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어쩌면 역사의 우연인가, 먼저 이룩한 성과에 만족하여 포만감을 느낀 포르투갈 왕이 인도에 정착하는 동안 스페인으로 하여금 아메리카의 길을 열게 하였다는 것이. 1492년 8월 3일, 햇살이 이제 곧 위력을 발하기 시작하려는 팔로스(Palos) 항.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그리고 영국인, 유대인 각 한 명을 포함한 88명의 선원을 나누어 태운 세 척의 배(100톤의 산타마리아, 50톤의 핀타, 40톤의 니나)는 경이로운 행렬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출발을 준비한다. 군중들의 소란스런 웅성거림 속에서, 맨 마지막으로 항구를 떠나는 배의 선미에 짙은 코발트색 외투를 걸친 자는 해군 제독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제노바의 직조공의 아들로 태어나 한동안 부친의 가업을 돕고 있었던 그는 끝내 바다의 유혹을 어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제노바가 고향인 그에게는 바다는 그의 생활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하늘보다 먼저 다가서는 것이 바다였던 것이다. 결국 천지학을 배운 후에 바다에 대한 열정으로 항해술을 습득하였다. 무한한 열정과 강력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그는 여러 차례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1477년부터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정착하여 1480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海圖製作)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피렌체의 천문학자인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地圖)를 구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이때 그가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그다지 신빙성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가 토스카넬리가 주교 성당의 참사원에게 보낸 편지를 접한 것은 1474년이었는데 실제로 그는 결혼한 이후에야 대규모의 항해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토스카넬리의 연구가 그의 인도 항해의 직접적인 발단이라고 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아무튼 1484년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탐험을 헌책하였으나 당시에 포르투갈의 왕은 아프리카 식민지 계획에만 열중하여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었고 또한 콜럼버스의 요구가 너무 과도한 탓도 있었기에 왕이 허락하지 않자, 스페인으로 갔다. 당시 스페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으로 구분되어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를 공동 통치하고 페르난도가 아라곤을 단독 통치하는 상태였다.

1486년부터 콜럼버스는 여러 차례 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헌책했으나 어렵게 맞이한 기회도 살라망가 대학의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거절당하고 만다. 계획이 너무 모호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럴 만도 했다. 아메리카는 아직 마음속의 대륙이었을 뿐이니 있지도 않은 길을 가겠다는 콜럼버스의 계획이 누구의 눈에라도 무모하고 모호하게 비치지 않겠는가. 더구나 보수적인 대학의 학자들의 눈에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 강철 같은 의지의 소유자인 그도 절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대한 희망을 가진 자는 결코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며 또 하늘도 영원히 홀대하지 않는 법이다. 1491년 스페인은 무어인을 제압하여 그라나다를 완전 병합하는 통일을 달성한다. 이때에 이르러 이사벨과 페르난도 부부는 해외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이사벨이 콜럼버스를 등용하였다. 콜럼버스의 요구가 과도하여 역시 약간의 마찰이 있긴 하였으나 페르난도의 중개로 수습되어 콜럼버스는 마침내 이사벨라의 후원을 얻게 되었다.

계약조건을 보면 콜럼버스는 발견한 토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 직책과 특권(산물의 1/10)은 자손에게 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벨은 자금을 제공한 외에도 팔로스시(市)로 하여금 선박 2척, 핀타 호와 니나 호를 내주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를 사면하여준다는 조건으로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하여주었다. 또한 팔로스 항에 사는 핀손이라는 부유하고 유능한 선장이 자기 소유 선박인 산타마리아 호와 함께 참가하였다.

인디언의 환영을 받는 콜럼버스 일행.

인디언의 환영을 받는 콜럼버스 일행.

