한 번역문제와 겹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문제는 영어에서는 명사에 소유격(2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문법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격(case)>자체의 특성에 대한 규명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역시 서구문법에 따른 것” 입니다. 즉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 개념에 맞도록 소유격을 <의>라는 용어로 번역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말 문법에서는 <관형어>로 되기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한 말 중에 “이곳은 아버님 자리입니다”라는 예에서, 들면서 “이곳은 아버님의 자리입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부분을 지적합니다. 또한 “우리 집으로 간다”라고 말하지 “우리의 집으로 간다”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무의식중에 <의>를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이오덕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3.1. <의>에 대한 문법적인 면을 통한 반성.

먼저 사전적 정의는 “<의>: 앞의 체언을 관형어로 만드는 관형격 조사”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관형어>에 대한 정의는 “문장에서, 체언 앞에서 체언의 내용을 꾸미는 구실을 하는 문장 성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관형사> 역시 “체언 앞에 놓여서 그 체언이 가지 뜻을 꾸며 주는 품사”라고 정의(定義,definition)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어 교육문법론」이라는 책에서도 “관형어는 체언 앞에서 그것을 꾸며주는 문장 성분이다. 관형어는 문장 성립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실현되는 성분은 아니다”고 관형어를 정의하면서 문장 부분에서 부속부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예를 “나는 한용운의 시를 매우 좋아한다”고 <“의”>를 예를 들고 있습니다. 또한 해석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김교수의 사진”이라는 문장은 <의>라는 관형격 조사 때문에 다음 3가지로 해석된다.

① 김교수를 찍은 사진

② 김교수가 찍은 사진

③ 김교수가 가지고 있는 사진

이 문제를 좀더 심도있게 살핀 최경봉님도 <“의”>에 대한 문제는 크게 ‘구조와 관련된 문제’와 ‘생성과 해석에 관한 문제’ 두가지로 나누면서 [의]를 관형격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형격 구성은 체언(명사?대명사?수사)과 체언의 의미 관계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산출하지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기본 구조는【 “수식어+핵어”의 결합이다.】 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좀더 풀어서 해석을 해보면 ‘뒤에 나오는 사건 명사가 핵심적인 명사이고 먼저 나온 명사에게 그 의미를 허락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우리말 번역에서, 특히 신학적 사유에서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3.2. ‘의’에 대한 오용사례 - 이오덕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오용사례를 통한 반성.

이오덕 선생님께서 지적한 <의>에 대한 성경 오용사례와 교회에 관계된 용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개척 당시부터의 주보가 한 자리에 모여있어 교회의 발전해온 모습을 보여준다.(「신앙생활」88.6)

▶당시부터의 → 당시부터 나온

▶교회의 → 교회가

 

마태복음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개역한글)

▶ 너희의 → 너희가

◆ 이 부분을 [개역개정]판에서는 “너희가” 로 수정해서 번역을 하고있다. 문제는 번역에서 일관성의 문제입니다.(이 문제는 이후에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인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 부분이 복수<2격>으로, 즉 <소유격>(krinete/krivnete)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격에 대한 문제를 단순하게 [의]로 번역할 것인지, 소유하는 주체를 강조해서 주격처럼 번역할 것인지 하는 원칙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3.3. 성경에 나타난 ‘의’에 관한 오용 사례를 통한 반성.

 

마가복음 11:17(상반절)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만민의 → 만민이

◆ 문제는 개역한글에서 “만민의”로 번역한 헬라어 원문은 [3격/여격]입니다. 그러므로 이 <의>에 대한 번역은, 이 부분에서는 일본어 <の>의 영향이라는 것도 설득력을 얻는 부분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 문법이 서구문법에서 사용한 [격]을 받아들여서 문법 틀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좀더 철저한 반성을 하면서 번역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개역개정> 은 마태복음 11:17을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수정해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보면 개역개정이 <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번역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라는 번역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혼용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기에 이 부분 역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영어 ‘kingdom of God’을 →‘하나님의 나라’로 번역을 했을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말 문법에서는 <수식어 + 핵심어>라는 구조로 살펴보면 [ ‘하나님의’는 수식어/]가 되고 [나라]가 핵심어가 됩니다. 이것은 [나라]가 주체가 되고 [하나님]은 나라를 꾸며주는 보조개념이 되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됩니다. 개혁주의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고 핵심이 되고 원리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나라가 주체가 되는 역전 현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기에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 ‘하나님 나라’ 번역에 대한 통계 : 개역한글을 중심으로:

 

성경

하나님의 나라

마12:28, 21:31, 21:43/ 막4:30, 9:47, 10:15, 10:24, 10:25, 12;34/ 눅9:2, 9:27, 9:62, 10:9, 눅10:11, 11:20, 13:18, 13:20, 13:29, 14:15, 17:20, 17:21, 18:16, 18:17, 18:24, 18:25, 18:29, 19:11, 21:31, 22:16, 22:18, 23:51/고전4;20, 6:9, 6:10 / 갈5:21, (합:35)

하나님 나라

막4:11 눅8:10, 16:16, / 요3:3, 3:5/ 행1:3, 8:12, 14:22, 19:8, 20:25, 28:23, 28:31/ 고전15:50/골4:11/ 살후1:5. (합:15)

