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실사구시와 실천궁행

신 실사구시와 실천궁행


이런 회개가 있다고 합시다. ‘주여! 내가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한 것을 용서해 주시고, 하지 말아야 행동을 한 것을 용서해 주시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을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 마땅히 생각할 것을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고, 마땅히 행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고, 마땅히 할 말을 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소서’ 아주 좋은 시지요. 근데 그 다음엔 어쩌지요?생각과 행동과 말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하지요? 이게 바로 철학과 현대교육의 맹점입니다. 문제를 짚어내고 잘못을 알고, 어떻게 하자는 목표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가는 사람을 만드는 원리는 없습니다.

실사구시로 조선이 온통 사색당파로 서로 싸우다가 망했습니다. 실천궁행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 때는 잘 되지도 않는 명분을 세워 놓고 그 실제의 원리라고 하는 이론만 배우면 양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러다간 굶어죽겠다 하고 실학(실천궁행)이 들어왔습니다. 정약용선생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다가 관직에서 쫓겨나고 귀양을 갔습니다. 실사구시 논쟁이 무슨 소용이냐 정당한 생각과 행동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해야지 가만히 앉아서 제대로 되는 인간에 대한 토론만 하면 뭣하나 밥이 나오나 죽이 나오나 이 말입니다. 실사구시, 이발(理發)이 먼저냐 기발(氣發)이 먼저냐 이발 기발이 함께 되느냐 하는 끝이 없는 학문의 논쟁으로 편을 갈라 나라를 말아먹었습니다.

그러다가 세계는 드디어 실용주의가 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무어냐 나는 누구냐 야 묻지 말고 열심히 삽질이나 해 불도저로 밀어 붙여 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단한 발전입니다. 그러나 물자는 넘쳐도 마음은 더 궁핍해 졌고, 고속도로나 광대역 통신은 넓어져도 인간의 시야는 더 좁아지고 말았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목적이 이끄는 삶, 동기부여를 하라 등의 말이 나옵니다. 당연히 적극적인 사고방식이지요. 진리로 인간을 만드는 시간이 너무 더디니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몰아갔습니다. 그야말로 기(氣)로 이(理)를 끌고 간 실천궁행이지요. 그게 지금의 온 세계가 구조악과 부조리의 온상이 된 원인입니다.

이(진리)를 통해 생명을 공급받아 발생하는 그 기로 삶을 꾸려야 그게 하나님 앞에 합당한 실천궁행입니다. 진리를 습득하여 자신을 새로 만드는 영적인 기술이 없이 무조건 다다익선의 경제논리나 위대한 업적을 쌓으려는 인간의 죄로부터 출발한 부패한 욕심이 지금의 세계의 현상입니다.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이제 더 갈 데가 없습니다. 신앙으로 자신을 재창조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하늘적인 삶만이 참 실사구시입니다. 말씀 몇 구절 붙잡고 실천하려는 어설픈 실천궁행의 목소리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와 철학과 교육의 선생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긴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베트남의 어느 승려가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는 지나갔다 미래는 없다 현재 이 순간만 소중하다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매만지면서 이겨내라 걸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마음이 편해지리니...’ 이 말이 그렇게 좋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 속에는 과거의 죄성과 악성이 그대로 담겨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과 자신의 육체에 대해 자유를 누리고 그 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 나아감으로 존재가 바뀌고(이발) 삶이 바뀌는 생명의 발로(기발)로 실천이 되는 삶(실천궁행)만이 지고지선을 바라는 인간의 최고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