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지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5절)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 율법, 할례 등은 목숨과도 같은 겁니다. 다만 그게 그들의 자랑이요 자부심일 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보고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나를 알지 못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의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과 삶을 통해 영을 움직여 믿음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의 차이가 확연합니다. 사람들의 신앙 간증을 들어보고 ‘나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했다’ 이렇게 나오면 육체의 사람이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면 영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다’ 하면 영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 그 사실을 확실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는 말은 영적이니 뭐니 하면서 여전히 그 사람은 육신을 사용해서 마뜩하고 알뜰히 그리고 선하고 착하게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자주 거울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의식해가며 말입니다. 이건 마음을 찢은 마음의 할례가 아닙니다. 말씀을 몇 구절 마음에 담아 그 말씀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는 조문에 묶인 사람입니다. 생각만 사용할 뿐 영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2%의 결핍을 느끼면서 다른 활동으로 때우고 사람의 칭찬으로 묻어갑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당연히 이웃도...
그리스도인은 이제 율법의 요구인 죄와 그 삯인 사망에 쫓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나아가야 하는 빚 독촉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그 은혜의 빚 곧 사랑의 빚은 평생지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의 활동 중에도 순간순간 묵도와 기도의 시간을 갖습니다. 죄와 사망을 안고 있는 자신의 전적 타락과 무능에 대한 가슴을 찢은 마음을 주님께 드러내고, 영혼의 자유를 허락받아 영을 사용하여 진리를 좇아 거룩과 영광으로 아버지 앞에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욕구를 따르지 않고 영의 욕구를 따르므로 그 율법의 요구 사랑이 이룩되어 갑니다(롬8:4) 당연히 내부고발이 줄고 자신이 사랑스러워집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이 글을 쓰기 전에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제 영혼을 활용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리고 주의 말씀을 증거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말씀(레에마)이 바로 영과 생명입니다(요6:63) 이 말씀이 믿어지고 실제가 될 때까지 자신의 시간과 열심을 투자하기를 주저하지 마세요. 말씀을 보고 육체를 움직이는 기발인가? 영이 그 생명으로 살아 마음을 움직여 삶이 되는 의발인가? 이 말에 대해 따지지는 마세요. 저의 신 실사구시이니까요. 다만 자신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이 하나님께 찬양이 되는지 아니면 거기서 나오는 칭찬을 자신이 받고 있는지 이것만 계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