위에 게재한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 와 [하나님나라]로 두가지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성경본문,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서도 어느 부분은 ‘하나님의 나라’로 어느 부분에서는 ‘하나님나라’로 번역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 역시 일본어 <の>와 영어 <of>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갈등은 개역개정 에서도 나타납니다. ‘개역개정’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번역에서 대부분 ‘개역한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히려, 개역한글에서 ‘하나님나라’로 번역한 부분을 ‘하나님의 나라’로 수정 번역한 부분은 요한복음3:3, 3:5, 사도행전 14:22, 20:25, 28:23, 28:31, 데살로니가전서 1:5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의>에 대한 번역에서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kingdom of God’에 대한 번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번역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나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으로 여겨집니다. 그 이유는 복합어가 될 경우에는, 우리말에서 앞에 말에 주도권이 주어지고 핵심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번역이 옳다고 여겨집니다. 즉 앞에 말이 핵이 된다는 것에 대한 좋은 예는 요즈음에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북미대화’입니다. 10년전만해고 [미북대화]였습니다. 그리고 10년전에 만약에 누가 [북미대화]라고 했다면 아마도 보안법에 위반될 수 도 있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북미대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4. 창세기 1-4장에 [하나님, 여호와]에 관한 관형격 조사 <의>에 대한 비교연구.

 

◆창세기 1장(아래에 기록한 숫자는 관계된 절을 의미합니다)

 

개역한글: 하나님의

하나님<의> 보시기에

개역개정: 하나님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공동번역: 하나님께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4, 10, 12, 18, 21.(5회)

4, 10, 12, 18, 21.(5회)

■관형격 조사<의>를 주격조사 <이>로 바꾸어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4, 10, 12, 18, 21.(5회)

■ <의>를 주격조사 <이>로 바꾸어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는 개역개정은 <의>를 소유격적 의미와 관형격 조사가 혼용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번역을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경우 [하나님<의> 보시기]라는 부분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라고 주격으로 바꾸어서 번역하는 것이 우리말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 존칭어를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라고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더 좋다고 여겨집니다.

 

▶1:27절에서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1:27: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습대로

이 부분 1:27절은 ‘하나님형상’으로 한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하게되면, 우리 문법에서는 ‘형상’이 핵어가 되고 ‘하나님’은 관형격 조사가되어 보조개념이 될수도 있기 때문에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원문을 분해 해보아도 ‘의’로 번역해야 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a):①전치사(B] /안에 안쪽에)+②명사/남성단수 (ml]x /형상 )+3인칭 단수 남성 접미 대명사( / ) : 그러므로 이 어휘 자체만을 직역한다면 ‘그분(3인칭에도 우리말에는 그분이라는 존칭어가 있습니다) 형상안에’가 됩니다.

b):①전치사( B] /안에 )+②명사 남성 단수( !l,x / 형상 ):직역하면 ‘형상안에’

그러므로 ‘!l,x,B] /ml]x\'B] ’ 은 ‘하나님 형상안에 있는 형상(대로),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형상/하나님께서 주신 형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의 ‘image of God’과 일본어 < の >라는 어휘가 준 영향 때문에 ‘의’로 번역한 것으로 추론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조직신학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에 재번역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라틴어는 ‘imago Dei’라는 두 단어를 영어에서는 소유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of]를 넣어서 번역한 것은 우리가 이 <의>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시사해 분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도 소유격을 강조해서 [의]를 사용하기보다는 “하나님형상”으로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영어의 <of>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가 많기 때문에 우리가 영어에서 오는 영향을 줄이고 원문에서 바로 대상언어(meta-language)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창세기 2장

 

개역한글: 하나님의

사람의

개역개정:하나님이

사람이

공동번역:하나님께서는

아담이

2: 하나님<의> 지으시던

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관형격 조사<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18: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관형격 조사 <의>를 주격조사 <이>로 바꾸어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2:하느님께서는

18: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관형격 조사 <의>를 주격조사 <이>로 바꾸어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11: 첫째<의> 이름은

12: 그 땅<의> 금은

13:둘째 강<의> 이름은

14:셋째 강<의> 이름은

■여기 이 부분은 모두 <의>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남용한 것으로 여겨입니다.

11: 첫째<의> 이름은

12: 그 땅 <의> 금은

13:둘째 강<의> 이름은

14:셋째 강<의> 이름은

11:첫째<의> 이름은

12:그 땅<의> 금은

13:둘째 강<의> 이름은

14:셋째 강<의> 이름은

■여기 이 부분은 모두 <의>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남용한 것입니다.

11: 첫째<의> 이름은

12: 그 땅 <의> 금은

13:둘째 강<의> 이름은

14:셋째 강<의> 이름은

 

11:첫째 강줄기<의> 이름은

12:그 땅은 좋은 금뿐아니라

13:둘째 강줄기<의> 이름은

14:셋째 강줄기<의> 이름은

■여기 이 부분은 모두 <의>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남용한 것입니다.

11: 첫째 강줄기<의> 이름은

12: 그 땅 은

13:둘째 강줄기<의> 이름은

14:셋째 강줄기<의> 이름은

 

 

◆창세기 3장

 

개역한글

개역개정

공동번역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 <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하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