항해는 비교적 순조로웠고 5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카나리아 군도에서 재충전한 후에도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명령을 거역하고 육지에서 멀어지는 데 불안을 느껴 회항을 간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항해한 거리를 숨기고 이제 곧 재물이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선원들을 설득하고 진정하였다. 10월 11일, 핀타 호의 선원이 갈대와 풀잎이 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콜럼버스는 맨 먼저 육지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왕과 여왕이 약속한 11~12세기에 주조한 스페인 금화 일만 마라베디와 명주 속조끼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마침내 10월 12일 육지가 나타났다. 콜럼버스는 그곳을 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의 '산 살바도르'라고 명명했다.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다다른 육지는 곧 구세주와 다름없는 것이었으니 본능적이고도 적절한 명칭인 셈이다. 이 새로운 땅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4월에나 볼 수 있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이듬해 3월에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귀항했고 의기양양한 이 탐험가를 스페인은 최고의 영예로서 맞아주었다. 신세계 부왕으로의 임명은 그에 비하면 구차한 수식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후 그는 17척에, 대부분 금을 기대하고 지원한 1,500명의 대선단을 이끌고 2차 항해를 떠났다. 그는 그곳에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시를 건설하는 한편, 인디언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은 신통치 않았고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살육하고 노예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금 대신 노예가 본국으로 보내졌고,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하였다.

총독으로서는 실패한 것이었다. 사실상 그 직책을 파면 당한 채 구금상태로 스페인으로 송환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 시점에서 인간적 욕망과 의무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이다. 그에게 두 번 다시 행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소문으로는 가난해져서 죽었다고도 하지만 그 근거는 없다. 1506년에 그가 죽을 당시는 그런 대로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꿈은 단순한 공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해양과 지구 물리학에 관한 지식이 그의 상상력을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숙독하고 있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실제로 스페인의 세비야에 있는 콜럼버스 박물관에는 그가 기입한 라틴어로 된 『마르코 폴로 여행기』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콜럼버스의 항해의 목적이 '황금의 나라'를 발견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하는 속설이 있었으나, 이슬람교도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인도와 교역하는 길을 열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었던 것 같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은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동서 교섭의 관계에 있어서 중세에는 서양이 수동적인 입장에 서 있었는데, 아메리카 발견을 전후해서 동양이 수동적으로 되고 서양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결국 무역의 중심지가 이동됨으로 해서 지중해 무역이 쇠퇴하고 대서양 연안 국가들이 번영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유럽인들의 생활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동양의 산물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신대륙에서 담배, 코코아, 감자 등이 수입되었다. 또한 새로 생긴 넓은 시장을 토대로 유럽의 상공업과 금융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신항로 개척의 결과 지구상의 여러 지역과 문명이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가 성립되게 된 것이다.

물론 콜럼버스는 신세계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카르타고의 집정관 하논의 탐험대에서 조난한 난파선이 아메리카 대륙까지 흘러갔다는 설도 있고, 중세 북유럽 바이킹족인 리프 에리크는 콜럼버스보다도 몇 세기나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었다고 한다. 바이킹과 콜럼버스와의 시대적 간격에도 대서양을 넘은 유럽인이 몇 사람 있었다는 것은 그럴 듯한 추측이다.

설혹 콜럼버스가 실패했다손 치더라도 그 당시의 형세로서는 결국은 누구든지 발견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진정한 발견자는 어쩌다 우연에 의해서 최초로 어떠한 곳에 다다른 자가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의 가정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여 발견하는 사람이다. 선배들의 사상과 열정을 공유하고 마찬가지로 그가 이룩한 업적이 공통의 유산으로서 남게 되는 그러한 자들을 진정한 발견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콜럼버스는 의지력, 탐구심, 재능 면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하였다. 다만 콜럼버스론을 마치면서 조금 안타까운 점은 콜럼버스의 인격은 그다지 향기로울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는 의심이 든다는 점이다. 그는 어쩌면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사나이였는지도 모른다.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재정적 원조를 얻는 과정에서도 지나친 요구로 인해 실패할 뻔하였으나 다행히 페르난도의 중개가 있었기에 여왕의 허락을 얻어냈고 신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몹시 잔학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은 때로는 완벽한 도덕주의자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나친 절제와 인내는 진보를 향한 발걸음을 더디게 할 수 있다. 더욱이 오늘날의 윤리기준으로 그를 심판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그가 이룩한 업적의 역사적 의미는 백 번 양보한다 할지라도 그의 모든 결점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여행 이야기, 2004.6.30, ㈜살림출판사)